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전
차례
새판 머리글
초판 자서
제1편 가계와 배경
제1장 가계
제2장 1880년경의 조선
제2편 소년
제1장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
제2장 임오군란
제3장 갑신정변
제4장 도동서당
제5장 과거행
제6장 갑오년까지
제3편 청년
제1장 고민
제2장 배재학당 입학
제3장 제중원
제4장 국모살해의 복수사건
제5장 서재필 박사의 귀국과 협성회
제6장 '협성', '매일'지의 청년주필
제7장 독립협회
제8장 만민공동회의 영도자
제9장 중추원과 격문사건
제10장 탈옥과 재투옥
제11장 옥중생활
제4편 해외풍상
제1장 출옥 전후
제2장 아메리카로 가는 길
제3장 미국에서의 수학과 연설 행각
제4장 한일합병의 소식을 듣고
제5장 빼앗긴 조국의 하늘 밑에서
제6장 다시 세계를 무대로
제7장 기미 3 1운동 전후
제8장 1933년의 국제연맹회의에서(상)
제9장 국제연맹회의(중)
제10장 국제연맹회의(하)
제11장 한편의 로맨스
제12장 예언과 같이
초판자서
여기 그의 70여의 생애를 한 거찬 의지로서만 관철하였고, 또 관철하면서 있는 한 조선 사람이
있다. 구한국 말엽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 세기에 가까운 이 민족의 변화 많은 세월 속에
있어, 아마 그는 누구보다도 조선 사람으로서 변화하지 않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일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또 한 사람의 일생쯤 소비된대도 아까울 게 없다.
그만큼 그는 저 뭇 묏부리와 구릉들을 대표할 수 있는, 뛰어난 한 준령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의 그러한 생애를 나같이 부족한 것이 이야기해 본다는 것은-더구나 제한된 시간과
한정된 능력으로서 이야기해 본다는 것은, 이 준령에 대한 무엄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어찌
생각해 보면, 우선 이렇게라도 이야기해 두는 것은 이런 심란한 민족의 사절을 위해서는 또
상당히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였다.
끝으로, 1947년 다사하신 한 여름과 가을을 친히 저자에게 이 전기의 자료를 구수해주신 우남
어른께 삼가 절을 올리며, 이 전기의 성립까지에 많은 힘이 되어주신 해위 윤보선 선생과 이
책의 발행담당자 삼팔사 이북 주간에게도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1949년 공덕리에서
미당 서정주
제1편
가계와 배경
제1장
가계
물과 하늘 사이 이 몸을 띄워
가없는 바다를 오고가고 또 갈제
고운 땅이사 곳곳이 있네마는,
꿈에도 못 잊는 건 고향 한남산
이 한 토막의 절구는 1924년 갓 쉰 살이 된 이승만 박사가, 그 무렵 미국에서 발행되던 어떤
중국 사람의 신문에 발표한 것으로서, 고국의 산천-그 중에서도 그의 자라난 곳인 서울 남산을
가슴 저리게 그리워하였던 느낌을 엿볼 수가 있다.
이로부터 다시 21년 뒤인 1945년 가을, 박사는 벌써 일흔한 살의 백발이 허연 늙은이로서
비로소 이 남산과 서울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이때까지 싸워온 뜻과 소원대로 조국에
해방의 날이 온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어느 날, 그 그리던 옛 보금자리 남산골에 올라가, 인제는
모두가 헐리고 바뀌어 그 전날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는 옛 터전을 앞에 두고 또 한번 아래와
같이 읊었다.
복삿골의 옛 벗들 연기처럼 흩어져
어수선히 지나간 오십 년이여.
모두 변한 터전에 흰 머리로 돌아와
옛 사당 앞 비낀 해에 눈물을 뿌리다니...
그윽한 복사꽃밭과 옛 동무들이 있던 곳으로서, 또 옛 조상의 사당이 있던 곳으로서, 그 거센
오십 년의 해외생활 속에서도 이박사가 늘 못잊어하던 서울 남산골. 남산골은 다만 이박사가
자란 곳만이 아니라, 그의 선조들이 대대로 그 청빈한 선비의 생활을 이어온 곳이기도 하였다.
남산의 서남쪽에 울창한 솔밭, 그 밑에 다시 자욱한 향나무, 노간주나무 숲속에는, 조선
말엽까지만 하여도 이박사 일문의 종조인 양녕대군-조선조 제3대 왕 태종의 맏아드님의 사당이
있었다. 숙종 원년(1675) 이 도동에 그의 사당인 지덕사가 선 뒤로, 후손들은 이 사당을 에워싸고
옹기종기 모여들어, 이 사당을 떠받듦으로써 한 커다란 자랑을 삼았던 것이니, 가끔 가다간 그들
사이에서도 몇 사람씩의 벼슬아치가 나오는 일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하여도 그들은
한결같이 이 골짜기에 늘어붙어서, 그들의 사당을 모시고 유도를 닦고 또한 그 청렴한
가난살이를 계속하기에 조금도 딴 생각을 낼 줄 몰랐다.
'굶을 줄 알아야 남산골 샌님'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비록 집에서는 풀을 쑤어 먹고
지낼지언정 밖에 나와서는 턱주가리 쳐들고 이를 쑤시며 다니는 것이 그들의 생활태도였다 한다.
영조 때의 어느 겨울날이었다. 이러한 남산골 어떤 이샌님의 집에 산에서 중이 동냥을 왔다.
그러나 주인에겐 아무것도 줄 것이 없어, 추위에 불도 때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가난한 사정을
말하고 넌지시 물러가기를 권하였다. 그러자 중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건너편 노간주나무 수풀
속의 지덕사를 가리키며
"그렇게 추우시면 저 사당 앞의 나무들이라도 베어 때시지 그러시오."
하였다. 아닌게아니라 들어보니 그건 자기로선 엄두도 내어볼 수 없던 일이었지만, 무던한
권고임엔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샌님은 며칠 사이에 사당 밖의 향나무, 노간주나무들을 발갛게
베어 벼려, 뒤에 왕실의 눈이 다시 여기에 미치기까지 사당은 꽤 오랫동안 털뜯긴 날짐승과 같이
그 알몸뚱이를 드러내놓고 있은 적도 있었지만, 그들의 가난이란 참으로 이와 같았고, 또 그건
아들이나 손자나 또 손자의 때가 되어도 별 다름이 없었다.
이박사의 아버지 경선의 때에 와서도 이러한 '남산골 샌님'의 기질과 생활태도엔 변함이
없었다. 다만, 경선에게는 천성으로 타고난 낭만성이 있어서 그랬는지, 또는 그 아버지를 따라
한때 황해도에서 시골살이를 한 때문에 산천의 맛을 알게 되어서 그랬는지, 한 군데 오래 붙어
있지를 못하고 늘 유람생활을 계속한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경선은 젊어서 한때를 그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 해주에서 지내다가 뒤에는 다시 평산군
능내동이란 곳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두 부부의 나이 마흔이 넘은 뒤에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 1875년 2월 19일 둘째아들 승룡을 낳으니, 이가 곧 우리의 이박사이다. 박사에게는
손위로 훨씬 나이가 동떨어진 두 누님과 한 형이 있었으나, 형은 열살 안에 마마손님으로 세상을
떴고, 두 누님도 일찍이 출가를 하였다. 큰누님은 해주 우씨의 집 사람이 되었고, 둘째누님은
평산 심씨의 집 며느리가 되어 갔다. 그러므로 이미 5대째 외아들로 내려온 경선의 단 하나의
아들로서, 박사는 문자 그대로 6대 독자가 된 것이었다.
박사의 나이 세 살이 되는 해에, 경선은 다시 평산의 살림살이를 걷어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의 술값으로 쌓아올린 빚 때문에 시골집마저 정리해야 할 형편이 된 때문이었다.
서울에 당도하자 남대문 밖 염동에 자리를 잡긴 하였으나, 경선은 그 뒤에도 집에 붙어있는
때가 별로 없었다. 그는 여전히 아름다운 산천을 찾아서 금강산으로 태백산으로 오대산으로
헤매고 다니는, 그의 소요생활을 쉬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겐 털빛이 서릿발처럼 흰 한 마리의 서산나귀와, 산천의 방위를 보는 한 개의 조그만
지남철이 있었다. 그가 빚으로 모든 재산을 잃은 뒤에도 오직 이 두 가지만은 끝까지 버티어온
것으로서, 그는 이 서산나귀를 타고 돌아다니며, 그 조그만 지남철로 산천의 방위를 살피고
명당자리를 점치는 것이 뜻같지 않은 세상살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기꺼운 모양이었다. 흔히
그는 불시에 나귀등에 올라앉아 방울소리를 울리며 집을 나서면, 두 달 석 달 때로는 한해가
기울어도 소식이 없다가, 문득 어느 눈 내리는 날 밤 다시 말방울 소리를 울리며 돌아오기가
일쑤였다.
이같은 남편이요 아버지인지라, 집안살림은 자연 그의 아내 김씨가 도맡아서 하게 되었다.
식구라야 남편이 늘 집에 없으니 한 사람의 안종 복녀까지 합하여 밥을 먹는 건 세
사람뿐이었으나, 한 여인의 집으로선 이것도 너무 과하였다. 일가친척들의 도움마저 뚝 끊어진
때면, 부인은 남몰래 바느질삯 품을 팔아 겨우 입에 풀칠을 해가는 날이 많았다.
이러한 양친의 그늘에서 어린 이박사가 나날이 자라고 있을 무렵, 즉 1875년경으로부터
1882년경에 이르는 7, 8년 동안의 이 나라의 움직임은 어떠하였던가? 인제 우리는 이 전기의 맨
처음 배경이 되는 것을 잠깐 동안 들여다봐 두어야 한다.
제2장
80년경의 조선
역시, 이 무렵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벌써 조선의 황혼이 시작된 때다.
거센 외세와 신문명의 물결은 이미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 처사의 나라 조선반도를 에워싸고
출렁거리기 시작했건만, 조선은 여전히 태고의 꿈에서 깨지를 못한 채, 세계와 합류할 철저한
자각도 없었고 또 이를 끝까지 거부할 통일된 힘도 없이, 황혼의 장터와 같은 외세의 트집판
속에 어쩔 수 없는 낙일을 비롯한 때였다.
병인(1866), 신미(1871) 두 차례의 양요는 언뜻 보기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인천 바다의
조그만 애기씨름에 지나지 못하기는 했지만, 그 결과는 비로소 서양 여러 나라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어, 뒷날 1882년에 미국과의 사이에 한미통상조약을 맺는 첫 실마리를 짓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이 미국과의 수호조약은 이 나라 정부의 자발적인 처사였다기보다는, 청국의
권고에 마지못해 따른 것이니, 청국의 낯을 보아 조약을 맺긴 하였어도, 속에 간직한 완고한
척양정신에는 별 다름이 없었다.
그렇지만, 청국이 한미조약을 권한 배포는 또한 딴 곳에 있었다. 그것은 다만 그 당시 조선에
가까워지고 있는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을 여러 나라의 테두리 안에 두려
함이었으니, 저 병인년의 천주교도 학살과 신미년의 미군과의 충돌이 있었을 때에도, 프랑스와
미국이 청나라에 그 책임을 묻자, "조선은 자주국이다. 선전 강화의 권리가 모두 조선에 있으니,
책임을 추궁할 일이 있으면 그 나라에 가서 직접 추궁하라"하여,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에
표명하던 청국이, 뜻밖에 1882년 이홍장을 시켜 미국과의 조약을 맺게 한 것은 다름아닌, 1876년
2월 일본과 조선 사이에 성립된 강화조약 이후로 이 나라에 뻗치기 시작한 일본의 힘을
억누르려는 속셈에서 한 짓이었을 따름이다.
한편, 일본은 음험한 청국의 방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뻗친 그들의 마수를 거두려 하진
않았다. 덕천막부의 말엽, 일본 쪽이 서양과의 통상의 길을 터서 새 문명을 받아들여 명치유신의
새 정부를 세우자, 바로 그들은 조선에 그 사연을 적어 보내 새로운 수호조약을 맺고자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보낸 글발이 공손치 못하다 하여 받아들임을 받지 못하자, 이를 악물고 다시
힘을 쌓아올리더니, 그로부터 8년 뒤인 1875년 섣달엔 그들이 군함을 몰고 강화도 옆바다에까지
들어와서 한강을 엿보고 있었다. 그래, 우리 군대가 퍼부은 포탄에 쫓기어 되돌아가긴 하였으나,
사실인즉 이것만이 그들이 바라던 바이었으니, 다음달인 1876년 정월에는 이 포격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을 핑계삼아, 두 척의 군함과 세 척의 운송선에 그들의 대사 흑전청륭, 정상형 등을
보내어서 어울리게 한 끝에 그해 2월 2일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두 나라가 강화에서 수호조약을
맺었다. 조약은 모두 열두 조목으로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밝히고, 일본과의 사이에 사신을
교환하며, 부산 등 세 항구를 통상지로 열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이 결과로서 이해 4월에 일본에
수신사를 보냈고, 1897년엔 일본정부의 외무대신이었던 화방의질이 정식으로 공사가 되어 서울에
패들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서대문 밖 청수관에 자리를 잡았다. 이리하여 부산, 원산, 인천이
차례차례 열리고, 일본에 유람하는 이의 수가 늘어 개화당이 생기고, 일본 군인을 맞이하여
병대에 신식훈련을 베풀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여기에서 완전히 열릴 만큼 송두리째 깨이지도 않았고, 또한 이러한 모든 외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안으로 굳은 통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원군 섭정 십년 만에
고종 10년(1873) 정권이 왕에게로 돌아가자, 아직까지 대원군의 압력에 눌려 기를 못 쓰던 왕후
민씨는 그의 친정 족속들을 정부에 끌어들여 일본과 결탁하고, 또 대원군은 대원군대로 수구파의
두령격으로 이에 대립하니, 저 얽힌 외세에 이 내분은 참으로 조선의 몰락을 재촉하는 두 개의
채찍이 되었던 것이다.
제2편
소년
제1장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
1
"승룡아..."
"..."
어머니는 호롱불 옆에서 바느질손을 놀리다 말고 누워 있는 어린 아들의 이름을 또 한번
불러보았으나, 승룡은 어느새에 잠이 들었는지 아무 대답도 없다. 계집애 종 복녀까지 그 옆에서
벌써 코를 드르렁거리고 있다.
밖에선 싸락눈이 내리는 1880년의 어느 을씨년스러운 겨울밤이었다.
"그이는 오늘도 아니 오시나..."
김씨 부인은 문득 바느질손을 멈추고 얼빠진 사람처럼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그이'란 물론 승룡의 아버지요 자기의 남편인 경선인 것이다. 늦봄에 금강산엘 간다고 집을
나선 뒤로 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돌아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디쯤 있다는 소식조차
없다.
'그야 본래가 그런 분이니까 인제사 새삼스레 놀랄 것도 없지만, 우리 승룡이는 어찌하는가.
멀쩡하니 장님이 되어버린 저 어린것은 어찌하는가?'
부인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한 손에 들었던 삯바느질거리는 저절로 미끄러져 방바닥에
떨어지고, 긴 한숨이 호롱불을 흔들었다.
남편이 산에 들어간 뒤면 부인의 손 하나로서 식구들의 목숨을 이어가는 것은 벌써 오래
전부터의 일이라, 부인에겐 인제는 그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집에
우환이나 없어야 말이지, 승룡이가 첫겨울부터 독한 마마손님을 앓고 누웠는데 참으로
아찔하였다. 가뜩이나 어려운 처지에 약값을 당해내기도 여간 일이 아니었거니와, 겨우 열이
잡히면서부터 다시 눈이 뵈지 않는 데는 부인은 참으로 어쩔 바를 몰랐다. 날이면 날마다 앉고
앉아서 혓바닥으로 핥아도 주었고, 이웃 의원들이 권하는 대로 약이란 약은 모두 구해
써보았으나, 승룡의 눈은 빛을 보지 못한 채 벌써 한 달이 가까운 것이었다.
봄에 남편이 나간 뒤로 "천자문"을 한 달 동안에 배워 외우고, 인제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것이 "동몽선습"을 거리낌없이 익혀나가는 걸 생각하니, 부인은 문득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여,
"승룡아..."
또 한번 잠든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 옆에 가 구부리어 승룡의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마주 대고 부비었다. 부인의 두 눈으로부터는 굵다란 눈물이 흘러내리어, 혹독한 마마로 온통
껍질을 벗은 어린 외아들의 낯을 적시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바느질거리를 붙들어 잡고 한참 동안 바늘을 놀리고 있을 때였다. 마음의
탓인지 바람소리에 섞여 어느 골목쟁이를 돌아오는 말방울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그 소리는
점점 이 집을 향해 가까워오고 있었다.
김씨 부인은 무심결에 일어나 방문을 열고 대문짝을 내다보았다.
아닌게아니라 오래잖아
"복녀야!"
하고 부르며 대문을 흔드는 것은, 벌써 여덟 달 전에 바람처럼 새어나갔다가 인제 다시 바람처럼
스며들어오는 남편이었다.
부인은 무척 원망스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심정에, 처음엔 달려가 커다란 고함이라도 칠
듯한 기세로 일어서서 몇 발짝을 옮겼으나, 얽힌 긴장이 탁 풀리는 듯 되돌아와서 자는 복녀를
깨워 내보냈다. 그리고 자기는, 장님이 되어 누워 있는 아들의 곁에 쓰러져서 비로소 걷잡을 길이
없는 흐느낌에 잠겼다. 이 바람에 승룡이가 잠을 깨서 불쑥 일어나 섰다.
드디어 마루에서 눈을 터는 소리가 나더니, 경선은 조그만 보따리를 든 복녀를 앞세우고
방으로 들어섰다. 손에 든 갓모와 말채찍, 거센 들바람에 거친 얼굴로
"웬일이냐!"
하고 굵다란히 외치는 음성까지가 분명히 그는 오랜 풍상을 산천으로 혼자서 헤매다가 돌아온
낭인의 풍모였다.
"웬일이어?"
아무 말도 없이 쓰러져서 울고만 있는 아내와, 서 있는 아들을 번갈아 보며 그는 또 한번
이렇게 묻고는, 그 우악스럽게 큰 팔을 벌려 말뚝처럼 서만 있는 승룡을 덥석 들어 보듬고, 잠깐
이웃에나 다녀온 듯한 표정으로, 이불을 발로 밀치며 방 아랫목에 가 넙죽 앉았다. 그러고는
아들의 얼굴을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지도 않고 머리만 가벼이 쓰다듬어 주면서,
"의정부에서 해질 무렵에 친구를 만난 것이..."
하고, 언제나 하는 버릇으로 그의 밤길차 온 것을 변명하고 나서는, 곧 복녀에게 냉수를 청해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켜고, 그 다음엔 또 말의 먹이를 부탁하였다.
"말도 말이지만 그애 눈을 좀 보세요."
김씨 부인은 비로소 울음을 멈추고 바로 앉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눈이라니! 어디서 다쳤나? 어디 보자."
하고, 아버지는 그제서야 팔에 안긴 아들의 눈과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시월 달에 마마를 앓더니, 나으면서 벌써 달포 전부터 그렇게 되었어요..."
옆에서 설명을 하는 어머니의 음성엔 아직도 울음이 섞였다.
"흐음...!"
오랫동안 아들과 아내를 돌보지 않았던 낭인의 높이 치켜드는 검은 구레나룻에 파묻힌
입으로부터 드디어 온집안이 꺼져버릴듯한 커다란 탄식이 새어나왔다.
"마마에 눈이 멀란 팔자는 없을 텐데. 그래, 승룡아! 눈이 보일 것 같으냐? 끝내 안 보일 것
같으냐?"
이렇게 물으며 그는 두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움켜잡고 잠깐 두 눈을 뚫기나 할 듯이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어린 승룡의 감긴 두 눈으로부터는 두 줄기의 굵다란 눈물이 스며내리고 있는 것을
아버지는 보았다. 그와 동시에 승룡의 목으로부터는 어린애답지 않은 울음이 솟구쳐 나오며,
아버지의 팔을 뿌리치고 나서더니, 온방을 공처럼 굴러다니며 가로 뛰고 모로 뛰면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어두워! 아이고 어두워! 아이고! 아이고!"
끊임없이 이렇게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그의 모양은 마치 달대로 단 무쇠불덩이와 같았다.
"저놈 좀 보아... 저놈 좀 보아..."
아버지는 다만 어안이 벙벙하여 되뇌며 바라볼 뿐이었고, 어머니는 아무리 그를 멈추려
애썼으나, 드디어 스스로 기진맥진하여 방바닥에 늘펀히 자빠지도록까지는 그의 몸부림을 말릴
길이 없었다.
2
이튿날부터 아버지는 승룡의 눈을 고치기 위하여 백방으로 이름 있는 의원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그들이 권하는 것은 대부분이 내복약이었고, 그것들은 또 낱낱이 직접 눈을 뜨게 하는
데는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
1880년이 지나고 이듬해 2월이 되었다. 이박사의 생일에서 사흘 전날이니까 그것은 2월
16일이었다.
초저녁에 경선이 진고개에서 사람을 시켜 "명의가 있으니 애기를 보내라"하여, 복녀가 업고
따라가 보니, 그곳은 뜻밖에도 일본 사람의 병원이었다.
1879년 화방의질이 공사로 서울에 온 후,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일본 사람의 수효는 나날이
늘어가는 판으로, 진고개에는 벌써 병원, 사탕장수들을 비롯한 그들의 가게는 상당히 많았으니,
경선이 이들의 손에 아들을 맡기게 된 것은 무슨 그들의 의술을 믿어서라고 하기보다도, 인제는
꼼짝없이 버린 자식이니 마지막으로 왜놈들의 하는 짓에 혹 요행이나 있을까 하여, 친구들의
권고도 있고 해서 마지못해 뵈어보려는 것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손으로써 내
아들의 눈이 뜨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승룡은 복녀의 등에 업혀 처음 그들의 병원에 들어서자, 쿡하고 코에 오는, 아직껏 맡아보지
못하던 쌩긋한 내음새에 코를 찡그리고 복녀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왜내 난다. 가자"고 하였다.
이를테면 이건 그가 이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맡아본 신문명의 내음새였음에 틀림없었으나,
어른들의 하던 말을 빌려 '왜내'라고 할 수밖엔 별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누와 알코올 냄새까지도
이 무렵의 조선사람들은 모두 왜놈의 몸에서 나는 내음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걸 본 일본인 의사는 일부러 지어서 깔깔거리고 웃으며, 통역을 시켜 "안심하라"는
뜻을 전하고는, 승룡의 곁으로 와서 불결하게 감긴 두 눈을 까보았다. 그러고는 붓끝으로 몇
방울의 물약을 찍어 거기 발라주며
"사흘이면 나을 테니 염려 말라"고, 경선을 바라보고 다시 통역을 시켜 대담하게 장담을
하였다. 물론 경선은 그때만 그의 말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이튿날과 그 사흗날의 똑같은
장담을 들었을 때에도 그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나흘째 되는 날, 뜻밖에도 아들의 눈이 보이기 시작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선이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고 앉아 "고문진보"의 출사표를 소리를 뽑아
마악 두번째 읽어내려가는 판인데, 옆에 앉아서 자릿굽을 만지고 있던 승룡이가
"아버지 자릿굽이 보여!"
하고 외친 것이다.
"자릿굽이 보이다니? 정말로 보여?"
아버지는 읽고 있던 책을 팽개치고 바짝 승룡의 곁으로 와서, 실낱같이 뜬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보이거든 한번 세어봐라!"
승룡은 자리갓으로부터 굽을 손으로 가리키며 하나씩 하나씩 세기 시작하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아닌게아니라 그의 눈은 일인이 발라준 약 때문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보이기는 참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책상 위의 연적을 손에 들고
"이것은 뭐냐?"고 물어보았다.
승룡은 역시 "연적"이라고 그것마저 똑똑히 알아맞혔다.
"여보! 승룡이의 눈이 보이오! 여보! 어서 좀 들어와서 보오!"
경선은 부엌에 있는 아내를 향해 소리를 쳤다.
그 수선통에 부엌에서 간단한 승룡의 생일상을 보고 있던 김씨부인은 물론, 복녀까지도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리하여 승룡이를 얼싸안고, 두 부부는 한참 동안 아침상을 받는 것도 잊어버리고
기쁨에 잠겼던 것이다.
부인의 생각에는 승룡이는 꿈에 용을 보고 낳은 아이니, 골라서 생일날 눈이 뜨이게 된 것이라
하였다. 또 경선의 생각으로 그것도 그렇기는 하지만 혹 진고개의 왜의사는 신통력을 가진
사람일는지도 모른다 하였다.
하여간 그날은 이 집안에서는 드물게 보는 기쁜 날이었다. 진고개 의사에게는 달걀 두
꾸러미를 사 보냈으나, 그가 그것을 받지 않고 도로 보내오자, 그걸로 전과 지지미 등속을
만들고, 오랜만에 이웃 술친구들을 불러 조그만 잔치까지 열었다. 물론, 이 술값과 이 달걀값도
모두 김씨 부인의 십년이 하루 같은 바늘끝으로써 얻어진 것이었지만...
밤이 되었다. 승룡이 눈뜬 것을 축하하러 왔던 이웃과 친척의 손들도 돌아가고, 집안 식구만이
한 이불 속에 들게 된 밤이 되었다.
"그래 따뜻해지면 또 떠나시려우?"
이미 오십에 가까운 아내가 남편에게 묻는 말이다.
"암, 가야지. ...금강산에는 아버지의 혼령을 모실 좋은 자리가 꼭 하나 있을 것 같긴 한데,
아직도 그곳을 찾지 못했단 말이야. 지난 해엔 눈 때문에 상팔담쪽까지를 들어가다 말았으니,
봄이 되면 그쪽을 또 더듬어봐야지..."
역시 오십에 가까운 남편이 대답한다.
"금강산은 산세가 좋다지요?"
"암, 이르다뿐인가. 맛이라면 모두가 맛 덩어리요, 곱다면 모두가 고운 것 덩어리지... 진시황의
사신이 거기 가서 숨어버렸다는 것도 거짓은 아닐 거야. 하여간 아버지만은 옳은 자리를 골라서
거기 모시면 우리집은 저절로 밝아질 것이니까..."
"그렇지만..." 하고, 부인은 남편의 마음을 막아보려 한다.
"그렇지만 당신께서도 인젠 쉰이 다 되시었는데 그만 들어앉으셔야지. 승룡이도 커가고..."
그러나 남편의 음성은 산속에서 울리듯이 한층 더 외지고 한층 더 커진다.
"예순이면 대순가. 찾을 것은 찾아야지... 망할 것 다 망해먹고 들어앉으면 육십에 진사를
하겠나? 승룡이나 우선 잘 기르게. 나는 아직 산을 떠나서는 한시도 살 수가 없네."
역시 이것은 그의 본심이었다.
명당을 찾기보다도, 그는 산을 떠나서는 이미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런
남편인지라, 부인은 여기에선 늘 그만 잠잠해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승룡이가 뜻밖에 아버지 쪽을 향해 돌아누우며
"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는 자는 듯이 그렇게 누워서 부모들이 하는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금강산에도 사람이 사우?"
이번에는 승룡이가 묻는다.
여기에 또 아버지는 대답한다.
"살기야 살지. 하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중이나 포수나 나무꾼들뿐이다."
"중하고 포수는 무얼 하고 사는데?"
"중은 염불하고 북 치고 경 읽고 살고, 포수는 총으로 짐승을 잡지."
"호랑이도?"
"암, 호랑이도 늑대도 멧돼지도 잡지. 그렇지만 겨울이 되면 눈이 몇 길씩 쌓여 아무것도
못한다."
"그럼 눈이 오면 어떻게 다니우?"
"눈 속으로 굴을 뚫고 다니기도 하고, 또 쌓인 눈 위로 그냥 걸어다니기도 한다. 눈이 어떻게나
많이 쌓이는지 그 위로 걸어다니다가 해진 신발을 버려두면, 이듬해 봄 눈 녹을 땐 그 신발들이
모두 나뭇가지 맨 꼭대기에 주렁주렁 걸리게 될 만큼 눈이 많이 와서 쌓이니까..."
"그럼 참 재미있겠는데, 금강산은..."
승룡은 이빨을 드러내고 빙긋이 웃어보였다.
"나도 크면 언제 가봐야지".
그러고는 잠자코 있더니, 아버지의 한쪽 손을 단단히 움켜쥔채 어느새인지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이러한 단란한 밤이 얼마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봄볕이 아지랑이를 다시 늘일 무렵이 되자,
아버지는 그 털빛이 서릿발처럼 흰 서산나귀 등에 올라 또 나그넷길을 떠나고, 집에는 사철
바느질만 하는 어머니와 승룡이와 복녀만이 남았다.
제2장
임오군란
1
4월부터 승룡은 낙동(현재의 진고개 뒤)에 있는, 명문 자제들만 다니는 서당에 입학을 하였다.
서당은 퇴직대신 이건하라는 이가, 과부가 된 그 형수의 외아들 범교라는 아이를 가르치기
위하여 연 것으로서, 낙동, 도동 등지의 소위 양반집 아들들만 뽑아 한 30여명이 모여 있었다.
승룡은 처음 2마정이나 되는 염동으로부터 이곳까지 날마다 통학을 하였으나, 가을에 아버지가
돌아오자 식구들은 이 외아들이 통학하는 서당 근처를 찾아 다시 낙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서당, 범교네 서당, 이곳 역시 사랑방의 한쪽을 치우고 훈장과 학동들이 뺑 둘러앉아서 늘 글을
읽고 글씨만을 쓰는 점은 개화 이전의 이 나라의 그 많은 서당들과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러나
서당이라 하면 흔히 아이들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리는 것까지를 허락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 범교네 서당은 그 점만은 조금 달랐으니, 그 까닭은 이 집주인이 대신줄에 가는 양반인 데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더 큰 직접의 원인은 이것이 이 대신 집의 귀동자인 과부의 외아들을
위해서 연 서당이기 대문이었다.
하루는 이 주인마님의 외아들 범교가 잘못을 저질러 그 때문에 학동 전부가 훈장에게 몰매를
맞은 일이 있었는데, 범교는 그 직접 책임자로서 한층 더 매를 맞았다. 그러나 저녁에 범교가
돌아가서 매맞은 종아리를 보이자, 그 어머니는 크게 노하여 곧 하인을 시켜서 훈장에게 전갈을
하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랬지 누가 때리라더냐!"
하는, 큰 호령이었다. 그리하여 그 뒤부터 이 서당에서만은 훈장이 학도의 종아리를 때리는 일이
없어진 것이다.
이 첫 서당에 있어서의 승룡의 성적은 두드러지게 뛰어나 보이는 일은 없었으나 어린애답지
않게 착실한 편이었다. 그에겐 한 가지 일을 끝까지 꼬치꼬치 들여파는 성미가 있어서, 그의
질문엔 훈장도 귀찮증을 내고, 또 아이들에겐 핀잔도 많이 받았으나, 그는 이 성미의 덕택으로,
같은 학과의 대문과 전주밖에도 학동들이 모르는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보통
때에는 그의 존재는 아이들의 그늘에 숨어서 별로 드러나 보이지 않았지만, 한번 그에게 발표의
기회를 온전히 주어보면 비로소 그가 그의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 아이임을 알 수가 있었다.
평상시엔 소처럼 하잘것없이 보이되 힘드는 자리에 가선 비로소 넉넉한 힘을 나타내일 수 있는
것이 어려서부터의 그의 성격이었다.
서당엔 그때 서도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건 학동들의 공부욕심을 북돋워주기 위한 학과의
종합경기이다. 한 서도기가 새로이 시작되면 훈장은 학동들을 좌청룡과 우백호의 두 패로 똑같이
갈라두고, 그들의 근면, 강독, 필서의 성적 등을 낱낱이 기록해 둔다. 그랬다가 맨 마지막 날엔
도강이라는 것을 받는데, 이것은 그동안 배운 글의 전부를 한꺼번에 외우게 하고 또 해석하게
하는 것으로서, 이 도강에 점수가 제일 많았다.
승룡은 말하자면 이 도강에 늘 장원을 하여 마지막날에 가서 자기편에 점수를 월등하게
더하여,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아이로서, 학동 가운데 제일 공부를 못하는 범교와 함께 별명을
하나씩 받았으니, 범교는 범보요 승룡은 용보였다.
임오군란(1882) 직전의 어느 도강날이었다.
마침 집에 돌아와서 묵고 있던 경선은 서당의 초대를 받아 아들의 공부하는 양을 보러 갔다가
승룡이 "통감" 셋째 권을 도강하여 장원하는 것을 보고 훈장에게 물었다.
"저게 건성으로 외우고 종알거리는 건 아닐까요?"
"천만에. 저애는 양태부 가의가 상소한 것뿐이 아니라, 가의의 집안 내력까지 다 알고 있소.
심심하시면 물어보시지요."
훈장은 대답하였다.
"무슨 당치않은 말씀을..."
경선은 아이들을 칭찬하지 못하게 하는 그의 성미로써 말하긴 하였으나 마음속으론 또한
기쁘지 않은 바도 아니었다.
그날 밤 승룡이 집에 가니 저녁상에는 뜻밖에도 생선찌개가 하나 더 올라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웃으며 그를 칭찬할 눈치를 보이자 아버지는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큰 기침을 하였다.
2
6월에 서울에 군란이 일어났다. 이를 세상에서 임오군란이라 하는 것이다.
승룡은 어느 날 서당에서 글을 읽고 앉았다가 발이 저려서 잠깐 일어나 벽을 기대고 섰는데,
뜻밖에 '쿵!'하고 하늘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온 서당방이 되게 울리는 바람에 놀라 방바
닥
에
가 쓰러졌다.
"웬일일까?"
훈장의 물음에 아이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승의 낯빛만 우러러보았다.
"아아, 어디 마른 벼락이 내리셨나보다..."
훈장은 또 말하였다.
그러나 마른 벼락은 하늘에서 내린 것이 아니라, 불평을 품은 군대들이 난을 일으켜 동대문 밖
화약고에 불을 질러서 그것이 폭발된 것이었다.
궁금증을 못 이겨 그곳까지 가서 보고 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화약고가 터지는 바람에 죽은
사람들의 처참한 모양은 눈으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한다. 일본공사 화방의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아우의 시체가 어느 연못물에 내던져진 것을 보았다 한다. 왕후 민씨는
난군에게 몰려 어디론지 도망가고, 궁궐은 점령되고, 선혜당상 민겸호는 박살을 당하였다고 한다.
"대체 어찌된 셈이냐?"
서당에선 공부도 중지하고 치들을 떨며 궁금해 있던 중, 밤까지 들려온 소식을 들어보면
난리의 전말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879년, 서울에 일본공사관이 서고 군대에 신군제를 실시하고, 개화를 일본에 본뜨기 시작한
뒤로, 이들 개화당의 중심 세력이 되어 있는 민씨 일족에 대한 수구파의 불평은 나날이 더해가고
있던 판에, 요즘 와서 구식인 훈국군에게 오랫동안 밀린 요를 주는데 모래 섞인 싸라기를 주자,
뻗히였던 그들의 분노가 드디어 폭발한 것으로서, 그들은 반기를 들자 곧 여러 패로 나누어
행동을 개시하여, 한 패는 먼저 수구파의 두령격인 대원군에게 원정을 가고, 한 패는 이번 요의
직접책임자인 선혜당상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고, 또 한 패는 여러 민가의 집을 들여부수고, 또 한
패는 하도감으로 가서 일본인 군사교관 굴본례조 중위를 죽이고, 또 다른 한 패는 서대문 밖
일본공사관을 습격했으며, 다시 그들은 돈화문으로부터 창덕궁에 침입하여 왕의 침전 앞에서
민겸호 등을 죽이고 민비에게까지 손을 대려 하였으나 민비는 재빠르게 변복하고 몸을
피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난리는 대원군이 입궐하여 겨우 진정됐으며, 온갖 개화시설은 즉각
모두 폐해버렸다는 것이다.
"대원대감이 영걸이셔!"
"암, 개화라니 어림이나 있는 소린가!"
서당에 모인 어른들은 입입이 모두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은 모두 뿔관때기를 이마 위에 얹은
양반들이요, 또 보수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이튿날은 다시 새 소식이 들려왔다. 이날 새벽 드디어 '일본놈'들은 그들의 공사관에 스스로
불을 지르고 제물포로 배를 타러 모두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서당은 여전히 모여드는 어른들로 북적대는 통에 공부도 할 수 없는지라, 아이들도 뿔뿔이
밖으로 나갔다.
승룡이도 몇몇 아이들과 같이 서당을 빠져나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만 찾아서 쫓아다녀
보았다.
역시 곳곳에선 아직도 난군들의 행패가 계속되었다. 수하동 어느 민씨의 집에선 난군들이
몰려와서 집안살림을 모조리 때려부수고 있었는데, 곳간문을 열고 독을 깨트리니 그 속에서 돈이
그득그득히 쏟아져나와 마당가에 산더미를 이루며 굴렀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가서 주우려 하기도 하였으나, 병정들은 고함을 쳐
그들을 물리쳤다.
