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4 권
제 7 장 천응교(天鷹敎)의 반본귀종(返本歸宗)
"여러분들은 내 말을 들으시오. 장대협은 무공이 개세(蓋世)하
고 의박운천(義博雲天)하여 본교에게는 끊을 수 없는 대은을 베
풀었소. 우리는 장대협을 본교의 제 삼십 사 대 교주로 추대 합
시다. 만약에 교주의 명이 있으면 사람들을 호령하여 비도로 들
어가게 할 수 있을 것이오. 교주의 명을 준수하는 건 규칙에 어
긋나는 게 아니오."
양소, 은천정, 위일소 등은 벌써부터 장무기를 교주로 추대하고
자했던 터라 막상 팽화상이 말을 듣자 모두들 찬성했다.
장무기는 얼른 손을 흔들며 말했다.
"소자는 젊고 무식하고 무덕무능(無德無能)한데, 어찌 그같은
중임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저의 사부 장진인께서도 제
게 명하기를 명교에 가입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은천정이 말했다.
"나는 너의 외할아버지다. 내가 너보고 명교에 가입하라고 하겠
다. 설사 외할아버지가 너의 태사부보다는 못하지만 다 비슷비슷
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니 나와 장진인의 말은 모두 못 들은 걸로
하면 되지 않느냐? 명교에 가입하든 안 하든 간에 그건 네 자신
이 결정해라."
은야왕이 말했다.
"외삼촌을 하나 더 보태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옛
말에도 외삼촌을 보면 어머니를 본 것 같다고 했다. 너의 어머니
가 안 계시니 나는 마치 너의 친어머니 같은 생각이 드는구나."
장무기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말을 듣자 내심 괴로웠다.
"왕년에 양교주님께서는 한 통의 유서를 남겨 놓았습니다. 제가
비도에서 갖고 나왔는데, 여러분들의 상처가 완쾌된 다음에 보여
드리려고 했습니다. 양교주님의 유명(遺命)은 저의 의부인 금모
사왕에게 교주의 자리를 물려 주셨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품안에 있는 그 유서를 꺼내 양소에게 건네주
었다.
팽영옥이 말했다.
"장대협, 대장부의 신변에 큰일이 닥쳤을 때는 작은 귀절에 급
급할 수 없소. 사사왕은 당신의 의부이니 마치 친부와 같은 것이
오. 예로부터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고 합니다. 사사왕께
서는 여기에 안 계시니, 당신이 양교주님의 유언을 따라 교주의
존위를 승계하시오."
"옳소! 옳소!"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장무기는 살성(殺聲)이 점차 가까이 들려오자 내심 다급한 나머
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사람을 구하는 게 시급하다. 다른 일은 천천히 상의해
도 된다.'
장무기는 이런 생각을 하자, 즉시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의 의사가 그러하니, 소자가 만약 허락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명교의 대죄인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소자 장무기가 잠
시 명교 교주의 직위를 승계하면서 오늘의 난관을 헤쳐 나가겠으
니, 다음에 여러분들은 다른 현능(賢能)을 선택 하십시오."
그러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비록 대적이 가까이
다가오고 화가 눈앞에 닥쳐왔지만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
르며 모두들 기뻐했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즉시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은천정과 은야왕은 비록 존친(尊親)이었지만 예외 될
수 없었다.
그러자 장무기는 얼른 무릎을 꿇고 답례를 하면서 말했다.
"여러분들 일어나십시오. 양좌사님, 당신이 호령을 전하십시오.
본교의 상하 모든 사람은 일제히 후퇴해서 비도로 들어가라고 하
십시오."
"네, 교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교주님께 아뢰오, 우린 열화
기에게 불로 적을 막으라 명하였는데, 그들은 광명정에 있는 가
옥을 모두 태우고 말았소. 적은 우리가 도주한 줄 알고 있소. 어
찌 하면 좋겠소?"
"이 계책은 아주 묘합니다. 양좌사께서 명을 전하시오. 이 방법
은 왕년에 주장령이 사용했던 것입니다. 계책 자체는 본시 좋은
건데, 그는 이 방법으로 나를 기만했던 것입니다."
양소는 즉시 명령을 하달했다. 각처를 수비하고 있는 교도들을
철수시키고 홍수와 열화기에게 명하여 뒤를 차단하라고 했다. 그
리고 나머지는 각자 비도로 후퇴하라고 명했다. 명교는 주인 입
장이고 천응교는 손님 입장이므로, 천응교의 교중을 먼저 후퇴하
라고 명했다. 따라서 천지풍뢰 사문과 광명정에 있는 사람들과,
예금, 거목, 후토 삼기, 그리고 오산인과 위일소 등도 선후로 후
퇴해 들어갔다. 장무기와 양소가 퇴입한 지 얼마 후 홍수기 사람
들이 나누어서 들어오자 동서 양면의 불빛이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불길은 타오를수록 왕성했다. 열화기의 사람들은 손에 분통(噴
筒)을 들고 끊임없이 서역의 특산인 석유를 분사했다. 그러자 공
격해 온 각 문파의 사람들은 불이 무서워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는 못했다. 단지 사방을 몇 겹으로 포위해서 명교 사람이 빠져나
가지 못하게 할 뿐이었다. 열화기 사람들이 비도에 들어가고 곧
이어 철문을 잠그어 버리자, 가옥들이 쓰러지면서 비도의 입구를
화염 밑으로 감추어 버렸다. 이 화재는 계속 이틀 밤낮을 타도
꺼지지 않았다. 광명정은 명교의 청단으로서 백여 년의 역사와
함께 수백 칸의 아름다운 청당 가옥들이 모두 초토로 변해 버린
것이다.
공격해 온 적들은 불길이 약해지자 화장으로 다가가 뒤적거리며
수색해 보았다. 많은 명교도의 전사자 시체들을 발견했지만 모두
가 얼굴을 식별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명교도들이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택해서 모두 자진한 줄 알고 있었다. 양소, 위일소 등도
모두 화장 안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천응교와 명교 사람들은 비도의 지도가 지시한 대로 나누어서
석실에 입주했다. 그곳은 깊은 지하였기 때문에 비록 위에는 큰
불이 활활 타고 있었지만 비도 안에는 전혀 아무런 소리도 들리
지 않고, 또 하나도 더운 느낌이 없었다. 사람들은 충분한 양식
과 물을 휴대하였기에 한두 달은 나가지 않아도 굶어 죽거나 목
말라 죽을 염려는 없었다. 명교와 천응교의 사람들은 이 비도가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성지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 교
주의 은전으로 들어와서 피난하게 되니 어느 누구도 감히 함부로
떠들거나 행동하지 못했다.
양소 등 수뇌급 인물들은 모두 양정천의 유해 옆에 모여서 장무
기가 어떻게 양교주의 유서를 발견하고 어떻게 건곤이위심법을
연성하게 되었는지를 듣고 있었다. 그는 말이 끝나자 심법을 기
록해 놓은 양피지를 양소에게 넘겨 주었다. 양소는 받지 않고 허
리를 굽히며 말했다.
"양교주님의 유서에 분명히 적혀 있소. <건곤이위심법은 잠시
사손이 보관하고 있으니 나중에 신교주에게 전송하여라> 그러니
이 심법은 당연히 교주님께서 보관하시오."
그러자 사람들은 양정천의 유서를 돌려보면서 모두들 개탄하며
말했다.
"양교주님 같은 인물이 부부의 정 때문에 목숨을 잃을 줄 몰랐
소. 우리가 만약에 진작 이 유서를 보게 되었더라면 오늘 같은
비참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오."
모두는 죽음을 같이한 동료가 참변을 당하는 것과 자신들이 비
참하게 도망다니는 걸 생각하자 모두 이를 갈면서 성곤에게 욕을
했다.
양소가 말했다.
"그 성곤은 비록 양교주 부인의 사형이고, 금모사왕의 사부였지
만, 우리는 전에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소. 그러니 그 사람
은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겠소? 수 십년 전부터 그는 본교
를 섬멸하려고 작심하였던 것이오."
주전이 말했다.
"양좌사, 위복왕, 당신들은 모두 그의 계략에 빠져들었는데도
전혀 느끼지 못했으니 정말 무능하구료."
그는 은천정까지 함께 말하려 했지만, 교주의 체면을 생각해서
<백미응왕> 네 글자를 도로 삼켜 버렸다. 그러자 양소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히 그 성곤 악적은 결국 야왕 형의 장력에 죽고 말
았다."
열화기의 장기사는 이를 갈며 말했다.
"성곤, 그 악적은 그렇게 큰 죄악을 범했는데, 어찌 그처럼 곱
게 죽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토론을 끝마치고 나누어 앉아서 내력으로 상처를 치료
했다.
비도에서 칠, 팔 일이 지나자 장무기의 검상은 거의 완쾌되었
다. 그러자 그는 외상을 입은 형제들을 치료해 주었다. 비록 약
품은 많이 부족했으나 그의 침술과 마사지 기술은 그야말로 착수
성춘(着手成春)이었다. 사람들은 단지 이 소년 교주의 무공의 깊
이를 측정할 수 없는 줄만 알았는데, 그가 의도에도 이처럼 깊은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마치 왕년의 <접곡의선> 호청우가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장무기의 검상은 완쾌되었다. 즉시 구양신
공을 운용하여 양소와 위일소, 그리고 오산인에게 체내에 있는
현음지의 한독을 몰아내 주었다. 삼 일 동안에 여러 고수들은 내
상이 모두 완쾌되었다. 한결같이 의기풍발(義氣風發)하여 비도를
박차고 나가서 공격해온 적을 모조리 토벌하려고 했다. 그러자
장무기가 말했다.
"여러분들의 상처는 이미 완쾌되었으나 내력은 아직 부족하오.
이왕 많은 날을 참아왔으니 며칠만 더 기다려 주시오."
이 며칠 동안 모든 사람들은 열심히 내공을 연마하였다. 무공이
얕은 사람은 도검을 갈고, 무공이 깊은 사람들은 연기운경(練氣
運勁)하였다. 육대문파가 광명정에 위공(圍攻)해 올 때부터 명교
는 시종일관 매를 맞고 모욕을 당했다. 그러니 그 원한이 얼마나
뼈에 사무쳐 있겠는가.
그날 밤 양소는 명교의 교의종지(敎義宗旨), 교도들에게 역대로
전해 내려온 규칙이며 각지에 있는 명교의 지단(支壇)의 세력,
교도들의 수요(首要) 인물의 재능, 성격 등등을 하나하나 장무기
에게 상세히 아뢰었다.
찰랑찰랑하는 쇠사슬 소리가 들리더니 소조가 쟁반에 차 두 잔
을 갖고 왔다. 장무기가 말했다.
"양좌사, 근래 이 어린 낭자는 별다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
니 사슬을 풀어 주어서 그녀를 놓아 주시오."
"교주님의 명이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즉시 양불회를 불러 말했다.
"불회야, 교주님께서 분부하셨으니 네가 소조의 사슬을 풀어 주
어라."
"그 열쇠는 제 방에 있는 서랍에 있는데, 미처 갖고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그럼 됐소. 열쇠는 불에 타지 않으니 얼마든지 다시 쓸 수 있
소."
양소는 딸과 소조가 물러나간 후 다시 말했다.
"교주님, 소조란 계집은 비록 나이는 어려도 몹시 이상한 아이
입니다. 그녀에게 약간의 경계는 하는 게 좋겠소."
"저 작은 낭자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반 년 전, 불회하고 하산하여 놀러다니는데 그녀 혼자 사막에
서 두 구의 시체 앞에서 울고 있는 걸 보게 되었소. 우리가 다가
가서 연유를 묻자, 그녀는 죽은 사람이 자기의 부모라고 했소.
그녀의 아버지는 중원 사람인데 관부에게 잘못보여 일가구가 종
군하며 서역까지 오게 되었소. 며칠 전에 몽고 관병의 등살에 못
이겨서 도망나왔는데, 결국 그녀의 부모는 상발력진(像發力盡)되
어 한꺼번에 죽게 된 것이오. 난 그녀가 어린 나이에 홀로 된 것
도 안쓰러웠고, 비록 용모는 추악해도 말하는 것은 둔하게 보이
지 않아서 그녀의 부모를 묻어 주고 나서 그녀를 데리고 와 불회
의 시중을 들라 하였소."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조의 부모는 모두 돌아가셨구나. 가련한 신세가 나와 똑같
군.'
양소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소조를 데리고 광명정에 돌아온 후, 하루는 내가 불회
에게 무예를 가르치고 있는데 소조도 옆에서 듣고 있었소. 그런
데 내가 육십 사 괘(卦) 방위(方位)를 설명해 주고 있을 때, 불
회는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소조의 눈빛은 이미 정확한 방위를
쳐다보고 있었소."
"아마도 그녀의 머리가 영특하여 깨우침이 불회 누이보다는 조
금 빠른 게 아닙니까?"
"처음에 저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몹시 기뻐했지요. 다시 생각해
보니 의심이 가더군요. 그래서 일부러 불회에게 가르치지 않은
어려운 구결(口訣) 몇 마디를 하면서 일부러 방위를 틀리게 말을
하자 그녀는 이마를 약간 찌푸리며 나의 틀린 점을 발견한 것이
오. 그 후부터는 난 그녀를 경계하고 있었소. 이 어린 낭자가 필
시 어떤 고인의 전수를 받고 몸에 상승무공을 지니고 있으며, 광
명정에 오게 된 것은 무슨 목적이 있다고 생각되었소."
"혹시 그녀의 부친이 역리(易理)를 정통하였고, 그건 가전비학
인 줄도 모르지 않소?"
"문사가 배운 역경은 무공 안에 있는 역리와는 다른 곳이 많습
니다. 만약에 소조가 배운 게 그녀의 부모에게서 전수받은 것이
라면 그녀의 부모는 필시 무림에서는 일류 고수일 텐데, 어찌 몽
고 관병의 등살에 못 이겨서 죽게 되었겠소? 그 때는 그냥 지나
치고 며칠 지난 후에야 그녀의 부모 이름과 신세를 물어 보았소.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전혀 흔적을 보이지도 않
았소. 난 화를 내지 않고 단지 불회에게 몰래 살펴보라고 당부하
였소. 하루는 내가 우스운 얘기를 했는데 불회가 깔깔대며 크게
웃자 옆에서 듣고 있던 소조도 참다못해 웃어 버렸소. 그 때 그
녀는 우리 부녀 두 사람의 등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녀를 볼 수 없는 줄 알았던 모양이오. 마침 불회는 수중에 비수
한 자루를 갖고 있었는데, 그 비수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비추어
주었던 거지요. 그런데 그녀는 불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소. 그
런데 내가 고개를 뒤로 돌리자 그녀는 즉시 눈을 이상하게 하고
입이 비틀어진 괴상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소."
장무기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온종일 그런 괴상한 모습으로 위장하려면 정말 어려운 일일 텐
데요?"
양소는 다시 말했다.
"그래도 난 참고 말을 하지 않았소. 하루는 모두 잠들고 조용한
밤에 난 살며시 딸아이 방에 가서 소조의 행동을 염탐하였는데,
그 계집애가 마침 불회의 방에서 나오고 있었소. 그녀는 동쪽에
있는 가옥을 지나면서 뭘 찾고 있었소.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
여 그녀에게 다가가서 뭘 찾고 있는지, 누가 보내서 광명정에 잠
복하였는지를 물어 보았소. 그녀는 몹시 침착해 전혀 당황하지도
않았고, 아무도 자기를 보내지 않았다고 하면서 단지 여기저기
놀러다니는 걸 즐길 뿐이며 호기심 때문이라고 했소. 난 여러 방
법으로 호통을 쳐보고 유도를 해 보았으나, 그녀는 시종일관 엉
뚱한 소리만 하고 있었소. 그래서 난 그녀를 칠 일 동안 굶기면
서 캐물었으나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소. 그래서 난 교중에서 옛
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 현철(玄鐵) 사슬로 그녀를 묶어 버린 것
이오. 그녀가 행동할 때마다 찰랑찰랑 소리가 나니까, 몰래 불회
를 해칠 염려를 없게 한 것이오.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는 이유
는 그녀의 내력을 알아 내기 위함이오. 교주님, 그 계집은 적이
보내온 염탐꾼이 틀림없을 것이오. 그녀가 팔괘방위(八卦方位)에
정통한 걸 보면 곤륜파가 아니면 바로 아미파일 것이오."
장무기는 웃으면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우리 모두 지하 감옥에서 오랫 동안 갇혀 있었으니, 이제 나가
볼 때도 된 것 같소."
"당장 나갈 것입니까?"
"상처가 완쾌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완쾌된 사람들만 모두 나갑시다. 좋습니까?"
양소가 나가서 명을 하달하자 비도에는 즉시 환호성이 우뢰 같
았다.
사람들이 비도에 들어올 때는 양불회의 방으로 들어왔지만, 나
갈 때는 뒷산으로 통하는 옆문으로 나갔다. 장무기는 맨 먼저 나
가 문을 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밀어내었다. 그리고는 나올 만
한 사람들이 다 나오자 다시 바위를 밀어서 막아 놓았다. 후토기
의 장기사 안원(顔垣)은 명교 중에서 제일가는 신력지사였다. 그
도 운경하여 그 거대한 바위를 밀어 보니, 마치 잠자리가 돌기둥
을 미는 것처럼 바위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혀를 내두르
며 젊은 교주에게 더욱 탄복했다.
사람들은 비도를 나간 후 적에게 발각될까 봐 기침소리도 내지
않았다.
장무기는 큰 바위 위에 서 있었다. 달빛을 빌어 아래를 바라보
니 천응교 사람들은 서쪽의 빈위(貧位)에 나란히 서 있었다. 천
미(天微), 자미(紫微), 천시(天市) 삼당과 신사(神蛇), 백호(白
虎), 청룡(靑龍), 주작(朱雀), 현무(玄武)단은 각각 통솔자에 의
해 질서정연하게 나란히 서 있었다. 동쪽에는 명교 오기인 예금
(銳金), 거목(巨木), 홍수(洪水), 열화(烈火), 후토(厚土), 각기
의 장기사가 본기의 형제들을 이끌고 오행 방위에 나누어 버티고
있었다. 중간에는 양소의 부하인 천, 지, 풍, 뢰 등 사문 문주가
통솔한 광명정 무리들도 보였다. 그 천자문에 속해 있는 것은 중
원의 남자 교도들이고, 지자문의 소속은 여자 교도들이고, 풍자
문의 소속은 석가, 도가 등 출가한 교도들, 그리고 뢰자문의 소
속은 서역 변방 인씨의 교도들이었다. 위일소, 냉겸 등 오산인은
장무기의 뒤에 서서 그를 호위하면서 모두들 조용히 교주의 명령
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무기는 천천히 말을 했다.
"본인은 살생을 많이 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유념
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응교는 은교주께서 이끌고 서쪽에서 공격
하십시오. 오행기는 거목기의 장기사 문창송(聞蒼松)이 통솔하여
동쪽에서 공격하십시오. 양좌사께서는 천자문, 지자문을 이끌고
북쪽에서 공격하십시오. 오산인은 풍자문, 뢰자문을 이끌고 남쪽
에서 공격하십시오. 그리고 위복왕과 본인은 중앙에서 책응(策
應)하겠소."
사람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히고 명에 순순히 따랐다.
장무기는 왼손을 한 번 흔들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가십시오."
네 패의 교도들은 동서남북으로 나누어서 광명정 사방을 포위했
다.
장무기는 위일소에게 말했다.
"복왕님, 우리 두 사람은 비도로 나가서 그들의 허를 찌릅시
다."
위일소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묘책이오."
두 사람은 다시 비도로 들어간 다음 양불회의 방에 있는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많은 기와며 타다 남은 나무 같은
게 잔뜩 쌓여 있어서 빠져 나오기가 힘들었다. 이때 명교의 사람
들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광명정 위에 남아 있는
적들은 이미 그들을 발견하고는 당황한 채 소리를 지르며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장무기와 위일소는 서로 바라보며 살짝 웃었
다.
"저 녀석들이 저토록 의아해 하고 있으니, 싸울 필요도 없이 승
패는 이미 판가름 났소."
두 사람은 반이나 쓰러진 돌담 뒤에 숨어 있었으나, 달빛아래
검은 그림자가 왔다갔다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얼마 후, 설불득과 주전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먼저 다가왔다.
이미 남쪽에서 공격해온 것이다. 그들은 적의 무리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마치 호박을 자르고 야채를 쓸 듯 적을 죽이고 있었다.
이와 함께 은천정, 양소, 오행기 사람들도 일제히 다가와서 적을
공격하니 마치 호랑이가 양떼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광명정에 공격해 온 것은 원래 개방, 무산방, 해사파 등 십여
개 크고 작은 방회였다. 그런데 광명정이 잿더미로 변하고 명교
사라들을 한 병도 잡지 못하자 이미 전승을 얻은 줄만 알고 있었
다. 개방, 거경방 등 반수 이상의 방회들은 요 며칠 사이에 모두
하산해 버려서 광명정에는 오직 신권문, 삼강방, 무산방, 오봉도
네 개 방회 문파만 남아 있었다. 명교 교도들이 갑자기 나타나자
이 네 개 문파에도 고수가 몇몇 있긴 했으나 어찌 양소, 은천정
등의 적수가 되겠는가! 잠깐 사이에 사상자는 반 이상이나 되었
다.
장무기가 몸을 타나내며 낭랑한 목청으로 말했다.
"명교의 고수들은 지금 광명정에 모두 모여 있다. 여러 방회,
문파는 들어라. 다시 싸워 봤자 그대들에게는 불리하니 일제히
병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너희들 목숨을 살려주겠다!"
신권문, 삼강방, 무산방, 오봉도 중에 있는 고수들은 이미 반
이상 사상되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투지를 잃은 지 오래
였다. 그들은 병기를 버리고 모두 투항했다. 이 십여 명의 용감
한 무리가 맹렬하게 저항했으나 순식간에 시체로 변하고 말았다.
십여 일 동안에 무산방 등의 사람들은 이미 산 위에다 많은 오
두막을 짓고 잡시 거주하였다. 거목기 밑에 있는 교중은 다시 벌
목을 하여 오두막을 지었다. 지(地)자 문하에 있는 여신도들은
서둘러 물을 끓이고 밥을 지었다.
광명정 위에는 활활 타오르는 큰 불을 피워 명존화성(明尊火聖)
이 보호해 줌을 감사했다.
백미응왕 은천정이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천응교의 교하 사람들은 들어라! 본교와 명교는 본시 일맥이
다. 이 십여 년 전 본인은 명교의 동지들하고 불화가 있었기에
멀리 떨어진 동남쪽으로 가서 문호를 자립한 것이다. 지금 명교
는 장대협께서 새로운 교주가 되었으니 <천응교>란 이름은 오늘
서부터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모두 교중이
며 우리 모두 장교주의 호령을 들어야 한다. 만약에 복종할 수
없는 자가 있으면 빨리 산 밑으로 꺼져 버려라!"
그러자 천응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천응교의 근본은 명교에서 나온 것이니, 지금 우리는 반본귀종
(返本歸宗)하는 것이오. 우리가 모두 명교에 가입하는 건 대단히
영광스런 일입니다. 은교주나 장교주는 친척간이니 어느 분 교주
의 명령을 들어도 모두 같은 것이오!"
은천정이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부터는 오직 장교주만 존재한다! 누구든 나에게 <은교주>
라 부르면 범상반역(犯上叛逆)이다!"
장무기는 포권을 하며 말했다.
"천응교와 명교가 다시 합쳐진 것은 실로 하늘만큼 큰 경사입니
다. 그러나 본인은 정세에 눌려서 하는 수 없이 잠시 교주의 자
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제 대적도 제거했으니 우리는 다시 교
주를 선출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명교인 중에는 많은 영웅호
걸이 계신데, 본인은 나이도 어리고 배운 것도 없는데 어찌 감히
오래 동안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교주, 당신도 우리를 위해서 생각 좀 해주십시오. 우리가 이
교주의 자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천신만고 끝에 당신을 선출했는데, 당신이 만약에 마
다한다면 당신이 다른 사람을 추천해서 교주를 하라고 하시오.
흥! 누구든 간에 나 주전이 먼저 불복할 것이오. 만약 나 주전더
러 교주를 맡으라 하면 다른 사람이 또 불복할 것이오."
팽영옥이 말했다.
"교주, 만약에 또다시 옛날 같은 비참한 길을 갈 것이라면, 그
때 가서 당신이 다시 구하려 올 것입니까?"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이 사람들의 말이 옳다. 이러한 정세에 놓여 있으니 나로서는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난 교주의 자격도 없거니와 또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여러분들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본인도 더 이상 마다하지 않
고 잠시 교주의 중임을 맡아 보겠소. 그러나 세 가지 조건이 있
으니 여러분들이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은 죽어
도 교주직을 맡지 않겠습니다."
"교주의 명인데 세 가지가 아니라 삼 십가지 일지라도 감히 위
반하지 못합니다. 그 세 가지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남들은 본교를 사마외도(蛇魔外道)라 보고 있습니다. 비록 명
교 외의 사람들이 본교의 진상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하고 있다지
만, 본교의 교도들 수가 많아지면 행실이 방종한 자도 더러 있을
겁니다. 그러니 첫 번째 일은 지금부터 본인 이하 여러분들은 모
두 본교의 규칙을 엄수하여야 하고, 선을 행하되 악을 물리쳐야
하며, 협의지심을 발휘하여야 합니다. 본교의 형제지간은 필히
화목하게 지내서 마치 수족과 같이 되어야 하고, 서로 투쟁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장무기는 주전을 한 번 쳐다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입씨름하며 욕지거리하는 건 무관하지만 손을 쓰는 건 절대로
안 됩니다. 본인은 냉겸 냉면 선생이 형당집법의 직책을 맡으시
길 부탁 드립니다. 규칙을 위반하는 모든 자는 일제히 중벌로 다
스릴 것이며, 설사 본인의 외할아버지나 외삼촌 등 존장도 예외
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옳소!"
냉겸은 한 걸음 다가가서 말했다.
"봉명(奉命)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많이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일은 말하기가 좀 거북스럽습니다. 본교와 중원의 각
문파와는 이미 깊은 원한 관계가 있는 줄은 알고 있습니다. 앞으
로는 절대 각 문파를 찾아가서 원한을 갚으려 하지 맙시다."
사람들은 그의 이 말에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
켰다.
주전이 말했다.
"만약에 각 문파가 다시 와서 시비를 할 때는 어떻게 하면 되겠
습니까?"
"그 문제는 그 때가서 임기웅변하십시오. 만약 상대방이 자꾸
만 억압하면 우리도 가만히 앉아 죽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어차피 우리의 목숨은 모두 교주께서
구해 주셨으니, 교주께서 하라는 대로 우리는 따르겠습니다."
팽영옥이 큰 소리로 말했다.
"형제 여러분, 중원의 각 문파는 우리의 동도들을 많이 살해했
지만 우리도 각 문파의 사람을 많이 죽였소. 만약 쌍방에서 서로
복수하려고 하면 여러분은 점점 더 많이 죽게 될 것이오. 교주께
서 우리에게 복수하지 말라고 명하는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하는 말씀이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옳다고 대답하였다.
장무기는 몹시 기뻐하며 포권의 예를 취하고 말했다.
"여러분의 하해 같은 도량은 실로 무림의 복입니다."
그는 즉시 오행기의 각 기사에게 명하여, 신권문, 무산방 등 문
파방회의 포로를 석방하고 그들에게 명교는 중원의 각 문파들과
다시는 적으로 대적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전해 주고, 포로들의
뜻대로 광명정을 떠나라 했다.
"다음 세 번째 일은 양교주의 유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양 교주
의 유서에 따르면, 성화령(聖火令)을 찾아온 자를 제 삼 십 사대
교주로 승계하고 했습니다. 그가 돌아가신 후 교주의 자리는 금
모사왕 사법왕에게 승계하고 했습니다. 우리는 당장 해외로 나가
서 사법왕을 맞아들여서 그에게 교주의 자리를 승계해야 됩니다.
그런 다음에 성화령을 찾는 방도를 강고해야 합니다. 그 때 가서
본인이 교주직을 물러나면 여러분은 절대 다른 의견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양소가 말했다.
"양 교주의 유언은 이 십여 년 전에 쓴 것이오. 그 때의 시국은
지금과 아주 달랐습니다. 금모사왕은 당연히 모셔와야 되고 성화
령도 마땅히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교주의 직을 맡
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심복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장무기는 양교주의 유명을 절대로 위배해서는 안 된다고 고수하
자, 모두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뜻을 따랐다.
이 세 가지 일은 장무기가 십여 일 동안 계속 생각해 온 것인
데, 사람들이 모두 이를 따르자 장무기는 매우 기뻤다. 즉시 사
람을 시켜서 소와 양을 잡고는 절대로 이 세 가지 일을 위배해서
는 안 된다고 교중들과 피로 맹세하였다.
장무기가 말했다.
"본교의 제일 시급한 큰 일은 해외에 나가서 금모사왕 사법왕을
영접해 오는 것입니다. 이번에 가게 되면 본인이 직접 가야 하니
어느 분께서 동행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말했다.
"교주를 따라서 해외로 같이 나가겠소!"
장무기는 소리를 낮추어서 양소와 잠시 상의한 후 그제서야 낭
랑한 소리로 말했다.
"해외에 나가는 것은 많은 사람이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
나 이번에 나가게 되면 많은 큰 일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양좌사께서는 천, 지, 풍, 뢰 네 문을 이끌고 광명정을
지키면서 총단을 중건하십시오. 금목수화토 오기는 각지로 나누
어 나가서 본교의 분산된 사람들을 모집하여, 우리가 아까 약속
한 세 가지 일을 전해 주십시오. 외할아버지와 외삼촌께서는 천
응교를 이끌고 적이 아직도 본교와 시비할 의사가 있는지 염탐하
시고, 광명우사와 자형룡왕, 두 분의 행방을 알아 보십시오. 그
리고 위복왕께서는 육대파 장문인의 거처로 가서 본교의 의사를
말해 주십시오. 설사 적을 친구로 만들지 못해도 우리의 도리는
해야 합니다. 이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위복왕께서는 반드
시 성사시키시리라 믿습니다. 해외에 나가서 사법왕을 영접하는
일은 본인과 오산인이 동행하겠습니다.
양불회가 말했다.
"아버님, 저도 해외에 나가서 만년빙산의 풍경을 보고 싶습니
다."
"교주에게 부탁하거라. 난 결정할 수 없다."
양불회는 입을 삐쭉거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살짝 웃더니 수년 전 양불회를 서쪽으로 데리고 오던
일이 생각났다. 그녀는 떼를 쓰면서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
라 댔다. 그래서 자기는 빙화도에 있는 여러 기경과 백곰, 바다
표범, 괴어 등 각종 진기한 동물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 가서 보고 싶었던 것이다.
"불회 매자, 바닷길은 몹시 험난하다. 그래도 겁나지 않는다면
양좌사께서도 안심하고 보낼것이다. 그렇게 되면 양좌사와 불회
매는 함께 나를 따라서 해외로 갈 수 있는 거지."
양불회는 박수를 치며 말했다.
"난 두렵지 않아요. 아버님, 우리 둘이서 모두 무기 오빠를 따
라서..... 아니, 교주님을 따라갑시다."
양소는 대답하지 않고 장무기를 바라보면서 그의 의사를 따르기
로 했다.
"정히 그러하다면, 냉 선생의 신세를 져야겠습니다. 냉 선생님
은 광명정에 남아서 잠시 천, 지, 풍, 뢰 네 문을 통솔하시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자 주전은 박수를 치며 발까지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묘합니다, 정말 묘합니다."
설불득이 말했다.
"주형, 뭐가 묘하다는 것이오?"
"교주께서 이토록 냉겸을 의중하시는 것은 우리 오산인의 체면
때문이오. 다시 말해서 망망대해에서 며칠 밤낮을 항해 하게 될
지 모르는데, 양좌사 부녀가 따라가면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얼마나 즐겁겠소? 만약에 냉겸이 같이 가게 된다면 그건 입을 열
지 않는 나무토막이 하나 더 많아진 것이 아니오."
사람들은 일제히 웃어 댔다. 하지만 냉겸은 화를 내지도 웃지도
않는 것이 마치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날 사람들은 양껏 배를 채우고 나서 각자 휴식을 취했다. 장
무기는 양불회에게 소조의 현철사슬을 풀어 주라고 하였지만, 열
쇠를 화장의 초옥 기왓장더미에 잃어 버려서 다시는 찾지를 못했
다. 소조가 담담하게 말했다.
"난 이 찰랑찰랑하는 쇠사슬을 달고 있으면 걸어다닐 때 오히려
듣기 좋아요. 그러니 그대로 차고 있는 게 좋겠어요."
"소조,넌 안심하고 광명정에서 기다려라. 내가 의부를 영접해
돌아오면 그의 도룡보도를 빌려서 너의 사슬을 풀어 주겠다.
소조는 고개를 흔들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장무기는 사람들을 이끌고 냉겸에게 작별을 했다.
그러자 냉겸이 말했다.
"교주, 몸조심 하십시오."
"냉 선생님, 총단을 맡아 수고해 주십시오."
냉겸은 주전에게 말했다.
"괴어가 널 잡아먹을지 모르니 조심해라."
주전은 그의 손을 쥐고 내심 몹시 감동하였다. 오산인의 정은
마치 형제 같았다. 냉겸이 오늘 예상을 뒤엎고 이처럼 말을 길게
한 것은 혹시라도 바다에 있는 괴어가 형제를 잡아 먹을지 몰라
몹시 걱정스러워서 말한 것이다.
냉겸과 천, 지, 풍, 뢰 네 문의 수령들은 광명정의 밑까지 배웅
해 주고 다시 그제서야 작별을 했다.
일행은 백여 리 길을 걸어와 바로 산막에서 야영을 했다. 장무
기는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쪽 끝에서 달그
락달그락하고 금속성이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잠이 깨어 살
며시 소리나는 곳으로 가 보니, 달빛에 작은 그림자가 아른거리
는 것이 보였다. 그는 더욱 빨리 달려갔다.
"소조, 네가 어떻게 여기에 왔지?"
역시 소조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장무기를 보자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며 장무기의 품에 안기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훌쩍훌쩍 우는 것이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울지 마라, 착하지."
소조는 그 동안 많은 설움을 당하고 이제서야 발산할 곳을 찾았
다는 듯이 더 큰 소리로 울어 댔다.
"어딜 가시든 저도 따라갈 거예요."
'이 어린 아가씨는 부모를 모두 잃고 거기다 양좌사(陽左使) 부
녀에게 의심마저 받고 있었으니 정말 가련하구나. 아마 내가 그
동안 잘 대해 주어서 나를 이렇게 따르는 모양이구나.'
장무기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말했다.
"그래, 이제 그만 울어라. 해외에 너도 데리고 가마."
소조는 고개를 들어 웃음을 보였다. 희미한 달빛이 그녀의 자그
마한 얼굴을 비추자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망울엔 아직 눈물이 고
여 있고, 입가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무기도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소조야, 넌 앞으로 크면 정말 아름다울 거야."
"어떻게 아세요?"
장무기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동북쪽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적어도 백여 명이 되는 인마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 위일소와 양소
가 달려왔다.
"교주님, 깊은 밤에 이 많은 인마가 달려가는 것을 보니, 아마
본교의 적인 것 같습니다."
장무기는 소조를 팽영옥 등과 함께 있으라고 하고는 위일소와
양소를 데리고 말발굽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달려가
보니, 사막 한 가운데 말 발자국이 나 있었다. 위일소가 몸을 낮
춰 모래 한 줌을 쥐어 보면서 말했다.
"핏자국이 있군."
장무기도 모래를 한 줌 주워 냄새를 맡아 보니, 피 비린네가 물
씬 풍겼다. 세 사람은 말 발자국을 따라 몇 리를 쫓아갔다. 양소
가 갑자기 모래 위에서 두 동강이 난 칼을 주워 자세히 살펴 보
니, 손잡이에 풍원성(풍遠聲)이란 세 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자는 공동파의 인물이야. 교주님, 아마 공동파가 여기에서
말들을 준비하고 중원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 같습니다."
위일소가 다시 말했다.
"광명정에서 내려온 지 벌써 반 달이 훨씬 넘었는데, 아직도 여
기 있다니 무슨 수작들을 부리고 있는지 모르겠군."
세 사람은 공동파라는 것을 알자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다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이 일째 되는 날이었다. 앞쪽의 초원에서 일행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대부분이 여승들이었는데, 약 칠, 팔 명의
남자도 끼어 있었다. 쌍방이 서로 가까와지자 한 여승이 외쳤다.
"마교의 도적들이예요!"
그들은 그 말에 모두 병기를 뽑아 들고 흩어져 공격 태세를 취
했다. 장무기는 이들이 모두 아미파 사람들인데, 어째서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있는지 이상했다. 더구나 이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아미파 사람들이었다. 그는 큰 소리로 물었다.
"아미파 문하의 사태님들입니까?"
몸이 가냘픈 중년 여승 한 명이 뛰쳐 나와 날카롭게 외쳤다.
"마교의 도적들아, 뭘 물어 볼 게 있느냐? 어서 죽을 각오나 해
라!"
"사태님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어째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겁니까?"
"이 도적들아, 네놈들이 감히 내 이름을 알려고 하다니! 넌 누
구냐?"
위일소가 잽싸게 뛰쳐나와 그들의 무리 속에 들어가 남제자 두
명의 혈도를 찌르고는 목덜미를 움켜잡아 멀리 던져 버리고는 제
자리로 잽싸게 돌아왔다. 그의 동작은 정말 번개와 같았다. 그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분은 바로 당세 무공의 제일인자이시고 담력이 천하무쌍이신
기남자이시며, 좌우광명사 사대호교법왕(四大護敎法王) 오산인,
오행기를 통솔하시는 명교의 장교주이시다. 지금 막 아미파를 하
산시키고 멸절사태의 의천검을 뺏은 훌륭한 인물이시니, 너의 이
름을 물어본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아라!"
위일소가 한참 소리치고 나자 아미파 제자들은 모두 그만 겁에
질렸다.
조금 전에 믿기 어려운 위일소의 무공을 한 수 본 그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중년 여승은 잠시 정신을 차리고 나
서 물었다.
"귀하께선 누구신지요?"
위일소가 웃으며 말했다.
"나의 성은 위요, 별명은 청익복왕이라 하오."
아미파 제자들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모두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놀라고 말았다. 갑자기 그들 중 네 명이 조금전에 위일소
에게 던져진 동문을 구하러 달려갔다.
위일소는 다시 말했다.
"장교주님의 호령에 따라 명교와 육대문파는 무기를 거두고 우
호를 맺었다. 귀동문께서는 이번에 운이 좋아 나 청익복왕이 그
들의 피를 빨지 않았소!"
위일소는 장무기의 구양신공에 의해 치료를 받은 후론 현음지한
독(玄陰指寒毒)을 말아 낸 것뿐만 아니라 체내에 쌓였던 독도 반
이상이나 없어져, 매번 무공을 펼쳐 경력을 소비한 후 추위를 이
겨내기 위해 피를 빨아 먹을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네 사람이
두 동문을 안고 와 점혈을 당한 혈도를 풀어 주려고 방법을 생각
하고 있는데, 갑자기 획! 획! 하고 두 개의 작은 돌맹이가 바람
을 가르고 날아와 두 사람의 혈도를 때렸다. 순간 두 사람은 즉
시 혈도가 풀렸다. 그것은 바로 양소가 탄지신통(彈指神通)으로
정석점혈(挺石點穴)을 펼쳐 보였던 것이다. 중년 여승은 상대의
인원수가 적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잠깐 보인 신
수를 보자 무공이 정말 기괴하리 만치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서 만약 섣불리 공격을 했다간 크게 다칠 것이 뻔한 사실이라,
무기를 거두면서 우호를 맺었다는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아
랑곳 없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빈니의 법명은 정공(靜空)이라 합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저의
사부님을 보셨습니까?"
그 말에 장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존사께서는 광명정을 내려가신 지 반 달이 훨씬 넘었는데, 제
생각엔 지금쯤 옥문관(玉門關)까지는 가셨으리라고 생각되는군
요. 혹 여러분이 이쪽으로 오면서 그분과 엇갈린 게 아닙니까?"
정공 뒤에 서 있던 약 삼십여 세로 보이는 한 여자가 외쳤다.
"사저님,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세 갈래로 나눠 마중을 했고 연
락을 취하는 불화살이 있는데, 어떻게 길이 어긋납니까?"
주전이 그녀의 무례한 말에 몇 마디 나무라고 싶어 입을 열었
다.
"그래요? 그거 이상하군."
그러자 장무기가 낮은 소리로 그를 타일렀다.
"주 선생, 저 여자와 상대할 필요 없습니다. 저들은 자기네 스
승을 못 찾아 마음이 조급해서 그러는 겁니다."
정공은 크게 의심을 하고 있었다.
"우리 스승과 동문들이 모두 명교에게 당한 게 아닌가요? 대장
부라면 자기가 한 일에 자기가 책임을 질 줄 알아야지, 어째 속
이려고 하는 거죠?"
그 말에 주전이 웃으며 대꾸를 했다.
"사실은 아미파에서 자기 주재도 모르고 광명정을 공격하려다,
멸절사태와 그의 문하들은 모두 생포당해 지금 감방에 갇혀 있
고. 자기네들의 죄를 뉘우친다 해도 칠, 팔 년 지나면 그 때가서
풀어줄까 말까 하오."
팽영옥이 잽싸게 주전의 앞을 가로 막았다.
"여러분 믿지 마십시오. 이 주형께서 농담을 한 겁니다. 멸절사
태의 신공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고 그의 문하들의 무예도 하
나 같이 다 고강한데 어떻게 명교에 생포 당하겠습니까? 지금 우
리와 귀하는 이미 단합을 했으니, 아미로 돌아가시면 자연히 만
나실 겁니다."
정공은 그 말을 반신반의하며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위
일소는 웃으며 그녀를 나무랐다.
"우리 주형께서 농담을 하기 좋아해서 한 말이지만, 당당지존
(堂堂之尊)이신 우리 명교 교주께서 당신네 같은 소인배들을 어
찌 속이겠소?"
"마교에서는 항상 간사하고 교활한 계략을 많이 써 왔는데, 어
떻게 믿겠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갑자기 홍수기 장기사 당양(唐洋)이 왼
손을 쳐들었다. 순간 거목기는 동쪽으로, 열화는 남쪽, 예금기는
서쪽으로, 홍수는 북쪽, 후토기는 주위에서 맴돌며 아미파 사람
들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은천정이 큰 소리
로 호통을 쳤다.
"노부가 바로 백미응왕이다. 나 혼자 너희들을 상대해도 너의
같은 소인배들쯤은 모조리 해치울 수 있다. 오늘은 명교에서 너
희들을 용서해 줄 테니, 앞으로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외침은 벼락과도 같이 울렸다. 아미파 제자들은 귀가 쨍쨍
울렸고, 그의 백발과 흰 수염의 당당한 위세에 눌려 모두 겁에
질려 버렸다. 장무기는 읍을 하며 말했다.
"존사에게 전해 주십시오. 명교의 장무기가 안부를 전하더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앞장 서 동쪽을 향해 걸어갔다. 당양은 위일소,
은천정 등 일행이 모두 지나가자 그제서야 손짓을 하며 오행기를
불러 들였다. 아미파 제자들은 그들의 성세에 눌려 겁에 질린 채
장무기 등의 일행들이 멀리 떠나는 것을 멍청하게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팽영옥이 이상하다는 듯이 입을 열
었다.
"교주, 제가 보기엔 여기에 무슨 영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멸
절사태와 저들의 길이 어긋날 리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각 문
파에서 모두 연락을 취하는 신호가 있는데, 전혀 그림자도 보지
를 못했다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걸어가면서, 아미파의 그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사막에서 종적을 감춘 것을 이해할 수 가 없었
다. 더욱이 장무기는 주지약이 걱정됐으나 누구와 의논할 수 없
는 처지였다.
이 날은 날이 저물 때까지 걸었는데, 후토기 장기사 인원은 갑
자기 이상한 것을 느꼈다.
"여기가 좀 이상합니다."
그러면서 숲으로 뛰어가 동정을 살폈다. 그는 한 부하의 손에서
삽을 받아 땅을 파기 시작했다. 조금 파 들어가자 시체 한 구가
보였는데, 얼굴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옷차림으로 보아
곤륜파 제자가 틀림없어 보였다. 후토기 부하들이 달려들어 같이
삽질을 하자 웅덩이 속에서 여섯 구의 시체가 더 나왔다. 모두
곤륜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몸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장무
기는 시체를 모두 다시 안장 시키도록 지시했다. 그들은 모두 서
로 쳐다보며 누가 한 짓인지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었다. 팽영옥
이 의혹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 일은 꼭 진상을 알아 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또 우리가 이
누명을 쓰게 될 거야."
설불득이 다시 말했다.
"모두들 듣게나. 만약 상대가 정정당당히 나선다면 우리는 교주
님의 인솔하에 천하무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누구한테
지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상대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이
상 이제부터는 물을 마실 때나 야영을 할 때나 항상 적의 기습을
조심해야 된다."
명교인들은 그 소리에 모두 네! 하고 한결같은 대답을 했다. 다
시 한참을 걸어오자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독수
리 한 마리가 밑으로 내리치더니 다시 하늘로 치솟았다. 순간 날
개에서 털 몇 개가 떨어져 휘날리며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에게
몸에 무엇으로 적중당한 것이 분명했다. 예금기의 장기사 장정이
의천검에 목숨을 잃은 후, 부기사 오경초는 장무기의 명령으로
장기사로 승진됐었다. 이때 그는 독수리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
각했다.
"제가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부하 두 명을 데리고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따라갔던 한 명이 먼저 돌아와 장무기에게 보고했다.
"교주님께 보고 드립니다. 무당파 은육협이 저 모래 계곡밑에
쓰러져 있습니다."
"뭣이! 육협이 크게 다쳤는가?"
"중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오기사께서 그를 구하러 계곡 아래
로 내려갔습니다....."
장무기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려
갔다. 양소와 은천정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적어도 십여 장 깊
이는 되는 큰 모래 계곡이었다. 오경초는 왼팔로 은이정을 안고
한 걸음 한 걸음씩 매우 힘겨워하며 올라오고 있었다. 장무기는
황급히 달려가 귀를 가슴에 대로 자세히 살펴보니 숨은 아직 쉬
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오경초의 팔에서 은이정을 뺏어 안고 몇
번 몸을 날려 올라와 그를 눕히고 자세히 살펴본 순간, 크게 놀
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은이정은 사지의 뼈마디 마디마다 다 부
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숨은 희미하게 쉬고 있었으나 조금도 움
직일 수가 없었다. 누가 이런 잔인한 수법을 쓰다니, 정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은이정은 아직 기절하지는 않아 장무기를 보자 얼굴에 회색이
감돌았다. 그러면서 입에서 작은 돌맹이 두 알을 내뱉었다. 그는
계곡 밑으로 떨어져 아직 정신을 잃지 않고 있는데, 독수리가 자
기를 물어 뜯으려 덤벼들자 그는 자신의 정순한 내력으로 옆에
있던 돌을 입에 물고 덤벼드는 독수리를 격퇴시켰던 것이다. 이
런 식으로 버티기를 이미 며칠이 됐던 것이다. 공중엔 아직도 네
마리의 독수리가 사람들이 은이정을 버리고 가면 다시 그를 쪼기
위해 빙빙 돌고 있었다. 양소가 돌맹이 네 개를 들어 던지자 꽥!
꽥! 하고 소리내며 모두 머리통이 부서져 땅에 떨어졌다.
장무기는 먼저 그에게 지통호심단(止痛護心丹)을 먹이고 다시
자세히 보니, 전신 이십여 곳의 뼈마디가 부러져 있었다. 상처마
다 모두 무서운 지력에 뼈마디가 부러져 있어 더 이상 접골할 방
법이 없었다. 은이정이 신음소리를 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삼사형과 마찬가지로 소림파..... 금강지력에 당한....."
장무기는 갑자기 옛날에 삼사백 유대암이 당했던 일이 뇌리를
스쳤다. 그도 역시 소림파 금강지력에 의해 뼈마디가 모두 부려
져 가루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십 여 년이 지난 지금 또
한분의 사숙이 소림 금강지에 당한 것이다.
"육숙, 괴로와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이 조카에게 맡기십시오.
누구든 피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혹시 소림파 중에 어떤 인물
이 한 짓인지 육숙님은 아십니까?"
은이정은 고개만 흔들더니 그만 기절해 버렸다. 그는 며칠 동안
이를 악물고 버티어오다 이젠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무기는 자기 부모가 자살한 이유도 바로 삼사백에게 미안한
생각에서 저지른 것인데, 오늘 육사숙이 또 이런 비참한 꼴을 당
하자 더 이상 소림파에 죄인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으면 유삼백이
나 은육숙을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 허무하게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은이정은 기절을 했
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부러진 뼈를 접골하지 못해
유대암과 똑같은 운명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장무기는 경력이 짧고 또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데 언제나 신중
을 기하였다. 그는 훌쩍 멀리 걸어와 작은 모래 언덕에 앉아서
곰곰히 생각했다. 그의 마음엔 두 가지 생각이 서로 교차했다.
