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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의천도룡기 41~45

by Casey,Riley 202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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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제 3 장  불문(佛門)에 귀의(歸依)한 마성(魔性) 


 장무기가 사손의 손을 잡고  막 떠나려는데 사손이 갑자기 소리
쳤다.

 그는 많은 소림  승려 중에 한 노승을  가리키며 싸늘하게 외쳤
다.

 "성곤, 일어나라! 천하  영웅들 앞에서 그간에 있었던 우여곡절
을 분명하게 밝혀라!"

 군호들은 깜짝 놀랐다. 그가 가리킨 노승은 등이 굽고 꾀죄죄하
게 생겨 성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장무기는 그가 성곤이 아니
라고 말하려는데 사손이 다시 소리쳤다.

 "성곤, 넌 용모를 바꿀  수 있을 망정 음성마저 바꾸진 못했다.
너의 기침소리를 듣고 난 대번에 네가 누군지 알아냈다.

 그 노승은 징그럽게 웃었다.

 "지금 무슨 잠꼬대를 하고 있는  거냐? 네 말을 믿을 사람은 아
무도 없다!"

 그가 입을 열자 장무기는  즉시 가슴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그
날 광명정에서 그는 건곤일기대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성곤의
얼굴을 대하기 앞서 그의  음성부터 들었기 때문에 유난히 그 음
성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지금 성곤이 비록 일부러 음성마
저 변성시켰지만 외모와는 달리 역시 빈틈이 남아 있었다.

 장무기는 대뜸 앞으로 뛰쳐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원진대사, 아니 성곤 선배님, 대장부라면 자신이 행한 일에 대
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소? 이젠 자신의 진면목을 밝히시오!"

 성곤은 변장을  하여 사람 틈바구니에  섞여 있었으므로 좀처럼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황삼 여인이 주지약을 제압하는
순간 너무나  뜻밖인지라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게 된 것이
다.

 사손은 실명한 후 청각이 유난히 예민해졌다. 게다가 성곤에 대
한 원한이 뼈속 깊이 사무쳐 하루도 잊은 날이 없었다. 사손에게
있어 성곤의 기침소리는  청천벽력과도 같았으며 즉시 그를 알아
낼 수 있었다.

 성곤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곧 싸늘하게 외쳤다.

 "소림의 승려들은 들어라!  마교가 불문성지를 어지럽히고 본파
를 멸시하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모두들  그들과 대항해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없애 버려라!"

 공지는 사형 공문이 본사의 반도들에게 위협을 받은 바 있기 때
문에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오랫 동안 분노를 억제해 왔다.
지금 원진이  명교와 정면 대결을 벌이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을
듣자 안색이 크게 변했다.  만약 혼전이 벌어진다면 본사의 승려
들은 엄청난 손상을 입을 게 뻔했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므로 그도 즉시 목청을 높여 외쳤다.

 "공문방장께선 이미 저 반도인  원진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 모
든 제자들은  우선 저 반도를 제압하고  다시 장문인을 구하도록
해라!"

 삽시간에 주위에 큰 혼란이 일었다. 장무기는 주지약이 땅에 쓰
러진 채 실의에 잠겨 있는  것을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어 곧 앞
으로 다가가  혈도를 풀어주고 부축해  일으켰다. 주지약은 그의
손을 뿌리치더니 아무 소리없이 아미파 제자들에게 돌아갔다.

 이때 사손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 일은 나하고 성곤  두 사람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니만치,
모든 은원을 우리 두  사람이 해결할 것이오. 사부, 당신은 나에
게 무공을 전수해 주었소.  그러나 성곤, 너는 나의 혈육을 죽였
다. 당신은  은혜와 나의  원한을 이번 기회에  깨끗이 청산하겠
다!"

 성곤은 공지가 뜻밖의 명령을  내린 것을 듣고는 가슴이 철렁했
다. 소림 승려들 중에는 비록 자기에게 포섭된 자도 적지 않지만
그보다 공지의 명령에 따르는 자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었다. 일
단 정면 충돌이 벌어지면  자기가 이끄는 세력이 불리할 게 뻔했
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성곤은 소림 장문인의 자리를 넘보는 야욕
마저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사손은 잔악무도한 놈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만약 놈을 제압
한다면 모든 죄목을 그에게  뒤지어 씌울수가 있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서 무공을 배웠고 또한  앞을 볼 수 없으니 어떤 상황에서
도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재빨리 상황을 저울질해 본 연후에 결정을 내렸다.

 "사손,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강호의 영웅 철검들이 네 손에 희
생을 당했는지 아느냐? 넌 그 엄청난 죄과를 뉘우치기는 커녕 오
늘 명교의 마두들을 앞세워 소림의 불문성지를 찾아와 소란을 피
우며 천하의 영웅과 적대시하려  들다니! 내 일찌기 너에게 무공
을 전수해 준 것이  후회막급할 뿐이다. 지금이라도 무림의 협의
도를 위해  기사멸조(欺師滅祖)의 역도인  네놈을 처단하고 말리
라!"

 그는 의연하게 말하며 성큼성큼 사손에게 다가갔다.

 사손은 소리 높여 외쳤다.

 "천하의 영웅들이여, 내 말  좀 들어보소! 나 사손의 무공은 이
성곤 사부로부터 전수받은 게  틀림없소. 다시말해 그가 나의 사
부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소. 그러나  나의 아내를 겁탈하고
나의 부모와 자식을 살해한  흉수도 바로 여기에 있는 이 성곤이
오! 이 또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오. 물론 스승을 받들어야 하
는 것이  우리 무림인의 본분이지만 멸족을  당한 원한을 갚아야
하는 것도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소? 스승이 존귀한들 어찌 나를
낳아준 부모만 하겠소? 여러분,  내가 그에게 복수를 하는 게 당
연하지 않소이까?"

 사방에서 군호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복수를 해야 하오!"

 "성곤을 죽여라!"

 성곤은 아무 말 없이  사손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뻗어냈다. 사
손의 입을 봉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사손은 살짝 몸을 옆으로  틀며 급소를 피했으나 팍! 하는 소리
와 함께 성곤의 일장이 어깨쭉지에 적중되었다. 사손은 흥! 하고
냉소를 날릴 뿐 반격을 하지 않았다.

 "성곤, 왕년에 네가  나한테 장홍경천(長紅經天)의 초식을 전개
해 주었을 때 그 초식이 상대의 몸에 적중되는 순간 즉시 혼원일
기공(混元一氣功)을 끌어올려야만 결정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
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혼원일기공을 끌어올리지 않았느
냐? 나이가 늙어 이제 공력을 끌어올릴 힘조차 잃었단 말이냐?"

 알고보니, 성곤이 전개한 첫 번째 초식은 허초(虛招)였다. 그는
상대방이 피하지  않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단지 사손의 입을
막기 위해 일초를 전개했기 때문에 공력을 주입시키지 않았던 것
이다. 그래서 사손도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다.

 성곤은 이번엔 왼손으로 원을 그리며 오른손을 쭉 밀어냈다. 사
손은 옆으로 미끄러져 피하며 여전히 반격을 하지 않았다.

 성곤은 즉시 세 번째  공격을 연결시켰다. 세 번째 공격은 연환
퇴(連環腿)로서 사손의 옆구리를  노린 것이다. 이번에도 사손은
그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성곤의 발이
정확히 옆구리를 강타했다. 제아무리 철탑처럼 건장한 몸을 지니
고 있는 사손이라 할지라도 옆구리를 걷어채이자 즉시 허리가 꺾
이며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그것을 본 장무기가 다급히 외쳤다.

 "의부님! 어서 반격하세요. 왜 반격을 하지 않습니까?"

 사손은 비틀거리며간신히  몸을 고정시키고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한때 나의 사부였다. 내가 그에게 삼 초를 양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말을 내뱉기 무섭게  포효하듯 기합을 길게 토하며 성곤에게
질풍같이 쌍장을 떨쳐냈다.

 성곤은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빌어먹을 놈이 나에게 깊은 원한을 갖고 있어 싸움이 시작되자
마자 미친 개처럼 덤벼들  줄 알았는데..... 진작 녀석이 삼초를
양보할 줄 알았다면 일찌감치 살수를 전개하는 건데.....'

 그는 좋은  기회를 놓친 게 후회스러웠다.  그는 사손의 장력이
매우 위력적인  것을 보자 왼손으로 막으며  반원을 그려 재빨리
사손의 등 뒤로 돌아갔다. 사손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약점잡
아 소리없이 그의 등 뒤를 향해 일장을 밀어냈다. 그러나 사손은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뒤쪽을 향해 발로 걷어차냈다.

 성곤은 살짝 위로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거대한 독수리처럼 덮
쳐내렸다. 그의 나이는 고희를  넘겼지만 젊은이 못지 않게 몸놀
림이 민첩했다. 사손이 청각으로  그의 위치를 간파해 쌍장을 위
로 뻗쳐내자 성곤은 재차 허공으로 튕겨져 정묘하게 회전하며 두
번째 공중 공격을 시도했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쾌속한 타법을
구사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칠, 팔십 초식을 교환했다.

 사손은 비록 앞이 보이지 않지만 성곤으로부터 무공을 전수받았
으므로 그의 모든 무공 초식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는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자기가 일장을 전개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대
처할 것이며 잇따라 어떤 변화를 구사할 것인지 십중팔구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사손은  성곤보다 십여 세 어리며 빙화도에서 
혹한과 무더위를  견뎌가며 부단히 내공수련을 해왔기 때문에 진
력(眞力)면에선 오히려 한 수 위였다.

 장무기는 한쪽에선  긴장된 표정으로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는
사손이 성곤에게 얼마나 깊은 원한을 갖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손이  처음부터 자신의 목숨 따위는 도외
시한 양패구상의 타법을 구사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뜻밖
에도 사손은 일초일식을 매우 신중하게 전개할 뿐 아니라 공격못
지 않게 수비에도 상당히 신중을 기하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장무기는 그의 예상 밖의 행동에 처음에는 의아해 했으나 곧 그
까닭을 깨닫게 되었다. 성곤의 무공은 상상 외로 고강하여 도액,
도난 등 소림 삼승과 견줄 만했다. 그러니 만약 사손이 처음부터
혈기를 앞세워 무리한 공력을 전개한다면 필경 삼백 초식을 넘기
지 못한 채 스스로 지쳐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복수는 커녕 오히려 개죽음을 당하게 될 판이니, 이 점을 감안하
여 처음부터 신중한 공격을 전개하는 게 분명하리라.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아슬아슬한 장면이 속출되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또 이십여 초식을 겨루었다.

 "앗!"

 순간 사손의 입에서 싸늘한 기합이 토해지며 일권을 뻗어냈다.

 획!

 거기에 따라 예리한 파공음이 일며 그 경풍이 회오리가 되어 사
방으로 비껴나갔다.  싸움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던 군호들 중에
공동파의 관능(關能)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졌다.

 "칠상장(七傷掌)!"

 사손은 좌우  쌍권을 연속적으로 격출해 냈다.  그 위력은 실로
광풍노도와도 같았다.

 공동파의 고수들은 이 광경에 모두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칠
상장은 공동파의 진산지학(鎭山之學)이지만 사손의 손을 빌려 전
개되는 위력이 자기네들보다 더 위맹하다는 걸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곤은 삼권을 피하더니 네  번째 주먹이 뻗쳐오는 찰나 오른손
을 수평으로 밀어냈다.

 팍!

 권과 장이 맞닥뜨려지자  사손은 머리카락이 고슴도치처럼 곤두
서며 제자리에 뿌리가 박힌 듯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반면, 성곤
은 비칠거리며 세 걸음 뒤로 밀려났다. 관전을 하고 있는 군호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사손에게 갈채를 보냈다.

 이제 사손과 성곤이 원한을  맺게 된 원인이 적나라하게 밝혀졌
다. 군호들은 사손의 수단이  너무 악랄했다는 것에 분노를 느끼
면서도 그의 처절한 입장에  대해 동정심이가기도 했다.  아울러
성곤의 간교함에 모두 치를  떨었다. 하여 사손에 의해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의 군호들이 성곤보다 사손이 이기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사손은 즉시 앞으로 세 걸음 내딛으며 다시 쌍권을 연거푸 떨쳐
냈다. 그러자 성곤은 장풍으로 맞서며 재차 뒤로 세 걸음 물러났
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사손이 기선을  잡은 것이라 생각했지만
장무기는 그 반대로 내심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맙소사, 성곤이 지금  전개하는 장법은 소림의 구양공(九陽功)
이다! 이 구양공은 그가 공견신승을 스승으로 모신 후에 배운 것
이므로 의부님께선 전수받지 못했다!'

 사손은 칠상권을 연마할 당시  하루속히 성곤을 꺾기 위해 무리
한 욕심을 부렸었다. 그래서 연마하는 도중 내상을 입어 권력(拳
力)을 펼치는데 결함이 있었다.  성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뒤로 물러나며 소림의  구양공을 전개한 것이다.
사손이 일권을 떨쳐낼 때마다 성곤은 그 권력의 칠성(七成)을 구
양공으로 와해시키는  동시에 나머지  삼성(三成)을 반탄시켜 냈
다. 즉, 구양공의  차력타력(借力打力) 수법을 암암리에 펼친 것
이다.

 사손은 단숨에 십이 권을  격출했고, 성곤은 수십 보 뒤로 물러
나 언뜻 보기에는 사손이 크게 우위를 차지한 것 같지만 사실 내
상이 갈수록 심해졌다.

 장무기는 다급해졌다.  당장 앞으로  나서서 의부님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의부님이 꿈에서까
지 몽매불망 벼루어오던 복수의 기회가 아닌가! 장무기는 도저히
나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의부님은 필경
피를 토하며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뻔했다.

 이때 공지가 갑자기 냉랭하게 소리쳤다.

 "원진, 나의 사형이 왕년에 너에게 구양공을 전수해 준 것은 협
의를 위해 이바지하라는 뜻이었지, 너더러 간교한 살인 수단으로
이용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성곤은 냉소를 날렸다.

 "나의 은사께선 칠상장에 목숨을 잃었으니 난 오늘 은사를 위해
복수를 하려는 거다!"

 난데없이 여인의 음성이 터져나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공견신승의 구양공은 너보다  훨씬 심후한 경지를 이룩했을 텐
데, 어째서 칠상장을  막아내지 못했겠느냐? 공견신승은 바로 간
교한 네 손에 죽은  것이다! 너는 공견신승을 충동질하여 죽음으
로 몰아넣음으로써 자신의 추악한 음모를 끝까지 숨기려 했던 것
이다. 사대협은  단지 희생물에 불과했다. 앗!  저기를 좀 봐라!
네 뒤에 서 있는 자가  누군지 똑똑히 확인해 봐라!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어지고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너의 뒷통수를 노려보고
있는 자가 바로 공견신승이 아니냐?"

 이렇게 엉뚱한 말을 내뱉은 장본인은 다름아닌 조민이었다.

 성곤은 그녀의 허황된 말을  믿을 리 만무였다. 그러나 그도 양
심을 지닌 인간이기에  공견신승의 죽음에 대해 다소나마 죄책감
을 느껴온 것은 사실이었다.  하여 조민의 저주가 섞인 외침소리
를 듣자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기를 느꼈다.

 바로 이때 사손이 다시  일권을 전개해 왔다. 성곤은 즉시 장풍
으로 맞이했고 단지 몸이  약간 휘청거렸을 뿐 뒤로 물러나진 않
았다. 고수끼리 대결하는데 있어 어느 한쪽도 눈꼽만치의 방심을
해선 안 된다.  순간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지금 성곤의 집중력이 약간  흩어지는 순간 가슴에 일권을 맞자
혈기가 역류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즉시 신법을 전개해
사손 주위를 맴돌며 끓어오는 혈기를 가라앉히는데 급급했다.

 조민은 그가 정신 통일을 하지 못하게끔 다시 소리쳤다.

 "공견신승, 그에게  바싹 따라 붙으세요!  맞아요. 그렇게 하세
요! 그의 뒷덜미에다 차가운 입김을 부세요. 당신은 제자로 인해
죽음을 당했으니 그도 제자의  손에 죽게 될게 분명해요. 이것이
바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아니겠어요!"

 성곤은 그녀의 계속되는 외침에 짜증을 느끼는 한편 마음 한 구
석에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의식적으로 그 불안감을 떨쳐
버리려 할수록 더욱 진하게  그를 억눌러왔다. 그러자 정말 차가
운 입김이 뒷덜미로 뻗쳐오는 것 같았다. 사실 이곳은 절봉 위이
므로 늘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계속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어 등  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이는 것은 당
연한 일이었다.

 조민은 그가 움찔하는 것을 보자 다시 소리쳤다.

 "앗! 성곤, 고개를 돌려 등 뒤 좀 봐라! 고개를 도릴 용기가 없
느냐? 그럼 땅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를 보아라. 두 사람이 싸
우고 있는데 어찌 그림자가 셋이냐?"

 성곤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과연 조민이
말한 대로 두 사람 그림자 사이에 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섞여
있는 게 아닌가!  성곤이 흠칫 놀라는 순간  사손의 주먹이 다시
날아왔다. 성곤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역시 주먹을 뻗어내 정면
으로 맞부딪쳤다.

 순간, 펑! 하는 굉음이 터지며 두 사람의 진력이 허공에서 충돌
되어 각기 비칠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성곤은 그제서야
땅에 드리워진 제 삼의  그림자를 똑똑히 확인할수 있었다. 그것
은 허리가 잘려져 나간 소나무의 그림자였다.

 성곤은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 초조해졌다.

 '저 늙은 나의 제자는  눈까지 멀었는데 내가 계속 고전을 한다
면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심복들이 우선 나를 달리 평가할 것
이다. 현음지신공만  살아 있다면 이까짓  녀석쯤은 쉽게 처치할
수 있을 텐데..... 그날  장무기 놈의 순양내력에 의해 파괴됐으
니..... 어쨌든 이 녀석을  빨리 처치해야지만 명교의 기를 꺾어
그들과 원한이 있는 사람들을  충동질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야만  최악의  경우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도 있을  텐
데.....'

 그는 재빨리 생각을 굴리며 서서히 위치를 옮겨 그 부러진 소나
무로 접근해 갔다.

 사손이 연거푸 삼권을 전개하는  사이에 그는 자연스럽게 두 걸
음 물러나자 사손은 다시 두 걸음 내딛으며 맹공을 퍼부었다. 성
곤이 재차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  부러진 소나무 뒤로 살짝
비켜섰다. 사손이 다시 두  걸음 정도 따라붙는다면 소나무에 걸
려 쓰러질 판이었다.

 사손이 걸음을 내딛는 순간 장무기가 소리쳤다.

 "의부님! 앞을 조심하세요!"

 사손은 반응이 빨라 즉시 옆으로 미끄러졌다. 일단 위기를 모면
했지만 성곤은  그 틈을 타서 소리없이  일장을 밀어내 정확하게
사손의 가슴을 적중시켰다.

 "윽!"

 사손은 나직한 신음을 토하며 뒤로 쓰러졌다. 성곤은 그에게 숨
돌릴 기회를 주지 않고  다짜고짜 머리를 겨냥해 밟아갔다. 사손
은 반사적으로 뒹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가에서 계속
선혈이 흘러내렸다.  성곤은 제자리에 서서  잠시 돌처럼 굳어져
있다가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사손이 그와 삼백 여 초식을 겨루어 올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조건이 맞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상대방의 초식을 환히 알고 있
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바람소리로 상대의 위치를 판별할 수 있
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성곤의 출수는 그  두 가지 조건과 전혀 상관이 없
었다. 그는 사손의 생각에서 훨씬 벗어난 타법을 구사했을 뿐 아
니라 소리없이 느릿느릿하게  손을 밀어내 난데없이 어깨를 후려
쳤다.사손은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고정시켰다.  이 광경을 본
군호들 중에서 즉시 야유를 터뜨리는 자가 있었다.

 "비겁하다!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그러나 성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숨을 죽은 채 느릿하게 손
을 밀어냈다. 사손은 청각을 곤두세웠으나 상대가 상대인만치 좀
처럼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찰싹!

 이번에는 뺨을 얻어맞아  입가에서 더욱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사손은 영락없이 죽게 될 것이다.

 장무기는 안타까왔다.  설령 자기가  나서서 성곤을 죽인다해도
의부님은 자신의 도움을 평생의 한으로 생각할 것이다. 장무기는
다급한 나머지 덥석 조민의 손을 잡았다.

 "어서 무슨 수를 생각해 내야겠소!"

 조민은 나직하게 물었다.

 "몰래 암기를 발출해 성곤의 눈을 멀게 할 수 있나요?"

 장무기는 고개를 내둘렀다.

 "의부님께선 차라리  죽음을 택할 망정 내가  그런 암습을 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오."

 이때 성곤이 다시 일장을 천천히 밀어내자 조민이 소리쳤다.

 "가슴!"

 사손은 즉시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곧장 뻗어냈다. 성곤은 그와
정면대결을 할 필요가 없어  이내 손을 거두었다. 그는 계속하여
소리없이 손을 밀어내  암습을 기도했으나 번번히 조민의 외침으
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성곤은 다른 꾀를 썼다. 그는 눈동자를 교활하게 굴리며
사손의 어깨를 향해 천천히  손을 밀어냈다. 조민은 다시 소리쳤
다.

 "우견(右肩)!"

 그와 때를 같이하여 성곤의  왼쪽 어깨가 미미한 움직임을 보였
다. 장무기는 대뜸 그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외쳤다.

 "등심!"

 사손은 조민의  외침이 떨어지는 순간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호위하며 반격을 시도했지만  성곤의 그 일장은 허초(虛招)에 불
과했다. 오히려 조민의 외침을  빌려 사손의 주의력을 오른쪽 어
깨에 쏠리게 한  후 그 허를 찔러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등심을
강타했다.

 장무기가 비록 적시에  소리쳐 귀띔해 주었으나, 성곤의 변초가
워낙 빨라 사손이 다음  동작을 취하기엔 이미 때가 늦었던 것이
다.

 모든 사람의 놀란 외침이  터지는 가운데 사손은 반사적으로 몸
을 틀며 마치 오장육부를 입으로 쏟아내듯 붉은 핏줄기를 토해냈
다. 그 피가 온통 성곤의 얼굴에 뿌려졌다.

 "앗!"

 성곤은 절로 짤막한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얼굴의 피를 닦았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사손은 땅에 쓰러져 짐승이 포효하듯 괴성을
지르며 뒹구는가  싶더니 별안간 두 사람  모두 중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실로 갑작스런 변화였다.

 알고보니, 사손은 땅에서  뒹굴며 성곤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
며 있는 힘을 다해 끌어당기자 두 사람 모두 지하 감옥으로 떨어
지고 만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사손의 철저한 계획에 의한 결과
인지도 모른다.

 지하 감옥은 물이 목까지 차 있는데다가 칠흑처럼 캄캄했다. 그
속에 빠진 성곤은 즉시  눈뜬장님으로 변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뒤쪽을 향해  몸을 솟구쳤다. 일단  상대방에게서 멀리 벗어나고
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지하 감옥  안은 너무 비좁아 몸을  튕기자 등이 호되게
석벽에 부딪쳤다. 그가 재차  몸을 솟구치려는 순간 사손의 칠상
권이 정확하게 아랫배를 강타해 왔다.

 "으윽....."

 오장육부가 파열되는 듯한 통증에 성곤은 허리가 꺾이며 신음을
토했다. 성곤은 이번에 맞은  일권으로 심한 내상을 입었음을 알
았다. 그가 다시 신법을  전개한다면 어둠 속에서 상대방의 무서
운 공격이 다시 뻗쳐올 게  뻔했다. 성곤은 곧 생각을 달리해 소
금나수법(小擒拿手法)을 전개했다.  소금나수법은 상대방과 몸을
밀착시킨 상황에서 전개하는 가장 적절한 공격 수법이었다.

 소금나수법의 특징은 신속한 변초(變招)에 있었다. 설령 눈으로
보지 않아도 일단 손가락,  손바닥, 손등, 손목, 어느 부위라 할
지라도 상대방의 몸에  닿기만 하면 즉시 나꿔잡거나 후려치거나
갈고리처럼 긁거나 송곳처럼  후비는 공격으로 직결시킬 수 있었
다.

 사물이 보이지 않는 칠흑  속에서 성곤이 소금나수법을 펼친 것
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손도 그와 마찬가지로 소금나수법으로 대
결했다.

 밖에 있는 군호들은 더 이상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없었
으나 지하 감옥 속에서 계속 들려오는 싸늘한 기합과 고함소리로
그 처절한 광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오히려 직접 싸움을 지켜보
는 것보다 더욱 손에 땀을  쥐었다. 그 중에서 가장 긴장되어 있
는 자는 장무기였다. 이제는  최악의 경우 의부님을 성곤의 살수
에서 구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없어졌다. 지하 감옥으로 뛰어들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장무기는 다급해진 나머지  등줄기에서 계속 식은땀이 흘러내렸
다. 과연, 군호들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지하 감옥 속에서는 치
열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손이 일방적으로 당하던
지하 감옥 위에서의 싸움과는 양상이 달랐다.

 사손은 실명한 지 이십여 년이 되어 이전 충분히 청각으로서 눈
을 대신할 수 있었다. 그 반면 성곤은 물에 잠긴 채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자  당황함이 앞서 닥치는 대로  공격을 전개할 뿐이었
다. 이러니 쌍방의 전세가 이내 역전되었다.

 성곤은 갈수록 당황함이 눈덩어리처럼 커졌다. 그는 광풍폭우처
럼 양팔을 떨쳐  쾌속무비하게 소금나수법 중에서도 악랄한 초식
을 펼치며 속으로 외쳤다.

 '너의 일장을 더 맞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지하 감옥 위로 몸을
솟구치고 봐야겠다.'

 군호들은 차츰 지하  감옥 가까이 접근해 와  주위를 빙 둘러쌌
다. 모두들 긴장된  표정이었다. 성곤과 사손의 기합과 고함소리
가 계속 들려오는 것으로 미루어 아직도 승부가 판가름나지 않았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으악!"

 갑자기 성곤의 처절한 비명이  들리더니 두 줄기의 인영이 지하
감옥 속에서 곧장 치솟아 올랐다.

 군웅들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나는 순간  사손과 성곤이 좌우로
갈라지며 지면에  내려섰다. 군웅들은 비로소  두 사람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성곤과 사손의 눈에서 모두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마주 서서 잠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군호들도 숨을 죽였다. 지하 감옥속에서
어떠한 상황이 벌어졌기에 두 사람의 눈에서 모두 피가 흘러내리
는지 군호들은 궁금했다.

 그 까닭인  즉 이러했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사손이 쌍장을 좌우로 하여  성곤의 양쪽 옆구리를 공격했다. 성
곤은 내심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다.

 "얍!"

 그는 짤막하게 기합을 지르며  식지와 중지를 송곳처럼 세워 질
풍같이 사손의 두 눈을 찔러갔다.

 쌍룡창주(雙龍愴珠).

 지극히 평범한 초식이지만 성곤의  손에 의해 펼쳐지자 그 위력
은 대단했다.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일단 이 초식을 맞이하게
되면 얼굴의 위치를 옮겨 피해야만 했다.

 성곤도 그것을 계산에  넣어 사실은 왼손으로 상대의 태양혈(太
陽穴)을 노리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가 강호에서 일찌기 많이 사
용하던 수법이었다. 한데그의  계산과는 달리 사손은 얼굴을 피
하지 않았다.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성곤의 계산이  빗나가는 순간 사손의  입에서도 싸늘한 기합이
토해졌다.

 "이얍!"

 그도 똑같은 쌍룡창주의 초식을 전개한 것이다. 물론 그가 노린
것도 상대방의 눈이었다. 성곤의  두 손가락이 사손의 눈을 파고
드는 찰나 비로소 전광석화같이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뿔싸!"

 이어 자신의 눈에 극심한  통증이 전해져 오며 사손의 손가락이
이미 눈을 후비고 들어온 것이다.

 두 사람은 똑같은 부위에 똑같은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랐다.  사손은 오래 전에 실명했기 때문에
성곤의 손가락에 눈이 찔렸지만 일종의 외상을 입은 것에 불과했
다. 그 반면 성곤은  똑같은 상처를 입었지만 일순간에 맹인으로
변한 것이다.

 지하 감옥 위에서  대치하고 있던 두 사람  중에서 먼저 침묵을
깬 자는 사손이었다.

 "장님이 된 기분이 어떠냐?"

 말을 내뱉기 무섭게 일권을 격출했다. 성곤은 앞이 보이지 않으
므로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펑!

 칠상권이 여지없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사손이 왼손으로 다
시 일권을 떨쳐내자 성곤은 뒤로 대여섯 걸음 밀려나 나무뿌리에
걸려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그는 울컥울컥 피를 토해  내며 전신의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듯
몸이 측 늘어진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발했다.

 이때 도액의 음성이 들려왔다.

 "인과응보로다. 업보야....."

 사손은 세 번째 칠상장을  전개하려다가 도액의 음성을 듣자 도
중에서 권초를 거두고 냉랭하게 말했다.

 "난 원래 너에게 십삼  권의 칠상권을 전개할 생각이었다. 그러
나 넌  이미 실명한데다가 공력을 모두  상실한 편이나 다름없어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를 수 없기 때문에 십일 장을 생략한다."

 장무기 등은 사손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자 모두 환호성을 치며
좋아했다. 사손이 갑자기 땅에 주저앉더니 전신 뼈마디에서 부드
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무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손이  내력을 역으로 끌어올려
스스로 자신의 공력을 폐지시키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즉시 소
리쳤다.

 "의부님! 안 됩니다!"

 그는 쏜살같이 달려가 사손의  등에 손을 붙여 구양신공으로 제
지하려 했다. 그러자 사손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다짜고짜 자
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호되게 내리치더니 한 모금의 검붉은 피를
뱉어 버렸다.

 장무기가 얼른 그의 팔을 잡았을  때는 팔에 전혀 힘이 들어 있
지 않은 것을 느꼈다. 이미 공력이 완전히 상실된 게 분명했다.

 사손은 성곤 쪽을 향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성곤, 너는 나의 혈육을 죽였기  때문에 난 오늘 너의 눈을 멀
게 하고 무공을 폐지시킴으로써 복수를 했다. 사부님, 당신은 나
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었지만 난 오늘 스스로 그 무공을 전부 폐
지시킴으로써 당신에게 돌려주었소. 이제 나와 너는 서로 은혜도
없고 원한도 없어졌다. 당신은 영원히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성곤은 계속 고통스럽게  신음만 한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
다.

 군호들은 서로 마주 보며 모두 표정이 굳어 있었다. 사도(師徒)
간에 얽힌 은은원원이 이렇게 결말이 지어질 줄이야 어디 생각이
나 했겠는가!

 사손은 잠시 침묵을 두었다가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 사손은 온갖 악행을 일삼아 왔소. 오늘까지 목숨이 붙어 있
는 것만도 하늘이 내리신  복이라 생각하오. 여러분들 중에 친지
혹은 혈육이 이 몹쓸 놈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가 있을 것이
오. 내 목숨을 내놓을 테니 누구라도 앞으로 나와서 나의 목숨을
거둬가 주십시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장무기에게 위엄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무기야, 넌 절대 막으면  안 된다. 복수는 더군다나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나의 죄업을  더욱 증가시킬 뿐이다. 내 말을 알아
듣겠느냐?"

 장무기는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예....."

 군호들 중에는 물론 그에게 혈육 혹은 지인이 피살당한 자가 많
았다. 그러나 그들도 사손이  성곤에게 취한 행동을 똑똑히 지켜
보았다. 성곤은 불공대천의 원수지만 사손은 그의 무공을 폐지시
키는 것으로 일단락지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무공도 폐지시켰
다.

 이제 사손은 반항할 힘을 상실했다. 그러한 사손에게 복수를 하
겠다고 일검을 전개하거나 일장을 전개한다면 영웅호걸의 본분에
서 어긋날 것이다.

 사람들 틈에서 홀연 한 사나이가 걸어나왔다.

 "사손, 나의 선천이신 안령비천도(雁翎飛天刀)께선 너에게 목숨
을 잃었다. 내 자식된 도리로서  어찌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있겠
느냐?"

 이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사손 앞으로 걸어왔다.

 사손은 울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영존을 해친 게 분명하다.  어서 나에게 출수해
라."

 사나이는 칼을 뽑아쥐고 두 걸음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장무기의 머리에 혼란이 일었다. 만약 나서서 막지 않으면 의부
님은 필시 이  사나이에게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기가 사나이의 행위를 제지한다면  물론 더 이상 나설 자가 없
겠지만 의부님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더욱 큰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게다가 의부님은 눈이 실명된데 이어 무공마저 상실했으
니 도저히  그 죄책감을 견뎌내지 못해  언제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게 뻔했다.

 장무기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는 전신에 심한 진동이
일며 자신도 모르게 덩달아 앞으로 두걸음 내딛어 사나이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 즉시 사손의 싸늘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무기야, 네가 만약 그 자의 복수를 막는다면 그보다 더한 불효
는 없을 것이다.  결국 난 목숨을 끊어야  하며 저승에 가서라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사나이는 칼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갑자기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는 냅다 사손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울부짖었다.

 "선친께서 살아 생전 협명을  떨쳐오셨는데, 저승에 계신 그 어
르신네께서 내가 무공을  상실한 맹인에게 살수를 전개하는 것을
보시면 필시 비겁한 놈이라 나무랄 것이니....."

 그는 칼을 땅에 팽개치며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사람 틈바구니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이어 중년 부인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사손, 죽은  나의 남편  음양판관(陰陽判官) 윤대지(尹大地)를
위해 복수를 하겠다!"

 그녀도 앞으로 바싹 걸어와  사손의 얼굴에 침을 뱉더니 울음을
터뜨리며 물러갔다.

 장무기는 의부님이 계속 수모를 당하면서도 꼼짝하지 않는 것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무림인이라면 생사를 가볍게
생각하는 반면  어떤 경우에서도 수모를 참지  않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그것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명예와 직결되기 때문이
다. 그래서 사가살이불가욕(士可殺而不可辱)이라 하지 않았던가!

 복수를 하겠다고 앞으로 나선 두 사람은 모두 사손의 얼굴에 침
을 뱉고 돌아섰다. 이것은 실로 참기 어려운 모독이었다. 그러나
사손은 그러한 수모를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죄과를 철저하게 통한해 하며 참회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 틈에서 또 한 사람이 나왔다. 이번에는 뺨을 때렸다. 다시
발로 걷어차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욕설을 퍼붓는 자도 있었다.
사손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모든 것을  참고 견디었다. 그는
피하지도 원망의 소리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사손은 삽심여 명으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했다. 나
중에 수염이 긴 도인이 앞으로 나섰다.

 "빈도는 태허자(太虛子)라 하오. 나의 두 사형이 사대협과 겨루
어 목숨을 잃었소이다. 빈도는  오늘 사대협의 의연한 풍도에 절
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솔직히 털어놓는 바이오. 빈도 역시 흑
백 양도의 무수한 호걸들을  죽였소. 내가 만약 사대협에게 복수
의 명분을 빌려 모독적인  행위를 행한다면 나 역시 다른 사람으
로부터 똑같은 수모를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오."

 말을 끝낸 그가 장검을 뽑아 왼손 손가락으로 검신을 살짝 튕기
자 맑은 금속성과 함께 장검이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그는 부러
진 검을 땅바닥에 팽개치더니 사손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물
러났다.

 그의 뜻하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군호들은 제각기 수군거렸다.
태허자의 명성은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가 방금
검을 부러뜨린 무공은 실로 대단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넓
은 흉금이었다. 그가 오히려 자책을 하고 물러나자 더 이상 나설
자가 없었다.

 한데 뜻밖에도 아미파  제자 중에 한 중년  여승이 사손 앞으로
걸어나왔다.

 "살부지구(殺夫之仇)를 갚기 위해 나도 당신에게 침을 뱉어야겠
어요!"

 그녀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퉤! 하고 사손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런데 침이 날아오는  순간 예리한 파공음이 곁들여 있
었다.

 사손은 즉시 그것을 알아차렸으나 이미 죽음을 각오한 터였으므
로 오히려 홀가분했다.

 '난 벌써 죽어야 할 몸, 너무 늦은 감이 있구나.'

 아미파 여승의 입에서 못처럼 생긴 작은 암기가 뱉어진 것이다.
그 암기는 사손의 급소를  노렸으나 사손은 전혀 피할 생각을 하
지 않으니 결과가 뻔했다.

 이 아슬아슬한  순간, 갑자기 한 줄기의  황색 인영이 번뜩이며 
전광석화같이 허공을 수놓았다. 바로 황삼 여인이었다. 

 황삼 여인이 신속무비하게 소매를 떨치자 사손을 향해 날아가던 
암기가 소매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황삼 여인의 입
에서 위엄있는 호통이 터졌다.

 "사태의 법명은 무엇이오?"

 여승은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크게 당황해 했다.

 "정조(靜照)라 해요."

 황삼 여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정조라..... 그대가  속세를 떠나가 전에 남편의 이름
이 무엇이었죠? 그리고 어떻게 해서 사대협에게 살해되었는지 자
세히 말해 주겠어요?"

 황삼 여인의  음성은 크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짓누르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내가 나서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에요. 사대협
이 스스로의 죄과를 참회하기로 작심했으니 그와 원한이 있는 자
라면 누구라도 복수를 할 수 있소. 거기에 대해선 나도 참견하고 
싶지 않아요. 물론 사대협도 원치 않을 것이에요. 그러나 복수를 
빙자해 살인멸구를 하려는  자가 있으면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나서서 제지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정조는 즉시 반발하듯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나는 사손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살인멸구를....."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자신도 모르게 주지약을 힐끗 쳐다보았다.

 황삼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대는 사대협과 하등의  원한이 없는데 왜 그를 죽여 
입을 막으려 했죠? 아미파 정(靜)자 배분의 제자가 모두 열 둘이
며 그 중 정형, 정허,  정공, 정혜, 정가, 정조가 불문에 귀의했
지만, 어느 누구도 속세를 떠나기 전에 가정을 가진 자가 없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어요."

 정조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물러나려 했다. 

 그러자 황삼 여인이 냉랭하게 외쳤다.

 "그렇게 쉽게 물러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녀는 몸을 번뜩이는가 싶더니  이미 정조의 어깨를 향해 나꿔
채 갔다. 정조가 황급히 옆으로 피하자 황삼 여인은 초식을 변화
시켜 오른손  식지로 그녀의 옆구리를 찍는  동시에 발로 그녀의 
다리 부위 환조혈(環조穴)을 걷어찼다.

 정조는 그 자리에서 신음을 토하며 쓰러졌다.

 황삼 여인은 냉소를 날렸다.

 "주낭자, 이 살인멸구의 수법은 실로 악랄하군."

 주지약은 냉랭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정조사저는 사손에게  복수를 하려던  것뿐인데, 살인멸구라니 
대관절 무슨 소리죠?"

 그녀는 황삼 여인이 더 이상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스스로 음성
을 높여 다음 말을 이었다.

 "여기에 무수한 정파제자들이 있지만  정사(正邪)를 분별못하고 
요마들과 어울려 있으니 통탄할 일이에요! 우리 아미파는 그들과 
같은 대열에 끼고 싶지 않으니 이만 떠나야겠어요!"

 그녀는 곧 아미파의 제자들을 이끌고 서둘러 하산했다. 두 명의 
제자가 정조를 부축해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장무기는 황삼 여인 앞으로 다가가 정중히 몸을 숙였다.

 "여협의 도움에 뭐라고  감사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성함이
라도 밝혀 주신다면 가슴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황삼 여인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입에서 알듯모를 
듯한 말이 내뱉어졌다.

 "종남산(終南山) 이후 무상한  세월이 흘러 신조협려(神조俠侶)
는 영원히 강호에서 자취를 감추도다."

 이렇게 말하며 공수로서 장무기에게 답례를 하고는 곧 흑삼, 백
삼을 입은 여덟 명의 소녀를 이끌고 표연히 떠나갔다.

 장무기는 얼른 한 발짝 쫓아가며 소리쳤다.

 "여협, 잠깐만!"

 그 황삼 여인은 그의  외침을 아랑곳하지 않고 산봉우리 아래로 
차츰 멀어져 갔다.

 그러자 개방의 소방주인 사홍석이 소리쳤다.

 "양(陽)언니! 양언니!"

 그제서야 산중턱으로부터 황삼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개방의 일은 장교주께 부탁드려 도와달라고 하려무나."

 장무기는 즉시 대답을 했다.

 "분부에 따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삼 여인의 마지막 음성이 들려왔다.

 "미리 고맙다는 말을 드리겠어요."

 그녀의 음성은 분명 멀리서 들려왔지만 마치 지척에 있는 듯 뚜
렷했다. 장무기는 그녀가 사라진  쪽을 응시하며 무엇을 잃은 듯
한 적막함에 젖었다.

 공지가 성곤 앞으로 다가갔다.

 "어서 장문인을  풀어 주라고 명해라.  만약 장문인께 변고라도 
생겼다면 너의 죄업은 더욱 커질 것이다."

 성곤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동귀어진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설령 이 시각
에 공문화상을 풀어준다 해도 이미 때가 늦었다. 너는 장님이 아
닐 테니 지금쯤 불길이 이는 게 보일 텐데."

 공지는 이내 표정이  굳어지며 고개를 돌렸다. 과연 사찰쪽에서 
시꺼먼 연기와 함께 불길이 치솟고 있는 게 아닌가!

 공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달마당에서 불이 났다! 어서! 어서 불을 꺼라!"

 군승들은 우왕좌왕하더니 곧 앞을 다투어 산 아래로 달려갔다.

 공지는 비통한 표정으로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소림 고찰이 겁난을 면치 못하겠군....."

 불길이 워낙 거세게  일고 있어 도저히 잡을  길이 없음을 알았
다. 그런데 얼마 후 두 승려가 헐레벌떡 달려와 보고를 했다.

 "사숙께 아뢰옵니다. 원진의 수하 반도들이 달마당에 불을 질렀
으나 다행하게도 명교 홍수기의 영웅들이 나서서 쉽게 불길을 잡
았습니다."

 공지는 너무나 감격하여 장무기에게 걸어가 다시 합장을 했다.

 "소림 천 년 고찰이  화겁(火劫)을 면하게 된 것은 모두 장교주
의 은덕이니  빈승이 소림 중승을 대신하여  감사를 드리는 바이
오."

장무기도 포권의 예로 답례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너무 겸손하십니다. 우리로선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공지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공문사형께서 반도들에 의해 달마원에 갇혀 있소. 비록 불길이 
잡혔다 하나 사형의 안위를  알 길이 없으니 장교주와 여러 영웅
들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빈승이 직접 가서 확인을 해 봐
야겠소이다."

 한쪽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성곤이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하핫.....! 공문의 몸에  쇠기름과 돼지기름을 잔뜩 부어 놓았
기 때문에 불길이 일자마자 이미 저승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홍
수기가 달마당의 불길을 잡았다고 하나 절대 공문 노화상을 구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달려가 그의 안위를 살펴본
들 아무 소용이 없다!"

 성곤은 끝까지 자신의 음흉한 성품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공지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뿜어졌
다. 불심이 깊은 그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드문 살기였다.

 성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터라 오히려 여유작작한 면을 보였
다. 아니, 최후의 발악일지도  모른다. 한데 성곤의 말이 끝나자
마자 산중턱에서 한 사람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홍수기는 불을 끄는데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는 반면, 후토기
는 땅을 파서 사람을 구하는 재주가 있지!"

 이것은 범요의 음성이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곧이어 후토기의 
장기사 안원과 범요가 한  노승을 부축해 절봉 위에 모습을 드러
냈다. 노승은 다름아닌 장문인 공문선사였다.

 세 사람의 옷은 모두 군데군데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고, 심지
어 머리카락, 수염,  눈썹마저도 불에 그을러서 낭패한 모습들이
었다.

 공지는 즉시 앞으로 달려가 공문을 끌어안았다. 그는 격동된 음
성으로 외쳤다.

 "사형, 무사했군요! 다친 데는  없습니까? 이 사제가 무능해 사
형이 이런 고초를 당하게 했으니 죽을 죄를 졌습니다."

 공문의 보기 흉한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띄어졌다.

 "이 범시주와  안시주의 도움을 받아 지하  통로를 뚫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네. 그렇지  않았다면 사제 자네를 영원히 보지 
못할 뻔했네."

 공지는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명교 후토기가 땅굴을 파는데 일가견을 갖고 있다는 얘기는 들
었지만 오늘 그 신통력을 분명히 깨달았소."

 그는 범요와 안원에게 정중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 다시 
말했다.

 "범시주, 노승이 앞서 무례한  언동을 한데 대하여 심심한 사과
를 드리는 바이오. 대도 만안사의 약정을 취소할 것을 아울러 밝
히는 바이오."

 그의 말은 실로 뜻밖이었다. 무림인은 약조를 생명처럼 여긴다. 
게다가 그것이  무공을 겨루기로 한  약정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만치 약정을 스스로 취소한다는 것은 무공을 겨루어 패배
하는 것보다 백 배나 더 불미스러운 일로 여겨왔다.

 그런데 공지는 범요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형을 구해 준 은덕에 
감격하여 스스로 약정을 취소한 것이다. 두 사람은 이번 일을 계
기로 하여 더욱 상대방을 존중하게 되었으며 적대감정을 풀고 지
기가 되었다.

 한편, 성곤은 자신의 계획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자 마지막 남
은 광기마저 꺾여 아무 말 없이 그저 송장처럼 누워 있을 뿐이었
다.

 그런데 소림 공문대사는 어떻게 해서 이런 수모를 겪게 된 것일
까?

 알고보니, 성곤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영웅대회 전날 밤
에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하에서 공문의 혈도를 찍어 달마원에 
감금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달마원  주위에 가름과 유황 등 인화
물질을 잔뜩 쌓아놓고 심복을  시켜 단단히 지키게 했다. 그리고 
나서 성곤은 공지를 찾아가 자기의 분부에 따라 움직이도록 협박
을 했다. 만약 자기의 명령을  거역할 경우 당장 심복을 시켜 공
문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겠다고 했다. 공지는 사형의 안위가 무
엇보다 중요하므로 그가 하라는 대로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 성곤은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자 심복에게 신호를 하여 
달마원에 불을 지르게 한 것이다. 그것은 성곤이 던진 마지막 주
사위였다. 일단 달마당에 불길이 번지면 군호와 중승들이 불길을 
잡는데 급급할 것이고, 그 틈을 타서 심복들이 자기를 구출할 것
이란 철저한 사전 계산에  의해 행해진 일이었다. 한데 뜻밖에도 
그 마지막 탈출구까지 봉쇄당하고 말았다.

 사실 양소는 명교의 제자들이  떼지어 소실산에 오기 며칠 전부
터 후토기에게 명하여 먼저 소림사로 통하는 지하 땅굴을 파도록 
했다. 그것은 사손을  구출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손이 사내에 갇혀 있지 않았으므로 후토기는 그를 찾아내지 못
했다. 그 대신 열 여섯 개의 나한상 등에 새겨진 글을 전부 지워 
버릴 수 있었다.

 나중에 장무기와  주지약이 손을  잡고 금강복마권을 공격하고, 
성곤의 정체가  드러나 공지와 대립하게 되자  조민과 양소는 곧 
짚이는 바가 있었다. 조민과  양소는 암암리에 상의한 결과 범요
로 하여금 홍수, 후토  양기의 형제들을 이끌고 소림사로 잠입해 
불을 끄고 공문을 구출하게끔 한 것이다.

 그런데 성곤의  계획이 워낙 치밀하고  악랄해 일단 달마당밖에 
쌓아두었던 인화물질에 불이 붙자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 
후토기의 형제 다섯 명이  희생당했다. 범요와 안원이 즉시 불길
을 뚫고 달마원 안으로 뛰어들어가 공문을 구출했지만 눈썹과 수
염이 모두 불에 그을렸다.

 만약 미리 파 놓은 지하 땅굴이 없었다면 그들도 불기에 휩싸여 
목숨을 잃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달마원과 이웃하고 있는 몇 채
의 승사(僧舍)도 불에 타 버렸지만, 불길이 더 이상 번지지 않아 
대웅보전과 장경각, 나한당 등  요지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
다.

 공문과 공지는  잠시 상의하더니, 곧 명을  내려 성곤의 심복과 
일당을 모두 사로잡아  후전(後殿)에 무릎을 꿇리고 대기 시키도
록 했다.

 성곤은 소림사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적지 않은 심복을 포섭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괴수가 제압되고 장문인이 위험에서 벗어
나자 성곤 일당은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 감히 반항을 하지 못했
다. 그래서  나한당의 수좌가 중승들을  이끌고 그들을 색출하자 
모두 풀이 죽은 채 순순히 굴복했다.

 장무기는 사손 앞으로 다가가 외쳤다.

 "의부님!"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사손은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얘야, 이 의부는 세 분 고승으로부터 감화를 받고 크게 깨달음
을 받아 일생 동안  저질러온 죄업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씻을 수
가 있었다. 난 여지껏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 적이 없었다. 너도 
이 의부를 위해  기뻐해야 당연하거늘 어찌 슬퍼하는지 모르겠구
나."

 장무기는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 다시 목메인 소
리로 외쳤다. 

 "의부님!"

 사손은 공문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제자의 죄업이 너무 깊어 앞으로 남은 생애를 불문에 귀의하고 
싶으니,  부디 불쌍하게  여기시어 받아주시길  간곡히 부탁합니
다."

 공문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도액이 입을 열었다.

 "이리 오너라. 널 제자로 거두겠다."

 사손은 얼른 대답했다.

 "제자가 어찌 감히 그런 복연(福緣)을 바라겠습니까?"

 그가 공문을 스승으로  모시면 원(圓)자 배분의 제자가 되지만, 
도액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면 공(空)자 배분으로서 공문, 공지
와 사형제로 호칭하게 된다.  사손은 스스로 그것이 과분한 일이
라 생각했다.

 도액이 호통을 치듯 다시 입을 열었다.

 "공(空)은 공(空)이듯이  원(圓)도 공(空)이로다.  속세의 모든 
것이 바로 공(空)이 아니더냐!"

