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변호사 에리카 김의 라이프 스토리
나는 언제나 한국인
에리카 김
차례
머리말
프롤로그
1.
허물지 못한 문화장벽
조경묵씨와의 만남
징역 125년 형
한국인과 미국인의 대결
산산조각 난 아메리칸 드림
2.
UCLA 법대의 지옥훈련
떠나는 자와 남는 자
UCLA에서 만난 국민학교 친구
인생의 갈림길에서
검찰총장실에서의 아르바이트
다시 UCLA 공부벌레로
참석하지 못한 졸업
마지막 관문
3.
미혜 너 어느 나라 사람이냐?
마음의 고향 성심학교
눈물바다가 된 공항 대합실
경준이의 눈물
한국 남자는 울지 않는다
마이 네임 이스 미혜, 김미혜
엄마, 내가 밥을 했어요
바람아 너는 알고 있니?
첫 번째 성적표
코비나, 새로운 도전
늘 후로보 끝나고 마는 인기 투표
4.
Where are you from?
선택, 나의 대학
새로운 시작
화학은 무서워
추수감사절 소동
친구의 이별
에리카 김, 영원히 강하라
코넬에도 동성연애자가
삶의 질을 변화시킨 정치학 교실
지하 전용 도서실
아이비 리그 공산당
그 누나에 그 동생
한국 입양아와 사랑의 학교
5.
의사와는 절대 결혼하지 마라
그렇게 시집 가고 싶었니?
세상에서 가장 멋없는 남자
리처드, 우리 결혼할래요?
두 번 다시 못할 결혼
그 여자의 그 남편
6.
양말 장수 아저씨
이혼하는 여자들
문서에 약한 한국인
LA 폭동과 한인 사회
신세대 전문인 클럽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한국인입니다
에리카 김
한국명 김미혜.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2학년 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영어 한마디 못하는 어려움을 한국인 특유의 오기로
극복하면서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코넬 대학 정치학과와 UCLA법과
대학원을 나와 1990년 스물 일곱의 나이에 당당히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 그후
법률회사를 설립해 한인들을 위한 변호에 주력해 온 그녀는 현재 교포 젊은이들과
함께 한국 교민 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에 앞장서고 있고, '도산기념재단'을 만들어
한민족의 뿌리를 찾는 정신문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머리말
'황색 피부를 가진 우리가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고, 또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것일까.' 1992년 LA에서 일어났던 흑인 폭동으로 수십 년
동안 닦아 온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허탈감에 빠졌던 한국인들을
바라보면서, 내 가슴에 새긴 가장 큰 물음이었다.
2,30년 전 미주 이민이 본격화되었을 때, 이민 1세들이 이 땅으로 건너온 것은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을 수 있다'는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누구든 자신이
노력만 하면 그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한 줌의 희망이 생면부지의 땅을 향해
떠나도록 그들의 등을 떠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을 버리고 떠난 실패자들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고, 또
미국 사회로부터 소수 민족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코흘리개 시절 한국을 떠나와 이곳의 아이들 틈에서 경쟁하며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기까지 나는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내가 그토록 공부에
매달리면서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식들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참아내신 부모님의 피와 땀과 눈물 때문이었다.
1세대들이 개미처럼 일해 얻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우리 1.5세와 2세들은 편안한
가운데 공부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많은 젊은이들이 미국 주류 사회에 속속
진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 이민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이 점점
한국과 한국의 문화를 잊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는
한국인으로서 자식은 미국인으로서, 한 가정 내에 두 가지 이질적인 문화가
공존하게 되고, 결국 젊은이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미국 사회에서 한국인으로서 보다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사실을 잊고
미국인으로서 미국의 문화를 쫓으며 살아가다 보면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가 되고 만다. 한국인의 뿌리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교민 사회를 지켜주는, 특히 우리 젊은이들을 지탱해 주는 튼튼한 버팀목인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잇는 교민들을 하나의 정신적인 끈으로 묶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한국인의 긍지를 심어 주기 위해 설립한 '도산기념재단'도 거대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당당하고 떳떳한 한국인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뜻있는 젊은이들의
다짐인 셈이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나이에 아무것도 이룬 것 없으면서 내 이야기를 책으로
발간한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럽다. 그러나 삶의 목표를 정하지 못한 어린
후배들에게 악착같이 살아온 내 삶이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두서없는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이 부끄러운 글들이 한국과 미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땀흘리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 번 자신과 조국을
돌아볼 수 있는 조그마한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욕심을 내본다.
세계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뛰고
있다. 그들에게 조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또 한국 젊은이들과의
교류의 장을 마련해 준다면, 그들은 기꺼이 조국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것이 또한
한국의 세계화를 앞당기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내 나라를 떠나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결코 조국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한국인이므로.
LA에서 에리카 김
프롤로그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짧은 시간에도 나는 선고를 기다리는 피고처럼
하염없이 졸아들기만 했다. 그때였다.
"Pass!"
"네?"
"Pass!"
그 짧은 한 마디에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PASS,그 운명의 한 마디
시험. 그동안 학교생활을 통해 이력이 날 만큼 시험을 치러 왔지만, 변호사
시험은 앞으로의 내 인생을 좌우하게 될 가장 중요한 시험이기에 그 의미가
각별했다.
사흘 동안 치름 시험에 거의 탈진상태가 됐다. 시험장을 나서며 어떤 느낌을
잡아 보려 했지만 머리 속은 아주 복잡했다. 허탈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그동안 죽기살기로 공부해 온 것이 단 사흘의 시험으로 평가 내려지고 또
결정된다는 사실이.
발표하는 날까지 나는 법률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냈다. 하루하루
평온한 가운데 지나갔지만 발표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속은 마치 살어름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합격자 발표가 하루 앞으로 다가온 날, 아침에 출근을 하는데 같은
사무실의 비서 샌디가 내게 다가왔다.
"에리카, 내일 발표날인 것 알죠?"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만약 시험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니
심한 공포감마저 일었다.
"결과를 미리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요?"
나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억누른 채 비서를 바라보았다.
"신문사들은 내일 합격자 명단을 게재하기 위해 오늘 그 명단을 입수했을
거예요. 혼자 방에 들어가서 알아봐요."
비서는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하지만 내 손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아니, 안 할래요.내일이면 알게 될 텐데. 무섭기도 하구."
내가 주저하자 그녀는 한번 더 재촉했다.
"이미 결정은 난 건데 가슴 조리면서 내일까지 뭐하러 기다려요?"
"그래도...."
"아니, 오늘 밤에 잠은 어떻게 자려구.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잖아요."
비서는 내 등을 억지로 떼밀었다.
텅빈 방. 보통 때도 이렇게 고요했었나. 너무나 조용해서 숨이 막혀 왔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전화기가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커 보이는 걸까.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딱 한 번만. 만약에 통화중이면 내일까지 기다리지 뭐.
지금쯤 합격 여부를 알아보려는 사람들로 신문사 전화통이 불이 날 테니,
십중팔구 통화중일 거야.'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 다음에 쪽지를 펼쳤다. 그리고 숫자 하나하나를
일일이 확인하면서 전화 버튼을 눌렀다.
또르르 또르르....
기대하지 않았던 신호음이 울리자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쿵쾅거리며 눈앞까지
노래졌다.
"네, 편집국입니다."
수화기 저편에서 자동응답기의 기계음에 가까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기... 변호사 합격자...."
떨려서 말을 끝까지 맺지도 못했다.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에리카 김."
"번호는요?"
"90066"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짧은 시간에도 나는 선고를 기다리는 피고처럼
하염없이 졸아들기만 했다. 침 넘어가는 소리가 저편까지 들릴 것 같았다.
그때였다.
"Pass"
"네?"
"Pass(합격)!"
그 짧은 한 마디의 말에 나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멍청하게 서서 수화기를
귀에서 떼지도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간신히 현실로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숨막히던 침묵의 세계가 순식간에 바뀌면서 희열이
몰아쳐왔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풍경이 숨가쁜 속도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흥분으로 들뜬 가슴을 누르고 나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 동안 겪었던
수많은 갈등과 방황, 좌절을 이겨낼 수 있도록 빛이 되어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나보다 더 가슴 조리며 가게에서 땀흘려 일하고 계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빠, 나 합격했어."
"뭐라구?"
울음과 뒤범벅이 되어 나온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빠, 나 시험 됐다구. 변호사가 된 거예요."
수화기 저쪽에서 부모님의 환호성이 들려 왔다.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자랑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내 몸 속으로 전율처럼 파고들었다.
나는 전화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고마워요, 아빠 엄마!"
"정말 수고했다. 미혜야. 아빠는 네가 자랑스럽다."
아버지의 목소리도 울먹이고 있었다.
스물 일곱에 이룬 나의 꿈 변호사. 내 그 오랜 꿈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내가 한국인으로 당당히 맞설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1
교민 사회는 조경묵씨 사건으로 사기가 뚝 떨어져 버렸다.
현지 언론들은 한국사람들을 야만인 보듯 하며
있는 대로 호들갑을 떨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사건이 묘하게 흘러
마치 미국인과 한국인의 대결 양상을 띠고 있었다.
허물지 못한 문화장벽
"존경하는 재판장님. 조경묵씨는 이 나라에서 태어나고 이 나라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닙니다. 동양의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30년 넘게
살다가, 다시 한 번 열심히 자신의 삶을 개척해 보겠다고 태평양을 건너온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문화와 관습이 매우 다른 곳에서 성장했고, 따라서
그가 갖고 있는 사고방식 또한 매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태어난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실 미국 내의 소수 민족들 가운데서 자기 나라의 풍습대로 행동했다가 무고한
죄가를 치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사내아이의 고추를 만진다거나 부모가 자식을 위해 매를 드는 것을 성추행이나
학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하나라는 의식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피고 조경묵이 자식들에게 야단을 친 것이나, 이번 사건에 휘말리면서 아이들을
부둥켜 안고 '이렇게 살면 뭐하냐, 차라리 우리 모두 죽자'고 한 것은, 미국
사회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끔찍한 의미가 있는 것은 절대로, 절대로
아닙니다."
변론을 하는 동안 피고석의 조경묵씨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지구상에서 그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조경묵씨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다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경묵씨는 자신이 받고 있는 재판을 완벽하게 이해할 권리가 있고,
또한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을 역시 완벽하게 재판장님과 배심원들에게 전달해서
정당한 판결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경묵씨의 통역관은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며 통역관이 해야 한 의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조경묵씨의 입장이나
상황을 하나도 제대로 전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오가는 말들을 전달받지 못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명확하게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조경묵씨는 너무나 불리한 상황에서 재판을
받았고, 그것은 곧 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당한 것입니다. 그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지 못한 소수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입니다."
검사 측의 변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민첩하게도 조씨의 큰딸이 십여 년
동안이나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왔으면서도 지금까지 참아온 점을 들어
한국 여인의 인내심에 대해 피력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만 판사의
동정심을 자극하기엔 그만이었다.
"피고가 정말로 딸을 폭행하지 않았다면 왜 딸을 고소하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피고가 자신의 죄를 시인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0여 년 동안
자신의 친딸들을 성폭행한 죄는 그 어떤 죄보다도 무거운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어린아이들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행위가 더 이상 정의로운 이
사회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조경묵씨에게 엄한 벌을 내려 그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양쪽 변호사의 마지막 변론이 끝나면 피고 쪽과 원고 쪽에서 각각 한 사람씩
대표가 나와 증언을 한다. 피고 쪽에서는 평소 그의 사람 됨됨이를 설명하고, 비록
죄가 있을지라도 될 수 있으면 형량을 줄여 달라고 호소한다. 원고 쪽에서는
자신들이 당한 만큼 죄값을 치르게 해달라는 내용의 진술을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조경묵씨 쪽에서는 그의 편을 들어 주고 판사에게 눈물 어린
호소를 해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원고 쪽에서는 조경묵씨의 넷째 딸 영은양이 나왔다.
"재판장님, 저희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경영하는 가게에서 하루 종일 일을 시키면서도 점심값도 제대로 주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닐 때, 우리는 돈 많은 아버지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사람답게
살아 보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아버지에게 불평을 하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욕설을 퍼붓고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자살한 언니는 아버지가 죽인 거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우리 형제들이 당한 만큼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고 해도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매도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근엄한 법정이 한 인간의 삶을 그토록 가볍게 취급해도
되는 것인가.
나는 유죄가 확정된 이후 사건을 맡았지만, 그동안의 재판 기록을 살펴보면서
그가 전적으로 불리한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경묵씨. 내가 변호를 맡았던 수많은 한국인 중에서 가장 불행했던 그는
1993년 12월 17일의 형 선고 공판에서 종신형에 가까운 84년 형을 언도받았다.
동서양의 문화와 관습의 벽을 허물지 못한 데서 생긴 최대의 희생자 조경묵. 내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그와의 만남은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조경묵씨와의 만남
1993년 6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사무실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잠시
후 내 책상의 인터폰이 울렸다.
평일에는 법정을 뛰어다니고, 클라이언트들과 상담을 하고, 크고 작은 갖가지
모임에 쫓아다니느라 차분하게 사건 기록들을 정리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나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거의 사무실에서 보내며 현재 진행중이거나 곧 시작될
재판들을 철저하게 준비한다. 그날도 나는 자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저, 변호사님. 전화가 와 있는데요."
특근을 나온 비서가 주저하면서 말했다.
"누군데요? 토요일은 상담전화 안 받는 거 알잖아요."
"토요일은 휴무라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해도 에리카 김 변호사님과 꼭 통화를
해야 한다고 막무가내예요. 한국이라고 하면서."
한국?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은 채로 한국에서 전화를 걸어
올 사람은 없었다.
"장난전화 아닐까?"
"글쎄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목소리가 매우 다급하게 들렸어요."
순간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의 손을 이미 수화기를 집어들고 있었다.
"여보세요, 에리카 김입니다."
"저는 조경묵이라는 사람입니다."
조경묵이라는 한마디에 그 전화가 한국에서 걸려 온 전화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변호사님도 아실 거예요. 신문에서 하도 떠들어 댔으니까. 전 지금 교도소에서
전화하는 거예요."
"제, 압니다. 저도 신문에서 봤으니까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변호사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선생님 변호사가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 변호사라는 놈이 도대체 내
입장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요. 당연하지요, 날 이해하지 못하니까. 아니, 한국적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답답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난 꼼짝없이 당했어요.
제발 좀 저를 만나러 와주세요."
나는 그의 '한국적 사고방식'이라는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 사건에 대해 고작 신문에 실린 정도밖에 모르고 있었다. 왜
좀더 관심을 갖지 못했을까.
"죄송합니다만 저는 선생님 사건을 잘 모릅니다. 자세한 기록들을 보기 전에는
뭐라고 말씀 드릴 수가 없는데요."
"변호사님만이 절 살릴 수 있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그는 당혹스러워하는 내게 불행했던 어린 시절부터 수십 년에 걸친 자신의
가족사를 두서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꽤 집중을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의 이야기를 자꾸만 놓치고 있었다. 그것이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서류들
때문인가 싶어 아예 덮어 버렸지만 감이 잡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무엇인가 와닿는 것이 있었다.
"선생님, 전화로는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다음주 수요일에나 시간이 날 텐데, 제가 그날 가지요."
"안 돼요. 전 한시가 급해요. 내겐 시간이 않지 않아요. 더 이상 참을 수도
없고. 당장 저를 좀 만나러 와주세요."
"지금은 제가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이에요. 수요일에 가겠습니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아니, 내가 지금 얼마나 절실한 상황인데 그런 말을 합니까? 죽어가는 사람
살린다 생각하고 제발 빨리 좀 와주세요."
"정 그러시면 월요일 일이 끝나고 저녁 늦게라도 가겠습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멍한 상태로 있었다. 그리고 그냥 지나쳤던
신문기사들을 애써 생각해 보았다.
조경묵. 53세의 전직 목사. 미국에 이민 온 지 20년. 젊은 시절에 사귀었던
여자에게서 두 딸을 얻고, 이혼한 첫번째 부인에게서도 역시 두 딸, 그리고 재혼한
마지막 부인에게서 달과 아들. 세 명의 여자에게서 모두 여섯 자녀를 둔
사실만으로도 복잡하게 얽혀 있을 가족사를 짐작할 수 있었다.
조경묵씨 사건은 그의 큰딸이 아버지를 성폭행과 학대 혐의로 오렌지 카운티
아동보호국에 신고함으로써 시작된 것으로, 미주 한인 사회는 물론 미국
사회에서도 상당히 큰 파문을 일으켰다.
경찰이 조사에 착수한 후 오렌지 카운티 검찰은 네 자녀에 대한 성추행과 폭력
등 34가지의 아동 학대 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그리고 그를 고소했던 큰딸은 예심
재판이 진행중이던 1992년 10월, 동거하던 대학교수와 동반자살을 해 더욱
충격을 주었다.
그는 1년이 넘는 재판 과정을 거치면서 12명의 배심원 전원으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았고, 마지막으로 판사의 구형 공판을 남겨 놓은 상황이었다.
이 기간은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 변호사는 피고를 위한 마지막
변론과 항소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경묵씨는 자신의 입장을 재판부에
호소해 주고 항소 준비를 해줄 수 있는 한국인 변호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조경묵씨의 전화를 받고 나서 나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나는 날짜가
지난 신문을 모두 뒤지지 시작했다. 한인 신문은 물론이고 현지 언론들의 반응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한결같이 조경묵씨를 혹독하게 비난하는 목소리뿐이었다.
"오, 하나님 맙소사! 도대체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징역 125년 형
월요일, 일을 마치고 나는 오렌지 카운티의 교도소로 조경묵씨를 만나러 갔다.
오랜 교도소 생활로 지쳐 보이긴 했지만 특별히 건강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에리카 김입니다."
"변호사님을 찾느라 애 많이 썼습니다. 절 좀 도와주세요. 이젠 체면도 다
버렸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자식 새끼들 공부시키고 보란 듯이 살아
보겠다고 남의 나라 땅에까지 와서 죽도록 고생했는데. 물론 내가 구두쇠 노릇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긴 했지만, 그게 어디 나 혼자 잘 살자고 한 짓입니까?
결국 저희들한테 다 돌아갈 텐데... 바보 같은 자식들...."
조경묵씨는 이내 눈물을 쏟아냈다.
"선생님, 진정하세요. 그리고 차근차근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주셔야
해요."
나는 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면담을 끝낸 후 내 마음은
마구 뒤엉켜 있었다.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한 남자의 도덕적 결함과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상념이 혼란스럽게 교차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불행했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신학대학에
들어가 목사가 된 그는 우연히 만난 여자와의 애정문제로 목사직까지 박탈당하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후 그의 생활은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조경묵씨의 말로는 신학생 시절에 만난 여자는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을 와버렸고, 딸 둘을 낳았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해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이혼을 하고 말았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사업은 성공을 거두어 어느
정도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처음 알게 된 여인은 딸을 낳았다며 아이의 양육비와 생활비를 요구해
왔다. 아내와 이혼을 한 후 그는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잠시 한국에 들렀는데, 그
여자는 아예 그의 부모님 집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조경묵씨는 하룻밤을 그
여자와 함께 보내고 애원하다시피 하여 그녀를 어머니 집에서 내보냈다. 그런데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로부터 또 딸을 낳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다시 계속되었다. 얼마 후 그는 같은 교회에 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다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된 여자와 재혼을 했다. 딸과 아들
남매도 두었다. 행복한 듯 아무 일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 그는 한국에 있는 두 딸의 간절한 애원에 못
이겨 그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재혼한 부인과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들과 모두 여섯 식구가 한 집에서 살았다. 그때부터 집안에는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처음부터 아버지를 미워했던 큰딸 영선은 아버지가 모든 재산을 막내딸 앤에게
상속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영선은
교제하고 있던 미국인 교수와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큰딸 영선이 조경묵씨를
소고한 것은 그가 영선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찾아가 영선을 데리고 온 뒤였다.
조경묵씨는 큰딸이 자신으로부터 돈을 받아내기 위해 사건을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큰딸이 함께 살고 있는 대학교수와 짜고 저지른 계획적이고 치밀한
사건이란 것이었다.
판사는 전직 목사라는 사람이 친딸을 십여 년 동안이나 성폭행 했다는 사실에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다. 더군다나 조경묵씨는 백인 변호사나 통역사가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법정에서 통역사와 말다툼까지
하는 소동을 벌였는데, 그것이 또 판사의 존재를 무시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나중에 재판 기록을 보니 판사의 말이 아주 충격적이었다. 12인의
배심원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던 날이었다.
"당신 같은 파렴치한은 이 정의로운 미국 사회에서 영원히 매장되어야 합니다.
두고 보시오. 내 당신에게 125년의 징역형을 내릴 테니."
새로운 삶을 살아 보겠다고 생면부지의 땅에 와서 청춘을 다바쳐 일한 한
인간이 그 사회로부터 영원히 매장돼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기분이 과연
어땠을까.
나는 조경묵씨에 대한 동정심으로 혹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날까 봐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그의 묵은 사건 기록들을 밤을 새우며 읽어 내려갔고,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기 위해 그의 집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것은
조각그림을 맞추듯 내 인내심과의 싸움이었다.
한국인과 미국인의 대결
내 사무실에서 두 시간 거리인 오렌지 카운티의 감옥으로 나는 거의 매일
조경묵씨를 찾아가 오랜 시간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의 주의 사람들도
만나 보았다.
조경묵씨는 오렌지 카운티의 한인 회장까지 지냈는데 그에 대한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구두쇠로밖에는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잡음도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왜 그렇게 자녀분들에게 엄하게 하셨어요?"
"자꾸만 아이들이 미국 아이들처럼 변해가는 게 걱정되었어요.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다리도 쫙 벌리고 앉고, 그러니 어느 부모가 좋아하겠습니까?"
"여기 미국 아이들은 모두가 그래요. 선생님 자녀들도 미국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사실이 그랬다. 한국에서 데려온 두 딸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사실은, 그애 엄마처럼 될까 봐 그게 두려웠습니다."
"첫번째 여자 말인가요?"
"네."
"살인 협박은 어떻게 된 겁니까?"
조경묵씨의 얼굴이 갑자기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화가 나는데 무슨 말을 못해요? 너무나 비참해서 애들을 붙들고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너 죽고 나 죽자 그랬던 건데...."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것이 협박죄가 성립된다. 그 말을 그대로 영어로 옳기면
어떤 표현이 되는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또다시 답답해졌다.
"아이들, 특히 막내 아들에게도 성적 희롱을 일삼았다고 하는데...."
"아, 애비가 뒤늦게 얻은 아들 녀석 엉덩이도 못 두드려요?"
"선생님, 여기는 한국이 아닙니다. 미국이라구요. 한국에서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구요."
그뿐이 아니었다. 조경묵씨는 자식들 모두에게서 고소를 당한 상태였다. 역시
죄목은 성추행이었다.
"막내딸이 등이 다 드러난 옷을 입고 학교에 가는데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이 옷이 어때서
그러냐며 화를 내더군요."
그의 딸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이렇게 남자들이 손을 집어넣으면
어떻게 할 거냐'며 타일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경찰 조서에는 졸지에 다 큰
딸의 가슴을 애무했다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셋째 딸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다. 거실 바닥에 누워 TV를 보고 있던
조경묵씨가 자신의 머리 위로 넘어가려는 딸을 막느라 손을 뻗친 것이었다. 그때
마침 딸은 아주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만 딸의 허벅지 안쪽을
건드리게 되었다.
"딸년이 감히 아버지를 넘어다닌다는 게 있을 법이나 한 일입니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꼬여도 그렇게 꼬일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한마디로 조경묵씨의 사건은 아무리 한국말을 잘하는 변호사라 해도
한국적인 정서를 제대로 그리고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니 그의 미국인 변호사가 어떻게 했는지 눈에 선했다.
"그 빌어먹을 변호사 놈이 나보고 성폭행한 사실을 시인하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배심원들로부터 동정표를 얻을 수 있다나요?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조경묵씨와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그가 무죄라는 심증을 굳혔다.
확실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소수 민족에 대한 미국의 불합리한 대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했다.
조경묵씨가 무죄라는 내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한 것은 넷째 딸을 사무실로 불러
면담을 하고 나서였다.
"영은양은 언니의 옆방을 사용하지요? 혹시 무슨 이상한 소리 못 들었어요?"
"무슨 소리요?"
"예를 들면, 아버지와 언니가 다투는 소리라든지."
"언니는 아버지와 늘 싸웠어요. 아버지는 우리를 미워했거든요. 그뿐인 줄
아세요? 용돈도 없었다구요. 점심값도 주지 않을 정도였어요. 아무리 가게 일을
돕고 그래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그 정도뿐인가요?"
그녀는 자신도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건
상식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자신을 성폭행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고작 용돈을
안 주고 미워했다는 정도일 수가 있는 것인가.
"그건...."
"좋아요. 아버지가 영은양을 성폭행한 곳이 옷장 안이라고 했나요?'
"네."
"나와 함께 영은양의 집에 가서 확인해 볼 것들이 있는데."
그녀는 내 요구에 무척 당황했다. 그러더니 마구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게 요구할 게 있으면 내 변호사를 통해서 하세요."
나는 조경묵씨의 집에 가서 넷째 딸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옷장을 확인해
보았다. 120cm를 약간 웃돌았다. 아무리 옷장이 비어 있었다고 해도 이런
곳에서는 절대로 성폭행이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섰다.
결국 경찰의 수사에 대해 나는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뭔가 너무 허술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것 투성이였다. 조경묵씨의 전 변호사도 별
성의 없이 사건에 임한 것 같았다. 아니, 그 자신도 조경묵씨가 자녀들을
성폭행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조 선생님. 이 사건은 재수사해야 합니다. 그러니 자식들을 고소하세요.
그래야만 이길 수 있어요."
내 말에 조경묵씨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애비가 자식을 고소합니까? 그것도 내가 살자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더 이상 조 선생님 혼자만의 사건이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조 선생님의 사건 결과에 따라 우리 교민들의 위상이 달라진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실제로 교민 사회는 이 사건 때문에 사기가 뚝 떨어져 버렸다. 현지 언론들은
한국사람들을 야만인 보듯 하며 있는 대로 호들갑을 떨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사건은 묘하게 흘러서 마치 미국인과 한국인의 대결
양상까지 띠고 있었다.
그러나 조경묵씨는 끝내 자기 자식들을 고소하지 않았다.
산산조각난 아메리칸 드림
나는 조경묵씨가 유죄 판결을 받은 이후 사건을 맡았으므로 형이 확정된 후에
항소를 하기 위한 서류를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보다 완벽한 서류를 갖추기
위해서는 그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들을 찾아내야 했다.
어느 사건 하나 소홀히 다룰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조경묵씨 경우는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끝까지 싸워 보리라 결심한 사건이었다. 같은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그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기본적이 믿음 외에, 내가 이 사건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집착한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의 소수 민족들이 날마다 겪고 있는 인종 차별의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로 부각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소수 민족에 대한
미국의 차별을 시정하는 데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이다.
1993년 12월 17일. 형 선고 공판에서 그는 종신형이라 할 수 있는 84년 형을
언도받았다. 125년의 형을 주겠다던 판사의 엄포를 생각하면 그나마 형이 많이
줄어든 셈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항소를 하고 서류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우리
사무실은 거의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12월 25일, 성탄절 아침이었다. 나는 며칠째 밤샘 작업을 하고 새벽에 집에
들어왔기 때문에 모처럼 늦잠을 잘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에리카 김입니다. 네? 뭐라구요? 여보세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나는 잠결에 전화를 받다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 온 소식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경묵씨가 새벽에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몇 달 동안 초긴장 상태에 놓여 있던
신경이 한꺼번에 끊어져 버린 듯 온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 버렸다. 감옥
안에서도 재산을 걱정하고 자식들을 걱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끊임없이
걱정을 하던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을까. 형 선고 공판 후
항소를 해놓고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건에 매달렸었는데....
조경묵씨가 그러하듯 대부분의 이민 1세들은 미국에서 수십 년을 살았어도
한국적인 사고 방식을 버리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때는 그들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고, 특히 법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미국인 판사들에게
납득될 수 없는 상황으로 작용할 수 있다. 동서양의 가족과 성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다른가를 생각해 볼 때, 재판 과정 동안 조경묵씨가 당한 정신적인 피해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체포된 후 다섯째 딸과 막내 아들은 다른 위탁 가정으로 보내졌다. 위로
딸 다섯을 두고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얻은 아들이라 막내 자식에게 느끼는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아들에게 집착하는 마음은 여는 한국사람 못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아들에게 주고 싶다는 편지를 남길 정도로 아들을
특별히 사람하고 귀여워했다. 집안의 대를 이을 기둥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면회 때마다 그런 아들을 붙들고 서럽게 통곡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그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으니까 우리 가족에게 이런 고통이 닥치다니.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창피한 꼴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같이 죽자."
아버지가 워낙 서럽게 울어 대자 아들도 따라 울었다. 한국에서라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보호하면서 상황을 일일이 기록해
재판부에 보고하는 Social Worker들의 시각은 전혀 달랐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 함. 가족 몰살의 가능성이 있음. 평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아들이 아버지를 볼 때마다 울게 돼 정서적으로 불안해짐. 아들이
어디서 양육되는지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함.'
조경묵씨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모나고 따지기 좋아하는 성격은 법정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배심원들이나 그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도 동정심을 살 만한 인상을 전혀
주지 못했다. 영어가 서툴렀던 그를 위해 통역관을 두었지만 통역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싸워 통역관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신의 의견을 재판부에
전달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자신에게 얘기해 주는 그런 사람과 사이가
안 좋았다면, 그것이 또 얼마나 불리하게 작용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법정 통역사가 통역을 잘한다 해도 100% 소화되어 판사에게
전달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통역사와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말다툼까지 한 상태였다. 실제로 기록을 살펴보니 법정 통역관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통역을 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미묘하고 중요한 것들은 거의 다
빠뜨렸다. 게다가 변호사마저 한국의 문화를 모르는 미국인이었으니, 누가
법정에서 그 사람을 위해 싸워 줄 수 있겠는가. 조경묵씨는 바로 그러한 상황에
내몰려 있었다.
그에 비해 그의 자녀들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아이들이었으니 더욱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사건이 아버지에 대한 딸들의 미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밖에
나가 보면 친구들은 풍족하게 돈을 쓰는데 자신의 아버지는 하루에 점심값 몇
불도 주지 않는 수전노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경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시키고,
더구나 사사건건 딸들에게 참견하는 것들이 많았다.
딸들은 아버지로부터 너무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큰딸은
결국 집을 나가 자기가 다니던 학교의 교수와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그 역시
많은 돈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사건을 조작하여 고소를 했지만, 의외로
사건이 크게 번지고 쉽게 돈을 받아낼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고민 끝에 자살을
선택한 것 같다.
조경묵씨는 나와 만나 이야기할 때마다 미국에 온 것을 무척이나 후회했다.
나는 조경묵씨가 동서양의 문화 차이가 낳은 최악의 희생자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악착같이 돈을 벌긴 했지만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딸들에게도 근면한 생활을 하도록
강조하고 한국적인 가치 기준으로 판단하여 엄격하게 가르쳤을 뿐, 미국생활에
따른 환경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들로부터
어느 한 구석 존경받는 삶을 살지 못한 사람이었다.
조경묵씨는 세상을 떠났지만, 넷째 딸이 그의 부인을 상대로 낸 1,300만
달러짜리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 그 액수는 그의 부동산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합쳐도 모자라는 액수이다. 그러니 배상 판결이 내려지면
그의 부인은 파산선고를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젊은 날, 아메리칸 드림을 가슴에 품고 미지의 땅에 온 한 남자의 생이 한낱
꿈으로 끝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 가족 안에서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문화가 끊임없이 충동하며 빚어낸 극단적인 삶의 모습. 그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현재 이곳에서 살고 있는 모든 한국인들이 끌어안아야 할
바로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2
어린시절부터 죽을 힘을 다해 달려와
마침내 스물 일곱 해에 이루어낸 나의 꿈, 변호사.
그것은 코흘리개 때 한국을 떠나온 내가
이 거대한 이방의 나라 미국에서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UCLA 법대의 지옥훈련
유치원을 다니던 때였다. TV에 친척 아저씨(어머니의 사촌오빠) 얼굴이 나온
적이 있었다. 나는 왜 그분이 TV에 나왔는지 자못 궁금했다. 어머니에게 여쭈어
보니 아저씨가 맡은 사건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그분은 변호사였다.
어린 나는 그 모습에 꽤 감동을 받은 것 같다. 그 영향 때문인지 어른들이나
친구들이 미혜는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물으면 주저하지 않고 변호사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 이후 나는 한 번도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의심해 보지 않았고, 그
오랜 꿈을 성취하기 위해 UCLA 법과 대학원을 택했다.