제3장
갑신정변
1
임오의 군란은 끝이 나긴 하였으나, 그러나 그 결과는 한층 더한 복잡한 판국을 이 나라에
가져왔으니, 그로부터 두 해 뒤에 온 갑신정변과 중일충돌의 실마리는 이때부터 벌써 굳게
맺어진 것이었다.
대원군은 군란을 진압한 뒤 잠깐 동안 정권을 손에 잡는 듯하였으나 민씨 도당의 책략은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으니, 일본과 부동하려다가 뜻밖에 실패를 본 그들은 다시 청국에 매달릴
작정을 하고, 곧 그 당시 천진에 가 있던 김윤식에게 거짓 전보를 쳐서 "대원군이 난을 일으키니
청나라에 후원군을 청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김윤식에게서 청원을 받은 이홍장은 이 기회에
조선의 정치를 간섭해 볼 결심을 세우고, 군란의 다음달인 7월, 3천의 해군을 서울에 보내어
대원군을 중국으로 붙잡아가고, 원세개가 거느리는 일부의 군대는 그대로 서울에 남아
일본인들이 지도하던 하도감을 맡아 중국식의 이름으로 뜯어고치는 한편, 또 계속해서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홍장의 주선으로 영국, 독일 등의 여러 나라와도 통상조약을 맺게
하였다.
그러나 한편 일본은 또 일본대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원군이 중국으로 잡혀가자 그들은
다시 육, 해군을 거느리고 제물포로부터 들어와서 군란의 책임을 추궁하여 드디어 7월 17일
제물포조약이라는 것을 맺었으니, 그 조약에는 배상금 50만 원을 일본에 지불할 것과, 국서로써
정식으로 사죄할 것, 앞으로 일본공사관에 호위병을 둘 것 등이 약속되었다. 그리하여 몇 달 뒤엔
박영호, 김만식, 김옥균 등을 특파대사로 일본에 파견해서 사과의 뜻을 표하게 하였는데, 이들은
거기 가 있는 동안 일본과 연락하여 청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을 꾀하고, 돌아오던 길로 개화를
일본에 본뜰 것을 임금에게 권하여, 학술, 무예 등 각 방면의 고문들을 일본으로부터 초청해서
산업, 교통의 개화를 열게 하는 한편, 11월에는 다시 죽첨진일랑을 공사로 영접해서 수백 명의
호위병과 함께 서울에 머물게 하였다.
이와 같이, 1992년 임오군란의 뒤로부터 1884년 10월의 갑신정변에 이르는 만 2년 동안,
서울은 청국과 일본의 두 세력이 양쪽에 주둔한 가운데, 다시 여기에 각기 부동하여 쟁탈전을
꾀하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서, 언제든지 닿으면 터질 듯한 기세를 갖추고 있었으니
수구파의 대표는 임오군란 전까지는 일본편에 가담하다가 군란 후엔 다시 청국 세력에 아부하는
민씨 일족을 중심으로 한 민태호, 김병시, 민영익, 이조연, 한규직, 조영하 등이요, 개화파는 또
홍영식,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1884년 10월 17일이었다. 미리부터 보수파의 세력을 꺾을 계획을 세워오던 개화당 패들은, 이날
새로 설립된 우정국 낙성식 잔치가 있는 것을 이용하여 정부의 고관 10여 명과 각국 공사들을
국장 홍영식의 이름으로서 초대하였다.
정각 6시가 되자 초대받은 손님들은 일본공사만 제하고는 모조리 다 모였다. 그리하여 잔치가
얼마쯤 진행되었을 때다. 뜻밖에도 "불이야!"하는 고함소리가 밖으로부터 요란히 들렸다. 그러자
모인 사람들은 서로 살려고 앞을 다투어 밖으로 쏟아져나갔다.
그러나 이건 모두가 개화당이 미리 짜놓은 계획이었으니, 맨 앞에서 나가던 민영익은 마당에
내려서자 바로 자객의 칼을 맞고 거꾸러져버렸다.
이 사이에 김옥균, 박영효 등은 곧 대궐로 들어가서
"청병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라고 거짓말을 전하여, 일본 병정의 호위로 왕을 경우궁에 옮겨 모시고, 한쪽으론 사관학교
학생들을 시켜 민태호, 조영하, 이조연, 윤태준, 한규직, 민영목 등의 보수파 고관들을 죽여 없앤
후, 순식간에 개화당 내각을 조직해서 이튿날엔 다시 왕을 창덕궁으로 돌아오시게 하고
일본공사의 지휘 밑에 대궐 안의 파수를 보게 하였다.
그러나 보수파의 잔당들은 밤 사이에 청국 주둔군에 연락하여, 이튿날인 19일 새벽에는 승지
이봉구를 앞잡이로 원세개의 부하 2천이 대궐로 물밀듯이 쳐들어와서 온 하루를 일본군과 접전
끝에, 일본군은 드디어 할 수 없이 물러가 버렸으니, 이는 그들이 정해놓고 기다리던 일본
본국으로부터의 후원군이 그들의 예정대로 이 자리에 이르지 못한 때문이었다.
이 북새통에 왕은 또 잠시 홍영식의 호위로 비빈들이 피란한 북묘에 가서 계셨으나, 곧 다시
원세개의 영문으로 옮겨 가셨다.
이와 같이 개화당 내각은 하루를 서고 뒤집어진 후, 20일에 일본인들이 다시 민중의 혹독한
습격을 받으며 물러가는 틈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간신히 끼여가서 목숨을
건지고, 홍영식과 박영교는 북묘에서 왕을 모시고 있던 끝에 죽임을 당하고, 세상은 잠깐 동안
다시 보수파 민씨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것을 소위 갑신정변이라 하는 것이다.
2
이박사의 집 식구들은 이 정변의 난리바람에 한참 동안 팔자에 없는 고대광실에서 살게
되었다. 이미, 위에서도 그의 이름이 보이는 바 퇴직대신 이건하의 일족이 충청도 아산의 산골로
피란을 가게 되어, 그 빈집을 승룡이와 어머니와 복녀 세 사람이 가서 지키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경선은 이때에도 역시 집에 없었다.
세 식구의 입에 풀칠할 길이 아득하던 중, 이 피란간 뒤의 빈집 지키는 일은 참으로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남이야 가져서 피란을 가든 말든, 또 앞에야 어떠한 난리가 닥쳐오든 말든 우선
그들에게는 아침저녁을 끓일 걱정을 하지 않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곳간에 그득한
양식과 살림과 뒤안의 나뭇더미를 지켜주는 대신, 그동안 먹고 때는 것만은 써도 괜찮다는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집으로 옮겨오던 날 밤, 자리에 눕자, 승룡은 어머니에게 가만히 물었다.
"엄마, 이 집은 인제 우리를 주는 거야?"
"아니다. 인제 판서댁이 돌아오도록까지만 보아 달래는 거지..."
어머니는 대답하였다.
"그럼 왜 판서댁은 이 집을 비워놓고 나가우?"
"그야 피란이 아니냐. 난리가 나서 위태하니 잠깐 시골에 숨었다가 오실 작정이지."
"그럼 우리는 위태하지 않은가?"
승룡은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위태하지만 우리는 괜찮다. 그리고 우리야 또 어디 피란갈 데나 있니? 우선 양식 걱정이
없어진 것만 해도 다행이지..."
어머니는 또 대답하였다.
그러자 승룡은 눈을 말똥거리고 한참 동안을 가만히 있더니
"그럼 범교는 위태해도 나는 괜찮겠구먼? 범교네 엄마는 위태해도 엄마는 괜찮구?"
하며 큰 소리를 내어 어린애답지 않은 너털웃음을 터트리어 오랫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어머니가 울고 싶을만치 그 웃음소리는 너무나 어른답고 또 컸다.
이튿날은 바로 일본인들이 민중의 습격을 받으며 물러가던 10월 20일이었다.
승룡은 서당이 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밥 숟갈을 떼자 바로 어머니 몰래 집을 나와서
무서운 줄도 모르는 듯 소란한 난리 속의 길거리를 혼자서 구경하고 다녔다.
서소문 쪽에서는 구식 군대들이 군기서의 집채를 때려부수고 있었다.
진고개 뒤 녹천정 쪽에서는 일본 사람이 사는 집집마다 불이 붙어, 튀어오르는 기왓장의
불꽃은 참으로 굉장하였다.
호피로 각반을 하고 청룡도를 든 청국 병정들은 길거리에 몰려다니고, 민중들은 또 민중들끼리
읽히어 일본 사람의 집에서 된장통, 비누통 같은 것을 약탈해 내오는데, 병정들은 그것들을 또
낱낱이 청룡도로 쳐부숴 보고야 돌려 보냈다.
사람들은 구석구석에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개화당의 혐의만 받으면 죽인다. 말만 더듬어도 창으로 찔러 죽이더라"는 둥, 또 어떤 데서는
"왜놈이 통나뭇단을 안고 숨어 있다가 맞아죽어서 통나무귀신이 되었다"는 둥, 또 어떤 자는
손수 자기 눈으로 왜년 죽이는걸 보고 왔다고 손짓 몸짓으로 시늉을 하며 "구들장이
들먹들먹하여서 보니 그 밑에 생 젊은 왜년이 하나 아이를 안고 들어 있단 말이야. 어린애는
받아서 원세개한테 보내고 년은 단번에 창으로 찔렀는데 참 아깝단 말이야! 그 xx가 아까워!"
하고 너털거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나친 광경과 피비린내나는 이야기들을 보고 듣고 다니다가 승룡이가 집에 돌아온
것은 벌써 한낮이 훨씬 기운 뒤였다. 그는 어머니가 "어데를 갔다 왔느냐"고 물어도 대답도 않고,
또 "밖에 나가서는 안된다고 하지 않더냐!"고 야단을 쳐도 들은 시늉도 않고, 밥을 차려주어도
먹지도 않고, 마치 열병을 앓는 아이처럼 방 아랫목에 가 늘펀히 누워서 꼼짝도 않았다.
저녁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숟갈을 치워버렸다.
드디어 자리를 펴고 불을 껐을 때, 그는 어머니에게 비로소 물었다.
"일본은 뭐고 청국은 뭐야?"
"왜 그러니? 그것도 몰라?"
"아니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냔 말야..."
"응 그거야 빤하지 않니? 개화당은 일본을 끼고 우리나라 임금님의 자리를 뺏으려다 청국
대인들 때문에 그리 못된 것이지."
"대인? 그럼 대인들이 없으면 또 어떻게 하나?"
"그야 할 수 없지. 그러니까 대인들이 돌봐주어야지..."
김씨 부인 역시 한 수구파의 교양을 가지고 이렇게 대답하긴 하였으나 사실은 똑똑히 자신이
있어 한 말도 아니었다.
승룡은 더 뭐라고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제딴에는 무슨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모양이었다.
제4장
도동서당
1
정변이 끝나고 오래지 않아 아산으로 피란갔던 이건하씨의 가족들이 다시 올라오자, 승룡의
집은 남산 서남쪽에 있는 도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도동은 그들의 선조 양녕대군의 사당이 있는
곳으로서, 거기 그들의 일가가 많이 살고 있음은 앞의 제1편에서도 말한 바와 같다. 경선은 인젠
몸도 쇠약하여 산천 소요도 뜻같지 않으므로, 이 선조의 옛 터를 찾아서 그만 들어앉으려 한
것이었다.
우수현-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는 마루턱 밑 남쪽에 조그만 오막살이를
구해 살면서, 그들은 다시 승룡을 그 근처에 있는 판서 이근수의 집 서당에 보냈다. 이근수는
바로 양녕대군의 직계 종손으로서, 승룡에게는 항렬로 치면 조카뻘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승룡은 이 서당에서 스물 한 살까지 십년 동안 유학을 닦았고, 또 이 우수현 밑 오막살이에서
한 사람의 청년이 될 때까지 자랐다. 그러므로 뒷날 그의 호를 우남이라 하여 쓰게 된 것도
필경은 이 잊을 수 없는 우수현 남쪽의 보금자리를 오래 기념하려 함이었던 것이다.
도동 서당에서의 승룡의 맨 처음의 선생은 가인이라는 호를 가진 수원사람 이승설로서, 그는
그때 이미 육순이 넘은 노인이었다. 그는 늙도록 한번도 벼슬길에 올라서보지 못한 한낱 포의에
불과했으나 학식도 넉넉하고 또 성격도 너그러워 훈장으론 참으로 흠잡을 데가 없는 인물이었다.
승룡은 주인 근수의 아들 왈수와 또 그의 친척 되는 아이 을룡이들과 함께, 이 가인 선생에게
글을 배우면서, 또 한편으론 어느새인지 딴 애들과는 달리 혼자서 틈틈이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생겼다.
글 읽다 쉬는 시간에도 그는 다른 애들처럼 밖에 나가 놀지 않고 구부리고 앉아 무엇인지
자꾸만 열심히 그렸다. 선생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나비요, 꽃이요, 또 어느 때엔 가인 선생과
방불한 형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언제나 많이 그리는 것은 나비였다. 나비라도 나는 놈,
앉은 놈, 호랑나비, 흰나비, 부나비, 여러 가지 형상의 여러 가지 종류들이었다.
"너 그런 것을 그려서 뒤에 환쟁이가 될련? 아예 그런 짓 말고 글공부나 열심히 해."
언젠가 경선은 서당에 들렀던 길에 아들의 이 괴벽을 선생에게서 듣고, 그 짓을 중지할 것을
아들에게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림을 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가만 있으면 한층 더
열심히 그렸다.
선생도 처음엔 몇 차례 그만둘 것을 권해 보았으나 듣지 않는지라, 여가의 심심풀이론
나쁘지도 않을 것 같아 나중에는 내버려두어 버렸다.
어느 날 밤 글공부를 파한 뒤, 승룡은 낮에 그리다 둔 그의 그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때 마침 주인집에서 가져온 무를 숟갈로 바닥이 나도록 긁어먹고 있던 선생은 그 껍데기를
내밀며
"옛다 이것 승룡이 먹어라"하고 주어 보았다.
그러나 승룡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그걸 받기는 하였지만 다시 자리에 앉아, 한 손에
그것을 그냥 무감각하게 든 채, 다시 그리던 것을 되풀이하고만 있었다. 그 열중해 있는 품은
단순한 심심풀이만도 같지 않았다. 그래 아이들은 이 모양에 박장대소들을 하였으나, 눈이 바른
선생은 이때부터 그의 하는 일은 말릴 수 없음을 비로소 알고 내버려두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드디어 그의 그림을 스스로 뚝 멈춰버리고 말았다. 아이들이
"이나비! 이나비!"
하고 그를 딴 이름으로서 부르는 것이 듣기 싫었던 때문이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실은 그가
그동안 늘 그림의 스승으로 배워왔던 이 집 청지기 최응원의 별명이 또한 나비였던 까닭이다.
이러한 그의 열중과 고집은 어느 때 어떠한 곳에서나 쉼이 없었다.
도동으로 이사온 이듬해의 정월 대보름날 아침, 왈수의 집과 승룡의 집을 비롯한 이씨네들이
지덕사에 제사를 모시고, 그 앞에 엎드려 나란히 절을 올릴 때였다. 승룡이와 왈수도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는데, 왈수가 문득 장난을 할 생각으로
"승룡아 저게 무슨 글자냐?"
하고, 지덕사의 현판 글씨에 서명한 윤동섬의 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엎드려 절을 올리는 데 열중해 있던 승룡은 물론 얼결에
"응?"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왈수는 냉큼 미리 계획한 대로
"내 더위 사가!"
하고 보름날에 아이들이 흔히 하는 버릇으로 그 대답에 더위를 팔아버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으로 야단이었다.
노염이 머리끝까지 뻗친 승룡은
"무엇이 어째 이자식아!"
하고 달려들어 왈수를 걷어차며 덤벼드니 어른들이
"고얀놈 같으니! 더위쯤 팔기가 일쑤지."
하고 뜯어말리자, 쏜살같이 그 자리를 떠나 집에 돌아가서는 자리에 누운 채, 어머니가 권하는
약밥도 먹지 않고 그날 온종일을 굶으며 끙끙거렸다.
그까짓 더위쯤 사게 된 것이 노여운 게 아니라, 장난할 수 없는 때를 이용해서 협잡을 하는
것이 그에게는 이를테면 한없이 분하였던 것이다.
2
열두 살 되는 해 첫봄까지에 승룡은 "통감" 열 다섯 권을 완전히 끝마치고 다시 "맹자"로부터
"논어", "중용", "대학"의 사서들을 배우는 한편 글씨 공부에도 힘을 들였다. 이렇게 해서 그를
장차 과거의 문과에 급제하게 하는 것이 그 아버지 경선의 희망이었던 것이니, 일찍이 술과
외입으로 벼슬길을 단념해 버린 아버지는 인제 이 외아들에게만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가 못
걸은 길을 기어이 걷게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 승룡에게는 승룡이대로의 세계가 있었다. 그는 물론 학과에도 게으르지는 않았고,
글씨와 시짓기에는 서당패들 중 제일 뛰어난 성적을 꾸준히 나타내고 있기까지 하였지만, 그의
열중과 몰입은 그것들에만 멈추지 않고 참으로 넓은 범위에 걸쳤다.
넓은 범위, 그렇다. 그의 주의가 한번 집중되는 곳, 거기에서는 언제나 그의 열중이 계속되었다.
서당의 선배 신긍우 형제들의 권고로 그는 한번 "삼국지"를 손에 잡자, 보름 동안 서당에서
학과를 배우는 시간만을 제하고는 온전히 그 속에 빠져버렸다. 그 뒤에도 그는 "수호전",
"서상기", "전등신화"들을 번갈아 가며, 어떤 것은 부모와 선생의 눈을 피해 청지기네 집에 가
숨어서 읽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서 구해 볼 수 있는 이러한 외과서를 모조리
읽어버렸을 때에도, 그는 잠시도 심심해하는 일도 멍하니 앉아 있는 일도 없이 곧 또 다른 그의
일거리를 재빠르게 찾아냈으니, 소설책이 동나자 그가 바로 착수한 것은 또 '노래공부'였다.
그는 이미 여러 가지 소설책들을 통독한 뒤에, 마지막으로 부모들이 금하는 책 "서상기"를
숨겨 가지고, 청지기 최응원의 방에 가서 읽고 있었는데, 그것이 끝나자 즉석에서 그는 다시
자기의 그림 선생인 이 최나비에게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청하였다. 그것은 최나비가 늘 곧잘
노래도 하는 것을 승룡이 그전부터 아는 터로서, 이날 밤도 그가 곁에 앉아 영남조의 대문을
읊조리고 있는 때문이었으니, 그것의 무엇이 승룡을 그렇게 감동시켰는지는 모른다. 하여간,
승룡은 "서상기"의 마지막 책장을 덮자 바로 한참 동안을 엇비슷이 누워서 최나비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더니
"융마는 관산북이오..."
하고 최나비가 불러 넘기는 두율의 1절에 오자 소리를 나란히 하여 일어나 앉아
"나 그것 좀 가르쳐줘."
하고 간절히 졸랐다. 그리하여 그는 바로 종이를 가져다가 그 가사들을 최나비가 부르는 대로
베끼기 시작하였고, 며칠 뒤엔 그것에 책가죽을 두텁게 해가지고, 날마다 밤만 되면 이 청지기
방에 와 묻혀서 어리고도 앳된 목청을 뽑고 있었다.
연 날릴 때가 되면 연 날리는 데로도, 꽃필 때가 되면 꽃으로도, 복숭아 철이 되면 복숭아
수풀로도, 어디로도 그의 주의와 열중은 고르고 끊임없이 기울어졌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갖가지의 놀이도, 이것들을 조금만 주의해 보면 다른 아이들의 그것에
비해 수월찮은 차이가 있곤 하였다. 가령, 연날리기 놀이를 하는 데도 다른 아이들은 그저 연의
종류를 골고루 갖추고 연실을 튼튼하게 하여, 상대편과의 연싸움에 이기는 데만 그 목적과
흥미와 열중이 함께 달려 있었지만 승룡은 그런 데는 오히려 별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는
그저 이겨도 빙글거리고 져도 빙글거리기만 하였다. 그러자니 자연 그에게는 연싸움에 지는 적이
많아, 잃어버린 연을 대신할 수 있게 늘 딴 것을 몇 개씩 미리부터 예비해 둘 뿐으로, 그는
지거나 이기거나 그런 데는 눈살 한 번 찡그리는 일 없이, 연을 하늘가에 날려놓고는, 연자새의
실을 감았다 풀었다 하고 혹은 재주를 부리는 것만으로 넉넉히 만족하고 또 심심치도 않은
모양이었다.
서당에 공부가 없을 때에는 이렇게 혼자서 연을 날려놓고 그는 몇 시간씩 빙글거릴 적도
있었다.
봄에 풀꽃이 자랄 무렵이면 그는 또 곧잘 온갖 들의 풀꽃들을 뿌리째 옮겨다가 서당 앞
마당가에 심어두고, 그것을 가꾸고 매만지기에 정성을 다했다. 꽃이 피고 거기 나비와 벌이
날아와 앉을 무렵까지는 날마다 흙을 파다가 그것들의 뿌리에 다짐을 두텁게 하였고, 또 물을
주는 게 일이었지만, 일거리가 아주 없어진 때면 그냥 그 앞에 가서 그 꽃잎사귀들을
손가락 끝으로 스치며 왔다갔다 하는 짓을 몇십 번씩이라도 되풀이하고 있거나, 안 그러면
엉거주춤하고 앉아서 그것들을 보기만 하고 있기도 일쑤였다.
어느날 훈장 이승설씨가 이렇게 앉아 있는 승룡의 곁에 가 서며,
"너 무얼 그렇게 보고 있니?"
하고 웃는 낯으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승룡은 대답 대신에 빙그레 웃고 일어서서는, 역시 꽃
옆으로 왔다갔다 하며 손가락끝으로 꽃들을 스쳐 다니는 짓을 몇 번 되풀이하더니, 뜻밖에 이
엄한 훈장의 곁에 와서 훈장의 손을 꽉 붙잡고 또 한번 소리없이 웃었다.
"넌 무에 그리 좋아서 늘 빙글거리기만 하니? 꽃귀신한테 반한 녀석 같으니..."
훈장은 가벼이 손끝으로 제자의 머리를 매만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꽃귀신에게 반한 녀석'-아닌게아니라, 그의 모든 열중은 한번 시작되면 마치 흠빡 무엇에 반한
것과 같았고, 또 사실로 그는 모든 것에 반할 수 있는 성격을 갖춘 소년이기도 하였다.
제5장
과거행
1
승룡은 1887년, 열세 살 때부터 과거장중으로 정식으로 과거를 보러 다녔다. 알다시피 과거란
조선 말기에 이르도록까지의 고등관리 자격시험으로서, 문관이든 무관이든 이 관문을 지나야만
비로소 벼슬길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승룡은 문과를 지망하여, 이 구경은 이미 아홉 살 때부터 다녔던 터로,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첫시험을 보게 된 것은 전혀 이 외아들의 출세에 조급한 부모네의 소원 때문이었으니, 과거는
원칙으론 열 다섯 살부터 볼 자격이 있는 것이었으나, 고종 24년(1887)의 과거만은 동궁의
동갑으로서 열 네 살까지도 시험 보는 걸 허락했으므로, 그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한 살을
늘려 갑술생으로서 장중에 나가게 되었었다. 물론 여기에는 동궁과의 동갑임을 빙자해서
시험관의 주의를 끌고자 하는 부모와 일가친척들의 요행을 바라는 심리가 없는 바도 아니었다.
하여간 그는 승룡이라는 아명을 이때부터 던져버리고, 우남 이승만이라는 아호와 명자를 갖춘
한 사람의 버젓한 유자요 선비로서, 유관과 도포를 갖추고 장중인 경무대로 나갔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의 가난을 상징하는 것처럼, 두 발에는 굽 높은 나막신이 신겨져 있었다.
장중에는 벌써 조선의 방방곡곡에서 모인 청소년과 또 늙은 선비들까지가 구름더미처럼
모여서, 제각기 오행을 바라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20명씩, 30명씩 그들이 나온 지방과
학당 또는 문벌의 이름을 쓴, 장대 끝에 매달은 정사각형의 유지등 밑에 모여 있기도 하고, 또는
세력을 따라 수효를 늘릴 수 있는 유지우산 밑에 모이기도 하여, 모두다 끼리끼리 막들을 늘이고
궁궐의 문이 열릴 때만을 고개를 늘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한 무더기의 모임을
장중에서는 한 '접'이라고 하였다. '접'마다 모여 있는 것은 응시자뿐이 아니라, 참고서와
지필묵을 들고 따라온 하인배들까지 끼여서 혼잡을 떨었고, 구석구석에는 장국밥, 설렁탕
장수들이 차일을 친 곳도 있었다.
드디어 그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신무문이 열린다. 그러면 그들은 밀물과
같이 앞을 다투어 몰려들어가서 다시 근정전으로 통하는 안문 앞에 선다. 포졸들은 여기저기서
날카로운 눈들을 번쩍거리고, 그중에는 심지어 승룡의 신은 나막신을 가리키며
"대궐 안에서 그렇게 높은 나막신을 신으면 되오?"
하고 탓하는 자까지도 있었다.
그들이 근정전으로 가는 안문 앞에서 꽤 오랫동안, 어떤 때에는 거의 한나절을 지낸 뒤에야
멀리서부터 "고개 숙여라!" 소리를 치는 대전별감과 무예별감을 앞세우고 왕의 옥교가 나타났다.
그 뒤에는 열 네 살 된 동궁의 수레가 따르고 있었는데, 왕은 듣던 바와 같이 늘 생각을
지근거리고 있는 것이 먼 눈으로도 똑똑히 보였다.
왕과 동궁이 근정전에 올라 자리를 잡아 앉고, 현제판에 제목을 건 뒤에야 비로소 그들에게는
근정전 앞마당에 들어서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거기 들어서서도 역시 별감의 호령으로 고개를 숙이고, 낯 한번 바로 치켜들지 못하는
부자유 속에서 현제판의 글제목을 재빠르게 베껴야 하였다. 그 제목이라는 것은 문과엔 대개
시와 부의 두 종류였는데, 시는 흔히 18구씩 짓는 것이 규칙이었다.
이렇게 부자유한 속에 엉거주춤하고 서서, 선비들은 저마다 글제를 베껴 가지고 나와, 온
정력을 쏟아서 풍축에 시험답안을 썼다. 그 중에도 이미 반백이 된 시골노인들이 진땀을 흘리
고
있는 광경은 옆에서 보기에도 참으로 불쌍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언제나 흔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경무대엔 그들의 답안이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그 속에서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몇 개씩 골라 급제를 시키는 것은
오히려 공평한 편으로, 승룡이 과거를 볼 무렵에 와서는 시험답안지는 보지도 않고 덮어버리는
것이 예사였고, 급제는 모두 시험관들에게 바치는 금품으로만 팔리던 때였다. 더구나 경서를
외우게 하고 진사를 주는 일차유생과 같은 데엔 여간한 현직 고관 대작의 집 자손이 아니면
시험조차 볼 수가 없었으니, 아무리 지식과 덕행이 훌륭한 선비라도 이러한 난관 앞엔 붙어 보는
재주가 없었다.
거기다가 가장 공명정대해야 할 왕마저 할 수 없는 게으름뱅이요 무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밤에는 무당 광대들을 불러 질탕히 놀고, 낮에는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습관을 가져, 과거 보러온
들은 여름 뙤약볕에 한나절씩 세워두고, 실컷 잠을 자다가 해질 무렵에야 얼굴을 보이기가
일쑤였다. 그나마 그것도 잠깐 구경이나 온 것처럼 얼굴만 보이고는 곧 들어가 버렸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광대의 소리를 듣는 거로서 육자배기만 잘하여도 참봉을 준다는 소문까지 났다.
이러한 왕이요, 이러한 과거인지라, 유능한 선비들은 자진해서 일찍 그만두어 버리는 이도
많았지만, 승룡은 아버지의 간곡한 소원도 있고 하여 열세 살부터 이 제도가 폐지되도록까지
해마다 장중엘 부지런히 쫓아다녀 보았으나 그 결과는 역시 아무것도 이루지를 못하였다. 그는
그 동안에, 몇몇 현직 고관의 아들들이 일차유생 시험을 보는 데 글씨를 차작해 주어서 그들이
진사가 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2
이러한 과거의 날들이 까닭도 없이 또 길게는 끌었다.
과거는 밤까지 계속되어, 엿장수와 장국밥장수들만이 한몫을 톡톡히 보고 끝장을 막으면, 때는
흔히 사대문을 굳게 잠근 뒤였다. 일이 이렇게 되면 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은 괜찮겠지만,
대문밖에 사는 응시자들은 모두 성벽을 넘어서 집을 돌아가야 하였다. 응시자들에게만은 표를
보이면 성을 넘는 걸 허락해주긴 하였지만, 캄캄한 밤을 경복궁 뒤로부터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남대문까지 걸어나와서, 다시 성벽을 타고 넘어 도동골까지 돌아가기란, 승룡에게는 참으로
따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몇 해째 낙제만 거듭하는 과거에 다시 떨어지고서
오막살이에 까마득히 기다리는 늙은 양친을 터덕터덕 찾아가는 밤길임에랴.
어느 해 겨울, 그것은 아마 열 일곱 살 때였을 것이다. 과거가 파한 날 밤에 그는 남문의
성벽을 넘다말고 무심코 그 위에 걸터앉은 채, 꽤 오랫동안을 갈피 없는 생각에 잠겼다. 할 수
없이 되어 가는 집안의 일, 점점 노쇠해 가는 아버지의 일, 매관매작과 협잡에만 기울어지는
조정의 일, 또 승룡이 자기의 일...
그러자 이때, 문득 성벽 위의 바로 자기 곁에 인기척이 있는 듯하여 살펴보니, 이건 또
뜻밖에도 웬 장님 둘이서 지팡이를 궁둥이에 찌르고 성을 짚어 올라오다가 무엇에 놀랐음인지
"어?"
"어?"
하고 서로 돌아보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었다.
승룡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얼결에 큰 웃음을 쳤으나, 그 다음 순간 그는 까닭도 모르게
설움이 복받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똑똑히 그 뜻을 알 수는 없지만, 이 밤과 이 성벽과 이
장님과 그 소리는 마치 자기 자신과 같고, 자기 집안 일과 조정의 일과 같고 또 조선의 일과
같은 일종의 절망감에 붙잡혔던 것이다.
집에 돌아가니 아니나다를까, 늙은 두 부모는 그때까지도 호롱불 밑에 자지 않고 앉아서,
아랫목에 밥그릇을 묻어놓고 내 아들이 급제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룡이 밥숟갈을 들자,
"그래 어찌되었느냐?"
하고 아버지는 물었다.
"..."
승룡은 그러나 뭐라고 대답할 길이 없어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의 눈치로써
벌써 또 아들이 떨어진 걸 알아차린 모양으로,
"에이 이녀석..."
하고는 '휴!' 한숨을 쉬고, 그만 자리에 가 반듯이 드러누워 버렸다.
이것은 일찍이 승룡이가 보지 못하던 아버지의 절망의 표현이었다.
"명년에 또 보지. 뭘 그애 나이가 너무 많아서 걱정이시오?"
어머니는 말했으나, 아버지는 한숨만 여전히 계속할 뿐이었다.
승룡은 문득 놀리던 숟갈을 멈추고, 아버지가 자기를 보고 꾸짖는 '에이 이녀석' 소리는 마땅히
누구에게로 돌아가야 하겠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대답은 좀처럼 찾아지지 않았다.
'내년에는... 내년에는...'
승룡은 또다시 내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제6장
갑오년까지
1
참, 조금 전에 소개해야 할 일을 깜빡 잊었지만 승룡은 이미 열 여섯 살 되던 해, 즉 1890년에
자기보다 두 살인가 손위인 박씨 부인을 맞이하여 결혼을 하였다. 당시의 양반들의 가정엔 아홉
살짜리 신랑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열 여섯 살은 오히려 늦은 편이 되었다.
결혼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서당엘 다니며 경서를 닦고, 글짓기와 글씨 공부를 계속하여
해마다 오는 과거의 준비에 늘 분망하였다. 스무 살까지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급제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처지요, 또 심경이었던 것이다.
1890년으로부터 1893년에 이르는 4년 동안의 도동 학방의 선생은, 이승설씨가 돌아간 뒤를
이어 마을의 늙은 선비 석초 김생원이 맡아보았는데 그는 특히 시를 즐기고 술을 좋아하는
성미로서, 승룡의 아버지 경선씨와는 남달리 뜻이 맞아, 거의 날마다 같이 앉아서 글을 읊고 술을
기울였다. 이 스승 밑에서 승룡은 신응우, 신긍우, 신흥우의 삼형제와 주인 아들 왈수와 같이
해마다 하지로부터 7월까지에는 늘 시만 전문으로 공부하여 이 방면에 많은 깨우침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꽃철 녹음철에는 그는 또 곧잘 이 스승과 스승의 벗들을 모시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그들과 함께 스스로도 회포를 시로 읊조리기도 하였다.
일만 남긔 복사꽃 옆
서너 가호 이웃집
이라든가,
술 즐겨 베푼 잔치
붉어오른 얼굴엔,
고운 정자 푸른 녹음
이웃을 하리.
라든가 하는 구절들은, 모두 아직도(1947년 현재) 박사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로서, 이것만을
가지고도 우리는 그 당시의 도동의 모양과, 정자에 올라 즉흥시를 지어 읊고 놀던 서당패들의
모양을 눈앞에 선히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승룡은 아직도 어른의 편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아이들의 동무였다. 아무리 이마
위에 망건과 유관을 얹고 과거는 보러 다닐지언정 나이는 역시 나이였던 것이다. 그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시회와 잔치에도 참가하는 한편, 소년들과는 또한 소년으로서 어울려 온갖 그의
놀이를 계속하였다.
연날리기와 윷놀이와 돈치기를 비롯하여, 4월 초파일의 관등놀이, 5월 단오의 추천, 남사당판,
씨름판, 심지어는 회동 유기장수들 틈에까지 그의 발부리가 미치지 않는 놀이터는 서울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즐기는 것은 하지로부터 7월의 서당 파접에
이르도록까지의 당음읽기와, 이 무렵에 한참 맛이 드는 서당 뒤의 복사밭에 가서 아이들과 같이
뒹굴며 지내는 일이었다.
여름이 되면 서당에서는 그 딱딱한 경서 읽기를 중지하고, 알맞은 감정의 구슬덩이와 같은
당시를 들고 낭송하는 일을 시작한다. 해가 지기가 바쁘게 서당 마당에는 싱싱한 풀냄새도
향기로운 모깃불을 피우고, 서당패들은 마루에 마당에 마음대로 앉고 서서, 그들이 좋아하는
당나라의 시들을 제각기 목청을 뽑아 읊조리기도 하고 또 소리를 나란히 하여 읊조리기도 한다.
가령, 한 아이가 모깃불덩이를 끼고 돌면서
"아미산월가라..."
하고 나직이 시 제목을 외우면, 서당패들은 가지런히 그 뒤를 따라 돌면서
"아미산월이 반륜추하니... 영입평강강수류를..."
하고, 소리를 맞춰 읊어 넘기기도 하고, 반수가 한 줄을 외우면 다른 반수가 그 다음 줄을 차례로
받아넘기기도 한다.
당시야 두말할 것도 없이 가장 풋풋하고 의젓한 사람살이의 감정을 담은 문학으로서, 여기서
새삼스레 이러니저러니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 당음을 읽을 때야말로 서당의 해빙기와 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 그들의 소리는 마치 오랫동안 단단히 얼었던 얼음이 비로소 때를 만나 풀려서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같이 이때만은 아름답고 낭랑한 것이다.
더구나 풀냄새가 쿡쿡 코에 다질려오는 달밤이나 되고 보면, 읽는 사람들도 읽는
사람들이려니와, 근처의 마을 아낙네들은 일부러 이 소리를 듣기 위하여 서당 담 밖에 모여서
진을 치고, 조금이라도 더 그 소리를 속에 담아두기나 하려는 듯이 돌담에 귀를 대고 있기가
일쑤였다.
승룡은 서당패들 중에서도 유달리 글 읽는 소리가 크고 야무지고 아름다운 편으로, 집안에
걱정이 더하거나, 과거에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그의 소리는 나이 따라 한층 더 맑아만 갔다. 그가
먼저 시 제목을 이끌어 내거나 혼자서 읊어 넘길 땐, 서당 담에 붙어 있던 아낙네들은 서로
옆구리를 손으로 찌르며 "저게 뉘집 도령이여?" 하고 소곤거리기가 일쑤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낮에 쉴 때 우물가를 지나가면, 나이든 아낙네들은
"이생원댁 새서방님! 오늘밤에도 당음 읽으세요?"
하고 묻기도 하고.
"오늘 밤엔 더 좀 잘 읽으세요. 나도 좀 가서 들어볼 테니..."
하며 웃기도 하고, 젊은 여인들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기만 하기도 하였다.