 사손은 처음에  멍해졌으나 곧 그 참뜻을  깨달았다. 사부와 제
자, 배분과  법명, 그 모든 것이  불가(佛家)에서는 한낱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손은 즉시 진지하게 말했다.

 "사부님께서 공(空)이시니  제자도 공(空)입니다.  이 순간부터 
무죄무업(無罪無業), 무덕무공(無德無功)의  일념으로 오직 부처
님을 섬기겠습니다."

 도액은 껄껄 웃었다.

 "좋을씨구! 너는 내 문하가 되더라도 여전히 사손일 뿐이다. 내 
말의 뜻을 알겠느냐?"

 사손은 정중히 머리를 숙여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돌맹이처럼  굴러온 사손은 한낱 허상(虛像)에 
불과했습니다. 무심무물(無心無物)일진대  어찌 이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손은 문무를 겸비하여 도액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자 이내 불가
의 심오한 정의(精義)를 성오(性悟)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불문에 귀의해 결국 일대 고승이 되니........

 도액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자, 사바세계에서 발을 떼자꾸나."

 그는 사손의 손을 잡고 도겁, 도난과 함께 천천히 하산했다. 공
문, 공지, 장무기 등은 일제히 몸을 숙여 전송했다.

 금모사왕 사손, 그는 삼십  년 전에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기 시
작했으며 무수한 경세지사(驚世之事)를 저질러왔다. 그러한 그가 
오늘날 속세의 은원을  청산하고 불문에 귀의하자 군웅들은 모두 
새로운 감회에 젖었다.

 장무기는 기뻐하는  한편 가슴 밑바닥에서  뭉클한 감정이 솟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공문이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여러분들께서 소림을  찾아주셨는데 뜻하지  않은 변고로 인해 
제대로 대접을 하지 못해 송구스러울 뿐이오. 앞으로도 여러분을
이렇게 한자리에 모실 기회가 많지 않을 테니 모두 사내로 가서
잠시 얘기를 나누심이 어떻겠소?"

 군호들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소림사로 향했다. 공문은 제자들
을 시켜  그들을 융숭히 대접했다. 아울러  공문, 공지가 앞장서
제자들을 이끌고  불행하게 목숨을 잃은  영혼들을 위해 초도(超
度)를 해주었다.

 군호들도 그 자리를  빌어 일일이 향을 피워  애도의 뜻을 표했
다.


                                 ----- 제 7 권 3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제 4 장  어둠 속의 열기(熱氣) 


 일단 한 가지 큰 일이 마무리된 셈이다. 사손은 삼십 년이란 긴
방황 끝에 귀처(歸處)를 찾은 것이다.

 이제 그에게서는 증오와  불타는 복수심이 사라졌다. 그는 증오
와 복수심이  얼마나 무서운 자아학대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
증오를 포용할 수 있는  게 관용의 사랑이라는 것을 뒤늦게 통감
한 것이다.

 어쨌든 이제 그는 마음의 안식처를 찾은 셈이다.

 장무기는 그의 앞날에 편안함과  광명이 함께 하길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장무기의 마음 속에는 사실  아직까지도 많은 의문이 남아 있었
다. 그의 의문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바로 사손이거늘, 사
손이 총총히 떠나는  바람에 미처 그 의문을  물을 새가 없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어렴풋이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이 필경 주지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그는 한때 주지약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
다. 주지약도 자기에게 은혜를  여러 번 베푼 게 사실이다. 장무
기는 그녀와의 옛정을 생각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문을 덮어
두기로 했다.

 일단 의문이 한 꺼풀씩  벗겨지면 아무래도 주지약의 명예에 손
상이 갈 것 같은 불안감이 잠재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장무기는 의문을  밝히고 싶으면서도 그것을  밝혀서는 안될 것
같은 상반된 모순에 빠져 버렸다.

 소림사의 식사는 매우 담백했다. 육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
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장무기는 사홍석을 비롯한 개방 장로들
과 서쪽 객청에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개방의 앞날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장무기는 힘닿는데까지 개방을 돕고 싶었다. 그것은 황삼 여인
의 부탁이기도 했다.

 그들이 한창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명교의 제자 한 사
람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보고했다.

 "교주님, 무당파의 장사협께서  뵙자고 합니다. 아마 긴히 상의
할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장무기는 웬지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태사부님께서 심상치 않은 일이라도.....'

 그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내두르며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가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 장송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무기
는 먼저 장송계의 표정을  살펴보고,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
한 뒤에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장무기는 장송계에게 무릎을
꿇고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태사부님께선 편안하시죠?"

 장송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르신네께선 편안하시다. 무당산에서 한 가지 중대한 사실
을 접하게 되어 이렇게 밤을 세워가며 달려온 것이다."

 "그게 무슨 일입니까?"

 "원병(元兵) 이만 명이 소림사를  향해 진발해 오고 있다. 그들
은 이번 영웅대회를 기해 모종의 행동을 취하려는 게 분명하다."

 장무기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속히 소림 장문인께 알려야겠습니다."

 두 사람은 곧 후원으로  가서 공문에게 알렸다. 공문은 잠시 심
각하게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만 명이라면 엄청난 병역이오.  그들은 이번 기회에 우리 중
원 무림의 원기를 꺽으려는 것 같소. 모든 무림인의 안위에 관계
되니 만큼  군웅들과 상의하여 대책을  결정짓는 게  좋을 것 같
소."

 장무기와 장송계도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소림사의
경종이 우렁차게 울려퍼졌고, 얼마 안 되어 군웅들이 대웅보전에
운집했다.

 군호들은 공문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자 모두 놀라는 한편 제
각기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대웅보전 안은 곧 술렁거렸다. 그들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두 가
지로 나뉘어졌다.

 혈기가 왕성한 군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천하 영웅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 이번 기회에 그들을 맞이
하여 미리 선제공격을 취해 한바탕 통쾌하게 해치웁시다."

 비교적 생각이 온건한 사람들은 의견이 달랐다.

 "원병이 이동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 이번에 우리를 겨냥
해 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오. 그러니 구태여 긁어 부스럼을 만
들 필요가 있겠소?"

 그러자 장송계가 나섰다.

 "나는 몽고어를 알아듣는데, 그들 군관이 소림사를 겨냥해 진군
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몽고가 중원을 점령한 지 백  년이 넘은 때라 한인 중에 몽고어
를 알아듣는 자가 적지 않았다. 장송계는 본디 영특하여 각 지방
의 방언에 능통할 뿐 아니라 몽고어도 유창했다.

 공문이 그의 말을 받았다.

 "여러분들, 보아하니 우리가 이곳에서  회합을 갖는 것을 안 조
정이 필시 조정에 불이익을  줄 것이라 판단해 많은 병력을 동원
해서 탄압하려는 것 같소.  우린 무림인으로서 무공을 지니고 있
어 오랑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 정면대결을 벌일 수도 있
을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곳곳에서 <옳소>하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자가 적지 않았다.

 공문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알다시피, 우리 강호의 호걸들은 줄곧 일 대 일의 싸움
을 해 왔으며, 그 숫자가 많은 경우라도 몇 십명에 불과했소. 이
번처럼 수천,  수만 명이 떼지어  대교전(大交戰)을 벌이는 것은
전혀 경험이 없을 뿐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소. 모
름지기 이러한 대교전은 무공보다 병법(兵法)에 능통해야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텐데, 빈승으로선 심히  우려가 되는 바이
오. 그러니 차라리 그들을  피해 여러분들이 본사를 떠나심이 어
떨지....."

 군호들은 서로 마주보며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장무기가 나섰다.

 "우리가 이대로 떠나가면  오랑캐들이 두려워 도망친 결과가 될
것이니, 오히려 그들의 기세만 높여 줄 것입니다. 게다가 소림사
의 승려분들만 그들의  말발굽 아래 희생당하게 될지도 모르잖습
니까?"

 공문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원병이 이곳에 당도해 강호  영걸들이 모두 떠난 것을 보면 도
에 지나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 믿소."

 군호들은 공문의 호의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이번 영웅대회를
개최한 것이  바로 소림이므로, 공문은  소림으로 인해 군호들이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군호들은 모두 뜨거운  피가 끓어올라 이대로 떠나려 하
지 않았다.

 더군다나 조정에서 이미  대규모의 군사들을 출동시켰는데 헛탕
을 치고 돌아갈 리도  만무했다. 필시 소림만이라도 살겁의 대상
으로 삼을 것이다. 소림  승려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생포될 것이
고, 소림 고찰마저 잿더미로 변할 게 분명한 것이다.

 몽고 병사들은  워낙 잔악하여 살인방화를  예사로 여기고 있었
다.

 양소가 앙연히 나섰다.

 "오랑캐들은 여지껏 숱한  잔악 행위를 저질러 왔으니 한민족의
핏줄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과 대항해 싸울 책임이 있
소. 본인의 생각으로는 소림의 천 년 고찰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오랑캐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  생사결단을 내는 게 좋을 것 같
소."

 군호들은 분분히 그의 의견에 찬동했다.

 "옳소!"

 군호들의 의견이 분분하고 있는  사이에 사문 밖에서 급박한 말
발굽소리가 들려오더니 두 필의 준마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이어 지객승의 안내하에 두 사람이 대전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군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쏠렸다. 나타난 두 사람의 복
장으로 보아 명교의 교도임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곧장 장무기 앞으로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나
서 그 중 한 사람이 아뢰었다.

 "교주께 아뢰옵니다.  오랑캐 병사 오천  명이 선발대로 소림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소림 승려들이 반역을 계획하고 있
다면서 이번  기회에 소림을  완전히 멸망시키겠다고 떠들어대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중....."

 공문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중놈이라고 말하려는 모양인데, 개의치 않을 것이니 어서 말해
보게."

 사나이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을 이어갔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중은 물론이거니와 무기를 휴대한 무림인
이라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죽인다고 했습니다. 벌써 여러 명의
화상이 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명교 교도의 보고를 들은 군호들은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당장 오랑캐놈들과 생사결단을 냅시다. 그 동안 짓밟혀온 원한
을 이번 기회에 갚읍시다!"

 몽고가 중원 땅을 거머쥐고 송나라가 패망한 지 백 년이 되었지
만 무림에서 활약하는 군호들은 계속 몽고 관병들과 적대시해 왔
다. 지금 몽고 병졸들이 대거 공격해 온다는 것을 알자 한결같이
피가 끓어올라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장무기는 그 걷잡을 수 없는  혈기를 막을 수 없어 낭랑한 음성
으로 외쳤다.

 "여러분들, 오늘이야말로 사내  대장부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번 소림사 영웅대회가 천추에 빛
나도록 모두 힘을 합쳐 싸웁시다!"

 대전 곳곳에서 곧 우뢰와 같은 환호성이 터졌다. 군호들의 기세
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장무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뭉쳐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니, 공문방장께서 명령만 내려 주시면
우리 명교의 모든 형제들도 그 명령에 따를 겁니다."

 공문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장교주, 그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오. 본사의 승려들은 다소간
의 무공을  배웠지만 큰 규모의 전투에  임하는 병법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소이다.  근래에 와서 명교가 천하 방방곡곡에
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을 모르는 자가  없소. 오직 명교만이
오랑캐를 맞이해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오. 그러니 장
교주께서 명령을 내려 주시오. 우리 모두 장교주의 명에 따라 오
랑캐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겠소."

 장무기가 사양을 하려는데 이미 곳곳에서 찬성하는 갈채가 터져
나왔다.

 장무기는 비록 나이가 젊지만 혼자서 소림 삼승과 겨룬 것을 모
두 보았으므로 그의 무학이 천하 제일이라는데 대해 의심할 자가
없었다. 게다가 명교 산하에  있는 한산동, 서수휘, 주원장 등이
도처에서 원군과 싸워 승리를 거둔 것도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었
다.

 앞서 오행기가  광장에서 보인 솜씨만  하더라도 군호들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 각 문파의 고수들이 모여 있지만 군호들은 명교 교주
를 제외하고 이번 싸움을  이끌 자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
다. 하지만 당사자인 장무기는  군호들의 뜻을 선뜻 받아들일 수
가 없었다.

 "용병술은 별도의 학문으로서  본인은 부족한 점이 너무 많습니
다. 그러니 다른 적절한 인물을 내세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사양을 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산 아래에서 고함소리가
크게 들려오더니 소림 승려 두 명이 대전 안으로 달려 들어와 보
고했다.

 "방장께 아뢰옵니다. 몽고병이 산 밑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장무기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음을 알았다.

 "예금, 홍수 양기(兩旗)가 선발대로 그들을 맞이하시오. 그리고
주전 선생과  철관 도장께서  각기 일기(一旗)를  돕도록 하십시
오."

 주전과 철관도인은 곧 대답을 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라 장무기는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설불득 대사께선 나의 성화령을 갖고 가까이 있는 본교의 형제
들을 소집해 속히 소림으로 모이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설불득은 명을 받들고 떠나갔다.

 대전 안에 모여 있던  군호들은 원병의 고함소리가 갈수록 고조
되자 제각기 무기를 뽑아 쥐고는 벌떼처럼 몰려나갔다.

 그러자 양소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교주께서 확실하게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자중지란이 일어
나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이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산중턱에
이르러 전세를 살펴보았다.

 몽고병의 선봉대는 예금기와  맞닥뜨려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
치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몽고병은 무리를 지어 일사불란하
게 움직였다. 역시 징기스칸의 후예들답게 막강한 군사들이었다.

 이때였다. 홀연 우측에서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섞여 들려왔
다. 장무기의 시선이 자연히 그쪽으로 쏠렸다. 많은 여승과 남녀
가 몽고병에 쫓겨 산 위로 도망쳐오고 있었다. 바로 앞서 떠났던
아미파 일행이었다.  아마 도중에서 몽고  관병들의 공격을 받아
다시 쫓겨온 모양이었다.

 아미파 제자들 중에 십여  명의 사나이가 들것에 부상자들을 실
은 채 우왕좌왕하고 있으며,  몽고병들이 그들 주위를 빙 둘러싸
고 공격을 퍼부었다.

 주지약은 정현, 정소를 이끌고 거듭 공격을 전개했으나 수십 명
의 몽고병졸만 죽였을 뿐 동문을 포위망에서 구출하지 못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장무기는  문득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
었다.

 '아뿔싸! 저 들것에 송사형이 실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곧 소리 높여 외쳤다.

 "홍수, 열화  양기는 엄호를  해라! 좌우이사(左右二使)와 위형
(韋兄)은 나와 함께 사람을 구하려 갑시다!"

 그는 앞장서 몸을 날렸다.

 두 명의 몽고병이 즉시 긴  창을 휘두르며 그의 앞을 가로 막았
다.

 장무기는 날렵한 동작으로 긴  창을 좌우 양손에 나꿔잡고 살짝
떨치자 두 명의 몽고병은  줄이 끊어진 연처럼 산 아래로 날아갔
다.

 "으악!"

 그들이 지르는 비명이 허공에 길게 울려퍼졌다.

 장무기는 창 끝을 돌려 한 마리의 신룡(神龍)처럼 원병 틈을 뚫
고 들어갔다. 양소, 범요,  위일소, 팽화상 등도 그의 뒤를 따랐
다. 그들이  스쳐가는 곳에  원병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그들은 삽시간에 아미파 제자들에게 접근해갔다.

 범요가 주먹을 격출해 원병의  포위망을 뚫고 들것에 실려 있는
부상자를 나꿔채더니 즉시 몸을  돌려 후퇴했다. 그 순간 장무기
는 들것에 실려 있는 부상자를 살펴보았으나 몸집이 뚱뚱한 것이
송청서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한편 주지약은 온몸에 피가  묻은 채 좌충우돌 계속 몽고병에게
닥치는 대로 살수를 전개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지약! 송사형은 어디에 있소?"

 그러나 주지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채찍을 떨치며 계속 공
격을 전개할 뿐이었다. 그녀가 위치해 있는 좁은 산길에 많은 원
병이 몰려 있어 죽이고 또 죽여도 끝이 없었다.

 장무기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미파의 제자 두 명이
제각기 한 손으로 들것을  들고 원병에게 포위된 채 사투를 벌이
고 있었다.

 그것을 본 장무기는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보아하니 송사형은 저 들것에 있는 모양이군."

 그는 즉시 창 끝으로 땅을 찍으며 그 반탄력을 이용해 시위에서
벗어난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순간,

 "으악!"

 "악!"

 들것을 들고 있던 아미파의  제자들은 거의 동시에 화살을 맞아
비명과 함께 쓰러져 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내렸다.

 장무기는 허공에서 창을 던졌다.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창이 땅
에 꽂히면서 들것이 아래로  굴러내리는 것을 막았다. 이어 장무
기는 사뿐히 들것  옆에 내려섰다. 들것에 있는  자는 온몸이 흰
붕대에 똘똘 감겨져 있고  얼굴만 노출돼 있었다. 바로 송청서였
다.

 장무기는 얼른 그를 안아올렸다. 이상하게도 그의 몸은 무척 무
거웠다. 흰 붕대가 불룩한 것으로 미루어 몸과 다른 물체를 함께
감아 놓은 것 같았다.

 주위에서 원병들이 계속  공격을 해왔다. 장무기는 자세한 생각
을 굴릴 겨를이 없었다.

 그는 송청서의 뼈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좌우로 몸을 번
뜩여 원병의 공격을 피하며 옆으로 뚫고 나갔다.

 이때 공동파의 당문량과  종유쌍협이 달려와 그를 호위했다. 그
들이 검을 떨치자 원병들이 분분히 쓰러졌다. 장무기는 송청서를
안고 무사히 산 위로 올라왔다.

 이 무렵 수백 명의 원병이 떼를 지어 밀려오자 팽영옥이 소리쳤
다.

 "열화기, 공격해라!"

 열화기에 속한 교도들은 일제히 원통(圓筒)을 꺼내 기름을 뿜어
냈다. 잇따라 불화살이 빗발치듯 날아가자 거센 불길이 치솟아올
랐다.

 "으앗!"

 "악!"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앞장서 진격해 오던
이십여 명의  원병은 불길에 휩싸여  혼비백산했다. 그들은 옷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땅에서 뒹굴며 아비규환을 했다.

 자연히 원병 진영에 큰 혼란이 일었다.

 한데, 비참한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홍수기가 뒤따라
독수(毒水)를 뿜어냈다. 다시 수백  명의 원병이 독수 세례를 받
아 연신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삽시간에 원병 주위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몸부림치다가 죽어
가는 원병의 숫자가 늘어갈수록 생지옥을 연출했다.

 원병을 이끌고 있는 만부장(萬夫長)은 황급히 후퇴 명령을 내렸
다. 거기에 따라 후퇴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길게 울려퍼지며 원
병들은 앞을 다투어 후퇴했다.  뒤쪽에 있던 원병들은 방패를 앞
세워 앞쪽으로 달려와 방패막을 구축해 동료들의 후퇴를 도왔다.

 열화기 쪽에선 계속 화살을  쏘아댔으나 더 이상의 전과를 거두
지 못했다.

 원병은 비록 커다란 손실을 입었지만 질서를 유지하면서 후퇴하
자,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팽영옥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
다.

 "패배를 당해 후퇴하면서 혼란이 빚어지지 않는 것만 보아도 오
랑캐의 병졸이 천하의 정병(精兵)이라는 걸 알 수 있겠군."

 산 아래로 물러난  원병은 부채꼴로 흩어졌다. 그들의 상황으로
보아 당분간은 공격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장무기는 적시에 명령을 하달했다.

 "예금, 홍수,  열화 삼기는 산중턱 중요  길목을 지켜라! 거목,
후토 양기는 신속하게 나무와 흙을 옮겨 방위벽을 구축하라!"

 오행기는 그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였다.

 군호들은 앞서 원병들을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게 사실
이었다. 단지 혈기만 믿고 그들을 상대하려 했었다. 물론 승리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교전을 해보니  비로소 원병의 위력이 상상외로 강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울러 군사들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는
것이 무림에서 일 대  일로 무공을 겨루는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는 사실을 알았다.

 수천 명의 군사들이 한꺼번에 공격해 오자 그 기세는 성난 파도
와 같았다. 주지약 같이  무공이 뛰어난 고수도 물밀듯이 밀려오
는 군사들 틈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사면팔방에서 칼과  창이 난무하고 언제  어느 방향에서 화살이
날아들지 알 수 없어  평상시에 사용하던 무공 초식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만약 명교의  오행기가 진법을 펼쳐  원병의 질서정연한 진법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군호 쪽이 처절한 패배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군호들 중에서  소림의 승려만이 그런대로  질서를 유지했을 뿐
나머지는 마구잡이로 공격을  펼쳐 오히려 자중지란을 빚는 경우
도 있었다.

 소림의 승려들은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주로 나한진법(羅漢陣法)
으로 원병들을  상대했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승려가 희생되었
다. 원병이 물러간 뒤에 군호들은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보다 경
각심을 높였다.

 송(宋) 말년에 조정 장수들  중에도 무림 출신의 고수들이 많았
는데, 결국 몽고인에게 강산을 빼앗겼으니 병법과 무공이 용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군호들은 비로소 실감했다.

 장무기는 송청서를 천천히  땅에 내려놓았다. 그의 맥을 짚어보
니 다행하게도 맥박이 뛰고 있었다.

 장무기는 주지약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으나 보
이지 않았다.

 "송부인은 어디에 있소?"

 장무기가 물었으나 정확히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원병과 맞서 싸우느라 주지약이 어디로 갔는지 눈여겨 보지 않았
다.

 아미파의 제자들은 이제 명교에 대한 적개심이 다소 풀렸다. 그
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장문인이 갑자기 사라진데 대하여 어
리둥절했다.

 장무기는 혼란 중에 송청서가  다시 부상을 입었을까 봐 염려가
되어 일단 붕대를 풀어 살펴보기로 했다. 붕대는 세 겹으로 되어
있었다. 세 번째 붕대가  풀어지는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부러진 검과 칼이 떨어졌다.  역시 장무기가 처음 생각했던 대로
다른 물체가 몸과 함께 붕대에 싸여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부러
진 검과 칼일 줄이야 실로 뜻밖이었다.

 한데, 그 검과 칼을  확인한 장무기는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앗! 도룡도, 의천검!"

 그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군호들도 분분히 달려와
주위를 에워쌌다. 틀림없는  도룡도와 의천검이었다. 단지 그 두
가지 신병이기가 모두 반 토막으로 부러져 있었다.

 이 뜻하지 않은 사실 앞에 군호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장무기는 부러진 도룡도를  집었다. 역시 육중한 무게만은 변함
이 없었다.

 그는 부러진 도룡도를 손에 쥔 채 만감이 교차됐다. 도룡도. 부
모님의 목숨을 빼앗아간 칼이다. 이  칼로 인해 근 이십 년간 강
호에서 풍파가 끊이지 않았다.  군호들이 소림에 모이게 된 것도
사실은 이 한 자루의 보도 때문이었다.

 파란만장한 보도가 드디어  군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두 토막으로 부러진 것일까? 이로 인해 보도의 위
력이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장무기가 부러진  보도를 유심히 살펴보니  중간이 비어 있음을
알았다. 무엇을 숨겨  놓았던 것이 분명했다. 의천검을 살펴보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검 속에  무엇을 숨겨 놓았다면 아마 누가
그것을 갖고 갔을  것이다. 그 자가 누구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양소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주낭자의 무공이 갑자기 고강해진  것은 바로 이 도검 속에 숨
겨져 있던 비급을 얻은 게 분명할 것이오."

 장무기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아울러 장무기는 확연히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알고보니, 무인도에서 그날 밤 도검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은 조
민의 소행이 아니라 주지약이  저지른 것이었다. 그녀가 무슨 수
법으로 조민을  쫓아 버리고 은리(=주아)를  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실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주지약은 도검 속에 숨겨 있는  비급을 손에 넣기 위해 두 가지
의 신병이기를 부러뜨린 게  분명했다. 비급을 얻은 주지약은 암
암리에 무공연마를 해왔을 것이다.

 장무기는 생각을 굴릴수록 여러 가지 의문이 풀렸다.

 '맞아. 당시 무인도에서 그녀의  체내에 있는 독을 제거해 주기
위해 구양신공을 펼쳤을 때.....'

 그렇다. 당시 주지약의 체내에서 괴이한 힘이 뻗쳐 장무기의 구
양신공에 저항하지  않았던가. 그 힘이  갈수록 강해져 장무기는
그녀의 내력(內力)이 날로 증진돼 가는 것이라 생각 했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주지약은  속성을 꾀하기 위해 기초를 다지는
것을 완전히 무시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목적한
대로 짧은 기일 내에  음독한 무공을 연성했지만 그것이 상승 무
학의 경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주지약이 무당의 육이협과  은육협을 격패한 것은, 그 괴이하기
이를데 없는 초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것은 장무기가 총교 풍
운 삼사에게 패했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주지약의 진정한 무공은 육이협 등에 비해 많이 뒤떨어졌다. 차
후 다시 겨루게 된다면  주지약이 무당 제협에게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장무기가 혼자서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예금기의 장기사 오경초
가 엉뚱한 제의를 해왔다.

 "교주님, 속하는 장인(匠人) 출신으로 주검술을 배운 적이 있습
니다. 이  부러진 검과  보도를 이어보고 싶으니  윤허해 주십시
오."

 양소가 얼른 나섰다.

 "오기사의 주검술은  천하무쌍이니 한번  시도해 보라고 하십시
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두 자루의 신병이기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니
좋을 대로 해 보시오."

 오경초는 열화기 장기사 신연에게 도움을 청했다.

 "주검술은 화력과 깊은  관계가 있는 만치 신형께서 도와주셔야
겠어. 오랑캐들은 당분간 재진격을 해 오지 않을 것 같으니 우리
가 언제쯤 일을 착수하면 좋을것 같나?"

 신연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불을 지피는 일은 소제의 특기이니 만치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착수할 수 있소이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부하들을 지휘해 놓은  화로를 쌓게 했다.
화로의 불구멍은 직경 한  자에 불과했다. 오경초는 도룡도의 자
루 쪽 반 토막을  집어 끊어진 부분을 불구멍을 겨냥해 고정시켰
다.

 열화기는 늘 연료가 준비돼  있기 때문에 불을 지피는데 어려움
이 없었다. 순식간에 화로의 불길이 훨훨 타올랐다.

 오경초는 오른팔이 끊어져 왼팔 밖에 남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이미 십여 가지의 병기가  준비돼 있었다. 그는 처음서부터 계속
뚫어지게 노화(爐火)를 응시했다. 노화의 색깔이 변할 때마다 준
비해 놓은 무기를 집어 화력(火力)을 시험해 보았다.

 노화가 차츰 푸른 빛에서 흰 빛으로 변해 갔다. 거기에 다라 오
경초의 표정도 차츰 긴장되었다.

 오경초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드디어 집게로 나머지 반 토
막의 도룡도를 집어 화구(火口)에 고정시킨 자루 쪽의 반 토막에
갖다 붙였다. 뜨거운 화염  속에서 토막난 도룡도가 서로 연결된
채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오경초는 웃통을 벗고 있어 불꽃이 몸에 튀었다. 상당한 고통일
것이다. 그런데도 오경초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도룡도를 달구는데만 온 정신이  집중돼 있었다. 그의 모습은 장
엄하기까지 했다.

 한쪽에 떨어져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장무기는 내심 새로
이 느끼는 바가 있었다.

 '예전엔 주검술(鑄劍術)을 가볍게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그 나
름대로 대단한 기술과 학문을 요하는군. 화력의 강열을 조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만약 평범한  장인이라면 단지 저 엄청난 열을 견
뎌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갑자기,

 "앗!"

 "저런.....!"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군호들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나왔
다. 장무기도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알고보니 풀무질을 하던 열화기의  두 교도가 열을 견뎌내지 못
해 그만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진 것이다. 그 즉시 신연과 열화
기의 장기부사가 앞으로  뛰쳐나가 까무라친 두 사람을 끌어내고
직접 풀무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들 두 사람의  내공은 모두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어 일단
풀무질을 하자 노화가 치솟았다. 화염이 일 장 가량 솟구쳐 오르
자 장관을 이루었다.

 모든 사람의 기대와 긴장속에서 향 한 자루가 타는 시간이 경과
되었을까, 오경초의 입에서 별안간 짤막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앗!"

 비명과 함께 그는 뒤로  몸을 솟구쳤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그
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좌절의 빛이 역력했다.

 중인은 흠칫  놀라며 그를 지켜보았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순강으로 된  집게는 이미 불에  달구어져 쭈글쭈글했다. 그러나
반 토막의 도룡도는 원래 상태에서 전혀 변한 데가 없었다. 아무
리 강한  불길에도 달구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다시 증명된 셈이
다.

 오경초는 장탄식과 함께 고개를 절래절래 내둘렀다.

 "속하가 무능하여 도저히 보도를  복원시킬 수가 없군요. 이 도
룡보도는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신연과 열화기의 장기부사도  풀무질을 멈추고 한쪽으로 물러났
다. 두 사람은 모두 물 속에 첨벙 빠졌다.

 도룡도를 원상 복귀시키는 일이 이제 도저히 불가능해지는 듯했
다.그런데 줄곧  침묵을 지키며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조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장상공, 이 세상에 도룡도를  달굴 만한 집게가 없을 테니, 그
성화령으로 시험해 보는 게 어떻겠어요? 도룡보도가 성화령을 손
상시킬 수 없었잖아요?"

 장무기는 무릎을 탁 쳤다.

 "아! 그렇군!"

 여섯 매의 성화령 중에  하나를 설불득에게 주어 교도들을 소집
케 했으니 아직 다섯 매가 남아 있었다.

 장무기는 품 속에서 성화령을 꺼내 오경초에게 내주었다.

 "도검을 복원시키지 못해도  상관없지만, 성화령은 본교의 신물
(信物)이니 만치 파손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오경초는 힘주어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몸을 숙여 공손하게 성화령을 받았다.

 다섯 매의 성화령은 무슨 금속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금(金)도 아니며 강철도 아니었다. 그러나 견고무비했다.

 오경초는 성화령을 유심히 살피고 고개를 저울질해 보이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장무기는 은근히 염려가 되었다.

 "자신이 없으면 구태여 모험을 할 필요는 없소."

 오경초는 생각을 골똘히 하느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는 비로소 깊은 생각에 깨어나 정중하게 말했다.

 "속하가 물음에 신속히 답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성화령은 백금, 현철(玄鐵)에다  금강사(金剛砂) 등을 혼합해 만
든 것으로서 절대 불에 녹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
가 가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애당초 이 성화령을 어떻게 만들었
는지 불가사의합니다. 그것을 골똘히 생각하느라 다른 데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조민이 곁눈질로 장무기를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나중에 교주님께서 파사국으로 한 중요한 인물을 만나러 갈 거
예요. 그 때  당신도 함께 따라가 성화령을  만든 장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수수께끼가 풀릴 거예요."

 장무기는 멋적게 말했다.

 "내가 무엇하러 파사국에 가야 한단 말이오?"

 조민은 짓궂게 웃었다.

 "그야 교주님께서 더 잘 아실 게 아니겠어요?"

 조민은 다시 오경초에게 말했다.

 "성화령을 보면 꽃무늬와 줄이 새겨져 있는데, 도룡도와 의천검
으로서도 손상을 입지 않는 성화령에다 어떻게 꽃무늬와 글을 새
겼는지 모르겠군요."

 오경초가 곧 대답했다.

 "꽃무늬와 글을 새겨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성화령에
다 백랍(白臘)을 칠한 후 그 백랍 위에 꽃무늬와 글을 새겨 다시
강렬한 산액(酸液)으로 몇  달간 천천히 부식시켜 나중에 백랍을
긁어내면 꽃무늬와  글이 고스란히 새겨지게  됩니다. 소인이 알
수 없는 것은 용주(鎔鑄)하는 방법입니다."

 신연은 한쪽에서 기다리다 못해 은근히 짜증이 났는지 큰소리로
물었다.

 "이봐, 대관절 할 건가, 안 할 건가?"

 오경초는 결심을 내린 듯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리고
는 장무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교주님, 안심하십시오. 신형제의 열화가 제아무리 거세다 해도
성화령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을 겁니다."

 신연은 그의 말에 약간 망설여졌다.

 "내가 최선을 다해 불길을 키워 만약 본교의 신물을 손상시킨다
면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해 낼지 걱정이 되는구먼."

 오경초는 빙긋이 웃었다.

 "염려 붙들어 매고 이번 기회에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 보게. 내
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네."

 이리하여 도룡도를 연결시키는 일이 다시 착수되었다.

 오경초는 우성 두 매의  성화령으로 반 토막의 도룡도를 앞뒤로
끼어 다시 새 집게로 그 성화령을 집어 화로에 넣어 달구기 시작
했다. 용광로가 녹아내리듯 뜨거운  불길이 화구 위로 치솟아 올
랐다. 엄청난 열량이었다.

 중인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시간이 자꾸만 흘러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경초와 신연, 열화기 장기부사는 지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어느덧 반 시진이 흘렀다. 이제 오경초 등 세 사람은 힘이 완전
히 고갈되어 곧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더 이상 버
티는 게 무리였다.

 이때 철관도인이 주전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약
속한 듯 앞으로 달려나가 신연과 열화기 장기부사를 대신해 풀무
를 가동했다.

 이들 두 사람의  무공은 신연보다 한 수  위이므로 일단 풀무를
가동하자 화로 속에서 한 줄기의 백색 화염이 곧장 허공 높이 치
솟아 올랐다. 그 열기로  인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사람들마저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오경초의 표정은 극도로 긴장되어 갔다.

 홀연, 오경초의 입에서 짤막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고형제, 어서 출수하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예금기의  장기부사가 예리한 칼을
쥐고 화로 옆으로 뛰쳐나갔다.

 중인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와 오경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순간, 한 줄기의 싸늘한 도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예금기의 장
기부사가 다짜고짜 칼 끝으로 오경초의 가슴을 찔렀다.

 "앗!"

 군호들의 입에서 자연히 놀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대경실색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예금기 장기부사의  행동은 실로  뜻밖이었다. 군호들이 놀라는
가운데 오경초의 가슴에서 선혈이 뿜어졌다. 그 선혈이 도룡도에
뚝뚝 떨어졌다. 핏방울이 열에 닿자 뿌지지 하는 소리와 함께 파
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경초의 입에서 다시 짤막한 외침이 터졌다.

 "됐다!"

 그는 비칠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무너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의 손에 집중됐다.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거무스름한 대도(大刀)가  쥐어져 있었다. 바로 두 토
막의 도신(刀身)이 붙은 도룡보도였다.

 중인은 비로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알고보니, 검과 칼을 주조하는 대장인들은 왕왕 자신의 피를 주
물에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었다.

 옛날 간장(干將), 막사(莫邪)  부부도 자신들의 몸을 화로 속에
던져 천고의 신검(神劍)을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오직 신검을 만
들겠다는 신념 하나로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까지 미련없
이 버리는 것이 바로 고대(古代)의 장인정신(匠人精神)이었다.

 지금 오경초의 행동도 그 장인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다.

 장무기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오경초를 부축해 일으
켜 상처를 살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상처가 깊지 않았다.

 장무기는 금창약을 바르고 붕대로 가슴을 감싸주었다.

 "오장기사,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겠소? 도룡도를 연결시키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데 이로 인해 오장기사가 너무나 고
생이 많았소."

 오경초는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이 정도의 상처는 별것  아닙니다. 공연히 교주님께 염려를 끼
쳐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도룡도를 살펴보았다. 장무기도 그제서야 시
선을 도룡도로 돌렸다.

 도신의 연결  부분은 거의 완벽했다. 단지  어렴풋이 한 줄기의
혈흔이 나 있을 뿐이었다.  이것을 확인한 오경초는 매우 만족했
다.

 장무기는 다시 두 매의 성화령을 살펴보았다. 과연 아무런 손상
도 없었다.

 장무기는 오경초로부터 도룡도를  받아 원병으로부터 빼앗은 대
도(大刀)를 향해 내리찍었다.

 뚝!

 대도가 여지없이 두 동강이 났다. 도룡보도의 위력은 역시 예전
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군호들 사이에서 절로 환호성이 터졌다.

 "와! 보도다! 보도야!"

 오경초는 두 동강이가 난 의천검을 집었다. 그의 표정이 갑자기
우울하게 변했다.  예금기의 전임 장기사와  예금기 산하의 형제
수십 명이 이  의천검에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그 생각을 하니
오경초는 가슴이 아팠다.

 그는 의천검을 손에 받쳐든  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장무기에
게 말했다.

 "교주님, 나의 장대가(莊大哥)와 여러 형제들이 이 검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속하는 이 검에 대한 원한이 뼈속 깊이 맺혀
있습니다. 이 검만큼은 잇고  싶지 않으니 교주님께서 달리 벌을
내리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장무기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것은 오장기사의 의리이며  또한 인지상정이거늘 내 어찌 나
무랄 수 있겠소?"

 그는 부러진 의천검을 받아  아미파의 제자 정현 앞으로 걸어갔
다.

 "이 검은 귀파의 소유였으니 사태가 보관하셨다가 주..... 송부
인에게 전해 주었으면 좋겠소."

 정현은 아무 말 없이 단검을 받았다.

 장무기는 다시 도룡도를 손에 쥐고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 하더
니 소림 장문인 공문대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장문인, 이 보도는  나의 의부님께서 소유하셨던 것인데, 지금 
의부님께선 일문에 귀의해  소림제자에 속하니 이 보도를 의당히 
소림에서 맡아야 할 겁니다."

 공문은 당치도 않다는 듯 연신 손을 내둘렀다.

 "그 보도는 이미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어 마지막으로 장교주께
서 어렵게 수중에 넣지 않았소이까? 그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이며 더구나 귀교의 오장기사가 그 부러진 보도를 잇는데 성공하
지 않았소. 그보다도 장교주가 그  보도를 지녀야 할 가장 큰 이
유가 있소. 당금 무림에서 모두 장교주를 지존(至尊)으로 받들고 
있을 뿐 아니라, 재덕(才德)으로 보나, 지위로 보나 역시 장교주
가 그 보도를 관장하는 것이 당연지사일 것이오."

 군호들도 공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옳은 말이오! 모든 무림인의  뜻이니 장교주께서 더 이상 사양
할 필요가 없소!"

 장무기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내심 생각했다.

 '만일 이 보도로 천하 호걸들을 호령해 오랑캐를 중원에서 몰아
낸다면 이보다 더 보람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군호들은 입을 모아 우렁차게 외쳤
다.

 "무림지존 도룡보도, 호령천하 막감불종!"

 그 아래 원래 두 귀절이 더 있었다.

 ----- 의천불출 수여쟁봉! -----

 그러나 의천검은 절단되어 다시 이일 수 없으니 구태여 더 이상 
의천검을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의천검은 영원히 강호에서 
모습을 감추게 될 것이다.

 명교 예금기 산하의 사람들은  의천검에 대한 원한이 매우 컸었
다. 이제 도룡도가 옛  모습을 되찾고, 의천검이 여전히 두 동강
이가 된 채 무용지물로 사장되자 그들은 모두 후련해 했다.

 반나절 동안  분주하게 움직인 탓인지  군호들은 모두 시장기를 
느꼈다.

 명교 오행기와 소림의 일부  승려들은 제각기 나누어 중요한 길
목을 지키는  한편, 나머지 사람들은  승려들의 안내로 소림사로 
들어가 요기를 채웠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마루로 기울자 차츰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
다.

 장무기는 높은  나무 위로 올라 산  아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원병들은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산기슭 부근에 흩어져 있고, 연
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역시 저녁 식사를 할 분
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장무기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위일소에게 웃으며 말했다.

 "위형, 날이 어두워진 뒤에  혹시 적이 야습을 해올지도 모르니 
수고스럽지만 그들의 동태를 살펴봐 주시오."

 위일소는 명을 받들고 물러갔다.

 그러자 양소가 넌지시 장무기에게 말했다.

 "교주, 내가 보기에 놈들은 앞서 혼쭐이 났기 때문에 섣불리 재
공격을 해오지 않을 것이오.만약 다시 공격을 해온다면 정면 공
격보다 산기슭  뒤로 돌아가 기습을 시도할  가능성이 짙을 것이
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보니 그렇군요. 그럼 양좌사와 범우사가 이곳을 지켜 주시
오. 나는 산 저편으로 가서 살펴보겠소."

 그가 떠나려 하자 조민이 얼른 뒤를 따라갔다.

 "나도 함께 가겠어요."

 장무기는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어 그녀와 동행했다. 두 사람은 
사손이 갇혔던 산봉우리 쪽으로 와서 뒷산을 살폈으나 별다른 이
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장무기는 세 그루의 부러진 소나무와 시꺼먼 지뢰(地牢) 입구를 
바라보며 오늘 낮에 있었던 치열한 싸움을 생각하니 아직도 등줄
기가 오싹해지며 한의(寒意)를  느꼈다. 실로 아슬아슬한 장면의 
연속이었다.

 문득 장무기의 뇌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의부님이 나더라 지뢰  석벽을 살펴보라고 하셨는데 깜박 잊을 
뻔했군.'

 그는 곧 조민에게 말했다.

 "난 지뢰 아래로 내려가  살펴볼 것이 있으니 잠시만 위에서 기
다려 주시오."

 그는 조민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땅굴 속으로 뛰어내렸다. 땅
굴 속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장무기는 부싯돌로 불을 밝혔다. 어
느새 물이 빠졌는지 바닥만  약간 질퍽할 뿐 벽 아랫쪽은 빙둘러 
대리석을 깔아놓아 건조했다.

 장무기의 시선이 먼저 사면 벽에 쏠렸다. 그곳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장무기는 대리석 위로 올라 그림을 자세히 살폈다. 뾰족
한 돌로 새긴  듯 간단한 필획이지만 생동감이  넘쳤다. 동쪽 첫 
번째 그림에는 세  명의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한 여인이 땅에 
누워 있는데, 다른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보살펴주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여인은 오른손을 내밀어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
의 품 속을 더듬는 모습이었다. 이 그림 옆에 두 글자가 적혀 있
었다.

 ----- 취약(取藥). -----

 남쪽 벽 두 번째  그림은 큼지막한 해선(海船) 한 척이었다. 한 
여인이 다른 한 여인을 배 위로 던지는 모습도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 옆에도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 추방(追放). -----

 여기까지 살펴본 장무기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예측했던 
상황이 명확하게 그림으로 나타나  있었다. 실로 무서운 일이 아
닐 수 없었다.

 장무기는 이마에서 어느덧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장무기는 속으
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과연 내가  생각했던 대로군. 지약은  조민이 나의 사촌누이를 
보살펴주고 있는 틈을 타서 그녀의 품 속에서 십향연근산을 훔쳐
냈다. 그게 바로 첫 번째 그림에서 밝힌 취약(取藥)이다.....'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지약은 십향연근산을 몰래 음식에 풀어 모두 정신을 잃은 사이
에 조민을 안아 파사국의  해선 위에다 던져 배를 몰아 떠나게끔 
했을 것이다.....'

 그렇다. 사손의 그림에서 밝혀진 것과 같이 주지약은 조민을 일
단 무인도에서 몰아내 버린 것이다.

 장무기는 생각을 굴리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약은 왜 조민 낭자를 추방한 것일까? 차라리 그녀를 죽일 수
도 있었을 텐데.....'

 장무기는 의문에 봉착됐지만 곧 그 의문이 해답을 찾아냈다.

 '맞아..... 만약 섬에서 조민 낭자의 시신이 발견된다면 그녀에
게 모든  죄를 전가시키진 못했겠지. 이제  모든 게 분명해졌어. 
누이동생을 해친 것도 역시 지약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장무기는 절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시 
주지약이 주아(=은리)  시신 앞에서 눈물까지  뿌린 생각을 하면 
그 가증스러움에 치가 떨렸다.

 장무기는 다음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두 명의 남자가 그려져 있는 그림인데, 한 명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하고  한 명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본 장무기는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이제보니 의부님께선 지약이 천리(天理)에 위배되는 짓을 행하
는 것을 예민한 청각으로 모두 감지하고 있었군. 그런데 왜 아무
런 내색도 하지 않았을까?'

 장무기의 두 번째 의문도 곧 풀렸다.

 '그렇다. 의부님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십향연근산에 중독된 
후였을 것이다. 이미 공력이  상실되어 만약 내색을 한다면 지약
의 손에 죽게 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의부님은 한 술 더 떠 그 
당시 조민 낭자의 소행이라고 단언하며 일부러 매우 분개해 했던 
것이 분명하다. 내가 침착하지  못하고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알
고 있는 의부님은 행여나 무의식중에 기밀을 누설할까 봐 나에게
까지 숨겼던 것이다.'

 그림에는 군데군데 선혈이 묻어 있었다. 낮에 사손과 성곤이 혈
투를 벌이면서 뿌린 피였다. 그 선혈로 인해 그림의 내용이 더욱 
처절하고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장무기는 다음 그림을  살펴보았다. 이 그림에는 사손이 단정히 
앉아 있고 주지약이 그의  등 뒤에서 기습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
었다. 그리고 바깥 쪽에서 개방 제자들로 여겨지는 한 무리의 사
람들이 뛰쳐들어오는 것도 그려놓았다.

 이러한 상황은 조민이 대도(大都)에서 벌어진 유황성(遊皇城)놀
이에서 사람들을 시켜 분장한 것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장무기가 그 다음 그림으로  시선을 돌리려는데 손에 쥐고 있던 
불씨가 다 타버려 별안간 꺼져 버렸다.

 장무기는 즉시 땅굴 위쪽을 향해 소리쳤다.

 "조낭자, 이리 내려와 보시오. 부싯돌이 필요하오!"

 조민은 곧 불을 밝혀 들고 땅굴 속으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그림을 훑어보자  이내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장무기는 불빛을 빌려  마지막 그림을 살펴보았다. 이 그림에는 
몇 명의 사나이가 사손을 들고 걸어가는데, 멀리서 한 소녀가 나
무 뒤에 숨어 훔쳐보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제 장무기는 모든 그림을  살펴보고 그 내용도 확연하게 알았
다.

 그림의 필법은 모두 훌륭했으나  사손 한 사람의 모습을 제외하
고 나머지 사람들의 용모는  뚜렷하지가 않아, 내심 짚이는 바가 
없었다면 누가 누군지 전혀 알아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손이 실명했을 때 장무기는 아직 세
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사손은 장무기와 주지약, 조민, 주아의 
음성만 들었을 뿐 용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당
연히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그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무기는 마지막 그림 중에  나무 뒤에서 훔쳐보는 소녀를 가리
키며 조민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낭자요? 아니면 주지약이요?"

 조민은 생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예요. 성곤이 개방으로 가서 사대협을 납치해 소림으로 보낸 
뒤 스스로 길목에다 명교의 암호를 남겨 당신을 엉뚱한 방향으로 
유인한 거예요. 난 사대협을 빼앗아 오려고 여러 번 시도해 보았
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어요."

 장무기는 새삼 조민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그녀를 
의심해 온 것도 죄스러웠다.

 장무기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예전보다 훨씬 초
췌해진 모습이었다. 몇  달 동안 자기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은 
흔적이 얼굴에 역력했다.

 장무기는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격정이 끓어올라 왈칵 그녀를 
품안에 껴안았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낭자, 내 잘못이 너무 많은 것 같소."

 그가 갑자기 조민을 껴안는 바람에 불씨가 꺼지고 말았다. 주위
는 다시 어둠에 잠겼다.  장무기는 자신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
를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 낭자가 총명하고 지혜롭지 못했다면, 이 어리석은 장무기
가 경솔하게 낭자의 목숨을 앗아가 천추의 한을 남길 뻔했소."

 조민은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이 과연 나를 죽일 수 있었을까요? 당시 당신은 내가 흉수
라고 단정했는데  왜 마음을 모질게 먹고  살수를 전개하지 않았
죠?"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 낭자에  대한 나의 감정은 진실한  것이었소. 난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늘 그  감정에 지배되어 온   
게 사실이오. 만약 낭자가  나의 누이동생을 죽였다면 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거요. 그 동안 그 일로 인해 고민을 많이 해
왔소. 이제 진상이 밝혀지니 마음이 홀가분하구료."

 조민이 이렇게  가까이서 장무기의  마음을 읽기는 처음이었다. 
장무기는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고 조민은 그의 뜨거운 
마음이 직접 가슴에 와닿았다.

 조민은 짜릿한 희열을  느끼며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웬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행복에 겨워 눈물이 쏟아질 것
만 같았다. 장무기의 입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거짓없는 감정을 
듣기를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조민은 장무기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 왔다. 부
귀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혈육의 정마저도 뒷전으로 미루었
다.

 두 사람은 서로 껴안은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승유언
(無言勝有言)이란 말이  있듯이 이런  분위기에선 차라리 무언이 
더 많은 의미를 대신해 주었다.

 어느덧 달이 위치를 바꾸어감에 따라 땅굴의 좁은 입구 위로 그 
교교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희미한 달빛이 두  사람 머리 위로 
뿌려지자 비로소 조민은 고개를 쳐들었다.

 주위는 죽은  듯 고요했다. 조민이 접한  장무기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강렬했다. 그 강렬한 눈빛 속으로 자신이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자 조민은 웬지 불안하고 당황해졌다.

 그녀는 당황함을 숨기기 위해  다시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처음 녹류산장에서  만났을 때 함께 지하로 떨어졌는데 
그 상황이 오늘과 비슷하죠?"

 장무기의 입가에 한  가닥의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녹류산장 
지뢰(地牢)에서, 미륵묘의 북 속에서  있었던 일이 픽픽 그의 뇌
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장무기는 그녀의 앙증스러운 맨발을 잊을 수 없었다. 본연의 욕
망이 다시 그의 가슴 한 구석에서 꿈틀거렸다.

 그는 조민의 맨발을 다시 한 번 손에 쥐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
꼈다. 이젠  망설일 것이 없었다. 장무기는  자신의 욕망을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갑자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조민의 
왼발을 움켜잡고 신을 벗겼다.

 조민은 도리질을  했지만 형식에  불과했다. 그녀는 장무기에게 
자신의 발을 맡겼다.