소림사에 가 죄인을 찾아 부모와 유삼백, 은육숙의 원한을 갚아
야 할 것인가? 만약 소림사에서 순순히 죄인을 내놓는다면 다행
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명교와 무당파가 합심하여 소림에게 도전
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미 여러 형제들에게 앞으로
절대로 원한을 갚는 행동은 하지 않기로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사건이 직접 나에게 부딪치자 맹세했던 일을 금방 잊어
버린다면, 앞으로 어떻게 그들을 통솔할 것인가? 또 계속 이런
식으로 원한이 원한을 낳게 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칠 것
인가? 그는 너무도 괴로웠다.
이때 날을 이미 어두워, 명교인들은 모두 불을 피우고 솥을 걸
고 밥을 짓느라 부산을 떨었다. 장무기는 혼자서 외롭게 언덕에
앉아 새벽이 되어 해가 뜨려고 할 때까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먼저 소림사에 가서 장문인 공문(空門) 신승(神僧)을 만나 원
인을 설명드리고 나서, 그에게 정당한 대답을 들어야겠다. 그러
나 서로 말다툼이 생겨 꼭 손을 쓰지 않고서는 안 될 때는 어떻
게 하는가?'
그는 장탄식을 토하며 일어서면서 괴로운 심정을 억누를 수 없
었다.
'내가 이 어린 나이에 대임을 맡자, 바로 이런 큰 어려운 문제
가 닥치는구나. 전쟁을 막으려고 해도 이런 사건들만 자꾸 터지
다니..... 명교의 교주라는 중임을 맡았으니 앞으로는 이런 고민
이 그칠 날이 없을 거야. 교주 노릇을 안 한다면 얼마나 좋을
까?'
장무기가 돌아와 보니 모두는 배가 고팠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아직 밥을 들지 않고 있었다. 장무기는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들었
다.
"나를 기다리지 말고 어서들 드십시오."
은이정을 쳐다보니 양불회가 뜨거운 물로 그의 상처를 씻어 주
고 미음을 먹이고 있었다.
은이정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갑자기 두 눈을 부
릅뜨고 양불회를 멍하니 쳐다보며 헛소리를 했다.
"효부매(曉芙媒), 내가 얼마나 당신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시
오?"
양불회는 얼굴이 빨개지며 매우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다
시 미음을 떠 먹였다.
"몇 모금만 좀더 드세요."
"이젠 다시 내 곁은 안 떠나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양불회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이제는 미음이나 좀 더 드세요."
은이정은 매우 기쁜 듯이 미음을 받아 먹었다.
다음날 장무기는 모두 숭산의 소림사로 같아 가서 은이정을 타
상시킨 원인을 알아 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위일소나 주전 등 모
두는 은이정이 중상을 입은 것을 보고 울화가 치밀어 있었는데,
교주가 소림사로 따지러 간다고 하자 모두 즐거워했다.양소는 기
효부의 일로 항상 은이정에게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
런 일이 닥치자 그는 꼭 은이정을 위해 복수를 할 것을 다짐했
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속죄하려는 마음이었
다.
소림사로 향하는 장무기 일행에겐 별달리 이상한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은이정은 잠이 들었다 깼다 했다. 장무기는 그에게 어떻
게 된 것인가를 물었다. 은이정은 아무 설명 없이 망연히 대답만
했다.
"소림사 화상 다섯 명이 나를 협공한 거야. 소림파의 무공이 틀
림없어."
이날 이들은 옥문관에 당도하자 낙타를 팔아 버리고 다시 말로
바꾸었다. 그들은 남에게 발각될까 두려워 장사꾼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 몇 명은 노새를 사서 마차를 끌게 한 후 차에다 약재 같
은 짐을 싣고 장사꾼 행세를 했다.
다음날 새벽, 그들은 깊을 재촉했다. 그들은 감량(甘凉)의 큰길
을 달리고 있었는데, 뜨거운 햇살로 날씨가 매우 덥기 시작했다.
그들이 두 시간 남짓 달려오자 앞에 이십여 그루의 버드나무가
보였다. 그들은 나무 그늘에서 쉬려고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가
까이 가자 버드나무 밑엔 누군가 아홉 명이 앉아 있었다. 여덟
명의 대한들은 모두 사냥꾼 차림새에다 허리엔 칼을 차고 등 뒤
엔 활통을 메고 있었고, 거기다 사냥할 때 필요한 배가 대여섯
마리 있었다. 모두 흑색 털에 날카로운 발톱으로 위세가 당당했
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명은 젊은 공자였다. 남색 비단 옷에 접선
(摺扇)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부귀스러운 모습이었다.
장무기는 말에서 내려 그를 훔쳐 보니, 그의 얼굴이 매우 아름
다와 보였다. 총명한 눈동자엔 흑백이 분명하였고, 백옥으로 된
부채 손잡이를 든 손으로 얼마나 흰지 백옥 손잡이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허리에 찬 장검에 눈길이
쏠렸다. 그의 검집에 의천(倚天)이라는 두 자가 새겨져 있었다.
검의 모양이나 길이로 봐서 바로 멸절사태가 명교인들을 일대 도
살했고, 주지약이 그 검으로 장무기를 죽일 뻔하게 중상을 입혔
던 의천검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전이 참지 못하고 물어보려고 하자, 바로 그 때 동쪽 큰 길에
서 말발굽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한 무리가 요란스럽게 말
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원나라 병사들이었고 약 오, 육십 명은 되어 보였
다. 그리고 그들 뒤엔 백여 명이나 되는 부녀자들이 묶여 말 꼬
리에 끌려오고 있었는데, 모두 잘은 발에 걷기도 힘든데 어떻게
말에 끌려 뛸 수 있겠는가! 어떤 부녀자는 쓰러진 채 질질 끌려
오고 있었다. 이 부녀자들은 모두 한족(漢族)들이었다. 모두 이
원나라 병사들에게 체포돼 그중 반 이상은 이미 옷이 땅에 끌려
다 떨어져 반 이상이나 알몸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 울고불
고 하는 모습이 매우 처절했다. 병사들은 술병을 들고 마시며 어
떤 자는 이미 취하여 부녀자에게 채찍질을 가하고 있었다. 원래
몽고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말 위에서 자라 그들의 채찍질은 매우
훌륭했다. 채찍질 할 때마다 부녀자의 옷이 찢겨져 나갔고, 그들
은 모두 기뻐 날뛰었다.
몽고인..... 중국을 점령한 지 이미 약 백 년이 되었다. 그들은
한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밝은 대낮에 부
녀자들을 학살하고 희롱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심하게 행동한
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명교인들은 화가 치밀어 장무기의 명
령만 떨어지면 모두 뛰쳐나가 그들을 모두 죽이고 싶었다.
갑자기 그 공자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성이 들려왔다.
"오육파, 네가 가서 저 부녀자들을 풀어 주라고 해. 이런 못된
짓을 하다니!"
그의 음성은 여자의 목소리 같이 들렸다. 원병 무리들 중에서
한 군관이 타고 있는 말 위에서 뛰쳐 내려오더니 취한 눈으로 그
를 노려보면서 외쳤다.
"하! 하! 하!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구나. 어른신네가 하는
일을 간섭하다니....."
오육파가 그를 나무랐다.
"야, 이놈아! 대낮에 이런 나쁜 짓을 하다니, 너희들의 우두머
리가 누구냐? 빨리 풀어 주지 못할까?"
그 군관은 나무 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쳐다 보며, 그들의 당
당한 기세에 의아해 했다. 그러면서 그 소년 공자의 두건에 두
개의 큰 구슬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욕심이 생겨 크게 웃었다.
"어이 상공! 이 어르신네를 따라오면 좋은 구령을 시켜 주지."
그 공자는 원래 원병들의 이런 난폭한 행동을 보고도 별로 화내
지 않고 안색이 부드러웠으나, 이 무례한 말에 그만 눈을 치켜
뜨며 화를 냈다.
"한 명도 살려 보내지 마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획! 하고 한 개의 화살이 날아가 그
군관의 가슴을 뚫고 날아갔다. 바로 그 공자의 옆에 있던 사냥꾼
차림의 한 남자가 쏜 것이었다. 그의 놀랍도록 빠른 화살 쏘는
수법과 그 강한 경력은 무림의 일류 고수와 같았다.
연이어 획! 획! 하는 소리와 함께 여덟 명이 모두 화살을 쏘아
댔다. 정말 그들은 백발 백중이었다. 한 개의 화살도 빗나가지
않았다. 원병들은 갑자기 변이 생기자 모두 당황해 하며 그들도
화살로 응수했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 원병은 삼십여 명이나 죽
어갔다. 그러자 남은 원병들은 부녀자들을 내동댕이치고 달아났
다. 여덟 명의 남자들이 탄 말들은 모두 훌륭한 말들이라 번개같
이 쫓아가 곧 원병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러자 소년 공자는 말에 올라 여덟 명을 이끌고 떠나 버렸다.
"여보시오, 잠깐 할 말이 있소!"
주전이 외쳤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덟 명의 호위를 받
고 이미 멀리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장무기와 위일소는 자신들의 경공(勁功)을 시전(施展)하여 그들
을 따라가 자세히 물어볼 수도 있었으나, 그 여덟 명의 신기와
같은 화살로 적들을 죽인 협기가 가상해 내심 그들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실례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양소가 말했다.
"저 공자는 분명 여자가 틀림이 없어. 그리고 저 사냥꾼 차림의
여덟 명은 모두 고수들인데 그녀에게 그렇게 공손하다니! 그 여
덟 명은 궁술이 저토록 신묘한데, 중원의 어느 문파인지 모르겠
군."
양불회와 후토기 등 여러 사람들은 부녀자들을 안심시키고 물어
보니, 근처 촌마을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죽은 시체들 품속에
서 금은 재물들을 찾아 내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모두 돌려 보냈
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며칠간 그들은 항상 그 원병들을 무찌른
아홉 명의 얘기를 나누며, 그들과 친분을 맺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 했다.
주전이 양소에게 물었다.
"양형, 당신 딸도 사실 미녀인데 그 남장을 한 아가씨와 비교하
니, 정말 비교가 안 되는군."
"맞어. 만약 그들이 우리 명교에 가입한다면, 그 여덟 명은 아
마 지위가 오산인 위가 될 거야."
"허튼 소리! 말타고 화살쏘는 무공이 뭐 별건가? 나 주전과 한
번 겨뤄 보라고 해 봐!"
"음! 그러나 무공으로 따지면 냉겸형보다는 한 수 위인 것 같은
데.....!"
명교 오산인 중에서 냉겸(冷謙)의 무공이 제일 뛰어났다. 이것
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양소는 주전과 평소 불목하고 지
내왔다. 서로 겉으로 싸우지는 않았으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
전이 양소에게 말싸움을 걸곤 했었다. 그런데 양소가 여덟 명의
무공을 냉겸보다 높다고 비교하면서 오산인들을 놀리자 화가 치
밀어 무슨 말로 다시 대꾸하려고 했는데, 팽영옥(彭營玉)이 웃으
며 말했다.
"주형, 또 양좌사에게 당했군요. 일부러 당신을 화나게 하려고
한 겁니다."
주전이 크게 웃었다.
"내가 화를 절대로 안 내면 어쩔 수가 없겠지."
잠시 후, 주전은 또 양소의 기마술이 뒤떨어졌다고 비꼬았다.
사람들은 웃음을 멈추고 그들의 말다툼을 말렸다.
은이정은 매일 장무기의 치료 덕택에 정신이 많이 맑아져, 그날
광명정에서 내려온 후 생겼던 일들을 얘기했다.
그날 그는 마음의 안정을 못 찾고 그만 사막에서 길을 잃어 버
렸다. 황사가 날리는 망망한 사막에서 팔, 구 일을 헤매다 다시
원래의 길을 찾았을 땐 이미 무당파 사람과 연락이 끊겼던 것이
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다섯 명의 소림사 중들이 나타나 아
무 말도 없이 갑자기 도전을 한 것이다. 다섯 명의 무공은 모두
매우 고강했다. 은이정이 그 중 두 명을 쓰러뜨렸으나 여전히 숫
적으로 당해 내지 못해 그만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틀림없이 소림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명정에서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후원을 온 자들인지는 모르나,
왜 갑자기 자기에게 독수를 뻗쳤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은이정이 먼저 자신을 소개한 터라 사람을 잘못 알아 볼
리도 없었다.
----- 제 4 권 7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4 권
제 8 장 녹류산장(綠柳山莊)의 괴소녀(怪小女)
그들이 길을 가는 동안 양불회는 모든 정상을 다해 그의 시중을
들었다. 그녀는 자기 부모들이 은이정에게 진 빚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은이정의 모습이 너무 처량해 매우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날 황혼 무렵, 그들은 영등현(永登縣)을 지나 강성자(江城子)
까지 가서 투숙하기 위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소리가 들리며 앞의 큰길에서 두 필의 말이 나란히 달려오고
있었다. 십여 장 거리까지 달려오더니 말에서 내려 매우 공손하
게 길 옆에 서는 것이었다. 그 두 사람은 사냥꾼 차림이었고 바
로 원병들을 화살로 쏴 죽였던 팔웅(八雄)중의 두 인물이었다.
군호들은 기뻐하며 모두 말에서 내려 그들을 맞았다. 두 사람은
장무기의 앞에 오자 허리 굽혀 공손히 인사를 하더니, 그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저희 주인님께서 장교주님의 의협심을 양모해 오셨고, 거기다
여러 영웅호걸분들의 대단함을 익히 들어왔습니다. 저희 주인님
께서 여러분들을 존경하는 뜻에서 소인들에게 저희의 장으로 모
셔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천만의 말씀! 그런데 귀주인을 어떻게 칭호해야 하는지.....?"
"성은 조씨(趙)이나 구명은 저희가 감히 부를 수가 없군요."
여럿은 그들이 자기 주인이 남장한 것을 얘기하자 모두 솔직한
태도에 마음이 기뻤다.
'여러분의 신기와 같은 궁술을 본 후론 그저 매일 칭찬해 왔습
니다. 이렇게 친구로 맺을 수 있다니 정말 영광스럽습니다만, 오
히려 우리가 폐를 끼쳐 드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선 당세의 영웅들이 아니십니까? 오늘 이렇게 저희
고장을 지나가는 마당에 술 몇 잔이라도 대접하고 주인된 도리로
예를 갖출까 합니다."
장무기는 마침 이 영웅 인물들과 사귀고 싶었고, 또한 의천검이
어떻게 그녀 수중에 들어갔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러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두 사람은 희색이 만면하여 말 위로 올라 앞장서 길을 안내했
다. 얼마가지 않아 여덟 명 중의 또 다른 두 명이 말을 타고 달
려와 말에서 내려 길가에 공손히 서서 그들을 영접했고, 또 얼마
를 가자 다시 남은 세 명이 말을 타고 달려와 그들을 영접하는
것이었다. 명교의 군호들은 그들의 빈틈없는 예의에 모두 마음
속으로 흡족해 했다.
청석으로 깔린 큰길을 따라 어느 댁 장원 앞에 당도했다. 장원
의 주위는 도랑물이 흐르고 물가엔 푸른 버드나무가 우거져 있었
다. 감량 일대에서 이런 감상적인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정
말 드문 일이었다. 장문이 열리자 다리가 놓여 있었다. 조소저라
는 주인 아가씨는 여전히 남장을 하고 성문에 서서 이들을 영접
했다.
조소저는 앞으로 나서서 포권의 예를 올리며 인사를 했다.
"명교의 여러 군웅 호걸분들이 이렇게 저희 녹류산장(綠柳山莊)
에 왕림해 주시니, 정말 영광입니다. 장교주님, 그리고 양좌사,
은 노선배, 위복왕....."
그녀는 명교의 인물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기
전에 이름을 일일이 부르는 것이었다. 그것도 명교에서 지위 고
하를 따라 순서대로 부르니,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전은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소저, 어떻게 저희 이름을 다 알고 계십니까? 무슨 점치는 재
주라도 있습니까?"
조소저는 미소를 지었다.
"명교의 군호들의 협명은 강호에 소문난 것인데, 누군들 다 들
었을 겁니다. 그리고 광명정에서 장교주께서 절세의 무공으로 육
대문파를 위압한 사실은 더욱 무림을 놀라게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께서 중원으로 가시는 도중에 많은 무림 친구들의 접대를
받으실 것인데, 어찌 이 소녀가 접대하려고 하는 것이 무슨 대단
한 일이겠습니까?"
명교 군호들은 그녀의 말에 옳다고 생각하며, 기분이 좋으면서
도 겉으론 매우 겸손해 하며 신궁(神弓) 팔웅(八雄)들의 성함을
물었다. 그러자 한 키 큰 남자가 나서서 일일이 소개했다.
"소인은 조일상(趙一傷)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전이패
(錢二敗), 손삼훼(孫三毁), 이사최(李四催), 그리고 저쪽 넷은
주오수(周五輸), 오육파(吳六破), 정칠멸(鄭七滅), 왕팔쇠(王八
衰)라고 합니다."
명교 군호들은 모두 입을 딱 벌리고 기가 찼다. 여덟 명의 성이
백가성(百家姓)에 조, 전, 손, 이, 주, 오, 정, 왕의 순서대로
돼 있는 것도 괴이하지만 이름까지도 모두 불길하지 않은가! 정
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러나 강호에서는 가끔 화를 막고 원수
를 피하기 위해 가짜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아 군호들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조소저가 직접 이들을 대청으로 안내했다. 대청 위에는 <녹류산
장>이라는 네 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고, 중당에는 조맹조가 그린
팔준도(八駿圖)라는 그림 한 폭이 걸려 있었다. 여덟 마리의 말
의 자태는 모두 각각이었고 위세가 당당했다. 왼쪽 벽에는 시 한
수가 씌어져 있었고, 지은이의 이름은 조민(趙敏)이라고 씌어 있
었다. 장무기는 서예에 대해선 별로 조예가 없지만, 그러나 주구
진에게 글씨를 배운 적이 있어서 잘 쓰고 못 쓰고는 조금 알 수
있었다. 시를 보니 글씨가 조금 힘이 약한 것으로 보아 여자가
쓴 것이 분명했다. 장무기는 의서외엔 별로 읽은 책이 없었으나,
시의 뜻은 대략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소저의 이름이 민(敏)이
고 변량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가씨께선 중주구경세가(中州舊京歲家) 출신이군요. 정말 문
무(文武)를 겸한 인재이십니다."
조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교주의 존대인(尊大人)은 은구철획(銀鉤鐵劃)이라는 호칭을
지니신 서예의 명가가 아니십니까?"
그 말에 장무기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열 살 때 아버지를 잃
었으나, 아버지에게서 서예를 전혀 배우지를 못했다. 그 뒤 무공
을 익히고 의술을 배우긴 했으나 서예에 대해선 지식이 천박하였
다.
"아가씨께서 저에게 서예를 부탁한다면, 저는 사실 죽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선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배우지
못한 것이 정말 한스럽습니다."
그러는 사이 하인들이 찻잔을 올렸다. 찻잔엔 연하고 푸른 용정
차(龍井茶)가 떠 있었고, 그 은은한 향기는 코를 찔렀다. 이곳은
강남과 수천 리나 떨어졌는데 신선한 용정차가 있다니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장무기는 이 낭자의 모든 것이 기괴하다고 생
각했다. 조민은 먼저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신 후, 군호들이 모두
차를 마시고 나자 입을 열었다.
"먼길을 오시느라 피로가 쌓였을 것인데, 별로 준비한 것이 없
어서 죄송합니다. 저쪽으로 가셔서 술과 안주를 좀 드시지요."
그러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군호들을 안내하여 복도를 지나
어느 큰 화원으로 데리고 갔다. 화원에는 기괴한 모양의 바위 덩
어리가 널려 있었고 연못의 물은 무척 맑았다. 꽃은 별로 많지
않았으나 매우 우아해 보였다. 장무기는 화원의 운치에 대해선
잘 몰랐다. 그러나 양소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화원의 주인이
용속(庸俗)한 인물이 아니며 큰 뜻을 품고 있는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자에는 이미 주석이 마련돼 있었다. 조민은 장무기
를 자리에 안내하고 신궁팔웅들은 명교 군호들을 안내했다. 은이
정은 몸을 일으킬 수 없어서 한 방에서 양불회가 음식을 먹이며
시중들고 있었다.
조민은 큰 잔에다 술을 채우고 먼저 한 잔을 들이켰다.
"이 술은 십팔 년이나 묵은 소흥여정진주(紹興女貞陳酒)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술맛 좀 보세요."
양소, 위일소, 은천정 등은 조소저가 의협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조심성을 갖고 술잔이나 술주전자
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별 이상이 없는 것 같고 조소저가
다시 술 한 잔을 들이키자 그만 의심을 풀고 마음껏 먹으며 술을
마셨다.
명교 교칙에는 원래 육식을 하지 못하고 술을 마실 수가 없었으
나, 총단을 곤륜산으로 옮긴 후로는 이런 음식상의 금기는 없애
버렸다. 서역(西域)에선 야채를 구하기 힘들었고 육류보다 더 귀
하였다. 그리고 기후가 추운 곳이라 소나 양의 기름기를 섭취하
지 않으면 내력이 약한 사람들은 견디기가 어려웠던 이유에서였
다.
정자 주위의 연못엔 수선화 모양 같은 화초가 칠, 팔 그루가 있
었는데, 수선화보다는 크고 꽃은 흰색이었다. 향기가 아주 우아
했다. 군호들은 꽃향기 속에서 좋은 술을 마시며 기분이 매우 상
쾌했다.
조소저는 술을 마시며 중원 무림의 각파에서 있었던 옛날 얘기
를 했는데, 놀랍게도 은천정 부자까지도 알지 못하는 일까지 그
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소림, 아미, 곤륜의 무공에 대해선 별
로 칭찬을 하지 않았으나, 장삼봉과 무당칠협 얘기가 나올 땐 무
척 추대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명교의 군호들의 무
공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쓰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일일이 칭찬을
빠뜨리지 않았다. 군호들은 매우 기분 좋아하는 한편 그녀에게
탄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스승이 누구냐고 묻자 그녀
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려 버렸다.
조민은 오는 술잔마다 단번에 다 마셨고, 술이 몇 순배 돌고 안
주가 올라올 때마다 그녀는 항상 먼저 먹어 보았다. 그녀의 얼굴
이 빨개지며 취기가 약간 돌자 더욱 아름다와 보였다. 미인이란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니지 않았다면, 교태적인 요염한 아름다움
그 두 가지가 아닌가! 그러나 이 조소저는 아름다움에 어딘가 영
웅 호걸적인 자태가 숨어 있었고, 동시에 매우 부귀 티가 나 단
정하고 근엄한 태도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이 우러나 감히
쉽게 쳐다볼 용기를 주지 않았다.
장무기가 그녀에게 물었다.
"조소저, 이렇게 후대해 주셔서 폐교 상하 모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하마 입이 열
리지가 않는군요."
"장교주, 뭘 그렇게 미안해 할 게 있습니까? 강호 사람이라면
모두 형제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여러분께서 저를 높이 봐 주신
다면 여러분과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무슨 말씀이 있으신지 사
양마시고 물으십시오.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러시다면 묻겠습니다. 조소저께서는 이 의천검을 어디서 얻
은 것입니까?"
조민은 미소를 지으며 허리에 찬 의천검을 탁자에 놓으며 다시
물었다.
"여러분과 만난 후로 모두들 날카로운 눈초리로 이 검만을 쳐다
보셨는데, 무슨 이유가 있으신지 저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
까?"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이 검은 원래 아미파 장문 멸절사태의
검이었습니다. 그 검에 폐교의 많은 형제들이 목숨을 잃었습니
다. 저도 그 검이 나의 가슴을 뚫은 적이 있어서 모두 그 검에
관심이 있었던 겁니다."
"듣자하니, 장교주께서는 무적의 신공을 지녀 건곤이위심법으로
멸절사태의 손에서 이 검을 탈취했었다는데, 이 검에 다치시다니
요? 그리고 장교주를 찌른 사람은 무공이 별로 대단치 않은 아미
파의 어느 젊은 여제자라고 들었는데, 소매(小妹)는 그 점을 정
말 이해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 장무기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을 듯 말듯하
면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장무기의 얼굴이 빨개졌다.
"너무 갑작스럽게 생긴 일이라 정신을 차릴 여유가 없어, 그만
실수를 했습니다."
조민은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 주지약이란 언니가 아름답게 생겨서 당한 것이 아닙니까?"
장무기의 얼굴은 더욱 홍당무가 됐다.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그녀는 술잔을 들어 난처한 입장을 넘기려고 술을 마시려는 순
간, 자기도 모르게 왼손이 떨리며 옷깃에다 그만 술을 몇 방울
흘렸다.
조민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소매는 이제 취한것 같습니다. 벌써 횡설수설 한 것 같아요.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 바로 나오겠습니다. 여러분은 그 동안 사
양 마시고 마음껏 드십시오."
말을 마친 그녀는 포권의 예를 올리고 나서 정자 밖으로 나갔
다. 그러나 그 의천검은 여전히 탁자 위에 놓여져 있었다.
하인들은 부지런히 안주를 올렸다. 군호들은 한참 지나도 조민
이 돌아오지 않자, 주전이 입을 열었다.
"우리를 의심하지도 않고 의천검을 그대로 여기 두고 가다
니....."
말을 마친 주전은 자연스럽게 검을 손에 들더니 이상하다는 듯
이엇! 하고 소리쳤다.
"왜 이렇게 가볍지?"
검을 뽑자 군호들은 모두 놀라 일어섰다. 그 검은 모든 것을 잘
라 대던 날카로운 의천보검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목재검이었다.
군호들은 그 목재검에서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 검은
엷은 황색인 단향목(壇香木)으로 만든 것이었다.
주전은 당황하여 검을 검집에 다시 넣었다.
"양좌사..... 이게..... 도대체 무슨 장난이지?"
그는 평소 양소와 말다툼을 잘했지만, 사실 그는 내심 양소의
넓은 식견에 탄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당황스런 일이 생기
자 자기도 모르게 양소에게 물어본 것이다.
양소는 정색을 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교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조소저가 무슨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 모양입니다. 우린 지금 어떤 위험에 처한 것 같으니, 어서
빨리 여기를 떠납시다."
주전이 장무기가 말하기도 전에 다시 말을 가로막았다.
"까짓것 어린 소녀인데 두려울 것 없어. 감히 무슨 행동을 저지
르진 못할 걸세. 우리 같은 고수들이라면 그들쯤은 모조리 해치
울 수 있다구!"
양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녹류산장에 발을 들여놓은 후론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
습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여
기에 갇혀서 항상 그들의 공격의 위험에 처해 있어야 합니까?"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좌사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제 배도 채웠으니 이제 그만 떠
납시다."
그러면서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철관도인이 장무기에게 물었
다.
"그렇다면, 교주께서는 그 진짜 의천검에 대해 알아 보시지 않
으시렵니까?"
팽영옥이 그의 물음에 나서서 대답을 했다.
"제가 보기엔 이 조소저가 일부러 무슨 의혹을 만들려고 한 것
같은데, 무슨 곡절이 있을 테니까 우리가 그녀를 찾지 않아도 필
시 다시 우리를 찾아올 겁니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린 지금 할일이 있으니 다른 일거리를 만들 필요
가 없습니다. 훗날 모든 것이 드러날 때 다시 해결해도 됩니다."
그들은 정자를 나와 대청으로 돌아와서는 푸짐한 대접에 감사하
다고 말을 전하고는 작별인사를 고했다.
조민이 바쁜 걸음으로 뛰어나왔다. 그녀는 벌써 엷은 노랑색 비
단옷으로 갈아입었는데, 더욱 아름다와 보였다.
"벌써 가시다니요! 이 소녀가 대접을 너무 소홀히 해서 그러십
니까?"
"아닙니다. 정말 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린 급한 일이
있어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으니 훗날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
지요."
조민은 웃을 듯 말 듯 하면서 장원 밖까지 배웅을 했고 신궁팔
웅들은 길 옆에 서서 공손히 손님들을 보냈다.
군호들은 아무 말 없이 포권의 예를 올리고는 말에 올라타 쏜살
같이 달렸다. 산장과 멀리 떨어지자 사방이 평야로 둘러싸여 아
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주전이 큰 소리로 비꼬았다.
"그 조소저가 무슨 나쁜 마음을 품었던 것 같지는 않았네. 그저
목검으로 교주와 장난치려고 한 모양인데, 내가 보기엔 이번엔
양좌사가 잘못 본 것 같군."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말하기는 좀 어렵지만, 그저 무조건 이
상한 느낌이 든 것은 사실이오."
주전이 크게 웃었다.
"쟁쟁하던 양좌사께서 광명정에서 한바탕 싸우고 나더니, 이런
겁장이가 되다니....."
그는 말도 채 끝맺지 못하고 몸이 비틀하더니, 그만 말에서 떨
어지고 말았다. 설불득이 그와 제일 거리가 가까워 재빨리 말에
서 내려 그를 부축했다.
"주형, 왜 그러시요?"
"별것 아닙니다. 술이 좀 과했던 것 같습니다. 머리가 좀 어지
러워 잠을 좀 자고 싶습니다."
그 말에 군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안색이 변했다. 그들도 녹류
산장을 나와 말을 달리면서 모두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술기운에 그런가 하고 모두 신경을 쓰지 않았었
다. 그런데 주전의 높은 무공과 큰 주량에 술 몇 잔 마셨다고 말
에서 떨어질 정도라니 필시 무슨 우여곡절이 있는 것이 분명했
다.
장무기는 고개를 쳐들고 내심 생각을 굴렸다. 왕난고(王難姑)의
독경(毒經)에 의하면, 일종의 무색, 무미, 무취의 독약이 사람의
머리를 어지럽게 할 수 있다고 기록돼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
각해도 도대체 그런 독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군호들과 마찬가지로 마실 만큼 마셨는데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
는 갑자기 번개와 같이 뇌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그는 그만
크게 당황을 했다.
"정자 안에서 같이 술 마셨던 분들은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 그
리고 조용히 정좌를 하시오. 절대 운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리고 오행기와 천응기 형제들은 사방을 둘러싸고 여러 수령들을
보호하시오. 누구든 가까이 접근하는 자는 무조건 처치해 버리시
오."
교주의 엄숙한 명령이 내리자 모두는 병기를 들고 사방으로 흩
어졌다.
"내가 돌아오기 전엔 절대로 자기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군호들은 다만 머리만 좀 어지러운 것뿐이고 별다른 이상도 없
는데, 교주가 왜 그렇게 당황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눈치들이었
다. 장무기는 다시 당부를 했다.
"아무리 어지러워 괴롭다 해도 절대 운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즉시 독이 퍼져 살지 못하게 됩니다."
"아니 어떻게 독이 걸렸지?"
장무기가 몸을 슬쩍 날리자 이미 십여 장 밖에서 달리고 있었
다. 그는 말을 타면 느릴 것 같아 경공을 펼치며 녹류산장으로
달려갔다. 장무기는 마음이 너무 조급했다. 이번엔 극독에 당한
것이라 발작하게 되면 한 시간도 넘기지 못하고 즉사하는 독이었
다. 절대로 현음지와 같이 시일을 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
약 해약을 구하지 못하면 모두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었다.
그는 이십 리 길이나 되는 거리를 눈깜짝할 사이에 달려와 장원
앞에 당도했다. 그는 몸을 날려 쏜살같이 안으로 날아들었다. 문
지기들은 그저 눈앞에 그림자가 획! 하고 지나간 듯 했으나 아무
도 사람이 들어갔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장무기는 곧 바로 후원까지 와 정자 안으로 뛰어들자, 파란색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고 왼손엔 찻잔, 오른손엔 책을 들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바로 조민이었다. 이때 그녀는 벌써 여장으로 갈
아입고 있었다.
그녀는 장무기의 발소리를 듣자 고개를 돌리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조 낭자, 소저에게 화초 몇 뿌리를 얻고 싶소!"
그러면서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몸을 튕겨 반듯이 날으며 연
못 위를 지나 정자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는 눈깜짝할 사이에 벌
써 연못 속의 수선화 같은 칠, 팔 그루의 화초를 모두 뽑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가 발을 수각(水閣)에 딛는 순간 획! 획! 하는
소리와 암기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장무기는 오른손을 휘둘러
암기를 모두 소매 안으로 거둬들이고 다시 손을 휘둘러 암기를
조민을 향해 날렸다.
조민이 몸을 들어 피하자 바람소리와 함께 탁자 위에 주전자,
찻잔, 과일 접시들이 모조리 그의 소매 바람에 연못 너머로 날아
가 떨어졌다. 장무기는 몸을 세우고 화초를 살펴보니, 뿌리에 짙
은 자색의 긴 수염들이 달려 있으며, 수염마다 진주알만한 둥그
런 것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것은 파란색이었는데 꼭 비취
와 같았다. 그는 이미 해약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
았다. 그는 재빨리 그것을 품속에 넣었다.
"해약을 주서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떠나겠습니다."
조민이 살며시 웃었다.
"들어오긴 쉬워도 나가기는 어려울 걸요?"
그녀는 책을 팽개치고 잽싸게 책 속에서 종이장과 같이 얇고 서
리와 같이 흰 단검을 뽑아 들고 그를 덮쳤다.
장무기는 군호들의 생명이 위급해 그녀와 싸울 시간이 없어 오
른쪽 옷소매를 뻗어 소매 안에 박혔던 십여 매의 금침을 그녀를
향해 날렸다. 조민은 몸을 날려 수각 밖으로 피하며 다시 발끝을
튕겨 안으로 들어왔다. 이러기를 수차례, 장무기의 금침은 모두
연못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훌륭한 신법이군."
장무기가 그녀를 추켜올리자 그녀는 두 손을 휘두르며 장무기를
항해 두 개의 단검을 뻗었다.
'이 계집아이가 이토록 악랄하고 잔인하다니, 만약 내가 구양진
경을 터득하지 않고, 왕난고의 독경을 익히지 않았다면, 명교는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두 팔을 벌려 그녀의 검을 뺏어 버릴 자세를
취했다.
조민은 잽싸게 팔을 들어 쌍검으로 번개와 같이 장무기의 손가
락을 자르려고 휘둘렀다. 장무기는 그녀의 검을 뺏지 못하자 순
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러나 그의 무공의 변화는 얼마나 오묘한
가! 그녀의 검을 뺏지는 못했지만, 이미 그녀의 양팔의 혈도를
찔렀다. 그녀는 더 이상 검을 쥐고 있을 힘이 없자 쌍검을 장무
기의 머리를 향해 힘껏 팽개쳤다. 장무기가 잽싸게 피하자 두 검
은 수각의 기둥에 꽂혀 떨고 있었다.
장무기는 내심 놀랐다. 조민의 무공이 양소나 은천정, 위일소
같은 인물에는 훨씬 뒤떨어졌지만, 매우 기민하고 영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검을 잡을 힘을 잃고 떨어뜨리면서도 사람을 향해
해치려고 하다니, 장무기가 조금만 늦게 피했어도 그는 이미 이
두 검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조민은 단검을 잃자 잽싸게 몸을 틀어 목재 의천검이 든 칼집을
잡아들었다. 그러나 검을 뽑지는 않았다. 그녀는 장무기를 향해
칼집을 휘둘렀다. 장무기는 잽싸게 그녀 왼쪽 어깨의 견정혈을
찌르고 그녀가 몸을 피하려고 할 때 바로 오른손으로 그녀의 목
재검을 빼앗아 버렸다. 어찌 그의 건곤이위심법을 피할 수 있었
겠는가!
조민은 몸을 가누고 나서 가볍게 웃었다.
"장공자, 그게 무슨 무공입니까? 바로 그 건곤이위신공입니까?
내가 보기엔 별것도 아닌데....."
장무기가 왼손 손바닥을 벌리자 그의 손엔 한 송이 꽃이 있었
다. 바로 그녀가 머리에 꽂았던 장식이었다. 조민의 안색이 가볍
게 변했다. 장무기가 자기의 그 장식을 뽑은 것을 조금도 느끼지
를 못했던 것이다. 만약 장무기가 그것을 뽑지 않고 바로 자기의
태양혈을 찔렀다면 그녀는 지금 이미 죽어 있어야 했다. 그녀는
재빨리 정색을 하고 가볍게 웃었다.
"나의 그 주화(珠花)가 탐나세요? 그렇다면 강제로 뺏지 말고
얘기했으면 제가 그냥 드렸을 텐데....."
장무기는 그녀의 말에 오히려 난처한 입장이 됐다. 그는 왼손을
뻗어 주화를 내던졌다.
"자, 돌려 주겠소."
그러면서 그는 수각 밖으로 걸어갔다.
조민은 주화를 받으며 그를 불렀다.
"잠깐!"
장무기가 등을 돌리자 그녀는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어째서 내 주화에 꽂혀 있던 제일 큰 진주 두 알을 훔쳤죠?"
"쓸데없는 소리! 당신과 농담할 여유가 없소."
조민은 주화를 쳐들어 보이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것 보세요. 두 알이 없어졌잖아요?"
장무기는 그녀가 일부러 떼어 버리고 무슨 간계를 부리는 줄 알
고 더 이상 그녀와 말다툼을 벌이기 싫었다.
조민은 탁자를 잡고 서서 날카롭게 외쳤다.
"장무기, 용기가 있으면 내 앞으로 삼 보 가까이 올 수 있겠어
요?"
"네 꾀에 넘어갈 내가 아니야!"
그러면서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앞으로 다시 걸어갔다.
조민은 그가 자기 꼬임에 넘어가지 않자,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만 두세요. 오늘 제가 완전히 졌어요. 더 이상 우리 스승을
뵐 면목도 없어졌군요."
그녀는 팔을 젖혀 기둥에 박힌 단검을 하나를 뽑아 들며 외쳤
다.
"장교주, 고맙습니다. 나를 이 꼴로 만들어 주어서....."
장무기는 잽싸게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는 이미 검을 쳐들고 자
기의 가슴을 찔러 버렸다.
"당신 속임수에 넘어갈 것 같소?"
그러나 그녀는 이미 자기의 가슴을 찌르고 비명을 지르며 탁자
모서리에 쓰러지고 있었다. 장무기는 이 소녀가 이렇게 까지 성
격이 악랄할 줄은 정말 몰랐다. 몇 초식에 자기를 이기지 못하자
바로 검을 들어 자진을 하다니, 장무기는 내심 심장을 바로 찌르
지 않았다면 아직 살릴 가망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려 그
녀의 상처를 살피려고 걸어갔다.
장무기가 탁자와 삼 보 가까이 걸어가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는
순간, 갑자기 다리 밑이 허전해지면 자기의 몸이 밑으로 떨어지
는 것이었다.
"앗! 큰일 났구나."
장무기는 운기를 하여 위로 치솟으려고 힘을 쓰며 몸이 공중에
잠깐 머무는 사이에 팔을 잽싸게 옆으로 뻗었다. 장무기가 손가
락 끝이라도 탁자를 건드릴 수만 있었다면, 그는 그 힘을 이용해
서 다시 위로 뛰어오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조민은 자살한 척하
고 연극을 꾸민 후 이미 장무기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 예상을
하고 있었는지 장무기가 탁자를 건드리지 못하게 장풍을 뻗은 것
이다.
순식간에 생긴 일이었다. 쌍장이 부딪치자 장무기의 몸은 이미
반이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급한 나머지 팔을 돌려 조민의 손가
락을 잡은 것이다. 그녀의 손은 부드럽고 미끄러워 빠지려고 하
는 찰나, 장무기는 벌써 그 힘을 빌려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
다. 자칫하면 그의 몸이 밑으로 떨어지는 강한 힘으로 두 사람이
함께 밑으로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순간 쿵! 하고 위의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몸은 순식간에 컴컴한 밑으로
떨어졌다.
사, 오장 길이가 되는 함정이었다. 장무기는 발끝이 바닥에 떨
어지는 즉시 몸을 날려 벽호유장공(壁虎游墻功)의 초식을 이용하
여 뚜껑가지 올라가 뚜껑을 열려고 하였다. 그것은 거대한 철판
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는 건곤이위신공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러나 몸이 허공에 떠 있어 땅에 서 있는 자세와는 달리 몸을
의지할 곳이 없어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철판은 꼼짝도 하지 않
았고, 그의 몸은 이미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조민은 깔깔대고 웃었다.
"그것은 여덟개의 철근으로 걸려 있는 거예요. 아무리 힘이 세
다고 해도 그걸 열진 못할 거예요!"
장무기는 그녀의 간계에 속은 것이 화가 나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로지 빠져 나갈 방법만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사방을 살펴
봐도 차가운 느낌뿐, 조금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호! 호! 호! 장공자, 당신의 벽호유장공은 정말 대단하군요.
이 함정은 순전히 강철로 만들어서 빈틈없이 사방이 미끄럽기만
한데 위까지 올라갈 수 있다니 정말 놀랍군요. 호! 호.....!"
장무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도 나와 같이 떨어졌는데 뭐가 그리 우습소?"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이 계집은 너무 교활해. 함정에 필시 나가는 길이 있을 텐데.
이 계집만 혼자 빠져 나가게 할 수는 없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왜 이러세요?"
"혼자 빠져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살고 싶으면 어서
빨리 뚜껑을 열어!"
"그렇게까지 당황할 필요 없어요. 이 안에서 굶어 죽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걱정이 되는 것은 그들이 내가 산장을 나간 것
으로 알고 있으면 큰일입니다."
"이 함정엔 다른 출구가 없소?"
"생기시기는 똑똑하게 생기셨는데 왜 그리 답답하세요. 이 함정
은 우리가 살려 만든 것도 아닌데 어떻게 다른 출구가 있겠어요?
적을 잡으려고 한 것인데, 일부러 적을 도망가게 다른 출구를 만
들겠어요?"
"그렇다면, 사람이 함정에 빠졌는데 밖에서 모를 리가 있겠소?
빨리 뚜껑을 열게 하시오!"
"내 부하들은 모두 밖으로 내보냈어요. 조금 전에 수각에서 다
른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내일 이때면 돌아올 것이니 조급해
하지 마세요. 여기서 푹 쉬세요. 조금 전에 배불리 잔뜩 드셨으
니까 배가 고플 리는 없을테니."
장무기는 화가 치밀었다. 그가 여기에 오래 있는 것은 상관없지
만, 그러나 외할아버지나 군호들의 목숨이 촌각을 다투고 있었
다. 그는 이성(二成)의 힘을 들여 손에 힘을 주며 외쳤다.
"나를 즉시 여기서 내보내지 않으면, 먼저 당신을 죽여 버리겠
소!"
"나를 죽인다면 영원히 여기서 나갈 생각을 마세요. 여보세요.
어째 여자의 손을 이렇게 잡고 있는 거예요. 빨리 놓으세요!"
장무기는 그 말에 그녀의 손을 놓고 벽에 기대고 앉았다. 이 함
정은 사방이 몇 자 되지 않아 그녀와의 거리는 한 발짝 사이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조급하기도 하고 화도 치밀었다.
"우리 명교와 당신은 만난 적도 없고 서로 아무 원한도 없는데,
왜 우리를 모두 죽이려고 하는거요?"
"당신은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요. 이왕 말이 나왔으니 처
음부터 말씀 드리지요. 내가 누군지 아세요?"
그는 그녀의 내력과 목적을 알고 싶었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천
천히 얘기를 하게 되면 군호들의 목숨은 부지할 수 없는 것이 아
닌가! 그리고 사실인지도 의심스럽고, 만약 이 여자가 시간을 끌
기 위해 거짓을 꾸며 대도 별도리 없지 않은가! 그는 그녀를 협
박해서, 뚜껑을 열게 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누군지 지금 들을 여유가 없소. 어서 빨리 사람을 불러
나를 내보내지 않겠소."
"부를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여기서 소리쳐 봤자 위에들리지
도 않아요. 못 믿으시겠다면 당신이 소리를 쳐보세요."
장무기는 화가 끝까지 치밀어 왼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움켜잡
았다. 조민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빼려고 했지만 이미 옆구리에
혈도를 찍히고 말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목을 눌렀다.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이면 너는 죽은 목숨이 된다는 걸 알아야
해!"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그녀가 숨을 쉬기 어려워 헐떡거
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조민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나를 이렇게 괴롭히다니!"
장무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뚜껑을 열게 할 목적이었지 당신을 괴롭히려고 하는 건 아니
요!"
"문을 안 열겠다는 것이 아니잖아요? 좋아요, 사람을 부르겠어
요! 거기 누구 없느냐? 뚜껑을 열어라! 내가 이 안에 갇혔어!"
아무리 목청을 높여 외쳐도 조용하기만 했다.
"이것 봐요, 아무 소용도 없잖아요!"
장무기는 정말 울화통이 터졌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울다가 웃다가 그게 무슨 꼴이오!"
"당신이야말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약한 여자를 괴롭히다니요!"
"약한 여자? 교활한 간계를 따지면 남자 열 명보다 더 무서운
여자야!"
"과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무기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매우 조급했다. 만약 이대로
있다간 명교 전군이 멸망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찍!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치마가 한 쪽 찢겨
나갔다. 조민은 장무기가 갑자기 엉뚱한 행동을 하려고 하는 것
으로 알고 당황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나를 여기서 내보낼 것이라면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면 돼!"
"어째서요?"
장무기는 아무 말도 않고 찢겨진 옷자락에 침을 적셨다.
"죄송합니다. 이럴 수밖에....."
그는 옷자락으로 그녀의 코와 입을 막았다. 조민은 숨을 쉴 수
가 없었다. 잠시 지나자 가슴이 막혀 무척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끝끝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잠시 뒤 그녀는 몸을 꿈
틀거리고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그녀의 손목을 짚어보니 맥박이
희미하게 뛰고 있었다. 장무기는 할 수 없이 그녀의 코와 입을
막았던 옷자락을 떼어 버렸다. 조민은 곧 신음소리를 내며 깨어
났다.
"맛이 어떻소? 자, 이래도 나를 내보내지 않겠소?"
조민은 이를 악물었다.
"백 번을 기절해도 내보내지 않을 거예요. 아예 나를 죽이세
요!"
그녀는 자기의 입을 닦았다.
"툇! 당신의 침 냄새가 지독하군."
장무기는 그녀가 이렇게 버티자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급해졌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는 별 수 없이 무례를 저질러야겠
소. 용서하시요!"
그는 그녀의 왼발을 잡아 신발과 양말을 벗겼다. 조민은 놀라면
서도 화가 치밀었다.
"이놈아,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장무기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그녀의 오른발을 벗겼다.
그리고 나서 두 손의 중지로 그녀의 발바닥 용천혈(湧泉穴)을 누
르고 구양신공을 운공했다. 뜨거운 기운이 그녀의 용천혈에서 움
직였다.
용천혈은 발바닥 중심에 있기 때문에 바로 족소음신경(足少陰腎
經)의 기점이라 감각이 제일 예민한 곳이었다. 장무기는 의술에
통달해 이치를 모를 리가 없었다. 평소 어린애와 장난칠 때도 발
바닥을 간지럽히면 참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장무기는 구양
진공의 뜨거운 기운으로 그녀의 발바닥을 간지럽히니 조민은 깔
깔 웃어 대며 참지를 못했다. 그러나 혈도를 찔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어떤 고통보다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깔깔 웃다 그만 참지를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장무기는 그녀가 가없지만 별 수가 없어 계속 간지럽혔다.
"이놈아, 이 도적놈아..... 언제던..... 내가 꼭 너를 찔러 죽
일 것이다. 좋다, 그만 나를 용서해 줘. 장..... 장공자..... 장
교주..... 엇.....엇!"
"내보내 줄 것이요. 안 내보내 줄 것이요!"
"어서 멈추..... 세요!"
"나를 용서하시요."
장무기는 그제서야 멈추고 나서 그녀의 등을 주물러 혈도를 풀
어 주었다. 조민은 씩! 씩! 거리고 있었다.
"신발을 신겨 주세요!"
장무기는 그녀의 왼발을 잡고 신발을 신기며, 조금 전엔 별 생
각이 없이 한 짓이지만 이번엔 그녀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발의
감촉이 오자 그만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조민은 다리를 오그리
며 수줍음으로 얼굴이 빨개졌다. 다행히 어두워 장무기가 그 모
습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신고 나자 갑자
기 이상한 충동이 생겼다. 장무기가 다시 자기의 발을 만져 주었
으면 하는 충동이었다. 그러나 장무기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
다.
"어서 빨리 나를 내보내라!"
조민은 아무 말도 않고 벽에 그린 동그란 원을 찾아 검을 거꾸
로 들어 손잡이를 거기다 대고 몇 번을 가볍게 쳤다. 그러자 스
르르 빛이 스며들며 뚜껑이 열렸다. 원이 그려진 곳에 작은 구멍
이 있어 그녀가 암호에 따라 신호를 하니, 기관의 책임을 맡은
자가 즉시 문을 연 것이다.
장무기는 그녀가 약속대로 곧바로 문을 열어 주는 솔직함에 또
한 번 놀랐다.
"자 같이 나갑시다."
조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인 채 옆에 서 있었다.
장무기는 자기가 한 소녀를 그렇게 괴롭힌 것이 못내 미안했다.
그는 읍을 올리며 사과를 했다.
"조소저, 조금 전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조민은 몸을 돌려 벽을 보며 어깨를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잔인하고 교활할 때는 장무기는 그녀와 별생각 없이 상
대를 했었지만, 지금은 어딘가 미안한 감이 들었다. 그녀의 가냘
프고 부드러운 뒷모습, 그리고 백옥과 같이 흰 피부, 늘어진 머
리카락..... 그는 그녀가 가련한 생각마저 들었다.
"조소저, 그만 가겠소. 실례가 많았습니다."
조민은 어깨를 살짝 움직였지만 역시 돌아서지는 않았다.
