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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의천도룡기 31~35

by Casey,Riley 202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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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5 권


     제 4 장 보도(寶刀)에 숨겨진 비밀(秘密) 


 범요는 조민에게 손이 잡힌  채 곧장 만안사 밖으로 나왔다. 그
는 초조하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대관절 자기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 드디어 조민이 스스로 입을 열었다.

 "고대사, 우리 그 장무기라는 작자를 만나러 가요."

 범요는 다시 놀라야만  했다. 조심스레 조민의 표정을 살펴보니
눈동자에 생기가 감돌고  양볼이 불그스름한 것이 수줍음과 희열
이 엇갈려 있었다. 절대 자기의 계략을 간파한 눈치가 아니었다.

 범요는 일단 안심을 했다. 아울러 야릇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혹시 군주가 우리 교주에게  은근히 흠모의 정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한데 왜 나더러  함께 가자는 거지? 자신의 심복인
현명이로를 부르지 않고..... 맞아  이런 일은 노출시키는 게 좋
지 않으므로 벙어리인 내가 적격이겠지.'

 앞장선 조민은 얼마 후 장무기가 유숙하고 있는 객점 앞에 당도
했다. 범요는 다시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교주가 머물러 있는 곳을  즉시 알아내다니, 역시 보통 여자가
아니야.....'

 범요는 그녀를 따라  객점 안으로 들어갔다. 조민은 주인장에게
대뜸 <증아우>를 찾았다.  장무기는 객점에 투숙하면서 증아우라
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점원이 곧 가서 알렸다.

 장무기는 운공조식을 하며  만안사에서 불길이 치솟기만 기다리
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찾아왔다는 전갈에 멍해졌다. 그는 객당
으로 나와 방문객이 범요와  조민이라는 것을 보자, 내심 아뿔싸
를 토했다.  틀림없이 조민이 범요의  정체를 알아차려 자기에게
따지러 온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는 일단 공수의 예를 취하며 태
연하게 말했다.

 "조 낭자, 무슨 일로 이곳까지 날 찾아왔소?"

 "이곳에선 얘기하기가 불편하니  장소를 옮겼으면 좋겠어요. 저
쪽에 있는 작은 주막으로 가서 한 잔 하시지 않겠어요?"

 장무기로선 거절할 수 없었다.

 "좋소."

 조민이 앞장서 객점에서 다섯  집 건너에 위치한 작은 주막으로
들어갔다. 주막 안에는  드문드문 몇 개의 식탁이  놓여 있을 뿐
초라했다. 밤이 깊은 탓인지 손님이 전혀 없었다. 조민과 장무기
는 식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범요는 손짓으로서  자기는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조민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간단한 요리 두 접시와 백주(白酒)
두 병을 시켰다.

 술이 세 순배 돌자 조민은 나직하게 물었다.

 "장공자, 당신은 내가 누군지 이젠 알고 있겠죠?"

 장무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양왕부의 군주라는 것을 알았소."

 "당신은 내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겠죠?"

 "내가 낭자를 미워한다면, 이렇게  함께 앉아 술을 마시지 않았
을 것이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
오. 난 여지껏  살아오면서 혼원벽력수 성곤을 가장 미워했는데,
그가 죽은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오히려 그가 불쌍하게 여겨지
며 죽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바램도 없지 않소."

 조민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 건가요? 건방
지고 흉악한 계집이 죽었다고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겠죠?"

 장무기는 자신도 모르게 음성을 높이고 힘주어 말했다.

 "아니오! 난 절대 낭자가  죽는 걸 바라지 않소. 위복왕이 낭자
의 얼굴에 칼자국을 내겠다고  위협했을 때 난 속으로 은근히 걱
정을 했었소."

 조민은 생긋이 웃으며 양볼이 불그스름해졌다.

 장무기는 진지하게 말했다.

 "조 낭자, 다시는 우리와  맞서지 말고 육대문파의 사람들을 모
두 풀어 주시오. 모두  화기애애하게 친구로 지내면 얼마나 좋겠
소."

 조민은 활짝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맞아요. 내가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예요. 당신은 명교의 교
주이니 설득력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 그들에게 항복하여 조정에
협력하라고 전해 주세요. 모두들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거
예요."

 장무기는 천천히 고개를 내둘렀다.

 "우리 한인은 누구나 똑같은  염원을 갖고 있소. 그것은 당신네
몽고인이 물러가 조길 바라는 마음이오!"

 조민은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요! 그런 대역무도한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건가요?"

 조민은 한참 동안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얼굴에 띄어졌던
분노의 표정이 차츰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혼잣
말처럼 중얼거렸다.

 "결코 우리는 적대시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요?"

 그녀의 표정은 갑자기  울적하게 변했다. 장무기는 웬지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해주려 했으나, 적당
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묵묵히 앉아 침
묵을 지켰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장무기였다.

 "조 낭자, 밤이 깊었으니 이제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

 "나와 함께 이곳에 앉아있는 게 싫은가요?"

 "아니오. 낭자만 괜찮다면 난 상관없소."

 조민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내가 만약 몽고인도
아니고 군주도 아닌 그저  주 낭자처럼 평범한 여자라면, 당신과
좀더 가까와질  수 있을 거라고 말이에요.  장공자, 솔직히 말해
보세요. 내가 예쁜가요? 아니면 주 낭자가 더 예쁜가요?"

 장무기는 그녀가 노골적으로 이러한 질문을 해 오리라곤 뜻밖이
었다. 희불그레한 등잔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실로 요염하면서
도 아름다왔다. 그는 느낀 그대로를 털어놓았다.

 "물론 낭자가 더 아름답소."

 조민은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손등 위에 얹으며 눈동자에 기쁨
이 넘실거렸다.

 "장공자, 나하고 가끔 만나지 않겠어요? 만약 내가 다시 이곳으
로 불러내 함께 술을 마시자고 청하면, 응해 주겠어요?"

 장무기는 손등을  통해 그녀의 따사로운  체온을 느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이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소. 며칠  후면 남쪽으로 다시
가야 하오."

 조민의 표정은  다시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녀는  창 밖에 걸려
있는 초승달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내 세  가지 부탁을 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아직 잊지 않았겠
죠?"

 "물론이오. 낭자의 분부가  있으면, 전력을 다해 이바지할 것이
오."

 조민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 첫 번째 부탁을 드리겠어요. 나는 도룡도를 원해요."

 장무기는 그녀의 세  가지 요구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첫 번째부터  난제를 내놓을 줄은 실로 뜻밖
이었다.

 조민은 그가 난처해 하는 것을 보자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어때요? 설마 거절하는 것은 아니겠죠? 이번 일은 협의도에 위
배되지 않고, 당신의 능력으로 해낼 수 없는 일도 아니잖아요."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의부께서 도룡도를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든 강호인이 알고
있으니, 구태여 숨길 필요는 없겠지.....'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도룡도는 나의 의부이신 금모사왕의 소유이거늘, 내 어찌 의부
를 배반하고 그 보도를 낭자에게 갖다 줄 수 있겠소?"

 "당신더러 그  보도를 훔쳐오거나 빼앗아  오라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내가 그 보도를 갖겠다는 뜻도 아니에요. 단지 그 보도를
한 시진 동안만 빌리자는 것뿐이에요. 그것도 협의도에 어긋나나
요?"

 "그 보도는 비록 강호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별로 구경
할 만한 것이 못 되오. 단지 다른 칼에 비해 무겁고 예리할 뿐이
오."

 "나 역시 다른 뜻은  없어요. 의천검이 내 수중에 있기 때문에,
그와 쌍벽을 이루는 도룡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것뿐이에요. 만약 안심이  되지 않는다면 내가 보도를 살필
때 곁에 서  있으면 되잖아요? 당신의 실력으로  내가 그 보도를
가로채게 하겠어요?"

 그녀의 말에 장무기는 다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육대문파의 고수들을 구출한 후, 어차피 의부를 중원으로 모셔
와 교주의 직책을 넘겨드려야 한다. 조 낭자가 보도를 한 시진만
빌려 달라는데는 물론 어떤  흉계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
지만 내가 옆에서 지키고 있는 한 그 보도를 가로채지는 못할 것
이다. 단지.....'

 장무기는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의부의 말을 빌리
면, 도룡도에 무림절학에 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의부
는 실명하기 전에 그  보도를 수중에 넣어 오랜 세월동안 노심초
사했지만, 그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다. 혹시 이 조 낭자는 짧은
한 시진 동안에 그 비밀을 캐내는 게 아닐까?

 '조 낭자가 제아무리 영특하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할 거야. 그
리고 의부와 헤어진 지 벌써  십 년이 되었으니, 그 동안 의부께
서 홀로 고도에 남아 이미 보도의 비결을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조민은 그가 대답을 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
자,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다시 말했다.

 "싫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다른 부탁을 하는 수 밖에요.
하지만 훨씬 어려운 부탁이 될 거예요."

 장무기는 상대방이 심계가 깊고  매우 엉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어려운 문제를  내놓는다면 자기로선 더욱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내 낭자의  요구대로 도룡보도를 빌리러 가리다. 하지
만 사전에 말을 분명히 해 두겠소. 단 한 시진만 빌려 주는 것뿐
이오. 만약 보도를 강점할  생각을 한다면, 난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조민은 매우 기뻐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염려 마세요. 나는 칼을  사용하는 초식도 배우지 않았는데 그
렇게 무거운 칼을 빼앗아서 무엇에 쓰겠어요. 틀림없이 공손하게
돌려드릴 것을 약속하겠어요. 언제쯤 출발할 생각인가요?"

 "며칠 후에 바로 출발하겠소."

 "나도 빠를수록 좋아요. 나는  돌아가는 즉시 모든 떠날 채비를
갖추어 놓겠어요. 당신이 준비되는 대로 연락을 주세요."

 장무기는 안색이 변했다.

 "낭자도 함께 가겠단 말이오?"

 "물론이에요. 소문에 의하면  당신의 의부께선 고도에서 한사코
중원으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다는데, 이번에도 고집을 부리신
다면 당신이 불원천리 고도로 가서 보도를 갖고 와 나에게 한 시
진 동안 보여준 후, 다시  그 먼길을 무릅쓰고 보도를 돌려 주기
위해 다시 떠나야 하잖아요? 그건 너무 번거로운 일이에요."

 장무기는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다. 북해(北海)는
파도가 거세고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망망대해에서
과연 빙화도를 다시  찾아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는
데, 왕복을 하고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더
군다나 의부께서  끝까지 중원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고집하시
면, 자기가 보도만 갖고  중원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문제점이 많
았다.

 "낭자, 바다에는 풍랑이 거세고  언제 무슨 위험이 닥칠지 모르
는데, 구태여 그런 무리를 할 필요가 있겠소?"

 조민은 입을 삐쭉거렸다.

 "당신이 위험을 무릅쓸 수 있다면, 나 역시 못할 게 없죠."

 장무기는 다소 망설여졌다.

 "영존께서 과연 허락하시겠소?"

 "아버님은 나더러 강호의 호객들을 통솔하라고 하셨어요. 요 몇
년 동안 내가 어디를 가도 한번도 참견한 적이 없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창 밖에 붉은 불빛이 비치며 멀
리서부터 왁자지껄한 고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맙소사! 만안사 보탑에 불이 났어요. 고대사! 고대사! 어서 이
리 와 보세요!"

 그녀는 연방 불렀으나  고대사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미
혼자서 떠난 게 분명했다.

 장무기는 불길이 거센 것을 보고, 공력이 회복되지 않은 송사백
등의 안위가 염려되어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낭자, 난 먼저 실례해야겠소!"

 말을 내뱉기 무섭게 밖으로 몸을 날렸다.

 조민이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잠깐만! 함께 가요!"

 그녀는 주막 밖으로 뛰쳐나갔으나 장무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녹장객은 고두타가  군주와 함께 떠난 후,  즉시 보탑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곳은 불상과 경전, 사리 등 귀중한 물건을 모셔놓은
성역인지라, 아무나 함부로 들락거릴 수 없었다. 그는 제자인 오
왕아보에게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도록 신신당부를 해 놓고 나서
문을 잠그어 걸고 봇짐을  풀어 한씨를 내려놓았다. 한씨는 겁에
질려 안색이 창백했다. 녹장객은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부드럽
게 말했다.

 "이제는 두려워할 것 없다. 앞으로 넌 좋으나 싫으나 내 시중을
들어줘야 할 것이다. 나 역시 너를 섭섭하게 대하진 않을 거야."

 그는 한씨의 몸을 감싼  이불을 풀었다. 웬지 모르게 손이 떨렸
다. 여지껏 숱한 계집을 데리고 놀았지만, 이번처럼 가슴이 두근
거린 적은 없었다.

 한씨는 혈도가 찍혀  소리를 지를 수도 몸부림을  칠 수도 없었
다. 이 마두에게  걸려든 이상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해야만 했
다. 그녀는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이불이 벗겨지자 예상했던 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동
신(胴身)이 드러났다. 녹장객의 입에서 절로 나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백옥을 다듬어 놓은 듯한 완벽한 나신이었다. 나신 위로
녹장객의 뜨거운 눈길이 훑고 지나갔다. 녹장객의 눈에서 급기야
원시적인 불길이 피어올라, 한씨의 나신을 불태우듯 이글거렸다.
한씨는 눈을 감은 채  상대방의 거칠은 숨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가 있었다. 곧이어 뱀에게 물린  듯 그녀의 알몸이 한 차례 움찔
했다. 녹장객의 손길이 금단의 문을 여는 첫 신호를 울렸다.

 서늘한 느낌이 한씨의  목덜미에 잠시 머물다가, 둥그스름한 어
깨로 흘러내렸다.  한씨의 귓전에 뜨거운 입김이  와 닿았다. 그
입김은 그림자처럼  손길을 쫓았다. 그러나  탐닉의 손길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녹장객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씨의 몸에 이불을 덮
어 주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제자에게 다시 한 번 아무도 얼
씬 못하게 일러두고 나서 보탑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그 나름대
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욕심을 채우는 일을 뒤로 미룬 것이다.

 '이번 일은 고두타가 비밀을  지켜줘야 하니, 그가 원하는 일을
마무리지어야겠다. 어젯밤에도 그 마교의 교주 녀석이 주 낭자를
구해 가려 했으니, 멸절사태와  그 계집이 함께 사라지면 군주는
우선 그 녀석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녀석의 무공이 워낙 고강하
니, 군주도 우리가 경계를 소홀히 했다고 나무라진 못할 거다.'

 아미파의 여제자들은 모두  보탑 칠층에 갇혀 있었다. 멸절사태
는 일파의 장문인이니 만치 따로 작은 독실에 감금돼 있었다. 녹
장객은 문을 열게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멸절사태는 여러 날
동안 단식을 해왔기 때문에,  모습이 매우 초췌하여 더욱 꼬장꼬
장해 보였다. 녹장객이 점잔을 빼고 입을 열었다.

 "멸절사태, 기분이 어떻소?"

 멸절사태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기분이 어떻다고 대답하길 원하느냐?"

 녹장객은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고집불통이니, 어떻게  살아남길 원할 수 있겠소? 정말
딱하구료."

 "여러 소리할 필요없다. 아마  날 죽이러 온 모양인데, 내 스스
로 목숨을 끊을  테니 비수를 갖다 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청이 있다. 나의 제자인 주지약을 불러줬으면 고맙겠다. 그
애한테 몇 마디 당부할 말이 있다."

 녹장객은 그녀의 청을 들어주기로 하고, 밖으로 나가 사람을 시
켜 주지약을 데려오게 했다.

 '음..... 역시 모녀의 정은 피만큼이나 짙군. 이미 죽을 각오가
돼 있는 상황에서 수제자를 부르지 않고 주지약을 부르니.....'

 주지약은 스승님을 보자마자 품안으로 뛰어들며 흐느꼈다. 멸절
사태는 정색을 하고 녹장객에게 말했다.

 "이 애와 단둘이  얘기를 하고 싶으니, 잠깐  자리를 비켜 주겠
소?"

 녹장객이 밖으로 나가자  멸절사태는 주지약의 고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러나  이내 엄숙한 표정을
회복했다.

 주지약은 어젯밤 장무기가 나타나  자기를 구해 주려 했던 일을
대충 얘기해 주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멸절사태는 눈살을 찌푸
린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그가 왜 유독 너만  구하려고 했을까? 그날 너는 광명정안에서
그에게 일검을 찔렀는데, 무엇  때문에 오히려 너를 구하려고 했
지?"

 주지약은 양볼이 약간 붉어지며  고개를 떨군 채 나직이 대답했
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멸절사태는 냉소를 날렸다.

 "흥! 그  녀석은 너무 음험하고 독랄해.  틀림없이 무슨 무서운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주지약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별다른 흉계가 없는 것 같아요."

 멸절사태는 버럭 화를 냈다.

 "닥쳐라! 너도 기효부와  마찬가지로 마교의 음도(淫徒)에게 마
음을 빼앗긴 게 아니냐!"

 주지약은 놀란 나머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니에요. 제자가 어찌 감히....."

 멸절사태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엄숙했다.

 "정녕 너의 마음이 바위처럼  확고하다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를 해라."

 주지약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으나 어떻게 맹세를 해야 좋을
지 몰랐다. 그러자 멸절사태가 한 자 한 자 뚜렷하게 내뱉었다.

 "이렇게 맹세를 해라. 나 주지약은 하늘에 두고 맹세컨데, 앞으
로 만약  마교의 교주인 장무기 음도에게  마음을 주거나 부부의
연을 맺는다면, 구천에 계신  부모님의 시신이 편안을 얻지 못할
것이며, 나의 스승인 멸절사태도 필시 죽어 귀신이 되어 평생 동
안 나를 따라다니며 저주할 것입니다."

 주지약은 크게 놀랐다. 그녀는 천성이 온순하여 이런 독랄한 저
주가 담긴 맹세 따위는 아예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그러나 스승
님이 형형한 눈빛으로 무섭게 자기를 노려보자,  절로 머리가 어
지러워지며 그대로 맹세를 따라 했다.

 멸절사태는 맹세를 마치자 무섭게 굳어졌던 안색이 풀리며 부드
럽게 말했다.

 "얘야, 내가 일부러 너를 위협하는 게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너
를 진심으로 위하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기효부의 전철을 밟는
다면, 내 어찌 구천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겠느냐? 더군다나 나는
너에게 본파를 중흥시킬 중임을  맡겨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왼손  식지에 끼고 있는 구리반지를 빼내
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숙연하게 말했다.

 "아미파 여제자 주지약은 무릎을 꿇고 문중의 유시를 받들라."

 이렇게 말한 그녀는 반지를 높이 쳐들고 힘주어 다음 말을 이었
다.

 "아미파 제 사대  장문 제자 멸절이, 본교  장문인의 직책을 제
사대 여제자인 주지약에게 전승시키는 바입니다."

 주지약은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어지러웠던 차에 자기에게 장문
인의 자리를 전승시키겠다는 말을  듣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넋
을 잃고 말았다.

 멸절사태는 뚜렷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주지약은  본문 장문인을  상징하는 아미철지환(峨嵋鐵指環)을
받도록 해라. 어서 왼손을 내밀어라."

 주지약은 얼이 빠진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왼손을 내밀자, 멸절
사태가 반지를 그녀의 식지에 끼워 주었다.

 주지약은 비로소 제정신을 되찾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스승님, 제자는 나이도  어린데다가 입문도 늦거늘, 어떻게 이
런 중책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스승님께선 필시 이번 위기를 모
면할 수 있을 겁니다. 제발 분부를 거두어 주십시오!"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스승님의 다리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렸
다.

 녹장객은 밖에서 기다리다  못해 짜증이 났다. 게다가 울음소리
가 들리자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이봐요! 얘기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소? 앞으로 얼마든지 시간
이 있으니 할 얘기가 있으면 나중에 하도록 하시오."

 멸절사태는 대뜸 호통을 쳤다.

 "입 좀 다물지 못하겠느냐?"

 이어 주지약에게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네가 감히 스승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주지약은 스승님의 악에 받친 모습을 보자 덜컥 겁이 났다.

 "제자는 절대.....!"

 멸절사태의 표정은 더욱무섭게 변해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네가 내 말을 거역하다면, 그것은 문규에서 가장 큰 금기인 기
사멸조(欺師滅祖)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주지약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멸절사태는 그녀의 가냘픈 모습에서 연민의 정을 느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난 후, 이 온순하고 연약한 애가 어떻게 문중의 중임을
이끌어 갈 것인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하
고 아미파 제자 중에  장문인의 자리를 계승할 만한 인물이 없었
다. 주지약은 오성(悟性)이 가장  높아 자신도 터득 못한 문중비
학을 연성할 수 있는 유일한 적격자였다. 그러나 그 위업을 달성
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될 것이다. 멸절사태는
웬지 콧등이 시큰해지며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품안에 껴안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지약아, 내가 너에게 장문 자리를 물려 주는 것은 여러 사저들
보다 너를 편애하기 때문이  아니다. 문중 제자들 중에서 너만이
무림 군웅을 능가하는 절세무학을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약은 고개를 세차게 내둘렀다.

 "제자가 앞으로 열심히 무공을 연마한들, 어찌 사저들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멸절사태의 입가에 한 가닥의 교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들의 자질은 한계가 있다. 지금 이미 한계에 도달해 더 이상
의 진전을 바라보기가 어렵다.  반면 너는 비록 현재로선 그들과
비교해 뒤떨어지지만, 앞날이 무궁무진하다. 그래! 무궁무진하고
말고!"

 주지약은 이해가 가지 않아 그저 망연히 스승님을 쳐다보았다.

 멸절사태는 갑자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나직하게 말했
다.

 "너는 이제 본문의 장문인이니,  내가 본문의 한가지 커다란 비
밀을 얘기해 주마.  본문의 창파시조이신 곽여협은, 바로 왕년의
천하제일 대협이라 일컬어지던  곽정의 작은 따님이었다. 곽정대
협이 당시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두 가지 병법(兵法)이
며, 또 하나가  무공이었다. 곽대협의 부인이신 황용여협은 누구
보다도 지혜가 뛰어나 원병(元兵)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커져 양
양(襄陽)을 고수할 수 없음을 알고 죽음으로서 보국(報國)하기로
뜻을 굳혔단다. 그러나 곽대협의  절예가 실전되는 게 아까와 천
하에서 으뜸가는 장인(庄人)을 모셔와 양과(楊過) 양대협이 본문
사조께 주신 한 자루의 현철중검(玄鐵重劍)을 녹여, 다시 십방정
금(十方精金)을 혼합해 도룡도와 의천검을 만들었단다."

 주지약은 도룡도와 의천검의 소문을 많이 들어왔지만, 이제서야
그 한 쌍의 도검이  바로 본문 사조이신 곽양여협의 생모께서 만
든 신병이기(神兵利器)임을 알았다.

 멸절사태의 말이 계속됐다.

 "황여협은 도검을 만들기 앞서, 곽대협과 심혈을 기울여 병법과
무공의 정요(精要)를  각각 도검 속에다  숨겨 두었다. 도룡도에
병법이 숨겨져 있으며  그 이름을 도룡(屠龍)이라 명명했던 것도
용(龍), 즉 황제를 죽일 수 있다는 뜻이다. 훗날 그 속에 숨겨진
병법을 수중에 넣는 자가  몽고 오랑캐의 황제를 죽여 천하를 얻
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천검에 숨겨진  무학 중에 가장
걸출한 것은 구음신경(九陰身經)과 항마십팔장(降魔十八掌)의 장
법으로서, 후인이 그 무학을 터득하면 천하 무림을 호령할 수 있
다고 하셨다.

 주지약은 들을수록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거짓말 같은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멸절사태의 입에서 계속 엄청난 비밀이 이어졌
다.

 "곽대협 부부는 한 쌍의  도검을 완성한 후 보도를 아들인 곽공
(郭公) 파로(破虜)에게 주었고, 보검을 본파의 곽조사께 주었다.
물론 곽사조께선 부모님으로부터 무공을 전수받은 바 있었고, 곽
공도 역시 병법을 전수받았다.  그런데 곽대협 부부와 곽공 파로
는 양양성이 무너지는 날  함께 순국을 하셨다. 곽사조의 성품은
부친의 무학과 맞지 않아  나름대로 많이 변형시켰기 때문에, 본
문의 무학이 왕년 곽대협의 무학과 같지 않는 것이다."

 주지약은 그저 스승님의 얘기에  넋을 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멸절사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백 년 동안 무림에 많은  풍파가 생겨 그 한 쌍의 도검의 주인
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후진들은  단지 도룡도가 무림지존이며
의천검만이 필적할 수 있다는  것만 알 뿐, 어째서 무림지존인지
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곽공 파로께서 순국하실 당시 나이가 젊
어 전인이 없었다. 그래서  도검의 비밀은 단지 본문의 곽사조를
통하여 전해져 내려왔을 뿐이다. 그 어르신네는 생전에 도룡도의
행방을 찾는데 전력을  기울였지만, 결과를 거두지 못하셨다. 세
상을 떠나기  앞서 그 비밀을  나의 은사이셨던 풍릉사태(風陵師
太)께만 비밀리에 구전해 주었으며, 나의 은사 역시 곽사조의 유
명에 따라 백방으로 도룡도의 행방을 찾았으니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은사가 돌아가시자 내가  그 유지를 이어받게 되었다. 내
가 장문직을 맡은 지 얼마 후에, 너의 사백이신 고홍자가 마교의
젊은 고수와 원한을 맺게 되어 쌍방이 단둘이서 생사결단을 내기
로 약정했다. 너의 사백은 상대방이 비록 나이는 젊지만, 무공이
고강하다는 것을 알고 나에게서 의천검을 빌려 갔었다....."

 주지약은 마교의 젊은  고수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당시 장무기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멸절사태는 쉬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이제 밖에서 기다리고 있
는 녹장객도 재촉을 하지 않았다.

 "당시 그 싸움에서 너의 사백은 상대방의 간계에 걸려들어 가슴
에 일장을 맞고, 의천검을 뽑기도 전에 그 마두에게 빼앗기고 말
았다. 네 사백의 말을  빌리면, 그 마두는 광소를 터뜨리면서 의
천검 따위는 자기 눈에 한낱 녹슬은 쇠붙이에 불과하다면서 땅에
팽개치고 유유히 떠나갔다는 거다.  너의 사백은 검을 주워 문중
으로 돌아와 나에게 돌려주려  했는데, 워낙 자존심이 강한 위인
이라 생각할수록 분이 끓어올라  사흘 뒤에 그만 중병을 알아 일
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의천검은 그 고을 관리에 의해 조정
에 바쳐지게 되었다. 너의  사백이신 고홍자를 개죽음 당하게 한
그 마교의 악도가 누구인지 아느냐?"

 "모.....모릅니다."

 "바로 그  나중에 너의 기효부 사저를  죽음의 궁지로 몰아넣은
대마두 양소란다! 그 놈만 아니었더라면....."

 멸절사태는 이를 갈아부치며 다음 말을 이었다.

 "나중에 오랑캐 황제가 그 의천검을 여양왕에게 시사한 것을 내
가 여양부로 가서 빼앗아  왔는데, 이번에 불행하게도 간계에 걸
려들어 다시 마교 손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주지약은 자신도 모르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게 아니라 여양왕부의 조 낭자가 빼앗아간 거예요."

 멸절사태는 대뜸 눈을 부라렸다.

 "그 계집이 바로 마교의  교주와 한 패거리다. 너는 지금까지도
이 스승의 말을 믿지 못하겠느냐?"

 주지약은 믿기  어려웠으나 감히 스승님께 말을  할 수 없었다.
멸절사태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내가 너에게  장문직을 계승시킨데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난 아무래도 살아서 이 탑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그
장무기라는 음도는 너에게 엉뚱한 속셈을 품고 있기 때문에 절대
해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에게 거짓으로 정을 주는 척하면서
의천검을 빼앗아  와라. 그 도룡도도 그놈  의부 손에 있으므로,
네가 미색으로 유혹하면 수중에  넣는 일이 결코 어렵지 않을 것
이다. 물론 그것은 협의도에  사람이 할 짓이 못 되지만, 대(大)
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도리밖에 없다. 너도 생각해 보면 알
겠지만, 지금 그 조민이란  계집이 의천검을 갖고 있으며 도룡도
는 아직 사손의 손에 있으니, 그들이 의기투합하여 손을 잡는 날
에는 곽대협이 남긴 병법과 무공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생명을 잃게 될 것이며,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괴될 것인지 능히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군다나 몽고 오랑캐를  중원에서 몰아내는 대업은 영영 달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약아, 나도 이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모
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기필코 이
일을 성사시켜야만 한다.  지약아, 내가 천하의 백성들을 대신하
여 너에게 부탁하는 바이다."

 여기까지 말한  멸절사태는 갑자기  주지약에게 무릎을 꿇었다.
주지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도 황급히 무릎을 꿇고 소리쳤
다.

 "스승님, 이러시면.....!"

 "조용히 해라.  밖에 있는 악적이 들으면  큰일난다. 내 부탁을
들어줄 것이냐? 만약 들어주지  않는다면 난 일어나지 않을 것이
다!"

 주지약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장무기에게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라더니, 다시 자기더
러 장문직을 맡으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자기에게 미색으로 장무
기를 유혹해 도룡도와 의천검을 빼앗아오라고 하지 않는가! 주지
약은 한꺼번에 쏟아진 부담을 도저히 견뎌 낼 수 없어 머리가 어
지러워지며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갑자기 그녀는 인중혈에 극심한 아픔을 느끼며 눈을 번쩍 떴다.
스승님이 여전히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자 주지약
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스승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멸절사태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다그치듯 물었다.

 "그럼 나의 부탁을 승락하겠다는 거냐?"

 주지약은 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다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멸절사태는 대뜸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도룡도와 의천검을 수중에 넣은 후, 은밀한 장소를 찾아 한 손
에 보도를 한 손에  보검을 쥐고 내력을 끌어올려 도검을 맞부딪
치면 도검이 동시에 부러질 것이다. 그럼 도신과 검신 속에 숨겨
져 있는 비급을 취할 수 있다. 그것이 비급을 취할 수 있는 유일
한 방법이다. 보도와 보검은  그로서 파괴되어 다시는 세상에 존
재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똑똑히 기억하겠느냐?"

 그녀의 음성은 비록 나직했으니, 지극한 위엄이 담겨 있어 주지
약은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멸절사태가 다시 말했다.

 "이것은 본문의 가장 큰 비밀이다. 앞으로도 너의 뒤를 이을 본
문의 장문인만이 이  비밀을 알 수 있다.  그 도룡도와 의천검은
모두가 탐내는 신병이기이니 만치,  설령 누가 동시에 수중에 넣
었다 해도 파괴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너는 병법을 얻은
후, 천성이  착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투철한 지사(志士)를
선택해 병법을 전수해 주어 그로 하여금 몽고 오랑캐를 몰아내는
위업을 달성토록 하여라.  그리고 무공비급을 네가 연마해라. 항
룡십팔장은 순양강맹(純陽剛盟)한 무공이니  네가 연마하기엔 어
렵겠지만, 구음진경은 충분히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곽사조께
서 나의 은사께 남긴  유언에 의하면, 구음진경의 무학은 심오하
고 광대무변하여 원래는 속성할  수 없지만, 황여협께서 몇 가지
속성의 방법을 적어 놓았다고  한다. 물론 그 속성책은 임시변통
에 불과하며  진정 천하무적의  무학을 이룩하려면 기초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려야 한다. 이 점 각별히 유의하도록 해라."

 주지약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멸절사태는 길게 숨을 들
이켰다.

 "나는 평생 두 가지 소원밖에 없었다. 첫째는 몽고 오랑캐를 몰
아내 우리 한인의 산하(山河)를  되찾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미
파의 무학이 소림, 무당을 능가해 중원 무림의 제일 문파가 되는
것이다. 나의 소원은 달성하기  어렵지만, 이제 한 가지 길이 뚫
렸다. 네가 나의 분부에 따라 움직여만 준다면 언젠가는 그 두가
지 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쯤 나는 구천에서도 눈물
을 흘리며 너에게 감사를 할 것이다."

 그녀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멸절사태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했다.

 "이젠 들어와도 좋다."

 곧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여왔는데 녹장객이 아닌 고두타였
다. 멸절사태는 그들이 모두 한통속이므로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
지 않았다.

 "어서 이 얘를 데려가라."

 그녀는 주지약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결하고 싶지 않았다. 주지
약이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고두타는 가까이 걸어와 나직하게 말했다.

 "이것은 해약이니  어서 복용하시오. 잠시  후 밖에서 소리치면
모두들 일제히 달려나와 생사결단을 냅시다."

 멸절사태는 비로소 이상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귀하는 대관절 누군데 나에게 해약을 주는 거요?"

 고두타는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나는 명교의 광명우사 범요라 하오. 놈들에게서 해약을 훔쳐왔
으니 어서 복용하시오."

 멸절사태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난 음성으로 호통을
쳤다.

 "마교의 악도! 끝까지 나를 희롱하려 하느냐!"

 범요는 히죽 웃었다.

 "좋소. 내가 희롱했다고  합시다. 이것도 독약이니 배짱이 있다
면 당장 복용해 보시오. 한 시진 이내에 오장육부가 토막토막 끊
어져 비참하게 죽을 테니!"

 멸절사태는 아무 말 없이 가루약을 받아 입 안에 털어넣었다.

 주지약은 소리쳤다.

 "스승님!"

 범요는 황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조용히 하라. 자, 너도 어서 독약을 복용해라."

 주지약이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겨를도 없이 범요는 그녀의 양쪽
아관혈을 눌러 입을 강제로 벌리게 만들더니, 가루약을 쏟아넣고
는 옆에 있는 물병을 집어  다시 물을 몇 모금 마시게 만들었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억지로 약을 복용시키고 말았다.

 멸절사태는 화들짝 놀랐다.  주지약이 죽으면 자신의 모든 계획
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녀는 사력을 다해 범요에게 덮쳐가
며 일장을 후려쳐 냈다.  그러나 공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무
모한 행동에 불과했다. 범요가 살짝 밀자 그녀는 담벽에 쿵 하고
등을 부딪치며 쓰러졌다.

 범요가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림과 무당의 제자들도 모두  내가 준 독약을 복용했으니, 결
과가 흉인지 복인지는 잠시 후에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그는 껄껄 웃으며 밖으로 나가더니 문을 닫았다.

 범요는 주막 밖에서 기다리지  않고 곧장 만안사로 달려온 것이
다. 그가 보탑 꼭대기에 오르자  문 밖에 서 있던 오왕아보가 공
손하게 그를 맞이했다.

 "고대사, 이제 돌아오십니까?"

 범요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웃음이 나왔다.

 '빌어먹을, 제자더러 망을 보라 하고 늙은 것은 방 안에서 왕야
의 애첩과 한창  운우지락을 즐기고 있겠군. 이  틈을 이용해 방
안으로 뚫고 들어가 불의의 기습을 가해야지만 해약을 수중에 넣
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곧 구부정한 자세로  오왕아보의 곁을 지나면서 갑자기 지
풍을 날려 그의 아랫배 혈도를 찍었다. 불의의 기습이었다. 설령
오왕아보가 경계를 하고 있었다  해도, 그의 지풍을 피하진 못했
다. 혈도가 찍힌 오왕아보는 이내 몸이 굳어지며 크게 의아해 했
다.

 그 순간 범요는 문을 밀고 들어가 다짜고짜 침상을 향해 쌍장을
떨쳐냈다. 그는 녹장객의 무공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일격에 치명
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 자신들의 계획이 틀어질 것이라 생각
했다. 그래서 이 일격에 십성의 공력을 주입시켰다.

 팍!

 그의 쌍장이 적중된 곳에  이불이 파열돼 솜이 흩날리며 회오리
바람이 일었다. 그는 얼른 이불을 젖혔다. 그러자 한씨만 알몸인
채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을 뿐 녹장객의 모습은 보이
지 않았다.

 범요는 잽싸게 오왕아보를 끌고 와 침상 밑에 쑤셔넣고 문을 닫
자마자, 밖에서 녹장객의 성난 음성이 들려왔다.

 "아보! 아보! 녀석이 대관절 어디로 갔지?"

 녹장객은 멸절사태가  감금돼 있는 방  밖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주지약이 나오지 않자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해서 고두타를 생
각해 감히 거칠은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한씨가
염려되고 또한 그녀를 빨리  품안에 안고 싶은 욕심에 다시 보탑
위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오왕아보가 보이지 않자 혼자 투
덜거리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나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씨는 여전히 이불을 덮은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녹장객은 우선 방문을 안에서  잠그어 걸고 침상 앞으로 다가와
음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귀여운 것아, 이젠 혈도를 풀어  줄 테니 소리를 지르면 안 된
다."

 이렇게 말하며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한데 그의 손이
한씨의 등에 닿자마자 돌연 손목이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전신
에 힘이 쭉 빠졌다. 다음 순간 이불이 젖혀지며 머리카락이 치렁
치렁한 자가 불쑥 일어났다. 바로 고두타였다.

 범요는 녹장객의 맥문을  이미 나꿔잡은 상태에서, 왼손으로 지
풍을 날려 연거푸 열 아홉 군데의 혈도를 찍었다.

 녹장객은 뼈마디가 녹아내리듯 흐물흐물 그 자리에 쓰러져 꼼짝
도 할 수 없었다. 대신 그의 눈에는 분노의 빛이 이글거렸다.

 범요는 비로소 그에게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밝혔다.

 "노부는 명교의 광명우사 범요다. 오늘 떳떳하지 못한 수단으로
너를 제압했으니, 죽이지는  않겠다. 억울하면 나중에 날 찾아와
라, 언제든지 너의 도전을 받아 주겠다."

 그는 곧 녹장객의 옷을 벗겨 한씨의 시체 위에 포개놓고 짖굿게
웃으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어 해약을 갖고 각  감옥으로 찾아가 공문대사, 송원교, 유연
주 등에게 복용시켰다. 맨  마지막으로 멸절사태의 방에 들려 상
대방이 해약임을  믿으려 하지 않자 아예  독약이라고 위협을 한
것이다.

 이제 모든 사람에게 해약을 나누어 주고 스스로 득의해 있는데,
갑자기 보탑 아래서 왁자지껄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에서
가장 뚜렷한 고함은 학필옹이었다.

 "저 두타는 첩자다. 어서 놈을 잡아라!"

 범요는 내심 산통이 깨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젠장, 누가 저 녀석을 구해 줬지?'

 보탑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미 무사들이 새까맣게 깔려 탑 주위
를 완전히 포위한 상태였다.  그 중에는 손삼훼와 이사최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욕설을 터뜨렸다.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두타야! 이젠 네 놈이 당할 차례다!"

 혈도가 찍힌 그들 세  사람은 운이 좋았다고 봐야만 했다. 여양
왕부에서 보내온 병사들은  만안사를 모두 뒤졌으나 한씨를 찾아
내지 못하자, 한 사람이  문득 녹장객의 엽색행각이 상기되어 다
시 그가 기거하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감히 섣불리 접근
하지 못하고 한  졸개를 시켜 문을 두드리게  했다. 혹시 군주가
들리지 않았느냐는  핑계를 떨 심산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학필옹 등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학필옹은 혈도가 풀리자마자 고두타의 행방을 물어 즉시 무사들
을 이끌고 보탑을 포위한 것이다.

 '빌어먹을! 화상 등이  해약을 복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공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인, 지금으로선 시간을 끄는 도리밖에
없군.'

 그는 곧 녹장객과 한씨를 함께 이불에 싸서 들고와 높이 쳐들며
소리를 질렀다.

 "학필 늙은이야! 네가  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다면 당장 이
년놈들을 아래로 던져 버리겠다!"

 무사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으므로, 주위가 대낮처럼 밝았
다. 물론 보탑 꼭대기까지  그 불빛이 미치지 못했으나 학필옹은
녹장객과 한씨의 모습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

 학필옹은 질겁을 하며 소리쳤다.

 "사형! 사형! 별고 없소?"

 그가 몇 번 외쳤지만, 녹장객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고두타의
손에 죽은 걸로 생각했다.

 "고두타! 네놈이 나의 사형을 죽였다면, 목숨을 걸고 네놈과 생
사결단을 내겠다!"

 범요는 동시에 녹장객의  아혈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녹장객은
대뜸 욕설을 터뜨렸다.

 "학필, 늙은이,  너의 사형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왕야의 애첩을 납치해 왔다.  그래서 내가 그들이 놀아나는 현장
을 덮쳐 모두 사로잡은 것이다. 그래도 네놈은 사형을 두둔할 작
정이냐? 총관대인, 어서 저 늙은이를 체포하시오! 그들 사형제는
반모를 꾀하려 했으니, 체포하면  왕야께서 후한 상을 내릴 것이
오!"

 총관은 곁눈질로  학필옹을 쳐다보았다.  고두타가 갑자기 입을
연 것에 대해 이상하게  느껴졌으나, 녹장객과 한씨가 알몸인 채
같이 이불에 싸여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학필옹에게 출수를 할
순 없었다. 그는 엉거주춤하다가 탑 위를 향해 소리쳤다.

 "고대사, 어서 내려오시오. 우리 함께 왕야에게 가서 시비를 가
립시다!"

 범요는 원래 겁이 없었다. 지금 함총관, 학필옹 등과 왕부로 가
서 시비를 가린다면 그  동안 군호들의 공력이 충분히 회복될 것
이라 생각했다.

 "좋소이다. 이번 기회에 나도 왕야께 후한 상을 받아야겠소. 총
관대인, 그 늙은이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단단히 지켜 주시오."

 바로 이때였다. 홀연 요란한 말굽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인마가
질풍처럼 보탑  앞으로 달려왔다. 주위에  있는 무사들은 일제히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터주며 공손히 몸을 꺾었다.

 "소왕야!"

 뜻밖에도 여양왕의 세자인  고고특목이가 고수들을 이끌고 나타
난 것이다.

 고고특목이, 즉 왕보보는 냉랭하게 다그쳤다.

 "납치자는 대관절 누구냐?  부왕께서 노발대발하시기에 내가 친
히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달려왔다."

 총관이 얼른 앞으로 다가가 아뢰었다.

 "녹장객이 한 부인을 납치해  왔는데, 지금 고대사께서 사로 잡
았습니다."

 옆에 있는 학필옹이 황급히 변명을 했다.

 "소왕야! 그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입니다. 고두타는 적의 첩자
로서 사형은 그의 음모에 걸려....."

 왕보보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소리쳤다.

 "고대사와 녹장객더러 모두 내려와 진상을 밝히라고 해라!"

 범요는 왕부에서  오랫 동안 머물며  왕보보의 영특함이 부친에
못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탑 아래로 내려가면 자
신의 모든 모략이 금방 탄로날 게 뻔했다.

 "소왕야, 제가 녹장객의  음계를 파헤쳤기 때문에, 만약 아래로
내려가면 학필옹이 틀림없이 날 죽이려 할 겁니다!"

 범요는 여전히 시간을  끄는 원칙을 고수했다. 군호들이 공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왕보보는 막무가내였다.

 "어서 내려오시오! 학필옹이 절대 당신에게 공격을 취하지 못할
것이오!"

 범요는 고개를 내두르며 다시 소리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이곳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것 같습니
다. 소왕야, 나는 여지껏  벙어리 행세를 해 왔지만 오늘 왕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부득이 입을 열게 되었소!  내 말을 정녕
믿지 못하겠다면  당장 아래로 뛰어내려 죽음으로서 진심으로 증
명해 드리겠소!"

 왕보보는 그의  허황된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가
일부러 시간을 끌려 한다는  것도 눈치챘다. 왕보보는 곧 나직이
총관에게 물었다.

 "저 자가 무슨 속셈으로 시간을 끄는지 알고 있소?"

 총관은 망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둘렀다.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학필옹이 얼른 끼어들었다.

 "소왕야, 놈은 나의 사형에게서  해약을 빼앗아 탑에 갇혀 있는
역도들을 구해 주려는 속셈이 분명합니다."

 왕보보는 이내 짚이는 바가 있어 시치미를 떼고 보탑 위를 향해
소리쳤다.

 "고대사, 당신의 공로를 잘  알고 있으니, 어서 내려오시오. 후
한 상을 내리겠소."

 범요는 그의 말을 따를 리가 만무했다.

 "소왕야, 나는 녹장객과  싸우다가 다리가 부러졌소. 지금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운공료상을 한 후에 내
려가겠소."

 왕보보는 즉시 총관에게 명령했다.

 "총관, 어서 사람을 탑 위로 올려 보내 고대사를 업고 내려오라
하시오!"

 범요는 그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안 됩니다! 지금 상태에서 누가 내 몸을 건드리기만 하면 다리
를 영원히 못 쓰게 될 겁니다!"

 왕보보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한씨와 녹장객이
함께 이불에 싸여  있는 것을 보자 설령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해도, 부왕께서  더 이상 한씨를 받아들이지 않
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곧 결단을 내렸다.

 "총관, 탑에다 불을  지르시오. 그리고 궁수들을 대비시키고 누
구를 막론하고 탑에서 뛰어내리면 사살토록 하시오."

 총관은 대답을 하고 즉시 명령을 내리자, 궁수들이 만반의 태세
를 갖추어 탑을 포위하고  일부 무사들은 불을 지르기 위해 분주
하게 움직였다.

 이렇게 되자 놀란 것은 학필옹이었다.

 "소왕야, 나의 사형이 탑 위에 살아 있습니다."

 왕보보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

 "고두타는 저 위에서 평생을  머물 수 없으니 불을 지르면 자연
히 내려올 것이오."

 "그가 만약 나의 사형을 아래도 던지면 어떻게 합니까? 소왕야,
절대 불을 지르면 안 됩니다."

 왕보보는 냉소를 날리며 그를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았다.

 삽시간에 무사들이 마른 장작과  짚단을 탑 주위에 잔뜩 쌓아올
려 기름을 붓고 불을 지폈다. 학필옹은 다급해져 이내 몸을 날려
불을 지피려는 무사들을 공격했다. 그러자 왕보보가 싸늘하게 외
쳤다.

 "감히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다니! 놈을 잡아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다섯 명의 홍의빈승이 일제히 계도(戒刀)
를 뽑아들고 학필옹을 포위했다.

 학필옹은 사형의  안위가 염려되고 극도로  분노한 나머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왼쪽에 있는 빈승의 계도를 나꿔
채 갔다. 그 빈승은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잽싸게 계도를  떨치며 오히려 학필옹의  어깨를 베어갔다. 그와
동시에 다른 빈승들도 일제히  공격을 전개했다. 이때 탑 주위에
거센 불길이 치솟아 오르며 삽시간에 불바다를 이루었다.

 왕보보의 부하들 중에 열  여덟 명의 무공 고수들이 있었다. 그
들은 모두 십팔금강(十八金剛)이라 일컬어지며 오도(五刀), 오검
(五劍), 사장(四杖), 사발(四拔)로 나누어졌다.

 이 다섯 명의 빈승은 오도금강(五刀金剛)이었다. 그들 개개인의
무공은 학필옹에  비해 차이가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합세하면
그 위력이 대단했다. 학필옹은  비록 무공이 고강하지만 하루 전
에 장무기에 의해 각혈을  하는 부상을 입어 내력이 크게 손상되
었다. 더군다나 불길이 거세질수록 사형의 안위가 염려되어 정신
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왕보보의 부하들은 계속 마른 장작을 던져 넣었다. 불길은 갈수
록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범요는 녹장객을 버려두고 무당파의 제자들이 갇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지금 탑이 불타고 있소! 여러분들은 공력이 회복되었소?"

 그가 소리쳤으나 송원교, 유연주 등은 제각기 가부좌를 틀고 앉
아 운공조식을 할 뿐,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공력이 회
복될 긴박한 상황에 도달해 있는 모양이었다.

 군협들을 지키고  있던 몇몇 무사들이  달려와 공격을 시도했으
나, 범요에 의해 모두 탑 아래로 내던져져 죽음을 당하거나 불길
을 뚫고 아래로 달아나 버렸다.

 얼마 후 불길이 사층으로 번졌다. 사층에 감금돼 있는 화산파의
고수들은 공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허겁지겁 오층으로
달아났다. 불길은 계속 위로 번져갔다. 오층에 있는 공동파의 사
람들도 피신해야만 했다.

 범요가 속수무책일 때 홀연 한 사람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범우사, 받으시오!"

 바로 위일소의 음성이었다.  범요는 크게 기뻐하며 소리가 들려
온 쪽을 바라보았다. 위일소가  만안사 후전 지붕위에 서서 기다
란 밧줄을 던져 주었다. 범요는 잽싸게 그것을 받았다. 위일소가
다시 외쳤다.

 "어서 밧줄을 난간에 묶어 구름다리로 삼으시오!"

 범요가 그의 말대로  밧줄을 묶자마자, 신전팔웅 중에 조일상이
화살을 날려 정확하게 밧줄을  끊어 버렸다. 범요와 위일소는 동
시에 욕을 터뜨렸으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구름다리를
놓으려면 우선 신전팔웅을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다.

 위일소는 즉시 장검을 뽑아쥐고 몸을 날렸다. 그가 땅에 떨어지
자마자 다섯 명의 청의빈승이 검을 들고 포위해 왔다. 그들은 바
로 왕보보의 부하 중에  오도금강이었다. 다섯 명은 날카롭게 장
검을 떨치며 위일소를 협공했다.

 학필옹은 고전을 하며 다시 소리쳤다.

 "소왕야, 어서 불을 끄라고 명령하지 않으면, 나도 마지막 수단
을 쓰는 도리밖에 없소!"

 왕보보는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손에 선장을 쥔 네 명의
빈승이 즉시 왕보보를 에워쌌다.

 학필옹은 초조해졌다. 그는 쌍방을 떨쳐 앞쪽에 있는 빈승 셋을
물리치더니, 진기를 끌어올려 담 앞으로 몸을 날렸다. 다섯 명의
빈승이 그림자처럼 그를 쫓아왔다. 학필옹은 지체하지 않고 재차
몸을 솟구쳐 보탑 일층 지붕  위로 올랐다. 다섯 명의 빈승은 불
길이 너무 거세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학필옹은 단숨에 보탑 사층까지 올라갔다. 그 순간 범요가 칠층
에서 빠끔히 고개를 내밀어 그를 확인하더니 녹장객의 몸을 다시
번쩍 들어올렸다.

 "학필 늙은이, 더 이상 접근해 오면 한 사람이 핏덩어리로 변하
게 될 것이다!"

 학필옹은 과연 더 이상 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소리를 질렀다.

 "고대사, 우린  당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소.  정녕 당신의 정인
멸절사태와 딸 주 낭자를 구할 생각에서 그런다면 마음놓고 가서
구하시오. 난 절대 방해를 하지 않을 것이오!"

 멸절사태는 고두타가 준 해약이 정말 독약인 줄 알고, 주지약마
저 죽게 됐다고 생각하며  절망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고두타와 학필옹이 입씨름을 벌리고, 왕보보가 탑에 불을 지르도
록 명령하는 것을 똑똑히 듣고는 내심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귀신같이 생긴 두타가 정말로 나를 구하려 왔단 말인가?'

 그녀는 공력을 끌어올려 보니, 즉시 단전으로부터 한 갈래의 뜨
거운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이레동안 단식을 해  왔기 때문에, 뱃속이 텅텅 비어 약
력이 다른 사람보다 빨리 흡수되었다. 게다가 원래 송원교, 하태
충 등보다 공력이 심후해  그 사이에 공력이 절반 이상 회복되었
다.

 그녀가 운공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홀연 학필옹이 자기가 고
두타의 정인이고 주지약이 딸이라고 하는 말을 듣자 화가 머리끝
까지 치밀어 대뜸 밖으로 뛰쳐나가 호통을 쳤다.