 장무기는 곧  그녀를 맨발로 만들었다. 손  끝에 닿는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이  그의 가슴을 마구  뛰게 만들었다. 웅립(擁立)한 
엄지발가락에서부터 발등을 타고  이어진 부드러운 곡선, 오목하
게 패인 발바닥,  달걀같이 매끄러운 발뒤꿈치,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조민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연약한 여자라고 해서 멋대로 다루려는 거죠?"

 장무기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그대가 연약한 여자란 말이오?  모름지기 열 명의 남자를 합쳐 
놓은 것보다 더 무서울 것이오."

 조민은 입을 삐쭉거렸다.

 "장대교주님의 칭찬에 소녀는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녀가 장난투로 말하자 두 사람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
이 처음 녹류산장에서 만났을  때도 이와 유사한 말을 주고 받은 
기억이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은 적의를 갖고 한 말이지만 지금은 
무한한 유정(有情)이 깃들어 있어 금석지감을 느끼게 했다.

 장무기는 이제 쑥스러운 감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는 농이 섞
인 투로 말했다.

 "내가 다시 발바닥을 간지럽혀도 겁나지 않소?"

 조민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겁나지 않아요."

 장무기는 즉시 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그러자 조민은 간드러지게 웃으며 그의 손
에서 발을 빼려 했다.

 "호호호..... 간지러워요."

 장무기는 그녀가 간지러워 발버둥치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계
속 간지럽혔다.

 "겁나지 않는다고 했으니 얼마나 견디나 두고 보겠소."

 조민은 선 채로 그의 어깨를 밀었다.

 "호호..... 이제..... 그만  하세요. 호호..... 도저히 못 견디
겠어요."

 그녀는 발버둥치다가 그만 대리석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바
람에 장무기도 그녀의 발을 쥔 채로 쓰러졌다.

 이제 조민의 발이 바로  장무기의 코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의 발바닥을 간지럽히지 않았지만 여전히 발목을 쥐
고 있었다. 조민도 뒤로 쓰러져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주위가 갑
자기 조용해졌다. 모든 것이 일순간에 정지되는 것 같았다. 웬지 
모르게 이  갑작스러운 침묵이 두 사람은  묘한 감정의 회오리로 
끌어들였다. 두 사람은 정적  속에서 서로 상대방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민은 팔을 뒤로 뻗어 상체를 지탱한 채 다른 한 쪽 발로 그를 
밀어내려 했다. 순간, 장무기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며 그녀의 맨발에  얼굴을 묻었다. 조민은 그의 부
드러운 입술이 발등에 닿자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조민은 장무기를 안 후로부터 야성(野性)을 지닌 몽고의 여인이 
아닌 한인(漢人)의 규녀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해 
왔다. 물론 그녀는 한인의 규방 처녀가 오직 자기가 흠모하는 남
자에게만 발을 맡긴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밀폐된 침
실에서 부부만이 행할 수 있는 유희이며 즐거움이기도 했다.

 원래 옛부터 여인의 발에  관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은밀한 방사
(房事)가 많았다.

 청(聽)이라 하여 여인의 발소리를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간
(看)이라 하는 여인의 발을  바라보는 행위, 흡(吸)은 여인의 발
냄새를 깊이 들여마시는 것을 뜻한다.

 그밖에도 발가락을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깨무는 교(咬), 발 전
체를 혀로 골고루 핥는 첨(甛), 앙증스러운 발을 통째로 입 안에 
넣었다가 뱉으며 그 행위를 반복하는 탄(呑).

 그 외에도 기상천외한 유희가 많았다. 예를 들어 발가락 사이에 
대추 혹은 기름에 볶은  수박씨를 끼워 놓고 그것을 혀로 밀어내
어 먹는 식(食), 발을 따뜻하게 녹여 주는 온(穩), 발을 양 어깨
에 얹는 견(肩).

 아무튼 여인의 발은 남정네의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는 가장 강
렬한 신체 부위로 인식되어 왔다.

 유난히 예쁘장한 조민의 발을  접한 장무기의 이성이 차츰 무너
져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입술은 발등에서 잠시 머물다가 자리바꿈을 해 갔다. 거기
에 따라  조민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장무기의 
혀가 발가락  사이를 누비자 그녀는 온몸이  오무라드는 것 같았
다.

 장무기의 입술은 결코 한  군데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누가 가
르쳐 준 적도 없는데 그는  본능에 따라 입술을 움직여 갔다. 그 
본능은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올라 그의 몸을 불사르고 조민의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조민의 신음은  차츰 고조되었다.  간지럽기도 하고 감미롭기도 
한 묘한 기분을 무엇이라 형용할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
는 야릇한 기분임엔 분명했다.

 그녀가 몸을 뒤척이는데  따라 옷자락이 흐트러지면서 백옥같은 
각선이 드러났다. 살결이 너무 고왔다. 절대적인 힘을 지닌 본능
이란 마군(魔君)에 이끌려 장무기는 그녀의 동그스름한 발뒤꿈치
를 거쳐 한 치씩 위쪽으로 탐닉해 갔다.

 그를 주체해 오던 이성(理性)이  벌써 무너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제 그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본능적 감정뿐이었다.

 땅굴 위에서  뿌려지던 희미한 달빛이  갑자기 구름에 가려지자 
주위가 칠흑같은 어둠에 잠겼다. 어둠은 장무기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그의 입에서 계속 뜨거운 열기가 뿜어졌다. 그 열기가 
땅굴 안을 온통 휘저어 놓았다.


                                 ----- 제 7 권 4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제 4 장  어둠 속의 열기(熱氣) 


 일단 한 가지 큰 일이 마무리된 셈이다. 사손은 삼십 년이란 긴
방황 끝에 귀처(歸處)를 찾은 것이다.

 이제 그에게서는 증오와  불타는 복수심이 사라졌다. 그는 증오
와 복수심이  얼마나 무서운 자아학대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
증오를 포용할 수 있는  게 관용의 사랑이라는 것을 뒤늦게 통감
한 것이다.

 어쨌든 이제 그는 마음의 안식처를 찾은 셈이다.

 장무기는 그의 앞날에 편안함과  광명이 함께 하길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장무기의 마음 속에는 사실  아직까지도 많은 의문이 남아 있었
다. 그의 의문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바로 사손이거늘, 사
손이 총총히 떠나는  바람에 미처 그 의문을  물을 새가 없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어렴풋이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이 필경 주지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그는 한때 주지약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
다. 주지약도 자기에게 은혜를  여러 번 베푼 게 사실이다. 장무
기는 그녀와의 옛정을 생각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문을 덮어
두기로 했다.

 일단 의문이 한 꺼풀씩  벗겨지면 아무래도 주지약의 명예에 손
상이 갈 것 같은 불안감이 잠재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장무기는 의문을  밝히고 싶으면서도 그것을  밝혀서는 안될 것
같은 상반된 모순에 빠져 버렸다.

 소림사의 식사는 매우 담백했다. 육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
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장무기는 사홍석을 비롯한 개방 장로들
과 서쪽 객청에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개방의 앞날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장무기는 힘닿는데까지 개방을 돕고 싶었다. 그것은 황삼 여인
의 부탁이기도 했다.

 그들이 한창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명교의 제자 한 사
람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보고했다.

 "교주님, 무당파의 장사협께서  뵙자고 합니다. 아마 긴히 상의
할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장무기는 웬지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태사부님께서 심상치 않은 일이라도.....'

 그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내두르며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가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 장송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무기
는 먼저 장송계의 표정을  살펴보고,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
한 뒤에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장무기는 장송계에게 무릎을
꿇고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태사부님께선 편안하시죠?"

 장송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르신네께선 편안하시다. 무당산에서 한 가지 중대한 사실
을 접하게 되어 이렇게 밤을 세워가며 달려온 것이다."

 "그게 무슨 일입니까?"

 "원병(元兵) 이만 명이 소림사를  향해 진발해 오고 있다. 그들
은 이번 영웅대회를 기해 모종의 행동을 취하려는 게 분명하다."

 장무기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속히 소림 장문인께 알려야겠습니다."

 두 사람은 곧 후원으로  가서 공문에게 알렸다. 공문은 잠시 심
각하게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만 명이라면 엄청난 병역이오.  그들은 이번 기회에 우리 중
원 무림의 원기를 꺽으려는 것 같소. 모든 무림인의 안위에 관계
되니 만큼  군웅들과 상의하여 대책을  결정짓는 게  좋을 것 같
소."

 장무기와 장송계도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소림사의
경종이 우렁차게 울려퍼졌고, 얼마 안 되어 군웅들이 대웅보전에
운집했다.

 군호들은 공문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자 모두 놀라는 한편 제
각기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대웅보전 안은 곧 술렁거렸다. 그들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두 가
지로 나뉘어졌다.

 혈기가 왕성한 군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천하 영웅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 이번 기회에 그들을 맞이
하여 미리 선제공격을 취해 한바탕 통쾌하게 해치웁시다."

 비교적 생각이 온건한 사람들은 의견이 달랐다.

 "원병이 이동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 이번에 우리를 겨냥
해 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오. 그러니 구태여 긁어 부스럼을 만
들 필요가 있겠소?"

 그러자 장송계가 나섰다.

 "나는 몽고어를 알아듣는데, 그들 군관이 소림사를 겨냥해 진군
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몽고가 중원을 점령한 지 백  년이 넘은 때라 한인 중에 몽고어
를 알아듣는 자가 적지 않았다. 장송계는 본디 영특하여 각 지방
의 방언에 능통할 뿐 아니라 몽고어도 유창했다.

 공문이 그의 말을 받았다.

 "여러분들, 보아하니 우리가 이곳에서  회합을 갖는 것을 안 조
정이 필시 조정에 불이익을  줄 것이라 판단해 많은 병력을 동원
해서 탄압하려는 것 같소.  우린 무림인으로서 무공을 지니고 있
어 오랑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 정면대결을 벌일 수도 있
을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곳곳에서 <옳소>하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자가 적지 않았다.

 공문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알다시피, 우리 강호의 호걸들은 줄곧 일 대 일의 싸움
을 해 왔으며, 그 숫자가 많은 경우라도 몇 십명에 불과했소. 이
번처럼 수천,  수만 명이 떼지어  대교전(大交戰)을 벌이는 것은
전혀 경험이 없을 뿐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소. 모
름지기 이러한 대교전은 무공보다 병법(兵法)에 능통해야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텐데, 빈승으로선 심히  우려가 되는 바이
오. 그러니 차라리 그들을  피해 여러분들이 본사를 떠나심이 어
떨지....."

 군호들은 서로 마주보며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장무기가 나섰다.

 "우리가 이대로 떠나가면  오랑캐들이 두려워 도망친 결과가 될
것이니, 오히려 그들의 기세만 높여 줄 것입니다. 게다가 소림사
의 승려분들만 그들의  말발굽 아래 희생당하게 될지도 모르잖습
니까?"

 공문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원병이 이곳에 당도해 강호  영걸들이 모두 떠난 것을 보면 도
에 지나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 믿소."

 군호들은 공문의 호의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이번 영웅대회를
개최한 것이  바로 소림이므로, 공문은  소림으로 인해 군호들이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군호들은 모두 뜨거운  피가 끓어올라 이대로 떠나려 하
지 않았다.

 더군다나 조정에서 이미  대규모의 군사들을 출동시켰는데 헛탕
을 치고 돌아갈 리도  만무했다. 필시 소림만이라도 살겁의 대상
으로 삼을 것이다. 소림  승려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생포될 것이
고, 소림 고찰마저 잿더미로 변할 게 분명한 것이다.

 몽고 병사들은  워낙 잔악하여 살인방화를  예사로 여기고 있었
다.

 양소가 앙연히 나섰다.

 "오랑캐들은 여지껏 숱한  잔악 행위를 저질러 왔으니 한민족의
핏줄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과 대항해 싸울 책임이 있
소. 본인의 생각으로는 소림의 천 년 고찰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오랑캐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  생사결단을 내는 게 좋을 것 같
소."

 군호들은 분분히 그의 의견에 찬동했다.

 "옳소!"

 군호들의 의견이 분분하고 있는  사이에 사문 밖에서 급박한 말
발굽소리가 들려오더니 두 필의 준마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이어 지객승의 안내하에 두 사람이 대전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군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쏠렸다. 나타난 두 사람의 복
장으로 보아 명교의 교도임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곧장 장무기 앞으로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나
서 그 중 한 사람이 아뢰었다.

 "교주께 아뢰옵니다.  오랑캐 병사 오천  명이 선발대로 소림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소림 승려들이 반역을 계획하고 있
다면서 이번  기회에 소림을  완전히 멸망시키겠다고 떠들어대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중....."

 공문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중놈이라고 말하려는 모양인데, 개의치 않을 것이니 어서 말해
보게."

 사나이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을 이어갔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중은 물론이거니와 무기를 휴대한 무림인
이라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죽인다고 했습니다. 벌써 여러 명의
화상이 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명교 교도의 보고를 들은 군호들은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당장 오랑캐놈들과 생사결단을 냅시다. 그 동안 짓밟혀온 원한
을 이번 기회에 갚읍시다!"

 몽고가 중원 땅을 거머쥐고 송나라가 패망한 지 백 년이 되었지
만 무림에서 활약하는 군호들은 계속 몽고 관병들과 적대시해 왔
다. 지금 몽고 병졸들이 대거 공격해 온다는 것을 알자 한결같이
피가 끓어올라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장무기는 그 걷잡을 수 없는  혈기를 막을 수 없어 낭랑한 음성
으로 외쳤다.

 "여러분들, 오늘이야말로 사내  대장부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번 소림사 영웅대회가 천추에 빛
나도록 모두 힘을 합쳐 싸웁시다!"

 대전 곳곳에서 곧 우뢰와 같은 환호성이 터졌다. 군호들의 기세
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장무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뭉쳐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니, 공문방장께서 명령만 내려 주시면
우리 명교의 모든 형제들도 그 명령에 따를 겁니다."

 공문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장교주, 그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오. 본사의 승려들은 다소간
의 무공을  배웠지만 큰 규모의 전투에  임하는 병법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소이다.  근래에 와서 명교가 천하 방방곡곡에
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을 모르는 자가  없소. 오직 명교만이
오랑캐를 맞이해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오. 그러니 장
교주께서 명령을 내려 주시오. 우리 모두 장교주의 명에 따라 오
랑캐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겠소."

 장무기가 사양을 하려는데 이미 곳곳에서 찬성하는 갈채가 터져
나왔다.

 장무기는 비록 나이가 젊지만 혼자서 소림 삼승과 겨룬 것을 모
두 보았으므로 그의 무학이 천하 제일이라는데 대해 의심할 자가
없었다. 게다가 명교 산하에  있는 한산동, 서수휘, 주원장 등이
도처에서 원군과 싸워 승리를 거둔 것도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었
다.

 앞서 오행기가  광장에서 보인 솜씨만  하더라도 군호들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 각 문파의 고수들이 모여 있지만 군호들은 명교 교주
를 제외하고 이번 싸움을  이끌 자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
다. 하지만 당사자인 장무기는  군호들의 뜻을 선뜻 받아들일 수
가 없었다.

 "용병술은 별도의 학문으로서  본인은 부족한 점이 너무 많습니
다. 그러니 다른 적절한 인물을 내세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사양을 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산 아래에서 고함소리가
크게 들려오더니 소림 승려 두 명이 대전 안으로 달려 들어와 보
고했다.

 "방장께 아뢰옵니다. 몽고병이 산 밑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장무기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음을 알았다.

 "예금, 홍수 양기(兩旗)가 선발대로 그들을 맞이하시오. 그리고
주전 선생과  철관 도장께서  각기 일기(一旗)를  돕도록 하십시
오."

 주전과 철관도인은 곧 대답을 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라 장무기는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설불득 대사께선 나의 성화령을 갖고 가까이 있는 본교의 형제
들을 소집해 속히 소림으로 모이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설불득은 명을 받들고 떠나갔다.

 대전 안에 모여 있던  군호들은 원병의 고함소리가 갈수록 고조
되자 제각기 무기를 뽑아 쥐고는 벌떼처럼 몰려나갔다.

 그러자 양소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교주께서 확실하게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자중지란이 일어
나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이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산중턱에
이르러 전세를 살펴보았다.

 몽고병의 선봉대는 예금기와  맞닥뜨려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
치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몽고병은 무리를 지어 일사불란하
게 움직였다. 역시 징기스칸의 후예들답게 막강한 군사들이었다.

 이때였다. 홀연 우측에서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섞여 들려왔
다. 장무기의 시선이 자연히 그쪽으로 쏠렸다. 많은 여승과 남녀
가 몽고병에 쫓겨 산 위로 도망쳐오고 있었다. 바로 앞서 떠났던
아미파 일행이었다.  아마 도중에서 몽고  관병들의 공격을 받아
다시 쫓겨온 모양이었다.

 아미파 제자들 중에 십여  명의 사나이가 들것에 부상자들을 실
은 채 우왕좌왕하고 있으며,  몽고병들이 그들 주위를 빙 둘러싸
고 공격을 퍼부었다.

 주지약은 정현, 정소를 이끌고 거듭 공격을 전개했으나 수십 명
의 몽고병졸만 죽였을 뿐 동문을 포위망에서 구출하지 못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장무기는  문득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
었다.

 '아뿔싸! 저 들것에 송사형이 실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곧 소리 높여 외쳤다.

 "홍수, 열화  양기는 엄호를  해라! 좌우이사(左右二使)와 위형
(韋兄)은 나와 함께 사람을 구하려 갑시다!"

 그는 앞장서 몸을 날렸다.

 두 명의 몽고병이 즉시 긴  창을 휘두르며 그의 앞을 가로 막았
다.

 장무기는 날렵한 동작으로 긴  창을 좌우 양손에 나꿔잡고 살짝
떨치자 두 명의 몽고병은  줄이 끊어진 연처럼 산 아래로 날아갔
다.

 "으악!"

 그들이 지르는 비명이 허공에 길게 울려퍼졌다.

 장무기는 창 끝을 돌려 한 마리의 신룡(神龍)처럼 원병 틈을 뚫
고 들어갔다. 양소, 범요,  위일소, 팽화상 등도 그의 뒤를 따랐
다. 그들이  스쳐가는 곳에  원병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그들은 삽시간에 아미파 제자들에게 접근해갔다.

 범요가 주먹을 격출해 원병의  포위망을 뚫고 들것에 실려 있는
부상자를 나꿔채더니 즉시 몸을  돌려 후퇴했다. 그 순간 장무기
는 들것에 실려 있는 부상자를 살펴보았으나 몸집이 뚱뚱한 것이
송청서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한편 주지약은 온몸에 피가  묻은 채 좌충우돌 계속 몽고병에게
닥치는 대로 살수를 전개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지약! 송사형은 어디에 있소?"

 그러나 주지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채찍을 떨치며 계속 공
격을 전개할 뿐이었다. 그녀가 위치해 있는 좁은 산길에 많은 원
병이 몰려 있어 죽이고 또 죽여도 끝이 없었다.

 장무기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미파의 제자 두 명이
제각기 한 손으로 들것을  들고 원병에게 포위된 채 사투를 벌이
고 있었다.

 그것을 본 장무기는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보아하니 송사형은 저 들것에 있는 모양이군."

 그는 즉시 창 끝으로 땅을 찍으며 그 반탄력을 이용해 시위에서
벗어난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순간,

 "으악!"

 "악!"

 들것을 들고 있던 아미파의  제자들은 거의 동시에 화살을 맞아
비명과 함께 쓰러져 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내렸다.

 장무기는 허공에서 창을 던졌다.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창이 땅
에 꽂히면서 들것이 아래로  굴러내리는 것을 막았다. 이어 장무
기는 사뿐히 들것  옆에 내려섰다. 들것에 있는  자는 온몸이 흰
붕대에 똘똘 감겨져 있고  얼굴만 노출돼 있었다. 바로 송청서였
다.

 장무기는 얼른 그를 안아올렸다. 이상하게도 그의 몸은 무척 무
거웠다. 흰 붕대가 불룩한 것으로 미루어 몸과 다른 물체를 함께
감아 놓은 것 같았다.

 주위에서 원병들이 계속  공격을 해왔다. 장무기는 자세한 생각
을 굴릴 겨를이 없었다.

 그는 송청서의 뼈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좌우로 몸을 번
뜩여 원병의 공격을 피하며 옆으로 뚫고 나갔다.

 이때 공동파의 당문량과  종유쌍협이 달려와 그를 호위했다. 그
들이 검을 떨치자 원병들이 분분히 쓰러졌다. 장무기는 송청서를
안고 무사히 산 위로 올라왔다.

 이 무렵 수백 명의 원병이 떼를 지어 밀려오자 팽영옥이 소리쳤
다.

 "열화기, 공격해라!"

 열화기에 속한 교도들은 일제히 원통(圓筒)을 꺼내 기름을 뿜어
냈다. 잇따라 불화살이 빗발치듯 날아가자 거센 불길이 치솟아올
랐다.

 "으앗!"

 "악!"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앞장서 진격해 오던
이십여 명의  원병은 불길에 휩싸여  혼비백산했다. 그들은 옷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땅에서 뒹굴며 아비규환을 했다.

 자연히 원병 진영에 큰 혼란이 일었다.

 한데, 비참한 상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홍수기가 뒤따라
독수(毒水)를 뿜어냈다. 다시 수백  명의 원병이 독수 세례를 받
아 연신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삽시간에 원병 주위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몸부림치다가 죽어
가는 원병의 숫자가 늘어갈수록 생지옥을 연출했다.

 원병을 이끌고 있는 만부장(萬夫長)은 황급히 후퇴 명령을 내렸
다. 거기에 따라 후퇴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길게 울려퍼지며 원
병들은 앞을 다투어 후퇴했다.  뒤쪽에 있던 원병들은 방패를 앞
세워 앞쪽으로 달려와 방패막을 구축해 동료들의 후퇴를 도왔다.

 열화기 쪽에선 계속 화살을  쏘아댔으나 더 이상의 전과를 거두
지 못했다.

 원병은 비록 커다란 손실을 입었지만 질서를 유지하면서 후퇴하
자,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팽영옥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
다.

 "패배를 당해 후퇴하면서 혼란이 빚어지지 않는 것만 보아도 오
랑캐의 병졸이 천하의 정병(精兵)이라는 걸 알 수 있겠군."

 산 아래로 물러난  원병은 부채꼴로 흩어졌다. 그들의 상황으로
보아 당분간은 공격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장무기는 적시에 명령을 하달했다.

 "예금, 홍수,  열화 삼기는 산중턱 중요  길목을 지켜라! 거목,
후토 양기는 신속하게 나무와 흙을 옮겨 방위벽을 구축하라!"

 오행기는 그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였다.

 군호들은 앞서 원병들을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게 사실
이었다. 단지 혈기만 믿고 그들을 상대하려 했었다. 물론 승리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교전을 해보니  비로소 원병의 위력이 상상외로 강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울러 군사들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는
것이 무림에서 일 대  일로 무공을 겨루는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는 사실을 알았다.

 수천 명의 군사들이 한꺼번에 공격해 오자 그 기세는 성난 파도
와 같았다. 주지약 같이  무공이 뛰어난 고수도 물밀듯이 밀려오
는 군사들 틈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사면팔방에서 칼과  창이 난무하고 언제  어느 방향에서 화살이
날아들지 알 수 없어  평상시에 사용하던 무공 초식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만약 명교의  오행기가 진법을 펼쳐  원병의 질서정연한 진법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군호 쪽이 처절한 패배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군호들 중에서  소림의 승려만이 그런대로  질서를 유지했을 뿐
나머지는 마구잡이로 공격을  펼쳐 오히려 자중지란을 빚는 경우
도 있었다.

 소림의 승려들은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주로 나한진법(羅漢陣法)
으로 원병들을  상대했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승려가 희생되었
다. 원병이 물러간 뒤에 군호들은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보다 경
각심을 높였다.

 송(宋) 말년에 조정 장수들  중에도 무림 출신의 고수들이 많았
는데, 결국 몽고인에게 강산을 빼앗겼으니 병법과 무공이 용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군호들은 비로소 실감했다.

 장무기는 송청서를 천천히  땅에 내려놓았다. 그의 맥을 짚어보
니 다행하게도 맥박이 뛰고 있었다.

 장무기는 주지약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으나 보
이지 않았다.

 "송부인은 어디에 있소?"

 장무기가 물었으나 정확히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원병과 맞서 싸우느라 주지약이 어디로 갔는지 눈여겨 보지 않았
다.

 아미파의 제자들은 이제 명교에 대한 적개심이 다소 풀렸다. 그
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장문인이 갑자기 사라진데 대하여 어
리둥절했다.

 장무기는 혼란 중에 송청서가  다시 부상을 입었을까 봐 염려가
되어 일단 붕대를 풀어 살펴보기로 했다. 붕대는 세 겹으로 되어
있었다. 세 번째 붕대가  풀어지는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부러진 검과 칼이 떨어졌다.  역시 장무기가 처음 생각했던 대로
다른 물체가 몸과 함께 붕대에 싸여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부러
진 검과 칼일 줄이야 실로 뜻밖이었다.

 한데, 그 검과 칼을  확인한 장무기는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앗! 도룡도, 의천검!"

 그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군호들도 분분히 달려와
주위를 에워쌌다. 틀림없는  도룡도와 의천검이었다. 단지 그 두
가지 신병이기가 모두 반 토막으로 부러져 있었다.

 이 뜻하지 않은 사실 앞에 군호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장무기는 부러진 도룡도를  집었다. 역시 육중한 무게만은 변함
이 없었다.

 그는 부러진 도룡도를 손에 쥔 채 만감이 교차됐다. 도룡도. 부
모님의 목숨을 빼앗아간 칼이다. 이  칼로 인해 근 이십 년간 강
호에서 풍파가 끊이지 않았다.  군호들이 소림에 모이게 된 것도
사실은 이 한 자루의 보도 때문이었다.

 파란만장한 보도가 드디어  군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두 토막으로 부러진 것일까? 이로 인해 보도의 위
력이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장무기가 부러진  보도를 유심히 살펴보니  중간이 비어 있음을
알았다. 무엇을 숨겨  놓았던 것이 분명했다. 의천검을 살펴보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검 속에  무엇을 숨겨 놓았다면 아마 누가
그것을 갖고 갔을  것이다. 그 자가 누구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양소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주낭자의 무공이 갑자기 고강해진  것은 바로 이 도검 속에 숨
겨져 있던 비급을 얻은 게 분명할 것이오."

 장무기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아울러 장무기는 확연히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알고보니, 무인도에서 그날 밤 도검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은 조
민의 소행이 아니라 주지약이  저지른 것이었다. 그녀가 무슨 수
법으로 조민을  쫓아 버리고 은리(=주아)를  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실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주지약은 도검 속에 숨겨 있는  비급을 손에 넣기 위해 두 가지
의 신병이기를 부러뜨린 게  분명했다. 비급을 얻은 주지약은 암
암리에 무공연마를 해왔을 것이다.

 장무기는 생각을 굴릴수록 여러 가지 의문이 풀렸다.

 '맞아. 당시 무인도에서 그녀의  체내에 있는 독을 제거해 주기
위해 구양신공을 펼쳤을 때.....'

 그렇다. 당시 주지약의 체내에서 괴이한 힘이 뻗쳐 장무기의 구
양신공에 저항하지  않았던가. 그 힘이  갈수록 강해져 장무기는
그녀의 내력(內力)이 날로 증진돼 가는 것이라 생각 했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주지약은  속성을 꾀하기 위해 기초를 다지는
것을 완전히 무시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목적한
대로 짧은 기일 내에  음독한 무공을 연성했지만 그것이 상승 무
학의 경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주지약이 무당의 육이협과  은육협을 격패한 것은, 그 괴이하기
이를데 없는 초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것은 장무기가 총교 풍
운 삼사에게 패했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주지약의 진정한 무공은 육이협 등에 비해 많이 뒤떨어졌다. 차
후 다시 겨루게 된다면  주지약이 무당 제협에게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장무기가 혼자서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예금기의 장기사 오경초
가 엉뚱한 제의를 해왔다.

 "교주님, 속하는 장인(匠人) 출신으로 주검술을 배운 적이 있습
니다. 이  부러진 검과  보도를 이어보고 싶으니  윤허해 주십시
오."

 양소가 얼른 나섰다.

 "오기사의 주검술은  천하무쌍이니 한번  시도해 보라고 하십시
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두 자루의 신병이기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니
좋을 대로 해 보시오."

 오경초는 열화기 장기사 신연에게 도움을 청했다.

 "주검술은 화력과 깊은  관계가 있는 만치 신형께서 도와주셔야
겠어. 오랑캐들은 당분간 재진격을 해 오지 않을 것 같으니 우리
가 언제쯤 일을 착수하면 좋을것 같나?"

 신연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불을 지피는 일은 소제의 특기이니 만치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착수할 수 있소이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부하들을 지휘해 놓은  화로를 쌓게 했다.
화로의 불구멍은 직경 한  자에 불과했다. 오경초는 도룡도의 자
루 쪽 반 토막을  집어 끊어진 부분을 불구멍을 겨냥해 고정시켰
다.

 열화기는 늘 연료가 준비돼  있기 때문에 불을 지피는데 어려움
이 없었다. 순식간에 화로의 불길이 훨훨 타올랐다.

 오경초는 오른팔이 끊어져 왼팔 밖에 남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이미 십여 가지의 병기가  준비돼 있었다. 그는 처음서부터 계속
뚫어지게 노화(爐火)를 응시했다. 노화의 색깔이 변할 때마다 준
비해 놓은 무기를 집어 화력(火力)을 시험해 보았다.

 노화가 차츰 푸른 빛에서 흰 빛으로 변해 갔다. 거기에 다라 오
경초의 표정도 차츰 긴장되었다.

 오경초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드디어 집게로 나머지 반 토
막의 도룡도를 집어 화구(火口)에 고정시킨 자루 쪽의 반 토막에
갖다 붙였다. 뜨거운 화염  속에서 토막난 도룡도가 서로 연결된
채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오경초는 웃통을 벗고 있어 불꽃이 몸에 튀었다. 상당한 고통일
것이다. 그런데도 오경초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도룡도를 달구는데만 온 정신이  집중돼 있었다. 그의 모습은 장
엄하기까지 했다.

 한쪽에 떨어져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장무기는 내심 새로
이 느끼는 바가 있었다.

 '예전엔 주검술(鑄劍術)을 가볍게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그 나
름대로 대단한 기술과 학문을 요하는군. 화력의 강열을 조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만약 평범한  장인이라면 단지 저 엄청난 열을 견
뎌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갑자기,

 "앗!"

 "저런.....!"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군호들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나왔
다. 장무기도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알고보니 풀무질을 하던 열화기의  두 교도가 열을 견뎌내지 못
해 그만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진 것이다. 그 즉시 신연과 열화
기의 장기부사가 앞으로  뛰쳐나가 까무라친 두 사람을 끌어내고
직접 풀무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들 두 사람의  내공은 모두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어 일단
풀무질을 하자 노화가 치솟았다. 화염이 일 장 가량 솟구쳐 오르
자 장관을 이루었다.

 모든 사람의 기대와 긴장속에서 향 한 자루가 타는 시간이 경과
되었을까, 오경초의 입에서 별안간 짤막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앗!"

 비명과 함께 그는 뒤로  몸을 솟구쳤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그
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좌절의 빛이 역력했다.

 중인은 흠칫  놀라며 그를 지켜보았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순강으로 된  집게는 이미 불에  달구어져 쭈글쭈글했다. 그러나
반 토막의 도룡도는 원래 상태에서 전혀 변한 데가 없었다. 아무
리 강한  불길에도 달구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다시 증명된 셈이
다.

 오경초는 장탄식과 함께 고개를 절래절래 내둘렀다.

 "속하가 무능하여 도저히 보도를  복원시킬 수가 없군요. 이 도
룡보도는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신연과 열화기의 장기부사도  풀무질을 멈추고 한쪽으로 물러났
다. 두 사람은 모두 물 속에 첨벙 빠졌다.

 도룡도를 원상 복귀시키는 일이 이제 도저히 불가능해지는 듯했
다.그런데 줄곧  침묵을 지키며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조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장상공, 이 세상에 도룡도를  달굴 만한 집게가 없을 테니, 그
성화령으로 시험해 보는 게 어떻겠어요? 도룡보도가 성화령을 손
상시킬 수 없었잖아요?"

 장무기는 무릎을 탁 쳤다.

 "아! 그렇군!"

 여섯 매의 성화령 중에  하나를 설불득에게 주어 교도들을 소집
케 했으니 아직 다섯 매가 남아 있었다.

 장무기는 품 속에서 성화령을 꺼내 오경초에게 내주었다.

 "도검을 복원시키지 못해도  상관없지만, 성화령은 본교의 신물
(信物)이니 만치 파손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오경초는 힘주어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몸을 숙여 공손하게 성화령을 받았다.

 다섯 매의 성화령은 무슨 금속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금(金)도 아니며 강철도 아니었다. 그러나 견고무비했다.

 오경초는 성화령을 유심히 살피고 고개를 저울질해 보이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장무기는 은근히 염려가 되었다.

 "자신이 없으면 구태여 모험을 할 필요는 없소."

 오경초는 생각을 골똘히 하느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는 비로소 깊은 생각에 깨어나 정중하게 말했다.

 "속하가 물음에 신속히 답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성화령은 백금, 현철(玄鐵)에다  금강사(金剛砂) 등을 혼합해 만
든 것으로서 절대 불에 녹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
가 가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애당초 이 성화령을 어떻게 만들었
는지 불가사의합니다. 그것을 골똘히 생각하느라 다른 데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조민이 곁눈질로 장무기를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나중에 교주님께서 파사국으로 한 중요한 인물을 만나러 갈 거
예요. 그 때  당신도 함께 따라가 성화령을  만든 장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수수께끼가 풀릴 거예요."

 장무기는 멋적게 말했다.

 "내가 무엇하러 파사국에 가야 한단 말이오?"

 조민은 짓궂게 웃었다.

 "그야 교주님께서 더 잘 아실 게 아니겠어요?"

 조민은 다시 오경초에게 말했다.

 "성화령을 보면 꽃무늬와 줄이 새겨져 있는데, 도룡도와 의천검
으로서도 손상을 입지 않는 성화령에다 어떻게 꽃무늬와 글을 새
겼는지 모르겠군요."

 오경초가 곧 대답했다.

 "꽃무늬와 글을 새겨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성화령에
다 백랍(白臘)을 칠한 후 그 백랍 위에 꽃무늬와 글을 새겨 다시
강렬한 산액(酸液)으로 몇  달간 천천히 부식시켜 나중에 백랍을
긁어내면 꽃무늬와  글이 고스란히 새겨지게  됩니다. 소인이 알
수 없는 것은 용주(鎔鑄)하는 방법입니다."

 신연은 한쪽에서 기다리다 못해 은근히 짜증이 났는지 큰소리로
물었다.

 "이봐, 대관절 할 건가, 안 할 건가?"

 오경초는 결심을 내린 듯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리고
는 장무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교주님, 안심하십시오. 신형제의 열화가 제아무리 거세다 해도
성화령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을 겁니다."

 신연은 그의 말에 약간 망설여졌다.

 "내가 최선을 다해 불길을 키워 만약 본교의 신물을 손상시킨다
면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해 낼지 걱정이 되는구먼."

 오경초는 빙긋이 웃었다.

 "염려 붙들어 매고 이번 기회에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 보게. 내
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네."

 이리하여 도룡도를 연결시키는 일이 다시 착수되었다.

 오경초는 우성 두 매의  성화령으로 반 토막의 도룡도를 앞뒤로
끼어 다시 새 집게로 그 성화령을 집어 화로에 넣어 달구기 시작
했다. 용광로가 녹아내리듯 뜨거운  불길이 화구 위로 치솟아 올
랐다. 엄청난 열량이었다.

 중인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시간이 자꾸만 흘러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경초와 신연, 열화기 장기부사는 지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어느덧 반 시진이 흘렀다. 이제 오경초 등 세 사람은 힘이 완전
히 고갈되어 곧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더 이상 버
티는 게 무리였다.

 이때 철관도인이 주전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약
속한 듯 앞으로 달려나가 신연과 열화기 장기부사를 대신해 풀무
를 가동했다.

 이들 두 사람의  무공은 신연보다 한 수  위이므로 일단 풀무를
가동하자 화로 속에서 한 줄기의 백색 화염이 곧장 허공 높이 치
솟아 올랐다. 그 열기로  인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사람들마저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오경초의 표정은 극도로 긴장되어 갔다.

 홀연, 오경초의 입에서 짤막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고형제, 어서 출수하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예금기의  장기부사가 예리한 칼을
쥐고 화로 옆으로 뛰쳐나갔다.

 중인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와 오경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순간, 한 줄기의 싸늘한 도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예금기의 장
기부사가 다짜고짜 칼 끝으로 오경초의 가슴을 찔렀다.

 "앗!"

 군호들의 입에서 자연히 놀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대경실색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예금기 장기부사의  행동은 실로  뜻밖이었다. 군호들이 놀라는
가운데 오경초의 가슴에서 선혈이 뿜어졌다. 그 선혈이 도룡도에
뚝뚝 떨어졌다. 핏방울이 열에 닿자 뿌지지 하는 소리와 함께 파
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경초의 입에서 다시 짤막한 외침이 터졌다.

 "됐다!"

 그는 비칠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무너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의 손에 집중됐다. 그의 손에는
한 자루의 거무스름한 대도(大刀)가  쥐어져 있었다. 바로 두 토
막의 도신(刀身)이 붙은 도룡보도였다.

 중인은 비로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알고보니, 검과 칼을 주조하는 대장인들은 왕왕 자신의 피를 주
물에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었다.

 옛날 간장(干將), 막사(莫邪)  부부도 자신들의 몸을 화로 속에
던져 천고의 신검(神劍)을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오직 신검을 만
들겠다는 신념 하나로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까지 미련없
이 버리는 것이 바로 고대(古代)의 장인정신(匠人精神)이었다.

 지금 오경초의 행동도 그 장인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다.

 장무기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오경초를 부축해 일으
켜 상처를 살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상처가 깊지 않았다.

 장무기는 금창약을 바르고 붕대로 가슴을 감싸주었다.

 "오장기사,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겠소? 도룡도를 연결시키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데 이로 인해 오장기사가 너무나 고
생이 많았소."

 오경초는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이 정도의 상처는 별것  아닙니다. 공연히 교주님께 염려를 끼
쳐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도룡도를 살펴보았다. 장무기도 그제서야 시
선을 도룡도로 돌렸다.

 도신의 연결  부분은 거의 완벽했다. 단지  어렴풋이 한 줄기의
혈흔이 나 있을 뿐이었다.  이것을 확인한 오경초는 매우 만족했
다.

 장무기는 다시 두 매의 성화령을 살펴보았다. 과연 아무런 손상
도 없었다.

 장무기는 오경초로부터 도룡도를  받아 원병으로부터 빼앗은 대
도(大刀)를 향해 내리찍었다.

 뚝!

 대도가 여지없이 두 동강이 났다. 도룡보도의 위력은 역시 예전
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군호들 사이에서 절로 환호성이 터졌다.

 "와! 보도다! 보도야!"

 오경초는 두 동강이가 난 의천검을 집었다. 그의 표정이 갑자기
우울하게 변했다.  예금기의 전임 장기사와  예금기 산하의 형제
수십 명이 이  의천검에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그 생각을 하니
오경초는 가슴이 아팠다.

 그는 의천검을 손에 받쳐든  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장무기에
게 말했다.

 "교주님, 나의 장대가(莊大哥)와 여러 형제들이 이 검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속하는 이 검에 대한 원한이 뼈속 깊이 맺혀
있습니다. 이 검만큼은 잇고  싶지 않으니 교주님께서 달리 벌을
내리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장무기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것은 오장기사의 의리이며  또한 인지상정이거늘 내 어찌 나
무랄 수 있겠소?"

 그는 부러진 의천검을 받아  아미파의 제자 정현 앞으로 걸어갔
다.

 "이 검은 귀파의 소유였으니 사태가 보관하셨다가 주..... 송부
인에게 전해 주었으면 좋겠소."

 정현은 아무 말 없이 단검을 받았다.

 장무기는 다시 도룡도를 손에 쥐고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 하더
니 소림 장문인 공문대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장문인, 이 보도는  나의 의부님께서 소유하셨던 것인데, 지금 
의부님께선 일문에 귀의해  소림제자에 속하니 이 보도를 의당히 
소림에서 맡아야 할 겁니다."

 공문은 당치도 않다는 듯 연신 손을 내둘렀다.

 "그 보도는 이미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어 마지막으로 장교주께
서 어렵게 수중에 넣지 않았소이까? 그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이며 더구나 귀교의 오장기사가 그 부러진 보도를 잇는데 성공하
지 않았소. 그보다도 장교주가 그  보도를 지녀야 할 가장 큰 이
유가 있소. 당금 무림에서 모두 장교주를 지존(至尊)으로 받들고 
있을 뿐 아니라, 재덕(才德)으로 보나, 지위로 보나 역시 장교주
가 그 보도를 관장하는 것이 당연지사일 것이오."

 군호들도 공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옳은 말이오! 모든 무림인의  뜻이니 장교주께서 더 이상 사양
할 필요가 없소!"

 장무기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내심 생각했다.

 '만일 이 보도로 천하 호걸들을 호령해 오랑캐를 중원에서 몰아
낸다면 이보다 더 보람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군호들은 입을 모아 우렁차게 외쳤
다.

 "무림지존 도룡보도, 호령천하 막감불종!"

 그 아래 원래 두 귀절이 더 있었다.

 ----- 의천불출 수여쟁봉! -----

 그러나 의천검은 절단되어 다시 이일 수 없으니 구태여 더 이상 
의천검을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의천검은 영원히 강호에서 
모습을 감추게 될 것이다.

 명교 예금기 산하의 사람들은  의천검에 대한 원한이 매우 컸었
다. 이제 도룡도가 옛  모습을 되찾고, 의천검이 여전히 두 동강
이가 된 채 무용지물로 사장되자 그들은 모두 후련해 했다.

 반나절 동안  분주하게 움직인 탓인지  군호들은 모두 시장기를 
느꼈다.

 명교 오행기와 소림의 일부  승려들은 제각기 나누어 중요한 길
목을 지키는  한편, 나머지 사람들은  승려들의 안내로 소림사로 
들어가 요기를 채웠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마루로 기울자 차츰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
다.

 장무기는 높은  나무 위로 올라 산  아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원병들은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산기슭 부근에 흩어져 있고, 연
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역시 저녁 식사를 할 분
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장무기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위일소에게 웃으며 말했다.

 "위형, 날이 어두워진 뒤에  혹시 적이 야습을 해올지도 모르니 
수고스럽지만 그들의 동태를 살펴봐 주시오."

 위일소는 명을 받들고 물러갔다.

 그러자 양소가 넌지시 장무기에게 말했다.

 "교주, 내가 보기에 놈들은 앞서 혼쭐이 났기 때문에 섣불리 재
공격을 해오지 않을 것이오.만약 다시 공격을 해온다면 정면 공
격보다 산기슭  뒤로 돌아가 기습을 시도할  가능성이 짙을 것이
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보니 그렇군요. 그럼 양좌사와 범우사가 이곳을 지켜 주시
오. 나는 산 저편으로 가서 살펴보겠소."

 그가 떠나려 하자 조민이 얼른 뒤를 따라갔다.

 "나도 함께 가겠어요."

 장무기는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어 그녀와 동행했다. 두 사람은 
사손이 갇혔던 산봉우리 쪽으로 와서 뒷산을 살폈으나 별다른 이
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장무기는 세 그루의 부러진 소나무와 시꺼먼 지뢰(地牢) 입구를 
바라보며 오늘 낮에 있었던 치열한 싸움을 생각하니 아직도 등줄
기가 오싹해지며 한의(寒意)를  느꼈다. 실로 아슬아슬한 장면의 
연속이었다.

 문득 장무기의 뇌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의부님이 나더라 지뢰  석벽을 살펴보라고 하셨는데 깜박 잊을 
뻔했군.'

 그는 곧 조민에게 말했다.

 "난 지뢰 아래로 내려가  살펴볼 것이 있으니 잠시만 위에서 기
다려 주시오."

 그는 조민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땅굴 속으로 뛰어내렸다. 땅
굴 속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장무기는 부싯돌로 불을 밝혔다. 어
느새 물이 빠졌는지 바닥만  약간 질퍽할 뿐 벽 아랫쪽은 빙둘러 
대리석을 깔아놓아 건조했다.

 장무기의 시선이 먼저 사면 벽에 쏠렸다. 그곳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장무기는 대리석 위로 올라 그림을 자세히 살폈다. 뾰족
한 돌로 새긴  듯 간단한 필획이지만 생동감이  넘쳤다. 동쪽 첫 
번째 그림에는 세  명의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한 여인이 땅에 
누워 있는데, 다른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보살펴주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여인은 오른손을 내밀어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
의 품 속을 더듬는 모습이었다. 이 그림 옆에 두 글자가 적혀 있
었다.

 ----- 취약(取藥). -----

 남쪽 벽 두 번째  그림은 큼지막한 해선(海船) 한 척이었다. 한 
여인이 다른 한 여인을 배 위로 던지는 모습도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 옆에도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 추방(追放). -----

 여기까지 살펴본 장무기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예측했던 
상황이 명확하게 그림으로 나타나  있었다. 실로 무서운 일이 아
닐 수 없었다.

 장무기는 이마에서 어느덧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장무기는 속으
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과연 내가  생각했던 대로군. 지약은  조민이 나의 사촌누이를 
보살펴주고 있는 틈을 타서 그녀의 품 속에서 십향연근산을 훔쳐
냈다. 그게 바로 첫 번째 그림에서 밝힌 취약(取藥)이다.....'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지약은 십향연근산을 몰래 음식에 풀어 모두 정신을 잃은 사이
에 조민을 안아 파사국의  해선 위에다 던져 배를 몰아 떠나게끔 
했을 것이다.....'

 그렇다. 사손의 그림에서 밝혀진 것과 같이 주지약은 조민을 일
단 무인도에서 몰아내 버린 것이다.

 장무기는 생각을 굴리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약은 왜 조민 낭자를 추방한 것일까? 차라리 그녀를 죽일 수
도 있었을 텐데.....'

 장무기는 의문에 봉착됐지만 곧 그 의문이 해답을 찾아냈다.

 '맞아..... 만약 섬에서 조민 낭자의 시신이 발견된다면 그녀에
게 모든  죄를 전가시키진 못했겠지. 이제  모든 게 분명해졌어. 
누이동생을 해친 것도 역시 지약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장무기는 절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시 
주지약이 주아(=은리)  시신 앞에서 눈물까지  뿌린 생각을 하면 
그 가증스러움에 치가 떨렸다.

 장무기는 다음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두 명의 남자가 그려져 있는 그림인데, 한 명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하고  한 명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본 장무기는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이제보니 의부님께선 지약이 천리(天理)에 위배되는 짓을 행하
는 것을 예민한 청각으로 모두 감지하고 있었군. 그런데 왜 아무
런 내색도 하지 않았을까?'

 장무기의 두 번째 의문도 곧 풀렸다.

 '그렇다. 의부님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십향연근산에 중독된 
후였을 것이다. 이미 공력이  상실되어 만약 내색을 한다면 지약
의 손에 죽게 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의부님은 한 술 더 떠 그 
당시 조민 낭자의 소행이라고 단언하며 일부러 매우 분개해 했던 
것이 분명하다. 내가 침착하지  못하고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알
고 있는 의부님은 행여나 무의식중에 기밀을 누설할까 봐 나에게
까지 숨겼던 것이다.'

 그림에는 군데군데 선혈이 묻어 있었다. 낮에 사손과 성곤이 혈
투를 벌이면서 뿌린 피였다. 그 선혈로 인해 그림의 내용이 더욱 
처절하고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장무기는 다음 그림을  살펴보았다. 이 그림에는 사손이 단정히 
앉아 있고 주지약이 그의  등 뒤에서 기습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
었다. 그리고 바깥 쪽에서 개방 제자들로 여겨지는 한 무리의 사
람들이 뛰쳐들어오는 것도 그려놓았다.

 이러한 상황은 조민이 대도(大都)에서 벌어진 유황성(遊皇城)놀
이에서 사람들을 시켜 분장한 것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장무기가 그 다음 그림으로  시선을 돌리려는데 손에 쥐고 있던 
불씨가 다 타버려 별안간 꺼져 버렸다.

 장무기는 즉시 땅굴 위쪽을 향해 소리쳤다.

 "조낭자, 이리 내려와 보시오. 부싯돌이 필요하오!"

 조민은 곧 불을 밝혀 들고 땅굴 속으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그림을 훑어보자  이내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장무기는 불빛을 빌려  마지막 그림을 살펴보았다. 이 그림에는 
몇 명의 사나이가 사손을 들고 걸어가는데, 멀리서 한 소녀가 나
무 뒤에 숨어 훔쳐보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제 장무기는 모든 그림을  살펴보고 그 내용도 확연하게 알았
다.

 그림의 필법은 모두 훌륭했으나  사손 한 사람의 모습을 제외하
고 나머지 사람들의 용모는  뚜렷하지가 않아, 내심 짚이는 바가 
없었다면 누가 누군지 전혀 알아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손이 실명했을 때 장무기는 아직 세
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사손은 장무기와 주지약, 조민, 주아의 
음성만 들었을 뿐 용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당
연히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그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무기는 마지막 그림 중에  나무 뒤에서 훔쳐보는 소녀를 가리
키며 조민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낭자요? 아니면 주지약이요?"

 조민은 생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예요. 성곤이 개방으로 가서 사대협을 납치해 소림으로 보낸 
뒤 스스로 길목에다 명교의 암호를 남겨 당신을 엉뚱한 방향으로 
유인한 거예요. 난 사대협을 빼앗아 오려고 여러 번 시도해 보았
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어요."

 장무기는 새삼 조민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그녀를 
의심해 온 것도 죄스러웠다.

 장무기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예전보다 훨씬 초
췌해진 모습이었다. 몇  달 동안 자기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은 
흔적이 얼굴에 역력했다.

 장무기는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격정이 끓어올라 왈칵 그녀를 
품안에 껴안았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낭자, 내 잘못이 너무 많은 것 같소."

