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변호사도 울고 싶다
오세훈
차례
머리말
내가 아는 오세훈
1 여성을 위한 법률 카페
무작정 혼인신고부터 해버린 애인
나도 여차하면 뺑소니
성관계 유지는 약혼?
충동구매 잘하는 여성도 살기 좋은 세상
결혼과 팔자
제가 대신 갚아야 하나요
3년간 별거하면 자동이혼입니까
뒤바뀐 구속
차 팔 때도 조심하지 않으면
천 원 대신 전세금을 날리는 사람들
주머니돈이 쌈지돈인 줄 알았는데
내용증명이라는 괴물
뺨 맞고 해고당하고
2 서초동에서 본 인생살이
그렇게 묶여 있는 사람들--이인상
아들 죽인 살인자까지고 용서하며
자동차로 인한 날벼락
과거있는 아내는 개구리 팔자인가
모성 콤플렉스, 그리고 로맨티스트
이혼만으로는 억울하다!
간통한 여자는 맨손으로 쫓겨난다?
칠순 할머니의 이혼 결심
상속이 남기는 슬픈 이야기
1. 전부 쓰고 죽을 자신이 없으면
2. 정신 차리지 않으면 빚도 상속된다
3. 억울한 상속인, 횡재한 상속인
법조부조리와 변호사의 올바른 이용법
3 가끔은 변호사도 울고 싶다
내가 울고 싶을 때
하느님, 지운 죄만큼만 벌받게 하소서!
당직변호사제도, 마음껏 활용하세요
어느 날의 대화
인신구속 수사에 희생된 여고생
애숭이 변호사의 첫승리, '피고인은 무죄'
'피고' 인가, '피고인'인가
황금거위 이야기
환경에 미친 이상한 사람들
콩비지 한사발과 연수원 낙제생
환상 만들기--CF 촬연기--
법이라는 것, 방송이라는 것
체험, 삶의 현장
아내, 그리고 나
해장국집과 법률사무소
딸아이의 반장 선거
나의 어머니 아버지
신세대 여성들이여!
1 여성을 위한 법률 카페
무작정 혼인신고부터 해버린 애인
A양은 지금 죽고 싶은 심정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문서
위조^5,23^동행사, 공정증서원본 불실기재^5,23^동행사 등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죄명으로 고소를 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A양은 번듯한 집안의 외동딸이다. 명문 E여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여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미모의 아가씨이기도
하다.
그녀에게는 무려 3년간을 사귀어온 남자친구 B가 있었다. 대학
2학년 때 소개팅에서 알게 되어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며 애정을
확인해 온 사이지만, B가 아직은 군대도 가야 하고 직장도 갖지
못한 대학원생이라는 것이 결혼조건으로는 조금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을 결심한 두 남녀는 이제 양가 부모에게 서로를
소개해 드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먼저 A양의 부모에게
인사를 드리기로 했다. 예상대로 A양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쳤다.
어느 정도 생각은 했지만 부모님 반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경했다.
아직 사회적으로 기반을 잡지 못한 것도 핸디캡이지만, 그보다는
홀어머니에 외아들이라는 것이 더욱더 결정적인 이유였다. 생각보다
심각한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자 두 사람은 몹시 당황했다. 거의
매일 만나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고, 부모님의 간곡한 설득과 애원이 계속되자 A양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다급해진 것은 B였다. 결혼을 몇 년 미루자는 A양의 제의에
B군은 몹시도 심각하고 초조해졌다. 몇 년 지난다고 홀어머니에
외아들이라는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번에 말이 나온 김에 결론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생각이 한번 과격해지면 걷잡을 수 없는 것인가! B군은
결국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혼인신고'였고, 이를 행동으로 옮겨 일방적으로 혼인신고를 해버린
것이다. A양에게 상의하면 펄쩍 뛸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한 B는
혼자 몰래 혼인신고를 해버렸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 치기라는
식으로.
한 달 뒤 우연히 호적을 떼보게 된 A양의 아버지는 망연자실, 넋을
잃었다. 멀쩡한 딸 자식이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 날벼락을
어찌한단 말인가.
A양 아버지가 고심 끝에 나를 찾아와 상담을 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 사이에 혼인에
대한 합의가 없었음을 이유로 하여 혼인무효재판을 하고,
승소판결을 받아 이를 근거로 호적에서 지우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통상의 호적 정정은 지우개로 지우듯 결혼 사실이 완전 무결하게
깨끗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서류상으로는 혼인을 했다가 이 혼인이 무료가 되어 정정된 것으로
기재가 되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기혼녀로서의 과거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불합리하다. 어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생면부지의 여자를 정해서 일방적으로
혼인신고를 했는데도 그 고통을 여자 쪽에서만 져야 한다면 보통
억울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법원은 이런 특별한 사유를 위해 방법을 마련해 놓았다.
호적 정정 신청을 할 때 남자 쪽의 범죄행위로 인한 결과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서면을 첨부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호적을
아예 다시 만들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것을 '호적재제신청'이라고 한다.
이렇게 요건을 까다롭게 해놓은 이유는, 만약 이렇게 엄격하지
않으면 이 제도를 악용해서 이혼하는 사람들도 당사자들끼리 미리
입을 맞추어서 혼인무효판결을 받아서 호적을 깨끗하게 조작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해결방법이 있다는 소리에 부모님의 얼굴은 환하게
변했지만, A양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남자의 범죄행위를 입증할
서류란 '형사처벌을 받은 판결문'이나 '검사의 기소유예처분
결정문' 등을 말하는데, 이것을 갖추려면 B군을 고소해야 한다는
결론 아닌가?
혼인무효소송을 하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닌데, 게다가 애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벌까지 받게 해야 된다니!
만약 검찰에서 용서받지 못하고 전과라도 남게 되면 이 사람의
앞길은 어떻게 될 것인가? 더구나 사문서 위조^5,23^동행사,
공정증서원본 불실기재^5,23^동행사라는 죄명이니.
이러한 죄는 취직에도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
틀림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A양은 참으로 난감했다. 이런
것을 진퇴양난이라 하는가. 남자친구의 장래를 생각하자니 자신과
부모님의 체면이 말이 아니고, 부모님의 말씀을 따르자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못할 짓이었다.
며칠 지난 뒤, A양과 어머님이 함께 나를 찾아왔다.
A양은 어떤 결정을 했을까? A양의 선택은 결국 B군과의
결혼이었고,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도 성공한 모양이었다.
모든 법적인 조치를 포기하면서 A양 어머니가 한 마지막말이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아팠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더니... 꼭 딸을 강도당한 기분입니다.
그래 너도 나중에 꼭 너 같은 딸 하나만 낳아서 겪어봐라. 이
웬수야."
나도 여차하면 뺑소니
K양은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하여 늘 찾아가던 학생 집에 가다가
자동차 사이드 미러로 지나가던 국민학생을 툭 건드리게 되었다.
친구와의 장난에만 정신을 쏟으며 걷던 아이가 갑자기 차 쪽으로
다가서는 것을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다.
우선 넘어져서 울고 있는 아이를 일으켜주려고 황급히 내려 보니
아이의 코에서는 피가 나고 있지 않은가. 코피를 닦아주고 차에
태워서 아이의 집까지 데려다주며 몇 번이고 "괜찮냐?"고
되물었지만, 아이는 금세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멀쩡한
표정이었다. 안심이 된 K양은 아이를 집앞에 내려주고 원래의
목적지로 향했다.
이 일을 새까맣게 잊고 있던 며칠 뒤,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다친 아이의 동네 가게 아저씨가 혹시나 하고 차량 번호를
적어놓았는데, 아이가 몇 시간 지난 후부터 코가 아프다고 하자
부모가 병원에 데리고 갔다오던 중에 동네 아저씨로부터 차량
번호를 건네받아서는 경찰에 신고를 하였다는 것이다.
아이는 코뼈에 금이 가서 전치 4주 진단을 받았고, K양은
구속되었다. 죄명은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가법)
위반(도주차량)!' 쉬운 말로 '뺑소니' 였다.
K양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왜 뺑소니란 말인가. 평소 뺑소니
차량 이야기가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때마다 그렇게 분개해 왔는데,
내가 바로 그 뺑소니 운전사란 말인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만약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더라면
어땠을까? 또 연락처만이라도 적어주었더라면?
우리 '특가법' 은 교통사고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사망에 이르게
하고도 구호조치를 하지 않고 도망한 운전자를 매우 무거운 형벌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때 제대로 '구호조치'를 했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다음의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로
사상자를 병원에 데려가서 상처를 확인하고 치료를 해야 하며,
둘째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연락처를 남겨놓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K양이 아이를 병원에는 데려갔더라도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다면 결과는 비슷했을 것이다. 병원에 가지 않고 연락처만
남겼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두 가지 조치 중 한가지라도
했다면 어느 정도 성의를 다했으므로 구속까지는 면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덧붙이자면 아무리 작은 사고라도 경찰서에
신고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도로교통법' 이라는
법에는 신고를 안한 것도 처벌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가벼운 사고 장면을 가끔씩 목격한다.
며칠전에도 커브 길에서 오토바이를 건드려 넘어뜨린 포터 운전자를
보았는데, 역시 괜찮냐고만 물은 후 별다른 조치 없이 각자 제 갈
길로 가는 것이었다. 만약 그 오토바이를 탄 청년에게 생각지도
않은 후유증이 나타나서 신고를 하게 되면 그 포터 운전자 역시
K양과 비슷한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K양도 억울하지만 며칠전 변론했던 W씨는 아예 대책이 없는
사례였다.
시속 60킬로미터 정도로 달리던 W씨는 무단횡단을 하던 사람을
발견하고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미처 피하지 못하고 사람을 치게
되었다. 순간 W씨는 망설이기 시작했다.
'술을 먹었는데...' 하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앞이 캄캄해 졌다.
운전하기에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술을 아주 조금 마셨지만
사람이 다친 이상 아무리 경미한 부상이라도 음주운전이 겹쳐져
일단 구속될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퍼뜩 고개를 든 것이다.
몇 초간의 갈등 끝에 양심을 되찾은 W씨가 차를 돌리려고 마음먹고
속도를 줄이는데, 그 순간 뒤쫓아온 택시기사에 의해 정지당하고는
그자리에서 잡히게 되었다.
이제 그는 꼼짝없는 뺑소니 운전사! 망설이는 10여 초간에 차는
이미 200미터 이상을 지나왔으니, 돌아가려 했다는 주장은 공허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가장 흔한 뺑소니 사례다. 사고가 나면 바로 정차해야
한다.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리고 상처가 가벼워 보여도, 다친
사람이 괜찮다고 우겨도, 병원에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 그리고
연락처를 알려준 후 경찰에 신고도 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명심하라. 엄청난 누명을 쓰게 된 대부분의
사람들도 다 그렇게 쉽게 생각했던 덕에 뺑소니 운전사가 되었음을.
성관계 유지는 약혼?
다음에 옮긴 글은 95년 8월 8일자 모일간지에 실린 <성관계 유지
때는 약혼 해당> <장래약속 없었어도 혼인의사로 간주, 법원 '결혼
안해 주면 위자료 지급해야'>라는 제목의 기사다.
결혼에 대한 확약 없이 '사랑한다' 는 고백과 함께 지속적인
성관계를 가진 경우도 법적으로 약혼이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명문 K대를 졸업한 후 무역회사 여사무원으로 일하던 B(26세)씨를
만난 것은 91년 10월.
대학로를 혼자 걷던 A씨가 신세대식 연애법인 '헌팅' 을 함으로써
B씨와의 첫 만남이 이뤄졌다. B씨는 A씨의 세련된 매너에 반해
교제를 시작, 두 사람은 급속하게 가까워졌고 만난 지 한 달 만에
둘은 부산 해운대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이후 두 사람은
자연스레 자주 관계를 가졌고 B씨는 두 차례의 임신중절까지 했다.
A씨는 그러나 결혼에 대해선 단 한 번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채 '사랑한다' '좋아한다' 는 말만 되풀이했다.
만난 지 2년째 되던 93년 겨울, A씨는 B씨의 불우한 가정환경과
학력 차이 등을 문제삼으며 "사랑하지만 부모님 반대로 결혼할 수
없다." 고 결별을 선언하고 나섰다. B씨는 이에 완강하게 거부의
뜻을 나타냈으나 A씨는 맞선을 통해 만난 명문여대 출신의
C씨(24세)와 약혼식을 올렸다.
B씨는 결국 A씨를 상대로 7천만 원의 위자료 청구소송을 법원에
냈다. 이에 서울가정법원 가사3부(재판장 이태운 부장판사)는 7일
"피고 A씨가 교제기간중 사랑 고백과 지속적인 성관계를 통해
원고에게 간접^5,23^묵시적으로 혼인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며 "이것만으로도 약혼 성립이 인정되는 만큼 이를 파기한
피고에게 위자료 지급 책임이 있다." 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원고B씨도 결혼에 대한 확약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성관계를 허락해 임신중절 등으로 피해를 확대시킨 잘못이 있다."
며 "원고의 잘못으로 감안해 위자료로 2,000만 원만 인정한." 고
덧붙였다.
이 기사를 읽고 나니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기존의 법해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판결이었기 때문이다. 이 판례가 사실이라면
'혼전 성관계 후 절교 = 약혼 파기 = 위자료' 라는 등식이
성립되는데, '사랑한다면 혼전관계도 무방하다' 는 요즘 젊은이들의
성의식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가 수시로 보도되는 현실에 비추어볼
때 그 파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우려도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호색한들이야 "같이 즐길 땐 언제고..., 그나저나 큰일났네." 하며
코가 석 자는 빠졌을 테고, 대부분의 우리나라 여자들은
"플레이보이들 맛 좀 봐라. 아이고 고소하다." 며 입방아를 찧을
일이었다.
사실 약혼 성립에 무슨 특별한 절차나 형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실된 의사로 상호간에 잘래 부부가 될 것을 약속함으로써
비로소 약혼은 성립되며, 따라서 혼인에 관한 의사 표시의 합치가
없는 상태에서의 육체관계만으로는 약혼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기존의 설명이었다.
이해하기 쉽도록 이와 아주 유사한 사례를 예로 든 한기찬
변호사님의 저서 (재미있는 법률여행)의 해당부분을 옮겨본다.
직장 동료인 유들한 군과 최진이 양은 같은 부서에 근무하다가
서로 좋아하게 되어 가끔 잠자리를 같이했다. 이로 인해 최진이
양은 한 번의 임신중절도 해야 했다.
이런 관계가 2년 동안 계속된 유들한 군은 집안에서 장가가라는
성화에 못 이겨 다른 여자와 선을 보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진이 양은 유들한 군에게 "어떻게 할 거냐?" 고 따졌다. 그러나
유들한 군은 태연했다. "서로 좋아서 즐겼을 뿐인데, 왜 남의 일에
간섭하느냐?" 고 하면서 말이다. 최진이 양은 유들한 군과의 관계가
결혼을 전제로 한 것이었고, 때문에 좋은 혼처가 있어도
마다했는데...
'유들한 군과 최진이 양은 약혼하였다.' 고 볼 수 있는가?
1) 볼 수 없다. 간헐적인 성교관계가 있다고 해도 혼인을 예약한
것은 아니다.
2) 볼 수 있다. 둘의 관계는 약혼을 전제로 한 것이다.
3) 두 사람의 진의의 해석에 달렸는데, 유들한 군의 태도로 보아
약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정답은 1). 거듭 강조하지만, 약혼은 '장래 혼인하기로 하는
당사자간의 합의(계약)' 이다. ...중략...이 합의는 자유롭고
진지하고 성실한 것이어야 하며, 명시적이어야 함은 약혼이나
혼인의 사회적 의미와 중대성에 비추어볼 때 당연한 요청이다.
그런데 '성인 남녀가 서로 좋아서 2년 동안이나 간헐적으로
잠자리를 같이한 관계' 를 약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약혼의 본질과
건전한 사회통념에 비추어볼 때 약혼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의 교제기간 중에 일방은 혼인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일방이 동의하지 않은 이상, 그래서 쌍방이 합의에 도달하지
않은 이상, 비록 육체관계가 있었거나 심지어는 아이를 출산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법률상 유효한 약혼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도 최진이 양과 유들한 군의 관계는 '약혼'
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해답인 것이다. 그러면 약혼으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진이 양은 유들한 군이 자기를
농락했다고 하여 가령 손해배상책임을 지울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질문도 대답은 부정적이라고 해야겠다. 약혼에 이르지
않은 상태에서 남녀간의 육체관계가 존재하는 경우,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 책임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상대방에게
법률상 책임을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약혼으로 볼 수 없다? 그러면 일단 약혼한 사이에 육체관계를
가지게 되었는데 결국 남자의 일방적인 파혼으로 결혼을 못하게 된
경우, 약혼 부당파기에 대한 위자료 외에 정조 상실의 대가를
별도의 위자료로 청구할 수 있을까?
이것 역시 대답은 '노(No)'다. 약혼을 부당하게 파기당한데 대한
위자료는 물론 인정되지만, 그러나 당초부터 결혼할 생각도 없이
약혼이라는 방법을 이용하여 육체관계를 맺은 경우라면 모르되,
약혼기간 중에 쌍방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육체 관계가 이루어진
경우라면 설령 결과적으로 파혼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정조 침해로
인한 위자료 운운은 곤란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면 앞에서 예시했던 신문에 난 판결은 무엇인가? 그 정도로는
약혼이라고 볼 수도 없고 정조 침해에 대한 위자료도 불가능하다면
이 판결은 명백히 잘못된 것 아닌가?
이런 경우, 일단 판결문을 확인해 보아야 한다. 한정된 지면에
기사를 싣다 보면 본의 아니게 생략과 과장을 하게 되고, 결국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로 엄청난 오해를 낳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판결문을 구해 읽어보니 역시 마음이 여자 쪽으로 기울게 되는
요소가 적지 않았다. 자주 성관계를 가진 정도를 넘어서서 남자의
주거지 등에서 일주일에 1, 2회씩은 거의 정기적으로 관계를
가졌는데 3회의 임신 때마다 중절수술을 받았으며, 결혼을
명시적으로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의 결혼식에 함께 참석했을
때 "우리도 결혼하지." 라고 지나가는 말투로 몇번 이야기함으로써
여자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졀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한
면이 있었다.
더구나 이별을 통고받은 후 마지막 관계를 가지던 날 B씨가 임신
사실을 알린 것도, 아기를 낳으면 마음이 돌아설 것이라 생각하고
출산을 결행한 것도 모두 허사였다. 설상가상으로 8개월 후 아이는
폐렴으로 죽었고.
모르긴 몰라도 담당 재판부도 엄청난 고민을 했으리라. 기존의
이론에 충실하자니 여자가 불쌍하고, 그렇다고 모른 척 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고.
그래서 판결문에는 이렇게 어렵고 복잡하게 적고 있었다.
피고는 원고에게 위와 같은 약 2년에 걸친 일련의 행동 및
계속되는 성적 교섭에 의하여 간접적이고 묵시적이나마 원고와 혼인
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여 원고에게 약혼의 성립에 대한 신뢰를
주었다고 할 것이므로 이러한 원고의 신뢰보호를 위하여
원^5,23^피고 사이에는 약혼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상당하고,
피고는 원고와 교제를 시작할 당시 이미 알고 있었던 원고의
가정환경 및 학력을 핑계삼아 일방적으로 원고와 별거를
선언함으로써 위 약혼을 부당하게 파기하였다 할 것이며, 따라서
피고는 원고에게 위 약혼이 부당하게 파기됨으로써 원고가 입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다.
분명 기존의 법이론에 비추어보면 다소 무리한 판결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구체적인 사정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마음이 흔들리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다.
아마도 이 판결을 보고 많은 학자나 법률가들은 '목적주의에
입각한 무리한 판결' 이라는 비난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그러니까 사람이 재판하지. 컴퓨터에 사례를
입력시켜서 결론내도 될 일을...' 하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피 끓는 청춘남녀들이여!
신문기사 제목처럼 '성관계 유지 = 약혼' 이라는 등식이 쉽게
성립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 아직 고등법원, 대법원의 판결이
남았으니 법원의 견해가 최종적으로 결정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설사 대법원의 결론이 똑같이 나더라도 내 인생도 내 사랑도 내가
책임질 일이다.
충동구매 잘하는 여성도 살기 좋은 세상
우리 처제에게는 '혜인' 이라는 네 살배기 딸이 있다. 가만히 보면
처제가 살림은 기가 막히게 알뜰히 하는데, 자식이 뭔지 혜인이
교육에 들이는 돈만은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써댄다. 요즈음
미시족의 공통된 특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며칠전, 그런 처제가 심각하게 의논을 해왔다.
"형부, 일을 저질렀어요. 세일즈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지능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교재를 권하길래 욕심이 나서 바로 신청 했는데..."
"혜인이 영재교육 시키고 있잖아?"
"그래도 더 좋다길래. 그런데 막상 책을 자세히 보니 내용도
비슷한 것 같고, 월 6만 원씩 1년 동안이나 내야 할 걸 생각하니
후회막급이더라구요.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더니 절대 안된대요.
이거 물릴 수 없나요?"
충동구매! 화술 좋은 책 외판원이 찾아와 옆집에 아무개 엄마도
샀다면서 경쟁심과 교육열을 슬며시 자극하면 웬만한 엄마는
거절하기 힘들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 아이를 영재로
만들어준다는데.
더구나 할부로 구입해도 특별히 현금가로 준다는 등 너스레를 떨면
대개는 넘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돈 낼 때가 되면 반드시
후회한다는 것! 그렇다면 무슨 방법이 없는가 알아보자.
근래 들어 각종 상품에 대한 방문판매와 통신판매 들이 부쩍 늘고
있다. 그에 따른 피해 사례도 따라서 늘어나자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 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이 법은 철저히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소비자 편이다.
이 법에 의하면 먼저 판매자는 자신의 주소^5,23^전화번호 등의
연락처와 상품내용^5,23^가격 등을 상세히 적은 계약서를
소비자에게 반드시 주어야 한다. 이를 위반하면 꼼짝없이 처벌을
받는다.
소비자는 그 계약서를 받은 날로부터 10일 내, 만약 계약서를 받은
후에 물건을 받았다면 물건을 받은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물릴 수
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청약을 철회한다' 고 한다. 물론
소비자가 물건을 망가뜨린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청약을 철회하려면 내용증명으로 하면 되는데, 내용증명이라는
것이 별 게 아니다. 계약서에 써 있는 주소로 '안 사겠습니다' 고
적은 편지를 보내되, 우체국에 가서 '내용증명' 이라고 말하면
요령을 알려준다. 보통의 경우에는 편지가 상대방에게 도달해야
비로소 효력을 갖는데, 이 경우에는 발송만 하면 계약이 없었던
것으로 되니 그 얼마나 소비자 편인가!
계약이 없었던 것으로 되면 물건과 대금을 서로 돌려주어야
하는데, 판매자가 물건을 받지 않으려고 하거나 동시에 환불해 주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다. 이때 반환에 드는 비용이 있으면 판매자가
부담하고, 게다가 판매자는 구매자에게 위약금이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거의 환상적인 소비자 우선의 법이 아닐 수 없다.
10일이 지난 때에도 당초 이야기했던 성능에 미치지 못하거나 심한
바가지를 쓴 경우 등 계약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역시 계약을
깨버릴 수 있다.
요즘 신용카드로 대금을 지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철회하고
싶어도 망설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알고 보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판매자는 물건을 돌려받은 후 지체없이 카드 회사에 상품대금의
청구를 정지하거나 취소하라고 요청해야 되기 때문이다. 판매자가
이미 지급받은 대금이 있으면 당연히 카드 회사에 반환해야 하고,
위반하면 역시 처벌을 받는다.
충동구매 잘하는 여성도 참 살기 좋은 세상이다.
결혼과 팔자
몇 년 전부터 유학이 붐을 이루면서 유학생과의 결혼도 부쩍
늘었다. 그런데 이러한 결혼이 너무도 큰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조급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한 사람과 만나 몇 번 데이트하고
헤어졌다가 양가의 의견이 합치되면 그 다음 방학을 이용하여 다시
와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요즘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이런
결혼이라고 모두 잘못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평생 함께 할
배우자를 고르는 일에는 조금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M양도 이런 결혼의 희생양이다. 양가가 너무 흡족해 하는 화려한
결혼식을 뒤로 하고 신혼여행도 생략한 채로 바로 신랑이 유학중인
보스턴으로 떠났던 M양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커다란 마음의
상처만 간직한 채 되돌아와야 했다.
미국의 어느 곳이나 우리 유학생들로 만원이고, 그러니 어떤
사람의 생활태도나 행동거지에 관한 평가는 거의 비밀일 수가
없다고 한다. M양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에서 국민학교 동창을
만났고 그녀로부터 남편이 소문난 플레이보이였다는 말과 함께 동거
경력까지 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자신을 만나기 전의 일이라고 자위하면서 무시하려 했지만,
하필이면 그 말을 듣고 가까스로 감정을 수습하고 있던 날 밤에
과거의 여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자 결국 언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서로에게 신뢰가 생길 여유와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두 사람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말들을
내뱉게 되었고, 결국 술을 먹기 시작한 남자는 폭력을 쓰고 말았다.
여자는 친정집에 울며 전화하고, 급기야 어머니가 날아가고.
장모에게도 해선 안될 심한 말들을 내뱉고, 이에 충격받은 장모는
딸을 데리고 귀국하고.
결국 이혼녀라고 하기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 앳된 이혼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행히 혼인신고는 아직 하기도 전이었다.
그러므로 아직 법이 말하는 정식 혼인은 아닌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약혼의 단계는 이미 지난 상태이니 이런 경우를 굳이 이름
붙이자면 이른바 '사실혼' 이라고 하는데, 이런 때는 어떤 보호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을 M양 쪽에서 알고 싶어했다. 정식으로
혼인한 상태에서는 합의나 재판에 의하지 않으면 결혼상태를 해소할
수 없지만, 사실혼은 자유롭게 일방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잘못한 쪽은 상대방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해줄 의무가 생긴다. 대개 책임이 있는 쪽이
사실혼관계를 부당하게 깨어버리는 경우가 많겠지만, 상대방의
부당한 행위로 말미암아 더 이상 사실혼관계의 지속을 원하지 않는
쪽에서 사실혼을 해소하면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이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물론 과거에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것은 법적인 책임 사유가 안되지만, 그 이후의 폭행과
장모에 대한 욕설은 분명 잘못이기 때문에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이런 때의 손해배상에는 결혼비용 등의 재산상의 손해와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가 포함되는데, 위자료의 액수는 잘못한 정도,
당사자의 사회적 지위, 재산, 동거기간 등 여러 사정을 참작하여
결정하므로 M양은 그다지 많은 액수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 경우 예물을 반환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일단
사실혼이 성립하였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부부공동체의 공동
생활을 하였다고 인정될 수 없는 단시일 내에 그 사실혼관계가
깨어졌고, 따라서 그 결혼식은 무의미하게 되어 그에 소요된
비용이나 예물의 교부도 쓸데없는 지출이라고 보여지는 경우에
잘못이 있는 상대방은 그 결혼에 소요된 예물을 반환하고
결혼비용금 상당의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안과는 달리 어느 정도 혼인관계가 지속되다가 파경에 이른
경우에는 혼인비용의 청구나 예물반환의 청구는 어려우며, 위자료
청구만 가능하다.
또한 약혼관계에서 문제가 생겨서 혼인이 깨어진 경우에도 잘못이
있는 상대방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다만 잘못이
있는 쪽은 자기가 받은 물건을 당연히 반환해야 하지만 상대방에게
예물의 반환을 청구할 수는 없다.
이 정도가 결혼식을 전후하여 사고가 난 경우에 피해자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인데, 설명을 해주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모두 허탈하긴
마찬가지인 듯싶다. 웬만한 상담은 결론을 내릴 때 쯤에는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법인데, 이런 상담을 하고 나면 오후 내내 마음이
찜찜하다. 혼인신고를 안했다니까 호적엔 나타나지 않겠지만, 친척
친구 다 불러놓고 결혼식을 했으니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고.
누굴 탓하랴. 팔자? 그러나 팔자 탓만을 하기에는 무언가 미진한
듯하다.
제가 대신 갚아야 하나요
스무 살을 갓 넘어 보이는 아가씨가 상담을 하겠다며 찾아왔다.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신용카드 회사에서 날아온 독촉장을 내밀었다.
"변호사님, 이거 제가 갚아야 하나요?"
"신용카드 내는 데 친구 보증을 섰군요?"
"친구도 아니에요. 저는 요 옆 백화점에 근무하는데요, 작년에
입사동기들이 다 함께 신용카드를 냈어요. 그때 보증서가
필요하다고 해서 서로 옆에 있는 동료들끼리 도장 찍어준 일은
있었는데..."
"갚아야 합니다."
"..."
나의 망설임 없는 잔인한 답변에 기가 질린 듯 잠시 말을 못하던
이 친구, 잠시 정신을 수습하는 듯하더니 울상이 되었다.
"무슨 방법이 없나요? 정말 억울해요. 그 친구는 카드 발급 받은
후 두 달 뒤에 바로 직장을 그만두었는데, 세상에 이렇게 많이 쓸
줄은 몰랐어요. 아니, 보증섰다는 사실도 까먹고 있었는데..."
몇 달 밀린 신용카드 액수를 모두 합해 보니 외상 할부금에
현금서비스까지 거의 300만 원 가까이나 되었다.
이런 일은 의외로 흔히 있는 일이다. 보나마나 이 아가씨는
'연대보증' 을 섰을 테고, 연대보증이라고 하는 것은 돈을 빌리거나
외상으로 물건을 산 사람이 제때 못 갚으면 대신 갚겠다는 약속인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대보증이란 원금뿐만
아니라 이자에 손해배상까지 다 물겠다는 무서운 약속인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중대한 '법률행위' 를 하면서 사람들은 왜 그
서류조차 제대로 읽지 않는 것일까. 하긴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신용카드를 만들면서 함께 신청한 친구들끼리 아무 생각
없이 서로 돌아가며 보증을 섰던 기억이 난다. 신청서 쓰는 데
정신이 팔려서 도장을 찍으라고 하면 어떤 서류에든 마구 찍었던 것
같다.
이 아가씨를 도와줄 방법은 무엇일까, 무슨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 친구가 쓴 금액 내용을 확인해 보았나요?"
"네, 카드 회사에 가서 알아보았어요. 어떤 달은 한도액을
초과해서 쓴 달도 있었어요."
카드 회사마다 그리고 카드 소유자마다 한도액이 조금씩 다르게
정해져 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자기 한도액을 넘게 사용한 달이 두
번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혹시 이번에 연체된 것 외에 그전에도 연체를 해서
거래정지 되거나 한 적은 없던가요?"
"있어요. 6개월 전에 거래정지 되었다가 모두 다 갚고 다시
시작했었대요."
"그때 그런 사실을 연락받은 적은 없죠?"
"그럼요, 이번에 제가 갚아야 한다고 연락이 오면서 처음 안
거예요. 저번에 알았으면 가만있었겠어요?"
됐다. 그렇다면 방법은 있다. 이렇게 문제가 있는 카드 소유자에
대해서 카드 이용계약을 해제하지 않고, 더구나 그 거래정지 사실을
연대보증인에게 알려주지도 않은 경우에는 카드회사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보아서 갚을 금액을 깎아주는 판례가 있었다.
경우에 따라 20퍼센트를 깎아준 적도 있고, 많을 때는 절반까지도
깎아준 사례가 있다. 게다가 외상구입 한도액과 현금서비스 한도액
이상을 넘어서 사용한 달의 액수는 한도액의 합산액만 갚으면 된다.
거기까지만 보증을 선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정을 종합해 보니 이 아가씨의 경우에도 반 정도는 깎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거기에 월 사용 한도액 초과 부분을 빼니 금액이
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다행히도 이 아가씨는 이렇게 액수를 줄일 방법이 있지만, 보통
전액을 꼼짝없이 물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모름지기 도장은 함부로 찍을 일이 아니다.
3년간 별거하면 자동이혼입니까
상담하러 오는 분들 중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더 이상 마음이 맞지 않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참지 못해 별거를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몇 년이 흘렀다. 이제 호적을
정리하고 싶은데 누군가로부터 들으니 3년 정도 별거하면 법이
자동이혼을 인정해 준다고 하더라. 어떻게 하면 호적이
정리되느냐?"