 "이런 천벌을 받을 악적아, 지금 무슨 잠꼬대를 하는 거냐?"

 학필옹은 자세한 내막을 모르므로 한 술 더 떠 멸절사태에게 통
사정을 했다.

 "노사태, 제발 당신의 옛 정인을 설득해 우선 나의 사형을 놓아
주도록 해주시오. 그러면 당신네  세 식구가 무사히 이곳에서 떠
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소. 약속을 하리다."

 멸절사태는 더욱 오장육부가 터질 것 같았다.

 "뭐.....뭣이라고? 세 식구.....?"

 범요는 비록 위경에  처해 있었지만, 멸절사태가 발끈하여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자 매우 통쾌해 하며 광소를 날렸다.

 "노사태, 학필 늙은이는 당신이 나의 옛 정인이며 주 낭자가 우
리 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고  하니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
오?"

 멸절사태는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녀가 다시 호통을 치
려는데, 갑자기 탑 아래서 고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순간 불길
속에서 한 줄기의  인영이 종횡무진으로 번뜩이는 가운데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빈승이나 무사나  할 것이 없이 분분히 무기를 떨
어뜨리며 뒤로  밀러났다. 명교의 교주  장무기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장무기가 출수하자 위일소를 협공하던 오도금강의 장검이, 일제
히 허공으로 날았다. 위일소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장무기의 곁
으로 몸을 번뜩여 나직이 말했다.

 "내가 여양왕부로 가서 불을 지르겠소."

 장무기는 그의 뜻을  이내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부
에 불이 나면 무사들은  왕야를 보호하기 위해서 모두 왕부로 달
려갈 것이다. 실로 절묘한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였다.

 위일소는 즉시 한 줄기의 바람으로 화해 높은 담장을 뛰어 넘어
사라졌다.

 장무기는 주위의 상황을 한  번 훑어보며 낭랑한 음성으로 물었
다.

 "범우사, 어떻소?"

 범요가 소리쳐 대답했다.

 "큰일났습니다. 출로가 불길에 싸여  한 사람도 빠져나갈 수 없
는 상황입니다."

 이때 왕보보의 부하 중에  열 네 명이 장무기를 포위했다. 장무
기는 그들을 제압해도 보탑이 잿더미로 변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불길을 잡으려면 우선 왕보보를
제압해야만 했다. 그는 곧장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왕보보에게 접
근해 갔다.

 이때 왼쪽에서 한 갈래의  싸늘한 검기가 뻗쳐와 장무기는 얼른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여인의 앙칼진 음성이 들려왔다.

 "장공자, 저의 오빠에게 상처를 입히면 안 돼요!"

 바로 조민이었다. 그녀는 손에 의천검을 쥔 채 장무기를 응시하
고 있었다. 장무기보다 한 발 늦게 당도한 것이다.

 장무기는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불을 끄라고 명령을 내리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 역시 가
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조민은 그의 청을 거절했다. 그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였다.

 "십팔금강은 들으세요. 이 자의 무공은 대단하니 금강진을 펼치
세요!"

 십팔빈승은 즉시  왕보보와 조민을 중심으로  하여 원을 그리며
돌았다. 동시에 사발금강이 양  손에 쥐고 있는 동방(銅방)을 맞
닥뜨려 요란한 음향을 터뜨렸다. 그들은 장무기가 왕보보와 조민
에게 공격을 전개하지 못하게끔 철저한 보호벽을 구축한 것이다.

 장무기는 그들이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보법이 매우 특이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열 여덟 명이 구성한 인의 장벽에는 많은 변화
가 숨겨져 있었다.

 장무기는 금강진을 파괴해 그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보탑
의 굵은 기둥 하나가 무너져 버렸다.

 장무기가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불길이 이미 칠 층까지 번졌다.
화마에 휩싸인 가운데서 두 사람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
데, 바로 멸절사태와 학필옹이었다.  소림, 무당 등 무림의 군호
들은 모두 십 층으로 피신해 있었다. 그들은 아직 공력이 회복되
지 않았다. 설령 공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지면에서 십여 장이나
떨어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장무기는 재빨리 뇌리로 생각을 굴리더니, 갑자기 전광석화같이
신법을 전래해 좌충우돌하며  신전팔웅을 모조리 쓰러뜨렸다. 뿐
만 아니라 손에  활을 갖고 있는 무사라면  모두 혈도가 찍혔다.
실로 신속무비한 공격이었다.

 삽시간에 그들을 제압한 장무기는 소리 높여 외쳤다.

 "여러분들, 내가  아래서 받아줄 테니  어서 차례로 뛰어내리시
오!"

 탑 위에 있는 군호들은  모두 멍해졌다. 십여 장 높이에서 뛰어
내리면 몸의 무게가 가속되어 그  힘이 천 근이 넘을 텐데, 무슨
수로 받아낸다는 것일까?

 곤륜파와 공동파의 제자들 중에 몇몇이 소리쳤다.

 "저 녀석에게 속으면 안 됩니다. 절대 뛰어내리지 마십시오. 우
리를 분신쇄골 시킬 속셈입니다!"

 장무기는 안타까왔다. 더  이상 지체하면 군호들이 모두 화마에 
휩싸여 개죽음을 당하게 될 게 뻔했다.

 "유백부님! 백부님도 소질을 믿지 못하겠습니까? 백부님이 먼저 
뛰어내리십시오!"

 유연주는 비록 장무기를 믿어왔으나 이번만큼은 회의를 갖고 있
었다. 장무기의 무공이 제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절대 자기를 받
아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불타 죽기를 기다
릴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차라리 뛰어내려 죽겠다는 생각에 소
리쳤다.

 "좋아! 내가 먼저 뛰어내리겠다."

 그는 서슴없이 보탑 아래로 몸을 던졌다.

 장무기는 그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지면에 가
까와지는 순간 허리를 향해 살짝 일장을 뻗어냈다. 이 일장은 바
로 건곤이위신공의 절정무공으로서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막강한 
힘을 분산시키는 작용을 했다.

 유연주의 몸은 장무기의 일장으로 인해 방향을 꺾으며 일장(丈) 
남짓 날아갔다. 그는 공력이  칠, 팔 성 가량 회복되었으므로 허
공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사뿐히 땅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가까이 있는 몽고 무사에게 일장을 떨쳐 
쓰러뜨리며 탑 위를 향해 소리쳤다.

 "대사형, 사제, 어서 뛰어 내리시오!"

 탑 위에 있는 사람들은  유연주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송원교는 아들에 대한 정이 깊어 그로 하여금 먼저 위험에서 벗
어나게 했다.

 "청서야,네가 먼저 뛰어내려라!"

 송청서는 감방에서 나온 후 줄곧 주지약 곁에 서 있었다. 

 "주 낭자, 낭자가 먼저 뛰어내리시오."

 주지약은 공력이 회복되지 않아  한창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
는 스승님을 도와줄 수  없었다. 물론 자기만 살겠다고 뛰어내릴 
수도 없어 송청서에게 고개를 내둘렀다.

 "저는 스승님을 기다리겠어요."

 이때 하태충과 반숙한이  이미 선후로 뛰어내렸다. 장무기는 건
곤이위신공을 전개해  그들이 모두  무사히 착지하게끔 도와주었
다.

 하태충 부부는  비록 공력이 오,  육성밖에 회복되지 않았으나, 
그 정도만으로 능히 빈승, 무사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들은 유연주와 합세해 장무기의 주위를 호위해 주었다.

 탑 위에선  계속 사람들이 뛰어내렸다. 군호들은  그 동안 갖은 
수모를 겪었으므로  땅에 내려서자마자  모두 목숨을 도외시하고 
살수를 펼쳤다. 그 바람에  삽시간에 이십여 명의 무사가 죽음을 
당했다.

 왕보보는 상황이 갈수록 불리해지자 명령을 내렸다.

 "속히 가서 나의 친위대를 불러와라!"

 총관이 대답을 하고 막  떠나려는데 돌연 왕부쪽에서 불길이 치
솟았다. 총관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소왕야! 왕부에 불이  났습니다. 속히 달려가 왕야를 보호하는 
게 시급할 것 같습니다."

 왕보보는 부친의  안위가 중요하므로 반도들의  일을 일단 뒤로 
미루어야만 했다.

 "동생, 난 왕부로 달려가 봐야 하니 이곳은 네가 맡아라."

 그는 조민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곧장 왕부를 향해 
달려갔다. 십팔금강도 그의 뒤를 따랐고, 무사도 거의 태반이 떠
나갔다. 그들은 왕부의 실화가  단지 위일소 한 사람의 짓이었다
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했다. 틀림없이 반도들이 대거 진격해 온 
것이라 간주해서 허겁지겁 달려간 것이다. 

 이때 송원교, 송청서, 장송계, 막성곡 등도 뛰어내렸다. 쌍방의 
강약지세는 더욱 역전되었다.  이어 공문대사, 공지대사 등이 뛰
어내리자 조민의 부하들은 도저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민은 대세가 기운  것으로 판단했다. 자칫 꾸물대다가 오히려 
자기가 포로로 잡히게 될지도 모른다.

 "모두들 철수해라!"

 그녀는 명령을 내리고 나서 장무기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일 황혼 무렵에  다시 술을 대접할 테니,  그 장소로 나오세
요."

 장무기가 멍해지며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조민은 생긋이 웃
어 보이며 만안사 후원으로 물러갔다.

 이때 탑 위에서 범요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주 낭자, 어서 뛰어내려! 꾸물대다가는 목숨을 잃게 될 거야!"

 주지약은 고집을 부렸다.

 "스승님과 함께 있겠어요!"

 멸절사태는 학필옹과  계속 치열한 싸움을  벌이며 불길을 피해 
위로 올라가다 보니, 드디어 보탑 꼭대기 구석까지 옮겨 오게 되
었다. 그녀의 공력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죽음을 도
외시한 상태이므로 수비에 신경을 쓰지 않고 이직 맹렬한 공격만 
퍼부었다.

 한편, 학필옹은 사형의 안위가 염려되어 좀처럼 기선을 잡지 못
했다.

 멸절사태는 주지약의 말을 듣자 호통을 치듯 외쳤다.

 "지약아, 어서 뛰어내려라! 난  이미 이 음적과 죽음을 같이 하
기로 작심했다."

 학필옹은 내심 초조해졌다.

 '이 할망구는 죽으려고 환장했지만 난 사형을 구하는 일이 시급
하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멸절사태, 그 말을 고두타가  한 것이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
이 없소!"

 멸절사태는 공격을 거두고 대뜸 범요에게 몸을 돌렸다.

 "두타, 당신이 그 따위 미친 소리를 했소?"

 범요는 능글맞게 웃으며 반문했다.

 "미친 소리라니, 무슨 말을 했다는 거요?"

 그는 일부러  반문을 한 것이다. 멸절사태의  입을 통해 자기가 
한 얘기를 다시 반복하게끔  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그러나 멸절
사태가 어찌 '옛정인'이니 '사생아'  같은 말을 직접 입 밖에 낼 
수 있단 말인가? 멸절사태는  범요의 언동에서 학필옹의 말이 사
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울화가 치밀어 온 몸이 부들부들 떨
렸다.

 학필옹은 멸절사태가 자기에게 등을 돌리고 있자 기습하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시꺼먼  연기가 바람에 실려 오자 멸
절사태의 등을 향해 쌍장을 떨쳐냈다.

 주지약과 범요는  그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소리쳤다.

 "스승님, 조심하세요!"

 "늙은이, 조심하시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가 재빨리 몸을 돌려 반격을 하
려는 순간 학필옹의 쌍장이 등심에 적중되었다. 현명패천장의 위
력은 대단했다. 멸절사태는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 쓰러지려는 것
을 주지약이 황급히 부축했다.

 범요는 대노하여 호통을 쳤다.

 "이런 비겁한 놈!"

 그는 녹장객과 한씨를 싼 이불보따리를 냅다 탑 아래로 던져 버
렸다.

 학필옹은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자세히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
이 몸을 날려 이불보따리를  나꿔채려 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고 시간적으로도 너무 늦었다.  그의 손이 이불 귀퉁이를 잡는 
순간 몸의 중심을 잃고 함께 탑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한편, 장무기는 탑 아래  서서 시꺼먼 연기를 뚫고 육중한 물체
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자 본능적으로 건곤이위신공을 전개할 
준비를 갖추었다. 육중한 물체가 지면에서 가까이 떨어져 내리자 
장무기는 비로소 학필옹 등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자기가 
그들로 인해 숱한 고생을  겪었고, 또한 부모의 죽음마저 그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차마  그들이 분신쇄골 되게끔 
수수방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쌍장을 떨쳐내 이불보다리와 
학필옹을 제각기 좌우 이 장 밖으로 밀어냈다.

 학필옹은 허공에서 몸을  한 번 회전시켜 사뿐히  땅에 내려 설 
수가 있었다.  비록 무사히 목숨을  건졌지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울러  장무기가 원한을 덕으로  갚은 행동에 대해 
크게 의아해 했다.

 다음 순간, 그는 사형이 떨어진 곳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소스라
치게 놀랐다.  장무기가 일장을 전개하는  바람에 이불 보따리가 
풀어져, 그 속에서 굴러나온  두 개의 알몸이 공교롭게도 불더미
에 휩싸여 있었다. 녹장객은 혈도가 찍여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
므로 이내 머리카락에 불이 붙었다.

 학필옹은 질겁을 하며,

 "사형!"

 하고 소스라치는 동시에 불더미 속으로 달려가 녹장객을 구출했
다.

 이때 유연주가 싸늘하게 외쳤다.

 "일장을 받아라!"

 그는 왼손으로 학필옹의  어깨를 강타해 갔다. 학필옹은 알몸인 
사형을 안고 있으므로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옆
으로 미끄러지며 피했으나  유연주의 일장도 도중에서 방향을 꺾
으며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학필옹은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이마에 구슬땀이 돋았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녹장
객을 안은 채 몸을 날려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이 무렵, 탑은 온통  불길에 휩싸여 기둥이 무너지며 벽돌이 분
분히 떨어져 내렸다. 이젠  탑 전체가 흔들거리며 언제라도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불길 속에서 멸절사태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약아! 어서 뛰어내려라!"

 "스승님! 스승님께서  먼저 뛰어내리셔야만  저도 뛰어내리겠어
요!"

 이때, 범요의  장소가 들리며 탑  아래도 뛰어내렸다. 장무기가 
일장을 격출해 그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범우사, 성공이오! 정말 수고가 많았소."

 범요는 몸을 바로 세우고 그의 말을 받았다.

 "교주의 절세신공이 아니었더라면, 우린 모두 탑 속에서 개죽음
을 당했을 겁니다."

 멸절사태는 갑자기 주지약을 껴안더니 아래로 뛰어내렸다. 지면
이 가까와지자 그녀는 양팔에 공력을 끌어올려 힘껏 주지약을 위
로 던져 버렸다. 이렇게 되자  주지약은 몇 장 높이 허공에서 떨
어지는 격이 되었다. 그 반면, 멸절사태의 떨어지는 기세는 더욱 
가속될 수밖에 없었다. 장무기는 얼른 앞으로 달려가 건곤이위신
공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향해 장풍을 뻗쳐냈다.

 그런데 멸절사태는 이미 죽을 결심을 굳혔고, 또한 명교의 은혜
를 눈꼽만치도 받지  않겠다는 생각에 장무기의 장풍이 뻗쳐오자 
전신에 남은 여력을 모두 일장에 실어 떨쳐냈다.

 순간, 쌍방의 장풍이 허공에서  격돌되며 펑! 하는 굉음이 터졌
다. 장무기의 장풍은 그녀의  일장에 의해 방향을 바꾸었으며 멸
절사태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졌다. 그녀의 칠공(七孔)
에서 이내 피가 쏟아져 나왔다.  축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전
신의 뼈마디가 분쇄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직 숨
이 붙어 있었다.

 멸절사태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지약은 스승에게 달려가며 울음을 터뜨렸다.

 "스승님!"

 나머지 아미파의 제자들도 스승님의 주위를 에워쌌다.

 멸절사태는 힘없이 눈을 떴다.

 "지약아, 오늘부터  너는 본문의  장문인이다. 내가  당부한 일
을..... 명심하겠지?"

 주지약은 울먹이며 대답했다.

 "네, 스승님!"

 멸절사태의 피로 얼룩진 입가에 한 가닥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난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다....."

 장무기는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맥을 짚었다. 순간, 멸절사태는 
갑자기 손목을 젖혀  장무기의 손을 갈퀴처럼 나꿔잡으며 싸늘하
게 소리쳤다.

 "마교의 음도야! 네가 만약 내 제자의 청백을 더럽힌다면, 죽어 
귀신이 되더라도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

 그녀는 마지막 한 자를 내뱉지  못한 채 그만 숨이 끊어지고 말
했다. 그녀의 손톱이 장무기의 손목 살갗 속으로 파고 들어 피가 
배어 나오게 했다.

 범요가 얼른 소리쳤다.

 "모두들 나를 따르시오! 서문 밖에서 회합해야 하니 더 이상 지
체하면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오!"

 장무기는 멸절사태의 시신을 안고 나직이 말했다.

 "갑시다."

 주지약은 그에게서 스승님의 시신을 받아 장무기를 아예 쳐다보
지도 않고 앞장서 사찰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때 곤륜,  공동, 화산파의 제자들도  벌떼처럼 밖으로 뛰어갔
다. 단지 소림의 공문,  공지 두 고승만이 선배고인의 풍도를 잃
지 않고 장무기에게 다가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장무기는 건곤이위신공으로  육파 고수들을  구하느라고 내력이 
많이 소비되었다. 그는  공문 등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역시 
걸음을 옮겨갔다.

 날이 밝을 무렵, 군호들은 서문에 당도해 성문을 지키는 관병들
을 쫓아 버리고 곧장  서북쪽으로 몇 리쯤 달려가자 양소가 마차
의 행렬을 준비한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소는 중인에게 
일일이 축하한다고 인사를 했다.

 공문대사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오늘 명교의  교주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중원 육파의 운명을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오. 그 은혜는 나중에 갚기로 하고, 이제
부터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장교주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바이오."

 장무기는 겸손하게 말했다.

 "저는 아직 견식이 미천하니, 역시 소림방장께서 진로를 제시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공문대사는 한사코 사양을 했다. 그러자 장송계가 나섰다.

 "이곳은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으니,  왕부의 불길을 잡은 
후에 많은 병마가 쫓아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단 이곳에서 멀
리 벗어나  차근차근 대책을  의논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하태충이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놈들이 쫓아오면  한바탕 싸움을 벌여 그  동안 당했던 수모를 
갚읍시다."

 장송계는 고개를 내둘렀다.

 "모든 분의 공력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 정면 대결
을 뒤로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공문대사가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장대협의 말일  맞습니다. 오늘 설령  많은 적을 살상하다해도 
우리 역시 적지 않은 희생을  치루게 될 겁니다. 일단 이곳을 피
하는 게 상책인 것 같소."

 소림 장문인의 말을 역시  비중이 컸다. 더 이상 이의를 제시하
는 사람이 없자 공문대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장대협, 당신의  의견은 우리가 당분간  어디로 피했으면 좋겠
소?"

 장송계는 이미 생각해 놓은 바가 있었다.

 "몽고 오랑캐들은 우리가 남쪽,  혹은 동남쪽으로 갈 것이라 생
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 반대 방향을 택해 서북쪽으로 가
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중인은 모두 멍해졌다. 그러나 양소는 손뼉을 치며 찬성했다.

 "역시 장대협의 생각은 깊소.  서북지방은 땅이 넓고 사람이 적
으니 아무 황산(荒山)을 찾아들어가도 당분간 피신할 수 있을 것
이며, 오랑캐들은 전혀 예측을 하지 못할 것이오."

 중인은 장송계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하고 곧 북쪽으로 출발했
다. 약 오십 리쯤 벗어나자 군호들은 어느 골짜기로 접어들어 휴
식을 취했다. 양소는 이미 각종 물품을 구입해 놓았기 때문에 군
호들이 요기를 채우는 데는  불편이 없었다. 중인은 그간의 경과
를 얘기하며  장무기와 범요의 도움에 대해  새삼 고마움을 느꼈
다.

 한편, 주지약을  비롯한 아미파의  제자들은 멸절사태의 시신을 
화장했다. 공문, 공지, 송원교, 장무기 등은 일일이 큰절을 올리
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멸절사태는 비록 성품이 괴팍하지만 평생 협의도에 서서 의연하
게 자신을 지켜온 일대여협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다. 아미
파의 제자들은 방성통곡을 했고 군호들도 기분이 울적했다.

 공문대사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죽은 자는 다시 소생할 수 없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오랑캐를 몰아내는 것만이 멸절사태를 위한 복수
가 될 것이오."

 공지대사도 한 마디 했다.

 "중원 육대문파는 원래 명교와  적대시해 왔으나, 이번 일을 계
기로 하여 쌍방이 모든  원한을 말끔하게 씻어 버립시다. 앞으로 
오직 오랑캐를 섬멸하는데 협심동력합시다!"

 군호들은 모두 그러자고  호응했다. 그러나 복수하는 방법에 대
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공문대사가 다시 나섰다.

 "이 일은 서둘러서 성사되는 게 아닌 만큼, 우선 며칠간 휴식을 
취한 연후에 대책을 상의하도록 합시다."

 중인은 모두 찬성했다.

 장무기는 정색을 하고 늠름하게 말했다.

 "나는 개인적인 일이 있어  다시 대도로 들어가야 하니, 여러분
과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앞으로 여러분들과 손을 잡고 오랑캐
와 생사결전을 치를 것을  이 자리를 빌어 다시 다짐하는 바입니
다."

 군호들은 입을 모아 소리쳤다.

 "오랑캐를 몰아 냅시다!"

 그들의 함성은 산골짜기를 진동시키며 멀리 메아리쳐 퍼졌다.

 장무기는 작별을 고했다. 양소가 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교주, 교주는 천하영웅들의 희망이오. 부디 몸조심하시오."

 장무기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를 해 주셔서 고맙소."

 그는 곧 말을 몰고 남쪽으로 질주해 갔다.


                                 ----- 제 5 권 4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5 권


     제 5 장  금화파파의 은단의절(恩斷義絶) 


 대도(大都)가 눈 앞에 이르자 장무기는 어젯밤 만안사에서의 일
전 때문에  여양왕 수하의 많은 무사들이  자기 얼굴을 식별해서
불편을 많이 겪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는 한 농가에서
농사꾼이 입는 옷가지와 죽립(竹笠)을 구하여 갈아입고 나서, 탄
재로 얼굴과 손을 까맣게 칠한 다음에야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서성(西城)의 객점  밖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전혀 이상
이 없는 걸 확인하자  즉시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방으로 들어
갔다. 소조는  마침 창가에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깜짝 놀랐으나 바로 알아보았다.
이윽고 만면에 희색을 띄우고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 전  어떤 농사꾼이  방을 잘못 들어왔는  줄만 알았어
요."

 "넌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느냐?"

 소조는 얼굴을 붉히며 수중에  있는 바느질감을 등 뒤로 숨기고
부자연스럽게 말했다.

 "바느질을 해 보았으나 솜씨가 너무나 형편 없습니다."

 옷가지를 베개 밑으로 숨기고  나서 장무기에게 차를 따라 주었
다. 그의 까만 얼굴을 보자 웃으며 말했다.

 "세수하실 겁니까?"

 장무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일부러 칠한 것이니 씻을 필요없다."

 찻잔을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낭자는 나보고 도룡도(屠龍刀)를  빌리러 갈 때 동행해 달라
고 했다. 그러니 절대로  신의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더구나 나
의 본래의 계획은 의부를  중토에 돌아오시게 하려 했었다. 그러
나 의부께서는 중원에 적을 많이 두고 있고, 눈까지 멀었으니 그
들을 대적하기  힘들다고 걱정을 하셨다.  하지만 지금은 무림의
군호들이 한 마음으로 몽고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에 사사로운 원
한 관계는 모두 화해될 것이다. 내가 의부를 모시고 있으면 어느
누구도 감히 솜털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바다는 바람과 파
도가 험악하기 때문에,  소조는 함께 데려갈 수  없다. 음, 그렇
지, 조낭자에게 부탁해서 소조를 왕부(王府)안에 있게 하면 되겠
구나. 거기는 다른 곳보다 훨씬 편안할 것이다.'

 소조는 그가 갑자기 미소짓는 것을 보자 연유를 물어 보았다.

 "공자님, 뭘 생각하셨어요?"

 "아주 먼 곳에  가야하는데 널 데리고 가면  몹시 불편할 것 같
다. 그래서 네가 기거할 만한 곳을 생각해 냈다."

 "공자님, 전 당신을 꼭 따라가서 날마다 이렇게 시중들 것 입니
다."

 "난 널  위해서다. 내가 가야할 곳은  아주 멀면서도 위험하다.
더구나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

 "광명정의 그 동굴 안에서  전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당신이
가는 곳에는 저도 꼭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오로지 절 죽여야만
뿌리칠 수 있을 겁니다. 공자님은 제가 보기 싫어서 꺼려하는 겁
니까?"

 "아니다, 아냐. 넌  내가 좋아하고 있는 줄  알고 있지 않느냐?
단지 내가 무의미한  모험을 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내가
돌아오기만 하면 즉시 널 찾겠다."

 소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공자님만 곁에  있어주면 어떠한 위험도  겁나지 않아요. 공자
님, 절 데리고 가주세요."

 장무기는 소조의 손을 쥐고 말했다.

 "소조, 솔직히 너에게 말해 주겠다. 나는 조낭자의 부탁으로 그
녀와 함께 해외를 한 번  다녀오기로 했다. 나는 할수 없이 가더
라도 넌 꼭 갈 필요가 없지 않느냐?"

 "공자님과 조낭자가 함께 간다면 전 더욱 따라가야 합니다."

 소조는 얼굴을 잔뜩 붉히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뭣 때문에 더욱 따라가야 하느냐?"

 "그 조낭자의 마음이 독해서 그녀가 공자님께 무슨 일을 저지를
지 모릅니다.  제가 따라가면  당신을 보살펴 드릴  수가 있습니
다."

 그러자 장무기는 마음이 동요되었다.

 '이 작은 낭자가 나에게 정을 느끼고 있단 말인가?'

 "좋다. 함께 가기로  하자. 하지만 배멀미하더라도 날 원망해서
는 안 된다."

 "만약 공자님을 귀찮게 하게 되면 바다에 던져서 고기밥이 되게
하세요."

 "그건 너무나 아깝지 않느냐?"

 장무기는 웃으며  말했으나 소조는 한숨을  쉬며 한쪽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장무기가 소조에게 물었다.

 "웬 한숨이냐?"

 "공자님은 진정으로 아까운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미파의
주낭자며 여양왕부의 군주낭자도 있고,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지
도 모르지요. 그런데 어찌 저 같은 종년을 걱정하겠습니까?"

 장무기는 그녀의 면전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소조, 네가 항상 따스하게  대해준 걸 내 어찌 모르겠냐? 그것
도 모른다면  난 은혜를 저버리는 파렴치한  사람과 다를게 뭐가
있느냐?"

 그러자 소조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뻐했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
말했다.

 "전 공자님이 어떻게 대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에요. 단지 영원
히 공자님을 모실 수  있는 몸종으로 허락해 주신다면 전 그것으
로 만족합니다. 밤새 한숨도 못 주무셨으니 피곤하실 겁니다. 빨
리 침대에 올라가셔서 좀 쉬시지요."

 말을 하더니 이불을 들춰서 그가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게 해준
다음, 자기는 창가로 가서 앉더니 다시 바느질을 했다.

 장무기는 해질무렵에야 깨어났다. 국수 한 그릇을 먹고 나서 말
했다.

 "소조, 널 데리고 조낭자를  만나 보러 갈 것이다. 그녀의 의천
검을 빌려서 너의 수족을 묶고 있는 사슬을 잘라 주겠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와  보니, 몽고의 병졸들이 말을 타고 왔다
갔다하며 삼엄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이는 어젯밤에 여양왕부의
화재와 만안사에서 소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말굽소
리를 듣자 얼른  처마 뒤로 몸을 숨겼다. 얼마  후 바로 그 작은
주점에 도착했다.

 장무기는 소조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조민은 이미 어젯밤
술 마셨던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을 보더니 웃으면서 일어섰
다.

 "장공자는 정말로 신용이 있으시군요."

 그러자 장무기는 포권을 하며 말했다.

 "조낭자, 어젯밤 일은 정말 미안했소. 용서해 주기 바라오."

 조민이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의 그 애첩은 요사스러워서 난 몹시 싫어했는데, 장공자
가 사람을 시켜서 그녀를  살해해 주셨으니 정말 고맙습니다. 우
리 어머님께서 장공자를 매우 칭찬하시더군요."

 장무기는 깜짝  놀랐다. 이러한 결과가 될  줄을 실로 뜻밖이었
다. 이윽고 조민이 다시 말했다.

 "그 사람들도  장공자가 구해 주길  잘했습니다. 어차피 그들은
귀항(歸降)하지 않으니 내가 남겨  둔들 무슨 소용 있겠어요. 장
공자, 내가 당신에게 한 잔 권하지요."

 바로 이때  문 안으로 범요가 들어왔다.  그는 먼저 장무기에게
인사하고 나서, 다시 공손하게 조민한테 읍을 하면서 말했다.

 "군주님, 고두타가 작별하러 왔습니다."

 조민은 답례하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

 "고대사, 당신은 날 너무나 기만했소. 덕분에 당신의 군주는 많
은 수모를 당했소."

 그러자 범요가 일어나서 앙연히 말했다.

 "고두타의 성은  범이고 이름은 요라고  하며, 명교의 광명우사
(光明右使)입니다. 조정과 명교가  적대 관계이기에 본인이 여양
왕부에 잠입한 건 자연히  임무수행차 온 것입니다. 군주님의 많
은 보살핌을 받았기에 오늘 특별히 작별하러 온 것입니다."

 조민은 여전히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이 가고 싶으면 가는  것이지 구태여 인사하러 올 것 까지
없지 않소?"

 "대장부는 끊고 맺음이 좋아야 합니다. 지금부터는 군주님과 적
대관계가 되는  것인데, 만약 분명히  일러두지 않으면 군주님이
평소에 제게 잘 대해 준 것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조민은 장무기를 한 번 쳐다보면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기에 수하들을 모두 당신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오?"

 "우리는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인협을 위해, 의기를 위함
입니다. 범우사와 나는 평소에 서로 알지 못하고 지냈소. 그러나
만나자 마자  마치 오랜  친구처럼 간담상조(肝膽相照)하게 되었
소."

 그러자 범요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교주의 말씀은 바로  속하(屬下)의 생각과 같습니다. 교주, 부
디 몸조심 하십시오.  군주낭낭, 이분께서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
만 심한수랄(心限手辣)한 건 보통이 아닙니다. 당신은 양심이 너
무나 올바르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겠소. 절대로 방심하지 않겠소."

 그러자 조민은 웃으며 말했다.

 "고대사의 칭찬, 대단히 감사합니다."

 범요는 몸을 돌려 주점  밖으로 향했다. 소조의 옆을 지나갈 때
갑자기 얼굴  표정은 경악하면서도 괴상했다.  마치 갑자기 무슨
엄청나게 무서운 귀신을 본 것처럼 소리쳤다.

 "넌..... 넌....."

 그러자 소조는 이상하다며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범요는 멍청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아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가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닮았다, 정말 닮았어....."

 조민과 장무기는 서로 한  번씩 쳐다보았으나 그가 소조를 누구
와 닮았다고 하는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갑자기 먼 곳에서는  호루라기 소리가 세 번  길게, 두 번 짧게
들려왔다. 장무기는 순간  멈칫했다. 이는 아미파가 동문을 소집
하는 신호다. 그날 서역에서 멸절사태 등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
들은 이러한 신호로 서로 연락하는 걸 여러 번 들었다.

 "어째서 아미파가 대도로 돌아왔을까? 혹 적을 만난게 아닐까?"

 그러자 조민이 말했다.

 "저건 아미파입니다. 마치 무슨  급한 일을 당한 것 같군요. 우
리가 한 번 가 보는 게 어떻겠어요?"

 "당신이 어떻게 알죠?"

 "내가 서역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그녀들을 사흘 동안 밤낮으로
뒤쫓아가서 겨우 멸절사태를 잡았는데, 어찌 모르겠어요."

 "좋소, 가 봅시다. 조낭자, 우선 당신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
니다. 당신의 의천검을 빌려 주시겠소?"

 "당신은 도룡도를 미처 빌려 주기도 전에 먼저 나에게 의천검을
빌리는구료."

 조민은 웃으면서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보검을 풀러서 건네 주었
다. 그러자 장무기는 검을 뽑더니 소조에게 말했다.

 "소조, 이리 오너라."

 소조는 그에게 다가갔다. 장무기는 장검을 몇 번 휘둘러서 그녀
의 손 발을 묶고 있던  사슬을 일제히 잘라 주었다. 그러자 소조
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공자님, 군주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조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낭자구료. 당신의 교주는 필시 당신을 끔찍하게
사랑할 거예요."

 소조는 얼굴을 붉히며 눈에는 즐거운 빛이 번쩍거렸다.

 장무기는 검을 거둔 다음, 조민에게 돌려주자, 아미파의 호루라
기소리가 바로 동북방 쪽으로 가는 게 들렸다.

 "자, 그럼 갑시다."

 조민은 은 한냥을  탁자 위에 던져 놓고  재빠르게 주점을 나섰
다.

 장무기는 소조가  따라오지 못할까봐,  오른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 안고, 조민의 뒤를 따라갔
다. 그러나 십 여장밖에  달리지 않았는데, 소조의 몸이 몹시 가
볍게 느껴졌고, 발걸음을  이동하는 것도 몹시 신속해졌다. 그는
약간 이상하게 여겼다. 손에  도와주는 힘을 거두어 들였지만 소
조는 여전히 자기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비록 그는 상승경공
을 전개하지 않았으나 발놀림은 몹시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조민은 이미 한적한 작은 모퉁이를 몇개 지나
서 반쯤 무너진 담벽 밖에 당도했다.

 장무기는 담 안에서 여자들이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리자 아미파
가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윽고 소조의 손을 잡고 월장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조민도 뒤따라 들어왔다. 세 사람은 우거진 풀
숲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폐원의 북쪽 모퉁이에는 허름한 정자가 하나 있었고, 정자 안에
는 이 십여명이 모여 있었다. 이윽고 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본문에서  제일 젊은 제자다.  자질이나 무공을 따져봐도
넌 본파의 장문이 될 차례가 되지....."

 장무기는 정민군의 음성을 알고 있었다. 숲 속에서 포복하여 정
자의 수 장쯤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다. 이때 별빛이 어두워 매우
몽롱하게 보였다. 그는  안력을 모아서 주시하자, 정자에는 남자
도 있고 여자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아미파의 제자
였다. 정민군 외에는 멸절사태  좌하의 나머지 큰 제자들이 모두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왼쪽에 몸매가 가냘프고 청치마를 땅에
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주지약이었다.

 이윽고 정민군이 매우 엄준한 말투로 다그쳤다.

 "말해라, 말해.....!"

 그러자 주지약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사저의 말씀이 옳습니다. 사부님께서 이 대임을 소매에게 명
하실 때 소매는 한사코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선사께서는 무서운
말투로 책망하시더니  소매가 맹세하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부님의 분부를 저버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미의 대제자 정현이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영명하시기 때문에  주사매가 장문을 승계하라는
명은 필시 깊은 저의가 있을 것이오. 우리는 모두 사부님의 대은
을 입었기에 당연히 그 어르신네의 유지를 받들어 주사매를 보좌
해서 본파의 무덕을 빛내야 하오."

 그러자 정민군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필시 깊은 저의가 있다는 말은 정말 잘 하셨소. 우
리가 고탑(高塔)위와  아래 있을 때 모두  고두타와 학필옹이 큰
소리로 외치는 걸 직접  듣지 못했습니까? 주사매의 부모가 누굽
니까? 사부님이 뭣 때문에 그녀를 달리 보는 줄 아직도 모르겠습
니까?"

 고두타는 녹장객에게, 멸절사태가 자기의 옛 연인이라고 말했으
며, 주지약은 그들 두 사람의 사생아라고 했다. 그러나 학필옹이
이처럼 공공연하게  소리치게 되면 물론 남들은  전부 믿은 수는
없어도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남녀간의
일은 통상 믿는 쪽이 많았다.  각자는 정민군의 이 같은 말을 듣
자 모두 묵묵부답하였다.

 그러자 주지약은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정사저, 당신은  제가 장문을 승계하는  것에 대해 불복한다면
얼마든지 분명히 얘기하세요.  당신이 허튼소리로 사부님이 평생
이룬 청예(淸譽)를 더럽히게 되면  무슨 죄를 범하는 줄 아세요?
소매의 선친께서는 성이 주(周)고, 한수에서 배를 모는 뱃사공이
었고, 무공을 전혀  할 줄 모르오. 선모(先母)께서는 설(薛)씨고
조상은 세가(世家)이며, 본시  양양(襄陽) 사람인데 양양성이 함
락된 후 남쪽으로 피난하러  내려갔소. 의지할 곳이 없어서 선친
에게 출가한  것이오. 소매는 무당파  장진인의 추천으로 아미의
문하로 들어오게 된 것이오. 그 전에는 사부님을 만난 적이 없습
니다. 당신은 사부님의 대은을 입고 있으면서 사부님이 돌아가시
니깐 바로 이러한 말을 한다는 건....."

 그녀는 목이 메어 그만  눈물을 흘렸다. 다시는 말을 잇지 못했
다.

 정민군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본문의 장문이 되고  싶겠지만 아직 동문의 공인을 얻지 못
했다. 자기의  신분도 표명되지 않았는데  나의 잘못을 지적하고
무슨 사부님의 청예를  더럽히느니 하면서 주제넘게 떠들고 있는
것이냐? 넌 나에게 벌을  주려 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너에게 묻
겠다. 넌  사부님의 분부로 장문으로  승계했으면 당일로 아미에
돌아가야 되지 않느냐?  사부님께서 돌아가셨으니 본파의 수많은
사무가 모두 장문인의 처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넌 혼자서
소리없이 대도에 되돌아 온 이유가 무엇이냐?"

 "사부님께서는 매우 무거운 짐을 소매에게 안겨 주었소. 그러기
때문에 소매는 대도에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일이냐? 이곳에는  본파의 동문 외에는 다른 사람이
없으니 말해 보아라."

 "이건 본파의 최대 기밀이라 본파의 장문인 외에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는 안 되오."

 그러자 정민군은 냉소를 보이며 말했다.

 "흥, 흥! 넌 모든 걸  <장문인> 이 세 글자에 미는구나. 하지만
날 속이지는 못한다. 너에게 묻겠다. 본파와 마교는 불공천하(不
共天下)의 원수지간이다. 본파는  마교의 사손에 수 많은 동문이
희생되었고 마교의 교중도  사부님의 의천검 아래 부지기수로 죽
었다. 사부님이  돌아가신 이유는 바로 그  마교 교주의 일탁(一
托)을 받기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사부님의 시신이 미처 굳기도
전에 넌 마교의 그 장이란 소음적(小淫賊)을 살며시 찾으러 돌아
올 수 있겠느냐?"

 장무기는 마지막 이 몇 마디를 듣자 그만 몸이 휘청거렸다.

 '주낭자가 진정으로 날 찾으러 왔단 말인가?'

 이윽고 주지약이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당신..... 당신은 또 허튼소리로......"

 그러자 정민군은 큰 소리로 말했다.

 "발뺌하려는 거냐? 넌 사람들을 아미로 먼저 돌려 보냈다. 우리
가 너에게  대도에 돌아온 이유를 묻는데  뭣 때문에 꾸물거리고
있는 거냐? 여러 동문들은 예감이 심상치 않아서 너의 뒤를 밟은
것이다. 네가  너의 부친인 고두타에게  소음적의 행방을 물어본
것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네가 객점에 가서 그 소음적을 찾아
간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녀는 말끝마다 소음적, 소음적 하였다. 아무리 장무기의 성격
이 좋다 해도 어찌 울화가 치밀지 않겠는가? 이때 조민은 웃으면
서 그를 놀려 주었다.

 정민군이 다시 말했다.

 "네가 누굴  찾든지, 누굴 좋아하든지  다른 사람하고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 장이란 소음적은 본파의 철천지 원수다. 어젯밤
우리가 대도를 빠져나올 때 넌 도중에서 뭣 때문에 정이 서린 눈
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냐? 그의  발길이 옮기는 대로 너의 눈빛도
따라 옮겼다. 이건 절대로  널 모함하는 게 아니다. 여기에 있는
동문들도 모두 목격했었다.  그날 광명정에 있을 때도 그러했다.
의천검 같은 예리한 검으로 왜  그를 죽이지 못 했느냐? 그 안에
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주지약은 울면서 말했다.

 "당신은 뭣 때문에 듣기 싫은 말만 해서 날 모욕하는 것이오?"

 그러자 정민군은 냉소로 한 번 웃더니 말했다.

 "내 말이 듣기 싫으면  너의 소행들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냐? 흥! 방금 넌 그 객점의 주인에게 어떻게 물었느냐?"

 그녀는 주지약의 흉내를 내며 말을 했다.

 아미파의 대다수 제자들은 모두 사부의 유명대로 주지약을 장문
인으로 받들고 있었다. 그러나  정민군의 그럴싸한 말을 듣게 되
자 모두 마음이 동요되었다.

 '사부와 마교는 깊은 원한관계에 있다. 그런데 주사매와 마교의
교주는 보통 관계가 아니다.  만약에 그녀가 본파를 마교에게 팔
아 버리면 큰일이 아니겠는가?'

 이윽고 정민군의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주사매, 넌 무당파의  장진인이 사부님 문하에 인입(引入)시켰
지만, 그 마교의 소음적은  바로 무당 장오협의 아들이다. 이 중
간에는 도대체 무슨 괴이한 음모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목소리를 높여서 다시 말했다.

 "사형, 사저, 사제, 사매 여러분. 비록 사부님의 유명은 주사매
를 장문에 접임(接任)시켰소.  그러나 그 어르신네가 원적(圓寂)
한 후 시신도 미처 굳기  전에 본파의 장문인이 즉시 그 마교 교
주를 찾아가서 서로 정을  나눌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
오. 이 일은 본파의 존망흥쇠에 달려 있습니다. 선사께서 만약에
오늘 밤의 일을 알게 되면 그 어르신네는 필시 다른 장문인을 선
택할 것이오. 소매가 보기에는  우리가 필히 선사의 유지를 승계
하여 주사매의  장문 표시인  철지환(鐵指環)을 받아내서 우리가
본파의 장문을 다시 추대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동문 중에 이미 육, 칠 명은  그녀의 뜻을 
호응했다.

 그러자 주지약이 말했다.

 "전 선사의 명을 받들고 본파의 장문을 접임한 것이오. 이 철지
환은 절대로 넘겨줄 수 없소!  전 이 장문의 자리를 정말로 하기
싫습니다. 그러나 사부님에게 맹세를 하였기에 절대로..... 절대
로 그 어르신네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그 장문 철지환은 내놓기  싫어도 내놓아야 한다. 본파의 문규
에는 기사멸조(欺師滅祖), 음사무치(淫邪無恥)를 엄히 금하고 있
다. 넌 이 두 가지의 대계(大戒)를 범했는데 어떻게 문호를 손에
쥐고 있겠느냐?"

 조민은 입술을 장무기의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주낭자가 몹시 난처하게 되었어요. 당신이 나에게 착한
누님이라고 한 마디 부르면, 내가 즉시 나가서 그녀의 처지를 구
해 주겠어요."

 장무기는 이 낭자가 족지다모(足智多謀)한 줄 알기 때문에 필시
주낭자의 곤경을  벗겨줄 묘책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는 자기보다 많이 적었다.  그런데 누나라는 말이 실로 입에
서 나오지 않았다. 마침 주저하고 있을 때 조민이 다시 말했다.

 "부르기 싫으면 난 이만 가겠어요."

 장무기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불렀
다.

 "착한 누님."

 그러자 조민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막  몸을 일어서려는 찰나
정자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발각되고 말았다. 이윽고 정민군이
소리쳤다.

 "누가 거기서 엿듣고 있는 것이냐?"

 갑자기 담 밖에는 기침소리가 몇 번 들려오더니 한 여자의 음성
이 들렸다.

 "밤도 깊은데 아미파는 여기서 서성거리며 뭐 하는 것이냐?"

 한 차례의 옷자락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자 밖에
는 이미 두 사람이 많아졌다.

 이 두 사람의 얼굴은  달빛을 향하고 있었기에 장무기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은 등이 앞으로  꼬부라진 늙은 부인이었
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바로 금화파파였다. 다른 한 사람은
몸매가 가냘픈 소녀였는데 용모는 괴이하게 추악했다. 바로 은야
왕의 딸이자 장무기의  사촌 누이인 주아(珠兒) 아리(阿離)였다.
장무기는 그녀와  헤어지게 된 후부터  자주 그녀를 생각했었다.
뜻밖에 지금 갑자기 나타난  걸 보게 되자 그녀는 너무나 기뻐서
하마터면 소리를 내어 부를 뻔했다.

 정민군은 쌀쌀하게 말했다.

 "금화파파, 당신은 뭣 때문에 오셨습니까?"

 "너의 사부는 여기 있느냐?"

 "선사께서 어제  이미 원적하셨소. 당신은  원(圓) 밖에서 이미
들었으면서 뭣 때문에 또 묻는 것입니까?"

 "아니 멸절사태가 이미 원적했다구? 어떻게 죽은 것이냐? 뭣 때
문에 날  기다리지 않는 것이냐? 아유,  아유, 안타깝다, 안타까
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허리를 굽히고  몹시 기침했다. 주아는
살며시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정민군에게 냉소를 보이며 말
했다.

 "누가 너희들 말을 엿들었다고  하는 것이냐? 나와 파파가 여기
를 지나는데 네가 재잘재잘하고 말하는 걸 들었다. 난 너의 음성
을 알기 때문에  들어와서 보게 된 것이다.  파파가 너에게 묻지
않느냐? 너의 사부는 어떻게 죽은 것이냐?"

 "그게 너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뭣 때문에 너에게 말하겠
느냐?"

 금화파파는 길게 숨을 한모금 들여마신 후 천천히 말했다.

 "난 평생 사람들과 싸웠지만 유독 너의 사부에게 한 번 패했다.
그러나 그건 무공의 초수가  뒤진 게 아니라, 의천검의 예리함을
막아내지 못한 것 뿐이다. 요 몇 년 동안 난 예리한 검을 찾아서
다시 너의 사부와 고하(高下)를  겨루려 벼르고 있었다. 내가 온
세상을 헤매는  바람에 한 분의 고인(故人)이  보도를 나에게 한
번 빌려 주기로 승낙했다.  내가 듣기로는 아미파의 사람들을 조
정에서 만안사에  감금하였다고 들었다. 그래서  난 너의 사부를
구출해 내어 그녀와 진정한  재주를 겨루려 하였다. 그런데 오늘
만안사에 가 보니 이미  초토가 되어 버렸더군. 아유, 멸절사태,
멸절사태, 하루라도 늦게 죽을 수 없는 것이었냐?"

 그러자 정민군이 말했다.

 "우리 사부님께서 만약 아직도  살아 계셨다면 당신은 또 한 번
패배의 쓰라림을 보았을 것이오!"

 갑자기 팍팍팍팍!  네 번의 경쾌한  소리가 지나가자, 정민군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얼굴에  이미 금화파파의 사 장을 연거
푸 얻어맞은 것이다. 그녀와 정민군의 거리는 이 장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다가가서  사 장을 후려치고 다시 물
러나온 것은 마치 귀신같은 행동이었다.

 정민군은 화가 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즉시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다가가서 금화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거렁뱅이 같은 늙은이가 정말로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금화파파는 마치 그녀의 욕설을  듣지 못한양 그녀의 수중에 있
는 장검도 아랑곳 하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너의 사부는 도대체 어떻게 죽게 된 것이냐?"

 말투가 소침되어 있는 것이  마치 몹시 안타까운 것 같았다. 정
민군의 검 끝과 그녀의  흉구와의 거리는 불과 세치 정도밖에 안
되었으나 시종 찌르지는 못했다.

 "거렁뱅이 같은 할망구야, 내가 뭣 때문에 말해 줘야 하는 것이
냐?"

 금화파파는 긴 한숨을 쉬며 혼자 중얼거렸다.

 "멸절사태, 너는 일세(一世)의  영웅이며 무림에서는 뛰어난 인
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단 죽게 되니 제자 중에는 접장문
호(接掌門戶)할 인제는 하나도 없구나!"

 이윽고 정현사태가 한 발 다가가더니 합장을 하며 말했다.

 "빈니 정현, 파파를  참견합니다. 선사께서 원적하실 때 주지약
주사매가 장문에 접임하라는  유명을 남기셨소. 그러나 본파에는
약간의 동문들이 불복하고  있습니다. 선사께서 이미 원적하셨으
니 파파의 소원도 이루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본파의 장
문은 아직 결정되지 못했기에  파파와는 아무 약속도 할 수 없습
니다. 그러나 아미는 무림의 대파라서 절대로 선사의 위명(威名)
에 먹칠할 수 없습니다.  파파께서 무슨 분부가 있으시면 얼마든
지 말씀하세요.  나중에 분파의 장문이  무림의 규칙대로 당신과
일단락을 짓게 될 것이오."

 "존사가 원적할 때  이미 유명을 전해서 계임(繼任)할 장문인을
정해 놓았구나. 그것 참 잘됐다. 어느 분이지?"

 말투는 정민군과 말할  때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러자 주
지약이 다가가서 인사하며 말했다.

 "아미파의 제 사대 장문인 주지약, 파파에게 인사 드립니다."

 정민군이 큰 소리로 말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본파의 제 사대 장문인이라고 자칭하는구
나!"

 주아가 냉소를 보이며 말했다.

 "이분 주 언니는 너무나 좋은 사람입니다. 내가 서역에 있을 때
주언니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녀가  장문이 될 자격이
없다면 너는 자격이 있단  말이냐? 또다시 파파의 면전에서 방자
하게 굴면 너의 따귀를 몇 번 더 때려줄 것이다!"

 정민군은 대노하였다.  획 하고  일검을 주아의 분심(分心)으로
찔러 댔다. 주아는 몸을  비틀어서 피하며 장을 내밀어 정민군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녀의 이 신법은 금화파파와 똑같았으나 출수
하는 신속성은  한참 뒤떨어졌다. 정민군은  얼른 고개를 숙여서
피했다. 그녀의 일검도 주아를 적중하지 못했다.

 금화파파는 웃으며 말했다.

 "주아야, 내가 그렇게 여러 번 가르쳐 주었는데 아직도 이 쉬운
일초를 터득하지 못했느냐. 자세히 보거라."

 오른손을 휘둘러서 정민군의  왼뺨에 일장을 후려치고, 다시 손
을 되돌려서 그녀의 오른뺨을  후려쳤다. 바로 또 왼뺨을 후려치
고 나서, 손을 되돌려 오른뺨을 후려쳤다. 이 사장의 단락(段落)
이 분명하여 사람들도 모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정민군
의 온몸은 큰 힘이 감싸고  있는 것 같아서 사지를 움직일 수 없
었다. 다행히 금화파파의 손에는 경력을 운용하지 않아서 그녀는
중상을 면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주아는 웃으며 말했다.

 "파파, 이제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같은 내경(內
勁)은 없습니다. 제가 한 번 더 해보겠습니다."