 그가 갑자기 조민을 껴안는 바람에 불씨가 꺼지고 말았다. 주위
는 다시 어둠에 잠겼다.  장무기는 자신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
를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 낭자가 총명하고 지혜롭지 못했다면, 이 어리석은 장무기
가 경솔하게 낭자의 목숨을 앗아가 천추의 한을 남길 뻔했소."

 조민은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이 과연 나를 죽일 수 있었을까요? 당시 당신은 내가 흉수
라고 단정했는데  왜 마음을 모질게 먹고  살수를 전개하지 않았
죠?"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 낭자에  대한 나의 감정은 진실한  것이었소. 난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늘 그  감정에 지배되어 온   
게 사실이오. 만약 낭자가  나의 누이동생을 죽였다면 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거요. 그 동안 그 일로 인해 고민을 많이 해
왔소. 이제 진상이 밝혀지니 마음이 홀가분하구료."

 조민이 이렇게  가까이서 장무기의  마음을 읽기는 처음이었다. 
장무기는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고 조민은 그의 뜨거운 
마음이 직접 가슴에 와닿았다.

 조민은 짜릿한 희열을  느끼며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웬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행복에 겨워 눈물이 쏟아질 것
만 같았다. 장무기의 입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거짓없는 감정을 
듣기를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조민은 장무기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 왔다. 부
귀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혈육의 정마저도 뒷전으로 미루었
다.

 두 사람은 서로 껴안은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승유언
(無言勝有言)이란 말이  있듯이 이런  분위기에선 차라리 무언이 
더 많은 의미를 대신해 주었다.

 어느덧 달이 위치를 바꾸어감에 따라 땅굴의 좁은 입구 위로 그 
교교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희미한 달빛이 두  사람 머리 위로 
뿌려지자 비로소 조민은 고개를 쳐들었다.

 주위는 죽은  듯 고요했다. 조민이 접한  장무기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강렬했다. 그 강렬한 눈빛 속으로 자신이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자 조민은 웬지 불안하고 당황해졌다.

 그녀는 당황함을 숨기기 위해  다시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처음 녹류산장에서  만났을 때 함께 지하로 떨어졌는데 
그 상황이 오늘과 비슷하죠?"

 장무기의 입가에 한  가닥의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녹류산장 
지뢰(地牢)에서, 미륵묘의 북 속에서  있었던 일이 픽픽 그의 뇌
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장무기는 그녀의 앙증스러운 맨발을 잊을 수 없었다. 본연의 욕
망이 다시 그의 가슴 한 구석에서 꿈틀거렸다.

 그는 조민의 맨발을 다시 한 번 손에 쥐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
꼈다. 이젠  망설일 것이 없었다. 장무기는  자신의 욕망을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갑자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조민의 
왼발을 움켜잡고 신을 벗겼다.

 조민은 도리질을  했지만 형식에  불과했다. 그녀는 장무기에게 
자신의 발을 맡겼다.

 장무기는 곧  그녀를 맨발로 만들었다. 손  끝에 닿는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이  그의 가슴을 마구  뛰게 만들었다. 웅립(擁立)한 
엄지발가락에서부터 발등을 타고  이어진 부드러운 곡선, 오목하
게 패인 발바닥,  달걀같이 매끄러운 발뒤꿈치,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조민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연약한 여자라고 해서 멋대로 다루려는 거죠?"

 장무기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그대가 연약한 여자란 말이오?  모름지기 열 명의 남자를 합쳐 
놓은 것보다 더 무서울 것이오."

 조민은 입을 삐쭉거렸다.

 "장대교주님의 칭찬에 소녀는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녀가 장난투로 말하자 두 사람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
이 처음 녹류산장에서 만났을  때도 이와 유사한 말을 주고 받은 
기억이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은 적의를 갖고 한 말이지만 지금은 
무한한 유정(有情)이 깃들어 있어 금석지감을 느끼게 했다.

 장무기는 이제 쑥스러운 감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는 농이 섞
인 투로 말했다.

 "내가 다시 발바닥을 간지럽혀도 겁나지 않소?"

 조민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겁나지 않아요."

 장무기는 즉시 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그러자 조민은 간드러지게 웃으며 그의 손
에서 발을 빼려 했다.

 "호호호..... 간지러워요."

 장무기는 그녀가 간지러워 발버둥치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계
속 간지럽혔다.

 "겁나지 않는다고 했으니 얼마나 견디나 두고 보겠소."

 조민은 선 채로 그의 어깨를 밀었다.

 "호호..... 이제..... 그만  하세요. 호호..... 도저히 못 견디
겠어요."

 그녀는 발버둥치다가 그만 대리석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바
람에 장무기도 그녀의 발을 쥔 채로 쓰러졌다.

 이제 조민의 발이 바로  장무기의 코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그녀의 발바닥을 간지럽히지 않았지만 여전히 발목을 쥐
고 있었다. 조민도 뒤로 쓰러져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주위가 갑
자기 조용해졌다. 모든 것이 일순간에 정지되는 것 같았다. 웬지 
모르게 이  갑작스러운 침묵이 두 사람은  묘한 감정의 회오리로 
끌어들였다. 두 사람은 정적  속에서 서로 상대방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민은 팔을 뒤로 뻗어 상체를 지탱한 채 다른 한 쪽 발로 그를 
밀어내려 했다. 순간, 장무기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며 그녀의 맨발에  얼굴을 묻었다. 조민은 그의 부
드러운 입술이 발등에 닿자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조민은 장무기를 안 후로부터 야성(野性)을 지닌 몽고의 여인이 
아닌 한인(漢人)의 규녀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해 
왔다. 물론 그녀는 한인의 규방 처녀가 오직 자기가 흠모하는 남
자에게만 발을 맡긴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밀폐된 침
실에서 부부만이 행할 수 있는 유희이며 즐거움이기도 했다.

 원래 옛부터 여인의 발에  관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은밀한 방사
(房事)가 많았다.

 청(聽)이라 하여 여인의 발소리를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간
(看)이라 하는 여인의 발을  바라보는 행위, 흡(吸)은 여인의 발
냄새를 깊이 들여마시는 것을 뜻한다.

 그밖에도 발가락을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깨무는 교(咬), 발 전
체를 혀로 골고루 핥는 첨(甛), 앙증스러운 발을 통째로 입 안에 
넣었다가 뱉으며 그 행위를 반복하는 탄(呑).

 그 외에도 기상천외한 유희가 많았다. 예를 들어 발가락 사이에 
대추 혹은 기름에 볶은  수박씨를 끼워 놓고 그것을 혀로 밀어내
어 먹는 식(食), 발을 따뜻하게 녹여 주는 온(穩), 발을 양 어깨
에 얹는 견(肩).

 아무튼 여인의 발은 남정네의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는 가장 강
렬한 신체 부위로 인식되어 왔다.

 유난히 예쁘장한 조민의 발을  접한 장무기의 이성이 차츰 무너
져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입술은 발등에서 잠시 머물다가 자리바꿈을 해 갔다. 거기
에 따라  조민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장무기의 
혀가 발가락  사이를 누비자 그녀는 온몸이  오무라드는 것 같았
다.

 장무기의 입술은 결코 한  군데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누가 가
르쳐 준 적도 없는데 그는  본능에 따라 입술을 움직여 갔다. 그 
본능은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올라 그의 몸을 불사르고 조민의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조민의 신음은  차츰 고조되었다.  간지럽기도 하고 감미롭기도 
한 묘한 기분을 무엇이라 형용할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
는 야릇한 기분임엔 분명했다.

 그녀가 몸을 뒤척이는데  따라 옷자락이 흐트러지면서 백옥같은 
각선이 드러났다. 살결이 너무 고왔다. 절대적인 힘을 지닌 본능
이란 마군(魔君)에 이끌려 장무기는 그녀의 동그스름한 발뒤꿈치
를 거쳐 한 치씩 위쪽으로 탐닉해 갔다.

 그를 주체해 오던 이성(理性)이  벌써 무너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제 그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본능적 감정뿐이었다.

 땅굴 위에서  뿌려지던 희미한 달빛이  갑자기 구름에 가려지자 
주위가 칠흑같은 어둠에 잠겼다. 어둠은 장무기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다. 그의 입에서 계속 뜨거운 열기가 뿜어졌다. 그 열기가 
땅굴 안을 온통 휘저어 놓았다.


                                 ----- 제 7 권 4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제 5 장  늙은 마두(魔頭)의 음욕(淫慾) 


 한편, 군호들 사이에서 훌쩍 떠나가 버린 주지약은 어떻게 되었
을까?

 그녀는 혼란을 틈타 뒷산 쪽으로 달려갔다. 장무기에 의해 도룡
도와 의천검의 의문이 밝혀지게 될 것이 뻔한 사실이므로 그녀는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비록 임종을 앞둔  스승님의 엄한 유명(遺命)이고, 자신이 스승
님 앞에서 맹세한 일을 실천에 옮긴 것이지만 장무기에게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장무기를 진심
으로 사랑했었기에 그녀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 동안 멸절사태의 유명에  따라 의천검과 도룡도에 숨겨진 비
급을 찾아내 새로운  음공(陰功)을 연마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
문에 그 나름대로 장무기에  대한 죄의식을 잊고 있었는데, 이제
모든 것이 밝혀질 마당에  또 그 망각했던 죄책감이 한꺼번에 무
너져버려 그녀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간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후회도 해보았지만 그 때마다 스
승님의 유명이란 지상과제를  내세워 자신을 합리화 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마음의  부담이 말끔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만하고 적대시해야만 하는 자신이 미웠다.

 그렇다고 해서 스승인  멸절사태를 배반할 수는 없었다. 그녀에
게 있어 멸절사태는 스승인 동시에 어버이며 은인이었다. 임종을
앞둔 멸절사태의 그 처절하리 만치 강렬한 당부를 생각할 때마다
주지약은 등골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한 오싹함을 느꼈다. 아울러
멸절사태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당부가 귓전에 되살아났다.

 ----- 절대 장무기와 혼례를 해선 안된다.  너의 미색으로 그를
유혹해 의천검과 도룡도를 동시에 손에 넣어 본문의 무학을 천추
에 빛내야 한다. -----

 그것은 주지약에게 있어  더 없는 괴로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승님 앞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그녀의 진심과는
거리가 먼 약속이지만 한번 한 맹세는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스승님과의 약속을  이행했다. 그 결과가 어떠한 것
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언젠가는 그 죄의 댓가를 받게 되
리라고.....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것은 주아를 죽게  한 일이었다. 그일로
인해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언제쯤 자신의 죄상이 밝
혀지게 될  것인지 가슴이 조마조마하여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
다.

 이제 막상 그 사실이  밝혀지게 되자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과
더불어 홀가분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허탈
이었다.

 사문(師門), 스승님의 은혜, 자신을 속박해 온 그 모든 것이 일
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자신에게 아무런  위안도 줄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의  희생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며 어디에서
보상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인적이 없는 산길을 홀로  힘없이 걸으며 주지약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당장 장무기에게 다시 달려가 모든 것을 털
어놓고 용서를 빌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것
은 또한 이미 작고한 스승님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도 느껴졌다.

 그녀는 계속 걸음을 내딛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막막한 사막에 자기만이  버려진 듯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어려
서 부모를  잃고 자라온 그녀지만 이렇게  짙은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젠 머리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슴도 구
멍이 난 듯 텅 비어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홀연 등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왜소한 그
림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허탈상태에서 걷고 있던 주지약은
갑자기 사람을  발견하자 흠칫 놀랐다.  더군다나 상대방은 이미
자기에게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평상시라면 주지약의 예민한 감
각으로 이런 황산에서 사람이 나타난 것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그녀가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보니  왜소한 사람의 그림자는
추악하게 생긴 꼽추 노인이었다.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턱 밑이  헐어 진물이 흐르며
한 쪽 눈마저 흰자위뿐인 애꾸였다.

 인적이 없는  산길에서 추악한 노인이  불쑥 나타나자 주지약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꼽추 노인은 곧장 그녀에게 다가왔다. 주지약은 웬지 불안을 느
끼며 걸음을 멈춘  채 몸을 돌려 꼽추  노인을 지켜보았다. 그녀
앞에 다가온 꼽추 노인은  뜻밖에도 공수의 예를 취했다. 그리고
자갈을 입에 문 듯한 까칠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주낭자가 아니십니까?"

 주지약은 멍해졌다.

 "그렇습니다만, 노인장은 뉘시기에 저를....."

 꼽추 노인은 왼눈으로 그녀의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후 하고 한
숨을 내쉬었다.

 "주낭자를 찾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다행이구료. 노부는
명교 장교주의 수하로서 주낭자에게 전할 서찰이 있어 황급히 뒤
를 쫓아온 것이오."

 주지약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상대방이 정말 명교의 제자
인지 자세히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었다. 하기야 명교의 교도가
워낙 많으므로 세심을  기울인다 해도 상대방의 진위를 가려내지
못할 것이다.

 표정이 굳어지는  주지약에게 꼽추 노인은  징그럽게 웃으며 품
속에서 서찰 한 통을 꺼내 건네 주었다.

 주지약은 약간 망설이다가 그 서찰을 받았다. 서찰 겉장에 틀림
없이 용등호약하는 필체로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장교주가 이 서찰을 나에게 전해 주라고 했단 말인가요?"

 꼽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에  제삼자가 없는데도 다소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장교주께서 낭자와  은밀히 나눌 얘기가  있는 모양이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해 금방  낭자의 뒤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
에 이 늙은이더러 미리 서찰을 전해 주라고 분부한 것이오."

 주지약은 전신에  한 차례 진동이 일었다.  자기는 분명 아무도
모르게 떠났는데 장무기가 어떻게 자기가 떠난 방향을 알고 사람
을 시켜 서찰을  보낸 것일까? 그리고 서찰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주지약이 속으로 생각을 굴리고  있는 사이에 꼽추 노인은 다시
공수의 예를 취했다.

 "그럼 본인은 임무를 완수했으니 이만 떠나야겠소."

 이 말을 남기고 꼽추 노인은 즉시 신법을 전개해 오던 방향으로
사라졌다. 비록 등이 굽은 꼽추지만 그의 신법을 신속무비했다.

 주지약은 명교에 알려지지 않은  고수가 많다는 것을 새삼 실감
하며 잠시 제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가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뜯어보았다. 서찰에는 겉봉과
똑같은 필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 금만신시 소실산후  천룡암견 (金晩辛時 少室山後 天龍庵
見) -----

 오늘밤 신시 소실산 뒤편 천룡암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아래쪽에 천룡암으로 가는 약도와 장무기의 이름이 명시돼 있었
다. 천룡사라면 바로 지금 그녀가 가고 있는 방향에서 얼마 떨어
지지 않았다.

 주지약은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장무기가 자기를 만나려
하는 것은 불문가지, 무인도에서  있었던 일을 문책하려는 게 분
명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장무기는 마주치기가 두려운 존재가 아
닌가?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설
령 장무기가 자기에게 살수를 전개한다 해도 어차피 부딪쳐야 할
사람이다.

 장무기가 직접 뒤쫓아오지 않고  수하를 시켜 만날 장소를 약속
한 것을 보면 단둘이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심산임을 알 수 있었
다.

 주지약의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는 결심을 내렸다.
어떠한 결과가 벌어지더라도  장무기와 만나 은원을 해결 하리라
고.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키며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 동안 얼
마나 많은 각오를 해왔던가. 하지만 막상 그 각오가 현실로 나타
나자 서글픔이 앞섰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은 힘이 없
었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머지않아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 어둠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갔다.

 물론 그녀는 지금쯤 장무기가 오경초의 주검술을 지켜보고 있으
며 서찰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
면, 그녀에게 가짜 서찰을 전해 준 꼽추노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녀를 천룡암으로 유인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핏빛 놀이 서편 하늘을 붉게 물들인 가운데 주지약은 천룡암 앞
에 당도했다.

 그녀는 아직도 장무기의 서찰이  가짜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
었다. 물론 커다란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짐작하
지 못했다. 이왕 부딪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차라리 한시 바
삐 장무기를 만나고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장무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신시에 만나
자고 했으니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천룡암  앞 돌계단을 올랐다. 천룡암은 작은
암자로서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 되었음이 분명했다. 대문은 아
미 무너졌고 담벽도 옛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암자 안은 더욱 황량했다. 무성한 잡초가 무릎을 넘고 어디선가
들쥐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음씨년스럽기만 했다.

 뜨락 안으로 들어서며 보니, 돌로 세운 병풍이 있었던 모양인데
이제 무녀져내려 단지  아랫 부분에 새겨진 불(佛)자만이 어렴풋
이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돌병풍의 뒤쪽이 바로
암자의 대전(大殿)이었다.

 대전 안에서 뜻밖에도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비록 등잔을
밝힐 때가 되지 않았지만  이 황폐된 암자의 분위기가 워낙 침침
하여 일찍 등불을 밝힌 것 같았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
었다. 주지약은 당연히 장무기가 먼저 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음..... 벌써 당도해 날 기다리고 있었군.'

 주지약은 마음을 굳게 다지며  성큼성큼 대전 안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잡초가 무성한 곳을 지나가자니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사사삭!

 다른 여자라면 질겁을 할 정도로 기분이 나쁜 소리였다. 독사가
풀밭 사이로 기어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귀신이 해골을 파먹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라서,  웬만큼 담이 큰 남자라 해도 머
리카락이 쭈뼛해질 것이다.

 '날 이곳까지 오게 하고서 어찌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일까?'

 주지약은 다소 의혹을 느꼈으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이때였다.

 푸다닥!

 잡초가 무성한 대전 앞쪽에서  난데없이 몇 줄기의 시꺼먼 물체
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는 게 아닌가!

 이번에 주지약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몇 마리의 박쥐였다.

 '어두운 동굴에 사는 박쥐가 어떻게 이곳에.....'

 주지약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몸을 솟구쳐 사뿐히 대전 앞
에 내려섰다. 그  순간 또다시 푸드득 거리며  몇 마리의 박쥐가
잡초 틈에서 날아올랐다.

 주지약은 대전 앞에 서서 소리쳤다.

 "장교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곳에 왔는데 왜 모습을 드러내
지 않죠?"

 그녀의 외침소리는 조용한 주위를 가르며 멀리 퍼져나갔으나 대
전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주지약은 주춤하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대전 안으로 걸음을 옮
겨 놓았다. 대전 복판에 놓여  있는 탁자 위에 콩알 만한 등잔불
이 밝혀져 있었다. 그 뒤쪽으로 거미줄이 드리워져 있고, 곳곳에
두꺼운 먼지가 쌓여 있었다.

 주지약은 더 이상 자세한  것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낡은 탁
자 위에 종이 쪽지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기 대문이다.

 쪽지 위에는 분명 무엇인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가 어둑어둑하여 무슨 글
인지 식별할 수가 없었다.

 '대관절 무슨 속셈으로 이런.....'

 그녀가 생각해 온 장무기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상황이 계속 일
어나자 은근히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녀는 천천히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쪽
지에 적힌 글이 등잔불에 비쳐 똑똑히 시야에 들어왔다. 앞서 받
은 서찰과 똑같은 필체였다. 그런데  그 내용은 또 한 번 주지약
을 멍하게 만들 만큼 엉뚱한 것이었다.

 ----- 후원(後園)에서 기다리겠소. -----

 주지약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처음부터 나의  기를 꺾으려는 모양이군.  구태여 이럴 필요는
없을 텐데.....'

 그녀는 등잔을 손에 들고 후원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후원으로 가려면 좁고 긴 복도를 지나야만 했다. 복도에도
거미줄과 먼지가 뒤덮혀 있었다.  그런데 먼지가 쌓인 복도에 한
줄기의 발자국이 길게 연결돼  있었다. 그것이 바로 장무기가 남
긴 발자국이라 생각했다.

 등잔을 앞세우고 그녀는  복도를 지나 뒷편 뜨락으로 들어섰다.
이곳에도 잡초가 무성했다. 모든 건물이 낡을 대로 낡아 폭삭 주
저앉을 것만 같았다. 눈에 뜨이는 것은 오직 폐허뿐이었다.

 후전에서도 불빛이  새어나왔다. 주지약은  대전 밖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무도 눈에 띄지  않자 소리쳐 장무기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튀쳐나오려던 말을 삼켜 버렸다. 비록 죄를 짓
고 있는 입장이지만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장무기가 대전 안에 있다면  응당히 밖으로 나와야 하지 않겠는
가!

 주지약은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주지약
은 어쩔 수 없이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소리쳤다.

 "이봐요 장교주! 대관절 무슨 꿍꿍이속인가요?"

 하지만 후전 안은 조용할 뿐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주지약은 오기가 생겼다.  동시에 이상한 느낌도 들어 조심스럽
게 후전 안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후전 안쪽 기둥에 제각기 등잔불이 걸려 있어 주위를 환하게 밝
혀 주었다.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한복판에 탁자
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술병과 잔 두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술병 아래에 또 하나의  쪽지가 눌려져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
다.

 주지약은 발끈했다. 설령  장무기에게 문책을 받아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수모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는 부아가 치밀어  앞으로 달려가 쪽지를 집어들었다. 그곳
에 똑같은 필체로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 안주를 구해 올 테니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시오 -----

 주지약은 울지도 웃을 수도 없었다. 장무기가 이런 장난에 가까
운 짓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녀는 나직이 한
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후전 안도  마찬가지로 곳곳에 거미줄이  드리워져 있고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지만 탁자 주위만은 예외였다.

 주지약은 끓어오르는 울화를 억제하기 위해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술병의 마개를  열자 그윽한 주향(酒香)이
코 끝에 풍겨왔다. 주지약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과 같
은 심정에선 한 잔 마시고 싶었다. 자신의 불안감을 삭히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이때 그녀의 뇌리에 문득 이상한 느낌이 떠올랐다.

 '왜 하필이면 날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한 것일까?'

 그러나 그녀는 불길한 생각을 이내 떨쳐 버렸다. 이미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는데 아무려면 어떠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장
무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술잔에 술을 가득 따루었
다. 술의  빛깔은 벽록(碧綠)색으로 향기가 진했다.  한 잔 마셔
보니 입 안 가득히 향기가 감도는 것이 마실 만했다.

 주지약이 한 잔 마시는 사이에 어느덧 날이 어두어졌다.

 뜨락을 할퀴는 바람이  제법 차가왔다. 갑자기 바람결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주지약은 얼른 술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렸
다. 과연 어둠을 뚫고 한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주지약은  표정이 굳어졌다. 상대방은  멀리 떨어져 있어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장무기가 아니
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흡사 바람에 실리듯 눈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다
가온 사람은 장무기가 아닌 현명이로 중의 한 사람인 녹장객이었
다. 실로 뜻밖이었다.

 주지약은 대경실색했다. 그녀가 쪽지를 건네받을 때부터 느꼈던
많은 의문이 일시에 풀렸다. 비로소 자신이 함정에  걸려든 사실
을 깨달은 것이다.

 녹장객은 그녀를 뚫어지게 주시하며 입가에 징그러운 웃음을 띄
었다.

 "주낭자, 그  장무기라는 음적이 아니라  이 늙은이가 나타나니
무척 실망하는 눈치군."

 주지약은 의자에서  일어난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녹장객의 강렬한 눈빛에서 직감적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날 이곳으로 유인해 온 목적이 무엇이냐?"

 그녀가 싸늘하게 다그치자 녹장객은 느긋하게 대꾸했다.

 "네가 절세의  무공비급을 수중에 넣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서 순순히 그 비급을 내놓아라."

 주지약은 어림도 없다는 듯 냉소를 날렸다.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녹장객은 히죽 웃었다.

 "네가 신공을 어설프게 배웠다고  해서 우리 형제를 당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흐흐...."

 그는 징그럽게  웃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거기에 따라
주지약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오늘의 일전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녀의 귓전에 녹장객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원래 너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왜 너
를 일부러 이곳으로 유인해 왔는지 아느냐?"

 주지약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녹장객이 스스로 말을 이었다.

 "그것은 너를 다치게 하지  않고 일단 소유하고 싶어서였다. 계
집은 옥과 같은 것이라  티끌만한 하자가 생겨도 그 값어치를 상
실하기 때문이다. 이제 내 말뜻을 알겠느냐?"

 주지약은 다소 당황해졌다.  녹장객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
었다. 게다가 학필옹마저 부근에 도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렇다고 비급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데 주지약을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녹장객의 다음 말이
었다.

 "겁낼 것 없다. 너는 이미 합환주(合歡酒)를 마셨을 것이다. 그
술 속에 미약(迷藥)을 풀어놓은  사실을 넌 아마 모르고 있을 것
이다. 일단 그 약효가  온몸으로 퍼지면 제아무리 정절을 목숨처
럼 생각하는 계집도 세상에서 둘도 없는 탕녀(蕩女)로 변하게 된
다. 하하핫....."

 그는 양양하게 광소를 터뜨리며 눈에서는 욕정의 불길이 이글거
렸다.

 주지약은 황급히 진력을 끌어올려 보았다. 별로 막히는 데가 없
었다. 그러나 음호혈(陰戶穴)로부터  미미하게나마 한 갈래의 뜨
거운 기류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행하게도 그
녀가 새로 연마한 무공이 음유(陰)柔한 기운을 위주로 한 것이므
로 그 뜨거운 기류를 스스로 억제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 발작하게 될지 그녀로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마음을 결정했다. 그러기
위해선 기습 공격을 전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냉정하기만 하던 얼굴에 한 가닥의 엷은 미소가 피어오른
것은 바로 이때였다.

 "술에다 미약을 풀어넣었을 줄이야 정말 뜻밖이군요. 그 약효가
언제쯤 발작할 것인지 말해 줄 수 있나요?"

 녹장객은 본디 남달리  여색을 탐했다. 그는 주지약으로부터 신
공 비급을 탈취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학필옹의 양해를 얻어 내친
김에 자신의 욕심까지 채우려 했던 것이다.

 앞서 꼽추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자가 바로 학필옹이 위장한
것이다.

 녹장객은 주지약에게 억지로  미약을 복용시킬 수 없음을 알고,
일부러 이런 과정을 거쳐 주지약으로 하여금 홧김에 스스로 술을
마시게끔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늙은 생각이 맵다는 말
이 있듯이 실로 음흉한 마두였다.

 녹장객은 지금 주지약의 반응이 갑자기 부드러워지자 속으로 침
을 꿀꺽 삼켰다. 슬슬  약호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성급하게 생각
했다.

 주지약은 그의 성급한 마음을 부채질하듯 이번에는 눈웃음을 쳤
다.

 "당신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이군요. 당신이 노리는 것이
다 여기에 있으니 원하는 대로 해보세요."

 그녀는 마치 상대방을 맞아들이는 듯한 자세로 양팔을 벌렸다.

 녹장객은 앞으로  걸음을 내딛으려다가  주춤했다. 그는 자신이
너무 흥분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역시  그는 세심했다. 이제
주지약은 독안에 갇힌 쥐나  다를 바 없으니 구태여 서두를 필요
가 없었다. 어차피 상대방은  미약을 복용했으므로 그 미약의 약
호가 나타나면 자연히 자기의 품 안에 안길 것이다. 그에게 신경
이 쓰이는 것은 오히려 밖에서 망을 보고 있는 학필옹이었다. 그
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문밖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순간, 팔을 벌리고 있던 주지약이 갑자기 용수철에서 튕겨진
듯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핑! 녹장객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요란한 굉음
이 들리며 주지약의 몸이 천장 지붕을 뚫고 나갔다. 역시 그녀의
생각이 적중되었다. 그녀가 서 있던 후전은 건물이 낡을 대로 낡
아 몸을  솟구치며 쌍장을 펼쳐내자 지붕이  뻥 뚤리며 기왓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녹장객으로선 실로 뜻밖의 변화였다. 그는 자신이 문 입구 쪽을
가로막고 서  있기 때문에 주지약이 절대  달아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빗나간 것이다.

 녹장객은 손아귀에  들어온 떡을 놓칠 리  만무했다. 그는 즉시
뒤따라 그 뚫려진 지붕 위로 몸을 솟구치며 소리쳤다.

 "사제, 계집을 잡아라!"

 지붕을 뚫고 나온 주지약은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이 어둠 속을
향해 몸을  날렸다. 뒤에서 녹장객의  싸늘한 고함소리가 들려왔
다. 힐끗 고개를 돌려본 주지약은 녹장객 외에 또 한줄기의 그림
자가 자신의  뒤를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학필옹임이
분명한 것이라 생각했다.

 주지약은 신법을 최고  경지로 전개해 계속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녀가 달리는 방향은 공교롭게도 장무기와 조민이 함께 있는 그
지뢰(地牢)쪽이었다.

 한편, 한창 열기에 싸여 있던 장무기와 조민.

 장무기는 그녀의  입술을 빼앗고 마지막  실오라기 같은 이성이
무너지려는 순간, 홀연  서북쪽에서 고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
자 흠칫하며 현실로 되돌아왔다.

 조민도 찬물 세례를 받은 듯 활활 타오르던 열화가 순식간에 식
어 버리며 벌떡 몸을  일으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그녀
의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그녀는 장무기를 쳐다보기가 부끄
러웠다.

 이때 고함소리가 차츰 가까이 들려왔다.

 잠시 긴장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던 장무기가 덥석 조민의 손
을 잡았다.

 "어서 밖으로 나가 살펴봅시다."

 그는 조민의 손을 잡은  채 땅굴 위로 솟구쳤다. 고함소리가 들
려오는 방향을  살펴보니 세 줄기의 그림자가  질주해 오고 있었
다. 그들의 신법은 모두  전광석화같이 빨라 일류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무기가 언뜻 보기에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쫓는 각축전이었
다. 두 사람 중의 하나가  갑자기 손을 떨치자 한 줄기의 싸늘한
광채가 앞쪽에서 도망치는 자의  등을 향해 뻗쳐나갔다. 앞서 달
리는 자는 즉시 옆으로 피하며 장검을 떨쳤다.

 창!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는 가운데 빛줄기를 그리며 뻗쳐오던 물
체가 검에 의해 허공으로 높이 튕겨져 올랐다. 그가 멈칫하는 사
이에 추격해 오던 또 한 사람이 바싹 따라붙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구름에 가려졌던  반달이 모습을 드러내어
장무기는 그들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바로 현명이로와
주지약이 아닌가!

 녹장객은 가까이 따라붙자마자 재빨리 녹장을 사납게 휘둘렀다.
주지약은 황급히 우측으로  미끄러지며 허공에 검광을 뿌려 녹장
을 막았다. 달빛을 빌어  그녀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고 치
렁치렁한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장무기는 흠칫하며 얼른 조민과 함께 나무 위로 몸을 숨겼다.

 앞서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주지약의 장검에 의해 높이 튕겨져
오른 물체는 학필옹의  무기인 학취필이었다. 학필옹은 뒤쫓아와
허공에서 떨어지는 학취필을 나꿔잡더니 주지약의 왼쪽으로 내려
서서 녹장객과 더불어 좌우협공을 전개했다.

 주지약은 이를 갈며 싸늘하게 외쳤다.

 "계속 내 뒤를 쫓아와 대관절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녹장객이 공격을 펼치며 소리쳤다.

 "오늘 장무기가  도룡도와 의천검을 수중에  넣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비급은 이미  사라졌다. 그 비급만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장무기는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내가 의천검과 도룡도를 수중에 넣었을 때 저 마두들이 숨어서
지켜보았군.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니.....'

 주지약의 외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가 무공  비급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신공을 터득한 후에
이미 태워버렸다."

 녹장객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냉소를 날렸다.

 "네가 신공을 터득했다고?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다. 도룡도와
의천검은 자고로 무림지존이라  일컬어져 왔는데 그 속에 숨겨진
비급이 예사 무공이겠느냐?....."

 녹장객은 학필옹과 서로 위치를 바꾸며 계속 떠들어댔다.

 "너의 자질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짧은 시일 내에 그
절세 신공을 완전히 터득하진  못할 것이다. 만약 네가 터득했다
면 구태여 도망칠 필요없이  벌써 노부 형제를 죽였을 게 아니겠
느냐?"

 주지약은 아슬아슬하게 학필옹의 공격을 피하며 악을 쓰듯 외쳤
다.

 "네가 뭐라고 해도 이미 불태워 없앴다. 설령 나를 죽인다 해도
그 비급을 수중에 넣지는 못할 것이다."

 학필옹과 녹장객은 더 이상  입씨름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쳐
독수리가 먹이를 나꿔채듯 덮쳐내렸다.

 주지약도 몸을  급속도로 회전시키며 검을  떨치자 그녀의 주위
다섯 자 안이 온통 싸늘한 검광으로 뒤덮였다. 비록 수세에 몰려
있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

 장무기는 그녀의 검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가 신공을 연
마한 후 채찍을 사용하는  것은 보았지만 검을 전개하는 것은 처
음 보는 것이었다.

 달빛 아래 은빛 뱀이 난무(亂舞)하듯 검초(劍招)가 펼쳐지는 가
운데 그녀는  이대 고수(二大高手)를  맞이해 그런데로 버텨나갔
다. 예전의 주지약이라면 아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지약의 검초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따금씩 연출되는 절
묘한 변화였다. 허(虛)와 실(實)이 서로 어우러져 변화를 창출할
때마다 녹장객과 학필옹은 흠칫  놀라는 듯했다. 그 반대로 주지
약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숨을 돌릴 계기를 만들곤 했다.

 순식간에 쌍방은 삼십여 초식을 주고 받았다.

 이제 주지약이 펼쳐낸 검막은 둘레 여섯 자까지 뻗쳤다. 갈수록
검초가 더욱  위력적으로 변한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장무기는  그곳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임을
알고 있었다.

 주지약이 이러한 타법(打法)으로 쾌속하게 내력(內力)을 운용하
는 것은, 달아나기 위한  기회를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장무기
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만약 주지약이 계속 그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내력이 과도
하게 허비되어 스스로 지치게  될 뿐 아니라 무리한 공격을 전개
하는 도중에 눈꼽만치의 실수를  보이면 즉시 돌이킬 수 없는 위
경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장무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지약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
다. 이 순간 만큼은  그녀에 대한 원한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장무기는 손에 땀을 쥐며
무의식중에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갔다.

 만약의 경우 주지약을 도우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갑자기,

 "야압!"

 주지약의 입에서 날카로운 기합이 토해지며 녹장객을 향해 질풍
이 몰아치듯 연거푸 삼검(三劍)을 펼쳐냈다.

 녹장객은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답게 비록 놀랐으나 당황하
지 않고 재빨리 옆으로 몸을 뒤틀며 피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학필옹의 쌍필이 수중에서 벗어나 주지약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를
암기로 삼아 던져내는 것은  강호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었다.

 공격을 받는 입장에서 볼 때는 일종의 불의의 기습을 당하는 것
이므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반면, 기습을 전개
하는 쪽도 위험 부담을 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단 기습이 실
패로 돌아가면 무기를 잃게 되므로 오히려 자신이 위경에 처하게
된다. 그야말로 마지막 주사위를  던져 최후의 승부수를 거는 것
과 다를 바 없었다.

 학필옹의 쌍필을 던져내는  순간 장무기는 흠칫했으나 주지약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주지약의 등을  겨냥해 날아가던 쌍필이 갑자기 도중에
서 뜻하지 않은 변화를 일으킬 줄이야!

 창!

 맑은 금속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쌍필이 허공에서 서로 맞부딪치
며 방향을 꺾어 주지약의  뒷통수와 허리 뒤쪽을 향해 폭사돼 갔
다.

 뒷통수와 허리 뒤쪽 요후혈(腰後穴)은 모두 급소로서 일단 적중
되면 금강신선(金剛神仙)이라 할지라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
이다.

 한편, 주지약은 등 뒤에서 쌍필이 허공을 가르는 예리한 파공음
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려 피했으나 쌍필이 갑자기
도중에서 맞닥뜨리며  방향을 전환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
다. 아차하는 찰나 주지약은 뒤통수로 날아오는 학취필을 피했으
나 요후혈을 겨냥해 화살처럼 뻗쳐오는 또 하나의 학취필은 도저
히 피할 재간이 없었다.

 위기일발!

 주지약의 뇌리에 죽음의  암영(暗影)이 드리워지는 것과 동일한
시각에 한 줄기의 그림자가 불가사의한 속도로 날아와 그 죽음을
알리는 학취필을 나꿔챘다.  동시에, 학필옹이 잇따라 떨쳐낸 일
장을 맞받아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느닷없이 뛰쳐들어 주지약을 사선(死線)에
서 구해낸 장본인은 장무기였다.

 그러나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주지약
은 미처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사신(死神)의 손짓만 의식할 뿐 뇌리가 백지처럼 텅 비었다.

 그 틈을 타서 녹장객이  적시에 일장을 전개해 그녀의 아랫배를
적중시켰다. 녹장객이 전개한  것은 그 무시무시한 현명패천장이
었다.

 "윽!"

 주지약의 입에서 외마디 신음이  터지며 즉시 숨이 막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위기를 틈탄 녹장객의 교활한 출수가
결국 싸움을 마무리지은 것이다.

 장무기는 주지약이 쓰러진 것을  보자 소스라치게 놀라 손에 쥐
고 있던 학취필을 팽개치며 얼른 주지약을 안아올려 비스듬히 일
장 남짓 솟구쳤다. 그리고 분노에 찬 음성으로 호통쳤다.

 "이 비겁한 마두들! 무림  선배랍시고 거드름을 피울 때는 언제
고, 이제 와서 비겁하게  둘이서 한 사람을 공격하다니 그러고도
낯짝을 들고 무림 동도를 대할 수 있겠느냐?"

 녹장객은 가소롭다는 듯 광소를 날렸다.

 "으핫핫핫핫.....! 어느 놈이  감히 이 어른신네들의 일을 방해
하는가 했더니, 이제보니 장대교주시군, 마침 잘 만났다. 우리의
군주마마를 꾀어 어디다 숨겨 놨느냐?"

 장무기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나무 뒤 어두운 곳에서 조민
이 스스로 뛰쳐나왔다. 그녀는 우선 장무기로부터 주지약을 받아
안더니 현명이로를 향해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녹선생, 아직도  나를 못 잊어 오매불망  찾아 헤매고 있나요?
이런 식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주책을 부린다면 나의
아버님이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녹장객은 주지약을  탐하려던 것이 발각된  듯 스스로 수치심을
느꼈다. 그 수치심을 감추기라도 하듯 그는 버럭 화를 냈다.

 "이 요망한 계집, 여지껏 네가 군주라고 해서 흥이야 항이야 해
도 들어 줬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구나. 우리 형제는 네 아비와
벌써 인연을  끊었다. 그러니 여양왕도  앞으로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할 것이다!"

 여양왕부에 예속돼 있을  때는 그런대로 마성(魔性)을 억제하던
녹장객이 이젠 스스럼 없이 그 마성을 드러냈다.

 장무기는 녹장객이 주지약에게  독수를 전개하고 더우기 예전의
상전이었던 조민에게 서슴없이  무례한 언동을 발하자 분노가 치
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어렸을 때 그들 두 사람에게 현명
패천장을 당해 많은 세월 동안 고생해 온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
렸다.

 장무기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눈에서 짙은 살기가 뿜어
졌다.

 "민매(敏妹), 잠시  뒤로 물러나시오. 오늘 저  두 늙은 마두를
단단히 혼내주겠소."

 현명이로는 장무기가 빈손인 것을  보자 즉시 무기를 거두고 만
반의 응전태세를 갖추었다.

 장무기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받아랏!"

 대갈일성과 함께 공작전미(孔雀展尾)라는 초식을 쌍장으로 밀어
냈다. 이 초식은 태극권법으로서 장세가 뻗쳐나가는 속도는 매우
느렸다. 장무기는 이 초식에다 암암리에 구양신공을 주입시켰다.

 태극권법, 이 권법은  후세에 이르러 권법의 태두라 일컬어지며
여러 가지 다른 명칭으로  분리돼 널리 펴져나갔지만, 당시 장삼
봉이 창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림에서도 이 장법을 직접 목격
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녹장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런 음유무력(陰柔無力)한 장세
(掌勢)를 본 적이 없어 일단 당황했다. 어떤 변화가 숨겨져 있는
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장무기를 매우 경원
시하고 있었다. 그는 감히 정면으로 받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비
스듬히 옆으로 몸을 피했다.

 장무기는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유연하게 몸을 돌리며 학필옹
을 겨냥해 왼손을 뻗어냈다.

 백사토신(白蛇吐信).

 이와 동시에  장무기의 오른손이 왼손  손등에 붙여지며 미미한
떨림을 연출했다. 그의 왼손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경기(勁氣)가
분명히 뻗쳐나갔다.

 학필옹은 거기에 맞서 왼손 식지로 장무기의 장심(掌心)을 허초
로 찍으며 오른손으로  호선(弧線)을 그려 장무기의 아랫배를 노
렸다.

 장무기는 현명이로와  두 차례나 격출한  바가 있으므로 그들이
자기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
에 자신은 도액 등 소림 삼승과 치열한 한판 승부를 벌여 무공이
더 한층 증진되어 현명이로를 여유있게 격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실력을 만만하게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경솔한 마음을  갖지 않고 태극권법을 위주로  하여 잇따라 원을
그려내며 그 원형의  경기(勁氣) 사이로 구양신공을 간간이 구사
했다.

 싸움은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현명이로는 자신들의  열세를 풍부한  대적 경험으로 보충했다.
역시 고목의 뿌리는 깊었다.

 현명이로는 일초 인식을 신중하게 대처해 나갔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상대방에게서 뻗쳐오는  양강지기(陽剛之氣)가 거세지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뜨거운 양기가 자신들이 구사하는 현명신
장의 음한지기를 차츰 좀먹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휙! 휙!

 무서운 경기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계속 귓전을 때릴 뿐 쌍방
은 침묵 속에서 격전을 치루어갔다.

 어느새 쌍방은 백여 초식을 주고 받았다.

 순간, 장무기의  몸이 광풍에 쏠리는 한  닢 낙엽인양 허공으로
붕 떠올라  아랫쪽을 향해 쌍장을  교차시키며 떨쳐냈다. 새로운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허공에 떠 있는 장무기는 우연히 한쪽에 시선이 쏠리며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현명이로가  좌우로 갈라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사뿐히
당에 내려서면서 방금 시선이  쏠렸던 곳을 유심히 살폈다. 그곳
에 두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몸을 떨고  있었는데, 달빛을 빌어
조민과 주지약이라는 것을 대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장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눈꼬리를 치켜올리자 조민과 주지약
의 모습이 보다 확연하게  시야에 잡혔다. 조민은 주지약을 안고
있었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곧 주지약을 놓칠 것만 같았다.

 장무기는 이내 그 까닭을 깨달았다.

 '맙소사, 지약은 녹장 늙은이의 현명패천장을 맞아 도저히 견뎌
내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녀 자신도 음한한 무공을 연마한데다가
다시 천하에서 가장 음한하다는 현명패천장을 맞았으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 된 셈이다. 그 한기(寒氣)가 민매에게까지 전달된 게
분명하다.'

 이러한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치자 장무기는 공격을 최
고 경지로 끌어올려 앙연히 녹장에게 밀어냈다.

 녹장객은 그의 권법이 급변한  것을 보자 능구렁이답게 정면 대
결을 피하고 미끄러지듯 옆으로 몸을 번뜩였다. 동시에 장무기가
왜 갑자기 공격을 서두르게 되었는지 눈치챘다.

 그는 옆으로 미끄러지는 즉시 소리쳤다.

 "사제, 유투(遊鬪)를 펼치게.  주지약 계집의 한독이 발작한 모
양이니 녀석에게 돌봐줄 틈을 줘선 안 되네!"

 "알았소!"

 그는 일단 뒤로 물러서 학취필을 뽑아쥐더니 장무기를 중심으로
하여 원을  그리며 돌다가  통천철지(通天撤地)의 초식을 전개해
학취필로 장무기의 위아래를 찔러왔다.

 그는 녹장객과  더불어 이제부터는 정면  공격보다 측면 기습을
시작했다.

 장무기는 그들의 전술 변화에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오히려 냉
소를 날렸다.

 "어떠한 형식으로도 너희들을 상대해 주마!"

 장무기가 외침과 함께 광풍노도 같은 일장을 떨쳐내자 학필옹은
휘몰아쳐 오는 무지막지한 경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때 녹장객은 자신의 무기인  녹장을 손에 쥐기 무섭게 장무기
의 옆구리를 후리며 뻗어왔다.

 장무기는 속전속결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연거푸 권법을 변
화시켜 소림신승  공성(空性)으로부터 배운 용조금나수(龍爪檎拿
手) 삼십 팔식을 펼쳐냈다.

 무금식, 고슬식, 포풍식, 포잔식..... 계속 맹렬한 공격이 이어
졌다.

 녹장객이 몸을 피하며 소리쳤다.

 "이 용조공의 위력은 대단하군.  잠시 후 이 용조공으로 구덩이
를 파면 안성마춤이겠다!"

 "사형, 구덩이를 파서 무엇한단 말이오?"

 녹장객은 교활하게 웃었다.

 "주지약 계집이 죽으면 묻어 줘야잖겠느냐?!"

 알고보니, 그는 일부러 장무기의 마음을 흐트려 놓기 위해 얼토
당토않은 말을 내뱉은 것이다.

 한데, 장무기의 마음을 흐트러  놓기도 전에 그 자신이 입을 놀
리다가 그만 주의력이 분산돼 장무기가 걷어찬 발에 왼쪽 장단지
가 적중되었다. 녹장객은  질겁을 하며 몸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백전노장답게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녹장을 물샐틈 없이 펼쳐냈
다.

 장무기는 힐끗 고개를  돌려 다시 조민과 주지약을 살펴보았다.
두 사람은 좀전보다 더욱 심하게 떨고 있었다.

 장무기는 염려가 되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소리 높
여 외쳤다.

 "어떻소?"

 즉시 조민의 음성이 들려왔다.

 "몸이 자꾸만 차가와져 견딜 수가 없어요!"

 장무기는 이내 안색이  변했다. 조민의 떨리는 음성을 들어보니
그녀도 음한지기에 시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모름지기 조민은 주지약을 도와 체내의 음한지기를 몰아내기 위
해 공력을 주입시키다가  오히려 상대방의 음한지기가 체내로 유
입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의 공력이 현격한 차이가 있는
데다가 주지약의 내력(內力)이  워낙 괴이하여 빚은 불행한 결과
라고 생각했다.

 장무기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좌우 쌍장을 떨쳐 맹공을 퍼
부으며 한시바삐 싸움을 매듭지으려 애썼다.

 그러나 현명이로는 그의 속셈을  읽고 있는 터라 멀찌감치 떨어
져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뜩이며, 단지 시간을 끄는데 주력할 뿐
정면 대결을 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안타까왔다. 그는 다시 조민을 향해 소리쳤다.

 "민매, 어서 주낭자를 땅에 내려 놓으시오!"

 조민은 당황해 하는 음성으로 외쳤다.

 "손..... 손에서 떨어지지 않아요!"

 장무기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어째서.....?"

 조민의 울먹이는 듯한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 그녀의 등심에 붙인 손이 떨어지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음성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몸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때 녹장객이 다시 엉뚱한 말을 건네왔다.

 "장교주, 저 주낭자는 천성이 악랄해 일부러 자신의 음한지독을
군주에게 전해 주고 있으니 군주가 먼저 죽음을 당하게 될 게 뻔
하다. 그러니 군주를 살리고 싶으면 한 가지 조건을 교환하는 게
어떠냐?"

 장무기는 조급한 마음에 다그치듯 물었다.

 "교환 조건이 무엇이냐?"

 녹장객은 느긋하게 말했다.

 "우리가 이걸로서  싸움을 끝내는 것이다.  나는 주낭자가 갖고
있는 비급을 얻고, 장교주는 군주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장무기는 이내 냉소를 날렸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었
다. 현명이로의 무공은 지금  상태에서도 적수를 찾아 보기가 어
려운데, 만약 주지약으로부터 무공  비급을 얻어 더욱 음독한 무
공을 연마한다면 그야말로  온 무림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광분할
게 아니겠는가!

 장무기는 속으로 생각을 굴리며 다시 조민 쪽을 바라보았다. 조
민의 아리따운 얼굴이 이미 파르스름하게 변색된 채 고통으로 일
그러져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장무기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녹장객의 제의에 가
부를 대답할 겨를도 없어 조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즉시 왼
손으로 조민의 오른손을  잡아 체내의 구양진기를 주입시켜 주었
다.

 녹장객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대뜸 소리쳤다.

 "맹공을 퍼붓자!"

 그 외침을 신호로 하여  현명이로는 녹장과 한쌍의 학취필을 광
풍폭우처럼 전개했다.

 장무기는 왼손으로 조민의  체내에 구양진기를 주입시키느라 몸
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뿐 아니라, 한쪽 손만으로 현명이로의
맹렬한 공격을 상대해야 한다. 더군다나 진력을 조민에게 빼앗기
고 있어서 위험천만의 상황이었다.

 과연 그 위기는 즉각 현실로 나타났다.

 찍!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장무기의  왼쪽 바지 가랑이가
학취필에 의해 찢겨지며 선혈로 물들었다.

 조민은 본디 주지약의 체내에서  역류해 온 음한지기로 인해 전
신의 혈액이 응결되는 것  같았는데, 구양진기가 다시 체내로 유
입되자 차츰 그 혈기가 누그러졌다. 그러나 장무기가 다른 한 손
으로 현명이로를  상대하자 조민의  체내로 유입되던 구양진기가
약해졌다. 그로 인해 조민은 다시 오한에 시달렸다.

 녹장객은 연거푸 녹장을 떨쳐내 장무기의 눈을 노렸다.

 장무기는 한 손으로 장력을  뻗어내 맞이하자 학필옹이 때를 맞
추어 절묘한 자세로 뒹굴며 왼손에 쥐고 있는 학취필로 장무기의
옆구리를 찍어왔다. 장무기는  피할 여유가 없어 건곤이위신공을
전개해 학취필의 방향을 바꿔  놓으려 했다. 그러나 조민에게 태
반의 공력을 빼앗기고 있는 입장에서 학필옹의 전력이 담긴 학취
필을 따돌린다는 것은 무리였다.

 순간,

 창!