어디서 이런 속설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자동이혼' 이라는 것은
없다. 이혼에는 '합의이혼' 과 '재판상 이혼',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양 당사자 사이에 이혼의사와 합의조건 즉, 위자료나
재산분할, 아이들의 양육문제 등에 대하여 합의가 이루어지면 그
합의에 의하여 이혼할 수 있다. 이때는 가정법원에 가서
협의이혼의사확인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정해준 날짜에 판사
앞에 가서 확인 받은 후 본적지에 신고하면 이혼절차가 마무리된다.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할 수 없이 재판을 해야
하는데, 이때는 이혼을 요구하는 쪽에서 상대방의 잘못을 입증해야
이길 수 있다(이를 '유책주의' 라 한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때리거나 욕설을 하는 등 학대를 하거나, 바람을 피우는 것
등등인데, 법이 정해 놓은 사유 중에는 '배우자의 생사가 3년 이상
분명하지 않을 경우' 도 있다. 바로 이것이 와전되어 '자동이혼'
운운의 말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여하튼 법적으로 명확히 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장기간 별거하는
것은 여러 모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별거 당시에는 분명히
남편의 잘못으로 헤어졌지만 별거 후 남자가 생겼다고 가정했을 때
사후의 이혼재판에서 오히려 책임을 뒤집어쓸 수도 있고, 또 세월이
흐르면 남편의 재산 상태에 변동이 와도 이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어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상대방의 잘못을 입증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발생한다.
법률가의 입장에서는 별거란 상호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고, 당장 이혼을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
미봉책으로 시작하는 별거는 더 큰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이왕 이혼사유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으니 재판상 이혼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자.
위에서 본 법에서 정해진 이혼사유 외에도 정도가 지나친 광신,
알콜중독이나 마약중독, 지나친 도박, 이유없이 장기간 계속되는
성교 거부, 부당한 피임 등도 정도에 따라 재판상의 이혼사유가
된다. 따라서 상대방에게 이러한 잘못이 있다면 설혹 상대방이
이혼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혼을 청구하면서 재산의 분할과 위자료
등을 청구할 수 있다.
어느 쪽에게도 그다지 뚜렷한 잘못이 있다고 할 수 없는데 굳이
한쪽이 이혼을 원한다면 이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배우자 한쪽에게
잘못이 있어서 그에 따른 책임이 인정되는 경우에만 이혼이
이루어지는 이른바 '유책주의' 를 원칙으로 하므로 단순한
'애정상실' 이나 '성격차이' 를 원인으로 이혼을 청구한다면
법원에서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물론 그 정도가 심하고 다른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에는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나,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양육권이나 재산분배 문제에 관해서도 서로가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다면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다행히 그러한 엉거주춤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양 당사자나
가족들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식되면서 점차
법원의 태도가 변하고 있는 추세이므로, 도저히 못 견딜 상황이라면
과감히 소송을 제기하여 다투어보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그러나 만약 이혼을 생각하는 부부가 있다면 나의 조언을 듣기
바란다. 이 알쏭달쏭하고도 복잡한 이혼절차를 몸소 체험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반성을 거울 앞에서 반드시 해보라고.
관계 회복을 위해 나는 스스로 얼마만큼의 노력을 기울였는가.
가능한 방법은 모두 동원해 보았는가. 또 그 동안 나는 참을 만큼
참아 보았는가.
이러한 점들은 실제의 이혼재판에서 잘잘못을 가리는 데도 중요한
판단 요소가 되곤 한다.
뒤바뀐 구속
간통죄를 없애버리느냐, 그대로 두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한때
대단한 논쟁이 있었다. 개인의 애정생활에 법이 개입하는 것은
공권력의 과잉행사며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일이므로 간통죄는
폐지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과 혼인의 순결을 보장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며 아직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열세인 여성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유용한 제도이므로 없애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다가 결국 그대로 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사실 여권이 많이 신장되었다고는 하나 여성들이 아직 경제적으로
동등한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간통죄가 그나마
힘없는 여성의 권익을 지키는 데 기여하는 부분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대체적으로 잘된 결정이라고 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제도가 시행되는 모습을 보면 예상치 못한 면도 있어서 역시 법조문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사실 간통죄의 경우에 항상 남편은 가해자 그 아내는 피해자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갖가지 인간 군상들이 펼치는
파노라마는 상상 밖의 아이러니를 보여줄 때가 많다.
다음에 소개하는 두 가지의 사례를 통하여 실제로 법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소박한 기대를 져버리는지 살펴보자.
사례^5,23^1
김 여인은 이제 세 돌이 막 지난 딸을 가진 24세의 새댁이다.
그러나 말이 새댁이지 그 동안 받은 충격과 마음 고생으로 거의
탈진 상태에 빠져 있다. 남편과는 사내에서 연애를 하여 결혼에
이르렀는데, 연애시절이나 신혼기간의 남편은 더할 수 없이
다정다감한 사람이었고 자신을 무척이나 사랑해 주었다고 한다.
너무나 정도 많고 잘해 주던 그 사람이 딸을 출산할 무렵 직장을
옮기면서부터 새 여자에 빠지기 시작했다. 역시 새 직장에 함께
근무하던 여자와의 일이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쉽게 사랑에
빠지고 정을 주는 로맨티스트(?)였는가 보다. 눈치를 채고 가까스로
뒤를 밟아 두 남녀가 함께 있는 현장을 덥쳤더니 새 여자의 몸에
손을 댈까봐 미리 날뛰는 남편을 보면서 참으로 아연실색했다는 김
여인.
어떻게든 남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시부모님을 오시게 했더니, 그
여자가 유부남이면 사랑하면 안되느냐며 어찌나 당당하고 대차게
나오던지 시부모조차도 넋을 잃었단다. 시어머님은 "남편 때문에
한평생 속 끓이고 살았더니 이젠 자식까지 여자 문제로 속을
썩인다." 며 대성통곡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관계를 마무리짓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열흘 정도
지난 어느 날 남편이 행방불명 되어버렸다. 타고 나간 차도 그대로
둔 채 직장에도 한마디 말도 없이 그 여자와 사라져버린 것이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오리무중.
기다렸다. 아무래도 단시일에 해결될 문제도 아닌 듯하여 팔순이
넘은 시어머니께 아이를 맡겨가며 직장에 다니면서 참고 기다리길
2년여. 남들이 보기엔 바보스러워 보였지만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너무도 잘해 주던 좋은 사람이었기에,
그리고 그 여자의 사나운 성격 때문에 금방 싫증낼 것으로
믿었기에,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기에.
가끔 아이가 생겼다느니 둘째를 가질 거라느니 인내심을 시험하는
그 여자의 전화를 받았지만,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참았다. 김
여인을 흥분시켜 이혼소송을 하도록 유도하여 자신이 본처가
되려하는 술책임을 잘 알면서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어느 날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다.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호적등본을 떼어보니 그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호적에 올라 있었다. 주민등록도 이미 옮겨버린 후였고.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옮긴 주민등록을 추적해 보니,
주소만 옮겼을 뿐 사람은 흔적이 없었다. 그날 밤 그녀는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참담한 심정이 되어 한없이 울었다. 남편이 막노동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여자에
빠져 인생을 포기한 남편. 잠자는 아이를 보며 이제 결심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때 마침 전화가 왔다. 그 여자가 만날
것을 제안했다. 남편과 함께 나오겠다는 것이다. 처벌을 받든
소송을 하든, 빨리 마무리를 지으려는 속셈이 들여다보였다.
다음날 만나기 직전 이혼소송을 제기하고 두 사람을 간통죄로
고소했다. 마치 타인같이 아내에게 존대말을 써가며 이혼을
요구하던 얄미운 남편은 그렇게 해서 구속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그 여자에 대하여는 영장이 청구조차 되지
않았다. 너무 마음이 착하고 생각이 깊은 검사가 남녀가 모두
구속되면 1년 정도 된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여자는
불구속입건 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간통죄 존폐논의가 있은
후부터 간통에 대하여 관대해진 검찰의 분위기도 알게 모르게
한몫했으리라.
김 여인의 가슴은 지금 터질 듯이 아프다.
호적에 오른 그 여자의 딸아이 출생지를 추적해서 찾아낸 병원
의사로부터 여자의 몸에 예사롭지 않은 칼자국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짐작컨대 아마도 자해소동 등 그 동안
남편이 그 여자로부터 심하게 시달렸을 것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 여자는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는데, 남편은 갇혀
있으니...
어찌 이런 법이 있느냐고, 그 여자에게도 친정부모가 있는데 왜
아이를 돌보지 못하냐고, 단 하루라도 그 여자가 벌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울먹이는 김 여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참으로
민망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변호사가 남 구속시키는 일을 수임해 처리할 수도 없는
일이고, 재판부에 그 동안의 마음 고생을 잔잔하게 정리한 탄원서를
써 넣어보라는 맥빠진 충고나 할 밖에!
사례^5,23^2
서 여인은 7년 전에 남편을 잃었다. 다행히 큰 상점을 경영하던
남편이 남기고 간 적지 않은 재산으로 생활에 불편은 없었지만, 이
재산이 화근이었다. 남편이 생전에 거래하던 은행에 근무하던 어떤
남자가 젊어서 혼자가 된 서 여인의 재산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은행 돈을 횡령하여 방탕한 생활을 일삼고 돈 관계가 복잡했던 이
남자는 서 여인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대출에 편의를 봐주는 등
호의를 베푸는 척하더니 급전이 필요하다며 500만 원을 꾸었다가는
사흘 만에 600만 원을 갚고 다시 1,000만 원을 꾸었다가 이자를
잔뜩 붙여 금방 갚는 등 아주 매너 좋고 신용 있는 호남으로
처세했다.
이런 방법은 소위 제비족들이 큰 건을 하기 위해 낚시밥을 뿌릴 때
써먹는 전형적인 수법인데, 세상물정 모르는 서 여인으로서는 이런
무시무시한 세상사의 이면을 미처 알지 못했다. 오로지 든든한
재정전문가요 조언자인 이 듬직한 남자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고,
거래액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이제 적당한 시점이 되자 이 남자는 이성으로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인천의 동생에게서 돈을 받을 것이 있는데 그 돈을
받아서 빚을 갚겠다고 운을 뗀 후, 바다 구경도 하고 회도 좀 먹고
오자며 그곳까지 끌고 가서는 술을 잔뜩 먹여 겁탈을 해버렸다.
이렇게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일임을 꿈에도 모르는 서 여인은
사랑한다는 말에 넘어가 그후에도 몇 차례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의 처가 간통죄로 두 사람을 고소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겁을 한 서 여인! 어쨌거나 그녀는 간통한
여자였던 것이다. 망신스러웠지만 숨길 수만은 없어서 이제 막
혼사를 치른 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가게를 맡기고 몸을
피했다. 결국 그 남자만 간통과 횡령 등의 죄로 실형을 선고받고 약
1년 남짓 복역한 후 석방되었는데, 그 부인의 추적으로 숨어 지내던
서 여인이 최근 경찰에 잡히게 되었다.
그 남자는 처음 수사받을 때 마치 처벌을 바라는 것처럼 간통
부분을 상세히 자백하는 진술을 하여 서 여인이 빠져 나갈 길을
봉쇄해 놓았고, 과거의 이 진술을 근거로 서 여인은 붙잡히자마자
변명할 틈도 없이 구속되어 버렸다.
전후 사정으로 보아 엄청난 빚에 쫓기게 되자 아내와 짜고 서
여인을 간통으로 구속시켜 놓고 아내로 하여금 거액의 합의금을
받아내게 하려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추측일 뿐 입증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간통죄로
고소되었는데 수사에 응하지 않고 도망가자 자연히
기소중지(피의자가 잡힐 때까지 일단 보류상태로 해두는 조치)가
되어 있었고, 그런 상태에서 사람이 붙잡히니 당연히 구속해 버린
것이다.
사실 서 여인이 고소당한 직후에 법률전문가에게 상의를 했더라면
자초지종을 밝혀서 오히려 피해자라는 것을 증명한 후 구속은 면할
수도 있었는데, 도망가는 바람에 일이 더욱 망가진 것이다.
이제 나는 서 여인이 간통에 이른 경위를 밝혀서 풀어내야 할
판이다. 그 남자와의 돈거래 등을 증명해서 저간의 사정을 밝히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많은 세월이 흘렀으므로 쉬울 것
같지도 않다. 이제 믿어줄지도 의문이려니와 밝혀내는 동안 고생은
고생대로 해야 할 터이다. 석방된 그 남자는 찾을 길이 막연하고...
두 사례 모두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일리가 있는 불구속과 구속인데,
비슷한 시기에 사건을 접한 나로서는 뒤바뀌었으면 좋았으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잘못된 것을 사후에라도 바로잡으라고
변호사가 있고 판사도 있는 것이고, 또 이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시간이 필요하고 판단이 필요하고, 그리고 그 동안 마음
졸이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두 사건 모두 시간이 흐르면 사필귀정으로 마무리되리라고 믿고
싶지만 어째 개운치는 않다. 법이 불완전하다는 건 그렇다치고 왜
우리는 서로 상처 주고 속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차 팔 때도 조심하지 않으면
한 아주머니가 법원에서 보내왔다는 소장과 변론기일 소환장이라는
것을 함께 들고서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찾아왔다.
"남편 볼 면목이 없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왜요?"
"두 달 전에 바깥양반이 3년 정도 탄 중고 소형차를 차 시장에
내다 팔고 조금 큰 차를 사겠다고 하더라구요. 마침 중고차를
사야겠다고 말했던 친구가 기억나서 그 친구와 의논한 끝에 200만
원에 팔기로 했죠. 차가 급하다고 해서 우선 50만 원만 받은 후
차를 넘겨줬구요."
"혹시 그때 차 명의를 변경하는 데 필요한 서류도 함께 넘겨
주시진 않았나요?"
"예. 하지만 아직 차 명의를 바꾸지 않았었나 봐요. 어쨌든 서류를
건네주고 며칠후에 그 친구의 남편이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하는
사고를 내고 돌아가셨어요, 글쎄, 꼭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친구한테도 너무 미안하고..."
"사고 당시 차의 명의가 아직 아주머니 남편으로 되어 있었다면서
그 사고 피해자 가족이 아주머니에게 몰려와 합의를 하자고
요구했겠네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그런 정신나간 사람이 꽤 많은가
보죠?"
"사고낸 사람이 변변한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반면에 차
명의자가 돈이 많아 보이면 그렇게 하기도 하지요."
"아, 그렇군요. 우리는 당연히 못 들은 척했지요. 사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어요? 차도 서류도 다 주었는데... 그런데도 남편을
상대로 이런 소장을 보내온 거예요. 알고 보니까 우리집에
가압류라는 것까지 해놨더라구요, 글쎄."
소장을 살펴보니 손해배상 청구소송이었다.
"명의가 채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차를 산 사람이 사고를 내면,
차를 판 사람이 책임을 지는 건가요?"
이런 경우가 드문 것 같지만 실생활에서는 너무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보통은 차를 사놓고도 명의변경 하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그러다가 보험에도 안 든 상태에서 사고라도 덜컥 내게 되면
피해자는 차의 명의자에게 책임을 묻는 수가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재판을 해도 아주머님댁이 반드시 이긴다고
보장할 수는 없겠습니다."
"예에?"
"우리 법원 판결에는 비슷한 경우에 차를 판 사람한테 책임을 물은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거든요."
"..."
대충 계산해 보니 이 아주머니가 재판에 지게 되면 최소한 1억
이상은 물어야 할 판이었다. 이럴 때 왜 내가 미안해야 하는지...
사실, 매매 후 차를 넘기면서 아무리 명의변경에 필요한 서류
일체를 매수인에게 전해 주었더라도 아직 매매대금을 완납받기
이전이면 차를 판 사람이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진다는 판결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차량을 팔면서 계약금을 지급받고 차량과
이전 등록서류를 모두 넘겨주고 보험계약 해지신청까지 한
경우인데, 산 사람이 잔금을 지급하기로 한 바로 전날 교통사고를
일으키자 판 사람은 책임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사례도 있었다.
따라서 이 아주머니의 경우에는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내려질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대금을 모두 받고 차와 서류를 건네준
경우에는 당연히 차를 산 사람의 책임이 되지만 말이다. 이런 것을
어려운 말로 '자동차 손해배상 보장법' 의 '운행자성' 을 판단하는
문제라고 하는데, 법원은 이런 경우 차를 사고팔 당시의 여러 가지
주변 상황을 참작해서 책임자를 결정하게 된다.
여기서 자동차를 사고 팔 때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유의 사항
몇 가지를 정리해 보자.
우선 차를 팔 때는 위의 경우와 같이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반드시 대금을 완납받은 후에 차와 서류를 넘겨 주어야
뒷탈이 없다. 둘째로 요즈음은 다른 사람에게 타던 차의 판매를
의뢰하기 위하여 자동차 열쇠와 등록증 등을 맡기는 수가 많은데
이때도 사고가 나는 경우에는 차 주인이 손해를 볼 수 있다. 대개는
차 주인에게 책임이 없다고 보지만, 차를 가져간 사람이 마음대로
차를 운행하다가 사고를 냈는데도 차 주인에게 책임을 물은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천 원 대신 전세금을 날리는 사람들
"오빠, 큰일났어."
사혼 여동생이 몹시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작년 봄에
시집간 여동생을 만나, 두서없이 늘어놓는 이야기를 듣고 종합해
보니 과연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사촌 여동생은 결혼하기 전 지금의 남편과 함께 연애를 하면서도
악착같이 구두쇠 작전을 폈다.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자, 연애기간
동안 월급 받아 알뜰히 모아두었던 돈에 시집에서 보태준 돈을 합해
6,000만 원짜리 전셋집을 구했다(법률용어로는 '임대차'라 한다).
상식대로 미리 등기부를 떼어보고 그 집이 이미 주택은행으로부터
장기융자 2,000만 원을 얻어쓰고 근저당이 설정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집값이 1억 정도는 되므로 혹시 잘못되더라도 6,000만
원 정도 받고 나오는 데는 염려가 없다고 생각하고 계약을 했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집은 거의 주택융자를 끼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례는 매우 흔한 경우이다. 그 당시 동생 내외는 일단 일반적인
상식에 의해 해야 할 일은 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동생 내외가 입주하고 전입신고를
한 직후에 집주인이 사채업자로부터 5,000만 원을 빌려쓰고
근저당을 설정하였는데, 이것을 제때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가
동생이 사는 집을 경매에 붙였다는 것이다.
법률상으로는 2번 저당권자인 사채업자의 신청에 의해서 경매가
되고 집이 팔리더라도, 은행의 1번 저당권이 없어지면서 그 다음
순위의 임차권도 함께 없어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세들어 사는
사람은 경매로 집을 새로 산 사람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하며 돈
한푼 받지 못하고 쫓겨나게 된다.
경매로 집이 팔리게 되면 요즘은 보통 싯가의 80퍼센트 선인
8,000만 원 정도에 낙찰 된다. 결국 그 동 중에서 1번 저당권자인
주택은행이 2,000만 원 융자금 중 미상환분을 먼저 받아간다.
그렇다면 다음 순위는 누구일까? 그 다음 순위로 받아갈 사람이
사채업자가 될지 세입자가 될지는, 세입자가 임대차계약서에 이른바
'확정일자인' 을 받아놓았느냐 아니냐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 '주택임대차 보호법'은 세입자가 입주하고 주민등록
전입신고를 마친 후 그 임대차계약서에 확정일자인을 받으면 후
순위권리자, 즉 이 경우의 사채업자보다 우선해서 임대보증금을
배당받을 수 있도록 규정함으로써 억울한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동생은 확정일자인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확정일자인 받아뒤야 하는 것 몰랐니?"
"어렴풋이 알긴 알았는데...설마 하는 생각도 들고, 비용도 들 것
같고, 그러다가 며칠 지나니까 그만 잊어버려서.... 그런데 오빠,
무슨 법이 이래? 없는 사람들을 보호해 주기는 커녕..."
"보호해 주려고 생긴 법이다,, 이 녀석아. 비용은 1,000원이면
되고. 예전에는 이 법이 없어서 한푼도 못 건지고 길거리에 나 앉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어."
하기야 따져 무엇하랴. 작년에 무슨 통계조사 결과를 보니 이
제도를 알고 있는 사람이 50퍼센트에 불과했고, 그나마 그대로
이행한 사람은 제도를 알고 있는 사람의 36.5퍼센트였다. 결국 10명
중에 2명 정도가 제대로 활용하는 셈이고 나머지는 운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큰일이다. 무슨 수가 없을까?
집이 경매로 팔리기 전에 집주인의 은행융자금을 대신 갚으면
동생이 앞순위가 되어 경매로 집을 산 사람에게 맞서서
임대기간까지 살다가 보증금을 전액 받아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다. 그러나 신혼 살림에 은행융자를 대신 갚아주려면 허리가 휠
것이 아닌가.
은행에 가서 확인해 보니 다행히도 융자금 미상환액은 1,000만 원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5,000만 원은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것을 불행중 다행이라고 하나?
전세 들 때 꼭 명심해야 할 것 세가지!
첫째, 등기부등본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떼봐야 한다.
등기부상 근저당이 설정되어 있거나, 가압류^5,23^가등기 등이
있으면 요주의 경우다. 액수를 비교해 보고 정확한 내용을 파악한
후 계약 여부를 결정한다. 근저당설정 금액이 집값에 비해 적을
때는 마음을 놓아도 되나, 많으면 계약을 피하는 것이 좋다.
계약시에는 등기부가 깨끗했었는데 입주해서 주민등록을 정리할
사이에 기재되는 경우도 간혹 있으므로 마지막 순간까지 경계심을
늦추지 말 것.
둘째, '확정일자인' 은 반드시 받아놓아야 한다.
'확정일자인' 이란 그 날짜에 그 계약서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뜻의 도장을 찍는 것으로서, 공증법률사무소에서
1,000원의 비용으로, 아니면 법원등기과 및 등기소에 가서 500원만
내면 척척 알아서 다 해준다. 집주인의 협조없이 혼자서도
가능하므로 괜시리 눈치볼 것 없다.
셋째, 주민등록 전입신고를 서두를 것.
우리 '주택임대차 보호법' 은 임차인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가지
제도를 규정하고 있지만, 아무리 그 집에 들어가서 살고 있어도
전입신고가 없으면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다. 또 간혹 주소의
호수를 빠뜨려서 어처구니없게도 보호받지 못한 예도 있으므로
전입신고를 할 때는 통^5,23^반, 그리고 다세대주택의 경우에는
동^5,23^층^5,23^호수까지를 명확히 기재해야 안심할 수 있다.
내 집 없는 것도 서러운데 전세금까지 날릴 수는 없다. 이
세가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끝마치고 나서야, 내 집 마련을
꿈꾸며 전셋방에서의 단잠을 자기 시작하자.
주머니돈이 쌈지돈인 줄 알았는데
A와 B는 여고 동창이다. 두 집 모두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남부럽지 않게 살 정도는 되었다.
어느 날 A여인은 B여인에게 남편이 차를 사려고 하는데 부족한
돈을 꿔오란다며 500만 원만 빌려주면 계를 타게 되는 여섯 달 뒤에
갚겠다고 부탁했고, B여인은 A여인 남편의 재력으로 보아 그 정도의
액수를 갚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응하였다.
물론 아무리 동창이지만 셈은 정확히 해야 하는 법이라는 생각에
A여인이 써주는 그 남편 이름으로 된 차용증을 받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록 2부 이자이긴 하지만 처음 두 달은 이자가 꼬박꼬박
들어왔다.
그런데 석 달 후부터 이자가 들어오지 않더니,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 부부 사이에 불화가 생겨서 합의이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이자 독촉도 할 수 없고 하여 6개월까지 기다렸다가
당사자를 만나보니 이혼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 민망한 마음에도
어렵게 빚 독촉을 해보았으나 이혼하면서 위자료도 제대로 못 받아
경제 형편이 어렵고 더구나 그때 꾼 돈은 남편의 차를 사는 데
들어갔으니 남편에게 받아보라는 것 이었다.
하긴 A여인의 지금 형편으로 보아하니 도저히 그 이상 다그치기도
곤란했다. 결국 그 남편을 찾아가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그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뗐다. 차용증도
자기가 쓴 것이 아니니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돈이 차를
사는 데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마련하여 보관시켜 둔
차 살 돈을 아내가 다른 데 써버리고 자신으로부터 추궁을 받자
어디선가 빌려왔던 모양인데 그걸 왜 자기가 책임져야 하느냐며
돈을 받으려거든 아내에게 가보라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에 재력이 있는 남편을 상대로 빌려준 돈을 갚으라는
소송을 내면 이길 수 있을까? 독자들은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비록 나중에 이혼을 했지만 돈을 빌릴 당시는 부부였고 부부는
일심동체인데, 그리고 그 돈으로 남편의 차를 산 것도 사실이고
차용증도 있는데 왜 못 이기겠냐구요. 법은 상식이 아니냐구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반드시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이와
유사한 사례에서 남편은 갚을 책임이 없다는 판결이 나온 바 있다.
왜 그럴까 궁금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 이유를
알아보자.
우리나라는 부부가 혼인 전부터 가지고 있던 재산과 혼인 후에라도
한쪽 명의로 구입한 재산은 그 명의자의 것이라는 이른바
'부부별산제' 를 취하고 있으며, 인격적으로 부부는 엄연히 별개의
사람이므로 아무리 부부 사이라고 해도 한쪽 배우자가 다른 쪽
배우자의 명의로 돈을 꾸는 등의 행위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원칙대로 한다면 남편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이를 제시하고
남편의 법률행위를 대신해야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부부 사이에서는 현실적으로 한쪽이 다른 한쪽의 명의로
법률적인 행위를 해야 할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부부 한쪽의 이름으로 구입하는 경우나 자녀 교육에
필요한 일을 부부 한쪽의 명의로 하는 경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런 경우까지 부부 중 어느 한쪽이 꼭 자신의 이름으로 해야
하거나 그렇지 않을 때는 다른 한쪽에게 그때마다 위임장을 주어야
한다면, 이것은 몹시도 불편한 일이다. 또 어떤 행동을 할 때 부부
중 어느 한쪽이 행여나 계약의 내용을 부인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세상은 불신으로 가득 찬 삭막한 곳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민법은 어느 정도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부부의
한쪽이 '일상의 가사' 에 관하여 제 3자와 법률행위를 한 때 다른
한쪽 배우자는 그로 인한 채무에 대하여 연대책임이 있고, 부부는
일상의 가사에 관하여 서로 대리권이 있다고 규정해 놓은 것이다.
부부는 이와같이 일상의 가사에 대하여는 별도의 위임장 같은 것이
없이도 서로 대리권이 있기 때문에, 앞의 사건에서 남편 명의로
돈을 빌린 행위가 과연 일상의 가사에 포함될 것이냐 아니냐를
따져봐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일상의 가사' 라는 것은 부부 공동생활의 유지에
일반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국한된다. 따라서 의식주에
관한 사무나 가족의 보호, 오락, 교제, 자녀 양육과 교육 등에 관한
사무에 한정되어 있다.
그외에 일상의 생활비를 초과하는 금액을 빌리는 것, 부동산을
파는 것, 가옥의 세를 놓는 것 등은 일상의 가사를 넘어서는 것으로
되어, 이러한 행위를 다른 한쪽의 명의로 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대리권이 있어야 한다.
우리 법원은 남편이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에 관한 근저당권의
설정, 타인의 빚 보증이나 계에 가입하는 것, 자가용 차를 구입하기
위하여 타인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행위 등도 일상가사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판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경우에 남편 명의로 돈을 빌린 부인의 행동은
일상가사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결국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대리권도 없이 돈을 빌렸으니 자기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부부는 일심동체' 라든가 '주머니 돈이
쌈지돈' 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달리 생각해야 할 시대가
온 모양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서구화되면서 인정 보다는 법이
앞서는 부분이 점차 많이 생기게 되었다. 요즘 세상에는 옛날식
사고방식으로 모든 일을 쉽게만 생각하고 방심하다 보면 낭패를
보는 수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항상 돈을 빌려준 선량한 사람만 당하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 그런 불합리를 구제하기 위하여 법은 이른바
'표현대리' 라는 제도를 두어서 당시 상황에 비추어볼 때
상식적으로 옳게 행동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면 보호하고 있다.
이 제도는 복잡한 설명을 필요로 하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일단 독자들이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법률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재산에 관한 한 부부는 '일심동체' 가 아닌
'양심이체' 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독자분들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냅둬! 난 이렇게 골치 아픈 건 모르구 살다 그냥 죽을껴!"
내용증명이라는 괴물
상담을 하면서 가장 자주 접하는 질문 중의 하나가 '내용증명' 에
관한 것이다. 다소의 공포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내용증명' 이란
과연 무엇일까?
경험이 있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내용증명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이나 의사표시를 상대방에게 통보할 때 사용되는 일종의
편지이다. 우체국에 가서 내용증명으로 우편물을 보내겠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문구와 함께 내용증명이라고 표시하여 발송해 준다.
이 우편물은 199O.O.OO. 등기 제OO호에 의하여 내용증명 우편물로
발송하였음을 증명함. OO우체국장
우체국에서는 이런 내용증명을 3통 제출받는데 1통은 발송, 1통은
우체국에 3년간 보관, 1통은 발송인에게 반환하도록 되어 있고,
글의 내용에는 발송인과 수령인의 주소와 성명을 적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하여 어떤 내용의 글을 보내게 되면 그러한 의사표시를
발송인이 수령인에게 한 바 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되는 것이다.
즉 나중에라도 상대방이 "나는 그런 말 들은 적이 없다." 고 딱
잡아떼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하는 정도의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상담자들은 일단 내용증명이라는 것을 받으면
답변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 같다.
"이런 것을 받고도 답신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상대방의 주장
내용을 인정한다는 뜻이라는데..." 라며 자못 심각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답신을 하지 않는다고 내용을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내용에 따라 답신하는 것이 도움될 때가 있기도 하지만, 반드시
답신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답신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왜냐하면
내용증명은 보내는 사람의 일방적인 주장이나 자기 판단을 담고
있는 것이므로, 답변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답변이 되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반박한답시고 자신의 생각을 장황하게 글로 써
보냈다가는 오히려 상대방이 알아서는 안될 부분을 맥없이 알려
주거나 증거까지 남기는 자충수를 둘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내용증명을 받고 나서 반드시 답변을 해야 할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항상 거래를 계속하고 있는 상인들이 있다고 하자. 늘상
거래해 오던 물건에 관하여 한쪽이 다른 쪽에게 사라고 제의하였을
때(이를 '청약' 이라 한다) 지체없이 '예스', '노'에 관한 통지를
하지 않으면 그 제의를 승락한 것이 된다. 이런 경우에는 답변이
귀찮더라도 반드시 답변을 해야 한다.
그러면 내용증명을 보내려 할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어떤
경우에 보내는 것인지 알아보자.
법적인 의미에서 상대방에게 의사표시를 하는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그 통지가 상대방에게 도달해야만 비로소 효력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내용증명과 함께 '배달증명' 까지 받아 보관해 두면 보다
확실히 증거를 확보하는 셈이 된다.
보통은 내용증명 우편물을 등기우편으로 보냄으로써 배달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 우편물 배달장은 우체국에 1년간만 보관되고 발송인
본인은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세월이 흐르면 입증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니 가능하면 '배달증명 제도' 를 이용하는
것이 더욱 확실한 의사표시가 될 수 있다.
사실 내용증명은 상대방에게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기 위해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정말로 필요한 경우는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첫번째 예로 전세를 사는 H씨의 경우를 보자. 임대차(전세) 기간이
끝날 때가 되었는데도 집 주인은 이제 그만 나가라는 통지를 미리
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H씨는 임대차 기간이 끝나도 이전과 똑같은
조건으로 다시 계약한 것이 된다. 그러나 임대차의 기간을 새로
정하지 않았으므로 집 주인은 H씨에게 그 후 언제든지 이제 그만
나가달라는 통지를 할 수 있다.
다만 그 나가달라는 통지는 H씨에게 도달한 날로부터 6개월이
지나야 효력이 있으므로 임차인인 H씨는 통지를 받은 날로부터
적어도 6개월은 버틸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나중에 '나가야 할
날이 과연 언제인가' 가 문제되어 재판이 벌어졌을 때, 집 주인이
나가라는 통보(이를 '계약해지의 통보'라 한다)를 내용증명으로
해놓았다면 날짜에 대하여 다툴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 예로는 계약을 해놓고 상대방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때
그 독촉이나 계약해제를 내용증명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상당한 기간을 정해 독촉을 했는데도 그 기간 내에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데, 이 때 그
독촉이나 해제를 내용증명으로 하는 것이 증거를 확보하는 길이다.
또 일단 이루어진 계약을 어떤 이유로(예컨대 사기나 협박을
당해서 계약하게 된 경우) 취소하고 싶을 때도 내용증명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이와같이 우리들이 별 생각 없이 주고받는 내용증명 통보서나
답변서에도 경우에 따라 갖가지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내용증명이 오고갈 정도면 이미 무언가 분쟁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는 것이고, 따라서 쉽게 판단이 서지 않으면 바로 전문가를
찾아가서 대처방안을 상의하는 것이 훗날의 분쟁에 현명하게
대비하는 요령이다.