이럴 때면 승룡은 흔히 웃는 양, 낯을 붉히고 걸음을 빨리 하여 건너편 언덕너머 복사밭골로
들어가 버렸지만, 그 여인네들이 당음의 뜻을 참으로 한 알고서 이러는 것이라면 이건 참으로
로맨틱한 광경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그 읽는 소리에만 취했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그야 하여간 승룡에게도 여인네들의 이러한 청이 싫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그것은 그가
들어가서 그 밑에 앉은 복사밭의 그늘과 같이 훈훈하고 따뜻한 느낌을 그에게 더하였다.
그래 그는 그의 뒤를 따라서 복사밭골에 올라온 왈수와 을룡이를 시켜 복숭아를 따오라고
명령해 놓고는, 자기는 그 훈훈한 언덕 밑에 드러누워 '오늘밤에는 어떻게 하면 좀 더 당음을 잘
읽을까?' 하는 것과, '명년 봄에는 꼭 과거에 급제를 해야 할 텐데...' 하는 것을 늘 생각하였다.
그에게도 인제 한 청춘의 물결이 새로 용솟음을 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문득, 복사밭에 스며든 왈수와 을룡이를 발견한 복사밭 주인이
"게 있거라, 이놈들!"
하고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나 줄달음질쳐서 이 꿈과 같이 아늑한 보금자리를 버리듯이,
과거와 서당과 당음을 그가 버리지 않을 수 없는 때는 이미 다가오고 있었다.
2
그는 1893년 계사년까지 과거를 계속하였고, 또 "시전", "서전", "주역" 등의 경서도 거의
완전하리만치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조선 말엽의 과거제는 매관매작의 한 형식의 도구노릇만
되풀이하다가 1894년의 갑오경장에 이르자 그만 뚝 끊어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승룡이와 그 가족들의 소망은 아주 헛된 것이 되고 말았다.
갑오경장-나는 이제 1884년의 갑신정변 뒤 여기에 이르도록까지의 이 나라의 밟아온 길을,
간단히나마 여러분에게 설명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미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갑신 10월의 정변의 끝은 개화당의 패퇴와 일본공사관의
물러남으로 인하여 한동안은 다시 보수파의 천하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11월이
되자, 일본은 다시 보병 2대대의 호위로 정상형을 전권대사로서 서울에 보내, 조선 정부로 하여금
또 한번 일본에 사신을 보낼 것과, 일본공사관을 새로 짓는 데 비용 일체를 당할 것 등의 조약에
도장을 찍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고야 말았다. 한편, 그들은 또다시 이듬해 1885년 3월에는
이등박문을 대사로서 청국에 보내 천진에서 이홍장과 만나게 하여 갑신정변 때 청국이 일본에
끼친 손해의 책임을 추궁한 끝에 '일청 양국은 앞으로 넉 달 안에 조선으로부터 주둔시킨 군대를
철회할 것'과 '장차 조선에 변란이 있어 일청 양국이 군대를 파견하게 될 때에는 미리 서로 알릴
것'등을 정하게 하였으니, 이는 소위 천진조약이라는 것으로서, 뒷날 청일전쟁의 한 구호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두 나라 병대가 모두 돌아간 뒤에도 청장 원세개만은
조선통상사무전권위원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서울에 남아 정치에 대한 간섭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일청 두 나라의 신경전이 조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한편, 또 하나 안심할 수 없는
것은 점점 손아귀를 벌리기 시작한 러시아의 세력이었다. 러시아는 그동안 유럽 쪽이 시끄러워
조선을 굽어볼 겨를이 없다가, 이 무렵 서쪽이 안정되자 재빠르게 여기 눈을 붙이고, 1884년
6월에는 북경공사관 서기관 웨벨을 보내어 그해 안으로 통상조약을 맺게 하고, 뒤이어 그를
총영사로서 서울에 머물게 하였는데, 그는 교묘히 민비 일족의 환심을 사서 1889년엔 함경도
경흥을 러시아에 개방케 하는 조아변계통상조약이라는 것을 맺는데까지에 성공하였다. 청국은,
일본과 대립하는 한편으로 러시아의 세력을 막기 위하여 1889년 9월 대원군을 돌려보내고, 그뒤
계속하여 온갖 간섭을 다 하였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러시아의 세력에 기대려는 조정의 경향은
한층 더 절실하여져서 한동안은 일청 두 나라의 세력을 막기 위하여 러시아와의 사이에 밀약까지
맺어질 뻔한 형세였다.
이러한 외세 속에서 정부나 변변하였으면 오죽이나 좋으랴. 그러나 정부는 또 부로써 썩을
대로 썩어서, 중앙에선 민씨 일족의 세도 아래 돈으로써 온갖 관직과 온갖 일이 모두 다
팔렸으며, 그 결과로 시골에선 또 군수, 관찰사 등속들의 토색질이 공공연히 이루어져, 백성은
혹독한 착취와 약탈에 울부짖고 정부를 원망하는 소리는 나날이 높아가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쌓이고 쌓인 민중의 분노는 드디어 1894년 2월 동학당의 힘을 빌려, 그 중 토색질이
심했던 전라도 고부에서 폭발되니, 봉기의 두령은 전봉준이요, 그들이 내건 구호는
'제폭구빈'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구호에 찬동하고 일어선 각지의 백성들과 합세하여 5월 그믐껜
전주를 완전히 점령해버렸다.
이에 조정은 비로소 당황하여 원세개를 통해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해 6월 초엿새날
이홍장이 보낸 청병 1천5백 명은 아산만으로부터 상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일본으로선 기다리고 바라던 기회였다. '장차 조선에 변란이 있어 일청
양국이 군대를 파견하게 될 때에는 미리 서로 알릴 것'이라고 기록한 1885년의 천진조약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조선의 요청을 받은 청국이 일방적으로 군대를 출동한 것이다. 또 이해
갑오년 2월엔 일본에 체류 중이던 갑신정변의 망명객 김옥균이 당시 청의 실력자 이홍장을
만나러 갔다가 자객 홍종우에게 상해에서 암살되자, 청국은 도리어 홍종우를 보호하고 김옥균
의
시체를 조선에 보내여 사지를 찢는 육시에까지 부쳐지게 한 일도 있었다. 일본은 천진조약을
조
선출병의 빌미로 삼았다.
'청국을 치라'는 일본 국내여론을 업고 일본측은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1894년 5월, 일본공사
대조규개는 이동우형이 거느린 8척의 군함과 대도의창이 인솔하는 3천 명의 육군을 데리고
서울로 들어와서 원세개를 만나고 "조선의 화근을 뽑아놓기 위하여서 일청 두 나라가 힘을 합해
그 시정을 개혁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국이 이에 응하지 아니하자, 일본은 청국을 제쳐두고, 혼자서 조선 정부에 육박하여
이를 요구하는 한편, 청병을 돌려보내고 청국과의 모든 조약을 없이 할 것까지를 권고하였다.
권고라고 하기보다 이건 벌써 강제요 또 명령이었다.
이 지경에 이르매, 원세개의 일행은 변복하고 청국으로 돌아가고, 정부는 뒤바뀌어 다시 숨어
있던 개화당의 천지가 되고, 드디어 6월 29일 청일전쟁이 정식으로 포고되었다.
이 판국에 새 정부는 6월 24일 개혁의 중추기관으로서 군국기무처라는 것을 세우고, 새 영의정
김홍집을 회의 총재로 하고 개화당파들을 회의원으로 하여, 개혁할 시정안건을 날마다 토의케
하니, 이 결과로서 생긴 것이 소위 208건의 경정책으로서, 거기엔 정부직제의 개혁을 비롯하여
반상타파, 노비해방, 혼제개혁, 과거폐지, 외국인고문제 등이 결정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전의 의정부는 내각이 되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 서광범은 돌아와서 다시
정부에 자리를 잡고, 대원군과 민비는 둘 다 정부에 관계를 못하게 되고, 청국의 세력은
청일전쟁에서 패하자 완전히 조선으로부터 물러가 버렸다.
이와 동시에 어쨌든 이 나라엔 전면적으로 거센 개화의 물결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갑오년-이 해는 한 사람의 서당꾼 승룡의 과거길을 막았음과 같이, 전민족에게도 역시 한껏
다난한 해였다.
갑오년-승룡은 인제 벌써 스무 살이 된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또 이미 세 살이 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아직도 상투를 덩시랗게 꽂은 채 과거길마저 막힌 이 다난한 마당에 서 있다.
인제부터 우리는 그를 아명으로 부르지 않고, 바로 '이승만' 그 이름으로서 부르기로 한다.
제3편
청년
제1장
고민
1
"그래 어찌할 작정이냐?"
"..."
갑오년 여름 과거법을 폐한다는 조서가 내린 뒤로, 부자가 조용히 얼굴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묻는 아버지의 질문이요 아들의 침묵이었으나, 그들에겐 역시 별다른 방책이 손쇱게 머리에
떠오르지는 않았다. 이미 육순이 넘은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까맣게 절망을 하고, 아들은 또
아들대로 수그러진 머리를 치켜들 수 없는 채, 우울하고 가난한 나날이 겹쳐갈 뿐이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이 무렵에 와서는 일가친척들마저 이 출세의 길을 잃은 선비의 가족들을
아주 버리고 말았음인지, 돌보아주는 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되어, 그들 여섯 식구의 입에는 죽도
바로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의 울화는 나날이 더하고, 가족들의 얼굴은 눈에
보이게 수척해 갔다.
이러한 여름과 가을도 지난 뒤의 어느 첫 기러기 소리나는 늦가을 밤이었다.
아버지의 밤자리를 보살피러 들어간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또 한번 물었다.
"그래 요즘도 조정에서는 아무 딴 방책이 없다더냐?"
묻지 않아도 그것은 이 노인의 유일한 소망이었던 아들의 과거길에 대하여 아직도 혹시나 하는
한 가닥의 희망을 부치고 하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대답할 말이 없기도 하려니와, 아버지의 걱정하심이 민망하기만 하여 그
앞에 가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흥! 미친놈들! 조상이 천년을 하루같이 지켜오던 성현의 길을 폐지하고, 그러고도 그놈들이
벌을 받지 않을까? 인재를 골라서 쓰지 않는다면 어느 개새끼라도 마구 갖다 쓸 작정인가!
무렴한 왜놈들! 무렴한 개화당놈들! 그놈들 때문에 인제 나라는 망하고 마느니라! 인제 두고
보아라!"
아들의 침묵과는 반대로, 늙은 경선의 울화는 한번 치밀어 오르면 그칠 바를 몰라,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치고 책상을 치고 또 자기의 무릎까지를 거침없이 함부로 친다.
"... 새로 된 시험제도라는 것이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마는..."
승만은 자기의 침묵이 하도 딱하여 거의 억지로 한 마디 되뇌어본다. 그러자 아버지의 소리는
한층 더 날카로워지며
"뭐? 시험제도라니? 그깐놈들에게 붙어서 그래 개화당이 돼? 어림도 없는 소리다. 선비는
죽어도 군색해선 안 되느니라. 가령, 백이숙제같이 산채를 씹다가 죽을지언정, 어찌 그까짓
왜놈배들에게 부동한단 말이냐? 그럴 리야 없겠지만, 꿈에라도 너는 그따위 시험제도 같은 건
생각지도 말고, 이 난세에 성명을 보존할 생각을 해라. 고르지 못한 때에 묻혀서 사는 것은
예로부터 있던 길이다. 알겠느냐?"
하고, 하고 마치 자기의 몸으로써 아들의 앞길을 바로 하기나 하려는 듯이, 바짝 승만의 앞에
다가앉았다.
"어서 그만 진정하시고 주무시지요..."
아들은 아버지의 흐트러진 백발을 바라보고 문득 더워오는 눈시울을 손끝으로 억누르며 나직한
소리로 권하였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리에 가 눕더니, 이제까지와는 아주 다른 소리로
"승룡아, 거기 잠깐만 더 앉아라..."
하고, 오랜만에 아명을 불러 아들을 만류하였다.
"승룡아 들어봐라..."
아버지의 음성은 돌연히 목이 메인 듯하였다.
"너도 알다시피 내 나이 벌써 예순을 넘지 않았느냐. 내 스스로 과거길에 실패하고 가산을
탕진한 뒤에 만득으로 너 하나를 얻어서, 네게나 어떻게 입신의 길이 열리는 걸 보려 했더니,
인젠 그것도 다 틀리고 딴 세상이 되고 말았구나. 그러니 인제사 내게 무슨 보람이 있겠느냐.
어떻게 살든 인제는 벌써 구차한 목숨들이 되었다. 승룡아... 내일 나는 황해도 너의 누이 집에나
다녀올까 하니, 언제 돌아올는지는 모르지만 딴 생각 내지 말고 식구들의 연명책이나 생각해
봐라..."
"..."
승만은 역시 아무 대답도 하지는 못했지만, 듣고 있자니 그것은 너무나 비통한 아버지의
심정임에 틀림없었다. '그이 자신의 일생의 절망에 인제는 아들의 절망까지를 겸해 지니고
아버지는 또다시 분명히 그이 산천 소요의 길을 떠나려 한다'는 생각이 들자,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솟아오름을 승만은 금할 길이 없었다.
"아버지, 제발 진정해 주무시고 다시 생각해 보옵시요..."
승만은 겨우 이 말을 입 밖에 내고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그만큼 엄한 아버지요. 그 뜻을
좌우할 수 없는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이튿날이 되자, 경선은 가족들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과 같이 방랑의 길에 오르고
말았다. 굳이
"평산 딸의 집에 잠깐 다녀오겠다."
고만 고집을 세워 말 위에 올랐으나, 한번 떠난 그는 물론 그 겨울이 다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2
"어쨌으면 좋겠느냐?"
아버지가 늘 그에게 묻던 말을 승만은 그뒤에도 날마다 속으로 되풀이해 보았다. 그러나 앞은
역시 아득하기만 할 뿐이요, 신통한 답안은 쉬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이때까지 지켜오던 습성으로, 그뒤에도 늘 서당엔 나갔다. 그러나 이미 배워야 할 경전을
모조리 다 배워버렸고, 또 그것을 풀어볼 목적을 잃어버린 지금의 그에게 있어서는 서당은 벌써
아무 소용도 없는 공허한 장소였다. 거기다가 그와 한 또래의 학도들은 모두 뿔뿔이 헤어져서
인제는 서당에 들어서야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았고, 또 그의 방 아랫목에 늘펀히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날이 많게 되었다.
이러한 어느 날. 뜻밖에도 같이 도동 서당에 다니던 신긍우가 찾아왔다. 긍우는 승만과 같이
서당에 다니던 그들의 삼형제(응우, 긍우, 흥우)들 중의 한가운데로서, 그의 아버지 면휴는 일찍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개화당에 가담하고 있던 터인지라, 그의 아들들에게도 신학문을 두루
허락하여 긍우는 이미 유신파의 명사 현채라는 이에게서 일본말 공부를 열심해 해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삼형제가 모두 승만과 유달리 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 면휴 또한
경선과는 흉허물을 가리지 않는 사이였다.
"자네 나하고 좀 조용히 이야기할 수 없나?"
긍우는 승만의 안방에 들어와서 그 어머니에게 인사를 마치자 승만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승만은 그를 이끌고, 그 아버지가 거처하던 윗방으로 갔다.
"다른 게 아니라 오늘은 꼭 자네에게 한 가지 권할 일이 있어서 왔네."
자리에 앉자 성미가 급한 긍우는 곧 그의 찾아온 내력을 말하였다.
"자네도 대강은 짐작하겠지만 때는 벌써 뒤바뀌어 가고 있네. 두말할 것도 없이 유학이나 닦아
과거나 보던 때는 지나고, 인제는 개화 천지가 되어가고 있단 말일세. 그만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온지 알겠지? 주저하지 말고 자네도 우리하고 같이 개화를 배우세. 일본말도 배우고,
영어도 배우고, 산학도 배우고, 세상 돌아가는 도리도 알아보잔 말이야. 어쩔 텐가, 내일부터라도
같이 현채 선생한테 갈 텐가? 케케묵은 과거나 볼 생각 인제는 되지도 않을 것이니 그만
집어치우고..."
그러나 그의 열변은 여기에서 승만의 반대 때문에 중단되었다.
"아따, 자네 말주변이 꽤 늘었네 그려."
승만은 찾아온 손에 대해 실례됨을 돌아볼 겨를도 없는 듯이 큰소리로 말하였다. "그것 모두
다 현채라는 사람한테 배웠나? 과거야 하든 안하든 십년을 학문을 닦았으면 그만한 건 가질 줄
알아야지. 자넨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유자가 아니고 천주학쟁이고 또 왜놈의 사환인가? 실없는
사람 같으니! 그런 소릴 하려면 아예 두 번 다시 우리 집에 오지 말게!"
이렇게 외치며 승만은 그 자리를 그대로 일어서려 하였다. 그러나 긍우는
"잠깐만 내 말을 더 듣게" 하고 승만의 팔을 붙들었다. "자네가 아직도 그렇게 말할 걸
미리부터 다 짐작하고 왔네. 자네 말도 옳으이. 그야 가질 것은 가져야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지만 아무리 유자라도 알 것을 다 알고 반대할 것을 반대해야 하지 않을까? 저 서양인들은
우리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하루에 천리씩 가는 불수레도 만들고, 화륜선도 만들고 또 별것을
다 만들었다네. 그들이 그렇게 할 때에는 우리보다 무엇이든 아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있어서
그러는 것 아니겠나? 우선 알기 쉽게 자네가 어려서 마마손님으로 장님이 될 뻔하였을 때
우리나라 의원의 재주로서는 고칠 엄두도 못 내던 것을 물약 몇 방울로 눈을 뜨게 한 위력은
무엇인가? 일본 사람들인들 어디 처음부터 그런 재주를 가지고 있었는 줄 아나? 그건 모두
그들이 너그러이 개화를 받아들여 서양 사람들에게서 배울 걸 똑바로 배운 때문이란 말야. 물론
나는 자네보고 개화당이 되라고 권고하지는 않네. 그렇지만 일본 사람이든 서양 사람이든 그들의
우리보다 나은 점을 알아는 봐야 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긍우는 열에 복받친 사람처럼 단숨에 말하고는 비로소 승만의 팔을 놓았다.
승만은 처음 그가 섣불리 자기를 움직이려 하는 것이 못내 불쾌하였으나, 나중엔 그의 너무나
지나친 열중 때문에 웃음을 띄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점으로 보거나 긍우는 긍우대로 마음이
쏠린 데가 있어서 친구를 위해 그와 같이 행동하기를 권하러 온 것이요, 그밖에 허튼 생각은
조금도 없음을 그의 태도로써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자네나 좋으면 개화당을 맘껏 하게. 그렇지만 나한테 권할 생각은 아예 꿈에도 내지 말게."
하고 승만은 비로소 나직이 말하였다.
"고집부리지 말고, 좀 많이 생각해 보아. 일본말과 영어를 배워두어서 해로울 건 무에 있단
말인가? 행여 외국 사신으로 가더라도 말쯤은 알아둬야 할 것 아냐? 자, 그럼 나는 가네. 며칠새
또 올 테니 많이많이 생각해 보아."
긍우는 이렇게 말하며 자리를 일어섰다.
승만은 그를 따라나가서 문밖까지 전송하였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긍우의 우정을 대접하려는
승만의 한 우정일 따름이요, 긍우의 열변에 조금치라도 감복된 때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참으로 무서운 것은, 아니 참으로 위대한 것은 이 우정이었다.
긍우는 그 뒤에도 쉼없이 하루 걸러씩은 승만을 찾아와서 되풀이되풀이 그의 생각하는 바를
말하며 여기에 동의를 구하였고, 승만은 승만대로 그의 열중과 정의에 감복하여 긍우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궁금히 여기게끔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긍우는 은근히 가난한 승만의 처지를 걱정하여 몇 차롄가 쌀말과 장작짐을 하인에게 들려 보낸
일까지도 있어, 그의 사심없는 우정은 승만을 적잖게 감동시키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두어 달이 지난 뒤의 동짓달 어느 날의 저녁때였다. 긍우는 다시 찾아와서 승만을
조르기 시작하였다.
"그래 아직도 결심을 세우지 못했나? 자네보고 예수교꾼이나 개화당이 되란 말은 아예 권고도
하지 않네. 더구나 시방 자네 비위에 맞지 않는 일본말은 배우란 말도 하지 않아. 그렇지만 제발
소원이니 배재학당엔 꼭 한번 나와 보게. 늘 하는 말이지만 서양사람들에겐 우리가 아직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도리가 있어. 입학이야 하든 안 하든 꼭 한번 구경이라도 와서 해보게.
이것까지도 못 들어주겠는가?"
아닌게아니라 벌써 몇 달을 두고 여기까지 조르는 데는 승만으로서도 너무 거절만도 할 수는
없었다. 긍우의 우정도 우정이려니와, 한편으론 또 그 '배재학당'이라는 것이 무슨 요술을 하고
있는 곳인지 적이 궁금하기도 한 것이었다. 그래 승만은 드디어 "그럼 가보지. 내일 가봐!" 하고
승낙을 하고 말았다.
제2장
배재학당 입학
이튿날 아침나절 승만은 벗 긍우와 흥우의 형제에게 이끌리어 배재학당을 향해 정동 고개를
올라가고 있었다. 낡은 도포와 헌 갓에, 그때도 여전히 그는 굽 높은 나막신을 신었다.
길거리가 모두 꽁꽁 얼어붙은 춥고도 밝은 날씨에 그는 늘 미끄러질 듯 미끄러질 듯
뒤뚱거리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서 말하였다.
"별일이 있어도 천주학은 하지 않을 테니 그쯤 알아. 알겠나?"
그럴 때마다 긍우는 상을 찌푸리고 대답을 하였다.
"어이 사람도... 천주학은 아무데도 없다니까 그래. 대원대감이 다 잡아죽이고 인제 어디 씨나
남았나? 염려 말고 따라와. 설마하니 내가 자네를 몹쓸 데로 인도하겠나?"
드디어 그들의 일행은 배재학당 사무실에 당도했다.
긍우는 먼저 그를 미국인 교사 노블이란 사람이 있는 곳에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켰다. 노블은
웃는 낯으로 흔연히 일어서서
"내가 노블이오, 잘 오셨습니다" 하고 유창한 조선말로 말하면서 악수를 할 양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악수를 아직도 모르는 승만은 적잖이 의하하여 그의 하는 짓과 이상한 짐승
같은 생김새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노블은 그러한 승만의 주시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듯 여전히 빙글거리는 낯으로
"오, 이선생, 우리 학당 오시는 것 싫어하신다더니 어떻게 오늘은 이렇게 반갑게 오시었소? 참
잘 오시었소. 부디 좀 잘 살펴보시고 좋으시면 우리 학교 입학하시오. 그리고 우리 미국 사람들께
조선말도 잘 좀 가르쳐주시오. 우리들 조선말 모르는 사람 참으로 많습니다."
하고 유창하기는 하나 역시 어색한 어조로 뇌까렸을 때에는 서양 사람이라는 것을 가까이서
처음 대하는 승만으로서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노블은 스스로 앞장을 서서 승만을 교실마다 안내해 주었다.
처음 그가 구경하게 된 것은 기도실이었다. 무슨 뜻인지 '금일대성벽 생구주'라고, 붉은
비단폭에 금글자로 써서 벽에 붙인 밑에 여러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있는
방이었는데, 그 꼴들이 어찌나 우습던지 무심결에 승만은 소리를 내어 웃으며 옆에 있는 긍우를
보고
"저게 천주학이지?'
하고 물었다. 그러나 긍우는
"천주학은 무슨 천주학이야? 그건 기도라는 것일세. 여기선 기도만 하면 그만이니까."
하고 또 질색을 하였다.
다음에 들어간 것은 북학반이었는데, 거기에서는 지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칠판 옆에다
시간표를 큼직하게 써서 붙여놓았는데, 금목수화토의 오행밖에 배운 일이 없는 승만의 눈으로선
월화수목금토의 육요의 분간은 오행을 잘못 뒤집어놓은 것만 같아, 또 한번 긍우를 돌아보고
"저게 뭐냐? 오행 하나를 똑바로 쓸 줄도 모르고?'
하고 묻기까지 하였으나, 강단에 선 선생이 오대양 육대주와 노선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는
것만은 처음 듣는 것이어서 신기하기도 하려니와, 그 내용이 궁금하여 꽤 오랫동안 그의 발길을
여기에 멈추게 하였다.
옆에서 이 눈치를 알아차린 긍우는 "저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다녀보면 우리들이 모르던
새 지식이 얼마든지 나오니까. 가령 우리나라나 청국뿐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역사라든지,
서당에서 못 배운 것을 얼마든지 배울 수 있어."
하고 승만의 귀 가까이 입을 갖다 대고 간곡히 말하였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영어 교실에서 한 사람의 미국인 교사가 생도들에게 단어를 가르치는 것을
보고 다시 노블 교사의 사무실로 돌아온 것은 이미 점심시간이 다 된 때였다. 노블은 승만에게
점심준비를 시켰으니 같이 먹자고 하였으나, 승만은 굳이 그것을 사양하고 긍우의 형제와 같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의 발길이 교문 밖을 나서자, 긍우는 승만을 돌아보고 "그래 어떤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승만은 "어떻긴 무엇이 어때? 과히 심심치는 않겠고, 자네 말같이 꽤 배울 것도 있어 보이긴
하네마는 거 정말로 천주학이나 개화당은 하지 않으렷다?"
긍우를 보고 도리어 물었다.
"염려 말어. 그런 것을 하거든 내 목을 베게. 내 목을 베어. 그럼 우선 먼저 자네는 집으로
돌아가게. 나는 또 학교에 가서 오늘 학과를 마저 마치고 저녁 때 자네 집에 갈께."
긍우는 대한문 옆까지 승만을 전송하면서 이렇게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승만은 집에 돌아가서 그를 기다리면서 걷잡을 길이 없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었다. 집을
떠난 아버지의 일. 떠나시던 전날밤에 그이의 하시던 부탁. 현재의 혹독한 가난. 배재학당. 아까
배재학당에서 노블이란 서양 사람이 그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쳐달라고 하던 일. 개화당과 천주학.
개화당과 천주학은 하지 않는다던 긍우의 맹세... 그리하여 이러한 착잡한 여러 갈래 생각 중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아버지의 부탁과 같이 가족들의 연명책을 세울 수 있다면 배재학당 아니라 그보다 더한
데라도 들어가자. 가령 긍우의 말과는 달리 배재학당이 천주학과 개화당을 하는 곳이라 하더라도,
내 마음은 그런 것에는 붙잡힐 리가 없다. 그러나 천주학과 개화당, 그것이 참으로 어떤 것인가도
내 마음으로 똑똑히 알아보자.'
이렇게 그가 그의 마음을 마악 정리하고 누워 있는데, 때마침 또 오후의 학과를 마친 긍우가
찾아왔다.
"아까 노블이란 서양 사람이 조선말을 가르쳐달란 말을 했는데 그것 정말일까? 그리고 또
월사금은 얼마나 내줄 작정인가?"
승만은 다짜고짜로 긍우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야 물론이지. 서양 사람은 거짓말은 않네. 아마 적어도 생활비야 받게 되겠지. 그렇지만
그럴려면 꼭 배재학당엘 입학해야 하네. 그래야만 조선말 교사로도 채용해줄 테니까."
긍우는 대답하였다.
그러자 승만은 서슴지 않고
"그럼 내일부터 배재학당에 입학을 하겠네. 오늘 갔을 때만큼 다시 찾아갈 테니 자네가
입학절차를 소개해 주게. 진담일세!"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튿날부터 배재학당의 생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통학하는 것을
상당히 오랜 뒤에까지도 그의 가족들은 몰랐다.
제3장
제중원
1
승만이 배재학당에 입학한 뒤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그의 총명은 교내에 두루 알려지고 널리
서양인 선교사들 사이에까지도 선전되어, 드디어 그는 그의 뜻대로 구리개에 있는 서양인 병원
제중원에 나아가 한 미국 부인에게 매일 아침 조선어를 가르치는 직업을 맡게 되었다. 제자는
여의사로서 조지아나 화이팅이라는 이름이었다.
제중원, 나는 인제 여러분에게 이것의 유래와 윤곽을 잠깐 동안 설명해 둘 필요를 느낀다.
여러분은 내가 이미 제2편에서 말한바 갑신정변 때의 이야기들을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새로
우정국이 설립되고 홍영식이 그 국장으로 취임하여 그 낙성식 연회를 베풀었던 갑신년(1884)
음력 10월 17일 저녁, 연회 도중에 "불이야!" 소리가 나서, 모였던 손님들이 우- 밖으로
몰려나가다가 보수파의 두령 민영익이 개화당이 매복시킨 자객의 칼끝에 쓰러졌던 것을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민은 그때 요행히도 아주 죽진 아니하고, 한쪽 귀가 떨어졌으며
머리 한쪽에 얼마쯤 생채기를 입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일가친척들은 그의 상처를 고치기
위하여 백방으로 명의를 찾은 끝에, 고종황후 민씨가 마지막으로 끌어들인 것이 미국인 선교사요
또 의사인 알렌이란 사람이었으니, 그의 치료로 민영익의 상처는 참으로 씻은 듯이 잘 나았다.
그래 이 신속한 치료에 감동한 민비는 서양 사람의 병원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곧 알렌에게
명하여 세우게 한 것이 구리개의 제중원이었는데, 승만이 이곳에 조선어 교사로 취임했을 대는
서양 의사의 수효는 벌써 40명이 넘어 있었으나 환자들은 웬일인지 이때까지도 잘 모여들지
않았다. 원장은 알렌의 뒤를 이어 이때에는 에비슨이란 사람이 맡아보고 있었다.
승만은 여기에 처음 얼마 동안은 아침 일찍 나가서 맡은 과업을 가르치고 다시 배재학당에
통학하고 있었으나, 그뒤 오래잖아 제중원의 요청으로 배재학당은 그만두고, 동창생 이충구란
사람과 같이 매일 그곳에 가 배기게 되어, 오전에는 제자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그
자제에게서 다시 유창한 영어를 배우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그들은 승만과 충구에게 각각
방을 한 개씩 주어, 승만은 계속해서 화이팅 부인을 상대하고, 충구가 또 따로 맡은 것은
지컵슨이란 이름을 가진 역시 미국인 여의사였다.
승만에겐 처음 이 외국인 여자를 상대하기가 여간 어색하고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비록
상대는 이미 사십에 가까운 중년부인이요, 또 털빛이 다른 남의 나라 사람이긴 하였으나, 아직껏
남녀칠세부동석의 윤리와 교양밖에는 가지지 못한 그에게 있어 여자를 딴 방에서 호젓이
대한다는 것이 첫째로 어색한 일이요, 또 둘째로는 배재학당에서 몇 달쯤 배운 영어로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늘 손짓과 몸짓으로 설명을 하기가 여간한 괴로움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이란
사귀면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요, 또 스스로 알게도 되는 것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승만을
얼마쯤 얕잡아보는 듯한 눈치가 보이던 화이팅 부인도 드디어는 그의 너무나 지나치게 경건하고
존엄한 태도와 투철한 재능에 감동하여 그를 존경하게끔 되었고, 승만에게도 또 마침내는 이
외국 여자의 눈에 선 관습과 노린내 등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되어버리고, 그의 좋은 점만이
골고루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이곳에 취임한 지 꼭 한 달이 되는 1895년 2월의 어느 날, 그는 화이팅 부인으로부터 한 달
월급으로 미화 20불이 든 봉투를 받았다.
"오, 이선생 이것 이달 월사금이오. 우리나라 돈으로 20불. 이것 정부에 가서 조선 돈으로
바꾸어 쓰시오."
그는 그것을 승만에게 전해 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선생 어머니를 오늘은 꼭 뵈러 갔으면
좋겠습니다..."
승만은 그전에 화이팅 부인의 물음에,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부터
승만의 집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 싶다고 늘 기회만 있으면 졸라왔었는데 오늘 월급을 받는
기회를 타서 그 이야기를 꺼내고 다시 승만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그러나 승만으로 말하면
아직도 가족들에게는 그가 배재학당과 이곳에 다니는 걸 숨겨오는 터로서, 그걸 먼저 그가
알리기 전에 화이팅이 그의 집을 방문하는 일이 생긴다든가 하면 여간 딱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
그의 주소도 도동이라는 것만 알리고 번지 같은 건 늘 주의해서 숨겨오던 터라, 오늘도 약간
얼굴을 붉히며
"미세스 화이팅, 고맙소. 우리집엔 인제 내가 쉬이 안내해 드릴 것이니 미안하지만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십시오."
하고, 그의 방문을 은근히 거절하였다.
"이선생 대단히 미웁소. 오늘도 같이 어머니에게 안 가시오?"
하며 화이팅은 승만의 부끄러워하는 모양이 이상한 듯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승만도 그의
익숙해진 듯한 언변이 우스워 같이 소리내어 웃었다.
승만은 화이팅 부인을 작별하고, 마치 날아라도 가고 싶은 기분으로 도동집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20불이면 인제 한 달은 그래도 가족들이 굶지는 않겠지?' 그걸 생각하니, 그의 마음은
여간 기쁜 것이 아니었다. 돌아다보건대 벌써 얼마 동안을 가족들은 혹독한 굶주림에 시달려왔던
것인가? 요즘 와서는 참으로 죽거리도 없어 굶는 저녁이 항다반하였던 것이다.
집에 돌아가자, 그는 가지고 간 월급봉투를 어머니 앞에 내어 놓고, 그가 지난해 동짓달
배재학당에 입학했을 때부터의 경과를 죽 이야기하였다. 그러고는,
"어머니, 인제사 알려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염려하실 건 없어요. 제가 설마 몹쓸 길에
떨어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하고 장담을 하였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는 아들의 고백이 끝나자, 목메인 소리로
"승만아 굶어죽어도 좋으니 행여 천주학은 하지 마라..."
하며 울었다.
좀처럼 눈물을 보이는 일이 없는 어머니의 우는 걸 보니 승만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스스로도 한없이 울어질 것만 같은 심정을 꾹 억누르며
"어머니 나를 믿으세요!"
하고, 뚜렷하고도 자신만만한 소리로 외쳤다.
2
승만의 매달 받는 수임으로써 가족들은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화이팅 부인은 한번
승만의 집을 알게 되자 매일같이 찾아와서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고 물질적으로도 또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는 동안 는 것은 화이팅 부인의 조선말뿐이 아니라, 승만의 영어도 또한 많은 발전을 하게
되어, 그들이 상대한 지 반년이 지난 뒤엔 승만도 어지간한 일상생활에 대한 영어회화에는
군색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1895년 8월, 승만은 제중원에 나가는 한편, 또 배재학당 펑커 교사의 초청을 받아
그곳의 영어교사로도 취임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실로 그가 배재학당에 입학한 지 꼭 8개월
만이었다.
8개월이라면 얼마 안 되는 동안이지만, 그는 이동안에 보통사람이 일생을 걸려서도 깨우칠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일들을 참으로 많이 깨닫게도 되었고 또 알게도 되었다. 영어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그동안에 개화당이 그 근본이상에 있어선 정당한 것도 알게 되었고, 세상에는
유교만이 사는 도리가 아니라 기독교도 또한 한 사는 도리임도 알게 되었고, 여러 개화당의
친구들을 통해, 정부의 움직임도 그전보다는 똑똑히 알게 되었다.
배재학당에 입학한 뒤로 그가 주로 사귄 친구들은 신긍우의 형제들 외에 이충구, 윤창렬,
이익채 등이었는데, 그들은 늘 개화를 주장하는 열혈청년들로서, 승만이 그들에게 배운 것은
참으로 많았다.
그들은 정부에 정치적 변동이 있을 때마다 승만에게 그것을 알리고, 자기들의 의견을 말한
뒤에 승만의 동의를 늘 구하는 것이 예사였거니와, 8월 20일 아침 민비의 살해사건이 있었을
때에도 맨 먼저 그 기별을 승만에게 알리고 비분한 감개를 말하며 찬성을 구한 것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이충구였다.
"승만형! 이런 비분한 일이 또 어디 있겠소? 오늘 아침 국모께서 일본공사 삼포란 놈들의 손에
살해를 당했다니! 우리는 얼굴을 어디로 들고 다니겠소? 천벌을 받을 무엄한 놈들... 살해하고는
또 그걸로도 부족해서 어구를 다시 불에 던져 살랐다니! 이놈들의 원수를 갚지 않고 어찌
견디겠소!"
"아니, 그게 정말이오?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오!"
이 비참한 기별엔 승만도 너무나 놀람과 동시에 이가 갈림을 느끼며 물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소! 정말이오, 정말이야!" 충구의 말에는 벌써 울음이 섞여 있었다.
"형도 아시다시피, 왜놈들은 이번 청일전쟁엔 이겼으나, 하관조약에서 정한 요동반도의 점유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세 나라의 협박과 간섭으로 취소해 버리지 않았소? 이렇게 제몸 주체도
못하는 주제에 우리나라에까지 손을 벌리려는 것이 얄밉기도 하려니와, 또 이 틈에 교묘히도
조정에 손을 뻗치기 시작한 러시아공사에게 정부가 흠빡 반하여서 모든 친일파들을 배척해 오던
것은 형도 잘 아는 일이 아니오? 여기에 악이 바친 왜놈들은 정상이를 불러가고 삼포란 놈을
보내오더니, 오늘 아침에는 기어이 그 보갚음으로, 대원대감을 일부러 공덕리로부터 모셔내어,
그분이 보는 앞에서 국모를 살해하여 장작더미 불 속에 던졌다는구려! 아! 분해라! 우리는 왜
이리도 약하오? 형!"
