본문 바로가기
책,영화,리뷰,

의천도룡기 11~15

by Casey,Riley 2023. 3. 28.
반응형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6 장  눈물겨운 우의(友誼) 


 장삼봉은 장무기를 데리고 소실산에서 내려왔다. 이제는 장무기
를 치료해야겠다는 마지막  일념마저 산산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
다.다만 그와 농담을 나누며 서로의 근심을 덜어줄 뿐이었다.

 이날, 그들은  한수(漢水)에 도착했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빌려 탔다. 배가 중류에 다다르자 강물이 심하게 요동했다. 자그
마한 배도  따라서 흔들렸다. 뿐만 아니라,  장삼봉의 마음 역시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

 이를 보다못한 장무기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태사부님, 너무 그렇게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죽으면 꿈
에도 그리던 부모님을 만날  수 있으니 그것보다 더 좋은게 어디
있습니까?"

 장삼봉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소리 말아라.  이 태사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너를
살려주마."

 "만약에 제가  소림파의 구양신공(九陽神功)만  배울 수 있었다
면, 당장 세째 사백님께 달려가서 가르쳐 드리고 싶었어요."

 "왜?"

 "사백님이 무당파와 소림파의  신공을 터득하면 불구의 몸이 완
치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네 사백이 입은 상처는 근골외상(筋骨外傷)이라 제아무리 내공
이 고강해도 완치될 수 없느니라."

 장삼봉은 장무기의 갸륵한 생각에 감동되어 코끝이 시큰했다.

 '자기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지금 오히려 남을 생각해 주다
니 과연 협의심이 대단하군,'

 바로 이때, 돌연 우렁찬 외침이 전해 왔다.

 "썩 배를 멈추고 그 애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 보통 내공이 강한 자의 외침이 아니었다.

 장삼봉은 냉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누가 감히 겁도 없이 애를 내놓으라는 걸까?'

 그는 외침이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 강심에서  두 척의 배가 나르듯이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앞서가는 작은 배의 선미에는 덥석부리 장한이 양손으로 힘껏 노
를 젓고 있었다. 선실에는 소년소녀가 앉아 있었다. 뒤에는 비교
적 큰 배가 따르고 있었다.  그 배에는 네 명의 범승과 칠 팔 명
의 몽고 무관(蒙古武官)이 타고 있었다.

 덥석부리 장한은 팔힘이 대단했다.  노를 한 번 저을 때마다 일
장 남짓 미끄러져 나갔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배에는 사람이 많
아 제아무리 빨리 노를 저어도 두 배의 간격은 점점 더 가까와졌
다. 잠깐 사이에 두 배는 나란히 서게 되었다. 몽고 무관들과 범
승들은 저마다 활을 들고 일제히 장한에게 화살을 쏘아 댔다.

 슉! 슉! 슉.....!

 장삼봉은 비로소 어찌된  영문인지 알았다. 그러나 그는 몽고병
들이 한인(漢人)을 죽이는  것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겨온터러 지
체하지 않고 도와주려고  했다. 이때, 덥석부리 장한은 왼손으로
노를 저으면서  오른손에 든 노를 휘둘러  날아드는 화살을 모두
막아냈다. 민첩하기 이를데 없는 수법이었다.

 장삼봉은 즉시 사공에게 외쳤다.

 "사공, 배를 저쪽으로 갖다 대시오!"

 사공은 기겁을 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도.....도장님, 농.....농담을 하시는 거겠죠?"

 장삼봉은 다급한 나머지 다짜고짜  노를 뺏어 들고 뱃머리를 돌
려 그쪽으로 몰았다.

 순간, 악! 하는 비명과 함께 선실에 있는 남자애가 등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덥석부리 장한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급히 앞으
로 달려가 살폈다. 그 바람에 어깨와 등 부위에 무차별하게 화살
이 적중되었다.

 "윽.....!"

 그가 노를 놓치자 배마저 멈추었다. 칠,팔 명의 몽고 무관과 범
승들이 일제히 작은 배로뛰어내렸다. 덥석부리 장한은 결코 굴
복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맞섰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몸이라 금
방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장삼봉은 그들 배와 간격이  좁아지자 즉시 허공으로 몸을 솟구
쳤다.

 "이놈들! 썩 물러나지 못하겠느냐!"

 두 몽고 무관이 장삼봉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장삼봉은 허공에 뜬 채  도포소매를 가볍게 흔들어 화살을 멀리
날려버렸다. 이어 배에 사뿐이  내리면서 왼손을 격출하자 두 범
승의 몸이 허공을 가로질러 풍덩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실로 하
늘에서 하강한 비장군(飛將軍) 같았다.

우두머리 격인 무관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외쳤다.

 "도장은 대체 누군데 남의 일에 참견이오?"

 장삼봉은 대뜸 호통을 쳤다.

 "어디서 감히 양민을 살해하고 그러느냐! 썩 꺼지거라!"

 "이 자가 누군지 아시오? 바로 천하에 체포령이 떨어진 원주(袁
州) 마교(魔敎)의 반역자 잔당들이오!"

 장삼봉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럼 주자왕(周子王)의 부하란 말인가?'

 그는 즉시 덥석부리 장한에게 다르쳤다.

 "그게 정말인가?"

 덥석부리 장한은 전신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왼손으로 남자
애를 안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소주공(小主公).....  소주공께서  화살에 맞아  운명하셨습니
다."

 자기의 신분을 시인하는 한 마디가 되었다.

 장삼봉은 더욱 놀랐다.

 "그럼 이 애는 주자왕의 아들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소주공을 안전하게 모시지 못했으니 이 목숨도 소
주공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그는 남자애를 바닥에  내려놓고 무작정 무관에게 덮쳤다. 그러
나 어깨와 등에 맞은  화살의 독이 발작하기 시작했는지 몸을 솟
구치자마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편, 여자애는 선실에서 남자 시체를 부둥켜 안고 통곡을 터뜨
리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그 남자 시체는 사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장삼봉은 마음이 약간 내키지 않았다.

 '마교의 인물인 줄 알았다면 이 일에 끼어들지 않는 건데, 그러
나 기왕에 끼어든 이상 그냥 물러설 순 없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삼봉은 무관에게 외쳤다.

 "이 애는 이미  죽었고, 저 자도 독화살에  격중되어 금방 죽게
될 테니 이제 그만 가봐라!"

 "그럴 순 없소. 저 두 놈의 수급을 갖고 가야 하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느냐?"

 "도장은 대체 누구길래 이 일에 끼어든 것이오?"

 "무림인이 무림의 일을  간섭하겠다는데 누가 감히 뭐라고 그러
느냐!"

 "뭐라고!"

 다짜고짜 두  몽고 무관이 그의 어깨를  향해 장도를 내리쳤다.
도세(刀勢)가 쾌속한 데다가  쌍방의 간격이 워낙 가까와서 도무
지 피할 틈이  없었다. 장삼봉은 슬쩍 몸을  돌렸을 뿐인데 이미
날아드는 장도를  교묘하게 피했다. 이와  동시에 쌍장을 격출했
다. 팽! 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무관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자기네들이 타고 온 배에 나동그라졌다.

 우두머리 격인 무관은 대경실색했다.

 "당.....당신은..... 혹.....혹시.....!"

 "몽고놈들만 죽이는 저승사자다!"

 장삼봉은 도포의 소맷자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다음 순간, 무관
과 범승들은 하나같이 숨이 막혀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한참
만에야 장삼봉은 떨쳐든 소매를 멈추었다. 무관과 범승들은 안색
이 하얗게 질린 채 서로  앞을 다투어 자기네 배로 탈주했다. 물
에 빠진 범승들을 건져내어 허겁지겁 배를 몰고 도주했다.

 장삼봉은 단약을 꺼내  덥석부리 장한에게 복용시켰다. 그는 작
은 배를 자기들이 타고 온 배로 몰고갔다. 그리고 덥석부리 장한
을 부축해서 배를 옮겨 태우려고 했다. 그런데 장한은 거절했다.

 덥석부리 장한은 한 손에  남자애 시체를, 한 손에 여자애를 안
고 가볍게 몸을 날려 배을 옮겨탔다.

 장삼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견해 했다.

 '중상을 입은 몸인데도 저토록 어린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다니,
참으로 대단한 기백이군. 이런 자는 마땅히 살려놔야한다.'

 그는 배로  돌아간 후, 장한의 독화살을  뽑아주고 독을 제거해
주는 약을 발라 주었다.

 그 소녀는 부친의 시신이 있는 작은 배가 멀어져 감에 따라, 더
욱 구슬프게 울어 댔다.

 장삼봉은 신속히 뇌리를 굴리고 있었다.

 '현재론 무기도 걸어다닐  수 없는데, 만약에 노하구(老河口)에
가서 투숙하면 현상범인 이  자까지 보살펴야 하지 않은가? 노하
구보다 더 안전한 곳이 없을까?'

 그는 돌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사공에게 은자 세 냥을 건네
주었다.

 "사공, 수고스럽겠지만 우리들 태평점(太平店)으로 태워다 주시
오."

 장삼봉이 몽고 무관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린 광경을 목격한
사공은 무한한 경의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은자까
지 주자,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사공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배를 동쪽으로 몰았다.

 이때, 장한이 선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소인 상우춘(常遇春)의 절을 받으십시오."

 장삼봉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상대협, 이렇듯 대례까지 올릴 필요 없소. 어서 일어나시오."

 그의 손이 상우춘의 몸에  닿는 순간 얼음장같이 차가운 감촉이
전해왔다.

 "혹시 내상을 입었소?"

 "소주공을 모시고 신양(信陽)서부터 이곳까지 호송해 오는 동안
오랑캐들이 파견한 추격대와 네 차례에 걸쳐 접전을 벌였습니다.
그 바람에 가슴과 등에 장력을 맞았습니다."

 장삼봉은 그의 완맥을  짚어보았다. 맥박이 미약하게 뛰고 있었
다. 그의 옷을 벗기고  상처를 보더니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력에 적중된 부위가 많이  부어올라 있었다. 상세가 결코 가법
지 않았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장삼
봉은 더 이상 그에게 말을 시키지 않고 선실에 눕혀 안정을 취하
도록 조치했다.

 그 여자애는 열 살 정도밖에  안 됐으며 누더기 옷에 맨발 이었
지만, 용모만은 수려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 애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어 장삼봉은 그 계집애를 불쌍하게 여기며 물었다.

 "애야, 네 이름이 뭐냐?"

 "주지약(周芷若)이에요."

 "집은 어디에  있으며, 집에 누가 있느냐?  내가 집까지 바래다
주마."

 주지약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대답했다.

 "저는 아버지와 단 둘이 배에서 살아왔어요."

 장삼봉은 지그시 눈을 감고 내심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천애고아가 되지 않았나? 쯧쯧.... 이를 어쩐다...!'

 상우춘이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소인은 여지껏 한 번도 도장님처럼 무공이 고강하신 분을 뵙지
못했습니다. 감히 도장님의 법호를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장삼봉은 미소를 지었다.

 "장삼봉이라고 하오."

 상우춘은 대경실색하며 벌떡 일어났다.

 "무당산 장진인이셨군요. 오늘  이렇듯 선장(仙長)님을 뵙게 되
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장삼봉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노도는 단지 다른 사람보다 몇 살 더 산 것뿐인데 무슨 선장으
로까지 칭호받을  자격이 있겠소?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니 어서
누우시오."

 그는 상우춘의 호기에 호감이 갔으나, 마교의 수하인지라 더 이
상 말을 깊이 나누고 싶지 않아 그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상처가 심하니 되도록 말을 삼가시오."

 장삼봉은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어, 정사(正邪)에 대해어느 쪽
에도 편견을 두지 않았다.  때문에 장취산에게도 항상 다음과 같
이 당부하곤 했다.

 ----- 정과 사는 본시  구분하기가 힘들다. 정파의 제자라도 마
음이 똑바르지 않으면  사도(邪道)가 되는 것이오. 사파일지라도
마음만 선량하면 정인군자(正人君子)가 되느니라. -----

 뿐만 아니라 천응교주 은천정은  비록 성격이 괴팍하고 격한 편
이지만 광명정대한  사람이니 이런  친구들을 사귀라고 당부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장취산이 자결하자 이  모든 것이 천응교로 인해 벌어졌
으므로 그들을 증오하지 않을  수가없었다. 나중에 간신히 은천
정에 대한 복수심을  억눌렀으니 사마(邪魔)라는 두 글자만 들어
도 치를 떨었다.

 주자왕은 바로 여러 마교에서도 명교(明敎)에 속한 미륵종(彌勒
宗) 대제자로서 수년 전에  강서 원주에서 거사를 일으켜 스스로
제왕이 되어  국호를 주(周)로 칭했다.  그러나 곧 원군(元軍)에
의해 섬멸당하고 주자왕도 잡혀 참수를 당했다.

 미륵종과 천응교는  비록 일파가 아니었으나  같은 명교의 지파
(支波)로서 상호간에 연원(淵源)이  무척 깊었다. 주자왕이 거사
를 일으킬 때도 은천정이 절강(浙江)에서 원조를 해줬다. 장삼봉
이 상우춘을 구하게 된 동기도 일시적인 협의심에서 우러나온 것
뿐이지, 사전에 그의 신분을  알았다면 결코 돕지 않았을지도 모
른다.

 이날 밤  이경(二更)이 넘어서야  태평점에 도착했다. 장삼봉은
사공으로 하여금 고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다 배를 정박하라고
지시했다. 사공은 고을에 가서  먹을 음식을 사다가 선실에다 음
식상을 차렸다. 장삼봉은 상우춘과 주지약을 먼저 먹게 하고, 자
기는 장무기에게 다가가 음식을  먹여 주었다. 상우춘이 그 원인
을 물어보는 바람에  장삼봉은 장무기의 목숨을 잠시 지연시키기
위해 혈도를  제압했다고 상세히 말해  주었다. 장무기는 마음이
찢어질 듯이  괴로워 음식마저 넘어가지  않았다. 장삼봉이 계속
먹이려 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주지약이 보다못해 장삼봉에게서 음식을 받아들었다.

 "도장님, 먼저 드세요. 제가 상공에게 먹이겠어요."

 장무기는 단호히 고개를 내둘렀다.

 "배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어요."

 "상공이 정녕 음식을  드시지 않으면 도장님께서도 식사를 못하
시잖아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주지약이 다시 음식을  입가에 갖다 대자
장무기는 지체하지 않고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주지약은 생선가
시, 닭뼈 등을 세심하게 발려 정성스레 음식을 먹였다. 장무기는
조금도 싫다는 기색없이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장삼봉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이런 중병까지 얻었으니 참으로 기
구한 운명이로고.... 세심한 여인의 시중을 받아야 하거늘.....'

 상우춘은 생선이나 고기 종류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단지 야채
만 깨끗이 비웠다. 그는 비록  중상을 입고 있었으나 밥을 네 그
릇이나 먹었다. 장삼봉은 육류나  생선을 개의치 않고 먹기 때문
에 상우춘에게도 권했다.

 상우춘은 고개를 저었다.

 "장진인, 소인은 보살을 모시는  몸이라 육류나 생선을 먹을 수
없습니다."

 "아! 내가 깜빡 잊었군요."

 장삼봉은 비로소 마교는  당조(唐祖)이래 줄곧 채식(菜食)만 먹
어왔음을 새삼 상기시켰다.

 북송(北宋) 말년에 명교의  대수령인 방엽이 절동(浙東)에서 거
사를 일으켰을 때,  당시 관민들은 그를 식채사마교(食菜事魔敎)
로 칭했다. 채식을 섭취하고 마왕을 받드는 것이 마교의 양대 규
율로서 수백 년을 전해  왔다. 그런데 송조(宋祖)가 망하자 관부
(官府)에서는 마교의 교도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기 시작했고,
무림인들도 그들을 멸시하기에 이르렀다. 마교 교도들은 차츰 은
밀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고, 채식을  섭취하는 것은 부처님을
신봉하기 때문이라고 거짓말했다.

 상우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장진인께선 저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인 동시에 저의 내력까지
알고 계시니 솔직이  털어놓겠습니다. 소인은 명교의 사람으로서
조정 관리들은 우리를 극악무도한 무리로 여기고, 무림정파의 협
의지사들이 우리를 멸시하는 것 모두 참을수 있지만, 살인방화를
일삼는흑도도 우리를  요괴마귀(妖怪魔鬼)로 몰아부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어르신네께서는 저의 신분을
알면서도 구해 주셨으니 이 은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
다."

 장삼봉은 마교의 내력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 마교가 받드
는 대마왕은 마니(魔尼)라는  사람으로서 교도들은 그를 명존(名
尊)으로 칭했다. 마교는 당나라 헌종(憲宗) 원화년(元和年)에 중
원으로 들어왔다.  당시에는 마니교,  또는 대운광명교(大雲光明
敎)로 불리어졌고, 교도들은 명교로 칭했다.

 장삼봉은 약간 망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상대협....."

 상우춘이 급히 말을 가로챘다.

 "도장님, 앞으로는 소인을 그냥 우춘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우춘, 자네 지금 몇 살인가?"

 "스물입니다."

 그는 비록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나 행동거지가 무척
젊어 보여서  장삼봉이 물어본 것이다.  장삼봉은 고개를 끄덕였
다.

 "자네는 비록 마교에 투신했으나 나이가 젊어 아직은 마음을 돌
이킬 수 있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어 주겠나?"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오늘부터 세심혁면(洗心革面)하고 사교를 버리게. 그러면 자네
를 내 수제자인 송원교의 제자로 들어가게 해주겠네. 어떤가?"

 송원교는 칠협의 첫째로서 그  명성이 천하를 진동하고 있는 동
시에 보통 무림인들은 그를  한 번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웠다. 이러한 영웅을 사부로  삼을 수만 있다면 실로 크나큰
복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상우춘은 낭랑한 음성으로 대답했
다.

 "소인을 그토록 어여삐 봐주셔서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
르겠습니다. 그러나 소인은  이미 명교에 투신한 이상, 종신토록
배교(背敎)할 수 없습니다."

 장삼봉은 재삼 권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애는....."

 상우춘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하십시오.  이 애는 저로 인해 아버지를
잃었으니 소인이 책임지겠습니다."

 "알았네. 그러나 절대로 귀교에 투신시켜서는 안 되네."

 "어찌하여 우리를 그토록  나쁘게만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
지만 도장의 분부대로 절대 이 애를 본교에 투신시키지 않겠습니
다."

 장삼봉은 장무기를 품에 안으면서 작별을 고했다.

 "그럼 우린 여기서 헤어지기로 하세."

 그는 더 이상 마교  교도들과 인연을 맺기 싫었다. 따라서 인연
이 있으면 다시 만나자는 얘기를 입밖에 내지 않았다.

 상우춘은 정중한 대례로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주지약이 장무기에게 다정스레 말했다.

 "상공, 도장님  걱정하시지 않도록 매일같이  식사를 잘해야 돼
요."

 장무기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호의는 고마우나..... 내가  밥 먹을 수 있는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장삼봉은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팠다. 그는 소매를 들어 장무
기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주지약은 장무기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뭐라고요.....? 무엇 때문에.....?"

 장삼봉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애야, 앞으로 정도만 향해 가기를 바란다."

 "알았어요. 그런데 저 상공께서 왜 그런 이상한 말을 하시는 거
죠?"

 장삼봉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상우춘도 의아하게 여기고 물었다.

 "어르신네께선 내공이 심후하고 신통력이 광대하셔서 중독된 것
쯤은 충분히 해독시킬 수 있겠죠?"

 "물론이지."

 장삼봉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무기가 눈치채지 못하게 왼손을 가
볍게 흔들었다. 완쾌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상우춘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소인도 내상이 가볍지 않아 신의(神醫) 한 분을 찾아가 치료를
받을까 하는데 같이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장삼봉은 고개를 저었다.

 "이 애는 한독(寒毒)이  내장까지 침투되었기 때문에 평범한 약
물로 완치시킬 수 없네. 다만..... 다만 자연스럽게 독을 제거해
야 되네."

 "하지만 그 신의는 정말로 기사회생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장삼봉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돌연 한 사람을 떠 올렸
다.

 "혹시 접곡의선(蝶谷醫仙)을 마하는 게 아닌가?"

 "맞습니다. 어르신네께서도 저의 호사백님을 알고 계시군요."

 장삼봉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접곡의선 호청우(胡靑牛)는 비록  고명한의술을 갖고 있지만,
마교의 사람으로서  모든 무림인들을 원수  대하듯 하지. 더우기
성격이 괴팍하여  마교 교도가 아닌 사람은  절대로 치료해 주지
않는다고 들었네. 그래서 견사불구(見死不救)라는 칭호까지 붙었
다는데....."

 상우춘은 장삼봉의 고충을 이해했다.

 "장진인, 저의 호사백님께선 비록 외인에게 치료를 해주지 않지
만, 소인을 살려 주신  장진인이라고 하면 반드시 도와주실 겁니
다. 만약에 정말 치료해 주지 않는다면 제가 가만 있지 않겠습니
다."

 "설령  치료해  준다  해도  무기의  한독을  제거하기엔  힘이
좀....."

 상우춘은 가슴이 답답한지 큰 소리로 외쳤다.

 "이 공자는 어차피 죽을 건데 뭘 그리 망설이십니까?"

 그는 성격이 괄괄하여 생각나는 대로 무조건 털어놓았다.

 장삼봉은 할 말을 잃었다.

 '옳은 말이다. 어차피 한 달 남짓밖에 살지 못하지 않은가!"

 그는 비록 잃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흉악한 마교 제자에게 무기
를 맡기기가 꺼림칙했다.

 상우춘은 장삼봉의 마음을 꿰뚫어보듯 했다.

 "장진인께서 저의 호사백님을 만나기 싫어하는 것도 잘 알고 있
습니다. 게다가 호사백님은 성격이 괴팍하여 장진인께 무례한 언
사를 퍼부을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제가 단독으로 장소제를 데리
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절대
로 장소제에게 해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정히 그렇다면 자네만  믿겠네. 하지만 내 미리  말해 둘 것이
있네."

 "뭡니까?"

 "무기를 강제로 입교(入校) 시켜선 안 돼네."

 상우춘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잘 좀 보살펴 주게."

 "전심전력 하겠습니다."

 "그럼 이 여자애는 내가 무당산으로 데리고 가겠네."

 상우춘은 강변에 있는 한 고목으로 다가가 구덩이를 팠다. 그리
고 주공자의  시신에서 옷을 전부 벗기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매장했다. 이러한  나장(裸葬)은 명교의 규칙 중의 하
나로서 태어날 때 발가벗은  채로 왔으니 이승을 떠날 때도 알몸
이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장삼봉은 그러한 이유도 모르
고 오직 이 자들의 행동이 하나같이 요사스럽게 느껴졌다.

이튿날, 날이 밝자  장삼봉은 주지약을 데리고 떠났다. 장무기는
친조부님과 같은 장삼봉이  홀연히 떠나자 눈물이 샘솟듯 흘러나
왔다.

 이를 보다못한 상우춘은 미간을 찌푸렸다.

 "장소제, 자네 지금 몇 살인가?"

 장무기는 울음섞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열 두 살입니다."

 "열 두  살이며 어린애도 아닌데 그렇게  울고불고 하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사내 대장부라면 적어도 피는 흘릴망정 눈물만은
흘리지  말아야지. 계속해서 그렇게 울면 혼날 줄 알아!"

 "나는 태사부님과 헤어지기 싫어서  운 거지, 결코 누가 때린다
고 해서 울지 않아요. 만약에  오늘 나를 때린다면 훗날 열 배로
갚아 주겠어요."

 상우춘은 약간 어리둥절하더니 앙천대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
리고 한결 친숙한 말투로 말했다.

 "옳지, 사내 대장부라면  그만한 오기가 있어야지. 그렇게 무시
무시하게 나오는데 내 어찌 감히 너를 때릴 수 있겠느냐?"

 "나는 움직일 수도 없는 몸인데, 왜 때리지 못하는 거죠?"

 "오늘 너를 때렸다가 훗날 네가 네 태사부님에게 무공을 전수받
아서 나를 때리면 내 힘으로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느냐?"

 장무기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상우춘은 곧 배를  빌려서 한구(漢九)로 향했다. 한구에 도착한
후 다시 장강으로 가는 배를 갈아타고 동쪽으로 내려갔다. 그 접
곡의선 호청우가 은거하고 있는 호접곡은 완북(碗北) 여산호반에
있었다. 이 년 전, 장무기는 강줄기를 따라 북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부모님과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하는 도중
에 상당히 즐거웠었다. 오늘은  양친을 모두 잃은 상태에서 치료
를 받기 위해 동하(東下)하고  있으니, 그의 기분은 예전과 비교
해서 실로 천양지차가 있었다. 마음이 찢어질 듯이 괴로왔다. 그
러나 상우춘이  화낼까봐 감히 울지도  못했다. 더우기 장삼봉이
봉쇄했던 혈도가 스스로 풀리면서 한독이 발작할 때마다 이를 악
물고 참았다. 그 바람에 그의 입술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리고 한독은 하루하루 심하게 엄습해 왔다.

 장강 하류인 집경(集慶)에  도착하자 상우춘은 하선하여 마차를
빌려서 북으로 치달렸다. 수일 후, 그들은 봉양(鳳陽) 동쪽에 자
리잡은 명광(名光)에 도달했다.  접곡의선 호청우는 자기의 은거
처를 남이 아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때문에 상우춘은 여산호
반의 호접곡과 이십여 리쯤 떨어진 것에서 마차를 보내고 장무기
를 업고 걸어서 갔다.

 그의 생각 같아선 이십여 리  정도는 단숨에 달릴수 있을 것 같
았다. 그런데 범승에게 당한 내상이 심해선지 일 리밖에 걷지 않
았는데 전신의 근골이  쑤시고 아파서 걸음조차 옮겨놓기가 힘들
었다.

 장무기는 몹시 미안해 했다.

 "상대형, 이제부터는 혼자 걷겠어요. 이러다간 상대형의 몸마저
큰일 나겠어요."

 상우춘은 은근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평상시엔 단숨에 백 리를 왔다갔다 해도 끄덕없었는데, 그까짓
범승에게 맞은  장력이 나를 꼼짝 못하게  하다니 정말 어처구니
없었다."

 그는 오기가 발동했다. 하여  더욱 속력을 내서 달렸다. 그러나
내상이 심한데다가 억지로 힘을  내자 수십 장도 못 가서 사지백
해의 관절이 모두 산산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장무
기를 내려놓지 않았을  뿐더러 앉아서 쉬지도 않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너무나도 느린 걸음이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걸었는데 반도 채 가지 못했다. 산길마저
험준하여 점점 더 걷기 힘들었다. 결국은 한 숲에 도달하여 상우
춘은 장무기를 내려놓고 벌렁  드러누웠다. 한 발자국도 더 이상
옮겨 놓을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일단 숲속에서 하룻밤을 쉬고
내일 떠나자고  권했다. 상우춘도 지칠대로  지쳤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따랐다. 그들은 한 고목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심야에 장무기
는 한독이 다시 발작하면서  전신을 심하게 떨었다. 그는 상우춘
이 깨어날까 봐 감히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억지로 참았다.

 바로 이때였다. 멀리서 병기가 부딪치는 금속성이 들려왔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러느냐?"

 "동쪽을 봉쇄하고 숲속으로 몰아라!"

 일련의 외침이 울리더니  어지러운 발자국소리와 함께 숲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우춘은 깜짝 놀라 깨어나면서 오른손에 단도를 뽑아들고 왼손
으론 장무기를 안은 채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장무기는 나직이 말했다.

 "우리에게 덤비는 것 같지 않은데요."

 상우춘도 고개를 끄덕이며  고목 뒤에 몸을 숨기고 살펴보았다.
칠흑같은 어둠이 깔린 가운데 칠,팔 명이 한 명을 포위해서 협공
을 가하고  있었다. 협공을 당하고  있는 자는 적수공권이었으나
쌍장을 난무하는 가운데,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치 않았다. 한참
동안 격전을 벌이자, 포위망이 차츰 좁혀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초승달이 구름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주위가 약
간 환해졌다. 협공을  당하고 있는 자는 백색  승포를 입고 있는
사십여 세의 키가 크고 깡마른 화상이었다. 협공을 하고 있는 자
들 중에는 도인, 속가차림의  장한, 그리고 두 여인까지 끼어 있
었다. 모두 여덟 명이었다.

 두 회의승인 중 하나는 선장을, 또 하나는 계도를 들고 있었다.
선장과 계도가  한 번씩 휘둘러질 때마다  굉장한 질풍이 일면서
숲속의 낙엽이  사면팔방으로 난비했다. 한  명의 도인은 무수한
검광을 펼치고  있었다. 왜소한 체격의 사나이는  쌍도를 쥔 채,
땅바닥을 이리저리 뒹굴면서 지당도법(地堂刀法)으로 백의화상의
하체를 공격했다.

 두 여인은 각자 장검을  무기로 하여 쾌속무비하게 검법을 전개
했다. 그런데 격투를 벌이던 한 여인이 몸을 돌리는 순간 얼굴이
달빛에 비쳤다. 이를 본 장무기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 여인은 다름아닌 은이정의 정혼녀인 기효부였다. 장무기는 처
음에 여덟 명이 화상 한 명을 협공하는 것을 보고 비열하다고 여
겼다. 동시에 그 백의화상이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가기를 바랬
다. 그러나 막상 기효부를 알아보자 백의화상이 악인임에 틀림없
다고 단정내렸다.

 이때, 갑자기 한 장한의 외침이 울렸다.

 "암기를 사용합시다!"

 그 즉시 장한 한 명과  도인 한 명이 좌우로 흩어지면서 소매를
휘둘렀다. 파공음과 함께  탄환과 비도가 끊임없이 백의화상에게
날아갔다. 이쯤되자 백의화상은 버티기가 힘들었다.

 검을 쥔 긴 수엽의 도인도 외쳤다.

 "팽화상(彭和尙), 우리는 당신을 죽이려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목숨을 걸고 버티는 것이오? 백구수만 내놓으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 아니오?"

 이 말을 들은 상우춘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나직히 중얼거
렸다.

 "저분이 팽화상이란 말인가?"

 장무기는 부모님에게서 왕반산의  일과 천응교가 각파와 원한을
맺게 된 동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때문에 백구수가 왕반산에
서 유일하게 생환(生還)한  천응교의 현무단 단주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최근 각 방파가  천응교와 끊임없이 격전을 벌이는 이유
도 바로 백구수로 하여금 사손의 행적을 실토케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장무기는 신속히 생각을 굴렸다.

 '혹시 이 팽화상도 내 어머니와 같은 천응교의 인물이 아닐까?'

 이때, 팽화상의 낭랑한 외침이 들려왔다.

 "백단주는 이미 너희들 손에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
그런 자를 어찌 내놓을 수 있겠느냐?"

 긴 수염의 도인이 말했다.

 "우린그를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사람의 행방을 알
고자 할 뿐이다."

 "사손의 행방을 알고자 함이면 소림사 방장을 찾아가면 되지 않
느냐!"

 "당치않은 소리 작작해라! 방장님이  사손의 행방을 어찌 알 수
있느냐! 이건 순전히 천응교의  요녀 은소소가 우리 소림사를 궁
지에 몰아넣기 위해 꾸며낸 흉계다."

 장무기는 회의승인이 망모(亡母)의  이름을 들먹이자 어깨가 으
쓱해지는 한편 가슴이 아팠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이 년이 됐는데도 저들을 아직도 혼란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니.....'

 돌연 바깥쪽에서협공하고 있던 도인이 짤막하게 외쳤다.

 "모두 엎드리시오!"

 나머지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즉시 땅바닥에 납작하게 엎드
렸다. 순간, 섬광이 번뜩이며 다섯 자루의 비도가 팽화상의 가슴
을 향해 질풍처럼 날아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무기가 흠칫 하
는 순간, 화상의 몸이 용수철에 의해 튕겨지 듯 허공으로 솟아올
랐다. 다섯 자루의 비수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발밑을 스치고 지
나갔다. 그러나 위기를 완전히 모면한 것은 아니었다. 비도는 피
했으나 소림승의 선장과 계도 그리고 도인의 장검이 제각기 다리
를 향해 뻗쳐왔다.

 팽화상은 몸이 허공에 떠  있는 상태이므로 다시 신공을 구사해
피할 재간이 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회전시키는 동시 왼
손을 쭉  З어냈다.

 팍!

 그가 노린 것은  소림승의 정수리였다. 소림승의 정수리에 정확
히 이장을  내리친 그는 오른손을 펼쳐  상대방의 손에서 계도를
빼앗아 그 계도로 선장을 막았다.

 쳉!

 정수리에 일장을  맞은 소림승은 그  자리에서 두개골이 파열돼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성난 듯 고함을 지르며 추격해
갔다. 선장을 사용하는 소림승은  성난 야수와 같이 선장을떨치
며 소리쳤다.

 "팽화상! 내 사제를 죽였으니 오늘 네놈과 생사결단을 내겠다!"

 도인도 살기띤 음성으로 외쳤다.

 "네놈은 다리에 갈미침(蝎尾針)을  맞았으니 곧 독이 발작해 죽
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팽화상은  다리가 풀려 비틀거리며 제대로 몸의
중심을 잡지 못했다.

 상우춘은 안타까왔다.

 '그는 우리 명교의 큰  인물인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야 한
다.....'

 그는 심한 부상을 입고  있으면서도 앞으로 달려나가기 위해 억
지로 진기를 끌어올렸다.  순간, 내상이 격발되어 온몸이 으스러
지는 고통이 한꺼번에 엄습해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이때 팽화상은 일 장 밖으로 다시 몸을 솟구쳤으나 쓰러지고 말
았다. 체내의 독이 발작한  게 분명했다. 상우춘은 눈을 크게 뜬
체 상황 변화를 지켜보았다.  팽화상을 협공하는 일곱 명은 선뜻
팽화상에게 가까이 접근해 가지 못했다. 팽화상은 쓰러져 있지만
역시 그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수염이 긴 도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허사제, 자네가 먼저 비도 두 자루를 날려 시험해 보게."

 비도를 쓰는 도인은 즉시 오른손을 떨치자 두 자루의 비도가 파
공음을 내며 날아갔다. 한  자루는 팽화상의 오른쪽 어깨를 노렸
고, 한 자루는 왼쪽다리를  노렸다. 팽화상은 땅에 쓰러진 채 꿈
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죽은 듯 싶었다. 두 자루의 비도는 정확
하게 목표물에 꽂혔다. 그래도 팽화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수염이 긴 도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둘렀다.

 "이미 죽은 모양이야. 정말 아깝게 됐군. 저놈이 백구수를 어디
에다 숨겼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일곱 명은 동시에 앞으로 달려나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펑! 펑! 펑! 펑! 펑!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다섯 명이 동시에 뒤로 벌렁 나자
빠졌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팽화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그의
어깨와 다리에 여전히 비도가 꽂혀 있었다. 그는 독이 묻은 갈미
침을 맞아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적을 가까이 유
인하기 위해 일부러 죽은  척한 것이다. 그리고 계획대로 그들이
가까이 접근해 오자 대풍비운장(大風飛雲掌)을 전개한 것이다.

 그가 노렸던 다섯 명은 아미파의 두 여제자를 제외한 남자 다섯
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가슴에 일장을 맞았다. 팽화상은 땅에 쓰
러져 줄곧 공력을 끌어모으고 있었으며 또한 죽음을 각오한 마지
막 일격을 전개한 것이므로 그 위력이 엄청났다.

 기효부와 정민군은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땅
에 쓰러져 있는 다섯 명을 살펴보니, 한결같이 입에서 선혈을 토
해 내며 처절한 신음을 연발했다. 그러나 팽화상 역시 진력이 탈
진되어 휘청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것을 본 긴 수염의 도
장이 얼른 소리쳤다.

 "두 분 낭자, 어서 검으로 놈을 해치시오!"

 정민군은 속으로 냉소를 날렸다.

 '흥! 네가 뭔데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는 거냐!'

 그녀는 장검을 떨쳐 팽화상의 발목을 향해 베러 갔다. 팽화상은
장탄식을 하며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로서는 죽음을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생사일발의 순간,

 창!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며 정민군의  검을 가로막는 또 한 자루
의 검이 있었다. 뜻밖에도  기효부가 정민군의 검을 가로막은 것
이다.

 정민군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입이 벌어졌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

 "사저(師姐), 팽화상은  우리에게만은 기습을  전개하지 않았어
요. 우리도 그를 죽일 순 없잖아요!"

 "뭐라고? 그가 일부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냐? 그는 단지
우리까지 손상시킬 힘이 없었던 것뿐이다!"

 정민군은 팽화상에게 앙칼지게 다그쳤다.

 "팽화상, 나의 사매가 자비를  베풀어 너의 목숨만은 살려 주라
고 하니 너도 이젠 백구수가 있는 곳을 순순히 털어놓아라!"

 팽화상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정낭자, 나 팽영옥(彭營玉)을 우습게 생각하는 모
양이군. 무당파의 장취산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의형의
거처를 입 밖에  내지 않았는데, 나 팽영옥은  비록 그와 비교해
보잘것 없는 존재지만 그를 본받을 자격은 갖추고 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며 그 자리
에 주저앉았다.  정민군은 잽싸게 앞으로  다가가 다시는 움직일
수 없게끔 허리를 찍은 것이다.

 정민군은 냉소를 날렸다.

 "장취산은 눈이 멀어 사교의 요녀와 결합하여 결국 헛되게 죽음
을 당했는데 뭐가 본받을 게 있단 말이냐?그들 무당파는....."

 기효부가 얼른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사저.....!"

 "은육협까지 들춰내지 않을 테니 안심해라!"

 정민군은 수중의 장검을 살짝  떨쳐 팽화상의 오른쪽 눈을 겨냥
하며 한 자 한 자 뚜렷하게 내뱉었다.

 "네가 만약 실토하지 않으면, 우선 오른쪽 눈을 찌르고 나서 다
시 왼쪽 눈을 찌르겠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으면 귀와 코, 순서
대로 베어 버리겠다!"

 그녀의 검 끝이 팽화상의 눈에서 불과 반 치밖에 떨어지지 않았
다. 그 검 끝에서 싸늘한 검광이 뿌려졌다.

 팽화상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냉랭하게 맞섰다.

 기효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매우 난처해 했다.

 "사저, 동문의 우애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닥쳐라! 찌르지 않겠다는 거냐!"

 "사저, 안심하세요. 사부님이 저를 의발전인으로 지목해도 저는
절대 그 뜻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흥! 네 말을 듣고 보니  마치 내가 질투를 느끼는 걸로 오해하
는 모양인데, 내가 너만  못한 게 뭐가 있다고 질투를 하겠느냐?
여러 말 말고 찌를 건지,  아니면 내 입에서 모든 얘기가 나오길
바라는지, 어서 선택하라!"

 기효부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소매가 무슨 잘못을저질렀으면 사저의 처벌을 달게 받겠어요.
제발 다른  문파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저를 궁지로 몰지
마세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정민군은 막무가내였다.

 "흥! 그렇게 가련한 꼴을 꾸며낸다고 해서 내 마음이 달라질 줄
아느냐! 넌 눈물을 흘리면서도 속으론 날 욕하고 있겠지! 그러니
까 사 년 전이었을까, 삼 년 전이었을까? 아무튼 너는 잘 기억하
고 있겠지. 그해 감주에서 너는 정말 병이 생겼느냐? 흥! 생기긴
생겼지. 병이 생긴 게 아니라 어린애가 생긴 게 아니었느냐?"

 여기까지 들은 기효부는 이내 몸을 돌려 뛰어나갔다.

 정민군은 그녀가 달아날 것을  예측하고 있던 차라 잽싸게 신법
을 전개해 장검을 쥔 채 앞을 가로막았다.

 "내 말대로 순순히 팽화상의 눈을 찔러라! 그렇지 않으면 그 어
린애의 부친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명문정파의 제자로서 마교
의 요승을 감싸주는지 밝혀라!"

 기효부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이대로 떠나도록 내버려 둬요!"