 정민군은 여전히 금화파파의  내력에 눌려 있었다. 주아의 일장
이 다시 얼굴을  후려쳐 오는 걸 보자,  화가 치밀어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갑자기 주지약이 재빨리 다가가더니 왼손을 뻗어서 주아의 일장
을 막아내며 말했다.

 "언니, 멈추시오!"

 이윽고 고개를 돌려서 금화파파에게 말했다.

 "본파 문호의 일은 외부인이  간섭할 수 없습니다. 소녀는 선사
의 유명을  받들고 있습니다. 비록  재주는 뛰어나지 못할지라도
외부인이 본파 문인을 모욕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금화파파는 웃으며 말했다.

 "좋다, 좋다, 좋다!"

 갑자기 쌍장을 일제히  출수했다. 일장은 주지약의 앞가슴을 눌
렀고, 일장은 그녀의  후심(後心)을 누르고 있었다. 쌍장이 누르
고 있는 곳은 모두 치명적이 대혈(大穴)이었다.

 이윽고 금화파파는 엄숙하게 말했다.

 "주낭자, 당신 같은 장문인은 정말 드물고 보잘것도 없구료. 어
째서 존사는  아미파의 장문이란 중임을 당신  같은 연약한 작은
낭자에게 넘겨 주었소?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허튼소리 하고 있
는 것 같구료."

 주지약은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했다.

 '지금 그녀의 손에서 내경만 토해 내면 내 심맥은 바로 진단(震
斷)되어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어찌  사부님의 위명에 먹칠할
수 있겠느냐?'

 막상 사부를 생각하지 즉시 용기가 났다. 이윽고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건 선사께서 친히 나의  손에 끼어 준 아미파 장문의 철지환
이요. 그런데 어찌 거짓이 있겠소?"

 금화파파는 웃으며 말했다.

 "방금 너의 사저가,  아미는 무림대파라고 한 말은  옳은 것 같
다. 그러나 네가 지니고  있는 재주로 어떻게 무림대파의 장문인
이 될 수 있느냐?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얌전히 내 분부를 듣
는 게 좋을 것 같다."

 "금화파파, 비록 선사께서는  원적하셨지만 아미파가 이대로 끝
나는 건 아닙니다. 주지약은  비록 나이가 어리고 연약한 여자지
만 중임을 맡고 있는 이상 생사 같은 건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습
니다!"

 장무기는 몹시 안절부절했다. 금화파파가 노해서 그녀의 생명을
다칠까봐 막 나가서 구출해 내려는 찰나, 조민은 그의 속셈을 간
파했다. 얼른 그의 오른팔을  잡고 살짝 한 번 흔들었다. 서두르
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

 이윽고 금화파파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역시 멸절사태가 사람을 잘  골랐구나. 넌 비록 무공은 약하나
성격은 완강하구나. 음,  됐다. 됐어! 무공의 부족함은 연마해서
보충할 수 있다. 강산은 쉽게  바꿀 수 있어도 본성은 고치기 힘
든 법이니까."

 사실 주지약은 무서워서 정신이 없었다. 단지 사부가 죽기 직전
에 중임을 부탁한 걸 생각해서 억지로 굴복하지 않은 것이다.

 아미파의 동문들은 주지약을  모두 멸시하고 있었는데, 지금 그
녀의 행동을 보게 되자 모두 탄복하는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때
정현이 장검을 한 번 휘두르며 호루라기를 몇 번 불자, 아미파의
제자들은 갑자기 흩어지면서 각자 병기를 뽑아 들고 정자를 겹겹
으로 포위했다.

 금화파파는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느냐?"

 정현이 말했다.

 "파파는 아미의 장문을 위협하는 저의가 무엇이오?"

 금화파파는 기침을 몇 번 하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떼거지로 덤벼들 작정이냐? 내가 보기에는 열배가 더
많아도 아무 소용없게 느껴지는구나."

 갑자기 주지약을 놓아주고 신형을 흔들더니 곧바로 정현앞에 다
가왔다. 그러더니 두 손가락을 뻗어서 그녀의 두 눈을 공격했다.
그러자 정현은 감히 검을 돌려서  그녀의 양 팔을 베려 했다. 순
간 윽 하는 소리가 나더니 옆에 있던 동문사매 하나가 쓰러졌다.
금화파파는 정현을 공격하면서 왼발로 아미의 여제자 한 명의 허
리에 있는 혈도를 걷어 찬 것이다.

 그녀는 정자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큰 소매자락을 펄럭이면서
간간히 기침소리가 몇 번  들리곤 했다. 아미파 문인들은 일제히
장검을 휘둘렀으나 그녀의 옷자락도 스치지 못했다. 그러나 남녀
제자는 이미 일곱명이나 혈도에 적중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타혈수법(打穴手法)이 몹시  괴이해서 적중된  사람들은 모두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일시에 폐원에는  비명소리가 여기 저기
나면서 듣기에 소름이 끼쳤다.

 금화파파는 손뼉을 한 번 치더니 정자 안으로 돌아가서 말했다.

 "주낭자, 너희 아미파의  무공이 금화파파와 비교하면 어떠하다
고 생각하느냐?"

 "본파의 무공이 당연히 파파보다는 높지요. 왕년에 파파는 선사
의 검 아래 패한 걸 잊으셨습니까?"

 금화파파는 노하여 말했다.

 "멸절 늙은이에게 패한 건 단지 보검이 예리했기 때문이다!"

 "파파는 솔직히  말해 주세요. 만약에  선사와 파파가 맨손으로
겨루었다면 승부는 어떻게 됐을 겁니까?"

 금화파파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모르겠다. 나와 존사  두 사람 중에 도대체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 걸 알기 위해서  오늘 대도에 온 것이다. 아하, 멸절사태가
원적하였으니 무림에는 고인을 한  분 잃은 것이다. 아미파도 지
금부터는 덩달아 쇠약해졌군."

 일곱명의 아미 제자들은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정현
등 나이 많은 제자들이 그들에게 힘껏 추혈과궁(推穴過宮)했으나
전혀 효력이 없었다. 아마 금화파파 본인만이 풀어줄 수 있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왕년에  금화파파에게 상한 사람들을  많이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노파의 악랄한  수법을 잘 알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나가서 구해 주고 싶지만 마음을 고쳐 먹
었다.

 '내가 주낭자를 도와주면, 주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내 사촌
누이는 나에게 잘  대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골육지친(骨肉之親)
이 아니더냐. 그런데 내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윽고 금화파파의 말소리가 들렸다.

 "주낭자, 굴복 하겠느냐?"

 "본파의 무공은 바다처럼 깊기  때문에 속단할 수 없습니다. 우
리는 아직 젊기 때문에 파파의 무공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나중
에 진전하게 되면 그때는 어떨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자 금화파파는 웃으며 말했다.

 "아주 묘하다. 아주 묘해. 금화파파는 이만 작별하겠다. 나중에
너의 무공이 진전되거든 다시 와서 그들의 혈도를 풀어 주겠다."

 말을 하면서 주아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려서 떠나려 했다.

 주지약은, 이 동문들의  고통이 잠시도 참기 어려운데 금화파파
가 가 버리면 아마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그러자 급히 말했다.

 "파파, 잠깐 멈추시오. 저의  동문 사저, 사형들을 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어렵지 않다. 지금부터  금화파파와 나의 이 제자가 가는
곳에는 아미 문인들은 우리를 피해서 다녀라!"

 주지약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

 '내가 장문직을 맡자마자 바로  강적을 만났구나. 만약에 이 일
을 승낙하게 되면 아미파는 어떻게 무림에서 발디딜 수가 있겠는
가. 그렇게 되면 아미 일파는  바로 내 손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
냐?'

 금화파파는 그녀가 망설이고 있는 것을 보자 웃으며 말했다.

 "넌 아미파의 위명을 먹칠하기  싫으면 그만 두거라. 대신 너의
의천검을 나에게  한 번  빌려주면, 너의 동문들을  풀어줄 것이
다."

 "본파의 사도들은 조정을 간계에 빠져서 고탑에 감금 되었는데,
어찌 의천검이 아직도 우리의 수중에 있겠습니까?"

 금화파파는 주지약의 이같은 말을 듣자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스쳐갔다. 갑자기 무서운 소리로 말했다.

 "네가 아미파의 명성을  보전하려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
한다.....!"

 말을 하면서 품안에서 환약 한 알을 꺼내더니 다시 말했다.

 "이건 단장렬심(斷腸裂心)하는  독약이다. 네가  먹는다면 내가
사람을 구하겠다."

 주지약은 떨리는 손으로 독약을 받아 들였다. 그러자 정현이 소
리쳤다.

 "주사매, 절대로 먹지 마라!"

 장무기는 정세가 위급한 것을 보자 다시 나가려 하는데, 조민이
그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바보, 가짜다. 독약이 아니다."

 장무기가 멈칫하는 순간 주지약은 환약을 이미 삼켜 버렸다.

 정현 등 사람들은 저마다  소리치며 다시 금화파파와 싸우려 했
다.

 "좋았어. 의지는 강하구나. 이 독약의 약성은 금방 발작하지 않
는다. 주낭자, 날  따라라! 얌전하게 말 잘  들으면 이 늙은이가
기분 좋아서 너에게 해독약을 주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윽고 그  혈도를 찍힌 아미  문인들에게 다가가서 번갈아가며
몇 번 두드렸다. 그 사람들의 통증은 즉시 멈추었으나 사지가 저
리고 마비되어서 여전히 금방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은 주
지약이 독약을 복용하면서 자기들을 구해주는 걸 보게 되자 몹시
감격하였다.

 금화파파는 주지약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얘야, 네가 날 따라오면 파파는 너에게 잘 대해 줄 것이다."

 주지약은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한 줄기  거대한 힘이 자기를
끌어대는 것 같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몸이 위로 솟구쳤다. 그러
자 정현이 소리쳤다.

 "주사매!"

 다가가서 저지하려 했으나 한 줄기 지풍(指風)이 비스듬히 공격
해 왔다. 이는 주아가 옆에서 발지(發指)하여 기습한 것이다. 정
현은 좌장을 휘둘러서 막았으나 주아의 이 일초는 뜻밖에도 허초
였다. 팍 하고 소리가  나더니 정민군의 얼굴에 일장이 후려쳐졌
다. 이 지동타서(指東打西)의 수법은 바로 금화파파의 무학이다.
이윽고 주아의 깔깔거리는  교소(橋笑)가 들리면서 이미 담을 넘
어 밖으로 나갔다.

 장무기가 말했다.

 "빨리 쫓아가자."

 한 손은 주민을 끌고, 한 손은 소조를 데리고 세 사람은 동시에
월장하였다. 정현 등은 갑자기 풀밭에 세 사람이 숨어 있던 것을
알게 되자 한결같이 경악했다. 금화파파와 장무기의 경공은 얼마
나 고묘(高妙)한지, 아미의 제자들이 담을 넘어오자 여섯 사람은
벌써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장무기 등이 십여 장을  쫓아갔으나 금화파파의 걸음은 전혀 정
지하지 않으면서 소리쳤다.

 "아미파의 제자에 감히 금화파파를 쫓아올 담력을 가진 자가 있
다니, 흐흐, 대단하구나."

 조민이 말했다.

 "본파의 장문을 남겨 놓아라!"

 조민의 몸이 한 번 휘청거리더니 수장 앞으로 다가갔다. 의천검
의 검 끝은 이미 금화파파의  등 뒤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일초
는 금정불광(金頂佛光)이며 바로  아미파 전통 검법의 하나였다.
그녀가 만안사에  있을 때 아미파의 여제자  수중에서 배운 것이
다. 단지 멸절사태에게 배운 게 아니라서 정묘한 것은 부족했다.

 금화파파는 등 뒤에서 금도(金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듣게
되자, 주지약을  놓아주고 급히 몸을 돌렸다.  조민은 손목을 한
번 흔들더니 다시  천봉경수(千峯競秀) 일초를 전개했다. 금화파
파는 그녀의  수중에 있는 병기가 바로  의천검이란 것을 알아채
자, 놀라워하면서도 기뻐했다. 즉시 손을 뻗어서 뺏으려 했다.

 몇 초가  지나자 금화파파는 이미 조민의  몸 앞으로 접근했다.
손가락이 그녀가 검을 쥐고  있는 손목에 닿으려는 찰나, 뜻밖에
조민은 장검을  급회전시키며 곤륜파의  검초인 신타준족(神駝駿
足) 일초를 전개했다.

 금화파파는 그녀가  나이가 젊은 여자며  손에는 의천검을 쥐고
있고, 검법  또한 아미파의 검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자, 그녀가
아미파의 제자인 줄 알았다. 금화파파는 멸절사태와 겨루기 위해
서 아미파의 검법을 수년 간 연구했었다. 그러나 이 젊은 낭자가
갑자기 곤륜파의 검법을 전개하자,  금화파파는 하는 수 없이 얼
른땅에서 한 번 뒹굴어야만 그녀의 일검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
나 왼손의 옷자락은 예리한 검날에 스쳐서 큰  조각이 베이고 말
았다.

 금화파파는 놀라면서도 화가 치밀었다. 즉시 다시 덮여갔다. 조
민은 자기의 무공이 그녀보다는  훨씬 못한 것을 알고 있기에 의
천검을 휘둘러서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갑자기 공동파 검법을
사용하다가 갑자기 화산파 검법을 사용하고, 갑자기 곤륜파의 대
막비사(大漠飛沙) 일초를 전개하더니 바로 소림파 달마검법의 금
침도겁(金針渡劫) 일초를 전개했다.  매초마다 모두가 각파의 검
법 중에 뛰어나게 우수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매 초마다 매우
거대한 위력을 지녔다. 더구나 의천검의 예리함을 가미하면 금화
파파는 도저히 접근하지 못했다. 주아는 옆에서 보다못해 허리춤
에 있는 장검을 풀어서  금화파파에게 던져 주었다. 조민은 연거
푸 칠, 팔 검을 빠르게 공격했다. 제  구검째가 되자 금화파파는
하는 수 없이 병기로 막아야 했다. 싹! 하고 소리가 나더니 장검
은 두 토막으로 잘라졌다.

 금화파파의 안색이 몹시 변하더니  얼른 몸을 옆으로 튕겨서 피
하며 소리쳤다.

 "넌 도대체 누구냐?!"

 그러자 조민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도룡도를 뽑지 않는 거죠?"

 "만약에 나에게  도룡도가 있다면 네가 어찌  나의 십초를 막아
내겠냐? 날 따라와서 시험해 보겠느냐?"

 "당신이 도룡도를 얻게 되면  오히려 잘된 일이오. 난 대도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칼을 얻은  다음에 다시 도전하시
오!"

 "고개를 나에게 돌려라.  그래야만 널 똑똑히 볼  수 있지 않느
냐?"

 그러자 조민은 몸을 비스듬히 돌려서 혀를 내밀고 왼쪽 눈을 감
고, 얼굴의 근육을 실룩거리면서  그녀에게 괴상한 얼굴을 해 보
였다. 금화파파는 몹시 화를 냈다. 이윽고 땅에다 침을 한 번 뱉
더니 단검을 버리고 주아와 주지약을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떠났
다.

 그러자 장무기가 조민에게 말했다.

 "우리 다시 쫓아갑시다."

 "서둘지 말고 날 따라  오세요. 당신의 주낭자는 무사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은 도룡도라고 말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오?"

 "아까 그 할머니가 폐원에서  말하길, 그녀는 온 세상을 헤매다
가 결국  한 분의 고인에게 보도를  빌려서 멸절사태의 의천검과
겨루게 됐다고 하지 않았나요? <의천불출, 수여쟁봉> 즉, 의천검
과 예리함을  겨루려면 오직 도룡도밖에  없소. 그렇다면 그녀는
당신의 의부인 사 노선배에게 도룡도를 빌리게 되었단 말인가요?
그러나 그녀의 손에는 보도가 없어서 나보고 그녀를 따라와 시험
하라 했어요. 마치 그녀는  이미 도룡도의 소재를 알았는데 손에
넣을 수 없는 것 같았어요."

 "그것 이상한 일이군....."

 "내 생각으로는 그녀가 바다로 나가서 칼을 찾으러 갈 것 같소.
우리는 필히 한 발 앞서야  하오. 그래야만 두 눈이 이미 장님이
되고 마음이 착하신 사 노선배님이 이 악독한 할머니에게 농락당
하지 않을 것이오!"

 장무기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듣자, 가슴의  뜨거운 피가 위로
솟구쳤다. 그러자 급히 말했다.

 "그렇소, 그렇소!"

 장무기가 조민이  도룡도를 빌리러 가자고 할  때 승낙한 것은,
단지 대장부가 일구이언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지금은 금화파파가 의부를 찾아가서 농락한다는 것
을 생각하자 날개라도 있으면 얼른 날아가서 구해주고 싶은 심정
이었다.

 이윽고 조민은 두 사람을  데리고 왕부의 앞으로 왔다. 부문(府
門) 앞에 있는 위사(衛士)에게  한참 동안 뭔가 분부했다. 그 위
사는 연거푸 대답했다. 얼마 후 아홉 필의 준마를 끌고 나오면서
금은이 담긴 큰 보따리  하나를 갖고 나왔다. 조민과 장무기, 소
조 세 사람은 세 필의 말을 타고, 나머지 여섯 필은 뒤에 따라오
게 하더니 교대로 갈아타면서 동쪽으로 질주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아홉  필의 말은 모두 지쳐서 움직이지 못
할 정도였다. 그러자 조민은 지방관(地方官)에게 여양왕 이 천하
의 병마를 부릴  수 있는 금패를 보이면서  다시 아홉 필의 말을
교환했다. 당일 심야가 되자 해변가에 당도했다.

 조민은 말을 몰아서 현성(顯城)으로 바로 들어갔다. 현관에게는
최고로 견고한 큰배 한  척을 속히 준비하라고 명하였다. 선상에
는 타공(舵工), 수수(水手), 양식,  식수, 병기, 겨울옷 등을 모
두 갖추도록 했다. 이밖에 모든 해선을 즉시 남쪽으로 몰라고 하
고, 해변 오십 리 안에는 다른 선박이 정박하지 못하도록 지시했
다. 여양왕 금패가  가는 곳에 말단 현관들이  어찌 명을 따르지
않겠는가. 조민과  장무기, 소조 세 사람은  현에 있는 관아에서
술을 마시며 기다렸다.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모든 것을 준비
완료하고 현관이 보고했다.

 세 사람은 해변으로 갔다. 배를 보더니, 조민은 발을 동동 구르
며 소리쳤다.

 "큰일이에요!"

 해변에 정박해 있는 해선의  선채는 매우 컸다. 배의 높이는 이
층으로 되어 있고, 뱃머리의 갑판과 왼쪽, 오른쪽 뱃전에는 모두
철포(鐵砲)가 장치되어  있었다. 이는  몽고 해군의 포선이었다.
왕년에 몽고의 대군이 일본을  원정하러 갈 때 뜻밖에 태풍을 만
나서 몽고 해군이 엉망으로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동정(東征)하
는 일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함의 모양은 그
때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이때 배 안에는 양식, 식수 등이 모
두 준비되었고, 더구나 해변에  있는 나머지 배들은 이미 여양왕
금패의 전령에 따라  벌써 남쪽 수십 리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조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는 수 없이 대포 위에다 고기 그물을
여러 개 걸쳐 놓고 배 위에는 십 여 단의 신선한 생선을 갖다 놓
으라고 뱃사공들에게 분부했다. 이는 포선이 오래 되어서 쓸모없
게 되자 어선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으로 위장한 것이다.

 조민과 장무기,  소조, 세 사람은  뱃사공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서 유채(油彩)로 얼굴을 노랗게  칠한 다음, 다시 쥐같은 수염
두 개를 그렸다.  세 사람은 배 안에  앉아서 금화파파가 오기만
기다렸다.

 조민 군주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과연 해질 무렵이 되자 큰 수
레 한 대가 해변으로  다가왔다. 금화파파가 주아와 주지약을 데
리고 배를 구하러 다가왔다.  선상에 있는 사공들은 이미 조민의
당부를 받아서 여러 번  사양하면서 말하길, 이건 오래된 포선이
어선으로 개장(改裝)한 것이라 고기만 전문적으로 잡는다며 절대
로 손님을 태우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금화파파가 두 덩어리
나 되는 황금을 꺼내서  뱃삯이라고 하자, 선장은 그제서야 마지
못해 승낙했다. 금화파파는  주아, 주지약을 대동하여 배에 올라
가더니, 즉시 돛을 내려서 동쪽으로 가자고 명하였다.

 배가 이틀쯤 가자, 장무기와 조민은 배의 밑창에 있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해와 달은 항상 왼쪽의 뱃전에서 떠올랐다. 이
는 배가 남쪽으로 가는 것을  뜻한다. 그 때는 이미 초겨울 날씨
라서 북풍이 몰아쳤다. 돛에 잔뜩 바람을 먹게 되자 배의 속도가
매우 빨랐다. 장무기와 조민은 여러 번 상의했었다.

 "우리 의부는 북극의 빙화도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찾으려
면 필히 북쪽으로 가야하는데,  어찌 반대로 남쪽으로 가는 것이
오?"

 조민은 매번 같은 대답을 하였다.

 "금화파파에게 필시 무슨 꿍꿍이 속이 있을 거예요. 더구나, 지
금 이 계절에는 남풍이 불지 않기 때문에 북쪽으로 가려 해도 갈
수 없어요."

 사흘째 되던 오후였다.  키잡이가 내려와서 조민에게 보고하길,
금화파파는 이 일대의 사정에 매우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오히려
자기보다 더 똑똑히 알고 있다고 했다.

 장무기는 갑자기 뇌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 그렇다! 그녀는 영사도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조민이 물었다.

 "영사도라니?!"

 "금화파파의 옛집은 영사도에 있소. 그녀의 별세한 남편 이름은
은엽선생이오. 영사도의  금화은엽(金花銀葉)을 당신은 들어보지
못했소?"

 그러자 조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보다 겨우 몇 살 위인데 강호에 있는 일을 정말 많이
알고 있군요."

 "명교는 사마외도라 군주 낭자보다야 강호의 일을 많이 알 수밖
에 없죠."

 키잡이는 보고한 후 금화파파에게 발각될까봐 얼른 배 뒤쪽으로
돌아갔다.

 조민이 웃으며 말했다.

 "장교주, 귀찮겠지만 당신은  영사도의 금화은엽이 강호에서 위
세를 떨친 이야기를 이 계집에게 해 주겠습니까?"

 그러자 장무기는 웃으며 말했다.

 "얘기하자면 부끄러운 일이요.  은엽선생이 어떠한 인물인지 난
전혀 아는 바가 없소. 그러나 그 금화파파란 분은 나와 한 번 적
대관계가 된 적이 있소."

 이윽고 자기가 어떻게 해서 호접곡에서 접곡의선 호청우에게 의
술을 배운  것하며, 어떻게 해서  각파의 사람들이 금화파파에게
당해서 접곡으로 온 일하며,  호청우가 자기를 지적해 줘서 사람
들을 치료했다는 일과, 금화파파가 어떻게 해서 멸절사태에게 패
한 일하며, 호청우, 왕난고 부부가 결국은 금화파파의 손에 다시
죽게 되었나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일일이 얘기해 주었다.

 그는 호청우의  성격이 몹시 괴팍하였으나  자기에게는 실로 잘
대해 주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 부부의 시체가 나뭇 가지에 높
이 걸려 있는 광경을 생각하자 그만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는 주아가 자기를 사로잡아서 영사도로 데려가서 그녀의 동무
가 되어 달라는 일과, 자기가  그녀의 손등을 한 입 물었다는 일
은 생략했다. 뭣 때문에 생략했는지 자기도 그 영문을 몰랐다.

 조민은 소리내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이윽고 점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엔 난 이 할머니가  단지 무공이 뛰어난 고수인 줄만 알았
는데, 그 속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군요. 당신의 얘기를 들어
보면 이 할머니는 매우 상대하기 어려운 것 같은데, 우리는 절대
로 방심해서는 안 되겠죠?"

 "군주 낭자는 문무쌍전하시고,  수하에는 많은 기재이능지사(奇
才異能之士)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그까짓 금화파파 하나쯤이
야 식은죽 먹기 아닙니까?"

 그러자 조민은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망망대해에서는 나의 수하에 있는 무사들을
소환하지 못해요."

 "밥을 짓는 부엌떼기들과 돛을 끄는 사공들은 강호의 일류 고수
라고 할 순 없어도 이류는 될 게 아니오?"

 그러자 조민은 멈칫거렸다. 이윽고 깔깔 웃으며 말했다.

 "정말 탄복했어요. 장교주의 안력은 정말 놀랍군요."

 그녀는 왕부에 돌아가서 금은과 말을 끌고 올 때, 몰래 위사(衛
士)에게 분부해서  한패의 부하들을  해변으로 이동시켜 놓았다.
이 사람들은 쾌마(快馬)로 달려가서 장무기와 소조보다는 반나절
이나 먼저 도착한 것이다.  그녀가 이동시킨 사람들은 모두 반안
사의 일전에  참가하지 않아서 장무기는 그를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장무기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조민은 그의 말을 듣자 이미 그에게 간파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금화파파의 눈은 더욱  속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자기편에는 사람이 많고 세력 또한 막강했다. 더구나
무공이 고강한 장무기도 있다.  그녀가 설사 간파해서 싸우게 되
더라도 별로 겁날 것은 없었다.  그녀가 가만히 있는 한 계속 모
른 체하기로 했다.

 요 며칠 동안 장무기가 제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주지약이 금화
파파의 그 환약을 복용했기에  독성이 발작하느냐, 안 하느냐 하
는 것이다. 조민은 그가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걸 보자 그의 속
셈을 눈치챘다. 그러자 사람을 상창(上艙)에 파견해서 차와 물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가장해서  동정을 살피라고 하였다. 매번 들
어와서 보고할  때는 주낭자에게 전혀 이상이  없다는 말을 하였
다. 이처럼 몇 번 지나자 장무기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선면(船面) 위에서  한 차례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바로 사공이 내려와서 보고했다.

 "앞에 육지가  보이는데 할머니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가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조민과 장무기는 창 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수 리 밖에는 나무가
우거진 큰 섬이 있었다. 배는 바람을 잔뜩 먹었기에 곧바로 앞으
로 다가갔다. 잠시 후 섬에 당도했다.

 전선(戰船)이 미처 정박하기 전에 갑자기 산등성이에서 큰 소리
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장무기는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이 외
치는 소리가 몹시 귀에 익기 때문이다. 바로 의부인 금모사왕 사
손의 음성이었다. 십여 년을 헤어졌지만 의부의 웅풍(雄風)이 옛
과 다름없는 것을 보자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얼른 사
다리로 올라가서 선미(船尾)  쪽으로 가더니 소리를 발출한 산등
성을 바라보았다.

 이때 네 명의 남자가  병기를 손에 쥐고, 체격이 거대한 사람을
포위해서 공격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맨 손으로 적을 맞이하였
다. 바로 금모사왕 사손이었다. 장무기가 의부를 보니 비록 눈은
장님이고 일 대 사로  싸우고 있었으나 전혀 그들에게 놀리는 감
은 없었다. 그는 의부가 남하고  싸우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
다. 지금 몇 초를 보았지만 매우 기뻤다.

 '왕년에 금모사왕이 위진천하한 건 과연 헛소문이 아니구나. 의
부의 무공은 청익복왕보다 한 수 위라서 나의 외할아버지와 비슷
한 것이다.'

 그 네 사람의  무공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선미에서 산등성을
올려다보니, 네 사람의 얼굴은  똑똑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누
더기 옷하며 등에 포대(布袋)를 짊어지고 있는 것을 보아서는 개
방의 인물인 것 같았다. 옆에는  다른 세 사람이 진을 치고 있었
다.

 이윽고 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도룡도를 내놓아라..... 널 살려주마..... 보도와 너의 목숨을
바꾸는 것이다....."

 산간의 가벼운 바람이 그의  말소리를 간간이 끊으면서 전해 왔
다. 이 사람들의 저의는 도룡보도를 강탈하는 것이다.

 이윽고 사손이 큰 소리로 웃어대며 말했다.

 "도룡도는 나의 신변에  있다. 개방의 더러운 도적들아, 재주가
있으면 뺏어 보아라!"

 그는 말을 하면서도 손발의 초수는 전혀 늦추지 않았다.

 금화파파의 몸이 한 번  휘청거리더니 이미 물가의 언덕에 올라
갔다. 기침을 몇 번 하면서 말했다.

 "개방의 군협(群俠)이  영사도에 광림했으면  나하고 말을 해야
지, 뭣 때문에 영사도의 귀빈에게 귀찮게 구는 것이냐?"

 그러자 장무기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 섬은 과연 영사도구나.  금화파파의 말을 들어보면 마치 나
의 의부는 그녀가 모셔온 손님 같구나. 나의 의부는 왕년에 어떠
한 일이 있어도 빙화도를  떠나 중원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금화파파의 부탁을  받고 그가 바로 돌아왔을까? 금
화파파는 또  어떻게 의부,  그 어르신네의 소재를  알게 되었을
까?'

 마음속에는 삽시간에 수많은 의문이 생겼다.

 산등성이에 있는 네  사람은 이 섬의 주인이  당도한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다급해져서 사손에게 더욱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그
러나 이렇게 되면 곧 무학  중의 큰 금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사손은 장님이기 때문에 적의 병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듣고
방향을 잡아서 적을 응대하는 것이다. 이 네 사람의 출수가 빨라
지자 바람소리가 더욱 커졌다. 사손은  길게 한 번 웃더니 펑 하
고 일권을 한 사람의 앞  가슴에 적중했다. 그 사람은 길게 비명
을 지르며 산등성이에서 밑으로 떨어졌다. 두개골이 깨지면서 뇌
장이 낭자했다.

 옆에서 진을 치고 있던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소리쳤다.

 "물러서라!"

 가볍게 나부끼는 일권을  후려쳤다. 권력은 약유약무(若有若無)
하였다. 이는 사손이 방향을  잡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과연 주
먹이 사손의 몸 앞에  가까이 똑바로 다가가자 그는 그제서야 발
각되면서 급히 응초(應招)했다. 이미 수족이 양난되어 매우 낭패
하였다. 먼저 싸웠던 세 사람은 물러나고 옆에서 진을 치고 있던
한 노자가 다시 전단(戰團)으로 가입했다. 이 사람은 먼저 그 사
람의 타법과 똑같았다. 그 역시 출장이 가볍고 유연했다. 수초가
지나자 사손은 위험한 처지에 놓여졌다.

 금화파파가 소리쳤다.

 "계장노(系長老), 정장노(鄭長老), 금모사왕이  눈이 불편한 줄
알면서 그처럼 비겁한 수단을 쓰다니, 강호에 이름있는 영웅이라
할 수 없겠군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그녀
의 엉성한 걸음을 보면  마치 산바람이 불기만 하면 밑으로 내동
댕이쳐질 것  같지만, 몸의 이동은 매우  신속했다. 주아가 뒤에
바짝 다가갔으나 오히려 한참 낙후되었다.

 장무기만 의부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빠른 걸음으로 산을 올라갔
다. 조민도 따라 올라오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 노파가 있는 한 사왕에게는 위험이 없을 거예요. 당신은 출
수할 필요 없으니 숨는 게 시급해요."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아의 뒤를 따라갔다.

 네 사람은 잠깐 사이에 산마루에 도착했다. 사손의 양손 출초는
매우 짧으면서 수비만 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적의 권각(拳脚)이
가까이 공격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제서야 소금나수(小擒拿
手)로 막아냈다.  이러한 타법은 일시적으론  염려할 것 없지만,
적을 공격해서 승리를 얻으려면 몹시 힘들었다.

 장무기가 한 그루의 큰 소나무 밑에서 의부를 바라보니, 얼굴은
주름 투성이고 머리도 거의 모두 하얗게 되었다. 그날 헤어질 때
보다는 훨씬 더 늙었다. 아마 이십여 년 동안 혼자서 황도(荒島)
에 살아서 몹시  고생한 것 같았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마음이
몹시 아팠다. 참다 못해서 그를 대신하여 적을 처치할 생각이 굴
뚝 같았다. 조민은 그의 마음을 알았다.

 이윽고 금화파파의 말소리가 들렸다.

 "계장노, 당신의  음산장대구식(陰山掌大九式)은 강호에 펼쳤는
데, 뭣 때문에 슬며시 연장초식으로 바꾸는 것이오? 정장노는 더
욱 형편 없구료!  당신은 회풍불류권(廻風拂柳拳)을 몰래 팔궤권
중에 숨겼으니 금모사왕 사대협은  알 도리가 없죠..... 콜록 콜
록....."

 사손은 적의 초식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적과 싸울 때는 몹시 손
해였다. 더구나 그 계, 정 두 장노는  몹시 교활해서  출초할 때 
일부러 변식하여 그가 알아채지 못하게 했다. 금화파파가 이처럼
허를 일러주게 되자 그는 짐작하게 되었다.

 사손은 정장노의 권법이 미처  바뀌기 전에 몸을 타서 훅! 하고
일권을 후려쳐서 마침 정장노가 공격한 일권을 막아냈다. 정장노
는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나서야 몸을 똑바로 가눌수가 있었다. 계
장노는 옆에서  장풍을 휘두르면서 보호했다.  이는 사손이 추격
(追擊)할 틈을 주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장무기가 개방의 두 장노를 바라보니, 그 계장노는 키가 작았고
뚱뚱했다. 얼굴이  블그스름한 것이  마치 도살장의 백정같았다.
그 정장노는  비쩍 말랐으며 얼굴에 채색이  있는 것이 영낙없는
개방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등에는 모두 여덟개의 포대를 짊어
지고 있었다. 멀리 서 있는  삼십 세 정도의 청년도 개방의 복장
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옷가지는 매우 청결하였다. 등에는 역시
여덟개의 포대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의 나이에 개방의 팔대(袋)
장노가 되었다는 것은  꽤 드문 일이다. 갑자기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금화파파, 당신은 옳게  사손을 도와주지 않았지만 구두(口頭)
로 도와주는 건 치지 않는 겁니까?"

 그러자 금화파파는 냉랭하게 말했다.

 "각하도 개방 중의 장논가요?  노파가 눈이 어두워서 몰라 뵈었
소."

 "소인은 새로 개방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파파는 의당 모를
것이오. 소인의 성은 진(陣)이고, 이름은 우량(友諒)이라고 합니
다."

 금화파파는 혼자 중얼거렸다.

 "진우량, 진우량, 진우량, 못 들어봤다!"

 갑자기 크게 호통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장노의 왼팔에 사손의
일권이 다시 적중되었다. 그러자  옆에서 관전하는 세 명의 개방
제자들은 다시 병기를  빼앗아 다가가면서 위공(圍攻)하였다. 이
세 사람의 무공은 계, 정  두장노보다는 못해서 오히려 거추장스
러웠다. 그러나 사손은 장님된  후 한번도 남하고 싸우지 않아서
경험이 없었다. 오늘 처음 강적을 만난 것이다. 적들은 권각에다
병기까지 쓰고 있으니 소리가 혼란되어 방향을 분별하지 못했다.
잠깐 사이 어깨에 일권이 적중되었다.

 장무기는 정세가  다급해진 것을 보고  막 출수하려는데 조민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금화파파가 구해줄 거예요."

 장무기는 잠깐  주춤했다. 금화파파를  바라보니 그녀는 여전히
지팡이를 짚고 있으며 살짝  냉소를 보일 뿐, 다가가서 구해주지
는 않았다. 바로 이때 사손의 왼쪽 다리가 다시 정장노에게 무섭
게 걷어채였다. 사손은 휘청하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장무기의 수중에는 벌써  일곱개의 돌멩이가 쥐어져 있었다. 이
때 참지 못해서 오른손을 일진(一振)하여 일곱개의 작은 돌을 다
섯 사람에게  나누어서 공격했다. 돌이  미처 그들에게 당도하기
전에 갑자기  검은 빛이 번뜩거리더니 지직  하는 소리가 나면서
세 가지 병기는 즉시 잘라졌고,  다섯 사람 중 네 사람은 일제히
몸통이 잘라지면서 여덟 토막으로 되었다. 여덟 토막의 몸뚱이는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산기슭 밑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정장노만
왼팔이 잘라지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등에는 장무기가 격출한
돌 두 개가  박혀 있었다. 그 네 개의  잘려진 몸에도 모두 돌이
박혀 있었다. 다만 칼에 먼저 베였고 돌은 나중에 박힌 것이다.

 이 갑작스런 변고에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사손의 수중에는 거
므스름한 대도가 한 자루 쥐어져 있었다. 바로 <무림지존>이라고
부르는 도룡보도였다. 그는 칼을 들고 산마루에 서 있었다. 위풍
당당한 것이 마치 전신(戰神) 같았다.

 장무기는 어려서부터 이 대도(大刀)를 보아왔다. 그러나 이처럼
예리하고 위맹(威猛)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금화파파가 수다스럽게 말했다.

 "무림지존 보도도룡, 무림지존 보도도룡!"

 정장노는 팔이 잘리자 아파서 마치 돼지 멱따는 소리로 크게 소
리지르고 있었다.

 진우량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사대협의 개세무공(蓋世武功)엔 정말 탄복했소이다. 이분 정장
노를 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소인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대신
하겠습니다. 자, 사대협은 손을 쓰시오."

 이러한 말이  나오자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이 사람의 의기가
이처럼 심중(深重)할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장무기도 그만 존경
하는 마음이 생겼다.

 사손이 말했다.

 "진우량, 음, 그래도 넌 호한(好漢)이구나. 좋다! 이 정가란 자
를 데려 가거라."

 "소인은 우선  불살지은(不殺之恩)을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개방에는 이미 다섯 사람이 사대협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소인
이 십 년 안에 무공의  진전이 있게 되면 다시 와서 오늘의 원한
을 갚을 것이오."

 "노부가 십 년을 더 살 수 있으면 꼭 기다려 주마."

 진우량은 포권을 하며 금화파파에게 인사하면서 말했다.

 "개방이 귀도(貴島)에 함부로 들어온 것을 사과드립니다."

 이윽고 정장노를 끌어안고 산 밑으로 내려갔다.

 금화파파는 장무기에게 눈을 부릅뜨고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의 타혈수법(打穴手法)은 대단히  정확했소. 당신은 뭣 때
문에 모두 일곱 개의  돌을 발사했소. 하나는 진우량을, 또 하나
는 날 때리려는 것이오?"

 장무기는 그녀가 자기의 저의를 간파한 것을 보고 그저 살짝 웃
기만 했다. 그러자 금화파파는 사나운 소리로 말했다.

 "노인장, 당신의 존함은  뭡니까? 사공으로 가장하여 이 노파를
뭣 때문에 따라왔소? 금화파파의 면전에서 잔꾀를 부리다니 그래
도 살고 싶은 것이오?"

 장무기는 거짓말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녀의 물음을 듣
더니 멈칫하면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조민이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거경방은 항상 바다에서 밥을 찾아 먹고 본전없는 장사를
하고 있소.  노파파께서 많은 금을  내놓으셔서 여기까지 모셔온
것 뿐인데 뭐가 잘못 되었소? 이분 형제는 개방이 자기편 사람이
많다는 걸 믿고 남을 못살게 구는 걸 보다 못해서 출수하여 도운
것인데, 뜻밖에도 사대협의 무공이  이처럼 대단한 줄 정말 몰랐
소. 우리가 괜한 일을 한 것 같구료."

 그녀는 남자의 음성을  흉내냈으나 듣기에 몹시 귀가 거슬렸다.
그러나 그녀의 화장이 정묘해서 금화파파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사손은 손을 한 번 휘두르며 말했다.

 "정말 고맙소. 아하, 금모사왕이 호락평양(虎落平陽)하니까, 오
늘은 반대로 거경방의 도움을  받게 되었구료. 강호와 작별한 지
이십 년이 되니까 무림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나왔구료. 내
가 구태여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었구료."

 마지막 몇 마디 할 때는 음성이 의기소침하였다. 이윽고 금화파
파가 말했다.

 "사삼가(謝三哥), 난 당신이 남의  도움을 받기 싫어하는 줄 알
기 때문에 출수하지 않았소.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죠?"

 장무기는 그녀가 자기의 의부에게 <세째 오라버니>라는 말을 하
자 약간 이상하게  여겼다. 그는 의부의 항렬이  세째인 줄 몰랐
다. 더구나 금화파파는 그의 의부보다도 더 늙었다. 이윽고 사손
이 말했다.

 "뭘 이상하게 보고 자시고  하겠소. 당신은 이번에 중원으로 돌
아가서 무기의 소식을 들은 적이있소?"

 순간 장무기의 가슴은 찡했다. 이윽고 부드러운 손이 그의 손을
힘껏 쥐고 있었다. 이는  조민이 지금 자기가 나가서 상인(相認)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자 금화파파가 말했다.

 "없소."

 사손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한참 지난  다음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한부인(韓夫人), 그 무기는 확실히 살아 있는 거요?"

 그러자 금화파파는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주아가 갑자기
말했다.

 "사대협....."

 금화파파는 왼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힘껏 잡으며 눈을 부릅
뜨고 쳐다보았다. 그러자  주아는 더 이상 감히  말을 하지 못했
다. 사손이 다그쳤다.

 "은 낭자, 어서 말해 보아라. 너의 파파가 날 속이고 있는 것이
다. 그렇지?"

 주아의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금화파파는 우장
을 들어 올려서 그녀의 머리 위에다 올려놓았다. 주아가 한 말이
그녀의 비위를 거슬리기만 하면 내력을 토해내서 즉시 그녀의 목
숨을 앗을 심산이다.

 "사대협, 우리 파파는  당신을 기만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우
리가 중원에 갔지만 장무기의 소식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금화파파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자, 우장을  즉시 들어 그녀의
뇌문(腦門)에서 떼었다. 그러나 왼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잡
고 있었다.

 사손이 말했다.

 "그럼 너희들은 무슨 소식을  알아 보았느냐? 명교는 어떻게 됐
느냐? 우리의 옛 친구들은 어떻게 됐느냐?"

 "모르겠소. 강호의 일은 알아보지도 않았소. 난 단지 내 남편을
해친 두타(頭陀)를 찾아서 복수하려  했소, 또 아미파의 멸절 늙
은이를 찾아서 그 일검을 복수를  하려 했소. 나머지 일은 이 할
망구의 안중에도 없소."

 사손은 화를 내며 말했다.

 "잘하는구나. 한부인,  당신은 그날  빙화도에서 나에게 어떻게
말했소? 당신은 나의  장오제(張五弟)부부가 내 은신처를 발설하
지 않았기 때문에 무당산에서 사람들에게 강압당해서 자진했다고
하지 않았소? 내 그 무기  아이는 돌봐줄 사람도 없는 고아가 되
어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남에게  설움을 당할 게 아니오? 얼마나
비참하겠소. 안 그렇소?"

 "맞습니다."

 "당신은 그가 누구에게  현명패천장 일장을 얻어맞고 밤새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소? 당신은 호접곡에서 직
접 목격했다며, 그가 영사도로  오기를 바랬지만 그는 절대로 오
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소?"

 "틀림없는 일이오. 내가 만약에 당신을 속인다면 하늘이 꾸짖고
땅이 꺼질 것이오. 죽은 내 남편도 지하에서 편치 못할 것이오."

 사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 낭자, 너의 얘기는 어떠하냐?"

 "그 당시 전 그에게 영사도로 가자고 권했지만 제 말을 듣지 않
았습니다. 오히려 저의  손등을 물었습니다. 저의 손등에는 아직
도 이빨자국이 남아  있으니 절대로 거짓말은 아닙니다. 전.....
전 그가 몹시 걱정됩니다."

 조민은 장무기의 손을 갑자기  힘껏 끌더니 눈을 부라리고 그를
주시했다. 눈빛에는 비웃기도  하고 원망하는 뜻이 서려 있었다.
그러자 장무기는 얼굴을  붉히며 주아가 자기에게 비상한 정의로
대해준 것이 생각났다. 순간 가슴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했다.

 갑자기 조민은 장무기의 손을  입가에 끌어가서 그의 손등을 사
납게 물었다. 그러자 장무기의 손등은 즉시 선혈을 내뿜었다. 체
내의 구양신공이 자동적으로 저항하는 힘이 생겨나자, 조민의 입
가는 모두 진파(震破)되어서 덩달아 피를 흘렸다 그러나 두 사람
은 모두 아픔을 참고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장무기는 조민을 쳐
다보았으나 그녀가 뭣 때문에 자기를 갑자기 물었는지는 몰랐다.
그녀의 눈은 웃음을 머금고 있으며, 얼굴은 약간 붉히고 있는 것
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입술 위에는 두 가닥의 가짜 수염을 붙였
지만 아리따운 얼굴을 가릴 수는 없었다.

 사손이 말했다.

 "한부인, 난 무기가 혼자서 떠돌아다니며 고생할까 봐 걱정되어
서, 만리 길을 불사하고 빙화도를 떠나 중원으로 다시 돌아온 것
이오. 당신은 나에게  무기를 탐방하러 간다고 응답하였는데, 어
찌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오?"

 장무기 눈에는 눈물이 핑 돌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의부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중원에 돌아온  것이 모두 자기 때문인 것을 알
았다.

 "그날 우리는 약속했죠? 내가 당신을 위해 장무기를 찾아준다면
당신은 도룡도를 나에게  빌려준다고 했소. 사삼가, 노파의 말은
산처럼 무겁소. 당신이 나에게 칼을 빌려 준다면, 당연히 당신을
위해 그 아이의 확실한 소식을 탐방할 것이오."

 사손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무기를 먼저 데려오시오. 그럼 칼은 자연히 빌려 줄 것
이오."

 "날 믿지 못하는 거요?"

 "세상의 일은 예측하기 매우 힘드오. 부모형제처럼 친하게 지내
도 어떤 때는 믿지 못할 때가 있소!"

 "그렇다면, 칼을 먼저 빌려줄 수 없다는 거죠?"

 "내가 개방의 진우량을 놓아 줬기 때문에 앞으로 영사도는 조용
한 날이 없을  것이오. 게다가 무림에 있는  수많은 원수들이 날
찾으러 오게 될  것이오. 금모사왕은 벌써부터 옛날과는 다르오.
이 도룡도 외에는 의지할 게 없소이다. 흐흐흐....."

 그는 갑자기 냉소를 몇 번 터뜨렸다.

 "한부인, 아까 그 다섯 사람이 날 포위해서 공격할 때 거경방의
호한 그분까지 미리 알고  수중에 돌을 일곱개 쥐고 있었던 것이
오. 그렇다면 당신은 날 해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소? 당신이
바라는 건 내가 개방에게 죽어서 보도를 어부지리로 얻으려는 것
이죠?  비록 사손의 눈은 멀었지만 마음은 멀지 않았소. 한부인,
한 가지 더 물어 보겠소.  사손이 영사도에 온 일은 몹시 은밀한
데 개방이 어찌 알게 되었소?"

 "나도 자세히 알아볼 참이오."

 사손은 손가락으로 도룡도를  한 번 튕기더니 장포(長袍)안으로
집어 넣었다.

 "당신이 나를  위해 무기를 탐방하는 것은  당신 마음대로 하시
오. 사손은 오직 강호로 다시 들어가서 모두 엎어 버리는 수밖에
없겠구료."

 말이 끝나자  하늘을 우러러보며 휘파람을 한  번 불더니, 몸을
위로 솟구쳐 어느새 서쪽 산비탈로 걸어 내려갔다. 그는 매우 신
속하고 민첩한 걸음으로 섬 북쪽에 있는 산봉우리를 향해 곧바로
갔다.

 그 산정(山頂)에는 오두막집 하나가 외롭게 서 있었다. 아마 그
는 거기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금화파파는 사손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돌려 장무
기와 조민에게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썩 꺼져라!"

 조민은 장무기의 손을 잡고 즉시 하산하여 배로 돌아갔다. 이윽
고 장무기가 말했다.

 "난 의부를 만나러 가겠소!"

 "당신 의부가 떠날 때 금화파파의 눈에는 흉악한 빛이 번뜩거렸
는데, 당신은 보지 못했나요?"

 "난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소!"

 "내가 보기엔 이 섬에는  많은 간사하고 비밀스런 일이 숨겨 있
는 것  같아요. 개방의 사람들이 어떻게  영사도에 오게 되었죠?
금화파파는 어떻게 빙화도를 찾아 갔을까요? 이 중간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아요. 당신이 가서 금화파파를 일장에 죽
이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죠.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는 거예요."

 "난 금화파파를 죽일 생각은 없소. 단지 의부께서 날 너무나 보
고 싶어하기 때문이오. 난 즉시 그를 만나러 가겠소."

 조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십여 년도 헤어져 있었는데  하루 이틀은 더 기다릴 수 있잖아
요? 장공자, 우리는  금화파파를 방어해야 되겠지만 진우량도 방
어해야 해요."

 "그 진우량 말이오? 그  사람은 의리를 중요시하는 대장부가 아
니오?"

 "당신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날 속이는  게 아니
죠?"

 장무기는 이상히 여기며 말했다.

 "뭣 때문에 당신을 속이겠소?  그 진우량은 정장노의 죽음을 대
신 자처하지 않았소.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오."

 그러자 조민은 그를 주시하며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장공자, 당신은 명교의 교주이며 사납고 교만하고 불순한 수많
은 영웅호걸을 통솔해야 하며,  수많은 대사를 도모해야 할 사람
이에요. 그런데  이처럼 쉽게 사람에게  기만당하면 정말 큰일이
아니에요?"

 "남에게 기만당하다니?"

 "그 진우량은  분명히 사대협을 기만했어요.  당신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어찌 알아채지 못했어요?"

 장무기는 펄쩍 뛰었다.

 "그가 나의 의부를 기만했단 말이오?"

 "당시 사대협께서  도룡도를 한 번 휘둘러  대자 개방의 고수는
네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은 부상당했소.  그 진우량의 무공이
제아무리 높아도 도룡도의  일할(一割)은 벗어나지 못해요. 이런
처지에 놓여있을 땐 무릎꿇고  비는 수밖에 없소. 당신도 생각해
보세요. 사대협께서는 자기의 행적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려
하고 있으니, 설령 진우량이  절을 삼백번 하더라도 사대협의 마
음을 돌릴 수는 없소.  그러니 인협중의(仁俠重義) 말고 더 좋은
위장 방법이 있겠어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장무기  손등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자기
의 손수건으로 상처를 감아주었다.

 장무기는 그녀가 진우량의 처지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 보니, 과
연 틀린 곳은 없었다. 그러나 당시 진우량의 전혀 거짓없는 표정
을 회상하더니 여전히 반신반의(半信半疑)하였다. 이윽고 조민이
다시 말했다.

 "좋아요. 내 당신에게 다시 묻겠소. 그 진우량이 사대협에게 말
을 할 때 그의 양손과 양발은 어떠했어요?"

 장무기는 그 때 진우량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의 얼굴과 의
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기에 진우량의 손, 발에는 주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온몸  자세는 눈에 선했다. 다른 사람이 말
하지 않으면 그 역시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조민이 자기
에게 묻자 당시의 정경이 다시 뇌해(腦海)에 새로 펼쳐졌다.

 "음, 그 진우량의 오른손은  약간 들어올리고 왼손은 가로 흔들
었다. 그건  <사자박토(獅子搏兎)> 일초다. 그의  양 다리는 음,
맞다 이건  <강마탕두식(降魔湯斗式)>이다. 그건  모두 소림파의
권법이다. 하지만 별로 대단한  초수라 할 수 없소. 그렇다면 그
는 의부에게 사정하는 척하면서 도습하려는 것이란 말이오? 그건
옳지 않은 생각이오. 그 두 가지 초식은 별로 쓸모가 없소."