충구는 이렇게 말하며 분을 못 이겨 제 가슴을 제 주먹으로 쿵하고 쳤다.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소리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국모께선... 놈들에게 무찔리어 돌아가시며 친위대를 향해 '날 살리라' 하고 고함을 치셨다.
하오. 역적놈들, 모두 무얼 하고 있었는지! 형! 나는 기어이 이 원수를 갚으려 하오! 어떻게
해서라도! 인제 두고 보시오..."
"충구형... 일을 꾸미거든 나도 같이 하게 해주시오..."
승만은 무심결에 충구의 옆으로 가까이 가서 그의 손을 잡으며 진심으로 말하였다.
"고맙소. 그렇지만 형은 아직 그대로 계시오. 인제 더 큰일에 쓰일 날이 있을 테니..."
충구는 대답하며 승만의 잡은 팔을 가벼이 떨치고 그의 곁을 떠났다. 승만에게는 이 바르고
그른 것을 똑바로 가릴 줄 아는 충구와 같은 개화당이라면 얼마든지 조선에는 더 있어야겠다고
느껴졌다. 사실은 이미 그 자신도 그러한 청년 중에 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충구는 그뒤 꽤 오랫동안 제중원에도 학교에도 나오지 않았다. 승만은 그에게서 다시 기별이
있을 날만 까마득히 기다리고 있었다.
제4장
국모살해의 복수사건
1
그해(1885) 동짓달 열 하룻날이었다.
오랫동안 얼굴을 볼 수 없던 이충구가 낮에 제중원으로 찾아와서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우리집까지 같이 좀 갑시다."
라고 하여 승만을 그의 집으로 이끌었다.
그의 집에 당도하자 충구는 안방에서 식구들을 다 몰아내고, 술상을 가져오라 하여 승만에게
권하면서 조용히 말하였다.
"사실은 일을 좀 만드느라고 그동안 형을 찾지 못했지만 인제는 일이 다 되어 내일 새벽 바로
거사하게 되었소! 국모를 손수 모시고 있던 친위대들이 우리편이 되었으니 일은 반드시 성사할
것이오. 윤웅렬, 이도철, 그렛 하우스 등이 우리편이오. 우리는 내일 새벽 바로 대궐로
쳐들어가서 국모를 죽이게 한 친일파 내각놈들과 그 흉악한 왜놈들을 모조리 없이 하고, 상감을
모실 작정이오마는 혹시 일이 어찌될는지 몰라서... 그래서 사실은 형을 모시고 온 게지만, 형!
만일에 내게 화가 미치는 날이 있으면 내 가족들을 좀 보살펴주시오. 웬일인지 이 부탁은 꼭
형에게 해두어야만 할 것 같아 미안을 무릅쓰고 말씀드리는 것이오."
충구의 말을 듣고 있던 승만은 그전 언제와 같이 옆에 가서 충구의 손을 붙잡으며 "그게 무슨
말씀이오?" 하고 충구를 나무랐다. "요전에도 말한 것처럼 형의 하는 일이면 나도 같이할 각오가
있소. 형만 혼자 보내고 낸들 뒤에서 어찌 편안히 앉아 있겠소?"
"그렇지만 이번 일을 맡을 사람들은 이미 다 결정이 되었고 다만 내 뒤를 부탁할 친구만이
없소. 형을 빼고 싶어서 뺀 게 아니라, 그렇게 한 것은 역시 부질없지만 내 우정인 줄 아시오.
형은 6대 독자가 아니오? 그러니 인제 그 값이 될 만한 더 큰일에 몸을 바치시란 말이오... 그래,
형은 내 청을 들어주시려오? 어쩌시려오?"
그러나 여전히 충구의 생각과 말은 어느 한모 빈틈이 없어, 반대할래야 반대할 나위도 없었다.
그래 승만은 드디어
"그렇게 하리다."
하고 그의 청을 승낙하는 수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날 저녁상을 같이하고 두 사람은 그 방을 나왔다. 집을 나올 때에도 충구는 가족들에게
이렇다 하는 부탁 한 마디도 없었다. 그들은 나란히 길거리로 나와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악수를 하고 갈렸다.
승만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갔으나 밤새 잠도 오지 않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충구야말로
자기보다 너무나 강하고 의젓한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밝힌 뒤에 이튿날 아침 일찍이 승만은 충구의 그 뒷일이 궁금하여 다시 그의
집에 가 보았다. 그러나 으레 그때 그 집에 없어야 할 충구가 그의 부름에 직접 나와주는 데는
승만은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충구는 당황해 하는 승만에게 딱한 얼굴로 조용히 설명을 하였다.
"흥! 애석하게도 일은 다 틀렸소! 새벽에 우리들은 틀림없이 대궐문 앞에 가서 신호의 총을
놓았지만, 안에 호응하기로 약조한 놈들이 문을 열어주어야지! 놈들은 하룻밤 사이에 변절하여
도리어 우리를 향해 탕탕 총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오! 참 분하고도 어이가 없소. 사람들이
이렇게 되어가다가는 이 나라일이 어떻게 될는지... 일은 벌써 다 글렀소! 인제 오래잖아 포졸들은
우리를 잡으러 올 것이오."
"그럼 어째 도망하지 않고 그러고 계시오?"
승만은 참으로 딱하여 물어보았다.
그러나 충구는
"도망해선 무엇하게요? 내가 달아나면 같이 일하려던 사람들만 경칠 테니 내가 혼자 총책임을
지겠소."
할뿐이었다.
아무리 권해도 소용이 없으므로 할 수 없이 승만은 그 집을 나왔다.
그 이튿날 들으니, 충구는 이미 이도철과 같이 체포되고 윤웅렬은 윤치호와 같이 상해로
망명하였다고 했다.
법부대신 장박이 몸소 충구를 고문케 하니
"이 역적놈들아 내가 성공했으면 너희 놈들이 먼저 죽었을!"
하고 외쳤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런 기별을 들으면 들을수록, 승만의 이충구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마음은 점점 더해가기만
하는 것이었다.
2
그러자 그뒤의 어떤 날.
승만은 제중원에서 화이팅 부인을 가르치는 그의 일과를 계속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그의 집
하녀 복녀가 울면서 쫓아 들어왔다.
놀라서 일어선 화이팅 부인에겐 거리낌도 없이 그는 승만을 향해 떨리는 울음소리로 말하였다.
"서방님 큰일났어요. 아까 윤창렬씨가 서방님을 집으로 찾아왔는데, 그뒤를 따라서 순검들이
셋이나 쫓아 들어오며 윤선생의 손을 붙들어 잡고 '당신 이승만씨요?' 하지 않겠어요? 아니라고
하니 윤선생은 놓아주고 방으로 들어와서 샅샅이 뒤지고 있어요! 마님께선 어떻게 놀라시는지...
그러니 서방님, 집엔 가시지 말고 어디 숨으세요. 네?"
"그래, 윤창렬씨는 어떻게 되었니?'
승만은 물었다.
"윤선생은 순검들이 방에 들어온 틈에 도망했어요."
"알았다. 그럼 어서 집에 가서 마님께 잘 알아서 할 테니 내 일은 조금도 걱정 마시라고 해라.
어서 빨리 가거라."
이렇게 당부하여 승만은 복녀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진작부터 그런 예감이 전연 안 들었던
것도 아니지만, 돌연히 당하는 일이라 마음속은 어수선하기만 하였다. 충구처럼 일에 관계나 하고
당하는 일이라면 도 모르지만, 전연 사건에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을 잡겠다는 이 법은 또
무슨 법인가? 그걸 생각하자, 그는 즉시 피신할 것을 결정하고 화이팅 부인과 에비슨에게 그
사정을 말한 후에 그를 잠깐 동안 어디로 피신시켜달라고 청탁하였다.
그래 그는 에비슨의 부탁도 있고 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상투머리를 잘라버리고, 길 떠날
준비를 하였다. 바로 며칠 전에 단발령이 내려 있던 때인 만큼 머리를 길러두면 혹 정부의 눈에
가시가 되지 않을까를 염려한 때문이었지만, 사실인즉 진작부터 승만은 그 거추장스런 상투만은
깎으려고 마음은 먹고도 하루 이틀 미루어만 오던 판인지라, 차라리 이 기회에 깨끗이
깎아버리는 것이 오히려 속시원하였다.
모든 준비는 밤 동안에 다 되었다. 이튿날 이른 새벽, 그는 화이팅 부인의 수고를 빌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여자 환자로 가장하고 가마에 몸을 실은 뒤에 남문 밖을 나와 양화진으로 갔다.
양화진에는 화이팅 부인의 친구요, 또 승만과도 안면이 있는 지컵슨 부인이 혼자서 살며 조선말
공부를 하고 있었으므로 거기에 잠깐 몸을 감출 생각이었던 것이다.
양화진에 당도하여 지컵슨 부인을 만나니, 그는 마음으로부터 반가이 승만을 맞아주었다.
그러나 서울로부터 별로 멀지 않은 이곳 역시 안심하고 숨어 있을 처소는 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래 그는 여기서 꼭 하루를 지낸 뒤에 다시 이곳을 떠나서 황해도 평산에 있는 누님 집을
찾아갔다. 4백여 리가 넘는 길을 단 혼자서, 늘 사람의 눈을 피해 걸어갔던 것이다.
평산의 누님 집에 숨어서 그는 꼬박 석 달을 지내었다.
그러자 그뒤의 어느 날, 서울의 화이팅 부인은 이곳까지 일부러 사람을 보내 새로운 소식을
전해 왔다.
"이충구씨는 사형을 면하게 되어 서북의 섬으로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고, 이도철씨가 사형을
당한 외엔 딴 사람들에겐 별다른 화는 없을 듯하니 그만 상경하라."
는 부탁이었다.
정말로 그럴까 염려되는 바도 없지 않았으나, 승만은 우선 화이팅 부인의 부탁대로 상경해
보았다.
그러나 그가 상경한 뒤 오래잖아, 그의 염려와는 달리 정국은 또 한번 바뀌었다.
고종께서 궁궐을 나와 잠시 미국공사관에 계시다가 다시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게 되자, 곧
"국모를 살해케 한 원수들을 잡아죽이라"는 공포를 하였으니, 이 통에 장안은 또 한번 발칵
뒤집혀, 유길준, 장박, 박영효 등은 다시 일본으로 도망가고, 김홍집은 체포되어 맞아죽고, 잠깐
동안 서북의 섬으로 귀양살이를 가 있던 이충구는 다시 불리워 서울의 경무사가 되었다.
제5장
서재필 박사의 귀국과 협성회
1
1896년 가을 서재필 박사가 정부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부터 돌아왔다. 알다시피, 그는
1884년의 갑신정변 뒤에 일본에 망명해 있다가, 뒤에 미국에 들어갔었는데, 그곳에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워싱턴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신풍조의 세련을 쌓은 후, 고국을 떠난 지 12년 만에
갑오경장으로 성립된 유신당 내각의 위촉을 받아 정부의 고문격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가
조선에 머물기로 정부와 약조한 기한은 10년 동안이었고, 또 그는 그때 이미 한 미국 시민의
자격으로서 미국인 부인까지 동반하고 왔다. 물론, 갑신정변 뒤에 그의 가족들은 외가와
처가까지도 모조리 처형을 당해 버리고, 이제는 이미 그의 가까운 일가친척이라고는 서울에 한
사람도 남지 않은 때였다.
그야 하여튼, 서박사는 한동안 장안의 한 명물이 되었다. 그가 '실크 해트'에 '모닝'을
바로 입고, 그의 색다른 부인과 같이 길거리를 걸어다닐 때는 늘 몇십 명씩의 구경꾼이 그 뒤
를
졸래졸래 따라다닐 정도로 그는 유명하였던 것이다.
그가 귀국하여 오래지 않아, 배재학당에서는 그를 초빙해 강연회를 열었다. 그는 그때에도 역시
'실크 해트'에 '모닝'을 차리고 강단에 올랐는데, 태반은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서 좁은 강당은
미어질 듯하였다.
승만은 정각보다 한 시간이나 전부터 강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고, 그가 등단하자
또 그의 일거일동을 주시했으며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의해 들었다. 그가 그리한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처럼 호기심에 이끌린 점도 전연 없진 않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웬일인지 이 '서재필 박사'를 똑바로 알지 않고는 한시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마음속의
불안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들어만 온 소문으로서는 서박사를 못마땅하게도 알았고 또
한편으론 의심스럽기까지도 하였으니, '왜 조선사람으로서 떳떳이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 사람이
되어 미국 여자를 데리고 괴상한 차림새로 돌아와야만 하느냐.' 하는 것이 그에 대한 불만이었고,
또 '저와 같이 고국에서 삼족을 멸하는 중벌을 받고 미국인으로서 돌아온 사람이 참으로
마음으로부터 조국을 사랑한다면 얼마나 사랑할 수 있을까? 여간 건실한 마음이 아니면 그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는 것이 그를 똑바로 알아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의문이요 또
불안이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며, 12년 만에 돌아와 그의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서박사를 보고
있자니, 승만은 자꾸만 눈시울이 더워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승만의 의심과 염려는 한낱 쓰잘데없는 관심에 지나지 않았음을 드디어 그는 알았다.
아무리 고국에서 돌을 맞으며 쫓겨나도, 그뒤에는 또 삼족이 씨가 없이 무찔림을 당해도, 그뒤
오랜만에 한 외국인이 되어 돌아온다 하여도, 조국이란 역시 잊을 수 없는 것이며,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임을 승만은 서박사를 통해서 똑똑히 알 수가 있었다.
"여러분! 여러 가지 파란곡절 끝에 다시 내 나라에 돌아오니 뭐라고 했으면 좋을지 말문이
막히오..."
서박사는 먼저 이렇게 말하고 한참 동안 감격을 견딜 수 없는 듯이 말을 계속하지 못하였다.
그의 음성과 두 손은 떨리고, 안경을 슨 눈에서는 눈물 방울의 흔적이 역력히 빛났다.
이것을 보고 듣는 순간, 승만의 가슴속도 찌르르 하여지며, 문득 자기도 울어버릴 것만 같아
고개를 숙였다. '역시 제 나라를 버릴 수 없는 것은 그 나라 사람된 자의 필연이로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서박사의 눈에 어리는 저 뜨거운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승만은 이때까지 자기가 서박사를 의심하려던 것이 뉘우쳐지며, 그에 대한
신뢰감으로 가슴속이 그득하여짐을 느끼었다.
서박사는 다시 말을 계속하여, 조선의 아직도 깨이지 못했음을 말하고, 미국의 민주주의와
국회제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였다.
"미국에서는 인민의 권리라는 것을 대단히 존중합니다. 각 도, 각 고을에서 백성들이 각기
자기들 마음에 맞는 훌륭한 인물을 선거해서 정부에 보내면, 정부에서는 이들로서 국회를
조직하고, 그들이 정하는 대로 온갖 정치를 운영하게 됩니다. 법도 그렇게 해서 정합니다. 그러니
미국에서는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백성이 불평을 갖는 일이 없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국회는, 즉
그들이 뽑아보낸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까요."
서박사의 이 이야기는 적잖게 젊은 청년들을 감동시켰다. 그렇잖아도 그들은 정부의 전제에
대해 많은 불평을 품어오던 판이었다.
'백성이 마음대로 뽑아보낸 사람들이 정치를 움직이는 세상이 된다면 전제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온갖 타락과 무력은 저절로 없어지고 참으로 나라를 좋게 하여 보려는 열정과 힘도
자연히 생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그 이야기를 듣는 젊은 청년들은 누구나 미국을
부러워했고, 또 서박사를 통해 미국을 점 더 자세히 알고 싶어했고, 되도록이면 조선도 그렇게
만들어보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그뒤에도 서박사의 강연이 있을 때마다 청중의 수효는 점점 더하여갔고, 그를
흠모하여 그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그를 모시고서 좀더 자세히 배우자는
의견까지 내게 되어, 그 결과 서박사의 승낙을 얻어 생긴 것이 협성회라는 모임이었다.
2
협성회에서는 한 주일에 두번씩 서박사를 모시고 강연을 들었는데, 차츰 자리엔 정부의
고관들도 많이 참석하여 듣게 되었다.
배재학당패로서 당시에 서박사의 협성회에 관계한 것은 승만 외에 유영석, 민찬호, 서영석,
신흥우, 이완용의 아들 이승구 등이었는데, 서박사는 별 강연할 것이 없을 때는 이들 청년들을
시켜 토론회를 열기도 하였다.
가령 그 제목은 '민주주의와 전제주의'이기도 하였고, 또 '남자와 여자'이기도 하였는데, 제목엔
반드시 상대적인 두 개념을 내걸어, 그걸 가지고 둘로 패를 갈라 서로 반대편을 논박하고 자기
편이 옳다고 주장하게 하였다. 그 결과로서 그들은 상당히 변론술이 발전되었다.
이러한 어느 날.
서박사는 그들의 토론 도중에 문득 생각난 듯이 그들에게 박수하는 법을 가르쳤다.
"여러분은 아직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남이 연설할 때 잘하면 손바닥을 마주 때려 박수라는
것을 하는 법이오. 여러분도 잘 한다고 생각되거든 그렇게 해보시오."
그러나 이때 승만에게는 '아무리 미국이 좋다 하여도 이런 것까지는 흉내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또 한번 서박사를 고쳐 보면서 청중을 향해
"자, 그럼 우리 박수 합시다!"
하고 큰소리를 내어버렸다. 그처럼 그는 무슨 일에 열중하면 열중할수록 모든 형식적인 것을
미워하는 성미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박사는 역시 실크 해트와 모닝에 안경까지를 갖추고 큰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한
사람의 형식주의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승만의 소리를 듣자 곧
"좋으면 혼자서나 박수하지 남까지 똑같이 하자고 권할 것은 뭐야?"
하고 호통을 하였다.
그러자 온 강당 안은 한바탕 웃음판이 되고 말았지만, 이 언뜻 보기엔 사소한 듯한 일은 이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있어 참으로 재미있다. 아닌게아니라, 이 두
사람의 그뒤의 생애는 '손뼉을 칠 수 있는 사람'과 또 '손뼉을 칠 수 없는 사람'의 사이와 같은
차이가 없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서박사는 협성회를 통해 젊은이들의 계몽에 힘쓰는 한편으론 또 '독립신보'라는
제호로서 영어와 조선말 두 가지로 주간신문까지도 발간하여 일반을 깨우치기에 전력을
다하였다.
제6장
'협성', '매일'지의 청년주필
1
한편, 협성회의 젊은패들도 오래잖아 '협성회보'라는 주보를 따로 하나 내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서박사의 '독립신보'를 보고 신문의 성능이 대강 짐작되자 '우리도 신문을 하나 가지자'는
의견이 돌아, 앞뒤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곧 착수한 것이었으나, 여러 가지 기술이
부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담한 논설은 오히려 일반의 흥미를 끌어, 예상보다도 신문은
많이 나갔다. 승만이 주필이 되어, 유영석 등 협성회의 몇 사람과 같이 처음엔 등사판으로
박아내었으나, 나중에는 몇몇 미국 공사관 사람들의 후원을 얻어 마침내 활판으로 찍기까지에
이르렀다.
승만은 이 '협성회보'의 지면을 이용하여 정부의 부패한 관리들을 정면으로부터 공격하는 한편,
국민을 위한 민권정치를 시행할 것과, 국가의 독립을 보전하는 데에는 국민이 총궐기해야 할
것을 늘 기사로 보도도 하고 또 논설로 주창도 하였다.
"간신배가 작당하여 옹폐총명 한다."
"국민의 복리를 위한 입법을 새로이 하라!"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동포들은 모두 다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그가 늘 즐겨서 신문에 붙인 제목들이었다.
그러나 이미 부패한 정부는 부패했기 때문에 더욱이 이러한 불만과 요구를 그대로 두지는
않았다. 정부 내의 간신배들은 드디어 '협성회보'를 정부반대파라고 왕에게 고자질하여, 왕은
미국공사 알렌을 통해 '신문의 즉시 폐간'을 명령해 왔다.
어느 날 미국공사관에서 알렌이 기다린다 하여 승만이 가보니, 그곳엔 알렌과 아펜젤러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이 신문 폐간 명령까지의 전후 사실을 자세히 알려주며
"섭섭한 일이지만 할 수 없는 일이오. 오늘부터 신문은 박지 말아주시오."
하였다.
"폐간이라니 안될 말이오!" 승만은 즉석에서 반대하였다. "우리를 정부반대당으로 몰다니?
공정한 여론을 전개하는 우리를 그렇게 몰고, 타락한 관료배들의 말을 언제까지나 그대로
믿어간다면 이 나라일은 대체 어떻게 되겠소? 더 뚜렷한 이유를 내세우기 전에는 신문은 폐간 못
하겠소."
"아! 이선생님 말씀이 옳은 줄 아오. 그렇지만 이 나라와 같은 전제정치 밑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왕이 명령하심을 어찌하겠소? 꼭 하고 싶으면 맘대로 하시오마는 우리는 인제부터 거기
관계할 수 없소."
그러나 알렌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필경 이제까지 보아주던 활판인쇄의 편리도 앞으로는
보아줄 수 없다는 뜻임에 틀림없었다.
승만은 눈에서 불이 나는 듯하였으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또 한번 그들의 정의감에 호소해 보고자 입을 열었다.
"알렌씨! 아펜젤러씨! 당신들은 한번 당신들의 조국 미국의 초창기인 독립전쟁 당시를 회고해
보시오! 지금 우리나라도 꼭 그렇소.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것이오. 그러니 이때까지
보아주시던 편리를 계속해 주시오."
그러나 그들은 빙글거리기만 할 뿐이요, 대답은 끝까지 "그럴 수 없소"였다.
"그럼 그만두시오. 그렇지만 우리 힘으로 신문은 인제 기어이 다시 나올 테니 두고보시오!"
하고, 승만은 그 자리를 물러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승만은 협성회관으로 돌아오자, 친구들을 모아놓고 그 대책을 상의해 보았다. 그들은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별일이 있더라도 신문만은 계속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2
그러나 뜻과는 다른 것이 현실이어서, 가난한 서생인 그들의 힘을 모아, 한 개의 신문을
송두리째 경영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큰 난관은 활판을 구할
길이 아득한 점이었다.
그래 그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 일 때문에 애를 태우고 지내다가 어찌어찌하여 활판 한 벌이
얻어 걸리게 되었다. 김익승이란 사람이 갑오년에 일본엘 갔다가 활판 한 벌을 일본인 직공까지
한 사람 10년 기한으로 끼어서 사온 게 있었는데, 청일전쟁 뒤의 옥신각신 통에 놀고 있는 것을
유영석이 어디서 알았는지 와서 귀띔을 해주어서 협성회의 간부 몇 사람이 찾아가 떼를
쓰다시피 하여 간신히 얻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김익승의 활판을 얻게 된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십년 가뭄에 비를 만난 것보다도
더 반가웠다. 그들은 남문 안 싸전 거리에 집 한 채를 빌려서 이 활판을 마치 어여쁜 신부나
모셔들이듯 고이고이 떠받들어다가 거기 차리고, 다시 환희용약하여 신문을 계속하였다.
'협성회보'가 폐간 당한 뒤라, 또 정부의 간섭이 있을 것을 고려, 제목은 '매일신문'이라
고치고, 내친 김에 큰 맘을 내어 일간으로 날마다 내놓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가난한
애국청년들의 손으로 운영된 이 매일신문은 실로 이 나라에 있어서의 맨 처음의 일간신문이
되었던 것이다.
날마다 신문을 찍어내자니 자연 일도 바빠, 유영석은 아주 배재학당을 그만두고 신문에만
전력을 쓰게 되었고, 기자의 수효도 그전보다 늘어 이종일이란 사람이 새로 잡보의 기사를
취재해 썼고, 최정식이란 이가 승만과 같이 논설을 쓰는 사람으로 와 있게 되었다.
신문은 국문만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하는 데는 친구들의 반대도 많았으나, 승만은 끝까지
고집하여 애써서 한문은 한 자도 안 쓰도록 노력했으니, 그가 이렇게 일부러 고집을 세운 데는
적잖은 포부가 있었다. 민주주의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지한 일반 민중이 깨야 한다.
갑신정변 이후 유신당은 이 점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민중은 민중대로 내버려두고 강제적으로
정부만을 뜯어고치려다가 실패하였다. 그러므로 유신을 근본적으로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중을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신문을 우리말로만 박아 퍼뜨려 한문을 한 자도 모르는
아녀자나 일반 상민계급에까지도, 그와 그의 동지들의 포부를 널리 선전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로 아닌게아니라, 신문은 날개가 돋힌 듯이 잘 나갔다. 가끔 장동의 시장 같은 델
지나다가 보면, 가게에 앉은 장사치들까지 '매일신문'을 펴들고 앉아서 희희낙락하고 있는 모양이
승만의 눈에 띄게끔 되었다.
그럴수록 그들은 용기를 더하여, 민중을 민주주의적으로 계몽하고 인도하기에 있는 힘을
다하였으니, 특히 승만은 밤잠도 자지 않고 날마다 논설을 꼭꼭 하나씩을 썼다. 왕께서 이 무렵
러시아편에 기울어져 그들의 공사관에 가 계시는 것을
"왕은 대궐로 돌아오셔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였고, 당시 러시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삼림권을 반대한 것도 그였고, 러시아가 다시 경상도의 절영도와 진해만을 그들의 군항으로 쓰기
위하여 정부로부터 빌리게 되었다는 기별을 탐문하자, 며칠을 두고 이를 반대하고 걱정하는
논설을 계속 발표하여 많은 민중의 공명을 얻어서 마침내 만민공동회를 열기까지에 이르게 된
데도 그의 힘은 컸다.
만민공동회란 말하자면 당시 스스로 자각하여 일어선 민중들의 모임으로서, '매일신문'과
'독립신문'을 통하여 민중은 절영도와 진해만 문제를 알게 되자 격분할 대로 격분해 있던 판에,
이승만 일파의 가두선전 연설을 계기로 수천 군중이 손쉽게 결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철석같은 시위와 반대 진정 때문에 한동안 위태하였던 두 개의 항구는 무사하게 되었고,
러시아의 뻗쳤던 마수는 한동안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7장
독립협회
1
한편, 배재학당에서 서박사를 중심으로 모이는 '협성회'는 '독립협회'로 이름을 고쳐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이렇게 새 출발을 한 데에는 당시의 정치활동의 긴박성에
비추어 좀더 모임의 확장을 꾀한 때문이 아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보다도 더 직접적인 원인은
정부로부터 서박사가 배재학당에서 강연하는 걸 금지한 때문이었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서박사의 강연회엔 정부의 관료들이 언제나 많이 참석해 있었는데, 그들이 왕에게 가서 뭐라고
보고를 하였는지, 뜻밖에도 왕은 알렌 공사를 통해 이것마저 중지할 것을 명령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에 불만을 품은 협성회원들은
"그럼 딴 데로 나가서라도 하자"는 의견이 일치해서 백방으로 그들의 옮겨갈 곳을 물색하던
끝에, 드디어 발견해낸 것이 서대문 밖 모화관이었던 것이니, 모화관은 알다시피 병자호란 이후
청국의 사신을 영접하고 그들의 사나운 비위에 아첨하기 위하여 지은 집으로서, 협성회 사람들은
이 집에 들게 되자, 그 비겁한 이름을 없애버리고자 머리를 기울인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독립관'이었으며, 또 '독립협회'였던 것이다.
"이 더러운 이름을 가진 집은 인제부터 독립관이라 하고, 우리의 모임도 그렇게 고쳐
독립협회라고 합시다."
"그럽시다"
하여, 곧 그들은 거기 협회의 간판을 써붙이는 한편, 그 옆에 있는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 독립문까지 세웠다.
이 무렵의 독립협회의 중심인물들은, 이상재, 남궁억, 윤치호, 정교 등으로서, 그들의 애국열과
혁명의욕은 참으로 물불을 헤아릴 줄 몰랐으니, 서박사의 주창으로 '사자동맹'을 맺어 죽음을
내걸고 외세에 항거하며 그들의 포부를 실천하기로 각오를 세우던 것도 이때의 일이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루고 닳도록' 하는 저 우리의 애국가가 윤치호의 손으로써 씌어진 것도 모두 이때의
일이었다.
독립협회에서는 마침내 정부의 자문기관으로서 중추원을 세우라는 요청을 정부에 정식으로
하게 되었다. 직접으로 정부의 고문이 되어서 그들의 그릇된 점을 간하는 기관으로서 이것을
세우고, 협회원들이 여기 전부 참가하여 정부를 개조케 하고, 국운을 바로잡으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니, 말하자면 서재필 박사가 늘 말하던 미국의 국회와 같은 것을 이 나라에도 한번 세워보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 요청은 헛되어 거절당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왕의 노염을 사서, 서박사를 다시
미국으로 돌려보내는 나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왕은 그렇잖아도 가뜩이나 미국식
민주주의의 세력이 늘어가고 있는 걸 걱정하고 있던 판인데, 거기다가 수구파의 간신배들은 있는
소리 없는 소리 왕에게 일러바치고, 심지어는 서박사가 안경 쓰는 것까지를 '목무군부'니
'불경'이라 몰아, 고종은 그들의 책략에 고스란히 넘어가서, 또다시 알렌 공사를 불러 "서재필을
미국으로 데려가게 하라"고 분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1898년, 서박사는 고국에 돌아온 지 3년
만에 다시 아메리카로 떠나지 않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는 아메리카로 돌아갈 때에, "처음
약조는 10년 동안이었으니 10년치의 월급을 내지 않으면 물러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기어이
그것을 받아 가지고 갔다. 오, 얼마나 그는 조국을 사랑했음으로 해서 또 원망했을 것인가.
승만은 그것을 생각하니 차마 울 수도 없는 심경이었다.
서박사가 떠난 뒤, 후임 회장과 '독립신문'사장에는 윤치호가 취임하였으나 그는 본래 모험심이
적고 약은 사람이라, 협회의 통솔은 그전처럼 잘 되지 않았고, 일반사회에서도 협회를 점점 남의
집일같이 보기 시작하였다. 거기다가 또 정부는 이 기회에 독립당의 세력을 아주 꺾어버리려고
부상배의 두목 길영수란 자를 시켜 팔도의 등짐장수를 모이게 하여 일진회와 보안회를 만들게
하고, 갑오년에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에게는 또 바로 황국협회라는 것을 조직케 하여, 정면으로
독립협회와 대립케 하였으니, 독립당의 위기는 참으로 이때부터 비롯하였던 것이다.
2
이와 같이 독립당을 박해할 계획이 은연중에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오후.
승만이 배재학당에서 맡은 교수를 끝마치고 독립신문사엘 들르니, 사장 윤치호는 무슨 큰
걱정이 있는 듯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거 아무래도 큰 야단날 것 같소."
하고, 승만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말하였다. "상감께서 나보고 궐내로 들어오라고 하시는데,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고 말려나 보오."
"일이야 무슨 큰 별일이 있을라구요. 하여간 부르신다면 빨리 들어가나 보시구려."
승만은 이렇게 그를 달랜 뒤에 같이 밖으로 나와, 해어스름 때 신문사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승만이 해어스름 때 다시 신문사엘 가니, 윤은 벌써 대궐을 다녀 나와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들으면, 대궐에 들어가니 상감께선 뜻밖에도 다짜고짜로 "너 어제 저녁 어디서 잤니?" 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잔 곳을 알려드렸더니 "그럼 어서 나가거라"하여서 그만 나왔는데,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그는 여전히 질린 얼굴로 말하였다.
"설마하니 상감께서 손수 형을 포박할 장소까지 조사하시겠소. 원래가 싱거우신 분이라
궁금해서 불렀다가 그냥 입에서 나오는 소리로 물어보신 것이겠죠."
승만은 또 한번 그를 위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승만의 상상은 맞지 않았다. 윤은 그날 밤 집에서 자다가 뜻밖에도 별순검들의 포위를
받고, 뒷문으로 도망하여, 배재학당 아펜젤러의 집에 숨어야 할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화는 드디어 승만에게까지도 뻗치었다.
윤치호가 피신한 이튿날, 승만은 사설을 써들고 신문사로 가다가 같은 사원 유영석을 만났는데,
그는 당황한 말로
"독립당원 잡으라는 방이 붙은 것 못 보셨소? 어서 피신하시오!"
하는지라,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 길로 그의 집 근처에까지 가서 살펴보니, 아닌게 아니라 그때
벌써 그의 집은 두 겹 세 겹으로 별순검들에게 둘러싸인 뒤였다.
승만은 다시 방이 붙었다는 남대문 앞으로 나가 보았다.
"독립당이 도당을 모아 국권을 침해하니 수령을 잡아 처벌하고 해산케 하라."
남대문에는 아직 쓴 지도 얼마 안 되는 검은 먹글씨로 이러한 왕의 칙령이 붙어 있었다.
이걸 보고, 이걸 써붙인 까닭이 이해되자, 승만의 쌓이고 쌓였던 울분은 모두 한때에
폭발하였다. 그는 주의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이 방 앞에 모여섰는 무리들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고 부르짖었다.
"흥! 우리보고 국권을 침범한다고? 간사한 대신놈들! 네놈들이 음모하여 상감의 총명을
막는다!"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외치며, 그는 그 길로 정동에 있는 아펜젤러의 집으로 향하였다.
아펜젤러의 집에는 이미 윤치호, 이근호, 최정덕, 윤학주 등이 벌써부터 모여서, 돌연히 변한
사태에 변색들을 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승만은 그들의 골을 보고 있자니 치미는 울화를 어찌할 수 없어
"어서 나가 역명을 씻을 생각들은 않고 왜 이러고들 앉아만 있는 것이오?"
하고 큰 소리로 호통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별다른 대답도 없이 여전히 떨기만 할 뿐이고, 윤치호가 겨우 나직한 소리로
"야단났소. 이상재, 남궁억이 모두 경무청에 붙들려갔는데 형도 조심하시오. 6대 독자로 괜히
큰일나리다."
승만은 이러한 그들을 할 수 없이 거기 그대로 남겨두고, 문밖으로 뛰어나와 육조 앞으로
달리어 갔다.
국권 회복과 외세의 배제를 위해서는 죽음을 같이하자던 동지들이 갇혀 있다는 경무청 앞에
당도하자, 승만은 자기 자신의 몸에 위험이 미칠 것까지도 잊어버리고 길거리의 군중과 지나는
행인들을 향하여 부르짖었다. 이러한 가두연설은 그에겐 이미 많은 경험이 있는 터였다.
"여러분! 지금 이 경무청 안에는 우리들 독립협회의 동지들이 갇혀 있습니다. 침략해 들어오는
외국 세력을 방지하고, 경상도의 한쪽이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가려 할 때에 도로 찾아낸
우리들 독립협회원들의 공적과 사업은 여러분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자리에서 바로
만민공동회를 다시 열어, 대표를 뽑아서 경무청에 교섭하고, 우리 동지들을 한시바삐 빼내어
기울어져가는 내 나라의 운명을 건지도록 합시다!"
그의 성의와 힘을 다해 외치는 소리에 지나던 군중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모여들어, 드디어
경무청 앞은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렇게 만민공동회는 또 한번 열린 것이었다.
제8장
만민공동회의 영도자
1
마침내 군중은 승만에게 동의하여 그를 만민공동회의 대표자로 선정하고, 체포된 독립협회원의
석방을 정식으로 경무사에게 요구할 것을 그에게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승만은 공동회의 대표로서 경무사 김정근에게 면회를 청해 그를 만났다. 그는 승만이
들어가자 그의 옆에 놓아두었던 군도를 집어들었으나 승만에겐 그런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황명이 어제 같은데 이 무슨 일이오? 독립협회원들을 어서 빨리 놓아주고, 그들에게
독립운동을 추진케 하시오!"
하고, 그는 큰 소리로 요구할 것만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정근은 "빨리 해산하라"는 말을 할 뿐으로 요구조건에는 대답도 하지 않는지라,
승만은 다시 밖으로 나와 그 경과를 알리고 다시 군중을 지도하여 경무청에 갇힌 17인의
동지들이 아주 놓여나올 때까지는 공동회를 언제까지나 계속하기로 하였다. 한번 정의감에
감동된 군중이란 그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 동안만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자진하여 생사를
같이할 것을 맹세하는 청년들의 수효를 헤일 수 없을 정도로 공동회의 결속은 점점 굳어만 갔다.
그날 저녁 경무청에 갇혔던 17인의 동지는 평리원(지금의 고등법원)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승만은 다시 군중을 이끌고 평리원 앞으로 몰려가서 그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밤을 밝혀가며
외치고 또 외쳤다. 군중의 수는 밤이 되자 점점 더하여 정말로 이 공동회를 지키려는 사람뿐이
아니라, 나중엔 거지 부랑배까지도 있는 대로 다 모여 참으로 수만 명이 되었다.