뺨 맞고 해고당하고
매주 월요일 오후는 환경운동연합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법률상담에
응하는 날이다(20여 명의 변호사가 참여하고 있으며 무료이므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활용하시기 바란다). 이번 상담중에 아직도
이런 회사가 있나 싶을 정도로 기가 막힌 사례를 접하고, 직장생활
하는 분들이 의외로 자신의 권리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Y양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중소규모의 전자제품 생산업체에
사무직으로 입사했다. 입사 후 소비자들의 불만사항을 접수하여
처리하는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업무의 성격상 영업부
남자직원들과의 원활한 업무협조가 꼭 필요했다. 모두들 새로
입사한 Y양에게 자상하게 대해 주었고 그 덕분에 직장생활에
적응하여 일이 즐거워질 무렵 어이없게도 갑자기 해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해고 사유가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화합하지 못하는 사원은 필요없다고 하던데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싸웠어요. 아니, 싸웠다기보다는 두 살 많은 영업부 남자직원한테
일방적으로 야단 맞고 따귀까지 맞았는데 그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니 제 자리가 없어져버렸어요. 그날로 생산공장의 사무실로
발령이 났다는데, 거긴 수원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이유를 물었죠. 이유를 듣고 보니 눈치가 그 남자직원이 저를
모함한 것 같았어요. 그 전날 어떤 소비자의 불만을 그 남자
직원에게 전달해 주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겨서 말다툼이 있었는데,
자기가 잘못한 일을 마치 제가 잘못한 것처럼 윗사람에게 보고한 것
같았어요."
"그러면 인사과장이나 높은 분에게 그런 걸 설명하지 그랬어요."
"기회를 줘야지요. 사장님 조카인 인사과장님한테 찾아갔더니 다
알고 있다며 들을 것도 없으니 당장 수원으로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속상하고 억울해서 해명을 하려고 했는데 제가
흥분해서 목소리가 좀 커졌어요. 그랬더니 어린 것이 버릇없다고
당장 해고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그날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그냥 돌아왔다가, 그 다음 날
사과 말씀드리러 찾아갔는데 수위실에서부터 막더라구요. 나중에
마지막달 월급 계산해서 받던 날 입사동기 여직원들을 통해서 들은
얘긴데, 시범 케이스로 잘랐으니 다른 여직원들도 잘 하라고
하더래요."
"몇 개월간이나 근무했나요"
"딱 4개월요."
듣고 보니 기가 막혔다. 이른바 괘씸죄에 걸려 속수무책으로
쫓겨난 것이다. 요즘 세상에도 이런 회사가 있을까 싶었다. 하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더 교묘하게 직원들을 골탕먹이는 회사도
많을 것이다. 아마도 나이 어린 여직원이라고 아주 무시한 것
같았다.
이런 경우 Y양에게는 어떤 방법이 있는지, 또 일반근로자에게는
어떤 권리가 있는지 알아보자.
우리 법은 사회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근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근로기준법' 에 의하여 해고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아무리
사용자라 해도 근로자를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하거나 휴직시키는
등의 불이익을 줄 수 없다. 여기서 '정당한 이유' 란 상식적으로
판단하여 더 이상 일을 시킬 수 없는 책임이 근로자에게 있다든가,
불황으로 도저히 감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등의 부득이한 경영상의
이유를 말한다. 따라서 Y양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해고의 정당한
근거를 조금도 찾을 수가 없는 셈이고, 따라서 이 해고는 무효다.
그러므로 우선 법원에 '해고무효확인의 소' 를 제기하고, 동시에
이 소송의 승패가 결정될 때까지 계속 임금을 지급하라는 이른바
'임금지급가처분신청' 도 함께 낼 수 있다.
게다가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를 한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고
규정하고 있으니, 사장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소할 수도 있다.
물론 Y양을 때린 남자직원도 형법상의 폭행죄에 해당하므로 함께
고소하면 된다.
참고적으로 알아둘 것은 사용자는 근로자를 해고할 때 적어도 30일
전에 알려야만 하고(이를 '해고예고'라 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는
30일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규정의 보호를 받으려면 월급근로자로서는 6개월이
지나야 하므로(일용근로자는 연속 3개월을 근무해야 하고
수습근로자는 해당 없음) Y양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또 근로기준법의 규정은 원칙적으로 5인 이상의 근로자가 계속
근무하는 사업장에서만 적용된다는 점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상의 내용을 Y양에게 설명해 준 다음, 일단 그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무엇이라고 변명하는지 일단 들어나보고 나서 그
다음 조치를 취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변호사라고 신분을 밝힌 후 Y양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 양반 하는 말씀.
"아, 그거요. 사장님으로부터 일 잘못했다고 시정지시를
받았습니다. 선처해 줄 예정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고 하던
참인데, Y양 좀 바꿔주시죠."
"...?"
정말로 그런 시정지시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 양반 순발력이
기막히게 뛰어난 건지. 여하튼 전화를 받고 회사로 달려간
Y양으로부터 더 이상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이 잘된 모양이다.
아마도 회사 체면 때문에라도 복직까지는 시키지 않았을 테고
적당히 합의했을 가능성이 많을 것 같다.
전화 한 통화로 사건을 해결해 보기는 난생 처음이다. 법이 무섭긴
무서운 건가?
2 서초동에서 본 인생살이
그렇게 묶여 있는 사람들 --이인상--
내 사무실에는 청동상이 하나 있다. 원래 처가집에 있던
것이었는데 사무실 장식용으로 적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개업 때 가져다 놓았다.
볼 때마다 변호사 사무실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대리석
받침대 위에 두 사람이 등을 마주 대고 서 있고, 무엇인가에 의해
둘둘 말려져 두 사람은 꼼짝없이 묶여져 있다.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무엇인가 생각하며 묶여 있는 두 사람. 우리 사무실에 자신의
문제를 의뢰하러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 모습이 바로 그렇다.
재산 때문인지 아니면 감정 때문인지 이제 등지고 미워할 수 밖에
없지만, 당분간은 속 시원히 헤어지거나 안 볼 수도 없어서 그렇게
함께 묶여 있어야 하는 사람들. 어쩌면 한평생 그런 사이로
살아가야만 될 사람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사고나 업무로 인해서 다툼에 말려든 후
어쩔수 없이 싸움의 무대를 법정으로까지 옮겨서 법원의 결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다투는 것 자체가 몹시
괴로운 사람들도 많다.
재산 때문에 원수지간이 된 형제들, 아이를 둘 셋씩 낳고 살다가도
헤어지는 마당에 아내를 남편을 세상에 둘도 없는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부부들, 땅 한 평 더 차지하려고 몇 년째 싸우고 있는
이웃들, 한쪽은 갚았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은 못 받았다고 우기는
친척들, 한때는 동업자였던 죽마고우들..., 이들에게 다툼은 뼈를
깎아내는 고통 그 자체이다.
게다가 이들의 다툼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참기 어려운 고통에
동참할 것을 강요한다. 친했던 사이일수록 명확한 증거를 남기지
않는 법이므로 대부분 주위 사람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증인 역시 양쪽을 잘 아는 사람이므로 인간적인 갈등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법정에 서는 순간부터 그들 또한 함께 꽁꽁
묶여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또다시 덧붙여서 묶여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변호사들이
바로 그들이다. 어느 한 편에 서서 법률 지식과 싸움의 기술을
제공하는 법률가들.
물론 변호사가 하는 일 가운데는 억울한 사정을 밝혀주고 얽혀
있는 것을 풀어주는 보람된 일이 많고 때로는 그러한 작업이 보기
좋게 성공하여 살맛 나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간혹 묶여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끼여 있는 나를 발견할 때는 괴롭기만 하다.
그럴 때면 문득 평상심으로 돌아가 화해와 용서를 권해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무력감만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미
증오심에 불타오르는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승부만이 보일 뿐이다.
비록 자신에게 돌아올 몫이 처절한 패배일지라도, 그리고 그
다툼에서 이기더라도 그 조그마한 승리가 더 큰 패배를 의미할
뿐인데도 말이다.
이런 우스꽝스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는 수십억 년 전에 생겼다는 지구 위에 잠시 머물고 가는
조그만 '점' 이 아닌가. 그리고 또 지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 중 하나일 뿐이고. 그런 속에서 하루살이 같은 우리네 인생이
그렇게 서로 묶여서 소모적인 갈등을 계속하고 있을 때, 누군가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얼마나 측은해 할 것인가.'
가끔씩 서로 등을 기대고 묶여 있는 두 사람의 청동상을 보면서
이런 허망한 생각이 떠올라 나는 혼자 씁쓸하게 웃곤 한다.
아들 죽인 살인자까지도 용서하며
"변호사님! 우리 아이들 좀 살려주십시오. 살인 죄라니요? 절대
그럴 만한 배포도 없고 그런 성품도 못되는 아이들입니다. 아이구,
그것도 몇 명이 작당을 해서 칼을 휘둘렀다니 세상에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제 갓 스물이 넘은 청소년 4명이 아는 사람을 찾느라 당구장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불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욕설까지 했다는
이유 하나로 이들 4명은 전화받은 놈을 죽여버리자고 의견을 모으고
그 즉시 달려가 칼을 휘둘러 죽여버렸다.
이처럼 황당하기조차 한 기소내용을 열심히 설명하면서 가족들은
절대 그럴 아이들이 아니라는 말을 수십 번 반복했다. 그 진지하고
순박한 표정 때문인지 뭔가가 잘못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두 아이의 보호자로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누나들이
찾아왔는데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동생들 죄명이 다름 아니 '살인' 이니, 남편들 보기에는 또 얼마나
민망하겠는가.
"그래요? 가족들이 모르는 면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수사기록부터 살펴보고 제가 맡을 것인지, 맡으면 어떻게 변론 할
것인지를 결정하지요?"
수사기록만으로는 그들에게 가망이 없어 보였다. 경찰과 검찰의
모든 조서가 자신들의 범행을 자백한 것으로 되어 있고, 칼을
휘두르지 않은 피고인들도 칼을 품고 들어가는 일행을 위하여 망을
본 것으로 되어 있었다.
'사람 목숨을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도 있나? 요즘 아이들 아무리
겁이 없다고 해도 이 녀석들 정말 혼 좀 나야겠구나.' 하는 검사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수사를 연수원 동기가
했다는 것, 그리고 그 양반이 그렇게 무리하게 일을 처리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어쨌든 기록상으로는, 이들 일행이 가끔 어울려 노는
사이라기보다는 숙식도 같이하는 일군의 패거리처럼 묘사된 면이
있어 은근히 범죄집단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이 살인죄 이외의
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 이들은 그 동네
불량배들로 소문이 난 터였다. 그러니 자신들의 세를 과시할
생각으로 범행한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아이들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칼을 휘두른 피고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칼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고, 더욱이 그 칼을 휘두르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는데, 수사받을 때 아무리 그런 사정을 이야기해도 전혀 믿으려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나머지 피고인들은 그 당구장에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전화 받은
사람이 사라지고 없을 것이고 그러면 술이나 한잔 더 해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간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전화로 욕을 한
그 사람을 찾게 되었고, 일행이 잘잘못을 가리고 나오면 함께
가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느닷없이 도망 가자고 소리치며
나오는 일행을 따라 얼떨결에 도망간 사실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피고인들의 말이 맞다면 나머지 피고인들은 '상해치사' 나
'폭행치사' 정도로 죄명이 변경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문제는
유리한 사정을 밝힐 증거가 우리 쪽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피고인들의 말밖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다만 칼을
휘두른 피고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과가 전혀 없다는 것이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었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검찰에서도 결사적이었고, 나 역시 접견을 몇
차례씩 다녀오며 사력을 다했다. 현장에 있었던 증인을 불러 신문할
때에는 나도 모르게 흥분하여 언성이 높아졌다.
칼을 휘두른 아이의 부모가 뒤늦게 그 아이만을 위해 변호사를 한
분 더 선임했다. 그 아이에게만 다른 강력범죄가 더해진 데다가,
재판 도중 아이들끼리 주장이 엇갈리는 부분이 생기자 불안했던
모양이다. 최선을 다하고 있던 나로서는 다소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살인죄를 저지른 아들을 둔 부모의 심정이
오죽하랴 싶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여하튼 재판을 마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변론요지서를 작성하여
재판부에 제출했다.
1. 공소사실의 요지
피고인 A,B,C,D는 공소외 E(미체포로 기소중지)와 공모하여,
199O년O월O일 OO:OO경 부천장 여관 201호실에서 비디오를 보고 있던
중 피고인 A의 호출기에 호출음이 울려 피고인 A가 호출기에 나타난
전화번호에 따라 전화를 하여 서울 영등포당구장에서 당구를 치고
있던 피해자 L이 전화를 받자 호출한 사람을 바꾸어 달라고
하였으나 위 피해자가 위 당구장 근처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공소외
P가 호출하고 가버렸으니 포장마차로 연락하라고 반말조로 말한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어 심하게 언쟁을 하다가 전화를 끊은 다음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피고인 B,C,D등에게
"같이 가서 이 새끼 죽여버리자." 고 하여 이들의 동조를 얻어 위
여관을 빠져 나온 다음 피고인들과 위 여관에서 같이 있다가 조금
전 밖으로 나간 E에게 가서 위 언쟁사실을 이야기하여 그도 위
피해자를 살해하는 데 동참하도록 하면서 위 E로부터 그가 일부분을
붕대로 감아 소지하고 있던 길이 약 30센티미터의 회칼을 건네받아
위 칼로 위 피해자를 살해할 것을 결의한 다음, 피고인 C에게 위
칼을 잠시 소지하도록 하면서 영업용 택시 한 대에 피고인들 및 위
E등 5명이 탑승하여 같은 날 OO:30 서울 OO동 육교 앞으로 가
그곳에서 하차하여 피고인 A는 C로부터 위 회칼을 건네받아
허리춤에 감춘 후 피고인들과 위 E 모두 위 피해자를 찾아다닌던 중
위 P 등을 도중에 만나 피해자 L이 지금 실내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위 포장마차 앞으로 가 피고인
C,D,E는 위 피해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포장마차 입구에 지켜서고,
피고인 A,B는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위 피해자에게 다가가서 피고인 B는 욕설을 하면서 위세를
가하고, A는 위 피해자에게 "형씨가 아까 전화받은 사람이냐?" 고
말을 걸어 위 피해자가 "이 자식 싸가지가 없네." 라고 하자 갑자기
허리춤에 감추어둔 위 회칼을 우측 손으로 꺼내어 들고 그의
가슴부위 등을 마구 찔러 그에게 간자 창상 등을 가하고 이로
인하여 같은 날 02:00경 치료중 사망에 이르게 하여 그를 살해한
것이다.
2. 사실관계
(1) 위 공소사실 중 다음의 점은 사실과 다릅니다.
#1 통화내용을 듣고 있던 피고인 B,C,D등에게 "같이 가서 이 새끼
죽여버리자." 고 하여 이들의 동조를 얻어
#2 조금 전 밖으로 나간 위 E에게 가서 위 언쟁사실을 이야기하여
그도 위 피해자를 살해하는데 동참토록 하면서
#3 E로부터 회칼을 건네받아 위 칼로 위 피해자를 살해할 것을
결의한 다음
#4 포장마차 앞으로 가 피고인 C,D,E는 위 피해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위 포장마차 입구에 지켜서고
#5 피고인 A, 피고인 B는 위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위 피해자에게 다가가서 피고인 B는 욕설을
하면서 위세를 가하고
(2) 피고인들은 살해를 결의한 바 없습니다.
피고인들이 비록 일정한 직업이 없다고 하나 대부분 취직을 위하여
지방에서 상경하여 아직 직업을 얻지 못한 무직자들일 뿐, 어떤
범죄목적을 위하여 조직화된 폭력배들은 결코 아닙니다.
그중 한 명이 전화상 다툰 자를 죽이러 가자고 즉흥적으로 제안
하였다고 하여 그 즉시 모두 이에 동의하여 살인을 결의하고 칼을
준비할 정도로 결합관계가 깊고 위계질서가 있다면 당연히 그
조직결성 경위나 조직의 목적, 여죄 등이 추궁되어 뒷받침되어야
상식적일 것입니다.
(3) 피고인들은 묵시적으로라도 살해를 결의한 사실이 없으며,
살인을 예상치도 못하였습니다.
피고인들에 대한 경찰과 검찰에서의 피의자신문조서를 종합하면,
마치 피고인들, 모두가 미필적 고의가 있었던 것을 자백하고 있는
것처럼 기재되어 있으나,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조서를 읽어보기
전에 무인을 찍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 내용도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합니다.
특히 피고인 B,D는 수사담당자에게 칼의 소지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수차례 변소하였으나, 이것이 완전히 묵살되었습니다.
범행 당시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사후의 결과를 기준으로 해서, 그
정도로 칼을 휘둘렀다면 당연히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대답을 유도하여 마치 범행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하였다는 진술을
한 것처럼 조서에 기재한 것에 불과합니다.
(4) 피고인들 중 피고인 B와 D는 칼의 소지사실을 미처 모르고
서울로 오는 일행에 합류하였습니다.
좁은 여관방에서 칼에 압박붕대를 감았으므로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는 변소가 설득력이 약하고 그 구성원이 모두 범행장소에
함께 왔으니 당연히 칼의 소지사실을 알았을 것이라는 추리도 물론
가능하나, 그 여관방이 'ㄱ' 자로 꺾여진 방이라는 것은
실황조사서상으로도 명백하고 모두 술을 한잔한 다음 비디오나
보자고 이야기되어 여관을 찾은 것인 만큼 샤워를 하는 사람(B),
누워 잠을 자는 사람(D), 비디오를 보는 사람 등 모두 제각각이어서
칼을 만지는 것을 알지도 의식하지도 못하였다고 합니다.
(5) 가령 백보를 양보하여 칼의 소지사실을 알았다고 하여도 설마
전화상으로 몇 마디 다툰 피해자에게 그런 식으로 칼을
휘두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들 피고인들이 조직폭력배라고 가정을 하더라도, 그리고
피고인들 모두가 매우 경솔하고 사리분별력을 결한 자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조직에 전혀 실리가 없는 살인을 소위 보스도 아니고
나이도 어린 편인 A피고인이 제의했다고 하여 나머지가 모두 이에
순순히 동의하고 그를 돕기 위하여 순식간에 움직였다는 것이
도무지 설득력이 있는 추론인지 묻고 싶습니다.
피고인 A를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이 모두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처럼 OO동에 도착하면 당연히 공소외 P가 전화했던 일은
마무리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모두 한잔 더 할 생각만으로
일행에 합류하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6) 나머지 피고인들이 밖에서 망을 보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전혀 없는 밀폐된 가정집과 같은 곳에서의 비밀스런
살인을 모의하였다면 망보는 자와 직접 범행을 저지를 자의
행위분담이 혹시 필요할지 모르나, 공개된 술집에서 순식간에
벌어질 일에 무슨 망이 필요하다는 말인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공소사실에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포장마차 입구에 지켜 서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당초 살해의 모의가 없었기 때문에 도망가지
못 하도록 지켜 서 있겠다는 인식은 전혀 없었으며 피고인 B,C,D가
당구장으로부터 범행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빠르게 걸어온 피고인
A혼자 이 사건 현장인 실내포장마차에 먼저 들어섰던 것이며 나머지
피고인들은 단지 밖에서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던 것뿐입니다. 또
상대방이 여러 명이었다면 피고인들 여러 명이 위세를 과시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순간적인 말다툼을 했던 한 명을 만나는
정도인데 칼을 휘두를 것을 미리 결의하고 망까지 본다는 것이 몹시
어색하다고 생각됩니다.
(7) 피고인 B가 범행현장에서 욕설을 하면서 위세를 하였다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피고인 B의 진술에 따르면 당구장 쪽에서 사건 현장인 실내포장
마차 부근에 와보니 이미 A피고인이 바로 실내로 들어가 있었고,
그래서 혹시라도 쓸데없는 시비가 발단이 되어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생길 것이 염려되어 안에 들어가 상호간의 주먹다짐을 미리
봉쇄하고 A를 다독거려서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고인 A가 갑자기 무엇인가로 피해자를 때리는 듯하여
말리려 하는데 그것이 칼인 것을 보고 너무도 당황하였으며, A가
도망하는 것을 보고 엉겁결에 함께 뛰었다는 것입니다.
(8) 불행히도 칼을 운반한 자를 변호인도 확실히 정리하여 주장할
수 없습니다.
조서상으로는 피고인 C가 부천에서 A로부터 얼떨결에 건네받아
OO동에서 하차할 때까지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재판에 이르러 피고인 C가 이를 전면 번복하면서 사실은 A가 너무
큰 형을 받을 것 같아서 자신이 일부라도 덜어주려고 하는 생각에서
A의 부탁에 따라 그렇게 진술하였던 것이라고 주장함에 반하여,
피고인 A는 이와는 반대로 C가 자신도 모르게 E로부터 칼을
받아와서 OO동에 도착한 후 자신에게 건네주었다고 주장하여 진술이
어긋나고 있습니다.
피고인 C는 자신은 별 잘못이 없으므로 당연히 가벼운 처벌을
받으리라고 쉽게 예상하였는데 살인죄로 기소된 사실에 충격을 받아
번복하는 것이라고 울면서 결백을 밝혀달라고 애원하고 있으며,
피고인 A역시 자신은 어차피 엄벌에 처해 질 것이라고
자포자기하였었으나 부모님이 애태우는 것을 보니 사실대로
밝혀야겠다고 주장하며 절대로 자신이 C에게 운반을 부탁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누구의 진술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령 피고인 A의
주장처럼 피고인 C가 칼을 운반하여 와서 A피고인에게 주었다고
가정하여도 C의 나이가 더 어리므로 그것이 살인의 지시나 결의를
당연히 나타낸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평소 칼을 소지하고 다닌 까닭에 장소를
옮기면서 당연히 이를 가지고 이동하였던 것일 뿐이며, 단지 이를
가장 나이가 어리고 대하기 쉬운 C피고인에게 가지고 있으라고 했던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피고인 B와 D는 그것을 가지고 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였고 나아가 그것을 휘둘러 사람을 죽게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였던 것입니다.
3. 과연 살인죄에 의율한 것이 타당한가.
상술한 바와 같이 피고인 B,C,D,가 범행 현장에서의 폭행 정도를
예상할 수도 있었던 점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따라서 동
피고인들에 대하여 '폭행치사' 나 '상해치사' 정도의 책임을 묻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살인죄에 의율함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공모의 범위를 아무리 최광의로 해석한다고 하여도 이 건에 있어
살인의 고의를 인정하는 것은 조리칙(상식)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판단되며, 따라서 세 피고인들에 대하여는 무죄가 선고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4. 정상론
(1) 피고인 A에 대하여
피고인 A는 6,7센티미터 정도의 칼날을 휘두른다고 하여도 사람이
죽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변소하고 있습니다. 칼을
휘두른 부위나 정도 등에 비추어 이러한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판단되기는 하나, 피고인이 사람을 죽일
목적까지는 없었다는 점은 강조하고 싶습니다.
피고인의 경솔한 성품이 살인의 결과를 낳긴 하였으나 이는 그의
성격상 결함에 기인한 바 크며, 범행 당시 어린 나이와 일천한
경험으로 인하여 스스로 흥분하여서 살인이라는 결과에까지 도달
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비록 살인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시는
경우에도 동 피고인의 나이와 그 가족의 처지를 감안하시어
관대하신 처분을 바랍니다.
(2) 피고인 B,C,D에 대하여
피고인들은 모두 나이 어리고 아직 사회생활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청소년들입니다.
피고인들이 비록 객지에 나와 서로 잘못 만나서 건전치 못한
만남을 통하여 소일하긴 하였으나, 상술한 바와 같이 이 건으로
살인죄로 처벌받기에는 너무도 억울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령 견해를 달리하시어 그대로 처벌하게 되는 경우에도 동
피고인들이 한평생 살인죄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가야 할 딱한
사정과 가족들의 심적 고통을 감안하시어 최대한 관대하신 처분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이 끝나고 검사의 구형이 있던 날 가족들은 망연자실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검찰 쪽에서 처벌이 가벼운 폭행치사나 상해치사로
죄명을 변경하기는커녕 엄청난 구형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검찰에서 왜 이렇게 무리를 하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슬그머니
초조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기다려봅시다. 판결은 판사님이 하시는 것이니 현명하신 결정이
있으시겠지요."
담당 변호사로서 그저 원칙적인 이야기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선고예정일에 선고가 2주 연기되었고, 몇 시간 후에는 혹시나 했던
검사의 공소장 변경을 위한 연기신청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가족들은 너무도 좋아했다. 검사는 나머지 세 피고인들에 대하여는
'상해치사' 로 죄명을 변경하였는데, 그것은 적어도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살인의 '미필적 고의(결과를 예측하고 그래도 할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실행하는 정도의 고의)' 정도도 없었다는
사실을 시인한 결과인 것이다.
공소장을 변경하지 않았으면 아예 무죄가 선고되었을 테니
검찰로서는 고육지책인 셈이었다. 결국 직접 칼을 휘두른
피고인에게는 살인죄와 병합된 죄가 그대로 인정되어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이라는 것을 가족들도 이해하고
있었고,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는 매우 짧은 기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나머지 피고인들의 항소심도 역시 내가 맡아서 변론하였다. 다행히
항소심에서는 피고인들의 부모, 형제들이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가족과 합의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독실한 신자인
피해자 가족들이 선처를 원하는 탄원서까지 제출해 준 덕에 형량이
많이 즐어들었다. 직접 칼을 휘두른 피고인도 상당히 감형되었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집행유예판결을 받고 석방되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들은 살인죄를 뒤집어쓴 채 6개월간이나 갇혀 있는 지독한
경험을 했고, 또 피해자 가족에게서도 기대 이상의 큰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그들은 아마도 문제있는 친구들과는 어울리는 것조차
피하며 성실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될 것이다.
이 사건을 변론하면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항소심에서 그
피해자 어머님이 피고인 하나하나마다 별도로 작성하여 재판부에
제출해 주셨던 진심어린 탄원서이다. 보통의 경우엔 합의가
되더라도 이렇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어서 그런지 나는 그 탄원서 구절의 일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질박함 속에서 진실을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그대로
옮기며,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하고 전재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리라
믿는다.
존경하는 판사님께
저는 OO년 O월 O일 O시에 숨을 거둔 OOO의 어머니입니다.
OO세의 생을 마치면서, 그것도 난자를 당하다시피 비참하게
죽어가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을 보지 못하고
어머니^5,23^아버지^5,23^동생들에게도 말 한마디 못하고 죽은 걸
생각하면 어미로서 가슴이 찢어지고 또 찢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 모두는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으로 생활하는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함으로써 그 힘든 상황 속에서 그를 용서하고 또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아직 미성년자이므로 주위의 친구들과 합세했지만 앞길이 구만리
같은 인생인데 그의 앞길을 매일처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판사님!
그 앞날을 위해서도, 또 노부모님들의 애타는 가슴을 생각해서라도
OOO을 처벌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또 OOO의 형과 누님이
우리집에까지 오셔서 무릎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빈 것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판사님, 부모님과 형제들의 심정도 살펴주셔서 제발 좋은 선처를
바라고 바라겠습니다. 매일같이 그 먼 곳 OO에서 노부모들이
시외전화로 아침저녁 위로를 했습니다.
판사님.
OOO을 용서해 주세요. 마음으로 무릎 꿇어 사정합니다.
OO이는 어려서 이번 기회에 크게 죄를 뉘우치고 좋은 앞날을
위해서 노력할 사람 같습니다. 저와 약속을 했습니다. 다시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습니다.
또 한 번 말씀드리지만, OOO을 용서하시고 처벌을 원치 않는
피살자 에미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길 간정히 바랍니다.
판사님의 건강을 위해 또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판사님이 되시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망자 OOO의 모
OOO 올림
자동차로 인한 날벼락
가족들이 모두 외출하면서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 혼자 집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사고가 났다. 화장대 서랍 속에 자동차
키를 놓아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놀러 온 아들 친구가
운전연습을 하자고 유혹하자 이 아들이 차를 몰고 나가 그만 사람을
다치게 한 것이다.
운전은 아들의 친구가 했고 아들은 옆좌석에 앉아만 있었지만,
사고를 낸 아들 친구의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한푼도 도움을 못
준다고 하자 다친 사람의 가족들이 자동차의 명의자에게 치료비와
입원기간 동안의 손해를 모두 물어내라고 한다면?
한창 호기심이 많은 사춘기 나이의 아들을 가진 집이라면 한번쯤은
이런 일을 상상해 보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적잖게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엔 억울한 면이 있긴 하지만, 자동차의 주인이 책임을 질
가능성이 높다. 마침 보험처리도 안되는 상황이라면 보통 낭패가
아닌 것이다.
우리 법원은 이와 유사한 경우에 책임한계가 애매모호하다면, 여러
가지 주변 상황를 고려하여 과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결정한다.
그렇다면 그 고려 사항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평소의 차량관리
상태, 차량 보유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동차가 운행된 경위, 차량
보유자와 사고를 낸 운전자의 관계, 운전자가 나중에 차를 돌려줄
의사가 있었는지, 무단운전 후에 보유자가 용서할 가능성이 있는지
등이 판단 요건들이 된다.
우리 법원은 앞의 경우와 유사한 사례에서 이러한 여러 사정을
참작하여 결국 차량 보유자에게 손해배상책임을 물은 적이있다.
차는 결국 주인의 관리 책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를 하나 더 찾아보자.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볼일을 보러가게
되었다. 시동을 걸어둔 채 용무를 보던 사이에, 아들과도 잘 아는
사이이고 전에도 그 오토바이를 2회 가량 빌려 탄 적이 있는 사람이
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람이나 쐬고 오겠다며 그 오토바이를
끌고 나가 사고를 냈다. 이 경우에도 우리 법원은 그 아버지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 정도라면 그래도 덜 억울한 경우다. 정말 당치도 않게 더욱
억울한 경우도 있다.
거의 차량을 도난당했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인데도 차를 관리하는
데 잘못이 있었다고 하여 책임을 진다. 야간에 운전석 출입문을
잠그지 않은 채 점포 앞에 주차시켜 놓은 차를 옆집 점원이 함부로
몰고 나가 운전하다가 일어난 사고에 대하여 차를 잘못 관리한
잘못이 있으니 차 주인에게 손해를 물어주라고 한 판결도 있다.
그러므로 차의 관리에는 만전에 만전을 기해야 날벼락을 면할 수
있다.
과거있는 아내는 개구리 팔자인가
사람은 왜 무시해 버리고 싶은 과거의 괴로움 속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자신을 회계사라고 밝힌 K씨는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진 채 출구를
찾지 못하고 거의 탈진상태에 놓인 듯했다. 세태에 비추어 본다면
K씨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부부가 앞으로는 점점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K씨는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어야 할 새신랑이다. 그런데 결혼
직후 우연한 기회에 한 친구의 친구로부터 아내의 과거를 전해 듣게
되었다. 아내가 자기를 만나기 전 1년 이상을 죽자사자 좋아했던
남자가 있었으며, 둘 사이가 보통을 넘었을 거라는 얘기였다. 역시
세상은 넓고도 좁은 것일까.
잔뜩 의심이 생긴 K씨는 현명치 못하게도 거의 매일 밤 아내를
들들 볶아댔고, 이를 견디지 못한 아내가 드디어 딱 한 번 육체
관계를 가졌다는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안 들으니만 못한 고백을 듣게 된 K씨. 그는 미칠 것만 같았다.
너무도 괴로워 "차라리 묻지 말 것을..." 하는 후회를 했지만,
이제는 엎질러진 물.
매일 밤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또 정말 '딱 한 번' 인지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와 추궁을 하다가는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주먹질도 했다고 한다. 내가 듣기에도 정말로 참기
힘들 것 같은 모욕과 함께.
아내는 그래도 처음에는 참아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두 달이 가고 석 달이 가도 K씨의
냉정해진 마음과 폭력적 행동은 변할 줄을 몰랐다. 예전의 K씨로
다시 회복될 기미가 영 보이지 않았다.
K씨도 마음과는 다르게 장인 장모에게까지 함부로 대하는 자신을
느끼며 괴로워했다. 아내도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들었고,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과연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 생활이 6개월. 남편은 여전히 아내를 보기만 하면 얼굴도
모르는 아내의 과거 남자가 떠올라 미칠 것 같았고, 아내 역시
남편의 육체적^5,23^정신적 학대를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헤어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도저히 합의가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남편은 아내의 과거가 이혼의
발단이었으므로 당연히 자기가 피해자라는 입장이었고, 아내는 남편
얼굴도 모를 때의 일로 학대를 받았으니 오히려 자신이 위자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K씨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자신이 이혼소송을
시작하면 위자료를 받아낼 수 있는지, 만약 아내가 소송을 시작하면
그 결과는 어떨 것인지 하는 점이었다.