 그러자 조민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공자, 당신은  세상의 민심이 얼마나  험악한지 도무지 아는
게 없구료. 그 진우량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대협을 도습
한다는 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어요. 그 사람의 총명함과 기경
(機驚)함은 실로 일류급이라 할  수 있어요. 만약에 그가 가장한
의기심중한 잔재주가 사대협에게 간파되어 그를 살려주지 않는다
면, 당시 그의 서 있는 위치로 봐서 강마탕두식은 누구를 걷어차
려는 것이죠? 그리고 사자박토  일초는 누구를 잡으려 하는 것이
죠?"

 장무기는 마음이 너무  착해서 사람을 대할 때  모든 것을 좋은
쪽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우량의 계략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막상 조민이 일침을 놓자, 뇌리에는 뭔가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이윽고 식은땀이 나면서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그..... 그의 일각(一脚)은 땅에 누워있는 정장노를 차려했고,
출수하여 잡으려 하는 건 은 낭자였소."

 그러자 조민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틀림없어요. 그는  정장노를 발로 걷어차서  사대협 몸 앞으로
날아가게 한 다음, 다시 그  은 낭자를 잡아서 사대협 몸 앞으로
미는 것이오. 이처럼  시간을 약간 벌면 그는  기회가 생겨서 혹
도피해서 목숨은 부지할 줄  모르지 않아요? 비록 사대협이 무공
이 뛰어나고 보도도 들고 있지만, 그래도 이 방법은 성공률이 높
아요. 난 지금까지 생각했지만 여전히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했어요. 그  자는 잠깐 사이에 그처럼 임기웅변하
다니 실로 대단한 인물이에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칭찬을 금치 못했다.

 장무기는 생각할수록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 지나서야 말
했다.

 "조 낭자, 당신은 한눈에  그의 속셈을 바로 꿰뚫었으니 당신은
그보다 더 대단하구료."

 조민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날 빈정대고 있는  거예요? 내 당신에게 분명히 말하겠
는데, 만약 나의 마음 씀씀이가 험악하여 겁난다면 차라리 날 멀
찌감치 피해 있는 게 상책이라 생각해요."

 그러자 장무기는 웃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소. 당신이 나에게 많은 계략을 행했기에 난 모
든 일에 방어하고 있소."

 조민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의 손등에 독약을 발라
주었는데 어찌 모르고 있는 거예요?"

 장무기는 깜짝 놀랐다. 과연 상처 부위는 약간 마비되고 간지러
운 것 같으면서 몹시 이상했다. 얼른 손수건을 찢어 버리고 코에
대고 맡아보더니 그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이구!"

 장무기는 얼른 선미(船尾) 쪽으로 달려가서 깨끗한 물로 상처난
곳을 씻었다. 조민은 뒤를 따라가서 웃음을 띄우며 그가 씻는 일
을 도와주었다. 그러자 장무기는 그녀의 어깨를 밀면서 괴로워하
며 말했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마오! 뭣 때문에 이처럼 고약한 장난을 하
는 거죠? 남은 아프지 않는 줄 아오?"

 조민은 깔깔 대며 웃었다.

 "난 당신이 고통당할까 봐 이 방법을 사용한 거예요."

 장무기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식식거리며 선창 안으로
돌아가면서 두 눈을 감았다. 조민이 따라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장공자!"

 장무기는 자는 척했다. 조민은  다시 두 번을 불렀으나 그는 아
예 코를 골았다. 그러자 조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진작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독약을 발라서 그의 개같은 목
숨을 끊어 버리는 게 훨씬 좋았을걸."

 장무기는 눈을 뜨더니 웃으며 말했다.

 "나도 당신의 손등을 한 번  물어서 평생 날 잊지 못하게 할 것
이오."

 이윽고 그녀의 왼손을 잡고 입에 가져다 대었다.

 조민은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밖
으로 달려갔다. 하마터면 소조와 정면 충돌할 뻔했다. 조민은 깜
짝 놀랐다.

 '아차, 나와 그의  대화를 이 계집이 다  들었을 것이다. 아유,
창피해!'

 그만 얼굴을 붉히며  갑판으로 뛰어갔다. 소조는 장무기에게 다
가가서 말했다.

 "공자님, 금화파파와  그 못생긴  낭자는 저쪽으로 지나갔는데,
두 사람은 모두 큰 자루를 하나씩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슨 수
작을 부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섬 북쪽에 있는 그 작은 오두막집으로 갔느냐?"

 "아닙니다. 그들 두 사람은  줄곧 북쪽으로 갔으나 산으로 올라
가지 않았습니다. 마치 무엇인가 다투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금
화파파는 몹시 화가 나있는 것 같았습니다."

 장무기는 선미 쪽으로 다가갔다. 멀리 조민이 뱃머리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바다만 바라보고 있을 뿐 몸을 뒤로
돌리지 않았다. 한참 후 태양이 서쪽 바다 밑으로 가라앉자 선창
으로 돌아갔다.

 장무기는 저녁을 먹고 나서 조민과 소조에게 말했다.

 "난 의부를 살펴보고 올  것이니 당신들은 배에 남아 있으시오.
사람이 많으면 금화파파에게 발각될지 모르니까."

 그러자 조민이 말했다.

 "그렇다면, 아예 일경(一更)을 더 기다렸다가 날이 완전히 어두
워지면 그 때 가세요."

 "알겠소."

 그는 의부를 걱정하고 있기에 심혈이 마치 부글부글 끓는 것 같
았다. 이 일경은 정말 기다리기 힘들었다. 마침내 사방이 칠흑처
럼 캄캄해지자,  그는 일어서더니 조민과  소조에게 살짝 웃으며
창문쪽으로 갔다.  그러자 조민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의천검을
풀면서 말했다.

 "장공자, 이 검을 지니면서 몸을 방어하세요."

 장무기는 깜짝 놀랐다.

 "당신이 갖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니오. 웬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료."

 "뭘 걱정하는 겁니까?"

 "나도 모르겠소. 금화파파의 계략은 예측할 수 없고, 진우량 또
한 귀계다단(鬼計多端)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당신 의부마저 당
신이  그 <무기  아이>란 걸  믿을지  믿지 않을지  모르지 않아
요..... 이 섬은 영사(靈蛇)라  칭하니, 혹 섬에 무슨 무서운 독
물(毒物)이 있을지 모르죠. 더구나....."

 그녀는 말을 끝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장무기가 물었
다.

 "더구나 뭡니까?"

 조민은 자기 손을 들어올리더니  무는 시늉을 하면서 호호 하고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장무기는 그녀가 자기의 사촌누이인 주아
를 얘기하는 줄 알았다. 이윽고 손을 흔들면서 선창문을 나섰다.
그러자 조민이 소리쳤다.

 "받으세요!"

 의천검을 던져준 것이다. 장무기는 검을 받아 들면서 가슴이 찡
했다.

 '그녀는 의천검까지도 나에게 빌려주면서 날 믿는구나.'

 그는 검을 등  뒤에다 꽂은 다음 기를  끌어올리더니 섬 북쪽에
있는 그 산봉우리로 달려갔다.  그는 조민의 말을 기억하면서 풀
속에 독사와 독충이 숨어  있을까 봐 매끄러운 바위만 골라서 발
을 디뎠다. 잠시 후  산봉우리 밑까지 달려갔다. 고개를 들어 바
라보니 산봉우리 위에 있는 그 오두막집은 깜깜하니 전혀 등불이
없었다.

 '의부께서 이미 주무셨을까? 아니다. 그 어르신네는 장님이니깐
등불이 필요없을 게다.'

 바로 이때, 왼편의 산기슭 쪽에서 말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그는 몸을  구부려서 소리나는 쪽으로 갔으나  소리는 또 들리지
않았다.

 이때 한차례 삭풍(朔風)이  북쪽에서 불어오자 초목이 바스락거
리며 소리냈다. 그는 바람소리를  타고 질주해 갔다. 그러자 사,
오 장  밖에서 금화파파가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하는 것이 들렸
다.

 "아직도 하지 않느냐? 왜 꾸물대는 것이냐!"

 주아가 말했다.

 "파파, 당신은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이러면..... 이러면 옛
친구에게 죄를 짓는 겁니다.  사대협과 당신은 수십 년의 친구가
아닙니까? 그는 당신을 믿기 때문에 빙화도에서 중원으로 돌아온
게 아닙니까?"

 금화파파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날 믿는다구? 정말  우스운 얘기군. 그가 날 믿는다면 뭣
때문에 나에게 도룡도를 빌려주지  않는 것이냐? 그가 중원에 돌
아온 건 오로지 의자(義子)를 찾기 위함이다. 나와 무슨 상관 있
느냐?"

 어둠 속에서 금화파파의  꼬부라진 몸이 어렴풋이 보였다. 갑자
기 땡 하고 그녀의  몸 앞에서 쇠붙이와 바위가 부딪치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잠시 후  다시 이러한 소리가 났다. 장무기는 몹시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발각될까 봐 앞으로 다가
가서 보지는 못했다. 이윽고 주아의 말소리가 들렸다.

 "파파, 그의 보도를  뺏으려면 정정당당하게 교전(交戰)하세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만약에 소문이라도 나면 천하의 호
한들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그 멸절사태는 이미 죽었는데 도룡
도는 또 어디에 사용할 겁니까?"

 금화파파는 대단히 화가 났다. 몸을 꼿꼿이 세우면서 사나운 소
리로 말했다.

 "이년아! 왕년에 누가 네 부친  창 밑에서 너의 목숨을 구해 주
었느냐? 지금  어른이 됐다고 파파의 분부를  듣지 않는 것이냐?
그 사손은 너와는 아무런 친척 관계도 아닌데 뭣 때문에 그를 감
싸주려 하는 것이냐? 어디 그 연유를 파파에게 말해 보아라!"

 그녀의 말은 비록 엄준했으나 목소리는 몹시 낮추었다. 마치 산
정(山頂)에 있는 사손에게 들킬까 봐 겁내는 것 같았다.

 주아가 손에 들고 있는  자루를 땅에다 팽개치자 찰랑찰랑한 차
례 소리가  났다. 뒤로 세 걸음을  물러섰다. 그러자 금화파파는
사나운 소리로 말했다.

 "꽤 깃털이 많아지니깐 날으려 하는구나, 그렇지?"

 "파파, 전 절대로  제 목숨을 구해준 것과  무예를 가르쳐 주신
은혜는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대협께서는 그..... 는 그의 의
부잖아요."

 "세상에 너처럼 어리석은 계집도  있구나. 그 장가란 녀석은 서
역에 있는 만장심곡(萬丈深谷) 아래로 떨어졌다는 말을 넌 무열,
무청영에게 직접 듣지 않았느냐?  지금쯤 그 장가란 녀석의 시신
은 모두 재로 화했을 것이다.  넌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고 있구
나."

 "파파, 전 도저히 그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마 이게 바로 당신
께서 말씀하신 무슨..... 무슨 전세의 원(寃) 뭐가 아닙니까?"

 그러자 금화파파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왕년에 그 애는 우리를 따라서 영사도로 오려 하지 않았다. 설
령 너와 부부가 됐다고 하더라도 그가 죽었으면 그만 아니냐? 그
가 일찍 죽은 건 오히려 다행일지 모른다. 너의 이러한 생김새를
보게 되면 어찌 널 사랑하겠느냐? 넌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걸 어떻게 볼 수 있겠느냐?"

 이 몇 마디의 말투는 매우 부드러워졌다. 주아는 묵묵부답 하였
다. 아마 대답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자 금화파파는 다시
말했다.

 "다른 사람은 얘기할 것도 없다. 우리가 잡아온 그 아미파의 주
낭자만 해도 그처럼 아름다운데, 그 장가란 녀석이 보게 되면 어
찌 마음이  동요되지 않겠느냐? 아니면 그  녀석을 죽일 것이냐?
흥! 흥!  만약에 네가 그 천주만독수를  연마하지 않았다면 너도
절세가인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다 끝났다."

 "그는 이미 죽었고, 제 얼굴도 훼손되었으니 더 이상 얘기할 게
또 뭐가  있습니까? 그런 사대협은 여전히  그의 의부입니다. 파
파, 우린 그의  솜털 하나라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파파, 전
이 일만은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일은 모두 파파의 말을 듣겠습
니다."

 말을 하면서 주아는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장무기는 혼자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명교의 교주로  신임(新任)한 일은 벌써 무림을 진동했는
데 어찌 그녀들은 모르고 있을까? 음, 그렇다 그들 두 사람은 먼
빙화도까지 가서 의부를 맞이해 왔으니 왕복 시일이 많이 걸렸을
것이다. 이번에 대도에 왔으나 오자마자 바로 돌아갔으며, 또 사
람들과 내왕이  없으니 나의 이름에 대해서도  전혀 듣지 못했을
것이다.'

 금화파파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좋다, 일어나거라!"

 "정말 고맙습니다, 파파."

 "단 그의 목숨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도룡도
만은 꼭 탈취해야....."

 "그러나....."

 금화파파가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소리쳤다.

 "다시 또 이러쿵저러쿵하면 파파는 화낼 것이다!"

 손을 휘두르자 땡 하는  소리가 다시 났다. 그녀는 양손을 연거
푸 휘두르며 점점 멀어졌다. 땡땡..... 소리는 끊임없었다. 주아
는 머리를 부둥켜 안고 바위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
녀가 자기에게 일편단심인 걸  보게 되자 몹시 감동되었다. 잠시
후 금화파파는 십여 장 밖에서 소리쳤다.

 "갖고 와!"

 주아는 하는 수 없이 자루  두 개를 들고 금화파파가 있는 쪽으
로 갔다.

 장무기가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서 고개를 숙여 바라보니, 정말
너무나 놀라웠다. 세 치 간격으로 칠, 팔촌 길이의 강침(鋼針)이
바위에 꽂혀 있었다. 끝이 매우 뾰족하고 날카로우며, 빛이 번쩍
번쩍 났다. 그는 생각할수록 섬찟했고 울화가 치밀었다. 즉시 손
을 내밀어서 강침을 뽑아 그녀의 음모를 분쇄하려 했지만 마음을
달리 먹었다.

 '이 악파(惡婆)가 나의 의부를 사삼가라고 부르는걸 보면, 옛날
에 두 사람의 사이는 보통이 아닌 것이다. 우선 그녀가 의부에게
등을 돌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그녀의 음모를 격파해야겠다.
오늘 하느님이 장무기를 여기에  있게 했으니, 절대로 의부가 손
상을 입게 해서는 안 된다.'

 이윽고 무릎을 꿇고 바위  뒤에 앉아서 변화를 조용히 관망하기
로 했다. 갑자기 바람소리에  마치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경공
이 고강한 사람이 살며시 다가오는 것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 바
라보니 한 사람이 요리조리  피하면서 다가왔다. 바로 그 개방의
장노인 진우량이었다. 손에는  만도(灣刀)를 쥐고 있었으나 포대
로 칼 빛을 가렸다. 그는 조민이 예상한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 자는 과연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윽고 금화파파가 길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삼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놈이 당신을 찾아왔소!"

 장무기는 깜짝  놀랐다. 자기의  행적이 금화파파에게 발각됐는
줄만 생각하였다. 이때 진우량은 길 풀숲 속에 엎드려서 더욱 꼼
짝하지 않았다. 이윽고  장무기는 몸을 몇 번  튕겨서 다시 수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의부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좋다고 생각
되었다. 그래야만 금화파파가 갑자기 간계를 쓰더라도 얼른 구조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쯤 지나자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산정에 있는 오두막집에서
걸어나왔다. 바로  사손이었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하산하더니
금화파파와 수장 떨어진 곳에 다가섰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
다. 그러자 금화파파가 말했다.

 "흐흐! 사삼가, 당신은  옛 친구를 경계하면서 외인에게는 경신
(輕信)하는구료. 당신이  낮에 놓아준 그  진우량이 지금 당신을
다시 찾아왔군요."

 그러자 사손은 냉랭하게 말했다.

 "사손의 일생은 오직 자기 사람들에게 손해보았소. 그 진우량이
날 또 찾아왔다고? 뭣 때문에 왔을까?"

 "그처럼 간사하고 교활한 소인을 뭣하러 상대하려 하는 것이죠?
낮에 그의 목숨을 살려줄  때 그의 손발이 어떤 초식을 취했는지
당신은 알고 있소? 그의  두 손은 사자박토의 초식을 취했고, 발
에는 강마탕우식 일초를 취했소. 하하하하!"

 사손은 놀랐으나 금화파파의  말일 거짓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자기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진우량에게  당했다는 것도 알았다. 
이윽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사손이 사람에게 기만당한 건 이미 처음 있는 일이 아니오. 그
런 소인배는 강호에  얼마든지 있소. 하나 더  죽이든 덜 죽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소. 한부인, 당신은 나의 친한 친구라 할 수 있
는데, 그 당시 말해 주지 않고 지금 말해 주는 것은 날 약올리는 
건가요?"

 여기까지 얘기하더니 갑자기  몸을 솟구쳐서 번개처럼 신속하게 
진우량의 몸 앞으로 덮쳐갔다.  진우량은 크게 놀라며 칼을 휘두
르며 후려쳤다. 사손은 왼손을  비틀어서 그의 수중에 있는 만도
를 낚아채면서 팍팍팍! 연거푸  그의 뺨을 세 번 후려쳤다. 오른
손으로 그의 뒷덜미를 잡아서 들어올리며 말했다.

 "지금 내가 널 죽이는 건 마치 닭 잡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그
러나 사손은 너에게 미리 말해  둔 게 있다. 그러니 넌 십 년 후
에 다시 날  찾아오너라. 만약에 이 섬에서  나와 다시 부딪치게 
되면 당장 네 놈의 목숨을 끊어줄 것이다!"

 사손은 손을 휘둘러서 그를 던져 버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진우량의 몸이 떨어지는 곳이  바로 뾰족한 침을 잔뜩 꽂아 놓은 
곳이었다. 그의  몸이 떨어져서 침에  찔리기만 하면 금화파파가 
밤새도록 설치한  간계가 즉시 발각되는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몸을 날려 다가가더니 지팡이를  뻗어 그의 허리쪽을 한 번 받쳐 
그를 다시 수장 밖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호통을 쳤다.

 "나의 영사도에 한 발자국만  더 밟게 되면 내 너의 개방거지를 
백 명을 죽일 것이다.  금화파파가 한 말은 항상 지켜왔다. 오늘 
너에게 우선 금화(金花) 한 송이를 하사하겠다!"

 왼손을 한 번 올리자 노란  빛이 살짝 번뜩거리더니 푹 하는 소
리와 함께 진우량 왼뺨의  협차혈에 적중되었다. 그가 말을 못하
게 한 것이다. 그래야만  기밀 누설을 막을 수 있었다. 진우량은 
왼빰을 누르며 급히 산 밑으로 뛰어갔다.

 이때 사손과 침진(針陣)의 거리는  불과 수장 정도밖에 안 되어 
장무기는 오히려 그의 등  뒤에 있었다. 장무기는 진우량보다 내
공이 훨씬 강했다. 호흡을 하지 않고 있으므로, 사손과 금화파파
는 그가 옆에 엎드려 있는 줄도 알아채지 못했다. 금화파파는 몸
을 돌리며 칭찬했다.

 "사삼가, 당신은 귀로 눈을 대신하는데 전혀 손색이 없군요. 앞
으로 중진웅풍(重振雄風)하면 다시 강호에서 이십 년이나 종횡무
진할 수 있겠소."

 "무기, 그 아이의  확실한 소식만 알게 되면  난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 사손에게는 산처럼 많은 혈채(血債)가 있어서 아무리 비
참하게 죽어도 당연한 것이오. 그런데 강호를 종횡무진하다니 그
건 또 무슨 말이오?"

 그러자 금화파파는 웃으며 말했다.

 "명교의 호교법왕이 사람 몇을  죽인 게 무슨 대수입니까? 사삼
가, 당신의 도룡도를 나에게 한 번만 빌려 주시죠?"

 사손은 고개를 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금화파파는 다
시 말했다.

 "이곳의 행적은 이미 폭로되었으니 당신은 더 이상 여기서 살면 
안 되겠소. 내 다른  은밀한 곳을 찾아줄 것이오. 당신은 거기서 
몇 달 동안 기거하고 있으면, 내 도룡도로 아미파의 적을 물리치
고 나서 당신을 위해  장공자의 행방을 전력을 다해서 알아볼 것
이오. 나의 재주로 장공자를 당신 면전에 데려오는 건 그다지 어
려운 일은 아니오."

 사손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사삼가, 당신은  아직도 <사대법왕  자백금청(四大法王 紫白金
靑)>, 이 여덟 자를  기억하고 있소? 왕년에 우리가 양교주 수하
에 있을 때  응왕 은이가(殷二哥), 복왕 위사가(韋四哥),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을 보태서 천하를 누비고 다닐 때 누가 감히 우리를 
막았소? 오늘날  몸은 비록 늙었지만  웅심(雄心)은 아직 존재하
오. 당신은 자삼노매(紫衫老妹)가 남에게 설움을 당하는 걸 보고
만 있을 건가요?"

 장무기는 몹시 놀랐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정녕 그녀가 본교 사대법왕의 우두머리인 
자삼용왕(紫衫龍王)이란 말인가? 세상에  이처럼 이상한 일도 있
단 말인가! 그런데 어찌 그녀는 위복왕도 <사가(四哥)>라고 부르
는 것일까?'

 이윽고 사손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건 지나간  일이오. 다시 얘기해야 무슨  소용 있겠소. 늙었
소, 여러분은 모두 늙었소!"

 "사삼가, 이 십년 동안에 당신의 무공이 크게 진전된 걸 모르고 
있었소. 뭣 때문에 또 겸손해 하는 거죠?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소. 내가 보기에는 명교의  사대법왕이 아직 살아있을 때다
시 손을 잡고 후세에 남길 만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되오."

 그러자 사손은 탄식을 하며 말했다.

 "은 둘째 형님과 위 네째 아우는 지금쯤 모두 살아있지 않을 것
이오. 더구나 위 네째 아우의 몸에 있는 한독은 제거하기 힘들기 
때문에, 아마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이오."

 금화파파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잘못 생각한  것이오. 솔직히 당신에게 말하는데, 백미응
왕과 청익복왕은 지금 모두 광명정 위에 있소."

 "그들이 뭣 때문에 다시 광명정에 돌아갔소?"

 "이건 주아가 직접 목격한  것이오. 주아는 바로 은이가 오빠의 
친손녀죠. 그녀는 부친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녀의 부친이 
그를 죽이려 했소. 첫  번째는 내가 구해줬지만, 두 번째는 위사
가 오빠가 구한  것이오. 위사가 오빠가 광명정으로 데려갔지만, 
도중에서 내가 살며시 다시 훔쳐온 것이오. 주아야, 네가 육대문
파가 어떻게 광명정을 위공했는지 사삼가에게 얘기해 드려라."

 주아는 서역에서 본  일들을 간단명료하게 얘기해 주었다. 그녀
는 광명정에 올라가기  전에 금화파파가 데려왔기에 나중에 광명
정에서 일어난 일들은 전혀 몰랐다. 사손은 들을수록 초조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느냐?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느냐?"

 연거푸 물어보더니 결국은 화를 내며 말했다.

 "한부인, 당신은 비록  혼인 문제 때문에 형제들과 불화했으나, 
본교가 위험에 처해 있었는데  당신은 어찌 수수방관할 수 있소? 
양교주는 당신의 의부가 아니오?  그가 왕년에 어떻게 당신을 대
해 주었는지 모두 잊고 있는 거요? 당신도 보시오. 은 둘째 형님
과 위 네째  아우, 오산인과 오행기 등  사람들은 모두 광명정에 
가서 협력하지 않았소!"

 그러자 금화파파는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도룡도를 얻을 수 없으면 끝내는 아미파의 멸절 늙은이의 
수하대장이오. 설령 광명정에 가더라도 그녀와 싸울 면목이 없는 
것이오. 그러니 가봤자 헛걸음밖에 더 하겠소?

 두 사람은 묵묵히 마주하고 있었다. 잠시 후 사손이 금화파파에
게 물었다.

 "당신은 그날 나의 소재를 어떻게 알았소? 뭣 때문에 숨기려 하
는 거요? 무당파 사람이 얘기해 준 거요?"

 "무당파 사람들이 어찌 압니까? 장취산 부부는 자결을 하면서도 
당신의 은신처를 말하지 않았는데  무당 문하가 어찌 알겠소? 좋
소, 오늘 모든 걸  다 털어놓겠소. 내가 서역에서 이름이 무열이
란 자와  부딪쳤소. 그는 무삼통의 자손이오.  난 그와 딸아이가 
말을 하는 걸 듣고 그들에게 지독한 형벌을 가해서 입을 열게 했
죠."

 사손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 무가란  자가 나의 무기 아이를  만났었습니까? 아마, 그는 
어린애를 속여가며 비밀을 알아냈을 것이오."

 장무기는 이 말을 듣자 몹시 부끄러웠다. 왕년에 자기가 주가장
에서 농락당한 일이 생각났다. 만약에 의부가 그 일로 인해서 간
인(奸人)의 수중에 떨어졌다면, 자기는  만 번 죽더라도 그 죄를 
씻지 못할 것이다. 비록 의부의 눈은 멀었지만 그 일을 추리하기
는 마치 직접 목격한 듯  했다. 이윽고 사손이 다시 말하는 것이 
들렸다.

 "육대파가 명교를 위공했다면 보통  일은 아니오. 우리 교는 도
대체 어떻게 되었소?"

 "명교의 흥쇠존망(興衰存亡)은 이 늙은이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
어진 지 오래 되었소. 왕년에 광명정에서 모든 사람이 일제히 나
를 몰아세운 일은 당신은 전부 잊었지만, 이 늙은이는 똑똑히 기
억하고 있소. 그  당시 양교주와 당신만이  나에게 잘 대해 주었
죠. 나도 잊지 않고 있소이다."

 "아하, 사사로운 원한은 작은 일이고 교를 보호하는 게 큰 일이
오. 한부인, 당신의 속도 몹시 좁구료."

 "당신은 남자 대장부지만 난  도량이 좁고 작은 아녀자예요. 왕
년에 내가 파문출교(破門出敎)할  때 맹세코 명교와는 인연을 끊
기로 했소.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그 호청우가 어떻게 날 외인
으로 취급하겠소. 호청우는 내가 살해했소. 자삼용왕은 벌써부터 
명교의 대계(大戒)를  범했소. 그러니 나와  명교는 무슨 관계가 
있겠소?"

 사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부인, 난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소. 당신이 도룡도를 빌리려 
하는 건  말로는 아미파를 상대한다지만,  실상은 양소와 범요를 
상대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오? 당신이 줄곧 잊지 못한 건 광명정
의 비도(秘道)에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난 더욱 빌려
줄 수 없소!"

 그러자 금화파파는 기침을 몇 번 하면서 말했다.

 "사삼가, 왕년에 당신과 나의 무공 고하(高下)는 어떠했소?"

 "사대법왕은 각자 특기가 있소."

 "오늘날 당신은 두  눈을 못 쓰게 되었소.  다시 이 늙은이하고 
겨룬다면....."

 그러자 사손은 앙연히 외쳤다.

 "당신은 무력으로 칼을 빼았으려는 거요? 사손은 도룡도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내 눈 몫은 할 것이오!"

 그는 숨을 한 모금  길게 마시더니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면서, 
실명된 한 쌍의  눈동자를 금화파파에게 조준했다. 위풍당당하였
다. 

 주아는 겁을  먹어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금화파파는 몸을 
구부리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간간이 한, 두 번의 기침을 하
였다. 마치 사손이 손을 뻗기만  하면 당장 그녀를 일도에 두 동
강이 낼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마치 
사손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그녀의 배명(排名)이 자기 외조부, 의부와 위복왕보다 
높으니 무공도 당연히 한 수 위라는 생각을 하자, 은근히 사손을 
걱정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보면서 서 있는 거리는 불과 일 
장 정도였으나,  누구도 먼저 출수하지 않았다.  얼마가 지난 후 
사손이 갑자기 말했다.

 "한부인, 오늘 당신이 날  억압하여 꼭 출수하게 하는 건, 우리 
사대법왕이 옛날에 결의를  맺은 언약을 위배하는 일이라 사손은 
몹시 괴롭소."


 "사삼가, 당신의  마음이 약하다는 걸 난  예전에 미처 몰랐소. 
무림에 있는 그 수많은 영웅호걸들은 모두 당신이 손수 살해했잖
소!"

 그러자 사손은 탄식을 하며 말했다.

 "난 부모처자와  원한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어서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소.  내 평생 최대의 실수는  바로 칠상권 십 
삼초를 연발하여 소림파의 공견신승을 격패한 일이오."

 금화파파는 깜짝 놀랐다.

 "진정 공견신승이 당신 손에  죽었소? 당신은 언제 그처럼 무서
운 무공을 연성했죠?"

 그녀는 사손에게 퍽  자신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두려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겁낼 것  없소! 공견신승은 맞기만 했지  저항은 하지 않았소. 
그가 끝없는 불법을 전개했더라면 나 같은 사마외도는 상대도 되
지 않았을 것이오."

 금화파파는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그럼 그렇지. 이 늙은이는  공견신승보다 못하니  구, 십 권을 
사용하지 않아도 이 늙은이를 요리하게 되겠군요."

 사손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갑자기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
다.

 '한부인, 옛날 광명정에서 당신은  정말로 나에게 잘 대해 주었
소. 그날 내가 병들어 있을 때 하필이면 안사람도 산후 허약하여 
거동이 불편했는데, 당신이 한  달 넘도록 날 정성스럽게 보살펴
준 것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소."

 그러자 금화파파는 처량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옛날 일들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료."

 사손은 앙천대소하더니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장무기는 
의부가 자기 때문에 상심하는  것을 보게 되자 참다 못해 나가려
는 찰나, 갑자기 금화파파의 말소리가 다시 들렸다.

 "사삼가, 당신의  그 의자 장무기는 이미  죽었는데. 뭣 때문에 
그 도룡보도를  지키고 있는  겁니까? 차라리 나에게  빌려 주시
죠?"

 사손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날 너무나도 기만하였소. 보도를 탈취하고 싶으면 먼저 
날 죽이시오!"

 이윽고 지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장포의 앞깃을 찢어내서 금화
파파에게 던져 주었다.  이것은 할포단의(割袍斷義)라고 하는 것
이다.

 '내가 지금 나가서 진상을 설명할 때가 됐구나. 그래야만 두 사
람의 의기(義氣)가 상하지 않을 것이다.'

 장무기는 이처럼 생각을 했다.  바로 이때 갑자기 왼쪽 멀리 떨
어진 긴 풀숲 사이에서 경미한  숨소리가 몇 번 전해 왔다. 비록 
거리가 멀고 숨소리도 몹시 가벼웠으나, 장무기의 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뇌리에 번뜩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금화파파가 몰래 매복시켜 놓은 자가 있었구나! 그렇다면 아직 
나타나서는 안 된다.'

 이윽고 도풍(刀風)이 획획!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손과 금화
파파의 격전이 시작되었다. 

 사손은 보도를 휘두르며 마치  흑룡처럼 그녀의 몸 주위를 맴돌
았다. 갑자기 빠르게,  갑자기 느리게 초수를 변화시키는데 마치 
귀신 같았다. 금화파파는 보도가  예리한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멀찌감치 그의 몸 옆을 돌기만 했다. 사손에게 간간이 빈틈이 보
일 때마다 금화파파는 서슴없이  공격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보
도를 돌려서  후려치면 금화파파는 얼른  교묘하게 피하곤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무공을 잘 알기 때문에 일, 이 백 초안에는 승부
가 날 것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모두 자기들의 유리한 점을 십
분 발휘하여 상대방을 제압하려고만 했지 초수와 내력을 전혀 생
각지 않았다.

 갑자기 획획 두 번의 소리와 함께  노란 빛이 번뜩거리더니, 금
화파파의 두 송이 금화가 발출되었다. 사손이 도룡도를 한 번 돌
리자 두 송이 금화는 모두 보도에 붙어 버렸다.  금화는 순강(純
鋼)으로 주조했고,  겉에는 황금으로  도금한 자성(磁性)을 지녔
다. 그러기에 쇠붙이를 만나는 즉시 붙어 버리는 것이다. 뜻밖에
도 이 도룡도는 다른 모든 암기의 극성(剋星)이었다. 금화파파는 
좌우로 여덟 송이 금화를  연발했으나 모두 도룡도에  붙어 버렸
다. 갑자기 금화파파는 기침을  한 번 하더니  한 주먹의 금화를 
뿌렸다. 모두 열여섯, 열일곱  송이나 되었다. 그러자 사손은 소
매자락으로 일곱, 여덟 송이를 말아  버리고 나머지는 모두 다시 
도룡도에 붙었다.

 "한부인, 당신의 호칭이 자삼용왕이기에 이름 자체가 이 보도의 
기위(忌緯)를 범한 것이오. 만약 다시 연전(戀전)하게 되면 그대
에게는 불리할 것이오."

 그러자 금화파파는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 나의 이  살사장(殺獅掌)이 눈먼 사자(獅子)를 먼저 죽여 
버릴지도 모르죠."

 그리고는 즉시 훗 하며 일장을 후려쳤다. 사손은 어깨를 재빨리 
피했으나 발 밑이 갑자기  휘청하였다. 순간 아! 하는 소리가 나
더니 이 일장은 그의 왼쪽  어깨에 적중되었다.  비록 힘이 반이
상은 감소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볍지는 않았다.

 장무기는 사손이  일부러 피하지 못하는  척하면서 일장을 얻어 
맞는 것을 보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의부는 왼쪽 소매자락에 있는 금화를 뿌리고 다시 도룡도로 천
산만수(千山萬水) 일초만  전개하면, 금화파파는  보도의 예리한 
것을 막아내지 못해서 필시  왼쪽으로 더 물러날 것이다. 연거푸 
두 번 물러날 때  의부가 내력으로 도룡도에 있는 금화를 발사하
면 금화파파는 막을 힘이  없어서 멀리 피하며 중상을 입을 것이
다.'

 과연 노란 빛이 번득거리더니, 사손은 왼쪽 소매자락에 말려 있
는 금화를 뿌렸고 금화파파가 얼른 왼쪽으로 후퇴하는 것이 보였
다. 장무기는 순간적으로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아이구, 큰일났다. 금화파파는 장계취계(將計就計)하는구나!'

 사손은 대갈일성(大喝一聲)하며 보도에  붙어 있는 십여 송이의 
금화를 재빨리 앞으로  발사했다. 그러자 금화파파는 아이구! 하
며 소리를 한 번 지르더니  다리가 한 번 휘청하면서 뒤로 몇 걸
음 물러났다. 사손은 끊고 맺음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이미 할포
단의한 사이라 전혀 봐주지  않았다. 이윽고 몸을 솟구치더니 보
도를 휘두르며 금화파파에게 후려치며 갔다. 갑자기 주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심하시오. 발 밑에는 뾰족한 침이 있소!"

 사손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으나 자세를 거두기에는 이미 때
가 늦었다. 이윽고 획획!  하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십
여 송이의 금화가 일제하  날아왔다. 금화파파는 그의 몸이 공중
에 있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 없게끔 해서 양발이 뾰족한 침에 
떨어지도록 할 속셈이다. 사손은  어쩔 수 없이 보도를 휘두르며 
금화를 막았다. 갑자기 발 밑에서  탱탱 하는 소리가 몇 번 들리
면서 그의  양발을 착지했으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허리를 굽히고 더듬어보니 사방에 있는 바위에는 모두 칠, 팔 촌
(寸) 길이의 강침이 이미  사람이 돌을 던져서 부러뜨려 놓았다. 
그 돌을 던져 강침을  부러뜨린 경세(勁勢)를 들어보니, 바로 낮
에 일곱 개의 돌을 던졌던  그 거경방의 소년이었다. 그 자는 옆
에서 몰래 보고 있는데도  자기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에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발 밑에 이미 중상을 입고 금화파파
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손은 뇌리에 이러한 생각이 
스치자 등에는 식은땀이 한 차례 흘렀다.

 그들 두  사람은 서로  고육지책(苦肉之策)을 사용했다. 사손은 
어깨에 일장을 얻어 맞았고, 금화파파 몸에도 두 송이 금화가 꽂
혀 있었다. 비록 급소에는  모두 맞지 않았으나 상대방의 경력으
로도 그리  가벼운 상처는 아니었다.  금화파파는 심하게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장무기가 숨어있는 곳을 향해서 말했다.

 "거경방의 녀석아! 넌 뭣  때문에 늙은이의 대사를 그르치게 하
는 것이냐? 어서 이름을 대라!"

 장무기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갑자기  노란 빛이 번뜩거리더니 
주아가 윽!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가슴에는 세송이 금화가 
꽂혀 있었다. 금화파파는 장무기의  무공이 대단한 것을 보게 되
자, 자기가 주아에게 출수하게 되면 그가 필히 막을 것이라는 생
각을 했다. 그래서 그에게 말을  하는 척 하며 손을 되돌려서 금
화를 발출한 것이다. 장무기는  몹시 놀랐다. 얼른 몸을 위로 솟
구치더니 허공에서 금화파파가 발사한 두 송이 금화를 받아 버렸
다. 착지하자마자 주아를  품안에 끌어안았다. 주아는 아직 정신
이 혼미하지 않았다. 수염달린 남자가 자기를 안고 있는 것을 보
자 얼른 손을 내밀어서 반항했다. 그러나 힘을 쓰게 되자 입에서
는 몇 모금의 선혈이  연거푸 쏟아졌다. 그러자 장무기는 손으로 
자기 얼굴을 힘껏 몇  번 문지르면서 화장한 것을 지우니 본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자 주아는 멈칫하면서 소리쳤다.

 "아우 오빠! 오빠가....."

 "그렇소, 나예요."

 장무기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더니, 즉시 그녀의 신봉, 영허,
보랑, 통곡 등  여러 곳의 혈도를 찍어서  그녀의 심맥을 보호해
주었다.

 이윽고 사손이 낭랑한 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각하께서 두 번씩이나 출수하여 구해주셔서, 사손은 정말 고맙
게 생각합니다."

 장무기는 목이 메이며 말했다.

 "의.....의..... 당신께서 구태여....."


                                 ----- 제 5 권 5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5 권


     제 6 장  한 배에 탄 네 여인(女人) 


 바로 이때 갑자기 뒤에서 땡!  땡! 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세 사
람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모두 백포를 들러 입고 있었고,
중간에서 달려오고 있는 자의 키는 매우 컸고 한 편은 여자인 것
을 볼 수 있었다. 세 사람은 달빛을 등지고 서 있어서 얼굴 모습
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 사람의 백포에는 모두 불길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명교 사람임에 틀림 없었다.

 세 사람은 모두 두 손을 높이 쳐들고 그들의 손에는 모두 두 자
가 넘는 흑패(黑牌)를 들고 있었다.  그들 중에 키가 큰 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명교의 성화령이다. 호교법왕,  사손은 빨리 나와 무릎을 꿇지
않고 뭘 꾸물거리느냐?"

 그의 발음은 정확치 못하고 매우 딱딱하게 들렸다.

 장무기는 내심 깜짝 놀랐다.

 양교주의 유언에 본교의 성화령은 삼십 일 대 석교주 때부터 이
미 잃어 버렸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 세 사람의 손에 들어 갔으
며, 진짜 성화령인지 아닌지, 또 이들이 본교의 제자들인지 도무
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자 금화파파가 그들의 말에 대답을 했다.

 "본인은 이미 파교를 한 지 오래니, 호교법왕이란 네 자는 다시
거론하지 마시오. 당신네들은 누구요? 당신네들은 어디서 왔소?"

 "이미 파교를 했다면 어째서 그렇게 꼬치 꼬치 캐묻는 거냐?"

 "나 금화파파는  평생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했고,
또한 양교주께서 살아 있을  때도 나한테 존대를 했었는데, 너희
들은 명교에서 무슨 신분이기에 감히 나 금화파파를 이래라 저래
라 하느냐?"

 그러자 별안간 세 사람의 몸이 움직이면서 금화파파에게 접근하
여 동시에 그들의 왼손이 금화파파를 내리찍는 것이었다.

 금화파파는 재빨리 세  사람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어느새 세 사람은 몸을 움직여 신형(身形)을 변화시켰다. 금화파
파의 지팡이는 허공을 휘두르고 목덜미를 똑같이 세 사람의 오른
손에 붙잡혀 멀리 내팽개쳐졌다.

 금화파파의 무공에는 천하에 제일  무서운 세 고수가 위공을 한
다 해도, 단 일초식에  그의 뒷덜미를 잡아 내동댕이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 세  백포인들의 보법은 매우 교묘하고 배
합도 오묘하여 꼭 한 사람이 팔 여섯 개를 달고 있는 듯했다.

 장무기는 자기도 모르게 엇! 하고 외쳤다. 그러나 세 사람의 몸
이 움직이는 사이에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키가 제일 큰  사람은 파란 눈에 털보였고,  또 한 사람은 노란
수염에 코가  매부리코였다. 그러나  여자의 머리카락은 화인(華
人)과 똑같은  검은 색이었으나, 얼굴색은 매우  하얀 것이 거의
백지장과도 같았다. 나이는 약 삼십 세 안팎으로 보였다. 어딘가
괴이한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의 얼굴은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음,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호인(胡人)들이었구나. 그래서 말
하는 것도 책 읽듯이 딱딱하게 들렸었구나.'

 털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성화령은 바로 교주나 다름없는데,  사손은 어찌 빨리 나와 무
릎을 꿇지 아니 하는가?"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본교의 제자들이라면 나 사손이 당신
네들을 알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본교의  제자가 아닌 것이니,
성화령과 당신네들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오!"

 털보가 다시 외쳤다.

 "명교의 발상지가 도대체  어딘가? 파사국(페르시아)이 아닌가?
그렇지? 내가  바로 파사국의  명교 총단의 유운사(流雲使)이고,
이 두 사람은  묘풍사(妙風使)와 휘월사(輝月使)다. 우리는 총교
주의 명을 받도 파사국에서 중토에 왔네."

 사손과 장무기는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무기는 양소가  지은 명교유전중토기(明敎流轉中土記)를 본적
이 있어서 명교가 파사국에서  들어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이  모두 호인임엔 틀림 없고,  거기다 무공과 신법이
모두 이렇게 훌륭하니 거짓말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노란 수염의 묘풍사가 말했다.

 "우리 교주께서 중토의 지파 교주가 실종하여 제자들이 서로 잔
혹한살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본교의 세력을 유지하
기 위해 특별히 운(雲),  풍(風), 월(月) 세 특사를 보내 중토의
교무를 정돈하라고  하셨다. 그러니 그분의  호령에 따라 조금도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

 그 말에 장무기는 크게 기뻤다.

 '총교주의 호령이라면  정말 잘 됐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 중책을 맡을 필요가 없게 됐으니.'

 그러자 사손이 입을 열었다.

 "우리 중토의 명교가 파사국에서  전해 온 것은 틀림없으나, 이
미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독립된 하나의 명교가 된 지 오래고 또
한 파사국 총교의 관할을 받아 온 적이 없소. 세 분이 멀리 우리
이 중토에까지 오신 것을 나 사손은 크게 환영하나, 무릎을 꿇으
라 하는 말은 절대로 들을 수 없소!"

 유운사 직책의  털보가 갑자기  두 손의 흑패를  서로 부딪치자
쨍!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로 보아 흑패는 금도 아니
고 옥도 아닌 매우 이상한 물체였다.

 "이것은 바로 중토 명교의 성화령이다. 전임 서교주가 칠칠맞게
밖에서 잃어버려 우리가 찾아  왔다. 예로부터 성화령을 보면 교
주를 만난 것이나 다름없는데,  사손은 이래도 명령을 받지 않겠
는가?"

 사손이 명교에 입교할 사기엔  성화령을 잃은지 벌써 오래라 그
는 한 번도  성화령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성화령에 대해서
들은 것은 많았다. 또한 경전에도 성화령에 대해 많은 소개가 있
었다. 또 금화파파를 단번에  내팽개친 그들의 무공은 보통 사람
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는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았
다.

 "소인 존가(尊駕)의 말을 믿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분부가 있으
신지?"

 유운사가 왼손으로 손짓을 하자 묘풍사, 휘월사 셋은 동시에 몸
을 날려  금화파파 옆으로 접근했다.  그러자 금화파파의 금화가
세 사람을 향해  날아왔다. 세 사람은 가볍게  몸을 움직여 피하
며, 휘월사가 재빨리 금화파파의 목을 찌르자 금화파파는 당황하
여 지팡이로  그의 손가락을 막으려고 하는  동시에 갑자기 그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어느새 유운사와 묘풍사에게 뒤를
잡혀 공중으로 틀린 것이다.  휘월사가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가
슴에 연속으로 삼 장을 내리쳤다.  그의 삼 장은 별로 무겁게 보
이지는 않았으나 금화파파는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내심 이  세 사람의 신법이 별로  특출한 점은 발하지
못했지만, 세 사람의 신법 배합은 매우 오묘하다고 느꼈다. 휘월
사가 앞에서 적을 유인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어느새 신출귀몰하
게 금화파파의 뒤를  잡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무공으로 따지면 금화파파보다는  훨씬 뒤떨어져 보였다. 휘월사
가 내려친 삼 장은 혈도를 친 것은 아니었지만 중토의 점혈 수법
과 매우 흡사한 점이 많았다.

 유운사는 금화파파를 사손 앞으로 내던지고 입을 열었다.

 "사왕(獅王), 본교의 교규에 누구든  한 번 입교하면 절대로 배
반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자는 파교를 했으니 본교의
반도가 된 것이니, 당신이 이 여자의 머리를 먼저 잘라라."

 사손은 크게 놀라며 당황했다.

 "중토 명교에는 그런 교규가 없습니다."

 유운사가 냉랭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지금부터 중토 명교는 파사국  총교의 호령에 따라야 한다. 그
리고 파교한  배반자는 언젠가는 화근이 될  것이니 빨리 그녀를
처치하라!"

 "명교 법왕이라면 친 남매와 다름없는데, 오늘 금화파파가 아무
리 나한테  무정하게 했기로서니 나 사손은  절대로 그런 불의를
저지를 수 없소!"

 "하! 하! 하!"

 묘풍사가 크게 웃었다.

 "중국 사람들은  왜 이리 시시콜콜하지?  파교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겠다니 이게 무슨 교리야. 정말 이상하군!"

 "나 사손은  눈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였지만, 절대로 동교의
친구를 살해하진 않소!"

 휘월사가 입을 열었다.

 "꼭 당신이  이 배반자를 처치해아겠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우리가 당신을 먼저 죽일 것이다."

 "세 분이  중토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이 금모사왕으로 하여금
자삼용왕을 죽이라고 하다니..... 겁을 주기 위해 위엄을 세우려
는 겁니까?"

 휘월사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두 눈이 멀었어도 머리는 아직 살아 있구나. 그렇다면 빨
리 이 배반자를 처치해라!"

 사손은 목청 높여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계곡을 진동하
는 듯했다.

 "나 금모사왕은 같은 교의 친구를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
의 철천지 원수라 해도 이미 당신네들한테 붙잡혀 조금도 저항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절대 죽이지 않소!"

 장무기는 의부의 이  호통한 말에 내심 갈채를  보내며 앞의 세
사람에게 점점 반감이 우러났다.

 그러자 묘풍사가 말했다.

 "명교 교도라면 그  누구도 성화령을 교주와 마찬가지로 대하는
데, 네가 감히 명령을 어기려고 하느냐?"

 "나 사손은 절대로 명교를  배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오! 우리
명교의 교지는 어디까지나 행선제악하며, 의를 제일 중하게 여기
는 교요. 나 사손의 머리가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이런
졸장부 짓은 하지 않겠소!"

 금화파파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지만 사손의 말은 한 마디 한 마
디 모두 듣고 있었다.

 장무기는 의부의  생사가 바로 눈앞에 걸린  것을 알고, 주아를
가볍게 땅에 내려놓았다.

 이윽고 유운사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명교 교인이라면,  그 누구도 성화령에  불복하는 자는 절대로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나는 호교법왕이오. 교주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 해도 먼저 교
단을 열어 죄를 공표하고 집행할 수 있소."

 묘풍사가 히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명교가 파사국에서는 아무 탈도 없이 조용했는데, 중토에 들어
오자 이렇게 귀찮은 규칙이 많이 생겨 나다니....."

 세 사람은 동시에 휘파람을 불며 사손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사
손이 도룡도를 휘두르자 그들은 쉽게 사손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
다. 휘월사는 재빨리 달려들어  왼손에 들고 있던 흑패로 사손의
천령혈을 내리치자, 사손의 도룡도와 부딪치며 띵! 하는 매우 괴
이한 소리가 들렸다. 도룡도라 하면  그 어떤 물체도 자를 수 있
는데, 이 성화령은 조금도 파손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유운사는  왼쪽으로 몸을 굴려 그의 흑패로 사손
의 다리를 내리쳤다. 사손이  휘청거리는 사이 묘풍사가 그의 뒤
에 서서 흑패를 내리치려는  찰나, 갑자기 손마디가 풀리며 누구
에겐가 흑패를 빼앗겼다. 그는  크게 놀라 뒤돌아 보니, 한 소년
의 손에 그 성화령이 쥐어져 있는 것이었다. 장무기가 이 성화령
을 빼앗은 신법은 정말 쾌속하고도 오묘의 극치였다.

 유운사와 휘월사는 그 광경에  격노하여 장무기를 향해 몸을 날
려 협공했다. 장무기는 몸을  돌려 왼쪽으로 피하는 사이에 그만
등에 휘월사의 흑패에 적중당하고  말했다. 그 성화령은 매우 견
고한 괴이한 물질이라, 그것을  맞은 장무기는 그만 눈앞이 캄캄
해지며 쓰러질  뻔했으나, 다행히 몸을  보호해 주는 구양신공이
위력을 발휘하여 즉시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삼 보를 뛰쳐 나갔
다.

 그러자 셋은 재빨리  그를 포위하였다. 장무기는 오른손에 흑패
를 들고 유운사를 향해  공격하는 척하며 신속히 왼손을 뻗어 휘
월사의 성화령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뜻밖에도 휘월사가 갑자기
손을 놓자  성화령이 밑에 튕겨지며  장무기의 손목을 내리쳤다.
장무기는 갑자기 손이  마비되어 들고 있던 성화령마저 떨어뜨리
자, 휘월사가 재빨리 채갔다.

 장무기는 이미 건곤이위심법을  익히고 거기다 장삼봉에게 태극
권의 오묘함까지 전수받아  지금까지 적수가 없었는데, 뜻밖에도
휘월사라는 여자에게 연속으로 당했다. 두 번째는 다행히 구양신
공의 힘으로 상대를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손목
이 벌써 부러졌을 것이 분명했다.

 장무기는 크게 놀라 다시는  적과 정면 대결을 못하고, 그의 초
식을 살피기 위해 가만히  서서 그들을 주시했다. 파사국 특사들
도 장무기가 두 번이나  적중당하고도 전혀 상처를 입지 않자 크
게 놀라고 있었다.

 묘풍사는 갑자기 머리를 숙이고 장무기를 향해 부딪쳐 왔다. 이
런 타법은 사실 무학의 금기였다. 자신의 제일 중요한 부분을 상
대에게 들이대는 것이다. 장무기는  필시 무슨 함정이 있을 것을
알고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의 머리가  자기와 가까워질 때
살짝 옆으로  피하자 갑자기 유운사가 몸을  날려 그의 엉덩이로
장무기의 머리를  향해 내려앉는 것이었다.  실로 괴이한 초식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의 무학이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이런 둔탁
한 초식은 본 적이 없었다. 장무기는 다시 재빨리 옆으로 피했는
데, 그만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것은 묘풍사의 팔꿈치에 맞
은 것이었다. 그러나 묘풍사는  구양신공의 탄력에 뒤로 세 발짝
휘청거리더니 다시 뒤로 세 걸음 물러서서 몸을 가누려고 하다가
다시 뒤로 세 걸음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파사국의 세 특사는 그만 모두 놀라 안색이 크게 변했다.

