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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한수산] 먼 그날 같은 오늘

by Casey,Riley 202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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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그날 같은 오늘


한수산

  
         차례

  작가의 말

  첫번째 이야기
  겨울안개는 깊지 않다

  두번째 이야기
  밤기차
  1. 1989년 9월 9일. 나리타 공항의 비
  2. 북경. 달빛 속의 천안문
  3. 장춘, 긴 봄이라는 도시의 짧디 짧은 봄
  4. 가톨릭 3수생
  5. 백두산 가는 길
  6.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해 빌으소서
  7. 밤기차

  세번째 이야기
  사막에서 쓴 편지
  

  
    첫번째 이야기 겨울 안개는 깊지 않다
  
    1

  왜 그 생각을 했을까. '기다리지 않아도 돼', 하던 그의 말을.
  다른 곳도 아니었다. 지하철을 나와 껌딱지가 드문드문 붙어 있는 계단을 
올라와서였다.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왜 그 말을 떠올렸을까. 
기다리지 않아도 돼.
  오늘... 그래, 12월이다.
  어제와 무엇이 다르랴. 달력의 마지막 장은 어젯밤에 떼어냈으니 오늘 아침에는 
다만 12월을 맞으면 되었었다. 벙어리 장갑도 가죽장갑도, 몇 가지의 목도리도 
그리고 긴 겨울코트와 목언저리에 털이 달린 점퍼도... 따뜻한 내의와 함께 이 
겨울을 살아낼 모든 내 '이웃'이 준비되어 있다고 믿었던 이 12월의 첫날이 
아니었던가.
  늘 생각했었지. 12월에는 혼자여서는 안 된다고. 12월은 그렇게 속삭이는 
달이라고.
  까닭없이 12월은, 왜일까.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한다고 느끼게 만든다. 헤어지는 
날들만으로 가득 차서인지도 모른다.
  한해를 보내야 하고, 다시는 돌아올 길 없는 나이... 스물 몇 살 서른 몇 살을 
보내야 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마지막 열차처럼 사라져간다. 결코 돌아오지 
않는 선로를 그렇게 간다.
  그리고 무엇이 오던가. 아, 새 달력. 새 일기장. 새 계획들. 지켜지지 못할 것이 
너무나 확실한, 그것들이 온다. 정말이지 우리 삶에 이토록 확실한 것이 있을까, 
새해에 세워보는 계획처럼 지켜지지 못할게 확실한 것들이. 새해라는 이름의 그 
열차는 결코 12월이라는 역에는 가지 않을 것을, 마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좌석번호에는 '영원'이라는 스탬프라도 찍혀 있는 것처럼 믿게 하며 그렇게 온다.
  그렇지만 오늘은, 12월이다. 첫날이다. 아, 속임수라고는 생각하지 말자. 살아 
있다는 것은 믿음이고 약속이니까.
  그래서인가. 12월은 모든 헤어짐을, 이별을, 상점의 셔터를 올리듯 벌려놓는다. 나 
하나에서 그치지 않고 혼자서 치러내야 할 것들을 공식화시킨다. 그런 나날들. 모든 
일들이 그렇다.
  나 혼자 혹은 우리끼리라는 한정사를 놓고 우리는 살아간다. 그것이 우리들의 
나날이다. 그런데 유난히 12월만은 그렇지가 않다. 모든 것을, 나 혼자만 혹은 
둘이서 셋이서 우리끼리만 해야 할 일을 갑자기 여러 사람 앞에 내놓고 떠벌여대게 
만든다.
  망년회. 연하장... 새 달력, 새 일기장... 그리고 날아드는 크리스마스 카드들. 
근하신년에서 해피 뉴 이어까지.
  이제 겨우 남아 있는 한 달을 이렇게 마구 써 버려도 되는 것인가 싶게 사람들은 
12월을 쓴다. 버리듯 쓴다. 빚장이가 물건 들어내가듯 그렇게들 시간을 살아간다. 
혼자서만 해야 할 일들을, 둘이서 손을 잡고 지켜가기로 해야 할 것들을, 우리끼리 
이마를 맞대고 나누어야 할 말들을, 마구 써 버린다.
  그것이 12월일까. 그래도 되는 것이 12월일까.
  그런 나에게 그의 말이 들려왔던 거다. '기다리지 않아도 돼' 하는 그 낮고도 
음울했던 목소리. 마치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 약속하듯 했던 그 
말이.
  아침에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 섰을 때,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서 있었다. 어느 
날과 다를 것이 없었다. 빨간불이 꺼지기를 기다리는 것도, 그래서 파란불이 
들어오면 횡단보도 그 건너편에 무슨 선착순으로 건네주는 무료입장권이라도 있는 
듯이 건너가곤 하는 그 횡단보도.
  마이클 잭슨이 올 리도 없지만, 마치 마이클 잭슨 공연장의 무료 입장권을 
선착순으로 나누어준다는 팻말이라도 본 그런 사람들처럼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오늘도 그랬다. 그런 '행운'이나 '기쁨'이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듯이 남들에게 
뒤질세라 빠르게 건너가는 그것조차 다른 날과 다를 것이 없었다.
  추위 때문에 어깨를 웅크린 월급쟁이들이 서 있이도 마찬가지였다. 보기만 해도 
이가 시리도록 공연히 추워 보이는, 그렇게 드높은 미니스커트에 부츠를 신은 
아가씨들의 모습이 옆에 보이기도 여전했다.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그 동물이 살아서의 일이다. 이 땅위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다. 새들까지도 초원을 들뛰는 들짐승이나 흙탕물 속에 몸을 
잠그고 사는 악어까지도 그렇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사람만이 죽은 동물을 
사랑한다. 몸에 두르고 다니는 숄, 들고 다니는 핸드백, 품에 넣고까지 다니는 
지갑... 그 모든 것이 죽은 동물이 아니고 무엇이랴. 죽은 동물을 몸에, 그것도 
껍질과 털을 목에 걸치고 자신의 살찐 몸통을 자랑스레 버티고 서 있는 아줌마가 
있기도 어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보고 말았다. 건너편 백화점 벽에 커다랗게 그려진 그 
순록이 이끄는 눈썰매를. 빨간 모자와 썰매에 가득한 선물보따리와 희디 희게 
눈덮인 그 벌판과 눈썰매가 지나온 S자로 휘어진 길까지.
  그랬다. 12월이었다. 12월은 그렇게 나에게 찾아왔다. 아니, 와 있었다. 
기다리지도 바라지도 않았는데, 그 해는, 그 12월은 그렇게 와 있는 거였어.
  그리고 문득 그때 나는 내가 치러내야 했던 그 이별을 떠올렸다.
  살았다면 얼마나 살았다는 것일까마는... 아, 이렇게 늙은이처럼 말하지는 말자. 
그러나 스물 몇 살을 살아내면서 내가 치러내야 했던 가장 아픈 그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그 횡단보도 앞의 오늘은 잊을 수가 없다.
  오늘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늘 떠올려야 했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입대를 앞두고 있었고, 그는 그걸 조금은 그럴 듯하게 말해서 '푸른 
옷을 입으러 간다'고 말했고, 나는 그때 뭐였나?
  '나 꽤 괜찮은 여자로 있을 거다. 토플 같은 건 싸악 통과해 놓고 있으면서 말야!' 
그렇게 말해야 할 여자였던가.
  노인처럼, 이제 더 기다릴 것도 없는 사람처럼, 월급날을 이틀 앞둔 저녁 퇴근길에 
만져지는 지갑처럼, 은퇴한 군인처럼, 아니다, "늙은 군인의 노래" 속의 그 
아저씨처럼 그렇게 그 날을 떠올릴 수가 없는 것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아들 너로다.

  그렇게 나 자신을 타이를 수가 없을 뿐인 거야.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었지만, 난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건너갈 수가 없었다. 
뿔달린 사슴들이 끄는 눈썰매에 선물을 가득 싣고 달려오는 그 빨간모자의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서둘러 차와 차 사이를 건너가고 있었는데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백화점 벽을 메우다시피 내걸린 그림을 쳐다보면서 나는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가 했던 마지막 말.
  --기다리지 않아도 돼.
  --무슨 뜻?
  --네가 힘들어 하는 건 싫어.
  --난 아무것도 힘들어 하지 않아. 힘들여 살려고 할 뿐이지.
  --말놀이가 아냐.
  말놀이. 그랬었지. 우리는 곧잘 서로의 가슴을 숨겨가면서 말놀이를 했었다. 그의 
손을 잡고 싶을 때면 나는 '오른 손'하고 말했었다.
  오른 손, 손님, 님의 침묵, 묵사발, 발발이, 이퇴계, 계집애, 애새끼, 끼있는 여자, 
자유, 유행, 행방불명, 명상음악, 악악악. 그게 뭔데? 악악악이라니. 네가 너무 
꼴보기 싫을 때 내 가슴에서 뛰는 소리.
  너도 차암 힘든 여자야.
  이번엔 누가 이긴 거지?
  그렇게 말하며 나는 그의 손을 잡았었다. 그럴 때는 그 손이 왼손이어도 
좋았었다.
  그는 선물을 싣고 오는 산타할아버지의 그림을 쳐다보면서, 마치 산타에게 '여기 
지금 공사중이니까 잠깐 스톱!' 하듯이 말했었어.
  그때.
  --내가 네 삶에서 힘든 부분이 되는 건 싫다는 이야기야.
  --그건 내 문제야. 힘들어 하든 말든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네가 무슨 
전염병도 아니잖니.
  키 큰 남자는 이럴 때 싫다. 나를 내려다보니까. 그는 나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아냐, 그렇지 않아. 너에게서 내가 힘들어지는 거, 그건 싫어.
  --자유로우라는 뜻?
  나는 아마 그때 그렇게 묻지 말았어야 했을 거다. 자유라니. 그건 누가 누구에게 
건네줄 수도, 마련해 줄 수도 없는 것이라는 걸 나 자신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좋은대로 생각해.
  --무책임.
  --그래. 나는 널 어떤 방법으로도 책임질 수 없는 곳으로 가. 그걸 알아야 해. 
한밤에 내게 전화를 할 수도 없어. 나 지금 도서관 앞에 있는데 갑자기 보고 
싶으니까 나와 그렇게 말할 수도 없어. 네가 아주 이상한 그래서 꼴불견 같은 
모자를 쓰고 다닌다 해도 나는 그걸 볼 수가 없고, 네가 만난 미팅 상대가 차마 
봐줄 수도 없는 목걸이를 하고 있는 사내라는데 화가 나서 네가 커피를 스푼으로 
떠먹고 앉아 있었다고 해도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어.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넌 차멀미를 잘 하니까 버스여행은 삼가라는 거, 너는 벌레에게 잘 
쏘이는 체질이니까 강가에서 하는 엠티 같은 건 되도록 안 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거, 네가 머리를 기르고 싶으면 기를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네 짧은 
머리모양을 좋아한다는 거... 그런 따위 말밖에... 나는 네게 할 것이 없어.
  그때 나는 뭐라고 말했던가.
  --넌 겨우 군대를 가는 거야.
  --겨우라고 말하지 마. 그런 말은 유치원에 가는 아이한테나 하는 소리야.
  --하여튼, 하여튼 그만 좀 엄숙해질 수 없어? 군대는 대한민국 남자는 누구나 
가는 것이고, 최소한 네가 입대해 있는 동안에는 전쟁같은 건 터지지 않을 것이고, 
적어도 대한민국 육군에서는 세끼의 밥과 담배도 주는 건 확실한 거고, 지금과는 
달리 너도 소리를 질러가면서 '충성' 어쩌고 하면서 거수경례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고... 그런 거야. 난 그저 그런 거라고 생각할 뿐이야. 엄숙해지고 싶어도 
난 아무것도 엄숙해지지가 않아. 그걸 모르겠어?
  그때가 겨울이었다. 12월이었다.
  그와 같이 서서, 횡단보도 앞에 서서, 안타깝게 쓰려오는 가슴을, 저 로마시대의 
갑옷처럼 커다랗고 견고한 것이 있으면 입고 싶도록 마음이 춥고 서럽고 
가난해져서, 그렇게 서서 함께 바라보던 그림. 그 백화점 벽에 내걸린 눈썰매, 순록, 
희디 흰 눈벌판, S자로 휘돌아 간 썰매자국, 빨간모자의 아저씨, 선물보따리... 그런 
것들을 보았었어.
  그렇게 말하고, 기다리지 않아도 돼... 라고 중얼거리고 그는 입대를 했다. 
무언가를 가지런하게 정리해 놓듯이 내게 그런 말을 하고 떠났던 남자. 그는 
누구였나.
  겨울밤 12시. 12월의 첫날의 12시를 넘어선다.
  내일은 또 춥고 또 바쁘고 또 지치리라. 그러므로 지금은 자야 하는 시간이다. 
하필 오늘 이 마지막 가는 해의 첫날에 그를 떠올려야 했던 건 무어람. 산타 
할아버지가 눈썰매를 타고 오는 그 그림을 그와 함께 바라보면서, 자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던 남자.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어쨌든 지금 우리는 혼자이다. 아니, 나는 혼자이다.
  그는 지금 어떨까. 그도 혼자일까. 그 사람만이라도 혼자가 아니기를 바란다. 혼자 
있다는 건, 추워도 조금 더 춥고... 서글퍼도 조금 더 서글프고... 그리고 배가 
고파도 조금은 더 배가 고프니까.
  12월 1일에 시작해서 2일까지 넘어오며 쓰는 일기는 도대체 12월 1일의 
일기일까. 2일의 일기일까. 아니면 두 다리 걸치고 더블데이트를 하는 그런 
일기일까.
  이제 잠들기로 하자. 씩씩하게 잠들기로 하자. 이 혼자인 여자야.