장무기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벽호유장공을
펼쳐 기어올라가 몸을 밖으로 날렸다. 그러면서 그는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행여나 누가 밖에 숨어 있다가 갑작스런
기습이라도 할까 봐 대비한 것이었다. 사방을 둘러 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는 또 다른 일이 생길까 봐 담을 넘어 명교 군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그는 함정서 한참을 지체해 해는 벌써 서산
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장무기는 은천정 등 군호들이 어떻게 됐는지 몰라 조급해 하며
발걸음을 더 빨리 재촉했다. 잠깐 사이에 그들에게 가까이 온 그
는 그만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고의 기병들이 원을 그리고 달리며 명교 군호들을 포위하고
군호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본교의 수령
들이 모두 중독당해 명령을 내릴 자가 없으니 어떻게 저들을 막
아낼 것인가. 장무기는 당황하며 쏜살같이 달려갔다.
좀더 가까이 접근하자 맑은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예금기는 동북쪽을 공격하고, 홍수기는 서남쪽으로 그들을 포
위하세요."
바로 소조의 음성이었다. 곧 예금기는 동북쪽으로 공격하고 홍
수기가 서남쪽을 공격하자 원병들은 양쪽으로 나눠 그들과 맞섰
다. 그러자 갑자기 중앙에서 황기를 든 후토기와 청기를 휘두르
는 거목기 부하들이 한복판을 뚫고 나가는 것이었다. 두 마리의
청룡과 황룡이 용솟음치는 것 같이 보였다. 원병들은 그만 혼란
을 일으키며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장무기는 몸을 몇 번 날려 군호들 앞에 떨어졌다. 모든 교인들
은 교주가 나타나자 사기가 크게 올라 소리를 지르며 병기를 마
구 휘둘렀다. 은천정, 양소, 주전 등 군호들과 오행기 장기사 모
두는 조용히 앉아 있었고, 오히려 소조가 깃발을 들고 호령을 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작은 언덕 위에 서서 교도들을 지휘하
고 있었던 것이다. 오행기, 천응기 교도들의 무예는 모두 높지
만, 수령들이 모두 중독(中毒)을 당하자 일시에 당황을 하고 혼
란이 생겼는데, 소조가 팔괘진으로 그들을 지휘하자 원병들이 쉽
게 공격을 못했던 것이다. 소조는 장무기를 보자 기뻐하며 외쳤
다.
"장공자, 빨리 와서 지휘하세요!"
"나보다도 네가 더 잘하는구나. 나는 군관이나 몇 명 처치 해야
겠다."
획! 획! 하고 화살이 장무기를 향해 날아왔다. 장무기는 한 교
도의 손에서 긴 창을 뺏어들었다. 그리고는 날아오는 화살을 모
두 막아내며 긴 창을 화살과 같이 날리자, 그 긴 창은 한 명의
원병 수령의 가슴을 뚫고 날아가 떨어지며 원병의 앞에 꽂혀 버
렸다. 원병들은 모두 놀라 다시 뒤로 수십 보를 후퇴했다.
갑자기 멀리서 십여 명의 기병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
다. 맨 앞에서 달려 오는 자는 바로 조민의 밑에 있던 신궁팔웅
이었다.
'이 팔인의 궁법은 매우 높은데, 만약 저들이 화살을 날린다면
많은 교도들이 당할 것이다.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만 된다.'
장무기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팔웅 중에 우두머
리격인 조일상이 금색으로 된 짧은 용머리 지팡이를 휘두르며 외
쳤다.
"주인의 명령이다! 즉시 군사를 철수시켜라."
원병을 통솔하던 대장이 뭐라고 몽고 말을 지껄이더니 그만 말
머리를 돌려 달려가 버렸다.
전이패가 큰 쟁반을 안고 장무기의 앞에 걸어와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저희 주인께서 장교주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쟁반에는 황금색으로 된 상자가 놓여져 있었다. 장무기는 그것
을 손에 쥐면서 그녀가 또 무슨 수작을 벌이는 것인가 하고 생각
했다. 전이패는 허리 굽혀 인사를 올리고 뒤로 물러서 말에 올라
되돌아갔다.
장무기는 상자를 소조에게 건네주고는 군호들의 병세가 위급해
상자 속에 무슨 물건이 들었는지 볼 여유가 없었다. 그는 깨끗한
물을 떠오게 하고 가져온 해약을 물 속에 넣어 휘젓고 나서 중독
된 사람들에게 나눠 마시게 했다. 수각에서 술을 마신 사람은 구
양신공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장무기만 중독되지 않았고 모두 독에
걸린 것이다. 다만 양불회는 은이정의 시중을 드느라 중독되지
않았고, 소조 역시 교도들과 다른 방에 있어서 독을 피할 수 있
었다.
반 시간쯤 지나자 군호들은 체내의 독이 해독되어 머리가 더 이
상 어지럽지 않았다. 다만 전신이 피로했다. 그들은 중독된 원인
과 해약을 얻게 된 원인을 물었다.
"우린 모든 것에 신경을 쓰고 있어서 음식에 독이 들었었다면
즉시 알 수 있었을 텐데, 그 조 낭자가 독을 쓴 방법은 나도 기
가 찰 노릇이었소. 이 수선화와 같은 이것은 이름이 취선영부(醉
仙靈夫)라고 합니다. 구하기는 힘들지만 독은 없습니다. 그 가짜
의천검은 바닷속의 기준향목(寄駿香木)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자체에도 독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향기가 어울리게 되면
극독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주전이 자기의 다리를 탁 쳤다.
"모두 다 내 잘못이었습니다.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그 검을
뽑아 이런 화를 당하다니!"
"그런 함정을 미리 계획했던 것이라,주형이 만지지 않았더라도
그녀가 하인을 시켜서 검을 뽑았을 겁니다."
"갑시다. 가서 녹류산장을 불태워 버립시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멀리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불길이 보
였다. 바로 녹류산장이 불에 타고 있었다.
군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
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조 낭자가 벌써 우리의 생각을 예측하고 자기가 먼저 불에
태워 버렸구나. 나이 어린 소녀가 이렇게 우리의 강적이라니!'
주전이 다시 외쳤다.
"불을 질렀어도 빨리 쫓아가 그들을 모조리 해치웁시다!"
양소가 말렸다.
"그녀가 장원까지 태워 버릴 정도면 모든 준비를 미리 다 해놓
았을 텐데, 우리가 쫓아가도 별 수 없을 거요."
"양형, 당신의 무공이야 별 것 아니지만, 계략 술수라면 그래도
이 주전보다는 한 수 위가 아니요?"
양소는 웃으며 다시 말을 되받았다.
"천만에, 주형의 신기묘상을 소제(小弟)가 어찌 따르겠소?"
장무기는 웃으며 두 사람의 입씨름을 말렸다.
"두 분 그만 참으십시오. 다행히 이번에는 큰 손상을 입지 않았
습니다. 다만 십여 명이 화살에 다쳤으니, 하늘이 도운것으로 알
고 이만 길을 떠납시다."
그들은 길을 재촉하며 어떻게 중독되었는지 그 경위를 묻자 장
무기는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어서 위일소가 말을 했다.
"소조, 그 어린 계집아이한테 이런 기공(奇功)이 있었다니 정말
뜻밖이오. 그 애가 그 위급한 상황에서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크게 당했을 텐데....."
양소는 여지껏 소조를 적이 보낸 첩자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
싸움에서 오히려 명교를 위해 큰 공을 세웠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그들은 조민의 내력에 대해 말하며 모두 아리송해 했다.
장무기는 그녀와 같이 함정에 빠져 그녀의 발바닥을 간지럽힌 것
이 별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웬지 그 일을 군호
들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그들은 잠을 자기 위해 객점을 찾았다. 워낙 인원수가
많기 때문에 일부는 절간이나 사당을 빌려 하룻밤을 신세지기로
했다. 소조는 세수물을 떠서 장무기 방으로 갖고갔다.
"소조, 소조는 오늘 큰 공을 세웠으니 이제부터는 종노릇을 할
필요가 없다."
소조는 가볍게 웃었다.
"종이든 하인이든 저는 공자의 시중을 드는 일이 제일 기쁩니
다."
그가 세수를 끝내지 소조는 황금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혹시 이 상자 속에 독벌레나 독약, 암기 같은 것이 들어있을지
도 모릅니다."
"맞아, 조심해야 돼."
상자를 탁자에 놓고 장무기는 소조와 함께 멀찌감치 떨어져 동
전 한 닢을 꺼내 상자를 향해 던졌다. 띵똥! 상자 뚜껑이 곧 열
렸지만 아무 이상도 없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안에는 한
송이의 주화(珠花)가 들어 있었다. 바로 조민의 머리에서 뺏었던
그것이었다. 조민이 빼버렸던 진주로 된 노리개 두 개가 고스란
히 담겨져 있었다. 장무기는 그녀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보내왔
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난 남자라 이런 여자들의 노리개는 필요없으니, 소조 네가 갖
고 가거라."
소조는 웃으며 손을 연신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조민이 공자께 준 정표인데 제가어찌 감
히....."
장무기는 주화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빙긋이 웃으며 가볍게 던
져 소조의 머리에 꼽았다. 소조는 손을 들어 그것을 떼려고 하자
장무기가 말렸다.
"그래, 너한테 선물을 주면 안 되느냐?"
소조의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조소저가 보면 화를 내지 않을지 모르겠습
니다."
"오늘 네가 이런 큰 공을 세웠으니, 양좌사 부녀가 너를 다시는
의심하지 않을 거야."
소조는 크게 기뻐하였다.
"공자가 떠난 지 오래 되도록 안 돌아오자 불안해 하고 있었는
데, 원병이 또 공격해 오자 어찌 할 줄 몰라 그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외치게 된 겁니다. 그 때 저도 무척 무서웠습니다. 공
자께서 오행기와 천응기 여러분들에게 말씀 좀 해주세요. 이 소
조가 무례한 행동을 저지른 것을 용서 하시라구요."
그들은 어느새 벌써 하남성(河南省) 경내에 접어들었다. 그 당
시 천하가 혼란하여 사방에서 군호들이 반란을 일으켜 놓고 관병
들의 검문이 무척 삼엄했다. 명교의 많은 교도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기 불편해서 뿔뿔이 흩어져 숭산 아래서 다시 모이기로 결정
하고 소실산을 향해 떠났다. 거목기의 장기사 문창송이 장무기와
군호들의 명첩(名帖)을 들고 먼저 소림사로 떠났다.
이번에 소림사로 가게 되면 다시 서로 병기를 들고 싸우는 일이
없길 바랐으나, 결과가 어떻게될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만약
소림사 승려들이 경우를 따지지 않고 무력을 동원한다면, 명교에
서도 상대를 안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장무기는 각 수령들로
하여금 먼저 소림사에 들어가게 하고 오행기와 천응기의 교도들
은 모두 절 주위를 지키라고 했다. 자기가 휘파람소리를 세 번
불면 즉시 안으로 쳐들어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교도들은 명령을
받고 서로 자기의 방향대로 길을 떠났다.
소림사에 당도하자 사내에서 한 늙은 승려와 문창송이 걸어나왔
다. 늙은 승려가 입을 열었다.
"본사 장문인과 여러 장로들께선 폐관정수(閉關靜修)하고 있는
중이십니다. 죄송하지만 누구도 만날 수 없습니다."
군호들은 모두 난처해 했다. 주전이 버럭 화를 냈다.
"이분은 명교의 교주이시며 직접 불원천리 소림사를 방문 오셨
는데, 노화상들이 만나 주지 않다니 너무 안중무인이 아니요!"
늙은 스님은 고개를 숙이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단호하게 말
했다.
"만날 수가 없습니다."
주전은 더욱 노하여 냅다 스님의 멱살을 움켜잡으려고 하자 설
불득이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주형,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시오."
스님은 합장을 하며 냉랭하게 말했다.
"만나지 못할 거라 말하지 않았소?"
팽영옥이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달마당 수좌나 나한당 수좌께서도....."
"만날 수 없을 겁니다!"
은천정이 참다못해 벼락같이 외쳤다.
"만나 줄 건가, 안 만나 줄 건가?!"
그는 쌍장을 다짜고짜 한쪽으로 밀어 붙였다. 순간 꽝! 하고 길
옆의 큰 소나무가 반으로 뚝 부러졌다. 그 스님은 그제서야 두려
운 기색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여러분께서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으니 응당 예절로
맞아들여야 할 터인데, 여러 장로께서도 지금 좌선을 하고 계시
므로 죄송하지만 다음 기회에 다시 오십시오."
말을 마친 노승은 합장을 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는 것이었다. 그러자 위일소의 몸이 번뜩이는 것 같더니 벌써 그
스님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사의 칭호가 어떻게 되는지요?"
"소승의 법명은 밝히고 싶지 않소이다."
위일소는 그의 어깨를 두 번 툭툭치며 웃는 낯으로 다시 말했
다.
"좋소. 그렇다면 내가 본때를 보여 주지."
위일소가 그 노승의 어깨를 두드리는 순간, 그 스님은 어깨서부
터 차가운 한기가 가슴까지 스며들어 온몸이 얼음장처럼 굳어지
는 것 같았다. 그래도 노승은 억지로 참으며 위일소 옆을 지나
연신 몸을 떨며 산으로 올라갔다. 위일소가 그의 뒷통수를 향해
크게 외쳤다.
"저놈은 무예를 지니고 소림사에 들어간 거야. 소림파의 내공이
아니야!"
장무기는 즉시 원진이 떠올랐다. 그도 자신의 무예를 숨긴 채
다시 소림에 입문하지 않았던가! 소림사에선 이런 경우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위복왕께서 그의 어깨에 한빙면장(寒氷綿掌)을 전개했으니, 그
의 사조(師祖)나 사부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자, 올라가 봅시
다! 그래도 노화상들이 안 만나 주면 한바탕 벌이는 도리밖에 더
있겠소!"
모두는 일장 악투를 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림파하면 무
림의 태산북두가 아닌가! 천 년을 내려오면서 강호에 장승불패문
파(長勝不敗門派)라는 칭호까지 얻고 있었다. 오늘 만약 일장 대
전이 벌어진다면 도대체 명교와 소림파 어느쪽이 강한지 판가름
날 것이다. 모두들 가벼운 흥분마저 느끼며 빠른 걸음으로 산을
올라갔다. 소림사에는 고수들이 구름과 같이 많은데 이번 대전은
격렬할 것이 분명했다.
잠시 후, 그들은 소림사 앞 석정(石亭)에 당도했다. 장무기는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전에 태사부를 따라 이 석정에서 소림사
삼대 신승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오늘 다시 여기에 온 것이다.
비록 몇 년 전의 일이지만 그 때는 약하고 병이 든 어린 소년이
었는데 반해, 오늘은 당당한 명교 교주라는 높은 신분이라 격세
지감이 들었다.
석정의 두 기둥은 부러져 있었고 석탁도 쓰러져 있었다. 설불득
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림 화상들은 정말 싸움꾼들만 모인 모양이군. 부러진 지 얼
마 안 된 것으로 보아 아마 며칠 전 한바탕 싸우고 난 뒤 아직
수리를 하지 못한 것 같군."
주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후에 승전을 하고나서 이 정자를 모두 부숴 버립시다."
군호들은 석정에서 기다리며 소림사에서 많은 고수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오면 먼저 예절로 상대한 수, 은이정
을 이렇게 만든 죄를 문책하기로 했다. 만약 화상들이 무례하게
나오면 그 땐 부득불 병기를 사용하기로 하고 반나절을 기다렸지
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또 한 참이 지나자 멀리서 사람들이
소림사 뒷산으로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흥! 저들이 무슨 매복을 하는 건가?"
장무기가 외쳤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양소, 위일소, 은천정, 은야왕, 철관도인, 팽영옥, 주전, 설불
득, 사신인 모두는 장무기를 따라 안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이 대
웅보전에 와보니, 불상 앞의 공탁(供卓)이 넘어지고 향로도 바닥
에 떨어져 있었다. 모든 것이 어수선하게 널려져 있었으나 사람
은 보이지 않았다. 설불득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림사에서 우리가 온 것을 알고 향로까지 쓰러뜨리고 도망가
기에 급급했다니 정말 우습구나."
장무기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명교의 장무기가 소림사의 방장대사를 만나뵈러 여기에 왔습니
다!"
그의 외침은 별로 큰 소리가 아니었지만, 그의 내력이 웅후하여
대웅전 옆의 큰 종마저 내력에 울려 윙! 윙! 하고 울렸다.
양소와 위일소는 서로 마주 보며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
다.
'교주의 내력은 실로 무섭구나. 당년 양교주가 살아 있다해도
장교주를 따를 수는 없을 거야. 보아하니 오늘은 우리 명교가 이
길 것 같군.'
그러나 누구 한 명 나타나지를 않았다.
주전이 다시 크게 외쳤다.
"소림사의 화상 형제들, 어째서 숨어 있기만 하오?"
그의 말소리는 장무기보다는 더 컸으나 종이 울리지는 않았다.
군호들은 또 잠시를 기다렸으나 여전히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
다.
팽영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안은 어딘지 음침하며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주전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이상한 느낌이 든다는 거요?"
철관도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엇! 여기 부러진 선장(禪杖)이 있습니다."
설불득이 앗! 하고 놀랐다.
"여기에는 핏자국이 있군."
주전이 웃으며 말했다.
"아마 광명정에서 일전을 치른 후, 교주의 위세가 사방에 떨쳐
소림파에서 면전패(免戰敗)를 내건 모양이군. 황급하게 도망치느
라 병기마저 다 버리고 가더니."
철관도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주전이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런 것 같지 않다는 거요?"
"이 핏자국은 왜 있습니까?"
"아마 겁이 나서 자기들이 스스로 자기의 손을 잘라 버렸
나.....?"
자신도 너무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주전
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바로 이때 거센 바람이 불어와 사람들의 소매가 날렸다.
"시원하군."
하고 말하자 갑자기 서쪽에서 뿌드득! 하고 소나무 부러지는 소
리가 들려왔다. 군호들은 모두 놀라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 소나
무는 한쪽 마당의 동남쪽 끝에 있었으나 마당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분명 누군가 심후
한 수법으로 부러뜨린 사람의 짓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부러진
곳이 이미 건조되어 있어 조금 전에 한 짓이 아닌 것으로 보였
다.
군호들은 사방을 살펴보았다. 역시 마당엔 격렬한 전투를 한 자
국이 역력했다. 돌상이나 나뭇 가지, 그리고 벽에는 부러진 병기
나 장풍에 맞은 흔적이 많았다. 사방에 핏자국도 널려 있었다.
일장의 악투를 벌인 게 틀림없었다. 땅에는 발자국마저 보였다.
그것은 고수들이 내공을 겨룰 때 생긴 것 이었다.
장무기가 크게 외쳤다.
"빨리 그 스님을 잡아오십시오!"
위일소와 설불득이 양쪽으로 나눠 그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그
스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를 않았다. 살피러 나갔던 오행
기 교도들이 돌아와, 이 사원 안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를 하며 사방에 격투를 벌인 흔적이 있다고 보고를 해왔다.
사방에 싸웠던 흔적이 있고 핏자국이 널려 있었으나, 시체는 하
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양좌사,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 격투는 이삼 일 전에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림파
가 전군이 섬멸당한 것일까요?"
설불득이 다시 말했다.
"조금 전에 수십 명이 뒷산으로 도망가지 않았소?"
"그것은 아마 소림파의 적들이었을 겁니다. 여기 남아 있다 우
리가 오자 그만 도망을 간 모양입니다."
팽영옥이 입을 열었다.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아까 그 스님도 가짜였을 겁니다. 그
런데 소림파와 맞설 이런 무서운 방파가 있습니까? 혹시 개방이
아닐까요?"
주전이 다시 말했다.
"아무리 개방의 세력이 크고 고수들이 많다 해도, 일거에 소림
파를 모조리 해치우지는 못할 거요. 명교 외엔 그런 실력을 가진
파가 없는데, 그렇지만 우리 명교가 한 짓은 아니고....."
철관도인이 입을열었다.
"주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게. 그래 우리가 한 짓을 우리가
모르겠나?"
후토기 장기사 안원이 보고를 올렸다.
"교주께 보고드립니다. 나한당의 십팔존(十八尊) 나한 불상을
누가 움직였던 것 같은데, 무슨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군호들은 안원이 토목 건축학에 일가견이 있는지라 그가 의심이
생겼다면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나
한당에 와보니 벽에 핏자국이 있고 사방에 계도(戒刀)와 선장(禪
杖)이 널려 있었다.
주전이 물었다.
"안형, 이 십팔 나한상이 어디가 이상하다는 거요?"
안원이 대답을 했다.
"누가 움직인 것 같아 뒤에 무슨 비밀 통로가 있는가 하고 제가
살펴보니, 그런 비밀 통로는 없었습니다."
양소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안원이 다시 십팔나한상을 움직였으나 뒷벽에는 아무 이상도 없
었다. 양소는 신상 위로 뛰어올라 나한상을 살펴보더니 엇! 하고
이상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나한 등에 글씨가 씌어져 있군."
그러면서 나한상을 뒤로 돌려 놓았다.
군호들은 커다란 멸(滅)자를 볼 수 있었다. 깊이 새겨져 흙이
보일 정도였다. 새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다. 주전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멸자라..... 무슨 뜻이지? 아! 그렇구나! 아미파에서 소림을
쳐부수고 멸절사태가 자기의 위세를 알리려고 멸자를 새겨 놨구
나!"
그의 엉뚱한 얘기에 모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사이 군호들은 십팔 나한상 전부를 뒤로 놀려놓았다. 그
러고 보니 양쪽 맨 끝 두 나한상 외엔 모두 등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차례로 읽어 내려가자 모두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
다. 그것은 바로 이런 뜻이었다.
----- <선주소림(先珠少林) 재멸무당(再滅武當) 유아명교(惟我
明敎) 무림칭왕(武林稱王)> -----
은천정, 철관도인, 설불득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것은 죄를 우리 명교에 덮어 씌우려는 계략이다."
소림사 군승들이 이런 처참한 횡액을 당한 것을 모두 명교에 뒤
집어 씌우려고 하다니, 군호들은 모두 일일이 걱정스럽다는 표정
들이었다.
"빨리 이 글들을 지워 버려야 된다. 누명을 쓰기 전에....."
주전이 이렇게 외치자 양소가 그의 말을 받았다.
"모든 악랄한 수법을 다 쓴 것같군. 아마 이 열 여섯 자를 지
워 버린다고 일이 해결되지는 않을 걸세."
이번엔 양소의 말이 일리가 있는지 주전이 그와 더 이상 입씨름
을 벌이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오?"
이번엔 설불득이 그의 말을 받았다.
"이 열 여섯 자가 바로 증거가 되는 걸세. 그러니 우리에게 누
명을 씌운 놈을 잡아 이 열 여섯 자와 대질시키는 거지."
양소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팽영옥이 다시 물었다.
"소승 한 가지 이해 못할 일이 있어서 양좌사의 가르침을 받을
까 합니다. 이 열 여섯 자를 새긴 자가 소림파를 궤멸시킨 누명
을 우리에게 씌우려고 했다면, 밖으로 보이게 새기지 않고 왜 하
필 나한상의 등 뒤에다 새긴 것입니까? 만약 안기사께서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면, 누가 나한상 등 뒤에 글자가 새겨진 것을 알겠
습니까?"
양소는 침울한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
"내 생각엔 누군가 다시 이 나한상을 돌려놓은 사람이 있는 것
같소. 아마 몰래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이겠지요. 우린 그 사람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 것 같소."
그 말에 군호들은 양소에게 또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요? 양좌사께서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응! 무슨 우여곡절이 있는지 나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
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 하고 장무기가 외쳤다.
"선주소림 재멸무당이라..... 아마 무당파에서 지금 위험이 닥
치고....."
위일소가 말을 이었다.
"빨리 무당파를 도우러 갑시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이런 짓
을....."
은천정이 뒤따라 말했다.
"늦기 전에 빨리 출발하세. 그 도적놈들은 벌써 이틀 전에 그곳
으로 떠났으니까."
장무기는 송사백 등 일행이 서역에서 무당산으로 돌아왔을지 모
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쨌든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들의 소
식은 전혀 들은 바 없었다. 만약 그들이 도중에서 무슨 변고라도
생겼다면 무당산을 지키고 있는 건 태사부님과 약간의 제 삼대
제자들뿐일 것이다. 삼사백 유대암은 불구가 되어서 침대에 누워
있을 텐데, 강적들이 갑자기 당도하게 되면 어찌 대항을 하겠는
가! 이러한 생각이 들자 더욱 조급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이윽
고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선배 여러분, 무당파는 선친의 출신지고 태사부님이 제게 베푸
신 은혜는 산처럼 무겁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큰 시련이 닥쳤습
니다. 구병(救兵)은 마치 불을 끄는 것처럼 한시라도 빨리 당도
하면 그만큼 화를 면하게 되는 것이오. 우선 위복왕과 본인이 앞
서 가서 구원할 것이니, 여러분들은 양좌사와 외할아버지의 지시
대로 곧 뒤따라 오십시오."
이윽고 포권의 예로 인사하고 나서 급히 산문(山門)을 나왔다.
위일소는 경공을 전개해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달렸다. 군
호들의 대답하는 소리가 미쳐 나오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소
림사 밖으로 나왔다. 이 두 사람의 경공 실력은 당세에 그들을
따를 자가 없었다.
두 사람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단숨에 수십 리를 달렸다. 위
일소는 처음에 전혀 장무기에게 낙후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르
자 내력이 점점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
'무당산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계속 쉬지 않고 달릴
수는 없다. 더구나 강적이 앞에 있으니 전력을 너무 허비하면 안
되겠다.'
이윽고 장무기는 위일소에게 말했다.
"우리 앞에 있는 시진(市鎭)에 가서 말을 두 필 산 다음에, 잠
시 쉬었다가 갑시다."
위일소는 벌써부터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
다.
"교주, 말을 구입하는 일은 너무 시간이 걸립니다."
얼마 후, 앞에서는 오, 육 명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
러자 위일소는 몸을 솟구치더니 두 명의 말 탄 자들을 들어올려
서 살짝 땅에 내려놓고 소리쳤다.
"교주, 올라오시오!"
장무기는 걸음을 멈추고 망설였다. 길을 막고 말을 뺏는 일은
강도의 소행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위일소가 다시
소리쳤다.
"대를 위해서 소는 희생되는 것이오. 뭣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것이오!"
그는 호통을 치면서 또다시 두 명을 말에서 끌어내렸다.
그 자들도 약간의 무공을 할 줄 알았다. 저마다 욕을 퍼붓더니
병기를 뽑아 들고 공격하려 했다. 위일소는 양손으로 말 네 필을
멈추게 하더니, 발을 날려서 그들의 병기를 모두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막고 강도질하는 건 어떤 호한(好漢)의 행실이냐? 어서
말을 돌려 줘라!"
장무기는 그들을 붙들고 늘어져 봤자 못된 짓만 더할 것 같아서
얼른 몸을 튕겨 말에 올라타더니, 위일소와 각각 한 필씩 끌고
달려갔다. 그 자들은 욕을 마구 퍼부었으나 감히 쫓아오지는 못
했다.
장무기가 말했다.
"비록 우리가 급한 나머지 이런 짓을 했지만, 그들도 급한 일이
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이건 좀 너무한 것 같습니다."
"교주, 그러한 작은 일에 뭣 때문에 연연해 하는 겁니까? 옛날
에 명교가 저지른 일이야말로 방자하고 거리낌없이 멋대로 행동
한 게 마치 무법천지 같았습니다."
위일소는 말을 하면서 껄껄 크게 웃었다.
장무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이 명교를 사악한 이단(異端)으로 보는 이유가 있었구
나. 하지만 도대체 어떤 자가 올바르고 어떤 자가 사악한 것인지
는 실로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장무기는 자기가 교주란 중임을 맡고 있는 것을 생각했으나 견
식이 얕아서 많은 일을 자기 주장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금방
말을 빼앗는 일만 해도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비록 무
공은 고강하나, 천하의 일들을 어찌 무공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
겠는가! 이러한 생각을 하자 내심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오직
하루속히 사손을 영접해 돌아오기만을 바랬다.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사람의 그림자가 번뜩거리더니, 두 사람
의 수중에 모두 강장(鋼杖)을 쥔 채 길을 막아섰다.
위일소가 소리쳤다.
"비켜라!"
그러면서 채찍으로 허리를 후려치며 말을 몰고 돌진했다. 그러
자 한 사람은 강장을 들어서 채찍을 막아내고, 또 한 자는 소리
를 한 번 지르면서 왼손을 한 번 흔들었다. 위일소의 말이 놀라
서 사람처럼 일어섰다. 순간, 숲 속에서 또 다시 네 명의 흑의
남자가 뛰어나왔다. 각자의 신법을 보니 보통들이 아니었다. 그
러자 위일소가 소리치며 말했다.
"교주께서는 멈추지 마시고 가시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은 제
가 맡겠소."
이 사람들의 저의는 무당파의 원병을 막아서 끊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그러니 무당파의 처지는 실로 극도로 위험한 것이 분명
했다. 그는 위일소의 경공과 무공이 모두 뛰어나서 이들을 물리
치리라 믿고 있었다. 설사 이길 수는 없어도 최소한 자신을 보호
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래서 양발로 말을 한 번 차더니 앞으로
질주해 갔다.
흑의인 두 명은 강장을 몸 앞에 가로 세우면서 길을 가로막았
다. 장무기는 몸을 밖으로 구부려서 그 자들의 강장을 탈취하여
즉시 던져 버렸다. 그러자 악! 악! 하고 비명소리와 함께 흑의인
두 명은 강장에 맞아 대퇴골이 부서지면서 땅에 쓰러졌다. 그는
위일소를 감싸고 있는 그 네 명의 무공을 살펴보니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니 자기가 가게 되면 위일소에게는 더욱 불리할
것 같아서 즉시 그를 도와서 두 명을 처치해 주었다.
숭산(崇山)과 무당산은 비록 예(豫), 악(顎) 양성(兩省)에 나뉘
어져 있었지만, 하나는 예서에 있고 하나는 악북에 있어서 거리
가 그다지 멀지는 않았다. 마산구(馬山口)를 지나자 남쪽으로는
모두 평야라서 말이 달리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점심때가 되자 내향(內鄕)을 지나갔다. 장무기는 허기가 저서
시장통에 있는 빵 파는 곳에서 요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 있는 말이 괴롭게 울부짖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말의
배에는 반짝거리는 칼이 한 자루 꽂혀 있었다. 순간, 그림자 하
나가 길모퉁이에서 번뜩거리더니 즉시 사라졌다.
장무기는 급히 몸을 날려서 그 자를 잡아 보니, 역시 또 흑의의
남자였다. 앞깃에는 말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장무기는 소리치며 다그쳤다.
"넌 누구의 수하냐? 어느 방회 문파냐? 너희들의 인마(人馬)들
은 이미 무당산에 당도했느냐?"
연거푸 몇 번 물어 보았으나 그 자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장무기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건 무당산에 도착하
면 자연히 밝혀진다는 생각이 들자 즉시 손을 내밀어 그의 대추
혈(大推穴)을 폐하였다. 그는 온몸이 말할 수 없이 아프면서 삼
일 동안 밤낮으로 고생하게 될 것이다.
장무기는 즉시 말을 달렸다. 단숨에 삼관전(三官殿)으로 달려가
서 한수(漢水)를 건너 남쪽으로 계속 갔다.
배가 중류에 접어들자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니, 그날 태
사부가 자기를 대동하여 소림사에서 구의(求醫)하고자 했으나 뜻
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길에 한수에서 상우춘(常遇春)을
만나고 또 주지약을 구해 준 일들이 생각났다. 순간 뇌리에 그녀
의 아름다운 모습과 광명정 위에서 끊임없이 주목하는 안파(眼
波)가 나타나자 그만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한수를 지난 후, 말을 재촉해서 계속 남쪽으로 쉬지 않고 달렸
다. 이때 하늘을 벌써 어두워져서 앞이 몽롱하게 보였다. 다시
한 시간 정도 달리자 더욱 어두워졌다. 말도 너무나 지쳐서 서
있지 못하고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말등을 몇 번 두드리고
말했다.
"말아, 말아, 넌 여기서 쉬고 싶은 대로 쉬었다가 네 갈 길로
가거라."
그리고는 경공을 전개하여 질주하기 시작했다.
사경(四更)쯤 되자 갑자기 앞에서 말굽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이윽고 그는 발길을 재촉하여 그 사람들 몸 옆으로 스쳐갔다. 그
의 신법은 신속하고 가벼웠다. 더구나 야밤이라서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한패의 사람들의 행방도 역시 무당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십 여 인은 전혀 말을 하지 않아서 신분이나
내력을 탐지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병기를 휴대한 것
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들도 역시 무당파의 적임을 절대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들보다 한 발 앞서 당도하면 무당파는 침공당하지 않을 것이
다.'
다시 반 시간 정도 걷고 나니 앞에는 또다시 한패의 사람들이
무당산으로 가고 있었다. 이처럼 전후로 해서 모두 다섯패 씩이
나 만났다. 한패에 작으면 십여 명이었고 많으면 삼 십여 명이었
다. 다섯 패째 사람들을 보고 나서 그는 갑자기 또 걱정이 되었
다.
'이미 몇 패의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혹시
본파의 사람들과 이미 격전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구나.'
그는 비록 무당파의 제자는 아니지만 부친이 근본이기 때문에,
항상 무당파를 자기의 문파로 알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되자, 달
리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얼마 후 무당산에 당도했다. 다행히 적들을 다시 만나지 않았
다. 산중턱에 오르게 되자 갑자기 앞에서 한 사람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대머리에 넓은 옷자락을 하고 있는 걸 보니,
그는 승인인 것 같았다. 경공의 실력이 실로 놀라웠다. 장무기는
먼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의 뒤를 밟으며 동태를 살펴보았다.
그 승인이 단숨에 산에 올라가 막 산꼭대기에 도착하려는 순간
한 사람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디에서 온 친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찌 심야에 무당을 광림하
는 것이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위 뒤에서 양도양속(兩道兩俗) 네 사람이
섬출(閃出)했다. 바로 무당파의 제 삼, 사대 제자들이었다.
그 승인은 합장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림 승인 공상이 무당 장진인에게 급한 용무가 있어서 찾아왔
소."
장무기는 의아했다.
'그는 소림파의 공(空) 자배(字輩)의 선배대사였구나. 그렇다면
공문, 공지, 공성 삼대신승과는 사형제 배(輩)일 것이다. 그가
고생을 무릅쓰고 무당산에 온 것은 소식을 전하려 했던 것이었구
나.'
무당파의 도인 한 명이 말했다.
"대사께서 먼길에 수고하셨으니, 걸음을 폐관(폐觀)으로 옮기셔
서 차라도 한 잔 드십시오."
말이 끝나자 즉시 앞으로 길을 안내했다. 공상(空想)은 허리춤
에 차고 있는 계도를 풀어내더니 다른 한 명의 도인에게 건네주
었다. 이는 병기를 후대하고 감히 관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예
의의 표시다.
장무기는 그 도인이 공상을 자소궁에 있는 삼청전(三淸殿)에 데
리고 들어가는 걸 보고는 얼른 창문 밖에 가서 쭈그리고 앉았다.
이윽고 공상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도장께서 즉시 장진인께 알리시오! 사정이 워낙 다급해서 잠시
도 지체해서는 아니되오."
"대사께서 오신 게 공교롭지 못하십니다. 폐사조께서 세좌관(歲
坐關)에 가신 지 벌써 일 년이 넘어서 본파의 제자들도 그 어르
신네를 못 본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송대협에게 통보해 주시오!"
"대사백께서는 가사(家師)와 여러 사숙님을 대동하고, 귀파와
연맹하여 명교를 원정하러 가셔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장무기는 <명교를 원정하러 가셔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
을 듣자 내심 놀라웠다. 그렇다면 송원교 일행은 도중에서 사고
를 당한 게 분명했다.
이윽고 공상이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무당파도 우리 소림파처럼 오늘의 이 폭행을 벗어나
지 못하겠구료."
"지금 폐파의 사부는 곡허자(谷虛子)사형께서 주치하고 있으니,
소도(小道)가 즉시 통보하여 대사님을 참견하시라 하겠습니다."
"곡허자는 어느 분의 제자지요?"
"유삼숙의 문하입니다."
"유삼협께서는 수족에 상처가 있지만 노승의 이 몇 마디는 알아
들이실 것이오."
"알겠습니다. 대사의 분부를 따르겠소!"
이윽고 그 도인은 안으로 들어갔다.
공상은 대청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몹시 초조한 것 같았다. 간간
이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는 게 적이 산으로 공격해 오는 것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 도인은 빠른 걸음으로 나와서 허리를 굽히고 말했
다.
"유삼숙께서 들어오시라 하십니다. 나와서 영접하지 못한 죄 대
사께서 용서하시라고 하시더군요."
이때 그 도인의 태도가 아까보다 더욱 공손해졌다. 아마 유대암
이 <공(空)>자배의 소림승이므로 그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분부한
것 같았다. 이윽고 공상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그를 따라서 유
대암의 와방(臥房)으로 갔다.
'삼사백은 사지가 불구가 됐으니 귀와 눈은 배로 영민(靈敏)할
것이다. 내가 만약에 그의 창 밖에서 도청하면 아마 그에게 발각
될지도 모른다.'
장무기는 유대암의 와방에서 수장(數丈) 떨어진 곳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차 한 잔 끓이는 시간이 지난 후, 그 도인은 황급히 유대암의
방에서 나오더니 소리를 낮추어서 불렀다.
"청풍, 명월, 이쪽으로 오너라!"
그러자 두 명의 도동(道憧)이 그에게 다가가면서 대답했다.
"네, 사숙님."
"연의(軟椅)를 준비해라. 삼사숙께서 나오실 거다."
두 명의 도동은 대답하고 나서 급히 준비하러 갔다.
장무기는 무당산에서 여러 해를 지냈지만 그 지객도인(知客道
人)은 유연주가 새로 맞이한 제자라 그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청풍, 명월 두 도동은 알아보았다. 그 도동들이 연의가 놓여 있
는 상방(廂房)으로 다가가자 살며시 뒤를 따라갔다. 도동들이 방
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소리쳤다.
"청풍, 명월, 너희들은 나를 알아보겠느냐?"
두 도동은 깜짝 놀랐다. 장무기를 눈여겨보자 얼굴이 어디서 본
듯은 했지만 금방 식별하지 못했다. 그러자 장무기는 웃으며 말
했다.
"나는 무기 막내 사숙이다. 너희들은 날 기억하지 못하겠느냐?"
두 도동은 즉시 옛일을 회상하면서 몹시 기뻐하며 소리쳤다.
"아, 막내 사숙님! 돌아오셨군요. 병은 완쾌되었습니까?"
이 세 사람은 나이가 비슷해서 전에 자주 같이 놀았었다.
"청풍, 내가 너로 가장해서 삼사백을 모시러 가면 날 알아 보겠
느냐?"
"그건..... 그건 곤란합니다."
"삼사백께서는 내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걸 보게 되면,
절대로 널 나무라시지는 않을 것이다."
장삼봉 조사(祖師) 이하 무당육협들은 이분 막내 사숙을 몹시
총애하고 있다는 것을 이 두 도동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건강
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건 하늘만큼 큰 경사였다. 더구나 그가
이같은 작은 장난을 하는 건 유대암의 병에는 약이 되는 것이라
과히 나쁜 일이 아니었다.
명월은 웃으며 말했다.
"막내 사숙님의 맘대로 하세요."
그러자 청풍은 즉시 낄낄거리며 도포와 신발, 양말을 벗어서 장
무기에게 주었다. 명월은 그의 머리를 도인의 머리처럼 빗겨 주
었다. 잠시 후, 영락없는 작은 도동으로 변했다.
명월이 말했다.
"막내 사숙님은 청풍의 얼굴을 닮지 않았으니, 관중에 새로 온
소도동이라고 하세요. 청풍은 다리를 다쳐서 대신 왔다고 하십시
오."
"잘 알겠다....."
그 도인은 방 밖에서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장무기와 명월은 혀를 몇 번 내밀더니 연의를 들고 유대암의 방
으로 얼른 갔다. 두 사람은 유대암을 부축해서 연의에 앉혔다.
유대암은 몹시 정중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를 들고 있는 게 누
구인지도 알아보지 않고 말했다.
"뒷산의 소원(小院)에 계신 조사 어르신네를 만나뵈러 가자."
"네, 알겠습니다."
명월은 대답하고 나서 연의의 앞을 들었고 장무기는 뒷부분을
들었다. 유대암은 명월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고 장무기는 볼 수
없었다. 공상도 연의의 옆에 붙어서 함께 뒷산으로 갔다. 그러나
그 지객도인은 유대암이 부리지 않아서 감히 동행하지 못했다.
장삼봉이 폐관정수(閉關靜修)하고 있는 수원은 뒷산 죽림(竹林)
의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밭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새소리
외에는 전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명월과 장무기는 유대
암을 들고 수원 앞까지 와서 연의를 내려놓았다.
유대암이 막 장삼봉을 부르려 하는데, 갑자기 문을 사이에 두고
장삼봉의 창로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림파의 어느 고승께서 한거(寒居)를 왕림해 주셨소? 노도가
멀리 나가서 영접하지 못한 죄 용서해 주기 바라오."
곧이어 소리가 나더니 죽문이 열리면서 장삼봉이 천천히 걸어나
왔다.
공상의 얼굴은 의혹으로 가득했다. 그는 장삼봉이 어떻게 방문
자가 소림승인 것을 알고 있을까, 몹시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까 그 지객도인이 사람을 보내서 미리 통보해 준 것이
라고 생각했다.
유대암은 사부의 무공이 날이 갈수록 더욱 정심해지는 걸 알고
있었다. 공상의 발소리만 들어도 그의 무학과 문파 무공의 깊고
낮음을 이미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이윽고 공상은 합장하며 말했다.
"소승은 소림의 공상입니다. 무당의 선배님인 장진인을 참견합
니다."
장삼봉도 답례를 하고 나서 말했다.
"별 말씀을..... 자,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다섯 사람은 함께 소원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주전자 하나 찻잔
하나가 있었고, 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었으며, 벽에는 목검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탁상 위와 바닥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공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장진인, 소림파는 천 년 만에 크나큰 참변을 당했습니다. 마교
가 갑자기 기습해 오는 바람에 본파의 방장인 공문사형을 비롯해
전사하지 않으면 포로가 되었습니다. 오직 소승 한 사람만 죽음
을 무릅쓰고 도망 나왔습니다. 마교의 대 부대는 지금 무당으로
오고 있으나, 오늘 중원 무림의 존망영욕(存亡榮辱)은 모두 장진
인 한 사람 손에 달려 있습니다."
장무기는 몹시 놀랬다. 그는 소림파가 이미 화를 당한 건 알고
있었으나 이처럼 전파가 복몰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장
삼봉도 백 년이란 수위가 있다 해도 갑자기 이런 놀라운 소식을
듣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교가 이처럼 당돌하다니, 하지만 소림사에는 고수가 구름같
이 많은데 어찌 마교의 독수에 당한 것입니까?"
"공지, 공성 두 분 사형께서는 문하의 제자를 이끌고 중원의 오
대파와 결맹하여 광명정을 위공(圍攻)하러 가셨고, 산사를 지키
고 있는 제자들은 날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
루는 원정갔던 사람들이 대승하여 돌아온다는 소식을 산 밑에서
보고해 왔습니다. 방장 공문사형께서는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뻐하
며 제자들을 대동하여 산문 밖으로 영접하러 갔습니다. 과연 공
지, 공성 두 분 사형께서 서정(西征)제자들을 이끌고 산사로 돌
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따로 수백 명의 포로도 끌고 왔지요.
사람들이 대원(大院)에 당도하자 방장은 승리하게 된 과정을 물
어 보았는데 공지사형은 자꾸 더듬 거렸습니다. 갑자기 공성사형
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사형, 조심하시오! 우리는 포로가 되
었소. 저 자들은 모두 적.....!" 이 찰나 포로들은 병기를 뽑아
들고 갑자기 달려 들었습니다. 본파의 사람들은 뜻밖에 당하는
일인데다 많은 고수가 서정에서 적의 포로가 되었으니, 본사를
지키고 있는 세력은 자연히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대원
자(大院子)의 앞뒤 출로는 이미 적들이 모두 차단해 버렸습니다.
자연 격전이 벌어졌으나 결국 모두 당하고 만 것입니다. 공성사
형은 거기서 순난(殉難)....."
여기까지 말한 그는 목이 메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마교가 이처럼 악독한 계략을 감행하니 누구라도 막을 수가
없소."
공상은 등에 메고 있던 노란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자 기름천에
쌓여 있는 수급 한 개가 나타났다. 두 눈을 부릅뜨고 몹시 격분
되어 있는 얼굴이었다. 바로 소림 삼대 신승 중의 한 사람인 공
성대사였다.
장삼봉과 장무기는 모두 공성의 얼굴을 알고 있어서 보는 순간
그만 아! 하고 일제히 소리쳤다.
공상은 곡을하며 말했다.
"전 죽음을 무릅쓰고 공성사형의 법체를 빼앗아 왔습니다. 장진
인, 이 원수를 어떻게 갚았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면서 공성의 수급을 정중하게 탁자에 올려놓더니, 땅에 엎
드려서 절을 하였다. 그러자 장삼봉도 허리를 굽히고 합장하여
인사했다.
장무기는 광명정에서 무공을 겨루던 생각을 하였다. 공성의 너
그러운 성품과 슬기롭고 뛰어난 도량은 실로 당당한 소림의 일대
종사(一代宗師)였다. 그러나 불의의 참변을 당해서 신수(身首)까
지 분리되었으니 몹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삼봉은 공상이 땅에 엎드려서 한참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자
손을 내밀어 부축하며 말했다.
"공상사형, 소림과 무당은 본시 한 집안이오. 이 원수는 꼭 갚
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펑! 하고 일성이 나더니 공
상의 쌍장이 그의 하복부를 후려쳤다.
갑자기 닥친 변고라서 제아무리 무공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장삼봉이라도 이 일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공상
이 너무나 비통해서 자기를 적으로 착각했다는 생각을 해보았으
나, 즉시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챘다. 하복부에 적중된 장력은 소
림파의 외문신공(外門神功)인 <금강반약장(金剛般若掌)>이었다.
더구나 공상은 전신의 경력으로 장력을 끊임없이 촉진시켜 왔다.
얼굴은 마치 백지장처럼 하얗고 입가에는 사나운 웃음을 짓고 있
었다.
장무기, 유대암, 명월 등 세 사람은 갑자기 일어난 변고를 보자
모두 놀라서 멍청해졌다. 유대암은 몸이 불구라서 사부를 도와주
지 못했다. 장무기는 나이가 어리고 견식 또한 부족하여 순간적
으로 공상이 일장으로 태사부를 죽여버리겠다는 의도를 깨닫지
못했다. 두 사람은 비명만 한 마디씩 질렀다.
장삼봉은 즉시 좌장을 휘둘러 팍! 하고 가볍게 소리를 내면서
공상의 천령개(天靈蓋) 위를 후려쳤다. 이 일장의 부드러움은 마
치 솜 같았고 단단함은 마치 무쇠 같았다. 이윽고 공상은 즉시
뇌골이 분쇄되어 마치 젖은 흙처럼 주저앉았다. 전혀 소리도 지
르지 못하고 즉사한 것이다.
유대암은 급히 물었다.
"사부님, 괜찮....."
그러면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장삼봉은 눈을 감고 좌정(坐正)
하였다. 잠시 후 머리 위로 가느다란 백기(白氣)를 뿜어내면서
갑자기 입을 벌리더니 몇 모금의 선혈을 토해 냈다.
장무기는 몹시 놀랬다. 태사부가 중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기 때
문이다. 만약 그가 토해 낸 것이 검붉은색의 피라면 그의 심후한
내력으로는 삼, 사일이면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토한 건
선혈이고 더구나 급히 뿜어낸 듯해서 필시 장부(臟腑)에 중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이 순간 그의 마음은 또다시 망설여졌다.
'즉시 신분을 밝히고 태사부님을 구해드릴까? 아니면 어떻게 해
야 되는 것일까?'
바로 이때였다. 발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이 문 밖에 당도했
다. 그의 급한 걸음걸이를 들어보면 몹시 다급한 것 같았다. 그
러나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또 소리도 감히 내지 못했다.
그러자 유대암이 물었다.
"영허냐? 무슨 일이냐?"
그 지객도인 영허가 말했다.
"삼사숙님께 아룁니다. 마교의 대대가 문 밖에 당도해서 조사
어르신네를 뵙자고 합니다.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무당파를 평정
한다고 하면서....."
"닥쳐라!"
유대암은 소리쳤으나 장삼봉의 정신이 흐트러질까 봐 몹시 조심
스러웠다.
이윽고 장삼봉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말했다.
"소림파의 금강반약장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구나. 아마 삼 개월
간 정양(靜養)해도 상처가 완쾌되지 않을 것이다."
'태사부님의 상처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심하구나.'
장삼봉은 다시 말을 이었다.