 뜻밖에도 금속성이  들리며 학취필이  옆구리를 긁고 지나갔다.
장무기는 별로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학필옹의 학취필이 마침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도룡도에 적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장무기는 평상시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도액 등 소림삼승과
맞붙을 때 성화령을 사용했던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도룡도를
허리에 차고  있으면서도 전혀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다.

 지금, 학필옹의 학필이 공교롭게도 도룡도에 적중되자 장무기는
비로소 도룡도에 생각이 미쳤다.

 "얍!"

 그는 용이 울부짖듯 일성  기합을 발하며 왼발을 쓸어내 학필옹
을 뒤로 석 자 가량 물러나게 만들고는 재빨리 도룡도를 뽑았다.
마침 녹장객의 녹장이 뻗쳐왔으므로 장무기는 도룡도를 맞닥뜨려
갔다.

 뚝!

 그 즉시 가벼운 소리가  들리며 녹장의 녹두(鹿頭) 부분이 싹뚝
잘려져 나갔다.

 녹장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앗!"

 그가 놀란 외침을 발하는  순간 학필의 쌍필이 파공음을 일으키
며 휘몰아쳐 왔다.

 장무기의 도룡도가 재차 허공에 수놓아지자 한 쌍의 학취필마저
모두 싹뚝싹뚝 네 동강이로 잘라졌다. 도룡도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현명이로는 더 이상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장무기는 비로소 자신의 진력을 차분히 조민의 체내에 주입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민은 금방 한독이 제거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지약이 당했던 현명한독이 즉시 말끔하게 씻든 듯 제거
되었다. 실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무기는 물론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해 계속 조민의 체내
에 구양진기를 주입시키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주지약은 비록 한독이  제거됐지만 간접적으로 조민의 손바닥을
통해 구양진기가 계속 체내로 뻗쳐들어왔다. 그녀가 새로 연마한
것은 구음내력(九陰內力)이었는데, 일단 현명한독이 사라지자 막
힘없이 뻗쳐들어오는 구양진기로 인해 애써 쌓아올린 구음내력이
파괴되어 갔다.

 주지약은 그러한 사실에 놀라고 당황했다.

 알고보니, 그녀는 벌써 정신을  되찾았다. 그 즉시 조민이 자신
의 체내에 공력을 주입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그
녀는 조민이 주입시켜 주는  내력이 자기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
한다는 것을 깨닫고 엉뚱한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어차피 조민의 도움을 받아 체내의 한독을 제거하지 못할바에는
거꾸로 자신의 한독을 조민의  체내로 되돌려 주면 자신의 살 길
이 열릴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살아야겠다는 본능적인  생각이지만, 배은망덕한 행위임
은 부인할 여지가 없었다. 조민은 그러한 사실도 모르고 단지 주
지약이 당한  음독이 너무나 심해 자기마저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했으니, 영특한 사람일수록 어리석은 구석이 있다는 말이 맞
는 모양이었다.

 주지약은 사실 무인도에서 의천검 속에 숨겨진 구음진경을 수중
에 넣었지만, 행여나 사손  혹은 장무기에게 발각될까 봐 외떨어
진 동굴에서 밤에만 몰래 연마하는 바람에 기초를 제대로 다지지 
못했다. 자연히 구음진경의 진수를 완벽하게 익힐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당한 현명패천장의 한독을 조민에게 되돌려 주려
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지금  그 단계를 넘어서 거꾸로 뻗쳐오는 
구양진기에 의해 자신의  구음진기가 자꾸만 소멸돼가자 내심 대
경실색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등심에 붙여진 조민의 손을 뿌리칠 수도 없는 입
장이었다. 체내에 구양진기가  뻗쳐들어오기 전까지는 자신이 의
도적으로 조민의 체내에  음한지기를 주입시켰기 때문에, 조민이 
안간힘을 서도 그녀의 등심에서  손을 뗄 수 없었지만 이젠 입장
이 바뀌어 조민의 손이 구양진기의 강한 점력(點力)에 의해 등에 
밀착돼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입장을  하소연하기 위해 소리칠 수 없었
다. 일단 입을  열면 진기가 흩어져 피를  토하며 숨이 끊어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민은 차츰 체내의 한기가 사라지며 혈액이 원만하게 유
통되자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이젠 됐어요. 내 걱정 말고 어서 전력을 다해 현명이로를 상대
하세요."

 장무기는 그녀가 회복되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그는 곧 구양신공을 거두었다.

 주지약은 비로소 강한  점력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되자 자신이 
당한 현명패천장의  음독은 말끔히  씻어졌지만 구음내력이 많이 
손실되었다.

 그녀는 장무기가 도룡도를  떨치며 현명이로를 상대하는데 여념
이 없는 것을 보자 또  다시 뇌리에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생각은 즉시 행동으로 옮겨져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
부려 다짜고짜 조민의 정소리를 향해 내리꽂았다. 뜻밖에도 불의
의 살수(殺手)를 펼친 것이다.

 이것은 극도의 미움이  자아낸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었다. 차라
리 발악이었다. 장무기가 자신에게서 멀어질수록 마음 한 구석엔 
그에 대한 미련이 더욱 간절하게 응어리져, 그 고통이 조민에 대
한 마음으로 변해 비뚤어진  행동으로 분출된 것이다. 조민을 극
진히 생각해 주는 장무기의 노골적인 행동에서 심한 심적인 자극
을 받은 영향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조민은  또 한 차례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녀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피할 새도 없었다.

 "앗!"

 그녀는 자지러지게  비명을 내질렀다.  정수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목숨을 잃게 되는 줄 알았다.

 그 순간  뼈마디가 어긋나듯 삐걱하는  소리가 들리며 주지약의 
입에서도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오더니 이내 몸을 튕겨 어둠 
속으로 질주해 갔다.

 장무기는 조민의 비명에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려 물었다.

 "무슨 일이오?"

 조민은 자신의 정수리를  만져보더니 혼비백산하여 제대로 대답
을 하지 못했다.

 장무기는 그녀가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에 의해  심한 상처를 
입은 것인 줄 알고 역시 대경실색했다. 그는 도룡도를 떨쳐 현명
이로를 막으며 조민에게  접근하여 왼손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만
져보았다. 손에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두개골이 손상되지는 않았다.

 장무기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
고 조민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위로해 주었다.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니 괜찮을 것이오."

 하지만 장무기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주지약이 의도적으
로 조민에게 가벼운 상처를  입혔을 리는 만무했다. 그런데 어째
서 찰과상만 입은 것일까?
 
 물론 장무기가 곰곰히 생각하면  의문이 금방 풀릴 수도 있었지
만 지금은 현명이로를 상대하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사실 조민이 또 한 차례  위기를 넘긴 것은 체내에 주입된 구양
진기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주지약은 내력이 크게 손상
된 상태에서 공격한 것이라,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한 구양진기의 반탄지력에 의해 손
목뼈가 삐걱하며 손마디에 심한 통증을 느껴 신음을 내뱉었던 것
이다.

 장무기가 약산 주춤하는 사이에 현명이로가 다시 공격해 왔다.

 주지약이 떠나 버리고 조민의 한독이 퇴치된 지금의 상황하에서 
장무기는 더 이상 마음의 부담을 느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구태
여 도룡도의 위력을 빌려  현명이로를 꺾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진정한 무공으로 승리를 쟁취하고 싶었다.

 장무기는 즉시 도룡도를 조민에게 건네주고 체내의 진기를 일주
천(一周天)시켜 전신에 골고루 퍼지게 하더니 왼손으로 학필옹이 
떨쳐온 일장의 방향을 살짝 바꾸어 놓았다. 드디어 건곤이위신공
을 전개한 것이다.

 상대가 상대인 만치  장무기는 건곤이위신공을 제칠단계인 최고 
경지로 전개하는 한편 구양신공마저 잔뜩 주입시켰다. 이것은 장
무기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위력적인 공격인 동시에 내력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타법이기도 했다. 모든 일에 표리(表裏)가 있듯이 
이 위력적인 공격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내력(內
力)의 안배가 어긋나게  되면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되어 스스로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전 조민과 주지약의 한독
을 퇴치해 줄 때는  비록 상황이 위급했지만 감히 이러한 타법을 
구사하지 못했던 것이다.

 건곤이위신공에 말려든  학필옹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녹장객의 어깨에 일장을 후려쳤다.

 녹장객은 깜짝 놀라 성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사제, 무슨 짓인가?"

 학필옹은 무공이 고강하지만  생각이 우둔한 편이었다. 왕왕 한
가지 일을 갖고 한참  생각해야만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창졸
간에 묘한 상황이 벌어지자 그 자신도 어리둥절하며 녹장객이 묻
는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잠깐 장무기가 수작을 부
린 것이란  생각이 들어 일단 자기가  열심히 장무기를 공격하면 
사형도 오해가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이를 악물며 전력을 다해 장무기를 향해 발을 걷어차냈다.

 장무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왼손을 떨쳐내자, 이번에도 학필옹의 
발이 엉뚱한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녹장객의 아랫배를 향해 걷어
차 갔다. 녹장객은 황급히 몸을 피하며 소리쳤다.

 "자네 미쳤나?"

 한쪽에 있는 조민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즉시 소리쳤다.

 "잘 하는구요.  학선생, 맞아요! 어서  저 대역무도하고 음탕한 
사형을 사로 잡으세요. 그럼  나의 아버님께서 약속한 대로 후한 
상을 내릴 거예요."

 장무기는 내심 웃음이 나왔다. 조민의 외침에 따라 녹장객과 학
필옹이 당혹해  하는 것이 재미있고도  통쾌했다. 그래서 원래는 
건곤이위신공으로 학필옹이 녹장객에게  공격을 전개하게끔 하고 
다시 녹장객의 공격이  학필옹에게 쏟아지게끔 할 생각이었는데, 
그 생각을 달리했다.

 계속 학필옹에게만  건곤이위신공을 전개해  녹장객을 당혹하게 
만들고, 녹장객에게는 태극권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한 
술 더 떠 조민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학필옹에게 외쳤다.

 "학선생, 아무 염려 마시오.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이 음
탕한 늙은이를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오. 여양왕은 이미 학선생
을 대장군에 봉하였소!"

 조민이 다시 소리쳤다.

 "학선생, 당신에게 봉관(封冠)한다는 공식문서를 갖고 있어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품 속에서 종이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음.....  대원호국양위대장군(大元護國揚威大將軍)에 봉해졌군
요. 어서 힘을 내세요!"

 장무기는 오른손을 펼쳐내 녹장객을 왼쪽으로 밀어붙였다. 건곤
이위신공의 영향을 받은 학필옹의 좌장(左掌)이 마침 녹장객에게 
뻗쳐오자 장무기와 더불어 좌우 협공하는 형태가 되었다.

 녹장객은 학필옹과 수십 년간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며 친형제 이
상으로 정이 두터웠다. 그래서 학필옹이 자기를 배신하리라곤 전
혀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학필옹이 거듭하여 자신의 급소
를 겨냥하여 공격해 오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부귀영화가 탐나 정말로 날 배신하려는 게 아닌가?"

 그가 의심스럽게 묻자 학필옹은 다급해졌다.

 "나는..... 단지....."

 그가 당황하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조민이 다시소리쳤다.

 "맞아요! 학선생은 단지 장래를 생각한 것뿐이에요. 언제까지나 
강호에서 풍파를 겪으며 살 수 없으니 호국양위대장군이 되어 말
년을 부귀영화 속에서 보내려는  거예요. 그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욕심이잖아요. 사형이 아무리  좋다 해도 자신의 행복과 바
꿀 수야 있겠어요?"

 장무기는 적시에 건곤이위신공을  펼쳐 녹장객에게 허초를 전개
하며 학필옹의 장풍을 유인했다.

 펑!

 학필옹의 장풍은 장무기의 허초를 피하려는 녹장객의 어깨에 적
중되었다. 녹장객은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아 즉시 학필옹의 뺨을 
후려쳤다.

 찰싹!

 호되게 뺨을 얻어맞은 학필옹은  그 즉시 얼굴이 부어오르며 이
빨이 여러 개 부러졌다. 그는 나이가 많아 몇 개 남지 않은 이빨
을 귀하게 여겨 왔는데 이렇게 되자 역시 발끈하여 소리쳤다.

 "사형, 이럴 수가..... 있소?"

 녹장객은 눈에 쌍심지를 키며 맞섰다.

 "네가 먼저 출수를 하지 않았느냐?"

 그는 비록 견식이 넓지만  이런 해괴한 위력을 지닌 건곤이위신
공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합리화시킬 
수 있는 것은  차력타력(借力他力)의 수법인데, 그것도 불가능했
다. 장무기의 공력으로 학필옹을 꺾을 수야 있겠지만 차력타력의 
수법을 전개해 학필옹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기 때문이다. 그래서 녹장객은 장무기가 암암리에 엉뚱한 장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치 않았다.

 학필옹은 자신의 결백을 표명하는데 다급하여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 교활한 놈!"

 물론 그는 장무기를 겨냥해  한 욕이었다. 그러나 조민이 그 화
살일 엉뚱한 데로 돌려 버렸다.

 "맞아요! 그는  이제부터 당신의 사형이  아니라 교활한 놈이에
요!"

 녹장객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여
지껏 자기에게 고분고분하던 학필옹이 스스로의 부귀영화를 위해 
자기를 배신했을 뿐  아니라 살수까지 전개하니 오장육부가 뒤틀
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는 눈이 충혈되어  계속 학필옹에게 공격을 전개했다. 학필옹
은 억울하게  일방적으로 당할 수가 없어  몸을 피하며 반격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장무기는 원병(元兵)들이 야습을 가해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할 수 없었다.

 "학선생, 그럼 이음탕한 늙은이를 맡기겠소!"

 그는 발 끝으로  살짝 지면을 찍으며 뒤로  물러나 조민의 손을 
잡고 소림사 방향으로 향했다.

 현명이로는 서로  초식을 주고 받으며  싸움이 갈수록 치열해졌
다.

 이때 어둠을 뚫고 조민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학선생, 그  <교활한 놈>을 사로잡는다면  도룡도의 비급을 한 
달간 빌려줄 테니 힘내서 싸우세요. 이런 기회는 많지 않을 거예
요!"

 녹장객은 더욱 울화가 치밀어 더욱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
들 두 사람은 같은  스승 밑에서 무공을 배워 실력이 막상막하였
다. 일단 둘이 맞붙어 악투를 벌이자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소림사로 돌아온 장무기는 조민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나서 웃
으며 말했다.

 "민매, 민매가 적시에 품  속에서 종이를 꺼내 보이지 않았다면 
녹장객이 속지 않았을지도 모르오."

 조민은 생긋이 웃으며 품 속에서 얄팍한 종이를 꺼내 흔들어 보
였다.

 "이게 무엇인지 아나요?"

 장무기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내둘렀다.

 "모르겠소. 민매가 알아 맞추라는 것은 도저히 알아맞추지 못하
겠소."

 조민은 얄팍한 종이 두 장을 장무기의 손에 쥐어 주었다.

 장무기가 불빛을 빌려  자세히 살펴보니, 이것은 종이가 아니라 
매미 날개처럼  얇은 비단이었다. 그곳에  깨알처럼 작은 글자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첫 번째 바단 첫머리에는 무목유서(武穆遺書)라는 네 글자가 적
혀 있고,  그 내용은 주로  병법으로서 포진술(布陣術)과 용병술
(用兵術)이었다.

 두 번째  비단 첫머리엔 구음진경(九陰眞經)이란  글이 적혀 있
고, 내용은  모두가 신기하고  괴이한 무공의 구결(口訣)이었다. 
맨 마지막에는 구음백골조와 철심장(鐵心掌)도 수록돼 있었다.

 장무기는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건..... 주낭자에게서 취해 온 것이오?"

 조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녀가 꼼짝 못하고  있을 때 슬쩍 훔쳐온 거예요. 나
는 이따위 음독한 무공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러나 그
녀가 이  무공을 배워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차라리 없애버리는 
게 낫겠죠."

 장무기는 구음진경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문구가 어렵고 뜻이 
깊어 퍼뜩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구음진경이  절대 음독한 무학이 아니라는 것
을.

 장무기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에 수록돼 있는  무공은 지극히 심오하여 기초서부터 차근
차근 연마하면 일, 이십 년  후에 틀림없이 대성할 수 있을 것이
오. 반면에 만약 속성하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은 사람을 
해치는 음독한 무공으로 전략할 것이오."

 그는 말 끝을 멈칫하더니 다시 말했다.

 "그 황삼을 입은 낭자의  무공은 분명 주낭자와 뿌리가 같은 것 
같소. 그런데 주낭자와는 정반대로 모든 초식이 광명정대하지 않
소? 아마 그것이 바로 구음진경의 진면목일 것이오."

 조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는 대관절 어떠한 내력(來歷)을 지니고 있을까요? 그 무슨 
<신조협려가 영원히 강호에서 모습을 감추다>하고 읊조렸던 기억
이 나는데....."

 장무기도 역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중에 태사부님을 뵙게  되면 여쭤봐야겠소. 그 어르신네께선 
어쩌면 아시는 게 있을 것이오."

 두 사람은 잠시 한담을 나누다가 원병 쪽에서 별다른 행동을 취
할 기미가 없냐는 보고를 받고 제각기 잠자리로 들어갔다.

 이날 밤, 조민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무기와 땅굴 속
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참만에 잠이 들은 그녀는 오색 무지개를 타고 하늘을 훨훨 날
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 제 7 권 5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제 5 장  늙은 마두(魔頭)의 음욕(淫慾) 


 한편, 군호들 사이에서 훌쩍 떠나가 버린 주지약은 어떻게 되었
을까?

 그녀는 혼란을 틈타 뒷산 쪽으로 달려갔다. 장무기에 의해 도룡
도와 의천검의 의문이 밝혀지게 될 것이 뻔한 사실이므로 그녀는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비록 임종을 앞둔  스승님의 엄한 유명(遺命)이고, 자신이 스승
님 앞에서 맹세한 일을 실천에 옮긴 것이지만 장무기에게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장무기를 진심
으로 사랑했었기에 그녀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 동안 멸절사태의 유명에  따라 의천검과 도룡도에 숨겨진 비
급을 찾아내 새로운  음공(陰功)을 연마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
문에 그 나름대로 장무기에  대한 죄의식을 잊고 있었는데, 이제
모든 것이 밝혀질 마당에  또 그 망각했던 죄책감이 한꺼번에 무
너져버려 그녀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간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후회도 해보았지만 그 때마다 스
승님의 유명이란 지상과제를  내세워 자신을 합리화 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마음의  부담이 말끔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만하고 적대시해야만 하는 자신이 미웠다.

 그렇다고 해서 스승인  멸절사태를 배반할 수는 없었다. 그녀에
게 있어 멸절사태는 스승인 동시에 어버이며 은인이었다. 임종을
앞둔 멸절사태의 그 처절하리 만치 강렬한 당부를 생각할 때마다
주지약은 등골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한 오싹함을 느꼈다. 아울러
멸절사태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당부가 귓전에 되살아났다.

 ----- 절대 장무기와 혼례를 해선 안된다.  너의 미색으로 그를
유혹해 의천검과 도룡도를 동시에 손에 넣어 본문의 무학을 천추
에 빛내야 한다. -----

 그것은 주지약에게 있어  더 없는 괴로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승님 앞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그녀의 진심과는
거리가 먼 약속이지만 한번 한 맹세는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스승님과의 약속을  이행했다. 그 결과가 어떠한 것
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언젠가는 그 죄의 댓가를 받게 되
리라고.....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것은 주아를 죽게  한 일이었다. 그일로
인해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언제쯤 자신의 죄상이 밝
혀지게 될  것인지 가슴이 조마조마하여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
다.

 이제 막상 그 사실이  밝혀지게 되자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과
더불어 홀가분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허탈
이었다.

 사문(師門), 스승님의 은혜, 자신을 속박해 온 그 모든 것이 일
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자신에게 아무런  위안도 줄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의  희생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며 어디에서
보상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인적이 없는 산길을 홀로  힘없이 걸으며 주지약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당장 장무기에게 다시 달려가 모든 것을 털
어놓고 용서를 빌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것
은 또한 이미 작고한 스승님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도 느껴졌다.

 그녀는 계속 걸음을 내딛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막막한 사막에 자기만이  버려진 듯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어려
서 부모를  잃고 자라온 그녀지만 이렇게  짙은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젠 머리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슴도 구
멍이 난 듯 텅 비어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홀연 등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왜소한 그
림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허탈상태에서 걷고 있던 주지약은
갑자기 사람을  발견하자 흠칫 놀랐다.  더군다나 상대방은 이미
자기에게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평상시라면 주지약의 예민한 감
각으로 이런 황산에서 사람이 나타난 것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그녀가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보니  왜소한 사람의 그림자는
추악하게 생긴 꼽추 노인이었다.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턱 밑이  헐어 진물이 흐르며
한 쪽 눈마저 흰자위뿐인 애꾸였다.

 인적이 없는  산길에서 추악한 노인이  불쑥 나타나자 주지약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꼽추 노인은 곧장 그녀에게 다가왔다. 주지약은 웬지 불안을 느
끼며 걸음을 멈춘  채 몸을 돌려 꼽추  노인을 지켜보았다. 그녀
앞에 다가온 꼽추 노인은  뜻밖에도 공수의 예를 취했다. 그리고
자갈을 입에 문 듯한 까칠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주낭자가 아니십니까?"

 주지약은 멍해졌다.

 "그렇습니다만, 노인장은 뉘시기에 저를....."

 꼽추 노인은 왼눈으로 그녀의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후 하고 한
숨을 내쉬었다.

 "주낭자를 찾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다행이구료. 노부는
명교 장교주의 수하로서 주낭자에게 전할 서찰이 있어 황급히 뒤
를 쫓아온 것이오."

 주지약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상대방이 정말 명교의 제자
인지 자세히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었다. 하기야 명교의 교도가
워낙 많으므로 세심을  기울인다 해도 상대방의 진위를 가려내지
못할 것이다.

 표정이 굳어지는  주지약에게 꼽추 노인은  징그럽게 웃으며 품
속에서 서찰 한 통을 꺼내 건네 주었다.

 주지약은 약간 망설이다가 그 서찰을 받았다. 서찰 겉장에 틀림
없이 용등호약하는 필체로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장교주가 이 서찰을 나에게 전해 주라고 했단 말인가요?"

 꼽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에  제삼자가 없는데도 다소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장교주께서 낭자와  은밀히 나눌 얘기가  있는 모양이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해 금방  낭자의 뒤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
에 이 늙은이더러 미리 서찰을 전해 주라고 분부한 것이오."

 주지약은 전신에  한 차례 진동이 일었다.  자기는 분명 아무도
모르게 떠났는데 장무기가 어떻게 자기가 떠난 방향을 알고 사람
을 시켜 서찰을  보낸 것일까? 그리고 서찰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주지약이 속으로 생각을 굴리고  있는 사이에 꼽추 노인은 다시
공수의 예를 취했다.

 "그럼 본인은 임무를 완수했으니 이만 떠나야겠소."

 이 말을 남기고 꼽추 노인은 즉시 신법을 전개해 오던 방향으로
사라졌다. 비록 등이 굽은 꼽추지만 그의 신법을 신속무비했다.

 주지약은 명교에 알려지지 않은  고수가 많다는 것을 새삼 실감
하며 잠시 제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가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뜯어보았다. 서찰에는 겉봉과
똑같은 필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 금만신시 소실산후  천룡암견 (金晩辛時 少室山後 天龍庵
見) -----

 오늘밤 신시 소실산 뒤편 천룡암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아래쪽에 천룡암으로 가는 약도와 장무기의 이름이 명시돼 있었
다. 천룡사라면 바로 지금 그녀가 가고 있는 방향에서 얼마 떨어
지지 않았다.

 주지약은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장무기가 자기를 만나려
하는 것은 불문가지, 무인도에서  있었던 일을 문책하려는 게 분
명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장무기는 마주치기가 두려운 존재가 아
닌가?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설
령 장무기가 자기에게 살수를 전개한다 해도 어차피 부딪쳐야 할
사람이다.

 장무기가 직접 뒤쫓아오지 않고  수하를 시켜 만날 장소를 약속
한 것을 보면 단둘이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심산임을 알 수 있었
다.

 주지약의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는 결심을 내렸다.
어떠한 결과가 벌어지더라도  장무기와 만나 은원을 해결 하리라
고.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키며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 동안 얼
마나 많은 각오를 해왔던가. 하지만 막상 그 각오가 현실로 나타
나자 서글픔이 앞섰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은 힘이 없
었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머지않아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 어둠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갔다.

 물론 그녀는 지금쯤 장무기가 오경초의 주검술을 지켜보고 있으
며 서찰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
면, 그녀에게 가짜 서찰을 전해 준 꼽추노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녀를 천룡암으로 유인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핏빛 놀이 서편 하늘을 붉게 물들인 가운데 주지약은 천룡암 앞
에 당도했다.

 그녀는 아직도 장무기의 서찰이  가짜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
었다. 물론 커다란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짐작하
지 못했다. 이왕 부딪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차라리 한시 바
삐 장무기를 만나고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장무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신시에 만나
자고 했으니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천룡암  앞 돌계단을 올랐다. 천룡암은 작은
암자로서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 되었음이 분명했다. 대문은 아
미 무너졌고 담벽도 옛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암자 안은 더욱 황량했다. 무성한 잡초가 무릎을 넘고 어디선가
들쥐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음씨년스럽기만 했다.

 뜨락 안으로 들어서며 보니, 돌로 세운 병풍이 있었던 모양인데
이제 무녀져내려 단지  아랫 부분에 새겨진 불(佛)자만이 어렴풋
이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돌병풍의 뒤쪽이 바로
암자의 대전(大殿)이었다.

 대전 안에서 뜻밖에도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비록 등잔을
밝힐 때가 되지 않았지만  이 황폐된 암자의 분위기가 워낙 침침
하여 일찍 등불을 밝힌 것 같았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
었다. 주지약은 당연히 장무기가 먼저 와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음..... 벌써 당도해 날 기다리고 있었군.'

 주지약은 마음을 굳게 다지며  성큼성큼 대전 안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잡초가 무성한 곳을 지나가자니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사사삭!

 다른 여자라면 질겁을 할 정도로 기분이 나쁜 소리였다. 독사가
풀밭 사이로 기어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귀신이 해골을 파먹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라서,  웬만큼 담이 큰 남자라 해도 머
리카락이 쭈뼛해질 것이다.

 '날 이곳까지 오게 하고서 어찌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일까?'

 주지약은 다소 의혹을 느꼈으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이때였다.

 푸다닥!

 잡초가 무성한 대전 앞쪽에서  난데없이 몇 줄기의 시꺼먼 물체
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는 게 아닌가!

 이번에 주지약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몇 마리의 박쥐였다.

 '어두운 동굴에 사는 박쥐가 어떻게 이곳에.....'

 주지약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몸을 솟구쳐 사뿐히 대전 앞
에 내려섰다. 그  순간 또다시 푸드득 거리며  몇 마리의 박쥐가
잡초 틈에서 날아올랐다.

 주지약은 대전 앞에 서서 소리쳤다.

 "장교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곳에 왔는데 왜 모습을 드러내
지 않죠?"

 그녀의 외침소리는 조용한 주위를 가르며 멀리 퍼져나갔으나 대
전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주지약은 주춤하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대전 안으로 걸음을 옮
겨 놓았다. 대전 복판에 놓여  있는 탁자 위에 콩알 만한 등잔불
이 밝혀져 있었다. 그 뒤쪽으로 거미줄이 드리워져 있고, 곳곳에
두꺼운 먼지가 쌓여 있었다.

 주지약은 더 이상 자세한  것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낡은 탁
자 위에 종이 쪽지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기 대문이다.

 쪽지 위에는 분명 무엇인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가 어둑어둑하여 무슨 글
인지 식별할 수가 없었다.

 '대관절 무슨 속셈으로 이런.....'

 그녀가 생각해 온 장무기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상황이 계속 일
어나자 은근히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녀는 천천히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쪽
지에 적힌 글이 등잔불에 비쳐 똑똑히 시야에 들어왔다. 앞서 받
은 서찰과 똑같은 필체였다. 그런데  그 내용은 또 한 번 주지약
을 멍하게 만들 만큼 엉뚱한 것이었다.

 ----- 후원(後園)에서 기다리겠소. -----

 주지약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처음부터 나의  기를 꺾으려는 모양이군.  구태여 이럴 필요는
없을 텐데.....'

 그녀는 등잔을 손에 들고 후원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후원으로 가려면 좁고 긴 복도를 지나야만 했다. 복도에도
거미줄과 먼지가 뒤덮혀 있었다.  그런데 먼지가 쌓인 복도에 한
줄기의 발자국이 길게 연결돼  있었다. 그것이 바로 장무기가 남
긴 발자국이라 생각했다.

 등잔을 앞세우고 그녀는  복도를 지나 뒷편 뜨락으로 들어섰다.
이곳에도 잡초가 무성했다. 모든 건물이 낡을 대로 낡아 폭삭 주
저앉을 것만 같았다. 눈에 뜨이는 것은 오직 폐허뿐이었다.

 후전에서도 불빛이  새어나왔다. 주지약은  대전 밖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무도 눈에 띄지  않자 소리쳐 장무기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튀쳐나오려던 말을 삼켜 버렸다. 비록 죄를 짓
고 있는 입장이지만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장무기가 대전 안에 있다면  응당히 밖으로 나와야 하지 않겠는
가!

 주지약은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주지약
은 어쩔 수 없이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소리쳤다.

 "이봐요 장교주! 대관절 무슨 꿍꿍이속인가요?"

 하지만 후전 안은 조용할 뿐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주지약은 오기가 생겼다.  동시에 이상한 느낌도 들어 조심스럽
게 후전 안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후전 안쪽 기둥에 제각기 등잔불이 걸려 있어 주위를 환하게 밝
혀 주었다.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한복판에 탁자
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술병과 잔 두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술병 아래에 또 하나의  쪽지가 눌려져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
다.

 주지약은 발끈했다. 설령  장무기에게 문책을 받아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수모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는 부아가 치밀어  앞으로 달려가 쪽지를 집어들었다. 그곳
에 똑같은 필체로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 안주를 구해 올 테니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시오 -----

 주지약은 울지도 웃을 수도 없었다. 장무기가 이런 장난에 가까
운 짓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녀는 나직이 한
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후전 안도  마찬가지로 곳곳에 거미줄이  드리워져 있고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있지만 탁자 주위만은 예외였다.

 주지약은 끓어오르는 울화를 억제하기 위해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술병의 마개를  열자 그윽한 주향(酒香)이
코 끝에 풍겨왔다. 주지약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과 같
은 심정에선 한 잔 마시고 싶었다. 자신의 불안감을 삭히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이때 그녀의 뇌리에 문득 이상한 느낌이 떠올랐다.

 '왜 하필이면 날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한 것일까?'

 그러나 그녀는 불길한 생각을 이내 떨쳐 버렸다. 이미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는데 아무려면 어떠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장
무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술잔에 술을 가득 따루었
다. 술의  빛깔은 벽록(碧綠)색으로 향기가 진했다.  한 잔 마셔
보니 입 안 가득히 향기가 감도는 것이 마실 만했다.

 주지약이 한 잔 마시는 사이에 어느덧 날이 어두어졌다.

 뜨락을 할퀴는 바람이  제법 차가왔다. 갑자기 바람결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주지약은 얼른 술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렸
다. 과연 어둠을 뚫고 한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주지약은  표정이 굳어졌다. 상대방은  멀리 떨어져 있어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장무기가 아니
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흡사 바람에 실리듯 눈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다
가온 사람은 장무기가 아닌 현명이로 중의 한 사람인 녹장객이었
다. 실로 뜻밖이었다.

 주지약은 대경실색했다. 그녀가 쪽지를 건네받을 때부터 느꼈던
많은 의문이 일시에 풀렸다. 비로소 자신이 함정에  걸려든 사실
을 깨달은 것이다.

 녹장객은 그녀를 뚫어지게 주시하며 입가에 징그러운 웃음을 띄
었다.

 "주낭자, 그  장무기라는 음적이 아니라  이 늙은이가 나타나니
무척 실망하는 눈치군."

 주지약은 의자에서  일어난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녹장객의 강렬한 눈빛에서 직감적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날 이곳으로 유인해 온 목적이 무엇이냐?"

 그녀가 싸늘하게 다그치자 녹장객은 느긋하게 대꾸했다.

 "네가 절세의  무공비급을 수중에 넣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서 순순히 그 비급을 내놓아라."

 주지약은 어림도 없다는 듯 냉소를 날렸다.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녹장객은 히죽 웃었다.

 "네가 신공을 어설프게 배웠다고  해서 우리 형제를 당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흐흐...."

 그는 징그럽게  웃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거기에 따라
주지약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오늘의 일전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녀의 귓전에 녹장객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원래 너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왜 너
를 일부러 이곳으로 유인해 왔는지 아느냐?"

 주지약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녹장객이 스스로 말을 이었다.

 "그것은 너를 다치게 하지  않고 일단 소유하고 싶어서였다. 계
집은 옥과 같은 것이라  티끌만한 하자가 생겨도 그 값어치를 상
실하기 때문이다. 이제 내 말뜻을 알겠느냐?"

 주지약은 다소 당황해졌다.  녹장객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
었다. 게다가 학필옹마저 부근에 도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렇다고 비급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데 주지약을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녹장객의 다음 말이
었다.

 "겁낼 것 없다. 너는 이미 합환주(合歡酒)를 마셨을 것이다. 그
술 속에 미약(迷藥)을 풀어놓은  사실을 넌 아마 모르고 있을 것
이다. 일단 그 약효가  온몸으로 퍼지면 제아무리 정절을 목숨처
럼 생각하는 계집도 세상에서 둘도 없는 탕녀(蕩女)로 변하게 된
다. 하하핫....."

 그는 양양하게 광소를 터뜨리며 눈에서는 욕정의 불길이 이글거
렸다.

 주지약은 황급히 진력을 끌어올려 보았다. 별로 막히는 데가 없
었다. 그러나 음호혈(陰戶穴)로부터  미미하게나마 한 갈래의 뜨
거운 기류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행하게도 그
녀가 새로 연마한 무공이 음유(陰)柔한 기운을 위주로 한 것이므
로 그 뜨거운 기류를 스스로 억제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 발작하게 될지 그녀로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마음을 결정했다. 그러기
위해선 기습 공격을 전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냉정하기만 하던 얼굴에 한 가닥의 엷은 미소가 피어오른
것은 바로 이때였다.

 "술에다 미약을 풀어넣었을 줄이야 정말 뜻밖이군요. 그 약효가
언제쯤 발작할 것인지 말해 줄 수 있나요?"

 녹장객은 본디 남달리  여색을 탐했다. 그는 주지약으로부터 신
공 비급을 탈취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학필옹의 양해를 얻어 내친
김에 자신의 욕심까지 채우려 했던 것이다.

 앞서 꼽추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자가 바로 학필옹이 위장한
것이다.

 녹장객은 주지약에게 억지로  미약을 복용시킬 수 없음을 알고,
일부러 이런 과정을 거쳐 주지약으로 하여금 홧김에 스스로 술을
마시게끔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늙은 생각이 맵다는 말
이 있듯이 실로 음흉한 마두였다.

 녹장객은 지금 주지약의 반응이 갑자기 부드러워지자 속으로 침
을 꿀꺽 삼켰다. 슬슬  약호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성급하게 생각
했다.

 주지약은 그의 성급한 마음을 부채질하듯 이번에는 눈웃음을 쳤
다.

 "당신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이군요. 당신이 노리는 것이
다 여기에 있으니 원하는 대로 해보세요."

 그녀는 마치 상대방을 맞아들이는 듯한 자세로 양팔을 벌렸다.

 녹장객은 앞으로  걸음을 내딛으려다가  주춤했다. 그는 자신이
너무 흥분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역시  그는 세심했다. 이제
주지약은 독안에 갇힌 쥐나  다를 바 없으니 구태여 서두를 필요
가 없었다. 어차피 상대방은  미약을 복용했으므로 그 미약의 약
호가 나타나면 자연히 자기의 품 안에 안길 것이다. 그에게 신경
이 쓰이는 것은 오히려 밖에서 망을 보고 있는 학필옹이었다. 그
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문밖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순간, 팔을 벌리고 있던 주지약이 갑자기 용수철에서 튕겨진
듯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핑! 녹장객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요란한 굉음
이 들리며 주지약의 몸이 천장 지붕을 뚫고 나갔다. 역시 그녀의
생각이 적중되었다. 그녀가 서 있던 후전은 건물이 낡을 대로 낡
아 몸을  솟구치며 쌍장을 펼쳐내자 지붕이  뻥 뚤리며 기왓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녹장객으로선 실로 뜻밖의 변화였다. 그는 자신이 문 입구 쪽을
가로막고 서  있기 때문에 주지약이 절대  달아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빗나간 것이다.

 녹장객은 손아귀에  들어온 떡을 놓칠 리  만무했다. 그는 즉시
뒤따라 그 뚫려진 지붕 위로 몸을 솟구치며 소리쳤다.

 "사제, 계집을 잡아라!"

 지붕을 뚫고 나온 주지약은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이 어둠 속을
향해 몸을  날렸다. 뒤에서 녹장객의  싸늘한 고함소리가 들려왔
다. 힐끗 고개를 돌려본 주지약은 녹장객 외에 또 한줄기의 그림
자가 자신의  뒤를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학필옹임이
분명한 것이라 생각했다.

 주지약은 신법을 최고  경지로 전개해 계속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녀가 달리는 방향은 공교롭게도 장무기와 조민이 함께 있는 그
지뢰(地牢)쪽이었다.

 한편, 한창 열기에 싸여 있던 장무기와 조민.

 장무기는 그녀의  입술을 빼앗고 마지막  실오라기 같은 이성이
무너지려는 순간, 홀연  서북쪽에서 고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
자 흠칫하며 현실로 되돌아왔다.

 조민도 찬물 세례를 받은 듯 활활 타오르던 열화가 순식간에 식
어 버리며 벌떡 몸을  일으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그녀
의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그녀는 장무기를 쳐다보기가 부끄
러웠다.

 이때 고함소리가 차츰 가까이 들려왔다.

 잠시 긴장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던 장무기가 덥석 조민의 손
을 잡았다.

 "어서 밖으로 나가 살펴봅시다."

 그는 조민의 손을 잡은  채 땅굴 위로 솟구쳤다. 고함소리가 들
려오는 방향을  살펴보니 세 줄기의 그림자가  질주해 오고 있었
다. 그들의 신법은 모두  전광석화같이 빨라 일류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무기가 언뜻 보기에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쫓는 각축전이었
다. 두 사람 중의 하나가  갑자기 손을 떨치자 한 줄기의 싸늘한
광채가 앞쪽에서 도망치는 자의  등을 향해 뻗쳐나갔다. 앞서 달
리는 자는 즉시 옆으로 피하며 장검을 떨쳤다.

 창!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는 가운데 빛줄기를 그리며 뻗쳐오던 물
체가 검에 의해 허공으로 높이 튕겨져 올랐다. 그가 멈칫하는 사
이에 추격해 오던 또 한 사람이 바싹 따라붙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구름에 가려졌던  반달이 모습을 드러내어
장무기는 그들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바로 현명이로와
주지약이 아닌가!

 녹장객은 가까이 따라붙자마자 재빨리 녹장을 사납게 휘둘렀다.
주지약은 황급히 우측으로  미끄러지며 허공에 검광을 뿌려 녹장
을 막았다. 달빛을 빌어  그녀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고 치
렁치렁한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장무기는 흠칫하며 얼른 조민과 함께 나무 위로 몸을 숨겼다.

 앞서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주지약의 장검에 의해 높이 튕겨져
오른 물체는 학필옹의  무기인 학취필이었다. 학필옹은 뒤쫓아와
허공에서 떨어지는 학취필을 나꿔잡더니 주지약의 왼쪽으로 내려
서서 녹장객과 더불어 좌우협공을 전개했다.

 주지약은 이를 갈며 싸늘하게 외쳤다.

 "계속 내 뒤를 쫓아와 대관절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녹장객이 공격을 펼치며 소리쳤다.

 "오늘 장무기가  도룡도와 의천검을 수중에  넣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비급은 이미  사라졌다. 그 비급만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장무기는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내가 의천검과 도룡도를 수중에 넣었을 때 저 마두들이 숨어서
지켜보았군.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니.....'

 주지약의 외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가 무공  비급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신공을 터득한 후에
이미 태워버렸다."

 녹장객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냉소를 날렸다.

 "네가 신공을 터득했다고?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다. 도룡도와
의천검은 자고로 무림지존이라  일컬어져 왔는데 그 속에 숨겨진
비급이 예사 무공이겠느냐?....."

 녹장객은 학필옹과 서로 위치를 바꾸며 계속 떠들어댔다.

 "너의 자질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짧은 시일 내에 그
절세 신공을 완전히 터득하진  못할 것이다. 만약 네가 터득했다
면 구태여 도망칠 필요없이  벌써 노부 형제를 죽였을 게 아니겠
느냐?"

 주지약은 아슬아슬하게 학필옹의 공격을 피하며 악을 쓰듯 외쳤
다.

 "네가 뭐라고 해도 이미 불태워 없앴다. 설령 나를 죽인다 해도
그 비급을 수중에 넣지는 못할 것이다."

 학필옹과 녹장객은 더 이상  입씨름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쳐
독수리가 먹이를 나꿔채듯 덮쳐내렸다.

 주지약도 몸을  급속도로 회전시키며 검을  떨치자 그녀의 주위
다섯 자 안이 온통 싸늘한 검광으로 뒤덮였다. 비록 수세에 몰려
있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

 장무기는 그녀의 검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가 신공을 연
마한 후 채찍을 사용하는  것은 보았지만 검을 전개하는 것은 처
음 보는 것이었다.

 달빛 아래 은빛 뱀이 난무(亂舞)하듯 검초(劍招)가 펼쳐지는 가
운데 그녀는  이대 고수(二大高手)를  맞이해 그런데로 버텨나갔
다. 예전의 주지약이라면 아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지약의 검초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따금씩 연출되는 절
묘한 변화였다. 허(虛)와 실(實)이 서로 어우러져 변화를 창출할
때마다 녹장객과 학필옹은 흠칫  놀라는 듯했다. 그 반대로 주지
약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숨을 돌릴 계기를 만들곤 했다.

 순식간에 쌍방은 삼십여 초식을 주고 받았다.

 이제 주지약이 펼쳐낸 검막은 둘레 여섯 자까지 뻗쳤다. 갈수록
검초가 더욱  위력적으로 변한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장무기는  그곳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임을
알고 있었다.

 주지약이 이러한 타법(打法)으로 쾌속하게 내력(內力)을 운용하
는 것은, 달아나기 위한  기회를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장무기
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만약 주지약이 계속 그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다면 내력이 과도
하게 허비되어 스스로 지치게  될 뿐 아니라 무리한 공격을 전개
하는 도중에 눈꼽만치의 실수를  보이면 즉시 돌이킬 수 없는 위
경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장무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지약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
다. 이 순간 만큼은  그녀에 대한 원한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장무기는 손에 땀을 쥐며
무의식중에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갔다.

 만약의 경우 주지약을 도우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갑자기,

 "야압!"

 주지약의 입에서 날카로운 기합이 토해지며 녹장객을 향해 질풍
이 몰아치듯 연거푸 삼검(三劍)을 펼쳐냈다.

 녹장객은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답게 비록 놀랐으나 당황하
지 않고 재빨리 옆으로 몸을 뒤틀며 피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학필옹의 쌍필이 수중에서 벗어나 주지약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를
암기로 삼아 던져내는 것은  강호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었다.

 공격을 받는 입장에서 볼 때는 일종의 불의의 기습을 당하는 것
이므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반면, 기습을 전개
하는 쪽도 위험 부담을 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단 기습이 실
패로 돌아가면 무기를 잃게 되므로 오히려 자신이 위경에 처하게
된다. 그야말로 마지막 주사위를  던져 최후의 승부수를 거는 것
과 다를 바 없었다.

 학필옹의 쌍필을 던져내는  순간 장무기는 흠칫했으나 주지약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주지약의 등을  겨냥해 날아가던 쌍필이 갑자기 도중에
서 뜻하지 않은 변화를 일으킬 줄이야!

 창!

 맑은 금속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쌍필이 허공에서 서로 맞부딪치
며 방향을 꺾어 주지약의  뒷통수와 허리 뒤쪽을 향해 폭사돼 갔
다.

 뒷통수와 허리 뒤쪽 요후혈(腰後穴)은 모두 급소로서 일단 적중
되면 금강신선(金剛神仙)이라 할지라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
이다.

 한편, 주지약은 등 뒤에서 쌍필이 허공을 가르는 예리한 파공음
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려 피했으나 쌍필이 갑자기
도중에서 맞닥뜨리며  방향을 전환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
다. 아차하는 찰나 주지약은 뒤통수로 날아오는 학취필을 피했으
나 요후혈을 겨냥해 화살처럼 뻗쳐오는 또 하나의 학취필은 도저
히 피할 재간이 없었다.

 위기일발!

 주지약의 뇌리에 죽음의  암영(暗影)이 드리워지는 것과 동일한
시각에 한 줄기의 그림자가 불가사의한 속도로 날아와 그 죽음을
알리는 학취필을 나꿔챘다.  동시에, 학필옹이 잇따라 떨쳐낸 일
장을 맞받아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느닷없이 뛰쳐들어 주지약을 사선(死線)에
서 구해낸 장본인은 장무기였다.

 그러나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주지약
은 미처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사신(死神)의 손짓만 의식할 뿐 뇌리가 백지처럼 텅 비었다.

 그 틈을 타서 녹장객이  적시에 일장을 전개해 그녀의 아랫배를
적중시켰다. 녹장객이 전개한  것은 그 무시무시한 현명패천장이
었다.

 "윽!"

 주지약의 입에서 외마디 신음이  터지며 즉시 숨이 막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위기를 틈탄 녹장객의 교활한 출수가
결국 싸움을 마무리지은 것이다.

 장무기는 주지약이 쓰러진 것을  보자 소스라치게 놀라 손에 쥐
고 있던 학취필을 팽개치며 얼른 주지약을 안아올려 비스듬히 일
장 남짓 솟구쳤다. 그리고 분노에 찬 음성으로 호통쳤다.

 "이 비겁한 마두들! 무림  선배랍시고 거드름을 피울 때는 언제
고, 이제 와서 비겁하게  둘이서 한 사람을 공격하다니 그러고도
낯짝을 들고 무림 동도를 대할 수 있겠느냐?"

 녹장객은 가소롭다는 듯 광소를 날렸다.

 "으핫핫핫핫.....! 어느 놈이  감히 이 어른신네들의 일을 방해
하는가 했더니, 이제보니 장대교주시군, 마침 잘 만났다. 우리의
군주마마를 꾀어 어디다 숨겨 놨느냐?"

 장무기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나무 뒤 어두운 곳에서 조민
이 스스로 뛰쳐나왔다. 그녀는 우선 장무기로부터 주지약을 받아
안더니 현명이로를 향해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녹선생, 아직도  나를 못 잊어 오매불망  찾아 헤매고 있나요?
이런 식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주책을 부린다면 나의
아버님이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녹장객은 주지약을  탐하려던 것이 발각된  듯 스스로 수치심을
느꼈다. 그 수치심을 감추기라도 하듯 그는 버럭 화를 냈다.

 "이 요망한 계집, 여지껏 네가 군주라고 해서 흥이야 항이야 해
도 들어 줬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구나. 우리 형제는 네 아비와
벌써 인연을  끊었다. 그러니 여양왕도  앞으로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할 것이다!"

 여양왕부에 예속돼 있을  때는 그런대로 마성(魔性)을 억제하던
녹장객이 이젠 스스럼 없이 그 마성을 드러냈다.

 장무기는 녹장객이 주지약에게  독수를 전개하고 더우기 예전의
상전이었던 조민에게 서슴없이  무례한 언동을 발하자 분노가 치
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어렸을 때 그들 두 사람에게 현명
패천장을 당해 많은 세월 동안 고생해 온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
렸다.

 장무기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눈에서 짙은 살기가 뿜어
졌다.

 "민매(敏妹), 잠시  뒤로 물러나시오. 오늘 저  두 늙은 마두를
단단히 혼내주겠소."

 현명이로는 장무기가 빈손인 것을  보자 즉시 무기를 거두고 만
반의 응전태세를 갖추었다.

 장무기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받아랏!"

 대갈일성과 함께 공작전미(孔雀展尾)라는 초식을 쌍장으로 밀어
냈다. 이 초식은 태극권법으로서 장세가 뻗쳐나가는 속도는 매우
느렸다. 장무기는 이 초식에다 암암리에 구양신공을 주입시켰다.

 태극권법, 이 권법은  후세에 이르러 권법의 태두라 일컬어지며
여러 가지 다른 명칭으로  분리돼 널리 펴져나갔지만, 당시 장삼
봉이 창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림에서도 이 장법을 직접 목격
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녹장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런 음유무력(陰柔無力)한 장세
(掌勢)를 본 적이 없어 일단 당황했다. 어떤 변화가 숨겨져 있는
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장무기를 매우 경원
시하고 있었다. 그는 감히 정면으로 받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비
스듬히 옆으로 몸을 피했다.

 장무기는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유연하게 몸을 돌리며 학필옹
을 겨냥해 왼손을 뻗어냈다.

 백사토신(白蛇吐信).

 이와 동시에  장무기의 오른손이 왼손  손등에 붙여지며 미미한
떨림을 연출했다. 그의 왼손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경기(勁氣)가
분명히 뻗쳐나갔다.

 학필옹은 거기에 맞서 왼손 식지로 장무기의 장심(掌心)을 허초
로 찍으며 오른손으로  호선(弧線)을 그려 장무기의 아랫배를 노
렸다.

 장무기는 현명이로와  두 차례나 격출한  바가 있으므로 그들이
자기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
에 자신은 도액 등 소림 삼승과 치열한 한판 승부를 벌여 무공이
더 한층 증진되어 현명이로를 여유있게 격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실력을 만만하게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경솔한 마음을  갖지 않고 태극권법을 위주로  하여 잇따라 원을
그려내며 그 원형의  경기(勁氣) 사이로 구양신공을 간간이 구사
했다.