    2

  '내 3년이 고여 있는 물이라면, 너는 흘러가는 물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아냐. 우린 둘 다 흐르고 있어야 해'.
  나는 그렇게 대답했고, 그리고 말했었다. 못을 박듯이.
  '그렇지만 물은 어디서든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넌 참 딱한 여자야. 그때 내 안에서 무언가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 자신에게. 
우리가 '형이상학'에 대해서 말하던 그때처럼.
  딱하다는 말에는 가엽다는 뜻도 들어 있다. 그렇다면 나는 가여운 여자였을까. 
아니야. 난 참 어떻게도 손대볼 수 없이, 마음 어딘가가 절룩거리는 여자인가 봐. 
나는 그런 뜻으로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던 거야. 너도 참 딱한 여자로구나 하고.
  그럴 수밖에.
  남자와 함께 강가에 나와, 교양강좌의 그 철학입문을... 형이상학을 이야기하며 
않아 있다니. 그런 여자일 수밖에 없었다니.
  내가 가진 모든 교양을 동원할 때... 라고 말하는 건 부끄럽다. 내 교양이라는 게 
뭔가. 공부라는 게 있지. 예습 복습이라는 걸 해야 하고, 제임스 딘이 나오는 흘러간 
명화 "에덴의 동쪽"이라도 빌어다 만드는 그 공부, 몇 점의 점수를 더 얻기 위해 
벼락치기로 시험공부를 하며 밤을 새우는 과정, 그걸 우리는 공부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미련없이 잊어버린다. 아니, 끔찍해서 더 생각하기조차 
싫어진다.
  생각해 봐.
  세계 금 생산량의 3분의 2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해서, 내가 금은방에 가서 18K 실반지를 사서 끼지 못하겠어? 18K 실반지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그런 게 공부라는 거였어.
  '시장의 균형상태에서는 가격이 OP이고 공급량이나 수요량은 OQ이다. 가격이 
비싼 OP1 상태에서는 수요량보다 공급량이 많은 초과 공급이 발생하며, 반대로 
초과 수요가 발생하는 OP2 상태에서는 초과 수요가 발생하여 가격이 오르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이야.
  이게 공부라는 이름의 공룡이었어. 쓰레기였어. 아니,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하는 것이나 다를 것 없는, 황당무계함이었어. '으으으으' 하는 
비명소리로 가득차서 그것을 외우고 있어야 했던 그 시절.
  유명상품이니, KS제품이니, 정부공인품질이니, Q자 표시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람. 우리는 그냥 가게에 가서 '이런 거 말고, 메이커 있는 거 없어요?' 하고 
물으면 되는데. 그리고 어디에서 정품 세일을 하는지만 알면, 4만 5천원짜리도 1만 
2천원이면 사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인데.
  공부, 공부, 공부. 내가 해야 했던 공부들에는 이런 것도 있었어.
  형용사의 활용형태.
  활용 1. 열심히 즐거워라. 활용 2. 열심히 즐겁자. 활용 3. 열심히 즐거우마.
  첫번째 것은 명령형이며, 두번째 것은 청유형이며, 세번째 것은 약속의 
평서형이다.
  이 형용사의 활용형태를 모른다고 해서 우리가 즐겁게 놀 줄을 모른다는 건가. 
우리는 얼마든지, '크리스마스 잘 보내' 하며 친구에게 즐거워라 할 수 있고, '열심히 
즐겁자' 하면서 친구집 전화번호를 타다닥닥 두드리고는 아주 그윽한 목소리로 '저 
아무갠데요 아무개 있으면 좀 바꿔 주세요' 하고 내숭을 떨 수도 있고, '걱정마 
열심히 즐거울게' 하면서 생크림 케이크를 사들고 원두커피 집에서 만나, 킬킬거리며 
약속장소로 마구마구 독일 병정처럼 걸어갈 수도 있어.
  형용사의 활용 따위, 그런 건 서울시에서 만들어 놓은 그 못생긴 거리의 공병 
넣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도, 정말 하나도 아까울 게 없는 거였어. 그걸 외우고 
있던 내 시절이 아까울 뿐이지.
  어디 그뿐이겠어.
  국어 문법시간은 또 얼마나 웃기지도 않는 시간이었담.
  '영숙이는 어제 떠나 버렸다'.
  두 말은 다 같은 '버렸다'이지만 위의 것은 '섭섭해 하는 마음이 함축'되어 있고, 
밑의 것은 '부담 제거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는 거였어. 그걸 외우라는 
거였어.
  도대체 그걸 누가 모르겠어. 우리가 4교시의 국어 문법시간을 앞두고 도시락을 
까먹는 바람에 내내 졸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프레드릭 포사이트의 추리소설을 책상 
밑에 몰래 넣고 읽고 있었다고 해서, 아무려면 '영숙이를 쓰레기 통에 던져 
버렸다'라고 쓰거나 '휴지는 어제 떠나 버렸다'라고 말하겠어?
  이것이 문법이라는 이름의 '거울아, 거울아...'였어.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렇게 공부라는 걸 살고, 내게 있어 공부는 '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었으니까. 왜냐하면, 먹고 자고 옷 갈아입고 화장실에 들르고 
하는 그것밖에 아무것이, 나는 공부라는 녀석을 데리고 살았으니까. 다른 아무도 
없었으니까.
  공부야 잘 자. 좋은 꿈 꾸며. 공부야 일어났니. 오늘은 늦잠이야, 지각이다 지각. 
그러면서 살았지.
  그런데, 그런 얼마가 지나가고 난 다음, 무언가가 남아 있었던 거야. 밤샘을 하며 
벼락치기로 시험공부를 하고 났는데도, 시험공부야 잘 가. 굿바이. 페어웰. 
쟈이지엔... 하고 인사를 했는데도, 그리고 며칠이 또 얼마가 지나갔는데도 잊혀지지 
않고 남는 그런 찌꺼기 같은 것이 있었던 거야. 그루터기 같은 것들이.
  그렇게 남은 것에, 그래, 형이상학이 있었던 거야.
  형이상(metaphysical).형이상학(metaphysics).
  형이상이란, 우리에게 지각되는 유형을 초월하는 것을 말한다. 무형의 것. 
정신적인 것. 형이상학이란 그것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유추하는 학문이다.
  형이하란,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것. 모든 자연 일반. 물질적인 것을 말한다. 
그러리까 형이하란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고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을 우리는 형이상이라고 한다는 거였어. 왜 그렇게 어렵게 말하는 
거야. '꼴'을 가진 건 형이하이고 '꼴'이 없는 건 형이상이다, 그러면 얼마나 간단해.
  그런데 그때 읽은 책에는 더 소름끼치는 말도 있었지. 로망 롤랑이라는, 베토벤에 
대해서 아주 감동적인 전기를 쓴 사람, "장 크리스토프"라는 왜 그렇게 길어야 
하는지 모를 소설을 쓴 사람. 그 영감님이 이러는 거였어.
  '헝이상학이란 사상은, 대포를 준비하는 것보다도 더 오래 성벽을 지킬 수 있다'.
  쳐들어오는 적을 무찌르기 위해 대포를 준비할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을 하라는 
거야. 미쳤었나 봐. '냉전시대'니 분단의 비극'이니 하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던 
할아버지였나 봐.
  그리고 얼마가 지나서였던가. 형이상학에 대한 참 아름다운 글을 어떤 책에서 
읽었지.

   형이상학...
   너는 나보다 더 아는 게 없다,
   무엇이 웃음이고 눈물이고 한숨인가를
   사랑과 미움과 노여움과 연민이 무엇인가를.
   그러니 형이상학아 잘 가거라 너 없이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너는 스러지리라.

  책에 나와 있는 사진으로는 그렇게도 이상하게 생기신, 심술이 줄줄 흘러넘치는 
얼굴을 한, 영국 철학자 할아버지가, 이토록 아스라지게 귀여운 말씀을 남기셨다니.
  그러나 그 모든 건 잘못이었어.
  책 읽는 여자, 그런 여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거였어. 그건 무엇보다도 사람을 
복잡하게 만들어. 짝짝 차가 빠지는 일요일의 세종로처럼 만드는 게 아니라, 
티코부터 덤프트럭까지 엉키고 뒤덮여서 오도 가도 못하는 토요일 오후의 영등포 
로터리처럼 만들어.
  단순해진다는 것의 아름다움에 눈멀게 만들어.
  어디 그것 뿐이겠어. 찻집 같은 데서 누굴 기다리며 책을 읽으면 그 흐린 조명 
때문에 눈이 나빠지는 건 당연한 거고, 도서관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다는 건 
변비에의 지름길이며, 또 있지. 밤새 책을 읽는다는 건 무엇보다도 피부미용에 
나쁘대. 이건 채영이 말이지만, 돼지고기를 먹는 거보다도 피부에 나쁘대나.
  정확하게, 그 강가에 앉아 있기 두 달 전에, 우리는 함께 도서관을 나와서, 언젠가 
택시 안에서 들은 '경상도로 갈까하이요오 전라도로 갈까하이요오' 하던 그 노래도 
아닌 노래처럼 잠시, 동숭동으로 갈까 신촌으로 갈까 머뭇거리다가, 멀고 먼 
멕시코로 가기로 했던 거야.
  "멕시코". 멀기는 뭐가 멀어. 그건 바로 학교 정문 앞쪽에 있는 지하찻집 
이름이었는데.
  선배의 선배의 선배가 드나들었던 다방. 내가 태어나서 겨우 기저귀를 벗어던질 
때쯤에 생겨났다는 다방. 칠십 몇 몇 학번들까지 여기서 쭈글치고들 않아 있었다나 
뭐. 그래서 전통과 역사가 계단까지 질질 넘쳐흘러서 삐꺼덕거리는 다방. 이름은 왜 
멕시코였는지 모르지. 그 집 주인이 아마 높은 곳을 많이 좋아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을까.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고원지대가 즐비한 나라, 그런 나라 이름을 딴 
찻집이어서였을까. 밖은 벌건 대낮인데도 우리는 산소결핍증에 걸린 아이들처럼.
  해롱거리며 앉아 있었어. 형이상학을 이야기하면서.
  --형이상학이란 말하자면 사람의 허리띠 위를 말하는 거 아닐까.
  이것이 나의 '중대발언'이었고, 두고두고 우리들 사이의 '역사'가 된 대사의 
시작이었어.
  --그러면 형이하학이란, 그러니까 허리띠 밑이라고 생각하니 넌?
  --물론이지, 안 그래?
  --아니지. 형이상학은 목 윗부분. 형이상학은 허리띠 밑부분.
  --그럼 중간은?
  --그건 그냥 육체야. 몸. 영혼의 보조기관. 아마 형이중학쯤 되겠지.
  그 말에 나는 그만 깜박 해버렸어.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해버렸어. 으아악 하면서 그 남자가 좋아져 버렸어.
  책 읽는 여자.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거였어. 책 읽은 여자로 살았기 때문에 
난 결국 그 강가에서 나 자신에게 '너도 참 딱한 여자야' 하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던 거야. 싫은 여자. 내가 생각해도 싫은 여자로 나는 자라 있었던 거야.
  '형이상학은 머리 위이고, 형이하학은 허리띠 밑이다. 그 가운데는 형이중학이다'.
  세상에. 우리는 그런 따위로 철학을 아야기했고, 그리고는 그 말들을 써먹어댔어. 
찻집엘 가든가 술을 마시러 갈 땐, 그가 말했어.
  --형이상학이나 하자.
  그냥 걸어가지 뭐, 하고 말하는 대신 내가 말하곤 했어.
  --우리 형이하학으로 하자.
  점심을 안 먹어서 때늦게 떡볶기 집으로 들어갈 때도, 라면에 달걀 하나 더 
넣어서 '특'으로 사치를 할 때도 우리는 말했어.
  --우리들의 형이중학을 위하여.
  까닭 있게 아랫배가 싸알싸알 아픈 날이면 나는 중얼거렸지.
  --안 되겠어, 오늘은. 형이중학이 여엉 저조해. 그만 집에 들어갈래.
  그들이 우리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그 토요일 강가에 앉아 있을 때... 그 남자가 
말했어.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고, 내게 몸을 돌리지도 않은 채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그가 말하는 거였어.
  --아... 형이상학 하고 싶다.
  철학아, 철학아, 너는 어쩌자고 우리를 그렇게 속을 썩였니. 그가 말한, 
형이상학을 하고 싶다는 건 입맛춤을 말하는 거였어.
  입맛춤. 그럴 것도 없이 그냥 키스라고 말해 버리자.
  그때 우리가 않아 있던 강가, 강가의 저녁, 잔 물결들이 은박지를 구겨놓은 듯이 
반짝이고, 여기 저기서 고기들이 '나 지금 여기 있단다'하고 손짓을 하듯 튀어오르고 
있었다. 검은 색의 안개가 있다면 아마 그런 것일까. 건너편 산, 계곡에서부터 
서서히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저녁무렵이었다. 우리들 앞에는 뭐라고 이름 붙여야 좋을지 모를 풀들이 우리들의 
가슴 높이는 되게 자라 있는 강둑이 있었고 그 둑너머에는 미류나무며 버드나무들이 
정말로 적막하게, 고아처럼, 저 혼자 여기저기 떠돌며 얻어먹으며 큰 그런 아이처럼 
자라서 푸른 잎을 너울거리는 저녁무렵이었다.
  입맛춤. 케이 아이 에스 에스. 키스를 그는 형이상학이라고 말했어.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그리고는,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리고, 내 눈을 바라보면서, 내게 가만히 손을 
뻗으면서 말했던 거야.
  --나야.
  나라니. 내가 언제 자기한테 '넌 누구니? 나하고 입맞추자는 넌 누구니?' 하고 
묻기라도 했담. 그런데 그는 '나야' 하고 말하는 거였어. 어쩌면 내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을까. '넌 누구야?' 하고.
  아아아. 그때 나는 왜 그 말이 그렇게 좋았을까. '나야' 하는 그애의 그 말이.
  훗날 생각해도 그 저녁에 그 강가에서 형이상학을 하자면서, '나야' 하고 말하는 
것보다 더 무슨 말이 있을 수 있었겠어. 그것보다 내가 더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이 
있었겠어. 그랬었다. 그는, 나야... 하고 말했었다. 내 입술을 처음으로 원하면서.
  이제 자야 할 시간이다. 넌 괜찮은 여자야. 그렇게 세번만 말해 주고 잠들기로 
하자. 넌 괜찮은 여자야. 넌 참 괜찮은 여자야. 넌 참 괜찮은 여자라고 난 믿어.
  그렇지만 참 이빨은 닦아야겠지.
  글세. 모르겠다. 괜찮은 여자는 잠자기 전에 이빨 같은 건 안 닦아도 되나 
모르겠다.