우리 집이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비행기로 여섯 시간이나 걸리는 동부의 코넬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던 내가 UCLA 대학원을 선택한 이유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집에서 가까운 학교를 택하라'는 부모님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사실 속마음은 Hastings Law School에 가고 싶었다. 그 학교에서는 동양
학생들이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나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동양인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대학 4년씩이나 눈물을 머금고 딸을 멀리 떠나 보냈던 부모님은 완강했다. 결국
나는 그 뜻을 꺾지 못했다.
UCLA를 다녀간 사람들은 이 학교 캠퍼스가 아름답다고 말한다. 하지만
초여름까지 산꼭대기에 눈이 쌓여 있고, 학교 전체가 초록으로 우거진 코넬
캠퍼스에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품위 있고 고풍스러운 마을과, 자연 한 부분을
뚝 잘라다 캠퍼스로 쓰고 있는 코넬의 그 싱그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UCLA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특히 일본인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일본어 푯말이 학교 곳곳에 붙어 있어 더욱 정이 가지 않았다. 그
캠퍼스의 황량함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내 대학원 생활을 힘들게 했던 첫번째
이유였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UCLA는 법대 1학년 내내 나를 괴롭혔다.
300명 정도의 1학년 학생이 네 개의 반으로 나뉘어 수업을 들었는데, 그들과의
피를 말리는 신경전이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법대생 가운데 절반 이상이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대학도 내로라 하는 일류
대학에서 날고 뛰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법대는 말 그대로 수재들의 집합소였다.
공부 또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웠다. 좌석이 지정되어 있는 강의실에
들어가면 교수는 좌석표를 보고서 한 학생을 지목한 뒤, 그날 수업을 위해 준비해
온 판결문에 대해 한 시간 동안 무차별 질문을 퍼붓는다. 유명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판결문을 완전히 숙지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 판결문 속에 드러나 있는
상황이 만약 다른 상황으로 일어난다면 하는 가정 하에 여러 가지 가설을
완벽하게 구성해 놓아야 한다.
한 시간의 수업을 듣기 위해, 아니 무사히 넘기기 위해 그 엄청난 양의
판결문을 달달달 외우고, 또 상황이 달라졌을 경우의 시나리오까지도 완벽하게
구성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지옥에서나 할 일이었다.
모든 수업은 생사의 갈림길과도 같았다.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교수가 한 학생을
지명하면, 그와 동시에 지명 당하지 않은 학생들의 안도의 한숨 소리가 강의실을
가득 메운다. 하지만 학생들의 그런 심리상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수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수업을 진행한다. 지난 시간간에 예시해 준 판결문에 대해서
징그러울 정도로 치밀하게 파고들어 간다.
호명 당한 학생이 단 몇 초라도 주춤거리면 곧장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처음
질문에 입이 막힌 학생은 계속해서 벙어리가 되기 십상이다. 어떤 때는 교수
혼자서 한 시간 내내 허공에 대고 질문만 퍼붓고 나간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교수가 홀가분하게 수업을 끝내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늘 질문한 것에 대한 리포트를 다음 시간까지 제출하세요. 다음 시간에
공부할 판결문은 1979년에 일어난 고호니 살인사건입니다."
수업이 끝났지만 그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번 시간에
지목 당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다음 시간에 지목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리포트와 판결문에 대한 준비.... 그 모든 것들이 학생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다.
이미 피고에게 실형이 선고된 판결문을 가지고 무죄로 만드는 것도 수업 중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교수의 머리 속에 감춰져 있는 그 가상의
시나리오를 어느 누가 파악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런 경우엔? 또 저런 경우엔?"
지명 당한 학생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말도 안 되는 엉뚱한 대답을 해도
아무도 웃지 않는다. 자신이 그 상황에 놓이지 않은 것만 감사할 뿐이다.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법정. 그래서 그곳에 서기까지는 관련
지식을 완벽하게 터득해야 함은 물론 그에 대해 냉혹하게 훈련받아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으므로, 교수들의 강도 놓은 수업방식을 군소리 없이 따라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
뒤에서 누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진땀을 흘리며 쫓기는 기분으로
보낸 법대 대학원 한 학기. 그동안 무슨 공부를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
머리 속에는 오직 한 학기 동안 무엇에 정신없이 쫓겨다닌 기억밖에 없었다.
짧은 겨울 방학을 지내고 다시 학교에 오니 군데군데 빈 자리가 보였다. 스스로
포기하고 떠나는 학생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고민으로 괴로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후 단 한 번도 의문을 품어 보지
않았던 나의 꿈. 나는 그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확실히 적성에 맞는 것일까, 혹시 그동안 환상만을 쫓아온 것은 아닐까,
내가 그 일을 정말 해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보따리를 싸들고 떠나는 아이들의 결단력이 부러웠다. 또 어떤 때는
변호사가 못 도리 바에야 빨리 집어치우고 차라리 변호사와 결혼이나 해버릴까
하는 유혹에 빠지기도 했다.
"어휴, 변호사가 도대체 뭐길래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이건 인간들이
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없어. 나, 공부 그만두고 변호사한테 시집이나 갈까?"
나의 자조 섞인 농담에 남학생들은 탄성을 질렀다.
"에리카, 생각 한번 잘했다. 여자 팔자는 다 남자에게 달린 거야. 여자가
그렇게까지 목숨 걸고 공부할 필요 뭐 있겠니. 일찌감치 나 같은 괜찮은 변호사
잡아서 결혼해 버리는 거야."
"야 이 녀석야, 네가 어디 변호사야? 변호사 지망생이지."
농담처럼 웃고 말았지만 그것은 결코 농담만은 아니었다.
풀이 죽어 다니는 내 모습을 본 어머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혜야, 변호사가 되는 게 네 꿈이었잖니. 그리고 그 공부가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엄마는 네가 방황하는 게 믿을 수 없구나."
"엄마, 그동안 내가 너무 막연하게 생각해 온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법대
공부가 어떤 건지도 모르고. 어쩌면 환상을 쫓아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정말 그럴까?"
"변호사가 적성에 안 맞을 수도 있잖아요. 저는 요즘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봐요. 왜 전에는 한 번도 다른 직업을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미혜야, 네가 요즘 너무 힘들어서 그럴 거야. 만약 변호사가 아니라면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있니? 어디 한번 잘 생각해 보렴."
딸에 대한 어머니의 집념이 느껴질 때마다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나는 국민학교부터 대학까지 한 번도 진로 문제로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 드린
적이 없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동생들 뒷바라지나 신경 쓰시라고
큰소리를 치며 맏이로서 제법 의젓하게 행동했었다. 그런데 정작 법대에 들어와서
이렇게 중심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보여 드리다니....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방황과 갈등 속에서 그리고 공부에 대한 중압감과 심한
정신적 혼란 속에서 법대 1년을 보냈다.
UCLA에서 만난 국민학교 친구
사람들은 누구나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난 기억을 한두
번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 우연한 만남이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낼 때 인연이라는 말로 서로를 묶어 놓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숨막히던 법대 1년을 보낼 때 내 생활에 사과처럼 상큼한 활력소가 되어 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너무도 뜻밖에 만난 성심국민학교 동창 혜숙이었다.
시간도 없고 그때 나는 학교 식당에서 사먹는 샌드위치 하나로 하루를 견뎠다.
혜숙이를 만난 날도 터키 샌드위치를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끝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줄을 따라 점점 앞으로 걸음을 옮겨가는데 식당 안에서 빠른 손놀림을 하는
여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한국사람 같이 생겼는데... 꼭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야. 어디서였을까?
어디였지?'
나는 빠르게 기억을 더듬어 가며 미국에 와서 만난 한국인들을 떠올려 보았다.
패사디나? 코비나? 교회? 파티? 모두 아니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나는 그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그렇다면 성심국민학교? 같은 반 친구였었나?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혜숙이. 혜숙이가 맞아. 이제 생각난다. 언젠가 미국에 공부하러 왔다는 얘기를
들었었지.'
얼굴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때 그 아이의 특이한 입 모양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박혀 있었다. 나는 어느새 15년 전의 기억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미혜야, 난 임금님 역을 하고 싶어. 이 역은 싫어."
"안 돼. 혜숙이 넌 키도 작고 목소리도 임금님 역엔 안 맞아. 임금님 역은
정은이가 해야 해."
국민학교 1학년, 학예발표회 때 올릴 연극을 준비하느라 한창 부산할 때였다.
자신의 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혜숙이가 연출을 맡은 내게 배역을 바꿔
달라고 졸랐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안되자 혜숙이는 울며불며 선생님에게
달려갔다.
"미혜야, 혜숙이가 임금님 역을 하고 싶다는데, 웬만하면 혜숙이를 임금님
시키면 안 될까?"
"선생님, 혜숙이는 안 돼요."
"왜? 왜 안 된다는 거니?"
"그앤 키도 작고 목소리도 임금님 역엔 맞지 않아요. 임금님 역은 김정은이가
해야 되는데 혜숙이가 자꾸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어쩜 그렇게 둘 다 고집이 세니?"
그래, 저앤 바로 그 혜숙이야.
어느새 차례가 되어 주문을 한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나 그 순간 곧바로
물어 보지 않으면 좀처럼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저... 이름이 뭔지 물어 봐도 돼요?"
"줄리."
"저, 혹시 한국사람 아니에요?"
"그런데요."
"한국 이름이 뭔지 물어 봐도 돼요?"
"지원이. 그런데 왜 그러세요?"
아, 아니었구나. 적잖이 실망하여 돌아서려는데, 이름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이상했는지 그 여자가 내게 이름을 물어 왔다.
"미혜, 김미혜. 혹시 성심국민학교 다니지 않았어요?"
그 여자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면 네가 성심국민학교에 다니던 그 미혜란 말이니?"
"그래 , 나 미혜야. 너 혜숙이 맞지?"
우리 둘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혜숙이는 샌드위치를 내팽개치고 밖으로
달려나왔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몰려들었던 학생들이 무슨 큰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우리를
둘러쌌다. 모두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우와, 이게 웬일이니? 너 여기서 공부하고 있었구나. 너희 가족들은? 집은?"
"미혜야, 한 가지씩 물어 봐. 정말 반갑다. 이게 몇 년 만이니?"
혜숙이의 또 다른 이름이 지원이었고, 혜숙이는 UCLA 학부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우리는 수업이 끝난 후 다시 만나 15년의 빈 시감을 메우느라
밤을 새웠다.
사람 사이의 만남이란 참으로 알 수 없다. 어린 시절 그애와의 작은 다툼이
없었다면 기억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내가 한창 외로움으로 방황하고 있을 때 혜숙이를 만난 건 참으로 행운이었다.
대한 시절에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던 미경이와 헤어져 마음의 방황이 더욱
심했는데, 그 빈 자리를 혜숙이가 채워 준 것이다. 물론 하는 공부가 다르고 함께
만날 시간이 아주 적었지만, 혜숙이는 내 가슴 속에 쌓여 있던 답답함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혜숙이는 졸업 후 세인트루이스에 살고 있는 한국 남자와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다.
보고 싶은 혜숙이.
인생의 갈림길에서
수업의 혹독함과 정신적인 방황으로 거의 초죽음이 되었을 즈음 다행히도
1학년이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쓰러지려는 순간 공이 울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권투선수가 느끼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생각될 정도로 더없이
고마운 순간이었다.
나는 기분도 전환하고 공부에서도 벗어날 겸 방학 동안에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또한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던 내게 좋은 핑계거리도
될 수 있었다. 기왕이면 법대에서 배운 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일자리를 찾았는데, 운 좋게도 검찰총장실에서 검사들을
보조하는 일을 맡았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학기 중에 얻어 놓았던 아파트에서 출퇴근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 일은 판사와 검사, 변호사들과 만나면서 그들이 삶이 어떤 것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늘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만을 쫓아왔었지
실제 그들의 생활이 어떤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일은 아무리 아르바이트라고 해도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내가
분석하고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검사가 재판에 나가 논고를 해야 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취급할 수 없었다.
그곳에 출근하면서 나는 학교에서 배운 이론이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신문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처리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커다란 수확이었다.
일에 대한 호기심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동안 방학도 끝나가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러나 학교로 다시 돌아가도 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어쩔 수 없이 공부벌레가 되어 24시간 학업에 매달려야 하는 생활,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법대 1년 동안 내내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생각이지만 한 학기 정도 학교를
쉬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또한 그동안 내가 참여했던 큰 사건들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 궁금하기도 했다. 마침 검찰총장실에서는 그런 나에게 혹시
학기가 시작되어도 일을 조금씩 계속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나로서는 더할 수 없이 반가운
소리였다.
일이 그쯤 되자 나는 자연스럽게 한 학기를 쉬면서 좀더 확실히 현장 경험을
쌓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제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엄마, 나 한 학기만 학교 쉬면 어떨까요?"
"뭐라구? 미혜 너 지금 뭐라고 그랬니?"
역시 어머니는 기겁을 했다.
"학교를 아주 그만둔다는 것도 아니고 한 학기만 쉬겠다는 건데 뭘 그렇게
놀라세요?"
나는 일부러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네가 그동안 공부해 온 걸 생각해 봐라.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네가 원하던
것들을 얻을 수 있는데 지금 와서 쉬겠다니, 그건 안 될 말이다."
"일을 좀더 하면서 경험을 쌓고 싶어서 그래요. 나중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면
많은 도움이 도리 거예요. 제발 허락해 주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시간이 필요했고 또한 자유가 필요했다. 그동안 오직
공부만 하느라 여유 있게 내 인생을 조목조목 생각해 볼 틈이 없었다. 나는 LA
검찰총장실이 집에서 출퇴근하기에 좀 먼 거리였으므로, 아파트에 계속 있으면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좀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겠다는 야무진 계산을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쉽게 승낙을 받아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며칠째
부모님과의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내 뜻을 꺾을 수 없다가 판단한
부모님은 결국 휴학을 해도 좋겠다고 허락했다.
"좋아. 생각할 시간도 갖고 실무 경험도 쌓겠다니 아빠로서도 어쩔 수 없구나.
그동안 네 문제는 네가 잘 알아서 처리해 왔으니 이번에도 현명하게 앞길을
헤쳐가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파트에 혼자 있는 건 안 된다. 아무리 멀어도
집에서 다니도록 해라."
"아빠, 이젠 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 잘하고
있을 테니까 그냥 아파트에 있게 해주세요. 집에서 다니려면 두 시간이나
걸린다고요."
"미혜 너, 학교에 다닐 때야 어쩔 수 없이 아파트에 혼자 있는 걸 허락했지만,
지금은 안 된다. 너, 세상 눈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기나 하니? 학교도 가지 않는
상태에서 여자 혼자 아파트에서 사는 걸 좋게 볼 사람 없다."
"아빠, 아무도 저한테 신경 쓰지 않아요. 다른 애들도 다 그렇게 살아요. 그리고
남들 눈이 뭐 그리 중요해요? 내가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집이 멀어서
그런 건데."
"다른 사람들은 신경을 안 써도 나는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다른 애들 다
그러고 살아도 내 딸만은 안 돼. 한국에선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 넌
한국 여자야. 한국 여자면 한국 여자처럼 살아야지, 미국 애들처럼 살 생각은
말아라. 안 좋은 소문이 나면 시집도 못 간다."
"아빠, 안 좋은 소문이 왜 나겠어요?"
"아무튼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그후 어머니는 아파트에 와서 내 짐을 몽땅 가져가 버렸다. 결국 나는 두 손을
들고 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부모님께서 그토록 말리는 것을 끝까지 우겨
가면서까지 집을 뛰쳐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절실한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일로 부모님과 서먹서먹한 관계가 된다면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가끔씩 아버지의 생각이 너무 고루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한국도 분명히
달라지고 있을 텐데, 딸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은 그곳을 떠나오던 70년대
사고방식에 그대로 머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 아버지는 내 또래의
딸을 둔 한국의 아버지들보다도 훨씬 보수적일지 모른다.
내가 논리를 펴가며 강하게 주장을 하고 내 뜻대로 어떻게든 밀고 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아버지가 끝까지 지켜 나가고자 하는 마지막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그 엄격함이 딸에 대한 각별한 애정 표현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검찰총장실에서의 아르바이트
나는 시장 독점을 견제하기 위한 법률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일을 하게 됐다.
내가 일을 시작했을 때 그 부서는 상당히 큰 사안이 걸려 있어서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온통 정신이 없었다.
LA 부근에 규모가 큰 몇 개의 슈퍼마켓들이 서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만약 그들의 뜻대로 된다면 소비자들은 굉장한 타격을 입게 될 터였다.
다시 말해서, 슈퍼마켓을 통합하여 그들이 상권을 독점하면 물건의 가격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소비자들만 피해를 입게 되는 상황이었다.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와 유사한 경우의 자료를 수집해서 슈퍼마켓이
통합되면 물가가 이전의 경우보다 얼마나 상승하는가를 분석하고 통계를 내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번의 통합 사건도 그럴 가능성이 짙다는 토대를 구축해야 했다.
그런 다음에 주법이나 연방정부의 독점규제법에 이를 적용시켜 슈퍼마켓들의
통합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워낙 사건이 중요하고 방대한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 일을 시작하자마자
일주일 동안 밤샘 작업을 했다. 소비자들의 권익을 위해 정말로 '발바닥에 땀띠가
날 정도로' 바쁘게 뛰어다니며 자료를 조사했고, 그 자료를 가지고 법정에 제출할
서류를 만들고, 그 서류를 가지고 검사들은 법정에 가서 싸웠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검찰청이라는 곳이 정부기관이고 검찰 총장이라는
자리도 선거를 통해 선출되기 때문에, 모든 일을 결정하고 서류를 제출할 때
거기에서 비롯될 정치적 영향이 어떻게 나타날지를 잘 분석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어 하나를 쓰더라도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단어를
선택하기 위해 진땀을 뺐다. 어떨 땐 오후 4시 30분까지 법원에 제출해야 할
서류를 단 몇 개의 단어 때문에 3시가 넘도록 작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역시 정치라는 것은 어쩔 수 없구나' 생각하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막판에 완성된 서류를 정해진 시간 내에 제출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검사들을 보노라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나는 윗사람과는 상관없이
소신껏 자신의 업무를 위해 새벽부터 밤늦도록 일하는 그들이 존경스러웠다.
내가 알기로 한국에서는 사법고시를 합격하면 판사나 검사로 발령이 나서 일을
하다가 나중에 변호사로 독립한다는데, 미국에서는 고시에 패스하면 자신의 뜻에
따라 바로 검사나 변호사로 일할 수 있다. 검사나 변호사나 다 똑같지만, 검사는
정부에 속한 공무원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렇게 5년 동안 근무를 한 다음에는
판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나는 당시 중국인 검사 밑에서 일을 했다. 고작 법학과 1학년에 불과한 나에게
그 중국인 검사는 정말이지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그가 조사 업무를 시키면 나는 재빨리 옆 건물에 있는 도서관으로 뛰어가는데,
내가 도서관에 도착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 자료를 찾기 시작하는 순간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자료 찾았어요?"
기가 막힐 노릇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경쇠약이 걸릴 정도로 5분마다 확인
전화를 한다. 물론 그때마다 나는 'NO'라고 대답한다.
하루는 한 시간이 넘도록 자료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데, 참다 못한 그
중국인 검사가 직접 도서관으로 달려와 순식간에 자료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일을 안 해도 좋으니 집에 가보라며 매몰차게 쏘아붙이고 나가
버렸다.
화가 나고 자존심도 상했지만 그처럼 빨리 자료를 찾는 검사를 보고는 그만
기가 죽었다. 그때부터 그 검사가 내게 무엇인가를 찾아오라고 하면 나는 지레
겁을 먹곤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내가 느끼는 성취감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여러 개의 상자에
가득가득 담겨 있던 서류들이 깔끔한 몇 장의 서류로 만들어지고, 그것을 가지고
법정에 나가 변호를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었다. 밤을 새워 일을 한 만큼 반드시 그에 대한 결과가 있다는 점을 배울 수
있었다.
이때부터 미친 듯이 일하고 연구해서 거의 예술 작품과 같은 완벽한 서류를
만들어 내고, 법정에 나가 끈질기게 자기 주장을 펼쳐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내 성격과 잘 어울린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억울한
사람들을 위한 일이며, 진실을 밝혀 내고 정의를 실현하는 작업이라는 데 생각이
모아지자 나의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한 학기만 휴학을 하려던 것이 일의 재미에 빠져 결국 두 학기를 쉬고 말았다.
일에 몰두한 지 1년이 되어 갈 무렵 나는 다른 쪽으로의 진로 변경을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 결정에 부모님은 몹시 기뻐했다. 그동안의 방황을 끝까지 침묵으로 지켜본
부모님이었다.
"엄마, 역시 변호사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 것 같아요. 학교로 돌아가
다시 열심히 공부하겠어요. 그동안 걱정을 끼쳐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엄마 아빠는 너를 믿었다. 그 기간이 너무 길어서 우리들도 내심 초조하긴
했지만 말이다. 힘들어도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지금까지도 견뎌 왔는데 2년
정도야 참지 못하겠니."
"알겠어요. 이젠 정말 걱정 마세요.'
결론이 확고하게 서자 나는 빨리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다. 제대로 공부를
마치고 좀더 떳떳하게 내 일을 갖고 싶었다.
누구의 권유나 강요가 아닌 내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으므로 마음 또한 날아갈
듯 홀가분했다. 무슨 일이든 스스로 깨닫고 진정으로 원할 때 그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고 신바람 나게 매달릴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번 경험을 통해 스스로 결정했을 때 강한 책임감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시 UCLA 공부벌레로
다시 찾은 학교의 풍경에 감회가 새로웠다. 다른 학생들보다 1년 뒤쳐진 것쯤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온 나는 죽을 힘을 다해 공부에 매달렸다. 정말 좋아서 하는 공부가
이런 것이구나 스스로 실감할 정도로 나는 오직 공부만 생각했다.
그 시절 나는 잊을 수 없는 선생님 한 분을 만났는데, 그는 내게 1분 1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자투리 시간까지도 아껴 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여러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사람이 결국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수재들입니다. 결국 누가 더
열심히 노력했나에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나는 한 번도 밥을 먹는 시간에 밥만
먹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 시간이 아까워 책을 보든 신문을 보든 반드시
무엇을 보고 있었지, 그 시간을 그냥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레이엄 교수. 나는 그의 시간 관리법을 철저하게 내 것으로 만들었다. 5분
간격으로 시간표를 만들었고, 밥먹는 시간은 물론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체크를
해보았다. 그렇게 하자 정말 밥먹는 시간까지도 아까워졌다.
"여러분들은 밥을 먹을 때까지도 책을 본다고 하면 밥 하나도 편하게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살아야 하느냐고,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 습관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보는 것은 단지 그 시간에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에서만은
아닙니다. 적은 시간도 소중히 생각하고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밥먹는 시간도 아끼겠다는 생각이라면 그 어떤 시간도 그냥
흘려 보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레이엄 교수의 시간 관리법은 놀라우리만큼 효과가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공부밖에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시간을 면밀히 점검해 보니 그동안 낭비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 그것을 차츰 줄여 나가자 마지막에는 일주일 168시간 중
132시간까지 공부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 36시간으로 잠도 자고 밥도
먹고 모든 사생활을 해결했다.
학교에서 사먹는 식사 외에 집에서 음식을 먹어야 할 때는 냉동식품을 먹으며
조리시간을 최대한 줄였고, 그것을 먹는 시간에도 책을 보며 공부를 했다.
경쟁을 위한 공부가 아니었다. 나의 한계에 도전한 내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이었다.
어느새 또 한 학기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학교로 다시 돌아와 첫번째 학기말 시험을 치르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저녁에 마지막 시험이 있었는데, 밤 10시가 되어서야 강의실을 나올 수
있었다. 나는 법대 건물 휴게실을 통해 옆문으로 빠져 나와 교정을 혼자 걸어
내려왔다.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목덜미로 한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내 눈에선
더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김미혜, 너는 최선을 다한 거야.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까지 네
자신을 몰고 가면서도 끝내 참아 냈잖아. 김미혜, 정말 수고했다.'
도저히 더 이상은 할 수 없는 데까지 했다는 만족스러움, 내 자신이 그렇게
대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떳떳했다. 시험 결과와 상관없이 만족스러웠고 후회도
없었다.
그후 나는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다양한 강의를 들으며 비교적 평온한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특히 내가 관심이 많았던 인종 차별에 관한 강의는 흑인 여교수가 맡고
있었는데, 그녀는 공교롭게도 나의 대학 선배였다. 내가 코넬 대학에 입학할 때
그녀는 졸업을 했고, 또 내가 UCLA 대학원에 입학할 때 그녀는 교수로 초빙되어
왔다. 나보다 네 살 정도 많은 그 교수를 볼 때마다 나는 솔직히 심한 열등감을
느꼈다.
'저 여자는 나보다 겨우 4년 선배인데 어떻게 저만큼 공부를 했을까. 얼마나
똑똑하고 또 얼마나 실력이 있기에 벌써 대학원에서 강의를 할까. 그런데 나는 저
여자의 논문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다니.'
강의를 듣는 동안에도 그런 의문이 계속되었고,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나 하는 생각에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그녀를 내가 본받아야 할 가장 가까운 대상으로 삼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후 교수가 되지 않고 법정에 나가 싸워야 하는 변호사가 된다
해도, 그녀는 내 삶의 모델이었다. 젊은 나이에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은 그 여자가
나는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도 할 수 있고 나도 저만큼
되어야 한다는 내 목표 설정의 안내자가 되었다.
그런 분이 내 마음속 깊숙히 자리했다는 것은 내 자신을 채찍질할 수 있는 둘도
없는 선물이었다. 내가 힘들고 지칠 때 나에게 힘을 주고, 내가 쓰러질 때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워 주는 나의 영웅이었다.
이제 더 이상의 방황은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갈
뿐이었다.
참석하지 못한 졸업
사실 미국에서도 변호사라는 직업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여성들이 활발하게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0년도 채 안 된다. 내 스스로 떠벌인 이야기 대문에라도
법대를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나는 그 한 가지 꿈만을 갖고 공부에 매달려 왔다.
그러니 내가 법대에 들어가자마자 변호사가 적성에 맞는지 심각하게 고민했을
때는 내 인생 자체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거기에다 아무런 대안도
없었으니 그때 그 답답했던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검찰총장실에서 현역 검사와 변호사들을 보면서, 그들이 하는 일이 정말로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일이고 하고 싶은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는 정말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다가 등대를
만난 기분이 그럴까.
목표를 재확인하자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뎌 낼 수 있었다. 아니 행복했다.
길을 잃고 방황할 때의 고통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지만,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고통은 확실한 나의 미래를 준비하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므로 달게 받을
수 있었다.
검찰총장실에서 돌아온 후 2년 동안 나는 완전히 공부에 미쳐 지냈다. 슬럼프에
빠질 틈도 없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작은 고민들은 모두 변호사
자격증을 따낸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판례집을 잃다 잠들고 법조문 사이를
헤매다 잠에서 깨어났다. 시험이 있을 때면 며칠 밤을 새우기 일쑤였지만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었다.
요즘도 UCLA 얘기가 나오면 어머니가 가장 섭섭해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졸업식이다. 나는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솔직히 졸업식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웃으며 사진을 찍고 돌아다닐 만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졸업식에 안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표정이었다.
"미혜야,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졸업식에 안 가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몰라.
얼마나 자랑스런 졸업인데. 특별히 안 갈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엄마
아빠는 법대 가운을 입은 너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단다."
"졸업식에 안 간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코넬 졸업식 때 가보셨잖아요.
똑같을 거예요. 졸업식 자체에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도 엄마는 네가 법대 가운을 입고 당당하게 졸업식장에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엄마,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엄마가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전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계집애도 참. 너는 어쩜 그렇게 네 기분만 생각하니?"
물론 난 그 졸업장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 졸업장을 받을
사람은 바로 부모님이었다.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하고 다라 나설 만도
한데, 도무지 몸과 마음이 따라 주질 않았다. 오직 2개월 후에 치르게 될 변호사
자격증 시험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변호사 자격증을 따기 전까지는 웃을
수도 기뻐할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300여 명의 졸업생 가운데 다섯 명 정도에게 주는 우등상장과 졸업장을
우편으로 받고 나의 법대 3년은 조용히 막을 내렸다.
마지막 관문
사흘 동안 치러야 하는 시험이 시작되었다. 하루 여섯 시간을 오전과 오후 세
시간씩 나누어 시험을 보는데 미국 헌법, 형사법, 민사 법정절차법, 형사소송법,
증거물법, 부동산법, 상해법, 항소법, 이혼법, 계약법, 변호사 도덕법 등 다양한
법들이 총 망라된다. 첫째 날과 셋째 날은 논술을, 둘째 날은 4지선다형으로
시험을 치른다.
같은 법이라도 주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미국 연방정부
법원에서 혹은 연방 헌법이나 영국에서부터 내려와 미국 전체에 똑같이 적용되는
법들도 있다. 그 분야들은 둘째 날 4지선다형으로 시험을 본다.
첫째 날과 셋째 날 치르는 논술은 캘리포니아 법 안에서 출제 되는데 오전에는
한 시간짜리 논술 세 개, 오후에는 세 시간짜리 논술 하나를 쓰면 된다. 한
시간짜리 논술은 제시된 문제를 법적으로 설명하고, 과연 그 상황에서 법을
어떻게 적용하여 어떠한 결론을 도출하는지를 설명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시험을
치를 대는 미국 헌법, 캘리포니아 가정법, 재판 증거물에 대한 문제가 나왔다.
세 시간짜리 논술은 법이나 신문기사 등의 자료를 제시해 주면 각자 독자적인
분석으로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헌법 조항을
만드는데, 한 문장으로 제시된 그 짧은 조항 안에서 무엇이 잘 되었고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판단하고, 그 조항에 반대할 사람들이 누구이며 그 법을 지지할
사람은 누구인지 분석해 내고, 그리고 그 법을 지지할 만한 정치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내용의 편지를 쓴다. 그러니까 현재의 법은 무엇이고 원하는 방향은
무엇이며, 무슨 계기로 그런 법안을 상정하게 되었는지를 구구절절 써서, 그
법안이 만들어지도록 정치인들을 설득해 내는 편지를 작성하는 것이다.
논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진 시간 안에 반드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을 내지 않으면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시험마다 시간이 엄격히
지켜지기 때문에 그 시간이 지날 때마다 시험 감독들은 다음 문제를 풀라고
명령하고, 수험생들은 지시에 따라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
수험생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소지품을 시험장에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데,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작은 탁상시계까지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시간을 재며
시험을 치렀다. 또 어떤 사람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매시간마다 들락날락하기도
했다.
나는 첫날 시험을 치르고 극도의 피로감으로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음날 시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몸이 말을 안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시험을 치렀는지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다 끌어냈었다.
이틀째는 그래도 네 개 중 한 개를 고르는 시험이었으므로 덜 피곤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은 첫째 날과 마찬가지로 논술을 치렀지만 의외로 언제 시험을 봤느냐는
듯 몸이 가벼웠다. 시험이 모두 끝났다는 데서 오는 홀가분함 때문에 몸과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다.
물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틀린 답을 쓴 문제가 떠오른다든지
논술시간에 다 쓰지 못한 것들이 생각날 때면 괴롭기까지 했다. 그리고 만약
시험에 덜어져 다시 도전해야 한다면 이렇게 끔찍한 시험을 어떻게 또 치르나
하는 생각에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신은 내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시험을 치르고 3개월 후, 신문사의
이름 모를 여자로부터 'Pass' 라는 한 마디를 들었을 때의 그 감격은 평생 잊지
못하리라.
당당하게 경쟁해서 따낸 변호사 자격증. 그것은 코흘리개 시절 한국을 떠나와
이 거대한 이방의 나라 미국에서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3
그때부터 나는 두 배의 노력을 쏟아야 했다.
집에서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써야 했고,
학교에서는 또 미국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영어를 배워야 했다.
한 나라에서 두 개의 언어로 살아야 하는 나.
하지만 어느것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미혜 너 어느 나라 사람이냐?
"아니, 어쩜 그렇게 우리 말을 잘하세요?"
한국에서 온 손님이나 이곳으로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다. 낯선 외국 땅에서 뜻밖에 모국어를 만났다는
반가움으로 환하게 웃으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다.
한번은 비서와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그는 3년 전에 LA로 유학 온 한국인
학생인데, 우리 사무실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와의 대화 중에 전혀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길래, "그래요? 그거 놀랠 노자군!" 그랬더니 그가 나보다 더
놀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다 배웠어요?"
"왜요? 나도 한국사람인데...."
그렇게 슬쩍 말꼬리를 흐려 버렸지만 솔직히 기분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이민 온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말을 잘하니 참으로 대견스럽다는
칭찬의 뜻이 담겨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나는 모국어 혹은 언어에 대한 생각에 잠기곤 한다.