 정민군은 장검으로 그녀의 가슴을 겨냥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애를 어디서 키우고  있느냐? 너는 무당파 은이정의 정혼녀
이거늘 어째서 다른 사람의 애를 낳았느냐?"

 정민군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크
게 의아해 했다.

 기효부는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져 질풍같이 앞으로 달려나
갔다.

 그 순간 정민군이 장검을 떨쳐 그녀의 오른팔에 검상을 입혔다.

 기효부는 심한 부상을 입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왼손으로 검
을 뽑아쥐었다.

 "사저, 계속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다면 나 역시 당하고만 있을
수가 없어요!"

 정민군은 자기가 기효부의  극비를 들추어내면 그녀가 틀림없이
살인멸구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막상생사투가 벌어지면,  자기는 기효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는 것을 잘 알고 선수를 쳐서 검상을 입힌 것이다.

 지금 기효부의 입에서 극단적인 말이 내뱉어지자 즉시 월락서산
(月落西山)의 초식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찌르려 했다.

 기효부는 오른팔에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사저가 악랄한
살수를 펼처오자 본능적으로  왼손으로 검을 전개해 막아야만 했
다.

 그들은 동문에서 검법을 익혔으므로 서로의 초식과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싸움을 벌이자 일초 일식이 주조면밀
하여 더욱 아슬아슬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중상을 입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므로 누구를 도와줄 수도  없었다. 단지 눈을 멀뚱멀뚱 뜨
고 싸움을 지켜볼 뿐이었다.

 기효부의 팔에서 계속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정민군을 뿌리
치고 속히 이곳을 떠나고 싶었으나 부상을 입은데다가, 왼손으로
검을 사용하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아 시종 수세에 몰렸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정민군이 늘  기효부의 무공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감히  지나치게 접근해 오지  못했다. 단지 외곽에서
쉴새없는 공격을  펼칠 뿐이었다. 시간을  끌수록 기효부는 피를
많이 흘려 제풀에 지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계획은 과연  적중되었다. 기효부는 갈수록 자세가 흐트
러지며 검법도 느슨해졌다. 정민군은 그 틈을 타서 두 초식을 성
공시켰다. 기효부는 오른쪽 어깨에 다시 이검(二劍)을 맞자 한쪽
옷이 선혈로 물들었다.

 이때 팽화상이 갑자기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정낭자! 어서 이리 와서 나의 왼쪽 눈마저 찔러라!"

 그는 기효부가 고마왔다. 더군다나 정민군이 그녀를 위협하는데
무기로 삼고 있는 약점이, 여자가 생명보다 더 중요시 하는 절개
가 아닌가!

 팽화상은 기효부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만 없었
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돕고 싶었다. 팽화상은 정민군의
초식이 갈수록 악랄해지자 욕을 퍼부었다.

 "정민군! 이 더러운 계집아! 강호에서 너를 독수야초(毒手野草)
라 부르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과연 마음이 독사같고, 생김새
가 잡초 같구나. 세상 여자가  모두 너 같이 구역질날 정도로 추
악하게 생겼다면 모든 남자가 절간으로 들어가 중이 되었을 것이
다. 이 호박 덩어리  같은 독수야초야! 제발 내 앞에서 얼씬거리
지 말아라. 아니면 그 추악한 꼬락서니가 안 보이게끔 어서 왼쪽
눈마저 찔러라! 부탁이다!"

 사실 정민군은 비록 미녀가 아니지만 이목구비가 수려한 편이었
다. 그러나 팽화상은 그녀가  추하게 생겼다고 소리칠 뿐 아니라
제멋대로 독수야초라는 별호까지 붙여 주었다.

 그는 세정(世情)에  통달하여, 어떠한  여자라 할지라도 용모가
추하다고 하면 자존심이 크게  손상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
민군이 자기의 말에  발끈하여 달려온다면 기효부는 이곳에서 벗
어날 수 있을 것이다. 팽화상이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정민군은 그의  격장지계에 선뜻 넘어가지 않았다. 일단
기효부를 처치하고  나서 얼마든지 그에게 능욕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모독적인 욕을 못 들은 척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팽화상이 아니었다. 그는 더욱 목청
을 높여 외쳤다.

 "기여협이 절세미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독
수야초 정민군이 자기의  분수도 모르고 무당파의 은이정을 유혹
하려고 꼬리를 치니 가소롭구나! 은이정이 너를 거들떠보지 않으
니까 이번엔 기여협을  모함해 죽이려는구나! 하하..... 너는 광
대뼈가 너무 높고 입이 하마  같을 뿐 아니라, 안색이 고양이 똥
처럼 누르퉁퉁하다! 집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거울에 그 상판때
기를 비추어 보고 나서 꼬리를 치든, 추파를 던지든지 해라!"

 정민군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성난 야수처럼 팽화상
에게 달려와 장검으로 입을 찌르려 했다.

 정민군의 광대뼈가 약간  높은 것은 사실이었다. 입도 앵두같이
작은 입이 아니며 피부색도  백옥처럼 희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
서 아주 보기 흉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자신은 가끔  그러한 것이 흠이라고 느껴지기는 했지만
주위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데,팽화상의 보는 눈이 예민하여 비단 그 약점을 쪽집개처럼
집어냈을 뿐 아니라 과장시켜 떠들어 대자 정민군이 어찌 오장육
부가 뒤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녀는 아직 은이정
을 만나 본 적도 없는데 고리를 친다느니, 추파를 던졌다고 운운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녀가 막 일검을  내뻗는 순간 숲 속에서  난데없이 한 사람이
뛰쳐나와 대갈일성을 하며 팽화상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사람의  출현은 실로 뜻밖이었다. 정민군은  미처 검을 거둘
새도 없이 그 자의 아랫배에 일검을 찔렀다.

 꼭 전광석화와 같았다. 순간 그 자는  장풍을 펼쳐내 정민군의
가슴을 적중시켰다.

 펑!

 정민군은 심한 충격과 함께 대여섯 자 뒤로 밀려나 땅에 쓰러지
며 입에서 선혈을 뿜어냈다.

 한편, 느닷없이 나타난 자는  배에 장검이 깊숙이 꽂힌 채 고목
처럼 쓰러졌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곤륜파의 수염을 길게 기른 도인이 대뜸 놀
란 외침을 토했다.

 "백구수다! 백구수!"

 그는 중상을 입은 후  팽화상이 자기를 감싸주기 위해 소림, 곤
륜, 아미, 해사파의 고수들에게 협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내, 있는 힘을  다해 달려와 팽화상을 위해  마지막 일검을 받은
것이다.

 그의 장력이 워낙 웅후하여  숨이 끊어지면서 펼쳐낸 일장에 정
민군은 갈비뼈가 여러 개 부러졌다.

 기효부는 겨우 숨을 돌려  옷자락을 찢어 상처를 동여매더니 팽
화상에 찍힌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떠나가려 했다.

 팽화상이 얼른 소리쳤다.

 "잠깐만! 기낭자, 이 팽화상의 큰절을 받으시오."

 그는 즉시 절을 올렸으나 기효부는 왼쪽으로 몸을 돌려 피해 그
의 절을 받지 않았다.

 팽화상은 곤륜 도장이 떨어뜨린 장검을 주웠다.

 "이 정민군은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려 기낭자의 절개를 더럽혔
으니 살려둘 수가 없소."

 이렇게 말하며 정민군의 목을 향해 찌르려 했다.

 기효부가 얼른 그를 만류했다.

 "그녀는 나의  동문 사저예요. 그녀는  나를 무정하게 대했지만
나는 그에게 정의를 저버리는 행동을 할 수 없어요."

 팽화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만약 그녀를 죽이지 않으면 차후에 기낭
자에게 더욱 불리한 행동을 할 것이오."

 기효부의 양볼을 타고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길한 계집이니 모든 것을운명
으로 받아들이겠어요. 팽대사, 나의 사저만은 상하게 마세요."

 팽화상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기여협의 분부인데 내 어찌 거역할 수 있겠소?"

 기효부는 나직이 정민군에게 말했다.

 "사저, 부디 몸 보증하세요."

 이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모습은 숲 속으로 사라졌다.

 팽화상은 중상을 입은 체 땅에 쓰러져 있는 다섯 명에게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 팽화상은 너희들과 아무런  원한이 없다. 그래서 처음엔 너
희들을 꼭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 저 말대가리처럼 생
긴 계집이 기여협을 모독하는  말을 너희들도 들었기 때문에, 그
헛소문을 강호에 퍼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입
을 영원히 다물게 해야겠으니 저승에 가서라도 날 원망하진 말아
라."

 그는 말을 하면서 곤륜파의 두 도인과 소림승, 그리고 해사파의
두 고수를 차례로 죽여 버렸다.

 이어 정민군의 어깨에 검을 갖다 댔다. 정민군은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중상을 입은 몸이라 저항할 수도 없어 욕을 터뜨렸다.

 "이 더러운 땡중아! 어서 날 죽여라!"

 팽화상은 이빨을 드러내어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 너같은 추녀도  남자의 손길이 두렵느냐? 솔직이 말
해서 너를 죽일 용기가 없다. 너 같은 추녀가 지옥으로 들어가면
지옥의 악귀들이 모두 놀라  인간 세상으로 뛰쳐나올 것이며, 염
라대왕마저 저의 상판때기에  놀라 구역질을 한다면 나중에 내가
지옥에 가더라도 지장이 있다. 하하핫....."

 그는 광소를 날리더니 장검을  버리고 백구수의 시체를 안아 다
시 통곡을 하고 나서야 유유히 떠나갔다.

 정민군은 한참  후에야 검집으로 몸을  지탱하여 비틀비틀 숲을
빠져나갔다.

 이 경심동백(驚心動魄)할 싸움을  장무기와 상우춘은 처음서 부
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둘은  정민군이 떠나간 후에야 길게 숨을
내쉴수가 있었다.

 무기는 한 가지 가장 궁금한 것이 있었다.

 "상대가, 기낭자는 저의 은육숙의  정혼녀인데 그 정씨 성을 가
진 여인의 말을 들어보면.....  다른 사람과 애를 낳았다는데 그
게 정말일까요?"

 "그 여자가 꾸며낸 말이니 믿지 말아라."

 "맞아요. 나중에 은육숙을 만나면  그 여자를 단단히 혼내 주리
고 해야겠어요."

 "아니야. 너의 은육숙에게 그 말을 하면 안 된다. 알겠느냐?"

 "왜 그러죠?"

 "그런 듣기 거북한 얘기는 될 수 있는 한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아."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잠시 후에 갑자기 물었다.

 "상대가, 혹시 그 일이 사실일까봐 그러는 게 아니예요?"

 상우춘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모르겠다."

 날이 밝자 상우춘은 몸을  일으켜 장무기를 업고 걸음을 떼어놓
았다. 간밤에 휴식을 취해서인지 그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몇 리쯤 가서 이들은 관도로 들어갔다. 상우춘은 주위를 살피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호사백이 은거하고 있는 호접곡은  매우 황폐한 곳일 텐데, 어
찌 관도로 들어섰지? 혹시 길을 잘못 택한 게 아닐까?"

 그는 행인을 찾아 길을 자세히 물으려 했다.

 이때 말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네 명의 몽고 병졸이 장도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빨리 걸어라! 빨리!"

 그들은 상우춘 뒤까지 달려와 마치 짐승을 우리로 몰 듯이 앞으
로 가라고 재촉하며 장도를 휘둘렀다.

 상우춘은 내심 암담했다.

 '오늘 다시  호랑이 굴로 떨어져 장형제의  목숨마저 잃게 되는
것이 아닐까?'

 지금 그는 무공이 완전히 상실되어 평범한 몽고 병졸도 당해 낼
수 없어 그들이 모는 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얼마 동안 걷자 관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
들도 원병(元兵)에 의해 짐승 몰듯하여 끌려 온 것이다.

 '보아하니 나를 잡는 게 목적이 아니고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히
려는 모양이군.....'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삼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말을
탄 몽고 군관이 육, 칠 십여 명의 병졸을 대동한 채 거드름을 피
우고 있었다.

 백성들은 그 군관앞을 지날 때마다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한인(漢人) 하나가 군관 옆에 붙어서서 다그치듯 물었다.

 "성이 뭐냐?"

 백성이 대답하면 한 몽고  병졸이 냅다 엉덩이를 걷어차거나 뺨
을 후려쳤다. 그 백성은 허겁지겁 지나갔다.

 이런 식으로 일일이 신문을  하다가 성이 장(張)이라고 대는 사
람이 있으면 멱살을 잡아 한쪽으로 끌어모았다.

 그런데 한 사람은 새로 사온 부엌칼이 발견되는 바람에 역시 한
쪽으로 분리시켰다.

 장무기는 상황이 심상치 않자  얼른 상우춘의 귀에 대고 속삭이
듯 말했다.

 "어서 일부러 넘어져 풀밭에다 칼을 버리세요."

 상우춘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잡초가 무성한 곳을 택해 일부
러 넘어지는 척하며 칼을  풀고 엉금엉금 기어 일어났다. 그리고 
뒤뚝거리며 군관 앞으로 걸어갔다.

 그 한인 통역관이 우악스럽게 호통을 쳤다.

 "이런 육시랄 놈! 대인께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하겠느냐?"

 상우춘은 주인으로 모시던 주자왕 일가족이 몽고병에 의해 참변
을 당한 것이  떠오르자 죽는 한이 있어도  무릎을 꿇을 수 없었
다.

 이때 마침 한 몽고 병졸이 그의 빳빳한 자세가 눈에 거슬렸는지 
냅다 무릎 안쪽 오목한  곳을 걷어차자 그 자리에 꺾이듯이 엎어
졌다.

 한인 통역관이 다시 다그쳤다.

 "성이 뭐냐?"

 장무기가 앞을 다투어 대답했다.

 "성은 사(謝)예요. 그는 저의 큰 형님이예요."

 원병이 상우춘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차며 소리쳤다.

 "어서 꺼져라!"

 상우춘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관자놀이가 웅실거렸다. 그는 
일어나며 속으로 피를 토하듯 자신에게 다짐했다.

 '내 생애에 오랑캐들을 막북(幕北)으로 몰아내지 못한다면 성을 
갈고 말겠다!'

 그의  이 맹세가  중국  대륙의 판도를  바꾸어  놓게  될 줄이
야.....

 상우춘은 장무기를 데리고 성큼성큼 북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어느 정도 걸어나갔을 때 등뒤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한쪽으로 격리되었던 십여 명이 모두 목
이 잘라진 채 쓰려져 있었다. 

 알고 보니 당시 조정의 학정에 반기를 높이 쳐든 사람들이 많았
다. 몽고 대신들은 한인을  뿌리째 뽑고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다. 결국, 태사(太師) 관직에 있는 파연(巴延)이 한 가
지 학살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천하에 
장(張), 왕(王),  유(兪), 이(李), 조(趙) 이  다섯 성씨를 가진 
한인을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죽이라는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학살령이었다.

 한인 중에 장, 왕, 유, 이  네 가지 성을  가진 자가 가장 많았
다. 그리고 조씨 성은  송조(宋祖)의 황족이므로 이 다섯 성씨의
씨족을 몰살하면, 한인의 원기가 크게 손상할 것이라는 게 그 학
살령의 취지였다.

 나중에, 이 다섯 성씨를 가진 자들 중에서도 원(元)에 굴복하여 
죽지 않은 사람이 벼슬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몽고 대신이 황제
께 상소하여 비로소 그 학살령을 철회했다.

 상우춘은 걸음을 재촉해 황폐하고 한적한 골짜기만 찾아다녔다. 
좀처럼 인적이 닿지 않는  야산이지만, 곳곳에 울긋불긋 꽃이 만
발하니 화사한 봄기운으로 충만돼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아름다운  경치에 속 편하게 눈길을 줄 마
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때  나비떼가 꽃밭 사이에서 한가로이 날
으는 것을 보고 장무기가 소리쳤다.

 "그곳이 정녕 호접곡이라면 저 나비떼를 따라가 보는 게 어떻겠
어요?"

 상우춘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좋아....."

 두 사람은 곧 꽃밭  사이로 뚫고 들어갔다. 꽃밭 깊숙이 들어가
자 작은 길이 나왔다.  그리고 나비가 더욱 많아졌다. 꽃밭 사이
에 뚫려 있는 작은 길은 산모퉁이를 끼고 돌자 녹음이 우거진 골
짜기로 연결되었다. 

 상우춘은 주위의 지세와 나비떼의 한가롭게 노니는 상황을 종합
하여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가벼운 흥분마저 느꼈다.

 장무기는 줄곧 그의 등에 업혀 있었다.

 "이젠 내려주세요. 혼자서 천천히 걸을 께요."

 상우춘이 그를 내려놓았다.

 골짜기 안으로  접어들어 한참 가자  해가 중천으로 자리바꿈을 
했다. 이때, 맑은 계곡물을  끼고 대여섯 칸의 초옥이 세워져 있
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초옥 뒤켠에는 형형색색의 화초가 심어
져 있었다.

 상우춘은 환성을 질렀다.

 "여기다! 저것이 바로 호사백님이 약재를 심는 약포(藥圃)다."

 그는 성큼성큼 초옥 앞으로  걸어가 공손히 낭랑한 음성으로 말
했다.

 "제자 상우춘이 호사백님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잠시 후 어린 동자가 초옥 안에서 걸어나왔다.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상우춘은 장무기의  손을 잡고 초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대청 옆에 제법 청수하게 생긴 중년인이 한 어린 동자가 약을 달
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청 안은 온통 약초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상우춘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호사백님, 그 동안 편안하셨습니까?"

 장무기는 내심 이 중년인이 접곡의선 호청우라고 생각해 따라서 
큰절을 올렸다.

 호청우는 상우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주자왕에 관한 일은 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운명이니라. 보아하니 오랑캐들의  운기(運氣)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니, 본교가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줄 날도 그만큼 늦어질 
모양이다."

 그는 묻지도 않고 상우춘의 맥을 짚어보더니 옷을 풀어 헤쳐 가
슴을 살펴보았다.

 "응..... 너는 철심장(鐵心掌)에 당했구나. 원래 대수롭지 않은 
것인데, 네가 힘을 너무 많이 쓰는 바람에 한독이 가슴으로 파고
들어 치료하기가 약간 까다롭게 됐다."

 그는 장무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애는 누구냐?"

 상우춘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백님, 그는  장무기라 하며 바로  무당파 장오협의 아들입니
다."

 호청우는 멍해지더니 이내 성난 표정으로 변했다.

 "그가 무당파라고? 왜 이곳으로 데려 왔느냐?"

 그러자 상우춘은 주자왕의  아들을 보호해 달아나다가 몽고병을 
만나게 되어 장삼봉에게 구원을 받은 경위를 일일이 얘기해 주고 
나서,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부탁했다.

 "제자는 그의 태사부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으니, 사백님께
서도 이번 한 번만은 그의 생명을 구해 주십시오."

 호청우는 냉랭하게 말했다.

 "넌 정말 통도 크고 인정도 많구나. 흥! 장삼봉이 구한 것은 너
지 내가 아니다. 그리고 넌 내가 파례적으로 무엇을 할 사람으로 
생각했느냐?"

 상우춘은 땅에 무릎을 꿇고 연방 큰절을 올렸다.

 "사백님, 이 장형제의 부친은 친구를 배반할 수 없어 스스로 목
숨을 끊은 대장부 중에 대장부입니다."

 호청우는 다시 냉소를 날렸다.

 "대장부라고? 천하에 대장부는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다. 그게 
뭐가 대수롭다는 거냐? 그가 무당파가 아니라면 몰라도, 정녕 명
문정파의 인물이라 자부한다면 왜 나 같은 사파의 사람에게 도움
을 청하러 왔느냐?"

 "자형제의 모친은 바로 백미응왕 은교주의 딸이니, 그도 절반은 
본교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호청우는 마음이  약간 동요되는 듯 고개를 끄덕
였다.

 "음..... 일어나라.  그가 천응교주의  외손자라면 생각을 달리 
할 수도 있지."

 그는 장무기 앞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

 "얘야, 나에게 한 가지 철칙이 있단다. 명문정파로 자처하는 사
람에게는 절대 병을 치료해 주지 않는다. 너의 모친이 정녕 우리
교의 사람이라면 너의 병을 치료해 주어도 철칙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지. 너의  외조부 백미응왕도 원래는  명교의 사대호법 중에 
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그가  스스로 천응교를 창립한 것은 교내
의 형제와  불화가 생겼기 때문이지, 명교를  배반한 게 아니다. 
다시 말해 천응교도 명교의 한  지파라 할 수 있다. 너의 상세를 
치료해 주기 전에 우선 나하고  한 가지 약조를 해야 한다. 다름
이 아니라 상세가 완치된  후에 곧장 너의 외조부를 찾아가 앞으
로 영원히  명교에 투신해야  하며, 무당파는 인연을  끊어야 한
다."

 장무기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상우춘이 입을 열었다.

 "사백님, 그것은 안 됩니다. 장삼봉 장진인께서 미리 못박은 말
이 있습니다.  장형제를 절대 억지로  명교에 가입시키지 말라고 
하셨고, 저도 그의 뜻에 따르기로 약조를 했습니다."

 호청우는 대뜸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장삼봉이 대관절 뭐냐? 그가 우리 명교를 업신여기는데 우리가 
왜 그를 도와야 한단 말이야? 애야, 너의 생각은 어떠냐?"

 장무기는 자신의 오장육부가  모두 한독에 침투돼 있어, 심지어 
태사부님 같은 공력이  심후한 사람도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기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 신의에게 치료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태사부님께선 절대 명
교에 가입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지 않았던가?!

 장무기는 명교가 왜  나쁘며, 태사부와 사백사숙들이 무엇 때문
에 명교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태사부님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있으므로 그분의 말이라면 틀림없
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를 치료해 주지 않겠다면, 설령 독이 발작해 죽는 한이 있더
라도 태사부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장무기는 당당하게 말했다.

 "호 선생님, 저의 모친이  천응교의 당주였으니 제 생각에 천응
교도 좋은 문파인 것  같아요. 하지만 태사부님께서 저더러 절대 
명교에 투신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저도  약조를 했으니 치료를 
해 주시지 않겠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제가죽음이 두려
워 명교에 가입한다면  상세가 완치되더라도 신의를 저버린 졸부
로 낙인 찍힐 것입니다."

 호청우는 가소롭단 듯이 코웃음을 쳤다.

 "쥐새끼만한 녀석이 영웅호걸의 흉내를 내는 꼴이란 정말 못 봐
주겠구나! 두고보자!  조만간 나한테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하게 
될 테니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상우춘에게 잘라 말했다.

 "그가 우리 교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것이 확고한 것 같으니 어
서 밖으로 끌어내라! 이 호청우의 집에 병들어 죽은 놈이 있어서
야 말이 되겠느냐?"

 상우춘은 이 사백의 옹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입밖에 내
뱉은 말은 절대 번복을  하지 않으니 이젠 통사정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소형제, 명교는 비록  명문정파로 인정받아 오지 못했지만, 당
조(唐祖) 때부터 세세대대  그 명맥을 이어오며 많은 영웅호걸을 
배출했네. 더군다나 자네의  외조부는 천응교의 교주시며 모친이 
천응교의 당주였으니 여러  생각 말고 나의 호사백님이 원하시는 
대로 명교에 가입하게, 후일  장진인에게는 내가 모든 책임을 지
겠네."

 장무기는 몸을 일으키며 의연하게 말했다.

 "상대가께선 이미 있는 최선을 다 하셨으니, 저의 태사부님께서
도 절대 나무라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당당하게 밖으로 걸어나갔다.

 상우춘은 흠칫 안색이 변했다.

 "어디로 가는 건가?"

 "제가 만약 호접곡에서 죽게 되면 접곡의선의 명성에 누를 끼치
게 될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곧장 초옥 밖으로 걸어나갔다.

 호청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흥! 견사불구(見死不救) 호청우의 악명을 아직 모르고 있는 모
양인데, 호접곡 밖에서 죽은 시체가 너뿐인 줄 아느냐?'

 건사불구(見死不救)!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구제하지 않는 신의 호청우, 그는 과연 괴
팍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었다.

 상우춘은 황급히  뒤쫓아가 장무기를 잡아  다시 호청우 앞으로 
데리고 왔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호사백님, 정말 이 장형제를 구해 주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호청우는 입가에 야멸찬 미소가 띠었다.

 "내가 견사불구라는 것을 너는 잘 알면서도 그런 어리석은 질문
을 하느냐?"

 "저의 상세는 치료해 주시겠죠?"

 "그야 물론이지."

 "좋습니다. 제자는 이  장형제를 완치시키겠다고 장진인께 약조
했으니 제자 대신 이  장형제를 치료해 주십시오. 제자와 장형제
를 서로 맞바꾸는 것이니 사백님께서는 전혀 손해가 없으실 겁니
다."

 호청우는 정색을 했다.

 "너는 절심장을 당해 곧  나의 치료를 받는다면 완쾌될 수가 있
다. 하지만 이레가 지나면 요행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
도 무공은 상실될 것이다. 그리고 열 나흘이 경과되면 도저히 구
제할 길이 없다."

 상우춘은 신의를 지키기 위해 죽음마저 불사했다.

 "그것이 바로 사백님의  명성을 더욱 빛낸 견사불구이니 제자는 
죽더라도 사백님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이때 장무기가 호청우에게 소리쳤다.

 "저는 당신의 도움을 받지 않겠어요!"

 이어 상우춘에게 고개를 돌렸다.

 "상대가, 나 장무기가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남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비겁한 소인배인 줄 아십니까? 그런 방법으로 목숨을 
유지하려면 차라리 죽는 게 속 편해요."

 상우춘은 그의  고집을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띠를 풀어 강제로 
그를 의자에 꽁꽁 묶었다.

 장무기는 다급해졌다.

 "어서 나를 풀어 주세요! 풀어 주지 않으면 욕을 하겠어요!"

 상우춘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호청
우에게 욕을 퍼부었다.

 "견사불구 호청우! 정말  소처럼 미련하군요! 아니 짐승만도 못
해요!"

 호청우는 그의 욕설을 들으면서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상우춘은 정중히 몸을 숙였다.

 "호사백님! 저는 이미  작별을 고해야겠습니다. 다른 의원을 찾
아갈 생각입니다."

 호청우의 음성은 눈빛만큼이나 차가왔다.

 "야생마처럼 날뛰어도 넌  이레 동안에 이곳 안휘성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상우춘은 초연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견사불구의 사백님 밑에 필사막구(必死莫救)의 사질
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는 즉시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호청우는 코털을 뽑아 후 하고 불며 상우춘의 뒷통수에 대고 태
연자약하게 말했다.

 "너는 네 자신 목숨과 이 녀석의 목숨과 바꾼다고 했지만, 내가 
언제 그 제의에 승락했느냐? 둘 다 구하지 않겠다!"

 이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반 토막의 녹용을 집어 살짝 던지자 
정확하게 상우춘의 무릎 안쪽 혈도에 적중되었다.

 상우춘은 그 자리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호청우는 장무기
를 풀어 주고 나서 뒷덜미를  잡아 냅다 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장무기는 상우춘이 쓰러져 있는 옆에 떨어졌다.

 그는 악을 쓰듯 소리쳤다.

 "이 지독한....."

 순간, 한독이 격발되어 정신이 흐릿해졌다.

 정신을 잃어가는 그의 귓전에 호청우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너희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생자멸(自生自滅)해라!"


                                 ----- 제 2 권 6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7 장  호접곡의 괴의(愧醫) 


 장무기의 맥을 짚어 본  호청우는 이내 안색이 변했다. 그는 눈
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녀석이 당한 한독은  정말 해괴하군. 혹시 현명패천장이 아
닐까? 그 장법은 실전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그 장법
을 구사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만약 현명패천장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이렇게 음독한 장력은
더 없을 텐데.....  이 녀석이 여지껏 버티면서  죽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야. 참, 그렇군, 틀림없이 그 장삼봉 노도
가 심후한 공력으로 그를  연명시킨 거야. 지금 음독이 오장육부
까지 침투해 응결되었으니 신선이 아니고서야 살려낼 수 없을 거
야.....'

 그는 장무기를 다시 초옥 안으로 안고 가 의자에 내려놓았다.

 잠시 후 장무기는 께어났다. 이때 호청우는 맞은편 의자에 앉자
넋빠진 사람처럼 깊은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우춘은 문 밖 잡초더미 위에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호청우는 평생  동안 의술에 심혈을  기울여 어떠한 난치병이라
해도 완치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의선(醫仙)이란 별호를 얻
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명패천장으로 인한  한독은 아직 겪어본 적이 없었다.
더우기 이 극한 음독을 당하고도 수년 동안 죽지 않고 독이 오장
육부에 응결된 사례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원래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장무기를 치료해 주지 않기로 결
심했다. 한데, 이건 평생에  겪기 어려운 괴질임을 알게 되자 은
근히 구미가 당겼다.

 호청우는 곰곰히 생각한 끝에 드디어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음..... 맞았어! 이 녀석을 우선 완치시킨 후에 다시 죽여버리
면 되겠군."

 그러나 오장육부에  응결된 음독을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청우는 의자에 앉아 꼬박 두 시간을
심사한 끝에 열 두개의  가늘고 작은 동편(銅片)을 꺼내 와 내력
(內力)을 이용해 장무기의 단전 아랫 부위 중극혈(中極血), 목줄
기 아랫 부위 천돌혈(天突血), 어깨 부위 견정혈(肩井血), 등 열
두 군데 혈도에 꽂았다.

 열 두 개의 동편을 꽂자 장무기 몸의 십이경상맥(十二經常脈)과
기경팔맥(奇經八脈) 이 즉시 단절되었다.

 장무기의 몸에 상맥과 기경이 단절되자 오장육부에 침투돼 있던
독이 서로 작용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호청우는 곧  그의 어깨 부위 운문(雲門),  중부(中府) 두 군데
혈도를 뜸질했다.

 이어 팔뚝에서  엄지까지의 천부(天府), 협백,  척택, 공최, 열
결, 경거, 대연, 어제, 소상 등 혈도를 뜸질했다. 이 열 두 군데
혈도는 수태음폐결(手太陰肺經)에 속하며, 장폐(臟肺) 깊숙이 침
투한 음독을 다소나마 감소시킬 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이열공한(以熱攻寒)이므로 장무기가 겪는 고초는 음독
이 발작할 때보다 몇 갑절 더 심한 것이다.

 호청우는 장무기의 고통 따위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얼마 후 장무기의 몸은 온통 뜸질자국으로 얼룩졌다. 그런 장무
기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내 입에서 신음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어림도 없을 것이
다.'

 그는 오히려 태연하게 웃으며 호청우와 혈도경맥의 부위에 대해
논했다.

 그는 비록 의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의부인 사손으로부터
점혈, 해혈, 그리고 이혈 수법까지 들어, 배의 혈도 부위에 대해
서는 손바닥 보듯이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세부적인  심층까지 파고들면 이  절세의 신의 호청우와는
비교가 될 수 없지만 그런대로 대화가 통했다.

 호청우는 뜸질을 하며 지루함을 달래는 듯 쉬지 않고 그와 얘기
를 나누었다.

 장무기는 그의  심오한 의리(醫理)를 십중  팔구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무당파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살려 때로는 자신의 주
장을 내세워 강변을 벌이기도  했다. 호청우는 그의 그릇된 생각
을 납득시키기 위해 장황한 이론을 늘어놓아 끝내 잘못을 시인하
게끔 만들었다.

 "네 녀석은 쥐뿔도 모르면서 멋대로 지껄이는구나."

 이 한 마디가 바로 그가 얻은 만족이었다.

 이곳은 심산유곡이므로 잡일과약을  달이는 일을 맡아 하는 몇
몇 동자 외에  호청우와 말벗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장무기를 맞이해 모처럼 자신의 심오한 강론을 털어놓게 되
자 제법 마음이 후련했다.

 그가 뜸질을 마쳤을 때 날이 이미 어둑어둑해졌다. 동자는 식사
를 마련하고 별도로 국과 밥을 쟁반에 담아 문 밖 초지에 누워있
는 상우춘에게 갖다 주었다.

 이날 밤 상우춘은 문  밖에서 자야만 했다. 장무기는 그의 혈도
를 풀어달라고 호청우에게  사정을 하지도 않고 스스로 상우춘의
곁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것은 고난을 함께 하겠다는 무언의 약조였다.

 호청우는 그러한  행동을 아예 못 본  척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혀를 찼다.

 '이 녀석은 과연 보통 애들과 다른 데가 있군.'

 다음날 아침, 호청우는 다시 장무기를 위해 기경팔맥 각 혈도에
뜸질을 해 주었다.

 반 나절이 지나자 장무기는 다시 십이경상맥이 물줄기처럼 순조
롭게 흐르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호청우는 다시 심혈을 기울여
약을 조제하여 그에게 복용시켰다. 장무기는 한결 정신이 맑아졌
다.

 이날 오후 호청우는 새로이 뜸질을 했다.

 장무기는 말로서 그의 비위를  긁어 상우춘의 상세를 치료해 주
게끔 격장지계를 썼지만 호청우는 막무가내였다.

 "흥! 헛된 수작 부리지 말아라. 난 <접곡의선>이란 외호가 마음
에 들지 않는다. 누구든 나더러 <견사불구>라고 해야지만 기분이
좋다."

 장무기는 은근히 그를 골려 주고 있었다.

 "인체 중에 이 대맥(大脈)이  가장 기묘해요. 호 선생께서도 아
실지 모르겠지만 이 대맥이 없는 사람도 있다든데요."

 호청우는 멍해지더니 이내 눈을 부라렸다.

 "당치도 않은  말이야! 인체에  어떻게 대맥이 없을  수 있겠느
냐?"

 호청우는 발끈했다. 그러더니 안채로 들어가 얄팍한 책자 한 권
을 갖고 나와 장무기에게 건네주었다.

 장무기가 첫장을 넘겨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 십이경상매과 기경팔맥은 모두 상하로 번복하여 흐르지만
대맥은  아랫배  계협(季脇)  아래서  시작하여  전신을  순환하
여..... -----

 장무기는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곳에는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
는 의술의 그릇된 헛점을 많이 지적해 놓았다.

 장무기는 읽어 내려가며 그  깊은 뜻을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웠
지만 범상치 않은 의서(醫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옛
사람의 그릇된 점을 골라 가르침을 부탁했다.

 호청우는 심히 흐뭇해 했다.  그는 침을 놓으며 해석을 해 주었
다.

 그는 내실에서 다시 열 두 권이나 되는 의서를 갖고 나왔다.

 호청우는 이 어린애가 의학에 대해 백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그러나 웬지 의기투합되는 느낌이 들었다.

 장무기가 펼쳐  보니 깨알처럼 작은 글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혈도의 위치, 약제의 분량,  침을 놓는 심도(深度) 등 모든 의술
상식이 총망라돼 있었다.

 장무기는 읽어 내려가며 문득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계속 읽어 내려가면 상대가의  상세를 치료해 줄 수 있는 방법
도 나오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제 삼 권 속하편 중에 장상료법(掌傷療法)이 수
록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치료법이 완벽하게 수록돼 있었다.

 그가 백 팔십여 종류의  장력을 보아 넘기자, 드디어 찾는 것이
나타났다. 절심장(截心掌)!

 장무기는 뛸 듯이 기뻐했다.  곧 자세히 읽어 보니 절심장의 장
력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적혀 있지만 그 치료법은 지극히 간단하
게 적어놓았다.

 알다시피, 중국의  의도는 변화무쌍하여  정규(正規)가 있을 수
없다. 장무기는 그 세세한 오묘함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는 이 치료법을 여러 번 읽어 뇌리에 기억해 두었다.

 이 장상치료법의 마지막 항목이 바로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인
데, 증상 설명에 이어 치료법 아래 단 한 글자가 적혀 있을 뿐이
었다.

 무(無)!

 장무기는 의서를  덮어 공손하게 탁자  위에 올려놓고 진지하게
물었다.

 "호 선생님의 이 자오침구경은 뜻이 너무나 심오하여 저의 우둔
한 머리로서는  태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지 가르침을
받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음양오행의 변화가 무엇입니까?"

 호청우는 몇 마디 해석을 해 주다가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
다.

 "이제보니 상우춘을  치료할 방법을  묻는 모양인데. 흐흐.....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은 절대 말해 줄 수 없다."

 장무기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 의서를 파고들었다.
호청우는 그가 읽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이날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침식을 잊은 채 의서를
파고드는데 전념했다. 그 덕분에  비단 호청우가 손수 지은 십여
종의 의서를 독파했을  뿐 아니라 황제내경(黃帝內經) 등 의학경
전도 섭렵했다.

 물론 짧은 기간내에 정독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절심장 혹은
그와 유사한 장상을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읽었다.

 이렇게 하여 며칠이 지났다. 손꼽아 헤어보니 그가 호접곡에 들
어온 지도 닷세가 지나 오늘이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호청우는 상우춘의  상세를 이레 이내에  치료하지 않으면 설령
나중에 치료된다  해도 무공이 상실될 것이라  언급한 바가 있었
다.

 그 동안 상우춘은 문 밖의 초지에 누워 닷새를 지냈다.

 이날 하늘에 먹장구름이 깔리더니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
작했다. 호청우는 상우춘이 진흙땅에 누워있는 것을 빤히 지켜보
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밤이 되자 빗방울이  더욱 굵어졌다. 게다가 천둥번개마저 가세
했다. 장무기는 이를 악물며 한 가지 결심을 내렸다.

 '설령 상대가의 상세를 잘못 치료해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해도
지금으로선 용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구나!'

 그는 곧 호청우의 약상자 속에서 금침 여덟 개를 꺼내 상우춘에
게 다가갔다.

 "상대가, 요 며칠 동안 소제는 나름대로 호 선생의 의서를 읽어
비록 깨달음을 얻지 못했지만, 시일이 촉박하니 위험을 무릅쓰고
서라도 상대가께 침을 놓아야겠어요. 만약 불행한 결과가 생긴다
면 소제도 상대가의 뒤를따르겠어요."

 상우춘은 호탕하게 대소를 터뜨렸다.

 "장형제,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인가? 아무 염려 말고 어서
침을 놓게. 만약 하늘의 도움을  입어 내가 완치될 수 있으면 견
사불구 호사백님께 그보다 더  통쾌한 일침을 가할순 없을 걸세.
그리고 설령 자네가 금침을 잘못 놓아 나를 죽인다 해도 이 진흙
땅에 누워 생고생을 겪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걸세."

 장무기는 그의 말에 용기를  얻어 조심스레 혈도를 겨냥해 금침
을 꽂았다.

 그는 침술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자연히 솜씨가 졸렬할 수 밖에
없었다. 단지 호청우가 매일 자기에게 침을 놓는 것을 유심히 살
펴두었다가 그대로 흉내내는 것에 불과했다.

 호청우의 침은  부드러운 금으로 만든  것이므로 심후한 내력이
없으면 사용할 수가 없었다.  장무기가 약간 힘만 주어도 금침이
이내 휘어졌다. 그래도  그는 거듭하여 금침으로 관원혈(關元穴)
을 찔렀다.

 자고로 혈도에 침을 놓아  피가 흐르는 경우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장무기가 어설프게  흉내를 내다 보니 상우춘의 관원혈에
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관원혈은 아랫배에 위치해  있으므로 인체 급소 중의 하나였다.
그곳에서 피가 흐르자 장무기는 더욱 당황해져 어찌할 바를 몰랐
다.

 갑자기 등 뒤에서 광소가 들려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장무기가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호청우가 뒷짐을 진 채 가소롭
다는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장무기는 다급하게 말했다.

 "호 선생님,  상대가의 관원혈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데 어떻게 
하면 졸겠어요?"

 호청우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나야 물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하지만 너한테 얘기
해 줄 필요가 있겠나?"

 장무기는 굳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다시 나의 목숨과  상대가의 목숨을 맞바꿀 테니 어서 상
대가를 치료해  주세요. 나는  즉시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어
요!"

 호청우는 천천히 고개를 내둘렀다.

 "치료해 주지 않겠다고 내 스스로 다짐을 했는데 어떻게 자신을 
배반할 수가  있겠느냐? 그리고 너는  자신의 목숨으로 상우춘의 
목숨과 맞바꾸겠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구나. 
네가 죽는다고 해서 나한테 이익이 될 것이 있느냐? 그러니 장무
기가 열 번 죽는다 해도 난 상우춘을 구해 주지 않을 것이다."