사연을 듣고 보니 소송을 하기는 해야 할 판이었다.
우리 법은 배우자의 '부정한 행위' 가 있을 때 즉, 어느 한쪽이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정조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이것을 이유로
이혼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의 부정한
행위는 시기적으로 결혼한 후에만 해당된다. 결혼전의 사실까지를
문제삼아 이혼할 수 있다면 어느 부부관계도 온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법 해석상 혼인 전 행위는 설사 그것이 약혼기간
중에 일어난 행위라도 부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 심정적으로는
사실 수긍하기 힘든 부분이다. 적어도 약혼 후에는 결혼이 예정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쌍방 모두에게 정조 의무가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약혼 후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함께 한
것이 나중에 밝혀지더라도 이혼사유는 되지 않지만, 약혼의
파기사유는 된다는 점이다. 약혼을 파기당하는 것은 물론
위자료까지 물고 예물도 반환해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혼인신고를 할 때까지만 숨기면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거 뭔가
문제가 있네...
그건 그렇고 다시 K씨 부부의 경우로 돌아가보자.
배우자의 결혼 전 과거는 이혼사유가 되지 않으므로 그것만을
이혼사유로 하여 소송을 제기하면 K씨는 당연히 이혼재판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이 부부는 더 이상은 함께 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가 너무 커서 심적으로
용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내는 속 좁고 이해심 없이 자신을 학대해 온 남편에게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을 것이고, 남편 역시 아내의 과거가 괴로워
견딜 수 없다. 법이 억지로 이들을 부부로 묶어놓아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럴 때 법은 무리하게 함께 살라고 판결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른바 '파탄주의' 라고 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잘못한 것 없는
쪽이 잘못한 쪽을 상대로 이혼을 청구해야만 받아들여지는
원칙(이를 '유책주의' 라 한다)이 예외없이 관철되었는데, 이제
우리 법원도 필요한 경우에는 파탄주의에 입각한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따라서 남편이든 아내든, 또는 두 쪽이 모두 함께 이혼소송을
제기하면서 사실상 파탄상태인 부부관계를 이유로 제시하면
'이혼하라' 는 판결을 받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위자료다. 위자료는 원래 잘못한 쪽이 그렇지 않은
쪽에게 주는 것이므로, 잘잘못을 철저히 가려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K씨 부부의 경우에는 과연 누가 더 잘못했다고
볼 것인가.
비록 조금 오래된 1960년대 중반의 판결이지만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아내의 과거가 밝혀져서 사실혼 관계(혼인의사는 있지만 혼인
신고는 하지 않고 동거하는 관계)에 있던 부부가 K씨 부부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헤어지기로 했다. 그리고는 아내가 남편을 상대로
사실혼관계 해소로 인한 위자료 청구를 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결론은, 특별히 누구의 잘못이랄 것 없이 부부관계가 깨진 것이므로
아내는 남편에게 위자료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반면 1991년도의 판결 중에는 이것과 정반대로 결론난 것이
있었다.
재일교포와 이른바 현지처로 보이는 여자 사이에 있었던 일인데,
약혼기간 중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고 임신을 한 상태에서 이런
사실을 속이고 결혼을 한 후, 그 남편의 아이를 출생신고까지 한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자가 위자료를 받을 수 있다는
판결이 났다.
판결내용을 분석해 본 결과 남편에게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상의 아내와 자식이 일본에 있다는 점, 서른다섯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아내를 국내에 두고 가끔씩만 왕래하는 비정상적인
생활을 해온 점, 남편이 폭행과 인격적 모욕 등 몹시 부당한 대우를
계속한 사실이 부부관계가 깨지는 데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 점
등이 참작된 듯하다.
결국 둘에게 모두 잘못이 있지만 남자가 더 잘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으로 해석되지만, 선뜻 납득하기는 힘든 면이 몇군데 있는
사례였다.
이 두 사례를 놓고 판단해 볼 때, K씨 부부의 경우에는 과연 누가
위자료를 받을 수 있을지 100퍼센트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바야흐로 여성 편이므로 만약 지금 판결을 한다면
아마도 아내의 승리로 들아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판단이다.
또한 K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너무 편협하게 생각했던
면이 없지 않다고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이런 일을 당한 남자의
마음일 테지만.
다소 엉뚱하긴 하지만 이번 상담을 하면서 맺은 나름대로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역시 세상에는 쓸데없이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항상
문제야. 심심풀이로 돌팔매질을 하지만 맞은 개구리는 어쩌라고."
모성 콤플렉스, 그리고 로맨티스트
"아이구, 세상에 바람피우는 남자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변호사 생활 5년 만에 절로 나오는 소리다. 변호사를 직업으로
하는 이상 갖가지 기기묘묘한 부부관계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데,
수년간 이 생활을 하면서 수십 가지 바람의 유형을 접하고 외도에
대하여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가슴 아픈 상담을 또 했는데 이제 한번 정리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을 앞둔 여성들을 위한 내용이니
가볍게 읽어 두기 바란다.
남자는 왜 바람을 피우는가?
물론 선천적으로 바람끼를 타고난 사람들도 있는 듯싶다. 이런
사람들은 분석대상에서 제외다. 원칙도 없고 특징도 없다. 그저
예쁘고 젊은 여자면 다 좋다는 타입이니까.
이런 남편을 둔 부인은 의외로 이혼까지는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초기에는 그 버릇을 고치려고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 보지만 곧
체념에 빠진다. 특정인을 대상으로 하는 애정표현이 아니라
동물적인 본능을 무차별적으로 발산하는 정도로 치부하면 그런 대로
견딜 만해지고, 그래서 한편으로 경멸하며 그럭저럭 함께 사는
것이다. 이런 남자는 여자를 밝히는 점만 빼면 다른 점은 거의
정상인 경우가 많고, 특히 돈을 잘 번다.
이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타입 중 가장 위험한
스타일, 즉 요주의의 유형은 이른바 로맨티스트 형이다. 그런
남편을 둔 부인의 한숨 섞인 사연을 듣고 있자면 공통으로 나오는
문구가 있다.
"연애할 때와 신혼초엔 정말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잘해 주었는데,
여자가 생긴 다음부터는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이런 유형의 남자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을 감격시킨다. 춥다고 장갑을 체온으로 덥혀서 얼른 끼라고
내밀어서 눈물이 핑 돌았다던가, 방금 헤어진 후 집에 가서
전화하다가 너무 보고 싶다며 다시 집까지 찾아와 창문 너머로
얼굴을 한번 보고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감격에 겨웠다던가,
몸살이 나서 누워 있었더니 나흘간을 옆에 앉아 밤새 팔다리를
주물러줘서 정말 결혼을 잘했다고 느꼈었다던가, 여하튼 한번
빠지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변하면 완전히 딴사람이 된다. 아내가 눈에 안 들어 오는
것은 물론 자식들도 부모도 안중에 없다. 새 여자에게도 그렇게
깊이 빠지기 때문이다.
경찰과 함께 현장을 덥쳤더니 당황하고 창피해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여자가 충격을 받을까봐, 그 여자에게 행여 어떻게 할세라 어쩔
줄 몰라하면서 막아서더라며 쓴 웃음을 짓던 어떤 젊은 부인은,
남편이 연애시절 너무 잘해 주어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와 결혼했다며, 부모님 가슴에 두 번 못질하는 불효를 자책했다.
우리가 보기엔 이런 성격의 남자는 무뚝뚝한 남자보다 외도를 할
확률이 훨씬 높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온전할리
없다고(?) 이런 사람은 선천적으로 어떤 여성에게도 다정다감할
테니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접근해 오는 여자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 지독한 로맨티스트가 그걸 무슨 수로 못 본 척한단
말인가.
열렬한 사내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는데, 정확히 1년 뒤 남자가
또다시 비밀스런 사내연애를 감행하여 파경에 이른 어떤 미시
아줌마는 "그 남자를 보고 있으면 접근하고 싶어져요. 결혼할 땐
모든 여직원이 부러워했었는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그런 남자와 프랑스 영화같이 물 불 안 가리는 사랑 한번
해봤으면 원이 없겠다.'
지금 혹시 그런 생각하시는 건 아닌지?
한평생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야 한다는 대가가 기다린다. 실제로
너무 잘난 남편을 만나서 의부증에 걸려 괴로워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그 다음으로 심각한 것이 콤플렉스 형이다.
진부한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여자는 대학 나왔는데 남자는
아니든가, 여자네 집은 부잔데 남자네는 가난하든가, 여자는 잘
버는데 남자는 아니든가, 뭐 그런 류의. 여기에 상승작용을 하는
것이 여성의 모성 콤플렉스이다.
쉽게 말하자면 동정이 사랑으로 바뀌는 신파조의 남녀관계인데,
이것이 정형적으로 결합하여 결혼에 이르면 자칫 구타와 학대,
그리고 외도로 이어져서 끔찍한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부잣집 외동딸이 반항아 스타일의 껄렁패에게 푹 빠져 부모님의
반대로 집을 나가 사서 고생을 한다는 식의 흔해 빠진 스토리는
요즘 세상에 오히려 드문 것 같고, 의외로 노처녀로 버티다가 늦게
배필감을 고르는 여성이 이런 함정에 쉽게 빠지는 것 같다.
번듯한 직장에서 10년 이상 경력을 쌓으면서 사회를 알 만큼 알게
될 무렵이면, 저금해 놓은 돈도 꽤 되고 굳이 든든하고 생활력 있는
남편이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남자 보는 눈에도
자신감이 생기는 한편 여러 남자를 겪으면서 세상에 별로 특별한
남자 없다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이럴 때 사회 생활에 때 묻지
않고 순수해 보이는, 약간은 자신감 없어 보이는 남자가 매력적으로
비치는 수가 있나 보다.
'왜 저렇게 자신감이 없을까? 그래 정 부족하면 내가 거들면
되지.'
이렇게 시작해서 맺어진 결합은 십중팔구 구타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그 남자가 여자를 이길 수 있은 유일한 방법이 힘의
과시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자의 인내심은 대단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몇 년을 맞으며 산다. 나중에 X--레이
사진을 찍어보면 갈비뼈에 금이 가 있고 디스크 증상까지 나타난다.
이른바 골병이 들어 도저히 못 견딜 상황인데도, 번번이 뒷돈을
대주고 어떻게든 사회에 적응시키려고 오기를 부린다. 마치
스스로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듯이. 결국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 파국을 맞는다. 남자는 아내보다 젊고 예쁜
여자와 바람을 피우면서 드디어 아내를 이겼다는 승리감에 자신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혼 상담을 하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는 수가 많다. 한
사람은 당하고 살다가 지치고 힘에 겨워 절망에 빠지고 또 한
사람은 온갖 나쁜 짓을 골고루 다 하면서도 적반하장격의 증오심만
키우고. 수년간 참으며 살아온 사연을 듣노라면 동정을 넘어서서 그
미련스러움에 한숨이 나올 때도 종종 있다.
요즈음 신세대들은 연애상대와 결혼상대를 영악하게 가린다는
매스컴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며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데, 이것도 변호사의 직업병일까 아니면 딸만 키우는 아빠의
콤플렉스일까.
이혼만으로는 억울하다!
오늘 P여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재판에서 이기고 몹시 기뻐하며
감사하다는 전화를 한 것이다. P여인은 내가 출연했던 TV
프로그램(생방송 오변호사 배변호사)에서 만난 여인 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불쌍한 처지에 놓인 분들의 사연을 수도
없이 다뤘지만, 아마도 가장 가련한 처지의 주인공이 바로 이
P여인이 아니었나 싶다. 이 사건은 재판을 지방에서만 하도록 되어
있어서 내가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그 지방의 동료 변호사에게
부탁을 했는데, 결과가 예상대로 좋게 나왔다는 것이다.
P여인은 우리 프로에 출연할 당시 임신 7개월의 무거운 몸이었다.
어머니의 친구분 소개로 남편을 만나게 되어 약 3개월의 교제 끝에
결혼에 이르렀는데, 신혼초부터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남편은 집들이는커녕 친구를 한 명도 소개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결혼 전에 입던 옷도 가져오지 않았고, 월급이라고 30만 원만 갖다
주곤 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삐삐호출이 자주
있었는데, 남편은 그때마다 결혼 전에 함께 자취한 죽마고우라며
옆방이나 공중전화로 가서 장시간 통화를 하곤 했다.
무언가 석연치 않았지만 별수없이 믿고 지내던 중, 낯선
남자로부터 알지 못할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하면서 남편의 학대까지
시작되었다. 남편은 "웬 놈이 밤늦게 전화질이냐?" 며 의심을 하고
그것을 이유로 구타를 시작한 것이다.
P여인은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에만 전화가 걸려오는 점과, 남편만
알 수 있는 일을 그 남자가 알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
전화가 남편과 어떤 연관이 있으리라고 추측하게 되었다. 그러다
남편의 미심쩍은 행동을 직접 확인해 보자고 마음 먹게 되었다.
며칠간의 아슬아슬한 미행 끝에 남편의 실상을 목격하고는
아연실색! 남편은 다른 여자의 집을 드나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네 주민들에게 확인해 보니 이미 2년 반 동안이나 함께
생활하면서 부부로 행세하여 이웃 주민 모두가 세상에 둘도 없는
잉꼬부부로 알고 있었던 것. 더욱이 가관인 것은 결혼 전에 집을
보러 다닐 때 동창이라며 어떤 여자를 데려와 소개했던 일이
있었는데, 동거하는 여자가 바로 그 여자였던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 여자는 자기가 먼저 살기
시작했고 남자가 좋아서 찾아오는데 어쩌라는 말이냐며 오히려
기세등등했다. 도대체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경찰을 대동하고 현장을 덮쳤으나 간통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두 사람은 맥없이 풀려났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배짱을 부리는 남편! 애도 낳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는 말을 던지고는 짐을 싸들고 나가버렸다.
나중에 사연을 알고 보니, 부모가 그 여자와의 결혼을 반대하면서
P여인과의 결혼을 강요하자 부모를 속이기 위해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무책임하고 나쁜 사람이 또 있을까. 한
여자를 제물로 삼아도 유분수지!
처음 이러한 P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나로서도 이혼만
가지고는 도저히 성에 차는 분풀이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혼보다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서 연구 끝에 생각해낸 것이 '혼인취소' 였다.
혼인의 취소는 혼인적령 즉, 남자 만 18세 여자 만 16세가 되지
않은 사람들간의 결혼이나 이중결혼, 사기나 강요에 의한 결혼 등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혼인을 아예 취소시켜 버리는 것이다.
위자료도 이혼보다 많을 뿐만 아니라, 호적에도 '이혼' 이 아니라
'혼인취소' 라고 표시되어 후일을 생각하면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더욱이 이혼의 경우에는 예물의 반환을 요구하거나 결혼비용을
받아내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혼인이 취소되면 이것 역시 가능하므로
여러 모로 유리했다.
사실 '혼인취소' 는 거의 쓰이지 않는 제도였다. 보통은 손쉬운
이혼을 생각하게 되지만, P여인의 남편은 경우가 달랐다. 전혀
결혼할 생각도 없이 P여인을 하나의 도구로만 생각하고 P여인을
속여 결혼한 것이므로 과감히 사기를 이유로 들어 혼인취소소송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이러한 예상대로 우리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남편은 적반하장격의 억지 주장을 해대며 격렬히 다투었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결국 완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검찰에
의하여 간통죄까지 인정되어 동거여인과 함께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P여인으로부터 이러한 소식을 듣고도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무거운 것은 웬일일까? 아이의 운명에 대한 연민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에 대한 실망 때문일까.
어쨌거나 세상은 험하고, 상식만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숨쉬며 살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 서글픈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요즈음 만난 지 2, 3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하는 커플을 가끔
본다. 결혼하는 사람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너무 쉽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운명에 맞겨버리는 것은 아닌지.
간통한 여자는 맨손으로 쫓겨난다?
30대 중반의 한 아주머니가 찾아오셨다. 밤새 울었는지 눈가가
퉁퉁 부어 있었는데, 사연인즉 언니가 간통으로 구속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여섯 살 연하의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하다가 현장에서
형부에게 발각되어 구치소에 갇혀 있다고 했다.
"남 부끄러운 일인 줄은 알지만, 사실 알고 보면 언니만 나쁜 건
아니에요. 원인 제공은 형부가 했거든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형부는 한평생 언니 속만 썩여온 전형적인
플레이보이요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사업하는 재주는
탁월해서 무일푼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경기도 일원에
여러 필지의 땅을 가지고 있을 만큼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여자를 너무 좋아하는 탓에 몇 개월에 한 번씩 여자를
바꾸다시피했다. 데리고 있던 여직원, 술집 아가씨, 거래처
아가씨... 그 바람에 언니의 가슴에는 피멍이 들어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따지고 들기도 하고 다투기도 많이 다투었지만 번번이
결과는 형부의 구타와 가출이었단다. 요즈음에는 아이들에게 온갖
애정과 관심을 쏟으며 나름대로 적응하는 것 같아 옆에서도 한시름
놓았는데 난데없이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간통한 여자를 변호한다는 것이 선뜻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 경우는 발 벗고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이미
남편에 의해서 이혼소송이 제기된 지 한 달 정도 되었다고 하니
조만간 이혼재판이 시작될 것이고, 형사재판도 바로 열릴 것이다.
급히 접견을 가서 사연을 정리했다.
이 부부는 한 직장에서 만나 사내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저금해
놓았던 각자의 돈을 모두 털어 조그마한 보일러 대리점을 시작했고,
아내는 사업 초기 어려울 때는 경리까지 모아주며 남편을 도왔으나
사업이 자리를 잡아가면서는 가사일에만 전념해 왔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방법이 있을 듯했다.
남편이 걸어온 이혼소송에 대하여 반소를 제기했다. 여기서 '반소'
라는 것은 오히려 내 쪽에서 억울하니 내가 당신을 상대로 이혼을
청구한다는, 쉽게 말하면 맞소송인 셈이다.
내가 비록 단 한 차례 실수를 하여 간통으로 구속까지 되었지만
당신은 한평생 바람을 피우고 내 속을 썩였으니 당신도 이혼에
책임이 있고 따라서 혼자만 당하고 있지는 않겠다는 의사표시인
것이다.
이러한 반소와 동시에 '재산분할' 도 함께 청구했다.
'재산분할청구' 는 부부가 함께 모은 재산이 있다면 이혼하는
마당에 그 기여도에 따라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라는 취지에서 생긴
제도이다. 아내가 밖에 나가서 돈을 벌었을 경우뿐만이 아니라
가정에서 살림만 했어도 그 가사노동을 인정하여 일정 부분을
인정하는 것이며, 순전히 가사노동에만 전념했어도 재산의 약 1/3
가량을 나누어 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재산분할청구권' 은 잘못한 쪽 배우자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원래의 제도 취지가 함께 모은 재산 중
각자 자기 몫은 자기가 챙겨가라는 것이므로 누가 이혼 원인을
제공했는지의 여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흔히 알고 있는 '위자료' 라는 것은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
배상이므로 이혼 원인을 제공한 쪽에 잘못이 없는 쪽에게 지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산분할은 이와 무관하게 자신의 기여도에 따라
자신의 몫을 계산해 받을 수 있다.
이 부부의 경우에 재산이 10억 정도인데 결혼생활을 시작할 때는
거의 무일푼이었다가 그 정도의 재산을 모으기까지에는 아내의
도움도 큰 역할을 했으므로 절반은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업 초기에 아이를 기르며 틈틈이 장사도 도왔고, 남편이 그 동안
집안일에 신경쓰지 않고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를
하였으니 당연히 절반은 아내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연실색했다. 처음에는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서방질한 여자가 감히 이혼청구를 하고 게다가 재산까지 그것도
절반이나 내놓으라고 하느냐며 흥분할 뿐 도저히 납득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쩌랴. 법이 그런 걸.
몇 군데 변호사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구미에 맞는 결론을
얻으려 했겠지만 어느 곳에서도 희망을 발견하지는 못했으리라.
적어도 재산분할만큼은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크게
고민하는 듯했다.
단 몇 푼의 돈도 나누어주기 싫은 그 남편에게는 이혼소송을
취하하는 방법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양쪽 변호사가
협의한 끝에 양쪽 다 소를 취하하자고 결론을 보았고, 이러한
결과에 그 남자는 이만저만 실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우리 판단으로는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반은 아니더라도 일부라도
나눠주고 과감히 이혼하는 것이 깨끗한 결말이 아닐까 싶은데, 그
남편은 결국 이혼소송을 취하하고 재산을 지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아마도 재산의 1/10이라도 내놓으니 차라리 그대로 살겠다는 심산인
모양이었다. 사람의 심사란 왜 이리 얄쏭달쏭한지.
어쨌든 그 아주머니는 풀려나게 되었다. 정부와 함께.
이러한 결말이 그 부부를 위해, 그리고 자식들을 위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선뜻 답할 수 없다. 이제는 두 남녀가
동등한 입장이 되었으니 현명한 결정을 했으면 좋겠는데...
칠순 할머니의 이혼 결심
한 할머니로부터 이혼소송을 의뢰받게 되었다. 할머니의 여세는
70세, 그리고 할아버지는 80세.
평소 그 인품을 흠모해 온 한 성직자분께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분이니 꼭 도와달라고 내게 특별히 전화를 걸어 말씀하실 때까지만
해도 그저 상처받은 할머님을 잘 설득해서 참고 사시도록 해달라는
뜻 정도로만 알아들었다. 그런데 막상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보니
문제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한평생 여자 문제로 한을 삭히며 살아오신 우리네의
전형적인 아낙이었다. 신혼초부터 시작된 남편의 외도로 자살기도도
여러 번, 결국 늘그막에는 신경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조금이라도 따지고 들면 여지없이 가해지는 남편의 폭행으로 입원도
여러 차례 하셔서 언제부터인가는 무관심과 포기, 그리고
신앙심만으로 버티며 살아오셨다.
칠순의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젊었을 때의 고운 자태가 그대로
연상될 정도로 곱게 늙으신 할머니의 인생역정을 듣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 숱한 속앓이에도 어쩌면 저리 곱게
늙으셨을까.
사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게 되자 남편의 외도는 끊일 줄을
몰랐다. 이렇게 꾹꾹 누르며 참고 살아온 할머니! 이제 아들 딸
모두 출가시키고 더 이상 기력이 없으신지 한풀 꺾인 영감님과
그럭저럭 지내오셨는데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인가.
바로 얼마전, 다른 곳도 아닌 집안세서 20년간이나 데리고 있던
가정부와 할아버지가 한이불 속에 누워 있는 꼴을 목격하시고 그만
졸도해 버리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고도 사과 한마디 없는
영감님!
자식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간통죄로 고소하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신 할머니는 한집에서 살 수 없으니 별거비용 정도만을
도와달라는 말씀으로 평생 처음으로 반기를 드셨는데, 할아버지는
늘 해오던 대로 간단히 묵살해 버렸다. 자존심이 구겨질대로 구겨진
할머니는 20년 이상 데리고 있던 가정부에 대한 배신감까지 겹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신 듯했다.
가능하면 소송까지는 가지 않으려고 중간에서 중재를 적극
도모하였지만 할아버지의 고집도 여간 아니었다. 할머니가 헛 것을
본 것으로 우기며 완전히 '오리발 작전' 으로 나오시니 화해를
권유할 수조차 없었다. 이 노부부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할머니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승부에서 설욕을 너무도 간절히 원하셨고,
할아버지는 이렇게 무서운 결심을 하게 된 할머니의 결심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결국 소장을 낼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외국에 있는 아들네
집으로 출국하여 수개월간 재판을 지연시키고 변호사를 동원하여
빠져 나가려 했다. 아마도 할머니가 그 가정부로 하여금 범행(?)을
자백하도록 한 내용의 녹음이라도 받아놓지 않았더라면 할아버지가
끝까지 '오리발 작전' 으로 나오셨겠지만, 소송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준비한 이 비장의 무기 덕분에 결국 할아버지는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정부를 매수한 결과라는 억지 주장을
사실상 철회하고 합의에 동의한 것이다. 실로 길고도 험난한 재판의
승리였다.
이런 사례는 매우 드문 경우이지만,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중년의
이혼이 급증하고 있다. 결혼한 지 2,3년도 되지 않은 신혼부부의
이혼율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제는 중년의 이혼이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자식들의 입시와 혼사 때문에 참고 참아왔던 한의 세월이 너무도
억울해서 일까. 2, 30년간 남편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살아올
수밖에 없었으니 이제는 나도 인생을 되찾아야겠다는 고뇌에 찬
결단일까.
일본에서도 노부부의 이혼이 번지고 있다고 한다. 남편이 정년을
맞을 즈음, 부인이 그 동안의 한 맺힌 생활을 청산할 것을 과감히
선포하고 이혼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금으로 받아든
퇴직금이 소송의 최종목표가 된다. 나이 들어 힘은 없고 자식들은
모두 출가해 외롭기까지 한데 퇴직금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한
남편들은 무엇을 낙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렇게 '황혼 이혼' 이 늘어나는 원인을 분석해 보면 해이해져
가는 성풍속에 가장 큰 원인이 있는 것 같지만 한편 여성에게
유리해진 이혼제도도 큰 몫을 하고 있다. 바로 '재산분할청구' 가
그것인데, 부부가 합심 협력하여 재산을 모았으니 헤어질 때도 함께
모은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라는 제도이다.
한평생 가사일만 돌본 가정주부도 전 재산의 30퍼센트 정도는
나누어 받을 수 있고, 만약 아내가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면
50퍼센트까지도 가져갈 수 있으니 그 액수가 엄청난 것이다.
과거에는 잘못한 남편에게 아내가 이혼을 할 수 있어 오히려
아내와 헤어지고 싶은 남편들에겐 내심 다행스러운 제도였는데
이제는 재산분할도 해주고 위자료까지 주어야 되니 참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셈이다.
여성의 지위가 이렇게 향상되었으니 중년의 아내들이 더 이상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필요 이상으로 참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앞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처럼 중년 남성들이 직장에서
퇴직한 직후 이혼을 당하는 사례가 빈번해져서 '퇴직 이혼' 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아내는 남편의 '괘씸한 짓거리들' 을 일단 참으며 살다가 남편이
정년퇴직하여 몫돈을 받아든 순간, 이혼소송을 제기하여 재산불할과
위자료로 그 절반 이상을 받아내서는 나이가 들수록 필요하다는
경제력도, 아내의 보살핌도 잃어버린 채 실의에 빠져 한심한 처지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인과응보겠지만, 복수도 이 정도 되면 시원한 정도를 넘어서
등골이 오싹해질 지경이다. '간 큰 남자 시리즈' 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요즘의 세태가 참으로 실감나는 세상이다.
상속이 남기는 슬픈 이야기
1. 전부 쓰고 죽을 자신이 없으면
요즘 법률상식에 대한 관심이 많이 늘어난 때문인지 생활법률에
대한 강좌를 부탁받는 일이 부쩍 자주 생긴다. 어떤 강좌가 됐든
필자는 동기부여를 위하여 20문항 정도 되는 질문지를 돌려 5분
안에 혼자 힘으로 답하도록 하고 나서야 강의를 시작한다. 아주
쉬운 질문으로 보이는데도 보통 반 이상을 맞추지 못하는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법률상식만을 뽑아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질문들 중에 상속에 관한 것은 다음과 같으니 독자분들도 답해
보기 바란다. 답은 O, X 둘 중에 하나.
자식들을 불러놓고 재산분배에 대하여 당부하면 그것이 바로
유언이다( )
무심코 'O'를 써 넣고 싶은 분들이 압도적으로 많겠지만,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X' 가 정답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유언자가 저세상에 가서 꼭 자기가 원한대로
상속재산이 분배되는 모습을 보려면 일정한 격식에 따른 유언을
해야 된다. 왜냐하면 유언에 있어서 법률의 힘이 필요한 때는
분쟁이 이미 생겼거나 생길 염려가 있는 경우인데, 어설프게 몇
마디 말한 것을 유언으로 보게 되면 더 큰 분쟁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자식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큰아이에게는 살고 있는 집을, 둘째에게는 상가 건물을,
셋째에게는 경기도 용인의 땅을 줄 것이니 그렇게 분배하도록
하라." 고 당부했다고 가정하자.
다행히 그 형제들이 양보심 강하고 돈 몇 푼보다는 형제간의
우애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각자 약간의 불공평을
감수하더라도 부모님 뜻대로 상속받아 별탈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중에 한명이라도 남의 떡이 더 커 보여서 그
유언에는 절대 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온다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자신이 그자리에서 직접 듣지 못했으므로 믿을 수 없다느니,
계산을 해보니까 둘째인 내가 제일 홀대받은 것 같으니 재분배
하자느니 하는 불평이 계속된다면 자칫 유산을 둘러싼 집안 싸움을
피하기 어렵다. 결국 적절한 선에서 조정이 되지 않아 서로 불신이
쌓이고 감정이 폭발하여 분쟁으로까지 번진다면 부모님이 애써 모은
재산을 그때부턴 오히려 재앙의 씨앗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런 경우라면 보통은 남보다도 못한 원수지간이 되어버리는데,
형제 남매간에 감정이 격해지고 상속세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지
못하는 바람에 아까운 재산이 국세청에 의해 공매처분 되어버리는
사례도 보았다.
부모들이야 '내 속으로 낳은 내 새끼들이야 설마...'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며느리가 끼여들고 사위가 욕심낸다면 형제간의
사이가 아무리 좋았더라도 재산 싸움은 예측불허이다.
그래서 법은 '유언' 에 있어 엄격한 격식을 요구하여 그러한
유언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유언의 내용이 정확한지를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하여 사후의 분쟁 가능성을 미리 봉쇄해 놓고 있다.
유언의 방법으로는 다섯 가지가 있다.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구수증서가 바로 그것이다. '자필증서' 에 의한 방법
이외에는 모두 1인 또는 2인의 증인이 필요한데, 미성년자나 유언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없다. 이 다섯 가지 방식에
의하여 유언하더라도 완벽하지 않으면 무효가 되는 경우도 있으므로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자필증서' 는 유언자가 직접 내용과 연월일, 주소, 성명을 적고
날인해야 하므로 비밀스럽고 간편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법을 잘 모르는 경우에는 방식과 내용에 미비한 점이 있어
불명확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언서의 존재 자체가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고, 위조나 변조의 위험 또한 있을 수 있다.
'녹음' 은 유언자가 유언의 내용, 성명과 연월일을 불러주고
이어서 증인이 유언의 정확함과 이름을 녹음해야 한다. 잘못하면
중요한 내용이 지워져버리는 흠이 있기에 내용이 복잡하고 많을
때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공정증서' 는 유언자가 증인 2인과 공증인이 참석한 가운데
유언의 취지를 말하고, 공증인이 이를 받아 적은 뒤 다시 낭독하여
유언자와 증인이 그 정확함을 확인한 후 각자 서명 날인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절차가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
'비밀증서' 는 유언자가 필자의 성명을 기입한 유언서를 엄봉
날인하고 2인 이상의 증인 앞에서 자기의 유언서임을 표시한 후, 그
봉서 표면에 제출 연월일을 기재하고 유언자와 증인이 각자 서명
날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재된 날로부터 5일 내에 확정일자인을
받아야 한다. 유언 내용을 완전하게 비밀로 할 수 있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절차가 복잡한 점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구수증서' 는 질병이나 그밖의 급박한 사유로 인하여 위의 네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없을 때 이용된다. 유언자가 2인 이상의
증인을 참석하게 하고 그중 한 사람에게 유언의 취지를 말한 뒤,
그것을 들은 사람이 필기 낭독하여 유언자와 증인이 그 정확함을
확인한 후 각자 서명 날인해야 한다. 또한 급박한 사유가 종료된 지
7일 내에 법원의 거인을 받아야 한다.
상속인 간의 싸움은 일단 시작되면 심각하고 대책도 없다. 재산이
있다고 반드시 분쟁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재산이 없으면 재산
싸움은 절대 없다. 그래서 '상속 안하기 모임' 같은 것도
생겨났다고 하는데 공평하게 갈라줄 자신도, 모두 쓰고 죽을 자신도
없는 분들은 한번 고려해 봄 직하지 않을까. 돈보다는 형제간,
가족간의 우애라는 유산을 남겨주는 일에 좀더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 정신 차리지 않으면 빚도 상속된다.
재산은 일단 유언대로 분배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유언이
없거나, 있더라도 위에서 예를 든 바대로 법률이 정한 격식을
갖추지 못하여 무효일 때는 법에 정해진 상속순위와 상속분에 따라
재산이 분배된다.
이제 유언이 없거나 무효라서 법이 정하는 대로 상속받는 경우의
순위와 몫에 대하여 한번 알아보자.