언어의 가치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밖으로 드러내는 데에 있다. 그래서 사람이
구사하는 어휘나 단어로 그 사람의 정서와 감각, 심지어는 성격이나 직업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언어 문제가 그렇게 쉽고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미국의 한인 교포들
가운데 언어 때문에 갈등을 겪는 가정들이 많다. 다시 말해 부모와 자식 간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다.
부모님들을 일단 이민을 오게 되면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 정신없이 일을 하느라고 자식들을 제대로 보살필 겨를이 없는 것이다. 설사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갑자기 변화된 주위 환경에 적응하다 보면, 자식들에게
모국어와 조국의 문화를 가르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부모들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에 매달리는 사이, 하루 종일 친구들과 놀게
되는 아이들을 금세 미국 아이들이 되어 버린다. 게다가 어른들은 외국어를
습득하는 데에 어려움도 많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영어에 익숙해진다. 날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자는 얼굴만 보게 되다가 어느
순간 문득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 있는 아이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모와 말도 통하지 않고 또 한국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국의 잡다한 문화를 받아들이다 보니,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니 어정쩡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부모와 자식
간에 통하는 말이 고작 '배고파' 나 '밥 줘', '돈 줘' 정도이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말이 통한다 해도 서로의 생각이나 의견 차이를 좁히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비롯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내가 현재 맡고 있는 가정문제와 관련된
사건 중에는 실제로 의사소통이 안 돼 법정까지 온 경우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니 내가 우리말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고, 또 가족간에 우리말로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의 한국어 실력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있다. 바로 나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여덟 살의 어린 딸이 행여 모국어를 잊을까 봐 항상
노심초사하였다. 한국인으로서 한국말을 모르면 끝장이라고 생각했던 분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러한 강경함이 어린 내게는 얼마나 부담스러웠는지 모른다.
새로운 사회에 뛰어들면 우선 그들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그들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다. 나 역시 내 주위를 온통 에워싸고 있는 노랑머리
아이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는 잠시도 내 머리와 입술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화장실에 앉아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쉬지 않고 외워 댔다. 어머니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는 것으로 무언의 응원을 보내 주었다. 학교를 다니게 되었을 때부터는
아이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틈만 나면 그것을 무조건 외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머니가 자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내가 잠꼬대를
영어로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어린 딸이
남의 나라 말을 배우려고 기를 쓰는 모습이 애처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날이 밝자마자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야만 했다.
"미혜야, 너 어느 나라 사람이냐?"
잠도 깨지 않은 상태에서 받은 뜻밖의 질문에 나는 어리둥절 했다.
"네?"
"대답을 해봐라. 너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한국... 사람이요."
도대체 아버지가 왜 그러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혜야, 큰소리도 또박또박 대답해 봐라. 너 정말 어느 나라 사람이냐?"
"대한민국 사람이요!"
나도 오기가 나서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행여 꿈속에서라도 네가 대한 민국 사람이란 걸 잊어서는 안된다.
알겠니? 그리고 앞으로 집에서는 절대로 영어를 쓰지 마라. 동생들도 네가
가르쳐서 한국말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네."
대답은 했지만 그건 고문이었다. 병이 날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워도 잘 안 되는
영어를 집에서는 사용하지 말라니.
그때부터 나는 두 배의 노력을 쏟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집안에서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영어를 배워야 했다. 한 나라에서 두 개의 언어로 살아가는 나.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한국말은 아버지의 엄명 때문에 그랬고, 영어는 내
자존심 때문에 그랬다. 한국에서는 주위에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곳 미국에서는 오로지 부모님밖에는 없었다. 어린 나는 그게 제일 겁이 났다.
가끔 부모님은 우리들의 언어 문제로 다투곤 했다. 나 역시 지나칠 만큼
우리말을 고집하는 아버지를 그 당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한국말을
잊지 않는 선에서 그친 게 아니었다. 우리가 성장해 나감에 따라 나이에 걸맞는
한국말을 구사하도록 꾸준히 우리말을 교육시켰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어머니와 거실에 놓을 소파를
사기 위해 가구점에 갔었다. 한참을 고르던 어머니는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찾았는지 나를 불렀다.
"그런데 이 소파는 디자인은 마음에 드는데 색깔이 우리 가구들 하고 너무
대조적이지 않니?"
"네? 대조적이요? 엄마, 대조적이라는 게 뭐예요?"
"아니, 넌 6학년이나 됐는데도 대조적이란 말도 몰라? 그 말은 3, 4학년 정도면
알아야 하는 단어야. 너 그래가지고 무슨 한국말을 잘한다는 거니?"
어머니의 꾸지람에 나는 매우 당황했다. 교회나 혹은 한국인 친구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로 한국말을 꽤 잘한다고 자부했던 터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대조적이라는 말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도적으로 그 말을 써보곤 했었다.
나는 요즘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내가 모르는 말이 나오면,
메모를 해놓았다가 사전을 찾아보든가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물어 본다. 그런 후
몇 번만 의식적으로 그 말을 써보면 곧 내 것이 된다.
가정 문제로 나를 찾아오는 한국인 클라이언트들에게 나는 조금 힘들더라도
자녀들에게 반드시 우리말을 가르치고 우리말로 대화를 하라고 충고해 준다. 말을
잃어버리면 문화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문화를 잃어버리면 한국인임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모는 아이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나는 우리 교포들이 모국어를 잊지 않는 한,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꿋꿋한
모국의 뿌리를 지니고 생활할 수 있다고 확실하게 믿고 있다.
마음의 고향 성심학교
유년기와 사춘기 그리고 20대를 미국에서 보내고 이제 서른을 넘긴 나이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내게는 아직도 한국에서의 기억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국민학교 2학년 때였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나와 두 남동생을 불러
앉혔다. 어머니가 하루 종일 쫓아다녀도 못 말릴 정도로 개구쟁이였던 우리
삼남매는 평소와 다른 부모님의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래도 뭔가 중대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호기심과 기대로 눈망울은
초롱초롱했다.
한참 동안 우리 삼남매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였었다.
"우리,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단다.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은 아니지만, 미혜
너는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날까지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돼. 알겠니?"
"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안방에서 나온 우리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누나, 미국이 어디야?"
"이모들이 사는 나라. 그런데 왜 그곳으로 이사를 가는 걸까?"
"이모라구? 그럼 비행기 타네?"
"응."
"야호, 신난다. 그런데 호진이랑 혜수는 어떻게 하지?"
막내 경모는 친구들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 심각한 얼굴의 막내와는 달리
그래도 형이라고 경준이는 제법 단호하게 대꾸했다.
"아마 못 갈걸?"
우리 삼남매에게 이민이란 단어는 겨우 이 정도로밖에는 와닿지 못했다. 그후로
어머니나 아버지도 이민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이 없었다.
이민을 떠나기 며칠 전 담임선생님은 나를 교탁 앞으로 불러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휴식시간이 되자 갑자기 아이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이민 가지 말고 자기네랑 함께 살자고 조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학급 회장을 맡고 있던 나는 학교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공부를 잘하기도 했지만, 성격이 쾌활하고 모든 일을 떠들썩하게 꾸미는 데에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슨 일이든 왁자하게 그리고 신나게 해냈었다. 무엇이든 내가 속한
그룹이 최고 여야 한다는 승부욕도 대단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황을 몹시도 싫어했다.
서른을 훌쩍 넘긴 요즘, 다람쥐처럼 학교 구석구석을 누비던 그 때 그 모습,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그 교정이 내 가슴 속 한 귀퉁이에 어슴푸레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심국민하교.
내가 2년도 채 다니지 못했던 한국에서의 내 학력의 전부인 이 학교는 당시에
몇 안되는 사립학교 중의 하나였다. 이름이 난 사립학교가 몇 개 있었지만,
성심만큼 열린 교육을 폈던 곳도 없다고 생각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님은 내가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배우고
생활하기를 바랐다. 성심학교는 천주교단에서 설립한 학교였고, 집에서도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오며 가며 훔쳐보았던 교정에 이미 내 마음을 빼앗긴 터였다.
어머니도 그 학교가 워낙 좋고 또 아이들을 사람으로 가르친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원서를 넣고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했다. 경쟁률이 엄청나게 높았는데도 내가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머니의 간절하고도 정성 어린 기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심학교는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한 울타리 안에 있는데, 모두
여학생들뿐이었다. 학급도 한 학년에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선생님들은 자연히
학생 개개인의 소소한 신상까지도 훤히 알 수가 있었다.
교정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던 자그마한 성당은 마치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지나칠 정도로 활달했던 나는 가끔 그 성당 안에 들어가 보곤 했는데, 성당
입구에 있는 성수반의 물을 이마나 어깨 위에 묻히면서 혼자 재미있어 하기도
했다. 성당 안에 조용히 앉아 있으면 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착한 아이가
되는 것 같았다. 해가 서쪽으로 살포시 넘어갈 때쯤이면 색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갖가지 색으로 성당 안을 신비롭게 채색하고, 나는 모처럼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며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다.
성심학교에서 내가 사랑했던 장소가 한 군데 또 있다. 학교 건물 뒤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는데 백일장이나 사생대회가 열리는 장소였다. 성당 안에서
날아오른 내 환상의 세계는 그곳에서 내려앉았다. 그날도 환상에 젖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도란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얼른 귀를 기울이고
눈동자를 굴렸다. 둥그런 바구니를 품에 안고 산을 오르는 수녀님들이 보였다.
전에도 두어 번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수녀님들을 미행했다.
"우와!"
놀랍게도 수녀님들이 발을 멈춘 곳에는 제법 널찍한 채소밭이 있었다.
수녀님들은 알맞게 자란 상추를 캐며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데, 그 웃음으로 온 세상이 다 환해지는 것 같았다. 수녀님들은 어린
채소들에게 물도 주고 쓰러진 것은 나뭇가지로 받쳐서 곧게 세우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수녀님들이 동산을 내려갈 때까지 몰래 숨어
있었다. 그때 식물의 어린싹이며 이파리들이 얼마나 보드랍고 고운지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기억 한 구석에는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운 사건이 한
토막 자리잡고 있다. 지금도 혼자 그 일을 생각할 때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하루는 아이들이 너무나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모두 일으켜 세웠다. 그래도
구석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조용히 하는 사람만 앉힐 테야!"
내 고함 소리에 갑자기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완전히 조용해지지는
않았다. 나는 얌전히 서 있는 아이 옆으로 가서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만히 앉으라는 의도로 그렇게 했는데, 그때부터 이것이 하나의 표시가 된
것이었다. 아이들도 내가 머리를 쓰다듬으면 앉아도 좋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데 갑자기 교장 수녀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수녀님의 표정이 그렇게 굳어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수녀님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미혜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저어...."
나는 수녀님의 굳은 표정과 내 나름대로의 정당한 이유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말을 잊었다.
"아이들의 머리를 왜 쓰다듬는 거지?"
"조용히 시키려구요."
목소리는 작았지만 수녀님의 표정이 이제는 밝아질 거라는 확신으로 나는
수녀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수녀님은 아까보다 더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뭔가 이상한 짓을 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미혜, 선생님한테 혼 좀 나야겠구나."
그때 우리 학교는 체벌을 절대 금했기 때문에, 손바닥 두 대를 맞은 것으로
내가 굉장히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교장 수녀님이 교칙을 깨면서까지 내
손바닥을 때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눈물바다가 된 공항 대합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넓어서 여행을 하거나 비즈니스로 다른 도시로 갈 때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 보통이다.
대학교 때 동부에 있던 나는 여간 큰맘 먹지 않고는 자동차로 집에 갈 엄두를
못 냈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대륙 횡단도로를 아무리 빨리 달려도 며칠이 걸리기
때문이다. 특히 밤에 불빛 하나 없는 사막을 달릴 때면 보통 무서운 것이 아니다.
동생 경준이가 코넬에 왔을 때 모험을 해보겠다는 생각에서 함께 차로 집까지
가본 적이 한두 번 있을 뿐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공항을 드나드는 나는 멀리서 찾아 온 친구나 가족을
배웅하기 위해 공항을 나갈 때면, 한국을 떠나 오던 날의 김포공항 생각이 자꾸
난다.
작은아버지 식구들과 함께 이민 길에 오르는 날, 우리는 김포공항에서 요란스런
진풍경을 연출했다. 이민을 떠나는 사람의 수가 양쪽 집 부모님과 아이들을 합쳐
모두 열 명이다 보니 배웅을 나온 사람 또한 엄청났다. 그 많은 사람들이 대형
버스를 대절해서 공항으로 환송을 나온 것이었다.
다시 만난다는 기약도 없는 상황이고 보니 어른들은 서운한 마음에 눈물부터
흘렸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은 소풍이나 가는 것처럼 들떠서 공항 안을
온통 아수라장으로 뒤집어 놓았다. 우리가 하도 뛰어다니며 난리를 피워 대자
어른들은 매점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거라도 먹으면서
잠시나마 어른들의 기분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으리라.
샌드위치를 먹고 소리까지 질러 대며 껑충거리던 나는 그만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쪽 구석에서 울고 있는 화영 언니를 보았기 때문이다. 언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 집에서 엄마의 일을 돕던 언니였다. 마음이 착한 화영
언니는 언제나 우리 형제들을 친동생처럼 사랑하고 귀여워해 주었다. 나는
어머니에게도 비밀인 것을 언니에게만은 털어놓고는 했었다.
화영 언니의 우는 모습은 한껏 들떠 있던 내 마음 한편에 싸늘한 파문을
일으켰다. 어른들처럼 내놓고 울거나 서운해 하지 못하는 언니의 그 쓸쓸한
배웅은 미국이라는 황홀함에 가려져 있던 내 가슴의 여린 부분을 터뜨렸다.
"언니도 함께 가자, 응?"
나를 바라보는 화영 언니의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안 돼, 난 못 가. 미혜야, 너희들 굉장히 보고 싶을 거야. "
나는 이번에는 어머니를 조르기 시작했다.
"엄마, 화영 언니가 우리 잘 도와주잖아. 함께 가요, 응?"
"미혜야, 화영 언니는 함께 갈 수가 없어. 언니는 여기에 식구들이 살고 있잖니?
우리가 함께 가면 화영 언니는 식구들이 많이 보고 싶을 거야. 그렇지?"
"언니는 우리가 보고 싶을 거라구 막 울어."
"엄마도 그러고는 싶지만, 그건 안 돼."
그때서야 난 갑자기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나는 화영 언니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어 댔다.
"자, 얘들아. 이제 갈 시간이다."
나를 향해 손짓하는 아버지의 음성도 여느 때와는 달리 떨리는 듯했다.
드디어 떠날 사람과 남을 사람이 두 편으로 갈라졌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이
왜 그렇게 갑자기 간절해지고 소중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학교에 두고 온
아이들도, 수녀님들의 밝은 웃음소리도, 성당의 성수반과 색유리창도. 효창동 집에
두고 온 대추나무, 감나무, 풀 한 포기.... 그 모든 것들을 두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또다시 울음이 쏟아졌다.
나는 사람들을 돌아다보았다. 사람들 틈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점점 멀어지는데 나는 눈물 때문에
할아버지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나 안 갈래. 할아버지!"
이별의 순간이 되어서야 나는 소중한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던 것이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그때는 공항 청사와 비행기 사이를 오가며
승객을 나르는 셔틀버스가 있었다. 나는 그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내내
울어서 어머니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렇게 울고불고 하던 나는 버스에서 내려서는 순간 내 앞에 버티고 있는
비행기를 보고는 그만 질려 버렸다. 사진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보아 왔던
비행기가 그렇게 크고 거대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난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방송이 나고 아이들이 억지로
자리에 묶이자 갑자기 기내는 쥐 죽은 듯 침묵이 흘렀다. 얼마 있자니 귀가
자꾸만 멍멍해지고 속이 부대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져서
급기야는 어금니 사이로 신 침이 스멀거리는 게 곧 토할 것 같았다.
비행기를 타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과는 달리 비행기에 대한 나의 첫 경험은
정신을 쏙 빼놓는 어지럼증이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긴 시간 동안 기내에서 그토록 힘들었던 것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진통의 일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경준이의 눈물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서울을 떠났던 우리 가족은 집을 구할 때까지 당분간 먼저
이민 와 살고 있던 외삼촌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1970년대 초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고, 뭔가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했던 젊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무작정
짐을 꾸리는 것이 한동안 열병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우리 부모님도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런 이유에서 이민을 결정했던 것 같다.
부모님은 도착한 다음날부터 우리가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녔다.
여행으로 인한 피로가 풀리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집을 찾아 나선 걸 보면
부모님들 또한 마음이 조급했던 것 같다.
어른들이 없으면 나와 남동생들은 말도 안 통하는 외사촌들과 하루 종일 소란을
피우며 싸우고 울고 난리를 떨었다.
"누나, 우리 집에 가고 싶어."
사촌들과 싸우다가 그들이 텃새를 부리면 약이 오른 경준이는 내게 매달렸다.
"누나, 여기 싫어. 재미없어. 미국이 뭐 이래? 저 자식들 다 때려 주고 싶어."
"경준아, 네가 참아야 해. 우리 곧 집 사서 이사 갈 거야. 엄마 아빠가 집
구하러 다니시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나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동생들을 달래고 안심시키는 일이 내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삼촌 댁에서 몇 주일을 보낸 우리는 그 근처에 방 하나 짜리 작은 아파트를
얻어 이사를 했다. 함께 이민 온 작은아버지 댁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 부모님은 아이가 딸렸다는 이유로 집을
얻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고 한다. 지금은 법을 만들어 아이가 딸렸다는
이유로 임대를 거절하면 고발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당시는 집주인
마음대로였다. 그러나 사실 아이들은 핑계였고 혹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특히
한국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서 온 이민족이었기 때문에 받은 괄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국에 살 때와 비교하면 아파트는 너무 작고 비좁았다. 정원 가득 나무들이
있고, 동생들과 술래잡기를 할 때 곧잘 숨었던 장독대가 있던 효창동 우리 집....
그래도 외삼촌 댁을 나와 우리 식구끼리 살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였다. 아버지는 우리들을 모두 불렀다. 막내 경모는 그때
네 살이었으니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였다.
"우리 동네는 한국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일자리를 구하기가
몹시 힘들단다. 그런데 작은아버지가 사는 동네는 일자리도 많고 한국사람들도
많아 살기가 편하다는구나. 우리도 그쪽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는데 너희들은
어떠냐? 아빠는 너희들 생각도 알고 싶다."
나와 경모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큰동생 경준이는 갑자기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안 돼요. 이사 가면 절대 안 왜요."
"이사를 가면 안 되다니, 경준이 너 그게 무슨 소리냐?"
"아빠, 전 여기서 친구들한테 얼마나 놀림을 당했는지 몰라요. 말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한다고 애들이 나를 바보라고 해요. 그놈들한테 당한 만큼 다 갚아
주기 전에는 안 돼요."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리는 경준이의 모습을 보고 부모님은 몹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경준아, 아이들이 널 놀려서 그렇게 속상했니? 하지만 괜찮아. 왠지 알아? 넌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야. 네가 바보가 아니란 걸 모르는 그애들이 진짜 바보란다.
그리고 이걸 언제나 명심해라.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진짜 이기는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그래, 우리 장남 말대로 한 번 해보자꾸나. 하지만 이제부턴 절대로
울어선 안 돼. 왜냐하면 넌 한국 남자이기 때문이야. 한국 남자는 절대로 울지
않아. 다시 한번 울면 넌 정말 바보야. 알겠니?"
한국 남자, 그는 절대로 울지 않는다. 그 말은 두 남동생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던 걸 같다. 그날 이후로 경준이는 정말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다짐했던 대로 자신을 놀려대던 아이들을 누르고 언제나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날의 일이 경준이는 물론 어린 경모의 가슴에도 깊게 새겨졌는지, 훗날
경모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미주 한국일보 백일장에서 '한국 남자는 울지
않는다' 라는 제목의 글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글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히곤 한다. 그 글을 소개한다.
한국 남자는 울지 않는다.
차가운 바람이 또다시 겨울을 예고합니다. 이제 모든 호수와 연못이 얼어붙을
때입니다. 바로 투쟁과 고통이 예견되는 것이지요.
수면부터 얼기 시작하는 연못 저쪽에서 백조 한 마리가 외롭게 헤엄을 치고
있습니다.
그 백조는 멀리 따스한 곳의 백조들과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연못은 그
백조의 아주 가까운 곳까지 얼어 가고 있습니다. 아직 얼지 않은 부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백조는 그럴수록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며 주의에 얼음이 얼지 않도록 헤엄을
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백조는 그렇게 연못이 얼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투쟁을 벌여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얼지 않은 그 연못에서
백조의 새끼들이 헤엄을 즐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인한 얼음은 그
자그마한 자투리 공간까지 차지하기 위해 위협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나는 멀리 떨어진 땅에서 온 백조입니다. 나는 아름다웠고, 존중받는
백조였습니다. 또한 날 수 있는 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험한 산과 깊은 바다를
넘어 이곳까지 날아오는 동안 깃털은 다 떨어지고 날개는 찢어졌습니다. 내가 이
먼 곳을 찾아 날아온 이유는 나의 꿈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꿈을 실현시키고자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 누구도 당신의 슬픔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매서운 바람을 맞을 때나 혹은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있을 때마다 나는
회상합니다. 한국에서의 겨울의 나날들. 나의 전사이셨던 두 분의 덕으로 겨울의
공포를 느끼지 못했던 시절을 저는 기억합니다.
두 분의 경이로운 지식의 날개 앞에서 사람들은 존경심으로 가득 찬 두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진정한 마음으로 인사를 보내곤 했었지요.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는 당신들의 목소리, 말 한마디 한 마디가 힘으로 충만했습니다. 두 분의
말씀을 듣는 그들의 그 놀라워하던 표정을 보셨어야 했을 겁니다.
"2달러 50센트입니다."
계산하던 점원이 말했습니다.
"무슨 말이요?"
아버지는 또박또박 되물었습니다.
"2달러 50센트라구요. 당신네 중국인들은 영어를 이해하지 못한단 말이요?"
점원이 아버지를 노려보았습니다.
공부에 대한 중압감으로 정말 힘이 들거나 시험 때문에 거의 초죽음이 될 때면
나는 회상합니다. 당신께 영어를 못한다고 놀렸던 그 나라는 이제 당신들이
미루어 낸 성과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다니시던 대학에 대해 자랑하시곤 하셨죠.
어머니는 이화여대를, 아버지는 연세대학을 졸업하셨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대학이지요. 두 분께서는 또 자랑스러운 졸업장을 보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전에 한 번도 일을 갖지 않으셨고, 아버지도 역시 힘든 육체적인 일은
하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섯 살 때까지만 해도 두 분은 서로의 대학에 대해서
담소를 나누시며 환한 웃음으로 즐거워하셨습니다.
수탉이 새날이 오는 것을 큰소리로 반기고 있습니다. 지난 밤의 기억이 아직도
머리 속을 맴돌고 있습니다. 차가운 이슬과 어젯밤의 비로 인한 습기가 여전히
주위를 감싸고 있습니다. 공기는 여전히 정적으로 가득 차 있고 어느 곳에서도
소음 하나 들려 오지 않습니다.
싸구려 자명종 시계의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깨며 또다시 삶을 소생시키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잠에서 깨어나십니다. 잠드신 지 다섯 시간이 채 안
됐는데.... 두 분 모두 여전히 어제의 노동으로 인한 통증을 느끼고 계십니다.
그분들은 어둠으로부터 걸어나오십니다.
이 새로운 땅은 내 부모님의 가치를 모조리 발가벗겨 버렸습니다. 두 분의 한국
명문대학의 졸업장은 이 나라에서는 별반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소리를 죽여 우셨고 아버지는 미소를 잃으셨습니다. 청결하고도 단아했던
어머니의 모습은 빛이 바래고 푸석푸석해졌습니다. 그 옛날의 아름답고 포근한
얼굴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단지 창백하고 과로에 지친
얼굴만이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날로 수척해지고 연로해지십니다. 그분의
얼굴은 이제 한국에서의 영민함을 잃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밤에 홀로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시곤 하셨습니다. 한국 남자는
결코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해합니다.
부모님이 너무나 열심히 일해 주신 덕에 저는 지금 미래를 성취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은 자신의 인생을 저에게
바치셨습니다. 먼 낯선 땅에서 저는 부모님의 희망이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미래였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부모님의 인생으로 만드셨습니다. 부모님은 저에게
너무나 큰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도 갚은 것이 없습니다. 부모님은 저에게 늘 최상의 것만을
주셨습니다. 부모님은 한 번도 입어 보신 적이 없는 셔츠를 저에게는 두 벌이나
사주셨고, 쪼들리면서도 우리 삼남매를 위해 음악 레슨도 받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크나큰 은혜들, 제가 평생을
바쳐도 다 갚지는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저희들에게 젊은이들은 존경심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러나 저희들은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두 분의 세대는 현대
역사의 영웅이요,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식의 세대들이 자신을 계발할
수 있도록 기회와 장소를 제공하셨습니다. 자식들이 최고의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고, 전문가의 대열에 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투자한 자본의 세 배, 네 배의 성공을 거두셨습니다. 당신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몇 세대에 걸쳐 이겨내야 했던 장벽을 극복해 내신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두 분은 저의 빛나는 전사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두 분은 현대의 영웅이십니다.
어머니 아버지, 고맙습니다.
--코리안 아메리칸 아들
마이 네임 이스 미혜, 김미혜
부모님은 이사를 마치자마자 나를 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국민학교였다.
알파벳의 A도 모른 채 어머니와 큰이모 손에 이끌려 교장실로 들어간 나는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그때까지 그렇게 키가 큰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인이라는 이질감이 더해져 교장 선생님의 큰 키는 나를 완전히 압도해
버렸다.
한국사람의 평균치보다도 작은 키에 속하는 큰이모는 교장 선생님 옆에 서자
완전히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큰이모는 최대한 고개를 쳐들고 열심히 무언가
설명을 했고, 2미터도 훨씬 넘어 보이는 교장 선생님은 그 큰 키를 반이나 접어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습던지 나는 혼자서 킥킥거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쥐었다.
"가만히 있어."
어머니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교장 선생님 손에 이끌려 반을 배정받았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나는 그야말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를 하지하고 그저 않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웃음을
터뜨리는데 나 혼자만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어색한
상황이 내 마음을 무척이나 불편하게 만들었다.
쉬는 시간보다는 차라리 수업 시간이 훨씬 좋았다. 쉬는 시간에는 모두들
떠들고 웃고 장난을 치는데, 나는 함께 놀지도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한국에서의 김미혜가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성심국민학교 아이들을 불러서 노랑머리 아이들 앞에 쫙 펼쳐놓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의 교실과 친구들이 떠오를수록 내 머리는 점점 책상 위로 떨구어졌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치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백인 여자 아이
두 명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무어라 내게 말을 하는데 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그들의 눈과 손짓에만 신경을 모았다.
"...."
그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는지 내 손목을 잡아 끌고는 교실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손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다이앤."
"브리타."
그러기를 서너 차례 반복했다.
바보들 같으니라구. 한 번에 나는 그들이 자기 이름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별로 주저하지 않고 나를 소개했다.
"미혜, 김미혜."
그러자 다이앤은 다시 자기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 댔다.
"마이 네임 이스 다이앤."
"마이 네임 이스 브리타."
그들이 나를 향해 빙긋이 웃었다.
"마이... 네임... 이스... 미혜, 김미혜."
다이앤과 브리타는 아까보다 더 활짝 웃었다. 이것은 내가 완벽한 문장을
구사해 낸 첫 마디의 영어였다.
다음 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교실 한쪽 구석에 있던 털레비전을 켰다. 화면으로
보아 영어 쓰기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내 옆에 앉아 있던 흑인 여자
아이에게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이름이 와니타라고 했는데, 그 아이는 화면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벌써 뒷장을 쓰고 있었다. 나는 화면을 보고서도 하나도 쓸
수가 없었는데....
그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어머니와 함께 슈퍼마켓에 가서 알파벳 인쇄체
필기체 노트 두 권을 사왔다. 그리고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서
바보같이 앉아 있는 게 싫었기 때문에 나는 그림처럼 보이는 글자도 쓰고 또
썼다.
창 밖으로 훤하게 새벽이 밝아올 무렵, 그림으로만 보이던 알파벳이 하나하나
글자로 보이며 완전히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아, 그때 그 기분이란.
다음날, 학교에서도 열심히 쓰기 연습을 하고 있는데 교실 한쪽 구석에서
갑자기 와아 하는 탄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났다. 뭔가 하고 슬쩍 고개를 디밀어
보니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공기놀이는 한국
아이들의 놀이인 줄만 알았다. 내심 반가운 마음도 생겨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어딘가 좀 이상했다.
미국 아이들의 공기놀이는 아주 단순하고 쉬웠다. 한국 공기는 공중으로 던져진
공기알이 땅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바닥의 공기알을 얼른 줍고 그와 동시에
내려오는 공기알을 바로 받아야 하는데, 미국 공기는 바닥에 한 번 튕겼다
올라오는 것을 받는 것이었다.
순간 내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평소 놀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김미혜가 드디어 미국 아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기회가 온 것이다.
심심하면 하려고 한국에서 가져온 공기가 내게 이런 굉장한 기회를 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다.
다음날 나는 학교에 가자마자 수십 개나 되는 공기알을 교실 바닥에 쫙
뿌려놓았다. 그리고는 온갖 묘기를 부리며 아이들의 두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꺾기며, 여러 알을 한꺼번에 잡기며, 멀리 떨어진 공기알을 훑어서 잡는
묘기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아이들은 탄성을 내질렀고,
저희들보다 어려운 공기놀이를 너무 능숙하게 하는 게 신기했는지 열심히
따라하기 시작했다. 말이 필요없었다.
겨우 마이 네임 이스 미혜 밖에 할 줄 모르는 촌스런 동양 아이에게 기죽은
미국아이들. 나는 당돌하고 극성스럽게 미국 생활의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엄마, 내가 밥을 했어요
아버지는 큰이모부가 경영하는 주유소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공장에 다녔다.
물론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동생이 둘이나 딸린 맏딸이었으므로 어깨가
무거웠다. 어머니가 안 계실 땐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도 누가 특별히
가르쳐 주기 않았지만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맏이들이 갖고 있는 본능적인
책임감인 것 같다.
아침에 시계벨 소리에 눈을 뜨면 부모님은 이미 일을 나가고 안 계셨다. 그러면
그때부터 내가 엄마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동생들을 깨우고, 아침을 먹이고,
도시락을 싸고, 동생들 옷을 입히고, 그리고 함께 집을 나선다. 나는 동생들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학교에 갔다. 동생들이 다니는 유치원과 내가 다니는
학교는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오후에 집에 돌아오면 다시 동생들을
씻기고, 함께 놀아 주고, 그리고 나서 내 숙제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내게 밥짓는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 저녁
시간에 맞춰 밥을 한 번 해보라고 했다. 어머니는 공장에서 늦은 시간이 되어야
돌아오니까 내가 밥이라도 해놓으면 저녁 준비가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이었다.
"미혜야, 엄마가 밥하는 걸 가르쳐 주면 할 수 있겠니?"
"해볼께요, 엄마."
그때는 전기밥솥이 없을 때였으므로 가스레인지에다 밥을 했다.
"엄마가 씻어 놓은 쌀이 저녁 때가 되면 다 불을 테니까, 둘째 손가락 첫 번째
마디까지 물이 오는지 확인하고 불에 얹어라. 알겠니?"
"알았어요, 엄마."
"냄비 바닥에서 따닥따닥 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불을 최대한으로 줄여
뜸을 들이는 거란다. 그리고 15분쯤 지나면 불을 완전히 끄는 거야. 너 정말 할
수 있겠어?"
"네, 엄마. 할 수 있어요."
"미혜야, 불을 다룰 땐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알았지?"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불을 만지게 하는 것이 못내 불안했던지 조심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다짐을 두었다.
다음날 저녁 나는 어머니가 가르쳐 준 그대로 밥을 했다. 불을 끌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며 시간을 재고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왔다.
"엄마, 엄마가 가르쳐 주신 그대로 했어요. 빨리 한 번 보세요."
"그래? 어디 보자...."
나는 어머니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머니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우리 미혜, 정말 잘하는구나. 이제 엄마가 걱정 안 해도 되겠는데."
"정말이에요? 정말 밥이 잘 됐어요? 와, 엄마 내가 밥을 했어요?"
나는 쌀에다 물을 넣고 끓이면 포실포실한 밥이 된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었다. 그리고 어머니나 화영 언니가 밥하는 걸 보면서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어른들만의 특별한 기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기분이
좋았다. 내가 밥을 다 하다니. 어머니로부터 신나게 칭찬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가 해놓은 하얀 쌀밥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어 버렸다.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인가 보다. 전기밥솥에 쌀과 물의 양이 눈금으로 표시돼
있지만, 난 지금도 그때 터득한 손가락 눈금으로 물의 양을 재어 밥을 해야
안심이 된다.