"드디어 명교가 대거 산으로 올라왔구나. 그건 그렇고 원교와
연주 등이 무사한지 모르겠다. 대암아, 네 생각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유대암은 묵묵히 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산사에 남아 있는
사부와 자기 외에 삼, 사 대 제자의 무공으로는 억울한 죽음만
당할 뿐 절대로 적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오늘의 일은 오직 자기가 목숨을 걸고 적들과 대항하는 동안 사
부는 피신하여 상처가 아문 다음 다시 복수하기를 기다리는 수밖
에 없었다. 이윽고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영허, 가서 그들에게 전해라. 내가 그들을 만나 볼 것이니 삼
청전에서 기다리라고 해라."
영허는 대답하고 나서 즉시 달려갔다. 장삼봉과 유대암은 오랫
동안 같이 지내서 심의가 상통되었다. 그가 이처럼 말을 하는 걸
듣자 이미 저의를 눈치챘다.
"대암, 생사승부에 너무 마음을 쓸 것 없다. 하지만 무당파의
절학은 절대로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십 팔개월 동안 좌관
(坐關)하면서 무학의 정요인 태극권(太極拳)과 태극검(太極劍)을
터득한 게 있다. 지금 너에게 전수하겠다."
그러자 유대암은 멍해졌다. 자기는 불구가 된 지 오래 되었는데
무슨 권법 검술을 배우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강적들이 이미 관
에 들어왔는데 무슨 여가가 있어서 무공을 전수받을 수 있겠는
가! 하고 생각했다. 그는 사부님만 부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장삼봉은 지그시 한 번 웃더니 말을 했다.
"나의 이 태극권과 태극검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무학과는 판
이하게 다르다. 이건 이정제동(以靜制動) 후발제인(後發制人)을
강구한다. 너의 사부의 나이는 백 세가 넘어서 설사 강적은 만나
지 못해도 몇 년을 더 살 수 있겠느냐? 그나마 기쁜 일은 죽기
전에 이 무공을 창재해 낸 것이다. 원교, 연주, 송계, 이정, 성
곡 모두 곁에 없고 제 삼, 사 대 제자들 중에는 유독 청서만 걸
출한 인재인데, 그도 역시 산에 없지 않느냐. 대암, 넌 내가 평
생 연마한 절예(絶藝)를 전수하는 중요한 책임을 짊어졌다. 무당
파 하루의 영욕(英辱)을 뭐하러 따지느냐? 이 태극권이 후대(後
代)에 전할 수 있다면 우리 무당파의 대명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윽고 장삼봉은 손등을 밖으로 향하게 하면서 양발을 벌리더니
바로 일초일식을 시전해 보였다. 입으로는 초식의 이름들을 불렀
다. 람작미(欖雀尾), 단편(單鞭), 제수상세(提手上勢), 백학량시
(白鶴亮市), 루슬구보(樓膝拘步), 수휘비파(手揮琵琶), 진보반난
추(進步搬欄錘), 여봉사폐(如封似閉), 십자수(十字手), 포호귀산
(抱虎歸山)........
장무기는 잠시도 눈을 굴리지 않고 열심히 관찰하였다. 처음에
는 태사부가 일부러 느리게 연출하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제 칠
초 <수휘비파>를 보자, 그의 좌장은 양(陽) 우장 음(陰)으로 해
서 눈을 왼쪽팔을 주시하더니 쌍장을 천천히 합장했다. 마치 산
처럼 무겁고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윽고 장무기는 갑자기 깨우침
을 얻은 것 같았다.
'이건 느린 동작으로 빠른 걸 제압하는 이정제동(以靜制動)의
상승(上乘) 무학이다. 세상에 이처럼 고명한 무공이 있을줄이야.
정말 뜻밖이다.'
그는 본시 무공이 뛰어나서 막상 깨우치게 되니 볼수록 넋을 잃
고 있었다. 이윽고 장삼봉은 양손을 돌렸다. 매 초식마다 모두
태극식의 음양 변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건 실로 무학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신천지를 개발한 것이다.
잠시 후 장삼봉은 양손으로 태극식의 원을 그리면서 말했다.
"이 권술의 촛점은 <허령정경(虛零頂經), 함흉발배(涵胸拔背),
송요수둔(송腰垂臀), 침견추주(沈肩墜주) 열 여섯 글자에 있다.
모두가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고 힘을 사용하는 건 금기이다. 행
신(行神) 합일(合一)이 이 권법의 요지다."
그러면서 상세히 해설해 주었다.
유대암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때가 다급하여
질문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록 중간에 이해 못하는
곳이 많았으나 억지로 기억하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사부에게
예측 못할 일이라도 생긴다면 이 구결(口訣) 초식들은 자기가 전
해 내려서 나중에 다시 총명한 재지지사(才智之士)가 그 안의 정
오함을 추구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많은 걸 깨우
쳤다. 장삼봉의 매 구결과 매 초식마다 초문대도(初聞大道)라 기
뻐서 어쩔 줄 몰랐다.
장삼봉은 유대암의 얼굴에서 이해 못하는 당혹한 표정을 발견하
고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얼마나 이해했느냐?"
"제자가 우둔하여 겨우 삼,사 성(成)밖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초식과 구결은 모두 기억했습니다."
"그만한 것도 다행이다. 만약에 연주가 여기 있다면 아마 오성
(成)은 이해할 것이다. 너희들 중에 오사제의 깨우치는 능력이
최고 높았지만, 안타깝게도 일찍 죽었다. 만약에 그에게 삼 년만
열심히 지적해 주면 나의 이 절기는 전할 수가 있을 텐데....."
장무기는 자기의 부친을 들먹이자 그만 가슴이 찡했다.
장삼봉이 말했다.
"이 권경은 우성 사송비송(似송非송) 장전미전(將展未展) 경단
의불단(勁斷意不斷)....."
계속해서 해설해 주려는데 앞에 있는 삼청전에서 한 늙은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장삼봉 노도가 정히 나타나지 않으면, 우린 그의 제자 제손들
을 먼저 처치해 버리자."
다른 소리가 또 들려왔다.
"좋다. 우선 이 도관(道觀)을 불질러 버리자!"
"노도(老道)를 화형시키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일이니, 우리가
그를 잡아서 밧줄로 묶어서 각처에 있는 문파에게 구경시켜 주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이 무학태두(武學泰斗)가 늙어도 죽지
않는 모양을 볼 수 있게 된다."
----- 제 4 권 8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4 권 끝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5 권
제 1 장 무당산(武當山)에 부는 회오리
뒷산의 소원과 앞에 있는 삼청전 거리는 이 리(里)정도 되었다.
그러나 그 몇 사람의 말소리는 똑똑히 전해 왔다. 필시 적들이
자기네 무공을 과시하려는 것 같았다.
유대암은 이처럼 사존을 모욕하는 언사를 듣자 화가 치밀어서,
눈에서는 마치 불을 뿜어나오는 것 같았다.
"대암아, 내가 너에게 단단히 일러둔 말을 벌써 잊었느냐? 모욕
을 참아내지 못하면 어찌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 있겠느냐?"
"네, 사부님의 교훈을 받들겠습니다."
"너는 온몸이 불구라 적들이 널 경계하지 않을 것이니 절대로
성질을 부려서는 안 된다. 만약에 내가 고심하여 창작해 낸 절예
(絶藝)를 후세에 전하지 못하면, 넌 바로 무당파의 죄인이 되는
것이다."
이윽고 장삼봉은 몸에 지니고 있는 쇠로 주조된 한 쌍의 나한
(羅漢)을 꺼내어 유대암에게 주며 말했다.
"이 공상의 말을 견주어 보면 소림파가 이미 섬멸되었다는데,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르겠다. 이 자는 소림파의 고수인데 그
자마저 적에게 투항하여 나를 암살하려 온 걸 보면 소림파는 필
시 큰 화를 당한 게 분명하다. 이 한 쌍의 철나한은 백 년 전 곽
양(郭襄) 곽여협께서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네가 나중에 소림의
전인(傳人)에게 돌려주어라. 이 철나한의 몸에서 소림파의 일항
절예(一項絶藝)를 유전(流轉)하기 바랄 뿐이다."
말을 하면서 큰 소맷자락을 한 번 흔들더니 문 밖으로 나갔다.
네 사람이 삼청전에 와보니, 삼청전 안에는 앉아 있거나 서 있
는 사람이 족히 삼, 사 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장삼봉은 가운데 서더니 포권하여 인사만 할 뿐 말을 하지 않았
다. 그러자 유대암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 분이 바로 저의 사존인 장진인이오. 여러분들이 무당산에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장삼봉의 대명(大名)은 무림을 위진(威震)하였기에 모든 사람의
눈빛은 일시에 그의 몸에 집중되었다. 그는 더러운 회색도포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은백색이었고, 체격이 몹시 클 뿐 무슨 특
별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장무기가 이 사람들을 살펴보니, 반수는 명교 교도들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앞에 서 있는 십여 명은 각각 다른 복장을 입고 있
었다. 아마 그들은 신분을 높게 보이려고 다른 사람으로 가장하
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다. 고왜승속(高矮僧俗) 수 백명이 진중
에 모여 있어서 일시에 각자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문 밖에 있는 자가 소리쳤다.
"교주가 오셨습니다."
삼청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을 듣자 즉시 정숙해졌다. 앞
에 있던 십여 명은 얼른 나가서 영접했고 나머지 사람들도 곧 뒤
따라서 나갔다. 눈깜짝할 사이에 삼청전 안에 있던 수백 명이 하
나도 남김없이 모두 나갔다.
이윽고 십여 명의 발자국소리가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워지더니
삼청전 밖에서 멈추었다. 장무기는 전문(殿門)을 바라보는 순간
그만 깜짝 놀랐다. 여덟 사람이 황단대교(黃緞大橋)를 들고 있고
칠, 팔 명이 앞뒤로 호위하며 문 밖에 서 있었다. 그 가마를 들
고 있는 여덟 명의 가마꾼은 바로 녹류장(綠柳莊)의 <신전팔웅
(神箭八雄)>이었다.
장무기는 얼른 두 손으로 바닥에 있는 먼지를 쓸더니 얼굴에다
칠하였다. 명월은 그가 적들을 보게 되자 너무 무서워서 그러는
줄만 알았다. 그러자 자기도 따라서 얼굴을 칠하였다. 두 소도동
은 금방 조군보살(조君普薩)처럼 변해서 본래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었다.
이윽고 가마문이 열리자 소년 공자 하나가 걸어나왔다. 몸에는
하얀 도포를 입고 있었고, 도포 위에는 시뻘겋게 불길이 수 놓아
져 있었다. 부채를 살며시 흔들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남장한 조민
이었다.
'모든 게 전부 그녀가 부린 재주였구나. 그러니 소림파가 전혀
수습하지 못한 것이다.'
이윽고 그녀가 삼청전 안으로 들어가자 십여 명이 따라서 들어
갔다. 그러자 체격이 우람한 남자가 한 걸음 다가서더니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교주께 아뢰오. 이 자가 바로 무당파의 장삼봉 노도이고, 이
불구자는 아마 그의 제 삼제자인 유대암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조민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서
부채를 접으며 장삼봉에게 읍을 하고 다시 말했다.
"만생(晩生)은 명교를 장악하고 있는 장무기입니다. 오늘 무림
의 북두(北斗)를 뵙게 된 것은 실로 영광입니다."
장무기는 몹시 화가 났다.
장삼봉은 <장무기> 세 자를 듣자 매우 이상하게 느꼈다.
'어찌 마교의 교주가 이처럼 젊고 아름다운 소녀일까? 이름도
하필이면 무기와 같단 말인가?'
이윽고 합장을 하며 답례하고 나서 말했다.
"교주께서 광림한 것을 모르고 있어서, 영접하지 못한 죄 용서
해 주기 바라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지객도인 영허가 화공도동(火工道憧)을 이끌고 차를 가지고 왔
다. 조민 한 사람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수하 사람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바른 자세를 취한 채 뒤에 서 있었다. 감히 그
녀의 곁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 불순하게 보
일까 봐 잔뜩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장삼봉은 송원교 등의 생사안위가 몹시 걱정되었다.
"노도의 제자들이 주제를 모르고 귀교에 갔는데, 여태까지 돌아
오지 않았소.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장교주께서 알려 주기 바라
오."
그러자 조민은 히히! 하고 웃더니 말했다.
"송대협, 유이협, 장사협, 막칠협 네 분은 지금 본교의 수중에
있습니다. 각자 약간씩 부상을 당했지만 생명에는 지장 없습니
다."
"상처를 입었다구? 아마 독에 중독되었을 것이오."
"장진인께서는 무학의 절학을 매우 자부하고 계시군요. 그들이
중독되었다고 하시니 그렇다고 하는 게 좋겠군요."
장삼봉은 제자들이 모두 일류 고수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
다. 설사 적이 많아서 역부족이라 해도 몇 사람은 피신하여 회보
(回報)할 것이라 믿었다. 만약에 정말 모두 잡혔다면 필시 적의
독약에 중독된 것이다. 조민은 그가 알아맞추자 자기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장삼봉은 다시 물었다.
"나의 그 은(殷) 제자는 어떻게 되었소?"
"은육협은 소림파의 매복에 당해서 이분 유삼협과 똑같이 사지
가 대력금강지(大力金剛指)에 의해서 절단되었소. 죽지는 않겠지
만 움직일 수는 없겠지요."
장삼봉은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자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인 것
같았다. 그 순간 가슴이 아파 오더니 왁! 하고 소리를 내며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었다.
조민의 등 뒤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기뻐했다. 그들
은 공상의 기습이 성공되었다는 걸 알았다. 이본 무당의 고인은
이미 중상을 입고 있어서 이제는 두려운 게 없었다.
조민이 말했다.
"만생에게 좋은 충고의 말이 한 마디 있는데, 장진인께서 받아
들이겠습니까?"
"말해 보시오."
"우리 몽고의 황제께서는 위력이 사해(四海)에 미치고 있습니
다. 장진인께서 만약에 순종하실 수 있다면 황제께서는 즉시 수
봉(수封)을 하사하실 겁니다. 무당파는 자연히 큰 영총을 받게
될 것이고, 송대협 등도 자연히 무사할 것입니다."
그러자 장삼봉은 고개를 들어 옥량(屋樑)을 바라보더니 냉랭히
말했다.
"비록 명교는 못된 짓을 많이 했으나 항상 몽고인과는 적대 관
계였소. 그런데 언제 조정에 투항하였소? 노도는 금시 초문이
오."
"기암투명(棄暗透明), 항상 사무에 밝은 자가 준걸이오. 소림파
의 공문, 공지 신승 이하 사람들은 모두 투항하여 조정에 진충하
기로 했소."
그러자 장삼봉의 두 눈은 똑바로 조민을 노려보며 말했다.
"원인(元人)들은 잔인무도해서 많은 백성들을 가해했소. 지금
천하의 군웅들이 함께 일어나는 것은 바로 호로(胡虜)를 몰아내
고 우리의 산하를 되찾으려 하는 것이오. 모든 황제(黃帝) 손은
한결같이 달자를 몰아내려는 마음을 갖고 있소. 비록 노도는 출
가의 몸이지만 어느 것이 대의인 줄은 알고 있소. 공문, 공지는
당세의 신승인데 어찌 세력이 굴복할 수 있겠소? 낭자는 어찌 말
을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오?"
그러자 조민의 뒤에서 갑자기 한 남자가 섬출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늙은이가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무당파는 눈깜짝할 사이에 전
멸될 것이다. 당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산에
있는 백여 명의 도인 제자들도 모두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을 줄
아느냐?"
그러자 장삼봉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읊어 댔다.
"인생자고수무사, 류취단심조한청(人生自古誰無死 留取丹心照汗
靑)."
이건 문천상(文天祥)의 두 귀절 시(詩)였다. 문천상이 의거를
일으켰으나 뜻을 얻지 못하여 한탄하고 있을 때, 장삼봉의 나이
는 아직 젊었다. 그는 이분을 몹시 흠모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그 때 무공을 왜 연성하지 못했었나 하고 자주 한탄하였다. 지금
생사가 눈앞에 다가왔으나 자기도 모르게 읊어낸 것이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말했다.
"문승상께서는 뭔가 꺼리고 있었지만 나는 오직 일편단심이다.
훗날 사서(史書)에 어떻게 적어놓든 상관하지 않겠다."
조민이 백옥처럼 흰 왼손을 살짝 한 번 흔들자 그 남자는 허리
를 굽히면서 물러갔다. 이윽고 그녀는 살짝 웃어 보이면서 말했
다.
"장진인께서 정히 이처럼 완고하시다면 잠시 그 얘기는 접어 둡
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저를 따라서 함께 갑시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 있는 네
사람이 재빨리 장삼봉을 포위했다.
이 네 사람 중 하나는 체격이 우람한 남자고, 하나는 누덕누덕
기운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고, 하나는 몸이 마른 화상이고, 다
른 하나는 털이 많고 파란눈을 가진 서역의 호인(胡人)이었다.
장무기는 이 네 사람의 신법을 보고 내심 놀랬다.
'저 조 낭자의 수하에 어떻게 저런 많은 고수들이 있을까?'
장삼봉이 만약에 그녀를 따라가지 않으면 그 네 사람은 즉시 출
수할 눈치였다. 그러자 장무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적방(敵方)의 고수가 너무나 많다. 이 자들은 어떠한 비열한
짓도 능히 하는 무리라서 광명정을 위공한 육대파 하고는 비교할
수 없다. 내가 태사부님과 삼사백의 안전을 보호하기는 실로 어
렵다. 설사 그 중의 몇 사람을 격패하더라도 그들은 절대로 패배
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한꺼번에 달려들 것이다. 이왕 일이 이
처럼 되었으니 오직 사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겠다. 만약에 조 낭
자를 잡아와서 상대방을 협박하게 되면 그 이상 바랄 게 없겠구
나!'
이윽고 그가 나서서 네 사람에게 호통치며 저지하려는 순간, 갑
자기 문 밖에 음산한 긴 웃음소리가 한 번 들리더니 청색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삼청전 안으로 들어왔다.
이 사람의 신법은 마치 귀신이나 바람, 번개 같았다. 순간 그
체격이 우람한 남자의 등 뒤로 돌아가서 일장을 후려쳤다. 그 남
자는 몸을 돌리지 않고 손을 되돌려서 일장을 받아쳤다. 그와 경
공(勁功)으로 겨루자는 의도 같았다. 그 사람은 일장이 명중되기
를 기다리지 않고 이미 왼손으로 그 서역 호인의 어깨를 후려쳤
다. 그러자 그 호인은 번개처럼 피하면서 발을 날려 그의 하복부
를 걷어찼다. 그 사람은 벌써 그 수화상을 공격하면서 바로 몸을
비스듬히 해서 뒷걸음치며 좌장으로 그 누더기옷을 입은 자에게
후려쳤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는 사 장을 연거푸 출수하면서 네
명의 고수에게 공격했다.
비록 일장도 적중되지 않았지만 수법의 신속함은 실로 혀를 내
두를 정도였다. 그러자 그 네 사람은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난
줄 알고 각자 몇 발씩 물러나더니, 다시 태세를 가다듬고 접전했
다.
그 청의인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장삼봉에게 허리를 굽히고
인사하면서 말했다.
"명교 장교주의 좌하 위일소 후배가 장진인을 참견합니다."
이 사람은 바로 위일소였다. 그는 도중의 적들을 물리치고 곧바
로 달려온 것이다.
장삼봉은 그가 <명교 장교주의 좌하>를 자칭하는 걸 듣자 그도
역시 조민 일당인 줄만 알고 있었다. 그가 출수하여 네 사람을
격퇴한 건 필시 다른 음모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냉랭하게 말했
다.
"위선생은 격식을 따질 필요없소. 청익복왕의 뛰어난 경공실력
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들어왔소. 오늘 직접 보게 되니 과연 헛소
문이 아니구료."
위일소는 몹시 기뻐했다. 그는 자주 중원으로 나오지 않아서 평
소에 명성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장삼봉이 자기의 경공 실
력을 알고 있다고 하자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장진인께서는 무림의 북두(北斗)이신데, 후배가 지인에게서 칭
찬의 말을 듣게 되니 실로 영광입니다."
그는 몸을 돌려서 조민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 낭자, 당신은 명교로 위장하여 본교의 명성을 더럽히는 저
의가 도대체 무엇이오? 진짜 사내 대장부라면 어찌 이처럼 음흉
악랄할 수 있단 말이오?"
"난 원래부터 사내 대장부가 아니오. 설사 음흉 악랄했더라도
당신이 어찌 하겠다는 거죠?"
"여러분들은 소림을 먼저 공격하고 다시 무당에 와서 소란을 피
우는데, 도대체 그 저의가 무엇이오? 여러분들이 만약에 소림,
무당과 원수진 일이 있다면 명교가 간섭할 일이 아니오. 하지만
여러분은 우리 명교의 이름을 도용하고 본교 교도들을 가장하고
있는데, 나 위일소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구료."
장삼봉은 백 년 동안 조정과 원수지간인 명교가 몽고에게 항복
했다는 것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막상 위일소의 말을 듣자 그
제서야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여자는 가짜였구나. 비록 마교의 명성이 좋지 않은 건 사실
이지만, 이처럼 큰일을 닥치게 되면 그들 역시 그냥 지나 칠 수
없겠지.'
조민이 그 체격이 우람한 남자에게 말했다.
"저 자의 당돌한 말투 좀 들어봐라.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는지
네가 한번 시험해 보아라."
"네."
그 대한(大漢)은 허리를 굽혀 대답하고 나서 허리띠를 졸라 매
더니 삼청전 중앙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위복왕, 당신의 한빙면장(寒氷綿掌) 무공을 구경하고 싶구료."
그러자 위일소는 깜짝 놀랐다.
'저 자가 어찌 한빙면장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나에게
도전해 오는 걸 보면 보통내기는 아닐 것이다.'
그 대한은 손뼉을 한 번 치더니 말했다.
"각하(閣下)의 존함은 무엇이오?"
"우리가 명교로 위장하고 왔는데 어찌 남에게 진짜 이름을 밝히
겠소? 복왕은 자신이 둔하다고 생각지 않소?"
그러자 조민의 뒤에 있던 십여 명은 일제히 큰 소리로 웃었다.
"그렇군. 물어본 내가 어리석었소. 각하는 이족(異族)의 사냥개
노릇을 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성명을 밝히지 않아야만 조상에게
욕되게 하지 않겠구료."
그러자 그 대한의 얼굴이 상기되면서 울화가 치밀었다. 순간
휴! 하고 위일소의 가슴에 일장을 후려쳤다.
위일소는 이미 예상을 했는지 옆으로 피하면서 손가락을 뻗어
그의 배심(背心)으로 공격했다. 그는 한빙면장을 사용하지 않고
먼저 그 대한의 무공 허실을 시험해 보았다. 그러자 그 대한은
좌필을 뒤로 흔들었다. 초수가 지나자 대한의 장세(掌勢)가 점차
빨라지고 장력 또한 예리해졌다.
위일소는 장삼봉 같은 대종사(大宗師) 면전에서 출수하기 때문
에 전혀 태만할 수 없어 즉시 한빙면장의 무공을 전개했다. 두
사람의 장세가 점점 느려지더니 서로 내력을 겨루는 경지에 도달
했다.
이때 갑자기 획! 하는 소리가 나더니 대문 안으로 시꺼먼 거대
한 물건 하나가 날아와 대한에게 다가갔다. 이 물체는 쌀 한 가
마니보다 더 컸다. 세상에 이렇게 방대한 암기가 있단 말인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자 그 대한은 좌장에 운경(雲勁)하여
이 물체를 일장 밖으로 후려쳤다. 손 닫는 곳이 물렁물렁한 게
도대체 무슨 물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곧이어 으악! 하고 비명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자루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자는
그 대한의 예리한 일장을 얻어 맞았으니 필시 근골이 절단되었을
것이었다.
순간 그 대한은 깜짝 놀라더니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위
일소는 소리없이 그의 등 뒤로 가서 등에 있는 대추혈(大推穴)에
다 한빙면장 일기(一記)를 후려쳤다. 순간, 그 대한은 경력이 엇
갈렸다. 급히 몸을 돌리면서 위일소의 머리 위로 일장을 반격했
다.
위일소는 하하.....! 하고 웃을 뿐 전혀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한의 장력은 상대방의 천령개(天靈蓋)에 적중되었으니, 전
혀 경력이 없어서 마치 살짝 스치는 것 같았다. 위일소의 한빙면
장이 몸에 적중된 순간부터 상대방의 경력이 즉시 사라진 것이
다.
그러나 고수끼리 대전하는데 어찌 뇌문(腦門)을 강적의 손에 마
음대로 후려치게 내버려둘 수 있단 말인가. 그 담력이야말로 놀
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관하고 있는 사람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위일소가 일생 동안 행한 일들은 모두 괴상망칙했다. 남들이 감
히 하지 못하는 것, 하기 싫어하는 것, 할 가치가 없는 일일수록
그는 골라서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대한이 잠시 방심하는 틈
을 타서 기습하는 건 광명정대한 일은 아닌줄 알았지만, 바로 뇌
문으로 상대방의 일장을 태연하게 받아내는 것 또한 지나친 것이
라 생각했다. 정말로 담력이 너무나 커서 생사를 장난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누더기옷을 입고 있는 자가 자루를 찢어서 사람 하나를 끌어
냈다. 그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 있는 걸로 보아 그 대한의 일
격에 벌써 죽은 것 같았다. 이 자의 흑의를 보니 바로 그들의 일
행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자루에 담긴 채 던져져 들어왔는
지 아무도 몰랐다.
그 자는 크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누가 감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얀 자루 하나가 머리 위로 다가왔다.
그러자 그는 얼른 기(氣)를 끌어올려 뒤로 튕기면서 이 일탁(一
卓)을 패했다. 그러자 방대한 화상 하나가 웃으면서 앞에 서 있
었다. 바로 포대화상(布袋和尙) 설불득이 도착한 것이다.
설불득의 건곤일기대(乾坤一氣袋)는 광명정에서 장무기에 의해
파손된 후, 진수의 병기가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설불득은 하는
수 없이 아무렇게나 포대를 몇 개 만들어서 응용하고 있는 것이
다. 물론 원래 지니고 있던 그 도검불파(刀劍不破)의 건곤일기대
만큼은 무력이 없다. 그의 경공은 비록 위일소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조예는 몹시 깊었다. 더구나 도중에서 장애물이 없었기에
바로 도착하게 된 것이다.
이윽고 설불득도 허리를 굽히고 장삼봉에게 인사하고 나서 말했
다.
"명교 장교주의 좌하 포대화상 설불득이 무당 장진인을 참견합
니다."
그러자 장삼봉도 답례를 하면서 말했다.
"대사께서 먼길을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소."
"폐교 교주의 좌하인 광명사자, 백미응왕, 그리고 사산인, 오기
사 등도 각각 다른 길로 무당산으로 오고 있습니다. 장진인께서
는 수수방관만 하십시오. 명교의 사람들이 남의 이름을 도용하고
파렴치한 짓을 하는 놈들을 상대해 주겠습니다."
그의 이 말들은 모두 허세였다. 명교의 대부대는 이렇게 빨리
당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민은 그 말들을 듣자 그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들이 이같이 빨리 올 수 있는 건 필시 기밀이 누설된 것이
다.'
"당신들의 장교주는 어디 있죠? 날 만나러 오라 하시오!"
그러면서 의문에 가득 찬 눈으로 위일소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위일소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우리 교주님으로 가장하지 않는구료."
말을 마친 위일소는 사방을 살피며 생각을 굴렸다.
'필시 교주는 벌써 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 있을
까?'
장무기는 명월의 뒤에 줄곧 은신해 있었다. 그런데 힘있는 방수
(幇手) 두 사람이 당도하자 매우 고마우면서 위안이 되었다.
조민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독 있는 박쥐 한 마리와 냄새나는 화상 하나가 무슨 쓸모가 있
겠느냐?"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동쪽의 지붕 위에서 한 사람이 길게 웃
더니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불득 대사, 양좌사는 아직 당도하지 않았소?"
이 자는 바로 백미응왕 은천정이었다. 설불득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양소의 웃음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서쪽 지붕 위에서 들려왔
다.
"응왕, 한 발 먼저 당도한 걸 보면 역시 당신의 공력이 한 수
위이구료!"
그러자 은천정은 웃으며 말했다.
"양좌사, 겸손할 것 없소.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도착한 것이
니 우열을 가릴 수 없소. 아마 당신은 장교주를 봐서 양보한 것
같소이다."
"어진 일을 하는데 어찌 양보하겠소? 이 몸은 전력 질주 하였는
데도 여전히 응왕께서 한 발 앞서 온 것이오."
그들 두 사람은 도중에서 각력(脚力)을 겨루었다. 은천정은 내
력이 비교적 심후했고 양소는 걸음이 가볍고 빨랐다. 그들은 어
깨를 나란히 해서 출발하여 동시에 도착한 것이다. 두 사람은 다
시 한 번 길게 웃더니 지붕 위에서 동시에 뛰어내렸다.
장삼봉은 은천정의 명성을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더구나 그는
또 장취산의 장인이 아닌가! 양소도 강호에서 대단한 명성이 있
었다. 장삼봉은 앞으로 세 걸음 다가가서 포권을 하며 말했다.
"은형, 양형의 대가(大駕)를 장삼봉이 공손히 영접하는 바이
오."
그러면서 내심 의아한 것이 있었다.
'은천정은 분명히 천응교의 교주인데, 뭣 때문에 <장교주의 체
면을 봐서>란 말을 하는 것일까?'
은, 양 두 사람은 허리를 굽히고 인사했다. 은천정이 말했다.
"장진인의 청명(淸名)은 오래전부터 흠모해 왔으나, 인연이 없
어서 뵙지 못했습니다. 오늘 지안(芝顔)을 뵙게 되어서 정말 영
광입니다."
"두 분께서는 모두 일대 종사인데, 광림하신 것은 참으로 성회
(成會)라 할 수 있소."
조민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목하 명교의 고수들이 점차
많이 오고 있는데, 장무기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아마
설불득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확실히 몰래 뭔가 무서운 진세
(陳勢)를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계획한 계책은
아마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장삼봉은 중상을 입고 있었다. 이건 천 년에 한 번 맞기
어려운 절호의 기회였다. 만약에 오늘 이 기회에 무당파를 처리
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그의 상처가 회복되게 되면 더욱 상대하
기 힘들 것이다.
조민은 결단을 내린 듯 새까만 두 눈을 몇 번 돌리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호의 소문에 의하면 무당파는 정대 문파라 하였는데, 안타깝
게도 소문과는 다르군요. 무당파는 몰래 마교와 내통하여 마교의
힘을 입고 있었군요. 그러니 본문의 무공을 내 세울 값어치도 없
을 거구요."
설불득이 말했다.
"조 낭자 너무나 유치한 말을 하는구료. 장진인께서 무림을 위
진(威震)할 때 아마 그대의 조부님도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
을 것이오. 어린애가 뭘 알고 있겠소?"
그러자 조민의 등 뒤에 있던 십여 명은 일제히 한 발 다가서더
니 무서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설불득은 오히려
즐거운 듯 웃으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내가 못할 말을 했다고 생각되느냐? 나의 이름은 설
불득이지만 말하는 건 항상 멋대로 한다. 그렇다고 너희들이 날
어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자 조민의 수하인 그 마른 화상이 화를 내며 말했다.
"주인나리, 소인이 저 말 많은 화상을 요리하겠소."
"좋다. 네가 야화상(野和尙)이면 나도 야화상이다. 우리가 겨루
고 있는 동안 무당 총사 장진인께서 미숙한 곳을 지적해 주신다
면, 우리가 고련(苦練) 십 년 한 것보다 더 능률적일 것이다."
말을 하면서 양손을 흔들더니 품에서 포대 한 개를 끄집어 냈
다.
그러자 조민은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은 우리가 무당절학을 배우러 온 것이오. 무당파의 어떤
분께서 나오셔도 우리는 기꺼이 상대해 주겠소. 무당파에게 과연
진재실학(眞才實學)이 있는지, 아니면 허위적인 명성뿐인지 오늘
일전을 치루고 나면 천하가 모두 알게 될 것이오. 명교와 우리의
사소한 일들은 나중에 천천히 다시 계산해 보기로 합시다. 장무
기, 그 간사하고 교활한 귀신 같은 놈은, 내 그의 힘줄을 뽑고
가죽을 벗기지 않는다면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할 것이다. 하
지만 그 일은 지금 서두를 것 없소."
장삼봉은 그녀의 말을 듣자 내심 몹시 이상하다고 느꼈다.
"명교의 교주 이름이 정말 장무기란 말이냐? 그런데 뭣 때문에
또 귀신 같은 놈이라고 하는 것이냐?"
설불득이 웃으며 말했다.
"본교의 장교주께서는 소년 영웅이오. 아마 조 낭자는 우리 장
교주보다는 몇 살 아래일 것이오. 차라리 우리 교주에게 시집오
는 게 어떠하겠소? 이 화상이 보기에는 아주 천생연분....."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조민의 등 뒤에 있던 사람들이
우뢰 같은 소리로 호통쳤다.
"허튼소리!"
"입 닥쳐라!"
"야화상, 개수작 하지 마라!"
조민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용모가 더욱 아름다왔다. 그녀의 눈
치는 별로 싫은 것 같지는 않았다. 군호를 호령하는 대수령이 삽
시간에 부끄러워하는 계집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잠시
였다.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더니 얼굴에는 마치 차가운 서리가
한 겹 싸여 있는 것처럼 냉정한 모습으로 장삼봉에게 말했다.
"장진인, 만약 당신이 한 수를 보이기 싫어하시면 말이라도 한
마디 남기기 바라오. 단지 무당파는 세상을 기만하는 도적 무리
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박수를 치고 물러가겠소. 설사
송원교, 유연주 그 녀석들을 당신에게 돌려 준다 해도 무슨 거리
낄 게 있겠소?"
바로 이때 철관도인 장중과 은야왕이 도착했다. 얼마 후 주전과
팽영옥도 무당산에 당도했다. 명교 쪽에는 다시 네 명의 고수가
증가한 것이다.
조민은 형세를 재어보니, 쌍방이 결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이기
리라는 승산이 없었다. 그녀가 제일 염려하는 건 역시 장무기가
몰래 수작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길은 명교의 사람들 얼
굴을 훑어보더니 잠시 생각을 굴렸다.
'장삼봉이 조정의 근심거리가 된 것은, 그의 위명이 너무나 성
해서 무림에 있는 사람들이 태산북두로 떠받들기 때문이다. 그러
나 그가 조정과 적대 관계가 된다면 중원의 무인들도 그를 멀리
할 것이다. 그는 바람 앞에 있는 촛불과 같은데 몇 년을 더 살
수 있겠는가? 오늘 구태여 그를 죽일 것까지는 없고, 단지 그에
게 한바탕 모욕을 주어 무당파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리기만 하면
이번 걸음은 크게 성공한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생각한 조민은 냉랭하게 말했다.
"우리가 무당을 방문한 것은, 단지 장진인의 무공이 도대체 진
짜인가 거짓인가를 알아보기 위함이오. 만약에 명교를 섬멸하려
했으면 우리가 뭣 때문에 광명정에 가지 않고 이리로 오겠소? 또
뭣 때문에 무당산에서 무예를 겨루겠소? 세상에서는 어찌 장진인
만을 태산북두로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럼 이렇게 합시다.
저에게 가인(家人) 세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돼지잡고 개잡는
검법을 배웠고, 하나는 거칠은 내공을 약간 배웠고, 또 하나는
다리 셋 달린 권각(拳脚)을 몇 초 배운 적이 있소. 아대(阿大),
아이(阿二), 아삼(阿三) 일어나거라. 장진인께서는 나의 이 쓸모
없는 가인 세 명만 제압하신다면, 우리는 무당파의 무공에 대해
서 나돌고 있는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란 걸 인정하지요. 그렇지
않는다면 강호에서 자연히 비평받을 것이니 구태여 제가 말할 것
까지는 없지 않소?"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서 천천히 세 사람이 걸어나왔다.
아대는 비쩍 마른 노자였고 두 손에는 장검 한 자루를 안고 있
었는데, 바로 그 의천보검이었다. 이 자의 체격은 훤칠한 키에
비쩍 마르고 얼굴은 주름투성이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것이
마치 금방 남에게 매를 맞은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그의 표정
을 보게 되면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려 줄 지경이었다.
아이라는 자도 같은 체격이지만 키가 약간 작았다. 머리 위가
까졌는데 머리카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양쪽의 태양혈은
반촌(半寸)쯤 안으로 오목했다. 아삼은 몹시 우람하게 생겼고 얼
굴, 손, 목덜미 등 보이는 근육마다 모두 울퉁불퉁해서 마치 온
몸에 정력이 넘쳐서 폭발할 것 같았다. 그의 왼뺨에는 검은 점이
하나 있고, 검은 점에는 긴 털이 많이 있었다. 장삼봉, 은천정,
양소 등은 이 세 사람의 모습을 보자 내심 깜짝 놀랐다.
주전이 말했다.
"조 낭자, 이 세 분은 모두 무림에 있는 일류고수라서 나 주전
은 그들의 상대가 못 되오. 그런데 어째서 머슴으로 가장하여 장
진인을 히롱하려는 것이오?"
"그들이 무림의 일류고수라뇨? 전 금시초문이예요. 그들의 이름
을 아십니까?"
그러자 주전은 즉시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즉시 농담으로 대답
했다.
"이분은 일검진천하(一劍震天下)의 추미신군(皺眉神君)이고, 이
분은 단기 팔방(丹己覇八方)의 독두천왕(禿頭天王)이오. 그리고
이분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히히...! 바로 ..... 저..... 신권
개세(神拳蓋世)의 대력존자(大力尊者)이지요."
조민은 그가 엉터리로 지껄이고 있다는 걸 알고는 그만 피! 하
고 웃으면서 말했다.
"나의 집에서 밥하고 차 끓이고 청소하는 머슴 세 사람을 무슨
신군, 천왕, 존자라 하고 있는 거요? 장진인, 저 아삼과 먼저 권
각을 겨루어 보시지요?"
그러자 아삼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더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장진인, 먼저 하십시오."
왼발을 한 번 내딛더니 부드득! 하고 소리가 나면서 땅에 놓여
있는 벽돌 세 장이 부서졌다. 발을 디딘 곳에 있는 파란 벽돌이
부서진 건 신기하지 않지만, 옆에 있는 벽돌 두장이 그의 각력에
울려서 가루가 되었다.
양소와 위일소는 서로 눈길을 주고 받으며 내심 감탄을 했다.
그 아대와 아이 두 사람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더니 고개를 숙이
고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무당파의 지객도인 영허는 줄곧
태사부의 상세(傷勢)를 걱정했었다. 이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우리 태사부님께서 방금 피를 토해 낸 것을 당신들도 보았지
않소? 그런데 당신들은 어째서..... 어째서.....!"
그는 울음이 터지려 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은천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진인이 부상을 입어서 피를 토했구나. 도대체 누구에게 부상
을 당했단 말인가? 설사 그가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해도 그 나이
에 어찌 이 자들 하고 권각을 겨루겠는가? 저 자의 무공을 보니
모두 강맹한 것 같은데, 내가 그를 상대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윽고 낭랑한 목청으로 말했다.
"장진인의 신분으로 어찌 이런 미천한 사람과 겨루겠소. 이거야
말로 엄청난 웃음거리가 아니겠소? 장진인은 말할 것도 없고, 설
사 나 자신도..... 이런 미천한 머슴은 나의 일천일각도 받을 자
격이 없소!"
그는 아대, 아이, 아삼이 절대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그들에게 모욕을 줘 자기에게 시비
를 걸어오기를 바랬던 것이다.
조민이 말했다.
"아삼, 넌 최근에 무슨 일을 했느냐? 그들에게 얘기해 드려라.
그래야만 그들이 무당파와 겨뤄도 자격이 있는지를 판가름할 것
이다."
그녀의 말은 시종일관 무당파를 물고 늘어졌다.
"소인은 최근에 별달리 한 일도 없습니다. 단지 서북도(西北道)
에서 소림파의 공성이라는 화상과 겨뤘는데, 지력(指力)대 지력
으로 그의 용조수를 격파하고 즉시 그의 수급을 잘랐습니다."
이 말을 하자 대청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공성신승은 광명정에서 용조수로 장무기와 겨뤄 크게 우세했
다는 건 명교 중 고수들은 모두 직접 목격했었다. 그런데 이 자
가 죽였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가 소림신승을 격패한
신분이라면 충분히 장삼봉과 겨룰 수 있었다.
은천정이 큰 소리로 말했다.
"좋다. 네가 소림파의 공성신승까지 타사했으니, 네가 한번 겨
루어 보는 것도 오히려 즐거운 일이다."
말을 하면서 얼른 앞으로 두 걸음 다가서더니 자세를 취했다.
백미(白眉)를 위로 세우니 더욱 더 위풍이 당당하게 보였다.
그러자 아삼이 말했다.
"백미응왕, 당신은 사마외도인데 나 아삼은 외도사마이오. 우리
는 한 코로 숨쉬기 때문에 자기 사람이 자기 사람을 치는 격이
되오. 당신이 정히 싸우고 싶으면 나중에 날짜를 잡아서 겨룹시
다. 오늘 주인나리의 명은 오직 소인에게 무당파 무공의 허실(虛
飾)을 시험하라고 하셨소."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장삼봉에게 말했다.
"장진인, 당신이 진정 나오기 싫어한다면 한 마디 말이라도 하
시오. 그래야만 상전에게 알리기라도 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무력을 써서 강압하지는 않겠소. 무당파가 패배를 인정하
는 게 그렇게도 하기 어려운 것입니까?"
그러자 장삼봉은 살며시 한 번 웃더니 속으로 생각했다.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만약에 새로 창작한 태극권 중에 있는
허로 실을 통제하는 상승무학 법문을 전개하면 반드시 그에게 패
한다고는 할 수 없다. 단지 힘든 건 아삼을 격패한 다음이다. 그
렇게 되면 아이가 내력을 겨루자고 할 것인데, 그건 전혀 꾀를
쓸 수 없어서 그 일만은 절대로 지나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발
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하는 수 없이 아삼을 우선 제압해 놓고
다시 생각하자.'
이윽고 느린 걸음으로 삼청전 중심으로 걸어가서 은천정에게 말
했다.
"은형의 아름다운 뜻을 빈도는 잊지 않겠소. 빈도가 근 몇 년
동안 권술 한 가지를 창작하였는데 이름은 태극권이라 하오. 제
생각으로는 일반의 무학과는 퍽 다른 것 같았소. 이분 시주께서
기어이 무당파의 무공을 인증(印證)하려는데, 만약 은형께서 그
를 격패하면 그의 마음은 흡족하지 않을 것이오. 빈도는 바로 태
극권 중의 초수로 그와 몇 수 겨룰 것이오. 그래야만 빈도가 다
년간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것을 여러분들에게 선보일 것이 아닙
니까?"
은천정은 그의 말을 듣자 몹시 기뻐했으나, 한편으로는 몹시 걱
정되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태극권에 대해서 퍽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장삼봉이 어떠한 인물인가! 일단
그 말이 나온 이상은 자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일세의 위명을 가볍게 떨어뜨릴 수가 있겠는가. 그
러나 방금 그는 중상을 입어서 피를 토했기에 권기는 비록 정오
해도 결국, 내력은 지탱하기 힘들것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포권을 하면서 말했다.
"후배는 장진인의 신기를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겠소."
아삼은 장삼봉이 바람처럼 가볍게 다가오는 것을 보자 속으로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서 내심 생각을 굴
렸다.
'오늘 내가 이 노도하고 양패구상(兩敗俱傷)만 되더라도, 그 또
한 무림을 놀라게 하는 큰 사건이다.'
이윽고 숨을 죽이고 정신을 집중하더니, 두 눈은 장삼봉의 얼굴
을 주시했다. 속으로 기를 몰래 돌리자 온몸의 뼈마디는 뿌드득!
하며 가벼운 폭발소리가 끊임없이 발출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
다시 얼굴을 서로 쳐다보면서 놀랬다. 이건 불문정종(佛門正宗)
의 최상승 무공으로 밖에서부터 안에까지는 전혀 사기(邪氣)가
없는 금강복마신통(金剛伏魔神通)이었다.
장삼봉은 그의 이같은 모습을 보자 두려움과 감탄이 일었다.
'이 자의 내력은 보통이 아니구나. 과연 나의 이 태극권이 쓸모
있으지 모르겠구나.'
이윽고 양손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리면서 아삼에게 출수하라고
하였다. 바로 그 순간, 유대암의 등 뒤에서 헝클어진 머리에 더
러운 얼굴의 소도동 한 명이 걸어 나오면서 말했다.
"태사부님, 이분 시주께서 우리 무당파의 권기(拳技)를 견식하
고 싶다고 하셨지만, 뭣 때문에 태사부님이 대가를 수고하시겠습
니까? 제자가 몇 초 행하여 그에게 보이면 족하지 않습니까?"
이 얼굴에 먼지투성이의 소도동은 바로 장무기였다. 은천정, 양
소 등은 그와 헤어진 지 오래 되지 않았다. 비록 지금 그의 복장
과 얼굴 모양이 전부 달라졌지만 음성을 듣자 즉시 알아차렸다.
명교의 군호(群豪)들은 교주가 여기에 벌써 와 있다는 것을 보자
모두 매우 기뻐했다.
장삼봉과 유대암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장삼봉은 그가 입고 있
는 복장을 보자 청풍인 줄만 알고 말했다.
"이분 시주께서는 소림파 금강복마의 외문신통(外門神通)을 지
니고 계시다. 필시 서역에 있는 소림의 고수일 것이다. 너처럼
어린애는 일초만 맞아도 즉시 근골이 파열될 것인데, 어찌 장난
을 하려 하느냐?"
그러자 장무기는 왼손으로 장삼봉의 옷자락을 끌며 오른손으로
그의 왼손을 맞잡고 살며시 흔들면서 말했다.
"태사부님, 그 태극권법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아서 성취할 것
인지 어떤 것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마침 이분 시주는 외가고수
(外家高手)라서 제자가 이유극강, 운허어실(以柔克剛 雲虛御實)
의 법문을 시험하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라고 하며 장무기는 몹시 심후하고 매우 부드러운 한 줄기 구양
신공을 손아귀에서 장삼봉의 체내로 전입했다.
그러자 장삼봉은 삽시간에 그 경력의 힘이 강맹무쌍하게 느껴졌
다. 비록 자기 내력의 정순(精純)한 것보다는 훨씬 못하지만 산
뜻하면서 오랫 동안 계속되어 끊어지지 않았다. 순간 장삼봉은
깜짝 놀라면서 장무기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오히려 은은하게 한 겹의 부드럽고
밝은 느낌을 주었다. 이미 내공이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았
다. 그가 살아 생전 만났던 인물 중에는 오직 본사(本師) 각원대
사(覺遠大師), 대협 곽정(郭靖) 등 몇몇 사람만이 이러한 수위
(修爲)가 있었다. 당세의 고인들도 자기 외에는 다른 누구도 이
러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실로 생각하지 못했다. 삽시간에 그의
마음에는 수많은 의문이 밀려왔다. 이윽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내가 쇠약하고 우둔한데, 무슨 좋은 무공을 너에게 가르쳐 주
겠느냐? 네가 이분 시주의 절정 외가무공하고 겨루는 것도 무방
하나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그는 이 소도동이 어느 파의 소년 고수가 달려와서 구원해 주는
줄 알고 말했지만 몹시 겸손했었다.
장무기가 말했다.
"태사부님, 당신은 제게 산처럼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저
의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부서진다 해도 태사부님과 사백숙님들
의 대은을 갚지 못합니다. 우리 무당파의 무공이 비록 천하무적
이라 할 수 없지만, 서역 소림의 수하에 패하지는 않을 것입니
다. 그러니 태사부께서는 안심하십시오."
그의 이 몇 마디는 너무나 간절하고 진실하였다. 몇 마디 <태사
부>라고 부르는 건 너무도 자연스레 부른 것이다. 장삼봉마저 몹
시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는 본문의 제자인데, 몰래 잠심수위(潛心修爲)하여
마치 옛날의 본사인 각원대사 같단 말인가?'
그는 천천히 장무기의 손을 놓아 주고 뒤로 물러갔다. 의자에
앉아서 곁눈질로 유대암을 쳐다보자 그 역시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삼은 장삼봉이 이 소도동을 출전시키는 걸 보자 자기를 극도
로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내가 일권에 저 소도동을
타사하여 노도를 격분시킨 다음 다시 그와 겨루게 되면, 더욱 승
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장무기에게 말했다.
"꼬마야, 발초하거라!"
"제가 새로 배운 이 권술은 우리 태사부님인 장진인께서 다년간
심혈을 기울여서 창작한 것인데, 이름은 태극권이라고 하오. 후
배가 처음 배운 것이라 수련을 많이 하지 못해서 권법 중에 정오
함을 미처 깨우치지 못했소. 그러니 삼 십초 이내에는 아마 당신
을 쓰러뜨리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그건 제가 무예를 잘못 배운
것이지 절대로 이 권술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란 걸 당신은 알아
두어야 하오."
그러나 아삼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고개를 돌리더
니, 아대와 아이에게 말했다.
"큰 형님, 둘째 형님, 세상에 이처럼 광망한 녀석이 있구료."
그러자 아이는 소리를 높여서 크게 웃었다. 그러나 아대는 이
소도동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다.
"셋째 아우, 적을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된다."
아삼은 욱! 하고 일권을 장무기의 가슴에 후려쳤다. 이 일초는
번개처럼 다가갔지만 중도에서 왼손 주먹이 더욱 민첩하게 다가
갔다. 후발선지하면서 장무기의 면문을 공격했다. 초수의 교묘함
과 괴이함은 실로 보기 드문 것이었다.