상속의 1순위는 죽은 사람의 아들과 딸(법률용어로 '직계비속'
이라 한다)이고, 2순위는 부모님('직계존속' 이라 한다)이다.
그리고 남편이나 아내는 직계존^5,23^비속과 같은 순위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아들이나 딸이 있으면 아들^5,23^딸^5,23^배우자가 함께
상속받고, 아들과 딸이 없으면 부모와 배우자가 함께 상속한다.
아들^5,23^딸도 부모도 아무도 없는 경우에는 배우자 혼자
상속받고, 배우자마저 없으면 형제 자매가 유산의 상속자가 된다.
이렇게 놓고 보니 같은 순위의 상속인으로 여럿이 있을 수 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자면, 부모가 있는 50대 가장이 1남 2녀와 처를
남겨두고 사망했다면 부모는 상속을 받지 못하고 아내와 자식들이
상속받게 되는 것이다.
이제 각자의 몫은 얼마인가를 알아보자.
원래 함께 상속받는 공동 상속인들 간에는 상속분이 똑같다.
과거에는 아들과 딸 사이에 차이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런 차별이
모두 없어졌다. 다만 배우자는 직계존^5,23^비속보다 5할을 더
받는다. 따라서 위에서 든 예의 경우에는 1.5(아내): 1(아들):
1(큰딸): 1(둘째 딸)의 비율로 나누어 받게 되므로, 아내가 3/9
아이들이 각자 2/9씩 상속받는 셈이다.
유언을 할 때 자식 한 명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고 아내와 나머지
자식들에게는 한푼도 주지 않는다는 유언도 가능할까. 상속은
유언하는 사람의 뜻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므로 어떤 유언도
가능하지만(따라서 전액 사회단체에 기부한다는 유언도 가능하다),
지나치게 형평에 어긋난 경우에 그 당사자는 '유류분' 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최소한의 자기 몫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찾을 수
있는 최소한의 상속분은 직계비속과 배우자의 경우 위에서 설명한
법정상속분의 1/2, 직계존속과 형제자매는 1/3이다.
따라서 위에서 든 예의 경우, 가장이 사망하기 전에 전 재산을
사회단체에 기부한다고 유언했을 때에도 아내는 전 재산의 3/18,
아이들은 2/18씩은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크게 유의해야 할 것은 재산뿐만 아니라
빚도 상속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법은 상속받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속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꼭 빚이
있어서라기보다도 당사자가 원치 않으면 상속을 강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따라서 상속인은 상속받은 재산의 범위 내에서만 빚을
갚겠다는 이른바 '한정승인' 도 할 수 있고, 아무 조건 없이 모든
재산과 빚을 물려받겠다는 '단순승인' 역시 가능하며, 상속 자체를
아예 '포기' 할 수도 있다.
우리 민법은 자신이 상속인이 된 사실을 안 날로부터 3개월내에
승인이나 포기를 하도록 규정하고, 이 기간 내에 아무 결정이
없거나 상속재산을 팔게 되면 '단순승인' 을 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빨리 빚이 재산보다 더 많지는
않은지 확인해 보고 자신이 없으면 '한정승인' 을 해놓는 것이
좋다.
실제로 아무 생각 못하고 있다가 돌아가신 친정부모에게 거금의
채권이 있다는 은행으로부터 소송이 들어옴과 동시에 부인 명의의
집이 가압류되자 부부간에 틈이 생겨서 가정이 깨어지는 가슴 아픈
경우도 있었다. 이 부인의 경우 친정아버님이 이사로 근무하던
회사의 은행대출에 연대보증을 섰는데, 그 회사가 부도나고
보증채무자인 친정아버님이 사망하자 은행이 상속인인 맏딸에게까지
그 빚을 갚으라는 소송을 낸 것이다.
또 상속포기와 관련해서는 이런 사례도 있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1남 2녀를 남기고 고혈압으로 갑자기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딸들에게 막내 남동생이 사업체를 무리없이 이어갈 수 있도록
상속재산 포기절차를 밟도록 타일렀다. 남동생 역시 누나들에게
형식적으로는 그렇게 해놓지만 나중에 섭섭하지 않도록 재산을
나누겠다고 약속했다. 어머니 역시 상속분을 포기했다. 어머니가
상속을 받았다가 나중에 또 자식들에게 상속해 주면 상속세를
이중으로 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세월이 흘러서 누나들도 시집갔고 대학에 다니던 남동생 역시
결혼을 했는데, 누나들이 보기에 남동생과 며느리가 홀어머니를
박대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누나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예전 같지
않았다.
이럴 때 포기했던 재산을 되찾을 수 있을까?
동생에게 사기를 당한 셈이므로 포기했던 것을 취소한다는 소송를
낼 수는 있으나 그 정도 가지고 사기가 인정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경우의 취소는 포기한 날로부터 1년 내에만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소송이 아예 불가능한 상태였다.
3. 억울한 상속인, 횡재한 상속인
상속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기억나는 사례들이 또 있다.
우리 민법은 "고의로 직계존속 또는 상속의 앞 순위나 같은 순위에
있는 사람을 죽인 자는 상속받을 자격을 잃는다." 고 규정하고
있다. 얼마전에 있었던 금용학원 이사장 피살 사건 때 범인인
아들은 한푼도 상속받지 못한다고 보도된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당연한 사리이고 반드시 지켜져야 할 규정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가슴 아픈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 법 규정이기도
한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이 고민에 빠졌다. 첫 애를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부모님들은 아이를 낳아주길 바라는
눈치셨지만 아버지 없이 자라야 할 아이의 장래와 생활대책을
생각하면 낳고 싶지 않아 결국 아이를 지우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 얼마후 교통사고 가해운전사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시작했고, 며느리를 괘씸하게 생각한
시부모님도 자신들이 오히려 진정한 상속인이라며 같은 소송을
제기했다. 당연히 낙태한 사실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우리 민법은 뱃속에 있는 태아도 상속에 관한 한 '사람' 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이 부인의 뱃속에 있던 태아는 엄마와 같은
순위의 상속권자였던 셈인데, 결과적으로 엄마가 지워버린 것이
된다.
이제 고민은 법원의 몫이 되었다. 법대로 하자면 부인은 상속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나 부인 입장에서 보면 확실히 억울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아이가 없어짐으로 해서 원래 상속받을 자격이 없던
시부모가 며느리와 같은 순위의 상속인이 되었으니 사실 시부모님
입장에서는 손해본 것은 없는 셈이다. 만약 아이를 지우지 않았다면
부인과 아이가 같은 순위이므로 둘이 공동으로 손해배상금을 받게
되는데, 사실상 갓난아이의 몫을 엄마가 관리할 것이므로 그 부인이
전액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고등법원은 고민 끝에 "낙태는 했지만 '상속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없었다" 는 근거를 들어 이 부인도 상속을 받을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많은 고민 끝에 끌어낸 이론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상고되자 대법원에서는 정반대로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은 법 규정 자체로 보아 '상속에 유리하다는 인식' 이
있었는지를 고려할 필요는 없으며, 원칙대로 '고의' 로 아이를 지운
사실을 기준삼아 판단해야 하므로 부인의 상속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대법원도 법과 현실 사이에서 심각한
고민을 했으리라.
이와는 정반대의 사례도 있다.
A남은 B녀를 상대로 이혼소송중이었다. 외국에 기술자로 나가 있던
사이에 아내가 자식도 돌보지 않고 바람을 피우며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송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남편이 직장에서 사고로
사망하였다. 다행히 남편이 고액소득자였기 때문에 회사를 상대로
한 협상에서 수억 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남편의 회사에서는 합의금을 지급하더라도 부모님께 드리고
싶었다. 남편이 아내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그리고 부모의 형편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자식이 있는 경우 상속순위상 아내와
자식에게만 상속권이 있다. 바람난 아내도 이혼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엄연히 법적인 아내이므로, 아내는 돈 한푼 못 받고
이혼당할 처지에서 갑자기 수억 원 대의 부자 미망인이 된 것이다.
법이 항상 정의의 편에 서는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최소한의 법은 알아두어야 하고, 미리 조치해야 할 것은 놓치지
말고 챙겨뒤야 한다.
법조부조리와 변호사의 올바른 이용법
요즈음 변호사 수가 너무 적어서 서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므로 수를 대폭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한창이다.
우리가 보기에도 법조계에는 '전관예우' 다 '사건브로커' 다 또는
'과다수임료' 다 해서 부끄러운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무엇인가 변화가 필요하긴 한데, 그것이 반드시 법조 인구의
증가로만 해결될 성질은 아닌 것 같다.
여하튼 그런 골치 아픈 문제는 높으신 양반들이 의논중이므로 일단
접어두고라도 일단 이용하는 분들의 불편이 대단하다고 하니 우선
급한 대로 현상태에서 변호사를 어떻게 이용해야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께
단편적인 법률지식을 알려드리는 것도 중요 하지만, 변호사를
이용하는 올바른 길을 알려드리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필요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건에 따라 특성이 다르므로 먼저 사건부터 구분해 보자.
'형사사건' 이란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는 절차이고, '민사사건'
이란 재산권행사 등에 관하여 다툼이 있는 경우에 재판을 통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는 절차이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발생 했다고
가정했을 때 그 사고를 낸 운전사를 처벌하는 절차는 형사사건
절차이고, 그 교통사고의 피해자나 가족이 가해자를 상대로 치료비
등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하게 되면 그것은 민사재판이 된다.
또 '가사사건' 이란 이혼과 상속문제 등 가족간의 문제를 다루는
재판 절차를 말하고, '행정사건' 이란 잘못 부과된 세금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과 같이 나라나 지방자치단체의 잘못된 행정을
바로잡고자 할 때 이용되는 절차다.
민사^5,23^형사^5,23^가사^5,23^행정 사건 등 다양한 종류의 사건
중 변호사 선임과 관련하여 가장 문제가 많은 것이 형사사건의
경우이다. 위에서 말한 법조계의 부조리도 거의 이 형사사건에서
발생하게 되는데, 일단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가족 중의 누군가가
구속이라도 되면 대부분 이성을 잃고 그 사람을 석방해 내는 데에
모든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보통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나중에 검찰로 넘겨지게 되는데, 이러한 수사 단계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소위 '사건브로커' 의 농간이다.
경찰 주변에는 갑자기 일을 당한 서민들에게 접근하여 구속된
사람을 기가 막히게 풀어내는 용한(?) 변호사를 소개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기생한다. 이들은 대개 변호사에게 사건을 보내고
그 수임료 중 20 내지 30퍼센트의 대가를 '와리' 라는 명목으로
받아 챙기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활동한다. 때로는 경찰들이 직접
이런 일을 하여 처벌되기도 하고 그런 방법을 사용한 변호사까지
징계를 당한 경우도 있었는데, 아직도 사건브로커는 뿌리 뽑히지
않고 있다.
피의자의 가족들은 이런 경로를 통하여 변호사를 찾아가면
브로커에게 지급될 소위 '와리' 를 감안하여 높게 책정된 수임료를
각오해야 한다. 과다수임료의 문제가 이로부터 파생되는 부분도
상당부분 차지한다.
심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과다수임료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전관예우' 문제다. 전관예우란
법원이나 검찰에서 옷을 벗은 지 6개월(과거에는 1년 정도였다고
하는데 옷 벗는 사람이 너무 많아진 다음부터 기간이 많이
짧아졌다고 한다)이 안되는 변호사의 청탁은 법원과 검찰이 기준을
어기는 무리를 해가면서까지도 들어준다고 하는 망국적 현상이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후진국에서도 보기 어려울 법한 이런
기현상이 최근까지 우리나라 법원과 검찰 주변에 엄연히 존재했고,
이것이 또한 과다수임료의 온상이 되어왔다.
기준에 어긋나는 판결을 받아내는 것을 조건으로 하므로 부르는 게
값이고, 또 당연히 구속되어 있어야 할 사람을 풀어내 주는 데 돈
있는 사람이라면 몇 천만 원인들 쉽게 내놓지 않겠는가. '무전유죄
유전무죄' 의 아우성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관예우 문제는 거의 형사사건에 국한되는 일로서 나머지
민사^5,23^가사^5,23^행정 사건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
었는데, 이는 당장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상대방이
존재하는 재판구조에 기인한다. 아무리 강심장인 판사도
이해관계인이 의식되는 상황에서 무작정 안면 있는 변호사의 편을
드는 데는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사법개혁작업이 시작되고 나서 옷을 벗고 나간 직후의
변호사가 수임하는 사건은 전담재판부로 몰아서 특별관리하는
획기적인 조치가 시행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전관예우의
폐해가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다.
어쨌거나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의뢰인이 사건브로커가 아닌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서 변호사를 선임하고 또 전관에 대한 청탁의
방법이 아닌 정당한 변론을 통하여 억울하지 않은 판결을 받고자
한다면 변호사가 아무리 원한다 해도 고액수임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면 이제 변호사를 정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는 사람이라야 안심을 하는 듯하다. 사돈의
팔촌일지언정 아는 사람을 통해서 소개를 받고서야 비로소 변호사를
결정한다. 물론 평생을 좌우할 만큼의 중요한 문제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지만, 무조건 아는 사람을 찾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본다. 선뜻 변호사를 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 일단 여러
법률사무소를 통하여 필요한 지식을 얻은 후 가장 성실히 일해 줄
수 있다고 판단되는 변호사를 선택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이때
상담단계에서 법률구조공단이나 각 변호사회 또는 각종
사회단체(가정법률상담소, 환경운동연합등)가 운영하는
무료법률상담실을 이용하여 사전지식을 얻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한 형사사건의 경우에는 당직 변호사 제도를 이용하는 것도 적극
권하고 싶다(이 제도는 워낙 중요하므로 3장에서 별도로 상세히
소개하겠다)
흔히 '변호사 사무실 문턱이 높다' 는 이야기는 대개의 경우 이미
사고가 터지고 나서의 일에나 해당되는 말이다. 병원에서도 병이
걸려 수술하게 되면 미리 예방하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비용이 들
듯이, 이미 분쟁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는 데 드는 변호사 비용은
많이 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변호사에게 미리 상담하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상담료를 아무리 많이 받는 변호사라
해도 미리 길을 묻는 당사자로부터는 2만 원 내지 5만 원 이상을
받지 않는다.
법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지금 무엇인가
법률적으로 의미있는 행동을 한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이때 확신이 서지 않으면 즉시 법률전문가에게 상담을 함으로써
저렴한 비용으로 최악의 사태를 사전에 막을 수 있다.
변호사의 올바른 이용법은 그 무엇보다도 '미리' 사용하는 것이다.
3 가끔은 변호사도 울고 싶다
내가 울고 싶을 때
"웬 놈의 법원 건물이 이렇게 좋아? 이 '사' 자 돌림 도둑놈의
새끼들, 이 자식들 편하라고 이렇게 잘 지어놔? L.A에 가봐. 얼마나
검소하게 지어놨나. 날강도 같은 자식들."
아침 재판을 마치고 나오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며 40대의 말쑥한
신사양반이 동료에게 내뱉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마도
재판에서 졌거나, 그게 아니면 가족 중에 누군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형량을 선고받은 모양인데, 그것이 모두 변호사의 무성의
내지는 무능 때문인 것처럼 느껴지는가 보다.
사무실에 돌아와 담배를 물었다. 그렇게 끊고 싶어도 끊지 못하는
담배. 이 직업을 가지고 있는 한 아마도 못 끊을 것 같다. 나는
정말 직업을 잘 선택한 것인가. 아까 40대 그 양반의 말처럼
변호사란 직업은 돈에 눈이 먼 도둑놈의 새끼들인가.
의뢰인들 중에는 돈이 남아도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수임료를 내지 못할 만큼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도 많다. 그런 저런
사람들에게 수임료 받아서 자가용 타고 다니고, 남으면 통장에
쌓아두었다가 번듯한 집이라도 마련하겠다고 마음 먹고 있으니 내가
정말 도둑놈인가?
사무실에 돌아와 함께 일하는 여직원에게 물어보니 배시시 웃으며
'아뇨' 라고 하기는 하는데... 회의가 몰려온다. 공부할 때는
이렇게 허우적거리며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요즘들어 부쩍 산
속에 들어가서 조용히 살고 싶어지니 내가 짓고 있는 죄가 크긴 큰
모양이다.
오늘 M피고인의 형사법정에서 평생 잊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변호사 대기석에서 기다리다가 내 차례가 되어 사건번호를 부르고
나가면서 그만 피고인석에 가서 선 것이다.
피고인이 나올 때까지고 멍청하게 그 자리에 서 있던 내가
피고인의 모습을 보고 그제서야 기겁을 하며 변호인석으로 올라가자
의아해 하시던 재판장님이 웃음을 터뜨렸고, 그 순간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간단히 끝나는 재판이라서 그 자리를 빨리
모면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 자리에 가서 섰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순간적으로 민사재판이라고 착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내가 재판을 받는다고 느낀 것인지.
그러고 보니 며칠전에 꾼 꿈이 생각난다. 내가 바로 오늘 재판받은
M피고인이 되어 어딘가로 한없이 쫓겨다니다가 결국은 허망하게
붙잡히고 마는 꿈이었다. '왜 하필이면 그렇게 죄질이 좋지 않은
사람으로 변했을까?' 아침에 깨어나서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요즘 들어 형사사건에 시달리는 일이 조금씩 빈번해지자, 아마도
심신이 피곤한 모양이다.
하기야 지난주에는 보석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면서 참으로 심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신청서를 내놓은 지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다
되어가는데도 결정이 나지 않으니 죽을 맛이었다.
가족은 매일 찾아와서 보채고, 판사는 결정을 하겠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고, 사무실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으며 밖으로 빠져 나왔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비 오는 한강변으로 차를 몰았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울다가 문득 스스로 참담한 심정이 되어 웃어도 보고, 아마도
지나가는 사람이 보았으면 실성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개업 후 1년 정도만 지나면 사건에 대해 점차 무뎌지니까 사건
때문에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드물어진다는 어느 선배의
말처럼,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가급적 빨리 사건에 대해서 초연해지고 싶다. 사람들은 죽어가는
환자들을 앞에 놓고도 징그럽도록 냉정하기만 한 응급실
외과의사들을 경멸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러한
냉정함이 한없이 부럽다.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일단 접어
놓고라도.....
하느님, 지은 죄만큼만 벌받게 하소서!
오전에 P씨의 항소심 재판을 마쳤다.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피고인의
최후진술을 듣고 나서 재판장님이 던진 한마디가 심상치 않았던
탓이리라.
"지하철에서 소매치기하는 것,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정말 처음이오?"
재판을 끝내고 나온 나를 자못 기대감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P씨
부인에게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재판장님의 말씀으로
미루어보건데 두어 달 정도나 줄어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혹시나 하는 기대가 영 사라지지 않았다.
변호사 생활 이제 1년 반. 한푼도 더 받지 않고 무료로 항소심까지
해준 경우도 처음이려니와, 이렇게 속타는 심정으로 읍소형 내지
항변형 변론요지서를 제출해 보는 것도 처음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재판장님은 과연 얼마나 헤아려주실지.
P씨는 아내와 두 딸을 가진 40대 전후의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경찰서 문턱에도 가본 경험이 없는 성실한
소시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지하철에서 어떤 처녀의
핸드백을 열고 돈을 훔치는 속칭 '소매치기' 를 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경찰에서 작성된 피의자 신문조서에는 체포된 직후 몸을
수색했더니 공중전화 카드가 4장이나 발견되었다고 했다. 더욱이
경찰이 여죄를 추궁한 결과, 그간 소매치기를 7회 정도 하였고 그
훔친 액수가 5,6만 원에 이른다는 자백까지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P씨를 접견한 결과, 이번 범행은 이미 지퍼가 열려서 떡
벌어져 있는 핸드백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도심이 발동하여
지갑을 꺼낸 순간적이고도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다른 범행
경험은 전혀 없는데도 경찰이 수사하면서 고장난 것과 다 써가는
것, 그리고 새것 등 전화카드가 여러 장 나오자 마구 때리며 자백을
강요하여, 현행범으로 잡힌 상태에서 더 이상 무슨 변병이 필요하랴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무조건 신문조서에 손도장을 찍었다는
것이었다.
그럴듯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었다. 그러나 P씨의 설명을 웬지
믿고 싶어지는 것은 변호사도 역시 인간인 탓일까.
너무도 선하고 정직해 보이는 P씨의 처와 처제를 몇 번 만나면서
전해들은 P씨의 성품과 인생역정, 그리고 집안 내력 등을 종합하고,
접견시 내가 직접 느꼈던 P씨의 온순하고 내성적이며 답답할 정도의
소심한 성격을 고려해 볼 때 우발적인 실수일 확률이 높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게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빠의 처지를
딸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출장가셨다고 둘러대고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나를 찾아와서 울며 하소연을 하는 부인의 처지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
이런 경우 대개는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보석 신청은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는 설명을 하고, 그런 전제하에 사건을
수임했으면서도 나는 무리하게도 보석신청까지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만이 피부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피고인의 성실성과
가족의 딱한 상황 등만을 내세워 선처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건 당시 주변 정황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설사
여러 번의 잘못이 있다고 가정하여도 뚜렷한 직업이 있고 전과가
전혀 없는 등의 사정을 참작하여 한 번 정도의 관용은 필요할
것이라는 취지로 진심어린 변론을 하는 것이 최선책이며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소매치기' 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엄격한 우리
법원의 원칙이 이 사건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결국 며칠 뒤의
1심 선고에서 P씨는 보석은커녕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그 선고가 있던 날 역시 하루 내내 우울했다. 어쩔 수 없는 법의
울타리, 그토록 굳센 울타리를 가진 법에 실망을 느끼게하는 선고가
있을 때마다, 내가 마치 피고인인 양 그처럼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마도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니 하루 빨리 초연한 심정이 되어야
한다고 선배들은 충고한다. 그 충고가 백번 옳다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이지만 아직 그렇게 무감각 해지기에는 연조가 부족한
듯하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며칠전 P씨의 가족들이 살던 집 옆의
공장에서 화재가 일어나 집이 완전히 타버렸다는 것이다. 그나마
살던 집이 무허가로 지은 집이었기 때문에 땅 주인이 천막조차
세우지 못하게 하여 가족이 당장 들어가 누울 수 있는 방 한 칸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항소심에서도 선처를 받지 못한다면 아마도 그 부인은 더
이상 어린 딸들에게 꿋꿋한 모습을 보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마음도 편할 수만은 없었다. 이럴 땐
'변호사가 이런 직업인 줄 알았다면 그렇게 애써서 공부 하지
않았을 걸.' 하는 생각에 후회막급한 심정이 된다.
하느님, 지은 죄만큼만, 딱 그만큼만 벌받게 하소서!!
당직변호사제도, 마음껏 활용하세요
당직변호사제도: 서울변호사회에서 1993년 5월부터 인권보호
차원에서 시작한 형사사건 무료법률상담제도로서 접견까지는
무료이며 적은 비용으로 당직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할 수
있다(1995년 8월 31일까지 총 3,283건 접견, 520건 선임).
서울변호사회 소속 변호사의 20퍼센트(약 400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되어 가고 있다(서울은 전화
02-597-1919).
자유직업의 대명사인 변호사에게 '웬 당직?' 이냐고 의아해 할
분들이 많으실 테지만, 변호사에게도 당직날이 있다. 물론 스스로
선택한 변호사에 한하여 1년에 네다섯 번 차례가 돌아오는 날에만
하는 것이지만.
아침에 출근하여 여직원에게 오늘이 내 당직날이라는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깜빡 잊고 재판기일을 받아놓은 것이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잠깐이면 끝나는 오전 재판이라서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오후 재판은 보통 증인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접견해야 할 사건이 접수되어 있는지 변호사협회 당직
상황실에 확인해 보았더니 아직은 없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오전 10시 30분. 서둘러 재판을 마치고 내려오니 마침 팩스가 하나
들어오고 있었다. 팩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피의자(OOO, 22세)는 95. O. OO. 새벽 2시경 퇴계로 부근에서
남자가 나이트클럽으로 2차를 가자며 잡아끌자 이를 거절하며
승강이를 하던 중, 지나가는 행인이 이를 발견하고 왜 여자를
괴롭히느냐며 위 피해자와 시비 끝에 폭행을 가하고 달아났다.
피의자 역시 폭행에 가담한 혐의로 당일 중부서에 연행, 현재 동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중.
내용이 어딘가 이상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당사자의 가족이
전화상으로만 당직 상황실에 접수한 내용이므로 정확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중부서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출발.
11시 정각 수사과장에게 접견신청을 하고 잠시 기다리니 예쁜
아가씨 하나가 초췌한 모습으로 수갑을 차고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이 아가씨는 모 나이트클럽의 이른바 호스티스인데,
2차를 가자는 손님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가 시비가 생긴 것이었다.
이 아가씨는 2차로 가라오케를 가자는 말에 함께 나왔는데 택시를
타자마자 손님이 행선지를 여관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는 몸싸움
끝에 겨우 택시에서 내릴 수 있었다.
그러자 술에 만취된 그 손님이 뒤따라 내려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
강제로 희롱하려 했고, 그 순간 동료 아가씨와 그녀의 파트너가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하고 일에 끼여들게 되었다.
중간에 끼여든 남자가 왜 여자를 괴롭히느냐면서 그 사람을 데리고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잠시 후 '퍽'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끼여든 남자는 도망을 가고,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에 의하여
나머지 일행이 모두 잡혀왔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 아가씨가
맥주병으로 사람을 때렸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아가씨가 내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셈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조치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우선
그 아가씨에게 조사받을 때의 유의사항 몇 가지를 당부한 후
사무실로 돌아왔다. 와서 보니 팩스 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성북 경찰서와 도봉 경찰서였다.
성북서에 도착하니 벌써 2시. 오늘은 어찌된 날인지 또 스무살
남짓의 아가씨다.
친구와 함께 나이트클럽에서 놀다가 전화를 걸려고 친구
핸드백에서 전화카드를 찾던 중 신용카드가 보이길래 순간적으로
슬쩍하여 그 카드로 금반지, 목걸이 등 160만 원 어치를 구입했다가
새삼 양심에 가책이 되어 스스로 카드회사로 찾아갔는데 덜컥
구속을 시키더라며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도 보석은 힘들 테고
적어도 석 달은 고생해야 할 것 같다.
그쪽에서 궁금해 하는 몇 가지 사항을 알려준 후 지하철을 타고
부지런히 도봉서로 가니 벌써 3시 반. 이번에는 부정수표 단속법
위반죄로 구속된 양반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도낸 수표를
회수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런 사람은 사실 당직변호사를 부르지 않아도 되는데..' 은근히
멀리까지 찾아온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이
양반에게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보다는 부도 수표를 한 장이라도 더
회수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충고를 해주었는데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5시가 조금 넘었다. 피곤이 밀려왔다. 밀린
상담을 두 건 끝낸 후 접견결과보고서를 작성하여 상황실에 보내고
잠시 쉬는데, 중부서에 구속중인 아가씨의 어머님이 사무실
근처에서 전화를 하고 찾아오겠다고 하셨다.
따님 사연을 설명하고 나서 억울한 점이 있으니 밝혀보자고
이야기했더니 그보다도 우선 빨리 나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나를 다그쳤다. '구속적부심' 이라는 것이 있다고 설명하자 형편이
어렵다는 말씀과 함께 변호사를 사자면 얼마나 드느냐며 눈치를
봤다.
웃으며 변호사는 사고 파는 물건이 아니라고 점잖게 한마디 한 후,
당직 변호사에게 사건을 위임하면 실비 100만 원만 받고 처리해
드리도록 규정되어 있다고 설명하자 반색을 했다. 사실 죄질이 별로
나쁜 편은 아니므로 피해자와 합의만 하면 적부심으로 풀려날
가능성이 높았지만, 본인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합의를 권하기엔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는 누명을
벗는 것보다는 신속한 해결을 원했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적부심청구서가 제출되었다.
피의자와 동료 OOO의 무고하다는 진술이 과연 진실인지 확인 할 수
없으나, 범행 직후 경찰에 의해 신병이 확보되어 말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인데 두 사람 모두 일치된 진술을 하고
있고(당직변호사로서 사건을 접수한 본 변호인은 즉시 접견하며
피의자의 진술을 확인하였고 다음날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OOO로부터 다시 사건 전모를 확인했는데, 두 사람의 진술이
세부적인 면에서도 일치하고 있었다) 설혹 피의자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가정하더라도 사고발생 장소와 시간 등에 비추어볼 때
범행동기에 참작할 바가 있다고 보인다.
본 변호인을 만나게 된 부모는 사고경위에 의혹이 있으니 그 점을
밝히자는 변호인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하루라도 빨리 석방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여 달라는 부탁이었고, 피해자를 자처하는 자와
합의한 후 구속적부심사청구를 원하고 있어 동 합의서를 첨부하여
일단 적부심사청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의 진실여부는 일단 덮어두고 #1 피의자가 나이 어린
초범이고 #2 이미 합의되어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고 있는 점 #3
그 부모의 자식에 대한 정성이 극진하여 가사 피의자에게 잘못이
있다고 밝혀지더라도 선도가 가능한 점 #4 범행동기에 참작할 바
적지 않은 점 등을 참작하여 앞으로 자유로운 몸으로 수사와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석방을 명하여 주시기 바란다.
적부심사 절차를 거쳐서 접견 이틀 뒤에 그 아가씨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러나 내게는 지금까지도 부모의 반대 때문에 진실을
밝혀보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
어쨌든 나는 개인적으로 '당직변호사제도' 에 대해서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고, 틈만 나면 이 제도를 알리려고 애쓰는 편이다.
이 제도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만약 이 제도가
적극적인 홍보와 변호사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더욱 발전하여
형사사건의 7,80퍼센트 정도에 당직변호사가 선임되는 날이 오고,
더 나아가 모든 형사사건이 국선화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법조문화가 펼쳐질 것이다.
누구든 인신이 구속되면 즉시 그날의 당직변호사를 부르고,
변호사는 곧바로 달려가 수사받을 때의 유의사항과 사건의 전망을
알려준다면 일단 심심치 않게 문제되는 인신구속 단계에서의
인권침해 논란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라는 부끄러운 말도
없어지게 될 것이고, 그쯤되면 어딘가 캥기는 곳이 있어 사선
변호사를 구한다면 그 속이 뻔한 것이므로 변호사 스스로도
형사사건에 사선변호인이 되는 것을 자제하지 않을 수 없는 풍토가
조성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시대 최고의 수치스러운 현상인 '전관예우' 도
자연히 설 땅을 잃게 될 것이 아닌가. 당연히 처벌받아야 할 사람도
변호사를 잘 사면(?) 그 매수가격에 비례하여 가벼운 처벌을 기대할
수 있다는 이 법조 후진국적 기현상이 없어 진다면 감히 사람들이
변호사를 산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 것인가.
또 하나 당직변호사제도의 정착이 주는 보너스격인,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효과가 있다. 다름 아닌 변호사의 변론에 대한
신뢰감이다. 때때로 법정에서 피고인의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을
부각시키려고 해도 참담한 실패로 끝날 때가 있는데, 이때 뼈져리게
느끼는 것은 변호사가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것에서 오는
한계이다. 더구나 일이 잘되면 '성공보수' 를 받는다는 사실이
판사로 하여금 변호사의 변론을 가볍게 생각하게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사건은 처리하는 데 따라 변호사에게 금전적인 이들이 없다면
변호사가 무리한 주장을 할 리가 없을 것이고, 당연히 그 주장에
무게가 실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법조 선진국인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변호사의 공적인 성격이 강조되곤 한다.
우리도 이제는 그런 것을 마냥 부러워만 할 시점이 아니다. 우선
이 제도가 적극적으로 홍보되어 많은 분들이 이용하면 분명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할 것이다. 변호사들이 당직날 선임된 사건은
보수가 시원찮음에도 불구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뛰므로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더없이 반가운 제도인데, 망설일 게 뭐
있는가.
요즘 들어 그 이용이 급증하여 처음에는 하루 2,3명이던
당직변호사가 이제는 하루 5명으로도 부족할 정도이다. 변호사들
사이에서 그리 어렵지도 않은 사람이 수임료를 아끼려고 이 제도를
이용한다는 불만이 나올 정도라고 하니 이제 어느 정도 정착 단계에
들어간 느낌이다.
수요는 공급을 창출하고, 공급은 발전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어느 날의 대화
"인사나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
이같은 일은 참으로 드문 일이다. 변호사가 열심히 변론한 덕에
생각보다 훨씬 빨리 석방되었어도, 출소한 뒤 인사라도 하러
찾아오는 피고인은 의외로 적다. 아마도 악몽 같은 구속 기간과
재판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서초동 근처에는 다시 오고 싶지
않다는 잠재적 본능 탓일 거라고 나름대로 위로하고 이해하고 있는
터이다.