요즘은 늘상 시간에 쫓겨 끼니를 거르기 일쑤고 먹어도 간단하게 때우는 때가
많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집에서 밥을 하지 못한다.
밥물에 손가락을 찔러 넣을 때마다 느껴지는 찡한 감촉. 나는 지금도 그때 나를
안고 울어 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니?
조그만 꼬마가 낯설기 그지없는 남의 나라에 와서 미국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달려드는 것이 보기에 대견했던지 선생님들도 점차 나를
귀여워해 주었다. 학교생활에 재미가 붙자 미국으로 이민 와서 처음으로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 놀이기구들이 몰려 있었는데, 나는 그네를 타며 시간을
보내길 좋아했다. 효창동 우리 집 마당에서 타고 놀던 그네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학교 갔다 돌아오면 화영 언니하고 그네에 앉아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선생님 얘기, 친구들과 장난친 얘기, 공부시간
얘기를 모두 언니한테 해주면 언니는 일부러 '어머, 그러니? 정말?'라며 내가 더욱
신이 나서 얘기하도록 분위기를 돋워 주었다.
이곳에서도 나는 학교가 끝나고 운동장이 텅 빈 시간이면 혼자 그네에 걸터앉아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 방울들, 무엇이 이들을 내려와 으음 어디로
데려갈까. 바람아 너는 알고 있니, 비야 네가 알고 있나....'
어디서 주워듣고 알게 된 노래일까? 아마도 이모들이 부르던 것을 따라하다
외우게 되었을 것이다. 양희은씨가 불렀던 이 노래의 가사를 지금은 다 기억할 수
없는데, 그때는 그 노래에 내 마음대로 가사를 붙여 불렀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니, 저 바다 건너 소식. 보고픈 할아버지, 그리운 이모들
소식을 알고 있니.'
그 노래는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그리움을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내는 요술램프 같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할아버지와 이모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가슴앓이를 앓고 있었다. 외할아버지 댁은 후암동이었는데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외할아버지 댁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이모들이
많아서 깜짝깜짝 놀랄 일들이 많았다.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이모들이 한글을 가르쳐 주었는데, 공책에 가득 글씨를
써오라고 숙제를 내주면 나는 집에 돌아와 열심히 숙제를 해 다음 번에 갈 때
가져갔다.
"미혜 너, 이모가 내준 숙제 다 했어?"
"그럼요."
"그래, 어디 보자. ...어머, 너 글씨 정말 잘 쓴다. 미혜는 이모 말 잘 들어서
이 다음에 학교 가면 공부 잘하겠는걸."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훨씬 전에 이미 한글을 깨우쳤다. 내가 잘 따라하니까
이모는 재미있어서 더욱 열심히 가르쳤고, 나는 또 이모의 칭찬을 듣고 싶어
숙제를 열심히 했다.
할아버지 액에만 가면 나는 이모들과 함께 잠을 잤다. 쪼그만 꼬마 눈에 비친
대학생 이모들의 생활은 하나같이 신기하고 부러운 것들이었다. 그리고 밤에 자다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게 되는 일이 많았다.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일어나
이모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모, 뭐해?"
"어머머, 쟤 또 깼어. 얘, 넌 무슨 애가 그렇게 잠귀가 밝으니?"
그때 이모들은 대개 밤참을 해먹고 있었다. 핀잔을 주긴 했지만 이모들은 꼬마
조카를 벼로 귀찮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밥도 볶아 먹고, 떡도 구워 먹고,
겨울이면 동치미로 김침말이도 해먹고....
한밤중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얻어먹는 밤참의 맛도 좋았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이모들 틈에서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는 맛이 훨씬 더 좋았다.
국민학교에 들어가서도 나는 학교가 끝나면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온
할아버지한테 곧장 달려갔다. 할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 숙제를 꼼꼼하게
돌봐 주었다. 그때 내 눈에 비친 할아버지는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척척
박사였다. 할아버지는 내가 물어보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바로바로 대답해
주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내 숙제를 들여다보던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미혜야, 미혜는 도대체 이런 말들을 어디서 알아 오는 거니?"
"할아버지요. 저 날마다 할아버지하고 숙제해요."
나는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는 것들을 빠짐없이 받아 적어 갔는데, 그때 내
숙제에는 할아버지가 쓰는 어려운 단어들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심지어는
한자말까지 있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할아버지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었다.
"미혜 할아버님은 건강하시니?"
"네."
"말씀도 잘하시고?"
"네, 굉장히 잘하세요."
"날마다 집에 계셔?"
그날의 그 질문들은 우리 할아버지를 학교로 모셔 오기 위한 준비단계였다.
할아버지는 1일 교사로 추천돼 우리 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할아버지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파란색 슈트에 빨간 넥타이, 가슴 주머니에 꽂은 빨간 손수건, 도수 없는
안경, 중절모.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안경을 안
써도 잘 보일 정도로 눈이 좋았지만, 안경을 쓰는 편이 훨씬 멋있다며 늘 도수
없는 안경을 썼다. 모자와 안경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너무나 자랑스러워 한없이 우쭐했다.
할아버지는 집에 계실 땐 늘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가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나를 불렀다.
"미혜야, 옛날 얘기 하나 해줄까?"
그러면 난 그때부터 할아버지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할아버지의 눈만 쳐다봤다.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옛날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옛날옛날 어느 마을에 몇 번이나 과거시험에 떨어진 선비가 있었다. 몇 년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결과는 해마다 낙방이었다.
하루는 임금님이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러 평복을 하고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그 선비의 집에서 쉬어 가게 되었는데, 선비의 학문이 참으로 높아 보여
내심 놀랐다.
임금님이 선비에게 물었다.
"글을 많이 읽으신 것 같은데 벼슬은 하셨소?"
"웬걸요. 저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과거시험만 보면 낙방이라...."
임금님이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정말 성실하고 실력은 대단한 사람인데 운이
나쁘게도 시험만 보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임금님은 그 선비를
꼭 시험에 붙게 할 방법을 궁리해 냈다.
"제가 듣기로는 이번에도 무슨 시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시험은
필기시험이 아니라 면접시험인데 시험관 앞에 가서 딱 한 글자만 알아맞추면
되다고 합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시고 꼭 시험을 보세요. 선비의
학문이 워낙 높으시니 이번엔 시험에 반드시 통과할 겁니다.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그 글자가 기러기 구자라고 들었습니다. 부디 선비의 뜻을 이루기를
빌겠소. 아, 그리고 응시자가 너무 많을까 봐 선착순으로 몇 명에게만 기회를
준다고 하니까 시간에 맞게 가세요."
궁궐로 돌아온 임금님은 선비에게 일러 준 대로 시험을 알리는 방을 붙였다.
선비는 그 글자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수천 번을 연습하며 외우고 또 외웠다.
드디어 시험날이 되었다. 시간에 맞게 가라던 나그네의 말이 생각나 선비는
궁궐 앞에서 하룻밤을 자고 첫 번째로 시험장에 들어갔다. 선비가 들어오는 것을
본 임금님은 기다리던 사람인지라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자, 이 글자가 무슨 글자인지 말해 보시오."
그런데 그 글자를 본 선비는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무슨 글자인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임금님이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봐도 선비는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임금님은 너무 답답했다. 그 선비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마침 임금님 뒤로 펼쳐진 병풍에 기러기 그림이 있길래 임금님은 그것을
가리키며 똑똑 두드렸다. 그러자 선비는 얼떨결에 '똑똑이 구자이옵니다' 하고
대답해 버렸다.
'어쩌면 이럴 수가.'
허탈감에 빠진 임금님은 선비에게 낙방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내보냈다.
낙심한 선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시험장을 나오다가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 순간 기러기 구자가 생각이 났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원통해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여보시오, 당신 지금 시험을 보러 왔소? 시험관이 물어 보는 글자가 기러기
구인데, 난 생각이 나지 않아 떨어졌지만 당신이라도 알아맞춰 붙으시오."
선비는 어리석은 자신의 얘기를 빠짐없이 들려주었다. 헐레벌떡 뛰어온 사람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시험장으로 달려갔다.
임금님은 김이 빠져 버렸지만 시간 안에 왔으므로 그 사람에게도 글씨를
물었다.
"예, 기러기 구자이옵니다."
임금님은 속이 상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 맞다. 너는 통과다."
"하온데 임금님, 시골 어느 마을에서는 기러기를 똑똑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투리를 써서 똑똑이 구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소리를 들은 임금님은 무릎을 탁 쳤다.
"아니 그럼, 아까 어느 선비가 똑똑이 구자라고 했는데, 그럼 그 사람도 기러기
구자라고 말을 한 거요?"
"그러하옵니다, 임금님."
"아니, 이럴 수가. 가서 그 사람을 찾아 오시오. 두 사람 다 통과요."
"미혜야 어떠냐, 재미있냐? 그 선비는 자기는 잘못 되어도 남이라도 잘 되게
하겠다는 착한 마음씨를 갖고 있어서 결국 두 사람 다 시험에 붙은 거란다.
미혜야, 너도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 그래야 복을 받아. 알았지?"
그네에 앉아 울고 있던 나는 '똑똑이 구자이옵니다.'라고 대답하는 선비의
모습이 떠올라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니, 할아버지 이모 소식을...."
나는 실컷 노래를 부르다 할아버지와 이모들에 대한 기도로 끝을 맺었다.
"하나님, 미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착한 일 많이 할 거에요. 그러니 꼭
할아버지와 이모들도 이곳에 와서 함께 살게 해주세요, 네?"
첫번째 성적표
차츰 학교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친하게 지내는 아이들도 많이 생겼다.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공부는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다. 산수를 제외한 영어와 사회 그리고 자연같은 과목은 집에 와서
어른들께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같은 내용을 학교에서는 영어로, 집에서는
한국말로 공부한 셈이다.
그러나 산수 시간만은 완전히 내 시간이었다. 산수 실력만은 우리나라 사람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얘기를 어렴풋이 듣기는 했지만, 나는 한국에 있을 때도
산수를 제일 잘했었다. 물론 이 시간에도 선생님의 말을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선생님이 칠판에 공식을 적으면 어떤 문제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영어를 못한다고 나를 얕잡아 보던 아이들도 산수 시간만큼은 아무 말도
못했다.
처음 분수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분수 문제를 써놓고, 나와서
풀어 볼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떠들썩하던 교실이 갑자기 잠잠해지며 아무도
나서는 아이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를 가만히 보니 그것은 내가 이미 한국에서
배운 것들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손을 번쩍 들었다. 교실 구서구석에서 아이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 내가 배운 방식대로
문제를 풀었다. 내가 문제를 푸는 방법이 이상했는지 아이들은 틀렸다는 듯 크게
웃어 댔다. 순간 나는 정말 내가 틀렸으며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얼굴이
달아올랐는데, 옆에 계시던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해주었다.
나는 점점 하얗고 인형처럼 생긴 아이들도 나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갖게 된 후부터 하루가 다르게 자신감을 회복해
나갔다.
나는 의식적으로 선생님이 내준 과제물만은 반드시 챙겼다. 비록 말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지만 김미혜가 누구보다 성실하다는 것을 확인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6개월이 지나 나는 미국에서 첫 번째 성적표를 받았다. 두 과목을 제외하고는
모두 'B'를 받았다. 두 과목은 물론 산수와 자연이었는데, 산수는 'A'였고 자연은
'C'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자연 점수에 대해서 그렇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자연 시간만 되면 나는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선생님이 사용하는 단어는
아무래도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무엇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짐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또한 자연 시험은 대개 선생님이 불러 주면 종이에
답만 적는 식으로 치러졌는데, 내가 문제를 못 알아듣는 것이 바로 문제였다.
선생님이 내주는 문제도 이해를 못하는데 어떻게 정답을 쓰겠는가. 미국의 학교는
우열반 형태로 수업을 이끌어 간다. 이를테면 각 과목별로 성적에 맞는 클래스에
들어가 수업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과 산수가 함께 들어 있는 날이면 나는
거의 날아다녀야 했다. 자연은 기초반으로, 산수는 고급반으로.
나의 산수 실력은 여전해서 7학년 때 산수 선생님이었던 Natt 선생님으로부터
완벽한 총애를 받았다. 그 선생님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이생을 살아온
분이었다. 워낙 머리가 좋아 컬럼비아대학을 열 여섯 살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 선생님은 쉰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결혼도 하지 않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 선생님의 수업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명석한 두뇌와 재치,
순발력이 나로 하여금 수업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선생님도 나를 굉장히
귀여워해 주었는데, 아이들 앞에서 나를 양녀로 삼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산수
시간만 되면 속된 말로 나는 무법자가 되었다.
공부하기 싫다거나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밖에 나가 몰고 싶을 땐 선생님께
당돌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
"선생님, 오늘은 수업하지 말고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세요."
그러면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내 청을 들어주기도 했다.
코비나, 새로운 도전
내가 10학년 때, 우리 가족은 패사디나에서 코비나로 이사를 했다. 학교도
Charter Oak High School로 전학을 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패사디나에서의 내 존재가 코비나에서는 전혀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한국에서의 내가 미국에서 인정되지 않았던 것처럼.
패사디나에서는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학교가 비좁다고 설치고 다녔지만 이곳
코비나에서는 그저 평범한 동양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공립인 이 학교는 물론
유명한 사립학교보다는 못했지만, 백인 아이들만 다니는 꽤 우수한 학교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내 존재 따위에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이었다. 나를 더욱 자존심 상하게 한 것은 학교 측의
태도였다.
"우리 학교는 미혜가 다니던 학교와는 전혀 달라. 모두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이라고 해도 전에 네가 다닌 학교에서라면 아주 잘하는 축에 속할 거야.
물론 네 성적이 좋은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다 인정해 줄 수는 없다. 그러니
당분간 네가 하는 것을 보고 수업을 조정하기로 하자."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 패사디나에서 나는 10학년이었으면서도 12학년의
수업을 들을 정도로 뛰어났었는데 그런 평가를 받다니, 너무나 기가 막혔다.
며칠 동안은 분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지냈다. 그러다 문득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이건 전혀 나답지 않아.'
결국 나는 김미혜다운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나는 공부는 물론이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를 따돌리던 아이들에게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야, 김미혜. 넌 어디서 왔냐? 너희 나라가 어디냐구?"
그러나 그건 궁금해서 물어 오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에 대한 괄시이자
시비였다.
"한국!"
나의 대답에 그들은 비아냥거렸다.
"한국? 그게 어디 붙어 있는 나라냐? 지도에는 나오기나 하냐?"
"들어 보지 못한 나라라면 분명 별볼일 없는 나라겠지."
"아프리카에 매달렸냐? 아니지, 네 피부를 보면 거기는 아니지."
"혹시 몇 나라가 짬뽕된 것 아냐?"
한마디씩 저희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끝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너희들과 이야기하지 않겠어."
속에서 화가 치밀었지만 나는 꾹 참았다.
그들이 한국을 정말 아는지 모르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한국을
들먹거리고 비하시키면서 내 기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괘씸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기가 죽을 내가 아니었다.
그후로 나는 그 아이들과 상대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그들에게
무관심해지기로 한 것이다. 그들 스스로, 내가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먼저 말을 걸어 올 때까지.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는 아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호기심인지 경계심인지 접근은 하지 않고 대신 끊임없이 나를
힐끗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도 나는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은근과
끈기. 그것이 바로 김미혜의 작전이었다. 대신 성실하다는 인상을 주려고
학교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에 대한 아이들의
경계심도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노골적으로 나를 얕봤던 아이들은 여전히
빈정거렸지만, 처음처럼 그렇게까지 뻔뻔스럽게 나오지는 못했다.
동물 보듯 나를 대했던 아이들과도 점차 말문이 트이면서 나는 제법
시끌벅적하게 생활해 나갈 수가 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내가 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주었다.
학기가 바뀌면서 나는 완전히 내 페이스를 되찾았다. 공부는 물론이고 서클
활동이나 봉사 활동에 있어서도 경쟁 상대가 많지 않을 정도였다. 누군가에게
지시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해 모든 일에 앞장섰고, 내가 이끄는 그룹이 다른 그룹과
비교해서 뒤떨어지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성격이 그렇다 보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하지만 내가 좀 피곤한 게 낫지 남에게
뒤떨어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더군다나 여기는 내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였기에 더욱 그랬던 것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국사람을
대표하기라도 한 듯 나는 대단한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그런 나를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한번은
학교에서 조를 편성해 폐품을 수집할 때였다. 학교에서는 그 폐품을 활용해서
사회단체나 양로원 같은 기관에 약간의 도움을 주곤 했다. 그런데 우리 그룹의
폐품 수집 상황이 다른 그룹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없이
나는 수업도 빼먹고 슈퍼마켓마다 돌아다니며 캔이나 병 따위를 줍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수업만은 빼먹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주장이었다.
"너, 그렇게 설치고 돌아다니면 공부는 언제 하니? 도대체 그게 무슨
짓이냐구."
"염려 마세요, 아빠. 저 공부 잘하잖아요."
"공부도 습관이 붙어야 할 수 있다는 거 몰라?"
"대학 가면 공부할게요. 지금 너무 공부에만 매달리면 대학 가서 못한대요.
그때 공부할 힘은 남겨 둬야 한다고 하던데요."'
난처한 상황을 얼렁뚱땅 넘기기 위해 이런저런 말들을 둘러대긴 했지만, 사실
나는 공부만이 다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내 극성 때문에 우리 그룹의 폐품 수집 성적이 가장 좋았다.
코비나에서도 나는 어느새 야무지고 똑똑한 한국 아이로 인정받고 있었다.
늘 후보로 끝나고 마는 인기 투표
우리 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그달의 인물을 투표로 뽑는 행사가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서클 활동도 열심히 함으로써 아이들로부터 인기가 높은 학생을
뽑는 것이었다. 주어지는 특권은 없었지만 친구들한테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어서 어떤 면에서는 우등상보다 더 가치 있는 상이었다. 사춘기의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다섯 명 정도가 후보로 추천되는데, 속상한 것은 항상 나는 후보에만 오르고 단
한 번도 그달의 인물로 뽑힌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늘 몇 표 차이로
밀려났다. 나는 여러모로 보아 그 자리에 뽑힐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내 예상을 빗나갔다. 그럴 때면 늘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는데, 그것은 어쩌면 배신감이나 소외감이었을지도 모른다.
똑똑하고 야무진 김미혜는 인정하지만,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뽑는 최고의 인기
학생으로는 만들 수 없다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 같다.
동양인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더욱 불쾌했다.
'차라리 후보에나 오르지 말 것이지, 왜 매번 후보에 올라 그 낯뜨거움을
맛보아야 하나.'
그때부터 대학만은 반드시 한국 학생이 많은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완전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무리 속에 끼어 보고 싶었고, 편견 없이 열린
마당에서 뼛속 깊숙히 스며드는 강한 유대감을 맛보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결혼할 사람은 반드시 한국 남자여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 깊이
자리잡았다. 고등학교 때, 그 많은 파티에 나는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백인
아이와 파트너가 되어 함께 춤을 추며 어울린다는 것이 싫었다. 지금 생각하면
지나쳤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는 그게 끔찍하도록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투표에 관한 또 한 가지 쓰라린 경험이 있다. 학교가 있는 지역의 교육구와
학교 사이를 연결해 주는 일종의 학생 대표를 뽑는 선거였다. 대표는 해당
교육구로 가서 모교의 상황과 학생들의 요구 사항을 전달하고, 또 교육구가
전하는 사항을 학생들에게 알리고 교육도 시키는 임무를 맡게 된다.
우리 학교에서는 10학년의 학생 가운데 다섯 명을 뽑아 교장과 부교장의
인터뷰를 거쳐 선발했다. 전학을 간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의 추천으로
나도 다섯 명에 낄 수가 있었다. 그날 나는 특별히 외모에도 신경을 써서
인터뷰에 응했다.
"왜 대표가 되고 싶은가?"
"어떤 식으로 우리 학교의 문제점과 그에 합당한 도움을 요구 할 것인가?"
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우연하게도
다섯 명 모두가 여학생이었고, 물론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백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세 시간이 지난 다음에 드러난 결과는 또 한 번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물론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인터뷰에 응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그 결과에 나는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다. 왜냐하면 대표로 뽑힌
수잔은 나보다 공부도 못했고 말솜씨도 훌륭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백인 아이들 가운데 가장 대답을 잘한 아이를 뽑은 게 틀림없어. 나는
애초부터 제외됐던 거야.'
차라리 내가 수잔보다 여러 가지 뒤떨어져서 선택되지 못했다면 인정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아침에 기도할 때,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셨단 말이야?'
아무 죄도 없는 하나님까지 원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때 주무시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에 또 다른 투표가 있었다. 그것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10학년
여학생들 가운데 각 학교에서 한 명씩 뽑는 투표였다.
대표로 뽑힌 학생은 캘리포니아의 세크라멘토로 견학을 가서 미국의 정부
단체들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일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공부하는 기회를 부여받는 것이었다. 모든 경비는 그 모임을 후원하고 있는
스폰서들이 지불하며, 기간도 일주일이나 되었다. 그 대표는 교육구와 학교를
연결해 주는 그런 학생 대표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이번에도 선생님으로부터 추천을 받았지만 거의 기대를 하지 않았다. 먼저
번과 다를 바 없을 테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미소를 지으셨다. 뜻밖에도
내가 대표로 뽑힌 것이다.
그후로 난 소원하는 일이 비록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더 큰 무엇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으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학교는 내 세상이었다. 나는 학교를 홍보하는 일로부터 교지를 만드는
일, 학교 앨범을 제작하는 일 등 여러 분야에서 바쁘게 활동함으로써, 선생님들과
다른 학생들로부터 그야말로 인정받는 김미혜가 되어 가고 있었다.
4
싱그러운 흙냄새가 스치며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코넬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마치 나를 환영이라도 하듯
우아한 모습으로 뽐내고 있었다.
이런곳이라면 공부가 저절로 될 것 같았다.
Where are you from?
내가 한국말을 열심히 공부하고 능숙하게 대화를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그렇게
한국말을 잘하느냐는 질문을 한국사람들로부터 받는 반면, 이곳의 노랑머리 코 큰
사람들이나 흑인들로부터는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Where are you from?"
내가 아무리 영어를 유창하게 잘해도, 이곳에서 수십 년을 살았어도, 그
순간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내 외모 때문에 받게 되는 수모이므로.
그러나 그런 일을 자주 당하다 보니까 이젠 면역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능청스럽게 대답할 수 잇는 여유까지 생겼다.
"I am from Los Angeles. Where are you from?"
그러면 상대는 내가 자기 말을 못 알아들은 줄 알고 Where- are- you-
from을 다시 한번 또박또박 끊어서 반복해 주는 친절함을 보인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 질문 속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세계 구석구석에서 모여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섞여 거대한 집합체를 형성하고
있는 나라 미국. 평화와 자유 그리고 평등이 있는, 하나의 이상국처럼 보이는 나라
미국, 그러나 그것은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백인
중심의 엄격한 보수성이 버티고 있다. 인종. 민족. 국적에 상관없이 미국 땅에서만
태어나면 시민권을 발급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지만,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엄격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이민 세계에서는 자기 조국의 위상이 미국 내 소수 민족의 서열을
결정하는 중대한 열쇠가 된다.
미국에서는 선거철만 되면 이민족 간에 때아닌 싸움이 일어난다. 그동안
선거구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나뉘어 있어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민족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선거구 조정에 관한 소송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도 특히 LA는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국적의 소수 민족들이
모여 사는 도시로, 흔히 인종 전시장에 비유되곤 한다. 한국사람들이 한인촌을
형성하듯이 일본인이나 중국인들 역시 그들만의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그나마
뭉쳐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민족의 타운이 둘로 쪼개지면 선거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가 없다. 자신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후보가
당선되어야만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선거구를 유리한 쪽으로 조정하는지라 시끄러운 것이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였는데, LA에 사는 남미사람들이 선거구와 관련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자기들의 권리를 빼앗으려는 정치적인 게임이라고 비난하고
나선 것이었다. 결국 선거구를 재조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불똥이 엉뚱하게도 우리 한인촌으로 튀었다. 갈라져 있던 일본인
타운이나 중국인 타운도 하나가 되었는데, 하나였던 우리 한인촌만이 둘로 나뉜
것이었다. 그러나 답답하게도 한국인들은 남미인들처럼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1980년대 초반, 한국의 정치. 사회는 매우 혼란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시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등 국제적으로 행세하기가 어려운 시기였다. 힘이 없는
나라의 국민은 남의 나라에서도 푸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을 나는
그때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내가 태어난 나라 대한민국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곳 학교를 다니면서 미국 아이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같이
경쟁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도 부러워하는 대학을 졸업했고
변호사라는 타이틀도 땄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가급적이면 하지
않으려 했다. 비록 입으로는 한국인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내가 살아야 할 곳은
이곳 미국 땅이었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아버지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한국인으로 생활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미국 문화에 접근하기가 더 쉬웠다.
따라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미국 아이들과 조금 다른 입장이라는
정도로밖에 인식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 동양인으로서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고 또 사회에
나와 부당한 상황들에 직면하게 되면서, 나는 낯선 얼굴들 속에서 묘한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처음 이민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미국 사람들의
얼굴이 다 똑같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도 거대한 미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영어를 잘하고 시민권을 갖고 투표권을
행사하며 살더라도, 또 인류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업을 갖더라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는.
미국이라는 백인 중심의 나라에서 나는 황색 피부를 지닌 소수 민족이기 때문에
결코 일등 시민은 될 수 없다. 설령 그들 무리에 속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늘
예외적인 존재일 뿐 그들과 똑같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일등 시민이라는
것은 아무리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백인이라면 당연히 주어지는 일종의
특혜와 같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하여 이곳에서의 대우가 달라졌지만,
그래도 그들의 밑바닥에 깔린 근본적인 의식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그들의
본심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가
머래도 내가 태어난 나라가 힘있는 나라가 되어야 하며, 나 또한 내 나라를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많은 한국인 2세들이 자신은 완전한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며
살다가, 어느 순간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기를 맞게 될
때가 있다.
흑인들 역시 백인에 의해 차별당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 수가 워낙 많아 이방인
취급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들을 뺀 백인들만의 역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인들도 우리들처럼 미국사회에서 일등 시민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흑인 미식축구선수 심슨 사건의 전개 과정만 봐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심슨과
이혼한 백인 여자가 살해되었는데, 심슨이 살인죄로 구속되었다. 경찰의 추격을
받으며 달아나는 심슨을 방송사 헬리콥터가 쫓으며 각 가정에 그대로 생중계해
더더욱 흥미를 끌었던 사건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여론조사 결과 심슨이 무죄라고
생각하는 흑인이 70%를 넘는 반면, 백인들은 거의 대부분 심슨이 유죄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를 담당한 백인 경관이 그를 짐승 취급하고
불리하게 증거를 조작한 녹음 테이프가 공개되면서, 사건은 결국 인종문제로
불거지고 말았다.
온 국민이 열광하는 스포츠 영웅으로서, 수천만 달러를 벌어들여 남부럽지 않은
초호화 생활을 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달라져도, 흑인을 무시하는 백인들의
의식에는 결코 변함이 없다.
이렇듯 끔찍할 정도로 인종 차별이 심한 미국 사회에서 소수 민족으로서 그나마
멸시받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한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내가 필요로 하는
만큼 누리기 위해서는, 그들과 치열하게 싸워 이겨야 한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깨닫고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
아울러 이민 1세대인 우리 부모님들에게 어떠한 방법으로든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며, 우리 다음 세대들이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닌 국적 불명의
정신적 미아가 되어 방황하지 않도록 그들을 이끌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국 한국인 후손을 낳을 것이므로.
선택, 나의 대학
삶을 살다 보면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이 몇 차례 닥친다. 나에게 있어
그 최초의 일은 대학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나는 버클리, 에일, 칼럼비아 그리고 코넬 대학에 각각 원서를 넣었는데, 운이
좋게도 네 곳에서 모두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한국에서 하버드나 에일을 최고의 대학이라고 생각하듯이, 내 주위의 어른들도
에일에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좀 달랐다. 학교마다 특징이 다르고
우수한 학과가 다르므로, 일시적인 기분에 휩쓸리기보다는 선택에 앞서 좀더
정확하게 정보를 얻고 싶었다.
생각 끝에 나는 일정을 잡아 대학을 순례하는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가 동행하겠다고 했지만 끝내 사양했다. 선배들을 만나 보고 그들로부터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혼자가 나을 것 같았다.
평소에 엄격하던 아버지도 선뜻 허락하였다.
"잘 보고, 현명하게 선택하거라."
첫 번째로 간 곳은 버클리였다. 미리 연락을 취해 둔 선배를 만나 학교 소개를
받았다.
버클리에는 유난히 한국인 학생이 많았다. 모두들 나를 환영하며 버클리로
오라고 난리였다. 모처럼 한국사람들 틈에 낀 나도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선배들이 열어 준 환영 파티에 나갔다. 나 역시 마음속으로 버클리도 괜찮을
거라는 쪽으로 어느 정도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술잔이 돌고 노래가 오가더니 일순 분위기가 아주 묘해지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곧잘 밤을 꼬박 새우며 술을 마시는 모양이었는데, 이 환영 행사가
그랬다. 환영을 받아야 하는 나는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고, 술에 취해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선배들의 무대가 되고 말았다.
"에리카, 죽도록 공부만 하고 싶으면 시골에 콕 처박혀 있는 코넬 같은 데 가고,
인생을 음미하고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대학생활을 하고 싶다면 이곳
버클리로 오라구."
될 수 있으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싶었지만, 역겨운 술 냄새와 흥청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더 이상 쏟아지는 졸음을 견뎌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곳을 빠져나와 한 선배의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짐을 찾으러 다시 그곳에
들렀다.
그런데 맙소사! 방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여기저기 쏟아 놓은 구토물로
역겨운 냄새가 진동을 했고, 있는 대로 어질러진 방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최악이었다.
'아니야, 이건 절대 아니야. 적어도 난 이런 모습으로 대학생활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
나는 그날로 가방을 쌌다. 한국인 학생이 많은 곳에서 생활하고 싶은 생각은
컸지만, 내게는 그보다 더 큰 꿈이 있었다. 대학 4년을 그런 식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엄마, 버클리는 아니에요."
동부로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를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학이 아니라면 예일만한 대학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집요하게 예일을 권했다.
코넬로 향하면서 나는 불길해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넬행 비행기는
바람이 조금만 세차게 불어도 금방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소형 비행기였다. 게다가
그 시골스러운 비행장이라니....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학교로 가는 길엔 4월인데도 흰 눈이 쌓여 있었다. 워낙 추위를 많이 타 늘
감기를 달고 다녔던 나는 거기서부터 기가 질리고 말았다.
마중을 나온 선배 언니는 그곳의 첫인상 만큼이나 순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그런데 네 표정이 왜 그러니?"
선배의 환한 미소가 짓궂은 미소로 변했다.
"언니, 난 이렇게까지 시골인지 몰랐어요."
"그게 어때서? 넌 무엇을 기대했는데?"
"기대라기보다는.... 다른 대학보다 굉장한 고립감을 느낄 것 같아요. 여태까지
접해 본 곳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거든요. 이런 곳에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봐. 오히려 네가 공부에만 전념하기엔 가장 좋은
곳일 수 있어."
"언니는 후회해 본 적이 없나요?"
선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 어깨 위에 두 손을 올려 놓았다.
"미혜야, 뒤를 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해?"
뒤를 돌아본 나는 두 눈을 똑바로 뜰 수가 없었다. 싱그러운 흙냄새가 스치며
한 폭의 그림처럼 밝고 아름다운 코넬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반짝이는 햇살을
가르며 코끝을 간지럽히고 지나가는 신선한 나무 향, 마치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고요와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풍경이었다.
나는 서서히 눈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때까지 왜 눈에 안 띄었는지 모를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마치 나를 환영이라도 하듯 우아한 모습으로 뽐내고 있었다.
"아, 너무 아름다워요."
"공부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야. 물론 자극이 없어서 그날이 그날 같은 때도
있지. 하지만 그래서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가 있어. 정해진 선이 없으니까
끝없이 하는 거지. 미혜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네 삶을
좌우하는 선택이 될 테니까."
교내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여기 코넬이에요."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거긴 어때?"
어머니의 음성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미 딸의 마음을 감지한 것
같았다.
"엄마, 그 노래 알지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하는.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공부하면 공부가 저절로 될 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구나.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으니 네 계획대로 다 돌아보고
마지막에 결정해도 늦지 않아. 하여튼 코넬이 그렇게 마음에 든다니 기쁘구나."