승만의 연설에 감동하여 울면서 나와서 금가락지 은비녀 같은 것을 비용에 보태 쓰라고 내놓고
가는 부인네도 있었고, 어떤이는 일부러 달걀을 초에 타가지고 와서 "목 쉬는데 이걸 잡숫고
말씀하세요" 하며 권하는 이도 있었다. 배가 고파 요기를 하러 종각 거리 국밥집 같은 델 가면,
"공동회 양반입죠? 많이 잡숫고 나라일 좀 잘되게 하여 줍쇼."
하며 음식값은 아무리 주어도 굳이 받지를 않았다. 승만은 그런 그들을 대할 때마다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에게 보답할 각오를 또 한번 새로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공동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러 날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이 공동회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만은 없다고 느꼈던지, 어느 날 새벽
한떼의 무장군대를 보내, 북을 울리면서 군중의 틈을 헤치고 행진하게 하였다. 이때는 마침
새벽이요 또 가을바람이 수월찮이 싸늘하여 군중의 수효가 가장 적은 때였다. 그래 '무장 군대의
시위에 군중이 헤어지면 어떻게 하나?' 염려한 승만은 그들을 이런 때 결속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용기를 보여야 할 것을 깨닫고, 무장군대가 군중사이를 헤치고 들어오자, 맨 앞에서 가는
자의 메고 가는 북을 발길로 힘껏 걷어차며
"이놈들 애국자들에게 이게 무슨 모욕이냐?"
하고, 큰 고함을 쳤다. 이 서슬에 가을 새벽공기로 마음이 헷갈리기 쉽던 군중은 다시 기운을
얻어 사방에서 고함을 치며 단결을 새로이 하였고, 군대는 그냥 헛되이 지나가 버렸다.
이러한 공동회인지라 경향각지는 이 때문에 떠들석하였고, 정부도 마침내는 그 태도를 고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은 드디어 정식 칙사로 민영환을 공동회장에 보내, 종로의 한구석에 차일을
치고 단을 모으게 한 다음, 왕의 조서를 공포하게 하였다.
"짐은 공동회중이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빨리 해산하고 물러가서 진정하고 있으라."
조서의 내용은 대강 이러하였다.
그러나 승만은 여기에서 굴하지 않고,
"체포한 독립회원들을 지금 바로 내어놓고, 그들을 잡게 한 간신배들을 곧 쫓아내라."
하고, 강렬히 주장하였다.
그 결과로 민영환은 다시 왕에게 교섭을 갔다왔었는데, 드디어 승만이 요구한 것의 전반만은
왕의 승낙을 얻어, 그날밤으로 17인의 독립협회 동지들은 모조리 놓여 나오게 되었다.
그들이 놓여 나와서 공동회장에 나타나, 그들의 그동안 지낸 감상과, 앞으로 독립협회의 나아갈
길에 대해 연설을 하자, 모여있는 수만 군중은 박수갈채를 하고 그 중에는 흥분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소리내어 우는 사람, 울음 섞인 소리로 뜻모를 고함을 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민영환은 다시 두번째의 조칙을 받들고 단에 올라서 다음과 같이 그것을 읽었다.
"짐이 특별은사령으로써 17인의 독립당원을 석방하는 바이니 인제는 물러가서 안돈하고
기다리면 모든 정치를 다 개량 발전시키겠노라."
하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군중이 저절로 얽히어서 물러나질 않았다. 한번 그들의 주장이 무사히
통과되는 승리감을 맛본 그들은, 이 마당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정부를 숙청하고 간신배들을 몰아내어 유신정책을 진행시키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물러나지 않는다!
고, 입입이 외치며, 다시 공동회를 발전시켜, 이번에는 왕이 계시는 러시아 공사관의 대한문
앞으로 물밀듯이 몰려갔다.
일이 이렇게까지 발전된. 이때부터 유명한 정치가와 귀족 부호들 중에서도 그들을 자진하여
돕겠다는 이들이 많이 생겨, 김가진씨와, 판서 김종한을 비롯하여, 임오군란 때 민비를 구해냈던
고영근 등이 있는 힘을 다하였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패로서, 황흥, 이규완 등이 같이 합류해 볼
양으로, 돈을 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2
당황한 것은 참으로 고종황제였다. 그러나 이때는 각국의 외세와 이목이 무섭던 때인지라,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할 수는 없어, 머리를 기울여 겨우 생각해 낸 것이, 길영수의 부상배와
홍종우의 황국협회원들을 동원시켜서, 이들 만민공동회의 군중을 공격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시내에서는 여기저기서 독립당과 그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김덕구라는 청년이
청파골에서 부상배에게 맞아죽기까지 하였다.
이에, 독립협회에서는 정부에 시위를 하기 위하여 일부러 대한문 앞에서 그의 장례식을 굉장히
지내고, 공동회의 군중으로 하여금 한층 더 기세를 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벌써 왕명을 받은 팔도의 부상배 수만 명은 이때 바야흐로 대한문으로 대한문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집도 절도 없이 바람 따라 굴러다니며 등짐장사로 생애를 단련해온 무지한
그들은, 이제 그들이 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도 생각해 보려 하지 않고, 다만 왕명이기 때문에
공동회를 없이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 걸고 몰려오는 것이었다.
무엇을 알아들을 만한 귀가 트인 사람들이라야 상대해서 말이나 해보지, 그럴 수도 없는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참으로 처참할 정도로 무서운 것들이었다. 여기저기서 그들이 들고 온
몽둥이질 바람에 공동회중은 수없이 쓰러지고 또 흩어졌다. 사방에서 비명하는 소리가 들리고
피가 흘렀다. 형용이 아니라 대한문 앞은 한동안 수라장이요 지옥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승만은 한동안 정신만이 유난히 맑을 뿐이요 몸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를
지경에 있었다. 그러자 문득, 폭풍 가운데 바다와 같은 이 싸움판을 부상배의 두목 길영수가 그의
곁으로 지나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 도적놈아! 나하고 같이 죽자!"
승만은 너무나 기가 막혀서 목메인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그들의 너무나 많은 수효를 그
혼자의 힘으로서는 어쩔 재주도 없었다. 무엇이 그의 등뒤를 아프게 갈기는 듯하여 비로소
정신을 차려 주위를 돌아보니 공동회 사람들은 벌써 하나도 눈에 띄지 않고, 머리에 수건을 동인
부상배들만이 몇 겹으로 그를 에워싸고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승만씨! 정신 차리시오!"
어디선지 누가 아스라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 비로소 그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그들의 둘레를 뚫고 서소문 쪽을 향해 줄달음질을 쳤다.
이렇게 하여 그는 겨우 목숨을 건지기는 하였으나, 울분함을 견딜 수 없어 크나큰 통곡이
저절로 나왔다.
그러나 그는 한번 적의 둘레를 헤치고 나오자, 울고 달려가면서도, 같이 도망하는 패들을 향해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내 뒤를 따르시오!"
하고, 연거푸 고함을 쳤다. 이에 호응하여 얼마쯤의 군중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수효는
비록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모두 칼로 쳐도 베일 것 같지 않은 굳은 각오를 얼굴에 나타내고
있었다.
그래 승만은 그들을 이끌고 다시 종로로 나가 공동회를 모았다.
"등짐장사치를 모아 우리를 죽이려 하다니 너무나 분하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의 요구를
끝까지 관철하기 전에는 우리는 물러나지 맙시다."
승만은 다시 외쳤다.
"그럽시다!"
"그럽시다! 나라일이 안 될 테면야 살아서 무엇하겠소!"
이렇게 대답하여 피있는 청년들은 다시 한 사람 한 사람씩 모이기 시작하였으니, 이때에 모인
사람들만은 참으로 곧 총알이 쏟아진대도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다시 종로에 공동회 결성'이라는 신문 호외가 돌았다. 장안은 다시 바짝 긴장하였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각국 공사들은 공론을 하고 고종황제의 잘못이라고 힐난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 대책으로서 시행된 것이 대한문 앞에서의 조서발표였다. 왕은 마침내 독립협회
대표와, 길영수, 홍종우들과, 각국 공사를 대한문 앞에 모으고
"너희들이 만족할 만한 새 법령을 곧 세우겠다. 여기 있는 각국 공사들이 그 증인이니 염려
말고 해산하라."
고, 선포하는 데까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결과로 오래잖아, 서박사가 있을 때 독립협회에서 요구한 중추원이 서게 되었다.
제9장
중추원과 격문사건
서박사를 미국으로 다시 쫓아보냈던 직접의 원인이 되었던 중추원은, 늦게야 인제사 한
무마책으로 설립을 보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때의 무마책에서 나온 것인만치,
독립협회에서 애초에 요구한 바와 같은 정말 민중의 의견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그들의 의견을
채택하기 위해서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의관이라는 허울좋은 감투를 주어, 슬그머니
달래 보려는 정부의 얕은 속셈에서 세워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의장엔 일부러 참판
이종건과 같은 독립협회의 정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을 임명해 앉히었고, 소장의원들의
열렬한 주장은 한번도 채택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늘 위로부터 억누르기만 하게 되었다.
이러한 중추원인지라 승만의 왕성한 민주주의 사상이 여기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는
중추원에 얼마동안 나다니는 동안, 그 진부한 관복이라는 것은 한번도 입어 본 일이 없이 늘
두루마기에 커다란 지팡이 하나만을 끌고 다니며, 여전히 부패한 정부의 쇄신을 부르짖고, 그들을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러 차례 민영환 등으로부터 "근신하라"는 명령도 받았으나, 그는
그런 말은 들은 체도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드디어 이들의 형식주의에 분격한 나머지,
"중추원을 둘 테거든 지금 있는 것과 같은 고루한 완고파를 웃대가리에 앉히고 억누르려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일본에 망명해 있는 박영효씨라도 데려다가 앉히라!
고, 주장하는 데까지에 이르렀다. 그때의 형편이 이 '박영효'라면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든
좋아하는 사람이든 유신의 거물로서는 일반이 인정할 만큼 유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이 엉뚱한 주장은 정부의 큰 반감을 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그의 비위까지 거슬리어 놓았다. 민비의 참변이 있은 뒤로, 왕은 일본에 망명한
정치가라면 덮어놓고 원수처럼 생각하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이었다.
"이승만은 참으로 맹랑한 놈이다."
왕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심복 신하들에게 중얼거리며,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체포해
들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뚜렷한 죄가 없는 이상, 외국 공사관들의 안목 때문에도 그렇게
마음대로는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와 같이 정부가 승만에게 단단히 눈독을 올리고 있는 반면에, 그러나 승만은 이런 소문에는
조금도 구속을 받지 않고 여전히 그의 할 일만 계속하였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현 정부기구를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 어리무던한 중추원 따위에 만족해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이 일을 구체적으로 추진시키기 위해 이규완, 황흥,
김덕기, 박용만, 정순만 등의 소위 진고개파와도 연락하여서, 유신파의 대동단결을 꾀하는 한편,
오래잖아서는 드디어 그 실천에 착수하여, 황위를 황태자에게 넘기게 함으로써 대개혁운동을
일으킬 방침을 세우고, 그때에 설립되어 있던 청년회의 이름으로
"황제는 나이가 많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옮기셔야 한다."는 뜻의 격문을 박아 서울 장안에
골고루 뿌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방대한 계획의 한 서곡일 따름이었던 이 격문사건이 뜻밖에도 그의
일생에 일대 변환을 가져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어느 날 오후, 진고개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돌연히 수십 명의 별순검에게 체포되어,
꼼짝달싹도 못하고 경무청 평리원을 거쳐, 서소문의 감옥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1899년, 광무 3년 정월이었다.
제10장
탈옥과 재투옥
감옥이라야 그것은 기다란 담벽과 큰 목제의 대문으로서 둘러싸여 있을 뿐, 그저 긴 줄행랑
같은 목조건물에 연달아서 감방이 마련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 여러 감방중에 특별감방이라 하여 온돌방이 하나 바로 대문 곁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여기엔 이를테면 비교적 점잖다는 죄인만을 수용하는 곳으로서, 승만은 입옥하자 바로 이
온돌방을 쓰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감금당하자 각국 선교사와 공여사들이 모조리 일어나서 그를 변호하는 한편,
경무청 미국인 고문관 설필림(본명은 스트림 폴링)씨에게는 미국공사가 따로 편지를 내어서 그의
신변보호를 부탁하여, 날마다 그에게 간수들이 하는 짓을 감시하게 했기 때문에, 그는 비록
감옥에는 있을망정 아무도 그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볼 수 없었다.
그 온돌감방에는 승만이 들어가기 전부터 서상대란 사람이 들어 있었는데, 그는 간성이란
고을의 군수를 지낸 사람으로서, 유신명사 박영효와도 가까운 사람이었다. 승만은 한동안 이
사람과 단둘이서 고독하고 암울한 날을 보내다가, 어느 날은, 뜻밖에 최정식이라는 사람이 한
감옥 속에 들어 있음을 알게 되자 설필림에게 부탁하여 그까지 불러내어 셋이서 같이 한방에
있게 되었다. 최정식이라면 이미 위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승만과 같이 한동안 '매일신문'의
기자를 하던 사람으로서, 그뒤 그는 어느 모임에서 연설을 하다가 황제를 모욕했다 하여
불경죄로 몰려서 붙잡힌 터로, 사죄에 해당하는 중죄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이 마당에 와서도 조금도 그의 한 몸을 걱정하는 일이
없이 늘 명랑하게 웃고 지내었다. 그는 흔히 백구타령을 잘하는 솜씨로서, 울적한 밤에는 늘
목청을 가다듬고
"백구야 훨훨 날지를 마라. 너를 잡을 내 아니다. 성상이 버리시니 너를 좇아 예 왔노라."
하고 한 가락 뽑아, 승만과 서상대를 위로해 주기가 예사였다.
승만에게는 그러나 최정식과 같이 모든 것을 단념하고 안심해 버릴 수는 없는 초조가 있어,
날이 갈수록 가슴속은 바작바작 달아오르기만 하였다.
밖에서 들어오는 소문은 "각국 공사들이 맹렬히 석방운동을 하고 있으니 인제 곧 놓여나갈 수
있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만이 날아 들어오는 속에서 하루 이틀 감금의 날만이
거듭해 가니 속은 한층 더 조급하기만 한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어찌되었을까? 아주 없어지지 않았을까? 정부는 협회를 없애기 위하여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 가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는 한시 반시도 더 감옥 속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될 몸임을 느낌과 동시에, 또 자연히 여기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 감방의 죄수 서상대, 최정식을 달래어, 같이 탈옥하여 다시 만민공동회를
모아 협회를 부흥하기로 굳게 맹세를 한 후, 배재학당 때의 절친한 친구인 한글학자
주시경씨에게 밖으로 연락을 해서 탈출할 때의 호신용으로 세 자루의 권총을 비밀히 들여오게
하는 한편, 공동회의 응원대도 미리부터 조직해 놓게 하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그러나 살아서 탈출하게만 된다면, 우리는 기어이 만민공동회를 통해
다시 독립협회를 살려서 민주혁명을 기어이 성취하자."
승만은 이렇게 두 사람을 격려하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 기회는 왔다. 경무청 고문관 설필림씨는 그 고문관의 직책 때문에 가끔 감옥서에
와서 죄수들을 검사하는 일이 있었는데, 정월 30일 오후에도 마침 그 조사를 나왔던 것이다.
간수들은 모두 설필림씨를 따라서 감방을 살펴보고 다니기에 단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설씨가 들어올 대 열어놓은 감옥서 대문은 아직도 열린 그대로 있었다. 이미 탈옥을 작정하고
그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참으로 하늘이 그들에게 선택해서
제공한 좋은 기회임에 틀림없었다.
그래, 그들은 설필림씨에게 밖으로 불려 나온 때를 이용해서 "햇볕을 조금만 더 소이겠다"는 걸
핑계로 얼마 동안 밖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설씨와 간수들이 단 감방을 검문하는 틈에, 미리
준비해 간직하고 있던 권총을 빼어들고 쏜살같이 밖으로 내달았다. 대문 옆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간수 두 사람이 뒤를 따르긴 하였으나
"가까이 오면 쏜다!"
하고, 위협하며 내두르는 권총 때문에 그 중 한 사람은 엉거주춤하고 서서 바라보기만 하고, 또
한 사람은 그래도 끝내 뒤를 쫓는 것을, 최정식이 드디어 발사하여 발을 맞혀 주저앉혀 버렸다.
이 틈에 최정식, 서상대 두 사람은 날래게 몸을 피하여 배재학당 쪽으로 달아나 버렸으나,
참으로 불운한 것은 승만이었다.
승만은 있는 힘을 다하여 그들의 뒤를 따라가다가, 이때에사말로 공교롭게도 다리에 쥐가 나서
한 걸음도 더는 옮길 수가 없어, 그대로 길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면, 아무리 비겁한 추격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를 그대로 놓아둘 리는 없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파수병들에게 다시 체포되어 이번에는 남문 안의 병대영문으로 끌려갔다.
영문에서는 그의 두 발에 단단한 차꼬(족쇠)를 채워놓고, 곧 그가 탈옥하다가 잡힌 사실을
대궐로 보고했다.
그러자 대궐에서는 명령을 내리어 그날 밤 안으로 그를 다시 경무청으로 옮겨가게 하였다.
경무청엔 그때 박돌팍이라는 사람이 경부사로 있었는데, 그는 손수 승만에게 온갖 고문을
다하였다. 화젓가락에 불을 빨갛게 달궈 팔다리를 지지는 것, 두 팔을 뒤로 틀어서 공중에
오랫동안 매달아두는 것, 그밖에도 여러 가지 잔인한 형벌을 승만은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각오한 바가 있는지라, 굳이 끝까지 입을 다물고 박돌팍의 힐난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또다시 감옥소로 끌려갔다. 그러나 그가 들어가게 된 곳은 그전과 같은 온돌
감방이 아니라, 살인범 같은 중죄수만 가두는 널빤지도 깔지 않은 맨흙바닥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두 발에는 여전히 차꼬를 채웠고, 목엔 다시 칼까지 씌웠다. 이리하여 그는 캄캄한 흙바닥
위에 몇 사람의 살인 강도의 무리와 함께 웅크리고 앉아서 마침내 당도할 사형의 날만 기다리게
되었던 것이다.
제11장
옥중생활
1
한 가닥의 햇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흙바닥엔, 밖에 비가 내리는 날은 또 견디기 어려운
습기가 어렸다. 이러한 날 새벽녘이나 해어스름 때면 으레 또 같이 있는 중죄수들의 통곡이
터졌다.
"선생님, 나 같은 것은 죽으면 으레 지옥에 가겠습죠?"
차마 듣기 어려운 울음 끝에 어떤 자는 승만에게 이렇게 묻기도 하였다.
또 어떤 자는 밖에서 덜커덕 하고 문 여는 소리만 나도 승만의 어깨에 매어 달리며
"선생님 인제는 꼭 내 차례가 왔나 보지요?"
하고 비지땀을 흘렸다.
똑같은 사형수의 처지이건만 그들은 웬일인지 승만에게 물으면 모든 것을 알 수도 있고, 또
그들의 할 수 없는 영혼을 기댈 수도 있는 무슨 큰 기둥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마다 승만은 늘 그들의 울음을 달래고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정성을 다했지만,
아닌게아니라 스스로의 목숨쯤이라면 그는 벌써 어떠한 처형 앞에서도 조용할 각오가 서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를 아직도 울리고 서글프게 하는 것은 자기 아닌 자기 주위의 모든 것들, 저
후즐그레한 흰옷을 걸친 의지할 곳 없는 가족들과 동지들과 민족들의 일이었다.
어느 날 아침 같은 방의 한 죄수가 밖에 심문을 받으러 나갔다가 검사의 방에서 그날 신문 한
장을 훔쳐 가지고 들어왔다.
펼쳐보니 그 잡보란에는
"죄수 이승만은 이 나라에서 누구보다도 나라를 위하는 독립 운동자이니 그를 죽일 테거든
나를 대신 죽게 하여 달라."는, 채규상이라는 사람이 쓴 글이 실려 있었다.
그것을 읽고 있는 동안 승만은 문득 울음이 복받쳐서 소리없이 울었다. 그를 울리는 것은 역시
그 자신의 처지 때문이 아니라, 그의 처지를 그처럼 동정하는 알 수 없는 벗의 정의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때 밖에서는 또 한번 문이 덜커덕하고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승만아..."
하고, 자지러지는 듯한, 분명히 틀림없는 그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시오, 내 자식의 시체를 어서 주시오! 어젯밤에 처교했단 말 다 들었으니 어서
내놓으시오!"
늙은 아버지는 울음 속에서 계속해서 이렇게 옥리를 향해 부르짖고 있었다. 분명히 그는
신문에 난 채규상이란 사람의 글을 오해하고 온 모양이나, 그의 절망해 있을 심정을 생각하니,
승만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여 '칼' 위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걷잡을 길 없는 통곡에 잠겼다.
"이 늙은이가 미쳤나 처교는 무슨 처교요? 당신 아들은 아직도 멀쩡허니 살아 있으니 염려
말고 어서 가시오. 어서 가!"
어떤 옥리인지 날카로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이 어째? 이놈들! 거짓말 말고 어서 내 아들의 시체를 내어놔라. 어서!"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외치고 있었다.
승만은 듣고 있다가 참지 못하여
"아버지!"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아버지! 저는 아직 살아 있으니 안심하시고 어서 집으로 돌아 가시요."
그러자 밖에서는
"승만아!"
아버지의 부르는 소리가 다시 들리더니, 왁자지껄하며 덜커덕 또 문 잠기는 소리가 나는 것이,
옥리들에게는 늙은이는 끝끝내 문밖으로 쫓겨나는 모양이었다.
그뒤에도 가족들은 가끔 찾아와서 못잊히는 음성으로 문밖에서 승만을 불러, 승만의 가슴에
아픈 못을 치고 갔고, 또 어느 때는 감옥소에 정식으로 교섭을 하여 그를 만나주고도 갔다.
그러나 승만은 언제든 오래잖아 한번은 형틀의 이슬이 될 몸으로서 아직도 살아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여간한 설움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일 바엔 어서 빨리 죽여주었으면.' 드디어 그는
그것만을 바라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 그는 다시 가족들은 안 만나볼 작정으로 어느 날 아버지께 올리는 마지막 유서를 썼다.
"불효한 자식 하나 안 두신 셈 치시고 길이 잊으시옵소서."
이렇게 써서 언제든지 그가 형틀에 오를 때는 옆에 남은 사람에게 주어 전하게 할 양으로 몸에
지니고 있는데, 하루는 해질 때쯤 되어 문득 그들이 들어 있는 제5칸의 감방문이 덜컥 열리며
흉측한 옥리의 얼굴이 나타났다.
'인제는 틀림없이 내 차례로구나...'
이렇게 생각한 승만은 가슴패기에 끼었던 유서를 재빠르게 꺼내 옆엣사람에게 전한 다음,
무심결에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형틀에 올리고자 데리러 온 것은 사실은 승만이 아니라, 공교로이도 승만에게서 유서를
받아 지닌 그 늘 저승일을 걱정하던 강도였다.
승만은 애가 바작바작 탔다. 그러나 그 뉘우치던 강도는 승만의 유서를 돌려줄 겨를도 없이
황망히 끌려나가 그 유서를 몸에 지닌 채 목을 졸리고 만 것이다.
사형의 선고와 동시에 그 집행을 받을 수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행복이었을 것이다.
감옥소의 담벼락 밖에서 늘 사모치는 가족들의 목울음이 들려오는 속에서, 몇 달을 두고 집행의
연기를 받아야 하는 한 사형수의 조여드는 마음과 애탔을 긴 시간을 상상해 보라.
이러한 흙구덩이 속의 일곱 달이 꼬박 지나는 동안에, 승만은 그야말로 뼈다귀만 남았다. 다만
한결 맑아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늘 죽음과의 엄숙한 대면 속에서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그의
한 쌍의 눈동자뿐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예상과는 다른 것은 진실로 운명이었다. 7개월 동안의 사형유예에서 죽음이라는
걸 온전히 그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승만에게, 뜻밖에도 사형을 면제한다는 황제의 특사령이
내렸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물론 황제의 심경도 심경이려니와, 또 밖에서 많이 노력한 동지와 외국
공사들의 힘이 없은 바도 아니었지만, 승만에겐 참으로 이건 너무나 뜻밖이어서 한참 동안은
얼떨떨한 것이 곡 무슨 못 당할 일을 또 당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틀림없이 사형으로부터 풀리어 이 지긋지긋한 흙구덩이에서 다시 유기수의
감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2
허나, 이렇게 부자유한 감옥 속에 있어서도 그는 언제나 그의 일을 쉬지는 않았다. 감옥이면
감옥 그대로 거기 적합한 일거리를 찾아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 또한 그의 성미인
것이다.
흙감방으로부터 보통감방으로 옮기어가자, 그는 곧 죄수들의 교육을 한 방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뒤엔 감옥서장의 승낙을 얻어, 감옥 안 전죄수들에게까지 미치기에 이르렀고, 또
오래잖아서는 그들의 정신작흥을 위하여 감옥안에 도서관을 두게까지 하였던 것이니, 그때
서울에서 발간되었던 '신학월보' 제 1권 5호를 보면 그가 밖으로 내보낸 자세한 옥중 서신이
다음과 같은 소개전문을 붙여 발표되었는데, 그 속엔 그의 당시의 옥중생활 모습이 물심양면으로
잘 나타나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오히려 번거롭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을 피하고, 그 글 전문을
여기 옮겨, 직접 그의 붓을 통해 기록된 그때의 그를 엿보기로 한다.
-옥중전도-
우리 사랑하는 형제 이승만씨는 옥에 갇힌 지 우금 7, 8년인데, 그지간 고생하는 중 참아 견딜
뿐더러, 옥중에 갇힌 사람에게 전도하여 아름다운 일을 행한 것이 많은데, 그 대강 사기를 얻어
좌에 게재하노라.
허구한 옥중 생활에 거연히 육년이 되오니 자연히 인간고초도 많이 겪었삽거니와, 고초 중에서
경력이 생겨 항상 세상을 대하여 말씀하고 싶은 것이 무궁무진하오나, 그렇지 못한 사정이 여러
가지인고로 귀월보를 볼 때마다 침츰울울할 뿐이옵더니 다행히 오늘 기회가 있기에 옥중경력의
두 가지 긴중한 것을 대략 말씀코저 하니, 이 두 가지인즉 첫째, 깨달음이요, 둘째, 감사할
일이라.
세상사람이 항상 남의 허물은 보기 쉽되 자기 허물을 보기 어렵고 자기 허물은 용서하기 쉽되
남의 허물은 용서하기 어려운 고로, 사람이 한번 국법을 어기고 옥중에 들어가 몸이 징역에 처한
자를 보면 곧 세상이 용납치 못할 인생으로 알아 함께 접화하기 싫어하며, 심지어 죄지은 자는
다 죽여 없이 하여야 절도 강도 등의 2, 3, 4차 다시 들어오는 폐단이 없으리라 하며, 나도 또한
밖에 있을 때에는 이 뜻을 합당히 여겨 악한 자를 화하여 착한 자가 되게 하는 도가 있는 줄을
깊이 믿지 못하였삽더니, 처음으로 옥중에 와본즉 위생 간수 등절의 가련 측은한 사정은 이루
말할 수도 없고, 또 글 보는 것을 금하는 전례가 심히 엄하여, 혹 언문 고담책을 사사로이 보다가
발각되면 곧 빼앗으며, 혹 오랜 죄수가 공부를 하여 보겠노라 하면 관원들의 대답이 이곳은
학당이 아니니라 하매, 혹 유지한 자 있어도 공부하기를 생의치 못하거든 어디서 착한 말을
얻어들으며, 착한 말을 얻어듣지 못한 후에야 어디서 회개하는 마음이 생기리요. 이러므로 신문에
이르기를, 감옥서는 회개시키는 복당이 아니요 곧 도적 기르는 굴혈이라 하였나니, 이로 볼진대
5, 6년 전 옥중의 어떠함을 가히 알리로다.
그 중에 내가 홀로 특별한 인기를 얻어서 외국문의 여러 가지 서적을 얻어 주야잠심하며, 같이
있는 친구를 권면하여 가르치매, 몸 이르는 곳에 스스로 문풍이 생기더라. 다행히 본서장
김영선씨와 간수장 이중진씨가 도임한 이후로 옥정도 차차 변하여 진보한 것이 많거니와, 총명한
아이들을 교육할 일로 종종 의론하다가 작년 음력 9월에 비로소 각간에 있는 아이 수십 명을
불러내어 한 칸을 치우고 '가갸거겨'를 써서 읽히니, 혹 웃기도 하고 혹 흉도 보고 혹 책망하는
자도 있는지라. 좋은 일이 으레 이러한 줄을 아는고로 여일일심하여 지금 반년이 못되었는데
국문은 다 잘 보고 잘 쓰며 '동국역사'와 '명심보감'을 배워 글씨쓰기와 뜻 알기에 어려서부터
배운 아이들만 못하지 아니하며, 영어와 일어를 각기 자원대로 가르쳐서 성취함이 가장 속히
되었으매 외국 교사가 시험하여 보고 대단 칭찬하였으며, 산학은 가감승제를 매우 잘하며, 지도와
각국의 유명한 일과 착한 행실을 듣고 감화한 표적은 여러 가지인데 다 말할 수 없으며, 신약을
여일히 공부하여 조석기도를 저의 입으로 하며, 찬미가 너댓가지는 매우 들을 만하게 하며, 언어,
행동이 통히 변하여 새 사람된 자 여럿이며, 어린 마음이 장래에 어떻게 변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믿을 만한 사람은 이 중 몇 아이만한 사람이 많지 못한지라.
배우기를 원하는 어른이 여럿인고로 한 칸을 또 치우고 좌우로 분하여 영어와 지지와 문법을
공부하여 성취함이 대단히 속하니 이는 다 전에 한문과 외국언어에 연숙한 선비들이라 그 공효의
속함을 이상히 여길 바 아니라. 이 어른의 방은 신흥우씨가 거하여 가르치며 양 종씨가 거하여
가르치는데, 공부 여가에는 성경 말씀과 옳은 도리로 주야근면하며, 나는 매일 한시를 분하여 두
군데를 가르치매 관계되는 일이 불소하여 자연히 분주하나 성취되어 가는 것이 재미로워 괴로운
줄을 깨닫지 못할러라.
매토요일은 본서장이 대청에서 도강을 받은 후에 우열을 보아 종이로 상급을 주며, 불하는
자는 절로 벌을 행하여, 매주일은 정학하는데, 팽거 목사가 와서 공부한 것을 문답도 하며
성경말씀도 가르치매 그 효험이 더욱 대단한지라. 그동안 내외국 친구들의 연조한 것도 많은 중,
제물포 사시는 어떤 친구는 제국신문사로 성명없이 편지를 하고 지폐 2원을 보내어 감옥소
학비를 보태라 하였으매 신기히 여기지 않는 자 없는지라. 2원으로 보태어 아이들의 의복을 고쳐
입히니 참 감동할 만한 일이라. 대강 경상이 이러하매 전일에 가르치는 것을 불가히 여기던
이들이 보고 탄복하여 극력 찬조하나니, 예수 말씀에 "병인이 있어야 의원이 쓸데 있느니라" 하신
뜻을 깨달을지라.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밉게 여겨 물리칠 것이 아니라, 사랑하여 가르치면
스스로 감화되어 의원이 병인 고친 것 같이 효험이 드러날지니 이것이 나의 깨닫는 바이요.
혈육이 연한 몸이 5, 6년 역고에 큰 질병이 없이 무고히 지내며 내외국 사랑하는 교중
형제자매들의 도우심으로 하도 보호를 많아 받았거니와, 성신이 나와 함께 계신 줄을 믿고
마음을 점점 굳게 하여 영혼의 길을 확실히 찾았으며, 작년 가을에 괴질이 옥중에 먼저 들어와 4,
5일 동안에 60여 명을 목전에서 쓸어낼새 심할 때는 하루 열 일곱 목숨이 앞에서 쓰러질 때에,
죽는 자와 호흡을 상통하며 그 수족과 몸을 만져 곧 시신과 함께 섞여 지내었으되 홀로 무사히
넘기고, 이런 기회를 당하여 복음말씀을 가르치게 되매 기쁨을 이기지 못할지라.
작년 예수 탄일에 우리도 다행히 구속하심을 얻는 사람이 되어 기쁜 정성도 측량 없거니와,
만국만민의 영광스러운 명일을 옥중에서도 처음 경축하는 것이 또한 용이치 않은 기회인고로
관원과 죄수들이 우연히 수합한 돈이 뜻밖에 수백냥이 된지라. 다과를 예비하고 관민 40여 명이
모여 저녁에 즐거이 경축할새 그 지낸 예식은 다 말할 수도 없으며 이날 오전에 팽거 목사께서
예물을 후히 가져오고 위로차 오셨다가 모인 아이들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여 매주일날에 와서
가르치기를 작정하매 관원들이 다 감사히 치사하였으며, 서적실을 실시하여 죄수들로 하여금
임의로 책을 얻어보게 하려 하매 성서공회에서 기꺼이 찬조하여 50원을 위한하고 보조하기를
허락하여 4백냥 돈을 들여 책장을 만들고 각처에 청구하여 서책을 수합하매, 지어일본과 상해의
외국 교사들이 듣고 서책을 연조한 자 무수한지라. 영서, 한문, 국문의 모든 서책이 방금 있는
것이 250여 권인데, 처음 50일 동안에 책 본 사람이 268인이요, 지난달은 1삭 동안에 통히
249인이라. 천문, 산학, 경제 등 모든 정치상 관계되는 책이 더 있으면 보는 사람이 더욱 많을
터인데 방금 구하여 오는 책이 또한 불소하다 하는지라, 국민의 이만치 유조할 일이 없을
듯하도다.
이 험한 중에서 이 험한 괴질을 겪으며 무사히 부지하여 있는 것이 하느님의 특별히 보호하신
은혜가 아니면 인력으로 못하였을 바이요,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로 하여금 나를
감화시키는 힘을 주시지 아니하였으면 이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요,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으로 세상 죄인들을 감화시키는 교가 아니면 불소한 재정으로 서적실을 졸지에 실시하였을 수
없을지라. 이것이 나의 이른바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함이니, 이 깨달음과 감사함으로 여일히
힘쓰면 오늘 심는 겨자씨에서 가지가 생겨 공중에 나는 새가 깃들이게 될 줄을 믿겠나이다.
광무 7년 3월 8일
교제 이승만 백
제4편
해외풍상
제1장
출옥전후
1
긴긴 7년의 감옥살이를 마친 뒤에 1904년, 승만은 왕의 특사를 받아 다시 밝은 날빛을 보게
되었다.
돌아보건대 그건 얼마나 울적하고 지루한 일곱 해의 어두운 나날이었던가. 제아무리 참을성이
많고 정신이 큰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옥은 분명히 견디기 어려운 이 세상의 지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승만이 그 속에서 한 일과 배운 일은 또한 적지 않았던 것이다. 위에서 우리들이 본, 그
자신의 옥중서신에도 적혀 있는 것과 같이, 그는 감옥을 한 학교로 삼아 무지하고 마음이 어두운
죄수들에게 문자와 지식과 정신감화를 주어 그들을 많이 밝은 곳으로 인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그 스스로도 늘 공부와 마음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니, 저 방대하고도 철저한
선지자로서의 글 - 독립정신의 저서를 한 것도 그때의 일이요, 그의 과거의 투쟁에 다시
움직이지 않는 신념을 얻어 그뒤 일생동안을 한결같이 조국 광복과 인류 정의를 위해 싸우고
버티게 한, 그 태산 같은 기개도 이 긴 감옥 안의 체념생활에서 배워진바 많았던 것이다.
소개하는 순서가 좀 늦어진 듯하나, 그가 광무 3년 탈옥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사형수로서
흙구덩이 속에 갇혀 있을 때에도 늘 두 눈을 지긋이 감고 영어 단자를 기억해서 외우기에 힘써다
한다. 옆에 있는 죄수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런 걸 외어선 무엇에 쓰나?"
하고 물으면,
"죽으면 못 쓰더라도 산 동안은 할 건 해보아야지. 혹 쓰일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고, 그는 태연히 대답하며 그의 공부를 쉬는 일이 없었다 한다.
그러한 그가 1904년 다시 쇠사슬이 풀리어 감옥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에게 자유가 없던 7년 동안에 조국은 또 참으로 너무나 많이 변하였다.
청일전쟁 뒤로 한국을 에워싸고 나날이 반목과 알력을 계속해 오던 러시아와 일본은 마침내,
승만이 출옥하던 해인 1904년 2월에는 정식으로 전쟁을 시작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독립협회가
왕성하던 시절에는 그들의 인민항쟁 때문에 늘 별렀던 마수를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던
러시아와 일본은 승만이 감옥에 들어가고, 독립협회가 무력하여지자 다시 그들의 음흉한 손길을
펴기 시작하였던 것이니, 승만이 바로 입옥하던 해인 광무 2년에는 일본이 먼저 경상도의 마산을
손에 넣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다시 러시아가 그 마산의 남쪽에 있는 밤구미를 그들의
해군기지로서 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늘의 암투를 계속해 오다가 1903년 러시아가
만주로부터 한 떼의 마적단과 같이 내려와서 평안도 용암포를 점령하고 한국 정부와 타협하여
이의 조차권을 얻으려 하는 데에까지 이르자, 드디어 그들의 그늘의 싸움은 표면화하고 말았다.