 장무기는 그와 더 이상  얘기해 보았자 우이독경이라는 것을 알
았다. 공연한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는 생각을 달리했다. 금침이 너무 연해 자기의 힘으로선 사용
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물색해야만 했다.

 잠시 후 상우춘은 시꺼먼 피를 몇 모금 토해 냈다.

 장무기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상우춘이 흑혈을 토한 것이 좋
은 현상인지, 아니면 상세가 더욱 악화된 것이지 알 도리가 없었
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호청우의 표정을 살폈다. 

 호청우는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야간이
나마 칭찬의 빛이 서려 있었다.

 장무기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곧 초옥 안으로 
뛰쳐들어가 의서를 뒤적거리며 심사숙고한 끝에 처방을 내렸다.

 그는 비록 의서에 의거하여 나름대로 약처방을 했지만, 생지(生
地), 자호(紫胡)가 어떻게  생겼으며 우황(牛黃), 웅담(熊膽) 무
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염치 불구하고 
약처방을 약을 달이는 동자에게 슬쩍 내주었다.

 "이대로 약 좀 달여 주게."

 동자는 그 처방을 호청우에게 보여 주며 가부를 여쭈었다.

 호청우는 연방 냉소를 날렸다.

 "가소롭다! 가소롭다! 그대로 약을  달여 봐라. 그 약을 복용하
고 만약 죽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죽는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
다."

 장무기는 황급히  처방을 빼앗아 약재의  분량을 절반으로 줄였
다. 동자는 처방에 따라 얼마  뒤에 사발에다 진한 약을 담아 왔
다.

 장무기는 상우춘의 입에 약사발을  갖다 대며 눈물을 머금고 말
했다.

 "상대가, 이 약이 과연  효험이 있는지는 소제도 알 수 없어요. 
단지....."

 상우춘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정말 재미있네. 소  뒷걸음에 쥐잡는 수도 있고  개똥 먹고 삼 
년 학질 뗐다는 말도있지 않는가!"

 그는 주저없이 약사발을 뱃속에다 부어넣었다.

 이날 밤 상우춘은 오장육부가 칼로 베이는 듯한 고통에 잠을 못 
이루며 밤새 피를 토했다.

 장무기는 천둥번개와 더불어 그의 곁에서 꼬박 밤을 세웠다.

 다음 날 아침, 억수처럼 퍼붓던 비도 거짓말처럼 그치고 상우춘
도 각혈량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피의 색깔도 검붉은 
색에서 진홍으로 변해 있었다. 상우춘은 훨씬 초췌해졌으나 정신
만은 예전보다 맑아진 것 같았다.

 "장형제, 자네의 약을 먹고도  죽지 않았으니 선부께서 나의 이
름을 상우춘(常遇春)이라 잘 지어준  것 같네. 그것은 늘 상(常)
자에 만날 우(遇) 그리고 춘(春)은 죽은 자도 회춘(回春)시킬 수 
있는 자네 같은 신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지 약이 악간 
진한 것 같아 마치 칼로 뱃속을 휘젓는 것 같았네."

 장무기는 그저 기뻐하며 짜릿한 흥분마저 느꼈다.

 "네, 네! 아무래도 약의 분량이 조금 과했던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 어찌 <조금> 과했을 뿐이겠는가? 만약 상우춘이 강
인한 체질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아마 견뎌내지 못하고 이미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호청우는 뒤늦게 초옥 밖으로 나와 상우춘이 안색이 불그스름하
니 정신이 맑은 것을 보자 오히려 깜짝 놀랐다.

 '음..... 한 녀석을 똑똑하고  대담하며 한 녀석은 건장한 체질
을 타고 났으니, 이 절심장의 장상도 머지 않아 완쾌되겠군.'

 이날 장무기는 보양탕을 조제하여  몸에 좋다는 인삼, 녹용, 하
수오, 무령 등을 듬뿍 달여 상우춘에게 복용시켰다. 

 이렇게 하여  십여 일이 경과되자  상우춘은 상세가 완쾌되었을 
뿐 아니라 무공도 종전처럼 회복되었다.

 물론 그 동안에도 호청우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줄
곧 초지에서 노숙을 해왔다.

 이날 상우춘은 장무기를 가까이 불렀다.

 "장형제, 나는 이제  상세가 완쾌되었네. 나 때문에 자네까지도 
매일 노숙을 해야 하니 우리 오늘로서 헤어지기로 하세."

 장무기는 그와 한 달 남짓 고락을 함께 해오며 은연중에 생사지
교로 맺어졌다. 그런데 막상 헤어지게 되자 섭섭함을 금할 길 없
었다.

 하지만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듯이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수
는 없는 법, 장무기는 눈물을 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우춘은 그를 위로해 주었다.

 "장형제, 너무 서운해 하지말게.  석 달 후면 다시 자네를 보러 
올 걸세. 그 때쯤 자네 몸에 한독이 완전히 제거되면 무당산으로 
데려가 주겠네."

 그는 초옥 안으로 들어가 호청우에게 작별을 고했다.

 "제자는 상세가 완쾌되었습니다.  비록 장형제가 치료를 해주었
지만 역시 사백님의 의서 덕분이며 또한 사백님의 귀중한 약재를 
많이 축낸 결과입니다."

 호청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극히 담담하게 말했다.

 "그야 별게 아니지. 다만 너의 상세가 완쾌된 반면 수명이 사십 
년 단축되었을 뿐이다."

 상우춘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너의 타고난 체혼(體魂)으로 최소한 팔십 장수를 누릴 수 있었
는데, 저 녀석이  약을 함부로 쓰는 바람에  앞으로 날씨가 궂은 
날이면 삭신이 쑤실 뿐 아니라 아마 마흔 살 되는 해에 염라대왕
을 만나게 될 것이다."
 (註:명사(明史) 상우춘전(常遇春傳)에  의하면 상우춘이 급환으
로 세상을 떠난 해가 불과 나이 사십이라 기록돼 있다.)
 
 상우춘은 일소에 부치며 앙연히 말했다.

 "대장부로 태어나 제세보국의  뜻을 품고 공업(功業)을 세울 수
만 있다면 서른 살도  충분하거늘 구태여 사십까지 살 필요가 있
겠습니까? 흐리멍텅하게 일생을 살 바엔설령 백 세 장수를 누린
다 해도 식량을 축낼 뿐입니다."

 호청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호접곡 입구까지 전송해 주었다.

 상우춘이 거듭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눈물로써 
작별을 고했다. 떠나가는 상우춘의 마음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
다. 

 장무기의 한독이 과연 말끔히  제거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지, 성품이 괴팍한 호사백과 과연 아무런 변고 없이 잘 견뎌
낼지 염려스러웠다. 

 한편, 장무기는 멀어져  가는 상우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
로 한가지 뜻을 세웠다.

 '내가 어설픈 방법으로  상대가의 상세를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 
수명이 사십 년이나 줄어들었으니,  열심히 의술을 배워 그 손실
을 보상해 드리리라!'

 호청우는 하루도 빠짐없이 무기에게  침을 놓고 약을 먹여 몸에 
퍼진 음독을 제거해 주었다.  무기는 열심히 의서들을 읽고 약전
(藥典)을 탐독했다. 미심쩍은 것이 있으면 즉시 호청우에게 물었
다. 호청우는 무기가 질문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여 상세하게 알
려 주었다. 때로는 무기가  기상천외한 질문을 해서 호청우가 생
각지도 못한 것을 깨우치게  하는 겅우도 있었다. 처음에 호청우
는 무기를 낫게 해 준  뒤 즉시 죽이려 했으나 이제는 이 소년이 
죽어 버리면 좋은 말벗을  잃는 셈이 되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
게 되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났다.  어느 날 호청우는 무기의 무명지 부위
에 있는 관충혈과 팔 위의 청냉연(淸冷淵). 눈썹 뒤의 사죽공(絲
竹空) 등의 혈도에 침을 놓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느꼈
다. 이  혈도는 손의 소양삼초경에 속한다.  삼초는 상초, 중초, 
하초로 오장육부의 하나인데  극히 오묘한 것으로서 손의 촉감으
로는 알아내기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청우는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 보았으나 무기의 삼초에 스며
든 음독을 제거할 수가  없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심했는지 
십여 일 사이에 그의 머리칼이 더욱 하얗게 세고 말았다.

 무기는 그가 노심초사 하는것을 보고 내심 감격하면서도 한편으
로는 은근히 불안감을 느꼈다.

 "호 선생님, 그만큼  전심전력하셨으면 됐어요. 세상에 안 죽는 
사람이 있나요? 삼초에 스며든 음독이 풀리지 않는 것도 저의 운
명이니 너무 고심하지 마세요. 저를 구하시려다 오히려 선생님이 
병들겠어요."

 호청우는 코웃음을 치더니 차갑게 말했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안달이 난 줄 아느냐? 다만 네 병을 못 고
치면 이 접곡의선의 명예에 금이  갈까 봐 이러는 거다. 너를 다 
낫게 한 되 다시 죽일 거니까."

 무기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별것 아닌 것처럼 가볍게 한 말이
지만 그 계획은 절대 바꾸지 않을 것이 뻔했다.

 무기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 음독은 끝내 제거할 수 없을 것 같으니 그냥 놔 두세요. 제
가 죽으면 되죠."

 호청우는 뜰 너머로 먼 하늘을 쳐다보며 고즈넉하게 말했다.

 "난 어린 시절부터 의술을 공부하여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이롭
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어. 내가 구해준 
사람이 은혜를 원수로 갚더구나.  한 소년이 귀주의 묘강에서 금
잠고독(金蠶蠱毒)에 걸렸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극독인데 중독된 
사람이 죽는 건 물론이고 죽을 때까지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
어야 하는 거야. 나는 사흘  밤낮을 꼬박 새며 애써서 그를 구해 
주었고 서로 뜻이 맞아  의형제를 맺어 내 여동생을 짝지어 주기
까지 했다. 그런데 그  자는 후에 내 여동생을 모해하여 죽였다. 
그런자가 지금 명문정파에서 이름을 날리는 인물이야."

 무기는 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자 측은한 생
각이 들었다.

 '그런 일을 당해서 이 사람의 심성이 바뀌어져 스스로 견사불구
라고 칭하게 되었구나.'

 무기가 넌지시 물었다.

 "그 나쁜 사람이 누굽니까?"

 호청우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 자는..... 화산파의 장문인인 선우통(鮮于通)이다."

 "그런데 왜 복수를 하지 않았나요?"

 "전후 세 번이나 그를  찾아가 복수를 하려 했으나 모두 참패하
고 말았어. 마지막 세 번째는 목숨을 잃을 뻔했지. 그 자는 무공
이 대단하고  기지가 뛰어나  사람들이 그를 신기자(神機子)라고 
부른다. 나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더구나 우리 명교는 근
년에 내분이  일어나 교내의 고수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느라 날 
도와 줄 수가 없었어. 또 그런 일을 남에게 부탁하는 것은 내 스
스로 원치 않는다. 그저  복수하지 못한게 분할 뿐이다. 아..... 
어려서  부모를 잃은  우리  오누이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는
데..... 불쌍한 내 동생은....."

 호청우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무기는 그를 바라보며 생
각했다.

 '이 사람도 원래부터 냉혹하고 비정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호청우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이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만일 딴 사람에게 누설하면 죽
을 수도 살 수도 없이 만들어 놓을 테니까!"

 무기는 몇 마디 쏘아부치고  싶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그만 두었
다. 호청우가 당한 일은 자기가  당한 일보다 더 처참한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아, 불쌍한 것....."

 그는 휭하니 내실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호청우는 무기에게 재주를 다해  치료를 해도 삼초에 스며든 한
독을 제거할 수 없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기껏 해봤자 목숨을 몇 년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무기를 생
각하는 마음이 변한 것이다. 그는 무기가 자기의 마음을 잘 헤아
리는 것을 보고 더욱 친근감을 느꼈다. 호청우는 매일 그에게 음
양오행의 변화와 맥을  지픈 법, 침술 등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
다. 무기도 그것들을 힘껏 배웠다.

 호청우는 무기가 명석하여 황제합마경(黃帝蛤마經), 서방자명당 
구경(西方子明堂灸經),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 침구갑을경(鍼
灸甲乙經), 천금방(千金方) 등  의학을 쉽게 깨우치는 것을 보고
한탄을 금치 못했다.

 "너의 타고난 총명에다가, 백 년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든 나 같
은 명사를 만났으니 스무  살도 안 되어 화타나 편작에 버금가는
명의가 되겠다만..... 아깝다! 아까와!"

 그의 말 속에는 열심히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뜻이 담
겨 있었다. 그러나 무기는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그는
고명한 의술을  배워 상우춘의 수명을 원래대로  돌려 주고 싶었
다. 또 세째 사백 유대암이 남의 부축을 받지 않고 혼자 걸을 수
있도록 해줄 생각이었다. 이 두  가지 일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이
금방 죽는다 해도 한이 없을 것 같았다.


                                 ----- 제 2 권 7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8 장  장무기와 요염(妖艶)한 중년부인(中年婦人) 


 세월은 덧없이 흘러 무기가  호접곡에 온 지도 이 년이 지났다.
이제 무기도 열  네 살이 되었다. 이 이  년 동안 상우춘은 여러
차례 찾아와 무당산과 호접곡을  잇는 역할을 해 주었다. 장삼봉
은 무기의  병세가 좋아진 것을 대단히  기뻐하며 상우춘을 통해
옷가지와 일용품들을  고루 갖춰 무기에게  보내 주었다. 그들은
무기가 보고 싶었으나 명교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직접 찾아오
지 못했다. 무기는 태사부와 여섯 분의 사백을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매일 치료를 받았다.

 상우춘은 올 때마다 강호의  소식도 전해 주었다. 근년 들어 몽
고인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져서  백성들의 의식(衣食)이 어려울
정도이며, 사방에서  도둑이 창궐하여 지금  천하는 말도 못하게
어지럽다고 했다.

 무림에도 명문정파와 마교의  생투가 갈수록 격렬해져서 사상자
가 엄청나게 많이 생겼으며  원한 관계는 더욱 쌓이고 있다는 것
이다. 상우춘은 호접곡에 한 번 오면 며칠 안에 떠나곤 했다. 교
내의 일이 퍽 바쁜 모양이었다.

 어느 날 저녁  무기는 왕호고(王好古)가 쓴 의학서적 <차사난지
(此事難知)>를 읽다가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피로가 몰려
오는 걸 느껴 즉시 잠을  잤다. 다음 날 일어나도 여전히 전신에
열이 많고 두통이 심했다. 그는 열을 내리는 약을 지어 먹으려고
대청으로 나갔다. 그런데 대청으로  나가 보니 벌써 해가 서산에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오후까지 잤던 것이다. 무기는 깜짝 놀랐
다.

 "이런, 오래도 잤군. 혹시 병이 난 건 아닐까?"

 자신의 맥박을 짚어 보았으나 아무 이상이 없었다.

 "혹시 음독이 발작한 걸까? 이제 내 목숨이 다했나?"

 호청우의 방에 가 보니  방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가볍게 기침
을 하자 안에서 호청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기야, 내 몸이 불편하니 오늘은 너 혼자 독서나 하려무나."

 "예."

 그러나 무기는 호청우의 병세가 걱정되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의 몸을 살펴볼까요?"

 그러나 호청우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필요없다. 내가 거울을 보고 살폈으나 별탈이 없어 우황지각산
을 복용했다."

 이날 저녁 시동이 식사를  가져갈 때 무기도 따라 들어갔다. 호
청우는 힘없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무기를 보자 손을 내저
으며 말했다.

 "빨리 나가거라. 내 병은 천연두야."

 무기가 보니 그의 얼굴과 손에 과연 붉은 반점이 나 있었다. 천
연두는 발작할 때가  위험해서 몸조리를 잘못하는 경우에는 목숨
을 잃거나 곰보가 된다.  워낙 의술이 정심한 호청우이므로 후환
은 없겠지만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호청우가 다시 말했다.

 "무기야, 다시는 내 방에  들어오지 말아라. 내가 쓴 그릇과 젓
가락들은 끓는  물에 반드시 삶아야 하고  너와 시동도 무엇이든
내가 쓰던 것을 써선 안 된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네가 호접곡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 그렇게 보름
만 있으면 천연두가 옮는 걸 막을 수 있을 게야."

 무기는 급히 대답했다.

 "아니에요. 선생님이 아프신데 제가 이곳을 떠나면 누가 시중을
들겠습니까? 두 시동보다는 어쨌든 제 의술이 낫지 않습니까?"

 "그래도 떠나는 게 좋아."

 무기는 호청우의 간곡한  권유를 듣지 않았다. 호청우의 성격이
괴팍하기는 하나 이 년 동안 두 사람은 은연중에 정이 깊이 들었
다. 더구나 어려움을 당해  피한다는 것은 무기의 성격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호청우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좋다. 그럼 내 방에만 들어오지 말아라."

 사흘이 지났다.  무기는 아침 저녁으로 방  밖에서 문안을 드렸
다. 호청우의 목소리가 약간 쉰 듯했으나 식사는 평소만큼 했다.
그리고 매일 자기가 먹을  약 이름과 분량을 지시하며 약동은 이
를 달여 갖다 주었다.

 나흘째 오후, 무기는  초당에 앉아 <황제내경> 가운데 사기조신
대론(四氣調神大論)을 읽고 있었다.

 이때,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후에 초당 밖에서
말발굽소리가 멎으며 외침소리가 들렸다.

 "무림 동도가  의선을 뵈러 왔습니다! 어른의 치료를 부탁합니
다!"

 무기가 나가 보니 얼굴이  가무잡잡한 사나이가 혼자서 세 필의
말고삐를 잡고 문 밖에 서 있었다. 두 필의 말 위에는 한 사람씩
엎드려 있는데 옷에 묻은 핏자국으로 보아 중상을 입은 모양이었
다. 고삐를 쥔 사나이의 머리에 동여맨 천에도 피가 배어나와 있
었다. 오른손을 붕대로 감아 목에  건 것이 역시 상처가 심해 보
였다.

 무기가 말했다.

 "공교롭게도 호 선생님이  병중이셔서 여러분을 도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른 분을 찾아가 보십시오."

 그러자 사나이가 대답했다.

 "우리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어 의선에 의지할 수밖에 없소이
다."

 "호 선생님은 천연두에 걸리셨는데 병세가 극히 중합니다. 결코
여러분을 속이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중상을 입어 접곡의선께서 구해 주시지 않으면 곧 죽게
될 거여. 번거롭겠지만 소형제가 사정 이야기를 전해 주시오."

 "여러분의 존함은....."

 "우리들의 천한  이름을 밝혀서 뭣하겠소?  우리는 단지 화산파
선우장문인의 제자들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비틀거리며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냈
다.

 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화산파의  선우통이라면 호 선생님의
원수가 아닌가. 그러나 혼자서 어떠한 결정을 내릴 수 없어 호청
우의 방으로 가서 아뢰었다.

 :선생님, 지금 세 사람이  중상을 입고 찾아와 치료를 부탁하는
데 화산파 선우통의 제자랍니다."

 그 즉시 호청우의 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쫓아 버려!"

 "알겠습니다."

 무기는 초당으로 돌아와 세 사람에게 말했다.

 "호 선생은 병이 깊어 거동을 할 수 없으시답니다. 양해해 주십
시오."

 사나이가 계속 간청을 하자 안정 위에 엎드려 있던 체구가 작은
사나이가 머리를  들며 무엇인가를 재빨리  던졌다. 순간 금빛이
번쩍이며 작은 암기가 초당 한가운데 있는 탁자에 꽂혔다.

 "그 금화(金花)를  견사불구한테 보여 주게.  우린 모두 금화의
주인에게 당했다네. 그 사람이 지금 이곳으로 온다하니 견사불구
가 우리를 치료해 주면 우리  셋이 여기 남아 도와 주겠네. 우리
의 무공이 대단치는 않지만 한 몫 할 걸세."

 무기는 탁자로 다가가  암기를 살펴보았다. 황금으로 만든 매화
는 실물 크기와 같았다. 무기는 손으로 빼내려 했으나 워낙 깊이
박힌 탓에 꿈쩍도 하지 않아 약칼로 그 부분을 도려내 겨우 빼냈
다.

 '저 사나이의 무공도 보통은  넘는 것 같은데 금화 주인에게 저
토록 당했으니, 금화 주인이 이리 온다는 걸 속히 선생님에게 알
려야겠구나.'

 그는 금화를 가지고 호청우의 방문 앞에 가서 사나이가 한 말을
들려 주었다.

 "그걸 내게 보여 주게."

 무기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컴컴했다.
천연두 환자는 바람과 빛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창문도 모두 가
려야 했다. 호청우는 얼굴에 청포를  쓴 채 두 눈만 드러내고 있
었다.

 '청포 속의 얼굴이 많이 헐은  게 아닐까? 병이 나은 뒤에 혹시
곰보나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금화를 책상 위에 놓고 빨리 나가거라."

 무기는 그의 말대로 금화를  놓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발을 내
리고 방문을 닫기도 전에 호청우의 말이 들렸다.

 "그 사람들의 생사는 나와 상관없다. 내가 죽든 살든 그것 역시
그들과 상관없는 일이야!"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금화가 대나무 발을 뚫고 날아와 땅에 떨
어졌다. 무기는 이 년 동안 그와 살았으나 그가 무공을 수련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무학의 고수였던 것이다.

 무기는 금화를 주워 가지고  나와 사나이에게 돌려 주며 고개를
저었다.

 "호 선생님은 너무 병이 깊어....."

 이때 갑자기 말발굽소리와 함께 마차 한 대가 계곡으로 급히 달
려오고 있었다. 마차는 전속력으로  달려 금방 초당 밖에 다다랐
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청년이 마차 안의 대머리 노인을 부축해
내렸다.

 "접곡의선 호 선생님은 계십니까? 공동파의 제자 성수가람(聖手
伽藍)이 불원천리 찾아와 치료를 부탁....."

 말을 제대로 맺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더니 청년은 부축하고 있던
노인과 함께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마차를 끌던  두 필의 말도
기진맥진하여 흰 거품을 뿜고 무릎을 꺽으며 넘어졌다.

 공동 문하라는 말을  듣자, 무기는 무당산에서 아버지를 괴롭힌
사람 가운데 공동파의 장로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이 대머리
노인은 그날  무당산에 오지는 않았으나 역시  좋은 사람은 아닌
듯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산길 저편에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다리를 절고 있는 사람, 지팡이
를 짚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부축하며 걷는 것으로 보아 모두
상처를 입은 게 분명했다.

 무기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소리쳤다.

 "호 선생님은 천연두에 걸리셔서 거동처자 하기 힘든 상태니 여
러분들을 치료하실  수 없어요! 그러니  지체말고 다른 의원님을
찾아가세요!"

 가까이 다가온 그들을 보니 모두 다섯 사람이었다. 몸에 상처를
입은 듯했다. 그들 중 키가 크고 뚱뚱한 사람은 성수가람과 그들
일행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세 사람 모두 씁쓸한 미소
를 짓는 걸로 봐서 서로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무기는 호기심이 생겨 물어 보았다.

 "당신들도 금화 주인에게 당한 건가요?"

 뚱뚱한 사람이 대답했다.

 "그렇다네."

 제일 먼저 도착해 선혈을 토했던 사나이가 무기에게 물었다.

 "자네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 호 선생과는 어떤 사이지?"

 "저는 호 선생님의 환잡니다. 호 선생님은 한 번 치료하지 않는
다고 말씀하시면 절대 하지 않으세요. 그러니 여기 있어 봤자 소
용이 없어요."

 그 사이에 또  네 사람이 몰려 왔다.  마차를 타고 오기도 하고
말을 타고 오기도 했는데 모두가 호청우에게 치료받기를 원했다.

 무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호접곡은 외딴  곳에 있어 명교 신도들이  아니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이 사람들은 명교 신도들도 아닌데 모두 상처를 입
고 약속이나 한 듯  정확히 이곳으로 찾아오다니..... 금화 주인
이 그토록 대단하다면 이들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텐데 왜
중상만 입혔을까?'

 이들 열 네  사람 중에 간곡하게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돌아갈 생각을 하는 사람
은 하나도 없었다.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자 초당안은 그 사람들
로 북적거렸다. 시동이 저녁밥을 가져 왔다. 무기는 그들에게 같
이 먹자는 소리도 하지 않고  혼자 식사를 했다. 식사를 끝낸 그
는 등잔불을 켜고 의학서적을  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있든 말
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호 선생님에게  의술을 배웠으니 견사불구하는 수법도 배
워야지.'

 밤이 깊어  사람들이 조용해지자 무기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중상자의 가느다란 신음소리만이  정적을 동반하고 있었다. 이때
멀리서 다가오는 두  사람의 발자국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들려왔
다. 발자국소리는 이들이 있는 초당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이윽고 맑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저기 등불이 있어요. 다 왔나 봐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그 어머니인 듯한 목소리
가 대답했다.

 "얘야, 힘들지 않니?"

 "난 힘들지 않아요. 의원님이  치료해 주시면 어머닌 병이 낫겠
죠?"

 "응, 그런데 의원님이 치료를 해 주실 지 모르겠구나."

 무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목소리는  귀에 익은 것인데.....  혹시 기효부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아닐까?'

 무기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기 아주머니십니까? 부상을 입었나요?"

 달빛 아래에서 한 여인이 여자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아미
파의 여협 기효부였다. 그녀가  무당산에서 무기를 보았을 때 무
기는 겨우 열  살이었다. 그러나 오 년이란  세월이 흘러 무기는
이제 어엿한 소년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어두운 밤이라 그녀는
무기를 알아보지 못했다.

 "누구신지.....?"

 "절 몰라보시겠어요? 장무깁니다.  무당산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가 돌아가셨을 때 만났었죠."

 "아!"

 기효부는 이런 곳에서 무기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
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딸을 데리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장
무기는 자기의  정혼자였던 은이정의 사질이  아닌가! 비록 나이
어린 무기 앞이었지만 그녀의 입장이 난처했다. 기효부는 부끄럽
고 창피하여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중상을 입은데다가 갑자기
충격을 받아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니가 쓰러지자 어린아이
는 그녀를 부축하다 함께 쓰러졌다.

 무기가 얼른 기효부를 부축하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 좀 쉬세요."

 그는 그녀를 초당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등불 아래에서 살펴보
니 왼팔과 어깨에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 싸맨 붕대 밖으로 선
혈이 계속 배어나오고 있었다. 시만 기침까지 했다.

 이 무렵 무기의 의술은  이미 명의의 수중에 올라 있었다. 그는
기효부가 기침하는  것을 보고 폐 부위에  중상을 입었음을 알수
있었다.

 "태음폐맥을 다치셨군요."

 그는 즉시  금침을 꺼내  어깨의 운문(雲門)과  가슴의 화개(華
蓋), 팔꿈치의  척택(尺澤)등 일곱 군데의  혈도를 찔렀다. 이제
그의 침술은 상우춘을 치료할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이 년 동안
호청우에게 열심히 침술을 배워 호청우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
다. 다만 투약하는  것과 경험면에서만 서툴렀다. 기효부는 그가
금침을 꺼내  눈깜짝할 새에 일곱 개의  금침으로 자신의 혈도를
찔러 오자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기뻤다. 모두 태음폐맥에
속하는 일곱 군데의 혈도에 침을 놓자 통증이 크게 가라앉았다.

 "무기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어. 이렇게 좋은 기술도 배웠군."

 그날 무당산에서 장취산과  은소소가 자결하는 것을 분 그녀는,
무기가 졸지에 고아가 된 것이 불쌍해서 따뜻하게 위로하며 자기
의 목걸이까지 주려 했었다.  그러나 무기는 비통에 잠긴데다 어
머니의 유언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부모의 원수
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기효부에게 냉정하게 대하여 그녀를 난처
하게 만든 채 헤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기호부가 자신에게 보여
준 포근한 애정은 잊지 않고  있었다. 이 년 전에 상우춘과 함께
숲속에서 그녀가  팽화상을 구해 주는 것을  보고 기효부의 착한
마음씨에 더욱 감격하게 되었다.  다만 아직 미혼인 그녀가 아기
를 낳은 일이 마음에  걸렸으나 남녀간의 미묘한 일을 잘 모르는
지라 곧 잊어버렸던 것이다.

 기효부의 딸은 참으로 예쁜  아이였다. 그녀는 검고 큰 눈에 호
기심을 가득 담고 무기를 쳐다보더니 어머니의 귀에 대고 속삭였
다.

 "어머니, 저 사람이 의원님이세요? 이제 안 아파요?"

 기효부는 무기앞에서 딸이 어머니라고 부르자 다시 얼굴이 붉어
졌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숨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분은 장 오빠란다. 장 오빠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친구야."

 이어 무기를 보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 애는..... 불회(不悔)라고 해. 성은 양(楊)씨고."

 무기가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이름이네요.  후회하지 않는다.....  내 이름과 비슷하군
요. 불회와 장무기."

 기효부는 무기가 책망하는 빛없이  대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
였다.

 "얘야, 무기 오빠의 의술이 참 훌륭하구나. 이제 어머니는 아프
지 않아."

 양불회는 큰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돌연 무기를껴안고 그의 뺨
에 입을 맞추었다. 어머니를 안  아프게 해준 데 대한 감사의 표
시로 그렇게 한 것이다.

 기효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못써요. 무기 오빠가 싫어하잖아."

 양불회는 다신 눈을 깜빡이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장무기
에게 물었다.

 "내가 한 짓이 싫어요?"

 무기는 어쩔 수 없이 웃고 말았다.

 "아니야, 나도 기분이 좋아."

 무기도 야들야들한 볼에 살짝 입맞춤을 해 주었다. 양불회는 손
뼉을 치며 좋아했다.

 "꼬마 의원님, 빨리 우리  어머니를 낫게 해 주세요. 그럼 내가
또 뽀뽀해 줄께."

 무기는 천진난만한  양불회가 귀여웠다.  그가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들은 모두 나이든 사숙과 사백들뿐이었다. 형과 아우로 지내
는 상우춘도 무려 여덟 살이나 위였다. 그와 배에서 만난 주지약
만이 같은 또래였는데 만난 지 하루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내게도 이런 여동생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기효부는 중상자들이  아직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혼자만
치료를 받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무기, 나보다 먼저 오신  이분들을 치료해 주지. 난 이제 많이
좋아졌어."

 무기가 대답했다.

 "이분들은 호 선생님의 치료를 받으러 오셨는걸요. 그런데 선생
님은 지금 중병이라 치료하실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이 분들은
돌아갈 생각을  않는군요. 기 아주머니는  호 선생님에게 치료를
받으려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이곳에 있으면서 의술을 약간 배
웠는데, 맡겨 주신다면 아주머니의 상처를 치료해 드리겠어요."

 사실은 기효부 역시  호청우에게 치료를 받을 생각으로 왔었다.
그런데 무기의 말을 듣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니 호청우의 치료
를 받기는 힘들 것 같았다.  게다가 무기에게 맞은 침이 즉시 효
과가 있는 것을 보니 믿음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고마와, 무기."

 무기는 그녀를 객방으로  데리고 가서 상처를 살펴보니, 어깨와
팔에 세 군데의 칼자국이  나 있고 팔뼈가 으스러지기까지 했다.
이런 상태에서 뼈를 잇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었으나 접곡
의선의 제자에겐 쉬운 일이었다. 그는 뼈를 잇고 약물을 발라 피
가 통하게 한 뒤 약방문을 지어 시동에게 달이게 했다.

 "이제 한잠 푹 주무세요.  마취약 기운이 사라지면 통증이 심할
겁니다."

 "고마와."

 무기는 약실에 가서 대추와  살구를 가져다 양불회에게 주려 했
다. 그러나 먼길을 오느라  심신이 지친 그녀는 어머니곁에서 이
미 잠들어 있었다. 무기는  대추와 살구를 그녀의 주머니에 살짝
넣어주고 초당으로 돌아왔다.

 각혈을 했던 화산파의 제자가 그를 보자 얼른 일어서서 읍을 한
뒤 말했다.

 "호 선생이 병이 드셨다니, 소(小)선생께서 우리를 치료해 주신
다면 감사하겠소."

 무기는 여지껏 상우춘과 기효부 이외의 사람에게는 의술을 시술
한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사람들은 내장이 진상(震傷)되어 있거
나 사지가 절단되는 등  갖가지 중상이었다. 무기는 멋지게 치료
해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호청우가 마음에 걸렸다.

 "이곳은 호  선생님의 집입니다. 저도  그분의 환자인데 어떻게
주인의 허락없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화산파 제자는  무기가 진심으로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한 차례  치켜올려 주면 되겠거니 싶어  그는 다시 한
마디 덧붙였다.

 "내가 알기로 명의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인데, 소선생은 어린
나이에도 그처럼 의술이 뛰어나니 정말 세상에 보기드문 일이오.
그 솜씨를 한 번만 써주시오."

 부유한 상인같이 생긴 뚱뚱보 양씨도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열 네 명은  모두 강호에서 약간의 이름이 있는 사람들이
오. 소선생이 치료해 주기만 하면 소문이 퍼져 천하에 명성이 자
자해질 거요."

 아직 나이가 어린 무기는 세상물정을 잘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기를 치켜올려 주니 우쭐해질 뿐이었다.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것은 원치 않아요. 호 선생님이 손을 쓰
지 않으면 저로서도 방법이  없어요. 다만 여러분의 상처가 가볍
지 않은 듯싶으니 고통이나 좀 덜어드리지요."

 그는 금창약을 꺼내 모두에게  고루 발라 주었다. 그런데 그 사
람들의 상처는 참으로 기이한  것이었다. 공격을 당한 수법도 모
두 제각기였다. 한 사람은  수십 개의 강침(鋼針)을 강제로 삼켰
는데 침에는 무서운 독이 묻어 있었다. 그런데 간장을 치료할 때
반드시 필요한 행간(行間), 중봉(中封), 음포(陰包), 오리(五里)
등의 요혈도 같이 상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두 손이 잘려 왼손
이 오른팔에  오른손은 왼팔에 붙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지네,
전갈 등 이  십 여 종의 독충에  물려 온몸이 푸르스름하게 부어
있었다. 그 상처를 살펴본  무기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
겼다.

 '이 사람들의 상세가  이토록 해괴하니 나로서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겠어 누군지 모르지만 이들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의도적으
로 호 선생을 골탕먹이려는 게 분명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기 아주머니의  어깨 상처는 별게  아니잖아. 혹시 아주머니도
기이한 내상을  입었을지도 몰라. 아주머니만  예외일 리가 없잖
아!'

 그는 급히 객방으로 뛰어가 기효부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과연
그녀의 맥박은 빨리 뛰다  천천히 뛰고, 불규칙하여 내장에 이상
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지 무기는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것을 무기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공동파 등 아버
지를 괴롭힌 문파의 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죄과를 받는 것
이니 오히려 통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효부의 상처만은 치료해
주고 싶었다. 그는 서둘러 호청우의 방문 앞으로 가서 낮은 목소
리로 말했다.

 "선생님 주무십니까?"

 "무슨 일이냐? 난 치료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는 사람들의 상처를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호청우는 발을 사
이에 두고 무기의 말을 자세히 들었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살
펴보고 와서 다시 설명하도록 했다. 무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열
다섯 사람의 상세를 자세히 알려 주었다.

 한참 생각한 뒤 호청우가 입을 열었다.

 "흥! 괴이한 상세지만 나한테는 어려울 것이 없다!"

 그가 말을 다 마치자 무기의 등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호 선생, 그 금화의  주인은 세상에선 당신을 의선이라 부르지
만 이 열 다섯 가지 기이한 상처를 한 가지도 고칠 수 없을 거라
더군요. 과연 당신은 자신이 없어  병이 든 걸로 위장 하고 있군
요."

 뒤를 돌아보니 공동파의  대머리 노인 성수가람이었다. 그의 머
리에는 머리카락이 한 오라기도 없었다. 무기는 그가 대머리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누군가 그의 머리에 독약을 발라 머리카락이 다
빠진 것이었다.  독약은 지금도 머리속으로  침투하고 있어 얼른
치료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이다. 지금 그의 두 손은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있었다. 머리가  너무나 가려웠기 때문에 긁지 못하도
록 같이 온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마구 긁었다간 두개골이
드러날 판이었다.

 호청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치료를 할 수 있든  없든 자네를 치료하지 않을 걸세. 앞
으로 대엿새밖에 못 살  테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 처자의 얼굴이
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게. 여기서 얼쩡거려 봐야 이로울 게
하나 없네."

 견딜 수 없이 머리가  가려운 성수가람은 담벼락에 머리를 연방
쳐박았다. 거기에 따라 손을  묶은 쇠사슬이 요란한 금속성을 냈
다.

 그는 헉헉 거리며 말했다.

 "호 선생, 그 금화 주인이  곧 이리로 올 거요. 당신도 곱게 죽
기는 어려울 테니 우리 모두  힘을 모아 그 자와 싸우는 게 드러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낫지 않겠소?"

 "자네들이 그 자를 이길수 있었다면 이곳까지 왔겠나? 난 자네
들 같은 멍텅구리들의 도움은 필요없네."

 그는 호청우에게 애걸복걸했다.  그러나 호청우는 들은 척도 하
지 않았다. 송수가람은 마구 소리치기 시작했다.

 "좋아! 어차피 모두 죽을  목숨들이니 당신의 집을 불살라 버리
겠다."

 이때 밖에서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화산파의 제자였다. 그는
품에서 아마차 한 자루를 꺼내 성수가람의 가슴을 겨낭하며 냉랭
히 말했다.

 "호 선생님께 그따위로  말하다니, 이 설가가 가만  있을 수 없
다. 만약 불을 지른다면 널 먼저 죽여 주마."

 청수가람의 무공은 본디 그보다 한 수 위였지만 두 손을 묶인터
라 싸울 수가 없었다. 그저 두 눈을 부릅뜨며 씩씩댈 뿐이었다.

 설가가 목청을 한층 돋궈 말했다.

 "호 선배님,  후배는 설공원(薛公遠)이라  합니다. 화산파 선우
선생의 제자입니다. 선배님께 절을 올리겠습니다."

 그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릎을 끓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연방 절을 해댔다. 설공원이 절을 해대는 광경을 바라 보면서 성
수가람은 한 가닥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호청우가 제아무리 거
만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지만  설가 녀석이 저렇게 신주대하듯 절
을 해대니 뭔가 될 것도 같았다.

 설공원이 절을 마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호 선생님께서 마침 병이  드신 건 저희들이 복이 없는 탓입니
다. 그러나 이 소년 역시 의술이 고명하니 그가 치료하도록 허락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의 상처는 모두가 괴이하여 접곡의선
의 제자가 아니면 천하에 그 누가 고칠 수 있겠습니까?"

 호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아이는 이름이  장무기로 무당파의 제자였던 장취산의 아들
이지. 나 호청우는 명교의  교인으로 이 고상한 명문의 자제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야. 이 아이는 몸에 음독이 있어 나에게 치료
를 받으러 왔지만, 난 명교  교인이 아니면 절대 고쳐 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의 생명을 구해 주지 않고 있어."

 설공원은 마음이 착잡했다. 그는 무기가 호청우의 제자인 줄 알
았고, 그가 스승만은 못해도  호청우가 승낙만 하면 상처를 치료
해 줄 것으로  믿었는데, 알고 보니 그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환자일 줄이야!

 호청우가 다시 말했다.

 "자네들은 내  집에서 왜 꾸물거리고 있나?  흥, 내가 선심이나
쓸 줄 알고 그러는 건가? 소용없는 일이야. 저 아이에게 물어 보
게 내 집에 온지 얼마나 되는지 말이야."

 설공원과 성수가람은 동시에 무기를 쳐다보았다. 무기는 손가락
두 개를 새워 보였다.

 설공원이 물었다.

 "이 십일?"

 "아뇨, 꼭 이년 이개월 됐어요."

 성수가람과 설공원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절망의 표정을 지었
다.