    3

  입맞춤. 입맞춤이라는 이름의 형이상학. 이 말이 가지는 모순처럼 그때 나는 아니 
우리는 무언가 잘못되어 있었는지도 몰라. 입맞춤이란 정말 형태가 있는 
형이상학이나까. 이제 와서야 나는 그걸 알고, 또 믿게 되었으니까.
  형이하학을 형이상학이라고 말했던 사람들, 그때의 우리들. 그렇지만 그들은 
젊었고 풋풋했고 조금은 그래 아름다웠다고 해도 좋으리라. 그의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입맞춤을 위해.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입맞춤을.
  태어나서 내가 처음으로 맞는 입맞춤이 그렇게 찾아와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때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준비라니? 지금에 와서도 나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키스를 위해 아무 
준비도 없었다는 것이 그때의 진실이었다면, 무슨 준비가 필요하다는 거니? 하고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은 지금의 진실이다.
  그때의 내가 말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첫 입맞춤을 그렇게 아무 마음의 준비도 
없이 할 수가 있니? 해치워 버릴 수가 있니?
  지금의 내가 말한다. 키스는 입술로 하는 거지 마음으로 하는 게 아냐. 넌 그만큼 
오래 이야기를 나누며 그와 마음을 맞추어 왔었잖아. 뭐가 더 필요했다는 거니? 
그리고 있지, 너 말 잘했어. '해치운다'는 그 말. 첫 키스 같은 거, 그냥 해치우면 
되는 거야. 거기에 무슨 고결한 의미 같은 거 애써 만들어 붙이고 그러지 마. 
그랬어야 해 넌.
  그때의 내가 말한다.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그때의 그 나이에 나는 그럴 수가 
없었어. '첫'이라는 이름이 붙는 모든 것은 아름다워야 하고 순결해야 하고 절대여야 
한다고 나는 믿었어. '아냐. 그렇지도 않을지 몰라.' 수없이 많이 훗날 생각했지만 
그러나 나는 그때의 내가 옳았다고 믿어.
  지금의 내가 말한다. '첫'이 붙는 말. 그래 좋은 말이야. 그렇지만 너 들어 본 적 
있어? 첫눈이라는 말은 있지만 첫비라는 말, 들어 본 적 있냐구? 없지? 그런 거야. 
오랜 만에 아주 드물게 오는 것, 그 희귀성의 가치. 그래서 우리는 첫눈이라는 말을 
써. 그렇지만 비는 아무 때나 와. 저 오고 싶으면 와. 넌 키스가 눈이라고 생각하니 
비라고 생각하니?
  그때의 내가 말한다. 아냐, 난 내 생의 모든 것을 눈물겹게 겪어내고 싶었어.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훗날 떠올리면 어금니를 물며 눈앞에 흐려져야 하게 그렇게 
모든 것을 바쳐서 치러내고 싶었어. 사랑에 있어서만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그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그러나 
그때는 아니었다. 그의 얼굴이, 입술이 다가오고 있었을 때, 그 저녁 강가에 앉아 
있을 때의 나는 그를 사랑이라는 말로는 부르지 않았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이름할 수 없는 그 무엇이기는 했어도.
  '나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눈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그의 눈이 다가와, 짙은 눈썹이 
조금씩 내려앉으며 감겨가는 것을 보면서, 그때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강물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 수박을 먹지 않았어.
  나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웃었다. 소리없이. 그리고는 맨발로 강가를, 그 자갈과 
모래가 섞인 강가를 뛰어나갔다.
  강물이 있는 곳까지 달려왔을 때, 자갈밭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돌아보면서, 마악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얼굴로 그를 돌아보면서, 나는 또 
소리쳤어.
  --하마터면 우리 수박 먹는 걸 잊어버릴 뻔했잖아. 내가 수박 가지고 갈게.
  이곳으로 오면서 사가지고 왔던 수박을 우리는 강물에 잠가놓은 채 그때까지 먹지 
않고 있었다.
  강가로 나가는 입구의 좌판에서 그 수박을 사면서 우리는 또 뭐라고 했던가. 그가 
말했었다.
  --야 너 이거 이렇게 큰 걸 사서... 다 먹고 나서 형이하학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그는 오줌 누는 일을 형이하학이라고 말했다.
  --염려 마. 남자의 형이하학은 입석제지만 여자의 형이하학은 좌석제니까. 훠얼씬 
간단할 수 있어.
  수박을 팔던 아줌마가 우리를 쳐다보며 말했어.
  --아이구, 강가에 무슨 입석제 좌석제가 있어유. 그냥 돗자리 깔고 아무데나 
앉으면 되지.
  그가 나를 만나 처음으로 원했던 그 입맞춤 앞에서 강가로 뛰어나가야만 했던 
나를 이제와 되돌아본다. 그렇다. 그때의 나는 지금 와서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사랑에 있어서만은 모든 것을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치러 갖고 싶었다는 그 생각을 
말이다.
  '첫'이라는 글자. 그것이 붙는 모든 것은 뜻깊다. 그러므로 살아간다는 그 시간의 
물살 안에서도 결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아름다웠던 것은 그것대로, 힘들었던 
것은 그것대로.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첫'이라는 글자가 붙는 모든 것은 아름다울수록 
좋으리라. 첫 입맞춤만이 아니다. 첫 여행. 첫 만남. 첫 남자. 첫 사랑. 첫 이별.
  그것은 모든 것의 아침이니까. 그리고 그것은 무섭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아프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붙는 것은 되돌아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아픔은 없다. 그러나 모든 '첫'에는 아픔이 있다. 되돌아보아야 
하는. 힘든 견딤이 뒤따라야 한다.
  강가에서 물에 잠가놓았던 수박을 들고 돌아오는 나를 그는 무릎을 두 팔로 
껴안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입맞춤을 하고 싶었던 여자, 그 나를.
  '나야' 하고 말할 것도 없이, 그냥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가 와 닿았는데 
그것이 그의 입술이었다. 그렇게 내가 첫 입맞춤을 겪었다면 어땠을까.
  수박을 안고 그에게로 돌아오며 내가 생각한 거란, 어쨌든 나는 아주 딴 여자처럼 
마구마구 큰 소리로 떠들어 대야 하겠다는 거, 그것밖에 없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영화에서 그 여자 마리아는, 첫 키스를 하고 
났을 때 남자에게 말하지. 이런 이야기였어.
  --나는 코가 걸려서 키스를 어떻게 하나 걱정했어요. 코가 방해가 안 돼서 참 
다행이에요.
  그렇지만 도대체 그 키스라는 걸 내가 어떤 얼굴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지 않아. 눈을 감아야 하는 건지, 떠야 하는 건지. 안 그렇니? 그 남자가 어떻게 
하나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어야 한단다, 하고 누구도 말해 준 사람은 없었어. 
그렇다고 해서 입맞춤은 입으로 하는 거니까 그냥 눈은 살포시 감도록 해라, 그렇게 
말해 준 사람 또한 없기는 마찬가지였던 거 아니니. 이제부터는 내 인생이로구나. 
아 난 첫 키스 앞에서, 비로소 나는 혼자이구나. 난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세상의 
한가운데에, 아니 사랑의 한가운데에 내팽개쳐져 있구나. 아, 나는 고아로소이다 
하고 알았던 거야.
  눈만이 아냐. 입술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그것도 나는 몰랐잖니. 그냥 무슨 쓴 
약 먹은 사람처럼 꽈아악 다물고만 있으면 되는 건지. 아니면 있는대로 헤 벌리고 
있어야 하는 건지.
  하긴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물라. 그런 건 그냥 알아서... 또 하나의 자연이 되어 
이루어지는 것을. 아가가 태어나서 젖을 빨고 배고프면 울면서 살아남듯이 그렇게 
이루어져 가는 것을.
  혼자서 가야 하는 길. 그것의 시작이 사랑이라는 거였지.
  안 그래? 종로 어디나 강남의 지하철역 어디쯤에 키스학원이 있어서, 곧 사랑을 
앞둔 사람들을 위한 '무슨 무슨 학원'이 있어서, 그래서 거기서 키스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해 봐.
  그래서 강사 선생이 내 얼굴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아니 그때는 눈을 
이렇게 하시고, 아니지요 아니죠! 그렇게 눈을 꾸욱 감으면 꼭 심청이 아버님 
같으니까... 사알짝 스르르, 더 좀 더어, 쪼오옴 더 분위기 있게, 그렇지요 그렇게 
하시어야지요오' 해 가면서 내 입술을 들입다 강사용 교재로 쓰고 있다고 생각해 봐. 
그러려면 아예 평생 키스 같은 거 안 하고 사는 게 훠얼씬 낫겠다 싶지.
  그렇지 않다구? 그런 학원에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키스는 인생에서 있어야 할 
아주 중요한 거라구?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학원 따위가 아냐. 나도 이제 알아. 무엇이든 그 '첫'이라는 
말이 붙어야 할 땐, 좋은 사람과 함께여야 한다는 것, '좋은 사람과 함께였을 
그때만'이라는 단서가 거기에 붙여야 한다는 걸 나는 알아. 입맞춤도 마찬가지야.
  그렇지만, 사랑은 어쩌고?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게 때맞춰서 생일 선물처럼 
리본달고 케이스에 넣어져서 오는 건 아니잖니. 사랑에 무슨 우편번호라도 있는 줄 
아니?
  사랑이란 건... 그렇지 않아. 어느 봄밤에 백목련이 지며 떨어져 내리듯이, 
잠자리에서 눈 뜬 어느 날 아침 후드득 후드득 창 밖에서 빗소리가 들리듯이 그렇게 
오고, 와 있는 거야.

  어느 빌어먹을 녀석이 다 씹은 껌을 지하철 의자에 살짝 붙여놓고 내린 걸 모르고 
그 남자가 거기 털퍼덕 눌러앉아 버리는 걸 보았다고 해봐. 그걸 본 너는 내내 웃을 
수밖에 없을 테고, 그 남자가 하필이면 같은 역에서 내려 같은 출구로 네 앞에서 
걸어나간다고 해 봐. 뚜벅뚜벅, 씩씩도 하셔라, 건강하게 걸어나간다고 해봐.
  '저어...' 하며 그 남자를 불러 세워서, '저어...껌이...' 하며 손가락 하나를 뻗어서 
그의 엉덩이를 가리키는 정도의 친절은 너도 아마 가지고 있을 거야.
  그때 그 남자가 자기 엉덩이에 짓이겨진 껌을 확인하면서, '짜아식들, 내가 
'프라이드'인 줄 아나봐, 탱크인 줄은 모르고'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류가방으로 
뒤를 가리며 걸어갔다고 해 봐.
  매일 아침, 매일 저녁. 너는 지하철을 타고, 내리며, 그 남자를 떠올릴 거야. 
그리고 혼자 중얼거리겠지. 그 남자 진짜 탱크일까? 내가 보기엔 그저 봉고차 
같던데.
  그런 어느 날, 지하철 계단 앞에서 그가 말해. 화안하게 웃으며. '그때는 
고마웠습니다. 어제는 맨앞 칸에서 내리시더군요. 그 전날은 두 번째 칸이셨고.'
  그렇게 시작할 수도 있는 게 사랑이라는 거야.
  요즘 우표는 침을 발라도, 어떻게 된 것이 잘 붙지 않는 게 있어. 뭐 옛날에는 
더했겠지. 그래서 우체국마다 풀을 준비해 두지.
  생각해 봐.
  어느 날 우체국에서 네가 산 우표가 아무리 침을 발라도 들어붙지를 않아. 그런데 
우체국에서 준비해 놓은 풀은 동이 나 있어. 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다시 한 번 우표 뒤에 침칠을 해 대. 그래도 역시 안 붙기는 
마찬가지야. 그때 혓바닥에 우표를 붙이고 서 있는 네게, 옆에 있던 남자가 말해.
  '그건 절 주시고 제 우표를 쓰시지요.'
  넌 우표가 붙어 있는 혓바닥을 내민 채 그를 쳐다봐. 남자는 다시 한 번 네 
혓바닥을 가리키면서 말해.
  '그 우표는 절 주시고, 제 꺼를 쓰세요. 직원이 풀을 가지러 갔는데, 아직인데요.'
  뭐 이딴 남자가 다 있어! 하며 너는 팍 돌아서야 하는데... 어쩐지 그게 안 돼. 
너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이 혓바닥 위의 우표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집어서 그에게 주고, 그 남자가 내미는 우표를 받아서 말없이 네 
편지 위에 붙여. 그리곤 돌아서서 고맙다는 뜻으로 그에게 고개를 숙여. 조금.
  고개를 드는 네게 그가 맨 나염 무늬의 넥타이와 희디흰 와이셔츠가 아주 
넓디넓게 느껴져. 잡목들이 가득한 언덕 뒤편으로 펼쳐진 희디흰 눈밭처럼.
  그가 말해.
  '지금 보내신 편지, 거기가 제 고향입니다. 죄송합니다. 우편번호가 눈에 익은 
것이라 저도 모르게 보아버렸습니다.'
  있지, 사랑이라는 거. 이렇게 올 수도 있는 거야.
  저 옛날의 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 다만 그때는 몰랐던 거지.
  그건 혼자 배워나가야 하는 거였어. 아니 배우지 않아도 되는... 봄, 여름, 
가을처럼 그렇게 다가와 있는 그런 거였어. 씹고 버린 껌이 붙어 있는 줄도 모르고 
한 남자가 지하철에서 그것을 깔고 앉으면서도 오고, 한 여자가 우표를 붙이기 위해 
혀를 빼물고 있는 순간에도 오는 것, 그게 사랑이라는 걸 다만 몰랐을 뿐이야.
  내가 그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