장무기는 장삼봉이 태극권을 설명하는 것을 들은 후부터 한 시
간이 넘도록 계속 이 권술의 권리(拳理)를 묵묵히 생각하고 있었
다. 막상 아삼의 좌권이 공격해 오는 걸 보게 되자, 즉시 태극권
의 일초인 람작미(欖作尾)를 전개했다. 그러자 아삼의 몸은 자기
도 모르게 앞으로 돌진했다. 두 걸음 넘어서야 겨우 몸을 똑바로
할 수 있었다. 방관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보게 되자 일제히 비명
과 탄식의 소리를 질렀다.
이 일초의 람작미는 천지간에서 오직 태극권이 처음으로 사람과
겨루는데 사용한 것이다. 장무기는 몸에 구양신공을 지니고 있고
건곤이위의 무술을 자유자재로 전개할 수 있어서, 비록 갑자기
태극권 중위 <점(點)>법을 사용했으나 마치 평생동안 연습을 한
것 같았다. 아삼은 그에게 한 번 떠밀리게 되자 자기의 일권에
있는 천만 근의 힘이 마치 망망대해에 타입(打入)된 것처럼 아무
흔적도 없었고, 몸은 오히려 자기의 권력에 끌려서 옆으로 두 걸
음을 내디디면서 넘어질 뻔했다. 그러자 그는 깜짝 놀라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빠른 주먹으로 연거푸 공격했다. 비영(臂
影)이 흔들거리며 마치 수십 개의 팔과 수십 개의 주먹이 동시에
격출(擊出)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광풍폭우 같은 공세를 보자 모두 놀라움
을 금치 못했다.
'저러니까 공성대사 같은 무공이 고강한 고수도 그의 손에 목숨
을 잃은 모양이군.'
조민과 함께 온 사람들 외에는 모두 장무기를 위해서 걱정해 주
었다.
장무기는 무당파의 위명을 과시하려는 심산으로 자기 본신의 무
공은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매 초식마다 전부 장삼봉이 창작해
낸 태극권의 권초였다. 그는 <수휘비파(手揮琵琶)> 일초를 사용
할 때는 순식간에 태극권지(太極拳旨) 중에 있는 오묘한 것을 깨
닫게 되어, 이 일초를 마치 움직이는 구름과 흐르는 물처럼 멋지
게 전개했다.
아삼은 상반(上盤)의 각로(各路)가 이미 모든 곳이 그의 쌍장에
감싸 있는 것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전혀 피할 수 없고 전혀 저
항할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등에다 운경(運勁)하여 억지로 그
의 일장을 받아 내면서 동시에 우권을 맹렬히 휘둘렀다. 오로지
두 사람이 각각 일초씩 받아서 양패구상의 상황으로 만들 속셈이
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장무기는 양손으로 원을 그리자 마치 태극을
안고 있는 것처럼 한 줄기 대단한 역도(力道)가 하나의 회오리를
만들더니, 그의 몸을 칠, 팔 바퀴 급회전을 시켰다. 마치 팽이와
나사못처럼 돌려 버렸다. 어렵게 사용한 천근추(千斤墜)의 힘으
로 고정시킨 아삼은 이미 얼굴이 온통 팽창되어 빨개지면서 낭패
의 꼴이 되었다.
그러자 명교의 군호는 큰 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이윽고 양소가
소리치면서 말했다.
"무당파의 태극권 무공이 이처럼 신묘할 줄이야. 정말로 믿어지
지가 않는구료."
주전은 웃으면서 말했다.
"아삼 노형, 난 당신에게 충고하고 싶소. 이름을 아전(阿轉)으
로 바꾸는 게 좋을 것 같구료."
은야왕이 말했다.
"많은 바퀴를 도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오? 옛날에도 있지 않
소. 삼십 육 착(着), 전위상착(轉爲上着)!"
설불득이 말했다.
"왕년에 양산박의 호한 중에는 흑선풍(黑旋風)이라는 사람이 있
었소. 그 선풍이란 본시 돌아야 하는 게 아니오?"
아삼은 울화가 치밀어서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성난 소
리를 한 번 지르더니 몸을 위로 솟구치면서 덮쳐갔다. 왼손은 권
또는 장으로 변화를 예측할 수 없었고, 오른손은 모두 손가락 무
공으로 다섯 손가락은 마치 판관필이나 점혈궐(點穴獗)처럼, 또
는 도검이나 창극(愴戟)처럼 공격해 오는 자세가 너무도 예리했
다.
장무기는 태극권의 권초가 미숙해서 금방 수족이 망란(忙亂)되
어 막아내지 못했다. 갑자기 지익! 하고 소리가 나더니 옷자락이
찢기고 끊어졌다. 하는 수 없이 경공을 전개하여 급히 피해다녔
다. 잠시 이 난생 처음 보는 오지무공(五指武功)을 피할 속셈이
었다. 그러자 아삼은 호통치며 쫓아다녔지만 어찌 상대방의 경공
을 따르겠는가? 연거푸 십여 초를 모두 헛치고 만 것이다.
장무기는 피해다니면서 생각했다.
'내가 피해만 다니고 싸우지 않는다면 그건 패배한 것이 아닌
가? 이 태극권은 아직 미숙하니까 잠시 건곤이위의 무공으로 그
와 겨루어야겠다.'
그는 몸을 한 번 회전하더니 양손으로 태극권의 일 초인 야마분
종(野馬分縱) 자세를 취하면서 왼손은 건곤이위의 수법을 전개했
다. 아삼은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어깨를 공격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자기의 왼팔을 찌르게 되었다. 순간 아픔과 함께 눈앞
에 별이 번뜩거리면서 왼팔을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양소는 장무기의 권법이 태극권의 무공이 아닌 줄 알면서 급히
소리쳤다.
"태극권은 정말 대단하구료!"
그러자 아삼은 울화가 치미는지 버럭 소리쳤다.
"이건 요법사술이지 태극권이 아니다!"
그러면서 연거푸 삼지(指)를 공격했다.장무기는 몸을 위로 솟구
치면서 피했다. 아삼의 긴 팔이 다시 뻗어오고 쌍지(雙指)가 덮
쳐 오자 그는 또다시 건곤이위심법으로 일견일인(一牽一引)했다.
순간 아삼의 두 손가락은 삼청전에 있는 나무 기둥에 똑바로 꽂
혔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깜짝 놀라면서도 몹시 재미있어 했
다.
사람들의 우뢰 같은 웃음소리에 유대암이 무서운 소리로 호통쳤
다.
"잠깐, 이건 소림파의 금강지력(金剛指力)이 아니오?"
장무기는 몸을 위로 솟구치면서 피하다가 <소림파 금강지력>이
란 말을 듣자 즉시 생각난 것이 있었다. 유대암은 소림파의 금강
지력에 의해서 부상당한 것이다. 이 십년 동안 무당산의 상하 모
두가 이 일 때문에 소림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아마
진범은 눈앞에 있는 바로 이 자인 것 같았다.
아삼의 냉랭한 말소리가 들렸다.
"금강지력이면 어떠냐? 뭣 때문에 호한(好漢)인 것처럼 도룡도
(屠龍刀)의 소재를 말해 주지 않았느냐? 이 이 십년 동안 불구가
된 맛이 어떠냐?"
그러자 유대암이 다시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오늘 진상을 밝혀 주어서 정말 감사하오. 내가 불구가
된 것은 당신네 서역의 소림파에서 감행한 독수구료. 그런 줄도
모르고 나의 다섯째 아우는....."
그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옛날에 장취산이 자
살한 이유는 유대암이 은소소의 은침에 상했기 때문에 사형을 볼
면목이 없어서인 것이다. 사실은 유대암이 은침을 맞게 되자 은
소소가 용문표국에 부탁해서 무당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은침의
상처는 달포쯤 치료하자 완쾌되었다. 그의 사지가 남에게 절단된
것은 바로 대력금강지의 독수 때문이었다. 만약에 그 때 이 진범
을 찾았다면 장취산 부부도 참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암은
사제의 무고한 죽임이 슬펐지만, 또 자기가 폐인이 된 것도 원통
하였다. 가슴에 원한이 복받치자 눈은 마치 불을 뿜는 듯하였다.
장무기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자 즉시 모든 원인을 알게 되었
다. 그는 어렸을 때 부친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 소림사의 화공두타(火工頭陀)가 몰래 무예를 배워서 소림
사의 달마수좌(達摩首座)인 고지선사(苦智禪師)를 격사(擊死)시
켰다. 그래서 소림파의 각 고수들은 크게 분란을 일으켰다. 그러
자 고혜선사(苦慧禪師)는 멀리 서역으로 떠나서 서역 소림 일파
를 창설했다. -----
아마도 이 자는 왕년의 고해의 의발전인인 것 같았다.
장삼봉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시주의 마음은 정말 악랄하구료. 우리는 왕년 고혜선사의 제자
중에 시주 같은 인물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그러자 아삼은 사납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혜는 어떤 놈이죠?"
장삼봉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즉시 깨닫는 것이 있었다. 옛날
유대암이 대력금강지에 부상을 입은 후, 무당파는 사람을 보내서
소림에게 질문하였지만 소림파의 장문방장은 단호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역의 소림 일파를 의심하고 여러 해 동안 알아
보았으나, 서역의 소림은 이미 무공이 없어졌다고 할 정도로 조
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었다. 제자들은 불학만 열심히 연구할 뿐
무공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지금 아삼이 <고혜는 어떤 놈이
죠?>라는 말을 하는 순간, 만약에 그가 서역 소림의 전인이라면
절대로 개파조사(開派祖師)를 모욕하고 욕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윽고 장삼봉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랬었군. 시주는 화공두타의 전인이구료. 그의 무공만 배운
줄 알았더니, 그는 자기의 악랄한 성품까지 모두 전수해 주었구
료. 그 공상인지 하는 자는 시주의 사형제요?"
"그렇소. 그는 나의 사제이오. 그의 이름은 공상이 아니라 강상
이라고 하오. 장진인, 금강문의 반약금강장과 당신네 무당파의
장법을 비교해 보는 게 어떠하겠소?"
그러자 유대암이 단호하게 외쳤다.
"한참 뒤떨어졌지! 그의 머리는 우리 사부님의 일장을 맞고 벌
써 뇌가 파열됐소."
그러자 아삼은 큰 소리로 외치면서 덮쳐왔다. 장무기는 태극권
의 일초인 여봉사봉(如封似封)으로 그를 막으면서 말했다.
"아삼, 흑옥단속고(黑玉斷續膏)를 나에게 주시오!"
그리고는 즉시 우장을 내밀었다.
아삼은 깜짝 놀랐다.
'본문의 접골 묘약은 극비라서 본문의 웬만한 제자는 그 이름조
차 모르는데, 이 소도동은 어디서 들은 것일까?'
그는 접곡의선 호청우의 <의경>에 묘약이 적혀 있다는 것을 모
르고 있었다. 그 의경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서역에는 외가무공이 있는데 소림이 옆으로 뻗은 가지와
같다. 수법이 몹시 괴이해서 사람의 뼈를 절단시키며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없다. 오로지 본문의 비약인 <흑옥단속고>만이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고약의 배합법은 전하지 않는다. -----
장무기는 이 귀절이 생각나서 그를 시험해 본 것인데, 그의 안
색이 갑자기 변하는 걸 보니 그들은 화공두타의 제자들이 분명했
다. 그러자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어서 다오!"
그는 부모의 죽음과 유, 은 두 분 사백숙의 비참한 모습을 생각
하자 즉시 죽여 버려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삼은 방금 그와의 교수(交手)를 통해 자기의 대력금강지를 전
개하면 그는 이리저리로 피하기만 했지, 전혀 반격하지 않았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니 그의 괴상망측한 견인수법(牽引手法)에
만 조심하면 시간을 끌수록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걸
음 다가오면서 소리쳤다.
"이 녀석아, 네가 무릎꿇고 세 번 절을 하면 널 용서해 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 유가가 바로 표본이다!"
장무기의 속셈은 그의 <흑옥단속고>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하지
만 그의 금강지를 어떻게 대적할 것인지는 이렇다고 할 선책(善
策)이 없었다. 건곤이위심법은 비록 그를 상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를 억압하여 약을 얻어 낼 수는 없었다. 마침 고민하고 있는데
장삼봉이 그를 불렀다.
"얘야, 이리 오너라!"
"네, 태사부님."
장무기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장삼봉은 말했다.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지 힘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태극의
원전(圓轉)은 끊임없이 전개되어야 한다. 마치 장강의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야 하느니라."
그는 방금 장무기가 적을 맞이하여 초수를 사용하는 것을 보니,
그는 지나칠 정도로 태극에만 너무 마음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그는 무공이 너무나 강했기에 권초의 능각(稜角)이 분명해서, 태
극권이 그 원전불단(圓轉不斷)의 저의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장무기는 무공이 고강해서 장삼봉의 이 몇 마디를 듣자 즉시 깨
닫게 되었다. 즉시 마음 속으로 그 태극도(太極圖)의 원전불단과
음양 변화를 그려보고 있었다.
아삼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임진학무(臨陣學武)하다니, 늦은 감이 없느냐?"
"안성마춤이오. 마침 그대에게 초수를 시험할 수 있으니....."
말을 하면서 그는 몸을 뒤로 돌려 오른손을 앞으로 하더니, 아
삼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바로 태극권 중의 일초인 고탐마(高
探馬)였다. 그러자 아삼은 오른손의 다섯손가락을 합치더니 칼처
럼 후려쳐 왔다. 그러자 장무기는 쌍풍관월(雙風貫月)의 초식으
로 양손을 원형으로 만들어서 격출했다. 과연 태사부의 가르침인
<원전불단> 네 자의 정의를 깨닫게 된 것이다.
곧이어 좌원 우원하며 원마다 하나의 원이 따라갔다. 그러자 대
원(大圓), 소원(小圓), 평원(平圓), 입원(立圓), 정원(正圓), 사
원(斜圓) 등등이 만들어졌다. 그 태극원이 하나하나씩 발출되더
니 즉시 아삼에게 씌워져서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마치 술에 취
한 것 같았다. 이에 아삼이 다섯손가락으로 맹렬하게 찍어오자,
장무기는 운수(雲手) 일초를 전개하면서 왼손은 높게 오른손은
낮게 하더니, 원 하나가 이미 그의 수필을 씌우고 있었다. 여기
에다 구양신공의 강경(剛勁)을 사용하니 뿌드득! 하고 소리가 나
면서 아삼의 오른팔 상하의 뼈가 일제히 부러졌다.
구양신공의 강경은 몹시 예리해서 아삼의 한 쪽 팔뼈는 즉시 여
러 토막으로 부러졌다.
장무기는 죽이고 싶도록 아삼을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운수를
끊임없이 전개했다. 그것은 마치 공중에서 구름이 지나가는 것과
같았다. 얼마 후, 뿌드득! 하고 소리가 나더니 아삼의 왼팔도 부
러졌다. 뒤이어 툭! 툭.....! 몇 번 소리가 나면서 그의 좌퇴와
우퇴마저 하나하나 부러졌다.
장무기는 평생 이처럼 가혹한 수법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러
나 이 자는 부모를 헤치고 삼사백을 헤쳐서 고생시키고 있고, 육
사숙을 해친 범인이 아닌가! 만약에 그의 몸에서 <흑옥단속고>를
얻어내려 하지 않았다면 벌써 그의 생명을 끊어 버렸을 것이다.
아삼은 으윽!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조민 수하의 한 사람이 뛰쳐나와서 그를 안고 물러섰다.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은 장무기의 이러한 신공을 보
게 되자 모두들 넋들이 빠져 버렸다. 명교의 고수들마저도 갈채
를 보내는 걸 잊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대머리 아이가 번개처럼 나오더니 우장으로 장무기
의 가슴을 맹렬하게 후려쳐 왔다. 장 끝이 미처 다가오지 않았는
데 장무기는 이미 호흡이 약간 곤란한 것 같았다. 즉시 일초의
<사비세(斜飛勢)>로 그의 장을 기울게 인도하였다. 이 대머리 노
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하반(下盤)을 고정시켜서 마치 땅에
다 못으로 박아놓은 것처럼 열심히 일장씩 후려쳤다. 내력 또한
엄청나게 심후하였다.
장무기는 그의 장로(掌路)를 보게 되자, 아삼과 일파라는 걸 알
았다. 나이를 따지면 아삼의 사형이지만 무공은 그에게 뒤졌다.
그러나 내력은 훨씬 심후했다. 장무기는 태극권 중의 점(點), 인
(引), 제(濟), 안(按) 등의 초식을 전개하여 그의 몸을 비틀어지
게 하려 했는데, 뜻밖에도 이 자의 내력이 너무나 강해서 오히려
자기가 한 발자국 헛디디고 말았다. 장무기는 영웅심이 갑자기
일어나 내심 생각을 굴렸다.
'너의 서역 소림 내공이 예리한지, 아니면 나의 구양신공이 예
리한지 너와 한번 겨뤄보겠다.'
이때 그의 일장이 공격해 오자 자기도 일장을 후려쳤다. 마치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식으로 상대를 공격했다. 쌍장이 부딪치
자 펑! 하고 큰 소리가 나더니 두 사람의 몸이 한번씩 휘청거렸
다.
장삼봉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내심 걱정했다.
'큰일이다. 이처럼 야만적으로 싸우면 힘이 강한 자가 이기게
된다. 이는 태극권의 권리와는 전연 반대이다. 이 대머리 아이의
내력은 무림에서도 보기 드물게 매우 심후한데, 아마 이 일장에
저 애가 중상을 입을지 모르겠다.'
바로 이때, 두 사람의 두 번째 장력이 다시 부딪치며 펑! 소리
와 함께 그 아이의 몸이 휘청하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러나 장무기는 여유있게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구양신공과 소림파의 내공은, 최고 경지까지 연마하게 되면 고
하를 분간하기 힘든 건 사실이다. 그러나 서역의 금강문을 창설
한 사조인 화공두타는 소림사에서 몰래 배운 무예였다. 권각과
병기는 몰래 배울 수 있지만 내공이란 체내의 기를 운행하는 것
이라 설사 남이 타좌정수(打座靜修)하는 걸 십 년쯤 본다 해도
어떻게 그가 내식(內息)을 조절하는 걸 알 수 있으며, 주천(周
天)을 어떻게 반운(搬運)하는 걸 알 수 있단 말인가! 해서 외공
은 몰래 배울 수 있어도 내공은 도학(盜學)할 수 없는 것이다.
금강문의 외공은 몹시 강해서 소림의 정종(正宗)에게는 지지 않
는다. 그러나 내공은 한참 뒤지고 있었다.
이 아이는 금강문 중의 이방인이었다. 천부적인 신력을 지니고
있어서 심후한 내공을 연서하게 되었다. 그것은 왕년의 조사인
화공두타를 훨씬 능가하게 되었다. 실로 천수(天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쌍장 삼초를 받아낸 사람은 극히 드
물었다. 그런데 장무기의 장력에 일보나 뒷걸음질 했으니, 내심
놀라면서도 울화가 치밀었다.
이윽고 그는 숨을 깊게 한 번 몰아쉬더니, 쌍장을 일제히 발출
하면서 장무기에게로 후려쳐갔다.
장무기는 소리를 질렀다.
"은육숙, 제가 사백님의 원수를 갚아 드리겠습니다."
마침 이때 은이정은 양불회와 소조 등과 두 명의 명교 교도들에
게 들린 채 무당산에 당도했다.
장무기는 대갈일성을 지르더니 우권을 후려쳤다. 순간 펑! 하고
크게 소리나더니, 그 대머리 아이는 연거푸 세 걸음 뒤로 후퇴하
면서 두 눈이 튀어나오고 흉구의 기혈이 번용(飜慂)하였다.
"은육숙님, 사백님을 포위해서 공격한 사람들 중에 이 대머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까?"
"그렇다. 이 자가 바로 우두머리다!"
이때 그 대머리 아이가 온 몸의 뼈마디를 픽픽! 팍팍! 하며 소
리를 발출하는 게 들렸다. 운경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대암은 이 아이의 내력이 강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데 이렇게 운공을 하게 되면 더욱 강맹하여져 실로 막아내기가
함들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즉시 소리치며 말했다.
"도하미제(渡河未濟), 격기중류(擊基中流), 즉 강을 미처 건너
기기 전에 허리를 끊어 버려라!"
"네."
장무기는 대답하고 나서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으니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윽고 아이가 쌍비를 휘둘러 대자 한 줄기 어마어마한
힘이 미처 산을 일어내고 바다를 역류하게 하는 것처럼 밀려왔
다. 그러자 장무기는 숨을 한 모금 들여마시고 체내의 진기를 유
전(流轉)시키더니, 우장을 휘두르는 한편 상대방의 장력을 부딪
쳐가면서 되돌려 보냈다. 이 두 줄기의 거대한 힘이 함께 합쳐지
자, 노자는 괴성을 지르더니 몸이 마치 발석기(發石機)로 돌을
쏜 것처럼 벽에 부딪치면서 뚫고 나가 버렸다.
사람들이 아연실색하고 있는 찰나, 갑자기 벽의 구명에서 한 사
람이 번개처럼 들어왔다. 그리고 아이의 몸을 땅바닥에 내려놓았
다. 그는 키가 작고 몹시 뚱뚱했는데, 마치 석고(石鼓)처럼 둥그
랬다. 생김새는 몹시 우스웠으나 신법은 너무나 민첩했다. 그는
바로 명교의 후토기 장기사 안원(顔垣)이었다. 그 대머리 아이의
양팔, 가슴, 어깨뼈는 모두 무기의 강맹하고 후심한 장력에 진단
(震斷)되었다.
안원은 아이를 내려놓고 나서 장무기에게 허리를 한 번 굽히더
니 다시 벽에 있는 구멍으로 나갔다. 왔다갔다 하는 게 마치 살
찐 들쥐 같았다.
조민은 이 소동이 자기의 수하에 있는 일류 고수 두 명을 연거
푸 격패하는 걸 보며, 진작부터 의심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안
원이 그에게 인사하는 걸 보자 즉시 알아차렸다. 그러자 그녀는
속으로 자기에게 욕을 퍼부었다.
'죽어도 싸다, 죽어도 싸. 내가 선입위주(先入爲主)하자 저 녀
석이 밖에서 수작을 부리는 줄만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도동
을 가장하여 여기서 수작을 부려 나의 큰 일을 그르치게 할 줄은
미처 몰랐다.'
이윽고 가느다란 소리로 말했다.
"장교주, 소도동으로 가장하다니 창피하지도 않소? 더구나 태사
부, 태사부하고 쉴새없이 부르고 있는데 정말 너무나 못났구료."
장무기는 그녀가 자기를 알아보자 낭랑한 목청으로 말했다.
"선친인 취산옹은 바로 태사부님의 좌하 다섯 번째 제자이신데,
내가 태사부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르겠느냐? 그런데 뭐가
창피하다는 것이냐?"
이윽고 몸을 돌려 장삼봉에게 무릎꿇고 절을 하며 말했다.
"소인 장무기, 태사부님과 삼사백님께 인사드립니다. 일이 너무
나 다급하기에 알리지 못했으니 기만한 죄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
니다."
장삼봉과 유대암은 놀라움과 기쁨이 엇갈렸다. 서역 소림의 양
대 고수를 격패한 소년이 옛날에 병들어서 죽은 줄만 알았던 그
가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좀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윽고 은천정에게 말했다.
"은형, 이런 좋은 외손자를 얻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장진인, 이처럼 훌륭한 도손을 가르쳐 낸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러자 조민은 투덜거렸다.
"무슨 놈의 좋은 외손자, 훌륭한 도손이람! 두 늙은이는 간사하
고 교활한 놈을 길러낸 것이다. 아대, 네가 가서 그의 검법을 시
험해 보아라."
"네."
그 인상파 아대는 즉시 획! 소리를 내면서 의천검을 뽑아 냈다.
그러자 모두의 눈앞에 파란 빛이 번뜩거리며 은은하게 한기가 스
며나오는 것이 명검임에 틀림없었다.
장무기가 아대에게 물었다.
"이 검은 아미파의 소유인데, 어찌 당신의 수중에 들어갔소?"
"이놈아, 네가 뭘 아느냐? 멸절 늙은이가 우리 집안에서 이 검
을 훔친 것이다. 지금 다시 주인에게 돌아온 것뿐이다. 의천검이
아미파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장무기는 의천검의 내력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되물어오자 말
문이 막힌 것이다. 장무기는 즉시 화제를 돌려서 조민에게 말했
다.
"조 낭자, 흑옥단속고를 나에게 주시오. 우리 삼사백과 육사숙
의 부러진 팔다리가 완치되기만 하면 지나간 허물은 탓하지 않겠
소."
"흥, 지나간 허물은 탓하지 않는다구? 말하기는 쉽겠지. 넌 소
림파의 공문, 공지, 무당파의 송원교, 유연주 등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느냐?"
"난 모르고 있으니 낭자가 알려 주기 바라오."
"내가 뭣 때문에 네게 말해 주겠느냐? 네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지 않으면 옛날에 녹류장 철창에서 너에게 당한 치욕을 씻지
못한다!"
그녀는 치욕을 당했다는 말을 하자, 그날의 일들이 되살아나 그
만 얼굴이 붉어지면서 울화가 치밀었다.
장무기도 그녀의 말에 덩달아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은 그날 명
교 군호들이 독에 중독된 것을 구하기 위해서 하는 수 없이 그런
치졸한 계책을 쓴 것이다.
그는 손으로 그녀의 발바닥을 간지럽히기는 했으나 절대로 경박
한 저의는 없었다. 하지만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 하지 않았는가!
비록다급해서 그런 짓을 하기는 했으나, 그런 일은 한 번도 남
에게 얘기한 적은 없었다. 만약 사람들이 정말 자기가 소녀를 희
롱했다고 알고 있다면 그건 낭패가 아닌가! 그는 난처했지만 조
민에게 다시 따져 물었다.
그러자 조민은 예쁜 눈을 한 번 굴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네가 흑옥단속고를 얻기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단 네가
나의 세 가지 조건만 들어 준다면 난 두 손으로 받치겠다."
"무슨 조건들이오?"
"지금은 아직 생각나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나거든 내가 한 가
지씩 말할 것이니 넌 따르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만약에 나보고 자살하라든가 개, 돼지
가 되라 해도 당신의 의사를 따라야 하는 거요?"
"그런 일들은 없을 것이다. 히히.....! 네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어서 말해 보시오. 만약에 협의(挾義)에 위배되지 않는
일이든지, 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당신의 뜻을 따르겠소."
조민은 막 말을 받아 하려다가 소조의 귀밑 쪽에 한 송이 진주
꽃이 꽂혀 있는 걸 보았다. 바로 자기가 장무기에게 선물한 그것
이었다. 그러자 몹시 화가 났다. 그러나 다시 소조의 밝은 눈동
자며 하얀 이, 앵두 같은 입술을 보게 되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
으나 마치 새벽 이슬을 맞은 연꽃처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
다. 그러자 이를 한 번 악물더니 아대에게 말했다.
"저 장가란 녀석의 양쪽 팔을 베어 버려라!"
아대는 의천검을 쳐들고 한 걸음 다가가면서 장무기에게 말했
다.
"장교주, 주인나리께서는 당신의 양쪽 팔을 베어 오라고 했소."
주전은 울화를 오래 참고 있었으나, 이때 더 이상 참지 못하겠
는지 입을 열고 욕설을 퍼부었다.
"개수작하지 마라. 차라리 네 자신의 양팔을 잘라 버려라!"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자 주전은 기분이 좋아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빨리 베어라."
"서두를 것 없다."
장무기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의천검의 검날이 너무나 날카롭
기 때문에 어떠한 병기도 부딪치기만 하면 부러지고 만다. 대책
이라고는 건곤이위심법을 사용해서 맨손으로 그의 병기를 탈취하
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예리한 보검앞에 손을 내밀었
다가 상대방의 검초가 약간 괴이하거나 변화를 예측하지 못한다
면, 자기의 한 쪽 팔은 손가락 끝에서 부터 어깨까지 어느 곳이
든 검날이 스치기만 하면 즉시 베이고 말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적을 대적해야 좋을지 몰라 몹시 주저하고 있었다. 그 때 장삼봉
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무기야, 넌 이미 내가 창작한 태극권은 모두 배웠으나 태극검
이란 게 또 있다. 괜찮다면 지금 너에게 전수하겠다. 그렇게 된
다면 이분 시주하고 겨룰 때 그걸 사용할 수가 있다."
"태사부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윽고 아대에게 말했다.
"선배님, 저의 검술이 정교하지 못해서, 필히 태사부님의 가르
침을 받아야만 당신하고 겨룰 수가 있겠소."
그 아대는 처음부터 장무기를 은근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비록
자기에게는 보검이 있지만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막상
그가 검초를 새로 배운다는 말을 듣자 몹시 좋아했다. 새로 배우
는 검초가 제아무리 정묘하다 해도 생소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
을 했다.
검술이란 경상영동(輕翔靈動)이 일체되어야 한다. 최소한 십 년
이나 이십 년을 수련해야만 적을 맞이했을 때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가서 초수를 배워라. 난 여기서 기다리겠다. 두 시간이면 족하
겠느냐?"
장삼봉이 말했다.
"다른 곳에 갈 것 없다. 여기서 가르치고 배우면 된다. 즉석에
서 볶아서 바로 팔아야만 신선하고 따뜻하고 매콤하다. 반 시간
이면 태극검법을 모두 가르칠 수 있다."
그가 이처럼 말을 하자 사람들은 모두 경악하면서 자기들의 귀
를 의심했다.
"아무리 무당파의 태극검이 오묘하고 신기해도, 어떻게 여기서
공공연히 초수를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상대방도 똑똑
히 보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장무기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대가 비웃듯 말했다.
"그렇게 해도 좋겠군요. 난 밖에서 기다리겠소."
장삼봉이말했다.
"그럴 필요없소. 나의 이 검법은 초창된 것이므로 쓸모있을지
없을지는 나도 잘 모르고 있소. 마침 그대는 검술의 대가이니 이
검술의 부족함을 지적해 주기 바라오."
이때 양소의 머리가 번뜩거리더니, 갑자기 무엇인가가 생각난
듯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각하는 팔비신검(八臂神劍) 방장로였었군요. 각하는 당당한 개
방장로의 신분인데, 어찌 자청해서 남의 머슴을 하고 있는 거
죠?"
명교의 군호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깜짝 놀랐다. 주전이 말했
다.
"당신은 죽었지 않소? 어떻게 다시 살아 돌아왔소? 이럴.....
이럴수가 있는 것이오?"
아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이 몸은 구사일생으로 살았소. 지나간 일을 말해 봐야 무슨 소
용 있겠소. 난 벌써부터 개방의 장로가 아니오."
윗 선배들은 모두 팔비신검 방동백(方東白)은 개방의 사대 장로
의 우두머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검술이 정묘하여 강호에 명
성을 날렸다. 그는 출검(出劍)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빨라 마치
칠, 팔 개의 팔이 달린 것 같아서 그러한 외호(外號)를 얻게 된
것이다. 십여 년 전 그가 중병에 걸려서 죽었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은 모두 애석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뜻밖에 그는 아직까
지 살아 있는 것이다.
장삼봉이 말했다.
"노도의 이 태극검법이 팔비신검의 지적을 받게 되어 영광이오.
무기야 너에게 검이 있느냐?"
소조는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서, 장무기가 조민으로부터 갖고
온 그 목재로 된 가짜 의천검을 받쳤다. 장삼봉은 받아들고 웃으
며 말했다.
"이건 목검이 아니냐? 노도는 부적을 날조하고 주문을 외워서
악마를 쫓으려 하는 게 아니다."
장삼봉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 왼손으로 검을 쥐고 오른손으
로 검결(劍訣)을 가리키더니, 양손으로 고리를 만들면서 천천히
들어올렸다. 이 기수식을 전개하자 따라서 환두월(環두月), 대괴
성(大魁星), 연자초수(燕子抄水), 좌란소(左欄掃), 우란소(右欄
掃)..... 일초 일초씩 전개해 보였다. 제 십 삼식인 지남침(指南
針)을 전개할 때는 양손으로 동시에 원을 그리면서, 제 오십 사
식인 지검귀원(指劍歸原)을 되풀이했다. 장무기는 초식을 기억하
지 않고 오직 그의 검초에 있는 신재검선, 면면불절(神在劍先,綿
綿不絶)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장삼봉이 모두 검법을 전개했으나 한 사람도 갈채를 보내지 않
았다.
'저렇게 느리고 힘없는 검법으로 어떻게 적을 상대해서 무공을
겨루겠는가? 아마 일부러 초수를 천천히 해서 그를 이해시키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장삼봉이 장무기에게 물었다.
"무기야, 유심히 보았느냐?"
"네."
"모두 기억할 수 있느냐?"
"아뇨, 조금 밖에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장무기는 고개를 숙여 생각해 보았다.
잠시 후 장삼봉이 다시 물었다.
"지금은 어떠냐?"
"이미 절반 이상은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주전이 소리쳤다.
"점점 더 잊어가니 큰일이구료. 장진인, 당신의 그 검법은 너무
나 심오하기에 한 번 보아서는 기억할 수 없소. 수고스럽지만 우
리 교주에게 한 번 더 해 보일 수 없겠습니까?"
장삼봉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소, 한 번 더 하겠소."
그러자 검을 쳐들고 출초하면서 다시 해보였다. 그러자 사람들
은 초수를 보며 몹시 이상하게 여겼다. 두 번째 해보이는 것은
첫 번째 것과 전혀 달랐다. 주전이 다시 소리쳤다.
"큰일이군, 큰일이야. 이렇게 되면 더욱 혼돈되어서 아무것도
모르게 될 것이다."
장삼봉은 검으로 원을 그리며 말했다.
"무기야, 어떻게 되었느냐?"
"아직도 삼초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장삼봉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검을 거두고 자리로 돌아
갔다.
장무기는 대전(大殿)을 천천히 한 바퀴 돌면서 한참 동안 생각
에 잠겼다. 다시 천천히 반 바퀴를 돌고 나더니, 고개를 들어 얼
굴에는 희색을 잔뜩 띄우면서 말했다.
"이제야 모두 잊게 되었습니다."
"기특하게 빨리도 잊어 버렸구나. 그렇다면 팔비신검의 가르침
을 받아 보아라."
그러면서 수중에 있는 목검으로 그에게 주었다. 장무기는 허리
를 굽혀 받아 들더니 몸을 방동백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방 선배님, 시작할까요?"
주전은 귀를 후비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몹시 걱정을 했다.
방동백은 기합을 내지르며 일검을 뻗었다. 그러자 파란 빛이 번
쩍 하면서 칙칙 소리가 났다. 내력의 강맹함은 그 대머리 아이와
별차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며 관전했다.
'그의 수중에 있는 것이 설사 의천검이 아니고 쓸모없는 쇠붙이
라 할지라도, 이같은 내력으로 사용하게 되면 그 기력을 막아내
지 못한다. <신검>이란 말은 과연 뜬 소문은 아니구나.'
장무기는 왼손으로 검결(劍決)을 사인(斜引)하더니, 목검으로
반달을 그리면서 의천검의 검등에 눕혀서 걸쳐 놓았다. 경력을
전출하자 의천검은 즉시 밑으로 한 번 휘청거렸다. 그러자 방동
백은 "좋은 검법이다."라고 소리치더니, 손목을 비스듬히 하고
검을 되돌려서 왼쪽 겨드랑이 쪽으로 검 끝을 찔러갔다.
장무기는 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순간 팍! 소리가 나면서 쌍검
이 서로 부딪치더니 각각 몸이 위로 솟구쳤다. 방동백의 수중에
있는 의천검이 이처럼 한 번 울리게 되자 계속 떨면서 윙윙....!
하며 한참 동안 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 두 개의 병기는 하나는 보검이고 하나는 목검이다. 그러나
정면으로 부딪쳤어도 보검과 목검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장무
기의 이 일초는 자기의 둔기로 적의 예리한 칼날을 막아낸 것이
다. 실로 태극권의 정오함을 터득한 것이다. 장삼봉은 그에게 검
의(劍意)를 전수한 것이지 검초를 전수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가 보게 된 모든 검초를 깨끗이 잊어야만 검의의 진수를 깨닫
게 되는 것이다. 비로소 적을 맞이할 때 자기의 뜻대로 검을 무
공무진한 변화를 시킬 수 있다. 이러한 진위를 양소, 은천정 등
의 고수들은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았으나, 주전은 그들보다 한
수 아래라서 혼자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이때 삼청전 안에는 칙칙.....! 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방동백의
검초는 더욱 예리하고 악랄해졌다. 심후한 내력으로 예리하기 짝
이 없는 검을 사용하니, 파란 빛이 흔들거리면서 검기(劍氣)가
자욱했다. 그러자 대전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큰 눈덩이가 몸 앞
에서 굴러다니는 것처럼 느끼면서 뼈를 좀 먹는 한기를 발출하였
다. 장무기는 목검으로 이 한 덩어리의 한광안에서 원을 하나 하
나 그렸다. 매 초마다 모두 괄호형으로 공격하고 괄호형으로 거
두어들였다. 마치 한 덩어리의 솜처럼 의천검을 감싸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백여 초를 넘기자 방동백의 검초는 점점 둔하게 보
이면서, 수중의 보검의 무게가 점점 증가되는 것 같았다. 다섯
근, 여섯 근, 일곱 근..... 열 근, 스무 근,,,,, 어쩌다 일검씩
지를 때마다 진력이 부족하여 오히려 목검에 끌려서 몇 바퀴씩
돌곤 하였다.
방동백은 초수가 지날수록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삼백여 초
를 격무하였으나 검봉(劍鋒)은 한 번도 부딪치지 않았다. 이는
그가 평생 동안 검을 사용했지만 한 번도 당하지 못한 일이다.
상대방은 마치 큰 그물을 투망하여 빠른 속도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방동백은 연거푸 육, 칠 가지의 검술로 바꾸어가면서 공
격했다. 관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이 오락가락했으나 장무기
는 시종일관 검으로 원을 그렸다. 장삼봉 외 다른 사람들은 그의
매 일초가 수비하는 것인지 공격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
었다.
이 태극권 검법의 초수를 따지자면, 오직 일초뿐이다. 그러나
각양각색의 원을 그리는 초수는 영원히 끝이 없었다. 갑자기 방
동백의 대갈일성이 들리더니 머리카락을 곤두세워서 의천검으로
중궁(中宮)을 공격했다. 이는 바로 건곤일격(乾坤一擊)이었다.
장무기는 그가 맹렬하게 다가오는 걸 보자 검을 돌려서 막으려
했다. 그러자 방동백은 손목을 약간 돌려서 의천검을 비스듬하게
옆으로 공격했다. 싹! 하고 가벼운 소리가 나더니 목검의 검끝이
여섯 치쯤 잘라졌고 의천검은 도무지 막아낼 수가 없었다. 이윽
고 장무기의 가슴으로 공격해 똑바로 찔러왔다.
장무기는 깜짝 놀랐다. 왼손을 반대로 돌리더니 본래 검결을 하
고 있던 식, 중 두 손가락을 벌려서 의천검의 검신(劍身)을 잡으
며 오른손의 반 토막 검으로 그의 오른팔을 후려쳤다. 비록 목
검이었지만 그가 구양신공으로 사용하게 되니 마치 강도(剛刀)와
같았다. 이윽고 방동백은 오른손에 힘을 가하여 검을 빼앗으려
했지만, 의천검은 상대방의 두 손가락에 끼여져서 꼼짝하지 않았
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오직 검을 놓고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
었다.
"손을 빨리 놓으시오!"
장무기의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방동백은 오히려 이를 악
물고 손을 놓지 않았다. 바로 이 전광석화의 눈깜짝할 순간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한쪽 팔이 목검에 의해 절단되었다. 마치
예리한 검으로 잘라내는 것 같았다. 방동백이 손을 놓지 않는 건
팔을 희생시켜서라도 검을 보호하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는 왼손
을 내밀어서 잘린 팔이 미처 땅에 떨어지기 전에 그걸 얼른 잡았
다. 잘린 팔은 이미 몸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다섯 손가락은 여
전히 의천검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가 이처럼
용감한 걸 보게 되자 놀라워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래서 그의 검을 뺏고 싶지 않았다.
방동백은 조민의 몸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주인나리, 소인의 무능함은 어떠한 벌도 달게 받을 것입니다."
조민은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말했다.
"오늘 명교 장교주의 얼굴을 봐서 무당파를 놓아주겠소. 자, 가
자!"
왼손을 한 번 흔들자, 그녀의 부하들은 방동백과 대머리 아이,
아삼의 몸을 안고 삼청전 밖으로 나갔다.
이때 장무기가 소리쳤다.
"잠깐! 흑옥단속고를 남겨 놓지 않고서는 무당산을 내려가지 못
하오!"
그리고는 즉시 몸을 튕겨 앞으로 다가가서 조민의 어깨를 잡으
려 했다. 순간 손아귀가 그녀의 어깨에 미처 닫기도 전에 갑자기
두 줄기 무성무식의 장풍이 좌우에서 기습해 왔다. 사전에는 전
혀 기미가 없었다. 장무기는 깜짝 놀라면서 쌍장을 동시에 되받
아쳤다. 오른손으로는 오른쪽에서 기습하는 일 장을 받았고, 왼
손으로는 왼쪽에서 오는 일 장을 받았다.
사 장이 동시에 부딪치자 기습해 오는 장력은 괴이하면서도 강
맹했다. 더구나 한 줄기 음냉하기 짝이 없는 한기가 서려 있었
다. 이 한기를 장무기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어렸을 때
그가 죽을 뻔했던 현명패천장이었다.
장무기가 놀라는 순간 구양신공이 바로 생겨났으나, 갑자기 좌
우 겨드랑이에는 동시에 양적(兩敵)의 장을 공격받았다. 그러자
장무기는 윽!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내동댕이쳐졌
다. 자기를 기습한 자들은 몸이 마르고 키가 훤칠한 두 노자였
다. 이 두 노자는 각각 일 장씩 출수하여 장무기의 쌍장과 겨루
고, 나머지 일 장씩을 무영무종(無影無縱)하게 그의 몸으로 후려
친 것이다.
양소와 위일소가 함께 화를 내며 호통치면서 앞으로 덮쳐갔다.
그 두 노자는 다시 일 장씩 후려쳤다. 펑펑! 두 번 소리가 나면
서 양소와 위일소는 동시에 뒤로 몇 걸음씩 물러났다. 가슴의 피
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고 뼈를 뚫는 한기를 느꼈다. 두 노자의
몸도 모두 몇 번 휘청거렸다. 이윽고 오른쪽에 있던 자가 냉소를
보이며 말했다.
"명교의 큰 명성도 별거 아니로군."
그들은 조민을 보호하며 서둘러 산 밑으로 걸음을 옮겼다.
----- 제 5 권 1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5 권
제 2 장 반원항호(反元抗胡)의 결의(決議)
그들은 장무기가 다친 것이 염려되어 더 이상 그들을 쫓지 않고
모두 장무기를 둘러쌌다. 장무기는 별일없다는 듯이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체내에 구양신공이 발동하여 현명패천장의 한기
를 몰아내고 있었다. 장무기의 머리끝이 찜통과 같이 뜨거워지더
니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장무기는 웃통을 벗어버리
고 구양신공을 더욱 발동시켰다. 그러자 검게 멍든 장인(掌印)은
조금씩 자색으로 변하다가 회색으로 변하더니, 끝내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두 시간도 채 못 되는 시간에 왕년엔 몇 년
걸려도 제거할 수 없었던 한독을 지금은 흔적도 없이 몰아낸 것
이었다. 장무기는 옷을 입으며 말했다.
"이번 일은 위험 천만이었지만, 그래도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 큰 다행입니다."
양소와 위일소는 반나절이나 앉아서 운기를 해서야 겨우 음독을
제거할 수 있었다. 장무기는 태사부의 상세를 걱정하자 장삼봉이
말했다.
"화공두타(火工頭陀)의 내공은 아직 멀었다. 외공은 강맹하지만
현명패천장이 미치지 못해 내 상처는 걱정 안 해도 된다."
이때 예금기 장기사 오경초가 달려와 적들을 모두 격퇴하였다고
보고를 해 왔다. 유대암이 지객도인에게 소석(素席)을 차려 명교
인들을 대접하라고 명령했다. 식사를 하면서 장무기는 장삼봉과
유대암에게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일일이 얘기해 드렸다. 그
의 지금까지의 일들을 들은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장삼봉이 입을 열었다.
"그 해에도 바로 이 삼청전에서 나와 그 노인이 일장을 겨뤘었
지. 그런데 당시에는 그가 몽고 군관 차림을 하고 있어서 둘 중
어느 노인인지 알 수가 없구나. 생각하면 창피한 일이야. 우린
지금까지도 상대의 신분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으니....."
양소가 입을 열었다.
"그 조소저의 내력이 얼마나 고강하기에 현명이로(玄冥二老) 같
은 고수마저 그녀의 명령에 움직이는 것일까요?"
모두 머리를 맞대로 의논을 했으나, 도무지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장무기가 말했다.
"지금 두 가지 급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흑옥단속고를 빼앗
아서 유삼백과 은육숙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송
대사백님의 소식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조소저
에게서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암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미 이십 년이나 이런 꼴로 살아 왔는데, 이제는 어떤
선단 신약이 있다 해도 고치지 못할 것이야. 그러니 큰 형님이나
육제(六弟)를 구해 내는 일이 더 급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양좌사, 위복왕, 설불득 대사,
세 분께서는 저와 같이 적을 쫓아갑시다. 그리고 오행기 각파 장
기사들은 각기 아미, 화산, 곤륜, 공동 그리고 복건(複建)의 남
소림으로 찾아가 무슨 소식이라도 알아내십시오. 그리고 철관도
장, 주선생, 팽대사 그리고 오행기 부장기사들은, 여기 무당에
잠시 머무르며 나의 태사부인 장진인의 명령에 따라 작전에 임하
고 계십시오."
은천정, 양소, 위일소 등 모든 군호들은 각기 이름을 부를때마
다 공손히 일어나 명령을 받았다.
장삼봉은 장무기가 어린 나이에 어떻게 군호들을 통솔할 것인가
하고 의심했으나, 지금 이 은천정 등 무림의 영웅 호걸들이 일어
나 공손히 그의 명령을 받는 장면을 보자 그는 내심 크게 기뻤
다.
'이 녀석은 나한테 태극권과 태극검을 배웠지만, 내공 바탕이
좋고 깨우침이 빨라,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한 것도 대견스럽지
만, 그것보다도 명교와 천응교의 이 대마두들을 정의의 길로 가
게 했으니 정말 훌륭한 일을 한 것이야. 음! 취산(翠山)에게 이
런 후계자가 있게 됐구나!'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수염을 만지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무기와 양소, 위일소, 설불득은 간단히 식사를 끝내고 장삼봉
에게 이별을 고한 뒤, 조민의 행방을 찾아 산을 내려갔다. 은천
정 등은 그들을 산 밑까지 배웅을 하고 산으로 올라왔으나, 양불
회는 아버지 양소를 따라 몇 리 길까지 배웅을 나갔다.
"불회야, 이제 그만 돌아가서 은육숙이나 잘 모셔라."
양불회는 양소의 말에 공손히 대답하면서 장무기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무기 오빠, 오빠에게 몇 마디 할 얘기가 있어요."
양소와 위일소 등은 무기와 양불회가 어렸을 때부터 남매나 다
름없이 자라온 터라, 무슨 사랑의 얘기라도 나눌 것이라고 생각
하고는 먼저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무기 오빠,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는 장무기의 손을 잡고 바윗덩어리가 있는 곳으로 가 앉았
다. 장무기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몹시 궁금했다.
그녀와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오면서 남달리 애정을 갖
고 있었지만, 서로 오래 떨어져 있었기 때문인지 그녀는 항상 자
기를 본 척 만 척해 왔었다. 그런데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
는지 장무기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녀는 얼굴이 빨간 채로 한
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말문을 열었다.
"무기 오빠, 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오빠한테 나를 잘 보살펴
주라고 부탁했었지요?"
"그랬었지."
"오빠는 천리 만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를 괴하에서 서역까지
우리 아버지에게 데려다 주셨어요. 그 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
를 넘겼고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 그 은혜 정말 잊지 못할 겁니
다. 마음 속에 늘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에게 얘기를 하지
않고 지내왔었어요."
"그게 무슨 중요한 것이라고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 만약 내가
너를 서역까지 데리고 가지 않았었다면, 난 지금 이렇게 되지도
못하고 벌써 독이 퍼져 죽었을 거야."
"아니예요. 오빠는 인협하고 후덕한 분이라 어떤 난관도 스스로
풀리게 되어 있어요. 무기 오빠, 나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었
고 아버지께서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해 주셨지만, 이것만큼은 아
버지한테 말씀드릴 수 없었어요. 당신은 우리의 교주이시지만 내
마음속엔 아직 나의 친오빠같이 생각하고 있어요. 그날 광명정에
서 당신이 아무 사고 없이 돌아온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다만 쑥스러워 오빠한테 말씀드리지 못한 거예요. 저를
나무라지 않으시겠어요?"
"천만에!"
"제가 소조를 잔인하게 따르는 것을 보고 무척 마음에 거슬렸을
거예요. 그러나 저의 어머니께서 너무 잔인하게 돌아가셨기 때문
에, 그 때부터 저는 악인들에겐 잔인하게 다루는 습관이 생겼던
것이예요."