어머니 말대로 예일과 컬럼비아까지 다 돌아보았지만 코넬로 가겠다는 결심이
바뀌지는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벅차올랐다. 그리고 나의 선택이 현명한 것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대학 4년을 다니는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 코넬로 가기로 한 결정을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새로운 시작
코넬에서의 9월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여름방학은 아무 부담 없이 데이트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한바탕 놀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나는 여행이니 미팅이니
하는 달콤한 유혹들을 다 뿌리치고 여름방학을 온전히 코넬의 서머스쿨에
투자했다.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학생활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해서
좀더 알차게 생활해야겠다는 나름대로의 굳은 다짐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서부에서 동부로 날아왔어도 학교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히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코넬에서의 나의 첫
학기는 좌충우돌하며 보냈다고 표현한 것이 옳을 것이다.
우선 기후부터가 달랐다. 날씨가 좋다가도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서
기온이 뚝 떨어져 쌀쌀해지는 변덕스러운 기후였다. 캘리포니아의 환상적인
날씨만 생각하고 늘 옷을 얇게 입은 탓에 나는 거의 코에 감기를 매달고 다녔다.
짧은 치마를 입고 강의실로 가다가 너무 종아리가 시려워 다시 옷을 갈아입고
가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 보다 못한 여자 선배들이 옷 입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코넬로 가겠다고 결정했을 때 12학년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미혜야, 코넬로 가게 된 것을 정말 축하한다. 너는 모든 걸 잘 알아서 하는
아이니까 그곳에 가서도 잘 지내리라 믿는다. 그래도 노파심에서 몇 마디 해줄
테니 어려움이 닥치면 내가 해준 얘기를 생각해 보렴."
"네, 선생님."
"처음으로 집을 떠나 혼자 생활하다 보면 분명히 향수병에 걸리게 될 거야.
가족들이 못 견디게 보고 싶고, 아마도 집에 오고 시어 입맛까지 없어지게 될지도
몰라. 그것을 이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님께 자주 편지를 쓰는 거야.
편지를 쓰는 시간에는 적어도 마음속으로 계속 대화를 할 수 있으니까.
물론 전화를 할 수도 있겠지만, 편지를 쓰는 것이 차분하게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털어놓을 수 있으니 그쪽이 훨씬 좋아. 그리고 경제적이기도 하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선생님."
"또 공부가 네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절대 절망해서는 안된다. 대학에 가면
아마도 고등학교 때 날고 뛰던 아이들만 모두 모여 있을 거야. 미혜 너처럼
말이다. 그러니 설령 처음에 성적이 나쁘게 나와도 절대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러 고등학교에서 내로라 하는 아이들만 모였으니 분명히
여기 코비나에서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 그 두 가지만 명심하면 보람있는
대학생활이 될 거다. 미혜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처음 학교에 와서는 난생 처음으로 집을 떠나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유혹이었다. 정해진 귀가시간에 단 몇 분만
어겨도 호통을 치던 아버지도 수천 마일 떨어져 있고, 누나 일에 시시콜콜
간섭하던 남동생들도 사정권 밖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곳엔 생각보다 많은 한국 학생들이 있어 신이 났다. 날마다 그
아이들과 만나는 일이 즐거워 거의 집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내심 안심했다. 늘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면 향수병 같은 것엔 걸리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학기가 시작되어 경쟁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자 슬슬 집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학교 공부는 너무도 어려웠고, 계속되는 시험 때문에 잠은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잘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공부를 해야 했다. 저녁 먹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다가 12시쯤에야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에 돌아와서도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날마다 그렇게 공부를 해도 수업을 따라가기가 여간 벅찬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때 고등학교 선생님의 애정 어린 충고가 없었다면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실망하고 좌절했을 것이다.
부모님이 보고 싶고, 경준이와 경모도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나를 무척
귀여워한 고등학교교장 선생님과 다른 선생님들까지 모두 그리운 사람뿐이었다.
나만 빼놓고 저녁마다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을 가족들로부터 완전히 소외당한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것을 반드시 실천으로 옮겼던 나는 공부를
다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부모님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하루 일과를 낱낱이 적었다. 그날의 수업 내용,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 친구들 얘기, 남자아이들 얘기, 그날의 기분, 도서관에서 공부한 것들,
하루 종일 먹은 음식 등등 부모님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빠짐없이 적었다.
그것은 하루의 내 일과를 돌아보며 반성을 하는 시간이기도 했고, 오직 자식들을
위해 고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새 힘을 얻은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날마다 부모님께 편지를 쓰며 집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어머니는 대학 시절 내가 보낸 편지를 아직까지도 모두 간직하고 있는데, 그게
몇 박스나 된다.)
거의 날마다 똑같이 이어지는 수업과 시험 끝없이 파고드는 공부 속에서
아이들은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들을 찾아냈다. 가끔씩 파티를 열기도
하고 토요일과 일요일을 이용해 한국 아이들끼리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나는
교회활동을 열심히 했다. 학교 안에 만든 한국인 교회였다. 노래를 특별히
잘하지는 못했지만 성가대도 열심히 참석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봉사활동을
하며 주일을 보냈다. 몸은 피곤했지만 봉사를 하고 나면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했다.
그리고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 학생 가운데서 특히 마음이 잘 통하는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신미경과 서영희. 미경이는 코넬의 서머스쿨에서 처음 만났는데
딸만 넷인 집안의 맏이로 아들 몫까지 해야 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미경이는
성격도 차분하고 사려가 깊어서, 설치고 덜렁대기 좋아하는 내 성격의 단점을
메워주는 좋은 친구였다.
영희는 집안 환경이 어려웠지만 공부도 잘하고 밝은 성격을 가진 친구였다.
언니가 공장에 나가 돈을 벌어 학비를 보내주고 있었다.
나는 틈만 나면 그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냈다. 집 생각이 나면 한국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으며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는데, 영희는 특히 한국 음식을 좋아해
어디서 누가 한국 음식을 한다는 소문만 나면 십리도 멀다 않고 달려갔다. 그리고
모처럼 여유가 생기면 밤을 새워 가며 수다를 떨었다. 강의시간 얘기, 교수님들
얘기, 전공문제, 장래문제, 남자친구 문제.... 지금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 것들을
가지고 왜 그렇게 오랜 시간 고민하고 불안해 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학교 공부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마음이 나약해지거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었다. 대학생활 동안 후회 없이 공부를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앞에 놓인 가장 중대한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가족들의 기대도 컸고 기대가 큰 만큼 우리들의 어깨도 무거웠다. 나는 변호사를
꿈꾸고 있었으므로 상급학교에 진학하겠지만, 미경이는 졸업하자마자 직업을 갖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훗날 가슴 속으로부터 넘쳐 흐르는 성취의 기쁨을 맛보며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괴로움과 시련쯤은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우리는, 어려움을 함께 극복할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고 부추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영희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로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지만,
미경이는 4년 내내 단짝친구로 지냈다. 코넬을 졸업하고도 우리들의 우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후일 미경이는 멀리서 달려와 내 결혼식에 들러리를 서주었고,
지금도 진정한 마음의 친구로 남아 있다.
화학은 무서워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전통적으로 코넬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하나 있다. 저녁 11시가 되면 모두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별별 비명 소리가 다 들리다. 죽여 달라는 아이도 있고,
살려 달라는 아이도 있고, 돌아 버리겠다는 아이도 있고, 그냥 꽥꽥 소리만 지르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다가 한 10분 정도 지나면 잠잠해진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공부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나면 정말이지
속이 시원해진다. 언제 한번 그렇게 마음껏 소리를 질러 보겠는가.
나는 수업 가운데서 화학이 가장 어렵고 힘들었다. 고등학교 때는 화학이 가장
재미있고 성적이 좋아 신이 났었는데, 그 화학이 나를 그렇게 괴롭힐 수가 없었다.
나도 밤 11시가 되면 곧잘 창문을 열고 꽥꽥 소리를 질렀는데 대부분 화학 공부를
할 때였다.
화학이 어려운 것은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것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대학 4년을 졸업할 후 대학원 과정에서 지원하게 되는 의대는
화학이 필수이므로, 후에 의대를 지망하려는 아이들은 모두 화학을 수강해야 한다.
그런데 1학년 학생의 30% 이상이 의과 대학원 지망생들이다. 하지만 그들을 다
의과 대학원에서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아예 처음부터 알짜배기들만 추려 내기
위해 일부러 필수과목을 굉장히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고등학교 1년 동안 배운
것을 한 시간 강의로 다 끝내 벌리 정도로 진도는 물론이고 수업의 강도 또한
대단했다.
우리 화학 교수는 키가 작은 50대 중반의 남자였다. 깐깐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어찌나 말을 빨리 하는지 더욱 죽을 맛이었다. 하나하나
천천히 설명해 가며 가르쳐도 이해가 갈까말까 한데 혼자서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끝내 버린다.
시간마다 내는 퀴즈, 서너 시간씩 계속되는 실험도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화학시험이 있을 때면 며칠을 도서관에서 화학만 공부했다.
내 공부 습관 가운데서 권해 주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나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즉시 다른 사람에게 물어 봐서 해결한다. 그것만큼 확실한 것이 없다.
모르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여 감추거나 혼자 해결하기 위해 끙끙거리지 않는다.
더군다나 모르는 것을 나중에 미루면 후에 그 여파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래서 나는 강의마다 담당 교수의 조교를 찾아가 모르는 것을 바로바로
해결했다. 그것은 화학뿐 아니라 모든 과목에 적용됐다. 일반적으로 조교는
대학원 선배들이나 그 학과 고학년 선배들이므로 그들만큼 확실한 선생님이 없다.
또한 후배가 모르는 것 좀 가르쳐 달라는데 야박하게 거절할 선배는 거의 없다.
평소에 특별히 밉게 보이지 않고 성실하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기꺼이 가르쳐 준다. 나는 대학 내내 그 방법을 쓰며 모르는 것을 해결했는데,
나는 지금도 그것보다 더 좋은 공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화학 조교는 내가 시간을 가리지 않고 귀찮게 하니까 복도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먼저 놀라는 눈치였다. 너무 미안해서 나중에 그 성배가 논문을 쓸 대 내가
타이핑을 해주었는데, 그렇게라도 해서 나는 조금이나마 마음의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첫번째 중간고사 화학시험은 정말 최악이었다. 시험시간 1시간 30분 동안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평생 그 소름 끼치는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전부 열
문제였는데 완전히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나는 1번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2번
문제도, 3번 문제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나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시험지를 앞뒤로 뒤적이다 보니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하나님 맙소사. 이러다가 정말 한 문제도 못 풀겠다. 김미혜, 정신 차려. 왜
이렇게 덜렁대는 거야? 너 공부 많이 했잖아. 천천히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내 자신을 타일렀다. 제발 진정하라고.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키고 마지막 문제부터 하나씩 풀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그리고는 1시간 30분의 시험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손이 안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빨리 답안지를 메워 갔다. 나 자신도 무슨 말을 쓰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아찔한 순간이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1번 문제는 풀지 못한
상태로 답안지를 제출했다.
아니나다를까, 시험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엎드려
우는 학생, 뛰쳐나가는 학생, 허탈감에 빠져 웃는 학생... 천여 명이 함께 시험을
본 교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모두들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모른다 나 역시 거의 몇 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는데.... 속이 몹시 상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시험문제까지 모두 풀어 봤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교들은 모두 어려웠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나, 이제 다 끝나 버린 것을. 나도 여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허탈감에 빠져 교실을 빠져 나왔다.
코넬의 캠퍼스는 계속과 폭포가 굉장히 많은데 그 물줄기를 따라 다리가 여러
개 걸려 있다. 그런데 화학시험이 끝나면 좌절한 학생들이 몰려와 그 다리 위에서
폭포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화학시험이 있는 날이면 학교
경찰이 다리 주변을 지키며 폭포로 뛰어드는 아이들을 막기 시작했다. 그날도
학교에는 이미 경찰들이 쫙 깔려 있었다.
대학마다 한 해에 자살하는 아이들이 몇 명씩 있는데, 그 중 코넬 대학이 가장
많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폭포 때문이었다.
하지만 통계로 보면 코넬이 예일이나 하버드 등 다른 아이비 리그 학교들에 비해
유난히 자살하는 학생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다리에서 폭포로 뛰어드는 것이
낭만적으로 보인 탓일까. 우리 하교의 자살 소동은 늘 아이비 리그 대학가의
화젯거리였다.
추수감사절 소동
해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한국 학생들의 파티가 있다. 그것은 한 해도 거르지
않는 연례 행사로 꽤나 전통이 있는 행사다. 다른 학교 아이들도 초청하여
성대하게 벌이는 이 추수감사절 파티는 신입생들을 환영해 주는 자리인 동시에
각자 어떤 장기들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학생들
모두 열심히 참여한다.
1학년 신입생들은 연극을 해야 했다. 1년 전에는 "흥부와 놀부", 2년 전에는
"김진사댁 셋째딸"을 했는데 모두 잘했으니 이번 1학년도 반드시 잘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어명이 떨어졌다.
일 저지르기를 좋아했던 나는 이번 기회에 선배들에게 본때를 보여 줄 생각으로
열심히 쫓아다녔다. 그 사실을 어머니가 알았다면 분명히 한마디 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내가 얼마나 설치고 다녔던지 어머니는 제발 대학에 가서는
얌전하게 지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미혜야, 너 또 시작이니? 너는 왜 그렇게 선머슴처럼 설치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니? 너 그러다 소문나서 어디 시집이나 가겠니?'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어쩌랴, 천성인 것을.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저녁을 먹을 대 모여 작품을 선정하고
대본을 쓰기로 했다. 우리는 만장일치로 "시집 가는 날"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영어도 섞고 노래도 넣어 가능한 한 코믹하게 극을 꾸미기로 했다.
대본이 다 완성되고 모두들 모여 배역을 정했다. 남학생들이 여자 역을 맡고
여학생들이 남자 역을 맡았다. 나는 연극 도중 세 개의 노래를 해야 하는 얼간이
역을 맡았는데, 그 역을 잘 해낼지 걱정스러웠다. 각자 역이 정해지자 따로따로
연습을 했다. 나는 틈틈이 쉬는 시간을 이용했다.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빨래를
하면서도 계속 노래를 불렀고, 식사를 챙기면서도 또 샤워를 하면서도 대사를
외웠다.
그리고 며칠에 한 번 함께 모여 합동연습을 했다. 우리말을 못하는 학생들은
우리말 연습까지 시켜가며 하려니까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파티 일주일
전부터는 저녁마다 모였다. 그런데 사흘 전 내가 배역을 바꿔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다. 깍쟁이 역을 맡은 남자애가 너무도 깍쟁이 짓을 못해서 내 얼간이
역과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애는 생긴 것도 얼간이 같아 그 역만큼은 잘 해낼 것
같았다. 아니, 제발 그러기를 바랐다.
하루 전날 우리는 총연습을 했다. 저녁 9시 30분부터 모여 한바탕 소란을
떨었다. 행사를 시작하면서 부를 노래들을 정하고 즉석에서 율동을 만들어
가르쳤다. 노래는 아리랑으로 시작해서 두만강, 신라의 달밤, 보리밭, 무궁화,
고향의 봄, 새나라의 어린이, 새마을 노래, 겨울나무, 하얀 마음, 모닥불, 서울의
찬가, 저 푸른 초원 위에, 토요일 밤, 잊혀진 계절, 사랑해, 그리고 애국가로 끝을
맺기로 했다. 할 줄 아는 노래는 무궁무진했다.
그런데 정작 연극을 할 단원들이 하루 전날인데도 대사를 다 못 외워 쩔쩔
매고 있었다. 나는 신경질을 내면서 아이들을 야단쳤다.(다행히 나는 대사를
완벽하게 외워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너희들 정말 이러기야? 우리가 제대로 못하면 선배들이 창피해서 죽으려고 할
거야. 우리가 분위기를 망칠 순 없잖아."
"미혜야, 화내지 마. 대사가 안 외워지는 걸 어떡하니.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다
외워 올 테니까 빨리 연습이나 계속하자."
얼간이가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애들이 대사를 외우는 건
무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끝없이 밀려 있는 공부도 해야지, 게다가 한국말을
모르는 아이들은 뜻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작정 외워야 했으니까.
"정말 내일까지는 모두 대사를 다 외우고 있어야 해."
"물론이지. 자, 빨리. 시간 없어, 빨리빨리."
난 연극 외에도 1학년 남학생과 듀엣으로 가요 두 곡을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편지"와 "눈과 눈을 마주보며"를 부르기로 했는데, 나는 연극 연습을
시키느라고 목이 쉬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 남학생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서 노래를 한다며 쑥스러워 했고, 난 그 아이를 설득하느라 또
진땀을 뺐다. 새벽 2시가 되니까 아이들이 모두 지쳐 떨어졌다. 할 수 없이
연습을 끝냈다.
다음날, 이날은 바로 우리들의 신나는 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강의실로 갔다 화학실험이 하루 종일 있는 날이었으므로 서둘러야 했다.
실험을 마치자마자 내 방으로 돌아와 연극을 할 때 입을 한복을 준비해
부랴부랴 행사장으로 달려갔다. 1학년 학생들은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새벽까지도 대사를 외우지 못했던 학생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다 외웠는지
확인했다. 모두들 대사는 다 외웠다는 데도 덜덜 떨고 있었다. 선배들이 저녁을
푸짐하게 차려 놓았지만 아이들은 너무 떨려 밥맛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것과 상관없이 잘 먹었지만.
4학년 선배의 오프닝 멘트로 행사의 막이 올랐다. 마치 한 맺힌 사람들처럼
우리는 서로 손을 붙잡고 끊임없이 한국 노래를 불렀다. 두만강도 좋고 서울의
노래도 좋고 파란 마음 하얀 마음도 좋았다. 가요, 동요 할 것 없이 모두가
목소리를 높여 가며 힘껏 불러 댔다.
내가 코비나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대 막연하게 그리워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같은 민족만이 이러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분명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감동이었다. 마주잡은 손이 한없이 따뜻했고, 서로의 감정을 읽는
데 말이 필요없었다. 코끝이 찡했다.
드디어 연극을 공연할 차례가 되었다. 내 상대역인 이쁜이를 맡은 남자애는
한국말이 아주 서툴렀다. 그애는 자기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외운
대로만 말을 할 뿐이었다. 대사를 외웠다길래 그런 줄만 알았는데, 한참 잘
나가더니 갑자기 옷고름을 뒤집어 미리 붙여 놓은 대사를 읽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마저 엉뚱한 대목을 읽고 있었다.
'으악, 이쁜아. 너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니?'
참다 못한 나는 할 수 없이 중간에 그애의 대사를 끊어 버리고 모른 척 내
대사를 했다. 그애는 당황했는지 얼굴이 빨개졌다.
"이쁜이 좀 봐. 저 애 뭘 읽고 있는 거야?"
"이쁜이가 이쁜 짓만 골라 하네."
관객들은 모두 한마디씩 하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얼렁뚱땅 위기를 넘기고 꿋꿋하게 밀고 나간 끝에 겨우 끝을 낼 수 있었다.
그래도 관객들로부터 엄청난 박수를 받았다.
듀엣으로 부른 노래는 시종 엉망이었다. 함께 부르는 부분에서 노래는 완전히
따로 놀았고, 그 진땀 나는 순간에 무대의 불까지 나가버렸다. 관객들은 또다시
배꼽을 잡았다. 그래도 나는 자존심이 있어서 내 파트너를 설득해 다시 처음부터
노래를 불렀다.
모두들 얼마나 웃어댔는지 여자 선배들은 얼굴에 주름살이 몇 개는 생겼을
거라며 걱정이었다.
프로그램이 모두 끝난 후 선배들은 역사상 이번 신입생들이 가장 재미있게
잘했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우리는 새벽까지 놀다가 파티를
끝냈다. 그리고는 3학년 선배들의 방으로 몰려갔다. 그 자리에서 1학년 후배들을
하나씩 일으켜 세워 질문을 하고 별명을 지어 주었다.
어떤 3학년 선배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김미혜, 너는 자신에게서 제일 아름다운 부분이 어디라고 생각하니?"
질문이 너무 황당하고 갑작스러워 나는 가만히 웃고만 있었다.
"Miss Piggy!"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미스 피기란 텔레비전의 머피
쇼에 나오는 극성스러우면서도 뚱뚱한 돼지 아가씨였다.
"싫어요, 난...."
아무리 싫다고 길길이 날 뛰어도 막무가내였다. 그후로 미스 피기는 내 별명이
되고 말았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해결했던 터라 좀 통통한
편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숙녀에게 그렇게 무례한 별명을 지어 주다니.
아이들은 나를 놀릴 때면 으레 미스 피기라고 불렀다.
무엇인가에 매달려 한바탕 정열을 쏟고 나면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든 성장을
한다. 수업과 공부를 빠뜨리지 않으면서도 극성스럽게 파티를 치르고 나니 앞으로
그런 일이 있으면 척척 해낼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물론 어떤 식으로 기회가
주어질지는 모르지만. 어떤 경우든 똑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 것 같다. 그러므로 자기 앞에 당장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매달리고, 그 결과에 상관없이 만족할 수 잇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과 관계도 좋아졌다. 그동안 막연했던 유대감에서 한 단계 뛰어올라
진심으로 서로를 알고 싶다는 기대감이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 함께 연극을
하면서 서로의 성격도 파악할 수 있었고 장단점도 서로 알게 되었다.
나는 무슨 일이든 진심으로 하고자 결심한다면 못할 일이 없다는 신념을 갖고
살아간다. 공부를 해도 그렇고, 일을 해도 그렇고, 사랑을 그렇고, 봉사를 해도
그렇다.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나를
지탱해 주는 가장 큰 힘이다.
아무튼 집을 떠나 처음으로 맞는 추수감사절 전야는 한바탕 소동을 덜고서야
막을 내렸다.
친구의 이별
추수감사절이 끝나면 거리나 백화점, 일반 가정들은 크리스마스트리를 하는 등
곧장 성탄 분위기로 이어지지만 학교는 다르다. 학기말 시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추수감사절에 나는 집이 너무 멀어 가지 못하고 그 대신 뉴욕에서 가까운 어머니
친구분 댁에서 보냈다. 어색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기숙사에 혼자 남아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생각에 서였다.
미경이와 영희는 추수감사절 며칠 전부터 안절부절못하고 기다리다 거의 병이
나다시피 하여 집으로들 떠났다. 영희는 특히 한국 음식이 먹고 싶다며
안달이었다.
감사절을 떠들썩하게 보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우리는 한 학기를 마무리할
채비로 분주했다. 분위기도 다시 얼어붙었다. 나는 시험만 끝나면 그렇게도
그리던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절망스런 시간들을 견뎌 냈다.
코넬에서의 쌀쌀한 겨울이 무르익어 갈수록 나와 미경이 그리고 영희와의
우정도 무르익어 갔다. 집과 가족을 떠나 생활하는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가족이 되었고 형제가 되었고, 물론 둘도 없이 친한 친구가 되었다. 공부를 하다가
지치면 우리는 모여 앉아 서로의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한바탕 수다를 떨며 속에
쌓여 있는 것들을 쏟아냈다.
영희와 미경이는 둘 다 남자 친구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나는 언제나 그
아이들의 카운셀러가 되어 고민거리를 들어 주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불발로
끝나 버린 나의 첫번째 데이트 파트너인 동만이가 코넬에서 자동차로 8시간
거리인 메릴랜드에 와 있어 가끔씩 만나는 상태였다. 나의 첫 남자친구였던
동만이는 내가 꼭 자기와 결혼하게 될 거라고 말하곤 했지만, 그와 결혼할 운명은
아니었는지 양쪽 어머니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결혼 상대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12월 초순에 들어서자 강의는 거의 종강을 했고 시험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금요일마다 서너 시간씩 하던 화학실험 시간이 끝난 것은 축하할 일이었다.
실험을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긴 했지만 금요일마다 실험에 갈 생각만 하면 왜
그렇게 눈앞이 캄캄해져 오던지. 전공 필수과목인 심리학도 한 학기 동안
화학실험만큼이나 지겨웠다.
그래도 한 학기를 마감할 시점에 다다르니 아무것도 할 것 없이 시간만 지나가
버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런 가운데 나는 한 학기를 잘 마무리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기 위해, 날마다 희뿌옇게 밝아 오는 새벽까지 공부를 했다.
코넬의 겨울은 몹시 추웠지만 아름다웠다. 캘리포니아에서는 거의 눈을 볼 수
없었는데, 새벽에 공부를 하다 잠을 쫓기 위해 창 밖을 내다보면 어느새 새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마음이 흐트러지려고 하면 나는 쏟아지는 나는 쏟아지는 눈을 보며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졸음이 쏟아지다가도 어머니 생각을 하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12월 둘째주 토요일이었던 것 같다. 학교는 그야말로 조용했다. 모두들
어딘가에 틀어박혀 미친 듯이 공부하고 있겠지. 나는 시험때는 내 페이스를
유지하며 공부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지 않고 기숙사에서 혼자 공부를 하는데,
그날도 일찌감치 마음을 잡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영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또 왔어."
영희는 입에서 대뜸 나온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영희에게는 뉴욕에서부터 줄곧 쫓아다니며 괴롭히던 남자가 있었다. 애인은
아니었다. 그는 틈만 나면 기숙사로 전화를 걸어 왔는데, 그때마다 영희는 친구를
시켜 그 남자를 따돌리고는 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기숙사로 직접 영희를
찾아와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또 왔다는 얘기였다.
"내일 아침에 시험 있는데 왜 찾아와서 난리인지 모르겠어."
영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영희야, 나한테 와. 나 오늘 밤새울 작정이었으니까, 내 방에서 함께
공부하자구."
나는 혼자서 방을 쓰고 있었으므로 영희와 함께 공부하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알았어. 금방 가방 싸가지고 갈게.'
그러나 금방 오겠다던 영희는 십분이 지나도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희의
기숙사와 내 기숙사는 따로 떨어져 있었지만 오분이면 족히 오고도 남는
거리였다. 그러는 동안 메릴랜드에 있는 동만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꽤 오랜
시간 동안 통화를 했다. 그 때까지도 영희는 오지 않았다.
"영희가 온다는 시간이 한 시간이나 넘었는데, 아직 안 오네. 영희한테 전화 좀
해봐야겠어."
동만이와 통화를 끝내고 영희 기숙사로 영희 기숙사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만
몇 번이고 되풀이됐다. 그때였다.
"미혜야, 큰일났어!"
노크도 없이 문을 밀치고 들어온 사람은 미경이였다. 미경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영희가 총에 맞았대.,"
순간 머리 속의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
"기숙사 안이 온통 난리야. 경찰도 왔구. 남자 친구가 총을 쏘았는데 머리를
맞았다나 봐."
그제서야 나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 친구가 아니라 뉴욕에 사는 그 남자야. 가봐야겠어."
그때 한 선배가 들어오며 영희의 죽음을 알려 주었다. 미경이와 나는 서로
끌어안고 비명을 질렀다.
정신 이상 증세를 갖고 있던 그 남자는 영희가 안 만나 주자 몰래 총을 숨겨
학교에 찾아온 것이었다. 영희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방으로 들이닥친 남자가 심한 말다툼 끝에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이다.
영희는 그 자리에서 죽고 또 한 친구는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학교 경찰에 의해 체포되기 직전에 자신의 턱밑에
총을 쏘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영희는 집안의 희망이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뛰어나게 공부를
잘해서, 막내인 영희를 공부시키기 위해 언니가 공장에 나가며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가족들의 기대가 컸던 만큼 영희는 그것 때문에 늘 가위눌린 듯
부담스러워했다. 나이를 먹는 것을 두려워했고 어른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섬세하고 약한 친구였는데....
나는 울고 또 울었다. 탈진 상태에 빠져 눈물이 안 나올 때까지 미경이와
붙들고 울었다.
내가 평소에 영희와 친했던 관계로 사건을 확인하려는 아이들이 모두 내 방으로
전화를 걸어 왔다. 그리고 전혀 사실과 다른 소문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사건을 사실과 다르게 과장해서 보도해 흥미 위주로 몰아갔다.
나는 내가 영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영희의 억울하고 불쌍한 죽음을
사람들이 사실 그대로 알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영희의 입장을 해명했다.
영희는 퍽 감상적인 친구였다. 자기 기분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를 좋아했고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면들이 많았다. 며칠 전에는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자신은
19살이 되지 않을 거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땐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
들었었는데.
영희의 죽음으로 인해 나는 완전히 몸과 마음의 리듬을 잃었다. 그 상태에서
시험 공부를 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내 얘기를 전해 들은 동만이 역시 매우 충격을 받았는지, 나에게 시험을
연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해 주었다.
"미혜야, 너 지금 그런 상태로 학기말 시험을 치른다는 건 무리야. 중대한
사유로 시험을 치를 수 없을 경우 시험을 연기할 수 있으니까 빨리 집으로 돌아가.
집에 가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2월에 새로운 기분으로 시험을 보는 거야. 그것
역시도 네 마음에 부담이 되기는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 역시 빨리 학교를 떠나고 싶었다. 나는 서둘러
행정적인 처리를 마치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갔다.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에리카 김, 영원히 강하라
새로 태어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 것도 있다는 자연의 이치를 알면서도
영희의 죽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활짝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억울하고 끔찍한 죽음을 당한 영희는 너무도
순수하고 착한 아이였다.
집에 있는 동안 나는 죽음이란 문제에 깊이 빠져들어 갔고 그러면 그럴수록
삶에 대한 회의가 일었다. 짧은 겨울방학이 다 끝나 갈 때까지도 마음은 정리되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가서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공부한다는 것은 죽은 영희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엄마, 저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내가 한심했는지 제발 나와서 얘기 좀 하자는 어머니에게
내 심정을 털어놓았다.
"미혜야, 너 그게 무슨 소리니?"
"공부하면 뭐해요. 사람이 언제 어떻게 죽게 될지 모르는데. 공부하는 것도,
열심히 사는 것도 모두 허무해요. 죽어라 밤 잠 안 자며 공부하면 뭐해요. 영희
보세요. 그애, 얼마나 착한 애였는데.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죽고 말았잖아요."
"너 아직도 영희 생각만 하고 있는 거니? 죽은 사람을 어쩌겠니. 미혜야, 이제
제발 그 일은 잊어버려라."
"엄마, 잊어버리라구요? 제가 그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나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친구가 죽었다고 네 인생도 끝났다고 생각하는 거니. 네가 이러는 게 영희를
위로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럴수록
마음을 굳게 먹고 네 삶에 충실해야 하는 거야."
"엄마가 지금의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요?"
어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엄마는 어릴 때 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불행을 겪었단다. 미혜야, 입장을
한번 바꿔 놓고 생각해 봐라. 내가 왜 너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겠니?"
마침내 어머니마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얼마 후
할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지금 살아 계신 외할머니는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기까지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도 어머니나 내게 잘해 주었고, 어머니 또한 외할머니께
끔찍하게 잘했다.
'내가 왜 이러지. 영희의 죽음을 핑계 삼아 혹 내 삶을 함부로 내팽겨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데. 더구나 우리들만이 바라보며
살아온 부모님께 정말 내가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 드려도 되는 건가? 삶과
죽음의 근원적인 문제를 이런 식으로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걸까?'
부끄러웠다. 부끄러워서 더 이상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가 없었다. 하ㄱ로
돌아가 1학기 학기말 시험도 치러야 하고 새 학기 준비도 서둘러야 하는데,
이렇게 세상을 다 포기한 아이처럼 넋 놓고 앉아서 시간만 보내고 있다니. 이것은
내 모습이 아니었다.
"엄마, 죄송해요. 엄마 말씀대로 학교로 돌아갈게요."
"미혜야, 고맙다. 엄만 널 잘 알아. 넌 항상 강한 아이였잖니. 지금의 상황이
견디기 힘들 거라는 거 이 엄마도 안다. 하지만 넌 이겨낼 수 있어."
어머니와 나는 한참을 붙들고 울었다.
코넬의 1월은 내 텅 빈 가슴을 꽁꽁 얼려 버릴 정도로 매서웠다.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방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느라 한바탕 대청소를 했다. 책상과 침대
밑까지 구석구석 묵은 체취를 쓸어냈다.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는 나약한 감정의 마지막 파편까지 모두 털어 내고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었다.
방학 내내 방에만 틀어박혀 울며 지낸 터라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니까 하나같이
낯설기만 했다. 더욱이 새 학기 준비를 동시에 하려고 하니 여간 힘겨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시간에 쫓기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이들도 하나둘씩 돌아오고 썰렁했던 학교가 다시 활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학교 서점은 새 학기를 준비하는 아이들로 연일 북적거렸다.
'그래, 새로 시작하는 거야.'
집에서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서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고 집
생각이 났다. 하지만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4개월을 또 공부에 매달려야 했다.
영어와 심리학, 수학, 화학, 정치학 등 골고루 과목을 선택해 시간표를 짰다.
그리고 체력단련이 필요할 것 같아 스키를 체육과목으로 선택했다.