 싸움은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현명이로는 자신들의  열세를 풍부한  대적 경험으로 보충했다.
역시 고목의 뿌리는 깊었다.

 현명이로는 일초 인식을 신중하게 대처해 나갔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상대방에게서 뻗쳐오는  양강지기(陽剛之氣)가 거세지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뜨거운 양기가 자신들이 구사하는 현명신
장의 음한지기를 차츰 좀먹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휙! 휙!

 무서운 경기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계속 귓전을 때릴 뿐 쌍방
은 침묵 속에서 격전을 치루어갔다.

 어느새 쌍방은 백여 초식을 주고 받았다.

 순간, 장무기의  몸이 광풍에 쏠리는 한  닢 낙엽인양 허공으로
붕 떠올라  아랫쪽을 향해 쌍장을  교차시키며 떨쳐냈다. 새로운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허공에 떠 있는 장무기는 우연히 한쪽에 시선이 쏠리며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현명이로가  좌우로 갈라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사뿐히
당에 내려서면서 방금 시선이  쏠렸던 곳을 유심히 살폈다. 그곳
에 두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몸을 떨고  있었는데, 달빛을 빌어
조민과 주지약이라는 것을 대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장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눈꼬리를 치켜올리자 조민과 주지약
의 모습이 보다 확연하게  시야에 잡혔다. 조민은 주지약을 안고
있었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곧 주지약을 놓칠 것만 같았다.

 장무기는 이내 그 까닭을 깨달았다.

 '맙소사, 지약은 녹장 늙은이의 현명패천장을 맞아 도저히 견뎌
내지 못하는 모양이군. 그녀 자신도 음한한 무공을 연마한데다가
다시 천하에서 가장 음한하다는 현명패천장을 맞았으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 된 셈이다. 그 한기(寒氣)가 민매에게까지 전달된 게
분명하다.'

 이러한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치자 장무기는 공격을 최
고 경지로 끌어올려 앙연히 녹장에게 밀어냈다.

 녹장객은 그의 권법이 급변한  것을 보자 능구렁이답게 정면 대
결을 피하고 미끄러지듯 옆으로 몸을 번뜩였다. 동시에 장무기가
왜 갑자기 공격을 서두르게 되었는지 눈치챘다.

 그는 옆으로 미끄러지는 즉시 소리쳤다.

 "사제, 유투(遊鬪)를 펼치게.  주지약 계집의 한독이 발작한 모
양이니 녀석에게 돌봐줄 틈을 줘선 안 되네!"

 "알았소!"

 그는 일단 뒤로 물러서 학취필을 뽑아쥐더니 장무기를 중심으로
하여 원을  그리며 돌다가  통천철지(通天撤地)의 초식을 전개해
학취필로 장무기의 위아래를 찔러왔다.

 그는 녹장객과  더불어 이제부터는 정면  공격보다 측면 기습을
시작했다.

 장무기는 그들의 전술 변화에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오히려 냉
소를 날렸다.

 "어떠한 형식으로도 너희들을 상대해 주마!"

 장무기가 외침과 함께 광풍노도 같은 일장을 떨쳐내자 학필옹은
휘몰아쳐 오는 무지막지한 경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때 녹장객은 자신의 무기인  녹장을 손에 쥐기 무섭게 장무기
의 옆구리를 후리며 뻗어왔다.

 장무기는 속전속결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연거푸 권법을 변
화시켜 소림신승  공성(空性)으로부터 배운 용조금나수(龍爪檎拿
手) 삼십 팔식을 펼쳐냈다.

 무금식, 고슬식, 포풍식, 포잔식..... 계속 맹렬한 공격이 이어
졌다.

 녹장객이 몸을 피하며 소리쳤다.

 "이 용조공의 위력은 대단하군.  잠시 후 이 용조공으로 구덩이
를 파면 안성마춤이겠다!"

 "사형, 구덩이를 파서 무엇한단 말이오?"

 녹장객은 교활하게 웃었다.

 "주지약 계집이 죽으면 묻어 줘야잖겠느냐?!"

 알고보니, 그는 일부러 장무기의 마음을 흐트려 놓기 위해 얼토
당토않은 말을 내뱉은 것이다.

 한데, 장무기의 마음을 흐트러  놓기도 전에 그 자신이 입을 놀
리다가 그만 주의력이 분산돼 장무기가 걷어찬 발에 왼쪽 장단지
가 적중되었다. 녹장객은  질겁을 하며 몸이 비틀거렸다. 그러나
백전노장답게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녹장을 물샐틈 없이 펼쳐냈
다.

 장무기는 힐끗 고개를  돌려 다시 조민과 주지약을 살펴보았다.
두 사람은 좀전보다 더욱 심하게 떨고 있었다.

 장무기는 염려가 되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소리 높
여 외쳤다.

 "어떻소?"

 즉시 조민의 음성이 들려왔다.

 "몸이 자꾸만 차가와져 견딜 수가 없어요!"

 장무기는 이내 안색이  변했다. 조민의 떨리는 음성을 들어보니
그녀도 음한지기에 시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모름지기 조민은 주지약을 도와 체내의 음한지기를 몰아내기 위
해 공력을 주입시키다가  오히려 상대방의 음한지기가 체내로 유
입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의 공력이 현격한 차이가 있는
데다가 주지약의 내력(內力)이  워낙 괴이하여 빚은 불행한 결과
라고 생각했다.

 장무기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좌우 쌍장을 떨쳐 맹공을 퍼
부으며 한시바삐 싸움을 매듭지으려 애썼다.

 그러나 현명이로는 그의 속셈을  읽고 있는 터라 멀찌감치 떨어
져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뜩이며, 단지 시간을 끄는데 주력할 뿐
정면 대결을 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안타까왔다. 그는 다시 조민을 향해 소리쳤다.

 "민매, 어서 주낭자를 땅에 내려 놓으시오!"

 조민은 당황해 하는 음성으로 외쳤다.

 "손..... 손에서 떨어지지 않아요!"

 장무기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어째서.....?"

 조민의 울먹이는 듯한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 그녀의 등심에 붙인 손이 떨어지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음성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몸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때 녹장객이 다시 엉뚱한 말을 건네왔다.

 "장교주, 저 주낭자는 천성이 악랄해 일부러 자신의 음한지독을
군주에게 전해 주고 있으니 군주가 먼저 죽음을 당하게 될 게 뻔
하다. 그러니 군주를 살리고 싶으면 한 가지 조건을 교환하는 게
어떠냐?"

 장무기는 조급한 마음에 다그치듯 물었다.

 "교환 조건이 무엇이냐?"

 녹장객은 느긋하게 말했다.

 "우리가 이걸로서  싸움을 끝내는 것이다.  나는 주낭자가 갖고
있는 비급을 얻고, 장교주는 군주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장무기는 이내 냉소를 날렸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었
다. 현명이로의 무공은 지금  상태에서도 적수를 찾아 보기가 어
려운데, 만약 주지약으로부터 무공  비급을 얻어 더욱 음독한 무
공을 연마한다면 그야말로  온 무림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광분할
게 아니겠는가!

 장무기는 속으로 생각을 굴리며 다시 조민 쪽을 바라보았다. 조
민의 아리따운 얼굴이 이미 파르스름하게 변색된 채 고통으로 일
그러져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장무기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녹장객의 제의에 가
부를 대답할 겨를도 없어 조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즉시 왼
손으로 조민의 오른손을  잡아 체내의 구양진기를 주입시켜 주었
다.

 녹장객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대뜸 소리쳤다.

 "맹공을 퍼붓자!"

 그 외침을 신호로 하여  현명이로는 녹장과 한쌍의 학취필을 광
풍폭우처럼 전개했다.

 장무기는 왼손으로 조민의  체내에 구양진기를 주입시키느라 몸
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뿐 아니라, 한쪽 손만으로 현명이로의
맹렬한 공격을 상대해야 한다. 더군다나 진력을 조민에게 빼앗기
고 있어서 위험천만의 상황이었다.

 과연 그 위기는 즉각 현실로 나타났다.

 찍!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장무기의  왼쪽 바지 가랑이가
학취필에 의해 찢겨지며 선혈로 물들었다.

 조민은 본디 주지약의 체내에서  역류해 온 음한지기로 인해 전
신의 혈액이 응결되는 것  같았는데, 구양진기가 다시 체내로 유
입되자 차츰 그 혈기가 누그러졌다. 그러나 장무기가 다른 한 손
으로 현명이로를  상대하자 조민의  체내로 유입되던 구양진기가
약해졌다. 그로 인해 조민은 다시 오한에 시달렸다.

 녹장객은 연거푸 녹장을 떨쳐내 장무기의 눈을 노렸다.

 장무기는 한 손으로 장력을  뻗어내 맞이하자 학필옹이 때를 맞
추어 절묘한 자세로 뒹굴며 왼손에 쥐고 있는 학취필로 장무기의
옆구리를 찍어왔다. 장무기는  피할 여유가 없어 건곤이위신공을
전개해 학취필의 방향을 바꿔  놓으려 했다. 그러나 조민에게 태
반의 공력을 빼앗기고 있는 입장에서 학필옹의 전력이 담긴 학취
필을 따돌린다는 것은 무리였다.

 순간,

 창!

 뜻밖에도 금속성이  들리며 학취필이  옆구리를 긁고 지나갔다.
장무기는 별로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학필옹의 학취필이 마침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도룡도에 적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장무기는 평상시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도액 등 소림삼승과
맞붙을 때 성화령을 사용했던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도룡도를
허리에 차고  있으면서도 전혀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다.

 지금, 학필옹의 학필이 공교롭게도 도룡도에 적중되자 장무기는
비로소 도룡도에 생각이 미쳤다.

 "얍!"

 그는 용이 울부짖듯 일성  기합을 발하며 왼발을 쓸어내 학필옹
을 뒤로 석 자 가량 물러나게 만들고는 재빨리 도룡도를 뽑았다.
마침 녹장객의 녹장이 뻗쳐왔으므로 장무기는 도룡도를 맞닥뜨려
갔다.

 뚝!

 그 즉시 가벼운 소리가  들리며 녹장의 녹두(鹿頭) 부분이 싹뚝
잘려져 나갔다.

 녹장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앗!"

 그가 놀란 외침을 발하는  순간 학필의 쌍필이 파공음을 일으키
며 휘몰아쳐 왔다.

 장무기의 도룡도가 재차 허공에 수놓아지자 한 쌍의 학취필마저
모두 싹뚝싹뚝 네 동강이로 잘라졌다. 도룡도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현명이로는 더 이상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장무기는 비로소 자신의 진력을 차분히 조민의 체내에 주입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민은 금방 한독이 제거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지약이 당했던 현명한독이 즉시 말끔하게 씻든 듯 제거
되었다. 실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무기는 물론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해 계속 조민의 체내
에 구양진기를 주입시키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주지약은 비록 한독이  제거됐지만 간접적으로 조민의 손바닥을
통해 구양진기가 계속 체내로 뻗쳐들어왔다. 그녀가 새로 연마한
것은 구음내력(九陰內力)이었는데, 일단 현명한독이 사라지자 막
힘없이 뻗쳐들어오는 구양진기로 인해 애써 쌓아올린 구음내력이
파괴되어 갔다.

 주지약은 그러한 사실에 놀라고 당황했다.

 알고보니, 그녀는 벌써 정신을  되찾았다. 그 즉시 조민이 자신
의 체내에 공력을 주입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그
녀는 조민이 주입시켜 주는  내력이 자기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
한다는 것을 깨닫고 엉뚱한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어차피 조민의 도움을 받아 체내의 한독을 제거하지 못할바에는
거꾸로 자신의 한독을 조민의  체내로 되돌려 주면 자신의 살 길
이 열릴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살아야겠다는 본능적인  생각이지만, 배은망덕한 행위임
은 부인할 여지가 없었다. 조민은 그러한 사실도 모르고 단지 주
지약이 당한  음독이 너무나 심해 자기마저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했으니, 영특한 사람일수록 어리석은 구석이 있다는 말이 맞
는 모양이었다.

 주지약은 사실 무인도에서 의천검 속에 숨겨진 구음진경을 수중
에 넣었지만, 행여나 사손  혹은 장무기에게 발각될까 봐 외떨어
진 동굴에서 밤에만 몰래 연마하는 바람에 기초를 제대로 다지지 
못했다. 자연히 구음진경의 진수를 완벽하게 익힐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당한 현명패천장의 한독을 조민에게 되돌려 주려
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지금  그 단계를 넘어서 거꾸로 뻗쳐오는 
구양진기에 의해 자신의  구음진기가 자꾸만 소멸돼가자 내심 대
경실색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등심에 붙여진 조민의 손을 뿌리칠 수도 없는 입
장이었다. 체내에 구양진기가  뻗쳐들어오기 전까지는 자신이 의
도적으로 조민의 체내에  음한지기를 주입시켰기 때문에, 조민이 
안간힘을 서도 그녀의 등심에서  손을 뗄 수 없었지만 이젠 입장
이 바뀌어 조민의 손이 구양진기의 강한 점력(點力)에 의해 등에 
밀착돼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입장을  하소연하기 위해 소리칠 수 없었
다. 일단 입을  열면 진기가 흩어져 피를  토하며 숨이 끊어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민은 차츰 체내의 한기가 사라지며 혈액이 원만하게 유
통되자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이젠 됐어요. 내 걱정 말고 어서 전력을 다해 현명이로를 상대
하세요."

 장무기는 그녀가 회복되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그는 곧 구양신공을 거두었다.

 주지약은 비로소 강한  점력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되자 자신이 
당한 현명패천장의  음독은 말끔히  씻어졌지만 구음내력이 많이 
손실되었다.

 그녀는 장무기가 도룡도를  떨치며 현명이로를 상대하는데 여념
이 없는 것을 보자 또  다시 뇌리에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생각은 즉시 행동으로 옮겨져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
부려 다짜고짜 조민의 정소리를 향해 내리꽂았다. 뜻밖에도 불의
의 살수(殺手)를 펼친 것이다.

 이것은 극도의 미움이  자아낸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었다. 차라
리 발악이었다. 장무기가 자신에게서 멀어질수록 마음 한 구석엔 
그에 대한 미련이 더욱 간절하게 응어리져, 그 고통이 조민에 대
한 마음으로 변해 비뚤어진  행동으로 분출된 것이다. 조민을 극
진히 생각해 주는 장무기의 노골적인 행동에서 심한 심적인 자극
을 받은 영향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조민은  또 한 차례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녀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피할 새도 없었다.

 "앗!"

 그녀는 자지러지게  비명을 내질렀다.  정수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목숨을 잃게 되는 줄 알았다.

 그 순간  뼈마디가 어긋나듯 삐걱하는  소리가 들리며 주지약의 
입에서도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오더니 이내 몸을 튕겨 어둠 
속으로 질주해 갔다.

 장무기는 조민의 비명에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려 물었다.

 "무슨 일이오?"

 조민은 자신의 정수리를  만져보더니 혼비백산하여 제대로 대답
을 하지 못했다.

 장무기는 그녀가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에 의해  심한 상처를 
입은 것인 줄 알고 역시 대경실색했다. 그는 도룡도를 떨쳐 현명
이로를 막으며 조민에게  접근하여 왼손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만
져보았다. 손에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두개골이 손상되지는 않았다.

 장무기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
고 조민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위로해 주었다.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니 괜찮을 것이오."

 하지만 장무기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주지약이 의도적으
로 조민에게 가벼운 상처를  입혔을 리는 만무했다. 그런데 어째
서 찰과상만 입은 것일까?
 
 물론 장무기가 곰곰히 생각하면  의문이 금방 풀릴 수도 있었지
만 지금은 현명이로를 상대하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사실 조민이 또 한 차례  위기를 넘긴 것은 체내에 주입된 구양
진기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주지약은 내력이 크게 손상
된 상태에서 공격한 것이라,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한 구양진기의 반탄지력에 의해 손
목뼈가 삐걱하며 손마디에 심한 통증을 느껴 신음을 내뱉었던 것
이다.

 장무기가 약산 주춤하는 사이에 현명이로가 다시 공격해 왔다.

 주지약이 떠나 버리고 조민의 한독이 퇴치된 지금의 상황하에서 
장무기는 더 이상 마음의 부담을 느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구태
여 도룡도의 위력을 빌려  현명이로를 꺾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진정한 무공으로 승리를 쟁취하고 싶었다.

 장무기는 즉시 도룡도를 조민에게 건네주고 체내의 진기를 일주
천(一周天)시켜 전신에 골고루 퍼지게 하더니 왼손으로 학필옹이 
떨쳐온 일장의 방향을 살짝 바꾸어 놓았다. 드디어 건곤이위신공
을 전개한 것이다.

 상대가 상대인 만치  장무기는 건곤이위신공을 제칠단계인 최고 
경지로 전개하는 한편 구양신공마저 잔뜩 주입시켰다. 이것은 장
무기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위력적인 공격인 동시에 내력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타법이기도 했다. 모든 일에 표리(表裏)가 있듯이 
이 위력적인 공격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내력(內
力)의 안배가 어긋나게  되면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되어 스스로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전 조민과 주지약의 한독
을 퇴치해 줄 때는  비록 상황이 위급했지만 감히 이러한 타법을 
구사하지 못했던 것이다.

 건곤이위신공에 말려든  학필옹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녹장객의 어깨에 일장을 후려쳤다.

 녹장객은 깜짝 놀라 성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사제, 무슨 짓인가?"

 학필옹은 무공이 고강하지만  생각이 우둔한 편이었다. 왕왕 한
가지 일을 갖고 한참  생각해야만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창졸
간에 묘한 상황이 벌어지자 그 자신도 어리둥절하며 녹장객이 묻
는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잠깐 장무기가 수작을 부
린 것이란  생각이 들어 일단 자기가  열심히 장무기를 공격하면 
사형도 오해가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이를 악물며 전력을 다해 장무기를 향해 발을 걷어차냈다.

 장무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왼손을 떨쳐내자, 이번에도 학필옹의 
발이 엉뚱한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녹장객의 아랫배를 향해 걷어
차 갔다. 녹장객은 황급히 몸을 피하며 소리쳤다.

 "자네 미쳤나?"

 한쪽에 있는 조민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즉시 소리쳤다.

 "잘 하는구요.  학선생, 맞아요! 어서  저 대역무도하고 음탕한 
사형을 사로 잡으세요. 그럼  나의 아버님께서 약속한 대로 후한 
상을 내릴 거예요."

 장무기는 내심 웃음이 나왔다. 조민의 외침에 따라 녹장객과 학
필옹이 당혹해  하는 것이 재미있고도  통쾌했다. 그래서 원래는 
건곤이위신공으로 학필옹이 녹장객에게  공격을 전개하게끔 하고 
다시 녹장객의 공격이  학필옹에게 쏟아지게끔 할 생각이었는데, 
그 생각을 달리했다.

 계속 학필옹에게만  건곤이위신공을 전개해  녹장객을 당혹하게 
만들고, 녹장객에게는 태극권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한 
술 더 떠 조민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학필옹에게 외쳤다.

 "학선생, 아무 염려 마시오.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이 음
탕한 늙은이를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오. 여양왕은 이미 학선생
을 대장군에 봉하였소!"

 조민이 다시 소리쳤다.

 "학선생, 당신에게 봉관(封冠)한다는 공식문서를 갖고 있어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품 속에서 종이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음.....  대원호국양위대장군(大元護國揚威大將軍)에 봉해졌군
요. 어서 힘을 내세요!"

 장무기는 오른손을 펼쳐내 녹장객을 왼쪽으로 밀어붙였다. 건곤
이위신공의 영향을 받은 학필옹의 좌장(左掌)이 마침 녹장객에게 
뻗쳐오자 장무기와 더불어 좌우 협공하는 형태가 되었다.

 녹장객은 학필옹과 수십 년간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며 친형제 이
상으로 정이 두터웠다. 그래서 학필옹이 자기를 배신하리라곤 전
혀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학필옹이 거듭하여 자신의 급소
를 겨냥하여 공격해 오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부귀영화가 탐나 정말로 날 배신하려는 게 아닌가?"

 그가 의심스럽게 묻자 학필옹은 다급해졌다.

 "나는..... 단지....."

 그가 당황하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조민이 다시소리쳤다.

 "맞아요! 학선생은 단지 장래를 생각한 것뿐이에요. 언제까지나 
강호에서 풍파를 겪으며 살 수 없으니 호국양위대장군이 되어 말
년을 부귀영화 속에서 보내려는  거예요. 그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욕심이잖아요. 사형이 아무리  좋다 해도 자신의 행복과 바
꿀 수야 있겠어요?"

 장무기는 적시에 건곤이위신공을  펼쳐 녹장객에게 허초를 전개
하며 학필옹의 장풍을 유인했다.

 펑!

 학필옹의 장풍은 장무기의 허초를 피하려는 녹장객의 어깨에 적
중되었다. 녹장객은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아 즉시 학필옹의 뺨을 
후려쳤다.

 찰싹!

 호되게 뺨을 얻어맞은 학필옹은  그 즉시 얼굴이 부어오르며 이
빨이 여러 개 부러졌다. 그는 나이가 많아 몇 개 남지 않은 이빨
을 귀하게 여겨 왔는데 이렇게 되자 역시 발끈하여 소리쳤다.

 "사형, 이럴 수가..... 있소?"

 녹장객은 눈에 쌍심지를 키며 맞섰다.

 "네가 먼저 출수를 하지 않았느냐?"

 그는 비록 견식이 넓지만  이런 해괴한 위력을 지닌 건곤이위신
공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합리화시킬 
수 있는 것은  차력타력(借力他力)의 수법인데, 그것도 불가능했
다. 장무기의 공력으로 학필옹을 꺾을 수야 있겠지만 차력타력의 
수법을 전개해 학필옹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기 때문이다. 그래서 녹장객은 장무기가 암암리에 엉뚱한 장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치 않았다.

 학필옹은 자신의 결백을 표명하는데 다급하여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 교활한 놈!"

 물론 그는 장무기를 겨냥해  한 욕이었다. 그러나 조민이 그 화
살일 엉뚱한 데로 돌려 버렸다.

 "맞아요! 그는  이제부터 당신의 사형이  아니라 교활한 놈이에
요!"

 녹장객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여
지껏 자기에게 고분고분하던 학필옹이 스스로의 부귀영화를 위해 
자기를 배신했을 뿐  아니라 살수까지 전개하니 오장육부가 뒤틀
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는 눈이 충혈되어  계속 학필옹에게 공격을 전개했다. 학필옹
은 억울하게  일방적으로 당할 수가 없어  몸을 피하며 반격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장무기는 원병(元兵)들이 야습을 가해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할 수 없었다.

 "학선생, 그럼 이음탕한 늙은이를 맡기겠소!"

 그는 발 끝으로  살짝 지면을 찍으며 뒤로  물러나 조민의 손을 
잡고 소림사 방향으로 향했다.

 현명이로는 서로  초식을 주고 받으며  싸움이 갈수록 치열해졌
다.

 이때 어둠을 뚫고 조민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학선생, 그  <교활한 놈>을 사로잡는다면  도룡도의 비급을 한 
달간 빌려줄 테니 힘내서 싸우세요. 이런 기회는 많지 않을 거예
요!"

 녹장객은 더욱 울화가 치밀어 더욱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
들 두 사람은 같은  스승 밑에서 무공을 배워 실력이 막상막하였
다. 일단 둘이 맞붙어 악투를 벌이자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소림사로 돌아온 장무기는 조민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나서 웃
으며 말했다.

 "민매, 민매가 적시에 품  속에서 종이를 꺼내 보이지 않았다면 
녹장객이 속지 않았을지도 모르오."

 조민은 생긋이 웃으며 품 속에서 얄팍한 종이를 꺼내 흔들어 보
였다.

 "이게 무엇인지 아나요?"

 장무기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내둘렀다.

 "모르겠소. 민매가 알아 맞추라는 것은 도저히 알아맞추지 못하
겠소."

 조민은 얄팍한 종이 두 장을 장무기의 손에 쥐어 주었다.

 장무기가 불빛을 빌려  자세히 살펴보니, 이것은 종이가 아니라 
매미 날개처럼  얇은 비단이었다. 그곳에  깨알처럼 작은 글자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첫 번째 바단 첫머리에는 무목유서(武穆遺書)라는 네 글자가 적
혀 있고,  그 내용은 주로  병법으로서 포진술(布陣術)과 용병술
(用兵術)이었다.

 두 번째  비단 첫머리엔 구음진경(九陰眞經)이란  글이 적혀 있
고, 내용은  모두가 신기하고  괴이한 무공의 구결(口訣)이었다. 
맨 마지막에는 구음백골조와 철심장(鐵心掌)도 수록돼 있었다.

 장무기는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건..... 주낭자에게서 취해 온 것이오?"

 조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녀가 꼼짝 못하고  있을 때 슬쩍 훔쳐온 거예요. 나
는 이따위 음독한 무공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러나 그
녀가 이  무공을 배워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차라리 없애버리는 
게 낫겠죠."

 장무기는 구음진경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문구가 어렵고 뜻이 
깊어 퍼뜩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구음진경이  절대 음독한 무학이 아니라는 것
을.

 장무기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에 수록돼 있는  무공은 지극히 심오하여 기초서부터 차근
차근 연마하면 일, 이십 년  후에 틀림없이 대성할 수 있을 것이
오. 반면에 만약 속성하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은 사람을 
해치는 음독한 무공으로 전략할 것이오."

 그는 말 끝을 멈칫하더니 다시 말했다.

 "그 황삼을 입은 낭자의  무공은 분명 주낭자와 뿌리가 같은 것 
같소. 그런데 주낭자와는 정반대로 모든 초식이 광명정대하지 않
소? 아마 그것이 바로 구음진경의 진면목일 것이오."

 조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는 대관절 어떠한 내력(來歷)을 지니고 있을까요? 그 무슨 
<신조협려가 영원히 강호에서 모습을 감추다>하고 읊조렸던 기억
이 나는데....."

 장무기도 역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중에 태사부님을 뵙게  되면 여쭤봐야겠소. 그 어르신네께선 
어쩌면 아시는 게 있을 것이오."

 두 사람은 잠시 한담을 나누다가 원병 쪽에서 별다른 행동을 취
할 기미가 없냐는 보고를 받고 제각기 잠자리로 들어갔다.

 이날 밤, 조민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무기와 땅굴 속
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참만에 잠이 들은 그녀는 오색 무지개를 타고 하늘을 훨훨 날
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 제 7 권 5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제 6 장  막을 내린 혈전(血戰) 


 이튿날 장무기는 일찍  잠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간밤에 원병들
은 아무런 거동도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아군의 진영을 살펴
보고 나서,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산 아래를 살펴보았다.

 산 아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원병들은 형형색색의 깃발을
펼쳐들고 떼지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끔 진영안에서 호
각소리가 잇따라 들려오기도 했다. 권토중래할 새로운 진법을 구
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장무기가 나무 위에서  내려오자 마침 조민이 가까이 걸어왔다.
장무기는 반색을 하며 그녀를 불렀다.

 "민매!"

 조민은 말쑥한 모습이었다.  간밤에 영롱한 꿈이 아직도 가슴에
여울지고 있는지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네. 왜 그러죠?"

 장무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내둘렀다.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그저 불러 보고 싶었소."

 사실 그는 조민과 더불어  원병을 퇴치할 방안을 상의할 생각이
었다. 조민의 명석한 두뇌에서  묘책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던 것
이다. 그러나 막상 그녀를 불러놓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조민은 몽고의 귀족이  아닌가. 그녀는 부친과 오라버니와 등을
진 채 자기를  따르고 있는데, 다시 그로  하여금 동족을 죽이는
대책을 세워달라고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었
다.

 그래서 장무기는 주춤하다가 말을 얼버무린 것이다.

 조민은 그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을 수 있어 나직이 한숨을 내쉬
었다.

 "제 고충을 이해해 줄 것이라  믿어요. 사실 도움이 될 말을 해
줄게 없어요."

 장무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품안에 껴 앉았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산새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왔
다.

 장무기는 조민에게서 신선한 아침 공기보다 더욱 싱그러운 내음
을 느낄 수 있었다.

 장무기는 조민과 헤어져 공문대사가  따로 마련해 준 자기의 거
처로 돌아왔다. 그의 마음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나무 위에서
살펴본 원병들의 동태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그들은 비록
고강한 무공을 지니지  못했지만 오랜 훈련을 쌓아올린 질서정연
한 군기가 있었다.

 한데, 군호들에게는 그러한 면이 부족했다.

 원병은 어제 첫 번째 공격을 시도하다 뜻하지 않은 장벽에 부딪
쳐 일단 패주했지만 새로운  진용을 구축해 진격해 올 게 분명했
다. 장무기는 어제와 똑같은 술책으로 그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 도저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방안을 배회하다가 어젯밤에 조민이 준 구음
진경을 훑어보았다. 난해한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장무기는 다시 무목유서를 읽어 내려갔다. 몇 줄 읽어 내려가자
우연히 병곤우두산(兵困右頭山)이란 다섯 글자가 눈에 쏙 들어왔
다.

 병곤우두산(兵困右頭山), 병사들이 우두산에  갇혔다는 뜻이 아
닌가. 장무기는 퍼뜩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어 자세히 읽어 내
려갔다.

 그 내용은 악비(岳飛)가  왕년에 금병(金兵)에게 포위되어 어떻
게 위기를 넘겼으며 어떻게 용병술을 전개해 불리했던 싸움을 승
리로 이끌었는지 소상히 적혀 있었다.

 장무기는 절로 무릎을 내리치며 소리질렀다.

 "하늘이 날 돕는구나!"

 그는 곧 무목유서를 갈무리하고 조용히 깊은 사색에 잠겼다. 지
금 군호들이 모여 있는 소실산의 상황은 왕년에 악비가 우두산에
갇혔을 때와 틀리지만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끈 병법과 묘책은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었다.

 악비의 전술은 실로 절묘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의 용병술을 읽
고 난 장무기는 내심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도
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묘책이 많았다.

 장무기는 곧 손가락으로 찻잔의  물을 찍어 도형을 그리며 악비
의 전술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 나름대로 여러 가지 진법을 구상
해 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지금의 상
황에서는 적의 숫자가  워낙 많으므로 정정당당한 진법으로 승리
를 쟁취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변칙적인 포
진을 하기로 작심한 것이다.

 장무기는 곧 대웅보전으로  옮겨가 공문대사로 하여금 군호들을
모두 불러모으게 했다. 삽시간에  각 문파의 인물들이 모두 대웅
보전에 모이게 됐다.

 장무기는 한복판에 우뚝  서서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고 난 후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오랑캐 병마가 바로  우리의 코앞에 몰려와 있습니다. 그
들은 얼마 후에 다시 대대적인 공세를 펴올 게 분명합니다. 우린
비록 어제 작은 승리를 거두어 오랑캐들의 예봉을 꺾었지만 그들
이 만약 죽음을  불사하고 다시 벌떼처럼 몰려온다면 막아내기가
어려쥭 o REGENUMVALUE, IPFINDNEX재지만 여러분들께서 이끌
어 주셔서 염치 불구하고  당분간 통솔권을 쥐게 되었으니, 오늘
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몇 가지 명령을 내려야겠습니다."

 군웅들은 일제히 호응을 했다.

 "분부에 따를 것이니 어서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장무기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좋습니다. 오장기사는 명을 받으시오."

 예금기의 장기사 오경초는 즉시  앞으로 나서며 정중히 몸을 숙
였다.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그는 가벼운 흥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교주께서 자기를 첫 번째
발령(發令) 대상으로 꼽아주니  이보다 더한 영광이 없다고 생각
했다. 그는 미리 마음을 단단히 다지고 있었다. 교주께서 아무리
어려운 일을 분부해도 목숨을 걸고 이행하겠다고!

 장무기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오장기사는 들으시오. 이 순간부터 본교 예금기 형제들을 이끌
고 군기(軍紀)를 맡아 주시오. 어느 영웅호걸을 막론하고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예금기의  칼과 도끼로 징벌해
주시오. 설령 본교의 원로와 무림에 명망 높은 선배님이시더라도
예외일 순 없소."

 오경초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는 곧 품 속에서 작은 깃발을 꺼내 두 손으로 높이 받쳐 들었
다.

 오경초는 강호에서 크게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모두
들 처음에는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광장에
서 오행기가 유감없이 위력을 펼쳐 보인 후로부터 군호들의 생각
은 달라졌다.

 그들은 오경초의 깃발에 따라 오백 자루의 화살과 장창, 그리고
오백 자루의  단부(短斧=짧은 도끼)가 동시에  날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하늘을  날으는 재주가 있는 자라 할지라
도 삽시간에  묵사발로 변할 것이니 오경초가  깃발을 펼친 것을
보자 모두 등골이 서늘했다.

 장무기가 오경초에게  군기를 맡긴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
다. 그는 무목유서에서 공감이 가는 한 귀절을 읽었기 때문이다.

 치군지도(治軍之道) 엄령위선(嚴令爲先), 군을 다스리는데 있어
지엄한 명령 계통을 확립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장무기는 소림에 모인 군호들이  여지껏 구속을 받지 않는 자유
분방한 생활을 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자존심을 내세워 타인과  공동협력하는 것을 쑥스러워 했으며 심
지어 굴욕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니 개개인이 비록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의 무
리로 형성되었을  때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만약 강력한 명령
계통을 확립하지 않으면 그들을 움직이기가 어려울 것이고, 따라
서 훈련이 잘된 몽고병과 겨룰 수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장무기는 무엇보다도  예금기 장기사로 하여금 군기를
맡으라는 명령을 첫 번째로 하달한 것이다.

 장무기는 군호들을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명령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협조를 구하는 바입니다."

 그는 대전 앞에 높이 쌓아올린 돌병풍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 중에서  저 돌병풍을 단순에 뛰어넘을  수 있는 자가
있으시면 지금 직접 솜씨를 보여 주었으면 합니다."

 군호들 중에 이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나타
냈다.

 '빌어먹을, 이런 긴박한 마당에 우리들더러 아무 상관없는 높이
뛰기를 하라하니, 장난도 아닐 테고.....'

 이때 장송계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뛰어넘을 수 있네."

 그는 곧 대전밖으로 나가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당
파 제운종의  신법을 전개해 돌병풍을  뛰어넘었다. 돌병풍은 이
장 남짓쯤 되었다. 장송계의  실력으로선 그 정도의 높이를 뛰어
넘는 게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직접 뛰
어넘지 않아도  그의 경공을 의심할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
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장송계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장무기의 요
구대로 돌병풍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어 유연주, 은이정, 양소,
위일소, 은야왕 등 일류  고수들도 일일이 장무기의 요구를 행동
으로 옮겼다.

 이렇게 되자 자존심 따위를 내세워 언짢은 기분을 갖고 있던 사
람들도 따라서 돌병풍을 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는 경공술
을 과시하기 위해 허공에서 절묘한 변화를 구사하는 사람들도 있
었다.

 사백여 명이 돌병풍을 뛰어넘은 후 더 이상 나설 자가 없었다.

 군호들은 제각기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권법과 장법에 뛰어
났거나 무기를  잘 사용하는 인물 중에서도  경공이 평범한 자가
있었다. 그들은 이 장 남짓한 돌병풍을 단숨에 뛰어 넘기엔 벅찼
다. 그들은  스스로의 단점을 알고  있으므로 무리하게 돌병풍을
뛰어넘으려 하지 않았다.

 장무기가 대충 파악해 보니  돌병풍을 뛰어넘은 사백여 명 중에
는 소림 승려가 태반을 차지했다.

 '소림은 무림  제일 문파로 알려졌는데  과연 소문대로군. 단지
경공술 한 가지만 보아도  다른 문파보다 고수가 많다는 것을 짐
작할 수 있겠군.'

 장무기는 즉시 명령을 하달했다.

 "유이백님과 장사백님,  그리고 은육숙님께선  경공술이 뛰어난
여러 영웅들을 이끌고 우리 전체가 달아나는 것처럼 보이게끔 허
장성세(虛張聲勢)를 해 주십시오.  그것은 적을 뒷산으로 유인하
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일단 그들을 뒷산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하
면....."

 이어 장무기는 자세한 전략을 얘기해 주었다.

 유연주 등은 입을 모아  알겠노라고 대답하며 그의 명을 받들었
다.

 장무기의 지시에  따라 유연주 등은 매복과  퇴로 차단, 정면공
격, 측면기습을 할 자들을 안배했다.

 양소 등은 장무기의  절묘한 계책에 탄복했다. 동시에 빈틈없는
명령 하달에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그들은 장무기가
무목유서에 수록된 병법을 응용한 것임을 모르고 있었다.

 장무기는 안배를 확인하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공문방장과 공지신승 두  분께서는, 아미파의 여러분들을 이끌
고 사상자를 돌보는 일을 맡아 주십시오."

 주지약이 떠나갔기 때문에 아미파의 제자들은 통솔할 자가 없었
다. 장무기는 그들이 자기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직접  지휘를 하지 않고 공문, 공지의 휘하
에 귀속시킨 것이다.

 과연 장무기의 명령이 하달되자 아미파의 제자들은 묵묵히 명을
맏아들이며 이의를 표하는 자가 없었다.

 장무기가 다시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음성에 웅후한 진
력이 담겨져 있어 마치 거종(巨鍾)을 치듯 찌렁찌렁 울려퍼졌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벼르어  오던 때가 온 것인지도 모릅니
다. 이번 기회에 중원의 협사들이 몸과 마음을 하나로 뭉쳐 오랑
캐를 무찌릅시다."

 군호들은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그들은 장무기의 치밀한 안배
와 진지한 격려에 사기가 충천하였다.

 곧 이어 열화기의 교도들이 짚단과 장작 따위를 소림사 앞 넓은
공터에 쌓아 올려 불을 질렀다. 삽시간에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
아 올랐다.

 후토기는 미리 흙으로 불길을  차단하는 흙벽을 만들어 놓아 불
길이 각처 불전에 만연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러
자 수백 칸이 되는 불전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라 마치 소림
사 전체에 불길이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한편, 산 아래서 새로운 공격을 서두르고 있던 원병들은 소림사
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자 입을 모아 소리쳤다.

 "놈들이 절을 태우고 달아나려 한다!"

 "어서 놈들의 퇴로를 차단해라!"

 이와 때를 맞추어 유연주가 백 오십여 명의 경공이 탁월한 군호
들을 이끌고  소실산 좌측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들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원병이 이미 요란한 북소리와 더불어 겹겹이 대열을
형성해 추격해 왔다.

 군호들은 즉시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날아오는 원병의 화
살을 분산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어  장송계가 이끄는 두 번째 군
호들이 산중턱으로 달려 내려오는가 싶더니 사면팔방으로 흩어졌
다. 은이정은 군호들을 이끌고 세 번째로 그 역할에 충실했다.

 군호들은 모두 등에 큼지막한 봇짐을 둘러메고 있었다. 물론 그
속에는 헌 옷가지와 이불,  나무 토막 등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봇짐을 챙겨 달아나는 것처럼 원병의 눈을 속이는 방편인 동시에
화살막이 역할도 톡톡히 해주었다.

 주위에 짙은 연기가 깔려  있어 원병들은 달아나는 군호들의 숫
자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만(二萬) 병력중에 만
명은 추격을 하고 나머지 만 명은 본 진영에 남아 변화에 대비했
다.

 이것을 확인한 장무기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양좌사, 역시 오랑캐 장군은 병법에 능통한가 봅니다. 온 병력
을 동원해  추격하지 않고 절반 가량이  산 아래 좌진(坐鎭)하고
있으니 일이 복잡하게 되는군요....."

 양소도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글쎄..... 우리의 술책을 눈치챈 게 아닐지....."

 그도 전략이 엉뚱한 결과를  빚어 장무기가 원망의 대상이 될까
봐 염려가 되는 모양이었다.

 이때 산 아래서 호각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두 패의 원병 천
인대(天人隊)가 좌우로 갈라지며  새로운 공격을 전개했다. 그들
은 산 위를 향해 좌우협공을 펼친 것이다. 산길은 험하고 가파르
지만 원병들이  몰고 있는 몽고마(蒙古馬)는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를 쳤다. 게다가 장창철갑(長槍鐵甲)으로 무장한 군사들이라
서 그 기세가 호호탕탕했다.

 이 이천(二千)명의 철갑기(鐵甲騎)가  산 중턱까지 진격해 오자
장무기의 손짓에 따라  열화기의 교도들이 부채꼴로 흩어져 잡초
속에 잠복했다.

 이천 명의 철갑기가 다시 앞으로  백여 장 가량 전진해 오자 신
연(辛然)의 휘파람을 신호로 하여 분통(噴筒)에서 기름이 분출되
고 잇따라 불화살이 날아가자 원병들은 이내 불길에 휩싸였다.

 "으앗!"

 몸에 불길이 붙은 원병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
져 뒹굴고 말들도 놀라 길게 울부짖자 삽시간에 아수라장을 연출
했다.

 원군은 군기가  엄해 비록 선발대가  실패했지만 후속대는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그들은 호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삼 개 천인대가  말을 타지 않고 보무도 당당하게 진격
해 왔다.

 열화기가 화염을 뿜어내자 다시 수백 명이 죽음을 당했다. 그러
나 나머지  군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목숨을 걸고 몰려왔
다.

 그러자 홍수기의 장기사  당양(唐洋)이 흑기(黑旗)를 힘차게 떨
쳤다. 순간 독수가  분출되었다. 잇따라 후토기가 독사를 뿌리자
원병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비록 수백 명이 죽음의  고비를 넘고 넘어 산봉우리까지 진격해
왔으나 예금, 거목 양기에 의해 섬멸되었다.

 싸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산 아래서 요란한 북소리가 들
리더니 오 개의 천인대가 거대한 방패를 앞세워 횡대(橫隊)로 편
성해 천천히 진격해 왔다. 산 위에서 바라보면 흡사 거대한 철성
(鐵城)이 이동해 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되자 열화, 독수,  독사의 공격으로선 별로 신통한 효과
를 거두지 못했다. 장무기는  거목기로 하여금 거목을 굴려 공격
을 시도케 했지만, 몇 차례  구멍이 뚫릴 뿐 역시 원병들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공문대사는 그것을 보자 당황해졌다.

 "장교주, 군호들을 이끌고  속히 떠나도록 하시오. 중원 무림의
훗날을 위해서라도 원기(元氣)를 보존해야 하오. 오늘 비록 패할
지언정 머지 않은 장래에 권토중래를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당황해 하는 것이  어디 공문대사뿐이겠는가. 다른 사람들도 마
찬가지였다. 그들이 당황해 하고 있는 사이에 홀연 산 아래서 새
로운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한 자루의  불화살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이어 산채가 울릴 듯한 함성이 들려왔다.

 양소는 크게 기뻐했다.

 "교주, 우리의 구원 병력이 당도한 모양이오!"

 산 위에서는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지만 흙먼지가 하늘을 가릴
듯 크게 일고 말굽소리가 뇌성처럼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구원군
의 숫자가 상당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장무기가 즉시 소리 높여 외쳤다.

 "구원군이 당도했다. 총공격을 합시다!"

 산 위에 있는 군호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제각기 무기를 떨
쳐 아래로 쳐들어갔다.

 장무기가 다시 소리쳤다.

 "여러분들, 오랑캐의 우두머리부터 노리시오!"

 즉시 군호들의 함성이 뒤따랐다.

 "오랑캐의 우두머리부터 노려라!"

 몽고군은 열  명을 최소 단위로  하여 십인대(十人隊)라 일컬었
다. 이들을 지휘하는 자는 십장(十長)이었다. 그 위로 백인대(白
人隊), 천인대(千人隊), 만인대(萬人隊)로 편성되어 철저히 명령
에 따라 움직였다.  그것은 곧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질서이기도
했다. 장무기는 그 질서부터 파괴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만약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한 상태에서 싸움이 벌어졌다면 장
무기의 의도가 실천에 옮겨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겹겹의 장
애물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병이 산비탈길
에 흩어져 싸움을 펼치고 있어 한결 수월했다.

 원병이 비록  강하다고 하지만 무공에  있어서는 무림 호걸들에
미치지 못했다.  삽시간에 백부장(白夫長)과  천부장(千夫長) 몇
명이 목숨을 잃었다. 명령에  따라 움직이던 원군들은 명령을 하
달하는 우두머리를 잃자 우왕좌왕하며 혼란을 빚기 시작했다.

 장무기 등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산 아래서 펄럭이는 깃발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남쪽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에는 서
(徐)자가 크게 수놓아져 있고, 북쪽 깃발은 상(常)자였다.

 서달과 상우춘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본디 회서(淮西)에 있
었는데 마침 예남(豫南)으로 돌아왔다가 포대화상 설불득의 전갈
을 받게 된  것이다. 그들은 교주가 소실산에  갇히게 된 사실을
알자 즉각 모든 병력을 끌어모아 밤을 세워가며 달려온 것이다.

 이 무렵 예남 일대는 명교 의군(義軍)과 원군(元軍)이 여러해에
걸쳐 싸움을 벌여왔기 때문에 땅덩어리를 서로 나누어 갖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서달,  상우춘의 행군이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틀도 채 안 되어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서달과 상우춘이 이끌고 있는  교도들은 대부분 많은 전투 경험
을 갖고 있는데다가  숫적으로도 우세해 달려오자마자 원병을 서
쪽으로 몰아붙여 패주케 했다. 실로 엄청난 기세였다. 흡사 밀물
이 밀려오듯 원병들의 숫자를 잠식해 갔다.

 한편,유연주 등이 이끄는  별동대를 추격해 간 만 명의 원군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유연주, 장송계, 은이정은 경공이 뛰어난 고수들을 이끌고 미리
계획한 대로 서쪽 산곡(山谷)을  향해 질주해 갔다. 물론 중간중
간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기도 했지만 의도한 대로 일이 진행되
었다.

 골짜기 안으로 원병을 유인한  군호들은 미리 절벽 위에서 드리
워 놓은 밧줄을 타고 질서있게 위로 올라갔다. 이제 골짜기 입구
만 봉쇄하면 원병은 독 안에 갇힌 쥐나 다름없었다.

 이때 원병의  만부장은 비로소 군호의  숫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군호들을 추격하는데만 전
념하다가 뒤늦게 주위의  지세를 살펴보니 온통 절벽으로 둘러싸
여 있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는 즉시 후퇴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우르르, 꽝!

 마치 천둥번개인양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골짜기 입구 쪽에서
거목과 바윗돌이 굴러떨어져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잇따라
절벽 위에서 열화와 독모래, 독수, 그리고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
아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패주하던 원군 제 이진이 골짜기 앞까지 밀
려왔다. 그들은 골짜기가 봉쇄된  것을 보자 사방으로 흩어져 달
아났다.

 장무기와 서달이  뒤쫓아와 이 광경을  보고는 모두 안타까와했
다. 만약 사전에 연락이 닿았다면 원군 제 이진마저 골짜기 안으
로 몰아넣어 한꺼번에 섬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장무기는 원병이 반으로  나뉘어져 군호들을 추격하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구원  병력이 이렇게 빨리 당도 하리라고
는 실로 뜻밖이었다.

 역시 병법은 쉬운 게 아니었다. 항상 다각도의 가능성까지 참고
로 하여 작전을 세워야만  했다. 무목유서에 수록돼 있는 전법은
아주 훌륭한 것이지만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야지만 그 위력
을 완벽하게 발휘할 수 있었다.

 만약 서달과 상우춘이 적시에 당도하지 않았다면 소림이 겁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며, 골짜기 안에  갇힌 원병 제 일진도 제 이진
에 의해 구출되었을 것이다.

 서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는 원병을  계속 추격하는 한편
수하들을 시켜 바윗돌을 옮겨오게 하여 골짜기 입구를 더욱 단단
하게 봉쇄시켰다.  이어 궁수(弓手)들을 시켜  절벽 위로 올라가
골짜기 안을 향해 화살을 집중 발사하도록 명하였다.

 원군들은 절지에 갇혀 반격할  재간이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
는 것은 화살과  독물이 미치지 않는 곳을  찾아 몸을 숨기는 게
고작이었다.

 얼마 후 상우춘도  수하들을 이끌고 당도했다. 오랜만에 재회를
하는 장무기와 상우춘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상우춘은 상황을 대충 듣고 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바윗돌을 치우고  골짜기 안으로  쳐들어가 오랑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는 게 좋겠소!"

 서달은 웃으며 말했다.

 "골짜기 안은 물도 없고  먹을 양식도 없으니 놈들은 오래 버티
지 못하고 굶어  죽게 될 것이니, 구태여  우리가 수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상우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찬동했지만 그래도 아쉬
움이 남는 모양이었다.

 "직접 쳐들어가 죽이는 게 속시원할 텐데....."

 그는 비록 서달보다 나이가  많지만 평상시 서달의 뛰어난 지략
에 탄복해 왔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장무기는 명령권을 서달과  상우춘에게 맡기고 뒷전으로 물러났
다. 서달과 상우춘은 오랜 전투 경험을 살려 적시에 적절한 명령
을 내렸다. 그들의 명령에  따라 명교의 교도들은 달아나는 원병
을 추격했다.

 이날 밤 소실산  아래에서는 환호성이 진동했다. 명교의 의군과
각 문파의 호걸들은 통쾌한 승리를 자축했다.

 군호들은 소림사에서 계속 채식만 해왔기 때문에 자축을 핑계로
하여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며 오랜만에 오장제(五臟祭)를 치루
었다.

 술좌석에서 장무기는 상우춘의 건강을 물었다.

 "내가 일러준 약방문대로 약을 계속 복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우춘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교주, 염려할 필요  없소이다. 보다시피 이 상우춘은 황소처럼
건강하지 않소이까? 한 끼에 고기  세 근과 밥 여섯 그릇 정도는
간단하게 해치울 수가 있소. 그리고 일단 싸움이 붙으면 사흘 밤
낮을 자지 않아도 끄떡없소이다."

 그의 말은 약을 복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무기는
호청우가 왕년에 한 말이 늘 마음의 부담이 되어 그에게 꼭 약을
복용하도록 권유했다. 그러자  상우춘은 겉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뿐 속으로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서달은 잔에 술을 가득 따루어 장무기에게 권했다.