  둘다 입으로 하기는, 그래 마찬가지로구나. 수박을 어석어석 씹든, 입맞춤을 하든. 
강물에 잠가놓았던 수박을 들고 돌아오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어. 그때 난 
정말이지 나에게 다가와 있던 첫 입맞춤이 두려웠어.
  나는 그애 옆으로 와서 수박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시원할 거야. 잘 익은 거 같고...
  과도를 찾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수박을 먹자고 이 강가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 둘 다 오전 강의밖에 없던 그날, 약속이나 하듯 두 강의가 다 
휴강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어딜 갈까 뭘 할까 떠들어대다가 서울시가 관리하는 
지하철을 탔고 그걸 또 철도청이 관리하는 다른 기차로 갈아탔을 뿐이었다.
  방학 때 우르르 시골집으로 몰려온 친척 아이들을 맞은 맏며느리처럼 좌악좌악 
수박을 쪼개서 놓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수 있는 쟁반도 과도도 우리는 
없었다. 둥그런 수박을, 첫 입맞춤으로부터 내게 도망갈 기회를 만든 그 수박을 나는 
낭패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칼이 없잖아. 이걸 어떻게 쪼개니.
  --간단해.
  --어떻게?
  그가 일어섰다. 그리곤 수박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때 그의 얼굴은 화난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 얼굴을 보며 도대체 나는 왜 뭔가 죄스러움을 
느껴야 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수박을 번쩍 들어올렸고, 승리의 투사처럼 아니 월드컵 축구에서 역전골을 
넣은 선수가 골문 안에 처박힌 그 볼에 키스를 하기 위해 감격에 겨워 집어올리듯이 
머리 위까지 들어올렸고, 그리곤 우리가 앉아 있던 자갈밭 가운데 가장 큰 돌 위에 
내리쳤다.
  박살이 난 수박이 시뻘겋게 자갈들 위에 널리고, 그는 하나를 집어서 내게 
내밀었다. 더럽게 잘 익은 수박이었어.
  --먹어.
  수박 쪼가리를 받으며 내가 말했다.
  --폭력. 잔혹.
  --아냐. 이렇게 아는 거야. 칼로 자른 거보다 이게 훠얼씬 맛 있어.
  그가 수박 쪼가리를 하나 집어들어 수왁수왁 먹어댔다.
  --뭐든 죽일 때는 고통없이 한순간에 죽여야 하는 거야. 서부영화에서도 다리가 
부러진 말을 죽일 때는 자기의 애마지만 총으로 쏘아 죽이잖아.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야. 그래서 영국에는 소를 죽일 때는 8초 안에 죽여야만 하는 법률이 있나 뭐 
그래.
  --수박은 동물이 아냐.
  중얼거리면서 나는 박살난 수박 쪼가리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수박이 
아니었다. 박살난 우리들 첫 입맞춤의 쪼가리들이었다.
  뭐, 슬픈 건 없었어. 다만 그렇게 해서 입맞춤 그 바로 앞에까지 갔던 우리들의 
눅눅했던 분위기만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니 박살이 나고, 우린 그냥 형이상학이나 
찾던 애들로 돌아와 있었던 거지.
  어석어석. 수왁수왁. 소리를 내면서 우리는 수박을 먹었다.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수박을 먹었다.
  --내가 어렸을 땐데, 수박을 먹다가 말이지, 씨까지 먹고 나서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니.
  --무슨 걱정을 해?
  --씨를 먹었으니까.
  --그걸 왜 걱정을 해?
  --내 뱃속에서 수박씨가 자라서 넝쿨이 자라고 수박이 열릴까 봐. 킬킬킬. 그가 
웃었다.
  --넌 동화를 너무 많이 읽었어.
  난 이미 그때부터 책읽는 여자였던가 보다.
  --넌 그럼 그런 걱정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거니? 모든 씨앗은 자라게 
되어 있는데, 수박씨를 먹었는데, 걱정이 안 된다는 거니?
  유치원도 가기 전인데.
  --전연.
  --그럼 넌 그 나이에 뭘 걱정했니?
  --지붕.
  --지붕?
  --그때 우리 집안이 망했거든. 망했다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머니가 무슨 
사업을 벌였다가 다 날렸나 그래. 제일 먼저 나타난 현상이 아버지도 어머니도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거였어. 두 번째가 이사였지. 우리가 살던 집의 부엌만한 방 
하나로 이사를 했으니까. 식구가 누우면 한방 가득 차. 그런데 그 방이 좀 이상했어. 
전에 무슨 건물이었던 걸 고쳐서 닥지닥지 방을 꾸며서 세를 주었던 집인데, 우리 
방이 전에 현관이었는지 창고였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지붕에 이만한 네모가 뚫려 
있고 거기가 유리로 되어 있어. 굴뚝자리였는지도 모르지. 하여튼 누우면 하늘이 
보여. 먼지가 끼어서 보통 땐 별은 안 보이고, 난 그냥 우는 거야. 저 유리가 깨져서 
비가 쏘다지면 우린 이제 어디로 가나.
  그가 수박씨를 튀 하며 뱉아냈다. 멀리. 나는 그를 홀깃 보았다. 그가 또 킬킬킬 
하고 웃었다.
  --난 그래서 지금도 소나기가 무서워.
  그가 또 수박씨를 뱉아냈다. 나는 그를 또 홀깃 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그가 또 
수박씨를 뱉아냈다. 멀리. 나도 수박씨를 뱉아보았다. 아하 그거였구나.
  내가 놀라서 소리쳤다.
  --너,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수박씨를 그렇게 멀리 뱉니!
  --수박만 먹었다 하면 형하고 나하고 시합을 했거든. 누가 수박씨를 더 멀리 
뱉나. 넌 형한테 뭐든지 졌는데 이 수박씨 뱉는 거 하나만은 언제나 이겼지.
  그가 이번에는 더 멀리 수박씨를 뱉아냈다. 수박씨는 우리들의 이루어질 뻔했던 
첫 입맞춤인 듯이, 저물어가는 강가로 멀리멀리 날아간다.

  수박씨 같은 이야기들. 우리가 그 어두워 오는 강가에서 나눈 이야기들도 그랬다. 
수박씨 같았다. 삼켜버린다 해도 뱃속에서 수박 같은 건 결코 열리지 않는, 그런 
이야기.
  저물어 가는 강위에 어둑하게 산 그림자가 어리고, 그 산 그림자를 깨며 나룻배가 
건너가고 있었다. 강건너 어느 마을 연못으로 가는 낚시꾼들인 것 같았다.
  그가 수박씨를 튀 뱉아냈다. 멀리.
  --저 뱃사공을 외계인이 본다면 얼마나 우스울까.
  나는 수박을 베어문 채 나룻배와 배 위에 타고 강을 건너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건너갔다가 왔다가, 왔다가 또 건너갔다가 종일 그러다가 저녁이면 집에 
들어가서 잠이 들고... 아침이 오면 또 나와서 강을 건너갔다가 왔다가, 왔다가 
갔다가. 자아식 저 녀석은 왜 거기서 뺑뺑 돌고만 있지? 외계인은 뱃사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할 거야.
  나는 조금 가슴이 답답해졌다. 학교에서 집. 집에서 학교. 나는 뭐가 다른 게 
있담. 회사에서 집, 집에서 회사. 아버지는 뭐 다를 게 있겠어.
  --개미들 같겠지, 그가 보면.
  --개미는 물어 나르는 거라도 있지. 저 뱃사공은 뭐야. 내렸다 싣고, 실었다 
내리고, 사람도 실었다 내리고 짐도 내렸다가 또 싣고. 저 사람이 하는 짓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거 아냐. 왜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지.
  --네가 좀 설명해 주지 그러니, 외계인한테.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럴까.
  그가 또 수박씨를 멀리 뱉아냈다. 그리고 말했다.
  --야, 외계인아. 저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란다.
  아아. 나는 가만히 그리고 조그맣게 소리쳤다.
  --절망하고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외계인이 강을 오가는 저 뱃사공의 반복을 이해할 수 없듯이 
그의 말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딘가에서 외계인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면 
그 앞에서 우리가 서툴 수밖에 없을 첫 입맞춤을 하기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되었다.
  뱃사공을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이 어떻게 우리들의 입맞춤을 이해하겠어. 쟤들 
지금 뭐하는 거야. 손도 있고 뭐도 있는데 하필이면... 입으로 입을 틀어막다니. 왜 
서로를 질식시키려고 하지. 뭐 그럴지도 모르잖아.
  후후. 웃으면서 나도 수박씨를 뱉아냈다. 내가 뱉은 씨는 겨우 발끝에 가서 
떨어졌다.
  돌아오는 길은 어둠이 가득했다. 우리는 버스를 탔다. 저녁에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뒤쪽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의자 서너 
줄 앞쪽에 겨우 몇 사람 앉아 있는 승객들을 바라보면서, 그 텅 빈 버스가 어쩐지 
마음에 들어서 나는 킬킬거렸다.
  --사람들이 있잖아, 밤에는 서울로 돌아가지 않나 봐.
  --아냐.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봐. 낮에는 가득가득 찼던 버스인데 지금은 사람들이 없잖아.
  --아냐, 아냐. 이 버스노선이 손님들에게 승차거부를 당하고 있는지도 몰라.
  --넌 차암 사회적이다.
  --그러는 넌? 사람들은 밤에 서울로 돌아가지 않나 봐 어쩌구 그러는 너는.
  --난 어쩌구 그러지는 않았다. 그냥, 사람들은 밤에는 서울로 돌아가지 않는가 
봐. 그렇게만 말했다. 그럼? 너처럼 그렇게 노사분규니 하면서 사회를 갈등구조로만 
이해해야 하니?
  --그럼 너처럼 이 세상을 노랫말처럼 보아야 하니. 네가 하는 말은 꼭 무슨 
노랫말 같애. 히트도 못 칠 노랫말 같애.
  --그래 난 노랫말이야. 아리깔깔이야. 세상을 그렇게밖에 못 봐.
  --그래 난 사회파다. 세상이 그렇게만 보인다.
  --자기가 파는 무슨 파람. 그냥 삐뚤어지게 세상을 볼 뿐이지.
  --너 지금 싸우자는 거야, 나랑?
  --아아니. 다만 우리 사이에 분규가 생겨서 갈등구조로 들어가 있을 뿐이지 뭐.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버스는 커다란 덤프트럭을 추월하기 위하여 
차선을 바꿨다. 차가 기울며 그의 몸이 나에게로 쏠려왔다. 갑자기 그의 어깨가 
두껍게 느껴졌다. 차가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앞좌석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으며 그에게 몸이 닿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차는 다시 승용차의 행렬을 옆으로 하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내가 
물었다.
  --너 지금 뭐했어?
  --트림.
  --우와. 그런 실례를 남발해도 내가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넌?
  --아니. 절대 그렇게 생각안해. 단 수박을 너무 많이 먹었을 뿐야.
  --그건 수박도 아니었어.
  --그럼?
  --깨진 수박이었지.
  깨진 입맞춤.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한 남자가 좋아질 때, 여자는 그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는 몰랐다. 나는 
네가 좋아져 버렸다. 그러므로 내 손끝 발끝에서부터 30cm까지의 모든 것을 
허락한다. 그렇게, 연립주택 지으면서 "공사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현장소장백" 
하고 써붙이듯 피킷을 들고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그냥 말했다.
  --느네 집에서는 맨날 수박을 먹을 때 그렇게 박살을 내서 먹니? 아버지는 
메다꼰고, 엄마도 냅다 던지고, 형은... 수박씨 잘 못 뱉는다는 그 형은 둘레메치고, 
그렇게 말이야.
  --그런 집안이 어딨어. 우리 식구가 뭐 히로뽕 중독자들인 줄 아니.
  --그렇지만 그렇게 수박을 박살을 내서 먹는 법이 어디 있니. 그때 너는 꼭 
식인종 같았어.
  --그건 맞아.
  --뭐가?
  --내가 식인종 같았다는 거.
  --무슨 소리야?
  --널 잡아먹으려고 했거든.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시외버스 좌석은 좁았다. 그의 얼굴은 바로 내 앞에 
있었다. 나를 잡아먹으려 했다는 남자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깜박였다.
  --우리 아빠 취미가 뭔지 알아? 사냥이야.
  --으이크.
  --날 잡아먹었다 하면 아빠는 곰 사냥하는 장총을 가지고 가서 널 쏘아버릴 걸.
  --우리 아버지 직업이 뭔지 알지?
  --외과의사라면서.
  --외과의사가 아무렴 사랑하는 아들이 총맞아 죽어가는데 그냥 놔두겠어? 잘 
수술해서 살려 놓을 거야.
  우린 뭐 이래. 식인종에게 잡혀 먹혀도 걱정없는 아버지를 한 덩어리씩 집안에 
가지고 있다니.
  --결국 나만 손해구나.
  내가 한숨을 쉬었다.
  --잡아 먹히는 건 나 뿐이잖아. 우리 아빠는 널 사냥을 하니까 취미 생활을 
즐기는 거고, 느네 아버지는 외과수술을 할 테니 돈 버는 거고, 넌 살아나니까 
한강에 배 지나가기로 본전은 건지는 거고... 난 뭐야. 난.
  버스 앞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나는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가 
살며시 팔을 둘러 내 어깨를 감쌌다. 나는 몸을 더 숙여 그에게 파고들 듯이 
기댔다. 숨을 할딱거리듯이 내 안에서 말하고 있었다. 난 네가 좋아.
  그가 속삭였다.
  --너 이번에는 진짜 뱃속에서 수박이 열릴지도 몰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 뱃속에서 수박이 아니라 밤송이가 열려도 
좋아. 그게 떨어져서 내 뱃속을 따갑게 한대도 좋아. 못 생긴 모과가 돌덩이처럼 내 
뱃속에 떨어진대도 좋아. 눈을 감은 채 나는 그의 어깨에 더 깊이 얼굴을 묻었다.
  달려가고 있는 버스의 엔진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처럼 들려왔다. 밖은 밤이다. 
우리는 돌아가고 있다. 집앞 골목까지 나를 바래다 주고 그는 돌아가리라. 
언제나처럼 내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다가, 불빛이 원뿔형으로 
비추는 그 외등 아래 서 있다가, 대문 앞으로 다가가며 내가 돌아설 때면 번쩍 손을 
들어올리고 나서, 그는 돌아가리라.
  --수박이 열릴지도 모른다니까.
  --그건 유치원 들어가기 전의 얘기야. 수박씨를 삼켰지만 아직 한번도 내 
뱃속에서 수박이 자란 적은 없어.
  --그때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수박이 자라지 못하지. 이젠 얼마든지 수박이 자랄 
수 있는 여자가 되었거든.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눈을 번쩍 떴다. 넌 여전히 형이상학을 생각하고 있는 거니. 수박과 
함께 박살이 난 그 입맞춤을 생각하고 있는 거니. 너를 식인종이 되고 싶게 만든 그 
순간을 떠올리고 있는 거니.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언제든 내 입술을 가져도 돼.
  버스의 그 엔진 소리에, 그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는 나를 
안고 있던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나는 갑자기 한뻠쯤 키가 커져 버린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입맞춤과 수박씨는 어딘가 닮은 데가 있었다. 수박씨를 삼킨다고 
해도 수박이 뱃속에서 자라지 않듯이, 남자와 입을 맞춘다고 해도 아이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때의 나도 그쯤은 알았다.
  --아니. 네가 원하지 않을 땐 하지 않을 거야. 둘이 함께가 아니면 안 할 거야.
  아. 분위기 영점. 학생은 이번 학기 재수강입니다. 내가 눈을 뜨며 물었다.
  --뭘? 뭘 안 해.
  --키스.
  하느님. 이 남자를 용서하소서.
  --너 진짜 식인종 같다. 집에 가거든 엄마한테 물어 봐. 엄마 혹시 식인종하고 
바람 피운 적 없어? 하고.