 휘월사가 다시 두  손에 성화령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유운사
는 갑자기 공중에서 세 번이나 제비넘기를 하며 공격해 왔다. 장
무기는 그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몰라  일단은 피하는 것이
묘수라 생각하고 왼쪽으로 한  발 비켜섰는데, 갑자기 눈앞이 번
쩍거렸는가 싶더니, 그만  어깨에 유운사의 성화령을 적중당하고
말았다.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초식이었다. 조금도 빈틈이 보이지를 않았
다. 분명 유운사의 몸은  공중에서 제비넘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
느새 손을 뻗어 자기를 적중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일격에 장무기는 심한 타격을 받았다. 그 통증은 구양신공으
로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자기가 뒤로 물러서면 의부의 목
숨이 위험한 것을  알고 그는 숨을 몰아쉬고  나서,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려 유운사의 가슴을 향해 장력을 뻗었다.

 유운사도 동시에 몸을 날려 성화령으로 막았다. 장무기의 두 손
이 부딪치자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공중에 뜬 장무기의 몸이 밑
으로 곤두박질하며 겨드랑이에 통증이 왔다. 이미 묘풍사에게 한
발 차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묘풍사
의 몸은 뒤로 튕겨져  나가고, 휘월사의 성화령은 또다시 장무기
의 오른팔을 적중하고 말았다.

 사손은 옆에서 듣고 모든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 소년이 연속으로 당하며 겨우 지탱하고 있는 데도, 원망스럽
게도 자기는 눈이 멀어 그를 도울 수가 없어서 마음만 조급해 하
고 있었다. 만약 자기 자신이 적과 싸운다면 소리를 들어 상대의
검이나 칼을 피하고 막아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돕는데에는
어떻게 적과 자기편을 가려낼  수 있겠는가. 그는 마음이 조급하
고 안타까워 큰 소리로 외쳤다.

 "소협, 이 일은 명교의 일이라 소협과는 아무 상관없으니, 빨리
여기를 피하십시오. 이 사손을  도우려고 하는 마음은 절대로 잊
지 않을 것이오!"

 "나는..... 나는..... 당신이나  빨리 여기를 피하십시오. 어서
빨리 내 말을 들으십시오!"

 그러는 사이에 유운사의  성화령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장무기
가 자기 성화령으로 그와  부딪치자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들렸
다. 유운사는 그 진동에  견디지 못하고 성화령이 손에서 벗어나
공중으로 날렸다.  장무기는 몸을 날려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찰나, 찍! 소리와 함께  그의 장심이 찢겨져 나가며 등을 휘월사
의  손톱에 할퀴고  말았다. 통증이 스며들며, 그 사이 성화령은
다시 유운사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한 사람씩 비교하면 그들의  무공은 장무기에 비해 보잘것 없지
만, 세 사람이 교묘하게  연결되어 장무기가 한 사람이라도 중상
을 입히지 않는 한 그들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때 사손이 대갈일성하며 도룡도를 안고 뛰어들었다.

 "소협, 이 도룡도를 쓰시오."

 그리고는 뒤로 다시 물러나는  사이에 그만 묘풍사의 일장이 사
손의 등을 적중했다. 그의  장풍은 무형무영하며 소리도 없어 사
손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장무기가 도룡도를  휘두르자 세 사람은  다섯 개의 성화령으로
맞서며 서로 엉켜 도룡도를  빼앗으려고 했다. 세 사람의 성화령
은 도룡도에 걸려 서로 내공으로  대치했다. 장무기는 가벼운 상
처를 많이  입었으나 조금도 그들에게  눌리지 않았다. 내력으로
싸운다면 오히려 파사국의  세 특사는 자기네 약점으로 장무기의
장점을 공격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장무기는 지금 정세로  보아 자신이 세 사람을 제압하기
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그는 외쳐댔다.

 "사대협님, 이 파사국 삼사의  무공이 아무리 괴이하다 해도 소
인이 이 자리를 피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서 먼저 여
기를 피하십시오. 이 도룡도는 나중에 꼭 돌려 드릴 것입니다."

 파사국 삼사는 그가 진력을  다해 내력을 쏟으면서 평상시와 조
금도 다름없이 말을 하는 것에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소협의 존함은 어떻게 됩니까?"

 장무기는 지금 절대로 사손에게  사실도래 말할 수 없다고 생각
했다.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사손은 장무기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고 파사국 삼사와  결사적으로 싸울 것이
분명했다.

 "소인은 증아우라  합니다. 사대협께서는 왜  아직 몸을 피하지
않습니까? 이 도룡도를 돌려  드리지 않을까 하고 염려되어서 그
러십니까?"

 "하하하! 증소협, 그런 말씀 마시오. 이 늙은 나이에 소협과 같
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입니다. 소협,
나의 칠상권으로 저 여자를 칠  것이니, 내가 힘을 쓰려고 할 때
빨리 도룡도를 버리시오."

 장무기는 의부의 칠상권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만약 자기가 도
룡도를 손에서 놓는다면 일권에 휘월사를 즉사시킬 수 있는 위력
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파사국 총교와 깊은 원한을
맺게 되는 것이 아닌가. 장무기는 사손이 누누이 얘기하기를, 동
교의 친구를  살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자기는
총교의 사자를 죽이다니, 그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었다.

 "잠깐!"

 하고 외치고 나서 유운사를 향해 말했다.

 "잠깐 휴전하는 게 어떻소? 세  분에게 자세히 물어 볼 것이 있
습니다."

 유운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무기는 다시 말을 건넸다.

 "소인은 사실 명교와 매우  관련이 있는 사람입니다. 세 분께서
성화령을 갖고 계시니 나의  손님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걸 용
서하시고 우리 동시에 내력을 거두고 싸움을 중지합시다."

 유운사는 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장무기는 기뻐하며 내력을  거두고 도룡도를 거두자, 파사국 삼
사도 동시에  내력을 거두었다. 그러나  갑자기 장무기는 가슴에
칼날과 같은  한기가 스며드는 충격을  받았다. 장무기는 재빨리
호흡을 멈추었으나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죽다니. 내가 죽으면 의부께서도 이들의 손아귀를
빠져 나가지 못해. 주아 동생, 주낭자, 조낭자, 소조, 그리고 원
나라를 무너뜨릴 대업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데, 유운사의  성화령이 자기의 천령혈을
향해 내리치는 것이었다. 장무기는  급하게 내력을 모아 조금 전
에 기습당한 옥당혈을 뚫으려고 했으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여자의 외침이 들렸다.

 "중토 명교의 사람들이 달려온다!"

 그 소리에  유운사는 놀라 쳐들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그러는
사이에 한 회색 그림자가  쏜살같이 달려와 장무기 허리에 찬 의
천검을 뽑아 유운사의 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장무기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으나 바로 조민이라는 것을 자세
히 볼 수 있었다. 조민의  이 초식을 바로 곤륜파의 살초인 옥쇄
금강이었다. 그것은 적과 같이 죽겠다는 타법이었다.

 유운사는 이 날카로운 일격에 세 사람이 연합하기는커녕 자신의
목숨이 당장 위급한 것을  알고, 황급하게 성화령을 쳐들어 검을
막으며 뒤로 나뒹굴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생각
하며 일어나, 왼쪽 뺨을 만져  보니 피가 흐르며 반쪽 수염이 살
점과 함께  달아나 있었다. 성화령이  기괴한 물질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의천검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장무기가 사손을 만나러 갈 때, 조민은 금화파파의 행동이 괴이
하고 진우량의 행동은 더욱  의심할 점이 많아 몰래 뒤를 미행했
던 것이다.

 조민의 의천검이  유운사의 성화령에 부딪쳐  튕겨 나와 자기가
쓴 모자 한쪽이 잘려 나가 그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녀는 다시 몸을 날려 묘풍사를 향해 공격했다. 그녀의 이번 초
식은 공동파의 절초인 인귀동도였다.

 이 초식 또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적과 같이 옥석구분(玉石
俱焚)하자는 것이다. 이런  타법은 매우 잔혹하여 소림이나 아미
와 같은 불문무공에는 이런 초식이 없었다.

 묘풍사는 그녀의 무서운 이  공격에 그만 온몸이 싸늘해지며 멍
청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로  이 찰나 유운사가 쏜살같이 조민
을 뒤에서 끌어 안았다. 조민은 상대에게 붙잡히자 어쩔 줄 몰라 
그만 검을  거꾸로 하고 자기의 아랫배를  찌르려고 하는 것이었
다.

 이 초식은 정말 더욱 잔혹한 것이었다. 이것은 무당의 천지동수
(天地同壽)라는 초식인데, 장삼봉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은
이정이 기효부가 죽고 난  후 그녀를 위해 복수하기 위해서 양소
의 무공을 자신이 이겨내지 못할  것을 알고, 그와 같이 죽기 위
해 정성을 쏟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초식은 바로 자신의 뒤
에 바싹 붙은  적을 죽이려고 할 때  자신의 아랫배를 관통한 후 
적의 몸을 찌르는 살법이다.

 바로 의천검이 조민의 아랫배에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장무기는 
혈도를 뚫고 재빨리 손을 뻗어 의천검을 낚아채었다. 그 순간 조
민은 힘껏 뿌리쳐 유운사  품에서 벗어나 재빨리 장무기 손에 있
는 성화령을 빼앗아 금화파파가 포진한 바늘진으로 던져 버렸다.

 성화령은 파사국 삼사가 자기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것이
다. 유운사와 휘월사는 장무기나 조민과 더 이상 싸울 여유도 없
었고, 심지어 묘풍사가  어떤 위경에 처해 있는지  알 바도 없이 
조민이 던진 쪽을 향해 달려가 줏으려고 했다.

 그들은 몇 장을 달려가자 그만 바늘진(針陣) 속으로 뛰어들어갔
다. 앗! 하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휘월사가 그만 예리한 강침을 
밟았다. 날은 어둡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 그들은 어디에 강침이 
있고 성화령이 어디 떨어졌는지 몰라 땅을 더듬으며 성화령을 찾
고 있었다. 그제서야 묘풍사가  꿈에서 깨어난 듯이 정신을 차리
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조민은  조금 전에 장무기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고 덤볐지만, 지금 정신이 들자 그만 겁에 질려 
응! 하고 소리내며 장무기의 품 속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장무기
는 그녀를 안으며 내심 말을 수 없이 감격스러웠다. 그러나 파사
국 삼사가 성화령을 찾고  나면 다시 돌아올 것을 생각하자 그는 
마음이 조급했다.

 "자, 이제 그만 빨리 여기를 피합시다."

 그러면서 도룡도를 사손에게 돌려  주고 중상을 입은 주아를 끌
어안았다.

 "사대협님, 지금은 잠시 저들을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렇게 합시다."

 사손은 허리를 굽혀  금화파파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장무기는 
내심 금화파파가 오늘 이  대난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사손의 덕택이므로, 그녀가 사손에게 크게 감사드려야 할 것이라
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갑자기 사손이 대갈일성하며 금화파파를 향해 주먹
을 내리쳤다.

 금화파파는 재빨리 피하며 주아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장무기
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크게 놀라 그들 앞으로 달려갔다.

 "한부인, 왜 또 은 낭자를 해치려고 하는 거요?"

 하고 사손이 외쳤다.

 금화파파는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은 당신 마음이지만, 내가 이 애를 
죽이는 것도 내 마음이요. 그러니 상관 마시오!"

 장무기가 그들의 말에 끼어들었다.

 "내가 여기 있는 한 누구도 함부로 누구를 죽일 수 없습니다."

 "존가(尊駕)께서 오늘  남의 일에  너무 끼어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천만에! 절대로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는 것이 아닐 거요. 파사
국 삼사가 곧 뒤따라올 텐데,  어서 빨리 여기를 피하지 않고 무
슨 쓸데없는 일을 하려고 합니까!"

 흥! 하고 금화파파는 서쪽으로  달아나며, 갑자기 뒤에다 세 개
의 금화를 주아의 뒤통수를  향해 날리는 것이었다. 장무기는 재
빨리 손가락을 뻗어 금화를  튕기자 화살보다 더 위력 있고 날카
롭게 다시 금화파파를 향해 날아갔다.

 처음에 장무기가 주아를 안을 때 그만 얼굴에 그렸던 수염이 지
워져 금화파파는 그 때 이미  그의 진짜 얼굴을 보아 내심 이 젊
은 소년에게 어찌  이런 무서운 내력이 있을까  하고 놀란 터라, 
그는 다시 날아오는 금화를  감히 받지 못하고 재빨리 땅에 엎드
려 피했다. 찍! 하는  소리와 금화파파의 옷이 세 군데나 찢겨지
며 금화가 날아가자  금화파파는 가슴이 섬찟하여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그만 쏜살같이 달아났다.

 장무기가 주아를  끌어안는데, 갑자기 조민이  윽! 하고 외치며 
허리를 구부리고 아랫배를 움켜  쥐는 것이 아닌가! 장무기는 깜
짝 놀라 물었다.

 "조소저, 왜 그러시오?"
 
 조민의 손에는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 전에 그녀가 천지동
수의 초식을 사용할 때  끝내 자기의 아랫배를 조금 찌르게 되었
던 것이다.

 "많이 다쳤소?"

 그러자 묘풍사의 함성이 들려왔다.

 "성화령이 여기 있습니다. 찾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민은 마음이 조급하여 재촉했다.

 "저는 상관 말고 빨리 여기를 피하세요."

 장무기는 한쪽에  주아를 안고 한쪽에는  조민을 안고 쏜살같이 
산 밑으로 달렸다.  사손은 그의 뒤를 따르며  내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소년은 정말 대단하구나!  두 사람을 안고도 여전히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다니!'

 장무기는 자기 품의  두 소년 중에 누구  하나가 생명을 잃는다 
해도 평생의 한을 남기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는 마음이 착잡하
고 무거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두 소녀의 체온은 따뜻하였다.

 파사국 삼사는  성화령을 찾아내자 곧바로  장무기의 뒤를 쫓았
다. 그러나 그들의 경공은  장무기나 사손에 비해 훨씬 뒤떨어졌
다.

 장무기는 물가에 당도하자 큰 소리로 외쳤다.

 "조민 군주의 명령이다! 빨리 배를 띄워라!"

 파사국 삼사가 바닷가에 당도할  즈음엔 배는 이미 수십 장이나 
떨어져 있었다.

 장무기는 조민과 주아를 나란히 선창 안에 눕혔다. 소조는 옆에
서 그를 도와 그들의 옷을 벗기고 상처를 살펴보니, 조민은 아랫
배를 약간 찔려 피를 많이 흘렸으나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주아
는 금화 세 개를 모두  급소에 맞아 살려 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
웠다. 장무기는 두 사람에게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주었다.

 주아는 이미  오래 전에  기절하여 혼미상태에 인사불성이었다. 
조민은 그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장무기는 아무리 조민
에게 병세를 물어도 그녀는  이를 악물고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었다.

 사손이 입을 열었다.

 "증소협, 나 사손은 세상과  떨어져 살다가 이번에 중토에 다시 
돌아와 소협과 같은 의리가  갚은 친구를 사귀어 정말 뜻밖의 기
쁨을 얻게 됐습니다."

 장무기는 사손을 일으켜 선창의  의자에 앉히고 무릎을 꿇고 절
하며 울면서 인사를 올렸다.

 "의부! 제가  바로 무기입니다. 좀더 일찍  의부를 모시러 오지 
못해 의부께서 고생을 더 하시게 했습니다."

 사손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고!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제가 바로 장무기입니다."

 사손은 할 말을 잊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장무기는 어렸을 때  사손이 자기에게 전수하던 무결을 외웠다. 
그것은 모두 빙화도에서  자기가 직접 장무기에게 가르쳐 주었던 
무학의 요결이라, 사손은 기쁨과 놀라움이 교차하여 말을 더듬었
다.

 "네가..... 정말..... 무기가 틀림없느냐?"

 장무기는 일어나 사손을 끌어안으며  그 동안 겪었던 일들을 간
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자기가 명교의 교주가 됐다는 얘기
는 일단 하지 않았다. 그것을 얘기하면 사손이 명교의 직책을 따
져 오히려 자기에게 절을  할 것이 틀림없었다. 장무기는 그것을 
피하고 싶었다.

 사손은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몰랐다.

 "하느님, 제 눈을 좀 뜨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갑자기 사공이 외쳤다.

 "적선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장무기는 재빨리 뒤로 돌아가 보니, 멀리 한 척의 큰 배가 다섯 
개의 돗을 달고 바람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적선은 돛을 많이 
날아 쏜살같이  달려오며 점점 접근해  오자, 장무기는 조급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별 수 없어 파사국 삼사가 이 배
로 올라와 그들과 선창에서  싸울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선
창 안이 좁으니 세 사람이  합동 작전을 펼 수 없을 것이라고 생
각했던 것이다.

 장무기는 조민과 주아를 한쪽으로  옮겨 놓고 나서 만반의 태세
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선채가 옆으로 기울어지며 
바닷물이 배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공이 황급히 외쳤다.

 "포격입니다, 포격!"

 그러나 다행히 배에  적중하지는 않았다. 조민은 장무기에게 손
을 흔들며 낮은 소리로 일러주었다.

 "우리 배에도 포가 있어요."

 그 말에 장무기는 정신을  차리고 갑판으로 뛰어나가 포를 끌어
내게 하고 폭약을 넣고  반격을 개시했다. 조민의 부하들은 비록 
무공은 뛰어났지만, 바다에서 포격에  대한 것은 전혀 알지 못해 
대포알은 얼마  날아가지 못하고  떨어지며 바닷물만 출렁거렸을 
뿐 적선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러나 적선에서는 
상대에게도 대포가 있다는 것을  알자 겁을 먹고 너무 가까이 접
근하지는 못했다. 얼마 지나자 적선은 다시 포를 쏘아, 이번에는 
뱃머리에 적중하여 곧 큰 불이 붙었다.

 장무기가 불을  끄도록 명령하고 나자, 또  위에 있는 선창에서 
갑자기 불길이 솟았다. 장무기는  큰 물통으로 물을 끼얹고 들어
가니, 안에는 주지약이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장무기는 물통을 
버리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주 낭자, 별일 없습니까?"

 주지약은 온 몸이 물에 젖어  매우 조급해 하고 있는 순간 장무
기를 발견하자 무척 반가워했다.

 그녀가 움직이자  땡그랑! 소리가 났다.  그녀의 손목과 발목에 
모두 금화파파가 쇠사슬을 채워 두었던 것이다. 장무기는 아래로 
내려가 의천검을 갖고 와 그것을 모두 잘라 버렸다.

 "장교주,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습니까?"

 장무기가 대답하기도 전에 갑자기 선체가 기우뚱하자 그녀는 발
을 헛짚으며 그만 장무기의  품 속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발갛게 홍조를 띄었다.

 장무기와 주지약이 갑판으로 나오자  배에는 이미 큰 불이 붙어 
배가 가라앉고 있었다.  장무기는 조급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배 
왼쪽에 작은 배 하나가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주낭자, 어서 빨리 저 작은 배로 뛰어 내리시오."

 이때 소조는  주아를 안고, 사손은 조민을  안고 밑의 선창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작은 배로 뛰어내렸다.

 이때 그 배에는 이미 불이 완전히 타올라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
고 있었다. 장무기는 힘껏 노를  저어 적선이 이 작은 배를 발견
하기 전에 빨리 큰 배의 근처에서 멀리 떨어지려고 애썼다. 그러
면 모두 배가 가라앉아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뻔했다. 한
참 노를 저어  큰 배와 멀리 떨어지자  갑자기 큰 배에서 요란한 
굉음과 배에 있던 화약들이  터져 배가 가라앉고 말았다. 파사국 
전함은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조민의 부
하들 중에서 수영을 할 줄 아는 부하들은 모두 살기 위해 적선을 
향해 수영해 갔으나 모두 적선에서 화살을 쏘아 죽이고 있었다.

 장무기와 사손은 조금도  지체하지 못하고 노를 저었다. 육지라
면 몰라도 바다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적선의 대포에 적중
당하지 않는다 해도 파도가 높이 출렁거리기만 해도 그들의 작은 
배는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두 사람의 내력이 심후해 
별로 피로를 느끼지는 않았다.

  날이 밝자 사방이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장무기는 크게 기뻐
하였다.

 "이 안개가 우리를 살려  주는군요. 이제 반나절만 지나면 적선
은 절대로 우리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갑자기 광풍이  몰아부치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작은  배는 그만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었
다. 그런데 지금은 한참 추운 겨울이라 옷이 모두 젖어 장무기와 
사손은 내력이 심후해 참을  수 있으나, 주지약과 소조는 추워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들은 그래도 신발을 벗어  배 안에 들어온 
물을 밖으로 퍼냈다.

 "무기야, 내가 네  부모와 당시 배를 타고  나올 때는 지금보다 
날씨가 더 험악했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나서 그는 하! 하! 하!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년에는 네 부모와  같이 갔었지만, 오늘은 네가 혼자 
여자 넷을 데리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냐? 하! 하! 하!"

 주지약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소조는 아무렇지도 않
은 듯이 태연자약했다.

 "할아버지, 저는 도련님의 시중을 들어 주는 시녀에요."

 조민은 상처를 입고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서 갑자기 입을 열었
다.

 "또 다시 그런 엉터리 말씀을 하시면, 내 상처가 다 나은 후 가
만히 두지 않겠어요."

 "하! 하! 소녀가  매우 무섭구나. 그런데 네가  어젯밤 모인 세 
초식 중에 하나는 곤륜파의 옥쇄금강이고, 하나는 공동파의 인귀
동도였는데, 세 번째는 무슨 초식인지 이 노인네가 들은 것이 별
로 없어 모르겠구나."

 조민은 내심 탄복했다.

 '과연 금모사왕이군! 그의 이름이 왕년에 세상을 진동했다는 것
이 헛소리는 아니야.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바람소리로 그 두 절
초를 알 수 있다니.....'
 
 "세 번째는 무당파의  천지동수라는 초식입니다. 그것은 근래에 
만든 초식이라 영감님이 모르시는 겁니다."

 "음! 그런데 어찌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한 거지?"

 "그.....그건....."

 조민은 쑥스러워 말을 잇지 못했으나 끝내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가 계속 주아를 안고 있어서, 나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
니다."

 네 사람은 그녀가  자기 심정을 솔직히 말하자  모두 깜짝 놀랐
다. 조민은 몽고 여자이기에  성격이 매우 활달하고 솔직한 것이
다. 또한 지금 이 생사를  모르는 위험 중에서도 솔직히 자기 심
정을 털어놓은 것이다. 장무기는  내심 조민이 원래 자기의 적이
였었는데, 이렇게 자기를 생각하자 크게 감격했다.

 비가 그치자  파도도 조용해지고, 그들은 모두  잠이 들어 버렸
다. 약 세  시간이 지나자 사손이 먼저  깨었다. 그는 다섯 명의 
청년 남녀의 숨소리와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민과 주아는 상처를 입어 숨소리가 매우 빨랐다. 장무기의 숨
소리는 매우 뚜렷해, 사손은 내심 자기 평생 이렇게 어린 나이에 
내력이 심후한 소년은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조의 
숨소리는 잠시 빨랐다가 잠시 느려서, 이 소녀가 배운 무공은 매
우 기이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손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그렇다면 이 소녀가 바로....."

 그러자 갑자기 주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장무기야, 왜 나와 영사도로 가지 않는 거지?"

 이 외침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는 또 계속 외쳤다.

 "나 혼자 섬에서 얼마나 고독했는데, 왜 나와 같이 있기를 싫어
하는 거지?  내가 이렇게 당신을 생각하고  있는데, 당신은 죽어 
지하에서 이런 내 마음을 아세요?"

 장무기는 그녀의 이마를  만져보니 무척 뜨거웠다. 상처를 입고 
열이 올라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은 배엔 약도 없
고 아무것도 없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장무기는 그저 옷자락
을 찢어 물에 적셔 그녀의 이마를 적셔 주었다.

 주아는 잠꼬대를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를 죽이지 마세요. 새 엄마는 내가 죽인 것이니 
나만 죽이세요."

 "주아야, 주아야, 네 아버지가 여기 없으니 무서워하지 마라."

 "아버지가 나빠요.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했으면 됐지, 왜 
둘째, 세째까지 얻어요? 그런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남자예
요!"

 장무기는 깜짝 놀랐다. 그는 조금 전 꿈 속에서 마침 자기가 조
민과 결혼한 후 또다시 주지약을 맞아들이고, 나중에 주아와, 소
조까지도 얻게 된 꿈을 꾸었던 것이다.

 "무기를 찾아다니다 당신이  절벽에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
고 정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증아우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도 무공이 매우 높고 인품이 훌륭한 사
람이었어요. 저는 그분에게 시집가겠다고 맹세했어요."

 조민, 주지약, 소조 세  사람은 모두 주아가 잠꼬대하면서 증아
우라는 이름을 부르자, 그가 바로 장무기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
다.

 장무기는 얼굴이 빨개져 어쩔  줄을 몰랐다. 세 소녀의 각기 다
른 시선이 자기를 주시하자,  장무기는 바다 속으로 뛰어들고 싶
은 심정이었다.

 주아는 계속 잠꼬대를 했다.

 "그 아우 오빠가 나한테  얘기했어요. '낭자, 내 진실로 당신을 
부인으로 맞아들일 것이니, 내가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
지 마시오. 지금부터 누구든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가만히 두
지 않을 것이오. 내 전력을  다해 당신을 보호해 줄 것이오.' 무
기 오빠, 이 아우 오빠의 인품은 당신보다 더 훌륭해요. 무기 오
빠, 당시 당신이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지금 후회하지 않
으세요?"

 장무기는 처음에 그녀가 자기가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는 것으
로 알고 매우 난처하고  쑥스러웠으나, 듣고 나니 그만 감격스러
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때 안개가 모두  걷혀 옆으로 누운 
주아의 몸매가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낮은 소리로 잠꼬대를 했다.

 "무기 오빠,  당신은 지금  유명(幽冥)에서 고독하지 않으세요? 
나는 파파와 같이 빙화도로  가서 당신의 의부를 모셔오고, 다시 
무당산으로 돌아가 당신 부모의 묘에  제사드리고 난 후, 당신이 
떨어져 죽은 절벽으로 가서  나도 떨어져 죽어 당신 곁으로 가겠
어요. 그러나 파파가 백살이 지난 후라야 됩니다. 지금은 당신곁
으로 갈 수 없어요. 파파  혼자 외롭게 이 세상에 남겨 둘 수 없
어요. 파파께서 나를 살려  주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내 아버지
에게 살해당했을  거예요. 당신의 의부를  위해 파파를 배반했지
만, 파파는 나를 무척  미워할 거예요.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파
파를 좋아하고 위해 드릴 거예요." 

 그의 이번 잠꼬대는  장무기와 상의하는 말투였다. 그녀는 장무
기가 이미 죽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연신 헛
소리를 하며 잠꼬대를 했다.

 다섯 사람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모두 바다를 바라보며 각기 자
기들의 심사를 생각하며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매우 부드러운 노래소리가 바다로 퍼져 나갔다.

 ----- 오늘을 넘겼으나 내일을  피할 수 없구나. 백세광음에 칠
십고래희라. 한 해 한 해 지나가는 것이 유수와 같구나. -----

 이것은 주아가 잠결에 부른 것이었다.

 장무기는 그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노래는 광명정에서 성곤
(成崑)에게 길일 막혀 위험에 처해 옴쭉달쭉 할 수 없을 때 소조
가 부른 노래였다. 장무기는 그만 소조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소
조도 자기를 멍청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제 5 권 6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5 권


     제 7 장  십이(十二) 보수왕(寶樹王)과 성화령(聖火令) 


 주아는 다시 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엔 완전히
중토의 곡조와는 달랐다. 자세히 들으니, 뜻은 여전히 소조가 부
르던 노래와 비슷했다.

 ----- 유수와 같이 흘러와  바람과 같이 사라지고, 어디서 왔다
가 어디로 사라지는가! -----

 그녀의 음성은 점점 가늘어지며 끝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
다.

 사손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 파사국 노래는  한부인이 가르쳐 준 것이야.  이십여 년 전
광명정에서 한 번 들은 적이 있었지. 그런데 한부인이 이렇게 매
정하게 이런 독수를 내리다니....."

 조민이 사손에게 물었다.

 "영감님, 한부인이  어떻게 파사국 노래를 부를  줄 알지요? 이
노래는 명교의 노래입니까?"

 "명교가 전해 온 곳이  파사국이지. 명교와는 많은 인연이 있지
만, 명교의 노래는 아니야. 이 곡은 이백 년 전 파사국의 유명한
시인 아묵(峨默)이 만든 것인데,  듣자 하니 파사국에서 부를 줄
모르는 사람이 없다더군. 당시  내가 한부인이 부르는 것을 듣고
내력을 묻자, 나한테 자세히 얘기해 주더군. 당시 파사국이 대철
야망(大哲野芒)이라는 사람이 천막을  치고 제자를 받아들일 때,
문하에 걸출한  세 제자가 있었는데,  아묵이라는 제자는 문학에
능통했고, 니약모는  정사에 밝고, 곽산은  무공이 절강했지. 세
사람은 의기가 투합하여 맹세하기를,  나중에 세 사람 모두 같이
부귀를 누리기를  약속했는데, 결국 뒤에  니약모는 교왕의 수상
자리까지 올랐지. 두 친구가 찾아오자 니약모는 교왕에게 청탁하
여 곽산에게 벼슬을 내리게  해주었지. 아묵은 벼슬에 관심이 없
어 다만 거액의 연금만 타고 문학 연구에만 전념했지. 그런데 곽
산은 야심이 커 정변을  일으켰지. 그런데 그 일이 실패하자, 그
는 부하를 결당하여 한 고장을 점령하고, 위세가 당당한 한 중파
의 수령이 된  거야. 의사미량파(依斯美良派)라고 살인을 전문으
로 하는 종파야.  십자군 시절에 서역의 산중노인 곽산(山中老人
藿山)이란 이름만 들어도 겁을 집어 먹었었지. 사실 서역의 많은
군왕들이 이  산중노인에게 죽음을 당했었지.  그런데 그 곽산이
왕년의 은혜를 잊고 니약모까지  암살한 거야. 바로 그 니약모가
죽으면서 부른 노래가  지금 이 주아가 부른  노래야. 그런데 그
뒤 산중노인 일파의 무공을  파사국 명교에서 습득한 거야. 파사
국 삼사의  무공이 괴이한 것도  바로 이  산중노인의 무공일 거
야."

 "영감님, 한부인의 성격이  그 산중노인을 많이 닮았군요. 당신
이 그녀를 그렇게 의리있게 대했는데도, 영감님을 죽이려고 했으
니."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희귀한 일이냐?"

 조민은 고개 숙여 한참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한부인이 명교 사왕(四王) 중에서 서열은 제일 높지만, 무공은
영감님보다 더 높지 못하던데, 어젯밤 파사국 삼사와 싸울 때 그
녀는 왜 천주만독수를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천주만독수? 한부인은  그런 무공을 할 줄  몰라. 그녀와 같은
절세 미인은 얼굴을 자기  목숨보다 더 중하게 생각하는데, 감히
그런 무공을 익히겠느냐?"

 장무기, 조민, 주지약은 그 말에 모두 어리둥절했다. 그들의 마
음속엔 지금의 금화파파의  모습으로는 삼, 사 십년 더 젊어진다
해도, 절세미인이라는 말은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조민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영감님, 제가  보기엔 금화파파가  별로 예쁜 것  같지 않은데
요?"

 "뭐라고? 자삼용왕은  이십여 년 전  무림의 제일가는 미인이었
지. 지금 나이가 들었다 해도 왕년의 미색은 남아 있을 거야. 나
야 지금 볼 수 없지만....."

 사손의 말에  조민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추악하게 생긴 노파가 왕년에 무림의 절세미인이었다니, 누가
뭐라 해도 절대 믿을 수 없었다.

 "영감님의 명성은 천하가 다 알고, 또한 무공이 심후한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리고 백미응왕도 자신이 교파를 창립하고
육대문파와 맞섰고, 청익복왕  또한 신출귀몰하여 전에 만안사에
서 내 얼굴을 훼손시키겠다고 겁주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섬찟
합니다. 금화파파의 무공이 높다  하지만 서열이 세분 위라 하면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 세 사람이 양보한 거야."

 "어째서죠?"

 사손은 갑자기 껄껄 웃고 나더니 입을 열었다.

 "영웅이란 미인관(美人關)을 빠져 나갈  수 없는 거야. 사실 대
기사(黛綺絲) 미색에  매료됐던 사람이  어디 세 사람뿐이었겠느
냐? 아마 교내 교외 해서 백 명은 넘었을 것이야."

 "대기사라니요? 그게 바로  한부인의 이름입니까? 어딘가 좀 이
상한데요?"

 "그녀는 파사국 사람이라 파사국 이름이지."

 장무기, 주지약, 조민은 모두 크게 놀랐다.

 "네? 그녀가 파사국 사람이라니?"

 사손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그녀의  생김새를 보면 모르겠느냐?  그녀는 원래 중국과
파사국의 혼혈이야. 머리카락과 눈은  모두 검은 색이나 눈이 움
푹 파였고, 코가 날카롭게 생기지 않았느냐? 그리고 피부도 백설
과 같이 하얗고, 우리 중토 여자와는 달라."

 "아닙니다. 그녀는  코가 납작하고  눈도 좁쌀만하고, 영감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전혀 틀립니다. 장 공자, 그렇지 않습니까?"

 "맞어. 그렇다면 그녀도 고두타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모습을 자
기가 훼손시켰단 말인가요?"

 사손이 다시 물었다.

 "고두타라니 어떤 사람이냐?"

 "바로 명교의 광명우사 범요입니다."

 그리고는 범요가 자기의  얼굴을 훼손하여, 모습을 바꿔 여양왕
부에 들어갔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사손은 긴 탄식을 뿜었다.

 "범형의 그런 행동은 정말 본교에 큰 공을 세운 것이야. 그것도
반 이상은 한부인의 자극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야."

 "영감님, 어서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사손은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한참을 있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
다.

 "이십여 년 전 당시 명교는 양교주의 통솔 아래 교세가 무척 흥
왕했었지.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세 명의 파사국 사람들이 파사
국 명교 교주의 친서를 들고 와 양교주를 직접 만나겠다는 거야.
친서에 쓴 것을 보니, 파사국 총교에 정선사자(淨善使者)라는 분
이 있는데, 원래는  중국인이라는군. 그는 파사국에 들어가 오래
살다 명교에 입교했는데, 공을 많이 세워 파사국 여자를 얻어 결
혼을 하고 딸아이 하나를 낳았지. 이 정선사자는 그 뒤 일 년 후
에 죽고 말았는데, 죽기 전에 고향을 생각하고 유언에 딸 자식을
중국에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양교주께서  승낙을 하자 그녀가
대청으로 들어왔지. 그녀가 들어오자  대청 안은 금방 환하게 밝
아오는 분위기였지. 정말 뭐라고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
웠지. 그녀가  양교주에게 절을 하자 대청에  있던 좌우 광명사.
삼법왕, 오산인,  오행기사 어느 누구 하나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 데리고 왔던 세  명의 파사국 사람들은 다음날 파사국으
로 떠나 버리고, 그 대기사라는 아름다운 소녀는 그 후 광명정에
서 살게 된 것이야."

 조민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영감님께서도 그 때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었군요? 사실대로 말
씀하세요."

 사손은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 나는 그 때 신혼이라 내 처와 매우 사랑을 했었지. 또
임신까지 했었고. 그런데 어떻게 내가 다른 마음을 품었겠나?"

 그 말에 조민은 자기의  그런 물음에 매우 후회를 했다. 조민도
사손의 부인이 성곤에게 피살된  것을 알고 있었다. 공연히 사손
의 슬픈 곳을 다시 생각나게 한 것이 죄송스러웠다.

 조민은 다시 물었다.

 "고두타 범요는 젊었을 때 무척 미남이었다는데, 대기사를 무척
좋아했었겠군요?"

 이번엔 사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첫눈에 반했었지.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했지. 그녀의 미
색에 반한 총각들이 무척  많았지만, 대기사는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를 않았지. 한번은 양교주  부인이 범요와 맺어 주려고 했는
데, 대기사가 일언에 거절해 버렸어. 그건 무척이나 범요의 자존
심을 상하게 했지. 그녀는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시집을 안 간다
는 거야. 그후 누구도 그런 생각을 버리게 된 거야. 그런데 그후
반 년이 지난 어느  날, 바다 건너 영사도에서 한천엽(韓千葉)이
라는 젊은이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양교주를 찾아온 거야.
우리는 모두 그 대단치  않게 생긴 젊은이가 홀로 광명정에 복수
하겠다고 나타나자 모두 비웃었지. 그러나 양교주는 큰 주연까지
베풀어 주었어. 연회가 끝나자  양교주는 그런 일이 생긴 연유를
털어 놓았지. 알고 보니 양교주는 그 젊은이의 부친과 사소한 말
로 인해, 그만  대구천수(大九天手)라는 일장으로 그의 부친에게
중상을 입히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불구를  만들어 놓은 거
야. 그 때 그의 부친은  꼭 복수를 하겠다고 공언을 한 거야. 다
만 자기의 무공으로는 상대가 되지 못해, 훗날 자기의 아들이 아
니면 딸이라도 시켜 복수하겠다는 거야.

 그런데 그 때 양교주는 그에게 말하기를, 아들이든 딸이든 자기
를 찾아올 땐 꼭  먼저 삼초(三招)를 양보해 주겠다고 약속을 한
거야. 그런데 그 사람은 초식을 양보할 필요는 없고, 그 대신 어
떻게 무술을 겨룰 것인지 자기 자식에게 선택하게 해달라는 것이
었어. 양교주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십여 년이 지나자 양
교주는 그 일을 깜빡 잊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그 사람은 정말
아들을 보낸 거야.

 모두는 생각하기를 혼자서 찾아올  땐 절대 만만치 않은 사람이
라고 짐작하고  있었지. 그렇지만 양교주의  무공하면 천하 무적
아닌가! 아마 무당파의 장삼봉 진인 외엔 어느 누구도 그의 일초
반 식을 받아 낼 자가  없었을 거야. 그런데 걱정스러운 것은 그
젊은이가 어떤  어려운 요구를 할지  그게 걱정스러웠지. 이튿날
그 한천엽은 여러 사람 앞에서 옛날의 약속을 공표하며 양교주가
다른 말을 못하게 하고 대결 방법을 말하더군. 그 자는 양교주와
광명정에 있는  벽수한담(碧水寒潭) 연못  속에서 겨루겠다는 거
야. 그 말을 들은 모두는  정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 그
연못의 물은 얼음처럼 차가와 뼈를 깎는 것과 같았지. 아무리 더
운 여름일지라도 누구 하나 그 물에 들어가지 못했지. 더우기 그
때는 한참 제일 추운  겨울이었거든. 양교주의 무공이 아무리 심
후하지만, 그분은 수영을 할  줄 몰랐던 거야. 그러니 무술은 둘
째치고 물에 빠져 죽을 것이 아닌가?"

 장무기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양교주께서 한  번 약속했으니 대장부 일언 중천금이라
약속을 안 지킬 수도 없지 않습니까?"

 조민은 그 말에 장무기의  손을 움켜잡고 살짝 꼬집으며 미소를
지었다.

 "네, 맞아요.  대장부 일언 중천금인데,  명교의 교주 신분으로
어떻게 식언을 합니까?"

 사실 그녀의 말뜻은, 장무기를 다시 깨우치는 것이었다. 사손이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바로 그것이야. 자기는  강호에 무명 소졸이라, 명교에서 자기
를 무슨 방법을  써서 죽여도 강호에 누구도  알 리가 없다는 거
야. 그러니  자기를 죽이고 싶으면  당장이라도 자기를 죽이라는
거야. 양교주는 한참 생각하고 나서 입을 열었지."

 "한형제, 당시 영존과 맹세한 것이라 다른 소리하지 않겠네. 그
러니 이번 싸움은 졌다고  인정하네. 그러니 자네가 나를 맘대로
조치하게."

 그러자 한천엽은 품 속에서 작은 비수 하나를 꺼내며 이렇게 말
했지.

 "이 비수는 선친의 것인데, 조치는 없고 다만 이 비수에 무릎을
꿇고 세 번 절을 하시오."

 군웅들은 그 말에 모두 크게 놀랐지. 당당한 명교의 교주신분으
로 어찌 그런 굴욕을 당한다는 건가? 그러나 양교주가 이미 졌다
고 인정했으니,  강호의 규율로 따지면 그의 말을 안 들어 줄 수
없었지. 그는 양교주의 절을 받고 나서 그 비수로 자신은 자진을
하지, 명교의  손에 죽지 않겠다는 거야.  순간 대청에는 쥐죽은
듯이 조용했고, 광명좌우사, 백미응왕, 팽영옥 등은 모두 지략이
뛰어난 사람들인데도 속수무책이었지.  한천엽의 그런 행동은 양
교주 스스로 자살하게 하고 자신도 자살하겠다는 것이었지. 바로
이 긴박한 상황에 대기사가 갑자기 앞으로 뛰쳐 나온 거야.

 "아버님, 저들에게 훌륭한 아들이 있다면 아버님한테는 이 딸이
있지 않습니까? 저쪽에서 아들을 보냈다면, 이 딸이 아버님 대신
그의 초식을 받아 내겠습니다."

 대기사가 양교주를 아버지라고  부르자 모두는 깜짝 놀랐지. 그
러나 그녀가 양교주의  위경을 해결하기 위해 가짜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즉시 깨달았지. 그렇지만 마음속으로 모두 대기사가
무슨 무술을 할  줄 아는가 하고 의심했고,  또한 무술을 익혔다
해도 별로 신통치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지. 더우기 얼음장과 같
은 연못 속인데 더 말할 나위가 없었지. 양교주가 미처 대답하기
도 전에 한천엽이 먼저 입을 열은 거야.

 "딸이 아버지 대신 해도 괜찮지요. 그러나 딸이 져도 여전히 양
교주가 이 비수를 향해 절을 해야 합니다."

 한천엽은 대기사를 보자 연약한 여자라 우습게 본 거야. 그런데
대기사가 다시 한천엽에게 물었다.

 "만약 당신이 진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렇게 되면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시오."

 "아버님, 걱정 마세요."

 그녀는 그 말을 하고 양교주를 향해 절을 하더군. 그 절을 올리
면서 대기사는 양교주와  의부녀(義父女)가 된 것이야. 양교주는
대기사가 자기를 위해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장포를 벗
어던지고 단도를 꺼내들고는 일어서 대기사를 말렸다.

 "대기사야, 너의 고마움은 알겠으나, 내가 그와 겨루겠다."

 그는 연못  속으로 뛰어들 결심을 했던  거야. 그런데 대기사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아버님,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해변에서 자라 물에
대해선 도통했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즉시 장검을  뽑아 들고 연못 속으로 몸을 날
려 얼음 위에 서서 검  끝으로 둘레에 작은 원을 그리더군. 그러
자 얼음은 갈라졌고 그녀는  왼발을 그 둥근 얼음에 딛고 서서히
물 속으로 들어갔지.

 그날은 차가운 북풍이 불어와  매우 추웠었지.  그날 그 연못의
상황을 생각하면, 정말 어제  있었던 일 같아. 대기사는 그날 엷
은 자색의 옷을 입었는데, 그녀가  얼음 위에 선 자태는 정말 선
녀와 다름없었다. 군웅들은 그녀가  얼음을 깨고 물 속으로 들어
가자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 한천엽은 그녀의 신법을 보자
그만 오만한 기색이 금방 사라지고 말았지. 그는 비수를 들고 뒤
따라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지. 그 연못은 너무  깊어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은 볼 수 없었으나,  물이 출렁이는 것은 볼 수 있었
지. 잠시 후, 한천엽이 물 속에서 뛰어 올라왔지. 그런데 호흡이
매우 급박했어. 그런데 한천엽의 두 손엔 아무것도 든 것이 없었
어. 그의 비수는 오히려  자기의 오른쪽 가슴에 꽂혀 있었고, 양
쪽 뺨에 칼자국까지 나 있었지.

 잠시 후 대기사는 물  속에서 몸을 날려  장검으로 방어하며 공
중에서 제비넘기를 하며 얼음 위에 살짝 내려앉는 거야. 그의 그
신법은 정말 아름다움의 극치였어.  양교주는 그녀의 두 손을 잡
고 정말 기뻐 어쩔 줄 몰랐지. 정말 아무도 그녀가 물에 대해 그
렇게 훌륭한 솜씨를 지녔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런데 대기사
는 오히려 한천엽을 위해 사정을 했지.

 "아버님, 이 사람의 솜씨는 정말 대단합니다. 자기 부친을 위해
복수하러 온 것을 생각해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양교주는 즉시 승낙을 하고  신의 호청우를 시켜 상처를 치료해
주게 했던 거야.  그날 밤 광명정에는 정말  큰 주연이 베풀어졌
지. 모두 대기사가 명교를 위해 큰 공을 세웠다고 칭찬이 자자했
지. 그리하여 양부인이 그녀에게 자삼용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
었고, 응왕, 사왕, 복왕과  같이 병렬하게 된거야. 그런데 위 셋
이 모두 그녀에게 첫째 서열을 양보한 거야.

 "그런데 그  벽수한담의 일전이 정말 큰  뜻밖의 결과를 몰고온
거야. 한천엽이 패하긴 했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대기사의 환심
을 얻게 된  거야. 아마 그녀가 매일  문병다니면서 사랑이 싹튼
모양이야. 한천엽의 상처가 다 치료되자 대기사는 갑자기 양교주
에게 한천엽에게  시집가겠다고 얘기를 했지.  모두는 그 소식을
듣고 크게 상심하고 실망을  했지. 어떤 자는 본교의 호교법왕이
어떻게 그 자에게 시집갈 수 있냐고 떠들었고, 어떤 자는 한천엽
을 모욕하고 인격을 무시했지.  그런데 대기사는 검을 들고 대청
입구에 서서 큰 소리로 맹세한 거야.

 "지금부터 한천엽은 나의  부군이니 누구든 그를 모욕하는 자는
이 장검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자 모두  한천엽이 입교하려고 하자, 반대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끝내 입교하지 못했지.  그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양
교주 부부가 실종된 거야. 광명정의 인심은 매우 어수선했지. 모
두 양교주 부부를  찾아 나섰는데, 어느 날  밤 광명우사 범요가
한부인 대기사가 비밀 통로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됐지."

 장무기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녀가 비밀 통로에서?"

 "그렇다. 명교의 교규가 매우 엄해  이 비밀 통로는 교주 한 사
람 외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야.  범요는 격노하여 그를
질책했었지. 그런데 한부인은 오히려 적반하장 격이었지.

 "내가 이미 본교의 교규를  어겼으니,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
세요."

 그날 밤 군효들은 대회를 열었으나, 한부인은 여전히 그 말밖에
하지 않았지.

 사실 교규로 따지자면, 그녀는 자살을 하든가 자기가 스스로 한
쪽 팔을 잘라야 했지. 그런데 범요는 자기가 그녀를 사모했던 정
을 봐서 그녀를 변호해 주었고, 나 또한 옆에서 거들자 군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죄를  십 년 옥살이로 결정을 내렸지. 그런
데 대기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거였어.

 "양교주가 여기 없는 한 누구도 나를 제재할 수 없습니다!"

 장무기가 갑자기 사손에게 물었다.

 "의부, 한부인이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비밀 통로에 들어 갔습
니까?"

 "그걸 설명하자면 말이 길어지지,  아마 명교에서 나 혼자만 알
고 있을 거야. 그 당시  군호들은 모두 양교주가 실종한 일과 관
련있다고 의심을 했지. 그러나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역설
했지. 결국 서로 대립이 되자 한부인은 끝내 파문출교(破門出敎)
하고 말았지. 그리고 한천엽과 홀연히 광명정에서 내려가 행방을
감추어 버린 거야."

 사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 후 양교주의 행방은 끝내  찾지 못하고 몇 년이 지나자, 서
로 교주  자리를 노리고 쟁탈전을 벌이느라  점점 일은 난장판이
되어 버렸지. 그후 백미응왕  은형은 광명정을 떠나 혼자서 천응
교라는 것을 창립했지. 내가 그렇게 말려도 듣지를 않아 결국 나
하고 불목하게 된 거야. 이십여 년 전 왕반산의 천응교에서 위세
를 떨칠 때, 난  그들의 위세를 꺾으려고 갔었지. 한편으로는 도
룡도의 위세를 믿었고, 또한  당시 그와의 불목했던 것에 앙갚음
을 하려고도 했고, 그가 명교를 떠나서는 위세를 떨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도 싶었기 때문이지.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 때
너무 심술을 부린 것 같다."

 사손은 또 긴 탄식을  했다. 그의 탄식엔 무수한 강호의 풍파가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모두 잠시 침묵을 지키자 조민이 입을 열었다.

 "영감님, 그 뒤 금화와 은엽의 명성은 강호를 진동시켰는데, 명
교에서 어찌 그 두 사람을 알아 보지 못했습니까? 그리고 은엽은
분명 한천엽인데 어떻게 독살당했습니까?"

 "그 중간 사정은 나도 몰라."

 "그런데 자삼용왕이 그렇게 미인이었다면 지금은 어째서 그렇게
추악해졌습니까? 자기 얼굴을 훼손시킨 자국은 없는데."

 "내 생각엔 무슨 교묘한 방법으로 변장을 한 것 같아."

 "파사국 총교에서 왜 그녀를 그렇게 찾는 겁니까?"

 "그것이 한부인의 제일 큰 비밀이야. 이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되
는데, 너희들이 영사도에 가서  그녀를 구출해 주기를 바라고 얘
기를 해주지."

 조민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영사도에 다시  간다는 말씀이에요! 우리가  그 파사국 삼사를
이길 수 있을까요?"

 사손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옛일을 회상하며 입을 열었
다.

 "중토 명교의 교주는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꼭 남자가 그 교주
자리를 지켰지만, 파사국 총교의  교주는 꼭 여자라야 교주가 될
수 있지. 그것도  꼭 시집을 안간 쳐녀라야  맡을 수 있지. 총교
경전에 규정되어 있기를  성처녀(聖處女)이어야 교주가 될 수 있
다는 거야. 명교의 신성 정결을 지키기 위해서 누구든 교주가 된
후엔 교중의 고위직에 있는 인사의 딸 세 명을 지명하여 소위 성
녀라고 부르는데, 이 세 성녀는 맹세를 하고 나서 방방곡곡을 돌
아다니며 명교를 위해 공덕을 쌓는 것이야. 교주가 죽고 나면 교
중의 장로들이 회의를 열어  그들의 공덕을 가려 한 성녀가 교주
로 임명되는 거야. 그런데 만약  이 세 성녀 중에 누구든 정조를
잃은 자는,  분신형(焚身刑)으로 사형에  처하는 것이야.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명교에서 꼭 체포해 죽이고 말았지."

 "아! 그렇다면 그 한부인이 바로  그 세 성녀 중에 한 명이라는
겁니까?"