 성수가람과 설공원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나
가려 했다. 그 때 호청우가 다시 말했다.

 "이 무당파 소년은 의술을 조금 알지. 물론 무당파 의술은 우리
명교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사람을 엉터리로 치료해 죽이지는않
을 거야. 무당파인 이 아이가 자네들을 구해 줘도 좋고 견사불구
해도 좋네만,  그것은 우리  명교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이
야."

 설공원은 잠시 생각했다. 그의 말 속에는 무기에게 의술을 베풀
라는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호 선생님, 이 장소협이  손을 써준다면 우리들이 살아날 가망
이 있을까요?"

 "그가 구하고 못 구하고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니
까. 무기야, 내 말을 명심해 듣거라. 내 집에서 의술을 펼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집 밖에 나가서 의술을 베푼다면 상관하지 않겠
다."

 설공원과 성수가람은  희망에 부풀었다가 이건  또 무슨 뜻인가
하여 멍하니 서서 호청우의 말뜻을 되씹고 있었다.

 무기는 이들보다 훨씬 총명했기 때문에 즉시 그 뜻을 알아 들었
다.

 "호 선생님께서 지금  병중이시니 당신들은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 모두 나를 따라오십시오."

 초당에 들어서 장무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제가 배운 의술은 보잘것없어 여러분의 괴이한 증세를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께서 믿어 주신
다면 제가 온 힘을 다해 치료해 보겠습니다. 생사는 하늘에 맡길
수밖에없습니다."

 이 무렵 사람들의 증세는 못 견디도록 가렵거나 마비되는 등 갈
수록 악화되어 잠시 고통을 면할수만 있다면 비상이라도 먹을 판
이었다. 그러니 무기의 말에 감지덕지 할 뿐이었다.

 무기가 다시 말했다.

 "호 선생님은 제가 그분의  집 안에서 의술을 하는 것을 싫어하
십니다. 그러니 모두 문 밖으로 나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상수가람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머리가 간지러워  죽을 지경이야. 그러니 장소협, 나부터
먼저 치료해 주겠는가?"

 그는 말을  마치고 쇠사슬을 철그렁거리며  성큼성큼 문 밖으로
나갔다.

 무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약실에  가서 남성. 방풍, 백지, 천마,
강활, 백부자, 화예석 등 십 여 종의 약재를 골라 시동에게 약절
구에 넣고 찧게 한 뒤,  달인 술로 이겨 고약을 만들게 했다. 무
기는 이 고약을 성수가람의 머리에 붙여 주었다.

 고약이 머리에 닿는 순간  성수가람은 비명을 지르며 펄쩍 펄쩍
뛰었다.

 "아이구 앞, 나 주네!  아, 이렇게 아플 수가 있다니..... 하지
만 가려운 것보단 훨씬 낫군."

 그는 길길이 소리를 지르며 풀밭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 이렇게 아프다니! 빌어먹을! 하지만 가렵지 않으니 살 것
같네. 이 성수가람은 자네한테 오직 감사할 뿐이네."

 사람들은 성수가람의 가려움증이 금세  낫는 걸 보자 앞을 다투
어 무기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이때 배를 움켜쥐고 뒹굴며 비명
을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강제로 삼 십여 마리의 거머리를
삼킨 사람이었다. 위에 들어간  거머리는 죽지 않고 위벽과 장벽
에 붙어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무기는 의학서적에서 거머리가
꿀에 녹는다는 것을 본 것이 생각났다. 호접곡에는 꽃이 많았다.
그는 시동에게 꿀  한 잔을 가져 오게  하여 그 사람에게 먹게했
다.

 새벽녘에 기효부와 그의 딸  양불회가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와
보니, 무기는 이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기효부는 상처에 붕대를 감아  주고 약을 먹이기도 하며 그를 도
와 주었다. 어린 양불회는  대추와 살구를 오물오물 먹으며 나비
를 쫓아다니며 놀 뿐이었다.

 오후가 되자 무기는 사람들의 상처를 대충 다 치료했다. 출혈을
막고 고통이 심한 자는 고통도 멎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상
세가 워낙 괴이했으므로 완치된  것은 아니었다. 무기는 방에 돌
아가 눈을 붙였다. 잠결에 심한 신음소리를 듣고 깨어보니 몇 사
람은 상세가 좋아졌으나 대부분이 오히려 악화되어 있었다. 장무
기는 속수무책인지라, 호청우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호청우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도 우리 명교  사람들이 아니니 죽든 살든 나는 상관
하지 않겠다."

 무기는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만약 명교 제자  한 사람이 몸은 멀쩡한데  배 속에 응혈이 져
있고 얼굴이 불그죽죽하며 정신이 혼미하여 죽을 것 같으면 선생
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가 명교 제자라면, 나는  산갑, 귀미, 홍화, 생지, 영선, 도
선, 대황, 유향을 술에  넣고 끓인 뒤 동변(童便)과 함께 복용시
켜 설사를 하게 함으로써 응혈을 없애겠지."

 무기가 다시 물었다.

 "만약, 명교 제자 한 사람의 왼쪽 귀에 납물이 들어가고 오른쪽
귀에 수은이 들어간데다  눈에는 옻칠을 해서 통증이 극심해지고
앞을 볼 수 없게 됐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호청우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만약 그가 명교 제자라면 나는 수은을 왼쪽 귀에 넣어 줄 것이
다. 납이 수은에 녹아 나올 테니 말이다. 오른쪽 귀는 수은이 금
에 붙는 성질이 있으니 금침으로 조심스레 후벼내면 된다. 옻칠
이 묻은 눈에 방계를 찧어 즙을 내서 바르면 치료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무기는  어려운 치료법 하나하나를 명교 제자
를 빌어 알아냈다. 호청우도  무기의 속셈을 빤히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호청우의  치료법도 효과가 없는
수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무기는 다시 호청우에게 물었고, 호청
우는 다시 연구하여 다른 처방을 가르쳐 주곤 했다.

 이렇게 오,육 일이  지났다. 사람들의 상세는 조금씩 나아갔다.
기효부가 입은 내상은 독에  중독된 것이었다. 무기는 자세히 진
단한뒤 용골, 소목,  오령지, 천금자, 합분 등을 복용시켜 해독
했다. 약을 복용한 뒤  맥박을 짚어보니 상세가 천천히 나아지고
있었다.

 이 무렵 사람들은 초당 밖에  차양을 치고 땅에다 볏짚을 깐 뒤
거기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기효부는  이들과 몇 장 떨어진 곳에
작은 움막을 짓고 딸과 함께 지냈다. 움막은 무기의 분부에 따라
사람들이 지어준 것이다.  이 열 네 명은  원래 천하를 종횡하던
호걸들이었으나 지금은 무기의  손에 목숨이 달렸으니 무기의 분
부를 거역할  사람이 없었다. 무기는  이들을 치료하느라 바쁘고
고생스러웠으나, 이로 인해 호청우에게 기묘한 처방 수법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환자들의 상세가 변화하여 거의 나아가는 듯하더니 갑자
기 악화되었다. 무기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 호청우에게
다시 물었다.

 호청우는 한 마디로 대답했다.

 "그 사람들의 상세는 정말 보통이 아니야. 한 번 치료해서 나을
것이라면 구태여 호접곡까지 와서 부탁했겠느냐?"

 이날 밤 무기는 침상에 누워 사색에 잠겼다.

 '상세가 반복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열 다섯
사람의 상세가  모두 똑같이 반복해서 변하는  것은 정말 기괴한
일이야.'

 삼경이 될 때까지 그는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홀연히 창 밖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발소리를 죽이
며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무기는 호기심이 일어 창호지에 침을
발라 구멍을 낸 다음  내다보았다. 어떤 사람의 뒷모습이 느티나
무 뒤로 사라졌다. 옷차림새로 보아 틀림없는 호청우였다.

 무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호 선생이 뭘 하시는 거지? 천연두가 다 나으셨나?'

 호청우는 다른 사람이 보는 걸 피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그
는 기효부 모녀가 기거하는 움막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기 아주머니를 욕보이려는 걸까? 내 비록 그의 적수는 못 되지
만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무기는 창을 뛰어넘어  발소리를 죽이고 호청우의 뒤를 따랐다.
호청우는 조용히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움막은 엉성하여 담도
문도 없이 그저 비바람만 피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
무나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무기는 움막 뒤로 돌아가  땅에 엎드려 안을 살폈다. 기효부 모
녀는 볏짚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호청우는 품에서 알약을 하
나 꺼내 기효부의 약그릇 속에 넣더니 즉시 밖으로 나왔다. 그는
푸른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천연두가 완전히 나았는지 어떤
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순간, 무기는 짚이는 게 있어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
렸다.

 '그 동안 호 선생이 야밤에 몰래 나와 독약을 투약했구나. 그래
서 이 사람들이 계속 낫지 않는 거로군.'

 는 다시 성수가람과 설공원 등이 있는 곳으로 가서 독약을 몰래
넣었다. 열 네 사람의 독약이 각기 다르기 때문인지 시간이 한참
걸렸다. 무기는  기효부가 자고 있는  움막으로 들어가 약그릇을
살펴보았다. 약그릇엔 팔선탕이 조제되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즉
시 먹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약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
다. 이때 호청우가 침실로 돌아가는 기척이 들렸다. 무기는 약사
발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기효부를 깨웠다.

 "기 아주머니, 기 아주머니."

 기효부는 이목(耳目)이 민감해 깊은 잠에 빠졌다가도 조그만 소
리에 금방 깨어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기가 여러 차례 불러
도 깨어나지 않았다. 무기가  어깨를 몇 번이나 흔들어서야 그녀
는 겨우 깨어났다.

 기효부는 놀라서 물었다.

 "누구세요?"

 "무기예요. 아주머니 약에 어떤 사람이 독약을 넣었으니 개울에
다 몰래 버리시고  아무 내색도 하지 마세요.  내일 제가 자세한
것을 말씀드리겠어요."

 기효부는 머리를 끄덕였다.  무기는 호청우한테 들킬까 봐 조심
스럽게 창을 넘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식사가 끝나자  무기와 양불회는 나비를 쫓으며 멀
리 계곡 밖으로 나갔다.  기효부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사람들
이 눈치채지 않게 무기를  따라갔다. 이 며칠동안 무기는 양불회
와 자주 놀아  주곤 했으므로 그들 셋이  멀리 가는 것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참을 나가니 조그마한 언덕이 있었
다. 무기가 풀밭에 앉자 기효부가 딸에게 말했다.

 "볼회야, 나비는 그만 쫓고 들꽃으로 화관을 세 개 만들어 하나
씩 머리에 쓰자꾸나."

 양불회는 손뼉을 치고 기뻐하며 꽃을 따러 갔다.

 무기는 간밤에 호청우가 사람들의 약에 몰래 독을 넣은 일을 이
야기해 주었다.

 "제가 어제  아주머니의 팔선탕 냄새를  맡아 보니 철선초(鐵선
草)와 투골균(透骨菌)의 냄새가 나더군요. 이 두 가지 약은 상처
를 치료하는 특효약이지만 독성이 강하고 팔선탕의 여덟 가지성
분과는 상충되기 때문에 몸에 아주 나쁜 걸과를 가져 오죠."

 "다른 사람들의 약에도 독약을 넣었다니 그것 참 이상하군."

 "기 아주머니, 이 호접곡은 아주 외진 곳인데 어떻게 알고 오셨
나요? 그리고  금화 주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와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까닭을 알 수 없어서 묻는 겁니다."

 "무기가 내 생명을 구해  주었는데 뭘 속이겠어. 더군다나 나와
불회에게 이렇게 잘 대해 주니....."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 년 전에 난 한  사저와 좋지 않은 사건이 있어서, 사부한테
도 못 가고 집에도 못....."

 "그 정민군은 나쁜  여자예요. 하지만 그 여자를  두려워 할 것
없어요."

 기효부는 이상해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무기는 그날 밤 상우춘과 함께 숲에 숨어 그녀가 팽화상을 구해
주는 걸 보았다고 얘기해  주었다. 기효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남이 알아서  안 될 일이라면 애당초  행하지를 말라는 옛말이
맞군."

 "기 아주머니, 저의 은사숙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아
도 괜찮을  거예요.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요? 나중에 은사숙을
만나면 제가 아주머니를 탓하지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나는 무기의 사숙을  일부러 피한 것이 아니야.  어쩔 수 없어
그랬던 거야. 그러나 후회하지 않아."

 그녀는 무기의 얼굴을 쳐다보며 혼자 생각했다.

 '이 아이의 마음은 하얀 종이처럼 깨끗하구나. 남녀간의 복잡한
문제를 무기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다. 더군다나 이 일은 그
것과 관계가 없으니까.'

 그녀는 화제를 돌려 말했다.

 "나는 정사저와 싸운 뒤  아미산에 돌아가지 않았어. 불회를 데
리고 여기서 서쪽으로  삼백 리 떨어진 순경산(舜耕山)에 은거하
며 이 년을 나무꾼이나 농사꾼과 어울려 참 즐겁게 살았어. 그런
데 보름 전에 불회의  옷을 사려고 조그만 진(鎭)에 나왔다가 담
장에 흰 분필로 그린  불광(佛光)과 검의 그림을 보았어. 분필의 
흔적으로 보아 최근에 그린 거였지. 그 그림은 우리 아미파가 동
문을소집하는 암호야. 그림을  본 난 잠시 당황했어. 그러나 사
실 정사제와  싸우긴 했지만 내 잘못도  아니었고 사문에 죄지은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오히려 동문이 어려움을 만났는데도 
도와주지 않는게 나쁘다는 생각이  들어 그 암호를 따라 봉양(鳳
陽) 까지 갔어....."

 기효부는 말은 계속 되었다.

 봉양성 안에서 또 암호를 보고 그녀는 불회를 데리고 임회각(臨
淮閣)이라는 주루에 갔었다. 주루에는 이미 칠,팔 명의 무림인들
이 와  있었다. 공동파의 성수가람, 화산파의  설공원과 세 명의 
사형제도 그 속에 있었다. 그런데 아미파 동문은 보이지 않았다.

 "나와 성수가람,  설공원은 전에 만난  적이 있었으므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그들도 동문의 암호를  보고 왔다는 거야. 
무슨 일인지 아무도 모르더군.  그날 하루 종일 기다렸으나 도움
을 요청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어. 나중에 다른 파 사람들이 몇 
명 더 왔지. 신권문과 개방 사람도 있었는데 역시 동문의 연락을 
받고 임회각까지 왔다는 거였어. 다음날 또 몇 명이 왔는데 모두
가 암호를 보고  왔을 뿐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더군. 우린 의논 
끝에 뭔가 이상하다는 결론을  내렸지. 어떤 적에게 우롱 당하는 
건 아닌가 하고....."

 장무기는 그녀의 말에 그저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임회각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열 다섯 명으로 아홉 개 문파 사
람들이었어. 이들 문파마다 암호가 다르고 비밀에 속하는 것이어
서 본문 사람이 아니면 그  뜻을 알 수 없게 돼 있는데, 만약 적
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어떻게 아홉 개 문파의 암호를 다 알아
냈을까? 나는 볼회를 데리고 있어 험한 일을 겪을 게 두려운데다 
동문을 만나는 게 싫어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층계 밑에서 쿵쿵
하는 하는 소리가 들리더군.  지팡이로 층계를 내리찍는 것 같았
어. 이윽고 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허리가 굽은 백발의 노파가 올
라왔어. 노파는 몇 걸음 걷다가 기침을 하곤 했는데 무척 고통스
러운 모양이더군, 옆에는 열 두세 살쯤 되는 소녀 하나가 노파의 
팔을 잡고 따라 올라왔어.  노파는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옷을 
걸친 폼이 가난한 늙은이 같았는데 왼손에 금빛이 번쩍이는 염주
가 쥐어져 있더군.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 보았더니 염주 하나하
나가 모두 황금으로 만든 매화였어....."

 무기는 여기까지 듣자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그 노파가 금화 주인인가요?"

 "맞았어. 그러나 그 때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녀는 품에서 작은 황금  매화 한 송이를 꺼냈다. 무기가 보았
던 그 매화와 똑같았다. 무기는 며칠 동안 금화 주인이 누구인지 
무척 궁금했다. 보나마나 무섭고 흉악한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
는데 기효부로부터 중병에 걸린 노파라는 말을 듣자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기효부가 말을 계속했다.

 "그 노파는 주루에 올라오자  한바탕 기침을 하며 옆에 있던 소
녀에게 '얘야,  저자들에게 물어 봐라.  무당과 곤륜파 사람들은 
안 왔느냐구?'했어. 노파가 올라올  때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
았는데, 그 소리를 듣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노파를 쳐다
보았지. 그러자 소녀가  천연덕스럽게 말하더군. '우리 할머니께
서 너희들에게 물으신다. 무당파와 곤륜파 사람도 왔느냐구.' 하
도 기가 막혀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잠시 후에 공동
파의 성수가람이 말했지.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그 때 노파
가 허리를 구부리며  또 기침을 해냈는데 바로  그 순간 한 가닥 
경풍이 내  가슴을 향해 날아왔어.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르는 
체 나는 엉겁결에장으로 받아쳤지. 돌연 가슴이 콱 막히며 기혈
이 솟아올라 버틸 수가 없었어. 나는 주루의 바닥에 쓰러져 선혈
을 쏟아냈어. 눈깜짝할 사이에 우리  열 다섯은 모두 한 대씩 얻
어맞고 쓰러졌지. 노파의 출수가 워낙 신출귀몰하여 우리들은 손 
한 번  써보지 못한 체 내력에  의해 오장육부가 진상(震傷)당한 
거야. 노파는 염주에 꿰었던 매화를  한 알씩 던져 열 다섯 사람
의 팔에 꽂더군. 그러더니 돌아서서 소녀의 부축을 받아 몸을 달
달 떨며 주루를 내려가더군.  지팡이 짚는 소리가 천천히 멀어져 
갔는데 기침소리는 계속귓전에 맴돌았어."

 기효부가 여가까지 말했을 때  양불회는 화관 하나를 만들어 가
지고 달려왔다.

 "어머니, 이 화관을 머리에 써봐요."

 그녀는 화관을 어머니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기효부는 즐겁게 웃으며 계속 말했다.

 "당시 열 다섯  사람은 모두 부상을 당해  신음하는 사람, 숨을 
헐떡이는 사람 등....."

 "어미니, 그 나쁜 할망구  이야길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는 하
지 말아요. 난 무서워."

 "그래 불회야. 다시 가서  화관을 만들어 무기 오빠한테도 주어
야지."

 양불회는 무기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떤 색깔을 좋아해요?"

 "빨간 색. 음,  흰색이 섞어도 괜찮지. 그리고  크면 클수록 좋
아."

 양불회는 두 손을 활짝 펴 보이며 말했다.

 "이만큼?"

 "그래, 그만큼."

 양불회는 손뼉을 치며 깡총깡총 뛰어갔다.

 "만들어 오면 꼭 써야 해!"

 기효부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십 여 명의 사내들이 다가오는 게 보
였어. 모두 주루의  주보, 주인, 요리사들이더군. 그들은 우리를 
주방으로 끌고 갔어. 그 때 불회는 놀라서 큰 소리로 울며 내 볕
에 있었지. 그 주인이란  자는 쪽지를 보고 성수가람을 가리키며 
말하더군. '이  자의 머리에 이 고약을  발라라.' 그러자 주보는 
준비해 두었던 고약을 성수가람의  머리에 발랐어. 주인은 또 쪽
지를 보더니  다른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지.  '그 자의 오른손을 
잘라 왼손에 붙여라.'  요리사가 부엌에서 칼을 가져다 명령대로 
했어. 내 차례가 오자 다행히도 괴상한 극형을 가하지 않고 달착
지근한 약물을 먹이더군. 나는 극독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 때는 
그들이 하는 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어..... 열 다섯 사람에게 괴
이한 혹형을 가한 뒤  그 주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지. '당신들은 
모두 불치의  상처를 입었소. 잎으로 열흘밖에  살지 못할 거요. 
다만 금화의 주인께서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한  가닥 살 길을 
알려 주겠다고 하셨소. 즉 당신들은 빨리 여산호(女山湖)반에 있
는 호접곡으로 가서  접곡의선이란 의원에게 치료해 달라고 부탁
하면 된다 하셨소. 아울러 금화 주인이 머지않아 그를 찾아갈 것
이니 관을  준비하고 있으라고 전하시오!' 그  자는 이렇게 말한 
뒤 호접곡으로 오는 길을  상세히 알려 주어서 모두 이리로 오게 
된 것이야."

 무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주루의 주인, 주보, 요리사들도 모두 그 나쁜 노파의 
일당인가요?"

 "노파의 부하들이겠지. 그런데 왜 우리에게 그렇게 가혹한 형을 
가했는지 알 수가  없어. 노파는 어째서 이런  괴이한 일을 했을
까?"

 무기는 한참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이 금화 노파가 호 선생님을 혼내 주러 온다면 호 선생님은 모
두를 치료해 준  다음 협력해서 그와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호 
선생님은 터놓고 사람들을 구하지 않고 암암리에 저를 통해 치료
케 한 다음, 다시 야밤에 몰래 독약을 넣어 그들을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이 만들려는 모양인데 정말 기이한 일이로군요."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양
불회가 큰 화관을 가지고 와서 무기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무기가 말했다.

 "기 아주머니, 앞으로는 제가 직접 갖다 드리는 탕약 외에는 아
무것도 드시지 마세요. 밤에는 머리맡에 병기를 준비해서 외인의 
침입에 방비하시구요. 제가 지은  약을 드시고 내상이 나은 뒤에 
불회를 데리고 몰래 달아나세요."

 기효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기, 호 선생의 속셈을 헤아릴 수 없으면서 그와 함께 지내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차라리 우리 함께 이곳을 떠나자."

 "호 선생님은  지금까지 저에게 잘해  주셨어요. 사실 선생님은 
내 몸의 음독을 제거한  뒤에 죽이겠다고 했답니다. 다만 여지껏 
낫지 않아 나를 죽일 필요가 없는 거죠. 지금 떠나는 게 제일 좋
긴 한데 아주머니의 내상을  고치는데 몇 가지 불확실한 것이 있
어요. 그것을 호 선생님에게 물어 봐야 해요."

 "그가 독약으로 나를 헤치려 하는데 제대로 가르쳐 줄까?"

 "그렇지 않아요. 호 선생님이  가르쳐 준 치료법만은 거짓이 아
니에요. 그 정도는 분별할 줄 알아요. 원래는 금화 주인이 호 선
생님이 병을 앓고 있는  중에 찾아온다기에 크게 염려 했는데 호 
선생님의 병은 가짜인 것 같아요."

 이날 저녁  무기는 신경을 곤두세워 잠을  자지 않았다. 삼경이 
되자 또다시  살금살금 자기 방을 빠져  나온 호청우는 기효부의 
움막으로 가서 그녀의 약에 독약을 넣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흘이 지났다.  기효부는 독약을 먹지 않았으므로 병세
가 매우 좋아졌다. 그러나 성수가람, 설공원 등은 병세가 좋아졌
다가 재발하는 반복을 거듭했다.  성질이 급한 몇 사람은 원망을 
하기 시작했다. 무기의  의술이 엉터리라는 것이다. 무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늘 밤만 지나면 기효부  모녀와 함께 멀리 
떠날 생각이었다. 그는 자기  몸에 퍼진 음독은 어차피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무당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심산유곡으로 들어가 혼자 
조용히 살다 죽기로 결심했다.

 이날 밤 무기는 내일 새벽에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왠지 처
량한 생각이 들었다. 호청우가  비록 괴팍한 사람이기는 하나 자
기한테는 잘해 주지 않았던가. 그 동안 같이 지내며 의술도 많이 
배웠다. 호청우와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무기는 벌떡 일어나 호청우를  찾아갔다. 조만간 금화 노파가 찾
아올 텐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호 선생님, 이젠 호접곡이 싫지 않으십니까? 경치가 좋은 다른 
곳으로 집을 옮겨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잠시 후에 호청우의 대답이 들려왔다.

 "내 이렇게 병이 들었는데 어딜 간단 말이냐?"

 "마차를 타고 가시면 되지요. 마차의 문과 창을 천으로 덮어 통
풍이 안 되게 하면 되잖아요. 호 선생님께서 가신다면 저도 따라
가겠습니다. 

 호청우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마음이 고맙구나. 그러나 천하가 아무리 크다 해도 어딜 가
나 마찬가지니라. 요즘 가슴에 무슨 이상은 없느냐?"

 "한기는 날로 심합니다. 어차피 제  병은 고칠 수 없는 것 아닙
니까?"

 호청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신통한 약방문을 하나  지어 주마. 당귀, 원지, 생지, 독
활, 방풍, 다섯  가지 약을 써서 이경  때쯤 천산갑과 함께 급히 
복용하거라."

 무기는 깜짝 놀랐다. 이 다섯 가지 약은 자기의 병과는 아무 상
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약성이  서로 상극되는 약제들을 
천산갑과 같이 복용하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약의 분량은 어느 정도로 하나요?"

 호청우는 갑자기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분량은 많을수록 좋다. 자,  이젠 빨리 물러나지 않고 뭘 꾸물
대는 거냐?"

 이렇게 까닭도 없이  갑자기 꾸짖어 대니 무기는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왔다.

 '자기를 걱정해서 멀리  피하라고 권했더니 오히려 이렇게 모욕
을 주다니. 그러고 그 엉터리 약방문은 뭔가?! 내가 그렇게 쉽게 
넘어갈 줄 알구?'

 그는 침상에 누워 호청우가  한 말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
러다가 잠이 막 들려는데 문득 머리에 스치는 것이있었다.

 '당귀, 원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그런데..... 당귀(堂
歸)라는 말은 마땅히 돌아가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머지  뜻도 분명해졌다. 원지(遠志)는 
뜻이 먼 곳에 있으니  당귀라는 말과 합쳐 멀리 도망하라는 뜻이
다. 생지(生地)는 살 곳을 말하는 것이고, 독활(獨活)은 혼자 살
라는 뜻이다. 방풍(防風)은  바람, 즉 풍문을 방비하라는 뜻이니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말이다.  또 이경에 천산갑(穿山甲)이란, 
이경에 대로로 가지 말고 산길을 뚫고 가라는 암시가 아닌가. 그
리고 급히 복용하라는 것은 빨리 도망가라는 뜻임이 분명했다.

 이렇게 풀이하고 보니 호청우가  약방문으로 알려 준 뜻이 명백
해졌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점도 있었다.

 '호 선생님은 재앙이 임박해  있음을 알고 계셨구나. 그런데 아
직 적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왜 직접 말해 주지 않고 이렇게 어
렵고 불분명하게 이야기하실까? 만약 내가 그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일을 그르치는 게  아닌가. 어쨌든 이미 이경이 지났으
니 빨리 피해야겠다.'

 그는 호 선생이 이토록 어렵게 말해야 할 사연이 있으리라고 생
각했다. 그리고 그가 아직 도망가지 않은 것은 적을 퇴치할 묘책
을 생각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호청우가 소문을 내지 말고 혼
자 가라고 했지만 기효부 모녀는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기
는 즉시 방을  나와 기효부에게 갔다. 가  보니 누군가가 허리를 
구부리고 잠자는 기효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 반달이 움막 
틈새로 비쳐 무기는 그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푸른 천으로 얼굴
을 가린 것으로 보아  호청우가 분명했다. 호청우는 기효부를 잡
고 입을 벌려  억지로 알약을 먹이려 하고  있었다. 무기는 급히 
뛰어 들며 소리쳤다.

 "안 돼요!"

 그 사람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사이에 그의 손에서 
빠져 나온 기효부는 그의 등을  항해 일장을 쳤다. 그는 이내 쓰
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얼굴을  가린 푸른 천이 풀어지면서 얼굴
이 드러났다.

 무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는 호청우가 아니
었던 것이다. 뜻밖에도 중년 부인이었다.

 여인임을 확인한 장무기는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당신은 대체 누구요?"

 여인은 기효부의  장력에 적중되어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말을 
제대로 못했다.

 기효부도 다그치듯 물었다.

 "왜 자꾸 나를 해치려는 거죠?"

 중년 부인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기효부는 장검을 뽑아 그녀의 심장을 겨냥했다.

 "저는 호 선생님을 뵙고 올께요."

 장무기는 호청우가 이미 이 부인에게 독수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숨에 호청우의 침실 앞으로 달려
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주위는 칠흑처럼 어둡고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장무기
는 다급한 나머지 상에서 화섭자를 집어 횃불에 불을 붙였다. 침
상에 있어야 할 호청우가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호청우의 모
습이 보이지 않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선생님께서 적에게 납치돼  갔다면 오히려 생명에는 지장이 없
을 것이다.'

 그는 급히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갑자기 침대 밑에서 거칠
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얼른 허리를 굽혀 침대밑을 살펴보
았다. 호청우가 손발이 묶인  채 침대 밑에 누워 있었다. 그래서 
대답을 못했던 것이다. 장무기는 그의 입에 물린 자갈을 빼고 나
서 손발을 묶을 밧줄도 풀어 주려고 했다. 

 그런데 호청우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 여인은?"

 "그녀는 이미 기 아주머니에게 제압되어 도망가지 못할 겁니다. 
혹시 불편하신 데라도 없으십니까?"

 "밧줄은 있다가 풀고 우선 그녀부터 데려오게. 어서! 늦으면 큰
일나네."

 "왜 그러십니까?"

 "어서 그녀부터 데려오라니까! 아니, 우선 우황혈갈단(牛黃血竭
丹) 세 알을 꺼내 그녀에게  먹여라! 세 번째 서랍에 있다. 어서 
서둘러라."

 그는 뭐라고 말할 수 없이 화급했다.

 우황혈갈단은 해독 영약으로서 갖은 진귀한 약물로 제조한 것이
라 한 알만 있어도 충분히 극독을 해독할 수 있는 데, 세 알까지 
복용시키라고 하니 장무기는 그 부인의 중독 상태가 굉장히 지독
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해약을 꺼내 기효부의 움막으로 달
려가 부인에게 외쳤다.

 "어서 이 약을 복용하시오!"

 부인이 대뜸 호통을 쳤다.

 "썩 꺼지거라! 누가 너의 호의를 받는다고 했느냐!"

 "이건 호 선생님께서 주신 것이오."

 "잔말 말고 썩 비키거라!"

 장무기는 두  말 않고 그녀에게 다가가  강제로 알약을 먹였다. 
그리고 기효부에게 말했다.

 "이 여인을 호 선생님께 데려가죠."

 기효부는 여인의 혈도를 찍고 장무기와 부축하여 호청우에게 데
려갔다.

 호청우는 여전히  땅바닥에 누워 있다가  여인이 들어서자 급히 
물었다.

 "약을 복용시켰나?"

 "네."

 "옳지 그래야지."

 호청우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 듯했다. 장무기는 그의 밧줄을 풀
어 주었다. 호청우는 밧줄이  풀리기 무섭게 여인에게 다가가 그
녀의 눈을  살펴보고 완맥을 짚어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찌 외상까지 입었소? 누가 그랬소?"

 그의 음성은 경황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움이 역력했다. 그 여인은 
입을 삐쭉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당신의 제자에게 물어보면 알 게 아니에요?"

 호청우는 고개를 돌려 장무기에게 물었다.

 "자네가 그랬나?"

 "그녀가....."

 장무기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철썩! 철썩! 하고 호청우가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장무기는 졸지에 뺨을 맞아  눈앞에 불꽃이 튕기고 볼이 얼얼했
다.

 기효부는 대뜸 장검을 뽑아들고 일갈을 질렀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호청우는 시퍼런 광채가 번뜩이는 장검을 보고도 전혀 아랑곳하
지 않고 그 부인에게 물었다."

 "가슴은 어떻소? 배가 아프진 않소?"

 그의 태도나 말투는 매우  근심스럽고도 끔찍한 정감이 듬뿍 담
겨 있었다. 평상시  견사불구의 차가운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그
러나 그 부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호청우는 부인의 혈도를 풀어 주고 손발을 주물러 주었다. 그리
고 몇 가지 약을 꺼내  정성스레 복용시킨 후, 그녀를 안아다 침
상에 눕혀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장무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이처럼 부드럽고 온화하게 대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장무
기는 잔뜩 부어오른 두 뺨을 어루만지면서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호청우는 애정어린 눈길로 부인을 한참 동안 주시하더니 부드럽
게 말했다.

 "이번에는 독에다가 상처까지  입었으니, 만약에 내가 완치시키
면 앞으로 다신 쓸데없는 시합을 하지 않기로 약조 합시다."

 그 부인은 냉랭히 웃었다.

 "이까짓 외상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복용한 독약이 문제
죠. 만약에 정말로 나를 완치시킬 수 있다면 굴복하겠지만, 아마 
이번만큼은 의선의 실력이  절대 독선(毒仙)을 따라가지 못할 거
예요."

 장무기는 비록 남녀간의 미묘한  감정을 이해 못했지만 두 사람
이 서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호청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십 년 전에도 말했듯이 의선은 절대로 독선의상대가 될 수 없
소. 그런데 당신은 그걸 믿지  않고 오히려 자기 몸을 시험 대상
으로 삼을 게 뭐요? 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의선이 독선보
다 낫다는  것을 보여  주리다.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말이
오."

 부인은 교태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만약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중독시켰다면 결국 또 일부러 져주
려고 못 고치는 척했을 게 뻔해요. 하지만 이번만은 전력을 다하
지 않고는 못 배길걸요?"

 호청우는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 어디 그런 농담할 때요? 어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쉬기
나 하시오."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죠."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가에 달콤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줄곧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기효부와 장무
기는 뭐가 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오리무중에 빠졌다.

 요염하게 생긴 중년부인은 대관절 누구일까?


                                 ----- 제 2 권 8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끝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3 권


     제 1 장  호접곡의 비화(秘話) 


 기인기사(奇人奇事)라는 말이  있듯이 괴팍한  사람만이 괴팍한
일을 저지를 수가 있는 모양이다.

 호청우도 괴팍한 사람임에 분명했다.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장무기에게 허리를 깊숙이 꺾어 읍을 했
다.

 "장형제, 상황이 너무 다급해서 부득이 자네에게 무례를 저질렀
으니 제발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서해 주게."

 장무기는 조롱을 당하는 듯한 기분에 분연히 말했다.

 "난 도깨비한테  홀린 기분입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군
요."

 호청우는 난데없이 자신의 뺨을 철썩철썩 갈겼다.

 "장형제, 자네는 나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네. 난 아내의 안
위가 염려되어 조금 전에 자네에게 몹쓸 짓을 한 걸세."

 장무기는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럼..... 이 여인이 호 선생님의 부인이란 말입니까?"

 호청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만약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으면 다시 내 뺨을 때
리게. 아니면 내가 자네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겠네. 자네가
날 구해 준 것은  별게 아니지만 집사람의 생명까지 자네가 구해
준 걸세."

 호청우는평상시 매우 근엄했다. 그가 스스로 뺨을 때린다는 것
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무기는 그가 진정으로
자기에게 사과를 하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이 여인이 그의 아내
라는 것을 알자 끓어올랐던 분노가 봄눈 녹듯 사라졌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뭣을 숨기겠는가? 집사람의 성을 왕(王)
이며 이름은 난고(難姑)라고 하네.  우린 같은 스승 밑에서 무공
을 배운  동문이라네. 나는 스승님으로부터  무공 이외에 의술을
배웠지만, 집사람은 독술을 배웠지. 그녀의 말을 빌리면, 무공을
배운다는 것은  살인을 하기  위함이므로 독술과 일맥상통한다고
하네. 오히려 독술을 상당한  경지로 터득하면 그 용도가 무공을
능가한다고 했네. 의술은 병을  치료해 사람을 구하는 게 목적이
니 만치 무공에는 위배된다는  걸세. 난 집사람의 심오한 이론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지. 그녀의  생각이 나보다 열 배는 더 깊
다는 걸 솔직히 시인하네. 하지만  난 워낙 의술에 대해 깊은 흥
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네. 지
금 와서 생각해도 그녀의 진심어린 충고를 거역한 게 후회스럽기
만 하네....."

 호청우의 말은 계속이어졌다.

 "우리 두 사람은 비록  제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서로 깊이
사랑했네. 스승님께서도 우리가  결합되는 것을 원하셨기 때문에
우린 순조롭게 부부가  될 수 있었네. 나중에  우린 강호로 나와
각자 명성을 얻게 되었지.  나를 의선이라 일컫는 사람이 있듯이
집사람을 독선(毒仙)이라 칭했네.  그녀의 독술이야말로 타의 추
종을 불허했네. 그녀는 자신의  독을 시험하기 위해 여러 사람에
게 만성적인  독약을 복용시켰네. 중독된  사람들은 나를 찾아와
치료를 의뢰했지. 그런데 난  어리석게도 그들의 독을 치료해 주
었네. 그것이 아내에 대한  불충이라는 것도 모르고 오히려 득의
양양했으니, 나보다 더 어리석고 미련한 놈이 세상 천지에 또 있
겠는가?"

 기효부와 장무기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매우 못마땅
하게 생각했다.

 호청우는 자신의 괴론을 다시 펴나갔다.

 "그녀는 늘 나에게 온순했으며  정감이 두터웠네. 이 세상에 그
녀보다 더 좋은 여잔 또  없을 걸세.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 거듭
하여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네 그녀에게 중독된 사람을 계
속 치료해 주었으니 말일세. 나중에 난 내 자신이 저지른 과오가
너무 엄청나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에게  독을 당한 사람이라면
절대 치료해 주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네. 세월이 흐르자 난 자연
히 <견사불구>라는 외호가 생기게 되었지....."

 호청우의 괴론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당연하
다는 듯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내는 내가 과오를 뉘우치자  그 동안 속상했던 일을 잊고 날
용서해 주었네. 그런데  개과천선한 지 몇 해가  되지 않아 아주
해괴한 독을 당한 환자를 만나게 되었네. 그 증상으로 미루어 아
내의 짓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네. 치료를거부하기
로 작심했네. 그러나 증상이 워낙 특출하여 손을 써보고 싶은 짜
릿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네.  결국 며칠 동안 이를 악물고 참은
보람도 없이 그만 자제력을  잃고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그 자
를 완치시켜 주었네....."

 여기까지 들은 장무기는  혀를 내둘렀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
히 납득할 수 없는 예기였다.

 호청우는 표정마저 울적하게 변해 말을 계속했다.

 "그 일로  인해 아내는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혀 훌쩍 호접곡을
떠나고 말았네. 나는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백배사죄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네. 그러나 병을 치료하는 게 유일
한 취미인지라 그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죽음을 강요
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괴질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손을
써야만 했네. 내가 치료해 준 사람들 중에는 아내의 작품도 섞여
있었네. 단지 그녀의 수법이  갈수록 절묘해져 난 쉽게 알아내지
못한 채 치료를 해 준걸세.  그러니 갈수록 우리 부부의 정이 멀
어질 수 밖에....."

 여기까지 말한 호청우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착하고 예쁜 아내를  마음 상하게 하여 끝내 집을 떠나
도록 만들었으니, 나보다 더  나쁜 남편이 또 어디 있겠는가? 강
호는 험악한 곳인데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혹시나 누구한테 해를
입지나 않을까, 그 동안 얼마나 염려를 했는지 하늘만이 내 마음
을 알 걸세."

 기효부는 침상에 누워 있는  왕난고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내심
중얼거렸다.

 '이 호 부인이 독선이라  일컬어질 만큼 독술이 뛰어났는데, 누
가 감히 그녀를 해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그녀가 남을 해치
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녀 역시 장무기와 마찬가지로 어처구니가 없었고, 우습기까지
했다.

 호청우는 줄기차게 말을 이어갔다.

 "결국 난 명교의 사람이  아니면 치료를 해 주지 않겠다는 맹세
를 하기에 이른 걸세. 아내가 심혈을 기울여 창출한 걸작품을 파
괴하는 따위의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굳은 신념에서 비롯
된 맹세였지. 우리 부부는  모두 명교의 제자이므로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명교 제자를 시험물로 삼지 않기 때문일세."

 기효부와 장무기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명교의 제자가 아니면 치료를 해 주지 않으려고 했군.'