장무기는 가볍게 웃었다.
"소조 그 계집아이가 어딘가 괴팍하고 이상한 데는 있지만, 내
가 보기엔 무슨 나쁜 사람 같지는 않더구나."
이때 날은 이미 저물었고 가을 바람이 불어 약간 추운 기운이
느껴졌다.
양불회는 부드러운 눈초리로 장무기를 바라보며 다시 낮은 소리
로 말했다.
"무기 오빠께서는 저의 양친이 은육숙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
하지 않으세요?"
"그것은 다 지나간 일인데, 다시 얘기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아니예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오래 전의 일이라고 생각
할 거예요. 저도 벌써 열 일곱 살이나 됐으니까요. 그러나 은육
숙은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어요. 중상을 입고 혼수상태이면서도
항상 내 손을 잡고 "효부, 효부!" 하고 불렀어요. 그러면서 "효
부! 난 이미 손 발이 모두 부러진 폐인이야. 나를 버리고 떠나지
마. 제발 빌겠어!" 하고 외치곤 했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무척 격동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혼수 상태에서 잠꼬대를 한 것이야. 진실이라고 할 수
없어."
"아니예요. 당신은 모르지만 저는 다 알고 있어요. 그분이 깨어
나서 나를 볼 때도 그의 눈빛엔 여전히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
어요. 다만 저한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장무기는 긴 탄식을 터뜨렸다. 그 자신 은육숙이 무공은 고강하
지만 마음은 누구보다도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기효부의 죽음이 그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 주었고, 또 자신은 폐인이 되자 불안감을 느끼고 있
었던 것이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흑옥단속고를 뺏어와, 삼사백과 은육
숙의 병을 고쳐 드리고 말 것이야."
양불회가 다시 말했다.
"은육숙이 나를 그렇게 쳐다볼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분
에게 죄를 지셨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무기 오빠, 저는 이미
내 입으로 은육숙에게 승낙을 했어요. 그분이 폐인이든 정상인이
든, 저는 영원히 그를 떠나지 않고 평생 같이 있겠다고....."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의 얼굴은 굳은
결의와 부끄러움, 그리고 기쁨이 역력했다.
장무기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불회가 은이정에게 평생
을 약속했다니,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네가.....?"
"저는 이미 그분에게 굳게 약속을 했어요. 그분이 평생을 움직
이지 못하고 폐인으로 산다고 해도, 저는 항상 그의 옆에 있으며
시중을 들어줄 거예요."
"그러나, 너는....."
"저는 갑작스레 생각이 나서 그분에게 승낙을 한 것이 아니예
요. 그 동안 저는 무척 그분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만약 그분이
이번 상처로 죽게 된다면 저도 같이 죽을 거예요. 그 분이 저를
쳐다보고 있을 때 저는 무척 기뻤어요. 무기 오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처음 좋아하던 물건 외에는 끝까지 다른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것만 좋아하는 고집을 잘 아실 거예요."
"그래, 그건 그랬지."
"은육숙은 제가 처음으로 좋다고 생각한 사람이예요. 이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항상 무기 오빠가
몇 번이나 내 생명을 구해 줬으니 나는 응당 평생 오빠를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오빠를 항상 친오빠같이 생각하고 지냈어요.
난 오빠를 존경해요. 그러나 그 분은 어딘가 좋으며 가련한 생각
이 들곤 해요. 저보다 나이가 배가 더 많은 어른이라고 남들이
웃을 것이고, 또 저의 아버지와 앙숙지간이라고 성사가 될 것 같
지 않지만, 내 마음은 결심이 섰다는 것을 오빠에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말을 마친 양불회는 더 이상 장무기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몸을
일으키더니,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장무기는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그는 한참 동안 멍청히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뒤에 일
행을 뒤쫓아오자, 설불득과 위일소는 장무기의 눈가에서 눈물자
국을 보고는 양소를 향해 웃었다. 그들의 웃음엔 "축하하네, 양
좌사. 교주의 장인이 됐구만." 하는 웃음으로 보였다.
네 사람은 무당산을 내려오자 양소가 말을 했다.
"조 낭자를 앞뒤로 호위할 것이라 절대로 그녀 혼자서 행동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녀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네 갈래로 나눠서 그녀를 찾다가, 내일 정오에 곡성에서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교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곡성은 무당산의 동쪽에 있는 곳이다. 장무기는 제일 먼 방향인
서쪽 방향으로 택하고 그들에게 당부했다.
"현명이로의 무공이 매우 고강하니, 세 분 중 어느 분이든 그들
을 만나면 될 수 있으면 피해 버리고 혼자 힘으로 그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세 사람은 작별을 고하고 각기 자기 방향대로 조민을 찾아 나섰
다.
서쪽은 거의 산길이었다. 장무기는 경공을 펼쳐 얼마 지나지 않
아 이미 십안진(十안鎭)에 도착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국수 한
그릇을 사 먹으며 점원에게 노랑색 비단으로 가려진 작은 가마를
본 적이 있는지 탐문했다. 그러자 뜻밖에도 점원은 본 적이 있다
고 알려줬다.
"약 한 시간 전에 본 것 같습니다. 상처를 입은 세 사람이 들것
에 실려 있었습니다. 황용진(黃龍鎭)쪽으로 갔습니다."
장무기는 그들이 빨리 가지를 못하니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것
이 염려가 되어, 날이 어두워지면 그들을 쫓기로 했다. 그는 조
용한 곳을 찾아 한잠 자고 난 후, 일경쯤 되어 황용진을 향해 달
렸다.
그는 이경도 되지 않아 황용진에 도착했다. 길옆에 숨어 살펴
보니, 길거리엔 한 사람도 다니지를 않았다. 한 객점에만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는 몸을 몇 번 날려 지붕 위로
올라섰다. 사방을 살펴보니, 멀리 개울가 옆 공터에 큰 천막이
쳐져 있는데 사람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경비가 삼엄해 보였다.
그는 내심 생각을 굴려 보았다.
'조 낭자가 저 천막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의 용모와 말
하는 것은 한인과 거의 비슷한데, 그러나 호사스럽고 오만한 행
세는 오히려 몽고인 같아.'
사실 이때는 이미 몽고인들이 중원을 점령한 지 오래라, 한인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몽고풍을 배우고 흉내내는 것을 영광으
로 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그가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창문 안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가볍게 뛰어 내려 창문
옆으로 걸어가 안을 들여다 보았다. 방 안에는 세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두 사람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상처가 고통스러
운지 낮은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두 팔과 두 다리에는 모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장무기는 내심 저 자의 부러진 팔다리를 자기네들의 영약인 흑
옥단속고로 상처를 치료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 그 약을 뺏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심스레 창문을 밀어제치고 안
으로 뛰어들어가자, 안에 서 있던 한 명이 놀라 주먹을 휘둘렀
다. 장무기는 왼손으로 그의 주먹을 움켜잡고, 오른손으로는 그
자의 연마혈(軟痲穴)을 찔렀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을 보니 바
로 아이와 방동백이 누워 있었다. 자기에게 혈도를 당한 그 자의
손엔 금침(金針)이 두 개 있었다. 아마 이 세 사람의 고통을 멈
추게 하기 위해 침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탁자 위엔 검은
병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장무기는 검은 병을 들어 뚜껑을 열어 보니, 아주 매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삼이 외쳐 댔다.
"누구 없느냐? 약을 강탈....."
장무기는 잽싸게 세 사람의 아혈(啞穴)을 봉했다. 그리고 나서
아삼의 붕대를 풀어보니 과연 팔 전체가 검은 색의 고약이 엷게
발라져 있었다. 장무기는 조민이 가짜약을 여기놓고 자기를 유인
하려고 간계를 부린 것이 아닌지 두려워, 세 명의 상처를 바른
검은 약을 긁어 붕대에 쌌다. 그는 병속의 약은 가짜라 할지라
도, 저들의 팔에 붙인 약은 절대 가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밖에서 경비하고 있던 자가 소리를 듣고 문을 박차고 뛰
어들어왔다. 장무기는 잽싸게 밖으로 한 명씩 걷어차 냈다.
객점은 어느새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몇 명을
걷어차며 이미 세 사람 상처에 붙인 고약을 반이나 긁어냈다. 더
이상 지체를 하여 현명이로가 달려오면 시간이 지체될 게 뻔했
다. 장무기는 긁어낸 고약과 검은 약병을 품속에 감추고 쓰러진
의원을 들어 밖으로 내던졌다. 팡! 의원이 무거운 장풍을 맞고
떨어졌다. 과연 장무기의 예상대로 밖에는 고수들이 매복하고 있
었다. 장무기는 바로 이 틈을 노려 밖으로 몸을 날렸다. 컴컴한
어둠 속에 흰 빛이 번쩍하면서 예리한 단검들이 그를 향해 날아
왔다. 장무기는 건곤이위심법을 펼쳐 혼란속을 좌충우돌하며 이
내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이번에 조민의 진상을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흑옥단속고를 얻었
으므로 장무기는 길을 재촉하며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는 곡성
에서 양소, 위일소, 설불득을 만날 여유도 없이 바로 무당으로
달렸다. 홍수기의 사람을 시켜 양소 등에게 산으로 돌아오게 하
라고 보냈다. 그 검은 약병은 옥으로 깎아진 것인데, 칠흑같이
검고 만지면 손에 따뜻한 촉감까지 있었다. 병만 따져도 하나의
진귀한 보물임에 틀림없었다.
무당산에 도착한 장무기는 사람을 시켜 은이정을 유대암 방으로
모셔오게 하고 두 사람을 나란히 눕히게 했다.
양불회도 뒤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장무기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의 환한 얼굴로 보아 마음 속으로 감사하는 듯
했다. 장무기가 자기를 서역까지 데려다 주고 하태충 집에서 자
기 대신 독주를 마신 은혜보다, 지금 은이정의 상처를 치료해 주
는 일이 더욱 고마운 모양이었다.
"삼사백님의 뼈는 이미 다 굳어서, 지금 치료하려면 이 조카가
다시 삼사백님의 뼈를 부러뜨리고 다시 접골해야 합니다. 그러니
고통스럽더라도 잠시만 참아 주십시오."
유대암은 사실 이십 년이나 폐인으로 살아온 자신이 다시 치유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상태보다 더 나빠지
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십 년 동안 이렇게 살아온 자신에
게 장무기가 조금이라도 자기 부모의 과실을 갚고자 하는 것이라
고 생각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말고 마음대로 하라."
장무기는 양불회를 밖으로 내보내고 유대암의 옷을 전부 벗겼
다. 곧 뼈마디를 자세히 살핀 후, 유대암의 혼수혈을 봉하고 부
러져 이미 굳은 뼈마디를 다시 부러뜨렸다. 유대암은 비록 혈도
가 봉해지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했다.
장무기는 번개와 같이 빠른 수법으로 다시 부위를 찾아 맞추고
흑옥단속고를 바른 후 목판을 대로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통증
을 없애기 위해 금침을 놔 주었다. 은이정을 치료하는 일은 매우
쉬었다. 그는 치료를 끝내고 적을 기습을 예방하기 위해 오행기
기사들에게 차례로 경비를 서게 했다.
그 날 오후, 장무기는 저녁을 끝내고 방 안에서 간밤의 피로를
풀기 위해 잠을 청했다. 잠시 후 그는 잠결에 가볍게 걸어오는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그러자 소조의 낮은 음성이 밖에서 들려
왔다.
"무슨 일이예요? 교주께서 잠이 드셨는데....."
곧이어 후토기 장기사 안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은육협께서는 몹시 고통스러워 벌써 세 번이나 기절하셨었는
데, 교주께서 알고 계시는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무기는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다. 쏜
살같이 유대암의 방에 달려가 보니 은이정은 눈이 뒤집혀진채 기
절해 있었다. 양불회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온 얼굴이 눈물로 젖
어 있었다. 유대암은 이를 빠드득 갈며 고통을 참고 있었다. 그
는 강인한 성격인지라 신음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본 장무기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은이정의 승읍
(承泣), 태양(太陽), 담중(膽中), 세 곳의 혈도를 주물러 그를
깨어나게 하고 유대암에게 물었다.
"삼사백님, 뼈가 부러진 곳이 고통스럽습니까?"
"아픈 것은 고사하고 오장육부가 간질간질해서 미치겠구나. 꼭
무슨 수만 마리의 벌레가 몸 속 사방을 뚫고 들어와 기어다니는
것 같아."
장무기도 보통 당황하는 게 아니었다. 유대암의 말대로라면 그
것은 분명 극독에 중독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육숙님은 어떻습니까?"
은이정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홍, 자, 청, 록, 황, 백 색깔이 정말 싱싱하구나. 수많은 구슬
들이 춤을 추는데 정말 아름답구나. 너도 좀 와서 봐라....."
장무기는 앗! 하고 외치며 그만 기절할 뻔했다. 그는 곧 바로
왕난고의 독경에 적힌 글자가 떠올랐다.
----- 그것은 칠충칠화고(七蟲七花膏)라는 것이다. 일곱 가지
독충과 일곱 가지의 독화(毒花)를 다져서 끓여낸 것인데, 그 독
에 걸린 자는 먼저 오장육부가 벌레에 물린 듯이 간질간질하다.
나중에는 별의별 색깔이 조화를 이루고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었
다. 이 약을 배합하는 방법을 마흔 아홉 가지가 있고 그 변화는
육십 세 가지 종류가 있다. 그 자체의 독으로 그 독을 풀 수가
있다. -----
장무기의 이마엔 땀이 빗방울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또 조민의
간계에 당한 것이다. 검은 병의 약은 가짜라 할지라도 세 명의
상처에 바른 것도 역시 가짜였다니! 두 명의 고수의 몸을 희생시
키면서까지 자기를 속이려고 했다니! 그녀가 이렇게 악랄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분통이 터져 재빨리 두 사람의 붕대를 풀고 나서 뜨거운
술로 두 사람의 사지를 바른 고약을 닦아 냈다. 양불회는 그 무
거운 표정으로 일이 잘못된 것을 알고 아무 말도 묻지 않은 대,
팔을 걷고 은이정 몸에 바른 고약을 뜨거운 술로 얼른 닦아 냈
다. 검은 색이 이미 살 속에 박혀 씻어지지 않았다. 하루 이틀에
없어질 것 같지 않았다.
장무기는 두 사람에게 진통제를 먹이고 난 후, 밖으로 나와 무
섭고도 후회스러워 그만 마음이 허탈해져 무릎을 꿇고 쓰러져 울
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기 오빠, 무기 오빠!"
하고 양불회가 그를 보고 소리쳤다.
장무기는 목멘 소리로 외쳐 댔다.
"내가 삼사백님과 육숙님을 죽인 거야."
칠충칠화고의 재료가 백여 가지가 넘는데 도대체 어느 일곱 가
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독을 제거하려면 이독치독법으로 치
료해야 되는데, 조금만 약을 잘못 써도 즉시 두 사람의 목숨이
끝장나는 것이다.
장무기는 갑자기 자기 부친이 자살을 해야 했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잘못을 이미 저지르고 난 후라 자살로 속죄하는 방법밖
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천천히 일어서자 양불회가 물었다.
"정말 치료할 약이 없습니까?"
장무기가 고개를 흔들자 양불회는 그저 놀라지도 않고 태연한
자세였다. 장무기는 그녀가 은이정이 죽으면 자기도 죽을 것이라
는 말이 생각났다. 그렇게 되면 자기로 인해 죽는 사람이 두 사
람이 아니라 세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장무기가 망연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오경초가 문 밖에서 보고
를 올렸다.
"교주님, 조 낭자가 관문 밖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그래? 마침 그녀를 찾아 나서려고 했는데 잘 됐군."
그는 비분을 참지 못하고 양불회의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 들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소조가 자기 머리에 꽂았던 주화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공자, 이것을 조 낭자에게 돌려 주세요."
장무기는 힐끔 그녀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래, 나와 조 낭자는 철천지 원수지간이라, 그녀의 어떤 물건
이라도 몸에 지닐 필요가 없지.'
그는 한 손에 꽃을 들고 관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관문 밖에는 조민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양볼이 발갛게 물든 석양 노을에 반사되어 어떤 아름다움과도 비
교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십여 장 뒤에는 현명이로가 서 있었
다. 두 사람은 세 필의 말을 잡고 있었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장무기는 몸을 날려 그녀 앞에 다가서며 두 손목을 움켜 잡고
검 끝을 그녀의 가슴에다 대고 외쳤다.
"어서 빨리 해독약을 내놓지 못할까?"
조민의 얼굴이 빨개지며 가볍게 핀잔을 줬다.
"픽! 좋아하지 마세요. 당신이 죽는 것하고 저하고 무슨 상관이
예요? 저보고 같이 죽어 달라는 거예요?"
"너하고 농담할 여유가 없다. 해약을 내놓지 못한다면 오늘이
바로 너의 제삿날인 줄 알아라!"
조민은 두 손목을 장무기에게 잡혀 있었기 때문에, 무기의 온몸
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매우 격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
었다. 순간 조민은 그의 손바닥에 무엇이 붙어 있는 느낌이 들어
물었다.
"손바닥의 이게 뭡니까?"
"바로 그 주화다. 네 것이니 돌려 주겠다."
그가 손을 획! 하고 들자 주화는 벌써 그녀의 머리에 꽂혔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두 손목을 움켜 잡았다. 장무기가 손을 놓아
주화를 꽂고 다시 그녀의 손목을 잡는 동작은 정말 번개와 같았
다.
"이것은 제가 준 선물인데, 왜 다시 돌려 줍니까?"
"네가 나를 얼마나 골탕 먹였는데, 내가 너의 물건을 뭣하러 갖
고 있겠느냐?"
"내 물건을 받지 않는다구요? 그 말 진심입니까? 그렇다면 왜
저에게 해독약을 달라고 합니까?"
장무기는 매번 그녀와의 입씨름에서 이긴 적이 없었다. 그는 잠
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유대암과 은이정이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쏟
아지려고 했다. 정말 그녀에게 사정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조민
이 저지른 악독한 짓을 생각하니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연약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때 양소 등 일행은 소식을 듣고 관문을 뛰쳐 나왔다. 그러나
조민은 이미 장무기에게 잡혀 있고, 현명이로는 멀리 뒤에서 관
심이 없는 듯이 서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은 것 같아
모두 옆에 서서 관전만 하고 있었다.
조민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명교의 교주이며 무공이 천하를 진동하는데, 어찌 이런
작은 문제에 눈물을 흘립니까? 조금 전에 눈물을 흘렸었죠? 정말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저는 다만 당신이 현명이로에게 맞은 장풍
의 상처가 어떤지 보러 온 거예요. 그런데 만나자마자 사람을 못
살게 굴다니, 도대체 이 손목은 언제까지 잡고 있을 겁니까?"
장무기는 조민이 그 틈을 노려 도망은 절대로 칠 수 없다고 생
각했다. 그의 발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즉시 그녀를 잡을 수 있
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놔주었다.
조민은 손을 들어 머리에 꽂힌 주화를 만지며 가볍게 웃었다.
"어째 당신은 다치지 않은 것 같군요."
"흥! 겨우 현명패천장으로 나를 다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럼 대력금강지(大力金剛指)나 칠충칠화고(七蟲七花膏)는 어
떻습니까?"
장무기는 그 말에 이를 갈았다.
"칠충칠화고가 틀림없군."
조민은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장교주, 당신이 흑옥단속고나 칠충칠화고가 필요하다면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나의 세 가지 부탁을 들어줘야 합니
다. 그래야만 제가 순순히 내놓지, 강압이나 협박을 동원한다면
나를 죽이면 죽였지 해약은 절대로 얻지 못할 겁니다."
장무기는 그 말을 듣자 눈물이 글썽하던 눈에 갑자기 웃음을 나
타냈다.
"세 가지 부탁이 무엇이오? 빨리 얘기해 보시오."
장무기의 그런 표정에 조민이 웃으며 말했다.
"울다가 갑자기 또 웃다니 창피한 줄도 모르세요? 미리 얘기해
드리지만, 지금은 갑자기 무슨 부탁인지 생각이 안 나니 지금은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승낙만 하시면 됩니다. 절대로 하늘의 별
을 따오라든가 정의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신보고
죽으라는 부탁도 아닙니다."
장무기는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어떤 어려운 부탁이라
도 들어 줄 수 있다고 결심을 했다.
"조 낭자, 만약 당신의 해독약으로 유삼백과 은육협을 낫게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명령만 내리면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절대
마다하지 않겠소."
조민은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우리 격장(擊掌)으로 맹세를 해요."
"좋습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손바닥을 서로 마주쳤다.
조민은 머리에 꽂은 주화를 뽑아들고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젠 내 선물을 받겠지요?"
장무기는 그녀가 해독약을 주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고 그녀의
의중을 몰라 주화를 손에 쥐었다.
"다시는 계집종에게 주어서는 안 됩니다."
"알았소."
조민은 웃으면서 몸을 돌려 걸어가며 외쳤다.
"해약은 즉시 보내 줄 것이니, 장교주는 어서 돌아가세요!"
현명이로가 말을 끌고 와 그녀를 태웠다. 세 사람은 말을 타고
산 밑으로 내려가 버렸다.
조민 일행이 첫 고개를 돌아가자 왼쪽 끝에있는 나무 뒤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신궁팔웅(神弓八雄)중의 전이패(錢二敗)였
다.
"우리 주인께서 장교주께 드리는 서신이니 받아 보시오!"
획! 하고 화살이 날아왔다.
장무기가 가볍게 화살을 받아들자 화살 끝에 쪽지가 달려 있었
다. <장교주께서 직접 뜯어 보십시오.> 라는 글자가 겉봉에 씌어
있었다. 그가 서둘러 펼쳐 보니 작은 글씨가 몇 줄 적혀 있었다.
----- 금색 상자 틈 사이에 영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화 속은
텅비었는데 그 속에 약방문이 있습니다. 두 가지 물건이 모두 오
래 전에 장교주 옆에 있었는데, 왜 그렇게 걱정을 했습니까? 아
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한번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인에게 주다
니, 어찌 이 미천한 여자의 소망을 저버립니까? -----
장무기는 몇 번이나 그 쪽지를 읽어 보며 놀랍고도 기쁜 한편
참회스럽기도 했다. 그는 잽싸게 주화를 살피고 꼭지를 돌리니,
과연 그녀의 말과 똑같았다. 그것을 꺼내 펼쳐보니, 거기엔 칠충
이 어느 일곱 가지 벌레이며 칠화는 어느 일곱 가지 꽃이고, 중
독되면 어떻게 해독하는 방법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사실 장무기는 어떤 일곱 가지라는 것만 알면 해독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그는 해독법이 틀림없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 어쩔
줄 몰라 안마당으로 뛰어가 해독약을 만들어 치료했다. 과연 한
시간도 채 못 지나 두 사람의 병세는 크게 호전됐다. 간질간질한
느낌이 사라지고 어른거리는 색채도 사라졌다.
그는 다시 조민이 준 주화를 담았던 금색 상자를 꺼내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틈 사이가 보였다. 그 속엔 검은 고약이 가득 차
있었다. 냄새는 오히려 매우 향기롭고 시원한 감을 줬다.
이번에 그는 다시는 경솔을 범하지 않기 위해 개 한 마리를 잡
아와 다리를 부러뜨리고 난 후, 다시 약을 발라 붕대를 감아 주
었다. 다음날 살펴보니, 과연 개의 상처는 크게 호전 되어 있었
다.
삼일 째 되는 날 유, 은 두 사람이 완전히 해독된 것을 확인한
장무기는, 진짜 고약을 그들의 뼈 마디에 발랐다. 이번에는 조금
도 뜻밖의 일이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흑옥단속고의 약효는
대단했다. 두 달이 넘자 은이정은 이미 두 손을 움직일 수 있었
다. 치유만 된다면 수족을 움직일 수 있겠고 무공도 별로 앓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만 유대암은 폐인이 된 지 너무 오래
라 다시 정상을 회복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회복되는 것
으로 보아 반 년 후면 적어도 두 팔에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
어다닐 수는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장무기가 무당산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가 보냈던 오행기 교도
들이 모두 소식을 갖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의 보고에 모두는
그만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아미, 화산, 공동, 곤륜 각파
에서 광명정에 원정갔던 소문이 퍼지기를 마교의 세력이 강해 서
역으로 갔던 고수들을 모조리 섬멸하고 그 뒤로 각 문파를 멸망
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림사 스님들이 갑자기 사라진
사건에 대해 공전의 큰 파문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번에 오행기 장기사들이 장삼봉의 신표를 지니고 가기를 천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각 문파에게 당할 뻔했었다.
또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지금 강호에는 각 문파나 각 방회, 그
리고 표국, 산채, 부두 어디나 명교에서 습격해올까 두려워 경비
가 삼엄하다는 것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은천정과 은야왕 부자도 무당산으로 돌아왔다.
천응교를 이미 명교로 개편 완료시킨 것이다. 또한 지금 동남지
방에서는 군호들이 반란을 일으켜 반원(反元)의 물결이 사방에서
일어나 천하가 일대 혼란에 휩싸였다는 얘기도 해주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원군은 아직 막강했었다.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
이 서로 각기 원군과 싸우며 연합 작전을 펴지 못해, 반란을 일
으키는 고장마다 곧 원군에 의해 평정 되곤 했었다.
그날 밤, 장삼봉은 후원에다 소연(素筵)을 차리고 은천정 부자
의 환영식을 베풀었다. 식사 도중 은천정은 사방에서 거사하여
실패한 이유들을 얘기하며, 명교의 천응교 제자들도 참여를 해서
생포된 자나 살상당한 자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군호들은 그의
말에 모두 탄식을 하며 울분을 터뜨렸다.
양소가 울분을 터뜨리며 말했다.
"지금 천하의 백성들은 갖은 고생에 시달려 인심도 변했고, 모
두 몽고놈들을 몰아내고 다시 우리 강산을 되찾기를 바리고 있습
니다. 양교주가 살아계실 때도 밤낮으로 우리의 강산을 다시 찾
기만을 일심 고대했지만, 다만 본교에서 하는 일들이 너무 괴이
해 백 년 동안 중원 무림의 여러 분파들과 앙숙지간으로 내려와
같이 단결하지를 못했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도와 장교주 같은
분이 교주를 맡아 각 파와의 원한을 조금이라도 씻어 냈으니, 이
제 모두 합심 단결하여 몽고놈들을 몰아내는데 힘을 합칩시다!"
주전이 양소를 비꼬았다.
"양좌사, 당신의 말은 일리가 있긴 하지만 모두 쓸데없는 소리
에 불과하오."
양소는 그의 말에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시다면 주형의 많은 지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강호에는 지금 명교에서 육대문파 고수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소문이 퍼져 명교 두 자만 들어도 치를 떨고 이를 가는데, 말이
야 합심 단결이지 실지로 그렇게 될 수 없지 않소?"
"우리가 지금은 그런 누명을 쓰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겠소? 거기다 지금 장진인께서 우리의 증인
이 아니오?"
"만약 우리가 진짜 송원교, 멸절사태, 하태충 등을 죽였다면,
장진인께서 역시 그런 사실을 모르고 계실 것 아니오? 그런데 어
떻게 증인이 될 수 있소?"
철관도인이 주전을 나무랐다.
"주전, 어찌 장진인과 교주가 있는 좌석에서 그런 헛소리를 하
느냐?"
주전은 그 말에 혀를 내밀며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팽영옥이 다시 말했다.
"주형의 말이 전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빈승의 생각으
로는, 우리가 대회를 열어 명교의 각 지방 수령들이 모였을 때
장교주께서 무림 각파와 우호를 맺을 것이라는 것을 공포하는 것
이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기다 각지 사람들이 다 모였으니, 송대
협, 멸절사태 등 여러 사람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 대회 기간 알
아낼 수도 있을 겁니다."
주전이 다시 말했다.
"송대협 등 그들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지요."
"그래, 무슨 방법이오? 왜 진작 얘기를 하지 않았소?"
주전은 득의양양하여 술 한 잔을 들이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교주께서 조 낭자에게 한 마디만 물어 보신다면, 적어도 구성
(九成)은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내 얘기는 조 낭자가 그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그가 생포하고 있을 것이란 얘기요."
근래 두 달 동안 위일소, 양소, 팽영옥, 설불득 등은 여러 갈래
로 조민의 종적과 내력을 수소문했지만, 그날 관문 밖에서 장무
기와 손뼉치며 맹세를 한 후부터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
무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수하들마저도 종적을 감
추어 버렸다. 군호들은 모두 그녀가 조정과 무슨 관계가 있을 것
이라고 추측했다. 그 외엔 무슨 단서를 찾아 낼 수가 없었다. 그
런데 주전이 그런 말을 하자 모두들 그를 나무랐다.
주전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대꾸를 했다.
"물론 당신들은 찾지 못할 거요. 그러나 교주께서는 자연히 만
나게 되실 거요. 교주께서는 그녀에게 세 가지 약속까지 한 것이
있는데, 악랄한 여자가 그냥 가만히 있겠습니까? 히! 히! 그녀의
아름다운 그 용모! 그렇지만 나는 생각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바
짝 설 정도로 으시으시하며 겁이 난단 말이야."
모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모두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차라리 그녀가 빨리 세 가지 부탁을 해왔으면 좋겠습니다. 빨
리 빨리 해결하고 일을 매듭짓게 말입니다. 요즈음엔 그녀가 무
슨 괴상한 부탁을 해올까 하고 그 걱정만 하게 되는군요. 팽대사
께서 조금 전에 건의하셨지만, 본교에서 각 지방의 수령들을 소
집해서 한번 실천해 볼 만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
신지요?"
"좋습니다. 무당산에서 그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군호들이 모두 그렇게 대답하자 양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교주님의 생각으론 어디서 모이는 것이 좋겠습니까?"
장무기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본인이 명교 교주가 된 것에는 두 분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
니다. 한 분은 접곡의선 호청우 선생님이신데 그분은 금화파파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또 한 분은 바로 상우춘(常遇春) 형님이십
니다. 이분은 지금 어디에 계신지 모릅니다. 그래서 본교의 이번
대회는 괴북 호접곡서 거행할까 합니다."
주전이 손뼉을 치며 찬성했다.
"대찬성입니다. 그 견사불구(見死不救)하던 사람은 나와 만나기
만 하면 말다툼을 했었지만, 사람은 별로 나쁘지는 않았지. 좀
괴팍한 데가 있었는데 그건 양좌사와 아주 비슷해. 죽어가는 사
람을 보고도 구해 주지 않았으니, 자기가 죽음을 당할 때도 누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지. 그게 바로 인과응보야. 이 주전이 그의
묘 앞에 절이라도 해줘야지."
군호들 중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바로 석달 후 팔
월 보름에 각 지방의 수령들을 소집하여 접곡에서 대회를 거행하
기로 결절을 내렸다.
다음날 아침, 오행기와 천응교의 사자들은 하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교주의 호령을 전달했다. 각 지방의 교인 중에 향주 이상
의 계급에 있는 자는 모두 팔월 중추절까지는 호접곡으로 모여
신교주를 알현하게 했다.
아직 추석까지는 시일이 멀었고, 장무기는 유대암과 은이정의
병세가 완전히 낫지 않아 또 무슨 탈이 생길지도 몰라 잠시 더
무당산에 머물러 두 분을 간호하기로 했다. 또한 틈이 날 때마다
장삼봉에게 태극권이나 태극검에 대한 무학을 익혔다. 위일소,
팽영옥, 설불득 등은 여전히 사방으로 조민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양소는 무당산에 남아 있으라는 교주의 명령을 받고 무당산에
남았지만, 은이정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는 평상시에 방 안에
서 독서를 하며 밖으로 나가지를 않았다. 이렇게 두 달을 지내
자, 어느날 오후 장무기가 그의 방으로 찾아와 호접곡 대회에서
교중들에게 알려 줄 일들을 상의했다. 장무기는 나이가 젊고 학
식이 비천해 갑자기 교주라는 중임을 맞자 속으로 두려워하고 있
었다. 일을 잘못 처리해 대사를 그르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양소는 교무에 매우 심통하므로, 그를 무당에 남게 해 수
시로 자문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잠시 의논을 하고 난 후, 장무기는 무심코 양소앞에
놓인 책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겉봉에는 명교유전중토기(明敎流
轉中土記) 일곱 자가 씌어 있었고, 밑에는 작게 제자 광명좌사
양소 공전(弟子光明左使 揚逍恭전)이라 쓴 글자가 씌어 있었다.
"양좌사께서는 정말 문무를 겸비하신 진짜 우리 명교의 기둥이
십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장무기가 책을 펼쳐보니, 작은 정자로 씌어져 있었고 옆에는 주
석까지 달아 상세한 설명이 되어 있었다.
----- 명교가 발생한 곳은 파사국인데 원명은 마니교다. 당나라
무칙천(武則天) 항후 때 우리 중국에 들어왔는데, 불다탄(拂多
誕)이라는 파사국인이 명교의 삼종경을 갖고 당나라에 들어와 중
국인들이 그 때부터 명교의 경전을 처음 보게 됐다. 당대력(唐大
曆) 때 가서야 대운광명사(大運光明寺)라는 명교 사원을 건축하
였다. 그 뒤로 태원(太原), 정주(정州), 양주(揚州), 홍주(洪州)
월주(越州)에도 사원이 생겨났다. 회창 삼년(會昌三年)에서부터
명교 교인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명
교의 교세는 크게 기울어지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명교는 금교
로 낙인찍히고 비밀교로 인식됐다.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항상 관
아의 말살 정책에 시달려 온 것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
으로 행동이 자연 괴이하고 비밀스러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마니
교 마자를 마(魔)자로 오해하고 세상 사람들은 마교(魔敎)로 부
르게 된 것이다. -----
여기까지 읽어내린 장무기는 그만 긴 탄식을 했다.
"양좌사, 본교의 교지는 제악행선(除惡行善)이라 불가와 같은
뜻을 갖고 있는데, 어찌 당나라 때부터 조정의 탄압을 받게 된
겁니까?"
"석가에서는 승려들이 출가하여 세속에 신경쓰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겁니다. 도가(道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본교
에서는 향민들을 모집하여 누구든 위급한 일을 당하거나 곤란이
닥치면 모두 교인들이 나서서 돕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든 어느
고장이고 관아에서 양민들을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이 있
는 고장에 본교 교인들은 반드시 일어나 그들과 맞서왔습니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 조정에서 괴롭히지 않고, 권세 있는 자들이 선량한 자
들을 못살게 굴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 명교가 왕성해질 수 있겠
군요."
그 말을 들은 양소는 탁자를 치며 일어섰다.
"바로 본교 교지의 관건을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양좌사,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양소는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런 날이 오기를 고대해야지요. 송나라 때 본교 방렵(舫獵)
교주께서 거사를 한 것도, 바로 관아에서 양민을 괴롭히지 못하
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책 속에 방교주가 거사하여 천하를 진동시켰던
사실을 기재한 곳을 펼쳐 보였다. 장무기는 그것을 보면서 무척
흥분을 했다.
"정말 대장부의 할 도리를 하셨군요. 물론 순교를 당하셨지만
훌륭한 일을 하신 겁니다."
두 사람의 마음은 상통하여 가슴의 뜨거운 피가 들끓었다.
양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역대를 내려오면서 본교는 계속 탄압을 당해 왔지만, 한번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남송 소흥(南宋紹興) 사 년에 왕거정(王居
正)이라는 관리가 홍제에게 본교에 대한 상소문을 올린 적이 있
습니다. 교주께서 한 번 보십시오."
----- 복견 양절주현(伏見兩浙州縣)에 채식을 하며 마를 섬기는
습속이 있는데, 방립 이전에 법금(法禁)이 엄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까지는 그 습속이 왕성하지는 않았지만, 방립 이후 법금이
엄해지자 마를 섬기는 습속이 더욱 왕성해졌습니다. 신이 알기로
는 마를 섬기는 자들은 절대 육식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
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모두 나서서 돕는데 육식을 안 하니 자
연히 절약이 되고 절약을 하니 자연히 풍족스러워져 서로 더욱
도울 수 있어..... -----
장무기는 여기까지 읽고 난 후 양소에게 말했다.
"이 왕거정이란 자가 본교를 좋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본교의 교인들이 검소하며 서로서로 돕고 지냈다는 것은 알고 있
었군요. 그리고 억압이 심할수록 본교는 더욱 왕성해졌다는 얘기
는 본교가 민심을 얻고 있었다는 좋은 증거입니다. 이 책은 제가
잠시 빌려 보겠습니다. 그래야 본교의 옛 현인들의 업적을 잘 알
것 같습니다."
"보신 후 교주의 지도를 바랍니다."
"유삼백과 은육숙의 상세도 많이 호전됐으니 우리도 내일 호접
곡으로 떠납시다. 그리고 양좌사에게 또 한 가지 상의할 얘기가
있습니다. 바로 불회매(不悔妹)에 대한 일입니다."
양소는 장무기가 자기 딸에게 구혼 요청을 하는 것으로 알고 내
심 기뻐했다.
"불회의 목숨을 교주께서 살려 주신 겁니다. 저희 부녀는 그 은
혜 잊지 못할 겁니다. 교주께서 어떤 분부를 내리시더라도 기꺼
이 따르겠습니다."
장무기는 그날 양불회가 자기에게 털어놓은 얘기를 자세히 설명
했다. 그 말을 들은 양소는 정말 크게 놀랐다. 그는 너무 놀라
할 말을 잃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내 딸 자식과 은육협이 혼인을 맺는다는 것은 사실 양문의 영
광이지만, 두 사람의 나이 차가 너무 나고 배분도 틀려 이 일
은....."
그러면서 그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은육숙의 나이 아직 사십도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 제일 건
장할 때가 아닙니까? 불회가 그에게 아저씨라고 부르지만 무슨
진짜 혈연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두 사람의 뜻이 맞아
정말 혼인이 성사된다면, 아버지 대의 원한을 풀어 버릴 수도 있
으니 정말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까?"
양소는 매우 활달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기효부의 일로 인
해 항상 은이정에게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불회가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두 사람이 결혼을 하여 자기의 잘못이 속죄가
되어, 앞으로 명교와 무당파는 아무 원한 관계도 없어질 것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교주께서 이렇게 나서서 신경 써 주시니, 제가 먼저 교주께 감
사드립니다."
그날 밤 이 소문이 나가자, 군호들은 모두 기뻐하며 은이정에게
축하를 보냈다. 양불회는 부끄러워 방에서 나오지를 못했다.
장삼봉과 유대암도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매우 놀랐으나, 은이정
이 좋아하는 것을 보자 그들도 함께 기뻐해 주었다. 혼인 날짜
얘기가 나오자 은이정이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대사형님들께서 산으로 돌아오시고, 여러 형제들이 모인 후에
날짜를 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음날 장무기는 양소, 은천정, 은야왕, 철관도인, 주전, 소조
등과 함께 장삼봉과 그의 제자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괴북을 향해
떠났다.
양불회는 계속 무당에 남아 은이정의 시중을 들기로 했다. 당시
에는 남녀지간의 규율이 엄했으나 이들은 모두 무림인들이라 별
로 그런 작은 예의 범절에 구애받지 않았다.
일행은 낮에는 걷고 밤에는 야영을 하며 동북쪽으로 길을 재촉
했다. 그들이 지나오는 고장은 무척 황폐했고, 백성들은 굶주려
있었다. 원래 연해의 몇 성은 무척 풍요로운 지방들이었다. 그러
나 지금은 모두 매우 어렵고 굶주려 있었다. 군호들은 악랄하게
약탈당한 백성들을 생각하며 개탄을 했다.
이날 그들은 호접곡과 가까운 계패집(界牌集)에 당도하여 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병기가 부딪치며 소리 지르며
싸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군호들이 채찍질 하며 말을
달려 나무숲을 빠져 나오자, 천여 명이 좌우 두 열로 나눠 한 산
채(山寨)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산채 위엔 빨간색 불길을 그린 큰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
것은 바로 명교의 깃발이었다. 인원수가 부족해 전세가 불리해
보였다. 그러나 절대로 굴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몽고군의 화
살은 비오듯 했다.
"몽고의 역적들아, 어서 항복하지 못하겠느냐?"
주전이 외쳤다.
"교주, 몽고군을 해치웁시다."
"좋소. 먼저 졸병들을 통솔하는 군관을 처치합시다."
군호들은 모두 뛰쳐나가 적진을 뚫고 장검을 휘둘렀다. 백 명을
통솔하는 백부장(百夫長)이 말에서 떨어지고 곧이어 은야왕의 단
칼에 천부장(千夫長)이 쓰러지자, 원병들은 우두머리를 잃고 일
대 혼란을 일으켰다.
산채에서는 후원이 생기자 환호성을 질렀다. 산채문이 열리자
검은 옷을 입은 한 대한이 긴 창을 들고 앞장서서 뛰쳐 나왔다.
두목을 잃은 원병들은 도저히 그 예봉을 꺾지 못했다. 사방에서
원병들이 말에서 뜨러져 나가자 그만 겁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을 치는 것이었다. 군호들은 위풍이 당당하고도 날카롭고 마
치 산신과도 같은 대한을 보자 모두 찬사를 보냈다.
"정말 훌륭한 장군이도다!"
이때 장무기는 벌써 그 대한의 모습을 보고 바로 상우춘 형님이
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쌍방의 싸움이 치열해 바로 뛰어가
인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양쪽에서 협공을 받은 원병은 사상
자가 오,육 백이나 생기자 나머지는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
지기 바빴다.
상우춘이 긴 창을 들고 크게 웃으며 외쳤다.
"어느 파의 형제들이 우리를 도왔는지, 나 상모(常某)는 진심으
로 감사드립니다!"
"상대형, 바로 소제입니다."
장무기는 그렇게 외치고 나서 뛰쳐나가 상우춘의 손을 잡았다.
상우춘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말했다.
"교주님, 내가 비록 형이지만 교주의 부하가 되다니 정말 기뻐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상우춘은 명교 중에서도 거목기에 속하였었다. 그는 벌써 장기
사 문창송에게 장무기가 교주가 된 사연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명
교의 형제들을 이끌고 장무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원군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상우춘은 수가 부족
한 것을 알고 원군을 산채까지 유인해 일거에 섬멸하려고 하던
찰나에 장무기가 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산채문을 열고 뛰쳐나
온 것이다. 그는 명교에서 직책이 높지 않아 양소나 은천정 등
군호들에게 일일이 알현했다. 그들도 상우춘이 교주와 의형제 사
이라 직책을 떠나서 그를 따뜻하게 대했다.
상우춘은 구호들을 산채로 모시고 소, 돼지들을 잡아 주연을 크
게 베풀었다. 그 동안 상우춘은 형제들을 모아 산적질을 하며 여
유있게 지냈다. 그러다 산채에 금은보화가 쌓이면 빈민들에게 금
은보화를 나눠 주곤 했다. 원군이 몇 번이나 그들을 공격했었지
만, 매번 실패할 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산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상우춘과 함께 다시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며칠 후 그들이 호접곡에 당도하자, 먼저 도착한 교도들은 교주
가 당도한 것을 알고 길 옆에 나와 그를 환영했다.
이때 거목기 교도들은 미리 와서 계곡에 많은 초가집을 지어 놓
고 대회에 참가하는 교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위일소, 팽영옥,
설불득 등도 이미 먼저 와 있었으나 조민의 소식을 알아 내지는
못했다.
장무기는 각 지방의 교도들을 만나본 후, 제수품을 준비하여 호
청우 부부와 기효부의 묘에 제사를 올렸다. 당시 자신이 처절하
게 이 계곡을 떠났던 일을 회상하니 감개무량했다. 지금 여기 다
시 돌아온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격세지감마저 들었다.
삼 일이 지나자 바로 추석이었다. 접곡에는 높은 단을 만들고
가 앞에 큰 불까지 피워 놓았다. 장무기는 단상에 올라 여러 문
파와 원한을 씻고 단결하여 반원항호(反元抗胡)하자고 선포했다.
그리고 교규도 선포했다. 교중들은 모두 자기 앞에다 작은 향불
을 피우며 교주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는 맹세를 했다. 불꽃이
하늘을 찌르며 향내가 사방에 퍼져 역대에 없는 일대 성황을 이
루었다. 연로한 교도들은 이 왕성한 기상을 보며 십여 년 전 명
교가 사분오열(四分五裂)했던 생각이 떠올라 그만 기뻐 눈물까지
흘렸다.
오후가 되자 홍수기에서 보고를 올렸다.
"홍수기의 제자 주원장(朱元璋)과 서달(徐達)이 당도했습니다."
장무기는 기뻐하며 직접 나가 그들을 환영했다. 주원장과 서달
은 탕화, 등유, 화운, 오랑, 오정을 데리고 밖에서 장무기가 나
오자 모두 허리 굽혀 인사를 올렸다. 장무기는 항상 서달이 자기
목숨을 구해 주었던 생각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들의
인사에 답례를 하고 양손으로 서달과 주원장의 손을 잡고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때 주원장은 이미 환속을 하여 승려 차림을 하지 않았다.
"저희들은 교주의 영지를 받고 일찍 접곡에 도착하려고 했으나,
도중에 매우 좋지 않은 자를 만나 그 일을 쫓느라 대회 날짜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교주님께 용서를 바랍니다."
"그래, 무슨 일이 생겼었습니까?"
주원장이 대답을 올렸다.
"유월 중순께였습니다. 우리는 교주님의 영지를 받고 다들 기뻐
서 형제들이 모여 교주님께 어떤 축하 선물을 갖고 갈까 하고 상
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 괴북 지방은 황량한 곳이라 별로 좋
은 물건도 없었고, 다행히 대회 날짜가 아직 멀어 형제들과 산동
으로 선물을 구하러 갔습니다. 우린 관병의 이목을 피해 마부로
변장하고 제가 마부 두목으로 변장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화남
귀덕부에 도착해 산동으로 가 서쪽 손님을 맞아 길을 가고 있었
는데, 갑자기 여러 명이 칼을 휘두르고 흉악하게 덤벼들더니 마
차 속에 있는 손님들을 쫓아내고 자기네 손님을 모시라는 겁니
다. 그 때 화형제가 그들과 싸우려고 하자 서형제가 눈짓으로 그
를 말렸습니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알고 난 후 싸워도 늦지 않
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 마차를 모두 어느
골짜기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열 몇 대의 마차가 대
기하고 있었는데, 땅에는 화상들만이 앉아 있었습니다."
"아니, 모두들 화상들만?"
"그렇습니다. 그 화상들은 모두 풀이 죽어 힘이 하나도 없어 보
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몇 명은 태양혈이 불쑥 튀어나오고
몸집도 우람했지요. 서형이 저에게 몰래 알려 주더군요. 이 화상
들은 모두 고강한 무공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그 흉악
한 자들은 화상들을 모두 마차 속으로 가둬 놓고 우리를 북쪽으
로 끌고 갔습니다. 우린 그들의 정체를 알려고 했으나, 그들은
이상하게도 행동이 수상했고 우리 앞에선 절대로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오량 형제가 용기를 내어 창가
에 가서 엿들었습니다. 사, 오일 밤을 엿듣고 나서야 겨우 이 화
상들이 모두 숭산의 소림사 승려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
다."
장무기는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아!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오량 형제가 그들 중에 한 명이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
다. "주인님의 신기묘산(神機妙算)에 정말 탄복했습니다. 소림,
무당 육파의 고수들을 모두 수중에 넣었으니, 지금까지 그 누구
도 이런 큰일을 해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하자, 또 다
른 한 명이 "그것보다도 마교의 여러 마두들을 이 일에 관련시킨
것은 더욱 훌륭했지."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논했습니
다. 이 일이 우리 명교와 관련됐다니 꼭 무슨 일인지 알아내야겠
다고 말입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주원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모두 북쪽으로 다시 떠나면서 멍청한 사람인 척했습니
다. 탕화 형제와 등유 형제는 서로 돈 오푼 때문에 싸우는 등 무
공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척하고 연극을 하자, 그들은 깔깔 대고
웃으며 우리를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첨을 떨었
지요. 처음엔 오정 형제가 마약을 구해와 그들을 마취시키고 소
림화상들을 구출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지금 그들이 무
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고, 또 그들의 무공이 모두 상당
한 것이 분명해, 잘못하여 실수라도 한다면 오히려 대사를 그르
칠까 염려스러워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간부(河間
府)에 당도하니 거기에도 여섯 대의 마차가 와 있었는데, 그 안
에도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습니다. 이번엔 모두 일반 속인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식사하는 도중에 한 소림 승려가 새로 온 사
람들을 향해 "송대협께서도 여기에 왔군요." 하는 소리를 들었습
니다."
장무기는 벌떡 일어나 물었다.
"송대협이라고? 그 사람의 생김새가 어떠했습니까?"
"가냘픈 몸집에 키가 크고 나이는 약 오, 육십 세 정도로 보였
고, 세 갈래 수염을 기르고 매우 조용한 인상이었습니다."
장무기는 놀라면서도 기뻤다. 또 다른 사람들의 인상을 묻자,
과연 생각했던 대로 유연주, 장송계, 막성곡도 거기에 끼어 있었
다.
그는 다시 다그쳐 물었다.
"부상을 입었거나 무슨 쇠사슬에 묶인 자는 많았습니까?"
"그렇지는 않고 보통사람과 똑같이 보였으나, 다만 정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길을 걸어가는 것도 휘청휘청해 보였습니다.