광무 7년 6월 23일, 일본과 러시아의 대표들은 광무황제 앞에서 어전회의를 열고 "한국에
있어서의 우리나라의 이익을 보호키 위해서는 군대를 출동하겠다." "아니다. 차라리 북위 39도
이북의 한국을 중립지대로 만들자" 하는 등의 문제로 옥신각신하다 마침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서로 헤어져서 싸움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 승만이 감옥 문을 나왔을 때에는 전쟁은 한참 불을 토하는 때여서 경의와 경원의 두
선로는 군용으로서 급히 만들어지고, 일체의 통신사업은 이미 일본인에게 위임된 뒤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간악한 간섭으로 러시아와의 모든 조약은 깨뜨려지고, 일본인들을 정부의
고문으로 모시는 소위 고문정치가 결정된 때였다.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인의 세력은 이미 고정화하여가기 시작하는 때였다.
2
승만은 또 한번 밝은 날빛을 보게는 되었으나 마음속은 다시 암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협회는 다시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산한 지 오래인 뒤였을 뿐만 아니라, 일러전쟁의
여파는 한국에까지 거세게 휘몰려와서, 협회를 다시 단합할 수도 없을 만큼 정국은 긴박하였다.
거기다가 1902년 일영동맹이 체결된 뒤론 미국은 오히려 일본의 편을 드는 때여서, 미국
사람들의 후원을 얻어 다시 협회를 세우자면 자연히 일본인들과도 대립할 수 없게끔 되어야 하는
것이나, 이미 일본의 야심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승만으로선 죽어도 그들과 결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러시아가 일찍부터 그의 적수였던 것처럼 일본도 인제는 때려부숴야만 할
그의 한 적수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출옥하자 바로 별 휴양을 할 겨를도 없이,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에 나가 그 총무의
일을 맡아보는 한편, 앞으로 그의 걸어나갈 진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 별
묘안이 손쉽게 생기지 않았다. 가족들의 일이라면 그들은 이미 그의 뒤를 따라서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도들이 되어 있는 때이니, 그에게 꼭 할 일만 있다면, 그들의 뒷일은 다시 하늘에게
맡겨버리고, 또 한번 목숨을 내어 던져도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몸을 내어 던져서
'일'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하는 데에 있었다. 저 표적을 가서 맞추지도 못하고
떨어져버리는 한 개의 쓸데없이 희생된 화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투철한 지혜가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그러자 여러 벗들과 선배들로부터 "미국에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는 권고가 들어왔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같은 미국친구들도 열심히 그것을 그에게 권하고 주장하였다.
"인제는 모든 것이 국제 관계로서 결정되는 때이다. 청일전쟁 뒤에 온 저 삼국 간섭을 보라.
일본은 청국을 버젓이 이기고도, 러시아, 독일, 프랑스 세 나라의 간섭을 어쩌지 못해 다 먹은
요동반도를 도로 내놓지 않았는가. 이번 일러전쟁 직전에 생긴 일영동맹과 러불동맹 등을 보라.
그들은 모두 국제적으로 뭉치고 동맹을 함으로써 그들의 나갈 길을 튼튼히 하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일본과 러시아는 그들의 그 야심을 버리지 않는 한, 언제나 한국 독립의 적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미국만은 아직 우리에게 아무런 영토적 야심도 보인 적이 없다. 그리고 미국은 또
일본이나 러시아보다도 훨씬 센 나라다. 그러니 승만 그대는 미국에 건너가서 그곳의 문물을
똑똑히 배우는 한편, 한국의 실정을 미에 호소하여, 미국과의 친선을 도모하고, 청국, 러시아,
일본 세 나라의 장벽 때문에 똑바로 알리지 못한 우리나라 사정을 널리 유럽 각국에도 알리게
하라."
그들의 의견은 모두가 이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번 일러전쟁이 끝나면 그뒤 수습에는 반드시
미국이 나서서 간섭할 것이니, 더구나 승만이 이 기회에 꼭 미국에 가서 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들은 주장하는 것이었다. "뒷일은 아무 염려도 하지
마라. 나라 안의 일은 우리들이 모두 자네 몫까지 맡아서 잘 처리할 터이니 주저하지 말고 믿고
떠나라." 벗들은 부탁하는 것이었다.
물론 승만은 "더 생각해 보겠다"는 한 마디의 유예도 없이 곧 이 일을 승낙하고 말았다. 무엇을
더 돌아보고 생각해 보자 하겠는가. 이때와 같은 정국과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출발이야말로 가장 표적이 적확하고, 가장 보람 있는 한 개의 화살의 출발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음에... 그리고 이것은 이 나라에서 가장 나라를 사랑하는, 먼저 깨인 선각자들이 머리를
나란히 하여 결정한 일이었음에.
그리하여 승만의 출발이 결정되었다. 칠순이 넘은 늙은 부모와 아내와 어린 아들을 전란의
조국에 그대로 두고, 한국의 민중을 대표하는 한 개의 날카로운 화살, 한 개의 커다란 소리가
되고자 승만은 첫 항해의 길에 올랐다.
그는 인제 갓 서른 살이었다.
제2장
아메리카로 가는 길
1904년 11월 4일 오후 1시, 승만은 서울을 떠나 이튿날 제물포에서 기선 오하이오호로
출범하였다. 그러나 뜻밖에 항해 첫날은 거센 날씨로 하룻밤 동안 배는 캄캄한 바다 위를
헤매다가 첫 새벽에야 겨우 다시 출발하였다. 죽음을 극복할 기회는 어느 때 어느 곳에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승만은 새삼스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목포를 거쳐서 부산에 들렀다가 배가 다시 조국의 마지막 항구 부산을 떠난 것은 11월 8일 밤
7시였다.
승만은 싸늘한 늦가을 밤의 바닷기운이 스며들어오는 갑판 위에 우두커니 서서 배의 진행에
따라 점점 멀어져가는 부산항의 수많은 불빛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 수많은
가난한 불빛은 낱낱이 그의 가슴속으로 안겨 들어오는 듯한 감개가 생기며, 그는 무심결에
속으로 또 한번 맹세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잘 있어라 동포들이여. 내 끝까지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싸우리니, 동포들이여 부디 잘 있어라..."
그가 하관과 신호와 횡빈 등을 거쳐 하와이의 항구 호놀룰루에 당도한 것은 11월 28일 오전
7시였다. 먼저 검역관이 배에 올라서 승객들의 검역을 한 뒤에 상륙증을 배부하였다. 승만은
계속해서 3등을 타고온 터라, 정상적으로 말하면 상륙증을 탈 자격이 없었으나, 그들은 특별한
편의를 보아서 그에게 그것을 하여 주었다.
부두에는 벌써부터 미국 기독교 선교사 존 W. 웨드먼 박사를 비롯하여 몇 사람의 동포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는 그들의 뒤를 따라 조선 사람들의 교회로 가는 동안, 아직껏 보지 않은
경치와 수목들을 대하고는 주춤하고 발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찍부터 여러 사람들에게서
들어오기는 한 터이지만, 조선은 벌써 추운 겨울일 텐데 여기는 아직도 수목이 청청한
여름이었다. 말로만 듣던 야자수와 바나나의 수풀 속에 반나체의 남녀들이 유쾌히 웃으며 뛰놀고
있는 광경은 처음 보는 승만에게는 참으로 지상낙원과 같았다. 이러한 먼 곳에까지 우리
동포들이 와서 살고 있는 것을 보니 그의 마음은 여간 기쁘지 않았다.
"저녁때에 우리들은 호놀룰루로부터 20마일 밖에 있는 조선농원의 이화교회로 갔다. 약 2백
명의 우리 동포가 나와 같이 성찬을 나누기 위하여 모여 있었다. 아 거기서 나는 사랑할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는 그 당시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만, 이건 비단 그가 스무날 남짓한 항해 뒤에
느끼는 향수 때문만은 아니리라. '아, 거기서 나는 사랑할 사람을 많이 만났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일생동안 지니고 온 동포애와 조국애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와 같이 조선인 교회에 참석했던 웨드먼 박사는, 다음과 같이 그를 모인 사람들에게
소개하였다.
"이곳 우리들의 일은 굉장히 잘 되어가고 있는데, 성령은 또다시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형제
이승만씨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그를 우리와 같이 있게 하고 싶지만, 그는 훌륭한 뜻이
있어 미국으로 가시는 길이니, 우리들은 그가 돌아오기까지 기다려야만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가
돌아오면, 그때는 우리는 그를 붙들어 놓읍시다."
승만은 웨드먼씨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그를 위해 대비하고 있는 연단에 올라섰다. 처음에는
치밀어 오르는 반가움과 감격 때문에 한참 동안 빙글거리고만 서 있었으나, 한번 말문이 터지자
그의 이야기는 네 시간 동안이나 그칠 줄을 몰랐다. 그는 참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였다. 조국의
형편-참으로 억울한 꼴이 되어 가는 조국의 형편, 일러전쟁의 이야기, 일청전쟁의 이야기, 삼국
간섭의 이야기, 일영동맹의 이야기, 독립협회의 이야기, 만민공동회의 이야기, 그의 투옥되었던
이야기, 탈옥하다 다시 잡혀 사형수가 되었던 이야기, 그뒤 옥중에서 지낸 이야기, 앞으로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의 이야기... 이야기는 한정이 없어서 웨드먼씨가 주의를 하지 않았으면 이미 밤
11시 반이 된 것도 까마득히 잊고 그는 밤새 그의 폭포와 같은 외침을 외치고 있었을 것이었다.
동포들은 그의 연설에 흥분하여 어떤 때는 소리를 같이 하여 고함을 치고, 어떤 때는 나직하나
뼈에 사무치는 소리로 울었다.
그러나 승만은 중지된 연설뿐만으로는 도무지 그의 감개를 풀 수 없는 것만 같아, 다시 소리를
높여 그들이 독립협회 때 손수 만든 '애국가'를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한 번 부르고, 두 번 부르고, 세 번 부르는 동안에, 어느 새인지 많은 합창자를 얻어, 이 때아닌
한 조선의 노래는 오랫동안 하와이의 밤하늘을 울렸다. 그리하여 그가 저녁밥을 먹고, 잠자리에
들어간 것은 새벽 2시 반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튿날 아침 6시 반 정각에는 이곳을 출발하여 호놀룰루시로 돌아와서 거기
동포들과 같이 또다른 회합을 열고 다시 그의 연설을 시작하였다. 그의 연설에 감동한 동포들은
금화 30불을 모아서, 그가 굳이 사양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포켓에 넣어주었으며, 오후 1시, 배가
미국 본토를 향해 떠나려 할 때는 수백명이 부두에까지 몰려나와서 서로의 모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수건과 모자를 흔들고 있었다.
호놀룰루를 떠난 지 엿새 만인 12월 6일에야 그가 탄 배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닻을 내렸다. 고국을 떠난 지 꼭 한 달하고도 이틀 만이었다.
그가 최초로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그것은 오로지 독자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나는 일찍이 한번도 그의 입으로부터 이 감상을 들어본 일이 없으므로
여기(제2장)에서는 다만,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당도한 뒤로부터 그의 목적지인 워싱턴에
가기까지의 그의 수첩의 기록을 그대로 옮김으로써 여러분의 참고에 바치고자 할 따름이다.
12월 6일 ... 오전 10시. 샌프란시스코에 입항, 3시에 상륙, 일본여관 오이소야에 투숙. 한방에
두 사람씩 자는 방. 하루저녁 숙박료는 50선. 먹는 것은 10선 이상.
12월 8일 ... 동 오클랜드 12가 475번지에 있는 안정수씨 집으로 왔다.
12월 9일 ... 안씨와 나는 산 라벨 614의 5번지 피시씨 댁에서 자다.
12월 15일 ... 우리는 금문공원 박물관에 조선동전 두닢을 주었다.
12월 16일 ...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시카고를 지나 워싱턴까지 가는 차표를 베일씨가
남태평양철도회사로부터 샀다. 값은 반액으로 513불 75선. 오후 5시 반, 샌프란시스코 출발.
12월 17일 ... 자정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 호 H. 심씨가 마중을 나왔다.
12월 19일 ... 출발하려 하였으나 호 H. 심씨의 요청으로 출발을 연기
12월 25일 ... 교회에서 강연.
12월 26일 ... 오후 8시, 산타페 선을 지나 워싱턴으로 출발.
12월 30일 ... 오전 9시. 시카고 도착. 마징가 박사(참벨 공원, 장로교회 목사)를 만나서 서울
언더우드 박사의 편지를 전했다. 오후 3시 펜실바니아 선의 기차를 탔다.
12월 31일 ... 오전 7시 반, 피츠버그에서 차를 갈아타고, 오후 7시 워싱턴 도착. 이날 밤
조선영사관과 코베난트 장로교회 목사인 할린 박사를 찾아갔다.
제3장
미국에서의 수학과 연설 행각
-철학박사가 되기까지
1905년 승만은 워싱턴에 있는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와 동시에 조선을 대표하는
그의 소리는 미국의 방방곡곡에서 울리기 시작하였다. 학교에 나가는 시간만을 제외하고는, 그는
그의 모든 시간과 정력을 기울여, 조선의 사정을 외국인들 앞에 정확하게 소개하여 그들의
동정과 환심을 사기에 노력하였고, 만나는 동포들에게는 또 애국심을 주입시켜 그와 같이 조국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동지를 만들기에 힘썼다.
그가, 그의 선전을 위하여 이용한 곳은 한동안 주로 교회를 통해서였다. 그것은 그가 교회를
배경으로 미국에 온 까닭도 있었지만 교회란, 더구나 당시의 교회란 각국의 일류 정치가들까지도
빈번히 출입하는 곳이어서, 널리 그의 목적을 추진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곳보다도 적당한 장소라
생각된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나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나가기만 하면-그곳이 개인의 집이든 교회이든-
'한국'을 일본과 러시아의 손아귀로부터 보호하여 독립을 보장케 해야만 동양의 평화가
가능하다는 그의 포부를 주장하기에 겨를이 없었고, 더구나 상대할 만한 정치가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에게 그의 생각을 발표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썼던 것이다.
1905년 한해 동안 그가 미국 각지에서 연설한 것만 해도 다음과 같다.
1월 8일 ... 아침, 워싱턴 스미스교회 성서독회에서, 저녁때 교도수양회에서,
2월 12일 ... 일요일. 가래이 기념교회에서.
3월 26일 ... 할민 교회에서.
4월 2일 ... 일요일 6시 반, 수도침례교회에서.
5월 30일 ... 수요일 오후 8시, 수도장로교회에서.
10월10일 ... 칸덴스벨 장로교회에서.
11월 5일 ... 뉴욕, 캄덴 기독교청년회에서, 또 극소 제1장로교회에서.
11월13일 ... 조지타운 중앙연합교회에서.
11월15일 ... 워싱턴 M. E. 교회와, 국제연합회에서.
11월29일 ... 오전, 연합교회에서. 오후, M. E. 교회에서.
12월 1일 ... 뉴욕 장로교회에서.
12월 3일 ... 칼바리 침례교회의 중국성서회에서.
12월 5일 ... 오전 11시 반, 제1복음 교회에서.
12월 6일 ... 발티모어 메디슨가, 제1장로교회에서.
12월10일 ... 에프오수 연맹과 환드리 M. E. 교회에서,
12월13일 ... 제1침례교회에서.
12월15일 ... 트리니티 교회에서.
12월17일 ... 오후 7시 반, 부리드 공원교회에서.
12월24일 ... 일요일 밤, 브르클랜드 침례교회에서.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것들은 1905년 한해 동안의 그의 연설표에 불과하거니와, 물론
그뒤라고 하여 그의 소리가 줄어들리가 없다. 다음해인 1906년에는 각지의 학교와 교회와 각국
사람들의 회합 등을 통하여, 그의 열변을 퍼붓기 39 차례, 그 다음해에는 또 50여 차례, 이리하여
그는 마치 조선의 온갖 정열을 한 몸에 지니고 불을 토하는 한 개의 커다란 분화구처럼, 점점
왕성하여지는 그의 소리를 세계를 향해 뿜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가 미국에 들어온 다음해인 1905년 6월에는 그의 아들 태산이가 조선에서 건너왔고,
다음해 1906년에는 불행히도 또 그가 필라델피아의 시립병원에서 객사하고 말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심의 흔적도 없이 언제나 그의 할일 만을 꾸준히 계속한 데는 또 한번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열 네 살밖에 되지 않은 그의 외아들 태산이를 호올로 남의 집에 맡겨두고 그는
강연행각을 하고 돌아다니느라고 태산이가 병원에서 죽었을 때에도 임석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아들이 죽기 전후의 사실을 1906년 2월 25일과 26일부터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아무 감정도 지니지 않은 사람처럼 기록하고 있다.
2월 25일 ... 오후 7시 태산이가 필라델피아 시립병원에서 죽었다.
2월 26일 ... 오드휠트 장의장에서 태산이의 장례식을 지냈다.
24일 오후 11시 반, 태산이를 맡아 있는 필라델피아의 보이드 부인한테서 전보가 왔다.
"태산이는 이틀 전부터 회충약을 먹고 단식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위독하니 어서 오라." 그래
나는 곧 정거장에 나갔으나 벌써 두 시간 반이나 앞에 필라델피아로 가는 차가 떠난 뒤였다.
나는 그 길로 우편국에 가서 "내가 갈 필요가 지금 있느냐, 속히 답하라"고 전보를 쳤다.
그랬더니 곧 답전이 왔다.
"경과를 보아서 다시 알리리다." 그래 나는 조금 안심하고 전보를 기다리고 있는데, 25일 오후
2시경에 또 전보가 왔다. "태산이가 위독하니 내일 3시 20분까지 보이드 부인 댁으로 꼭 오라"는
것이다. 나는 "곧 간다"는 답전을 치고, 밤 9시 반 차로 떠났다. 그래 26일 첫새벽 2시 반에
보이드 부인 댁에 도착하니, 부인이 하는 말이 "태산이는 그 겁나는 전염병 디프테리아로 사흘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 있다가 시립병원 격리병실에 입원시켰는데, 당신이 만일 그애를 만나기
위하여 병원에 간다면, 당신은 검역법에 의하여 최저 1개월 동안 그 병원 안에 억류되어 있게 될
것이오"하였다. "억류되어도 좋소"하고 내가 대답하니까 그는 "그럼 날이 밝거든
가보시오"하였다. 나는 다시 정거장으로 나와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래 아침에 병원엘 갔으나
병원에서는 나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11시가 되었을 때 머휘 부인으로부터 편지가 와서,
태산이 이미 오드휠트 화장장에서 화장이 된 걸 알았다.
이와 같이 그의 아들의 화장을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벌써 6대째 내려오는 외아들,
더구나 그 어린 소년이 저 세계의 동녘 끝에서 서쪽 끝까지 그 아버지만을 의탁해서 찾아왔다가,
호올로 털빛이 다른 사람들 틈에서 죽어 불에 재가 되었는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승만은 이날 26일 오후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에도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닷새 뒤인 3월 4일에는, 여전한 음성과 여전한 태도로서 리바데일의
장로교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가 연설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그것은 아마
사람이면 어린이거나 어른이거나 누구든지 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무슨 혼령이 잠겨
있었던 모양이다. 연설이 끝난 지 얼마 후에 애리스라는 미국 소년으로부터 편지 한 장이 손에
들어왔는데, 거기에는 '나의 그리운 나라 조선 사람 이승만씨!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하는
어리디어린 글씨로 쓴 사연이 적혀 있었다 하는 것을 볼 것 같으면...
그러나 그는 그의 한결같은 외침과 아울러, 그의 학과에도 결코 등한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이 죽은 1906년 6월 5일에는 입학한 지 일년 반도 못되어, 워싱턴 대학을 졸업하여, '바채라
오브 아쓰'의 학위를 얻었고, 이로부터 2년 뒤인 1908년 8월에는 하바드대학의 '마스타 오브
아쓰'의 전과정을 마쳤으며, 다시 1909년 2월에는 같은 하바드대학으로부터 '문학사'의 학위를
받았다가 1910년 저 한일합병의 치욕이 우리들의 머리 위에 씌워졌던 해의 7월 18일에는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동안(1910년까지) 그가 조선의 정치적 사정을 소개하고 호소하여 세계 각국 인사의 많은
공감을 얻은 큰 연설의 수효만도 실로 170여 차례가 넘었다. 그동안 그는 일정한 정처도 없이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이 하숙에서 저 하숙으로 굴러다녔던 것이다.
제4장
한일합병의 소식을 듣고
1905년 일러전쟁에 있어서의 일본의 승리는, 한국의 모든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고 또 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소위 을사보호조약의 결과를 가져오더니, 그것은 점차로 발전하여 5년
뒤인 1910년 8월에는 드디어 한일합병을 조인함으로써 끝장을 보게 되었다.
1907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밀사를 보낸 사건 때문에 일본의
책임추궁을 어쩌지 못해 황제가 퇴위하고 황태자에게 자리를 옮겨 융희라 하게 되었더니, 1909년
10월 통감으로 와 있던 이등박문이 하얼빈 정거장에서 안중근의 손에 거꾸러지자, 형세는 대번
변하여 이 나라엔 일본인의 손으로서 삼엄한 헌병경찰제가 실시되고, 뒤이어서 바로 합병조약이
결정되고 만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은 완전히 몰락하고, 그나마 지니고 있던 국호까지도 빼앗기고
말았다. 역사적 필연이라면 한 필연일는지는 모르나, 그것은 참으로 너무나 억울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승만이 이 소식을 들은 것은 8월 22일 서울에서 조인식이 끝나고도 얼마가 지난 뒤였다.
서울에 있는 동지들로부터도 물론 이 기막힌 기별은 알려왔지만, 일본은 또 정식으로 이 사실을
각국에 통고하여 미국의 신문에도 널리 보도되었던 것이다.
승만은 미국에 온 뒤에도 늘 본국의 소식을 동지들을 통해 들어온 터로, 보호조약이라든지,
차관정치라든지, 색다른 기별을 들을 때마다 "어디 보자, 어디 두고 보자!하고 이를 갈며 보복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이것은 참으로 꿈에도 생각지 아니한 청천의 벽력임에
틀림없었다. 인제 와서 생각해 보면 더욱 절실하거니와, 일본은 이때부터 이미 너무나 지나친
상식 밖의 짓을 많이 저질렀던 것이다.
이 환장할 기별을 처음 듣던 날 승만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그의 낡은 침대 위에
나자빠져서는 한나절을 온전히 흐느껴 울었다. 그가 '사형수'로서 죽음을 앞에 대했을 때에도, 또
그의 단 하나의 아들이 이역의 화장장에서 재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도 눈물을 흘려본
일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서 견딜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자리에 누운 그대로 사흘 동안을 온전히 침식을 잊고 밖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깜빡 속았구나. 나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세계정의를 믿고, 일본이 이처럼 야만인
줄은 몰랐더니, 이런 일이 또 언제 어느 때에 있었는가? 이렇게만 나간다면 일본은 인제 반드시
망한다. 인제 두고 보아라! 그것은 물론 그러려니와, 그러나 나는 지금 어쩌면 좋을 것인가? 나의
생애라는 것은, 조국아! 너 때문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수 없다. 7년의 감옥살이를 치른
것도, 아메리카 군다리에까지 굴러온 것도 조선아! 결국은 너의 행복을 위하고자 한 때문이
아니었더냐. 그러나 인제는 모든 것이 헛것이 되었다. 그러면 인제 나는 죽어야 하는가?'
그러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승만은 마치 이 어리석은 유혹에 항거나 하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니다. 아니다.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서 이 목숨을, 조국아! 너를 살리기
위해 쓸 대로 다 써버리고 가야 한다!' 그는 어느새인지 다시 마음속으로부터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지금 당장 그가 꼭 미국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먼저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말하고 그의 동의를 얻어 그것을
세계에 선포하는 일이라 생각해 내었다.
그래,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붓을 들어, 미국 대통령에게 전할 성명서를 기초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주권이 일본에 예속되어서는 아시아 평화는 있을 수 없을 것이며, 만일에 이것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일본의 야만정책은 머지않은 앞날에 반드시 태평양 주위의 여러 나라에까지
그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니, 그대가 진정으로 인류의 평화와 세계의 정의를 위한다면, 그대는
한국 2천만 동포를 속이는 한일합병조약의 폐기를 요구하는 나의 성명서에 동의서명해 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물론 굉장히 긴 글이었으나, 요약하면 대개 위에 적은바와 같은 내용이었다.
승만은 그 성명서가 기초되자 백방으로 연락하여 대통령을 직접 면회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열성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의 요청은 보람도 없이 거부되고
말았던 것이다. 승만에게는 모든 하늘이 금시에 자꾸만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감개가 생겼다.
'그렇다. 지금 조국의 하늘은 쉴 사이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동포들은 시방 모두 통곡 속에
잠겨 있으리라.'
이러한 생각이 물밀듯 그의 가슴속에 육박해 왔다. 그러자 그는 불현듯 그 암담한 속에 잠겨
있는 조국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가자! 조국으로 가자! 가서 거기서 동포들과 같이 당할 일을
같이 당하며 밀고 나갈 데까지 어디 한번 밀고 가보자...'
드디어 그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작정을 하고, 그의 초라한 하숙방에서 바삐 행장을 수습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9월 초순의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로부터 다시 어두운 고향땅을 향해 배에
올랐다.
제5장
빼앗긴 조국의 하늘 밑에서
승만이 부산에 상륙한 것은 10월 초순의 어느 맑은 날 오전이었다. 으레 그러하리라고 예상은
하고 온 바이지만, 부산 부두에 내려 동포들의 오고가는 모습과 얼굴들을 눈앞에 바짝 대하자,
그는 그만 가슴이 딱 질리어 저절로 벌려진 입이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다.
'내 눈앞에 오고가는 저들이 정말로 조선 사람들인가? 저 웅숭그리고 땅만 보며 걸어다니
는,
저
웃음도 바로 못 웃고 눈치만 슬슬 살피는-저들이 모두 조선 사람들인가?'
나라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너무나 무서운 현실임에 틀림없었다. 여섯 해 전에 그가
고국을 떠날 때만 하여도-물론 그들은 대부분이 가난하고 소극적인 사람들임엔
틀림없었지만-지금 보는 것과 같이 얼빠지고 다 죽어 가는 얼굴들은 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들이
뜻밖에 모두 저 죄수의 얼굴들을 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승만은 무심결에 눈을 들어서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드물게 맑은 가을 날씨임엔 틀림없었지만
하늘도 인제는 마음의 탓인지 모든 동포들에게도 그러할 것처럼 승만에게도 벌써 너무나
무거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어깨가 저절로 축 늘어졌다.
그러나 홀로 활기를 띤 것은 길거리에서 가끔 만나는 일본인들의 눈망울이요, 그들의
걸음걸이요, 새로 번성하는 그들의 상점, 그들의 살림살이의 모습이었다.
승만은 이것을 보고 저것을 보는 동안 마음속이 너무나 어지러워서 부산으로부터 차를 타고
서울에 오는 동안, 늘 눈을 감고 앉아서 되도록이면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서울에 당도하여 정거장 앞에 내리자, 똑같은 현실은 밀물처럼 겹겹이 그를 에워싸는
것이었다. 아! 그의 친구들의 얼굴에도, 일가친척들의 얼굴에도, 그 무거운 저주와, 자조와, 형벌의
흔적은 역력히, 역력히,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들의 얼굴만이
쑥대밭에 섞여 있는 풀꽃들처럼 한층 더 그의 마음을 미어지게 할 뿐이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인가?'
그의 선배와 친구들 중에도 어떤 이들은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떤 이들은 또 국외로
가버렸고, 또 다른 이들은 모두 문을 닫아걸고 들어앉은 채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독립협회
때의 동지들이 서울에 없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들에게도 아직 별다른 묘안은 없었다. 요컨대
조선은 완강한 쇠사슬에 겹겹이 얽혀서, 뜻밖에 온 압제에 질식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승만은 이러한 상태에서 자멸할 사람이 아님과 동시에, 또한 방탕의 몸부림이나 조그만
반항 쯤으로 그의 맡은 책무를 손쉽게 처리해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적어도 여러 십년을 두고두고, 넓고 질기게 싸워서 우리를 에워싼 마지막의 쇠사슬이 끊어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만 언제나 그의 생명을 예비할 수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람이, 이 질식할 합병 초의 고국에 돌아와서 아직도 집집마다 통곡이
끊이지 않은 장안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서서, 몇몇 어린아이들로 더불어 한겨울을
하늘을 쳐다보며 연만 날리고 지냈다 하여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있다. 이 민족의 통곡을
능히 대표할 감정과 의리를 가진 사람이면, 그 통곡의 때에 연 같은 걸 날리고 있던 심정도 알
수가 있단 말이다.
그렇다. 그는 1910년 합병되던 해의 한겨울을 날마다 남산 마루턱에 올라, 종이연을 하늘에
띄워놓고는, 자새에 감긴 실을 풀었다 감았다 하며, 수두룩이 짓밟히고 있는 조국의 혼을 모조리
그의 속에 불러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가 또 시행한 것은 통곡하는 동포들과의 일종의 기도와 어린이들에게 준 일종의
세례였다.
11월 27일 ... 서울 YMCA에서 동포들과 같이 기도.
12월 11일 ... 크리스마스 휴가에 세례를 받기 위해 32명이 성명과 주소를 알리러 왔다.
12월 12일 ... 어린 학생들이 세례 받기를 신청해 왔다.
이상은 1910년 겨울의 그의 수첩의 기록 중의 한 토막이거니와, 이 기도와 세례를 역시 우리는
그의 이 무렵의 연놀이와 거진 비슷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까. 그의 이 무렵의 연놀이가
얼마나 많은 통곡과 민족애와 부동의 신념을 표현하는 것인가를 우리는 위에서 보았다.
그의 기도와 세례 역시 이러한 데서는 어쩔 수도 없는 그의 축복의 몸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것들은 다만 그의 감상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감상이란 언제나 이산하는 세계의
이야기요, 이러한 집중 속에서는 그것이 혹시 어느 순간에 얼마쯤 있었다 하더라도 그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이다.
제6장
다시 세계를 무대로
1
두 해 동안을 조선에 있은 뒤에 1912년 3월 26일, 승만은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5월 1일부터
29일까지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세계 메서디스트 총회'에 참석할 조선대표로서 선임된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그는 이 회의가 끝난 뒤에도 조선에 돌아오지는 않고, 거기 남아서 다시
그의 활동을 계속할 작정이었다. 이미 꼼짝도 할 수 없이 속박되어 있는 조선에 남아서 일하는
것보다는, 다시 미국에 가서 세계를 상대로 일하는 것이 역시 정통적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갈바를 찾지 못하던 서울의 많은 동지들도 물론 그걸 찬성하였다.
도중, 그는 5월 29일 일본 동경에 내렸다. 31일부터 4월 5일까지 열리는
재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의 학생회의의 초청을 받았으므로 거기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동경 신교 정거장에서는 30여 명의 대학생들이 비를 맞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오신다고 하셔서, 어제는 백스무 명이 여기 와서 기다리다가 실망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말하며, 승만을 떠메고 가다시피 그들의 회관으로 데리고 가서 성대하고도 다정한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백남훈, 조용근 등이 그들 중의 대표로서 열렬한 환영사를 하였는데, 이
원수의 땅에 있어서의 그들의 기세는 참으로 당당하여서 승만을 적잖게 감동시켰다.
회의가 끝난 이튿날인 4월 6일 오후 2시에는 본전이라는 일본인 대승정의 장례식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승만에게는 이것이 적잖이 불쾌하였던 모양이다. "나는 이날 오후
2시 청산학원에서 거행되는 본전 대승정의 장례식에 참석치 아니하면 안 되게 되었다"라고 그는
그날의 일기에서 말하고 있거니와, 분명히 이 글투로 보건대 한 개의 종교인으로서의 감정보다도
한 개의 조선 사람으로서의 감정이 그에게는 이러한 때에 있어서도 훨씬 더 세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장례식으로부터 돌아오자, 그는 오후 7시부터 열리는 조선학생들의 특별회합에서 수백 명의
학생을 상대로 '조선인 학생에게의 기대'라는 제목으로 두 시간에 걸치는 긴 강연을 하였다. 이
특별회합은 동경에서의 조선 학생들의 집합장소가 될 조선인 YMCA의 건축 자금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강연이 끝나자 청중은 즉석에서 1,362원 50전을 기부하였다. 그리하여 회의 때 국제위원회에서
기부한 돈 2만원과 합하여, 회관의 건축 기금은 넉넉하게 되었다.
2
4월 10일 오전 11시, 승만은 다시 횡빈에서 배를 타고 빅토리아 항으로부터 상륙하여 5월
1일에는 '세계 메서디스트 총회'가 열리는 미니애폴리스에 도착하였다.
회의는 예정대로 이날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어 29일 동안 계속된다. 승만은 이 회합에서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는 먼저 약소민족의 해방이 필요하며, 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선 먼저
한국의 자주독립이 있어야 한다. 기독과 모든 교회의 정신은 마땅히 이러한 평화 옹호에 있어야
할 것이며 세계의 기독교도는 이 일을 위해서 단결 실천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여 각국 대표들의
많은 동의를 얻었다. 한편, 그는 그들 각국 대표들과의 개별적인 친선에도 힘을 썼고, 회의의
여가에는 그들과 같이 미니애폴리스 근처의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얼마 동안 멈추었던 그의
소리를 다시 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 와서 바로 착수하기로 결정하고 온 중요한 목적은 메서디스트 총회도
총회이지만, 그보다도 오히려 한시 바삐 미국 대통령 윌슨을 만나는 데 있었다. 그를 만나서
그동안 보고 온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한국 해방을 위하여 그의 동의를 얻는 데 있었다.
승만은 윌슨 대통령을 만나기 전, 먼저 그의 딸 윌슨양을 '라이트하우스'에서 만나고,
메서디스트 총회의 한국 대표자의 자격으로서 대통령이 그를 만나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윌슨양은 상냥한 처녀로서, 그렇게 할 것을 쾌히 승낙하고 가더니 그로부터 오래지 않은 6월
19일에는 대통령이 스스로 승만을 불렀다. 머지않은 장래에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여
우리나라에도 3 1 운동이 전개될 사상적 근거를 세워주게 될 이 거물은, 사람을
대하는 데도 퍽 원만하였을 뿐만 아니라, 약소 민족에 대해서는 이때부터 특히 상당한
동정을 가지고 있었다.
승만은 그가 프린스턴 대학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 '미국의 영향에 의한 중립주의'이
마침 대학으로부터 책으로 되어 나왔으므로, 그걸 한 권 가지고 가서 그에게 전하고 찾아온 뜻을
말하니 여간 반기지 않았다.
승만은 그가 보고 온 한국의 참혹한 꼴을 자세히 설명하고, 일본의 제국주의가 얼마나 동양의
평화를 해하고 있는가를 말한 후에, "한국해방을 세계에 호소하는 성명서를 만들고자 하니,
거기에 꼭 좀 동의서명을 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이것은 일찍이 1910년에도 그가 계획했다가
실패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노련한 정치가 윌슨은 다만,
"미국 대통령 아닌 나 한 개인으로서는 거기에 물론 서명해 드리고도 싶소. 서명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일을 도와주려고도 하오. 그렇지만 미국의 정치를 위해서는 아직도 내가 당신의
성명에 도장을 찍을 때는 아니오. 그러나 인제 우리가 같이 일할 때는 반드시 올 것이니 그것을
믿으시오. 그렇잖아도 나는 벌써부터 당신의 조국 한국을 포함한 모든 약소 민족 국가들의 일을
생각해 오고 있는 중이오."
하고 웃는 낯으로 너그러이 대답할 뿐이었다.
승만은 다시 한번,
"현상유지의 정치보다 정의인도의 미래를 위하여 나의 편이 되어주시오."
하고 졸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물론이오. 그렇지만 모든 일의 해결엔 반드시 그 적당한 때가 있는 것이오. 하여간 내 당신의
갸륵한 뜻을 명심해 두리다." 하고 여전히 빙글거리고만 있었다.
그리하여 이날은 우선 그의 집을 물러 나왔으나, 그뒤에도 연달아서 그는 윌슨씨의 집을
찾았고, 그러는 동안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자세히 알게도 되고 동정도
하게 되었다. 또 그것은 뒤에 그가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사상을 세우는 데 어느 만큼의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얼마 사귀지 않아서 승만은 윌슨 대통령의 많은 신망을 받게 되어서, 그의 소개를 받아
미국 안을 두루 강연행각을 할 수 있게까지 되었다.
"좋은 일이오, 퍽 좋은 일이오. 이승만씨! 당신은 나 한 사람의 도장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미국 국민들의 마음의 도장을 모두 받도록 하시오."
하며 윌슨은 그를 격려하고 선선히 추천장을 써서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외쳐도 외쳐도 한이 없는 그의 강연행각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가 그의 부친별세의 전보를 받은 것은 1913년 2월 3일,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막
상륙한 때였으나, 그날도 그의 외침은 쉬지 않았다.