 호청우는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아랑곳 않고 말을 계속했다.

 "칠 년 전에 한 쌍의  노부부가 극독을 당해 나를 찾아왔네. 그
들은 동해 영사도(靈蛇島)의 주인인 금화파파와 은엽선생(銀葉先
生)이었네. 그들은 예의를 갖추어 나를 깎듯이 대했네. 그러면서
도 금화파파는 은근히 한 가지 절세무공을 보여 주었네. 나는 그
녀의 무공에 질려 감히 치료를 거부할 수 없었네. 그렇다고 해서
이미 과거의 죄악을 씻고 개과천선한 몸이 어찌 재범을 할 수 있
겠는가? 나는  일단 그들의 맥을 짚어보고  나서, 노도주는 워낙
독이 심해 구제할  약이 없지만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 것이며,
노부인은독증이 깊지 않아 자신의 심후한 내력으로 스스로 독을
배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해 주었네."

 장무기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들도 호 부인에게 독을 당한 겁니까?"

 "아닐세. 서역의 한 벙어리 두타에게 당했다고 하더군. 물론 아
내와는 상관없지만 명교의 제자가 아니니 내 어찌 자신의 맹세를
헌신짝처럼 저버릴 수가 있겠나!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라도 난
그 맹세를 지켜야만 했네.  그들 부부는 나에게 강압적인 수단을
전개하지 않고 암담한 표정으로  돌아갔네. 나는 그와 유사한 일
들을 많이 겪었네. 그 바람에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네.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 부부 사
이가 금이 가서야 되겠나? 자네도 아마 내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걸세."

 기효부와 장무기는 모두  침묵을 지켰다. 호청우의 이런 견사불
구의 주장을 찬성할 수 없었다.

 호청우가 다시 말했다.

 "최근 아내는 은엽선생이  드디어 독이 발작돼 죽고 금화파파가
화풀이를 하기 위해 날 찾아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를 돕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걸세. 이것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날
생각해 주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을 걸세. 그녀는 집에 생소한 사
람이 있는 것을 보고 암암리에 미약을 풀어 무기를 깊은 잠에 빠
지게 만든 걸세."

 장무기는 비로소 그날 밤 깊은 잠에 빠져 이튿날 오후에서야 깨
어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호청우의 말은  계속되었다. 아내가  돌아오자 그는 하늘이라도
날을 듯이 기뻤다. 왕난고는  그에게 천연두에 감염된 것으로 위
장하라고 했다. 함께 방에 틀어 박혀 강적을 상대할 궁리에 몰두
하기 위함이었다.

 그 며칠 후에 설공원과  기효부 등이 연이어 왔다. 호청우는 그
들의 상세에서 금화파파가 자기를 시험해 보려 한다는 속셈을 이
내 알아차렸다. 과연 맹세했던  대로 명교의 제자가 아니면 치료
를 해 주지 않는지 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호청우는 제
각기 다른 열  다섯 가지 괴질에 대해  상당히 구미가 당겼으나,
감히 시술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무기가 치료 방법을 물어오
자, 그는 무당제자로서 자기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다는 것을 특
별히 강조한 연후에 비로소 치료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한데, 왕난고는 그의  치료법이 효과를 거두자 내심 못마땅하게
느껴져, 매일밤 각자의 음식에 독약을 풀었다. 호청우와 계속 시
합을 해보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호청우에 대한 호
의이기도 했다. 장무기가 만약 그들을 모두 완치시킨다면 금화파
파가 그 책임을 호청우엑  돌릴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장무기가
기효부의 움막으로 가서  어깨를 흔들어야만 그녀가 깨어났던 이
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왕난고는 기효부의  병세가 갈수록 호전되는  것을 보자 처음엔
자신의 독술을 의심하게 되었지만, 곧 장무기의 소행임을 알아냈
다. 그러자  왕난고는 장무기에게  독수를 전개하기로 작심했다.
호청우는 아예 상관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젯밤 무
기가 자기를 찾아와 멀리 피신하라고 권유하는 바람에 그의 갸륵
한 마음에  감동되어 별도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약방문을 말해
준 것이다. 당시 왕난고가 바로  곁에 있어 직접적인 말을 할 수
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난고는 영특한데다가 약성에 대해 전
혀 모르지 않으므로, 그 약방문에 숨겨진 진의를 알아차렸다. 그
녀는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혀 호청우를 밧줄로  묶고 스스로 몇
가지 독물을 복용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보, 당신과 나는 부부가 된지 이십 년이 넘었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아직까지도 나의 목숨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군요. 내가
무슨 독을 전개해도 늘 그  독을 풀었죠. 그래서 이번에는 내 스
스로 극독을 복용했어요. 당신이  정말 내가 복용한 독까지 완치
시킬 수 있다면, 앞으로는 절대로 독을 전개하지 않겠어요."

 호청우는 이 말에 혼비백산하여 무릎을 꿇고 통사정을 했다. 그
러자 왕난고는 그가 더 이상 말을 못하게 입에 자갈을 물린 것이
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바로 장무기와 기효부가 직접 겪은 것
들이었다.

 기효부와 장무기는 호청우의  말을 듣고 나자, 부화가 치밀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호청우가 아내에 대해 병적으로 편파
적인 사랑을 품고 있다는 건 그런 대로 이해가 가지만, 왕난고가
남편의 콧대를  꺾기 위해 자신을 시험물로  삼아 스스로 극독을
복용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호청우가 다시 말했다.

 "자네도 생각해  보게. 내 무슨 도리가  있겠나? 이번에도 내가
심혈을 기울여 그녀를  완치한다면 내 솜씨가 그녀를 능가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녀가 평생을 두고 우울해 할 게 아니겠
는가? 그렇다고 해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영락없이 세상을 떠나
게 될 테고....."

 그는 장탄식을 했다.

 "난 단지 금화파파가  빨리 나타나 날 죽여  주길 바랄 뿐이네.
그러면 영원히 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말일세. 게다가 근
래에 이르러 그녀의  독술은 눈부신 발전이 있어,  난 도저히 그
독을 제거할 방법이 없다네."

 "호 선생님의  의술은 신기라  일컬어지는데도 사모님께서 무슨
둑을 복용했는지 알아내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녀의 독술을 이제 나의 의술을 훨씬 능가하네. 난 머리가 깨
진다 해도 이젠 그 치료 방법을 생각해 낼 재간이 없네. 내 추측
으론 세 가지 독충과 세  가지 독초를 섞어서 복용한 것 같은데,
그 여섯  가지 독물을 어떻게  배합했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
네."

 호청우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탁자에다 약방문을 적었
다. 이어 손을 내두르며 힘주어 말했다.

 "이젠 나가 주게. 만약 아내가 죽으면 나도 혼자 살아남진 않을
걸세."

 기효부와 장무기는 입을 모아 진지하게 말했다.

 "부디 경솔한 생각 마시고, 사모님이 생각을 달리 하게끔 잘 설
득해 보십시오."

 "이젠 소용없을 걸세.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을 걸세."

 여기까지 말한 호청우는 그만 목이 메이는 듯 울음을 터뜨렸다.
기효부와 장무기는 곧 물러났다.

 호청우는 우선 아내의 등과 허리 부위의 혈도를 찍었다.

 "여보, 내가 무능해 도저히  당신의 독을 치료할 수 없으니, 저
승에서나마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함께 이승을 떠나겠소."

 그는 곧 왕난고의 품속을  뒤져 몇 봉지의 가루약을 꺼냈다. 과
연 그가 예측했던  대로 세 가지 독충과  세 가지 독초를 배합해
만든 독약이 있었다.

 왕난고는 몸을 움직일 수 없지만 말은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다
급하게 소리쳤다.

 "여보! 독을 복용하면 안 돼요!"

 호청우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오색찬란한 독가루를 모조리 입
안에 털어넣었다.

 왕난고는 대경실색했다.

 "그렇게 많이 복용하면 어떻게 해요? 그 분량이면 세 사람을 독
살하고도 남는단 말예요!"

 호청우는 담담하게  웃으며 의자를  끌어당겨 침상밑에 앉았다.
삽시간에 예리한  비수로 오장육부를  난도질하듯 극심한 통증이
엄습해 왔다. 이것은 여섯  가지 독물 중에 단장초(斷腸草)가 가
장 먼저 발작한 것임을 호청우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곧 나머
지 다섯  가지 독물도 연달아 발작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
다.

 왕난고는 안타깝게 소리쳤다.

 "여보! 그 여섯 가지 독물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
요!"

 호청우는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나.....난 믿을 수 없소. 이제 곧..... 죽게 될 것이오."

 "여보! 어서 우황혈갈단(牛黃血竭丹)과 옥룡소합산(玉龍蘇合散)
을 복용하고, 침술로서 독을 몸 밖으로 배출시키세요!"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제가 복용한 독은 소량이기 때문에 버틸 수 있지만, 당신은 너
무 많이 복용해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죽게 될 거예요."

 "난 성심 성의껏 당신을  위해 살아왔는데, 당신은 한사코 호승
심을 앞세워 나하고 우열을  겨루려 하니 이젠 사는 게 무의미해
졌소. 차라리 죽는 게..... 아이구..... 악!"

 그는 신음에  이어 비명을 내질렀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흡사 수백  마리의 독충이 오장육부를 갉아먹는  것 같아 정신이
차츰 흐릿해지더니 끝내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왕난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여보! 여보! 제가 잘못했어요. 당신은 절대 죽으면 안돼요! 다
시는..... 다시는 당신과 겨루지 않겠어요!"

 그들 부부는 비록  이십 년 동안 암투를  벌여 왔지만 정감만은
어느 부부 못지 않게 두터웠다. 왕난고는 남편이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자기를 살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오히려 남편의 죽
음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혈도가 찍혀 꼼짝할 수 없
는 그녀로선 당황하여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장무기는 왕난고의 울음소리를 듣고  얼른 방 안으로 뛰쳐 들어
왔다.

 "사모님, 사부님을 구할 방도가 있겠습니까?"

 왕난고는 그를 보자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뻐했다.

 "어서 우황혈갈단과 옥룡소합산을 복용시키고, 금침으로 용천혈
과 구미혈을....."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밖에서 갑자기 기침소리가 들려
왔다. 조용한 야밤에 난데없이 들려온 기침소리는 으시시한 느낌
마저 들었다. 순간 기효부가 뛰쳐들어와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
으로 말했다.

 "금화파파가.....!"

 순간, 한 줄기의 미풍이  이는 듯 싶더니 등이 구부정한 노파가
열 두세 살 가량의 소녀를  데리고 방 안에 나타났다. 그 노파가
바로 금화파파였다. 금화파파는 호청우가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
고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안색이 거무스름하게 변색된 것을 보자
그가 곧 죽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녀는 절로 멍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누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호청우는 사지가 축 늘어지며 눈
을 허옇게 까뒤집었다.

 왕난고는 통곡을 했다.

 "여보! 이렇게 죽으면 저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금화파파가 이번에  영사도에서 중원으로  들어온 것은, 남편을
죽게 한  원흉을 수소문하는 일 외에  호청우를 찾아와 화풀이를
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호청우가 극독을 복용할 줄이야! 금화파
파도 독에 관한 일가견을 갖고 있는지라 호청우와 왕난고의 안색
에서 독성이 이미 깊어져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걸 단숨
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호청우가 자기를 두려워해 스스로 목숨
을 끊기 위해  독을 복용한 것이라 간주했다.  그러니 더 이상의
수단을 전개할 수 없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업자득이군! 자업자득이야.....!"

 그녀는 소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방문을 나서자마
자 그녀의 기침소리가 십여 장 밖에서 들려왔다. 그 빠른 신법은
정말 불가사의했다.

 장무기는 황급히  호청우의 심장에  손을 얹었다. 미약하게나마
심장이 아직 고동치고 있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우황혈갈단과
옥룡소합산을 복용시키고 용천혈과  구미혈에 금침을 놓았다. 이
어 왕난고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시술을 해 나갔다.

 반 시간 가량이 지나자 호청우는 간신히 깨어났다. 왕난고는 기
쁨으로 인해 다시 눈물을 흘렸다.

 "장형제, 자네  덕분에 우리  두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
네."

 이어 장무기는 약방문을 적어  약동으로 하여금 탕약을 달여 두
사람에게 복용시켰다. 왕난고의 해독 방법은 신통한 것이 아니었
다. 그녀의 방법에만 의존했다면 독을 말끔하게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무기는 오늘 일이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금화파파는 호 선생이 이미 독을 복용해 죽은 걸로 알고 있
으니, 한 가지 큰 우환을 덜게 된 셈이군요."

 금화파파의 유령 같은  신법을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해
졌다.

 왕난고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금화파파는 오늘 순순히  떠났지만 나중에 틀림없이 진상을 알
게 될 걸세. 우리  부부는 즉시 떠날 테니, 수고스럽지만 무덤을
두 개 세워 묘비에 우리 부부의 이름을 새겨 주게."

 장무기는 그녀의 청을 승락했다.  왕난고는 곧 짐을 챙겼다. 약
동 두 명에게는 제각기 은자를 나누어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는, 나귀가 끄는 수레에 휘장을 두르고 부부는 야밤을 틈타 호접
곡을빠져 나갔다. 장무기는  그들을 골짜기 밖까지 전송해 주었
다. 그들은 이 년 동안 함께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막상 헤어지
게 되자 아쉬움이 앞섰다. 호청우는 자기가 직접 지은 의서를 꺼
내 장무기에게 내주었다.

 "무기, 내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의학이 여기에 수록돼 있
네. 예전엔 이 책만큼은  자네에게 보여 주지 않았네. 이젠 자네
에게 주겠네. 자네가 당한  현명패천장의 음독을 제거해 주지 못
한 게 마음에  걸리네. 자네가 이 의서를  바탕으로 하여 스스로
그 음독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내길 바라네. 그럼 우린 나중
에 또 만날 수 있을 걸세."

 장무기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의서를 받았다. 이번에는 왕난
고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우리 부부의 생명을 구해 주었고 또한 화해를 시켜줬으
니, 뭘로 보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내가 평생 쌓아 올린 독공
을 전수해 주고도 싶지만,  자네가 배워도 쓸모없는 것들이니 아
무튼 하루 속히 완쾌되길 바랄 뿐이네."

 장무기는 그들을 태운 수레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
가 돌아왔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 초옥  앞에는 두 개의 무덤이 새워졌다. 장
무기는 골짜기 밖으로나가 비석 두 개를 만들어 왔다.

 ----- 접곡의선호선생지묘

 ----- 호부인왕씨지묘

 설공원 등은  내막을 몰라, 호청우 부부가  죽음을 같이한 걸로
알고 모두 탄식을 했다.

 왕난고가 떠나가자 더 이상  암암리에 독을 전개하는 자가 없었
다. 각자의 병세는 장무기의  치료로 날이 갈수록 호전되어 열흘
도 채 못 되어 모두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 떠나갔다. 기효부 모
녀는 뚜렷이 갈 곳이 없어 골짜기에 남아 장무기를 도와주었다.

 장무기는 틈 나는 대로  호청우가 중 의서를 탐독했다. 그 내용
은 과연 방대하고 심오해의선의 걸작다왔다. 불과 열흘정도 읽
었는데도 의술에 커다란 진전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체내에 응결돼 있는  음독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눈꼽만치
의 단서도 찾아  낼 수 없었다. 그는  거듭하여 정독했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절망뿐이었다.

 '치료 방법이 있었다면 호  선생이 왜 나를 치료해 주지 않았겠
는가? 그도 치료  방법을 모르는데 그가 지은  의서에 그 방법이
있을 리 만무하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지막 한가닥  희망은 물거품으로 변했
다. 그는 의서를 덮어놓고 밖으로 나가 두 개의 가묘를 우두커니
쳐다보며 장탄식과 함께 울적한 심정에 빠졌다.

 '나도 머지않아 땅 속에 묻히게 되겠지. 내 묘비에는 어떠한 글
을 새겨야 할는지.....'

 바로 이때 등 뒤에서 홀연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장무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금화파파가 그 예쁘장한 계집애를 데리고
곧 쓰러질 듯 위태스러운 모습으로 몇 장 밖에 서 있었다.

 금화파파가 대뜸 그에게 물었다.

 "꼬마야, 넌 호청우와 어떤 관계나? 무엇 때문에 그곳에서 한숨
을 쉬고 있느냐?"

 장무기는 구태여 숨길 필요가 없었다.

 "저는 현명패천장에 당해 그 음독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금화파파는 바람처럼 다가와 그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 보았다.

 "현명패천장이라고? 세상에 정말  그런 장력이 있단 말이냐? 누
구에게 당했느냐?"

 "몽고 병사로 변장한 사람인데  정체는 알지 못합니다. 저는 호
선생에게 병을 치료받으러  왔지만 명교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
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앞으로 저의 증
세는 더욱 치료받을 길이 없어져 우울함에 젖어 있는 겁니다."

 금화파파는 그가 영준하고 똑똑하게 생긴 것을 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애통한 일이군. 아까와....."

 장무기는 남에게 동정받는 것은 원치 않아 앙연히 말했다.

 "하지만 저는  죽음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땅
속에 묻힐 것이며 그것이 이르고 늦는 차이뿐이죠!"

 금화파파 앞에 서 있는 소녀는 죽음의 의미를 잘 모르는지 초롱
초롱한 눈망울로 장무기와 금화파파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금화파파는 남편의 죽음이 되살아나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이 맞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서 태어나 다시 죽음으로
귀속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이 죽음보다는 아름답지
않겠느냐?"

 장무기는 금화파파가 흉악하고 잔인한 인물로만 생각했었다. 전
에는 언뜻 보아 얼굴이 온통 주름살로 얼룩지고 무표정하여 자신
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는데,  지금 자세히 보니 그녀의 눈동자
만은 소녀처럼 맑고 부드러움마저 담겨져 있었다.

 "애야, 너의 아버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느냐?"

 "저의 아버님은  성이 장이며 이름은  취자 산자로서, 무당파의
제자입니다."

 그는 아버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네가 무당 장오협의 아들이란 말이냐? 그렇다면, 그 악인이 현
명패천장을 전개한 것도 너에게서 금모사왕과 도룡보도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함이었겠구나?"

 "그렇습니다. 그는 온갖 혹형을  가했지만 저는 목숨을 걸고 절
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럼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겠구나?"

 "네. 금모사왕은 저의  의부이므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행방을
누설하지 않을 겁니다."

 금화파파는 갑자기 그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그 즉시 장무기는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한 갈래의 얼음장같이 차
가운 한기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이 한기는 현명패천장의
음독과 성질이 다르지만 역시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금화파파의 음성이 유난히 부드럽게 변했다.

 "애야, 너는 착한 애니까 나한테 사손의 행방을 솔직히 말해 주
겠느냐? 그러면 내가 너의 음독을  제거해 줄 뿐 아니라 천하 무
적의 무공도 전수해 주마."

 장무기는 고통으로 인해  눈물과 콧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나의 부모님은 의부의 행방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목숨까지 끊
으셨는데, 내가 부모님의 그  귀중한 뜻을 저버릴 사람처럼 보입
니까?"

 금화파파는 빙긋이 웃었다.

 "좋아! 네가 얼마나 버티나 두고 보자!"

 그녀는 손에 힘을 주었다. 장무기는 비명대신 버럭 소리를 질렀
다.

 "차라리 내 귀에  수은을 붓고 독침, 독충  따위를 삼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사 년  전 내가 어린애였을 때도 온갖 악형에
굴복하지 않았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겁장이가 됐다고 생각합니
까?"

 금화파파는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은  어린애가  아니고  어른이라고 생각한단  말이냐?  하
핫..... 하핫.....!"

 그녀는 광소를 터뜨리며  장무기의 손목을 풀어 주었다. 장무기
의 손은 이미 검붉게 변색돼 있었다.

 예쁘장한 소녀가 얼른 장무기에게 눈짓을 하며 한 마디 던졌다.

 "어서 파파에게 구명지은을 감사드려라."

 장무기는 냉소를 날렸다.

 "뭘 감사드리라는 거냐? 차라리  날 죽였다면 저승에 가서 고맙
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소녀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토라진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앞으로 거들 떠 보지도 않을 거야!"

 소녀는 정말 몸을 획  돌려 버렸다. 그러나 곁눈질로 다시 장무
기의 표정을 살폈다.

 금화파파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아리(阿離)야, 혼자서 섬에  있기가 심심하지? 이 꼬마 녀석을
잡아가 너의 시중을 들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단지 고집이 황
소 같아서 걱정이구나."

 소녀는 이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좋아요. 잡아갔으면 좋겠어요.  말을 듣지 않으면 파파께서 말
을 듣게끔 혼을 내주면 되잖아요?"

 장무기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다급해졌다. 금화파파가 당장 자
기를 죽인다면  별문제지만, 만약 영사도로  잡혀 간다면 도저히
그 모욕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금화파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날 따라와라!  우린 우선 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 일을
마무리짓는 즉시 영사도로 돌아가도록 하자꾸나."

 장무기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모두 나쁜 사람이오! 난 절대 따라가지 않겠소!"

 금화파파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영사도에는 모든 것이 다  구비 돼 있다. 네가 마음껏 뛰
어놀 수 있게끔 해줄 테니,  아무 생각 말고 순순히 날 따라오도
록 해라."

 장무기는 즉시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한 걸음을 내
딛자 마자 금화파파가 이미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가 어느 방향
으로 달아나도 번번이 앞이 막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얘야, 고집부리지 말고 우리와 함께 가자."

 장무기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향해 힘껏 일장을 뻗어냈다. 금화
파파는 살짝 옆으로 피하며 그의  손을 항해 후! 하고 입김을 불
어냈다. 그렇지 않아도 장무기는  손이 검붉게 변색돼 통증이 심
했는데, 입김을 쐬자 손 전체가 산산 조각으로 갈라져 나가는 것
같아 펄쩍펄쩍 뛰었다.

 양불회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무기 오빠, 무슨 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기효부가 그녀를 데리고  수풀 뒤에서 걸어나왔다. 그들은 산보
를 나갔다가 이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기효부는 금화파파를보자
질겁을 하며 이내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파파, 그 애를 괴롭히면 안 돼요!"

 금화파파는 기효부를 한 차례 노려보더니 냉소를 쳤다.

 "넌 아직도 죽지  않았느냐? 내가 하는 일에  참견할 생각 말아
라. 왜 오늘까지 죽지 않았는지  자세히 보고 싶으니 좀 더 가까
이 오너라!"

 기효부는 무림제자 출신으로 담력이 컸다. 그러나 어린 딸의 안
위가 염려되어 경거망동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딸애의 손을 잡
고 도리어 뒤로 한 걸음 물러나 나직하게 외쳤다.

 "무기야, 어서 이쪽으로 와라!"

 장무기는 달아나려  했으나 아리라는 소녀가  잽싸게 그의 팔뚝
부위 삼양락(三陽絡)을 나꿔잡았다.

 "달아나지 못할 거야. 너는 성은 장이고 이름은 무기라 하지?"

 삼양락이 잡히자  장무기는 이내 반신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놀람과 함께 화가 치밀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어서 이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이때, 홀연 맑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효부야, 왜  그렇게 겁이 많아졌느냐? 좀더  가까이 가 주려무
나!"

 기효부는 직감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어  경악과 기쁨이 엇갈려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스승님!"

 그러나 등 뒤엔 아무도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유심히 살피니
비로소 회색 장포를 입은 여승이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아미파의  장문인 멸절사태였다. 그녀 뒤에는 정민
군과 패금의 두 제자가 따르고 있었다.

 금화파파는 그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용모를 똑똑히 볼 수 없
었지만 지척에서 들리는 듯한 음성으로 미루어 내력이 얼마나 심
후한지 짐작이 갔다. 멸절사태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그녀를 모
르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하산을 하지 않으므로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가 가까이 걸어옴에 따
라 용모가 확연히 드러났다.  나이는 사십 중반으로서 빼어난 용
모를 지니고 있었다. 단지 눈썹끝이 비스듬히 아래로 처져, 염라
부의 사자처럼 으시시한 느낌을 주었다.

 기효부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스승님, 그 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멸절사태의 음성은 표정만큼이나 차가왔다.

 "너 때문에 울화통이 터져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기효부는 무릎을 꿇은 채 감히 일어나지를 못했다. 정민군의 입
가에 번진  냉소에서 스승님께 자기에 대해  얼마나 많은 비방을
했는지 짐작이 가므로, 절로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멸절사태가 다시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저 노파가 네가 왜  아직도 죽지 않았는지 가까이서 확인해 보
고 싶다고 하니, 가까이 가보도록 해라."

 "네."

 기효부는 감히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금
화파파 앞으로 걸어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금화파파, 나의  스승님께서 오셨으니 이젠  그 광태를 보리지
않는게 좋을 거예요!"

 금화파파는 기침을 두어 번하고 나서 멸절사태를 노려보며 턱을
끄덕였다.

 "음..... 당신이 바로 아미파의 장문인이군. 내가 당신의 제자
를 때렸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오?"

 멸절사태는 칼날처럼 잘라 말했다.

 "그것 잘 됐군. 때리고 싶으면 더 때려도 좋소. 그를 죽인다 해
도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오."

 기효부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스승님!"

 하고 소리치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스승님이 평상시
제자에게만은 얼마나  편파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설령 제자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억지를 써서라도 옹호해 주
곤 했다.  한데,스승님의 입에서 이렇게 매정한  말이 나올 줄이
야! 자기를 제자로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금화파파는 고개를 내둘렀다.

 "나는 아미파와 원한이 없으니  그녀를 한 번 때린 것으로 충분
하오. 아리야, 이제 우리는 떠나자꾸나."

 그녀는 곧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한편, 정민군은 금화파파의 내력을 모르고 있었다. 단지 병색이
완연한 할망구가 사부님께 무례한  언동을 하자, 혼을 내줄 심산
으로 즉시 몸을 번뜩여 앞을 가로막았다.

 "나의 사부님께 사죄를 하지 않고 그냥 떠날 생각인가요?"

 그녀는 상대방에게 위협을 주려는 듯 검을 절반 가량 뽑았다.

 다음 순간, 금화파파는 질풍처럼 손을 뻗어 두 손가락으로 검집
을 살짝 집더니 이내 놓으며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그런 썩은 쇠붙이로 누굴 겁 줄 생각이냐?"

 정민군은 화가 치밀어 즉시  검을 뽑으려 했다. 한데 그녀가 아
무리 힘을 주어도 검이  뽑혀지지 않았다. 아리가 까르르 웃으며
한 마디 내뱉었다.

 "썩은 쇠붙이가 아예 녹슬을 모양이군요."

 금화파파가 검집을  살짝 집는 순간, 그  웅후한 내력으로 검과
검집이 서로 달라붙게 만든 것이다. 정민군은 검을 뽑을 수 없게
되자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매우 낭패스러워했다.

 멸절사태가 보다못해 앞으로 다가가  손가락 세 개로 검집을 집
자, 검집이 수박 쪼개지듯  두 쪽으로 갈라지며 검날이 완연하게
드러났다.

 "이 검은  보검이라 할 수 없지만  쇠붙이는 아니지. 금화파파,
당신은 영사도에서 호강이니  하지 않고 무엇하러 중원으로 들어
왔소?"

 금화파파는 그녀가 손가락 세 개로 검집을 쪼개는 것을 보고 내
심 흠칫했다.

 "소문대로 실력이 만만치 않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늙은 짝이 죽어 혼자 섬에 머물러 있자니 하도 적적하여, 혹시
마음에 드는 떠돌이 화상이나 도사가 있으면 데려가기 위해 중원
으로 들어온 것이오."

 그녀는 일부러 화상과  도사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것은 상대방
이 여승이면서 멋대로 쏘다닌다는 것을 비꼰 것이다.

 멸절사태의 눈에 한 가닥의 살기가 번뜩였다. 그녀는 장검을 비
스듬히 들어올려 나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무기를 뽑으시지!"

정민군과 기효부 등은 스승님이  누구와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
었다. 특히 기효부는 금화파파의 무공이 고심막측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염려가 되었다.

 아리는 여전히 장무기의 팔을 잡고 있었다. 장무기는 갈수록 상
반신이 더욱 마비되었다.

 "어서 놓지 못하겠느냐! 날 붙잡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아리는 기효부가 옆에서 아무래도  출수할 것 같아 마지못해 그
의 팔을 풀어 주었다.

 "달아나진 못할 거야!"

 한편, 멸절사태의 눈을  응시하는 금화파파의 입가에 엷은 웃음
이 번졌다.

 "왕년에 아미파의 조사이신  곽양 여협의 검법이 천하를 진동시
켰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대(二代)  제자 때에 이르러 그 검법
이 얼마 정도 보존됐는지 모르겠군."

 멸절사태의 음성은 음침했다.

 "설령, 일성(一成)이 남았다 해도 소탕군마 하기엔 충분할 것이
요."

 금화파파의 시선은 그녀의 눈에서 손에 쥔 장검의 검 끝으로 옮
겨졌다. 돌연  그녀는 수중의 괴장을  들어올려 질풍처럼 찍어갔
다. 멸절사태의 장검이 파르르 떨리는 듯 싶더니, 그녀의 어깨를
향해 찔러갔다. 금화파파의 기침이  터진 것은 바로 이때이며 괴
장을 가로 쓸었다. 멸절사태의 몸이 검과 혼연 일치가 되어 전광
석화같이 상대방의 등 뒤로 미끄러져 갔다. 자연히 검 끝이 금화
파파의 등심을 노렸다. 금화파파는 몸을 회전시키지 않고 괴장을
뒤로꺾어 검날을 향해 맞부딪쳐  갔다. 두 사람이 서로 몇 초식
을 주고받는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며 멸절사태의 장검이
두 동강이로 부러졌다. 장검과 괴장이 정면으로 맞부딪치자 장검
이 절단된 것이다.

 관전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아리를 제외한 모두는 놀라움을 금
치 못했다. 검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괴장은 영사도 연안 해저
의 특산인 산호금(珊瑚金)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특이한 금속으로 혼합된 산호로서 바다 깊숙한 곳에서 천만 년의
세월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무쇠를 두부 베듯이 하니 제아무리
예리한 병기라 해도 일단  맞부딪치면 절단되는 게 당연했다. 금
화파파는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괴장에 몸을 의지한 채 기침
을 연발했다. 기효부, 정민군, 패금의는 행여나 스승님이 부상을
입었을까 봐 황급히 멸절사태의 주위를 에워쌌다.

 아리는 선뜻 손목을 뻗쳐 다시 장무기의 손목을 나꿔잡았다.

 "이젠 달아날 생각을 못하겠지?"

 그녀의 뜻하지 않은 출수에  장무기는 다시 맥문이 잡혀 상반신
이 마비되었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냅다 발을 날려 아리
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아리가 손에 힘을 가
하자 장무기는 도중에서 맥없이 발을 내려야만 했다.

 "어서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아리는 얄미울 정도로 생긋이 웃었다.

 "놓지 않겠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장무기는 망연히  고개를 숙여 다짜고짜  그녀의 손등을 깨물었
다. 그의 거침없는 행동은 완전히 발악이었다. 아리는 극심한 통
증에 비명을 질렀다.

 "아앗!"

 그녀는 오른손을  푸는 즉시 왼손으로  장무기의 얼굴을 할키며
덤벼들었다. 장무기도 황급히 뒤로  물러났으나 한 발 늦어 오른
쪽 뺨에 한 줄기의  핏자국이 그어졌다. 아리의 손등은 삽시간에
온통 피로 물들었다. 그녀는 고통으로 인해 눈물을 찔끔 흘렸다.

 두 어린애가 한쪽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도 금화파파는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멸절사태는 반 토막난 검을 버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것은 내 제자의 검이니 고수의 일격을 감당해 내기가 어렵겠
지.'

 그녀는 등에 짊어지고  있는 길쭉한 봇짐을 풀어  넉 자 남짓한 
한 자루의  고검을 꺼냈다. 그 순간,  금화파파는 검집에 한줄기 
푸르스름한 기운이 뻗쳐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 한 가지만 보아
도 평범한 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데, 검집에 새겨
진 금색창연한  두 글자를 보자 금화파파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앗! 의천검(倚天劍)!"

 멸절사태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의천검이오!"

 금화파파는 안색이 변했다. 그의 뇌리에 즉시 무림에 나돌고 있
는 여섯 마디가 떠올랐다.

 ----- 무림지존 도룡보도, 호령천하 막감불종, 의천불출 수여쟁
봉! -----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의천검이 아미파의 수중에 들어갔군."

 멸절사태는 입가에 묘한 웃음을 흘리며 짤막하게 외쳤다.

 "각오를 하시오!"

 그녀는 검을 비스듬히  들어올렸다. 그러나 검집에서 검을 뽑지
는 않았다.  그녀는 검집채로 금화파파의  가슴팍을 향해 뻗어왔
다. 금화파파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괴장으로 맞이했다.

 찍!

 쌍방의 무기가 허공에서 맞부딪치자 흡사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미미한 음향이 들리며  금화파파의 신병기인 산호금의 괴장이 두 
토막으로 잘라져 나갔다.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의천검이 검집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위력이 이 정
도이나, 과연 명불허전이군.'

 그녀는 의천검을 잠시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멸절사태, 그 검날을 한 번 보여 줄 수 있겠소?"

 멸절사태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이 검이 검집을 벗어나면 필히 피를 보아야만 하오."

 두 사람은 말뚝처럼 굳어진 채 한참 동안 서로 응시하며 침묵을 
지켰다. 금화파파는  상대방의 공력이 자기에  못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초식의  오묘함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지만, 멸절
사태가 아미파의 장문인이란  점을 감안하여 범상치 않다는 것만
큼은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천하의 보검으로 알려진 의천검
까지 갖고 있으니,  어느 모로 보나 자기에게  유리할 것이 없었
다. 금화파파는 곧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몸을 돌려 아리의 손
을 잡고 표연히 떠나갔다. 

 아리는 떠나가면서 고개를 돌려 외쳤다.

 "장무기! 장무기!"

 그녀의 외침은 차츰 멀어졌다.

 정민군 등은 스승이  강적을 쫓아 버린 것을  보자 크게 기뻐했
다. 정민군이 얼른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스승님, 그 할망구는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더
니 결국 꼬리를 감추고 달아났군요."

 멸절사태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앞으로 강호에서 그 노파의 기침소리만 들어도 멀찌감치 피하
도록 하라."

 그녀는 조금  전에 보검으로서  상대방의 괴장을 절단시켰지만, 
출검과 동시에 전개했던  아미구양공(峨嵋九陽功)이 마치 망망대
해에 빠진 바늘인 양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삼십 년 동안  온갖 심혈을 기울여 쌓아올린 아미구양공
으로도 그녀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가
슴이 서늘했다.  그 웅후한 내력과  엄청난 팔힘이 할망구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
각해도 그 점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멸절사태는 하늘을  우러러 잠시 넋빠진  사람처럼 깊을 생각에 
잠겼다. 홀연 기효부에게 시선을 던졌다.

 "효부야, 이리 가까이 오너라!"

 이 한 마디를 던지고 나서 초옥 안으로 들어갔다. 기효부 등 세 
사람은 곧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양불회도 엄마를 부르며 쫄랑쫄
랑 따라 들어가려 했다.

 기효부는 사부님이 자기에게 모종의 조치를 취하려고 한다는 것
을 알고 딸애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얘야, 넌 밖에서 혼자 놀고 있어라."

 한편, 장무기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심 생각을 굴렸다.

 '정민군이란 여인은 심보가 좋지 않아, 틀림없이 자기 스승님에
게 기 아주머니에게 불리한  나쁜 말만 과장해서 늘어 놓았을 거
야. 그날 밤의 일은  모두 저 독수야초의 잘못이었다. 그녀가 다
시 터무니없는 말로 기 아주머니를 모함한다면 내가 나서서 변명
해 주어야지!'

 그는 살며시  초옥 뒷쪽으로 돌아가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방 
안은 조용할 뿐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 식경이 
경과되었다. 멸절사태의 차가운 음성이 침묵을 깼다. 

 "기효부야, 네 자신의 일이니 네가 먼저 변명을 해 보아라."

 기효부는목매인 음성으로,

 "스승님... 저는..... 저는.....!"

 하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민군아, 네가 직접 물어보아라!"

 정민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대답을 했다.

 "네. 기사매, 우리 문중에 세 번째 금기가 무엇이지?"

 기효부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사방탕(淫邪放蕩)입니다."

 "맞았어. 그럼 여섯 번째 금기는 무엇이지?"

 "사문에 대한 배신 행위입니다."

 "그 계율을 어기는 자는 어떤 벌을 받아야 하지?"

 기효부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멸절사태를 향해 말했다.

 "스승님, 제자에게 말하기 어려운 고충이 있습니다. 정사저께서 
스승님께 말씀드린 것과는 다릅니다."

 멸절사태의 음성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좋다. 여기엔 외부 사람이 없으니 자세히 말해 보아라."

 기효부는 오늘  일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리 만치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스승님, 그 해 천응교가 왕반산도에서 도룡도의 위력을 과시하
다가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스승님께선 제자를 열 여
섯 사람을 하산시켜 금모사왕 사손의 행방을 알아 보라고 분부하
시지 않았습니까? 당시 제자는 서쪽으로 방향을 택해 천서(川西) 
대수보(大樹堡)로 가는 도중에 흰 옷을 입은 중년 남자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  자는 제자가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따라왔습니
다. 제자가 객점에 머물면 그도 객점에 유숙하고, 제자가 일부러 
걸음을 늦추면 그도 따라서  걸음을 늦추곤 했습니다. 제자는 처
음에 그를 외면했지만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질책을 했습
니다. 그 자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능청스러운 태도를 보
이는 바람에 제자는 검을 뽑았습니다. 그 자는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무공이 고절하여 세 초식만에 제자의 장검을 빼앗아 갔
습니다....."

 기효부의 말이 계속되었다.

 저는 당황하여 달아났습니다.  그 자는 뒤쫓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깨어나  보니, 장검이 바로 저의 베갯머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서둘러 객점을 떠났습니다. 뜻
밖에도 그가 다시 저의 뒤를 쫓아왔습니다. 저는 도저히 그의 적
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애원을 했습니다. 서로 생면부지
인 처지이고 게다가  엄연히 남녀유별이거늘 자꾸만 뒤쫓아 오는 
속셈이 무엇이냐고 따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비록 무공으로 적수
가 되진 못하지만, 만약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아미파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생사결단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멸절사태는 턱을 끄덕이며 수긍을 하는 듯 했다.

 기효부는 시선을 떨구었다.

 "제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피하려 했으나,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에게 붙잡혀......"

 그녀의 음성은 갈수록 기어들어갔다. 멸절사태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기효부는 고개를 숙인 채 나직하게 대답했다. 

 "제자는 도저히 그의  힘을 당해 낼 수  없어 몸을잃었습니다. 
제자는 죽고 싶었으나 그의  감시가 워낙 심해 뜻을 이루지 못했
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그와 원한이 있는 
자가 찾아왔습니다. 제자는 그 기회를 틈타 도망쳐 나왔는데, 얼
마 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자는 감히 스승님께 알
릴 수 없어 몰래 어린 것을 낳았습니다."

 "여지껏 말한 게 모두 사실이냐?"

 "제자가 천만 번 죽는다  해도 어찌 감히 스승님을 기만 하겠습
니까?"

 멸절사태는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 하더니,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불쌍한 것, 이게 어디 너의 잘못이겠느냐?"

 정민군은 스승님이 오히려 사매의  입장을 딱하게 여기는 것 같
자, 독기가 서린 눈으로 기효부를 노려보았다.

 멸절사태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적정이냐?"

 기효부는 눈물을 흘렸다.

 "제자는 본디  아버님의 뜻에 따라 무당  은육협과 혼약이 되어 
있었는데, 이런 변을 당했으니  삭발을 하여 불문에 귀의하고 싶
습니다. 부디 윤허해 주십시오."

 멸절사태는 고개를 내둘렀다.

 "그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음.....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든 
그 고약한 남자는 누구냐?"

기효부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그는..... 성이 양(楊)이며, 이름은 외자로서 소(소)라고 합니
다."