송대협이라는 사람은 그 소림 승려의 말을 듣자 그저 쓴웃음만
지어 보였고 대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소림 승려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한 흉악한 놈이 그를 끌고 갔습니다. 그 후로
는 두 패가 십여 리나 떨어져 한 번도 같이 숙식을 하지 않아 우
리는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칠월 삼일에 소림
승들을 태우고 대도(大都)에 도착했습니다."
"아니, 대도에? 내 생각대로 과연 조정의 짓이었구나. 그래서
또 어떻게 했습니까?"
"그 흉악한 놈들이 우리를 소림 승려들과 모두를 서성(西城)쪽
에 있는 한 사원으로 데리고 가, 우리까지 모두 그 절간에서 자
게 했습니다."
"그래, 그게 무슨 절간이오?"
"우리가 들어갈 때 정문을 쳐다보니 만안사(萬安寺)라는 글자가
보였습니다. 그 바람에 한 놈에게 채찍질을 당했지요. 그날 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놔주지 않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죽일 것
이 분명해 몰래 도망을 쳤습니다."
"그 흉악한 놈들이 뒤쫓지 않기를 천만다행이군요."
탕화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주대형께서도 미리 그 점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미리 짜 놨었
습니다. 우리 근처에 역마행에 가서 마부 일곱 명을 잡아와 옷을
갈아입은 뒤, 그들을 모두 죽이고 얼굴을 못 알아보게 피투성이
를 만들어 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온 큰 마차의 마부도
죽이고 은덩어리를 땅에다 버려서, 서로 돈 때문에 싸운 것처럼
위장해서 그들이 의심하지 않게 했습니다."
그 말에 장무기는 놀라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서달은 죄책감
이 드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등유는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탕화는 득의양양해 하며 설명하는데, 주원장만큼은 아무렇지
도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이 자는 정말 잔인하고도 무서운 사람이구나.'
그는 참다못해 말했다.
"주형, 당신의 계책은 훌륭했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무고한 사람
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교주가 훈시를 하자 그들은 모두 일어나 허리 굽혀 명을 받았
다.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 주원장, 서달, 등유, 탕화 등은 교주의 훈시대로 싸움터
에서나 어디서나 절대로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지 않아, 결국 민
심을 얻고 일대의 대업을 성공시키게 되었다.
장무기가 다시 물었다.
"여러분께서 소림, 무당의 고수들의 행방을 알아낸 것은 정말
큰 공을 세운 겁니다. 거사할 일을 상의하고 나서 대도에 가서
두 파의 고수들을 구출하겠습니다."
그날 밤 장무기는 교도들을 소집하여 불을 피우고 향을 태우면
서, 모두 합심하여 원나라를 쓰러뜨리자고 호소했다. 그러기 위
해서는 각 지방의 수령들은 사방에서 호응하여 거사를 일으켜 원
군이 정신을 못 차리게 혼란하게 만들어야 대사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계획이 짜지자, 장무기는 양소와 위일소에게는 총단을
집행하게 하고, 전교의 총수로 임명했다. 백미응왕 은천정에게는
천응기를 이끌고 강남에서 거사를 하게 하고, 주원장, 서달, 탕
화, 등유, 화운, 오량, 오정은 상우춘의 산채인마와 회합하여 손
덕애 등과 괴북과 호주에서 거사를 하게 했고, 설불득은 한산동,
유복통, 두존도, 라문소, 성문우, 왕현충, 한교아를 통솔하여 하
남 정천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팽영옥은 서수휘, 추보
왕 명오 등을 통솔하고 강서성 일대에서 거사를 일으키고, 철관
도인은 포삼왕, 맹해마 등을 통솔하여 상(湘), 초(楚), 정(停),
양(襄) 일대에서, 주전은 지마리, 조군을 이끌고 서(徐), 숙(宿)
풍(豊), 패(沛) 일대에서 거사를 일으키고, 냉겸은 서역의 교도
들과 서역에서 중원으로 들어오는 몽고병의 원군을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오행기는 총단의 명령에 대기하며 어디든 위급한 곳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계책은 거의가 양소나 팽영옥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다.
장무기가 이렇게 선포하자 교도들의 환호성은 천둥과도 같았다.
장무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일개 본교의 힘으로는 백 년이나 된 원의 뿌리를 뽑기란 힙듭
니다. 그러니 천하의 모든 영웅 호걸들과 힘을 합쳐야 성공을 거
둘 수 있습니다. 지금 중원 무림의 많은 수뇌들은 원나라 조정에
나포되어 있습니다. 총단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구출해 낼
것입니다. 내일이면 형제들은 방방곡곡으로 분산되는데, 기회가
생기면 몽고놈들을 해치우십시오. 총단에서도 중원 무림 인물들
을 구출하러 빨리 대도로 떠날 겁니다. 내일이 지나면 우리는 또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니, 오늘은 마음껏 놀고 즐깁시다.
형제들은 자기의 이익을 따지지 말고 의리를 중하게 여겨야만 대
사를 성공시킬 수 있습니다. 누구든 서로 살상을 하는 그런 의스
럽지 못한 일을 저지를 시에는 총단에서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
입니다."
와! 하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때는 팔월 추석이라 밝은 달은 대낮과도 같았다. 모든 교도들은
맨 바닥에 앉아 총단에서 그들에게 나눠주는 채식으로 된 둥근
떡을 받았다. 동그란 원병은 꼭 달과 같은 모양이라 교도들은 모
두 그것을 월병(月餠)이라고 불렀다.
후세에 한인들이 팔월 추석에 월병을 나눠 먹으며 몽고병을 죽
이자는 계획을 세웠다는 전설을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장무기는 다시 선포를 내렸다.
"본교에서는 역대를 전해 오며 술과 육식을 금했는데, 그러나
지금은 도처가 황패하니 먹을 것이 생기면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
습니다. 지금 그런 것을 따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같은 대
사를 앞에 두고 만약 먹을 것을 가린다면, 모든 형제들은 기력이
없어 싸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음식 금기를 해제
하지만, 교도들은 더욱 처세를 올바르게 하기를 바랍니다."
다음날 아침 각 지방 교도들은 교주에게 작별을 고했다. 앞으로
거사를 하면 죽을지 살아 남을지 몰라 모두들 이별을 섭섭해 하
며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고 자기의 목적지로 떠났다. 떠들썩하
던 호접곡은 다시 조용해졌고 양소와 위일소, 그리고 주원장 등
몇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장무기는 만안사의 위치와 그 흉악한 자들의 모습을 자세히 듣
고 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주형, 지금 이 호사(濠泗) 일대에 일대 혼란이 일고 있으니,
이 좋은 거사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나와 함께
대도에 갈 필요없으니, 여기서 그만 작별합시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성공을 거두기를 빕니다."
주원장, 서달, 상우춘 등은 장무기와 작별을 하고 계곡을 떠났
다.
장무기가 다시 양소를 향해 말했다.
"우리도 이제 그만 떠납시다. 소조야, 넌 사슬에 매어 있어서
행동이 불편하니 여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거라."
소조는 억지로 대답을 하고 난 후, 여전히 계곡 밖까지 그들을
배웅나갔다. 몇 리 길을 배웅하고 나서도 그녀는 일행과 떨어지
기 싫어했다.
"소조야, 점점 멀리 나오는구나.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장 공자님, 대도에 가시면 그 조 낭자를 만나시겠죠?"
"어쩌면 만날 수도 있겠지."
"그럼 그녀를 만나면 그녀에게 제 부탁 한 가지만 전해 주세
요."
"그래, 무슨 부탁이냐?"
"조 낭자에게 의천검을 빌려와 나의 이 쇠사슬을 좀 잘라 주세
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평생 이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는 그녀의 모습이 매우 가련해 보였다.
"여기까지 빌려 와야 하는데, 그녀가 빌려 줄지 모르겠구나."
"그러시면 저를 그녀 앞까지 데려다 주시면 되잖아요?"
장무기는 웃으며 말했다.
"결국은 어도 대도까지 가겠다는 얘기구나. 양좌사, 소조를 데
리고 갈 수 있겠습니까?"
양소는 장무기가 이 말을 물어올 때는 마음속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대답했다.
"상관은 없습니다. 또 교주의 차 시중도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다만 땡그랑! 하고 소리가 나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될 겁니다. 이렇게 합시다. 환자인 척하고 마차 안에 있게
하지요. 평소에는 절대로 나오지 말고."
소조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공자님, 그리고 양좌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위일소를 보고 웃으며 다시 그에게도 감사드렸다.
"위법왕님, 감사합니다."
"하! 하! 하! 나에게 감사해서 뭐하느냐? 조심이나 하거라. 내
병이 발작하면 네 피를 빨아먹을지도 모르니깐!"
그러면서 입을 벌려 흰 이를 드러내 보이고는, 귀신 얼굴을 하
며 그녀에게 장난을 쳤다.
소조는 뒤로 물러서며 우물우물 거렸다.
"겁을 주지 마세요. 무섭습니다."
----- 제 5 권 2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5 권
제 3 장 발가벗은 미녀(美女)
이날 오후 장무기 일행은 마차 세 대에 분승하여 북쪽으로 향했
다. 하루도 채 못 되어 이들은 원조(元朝)의 경성(京城)인 대도
(大都)에 당도했다. 당시 몽고인의 철기(鐵騎)가 동서양을 거의
다 정복하여 유례없는 광활한 국토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들이
경성으로 정한 대도가 바로 훗날의 북경(北京)이다.
황제가 기거하는 경성이니만치 여러 작은 나라와 각 부족에서
파견한 조공사신들이 부지기수였다. 장무기 일행이 성문 안으로
들어서 보니, 가는 곳마다 행인이 북적거리며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지닌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네 사람은 서성(西城)에 당도해 객점을 찾아들었다. 양소는 거
상(巨商)을 흉내내기 위해 씀씀이가 컸다. 그는 시설이 잘 돼 있
는 객방 세 칸을 빌려 점원에게도 돈을 넉넉히 뿌렸다. 점원은
자연히 그들을 신주 모시듯 하며 깍듯이 모셨다.
양소는 성 안의 명승고적에 대해 거론하다가 자연스럽게 고찰사
원(古刹寺阮)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점원은 가장 먼저 서성 부
근에 있는 만안사(萬安寺)를 꼽았다.
"만안사는 정말 규모가 대단합니다. 주위는 온통 숲으로 둘러싸
여 있고, 사내에 동(銅)으로 만든 불상 세 개가 있는데, 아마 세
상에서 그보다 더 큰 불상을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물론 구경
할 만한 곳이지만 어르신네들은 때를 잘못 잡았습니다. 반 년 전
부터 서역의 번승(番僧)들이 상주한 후로부터 일반 사람들은 얼
씬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양소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말했다.
"번승이 있다고 해서 구경을 가지 말라는 법은 없잖는가?"
점원은 혀를 날름거리며 주위를 두리번 살피더니 나직한 음성으
로 말했다.
"소인이 공연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어르신네들은 아마 경성
이 초행길인 모양인데 언동을 조심해야 할 겁니다. 그 번승들은
자기네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후려패고 심지
어는 죽이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게다가 예쁘장한 여인이 눈에
띄기만 하면 나이를 불문하고 잡아가 갖은 방법으로 욕심을 채운
답니다. 그들은 황제를 등에 업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감히
불행을 내색할 수 없습니다."
서역의 번승들이 몽고인의 세도를 등에 업고 갖은 악행을 일삼
고 있다는 걸 양소 등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점원과 더 이상 긴 얘기를 늘어놓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운공조식을 하며 이경이 될 때를
기다려 창문을 뛰어넘어 만안사를 찾아나섰다.
만안사는 사층 누각으로 되어 있고 뒷편에 십 삼층이나 되는 보
탑이 있어 멀리서도 쉽게 확인할 수가 있었다.
장무기, 양소, 위일소 세 사람은 경공술을 전개해 순식간에 사
찰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손짓을 하더니 재빨리 사
찰 왼쪽으로 돌아 보탑 위로 오르려 했다. 일단 높은 곳에 서서
주위의 상황을 살펴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답에서 약 이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을 때, 그들은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다.
답 주위에 이 삼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을
뿐 아니라, 매층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순시를 돌고 있는 게
시야에 잡혔다.
장무기 등은 내심 놀라는 한편 한 가지 새로운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탑 주위에 철통 같은 경계망이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소림, 무당 등 각 문파의 사람들이 갇혀 있는 게 분명했다. 이젠
더 이상 그들의 행방을 찾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
렇다고 해서 섣불리 행동을 취할 입장도 못 되었다. 공문대사,
송원교 등이 제압당한 것을 보면 상대방의 실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였다. 보탑 육층에서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며 열 명 가량이
손에 횃불을 들고 천천히 이동하는 게 보였다. 횃불은 육층에서
오층으로, 다시 사층으로 옮겨지며 결국 맨 아랫층으로 내려와
보탑 정문을 빠져 나오더니 사찰 뒷편으로 직진했다.
양소의 손짓에 따라 세 사람은 측면으로 조심스레 접근해 갔다.
만안사 뒷쪽은 아름드리 고목이 우거져 있어 세 사람에게는 좋은
은폐물로 이용될 수 있었다. 워낙 경공술이 뛰어난 세 사람이지
만 그래도 신중을 기하기 위해 낙엽이 떨어지는 순간에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곤 했다.
그렇게 이십 장 가량 접근해 가자 비로소 상대방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들은 황색 창포를 입은 사내들로서 제각기 횃불
과 무기를 쥔 채 한 노인을 압송하는 중이었다.
압송당하는 노인은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우연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장무기는 즉시 그를 알아보았다. 바로 곤륜파의 장
문인 철금선생 하태충이 아닌가!
황색 장포를 입은 사내들은 하태충을 앞세워 으슥한 뜨락안으로
들어갔다. 장무기 등은 잠시 주위를 살펴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담장을 뛰어넘었다. 뜨락은 제법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곳곳에 불당이 세워져 있어 흡사 소림
사를 연상케 했다. 이때 한복판에 위치한 대전(大殿) 안에서 불
빛이 새어나왔다. 하태충이 그곳으로 압송된 게 분명했다.
장무기 등은 대전 앞으로 바짝 접근해 갔다. 양소와 위일소는
좌우로 갈라져 망을 보고, 장무기는 창문 틈새를 통해 대전 안을
엿보았다. 이곳이 용담호혈이니 만치 비록 절정무학을 지니고 있
는 세 사람일지라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창문 틈이 워낙 좁아 하태충의 하반신만 보일 뿐 장무기는 다른
사람의 모습은 탁자등에 가려서 볼 수 없었다. 곧 하태충의 노기
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들 손에 함락된 이상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러니
나더러 오랑캐 조정에 협력케 할 생각은 아예 포기하는 게 현명
할 것이다. 한민족(漢民族)을 위해 이바지 못할 망정 내 어찌 몽
고 오랑캐의 앞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장무기는 그의 말을 듣고 암암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철금선생은 비록 정인군자라 할 수 없지만, 일파의 장문인
다운 기개는 지니고 있군.'
곧이어 한 남자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정녕 옹고집을 부린다면 더 이상 강요를 하지 않겠다. 그
대신 이곳 주인이 정한 규칙을 알고 있으렸다!"
하태충은 냉소를 날렸다.
"흥! 내 열 손가락이 전부 절단된다 해도 결국 투항을 하지 않
을 것이다."
"좋다.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겠다. 네가 만약 우리 세 사람을
이길 수 있다면 즉시 풀어주겠다. 그 반대로 네가 패한다면 손가
락 하나를 절단시켜 한 달을 더 감금시킨 연후에 투항 여부를 다
시 묻겠다."
"난 이미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됐으니 하나가 더 끊어진들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어서 검을 갖고 와라!"
"흐흣.....! 열 손가락이 모조리 없어진 후에는 설령 투항을 한
다 해도 폐물이나 다름없으니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자, 검을
갖다 줘라. 그리고 마가파사(魔訶巴思), 자네가 먼저 그와 몇 수
놀아 보게."
다른 한 굵직한 음성이 대답했다.
"네."
장무기는 손가락 끝에 신공을 운용해 창문 틈을 조금 넓혔다.
시야가 좀전보다 많이 트였다. 하태충의 손에는 한 자루의 목검
이 쥐어져 있는데 검끝은 헝겊으로 돌돌 말아 상처를 입힐 수 없
게 해 놓았다. 그의 맞은편에 서 있는 자는 체구가 우람한 번승
으로 손에 시퍼런 광채가 번뜩이는 계도를 쥐고 있었다. 두 사람
이 구태여 겨룰 필요도 없이 무기만으로도 승패를 판가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태충은 위축되는 기색없이 당당하게 목검을 들어 올렸
다.
"자, 어서 공격해라!"
그는 말을 내뱉기 무섭게 일검을 떨쳐냈다. 그 검세는 날카롭기
이를데 없었다. 곤륜검법은 과연 독특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번승 마가파사는 우람한 몸집에 비해 행동이 매우 민첩했다. 그
는 계도를 종횡무진으로 떨치며 계속 하태충의 급소만 노렸다.
'철금선생의 걸음이 왜 저렇게도 맥이 없을까? 내력(內力)을 전
부 상실한 것 같기도 하고.....'
하태충의 검법은 정교했지만 내력이 뒷받침해 주지 못하므로,
그 위력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었다.
번승의 무공은 어느 면으로 보나 그보다 두 수 가량 뒤떨어졌
다. 그는 거듭 맹공을 펼쳤지만 번번이 하태충의 절묘한 검초에
기선을 빼앗겼다. 약 오십여 초식을 겨루자 하태충의 입에서 짤
막한 기합이 터졌다.
"받아라!"
그의 목검이 동쪽으로 떨쳐지는 듯 싶더니 어느새 서쪽으로 방
향을 꺾어 전광석화같이 빈승의 옆구리를 찔렀다. 만약 그의 손
에 예리한 검이 쥐어져 있었거나 내력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번승
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됐을 것이다.
즉시 그 냉랭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마가파사는 물러나 온와아(溫臥兒)가 공격해라!"
장무기는 그 냉랭한 음성이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히끗
히끗한 수염이 마치 숯칠을 한 듯한 거무죽죽한 얼굴이 눈에 들
어왔다. 바로 현명이로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뒷짐을 쥔 채
서서 눈을 게슴츠레 접고 목전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전
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다시 그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비단으로
씌운 앉은뱅이 걸상이 놓여 있고, 그 걸상 위에는 한쌍의 맨발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나이 어린 비녀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맨발의 발톱을 정성스레 다듬어 주고 있었다. 걸상 옆에 가지
런히 놓여 있는 비단신에는제각기 붉은 구슬이 박혀 있었다.
장무기는 이내 가슴에 와 닿는 게 있었다. 손아귀에 쏙 들어올
만큼 그 발은 작은데다가 뒤꿈치의 선이 원만하며 상아를 다듬어
놓은 듯 티끌만한 흠도 찾아볼 수 없이 매끄러웠다. 실로 예쁜
맨발이었다.
장무기는 첫눈에 그 맨발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예전에 녹
류장에서 자기가 손에 쥐어 보았던 조민의 발이었다. 무당산에서
그녀와 대면했을 때는 서로 적대 감정이었지만, 지금 비단 걸상
위에 올려져 있는 그녀의 맨발을 보자 웬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가슴이 마구 뛰었다.
조민은 오른발을 비녀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하태충과
온와아가 겨루는 것을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차 한 잔 마시는 시간이 경과되었을까. 하태충의 짤막한 기합소
리에 이어 조민이 발 끝으로 갑자기 비녀를 밀어 냈다. 온와아마
저 패하고 말았다. 얼굴이 시꺼먼 현명노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온와아는 그만 물러나고 흑림발부(黑林鉢夫)가 실력을 보여 줘
라!"
장무기는 하태충의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연거푸 두
사람을 상대해 왔으니 몹시 지친게 분명했다. 삽시간에 다시 악
투가 벌어졌다. 흑림발부는 육중한 철장(鐵杖)을 무기로 사용했
다. 그가 철장을 전개할 때마다 거칠은 바람이 일며 거기에 따라
촛불이 어두워졌다 밝아지며 덩달아 춤을 추었다.
홀연, 몇 자루의 촛불이 일제히 꺼지며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목검이 부러졌다. 하태충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부러진 목검을
바닥에 팽개쳤다. 이번에는 패하고 만 것이다. 현명노인이 으례
그 감정없는 말투로 물었다.
"철금선생, 그래도 항복하지 않겠나?"
하태충은 앙연히 대꾸했다.
"항복할 수도 없거니와 승복할 수도 없다! 내력만 상실하지 않
았다면 저런 번승 따위가 어찌 나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느냐?"
현명노인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차갑게 명령했다.
"그의 왼손 무명지를 잘라 다시 탑으로 데려가라!"
장무기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양소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고
개를 내둘렀다. 지금 대전 안으로 뛰쳐 들어가면 큰일을 망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곧이어 대전 안에 새로 촛불이 밝혀지고 손가락을 절단하고, 다
시 약을 발라 치료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하태충은 신음은 고
사하고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비녀는 정성스레 조민의 발을 씻어 주고 나서 꽃신을 신겨 주었
다. 황의인들은 다시 하태충을 보탑으로 데려갔다.
장무기 등은 담구석에 몸을 숨긴 채 횃불이 비친 하태충의 안색
이 백지장처럼 창백하면서도 분노로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었
다.
일행이 떨어져 가자 대전 안에서 조민의 간드러진 음성이 들려
왔다.
"녹장선생(鹿杖先生), 곤륜파의 검법은 과연 대단하더군요. 그
가 마가파사를 제압했던 그 초식은 처음에 왼쪽으로 이렇게 떨쳐
내다가 다시 이렇게 오른쪽으로 돌려....."
장무기는 궁금하여 다시 창문 틈으로 살펴보니 조민이 손에 한
자루의 목검을 쥔 채 하태충의 검법을 흉내내고 있었다.
그녀가 녹장선생이라 부르는 자는 바로 얼굴이 시커먼 현명노인
이었는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주인의 총명함은 따를 자가 없습니다. 그 초식은 거의 한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조민은 계속하여 그 검초를 연습하고 나더니 다시 하태충이 온
와아에게 전개했던 절초를 골라 진지하게 모방해 나갔다. 녹장선
생은 옆에서 간혹 틀린 데가 있으면 자세히 시정해 주었다.
장무기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알고
보니, 조민은 각 문파의 고수들을 이곳에 가두어 약물로서 내력
을 잃게 한 후 투항하여 조정에 협력하라고 강요했다. 군호가 완
강히 거절하자 다시 교활한 수를 써서 각 문파의 절초를 차례로
훔쳐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실로 악랄하고 무서운 음모가 아닐
수 없었다.
이어 조민은 흑림발부를 불러내 그와 대련을 하더니 나중에 이
르러 초식이 둔해졌다.
"녹장선생, 이렇게 하는 게 맞나요?"
녹장객(鹿杖客)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고개를 돌려
한 마디 내뱉었다.
"학형(鶴兄), 난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혹시 기억하고 있나?"
그러자 대전 왼쪽 구석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보다 고대사(苦大師)가 더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걸세."
조민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그의 말을 받았다.
"고대사, 수고스럽지만 가르침을 주시겠어요?"
그러자 대전 오른쪽 구석에서 한 사람이 소리없이 걸어나왔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두타(頭陀)로서 몸집
이 우람하며 얼굴이 온통 칼자국으로 얼룩져 추악하기 이를데 없
었다. 게다가 머리카락이 붉으스름한 것으로 보아 중원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조민의 손에서 목검을 받아
재빨리 흑림발부에게 공격을 전개했다. 바로 하태충이 전개했던
것과 똑같은 곤륜검법이었다.
이 고대사라고 일컬어지는 추하게 생긴 두타는 역시 하태충을
모방하여 내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흑림발부는 좀전과 마찬
가지로 전력을 다해 첫장을 전개해 나갔다. 막바지에 이르러 그
가 철장을 가로쓸자 주위에 촛불이 일제히 꺼졌다. 하태충은 바
로 이 초식에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어 마지못해 목검으로 철장과
맞부딪치는 바람에 목검이 부러져 패배를 시인해야만 되었던 것
이다. 그러나 이 고대사는 절묘하게 목검의 방위(方位)를 바꾸어
살짝 떨쳐내자 흡사 바다제비가 수면을 스치고 지나가듯 철장에
붙은 상태로 베어나갔다. 흑림발부는 철장을 쓸며 미끄러져 오는
목검이 손가락에 닿는 순간, 호구혈(虎口穴)이 마비되며 이내 철
장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얼굴이 빨개졌다. 만약 상대방이 사용
한 게 목검이 아니라 철검이었다면 영락없이 손가락이 잘라졌을
것이다. 그는 황급히 몸을 숙여 정중하게 말했다.
"정말 탄복했습니다."
그가 철장을 주워 뒤로 물러나자 고대사는 목검을 조민에게 건
네주었다.
조민은 활짝 웃으며 물었다.
"고대사, 마지막 초식을 정말 절묘했어요. 그것도 역시 곤륜파
의 검법인가요?"
고두타(=고대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조민이 다시 말했다.
"그래서 하태충이 구사하지 못했군요. 고대사, 그 초식을 저에
게 가르쳐 주세요."
고두타는 손을 검으로 삼아 허공에다 초식을 그려냈다. 조민은
그대로 따라서 했다. 세 번째 연습을 마치자 고두타의 동작이 갑
자기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라졌다. 조민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
었다. 그러나 검초가 느릴 뿐 여전히 흉내를 내갔다. 고두타는
갑자기 몸을 젖혀 쌍장을 쭉 밀어내더니 모든 동작이 정지되었
다. 장무기는 내심 갈채를 금치 못했다.
'앗! 정말 대단하군!'
조민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고
두타의 자세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이내 깨닫고 물었다.
"앗! 고대사, 만약 당신의 손에 철장이 쥐어져 있다면 그 자세
로서 필시 내 팔을 적중시켰을 텐데, 나는 그 위기를 어떻게 벗
어나야 하죠?"
고두타는 고정시켰던 자세를 풀며, 새로이 오른손에 검을 쥔 자
세를 취하는 동시 왼손으로 허공에 반원을 그려 철장을 나꿔잡으
며 왼발을 걷어차 냈다. 그 즉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미 상
대방의 철장을 나꿔채고, 상대방을 걷어차 낸 것이다. 그의 몇
가지 동작은 둔해 보였으나 사실을 절묘한 변화가 담겨져 있는
외문절예(外門絶藝)였다. 조민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대사, 그 절초를 좀더 자세히 가르쳐 주세요."
그녀의 요염한 웃음은 뭇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장무기는 다시 가슴이 뛰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력이 부족한 주제에 그 절초를 어떻게 배울 수 있단 말인가?
계속 가르쳐 달라고 졸라 대면 상대방이 매우 난처해질 텐데....
...."
고두타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두 가지 손짓을 해 보였다. 그 뜻
은 "당신의 내력이 부족하니 배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곧 몸을 돌려 물러가며 더 이상 조민을 거들떠 보지 않았다.
장무기는 고두타의 정체에 대해 매우 궁금하게 느껴졌다.
'고두타의 무공은 현명이로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손짓만 할 뿐 말을 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듣기만 하
고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란 말인가? 조 낭자가 예의로서 그를
대하는 것을 보면 상당한 내력(內力)을 지닌 인물임에 분명한
데.....'
조민은 고두타가 자기의 청을 거절했는데도 전혀 화를 내지 않
고 빙긋이 웃었다.
"이번엔 공동파의 당문량을 불러오세요."
그녀의 분부에 따라 얼마 후 당문량이 끌려왔다. 녹장객은 다시
세 사람을 시켜 그와 세 판을 겨루게 했다. 당문량은 장풍으로
연거푸 두 사람을 깨었으나 세 번째 상대가 정면으로 내력(內力)
을 전개해 오자 속수무책이었다. 그 역시 손가락 하나가 잘려져
나갔다.
이번에는 조민이 공동파의 장법을 그대로 모방해 펼쳤고 녹장객
이 옆에서 가르침을 주었다. 장무기는 새삼 깨달은 바가 있었다.
조민은 자신의 내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내력을 쌓는데 세월
이 많이 걸리므로 가가 문파의 절예를 배워 짧은 시간 내에 일류
고수 대열에 끼려는 속셈임에 틀림없었다.
조민은 장법을 거듭 연마하고 나서 다음 상대를 골랐다.
"가서 멸절 늙은이를 불러오세요!"
한 황의인이 얼른 대답했다.
"멸절은 단식한 지 이미 닷새가 됐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고집을 부리고 있기 때문에 분부에 따르지 않을 겁니다."
조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굶어 죽게끔 내버려 두세요. 참, 아미파의 그 주지약이라
는 계집을 불러오면 되겠군요!"
그녀의 부하가 곧 대답을 하고 대전 밖으로 나갔다. 장무기는
주지약이란 이름에 가슴이 철렁했다. 잠시 후 한 무리의 황의인
이 그녀를 끌고왔다. 장무기의 시선은 조민으로부터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주지약은 예나 변함없이 청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
었다. 단지 광명정에서 보았을 때보다 다소 초췌해 보였다. 녹장
객은 그녀에게 항복여부를 물었지만 태연하게 고개를 내둘러 거
절했다. 생사 따위를 안중에 두지 않는 초연한 자세였다.
녹장객이 사람을 시켜 그녀와 검법을 겨루게 하려는데 조민이
입을 열었다.
"주 낭자, 그렇게 젊은 나이에 아미파의 절학을 익혔으니 정말
부럽군. 물론 이곳의 규칙을 잘 알고 있겠지? 우리중 세 사람만
꺾으면 무사히 보내주겠다는데 영사인 멸절사태는 왜 고집을 부
리는지 모르겠어."
주지약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스승님께선 목숨을 내놓을 망정 굴복을 하진 않을 겁니다. 당
당한 아미파의 장문인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당신네들과 같은
음독한 소인배와 겨룰 수 있겠습니까?"
조민은 화를 내지 않고 입가에 묘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럼 주 낭자의 생각은 어떠한가?"
주지약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어찌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스승님
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싸우지 않겠다는 뜻인데, 영사는 대관절 무엇
때문에 우리와 싸움을 피하려는 거지?"
"아미파의 검법은 비록 천하 제일의 절학은 아니지만, 중원에
널리 알려진 정통 무학임엔 들림없어요. 그런데 어찌 파렴치한
번승 오랑캐 따위가 그것을 훔쳐 배우게끔 도와줄 수가 있겠습니
까?"
그녀의 표정은 진지 했으나, 한 마디 한 마디가 상대방의 정곡
을 찌르는 비수와 같았다.
조민은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여유를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었다. 멸절사태가 자신의 속셈을 꿰뚫어보고
있을 줄이야. 그녀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주지약
이 "음독한 소인배"니, "파렴치한 오랑캐"라고 서슴없이 말하자
은근히 화가 치밀어 대뜸 의천검을 뽑아 쥐었다.
"우리들더러 파렴치하다고 했는데, 그럼 한 가지 묻겠다. 이 의
천검은 우리 집안의 가전지보(家傳之寶)인데 어떻게 해서 아미파
가 훔쳐가게 되었지?"
주지약은 담담하게 말했다.
"의천검과 도룡도는 처음부터 중원의 신검보도(神劍寶刀)로 알
려졌을 뿐 오랑캐와 관계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
다."
조민은 이내 얼굴이 빨개지며 냉소를 날렸다.
"흥! 이제보니 입만 살았구나! 정말 출수하지 않기로 결심했느
냐?"
주지약은 고개를 내둘러 대답을 대신했다. 조민의 눈동자에 갑
자기 매서운 살기가 번뜩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손가락 하나만으로 충분하겠지만, 너는 그 반
질한 얼굴을 믿고 고집을 부리는 모양인데 다른 방법을 써야겠
다."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고두타를 가리켰다.
"저분 대사처럼 얼굴에 칼자국을 그을텐데, 그래도 건방을 떠는
지 봐야겠군!"
그녀가 손을 살짝 휘두르자 황의인 둘이 달려와 주지약의 팔을
뒤에서 꺾어 조민 앞에 무릎을 꿇게 했다.
조민은 태연하게 웃었다.
"너의 얼굴을 귀신탈바가지처럼 만드는데는 그 무슨 아미 검법
이 필요없겠지?"
주지약은 눈물이 글썽거리며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의
천검의 검 끝이 바로 코앞에서 어른거리고 있으니 악마와 같은
상대방이 살짝 손목만 놀려도 영락없이 고두타처럼 추한 모습으
로 변할 것이다. 조민은 그녀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즐기는 듯 잠
시 지켜보고 나서 퉁명스레 물었다.
"두렵느냐?"
주지약은 더 이상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러자 조민이 다시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그럼 항복을 하겠느냐?"
주지약은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항복하지 않겠다! 차라리 날 죽여라!"
조민은 구석에 몰린 쥐를 희롱하는 고양이처럼 여유만만했다.
"나는 살인을 하지 않는다. 단지 너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싶을
뿐이다."
말을 끝내기 무섭게 그녀는 손목을 떨쳤다. 그 순간, 난데없이
대전 밖에서 작은 물체가 날아와 의천검에 적중되었다. 그와 동
시에 창문이 박살나며 한 사람이 뛰쳐 들어왔다. 주지약을 잡고
있던 두 사람은 엄청난 회오리에 밀려 좌우로 벌렁 나자빠졌다.
창문을 뚫고 들어온 사람은 재빨리 주지약을 왼팔로 끌어안으며
녹장객과 일장을 교환했다.
펑!
쌍방은 제각기 뒤로 두 걸음씩 물러났다.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침입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명교의 교주인 장무기였다. 그는 마치 하늘에서 내
려온 천장군(天將軍)같았다.
놀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명이로 같은 일류 고수들
도 사전에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조민의
앞을 가로막고 장무기와 일장을 교환한 것이다. 그가 뒤로 두 걸
음 물러난 것은 고사하고 온몸이 갑자기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
는 것을 느끼고 내심 크게 당황해 했다.
한편 주지약은 위기일발의 순간 느닷없이 한 사람이 나타나 자
기를 도와 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장무기의 품
안에 안긴 채 남정네의 짙은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이어 장무
기임을 확인하자 놀라움과 기쁨이 엇갈려 순식간에 온몸이 솜처
럼 풀려 까무라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여지껏 남자의 품에 안겨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상대방은 오매불망해 오던 의중지인(意
中之人)이 아닌가! 그녀는 벅찬 기쁨을 무엇으로 형용해야 좋을
지 몰랐다. 주위에 비록 많은 강적들이 있지만 그녀는 그저 마음
이 든든했다.
양소와 위일소도 교주가 예고없이 대전 안으로 뛰어들자 잇따라
몸을 번뜩여 장무기 뒤편 좌우에 내려섰다.
조민의 수하 고수들은 창졸간에 일어난 변화에 처음엔 당황하는
듯했으나, 이내 포위망을 구축해 장무기 등의 퇴로를 완전히 차
단한 채 조민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조민은 놀라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지 멍하니 장무
기를 바라보다가 대전 한쪽 구석에 떨어져있는 금빛 찬란한 물건
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장무기가 의천검을 막기 위해 창졸간에
던져낸 물건으로서 바로 조민이 주었던 황금합이었다. 그 금합은
의천검의 예리한 날과 맞부딪쳐 이내 두동강이로 변해 있었다.
조민은 잠시 동안 그것을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금합이 그렇데도 싫었나요? 이런 식으로 파괴해야만 속이
시원한가요?"
장무기는 그녀가 성난 음성으로 다그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눈
동자에 울적한 빛이 띄어져 있는 것을 보자 절로 멍해지며 미안
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몸에 암기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급한 나머지
품속에 집히는 물건을 꺼내 던진 것뿐이오. 고의가 아니니 양해
해 주시오."
조민의 눈동자에 야릇한 광채가 번뜩였다.
"그럼 이 금합을 늘 품 속에 간직하고 있었단 말인가요?"
"그렇소."
장무기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조민이 계속 야릇한 눈길로 장
무기를 주시했다. 장무기는 비로소 자기가 계속 왼팔로 주지약을
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팔을 풀었
다.
조민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 낭자가 당신의..... 친한 친구인 줄은 몰랐어요. 진작 알았
다면 그녀를 거칠게 대하지 않았을 거에요. 이제보니 두 사람
은....."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장무기는 자신도 모
르게 변명을 했다.
"사실 나는 주 낭자와 별로..... 별로....."
그는 말을 더듬거리며 제대로 잇지 못했다. 조민은 두 쪽으로
갈라진 채 버려진 금합을 다시 응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지약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저 여마두가 혹시 그에게 정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장무기는 그녀만큼 생각이 세세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조민이
준 금합으로 유대암과 은이정의 불치병을 치료했는데, 금합을 파
괴했으니 그저 미안한 생각만 앞섰다. 하여 한쪽 구석으로 걸어
가 잘라진 금합을 주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솜씨 좋은 장인(匠人)을 찾아 이 금합을 원상복귀시키겠소."
조민은 얼굴이 활짝 필 정도로 좋아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내심 투덜거렸다.
'무수한 영웅호걸들을 통솔하고 있는 자가 이런 금합 따위에 집
착하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역시 여자니까 시시콜콜한 것까
지 공연히 신경을 쓰는군.....'
그가 잘라진 금합을 다시 품 속에 갈무리하자 조민이 낭랑한 음
성으로 말했다.
"이젠 떠나도 좋아요."
장무기는 대사백 등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대로 떠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네 쪽 세 사람만으로 뾰족한 수가 있
는 것도 아니었다.
"조 낭자, 나의 대사백님 등을 어떻게 하실 작정이오?"
조민은 원래의 여유를 되찾았다.
"나는 호의를 베풀어 그들이 조정에 협력하여 각자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설득했어요. 한데 그들은 거절했어요. 나로서도 더 이
상 강요할 수 없으니 스스로 마음을 돌릴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예요."
장무기는 가볍게 냉소를 날리더니 다시 주지약 곁으로 걸어갔
다. 주위에 많은 고수들이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전혀 제
약을 받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행동했다. 그는 주위를 한 번 훑어
보고 나서 냉랭하게 말했다.
"정녕 그렇다면 우린 일단 떠나겠소이다."
이렇게 말하며 주지약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나가려 했다. 그
러자 조민이 대뜸 싸늘하게 외쳤다.
"당신이 떠나는 것은 좋지만 주 낭자를 데려갈 수 없어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즉시 현명이로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학
필옹(鶴筆翁)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음침하게 말했다.
"장교주, 한 수 보이지도 않고 그냥 사람을 데려간다면 우리 체
면이 뭐가 되겠소?"
장무기는 학필옹의 음성을 알아듣고 노기가 끓어올랐다.
"내가 어렸을 때 당신에게 잡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는
데, 무슨 낯으로 다시 내 앞에 나서는지 모르겠군요!"
말을 내뱉기 무섭게 대뜸 학필옹을 항해 일장을 뻗어냈다.
녹장객은 조금 전에 장무기와 직접 일장을 겨룬 바가 있으므로
학필옹 혼자의 힘으로는 그의 적수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앞을
다투어 일장을 격출해 냈다. 장무기는 오른손으로 학필옹을 노렸
으므로 왼손을 떨쳐내 녹장객을 맞이했다. 이것은 진력 대 진력
의 정면대결이니 만치 중간에서 몸을 피하거나 다른 얕은 수법을
쓸 만한 여지가 없었다.
세 사람의 장심(掌心) 네 개가 맞부딪치는 순간, 제각기 몸이
한 차례씩 휘청거렸다.
그날 무당산에서 현명이로는 쌍장으로 장무기의 쌍장과 맞부딪
치며 다른 쌍장으로 그의 몸을 공격한 바가 있었는데, 오늘도 똑
같은 수법을 전개했다. 그러나 장무기는 그날처럼 당하지 않았
다. 그는 즉시 건곤이위신공을 펼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학필
옹의 왼손이 녹장객의 오른손과 맞부딪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
로 건곤이위신공의 묘미가 아니던가!
현명이로는 같은 스승 밑에서 무학을 쌓았으므로 장법이 같은데
다가 공력도 비등했다. 두 사람 모두 이내 심한 충격을 느끼며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비록 무공이 뛰어났지만 어째서
갑자기 자기네끼리 장력을 맞부딪치게 되었는지 영문을 몰라 어
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들이 자세히 생각을 굴릴 여유도 없이 이번에는 장무기가 쌍
장을 뻗어내 선재공격을 했다. 현명이로는 여전히 쌍장을 격출해
공격과 수비를 동시에 펼쳤다. 조금 전에 전개했던 장법과는 판
이하게 달랐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장무기가 건곤이위
신공의 묘미를 살려 다시 녹장객의 좌장이 학필옹의 우장에 적중
되게 만들었다. 이 건곤이위심법의 절묘함은 실로 불가사의했다.
현명이로는 또 한 번 아연실색을 해야만 했다. 장무기의 세 번
째 장풍이 뻗쳐오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제각기 한 쪽 손만
뻗어내 맞이했다. 세 사람의 진력이 정면으로 맞부딪쳐지자 현명
이로는 상대방의 장력 속에 한 갈래의 순양지기(純陽之氣)가 걷
잡을 수 없는 기세로 휘몰어쳐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
장무기의 공격은 질풍 노도와 같았다. 어렸을 적에 학필옹의 현
명패천장을 맞아 그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죽을 고생을 겪어야
만 했던가! 하여 녹장객에게는 다소 사정을 보아 주었으나 학필
옹에게는 숨돌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십여 초식이 지나자 학필옹의 푸르스름하던 얼굴이 뻘겋게 상
기되었다. 상대방의 장력이 다시 앞으로 뻗쳐오자 황급히 왼손으
로 원을 그리며 와해시키려 했다. 동시에 오른손을 비스듬히 밀
어냈다. 다음 순간, 팍! 팍! 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며 학필옹
의 오른손이 엉뚱하게도 녹장객의 어깨쭉지를 강타했고, 장무기
의 일장을 끝내 막아내지 못해 가슴에 맞고 말았다. 그 즉시 학
필옹은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며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장무기가 그 틈을 타서 다시 일장을 뻗쳐낸다면 영락없이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나 장무기는 오늘 만큼은 인명 피해를 내고
싶지 않았다. 녹장객도 어깨에 일장을 맞아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현명이로는 조민의 수하 중에 가장 걸출한 인물인데, 이십 여
초식만에 제각기 부상을 입게 된 것이다. 조민의 수하들은 당연
히 대경실색했지만 양소와 위일소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날 무당산에서는 장무기가 현명이로에게 부상을 입었는데, 불
과 몇 달 안에 상황이 뒤바뀌어진 것이다. 실로 경탄할 발전이었
다. 양소와 위일소는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장무기
가 무당산에 머무는 몇 달 동안 장삼봉의 심오한 가르침을 받아
드디어 구양신공과 건곤이위신공, 무당의 절학인 태극신공 등 이
세가지 무상무학(無上武學)을 혼연일체로 융합시킨 게 분명했다.
양소와 위일소는 장삼봉의 고심막측한 무학 진리에 새삼 경탄을
금치 못했다.
현명이로는 장풍을 겨루어 패하자 즉시 무기를 전개했다. 녹장
객의 무기는 한 자루의 짧은 괴장(拐杖)으로 머릿부분이 갈라져
녹각(鹿角) 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가무잡잡한 윤기가 흐르는 것
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학필옹의 손에는 한 쌍의 붓이 쥐어져 있었다. 붓 끝이 학의 주
둥아리처럼 묘하게 생겼으며 한광이 번쩍였다.
현명이로는 조민을 따른 지 오래 되었지만 조민도 그들이 무기
를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일단 무기를 전개하자
한 갈래 흑기(黑氣)와 두 줄기의 백광(白光)이 허공을 수놓으며
장무기를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장무기는 빈손으로 그들을 상대해야 했으므로 상황이 다소 불리
했지만,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자
신의 무공을 시험해 볼 양으로 좌충우돌 맞서나갔다.
이때 조민이 손뼉을 쳐서 신호를 하자, 대전 곳곳에서 싸늘한
기합이 터지며, 세 사람은 양소를 겨냥해 덮쳐갔고, 네 사람은
위일소를 협공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은 공력을 잃은 주지약
을 제압했다.
양소는 잽싸게 상대방에게서 검을 한 자루 빼앗아 번개같은 검
광을 뿌려내자 황의인 한 명이 부상을 입고 물러났다.
위일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공술을 바탕으로 하여 현음면
장(玄陰綿掌)을 전개해 삽시간에 두 사람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상대방의 수가 많아 한 사람이 쓰러지면 즉시 두 사람이 덮쳐왔
다.
장무기는 현명이로를 상대하느라 좀처럼 그들을 도울 틈이 없었
다. 물론 양소와 위일소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어려
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지약을 구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
다. 그들이 어떻게 해야 좋을 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홀연 조민의 차가운 외침이 터졌다.
"모두 손을 거두세요!"
그녀의 수하들은 일제히 공격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양소는 장검을 바닥에 팽개쳤고, 위일소는 한 자루의 단도를 원
래 임자에게 던져주며 광소를 터뜨렸다.
장무기는 한 사나이가 비수로 주지약의 등을 겨냥하고 있는 것
을 보았다.
주지약은 그를 쳐다보며 울적하게 말했다.
"장공자, 세 분께선 어서 이곳을 떠나세요. 세 분의 고마운 뜻
은 결코 잊지 않을 거예요."
조민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을 이어 장무기에게 말했다.
"장공자, 저 달덩어리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당신의 정인(情人)
인가요?"
장무기는 그녀의 노골적인 물음에 오히려 쑥스러워졌다.
"주 낭자는 나하고 소시적부터 아는 사이였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학필옹을 힐끗 노려보고 나서 다음 말을 이
었다.
"내가 현명패천장을 당해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서, 주 낭자는 나를 보살펴 주었소. 난 아직도 그 은덕을 잊을
수 없소."
"그렇다면 죽마고우였겠군요. 혹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는
게 아닌가요?"
장무기는 웬지 당황해졌다. 그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산하(山河)를 되찾기 전에 내 어찌 한 몸 편하고자 가정을 이
루겠소!"
조민은 이내 얼굴에 냉기가 감돌았다.
"끝까지 나하고 맞서 나를 죽음의 궁지로 몰아넣어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뜻이군요?"
장무기는 고개를 내둘렀다.
"나는 아직도 낭자의 진정한 신분을 모르고 있소. 비록 몇 번
다툼이 있었지만 언제나 낭자가 나 장무기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
었지 내가 낭자에게 트집을 잡은 적은 없소. 지금이라도 낭자가
나의 대사백님을 비롯한 각 문파의 협의지사들을 풀어준다면 적
대시하지 않을 것이오. 더군다나 낭자의 분부에 따라 세 가지 일
을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있소."
조민은 그의 진지한 태도에 매우 만족해 하며 활짝 웃었다.
"아직 잊지 않고 있었군요."
이어 주지약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계속했다.
"저 주 낭자가 당신의 정인도 아니고 사매도 아니니, 내가 그의
얼굴을 추하게 만들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겠군요?"
그녀는 즉시 현명이로에게 눈짓을 보냈다. 녹장객과 학필옹은
그녀의 눈짓에 따라 주지약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다른 사나이가 예리한 칼날로 주지약의 얼굴을 겨냥했다.
장무기가 그녀를 구하려면 우선 현명이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민이 다시 냉랭하게
말했다.
"장공자, 내가 사전에 말을 분명하게 밝혔으니 날 원망하지 않
겠죠?"
이때 위일소가 갑자기 손에다 침을 뱉더니 그 손으로 신발 밑창
을 쓱쓱 문질렀다.
"으하하핫.....!"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도 이상했지만 난데없이 광소를 터뜨리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모두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데, 돌연 청색 그림자가 번뜩였다. 그 순간, 조민은 양쪽 뺨이
싸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흠칫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위일
소는 이내 제자리에 서 있었다. 단지 종전과는 달리 그의 손에
두 자루의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누구의 허리춤에서 빼앗아 왔
는지는 알 수 없었다.
조민은 직감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어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그
녀는 감히 손으로 뺨을 만지지 못하고 얼른 손수건을 꺼내 얼굴
을 닦았다. 과연 그녀의 불길한 느낌이 적중했다. 수건에 시커먼
때가 묻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위일소의 침과 신발 밑창의 흙이
라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위일소의 퉁명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조 낭자, 정녕 주 낭자의 얼굴을 못쓰게 만들겠다면 맘대로 해
보시지! 그대신 나도 조 낭자의 얼굴을 그냥 내버려두진 않을 거
야. 주 낭자 얼굴에 칼자국을 하나 내면 난 두 배로 갚아줄 것이
고, 그녀의 손가락 하나를 자른다면 나 역시 조 낭자의 손가락뿐
만 아니라 발가락까지 싹둑 잘라 보답을 해야지."
여기까지 말한 그는 두 자루의 단도를 한 번 맞부딪치고 나서
느긋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물어보면 잘 알겠지만 나 위일소는 한 번 한다면 꼭 하는 사람
이야. 여지껏 내가 장담을 해서 실천에 옮기지 못한 일이 없지.
물론 석 달 열흘쯤은 용케도 피해 다니겠지. 그러나 삼, 사년 혹
은 십 년 넘게 내 칼을 피하진 못할걸. 미리 선수를 쳐서 고수를
시켜 날 죽이려고도 하겠지만 내가 도망치겠다고 작심한 이상 아
무도 날 쫓아오지 못할 거야. 자, 그럼 난 이만 가봐야겠어."
말을 끝내는 순간 그림자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그의 모습이 온
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단지 팍팍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쥐고
있던 단도가 나란히 천장 대들보에 꽂혔다. 그뿐만 아니었다. 잇
따라 두 마디의 짤막한 비명이 들리며 대전 문쪽에 서 있던 두
번승이 천천히 쓰러졌다. 그들이 쥐고 있던 장검은 이미 연기처
럼 사라졌고, 모두 혈도가 찍힌 것이다.