 "그렇다네. 범요가  그녀가 비밀 통로로  나오는 것을 발견하기
전에, 난 이미 먼저  발견했었지. 한부인이 나를 믿고 모든 사실
을 고백한 거야. 그녀가 연못에서 한천엽과 살을 맞대고 싸운 것
은 어쩔 수 없었지만, 끝내  그 일로 큰 화를 초래하게 된 거야.
그녀는 총교에서  언젠가는 사신을 보내와 조사를  할 것이 분명
해. 그녀는 자기가 큰 공을  세워 그 죄 값을 치루려고 한 거야.
그녀가 비밀 통로에  들어간 것은 건곤이위라는 무공심법을 찾기
위해서였지. 그 심법은 총교에서 이미 잃어 버린 지 오래지만 중
토 명교에는 아직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지. 총교에서 그녀를 광
명정에 보내온 것도 바로 그게 목적이었지. 어디 갔어도 그 심법
을 찾지 못했어. 난 그녀에게 정중하게 경고했지. 그것은 본교의
대규를 범하는 것이니 절대로 용서받지 못한다고."

 조민이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아, 이제  알았어요. 한부인이 파문출교한 것도  바로 그 비밀
통로에 계속 드나들기 위해서였군요. 명교인이 아니니 그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잖아요?"

 "조낭자는 아주 총명하군.  그렇지만 광명정은 본교의 근본적인
요지인데, 어찌 외인이 함부로  드나들 수 있겠나? 그때 나도 그
녀의 뜻을 알았지.  한부인이 광명정을 떠나자 난  직접 내가 그
비밀 통로를 지키고 있었다. 그후 한부인은 세 번이나 왔었는데,
나를 보자 다시 가 버리곤 했지."

 사손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물었다.

 "그 파사국 삼사의 복장이  중토 명교의 복장과 다른 점이 없었
느냐?"

 "그들은 모두 백포를 입었고 옷자락엔 빨간 색의 불길이 그려져
있었고, 옷 끝에 검은  테두리가 둘러져 있는데, 그게 중토 명교
와 틀린 점이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야. 총교 교주가 죽어 검은 테두리로 조의를 표하
는 것이야.  그들은 신교주를 세우기  위해 천리만리를 불사하고
한부인을 찾아온 것이야."

 장무기가 다시 물었다.

 "한부인이 파사국에서 왔다면 필시 그 파사국 삼사의 괴이한 무
공을 알 텐데, 어찌 상대의  일초 반식에 손도 못 써보고 그들에
게 제압당했습니까?"

 그말에 조민은 웃으며 말했다.

 "아주 둔하군요. 한부인은 자기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그
런 거예요. 아마  그 때 영감님이 파사국  삼사의 말에 복종하고
한부인을 죽이려고  했다면, 한부인은 분명  달리 피신할 방법을
썼을 거예요."

 "한부인이 자기의  신분을 감추려고 그런  것은 맞아. 그렇지만
파사국 삼사에게 봉혈을 당하고 바로 도망치기는 어려웠을 거야.
그녀는 아마 내 칼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분신형의 고통을 당하
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야."

 조민이 다시 말을 꺼냈다.

 "중토 명교만 사교인 줄 알았더니, 파사국 총교는 더 사교군요.
왜 꼭 처녀가 교주를 해야 되며, 그리고 정조를 잃으면 분신형을
하다니....."

 그 말에 사손이 그녀를 나무랐다.

 "어린 소녀가 입을 함부로  놀리는구나. 교파마다 다 전해 내려
오는 규칙이나 의전이 있는 법이야. 뭣이 사교라는 거냐?"

 갑자기 주아가 이를 부딪치며 몸을 달달 떨었다. 장무기는 그녀
의 이마를 만져 보니 불덩어리였다. 그녀의 병세가 무척 심한 것
같았다.

 "의부님, 저도 영사도로 가고 싶습니다. 주 낭자의 상세가 위독
해 약을 구해야겠습니다.  설사 한부인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주
낭자야 살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렇게 하자, 이 주  낭자가 너를 그렇게 사모하는데, 안 살려
서야 되겠느냐? 주 낭자, 조 낭자, 두 사람의 생각은 어떻소?"

 조민이 대답을 했다.

 "내 상처는 대수롭지 않지만  주 낭자의 상처가 중하니,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주지약도 사손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영감님이 가신다면 저희도 따라가겠어요."

 그들은 안개가  걷히자 그제서야 방향을  잡아 서북쪽으로 노를
저었다.

 장무기와 사손은 파사국  삼사의 연합 무공에 대해 연구했으나,
시종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갑자기 눈앞에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은 보기엔
바로 앞인 것 같지만, 바다라 수십 리 길은 떨어져 있었다. 그들
은 다시  반나절이나 노를 저어 불빛과  접근하자 장무기가 외쳤
다.

 "저기가 바로 영사도입니다."

 사손은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왜 영사도에 불길이 하늘을  찌르고 있지? 설마 그들이 한부인
을 화형하는 것은 아니겠지?"

 쿵! 그 말에 소조가 그만 기절하고 쓰러져 버렸다. 장무기는 재
빨리 뛰어가 그녀를 부축하며,  그의 혈도를 눌러 깨우고 그녀에
게 물었다.

 "소조, 왜 그러는 거야?"

 소조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부인이 화형을  당한다는 말에 그만 겁이  나서 기절한 거예
요."

 "그건 의부님의 추측이야."

 "장공자, 제발 한부인을 좀 구해 주세요."

 "모두 힘껏 노력해야지."

 그들은 모두 합심하여 노를 더 빨리 저었다.

 조민이 갑자기 장무기에게 물었다.

 "장공자, 오랫 동안 생각했던  두 가지 일이 있는데, 아무리 생
각해도 알 수 없어요."

 "그래, 무슨 일이요?"

 "전에 녹류산장  밖에서 내가 당신의 외조부와  양좌사 등 여러
사람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을 때, 이 소조 낭자가 앞에 나서 지휘
를 하며 저항했어요. 그 때 정말 용장 밑에 약물이 없다고, 명교
교주 밑에 있는  한 명의 시녀가 그렇게  훌륭한 재주가 있을 줄
은....."

 사손이 갑자기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니, 명교의 교주라니?"

 "영감님,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당신의 이 의자가 바로 당당
한 명교의 교주이십니다. 당신이  오히려 그의 부하가 되는 겁니
다."

 사손은 반신반의하며 도저히 믿으려고 하지를 않았다.

 장무기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사손에게 낱낱이 얘기해 주었
다.

 사손은 기분이 매우 좋아 일어나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금모사왕, 교주께 인사드립니다."

 장무기는 재빨리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의부님, 그러지 마세요.  양교주의 유언에 의부님께서 교주 직
위를 잠시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어떻게 그런 중책을 감당
해 낼까  걱정했었습니다만, 다행히 하늘이  도와 의부께서 아무
탈 없이 돌아오셨으니,  정말 본교의 홍복입니다. 중토에 돌아가
면 의부께서 교주의 직책을 맡으세요."

 "아무 탈 없다니? 난 이미  두 눈이 멀었는데 명교의 교주를 어
찌 장님한테 맡기겠느냐? 조 낭자, 그래 무슨 두 가지 이해 못할
일이 있소?"

 "소조 낭자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런 기문팔괘(氣門八卦),음양
오행(陰陽五行)을 누가 가르쳐 주었으며, 어떻게 그런 나이에 그
런 이상한 재주를 갖고 있습니까?"

 "그것은 저의 가전무공입니다."

 "영존은 누구세요? 딸이  이렇게 대단하니, 부모님은 필시 천하
의 일류 고수가 틀림없을 거예요."

 "저의 아버님은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니 묻지
마세요. 설마 내 손가락을 자르면서 강제로 캐묻지는 않겠지요?"

 소조는 어린 나이지만  조금도 조민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
고 손가락 자르는 얘기마저 꺼내는 것은 주지약이 조민을 미워하
게끔 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조민은 웃으며 다시 장무기에게 물었다.

 "장공자, 우리가 그날 밤  두 번째로 주점에서 만날 때, 고두타
범요가 나한테  작별을 고하면서 소조 낭자를  보고 무슨 말인가
두 마디를 했었지요?"

 장무기는 너무 오래 전 일이라 한참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소조의 모습이 누구를 닮은 것 같다고 한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누구를 닮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어느덧 그들의 배는 섬에  점점 접근했다. 섬 서쪽에 큰 배들이
나란히 정박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장무기가 인상을 찌푸리
며 말했다.

 "파사국 총교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파견했군. 우리는 섬 뒤
쪽으로 돌아가  조용한 곳에다 배를  댑시다. 저들에게 발각되지
않게."

 그들의 배가 삼사 장 거리밖에  못 가 갑자기 큰 배에서 호각소
리가 울리며 펑! 펑! 하고 두 발의 포를 쏘자 그들의 작은 배 양
쪽에 떨어졌다. 그러자 두 개의 물기둥이 치솟으며 작은 배는 휘
청하며 전복될 뻔했다.

 큰 배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배를 이쪽으로 몰아와라. 그렇지 않으면 즉시 배를 가라앉히겠
다!"

 그들은 별수없이 큰 배  쪽으로 노를 저었다. 큰 배에 접근하자
큰 배에서 줄사다리를 내렸다.

 "기회를 보아 배를 강탈합시다."

 사손이 제일 먼저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 뒤엔 주지약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아를 안고 올라갔고,  그 뒤엔 소조, 맨
뒤엔 장무기가 조민을 안고 올라갔다. 배 위에 오르니 상대는 모
두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이고 모두 몸집이 큰 파사국 사람들이었
다. 그러나 전에 보았던 파사국 삼사는 안에 없었다.

 중국 말을 구사할 줄 아는 한 파사국 사람이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누군데 여기에 왔는가?"

 조민이 대답을 했다.

 "우린 바다에서 표류하여 이리로 오게 된 거예요."

 그 파사인은 반신반의하여 갑판  중앙 의자에 앉은 수령에게 뭐
라고 말을 주고 받더니, 다시 수하들에게 뭐라고 명령을 내렸다.
순간 소조가 갑자기  몸을 날려 수령을 향해  장풍을 뻗었다. 그
수령은 잽싸게 몸을 피하며 의자를 집어들고 소조를 향해 내리치
는 것이었다.

 장무기는 소조가 이렇게 빨리 공격을 취할 줄 모르고 있다가 일
이 벌어지자, 그는  재빨리 몸을 날려 수령의  혈도를 찔러 버렸
다. 배 안은 금방 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들의 무공도 모두 높
았으나 전의  파사국 삼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배를 강탈하고 점령해 버렸다.

 그러자 사방에서 고동소리가  들리더니, 다른 큰 배들이 그들을
향해 접근해왔다.

 장무기는 파사국 수령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든 이 배로 올라오면, 당장 이 사람을 죽여 버리겠다."

 그러자 그들은 뭐라고  떠들며 소란을 피웠다. 장무기는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저들이 감히 이 배로 올라
오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이 수령의 직위가 무척 높은 사람일 것
이라고 짐작했다.

 장무기는 다시 갑판으로 돌아와  막 잡고 있던 수령을 풀어주려
고 하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탱! 하는 소리와 함께 어떤 병기가
자기를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닌가.

 장무기는 재빨리 몸을 피하며 발로 걷어차자 앞에 다시 한 성화
령이 자기를 공격해 왔다.  그러자 곧바로 옆에서도 성화령이 자
기를 내리치는  것이 아닌가! 장무기는  유운사, 휘월사, 묘풍사
셋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모두 빨리 선창으로 피하십시오."

 그러면서 그는 수령의  목덜미를 잡고 한쪽의 성화령을 막았다.
그러자 그 성화령은 그만 그 수령의 뺨을 내리치고 말았다.

 그 수령을 때리게 된  묘풍사는 즉시 물러서며, 공손히 그 수령
에게 사과를 했다.  갑자기 고동소리가 울리며 한  척의 큰 배가
서서히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  배에는 열 두 개의 금색 깃발을
달고 있었다.

 배에는 열 두 개의  호랑이 가죽을 씌운 의자가 있었는데, 모두
사람이 앉아 있었고, 한 의자만 비어 있었다. 그 배는 가까이 접
근해 와 멈추었다. 비어 있는 의자는 여섯 번째에 놓여 있었다.

 조민이 장무기에게 말했다.

 "우리가 잡은 저 자의 옷이  저들과 똑같은 것으로 보아, 저 열
두 수령 중에 한 명인가 봐요. 아마 서열이 여섯 번째쯤 되는 모
양이군요."

 사손이 입을 열었다.

 "음! 총교의 십이 보수왕(寶樹王)이 온 모양이군. 대단하구나."

 조민이 그에게 물었다.

 "십이 보수왕이라뇨?"

 "파사국 총교 교주 밑엔  열 두 명의 대경사(大經師)가 있는데,
십이 보수왕이라고 부르지.  신분으로 따지면 우리의 사대법왕과
같은 직위야. 첫째는 대성(大聖), 둘째는 지혜(智慧), 셋째는 상
승(常勝), 넷째는  장화(掌火), 다섯째는  근수(勤修), 여섯째는
평등(平等), 일곱째는 신심(信心), 여덟째는 진악(鎭惡), 아홉째
는 정직(正直), 열 번째는 공덕(功德), 얼 한번째는 제심(齊心),
열 두번째는 구명(俱明)이라고 부르지. 그러나 이 십이 보수왕은
모두 교리와 경전에 통달하고  무공은 전혀 할 줄 모른다고 들었
는데, 이 사람이 여섯 번째라면 평등 보수왕이군."

 장무기는 한쪽에 앉아 평등왕을 자기 무릎에 눕혔다. 그리고 여
기서 살아 남으려면 이  자를 잘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자
를 쳐다보니, 성화령을 맞은  뺨은 크게 부어 올라 있었다. 그러
나 생명엔 지장이 없는 듯했다. 아마 묘풍사가 내리칠 때 잘못된
것을 직감하고 재빨리 힘을 거두어  들인 것 같았다. 또한 이 사
람도 상당한 내공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사방을 둘러보니,  주위에 큰 배들이 자기네들을 완전
포위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다 쳐들어  올라온다면, 그 천여
명을 모두 당해 낼 능력이 절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한 파사인이 중국말로 크게 외쳤다.

 "금모사왕은 듣거라! 총교 심이 보수왕이 모두 여기 계신데, 네
가 총교에  저지른 죄 십이  보수왕께서 너그러이 용서해주시니,
어서 우리의 교우를 풀어 주고 다른 데로 떠나거라."

 사손은 가볍게 웃었다.

 "나 사모(謝某)는  세 살 어린애도  아닌데, 너희들의 속임수에
넘어갈 것 같으냐? 우리가  포로를 석방하면 너희는 즉시 포격할
것이 아니냐?"

 "네가 포로를 석방  안 한다고 우리가 포를  쏘지 않을 것 같으
냐?"

 "나한테 세 가지 조건이 있다. 너희가 들어주면 이 포로를 풀어
주겠다."

 "무슨 조건이냐?"

 "첫째, 오늘 이후 총교와 우리 중토 명교는 서로 존경하며 절대
서로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고, 둘째, 대기사의 정조를 잃은 죄
를 다시는 묻지 말고 그녀를 이 배로 오게 해주어야 하고....."

 "그 조건은 절대로 승낙할 수 없다. 대기사는 총교의 대규를 어
겨 분신형을 받아야  하는데, 그 일이 중토  명교와 무슨 상관이
냐? 그래, 셋째는 무엇이냐?"

 "둘째 조건을 승낙 못하는데, 세 번째를 말해서 뭘하느냐?"

 "그래도 한 번 얘기해 보아라."

 "셋째는 아주 쉽지. 우리에게 작은  배 한 척을 보내 우리의 뒤
를 오십 리 정도 따라오게 한 후, 그 동안 너희가 우리를 따라오
지 않을 때 포로들을 모두 작은 배로 석방해 주겠다."

 "헛소리 말아라!"

 이 자는 바로 십이 보수왕 중의 말석인 구명 보수왕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소조가 앗!  하고 놀라며 외쳤다. 장무기가 그쪽
을 보니 유운사가 한  여인을 끌고 십이 보수왕의 좌석앞으로 가
고 있었다. 그 여인은 남루한  옷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이 바
로 금화파파였다. 두 번째 좌석에 앉은 지혜 보수왕이 뭐라고 그
녀에게 묻자, 금화파파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인지 난 하나도 모르오."

 지혜왕은 냉소를 지으며  일어나더니, 갑자기 금화파파의 흰 머
리를 낚아챘다. 그러자 그만 검은 색의 머리카락이 나타났다. 금
화파파가 얼굴을 다른쪽으로 돌리자, 지혜 보수왕은 다시 그녀의
얼굴에서 한 꺼풀의 껍질을  벗겨 냈다. 그것은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가면이었다. 금화파파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대기사는 자기의  진면목이 탄로나자 그녀는  모든것을 포기한
듯, 지팡이를 내팽개치며 가볍게 냉소를 짓고 있었다.

 지혜왕이 다시 그녀에게 뭐라고 묻자, 대기사는 파사국 말로 대
답했다.

 조민이 갑자기 물었다.

 "소조 낭자, 저 사람들이 지금 뭐라고 얘기하는 거죠?"

 소조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총명해요. 그런데 왜 미리 영감님께 두 번째 조건
을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저들은 원래 금화파파가 진짜
대기사인 줄은 모르고 있었어요.  영감님께서 앞을 못 봐 금화파
파의 가장이 얼마나  진짜 같은 줄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정말
누가 봐도 가장한 것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을 조 낭자 당
신은 알잖아요."

 "소조 낭자, 저는 정말 몰랐어요. 나는 파사국 사람들이 확실히
금화파파가 대기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줄로만 생각했었어요."

 그 말을 들은 사손은 미안한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는 내심 무슨 수를 쓰든 대기사를 구출해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소조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들이 지금 금화파파를 분신형에 처하겠다고 말한 거예요."

 장무기가 입을 열었다.

 "소조, 너무  상심하지 마라. 기회만 생기면  즉시 파파를 구해
낼 테니까."

 사실 장무기는 평소 파파라고 부르던 것이 습관이 됐지만, 자삼
용왕의 지금의 모습은  이미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조금도 조민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주지약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소조의 큰 언니뻘 되는 것
처럼 보였다.

 "천만에요. 십일 명의 보수왕, 그리고 풍운 삼사를 합치면 우린
그들의 적수가 못 돼요. 지금 저들은 어떻게 평등왕을 구출해 낼
것인가 그것을 연구하고 있어요."

 조민이 말했다.

 "흥! 평등왕이 살아 돌아간다  해도 얼굴에 이상한 글씨가 새겨
져 정말 꼴볼견이겠군요."

 장무기가 물었다.

 "아니, 글씨라니?"

 "아까 그 노란 수염이 성화령으로 그 자를 잘못 때렸을 때.....
앗!"

 조민은 갑자기 무엇이 떠올랐는지 소조에게 물었다.

 "소조, 파사국 문자를 아세요?"

 "네, 알아요."

 "빨리 좀 보세요. 뭐라고 새겨졌는지."

 소조는 몸을 일으켜 평등왕을 보니, 그의 얼굴은 심하게 부어올
라 글씨 자국이 깊이 나 있었다.

 소조는 전에 장무기와 광명정의 비밀 통로에 들어가 건곤이위심
법을 몇 번 읽은 적이  있었다. 장무기의 분부가 없어 연마를 하
지는 못했지만, 아직까지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
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저것은 건곤이위심법입니다."

 장무기는 영문을 몰라 물었다.

 "건곤이위심법이라니?"

 "아! 아니군요. 처음 볼 때 그런 줄 알았더니 지금 보니 아니군
요. 그런데 중국말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응좌측전(應左側前)
수우내후(須右乃後) 삼허칠실(三虛七實) 무중생유(無中生有), 그
리고 무슨 천방지원(天方地圓) 밑엔 자세히 보이지 않아요."

 장무기는 그 말에 갑자기  번개가 번쩍 하며, 하늘의 검은 먹구
름이 일시에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오리무중에서 하나의 
출구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응좌측전 수우내후!"

 그는 그것을  건곤이위심법에 배합해서  연구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리송했다.

 "장공자, 조심하세요. 저들이 명령을 내렸어요. 풍운 삼사는 당
신을 공격하고 근수왕과 진악왕, 그리고 공덕왕은 평등왕을 구출
해 내려고 그래요."

 사손은 평등왕을 자기 앞에 잡아 놓고, 도룡도를 장무기에게 건
네 주었다.

 "무조건 내휘둘러라."

 조민도 의천검을 주지약에게 건네주었다. 자금은 모두 합심해서 
적을 물리칠 수밖에 없었다.

 근수, 진악, 공덕은 몸을 이쪽으로 날려 사손을 향해 공격을 했
다.

 그들은 평등왕이 다치게 될까  두려워 병기를 쓰지 않고 주먹이
나 장력만 사용했다. 주지약은 의천검을 들고 사손을 도왔다.

 한 쪽에선 장무기와 풍운  삼사가 한데 엉켜 싸우고 있었다. 그
들은 서로 상대방이 두려워 조금도 감히 쉽게 덤벼들지 못했다.

 휘월사가 성화령으로 장무기를 내려쳤다. 그런데 무학의 이치로 
보아 그것은 분명히 장무기의 왼쪽 어깨에 와 맞아야 하는데, 웬
일인지 중도에 갑자기 괴이하게 원을 그리고 그만 장무기의 뒷덜
미에 와 맞는 것이었다. 장무기는 극렬한 통증을 느꼈으나, 그는 
갑자기 앞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이 모든 것을 깨달았다.

 풍운 삼사가 쓰고 있는  무공은 건곤이위심법의 제 일층 무공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화령에 다른 변화로 사용하는 용법이 
적혀 있었다. 그는 순간 소조가  읊은 네 구절의 구결을 완전 터
득했다. 다만 천방지원인가 뭔가 하는 것은 깨달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내심 이 성화령을  뺏어와 거기에 새겨진 글씨를 봐야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삼허칠실의 
초식으로 순식간에 휘월사의 두 성화령을 모두 빼앗아왔다. 그리
고 다시 무중생유의 초식으로  유운사의 두 성화령 마저 뺏고 나
서, 두 사람의 목덜미를 잡고 내팽겨쳐 버렸다.

 파사국 교도들은 그것을 보자  그만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피웠
다. 그 사이 묘풍사는  잽싸게 자기네 배로 달아나려고 했다. 장
무기는 어느새 그들의 무공  요점을 모두 파악했다. 묘풍사의 무
공은 그의 앞에서는 이미 아무런 신비감을 주지 못했다. 그는 어
느새 재빨리 그의 발목을  잡아 낚아채며 그의 성화령을 모두 빼
어 버리고 혈도를 찌르고 나서 한쪽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갑자기 장무기가 완전히  강세를 보이자, 모두 놀라면서도 기뻐 
그 연유를 물었다.

 "운이 좋아  평등왕이 성화령을 맞고 글씨  자국이 생겨 우리를 
살려 준 겁니다. 자, 소조야,  어서 빨리 이 성화령에 씌어진 글
씨를 읽어 보아라."

 소조가 성화령을  받아 읽어 내렸다.  장무기가 들으니, 그것은 
모두 건곤이위심법의 입문 공부였다.

 사실 이 여섯 개의 성화령은 명교와 같이 중토에 들어와 성화령
은 중토 명교의 영부(令符)가  됐는데,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 
중토 명교에는 파사국  문자를 알고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또한 수십 년 전 성화령을 개방에서 강탈해 가 어떤 경로를 거쳐 
파사국 거상에게 팔려 다시 파사국으로 흘러들어 가게 된 것이었
다. 파사국 총교에서 성화령에  새긴 문자를 수십 년간 연구하여 
직분이 좀 높은 사람들의 무공이 많은 진보를 얻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 새긴 무공이  너무 정심하여 수양이 제일 깊은 대성 
보수왕 마저도 그것의 삼, 사성밖에 터득하지 못했다.

 건곤이위심법은 사실  파사국 명교의  호교신공이나, 그 오묘한 
무공을 보통 사람은 터득할  능력이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중토 
명교에서 완전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파사국 명교에서는 일 
성 정도 되는 구건곤이위 무공과 이, 삼성의 새로운 성화령의 무
공으로, 이런 괴이한 무공으로 변화시켜 온 것이다.

 장무기는 뱃머리에  정좌하고 앉아  소조가 번역해 주는 문자를 
자세히 들으며 연구를 했다. 장무기는 소조가 다 읽어 주자 이에 
칠, 팔성을 터득했다. 그 정도로도 십이 보수왕이나 풍운 삼사의 
무공은 그의 앞에서는 보잘것 없게 되었다.

 그 사이 시간은 흘러  대기사의 손발에는 수갑과 쇠사슬이 묶여
졌다. 십일 보수왕은 무엇인가 토의를 하더니,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버리고 가벼운 갑옷으로  갈아 입더니, 각기 이상한 무기를 
손에 쥐었다. 앞뒤로 포위한  배에는 파사인들이 모두 줄을 서서 
활을 장무기가 있는 쪽으로  겨냥하고, 열 명의 파사인들은 따로 
도끼를 들고 수령의 명령만 떨어지면 물 속으로 뛰어들어 이쪽의 
배 밑에 구멍을 뚫어 가라앉게 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드디어 중앙에 앉아  있던 대성 보수왕이 대갈일성하자, 사면에
서 북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고 호각소리가 요란했다. 십일 명의 
보수왕들은 각기 무기를 들고 이쪽 배로 몸을 날려 건너왔다. 그
러나 바로 즉시 접근하지 못하고 기회를 노리는 것 같았다.

 지혜왕은 중국말로 말을 건네왔다.

 "어서 빨리 우리의 교우를  풀어 주어라. 당신네들이 잡고 있는 
포로는 우리한테는 조금도 중요치 않은 인물들이다. 너희들이 용
기가 있으면 그들을 즉시 죽여  봐라. 우린 눈 하나 깜짝하지 않
을 것이다."

 조민이 그의 말을 받았다.

 "큰소리치지 마세요. 우리가 거기에 속아 넘어갈 것 같아요? 우
리는 이 두 사람이 평등 보수왕과 묘풍사라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소. 또한 파사국 명교에서 지위가 상당히 높다는 것도 알고 있
어요. 정 그렇다면 좋습니다. 당신네 말대로 죽여드리지. 자, 어
서 그 자의 머리를 내리치세요."

 "알았소!"

 사손이 대답하고  나서 도룡도를 쳐들고  평등왕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그러나 머리까지 닿는 순간 바로 그 자의 머리 위에서 
멈추었다. 그러나 평등왕의 머리카락이 잘려 바다 바람에 사방으
로 흩어져 날렸다. 사손은  다시 그 자의 양어깨를 왼쪽, 오른쪽
으로 번갈아가며 검을 휘둘렀다. 휘두를 때마다 꼭 그의 두 팔을 
잘라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정확히 그 자의 옷 소매자락
만 찢어 냈다. 그러나 그의 휘두름은 매우 맹렬하여 장님이 아니
라 두 눈이 멀쩡한 사람일지라도 그런 솜씨를 보일 수 없었다.

 평등왕은 겁에 질려 혼이  빠져 기절할 정도였다.  십일명의 보
수왕, 그리고 풍운 삼사는,  모두 넋이 빠져 멍청히 쳐다보며 혀
를 내둘렀다.

 조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중토  명교의 무공 실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
까? 이분은 금모사왕이신데, 중토 명교에서 지위가 삼천 번째 되
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에요. 만약  당신네들이 인원수가 많다고 
우리를 공격하면, 앞으로 중토 명교와 파사국은 원수지간이 되어 
중토 명교에서 파사국 총교를  깨끗이 소탕해 버릴 것이오. 그러
니 일찌감치 협상을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거예요."

 지혜왕은 조민의 말을 믿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지금 당장 어
쩔 도리가 없었다.

 대성 보수왕이 갑자기 파사국 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소조가 그것을 보고 외쳤다.

 "적들이 배에 구멍을 내려고 해요."

 만약 저들이  배에 구멍을 내어 가라앉게  한다면, 그것은 분명 
큰일이었다. 모두들 수영을 할 줄 모르므로 그들에게 잡힐 수 밖
에 없었다. 장무기의 몸이  움직이자 어느새 대성왕 앞에 접근했
다. 곧이어 양쪽에 서 있던 공덕왕과 장화왕이 각기 쇠망치와 채
찍을 들고 동시에 장무기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장무기는 이미 그들의 무공에  대해선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면서 다리를 뻗어 
연속으로 걷어차며 제심왕과 진악왕  손에 쥔 큰 칼을 걷어차 떨
어뜨리고, 다시 두 발로  근수왕과 구명왕을 바다 속으로 걷어차 
떨어뜨렸다.

 그러자 보수왕 중에  한 명인 키가 크고 빼빼  마른 한 명이 두 
손에 단검을 들고 장무기의 배를 향해 찔렀다. 그의 초식은 매우 
영리하고 날카로왔다. 이  자는 바로 보수왕 중의 상승왕이었다. 
파사국 총교 십이왕 중에서 무공이 제일가는자였다.

 장무기는 공덕왕과 장화왕의 혈도를  봉하고 나서 두 사람을 선
창 안으로 던져 버리고, 다시 상승왕과 맞싸웠다. 상승왕의 무공
은 다른 왕들과 완전히 달랐다.

 장무기는 내심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정말 무공이 훌륭한 파사국 사람이군.'

 장무기는 성화령에 적힌  무공을 터득했지만, 그것을 연습할 여
유도 없이 갑자기 강적을  만나자 그는 하나 하나 생각하며 그와 
상대했다. 

 처음 십여  초식까지는 장무기는 순전히  심후한 내력으로 그와 
막상막하를 보였으나, 이십여 초식이 지나자 점점 성화령의 무공
과 건곤이위심법이 배합되어 조금씩 우세를 보였다.

 상승이라고 호칭이 붙은  그 자도 평생 이런  적수와 만난 적이 
없었다. 삼십여  초가 지나자 장무기는 그  자의 다리에 중도(中
都), 축빈(築賓) 양혈을 봉하였다.  그것은 바로 중토 무공의 나
혈지법(拿穴之法)이었다. 상승왕은 그만  두 디리에 힘이 풀리면
서 마비가 되어 탄식을 터뜨리며 장무기에게 순순히 잡히고 말았
다.

 장무기는 그 자의 재능이 아까워 그 자를 살려 주고 싶었다.

 "당신의 무공은 매우 훌륭하오.  당신을 헤치지 않을 것이니 어
서 돌아가시오."

 상승왕은 진정  감격하면서도 한편  창피스럽기도 하여, 재빨리 
자기 배로 몸을 날려 돌아갔다.

 조민이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어서  빨리 대기사를 우리 쪽으로  넘기고, 금모사왕의 세 
조건을 따르시오!"

 남은 보수왕들이 모여 뭐라고 상의를 했다.

 잠시 후 지혜왕이 입을 열었다.

 "당신네들의 조건을 들어줄 수도  있소. 그러나 이 젊은이의 무
공은 분명히 우리 파사파인데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소?"

 "당신네들은 본시 모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오. 이 청년은 중
토 명교의 광명좌사 밑의 여덟  제자 중의 막내요. 잠시 후에 일
곱 명의 사형들이 당도하면 당신네들은 살아 남기 힘들 거요."

 지혜왕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좋소. 대기사를 주겠소."

 두 명의 파사 교도가 대기사를 장무기의 뱃머리로 데리고 갔다. 
주지약이 검을 휘둘러 대기사의 쇠사슬을 잘라 버리자, 그 두 명
은 검의 예리함에 놀라 겁에 질려 재빨리 자기네 배로 돌아갔다. 
그런 후 다시 작은배 한 척을 보냈다.

 장무기 일행이 배를 몰고 얼마쯤 가자 날이 어두어졌다. 파사국 
배가 뒤따라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장무기는 사손에게 말했
다.

 "의부님, 이제 저들을 돌려보내 드리지요."

 "좋아, 그렇게 하자."

 그러자 묘풍사가 말했다.

 "이 여섯 개의 성화령은 제가 장관하고 있는 것인데, 그걸 잃으
면 무거운 죄를 받으니 그것도 함께 돌려 주시지요."

 "이 성화령은 중토 명교 교주가 지니고 있는 영부요. 오늘 다시 
원주인한테 돌아왔는데, 어떻게 다시 돌려 주겠소?"

 공덕왕이 배에 달린 줄을  잘라 버리자, 두 배는 떨어져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순간 갑자기 대기사가 큰 소리로 외치며 몸을 바다 속으로 날렸
다. 장무기는 깜짝 놀라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곧이어 바다 속
에서 빨간 피가 스며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대기사
가 입에  단검을 물고 한손에 파사인의  머리카락을 쥐고 올라왔
다.

 그제서야 모두는  파사인들이 간계를 부린 것을  알았다. 그 때 
갑자기 꽝! 하는 굉음과 함께  배 꼬리에 폭약이 터지며 큰 구멍
이 생겼다. 그러자  배 속으로 물이 왈칵  쏟아져 들어오고 타도 
온데간데 없이 떨어져 나갔다.

 조민은 마음 속으로, 잠시 지나면 페르샤의 큰배가 쫓아와 죽음
을 피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대기사가  소조에게 뭐라고 파사국말로 중얼거렸
다. 소조도 파사국  말로 뭐라고 대답을 하며  두 사람의 표정이 
수시로 변했다.

 한참을 서로 얘기를 주고 받고 나서, 대기사는 소조를 끌어안고 
서로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영문
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민이 장무기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보세요. 두 사람이 너무나 닮았어요."

 장무기가 쳐다보니 두 사람은 정말 흡사하게 생겼던 것이다. 그
렇다면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인가?

 대기사가 장무기에게 말했다.

 "장교주, 걱정 마세요. 그들이 쫓아오면 나와 소조가 해결 하겠
습니다. 나 자삼용왕은 여자의  몸이지만 내가 저지른 일은 내가 
감당할 겁니다.  장교주의 은혜는 정말 잊지  못할 겁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창에 물이 들어와 장무기는 주아를 안고, 주지약은 조민을 안
고 모두 돛대 위에 매달렸다.

 소조가 갑자기  동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모두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멀리 십여  척의 배가 접근해 오고 있었다. 점점 
접근한 그들은 배를 멈추고 포구를 그들의 돛대를 향해 조준하고 
나서, 지혜왕이 크게 웃으며 으시대며 외쳤다.

 "자, 이제 항복하겠느냐?"

 장무기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중토의 의사들은 죽는 한이 있어도 남한데 항복하지는 않
소. 당신네들이 정말  대장부라면 정정당당하게 무공으로 겨룹시
다."

 "하! 하! 대장부란 머리로 싸우지 힘으로 싸우지는 않아."

 대기사가 갑자기 파사국 말로 크게 외쳤다. 그러자 지혜왕은 깜
짝 놀라며 역시 뭐라고 대답했다. 몇 차례 일문일답을 하고 나자 
저쪽에서 여덟 명이 작은 배로 갈아 타고 이쪽을 향해 접근해 왔
다.

 "장교주, 나와 소조가 먼저 저  작은 배로 갈 것이니 잠시만 기
다리세요."

 사손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한부인, 당신이 만약 우리를  팔아 먹는다면 나 사손은 죽어서
도 당신을 용서치 못할 것이요!"

 대기사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 의자만  귀한 줄 아시는 모양인데,  나도 내 딸이 
누구보다도 귀중하오."

 소조는 과연 그녀의 딸이었다.

 대기사는 소조를 데리고 작은 배를 타고 그들의 큰 배로 올라가 
여러 보수왕들과 뭐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
네들의 배는 점점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사손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우리와 다른 민족이라  우리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무기야, 
넌 소조를 잘못 본 거야. 나 역시 한부인을 잘못 봤구나."

 주지약이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입을 열
었다.
 
 "소조는 절대로 장공자를 배반하지 않을 거예요."

 조민이 말했다.

 "저기 자삼용왕이  연실 소조를 협박하는  것이 보이지 않아요? 
끝내 고개를 끄덕거리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잖아요."

 그러자 갑자기 십여  척의 배에 있는 파사인들이  큰 배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큰 배의 십이 보수왕도 
모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세히는 볼 수 없었으
나 중간 의자에 앉은 사람은 소조인 것 같았다. 그들의 외침으로 
무슨 경사가 난 듯이 보였다.

 잠시 후, 다시  작은 배 한 척이  장무기가 있는 쪽으로 접근해 
왔다. 배에 탄 사람은 바로 소조였다.

 그녀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장공자, 그리고 여러분, 모두 저 큰 배로 가세요! 파사국 명교
에서 절대로 해치지 않을 것이에요."

 조민이 물었다.

 "어째서죠?"

 "저 큰 배로 가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사손이 갑자기 외쳤다.

 "소조, 네가 총교의 교주가 됐느냐?"

 소조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그만 그녀의 눈
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간 장무기도 사정을 파악했다.

 "소조야,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였구나."

 소조는 고개를 돌리고 장무기를 똑바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사손이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대기사에게 이런 딸이 있었구나. 무기야, 건너가자."

 그들 일행이 모두 큰 배로 올라가자 소조는 사람을 시켜 그들에
게 젖은 옷을 갈아입게 하고 먹을 것을 차리게 했다.

 장무기가 막 젖은 몸을 닦아 내자, 문이 열리며 소조가 새 옷을 
들고 들어왔다.

 "장공자, 제가 새 옷으로 갈아입혀 드리겠습니다."

 "소조야, 너는 이미 총교의  교주가 아니냐? 말하자면, 난 너의 
부하나 다름없는데 어찌해 시중을 들겠느냐?"

 "공자,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소조야, 처음엔 네가  나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한
테 이렇게 고맙게 대해 줄 줄은 정말 몰랐구나."

 소조는 머리를 장무기의 넓은  가슴에 기대며 낮은 소리로 속삭
였다.

 "공자, 전에는 제가 정말  공자를 속인 적이 있습니다. 저의 어
머니는 총교의 세 명의 성처녀 중의 한 명이었고, 후에 아버지를 
만나 중죄를 저지른 것을 알고, 성처녀가 지니고 있는 무지개 색
깔의 보석반지를 저에게  물려주시며 저를 광명정으로 보내 건곤
이위심법을 훔쳐 내게 한 겁니다. 그것이 제가 당신을 속여 왔던 
겁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엔 당신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지 않습
니다. 왜냐하면 저는 파사국  총교 교주보다 당신의 시녀가 되기
를 원했었으니까요. 그리고  추호도 건곤이위심법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너무 급박
해 할 수 없이 그것을 폭로한 것이에요."

 "이제 나도 모든 것을 다 알았다."

 갑자기 밖에서 대기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조야, 네가 네 감정을 억제 못하고 장공자의 목숨을 잃게 하
려고 하느냐?"

 소조는 갑자기 몸을 떨며 일어나 단호하게 말했다.

 "장공자, 지금부터 나를  잊어 버리고 기억에서 지워 버리세요. 
그리고 주아는 수년을 저의 어머니를 따르며 당신을 무척 사모했
고, 정말 당신의 좋은 베필감입니다."

 장무기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뛰쳐나가 다시 저들의 보수왕 몇 명을 인질로 잡고, 여기서 빠
져 나가자."

 소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쯤 사대협이나 은낭자 옆엔, 파사인들이 칼을 그들의 목에 
대고 있을 거예요.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보이면 그
들은 즉시 목숨을 잃을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대기사가 문 밖에 서 있
고, 두 명의 파사인이 장검을 들고 그녀의 뒤에 지켜 서 있었다. 
검 끝이 대기사의 등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소조는 당당하게 갑판으로  걸아 나갔다. 장무기도 그녀의 뒤를 
따라 갑판으로 올라갔다.

 과연 갑판에는 사손 등  여러 사람을 파사국 무사들이 위협하고 
있었다.

 "장공자, 여기 파사국의  약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주아의 상처
를 치료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사람을 시켜 당신네들을 중토까
지 모셔가게 할 테니, 이제 여기서 그만 헤어져야겠어요. 소조가 
비록 멀리 파사국에 있지만, 밤낮으로 장공자가 옥체 안강하시기
를 빌 테니, 만사 순조롭게 되기를 빕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울먹였다.

 일행은 모두 다른 배로 갈아탔다. 소조는 도룡도와 의천검을 모
두 장무기에게 돌려주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작별의 인
사를 했다.

 장무기는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어느새 소조가 탄
배에서 고동소리가 울리더니,  돛을 올리고 서서히 움직였다. 두
배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 제 5 권 7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5 권 끝





[김용] 의천도룡기 6권 1장 #1/6               02/24 21:12   406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1 장 새로운 바람(風)과 구름(雲) #1/6

 주아는 파사 사람의 약을 발랐는데도 전혀 차도가 없었다. 여전
히 열이 내리지 않고 헛소리를 했다. 며칠 동안 거친 바닷바람에
시달린 그녀는  오한까지 겹쳤다.  장무기는 자연히 초조해졌다.
사흘째 되는 날,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듯한 작은 섬이 보이자
장무기는 즉시 그곳으로 배를 몰도록 분부했다.

 육지에 오르자 일행은 다소  마음이 놓였다. 섬의 둘레는 몇 리
에 불과했다. 장무기는  주지약에게 주아와 조민을 보살펴달라고
부탁한 후 약초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섬에 자생하고 있는  화초는 중원과 판이하게 틀려 이름
조차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장무기는 그 중에서 약초가 될 만
한 것을 캐느라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에서야 몇 가지 약초를 구해 돌로 찧어 주아에게 복용시켰다.

 여섯 사람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요기를 채웠다. 교교한 달빛이
뿌려지는 가운데 바람결에  은은한 꽃향기가 실려오니, 갑갑하기
만 한 선창과는 달리 별천지에 온 기분이었다. 주아도 한결 정신
이 맑아졌다.

 "아우 오빠, 오늘 밤은 배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지내요."

 그것은 모든 사람의  바램이었다. 섬에는 사나운 짐승도 없으므
로 각자 마음놓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장무기는  잠에서 깨어나 첫걸음을 옮기자마자 비
틀거리며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다리가 솜처럼 풀려 후들후들
떨렸다. 여지껏 없었던 증상이었다. 그는 내심 놀라며 눈을 비벼
시야를 넓혀보니,  파사선이 있어야 할 곳에  없었다. 이렇게 되
자, 그는 더욱 놀라며  해변으로 달려갔다. 역시 배는 보이지 않
았다.

 장무기는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는 소리 높여 외
쳤다.

 "의부님! 별고 없습니까?"

 사손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장무기는 황급히 사손이 있던 곳
으로 뛰어가 보니 의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
자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조민, 주지약, 주아 세 사람은 어젯밤 멀리 떨어진 바윗돌 위에
다 잠자리를 정했다. 장무기가  그곳에 달려가 보니 주지약과 주
아만 서로 얼굴을 마주한 채 잠들어 있고, 조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가 더욱 놀란  것은 주아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예리한 칼날로  그은 십여 줄기의
상흔이 역력히 나 있었다.  장무기가 황급히 맥을 짚어보니 다행
하게도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었다.

 다시 주지약을 살피니, 그녀는  귀에 상처가 나 있고 고운 머리
카락이 절반 가량이나 잘려져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주지약
은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해당화처럼 아름다왔다. 장무기는 내심 아뿔
싸를 토하며 황급히 그녀를 깨웠다.

 "주 낭자! 주 낭자! 어서 일어나시오!"

 그러나 주지약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어깨
를 흔들었다. 주지약은 비로소  길게 하품을 하며 깨어나는 듯했
으나, 다시 고개가 꺾이며 새근새근 잠을 잤다.

 장무기는 그녀들이 미약에  중독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어
젯밤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전혀 느끼
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지금 온몸이 나른하여 전혀 힘을 쓸 수 없
으니 역시 중독된 게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장무기는 주지약을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다시 사손에게 달려
가 소리쳤다.

 "의부님! 의부님!"

 사손은 그제서야 깨어나며 어리둥절해 했다.

 "아침 일찍부터 웬 수선이냐?"

 "큰일났습니다. 우린 함정에 빠졌습니다."

 장무기는 파사선이 떠나  버리고, 주아와 주지약이 부상을 입은
일을 대충 얘기해 주었다. 사손은 대뜸 조민에 대해 물었다.

 "조 낭자는 어떻게 되었느냐?"

 장무기는 울적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키며 운공을 시도해 보았지만, 사지가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듯  힘을 전혀 쓸 수 없었다. 순간 그의 입
에서 절로 놀란 외침이 뱉어졌다.

 "의부님!우린 십향연근산의 독을 당한 겁니다!"

 육대문파의 고수들이  십향연근산에 의해  만안사에 갇힌 일을,
장무기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는 사손이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도저히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물었다.

 "그 도룡도와 의천검은 있느냐?"

 장무기가 비로소 살펴보니  보검과 보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데, 조민마저 자기를 배신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
한 일이었다.

 장무기는 치를 떨었으나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는 주아의 상세
가 염려되어  다시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주지약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공력이 자기나 의부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늦게 깨어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곧 옷자락
을 찢어 주아의  얼굴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닦아 주었다. 그녀
얼굴에 거미줄처럼 그려진 상흔은 모두 실처럼 가늘어, 의천검에
의한 것임이 분명했다.

 주아는 자삼용왕 금화파파에게 상처를  입은 후 피를 너무나 많
이 흘렸다.  그로 인해 체내의  천주독액(千蛛毒液)도 피에 섞여
많이 씻겨진 탓으로, 얼굴이  팅팅 붓는 부종기가 거의 가라앉았
다. 요 며칠 동안 그녀는 어릴 적의 예쁘장하던 용모를 되찾았는
데, 지금 수십 줄기의 검상이 그어지자 다시 추하고 징그러운 모
습으로 변했다.

 장무기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리고 끝없는 분노에 사
로잡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조민! 다시는 내 손에 걸려들지 말아라. 다시 너를 용서한다면
난 맹세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장무기는 길게 숨을  들이켜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지혈에 도움
이 되는 약초를 구해 와 입으로 질퍽하게 씹어 주아의 얼굴에 붙
여 주었다. 그리고 다시 주지약의 찢어진 귓부리부위와 머리카락
이 잘라져 두피가 보이는 부분에 발라 주었다.

 장무기는 그제서야 하품을 하며 눈을 떴다. 그녀는 장무기가 자
신의 머리를 만지고 있는 것을 문득 깨닫자, 얼굴이 붉어지며 얼
른 그의 손을 밀어냈다.

 "왜..... 왜 이러세요!"

 한 마디를 내뱉자마자 귀에 통증을 느껴 손으로 만저보더니, 그
만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앗! 어떻게 된 거죠?"

 그녀는 갑자기 무릎이 꺾이며 힘없이 장무기의 품에 쓰러졌다.

 장무기는 그녀를 부축하며 위로해 주었다.

 "주 낭자, 두려워할 것 없소."

 주지약은 주아의 가공스러운 얼굴을 보자 반사적으로 자신의 얼
굴을 만져 보았다.

 "이게..... 나도 저 모양이 되었나요?"

 "아니오! 낭자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을 뿐이오."

 "그..... 파사국의 악도들이 한 짓인가요? 난 어째 전혀 모르고
있었죠?"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며 울적하게 말했다.

 "아마..... 조 낭자가 한 짓인 것 같소. 어젯밤 우리가 먹은 음
식에다 독을 풀어넣은 모양이오."

 주지약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상처난 귀를 만지며 울음을 터뜨
렸다. 장무기는 그녀를 달랬다.

 "낭자,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것이오. 귓부리
의 상처는 머리카락으로 가리면 감쪽같을 것이오."

 주지약은 입을 삐쭉거리며 쏘아부쳤다.

 "머리카락이라뇨? 머리카락도 없잖아요!"

 장무기는 당황해졌으나 얼른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머리카락은 다시 자랄 것이오. 그러니 너무 심려 마시오."

 주지약이 갑자기 토라졌다.

 "내가 왜 머리카락으로 귀의 상처를 가려야 하죠? 일이 이 지경
이 됐는데도 당신은 그 계집을 감싸고 돌 생각인가요?"

 장무기는 엉뚱하게 무안을 당하자 얼른 변명을 했다.

 "난 절대 그녀를 감싸주는  게 아니오. 이렇게 악랄한 수법으로
주아의 얼굴을 난도질했으니,  잔 절대..... 그녀를 용서하지 않
을 것이오!"

 주아의 추하게 변한 얼굴을 보자, 그는 다시 걷잡을 수 없는 분
노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일단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을  시도해 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중독
현상이 깊었다.

 십향연근산에 중독되면 주민의 독특한 해약을 복용하지 않는 한
독을 제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구양신공을 운용해
독을 몰아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는 곧 내력을 운용하여 사지
백해에 산재돼  있는 독소를 천천히  단전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나서 조금씩 체외로 배출시켰다. 운공을 한 지 반 시진이 지나자
약간의 효과가  있었다. 장무기는 비로소  다소나마 마음이 놓였
다.

 그것은 구양신공이 체내에 운집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구
양신공을 사손, 주지약에게 나눠 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일단
자신의 독을 완전히 제거한 연후에 그들을 도와야만 했다.

 체내의 독을 밀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이레가 지
났는데 장무기는 체내의 독소를  삼 분의 일 가량 배출했을 뿐이
었다. 다행하게도 이  독소는 힘을 쓸 수 없게  할 뿐 몸에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처음 며칠 동안 주지약은  매일 짜증을 냈지만, 차츰 체념을 하
고 낮에는 사손과 함께  물고기도 잡고 잡일을 도맡아했다. 밤에
는 멀리 떨어진 동굴 속에서 혼자 잠을 잤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장무기를 피하려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내심 죄책감을 느꼈다. 조민이 꾸민 흉계지만 모두자
기로 인해 비롯된 것이라  생각됐다. 조민은 분명 몽고의 군주로
서 명교와는 같은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는 앙숙이 아닌가! 그런
데 자기는 그녀에 대해 전혀 경계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으니, 지금 와서 생각하니 부끄럽
기만 했다.

 사손과 주지약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장무기는 마
음이 괴로왔다. 우연히 주지약과  눈이 마주치게 되면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주지약의  눈빛은 무언중에 자기를  비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 당신은 조민의 미색에 현혹되더니, 결국 이런 큰 화를 당
하게 된 거예요! -----

 그럴수록 조민에  대해 분노와 배신감이  눈덩어리처럼 불어 났
다.

 한편, 주아의 상세는 차츰 더 심해졌다. 이 섬은 남해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  모든 화초가 호청우가 의경에  수록한 것들과 달랐
다. 그러니 장무기의 의술이 뛰어나다 한들 약초를 구할 수 없으
니 소용없는 헛것이었다.

 게다가 섬에 자생하는 나무는 한결같이 앉은뱅이처럼 왜소해 그
쓸모가 고작 불을 때는데  국한됐다. 그렇지 않으면 벌써 뗏목을
만들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중원행을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장무기가 차라리 의술을 몰랐다면, 이렇게 안타까와하지는 않았
을 것이다. 그는 칼로 도리는 듯 마음이 아팠다. 이날 밤도 그는
오열을 퇴치하는 약초를 씹어  주아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나
주아는 이제 그것마저 삼킬 수 없는 만큼 상세가 악화되었다. 장
무기는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쏟아졌다. 그의 눈물이 양볼을
타고 주아의 얼굴에 떨어지자  주아가 갑자기 눈을 떴다.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얼룩져 있었다.

 "아우 오빠, 슬퍼할 것  없어요. 난 저승으로 가서 그 야무지고
명이 짧았던 장무기를 찾겠어요.  그를 만나 아우 오빠의 예기를
들려 주겠어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위해준 고마운 사람이
라고요."

 장무기는 목이 메었다.  과연 그녀에게 자신이 바로 장무기라고
밝혀야 할지 망설여졌다. 주아는 그의 손을 쥐었다.