    4

  첫눈이 내리고 나자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이 이어진다.
  겨울은 추워야 하는데 춥지가 않고, 겨울은 눈이 내려야 하는데 어제는 오락가락 
빗발이 뿌렸다. 그렇지만 이것도 겨울이야 하고 혼자 중얼거려 본다.
  여자가 여자답지 않다거나 하는 말을 싫어하듯이 그래서 겨울을 보고 겨울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가 싫다. 존재하는 것, 그것은 그것이 거기 있는 것으로 이미 
완성되는 게 아닐까. 여자가 여자답지 않다거나, 너 답게 살라거나, 그 나이에 그게 
뭐니? 하는 말들이 가지는 잘못이 거기에 있다. 더 무엇을 어쩌란 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렇게 살면 되는 게 아닌가. 때로는 빗발도 뿌리면서 
때로는 봄날처럼 푸근해져서 그렇게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왜 겨울이 
아니겠어.
  사랑의 통과의례. 그때 그렇게 생각했었다. 사랑에도 통과의례가 있다면 이것이 
그 시작이라고.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늙고 그래서 죽는... 어느 것 하나 
비켜갈 수 없는 우리의 삶에서 그 한 고비 한 고비를 통과의례라고 한다면 사랑에도 
그와 같은 통과의례는 있다.
  만남이 이어지는 어느 날 둘이 손을 잡았다고 하자. 더듬어 찾아 쥐는 서로의 손, 
이것은 사랑의 첫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
  손이란 뭘까. 사람이 가진 것 가운데 이처럼 아름답고 이토록 의미깊고 그리고 
굳건하게 삶을 지탱해 가는 것이 또 있을까. 우리의 몸 가운데 이것만큼 혹사당하는 
것이 또 있을까.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중얼거린다. 손아 미안하다.
  목욕을 끝낸 어느 저녁, 천천히 손에 크림을 바르며 앉아 있을 때가 있다. 멍청한 
내 얼굴이 거울에 비친다(이 멍청함을 나는 때때로 '한가하게' 라고 또는 '생각없이' 
라고 미화시키지만, 그냥 멍한 거지 뭐. 멍한 거).
  생각없이, 한가하게. 즉 멍청하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사람의 몸 가운데 잠 잘 때만이 쉴 수 있는 게 두 가지가 있다. 손과 눈이다. 이 
두 개는 한순간도 멈추어 있지 않다. 그 어떤 기쁨도 노여움도 미움도 억울함도... 
살아 있는 순간 순간의 모든 것을 가장 먼저 나타내는 것이 손이며 눈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눈에는 즐거움도 있다. 환희도 있다. 오래 기다렸던 사람을 
만나는 설레임, 가슴 저미는 듯해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풍경을 만날 
때의 기쁨, 영화 "뽕네프의 연인들"을 볼 수 있는 찬란... 그것은 눈이 가질 수 있는 
은혜로움이다. 그러나 손에는 무엇이 있는가. 끝없는 노동 그리고 희생. 손의 모든 
것은 남을 위한 것 뿐, 자신의 몫이 없다.
  사랑의 통과의례. 그것을 처음으로 겪는 건 무엇일까. 그래 그건 손이었어. 하고 
나는 그때 생각한다.
  이 손이 처음으로 가져보는 기쁨이 무엇일까. 첫사랑. 그 첫 남자.
  그의 손을 처음으로 잡을 때의 설레임만은 손이 가지는 기쁨이다. 겨우 그것이 
손의 몫이었다. 어지러운 손금을 따라 촉촉히 땀이 배어나는 것 같은 그 순간의 
숨막히는 듯한 긴장을, 그렇게 확인하는 사랑의 시작을 손이 처러낸다. 손을 잡는 
것으로 우리들의 사랑의 통과의례를 시작한다. 그리고 서로를 껴안는다. 더 깊이 더 
가까이... 그를 나에게 있게 하고 싶어서.
  두 번째의 통과의례.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만들어내면서까지 그와 내가 조금은 
힘들게 피해 온 그 입술. 강가에서 깨어져 버린 수박과 함께 여름이 가고 가을이 
마악 다가와 있었다.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 저녁, 야간개장을 한 유원지가 문을 닫고 
있었다. 아악아악 소리를 질러가며 탔던 청용열차도, 내가 7개나 맞추는 사이 그는 
3개를 겨우 맞췄던 공기총 사격장도 캄캄하게 불이 꺼지고 있었다. 텅 비어가는 
유원지를 빠져나오다가 우리는 어린이 놀이터에서 그네를 탔다.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올드랭 사인'이 지글거리는 잡음과 함께 스피커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네를 내려서는 나에게 그가 다가섰다.
  그가 말했다.
  --이상했어. 어제 내가 흰 스웨터를 입었잖아. 집에 돌아가 옷을 벗는데 가슴에 
머리칼이 하나 붙어 있는 거야. 긴 네 머리칼.
  나는 천천히 그네를 멈췄다.
  --이상했어. 이제 겨우 네 것이 하나 나에게 와 있구나. 그런 생각도 들고... 왜 
하필 머리칼이람 하는 생각도 들고. 머리칼이란 잘라도 피가 흐르지 않는, 뭐랄까, 
우리 몸 가운데 유일하게 잘라버리면서 사는 그런 거잖아.
  그때 내가 말했다.
  --그만해.
  나는 그의 가슴 앞으로 다가서며 고개를 들었다. 가을 들판의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며 일제히 한쪽으로 고개를 숙이듯이 내 가슴 안에서 무엇인가가 그렇게 
휘몰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움직임도 없이, 뜨겁게, 소리없이.
  아주 작게 내가 말했다.
  --알아. 무슨 얘긴지.
  그리고 나는 내려오는 그의 입술을 받았다.
  어린이 놀이터 뒤편에서 바람에 불린 쇠그네가 흔들리며 댕강댕강 울렸다.

    5

  왜 사람들은 준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래. 세상에는 여자를 먹었다고 말하는 녀석들도 있으니까.
  그것은 다만 언어가 아닐까. 또다른 의미의 말들.
  사랑해. 만나. 기다릴께. 그렇게 말하듯이 우리는 손을 잡았다.
  말하는 것만으로 부족해서 손을 잡았고, 손을 잡는 것만으로 아쉬워서 서로를 
껴안았다. 간절하고 또 간절해서, 그 무엇이든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그에게 녹아 
흘러 하나가 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그의 입술을 받았었다. 그것은 나에게 다만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따금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그렇지 않을까.
  훗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나는 안다. 그리고 말할 수 있다. 그것 또한 
언어였다고. 말이었다고.
  아침에 일어나, 잘 잤어? 하고 인사를 나누듯이, 서로 만나 손을 잡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사랑하는데.
  너무 너무 오랜만이다 하며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는 것과 입술을 나누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서로 사랑하는데.
  세상에는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민족이 있고, 삼지창과 칼을 들고 설쳐대는 
민족이 있고, 손가락을 쪽쪽 빨아가면서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민족도 있다. 
그렇게 있다. 그렇게 존재한다. 그 많은 인종 그 많은 종교가 있는 것과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손으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눈에는 젓가락을 쓰는 사람들처럼 
우스꽝스러운 종족도 없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놀고 있네' 싶고, 젓가락질을 
하는 사람들을 보자면 '쟤들이 지금 길죽한 막대기를 들고 장난을 하는 거야 뭐야' 
싶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눈에는 손가락으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는 종족들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사랑한 다는 것, 누군가와 함께 
잔다는 것이 이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 민족으로 태어나, 그 풍습 안에서 자랐고, 그 윤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내 스무살의 사랑은 그렇게 힘들었던 거 아닐까.
  기쁨으로, 기다림으로... 사랑해 하고 말하는 그 어떤 말보다도 더 깊고 절실한 
표현으로 그리고 그 위에 얹히는 믿음과 약속으로 그렇게 한 남자의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믿었었다. 나만이 아니다. 그 남자도 그래야 
한다고 또한 믿었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몸이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세상의 남자와 어른들은 그렇지 않았어. 남자와 어른이라고 말하지 
말자. 나 아닌 남들이라고 말하자. 세상이라고 말하자. 남들이나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고. 누군가가 거기에 옷을 입혀 놓은 것이다. 윤리라는 이름으로, 도덕이라는 
기준으로, 이기와 탐욕으로, 그리고 자기 만족을 위해서.
  그것이 진실이고 아름다움이고 약속이라면 그것을 위한 또하나의 말이라면, 왜 
젊은 두 영혼이 육체를 열고 만나서는 안 되는 것인가. 거기에 왜 어째서, 돈 벌고, 
직장 들어가고, 전셋집 얻고, 혼수 장만하고, 예식장 예약하고, 사진 찍고, 함 져서 
보내고, 결혼이라는 그 절차에 지치고 지쳐서, 찔찔 짜다가, 까무라치게 신경이 
곤두서다가, 다 허망해서 울다가, '안 해, 너 같은 놈하고 절대 결혼 안 해' 소리를 
두어번은 질러대다가, 식 올리고, 껍질 벗어던지듯 부케 집어 던지고, 공항에 나가서 
'아빠 고마워요'하고 이제는 친정이 되어버린 그 집에 전화하고... 그리고 나서야 한 
남자와 여자가 함께 밤을 보내야 한다는, 대한민국 한 바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결혼이라는 그 절차가 필요한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그 예식장 바닥 어디에 
축복이 있는가.
  맞선은 또 뭐람. 무슨 노예시장에서 적당한 품질의 노예를 고르는 건가. 
가전제품을 사는 건가. 물건에는 그래도 사용설명서라도 있다.
  그것이 정말로 사랑이라는 것과 도대체 무슨 인연이 있다는 건가. 사랑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느껴지는 그 절차들이란 사랑이 아니라 생활일 뿐이다. 둘이 
살아가면서, 걸레도 필요하고 바퀴벌레 잡는 끈적이도 필요하고 드라이버도 필요한 
그 생활.
  그래도 힘들었다. 그와 함께 잔다는 것은, 그때의 나에게 있어, 기쁨이나 기다림이 
아니라 무서움이었고 고통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이따금 생각했다. 아 버리고 싶다. 
이 옷을 어떻게든 벗고 싶다. 처녀성이란 건 무엇인가. 누가 만들어 세운 철책인가.
  이것이 사랑인지도 모른다. 아마 나는 지금 사랑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되면서, 나는 참 많이 물었었다. 자신에게.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가. 사랑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사랑이라는 것은 뭔가.
  한 남자와 같은 것을 보고 웃고, 울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서로 닮은 기쁨과 
슬픔을 가지는 것일까. 그것이 사랑일까.
  한 남자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곤 한다. 서로 공유하는 생각의 폭이 넓다는 것, 
이것이 사랑인가. 서로가 같은 것을 좋아하는 거, 이게 사랑인가.
  만나면 그 만난다는 것만으로, 그와 함께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즐겁다. 함께 있어 
즐거운 것, 이것이 사랑인가.
  저녁에 헤어질 때면 언제나 무엇인가 미진하고 아쉽고 더 오래 함께 있고 싶고 
다시 만날 시간들이, 그 날이 기다려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사랑인가.
  사랑. 이 추상명사는 무엇인가.
  그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다. 무엇을 해도 그와 함께 하고 싶다. 혼자 맛 있는 
음식을 먹으며 그와 함께 왔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그에게도 이걸 들려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랑인가.
  전화가 그토록 위대해 보이기 시작한 건 그 전화를 통해 그의 목소리가 
들리면서부터였다. 편지를 전해 주는 집배원 아저씨가 겨우 하루에 한 번 우리집 
골목을 지나간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가 내게 편지를 보내면서부터였다.
  비오는 날은 또 어쩌랴. 바람 부는 날도 마찬가지다.
  만나기로 약속한 날에는 왜 그렇게도 자주 때마춰서 비가 내리는지. 전에는 
그랬다. 비가 오면 그냥 '비가 오나 보다' 했었다. 그런데 그 남자를 알고부터 
그것이 달라졌다. 비나 바람, 언제나 있었기에 늘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다. 그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것, 전에 없던 것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람에도 비에도 싱싱하게 물이 오르기 시작했었다. 내 바람, 내 비. 그렇게 
그것은 나의 것이 되었다. 그것이 사랑이었나.
  그와 함께 탄 지하철이 더러울 땐 어쩐지 그것이 다 내 탓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쩐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내가 좋아하는 창이 있어서 혼자서 드나들곤 하던 
찻집도 그렇다. 그 찻집을 그와 함께 갔었다. 그런데 그렇게 무심히 지나쳤던 그 
찻집의 아르바이트 여자애가, 이제는 서로 눈인사를 주고 받는 그애가, 잘 빠진 
몸매에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었고, 자주빛 앞치마를 두른 그 여자애의 뒷모습에 그 
남자가 길게 눈길을 주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두번 다시 그 찻집엘 가지 않았다. 
물론 혼자서도 가지 않았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건가.