위일소는 느긋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결코 형식적인 위협이 아
니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조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
다. 위일소가 얼굴에 오물을 묻히는 순간 손에 비수가 쥐어져 있
었다면, 지금쯤 양쪽 뺨에 칼자국이 나 있을 게 분명했다. 위일
소의 귀신 같은 신법에는 실로 따를 자가 없었다. 설령 장무기라
할지라도 장시간 동안 경합을 벌인다면 모를까, 순간적으로 전개
하는 신법에 있어서는 도저히 그를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장무기는 정중히 공수의 예를 취했다.
"조 낭자, 오늘은 실례가 많았소.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하오."
그는 양소와 함께 태연히 대전 밖으로 걸아 나갔다. 위일소가
간담이 싸늘할 정도로 위협을 주었으니, 조민은 더 이상 주지약
을 가해하지 못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조민은 분노와 수치로 이글거리는 시선을 그의 뒤통수에 꽂을
뿐 감히 앞을 가로막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장무기와 양소가 객점으로 돌아와 보니, 위일소가 기다리고 있
었다. 이날 밤 세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했
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날 동이 틀 무렵, 장무기는 창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즉시 잠에서 깨어났다. 순간 창문이 스르르 열리며 한 사람이 얼
굴을 들이밀며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장무기는 흠칫하여 침상의
휘장을 젖히고 유심히 살펴보니, 상대방은 다름아닌 그 추하게
생긴 고두타였다. 그를 확인하자 놀라움이 더욱 컸다. 장무기는
벌떡 침상에서 일어났으나 고두타는 여전히 귀신 탈바가지같은
얼굴로 그를 응시하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추한 얼굴이 갑자기 창 밖에서 사라졌다.
장무기는 즉시 창문을 뚫고 나갔다. 고두타가 성큼성큼 문 밖으
로 걸어나가는 게 보였다. 이때 양소와 위일소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달려왔다. 세 사람이 주위를 살펴보니 고두타 외에
다른 적은 보이지 않자, 곧 고두타의 뒤를 쫓아갔다.
고두타는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세 사람이 뒤쫓아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즉시 북쪽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장무기 등
도 눈빛을 교환하며 신법을 펼쳤다.
동이 텄지만 서편 하늘에는 여전히 조각달이 떠 있고 주위는 어
슴푸레했다. 이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신법을 전개해 얼
마 후에 북문을 벗어났다. 고두타는 쉬지 않고 황량한 산길을 택
해 다시 칠, 팔 리 가량 달려 으슥한 돌산으로 접어들자 비로소
신법을 멈추었다.
장무기는 예리하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날이 이마 완전히 밝았
고 시야가 확 트여 적이 매복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두타가 무엇 때문에 우릴 이곳까지 데려온 것일까?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혼자서 우리 셋을 상대하기엔 불리할텐데..... 보
아하니 악의는 없는 것 같군.....'
그가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고두타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가슴 앞에 세워 불길 모양을 만들고 장무기에게 큰절을 올
렸다.
"소인 광명우사(光明右使) 범요(范遙)가 교주께 인사를 올립니
다."
벙어리로만 알았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자 모두는 놀랐다. 더욱
놀란 것은 그가 스스로 광명우사라고 밝힌 일이었다.
장무기는 놀라움에 이미 어리둥절하며 얼른 그를 부축해 일으켰
다.
"정녕 그대가 본교의 광명우사라면 이보다 반가운 일은 없을 것
이오. 어서 일어나시오."
사실 그보다 더욱 놀란 것은 양소와 위일소였다. 양소는 그의
얼굴을 잠시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자네가.....자네가 정말 범형제란 말인가? 이게 대관절.....!"
범요는 무너지듯 양소의 몸을 끌어안았다.
"형님! 이제 교주께서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습니
다. 이 모든 것이 명존의 보살핌입니다. 훌륭한 교주가 탄생하기
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양소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런데 자네의 얼굴이 어찌 이 모양으로 변했나?"
범요의 일그러진 입가에 한 가닥의 쓴웃음이 띄어졌다.
"내가 스스로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벽력
수 성곤, 그 간교한 놈의 눈을 속일 수 있었겠습니까?"
세 사람은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적진에 잠입하
기 위해 스스로 얼굴을 난도질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소는 더 가슴이 아팠다.
"범형제,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
양소와 범요는 왕년에 강호에서 소요이선(遡遙二仙)이라 일컬어
질 만큼 모두 영준한 미남자였다. 그런데 범요가 대의(大義)를
위해 스스로 얼굴을 목불인견의 흉한 꼴로 만들 줄이야! 위일소
는 예전에 범요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 그
에게 심히 감동되어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범우사, 나 위일소는 오늘 진심으로 당신에게 탄복했소."
범요도 무릎을 꿇고 답례했다.
"위복왕이 경공은 변함없이 독보천하이며, 명확한 상황판단은
전보다 훨씬 고명해졌다는 걸 어젯밤에 새삼스레 느꼈소이다."
양소는 주위를 한 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곳은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으니, 자리를 옮겨 자세한
얘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네 사람은 다시 십 리 밖으로 벗어나 어느 토산 위로 올랐다.
이곳에선 몇 리 밖을 한눈에 바라볼 수가 있으므로 누가 엿듣는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멀리선 이곳을 자세히 볼 수
없는 잇점도 있어 넷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범요가 먼저 얘기 보
따리를 풀었다.
왕년에 명교의 교주였던 양정천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자, 명교의
고수들은 서로 교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하다가 사
본오열되는 결과를 맞았다.
당시 범요는 교주가 어디엔가 살아있다는 확신을 갖고 혼자 강
호로 나와 방방곡곡을 모두 다니며 교주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
는 사이에 몇 년이 흘렀고, 결국 교주를 찾아내지 못한 범요는
개방을 의심하게 되어 암암리에 개방의 여러 중요 인물들을 잡아
고문을 했으나, 여전히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단지 적지 않은
개방고수들만 억울하게 살상을 당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양교주 부인의 사형인 성곤을 보게 되었
다. 당시 무림은 살인자 혼원벽력수로 인해 발칵 뒤집혀져 있을
때였다. 범요는 그 일의 진상을 캐고 또한 성곤을 통해 어쩌면
양교주의 행방을 알아낼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멀찌감치 떨어져
성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성곤은 어느 주루로 들어갔다. 주루에는 두 명의 노인이 기다리
고 있었는데 바로 현명이로였다. 범요는 성곤의 무공이 고강하다
는 것을 알고 멀찌감치 떨어져 술만 마시는 척하면서 그들의 대
화를 엿들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놀라운 얘기를 접하게 된 것이
다. 그들은 명교를 멸망시키고 광명정을 파괴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범요는 이 사실을 안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어 다시 암암리에
그들의 뒤를 미행했다. 뜻밖에도 그들은 여양왕부(汝陽王府)로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현명이로는 여양왕이 고용한 무사
중에 핵심인물이었다.
여양왕 찰한특목이(察罕特穆爾)는 태위(太慰)라는 벼슬에 앉아
천하의 병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인물로서 현재 조정에서 첫손을 꼽는 실력자였다. 그 동안 천하
방방곡곡에서 의병(義兵)들이 궐기했지만 번번이 그로 인해 실패
로 끝나고 말았다.
장무기 등도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을 들어왔는데, 지금 범요의
입을 통해 녹장객과 학필옹이 그의 부하라는 것을 알자 모두 멍
해졌다. 양소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조 낭자는 누구인가?"
범요가 대답했다.
"바로 여양왕의 딸입니다. 여양왕에게 아들 하나와 딸이 있는
데, 이들은 고고특목이(庫庫特穆爾)라고 하며, 조민은 그의 딸로
서 몽고 이름은 민민특목이(敏敏特穆爾)라고 합니다. 고고특목이
는 여양왕 세자이니 장차 왕작(王爵)을 계승하게 될 것이라, 조
민은 소민군주(紹敏郡主)로 봉해져 있습니다. 그 두 젊은이는 모
두 상당한 무공을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인(漢人)차림
을 즐겨하며 한인의 말도 유창할 뿐 아니라 제각기 이름도 한인
처럼 지어 고고특목이는 왕보보(王保保), 소민군주는 조민이라
합니다."
위일소가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정말 맹랑한 오누이구료. 한 사람은 성이 왕이고 한 사람은 조
이니, 만약 우리 한인이라면 그보다 더 망신스러운 웃음거리가
또 어디 있겠소?"
범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그들의 성은 모두 특목이죠. 단지 몽고 오랑캐족은 풍습
에 따라 이름을 성(性) 앞쪽에 놓은 것뿐이오. 그 여양왕 찰한특
목이도 한인 성을 갖고 있는데 이(李)라 하던가.....?"
여기까지 말하자 네 사람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 註 : [新元史] 제 이백 이십 권 [찰한특목이전(察罕特穆
爾傳)]에 의하면 찰한특목이의 증조부는 활활대(闊闊坮)라 하고
조부는 만대(蠻坮), 부친은 아노온(阿魯溫)으로서 나중에 성을
이(李)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고특목이는 비록 세자(世
子)로 봉해졌지만 사실은 찰한특목이의 조카라고 한다. 이는 본
소설의 내용과 관계없으므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
양소가 한 마디 했다.
"그 조민이란 계집은 생김새가 한인 같지만 행동 하나하나에 오
랑캐의 거칠은 야성이 담겨져 있는 것을 보면 역시 피는 속을 수
없는 모양일세."
장무기는 비로소 조민의 진정한 신분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
가 조정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천하의
병권을 거머쥐고 있는 여양왕의 딸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범요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았
다.
그가 계속 암암리에 알아본 결과 여양왕이 강호의 모든 문파를
없앨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첫 번째 표적이 바로
명교였다. 그것은 성곤의 의견에 따른 결정이었다.
범요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교내
에선 계속 분쟁이 일어나고 적의 세력이 엄청나게 강하므로 이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여양왕부로 잠입하는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성곤이 버티고 있는 한 변장을 하여 잠입한다
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궁리 끝에 범요는 남들이 상상을
못할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얼굴을 난도질하고 약물로 머리카락마저 염색
했다. 그리고 서역에 위치한 화자자모(花刺子摸)라는 작은 나라
로 들어갔다. 그가 여양왕부와 만 리 길이 떨어진 화자자모국으
로 건너간 것은 계획의 치밀성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화자자모국에서 적당한 기회를 잡아 무공을 과시하자 그곳
의 몽고 왕공(王公)이 즉시 그를 보아서 받아들였다. 당시 여양
왕은 방방곡곡에서 무사들을 초빙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화자
자모국의 왕공은 여양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범요를 왕부로 보냈
다.
범요의 치밀한 계획은 척척 들어맞아 갔다. 그는 서역 하자자모
국에서 바쳐온 무사인데다가 얼굴이 완전히 달라지고 또한 벙어
리 흉내를 내므로 성곤이 제아무리 하늘을 날으는 재간이 있다
해도 그의 정체를 간파할 수 없었다. 여양왕부로 잠입한 범요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곤을 암암리에 죽이려 했다. 그러나 그 때 성
곤은 이미 왕부에 없었다.
범요는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성곤이
교주 부인의 사형이면서 무엇 때문에 여양왕을 등에 업고 명교를
멸망시키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기까지 들은 양소는 곧 성곤이 어떻게 하여 명교와 원한을 맺
게 되었으며 어떻게 광명정을 기습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장무기
가 그 위기를 맞은 경위와 은야왕이 장력을 겨루어 성곤을 죽인
상황을 얘기해 주었다.
범요는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입이 딱 벌어졌다. 그는 비로소 많
은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는 심한 격동을 느끼는 동시에 장무기
에 대한 존경이 더욱 깊어져 곧 몸을 일으켜 장무기를 향해 공손
하게 말했다.
"교주, 한 가지 사죄할 것이 있습니다."
"범우사,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앉아서 차근차근 얘기하십시
오."
"저는 여양왕부에서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 친히 본교의 향주
세 명을 죽였으니, 그 죄 값을 보상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갑자기 양소의 장검을 뽑아 자신의 오른손 손
가락 두 개를 잘라 버렸다. 장무기 등이 말릴 새도 없었다. 장무
기는 깜짝 놀라 황급히 그의 손에서 장검을 빼앗았다.
"범우사, 이게..... 구태여 이럴 필요가 있겠소?"
범요는 진지하게 말했다.
"본교의 무고한 형제들을 죽였으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없을 겁
니다. 응당 목숨을 내놓아야 마땅하겠지만, 지금은 할 일이 남아
있어 우선 손가락 두 개 잘라 죄 값을 대신합니다. 차후 모든 일
이 마무리되면 다시 나의 목을 바치겠습니다."
장무기는 그의 과격한 성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그가 또 어떤 과격한 행동을 취할지 걱정이 앞섰다. 그는 얼른
약을 꺼내 발라 주고 옷자락을 찢어 손가락을 동여 매 주었다.
"범우사가 본교 형제들을 죽인 것은 바로 본교의 존망을 고려하
여 취한 부득이한 행위였거늘, 내 어찌 나무랄 수가 있겠소? 정
녕 범우사가 다시 자신의 몸을 상대한다면 나의 무덕무능(無德無
能)으로 간주해 나 역시 똑 같은 죄값을 치룰 생각이오!"
양소는 눈물을 글썽이며 범요의 손을 잡았다.
"소림사의 나한상들을 돌려놓은 것이 혹시 자네의 짓이 아니었
나?"
범요는 히쭉 웃었다.
"군주가 나한상 등에다 본교에게 화를 전가시키는 말을 남기는
것을 보고 나중에 다시 소림으로 잠입해 슬쩍 나한상을 돌려 버
렸소. 형님, 그 때는 차마 내가 한 짓이라곤 생각지 못했겠죠?"
"물론일세. 적진의 어느 고수가 암암리에 우릴 돕고 있다는 생
각은 들었지만, 그게 바로 나의 단짝이었던 자네였을 줄이야 죽
었다 깨어난들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네 사람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양소는 명교가 이미 육대문파와 손을 잡고 몽고에 대항하기로
결정한 일을 설명해 주었다. 각 문파의 고수들을 구해내야 한다
고 강조했다. 범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우리 네 사람의 힘만으론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십향연근산의 해약을 구해 그들
에게 복용시켜 공력이 회복된 후 함께 함을 합쳐야만 합니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범우사의 말에 찬성하지만, 해약을 구하는 게 문제가
아니겠소?"
범요도 난처해 했다.
"나는 벙어리 행세를 해왔기 때문에 군주는 비록 나를 깍듯이
대해 왔지만 중요한 일을 상의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해약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죠. 단지 현명이로 중 한 사람이 해약을,
또 한 사람이 독약을 갖고 있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장무기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렇다면 그들 두 사람 중에 누가 해약을 갖고 있는가 부터 알
아내야 할 텐데,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군요."
잠자코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양소가 불쑥 끼어들었다.
"범형제, 현명이로가 평상시 어떤 취미를 갖고 있는지 알고 있
나?"
범요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녹장객은 여색을 즐기고 학필옹은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죠."
양소가 이번에는 장무기에게 물었다.
"교주, 십향연근산과 비슷한 약을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장무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비슷한 증세를 나타나게 하는 약은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약
효가 반 시진밖에 유지되지 않을 것이오."
양소는 매우 만족해 했다.
"반 시진이면 충분합니다. 나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는데, 과연
효과를 거두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까놓고 보면 아주 간단한 방
법이죠. 범형제가 우선 학필옹에게 술을 청해 암암리에 술에다
교주께서 만든 약을 풀어넣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범형제가 학
필옹에게 십향연근산에 당했다고 생트집을 잡으면 해약이 누구
손에 있는지 자연히 알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 방법을 강구해
그 해약을 빼앗아오면 되잖겠습니까?"
장무기는 신중을 기했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학필옹이 어떠한 태도로 나오느냐
에 따라 성패가 결정될 것이오. 범우사의 생각은 어떻소?"
범요는 지그시 눈을 감고 앞뒤를 한번 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
다.
"지금으로선 그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학필옹은 성질이 악
랄하지만 녹장객처럼 음흉하지 못해 만약 해약이 학필옹 몸에 있
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소가 한 마디 물었다.
"만약 녹장객이 해약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범요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일이 한결 어려울 겁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뒷짐을 준 채 토산 위에서 한참동안 왔다갔다
서성거리더니 문득 좋은 수가 떠올랐는지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
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녹장객의 결정적인 약점을 확보할 필요
가 있습니다. 그 약점을 이용해 그를 굴복시키는 외에 다른 방법
은 없을 겁니다."
양소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 늙은이가 자네에게 잡힐 만한 약점을 갖고 있나?"
"금년 봄에 여양왕이 새로 애첩을 얻게 되어 주연을 베풀었는
데, 그 자리에서 녹장객이 천하일색인 그 여양왕의 애첩에게 군
침을 흘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허허..... 단순히 군침을 삼켰다고 해서 그게 약점이 될 순 없
잖는가?"
"약점이 아닌 것을 약점으로 만드는 게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
입니다. 이번 일은 위형께서 수고를 해 줘야겠습니다. 그 뛰어난
경공술을 이용해 여양왕의 애첩을 납치하여 녹장객의 침상에 갖
다 놓기만 하면 됩니다. 그 늙은이는 틀림없이 음욕이 발동해 한
바탕 일을 벌일 겁니다. 설령 그가 욕정을 억제한다 해도 내가
적시에 그의 방 안으로 들어가 변명할 여지가 없게끔 만들어 버
릴 테니, 그쯤 되면 해약을 내놓지 않고는 못 버틸 겁니다."
양소와 위일소는 일제히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야! 녹장객 그 늙은이는 덩굴째 굴러들
어온 호박을 맛보게 되었군. 하핫.....!"
장무기는 우습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자기로선 도
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데, 부하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
해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이독공독(以毒攻
毒)이라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그 여양왕의 애첩이 죄없이 당하는 게 마음에 걸리는군요."
범요가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큰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선 사소한 일에 신경을 써선 아니됩니
다."
네 사람은 다시 자세한 계획에 대해 상의했다. 일단 해약을 탈
취하면 범요가 직접 탑에 올라 소림, 무당 등 각 문파의 고수들
에게 나누어 주기로 했다.
장무기와 위일소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범요가 만안사에다
불을 지르면 즉시 사찰 주위 곳곳에 불을 질러 군호들이 달아나
기 편리하게끔 혼란을 조성하기로 했다.
양소는 서문 밖에 여러 대의 마차를 대기시켜 군호들이 마차에
나누어 타고 놈들의 추격에서 벗어나 창평(昌平)에서 다시 회합
하도록 돕는 임무를 맡았다.
네 사람은 결정을 하고나서 제각기 흩어졌다. 양소는 마차를 구
하러 갔고, 장무기는 약을 만들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 했으며,
위일소는 커다란 포대를 구해 여양왕부로 잠입해 애첩을 납치해
오기 위해 날이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범요와 현명이로는 육대문파의 고수들을 지키기 위해 모두 만안
사에 상주하고 있었다. 조민은 황부에서 기거를 하며 매일 밤 무
공을 배우기 위해 마차를 타고 사찰로 올 뿐이었다.
범요는 장무기가 만들어 준 약을 갖고 만안사로 돌아왔다. 이
십여 년 동안 사분오열되었던 명교가 이제 중흥의 길로 접어들게
된 데에 대하여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 그 동안 숱한 고생을 겪
어온 것이 지금에서야 보람을 갖게 되었다. 장교주는 비단 무공
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사람됨이 인후하여 마음속으로부터 존경
심이 우러났다. 단지 수단이 악랄하지 못하고 매사에 정도만 취
하려는 게 옥의 티였다.
범요는 서쪽 상방(廂房)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현명이로는 뒷
뜰 보상정사(寶相精舍)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평상시 범요는 행
여나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봐 그들과 별로 접촉을 하지 않았
다. 그래서 일부러 멀찌감치 떨어져 방을 정한 것이다. 이제 만
반의 준비가 끝났는데, 학필옹을 불러내 술자리를 함께 하는 것
이 문제였다.
창문을 통해 뒤뜰을 바라보니, 해가 뉘엇뉘엇 서산마루로 기우
는 가운데 조용하기만 했다. 십 삼층 보탑도 나른한 햇살에 잠겨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범요는 적당한 구실이 떠오르지 않아 방 안에서 서성거리다가
일단 뒤뜰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그런데 마침 어디선가 고기
삶는 향내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범요는 코를 벌름거리며 그 향
내의 출처를 찾았다. 알고보니 바로 현명이로가 머물고 있는 보
상정사 맞은편 상방에서 풍겨오는 냄새였다. 그곳에는 신전팔웅
중에 손삼훼와 이사최가 기거하고 있음을 범요는 잘 알고 있었
다.
범요는 문득 묘안이 떠올라 성큼성큼 상방으로 걸어가 무턱대고
문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예측했던 대로 이사최가 화
로에 고기를 삶고 있었다. 손삼훼는 한쪽에서 젓가락과 술잔을
탁자에 올려놓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고두타가 예고없이 나타난 것을 보자 모두 멍해졌다.
동시에 고두타의 냉랭한 표정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들은
오늘 행길에서 황견 한 마리를 잡아와 몰래 방안에서 삶고 있는
중이었다. 만안사는 어쨌든 사실이니 만치 개고기를 삶아 먹는다
는 것이 떳떳한 일이 못 되었다. 게다가 고두타는 명색이 불문의
제자이니, 만약 그가 성질을 부린다면 자기네들로선 당하는 수밖
에 없을 것이다.
한데 고두타는 곧장 화로 앞으로 걸어가 솥뚜껑을 열더니,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길게 들이키는 게 아닌가? 고기의 향기를 음미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끓는 물에 불쑥 손을 넣어 개
고기 한 덩어리를 집어 게걸스럽게 뜯어 먹었다. 게눈 감추듯 고
기 한 덩어리를 씹어 삼키고 나서 입언저리에 묻은 기름기를 소
매로 쓱 문지르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멍하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두 사람은 이내 얼굴을 활짝
펴며 굽신거렸다.
"고대사,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개고기를 좋아하는 줄 미처 몰
랐습니다."
고두타는 권하는 자리에 앉을 생각도 않고 다시 개고기를 집어
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굶어 죽은 귀신처럼 게걸스럽게 뜯기
시작했다.
손삼훼는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발에다 술을 가득 따루어 대
령했다. 고두타는 사양 않고 술을 한 모금 들이키더니 갑자기 바
닥에다 전부 뱉어냈다. 이미 왼손으로 코를 움켜쥐며 오만상을
찡그린 채 고개를 내둘렀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손삼훼와 이사최는 그가 화를 내며 나가 버리자 다시 불안해졌
다. 그런데 고두타는 곧 큼직한 술호로를 갖고 나타나자 얼른 반
색을 했다.
"맞습니다. 우리의 술은 질이 좋지 않아 고대사의 입에 맞지 않
을 겁니다."
두 사람은 얼른 고두타를 상석에 모시고 개고기를 먹음직스럽게
접시에 담아왔다. 고두타는 무공이 고강하여 군주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이다. 평상시 신전팔웅은 그를 우러러 보
아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 술좌석을 함께 하게 되니 손삼훼와 이
사최는 그저 황송하기만 했다.
고두타는 호로병의 마개를 열어 세 사발을 따루었다. 끈적끈적
한 술이 사발에 가득 차자 그 향기가 코를 찔렀다. 손삼훼와 이
사최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새어나왔다.
"왓! 정말 좋은 술이군요!"
범요는 내심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현명이로가 방 안에 있는지 모르겠군. 만약에 외출했다면 내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갈 텐데.....'
그는 술이 담긴 사발을 펄펄 끓는 솥에다 띄웠다. 술을 뜨끈하
게 데워 마시기 위해서였다. 술이 데워지자 그 향기가 더욱 짙어
졌다. 손삼훼와 이사최는 군침을 삼키며 술을 마시려 하자 범요
가 손짓으로 만류하며 뜨겁게 데워서 마시라 했다.
세 사람이 번갈아가며 술을 데우자 그 향기가 계속 밖으로 새어
나갔다. 학필옹이 맞은편 정사에 없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경
우 틀림없이 주향을 맡고 달려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
보상정사의 문이 삐걱하고 열리며 학필옹의 음성이 들려왔다.
"카, 거 술냄새 좋다!"
그는 주저함도 없이 성큼 한걸음으로 다가와 문을 열고 들어왔
다. 그는 고두타가 손삼훼, 이사최와 더불어 푸짐한 술판을 벌이
고 있는 것을 보자 멍해지더니, 곧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고대사, 당신도 이런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을 줄이야 실로 뜻
밖이오."
손, 이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공공, 어서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고대사께서 직접 갖고 온
미주(美酒)인데 맛이 기가 막힙니다."
학필옹은 고두타의 맞은편에 앉아 거침없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
켰다. 손과 이는 부지런히 개고기를 대령하며 그들의 시중을 드
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쯤되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네 사람이 흥이 나서 마시다 보니 곧 거나하게 술기운이 올랐
다. 범요는 내심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사발에다
술을 찰랑하게 따르고 나서 마개를 막더니, 태연히 술호로를 거
꾸로 세워놓았다. 알고보니 그는 마개 한복판에 공간을 뚫어 장
무기가 만들어준 미약을 쑤셔넣고는 마개를 헝겊으로 쌌다. 술호
로를 바로 세워 놓을 시에는 약가루가 쏟아지지 않지만, 일단 거
꾸로 세우면 술이 헝겊을 침투해 가루약이 용해되면서 남은 술이
이내 독주(毒酒)로 변한다.
호로병은 원래 중간 허리 부분이 잘룩하고 위 아래가 균등하게
볼록하기 때문에 유심히 지켜보지 않는 한 거꾸로 세워놓아도 이
상하게 느끼는 사람이 없었다. 더군다나 학필옹 등 세 사람은 이
미 기분 좋은 상태로 술기운이 올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범요는 학필옹이 술사발을 비우자 곧 마개를 열어 호로병을 건
네주자 학필옹이 스스로 술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는 손과 이에
게도 넘실거릴 정도로 따라 주었다. 그 범요의 사발에 술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호로병을 내려 놓았다.
네 사람은 다시 사발을 들어올려 꿀꺽꿀꺽 들이켰다. 범요를 제
외한 세 사람은 모두 독주를 마신 셈이었다. 손삼훼와 이사최는
내력이 비교적 약해 독주를 마시자마자 손발이 흐물흐물해지며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손삼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
며 이사최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아우, 뱃속이 좀 이상한데......?"
이사최도 낮빛이 변했다.
"나.....나도..... 중독된 것 같은데......"
이때 학필옹 역시 체내의 진기가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절로 안
색이 크게 변했다. 범요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것도 바로 이때
였다. 그는 다짜고짜 학필옹의 멱살을 잡으며 입으로 이상한 소
리를 냈다. 손삼훼는 그의 행동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고대사, 왜 그러십니까?"
범요는 손가락으로 술찌꺼기를 찍어 탁자에다 다섯 글자를 썼
다.
----- 십향연근산(十香軟筋散) -----
손삼훼와 이사최는 현명이로가 십향연근산을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고두타와 자기 형제
들은 모두 십향연근산에 당한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은 서로 눈빛
을 교환하더니 학필옹에게 몸을 숙였다.
"학필옹, 우리 형제는 어르신네께 잘못한 점이 없으니, 제발 자
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 형제는 학필옹이 고두타를 겨냥해 십향연근산을 전개한 것
인데 자기네들이 공연히 덩달아 화를 당한 것이라 간주했다.
사실, 가장 놀란 것은 학필옹 자신이었다. 십향연근산은 자기가
갖고 있으며, 분명 왼손으로 사용하는 붓 속에 숨겨 두었다. 그
리고 그는 항시 그 붓을 몸에 지니고 다녔으니, 누가 그 십향연
근산을 훔쳐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대사, 노여워 마시오. 우린 서로 형제나 다를 바 없는데 내
가 왜 고대사를 해치려 하겠소. 사실 나도 온몸이 나른해져 도저
히 힘을 쓸 수 없소. 누가 이 따위 짓을 했는지 나도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오."
범요는 다시 술찌꺼기를 찍어 탁자에다 두 글자를 썼다.
----- 해약(解藥)! -----
학필옹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우선 해약을 복용하고 나서 우리에게 수작을 부린 놈
을 찾아 냅시다. 해약은 녹사형이 갖고 있으니 우리 함께 갑시
다."
범요는 내심 기뻐했다. 양소의 계책이 바라던 대로 효과를 거든
것이다. 그는 왼손으로 학필옹의 손목을 움켜쥐고 일부러 비틀거
리는 걸음으로 그와 함께 뜨락을 가로질러 보상정사로 갔다.
정사는 모두 두 칸으로 나뉘어졌는데, 녹장객은 북쪽 상방을 사
용했다. 그런데 북쪽 상방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학필옹이
소리 높여 외쳤다.
녹장객은 분명 방 안에서 대답을 했는데 좀처럼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사형, 어서 문을 열어 주시오! 아주 괴이한 일이 생겼소!"
녹장객은 다소 당황하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무슨 일인가! 난 지금 무공을 연마하고 있으니 방해하지 않았
으면 좋겠네."
학필옹은 녹장객과 동문 사형제로서 무공은 막상막하지만, 녹장
객이 늘 사형으로 자처하며 또한 심계가 깊어 학필옹은 그의 말
을 감히 거역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다급해진 것은 범요였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수포로
돌아갈 것이 뻔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어깨로 힘껏 문을 밀어
부쳤다. 그러자 안에서 걸어 잠그었던 문빗장이 부러지며 문이
활짝 열렸다.
녹장객은 침상 앞에 엉거주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있다가 문이
갑자기 열리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함
과 어색함이 역력했다. 범요는 침상에 반나(半裸)의 여인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여인의 몸은 이불에 똘똘 말려져 묶여 있었지
만 백옥처럼 흰 목덜미와 원만한 곡선을 이룬 어깨가 이불 위쪽
에 노출돼 있고, 종아리에서부터 하얀 맨발이 이불 아래쪽에 드
러나 있었다. 이불에 싸여진 그녀의 몸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구름처럼 늘어뜨린 여인은 빼어난 미모
를 지니고 있었는데, 바로 여양왕의 애첩인 한(韓)씨였다. 범요
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위복왕의 솜씨는 정말 놀랍군. 단신 홀몸으로 왕부로 잠입해
저 계집을 이곳까지 납치해 오다니.....'
사실 여양왕부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다. 그러나 위사들은 왕야
와 세자, 군주를 호위하는데 전력을 기할 뿐, 여양왕은 애첩이
많으므로 그녀들에 대한 경호는 다소 소홀했다. 게다가 위일소의
경공술이 신출귀몰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해 올 수 있었다.
오히려 납치해 온 계집은 녹장객의 방 안에다 갖다 놓는 것이
어려웠다. 그는 한참동안 기다려 녹장객이 뒷간에 가는 틈을 타
서 잽싸게 일을 해치우고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녹장객은 방으로 돌아와 웬 여인이 이불에 싸인 채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지붕 위로 올라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녹장객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와 여인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만 눈이 휘둥그래졌
다.
예전에 여양왕부에서 한씨를 보고 순간 넋을 잃고 강한 욕정을
느꼈었다. 그는 워낙 여색을 좋아하여 여지껏 그의 손에 몸을 망
친 양가의 부녀자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여양왕의 애첩 한씨이
니 당시 그는 군침만 삼켰을 뿐 감히 어떠한 행동을 취하지 못했
었다. 한데 한씨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선녀인 양 자신의 침상
에 알몸인 채로 누워 있으니, 그는 놀라는 한편 야릇한 충동을
느꼈다.
잠시 생각을 굴린 녹장객은 틀림없이 자기의 수제자인 오왕아보
(烏旺阿普)가 자기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한씨를 납치해 온 것이
라 간주했다. 그 외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이불 밖에 노출돼 있는 목덜미와 백설보다 더 흰 어깨, 그리고
야들야들한 종아리와 맨발이 그를 욕정의 늪으로 끌어당겼다. 게
다가 이불 속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상상하자 단
전으로부터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다. 그는 한씨의 발을 가만히
움켜쥐며 고개를 묻으려는 순간 학필옹이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당황해 했다. 그리고 범요가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이다.
이 뜻밖의 변화에 녹장객은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가 한씨를 숨
기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는 왕부에서 한씨가 납치된 것을
발견해 고두타를 시켜 자기를 잡으러 온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도저히 변명할 여지가 없으므로 그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게 상수라고 판단해 즉시 녹각을 뽑아쥐고 왼손으
로 한씨를 안아 창문으로 달아나려 했다.
학필옹이 적시에 소리쳤다.
"사형, 어서 해약을 내놓으시오!"
녹장객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해약이라니?"
"소제와 고두타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십향연근산의 독을
당했소!"
"뭐라고?"
학필옹이 다시 한 번 얘기하자 녹장객은 만면에 의아한 표정을
띄우고 말했다.
"십향연근산을 자네가 갖고 있지 않나?"
"글쎄, 소재는 어떻게 된 건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소! 멍청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중독되었소.
우선 해약을 복용해야 하니, 어서 해약을 주시오."
녹장객은 여기까지 듣자 일단 안심이 되는지 한씨를 다시 침상
에 내려놓았다. 학필옹은 사형의 침상에서 여인을 본 적이 많으
므로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씨를 알아 보지도 못
했다. 녹장객은 일단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내쫓을 생각으로,
"고대사, 우선 나의 학사제 방으로 가서 좀 기다려 주시오. 내
가 곧 해약을 갖고 가겠소."
하고 말하며 두 사람을 살짝 밖으로 밀었다. 그러자 학필옹은
비틀거리며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범요도 역시 비틀거리며 일
부러 내력을 상실한 척했지만, 원래 내력이 심후하여 외부의 힘
이 몸에 와 닿으면 자연적으로 저항력이 생긴다.
녹장객은 두 사람을 밀어내면서 학필옹의 내력은 전부 상실되었
지만, 고두타는 일부러 위장하고 있다는 걸 이내 알아차렸다. 그
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밀었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
다.
워낙 심계가 깊은 녹장객인지라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고 웃으
며 말했다.
"고대사,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이렇게 말하며 범요를 부축하는 동시에 손목 부위 회종(會宗),
외관(外關) 두 혈도를 노렸다. 그 순간 고두타는 자신의 위장이
탄로난 것을 알고 잽싸게 왼손을 떨쳐 학필옹의 등심 혼문혈(魂
門穴)을 강타했다. 학필옹은 그 즉시 온몸이 솜처럼 풀려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일단 학필옹을 제압했으니 최악의 경우 녹장객만 상대하면 되므
로 범요는 대담하게 냉소를 날렸다.
"흥!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군. 감히 왕야의 애첩을 납치해
와 욕심을 채우다니!"
그가 갑자기 입을 열자 현명이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은
고두타와 십 오, 육 년간 알고 지내왔지만, 줄곧 벙어리인 줄만
알았다. 녹장객은 고두타가 무슨 속셈으로 그 동안 벙어리 흉내
를 해 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필시 무서운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란 예감이 퍼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보니 고대사는 벙어리가 아니었군. 그 동안 노심초사 우리
를 속여온 이유가 무엇이오?"
범요는 잽싸게 생각을 굴리며 낭랑하게 말했다.
"왕야께선 당신이 언제 배반할지 모르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벙어리 흉내를 내게 하여 당신을 철저히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
소."
이 말은 사실 이치에 닿지도 않았다. 그러나 녹장객은 한씨와
함께 침상에 있는 것이 발각되었으므로 캥기는 게 있어 믿지 않
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여양왕이 부하들에게 가끔 엉뚱한 수
단을 부린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녹장객인지라, 범요의 말을 듣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럼 왕야의 명령에 따라 날 잡으러 왔단 말이오? 흐흐.....
날 이대로 잡아가기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이렇게 말하며 녹각장을 들어올려 공격 자세를 취했다. 범요가
음침하게 웃었다.
"녹형, 막상 싸움이 벌어지면 설령 내가 패한다 해도 일, 이백
초식을 능히 버틸 것이오. 한데 녹형은 왕야의 애첩을 보살피랴
사제도 구해야 할 입장이니 신중히 생각한 연후에 결정을 내리는
게 현명할 거외다."
녹장객은 사제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두타의 말이 형식적인 위
협만은 아니었다. 그들 사형제는 어릴 적부터 무예를 같이 익혀
오며 지금까지 단 하루도 헤어진 날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처
자식이 없어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왔다. 한데 이런 상태에서 어
찌 자기만 살겠다고 달아날 수 있단 말인가?
범요는 그의 마음이 동요되는 것을 재빨리 간파하고 손삼훼와
이사최를 소리쳐 불러들이더니, 방문을 닫았다.
"녹형, 이번 일은 아직 외부에 누설되지 않았소. 원한다면 내가
모든 것을 덮어 주겠소."
녹장객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덮어 주겠다는 거요?"
범요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이와 손의 아혈(啞穴)과 연마혈(軟
麻穴)을 찍어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 수법의
정확함과 신속함은 녹장객마저도 감탄할 정도였다. 고두타가 다
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스스로 입방아를 찧지 않으면 사제는 자연히 입을 다물
것이고, 나는 여지껏 벙어리였듯이 앞으로도 말 못하는 벙어리일
뿐이요. 저 두 녀석은 아혈을 찍어 영원히 입을 봉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할 게 아니겠소?"
손과 이는 대경실색했다. 개고기를 먹으려다 이런 화를 당하게
될 줄이야 어찌 죽어도 생각이니 했겠는가?
범요는 다시 한씨를 가리켰다.
"저 여인을 처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소. 죽여서 쥐도 새도
모르게 치워 버리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수시로 즐거움을 누리
는 방법이오. 물론 두 번째 방법은 위험 부담이 있겠지만 녹형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비밀이 지켜질 것이오."
녹장객은 한씨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씨는 비록 혈도가 찍혀 꼼
짝 할 수 없는 신세지만, 지각은 살아 있었다. 그녀는 녹장객에
게 애원의 눈빛을 던지며 두 번째 방법을 택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 같았다. 녹장객은 솔직히 말해 단칼에 그녀를 죽이기가 아까
왔다. 그는 절로 마음이 흔들렸다.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소. 그런데 아무 조건없이 날 도
와주진 않을 텐데....."
그는 고두타가 틀림없이 조건을 내세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범요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꾸며 댔다.
"아주 간단한 조건이오. 아미파의 장문인 멸절사태는 나하고 깊
은 관계를 맺어 왔소. 그 주씨 성을 가진 젊은 계집은 바로 나와
멸절사태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요. 부탁컨대 해약을 주어 그들을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해 주시오. 군주에게는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해명하겠소. 만약 녹형에게 눈꼽만치라도 누를 끼친다면 이
고두타와 멸절사태는 날벼락을 맞아 비명횡사할 것이오!"
그는 녹장객이 풍류를 즐기므로 일부러 남녀 관계에 얽힌 거짓
말을 꾸며낸 것이다. 게다가 양소로부터 명교의 형제들이 멸절사
태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그녀의 명예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쪽으로 거짓말을 꾸며 냈다. 그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매사에 편법을 써왔기 때문에 이 정도의 거짓말쯤은 예사로 생각
했다.
녹장객은 그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멍해졌으나, 곧 입가에 회심
의 미소가 떠올랐다.
'음..... 네놈이 이런 일을 꾸며 날 위협하는 것은, 이제보니
늙은 정인과 친딸을 구하기 위함이었군. 그야 인지상정이지. 이
번 일은 좀 위험스럽지만 절세가인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으니 전
혀 댓가가 없는 것도 아니지.....'
그는 고두타가 오히려 자기에게 사정투로 나오자 마음이 느긋해
졌다.
"그렇다면 왕야의 애첩을 이곳으로 납치해 온 것도 바로 고대사
의 걸작이겠구료?"
"이런 중요한 부탁을 어찌 빈손으로 할 수 있겠소?"
녹장객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떠올라 얼른
물었다.
"그런데 나의 사제는 어떻게 해서 십향연근산의 독을 당하게 됐
소?"
범요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야 간단한 일이 아니겠소? 그가 독약을 관리하고 있으니 그
가 거나하게 취한 틈을 타서 훔쳐내는 것 쯤이야 누워서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소?"
녹장객은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았다.
"좋소. 고대사, 앞으로 당신을 친구로 생각할 것이며 절대로 배
신을 하지 않겠소. 다시는 날 이런 식으로 골탕먹이지나 마시
오."
범요는 한씨를 가리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럼, 녹형이 기회를 봐서 나에게 이런 골탕을 먹여 주었으면
고맙겠소. 나도 굴러들어온 호박 맛이 어떤 건지 직접 음미해 보
고 싶소이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제각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 녹장
객은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이 위기만 넘기면 무슨 수
를 써서라도 고두타를 없앨 생각이었다. 범요 역시 속으로 주판
알을 튕기고 있었다. 현명이로는 한씨 일을 마무리지은 뒤에 틀
림없이 자기에게 출수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쯤이면 육대문
파의 고수들이 모두 구출될 것이다. 자기는 엉덩이를 털고 떠나
가면 그뿐일 것이다.
범요는 녹장객이 해약을 빨리 내주지 않자 내심 조급했지만, 겉
으로는 느긋한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녹형, 한씨의 혈도를 풀고, 우리 같이 한 잔 마시는 게 어떻겠
소? 미인과 더불어 한 잔 마시는 것도 인생의 큰 즐거움이 아니
겠소?"
녹장객은 그처럼 여유를 보일 수 없었다. 자기는 왕야의 애첩과
함께 있기 때문에 한시도 더 지체하고 싶지않았다. 그는 녹각장
을 꺼내 한쪽 녹각을 돌려 작은 잔에다 가루약을 조금 쏟아넣었
다.
"고대사, 이것이 해약이니 어서 갖고 가시오."
범요는 고개를 내둘렀다.
"이 정도 소량의 해약을 갖고 가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 정도면 두 사람이 아니라 대여섯도 구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인색하지 말고 좀더 줄 수 없겠소? 솔직히 말해 녹형은
워낙 심계가 깊기 때문에 혹시 내가 당할까봐 이러는 거요."
녹장객은 그가 많은 해약을 요구하자 갑자기 의심이 생겼다.
"고대사, 혹시 구하려는 사람이 멸절사태와 딸 말고 또 있는 게
아니오?"
범요가 변명을 하려는데 갑자기 뜨락 밖에서 요란한 발자국소리
가 들리더니, 칠, 팔 명이 뛰쳐들어왔다. 곧 그 중에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발자국이 여기까지 연결되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녹장객은 이내 안색이 변하며 해약을 쏟아넣은 잔을 얼른 품 속
에 갈무리했다. 범요는 그에게 침착하라는 손짓을 하며 우선 홑
이불로 한씨의 몸을 덮었다. 그러자 문 밖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녹선생, 집에 계십니까?"
범요는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자기는 벙어리이니 녹장객더러
대답하라는 뜻이었다. 녹장객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일인가?"
"왕부에서 한씨 부인이 누구에게 납치되었는데, 발자국이 여기
까지 연결돼 있습니다. 혹시 수상한 자를 보지 못했습니까?"
녹장객은 범요를 한 차례 노려보았다. 그의 솜씨로는 발자국을
남길 리가 없는데, 일부러 그런게 아니냐는 뜻이었다. 범요는 히
죽 웃으며 어서 상대방을 따돌리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속으
로 위일소가 이곳까지 발자국을 남긴 처사에 대해 혀를 내둘렀
다.
녹장객은 냉소를 날렸다.
"여기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어서 다른 곳을 찾아보도록 해라!"
그의 지위와 무공을 모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은 곧
대답을 하고 물러갔다. 그들은 만안사를 샅샅이 뒤질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녹장객이 한씨를 숨기는 일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
다. 그는 절로 눈살을 찌푸리며 고두타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범요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녹형, 당신의 계집을 숨길만한 적당한 장소가 있소."
"그게 어디란 말이오?"
"바로 저기요."
범요는 창 밖으로 보이는 높은 보탑을 가리켰다.
녹장객은 머리가 빨리 돌아가므로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
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료."
보탑에는 육대문파의 고수들이 감금돼 있고, 녹장객의 수제자인
오왕아보가 경비를 총책임지고 있었다. 다른 곳이라면 혹시 의심
을 품을지 모르지만, 왕야의 애첩을 경계가 가장 삼엄한 보탑으
로 납치해 갔으리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범요가 재촉
을 했다.
"지금 뜨락에 아무도 없으니 어서 행동을 취하시오."
그는 한씨를 싼 홑이불의 네 귀퉁이를 묶어 큰 봇짐으로 만들어
녹장객에게 건네주었다.
녹장객은 주저했다. 만약 자기가 한씨를 둘러메고 나가다가 고
두타가 엉뚱한 마음을 먹고 소리라도 치는 날에는 물증이 뚜렷하
므로, 영락없이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될 것이다. 그는 이 순간까
지도 고두타를 믿지 않았다. 고두타는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았
다.
"삼 년 상까지 봐주라는 말이 있으니, 내가 다시 한번 녹형을
도와 호화사자(護花使者)가 되어 드리리다."
이렇게 말하더니 봇짐을 짊어지고 밖으로 나가며 나직이 말했
다.
"녹형이 앞장서 줘야겠소. 만약 누가 앞을 가로막고 봇짐보자고
하면 그 자리에서 없애 버리시오."
녹장객은 몸을 번뜩여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행여나 범요가 기
습해 올까 봐 등을 노출시키지는 않았다. 범요는 문을 닫고 보탑
으로 향했다.
이때는 날이 어두워져 탑 밖에는 경비병 외에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비병들은 녹장객과 범요가 나타난 것을
보자 일제히 몸을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두 사람이 탑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오왕아보가 전갈을 받고 달려나왔다.
"스승님, 어서 오십시오. 오늘 밤은 탑을 한 바퀴 돌아보실 생
각입니까?"
녹장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범요와 함께 탑 안으로 들어가
려는데, 홀연 보탑 동쪽 월동문에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뜻밖에도 조민이었다.
녹장객은 캥기는 게 있으므로 조민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
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고두타 등과 함께 앞으로 나가 그녀를
맞이했다.
어젯밤 장무기 등이 나타나는 바람에 조민은 명교가 대거 진격
해 올 것을 대비하여 친히 순시를 나온 것이다. 그녀는 범요를
보자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고대사, 그렇지 않아도 대사를 찾고 있었어요."
범요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민이 다시 말했다.
"나하고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어요."
범요는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간신히 녹장객을 보탑까지 유인
해 와 이제 해약만 빼앗아내면 계획이 성공리에 끝날 텐데, 대관
절 조민이 이런 판국에 자기와 어디를 같이 가자는 것일까?
범요는 핑계를 대어 빠지고 싶었지만, 적당한 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벙어리 행세를 해야 하므로 입을 뻥긋할 수도 없
는 입장이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녹장객에게 방법을 강구하라고 떠맡겨야지!'
그는 곧 봇짐을 한 번 흔들어 보이며 턱으로 녹장객을 가리켰
다. 녹장객은 흠칫 놀라며,
'이런 죽일놈 좀 보게!'
하고 내심 욕설을 터뜨렸다.
조민은 영문을 몰라 녹장객에게 물었다.
"녹선생, 고대사가 들고 있는 봇짐을 무엇이죠?"
녹장객은 얼른 얼버무렸다.
"저..... 고대사의 이불보따리요."
조민은 이상하게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이불보따리라뇨? 왜 갑자기 이불을 쌌죠?"
이렇게 묻고 난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스스로 다음 말을 이었
다.
"고대사는 내가 너무 우둔해, 무공을 가르치는데 애를 먹기 때
문에 떠날 작정으로 이불보따리를 싼 건가요?"
범요는 고개를 내두르며 한쪽 손으로 아무렇게나 몇 가지 손짓
을 했다.
'녹장객이 알아서 거짓말을 하겠지. 이런 때는 벙어리가 더 유
리하단 말야.'
조민은 그의 손짓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녹장객
을 쳐다보았다.
녹장객은 재빨리 생각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이렇게 된 겁니다. 어젯밤 몇몇 마두들이 나타나 소란
을 피우는 바람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므로 우리 형제와
고대사가 상의하여 이곳으로 옮겨와 기거하기로 했습니다.
조민은 크게 기뻐했다.
"나도 역시 녹선생과 학선생이 직접 탑을 지켜주길 은근히 바라
고 있었어요. 단지 너무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 차마 청을 드리
지 못했는데, 세 분이 이렇게 자청해 주시니 정말 기뻐요. 이젠
마두들이 감히 보탑 부근에 얼씬도 하지 못할 거예요. 고대사,
우린 어서 가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서슴없이 범요의 손을 잡았다.
범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녹장객을 곤경으로 몰아넣을 수
도 있지만, 자기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가 봇짐을
넘겨 주자 녹장객은 어쩔 수 없이 받아야만 했다.
"고대사, 난 탑에서 기다리겠소."
이때 오왕아보가 얼른 나섰다.
"스승님, 그 이불봇짐을 저에게 주십시오."
녹장객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다. 이건 고대사의 이불이니 내가 직접 갖고 가겠다."
범요는 히쭉 웃으며 봇짐을 살짝 내리쳤다. 정확하게 한씨의 엉
덩이를 후려친 것이다. 한씨는 혈도가 찍혀 비명을 지를 수 없었
지만, 녹장객은 놀란 나머지 안색이 변했다. 그래도 그는 감히
주춤할 수 없어 얼른 조민에게 인사를 올리고 탑 안으로 들어갔
다.
----- 제 5 권 3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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