 "아우 오빠,  난 오빠의 청혼을 여지껏  승락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하진 않겠죠? 사실 오빠가 날 즐겁게 해주기 위
해서 그런 거짓말을 했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나처럼 못 생기
고 성질도 고약한 계집을 정말 아내로 맞아들이려 하겠어요?"

 장무기는 눈물을 삼키며 힘주어 말했다.

 "아니야! 내 진심이었다. 너같이 진실하고 정이 많은 낭자를 아
내로 맞아들이는 게 내 소원이었어. 상처가 완쾌되는대로 혼례를
올리고 싶은데 괜찮겠지?"

 주아는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내둘렀다.

 "아우 오빠, 내가 일부러 혼례를 피하는 게 아녜요. 난 이미 그
쌀쌀맞은 장무기에게 마음을 송두리채 주었기 때문에..... 오빠,
웬지 무서워요. 저승으로 가서  정말 그를 만날 수 있을까요? 나
를 보면 예전과 마찬가지로 사납게 대할까요?"

 장무기는 그녀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도 맑고, 양볼에 불그스름
하니 홍조가 띄어지는 것을 보자 가슴이 철렁했다.

 회광반조(廻光返照). 촛불도 꺼지기 직전에 마지막 광채를 발한
다는데, 주아가 바로 그런 상황이 아닌가?

 장무기는 머리가 띵해지며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랐다. 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다시 물어오자 비로소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영원히 너를 잘 대해 줄 거야. 너를 금지옥엽처럼 소중히
생각할 거야."

 "오빠가 나에게 해준 절반 만큼 잘 대해 줄까요?"

 "장무기는 하늘에 맹세코 성심성의껏  너를 보살펴 줄 거야. 내
가 여지껏 네게 해준 것과 조금도 다름없이....."

 주아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입가에 다시 미소가 피어 올랐
다.

 "그..... 그러면 안심이예요."

 장무기의 손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풀며  주아는 눈을 감았다.
끝내 호흡이 멎은 것이다.

 장무기는 그녀의 시신을  왈칵 끌어안았다. 억제했던 눈물이 주
르르 흘러내렸다. 주아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가 장무기라는 사
실을 모른 채 눈을 감은 것이다. 근래 며칠 동안 그녀는 줄곧 혼
수상태에 있었으므로 진실을 밝힐 기회가 없었다. 임종을 앞두고
맑은 정신이 돌아왔으나 역시  얘기할 새가 없었다. 하기야 지금
에 와서 그 사실을 밝힌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그로 인해 장
무기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조민이 그녀의 얼굴에 새로운 상처를 만들지 않았다면, 목숨까
지 잃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민이 우리를 이 외딴 섬에 버리
고 달아나지 않았다면 벌써 중원에 닿았을 것이고, 내가 무슨 수
를 써서라도 그녀를 살렸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장무기의 눈에서 원독의 불길이 뿜어졌
다.

 "조민! 이 사갈보다 악랄한  계집, 언젠가 내 손에 걸리면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

 그의 한맺힌 절규가 끝나는  순간, 등 뒤에서 냉랭한 음성이 들
려왔다.

 "막상 그녀의 꽃같은 얼굴을 보면 마음이 달라질걸요?"

 몸을 돌려보니 주지약이 경멸에 찬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장무기
는 가슴이 아프고 부끄러웠다. 그는 다시 한번 다짐을 했다.

 "난 사촌누이의 시신 앞에서  다시 맹세컨데, 그 요녀를 죽이지
않으면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으리다."

 주지약은 냉소를 날렸다.

 "과연 그  말을 실천에 옮길  배짱이 있는지  두고 보면 알겠군
요."

 그녀는 앞으로 성큼 걸어와  주아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을 했
다.

 사손은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와, 주아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역
시 상심해 했다.

 장무기는 언덕배기  양지바른 곳에 얕은  구덩이를 파서 그녀의
시신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혈흔이 낭자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관도 없으니 흙과 돌이 얼굴에 닿으면 얼마나 아파할까?'

 장무기는 나뭇 가지를 꺾어 구덩이에 즐비하게 가로걸치고 나서
그 위에다 돌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주아는 비록숨이 끊어졌지
만, 장무기는 자꾸만 그녀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돌무덤을 쌓고 나서 장무기는 나무줄기를 잘라 껍질을 벗긴 후,
주아의 비수로 몇 글자 새겼다.

 ----- 망처주아은리지묘(忘妻蛛兒殷離之墓) -----

 그는 스스로 주아(은리)의 남편으로 자처했다. 그것만이 주아를
위한 마지막 애정이라 생각했다. 묘비까지 세우고 나서 장무기는
엎드려 곡을 했다. 주지약이 옆에서 그를 위로했다.

 "당신은 은 낭자에게  인의(仁義)를 다했어요. 그녀는 저승에서
나마 편히 눈을  감을 거예요. 앞으로 조민을  죽여 그녀를 위해
복수해 주는 일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렇게 말하는 주지약의 눈동자에  웬지 모르게 불안한 빛이 깔
려 있었다.

 장무기는 체내의 독을 제거하는 일에 열중했다. 다시 십여 일이
지났다.

 섬의 기후가 무더워 야생하는 과일이 많았다. 그 덕분에 식생활
은 무난히 해결되었다. 주아가 죽은 후로부터 주지약은 장무기를
비교적 부드럽게 대해 주었다.

 장무기는 구양신공으로 사손 체내의  독을 제거해 준 후에 마땅
히 주지약을  도와야만 했다. 그러나 독을  제거하자면, 한 손은
상대방 허리 뒤쪽에 붙여야 하며,  한 손은 배꼽 아랫 부위에 붙
여야만 했다. 장무기로선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문제로 인해 장무기는  며칠을 두고 고심했지만 결정을 내리
지 못했다.

 이날 밤, 사손이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해 왔다.

 "무기야, 우리가 이곳에 얼마 동안 머물러야 될 것 같느냐?"

 장무기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하루 속히 이 근방을 지나는 배를 만나 중원으로 돌아
가길 바랄 뿐입니다."

 "그간 한 달 남짓이 지났지만, 배를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래, 물론  운이 좋으면 내일이라도 배를  만날 수 있겠지만,
수십 년간 배를 구경 못할지도 모른다."

                                                    계속 ---


#2862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6권 1장 #2/6               02/24 21:13   410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1 장 새로운 바람(風)과 구름(雲) #2/6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섬은 바다 한  가운데 떠 있어 해선(海船)의 항로에서 크게
벗어났으니, 우리가 살아 생전  과연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는
지 그저 막막하기만 합니다."

 사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게 되면 해약을  구하는 일도 자연히 포기해야 마땅하겠구
나. 십향연근산의 독소가  체내에 남아 있으면, 사지가 나른해지
는 증세 외에 다른 후유증이 없는지 모르겠구나?"

 장무기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일을 오래 끌지 않으면  별다른 해가 없겠지만, 모든 독소는
뼈를 삭이는 작용을  하므로 오랜시간이 경과되면 오장육부에 손
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사손은 여지껏 늘어놓았던 서론을 정리하듯 본론을 꺼냈다.

 "그러니, 하루속히 주 낭자의  독을 제거해 줘야 할 게 아니냐?
주 낭자는 너와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었으며, 네가 현명패천장
의 한독으로 고생할 때 은혜를 베푼 바도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녀와 같이 온순하고 덕을  지닌 요조숙녀도 흔치 않을 것이다.
혹시 그녀의 용모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게 아니냐?"

 장무기는 당치도 않다는 듯이 얼른 고개를 내둘렀다.

 '아닙니다. 주 낭자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녀만치 빼어난 용
모를 지닌 낭자도 드물 겁니다."

 사손은 결론을 내렸다.

 "이번 일만큼은  내가 독선을 부리겠다.  그러니 여러 생각말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도록 해라.  그러면 독을 제거하는 일도 자
연히 해결될 거 아니겠느냐?"

 주지약은 줄곧 옆에  있었다. 그녀는 사손의 단도직입적인 말을
듣자, 이내 얼굴이 붉어지며 횡하니 돌아서 달아나려 했다.

 사손이 적시에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는 너털웃음을 흘리
며 말했다.

 "당사자가 자리를 피하면 어떻게  하나? 오늘 이 중매장이가 기
필코 일을 성사시켜야겠네."

 주지약은 입을 삐쭉거리며 곱게 눈을 흘겼다.

 "사 어르신네, 정말 주착이시군요. 우린 지금 무슨 수를 써서라
도 중원으로 돌아가는 게  급선무인데, 그런 얼토당토 않는 얘기
를 꺼내면 어떻게 해요?!"

 사손은 다시 껄껄 웃었다.

 "남녀가 화합하는 것은  신성한 인륜대사이거늘, 어째서 얼토당
토 않는 얘기라는 거지? 무기야, 너의 부모님도 무인도에서 혼례
를 올렸다. 그들이 세속적인 예법을 간과하지 않았다면, 네 녀석
이 세상에 태어났을 리가  있겠느냐? 더군다나 오늘의 혼사는 이
의부가 직접 주선한 것이 아니냐?  혹시 주 낭자가 눈에 차지 않
아서 그러는 게 아니냐? 아니면  주 낭자 체내의 독을 제거해 주
기 싫어서 그러느냐?"

 주지약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다시  달아나려 했으나 사손이
소매를 불잡았다.

 "당장 이 자리를  피한다 해도, 우린 내일이면  다시 만나야 할
사람들이 아닌가? 음.....  이제보니 이봉사 늙은이를 시아버님
으로 모시기 싫은 모양이군?"

 주지약은 당황해졌다.

 "아니에요.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사 어른신네는 당세의 호
걸로서....."

 사손은 다짐을 받듯 물었다.

 "그렇다면 승락하는 거지?"

 주지약은 도리질을 하며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아니에요."

 사손은 일부러 성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 양아들이 낭자의 신랑감으로 부족하다는 뜻인가?"

 주지약은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장공자는 무공이  탁월하고 사람됨이  인의로와 전혀 나무랄데
없는 인물이에요. 단지... 단지....."

 사손이 다그쳤다.

 '단지 뭐란 말인가?"

 주지약은 힐끗 장무기를 쳐다보고 나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
했다.

 "그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조민이에요. 저는 그것을
알고 있어요."

 사손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조민 그 교활한 계집으로  인해 우리가 이런 고생을 겪고 있는
데, 설마 무기가  아직도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을 리가 있겠
나? 무기야, 네가 직접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솔직히 털어
놔 봐라."

 장무기는 갈등이 일었다.  조민의 달콤한 미소와 매혹적인 눈망
울, 그리고 자신이 손에  쥐었던 그녀의 예쁜 맨발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선혈로 낭자한 주아
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  위에 크게 확대되어 자신을 짓눌러오자,
얼른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조민은 나의 불공대천의 원수입니다. 기필코 그녀를 죽여 누이
의 원한을 갚겠습니다."

 "주 낭자, 똑똑히 들었는가?  이래도 그 몹쓸 계집이 마음에 걸
리나?"

 주지약은 다시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그가 하늘에 대고 맹세를 한다
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는 한 설령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그
의 도움을 받아 독을 제거하지 않겠어요."

 사손은 즉시 명령투로 말했다.

 "무기야, 어서 맹세를 해라!"

 장무기는 이미 마음의 결절을  내렸기 때문에 주저할 필요가 없
었다. 그는 낭랑한 음성으로 힘주어 말했다.

 "요녀 조민은 몽고 오랑캐  황실의 앞잡이로서, 우리 한인을 괴
롭혀 왔으며 많은 무림  협사를 상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의부님의
보도를 훔쳐갔고 사촌누이의  목숨마저 앗아갔으니, 나 장무기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원한을 잊지 않을 것이며, 만약 이에 위
배되는 행동을 할 시엔 천벌을 받아 횡사하게 될 것입니다."

 주지약은 그제서야 생긋이 웃었다.

 "설마 그녀를 보는 순간 지금의 맹세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
은 아니겠죠?"

 사손은 그녀의 확답을 받은 거나 다를 바 없다고 간주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특히 우리 강호인들
은 자질구레한 세속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으니, 오늘 당장 혼례
를 올리도록 하게. 그래야지만  하루 속히 십향연근산의 독을 제
거할 수 있을 걸세."

 장무기는 정색을 하고 반대 의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의부님, 주 낭자, 우선 저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주
아는 그 동안 저에게 깊은 정을 쏟아왔습니다. 우린 어릴 적부터
이미 상대방을  영원한 반려자로 생각해  왔습니다. 비록 혼례를
올리지 않았지만, 명분상  부부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데, 그녀의 시신이 미처 식기도  전에 내 어찌 다른 낭자를 아
내로 맞아들여 혼례를 올릴 수가 있겠습니까?"

 사손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럼 너의 생각으론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냐?"

 장무기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의 생각 같아선, 우리가  요행히 중원으로 돌아가 조민을 죽
이고 도룡도를 되찾은 연후에  다시 주 낭자와 혼례를 올리면 보
다 뜻깊은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사손은 빙긋이 웃었다.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오죽  좋겠느냐? 하지만 우리가 십 년이
넘도록 중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장무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삼 년 후에도 우리가 이 섬을 떠나지 못하게 된다면, 의부님께
서 저희들의 혼례를 주선해 주십시오."

 사손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주지약에게 물었다.

 "주 낭자의 의견은 어떤가?"

 주지약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의지할 곳이 없는  외톨인데, 스스로 무슨 주장을 내세우
겠어요? 모든 것을 어르신네의 분부에 따를 뿐이에요."

 사손은 흐뭇해 하며 껄껄 웃었다.

 "좋아, 좋아! 우리  세 사람이 이 자리에서  아예 약속을 하지.
자, 이제부터  나제들은 남남이 아니니  공연한 일로 쑥스러워할
것 없다. 무기야, 어서 내 며느리의 독을 제거해 주도록 해라."

 이렇게 말하더니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려는 듯 성큼성큼 뒷산으
로 걸어갔다.

 단둘이 남게 되자 장무기가 잠깐 침묵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지약, 내 고충을 이해해 주겠소?"

 주지약은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내가 못 생겼기 때문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서 미루는 게 아
닌가요? 만약 내가 조 낭자였더라면, 오늘 밤에 이미....."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장무기는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난 한때나마 네 명의  미녀를 동시에 아내로 맞이할 망상을 갖
고 있었다. 사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그 악마같은 요녀였
으니..... 미색에 눈이 어두워 선악을 구분 못한 것이 한없이 부
끄럽기만 하구나.'

 주지약은 고개를 돌려  그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
자, 조용히 떠나가려 했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그녀의 손을 나
꿔잡았다. 주지약은 공력이 회복되지  않아 그가 잡아 끄는 바람
에 비틀거리며 그만 그의  품안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몸부
림쳤으나 소용이 없자, 눈을 곱게 흘기며 쏘아부쳤다.

 "이젠 노골적으로 나한테 경박한 행동을 하시는군요!"

 그녀의 토라진 모습은  요염해 보이기까지 했다. 장무기는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감정이 용솟음쳐 올라, 그녀의 가냘픈 몸
을 끌어안고 나직이 말했다.

 "지약, 우리가 어릴 적에  한수(漢水)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 인
연이 되어,  오늘 같은 결과를 낳을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광명정에서 내 목숨을 구해  줄 당시만 해도 그저 감사를 느꼈을
뿐 감히 다른 망상을 갖지 못했었소."

 주지약은 다소곳이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날 난 당신에게 일검을 찔렀는데, 그 일로 인해 나한테 원한
을 품지 않았나요?"

 장무기는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당시 나의 급소를  피해 검이 날아왔을 때,  나에게 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챘소."

 주지약은 흥! 하고 코웃음을 날렸지만,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
올랐다.

 "그런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 때 아예 급소
를 노리는 건데, 앞으로  무궁한 세월을 당신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니, 당시 자비를 베푼 것이 후회스러워지는군요."

 장무기는 두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바싹 끌어안았다.

 "앞으로 난 모든 걸 바쳐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부부는 일심동
체라 했는데, 누가 누구의 시달림을 받겠소?"

 주지약은 깨를 뒤로 젖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만약 내가  당신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당신은 나를 욕하거나
때리거나 죽이진 않겠죠?"

 장무기는 지척에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은은한 난초의 향기가
풍겨오는 것 같아, 그만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당신같이온순하고 현숙한 아내가 남편에게 잘못을 저지를 리가
있겠소?"

 주지약은 섬섬옥수로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다소 떨리는 음성으
로 말했다.

 "신이 아닌  이상 사람은 누구에게나  잘못이 있기 마련이에요.
특히 나는 어릴 적에  부모님을 잃어 버릇없이 자랐기 때문에 언
제 잘못을 저지르게 될지 불안이 앞서요."

 "설령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난 좋게 타이르며 문제를 함께 해
결해 나갈 것이오."

 "그러한 마음이  언제까지 변함없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나요?
나의 잘못으로 인해 당신이 꼭 나를 죽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요."

 장무기는 그녀의 고운 이마에 다시 입맞춤을 했다.

 "그것은 공연한 생각이오. 내 어찌 그런 야만스러운 일을 할 수
있겠소?"

 주지약은 이상하리 만치 이 문제에 집착했다.

 "그럼 사내 대장부로서 약속을 하시는 거죠?"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서편  하늘에 모습을 드러낸 반달을 가리
켰다.

 "하늘의 달님이 우리 두 사람의 증인이 되어 줄 거예요."

 장무기는 여전히  그녀를 품안에 안고  달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말이 맞소. 저 달이  나의 진심을 증명할 것이오. 지약, 난
여지껏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에게 기만을 당했으며 숱한 고생을
겪었소. 나에게 한때나마 행복이 있었다면 그것은 빙화도에서 부
모님과 함께 생활을 한 것이 고작일 것이오. 그렇게 믿었던 조민
마저도 나를 철저하게 우롱했으니....."

 주지약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두 팔로  그의 듬직한 가슴을
끌어 안았다.

 "앞으로 내가 당신 가슴에 행복을 채워드리겠어요."

 장무기는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주지약을 사랑해 주고 싶었다.

 "지약, 당신이야말로 나의  영원한 반려자요. 당신은 줄곧 나에
게 베풀어 주기만 했소. 당신이 내 곁에 있는 한 난 행복의 의미
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을 나에게 주신 하늘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은 생각뿐이오."

 주지약은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에요! 나는 쓸모없는  나쁜 여자에요. 어쩌면 당신은 나로
인해 불행을 맛보게 될지도 몰라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영롱한 이슬이 맺혔다.

 장무기는 자신의 체온으로  그녀의 몸을 포근히 감싸주었다. 오
늘따라 달빛이 유난히 교교했다. 장무기의 귓전에 파도의 노랫소
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주지약의 가슴이 뛰는 소리도 들을 수 있
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가슴이 뛰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하나가되어 한참 동안 달빛에 젖어 있었다.

 다음날 장무기는 조용한 동굴 속에서 구양신공을 운공해 주지약
을 위하여 독을 제거하는 일을 착수했다. 비록 옷을 입은 상태지
만 장무기의 손길이 처음 몸에 닿는 순간, 주지약은 가늘게 떨었
다.

 장무기 역시 처음엔  가슴이 두근거렸다. 특히 배꼽 아랫부위는
여인의 신체 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금단의 성역이 아닌가! 장무
기는 손바닥을 통하여 그녀의 뜨거운 피와 뜨거운 숨결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그는 곧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고
운공에만 전념했다.

 주지약의 중독 현상은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것은 십향연
근산을 풀어놓은 음식을 많이 섭취하지 않은 탓이라 생각됐다.

 이날부터 주지약은  장무기에게 몸을  맡겼고, 장무기는 그녀를
위해 열심히 독을 제거해 주었다.

 그런데 이레째 되는 날이었다. 주지약의 체내에서 갑자기 한 갈
래의 이상한 기운이 뻗어나왔다. 그것은 장무기의 구양진기와 상
충되는 음한지기(陰寒之氣)였다. 주지약은 안간힘을 썼지만 도저
히 구양진기를 체내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부에게 달려가 까닭을 물
었다. 사손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나도 확실한  원인을 모르겠구나. 아마 아미파의 역
대 장문인이 모두 여자이므로,  그들이 연마한 내력이 너무 음유
(陰柔)한 쪽에 치우쳤던 탓일 것이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
다.

 다행하게도 주지약의  내력은 그와 비교해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장무기는 구양신공을 최고 경지로 끌어올려 그녀 체내에
유전되고 있는 음한지기를 억지로나마 누를 수가 있었다. 그러자
니 사손을 도와 독을 제거해 주었을 때보다 훨씬 어려웠다.

 장무기는 그녀 체내에 잠재해 있는 음유한 힘이 비록 아직은 약
하지만, 차후에 그 힘이 엄청나게 강해지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그는 절로 탄복해 마지 않았다.

 "지약, 존사인  멸절사태는 역시  불가일세(不可一世)한 기인이
오. 그가 지약에게 전수해  준 내공이 고심막측하다는 것을 이제
야 깨달았소. 지금 상태를  바탕으로 하여 열심히 내력을 쌓아나
간다면, 장차 나의 구양신공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게 분명하오."

 주지약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나를 놀리시는 거겠죠. 아미파의 무
학이 어떻게 장교주의 구양신공과 건곤이위신공에 비교가 되겠어
요?"

 장무기는 진지했다.

 "지약은 아직 무공 초식 면에서는 배운 게 많지 않지만, 내공의
기초를 아주  견실하게 다져놓았소. 나의  태사부님의 말을 빌리
면, 똑같은 무학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자질에 따라 그 결과가 다
르게 나타난다고 했소. 내가  보기에 지약의 무학은 나중에 필시
영사이신 멸절사태를 능가할 것이오."

 주지약은 눈을 곱게 흘겼다.

 "일부러 나를 기쁘게 해주려고  그러시는 거죠? 솔직히 말해 난
무공이 유별나게 고강한 것을  원치도 않아요. 다만 스승님의 근
처만 따라갈 수 있어도 만족할 거예요. 언제 기회가 있으면 구양
신공이나 건곤이위신공을 한 수  가르쳐 주세요. 설령 한, 두 수
라 할지라도 나한테는 굉장한 도움이 될 거예요."

                                                    계속 ---


#2863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6권 1장 #3/6               02/24 21:14   409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1 장 새로운 바람(風)과 구름(雲) #3/6

 장무기는 생각에 잠기며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주지약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장난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이 우둔한 주지약이 장교주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나 보죠?"

 장무기는 고개를 내둘렀다.

 "그게 아니라 지약의 내공이 내가 쌓은 내공과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만약 지금에 와서 다시 나의 무공을 배우게 된다면 그보
다 위험한 일이 없을 것이오."

 "가르쳐 주기 싫으면 그만이지  곧이 그런 구실을 갖다 붙일 필
요는 없어요. 어려운 무학이라면  배울 수 없는 게 고작일 텐데,
무슨 위험이 있다는 거죠?"

 장무기는 정색을 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오.  나의 구양신공은 순수한 양강(陽剛)
의 내공으로서 지약이  연마한 아미파의 순수한 음유지공(陰柔之
功)과는 서로 상반되므로,  나의 태사부님 같은 무학의 가재라면
그 두 가지  상반된 무공을 동시에 연마하여 수화상제(水火相濟)
강유상조(剛柔相助)의 경지를 이룩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주화입마(朱火入魔)되어 목숨을 잃거나 폐인이 되기 십
상이오. 그 대신 지약이 내공을 상당한 경지로 끌어올리는 날 건
곤이위신공의 심법을 전수해 줄 수는 있소."

 주지약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장난삼아 해본 얘기에요. 앞으로 난 언제나 당신 곁에 있
을 텐데 당신의  무공과 나의 무공이 무슨  구별이 있겠어요? 난
본디 게으르기 때문에, 설령 구양신공을 연마하라고 강요한다 해
도 꽁무니를 뺄 거예요."

 장무기는 그녀의 말에 가슴 뿌듯한 행복감을 느꼈다.

 행복한 나날을 빨리  지나가기 마련이다. 장무기 일행이 무인도
에 발을 내딛은지도 어느덧 몇 달이  지났다. 주지약은 자신의
내력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했다.  그 동안 장무기는 꾸준히 그
녀의 독을 제거해  주는 일을 도왔지만, 그  이상의 선을 넘지는
않았다.

 이날 섬 동쪽에  복사꽃이 유난히 아름답게 꽃망울을 터뜨렸다.
장무기는 복사꽃 가지를 한아름  꺾어 주아의 무덤을 찾았다. 그
가 무덤 앞에 세워놓았던  나무 줄기로 된 묘비가 이상하게도 한
쪽에 쓰러져 있었다. 장무기는 짐승들의 소행이라 생각하고 다시
똑바로 세워놓았다. 살아 생전  편안함을 누리지 못한 채 저승으
로 가버린 주아를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아팠다.

 그가 울적한 심정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바다 쪽에서 갈매기 떼
가 요란하게 날개짓을 하며  울어 대는 것이 들려와 고개를 돌려
보니, 뜻밖에도 배 한 척이  바람을 타고 미끄러져 오는 게 아닌
가! 장무기는 뛸 듯이 기뻐하며 얼른 소리 높여 외쳤다.

 "의부님! 지약! 배가 오고 있습니다! 배가 와요!"

 사손과 주지약은 즉시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주지약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웬 배가 이런 외딴섬을 향해 오고 있죠?"

 장무기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 바가 아니었다.

 "글쎄..... 혹시 해적선이 아닐지.....?"

 얼마 후 범선이 섬 가까이서 닻을 내렸다. 그러자 한 척의 작은
배가 범선에서 떨어져 나와 물살을 헤치며 미끄러져 왔다.

 작은 배를 몰고 온 사람들은  모두 몽고 병사의 복장을 하고 있
었다. 장무기는 선뜩 뇌리에 와닿는 바가 있었다.

 '조민이 뒤늦게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껴 다시 섬으로 돌아온 게
아닐까?'

 그는 곁눈질로 주지약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녀는 눈살을 찌푸
린 채 큰 근심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육지로 올라온 다섯 명의 병사 중에서 수군군관(水軍軍官)인 듯
한 자가 장무기에게 공손히 몸을 숙이며 물었다.

 "혹시 장무기 장공자가 아니십니까!"

 장무기는 부인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소만 귀하는 누군지.....?"

 상대방은 장무기를 확인하자 몹시 기뻐하는 것 같았다.

 "소인의 이름은 발속대(拔速坮)라  합니다. 이렇게 공자를 찾아
내게 된 것은 실로  행운입니다. 소인은 분부를 받들어 장공자와
사대협을 중원으로 모서가기 위해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는 주지약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이곳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그런데  누구의 분부에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인지.....?"

 발속대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소인은 복건성(福建城)의 달화적노(達花赤魯)  수군 제독의 수
하인데, 대도(大都)에 계신  발이도사(勃爾都思) 장군의 명을 받
아 출해하게 된 겁니다. 발이도사 장군께선 모두 여덟 척의 해선
을 바다로 내보내  장공자와 사대협을 찾아 모서오라고 명하였는
데, 생각지도 않게 그 중에서 소인이 공을 세우게 된 겁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그 무슨 장군께서  상을 내건 모양이었다.
장무기는 몽고 장군들의 이름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민
의 분부에 따라 명령을 내린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귀하의 상사께서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오라고 했는지 알고 있
소이까?"

 발속대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발이도사 장군께서는 장공자가  아주 귀하신 분이며 당세에 첫
손 꼽는 영웅 호걸이라면서,  만약 장공자를 찾게 된다면 소인더
러 정중히 모시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 외에 무엇때문에 장공자
를 중원으로 모셔오시라고  했는지는 소인의 직책이 미천하여 자
세한 지시를 듣지 못했습니다."

 주지약이 이들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혹시 소민군주(紹敏郡主)의 뜻이 아닌가요?"

 발속대는 멍해졌다.

 "소민군주라뇨? 소인은 워낙 복이  없는 놈이라 아직 뵙지 못했
습니다."

 주지약은 냉랭하게 말했다.

 "복이 없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발속대는 멋적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소민군주는 우리 몽고의  제일 미인입니다. 아니, 천하에서 그
분보다 더 아름다운 미인은 없을 겁니다. 문무를 겸비했을 뿐 아
니라 여양왕의 금지옥엽입니다. 소인처럼 박복한 자가 어찌 군주
의 그림자조차 뵈올 기회가 있었겠습니까?"

 주지약은 흥!하고 냉소를 날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장무기가 사손에게 고개를 돌렸다.

 "의부님, 그럼 배에 오르도록 하시죠."

 사손은 턱을 한 차례 끄덕였다.

 "우선 동굴로 가서 봇짐을  챙겨야 하니, 이들에게 잠시만 기다
리라고 해라."

 발속대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소인이 부하들과 함께 가서 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사손은 담담하게 웃으며 사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네. 우리가 가서 간단하게 챙겨 갖고 오겠
네."

 그는 장무기와 주지약의 손을 잡고 산 뒤로 들어갔다.

 "조민이 갑자기 배를 보내온  것은 필시 다른 음모가 있기 때문
이야. 너희들은 이 일을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냐?"

 장무기가 대답했다.

 "의부님, 조..... 조민이 범선에 있을까요?"

 사손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요녀가 배에 있다면 문제가 수월하게 해결될 수도 있다. 어
쨌든 배에 오르더라도 음식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그 원칙
만 고수한다면 다시는 어처구니 없이 당하진 않을 것이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모아두었던 음식을 배로 갖고 갑시
다. 식수도 충분히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손은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조민은 배에 없을 것이다. 그 계집은 파사 사람들이
한 짓을 그대로 재현할 속셈으로, 우리를 배로 유인한 연후에 바
다 한가운데서 몽고의 군선(軍船)을 시켜 우리의 배에 발포케 하
여 침몰시키려고 할 게 뻔하다."

 장무기는 그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가..... 그렇기도 악랄하단 말입니까? 우리를 그냥 이곳에
내버려두면 영원히 중원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구태
여 악랄한 살수까지..... 우리가  대관절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
러는지 모르겠군요."

 사손은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네가 만안사에 갇혀 있던 육대문파의 고수들을 모두 구해 주었
으니, 그 요녀가 원한을  품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더군다나 명
교의 교주가 별안간  실종되었으니 모든 교도들이 백방으로 찾아
나설 것이며, 언젠가는 이곳  외딴섬까지 찾아 올지도 모를 일이
기 때문에, 아예 우리를  죽여 후환을 없애려는 심산임에 분명하
다."

 장무기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에  발포하면, 발속대와 몽고 병사들도 함
께 죽음을 당하게 될 게 아니겠습니까?"

 사손은 껄껄 웃더니, 곧 장탄식을 했다.

 "무기야, 내 말을 명심해서 들어라.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
이라면 목적을 위해 몇몇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따위의 일쯤
은 서슴치 않는다. 너처럼 매사에 인의를 앞세운다면, 애당초 몽
고인이 우리의 강산을 차지하고 도처에서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
겠느냐? 자고로 만천하에 명성을 날린 영웅들은 무엇보다도 결단
력이 뛰어났단다. 그들은  매사에 망설임이 없었지. 관병의 목숨
따위는 고사하고, 필요하다면 심지어 자신의 부모와 자식의 목숨
까지도 제물로 바칠 것이다."

 장무기는 그의 말에 잠시  아연해 있다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
덕였다.

 "의부님의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는 몽고인이 매우 잔인하다는 것을 일찌기 알고 있었다. 그러
나 부하에  대해서는 성심껏 보살펴  주리라 생각했는데, 사손의
말을 듣고  나니 그 비정함에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한기를 느꼈
다. 자기가  이번에 중원으로 돌아가면  무림의 군호들을 이끌고
몽고 오랑캐를 중원에서 몰아내는 일에 앞장서겠지만, 만약 자기
더러 천하를 다스리라 한다면 도저히 자신감이 없었다.

 주지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의부님,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죠?"

 사손이 그녀에게 반문했다.

 "며늘애야, 너에게 혹시 무슨 묘책이 없느냐?"

 주지약이 소극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배에 오르는 것을 거절하면  어떨까요? 그 몽고 군관에게 우린
이곳이 더 좋으니, 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이에요."

 사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우리가 배에 오르지 않는다고 하면
그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물론 그들과 싸워 모조리 죽여 버릴 수
도 있겠지. 하지만 그 요녀가  다시 수십 척의 군선을 보내올 수
도 있잖겠느냐?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무가가 중원으로 돌아가 해
야 할 일이  많다는 데 있다. 이곳에 남아  늙어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느냐?"

 주지약은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의부님께서 방법을 제시하시는 게 좋겠어요. 저희들은 의
부님의 분부에 따르겠어요."

 사손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여차여차하는 게 어떻겠느냐?"

 장무기와 주지약은 그가 제시한  방법을 듣자 모두 고개를 끄덕
이며 찬성했다.

 장무기는 곧 주아의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뿌리며 이별을 고했
다. 이어 그들은 범선에 올랐다. 주지약은 섬에서 무료함을 달래
기 위해 많은 목각인형을  만들었는데, 한 보따리 짊어지고 배에
올랐다.

 장무기는 모든 선창을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조민의 모습이 보
이지 않았다.  병졸과 수부(水夫)들은 모두  무공을 지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특별히 경계할 만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
다. 닻을 올리고 배가  바다 한가운데로 옮겨가자 장무기가 갑자
기 발속대의 맥문을 나꿔잡아  다른 손으로 그의 칼을 뽑아 목을
겨냥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어서 부하들에게 배를 동쪽으로 돌리라고 하
시오!"

 발속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장.....장공자, 소...소인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여러 소리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허튼 수작을 부리
면 당장 목이 달아날 것을 각오하시오!"

 "네! 네!"

 발속대는 황급히 대답하며 수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어...어서 뱃머리를 동쪽으로 돌려라!"

 수부들은 순순히 그의  명령에 따라 뱃머리를 돌렸다. 장무기가
다시 위엄있는 음성으로 다그쳤다.

 "너희들이 나를  헤치려는 흉계를 이미  간파했으니, 모든 것을
순순히 털어놓아라! 만약 거짓이  있을 시엔 아무도 살아남지 못
할 것이다!"

 그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오른손으로 선창을 내리치자, 나무조
각이 흩날리는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

 주위에 있는 몽고  병졸들은 모두 대경실색했다. 발속대는 떨리
는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 굽어 살펴주십시오. 소인은 단지 상사의 명에 따라 공자
를 중원으로 모셔가려는  것뿐이며, 절대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소인은 이번 일로 공을 세워 상사로부터 상을 받을 욕심 외엔 정
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장무기는 그의 진지한 언동에서 거짓이 아니라고 판단돼 손목을
풀어 주고, 뱃머리 쪽으로 걸어가 좌우 양손에 제각기 육중한 닻
을 집어 들었다.

 "자, 모두들 똑똑히 보시오!"

 그의 외침이 뱉어지자마자 두 개의 닻을 허공으로 던졌다. 주위
에 있는 몽고  병졸들은 일제히 놀란 외침을  발했다. 백여 근이
넘는 닻이 떨어지는 순간, 장무기는 건곤이위신공을 전개해 쌍장
을 교차시켜 떨쳐내자 닻이  다시 허공으로 높이 치솟아 올랐다.
이렇게 세 번을 거듭한  후 가뿐하게 닻을 받아 뱃머리에 내려놓
았다.

 몽고인은 무(武)로 천하를 장악했듯이 용무지사(勇武之士)를 가
장 숭배했다. 그들은 장무기의  가공할 무공을 보자 일제히 갑판
에 엎드려 승복을 표하며  감히 엉뚱한 생각을 가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범선은 계속 해가 뜨는  동쪽으로 향했다. 사흘 동안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늘과 맞닿은 망망대해뿐이었다. 사손의 추측대
로라면 조민이 배치해 놓은 군선은 필시 복건성과 절강성에 포진
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망망대해에서는 군선과 맞닥뜨릴 염려가
없었다.

 닷새째 되는 날, 장무기는 비로소 뱃머리를 북쪽으로 꺾도록 명
령했다.

 북쪽으로 방향을  택해 쉬지 않고 스무  날을 항진했다. 조민이
제아무리 심계가 깊다 해도, 배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 중원 땅
에 닿으리라곤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 동안 장무기  등은 섬에서 갖고 온  양식을 먹거나 바다에서
신선한 물고기를 잡아 요기를  채웠다. 배에 비축돼 있는 음식에
는 일체 입을 대지 않았다.

 이날 정오 무렵 멀리  육지가 보였다. 몽고 병정들은 오랜 항해
끝에 육지로 돌아오자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해가 서산 마루로
기울쯤에 범선은 연안에 닿았다. 이 일대는 수심이 깊어 큰 배를
직접 육지 가까이 몰고 갈 수 있었다.

 "무기야, 네가 우선 육지에 올라가 살펴보고 오너라."

 사손이 시키는 대로 장무기는 육지로 몸을 날렸다.

 그는 신법을 전개해  조심스럽게 바닷가 주변을 살폈다. 주위는
온통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땅에 쌓였던
눈이 녹은 탓인지 질퍽했다.  멀리 나갈수록 숲은 태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장정 몇  사람이 팔을 벌려 맞잡아야지만 안을
수 있는 아름드리 고송(古松)이 하늘을 가린채 그 위용을 자랑하
고 있었다.

 장무기는 높은 나무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대로 온통
끝없는 송림이었다. 사람의 그림자는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 없
자, 장무기는 다시 범선으로 돌아갔다.

 한데 그가 범선이 정박돼 있는 해변에 가까이 이르렀을때, 난데
없이 처절한  비명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장무기는 흠칫 놀랐
다. 비명소리는 바로범선 안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단정
의 진기를 맹렬히 끌어올려 한 줄기 바람으로 화해 범선 위로 덮
쳐갔다.

 범선 갑판과 뱃머리  곳곳에는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발속대
를 비롯해 모두 몽고 관졸들의 시체였다.

 사손과 주지약은 멀쩡하게 한쪽에 서 있었음, 적의 모습은 보이
지 않았다. 장무기가 경악하며 물었다.

 "의부님, 괜찮습니까? 그런데 배를 기습한 적은 어디로 갔죠?"

 사손이 퉁명스럽게 그의 말을 받았다.

 "적은 무슨 적이냐? 적을 발견했단 말이냐?"

 "그게 아니라 이 몽고인들을 죽인.....!"

 "우리 두 사람이 죽인 것이다."

 장무기는 더욱 의아해 했다.

 "그럼 이 몽고 병졸들이 육지에 닿자마자 엉뚱한 행동을 취했단
말입니까?"

 사손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들이 감히 무슨 행동을  취하겠느냐? 내가 그들의 입을 봉하
기 위해 저승으로 보낸 것이다. 이들이 죽으므로 해서 조민은 우
리가 중원으로 들어온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암암
리에 행동하기가 한결 편리할 것이다."

                                                    계속 ---


#2864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6권 1장 #4/6               02/24 21:16   466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1 장 새로운 바람(風)과 구름(雲) #4/6

 장무기는 입이 딱 벌어진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
손은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

 "내 수단이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하느냐? 오랑캐의 관졸은 우리
의 적이다. 우리가 굳이 보살의 마음으로 그들을 대할 필요는 없
다."

 장무기는 웬지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발속대 등은 비
록 적이었지만 모두 고분고분하여, 구태여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고 생각했다. 사손은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힘주어 말했다.

 "양소비군자(量小非君子) 무독불장부(無毒不丈夫)라는  말이 있
지 않느냐? 담량이 작으면 군자가 아니고,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 했다. 내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죽인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조민이 우리에게 악랄한 행동을 취했
듯이 우리도 그들에게 앙갚음을 해야 한다."

 장무기는 계속 침묵만 지킬 수 없었다.

 "의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발속대  등의 시체를 보자  콧등이 시큰해지며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사손이 일방적으로 제의했다.

 "배에다 불을 질러야겠다.  지약아, 놈들의 시체를 뒤져 금은을
찾아내고, 만약의 경우를 위해 칼을 세 자루 추려 내도록 해라."

 두 사람은 곧 배에  불을 질렀다. 선체가 제법 컸으므로 삼경반
야가 돼서야 불이 꺼지며  배와 시체가 모두 잿더미로 화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육안으로는 그들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장무기는 의부님의 철두철미한 일처리에 새삼 느끼는 바가 있었
다. 역시 강호에서 오랜  세월 동안 경험을 쌓아온 분이라, 생각
에서 행동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배울 점이 많았다.

 세 사람은 가까운 숲속에서 새우잠을 자고 나서, 날이 밝자마자
숲을 뚫고 남쪽으로 향했다.  이틀째 되는 날, 그들은 비로소 대
여섯 명의 심마니들을  만나 물어보니 이곳이 요동(遼東) 딸이며
장백산(長白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심마니들과 헤어지자 주지약이 사손에게 물었다.

 "의부님, 저들도 죽여서 입을 봉해야 하나요?"

 이 말에 장무기가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망언이오?! 저 심마니들은 우리가 누군지도 전혀 모
르잖소? 앞으로 우리와 맞닥뜨리는 사람을 모조리 죽일심산이란
말이오?"

 주지약은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장
무기가 이같이 신랄하게 자기를 꾸짖기는 처음이었다.

 사손이 주지약의 어색한 입장을  모면시켜 주려는 듯 얼른 나섰
다.

 "나도 솔직히 말해 그들을  죽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교주가 많
은 살상을 원치 않으니  우린 속히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 원래의
모습을 감추어야겠다."

 세 사람은 곧 걸음을  재촉하였다. 이들은 이틀 후에야 겨우 숲
을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하루 정도 걷자 비로소 농가가 나타
났다. 장무기는 여러 집을 들러  은자를 두둑히 주고 헌 옷을 구
할 수가 있었다.

 주지약은 항상 몸단장을 깨끗히 해 왔기 때문에, 땀냄새에 저린
촌부(村婦)의 옷으로 갈아입자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아
야만 했다.

 사손은 다시 두 사람에게  얼굴에 덕지덕지 흙칠을 하고 봉두난
발을 하도록 명했다. 가까이  있는 수면에 자신의 얼굴을 비쳐본
장무기는, 스스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둔갑한 자신의 모습
에 아연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 정도면 설령 조민과 마주친다 해
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장무기 일행은  계속 남쪽으로 향하여  만리장성 안으로 접어들
어, 이날 어느 큰 고을에 당도했다.

 시장기를 느낀 세 사람은 우선  눈에 띄는 큰 주루를 찾아 들었
다. 장무기는 대뜸 석 냥  가량 되는 은자를 주루 사람에게 건네
주었다.

 "선불을 할 테니, 음식을 먹고 나서 나머지를 거슬러 가겠소/"

 그는 자신의 남루한 차림새를  감안해 거렁뱅이로 오해 받지 않
기 위해 미리 식대를 지불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루의 주
인장인 듯한 배불뚝이  중년인이 공손하게 일어나 그에게 은자를
다시 돌려주는 것이 아닌가!

 "나으리들이 모처럼 저희  집을 찾아주셨는데, 대접도 변변찮게
해드리면서 어찌 은자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서 거두어 주십
시오."

 장무기는 의아해 했다. 그는 자리에 앉은 후 나직이 주지약에게
물었다.

 "이곳의 주인장이 왜 우리의  은자를 받지 않는지 모르겠소. 혹
시 우리의 신분을 알아차린 게 아닌지 모르겠구료?"

 주지약은 자신과 장무기, 그리고 사손의 모습을 새삼 유심히 살
펴보았다. 어느 모로  보나 영락없는 거렁뱅이였다. 사손이 나직
이 입을 열었다.

 "주인장의 말투를 들어보니 두려움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아무
튼 조심해야겠다."

 이때였다. 층계를  밟는 발자국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칠,
팔 명이 기세당당하게 주루 이층으로 올라왔다. 공교롭게도 그들
역시 거렁뱅이  차림이었다. 그들은 마치  첩집 안방으로 들어온
듯 거드름을 피우며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점원이 굽실거리며  위장된 웃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어쨌든
그들을 고관대작 모시듯 깍듯이 대했다.

 장무기는 자연히  이 거렁뱅이들의 동태를  자세히 살피게 되었
다. 순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예사 거렁뱅이가 아니
었다. 그들 중에는  등에 다섯 개의 포대를  둘러멘 자가 있는가
하면, 여섯  개의 포대를 둘러멘 사람도  있었다. 알고보니 모두
개방에서 상당한 직위를 갖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장무기가 주문한 요리가 나오기도  전에 다시 대여섯 명의 개방
제자가 나타나더니, 잇따라 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올라왔다. 삽
시간에 삼십여 명의 개방  제자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그들
중에 세 사람은 포대를 일곱 개나 갖고 있는 칠대제자(七袋弟子)
였다.

 장무기는 또 한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개방 제자들은 오늘
이 주루에서 모임을 갖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주루의 배불뚝
이 주인장은 자기네들도 개방  제자인 줄 오인한 것이다. 장무기
는 나직이 사손에게 말했다.

 "우린 적당히  기회를 봐서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바로 이때 점원이 요리를  갖고 왔다. 튀긴 닭고기와 쇠고기 볶
음을 커다란 접시에 푸짐하게 담아 가지고 왔다. 게다가 백주 다
섯 병을 곁들여 갖고 왔다.  사손은 오랫 동안 포식할 기회가 없
었던 차에 구수한 향기가 후각을 자극하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일단 먹고 볼 심산으로 대뜸 닭고기를 집었다.

 "얘야, 조선땅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다. 먹다가 죽
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지 않느냐? 일단 먹고 보자, 우리가
얌전하게 음식만 먹겠다는데 설마 생트집을 잡겠느냐?"

 그는 게걸스럽게 닭고기를  씹더니, 백주를 사발에다 따루어 냉
수 마시듯이 벌컥벌컥 목구멍에다 쏟아 넣었다.

 "카! 술맛이 꿀맛이군. 이게  얼마만인가? 벌써 이십 년이 흘렀
군. 젠장 청상과부가 이십  년을 수절한들 이보다 눈물겹진 않을
것이다. 다시는 술맛을 보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내심 감개무량했다.  한 사발의 백주(白酒)를 말끔히 비우
고 나서 손등으로 입을 쓱 훔치더니, 홀연 표정이 굳어지며 나직
하게 말했다.

 "조심해라. 이번에 나타난 두 사람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장무기도 층계를 밟는  가벼운 발자국소리를 들었다. 과연 대단
한 인물임에 분명했다. 두  사람이 새로 모습을 드러내자 주루에
앉아 있던 개방 제자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사손의 손짓에 따라 장무기 등 세 사람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
어났다. 그들은 구석진 자리에 앉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다 일어서는데 세 사람
만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다면, 선뜻 눈에 띄었을 것이다.

 새로 나타난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턱 밑에 수염을 길게 길렀
고 차림새만  남루할 뿐, 의젓한 선비의  풍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자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덥석부리
인데다가 매우 험상궂게 생겼다.  언뜻보아 마치 절을 지키는 사
대신왕(四大神王) 중의 하나처럼 생겼다.

 두 사람의 나이는 모두 오십  줄 안팎으로 등에 제각기 아홉 개
의 포대를 메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홉 개의 포대는 손바닥 만
한 것을 실로 꿰매 엮은  것으로, 실용적인 게 아니라 단지 신분
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에 불과했다.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개방은 오래 전부터 강호에서 제일 큰 방파로 알려져 왔다. 태
사부님의 말에 의하면,  왕년에 개방 방주였던 홍칠공(洪七公)은
무공이 출중하고 협의심이  강해 무림 흑백양도의 존경을 받았다
고 했다. 그 뒤를  이어 황방주, 야율방주도 역시 걸출한 인물이
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개방의 명성이 많이 쇠퇴한 것
같다. 현임 방주인 사화룡(史火龍)은 좀처럼 강호에 모습을 나타
내지 않으므로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 없다. 저 두 사람이 아홉
개의 포대를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방주를 제외하고 가장 신분
이 높은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날 영사도에서 개방 사람들도 의
부님의 도룡도를  빼앗으려 했는데  저들 두  사람도 연관되었을
까?'
상대가 상대이니만치  장무기는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룡도와 의천검은 이미 조민에게  넘어갔지만, 그의 품 속에 아
직 여섯 개의 성화령(聖火令)이  남아 있었다. 조민은 미처 그의
품 속까지  뒤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무기는 본능적으로 품을
더듬어 여섯 개의 성화령을 확인했다.

 개방의 구대 장로(九袋長老) 두 사람이 중앙의 자리에 앉자, 개
방 제자들은 다시 착석하여  먹고 마시며 부지런히 손과 입을 놀
렸다.

 장무기와 사손은 구대장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을 곤두세웠
지만 실망했다. 그들은 먹고  마시는 데만 열중할 뿐, 진지한 대
화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구대장로중 두 장로가  식사를 마치고 아랫층으로 내려가자, 개
방 제자들도 꽁무니를 따라 떠나갔다.

 남은 것은 알맹이가  멀쩡한 세 거렁뱅이인 장무기 일행이었다.
사손은 귀만 갖고도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나직이 말했다.

 "무기야, 내가 보기엔 어떠냐?"

 장무기는 생각을 굴리고 있던 바를 얘기했다.

 "개방 사람들이 단순히 먹고 마시기 위해 이곳에 모여들진 않았
을 겁니다. 제 생각엔 오늘  밤 다른 장소에 모여 중요한 회의를
가질 게 분명합니다."

 사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이 맞을 것이다. 개방은 여지껏 본교와 적대시해 왔다.
광명정을 불태운 일에도 그들이 한 다리 끼었을 뿐 아니라, 도룡
도를 탈취해 가는 일에도 참여했다. 그들이 본교를 겨냥해 또 무
슨 흉계를 꾸밀지도 모르니,  우리로선 그들의 동태를 낱낱이 파
악할 필요가 있다."

 세 사람은 아랫층으로 내려가 식대를 계산하지 배불뚝이는 심히
당황해 하며 한사코 거절을 했다. 장무기는 내심 와닿는 바가 있
었다.

 '주루의 주인이 겁을 집어 먹고 음식값을 받으려 하지 않으려는
것만 보아도, 개방 제자들이  평소에 얼마나 많은 만행을 저질렀
는지 능히 짐작이 가는군.'

 세 사람은 주루를 나와 작은 객점을 찾아들었다. 개방 제자들은
방규에 따라 절대 객점에 투숙하지 않기 때문에 객점에서 그들과
맞닥뜨릴 염려는 없었다. 사손은 역시 경험이 풍부한 강호인답게
모든 일을 주도했다.

 "무기야, 지금부터  개방의 동태를  살펴야겠는데, 알다시피 난
앞을 볼 수 없으니  행동하는데 불편하고 지약은 무공이 높지 않
아 역시 실수를 저지를지  모르니, 네가 혼자서 수고를 해줘야겠
다."

 장무기는 이의가 없었다.

 "네, 저 혼자서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객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행길을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데 개방 제자라곤 전
혀 눈에 띄지 않았다.

 '반 시진도 안 되는  사이에 개방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사라졌
을까? 틀림없이 멀리 가진 않았을 텐데.....'

 그는 무턱대고 미친 개처럼  쏘다닐 순 없었다. 문득 한가지 꾀
가 떠올라 가까운 잡화점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진열장을 주먹으
로 내리치며 눈을 부라렸다.

 "이봐! 주인장!  우리 형제들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 혹시 보지
못했나?"

 점포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거칠은  모습을 보자 흉신(凶神)을
만나 듯 움츠려들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 중에서 그래도 배
짱이 좋아보이는 한 사람이 웃음을 자아내며 북쪽을 가리켰다.

 "모두들 저 북쪽으로 갔습니다.  어르신네께선 차라도 한 잔 마
시겠습니까?"

 장무기는 냉랭하게 소리쳤다.

 "필요없어! 차는 무슨 빌어먹을 차야!"