제7장
기미 3 1운동 전후 -그가 임정 대통령이 되기 전후
1
그가 윌슨을 향해 늘 주창해 온 '약소민족해방론'이 얼마만한 자극을 윌슨 자신에게
주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하여간 윌슨의 약소민족해방에 대한 관심은 나날이 높아가서, 1917년
9월에는 미국측의 주최로 뉴욕에서 세계약소민족대표자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승만은 이 회의
에
그가 정식 한국 대표가 되는 것을 굳이 사양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과 연락하여
박용만이라는, 뒤에 한때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이 된 사람을 파견케 하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에 쓸 사람이 많다는 것을 외국인들에게 보이기 위한 그의 겸허한 애국심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한국 대표가 회의에 나가서 많은 효과를 거두게 하기 위하여
그의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 회의 때 우리 대표들에게 소용된 120불의 비용도
그의 힘으로 하와이에서 거출되어, 직접 그의 손을 통해 안창호에게 전해졌다.
약소민족회의의 뒤를 이어서, 1918년 1월, 대통령 윌슨은 미국 국회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교서를 낭독하였다.
"한 민족과 국민은 강하고 약한 것을 가릴 것 없이 다른 모든 민족 사이에 있어서 자유 평등의
권리를 누릴 수 있으며, 또 그 생존의 평안과 공평한 기회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모든 국제적인
갈등의 원칙이 되는 것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그의 평소의 신념일 뿐만 아니라, 뒤에는 대전 후 평화조약의 한 부분으로 그가
세계에 제시한 내용의 한 골자를 이루는 것으로서, 이것이 국회에서 발표되자, 미국의 조야는
한참 동안 이 화젯거리로 왁자지껄하였다. "이번 세계전쟁이 끝나면 윌슨은 반드시 그것을
세계강화회의에 제출하리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승만도 또한 그렇게 생각하였다. "반드시 그때가 올 것이라"고, 윌슨이 언젠가 승만에게 말하던
일이 승만에겐 문득 기억되었다. 그리고 그때라는 건 바로 지금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승만은,
바로 국내와 국외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동지들에게 연락하여 윌슨의 성명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가 대전 후 강화회의에 이 문제를 올리게 될 때, 세계의 약소 민족은 모조리
일어설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후, 한국도 지금부터 이에 호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그는 이 지시를 서면으로도 보내고, 밀사를 통해서도 보내고, 전신으로도 보내어,
뜻있는 모든 동지들의 인식을 새롭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바로 이해-1918년 11월 11일 소란하던 세계대전은 독일의 참패로 휴전되고, 오래지
않아서 열린 파리의 예비적 평화회의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평화조약안 14개조 중에,
위에 말한 그의 성명의 내용과 틀림없는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이 똑똑히 명시되어 있었다.
아직 정식회의가 열리기 전부터(정식회의는 1921년 1월부터 있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특히 약소한 나라들은 입을 나란히 모아 그의 제창에 찬동하였고, '민족자결주의'라는 새 개념과
사상은 세계의 방방곡곡에 침투하게 되었다.
승만에겐 참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었다. 그는 이 기별을 듣자 바로 먼저 중국과
일본에 있는 동지들에게 "민족 총궐기의 기회가 왔으니 속히 대비하라"는 지시를 보내는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를 정식으로 파견하기 위하여 미국 정부에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19년 2월 26일, 미국 정부의 내무부장관인 프랭클린과 국무부장관인 폴크를
만나고, 한국의 정식 대표로서 강화회의에 참석할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였다.
국무장관 폴크는 "곧 파리에 연락하겠다"고 그에게 대답하였다.
한편 그는 대통령에게도 면회를 청했으나, 윌슨은 세계의 모든 눈이 그에게만 모여 있는
때여서 그런지, 혹은 정치적 제스처에서인지, 비서를 통해 "바쁘다"는 뜻을 말하고 "할 이야기가
있으면 서면으로 전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 승만은 할 수 없이 그 문제를 직접 대통령의
이름으로 회의에 보내달라고 요구하고, 또 거기 대한 회답을 곧 하여 달라는 편지를 전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식 대표로서의 참석은 불가능하고, 다만 한 객원의 자격으로 당시 상해에
있던 김규식이 뽑혀서 유명한 우리들의 청원서를 가지고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주밀한 연락과 지시를 내리고, 또 외교적 교섭을 진행시키는 한편으로, 그는 다시
미국에 있는 동포들을 단합하여 4월 14일부터 사흘 동안은 워싱턴 미국독립기념관 앞에서 일대
시위운동을 일으키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파리강화회의에는 '대한정부를 승인하라'는
전보를 쳤다. 이날은 서재필 박사도 나와서 그와 같이 열렬한 연설을 하였는데 미국 사람들도
굉장히 많이 모여서 모두 그들에게 동의를 표하였다.
2
한편 중국에 있는 동지들은 일찍부터 그의 지시에 의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대비할 것을
계획하고, 1919년 2월 1일 상해에 모여, 그 대책을 토의한 결과,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김규식을
파리에 보낼 것을 가결함과 동시에 조선 본국과 일본에 일대 항쟁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여,
장덕수를 일본에, 김철, 선우혁, 서병호 등을 본국에, 여운형을 러시아에 각기 파견 지도케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동경에서는 2월 8일, 조선인청년회관에서 많은 학생이 모여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독립요구서'를 써서 그것을 일본 의회와 정부에
제출하려다가, 일본 순경들의 칼끝에 유혈의 참극을 이루고 모두 체포되었으며, 서울에서도 역시
외국 동지들과의 연락 아래 비밀리에 송진웅, 현상윤, 최린, 최남선 등의 넓은 청년들이 계획을
추진시키고 있다가, 각 종교단체의 협력을 얻어, 그것은 드디어 3월 1일에 와서 전국적으로
무서운 폭발을 보게 되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천도교의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예수교의
이승훈, 박희도, 함태영, 불교의 한용운, 백용성이 이 운동에 참가하였고 손병희는 이 운동의
맹주가 되어 천도교로 하여금 일체의 비용을 부담하게 하였으며, 최남선은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보내는 글을 기초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은 서울 탑골공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뜻밖에도, 오랫동안 잊었던 태극기가 미리 예비했던 깃대 위에 걸려 하늘 높이 펄럭거리자,
천도교의 한 청년이 쌓아 놓은 단 위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높고도 맑은 음성으로 낭독하였다.
그것이 끝나자 모인 군중들은 손에 들고 온 작은 태극기들을 높이높이 치켜들며 소리를 나란히
하여 만세를 계속해 부르며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길거리에서는 골목마다 또다시 새로운
군중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늙은이도 어린이도 부인네도, 그들은 모조리 뛰어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연거푸 부르며 달려갔다. 이 불길은 나날이 조선 전체에 번져서 일본은 군대를
출동하여 삼천리의 방방곡곡에서 체포 감금을 수없이 하는 한편, 몸서리치는 학살을 계속했던
것이니, 그들의 손에 온갖 악독한 수단으로 무찔려 죽은 자의 수효는 남녀노소를 합하여 실로
7,500여 명, 체포 감금된 자 46만 900여 명, 이 운동에 참가한 동포의 수는 실로 200만 명이 훨씬
넘었던 것이다.
10년 동안을 짓밟혀오던 민족은 여기에서 죽음을 내걸고 그들의 민족정신의 건재함을 또 한 번
보였고, 세계 각국은 이 사실을 보고 한국민의 염원이 무엇인가를 새로이 인식한 동시에 일본의
야만성에 대해 비로소 이맛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이와같이 민족정기의 발현과 아울러 3 1운동은 우리들의 커다란 또 한 개의 수확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낳게 하였다. 3월 1일 이후 국내와 국외에 있는 많은 독립운동자들은 민족의
독립의사를 대표하는 최고기관으로서 임시정부를 만들 필요를 모두 절실히 느껴오던 차에,
그중에 대표인물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3월 하순경 모두 중국 상해로 모여들게 되자, 이것을
급속히 세울 것을 결의하고 서울에 있는 독립본부와 연락한 결과, 다음과 같은 제1차 내각이 4월
11일 선임되었다.
임시의정원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군무총장 이동휘, 재무총장 최재형, 교통총장 문창범.
그러나 그뒤 다시 많은 지도자들이 국내와 국외로부터 몰려오고, 특히 안창호가 미국으로부터
5월 25일에 상해로 오게 되자, 곧 임시헌법을 만들고, 역사편찬부를 두어 한일교섭의 유래와 이번
독립운동의 모양과 일본인의 야만적인 학살의 사실 등을 자세히 기록케 하여 국제연맹에
제출토록 준비하는 한편, 서울의 국민회와 다시 연락하여 임시정부 내각을 뜯어고치니 그 부서는
다음과 같았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군무총장 노백린,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외무총장 박용만, 교통총장 문창범, 참모총장 유동열,
노동국총변 안창호.
그러나 승만은 이러한 임시정부의 부서 결정은 전하는 소식으로만 들었을 뿐으로, 여러 차례
상해로부터 '잠깐 왔다 가라'는 초청을 받았으나 좀처럼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파리의
강화회의를 앞두고 미국의 여론을 한국에 집중시키는 것과,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치가들에게
한국에 대한 동정심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느라고 머리를 조금도 딴 데로 돌릴 수
없었음은 물론, 새로 사업이 확장된 조선인위원회와, 준비중인 구미 각국을 상대로 하는 한국
사정 소개 잡지의 발간 사무 때문에도 도무지 눈코를 뜰 새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가 겨우 발을 옮겨서 그의 비서 임병직과 같이 상해에 당도한 것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도 한 해가 훨씬 넘은 1920년 12월 5일이었다.
중국에 그는 임시정부의 동지들과 같이 1921년 6월까지 있었다. 파리에 대표를 보내놓고,
강화회의 본회의의 결정을 그들과 같이 기다렸으나, 그 결과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통치 밑에
있던 몇몇 나라가 겨우 민족자결주의의 혜택을 입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승만은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에 있는 동지들에게 다음 기회를 기다리며
꾸준히 싸울 것을 약속하고 상해를 하직하였다.
제8장
1933년의 국제연맹회의에서(상)
1
1921년 여름 중국으로부터 미국에 돌아오자, 승만은 이내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주미한국위원회장으로서 독립운동을 계속 추진시키는 한편, 1922년부터는 하와이에
교육사업협회를 조직하고 외지에서 커나가는 이 나라 제2세 국민들의 교육을 지도하며, 다시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1932년 또 한 번 기회가 왔다.
그칠 줄을 모르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마수는 조선을 완전히 짓밟게 되자 다시 만주에까지
뻗치어, 1931년 9월 18일 봉천 유조구에서 중국 군대가 만철선로를 폭파하였다는 것을 핑계로
장학량군과 더불어 전쟁을 열더니 마침내 이듬해 3월 1일에는 만주국이라는 허울 좋은 나라를
세우고, 옛 청국 황실의 후예 부의라는 자를 어디서 찾아다가 허수아비 황제로 앉혔다. 물론
만주국이란 다만 빛좋은 명목이요, 이것은 이미 그들의 완전한 영토였다. 이렇게 그들은 중국
침략의 첫 손을 벌린 것이었다.
그러자 중국 천지에서 항일운동이 맹렬히 일어났으며, 이 운동에는 우리들 한국의
독립운동자들도 가담하여 공동전선을 펴게 되었다. 그 당시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의
명령을 받고, 우리나라 청년 이봉창이 동경에서 일황을 쏜 것도, 또 상해에서 윤봉길이 일황 생일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의 괴수인 백천대장을 죽이고 중광대사와 야촌중장 등을 부상케
한 것도 모두 이때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만주사변 문제를 에워싸고 세계는 다시 왁자지껄하여, 1932년부터 33년에 걸쳐
국제연맹은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그러자 하와이와 미국에 있는 동포들은 "이 기회에 국제연맹에 가서 다시 조선 문제를
제기하자"고 하여 승만을 그 대표자로 선정하였다. 이 불변하는 화산은 58세의 환갑이 가까운
나이로서 다시 한 번 세계를 향해 그 애국의 불길을 뿜을 기회가 왔던 것이다.
1932년 12월 11일, 그는 미국 국무성에 나가 극동국장을 만나고 제네바의 국제연맹에 나가서
활동할 그의 패스포트를 발행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미국에 온 지 이미 30년이 되었건만,
미국시민으로서 입적하는 것을 늘 거부해 왔기 때문에 세계를 여행하자면 특별한 패스포트가
필요한 것이었다. 미국 정부는 이미 그의 업적을 잘 알고, 또 이번 연맹에 가는 목적에도
찬동하여 선선히 국무장관 스팀슨이 서명한 패스포트-일종의 세계 통행을 미국 정부가 책임
추천하는 패스포트를 내어주었다. 이것은 참으로 미국 정부로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2월 23일 뉴욕을 배로 출발하여 1933년 1월 2일 영국 런던을 거쳐서, 다시
비행기로 1월 4일에는 목적지인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그가 제네바에서 활동한 모습은 마침 그의 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나는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그 골자만을 아래에 옮겨 여러분에게 보이고자 한다.
2
1월 6일 ... 나는 중국대표 W. W. 엔씨와 그의 숙소에서 여러 시간 회담하였다. 그리고 회의의
준비를 하였다.
1월 7일 ... AP 통신원 푸란트스 J. 립시씨가 여관으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우리들의
문제를 진정의 형식으로 연맹에 제출하려고 하니 경험 있는 통신원이 문제를 취급해 주기
바란다"고 말하니, 그는 "정당한 보도를 하기 위하여 적당한 방법을 생각하겠다"고 대답하였다.
1월 8일 ... 미국 총영사 브레이크씨 부부와, 부인동맹 총재 가트리 더라스 부인을 만났다.
1월 9일 ... 워싱턴의 드류 퍼슨씨에게서 편지가 왔다. 미국영사요 연맹옵서버인 푸렌티스
길버트씨와, '뉴욕 타임스' 통신원 스트레이드씨, 세계 통신사원인 알빈 E. 존슨씨 등에게 주는
소개장이 들어 있었다. 그래 나는 스트레이드씨 등을 만나 우리들의 일에 대한 협조적인 보도를
의뢰하였다.
1월 11일 ... 중국대표 W. W. 엔 박사를 만났다. 말을 들어보니, 처음 그는 우리들을 돕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될지 까마득하였던 모양이다. 그래 나는 그에게 "조선문제를 연맹에
제출하는 것은 만주 문제와 아주 밀접히 관계가 되므로, 이것은 다른 각도로부터 일본을
물리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해 주었더니, 그는 곧 찬성하고 "당신들이 요구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우리는 연맹에 제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다시 나에게 파리에 있는 중국정치가
구 욀돈시와 주영중국공사 궈태치씨를 만나보라고 권하였다.
1월 12일 ... 나는 궈태치씨를 그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그는 나에게 "엔 박사와 구씨와 나는
당신들이 준비해 놓은 어떤 서류라도 연맹에 제출하는 데 찬성하였습니다"고 말하였다. 오후에
알빈 E. 존슨씨가 여관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일본신문과 관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우리들의 계획에 대해서는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를 보낸 다음 나는
다시 덴 박사에게서 받아둔 소개장을 가지고 연맹보건부 책임자인 라치만뉴 박사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처음 "조선문제를 제출하기에는, 지금은 좋은 기회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내가
"아니다, 첫째, 문젯거리는 조선이요, 그 다음이 만주다. 만주문제에 뒤이어서 조선문제를
제출하기에 지금은 제일 적당한 때이다. 조선은 중국의 도움이 됨은 물론, 연맹을 위해서도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들은 연맹이 지금 곧 우리의 독립을 제기하는 걸 기대하는 게
아니라, 우리 문제를 한 생생한 문제로서 취급해 주기를 바랄 따름이다"고 말하니 "당신네들의
일을 돕기 위해 대표자들과 연락하겠다"고 말하였다. 그의 집을 물러나와, 오후 6시 반, 나는
다시 중국의 유명한 정치가 '구'씨 댁에 갔다. 그는 나를 미국에서부터 잘 아는 터였으므로 여간
반겨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대표는 조선이 원하는 어떠한 서류라도 연맹에 제출할 터이니
'일본의 조약위반과 조선인의 항쟁'의 기록, '일본이 조선에 끼친 압제'의 기록을 꼭 그 서류에
자세히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1월 13일 ... 미국 영사 길버트씨를 방문. 그는 맨 처음 나에게 "당신이 대통령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아니다"라고 내가 대답하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미국 친구들은 나에게 당신을
소개하는 편지를 할 때마다 '대통령'이라고도 하고 '주지사'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실 예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연맹과 중국과 세계의 평화를 돕기 위하여 왔다. 조선문제는 중일관계의 한 부분이니
지금은 이 문제를 생생한 문제로 만들기에 제일 좋은 때라고 생각한다. 1910년, 세계 각국은
일본이 조선 정복과 만주의 문호개방쯤으로만 만족할 것이라고만 믿고, 일본의 세계정복의
야심을 몰랐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가 반드시 일본에 대해 환멸을 느낄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보라, 일본은 조선을 짓밟아 버리더니 인제는 다시 만주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지만, 이것은 결코 그들의 마지막 침략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세계가
극동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연맹 일본을 그들의 본래의 모양인 한 작은 섬나라로 밀어뜨려
버리도록 조처하여 달라는 것을 요구하려 왔다. 나의 이 요구를 연맹의 여러 나라는 반드시
응원해 줄 줄 믿는다."
나의 이 말에 길버트씨는 대단히 찬성하며 "약소제국은 모두 당신의 편이 될 것이다. 그네들이
여기 모이는 대로 두루 연락을 해주마"라고 하였다.
1월 14일 ... 중국 신문계의 대표 양궁송씨가 다녀갔다. 밤에는 푸랑코라는 언론인을 찾아가,
그에게 우리들의 일에 대한 서류와 기사의 수습과 그 보도임무를 맡기기로 하였다.
1월 15일 ... AP통신원 립시가 와서 뉴욕 본사에 보낸다고 나의 사진을 여섯 장 가져갔다.
오후에는 또 중국 신문기자가 와서 나의 담화와 사진과 약전 등을 가져갔다.
1월 16일 ... 오후에 푸랑코씨가 와서 나와 같이 연맹에 제출할 진정서의 초고를 정리하였다.
1월 17일 ... 연맹에 제출할 서류가 작성되었다. 나는 중국 대표 엔 박사를 만나서, 그의
법률고문에게 우리들의 서류를 사열시켜 제출을 준비하여 달라고 하였더니, 그는 승낙하고, 이
문제를 그들 손으로 제출하겠으니 구씨를 만나보라고 나에게 권고하였다.
1월 18일 ... 나는 구씨를 만났다. 그랬더니 그는 이상하게도 뜻밖에 "지금은 조선 문제를
제출할 때가 아니다"고 하였다. 나는 그에게 긴 설명을 하였으나 "그 문제는 근거가 박약하여
우리 중국대표들은 제출하지 않기로 하였다"고 잡아떼므로 할 수 없이 여관으로 돌아왔다.
1월 19일 ... 중국위원단 고문 코린스씨가 나를 전화로 불러서, "나를 중국공사 궈씨가 소개하여
이승만씨를 만나보라 하였으니 만나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승낙하였더니 그는 곧 왔다.
그가 오자, 나는 곧 그에게 '조선 임시정부 승인과 연맹에의 참가권을 요구하는'서류를 내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연맹맹약에는, 독립국가라야만 어떠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라는 조항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생각하였다. '중국대표가 이걸 제출하지 않으면
우리들의 이 정당한 요구는 연맹에 보내도 결국 상정도 보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먼저
우리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과 연관성이 있는 만주문제를 취급해서 중국이
이것을 제출케 해야 한다. 그것이 성취하는 날을 기다려, 우리의 문제는 상정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1월 20일 ... 중국주영공사 궈씨 집의 연회에 갔다. 궈씨는 나에게 "당신들의 요구를 제출하기
전에 먼저 조선 사람의 만주이민문제를 상정해야겠으니 거기 대해서 서류를 준비해 주시오"
하였다. 나는 그에게 "그건 참 좋으신 생각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한국
독립 문제를 열어주는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뒤이어 나는 이 자리를
물러 나와서 아일랜드 대표 레스터씨에게 전화를 거니 "곧 만나겠다"고 하여서 나는 그 길로
연맹 영국 본부로 갔다. 레스터씨는 나에게 말하였다. "당신네들이 제출한 것은 모두 퇴짜를 맞을
것이며, 비서도 그건 돌리지도 않을 것이오. 그러니 방법은 신문기자와 먼저 연락하여서 이
문제가 제출되면 곧 세계가 모두 떠들도록 하시오" 하였다. 그는 나에게 각국대표를 추천해 주고,
또 조선에 관한 책을 빌려 달라고도 하였다.
1월 21일 ... 궈태치씨가 그 전 펜실베이니아 대학 교수요, 현재 중국대표단 고문인 코린스씨를
또 보내주어 우리를 돕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이 연맹에 제출할 제안의 대략을 그에게 전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 나는 우리들의 계획서와 1919년으로부터 1921년까지의 조선 항일운동의
연대록을 그에게 주니, 그는 그것을 가지고 가면서 "연맹에의 제출사항이 갖추어지면 곧
통지하겠다"라고 하였다.
1월 23일 ... 코린스씨가 연맹에 제출할 우리들의 서류 내용이 되었다고 가지고 와서, "궈씨가
그것을 좋다고 하였다"고 하면서 나에게 그것을 보고 서명하라고 하였다. 그 내용은 리턴
보고에도 보이는 것처럼, '조선문제는 만주사변의 한 부분인 만치, 만주에 있는 조선사람들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건져 한 중립국인으로서 대우하도록 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리턴
보고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1922년 연맹이 만주에 파견한 영국인 리턴을 중심으로 하는
사절단의 보고를 말함이다. 나는 거기에 곧 서명을 하였다. 내 생각인즉, 중국이 우리
한국임시정부 문제를 곧 연맹에 제기할 수 없을 바에야 우선 이렇게라도 조선과 연관성이 있는
문제를 상정케 하여, 연맹이 이 문제를 주목하게 될 때 어떤 딴 나라를 시켜 한국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이 순서라고 본 까닭이었다. 생각이야 꿀 같지만, 지금 당장 우리들끼리 '조선독립'을
승인하라고 요구했다가 연맹이 그것을 보지도 않고 물리쳐버리면 그뿐 아닌가. 미국 영사
길버트씨를 찾아갔더니, 그는 "며칠 전에 만주국 사절단이라는 사람들이 와서 만주국 승인을
요구하는 요구서를 연맹에 제출했으나 비서는 곧 그것을 물리쳐버렸다"고 말하였다. "만일에
그들이 일본이나 다른 승인된 국가를 시켜 이 문제를 상정케 하였으면 이 문제는 각하 되지
않았을 것이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만주문제를 먼저 올리는 것이
순서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 서류를 정리하여 구박사에게 제출해 달라고 부쳤다.
제9장
국제연맹회의(중)
1
1월 26일 ... 오전 10시에 코린스씨가 찾아와서 "당신들이 구박사에게 보낸 서류는
조선인으로부터의 진정이 아니라, 중국인의 문제처럼 꾸며서 중국 대표가 연맹에 제출해야 되는
까닭에, 역사적 문제와 일본의 침략 문제 등을 삭제하고 다만 만주에 있는 조선인 문제에 한해야
되겠다. 그러니 우리 궈태치씨와 상의해서 중국의 성명서같이 만드는 걸 양해하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들에게는 3, 4종류의 계획이 있음을 명심해주기를
바란다. 즉, 그것은 우리의 정부 승인과 연맹에의 참가권 문제 등이다. 중국이 우리들의 이
요구에 입각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중국이 시키는 어떠한 일이라도 하겠다" 그랬더니 그는 "좋다.
당신네들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뒤 우리는 다시 궈태치씨 댁에 모였다. 궈씨는
나에게 "당신들의 진정서에 있는 한국 정부 승인 문제와 연맹에의 참가권 요구는 삭제하고, 우선
만주에 있는 조선인 문제만을 우리가 취급해 제출코자 하는데 좋은가. 그래야만 중국은 이번의
만주사변과 어긋나지 않은 문제로서 이 진정서를 연맹에 제출할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미 우리들이 엔 박사에게 제안한 것이므로 찬성한다고 말하였다. 중국
대표가 이 문제를 제출하면 뒤이어서 곧 우리들의 요구를 또 각서로써 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국 대표들은 참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만약 그네들이 다시
틀리는 제안을 하면 어떻게 할까? 그러나 그들은 늦어도 5, 6일 안에는 이 문제를 제출
추진시키고자고 약속하였다.
1월 27일 ... '워싱턴 스타'지의 존슨씨가 전화를 걸어 피시니 공사와 에스토니아 공사를 꼭
만나라고 권고해 왔다. 그들은 모두 이번 회의에 참가한 약소국가의 대표들이다.
1월 28일 ... 나는 피시니 공사 홀스티 루돌프씨와 에스토니아 공사 A. 슈미트씨를 만났다.
그들은 입을 나란히 하여 "우리들은 동맹국이니 힘을 다해 서로 협력하자"라고 말하였다. 그들을
만난 후에 나는 다시 중국 공사 궈씨를 찾아갔다. 궈씨는 "며칠 안에 '만주에 있어서의 조선인
시민권' 문제를 제기하겠다"라고 말하였다.
1월 30일 ... 중국이 만주 조선인 문제를 연맹에 제출한 뒤에 우리들이 그뒤를 이어서 제출할
진정서를 만들기에 나는 분망하였다. 나는 코린스씨를 만나서 "중국이 조선인 문제를 제출하는
것을 주저하는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다면 우리는 인제 더 기다리는 데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였더니, 코린스씨는 "우리는 중국이 끝마치도록 기다려야
된다. 그것이 우호적 신문기자단의 공통한 의견이다"라고 대답하였다.
2월 1일 ... 코린스씨가 와서 나에게 곧 중국 대표 엔 박사를 만나라고 하기에 나는 "엔 박사가
곧 우리 문제를 연맹에 제기할 것을 바란다"라고 요구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만주인을 대표하는
서류 586호가 '만주국을 지지한다'라고 성명한 회람-이것은 연맹 각국 대표에게 돌렸다-의 사본
을
가지고 왔다. 그 서류에는 '만주국은 인민의 원에 의하여 건국되었다'는 것을 성명한 길림에 있는
조선인들의 성명이 씌어 있었다. 나는 거기 대하여 조선의 이름으로서 항의문을 쓰고, 그것을
중국보고국에 보내서 등사시키게 하였다.
2월 4일 ... 연맹 대표로서 만주를 다녀온 리턴 성명서의 주인공 리턴경을 만나려고 백방으로
연락했으나, 그는 너무나 바빠서 만날 수가 없었고, 리턴경과 같이 '리턴 보고'를 심리하기
위하여 연맹에서 임명된 19위원 중의 한 사람인 스웨덴 대표 크리서천 렌지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능숙한 영어로 말하였다. "중일문제가 미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때, 어느 나
라
대표도 조선문제를 연맹에 제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날에는 반드시 조선독립을
우리들이 말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 나는 그에게 대답하였다. "아직 나는 귀하뿐만 아니라
어
떤 나라 대표에게도 조선독립 문제를 제기해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
금
귀하의 앞에 놓여 있는 문제에 관해서 중대한 한 개의 보고를 드림으로써, 연맹과 중국을 원조
할
수는 있습니다. 귀하의 앞에 지금 놓여 있는 문제는 연맹이 리턴 보고를 각하하고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쪽으로 일본은 또 리턴 보고는 거짓이라는
인상을 연맹뿐 아니라 세계에 선동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할 것입니다. 그들은 조선인
2명까지를 포함한 소위 서류 서명인 일람표 중에 '만주국은 일본인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는 586호 서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일본인의 서류 내용에 대
항
하는 데 필요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나는 연맹에 제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보도가치가 있도록 공적인 입장에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해, 나는 그것을 중국 대표 아
닌
어느 다른 나라 대표가 연맹 비서에게서 요구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회람케 해주기를 바랍니
다.
지금 내가 요구하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그랬더니 그는 "잘 알겠습니다. 나는 귀하가 스웨덴
수
상과 또 다른 스웨덴 대표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수상은 귀하를 만나고자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2월 5일 ... 일요일, 푸랑코씨 부부와 같이 레만호까지 산책을 나갔다.
2월 6일 ... 리치몬드 여관에 가서 영국 대표 세신경을 만났다. 그에게 부탁하면 리턴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말을 들었기 대문이다. 그는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조선인과 중국인은 서로
친한가. 만주에 있는 조선인이 만주국에 반대하는 것을 표시하는 무슨 증거 서류가 있는가." 나는
거기에 대해 곧 "있다"고 대답하고, "그것을 약소국 중의 어느 대표가 연맹 사무국에 부탁하여
회람시킬 수 없겠느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스페인 대표 마다리아가씨에게 소개장을
써주었다.
2월 7일 ... 스페인 대표 마다리아가씨를 만나려고 연락하였으나 그는 군축위원회의 중대한 일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나는 여관에서 조선성명서와 연맹사무총장에게 보내는 편지 150장과, 이
두 문제에 관계되는 리턴 보고서 초록 150벌을 준비하였다. 전부 오늘 2월 7일 날짜로 하였다.
그러나 그뒤 바로 미국 영사 길버트씨를 만나니, 그는 "그것을 연맹에 제출하기 전에 먼저
스페인 대표 마다리아가씨를 만나서 상의하라. 그와 아일랜드 대표 레스터씨는 그들의 손으로써
그것을 제출해 줄는지도 모르니까"라고 권고하였다. 그래 나는 하루를 더 기다리기로 하고
있는데 마침 연맹 비서가 나에게 보낸 우편 한 통이 배달되었다. 떼어 보니 그것은 '만주에 있는
조선인과 만주인이 만주국을 지지한다는 소위 568호 서류를 일본인이 제출'한데 대해서 반대한
하와이 조선인동지회가 중국 대표 엔 박사에게 보낸 전보에 대한 답장이었다. 하와이에 있는
우리 동포들을 시켜 나는 엔 박사에게 그 전보를 치도록 지시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연맹에
회람되고, 몇 군데 신문에도 발표되었다.
2월 8일 ... 아일랜드 대표 레스터씨에게 전화를 하니 오라고 하였다. 연맹에 보내는 우리들의
서한의 발송 준비를 끝마친 뒤 그것을 한 부 가지고 가서 그에게 보였더니 그는 그것이
잘되었다고 하며 "우리 정부로부터의 지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나는 꼭 정부에
요청해서 될 수만 있다면 당신 나라의 일을 연맹에 회람토록 하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래 나는
여관으로 돌아오자, 그것을 곧 연맹에 발송하고, 약 60부는 각국 대표에게, 또 그 나머지는 각
신문통신사에 보내버렸다. 뒤에 들으니 영, 불 두 나라 말로 작성된 우리들의 항의는 곧 방송국을
통해서 발표되었고 제네바의 각 신문은 이것을 자세히 보도하였다고 한다. 나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서영해가 연맹에 가서 이 사실을 서울 '동아일보'에 무전으로 알리고 있는데 뜻밖에 일본
신문인들이 그 옆에 와서 더 자세히 이 소식을 타전하였으므로 우리는 덕택에 결국 돈 한푼 안
들이고 조선에 알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우리들은 이 이야기를 하며 많이 웃었다.
2
2월 9일 ... 푸랑코씨가 왔다. 그는 우리들의 항의서의 내용과 그 제출 방식을 칭찬하고, 그것을
비참가국 대표들에게도 보내라고 하였다. 나는 그것을 이미 다 보냈다고 말하였다. 서영해군의
말을 들으면 중국신문국도 우리들의 항의서에 대해 긴 전보를 본국에 보냈다고 한다.
2월 10일 ... 항의서 사본을 미국 영사 길버트씨에게 보내, 그것을 스팀슨 비서와 린도브 소련
영사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2월 11일 ... '뉴욕 타임스'가 우리들의 통신을 게재했다는 뉴욕으로부터의 전보를 받았다.
'스위스 뉴스 신디케이트'를 대표하는 E. 데브리스 박사가 찾아와서 독일과 프랑스의 신문에
우리들의 일에 대한 기사를 쓰겠다고 약속하고, 내 사진과 약전을 가져갔다.
2월 13일 ... 존슨씨가 전화를 하여, 연맹위원과 신문인들이 우리들의 성명서에 관한 대책을
토의중이라고 하였다. 한편 신문 발표에 의하면 19개국 위원은 일본에 반대하는 결의를 하였고,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연맹과 스팀슨 안을 지지한다고 성명하였다 하며, 영국 외상 존
시몬스는 일본에 반대하는 연맹의 결의에 공공연히 반대하였다고 한다. 서군은 나에게 "중국은
지금 이박사께 축하를 드리기 위해 구박사 성명서라는 것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하였으나,
나는 그들이 약속을 실행해 주지 않은 것이 역시 불쾌하였다. 나는 오늘부터 '만주에 있는 조선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니,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도 조선인만은 중립국인으로 대할 것'을
요구하는, 리턴 보고서에 의거한 서류를 꾸미기에 골몰하였다.
2월 16일 ... 중국 대표 구씨의 비서가 전화를 걸어서 "중국 대표가 조선을 위해 연맹에 제출할
성명서에 관해서 만나고 싶어한다"고 하길래, "내일 오후에 오라"고 대답하였다.
2월 18알 ... 그 중국 대표라는 사람은 오늘 오후 3시에야 나를 찾아와서 킹 운쓰라는 명함을
내놓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재만조선인을 위하여 만주국을 세우는 데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내놓고, 나에게 서명을 하라는 것이다. 연맹총회는 21일 화요일에 다시 열리니 이것은 늦어도
월요일 아침까지는 취급되어야만 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읽어보고서 서명할 테니 나가서
기다리라"고 하고, 그가 나간 후 자세히 보니 그건 너무나 부족한 것이었다. 극히 상식적인
전정세를 재설명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래 나는 몇 군데를 삭제하고, 만주에 있는
조선인의 상태와 감정에 관하여 자세히 써넣었다. 그래 나는 점심 뒤에 그 킹 운쓰씨의
숙소를 찾아가서 둘이서 상당히 세밀한 검토를 다시 하였다. 그는 그것을 19일 오후까지 수정
완료하여 나에게 다시 통지하겠노라고 하였다.
2월 19일 ... 킹씨가 수정된 성명서와 나의 약전 두 부를 보내왔으므로, 다시 검토해보고 거기
서명을 해서 원문을 돌려보냈다.
2월 20일 ... 나는 종일 재만조선인 문제에 관한 서류 작성에 분망하였다.
2월 21일 ... 연맹총회가 오후 3시 반부터 열렸다.
2월 22일 ... 중국 대표 W. W. 엔 박사가 우리의 성명서를 오늘에야 겨우 연맹에 제출하여,
토이벌 비서가 그것을 회람에 부쳤다.
제10장
국제연맹회의(하)-러시아행
1
위에서 저자는 이박사의 성명서가 중국 대표의 손을 빌려 마침내 연맹에 제출 회람된 데까지의
그의 일기를 보였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연맹 안에서 많은 물의를 일으켜 마침내 연맹이
만주국을 반대하는 데 박차를 가하였고, 이에 할 수 없이 일본은 드디어 이해 3월에 연맹을
탈퇴하는 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본이 탈퇴하자 그뒤 얼마 동안 한가한 틈을 얻어, 승만은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각국의
정치가들과 친선을 꾀하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4월 18일에는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서 그의 일을 착수하였다. 이번에는 연맹에서
물러난 일본을 징계처분하려는 연맹안의 일부 세력과 합동하여 이 일을 추진시킴으로써 그의
주장을 관철하려 함이었다. 나는 아래에 이에 관한 그의 일기를 다시 초록하려 한다.
4월 25일 ... 미국 영사 길버트씨를 만나서 나는 "일본인이 제출한 586호 서류가 허위라는
강력한 증거를 제출해서 그들을 연맹이 징계처분하도록 하려 한다. 그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러시아를 거쳐서 만주까지 갔다 오려 하는데 어떻겠느냐?"라고 물어보았다. 그는 그건 퍽
재미있는 일이라 하며 역시 그걸 제출하는 데에도 중국 대표의 손을 빌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후엔 중국 영구대표 후치태씨를 만나 같은 뜻을 말하니, 그는 크게 찬성하여, 그의 힘이 자라는
대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였다.
4월 29일 ... 후치태 박사가 전화로 "소련 대표는 귀하를 추천하는 글을 파리와 베를린의
그들의 영사관에 보냈으니 거기서 귀하의 여권을 사증받으면 된다"라고 하였다.
5월 2일 ... 중국 대표 본부에서 후치태씨와 회담을 하였다. 우리들은 연맹이 연맹규약 제16조에
의하여 일본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연맹에 제출하는 문제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그는
내일 오후 1시부터 중국 대표 숙사에서 열 예정인 중국 오찬회에 나를 초대하였다.