    6

  그리고 그날이 왔다.
  오후였다. 기차를 탈까. 버스를 탈까.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물었다. 내가 말했다.
  --기차 타자.
  그렇게 해서 우리는 기차를 탔고, 우리들의 형이상학 그 입맞춤이 깨져버리던 
강가를 지나쳤고, 헐벗은 겨울 산이 조금씩 어두워져 가는 모습을 내다보며 앉아 
있었다.
  --우리 그만 내릴까?
  내가 물었고 그가 대답했다.
  --그러자.
  둘 다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역 앞을 빠져나오니 '주물럭'이라고 크게 써붙인 
서울식당 간판이 보였고, 그 못 생긴 글씨가 세상을 전부 주물러 버리고 싶도록 
싫게 만들었고, 거기서는 설렁탕을 팔고 있었고, 군청 앞을 지나치자 시외버스 
정류장이 나타났다.
  우리는 이층 다방엘 올라가 현철, 설운도의 흘러간 유행가와 조용필의 하나도 
즐겁지 않은 노래를 들었고, 밖으로 나와 저녁을 먹었고, 다시 들어간 다방에서 
엠비씨에서 하는 목요드라마를 틀기 시작했을 때 밖으로 나왔다.
  그가 말했다.
  --고아들은 맨날 이렇겠지.
  내가 그때 놀란 것은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갈 곳이 없는 
자리의 낯선 시간들. 나는 우리가 고아 같다고 생각했었고, 우리야 어쩌다가 
이렇지만 고아들은 맨날 이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오늘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전화를 한 것은 
11시가 가까워질 때였다.
  엄마가 받았다.
  --엄마, 여기 윤정이네 삼촌네 별장인데...
  이 세상의 별장이라는 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윤정이에게 삼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 밤중에 엄마가 윤정이에게 삼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러 동사무소엘 가서 
주민등록 담당 공무원을 찾을 리도 없었으니까.
  윤정이네 집도, 삼촌네 집도 아닌, 거기에서 또 별장이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내 생애 최초의 외박. 내 발로 걸어서 집에 돌아가지 않는 그 첫밤을 나는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엄마, 근데 있지...
  --있긴 뭐가 있어.
  --여기 윤정이네 삼촌네 별장이라니까.
  --그래서?
  --나 오늘 집에 못 가.
  --그래서?
  --그냥 그렇다구.
  --얘 좀 봐.
  잠시 후 엄마가 말했다.
  --아빠 바꿔줄 께.
  먼 목소리로 엄마가 아빠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얘 오늘 나가 잔대요. 당신이 
어떻게 해 봐요.
  아 그냥 집에 돌아갈까 봐. 택시 대절해서라도 집에 갈까 봐. 아빠, 나 지금 택시 
대절해서 집에 가니까 차비 좀 준비했다가 주세요. 대문 띵똥 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아빠가 말했다.
  --집에 못 온다구?
  --네.
  --어딘데?
  --멀어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내가 물었다.
  --아빠, 나 가야 돼?
  --자고 와야지, 임마. 이 밤중에 어떻게 와.
  바보 아빠.
  --너 잠 험하게 자는 앤데, 흉떨리지 말고 남의 집에서 조심해라.
  정말 정말 바보 같은 우리 아빠.
  --그런데... 어디냐 거기?
  --윤정이네...
  그때 아빠가 불쑥 말했다.
  --윤정이 걔 살 좀 뺐냐?
  무슨 이런 아빠가 다 있담. 내가 푸푸푸 하며 웃었다.
  --걘 먹는 게 특기란 말예요.
  --굶을 걱정은 없겠다. 걔 옆에 따라다니며 흘리는 것만 주워 먹어도.
  나는 그때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나 여기 있어도 되는 거예요? 하고 물을 
뻔했다.
  오늘 집에 못 들어가요. 그 짧은 말이 왜 그렇게도 힘들었을까.
  차라리 말하고 싶었다. 내가 알던 남자 애가 있는데요 아빠. 그애가 군대엘 
간대요. 그런데 날 보고, 기다리지도 말고, 자기 같은 건 잊어도 된대요. 잊혀지거든 
잊으래요. 너무 너무 화나서, 패 버리고 싶게 화나서, 며칠 생각했어요. 그런데... 
기다리지도 않을 거고, 잊혀지면 잊을 거라구, 왠지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오늘까지도 그래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그걸 모르겠어요. 입대하는 날이 다음 
월요일이에요.
  그때, 아빠가 말했다.
  --그래, 알았으니, 잘 놀다 오거라. 엄마 바꿔 줄까?
  --아니요. 됐어요.
  딸깍, 전화가 끊겼다. 잠시 송수화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먼 바람소리 같은 침묵을 향해 말했다.
  --네, 안녕히 주무세요.
  얼마 동안 공중전화를 바라보다가 나는 돌아섰다. 담배를 피우며 그가 길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길을 건너갔고, 우리는 밤늦은 거리를 걸었다. 
상점들은 문을 닫고 있었고 바람이 불어와서 불꺼진 거리를 더욱 황량하게 했다.
  그가 물었다.
  --어디다 전화했어?
  --집에.
  --돌아가야 하니?
  내가 되물었다.
  --그러길 바래?
  걸음을 멈추며 그가 말했다.
  --아니.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싫어서 내가 말했다.
  --좀 춥다.
  나는 그의 팔을 꼈다.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좁은 읍내는 아내 끝이 났고 캄캄한 
국도 저편의 벌판을 헤드라이트로 비추며 이따금 차들이 지나갔다. 우리는 돌아서서 
다시 읍내를 향해 걸었다.
  푸른 빛 글씨로 "여관"이라고 씌어진 간판이 저만큼 바라보였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먼저 말했다.
  --저 집 어때? 들어갈까?
  여관간판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저 집은 싫어?
  나는 그의 팔을 끼고 있던 손을 풀었다.
  --모르겠어.
  그랬다. 저 집이 싫은지 어떤지도, 들어가야 하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여관을 향해 걸으며 내가 말했다.
  --다 똑같겠지 뭐.
  여관 안으로 들어선 우리를, 아줌마라고 불러야 할 그런 나이의 여자가 맞았다. 
여자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침대방이었다. 방안을 들여다보고 나서 내가 말했다.
  --그냥, 온돌방은 없어요?
  --침대방이 싫으세요?
  내 대신 그가 대답했다.
  --네. 침대방밖에 없나요?
  --있어요. 온돌방. 이쪽으로 오세요.
  여자는 우리를 데리고 한 층을 더 올라갔고, 복도 맨 끝방으로 안내했다. 여자가 
돌아가고 난 후, 나는 창가로 갔다.
  방에서는 역이 멀리 바라보였고, 선로 옆으로 켜진 파아란 불빛이 보였다. 기찻길 
옆 작은 방, 작은 창에 계집애 하나 서서 한밤의 철로를 바라보고 있었네. 그런 
말들이 내 가슴을 오갔다.
  몸을 돌려 텅빈 방에 서 있는 그와 형광등 불빛을 올려다보다가 내가 말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딜?
  --가게에.
  --같이 갈까?
  --아니. 나 혼자 갔다 올게.
  밖엘 나갔다 왔을 때 그는 벽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나는 들고온 비닐봉지를 
내려놓으며 그의 앞에 앉았다.
  --담배, 여기 있고...
  나는 담배를 꺼내 놓았다.
  --술은 포도주야.
  나는 포도주를 꺼내 놓았다.
  --크리스탈 잔이 아니어서 미안해. 종이컵이야.
  나는 종이컵을 꺼내놓았다.
  --그리고 이거 신문, 어제 꺼야. 가게에 어제 꺼밖에 없었어.
  그 남자를 건너다보았다. 벽에 기대앉은 남자는 아무 표정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그토록 낯설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어쩐지 자신이 조금 슬프게 
느껴졌다. 두번째 느끼는 슬픔이었다.
  방으로 들어섰을 때, 이 남자가 날 안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게에 나갔다 
오며 잠깐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 대해 아무 생각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고, 그런 자신이 서글프게 느껴졌었다. 그것이 첫번째 슬픔이었다.
  그가 물었다.
  --그건 뭐니?
  --양초.
  나는 봉지에서 양초를 꺼냈고, 그의 라이터를 당겨 초에 불을 붙였다. 내가 
말했다.
  --방이 너무 환해서... 싫어.
  일어나서 형광등을 끄고 나서 나는 벽에 기대앉으며 말했다.
  --술을 마시든가, 담배를 피우든가, 아무거나 해. 그리고 아무 얘기나 해. 나 
잠들거든 신문이나 보든가 그래. 이제 됐지?
  --넌?
  --난 안 마실 거니까.
  나는 코트를 벗어 얌전하게 포개어 방 한구석에 놓았다. 그리고 요를 깔았고 
이불을 폈다. 하나만. 그리고 나서 베개에 스카프를 깔고, 옷을 벗지 않은 채 
누웠다. 세번째인가. 나는 까닭없이 슬펐고 까닭없이 화가 났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도 술도 마시지도 않았다. 신문을 집어들지도 않았다. 촛불에 
비친 그의 모습이, '아, 쟤 참 괜찮게 생겼네' 싶었다.
  누운 채, 벽에 기대앉은 남자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담배라도 피우지 그러니.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거보단 어제 신문이라도 보는 네가 좋고, 신문을 읽는 너 
보단 술이라도 마시는 네가 좋아. 그리고, 술 마시는 너보다는 나를 보고 있는 네가 
좋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그냥 보고 있어 줘.
  내가 무섭니? 하고 그가 묻지 않기를 바랬다. 그는 무언가 이야기를 할 테고, 
나는 밖에 눈내리는 소리를 듣듯이 그렇게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고 싶었다.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었을까. 밤은 그렇게 거기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12시가 가고 1시가 오고... 그러므로 밤은 지나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벽이 오고 
있었으니까.
  문득 독일 어느 공동묘지에 있다는 묘비명이 떠올랐다. 이름없는 누군가의 묘비에 
써 있다고 했던 그 말.
  "시간은 여기 있고, 흘러가는 것은 우리들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언제나 여기에 있을 
뿐이다. 여기, 지금의 자리에, 그 현재에.
  다만 사람들이 거기에 이름을 붙여 놓고 있다. 1895년, 1947년, 1990년. 혹은 
기미년, 병술년, 갑자년... 또는 토끼의 해, 말의 해, 용의 해, 개의 해라고. 그러나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이 되어 여기에 있을 뿐이다.
  사라져가는 것은 우리들, 꽃과 나무와 풀과 하늘을 나는 새, 땅을 거니는 동물들, 
그 우리들일 뿐이다. 가면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이 우리는 그렇게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여기 있고 흘러가는 것은 우리들이듯, 그날 그곳에서의 밤은 
그렇게 거기 있었고 흘러가고 있었던 건 우리들이었을까.
  그가 말했다. 나는 누워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집에 개가 하나 있었는데, 그 개는 우리 대장이 '야 설렁탕이나 먹으러 
갈까?' 하면, 혓바닥을 길게 늘어뜨리고 헬렐렐레 하면서 침을 질질 흘렸어.
  --대장이 누군데?
  --우리 아버지.
  --둘이 닮았어?
  --말 안해.
  미안해 하고 내가 말했고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친척 아이가 있었어. 그애가 어느 날, 자기 엄마 알약을 화분에다 심었어. 왜 
그랬냐고 했더니 싹이 나오라고 그랬다는 거야. 그 약이 꼭 무슨 씨앗처럼 
생겼었거든. 그렇지만 누구도 알약은 아무리 심고 물을 뿌려도 싹이 나오지 
않는다고 그 애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우리가 흘러가고 있었다.
  2시가 넘었을 때 나는 시간을 세지 않기로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가만히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 가장자리에 
성에가 끼어 있었다. 새벽 창 밖을 내다보았다. 파아랗게 선로 옆으로 켜진 불빛이 
무슨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불빛이 먼 데 있는 것들이 흐려 보여서 나는 밖에 
안개가 내리고 있는가 보다 생각했다.
  창가에 서 있는 내게 그가 다가왔다. 그는 나를 등뒤에서 안았다. 가볍게. 그의 
팔이 내 몸을 감싸며 팔까지 껴안았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갇혀 버린 느낌이었다. 
나를 안고 있는 그의 손이 내 젖가슴 앞에서 깍지 껴져 있었다.
  그가 목에 입술을 댔을 때 나는 눈을 깜박이며 선로 옆의 파아란 불빛을 눈이 
시리게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 안개가 조금씩 짙어졌다.
  --저기가 역이야.
  창을 마주하고 우리는 조그만 역사를 바라보았다. 역 광장에 켜진 화안한 외등에 
비춰진 모습들이 유리조각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기차길옆 오막살이, 아기는 잘도 
잤다. 기차길 옆 옥수수밭, 옥수수는 잘도 컸다. 기차길옆 작은 방, 우리는 새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우리 나갈까.
  --어딜?
  --첫차를 탈까.
  --지금?
  --하여튼... 첫차.
  --그래. 우리 새벽차를 타자.
  사람도 없이 텅빈 객차 안. 싸늘한 아침 기온. 들판을 덮고 있는 겨울 안개. 
기차가 가 닿을 곳, 서울은 아침이겠지.
  내가 몸을 돌렸다. 그가 손을 풀었다. 내가 말했다.
  --사랑해.
  무슨 뜻이었을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깊게.
  그것은 '알아, 알아'하는 속삭임이었을까. 아니면 '나도, 나도'하는 외침이었을까.
  --저만큼 가 봐.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걸음 물러섰다. 나는 천천히 윗옷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블라우스의 마지막 단추를 풀고 나서 나는 등뒤로 손을 
돌렸다. 브래지어의 후크를 열었다. 어깨선이 없는 것이었기에 브래지어는 내 
손끝을 따라 풀려나와 어제 저녁 개어 놓았던 검정 오버 위에 떨어졌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면서 윗옷을 어깨까지 내렸다.
  그를 향해 가슴을 연 채 나는 말했다.
  --나야.
  언제였나. 내 입술을 원하면서 그가 했던 말, 나야 하는 그 말. 나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야... 라고.

    7

  그리고 그는 떠났다. 짧게 머리를 깎고.
  그런 그의 모습이 갑작스레 아주 바보처럼 느껴져서 나는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리 모양이라는 것이 그토록 사람을 변해 보이게 하는 힘을 가졌던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떠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그도, 그 또래의 대한민국 남자들도, 그리고 그 
남자들의 가슴에서 풀어져 나온 끈 하나씩을 잡고 떠나 보내야 하는 여자들도, 우리 
모두가 나는 싫었다. 슬프기보다는 화가 났다.
  우리라고 불리었던 그와 나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이별은 그렇게 찾아왔다. 
분단국가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겪어야 하는 필연이다는 무슨 그런 거창한 생각은 
없었다. 별나게 이상한 나라에 우리가 태어나 살고 있었구나 하는 실감이 오히려 
진실이었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아픔 같은 건 남아 있지 않기를 나는 바랬다.
  내가 그의 여자가 되었는지 어땠는지도 나는 몰랐다. 그가 내 무엇을 
소유했다거나 내가 그의 어디에 속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무엇인가 아주 
커다란 날개 같은 것이 아니면 막막하게 드넓은 휘장 같은 것이 우리들 사이를 
뒤덮고 지나갔다는 그런 느낌만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을 우리 둘만이 알고 
있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비밀 같은 것이 남았다.
  걱정되고 조심스러운 날들이 지나가기는 했다. 그러나 그와 내가 함께 보낸 밤은 
'수박씨'처럼 내게 아무 변화도 주지 않고 지나갔다. 내 주기는 15일 전후였는데 
다음 달 그때를 나는 집에서 이틀동안 쉬면서 보냈다. 만나자는 친구에게 나는 
말했다.
  --나는 지금 선천성 근신 중이야.
  무엇보다도 놀라운 변화는 내 의식에서 찾아왔다. 무어라고 설명하기 힘든 죄책감 
같은 것,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어쩐지, 엄마나 아빠에게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같은 것이 나를 찾아왔다. 마치 내 얼굴에 무슨 점이라도 
갑자기 생겨났거나 아니면 내 피부가 얼룩말처럼 변해 버리기라도 한 듯했다. 
그래서 엄마가 나를 빤히 바라보거나 아빠가
  --너 요새 무슨 일 있냐?
  하고 묻기라도 할 때면 나는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그와 함께 다니곤 하던 찻집을 이제 혼자 드나든다는 것은 어쩐지 싫었다. 그와 
함께 만들었던 기억의 그루터기들을 혼자 남아 깔고앉아 있는 것 같은 청승도 
싫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나는 그와 함께 다니던 찻집이나 술집을 찾아가기는 했다. 
뭔가 아주 기쁜 날, 즐거운 일이 생긴 날이면 그곳을 찾아갔다. 그와 함께 그 
즐거움을 나눈다는 기분이었을까.
  비늘처럼, 흔적처럼 그와 나눴던 이야기들이... 그와 함께 가졌던 시간들이 내게만 
남아 있었다.
  --술 안 마셔?
  내가 물었었지. 그날 그 밤에.
  --취하고 싶지 않아. 네가 있으면 돼.
  그가 그렇게 대답했었지.
  --내가 지금 가버리면 어떨까? 그러면 넌 그 술을 마시겠지.
  그런 말도 했었고, 그때 그가 대답했었다.
  --아니. 따라서 나가겠지.
  그날 아침 내가 입고 있던 옷이 단추가 없는 옷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독구리 
셔츠라도 입고 있었다면 나는 머리칼을 헝클면서 목위로 옷을 벗겨냈을까. 언뜻 
그런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랬다면 그렇게 가슴을 그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믿어졌다. 다만 또 다른 어떤 형태로든 우리들은 
만났으리라고 스스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내가 있었고... 그가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문득 생각했었다. 나는 그 누구와도 
다르지 않다고. 똑같다고.
  그리고 그날 적었었다. 남자와 어른일 것이다. 순결이라는 것에 그토록 크나큰 
의미의 도금을 한 사람들은 그들일 것이다.
  결코 여자가 그런 족쇄를 스스로에게 채웠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어른들일 거다.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아는 어른이란 이름의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 세운 철책일 것이다. 남자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사람들이 그런 것을 만들어 세우고, 마알간 피부 속으로 뜨거운 
피가 들끓고 있는 젊음을 거기에 가두어 둘 생각을 했을 까닭이 없다.
  그리고, 나는 혼자였다.
  양희은이 부른 "늙은 군인의 노래"가 아니다. 젊은 군인. 내 남자였던 사람이 
군인이 되기 위해, 젊은 군인이 되기 위해 떠났다는 것을 알기에는 그렇게 시간이 
필요했다. 면회를 가기로 했을 때는 그에서 온 몇 번의 편지를 받고 나서였다.
  기다리지 않아도 돼, 그렇게 말하던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편지에는.