 "교주님의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 잔 올리겠습니다."

 장무기는 단숨에 술잔을 비워 버렸다.

 서달이 다시 말했다.

 "속하는 평상시에 교주님의  전륜한 무공과 빼어난 인품을 존경
해 왔는데, 병법에 있어서도 깊은 견해를 갖고 있을 줄이야.....
실로 본교의 홍복(洪福)이라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 온
한민족의 홍복입니다."

 "그것은 너무 과찬의 말씀이오.  오늘의 대승은 두 분의 공로이
며 또한 송대(宋代) 충신인  악비가 남긴 무목유서 때문이오. 본
인은 아무런 공도 내세울 것이 없소이다."

 서달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목유서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장무기는 품 속에서 그  얇은 비단을 꺼냈다. 바로 도룡도에 숨
겨져 있던 무목유서였다.  그는 서달에게 건네주며 <병곤우두산>
귀절을 가리켰다.

 "한 번 읽어보면 내 말뜻을 이해하게 될 것이오."

 서달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읽어 내려갈수록 표정
이 진지해졌다. 결국  그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목유서에 수록된 용병술은  실로 우리 같은 범인(凡人)이 상
상도 할 수 없을  만치 심오한 것이군요. 만약 악비 무목공(武穆
公)께서 오늘날까지 살아계셨다면  몽고 오랑캐들은 벌써 중원에
서 쫓겨났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목유서를 공손하게 돌려 주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
다.

 "무림지존 도룡보도, 호령천하 막감불종이란 열 여섯 글자에 담
긴 참뜻을  난 오늘에서야 깨달았소.  소위 <무림지존>은 도룡도
그 자체의 위력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 소장된 무목유서를
가리키는 것이었소. 이 병법으로 적을 상대하면 백전백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니 결국은  호령천하하게 될 것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고 단순히 도룡도의 예리함만으로 어떻게 천하를 호령할 수 있
겠소? 서대형(徐大兄), 이 병법기서(兵法奇書)를 드릴 테니 부디
무목공의 유지에  다라 오랑캐를  몰아내고 한민족의 금수강산을
다시 되찾아 주시오."

 서달은 다른 생각을 할  엄두도 없이 놀라움이 앞섰다. 그는 황
급히 사양을 했다.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어디서나 발에 채일 돌맹이 만큼이나
하찮은 속하가 어찌 감히  교주님의 이러한 후사를 받을 수 있겠
습니까?"

 장무기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서대형,사양하지 마시오. 나는 한민족의 장래를 생각해 이 병
서를 드리는 것이오."

 서달은 두 손으로 병서를 들고 있었는데 그 손이 떨렸다.

 장무기는 여전히 정색을 하고 말을 계속했다.

 "항간에 나도는 말 중에서 <의천불출, 수여쟁봉>이란 두 귀절이
더 있는데 그 또한 깊은  진의가 담겨져 있소. 지금 의천검은 비
록 절단되었지만 언젠가는 이어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오. 의천
검에도 절세의 무공비급이 담겨져 있기 대문에 그 의천신공(倚天
神功)과 의천검의 위력이 합쳐지면 가히 천하무적이라 해도 과언
이 아닐 것이오. 도룡도에 숨겨진 병서로서 천하를 호령할 수 있
되 만약 대권을 잡은  후 국태민안을 돌보지 않고 권력을 남용하
여 폭정(暴政)을 한다면 필시  의천검을 쥔 영웅이 나타나 그 자
의 수급을 취할 것이오.  백만 웅병(雄兵)을 거느리고 천하를 다
스린다 해도  의천검의 일격을 피하진 못할  것이오. 서대형, 내
말의 참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리라 믿소."

 서달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감히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속하, 교주님의 금언을 가슴깊이 새겨 무목유서에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무목유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공손하게 큰  절을 네 번
올렸다. 무목유서를 남긴 악비  무목공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이
다. 이어 장무기에게도 재삼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렸다.

 훗날 서달은 과연 빼어난 용병술로 원군을 상대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어 결국 몽고인을 새외(塞外)로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냄으로써, 대막(大漠)에 위명을  떨치고 일대 공업(功業)을 세
웠다.

 그리고 소림대첩이 있은 후로부터 중원의 영웅들이 모두 자발적
으로 명교에 귀속하여 장무기의 호령에 따라 움직였다.

 명교는 수백 년 동안  사교(邪敎)로 멸시와 질타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장무기의 출현으로 인해 중원 군웅들을 호령하는 용(龍)
머리의 위치로 부각되었다.  동시에 그것이 한족(漢族)을 중흥하
고 대하강산(大河江山)을 되찾는 기틀이 된 것이다.

 최종에 이르러 주원장(朱元璋)이 야심을 품고 간교한 음모를 전
개해 장무기를 밀어내고  용좌(龍座)에 앉을 때까지 명교의 역할
이 지대했다.

 주원장은 비록 자신을 보다  돋보이게 하기 위해 타인의 공로를
말살하려 했지만 명교의 공로만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여 다
른 것은 고사하고 국호를  명(明)으로 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다.

 명조(明朝).

 명태조(明太祖)  홍무(洪武) 원년(元年)에서  시작하여 숭정(崇
禎) 황제가 누루하치의 막강한 세력에 밀려 목매달아 죽을 때 까
지 모두 이백 이십 칠년간 중국 대륙을 다스려 왔다.

 명교가 없었다면 명조도 없었을 것이다.

 군호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실컷 마시고 그  동안 쌓인 긴장을
모조리 풀어 버렸다. 이날 오후가 되자 군호들은 공문, 공지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만약 원군이 보복을 하기 위해 다시 소림
을 대거 침공해 올  시에는 군호들이 미리 그들의 동태를 파악해
일제히 소림사로 달려와 돕기로 약속했다.

 서달과 상우춘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소규모의 공격쯤은 소
림 자체에서도 충분히 퇴치할 수 있을 것이다.

 유구한 역사를 유지해 온 소림은 무학의 본산지로서 차츰 그 위
치가 흔들리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하여 무공
연마에 더욱 박차를 가해 무학 중흥의 디딤돌로 삼았다.

 군호들이 선후로 하여 소실산을 떠났지만 아미파의 제자들은 장
문인 주지약의 행방이 묘연하므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마치 미아(迷兒)처럼 우왕좌왕했다.

 장무기는 그들이 측은하게  여겨졌다. 또한 송청서가 들것에 누
워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자 앞으로 다가가 정혜사태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송사형의 상세를 살펴봐도 되겠소?"

 정혜사태는 냉랭하게 쏘아부쳤다.

 "마음에도 없는 자비는 바라지도 않아요!"

 가까이 있던 주전이 보다못해 욕설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우리 교주님께서는  너희들 장문인과의 옛정을 생각
해 이 송가의  상세를 보살펴 주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문을 배반한 파렴치한 녀석을 누가 거들떠 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들은 고맙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주둥아리를 한 발 정도나 내
밀어 심통을 부리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정혜사태는 그의  지독한 욕설에 발끈하여  당장 꾸지람을 주고
싶었으나, 주전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자 또 무슨 충격적인 얘기
를 내뱉을지 은근히 겁이  났다. 입씨름을 벌여 보았자 손해보는
것은 자기일 것이라  판단한 정혜사태는 분노를 억제하며 냉소를
날렸다.

 "흥! 우리 아미파의 역대 장문인은 모두 청결한 몸을 끝까지 간
직했어요. 주 장문인이 만약  청결을 잃었다면 어떻게 여지껏 장
문인의 위치에 있을 수  있겠어요. 흥! 송청서가 본파에 남아 있
으면 주 장문인의 명예를  더럽히게 될 것이니 당장 무당파로 돌
려보내라!"

 송청서의 들것을 들고 있던 아미파의 두 제자는 즉시 대답을 하
고 들것을 유연주 앞으로 들고 가 내려놓았다.

 주위에 남아 있는 군호들은 정혜의 말에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가장 놀란 것은 역시 유연주였다.

 "뭐.....뭣이? 그럼  송청서가 아미파  장문인의 부군이 아니란
말이오?"

 정혜사태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흥! 우리 장문인이 이런 파렴치한 자를 반려자로 삼을 리가 있
겠어요! 장문인께선 단지 장무기가 변심하여 혼례를 파기하자 홧
김에 이  송청서 녀석을 남편으로  삼겠다고 무림에 공포했지만,
흥!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우리 장문인께서는 애당초...."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소 흥분한 탓인지 말을 제대로 잇
지 못했다.

 한쪽에 서서 정혜사태의 말을  듣고 있던 장무기는 넋빠진 사람
처럼 잠시 멍해져 있다가 마른침을 삼키며 정혜사태에게 물었다.

 "그럼..... 송부인.....  아니 귀파  장문인이 송사형과 부부가
아니란 말이오?"

 그는 확실한 것을 알고 싶었다. 주지약과 송청서, 그는 어느 한
쪽도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소!"

 이때 들것에 누워 있는 송청서가 몸을 한 차례 뒤척거리더니 나
직한 신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 장무기 녀석은..... 죽었소?"

 정혜사태는 냉소를 날렸다.

 "잠꼬대를 하는구나! 그렇게도 장무기를 죽이고 싶으면 죽어 귀
신이 된 후에나 방법을 물색해 봐라!"

 정혜는 주전에게  당한 것을 공연히  송청서에게 화풀이하는 것
같았다.

 은이정은 정혜가 흥분하여 말을 두서없이 내뱉자 아미파의 다른
제자인 패금의에게 나직이 물었다.

 "패사매,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소?"

 패금의는 왕년에 기효부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그녀는 은이
정이 물어오자 잠시  망설이다가 우선 정혜사태의 양해부터 구했
다.

 "정혜사저, 은육협은 본문과 인연이 깊은 분이니 자세한 얘기를
해드려도 괜찮겠죠?"

 정혜는 코를 벌름거리며 상기된 음성으로 말했다.

 "인연은 무슨 인연이냐? 인연이  없어도 얘기해 줘야 하고 인연
이 있어도 얘기해 줘야 한다. 우리 장문인은 청청백백한 몸이야!
저 송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너희들도 장문인 팔에 순결을
상징하는 수궁사(守宮砂)가  찍혀 있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그
사실을 모든 무림인에게 알려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미의
백 년 전통이 손상될 거야....."

 은이정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 정혜사태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들었는데 횡설수설하
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는 다시 패금의에게 말했다.

 "패사매, 정혜사태께서도 윤허를 했으니 어서 소상히 얘기해 주
시오. 나의 송사질이 어떻게  해서 귀파에 투신하게 되었으며 귀
장문인과 어떤 관계가 얽혀 있는지 자세한 것을 알아야 문중으로
돌아가 스승님께 말씀드릴 게  아니겠소? 이번 일은 귀파와 무당
의 공동사이니 만치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양파의 우호가 손상되
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오."

 패금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송소협의 인품과 무공은 뛰어나 강호에서 찾아보기 드문 인
재임을 잘 알고 있는 바예요.  그는 단지 한 순간 그릇된 생각으
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진 거예요. 우리 장문인께선
그가 장무기를 죽여 파혼의 치욕을 설욕해 준다면 정식으로 그와
혼례를 올리겠다고 약속했나 봐요. 그래서 그는 본파에 투신하여
장문인으로부터 새로운 기공(奇功)을 전수받았어요. 일전 영웅대
회에서 장문인이  갑자기 자신을  <송부인>으로 칭하여 송소협의
아내로 자처하자 본파의 제자들은  모두 매우 의아해 했어요. 그
날 장문인께선 각 문파의 고수들을 굴복시키고....."

 주전이 즉시 끼어들었다.

 "그것은 우리  교주께서 일부러 양보한 것인데  허풍을 떨고 있
군!"

 패금의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본파의 제자들은 그날 밤에야  궁금증을 풀 수 있었어요. 장문
인께서 <송부인>이라 자처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이죠. 장문인께서 
직접 왼팔을 드러내고 팔에 찍혀 있는 수궁사를 확인시켜 주었어
요. 그 수궁사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이 붉었어요. 청결
한 저자(妻子)의 몸이라는 게 확인된 셈이죠. 장문인께선 일부러 
장교주의 마음을 흐트러 놓기 위해 송부인이라 자처한 것이라 했
어요. 장교주의 무공이 워낙  고강해 자신의 실력으로 당해낼 수 
없기 대문에 비상수단을 쓴  것이죠. 그녀는 본파의 명예를 위하
여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감수했어요."

 패금의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끔 낭랑한 음성
으로 말을 이어갔다.

 "본파의 제자는 남녀로  구성돼 있으며 혼례를 금한다는 문구는 
없어요. 하지만 창파조사이신 곽조사 이래 청결을 지키는 처자에
게만 가장 심오한 무공을 전수해 주는 전통이 이어져 왔어요. 그
래서 모든  제자가 입문할 때 스승님이  직접 팔뚝에다 수궁사를 
찍어 주는 게 관례로 되어 있어요. 매년 곽조사의 탄일이면 스승
님께서 수궁사를 검사하시곤 했어요. 왕년에 기사저께선 바로 그
것 때문에....."

 여기까지 말한 패금의는 아랫 말을 얼버무렸다.

 은이정은 그녀의 말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왕년에 기효
부는 양소에게 몸을 잃었기 때문에 처녀의 상징인 수궁사가 사라
져, 마침내 멸절사태에게 발각당한 것이다.

 은이정은 양불회와 부부의 연을 맺은 후 날이 갈수록 정이 두터
웠다. 그러나 아직도 기효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풀
리지 않는 응어리가 맺혀 있었다.

 은이정은 자신도 모르게 양소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양소는 눈
물이 그렁그렁하여 고개를 돌린  채 소매로 눈물을 찍어 내고 있
었다.

 패금의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다시 말했다.

 "은육협님, 우리 장문인께선 명교 장교주에게 심적인 타격을 주
기 위해 뜻하지 않은  물의를 빚은 것이니 우리로선 송소협의 몸
이 하루속히 완쾌되길 바랄 뿐이예요. 은육협께서 문중으로 돌아
가시면 장진인과 송소협에게  오해가 없도록 말씀을 잘 드려주세
요. 저 역시 이번 일로  인해 양파의 사이가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아요."

 은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나의  이 사질은 하극상의  엄청난 죄를 저질렀으니 
백 번 죽어  마땅하오. 본파에 이러한 제자가  있었다는 것은 더 
없는 수치요. 그가 일찌감치 죽었으면 오히려 속이 시원하겠소."

 은이정은 본디 마음이 여리어 극단적인 말을 좀처럼 입 밖에 내
지 않는데,  송청서가 막성곡을 살해한  죄행이 워낙 통한스러워 
저주의 말도 서슴치 않은 것이다.

 이때였다. 갑자기 멀리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주지
약의 비명임에 분명했다. 그  비명에는 극도의 공포가 담겨져 있
었다.

 창졸간에 들려온 비명소리로 인해 군호들은 절로 모골이 송연해
졌다. 대낮에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있는데도 그 비명소리에 등
골이 오싹해진 것은, 그만치 비명소리가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주지약은 모름지기 모종의 흉험무비한 변고를 당한 게 틀림없었
다. 중인은 비명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장
무기와 정혜사태,  패금의는 이미 신법을  전개해 비명이 들려온 
쪽으로 달려갔다.

 장무기는 주지약의 안위가  무척 염려되었다. 그는 신법을 최고 
경지로 전개해 숲을 뚫고 나가니, 한 줄기의 청색 그림자가 미친 
듯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바로 주지약이었다.

 장무기는 얼른 그녀에게 달려가며 물었다.

 "지약, 어떻게 된 일이오?"

 주지약의 얼굴은 짙은  공포가 깔려 있었다. 그녀는 자지러지는 
소리로 외쳤다.

 "귀신..... 귀신이 날 쫓아왔어요!"

 그녀는 극도의 공포로 인해  앞뒤 분간할 겨를도 없이 장무기의 
품안으로 뛰어들어 바들바들 떨었다.

 장무기는 혼비백산해 하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등을 토닥거
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무서워할 것 없소. 귀신이 있을 리 만무이니 마음을 가라 앉히
고 무엇을 봤는지 자세히 말해 보시오."

 주지약의 옷은  가시덩굴에 걸려 갈기갈기  찢겨져 있고 얼굴과 
손에서는 피가 흘렀다. 장무기는  그녀의 찢겨져 나간 소매 사이
로 수궁사가 찍혀  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워낙 살결이 
백옥 같은데다가  수궁사의 붉은 색깔이 선명해  금방 눈에 띄었
다. 장무기는 의술에 능통해 처녀의 팔에 수궁사를 찍은 후 순결
을 잃지 않는 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
다.

 수궁사(守宮砂). 바로 처녀성의 상징이었다.

 앞서 정혜사태와 패금의의 말을 들었을 때 장무기는 반신반의했
었다. 그러나 지금 직접  그 수궁사를 확인하자 오만가지 생각이 
일시에 뇌리를 어지럽혔다.

 '송사협의 아내가  됐다고 운운한 것은  사실 무근한 일이었군. 
그녀는 무엇 대문에 나를 속였을까? 정말 나의 심기를 흐트러 놓
아 천하제일 고수의 명예를  안을 욕심 때문이었단 말인가? 아니
면 내가  자기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시험할 생각에서 였을
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장무기는 자신을 채찍질했다.

 '장무기야, 장무기! 이  여자는 너의 누이동생을 살해한 불구대
천의 원수다. 그가 처녀든 남의 아내든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냐?'

 그러나 주지약이 겁에  질려 떨고 있자 차마  품 안에서 밀어낼 
수가 없었다.

 주지약은 그의 품안에  안기자 차츰 두려움이 사그라졌다. 현실
로 되돌아온 그녀는 장무기의 몸에서 남성의 채취가 풍겨오는 것
을 의식했다. 여인의  본능이었다. 장무기의 가슴은 바다처럼 넓
고 봄볕처럼 따스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입
술을 열었다.

 "장교주, 당신이군요."

 "그렇소. 나요. 그런데 무엇을 보았기에 이렇게도 겁에 질려 있
소?"

 장무기의 말에 그녀는 다시 경황해지며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 양소와 위일소,  그리고 정혜사태, 은이정 등도 달려왔다. 
그들은 주지약이 장무기의 품에  안겨 흐느껴 오는 것을 보자 서
로 눈짓을 하며 슬그머니 물러갔다.

 명교와 무당파의 군협들은 모두 장무기가 주지약과 옛정을 되살
려 부부로 결합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거기에는 조민에 대
한 적대감정이  계속 마음 한구석에 잠재해  있기 때문이기도 했
다.

 조민은 지금 그의 곁에서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있지만, 몽고의 
귀족이라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장무기가 만약 그녀
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면 오랑캐를  몰아내는 지상과제에 차질이 
생갈 것이라 생각했다.

 주지약은 잠시 흐느끼고 나서 갑자기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날 쫓아온 사람이 없었나요?"

 장무기는 멍해지며 대답했다.

 "없었소. 대관절 누가  쫓아온다는 거요? 혹시 현명이로가 다시 
나타난 게 아니오?"

 주지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정말 아무도 날 쫓아오지 않았죠?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요? 날 쫓아온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귀.....귀신이었으니....."

 장무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청천백일하에 귀신이 있을 리  있겠소? 필시 허깨비를 본게 분
명하오."

 그는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지약, 며칠 동안 너무  피곤했던 탓일 거요. 사람의 몸과 마음
이 허해지면 허깨비를 보게 된다고들 하오."

 주지약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예요. 잘못 볼 리가  없어요. 한두 번도 아니라 연달아 세 
번이나 봤어요."

 그녀는 두려움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지 음성이 떨렸다.

 장무기는 내심  어이가 없어 하면서도  그녀가 무엇을 보았기에 
이렇게도 겁을 집어 먹고 있는지 궁금하여 넌지시 물었다.

 "세 번씩이나 무엇을 봤다는 거요?'

 주지약은 몸을 가볍게 떨며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고개를 돌
려 뒤쪽을 한번 쳐다보았다.  고개를 돌리는데 상당한 용기가 필
요했던 모양이다. 뒤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장무기를 쳐다보았다. 장무기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녀는 콧등이 시큰해지며 온몸에 힘이 쑥 빠져 무너지듯 장무기
의 품안에 쓰러졌다.

 "나는 나쁜  계집이에요. 모든 게 내가  한 짓이에요. 의천검과 
도룡도를 훔치고 은..... 은낭자를 사..... 살해한 것도 나예요. 
사대협의 혈도를 찍은 것도  내가 한 짓이었어요. 그러나 송청서
에게 몸을 허락하진 않았어요.  내 마음 속엔 오직..... 오직 당
신뿐이었어요."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소. 아직도 난 지약이 무엇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소."

 주지약의 양볼을 타고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나의 스승님이 만안사에서 나
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거예요. 선사께서는 도룡도와 의천
검의 비밀을 일러주시고 나더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도와 보검
을 수중에 넣어 그 속에 담겨진 무학을 연성한 후 본문을 빛내도
록 맹세하라고 강요했어요. 나는  추상같은 엄명을 거역할 수 없
어 무릎을 꿇고 맹세를  하고 말았어요. 아울러 선사께서는 신검
보도를 쟁취하기 위해 당신에게 접근하되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
다고 하시면서 나더러 맹세를 하라고 했기에 부득이....."

 주지약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소리내어 흐느껴 울었다.

 장무기는 조용히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왕년에 멸절사
태가 기효부를 쳐죽인 장면이  새삼 뇌리에 뚜렷이 떠올랐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멸절사태는 대막에서  명교를 멸망시키겠다고 
거의 발악에 가까울 정도로 날뛰었고 직접 의천검으로 얼마나 많
은 명교의 교도들을 죽였던가!

 심지어 멸절사태는  만안사에서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자신의 
도움을 거절했었다.  그것만 보아도 그녀가  명교에 대한 원한의 
뿌리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주지약이 그녀의 유명에 다라 장문직을 계승했으니 당시 얼마나 
모진 맹세를 강요받았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주지
약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여러모로 악랄한 행위를 저질러온 것이
다. 스승님의 유명이니 만치  그녀로서는 그 유명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주지약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본디 
천성이 너그러워 남의 과실을 쉽게 용서하고 원한을 가슴에 새겨
두지 않았다. 더군다나 주지약은  자신에게 큰 은혜를 베푼 바가 
있지 않는가!

 장무기의 뇌리에 아득한 옛일이 떠올랐다. 처음 한수(漢水)에서 
주지약을 만났을 때 자기는 현명패천장의 음독에 의해 제대로 몸
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시 어린 주지약은 정성스레 자신
을 위해 궂은 시중을 들어주었다. 그 때 주지약의 초롱초롱한 눈
망울을 장무기는 잊을 수  없었다. 광명정에서 하태충 부부와 화
산파의 고수를 상대해 악전고투할 때도 만약 주지약이 옆에서 도
와주지 않았다면 자기는 벌써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한 은혜를 늘 가슴 속에 간직해 온 장무기로선 근래 주지약
이 연거푸 취해 온  악랄하고 교활한 행동이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심한 배신감마저 느꼈던 게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그녀를 죽이겠다고 마음을 모질게 다져먹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
었다.

 그러나 이제 그 미움의  감정은 봄볕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모
든 것이 주지약의 본의에서 행한 짓이 아니고, 또한 자기에 대한 
깊은 감정 때문에 빚어진 엉뚱한 행동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았
기 때문이다.

 지금 자기의 품안에 안겨 눈물을 흘리고 있는 주지약은 한낱 연
약한 여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 준 여인이고, 자신
이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이제  그녀에 대한 원한은 고사하고 장
무기는 오히려 연민의 정을 느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지약, 이제 그대의 진심을  알았소. 내 어찌 그대를 나무랄 수 
있겠소? 그런데 무엇을 봤기에  그렇게도 겁에 질렸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주지약은 이내 안색이 창백해지며 세차게 고개를 내둘렀다.

 "말할 수 없어요. 그 원귀(寃鬼)가 나에게 씌워진 것은 내가 저
지른 죄악 때문이니 당연히 받아들여야만  해요. 나의 잘못을 전
부 털어놓고 당신에게  용서를 비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산 아래로 달려내려갔다.

 장무기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원귀가 씌웠다는  걸까? 혹시 개방 사람들이 복수
를 하기 위해 귀신으로 위장해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이 아닐까?'

 장무기는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며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
다.

 주지약은 군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녀는 우선 아미파
의 제자들부터 만나보았다. 패금의가 어디서 겉옷을 구해와 그녀
의 몸에 걸쳐 주었다.  주지약이 무엇인가 나직하게 당부하자 아
미파의 제자들은 일제히 몸을 숙였다.

 이때 산 아래 모여 있는  군호들 중에서 다시 무리를 지어 떠나
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문과 공지는 정중하게 그들을 전송했다.

 양소와 범요 등은 모두  장무기 곁에 모여 있었다. 장무기도 이
곳에 더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도 이만 떠나도록 합시다."

 그가 떠나자고 제의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주지약이 공문선사
에게 다가가  무엇인가 나직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공문의 
안색이 크게 변하며 잠시 굳어져 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
다. 무엇인가 거절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한 무엇인가 믿지 못하
겠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주지약은 간곡하게 몇 마디 더 하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공문
선사에게 합장을 했다.

 공문선사는 이내 안색이 엄숙하게 변하며 염불을 외웠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주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교주, 이 일은 아무래도 교주가 나서서 말려야 할 것 같소."

 장무기가 멍해졌다.

 "무엇을 말리라는 건지.....?"

 주전은 주지약 쪽을 다시 힐끗 바라보고 나서 말했다.

 "주낭자가 속세를  떠나 불문에 귀의하려는  게 분명하오. 만약 
그녀가 여승이 된다면 교주는..... 교주는 큰일날 게 아니겠소?"

 옆에 있던 양소가 냉소를 날렸다.

 "주낭자가 설령 속세를 떠날 생각을 갖고 있다 해도 소림장문을 
스승으로 모실 리가 있겠나?  소림에 여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잘못 짚었네!"

 "맞아! 맞아. 내가 왜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했을까? 주낭자가 
소림에 입문할 리가 없지.....  그런데 왜 무릎을 꿇고 통사정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녀는 아미파의 장문인이니 소림 장문과는 대
등한 위치이므로 구태여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을 텐데...."

 이때 주지약이  몸을 일으켰다.  공문선사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들었는지 한결 밝아진 표정이었다.

 장무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낭자 개인적인  일인 것 같으니 우리가  신경쓸 필요는 없을 
것이오."

 그는 고개를 돌리며 조민을 찾았다.

 "민매, 이만 떠납시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보니 조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최근 며
칠 동안 조민은 늘  그림자처럼 그의 곁에 붙어다니며 특별한 경
우를 제외하고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한 조민이 갑자
기 보이지 않자 장무기는 흠칫 놀라며 물었다.

 "조낭자를 보지 못했소?"

 순간 그의 뇌리에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뿔싸, 내가 지약을 품안에 안고 있는 것을 목격한 모양이군. 
그래서 내가 지약에 대한  옛정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해 말
없이 떠나버린 게 분명하다.'

 그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조민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열화
기의 장기사 신연이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다.

 "교주님, 조낭자가 하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무기는 자신의 생각이 적중된  것을 알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민매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며 오직 나를 위해 숱한 고
생을 해 왔는데, 내 어찌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할 수 있단 말인
가?'

 그는 곧 양소에게 말했다.

 "양좌사, 나를 대신해 이곳의 일을 처리해 주시오. 아무래도 먼
저 떠나야 할 것 같소."

 이어 공문, 공지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하고는 유연주, 장송계, 
은이정 등에게도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맨 마지막으로 그는 주
지약에게 다가갔다.

 "지약, 부디 몸보전하시오. 나중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
오."

 주지약은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러자 고였던 눈물이 방울방울  굴러 떨어졌다. 장무기는 그녀 곁
에 남아 여린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조
민을 찾는 일이 더 시급했다.  그는 주지약을 뒤로 한 채 신법을 
전개했다.


                                 ----- 제 7 권 6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제 7 장  좌절(挫折)과 세 번째 약속(約束) 


 장무기는 경공술을 전개해 계속 산 아래로 질주해 갔다. 산길을
따라 줄곧 군호들의 행렬이 보였다. 소림사에서 얼마전에 출발한
각 문파의 사람들이었다.

 장무기는 그들과 맞닥뜨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
하여 길 옆 숲길을 택해 군호들을 추월했다. 장무기는 갈수록 초
조해졌다.

 약 삼십 리 가량  달렸을까, 찾고자 하는 조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느덧  주위에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행인의 모습도
이젠 찾아보기 드물었다. 장무기는 문득 생각을 굴렸다.

 '민매는 심계가 뛰어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날 피할 생각이라
면 필시 큰 대로보다는 으슥한 산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
고서야 여지껏 달려 왔는데도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다. 아니야.....  혹시 소실산 근방에 숨어  있다가 내가 떠난
후에 반대편으로 간 게 아닐까?'

 장무기는 마음이 조급하여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는
허기도 잊은 채 이번에는  가까운 산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따
금씩 높은 나무에 올라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지만 까마귀 떼
가 삼삼오오  귀소하는 것만 보일 뿐  사람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장무기는 다시 소실산  뒤쪽으로 돌아갔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
다. 그는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민매, 어떤 상황에서도 그대에 대한 나의 마음은 바윗돌만큼이
나 단단하오. 설령 하늘  끝을 뒤져서라도 기필코 그대를 찾아내
겠소.'

 스스로 마음의 다짐을 확고히  하자 울적했던 기분이 다소 가셨
다. 하루종일 뛰어다닌 탓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그는 머지 않은
곳에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나란히  솟아 있는 것을 보고 곧 신법
을 전개해 나무 위에 올랐다.  그는 가지가 교차된 곳을 골라 다
시 여러 개의 나뭇 가지를 꺾어 가로 세로 얽어 편안한 잠자리를
만들었다. 일단 눕자 눈꺼풀이 감기며 곧 깊은 잠에 빠졌다.

 어둠 속에서도 어김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달이 중천으로 옮겨
갔을 즈음 장무기는 잠결에 인기척을 느끼고 이내 잠에서 깨어났
다. 분명 수십  장 밖에서 걸음을 옮기는  미약한 소리가 들려왔
다.

 장무기는 신경을 곤두세워 시선을 한 곳에 모았다. 달빛을 빌어
한 사람이 날렵한 신법으로  남쪽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왜소한 그림자였다. 아니,  잘룩한 허리와 가냘픈 몸의 곡선으로
미루어 여자임에 분명했다.

 장무기는 뛸 듯이 반가와  하마터면 <민매>하고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는  즉시 뒤쫓아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어 주춤했다.

 상대방은 여자임에 틀림없지만 자세히 보니 조민보다 키가 크고
경공신법도 판이하게 달랐다. 분명 조민보다 날렵한 신법을 구사
하고 있었다.

 '혹시 주지약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야밤에 웬 낭자가....
.'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주지약 같지도 않았다. 주지약에 비해
서는 신법이 뒤떨어졌다.

 장무기는 은근히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렇게  야심한데 혼자서 숲속을 뚫고 가는
것일까?'

 본디, 남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하는 장무기였다. 더우기
상대는 여인이 아닌가? 사사로운  일에 관여한다는 것은 더욱 생
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어쩌면 저 여인을 통해  민매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
른다. 만약 민매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면 슬그머니 떠나 버리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민매를  찾을 수만 있다면 어떠한 단
서도 놓쳐서는 아니 된다.'

 달빛에 잠겨 있는 울창한 숲은 나무 위에서 넓은 시야로 살펴본
것과 달리 달빛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아 어둑어둑했다. 그래도
장무기는 행여나 상대방에게  발각돼 공연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까 봐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생면부지의 낭자를 한밤중
에 미행하는 것은 결코 떳떳한 일이 못 되었다.

 상대방은 일신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바로 소림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것을 확인하고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저 낭자가 설령 민매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해도 소림으로 향
하는 것으로 미루어 무림의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만약 소림
을 겨냥해 엉뚱한 짓을 하려는 것이라면 수수방관만 할수 없지.'

 장무기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일단 걸음을 멈추고 주위에 유심
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흑의  낭자 외에 혹시 다른 야행인이 없
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런 이상한  소리도 그의 예민한
청각에 잡히지 않았다. 흑의  낭자가 단신 홀몸으로 야행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밥 한 끼 먹는 시간이  경과되도록 흑의 낭자는 시종 고개를 돌
린 적이 없었다. 장무기는 상대방의 뒷모습이 눈에 익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 전에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얼
른 뚜렷한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혹시 무청영 낭자가 아닐까? 아니면 아미파의 제자 중에 한 사
람.....?'

 다시 몇 리 가량 가자 소림사가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흑의 낭
자는 산모퉁이를 돌아 소림사 옆쪽으로 접근해 갔다.

 장무기는 그의 일거일동을  놓치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았다. 흑
의 낭자는 신법을 늦추어  나무와 바윗돌 사이로 몸을 은폐한 채
소림사와 거리를 좁혀가는  것으로 미루어 누구에게 발각될까 봐
매우 조심하는 것 같았다.

 이때 소림사 안쪽에서 목탁소리에  이어 염불 외는 소리가 우렁
차게 들려왔다. 모름지기 수백  명의 승인이 일제히 염불을 외는
것 같았다. 주위가 조용한데다가  수백 명의 승인이 동시에 염불
을 외자 가히 천승만기(千乘萬騎)와 같은 장엄함을 연출했다.

 장무기는 크게 의아해 했다.

 '소림 승인들이 야밤중에 염불을 외우다니 대관절 어떻게 된 일
일까? 게다가 수백 명의 승려가 일제히..... 갑자기 무슨 대법사
(大法事)를 집례하게 된 걸까?'

 흑의 낭자는 날렵한 신법으로 몸을  은폐한 채 다시 십여 장 가
량 접근해 가자  대전 옆에 이르렀다. 순간  흑의 낭자가 별안간
대전 아래 돌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곧이어 네 명의 소림 승려
가 손에 계도와 선장을 들고 순시를 하기 위해 다가왔다.

 흑의 낭자는 네  명의 승려가 지나간 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
대전 밖 창문 아래로 사뿐히 몸을 솟구쳤다. 날렵한 신법이었다.
이 신법만 보아도 그녀의 무공이 강호 일류 고수대열에 낄 수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무기는 그녀가  무기를 휴대하지 않고  혼자서 소림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소란을 부리려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가 가장 궁
금한 것은 흑의 낭자의 정체였다.

 장무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몸을  숙인채 대전 서북쪽으로 빙 돌
아갔다. 그는 아주 묘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명교 교주의 신분
으로서 몰래 소림사로 잠입해 들어온 것이 발각된다면 설령 상대
방이 눈감아 준다 해도 체면이 크게 손상될 것이다. 그래서 유난
히 행동에 신중을 기했다.

 이때 대전 안에서  염불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장무기는 조심스
레 창문 틈을 통해 안을  살펴보았다. 대전 안에는 수백 명의 승
인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지어 방석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한
결같이 황색 승포에다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손에 법기(法
器)를 들고 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목탁을 두드리는 자, 합장을
한 채 염불을 외우는  자, 바로 망혼(亡魂)을 초도(超度)하는 법
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무기는 이내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번 영웅대회에 많은  사람들이 살상돼 그들의 영혼이 극락왕
생하도록 법사를 올리고 있는 중이군.'

 그의 생각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법사를
직접 주재하고 있는 공문대사 옆에 한 낭자가 서 있었다.

 순간 장무기는 표정이 굳어졌다. 그 낭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
기 때문이다. 주지약, 뜻밖에도 그녀였다.

 주지약은 눈살을 찌푸린  채 몹시 어두운 표정이었다. 장무기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맞아. 낮에 지약이 공문대사에게  무릎을 꿇은 것은 법사를 간
청한 것이군. 아마 자신의 검에 죽은 무고한 생명들을 위해 망혼
제를 올리는 모양이군.'

 장무기는 천천히 공탁(供卓)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공탁에 모셔놓은 영패에 뜻밖에도 <여협은리
지영위(女俠殷離之靈位)>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불행한 삶을 살아오다가 끝내 불행하게 생을 마친 은리(주아)를
생각할 때마다 장무기는 가슴이  아팠다. 지금 그녀의 영위를 보
자 장무기는 다시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목탁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주지약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나직
이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장무기는 신공을 끌어올려 청각을 곤두세우자 그녀의 음성이 어
렴풋이나마 들려왔다.

 "은낭자..... 저승에서나마  편히 눈을  감으세요..... 이제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그 동안 나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장무기는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다. 주지약은 죄책감으로 인
해 몹시 괴로와해 왔던 것 같았다.

 삶의 꽃을 피우기도 전에 꽃봉오리인 채 시들어간 은리, 스승의
유명으로 인해 고통 속에서 혼자 몸부림쳐 온 주지약. 모두가 불
행한 여인이었다.

 장무기의 뇌리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날 광명정에서
명교의 교도들이 읊조렸던 노래가 메아리가 되어 다시 뇌리에 되
살아난 것이다.

 ----- 삶의 환희가 무엇이며  죽음의 고통이 무엇인가? 모든 게
부질 없는 것 -----

 이때 주지약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가 우연히 시선이 동쪽 창
문에 닿자 대경실색하며 소리쳤다.

 "앗! 그.....그녀가..... 또 나타났어요!"

 그녀의 자지러지는 외침은 비명에 가까왔으므로 주위에 있는 소
림 승려들이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장엄하게 울려퍼지던
목탁소리가 일시에 멎었다.

 장무기는 재빨리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 보았다. 창호지가 찢
어진 그곳에 뜻밖에도  상처투성이의 얼굴이 삐끔히 드러나 있었
다. 장무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기절초풍하여 하마터면 비명
을 지를 뻔했다.

 그 얼굴은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부종기가 빠진 은리의 얼굴임에
틀림없었다. 이미 목숨이 끊어져  자기 손으로 묻은 은리가 이곳
에 갑자기 모습을  나타냈으니 장무기가 기절초풍하는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장무기는 당장 달려가 그녀를 잡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너
무나 큰 충격으로 인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돌처
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 상처투성이 얼굴은 이내 사라졌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주지
약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되로 쓰러졌다.

 장무기는 자신의 행각이 노출되어 소림 승려들로부터 무슨 오해
를 사게 되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리 높여 외쳤다.

 "주아! 주아!"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더니
즉시 대전을 끼고 돌아 은리가 나타났던 방향으로 신법을 전개했
다. 하지만 차가운 달빛에  나뭇 가지의 그림자만 길게 드리워진
채 주위는 조용하기만 할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비록 귀신을 믿지  않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자 절로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넋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주아임에 분명해. 처음부터 뒷모습이 눈에 익다 했더니.... 주
아였군. 그렇다면 소림에서 망혼제를 올린다는 것을 알고 그녀의
혼백이 나타난 거란 말인가? 정말 그녀는 죽어 원귀가 되어 이승
을 떠돌아다니고 있단 말인가?"

 소림 승려들이 이때  대전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장무기를
확인하자 모두 표정이 굳어졌다. 그 중에 나이가 많은 노승이 앞
으로 다가와 합장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장교주께서 왕림한 것을 미처 알지 못해 마중을 하지 못했으니
용서해 주시오."

 장무기는 더욱 송구스러워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 소란을 피워 죄스
러울 뿐입니다."

 그는 곧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주지약은 눈을 감은 채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땅에 쓰러져 있는  그녀는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는 상태였다.

 장무기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인중혈을 누르고 등을 쓸어주자
비로소 천천히 깨어났다.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장무기를 보더니 품 안으로 파고들며 소리
쳤다.

 "귀신! 귀신이에요!"

 장무기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글쎄.....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두려워할 것은 없소. 이곳에
고승들이 많으시니 필시 원혼을 위로해 줄 것이오."

 주지약은 늘 몸가짐이  단정했다. 지금은 너무나 심한 충격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장무기의 품안으로 뛰어들었지만 정신을 차
리고 주위의 이목을  의식하자 얼굴이 붉어지며 황급히 장무기에
게서 떨어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몸이 계속 떨리는 탓으로
장무기의 손을 꼭 쥔 채 놓지 않았다.

 장무기는 공문 등과 인사를 나눈  후 조금 전에 창밖에 누가 나
타났다는 말을 거론하자, 공문 등은 보지 못했으므로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창호지가 찢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주지약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틀림없이  그녀였어요. 이번에도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어
요."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보았소."

 주지약의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정말..... 당신도 보았단 말인가요?"

 장무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분명히 나의 사촌 누이동생 은리 은낭자였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지약은  나직이 비명을 지르며 다시 정
신을 잃고 말았다. 이번에는  장무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으
므로 쓰러지지는 않았다.

 주지약은 곧 깨어났다. 장무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그녀를 본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귀신을  본 게 아니라
실지 살아 있는 은리를 본 것이오."

 주지약은 입술이 새파랗게 변해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에요. 그녀는 귀.....귀신이 됐어요."

 장무기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줄곧 그녀의 뒤를 다라 이곳 소림사까지 오게 된 것이오.
그녀의 걸음이  정상적인 것으로 보아 절대  귀신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소."

 그는 주지약을 안심시키기 위해  단호히 은리가 귀신이 아닌 사
람이라고 했지만, 그  자신도 마음 속으로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이미 죽은  자가 다시 살아서 나타난다는  게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주지약이 확인을 하듯 그에게 물었다.

 "정말 그녀의 걸음은 보통  사람과 같았나요? 정말 허공을 떠돌
아다니는 귀신이 아니란 말인가요?"

 장무기는 자신이 겪은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처음 흑
의 낭자를 발견한 순간부터 그녀가 소림사로 잠입해 창문 틈으로
대전 안을 엿볼 때까지  그 일거일동이 날렵하여 절세 무공을 지
닌 고수라는 사실 이외에 특이할 만한 것이 없었다.

 장무기는 주지약의 물음에 답하기 앞서 공문대사에게 물었다.

 "장문인, 한 가지 알고 싶은 일이 있으니 가르침을 주셨으면 감
사하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  죽으면 정말 그 영혼이 귀
신으로 변합니까?"

 공문은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장교주께서도  아시다시피, 아불(我佛)은  윤회를 중요시하오.
흔히 전생의 업(業)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중생은 지은 바 업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인데, 즉 육도(六道)라고 하오. 천상(天上),
인간(人間), 아수라(阿修羅),  아귀(餓鬼), 축생(畜生), 지옥(地
獄)이 바로 그것이오....."

 장무기가 일단 불법에서 말하는 피안(彼岸)의 세계에 대하여 묻
자 공문선사는 장황하게 불리(佛理)를 늘어놓았다.

 "천상이란 곳은 지혜가 밝고 마음이 선한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
며, 아수라는 네 가지가 있는데, 아귀로 태어났던 중생이 불법을
극호한 선행을 쌓은  공덕으로 신통력을 얻어 허공을 자유자재로
다니는 귀신 아수라와 하늘에 있다가 복이 다함으로 아수라로 떨
어진 사람 아수라와 기운이 세고 두려움이 없어 싸움을 즐겨하는
아수라와 바다 속에 있다가 아침에 허공을 날아다니다 해가 지면
다시 바다로 들어가는 축생  아수라가 바로 그것이오. 아귀는 본
디 죽은 사람이란 뜻이오.  사람이 죽어서 다른 계(界)에 환생하
지 못하고 귀계(鬼界)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 것을 말함이오. 아
귀로 태어남은 탐욕을 부리고 질투를 일삼는다든가, 진실을 파괴
하거나 불법을 비방한 여러  가지 업으로 아귀보를 받게 되는 것
이오. 아귀의  업보가 끝나면 다시 여러  종류의 귀신이 되는데,
그 이전에 업이 다하고 망상을 쉬면 보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
오....."

 공문선사는 장무기가 명교의 교주라는 것을 감안하여 심오한 불
리를 조심스레 들려 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장무기의 질문
에 대한 결론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승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
음이오. 그 마음에 따라 귀신도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
소."

 장무기는 진지하게  공문의 불리를 받아들이며  다시 질문을 했
다.

 "그렇다면, 법사를  행함으로써 유혼(幽魂)을  천상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까?"

 공문은 조용히 합장을 했다.

 "좋은 질문이오.  유혼은 초도(超度)가  필요치 않소. 이승에서
심은 업이 저승에서 보를 받게 되므로 선유선보(善有善報), 악유
악보(惡有惡報)일 뿐이오. 본문에서 법사를 행하는 것은 생인(生
人) 즉 이승에 남이 있는 자의 심안(心眼)을 구함이니 초도를 받
는 것은 바로 생인이라 할 수 있소."

 장무기는 이내 깨달음을 얻고 공수의 예를 취했다.

 "깊은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야심한데 불청객으
로 귀사에 어지러움을 끼쳐 죄스럽습니다."

 공문선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장교주는 본사의 대은인으로서  여러 차례 겁난을 구해 주었는
데 언제 왕림하여도 결코 불청객이라 할 수 없을 것이오."

 장무기는 군승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주지약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린 이만 떠나도록 합시다."

 주지약은 망설였다. 불전을  벗어나면 다시 은리의 원귀에 시달
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앞섰다.

 장무기는 동요하지 않고 그녀에게도 공수의 예를 취했다.

 "그럼 내가 먼저 실례해야겠소."

 말을 끝낸 그는 대전 밖으로 걸어나갔다. 주지약은 그의 뒷모습
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다시는 나를 보지 않을 생각인가요? 나도.....함께 가겠어요!"

 그녀는 즉시 앞으로 달려나가 장무기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들의 등 뒤에서 공문선사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미타불..... 아불의 자비가 있기를....."

 소림사에서 멀리 벗어나자  주지약은 장무기에게 바싹 붙어서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아직도 겁에 질려  있음을 알고 손을
꼭 쥐어 주었다. 그녀의 손은 부드러웠다. 게다가 몸에서 유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장무기는 묘한 감정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묵묵히 걸어나가다가 주지약이  장탄식과 함께 먼저
입을 열었다.

 "공문대사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는 전생의 업보를 받고 있나봐
요. 우리가 처음 한수에서 만났을 때 장진인의 도움을 받아 목숨
을 부지했는데,  삶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때 알았다면
차라리 한수에 몸을 던져 죽음을 택하는 게 좋을 뻔했어요."

 장무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 속에서 명교 교
도들의 노래가 다시 되살아났다.

 "삶의 환희가 무엇이며 죽음의 고통은 무엇인지 모든 게 부질없
는 것, 애환은 마음에서 생겨나도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읊조렸다. 주지약은 힘주어 그의 손
을 쥐었다. 그녀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음을 장무기는 느낄 수
있었다.

 주지약이 다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장진인께선 나의 장래를  생각하셔서 아미로 보냈겠지만, 차라
리 무당산에 남겨 나를 무당의 제자로 거두어 주셨다면 오늘날의
상황과 크게 다를 거예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은사께서도 나를 잘 보살펴 주었어요. 그러나.....그러나
그 어르신네께선 나더러  명교를 멸망시키고 영원히 당신을 미워
하도록 맹세를 강요한 것은..... 도저히.....도저히....."

 그녀는 울먹이는 음성으로 변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장무기는 그녀의  진심을 잘 알고 있었다.  여지껏 그녀가 행해
온 일은 그 진심과는  상관없는 멸절사태의 유명일 뿐이었다. 그
로 인해 그녀는 괴로움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장무
기는 그녀에 대한 연민의 정이 더욱 깊어졌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계속 달빛을 받으며 걸었다. 바람결에
짙은 꽃내음이  실려오며 어디선가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니 더없이 좋은 밤이었다.

 이 좋은 밤에 장무기는  미모의 낭자와 산길을 걸으며 그녀로부
터 깊은 정이 담긴 하소연을 듣고 있으니 어찌 가슴 속에 뜨거운
감정이 여울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무인도에서 한독을
제거해 주기 위해  그녀의 몸에 손길이 닿은  바도 있지 않은가.
당시까지만 해도 장무기는  그녀에게 깊은 정을 노골적으로 표현
했으며 일생의 반려자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와 상황
이 달랐다. 장무기는 마음이 착잡했다.

 주지약은 걸으면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날 호주에서 나하고 혼례를
올렸을 때  무엇 때문에 조낭자가 부르자마자  그녀를 따라 훌쩍
떠나가 버렸죠? 그렇게도 그녀에 대한 감정이 깊은가요?"

 장무기는 그녀와 차분하게 얘기를 나눌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일을 자세히 얘기해 주려 했소. 우리 이곳에
앉아 잠시 쉬는 게 어떻겠소?"

 이렇게 말하며 길 한쪽에 보이는 펑퍼짐한 바윗돌을 가리켰다.

 주지약은 고개를 좌우로 내둘렀다.

 "아니에요. 나는 지금 마음이 어지러워 무슨 말이든 귀에 잘 들
어오지 않을 거예요. 잠시 걷다가 마음이 안정되면 그때 다시 듣
기로 하겠어요."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여전히 손을 잡은채 꽃향
기 그윽한 산길을 걸어나갔다. 얼마 정도 걷자 주지약은 그의 손
을 잡고 좁은 샛길로 접어들었다. 다시 사, 오리 가량 걷자 걸음
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됐어요. 이제 하고 싶은 말을 해 보세요."

 그녀는 향나무가 우거진  쪽에서 평평한 바윗돌을 골라 장무기
와 나란히 앉았다.

 잠시 후 장무기는 조민이  사손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그녀를 따라가게  된 것을 소상히 얘기해 주었다.
주지약은 그의 말에 귀를 귀울이며 침묵을 지킬 뿐 이었다.

 장무기는 그녀를 쳐다보며 넌지시 물었다.

 "지약, 아직도 날 원망하고 있소?"

 주지약은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거듭 말하지만 난 죄가 많은 계집이에요. 모든 게 내 운명이에
요. 난 자신을 원망할 뿐 당신을 원망하진 않아요."

 장무기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부드럽게 말했다.

 "세상사는 복잡미묘하여 뜻대로 되지  않는 게 태반인 것 같소.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우린  달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소. 그
리고 불행 뒤에는 다시  예기치 않은 행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
오. 지약,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주지약은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간절
한 소망이 담겨져 있는 것을 장무기는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주지약은 그 맑은 눈망울로 그의 마음에 동요를 불러일으키며 진
지하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내가 묻는 말에 숨김없이
진실을 말해 준다고 약속할 수 있겠죠?"