 이 말이 떨어지자 마자 멸절사태는 펄쩍 뛰었다. 동시에 소맷자
락을 떨치자 우지끈  하며 앞에 놓여 있던  탁자가 박살이 났다. 
밖에 숨어서 엿듣고 있던  장무기는 물론이거니와, 기효부 등 세 
사람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멸절사태가 싸늘하게 소리쳤다.

 "양소라고 했느냐? 바로 그 마교의 대마두이며 일명 광명좌사자
(光明左使者)라는 양소란 말이냐?"

 기효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그는 명교의 인물로서 신분이 좀..... 높은 것 같았습
니다."

 멸절사태는 노기만면하여 호통을 쳤다.

 "명교는 무슨 얼어 죽을  명교냐?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잔인무
도한 악마의 집단이다.  ......그는 어디에 숨어 있느냐? 곤륜산
(崑崙山) 광명정(光明頂)에 숨어 있느냐?"

 기효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명교는....."

 "닥쳐라! 명교가 아니라 마교다!"

 "네. 그의 말에 의하면 마교의 총단은 원래 광명정이었는데, 몇 
년 전에 교내에 불화가  생겨 그는 광명정을 떠나 곤륜산 좌망봉
(坐忘峯)에 은거한다고 했습니다.  스승님, 그 사람은..... 본문
의 원수입니까?"

 멸절사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피맺힌 원한이 있다!  너의 대사백되시는 고홍자(孤鴻子)가 바
로 그 대마두 양소로 인해 울화통이 터져 생죽음을 당했다."

 기효부는 내심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론 딸애의 생부가 대단한 인
물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대사백이신 고홍자는 왕년에 천하에 
명성을 날린 고수였는데,  그로 인해 생죽음을 당했다니..... 기
효부는 자세한 것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다.

 멸절사태는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다시 한 번 이를 부드득 갈
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양소, 양소.....!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하더니, 결국 나의 수
중에 걸려들게 되다니....."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기효부에게 말했다.

 "좋다. 네가 몸을 더럽히고, 팽화상을 감싸기 위해 정사저를 궁
지에 몰아넣은  일, 스승을 기만하고 사생아를  키운 죄..... 내 
모두 용서하마! 그 대신 한  가지 일을 해 줘야겠다. 그 일을 무
사히 성공시키고 돌아온다면, 의천검을 너에게 주는 동시에 본파
의 장문 계승인으로 내세우겠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정민군의 
눈에선 질투의 빛이 이글거렸다.

 기효부는 정중하게 말했다.

 "스승님의 분부라면 제자는 있는 힘을 다해 거행하겠습니다. 하
지만 스승님의 의발진전을  이어받기엔 제자의 덕행과 무공이 너
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감히 그런 망상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멸절사태는 더 이상 여러 말 하지 않았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녀는 기효부의 손을 잡아  다짜고짜 초옥 밖으로 데리고 나가 
우측에 펼쳐진 언덕 위로  달려갔다. 장무기는 황급히 잡초가 무
성한 곳에 몸을 숨기고 바라보았다. 

 멸절사태는 언덕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 살피더니 기효부를 가까
이 불러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누구도 들어서는 절
대 안 될 기밀임이  분명했다. 기효부는 스승님의 귀속말을 듣고 
나서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굳어 있다가 끝내 단호하게 고개를 좌
우로 내둘렀다. 스승님의  명을 거역하는 듯 싶었다. 멸절사태는 
발끈하여 손을 번쩍  들어올려 내리치려다가 도중에서 거두었다. 
기효부가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만약 멸절사태가 일장을 내리친
다면 기효부는 영락없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는 눈을 똑바
로 뜨고 안타깝게 기효부를  응시했다. 기효부는 갑자기 스승 앞
에 무릎을 꿇며 다시  단호하게 고개를 내둘렀다. 그러자 멸절사
태의 손이 그녀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쳐졌다. 기효부는 그 자리
에 쓰러져 몸을 몇 번 꿈틀거리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경악과 비통으로 인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
다. 그는 잡초더미 속에  몸을 도사린 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바로 이때 양불회가 살금살금 그의 등 뒤로 덮쳐왔다. 

 "잡았다! 잡았어!"

 그녀는 초옥 밖에서 뛰놀다가  장무기가 잡초더미 속에 몸을 도
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자기와 숨바꼭질하는 걸로 생각하고 
살금살금 다가와 갑자기 등  뒤로 덮친 것이다. 장무기는 황급히 
그녀를 끌어안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귀에 대고 나
직하게 말했다.

 "쉿! 조용히 해. 나쁜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큰일난다."

 양불회는 창백한 그의 안색과 잔뜩 겁먹고 있는 얼굴을 보자 역
시 깜짝 놀랐다.

 멸절사태는 서둘러 언덕배기에서 내려와 정민군에게 말했다.

 "가서 그녀의 씨앗을 없애 화근을 남기지 말아라!"

 정민군은 스승님이  잔인한 수법으로 기효부를  죽인 것을 보자 
내심 기뻐했지만 겁이 나기도 했다. 지금 스승님의 명을 받자 얼
른 사매의 장검을 빌려 초옥 주위를 뒤졌다.

 장무기는 양불회를 끌어안고  감히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정민
군은 초옥을 한 바퀴 돌았으나 양불회를 찾아 내지 못했다. 그녀
가 다시 찾으려는데 멸절사태의 꾸지람이 들려왔다.

 "이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계집애 하나를 찾아내지 못하고 
쩔쩔 매느냐!"

 패금의는 평소 기효부와  친분이 두터웠다. 지금 스승님이 기효
부를 죽이고 다시 어린  딸까지 죽이려 하자 차마 지켜보고만 있
을 수가 없어 얼른 입을 열었다.

 "그 애가 골짜기 밖으로 달아나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스승님의 불 같은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골짜기 
밖으로 나가 찾아 내지  못한다면, 다시 골짜기 안으로 되돌아오
진 않을 것이다. 물론,  의지할 곳이 없는 어린애가 혼자 살아간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정민군의 검을 맞고 죽는 것
보다 낫다고 생각되었다.

멸절사태는 눈을 부라렸다.

 "왜 진작 예기하지 않았느냐!"

 그는 곧 앞장서 골짜기 밖으로 달려갔다. 정민군과 패금의도 뒤
따랐다.

 양불회는 어머니가  큰 변을 당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어리둥절해 했다. 장무기는 잡초더
미에 엎드려 세 사람이 멀리 떠난 것을 확인한 연후에 황급히 양
불회의 손을 잡고 언덕 위로 달려갔다.

 양불회는 천진무구하게 생긋이 웃었다.

 "무기 오빠, 나쁜 사람들이  전부 떠났어요? 이젠 우리 산에 올
라가 놀아도 되는 거죠?"

 무기는 대답없이 그녀를 기효부에게 데려갔다. 양불회는 비로소 
어머니가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엄마! 엄마!"

 그가 기효부의 맥을 짚어 보니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맥박
은 이어지고 있었으나, 두개골이  쪼개져 설령 호청우가 온다 해
도 목숨을 구하기는 불가능했다.  기효부는 힘없이 눈을 떠 장무
기와 딸애를 보자 입술을 움직이며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말
이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단지 구슬 같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릴 뿐이었다.

 장무기는 얼른 품속에서 금침을  꺼내 그녀의 신정, 인당 등 혈
도에 꽂았다. 기효부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애를.....  아버지에게..... 데려가.....  부탁.....  그 사람
을..... 해칠 수..... 없어....."

 그녀는 왼손을 가슴으로 들어올려 무엇을 꺼내려다 갑자기 목이 
꺾이며 숨을 거두었다.

 양불회는 어머니의 시신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엄마! 엄마! 어디가 아픈지 말해 봐요!

 기효부의 몸은 차츰  식어가는데, 그녀는 계속 울부짖으며 어디
가 아프냐고  물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왜  움직이지 않으며, 왜 
자기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지 몰랐다.

 장무기도 큰 비통에 잠겨 있었다. 게다가 부모님이 참사를 당한 
일이 되살아나 역시 시신에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울
고 또 울어도 가슴 밑바닥에 응어리진 한이 풀리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장무기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내심 생각했다.

 '기 아주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나더러 불회를 그녀의 아버지에
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불회의 아버지는 이름이 양소고, 명
교의 광명좌사자이며 곤륜산 좌망봉에 산다고 했으니, 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불회를 그곳으로 데려가 줘야한다.'

 그는 곤륜산이 수만 리  밖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기
효부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가슴을 더듬던 일이 생각나 만져 보
니 목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그 목걸이에 연결된 시커먼 철패(鐵
牌)에는 금색으로 불길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장무기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조심스럽게 풀어 양불회
의 목에 걸어 주었다. 그는 곧 초옥 안에서 쇠삽을 갖고 와 구덩
이를 판 후 기효부의 시신을 묻어 주었다.

 이 무렵 양불회는 울다가 지쳐 풀밭에 쓰러져 새근새근 잠을 자
고 있었다. 그녀가 깨어난  후 장무기는 그녀에게 어머니가 하늘
나라로 갔으니 오래오래 있다가 다시 하늘에서 내려와 그녀를 만
나러 올 것이라고 거짓말을  꾸미느라 진땀을 뺐다. 장무기는 밥
을 지어 양불회와 요기를 하고 나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작은 괴나리봇짐을  두 개 챙겨 호청우가 남겨 준 
은자를 갖고 양불회와 함께 기효부의 무덤 앞에 재를 올리고, 그
들은 서서히 호접곡을 떠났다.

 장무기는 양불회의 고사리 손을 꼭 쥐었다. 그는 어떠한 난관이
있어도, 기효부의 유언에 따라 불회를 아버지에게 데려다 주리라
굳게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강호는 험악한 곳, 강호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딛는 두 어린 것의 모습은 광풍노도가 휘몰아치는 망망
대해의 일엽편주처럼 안스럽기만 했다.


                                 ----- 제 3 권 1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3 권


     제 2 장  장무기와 양불회의 고난(苦難) 


 두 사람은 반나절이 걸려 겨우 호접곡을 벗어났다. 양불회는 걸
음이 늦은데다가 자꾸만 쉬겠다고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이날 어
두워질 때까지 황산이령을 헤매야만 했다. 밤이 으슥해져 사방에
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양불회는 계속 울며 보챘다. 장
무기는 겁이 났다. 그는 산길  옆에 작은 동굴이 있는 것을 발견
하고 양불회와 함께 들어갔다. 그는 양불회를 품에 안은 채 짐승
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아 주었다.

 장무기에게 이날 밤은 유난히 길었다. 밤새도록 두 어린것은 배
고픔과 무서움에  시달려야만 했다. 간신히  날이 새기를 기다려
산에서 야생하는  열매를 따 허기를 채우고는  산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정오가 되었을  무렵, 양불회가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길 옆 느티나무를 가리켰다. 그 순간 장무기도 나뭇 가지
에 두 구의 시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겁을
하며 냅다 양불회의 손을  잡고 뒤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얼마
달아나지도 못해 돌뿌리에 채여 함께 넘어졌다. 장무기는 용기를
내어 뒤돌아 보았다. 순간, 더욱 소스라치게 놀라 날카로운 일성
을 토했다.

 "호 선생!"

 나뭇 가지에  매달려 있는 앙상한 시체는  호청우였다. 다른 한
구의 시체는 머리카락을 풀어 해친 차림새로 보아 호청우의 아내
인 왕난고가 분명했다. 산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녀의 옷자락과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나부껴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장무기는 정신을 가다듬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무서워하지 말자. 무서울 것 없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한 발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과연 호청우
부부의 시체였다. 두 사람의 양미간에 제각기 한 송이의 작은 금
화가 꽂혀 있었다. 장무기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호청우
부부는 결국 금화파파의 독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나귀가
끌던 수레는 한쪽  개울에 박살이 난 채  버려져 있었다. 나귀의
시체도 그 옆에 있었다.

 장무기는 눈물을 흘리며 밧줄을  풀어 호청우 부부의 시신을 나
무에서 내렸다. 그 때  왕난고의 몸에서 책자 한 권이 떨어졌다.
그것을 주워  보니 겉장에 <왕난고 독경>이란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겉장을 넘기자 깨알 같은 글씨로 모든 독물의 독성과 사
용법, 화해법이 수록돼 있었다.  독약과 독초 이외도 각종 독사,
지네, 전갈, 독거미 그리고 희귀한 어패류, 날짐승, 화목토석(花
木土石)이 총망라돼 있었다.

 장무기는 그  책자를 품속에 갈무리하고  호청우 부부의 시신을
나란히 눕혀 돌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 무덤 앞에 배를 올리고
나서 양불회의 손을 잡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몇 리쯤 걷자 관로가 나왔다. 얼마 뒤에 그들은 작은 고을로 들
어설 수 있었다. 장무기는  먹을 양식을 구하려고 했지만 이상하
게도 고을 안 모든 집이  텅텅 비어 있었다. 물론 사람의 그림자
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논밭은 모두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잡초가 무성했다. 눈에 뜨이
는 것은 황폐뿐이었다. 장무기는 당황해졌다. 양불회가 배고프다
고 보채지 않고 자기를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고을을 벗어나자 길 옆에 몇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
였다. 뼈만 앙상한 것이 굶어 죽은 것임을 첫눈에 알아 볼 수 있
었다. 길을  갈수록 그러한 시체가 눈에  많이 띄었다. 장무기는
더욱 당황해지고 겁이 났다.

 '우리는 이대로 굶어 죽는 게 아닐까?'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어느 숲 속에 이르렀다. 숲 속에서 마
침 희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장무기는
뛸 듯이  기뻤다. 호접곡을 떠나 처음  대하는 인적이었다. 그는
곧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까이 가보
니, 남루한 차림의 두 사나이가 장작불에 가마솥을 걸어 놓고 국
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들은 장무기와  양불회를 발견하자 이내
구세주를 만난 듯 회색 만면하여 손짓을 했다.

 "얘들아, 마침 잘 왔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어른들과 함께 오
지 않았느냐?"

 장무기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우리 두 사람뿐이에요. 어른은 없어요."

 두 사나이는 서로 마주  보며 외심의 미소를 교환하더니 이구동
성으로 말했다.

 "정말 운이 좋군."

 장무기는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는  것 같아 무엇을 끓이는가 하
고 솥 안을 살펴보니 칡과  풀잎만이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한 사나이가 냅다 양불회를 나꿔채며 징그럽게 웃었다.

 "이 어린 양은 토실토실하고  연하니, 오늘 밤 진수성찬을 맛보
겠구나!"

 다른 사나이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 남자애는 남겨 두었다가 내일 잡아 먹어야겠네."

 장무기는 질겁을 하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얼른 내 누이동생을 놓아주시오!"

 사나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양불회의 옷을 찢더니 허리춤에서 예
리한 비소를 뽑아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연하고  야들야들한 고기를  정말 오랜만에  맛보게 됐
군."

 그는 양불회를 한쪽으로 끌고 가 각을 뜰 기세였다. 다른 한 사
나이는 사발을 들고 뒤를 따르며 퉁명스레 말했다.

 "피를 버리기 아까우니, 선지탕을 끓여 먹어야겠네."

 장무기는 놀란 나머지  혼비백산했다. 그들의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 양불회를 잡아먹을 심산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먹다니, 천벌이 두렵지도 않느냐!"

 사발을 들고 있는 사내가 히죽 웃었다.

 "이놈아, 이 어른신네는 석 달  동안 쌀 한 톨도 구경하지 못했
다. 그러니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선 사람이라도 잡아먹어야 할 게
아니겠느냐?"

 그는 장무기가 달아날까 봐 대뜸 뒷덜미를 나꿔잡으려 했다. 장
무기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며 오른손을 뻗어서 그의 등허리 급
소를 내리쳤다. 그는 근래 몇 년 동안 의술에 전념하느라 무공을
연마하지 못했지만, 사손으로부터  전수받은 무공 비결과 부친이
가르쳐 준 무당권법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상승 무학이었
다. 그가 있는 힘을 다해 일격을 전개했으니 웬만한 무인이라 할
지라도 감당해 내기 어려울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방은 일개 촌
부(村夫)인지라 쓰러져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장무기는 즉시 양불회  곁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남은 사나이가
우악스럽게 호통을 쳤다.

 "우선 네놈부터 죽여 주마!"

 그는 장무기의 가슴을  향해 비수를 내리꽂았다. 장무기는 무당
권법 중에 안시식(雁翅式)을  전개해 왼발로 사나이의 손목을 정
확하게 걷어찼다. 사나이의 손에서 비수가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장무기는 다시 원앙연환퇴법으로  아래 턱을 걷어찼다. 사나이는
비명을 내지르며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하더니 그 자리에 쓰
러져 기절해 버렸다. 장무기는 얼른 양불회를 부축해 일으켰다.

 바로 이때 발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몇 사람이 숲 속
으로 들어왔다. 양불회는 화들짝 놀라 장무기의 품속으로 파고들
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상대방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
다.

 '간대협, 설대협!'

 숲 속으로 들어오는 자는  모두 다섯 명인데, 한 사람은 공동파
의 간첩이고, 화산파의 설공원과  그의 두동문도 보였다. 이 넷
을 모두 장무기로부터 치료를 받아 완치된 사람들이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스무 살  가량의 젊은이로서 이마가 유난히 넓고 건장
하게 생겼는데, 장무기로선 초면이었다.

 간첩은 예리한 눈빛으로 주위를 훑어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장형제! 자네가 이곳에  웬일인가? 그리고 이 두사람은 어떻게
됐나?"

 장무기는 분연히 그간 경위를 얘기해 주고 나서 한 마디 덧붙였
다.

 "사람까지 잡아먹다니, 아무리 말세라  해도 이럴 수가 있는 겁
니까?"

 간첩이 묘한 시선으로  양불회를 쳐다보며, 갑자기 군침을 삼키
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꼬박 닷새를 굶었더니 하늘이 노랗군. 음..... 야들
야들한 살결..... 토실토실하니....."

 장무기는 그의 눈에서 탐욕의 불길이 이글거리며 굶주린 이리처
럼 이빨을 드러내는 것을  보자, 본능적으로 양불회를 품안에 끌
어안았다.

 설공원이 불쑥 물었다.

 "그 계집애의 엄마는 어찌 보이지 않느냐?"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리며 둘러댔다.

 "기여협은 쌀을 사러 갔으니 곧 돌아올 거예요."

 그러나 철없는 양불회가 고개를 내두르며 소리쳤다.

 "아니에요. 엄마는 하늘나라에 갔어요!"

 간첩과 설공원은 두 사람의  엇갈리는 말을 듣자 기효부가 죽었
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설공원은 냉소를 날렸다.

 "쌀을 사려 갔다고? 이 주위 오백 리 이내에선 쌀 한 줌도 찾아
내지 못할 것이다."

 간첩은 잽싸게  설공원에게 눈짓을 하더니  일제히 몸을 솟구쳐
간첩은 장무기를, 설공원은 양불회를 나꿔챘다.

 장무기는 경악하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간첩이 징그럽게 웃었다.

 "봉양부(鳳陽府) 일대는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은 사람이 부지기
수다. 이 계집애는 너와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 우리가 삶아먹든
구워먹든 상관하지 말아라. 조금만  기다리면 너의 몫도 있을 것
이다."

 장무기는 욕설을 터뜨렸다.

 "명문정파라고 자처하는  당신네들이 이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할 수 있소?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앞으로 무슨 낯으로 무림
동도를 대하겠소?"

 간첩은 발끈하여 주먹으로 그의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호통을 쳤
다.

 "소문이 안 나게 하기 위해선 네놈마저 잡아 먹어야 겠다!"

 조금 전에 장무기는  두 촌부를 간단하게 처치했지만, 성수가람
간첩 같은 고수에게는 도저히 반항할 여지조차 없었다. 설공원의
두 사제는 밧줄로 장무기와  양불회를 꽁꽁 묶었다. 장무기는 요
행을 바라기 어렵다는 걸 알았다. 이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을 줄
이야! 애당초 이들의 목숨을 구해 준 일이 후회막심했다.

 간첩은 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놈아, 당장 굶어 죽게 될  이 마당에 설령 내가 낳은 친자식
이라 해도 잡아먹을 판이니,  저승에 가서라도 부디 우릴 원망하
지 말아라. 애당초 내가 우리의 목숨을 구해 줬으니 끝까지 살길
을 마련해 주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

 이어 설공원의 사제에게 소리쳤다.

"어서 불을 지피지 않고 뭘꾸물대느냐?"

 두 사람은 불을 지피고 물을 퍼오느라 수선을 떨었다.

 장무기는 애원을 했다.

 "설대협, 저 두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 그렇게 굶주림을 못 견디
겠으면 저들을 먹으면 되잖겠습니까?"

 설공원은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저 녀석들은 뼈가 앙상한데다가 고기도 질기고 냄새가 나니 우
린 사양을 하겠다."

 장무기는 본디 자존심이 강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누구에게 애
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양불회와 같이 남의 먹이가 될
것을 생각하니 당황해져 저절로 통사정을 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마가  넓은 젊은이는 한쪽에 서서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간첩이 그에게 눈을 부라리며 한 마디 내뱉었다.

 "자네도 연한 고기가 먹고 싶으면 어서 일을 거들어야 할 게 아
니겠나?"

 젊은이는 얼른 대답을 하며  허리춤에서 한 자루의 단도를 뽑았
다.

 "돼지나 소를 도살해 각을 뜨는 일이라면 내가 전문이오."

 그는 단도를 입에 물고 한 손에 장무기를, 한 손에 양불회를 번
쩍 들어올려 성큼성큼 개울  쪽으로 걸어갔다. 장무기는 목이 터
져라 욕을 하며 그의 손등을 깨물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젊은이가 열댓 걸음 걸어나갔을 때, 설공원이 그의 뒷통수에 대
고 소리쳤다.

 "이봐, 여기서 멱을 따라고!"

 젊은이는 힐끗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개울에서 배를 갈라야 깨끗이 씻을 수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입에 칼을 물고  있어 말소리가 똑똑치 못했다. 그가 계속
개울을 향해 걸어가자 설공원이 신경질적으로 다시 소리쳤다.

 "여기에서 멱을 따라니까 왜 말을 듣지 않나?"

 그는 젊은이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젊은이가
서두르는 것으로 보아 마치  두 어린 양을 데리고 도망쳐 독식할
것만 같았다.

 이때 젊은이가 갑자기 나직하게 말했다.

 "어서 달아나라!"

 그는 두 사람을 내려놓더니 칼로 밧줄을 끊었다. 장무기는 고맙
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양불회의 손을 잡고 다짜고짜 앞으
로 달려갔다.

 설공원과 간첩은 일제히  성난 고함을 지르며 쫓아왔다. 젊은이
는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비스듬히 올려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
다.

 "멈춰라!"

 간첩과 설공원은 그의  위풍당당한 기세에 흠칫 굳어졌다. 간첩
이 호통을 쳤다.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젊은이는 눈을 부라렸다.

 "아무리 굶어 죽는 한이 있다 해도 천벌받을 짓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설공원은 성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 판국에 에미인들 못 잡아 먹겠느냐!"

 그는 사제 둘에게 손짓을 하며 외쳤다.

 "어서 쫓아라!"

 장무기는 양불회가 빨리 달릴  수 없자 번쩍 들어 안았다. 그래
도 빨리 달릴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간첩과 설공원은 이미
무기를 뽑아 젊은이를 협공했다.  젊은이는 그들의 적수가 못 되
는지 이내 허벅지에 검상을  입어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갑자기
단도를 설공원에게 던졌다.  설공원은 잽싸게 옆으로 피했다. 그
틈을 타서 젊은이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간첩과 설공원은 더 이
상 그를 추격하지 않고  장무기와 양불회를 잡으러 갔다. 젊은이
는 멀리 달아나며 소리쳤다.

 "장형제, 당황하지 말고  기다리게! 내가 가서 동료들을 데려와
자네를 구해 주겠네."

 간첩과 설공원은 신법을 전개해 어렵지 않게 장무기와 양불회를
다시 붙잡았다.

 간첩은 눈에 쌍심지를 켜며 욕설을 터뜨렸다.

 "그 서가 녀석이 감히 우릴 배신하다니! 어떻게 해서 그 녀석과
어울리게 되었소?"

 설공원이 멋쩍게 대답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 같이  어울리게 됐는데, 그렇게 나쁜 녀석
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이름이 그 무슨 서달(徐達)이라고 하
든가.....? 놈은 동료를  데리고 온다고 했지만 우리를 겁주려고
한 얘기일 거요. 이 야밤중에  어디에 가서 사람을 불러올 수 있
겠소?"

 그의 사제 한 명이 낄낄 웃으며 한 마디 거들었다.

 "녀석의 말투를  들어보니 이곳 봉양부의  토박이 같은데, 설령
사람을 데려온다 해도 촌뜨기밖에 더 있겠습니까?"

 간첩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봉양부의 사람은 모두 굶주려 기어다닐 힘도 없을 것이오.. 하
핫.....! 어서 저 두 말의 양을 삶아 마음껏 배를 채웁시다."

 잡힌 장무기는 코피가  터지도록 얻어맞고 옷까지 찢겨져, 품속
에 갈무리해 두었던 은자마저 땅바닥에 흩어졌다.

 '그 사람의 이르이 서달이군. 좋은 친구였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으니.....'

 그는 고개를 떨구다가 책자 한  권이 발 밑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왕난고 독경이었는데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책장
을 넘겼다. 순간, 장무기는 장작불의 불빛을 빌려 그곳에 독버섯
에 관한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독버섯의 모양과 냄
새, 빛깔,  독성, 화해법 등이 수록돼  있었다. 장무기는 마음이
어지러워 그 글이 뇌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한데 시선을 돌리
려다 우연히 자기에게서 서너  자 가량 떨어진 곳에 빛깔이 선명
한 버섯이 열 댓 개쯤 자생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무기는 순간적으로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저것이 무슨 버섯인지 알 수 없지만, 만약 극독을 지닌 독버섯
이라면 불회는 살아날 가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생사에 대해선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어차피 체내
의 음독이 발작할 것이니 죽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다가가 독
버섯을 모두 뜯었다. 설공원 등은 물을 끓이는데 정신이 팔려 있
었다.

 장무기는 서달이  달아난 방향을 바라보며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서대가! 이제야 왔군요. 어서 살려 주세요!"

 설공원 등은 사실인 줄 알고 일제히 무기를 뽑아쥐며 몸을 일으
켰다. 장무기는 그들의 시선이 동쪽에 집중돼 있는 틈을 타서 잽
싸게 등을 돌려 독버섯을 가마솥에 집어넣었다.

 설공원 등은 아무도 보이지 않자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개잡종 같은  녀석! 곧 죽게 되니까  정신마저 돈 모양이
군."

 설공원은 손을 툭툭 털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자, 이제부터 멱을 따야지. 누가 솜씨를 보일 거지.....?"

 간첩이 그의 말을 받았다.

 "내가 계집애를 죽일 테니 당신은 저 녀석을 맡으시오."

 그는 우악스럽게 양불회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올렸다.

 장무기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설대협, 목이 말라 견딜 수 없으니 따뜻한 국물이라도 한 그릇
주십시오. 그러면 죽어 귀신이  되어도 당신을 못살게 굴지 않겠
습니다."

 설공원은 느긋한 여유를 보였다.

 "좋다. 국물 한 그릇 정도야 인색할 내가 아니지."

 그는 곧 국자로 뜨거운 국물을 한 그릇 떠서 건네주었다.

 장무기는 국그릇을 입에 갖다  대기도 전에 크게 감격하듯 소리
쳤다.

 "야! 정말 향기롭군."

 국물에다 버섯을 넣었으니  향기가 그윽한 건 사실이었다. 설공
원은 허기가 찌들어 있다가  향긋한 냄새를 맡자 절로 군침이 돌
아 냅다 장무기에게서  국그릇을 빼앗아 들이키더니 쩝쩝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나.....!"

 그는 다시 국자로 휘휘  저어 한 사발을 떠냈다. 그러자 간첩이
얼른 그에게서  국그릇을 빼앗아 뜨거운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꿀꺽꿀꺽 마시더니, 직성이 풀리지 않는지 다시 한 사발을 떠 마
셨다. 설공원과 그의  두 사제도 역시 연거푸  두 사발씩 들이켰
다. 오랜 허기끝에  뜨거운 국물을 마시자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았다. 간첩은 아예 가마솥에서  버섯을 건져 오물오물 씹어 먹
었다. 어느 누구도 버섯이 어디서 생겨 났는지 신경을 쓰지 않았
다.

 간첩은 버섯을  씹어먹고 나서 배를  어루만지며 능글맞게 웃었
다.

 일단  바닥은 깔았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양고기를 먹어야
지."

 그는 양불회의 덜미를  들어올려 칼을 움켜쥐었다. 장무기는 그
들이 버섯국을 마시고도 별탈이  없는 것을 보자 마지막 한 가닥
희망마저 무산되었다.

 한데, 간첩은 두어 걸음 내딛다가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어이구!"

 그는 비틀거리더니 썩은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그 바람에양불
회와 칼도 한쪽에 팽개쳐졌다.

 설공원은 흠칫 놀랐다.

 "간형, 어떻게 된 거요?"

 그는 달려가 허리를 숙여  살피려다가 그대로 간첩의 몸위에 쓰
러졌다. 그의 사제 둘도 잇따라 독이 발작해 비명횡사 했다.

 장무기는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하늘이 우리를 도와줬구나!"

 그는 칼 옆으로 굴러가 뒤로 해서 칼을 집은 뒤, 양불회의 손을
묶은 밧줄을 끊었다. 양불회는  손이 떨려 장무기의 손에 상처를
두군데 내고서야 겨우 밧줄을 끊어 주었다. 두 사람은 죽음 일보
직전에서 목숨을 건지게 되자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서로 부둥
켜 안았다.

 잠시 후 장무기가 설공원 등을 살펴보니 모두 얼굴이 숯처럼 시
꺼멓게 변해 그 모습이  심히 가공스러웠다. 장무기는 내심 감개
무량했다.

 '독물이 나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좋은  사람을 구할 수도
있군.'

 그는 곧 왕난고 독경을  소중하게 품속에 갈무리해 나중에 시간
을 내어 열심히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주위에는 두 구의
시체에서 이제 여섯 구로  늘어났다. 양불회는 너무나 놀란 탓인
지 울지도 않았다.  장무기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
다.

 장무기는 양불회의손을 잡고 숲을 빠져 나왔다. 이때 동쪽으로
부터 횃불이 환하게 밝아오더니  대여섯 명이 손에 병기를 쥔 채
달려오는 게 보였다. 장무기와 양불회는 얼른 숲 속으로 몸을 숨
겼다. 상대방은 곧 가까이  달려왔다. 앞장 서 있는 자는 다름아
닌 서달이었다. 그는 왼손에  횃불을 높이 받쳐들고 오른손엔 장
창을 쥐고 있었다.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숲 속을 노려보며 호통
을 쳤다.

 "천벌을 받을 식인귀야! 냉큼 목숨을 내놓지 못하겠느냐?"

 그들은 즉시 숲 속으로 뛰쳐들어와  간첩 등 네 사람이 죽어 있
는 것을 보자 모두  아연실색했다. 서달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소리쳤다.

 "장형제, 별고 없나? 우리가 자네를 구하러 왔네!"

 장무기도 소리쳐 대답했다.

 "서대가,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즉시 앞으로 뛰쳐  나갔다. 서달은 몹시 기뻐하며 그를 덥
석 끌어안았다.

 "장형제, 자네처럼 협의심이 강한 사람은 아이들에겐 말할 것도
없고 어른들 중에서도 많지 않다네. 나는 자네가 악적의 손에 죽
은 줄 알고  무척 걱정했는데, 이렇게 살아  있다니 정말 다행이
네."

 이어 간첩, 설공원 등이  중독된 상황을 묻자, 장무기는 그간에
있었던 일을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말해 주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나의  절친한 친구들이네. 그들은 황소를 한
마리 잡아 지금 황각사에서 삶고 있는 중이네."

 서달은 여기까지 말하고  일행을 장무기에게 소개했다. 그들 중
네모 얼굴에 키가 유난히  큰 사람은 탕화(湯和)라 불렀으며, 만
면에 영기가  충만한 장한은 등유(鄧兪)라  불렀다. 검은 피부에
키가 장대처럼 큰 사람은 화운(花雲)이며, 얼굴이 희고 예쁘장하
게 생긴  두 형제는 오량(吳良)과  오정(吳禎)이라 했다. 마지막
한 명은 화상인데, 용모가  도저히 사람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
로 못 생긴데다 아래턱이 넓적하게 휘어져 마치 주걱처럼 생겼으
며, 얼굴 전체는 온통 곰보투성인데다가 십 리 가량이나 움푹 들
어간 눈에선 신광이 번뜩였다.

 서달이 그 화상을 가리켰다.

 "이분 주(朱) 형님의  이름은 원장(元璋)이라 부르며, 황각사에
서 중노릇을 하고 있다네."

 화운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는 놀기 좋아하는 풍류  화상인자라 독경 염불은 하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술과 고기만 먹고 마시지."

 양불회는 주원장의 못 생긴 얼굴이 무서워 장무기의 등 뒤로 숨
었다. 그러자 주원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비록 고기를 먹지만 사람은 잡아먹지 않으니 조금도 무서
워할 것 없다."

 탕화가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지금쯤 쇠고기가 다 익었을 거야."

 화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촉했다.

 "빨리 가봅시다. 소매(小妹), 내가 너를 업고 가마."

 하고 양불회를 등에  업더니 앞장서서 걸었다. 장무기는 이들의
호탕한 성격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약 사,오 리 가량 걸어 조그만 절의 대웅전에 들어서자, 쇠고기
향기가 코를 진동시켰다.

 서달이 장무기를 돌아보았다.

 "장형제, 우리가 쇠고기를 가져 올 테니 그 동안 자네는 여기서
쉬고 있게."

 장무기와 양불회는  방석을 깔고 나란히 앉았다.  잠시 후 주원
장, 서달, 탕화, 등유 등이  큰 대야에 익힌 쇠고기를 가득 담아
들고 왔으며, 오량과 오정 형제는 어디서 구했는지 백주(白酒)를
한 독 들고 뒤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부처 앞에 빙 둘러앉아 술
과 고기를 마시고 먹기  시작했다. 장무기와 양불회는 며칠간 굶
었던 터라 마치 걸신 들린 사람처럼 먹어댔다.

 화운이 고기를 한 점 입에 넣으며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서대가, 우리들의 교칙(校則)이 좋긴 하지만고기를 먹지 못한
다는 규칙은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순간, 장무기는 내심 크게 놀랐다.

 '이제보니 그들은 명교 사람들이구나. 명교는 채식을 하고 마왕
을 숭배한다던데, 그들은 여기서 쇠고기를 뜯고 있으니.....'

 서달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우리 교칙이 제 일 조는  선을 행하고 악을 물리치는 것인, 고
기를 먹는 것이 나쁘긴 하지만 맨 마지막 조항이야. 지금 이곳엔
쌀도 채소도 없으니 익은 쇠고기를 두고 굶어 죽을 수는 없지 않
는가!"

 한창 신나게 먹고 마시고  있을 때, 밖에서 갑자기 발자국 소리
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탕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
어서며 나직이 말했다.

 "정선달 집에서 소를 찾으러 온 설양입니다."

 이어 절문이 발길에 차여  열리더니, 체격이 건장한 두 명의 하
인이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잘들 놀고 있군. 장선달 집안의 황소를 감히 훔쳐 먹다니."

 하며 그 중 한 명이  주원장의 멱살을 움켜쥐었으며 다른 한 명
은 계속 고함을 질렀다.

 "이 땡땡이 중놈아, 오늘은  장물까지 여기 있으니 딴소리 하지
못할 게다. 내일 네놈을 관가로 잡아가 죽을 때까지 곤장맛을 보
여 주겠다."

 주원장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큰 소리로 마구 웃어 댔다.

 "정말 당치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구나. 우리들이 장선달네
황소를 훔치는 것을 누가  보았느냐? 출가인은 채식만 하는데 고
기를 먹었다고 억지를 쓰다니 그 죄가 얼마나 큰지 아느냐?"

 그 하인은 대야에 담긴 쇠고기를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이건 쇠고기가 아니고 무엇이냐?"

 주원장이 눈짓을 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이게 어째서 쇠고기냐?"

 이때 오량과 오정 형제가 두  명의 하인 뒤로 돌아가 함성을 지
르며 그들의 팔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주원장은 허리춤에서 비수를 뽑아들며 히죽히죽 웃었다.

 "두 분 형씨, 솔직히 말하겠는데 우리가 먹은 것은 쇠고기가 아
니라 사람고기야. 그 광경을 너희들에게 들켰으니 비밀이 누설되
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죽여야겠군."

 말을 끝내기 무섭게 한  하인의 가슴을 그었다. 그러자 옷이 갈
라지며 살갗에  혈선(血線)이 길게 그려졌다.  그 하인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주원장은 쇠고기를 집어 두 하인의 입에 쳐 넣었다.

 "삼켜!"

 두 하인은 감히 씹지도 못하고 꿀꺽 삼켰다. 주원장은 주방에서
소털을 한줌 집어와 또 두 하인의 입 속에 쳐 넣었다.

 "빨리 삼켜!"

 두 사람은  울상을 하며 시키는 대로  소털을 삼켰다. 주원장은
또 히죽히죽 웃었다.

 "너희들이 선달에게 우리가  그의 황소를 훔쳤다고 고자질하면,
나는 네놈들의 배를 갈라 누가 쇠고기를 먹었는지 선달에게 증명
해 보이겠다."

 하고 칼등으로  그들의 배를 그어 보였다.  그들은 차가운 칼이
배를 스치고 지나가자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오씨 형제가 대
소를 터뜨리며  두 사람의 엉덩이를  발길로 내질러 쫓아버렸다.
두 하인은 평소 장선달의 세력을 믿고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히다
이번에 혼이 나도록 봉변을 당하자 엉금엉금 기며 도주했다.

 장무기는 이 광경을 지켜보고 내심 탄복을 금치 못했다.

 '이 화상은 얼굴은  무섭게 생겼지만 일은 빈틈없이 처리하는구
나.'

 주원장은 서달을 통해 장무기가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양불
회를 구해 냈다는 말을 들었는지라, 장무기의 협의정신이 마음에
들어 연신 술과 쇠고기를  권하며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다.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었을 즈음 등유가 가볍게 탄식했다.

 "우리 한인(漢人)들은 오랑캐놈들의 압박을 받아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우리 한인은 모두 죽
게 될 겁니다."

 화운도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봉황부에만도 백성이 절반 가량 죽었는데, 이런 일은 봉황부뿐
아니라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뜬 채 굶어 죽느니 몽고놈
들과 사생결단을 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즈음은 인명이 개나 되지  목숨보다 못합니다. 이 두 소형제
와 소매도  하마터면 잡혀먹힐  뻔했으니 얼마나  많은 양민들이
소, 돼지  신세가 되었겠소?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고만 있는다면 살아 있을 가치가 없지요."

 이 말에 탕화도 동의했다.

 "옳은 말이오. 우리가 오늘은 운이 좋아 황소를 훔쳐 잡아 먹었
지만 내일 또 훔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지요."

 그들은 이 원인이 모두 몽고족들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원장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여기서 아무리 떠들고 욕을 한들 무슨 소용 있겠소? 사내 대장
부라면 당장 몽고놈들을 죽이러 갑시다."

 탕화, 등유, 화운, 오씨 형제들은 일제히 동조했다.

 "좋소, 갑시다."

 서달이 주원장을 돌아보았다.

 "주대가, 당신도 이제 땡땡이 중노릇 그만 하시오. 그리고 당신
의 나이가 제일 많으니 앞으로 우리는 당신의 지시에 따르겠소."

 주원장은 사양하지 않았다.

 "좋소. 그럼 오늘 이 시간부터  우리는 생과 사를 같이 하며 즐
거움과 고생도 함께 누립시다."

 그들은 일제히 축배를 들고 칼을 뽑아 탁자를 내리쳐 서로의 약
속을 다짐했다.

 양불회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라 겁에 질려 벌벌 떨었
다. 그러나 장무기의 생각은 달랐다.