'힘내자, 김미혜.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잖니. 좀더 냉정해지자.'
나는 내가 결정한 것을 실행에 옳기면서 한 번도 좌절이란 걸 몰랐었다. 내 삶은
내 스스로 충분히 책임질 수 있고 어떤 일이든 마음만 먹으면 내 뜻대로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 넘쳤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 내
뜻대로 만은 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공부하는 것이 힘들고, 날마다 계속되는 시험에 스트레스를 받고, 살찌는 것은
걱정스럽고,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갖고 살아야 할까 고민스럽고 하는 것들이
코앞에 닥쳐 있는 최대의 관심사이자 문제였던 내게, 영희의 죽음은 삶의 또 다른
면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었다.
그때 난 갑자기 어른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 마음과
생각이 자꾸만 침체되어 갔다. 살아온 시간보다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 훨씬 더
많은 나를 위해 좀더 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내가 원하는 일을 얻고 인생에서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는, 아직도 많은
관문을 통과해야 하고 더욱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나가야 한다. 언제 어느 곳에서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치게 될지 모른다.
'김미혜, 이제 시작일 뿐이야. 아직 네가 갈 길은 멀고 멀었어. 넌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 해. 어떤 것도 너를 쓰러뜨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가 되어야 해. 어떤 어려움도 너 혼자 해결하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이민 와서 줄곧 미혜라는 한국 이름을 고집했지만, 나는 그때 나에게 '영원히
강하다' 는 뜻을 가진 '에리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일종의 자기최면이라고나
할까.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에리카 미혜 김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영희를 보낸 지 10년이 넘었다. 그날의 끔찍했던 상황도, 영희의 짐을
챙기러 학교에 온 가족들의 침통한 모습도, 이젠 세월의 힘으로 어느 정도
희석되어 나의 머리 속에 낡은 사진처럼 남아 있다.
콘레에도 동성연애자가
공등학교 시절 심리학이 재미있어서 적성에 맞는 줄 알았는데, 막상 전공을
하고 보니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코넬에서는 물론 미국에서 가장 방대한 수업으로 널리 알려진 심리학 101은
수강 학생 수가 자그마치 1700명이나 됐다.
Mass 교수의 그 강의는 워낙 유명해서 수강생들이 집중적으로 몰리는 관계로
4학년 학생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는데, 나는 심리학 전공 필수과목이므로 어렵지
않게 수강증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강의에 들어가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교수는 한 시간
내내 일방적으로 강의를 하다가 끝냈고, 시험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지선다형이었다. 그렇다고 Mass 교수 자체가 매력적인 것도 아니었다.
"강의가 뭐 이래? 왜 그렇게 인기가 좋은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매번 수업이 끝나면 이렇게 투덜대며 강당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심리학을
전공하는 내게는 어차피 필수과목이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다.
춥고 추운 겨울날, 밤을 새워 공부를 하다가 아침에 따뜻하게 난방이 된
강의실에 들어가 앉으면 우선 몸이 나른해지면서 졸음이 찾아왔다. 수업 시간마다
적어도 몇 분씩은 꼭 졸다가 나와야 했다.
2학기 심리학 전공 시간에는 좀 색다른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코넬
대학의 동성연애자 수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동성여애자가 코넬 대학 전체 학생
가운데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지, 그들이 어떠한 까닭으로 동성연애자가 되었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유태계 학생과 파트너가 되어 우리들의 조사를 지도해 줄
조교를 만나러 갔다.
한참 동안 조사에 대해 토론을 하고 난 다음이었다.
"에리카는 정상이야?"
갑자기 조교의 입에서 나온 질문에 나는 영문도 알지 못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뭐가 정상이냐는 질문이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다시 내
파트너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고, 그도 역시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좀 어이가 없어 조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 여자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조교는 자신도 동성연애자라는 고백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당시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 때문에 그
조교가 동생연애자가 되었다는 자책감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은 태어난 때부터 동성연애자였고, 자신이 동성연애자인 것을 알게 된 것은
20대 초반이라고 했다.
이미 나와 있는 통계자료를 보면 미국 전체 성인 가운데 10%가 동성연애자이고
그 중 1%는 남여 모두와 성관계를 갖는 양성 연애자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놀라운 통계자료를 검증하기 위해 열심히 설문지를 만들고 조사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이미 나와 있던 우리 코넬 대학에도 적용되는 것임을 확인했다.
나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설문조사를 완벽하게 끝내고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한 보고서를 만드는 일이
재미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다분한 심리학을 흥미롭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강의시간 내내 쏟아지는 졸음을 참기 어렵다면 나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리학은 아니야.'
나는 신중하게 전과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삶의 질을 변화시킨 정치학 교실
전공을 바꾸는 문제는 시야를 좀더 폭넓게 갖고 여러 분야를 살펴본 뒤
결정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흥미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미국정치사를 배우면서 정치적인 힘이 사회 전분야에 걸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공부했는데, 내가 알지 못했던 충격적인 사실들을 접할 수 있었다.
시험을 볼 때에도 강의시간에 배운 것을 단순히 암기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미리 여러 주제를 주고 학생들이 그 사안에 대해 충분히 연구할 수 있게 한 후 그
중에서 문제를 출제했다. 객관적인 자료에다 자신의 주관적인 의견을 뒷받침해
논술을 하면 되었다. 광범위하게 자료를 조사하고 그 자료들을 치밀하게 분석해
내어 그럴 듯한 논리를 펴나가는 것이 따지기 좋아하는 내 성격에 딱 맞았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날마다 강의실과 도서관, 기숙사를 뱅뱅 도는 생활이었지만,
공부에 재미가 붙기 시작해서 심적인 갈등은 훨씬 줄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어느 정도 체념을 하자 진정되었다. 그러한 문제는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2학년에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전공을 정치학으로 바꿨는데, 정치학을
전공하는 학생 가운데 소수 민족은 극히 드물었고 동양 학생조차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국 학생은 나 혼자뿐이었다.
일반적으로 한국 학생들은 과학이나 엔지니어링을 전공하는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았고, 문리대 안에서는 경제학 전공자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의과대학원에 가려는 사람들이었고,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유학을 온 학생들은 언어 문제와 졸업 후의 취업을 생각해 엔지리어링
전공자들이 많았다. 부모님들도 대학 4년을 나와서 안정된 직업을 얻을 수 있는
이공계통을 절대적으로 선호하는 입장이었다.
전공을 바꿔 폭넓은 정치학 공부에 들어가자 그동안 가졌던 사회에 대한 나의
가치관에 혼란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적나라한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미국 내의 소수 민족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면 나는 백인 아이들과
외롭게 투쟁을 해야 했다.
"민중들의 정치"라는 강의를 들을 때였다. 여러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며
사는 사회의 갈등과 모순, 그리고 그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 사회적 배경에 대해
학습하는 시간이었다. 담당 교수인 에스먼 교수는 그 방면으로 많은 연구를 한
분이고 특히 동남아 쪽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분이었다.
20여 명의 학생들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앉아 세미나 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는데, 그 수업에서 동양인은 유일하게 나 혼자였고 흑인 여학생이 한 명
끼어 있을 뿐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백인이었다.
토론의 대상이 됐던 나라는 말레이시아, 이스라엘, 미국 등이었다. 말레이시아는
중국인과 말레이시아 원주민 그리고 타민족의 관계가 복잡한 나라로, 중국인들이
들어와 그 나라의 모든 경제권을 쥐면서 정치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역시 계속되는 인종 및 종교 문제로 바람잘 날이 없는 나라였다.
미궁의 문제에 이르자 더욱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영어만을 미국의 언어로 인정하자는 'English Only'라는 운동이 한창 열기를
띠고 있었다. 당연히 미국에서는 영어를 쓰지만 법적으로 영어만을 쓰도록 되어
있지는 않았다. 타민족들이 미국에 돠어 영어를 배우지 않고 자기들끼리 뭉쳐서
살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므로, 그들에게 영어를 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토론거리는 미국에 이민 온 타민족들이 반드시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그리고 영어만이 미국의 완벽한 국가 언어로 인정되어야 하는지의 문제와, 소수
민족들이 자신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아니면 미국 사회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어 자신들의 문화와 풍습을
버리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들이었다.
백인 학생들의 주장은 왜 미국으로 이민 온 타국 사람들은 미국 문화에
흡수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나라 말과 풍습을 지켜 나가며, 미국 내에 이질적인
문화를 형성함으로써 갈등을 야기시키느냐는 것이었다. 영어를 배우지 않고
차이나타운, 코리아타운, 이탈리아타운을 형성해 자기 나라 말로 간판을 만들어
붙이고 동족끼리 모여서 사는 것은, 결국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을 부정하는
것이고 미국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한 학생이 그런 주장을 펴자 이내 모든 아이들이 옳다고 아우성을 치고,
강의실은 금세 미국 내 소수 민족들을 성토하는 장으로 돌변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의 시선은 황색 피부를 가진 나에게로 몰렸다.
"한국사람을 예로 들거나 이탈리아인을 예로 들거나, 아무 상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지금 한 말은 모두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조금만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그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소수 민족들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이 원해서 그런 현상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 사회가 그런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는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조목조목 짚어 가며 반론을 제기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하나 먹더라도 영어를 써야 하는데, 왜 일부러
영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입장이 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면 ' 왜 학교에 가지 않느냐'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이 먹고 사는 것이 해결돼야 공부도 할 수 있는
것이고 학교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당장 먹을 것과 잠자리가 해결되지 않는데
공부하고 학교 다닐 꿈이나 꾸겠습니까?"
내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거기에 질세라 백인 아이들도 갖가지 예를 들면서
신랄하게 비판을 해왔다. 그러면 나는 적진에 혼자 수류탄을 들고 뛰어든
군인처럼 필사적으로 그들의 논리에 맞섰다.
"타운을 형성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비록 고국을 떠나왔지만, 수십
년을 뿌리내리고 살던 그곳의 음식과 풍습을 그리워하고 모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소수 민족들이 미국 사호에 섞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미국 사회에서 '너는 피부색이 다르니까 우리와
어울릴 수 없어. 그러니 저쪽 모퉁이에서 너희들끼리 모여 살아.' 하고 윽박지르며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탈리안이나 유태인들은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 그들은
피부가 하얗기 때문에 즉각적인 거부를 당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동양인들은
피부가 다르다는 이유로 애초부터 거부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함께 어울리지 못하게 높은 벽을 쌓아 놓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English Only'라는 정치적인 운동에 앞장선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인 하야카와라는 일본계 미국인이었다. 그 사람은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차별대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는데, 그는 백인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셈이었다. 결국 그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본인이 앞장서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동양 사람들에게 큰 타격을 안겨 주었다.
나는 백인 아이들의 독선적이 생각과 야비한 언어폭력에 대항해 끝까지 싸웠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던 백인 아이들과의 사이에, 보이진 않지만
결코 허물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 것도 그때였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미국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키워 내는 최고의 명문대학에서,
차세대의 지도자를 꿈꾸는 학생들이 그런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소수 민족들의 앞날이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미국이라는 사회 안에서 어떤 존재인가, 나의 정신을
지배하는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끝없는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곧장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한국에 관련된 책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내
말로만 듣던 대한민국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태어난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좀더 구체적으로 공부해 정신적인 백그라운드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도서관을 샅샅이 뒤지면서 나는 심한 무력감에 빠지고 말았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한국에 관한 책들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일본이나 중국에
간한 책자는 일본어나 중국어로 된 것은 물론이고 영어로 된 것들도 상당량
갖추어져 있었다. 그나마 코리아라고 해서 들춰 보면 그것은 대부분 북한에서
선전용으로 만든 책자뿐이었다. 얼마나 약이 오르고 답답했는지, 가슴이 다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중국과 일본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의 학문적인 갈증을 풀어 준 분은 중국학을 전공한 비비언 슈 교수였다.
침착하고 사려 깊은 여자 교수로, 여느 백인과는 달리 동양의 문제에 대해 매우
객관적이었고 학문적인 중립을 잃지 않은 분이었다.
나는 비비언 슈 교수를 지도 교수로 모시고, 대학생활 내내 내 행동의 모델로
삼았다. 생활태도부터 학문하는 자세까지 할 수 있는 한 그분을 본받고 싶어
열심히 쫓아다녔다. 아무래도 여자 교수들의 모습이 좀더 가깝게 다가왔는데,
그것은 나도 열심히 공부하면 그분들처럼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분은 내가 갖고 있는 많은 의문을 풀어 주었다. 그 영향으로 나의 관심은
점점 동양 쪽으로 기울었다. 그때 중국의 혁명사와 동아시아의 세력 형성에 관해
깊이 있는 공부를 함은 물론, 중국의 철학. 역사. 종교. 정치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공부를 했다.
내가 중국과 일본을 공부한 것은 단지 그들 나라를 알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나라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동양의 뿌리를 알 수 있을 것이고, 그 문화권
안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공부를 하면서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중국을 방문해 광활할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중국에 가게 되면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을
찾아가 그들을 어떻게 이민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미국에서 소수 민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들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1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아온 나는 대학시절 정치학과 교실에서야 비소로
미국인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하 전용 도서실
전공을 정치학으로 바꾼 이후 나는 동양학 관련서들로 꽉 들어찬 대학원
도서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비록 침침하고 어두컴컴한 지하 도서실이었지만,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곳에 있으면 집에
있는 듯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원하는 책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기도 했지만 지하실에 있는 대학원 도서실이
좋은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코넬은 흐린 날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어쩌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학생들은 모두들 미친 듯이 날뛰며 밖으로 달려나간다. 평소
햇빛에 굶주려 있다가 해가 반짝 나오면 모두들 잔디밭에 드러누워 해바라기처럼
햇빛을 즐기는 것이다. 햇살의 유혹을 뿌리치고 도서관에 앉아 있어도, 밖에서
들려 오는 아우성 소시에 마음은 어느새 콩밭에 나가 있어 공부가 될 리 없다.
나 역시 캘리포니아의 화창한 날씨가 그리워 그 유혹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지하실에 있는 대학원 도서실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지하실에 숨어
있으면 날씨가 흐리든 맑든 마음의 동요 없이 밤낮 가리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옆자리에 와서 귀찮게 하거나 똑같은 책을 펼쳐 놓고 신경을
거스르는 사람도 없으니, 혼자 마음껏 책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 시절은 내가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독서를 할 수 있었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고 시키는 공부가 아니라 내가 알고 싶은 것들을 독서를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터득해 가는 공부였다. 책을 읽는 데 투자한 시간 이상의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읽었던 책 중에 "잊을 수 없는 명령"이라는 일본 책이 있었다. 그
책은 일본 역사 강의를 들으면서 만난 책이었다.
일본 내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고 있는 '이노우에'들의 삶을 그린 그 책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매우 평등한 삶을 살았던 그들이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얼마나
천덕꾸러기로 살아가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그러나 그런 사회 속에서도 자기
민족의 철학과 도덕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들이 눈물겹도록 감동적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잊지 말아라. 어떠한 핍박과 어려움이 닥쳐도 떳떳하게
살아남아야 한다.'
죽음을 맞는 이노우에들은 자손들에게 그 말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잊을 수
없는 명령이라는 것이었다.
사회적인 차별 때문에 이노우에이기를 포기하고 일본 본토 사회로 뛰어들었던
한 이노우에가, 일본 사회에서 버림을 당하고 다시 이노우에 생활로 돌아오면서
자기 조상들이 영원히 지켜야 한다고 했던 그 계명, 영원히 이노우에임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미국 내에서 항상 차별의 대상이 되는 나와 같은 동양 사람들, 특히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면 절대로 미국 땅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누구이건, 다른 사람들이 내가 누구라고 말하건, 나는 내 자신을 강하다고
생각하고, 내 자신을 조경하고, 내가 세상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그
책은 내게 심어 주었다.
"잊을 수 없는 명령"은 미국에서의 삶이 어떤 삶이고,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투쟁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인종차별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이 나라에서 나는 내
나름대로 뿌리를 탄탄히 유지하며 미래를 개척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대학원 지하 도서실을 나의 전용 도서실로 정하고 수업만 끝나면 그리로
달려가 끝없는 나와의 투쟁을 계속했다.
누가 내게 대학 4년 동안 배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 가장 큰 배움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이비 리그 공산당
대학시절 공부 못지 않게 중요하게 생각하여 열심히 쫓아다닌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데모 모임이었다.
나는 공부만 잘하는 학생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정치학 교실에서 배운
이론과는 많이 다른 현실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그때만 해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차별은 미국 내에서도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우리 데모꾼들은 그 문제도 건드렸다. 그 곳에 거주하는 아주 극소수의
백인들만을 위해 법률이 개정되고 사회체계가 구성되었으니, 무수히 많은 흑인
원주민들의 핍박과 불평등은 안 봐도 뻔한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 코넬 대학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진출에 있는 백인 기업에
자금을 투자하여 그 이익금을 받고 있었다. 우리들은 학교의 자금이 그곳
원주민들을 핍박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그 투자금을
전액 회수하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때까지 데모를 벌였다. 그 결과 우리 코넬 대학이
아이비 리그 대학 가운데 최초로 남아프리카에 투자한 돈을 회수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 한 가지 내가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시위가 있었는데, 그것은 코넬 대학 내게
한국어 강좌를 개설하기 위한 시위였다. 한국 학생들이 주축이 됐기 때문에
소규모였지만 우리는 끈질기게 매달렸다.
코넬의 외국어 강좌는 무려 80여 가지에 이른다. 그 중에는 이미 없어진 국가의
언어도 있는데, 한 학년에 한국인 학생 수가 50명이 넘는 코넬에 한국어 강좌가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코넬에 재학중인 모든 한국인 학생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더 이상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리들은 체계적으로 조직을 편성해서 시위를 벌이는 한편 학교 측과 교육
당국에 진정서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학교 측과 학생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
특히 한국인 학생 사이에서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 격렬한 토의가 벌어지기도
했다.
중국어나 일본어 수업에 들어가 보면 중국인 학생이나 일본인 학생보다는 미국
학생들이 훨씬 많다. 백인 학생들이 중국이나 일본을 알기 위해 그 나라 말을
공부하는 것이다. 한국어 개설을 반대하는 학생들은 왜 한국이 그런 대상도 못
되면서 큰소리를 치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미국 학생들이 중국이나 일본을 배우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공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욱 비참해지는 것이었다. 어째서
내 나라 대한민국은 외국 사람들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만큼 관심 밖의
나라여야 하는가.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안으로 한국 학생들의 의견 차이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총장을 찾아가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총장의 반응도 역시 냉담할 뿐이었다. 결국 내가 졸업하던 1987년까지도
한국어 강좌는 개설되지 않았다.
그밖에도 나는 정치에 의해 역사가 왜곡된 현실과 사회 부조리에 대해 비판을
하며 데모를 하기도 했다.
방학 때면 집으로 돌아가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점과 현상에 대해 경준이와 열띤
토론을 벌이고는 했다.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그동안 배운 것들을 소리 높여
이야기하며 사회를 비판하는 일도 잦았다. 그때 내 눈엔 왜 그렇게 뜯어고쳐야 할
것들만 보이는지.
처음에는 자식 입에서 정의로움으로 가득 찬 진실의 항변이 나오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부모님들도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내 목소리에 질겁을 했다.
"너 공부하라고 대학 보내니까 혹시 이상한 짓 하는 거 아냐?"
"엄마, 이것도 다 공부라구요."
"세상이 어디 그렇게 원리원칙대로만 된다더냐? 세상에는 너 말고 똑똑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너는 제 공부만 충실히 하면 돼."
"왜 정치를 정치인들에게만 맡기느냐구요? 그건 안 될 소리예요. 우리 모두가
그들을 감시해야 해요. 그리고 미국에 살고 있는 소수 민족들도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워야 한다구요. 아니 뼈빠지게 일해 똑같이 세금 내고 사는데 왜
바보처럼 당하고 사냐구요. 엄마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의 양미간 골짜기가 더욱 깊어졌다.
"너, 엄마가 캘리포니아에 있으랬더니 아이비 리그에 가서 공산당 된 거
아니니? 얘, 아이비 리그에선 공산당 되기 십상이라더라."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학문을 할 것이지 돈 버는 일과는 상관도 없는 정치학을
공부하다가 사람만 거칠어진다고 어머니는 한걱정을 했다.
하지만 나는 코넬에서 정치학과 국제관계를 전공하면서 참으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끊임없이 보고 배우고 느끼는 혼돈기를 거치면서 사회의 이면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그리고 막연하던 생각들이 질서를 잡으며 삶과 사회에 대한
철학도 생겼다.
물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풋내기 정치학도의 눈이 얼마나
이상에 치우쳐 있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됐지만.
그 누나에 그 동생
항상 나의 오빠 노릇을 하는 큰동생 경준이는 남다른 성격의 소유자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든 이루어 내고야 마는 지독하리만큼 철저한 인간이다. 그는
공부를 해도, 집안일을 해도, 교회일을 해도, 친구를 사귈 때도 자신의 성격처럼
철저하다.
경준이는 내가 수석으로 졸업한 Charter Oak High School을 역시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역시 코넬로 와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경준이가 내 뒤를 계속
쫓아온 것을 보면 내가 꽤 괜찮은 누나였던 것 같다.(정확한 것은 경준이에게
물어 봐야 하겠지만)
경준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의 일이었다.
수석 졸업자가 졸업생을 대표해 답사를 해야 하므로, 경준이가 전교생과
학부모들이 있는 가운데서 연설을 했다. 그런데 그 연설이 걸작이었다.
한국에서는 5월 8일 어버이날에 부르는 "어머니 은혜"라는 노래가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성심국민 학교를 다닐 때도 5월 8일이
되면 어머니들을 학교에 모셔와서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고 "어머니 은혜"라는
노래를 불러 드린 기억이 난다.
그런데 경준이는 어디서 알아 왔는지, 우리를 이렇게 훌륭한 청년으로 키워 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자는 취지의 연설을 하면서 그 감동적인 노래를 영역하여
시로 낭송을 했다. 영역을 얼마나 잘했던지 한국말로 노래를 들을 대의 그 감동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님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
내가 알기로 미국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를 이토록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표현한 노래가 없다. 한번도 그렇게 절절한 사연을 담은 감사의 말을
들어 보지 못한 미국 어머니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게다가 있는 대로
감정을 잡아 낭송한 김경준의 시에 완전히 감동되어 졸업식장은 순식간에
눈물바다로 변해 버렸다.
한국에서도 그 노래를 부를 때면 가사와 분위기에 젖어들어 눈물을 흘렸었는데,
미국에서 그것도 뜻하지 않은 날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그 노래를 듣자 우리
가족들도 모두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백인들만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코리언 아메리칸이 1등으로 졸업하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학부모들과 학생들을 한편의 시로
감동시켜 졸업식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으니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일로
경준이는 LA타임스에까지 실리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내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아니면 학교가 마음에 들었는지, 경준이는 나를 따라
코넬로 왔다. 그리고 늘 나를 감시하며 오빠처럼 행동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어느 주일 날이었다. 경준이 역시 교회활동을 열심히 했으므로 주일은 빠짐없이
나와 같이 교회에 나갔다. 그날도 그랬다.
내가 교회 안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어떤 아이가 달려와 경준이가 싸움을 한다는 것이었다. 설마 하고 나가 보았는데
경준이가 2학년 남자애를 넙치가 되도록 패주고 있었다.
하나님 맙소사! 나는 얼른 달려들어 싸움을 말렸다. 말이 싸움이지 2학년
아이가 일방적으로 경준이에게 매를 맞고 있었다.
"경준아,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누나는 저리 가 있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말로 해. 왜 사람을 때리니?"
"말로 해선 안 될 일이니까 그렇지. 실컷 패주어야 내 속이 풀릴 것
같다구. 누나는 벌써 다 잊었어?"
내가 2학년 때의 일이었다. 선배들과 함께 어울려 파티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 날 무척 따르던 1학년 남자애가 술이 잔뜩 취해 와 있었다. 내가
다른 아이와 춤을 추고 있는데 그애가 다가오더니 나와 춤을 추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혹시 싸움이 날까 두려워 내 파트너를 다른 쪽으로 보내고 그
아이와 춤을 추었다.
그런데 키가 꺽다리 같이 큰 그애가 자그마한 나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다짜고짜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는 데서 봉변을 당한 나는
구둣발로 그애를 마구 걷어찼다. 그리고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금세 사람들이 달려오고 그애는 선배들에게
끌려나갔다. 파티를 다 망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너무 분하고 속이 상해
큰소리로 또 울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내 한 몸 스스로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 나를 더욱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 약하고 힘없는 여자라는 것이
그날처럼 약이 오른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방학 때 집에 가서 식구들한테 얘기해 주었는데,
경준이가 몹시 화를 냈다.
"나쁜 자식. 그래서 그 자식을 그냥 뒀어?"
"그냥 두긴, 선배들이 혼내 줬지. 나도 태권도를 배우든지 해야지 이거 어디
서러워서 살겠니. 후배 녀석까지 조그맣다고 나를 만만하게 보다니. 내가 얼마나
분통이 터졌는지 넌 상상도 못할 거야?"
"그 자식, 내 손에 걸리기만 해봐. 가만 두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경준이는 정말로 그 일을 잊지 않고 가슴에 묻어두었다가 코넬에 온 후
나 몰래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아냈다. 그리고 교회에서 그 아이를 발견하자 교회
마당으로 끌고 나가 다짜고짜 주먹질을 한 것이다.
사람들이 겨우 뜯어말려 경준이를 기숙사로 보냈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
경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준아, 너 어떻게 그애를 알아냈니? 그렇게까지 할 건 없었잖니?"
"내가 누나를 보호해 주지 못해서 그런 거야. 더 패주었어야 속이 풀릴 텐데.
내 책임이야. 하나밖에 없는 누나를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돼?"
경준이는 울고 있었다.
"세상에. 김경준, 너는 그때 코넬에 있지도 않았어. 너는 캘리포니아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구."
경준이의 모습은 영낙없이 여동생을 보살피는 오빠의 모습이었다.
'경준아, 너 설마 그애 때려 주려고 코넬에 온 건 아니겠지?'
경준이는 공부도 물론 잘했지만 리더십이 퍽 강한 아이였다. 학교 일과 단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했다.
그는 특히 동양 학생들을 위한 일에 많은 관심을 쏟았는데, 그중에서도
동양에서도 동양 학생들을 따로 모아 치르는 졸업식은 그의 작품이었다. 동양
학생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이나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일, 학내 문제를
토론하는 일 등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데모에서도 늘 앞장섰다. 우리 집안에
나보다 더 진보적인 공산당이 출연한 것이다.
그 때문에 날마다 공산당이라고 혼나던 나는 뒷전으로 밀리고 경준이가
어머니의 새로운 근심거리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래도 경준이는 남자라는 이유로
허용되는 것들이 많았고, 상당 부분 눈 감아 주는 것들도 있었다.
경준이가 3학년에 올라갔을 때 나는 코넬을 졸업하고 UCLA에 와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경준이한데서 전화가 걸려왔다.
"누나, 나 학생회장에 출마했어."
"그래, 너다운 일이다."
경준이는 워낙 학교 일에 적극적이었으므로 나는 그가 학생회장에 출마하지
않았다고 말했어야 놀랐을 것이다.
"며칠 동안 선거유세를 했어. 유세장에서 사람들하고 하도 악수를 많이 해서
손이 다 얼얼해. 장차 대통령 할려고 그랬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너 농담하는 걸 보니 자신 있나 보구나."
"글쎄, 모르지. 너무 힘들어. 왜 고생을 사서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시작한 거니까 꼭 당선되도록 잘해."
"걱정 마. 그런데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또 걱정하실 테니까."
그리고 며칠 후 당당한 목소리의 경준이 전화를 다시 받았다.
그후 경준이는 총학교회장(교수와 이사진까지 포함되어 있는 단체)에까지
선출돼 코넬의 총장님과 함께 학교 PR을 다니는 등 1년 동안 모든 코넬인을
대표해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한국 입양아와 사랑의 학교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 Ithaca. 그곳에 자리잡은 코넬에서 나는
한국사람만 만나면 너무나 반가워 금방 친구가 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가깝게 지내던 선배로부터 한국에서 입양되어 온
아이들이 이타카에 많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아니 이런 시골 구석에까지 한국 애들이 입양되어 오다니.'
한편으로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마음 한 구석이 썰렁해져 왔다.
그때만 해도 한국은 고아 수출 1위라는 불명예스런 꼬리표를 달고 있을 때였다.
전세계에서 해외에 어린애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 한국.
아이들이 미국으로 입양될 때 부모를 잘 만나면 교육도 잘 받을 수 있고
인간적인 사랑도 받을 수 있겠지만, 부모를 잘못 만나면 학대를 받기도 하고 별별
고통을 당하면서 살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타카는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이기 때문에 교육 수준도 높고 환경도 매우 좋았다.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인들을 본받고 싶은 면들이 별로 많지 않았지만, 남의
나라 아이들을 데려다 잘 키우는 그 모습만큼은 내 마음에 아픈 감동을 남겨
주었다.
한국사람들은 '씨'를 따지기를 좋아해서 근본을 모르는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는
것을 몹시 꺼린다. 그것 때문에 한국의 고아들을 남의 나라도 보내는 비극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나는 수소문을 해서 한국 아이들을 입양한 가정을 찾아냈다. 예닐곱 가정에서
한국 애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주로 한 집에 2__3명 정도였다. 한 아이만 데려다
키우면 외로울까봐 취한 세심한 배려였다.
코넬의 선배들이 이런 한국의 입양아들과 관계를 맺고 약간의 교분을 다지고
있었지만, 한국말을 가르친다거나 하는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친
학교에 한국에 강좌를 개설하자는 주장이 실패의 쓴맛을 보았던 터라, 나는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모국어를 가르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그들 양부모의 반응이 어떨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양육권을 주장하며 아이들과의 접촉조차도 꺼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첫번째 입양 가정을 찾아가
그들 부모를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한국을 원망하게 되었다.
"아주 좋은 일이군요. 아이들을 위해서도 모국이 어떤 곳이라는 것쯤은 우리도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그런 생각에 감동을 받은 나는 한편으로 이렇게 많은 어린아이들을 남의
땅에 내팽개친 나의 조국 한국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국사람들이 강조하는
'씨'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도 솟구쳤다.
의외로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혼자서는 그들을 교육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냄 것이 학교 안의 한국인 교회에다가 아예 '학교'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을 교회서는 두말 없이 허락해 주었고, 다른 학생들도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일에 스스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욕심을 내어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이 예쁜 동요도 가르쳤다 한국
음식도 만들어 주며 그들의 고향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음식 만드는 일이
너무 서툴러서 그렇게 자주 해 주지는 못했다.
학교를 운영하면서 나는 그들 양부모에게서 또 한번 감동을 받았다. 어쩌면
그렇게 열성적으로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주는지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웬만한
일이 아니면 아이들을 결석시키거나 지각시키는 일이 없었다. 무슨 사정이 생기면
반드시 사전에 아이를 데려다주지 못하겠다는 연락을 취했다. 정규 학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뭐 대단한 교육을 시켜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양부모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아니었다면 '사랑이 학교'는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 아이들을 대할 때는 안쓰러운 마음 대문에 제대로 시선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아이들도 그런 낯선 감정을 느꼈는지 말을 시켜도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감정이
격해져서 교실 밖으로 몇 번씩이나 나갔다 들어와야 했다
그들의 작은 몸짓이나 표정에도 가슴이 저려 왔고, 자꾸만 불쌍한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차츰 냉정을 되찾았다. 그때부터 아이들과 나
사이에 정말 올바른 관계가 어떤 것이라는 기준이 희미하게나마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맹목적인 동정심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아끼고
보살피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인식시켜 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후
아이들은 자신들과 외모가 비슷한 우리들에게 아주 빠르게 적응해 나가는 듯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같은 또래의 문화가 그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생각해서 처음에는 일종의 놀이방 형식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놀이를 통해 우선 아이들끼리 얼굴을 익히게 하고, 역시 놀이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열고 학습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아이들 가운데 유난히 내 마음을 끌었던 아이가 있었는데, 세라라는 미국
이름을 갖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눈동자가 머루처럼 아주 새까만 예쁜 아이였다.
세라는 내가 제일 먼저 자기를 알아주기를 기대했다. 만약 내가 다른 아이부터
아는 체를 하면 그날을 하루 종일 말도 하지 않고 토라져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다른 아이들이 있는 앞에서 세라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일 수가 없었다. 세라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보이면 또 다른 아이들이 소외감을 느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신 집으로 돌아간 다음에 전화를 따로 해서 다독거려 주고는 했다.
그러면 다음날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표정으로 환하게 나를 맞이하고는 했다.
나는 코넬에 있는 동안 열심히 '사랑의 학교'를 이끌어 나갔다.