 장무기는 힘주어 대답했다.

 "좋소. 내 숨김없이 대답해 드리리다."

 주지약은 서편으로 기울어가는 달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
다.

 "이 세상에서 네 명의 여인이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난 잘 알고  있어요. 한 사람은 파사로  간 소조이고, 한 사람은
조낭자,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그.....그....."

 그녀는 마음 속으로 은리를  꼽고 있었으나 은낭자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을  입 밖에 내면 다시 그 원귀
가 나타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앞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말 끝을 멈칫하더니 이어갔다.

 "만약 우리 네 사람이 모두  무사히 이 땅에 남아 당신 곁에 있
다면, 당신은 그 중에 어느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겠어요?"

 장무기는 마음에 혼란이 왔다.

 "그건..... 그건....."

 그는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주지약과 조민, 은리, 소조와
함께 배를 타고 출해(出海)할  당시 그는 이 문제를 놓고 곰곰히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네 명의 낭자는 모두 나에게 깊은 정을 베풀고 있다. 난 어
떻게 해야 옳단 말인가? 내가  그들 중에 어느 누구와 혼례를 올
려도 나머지 세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마음 깊숙히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누구일까?'

 그는 시종  결론을 내리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생각에서
달아나려고 했다.

 '오랑캐를 중원에서  몰아내고 산하를  되찾는 대업을 이룩하기
전에 내 어찌  한 몸 편하기 위해 가정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지금으로선 남녀간의 사사로운 정따위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는 자신을 채찍질하기도 했다.

 '나는 명교의 교주이다. 나의 일거일동은 본교와 무림의 흥망과
모두 관련이 있다. 난 여지껏 하늘을 우러러 양심의 부끄러움 없
이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여색에 정신이 팔려 자신을 주
체하지 못한다면 천하영웅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고, 본교
의 명예도 크게 손상을 입힐 것이다.'

 그의 생각은 다른 각도로 이어지기도 했다.

 '어머님은 임종을 앞두시고 분명 나에게 신신당부를 한 바가 있
다.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속임수에 능통하니 평생을 두고 경계하
라고, 내 어찌 어머님의 유언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사실 그는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스스로의 질문을 회피했지
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기만에 불과했다. 그가 정말로 한 여
인을 점찍어 한눈을 팔지  않고 온 마음을 쏟아 사랑했다면 산하
를 되찾는 대업에 지장을  주지 않았을 뿐더러, 명교의 명예에도
손상을 입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자기에게 진심
을 보여 준  네 여인 중 어느 누구도  모질게 외면할 수가 없다.
이 여인도 버릴  수 없고, 저 여인도  마음을 써 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시키는데만 급급했다.

 그는 비록 무공이  고강하지만 사실 성격이 우유부단했다. 모든
일을 모나지 않게 무리없이 해결하려 했다. 다른 사람의 뜻을 존
중해 주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억제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건곤이위신공을 연마하게 된  것은 소조의 요구에 따른 것이며,
명교 교주가 된 것도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은천정, 은야왕 등의
의사에 다른 피동적인 것이었고, 주지약과 무인도에서 혼례를 언
약한 것도 사손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 혼례를
파기한 것도 또한 조민의 강요에 좌우된 것이다. 만약 왕년에 금
화파파와 은리가 무력을  앞세워 강요하지 않고 부드럽게 빙화도
로 함께 가지고 청했다면 십중팔구 그 청을 수락했을 것이다.

 그는 때로 엉뚱한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다.

 '만약 네 낭자와 더불어  화목하게 일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
마나 좋을까?'

 당시는 원나라 말엽으로써  농공병상(農工兵商) 혹은 선비나 강
호 호객, 어느 신분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삼처사첩(三
妻四妾)을 거느리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오히려 조강지처만으로
만족하는 자가 찾아보기 드물 정도였다. 단지 명교는 파사국에서
뿌리가 유래되었듯이 교도들은 근면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아 정실
이외에 첩을 거느린 경우가 드물었다.

 장무기는 명교의 교주이기 이전에  원래 천성이 착하여 어느 낭
자를 먼저 아내로 맞아들이면,  그것을 자신의 더없는 큰 복이라
여기며 다시 첩을 맞이할 생각은 아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엉뚱한 생각을 갖는  즉시 지워 버렸다. 아울러 그런 생
각을 갖게 된 자신을 책망했다.

 '사람은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나에게 그런 과욕이
잠재해 있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나중에 소조가 파사국으로 떠나 버리고 은리가 세상을 뜨자, 그
는 차츰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은리를 해친 원흉이 조민이라
단정했기 때문에 순리대로  주지약과 혼례를 올리기로 결정한 것
이다.

 한데, 하늘의 풍운은  예측할 수 없듯이 인간사도 변화무쌍하여
진상이 밝혀짐에 따라 마음의 결정이 다시 변하게 됐다.

 조민과 주지약, 장무기가  그녀들에게 느끼고 있던 선악의 관념
이 뒤바뀌어진 것이다. 그는  주지약과 혼례를 올리지 않은 것을
큰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혼례를 마쳤다면 그것은 돌이길 수
없는 잘못일 것이다.

 조민은 자기를 따르기 위해 혈육과도 등을 돌렸다. 그러한 조민
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조민이 훌쩍 떠나가  버린 지금 주지약으로부터 단도직입적인 질
문을 받게 되자 장무기는 선뜻 단호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주지약은 그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자 다시 입
을 열었다.

 "내가 묻는 것은 만약의  경우예요.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다르겠
죠. 소조가 파사국 명교의 처녀 교주가 되었고, 나 또한 은.....
은낭자를 살해했으니  네 명의 여인 중에  조낭자밖에 남지 않았
죠. 그러나 내가 묻는 것은  네 명의 여인이 모두 아무런 변화없
이 당신의 곁에  남아 있을 경우에요. 그  때는 누구를 택하겠어
요?"

 장무기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변했다.

 "지약, 사실 나도  이 일로 인해 오래  전부터 고심해 왔소. 그
동안 줄곧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이제 비로소 진정으로
사랑한 게 누구인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소."

 "그게 누구죠? 조낭자인가요?"

 장무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오늘 그녀가 홀연히 내  곁을 떠나 버리자 난 모든 것
을 잃은 듯한  충격을 받았소. 그녀가 없는  세상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소. 소조가  나에게서 떠나갔을 때 난  매우 가슴이 아팠
소. 누이가 세상을 떠날 때도 슬펐소. 그리고 지약의 일로도 난.
.... 깊은 충격을 받았소. 그러나 지약, 이제 내가 더 이상 무엇
을 숨기겠소. 만약 앞으로 다시 조낭자를 보지 못하게 된다면 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소. 이런 강렬한 감정은 여지껏 누
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오."

 그는 애당초 은리, 주지약, 소조, 조민, 네 사람에 대한 감정이
비슷했었다. 그러나 조민이 훌쩍  떠나 버린 이제서야 그녀가 자
기 마음 속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 것이
다. 그것은 다른 세 여자와 다른 감정이었다.

 주지약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대도에서 당신이  조낭자와 주막에서 만나는 것을 목격한
순간부터 당신이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요. 그래서 난 불안했어요. 나는 당신과 혼례를 올림으로써 그녀
로부터 당신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생각하니 그 때 혼례를 올렸다 해도 역시 당신의 마음을 독
차지하진 못했을 것이란 사실을 알았어요."

 장무기는 웬지 그녀에게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지약, 난 항상 그대를 존중해 왔소. 은리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느꼈고 소조에게는 연민의 정을 가졌었소. 그러나 조낭자에 대한
감정이 가슴깊이 사무치는 그리움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소."

 주지약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슴깊이 사무치는 그리움이라....."

 그녀는 장무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역시 당신에게 사무치는 그리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아
시나요?"

 그녀의 음성은 격정으로  인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장무기는
가슴 뭉클한 감정을 느껴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지약, 나도 그대의 마음을  알고 있소. 당신의 그 고마운 마음
을 무엇으로 보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난..... 그저 죄스러울
뿐이오."

 주지약은 울적한 심정을 떨쳐  버리려는 듯 길게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늘 나한테 잘 대해
주었어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어요. 만약 조낭자가
영영 떠나 버려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든가, 누구에 의해 살해
되든가, 아니면  변심하여 당신을 외면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
죠?"

 장무기는 그렇지 않아도 조민이  혹시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
떻게 하나 하고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주지약의 말을 듣자
크게 당황해졌다.

 "그건..... 안 될 말이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찾
아내고 말겠소."

 주지약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당신에 대한 마음이  변할 리가 없겠죠. 당신이 그렇게
도 그녀를 간절하게 찾고 싶다면 쉽게 찾아줄 수도 있어요."

 장무기는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단 말이오? 어서 말해 주시오!"

 주지약은 그의 얼굴을  잠시 뚫어지게 주시했다. 장무기의 얼굴
에는 조민을 찾을 수  있다는 벅찬 환희가 넘실거렸다. 주지약의
입에서 다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당신은 아마  영원히 나에게는 이런 관심을  보이지 않을 거예
요. 그렇게도 조낭자의 행방을 알고 싶으면 나의 요구를 한 가지
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나더러 무슨 요구를 들어 주라는 거요?"

 "지금은 뚜렷이 요구할 게 없지만 나중에 생각나는 대로 말하겠
어요. 아무튼  협의도에 어긋나지 않고  산하를 되찾는 대업에도
지장이 없으며, 당신과 명교의  명예에도 손상이 없는 일일 테니
쉽게 이행할 수 있을 거예요."

 장무기는 멍해졌다. 그는 내심 생각했다.

 '예전에 민매도 나에게 세 가지 요구를 제시해 왔다. 역시 협의
도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운운하면서..... 지금까지 난 그녀의 요
구를 두 가지 들어주었지만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
약까지 그녀를 흉내내어 이런.....'

 주지약이 그의 생각을 끊어 버렸다.

 "승낙을 하기  싫으면 강요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만약 승낙을
한다면 대장부답게 때가 오면 그 요구를 응해야 해요."

 장무기는 생각을 굴리며 물었다.

 "정말 협의도에 어긋나지  않고 오랑캐를 몰아내는데 지장이 없
으며, 나와 본교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 않는 일이란 말이오?"

 주지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장무기는 한시바삐  조민을 만나고 싶은  심정에서 당장 약속을
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마음에  부담을 느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주지약이 비록  겉으로 온순해 보이지만 일을 행함
에 있어 심지가 깊고 때에 따라 수단이 악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주지약이 나중에 어떤 요구를 해 올지 부담이 느
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주지약은 그가 망설이자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보아하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군
요. 승낙만 하면 바로 조낭자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장무기는 결정을 내렸다.

 "좋소. 어서 그녀의 행방을 말해 보시오."

 주지약은 바로 그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걸어가
무성한 나뭇잎을 헤치자 그곳에  한 소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드
러났다.

 바로 조민이었다.

 장무기는 뛸 듯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민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주지약과 장무기의 등 뒤 수십여 장쯤 떨어
진 곳에서 지극히 나직한 인기척이 들렸다.

 "아니.....?!"

 분명 여인의 음성인데, 조민의 뜻하지 않은 출현으로 인해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대관절 누구일까? 장무기는 그녀의 놀란 외침
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일순 표정이 굳어졌으나 재빨리 생각을
굴리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조민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경직돼 있었다.

 장무기는 비로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낮에 조민이 갑자기 사라
진 것은 스스로 떠나간  게 아니라 주지약에 의해 납치된 것이었
다.

 주지약은 그녀의 혈도를 찍어 이곳에 은폐해 놓은 후 일부러 자
기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다.  만약 자기가 주지약의 간절한 마
음에 이끌려 그만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뜨거운 행동을 취했다
면, 조민이 모든 것을 듣고  느꼈을 테니 정말 영영 떠나 버렸을
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장무기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조민의  맥을 짚어보니 기혈이  순조롭게 유통되는 것이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았음을  알았다. 장무기는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달빛 아래 조민은 만면에 행복에 겨운 미소를 머금고 있
었다. 그러한 모습이  한없이 요염하게 느껴졌다. 자기와 주지약
의 대화를 그녀는 한 마디도 빠짐없이 들었을 것이다.

 장무기가 조민의 혈도를 풀어  주려는데 주지약이 몸을 숙여 그
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 속삭였다. 그러자 장무기는 나직이 한 마
디 대답했다.

 순간, 주지약의 입에서 성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장무기, 이제 와서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자세히 보세요!
조낭자는 이미 중독되어 살아나지 못할 거예요!"

 실로 뜻밖의 호통이었다. 장무기는 몹시 놀라며,

 "그게..... 사실이오? 정말 독을 당했단 말이오?"

 하고 조민의  맥을 다시 짚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주지약이
그의 등을 향해 지풍을 날렸다.

 "윽!"

 그 즉시 장무기의  입에서 신음이 내뱉어지며 쓰러지고 말았다.
주지약은 다시 장검을 뽑아쥐고 그의 목을 겨냥하며 소리쳤다.

 "이렇게 된 이상 당신의 목숨도  살려둘 수 없어요! 나 역시 은
리의 원귀로부터 시달림을 받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으니 우리
모두 함께 죽기로 해요!"

 이렇게 외치며 다짜고짜  장무기의 목을 겨냥해 찍어갔다. 아무
도 예기치 못한 변화였다.

 이때, 뒤쪽에서 여인의 뾰족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주지약, 은리는 죽지 않았다!"

 주지약이 고개를  돌려보니 흑의 여인이  질풍처럼 나무 뒤에서
뛰쳐나오며 장풍을 떨쳐냈다.

 주지약은 재빨리  한쪽으로 미끄러지며  몸을 돌렸다. 난데없이
나타난 흑의 여인은 다름아닌  은리였다. 비록 얼굴에 상흔이 얼
룩져 있지만 부종기가 빠진 원래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주지약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나 검 끝으로 장무기의 가슴을 겨냥
하며 소리쳤다.

 "더 이상 접근해 오면 우선 이 사람부터 죽이겠다!"

 은리는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그녀는 당황해 하며 말했다.

 "여지껏 저지른 악행만으로도 부족하다는 거냐?"

 주지약은 그녀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넌 대관절 사람이냐, 귀신이냐?"

 은리는 힘주어 대꾸했다.

 "물론 사람이다!"

 그녀가 자신이 사람이라고 시인하기 무섭게 장무기의 입에서 격
동에 찬 일성이 터졌다.

 "주아!"

 그는 펄쩍 몸을 솟구쳐 은리를 껴안았다.

 "주아,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인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은리는 흠칫 놀랐다. 그녀는 장무기의 팔
을 뿌리치려 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주지약이 빙긋이 웃으
며 말했다.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겠지?"

 그녀는 몸을 돌려 조민의  혈도를 풀어 주고 추혈과궁 수법으로
혈액이 원활하게 유통하게끔 해 주었다.

 조민은 그녀에게 혈도가 찍혀 한참동안 움직일 수 없었지만, 모
든 것을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하여 처음에는 짜증스럽고 분
노가 치밀었지만 장무기가  자기를 진실로 사랑한다는 말을 실토
하는 것을 듣자 그 분노가 환희로 바뀌어졌다.

 한편 은리는 눈을 곱게 흘겼다.

 "어서 손을 놓으세요. 다른 사람들도 보고 있는데 이게 무슨 추
태예요?"

 장무기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주아가 이렇게 살아 있으니 기쁨을 어떻게 형용해야 좋을지 모
르겠군. 그런데..... 대관절 어찌 된 일인지.....?"

 은리는 대답을  하기 앞서 장무기의  얼굴을 뜯어보듯 이리저리
유심히 살피고 나서 갑자기 귓바퀴를 꼬집었다.

 장무기는 고통으로 인해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은리는 앙칼지게 말했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못난이, 나를 땅 속에 생매장하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아나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장무기의 가슴을 주먹으로 호되게 때렸다.
장무기는 구양신공으로 몸을  호위하지 않고 연거푸 삼권을 맞았
다. 가슴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으나 그는 웃으며 말했다.

 "주아, 난 정말 주아가 죽은 줄만 알았어. 그로 인해 내가 얼마
나 가슴 아파했는지 알아? 어쨌든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으니
정말 기쁘군. 오직 하늘에 감사할 뿐이야."

 은리는 여전히 토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하늘은 당신처럼 무심하지가 않아요. 내가 정말 숨이 끊어졌는
지 똑똑히 확인도 하지 않고..... 당신은 내가 추하게 생겨 진작
부터 죽여 없어지길 바랬겠죠?  그래서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
았는데도 땅 속에 묻은 거죠? 이 양심없는 못난이, 비겁장이!"

 그녀는 계속  억지를 쓰고 욕을  섞어가며 장무기를 몰아부치는
게 예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장무기는 헤벌쭉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욕을 들어도 마땅하지 그런 엄청난 실수를 범하다니.....
당시 주아의 얼굴이  피투성인데다가 호흡이 멎었기 때문에 죽은
줄로만 알았어....."

 은리는 펄쩍 뛰며 다시  그의 귀를 잡아 비틀려 했다. 장무기는
얼른 몸을 피하며 공수의 예를 취해 용서를 빌었다.

 "주아,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줘."

 은리는 냉랭하게 말했다.

 "용서할 수 없어요. 그 날  땅 속에서 깨어나 보니 주위가 얼음
장처럼 차갑고 돌에 깔려  있는 것을 알았어요. 나를 생매장하는
것도 억울한데 왜 돌로 덮어 놓았죠? 흙으로 덮었다면 숨이 막혀
정말 죽을 뻔했잖아요! 내가  죽었다면 이렇게 당신 앞에 나타나
괴롭히지도 않을 테니 좋았을 게 아니겠어요?"

 장무기는 후 하고 한숨을 불어냈다.

 "다시 하늘에 감사를 드려야겠어.  당시 흙으로 덮지 않고 돌을
올려 놓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

 그는 감격을 금치  못하며 한 쪽에 있는  주지약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은리는 냉소를 날렸다.

 "당신보다 더 나쁜 사람은  없을 거예요. 흥! 저 여인을 쳐다보
지 말아요!"

 "왜 쳐다보지 말라는 거지?"

 "그녀는 나를 죽인 흉수인데 왜 쳐다보는 거죠?"

 잠자코 있던 조민이 이때 불쑥 입을 열었다.

 "죽지 않고 이렇게 정정히  살아 있는데 어떻게 흉수라고 할 수
가 있죠?"

 은리는 차갑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난 이미 한 번 죽었어요.  그러니 그녀는 한 차례 살인 흉수가
되었던 거예요!"

 장무기가 나섰다.

 "주아,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으니 우리 모두에게 기쁜 일이야.
자, 여기 편히 앉아 죽음에서 되살아난 경과를 자세히 얘기해 주
지 않겠어?"

 은리는 눈을 흘겼다.

 "우리라뇨? 내가 묻겠는데, 당신이 말한 <우리>는 대관절 몇 사
람이 포함돼 있는 거죠?"

 장무기는 멋적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에 네 사람밖에 없으니  물론 나와 주낭자, 조낭자를 포함
해서 말한 거야."

 은리는 다시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에 대해 당신은 어쩌면 기뻐
할지  모르겠지만, 과연  주낭자나 조낭자도  진심으로 기뻐할까
요?"

 주지약이 얼른 그녀의 말을 받았다.

 "은낭자, 그날 난 나쁜 마음을 먹고 낭자를 해쳤지만, 그 후 얼
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매일  밤 꿈에도 당신의 혼백이 나타나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어요.  나는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
어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해봤어요. 그런데 낭자
가 이렇게 무사한 것을  보니 기쁨을 뭘로 형용해야 좋을지 모르
겠어요. 하늘이 나의 이 죄를 용서한 걸로 생각하고 싶어요."

 은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조금은 이해가 가는군요. 난 원래 당신에게
복수를 할 생각이었는데, 정녕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면
그만 두겠어요."

 주지약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흐느꼈다.

 "나..... 나는 낭자에게 너무나 큰 죄를 졌어요."

 은리는 원래 고집이 대단해 한 번 마음먹은 일을 좀처럼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자존심이 매우  강한 주지약이 무릎을 꿇고 용서
를 빌자 마음이 누그러져 얼른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주언니, 이미 지난  일이니 나도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겠어
요. 어쨌든 난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잖아요. 주 언니가 내 얼굴
에 상처를 내는 바람에 부종기가 독혈(毒血)에 섞여 모두 흘러나
와 이렇게 멀쩡해지기도 했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죠."

 주지약은 그저 죄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장무기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와 의부님,  그리고 주낭자는 섬에  오래 머물렀는데 주아는
무덤에서 나온 후 어째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

 은리는 다시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의 꼴이 보기  싫었어요. 당신이 주낭자와 밀어를 속
삭이는 것을 듣고 얼마나  화가 치밀었는지 아나요? 흥! <앞으로
난 모든 걸 바쳐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부부는 일심동체라 했는
데.....>"

 은리는 장무기의 말투를 흉내내더니 다시 주지약의 음성을 모방
했다.

 "<만약 내가  당신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당신은 나를 욕하거나
때리거나 죽이진 않겠죠?>"

 은리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다시 남자의 음성을 흉내내었
다.

 "<지약, 당신같이 온순하고  현숙한 아내가 남편에게 잘못을 저
지를 리가 있겠소? 설령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난 좋게 타이르며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갈 것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손으로 서편의 달을 가리켰다.

 "<하늘의 달님이 우리 두 사람의 증인이 되어 줄 거예요.>"

 알고보니, 그날 밤 장무기와 주지약이 정답게 밀어를 나누는 것
을 은리가 전부 엿들은 모양이다. 은리가 당시 두 사람이 나누었
던 말을 일일이 들추어 내자 주지약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
고, 장무기는 멋적어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장무기가 조민을 힐
끗 쳐다보니 그녀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푸르락누르락했다.

 장무기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순간 조민은
손을 젖히며 손톱으로 그의  손등을 세게 꼬집었다. 장무기는 심
한 고통을 느꼈으나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은리는 품 속에 손을  넣어 길쭉한 나무 조각을 꺼냈다. 그것을
장무기에게 내보이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나요?"

 장무기는 물론 알고  있었다. 그 나무 앞면에 <애처은리지묘>라
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그 당시 자기가 은리의 무덤 앞에
세워놓았던 나무 묘비의 일부분이었다.

 은리가 한스럽게 말했다.

 "나는 무덤  속에서 나와 이 나무  조각을 보고 어리둥절해졌어
요. 묘비 아래 장무기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
중에 당신과 주낭자의 대화를 듣고 비로소 증아우가 바로 장무기
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이  교활하고 비겁한 사람! 그 동안 용케
도 나를 속여왔군요!"

 이렇게 말하며 나무토막으로  다짜고짜 장무기의 머리를 내리쳤
다. 탁! 하는 소리가 들리며 나무조각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사
방으로 튕겼다.

 조민이 성난 음성으로 소리쳤다.

 "왜 걸핏하면 이 사람에게 손찌검을 하죠?"

 은리는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내가 그를 때리니까 가슴이 아픈 모양이군."

 조민은 얼굴이 빨개졌다.

 "이 사람은 계속 양보하고 참고 있는 것이니 자중을 하세요."

 은리는 코웃음을 쳤다.

 "자중하라고? 흥!  자중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방금 묘비에 새겨진 글을  보지 못했나요? 분명히 애처라고 적혀
있었어요.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그가 당신을 받아들일 수도 있
고, 저버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난 당신과 이 못난
이를 놓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내 마음 속에는 오직 한 사람만
존재할 뿐이에요. 그 호접곡에서  내 손등을 깨물은 작은 장무기
예요.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못난이의 이름이 증아우든 장무기든
내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그 장무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장무기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아우 오빠,  당신은 줄곧 나에게 잘해  주었어요. 나는 그것을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난 마음을 이미 그 쌀쌀맞고 흉악한 작
은 장무기에게 주었어요. 당신은 그가 아니에요. 아니고 말고요.
아무도 그를 대신할 수 없어요. 아무도....."

 장무기는 멍해졌다.

 "내가 분명 장무기이거늘, 어째서..... 어째서....."

 은리는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우 오빠,  당신은 몰라요. 서역 대막에서  우리 둘은 공생공
사, 동고동락을  했고, 해외 작은 섬에서  당신은 인으로서 나를
대해 주었어요.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나 이 말만큼
은 분명히 명심해  주세요. 난 이미 그  작은 장무기에게 마음을
정했어요. 그를  찾아가야겠어요. 기어코  그를 찾아내고 말겠어
요.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예전과 같이 나를 때리고 욕하고 깨
물까요?"

 이렇게 혼잣말처럼 씨부렁거리더니  장무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나갔다.

 장무기는 문득  가슴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알고보니,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어렸을 때 가슴  속에 새겨놓은 장무기의
환영(幻影)일 뿐 이미 어른으로 성장한 장무기가 아니었다.

 장무기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마음은 착
잡했다. 슬픔, 아쉬움, 적막함이 한데 어우러져 그의 심저(心底)
에 여울져 퍼졌다. 그는 은리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까지 지켜보며 돌처럼 굳어 있었다.

 은리는 호접곡의 그  어린 소년을 영원히 가슴  속에 간직한 채
살아갈 것이다. 그녀는 그  소년을 찾아나선다고 했지만 찾을 수
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벌써 그 소년을 찾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 소년은 바로 그녀의 가슴 깊숙한 곳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한  사랑, 그것은 어쩌면 실지 현실에서 경
험하는 사랑보다 더욱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주지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이에요. 나 때문에 그녀가 넋빠진 사람으로 변
한 것 같아요."

 장무기는 달리 생각했다.

 '그녀가 환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면 나 때문일 것이다. 하
지만 정신이  맑은 사람보다 그녀처럼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게
더 행복할지도 모르지.....'

 한편 조민의 생각은  각도가 달랐다. 은리는 떠났지만 주지약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은리는 죽지 않고 사손도 무사하며, 의천검과
도룡도에 숨겨졌던  비급도 도룡도와  함께 장무기에게 되돌아갔
다. 이제 주지약에게 큰 잘못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물론 송
청서는 그녀로 인해  막성곡을 죽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송청
서가 저지른 죄악일  뿐, 주지약은 사전에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또한 사주한 것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무기가 이미 그녀와 혼례를 약속한 바 있다
는 사실이다. 장무기는  신의를 중시하는 위인이므로 주지약에게
큰 잘못이 없는 한 그 언약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주지약이 몸을 일으켰다.

 "우리도 이제 떠나요."

 조민이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죠?"

 주지약이 답했다.

 "조금 전 내가 소림사에  있을 때 팽화상이 교주를 찾아온 것을
보았어요. 명교에 무슨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에요."

 장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내심 다급해졌다.

 '내가 남녀간의 사사로운 정 때문에 교내의 대사를 그릇치는 게
아닐까?'

 그는 서둘렀다.

 "어서 가 봅시다."

 세 사람은 곧 신법을 전개해  얼마 후 명교 교도들이 야영을 하
고 있는 곳에 당도했다.

 양소, 범요, 팽화상 등은 사람을 시켜 도처로 교주를 찾아 다녔
는데, 그가 돌아온 것을 보자 내심 의아해 하기도 했다.

 장무기는 얼른 물었다.

 "팽대사, 나를 찾아다닌 모양인데, 교내에 무슨 일이 생겼소?"

 팽화상은 주지약과 조민의 눈치를  살피며 선뜻 대답을 하지 않
았다. 주지약은 얼른 조민의 손을 잡았다.

 "우린 저쪽으로 가죠."

 조민도 자리를 피할 필요성을  느껴 그녀와 함께 한쪽으로 물러
갔다.

 팽영옥은 그녀들이 멀어지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교주께 보고하오. 우리가 호주에서 참패를 당해 한산동 한형이
순직했소."

 장무기는 이 말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맙소사!"

 그는 통한을 금치 못했다. 팽영옥이 다시 말했다.

 "지금 회서(淮西)의  의군을 주원장 형제가  지휘하고 있소. 서
달, 상우춘 두 형제는 소식을  전해 듣는 즉시 대군을 이끌고 후
원하기 위해 달려갔소. 한림아도 역시 함께 갔소. 화급을 다투는
일이므로 교주의 명을 기다릴 겨를이 없었소."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한 일이오."

 이들이 군정(軍情)을 상의하고 있는 사이에 은야왕이 달려 들어
왔다.

 "개방에서 방금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진우량 녀석의 행방이
밝혀졌다고 하오."

 장무기가 물었다.

 "그가 어디에 있소?"

 은야왕이 대답했다.

 "그 놈은  본교 서수휘 형제의 휘하로  잠입하여 상당히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다고 하오."

 장무기는 잠시 생각을 굴리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정녕 그렇다면  성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 같소. 삼촌,
수고스럽지만 사람을  시켜 진우량의  정체를 서형에게 알리도록
하세요. 진우량은 워낙 교활하여  곁에 두면 언젠가는 화근이 될
거라고."

 은야왕은 대답을 하고 나서 말했다.

 "차라리 내가 직접 찾아가 단칼에 죽여 버리는 게 어떨는지?"

 장무기가 그의 제의에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교조 한 명이 서수
휘의 긴급 문서를 갖고  들어왔다. 양소는 직감적으로 느끼는 게
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큰일났군. 아무래도 녀석이 선수를 친 모양인데....."

 장무기는 급히 문서를  펼쳐보았다. 서수휘의 친필 서한이었다.
그 내용은 진우량이 한때 교주에게 죄를 지었지만, 지금 그 죄를
참회하고 본교에 투신해  성심껏 이바지하고 있으니 교주께서 그
에게 개과천선할 길을 열어 주십사 하는 간청이 담겨져 있었다.

 장무기는 서찰을 양소와  은야왕 등에게도 보여 주었다. 은야왕
은 심려를 했다.

 "서형은 이미 그 녀석의  간교한 술책에 현혹된 모양인데. 필시
후환이 있을 것이오."

 양소도 한숨을 내쉬었다.

 "진우량이 교활한  게 사실이지만, 지금  서형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으니 경솔하게  죽인다면 서형과의 관계가 서먹해질 우려
가 있소. 게다가 진우량은  겉으로 개과천선하는 흉내를 내고 있
을 테니, 우리가 그를 받아 주지 않으면 천하 영웅들로부터 우리
의 아량이 좁다고 손가락질 받게 될지도 모르오."

 장무기는 심각하게 말했다.

 "양좌사의 말도 일리가 있소. 팽대사, 대사는 서형과 남달리 친
분이 두터우니 진우량을  항상 경계하고 충고를 해주었으면 좋겠
소. 만약 진우량의 손에  병권이 넘어간다면 우린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될 것이오."

 팽영옥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서수휘는 결코  팽영옥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우
량을 신임한 나머지 그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된다. 나중에 진우량
은 명교 서로의군(西路義軍)을 이끌고 자칭 한왕(漢王)이라 하며 
명교 동로의군(東路義軍)과 천하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다가 파양
대전(播陽大戰)에서 패배를 당해 죽고  만다. 그 수년 동안 진우
량으로 인해 명교의  영웅호걸들이 숱하게 죽어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이날 밤, 장무기는 양소,  팽영옥 등과 상의하며 교대 형제들을 
각처에 있는 의군에게 보내 후원하도록 결정했다. 협의를 마치자 
그들은 잠시나마 눈을 붙였다.

 이튿날 아침 조민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 언니는 어젯밤에 떠나갔어요.  미처 작별을 고할 새가 없었
기 때문에 나더러 대신 전해 달라고 했어요."

 장무기는 잠시 적막함에 잠겼다.

 얼마 뒤,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장삼봉과 헤어진지 오래되어 한 
번 찾아뵙고 싶었다. 그래서 조민, 송청서, 유연주 등과 곧장 무
당산으로 향했다.

 소실산과 무당산은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며칠 후 장무기 
일행은 무당산에 당도해 장삼봉을 배견하고 송원교와 유대암에게
도 인사를 올렸다. 송원교는 아들이 대전에 와 있다는 말을 듣자 
안색이 파랗게 상기되어 당장 검을 뽑아쥐고 뛰쳐나갔다. 장무기 
등이 만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모두 대전에 모이게 되었
다. 장삼봉도 따라나왔다.

 송원교는 흥분하여 소리쳤다.

 "대역무도한 그 짐승이 어디에 있느냐?"

 그는 송청서가 한쪽 침상에 누워 흰 붕대로 온몸을 칭칭감고 있
는 것을 보자  다짜고짜 장검을 떨쳐 찔러갔다.  그러나 검 끝이 
송청서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손목에 힘이 쭉 빠져 그만 검을 내
리고  말았다. 일순  부자지정(父子之情)과 동문지의(同門之義), 
만감이 교차되어 몸을 가볍게  떨더니 갑자기 검 끝을 돌려 자신
의 아랫배를 향해 찔러갔다.

 위기일발의 순간  장무기가 황급히 그의  손에서 장검을 빼앗었
다.

 "대사부님, 절대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번 일은 어떻게 처리
할 것인지 태사부님의 가르침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삼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무당 문하에 이런  몹쓸 제자가 배출됐다는 것은 원교 한 
사람만의 불행이 아니다. 이  대역무도한 이놈은 차라리 없는 게 
좋을 것이다."

 그는 말을 내뱉기 무섭게 송청서의 가슴에 일장을 뻗어냈다. 송
청서는 즉시 오장육부가 파열되어 숨이 끊어졌다. 

 송원교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스승님, 제자가 자식놈을 제대로 관속하지 못해 칠제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이 엄청난  죄를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 모르
겠습니다."

 장무기는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번 일은 너에게 책임이  있다. 오늘부터 본파 장문제자의 자
리를 유연주에게 내주도록 해라. 너는 태극권법을 연구하는데 전
념하고 다시는 장문의 업무를 관여하지 않도록 해라."

 송원교는 다시 무릎을 꿇고 그의 명을 받들었다.

 유연주는 한사코 사양을 했으나  장삼봉의 확고한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중인은 장삼봉이 송청서를 직접 죽이고 송원교를 장문제자의 자
리에서 물러나게 한 엄한 문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삼봉은 영웅대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상히 물으며 장무기에 
대해서는 종전보다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조민은 장삼봉에게 무릎을 꿇고  예전에 무례했던 죄를 용서 빌
었다. 장삼봉은 호탕하게 웃어 넘기며 별로 개의치 않았다. 유대
암이 불구가 되고 장취산이 목숨을 잃게 된 것이 모두 조민의 수
하였던 아대, 아이 등과 깊은 관련이 있지만, 그 당시 조민은 아
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직접 그  죄를 결부시키지 않았
다. 오히려 그녀가 혈육과 등을 돌린 채 장무기를 따르고 있다는 
말을 듣자 가상하게 여겼다.

 "하핫..... 어려운 인연이로다."

 장무기는 무당산에서 며칠간 머문  후 조민과 함께 호주로 향했
다.

 도중에서 그는 명교의 의군들의  전승보를 계속 접할 수가 있었
다. 그리고 도처에서 새로운  의군들이 궐기하고 있다는 것도 들
었다. 고소(姑蘇)에서 장사성(張士城), 태주(台州)에서는 방국진
(方國珍), 그들은 비록 명교의 소속이 아니지만 오랑캐를 몰아내
겠다는 뜻은 같았다.

 장무기는 내심  기뻐했다. 하루속히  산하를 되찾아 태평천하가 
되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아울러 자기가 그 동안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며 동분
서주해 온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무기는 떠들썩한 것을 원치  않아 도중에서 명교 의군 수령들
을 상면하지 않았다. 단지  암암리에 그들의 동태를 관찰할 뿐이
었다. 명교의 의군은 군기가  엄해 백성에게 피해를 입하는 사례
가 없었다. 장무기가  가는 곳마다 주원장(朱元璋) 원수(元帥)와 
서달 대장군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장무기는 흐뭇했다.

 이날 호주성에  당도하자, 주원장이 소식을  전해 듣고 탕화(湯
和), 등유(鄧愈) 두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장무기를 
영접케 했다. 장무기는 빈관(賓館)으로 안내되었다.

 탕화가 아뢰었다.

 "주원수와 서대장군, 상장군께선 긴요한 군무(軍務)를 상의하느
라 친히 교주님을 영접나오지  못했습니다. 이 점 속하들로 하여
금 미리 교주님께 용서를 빌라고 하셨습니다."

 장무기는 웃음을 머금고 그의 말을 받았다.

 "우린 모두 한 핏줄을 나눈 형제나 다를 바가 없는데 그런 형식
이 무슨 필요가 있겠소.  긴요한 군무를 젖혀놓고 날 영접나왔다
면 오히려 나무랐을 것이오."

 이날 밤 빈관에서 주연을  베풀어 탕화와 등유가 장무기를 접대
했다. 술이 세 순배  돌았을 때 주원장이 대장(大將) 화운(花雲)
을 대동해 허겁지겁 나타나 땅에 엎드려 장무기에게 큰절을 올렸
다. 장무기는 얼른  그를 부축했다. 주원장은 공손하게 장무기에
게 술잔을 받아 모두  단숨에 비워 버렸다. 주원장은 조민에게도 
술을 올렸다. 조민은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

 주연이 계속되는  가운데 주원장은 그  동안의 전과를 보고하며 
매우 양양해 했다. 장무기도 크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흥이 무르익어갈 무렵,  대장 요영충(요永忠)이 성큼 대청 안
으로 들어와 교주를 배견한 후 주원장에게 귓속말로 보고했다.

 "잡았습니다."

 주원장은 매우 기뻐했다.

 "잘했다!"

 이때 대문 밖에서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억울하다! 난 억울해!"

 장무기는 그 외침소리에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바로 한림아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한 형제가 아니오?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오?"

 주원장은 힘주어 대답했다.

 "교주께 아뢰옵니다. 한림아는  오랑캐와 결탁해 본교를 배신하
려 했습니다."

 장무기는 흠칫 놀랐다.

 "한형제는 누구보다도 충심이 확고한데 그럴 리가 있겠소? 내가 
직접 물어볼 테니 어서 데리고....."

 그는 말을 끝까지 잇기도  전에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눈
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깨어났을 때 손발이 굵은 밧줄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았
다. 그의 놀라움은 컸다.  다행하게도 조민도 묶인 채 옆에 있었
다. 그녀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장무기는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이내  깨달을 수가 있었다. 
필시 주원장이 엉뚱한 마음을 품고 행한 음모일 것이다. 이제 명
교는 도처에서 원병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머지 않아 천하를 
움켜쥘 것이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순리에 따라 장
무기가 황제 보위에 오르게  될 것이니, 주원장은 장무기를 제거
해 그 보좌를 차지하려고  술에다 독한 미약을 풀어넣은 게 틀림
없었다.

 장무기가 운기를 해보니 체내에  아무런 이상도 없고 공력도 상
실되지 않았다. 그는 내심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이까짓 밧줄로 날 묶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
지. 민매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으니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갈 필
요는 없다. 날이 밝은 후에 모든 교도들 앞에서 주원장의 음모를 
폭로해야겠다.'

 장무기는 곧 마음을 차분히 하고 조용히 운공조식을 했다.

 약 한 시진이 지났을까,  홀연 몇 사람이 옆방으로 들어오는 인
기척이 들렸다. 그들은  곧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다름아닌 
주원장, 서달, 상우춘이었다.

 주원장이 다소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이 자가 본교를  배신하고 원조(元朝)에 투항한 증거가 뚜렷하
니 실로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네. 두 분 형제의 의견으로 
이 일은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나?"

 서달과 상우춘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주원장이 다시 말했
다.

 "이 자의 심복이 도처에 깔려 있으니, 신중을 기하기 위해 우린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

 서달이 그의 말을 받았다.

 "주대형, 큰 일을 성사하기 위해서는 사사로운 인정에 얽매여선 
아니 되오. 풀을 벨 때 뿌리째 뽑아야 하듯이 속히 놈을 죽여 후
환을 없애는 게 현명할 것 같소."

 주원장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우리의  두목이 아닌가. 그를 죽인다는 것은 
배은망덕한 짓이  아닐지..... 그가 우리  세력의 주춧돌 역할을 
해 온 게 사실인데....."

 이번에는 상우춘이 나섰다.

 "주대형, 그 녀석을 죽여 군에 변란이 생길 게 우려된다면 우리
가 암암리에 살수를 전개하겠소. 자칫 잘못하면 주대형의 명예에 
손상이 갈까 봐 염려가 되기 때문이오."

 주원장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두 분 형제의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나도  더 이상 이의가 없
네. 어쨌든 그 녀석은 여지껏 본교에 은덕을 주었고, 두 분 형제 
또한 그와  친분이 두터웠으니 이번 일을  절대 누설하지 않도록 
하게....."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만부득이한 상황이라지만,  그를 죽인다는 게  실로 가슴 아프
네."

 서달과 상우춘이 입을 모아 말했다.

 "나라를 되찾는 대업을  달성하기 위해선 친구에 대한 사사로운 
감상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오."

 세 사람은 곧 밖으로 걸어나갔다.

 장무기는 그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으므로 등줄기가 오싹해지
는 한기를 느꼈다. 그는 곧 신공을 끌어올려 밧줄을 끊고 조민은 
안은 채 빈관을 빠져 나갔다. 그는 오만가지 생각이 겹쳐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장무기는 그들 셋을 모두  죽여 버릴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들을  없애면 의군이 와해될 우려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장무기는 본디 욕심이 없었다. 그는 황제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서달과 상우춘은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군. 그렇게도 믿
었던 사람들인데..... 역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
은 모른다는 말이 맞군.'

 장무기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민을 데리고 떠나가 버렸
다.

 성 밖에 이른 그는 서찰 한 통을 써서 명교 교주 자리를 양소에
게 물려 주었다. 그리고 호주에서 당했던 일은 전혀 언급하지 않
았다.

 장무기는 사실 주원장의  치밀한 술책에 걸려든 것이다. 서달과 
상우춘이 죽이자고  한 것은 그가  아니라 한림아였다. 장무기가 
호주에 나타난 일을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주원
장의 음랄한 술수였다. 그는  장무기로 하여금 좌절과 실의에 빠
지게 하여 스스로 물러나게끔 만든 것이다.

 장무기는 나라를 되찾는 일을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시하고 있으
며, 또한 서달, 상우춘과 친형제 이상으로 친분이 두터워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 필시 자발적으로 물러날 것이라 예측했었다. 그의 
예측은 과연 적중했다.

 장무기는 비록 무공이  천하무적이지만 심계와 계략에 있어서는 
도저히 주원장을 따를 수가  없었다. 하여 끝내 이 일대 효웅(梟
雄)의 간계에 걸려든 것이다.

 물론 장무기는 애당초 황제가  될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주원장
의 음모가 그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서달과 
상우춘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우
울해졌다.

 한편, 한림아가 오랑캐와  결탁해 명교를 배반했다고 운운한 것
도 역시 주원장의 모함이었다. 알고보니, 한산동이 죽은 후 의군
들은 한림아를 새로운 통솔자로 꼽아 실지로 주원장, 서달, 상우
춘은 그의 속하라 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한림아가 적과 내통한 
친필 서한을 조작하여 다시 후한 조건을 제시해서 한림아의 심복
을 매수해 서달, 상우춘에게  그 거짓 사실을 알리게 했다. 서달
과 상우춘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상황하에서 한림아를 죽이자고 
고집한 것이다. 주원장은 한림아의 공로와 위치를 내세워 마음에
도 없는 능청을 떨다가 마치 서달, 상우춘의 확고한 뜻에 못이기
는 것처럼 한림아를 죽이는 것을 억지로 승낙했던 것이다.

 주원장은 장무기와 조민을 옆방에 가두어 놓았지만 장무기의 무
공으로 충분히 스스로 밧줄을 끊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무기가 밧줄을 끊자마자 복수를 해올까봐 서달, 상우춘
으로부터 자기가 원하는  말을 입 밖에 내게  한 후 즉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나중에 장무기가  떠난 것을 확인한 그는 요영충
에게 명하여 한림아를 물에  빠뜨려 죽이게 했다. 이 일석이조의 
계책은 실로 악랄하면서도 완벽한 것이었다.

 나중에 양소가 비록 명교 교주에 올랐지만 그 때는 주원장이 이
미 확고부동한 위치를 확보한 후였다. 양소는 이미 고령인데다가 
덕을 쌓은  게 많지 않아 주원장과  황제의 자리를 쟁탈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원장은 등극한 후 오히려  명교를 핍박하고 교내에서 공을 세
웠던 형제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상우춘은 급병을 앓아 일찍 요
절했지만, 서달은 결국 주원장의 손에 죽음을 당하게 되니.....

 조민은 장무기가 양소에게 띄우는  서신을 쓰고 나서 붓을 내려
놓을 생각을 않고 시무룩해 있는 것을 보자, 생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상공, 세 가지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한 약속으로 도룡도를 빌
려주었고, 혼례를 올리지 않았어요. 이제 세 번째 약속을 이행할 
차례예요."

 장무기는 안색이 굳어졌다.

 '또..... 무슨 엉뚱한 일을 시키려는 건지.....'

 장무기는 웬지 가슴이  철렁하며 불안했다. 조민은 가지런한 치
아를 드러내 생긋이 웃었다.

 "내 눈썹이 너무 엷은 것  같으니 붓으로 좀 그려 주세요. 강호 
협의도에 위배되는 요구는 아니겠죠?"

 화미(畵眉) ----- 여인의 눈썹을 그려 주는 것으로, 정인(情人)
이나 부부 사이에 행해지는 낙취(樂趣)이다.

 장무기는 굳어졌던 표정이 풀리며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매일 눈썹을 그려 주겠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창 밖에서 여인의 간드러진 음성이 
들려왔다.

 "나의 요구도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한 약속을 잊지 않았겠죠?"

 바로 주지약의  음성이었다. 장무기는  양소에게 띄우는 서신을 
쓰느라 정신을 쏟는 바람에 그녀가 어느새 창 밖에 나타났는지조
차 몰랐다.

 창문이 천천히  열리며 주지약의 달덩어리  같은 얼굴이 나타났
다. 촛불에  비춰진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웃음이 깔려 있었다. 
장무기는 다시 표정이 굳어졌다.

 "지.....지약은 또 나에게 무슨 요구를 하려는 거요?"

 주지약의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샛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엇을 요구할는지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하지만 당신
이 민민 동생과 혼례를 올리게 되는 날 생각이 날 거예요."

 장무기는 고개를 돌려 조민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다시 주지약
을 쳐다보았다.  일순, 여러 가지 생각이  어우러져 그의 심기를 
흐트러 놓았다. 기쁨인지 우려인지 알 수 없는 격정으로 인해 손
이 가볍게 떨리며 쥐고 있던 붓이 탁자 위에 떨어졌다.

 조민과 주지약, 그녀들이  마주보는 미소에서 장무기는 가슴 속
에 어우러졌던 여러  가지 감정이 뿌듯한 행복으로 양각(陽刻)되
어 일렁거렸다.


                                 ----- 제 7 권 7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끝


                      작가후기 (作家後記)


 대한영웅기(의천도룡기)는 대한영웅전, 신조협려에 이은 삼부작
의 마지막 제삼부다.

 이 삼부작의 남자  주인공은 제각기 개성이 다르다. 곽정(郭靖)
은 성실하고 소박하며,  양과(楊過)는 감정이 깊고 호탕하다. 그
들에 비해 장무기의 성격은 비교적 복잡하고 또한 비교적 연약하
다. 그에게는 영웅의 기질이  부족하다. 물론 그의 성격 중에 결
점이 많지만 장점도 많다. 어쩌면 우리 주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유형일지도 모른다. 양과는 매사에 적극적이며 스스로 
흐름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곽정은 작은 일에 있어 황용(黃蓉)의 
충고를 참고로 삼지만 큰 일을 임할때에는 확고한 신념이 두드러
진다.

 장무기의 일생은 늘 타인의 영향을 받아왔다. 그리고 환경의 지
배를 받아 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애정 면에 있어  양과는 소용녀에게 적극적이었으며 사회규범을 
무시했다. 곽정이 황용과 화쟁공주 사이에서 흔들렸던 것은 순수
한 도덕 관념에서 빚어진  갈등이지 결코 애정에 있어선 절대 주
저하거나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시종일관 뚜렷한 주관이 없이 피동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주지약, 조민, 은리,  소조, 네 명의 낭자 중에서 그
는 조민을 가장 깊이 사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주지약에
게도 그와 똑같은 말을 했다.  사실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 어느 
낭자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아마 그 자신도 모
를 것이다. 작가도 역시 알 수 없다. 이왕 그의 성격을 우유부단
한 면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의 개성에 따라 펼쳐나
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작가도 그의 굳어진 개성의 테두리를 벗
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장무기 같은 위인은 아무리 무공이 고강해도 정치상의 영도자가 
될 수는 없다. 물론 그  자신도 원치 않으며 설령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최고의 보좌에 오른다 해도 결국은 실패할 것이다. 중국
삼 천 년의 정치사에  있어 그러한 사례가 명확한 결론으로 나타
나 있다. 중국의  정치사에서 영도자로서 성공을 거두려면, 첫째
조건이 인(忍)이다. 자신을 억제하는 忍, 그리고 정적에 대한 잔
인(殘忍)이 그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명쾌한 결단력이다. 그리
고 세 번째는 강한 권력욕인데,  장무기는 그 중 어느 조건도 구
비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민과 주지약이  그런 정치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  두 낭자는 비록 아름답지만 사랑스럽
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작가로서 소조를  가장 아끼고 사랑했다. 그녀가 장무기와
일생을 함께 하도록 만들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늘 마
음의 부담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애정 줄거리는 별로
만족한 것이 못 된다.  영롱한 무지개빛으로 채색하지 못했기 때
문이다. 비록 현실성에 가장 접근하기는 했지만.....

 장무기는 좋은 영도자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친근감
을 주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사실 이 삼부에서 그리고자 한
것은 남녀간의 애정이 아니라 남아(男兒)와 남아간의 정의(情義)
였다. 무당칠협의 대보다 진한 우애, 장삼봉이 장취산에게, 사손
이 무기 부자에게 쏟은 애정.

 한데 장취산이 자결할 때 장삼봉의 비통한 심정, 장무기가 죽었
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하던  사손의 모습을 이 책에선 나무 얇게
그려지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진실한 삶은 그런게 아닐
텐데.....

 당시만 해도 난 참된 삶을 몰랐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 金    庸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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