더구나 이분의 경우에는 사실상 내 힘이 도움된 부분도 별로
없었다.
택시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할머니를 돌아가시게 해서 구속이
되었는데, 피해자에게도 무단횡단의 잘못이 있었고 합의도
되었으므로 내심 보석으로 풀려날 것을 기대했던 사건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보석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3개월
가량 고생한 끝에야 집행유예로 석방된 것이다.
절친한 친구의 외삼촌이 인연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서 수입료를 덜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형사사건의 경우 일반인들은 결과만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전혀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뭘요. 도움도 되어드리지 못했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변호사님이 접견해 주실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모릅니다. 사실 저 그 안에서 공부 많이 했습니다.
정말 저에게는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사회에서는 처 자식 먹여
살리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손님 한 명이라도 더 태우는 데만
급급했는데 그게 얼마나 헛된 짓이었는지 뼈져리게 느끼고
나왔습니다. 인생을 되돌아볼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힘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뇨. 사람을 죽인 놈이 무슨 그런 편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거기
들어와 있는 여러 사람과 대화하면서 배운 것도 많고 느낀 것도
많습니다. 거기서 소년수들을 몇 명 만났는데, 예외없이 처음
잘못을 저질렀을 때 너무 쉽게 용서받았던 아이들이었어요. 모두
있는 집 자식들이어서 그런지 처음 잘못했을 때 변호사를 사서 금방
빼내놓으니 아이들이 무서운 줄 모르고 또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더군요."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작년에 한 아이의 어머니가 다급하게 뛰어와서 수임을 부탁했다.
아이가 가출하여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도둑질을 했다는 것이다.
절도는 쉽게 풀어주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 꽤 힘들였지만 열심히
뛰어다녀서 조금 빨리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만에
이번에는 동네 당구장을 털다가 사람까지 크게 다치게 해서 또
구속된 것이다.
그 어머님이 망연자실하여 다시 찾아왔을 때의 무력감! '차라리
그때 풀어내지 못했다면 이렇게 무거운 죄를 저지를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맞습니다. 가끔 허탈할 때가 있어요."
"죄를 짓고도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 없는 사람들도 많고.... 어떤
사람은 차로 사람을 치고 뺑소니치다가 잡혀 들어와서는 자기를
뒤쫓아와서 잡은 택시기사만 원망하더군요. 사람의 탈을 쓰고
참..."
"그나 저나 개인택시 면허는 이제 포기하셔야 되겠네요.
섭섭하시죠?"
"아닙니다. 그런 걸 인생의 목표로 생각했던 제가 부끄러워
졌습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성실히 일할 수만 있다면 그게
행복이더군요."
어떤 사람은 구치소 생활 몇 개월간 범죄수법만 배우고 나오는데,
또 어떤 이는 이렇게 인생 달관의 경지에까지 이르러 나오는구나
생각하니 어디서 들은 듯한 이런 말이 생각났다.
"똑같은 물을 먹고도 독사는 독을 만들지만 젖소는 젖을 만든다."
나도 그날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어딘지도 모른
종착역을 향해 정신없이 뛰고 있는 나의 모습과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분의 모습이 겹쳐져 보이는 바람에....
인신구속 수사에 희생된 여고생
오늘 은영이가 풀려났다.
은영이는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이다. 정확히 1주일간을 경찰서와
구치소에 갇혀 지내다가 오늘 구속적부심사청구(수사기관에 의하여
구속된 피의자의 청구에 따라 법원이 그 구속의 적법 여부를
심사하여 그 구속이 위법^5,23^부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구속된
피의자를 석방시키는 제도)가 받아들여져서 석방된 것이다. 그러나
사흘 전 토요일 은영이를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서 보았을 때
느꼈던 분노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날은 당직날이었다. 오전 11시까지 당직 상황실로부터 별 다른
연락이 없길래 오늘은 별일없이 당직이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거의 퇴근할 시간이 되어서야 팩스가 한 장
날아들었다. 나는 역시 일복을 타고난 팔자임에 틀림이 없는
모양이다.
읽어보니, 딸 아이가 중간고사 기간 중에 등교 준비를 하다가
형사기동대에 의해서 갑자기 잡혀갔는데 나흘이 지나도 풀려날
기미가 없으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죄명은 거창하게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죄'. 학교 부근에서 몇명이
어울려 하급생들을 때리고 겁을 주어 몇 백 원씩 빼앗았던 일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에 이렇게 결과가 빤히 보이는 일 때문에 경찰서로
접견을 가자니 갑자기 짜증스러운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괜시리 당직은 하겠다고 나서가지고 사서 고생을 하는구먼.
눈송이처럼 꽃가루가 휘날리는 이런 화창한 토요일 오후에 이게 웬
일복이람."
투덜대며 찾아간 경찰서 접견실. 어두컴컴한 접견실에서 잠시
기다리니 담당지가 앳된 여학생 하나를 데리고 나왔다. 얼굴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잔뜩 묻어 있는데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죄' 라는 엄청난 죄명을 쓴 불량소녀 티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혹시 돈 뺐었니?"
"네"
"몇 번이나, 얼마나?"
"서너 번, 다 합해서 한 3만원 될 거예요."
"언제?"
"작년 중 3 때 학교 친구들이랑 몇 번이요. 전 옆에 서 있기만
했어요. 돈을 나눠서 쓴 적도 없고. 그런데 이상해요. 지난
겨울방학 때 경찰서에 잡혀가서 그 일로 혼나고 나왔는데 또
잡아왔어요. 한 번 잘못하면 이렇게 몇 번씩 혼나는 건가요?"
"...."
어! 이거 뭔가 이상한데?
"작년에도 구속됐었니? 어디에 잡혀 있었니?"
"서울구치소요. 그런데 용서해 줘서 며칠 있다가 바로 나왔어요."
"그때도 이번 일과 똑같은 일로?"
"예, 형사 아저씨가 묻는 걸 보니까 똑같은 일이에요. 피해자
아이들 이름은 다르지만."
"어떻게 다르니?"
"작년에는 한 학년 아래인 경비한테서 돈 뺏은 거였는데, 이번에는
다른 아이 두 명한테 뺏은 것 때문이래요. 중학교 3학년 1학기 때
나쁜 친구들하고 몇 번 어울려 다니다가 가을부터는 그 친구들 만난
적도 없는데..."
눈물에 콧물까지 흘리며 떠듬떠듬 설명하는 것을 꿰어 맞춰보니
이해가 갔다. 이번에 기록상 피해자로 되어 있는 아이들 역시
불량청소년들이었다. 경찰서에 다른 일로 잡혀왔다가 경찰이
"누구한테 맞은 일 있으면 얘기해라. 옛날 일이라도 좋다." 고
유도하자 1년 전에 있었던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 털어놓았고
실적에 쫓기던 경찰은 한 건 했다고 기뻐하며 은영이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을 잡아들인 것이다.
같은 일로 두 번 처벌할 수는 없는 법이지만, 피해자가 다르므로
같은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고 따라서 잘못된 법 집행은 아니다.
그러나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범죄소탕 100일 작전' 같은 실적에
쫓길 때나 등장하는 치졸한 수사방법이 나이 어린 청소년에게까지
미치다니.
한때 잘못을 저질렀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마음잡고 성실한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를 1년 전의 일로 또다시 구속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잘못한 일 때문에
잡혀 들어가서 이미 용서받고 나왔는데 다시 구속했으니. 그렇다면
한 가지씩 밝혀질 때마다 매번 구속시킬 셈인가? 지난번 잡혀갔을
때 은영이가 모두 털어놓고 용서를 받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아직
미성년자인 그 아이에게 그 정도까지의 법 지식을 바라는 것은
확실히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구속제도가 구조적으로 잘못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만약 영장을 발부할 때 피의자를 직접 불러서 이미
구속까지 되었던 범죄사실과 처벌시기를 물어 대조해 보고, 혹시
비슷한 시기에 저지른 일이 아닌가, 요즈음의 생활은 어떤가를
확인했더라면 아마 어느 판사라도 영장을 발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판사는 지난번에 처벌받은 것을 은영이의 전과로
간주하고 '그 버릇 못 고쳤구먼. 한번 혼나야겠다.' 고 생각했던
것일까. 피의자 얼굴 한 번 안 보고 경찰의 수사기록만으로 결정을
하니 피의자의 설명을 들을 기회는 아예 봉쇄되는 것이다.
더구나 은영이에게 영장에 기재된 범죄사실을 하나하나 물어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일부 자신이 한 것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이
과장되었거나 날조된 것이었다. 불러주는 대로 자술서를 쓰면 빨리
학교에 갈 수 있게 된다는 형사의 말만 믿고 시키는 대로 한
때문이다.
은영이의 큰 눈망울에 이슬이 맺혀 뚝뚝 떨어질 때마다 기성
세대로서의 부끄러움과 함께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접견이 끝나고 유난히 캄캄해 보이는 유치장 속으로 고개 숙이며
들어가는 은영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같은 법조인들이 잘못해서 너처럼 안해도 될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가끔 생긴단다. 빨리 나올 수 있도록 서두르마.'
차마 말하지는 못했지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영장실질심사제도' 니 '체포장제도' 니 해서 구속제도를
바꾸어보려는 논의가 요즘 한창 진행중이다. 제도를 바꾸면 억울한
구속자가 얼마나 줄어들지 모르겠지만, 하루 빨리 손보아야 할 것이
우리나라의 '인신구속제도' 이다. 물론 잘못된 것이 구속제도만은
아니지만...
애숭이 변호사의 첫승리, '피고인은 무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바로 그 이듬해 3월부터 사법연수원에
입소하여 2년간의 연수를 받는다. 이 기간 동안에는 실무교육을
통하여 실무처리 능력을 키우게 되는데, 처음 약 8개월간에 걸친
전반기 교육기간 동안 장래의 판^5,23^검사로서 혹은 변호사로서
처리하게 될 모든 업무를 이론적으로 익히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전국의 법원과 검찰청으로 각각 흩어져서 직접
수사를 해보기도 하고, 법원에서 생생한 기록을 보면서 판결문도
써보고, 국선변호인으로서 직접 변론도 해보게 된다.
나는 당시 서소문에 있던 서울민^5,23^형사 지방법원에서 실무
수습을 거치게 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평생 잊지 못할 하나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당시 6개월간의 법원 연수기간을 지내면서 연수생 1인당 보통
7,8건의 국선변호사건을 배당받아 처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나는 기성 변호사도 쉽게 받아보기 힘들다는 무죄 판결을 두번째
배당받은 사건에서 기어이 받아내어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던
것이다.
평생 처음 서보는 법정. 그 첫번째 법정에서 마치 헐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처럼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였고, 그 결과 무죄판결을
받아냈으니 그 감격이 어떠했겠는가, 무죄선고가 있던 날, 자유로운
몸이 된 피고인이 직접 전화를 걸어 감사의 마음을 내게 전하던
그때 그 순간의 희열은 아마도 한평생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변론요지서는 당시 피고인을 위하여 내가 법원에
제출했던 것이다. 스물다섯 나이의 애송이 법률가의 순수한 열정이
녹아들어 있는 이 글을 나는 지금까지도 매우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지금 읽어보면 다소 유치하고 무리하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없지 않으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전혀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
옭긴다(당사자의 이름과 고유명사는 가명임).
변론요지서
사건 86 고합 1672호 강간치상
피고인 이대훈
다음
1. 공소사실의 요지
피고인은 1986. 12. 30. 06:00경 서울 중구 신당동 139소재 공소외
정수미 경영의 수정찻집 방에서 술을 마시다가 위 정수미가
피고인의 부탁으로 담배를 사러간 틈을 타 그곳 방 문턱에 앉아
걸레질을 하고 있던 피해자 김은주를 강간하기로 마음먹고 동녀의
앞 가슴을 손으로 잡아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 방바닥에 넘어뜨리고,
한손으로는 동녀의 목을 잡아 누르면서 반항을 못하게 한 다음,
다른 한손으로 동녀의 하의를 벗기고 강제로 동녀를 1회 간음하여
강간하고, 그로 인하여 동녀에게 요치 7일간의 경부좌상 등을 입게
한 것이다.
2. 변호인이 주장하는 사건경위(사안의 실체)
(1) 피고인은 사건발생 당일 0:30경 피고인의 직장인 OO호텔
나이트클럽이 끝난 후 같은 직종의 친구들과 어울려 2차에 걸쳐
술을 마신 후 본건 '수정찻집' 에 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 위 '수정찻집' 은 옥호와는 다르게 호스티스 2명을 두고 술을
파는 일종의 작부집이며, 그 부근은 술집들로 이루어진 유흥가
입니다.
(3) 피고인은 그곳에 들어갈 때 금 7만 5,450원을 가지고 있었는바,
처음에는 술도 깰 겸 차나 한잔하려는 의도로 들어갔으나 그곳의
분위기를 알고는 곧 기본주대 7,000원 하는 술값을 5,000원으로
깎아 선불하고 맥주 2병과 마른안주 1개를 시켜 그곳 주인 정수미
여인과 이 사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김은주 여인과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수사기록 57정에 술좌석에서 김은주도 함께
맥주 1잔을 먹었다는 정수미의 진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 3인이 함께
앉아 술을 먹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4) 그 자리에서 위 정수미(38세)와 김은주(35세)는 난잡한
방법으로 피고인을 유혹하려 하였고, 피고인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를 수긍하며 술을 두어 잔 하였을 무렵 담배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5) 그때 만원권 7매와 동전 450원만을 가진 피고인이 450원을
내놓으며 담배를 부탁하였고, 정수미가 이에 응하여 50원을 보태어
담배를 사왔습니다.
(6) 사온 담배를 꺼내어 1개비씩 피운 후 정수미는 재미 좀 보라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선 후 집으로 간다는 말을 남기고 방 밖으로
나갔습니다.
(7) 둘만 남은 상태에서 김은주는 불을 끄고 자신의 바지를 벗고
피고인의 바지를 벗긴 후 피고인과 잠깐 희롱하였던 바, 그 순간
문이 약간 열리며 김은주와 정수미가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8) 잠시 후 아무래도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 피고인이
불을 켜고 자신의 바지주머니를 뒤져본 결과 그 속에 있던 만원권
7매가 없어지고 대신 1,000원권 7매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9) 화가 난 피고인이 정수미, 김은주에게 내 돈을 내놓으라고
따졌고, 정수미가 절도사실을 부인하며 피고인이 1,000원권 7매를
가지고 왔다고 우기자 약 1시간 정도에 걸친 입씨름이
시작되었습니다.
(10) 피고인이 "그렇다면 내가 술값으로 낸 5,000원권 1매는 어디
갔느냐, 보여달라." 고 따졌으나 정수미는 끝내 5,000원권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11) 도저히 돈을 돌려받지 못할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미친
피고인이 경찰에 신고하러 가겠다고 나서자, 정수미와 김은주는
돈만 손해보고 가는 것이 차라리 이익일 것이라며 피고인을
붙잡았던 바, 그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졌고 이때 피고인이
김은주의 목을 밀어 넘어뜨려 김은주의 목과 하퇴부에 좌상 및
타박상이 생겼습니다.
(12) 문을 박차고 뛰어나간 피고인이 그 부근 초소에 근무하던
전경(피고인은 전경이라고 기억하나 방범대원일 수도 있습니다)
에게 절도사실을 신고하였고, 신고를 받은 전경이 피고인 일행을
파출소에 인계하였습니다. 피고인이 신고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당시 초소근무자를 확인하여 보았으나 파출소 근무자의 비협조로
확인 불가능하여 증인신청이 불가능하였습니다.
(13) 그러나 파출소에 도착한 직후부터 이상하게도 피고인이
강간피의자로 취급되기 시작하였고, 절도피해를 주장하는 피고인을
2회에 걸쳐 거꾸로 매달고 코에 물을 붓고 구타하는 등의 엄문으로
터무니없는 조서가 작성되기에 이르렀습니다.
(14) 당시 담당경찰관은 병원에 가 자신의 성기를 검사하여 보면
과연 강간이 있었는지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수차에 걸친 피고인의
간청을 묵살하고 일방적인 조서를 작성하였습니다.
3. 다음과 같은 이유로 무죄를 주장합니다.
(1) 강간은 있었는가 --두 여인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증인 김은주는 피고인이 한 팔로 자신의 목을 누르고 다른 한손으로
자신의 바지를 벗기고, 팬티까지 완전히 벗기고, 그리고 피고인
자신의 바지와 팬티를 완전히 벗은 후 자신을 강간하였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또 증인 정수미는 자신이 담배를 사러 갔다 와보니 두 남녀가
하의를 완전히 벗고 성교를 하고 있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피해자로 자처하는 김은주는 여자치고는 비교적 체구가 큰 35세
사지 멀쩡한 여자이고, 피고인의 체격은 비교적 왜소한 쪽이고
적어도 건장한 편은 못되며 안경을 끼었습니다.
또한, 피해자는 분명히 흉기로 위협당하거나 심하게 폭행당하거나
무서운 위협(예컨대, 목을 졸라 죽이겠다는 등의) 을 당한 사실이
없고 다만 피고인이 한쪽 팔로 자신의 목을 누른 사실밖에는 없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증인 김은주, 정수미의 증언을 모두 믿는다 하더라도, 김은주가
조금이라도 반항하였다면 두 팔로 자신의 목을 잡은 피고인의
손목을 붙잡고 몸을 비틀어 빠져 나온다거나, 하의를 벗기지 못하게
발을 비벼 꼬아 힘을 주던가, 아니면 손과 발로 피고인을 때리고
차던가,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여자라 하더라도,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사람은 보통 이상의 힘을 낸다고 합니다). 팬티는커녕 바지
하나 벗기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잠시 동안의 추측으로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피고인이 엄청난 힘을 가졌고 피해자가 약간의 반항만 했다
하더라도 바지와 팬티를 무릎 정도까지 내리는 것은 혹시 가능할 수
있어도, 완전히 벗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팔길이와 몸길이는 같거나 비슷하기 때문에 옷을 완전히
벗기기는 힘들며, 옷을 완전히 벗기려면 목을 잡은 손을 놓거나
적어도 그 손에 힘이 가해지지 않은 상태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피고인 및 피해자의 하의가 모두 벗겨져 있었다는 증언이
진실이라면 스스로 벗은 것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적극적인 반항이
없었음이 틀림없습니다.
(2) 가령 피고인이 피해자의 목을 눌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강간죄의 구성요건으로 필요한 폭행의 정도에 해당하는가.
전혀 믿을 수 없지만, 백보를 양보하여 피고인이 피해자의 목을
눌렀고 그로 인해 피해자의 옷을 벗긴 후 강간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치료가 필요없는 '안정가료' 1주일의 경부좌상 정도가
과연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할 정도의 폭행에 이른 것인가는 반문해
볼 가치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3) 강간의 형식을 취한 화간일 가능성에 관하여
정수미(고용자), 김은주(피용자), 피고인 3인이 술을 먹다가
담배가 떨어져 한 사람이 담배를 사러가야 한다면 당연히 김은주가
가는 것이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수미가 갔다는 사실은 피고인과 김은주의
성교를 유발하여 화대를 받아내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음을 추측
가능하게 합니다.
여하튼 정수미가 담배를 사러갔습니다.
담배를 사오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느냐는 질문에,
수사기관의 진술조서에서는 아침이라 문을 연 담배가게가 없어
여러군데 헤맨 까닭에 시간이 약 15분 내지 20분 걸렸다고 기재되어
있고, 법정에서는 약 100m 떨어진 담배가게에서 담배를 사오다가
도중에 싸움 구경을 잠깐 하고 20분 만에 돌아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말이 일관되지 않는 것으로도 의심이 갑니다만, 법정에서의 증언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믿기 어렵습니다.
#1 100m라면 걸어갔다 와도 2--3분이면 충분한 거리입니다.
#2 새벽 06:00경 싸움이 있었다는 것도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가령 싸움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추운 겨울날(12월 30일), 그것도
가장 춥다는 새벽에 술 손님이 술을 먹던 도중에 부탁한 담배를 사
가지고 오는 도중에 한가하게도 15--18분 가량을 서서 구경을
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3 본건 찻집 부근은 술집으로 가득 찬 유흥가인 바 그런 곳에서의
술꾼들의 싸움은 다반사인데, 술집을 경영하는 정수미가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15분 가량을 서 있었다는 것은 선뜻
믿기 어렵습니다.
만약 진실로 100m 떨어진 담배가게에서 담배를 사오는 데 20분을
끌었다면, 피고인과 김은주 간에 성교를 유도하여 화대를 벌자는
의도로 시간을 준 것이라는 추측이 다시 한 번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시중의 'OO 찻집' 이라 함은 다방과는 달리 여자장사를
하는 작부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약 정상적인 시간(추측컨대 2--5분 정도) 이 걸렸고 그정도
시간을 버텨내지 못하고 옷을 모두 벗기웠다면 소극적이고 형식적인
반항으로 강간의 형식을 취한 화간일 가능성이 더욱 높습니다.
게다가 함께 술을 먹다가 정수미가 담배를 사러가자 손님을
술좌석에 홀로 앉혀놓은 채 방 밖으로 나가 방 문턱을 걸레질했다는
진술을 과연 믿을 수 있습니까.
술병이나 잔이 엎어져 앉아 있기 곤란한 지경이 되었으면 모를까,
어느 술집에서 손님을 앉혀두고 걸레질을 합니까.
(4) 증거에 관한 견해
이 건 공소사실에 대한 증거로는 증인 정수미, 김은주의 증언,
검찰 및 경찰의 이들에 대한 진술조서, 그리고 상해진단서가
있습니다만 증거로 하기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가) 물론 강간이나 간통죄와 같이 인적이 드문 장소나 밀실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있어 대부분의 경우 피해자의 진술 이외에는
증거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그 정도의 증거로도 유죄를
인정하기에 반드시 부족한 것은 아니라 할 것이나, 이 건의 경우는
피고인이 위 양인 공모하의 절도 피해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으므로
위 증거들에 대한 가치평가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되는
것입니다.
만약 피고인의 절도피해가 사실이라면 위 두 여인은 절도죄,
무고죄에 위증까지 추궁받아야 할 처지이고, 따라서 사생결단으로
피고인의 강간 사실을 주장할 것이 당연한 이치이므로, 위 김은주와
정수미의 진술에 객관적 증거가치를 부여하기에 부족한 점이 없다
할 수 없습니다.
나) 상해진단서는 강간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의사 강성만 작성의 김은주에 대한 상해진단서를 살펴보면 상처는
7일간의 안정가료를 요하는 경부좌상 및 하퇴부타박상이라 기재되어
있습니다. 피해자는 강간시 피고인이 손으로 목을 눌러 경부좌상이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나, 정수미, 기운주가 법정증언에서 스스로
인정한 바와 같이 대퇴부타박상은 3인이 수정찻집 문 옆에서
다투다가 피고인이 피해자를 떠밀어 생긴 것이고, 피고인이
경부좌상도 그 자리에서 김은주를 밀 때 생겼을 것이라고 강력히
다투고 있는 점을 참작하면 상해진단서가 강간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다) 76. 2. 10. 74도 1519 대법원 판례
남녀간의 정사를 내용으로 하는 범죄에 있어서 그 행위의 성질상
외부에서 알기 어려운 상황에서 행하여지고, 피해자 이외에는 다른
증거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으므로 그런 경우 피해자의
증언을 토대로 제반증거를 종합하여 경험법칙에 비추어 범행을
인정할 수 있으면 유죄로 하여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고, 이는
공감이 가는 정착된 판례로서 이 사건 강간을 인정하기 위해 적용
될 수도 있겠지만, 이 판례의 취지를 절도사실에 적용시켜 보면,
이번 사건은 불행히도 김은주에게뿐 아니라 피고인에게도 피해자,
피고인, 정수미 3인만이 있는 상태에서 발생하였고, 따라서 김은주,
정수미의 절도행위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원천적으로 없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4. 피고인의 자백취지의 탄원서에 관하여
피고인은 재판받기 직전에 마음이 몹시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아무리 다투어도 유죄가 나올 것 같다는 절망감과 빨리 출소하여야
식구들을 부양하고 밀린 외상값을 회수할 수 있다는
초조감(피고인은 나이트클럽 웨이터로 재직중이었으며 밀린
외상값의 환수는 각 웨이터의 책임하에 행하여지고 외상값 환수가
미진하면 파면된다고 상당히 초조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자백을 하면 집행유예도 기대할 수 있다는 구치소
동료들의 말에 판단력을 잃은 피고인은 강간부분을 수긍하고
반성하는 듯한 자신과 가족 명의의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한 바
있으며, 본 변호인이 접견하였을 때에도 위 탄원서 제출을
이야기하며 차라리 자백을 하고 집행유예를 기대하는 것이
조기석방의 길이 아닌가 하는 상의를 해온 바 있습니다만 변호인의
의견을 듣고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밝혀보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보인 바 있습니다.
따라서 재판부에 제출된 자백취지의 탄원서를 참작하시는 데
이러한 피고인과 그 가족측의 심경이 고려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5. 예비적 주장
만에 하나 유죄의 심증을 가지게 되시더라도 다음의 점을 참작
하셔서 관대한 처분이 있기를 바랍니다.
(1) 피해자의 정조가 과연 보호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피해자 김은주는 "이웃 부인네의 간곡한 부탁으로 며칠간만 찻집의
주방일 정도를 도와주기 위해 와 있다가 변을 당한, 남편과 자식이
있는 35세의 평범한 가정주부" 라는 것이 수사기관에서 작성한
조서를 읽고 처음 받을 수도 있는 인상입니다.
그러나 사건 발생시각이 새벽 06:00경이고 그 전날 밤부터 사건
발생시까지 그 술집에서 계속 있었던 점, 그 술집은 호스티스가 2명
있는 3평 남짓한 저급술집이고 사건 직전 김은주도 술을 함께한 점
등은 피해자측도 인정하는 바이고, 사건 후 술집이라면 꺼려야 할
피해자가 공판이 진행되는 3월까지 그 술집에 계속 근무한 점,
위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별다른 반항 없이 성교에 응한 점 등을
참작하면 과연 이 여인이 정상적이 가정주부로서 그 정조가 보호의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적어도 이 여인의 정조를 다른 평범한 주부의 정조와 동일
차원에서 논한다면 여성의 정조에 대한 모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2) 합의되어 피해자도 처벌은 원치 않고 있습니다.
비록 많은 금원으로 피해를 보상한 것은 아니나, 합의되어
피해자도 처벌을 원치 않고 있습니다.
6. 피고인의 폭행전과에 관하여
생각컨대 피고인이 의심받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폭행전과일 것이다.
15만 원을 선고받은 벌금전과 1회, 10만 원을 선고받은 벌금전과
2회가 없었다면 수사기관에서의 피고인 절도 피해 주장이 그렇게
철저히 묵살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추측컨대 아마도 검찰에서 좀더
신중한 수사가 행해져서 사안의 실체가 밝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가까지도 듭니다.
피고인은 현재의 직장에 있기 전에 술집을 자영한 경험이 있으며,
위 전과는 술집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술취한 손님들과의 시비로
인해 생긴 것임을 참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1987. 4. 1.
피고인의 변호인
사법연수생 오세훈
이 사건을 통해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첫번째는 피의자 부부간의 믿음과 애정이 나를 몹시도 감격시켰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남편이 다른 것도 아닌 강간의
혐의로 법정에 섰는데 어느 부인의 심정이 참담하지 않겠는가.
피고인의 부인 역시 참으로 남편이 실망스럽고 또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은 죄가 없다는 남편의 주장을 그대로 믿는다 하더라도 사건이
일어난 장소 등을 생각해 본다면 남편이 몹시 밉고 수치스러웠을
터인데도, 아이를 업고 찾아와 남편의 무고함을 열심히 설명하며
'내 남편이 그럴 리 없다' 고 나를 설득하는 부인을 보면서 나는
아내의 그 믿음을 믿어보아도 괜찮겠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당시의 나는 첫번째로 배당받아 처리했던 국선변호사 건에서
피고인의 말만을 곧이 곧대로 믿고 변론했다가, 법정에서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몹시 당황했던 직후였다. 따라서 피고인에 대한
불신감이 상당히 깊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남편을 향한 그
부인의 믿음이 나를 감동시키고 결국은 강간죄로 고소된 남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바로 그 부인의 심정이 되어 열심히
뛰어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두번째로는 검사라는 직업의 중요성을 피부로 절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검사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무고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뒤바꿔 처벌할 뻔하지
않았는가. 바로 그런 상황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게 되자, 등골이
오싹해지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세번째로 변호인의 뚝심이 사건의 결과를 크게 좌우한다는 점 역시
그 사건이 내게 준 큰 교훈이다.
사실 변론을 끝낼 때까지는 첫번째 국선변호사건의 악몽이 계속
나를 회의하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적당히 변호하고 현명한 판결을
기다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만약 그러한
갈등에 못 이겨 적당히 했더라면 그 피고인과 그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그 사건 이후 이대훈 씨와는 가끔 만나 소주도 한잔씩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이 사건 이후로 술도 끊고 착실하게 생활하여 집도
장만하고 레스토랑도 내는 등 여유있게 살고 있다.
이 사건이 인생의 전기가 되었고, 덕분에 오늘날의 자신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그분에게 나 역시 감사하는 마음이다.
'피고' 인가, '피고인' 인가
며칠전 고등학교 은사님께서 찾아오셨다. 작년에 사시던 집을 헐고
측량까지 새로 한 후 그 자리에 새집을 지으셨는데, 난데없이 옆의
빈 땅 임자로부터 자기 땅이 침범되었다니 무슨 영문인지
모르시겠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양쪽 중 한편의 측량이 잘못된 것일 테니 소송중에 다시
엄밀하고 공정한 삼각측량을 해보면 결론은 쉽게 날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선생님께서 몹시 상심해 하신다는 것이었다.
"나를 왜 '피고' 라고 하는가?"
선생님이 받아들고 오신 소장에 선생님은 분명히 '피고' 라고 씌어
있다. 옆의 땅 임자는 '원고' 라고 씌어 있고.
한평생 남에게 해되는 일은 해본 적이 없다고 자부하시는
선생님으로서는 '피고' 라는 호칭이 억울하고 분하신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피고' 로 불리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죄를 짓고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사람들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를
'피고' 라고 부른단 말이다.
사실 법률상담을 위해 사무실을 찾는 분들 중에 적지 않은 수가
이러한 억울함(?)을 호소한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러한 현상은
'피고' 와 '피고인' 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변호사의 올바른 이용법을 설명하면서 민사재판과
형사재판에 관하여 이미 말했다.
민사소송에서 소송을 거는 사람을 '원고', 소송을 당하는 사람을
'피고' 라 한다. 이때 민사소송의 피고는 아무라도 될 수가 있다.
'원고' 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아무나 한 사람을 지정하여 빌려간
돈을 갚으라고 소송을 내면 그 지정된 사람은 그때부터 도리없이
'피고' 가 되고 만다.
재판 결과 그 피고가 돈을 빌린 사실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
피고가 승소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피고는 원고에게 소송비용을
받음으로써 그 억울함을 풀 수 있다. 따라서 재수가 없으면
누구라도 피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원고의 착각에 기인한
것이든 오해에 의한 것이든, 어쨌든 피고는 열심히 억울함을
주장해야 된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는
소송에서 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면 '피고인' 은 누군가. 검사가 보기에 죄가 있다고 판단되어
형사재판에 넘긴 사람을 말한다. 일단 범죄혐의를 받게되어
경찰이나 검찰에 의해 수사를 받고 있는 사람을 '피의자' 라 하고,
검사가 죄를 지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법원에 보내서 재판을 받게
하면 그 순간부터 '피고인' 으로 부른다.
'피고' 와 '피고인' 은 이렇게 하늘과 땅 차이인데, 웬만큼
배웠다는 분들도 그 차이를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이렇게 된 데는
매스컴의 책임을 빼놓을 수 없다. 시청률이 역대 최고였다는 TV
프로그램<모래시계>에서 주인공 태수가 재판을 받는 장면에서도
여지없이 두 용어가 혼동되고 있었다. 태수를 '피고' 라고도
불렀다가 '피고인' 이라고도 부르는 등 기분 내키는 대로 불러대니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에 빠져 있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무의식중에
피고와 피고인을 같은 말로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는 그 둘을 혼동하는 무지한 기자는 없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 혼동은 신문지상에서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특히
글을 쓰거나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하는 직업을 가진 분들은
피고와 피고인, 그리고 피의자라는 용어와 함께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을 확실히 구분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
황금거위 이야기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를 기억하는지.