대학을 졸업할 시기가 다가오자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졸업하면
아이들과의 교류가 끊어질 것 같아서였다. 물론 정이 많이 들어 헤어지기
섭섭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이들의 앞날이 걱정이 되었다. 우리가 졸업을 해도
'사랑의 학교'는 계속 운영이 되겠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지속적으로 자기들에게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아이들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며칠
동안 끙끙거리며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의형제 맺어주기였다.
"우리, 아이들하고 의형제를 맺으면 어떨까?"
다른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다른
학생들도 이 뜻밖의 제안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몇몇 학생들이 내
제안에 동의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동생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웬만하면 서로 좋아하는 학생과 아이들을 맺어졌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인연을 맺도록 하는 것. 특별히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이성보다 동성의 형제가 낫겠다 싶어서였다.
나는 세라와 테니라는 두 여동생을 맞이했는데 지금까지고 서로 연락을 하고
있다. 물론 나는 LA에 있고 그 아이들은 아직도 Ithaca에 살고 있어서 자주 만날
수가 없지만 말이다.
나는 그 아이들이 아주 유창하게 한국말을 구사하기를, 또 한국 남자를 만나
결혼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외모 때문에 생기는 주위 사람들과의
이질감 정도는 능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사랑의
학교를 세웠던 보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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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일을 위해 기꺼이 불편을 참아 주는 남편
나는 늘 그런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갖고 산다.
저녁을 남편 혼자서 샌드위치로 때워도,
새벽까지 일하다 내가 파김치가 되어 들어가도
그는 항상 자신보다는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었다.
의사와는 절대 결혼하지 마라
지금까지 결코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세월 동안 내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방황할 때
길을 가르쳐 주었고 삶의 지혜를 갖도록 도와주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미세스
오머트, 코넬의 비비언 슈 교슈, 그리고 UCLA의 그레이엄 교수... 그분들은
모두 내 삶에 있어 등불 같은 존재였다.
아, 그리고 외할아버지.
공항에서 친척들과 그 요란스러운 진풍경을 연출하며 한국을 떠난 후, 나는
가금씩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친가 쪽은 우리 가족이 패사디나에 정착한 지
2년만에 미국으로 모두 이민을 왔지만, 외가 쪽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천식을
앓고 있었던 외할아버지는 겨울 동안 따스한 캘리포니아에 오서 요양을 하곤
했다. 외할아버지만 오면 나는 마치 정에 굶주린 사람처럼 할아버지의 품에
파고들었다.
"할아버지도 이민 오시면 안 돼요?"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될 무렵이면 나는 외할아버지와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이렇게 보채고는 했다. 그러다가 그 소망이 이루어진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두 분의 이모만 남겨두고 외가 쪽도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온 것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나의 사촌들은 한국말을 못했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불행이었다. 어릴 때 외할아버지를 통해
내가 보았던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런 세상을 사촌들은 알지 못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사촌들과의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했다. 이민 오기 전에
공부를 좀 했는지, 아니면 젊은 시절에 배웠던 것을 그때까지도 잊지 않았는지,
생활하는데는 별로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이곳에서도 할아버지는 내가 학교가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 녀석은 어째서 맨날 국민학생 같아?"
"할아버지, 전 절대로 할아버지보다 키가 안 클 거예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절
내려다보시면 얼마나 든든한데요."
그런 외할아버지가 몸에 이상을 느꼈는지 하루는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했다.
평소 건강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신경을 썼던 분이라 아무도 할아버지의 건강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이가 있으니 종합진단을 받아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병원으로 모셨다. 며칠 후 진단 결과가 나왔는데 그저 위와 장의 연결 부분이
막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의 얼굴은 노랗게 변색되어 갔고, 외관상으로도 별로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받게 될 수술이 어떤 것이지, 또 얼마만큼 위험한
것인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수술을 앞둔 바로 전날이었다.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캔서일지도 모르겠군요."
가족들을 불러모아 놓고 의사는 너무나 엄청난 말을 꺼냈다.
"캔서라면, 암이란 말입니까?"
우린 모두 깜짝 놀랐다.
"상태는 어느 정도입니까?"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어디에 종양이 생긴 것입니까?"
전혀 뜻밖의 말에 가족들은 정신없이 의사를 괴롭혔다.
"췌장입니다. 수술을 해봐야 알겠지만, 수술에 들어가서 시간이 오래 걸리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금방 나오면 노인께서는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의사가 장담하지 못하면 암의 진행이 이미 말기에 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두들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날이었다. 수술실로 들어간 의사는 불과 한 시간도 안 돼서 밖으로 나왔다.
"이미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암이 퍼져 있었습니다. 우리도 깜짝
놀랐어요. 이 지경이 되도록 여태까지 어떻게 견디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자식들의 절망과는 달리 마취에서 깨어난 할아버지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할아버지가 오래 사실 수 없다는 생각에 자주 할아버지를 찾아가 말동무가
되어 드렸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나는 앞으로 닥치게
될 이별에 누구보다도 가슴이 아팠다.
병상에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는 어느 날 나의 손을 꼭 잡으며 결혼 얘기를
꺼냈다.
"우리 미혜는 절대로 의사하구 결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기 있으면서
보니까 남편감으로는 제로야 제로."
"왜요? 할아버지?"
"가정에 충실할 수가 없어, 의사들은."
나는 병세가 어떤지 모르고 있는 할아버지께 솔직히 모든 것을 얘기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병이 낫질 않는 게야? 수술까지 했는데...."
할아버지는 차츰 고통을 호소했고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져 갔다. 나중에는
음식물도 넘기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튜브를 식도에 넣는 수술을
포함해 두 번의 수술을 더 받았다. 수술을 받은 후 3일 동안이나 출혈이 멈추지
않아 출혈을 멎게 하는 수술을 다시 받았는데, 그후 할아버지는 그만
코마(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닷새 만에 운명하셨다.
끝내 할아버지는 당신의 죽음과 관련해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돌아가시고 만 것이다. 그대 할아버지는 일흔 아홉이었다.
"딱 5년만 더 살다 죽으면 좋겠는데... 우리 미혜가 결혼해 손주를 한번 안나
보구....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못내 아쉬운 것이 있는데, 내 남편감을 할아버지께
생전에 보여 드리지 못한 것이다. 물론 만나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때는 결혼이나
미래를 예상할 수가 없었다. 또한 돌아가시지 전에 남편감을 소개해 드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결혼이라는 인생의 가장 중대한 사안을 두고 섣부른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애를 쓰기는 했다. 교회 목사님의 주선으로 선도 보았고, 아는
친척들로부터 소개도 받아 보았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말도
잘하고 한국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남자를 원했지만 어느 누구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그러니 할아버지께 '이 사람입니다.'하고 인사를 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할아버지가 손녀 사위를 보고 싶어 한다 해도 그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몇 년 후 결혼을 했는데, 나의 남편은 공교롭게도
할아버지가 남편감으로 낙제라던 의사였다.
그렇게 시집 가고 싶었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달쯤 지나 사촌 동생의 결혼식이 있었다. 그날
부모님은 친구분 댁에도 결혼식이 있어서 그곳에 들렀다가 사촌의 결혼식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사촌의 결혼식장에 미리 가 일을 돕겠다는 나를 부모님은 함께
들렀다 가자며 한사코 성화를 부렸다.
결혼식에 갈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잠시 할아버지 생각으로 기분이
우울해졌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무척 섭섭해하셨을 테지. 동생을 먼저 시집
보낸다구.'
할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도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오히려 내 걱정을 했다.
"미혜야, 너 어째 얼굴이 그러니? 표정을 좀 밝게 지어봐."
처음에는 몰랐는데 차를 타고 가면서 보니 어머니나 아버지의 차림이 여간
정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얼굴에는 뜻 모를 미소가 내내 떠나지 않았다.
그동안 많이 힘들어했는데 이제 조금 진정이 되었구나 싶어 다행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런데 식장에 도착해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남자를 소개시키겠다는 어른들의 지나친 배려가 있었던 듯, 나는
남의 결혼식장 피로연 자리에서 얼떨결에 남자를 소개받는 쑥스러운 일을 당하고
말았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감쪽같이 속이고 나를 그곳으로 데려간 부모님이
야속할 뿐이었다. 내가 어릴 땐 결혼하지 않아도 되니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고
하던 아버지도 딸이 결혼할 나이가 되니까 180도 달라졌다. 어떻게든 한 남자에게
딸을 넘겨줘야 짐 하나를 벗어 벌릴 수 있다는 듯 결혼을 하라고 성화였다.
'아빠, 아니에요. 저는 할 일이 태산같고 갈 길이 아직도 멀어요. 결혼은 정말
안중에도 없어요. 한 남자에게 제 인생을 맞기며 살진 않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살아 게신 동안에는 어떻게든 결혼을 해서 가시는 길을 좀 편안하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두 차례 맞선 제의가
들어왔지만 나는 그때마다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상견례가 으레 그렇듯이 좋은 말들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십여 분이 지났을
때, 키가 멀쑥하게 큰 남자가 우리 테이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리처드 안입니다."
우리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에 낮은 그는 그때부터 아무 말도 없었다.
음식이 나오면 먹고 차가 나오면 마시고 물어보면 대답하고, 그게 다였다.
"미혜야, 우리 먼저 결혼식장에 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놀다 오너라.'
시계를 보면서 사촌 동생의 결혼식 때문에 엉덩이를 들썩였던 사람은 바로 난데,
그런 나만 빼놓고 부모님은 훌쩍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래도 나는 사촌의
결혼식에 꼭 가야 했다.
리처드 안, 직업은 의사. 첫인상은 별로 나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가정적이지 못할 거라고 충고해 주었던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어서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의 가족들이 둘러앉은 자리에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 있는 것도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면서도 힐끔힐끔 나를 관찰하는
눈길이 어색해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나마 사촌의 결혼식이 나를 살렸다.
몇 마디 더 나누다가 나는 늦었다고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빠져 나왔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있던 그는 배웅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전화번호조차
물어 오지 않았다. 나는 그 남자가 기본적인 예의조차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했다.
"어, 이것 봐라. 전화번호도 안 물어봐? 김미혜 면전에서 딱지를 놔?"
자존심 상하는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돌아서려는데 그때 그가 어색하게
전화번호를 물어 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식장에 도착해 보니 결혼식이 막 끝난 후였다. 이모들은 이번엔 꼭 부케를 받아
제발 시집 좀 가라고 성화였다. 한국에서는 신부 친국 중에서 미리 부케를 받을
사람을 정해 놓고 그 사람이 혼자 나가 신부가 던지는 부케를 받지만, 미국에는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미혼 여성에게 똑같이 기회가 주어진다.
극성스러운 이모들에게 떠밀려 나도 앞으로 나갔다. 가족들의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서라도 부케를 잡아야지 안 그러면 며칠 또 시달릴 판이었다.
나이가 좀 든 여자들은 모두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으므로 부케를 잡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드디어 공중으로 솟아오른 꽃다발이 여자들을 향해 날아왔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뛰어올랐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분명 손에 쥐긴 쥐었는데 옆에 있던
사람과 함께 움켜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내 눈앞에 무시무시한 이모의 얼굴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부케를 힘차게 낚아채 버렸다.
리처드를 만나고 난 후 무의식 속에 결혼이라는 것이 자리잡은 탓일까. 어쨌든
부케는 내 손에 들려 있었고 나는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축하를 받아야 했다.
'김미혜, 너 그렇게 시집 가고 싶었니?'
'아니야, 이건 순전히 잔소리 심한 이모들 때문이라구, 내가 언제 시집 가고
싶댔어?'
'그래도 넌 한 번도 이렇게 적극적이지 않았잖아. 이모들은 순전히 핑계일
뿐이라구. 잘 생각해 봐.'
마음속에서는 두 개의 상반된 감정이 계속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나마 마주앉아
있는 동안 내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 남자를 생각하며 그랬을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나는 의사는 안 된다는 할아버지의 충고를 어기고 그날 어색한 첫
만남을 나누었던 리처드 안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다. 순전히 그날 받은 부케
덕분에.
그를 처음 만난 날 받은 부케인지라 몇 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우리들의
방에 그 부케를 정성스레 모셔놓았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가끔씩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김미혜. 너 그렇게 시집 가고 싶었니? 그 남자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세상에서 가장 멋없는 남자
겨우겨우 내 전화번호를 물어 온 만큼이나 한참 뜸을 들여 첫번째 데이트
신청이 왔다. 병원 일을 끝내고 나의 아파트로 데리러 오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일주일 후에나.
약속한 날, 나는 미리 외출할 준비를 모두 끝내고 기다렸는데 약속 시간에서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었다. 배도 고프고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려는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답, '환자 때문에'였다. 평소 같았으면 30분
정도 기다리다 화를 참지 못하고 혼자 어디로 나가 버렸을 텐데, 그날은 기다리는
것이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모를 일이었다.
두 시간 반이나 늦게 나타나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첫번째 데이트에 시간
약속을 못지키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으면 미안한 생각에 잘 보이려는 노력 정도는
할 만도 한데, 그는 맹숭맹숭 밥만 먹더니 공부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내 아파트에 나를 떨구어 놓고 가버렸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기까지 한 시간 반밖에 안 걸렸다. 세상에, 기록에 남을 정도로
짧은 데이트였다.
난생 처음 당해 보는 푸대접에 당황스러웠다. 쫓아다니는 남자들 모두 제껴
놓고 그에게 먼저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그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남자는
자기 마음대로였다.
'그래, 어디 두고 보자.'
어쨌든 나와 리처드는 그렇게 멋없이 만나기 시작했다.
나보다 한 살 위인 리처드 안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합법적인
가족 이민으로는 처음일 정도로 그 집안은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다섯 형제 중 셋이 의사였다.
리처드를 만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그가 우리말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워낙 한국인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말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고 했다. 다섯 형제 중인 막내인 그는 바로 위의 형과 나이 차이가 10여
년이나 나는데, 그 덕택에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고 나이가 들어서도 어린애
취급을 받았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텍사스 의과 대학원을 나왔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UCLA 신경내과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고 있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데이트를 했지만 만난 지 1년이 지나도록 양쪽 모두 결혼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더구나 리처드 가족들은 귀엽고 사람스런
막내를 좀더 곁에 두고 싶어했기 때문에 결혼을 서두르기는 커녕 늦으면 늦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급한 쪽은 우리 부모님이었다. 나이 많은 여자가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고 한 남자를 오래 만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미혜야, 너 도대체 리처드하고 결혼할 거니, 안 할 거니? 리차드와 결혼 얘기
안 했니?"
"아니요, 그 사람 아무 말도 안 해요."
"그만둬라, 그만둬. 무슨 남자가 그렇게 추진력이 없니? 세상에 너 같은 신부감
구하기가 어디 쉬운 줄 아니? 그나저나 너는 리처드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
거니?"
사실 그때 내 마음속에는 이미 리처드가 자리잡고 있었다. 반드시 한국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고, 그렇다면 그 남자가 리처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남녀란 선을 분명하게 그어 놓고 만나는 게 좋아. 그렇게 오래 만났는데
결혼하자는 얘기를 안 했다니 이상하구나. 너 괜히 결혼 할 마음도 없는 사람과
계속 만나다가 좋은 자리 다 놓치겠다."
"엄마, 그렇다고 내가 먼저 얘기할 수는 없잖아요."
이때만큼 리처드가 야속했던 적이 없었다.
'이 김미혜를 놓친다면 그건 리처드 당신 일생에 가장 큰 실수예요.'
하지만 머리 속에서만 맴돈 내 생각이었다.
리처드, 우리 결혼할래요?
대학에서도 또 대학원에서도, 선배들을 잘 따르고 무슨 일이든지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성격 때문에 주변에서 나를 쫓아다니는 남자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별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면서 점잖게 사양했다.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괜찮은 남자들이었지만, 친구나
선배에서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는 것이 영 어색했다.
그런 내가 리처드를 소개받고 계속적으로 만난다는 소문이 돌자 대학원
친구들은 콧대 높은 김미혜가 웬일이냐며 모두 놀란 표정들이었다.
어머니의 성화는 하루가 다르게 그 강도를 높여 갔다. 교회를 비롯해서 어머니
친구들이 중매를 서겠다고 나서는 곳이 많았는데, 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얘, 미혜야. 교회 집사님이 괜찮은 신랑감 소개하고 싶다더라."
"어마도 참. 리처드 만나면서 어떻게 또 선을 봐요?"
"미혜야, 내 얘기가 바로 그거다. 왜들 빨리 결정을 안 내리는 거니? 아무런
결정 없이 오랫동안 만나기만 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야. 너는 나이도 있으니
대학생들처럼 그냥 친구로 사귀는 것은 안 돼.너희들은 데이트하면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니?"
"엄마, 리처드하고 나는 마음 편하게 앉아서 얘기하기도 쉽지 않아요. 앉아
있다가 삐삐가 울리면 병원으로 바로 달려가야 해요. 그러니 결혼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있겠어요?"
"그러면 너라도 먼저 물어 보면 되잖니.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그리고 계속
그렇게 뜨뜨미지근하게 나오면 빨리 끝내고 정신 차려."
그러던 어느 날, 리처드의 아파트에서 함께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리처드, 우리 결혼할래요?"
리처드의 청혼을 기다려 온 나는 참다 못해 먼저 결혼 얘기를 꺼내고야 말았다.
내가 아는 한 청혼은 반드시 남자가 먼저 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으니까. 그가
청혼할 때를 기다리다가는 머리가 하얗게 셀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남자를
선택해 먼저 청혼을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멋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지만.
나는 리처드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OK!"
내가 무척이나 고민한 끝에 얘기를 꺼낸 것에 비해 리처드의 대답은 싱거울
정도로 즉각적이었다.
"아니, 리처드. 그러면 당신 역시 나와 결혼할 생각이 있었던 건가요?"
"그럼."
"아니 그런데 왜 한 번도 결혼 얘기도 안 꺼내고 청혼도 안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계속 만나면 당연히 결혼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는 건가?"
"세상에! 그래도 그렇죠.."
내가 마음 졸이고 답답했던 것과는 달리 리처드는 별 의심 없이 우리들의 관계를
결혼이라는 상황까지 연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두번 다시 못할 결혼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절실하게 느끼는 일이 있다. 미국과 한국의
이중적인 문화를 동시에 소화해 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결혼 준비 역시 그랬다. 나는 결혼에 관한 한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미국식을
따르고 싶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전통 혼례보다는 서구식을 일반적으로 따르고
있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사뭇 다른 면들이 많다. 그러나 이민 와 살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한국의 결혼 풍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내가 결혼 준비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연히 비용만 드는 약혼식도 생략하고 결혼식에
초대하는 인원도 최대한으로 줄이고 싶었다.
"엄마, 결혼을 결국 나와 리처드 두 사람을 위한 것이니까 우리들 뜻대로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미혜야, 너 여태껏 네 마음대로 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다고 벌써부터 고집을
부리려고 하니? 물론 네 뜻을 백 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결혼은 너희
둘만의 문제가 아니야 양쪽 집안이 만나는 거니까 중요한 절차들을 생략하는 것은
실례가 될 수 있어."
"엄마, 저는 형식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그리고 양쪽 부모님만
양해해 주시면 실례될 것도 없구요."
"그래도 우리 집은 초혼이라 올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오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말리니?"
"엄마 제게 맡겨 주세요."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엄마들한테는 딸 시집 보낼 준비를 하나하나 챙기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데, 그 일을 너한테 맡기라구?"
이번만큼은 어머니도 전혀 양보할 기색이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결혼을 약속하면 결혼 날짜를 1년이나 1년 6개월 정도 뒤로 잡고
신랑 신부가 그 동안 하나하나 준비를 한다. 한국에서는 결혼식 당일 식장에서
축의금을 내거나 가까운 사람들은 선물을 가져오는데, 미국식은 아주 색다르다.
결혼 준비 기간 동안 신랑 신부는 백화점을 정하고 그곳에서 아이쇼핑을 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필요한 살림살이의 품목과 가격 등을 적어 목록을 만든다. 물론
그것에는 가구부터 부엌살림, 화장실 용품까지, 그리고 몇십 불하는 것부터
몇백 불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렇게 하고 청첩을 하면 사람들은 신랑 신부가
쇼핑을 해둔 백화점에서 자기 형편에 맞는 선물을 선택해 배달을 시킨다.
신랑 신부는 보통 이런 '웨딩 샤워'를 통해 살림을 마련한다. 똑같은 선물이 몇
개씩 겹칠 염려도 없고,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도 체인 백화점의 온라인
전산망을 통해 원하는 선물을 보내 줄 수 있다. 신랑 신부는 선물을 받으면 일일이
보낸 사람의 이름과 선물을 빠드리지 않고 적어 놓았다가 'Thank you'카드를
보낸다. 아기를 낳았을 때도 '베이비 샤워'를 통해서 필요한 용품을 마련한다.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결혼 준비를 하다 보니 어머니와의 의견 충돌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호텔에서 리셉션을 하기 위해 양쪽
집의 가족과 하객을 합쳐 240명으로 제한했다. 리셉션은 한국의 피로연에 해당하는
것으로 미국에서는 주로 호텔에서 한다. 결혼식을 오후 늦게 하고 리셉션에서
저녁을 먹으며 인사도 하고 댄스파티도 하게 된다. 그렇게 모든 행사가 끝나면
신랑 신부는 그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나는 리셉션을 내가 원하는 호텔, 내가
원하는 룸에서 하기 위해 적지 않은 고생을 해야 했다. 호텔은 사용하기 1년
전부터 예약을 받는데, 결혼 날짜를 다음해 9월 12일로 잡은 나는 8월말부터 매일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날마다 전화를 건 덕분에 9월 12일에 아침 일착으로 내가
원하는 룸을 예약했다.
어머니는 교회 사람들이 많이 올 텐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말리느냐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호텔에서 반드시 피로연을 하고 싶었고, 내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사람들만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우겼다. 어머니가
너무 강력히 약혼식을 고집하여 그 부분에서는 내가 손을 들고 말았지만, 약혼식
하루 전 리처드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결국 어머니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혼식을 올릴 교회를 찾는 일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교회마다 규정이
조금씩 달랐는데, 까다로운 데는 아예 그 교회의 교인이 아니면 빌려주지 않는
곳도 있었다.
나는 성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교회를 찾고 싶어 여러 동네의 교회를 직접
찾아가 보았다. 물론 간단하게 결정할 수도 있겠지만 평생 한 번인 결혼식을 내가
구상한 대로 완벽하게 치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 며칠을 돌아다닌 끝에 마음에 쏙 드는 교회를 찾아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교회는 목사님이 예배를 집전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고, 나는 한국
목사님을 주례로 모시고 싶었다. 일생에 한 번 있는 결혼식을 백인의 주례로
치른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내 결혼식에는 두 분의
목사님이 함께 주례를 섰다.
드디어 결혼식 날, 완벽하게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요 당황스런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미국 결혼식엔 반드시 들러리를 세워야 하므로 우리는 여자 셋, 남자
셋을 정했다. 여자는 중학교 때부터 오랜 친구인 중국 아이 셜리와 코넬에서 만난
미경이, 그리고 UCLA에서 만난 성심국민학교 동창 혜숙이였고, 남자는 리처드의
두 형님과 내 큰동생 경준이었다.
문제는 식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터지고 말았다. 식이 진행되는 도중에
서약을 하면서 서로에게 마음의 징표로 반지를 끼워 주는데, 신부에게 줄 반지는
남자 들러리가 갖고 있다가 신랑에게 전해 주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반지를
리처드의 형님이 잃어버린 것이었다. 결혼식 바로 전에 신부의 반지가 없어졌으니
이만저만 난리가 아니었다. 가족들 모두 땅만 보고 다니며 반지를 찾는 소동이
벌어졌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의 동서 될 분(반지를
잃어버린 형님의 부인)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에리카, 큰일났어."
"무슨 일인데요?"
내가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않고 그분은 자기 손에서 반지를 빼더니 내 손에 끼워
보라는 것이었다.
"어머, 왜 그러세요?"
"저기... 리처드 형님이 반지를 잃어버렸어. 그러니 이거라도 맞으면 끼는
수밖에 없겠어. 자, 시간이 없어. 얼른 껴봐.
반지는 내 손에 꼭 맞았다.
"에리카,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가 있지?"
"할 수 없죠 뭐. 괜찮아요."
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달리 방법도 없었다.(그래서 내 결혼반지는 나중에
반지를 잃어버린 시아주머니가 해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들러리를 서기로 했던 혜숙이가 식이
시작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 살고 있던 혜숙이는 결혼식 당일날 일찍 와서 나를 돕고, 또
결혼식 리허설에 빠졌기 대문에 미리 와서 그 진행 과정을 익히기로 했었다. 나는
그애가 혹시 비행기를 타지 못한 건 아닐까 해서 걱정이 되었다. 혜숙이가 빠지면
짝이 안 맞으니까 남자 들러리도 한 명을 빼야 할 형편이었다. 모두들 발만 구르고
있었다.
마침 그날 고속도로에 사고가 생겨 결혼식을 20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혜숙이가 나타났다. 애를 태우며 기다렸던 우리는 반가워
어쩔 줄 몰랐는데 늦은 이유를 듣고 나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혜숙이는 결혼을
하는 나보다 더 흥분되어서 정성스레 화장과 머리를 하느라고 늦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이 김미혜를 버리지 않으신 덕택에 식은 시작되었다. 나는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나는 두 분이 딸을 키우느라 똑같이
고생했으므로 내 결혼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는 하객들과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기쁨과 감사와 영광을 나누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나와 의견이
달랐지만 그 일만큼은 절대적으로 찬성하며 기뻐했다.
나는 두 분의 목사님 앞에서 리처드를 남편으로 맞아들이는 혼인서약을 했다.
어린 시절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미지의 세계에 던져진 후 지금까지 겪어 왔던
삶의 편린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결코 쉽지 않은 도전과 담의
시간들이었다. 거의 반은 미국인으로 살면서도 나의 근본을 지킬 수 있었고,
원하던 대로 한국 남자를 만나 결혼함으로써 내 인생의 두번째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시기 진행되는 도중 리처드의 둘째 형과 경준이가 특히 많이 울었다는데, 나는
그들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경준이가 사회를 본 리셉션에서도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형제들을
비롯해 일가친척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는데, 나의 시아버님이 가족들의 이름을
한자로 적어 주어 사회를 보던 경준이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경준이가 억지로
읽어 낸 그 한국 이름을 평소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리처드 형제들이 잘
알아듣지 못해서 또한 한참을 당황했다. 경준이는 온갖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위기를 넘기느라 진땀을 뺐다.
나는 여러 미혼 여성들을 위해 부케를 힘껏 던졌다.
'잘 가라, 내 청춘!'
부케는 수미라는 친구의 손에 쥐어졌다.
미국식 결혼 풍속에는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다. 신부가 부케를 던지듯
신랑도 신부가 신을 스타킹 밴드를 벗겨 총각들에게 던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여자들은 서로 부케를 받으려고 달려들지만 남자들은 서로 받지
않으려고 물러난다.
그래서 경준이가 자기가 100불짜리 지폐를 밴드에 묶을 테니 다들 달려나와
받으라고 총각들을 구슬렀다. 마침내 리처드가 밴드를 힘껏 공중으로 던졌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나이 어린 경모가 그것을 받았다. 알고 보니 그 100불은
경모가 빌려준 것이었고, 경모는 또 그 돈을 놓치지 않으려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준이는 이미 그것을 1불짜리로 바꾸어 매달아 놓았었다.
몇 가지 옥의 티 같은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순간순간 마음을 졸인 그
해프닝으로 이해 더욱 더 기억에 남는 결혼식이 되었다.
나는 식이 끝나고 리처드의 가족들에게 폐백을 드리지 않았다. 여자만 특별히
남자의 가족에게 큰절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순종을 넘어 여자는 무조건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 시집 가면 벙어리 3년과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을 지내야 한다는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시절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오랜 전통이고 풍습이니까 그냥 따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모든
절차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고 그것에서 어긋나면 과감하게 버렸다.
나는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완전히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 남녀 모두에게 똑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길 바랐다. 부모님의
손을 함께 붙잡고 입장한 것도, 시집 식구들에게 폐백을 올리지 않은 것도, 그리고
결혼 후에도 미국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에리카 미혜 김'을 고집한 것도
나에게는 나름대로 커다란 의미가 잇는 일이었다.
결국 난 결혼식을 치르면서 한국과 미국의 풍습을 혼합하며 그중 좋은 것들만
취한 셈이다. 어쩌면 나에게 편리하고 유리한 쪽으로만 의미 부여를 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결혼 풍습에까지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남성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사실 그것은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의외로 쉽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이었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을 비롯해 동남아의 여러 나라를 돌며 동양정신을
체험하겠다던 나의 깜찍한 신혼여행 꿈은 나와 리처드의 바쁜 일 때문에 그야말로
꿈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그래도 어머니의 간절한 당부에 따라 할머니의 산소도 돌아보고 또 나와
리처드의 정신적인 고향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한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 여자의 그 남편
교포 사회에서 일을 하면서 변호사 일 외에도 크고 작은 단체나 모임에서 감투를
쓰는 일이 많아졌다. 교포 사회의 규모가 작기도 했지만, 내가 젊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을 시키기에 적당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뜻하지 않게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어 유명인사 아닌 유명인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는데, 그런 내게
사람들은 다소 호전적인 느낌을 주는 맹렬여성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었다.
얼마 전에 한인 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그 여자의 그 남편'이라는 코너가
신설되면서 그 첫번째 초대 손님으로 나와 나의 남편 리처드가 불려나갔다.
그런데 진행자들은 나를 좀 곤혹스런 상황에 빠뜨려 즐거움을 맛보려 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리처드에게 짓궂은 질문만 하였다.
"요즘 신문이나 방송, 잡지 등에 에리카 김 변호사님과 관계된 기사들이 심심치
않게 실리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기사는 '그녀는 신경내과 의사 리처드 안씨와
결혼해 LA시내에 살고 있다'거나 혹은 '김 변호사는 얼마 전 교포 내과 의사
리처드 안씨와 결혼했다.'는 구절로 끝을 맺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리처드 안씨는
본인 스스로로의 자격이 아닌 김변호사님의 남편으로 소개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기분 나쁜 적은 없었습니까?"
아주 난처한 질문이었다. 질문을 받은 당사자인 리처드는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지만, 나는 리처드가 이 상황에서 어떤 대답을 할까 내심 걱정되었다.
"아니오.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똑똑한 아내를 두었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때마다 우쭐해지는 걸요. 자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누구라도 축하할 일이고, 그 사람이 바로 제 아내라면 저는 정말
행운아요."
"김변호사님은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다르지 않았는데, 두 분이 충분히 합의가
되신 건가요? 그 문제로 혹시 두 분이 다투신 일은 없습니까?"
"에리카가 성을 바꾸지 않겠다고 했을 때 저는 전혀 반대하지 않았어요. 결혼과
동시에 여자가 자기 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저 역시 좋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저희 누님들도 결혼 후 성을 바꾸지 않았고 형수님들도 마찬가지였어요.
한국에서는 결혼을 해도 여자가 자기 성을 그래도 갖고 있잖아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진행자들의 짖궂은 질문을 리처드가 넉살 좋게 받아넘김으로써 결국 우리
부부의 승리로 인터뷰는 끝이 났다.
나는 평소에 남편 리처드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산다. 미국이란 나라가
아무리 여권이 시장되었다고 해도 그래도 여자는 우선적으로 가정을 잘 꾸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는 나의 일을 위해
자신의 불편을 기꺼이 감수해 주었다. 저녁을 혼자서 샌드위치로 때워도, 새벽까지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파김치가 되어 집에 들어가는 일이 잦아도, 그는 자기의
입장보다는 나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었다.
그는 밤낮을 구별하지 않고 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새벽에도 응급환자가
있다는 연락이 오면 벌떡 일어나 나가야 한다. 그래서 더욱 아내의 세심한 배려를
필요로 하는데도 한 번도 내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일과 가정, 우선 순위에 따라 어느 한쪽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데, 나는
아직까지는 일이 우선이다.
"미혜야, 엄마는 너희들이 정말 하늘이 맺어준 사이라고 믿는다. 도대체
인연이란 게 얼마나 오묘한 건지 모르겠다. 리처드는 텍사스에서 태어나
자랐잖니. 너는 한국에서 태어나 이 미국 땅으로 건너오고. 그것도 정반대에서
살던 사람이 만난다는 일이 어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겠니. 엄마는 너희들의
만남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구나. 게다가 리처드처럼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너를 끔찍이 생각해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어머니는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사실 난 결혼을 하고 나서 훨씬 더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갖고 있는 문제나 고민거리를 진지하게 의논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 것도
행복이다. 예전 같았으면 나 혼자 결정해야 할 일들도 요즘은 리처드의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힘들 때, 용기와 힘을 주고 쉴 수 있는 휴식처가 되어
주는 사람이 바로 리처드이다. 그가 나를 사랑해 주는 만큼 자신감이 생겨나고,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나의 마음도 풍요로워진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그가 한국말을 잘 못해 사위를 무척이나 아끼는
장인 장모와 애정 어린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직업 때문에 좀처럼 다로 공부시간을 내기 어렵지만, 요즘은
그 바쁜 틈틈이 우리말을 하기 위해 스스로 많은 노력을 한다.