 '태사부님께선 내게 마교 사람들과 절대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
셨지만, 상우춘 형님과 이분  서 형님은 마교 사람이면서도 간첩
이나 설공원 같은 명문정파의 제자들보다 몇 배나 훌륭하구나.'

 그는 장삼봉을  더없이 존경하고 있지만  마교 사람들에 대해선
편견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장삼봉의 분부를 어기
고 싶지는 않았다.

 주원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내 대장부는 말과 행동이 일치되어야 하오. 듣자니 장선달이
오늘 몽고 관병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인다고 하니, 그 놈들부터
먼저 절단내어 버립시다."

 화운이 뒤따라 칼을 집어들었다.

 "잠깐!"

 이때 서달이 주방으로 나가  바구니를 가지고 오더니 삶은 쇠고
기를 이십 근 가량 바구니에 담아 장무기에게 건네주었다.

 "장형제, 자네는 나이가 아직  어려 우리와 함께 관리를 죽이는
일을 할 수 없네. 우리는  빈털터리라 주머니에 은자 한 푼 없으
니 쇠고기를 대신 주겠네. 요행히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후일 다
시 만나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시세."

 장무기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구니를 받았다.

 "여러분이 몽고놈을 깡그리  죽여 천하 백성들로 하여금 행복하
게 지내게 해주십시오."

 주원장, 서달,  탕화, 등유 등은 다투어  장무기의 손을 잡으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장형제의 말이 옳네. 그럼 인연이 있으면 다음에 또 만나세."

 하고 제각기 병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불회만 없었다면 나도 저들과 함께 오랑캐를 죽이러 갔을텐데,
저들은 고작  일곱 명이니 만약 상황이  불리해지면 장선달 집에
모인 오랑캐  병졸들과 장정들이 이곳까지 뒤쫓아  올 게 분명하
다.....'

 장무기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그는 쇠고기가 담
겨 있는 바구니를 들고 양불회와 함께 길을 떠났다. 어둠을 뚫고
약 사, 오 리 쯤  가자 북쪽 하늘을 붉게 물들일 정도로 거센 불
길이 치솟아 오르는 게  보였다. 필시 주원장, 서달 등이 장선달
의 집을 불태운 것이라 생각하며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날 밤 두 사람은 산속에서 새우잠을 자고 날이 밝자마자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두 어린 것은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며 온갖 고
생을 겪었다. 다행하게도 양불회는 부모가 모두 무학의 명인이기
때문인지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질을 타고나  병을 앓지 않았다.
두 사람은  보름이 지나서야 겨우 하남(河南)  경내로 들어설 수
있었다.

 하남 경내도 다른 지방과  별 차이가 없었다. 가는 곳마다 기아
에 허덕이고 굶어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장무기는 나뭇 가
지를 꺾어 활을 만들어  짐승을 포획해 하루는 포식하고, 하루는
굶는 식으로 양불회와 천천히 서쪽으로 향했다. 다행하게도 도중
에서 몽고 병졸, 혹은  강호 인물과 맞부딪치지 않았다. 몇몇 예
사로운 불량배들이 그들에게 엉뚱한 짓을 하려고 한 적이 있었지
만 장무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날 장무기는 도중에서 눈먼  노인과 만나게 되어 한담을 나누
다가, 곤륜산 좌망봉으로 간다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눈 면 노인
은 그의 말에 놀라 입이 딱 벌어졌다.

 "곤륜산은 이곳에서 십만 팔천 리도 더 떨어졌을 텐데, 그 곳으
로 가려 한다니 혹시 미치지 않았나? 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도
록 하게."

 장무기는 풀이 죽었다.  곤륜산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우선 무당산으로 돌아가 태사부
님을 만나 뵐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달리 했
다.

 '남의 부탁을  받았는데 길이 멀다고 해서  도중에 포기할 수야
없지 않은가? 게다가 난  언제 죽게 될지도 모르는 몸이니, 죽기
전에 불회를 아버지에게  데려다 주지 못한다면 저승에 가서라도
기 아주머니를 뵐 면목이 없을 거야.'

 그는 노인과  헤어져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로부터 스무 날이
경과되자 두 어린 것은  모두 옷이 남루해지고 얼굴도 초췌해 졌
다. 장무기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양불회가 보채는 일이었
다. 그녀는 엄마가 왜  아직도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느냐면서 질
질 눈물을 짜곤했다. 그럴  때마다 장무기는 지금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둘러대기도 하고, 옛날 얘기도 들려 주며, 때로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그녀가 눈물을 그치게 만들었다.

 주마점(駐馬店)을 지나자 바람이 차가와졌다. 어느덧 가을이 막
바지에 이르러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두 어린 것은 아직도 얇은
옷을 입고 있으므로 몸을 덜덜 떨었다. 장무기는 자신의 낡은 겉
옷을 벗어 양불회에게 입혔다. 양불회는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무기 오빠는 춥지 않아?"

 장무기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난 춥지 않아. 몸에서 열이 화끈거리는데."

 그는 제자리에서 깡총깡총 뛰어 보였다.

 양불회는 고개를 떨구고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시무룩하게 말했
다.

 "오빠는 나에게 너무 잘해 누는 것 같아. 자기도 추우면서 옷을
나한테 주니....."

 어린 계집애의 입에서 어른스러운 말이 나오자 장무기는 오히려
멍해졌다. 이때 산비탈길 뒤쪽에서 병기가 서로 부딪치는 음향에
이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인의  앙칼진 음성이 뒤따랐
다.

 "악적! 넌 독이 뭍은 상문침(喪門針)에 맞았으니 빨리 달릴수록
빨리 발작될 것이다!"

 장무기와 양불회는 얼른 잡초더미 속에 몸을 숨겼다. 곧이어 서
른 살 가량의 건장한 사나이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뒤에
는 몇 장의  간격을 두고 한 여인이  손에 쌍도를 쥔채 쫓아오고
있었다. 사나이는 갑자기  자세가 흐트러지더니 비틀거리며 땅바
닥에 쓰러졌다.  여인은 이내 가까이  달려왔다. 순간, 사나이가
펄쩍 몸을 솟구쳐 잽싸게 오른손을 힘껏 뻗어내 여인의 가슴팍을
적중시켰다. 여인은  심한 충격을 받아  벌렁 뒤로 나자빠지면서
손에 쥐고 있던 쌍도도 떨어뜨리고 말았다.

 사나이는 손을 젖혀 등에 꽂혀 있는 독침을 뽑더니 싸늘하게 말
했다.

 "어서 해약을 내놔라!"

 여인은 냉소를 날렸다.

 "이번에 스승님이  너를 잡기 위해  우리를 강호로 내보내면서,
단지 독이 묻은  암기만 주었을 뿐 해약은  주지 않았다. 그러니
죽이려면 어서 죽여라. 그 대신 너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사나이는 왼손에 쥔 칼끝으로 그녀의 목을 겨냥하며, 오늘 손으
로는 주머니를 뒤져 보았으나  해약을 찾아 내지 못했다. 그러자
사나이는 극도로 화가 치밀어  그 독이 묻어 있는 상문침을 냅다
여인의 어깨에 꽂았다.

 "자, 너도 이 독침의  맛이 어떤지 음미해 보아라! 너희 곤륜파
는....."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하고 독성이 발작했는지 나직한 신
음을 토하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여인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하며 다시 스러졌다. 그녀는 간신히 독
침을 뽑아 땅에 팽개쳤다. 그들은 길옆 풀밭에 쓰러진 채 한결같
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장무기는 설공원, 간첩 등에게 당한
후로부터 무림인에  대해 상당히 경계했다.  그래서 한쪽에 몸을
도사린 채 변화만 지켜볼 분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잠시 후 사나이가 장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나 소습지(蘇習之)는 오늘  이곳에서 목숨을 잃게 되면서도 아
직 당신네들이 곤륜파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소. 대
관절 날  끝끝내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것을 알아야지만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게 아니겠소?"

 여인의 이름은  첨춘(詹春)이며 곤륜파의  제자였다. 그녀도 곧
상대방과 함께 목숨을  잃게 될 생각을 하니  모든 게 부질 없이
느껴져 울적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이 나의 사부님께서 검법을 연마하는 것을 훔쳐 보았기 때
문이에요. 그 양의검법(兩儀劍法)은  본문의 진산지학으로서, 설
사 문중제자라  할지라도 스승님께 직접 전수를  받지 않고 훔쳐
배우는 경우가 있으면 눈을을  후벼내는 중형을 받게 돼요. 더군
다나 당신은 외부 사람이잖아요."

 소습지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빌어먹을! 정말 죽어야 할 놈은 따로 있군!"

 첨춘은 이내 성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당신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나의 사부님을 모독할 생각인
가요?"

 "그에게 더 지독한 욕을 한들  날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난 백
우산(白于山)을 지나다가  낭자의 사부가  연검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된 것뿐이오. 언뜻 스쳐 본 것으로 그 검법을 배울 수 있는
실력이라면, 오늘 이 꼴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첨 낭자, 분
명히 말하겠는데 낭자의 스승인 철금선생은 너무나 옹졸하오. 내
가 양의검법을 눈꼽만치 배우지도  않은 건 사실이지만, 설령 한
두 초식 우연히 배웠다 해도 그게 죽을 죄는 아닐 것이오."

 첨춘은 침묵을 지켰다. 솔직히 말해 그녀도 역시 스승님의 처사
가 너무  지나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습지가 우연히 연검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서 여섯  명의 제자를 시켜 추살케 한 것이
다. 죽음을 눈앞에 둔 소습지의 말이니 거짓이 아닐 것이다.

 소습지가 다시 입을 열어 투덜거렸다.

 "그는 제자들에게 독이 묻은 암기를 내주면서 해약을 주지 않았
다니,  무림에 이런  법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 빌어먹
을.....!"

 첨춘은 부드럽게 말했다.

 "소대협, 모두 제 잘못이에요. 지금은 그저 후회스럽기만 해요.
그 죄값으로 소대협과 죽음을 함께 하게 됐으니 다소나마 위안이
되긴 하지만, 소대협의 집안 식구들을 생각하면....."

 소습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아내는 이미 이 년 전에 세상을 떠났소. 슬하에 여섯 살 짜
리 남자애와 네 살된  계집애가 있는데, 내일이면 그들도 고아가
될 것이오."

 "집에 다른 사람은 없나요? 누가 어린애들을 돌보죠?"

 "지금은 형수께서 보살펴 주고 있지만, 워낙 성깔이 거친데다가
손찌검이 심해 그 동안은  내 눈치를 보느라 어린 것들을 학대하
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그는 말을 데대로 잇지 못하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첨춘은 죄스러운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모두 제가 지은 죄예요."

 소습지는 고개를 내둘렀다.

 "낭자를 탓하지는 않소. 낭자가 나와 무슨 원한이 있겠소? 단지
스승님의 분부에 따라 일을 행한 것이 아니오! 사실 나만 죽으면
그뿐인데 낭자에게까지 독침을  전개한 것이 후회스럽소. 그렇지
않고 내가 모든 사정을 털어놓고 간청을 했다면 낭자같이 마음씨
착한 사람이 내 불쌍한 애들을 돌봐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첨춘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당신을  해친 흉수인데,  어떻게 마음이 착할  수가 있어
요?"

 "난 낭자를 탓하지 않소. 정말 낭자를 원망하지 않소."

 지금의 상황은 조금 전에 목숨을 걸고 악투를 벌였을 때와 판이
하게 달랐다. 그들은 머지않아 죽게 될 것을 알고 진심을 털어놓
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장무기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내심 생각을 굴렸다.

 '이들은 천성이 착한 것  같아. 더군다나 저 남자에게는 어린애
가 둘이나 있는.....'

 그는 양불회와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되새기며 남의 일처럼 느
껴지지 않아 잡초더미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첨 낭자, 그 상문침에 어떤 독이 묻어 있는지 알고 있나요?"

 소습지와 첨춘은 잡초더미에서  남자애와 계집애가 불쑥 나타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됐는데, 장무기의  엉뚱한 질문을 듣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장무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의술을 약간 배운 바가  있어, 어쩌면 두 분의 독상을 치
료해 드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첨춘이 그의 말을 받았다.

 "무슨 독인지는 나도 모르겠다.단지 상처 부위가 견디기 어려
울 지경으로  가렵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라면  우린 네 시진을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제가 상세를 살펴봐도 될까요?"

 소습지와 첨춘은 그가 나이도 어린데다가 거렁뱅이처럼 생겨 독
상을 치료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소습지는 마치 조롱을 당하는 기분이 들어 거칠게 소리쳤다.

 "우린 이제 곧 죽게 될  것이니, 귀찮게 굴지 말고 멀찌감치 물
러나라!"

 장무기는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상문침을 집어 냄새를 맡아 보
았다. 은은한 난화의 향기가  풍겼다. 근래에 그는틈이 생길 때
마다 왕난고가 남긴 독경을  읽어 천하의 온갖 해괴한 독물에 대
해 확연히 알고 있었다. 지금 이 향기를 맡자 상문침에 청타라화
(靑陀羅花)의 독액이 묻어 있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독경에
서술한 바에 의하면, 이 꽃즙  자체는 독성이 없어 한 사발을 들
이켜도 중독이 되지 않지만 일단 피와 혼합되면 극독으로 변하는
동시 비릿한 냄새가 향기로 변한다 했다.

 "이것은 청타라화의 독이 분명합니다."

 첨춘은 상문침에 묻어 있는  독이 무슨 독인지는 몰라도 스승님
의 화원에 여려  종류의 기화이초(奇花異草)가 심어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장무기의 말을 신통하게 생각하며 얼른 물었다.

 "아니..... 그것을 어떻게 알았지?"

 청타라화는 그 원산지가 서역이므로 중원에선 좀처럼 보기가 어
려웠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수가 있어요."

 그는 곧 양불회의 손을 잡았다.

 "우린 이만 가자."

 첨춘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소형제, 만약 치료 방법을 안다면 우리 두 사람의 목숨을 구해
주게."

 장무기는 본디 그들을 구해 줄 작정이었으나, 돌연 설공원 등의
배은망덕한 일이 떠올라  망설여졌다. 이번에는 소습지가 간청을
했다.

 "소상공, 내가 고인을 몰라보고  무례한 언동을 한 것을 용서하
게."

 장무기는 결심을 내린 듯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좋습니다. 한 번 시험해 보겠습니다."

 그는 금침을 꺼내 첨춘의 가슴 단중혈과 어깨 양쪽 결분혈을 몇
번 찔렀다. 일단 장상을 입을 통증을 없애 주기 위해서였다.

 "이 청타라화는 피를 봐야지만 독으로 변하니 삼켜도 상관 없습
니다. 우선 두 분이 서로  상대방의 상처 부위를 빨아 엉켜 있는
피를 제거해야 합니다."

 소습지와 첨춘은 모두 쑥스러워했다. 그러나 목숨이 중요하므로
서로 번갈아가며 상대방의 상처 부위를 빨았다. 장무기는 산기슭
에서 세 가지 약초를 구해와 입으로 잘근잘근 씹어 두 사람의 상
구에 붙여 주었다.

 "이 세 가지 약초는 독성이  더 만연되지 않게 할 뿐 독을 근본
적으로 제거하는데는  별 효험이 없습니다.  일단 가까운 마을로
들어가 약방을 찾아 다시 독을 치료하는 약을 조재해 드리겠습니
다."

 소습지와 첨춘은 원래 상처  부위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근질근
질했다. 그런데 약을 바르자 거짓말처럼 시원하고 사지가 마비되
는 증상도 사라졌다. 그들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두 사
람은 나뭇 가지를 꺾어  지팡이로 삼아 천천히 걸어갔다. 첨춘은
장무기의 사문 내력에  대해 물었지만 장무기는 적당히 얼버무리
며 그저 어렸을 대부터 의술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고만 했다.

 한 시진 후에 이들은 사하진(沙河鎭)으로 들어서 객점에 투숙했
다. 장무기가 약방문을 지어 주자 소습지가 점원을 시켜 약을 지
어 오게 했다. 예서(豫西)일대는 다행하게도 가뭄의 피해가 심하
지 않아 비록 넉넉지는  못해도 모두 나름대로 끼니를 때우며 살
았다. 점원이 약을 지어 오자 장무기는 탕약을 달여 소습지와 첨
춘에게 복용시켰다.

 이들은 객점에서 사흘을  머물렀다. 장무기는 매일 약방문을 바
꿔가며 환부에 발라 주기도  하고 탕약을 복용시키기도 했다. 나
흘째 되는 날 두 사람이 당한 극독은 말끔히 제거되었다. 그들은
크게 감격해 장무기와 양불회가  어디로 가는 길인지 물었다. 장
무기는 곤륜산 좌망봉으로 가는 길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첨춘은 내심 생각을 굴리는 듯 하더니 아랫 입술을 지그시 깨물
며 말했다.

 "저..... 소대협, 이 소형제가 우리의 목숨을 구해 주었지만 저
의 사형들은 계속 소대협을 찾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차라리 저
와 함께 곤륜산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어요?"

 "곤륜산으로.....?"

 "네. 저의 스승님을 만나뵙고 사실대로 양의검법을 훔쳐 배우지
않았다고 말씀드리세요. 그 어르신네가 생각을 달리 하시지 않는
한 언젠가는 후환이 닥칠 거예요."

 소습지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난 단지 우연한  기회에 한 번 보았을  뿐인데, 끝끝내 죽음의
궁지로 몰려고 하니 세상에 이런 무경우가 또 어디 있겠소?!"

 첨춘은 부드럽게 말했다.

 "소대협, 소매는 곰곰이 생각한  연후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거
예요. 저의 스승님이 믿어 주시기만 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해
결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피해 다니시다가 저의 사형들에게 불행
을 당하게 된다면 소매도  죄책감 때문에 더 이상 살아갈 용기가
없을 거예요."

 이들 두 사람은 죽음의 문턱에서 며칠간 생활을 같이 해오는 동
안 서로 정이 들었다. 소습지는 그녀의 염려어린 말을 듣자 이내
분노가 사라졌다. 곤륜파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쫓기다 보면 언
젠가는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니.....

 첨춘은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자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 생각 말고 우선 저와 곤륜산으로 가세요.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시다면 곤륜산에 다녀온 후 소매도 함께 돕겠어요."

 "좋소, 그렇게 합시다. 한데 영사가 내 말을 믿어 줄지....."

 "스승님은 늘 저를 아껴 주셨으니 통사정을 하면 소대협을 난처
하게 만들진 않을 거예요. 이번 일을 매듭지은 뒤에 소매는 소대
협의 아드님과 따님을 만나보고 싶어요. 그들이 당신의 형수님께
학대를 받는 것이 안타까와요."

 소습지는 그녀의 말투에서 자기에게 일생을 맡기겠다는 뜻을 간
파하고 내심 크게 기뻐했다. 그는 곧 장무기에게 말했다.

 "소형제, 우리도 곤륜산으로 가야  하니 길벗이 되어 함께 가도
록 하세."

 다음날, 소습지는 마차 한 대를 빌려 양불회와 장무기를 마차에
태우고 자기와 첨춘은 말을  타고 앞장섰다. 정오 무렵, 큰 마을
에 이르자 첨춘은 장무기와 양불회에게 새 옷을 사 주었다. 말쑥
한 모습으로 탈바꿈한  장무기와 양불회의 영준하고 귀여운 모습
을 보자 갈채를 보냈다.

 서쪽으로 갈수록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추워졌다. 소습지와 첨
춘의 보살핌을 받아 아무런  변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역에 당
도하자, 곤륜파 세력 안으로 들어온 셈이니 더욱 말썽이 생길리
가 만무했다. 단지  뼈를 에일 듯한 한풍과  황사가 기승을 부려
견디기가 어려웠다.

 서역으로 들어선 지 이틀 후에 이들 일행은 곤륜산 삼성요(三聖
拗)에 다다랐다. 이곳은 별천지였다.  융단을 깐 듯한 초원이 펼
쳐져 있고 곳곳에 기화이초가  만발했다. 이곳 삼성요 주위는 온
통 하늘을  찌를 듯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이상난류가
형성돼 있었다.  곤륜파는 곤륜삼성 별건가  이래 혁대 장문인들
모두가, 이 삼성요를 별지로 가꾸겠다는 노력하에 제자들을 강남
천축(天竺)가지 보내 기화이초를  옮겨와 뿌리를 내리게 했던 것
이다.

 첨춘은 세 사람을 데리고 철금선생이 사는 철금거(鐵金居)로 갔
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대청 밖에 몇몇 제자들이 서성거리며 모
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첨춘은 무슨 일인가 궁금해 하면
서 사매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스승님은 안에 계시냐?"

 그 여제자가 대답하기도 전에  철금선생 하태충의 벼락 같은 호
통소리가 후당 쪽에서 들려왔다.

 "이런 밥통들, 무슨 일을  시키면 제대로 해내는 게 없구나! 너
희들 같은 제자를 키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어 탁자를 내리치며 야단법석이었다.

 첨춘이 나직하게 물었다.

 "스승님의 역정이 대단하신 것 같으니, 아무래도 내일 만나뵙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태충의 외침이 들려왔다.

 "첨춘이냐? 뭘  소곤거리느냐? 그 소가 녀석의  목을 갖고 왔느
냐?"

 첨춘은 안색이 약간 변하며  얼른 대청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
었다.

 "너에게 시킨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그 소가  녀석을 없앴느
냐?"

 "지금 밖에서 스승님께 사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본문의 규칙을 몰라  우연히 스승님께서 검술을 연마하시는 것을
보았지만, 단지 천하무쌍의  고명한 검술이라는 것만 느꼈을 뿐,
워낙 오묘하여 그 초식에  대해서는 조금도 깨우친 게 없다고 합
니다."

 그녀는 스승님을 모신 지 오래 되므로 스승님이 무공에 대해 상
당한 자부심을 갖고 계시다는 걸 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습지
가 본문의 무학을 극구  칭찬한다는 투로 말씀드린 것이다. 그래
야지만 스승님의 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평상시 같
았다면 하태충이 우쭐대는 기분에 첨춘이 바라는 대로 일을 가볍
게 처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하태충
은 냉소를 날리며 말했다.

 "어쨌든 녀석을 잡아온 것은 잘했다. 그 녀석을 우선 뒷산 석실
에 가두어라. 나중에 천천히 처리를 하겠다."

 첨춘은 그의 기분이 언짢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간청을 할 수
없었다.

 "네."

 하고 대답하며 다시 물었다.

 "사모님들께선 모두 편안하시죠? 제가 내당으로 가서 그 분들께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하태충은 처와  소실을 모두 다섯 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다섯째 첩을 제일  좋아했다. 첨춘은 소습지의 일을 원만
하게 해결하기 위해 우선  다섯째 사모님의 환심을 사 둘 필요가
있다고 느껴졌다.

 하태충은 갑자기 울적한 표정이 되어 장탄식을 했다.

 "가서 오부인(五夫人)을 만나뵙도록  해라. 그녀는 중병에 걸려
마지막 상면이 될지도 모른다."

 첨춘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무슨 병을 앓게 되셨죠?"

 하태충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병명이라도 알면  오죽 좋겠느냐? 이미 칠,  팔 명의 용하다는
의원들을 불러왔지만 병명조차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다. 지금 온
몸이 퉁퉁 부어 그렇게 아름답던 모습이..... 정말 딱해서 못 보
겠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연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었다.

 "그렇게 많은 제자가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나도 쓸
모가 없으니..... 장백산으로 가서 천 년 삼을 구해 오라고 보낸
지도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소식이 없지를 않나, 설련과 하
수오 같은 영초를 구해 오라고 시키면 번번히 빈손으로 돌아오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구나."

 첨춘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장백산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오가는데만 꼬박 두 달이 걸릴 텐데, 당도하자마자 천년 삼을 찾
아 낼 리도 만무할  것이다. 게다가 설련, 하수오 같은 기사회생
의 영초를  지닌 이물(異物)은 평생을 두고도  찾기 어려운 것인
데, 어떻게 짧은  시간 내에 구해 올  수 있단 말인가? 스승님은
이 소첩을 자기의 목숨처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엉뚱한 사람
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태충이 다시 분연히 말했다.

 "흥! 만약 그녀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 모든 돌
팔이 의원을 죽여 없애겠다."

 첨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자가 직접 가 뵙고 싶습니다."

 "좋다. 나도 함께 가마."

 그들은 오 부인의 침실로  갔다. 문 안을 들어서자 마자 약냄새
가 진하게 풍겼다. 아니나  다를까, 하태충이 말한 대로 오 부인
은 온몸이  퉁퉁 부어 목불인견이었다.  그렇게 빼어났던 용모가
이렇게 추악하게 변하리라곤 첨춘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태충은 시중을 들고 있는 아줌마에게 짜증스럽게 분부했다.

 "가서 그 돌팔이 의원들을 다시 불러와라."

 얼마 후 쇠사슬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일곱 명의 의원이
들어왔다. 그들은 발목에 모두 사슬이 묶여 서로 연결돼 있었다.
그 동안 얼마나 시달렸는지 안색이 초췌했다. 이들은 모두 사천,
운남, 강숙 일대에서  용하다고 소문이 난 의원들로서, 하태충이
제자를 시켜 간청 반, 위협 반으로 붙잡아 온 것이다. 한데 그들
의 견해는  서로 엇갈렸다. 오  부인의 증세가 수종(水腫)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귀(寃鬼)가 뒤집어 씌운 거라고 부
득불 우기는 사람도 있었다.  자연히 그들이 내린 약방문도 각양
각색이었다. 그들에게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오 부인의 병을
조금도 호전시키지 못했다는 것뿐이었다.

 하태충은 노발충천하여 그들을  모조리 사슬로 묶어 버리고, 만
약 오 부인을 완치시키지 못할 시에는 함께 매장시키겠다고 으름
장을 놓았다. 그렇치 않아도 의견이 엇갈리는 그들은, 생명의 위
험을 느끼게 되자 매번  회진을 할 때마다 더욱 자신들의 고집을
내세우며 심한 논쟁을 벌였다.  서로들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
루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 진맥
을 한 후 곧장 논쟁으로 돌입했다. 하태충은 울화통이 터져 냅다
욕설을 퍼부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첨춘은 문득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스승님, 제자가 하남에서 명의 한 사람을 모시고 왔습니다. 비
록 나이는 어리지만 누구보다도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하태충은 이내 얼굴이 환해지며 소리쳤다.

 "왜 진작 얘기를 하지 않았느냐? 어서 모셔오도록 해라!"

 첨춘은 곧 장무기를 데리고 왔다. 장무기는 하태충을 보는 순간
왕년에 무당산에서 부모님을  죽음의 궁지로 몰아넣은 사람들 중
에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 상기되어 내심 원망스러운 생각이 들었
다. 하지만 장무기는 그 동안 많이 성장하여 하태충은 그를 알아
보지 못했다. 그는  열 다섯 살 가량의  소년이 냉랭한 표정으로
첨춘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으며 첨춘에
게 물었다.

 "네가 말한 명의는 어디에 있느냐?"

 첨춘은 장무기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바로 이 소형제예요. 그의  의술은 아주 뛰어나 웬만한 증상이
라면 문제없이 완치시킬 거예요."

 하태충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런 판국에 농담을 할 작정이냐?"

 첨춘은 진지하게 말했다.

 "제자가 청타라화의  독을 당했는데, 바로  이 소형제가 치료해
주었습니다."

 하태충은 깜짝 놀라며 내심 생각을 굴렸다.

 '청타라화의 독이라면 본문의 독특한 해약 없이는 필시 죽기 마
련인데, 이 꼬마 녀석이 치료를 했다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
군.'

 그는 장무기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네가 정말 병을 치료할 줄 아느냐?"

 장무기는 부모님의 참변으로 인해 본디 하태충을 원망스럽게 생
각했으나, 천성이  순박하여 원한을 가슴  속에 깊이 묻어두지는
못했다. 설공원 등의 병을 치료해 준 것도 그런 순박한 마음에서
였다. 장무기는 그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한 갈래의 이상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잠시 머물려 있는 동안 그 냄새가 짙어졌다가 다시 엷어
지는 것을 느끼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하태충의 허락
도 얻지 않고 오 부인의  침상 앞으로 다가가 양쪽 손의 맥을 짚
어보고 나서 금침을 꺼내 갑자기 그 퉁퉁 부은 얼굴을 찔렀다.

 하태충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뭐하는 짓이냐?"

 그는 장무기의 손을 나꿔채려 했으나, 장무기는 이미 금침을 뽑
았다. 그 즉시 오 부인의  얼굴에서 피가 섞이지않은 고름이 나
왔다. 장무기는 금침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아 보더니 턱을
끄덕였다.

 하태충은 그의 느긋한 행동에서  한가닥의 희망이 생겨 다소 누
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소..... 소형제, 이 병이 완치될 수 있을까?"

 그는 한 문파의 지존이면서도 스스로 신분을 낮추어 장무기에게
소형제라 칭했다.

 장무기는 대답을 하지 않고 갑자기  오 부인의 침 상 밑을 유심
히 살피더니, 다시 창문을  열어 화원을 살폈다. 이어 침상 밖으
로 뛰쳐나가 뒷짐을 진  채 울긋불긋한 기화이초를 감상했다. 하
태충은 오 부인을 총애하므로  창 밖에다 온갖 화초를 가꾸어 놓
았다. 그는  즉시 신통한 처방을 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렸는데,
뜻밖에도 장무기가 창  밖으로 뛰쳐나가 여유작작하게 꽃을 감상
하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한 가
닥의 서광을 발견한 터라  억지로 울화를 눌러 참았다. 그러자니
안색이 푸르락누르락해졌다.

 장무기는 화초를 잠시 살펴보고 나서 깨달은 바가 있는 듯 고개
를 끄덕끄덕 하더니 방 안으로 돌아왔다.

 "병을 치료할  수는 있지만 치료하고 싶지  않습니다. 첨 낭자,
저는 이만 떠나야겠습니다."

 첨춘이 얼른 그를 만류했다.

 "장형제, 만약 자네가 오  부인의 병을 치료해 준다면, 우리 곤
륜파의 모든 사람이 자네의 은혜를 잊지 않을 걸세."

 장무기는 하태충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의 부모님을 죽게 한 가람들 중에 이 분 철금선생도 끼어 있
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그의 부인을 치료해 주어야 합니까?"

 하태충은 흠칫 놀라 물었다.

 "소형제, 자네의 성함은 무엇이며 영중영당이 누구인가?"

 장무기는 힘주어 말했다.

 "저의 성은 장이며 선친은 무당파의 제 오 제자입니다."

 하태충은 이내 안색이 굳어졌다.

 '이제보니 장취산의 아들이군.  무당파의 학문은 뿌리가 깊으니
내가 상상 못할 의술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곧 처연하게 장탄식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장형제, 영존이 생존해 계실  때 나하고는 친분이 매우 두터웠
네. 그가 뜻하지  않게 목숨을 끊자 내가  얼마나 비통해 했는지
그 땐 자네의 나이가 어렸으니 잘 모를 걸세."

 그는 애첩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거짓을 꾸며 냈다.

 첨춘도 스승님을 돕기 위해 거짓을 꾸며 냈다.

 "영존과 영당의  죽음으로 인해  스승님께서는 문중으로 돌아와
통곡까지 하셨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늘 장오협과는 평생의 지
기라고 말씀하시곤  했네. 장형제, 왜 진작  신분을 밝히지 않았
나? 자네가 장오협의 혈육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더욱 대접을 잘
해 주었을 걸세."

 장무기는 반신반의했다. 어쨌든 첨춘이 자기에게 잘 대해 준 것
만은 사실이므로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분 오 부인께서는 꾀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라 금은혈사(金
銀血蛇)의 독을 당한 겁니다."

 하태충과 첨춘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금은설사?"

 "그렇습니다. 저도 이런 독사를  본 적은 없지만 부인의 증상으
로 미루어 틀림없는  겁니다. 철금선생, 부인의 발을 살펴보십시
오. 발가락 끝에 생소한 이빨자국이 있을 겁니다."

 하태충은 즉시 이불을 젖혀  오 부인의 발가락을 유심히 살펴보
았다. 과연  발가락 끝부분마다 거무잡잡한  이빨자국이 나 있었
다. 하지만 워낙 미세하여 코를 가까이 대고 유심히 살피지 않으
면 절대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하태충은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장무기에 대한 믿음이 확실해졌
다.

 "과연 발가락마다 이빨자국이 있네. 소형제, 정말 대단하네. 이
제 병의 근원을 알아냈으니  치료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 소첩
이 완쾌만 되면 내 후한 보상을 하겠네."

 이어 한쪽에 멀건히 서 있는 일곱 의원들에게 호통을 했다.

 "이런 돌팔이 같은 놈들!  발가락에 치흔이 있는 것도 발견하지
못했단 말이냐?"

 그는 욕설을 하면서도 희색만면하였다.

 장무기가 넌지시 말했다.

 "부인의 증상은 워낙 특이하여 저들이 병의 근원을 찾아내지 못
한 것을 나무랄 수 없으니, 모두 돌려보내도록 하십시오."

 하태충은 껄껄 웃었다.

 "알았네, 알았어. 소형제가  왕림을 하셨는데 저런 돌팔이 의원
들을 무엇하러 이곳에 붙잡아 두겠나? 춘아야, 저들에게 각자 은
자 백 냥씩을 주어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해라."

 일곱 명의 의원은 죽음의 수렁에서 목숨을 건진 거나 진배 없으
므로 날 듯이 기뻐하며  서둘러 떠나갔다. 행여나 장무기의 의술
마저 신통치 않다는 게  판명돼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할까 봐 삼
십육계 줄행랑을 친 것이다.

 장무기는 다시 엉뚱한 말을 했다.

 "가람을 시켜 부인의 침상을  옮기라고 하십시오. 침상 밑에 작
은 구멍이 있을 겁니다.  그곳에 바로 금은혈사가 들락거리던 구
멍입니다."

 하태충은 누구를 시킬 생각도  않고 스스로침상을 번쩍 들어올
려 한쪽으로 옮겼다. 과연 그 밑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는 즉시 소리쳤다.

 "어서 유황을 갖고 와라! 당장 이 고약한 독사를 태워 죽여야겠
다."

 장무기가 얼른 손을 흔들며 제지했다.

 "아니 됩니다. 부인의 독을 제거하려면 그 두 마리의 독사가 필
요합니다."

 하태충은 멍해졌다.

 "그거 참 납득이 가지  않는군. 이유가 무엇인지 가르침을 주겠
나?"

 장무기는 창 밖 화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철금선생, 오 부인의 기병은  저 화원에 심어져 있는 여덟그루
의 영지란(靈脂蘭)에서 비롯한것입니다."

 "저것이 영지란이란 말인가? 사실 나도 이름을 몰랐네. 내가 화
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한 친구가 서역에서 갖고 와 삼은 걸
세. 꽃도 예쁘거니와  향기도 좋아 애지중지했는데, 그게 화근일
줄이야....."

 "책에 적힌 대로라면, 저 영지란의 뿌리는 둥근 구형(球形)으로
서 색깔이 핏빛처럼 붉으며  극독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그런지 캐서 확인해 봅시다."

 하태충은 곧  제자들을 시켜 영지란의 뿌리를  캐게 했다. 과연
장무기가 말한 그대로 였다.  장무기는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다
음과 같이 말했다.

 "수고스럽지만, 여덟  그루의 뿌리를 모두  캐서 질그릇에 넣고
계란 여덟 개와 닭피 한 사발을 섞어 질퍽하게 찧어 놓도록 하시
오. 그리고 찧을 때 살갗에 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첨춘은 대답을 하고 사매 둘과 함께 물러갔다.

 장무기는 다시 한  자 남짓한 죽통 두  개와 죽봉(竹棒) 하나를
요구해 한쪽에 놓아두었다. 한참 기다려서야 영지란의 뿌리가 질
퍽하게 찧어졌다. 장무기는 그것을  바닥에 빙 둘러 원을 만들고
는 두 치 가량의 틈새를 터놓았다.

 "잠시 후 이상한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모두 소리를 내면 안 됩
니다. 독사가 놀라 달아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두
를 솜과 감초로 코를 틀어막으십시오."

 일을 거들고 있는 여제자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장무기도
코를 틀어막고 나서 불을 붙여 영지란의 잎을 뱀구멍앞에서 태웠
다. 얼마쯤 시간이 경과되자, 작은 구멍 속에서 조그만한 뱀대가
리가 빠끔히 드러났다. 뱀의 몸은 핏빛이며 머리에 금빛 볏이 달
려 있었다. 그 뱀이 느릿느릿하게 기어 나왔다. 뜻밖에도 다리가
네 개 달려 있으며 몸의  길이는 여덟 치 정도였다. 잇따라 구멍
속에서 다시 똑같이 생긴 뱀이 기어나왔다. 단지 머리 위에 달려
있는 볏이 은색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하태충 등은 이  두 마리의 괴사를 보자  모두 숨을 죽였다. 두
마리의 괴사는 혀를 날름거리며 다정하게 서로의 등을 핥아 주더
니 천천히 그 영지란의  뿌리를 찧어 만든 동그라미 안으로 들어
갔다. 장무기는 얼른 죽통의 주둥이를 동그라미의 유일한 틈새에
다 내려놓고 죽봉으로 살짝 은관혈사(銀冠血蛇)의 꼬리를 건드렸
다. 그러자 은관혈사는 전광석화와도  같은 동작으로 그 죽통 속
으로 기어들어갔다. 금관혈사도  따라서 들어가려 했지만 죽통의
길이가 넉넉치 못해 두 마리가 한꺼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금관
혈사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다급해 했다. 장무기는 또 하나의 죽
통으로 금관혈사를  몰아 넣고는 마개를  막아 버렸다. 그제서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길게 숨을 불어냈
다.

 장무기의 말에 따라 곧 여섯 명의 여제자가 뜨거운 물로 바닥을
깨끗이 청소했다. 장무기는 다시  창문과 출입문을 굳게 닫게 하
고는 웅황(雄黃),  대황(大黃), 감초 등 몇  가지 약제를 가루로
빻아 은관혈사의 죽통 속에  주입하자 이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거기에 따라 금관혈사도 마치  맞장구를 치듯 기성을 질렀다. 장
무기는 잠시 기다렸다가 금사의  죽통 마개를 뽑았다. 금사는 곧
죽통 속에서 나와 은사가 들어 있는 죽통을 중심으로 하여 몇 바
퀴 맴돌더니, 갑자기 침상 위로 뛰어올라 부인의 이불 속으로 뚫
고 들어갔다.  하태충은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장무기는 그  더러 조용히 있으라는  손짓을 하며 살며시
이불을 젖혔다.  그러자 금관혈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오 부인의
발가락을 핥다가 잘근잘근 깨무는 게 똑똑히 보였다.

 장무기의 얼굴에희색이 띠어지며 나직하게 말했다.

 "부인이 당한 금은혈사의 독을 지금 이 금은혈사를 이용해 다시
빨아내는 겁니다."

 향이 반 자루가 타는 시간이 경과되자 발가락을 빨고 있던 금관
혈사의 몸이 거의 두 배  가량 불어났다. 그리고 금빛 볏이 더욱
선명해졌다. 장무기는 그제서야 은관혈사가 들어 있는 죽통의 마
개를 뽑았다. 금관혈사는 그  즉시 침상에서 뛰어내려 죽통 가까
이 기어와 입으로 독혈을 뱉어내 은사에게 먹였다.

 장무기는 매우 만족해 했다.

 "됐습니다. 매일 이렇게 두  번씩만 독혈을 빨아내게 하면 열흘
이내에 완치될 수 있습니다."

 하태충은 크게 기뻐하여 장무기를 자기 서재로 데려갔다.

 "소형제의 신기에 정말 감탄했네.  어떻게 해서 그런 방법을 생
각해 냈는지 가르침을 주겠나?"

 장무기는 아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책에 기록돼 있는 바에  의하면, 이 한 쌍의 금관, 은관혈사는
천하 독물 중에 마흔 일곱 번째에 나열돼 있습니다. 그다지 무서
운 독물은 아니지만 한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그건 독을 흡취하
는 것으로 비상, 학정홍(鶴頂紅), 공작담(孔雀膽) 따위의 극독을
가장 즐겨 먹습니다. 오 부인  침실 밖에 심어 놓은 영지란의 독
성도 대단하기 때문에, 이 한 쌍의 금은혈사를 끌어들이게 된 것
입니다."