5월 3일 ... 오전에, 연맹총회에 의하여 임명된 중국 문제 고문위원회의 의장 크리스천 렌지
박사의 사무소를 방문하였다. 우리들은 극동정세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였고, 그는 특히 일본에
대해서 많이 물었다. 그는 "일본은 분명히 전쟁을 또 원하고 있다. 여기 대해서는 연맹이 이미
조처를 강구하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서 결정적인 무엇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조선의 연맹 참가권은 승인될까?" 하고 물으니 "그것은 지금은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비공식 회의에서 이 문제를 토의한 일이 있는데, 그때 그것을 승인치 않기로 의견이
일치되었다"라고 하였다. 그와 헤어진 후 나는 중국 본부의 오찬회에 나가, 그들 중국 대표들과
같이 조선과 중국 문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였다.
5월 5일 ... 조선관계조약을 연맹에 등록하기 위해 그 준비로서, 각국 정부에게 '그 관계 조약의
정식사문을 보내라'고 요구한 요청서를 과거에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 일이 있는 여러 나라에
보냈다. 이것이 수집되면 이걸 연맹에 등록하고, 조선이 얼마나 각국으로부터, 더구나
일본으로부터 조약 위반을 당하였는가 하는 산 증거로 삼아 다시 우리의 문제를 논의케 하려
함이었다.
5월 9일 ... 연맹 사무총장으로부터 우리들의 성명서를 틀림없이 받았다는 확인장이 왔다.
5월 11일 ... 중국 대표 후치태씨는 내가 러시아를 거쳐 만주로 가는 일에 대하여 베를린 주재
중국 공사에게 소개장을 부쳐 주었다.
5월 18일 ... 나는 제네바를 출발하였다. 파리에 가서 먼저 나의 패스포트에 러시아 영사의
사증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5월 21일 ... 파리 도착.
5월 30일 ... 러시아 영사관에 갔으나 제네바로부터 아직 추천장이 오지 않았다 하여서
후치태씨에게 빨리 추천장을 부치라는 전보를 쳤다.
6월 10일 ... 제네바에 있는 데비스씨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거기에는 내가 5월 5일부로 각국에
발송한 '조선관계조약의 정식사문을 보내라'고 한 요청서에 대하여 벨기에 정부가 보낸
정식사문이 동봉되어 있었다. 그 밖에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묵살해 버렸건, 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회답해 온 것이었다.
7월 13일 ... 나는 겨우 여러 곳에서의 여권사증을 마치고, 빈으로부터 모스크바를 향해
출발하게 되었다.
7월 18일 ...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출발. 기차는 넓은 평야를 북쪽으로 달린다. 여기저기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것은 지금까지 유럽에 와서 내가 보아온 중에서는 가장 동양의 농가와
비슷한 집들이었다. 남녀노소들은 들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물오리, 물새, 또
조선에서 보던 것 같은 학의 무리가 긴 목을 빼고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6시(러시아 시간으로)에 우리는 러시아와의 국경 지방 네가레라그에 도착하였다. 삼엄한 경계.
제복의 병정들이 쌍안경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총칼을 번쩍거리는, 이러한 광경은 참으로 흥미가
있었다. 이곳에서 차를 바꾸어 타고 특별열차로 나는 국경을 넘어 모스크바로 갔다.
2
7월 19일 ... 오전 9시 반, 소비에트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정거장에는
여행안내소원과 두 사람의 미국인이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안내소원은 나의 수하물을
찾아 가지고 그들의 안내소 소속의 80대의 자동차 중의 한 대에 나를 싣고 모스크바 호텔
525호실에다 안내해 주었다. 이 여관은 바로 모스크바 강변에 크레믈린 궁과 붉은광장과의
반대편에 있었다.
나는 방값, 식사, 구경값으로 날마다 5불씩을 주면 되는 여행자표를 사서 쓰기로 하였다. 그
표를 사면 모든 일에 친절한 접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또 그들의 혐의를 받지 않기 위하여 혼자 돌아다니는 걸 피하고 다른 여행자들과 같이
구경을 나갔다가 오후 2시쯤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여관의 통역이,
"외무성에서 사람이 와서 당신을 찾다 갔습니다. 방에 그대로 계시겠으면 내가 외무성에
연락을 해드리겠어요" 하였다. 통역은 G. 토빈슨이라는 처녀였다.
나는 빈에서 러시아 공사 피너위스키씨로부터 나의 이번 임무를 러시아 정부에 알려 협조를
얻도록 하겠다는 언약을 받았으므로, 그들이 이미 피터위스키씨의 전보를 받고 사람을 보낸
것이려니 생각하고 내 방에 머물러서 다음과 같이 그들의 외무성에 보내는 편지를 썼다.
소비에트 러시아 외무위원회 귀하.
나 이승만은 오늘 모스크바에 도착하였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적당한 귀국의 관계관과
비밀히 회담코자하오니 보내주십시오. 빈에서 나는 내가 모스크바에 온 사명을 귀국 공사 폰
피터위스키씨에게 자세히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나의 말에 찬성하고 내가 여기 도착하면
편지를 써서 외무위원회에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지금 모스크바 호텔에 있으니 속히
답하여주기를 기다립니다.
날씨는 무척 덥고 답답하였다. 내가 이 편지를 다 썼을 때, 누가 문을 노크하여서 열어보니,
토빈슨양이 웬 젊은 청년 하나를 데리고 와서
"여기 외무인민위원회 대표자가 왔습니다. 내가 통역을 하겠습니다"하였다.
우리가 방에 들어가서 각각 자리에 앉자, 청년은 정중한 투로 말하였다.
"외무인민위원회는 대단히 미안하오나 귀하에게 러시아를 떠나시기를 요구합니다. 입국 여권을
사증한 것은 사무장의 실책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래 방금 써놓은 편지를 보이고, 내가 여기 오게 된
것은 파리의 러시아 영사 안토노프와 빈의 공사 피터위스키의 승인을 받은 결과이며, 또
러시아의 외무인민위원회와 상의할 중대한 안건을 가지고 온 것을 누누이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조용히
"외무인민위원회는 귀하를 알고 있으며, 또 귀하의 여행 목적과 여권사증에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다만 이쪽의 과실로 사증된 것뿐이니, 이 때문에 우리는 귀하에게 가시기를
요구합니다" 할 뿐이었다.
"이 여권을 내가 사용한 뒤에, 당신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증거할 만한 무슨 잘못을 내가
저질렀습니까?" 하고 내가 물으니, 그는
"아니올시다. 만일에 당신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정부는 군대사관을 시켜 당신을 추방할
것이올시다. 그러므로 나는 외무인민위원회를 대표하여 귀하께 미안의 뜻을 말하고 잘못 사정된
여권에 대해 사과하는 바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래 나는 웃으며
"네. 당신들의 등뒤에 무엇이 있어서 그런지 잘 알겠습니다. 나는 귀국 외무위원회의
태도표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알았으니만큼 꼭 하루만 더 여기 있고 싶습니다." 하고,
편지를 그에게 주며 적당한 관계관에게 전달하라고 하였다.
"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귀하께 말씀한 내용이 변경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말하며, 포켓에 편지를 넣고 정중히 인사를 하며 나가버렸다.
토빈슨양은
"당신 동무에게 말씀하셔서 원조해 달라고 하세요. 당신은 사증을 맡으셨는데, 정부는 어째서
당신을 거절하는지 딱하지 않아요?" 하였다.
나는 혼잣말처럼
"그것은 일본을 겁내서 그러는 것이오. 그러니 어떤 친구도 이 일엔 손을 댈 수 없소. 그들은
그들의 과실을 인정하고 공식으로 내게 사과했으니, 이런 데서 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내가 모스크바에 왔다는 전보를 하와이에 쳤다. 아직까지는 일본인이 내
일을 방해할까 염려하여 전보를 치지 못했으나 인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전보를 친 뒤에 나는 중국 공사관에 갔다. 공사 유난주씨는 내 일에 동정한다고 하며
"무엇이든 부탁할 일이 있으면 말씀하시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때 동지나철도 문제로
중러관계가 긴장해 있는 때이라, 그들은 나를 도울 길이 없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유 공사는
"지금 바로 동지나 철도를 매수하기 위해서 일본인 철도위원들이 여기 와 있습니다. 중국은 그
철도를 팔아먹으려는 소련의 권리를 강경히 반대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일본놈들이 내 행동을 진작부터 감시하여 소련에 항의한 결과, 소련 정부는 비겁하게도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나를 거절한 것은 명백한 일이다. 이것이 명백하여지자 맨 처음
내 머릿속에 번쩍이는 생각은, '이 사건 전부를 세계에 공표하여 여론을 일으켜볼까'하는
것이었으나, 이보다도 더 좋은 안이 생각되어서, 나는 그것을 우선 나 혼자만 알고, 뒷날
우리들에게 이롭도록 이 사건을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밤에는 중국 공사관의 초대를 받았다.
7월 20일 ... 오전에 차표를 사고 여권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 여행 안내소에 갔다가 다시
여관에 돌아왔을 때는 오후 2시경이었다. 토빈슨양이 그 동안에 또 외무 위원회 대표가 왔다
갔다고 하였다.
점심 뒤에 여관의 노대에 나와 있으니 토빈슨양이 또 그 청년을 안내해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포켓에서 내가 위원회에 전달하라고 준 편지를 꺼내 들고 "미안하지만 외무 위원회에서는 이런
편지를 못 받겠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것을 도로 받아 가지고 그 봉투에 그 청년의 성명을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거기에 '외무 위원회 대표 프리 겐트'라고 서명하였다. 나는 그 옆에 다시 통역
토빈슨양의 서명도 받았다. 그런 뒤에 통역을 시켜서 나는 말했다.
"사정이 그렇게 되어 귀국 정부 당국에 면회를 못 하고 가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그러나
귀국 정부의 정식 사과에는 나는 조금 만족하였다. 외무 위원회에 이 뜻을 전해 주기 바란다."
그러고 나서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도 따라서 일어섰다. 청년은 인사를 하고 곧
나가 버렸으므로, 나도 그곳을 물러났다.
그래 그날 밤 11시 나는 모스크바를 떠나는 삼등열차로 이 나라를 떠났다.
내가 모스크바를 다녀온 동안에 보고 느낀 것은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농가들보다도 러시아의
농가가 가장 빈약한 점이었다.
기차 속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러시아의 길거리에서 굶어 죽은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고 하였다.
이 박사가 1933년 국제연맹에서 활동한 정치적인 기록은 이상으로서 끝이 난다. 그는 러시아
정부의 거절로 그의 만주행의 계획이 좌절되자, 이를 갈고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서 그 동안 사귄
친구들에게 다음 기회를 약속한 후에 이탈리아를 거쳐서 8월 10일, 유럽에 온 지 9개월만에
이곳을 일단 하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8월 16일 그는 미국 뉴욕에 다시 도착하였다.
제11장
한 편의 로맨스
나는 여기에서 아무래도 여러분에게 이박사의 한 편의 로맨스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현재 그의 부인이 되어 있는 프란체스카 여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앞의 10장에서는 그가 연맹에서 활동한 기록만을 중심으로 하다 보니까 깜박 빠져 버렸지마는
이박사가 제네바에 있을 때 오스트리아의 여성 '팬니(프란체스카 여사의 처녀 때의 이름)'는
이박사의 외침이 구라파의 각 신문지에 게재될 때마다 누구보다도 뒤에 숨어서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그를 존경하게 된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자기 또한 같은 약소민족의 한 사람임으로
해서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역시 오스트리아가 낳은 한 혁명가였음으로 해서 더욱이
절실하였다.
그래 팬니는 이박사를 존경한 나머지, 그에게 편지하여 그의 일을 돕게 하여 달라는 편지를
하여, 그의 승낙을 얻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마음은 드디어 굳게 결합되었다. 남성과
여성으로서보다도, 내조가 필요한 커다란 한 일꾼과, 그 일을 알고 또 이것을 능히 도울 수 있는
한 후배와의 결합이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이박사가 1933년 8월, 구라파를 떠나올 때, 팬니는 곧 그를 따라 나서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 날을 약속하고 한 걸음 먼저 떠났다.
빈에 홀로 남은 팬니는 한 해가 훨씬 넘도록 기다렸다. 이박사는 1934년 봄이 되자, 벗들과
상의하고 그를 미국으로 데려오기로 작정하여 곧 팬니에게 그 뜻을 알리는 한편, 미국 정부에
부탁해서 빈 주재 미국 영사가 팬니의 여행권을 곧 알선해주도록까지 하였으나 그곳 영사의
불찰로 그렇게 늦어진 것이었다.
그러자 로맨스라면 기를 쓰고 덤비는 미국의 어떤 신문에는 이박사의 편을 들어 빈 주재 미국
영사를 비방하는 기사까지 게재되었다.
"빈 주재 미국 영사는 여행권 사증문제를 처리하는 데 너무나 게으르지 않은가? 유명한 동양의
신사가 빈에 있는 여자에게 여행권을 발행해 주라고 신청했으나 영사는 낮잠을 자는지 꿩
구워먹은 소식이라 한다." 하는 따위였다.
하여간 그 보람이 있어서 팬니는 9월에야 미국 영사의 사증을 얻어 10월 4일 오후 3시 뉴욕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이박사는 그날의 그들이 만났던 기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0월 4일 오후 3시에 기선 구라파호는 뉴욕 부두에 도착하였다. 기선은 도착하였지만, 나와
킴버렌드, 남궁씨 부인은 교통 관계로 늦어서, 팬니는 상륙하자 마중 나온 사람이 보이지 않아
오랫동안 애를 태웠다 한다. 그는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렸어요!" 하였다. 다시 만난 우리들의
행복은 말로는 형용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그 길로 바로 레키신통가에 있는 몬트 크레아
여관으로 갔다. 킴버렌드 중좌 부부를 통해 미리 예약해 둔 곳이었다. 저녁에 우리는 남궁씨 댁에
가서 그의 부인을 데리고 발터 회관에 나가 저녁을 먹고, 결혼식 준비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이로서 볼 것 같으면 그가 그때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눈에 보는 듯이 역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육십된 조선 사람 같지 않게 참으로 모든 감정이 건재해 있던 그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곧 벼락과 같이 결혼준비에 착수하여 팬니가 당도한 이튿날인 10월 5일에는 시청에
가서 결혼 허가를 얻었고, 10월 8일에는 벌써 몬트 크레아 여관 특별실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킴버렌드씨 부인과 남궁씨 부인이 신랑 신부의 들러리가 되었고, 존 H. 홈스씨와 P. K. 윤씨가
사회를 하였다. 각국의 많은 친구들이 와서 그의 결혼 기념첩에 서명들을 하였다.
그리하여 두 신혼부부는 바로 여행길에 올라 12월까지 그들의 여행을 계속하였다. 멀리 텍사스
주의 사막에까지 그들의 발길은 미쳤던 것이다. "우리들은 라스 크류세스를 향해 사막을 횡단해
가다가 굉장한 모랫바람을 만났다. 이 모랫바람속에 자동차로 3백 마일을 달려, 오후 7시에야
덴닝 야영지에 도착하였다." 그는 어느 날의 여행 기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거니와, 육십에 이
정열은 우리로서는 참으로 상상 밖이어서 다만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를 보라. 그는 꼭 아직도 얼굴이 붉은 청년과 같이, 결혼하고 여행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미국에 온 지 30년, 한결같이 홀로 지내왔음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고국에
그의 처음의 아내 '박씨'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박씨는 벌써 오래 전에 그를 기다리지
않고 그와는 다시 만나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 소식을 들은 뒤에도 그는 참으로
오랫동안을 그대로 홀로 있다가, 꼭 육십에 다시 그의 문을 두드리고 온 여인을 맞이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한번 그가 팬니여사를 맞이하자, 그 정열은 어디 조금이나 늙었던 것 같은가?
이 정열은 바로 30년을 한결같이 기다렸고, 또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있는 그 똑같은 정열이요,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일에 그러할 수 있는 정열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개인에 대해서도,
민족에 대해서도, 세계에 대해서도...
제12장
예언과 같이
정열. 흰머리가 허옇도록 조금도 변할 줄을 모르고 점점 왕성하고 두터워만 온 이 정열. 개인과
민족과 세계에 대해 늘 한결같이 성실해 온 이 정열과 의지의 사람에게는 또한 유난히 투철하게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었다고, 그의 과거를 소개하는 이들은 모두 말하고 있다. 특히 그 미래를
내다보는 정치적 안목은, 미국 아니 온 세계에 있어서도 그를 따를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1933년 제네바로부터 미국에 건너오자 그는 바로 부르짖었다.
"만주사변은 결코 한낱 만주사변에만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과거 일본의
침략의 역사와 그들의 민족성격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저 한국 침략의 역사를 보라. 그들의
한국에 대한 조약은 모두가 그들이 침략을 위한 수단이요 허위였다. 이번 사변에서 그들이
연맹에 제출한 소위 586호 서류라는 것을 보라. 그것은 너무나 세계와 연맹을 무시하는 뚜렷한
거짓임이 밝혀지지 않았는가? 그들은 될 수만 있으면 세계와 모든 국가의 눈을 속여 그들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만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연맹을 이미 탈퇴하긴 하였지만,
그것으로서 그들을 안심하고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오래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2, 3년
안에 만주로부터 중국에 그 침략의 마수를 뻗칠 것임을 나는 확신해 의심치 않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시 서양에까지도 선을 벌려 미국을 공격해 오는 날이 없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동서양을 물론하고 그들의 침략 정책을 세계의 평화 확립을 위해 영구히
말살할 공동전선을 펴지 않으면 안된다. 그중에도 특히 미국과 중국과 한국 사람들의 단결은
절실히 필요한 과제인 것이다."
그의 이 연설은 많은 미국의 정치가들도 와서 들었지만 그들은 모두 그의 근본정신에는
찬동하면서도 바로 2, 3년 안에 중일전쟁이 일어난다는 데에 대해서는 모두 "설마 그렇게까지 될
리야 있느냐?" 하고 머리들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의 예언과 같이 1937년 7월이 되자, 일본은 북경 밖 노구교에서 중국 병정이
불법으로 총을 쏘았다는 것을 핑계로 드디어 전쟁을 열고 말았다.
"보아라. 나는 그전에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그러나 일본의 마수를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그들은 결코 중국에서만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몇 해 안에는 반드시 아메리카를 공격해 올
것이니 두고 보라. 그들은 중국을 정복한 후, 미국의 영토인 태평양 여러 섬에 손을 뻗칠 것이다.
미국 함대의 우수한 동양근거지인 진주만에 그들의 폭격이 시작될 날은 멀지 않았으니 미국은
지금부터 그에 대비한다 하여도 결코 빠른 것은 없다고 나는 확인한다."
승만은 다시 미국의 조야를 향해 외쳤다. 그러나 이때에도 역시 그들은 머리를 흔들었고,
그중에는,
"이승만씨는 자기의 눈을 너무 확신하는 나머지 과대망상증에 걸렸다. 일본의 동양침략의
야망은 우리가 보아온 바이지만, 설마 그까짓 것들이 세계의 중추 세력인 미국이야 공격하랴.
이승만 씨는 그 칠십 평생을 조국 광복을 위해 과로해 왔기 때문에 인제는 정신이 좀
이상하여졌다." 고, 웃음거리로 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또 그의 예언은 분명히 적중되었다. 적중이라도 바로 그 과녁의
한가운데를 가서 맞혔던 것이다. 틀림없이 일본은 1940년 미국의 해군 근거지 진주만을
폭격하였고, 그해 12월 8일에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전 그를 비웃었던 미국의 정객들은 비로소 눈을 동그렇게 뜨고 그의
예언에 감탄하였다. 그들은 말하였다. "저 한국 사람 이승만에게는 참으로 묘한 데가 있다." "이
늙은이에게는 마치 저 신약의 선지자의 눈과 비슷한 눈이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그렇다. 그 눈이-그 '일본은 반드시 패망하고 조선은 반드시 독립한다'는 신념의 눈이 없고서야
어찌 그의 70년이 하루 같을 수 있었겠는가.
1945년. 제2차 세계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승만 그의 일생의 소원대로 패망하자, 그는 한
승리자로서 우리 앞에 나타났음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그의 승리는 참으로 조선 말엽 이후
1945년 을유해방에 이르도록까지의 이 나라의 모든 승리를 대표할 수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의 일생의 억센 경력은 능히 현대 조선 민족의 최고준령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서정주의 '우남 이승만전'을 읽고서
위대하지 않은 사람의 전기를 읽을 만큼 우리의 시간은 많지 않다. 우남 이승만이 위대한
인물임을 우선 확인해 두자. 우남 사료를 조사하고 있는 한림대학교의 유영익 교수는 맵게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 국사학자의 입장에서도 우남을 "역사에 보기 드문 출중한 인재였으며 우리
민족이 배출한 최초의 정치가"(중앙일보 1995. 1. 25)라고 했다.
그동안 우남을 찬양하던 사람들은 우남을 보통 '건국대통령'이라 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우리를 해방시킨 미국의 의지로부터 자유케하고 독립하는 일의 어려움을 간과하게 하기 쉽다.
역사에는 새장의 새를 허공중에 풀어주는 것 같은 해방은 없는 것이다. 8. 15해방이란 정확하고
냉엄하게는 일본의 세력공간으로부터 미국의 의지공간으로 우리 민족의 운명이 자리바꿈한
것이었다 할 것이다. 이승만은 건국과정과 그 이후에서 해방자인 미국의 의지로부터 자유하는
가장 어려운 투쟁을 승리해 냈던 것이다. '건국은 이승만 아니라도...'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주국의 기틀을 다진 미국으로부터의 자유는 이승만 아니고는 성취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그전에 나라가 망하자, 그 혼의 불씨를 가슴에 담아 지구 저쪽으로 가서는 한평생이
다 가는 기약없는 수십년을 버텨 내어, 기다렸던 천시에 그 불씨를 갖다대기도 했던 것이다.
시인 미당 서정주가 전기 집필을 위해 우남을 만난 것은 1947년, 미당 서른 세 살, 우남
일흔 세 살 때였다. 미당의 시연보('미당시전집1', 민음사)를 보면, 이 무렵 긍정이나 성숙을
노래한 것으로 보이는 '밀어'와 '국화 옆에서'등의 시편을 내어놓고 있다. 꽃배암이 물어뜯는
숨가쁜 '화사'의 몸부림이나 '귀촉도'의 한을 넘어선 다음이다. 이쯤해서 그가 인간의 거봉
우남을 만나게 된 것은, 정이 들었을(미당의 진술) 만큼 우남의 인간 곁에 갔던 것은, 청년
미당의 대기성을 예감케 하는 대목이다.
더 내려와서 뒷날 미당은 신라인들의 '삶의 전략감각'을 노래하고 있다. 미당은 신리가 당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하고 당이 반도에 흑심을 갖자 싸워서 쫓아내 버린 전략감각에 주목했다.
신라가 당군의 후원을 얻어
백제를 정복하고 있노라니까
당군은 어느 사이 두 마음을 먹구서
신라까지 쳐부숴 보자 쑥덕이고 있는지라.
태종이 "어쩔건가?" 유신더러 물으니
유신은 단숨에 대답하고 있었다.
"개는 주인을 잘 따르지만
주인이 그 발목까지 밟으면
성내서 그 주인도 무는 겁니다.
개도 그렇건대, 우린 말짱한 사람입네다.
싸웁시다. 싸워서 이겨 냅시다."
그래서 당장 소정방이도 이 기운에 기겁해
그대로 돌아가서 당황제에게 아뢰었다.
"신라에 지금처럼 신하와 왕이 살아 있는 한
우리 뜻대로는 절대로 안 되옵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안 되옵니다!"
-"김유신 장군 2"(미당시전집2)
우남 이승만을 끌어안을 수 있었던 미당의 시심이 김춘추, 김유신의 전략안을 노래부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청년 미당은 인간의 거봉 우남에게 잠식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우남 이승만전"은 우남 본인의 회고와 면담 구술을 일차자료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전기는 '이 땅의 시인 누구보다도 천부적인 시적 재질과 능력을 고루 갖춘 시인'(김재홍 교수)인
미당과 거인 이승만의 만남의 결과이다. 그래서 읽어볼 만하다.
앞으로 지도자이고 싶거나 지도자에 관심을 가지는 모든 젊은이들에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전기는 이승만의 출생에서부터 미일전쟁이 개전되던 1941년까지가 주로 다뤄져 있다. 이 기간은
이승만 수학과 수난과 형극의 세월이었다.
맹자가 설파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큰 지도자를 있게 하기 위해 하늘이 과한다는 연마과정에
이승만의 일생은 너무도 들어 맞는다는 느낌을 준다. 맹자는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대임을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고뇌하게 하고, 곤궁하게 하며, 또한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뒤틀어지게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타고난 성정을 강인하게
만들며, 그의 부족한 점을 키워주는 것이다.(고자 하편 박기봉 역)"고 했다. 출생해서 미주
망명생활을 끝낼 때까지의 이승만의 일생을 맹자의 이 말에 한번 대입해 볼 것이다.
미당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동원했던 천둥과 먹구름과 무서리와 잠 안 오는
밤의 이미지는 맹자의 '천장륭대임어...(하늘이 장차 대임을 맡기려 할 때에는...)'의 의미 내포와
닯았고, 이 모두는 이승만의 일생 위에 그대로 얹어볼 수 있다. 종말을 알 수 없는 긴 세월 동안
되풀이되는 좌절 앞에서 견지된 그 의지와 운명에의 확신은 놀라울 뿐이다. 이것이 나라와 세계
앞에 서 보려는 꿈을 가진 소년들에게 이 전기를 권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 전기는 그 자체로서 미당의 시적 영토의 일부로도 읽힌다. 가령 미당시집 '질마재
신화'에 실려 있는 '지연승부'의 한 구절,
산봉우리 우에서 버둥거리던 연이 그 끊긴 연실 끝을 단 채 하늘 멀리 까물거리며
사라져가는데, 그 마음을 실어보내면서 '어디까지라도 한번 가보자'던 전 신라 때부터의 한결같은
유원감에 젖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을의 생활에 실패해 한정없는 나그네길을 떠나는 마당에도 보따리의 먼지
탈탈 털고 일어서는 끊겨 풀려나가는 연같이 가뜬히 가며, 보내는 사람들의 인삿말도 '팔자야
네놈 팔자가 상팔자구나' 이쯤 되는 겁니다.
이 구절은 전기 속에 몇 군데 등장하는 이승만의 연날리기도 연날리기이지만, 그의 아버지
경선이 서릿발처럼 흰 서산 나귀 한마리 타고 표표히 천하 방랑길에 오르는 분위기와 닮아 있지
않은가. 하나 더 보탠다면 전기 속에 묘사돼 있는 이승만의 소년시절, 한말의 서당풍경 당음 읽기
대목이다. 전기보다는 훨씬 뒤 80년대에 나온 시집 '안 잊히는 일들' 속에 '당음'이란 시가 있다.
'아미산월가라
아미산월이 반륜추하니
영입평강강수류를...'
일고여덟 살 또래의 우리 서당패거리들이
여름 달밤 그 마당의 모깃불가를 돌며
요렇게 병아리 소리로 당음을 음미해 읊조리는 것은
고것은 전연 고 음미 쪽이 아니라
순전히 고 뜻모를 소리들의 매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이턴, 모깃불의 신바람에,
달밤에 우는 소리를 울려펴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의 이쁜눈썹' 같은 거니 뭐니 그런 생각일랑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전기 속의 서당패 풍경과 시 '당음'은 겹쳐 있다.
미당에 대한 한 평론에 "해방 후에 특정인의 전기를 집필하는 등 치우친 언행을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불러일으킨 바도 있다"라는 것이 있다. 평단에서는 미당이 우남전기를 집필한
것이 흠이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미당전집을 간행하는 출판사도 전집에서 '우남 이승만전'을
빼놓았다. 미당이 노래부른 '신라정신'으로 얘기한다면 참으로 성에 차지 않는 얘기다. 천재시인
미당과 거인 우남의 만남이 시적사안으로 느껴지지 않는 정신의 '가난함'은 영 마음에 걸린다.
평단이 전기 집필을 흠으로 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미당이 인생 팔십 줄에 앉아, 세상이
잊어버렸던 이 책을 내게 하는 데서 나는 다시 한번 미당이 크다는 것을 느낀다.
지난 설날 세배를 갔더니, 미당은 얘기 끝에 자기가 생부 말고 인생에 사부로 생각하는 사람이
두 사람 있다 했다. 한 사람은 석전 박한영 대종사, 그는 일제하에서 민족불교를 지켜낸
대학승으로 그의 문하에 위당 정인보, 육당 최남선, 만해 한용운, 춘원 이광수가 있었다. 미당도
물론 그 앞에서 머리를 깎고 불교를 배웠다.
미당은 또 한 사람의 사부로서 우남 이승만을 들었다.
1995. 2. 4.
전 통일원 장관. 허문도
발문
어느덧 우리 민족이 해방의 기쁨을 맞은 지도 반세기가 된다. 그 동안 우리는 미, 소 양군의
군정하에서 줄기찬 독립운동 끝에 현대 민주국가 대한민국을 수립하여 나라 있는 백성이 되었고,
공산군의 남침을 격퇴하여 자유민주 체제를 굳건하게 지켰다. 그리고 교육의 진작과 부흥경제의
토대 위에서 경제발전도 이룩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희생이 컸는가를 아주 잊었거나 생각해 볼 겨룰도 없이 살고 있는 실정이다. 즉 민족적
역사의식의 결핍과 잘못된 인식 속에서 애국의 대상과 국민생활의 정신적 지주마저 잃고서
목전의 안일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역사의 진실을 알아야
하고 자기의 본체를 돌아봐야 할 때인 것이다. 그것은 진실을 아는 것만이 우리의 삶과 앞날의
진로를 가늠하는 데 꼭 필요하고 건설적이기 때문이다.
1965년 선고 이승만 박사께서 돌아가신 후 이렇다 할 전기가 출판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그 사이 우리는 정치적인 격변을 여러 번 경험하였고, 공산주의의 그 증오의 철학이 어떠한
것인지도 보아왔다. 이러한 중에 정권적 이기주의와 식민사관, 파당적 역사관과 상업주의 언론의
파괴적 횡포로 우리의 독립운동으로 세워진 대한민국의 건국사가 오유로 돌아가 버렸으니, 그
주역이던 선고에 관한 참된 연구와 발표가 없었던 것도 일면 당연한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조만간에 밝혀지게 마련이요, 그것을 터득하는 데 빠를수록 그 민족은 슬기롭다 할
것이다.
이 전기는 해방 후 건국 초에 미당 서정주 선생님께서 선고의 회고와 구수에 의거하여 쓰신
글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우리 민족이 가장 어려웠을 때 독립운동과 현대국가 창업을 위해
90평생을 바치고 가신 선고의 방대한 업적과 사료를 두루 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진실을 밝혀주고 있는 점에서 앞으로의 연구자를 위해 그 가치는 실로 매우 소중하다고 할
것이다.
이번에 미당 선생님의 매우 어려운 결단과 허문도 선생, 허만일 사장님의 권유와 노력으로 이
전기가 46년만에 강호제현 앞에 나오게 된 것을 깊은 감회와 함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있을
선고에 대한 많은 연구와 발표로 우리 민족이 어서 자기 역사에 대한 긍지와 자존심을 회복하여
선고께서 못다하신 통일을 위해 모두 힘을 합해 매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1995년 1월 25일
불초 이인수
우남 이승만 박사 주요연보
1875. 3. 26 (고종 12년)
황해도 평산군 능내동에서 부친 이경선(양녕대군 15대손)과 모친 김해김씨 사이에 6대 독자로
출생(아명은 승룡).
유년시절 서울로 이사(1877).
천자문, 동몽선습을 읽고, 서울 도동서당 등에서 수학.
통감과 중용, 논어, 대학, 맹자, 시전, 서전, 주역 등 7서를 모두 읽었음.
1887. (고종 24년)
과거를 보기 위해 아명을 버리고 우남 이승만으로 아호와 명자를 갖춘 선비가 되었음.
그의 아호 우남은 청년시절을 보낸 우수현(기우제를 지내던 마루턱)남쪽을 생각하여 지은 것임.
1894.
배재학당에 입학
1895.
배재학당 초급영어 교사.
1895.
명성황후 시해의 복수를 획책하다 수배되어 고향 평산으로 피신.
1896.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협성회를 조직하여 '협성회보'를 발행, 민중계몽에 앞장섬.
또한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 결성.
1898.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 '매일신문'을 창간, 주필이 되어 독립협회의 구국운동 주도.
1899.
황국협회와 싸우다 체포, 투옥,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후에 종신형으로 감형.
1901.
'제국신문'에 옥중 논설 집필(1903년까지 27개월).
1904.
옥중에서 '독립정신' 집필 완료.
특사로 서대문 감옥에서 출옥(8월)
'한미수호조약'의 협력조항에 의거,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도미(11월).
1905.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2월).
윤병구 목사와 함께 루스벨트 미대통령 면담, 한국독립을 청원(7월).
1907.
조지워싱턴 대학 졸업.
하버드 대학 석사과정 입학.
1910.
프린스턴 대학 졸업식에서 '미국의 영향에 의한 중립주의'라는 논문으로 윌슨(28대 미국
대통령) 총장으로부터 철학박사 학위 받음(6월).
귀국하여 YMCA 청년학교 학감에 취임.
월남 이상재와 함께 후진교육에 앞장섬(11월)
1912.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리는 국제 감리교 대표회의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차 도미,
한국독립운동 추진.
1913.
하와이에서 월간잡지 '태평양'을 창간하고, 주필로서 한국 독립정신 고양.
1916.
호놀룰루에 한인기독학원 창설.
1918.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인 신립교회 창설.
1919.
고종황제 승하(1. 22).
기미 3 1 만세운동(3. 1).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인대표자대회 개최, 한국의 독립을 선언(4. 14).
13도 대표들이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임시정부 수립 선포.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4. 23).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명의로,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정부수립을 정식
통고, 한국국제명칭 'Republic of Korea'를 이때 처음 사용(6. 14).
1920.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상해에서 시무.
1921.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군비축소회의에 한국대표로 이승만(전권대사), 서재필(부대사),
정한경(서기)을 선임.
1932.
임시정부 국무회의 이승만을 제네바 국제연맹에 한국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
1934.
뉴욕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10. 8).
1941.
영문저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 출간.
태평양 전쟁을 미리 예견.
임시정부, 워싱턴에 구미외교위원회 설치.
위원장에 이승만 취임.
1942.
'미국의 소리 방송(VOA)'을 통해 동포들에게 자유의 소식을 전하는 육성방송.
1943.
조국해방을 앞두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활동(미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공식서한
발송).
1945.
8. 15 광복.
33년만에 귀국,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10월).
미, 영, 소, 중 4대연합국에 협의회의 결의문 발송. 반탁, 반공노선 천명.
1946.
대한국민 대표 미주의원 의장,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정부수립 운동 전개, 도미하여 건국외교
교섭.
1947.
미국에서 과도정부 수립의 필요성에 대한 담화문 발표.
1948.
제헌국회 국회의장에 이승만 선출(5. 31).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선출(7. 20).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8. 15).
1949.
대마도 반환요구 기자회견(1월).
대일배상요구 관철 주장(5월).
1950.
애치슨 미국무장관, 한국은 미태평양방제선 외에 있다고 언명(1. 12).
이대통령, 극동보루로서의 한국에 계속 원조 필요성 강조(1. 22).
미국무장관 덜레스 내한. 3.8선 시찰.
이대통령, 극동방위계획에 한국도 포함시키도록 요청(6. 17).
오전 4시. 3.8선 전역에 불법남침(6. 25).
UN 안보리, 북괴군사제재를 결의(6. 27).
이대통령, 한국통일 방해는 있을 수 없으며, 국군에 한만 국경까지 진군을 명령(9. 19).
1951.
이대통령, 일본군 참전설에 대하여 일본군 먼저 격퇴해야 한다고 담화(1. 12).
미대통령에 휴전협상 반대전문 발송(7. 3).
휴전수락 4대원칙 제시(9. 20).
1952.
이대통령, 평화선을 선포(1. 18).
직선제 정부통령선거 실시.
제2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함태영 취임(8. 5).
1953.
반공포로 석방(6. 18).
휴전협정 조인. 하오 10시 전 전선에서 전투 중지(7. 27).
1954.
UN본부에서 국토통일을 위한 원조를 역설(8. 3).
한일회담 재개 용의 표명, 일본태도 반성촉구(8. 9).
1955.
미국 대외정책 수립자들에게 대공유화 위험 경고(7.7).
휴전협정 폐기 담화발표(8. 13).
1956.
제3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장면 취임(8. 15).
1957.
유도탄등 도입을 위시한 군사력 증강 역설(4. 2).
1958.
UN감시하에 북한만의 선거를 주장(6. 29).
1959.
미지 회견에서 미국원조 없이 북진 가능하다고 표명(6. 9).
일본의 동포 북송을 비난하고 공산당보다 일본을 더 경계해야 한다고 언명(2. 4).
정. 부통령 선거(3. 15).
대통령령 4선 확정(3. 15).
4. 19학생 의거. 이대통령 학생대표 5명 면담. 하야를 약속(4. 26).
이대통령, 이화장으로 이사(4. 27).
1965. 7. 19
호놀룰루시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서거(향년 90세).
국립묘지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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