'리처드, 힘내세요!'
6
시련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흑인 폭동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 천재지변이 우리 교민 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거기에서 주저앉기엔 그동안의 고생이 너무 아까웠다.
생면부지의 땅을 삶의 터전으로 일궈 온 우리 부모들의
땀을 도저히 허망하게 지울 수가 없었다.
양말 장수 아저씨
미국에서 살면서 변호사 한번 잘못 만나면 고생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크고 작은 모든 분쟁을 법을 통해 해결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분쟁 당사자들끼리 합의를 보아서 적당히 끝내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한국사람들은 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이민 와서 살면서도
그런 미국의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기 십상이다.
한 1년 전쯤의 일이었던 것 같다. 허름한 아저씨 한 분이 퇴근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 나를 찾아왔다.
"아저씨, 무슨 일로 오셨어요?"
피곤에 지친 그분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3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귀를 다쳤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치료도 못하고
돈도 한 푼 못 받았는데 서류에 사인을 하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저씨 변호사가요?"
"모르겠어요. 말도 잘못 알아듣겠고. 그런데 사무장인가 하는 사람이 사인 안
한다고 얼마나 욕설을 퍼붓는지.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아저씨 직업이 뭡니까?"
"LA 시내에서 양말을 가져다가 라스베가스의 시장에 내다 팔아요. 그날도
양말을 가지러 오다가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당했어요."
"사무장이 한국사람이라고 하셨나요?"
"네, 젊은 놈이 어찌나 고약하게 구는지. 난 다친 귀도 못 고치고 돈도 한 푼 못
받았어요. 그런데 그놈이 무조건 사인을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따졌지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무슨 사인이냐고. 사정을 설명해 달라고 했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욕까지 해대는데,
어찌나 무섭고 겁이 나던지. 우리 마누라까지도 말리다가 혼쭐이 났어요. 내일
법정에 가야 한다는데 난 아무것도 모르겠고. 김변호사님, 제발 우리 좀
도와주세요."
어떤 사정인지 알만했다.
요즘 젊은 한국인 변호사들이 한인 사회로 많이 들어와 형편이 나아진
편이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말 잘하는 한국인 변호사를 만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미국인 변호사들이 한국사람들을 상대로
일을 맡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말을 못하는 미국 변호사들은 통역사 격으로
자기들 밑에 한국인 사무장을 두고, 그를 통해서 한국인 고객들을 끌어모았다.
나를 찾아온 아저씨가 바로 그런 변호사를 만난 경우였다. 더군다나 교통사고를
전담하는 변호사들은 변호사 가운데서도 이미지가 좋지 않다. 변호사를 잘못
만나면 교통사고를 당한 클라이언트를 담보로 보상금을 받아내 그것으로 실컷
자기들 이속을 차리고, 정작 사고를 당한 당사자는 돈도 제대로 못 받고 시간만
낭비하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그 아저씨는 사고나 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다친 귀를 치료 받지도
못하고 보상금이 나왔는데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서류에 사인을 하지 않는다고
온갖 협박을 당하고 있었다.
"아저씨, 제가 아저씨 사건을 맡아 도와드리려면 지금까지의 서류가 필요해요.
서류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시죠?"
라스베가스에서 차를 몰고 와 물건을 가져가는 양말 장수 아저씨 내외는 다음날
서류를 찾아오기 위해 LA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하루 저녁
호텔값을 아끼기 위해 자동차에서 쪼그리고 새우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부인은 차 안에 남아 양말을 지키고, 혼자서 서류를 찾으러 갔던
아저씨는 서류는커녕 전날보다 더 혹독한 대접을 받고 쫓겨왔다.
"아저씨, 이런 경우에는 변호사를 고발하셔야 합니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하는데...."
"아저씨, 혹시 영어 잘하는 자녀분들 안 계세요? 본인이 고발을 해야 하니까
자녀분들이 있으면 도움을 청하세요. 아저씨를 도울 만한 자녀분이 가까운 곳에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자 아저씨의 표정이 더욱 쓸쓸하게 변해 갔다.
"있어요. 남가주 대학에 다니는 아들 놈이 있긴 있지요. 하지만 그놈은
우리일로 자기를 귀찮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불러도 오지 않을
겁니다.."
"아니, 아저씨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버지가 큰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아들이
모른 척해요. 그리고 아들이 있는데 아들 집에 가서 주무시지 왜 차에서
주무세요?"
"아들이 제 집에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그러지, 낸들 아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아저씨, 힘겹게 양말을 팔아서 자식들 학비 대주시지 않았어요?"
"대줬죠. 애비가 자식 학비 대는 거야 당연하다고들 생각하지, 그게 어디 내세울
만한 겁니까?"
"그러면 이런 경우 아들이 나서서 돕는 것도 당연한 거예요.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하세요."
"아니에요. 변호사님이 몰라서 그래요. 제 아들놈은 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변호사님이...."
미국인 변호사 밑에 빌붙어서 말 못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협박하고 속여 돈을
뜯어내는 젊은 사무장이나, 자기 아버지 일인데도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그 아저씨의
아들이나 모두 한심한 사람들이다.
내가 일을 하면서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을 속이고
이용하는 경우다. 미국에 며칠 먼저 왔다고, 말 몇 마디 더 할 줄 안다고, 같은
한국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다니.
미국사람들을 우리와 한 핏줄이 아니므로 자신들이 잘 아는 것을 가지고
어수룩한 타민족들을 상대로 사기를 칠 수도 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이를
갈며 다시는 절대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악착같이 매달려 하나라도 더
알아야 한다. 특히 이곳에서 교육받은 젊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그런 사람들을
보호해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쥐꼬리만큼 더 안다고 미국생활에 어설픈 한국사람을 상대로 한국사람이
사기를 친다면, 그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기를 치려거든 미국 사회에 나가서
미국사람을 상대로 크게 할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사람들 상대로 좀도둑질을
하다니,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그 아저씨의 서류를 내가 대신 꾸며 변호사를 고발했고, 아직도 재판이
진행중이다.
이혼하는 여자들
요즘 한국에서도 이혼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이혼율은 이미 50%를 넘어 이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나라다.
언뜻 생각하면 미국 남자들은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연약한 여자를 완벽하게
보호해 주는 기사도 정신이 철철 넘치는 신사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에서나 있는 일이다. 물론 동양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내기 좋아하는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어느 정도 그렇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사람 사는 것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매맞고 사는 여자들이 많다고 하지만 미국도 하나 다를 것이 없다. 어떤 면에서는
미국 남자들이 더 잔인하기까지 하다. 거구의 백인이나 흑인들의 커다란 주먹을
보면 그래도 한국 남자는 체구가 작아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내가 가정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 동양인 빈민층을
위한 법률상담소에서 일을 하면서부터였다.
상담의 대부분은 이혼 문제였다. 그것도 남편의 폭력을 참을 수 없어 이혼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남편의 폭력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는 얘기였다. 이가 빠졌거나 얼굴이 찢어진 여자는
물론 목숨의 위협을 받아 도망을 나온 여자들까지, 이유는 달라도 상황은 거의
비슷했다. 나는 같은 여자로서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내가 가정 내 폭력에 얼마나 흥분을 했는지, 집에 자동차가 없어 법률사무소에
못 오는 여자들을 위해 내 자동차로 데려오고 데려다주며 상담을 해줄 정도였다.
나는 그 여자들이 울 때 함께 울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 사람들을 생각하며 잠도
못 자고 괴로워했다.
나는 그런 경우 해결 방법은 이혼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자들에게 경제적으로 독립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집안에서 살림하고
아이들만 돌보던 여자들이 남편과 이혼해 독립하려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하는데, 모두들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
나는 그런 여자들을 돕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새 삶을 찾지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두려움 때문에 과거의 생활에 그냥 주저앉고 마는 경우들이
많았다.
여성들이 갖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한계와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이 무너지고
파괴되는 현장을 목격한 나는, 그 안타까움과 충격으로 법대에 가서 절대로
가정법은 전공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법대 2학년 때, 부부가 이혼할 때 재산을 분배하는 법을 배우면서 나는
법이 얼마나 여성에서 불리하게 되어 있는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이혼하는 여성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섯 전체의 권익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때부터 내 관심을 다시 여성 문제로 쏠리기 시작했다.
미국인 부부의 이혼율 못지 않게 이민 온 한국사람들의 이혼율도 최근 들어
급속도로 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에서도 여자들이 쉽게 이혼을 못하는 건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직업을 갖지 못한 여성들이 이혼하면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하므로 남편이 죽도록 미워도 참고 사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사는 한국 여자들은 대부분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경우엔 여자들이 남자보다 더 악착같이 일을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여자에게도 경제력이 생기게 되고, 그 경제력 만큼 자신감도 생겨난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발언권이 강화된다. 그때부터 과거에는 참고 살았지만 이젠 한 말은
하면서 살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마디로 죽어 지낼 가장 큰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처음 이민 와서는 잘 살아 보자고 부부가 함께 새벽별을 보며 나갔다가
밤늦도록 일하고 돌아온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살만해지면 남자들이 한눈을
팔기 시작한다. 돈을 벌어 집도 사고, 사업체도 잘 돌아가고, 생활이 좀 편해지면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죽도록 고생한 탓에 여자로서의 매력을 잃고 만다. 스스로를
가꿀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결국 여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어쩔 수
없이 삶에 매달려 살아가는 억척스러운 생활인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가정 문제로 나의 사무실을 찾아오는 여성들에게 나는 냉정하게 자신의 입장을
결정하도록 충고한다. 정말 이혼할 생각이라면 재산도 찾고 권리도 찾을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정을 해야 하고, 그래도 이혼하지 않고 참고 살
거라면 어떻게든 해결을 보겠다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딱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잘 살아 보겠다고 남의 나라까지 와서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이제 살 만하니까 이혼이라니. 그럴 경우 아무래도
여자들의 정신적인 피해가 남자들보다 더한 게 현실이다.
거의 모든 여자들이 이야기를 꺼내다가 한없이 울고 만다. 아무데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구구절절한 속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면 울음이 복받치는 모양이다. 그런 경우 나는 계약관계에 의해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변호사가 아닌, 인생 상담을 해주는 카운셀러가
되어야 한다. 함께 슬퍼해 주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의
입장이 되어야 문제를 풀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혼을 결심한 여성들에게 가장 먼저 강해지라고 당부한다. 지독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강해져야 남편과 끝까지 법적 투쟁을 할 수 있다고.
이혼하겠다고 결심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판에서 이기겠다고 이를 갈던
미국 여성들도, 재판이 길어지고 아이들의 양육권을 놓고 치사한 싸움에 들어가면
먼저 손을 드는 경우가 많다. 냉정하고 합리적인 그들도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싸우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에 비해 남자들은 지독할 정도로
끝까지 싸워 한 푼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열이면 열, 남자보다
여자가 먼저 나가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개인적인 선택을 먼저 하고, 법적 투쟁을 하겠다는
결심이 서면 마음을 독하게 먹고 강해지도록 훈련을 시킨다. 내가 아무리 칼을
휘두르며 앞서 나간다 해도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이 마음이 약해지고 지쳐
떨어지면 싸움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 젊은 여성들이 찾아오면 더욱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현실을
직시하도록 깨우쳐 준다. 나이 많은 분들은 원가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굳어져
있으므로 남편이 악질적이지만 않다면 어떻게든 해결을 하는 쪽으로 유도를
하지만, 아직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는 젊은 여자들에게 참고 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최선의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클라이언트 중에 30대 중반의 능력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 여자는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했는데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밑지는 결혼을 한 경우였다.
학벌도 좋고 집안도 괜찮고, 똑똑하고 예쁜 여자였다.
남편이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부부가 땀흘려 일한 결과 제법 큰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다. 그런데 남편이 술만 먹고 들어오면 여자를 때리는
것이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또다시 술만
먹으면 폭력을 휘둘렀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던 끝에 큰 싸움이 벌어졌고, 마침내
여자가 집을 나와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재산도 찾고 이혼을 하겠다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똑똑하고 능력도 있는 여자가 너무 안됐다는 생각에 꼭 이길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소송을 준비하는 동안 남편은 거짓으로 맹세를 해가며 여자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다 해줄 테니 제발 소송을 기각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여자는 마음이 약해져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약속을 지킬 남자가 아니었다. 결국 아이까지 내주고 재산의 절반과
함께 다달이 생활비를 받는 조건으로 이혼에 동의했으나, 남편은 돈을 줄 때가
되자 재산을 분산시켜 숨기고 파산신고를 해버렸다.
그 동안의 남편 행동으로 미루어 당신이 속고 있다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같이 살던 남자이기 때문에, 또 그 남자의 아이가 있기 때문에
남편이 그럴 듯하게 회유를 해오면 마음이 약해지는, 그런 답답한 일이
반복되었다.
내가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이혼법을 하겠다고 했더니, 부모님은 왜
쫓아다니면서 남의 가정을 깨뜨릴려고 하느냐며 싫어했다. 나 역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가정을 지키며 유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처럼 그저 억지로 참고 남편에게 맞으면서 평생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보다는, 아픔이 따르더라도 삶의 참의미를 갖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사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 채 어느 구석에서 남 모르게 숨죽여 울고 있을
많은 여성들에게,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문서에 약한 한국인
내가 이곳에서 한국사람들을 상대로 일을 하며 가장 놀란 점은 한국사람만큼
남을 쉽게 믿고 자시의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는 사람들도 없다는 것이다. 중대한
계약도 구두로 대충 하기 일쑤고, 돈을 지불할 때도 현금을 준다.
그런데 그런 한국사람들의 허점을 악이용하는 미국인들이 있다.
예를 들어 A라는 지역이 도시 재개발 계획이 수립돼 상가를 모두 없애거나
10년 동안 장사를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곳에서 장사를 하는 미국사람은
정보를 미리 알고 가게를 팔려고 내놓는다. 그런데 평소 그 지역에 가게를 갖고
싶었던 한국사람과 비즈니스가 이루어질 경우,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른 척하고
이야기 해 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게를 사는 사람이 다리를 놓아준 복덕방이나 행법기관에 잘
알아보고 사야 하는데, 보통 한국사람들은 그 절차를 무시해 버린다. 문서 조항을
일일이 따져 보는 일에 약하기도 하지만, 사람을 무조건 믿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돈을 모두 지불하고 나서야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건물을 판 사람이나 중개인을 상대로 소송을 해야 한다. 하지만 판
사람은 자기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다 알고 있으므로, 계약서를 작성할
때 이미 철저하게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놓는다. 계약서 안에 자신에게
불리한 조항이 있는지 낱낱이 따져 봐야 하는데도, 영어를 잘 몰라서 혹은
중개인이 사인하라고 하니까 대충 넘어가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그러다
나쁜 사람을 만나면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 것이다.
나중에 아무리 항변해 본들 그대는 이미 어쩔 수 없다. 계약서에 사인을 한
것은 모든 것을 인정했다는 증거이므로 그것이 통할 리 만무하다. 법정에 가서
싸울래도 서류가 완벽해야 하는데, 그런 상황이고 보면 고스란히 앉아서 손해를
보는 수밖에 없다.
나의 한 여자 클라이언트는 미국사람에게 70만 불을 주고 빌딩을 사들였는데,
다달이 얼마씩 갚는 조건이었다. 그 여자는 엄청난 돈을 들여 지저분하고
허름했던 그 건물을 멋지게 수리해 임대업을 시작했다. 그러자 빌딩 값이 수백만
불로 뛰어올랐다. 그 사실을 안 전 주인은 건물을 도로 빼앗기 위해 계약서의
조항을 들어 소송을 걸었다. 상대가 힘없는 동양인이니 법정에서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조항과 그들이 취한 행동은 내가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건물을 놓고 소송에 들어가자 입주자들은 불이익을 당할까봐 모두 나가 버리고,
결국 나의 클라이언트는 엄청난 손해를 보고 말았다.
재판에 이겨 결국에는 그 건물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그 사람이 받은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모두 보상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여자의 남편은
건물이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여자 남편의 경우 미국에서는 거의 보상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다. 한국에서 살다가 미국에 이민 온 사람이므로, 그가 얼마나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나를 따질 때 불리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 나이가 60이 넘었으니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미국에서는 사람이 죽어 보상액을 정할 경우 어린아이의 보상액이 상당히 높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은 부모들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소년기가 되면 보상액이 내려간다. 그들은 경제적인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부모들에게 그다지 기쁨을 주는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다시 어른이
되면 경제적인 능력 때문에 값이 올라간다. 그리고 노인이 되면 형편없이
보상액이 떨어진다.
손해배상을 청구한들 죽은 남편을 담보로 얼마를 보상받을 수 있으며, 또
보상을 받은들 그것이 그 여자의 망가진 삶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가.
LA폭동과 한인 사회
1992년 4월 29일, LA 한인 타운에서 일어났던 흑인들의 폭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인들의 미국 이민사에 영원히 기록될 뼈아픈
사건이었다.
자신들이 뿌리내리고 사는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는 끔찍한 일을
당한 교민들은 한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도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인 타운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던 나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폭동의 현장을 목격했다. 백인 경관이 흑인 운전자를 난폭하게 폭행하는 모습이
지나가던 행인의 비디오 카메라에 찍혀 미국의 각 가정에 적나라하게 공개되면서
일시에 흑인들의 분노를 산 로드니 킹 사건. 그 사건이 발단이 되어 끓어오르기
시작한 흑인들의 분노가 왜 하필이면 한국사람들을 향해 폭발한 것일까.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지켜보며 미국인들의 교활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정치인들이 그렇고,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국수주의에 빠진 언론들이 또한
그러했다.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했던 것은 미국의 CNN 뉴스를 그대로 인용해 보도한
한국 언론들이었다. 그 보도대로라면,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미국에 이민 와
살고 있는 한국사람들이 그동안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되어 미국 사회에서는
스스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러면 도대체 왜 한국인들이 피해자가 되어야 했을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미국은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에 철저한 신분상의 차별이
존재하는 나라이다. 동양인들이나 남미인들, 흑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백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다. 그 신분상의 차별을 극복하고 백인 중심의
주류 사회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처절한 개인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미국에서 흑인이 거주하는 지역은 대개 빈민가를 형성하고 있고 또 범죄가 많은
지역이다. 일하지 않으면서 사회보장제도의 보호를 받는 것이 일하는 것보다
수입이 높을 정도로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 냉대의 역사는 골이 깊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흑인 거주 지역에서 장사를 하려면 비용은 적게 들지만
항상 위험이 따른다. 보험회사들조차 보험에 가입시키는 것을 꺼린다. 그러나
금전적인 기반이 없는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곳에 들어가서 장사를 할
수밖에 없다. 초기 이민자들은 그곳에서 열심히 돈을 모아 좀더 안전하고 좋은
지역으로 옮겨 가는 것이 최대의 목표이다. 한국인들이 흑인 지역에 들어와
장사를 하기 훨씬 이전에 유태인들이 그곳에서 장사를 해서 돈을 모아 나갔고,
이탈리아 사람들 역시 그랬다.
나는 흑인 폭동이 일어났을 때 운 나쁘게도 한국인들이 그곳에서 장사를 했기
때문에 당한 것이지, 그들이 한국사람들이어서 폭동의 피해자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 정부나 언론은 문제의 본질을 국민들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심각한 정치. 사회적인 문제가 생길
때마다 사람들의 관심을 교묘히 다른 곳으로 떠넘기기 잘하는 미국. 미국 역사를
돌아보면 그러한 예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로드니 킹을 폭행한 경관들에 대해 판결이 있기 전, 만약 그들에게 무죄 판결이
난다면 흑인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 빗나가지 않았다.
폭동이 난 후 정부가 취한 태도를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소수 민족의 아픔을
절감했다. 폭동을 진압해야 할 경찰들은 모두 백인 마을을 지키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성을 잃고 군중심리에 날뛰던 흑인들은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는 한인 타운으로 달려가도록 길을 터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언론은 그
수백년 역사의 골 깊은 흑백 갈등을 유색인종 간의 감정 싸움으로 여론을 조정해
갔다. 그곳에서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면 그들 역시 똑같이
당했을 것이다.
순진하고 힘없는 한국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 꼼짝없이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꼭두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오직 일에만 매달리며 살아온 한국사람들. 그들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남들이 다 기피하는 흑인 거주 지역에 들어가 그래도 참고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일한 만큼 좀더 나은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돈만 벌 줄 알지
자기네들의 물건을 팔아주는 흑인 사회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갈등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몇 불짜리 팔아 고작 몇 푼의 이익을
남기며 하루 종일 다리가 붓도록 일하는 그들에게 그러한 자비심을 기대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지나친 희망이 아닐 수 없다. 그들 역시 지치고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폭동의 피해자들은 보상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아무리 탄언을 하고 호소를
해도 소용없었다. 정부에서 내라는 세금 다 내면서 살았는데 누구 하나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정치인들은 한인 타운에서 얼굴을 돌려 버렸다.
정치인들도 다수를 차지하는 백인과 흑인들의 입장을 옹호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들에게 인심을 잃었다가는 선거고 투표고 다 끝장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이민 와 영주권만 갖고 살고 있는 소수 민족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1세기를 바라보는 이민 역사에도 불구하고 졸지에 이 사회로부터 배반당한
한국인들. 그동안 우리 부모들이 뼈빠지게 일해 온 노동의 대가는 무엇인가? 나는
수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이제 어느 정도 폭동의 흔적은 사라지고 일상의 평온을 되찾은 듯하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상처는 앞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치유될 수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신세대 전문인 클럽
시련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폭동의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산불과 지진 등
천재지변까지 겹치면서 하인 사회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기에는 그동안의 고생이 너무 아까웠다. 생면부지의 땅을 삶의
터전으로 일궈 온 땀을 허망하게 지울 수는 없었다.
그즈음 1세대들의 배려로 큰 어려움 없이 공부를 마치고 미국사회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1.5세와 2들 사이에서, 이제는 우리들이 발벗고 나서서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였다. 그리고
신세대 전문인 클럽(Young Professional`s Club)이 태어났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 친목도모, 상호발전, 한인 사회에 대한 봉사라는 3대 강령을 내걸고
흩어져 있는 힘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12명이라는 적은 인원으로 출발했지만
우리는 뭐가 시작의 물꼬를 틀 수 있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했다. 나는 남편까지
설득해 함께 활동에 참여했다.
60년대 이후에 출생한 사람들 중 각계에서 전문인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는데, 뜻을 하나로 모으다 보니 의욕들이 대단하다는 것을 서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첫번째 작업으로 소액청구재판의 한국어 안내서를 만들기로 계획을
세웠다. 소액청구재판이란 각종 거래시 발생하는 5천 달러 이하의 민사소송을
변호사없이 소송 당사자가 직접 절차를 밟아 진행하는 재판을 말한다. 최근 각종
분쟁들로 한인들의 소송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하루 평균 20__30명의 한인들이
소액청구재판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인식 부족으로
소액청구재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소액청구재판의 기본 개념부터 접수방법, 재판 진행의 절차 및 판결
후의 처리방법에 이르기까지 재판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들을 꼼꼼하게 알려 주어
시간과 비용의 낭비를 막아 보자는 생각이었다.
각자 자기 일 하기에도 바빴던 우리들은 철저하게 사전준비를 하고 계획을
세워 최대한 시간을 절약해 가며 일을 했다. 즐겁게 일을 하니까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더할 수 없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첫 작업인데도 손발이
잘 맞았다.
일에 자신이 생긴 우리들은 다음 활동으로 세금보고서 작성 자원봉사를 택했다.
1년에 한 번씩 누구나 반드시 소득세를 보고해야 하는데, 그 작성방법이 까다로워
어른들을 당황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문 대행기관에 맡기자니 비용이 수월치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영어에 어두운 노인과 저소득층, 그리고 지진 피해를
심각하게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세금보고서를 무료로 작성해 주는 일을
구상했다.
남의 세금보고서를 대신 작성해 줄 경우 연방국세청(IRS)이 정하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어야 하므로, 우리 회원들은 IRS가 주관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여
자격증을 땄다. 일이 없는 토요일을 정해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한 달간
세금보고서를 작성해 주었는데, 자원봉사자 학생들의 도움까지 빌려야 했다.
신문사에서도 적극적으로 홍보를 해주었고, 젊은이들이 일을 한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후원의 목소리가 높았다.
우리는 봄과 가을로 나누어 봉사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회원들의 적극성에
나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가을에는 남가주 총고등학생회와 함께 '대학 전공 및 진로설정' 세미나를
열어 대학 입학을 앞둔 학생들과 부모님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한국사람들의 교육열은 세계에서도 알아줄 만하다. 이곳에 와서 살고 있는 이민
1세들의 가장 큰 꿈은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 미국 주류 사회에 떳떳하게 진출하는
것이다.
우리 회원들은 각자의 경험을 토대로 대학시절의 전공 선택 과정과 공부방법
그리고 현재 갖고 있는 직업의 장단점 등을 상세히 설명해 주면서, 학생들 스스로
진로를 개척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
행사를 치를 즈음엔 회원이 30여 명으로 늘어났는데, 의사, 치과의사, 엔지니어,
약사, 변호사, 의상 디자이너, 건축설계사, 부동산 전문가, 회계사, 증권투자
전문가, 교사, 통역사 등 회원들의 직업이 모두 달랐다. 그래서 학생들은 다양한
직업의 선배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전공
문제로 고민하던 경험과 코넬에서의 전과의 경험을 토대로 좀더 현실적인 상담을
해줄 수 있었다
한일 사회를 위해 작은 일부터 시작한 우리 신세대 전문인 클럽 회원들은 힘을
모으면 어떤 일이든 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교훈과 자신감을 얻었다.
'I can do it!'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미국,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
우리는 누구인가
'과거를 묻지 마세요.'
이곳에 이민 오서 사는 사람들이 가끔 자조 섞인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그것이 그냥 의미 없는 우스갯소리는 아니다. 그 말속엔 과거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혹은 잊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렇기 대문에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직업을 갖고 있었는지 묻는 것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곳 교민들은 '한국에서 부도를 내고 도망간 사람들은 모두 LA에서
만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이민 와서 사는 사람들에게 대해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듯 떠났다는 비유로 하는 말들일 것이다. 내 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를 찾아간 사람이라는 그 안타까운 이미지를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
한 순간 내 나라를 버리고 떠났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살면서 절실하게 내
나라의 말과 풍습을 그리워하고 내 나라의 음식을 그리워하고, 내 나라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자신들이 못 이룬 꿈을 자식들이 이루어 주기를 희망하며 사는
사람들. 꼭두새벽부터 한밤중까지 개미처럼 일하며 오직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 이민 1세들의 참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일류 대학을 나와야만 앞날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지만, 어쩌면 이곳에 와서 살고 있는 우리 부모들이 한국의
부모들보다 더 절실하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유소에서 가스를 넣으면서, 빌딩에서 청소를 하면서, 기름 냄새 나는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구우면서 하루 10시간 이상씩 일주일 내내 일을 하는 우리
부모들. 그들은 자식만은 결코 자신과 같은 육체노동을 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돈을 벌어 아이들을 고생시키시 않고 공부시킨다 해도 아이들이
반듯하게 자라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온갖 자극에
아이들이 노출되어 있다. 또한 부모들이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나쁜 길로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한국에서보다 훨씬 높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모들의 맹목적인 기대를 감당하지 못해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괴로움을 잊기 위해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다 타락의 길로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에 와서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살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인 안정을 얻은 사람들이나 한국에서 웬만큼 경제력을
갖고 이민 온 사람들은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여유가
있다고 해서 아이들이 모두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커 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미국의 법이나 제도가 아이들의 성장을 막을 수 있고,
뜻하지 않은 한 번의 실수가 아이들의 삶을 망쳐 놓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동안 흑인 폭동과 지진 등의 재난을 겪은 한인들은, 우리 교민들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강한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마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도대체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100년의 이민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한인 교포가 수십만을 헤아리는데도,
우리 교민 사회는 이렇다 할 이민 문화를 창출해 내지 못했다. 각자의 삶은
비교적 충실하게 살았지만, 힘을 모아서 보다 강한 한인 공동체를 만들고 자식들을
위해 우리의 문화적인 전통을 만드는 일에도 다를 소홀했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 이민 사회가 방황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뭔가를 바로잡지 않으면 앞으로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아니
어쩌면 영영 기회를 잡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쌓이면서, 내게 '실천'이라는
과제로 다가왔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들은 이제 너무 지쳤고 나이가 들었다. 이제는 그분의 피와
땀으로 성장한 1.5세와 2세들이 나서야 할 때이다. 젊은이들 역시 우리들의
자식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때가 닥친 것이다.
마음은 간절한데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일을 시작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나와 뜻을 같이하는 1세대 사업가 한 분을 만난 건 크나큰 행운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의지를 갖고 사람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때 그는 단지
내 클리이언트였다.
미국 회사에 의류 납품을 하던 내 클라이언트는 미국 회사로부터 억울한 소송을
다했는데, 백인 변호사를 믿을 수 없어 유태인 변호사를 찾다가 우연히 나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내 아버지의 어려움이라고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매달려 억울함을 벗도록 도와주었다.
몸집도 작고 나이도 어린 여자가 당하게 일을 해나가는 것에 놀랐는지, 그는
한인 공동체를 위해 함께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1세대들을 설득하고
사업을 후원하는 일은 자신이 할 테니, 젊고 실력 있는 사람들을 모아 1세대들을
위해 그리고 자라나는 3. 4세대들을 위해 함께 일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반드시 길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우리는 한국인입니다.
한인 교포들을 하나의 정신 아래 결속시키고 스스로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자긍심을 부여할 만한 인물이 누구일까.
도산 안창호 선생.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인 도산은 초기 미주 이민의
정신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미주 이민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LA에서,
도산을 통해 코리안 아메리칸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고 도산의 정신 아래 우리
교민 사회가 하나로 뭉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개인 스스로가 자기 개발을 위해 노력한다.
--민족 간에 굳건한 결속력으로 단결한다.
--우물 안 개구리 식의 민족정신이 아니라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민족주의로 발전시킨다.
--미주 동포는 미국 사회 안에서 모범적인 시민이 되어야 한다.
이 도산의 정신은 우리 세대들에게 아주 절실하게 필요한 가르침이었다.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도산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확실한 정보가
필요했다. 나는 정보를 얻기 위해 고국에 있는 도산기념재단과 연락을 취하는
한편, 전문직을 갖고 있으면서 자신의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할애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모았다.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한 젊은이들이 많았는지 쉽게 뜻이
모아졌고 모두들 적극적이었다.
우리들의 뜻을 전달받은 서울에서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1995년 1월에 미주 도산기념사업재단 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재단 설립 단계로 들어갔다.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애국계몽운동을 벌여, 이민 1세는 물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한국인임을 잊지 않게 하고 자랑스런 한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한다.
--남북통일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여, 조국 통일을 위해 해외에서 남과 북의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 인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1.5세와 2세들이 미 주류 사회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돕고, 미국 속의 한인들의
힘을 키우기 위해 정치, 경제, 문화, 교유, 외교들의 각 분야에서 우리 한인들이
뿌리를 견고하게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교포 사회의 정신문화 창달을 위한 연구사업을 지원한다.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이민사 관계자료와 해외 독립운동 사료를
수집, 전시하기 위한 기념관 건립을 추진한다.
사업계획이 세워지고 본격적인 활동을 위한 기초작업들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94년 2월, 한국의 여러 학자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학자들을 초청해
'도산:코리언 아메리칸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것을 시작으로, 도산 재단을
정식으로 발족시키게 되었다.
시작이 어려웠는지 일단 뜻이 모아지자 눈덩이가 불어나듯 힘이 붙었다.
교포 사회가 '정신의 불모지'라는 오명의 벗고, 1세와 2세가 공통 관심사를
만들어 그것에 대해 함께 고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미주 이민 100년사의 상징적 인물인 도산의 가르침을 우리들의 가슴 속에
되새기고, 그것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오늘의 힘'으로 전환시키는, 어려우면서도
가슴 벅찬 과제가 우리들 앞에 남아 있다.
그동안 가슴 속에 응어리로 맺혀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풀리면서, 그것이
우리가 벌여나가고자 하는 정신운동의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굳게 믿는다.
이제 더 이상 고국을 등지고 떠난 뿌리 없는 이민이 아닌, 세계 속에서 한몫을
충실하게 담당하는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기억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이 아버지의 나라를 자랑스러워하고 스스로 한국인임을 기뻐하는
그런 날이 꼭 오리라고 믿는다.
자,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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