하루에 하나씩만 낳는 황금알에 만족하지 못한 거위 주인은 성급한
욕심을 부리다가 마침내 거위의 배를 갈라버렸다고 하는 이야기. 잘
먹이고 아껴줘서 하루에 두 알 정도를 기대했으면 좋으련만 하루
아침에 갑부가 되려다가 망한 이야기.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
우리는 잘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뛰어왔다. 참으로 열심히
일해 왔다.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공장만 쌩쌩 돌리고 수출만 많이 하면
된다고 하던 시절, 1년에 GNP가 몇 퍼센트 늘어난 것이 지상 최고의
자랑거리이던 시절이 있었다.
결국 우리가 다시 마시게 되는 강물에 시꺼먼 공장폐수가 펑펑
흘러들어도, 우리가 숨쉬는 우리 강토의 하늘에 이름조차 생소한
별의별 화학물질이 뿜어져 올라가도, 경제성장 그 괴물을 위하여
모든 것들이 뒷전으로 밀리던 시절이 있었다. 공해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꺼내면 정부시책에 엇가는 반정부, 좌경으로 물리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꼭 물통을 들고 학교에 간다. 우리는
기름값보다 비싼 생수를 사먹고 산다. 벤젠, 톨루엔이
발암물질이라는 것도, 그리고 이런 것들이 수돗물에 양념처럼 들어
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환경부 장관이 수돗물이 안전하다며 받아
마시는 장면이 신문기사에 날 정도로 다급한 처지인 것도 잘 안다.
겨울철 도시에서 하는 아침 조깅은 유독가스를 눌러담아 곱배기로
들이마시는, 자살의 한 가지 훌륭한 방법이라는 사실도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하도 독해서 벌레들도 못 살고, 그래서 제비
한 마리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도시의 하늘 아래 우리는
산다. 이제라도 그렇게 죽어간 거위를 살려 보려면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벌어 모은 돈의 몇 배를 써도 될까 말까 하다는 사실도
이제는 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아는가? 아무리 원자력 발전소는 제일 안전하고
경제적인 발전 수단이라고 유명 탤런트를 내세워 TV 광고를 해대도,
고리에서 월성에서 자칫 실수하면 한반도 전체가 유령마을처럼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러한 실수의 조짐들이 종종 나타나지만 신문 한귀퉁이에
등장했다가 곧 사라지고 잊혀지고 있다는 것을. 발전소에서 쓰고 난
방사능 찌꺼기들, 조금만 접촉해도 기형아의 씨앗이 되는
핵쓰레기들을 해독 없이 만들 기술을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 그래서 수만 년 후의 자손들이 그 기술을 개발할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 산하의 어느 곳엔가 꽁꽁 묻어두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은 지 30년이 되면 수명을 다한 그 큰 발전소 자체가
커다란 핵쓰레기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그래서 선진국들은 이미
핵발전소를 서서히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골프장 만든다고 스키장
만든다고 수십 년 키워온 나무들이 뿌리채 뽑히고 잘린 후 그
자리에 외국산 잔디가 깔리고 있는 사실을. 그리고는 그러한 기형을
보기 좋게 유지하려고 지독한 농약과 제초제를 무지막지하게
뿌려대고, 이것이 흘러 흘러 우리 강산 푸른 물을 독천지로 만드는
것을.
자연을 보호하자고 자연공원을 만들어놓고도 그 안에 이런 시설
수만 평씩을 만들도록 해주려는 정신나간 나랏님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정치뒷돈 마련을 위해 이런 사업들을 이권 사업으로 만들어
키워주고 허물 덮기에 급급해 왔던 모리배들이 우리와 한 하늘 아래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국토를 황금거위로 믿나 보다. 마술상자라
믿나 보다. 오늘 이만큼 파먹어도 내일 또 그만큼의 생명을 갖고
다시 태어나 우리에게 봉사할 줄로 아는가 보다. 겁없이 잘라내고
파헤치고 더럽혀도 그들이 용서해 줄 걸로 믿나 보다. 수만 년 후
자손들의 몫을 차용증도 쓰지 않고 빌려다 쓰면서 그들이 우리를
저주하지 않을 걸로 아는가 보다.
누굴 믿고 기다리는가. 누가 해결해 주길 바라는가.
이미 늦었다고 후회할 때가 가장 좋은 때라던데...
환경에 미친 이상한 사람들
이 사람들을 혹시 아시는지?
언젠가 광화문 한가운데 이순신 장군 동상에 마스크를 씌워서
상징적인 경고를 울렸던 그 사람들. 재벌들의 입장만 대변하는
반환경적 정부정책을 소시민의 입장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여론을
환기시키고자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사람들.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목청 높여 외치던 그 시절에도 온갖 눈총 다 받아가며 환경은 한번
파괴되면 돌이킬 수 없다고 외롭게 외치던 사람들.
이들은 직업이요 본업이 환경운동 봉사자이다. 이들에겐 보상도
없고 보수도 없다. 그래서 미혼이 많고 여성이 적지 않다. 가장이
되면 가족을 부양해야 할 테니 여간 지독한 결심이 아니면 버텨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들에게는 생기가 넘쳐 흐른다. 모두 무언가에 미쳐있다.
무엇이 그들을 미치게 하는가? 잘못된 원자력 발전소 정책,
식수로도 쓸수 없는 한강^5,23낙동강^5,23영산강, 독가스와 구분이
안되는 도시의 하늘, 그럼에도 각종 이권을 위해 깎겨 나가는
국토의 허파들, 이 모든 것들이 이들이 돌보아야 할 것들이다.
그래서 전국 210여 명의 활동가들에게는 쉴 틈이 없다.
정부조직 중에 환경보호업무만 전담하는 환경부도 있는데 왜
이들이 바빠야 하는가?
아직은 정부만을 믿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환경련이 올해 전국 4대 강의 수질오염 현황을 조사한 적이 있다.
금강을 제외한 한강^5,23영산강^5,23낙동강의 수질이 식수원으로는
도저히 안심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는데도 정부차원의 대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제기되어온 문제이고
폐수배출 총량규제 등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혹시라도 산업 생산활동이 위축될까 봐서, 더 솔직히 말하면
보수계층의 표가 떨어질까 봐서 눈치만 보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책임회피가 쉬운 환경을 희생해서 '경제' 만 살리면
정권은 유지된다는 생각을 아직도 하고 있는지, 수질이 아직은 먹을
만한 수준이라는 통계수치만 발표해 대고 있으니.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재정경제원이나 통상산업부 등의 경제부처는
경제개발에만 관심이 있는 부처다. 그런데 환경까지 보호해 가면서
경제개발을 하려면 속도도 더뎌지고 비효율적이라는 것이 그들의
고집스러운 생각이다. 따라서 일단 그들 식의 계산법을 동원한
경제성장 숫자놀음에서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어내려면 환경보호는
적당히 뒷전으로 밀어두어야 한다.
이럴 때 성심껏 제동을 걸고 목청을 높여야 하는 곳이 바로
환경부인데, 아직 막강한 힘을 휘둘러대는 경제부터와 맞설 힘도
부족하려니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곤혹스러운 입장에서 소신만을
외칠 수는 없으리라. 높으신 나랏님이 '경제' 살리는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더욱 대책이 없는데, 그놈의 '경제'가
도대체 누굴 위한 '경제'인지...
그러나 이제 이들은 외롭지 않다. 이미 전국에 열렬한 지지자들인
2만 명의 회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코흘리개 국민학생부터
추기경님까지 진심어린 성원을 보낸다. 그 순수하고도 열정적인
활동에 힘입어 드디어 아시아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많은 회원이
지지하는 환경단체로 성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정부정책을 떡 주무르듯하는 재벌기업들을
상대하고 막강한 관료조직의 잘못된 시책을 따지려면 더욱 결집된
시민들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몇 년 전의 이야기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이야기.
환경련의 출근시간은 9시다. 비록 스스로들 정해 놓은 약속이지만,
지키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한 여성 활동가가 거의 매일
30분 이상 늦는 것이다. 너그럽게 이해했던 동료들도 점점 이상하게
생각했고 급기야 징계논의까지 나왔다. 아무리 이유를 물어도
시원한 해명도 없으니 오해를 살 밖에. 그러던 차에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동료 활동가 한 명이 이제 활동을 중단하고 취직이라도
해야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때 이 지각대장이 만류하며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차를 타고 오면 점심을 굶어야 할 형편이라서..."
사무실은 광화문에 있고, 그 활동가의 집은 구파발이었다던가.
세상에는 참 이상한 사람들도 많다. 눈 딱 감고 취직해 버려도
누가 뭐랄 사람 없는데 말이다.
*더욱 많은 회원과 자원봉사자가 필요합니다. 회원 여러분이
정성껏 보내주신 회비는 각종 환경사업 활동비와 사무실유지 비용
등으로 쓰이는데, 아직은 회비를 모두 모아도 필요한 비용의
33%밖에 안됩니다.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각종 행사 및
사업수익금(환경바자회, 환경물품 판매) 등으로 마련하고 있습니다.
수시로 터지는 각종 환경파괴사안에 지체없이 대응하는 데는
고정적인 지원금인 회원분들의 회비가 더할 수 없이 큰 힘이
됩니다. 환경련을 돕고 싶어하는 독지가나 기업체들도 있습니다만,
기업과 정부의 도움을 받게 되면 시민단체는 소신껏 일할 수가
없습니다. 적더라도 한 분 한 분의 정성이 절실히
필요합니다.(서울은 전화 02-735-7000)
4 오세훈의 살아가는 이야기
콩비지 한사발과 연수원 낙제생
나는 사법시험을 비교적 쉽게 통과한 편이다. '이 정도 공부하고
붙겠다고 하면 도둑놈 심보지.' 하고 생각했던 해에는 당연히
떨어졌고, '이 정도 했으니 이제 붙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을 땐
합격했다. 그러니 사실 시험운이 내 마음먹은 대로 따라주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나보다 공부량이 휠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떨어졌던 친구들을 보면 내 경우는 모든 것을 운수대통의
팔자소관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그런 연유로 사법시험 준비 시절에 겪었던 애환에
관해서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 그저 할 때는 성실하게, 정말
독하게 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지금도 내 엉덩이에는 보기 흉한
수술자국이 여러 군데 있다. 고시 준비하느라 항상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면서, 의자에 닿는 부분에 생긴 종기가 살갗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가 결국 장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던 경험의 흔적이다. 이렇게 한때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공부하던 시절도 있긴 했다.
이렇듯 맹숭맹숭한 사법시험 준비 시절과는 달리, 연수원 시절의
이야기라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다. 재미있다기보다는 먹을
것을 밝히다가 황당하게 겪어야 했던 쓰라린 추억이라 해야 옳을 것
같다.
앞에서 나의 애숭이 변호사 시절을 애기하면서 설명했듯이 일단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법조인이 되기 위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과정이 사법연수원에서 받는 2년간의 실무교육인데 나는 특이하게도
이 과정을 남들보다 1년을 더 걸려서 3년만에야 마칠 수 있었다.
법조계 계통을 조금 아는 분들 중에는 종종 "사법시험이 26회면
연수원은 당연히 16기여야 할 텐데 왜 17기로 수료했느냐?" 고 묻는
분들이 있다. 길게 설명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분위기일 때는 그냥
"낙제했어요." 라고 둘러대고 마는데, 이것이 더욱 호기심을
자극하는지 결국에는 되뇌이고 싶지 않은 과거를 털어 놓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연수생 시절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신혼시절이었다.
시험에 합격하고 난 이듬해 3월 연수원 입소를 코앞에 두고, 그
바로 전인 1월말에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이다.
"연수원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하려면 잡념이 없어야 하고,
그러려면 아예 결혼을 해버리는 것이 낫다."
이것이 지나치게 빠른 결혼에 대한 나의 변명이었지만, 그건 모두
핑계일 뿐 지금 생각하면 빨리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것
같다. 당시 내 나이는 스물넷이었고, 동기 중에 제일 빠른
결혼이었다. 어쨌든 너무 이르다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고, 신혼 1년간은 부모님과 떨어져 살림을 했다.
당연히 연수원에서 주는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았다.
양가에서 얼마간의 도움을 받아야 어설프게나마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는데, 그 빠듯한 살림 속에서도 아내는 거의 매일 새로운 요리
하나씩을 준비했다. 조금 맛있으면 열광적으로 칭찬하고, 맛이
없으면 면박을 주는 등 내 반응이 너무도 즉각적이고 극적이라
요리를 준비하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고 아내는 지금도 회고한다.
음식을 향한 아내의 정성은 계속되었고, 연수원 전반기 교육이
마무리될 무렵에 치러야 하는 이른바 전반기 시험기간 동안에는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사나흘 쉬고 하루 시험보고, 또 사나흘 쉬고
하루 시험보고 하는 식의 시험이 약 보름 정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시험인 민사재판 실무 시험을 남겨두고 있었는데,
가장 배점이 높은 중요한 시험이었다.
그 시험 바로 전날, 아내는 하루 종일 앉아서 판례와 씨름하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지금까지 닦아온 온갖 요리 실력을 모두
발휘하여 정성스런 밥상을 마련했다. 아침은 라조기, 점심은
칼국수, 저녁은 콩비지 찌개.
시험기간인데도 웬 식욕이 그렇게 동했는지, 해주는 대로 모두
먹어치우고는 약간 거북함을 느끼면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새벽 2시부터 느닷없이 화장실행이 시작된 것이다.
아마도 저녁에 먹었던 콩비지가 약간 상한 모양이었다. 밤새 설사와
고열을 동반한 토사곽란이 10분 간격으로 계속되었다.
동이 틀 무렵에는 39도를 오르내리는 오한 속에서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급히 뛰어오신 부모님에 의해 병원으로 겨우 옮겨졌지만,
이미 몸은 극도의 탈진 상태였다. 도저히 앉아 있지 못할 것이니
시험을 포기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만류를 뒤로하고 링거 바늘을
무작정 뽑아들고 시험장에 가 앉았다.
그러나 역시 불가항력, 두어 시간 뒤에는 다시 탈진 상태가 되어
병원으로 실려와야 했다. 하루 종일 꼬박 앉아서 판결문을 작성해야
했던 그날의 시험은 물론 결시로 처리되었다.
병명은 '세균성 대장염' 으로 흔히 말하는 '식중독' 이었는데,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함께 먹은 아내는 왜 멀쩡했는가 하는
거였다.
어쨌거나 그후 별탈없이 연수가 마무리될 줄로만 알고
서울지검에서 검사 실무수습을 하고 있는데,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연수원에 재입소하라는 것이었다. 공정한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비교 대상이 동일해야 하는데, 한 과목 시험을 아예 치르지
않았으니 평가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이해할 수는 있으나, 받아들이긴 힘든 결정이었다. 그,후의
1년간은 완전히 의욕을 상실한 채 보냈던,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도 우울한 시간들이었다. 그 1년은 왜 그리도 길었던지.....
이런 일이 있은 후 10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집 밥상에는 그
1년간의 악몽을 낳게 했던 콩비지는 물론 콩밥조차 올라온 적이
없다. 영 맛을 잊지 못해 가끔씩 입맛을 다시게 하는 순두부만
제외하고는.
환상 만들기--CF 촬영기--
참으로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라고 자못 설레이던 여행이었다.
바쁜 일정에 쫓기며 살다 보니 여유있는 여행은 감히 생각도 못하고
살아온 터이다.
남들은 미국도 가보고 유럽도 다녀와서 은근히 자랑하며 과시를
해대는데, 나는 큰맘 먹고 사나흘 '괌' 에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개업 후 몇 년간은 여름휴가조차 완전히 잊고 사는 바람에
가족들의 원성이 거의 쿠데타 일보직전까지 갔었는데 드디어
남편노릇을 멋지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온가족이
해외여행에 전속 촬영팀(?)까지 대동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경사스런
일인가.
처음 CF 제의를 받았을 때는 웃으며 넘겼다. 변호사가 무슨
상업광고냐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주로 섭외받는 상품이 양복
이었고, 아이스크림, 신용카드회사, 건강식품, 생명보험회사,
골프웨어에 심지어 속내의까지 다양한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런데 그런 제의가 거듭되면서 슬슬 마음이 동하는 것이었다.
'이미지만 크게 구기지 않으면 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 다른
변호사도 하던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니, 웬만한 양복 회사
광고 에이전시에서 한 번씩 다 왔다가는 지경에 이르자 급기야는
결정적으로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CF를 잘 만들어 놓으면 환상적으로 보이던데, 이왕이면 멋 있게
보일 수 있는 걸로 골라야겠다. 평생 추억거리로 삼을 수 있도록.'
생각이 이 단계에 이르렀을 무렵, 마침 한 패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역시 인연이란 따로 있는 것일까? 먼저 찾아왔던 곳과는 달리
광고대행사의 담당자들과 에이전시 직원들이 함께 찾아온 그
매너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또 그들이 그려내고자 하는 '이미지'
역시도 나의 생각과 일치했다.
애초에는 내가 살아온 인생을 몇 컷으로 요약해서 기쁨과 좌절의
순간을 표현해 보자는 것이 기획 내용이었지만, 나의 연기력이 못
따라갈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일상적인 모습을 담은 것으로
바뀌었다.
오변호사의 '일' 과 '휴식.' 그래서 여가를 즐기는 모습을
담으려다 보니 가족과의 야외촬영이 필요했고, 여름까지 방송될
내용이므로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하다 보니 우리와 계절이
정반대인 뉴질랜드까지 가기로 된 것이다.
그런데 일정을 맞추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재판이 없는 구정
연휴를 전후해서 일정을 잡았고, 그러다 보니 결혼 10주년 기념일이
여행기간에 끼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본의 아니게 아이들까지 함께
하는 결혼 10주년 기념 가족여행이 되었다.
아내는 들떠 있었고, 나도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이 될 것 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역시 뉴질랜드는 아름다운 나라였다. 비좁은 도시에서 부대끼며
살다가 드넓은 초원 위에 내려서니 세상없는 해방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자 이제부터 '환상' 여행이 시작된다!"
그런데 그런 감격도 잠시, 도착 당일 하루를 쉰 우리 일행은
다음날부터 촬영스케줄이라는 무지막지한 현실 앞에 숨돌릴 틈도
없었다. 사흘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카메라를 돌려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세상에 15초, 20초 정도 방영할 필름을
찍으려고 그렇게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돈을 투자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첫째날는 새벽 6시에 숙소에서 출발하여 돌아오니 밤 12시. 둘째
셋째날의 귀가시간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으니 관광은 아예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멀리 뉴질랜드까지 날아와서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 잠깐잠깐 하는 경치구경에 만족해야 했으니 얼마나 안타깝고
한심했겠는가.
노래방에서 배경화면으로나 보던 뉴질랜드의 명물 '번지점프' 도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고. 물론 먼저 온 선발대가 미리 헌팅해
두었던 촬영지의 풍광이 뛰어나서 문득문득 섭섭한 마음을 달랠
수는 있었지만.
첫날은 호숫가에서 낚시하는 장면을 찍었다. 석회암이 녹아 내려
흰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뽀얀 물 위에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이 드리워져 있고, 그 물이 만년설과 조화를 이룬 '테카포'
호수. 그곳에서 아이들과 나는 세상을 잊고 낚시에 몰두한 모습을
연기했다. 호숫가의 오래된 성당에서 물새떼와 노니는 모습,
아이들과 낚시터로 가는 모습, 함께 낚시줄을 드리운 모습, 배 위에
한없이 편안하게 누운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질 무렵 붉게
물든 호수 위의 나룻배에서 주원이와 낚시를 하는 장면은 아마도
한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만큼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둘째날은 목장에서 촬영했는데, 파아란 잔디 위에 솜사탕같이
흩어져 있는 양떼들을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는 장면이었다. '편안한
정장' 이라는 브랜드의 이미지 메이킹 작업이었다.
멀쩡한 대낮인데도 강렬한 조명을 밝히고 찍는 것이 나로선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나중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화면을 보고
나서야 표현을 극대화시키려는 감독의 깊은 뜻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목장
처마 밑으로 숨는 장면.
이 장면을 위해 살수차가 동원되었고, 계속되는 NG 때문에
스태프진 모두가 물에 빠진 생쥐처럼 되었다. 영화 속의 비오는
장면은 모두 마른 하늘에 물을 뿌려가며 찍은 눈속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소득도 있었고, 슬슬 물이 오르는(?) 나의 연기에
스태프들이 감격하는 척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았다.
셋째날은 자동차 운전과 바닷가 신을 찍었다.
아내와 빨간 스포츠카를 모는 장면. 아름다운 화면을 만들기 위해
꽃잎과 나뭇잎을 선풍기로 날려가며 애쓰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실제로는 운전도 안하면서 앞 차와 연결된 트레일러
위에 스포츠카를 올려놓고 앞 차에서 카메라를 돌리는 눈속임
수법은 문외한이 보기엔 신기하기만 했다.
부슬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옆에서 선풍기를 틀어대니 여름 옷을
입은 온몸이 오그라 붙는 듯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오후에 찍었던 바닷가 신은 섬나라 뉴질랜드까지 와서 바다 냄새도
맡지 못하고 돌아가는가 했던 내게는 너무 반가운 기회였다.
바닷가의 고성 앞 절벽에서 사색에 잠겨 걷는 모습을 연출하다 보니
뉴질랜드 사람들이 빙 들러서서 구경을 했다. 그 순간
'우리나라에서 찍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아내와 바닷가를 걷는 장면에서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하기
위하여 주위를 날아다니는 물새떼가 필요했다. 식빵을 한없이
뿌려대며 물새를 모으고 날려보내기를 반복하는 난장판 속에서
바닷가를 무드 있게 거닐라고 하니 그것이 제대로 되겠는가?
"오변호사님, 표정이 그것밖에 안 나와요?"
감독님의 성화에 아무리 애를 써도 무드가 있기는커녕 어색함을
애써 감추려는 표정밖에 안된다는 것이 나 스스로도 느껴 졌으니까.
이렇게 정신없이 갖가지 장면을 찍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 적어도
광고 촬영은 우리가 완성된 작품을 보듯 그렇게 '환상' 적인 작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살아남기 위한 '전쟁' 에 가깝다고나
할까.
서울에 와서도 이틀을 더 찍었다.
창문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긴 장면, 재판정에서 열변을 토하는
장면, 사무실에서 고민에 빠진 장면, 전화로 승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장면, 꼬마 발레리나인 주원이와 함께 춤추는 장면
등등.
며칠 뒤, 내 모습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편집하는 데
동석하게 되었다. 이미 내용이 거의 추려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드디어 '환상 속의 나' 를 보았다. 유니세프 기념음반에 들어
있다는 약간은 처량스런 배경음악 속에서 물 흐르듯이 바뀌어가는
화면 안의 나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의 '오세훈' 이 아니었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상담과 재판에 쫓겨 담배 한 대 여유있게
못 피울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낭만적이고
편안한 남자, 정말 여유있게 사는 사람으로 둔갑해 있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허상' 이 있나. 촬영은 막노동이어도 그 결과는
'환상' 인 것인가!
그렇지만 너무너무 섭섭한 점도 있었다. 그렇게 애써 찍었는데,
모두 합해 겨우 7,8컷만이 살아남고 그 많은 장면들이 잔인하게
싹뚝싹뚝 잘려 나간 것이었다.
뉴질랜드의 추억이 어린 기막히게 아름다운 장면들은 다 어디로
가고, 서울에 와서 찍은 양복 입은 장면만 살아남았단 말인가. CF가
'환상' 이긴 하지만 그것조차도 결국은 '상업용' 환상인 까닭에?
법이라는 것, 방송이라는 것
"어머, 혹시 오변호사님 아니세요?"
"실물이 훨씬 낫네요."
여름 양복이 마땅치 않아 불편을 겪던 중에 세일을 한다는
백화점에 들었다가 자칭 '팬' 임을 내세우는 아가씨들의 너스레에
넘어가서 얼떨결에 양복을 세 벌이나 사고 말았다. 방송출연 첫날,
우리 맏딸이 일기장에 "우리 아빠가 드디어 출세를 하셨다." 고
표현한 대로 이른바 '출세' 를 하기는 한 모양인데, 덕분에 그날
아내의 옷값까지 덤터기 썼으니 출세의 대가를 꽤나 톡톡히 치른
셈이었다.
방송출연 후에 가장 실감나는 변화는 얼떨떨한 정도로 계속되는
인터뷰 요청이다. 사진기자들 앞에서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해 보는
재미도 이제 슬슬 시들해지고, 반복되는 비슷비슷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지겨워서 기사를 스크랩해 두었다가 내밀고는 "잘
써주십시오." 하는 한마디로 인터뷰를 때우는 요령도 생겨났다.
첫 방송출연을 결정하고 나서 참으로 어렵고도 어수룩하게
시작했던 텔레비전 프로였다. 그러나 시청률도 다행히 그 시간대
경쟁프로와 항상 1, 2위를 다투었다고 하니 함께 일하는 분들도
힘이 났을 것이고, 평상시 법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일반인들에게
꼭 알리고 싶었던 법률상식들을 조금이나마 전할 수 있어 나름대로
보람도 느낀 것이 사실이다.
방송을 시작하면서 가장 염려되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보수적인
법조계 선배들의 반응이었다. 어차피 방송이란 내 뜻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내용이 될 수 있고, 내가 자칫 잘못하면 변호사들의
이미지를 흐릴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탤런트냐.
변호사지." 하는 선배들의 질책도 다소 걱정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후 만나뵙는 선배들의 평가가 생각보다는 긍정적이고
격려성이어서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는 법, 신문기자들은 왜 그리도
야박했는지 모르겠다.
한때는 조간신문의 TV 프로 평론란을 펼칠 때면 날마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며 긴장이 되곤 했다. 가끔은 우리프로를
열심히 보고 연구해서 쓴 흔적이 엿보여 그 내용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매서운 질책도 있었지만, 한두 번 정도 수박겉핥기로
시청하고는 비평란을 메우기 위해 억지로 쓴 듯한 견강부회성
기사들도 없지 않았다.
그 프로의 기본적인 성격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한 당사자의
사연을 우선적으로 듣고 그런 경우에는 이러이러한 법적인 구제책이
적당하다고 알려주는 일종의 상담프로였다. 그러나 이를 간과한 채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비평을 하는가
하면, 법률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전제사실의 확정을 위하여
당사자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내용이 삽입된다며 호기심 차원의 대담이라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평소 상대방 변호사가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하면 마음껏
반박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지, 이렇게 반론의 기회가 영
주어지지 않는 일방적인 매스컴의 비평을 접하게 되면 이만저만
억울한 것이 아니다.
또 한 가지 가슴 아픈 지적은 프로가 선정적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횟수를 거듭하면서 시청률과 방송내용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어렴풋이 알게 될 즈음에는, 선정성에 대한 지적이 나올 때마다 그
영원한 숙제를 과연 어떻게 풀어야 할지 꽤나 고민을 했다. 아무리
알찬 내용으로 꾸며도 시청자가 보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보도록
만들자니 선정적이라는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전세 사기' 편을 다룰 때는 정말 일반이이 알아야 할 내용이라는
생각에 있는 성의를 다하면서 가슴 뿌듯했는데, 시청률에서는 겨우
꼴찌를 면했다니 시청자들의 취향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또 다른 스트레스를 들라면 실수에 대한 공포였다. 사람들은
변호사나 판^5,23^검사 정도 되면 무슨 사건이든 법률적인 해석을
즉시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얼키고 설킨
문제도 최소한 하루 이틀 연구하면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방송국 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음주의 방송 아이템이 정해지면
부지런히 검토해서 하루 이틀 만에 멋진 해답과 이에 대한 알기
쉬운 설명까지 곁들여 주길 원하는데, 그러기까지는 때때로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적어도 사나흘 정도
이것저것 뒤져보아야 상세하게 검토할 수 있는데, 법적 검토가
늦어지면 스태프진이 시간에 쫓겨 고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우리로서는 시간을 재촉할 때마다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만에 하나 틀리는 부분이 있어 선의의 피해자라도
생기게 되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이며 그 창피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한 번은 방송의 출연자와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분이 방송이
되기도 전에 온갖 경로를 통하여 내용을 완화시켜 달라고 부탁을
하더니, 방송 후에는 법률적인 결론에 하자가 있다며 문제를 제기해
온 일이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느껴지는 불안한 심정은 어쩔 수 없었다. 그분의 이야기가 나름대로
논리를 갖추었고 일견을 타당한 듯도 하여 재차 심층분석을 하여 그
내용을 서면으로 보내주었는데, 나 스스로 완벽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혹시 그분의 주장에 맞는 부분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몹시 신경이 쓰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프로의 성격상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날 것은 아니었다. 항상
이해를 달리하는 상대방이 있기 마련이며, 또 법률판단이라는 것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수도 있는데, 출연자의 일방적인 설명만
듣고 이를 전제로 하여 판단하다 보니 상대방이 불만을 가질
가능성은 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방송에서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직업상 늘
부딪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제 어느 정도 체질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일단 전파를 타고 나가버리면 주워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방송에서의 이러한 일은 훨씬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것이리라.
어찌됐든 방송을 끝내고 보니, 방송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
변호사들로 인하여 마음고생이 심했을 스태프진께 송구스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이 가지는 매력에 흠뻑 젖어서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던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체험, 삶의 현장
막노동자로서의 하루! 참으로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KBS로부터 <체험, 삶의 현장> 이라는 프로에 나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선뜻 응했다. 평소
육체노동을 할 기회가 없는 책상물림들이나 연예인들에게 이른바 3D
업종의 일을 경험하게 하고 그 장면을 방영하는 프로인데
시청자들이 호응이 대단하다는 방송국측의 설명도 내 마음을
흔들었다.
의논 끝에 내가 일할 장소로 정해진 곳은 전라도 광주에 있는
'쌍합주물공장'. 장소가 결정되자 PD와 작가는 내게 겁을 잔뜩
주었다. 어느 여자 탤런트는 작업 도중 힘들다고 눈물을 흘리며
가버렸다는 둥, 모 인사는 녹음기를 차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너무 힘든 일을 시킨 스태프진을 실컷
욕하였는데 편집하면서 그 녹음된 내용을 듣고 방송국 사람들끼리
배꼽을 잡았다는 등등.
그러나 그런 후일담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내심으로는 느긋했다.
'평소 헬스클럽에서 땀흘리며 다져온 근육(?)의 진가를 발휘해 볼
기회가 드디어 왔군. 아마 내가 일하는 걸 보면 꽤 놀랄걸.'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막상 현장에 도착해 보니 예상보다
할일이 훨씬 많은 것에 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일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줄곧 놀라움과 망신의 연속이었다. 처음 작업해야 할
것은 쇳덩어리인 선철과 고철을 손수레에 실어 용광로까지 옮기고
다시 용광로 안에 붓는 과정. 이를 악물고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20킬로그램짜리 선철 열댓 덩어리 정도와 고철 약간을 싣고 끙,
손수레를 밀었다. 순간 느껴지는 무력감. 어찌된 일인지 손수레가
꼼짝을 않는 것이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겨우 50여 미터 옮기고
나서는 도르래를 이용하여 지상 10미터 위로 올려 놓으니, 이번에는
펄펄 끓는 수천 도의 용광로 안으로 쇳덩이를 밀어넣는 작업을
하란다.
시뻘건 화염이 밖으로 밀려나오고 있는 불구덩이 가까이까지 간
다음 삽을 이용하여 쇳덩어리를 하나씩 밀어 넣어야 할 판인데,
조금만 가까이 다가서도 얼굴이 녹아버릴 같은 고열 때문에 눈조차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어느새 땀은 비오듯 하고, 정신을
오락가락.
죽기 아니면 살기로 땀을 뻘뻘 흘리며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두
수레를 밀어 넣고 나니 후회막급이었다. '여길 오겠다고 한 내가
바보지.'
얼굴은 점점 더 화끈거리고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파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제는 쇳물을 부어서 모양을 만들기 위한
틀을 만들 차례.
정작 힘든 일은 그때부터였다. 소 한 마리는 족히 들어갈 만큼 큰
가마솥 틀을 만들기 위해 흙을 한없이 집어 넣으며 다져 나가는데,
다른 작업자들의 속도에 맞추려니 정말 죽을 노릇이었다. 조금
쉬었다가 했으면 좋으련만 웬 힘들이 그리도 좋은지. 하도 자주
허리를 펴고 힘들어 하니 뒤에서 핀잔소리가 들린다.
"원, 젊은 사람이 저렇게 약해서야..."
야속한 심정이 들어 주저앉고 싶어진다.