 그는 즉시 점포를 나서  성큼성큼 북쪽을 향해 걸아가며 터져나
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고을을 벗어나 얼마 동안 걸어가자 길 옆 잡초가 무성한 곳으로
부터 한 줄기의 그림자가 번뜩이더니, 개방 제자 하나가 앞을 가
로막았다.

 "누구냐!"

 순간 장무기는 절묘한신법을 구사해서, 연기처럼 그 개방제자
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잡초가 무성한 길  옆 숲속으로 몸을
감춘 것이다. 개방 제자는  멍해지며 자신의 눈을 비비적 거리더
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내가  잘못 봤나? 분명히 누가  다가오는 것 같았는
데.....?"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장무기는 연도에 개방 제자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는 것
을 알고, 숲길을 택해  계속 북쪽으로 향했다. 일단 경각심을 높
이자 개방 제자들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
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그의  길잡이가 돼 주었다. 얼마 동안 달
리자 그는 어느 절간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절문 위에 큼지막
한 현판이 걸려 있었다.

 ----- 미륵불묘(彌勒佛廟) -----

 겉만 보아도 규모가 상당히 큰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
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이번 개방 집회에 중요한 인물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
약 개방 제자 행세를 하며 얼렁뚱땅 끼어들다가는 발각되기 심상
이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 살펴 좌측 담장 안에 한 그루의 고송(古松)
이 하늘을 찌르듯  솟아 있는 것을 보았다.  고송 주위에는 다른
나무들이 울창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어, 일단 고송 위로 오르
면 은신하기 안성마춤이라 생각됐다. 그곳에선 뜨락 한가운데 자
리잡은 대웅보전(大雄寶殿)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장무기는 재빨리  좌측으로 돌아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돌맹이
하나를 집어 담장 우측에 던지더니, 곧이어 고송 위로 몸을 솟구
쳤다. 그의 신법은 한  줄기 연기와 같았다. 소나무 위로 오르니
과연 예측했던 대로 대웅보전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행하게도 그
가 소나무 위에 은신한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대전(大殿) 앞에는 개방  제자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들의
수는 삼백 명 가량 되는 것 같았다. 이들은 모두 대전을 향해 앉
아 있었으므로,  뒤쪽에서 장무기가 신법을  전해하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대전 안에는 다섯 개의 방석이 놓여 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
다. 아마 방석에 앉을  사람이 아직 당도하지 않은 모양이다. 대
전 앞에 삼백여 명이 운집해 있었으나 조용했다. 얼마 전 주루에
서 왁자지껄하던 분위기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음..... 개방은  비록 근래에 와서 쇠퇴했지만,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전통은  과연 무시할 수가 없구나.  기틀이 잡혀 있는
방파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군.'

 대전 뒤쪽 한복판에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데, 불룩한 배를 노출
한 채 헤벌쭉 웃는 모습이 매우 자상한 느낌을 주었다. 장무기가
두루두루 살피고 있는데, 대전 옆쪽에서 낭랑한 외침소리가 들려
왔다.

 "장발용두(掌鉢龍頭)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이 외침을  신호로 하여 개방 제자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장무기가 주루에서  보았던 선비처럼 생긴 구대장로가 손
에 깨진 사발을 들고 천천히 걸어나와 우측에 섰다. 낭랑한 외침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장봉용두(掌捧龍頭)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이번에는 그 덥석부리 구대장로가 손에 철봉을 높이 받쳐 든 채
모습을 나타내 좌측에 섰다.

 "집법장로(執法長老)께서 오셨습니다!"

 외침소리에 따라 몸집이  왜소한 늙은 거렁뱅이가 낡은 죽편(竹
片)을 쥐고, 마치 구름을 밟듯 사뿐한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이 사람의  경공술을 대단하군. 위복왕에  비해 약간 뒤떨어질
뿐이다.'

 낭랑한 호명에 이어 네  번째 인물이등장했다. 흰 수염에 백발
이 성성한 늙은이로서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그의 걸음걸
이나 외모로 보아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추측할 수 없었다. 그러
나 그를 전공장로(傳功長老), 즉  무공 전수를 맡은 장로라 칭하
는 것으로 미루어, 개방에서 독보적인 존재임을 짐작케 했다.

 네 명의 개방 핵심  인물이 좌우로 나열하더니, 일제히 몸을 숙
이며 입을 모았다.

 "방주님을 모시고자 합니다!"

 장무기는 다소  긴장되었다. 개방의  방주가 사화룡이며 외호가
금은장(金銀掌)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무림에서 그
의 진면목을 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가  대관절 어떻게 생긴
인물인지 자못 궁금했다.

 대전 앞에 모인 개방 제자들도 일제히 몸을 숙이자, 잠시 후 병
풍 뒤에서  육중한 걸음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육 척이 넘는 장신에다가  어깨가 딱 벌어졌으며, 안색이 불그스
름한 게 마치 고관대작 같은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가 대전
한복판에 팔짱을 끼고 우뚝 서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방주께 인사를 올립니다!"

 개방 방주 사화룡은 손을  가볍게 휘두르며 우렁찬 음성으로 말
했다.

 "인사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인사냐? 그 동안  모두 밥 잘먹고
똥 잘 쌌느냐?"

 사화룡이 가운데 방석에  앉자 모두들 비로소 제자리에 앉았다.
사화룡은 대뜸 장발용두에게 고개를 돌렸다.

 "옹(翁)형제, 우선 금모사왕과 도룡도에 관한 일을 모든 형제들
에게 말해 주시오."

 장무기는 <금모사왕과 도룡도>라는 말을 듣자 긴장되어 귀를 세
웠다.

 장발용두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선 방주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형제 여러분들이  마교와 본방은 육십 년  동안 싸움을 지속해
오면서 깊은 원한이 쌓였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듯이, 앞으로 놈들과 맞서 싸우려면 그들에 관한 모든 것
을 낱낱이 파악할 필요가  있소. 최근 마교는 장무기라는 새로운
교주를 내세웠소. 광명정을 협공한 일에 참여한 본방의 형제들은
그 자를 직접 대면했는데,  아직 젖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애송이
라 하오. 그런  철부지가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겠소이까? 우리
사방주님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바윗돌에 붙은 파리똥에 불과하오
이다!"

 개방 제자들은 우뢰같은 함성을 지르며 그의말에 호응을 했다.
사화룡 역시 어깨에 힘을 주며 우쭐대는 모습이었다.

 장발용두의 말이 계속 되었다.

 "그런데 마교가 새로운  교주를 내세운 후로부터 사분오열 되었
던 내분이 종식되고 서로  힘을 모으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소.
우린 그 점을  가볍게 보아 넘겨선 아니 될  것이오. 특히 일 년
전부터 마교의 마두들이  도처에서 떼를 지어 원군(元軍)과 맞서
싸워 연승을 거두며 사기가 충천돼 있소. 사천성(四川省) 일대에
선 한산동(韓山童)과  주원장(朱元璋), 호남성(湖南省)과 호북성
일대에선 서수휘(徐壽輝) 등이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소. 만약
그들이 소 뒷걸음질에 쥐 잡듯이 얼토당토 않게 몽고놈들을 몰아
내고 천하를 거머쥐게 된다면,  본방의 십여 만 형제들은 그들에
게 떼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오!"

 즉시 곳곳에서 성난 외침이 터져나왔다.

 "놈들을 미리 때려 잡아야 합니다!"

 "절대 그들이 천하를 얻게 해선 안 됩니다!"

 "몽고놈들을 쫓아내야겠지만, 마교에게 그 공을 빼앗길 순 없습
니다!"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내가 중원을 떠난  지 몇 달 동안  형제들이 많은 업적을 쌓았
군.개방은 오래전부터  본교와 적대시해 왔으니, 본교의 세력이
확장돼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겠지. 그러나 본교는 그들과 묵은
원한을 청산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 개방은 인원수가 많은데다가
걸출한 인재도 적지 않아  몽고 오랑캐를 몰아내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무슨 수로 그들과 손을 잡지.....?'

 장발용두는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다시 입을
열었다.

 "방주님께선  줄곧 연화산장(連花山莊)에서  조용히 지내오셨지
만, 이번에 큰일을 임하게  되어 부득이 직접 강호출도를 결심하
게 되었소. 하늘의 도움을 얻어 본방이 팔대장로(八袋長老) 진우
량이 무당 제자 한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 자가 마교에 대한
중요한 소식을 갖고 있다  하니 특별히 이 자리에 모시도록 하겠
소."

                                                    계속 ---



#2865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6권 1장 #5/6               02/24 21:18   486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1 장 새로운 바람(風)과 구름(雲) #5/6

 여기까지 말한 그는 음성을 높여 외쳤다.

 "진장로!"

 즉시 뒤쪽에서 대답소리가 들리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걸어나
왔다. 그 중 한 사람은 서른 살 가량의 깐깐하게 생긴 인물로서,
바로 영사도에서 사손이 목숨을 살려 주었던 진우량이었다. 그리
고 또 한 사람은 이십 대 후반의 준수하게 생긴 인물로서 다름아
닌 송원교의 아들 송청서였다.

 장무기는 의아해 했다.

 '송사형이 어째서 개방 사람과 어울리게 되었을까?'

 그러나 곧 이해가 갔다.

 '무당파와 개방은 모두 협의도를 걸어온 방파이니, 쌍방이 친분
을 맺은 것은 당연지사겠지.'

 진우량과 송청서는 우선 사화룡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나서
전공, 집법 두 잘오와 장발, 장봉 두 용두에게 공수의 예를 취하
고는, 다시 대전 앞에  예를 표했다. 장발용두가 다시 입을 열었
다.

 "형제 여러분들, 이분 송청서 송소협은 무당파 송원교 송대협의
아드님으로서, 장차 무당파의 장문직을 계승할 가장 유력한 인물
이외다. 그 마교의 교주인 장무기는  그의 사제라 할 수 있기 때
문에 마교의 내부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소. 몇 달 전 마교의
대마두인 금모사왕 사손이 동해 영사도에 나타났다고 전해 준 장
본인도 바로 이 송소협이오."

 이때, 집법장로가 불쑥 나섰다.

 "금모사왕 사손의  행방은 줄곧 무림의  극비로 되어 있었는데,
송소협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자세한 것을 듣고 싶
소이다."

 사실 장무기도 이 점에 대해 줄곧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자삼용왕은 무열 부녀로 인해 의부님의 소재를 알게 되어 영사
도로 달려갔지만, 극비리에 행동을 취했는데 송사형이 어떻게 해
서 그 사실을 개방에게 알려준 것일까?'

 장무기는 이 의문을 여러번 사손에게 물었지만, 사손 역시 정확
한 해답을 해주지 못했다. 장무기는 자연히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데 송청서 대신 진우량이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우연하게 이루어진 겁니다. 동해에 금화파파가 있는
데, 워낙 항해술이 뛰어나 집념을 갖고 사손의 행방을 쫓다가 결
국 북해  끝에 위치한 어느  황도(荒島)에서 찾아냈다고 합니다.
금화파파는 사손을 영사도로  데려왔는데 마침 영사도에 두 부녀
가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열과 무청영이라 하며 바로 대리
(大理) 남제(南帝) 일파의  진인들입니다. 그들은 금화파파가 중
원으로 떠난 새에 지키는  사람들을 죽이고 도망쳐 와 산동성(山
東省) 부근에서 위험에 처한 것을 송소협이 구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얘기 끝에 송소협이  금모사왕의 행방을 알아내게 된 것입
니다."

 집법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랬었군."

 장무기도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다. 진우량의 말이 이어졌다.

 "본인은 송소협과 생사지교를  맺은 사이로서 서로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그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후  즉시 계(季), 정(鄭),
두 팔대장로와 같이 다섯 명의 칠대제자들을 이끌고 영사도로 달
려가 사손을 사로잡고  도룡도를 빼앗아 방주님께 바치려 했습니
다. 그런데 뜻밖에도 때마침 마교에서도 많은 고수들이 영사도에
나타났습니다. 우린 목숨을  걸고 그들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인지
라 계장노와  칠대제자 네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영사도에서
있었던 전황에 대해서는  정장로께서 직접 방주님께 보고를 드릴
겁니다."

 불구가 된 정장로가  사람들 틈에서 일어나, 영사도에서 벌어진
명교와 개방의 싸움에 관해  보고했다. 그는 개방이 무더기로 사
손을 협공한 것을 거론하지  않고, 오히려 명교가 인해전술로 나
오는 바람에 자기네들이 선전분투에도 불구하고 패했다고 장황하
게 늘어놓았다. 게다가 진우량이  자기를 살리기 위해 너무나 의
연한 자세로  나오는 통에, 사손이  그의 정기(正氣)에 탄복하여
감히 살수를 전개하지 못했다고 침을 튀겨가며 추켜세웠다.

 대전 안팎에  모인 개방 제자들은, 그의  열변에 모두 격양되어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전공장로  역시 감격해 하는 기색이 역력
했다.

 "진형제는 지용(智勇)을 겸비했는데,  그렇게 의롭기도 하니 실
로 고개가 숙여지는군."

 진우량은 그에게 정중히 몸을 숙였다.

 "저는 방주님과 장로님들의 가르침을 받아 본방의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불바다에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소
한 일로 장로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으니, 오히려 몸둘 바를 모르
겠습니다."

 개방 제자들은 그가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도리어 겸허한
것을 보자 더욱 탄복해 마지 않았다.

 한편, 장무기는 나무 위에서 그의 말을 들을수록 울화가 치밀었
다. 실로 뻔뻔스럽고  비겁한 소인배라 생각되었다. 분명히 친구
를 팔아 목숨을 유지한 것이거늘, 이제 오서 의로움을 앞세워 친
구를 구한 것으로 변조됐으니 이보다 더 치졸한 일이 또 어디 있
겠는가? 그는  워낙 빈틈없이 일을  해치웠기 때문에 정장로마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실로 간웅(奸雄) 중에 대간웅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장무기는 문득 가슴에 와  닿는 게 있어
시무룩해졌다.

 '당시 의부님과 나도 저  자에게 감쪽같이 속았다. 그러나 조민
낭자만큼은 속일 수가 없었지..... 그녀는 역시 누구보다도 영특
해. 그녀가 우리의 적이 아니었더라면.....'

 집법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랭하게 소리쳤다.

 "본방의 많은  형제들이 또 마교에게  희생되었으니, 이 피맺힌
원한을 어찌 갚지 않을 수가 있겠소!"

 개방 제자들은 앞을 다투어 고함을 질렀다.

 "계장로를 위해 복수합시다!"

 "광명정을 잿더미로 만들어 마교를 뿌리째 없앱시다!"

 "장무기를 죽여라! 사손을 죽여라!"

 "본방이 있는 곳에  마교가 존재할 수 없다!  닥치는 대로 죽여
없애자!"

 "방주님! 어서 모든 제자들을 불러모아 마교로 처들아 갑시다!"

 집법장로가 사화룡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주님, 형제들의 피맺힌  한을 풀어 주십시오. 현명하신 분부
가 있길 바랍니다."

 사화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말이야..... 본방의  중대사이니 음..... 음..... 칠대제
자 이하는 우선 절 밖으로 물러가 있으라고 하시오. 우리끼리 모
여 상의 좀 해야겠소."

 집법장로는 대답을  하고 나서 몸을  돌려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외쳤다.

 "방주님의 명령이니, 칠대제자 이하는 모두 밖으로 물러가 기다
리도록 하시오!"

 이때 진우량이 앞으로 다가가 몸을 꺾었다.

 "방주께 아뢰옵니다. 이 송형제는  본방을 위해 큰 공을 세웠으
니, 본방에 가입하는 것을 윤허해 주시면 앞으로 더욱 본방을 위
해 이바지 할 것입니다."

 송청서는 이 말에 이내 안색이 변했다.

 "아니..... 그건.....!"

 순간 진우량이 고개를 돌려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송
청서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떨구더니, 더  이상 아마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개방에 가입하는  문제는 진우량의 일방적인
제의인 것 같았다.

 사화룡은 쾌히 승락했다.

 "그거 좋지. 좋고 말고. 송청서 우리 방에 들어온다면야 당분간
육대제자의 위치에서 팔대장로인  진우량의 통솔을 받도록 해라.
물론 본방의  규칙을 준수해야 된다는 것쯤은  상식이니 내가 더
이상 입을  놀리지 않아도 되겠소..... 아무튼  잘 해봐. 잘하면
상을 줄 것이고 잘못하면 벌을 내릴 거다."

 사화룡은 천하 제일 대방의  방주답지 않게 말주변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한편, 송청서의 눈에는 분노의  빛이 띄어졌으나 곧
억제를 하고 앞으로 다가가 사화룡에게 무릎을 꿇었다.

 "제자 송청서가 방주님께  큰절을 올립니다. 육대제자의 지위를
하사하신 방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어 장로들에게도 일일이 인사를 올렸다.

 집법장로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송형제, 자네가  본방에 가입한 이상  본방의 규칙을 엄수해야
하네. 설령 앞으로 자네가 무당파의 장문인이 된다 해도, 본방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내 말을 알아듣겠는가?"

 그의 말투는 매우 준엄했다. 송청서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집법장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방은 무당파와 더불어 협의를 위해 같은 길을 걸어온게 사실
이지만 나름대로 다른 뜻을 갖고 있네, 하물며 자네는 장차 무당
파의 장문직을 계승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본방에 귀속되려고
하는지 그 까닭을 분명히 밝혀 주길 바라네."

 송청서는 진우량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진장로님이 제자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며 여러모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에, 그  인품을 흠모한 나머지 뒤를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진우량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한집안 식구이니 허물없이 말씀드리겠
습니다. 아시다시피 아미파의 장문인 멸절사태가 죽은 후에 새로
장문직을 계승한 미모의 젊은 여인 주지약은, 송형제와 죽마지우
이며 둘은 일찌기 혼례를  언약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교의
대마두인 장무기가 완력으로  그 여인을 납치해 바다로 데려갔습
니다. 그리고 저는 형제지간의  우애를 생각해 책임지고 그 여인
을 빼앗아 와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장무기는 들을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저런 터무니없는 말을 함부로 지껄이다니.....'

 그는 당장 뛰쳐나가 혼쭐을 내주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이어 사화룡의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고로 영웅은 미인을 좋아한다더니 그 말이 맞긴 맞아. 한 사
람은 장차  무당파의 장문인이 될 인물이고  한 사람은 아미파의
장문인이니 그야말로 짝자꿍  잘 어울리는군. 천생연분에다 천생
배필이야."

 집법장로가 가장 신중했다.

 "정녕 송형제가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왜  장삼봉 장진인 혹은
송대협에게 하소연을 하지  않고 진장로에게 도움을 청했는지 모
르겠구료."

 진우량이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송형제의 말에 의하면, 장무기 녀석은 장취산의 아들로서 장삼
봉은 제자들 중에서 장취산을  가장 아꼈고, 또한 무당파가 근래
마교와 손을 잡으려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선뜻 얘기를 꺼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장삼봉과 송대협이 마교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 할 게 뻔하기 때문이죠. 당금 무림에서 오직 본방만이 마
교와 정면으로 적대시하고 있고,  또한 마교와 대결할 만한 힘을
비축해 놓고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심사숙고한 연후에 저에게 도
움을 청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집법장로는 비로소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런 이유가 있었군.  마교를 멸하고 장무기 녀석을 제거
한다면, 송형제의 염원도 자연히 이루어질 것이오."

 장무기는 나무 위에 몸을  숨긴 채, 여러 가지 생각이 주마등이
되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역 대막에서, 광명정에서, 송청
서가 주지약을 대하는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유별난 데가 있었는
데, 이제서야 그가 주지약에게  흠모의 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쨌든 장무기는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무당 제자가 개방에 가입해선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미리 태
사부님이나 송사백님의 승낙을  받아야 순서이거늘, 그는 단순히
일개 여자로 인해 사문을 배반하고 부친을 배신했으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겠나?  게다가 주지약은 이미 나에게 진심
을 주었는데, 송사형이 개방의  도움을 얻는다고 해서 강제로 그
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송사형은 이미 강
호에 명성이  알려져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인재로 인정돼
있는데, 어째서 저다지도 생각이 부족할까?'

 "방주님께 아뢰옵니다. 제자는 대도 부근에서 마교의 중요한 인
물 한 명을 잡았는데, 그  자는 본방이 계획하고 있는 대업과 밀
접한 관계가 있으니 방주님께서  직접 그 자에 대한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

 사화룡은 매우 기뻐했다.

 "어서 끌어내도록 해라!"

 진우량은 즉시 손뼉을 세 번 쳤다.

 "그 마두를 데리고 와라!"

 곧이어 대전 뒤쪽에서 개방 제자 넷이 한 사람을 끌고 왔다.

 끌려온 자는 두 손이 뒤로  묶여 있으며 약관을 갓 넘긴 젊은이
였는데, 장무기는  호접곡 명교대회 때 그를  본 기억이 있었다.
단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젊은이는 얼굴에 짙은 노기가 깔려, 진우량의 곁을 지날때 갑자
기 그의얼굴을 향해 가래침을 뱉었다.

 진우량은 재빨리  피하며 냅다 그의 뺨을  후려쳤다. 순간 찰싹
하는 소리가 들리며 젊은이의 왼쪽 뺨이 이내 푸르딩딩하게 부어
올랐다. 그를 압송해 온 개방 제자는 등을 떠밀며 호통을 쳤다.

 "어서 무릎을 꿇고 방주님께 큰절을 올리지 못하겠느냐!"

 젊은이는 기침과 함께 이번에는 사화룡의 얼굴을 겨냥해 호통을
쳤다.

 젊은이와 사화룡의 거리가 매우  가까왔고 또한 진력을 잔뜩 끌
어올려 침을 뱉은 탓인지 사화룡은 황급히 피한다고 고개를 숙였
으나,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가래침이 이마에 달라붙고 말았다.
진우량은 대뜸 그 젊은이를 걷어차 쓰러뜨리며 사화룡의 앞을 가
로막고 우악스럽게 호통을 쳤다.

 "이런 발칙한 놈! 죽고 싶어 환장을 했느냐!"

 젊은이는 다짜고짜 욕을 터뜨렸다.

 "이 더러운 거렁뱅이야, 네놈들  손에 잡힌 이상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진우량이 앞을 가로막는 틈을  타서 사화룡은 얼른 가래침을 닦
아 버렸다. 진우량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정중하게 말했다.

 "방주님께 아뢰옵니다. 이 녀석은 마교의 일류 고수로서 사대호
교법왕보다  무공이 뛰어났으니,  절대 과소평가해선  아니 됩니
다."

 장무기는 그의  말을 듣고 처음엔 의아했으나,  곧 깨달은 바가
있었다. 진우량은 방주의 낭패한  입장을 덮어 주기 위해 일부러
상대방의 무공을 고강하다고 과장시킨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사화룡이 개방의  방주이면서 가래침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런 엄청난 수
모를 당하고도 얼굴에 나타난 것은 분노가 아니라 당황한 빛이었
다.

 집법장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진형제, 이 자는 누구인가?"

 진우량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의 이름은 한림아(韓林兒)라고  하며, 바로 한산동의 아들입
니다."

 장무기는 암암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호접곡대회 때 그는  줄곧 부친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
라다녔을 뿐, 나하고 얘기를 나눈 바가 없었으니 선뜻 이름이 떠
오르지 않았군.'

 집법장로는 기뻐하는 눈치였다.

 "아, 그가 한산동의 아들이라고? 진형제, 정말 큰 공을 세웠네.
한산동이 근래에  원군(元軍)을 연패시켜  위명을 떨치고 있으며
그의 부하들 중에 주원장,  서달, 상우춘 등은 모두 마교의 중요
한 인물들이니, 이 녀석을 인질로 잡고 있으면 한산동도 어쩔 수
없이 본방에 무릎을 꿇고 말 걸세."

 한림아는 다시 우악스럽게 욕을 퍼부었다.

 "이 똥물에 빠져  죽을 구더기 같은 놈아!  지금 무슨 잠꼬대를
하고 있는 거냐? 나의 아버님 같은 영웅호걸이 네놈들 같은 비겁
한 소인배의 위협에 넘어갈  것 같으냐?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개
소리 말아라! 나의 아버님은 오직 장교주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너희 개방이 명교와 쟁응을  하려 들다니,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
다가 가랑이가 찢어진 얘기도 못들었느냐? 하기야 무식한 놈들이
니..... 너희들의  방주인지 방귀인지는  몰라도, 아마 장교주의
발바닥을 핥아줄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진우량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히죽히죽 웃었다.

 "한형제, 자넨 마교의 장교주를 신주단지처럼 받들어 모시고 있
는 모양인데, 우리를  그 신주단지에게 안내해 주겠나? 우리에게
도 그 신주단진지 똥단지를 배알할 영광을 줘야 하지 않겠나?"

 한림아는 콧방귀를 날렸다.

 "흥! 장교주는 큰 일을 맡고 있는 분인지라 본교의 형제들도 좀
처럼 뵙기가 힘든데, 네까짓 놈들을 일일이 접견할 틈이 어디 있
겠느냐?"

 진우량은 여전히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듣자 하니 장무기는  이미 원병에게 잡혀가 대도에서 참수형을
당했다는데, 그래도 허풍을 떨 작정이냐?"

 한림아는 발끈하며 침을 내뱉었다.

 "주둥아리 닥쳐라! 몽고 오랑캐가 우리의 교주님을 붙잡아 갔다
고? 천군만마가 그분을 칭칭  포위한다 해도 그림자 조차 건드리
지 못할 것이다. 장교주께서  물론 대도에 간 적이 있지만, 그것
은 육대문파의 인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무슨 참수형을 당했다
고? 네놈의 조상 중에 누가  참수형을 당해 그 귀신이 뒤집어 씌
어져 누구나 다 참수형을 당했다고 헛소리를 하는구나!"

 진우량은 여전히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강호에 소문이 파다하니  믿기 싫어도 믿어야 할 게 아
니냐? 한 가지 묻겠는데, 어째서  최근 반 년 동안 명교의 그 무
슨 한산동이니,  서수휘니, 주원장, 포대화상  같은 이름만 들릴
뿐 장무기라는 이름 석 자가 자라 대가리처럼 쏙 들어갔느냐? 그
게 바로 저승길에 올랐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한림아는 화가 치밀어 눈에 핏발이 곤두서고, 이마에 지렁이 같
은 시퍼런 심줄이 솟아났다.

 진우량은 턱을 삐딱하게 쳐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장무기의 무공과 계집 홀리는 솜씨는 나도 인정하지 않는 바가
아니다. 주 낭자를 농락한 것만 보아도 그 실력을 짐작 할 수 있
지. 하지만 녀석은 비명 횡사할 운명을 타고 났어. 내가 아는 용
한 점장이가 그의 운을 꼽아보니,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라 하더
군....."

 이때 뜨락 우측에 우뚝 솟아 있는 느티나무 위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느끼지 못했
다. 장무기는 이내 긴장되며 그쪽을  예리한 눈빛으로 훑었으나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음..... 나보다 먼저 와  있는 불청객이 있군. 내가 여지껏 느
끼지 못했으니 무공이 상당한 인물 같은데, 대관절 누구일까?'

 한림아의 성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네놈이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피똥싸고 죽을 상이다. 장교주는
성품이 인후하여 누구보다도 천수를 누릴 분이다."

 진우량은 장탄식을 하며 혀를 끌끌 내찼다.

 "하지만 열길 물 속은  알아도 사람의 한길 마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잖느냐? 그는 양의 탈을쓴 늑대이니 관상에 나타난 대로
비명 횡사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지....."

 난데없이 느티나무 위에서 한  줄기의 청색 그림자가 뛰어 내린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 자의 입에서 뜻밖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장무기는 여기 있다! 누가 나더러 비명 횡사했다고 했느냐?"

 그는 한 줄기  회오리바람처럼 대전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대전
문 쪽에 서 있는 장봉용두가 즉시 그 자의 뒷덜미를 향해 나꿔채
려 했으나, 날렵한 신법으로 피했다.

 그제서야 나타난 자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는데, 청색 장
삼에 방건을 쓴 준수하게  생긴 서생이었다. 그리고 얼굴은 백옥
처럼 희고 눈동자는 호수처럼 맑았다.

 장무기는 그 자를 똑똑히  확인하는 순간, 그만 입이 딱 벌이지
고 말았다. 뜻밖에도 남장을 한 조민이었다.

 한편, 개방 제자들은 장무기를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소문만으
로 명교의 교주가 스물  살 가량의 젊은이로서 무공이 지극히 높
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방금 장봉용두의 금나수법
을 피하는 것을 보고  그 뛰어난 신법에 명교의 교주임에 틀림없
다고 믿으며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장무기는 복잡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놀라움과 분노,
그리고 반가움과 가벼운 흥분마저 느꼈다.

 진우량은 남장한 조민을 유심히 살펴보며 눈동자를 교활하게 굴
렸다. 아무리 봐도 소문에  듣던 장무기의 모습과는 똑같지 않았
다. 게다가 음성이 아무래도 여자 같은 느낌이 들어 대뜸 호통을
쳤다.

 "장무기는 벌써 죽었다. 너는 누구인데 그의 행세를 하느냐?"

 조민은 성난 음성으로 외쳤다.

 "장무기는 이렇게 엄연히 살아 있는데, 그게 무슨 망언이냐? 하
늘의 보살핌을 받고 있어  너희들이 모두 죽은 연후에도 백 년은
더 살 것이다."

 장무기는 이 말을 듣자  뭉클한 것이 가슴에 와 닿았다. 조민이
양심의 가책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달리했다.

 '저런 악랄한 여인이 무슨 양심이 있을까? 난 절대 저 아름다운
겉모습에 현혹돼선 안 된다.'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굳게 다졌다. 진우량은 냉소를
날렸다.

 "넌 대관절 누구냐?"

 조민의 태도는 확고했다.

 "내가 바로 명교의 교주 장무기다! 네가 나의 부하를 잡은 모양
인데, 어서 놓아주지  못하겠느냐? 너도 사내 대장부라 자처한다
면 나하고 일 대 일로 승부를 짓자!"

                                                    계속 ---


#2866   진성하   (bearjin )
[김용] 의천도룡기 6권 1장 #6/6               02/24 21:19   486 line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1 장 새로운 바람(風)과 구름(雲) #6/6

 이때 옆에서 한 사람이 코웃음을 치며 나섰다.

 "조민 낭자!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나 송청
서의 눈은  속이지 못할 것이오! 방주께  아뢰옵니다. 이 여인은
바로 여양왕의 딸로서 많은 고수들을 거느리고 있으니 각별히 경
계해야 할 겁니다."

 집법장로가 즉시  입술을 오무려  휘파람을 불더니, 장봉용두를
향해 외쳤다.

 "장봉장로, 속히 형제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적의 공격에 대
비하시오!"

 장봉용두는 즉시 대답을  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삽시간에 절
간 밖에서 우렁찬 기합소리가  들리며, 개방 제자들이 만반의 전
투 태세를 갖추었다.

 조민은 그들의 기세에 위압감을  느끼는 듯 안색이 약간 변하더
니, 이내 손뼉을 치자 두 사람이 사뿐히 담장을 뛰어넘어 들어왔
다. 바로 현명이로인 녹장객과 학필옹이었다.

 "저놈들을 잡아라!"

 집법장로의 외침에 따라 네 명의 칠대제자가 현명이로에게 덮쳐
갔다. 그러나 그들은 현명이로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네 명의 칠대제자는 모두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백발이 성성한 전공장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다짜
고짜 학필옹을 향해 일장을  격출해 냈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
리며 그의 장세는 매우 위력적이었다.

 학필옹은 현명패천장으로 응수했다. 순간 펑! 하는 굉음이 터지
며 쌍방의 장력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거기에 따라 주위에 무
서운 회오리가 일었다. 두  사람은 모두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일장으로선 우열을 판가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연거푸 삼장을 겨루자  전공장로가 뒤로 반 걸음 물러나
며 열세를 드러냈다.한편, 녹장객은 녹각장을 휘두르며 집법장로
와 장발용두를 상대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선뜻 고하를 판가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상막하였다.

 장봉용두는 전공장로의 안색이 빨갛게 상기되어 계속 뒤로 밀리
는 것을 보자,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전공장로라 하면 개
방에서 첫손 꼽는 무공 고수이거늘, 그가 상대방을 당해 내지 못
한다면 더 이상 나설 만한  인물이 없을 것이다. 쌍방이 약 십여
초식을 교환하자 전공장로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백발이 헝클
어져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

 장봉용두는 가가 누구의 도움을  받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지금의 상황으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장봉용
두는 즉시 철봉으로 허공을 가르며 학필옹의 하체를 후려쳐갔다.

 조민은 현명이로가 나타나는 순간 물러갈 생각이었으나, 진우량
이 장검을 뽑아 쥐고  앞을 가로막았다. 조민은 만안사에서 육대
문파 무학의 정수를 배운바 있기 때문에, 즉시 삼검을 떨쳐냈다.
그녀가 전개한 첫 번째  초식은 화산검법이며, 두 번째는 곤륜검
법, 세 번째는 공동파의  검법이었다. 이어 그녀는 네 번째 초식
을 전개했는데, 바로 아미파의 금정구식(金頂九式)이었다

 진우량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민의 변화무쌍한 검초를 도저
히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순간 조민의 장검이 작은 원을 그리며
그의 가슴을 겨냥해 전광석화같이 쳐나갔다.

 진우량으로선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창! 하는 맑은 금속
성이 들리며 한 자루의  장검이 비스듬히 뻗쳐와 조민의 검을 밀
어냈다. 느닷없이 출수한 사람은 다름아닌 송청서였다.

 장무기는 높은 나무 위에서  이들이 싸우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
볼 수 있었다. 송청서가  전개한 무당검법은 힘이 곁들여 있으면
서도 많은  변화가 숨겨져 있었다.  과연 송원교의 진전(眞傳)을
이어받은 게 역력했다.

 진우량은 측면에서  협공을 전개했다.  조민은 비록 각대문파의
절초를 배웠으나  이직은 깊이가 부족했다.  더군다나 혼자서 두
사람을 상대하자니 공격보다 수비에 치중해야만 했다.

 장무기는 내심 초조해 하면서 또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왜  평범한 검을 사용하는  것일까? 의천검을 사용하면
충분히 상대방의 검을 절단시켜 포위망을 뚫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늘 의천검을 갖고 다니는  그녀인데, 오늘은 그 보검을 몸에 지
니지 않았다. 장무기는 잠시 초조해 하다가 절로 자신을 탓했다.

 '장무기야! 저 요녀는  너의 누이동생을 해친 흉수이다. 그런데
넌 그녀의 안위를 걱정해 주다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저승에 있
는 누이를 대할 것이며  의부님과 지약에게도 죄를 짓는 게 아니
냐?'

 이때 개방의  몇몇 고수가 다시 싸움에  가담했다. 그러나 조민
쪽에는 더 이상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녹장객은 시간을 끌수
록 상황이 불리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군주마마, 일단 이곳을 떠나야겠습니다."

 조민도 동감이었다.

 "좋아요. 이 진가 녀석은 장공자를 모함하고 저주를 했으니, 도
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요. 두  분이 알아서 이 녀석 만큼은 단단
히 혼을 내주세요!"

 현명이로는 일제히 대답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군주께선  그 녀석을 우리에게 맡기
고 먼저 떠나가십시오."

 조민이 다시 말했다.

 "저 한림아는 장공자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니, 무슨 수를 써
서라도 구해 줘야 돼요."

 녹장객이 대답했다.

 "어서 떠나십시오. 사람을 구하는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
다."세 사람은  강적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태연스럽게 말을
주고 받았다. 개방 고수들을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대전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사화룡은 구석진
곳에 서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전공, 집법, 두 장로는
조민 등의 대화를 듣자 즉시 명령을 내려 퇴로를 차단케 했다.

 돌연, 녹장객과 학필옹은  싸우던 상대를 제쳐두고 맹렬히 사화
룡에게 덮쳐갔다. 그들은 흡사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처
럼 행동을 같이했다. 그들의  신법은 어느 때보다도 신속 절륜했
다.

 사화룡이 질겁하는 순간,  진우량이 황급히 그를 미륵불상 뒤로
밀어부쳤다. 알고보니,  그는 조민이  현명이로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심상치  않는 낌새를 채고 사화룡의  곁으로 다가간 것이
다.

 현명이로가 격출한 장풍은  미륵불상에 적중되어 흙가루가 분비
했다. 아울러 대전 천장에 맞닿을 만큼 우람한 불상은 엄청난 장
풍에 의해 흔들거렸다.

 학필옹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재차 불상을 향해 쌍장을 밀
어냈다. 꽝! 육중한 불상이  끝내 그의 장풍을 견뎌내지 못해 쓰
러져 내렸다. 개방 제자들이  신으로 받들고 있는 불상이 무너지
자, 모두들 아연실색하며 놀란 외침을 발했다. 그 바람에 혼란이
일었다.

 조민은 그 혼란을 틈타  재빨리 뜨락으로 몸을 날렸다. 그와 때
를 같이하여  송청서와 장봉용두가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붙었
다. 순간, 절문 옆에서 세 자루의 타구봉(打狗棒)이 예리한 파공
음을 일으키며 조민의 하체를 향해 느닷없이 휘몰아쳐 왔다.

 조민은 송청서의  장검과 장봉용두의 철봉을  피하며 다시 몸을
번뜩여 두 자루의 타구봉을 피했지만, 세 번째 타구봉이 왼쪽 발
꿈치에 적중되었다. 그녀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그만 몸의 중
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송청서는  그녀에게 숨돌릴 기회를
주지 않고 검자루로 그녀의  뒷통수를 내리쳐 갔다. 그녀를 기절
시켜 사로잡을 속셈이었다.

 그런데 검자루가 그녀의  뒷통수에 적중되려는 찰나, 홀연 장봉
용두의 수중에 쥐어져 있는 철봉이 비스듬히 뻗쳐와 송청서의 장
검을 옆으로 밀어부치는 게  아닌가! 한 줄기의 그림자가 번개처
럼 담장을 뛰어넘은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송청서는 즉시 몸을 돌려 장봉용두에게 다그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왜 그녀를 도와 달아나게 만듭니까?"

 장봉용두는 버럭 화를 냈다.

 "무슨 소리야?! 자네야 말로 무엇 때문에 내 철봉을 막았나?"

 송청서는 대뜸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분명히 철봉으로 나의 장검을 밀어부치고 나서 오히려.....!"

 장봉용두는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어서 그 계집을 찾자!"

 두 사람은  일제히 몸을 솟구쳐 담장을  뛰어넘었다. 담장 밖에
칠대제자 한 명이 다리가  부러진 채 쓰러져있었다. 장봉용두가
그에게 물었다.

 "그 요녀는 어느 방향으로 달아났나?"

 담장 밖에서 지키고 있던 일곱  명의 개방 제자는 입을 모아 대
답했다.

 "우리는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장봉용두는 화를 냈다.

 "방금 분명 한 사람이  이쪽으로 뛰쳐나왔을 텐데, 모두들 눈이
멀었느냐?"

 육대제자 한 명이 그  다리가 부러진 칠대제자를 부축하며 대답
했다.

 "조금 전에 이 형님이 담장 안에서 뛰쳐나왔을 뿐 그 외엔 아무
도 보지 못했습니다."

 장봉용두는 멍해지더니, 그 칠대제자에게 물었다.

 "자네는 무엇하려고 담장을 뛰어넘었나?"

 칠대제자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하며 대꾸했다.

 "나..... 나는 내 던져진  것이오. 그 요녀의 수법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괴이했소."

 장봉용두는 그녀를 놓쳐 버리자 고개를 돌려 송청서에게 화풀이
를 했다.

 "방금 자네가 검으로 내 철봉을 막지 않았다면, 그 요녀를 때려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대관절 속셈이 뭐야? 본방에 가입하자마자
똥구멍으로 호박씨를 까려는 건가?"

 송청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펄쩍 뛰었다.

 "제가 검자루로 그  계집을 제압하려는데, 장봉용두께서 봉으로
나의 검을 밀어부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요녀가 달아났는데 이
제 와서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립니까?"

 장봉용두는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가 왜 자네의 검을 밀어부
치겠는가? 난 본방에서 수십 년 동안 몸담아 오면서 명색이 장봉
용두이거늘 어찌  외적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묻겠는데,
무슨 속셈으로 그 요녀를 도왔는가? 흥!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이
번 일을 간단하게 묵과하진 않을 걸세!"

 송청서는 무당파에서  비록 제  삼대(三代) 제자지만, 무당파의
문하들은 그가 미래의 장문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설령 유연주, 장송계 등  사숙뻘 되는 사람들도 말을 조심스럽게
했다.

 그런데 지금  장봉용두로부터 힐난하는  문책을 받자 발끈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지 않은가!

 "장봉용두께선 호박씨를 운운했는데, 과연 그 말이 누구에게 해
당되는지 모르겠군요!"

 장봉용두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본디 성깔이 불과
같았다. 그의 입에서 대뜸 욕설이 터져나왔다.

 "이런 발칙한 놈! 너는 위아래도 없느냐? 아니면 무당파의 세력
을 믿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거냐?"

 그는 말을 내뱉기 무섭게  송청서의 면상을 향해 철봉을 떨쳐냈
다. 극도로 분노한 상태에서 전개한 일격이니 만치 그 위력이 엄
청났다.

 송청서 역시 참을 대로 참았다. 그는 당할 수만 없어 즉시 장검
으로 맞이했다. 순간 장검과 철봉이 맞부딪치며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튕겼다.

 송청서는 손목이  얼얼해지는 충격을  느꼈다. 장봉용두는 이미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뛰었다.

 "주리를 틀어 죽일 놈! 이제보니 네놈은 그 요망한 계집의 밑구
멍에서 기어나온 첩자였구나!"

 그는 일단 이성을 잃자  개방의 고수답게 질퍽한 욕설도 서슴치
않았다. 아울러 두 번째도 철봉을 후려쳐 갔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절문 안쪽에서 한  사람이 뛰쳐나와 그의
철봉을 가로막았다.  그는 바로  팔대제자인 진우량이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 살피며 물었다.

 "그 요녀는 어디 있습니까?"

 장봉용두는 송청서에게 삿대질을 했다.

 "저 놈이 놓아 주었네!"

 "아니오. 장봉용두가 놓아 주었소!"

 두 사람이 언쟁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현명이로가 뛰쳐나왔다.
주위를 살펴보니 조민이 보이지 않자 무사히 이곳을 벗어난 것으
로 간주해 즉시 광소를  날리며 일제히 쌍장을 밀어냈다. 가까이
있는 네 명의 개방 제자가 그들의 장풍을 맞자 그 자리에 쓰러졌
다.

 진공장롱, 집법장로가 뒤쫓아 달려왔을 때는 현명이로의 광소가
이미 십여 장 밖에서  메아리쳐 왔다. 그들의 뒤를 추적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조민은 대관절 어떻게 된 것일까?

 알고보니, 송청서가 검자루로 그녀의 뒷통수를 내리치려는 위기
일발의 순간, 장무기는자세한  생각을 굴릴 새도 없이 반사적으
로 고송 위에서 떨어져 내린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치 그가 구사한 신법은 번개처럼 빨랐다. 그
는 한 줄기  빛처럼 떨어져내리기 무섭게 건곤이위신공을 전개해
장봉용두의 철봉을 송청서의 장검으로 밀어부치게 만든 것이다.

 그가 연마한  건곤이위신공만으로도 불가사의한  행동을 연출할
수 있는데, 그간 몇  달 동안 무인도에서 소조가 번역한 <성화령
비결>까지 터득하였으니, 파사삼사(波斯三使)의 괴이한 무공보다
열 배는 더 고강했다.

 그는 비록 창졸간에  행동을 개시했지만 장봉용두와 송청서같은
고수들도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니 장봉용두는
송청서가 장검으로 자신의  철봉을 막았다고 하고 송청서는 그가
자신의 장검을 밀어부쳤다고 굳게 믿는 게 당연했다.

 장무기는 그들이 흠칫 놀라는 순가, 왼손으로 칠대제자 한 명을
나꿔잡아 냅다 담장 밖으로 집어던지는 동시에, 조민을 끌어안고
전광석화처럼 대전 지붕 위로 몸을 솟구친 것이다.

 장무기가 구사한 불가사의한  신법은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은신술에 가까왔다. 물론 미륵불상이 쓰러져 주위에 흙먼지가 뿌
옇게 깔려  있었고, 개방 제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혼란을
빚고 있었기 때문에,  장무기가 득을 보았지만, 칠대제자를 적시
에 담장 밖으로  집어던져 장봉용두와 송청서의 주의력을 그쪽에
쏠리게 한 것이 무엇보다도 주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무공이 높은 자들은 현명이로를 협공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고, 무공이  약한 자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가 번개처럼 나타나 조민을 구해 연기같이 사라진 사실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조민은 죽음의 가장자리에서 난데없이 강한 힘에 이끌려 일학충
천(一鶴沖天)의 기세로 몸이 허공으로 날아가자,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전 지붕 위에 사뿐히  내려선 그녀는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고
얼른 고개를 돌려 자신을 구해 준 장본인을 쳐다보았다. 짙은 눈
썹, 생기가 넘치는 서글서글한 눈동자, 바로 장무기가 아닌가!

 순간, 꿈에서 갓 현실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 꿈인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니.....!"

 장무기는 황급히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가 조민을 데리
고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라면  지붕 위로 몸을 날리지 않았을 것
이다. 그는 이곳에 좀더  남아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개방
이 명교를 상대할 대책을  극비리에 상의하고 있고, 송사형이 뜻
밖에도 개방에  가입했으니 보다 자세한  것을 알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한림아를 구해야겠다는 마음도 작용했다.

 대전 안은 흙먼지로 뒤덮힌 가운데 미륵불상이 쓰러져 아수라장
으로 변해 있었다. 장무기는  처마 쪽으로 옮겨가 절묘한 신법으
로 대전 좌측에 세워져 있는 불상 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대전
안에는 부상을 당한 몇몇  개방 제자들이 쓰러진 채 신음을 하고
있을 뿐, 한림아는 다른 곳으로 끌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주위를 두리번 살폈으나, 몸을 숨길 만한 적당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았다. 조민은  그의 생각을 꿰뚫듯 커다란 가죽북을
가리켰다. 그 북은 높은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으며 우측에 걸어
놓은 거종(巨鐘)과 마주 보고 있었다.

 장무기는 이내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벽에 등을 바싹 붙인 채
큰 북 가까이  접근해 갔다. 이어 북의  일면을 손가락으로 긁자
쇠가죽이 열 십자로 찢어졌다. 장무기는 잽싸게 몸을 날려 그 틈
새를 뚫고 북 속으로 들어갔다. 조민도 잇따라 행동을 전개했다.

 북은 비록 크지만 바닥이 원형을 이루고 있어 두 사람이 들어가
면 몸을 포개야만 했다.  뒤따라 들어온 조민은 서슴없이 장무기
의 몸을 깔고 앉았다. 장무기는 그녀를 밀어내려 했으나 몸을 움
직이기가 불편했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자  그녀의 몸에서 유향
(油香)이 은은히 풍겨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는 애증이
교차되는 야릇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그녀에게 문책할 말이 많았
지만, 이런 상황하에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조민은머리에 쓰고  있는 방건을 벗어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으며 정감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름처럼
치렁치렁한 머리결이 장무기의 얼굴에 와 닿자 흠칫했다.

 '결국 또 그녀를 구해  주고 말았군. 다시는 그녀에게 현혹되지
말아야지.....'

 그는 의식적으로 조민을 밀어냈다. 조민은 자존심이 상한 듯 입
을 삐쭉거리더니, 그의 가슴에 한 차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녀
다운 오기의 표출이었다.

 장무기도 오기가 생겨 무릎을 세워 그녀의 등을 찍었다. 조민은
이 뜻밖의 일격에 심한  고통을 느껴 입을 벌리며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것을 본 장무기는  당황하여 얼른 그녀의 목을 끌어안으
며 다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때 집법장로의 음성이 들려왔다.

 "방주님께 아뢰옵니다. 적은 이미 달아났습니다. 저희들이 무능
하여 적을 제압하지 못했으니 엄벌을 내려주십시오."

 사화룡이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내 어찌 벌을 내리겠소.  그 년놈들의 무공이 심히 고강하다는
것을 모두 직접 보지  않았소?! 빌어먹을, 오늘은 재수가 더럽게
도 없는  날이오. 일진이 좋지 않았던  것뿐이니, 장로와는 아무
상관도 없소."

 집법장로는 정중하게 말했다.

 "너그러움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어 장봉용두와 송청서가 서로 자신들의 고집을 내세우며 언쟁
을 벌이자, 대전  안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사화룡은 진우량의
의견을 물었다.

 "진형제, 자네가 보기에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가?"

 진우량이 곧 대답했다.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우선 장봉용두께선 본방의 원로이시
니,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게 틀림없는 사실일 겁니다. 그러나 송
형제도 자신의 영달을 제쳐두고  본방에 가입했으며, 또한 그 조
민이란 요녀와는 앙숙이므로 절대 고의로 그녀를 도와줄 리가 없
습니다. 필시 그 요사한 계집이 차력타력(借力打力)과 같은 괴이
한 무공을 구사해 용두 형님의 철봉으로 송형제의 장검을 뿌리치
게끔 만든 것 같습니다.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하에서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해 서로 오해가 생긴 모양입니다."

 장무기는 내심 혀를 찼다.  진우량은 과연 심계가 깊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보지 못했으면서도 엇비슷하게 추측을 해
낸 것이다. 사화룡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 분석은 상당히 이치에 맞는군. 모두는 본방을 위해 애를 써
야 하는데, 사소한 일로 대가리 깨지게 싸워서야 되겠나?"

 장봉용두는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설령 내가....."

 진우량이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송형제, 용두 형님은 덕망이  높아 설령 자네를 잘못 나무라셨
더라도 성심껏 받아들여야 당연하네. 자, 어서 사과를 드리게."

 송청서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장봉용두, 소제가 무례한 행동을 취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장봉용두는 방주 등의 이목을  의식해 더 이상 노골적으로 화를
낼 수 없어, 냉소를 날리며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었다.

 "알았네!"

 진우량은 일방적으로 송청서를  몰아세운 것 같지만, 사실 그의
말을 곰곰히 따져보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앞서 조민이 차력
타력과 같은 괴이한 무공을 구사해 용두 형님의 철봉으로 송형제
의 장검을 뿌리치게끔 만든 것 같다고 했고, 이번에는 용두 형님
의 덕망이 높아 설령 잘못 나무라셨더라도 성심껏 받아들여야 한
다고 말했으니, 결국 모든  게 장봉용두의 잘못이란 뜻이 아니겠
는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진우량은 최근 방주에게  가장 신임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문제삼지 않았다.

 사화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진형제, 조금  전에 이곳에 나타나  한바탕 지랄발광을 떨다가
꽁무니를 뺀 요녀가 여양왕의 딸이었다고? 그렇다면 마교와는 으
르렁대는 앙숙일 텐데, 어째서 우리가 그 마교의 마두 새끼 장무
기를 욕하는데 괜히 나서서 열을 내는지 모르겠군."

 진우량이 생각을 굴리며  대답을 하기 전에, 장발용두가 눈살을
찌푸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오랑캐 요녀가 유별나게 마교 교주를 옹호하고 나서는게 아
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때 송청서가 나섰다.

 "그 이유라면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화룡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자네가 속시원히 말해 보게."

 송청서는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교는 비록 조정과 맞서고  있지만, 그 군주 요녀는 장무기에
게 현혹되어 그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입니다. 그
래서 기를 쓰고 그를 감싸고 나선 겁니다."

 개방 사람들은 이 말을 듣자  모두 입이 딱 벌어지며 의아해 했
다.

                                   ----- 제 6권 1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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