    8

  나하고 한 일을 다른 사람하고는 하지 마. 그가 했던 말이 그때 왜 떠올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남자의 면회를 간 적도 없었다. 다른 남자를 군에 내보내 본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곳을 오며 그 말이 떠올랐을까.
  젊은 남자친구를 가진 대한민국 여자는 다들 이렇게 면회를 오는 건가 싶었다. 
아닐지도 모른다. 군에 가면 그것으로 바이바이 손 흔들고 끝나는 여자도 있지 
않을까. 또 다른 여자도 있겠지. 남동생을 둔 여자들도 면회를 오겠지. 시외버스를 
타고 먼 산길을 오겠지.
  오랜 만에 타보는 시외버스는 시골길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어서 좋았다. 돌로 
만들어 세운 해태가 지나가고 나자 경기도였다. 길가의 집들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차창 밖으로는 야산이 바라보이기 시작했다.
  --참 한국은 산 투성이야.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살다가 산에서 죽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어.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었다.
  --왜 바다도 있는데,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라구요.
  --그렇지만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살던 사람도 산에 묻히잖니.
  --그렇나? 그러구 보니 그렇네.
  --그렇지만 들판에서 태어나서 들판에서 살다가 들판에서 죽는 사람도 있을 걸.
  --우리 나라가 무슨 들판이 있니. 우리 나라는 그냥 산이야 산.
  한국의 산은 그러고 보면 참 아기자기하다. 선들이 부드럽고 저 능선들은 또 
얼마나 순해 보여.
  새삼스레 산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때 생각했었다. 산을 보고 순하다고 하는 말도 
있을 수 있구나.
  그래 순한 산 안에 갇혀서 순하게 살다 가는 사람들이 우리들인지도 모르지. 아니 
우리들이었는지도. 이제야 산에 갇혀 사는 사람도 없고, 산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없는 게 아닐까. 저 옛날 농경민이었을 때의 이야기지. 그때는 부모 자식이 함께 
들에 나가 일을 했고, 그래서 뭐든지 아버지에게 배우던 시절이었지.
  이제는 그것도 아니잖아. 농사꾼 아들 농사짓고 목수 아들이 장롱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니까.
  여기 오면서 내내 산을 보았다고, 나마 나는 그에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면 
그 남자는 어떤 얼굴을 할까.
  --여기 오면서 내내 무얼 했는지 알아.
  --꿈도 크시네. 그럼 무슨 생각을 했다는 거야.
  --생각이 아니라, 봤어.
  --뭘?
  그때 나를 바라보는 그이 눈빛을 보고 싶다. 보다니 뭘 보았다는 거냐고 묻는 
그의 눈을. 나는 대답하리라.
  --산.
  --산?
  --으응, 산을 봤다구.
  --싱겁긴,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니.
  --우리 나라 산아 참 순하게 생겼다는 생각도 했어, 착하게 생겼다고 할까.
  --흉칙하고 무섭게 생긴 산은 어떤 건데.
  --사진에서 보는 외국산들, 다 그렇지 뭐.
  --얘, 산도 뭐 순하고 아니고 그런 게 있냐, 그건 그냥 자연이야 자연, 자연은 다 
착하고 순하고 그런 거야.
  --아냐. 한국 산은 순했어. 난 아직 한번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봤거든, 이번에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내가 나이가 드는 건가 
싶었어.
  --나이가 드는 게 아니라, 늙는 거겠지. 아냐. 저 정말 그러고 보니까 많이 늙은 
거 같애. 몇 달 전의 네가 아냐.
  그때 나는 웃을 수도 있으리라. 창 밖을 내다보면서 나는 그와 그렇게 이야기를 
묻곤 했어. 너는 무어라고 말할까. 어쩐지 나 혼자 있으면서도 늘 그렇게 되곤했어. 
너는 무어라고 할까.
  --그때 비로소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아주 이상한 확인이었지.
  그리고 그때 비로소 나는 웃을 수도 있으리라.
  면회 오는 여자. 아니, 면회 가는 여자. 어쩌다 그런 여자가 되었을까. 그냥 
웃으면서, 우와 너 살쪘어, 징그럽게 쪘어 해줄 수 있으면 되는 거지.
  아니면 다르게 말할 수도 있겠지. 하나도 안 변했어. 어쩜 군인이 되었는데도 
그렇게 변한 게 없니 하고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부대가 있는 곳이 가까워오고 있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산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낮은 집들이 웅크리듯 엎드려 있는 
그런 모습으로 차창 밖을 지나갔다. 그 모습마저도 잿빛이어서 나는 조금 우울한 
마음으로 미류나무 가로수 뒤쪽으로 그 집들을 바라보았다.
  왜 우리 시골집들은 저렇게 낮게, 몸을 숨기듯 엎드려 있는 모습을 해야 할까. 
반듯하고 날아갈 듯한 집들을 지으면 안 되는 걸까. 어딜 가나 마찬가지다. 벽은 
낡았고 지붕과 기둥은 구십도로 각을 이루며 맞물려 있는 것을 볼 수가 없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놓은 집 같다. 그 집 앞을 무심하게 개가 뛰어가고 아이들이 
지나간다.

  내가 버스를 내린 곳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그건 읍내라고 말할 것도 없이 
거리가 끝나는 그런 곳이었다. 차표를 팔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대합실이 있고 그 건물 앞은 조그만 공터였다. 그 공터 건너편으로 식당과 다방과 
구멍가게들이 몇 바라보였다. 그리고 이상스레 눈에 띄는 사진관이 있었다. 웃고 
있는 여자의 커다란 사진 옆으로, 돌사진일까, 고추를 내민 아기가 턱살이 늘어진 채 
나를 바라보았다.
  이 부근 어디라고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버스를 내렸지만 막상 이곳 어디에 
그가 몸담고 있는 부대가 있는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나는 다시 대합실로 들어갔고, 
월급이 적당하기만 하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한가한 직업일 것 같은 승차권을 팔고 
있는 아가씨에게, 그녀의 얼굴 앞에 둥글고 조그맣게 파놓은 유리 구멍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저 말씀 좀 물을께요.
  그러렴도 아니고, 묻든가 말든가도 아닌 적당한 귀찮음과 가득 찬 무책임을 
내보이며 그녀가 나를 마주보았다. 나는 부대 이름을 대면서, 혹시 어딘지 
모르세요? 하고 소리없이 웃었다.
  그녀가 이번에는 가득찬 무례함과 넘치는 피곤을 내보이며 말했다.
  --앞에 나가면 택시 있어요.
  뭔가가 와삭와삭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길을 물었지 택시를 어디서 타는지를 묻지는 않았단다. 그렇게 말해 주고 
싶은 것을 참으며 나는 다시 아가씨에게 웃으며 물었다. 분명히 웃으며.
  --여기서 먼가 보지요? 택시를 타야 하면.
  --기본요금이에요.
  태어나면서부터 무례함과 피곤함과 무책임과 귀찮음을 껴안고 태어났나 보다. 
나는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잘 있어.
  대합실을 나오자니, 그녀가 내 뒷모습을 쏘아보고 있을 것 같아 조금 화가 났고,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래야 하는지에 많이 화가 났다.
  그녀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택시는 대합실 건물 옆에 세워져 있었다. 낡고 
더러운 모습으로. 택시 기사는 문을 열어놓은 채 조는 것 같은 자세로 발을 밖으로 
내뻗고 있었다.
  --가실 거지여?
  기사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가지요. 타세요.
  여기 사람들은 왜 전부 이렇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기사가 음악부터 틀어댔다. 
마치 그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이기라도 한듯이. 그 음악이, 비내리는 영동교에서 
마포종점으로 갔다가, 다시 소양강 처녀가 삼천포 아가씨를 불러대는 가요 
메들리였다. 찬란한 음악이 나를 환영하는구나.
  여기 와서부터 뭐가 되는 일이 없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외버스 운전기사에게 
물어보는 건데.
  대합실 아가씨의 말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내가 가요 메들리를 두 곡 듣고 
났을 때 기사는 부대 정문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면회 오슈? 오늘로 세번째 손님이네.
  그렇게 물으며 기사는 내가 내미는 요금을 받았다.
  소음을 뿜어내며 택시가 사라지고 났을 때, 나는 아주 많이 구겨져 있었다. 한 
남자를 만나러 오는데 이런 기분이 되어야 할 건 뭐람. 그를 만날 일이 아주 
까마득하게 느껴져서 나는 부대 정문 초소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건 아니잖아. 나는 뚜벅뚜벅 초소를 향해 걸었다. 
마치 싸움을 하러 가는 사람 같았으리라.