가까스로 틀을 만들고 났더니 이제는 펄펄 끓는 쇳물을 용광로에서
받아다가 틀 위에 있는 동전만한 구멍에 부어 넣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
새빨갛게 끓는 쇳물을 쇠두레박에 받아 들고 틀 위로 옮겨야
하는데, 쇠의 비중이 높아서인지 그 무게가 이만저만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흘리거나 쏟는 날이면
흙바닥의 물기 때문에 1,500도의 쇳물이 사방으로 튀어 올라 내
다리는 물론 주위사람들의 살까지 녹아 내린다며 공장장님이
결사적으로 말리셨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온 일이 있는데, 고지가
바로 저긴데 거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붙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히는 순간
이상하게 오기 같은 것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주물공장에 와서
쇳물을 옮겨 붓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변호사가 법정에 가지 않고
변론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고집을 부려 쇳물을 반만 받아 옮기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서 끓고 있는 벌건 쇳물이 출렁출렁하자
머리카락이 10센티는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쇳물을 옮기는 것도
가까스로 옮겼는데 동전만한 구멍에 부으려니 제대로 들어가겠는가.
사방팔방 밖으로 새어나와 흘러내리고 튀고... 지금 생각해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런 작업이 계속 반복되면서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왔다. 이제 다
끝났다 싶어 한숨 놓았는데 용광로를 끄는 마지막 작업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쇳물과 코우크스가 범벅이 된 용광로 안의 거대한
불찌꺼기를 밑으로 꺼내놓고, 이를 식히기 위하여 몇 드럼의 물을
들어 부어야 하는데 이 작업 역시 모두 물통을 이용한 수작업으로
해결을 해야 했다. 이제 내 허리는 완전히 망가지는 것만 같았다.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젊은 사람들이 취직해 들어와도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버려 공장 내에는 서른다섯 살 이하의 젊은이는
한 명도 없다는 공장장의 설명이 너무도 절실하게 피부에 와
닿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동안 너무 쉽게 돈을 번 것은 아닌가?'
'너무 쉽게 돈을 쓴 것은 아닌가?'
사실 그 동안 동료 변호사들과 소주잔을 놓고 신세 한탄을 하면서
세상없이 힘드는 직업이 변호사라느니, 우리는 뛰어다닌 만큼
벌어먹고 사니 육체노동자나 다름 없다느니 하며 너스레를 떨던
것이 다시없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운이 좋아 사법시험에 붙은 것을 밑천삼아 너무 쉽게 세상을
보아온 경솔함을 새삼 느끼고는 그분들에 대해 진심으로 우러
나오는 외경심을 누를 수 없었다.
그날 하루 일을 끝내고 받은 일당은 3만 2,000원. 그 돈을
받아드는 순간 멀쩡한 몸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도 행복하고 고마웠다. 물론 그후로 며칠 동안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해서 혹시 디스크는 아닌가 슬그머니 걱정이
될 정도였지만.
스튜디오 녹화날은 편집해 놓은 필름을 스태프진과 함께 보다가
눈자위가 여린 나는, 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가에 이슬이 맺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한바탕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모든 사람이 이런 경험을 1년에 한 번 정도씩만 할 수 있다면
이른바 사치나 과소비 같은 사회현상이 당장에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겨우 하루 노동해 보고 지나치게 생색을 내는
것일까.
아내, 그리고 나
왜 글을 쓰려고 컴퓨터 자판 앞에만 앉으면 마음이 진솔해지는지
모르겠다. 이 순간만큼은 일기를 쓰듯 벌거벗고 서고 싶은 본능이
있는 걸까?
웬지 모르게 호감이 가는 MBC 장수프로 <여성시대> 담당 PD의
재기발랄한 센스에 넘어가서 엉겁결에 원고청탁을 받아 놓았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난감하던 차에 달이 지나간 <여성시대>를
들쳐보다 정신과 전문의 김정일 선생이 쓴 '마누라 휘어잡고 사는
법' 이라는 글을 읽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사실 세상에 드러내놓기엔
적당치 않은 가정 안에서의 일이라 그 동안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있었던 일인데 그 글을 읽고 '나도 한번?' 하는 용기가 생긴
것이다.
사실 나 역시 아내를 꽉 잡고 산다고 자부한다. 주위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알고 있다. 왜냐하면 아내가 동네방네 다니며 그렇게
외치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고 나 역시 굳이 그런
아내의 주장에 반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내는 틈만 있으면 나에게도 자신이 나의 대찬 '기' 와 '성깔'에
눌러 꼼짝 못하고 사는 것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한다. 일종의
세뇌공작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아내를 꽉 잡고 있다고 확신하고
산다.
사실 우리 부부 사이에는 부부싸움이 거의 없다. 의견충돌 역시
별로 없다. 결혼생활 10년 중 신혼초 몇 개월을 제외하고는 큰
소리로 다툰 기억이 없다. 싸우고 난 뒤 한쪽이 집을 뛰쳐나간
기억도 전혀 없다. 정신과 의사 선생들이 들으면 오히려 문제있는
부부라는 분석을 내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기가 너무 센 남자요, 남편이다. 남에게
진다는 생각이 들면 절대로 참지를 못한다. 또 사람 관계에
있어서도 내가 우월한 입장에서 서서 베푸는 처지가 되면 오래도록
유지가 되지만, 그 반대의 상황이라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세상에 오기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유독 오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오기는 아무도 못 말린다. 방송을 통해 내 얼굴이
나가고부터 '부드러운 남자' 또는 '날카로운 변호사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바꾼 변호사' 라는 낯간지러운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이는 방송매체가 만들어낸 환상 내지는 허상에 불과하다. 사실
대중매체 앞에 나서서 있는 그대로를 훤히 보여주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여하튼 아내는 이런 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연애기간 7년에
결혼기간 10년, 합이 17년이니 이제는 어머니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나에 대해 아내가
고육지책으로 생각해 낸 방법이 '백기 들고 싸우기 전법' 이다.
세상이 모두 '그 집은 남자가 꽉 잡고 산다' 고 알고 있도록 해서
내 자만심(?)을 잔뜩 부풀리고, 세뇌공작을 통해서 나 스스로도
그렇게 착각하도록 만든 후 실속은 알토란같이 챙기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나는 그런 아내의 귀여운 술수가 눈에 보일 때마다 아내를 '여우'
라고 부른다. 내가 "아이고, 이 여우야!" 하면 아내는 "나는 소야,
소." 하고 되받고는 곧이어 자신의 착함과 우직함을 역설한다. 이건
말하자면 철저한 위장전술일 수 있는데, 그래도 이렇게 지지 않고
열심히 응수하는 아내가 전혀 밉지 않다.
그런데 이런 아내가 한 번, 딱 한 번 내게 반기를 든 적이 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정확히 4년 전의 일이다. 대학 동기녀석의 늦은 결혼식에 함이
들어가던 날 밤, 그 친구 처가댁에서 거나하게 술에 취해 나오니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정신없는 경황에 어찌어찌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님이 사색이 되어
계셨다.
"얘 아범아, 큰일났다. 이것 좀 봐라."
아내의 쪽지였다.
"세훈씨, 나 찾지 마.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완전 날벼락! 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 전날 다투기라도 했으면
그리 얼떨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술취한 정신에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보아도 다툰 기억이 없다. 집안을 둘러보니 옷가지와 가방이
없어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구나, 아니 그런데
이유가 도대체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처가집에 연락해 보니 오지 않았다고 했다. 상계동의 처제도
금시초문이라며 지레 먼저 놀라 자빠졌다. 술이 확 깨면서 온갖
불길한 생각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혹시 거짓말을 하는가 싶어
처가집으로 처제집으로 뛰어가봤지만 모두 얼떨떨한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파김치가 되어 집에 오니 어느새 새벽 4시. 망연자실해서 어쩔 줄
모르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니, 참으로 죄송스럽고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날이 훤하게 밝았다. 웬만한 일로는 절대 잠을 설치지 않는 내가
한잠도 자지 못하고 밤새 끙끙댄 것은 일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유를 알아야 대책을 세우지, 나 원 참...'
아침 8시가 되고 9시가 되어도 연락이 없다. 슬슬 화가 났다.
'이혼이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들을 것도 없이 무조건 이혼이다.'
더구나 그 당시 가장 큰 충격은 '감히 나에게...' 하는
생각이었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반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아이들을 보면 한심했다. 이제 일곱 살, 다섯 살. 눈만
초롱초롱한 두 계집애를 보니 앞이 캄캄해지는 것이다.
"누가 키워도 제 에미만은 못할 텐데..."
그러다 문득 '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비고비 때마다 참고 살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분노와 체념이 교차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처제였다.
"언니, 지금 막 우리집에 왔거든요."
전화를 내던지듯 끊고 처제집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막상 아내의
얼굴을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어디서 잤어?"
"....."
"이유가 뭐야?"
"..."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걸 간신히 참고, 목에 꾹꾹 힘을 주며
한마디 한마디 이어갔다.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대단한 인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내의 불만을 정리하면 다음 세가지로
요약되었다.
이제 더 이상 시집살이는 죽어도 못하겠다. 아들 하나 더 낳자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왜 버는 돈을 다
갖다주지 않느냐.
세상에, 기가 막혔다. 그 말 하려고 이 난리를 피우고 집안을 홀딱
뒤집어 놓았단 말인가. 아내는 충격요법으로 만든 이번 기회를
빌어, 자신에게 밟히는 현안들을 몽땅 해결하겠다는 전략인 듯했다.
아내의 속셈을 간파하고 나자 괘씸하고 약이 올랐지만, 극도의
자세심을 발휘해서 다시 한 번 꾹꾹 눌러 참았다.
"그래, 세 가지 모두 들어줄게. 그러니까 일단 집에 가자."
너무도 손쉽게 요구사항을 수락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아내는
슬그머니 의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몇 번씩이나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사실 나로서는 아내의 말보다 집에서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계실 부모님 얼굴만 눈에 선했다. '가서 뭐라고
말씀드리나? 일단 무조건 사죄부터 해야 되겠지.'
"어머님, 아버님. 죄송합니다."
"그래, 아가. 힘들게 산다는 거 잘 안다. 공부하랴 살림하랴
시부모 모시랴, 힘들었지? 며칠 친정에 가서 쉬다가 오너라."
아내의 머쓱한 처지를 간파한 어머님의 배려로 그날의 해프닝은
그렇게 간단히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모두 민감한 요구들뿐이니 무슨
수로 그걸 다 들어준단 말인가.
물론 그 동안 아내가 군소리없이 시집살이를 해주는 것에 대해서
무척 고마워하고 있었다. 신혼초 꼭 1년간 나가 살다가 어머님의
뇌하수체 종양이 발견되던 날 우리는 부모님이 계신 집에 들어와
살기로 합의했다. 물론 아내는 나의 부탁에 선뜻 내키지 않는
동의를 한 것이지만 말이다. 어머님은 그후 몇 차례의 어려운
수술을 거쳐서 많이 좋아지셨지만, 그렇다고 다시 살림을 날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아내를 설득시키고 위안을 줄 수 있을 만한 적절한
사례라도 발견된다면 마음이 조금 편하겠는데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당시 아내나 내 주변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눈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내의 친구는 물론 내 친구들도
어쩌면 모두들 하나같이 분가를 해서 사는지 야속 할 정도였다.
아내는 늘 신혼초의 생활을 그리워하는 듯했다. 아니, 확실하게
그리워했다. 그런 아내의 마음이야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도
잘 알지만, 눈치없이 이런 일을 벌이고 나서 어찌 당장
살림나겠다는 말을 어른들께 꺼낼 수 있겠는가?
아들 문제만 해도 그렇다. 나는 사실 크게 아들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 세대에 자식 공양을 받을 것도 아니고, 딸 둘이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가끔 아들녀석 데리고 목욕탕 가는 것이 소원 이라는 둥
아내에게 은근히 압력을 넣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냥 가끔씩
남자들끼리의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아빠와 아들의 관계가
부러워서 그러는 것이지 뭐 대단히 절실해서는 아니었다. 그건
아들만 둔 엄마가 딸 하나 예쁘게 키우고 싶어하는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있어서 어느 집안에서나 그러하듯이 핵심은
내가 아니었다. 아버님은 10남매 중 장남이시고 나는 외 아들이다.
그런 형편을 나보다 잘 아는 아내가 스스로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고, 가끔 양자 이야기까지 꺼내시는 아버님 때문에 스트레스
꽤나 받았으리라.
또 돈 문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생활비 이외에 나머지 돈을 자신이 관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아내는 자신도 인정하지만 재테크의 'ㅈ' 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다른 부인네들처럼 그쪽으로 머리를 쓸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기껏해야 은행에 가서 가장 이율 높은 저축상품을 골라 예금하는 게
전부인 사람이다.
그래도 나는 직업이 변호사인데 이쪽저쪽 정보도 많고 관심도 많질
않겠는가.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 가정의 돈 관리는 내가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져왔다. 그런데 그게 불만의 요소가 될 줄이야.
그렇지만 이 문제만은 우리 가정의 재테크 전략에 다소 차질이
생긴다 하더라도 내가 져줘야 할 것 같았다. 나 스스로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어쨌든 이 소동 때문만은 아니지만 운좋게도 아내의 소원은 대충
이루어진 셈이 됐다.
그 뒤로도 바로 살림난다는 말씀은 차마 못 꺼내고 차일피일하던
차에 1년쯤 뒤 아버님이 지방으로 발령이 나시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분가가 된 셈이고, 아이 문제는 아내의 박사논문이 끝날 때까지
무조건 보류라는 타협안이 통과되었다. 그놈의 논문이 아직도
진행중이라서 문제이긴 하지만.
아마도 아내는 논문이 끝나면 또 다른 연기의 구실을 찾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내 스스로 원하지 않으면 나도 강요
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우리 부부는 이렇게 산다. 지금쯤은 독자분들도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리라.
"당신이 당신 아내를 꽉 잡고 사는 게 아니라 아내의 치밀한
'강온양면작전' 에 당하는 줄도 모르고 당하면서, 꽉 잡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구먼. 쯧쯧."
그러면 어떻습니까?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고, 그렇게 사는게
인생인데.
해장국집과 법률사무소
우리 가족은 일요일 아침이면 집에서 가까운 남산으로 산책을 가곤
한다. 일요일 아침에 방영하는 TV 만화영화 주제가의 '엄마 아빠
늦잠자는 일요일 아침' 이라는 가사가 적어도 우리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휴일날 느긋하게 아침잠을 즐기는 아내와 두 아이들과는 달리 나는
6시부터 일어나 온가족을 깨워댄다.
"아빠하고 산에 갈 사람!"
이 소리에 아이들과 아내가 아침잠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군소리
없이 벌떡벌떡 일어나서 아침 산책에 동참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해장국 때문인 것이다.
등산 후의 늦은 아침에 해장국을 먹는 것을 코스화해 놓았더니,
유난히 먹성 좋은 두 딸뿐만 아니라 아내까지도 군침이 도는
모양이다. 더구나 아내로서는 아침식사 준비를 덜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이니 게으름을 부릴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데 얼마전부터 해장국 전선에 이상이 생겼다. 지난 식목일에도
어김없이 늦잠을 즐기려는 아내를 깨워 아침 산책을 한 후
해장국집을 찾았다. 늘 가던 맛이 기막히게 좋은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이 웬일인지 문을 닫고 말아서 근처의 다른 집을 물색해 놓았던
터였다. 지난번에 가보니 맛도 그런 대로 괜찮은 편이고 집과도
가까워서 '이제 단골은 여기구나' 하고 생각했던 집이다.
주차를 시키려니 안 그래도 좁은 공간에 배달용인 듯한 오토바이
한 대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어 영 힘들었다. 몇 번씩 전진과 후진을
거듭하면서 땀을 흘리며 쩔쩔 매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아내가
식당으로 뛰어들어가 주인을 불렀다. 그러나 느지막히 나온 일하는
아주머니는 배달하는 남자가 없어서 오토바이를 치우는 것이
힘들다는 얘기만 불쑥 던지고는 그냥 들어가버렸다.
이런 난감할 데가 있나. 이미 차는 좁은 공간에 꽉 끼여 있어서
주차하기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빠져 나가자니 그도 힘든
상황이었다. 공간이 하도 좁아서 차문을 열고 내릴 수조차도 없을
지경이니 내가 오토바이를 옮기기도 어려웠다.
그때 갑자기 아내가 샐쭉한 표정이 되어 식당을 나오더니 집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아주머니 말과 달리 식당 안에서 벌렁 누워 잠을
자고 있는 남자 종업원을 발견하고는 그만 발끈한 것이었다.
사실 해장국 네 그릇을 팔아보아야 얼마나 남겠는가. 또 그 사람을
깨우려면 같은 종업원 입장에서도 미안했을 것이다. 그런 저런
사정이 이해는 되지만 섭섭하고 괘씸한 마음을 지울수는 없었다.
나는 이제 그 집을 단골삼자고 작정한 터였는데 겨우 해장국이나
먹는 손님이라고 갈 테면 가라는 투였으니 말이다. 외식을 자주
하는 편인 우리가 저녁 때 와서 돼지갈비며 등심구이도 팔아줄 수
있는데, 어쩌구 하며 계속 툴툴거리는 것을 보니 아내도 어지간히
속이 상하고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가 해준 밥을 먹으며 연신 '맛있다'는 말로
아내의 화를 풀어주긴 했지만 앞으로가 정말 큰일이었다. 그 집
말고는 갈 만한 데가 마땅치 않으니, 다음부터는 무슨 말로
아이들과 아내를 깨운단 말인가.
그날,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주인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가도록 내버려두었을까? 우리가
그렇게 돌아온 사실을 알면 주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면서 이어지는 생각.
'그나저나 우리 사무실은 잘하고 있나?'
그렇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나부터 잘해야지! 직원들한테도 의뢰인에게도.'
그러면서 며칠전 한 의뢰인에게 들은 말이 생각나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거기 여직원 참 영리해요. 한 번 보았는데도 그 다음에 전화를
하니까 누군지 척 알아듣더라구요. 참 기분좋대요. 여직원 하나만
봐도 사무실 분위기가 느꺼져서 안심이 돼요."
딸아이의 반장 선거
"아빠, 나는 쌍꺼풀도 없구 지은이보다 밉게 생겼나 봐."
며칠전 반장선거가 있던 날 국민학교 3학년인 큰딸 주원이가 집에
들어서며 심각한 얼굴로 했던 말이다.
주원이가 다니는 학교는 2학년부터 한 학기에 두 번씩 반장을
뽑는다. 이제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으니 이번 선거까지 합해서 모두
여섯 번의 반장 선거를 치른 셈이다. 그런데 본인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항상 대여섯 표 차로 2등을 한다고 한다.
남녀 반장을 따로 뽑는 대신에 부반장 제도가 없으니, 반에서 기를
펼 수 있는 고위직(?)이 되기 위해서는 늘 다음 선거를 기대해 보는
수밖에 없는데, 그 다음 선거 때가 되면 영락없이 또 다른
'다크호스' 가 나타나서는 표를 가장 많이 받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원이가 이 '반장' 을 몹시 하고 싶어한다는데
있다. 아예 반장에 뜻이 없다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겠지만, 본인이
반장에 뽑히기를 너무나도 절실히 원하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어린 마음에 좌절감이 보통이 아니다.
아내와 나는 우리 주원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당연히 1등은
도맡아하고, 반장 같은 건 당연히 주원이 몫이라고 확신했었다.
대부분의 부모가 자녀가 보여주는 약간의 재능에 전적으로
빠져버리는 것처럼 적어도 우리 부부의 눈에 비친 딸 주원이의
영특함은 거의 천재에 가까웠고, 성품마저 착하고 따뜻하니 더 없이
훌륭한 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왕년에 잘나가지 않던 사람이 없겠지만, 나 역시 국민학교에서는
단 한 번도 반장과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으며, 아내 역시 반장을
하고 싶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친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때문에 할 수 없이 했노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처지이고 보니, 우리
딸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착각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두 번 딸 아이의 낙선을 경험하자 부모로서 은근히
오기가 발동했다. 이리저리 귀동냥을 한 끝에 저학년 때는 코믹한
선거유세가 특효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1주일 전부터 아이들을 웃게
만드는 유세는 어떤 것일까 머리를 짜내며 함께 반장선거를
준비하는 극성도 떨어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간발의 차로
낙선!
이제는 가족 모두가 한계를 느껴, 어느 정도 포기상태에 돌입한
듯한데, 며칠전부터 어깨가 축 처져 다니는 주원이를 보면서 웬지
모를 죄책감이 드는 것이다. 주원이가 저렇게 마음아파 하는 것이
필시 우리 부부의 과욕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까닭이다.
아빠의 어린시절을 부풀려 '반장도 못하면 내 딸 자격이 없다' 는
억지를 은연중에 주입한 것은 아니까. 사실 변두리 학교를 다니던
나의 어린시절과 지금 주원이의 상황은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다르다. 지금이야 먹고 살 만한 세상이 된 탓에 어느 부모를
막론하고 교육열이 대단들 해서 모든 아이들이 하나같이 다
똑똑하다지 않은가. 그런저런 형편을 애써 무시한 채 내 어린시절을
강요한 것이 슬그머니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까짓 반장 좀 못하면
어떠랴.
제딴에는 이번 낙선의 이유를 심각하게 분석해 본 결과, 자신의
쌍꺼풀 없는 눈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외모까지
탓하게 된 그 심정이 오죽하랴 싶었다.
나의 경우 국민학교 때는 늘 반장을 하며 우쭐대다가 중학교에
가서는 내내 그 자만심이 채워지지 못하자, 철없는 마음에 아버지의
높지 않은 신분과 그다지 부유하지 못한 우리집의 경제 형편에서
원인을 찾았었다. 이런 나의 어린시절을 더듬어보면 주원이의
허탈한 심정을 너무 잘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가을의 차기 반장에 대한 집념을 불태우는 우리 큰딸이 더
이상은 좌절하지 않기를, 그리고 낙선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을 과시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또 한편 안타까운 생각이 마음 한쪽을 무겁게 누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주원이의 성적이 들쑥날쑥한 덕에 아이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그것이 낙선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주원이는 어린 나이에 벌써 '공부' 와 '성적' 이라는
괴물에 짓눌려 자신의 소망이 좌절되는 것을 경험하는 셈이다.
내가 주원이만한 나이 때는 학교 갔다와서 책가방을 내던지고 실컷
나가 놀다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겨우 가방 챙겨서 학교에 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렇게 학교에 가서는 공부시간에 선생님 말씀 잘
듣는 것 하나로도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에 참으로
즐겁고도 신나는 학교생활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주원이는 방과 후 여기저기를 돌며 빡빡한 일정에
쫓기다가 밤 11시까지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도 제 마음에나
부모 마음에나 미치지 못하는 성적으로 안타까워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주원이의 야무지지 못한 성품 때문에 과외선생이 필요할 것
같다는 소리까지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어 언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 분노는 어린시절의 여유로움과 천진함을 너무 빨리
앗아가는 부모들의 소모적인 교육열과, 나도 모르게 그런 세태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경쟁에 단련되어 온 우리 세대의 부모는
무의식중에 아이들의 장래를 놓고 또 다른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경쟁이 과연 아이를 위한 경쟁인지 부모의
만족을 위한 경쟁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선뜻 결론이 나지 않으니 이
또한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나의 어머니 아버지
부모님에게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는지, 아이들은 어떻게
키우는지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덕분에 부모님, 그리고
아이들에 대해 생각을 해볼 기회를 가졌다. 빡빡한 스케줄에 쫓기다
보니 사실 부모님께 시간을 배려해 드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좋은 아빠가 되려면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가능하면 그렇게 하려고 노력도 하고 있지만,
부모님께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아서 죄송하다는 마음이 많이 든다.
아마도 아이들에게 할애하는 시간의 1/5 정도라도 부모님께 시간을
내드리면 효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막연히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너무 소홀히 대해 오지 않았나 싶다.
우리 부모님은 매우 평범하신 분들이다. 아마도 지극히 한국적인,
지극히 평균적인 삶을 살고 계신 불들이 아닌가 한다. 아버님은
중소 건설회사에서 30년을 근속하시다가 몇 달 전 퇴사 하셨고,
어머님은 아버님의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버겨우셨던지 몇 년
전까지도 조그마한 수예점을 하시다가 건강이 안 좋아지시자 가게를
정리하고 요즘은 수영이나 계모임 등으로 소일하고 계신다. 한평생
크게 기복이 없는, 보기에 따라서는 행복한 인생을 사셨다고 할 수
있겠다.
부모님은 우리 남매를 키우시면서 무척 행복하셨다고 회상 하시곤
한다. 여동생도 제일 좋다는 국립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후 남편
따라 독일에 유학가 있고, 나 역시 지금까지 살면서 크게 속상하게
해드린 기억은 없는 것 같다.
단지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지 못했음에 다소의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우리 남매 모두가 우리집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자랄 만큼 어머님은 빠듯한 살림 속에서도
우리들이 금전적인 면에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엄청난 노력을
하셨던 것 같다.
아버님이 근무하시던 회사는 무척이나 정치바람을 타던 회사였다.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까지 갔던 기억이 내게도 몇 번 있다.
제일 어려울 때는 월급이 몇 달씩 지급되지 않아서 라면이나
싸래기밥만 먹으면서 며칠을 보낸 적도 있는데, 그런 와중에도 크게
충격을 받거나 가슴 아파했던 기억은 없다. 아마도 생활고를
아이들에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어머님의 엄청난 노력 덕분이 아닌가
싶다.
다만 내 기억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각오를 다졌던 일이 있었다.
아버님이 근무하던 회사의 회장님은 어머님의 이모부가 되신다.
이분이 그 옛날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일본에 망명해 계시다가
정권이 바뀌자 귀국하셨지만 귀국 직후 돌아가시고, 그 아들 즉,
나에겐 외오촌당숙이 되는 분이 현재의 회장님으로 취임하셨는데,
그때는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집안의 어른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던 중 아버님이
회사에서 손 아래 동생뻘인 회장님께 깍듯하게 예를 갖추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할 것 같은 그말이 당시에는
왜 그렇게도 내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모르겠다. 나에게도 무척
자상하게 대해 주시던 그 아저씨에게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절대로 셀러리맨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는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를 돌이켜보면 어머님의 교육열은 대단하셨다.
국민학교 4학년 때는 1년 내내 도시락을 학교로 날라주셨다.
도시락이 아니라 따뜻한 밥을 새로 하셔서 된장이나 돼지고기
찌개와 함께 밥을 담은 쟁반을 보따리에 싸서 학교까지 갖다 주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나게 도가 지나친 정성이 아닐 수 없다.
그때 왜 그러셨는지 여쭤보았더니 담임 선생님께서 세훈이가 몸이
약하니 특별히 신경을 쓰라고 하셔서 그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치맛바람(?)의
주범이시지만, 어머님 나름의 기준은 분명하셨던 것 같다.
국민학교 5학년 때는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일이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쓰리고 아픈 사연으로, 담임 선생님의 감정적인 처사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직장 관계로 부산에
살았다. 그때 내가 다녔던 학교는 공립이에도 불구하고 시내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치맛바람이 정말 대단했다. 어머니들의
극성에 견디다 못해 한 반에 반장을 열 명이나 뽑아 돌아가면서
시킬 정도였으니 알 만하지 않은가.
또 보통 웬만한 집 아이들은 과외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가
담임 선생님께 과외수업을 받는 것이었다. 물론 그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했고. 그래서 나도 어린 마음에 담임
선생님에게 괴외를 받고 싶었다. 그런데 어머님은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단호하셨다. 담임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으면 성적은
좋아질지 모르지만, 그것이 제 실력은 아니라는 주장이셨다. 실제로
당시 내 기억으로는 친구가 과외시간에 풀었다는 문제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출제되곤 했다.
선생님은 내가 외부에서 과외를 받는다는 사실을 아시고는 은근히
옮길 것을 권유하셨다. 그러나 어머님은 요지부동이셨고 결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지만 '보복' 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하루는 어느 여학생이 먹은 것을 토하자 아무 상관이 없는 내게
그것을 치우고 걸레를 빨아오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이런 종류의 학대가 계속되자 집에는 말을 못하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급기야 잠을 자다가 헛소리를 하기도
했고, 몽유병 환자처럼 잠을 자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내가 집
밖에 나와 있기도 했다. 그 이유를 알아내신 후에도 어머님은 담임
선생님께 말 한마디 않으시고 그 학년을 버텨내셨다. 물론 내게도
인내를 강요하셨고.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선생님도
선생님이지만 어머니 쪽이 더하다. 그 학년에 실력이 중요하면
얼마나 중요하다고 그러셨는지.
얼마전 <TV는 사랑을 싣고> 라는 프로에 나가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여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찾는 내용이었는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부터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주책없게도 프로가 끝날 때까지 멈추질 않아서 보통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주위의 많은 분들이
웬 남자가 눈물이 그렇게 많냐고 놀려댔지만, 사실 나는 그
회상장면을 보면서 부산에서의 그 잔인했던 세월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어머님의 그런 지독한 면을 닮은 부분이 있다. 그때
그 사건 이후 어린 나이임에도 세상을 많이 배웠다. 나는 지금도 그
선생님이 나를 강인하게 만들어주는데 일조한 은인의 한 분이라고
꼽고 있다. 두서없이 옛일을 회고하다 보니 묻어두어야 마땅할
내용이 공개된 것 같아서 쑥스럽다. 사실 따뜻하고 자상한
선생님들을 더 많이 만났는데.
나도 자식을 둘 키운다. 과연 우리 부부가 어머니만큼의 분별력을
가지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그저
두려울 뿐이다.
신세대 여성들이여!
'신세대 여성' 이란 어떤 여성일까? 현대의 신여성은 평생
독신이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 대부분 가정을 꾸미는
것보다는 일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가능하면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가능하면 늦게 하고, 그 동안에 일과
인생을 만끽하려 하며, 딸이든 아들이든 아이는 하나만 낳고 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신세대 여성은 개성이 강해서 자신을 꾸미는
데도 정형적인 것을 거부하며, 그래서 미니도 미디도 동시에 유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또 남자를 선택하는 데 나이나 기혼 여부가 전혀 기준이
되지 않는다. 혼전관계에 대해서도 '사랑' 이라는 것이 전제되면
매우 관대한 반면, 헤어짐에도 망설임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집을
마련하는 것보다는 우선 자동차가 있어야 하고, 스키 세트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일한 만큼 휴가도 필요하고 해외여행도 가야 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요즈음 이야기되는 신세대 여성을 제대로
묘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그러나 대충 이 정도면
구세대와 구별되는 신세대 여성들을 표현했음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도 신세대는 있어왔고, 그 신세대의 새로운
발상과 스스럼없는 행동이 때로는 구세대를 주눅들게 하고
우려하게도 하며 깨어나게도 해왔다.
신세대의 일탈성이 구세대의 수용한도를 넘어서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분명히 충격일 테지만, 그 충격이 충격에만 머물지 않고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와서 구세대의 경직된 사고를 서서히 바꾸고
결국 구세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참된 의미의 신세대,
바람직한 신여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신세대 여성이라면 그들에게 대리만족은 없다. 신여성은
스스로의 성취감에 승부를 건다. 남편의 출세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거나 아이의 떨어진 성적 때문에 노심초사하기 보다는, 나의
내면이 점차 스러져가는 것에 슬퍼하고 내가 남에게 조그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종종걸음치며 바쁠 것이다.
차를 한잔하면서 신간서적을 읽을 시간은 있어도 아침 시간에
앞으로의 스토리 전개가 훤히 보이는 삼각관계 TV 드라마를 중독된
듯 넋 잃고 볼 시간은 없을 것이다.
신세대 여성은 세상 물정에도 어둡지 않다. 적어도 쓰레기
소각장이 날림으로 지어져서 '다이옥신' 이라는 맹독성 물질이
기준치 이상으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BOD, COD가 우리가
먹는 강물의 오염도를 나타내는 지표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 지역구 의원의 소속상임위 정도도 물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당선된 후 공약을 지키고 있는지를 늘
지켜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음 선거 때는 그 앙갚음을 기어이
하고야 말 것이다.
신세대 여성은 깨어 있다. 슈퍼마켓에서 수입산 칼로스 쌀을 사는
사람을 분노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우리 아이가 꼭 손해를 볼 것만
같은 불안감 속에서도 옳지 않은 일 같아 선생님께 '인사'(?)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핵실험이 전 세계적으로
지탄받아야만 하는 이유에서부터 합성세제를 써서는 안되는
이유까지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더 이상의 환경 교육이 필요없을
것이다.
신세대 여성은 보는 스포츠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조깅도하고
에어로빅도 하고 수영도 하며 그 즐거움을 만끽하긴 하지만, 편안히
살뺄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누워만 있어도 칼로리가
소모된다는 기구에 몸을 맡기며 시간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신세대 여성은 돈과 출세에 대해 관심이 적다. 오로지 그들의
관심은 가족, 친구, 그리고 이웃과의 좋은 관계와 일을 통한
만족감에서 비롯되는 내적 성취감에 있다. 그들에 있어 '성공' 이란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 그 자체' 이다.
이러한 신세대 여성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복잡하고 허영이
많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어놓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아둔한 남자들, 그리고 구세대를 두드려 깨우쳐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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