 하태충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었군."

 하고 장무기의 독에 관한 지식에 탄복해 마지 않았다.

 장무기가 설명을 계속했다.

 "금은혈사는 필히 수컷과 암컷이  함께 있습니다. 조금 전에 제
가 웅황 등의 약재로  암놈을 탈진 상태로 만들자 수컷인 금관혈
사가 짝을 구하기 위해  부인의 발가락을 빨아 그 독을 암놈에게
먹인 겁니다. 다음엔 약재로  수컷을 적당히 다스리면 암놈이 독
혈을 흡취해 짝에게 먹일  겁니다. 그렇게 반복하면 부인의 체내
에 있는 독혈이 말끔히 제거될 겁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 한 쌍의 혈사가 애당초 왜 오 부인의 발가락을 깨물었을까?
거기엔 까닭이 있을 텐데.....'

 그는 확실한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
았다. 이날  하태충은 연회를 마련해  장무기와 양불회를 깍듯이
대접했다.

 며칠이 지나자  오 부인의 퉁퉁 부었던  몸이 차츰 가라앉았다.
이제는 정신도  맑아졌고 음식을 섭취할  수도 있었다. 장무기는
작별의 뜻을  비쳤다. 그러나 하태충이  한사코 만류하는 바람에
눌러 앉았다. 열흘째  되는 날 오 부인의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
다. 이날, 오 부인은  특별히 정성드려 주연을 마련해 친히 장무
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표했다. 이 자리에 첨춘도 배석했다. 오
부인은 비록 아직은 안색이 초췌하지만 타고난 미모가 다시 되살
아났다. 하태충은  그저 좋아서  싱글벙글했다. 첨춘은 스승님의
마음이 흡족한 틈을 타서 소습지를 문하로 거두어 달라고 간청했
다.

 하태충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춘아야, 너의 빈틈없는 계략에  두 손 들었다. 내가 그 녀석을
제자로 삼으면 나중에 자연히  양의검법을 전수해 줄 테니, 예전
에 한 번 훔쳐본 것쯤이야 뭐가 문제될 게 있느냐?"

 "스승님, 만약 그 사람이  스승님이 연검하시는 것을 엿보지 않
았다면 제가 그를 잡으러 갈 리도 없었고, 그러면 장형제를 만나
게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스승님과 오 부인의 홍
복(洪福)이며 하늘의 보살핌입니다.  물론 장형제의 고명한 의술
덕분이지만, 소습지도 약간의 공로가 있는 셈입니다."

 오 부인도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당신은 많은 제자를 거두었지만,  결국 도움을 준 것은 첨낭자
밖에 없잖아요? 첨 낭자가 그 소습지라는 사람을 잘 본 모양인데
제자로 거두도록 하세요. 나중에 당신의 의발제자가 될지도 모르
잖아요."

 하태충은 애첩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다.

 "알았소. 제자로 삼으리다.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소."

 "그게 무엇이죠?"

 오 부인이 묻자 하태충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내 문하에 투신한 후 열심히 배워야 하며, 춘아에게 엉뚱한 마
음을 품어 아내로 맞이하려 한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첨춘은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떨구었다. 오 부인은 까르르 웃었
다.

 "맙소사! 스승이 솔선수범해야죠. 자기는 첩을 주렁주렁 거느리
고 있으면서 제자의 혼례를 금지시킬 수 있나요?"

 하태충은 일부러 첨춘을 골려 주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는 껄껄 웃었다.

 "자, 술이나 마시지!"

 어린 하녀가  나무 쟁반에 술주전자를  받쳐들고 가까이 다가와
각자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끈적끈적한 술이 빛깔도 고울
뿐 아니라 향기 또한 농후했다.

 하태충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장형제, 이 술은 곤륜산의 명산으로 호박밀리주(琥珀密梨酒)라
고 하네. 다른 곳에선 마실 수 없는 술이니 몇 잔 마셔두게."

 사실 그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금모사왕의 행방을  캐내야 하는데, 일이
중요한 만큼 서둘러선 안 되겠지.....'

 장무기는 본디  술을 마실 줄 몰랐다.  그러나 이 호박밀리주의
그윽한 향기에  구미가 당겨 술잔을 들어올려  입술을 갖다 대었
다. 그 순간 품속 죽통  안에 있는 금은혈사가 갑자기 이상한 소
리를 냈다.

 장무기는 이내 느끼는 바가 있어 소리쳤다.

 "이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멍해져 술잔을 내려놓았다.

 장무기는 품속에서 죽통을  꺼내 금관혈사를 풀어놓았다. 그 금
사는 술잔 가까이 기어가더니  술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
버렸다. 장무기는 금사를 죽통 속에 몰아넣고 이번에는 은관혈사
를 풀었다. 은관혈사도 마찬가지로 술 한 잔을 깨끗이 비워 버렸
다. 이 한 쌍의 혈사는 짝없이는 살 수 없으므로 한 쪽만 풀어주
면 절대 달아나지 않았다.

 오 부인은 영문을 몰라 그저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다.

 "소형제, 이 한  쌍의 독사가 술을 마시니  정말 재미있는 일이
군."

 장무기는 하녀에게 말했다.

 "가서 강아지나 고양이를 잡아다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녀는 공손히 대답을 하고 물러가려는데 장무기가 만류했다.

 "낭자는 이곳에 남아 있고 다른 사람을 시키세요!"

 잠시 후 한인 한 명이 누런 개를 잡아 왔다.

 장무기는 하태충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집어 개의 입 속에 부
어넣었다. 개는 비명을 지르더니 곧 피를 흘리며 죽었다.

 오 부인은 놀란 나머지 오돌오돌 떨었다.

 "술에 독이.....  누가 우리를  독살하려던 모양인데, 장형제는
어떻게 알았지?"

 장무기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금은혈사는 독물을 즐겨 먹기  때문에 술 속의 독약 냄새를 맡
자 기뻐서 괴성을 지른 것입니다."

 하태충은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대뜸  하녀의 손목을 나꿔잡아
다그쳤다.

 "누가 이 술을 갖다 주라고 했느냐?"

 하녀는 놀란 나머지 혼비백산하여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는.....  독이 있는지  몰랐어요.  큰  주방에서 들고  왔는
데....."

 "큰 주방에서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혹시  누굴 만나지 않았느
냐?"

 "복도에서 행방(杏芳)을 만났어요.  그녀는 저를 붙잡고 얘기하
면서 주전자 뚜껑을 열어 술냄새를 맡아 보았어요."

 하태충, 오 부인, 첨춘은 서로 마주 보며 모두 두려워하는 표정
이었다. 행방은 바로 하태충 정실부인의 몸종이었다.

 장무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철금선생, 한 가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있어 줄곧 주의를
기울여 왔는데, 애당초 금은혈사가  오 부인의 발가락을 물어 사
독을 체내에 전달하게 된 것은 오 부인이 그 독약에 중독돼 있었
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예전에  오 부인에게 독을 전개했던 사
람이 바로 오늘 술에다 독을 풀어 넣을 자 일겁니다."

 하태충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한 줄기의 그림
자가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장무기는 멍치 부위에 따끔한 느낌이
들며 이미 누구에 의해 혈도가 찍히고 말았다. 앙칼진 여인의 음
성이 들린 것도 바로 그 때였다.

 "맞았다. 내가 독을 전개한 것이다!"

 난데없이 나타난 자는 몸집이 우람한 반백의 여인으로서 머리카
락이 희끗하며 양미간에 살기가 서려 있었다.

 이 여인은 대뜸 하태충에게 턱을 치켜들며 시비조로 말했다.

 "내가 술에다 지네의 극독을 풀어 넣었으니 어떻게 하겠어요?"

 오 부인은 겁먹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 동안 별고 없으셨어요?"

 이 몸집이 우람한 여인은 하태충의 정실부인이신 반숙한이었다.
또한 그의 동문 사제이기도 했다. 반숙한은 오 부인을 아예 거들
떠 보지도 않고 다시 하태충에게 다그쳤다.

 "내가 독을 풀었으니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는데, 왜 대답
이 없죠?!"

 하태충은 양미간을 접으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 소년 의원이 못마땅하게  여겨져 술에 독을 푼 것은 이해가
가지만, 만약 나까지 중독되었다면....."

 "닥쳐요! 이곳에 있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도 내 속이 풀리지 않
을 거예요!"

 그녀는 술주전자를 집어 흔들어 술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더니, 하태충앞에 내려놓고 냉랭하게 말했다.

 "난 원래 다섯 명을 모두  죽일 작정이었는데, 이 귀신 같은 녀
석에게 발각됐으니  네 사람의 목숨은  살려두겠어요. 어서 다섯
사람 중에 한 사람을 택해 그 독주를 한 잔 마시게 하세요!"

 이렇게 말하며 검을 뽑아 쥐었다.

 반숙한은 곤퓬파의 걸출한 인물로서 하태충보다 나이가 두 살이
나 더 많았다. 입문도 일찍 한데다가 무공도 하태충에 못지 않았
다. 하태충이 젊었을 때  영준하게 생겼기 때문에 사저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들의 스승인 백녹자(白鹿子)는 명교의 한 고수와 싸우다 죽음
을 당하는 바람에 미처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자 제자들은
장문인 자리를 쟁탈하기 위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 반숙한이 적극적으로 하태충을 도왔다. 그들이 힘을
합치자 막강한 세력이 형성되어 다른 사형제들이 감히사심을 품
을 수 없었다. 결국 하태충이 장문인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 것이
다. 하태충은 그녀의 은덕에 감격하여 곧 아내로 맞아들였다. 서
로 젊었을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나이가 많아지자 반숙한
은 하태충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하태충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첩을 얻기 시작했다.

 반숙한은 수십  년 동안 그를 도와온  막강한 존재였다. 게다가
적당한 구실을 내세웠을 망정  첩을 얻은 것이 마음에 걸려 더욱
아내를 경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내를 두려워하면서도 첩을 늘
려가는 일에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첩이 많아질수록 엄
처시하가 되어 갔다. 지금 아내가 독술을 자기 앞에 내려놓자 감
히 거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난 물론 독술을  마실 수 없다. 오 부인과  춘아도 마실 수 없
고..... 장무기는 날 구해 준 은인이니 저 계집애를 내세우는 수
밖에 없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친 하태충은  자리에서 일어나 잔에 독술을 따
라 양불회에게 건네주었다.

 "얘야, 네가 이 술을 마시도록 해라."

 양불회는 질겁을 했다. 조금 전에 누런 개 한 마리가 술을 마시
고 즉사하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감히  술잔을 받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싫어요! 난 마시지 않을래요!"

 하태충은 대뜸  그녀의 멱살을 잡아 강제로  마시게 하려 했다.
장무기는 지켜만 볼 수 없었다.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내가 마시겠어요."

 하태충은 아내를 의식해 만류할 수가 없었다.

 한편, 반숙한은 남편이 오  부인만 총애하는 것에 대해 짙은 질
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독살을 계획했는데, 장무기로 인
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증오심에 불탔다. 그녀는 차갑
게 말했다.

 "저 녀석은 해괴한 짓거리를 많이 하니, 독을 제거할 방법이 있
을지도 모르지. 만약 그가  대신 마시겠다면 한 잔으로선 부족하
니 독술을 깨끗이 비워야 한다!"

 장무기는 하태충에게  구원의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하태충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첨춘과 오 부인도 겁
을 잔뜩 집어 먹고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장무기를 위해 입을
열기만 하면  당장 반숙한으로 부터 날벼락이  떨어질 것만 같았
다.

 장무기의 가슴 밑바닥에서 찬바람이 일었다.

 '저 사람들의 생명은 내가 구해 준 것인데, 내가 위기에 처하니
모두 수수방관만 하는구나.....'

 그는 죽음에 대해 별다른  두려움은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죽
음을 초월한 것이다. 그러나 양불회가 걱정되었다.

 "첨낭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누이
를 곤륜산 좌망봉에 있는  그녀의 아버님께 데려다 주실 수 있겠
습니까?"

 첨춘은 자신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스승님을 쳐다보았다.

 하태충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장무기에게 대답했다.

 "좋아. 내가 그녀의 아버님께 데려가 줄께."

 그러나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곤륜산의 범위가 천 리나  되는데, 좌망봉이 어디에 붙어 있는
지 알아야지.....'

 그녀의 생각은  자연히 표정으로  표출되었다. 장무기는 그녀가
건성으로 대답하는 느낌을  받자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혀 냉소를
날렸다.

 "명문정파라 자처하는 곤륜파가,  알고 보니 형편없었군. 좋소,
어서 술을 나에게 주시오."

 하태충은 그의 모욕적인 말에  발끈했으나, 이제 곧 죽게 될 것
을 생각하니 노골적으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는 사손의 행방
을 추궁할 생각도 잊은  채 술주전자를 건네주었다. 장무기는 이
미 죽을 결심을 한  터였으므로 주저없이 술을 모두 꿀꺽꿀꺽 마
셔 버렸다. 양불회는 장무기를 끌어안고 방성통곡을 했다.

 반숙한은 코웃음을 날렸다.

 "너의 의술이 제아무리 뛰어났다 해도 움직일 수 없으면 자신을
구할 재간이 없겠지!"

 그녀는 장무기의 어깨, 허리 등 여러 부위에 혈도를 찍었다. 이
어 하태충, 첨춘, 오 부인, 양불회에게도 혈도를 찍었다.

 "두 시진 후에 너희들의 혈도를 풀어 주러 오겠다."

 그녀가 혈도를 찍을 때 하태충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반숙한은 한쪽에서 떨고 있는 하녀에게 호통을 쳤다.

 "모두 밖으로 나가라!"

 그녀는 맨  마지막으로 방을 나와 밖에서  문을 잠그어 버렸다.
독술을 마신 장무기는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 엄습해 왔다.
그러나 고통을 참는데 익숙해진  그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고통을 참으며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올려 사손으로부터 배
운 방법으로 우선 몸에  찍힌 혈도를 차례차례 풀어나갔다. 그리
고 나서 머리카락을 몇 올  뽑아 입 안에 넣어 후두를 살살 건드
리자 즉시 울컥울컥 뱃속의  독술을 거의 다 토해냈다. 하태충과
첨춘 등은 혈도가 찍힌 그가 움직이자 모두 의아해 했다. 하태충
은 그가 술을 토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혈도가 찍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장무기는 이제 더 이상  토해 낼 것이 없었다. 그저 헛구역질만
할 뿐이었다. 우선 양불회의  혈도부터 풀어 주려 했다. 한데 반
숙한의 점혈수법이  독특하여 좀처럼 풀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해혈수법으로 거듭 시험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할 처지가 못 되었
다. 그는 곧  양불회를 안아 창문을 열고는  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창문 밖에 내려놓았다.

 하태충도 반 시진 후면 자신의  진기로서 찍힌 혈도를 풀 수 있
었다. 지금 장무기가  달아나려는 것을 보자 당황해졌다. 아내에
게 나중에 문책당할 것도 문제겠지만, 장무기가 달아나 자기네들
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퍼뜨린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어떠
한 수를 써서라도 장무기를 죽여야만 했다. 그는 아내에게 이 사
실을 알리기 위해 소리를 지르려 했다. 장무기는 그것을 이미 예
측하고 품속에서 검은 알약을  꺼내 오 부인의 입 속에 쑤셔넣었
다.

 "이것은 구비환(鳩批丸)이오. 열 두  시진 후엔 오 부인의 오장
이 파열돼 죽게  될 것이오. 내가 해약을 삼십  리 밖 나무 위에
올려놓고 표시를 해 놓을 테니 사람을 시켜 갖고 오도록 하시오.
그러나 내가 붙잡혀 죽는다면 부인도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소형제, 내가 사는  이곳 삼성당은 비록 용담호혈은 아니지만,
너의 실력으로선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다."

 장무기도 그의 말이 결코 근거없는 위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
다.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나 오  부인이 복용한 이 구비환의  독성은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해독할 수 없을 것이오."

 "좋다. 나의 혈도를 풀어 주면 내가 직접 널 데리고 나가겠다."

 장무기는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지금  상황으로선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하태충에 찍힌 혈도를 풀기 위해 노력해 보았
으나 소용이 없었다. 물론 그의 해혈수법도 독특했다.

 그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곤퓬파의 점혈수법은 과연 무섭군. 의부는 나에게 일곱가지 해
혈수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아무런 효용이 없으니.....'

 하태충도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녀석의 해혈수법은  괴이하면서도 정묘하군. 마누라가 분명
녀석의 일곱 군데 혈도를 찍었는데 스스로 간단하게 풀다니.....
무당파가 최근에 강호에서 명성을  크게 떨치고 있는 게 결코 우
연한 일만은 아니군. 그날  무당산에서 싸움을 벌이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다. 이 꼬마 녀석의  실력이 이 정도이니 장삼봉과 그
의 제자들은 오죽하겠는가?'

 하태충은 장무기가 사손으로부터 스스로 혈도를 푸는 비법을 가
르침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무당파는 나름대로
무림에 위명을 떨칠 만한  비학을 지니고 있었지만, 장무기의 이
두 가지 비법은 무당파와 무관했다.

 하태충은 그의 해혈수법이 효용을  거두지 못하자 한 가지 묘책
이 떠올랐다.

 "향차를 한 잔만 마시게 해줬으면 좋겠다."

 장무기는 그가 이러한 상황에서  왜 갑자기 차를 마시려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그러나 애첩의 생명을 생각해 감히 자기에
게 허튼 수작을 부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차를 한 잔 마시게
해주었다.

 하태충은 차를 삼키지 않고  입 안에서 한 번 굴리더니, 갑자기
자기의 팔꿈치 안쪽  청냉연(淸冷淵)을 겨냥해 힘차게 뿜어냈다.
한 줄기의 물살이 쏟아지자 팔에 찍힌 혈도가 이내 풀렸다. 장무
기는 곤륜산  삼성당에 온 후로부터 줄곧  하태충의 연약한 면만
보아왔다. 그런데 지금 그가 신공을 전개하는 것을 보자 내심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곤륜파의 장문인답게 심후한 무공을 지니고 있군. 보아하
니 그의 무공은 나의  이사백님과 금화파파, 멸절사태에 비해 손
색이 없는 것 같다. 만약  그가 물화살을 내 얼굴에 뿜었다면 이
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태충은 곧이어 스스로 자신의 다리 부위 혈도를 풀었다.

 "우선 해약을  내놓아라. 그러면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게 해주
마."

 장무기는 고개를 내둘렀다.

 하태충은 다급해졌다.

 "나는 곤륜파의 장문이다. 너  같은 어린애에게 약속을 어길 것
같느냐? 만약  그 동안  독성이 발작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느
냐?"

 장무기는 단호하게 말했다.

 "독성이 절대발작하지 않을  것이오. 더구나 해약에다 한 가지
약초를 더 첨가해야 하므로 지금은 내줄 수가 없소."

 하태충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일단 몰래 이곳을 빠져 나가자."

 두 사람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는 양불회의 등에다
소매를 살짝 떨치자 이내  혈도가 풀어졌다. 실로 경쾌하고 절묘
한 수법이었다. 장무기는 다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태충은 그
의 눈빛에서  마음을 꿰뚫어 보는지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띄더
니, 두 사람을  데리고 삼성당 뒤쪽 화원을  끼고 돌아 옆문으로
빠져 나갔다.

 삼성당은 모두 아홉 칸으로 되어 있었다. 후화원의 옆문을 나와
꾸불꾸불한 꽃길을 지나 다시  여러 군데의 대청을 뚫고 나갔다.
그는 곳마다 처마와 처마가 줄줄이 이어진데다가 문이 워낙 많아
하태충이 앞장서지 않았다면  장무기는 영락없이 길을 잃었을 것
이다. 설령 곤륜파 제자들의 저지를 받지 않는다 해도 이곳을 빠
져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삼성당을 벗어나자 하태충은 양불회를 한 손으로 안고, 한 손으
로는 장무기를 잡더니 경공술을 전개해 서북쪽으로 질주했다. 장
무기는 달리는 도중에 품속에서 해독환을 두 알 꺼내 삼켰다. 한
데, 그들이 한참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여인의 앙칼진 외침소리
가 들려왔다.
 "하태충..... 하태충! 멈추지 못하겠소?"

 바람결에 실려온 이 외침소리는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기
도 하고 지척지간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반숙한의 음성이라는 사실이었다.

 하태충은 엉거주춤하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아내가 뒤쫓아온 모양이니 더  이상 너희들을 데리고 갈 수 없
다. 이제부터 너희들끼리 달아나도록 해라."

 장무기는 내심 생각했다.

 '철금선생은 아주 나쁜 사람이 아니군.....'

 그의 순진함은 너무나 쉽게 감동하게 했다.

 "철금선생, 이젠 돌아가세요.  내가 오 부인에게 복용시킨 것은
독약이 아니니 아마 염려 마세요."

 하태충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정말 독약이 아니란 말이냐?"

 장무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손으로 오 부인을 구했는데 어떻게 내 손으로 다시 해칠 수
가 있겠습니까?"

 이때 반숙한의 외침이 다시 들려왔다.

 "하태충.....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소?"

 그녀의 음성이 훨씬 가까이 들렸다.

 하태충이 장무기와 양불회를 데리고 달아난 것은 순전히 애첩의
안위가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속임수 였음을 알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그는 다짜고짜 장무기의 뺨을 철썩철썩
후려쳤다. 장무기는 이내 얼굴이 붉게 부어올라 입가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장무기는 비로소 후회가 됐다.

 '내가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  이젠 진심을 알았으니 나는 물론
이거니와 불회 누이까지 목숨을 잃게 됐군.....'

 하태충이 다시 뺨을 때리려 하자 장무기는 발악을 하듯 무당 권
법 중의  한 초식인 도기룡(倒騎龍)을 전개해  주먹을 쭉 뻗어냈
다. 만약 유연주 등이 이 초식을 전개했다면 위력이 상당했을 것
이다. 그러나 장무기의  보잘것없는 실력으로서는 계란으로 바위
를 깨려는 꼴이었다. 하태충은  살짝 옆으로 피하며 그의 오른쪽
눈을 적중시켰다. 그 즉시 눈두덩이 부어 올랐다. 장무기는 도저
히 상대방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아예 반항을 포기
했다.

 장무기는 눈에서 별들이  보일 정도로 호되게 얻어맞았다. 한참 
정신없이 맞고 있는데 반숙한이 여제자 둘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그녀는 장무기가 전혀 반항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재미가 없다
고 느꼈는지 하태충에게 소리쳤다.

 "이번엔 저 계집애를 때려 보시지!"

 그녀의 몸에 잔인한 피가 흐르는 게 분명했다. 하태충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이내 몸을  돌려 양불회의 뺨을 후려쳤다. 양불회는 
아픔을 견디지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장무기는 참을 수 없었다.

 "이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거냐? 차라리 날 죽여라!"

 그는 하태충이 다시 양불회에게  손찌검을 하려는 것을 보고 다
짜고짜 그의 가슴에 머리를 쳐 박으며 덤벼들었다.

 반숙한이 냉소를 날렸다.

 "저 어린  녀석도 의리를 아는데 당신같이  의리가 없고 박정한 
사람은 느끼는 게 없나요?"

 하태충은 얼굴이 붉어지며 장무기의 뒷덜미를 잡아 냅다 한쪽으
로 집어던지며 호통했다.

 "이 잡종 같은 놈! 저승으로 가서 네 애비, 에미나 만나거라!"

 이번만큼은 진력을 사용해 장무기를 집어던진 것이다.

 장무기는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러 멀리 떨어져 있는 바
윗돌을 향해 머리부터 부딪쳐  갔다. 영락없이 뇌가 파열되어 목
숨을 잃게  될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 갈래의 
힘줄기가 뻗쳐와 장무기를 옆으로 밀어낸 것도 바로 이 순간이었
다. 

 장무기는 별다른 충격  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혼비백산
하여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퉁퉁 부은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흰색 장포를 입은 중년 서생이었다. 반숙한, 하태충 
부부는 서로 마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서생이 언제 
이곳에 당도했으며, 어느  방향에서 왔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설령 그가 벌써부터 바위  뒤에 숨어 있었다 해도 자기네들의 예
민한 감각으로 눈치를 못 챌 리가 없었다. 하태충이 방금 장무기
를 집어던진 힘은 최소한 오, 육백 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서생
은 소매를 살짝 떨쳐 그 힘을 와해 시키지 않았던가! 이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중년 서생은 냉랭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호수처럼 깊은 그
의 눈에는 왠지 우수가 담겨져 있는것 같았다.

 하태충은 헛기침을 하고 나서 물었다.

 "귀하는 누군지.....? 무엇 때문에 우리 곤륜파가 하는 일에 참
견을 하는 거요?"

 중년 서생은 담담하게 말했다.

 "두 분이 바로 철금선생과 하 부인이오? 나는 양소라고 하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하태충, 반숙한, 장무기는 동시에 놀란 
외침을 토했다.

 그러나 장무기의 외침 속에는 기쁨이 섞여 있었고, 하태충 부부
의 외침 속에는 분노가 깔려 있었다.

 곤륜파의 두 여제자는 분부가  떨어지기도 전에 검을 뽑아 사부
와 사모님께  건네주었다.하태충은 즉시 장검을  가슴 앞에 세워 
설포교(雪抱僑)의 자세를  취했고, 반숙한은  검끝으로 비스듬히 
땅을 가리키며 소목엽(掃木葉)의  자세를 전개했다. 그들은 상대
방이 만만찮은 강적임을 알고  곤륜파 검법 중에 가장 심오한 초
식을 펼친 것이다.

 양소는 그들을 무시하듯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다만 장무
기의 외침 속에 기쁨이 담겨 있는 것이 다소 이상하게 느껴져 그
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때 장무기는  눈두덩이가 붓고 코가  시퍼렇게 멍들어 얼굴이 
온통 피로 뒤범벅돼 있었지만,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기쁨이 그
대로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장무기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소리쳤다.

 "다...당신이 정말 명교의 광명좌사자 양소 양백부님이신가요?"

 양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날 어떻게 알고 있지?"

 장무기는 양불회를 가리키며 다시 흥분에 들뜬 음성으로 소리쳤
다.

 "얘가 바로 당신의 딸이에요."

 그는 양불회를 끌고 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불회야, 어서 아버지라고 불러라.  어서! 우린 드디어 찾아 냈
어!"

 양불회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양소를 쳐다보았다. 장무기의
말을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양소가 아버지든 아
니든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엄마는 어디에 있지? 엄마는  왜 아직도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
는 거야?"

 양소는 전신에 한 차례 진동이 일며 냅다 장무기의 어깨를 움켜
쥐었다.

 "얘야, 방금  뭐라고 했느냐? 이.....  여자애가 누구의 딸이라
고? 그의 어머니는 누구냐?"

 그가 힘주어 움켜쥐는 바람에 장무기는 어깨쭉지가 떨어져 나가
는 것 같았다. 좀처럼 비명을 지르지 않는 그도 앗! 하고 소리치
며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당신의 딸이에요. 그녀의 어머니가 바로 아미파의 여협 
기효부예요."

 본디 창백한 양소의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고, 음성마저 떨
려 나왔다.

 "그녀에게 딸이..... 있었단  말이냐?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느
냐?"

 그는 얼른 양불회를 안았다. 하태충에게 맞아 뺨이 부어 있지만 
기효부와 닮은  데가 많았다. 그가  직접 양불회에게 물으려는데 
홀연 목에 걸려 있는 검은색의 쇠줄을 발견했다. 그 가느다란 쇠
줄 끝에 철패가 매달려  있는데, 한복판에 금색으로 불길 형상이 
새겨져 있으니, 바로  자기가 기효부에게 준 명교의 철염령(鐵炎
令)이었다. 이제는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불회를 품안
에 꼭 끌어안으며 다급히 물었다.

 "너의 어머니는 어디 있느냐?"

 양불회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엄마는 하늘나라로 갔어요. 나도  엄마를 찾고 있는데 저희 엄
마를 보지 못했나요?"

 양소는 그녀의 나이가 어려  말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자 장무기
에게 시선을 던졌다.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양백부님, 제 말을 듣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기 아주머니는 
자기의 스승님 손에 목숨을 잃었어요. 죽기 전에 저더러....."

 양소가 갑자기악을 쓰듯 소리쳤다.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그는 엄청난 충격에 이성을 잃었다. 장무기는 그에게 팔이 잡혀 
있었는데 양소가 악을 쓰는 순간 그만 팔뼈가 부러졌다. 그와 동
시에 양소와  함께 한쪽에 쓰러졌다.  양소는 여전히 오른손으로 
딸을 안고 있었지만 눈을  희끄무레 까뒤집은 채 기절해 있었다. 
엄청난 충격을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태충
과 반숙한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장검을  뻗어내 양소의 목과 
미간을 겨냥했다.

 양소는 명교의 대고수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반숙한
과 하태충은  스승님이 명교 고수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만 알 
뿐 흉수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곤륜파의 동
문들은 모두 양소의 소행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하태충 부
부는 이곳에서 갑자기 양소를  만나게 되자, 이심전심 이미 살의
(殺意)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출수를 하기도 전에 양소가 스스
로 까무라쳤으니,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라 생각해 즉각 급소를 
겨냥하게 된 것이다.

 반숙한이 잔인하게 말했다.

 "우선 놈의 사지부터 자르세요!"

 하태충은 여부가 있겠느냐는 듯 신이 나서 대답했다.

 "알았소!"

 양소는 죽음이  눈앞에 닥쳤다는 사실도  모르고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다급해진 것은 그가 아니라 장무기였다. 그는 팔이 
부러진 고통으로 인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기각을 잃지 않고, 
황급히 발끝으로  양소의 정수리  백회혈(百會穴)을 살짝 걷어찼
다.

 백회혈은 뇌의  중추혈도로서 가벼운 충격을  받자 양소는 이내 
깨어나 눈을 떴다.  그 순간 음산한 한기가  미간을 엄습해 오는 
것을 직감했다. 그의 몸이 마치 용수철에 의해 튕겨지듯 곧장 뒤
로 날아간 것도 바로 이  순간이었다. 오랜 경험에 의해 몸에 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뒤로 날아가는 그의 몸은, 빳빳한 것이 흡
사 죽은 송장의 목에  밧줄을 걸어 뒤에서 힘껏 끌어당겨진 것처
럼 보였다. 그가 날아가는  방향에 따라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피빛 무지개가 수놓아졌다. 뒤로 일 장 남짓 날아가 떨어져 내린 
그의 가슴에  길다란 혈흔(血痕)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미간을 겨냥했던  반숙한의 검끝이  아슬아슬하게 코끝은 스치고 
가슴에 가벼운 상처를 낸 것이다. 그리고 사지를 자르기 위해 떨
쳐졌던 하태충의  검도 빗나가 단지 팔뚝에상처를 냈을 뿐이었
다.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만약 반숙한의  검끝이 반 치 
가량만  더 깊이 파고 들었다면, 양소는 가슴이 찢어져 오장육부
를 쏟아내며 참사를 당했을 것이다.

 양소가 전개한 신법은 실로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놀란 것은 오
히려 하태충  부부였다. 그들은 분명  눈앞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불구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입을 멍하니 벌린  채 그들은 넋을 
잃었다. 그 순간 양소의 몸이 다시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튕겨
왔다.

 뚝! 뚝!

 하태충 부부의 장검이  부러졌다. 양소가 전광석화같이 발로 걷
어차 부러뜨린  것이다. 하태충 부부의 무공으로  미루어 볼 때, 
양소의 무학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동시에 두 자루의 장검을 
걷어차 부러뜨릴 수는  없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초식이 워낙 괴이한데다가 하태충 부부는 그가 부상을 입은 상태
에서 느닷없이 반격을  해오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흠칫 놀라 미처 검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모든 변화는 한 순간에  일어난 것에 불과했다. 더욱 놀라운 것
은 양소의 괴초가 그것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잇따
라 두 발을 날리자  부러진 장검의 앞토막이 격출되어 제각기 하
태충 부부를 행해 뻗쳐갔다.  하태충 부부는 반 토막의 장검으로 
막아야만 했다.  순간, 맑은 금속성이 들리며  하태충 부부는 반 
토막의 검끝으로 맞섰으나  손목이 얼얼했다.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나 서북 방향과  동남쪽으로 서로 갈라섰
다. 그들 손에 쥐어져 있는  장검은 비록 반 토막밖에 남아 있지 
않았으나, 한 사람은  가슴앞으로 들어올려 하늘을 가리키고, 한
사람은 허리 아래로  내려 땅을 겨냥했다. 그것은 음양합벽(陰陽
合壁)으로서 바로  곤륜파의 진산비학인  양의검법의 기수식이었
다. 그들은  내심 다소 당황했지만  기세만큼은 태산을 압도하듯 
위압감을 주었다.

 곤륜파의 양의검법은 이미 수백  년 전에 명성을 얻은 천하명검
법중의 하나였다. 하태충 부부는 동문 사형매로서 어려서부터 무
공을 함께 연마해 왔기 때문에, 특히 이 양의검법에 대해서는 자
신만만 했다.

 양소는 곤륜파의 고수들과 겨루어  본 적이 있어 이 양의검법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두렵지는 않지만 상대방을 격패하
려면 최소한 백여 초식  이상을 맞부딪쳐야 하 것이다. 한데, 지
금은 기효부의 비보로 인해 정신 집중이 어려운 데다가 부상까지 
입어 시간을 오래 끌면  유리할 게 없었다. 하여, 냉랭하게 말했
다.

 "곤륜파는 갈수록 검법이  퇴보하는군.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겠
지만 나중에 필시 이 빚을 갚으리라!"

 그는 왼손으로 양불회를 안고 오른손으로 장무기를 잡아 아무런 
자세도 취한 것 같지 않았는데  홀연 일 장 밖으로 물러났다. 그
리고 눈깜짝할 사이에 이미 십여 장 밖으로 벗어났다.

 하태충 부부는 그의 귀신  같은 신법에 다시 넋을 잃었다. 그들
은 이 대마두가 스스로 물러간 것을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였으니 
감히 추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양소는 단숨에 몇 리  밖으로 달려나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는 
장무기에게 물었다.

 "기효부 낭자가 어떻게 해서 죽음을 당했느냐?"

 장무기는 독술을 토해  내고 해독환을 복용했지만, 아직 체내의 
독이 말끔히 제거되지 않아  다시 복통이 일어났다. 그는 금관혈
사를 꺼내 자기의 왼손  식지를 깨물어 독을 빨아내게 하며 기효
부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병을 치료해 주었으며, 어떻
게 해서 멸절사태와 만났고 목숨을 잃게 되었는지 소상히 얘기해 
주었다. 이 무렵 금관혈사는 그의 체내의 독소를 모두 뽑아냈다.

 양소는 기효부가 임종을 앞두고 한 말을 다시 자세하게 듣고 나
서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멸절, 그 잔인한 계집중의 요구에 따라서 날 죽였다면, 아미파
를 위해 큰 공을 세워  장문까지 계승할 수 있었을 텐데..... 효
부! 왜  죽음을 무릅쓰고 거절을 했소?  거짓이라도 좋으니 일단 
승락만 했다면 우린 다시  만나게 됐을 것이고 당신도 목숨을 잃
지 않았을 게 아니오!?"

 장무기가 그의 말을 받았다.

 "기 아주머니는  인품이 곧아 당신에게 독수를  전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승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양소는 처연하게 웃었다.

 "너야말로 효부의 지기구나. 그녀의 스승이 그런 잔인한 수단을 
전개할 줄이야....."

 장무기는 그의 품안에 안겨 있는 불회를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저는 기 아주머니의 유명에 따라 불회누이를 당신에게....."

 양소의 몸에 한 차례 진동이 일었다.

 "불회라고?"

 그는 직접 양불회에게 물었다.

 "얘야, 내  착한 보배야,  너의 성은 무엇이며,  이름은 무엇이
냐?"

 양불회는 이내 대답했다.

 "성은 양이고, 이름은 불회예요."

 양소는 앙천장소를  했다. 그의  장소(長簫)에 주위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한참 후에야 그는  장소를 거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과연 성이 양이군.  불회라..... 볼회..... 효부! 당신은 비록 
억지로 나에게 몸을 잃었지만 후회하지 않았구료....."

 장무기는 기효부에게서 두 사람 사이에 얽힌 얘기를 들었다. 지
금 양소를 보니 비록 그녀에 비해 나이가 많은 것이 흠이지만 영
준비범하여 멋진 미남자임에 분명했다. 순진해 보이기만 한 은이
정 숙부에 비해,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여건을모두 갖추고 있
는 것 같았다. 기효부는 비록 강압에 못 이겨 순결을 상실했지만 
결국은 진심으로 그를 흠모하게  된 것이다. 장무기는 아직 어려 
남녀지간의 복잡 미묘한  감정 변화를 알랴마는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다.

 장무기는 부러진 팔에 다시 통증을  느껴 나뭇 가지 두 개를 꺾
어 양쪽에 받치고 나무 껍질로 동여맸다. 양소는 가가 어린 나이
에 익숙한 솜씨로 접골을 하는 것을 보자 다소 의아해 했다.

 장무기는 곧 작별을 고했다.

 "양 백부님,  이제 기 아주머니의  분부대로 불회에게 아버님을 
찾아 주었으니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양소는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불원천리 내 딸을 데려다 주었는데, 내 어찌 보답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원하는 것이 있으면  서슴없이 말해 보아라. 
이 양소가 해내지 못하는 일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장무기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양 백부님, 기 아주머니를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것 같군요. 혹
시 그녀의 죽음이 헛된 게 아닌지 걱정이 되는군요."

 양소는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장무기는 힘주어 말했다.

 "기아주머니는 저를 과소평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따님을 당신
께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을 겁니다. 만약 제가 무엇을 바라는 놈
이라면 애당초 부탁이나 했겠습니까?"

 그는 내심 투덜거렸다.

 '불화와 이것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겪어야만 했던가!
죽을 고비도 여러 번 있었지. 만약 내가 이득을 바라는 소인배라
면, 오늘 당신네 부녀는 상봉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는 공치사가 싫어 그간의 고생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몸
을 숙여 정중히 읍을 하더니 곧 떠나가려 했다.

 양소가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너는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나 양소는 은원이 분
명한 사람이다. 자 나와  함께 가자, 일년 이내에 너를 절세고수
로 만들어 주겠다."

 장무기는 이번  기회에 강호가 얼마나  험악한 곳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강한 무공을 배울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절대 마교의 사람들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는 태사부의 말
씀이 떠올랐다. 더군다나  자기는 수명이 반 년  남짓 밖에 남지 
않았다. 설령  천하무적의 무공을 연성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
가!

 "양 백부님의  뜻은 고맙지만, 저는  무당제자로서 다른 문파의 
무공을 배울 수 없습니다."

 양소의 낯빛이 약간 굳어졌다.

 "네가 무당파의 제자라고? 그럼 은이정 은육협과도....."

 "그분은 저의 사숙님입니다. 선친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은육숙
은 친숙부님 못지 않게 저에게 잘해 주었습니다. 저는 기 아주머
니의 부탁을 받아 불회를 이곳까지 데려왔지만, 은육숙에게는 미
안한 생각이 없지 않습니다."

 양소는 그의 눈과 마주치자 내심 죄의식을 느껴 손을 흔들며 작
별을 고했다.

 "너의 은혜는 나중에 보답하겠다.  그럼 너의 앞날에 하늘의 가
호가 있길 바라겠다."

 그는 몸을 번뜩이더니 이미 몇 장 밖으로 물러났다.

 양불회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무기 오빠! 무기 오빠!"

 그러나 양소는 신법을 전개해 이내 멀어져 갔다. 따라서 불회의 
외침소리도 차츰 멀어져 갔다.


                                 ----- 제 3 권 2 장 끝 -----






반응형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천도룡기 21~25  (0) 2023.03.29
의천도룡기 16~20  (0) 2023.03.29
의천도룡기 6~10  (0) 2023.03.28
의천도룡기 1-5  (0) 2023.03.28
패러디를 통한 시쓰기와 창작 교육  (0) 2023.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