  초소 정문에는 총을 든 군인이 서 있었다. 그의 뒤쪽으로 길게 포플러가 자라고 
있는 길이 바라보였다. 그 안쪽에 부대 막사가 있으리라. 그가 살고 있는 집이 
있으리라.
  길 옆으로 바라보이는 연병장은 아주 드넓어 보였다. 정문으로 다가서는 내게 
총을 든 군인이 다가오며 물었다.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그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그것은 내가 그 나이가 되도록 들어 본 어떤 남자의 
목소리와도 닮아 있지 않았다.
  --네.
  역시 큰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면회 오신 겁니까?
  --그런데요.
  이번에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나는 그의 안내를 받아 초소 옆 면회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군인이 내밀어 
주는 용지에 또박또박 적어나갔다. 한 남자의 이름과 계급을 적고 나서 그 밑에 
있는 '관계'라는 란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와 나는 무슨 관계인가. 성이 다르므로 가족이라고 적을 수는 없었다. 친척. 
외사촌쯤으로 해도 되는 걸까. 나는 그렇게 썼고, 내 이름과 주소와 
주민등록증번호를 마지막으로 적었다.
  종이를 받으며 그가 말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연락하겠습니다.
  면회실 창으로 멀리 연병장이 내려다보였다. 토요일이어선가. 운동장에서는 
군인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무슨 대회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놀고 있는 
것 같은 편한 분위기가 거기서 느껴졌다.
  축구도 하고 그러는구나. 참,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내무반인가에서 
텔레비전도 보던데 뭘. 그들을 내다보고 있자니 버스에서 내려 여기까지 오던 
우울함이 조금은 가셔지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저걸 길렀을까. 면회실 옆으로는 코스모스며 깨꽃 같은 것들이 정성스레 
심어져 있었다. 남자들만 있는 곳에 피어 햇살을 받고 있는 꽃들이 아주 낯설게 
느껴졌다.
  해바라기도 보였다. 해바라기는 정문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게 난 길에 피어 
있었다. 훈련들은 안 받고 꽃들만 기르나. 이상스레 마음이 편안해져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좀전의 남자가 컵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곧 나올 겁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보리차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좀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마르던 때라 나는 그가 내미는 잔을 받았다. 그리고 한 모금 
마셨다.
  --서울서 오셨습니까?
  --네.
  --애인이십니까.
  --아, 아니예요.
  --괜찮습니다.
  남자가 껄껄 웃었다.
  --저희들이야 같이 먹고 자는 한 식구가 아니라, 같이 죽고 사는 전우입니다.
  목소리는 큰데 이 남자는 꽤 수다스럽구나 싶었다. 군인들이란 다들 뭔가 이렇게 
한 가지씩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건가.
  --저도 집이 서울입니다. 합정동이지요. 신촌서 퍼마시고 다닐 때가... 
아득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긴 길을 따라 걸어나오는 군인이 있었다. 그가 그렇게 
걸어나오고 있었다. 면회실 창 밖으로 피어 있는 코스모스 사이를 그는 아주 천천히 
걸어나왔다. 내가 일어섰다.
  그였다.
  그러나 나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저 남자가 그였단 말인가.
  그는 걸어와서 초소에 있던 군인들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형이상학을 말하던 
남자. 기다리지 않아도 돼 하던 남자. 나는 마음 속으로 고개를 젖고 있었다. 아냐. 
아니야. 저 남자는 아니야.
  그가 면회실 안으로 들어와 섰을 때 나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울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너무나 말라 있었고 그리고 너무 까맣게 타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눈을 둘 곳이 없었기에 나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부르터스 너마저. 시저가 소리치듯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유난히 손마디가 길던 
그의 손마저 까아맣게 거칠어져 있었다.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그가 말했다.
  --앉아.
  나는 그의 손을 놓았고, 그와 나란히 면회소 안의 나무 의자에 앉았다.
  --잘 있었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면 온다고 연락을 해야지. 막내이모가 한번 오겠다고 해서, 이모인가 했어.
  미친 놈. 차라리 소리치고 싶었다. 막내이모라니. 울 수 있다면 울고 싶었다. 내가 
왔는데 막내이모가 왔나 했다니.
  그리고 그 꼴이 뭐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슨 군대가 이렇니.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놓니.
  그가 말했다.
  --너 머리 모양 바꿨구나.
  --응. 요즘에 이렇게들 많이 해.
  --유행? 너 그런 거 안 탈 줄 알았는데.
  내가 웃었다. 소리없이. 그것은 아마 '쓸쓸하다'는 부사가 앞에 붙어야 할 그런 
웃음이었으리라. 내가 뭐 직지사에서 도 닦는 여승인 줄 알았었니. 나 그냥 그런 
여자야.
  --지금 저기서 축구하다가 왔어?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까맣게 탔어?
  --훈련을 나갔다 왔거든. 며칠 됐어. 돌아온 지.
  --그래도... 너무 말랐다.
  --그럼. 유격훈련인데.
  --그게 뭔데?
  --사내 만드는 거지.
  --까아맣고 마르면 사내가 되는 거야?
  --말투는 똑같구나.
  --그럼. 내가 뭐 달라질 게 있는 여자라야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여자, 그렇게 말하고 나자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이 
세상에서 달라질 게 없는 여자 같았다.
  그건 무엇일까. 달라질 게 없다면 완벽한 여자라는 뜻일까. 그건 끔찍했다. 여자의 
완벽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뭔가. 완벽한 직업여성. 그런 것들을 합쳐놓았을 때, 그건 
아마 시커먼 액체고무 같은 것으로 만들어놓은 흐물흐물거리는 괴물이 아닐까 
싶었다.
  면회실 창 밖으로 바람이 불며 지나갔다. 연병장 가에 심어진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그가 말했다.
  --외출증을 받아와야 하는데.
  --외출...증? 그럼 나갈 수도 있어?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누구 당번병을 하는데.
  그는 마치 고위층의 아들이나 된 듯이 말했다. 내가 뭘 알 수 있었으랴.
  --정말 밖에 나가도 돼?
  --그럼. 토요일인데. 하룻밤 자고 내일 귀대하는 거지.
  군인이 하룻밤을 나가 자도 된다는 것을, 아니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정말이지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다가, 만약 그러다가... 저 위에 사는 혹부리가 부자가 쳐내려 오기라도 
하면.
  그가 살짝 내 머리를 때렸다.
  --장난하지 말고, 너 내가 하라는 대로 해.
  그가 말했다. 지금 나와 헤어져서 여기를 나갈 것. 그 다음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으로 걸어갈 것. 왼쪽 길로 들어가면 거리가 나옴. 거기서 '파도'라고 퍼런 
간판을 단 다방을 찾을 것. 거기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것.
  --네가 군인이라는 건 알지만 이건 순전히 명령밖에 모르는 짓이잖아. 난 
민간인이야. 그렇게 일방적이라면 난 못 해.
  --그럼 죽어야지.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정말 나를 죽일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 빛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에게서 그런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무릎이 잘리는 것 같았다. 그의 말과 눈빛이 덩거덩 하고 내 무릎을 자르는 
것 같았다.
  --알았어. 그렇게 할께.
  내가 먼저... 가방을 들며 일어섰다.
  설악산에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때 학교는 축제기간이라 강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친구와 여행을 간다고 엄마 아빠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얻어낸 사흘이었다.
  아, 모르겠다. 도대체 왜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부모를 속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내 사랑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아니면 부모가 잘못된 것일까. 나라는 
애가 끔찍하게 치사하게 독사처럼 나빠서 이런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면회실을 나왔고, 터벅터벅... 
김민기가 부르는 노래의 타박네처럼 비포장길을 걸었고, 거리에 들어서자 '저년 
저년' 하듯이 개가 컹컹 짖었고, 그가 말하던 '파도' 다방에 들어와 앉아, 파도타기는 
커녕 진흙밭에 빠져버린 아이처럼 점점 컴컴해져서 바닥으로 가라앉아 가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방 아가씨는 껌을 쨔쨔 잘도 소리내어 씹었고, 금색 굽높은 슬리퍼를 
따각따각하며 신고 다녔고, 으응 너 왜 여기 와서 죽치고 앉아 있는지 다아 알아... 
너 육군 쫄짜 면회 왔지? 하듯이 눈도 한번 안 주고 나를 내팽겨쳐 두었고, 나는 
차라리 '이 남자가 무슨 오데코롱 향수라도 뿌리고 머리에 무스 바르고 나오느라고 
늦는 거야 뭐야' 하며 지쳐갔고, 가방에서 J. 네루가 지은 "세계사 편력"을 꺼내 
읽어나가다가 이런 내가 너무너무 싫어져서 도로 가방에 쑤셔넣었고, 다방에 
굴러다니는 주간지란 주간지는 몇 주씩 지난 것까지 얻어서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고, 거기서도 '독자상담, 어찌하오리까' 같은 것을 찾아서는 '저는 21세기의 
여성입니다. 한달 전에 순결을 잃었습니다, 임신이 되지 않을까요? 죽고 싶습니다' 
같은 것을 내려다보곤 '별 미친년'하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고, 지겹도록 들려오는 
텔레비전 소리를 들었다. 나는 텔레비전과는 등을 지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왔다. 무스를 바르지도 않았고 향수를 뿌리지도 않은 대한민국 육군 
쫄짜의 계급을 달고. 여전히 새까맣게 타고 여전히 비썩 마른, 그래서 나를 하염없게 
만드는 그 모습 그대로.
  그가 차를 마시고 났을 때 나는 물었다.
  --그럼 너... 내일 부대에 들어가는 거니?
  --물론이지. 외출인데.
  --너 그럼 어디서 자니?
  새까맣고 비썩 말라서 나를 슬프게 하는 그 남자가 그때 말했다. 목소리만은 저 
우리들 형이상학의 시대 그 빛나는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어딘가 찾아봐야지. 네가 불편해 하지 않을 곳을.
  나는 두번째로 무릎이 잘렸다.
  내가 말했다. 담담하고 낮게. 나도 우리들 형이상학의 시대가 되어.
  --우리 어디 가서 뭐 먹자. 나 갑자기 배고파졌어.

    9

  저녁이 왔을 때, 나는 두어개의 이층집이 서 있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야 하고 소리를 지르면 푸슬푸슬 내려앉을 것만 같은 그 거리에게 묻듯이 내가 
말했다.
  --어디 뭔가 좀 칙칙해 뵈는 그런 술집 없을까?
  --포기해. 그러는 게 몸에 좋아.
  --몸에 나빠도 좋아. 벌써 다 나빠진 걸 뭐.
  오후에 나는 정말로 거기에서 먹을 만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그와 함께 
구멍가게 한구석의 식탁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었다.
  --서울 하고도 여대생 아가씨. 이 거리는 두 가지를 용납하지 않아요. 교양과 
선택.
  --교양을 버리면? 식인종같이 되라는 거고... 선택을 버리면? 뭐든 보이는 그 
순간 잡아먹어라 그 말이니?
  --난 네가, 결정적 순간에 잘 타협할 줄 아는 그게 좋아.
  --타협이 아냐. 포기야.
  --둘 다 같은 말이야. 쌍둥이.
  그때 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거리에서 이 남자가 가서 마시던 곳, 거길 가면 
좋겠다.
  --그럼, 너는 술 마실 때 어디 가서 마셔? 우리 거기 가자.
  그가 조금 난감한 얼굴을 했다.
  --거긴 안 돼.
  --왜?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서...
  --우린, 우리라는 건 나 같은 졸병들은 말야, 대체로 여길 나오면 두 가지고 
마셔. 하나는 구멍가게에서 라면 끓여놓고 소주 마시고.
  --또 하나는?
  --여자애들이랑 이거 하면서 마셔.
  그가 두 손을 들어 젓가락 장단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이거?
  나도 똑같은 손짓을 했다.
  --재밌겠다. 나랑 같이 가서 안 될 것도 없잖아. 잘 됐다, 렛츠고.
  --너 정말... 거긴 가도 되고?
  잠시 나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말했다.
  --알았어. 가자.
  등 뒤에서 엔리코 모리코네의 "황야의 무법자" 주제음악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은 
풍경 속으로 우리는 걸어들어갔다.

  우리들이 찾아간 그 술집, 문 옆에는 빨간 색등이 두 개 달려 있었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색 썼어. 그렇게 말하고 나자 내 스스로가 우스워져서 나는 
히이히이히이하며 웃었다.
  그가 나를 보며 물었다.
  --뭐야? 그 소리는.
  --그냥 웃는 거야. 뭐 기도하러 들어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저 이 거리에 있을 법한 보통의 가정집 같은 그런 집이었다. 다만 안으로 
들어서자 탁자 세 개가 놓여 있는 홀이 우리들을 맞았다. 그리고 순간 아하 하고 내 
속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홀 오른쪽으로 문이 열린 방이 있었다. 그 방에 한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둘러앉아 화투들을 치다가 일제히 우리들을 내다보았다.
  그가 나를 탁자 앞의 의자에 앉게 하고 여자들에게 말했다.
  --마담 어디 있습니까?
  무엇에 놀란 듯이 여자들이, 온갖 원색으로 휘감긴 한복의 여자들이 말없이 
우리를 내다보기만 했다. 마치 잠시 정지시킨 비디오 화면처럼.
  그때 우리가 들어온 그 문으로 한 여자가 들어섰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서 
말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아니. 그래 어쩐 일이셔? 외출?
  그렇게 묻던 여자의 눈길이 내게로 와 꽂혔다. 그랬다. 그것은 꽂히는 것이었다. 
그 눈길을 받으며 그때 나는 웃고 있었을까.
  그가 말했다.
  --한잔 했으면 하는데요.
  --혼자?
  여자가 또 나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앉아 
있었다.
  --제 여자친굽니다. 둘이서 한잔 마실까 해서요.
  --방을 하나 달라는 건가 본데... 너무 한다. 오늘 토요일인 거 알면서 그래. 왜 
하필 우리집이야. 못 됐네 참.
  여자가 내 앞 의자에 앉으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학생?
  --네. 인사드릴께요.
  --인사는 무슨, 촌 술장사년한테. 집이 서울?
  --네.
  --첫정인가 보구나. 면회를 다 오구.
  그리고 나서 여자는 화투를 치고 있던 그 여자들에게 소리쳤다.
  --9호실, 거기 술상 하나 차려라. 두 사람이다.
  까르르 여자들이 웃었다. 무언가가 무너지듯이 그렇게 여자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면회 온 여자를 데리고 색시들이 있는 술집엘 왔다. 이때 웃음거리가 
되어야 하는 쪽이 누구인지 나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 남자였을까. 아니면 
쑥맥같이 앉아 있던 나였을까.
  그가 마담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디 데리고 갈 만한 데가 있어야지요.
  주인 여자가 담배를 든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마수 손님인데, 오신 손님을 내치지야 못하지. 자 어서 데리고 들어가.
  그렇게 말해 놓고 나서 주인 여자는 와글와글 떠들고 있는 색시들을 보면서 
소리쳤다.
  --이것들이 뭐하는 거야, 호떡집에 불났니!
  남자는 나를 데리고 여자들이 가득찬 그 방앞을 지나갔다. 흘깃 들여다 본 
방안에는, 어머 쟤는 아주 귀엽네 싶은 여자의 얼굴도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의 여자들은 화장 때문인지 얼굴들이 유난히 커 보였다. 
넓적한 얼굴들에 어쩌자구 그렇게 눈썹들을 시커멓게 그리고 있었는지, 
달려들기라도 하면 엄마야 소리치며 도망이라도 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방앞을 지나 뒤쪽으로 돌아간 그가 방문 하나를 잡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문을 열었다. 엷은 꽃무늬 벽지를 바른 텅빈 방에 빈 상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가 먼저 나를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몸을 구부려 군화를 벗고 난 그가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앉아.
  여기서 이 남자는 무엇을 하며 살았던 것일까. 술, 술을 따르는 여자, 전방부대 
가까이의 저 살벌한 거리, 어디에 마음을 걸어놓고 그는 술을 마셨던 것일까.
  바로 옆방인듯 여자들이 떠들고 있었다. 그들이 내뱉는 말 속에, 놀고 있네, 
왕년에 누구는, 수청들겠다 이것도 몰라, 짜지 마... 따위의 말들이 섞여서 들려왔다.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쩐지 노는 게 좀 다르더라니.
  --너무 한 거 아냐? 면회 온 애인을 끌고 여길 와야 하냐, 뭐 저런 자식이 다 
있냐.
  좀 굵고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주인 여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왜? 어때서. 자기 놀던 집에 애인도 데려올 수 있고, 당당하다 이거 아냐. 못할 
짓 안 했다 이거 아냐. 이것들아. 너희들도 잘 봐둬. 남자 처신이 저만은 해야 되는 
거야.
  텅 빈 방에 앉아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로소 내 마음 속에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잘 있었어?
  서로 떨어져 지낸 시간들이 켜를 이루면서 우리들 사이에 쌓여 있는 것 같았다. 
내게 보낸 몇 번의 편지에서 그가 적었던 말들을 나는 떠올렸다.

  여기는 바람까지도 서울의 그것과 달라. 여기는 나무까지도 서울의 그것과 달라. 
햇빛도 마찬가지지. 그런 속에서 이따금 생각해. 여기선 나까지도 서울의 나와는 
다르다고. 제대를 앞둔 고참들이 수첩에 조금만 달력을 넣고 다니며 매일 그것을 
까맣게 지우는 것을 봐.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죽여가는 나날처럼 그 
까아만 달력에서는 하루하루가 지워져 가. 나에게서도 그렇게 시간들이 지워져 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면 나는 나 자신이 두려워지곤 해. 적어도 군에서 
보내는 날들이 나에게서 '없었던 시간'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나는 자신에게 
약속했으니까.

  갓이 없이 천정에 매달린 알전구가 우리들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밀어올리듯이 내가 물었다.
  --많이 힘들어?
  --아니.
  --그래도... 그래 보여.
  --괜찮아. 다들 잘 해내고 있고,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야.
  --믿어도 돼?
  --빌리브 오어 낱.
  피식. 내가 웃었다. 그래. 빌리브 오어 낱.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우리는 술을 마셨다. 생각해 보면 둘이 마주앉아 그렇게 술을 마셔 본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갑자기 우리는 어딘가가 팍삭 늙어버린 것도 같았다. 
살벌하기만 한 방안과 알전등과 귀퉁이가 벗겨진 호마이카 술상 때문이었을까. 이 
세상과는 떨어져서 아주 먼 어딘가에 와 있는 것도 같았다.
  --나 여기까지 오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사랑이라는 건 그 누군가 한 
사람을 위해서 혼자가 되는 일이 아닐까. 고아가 되는 일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어. 엄마 아빠도, 친구도... 그렇게 떠나야만 하는 거. 설악산엘 간다고 하면서 
여길 온 건 그러므로 그런 아무 잘못도 아닐 거다. 혼자가 되어야만 걸어갈 수 있는 
길. 그걸 나는 지금 걸어가나 보다. 그런 생각들을 했어.
  아마 그것은 내가 그에게 한 최초의 고백일 게다. 너를 사랑하나 봐.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혼자라고. 너를 향해서 혼자의 길을 걸어왔다고.
  그가 손을 뻗어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알아. 
그렇게 말하듯이.
  --그리고 난 여길 오면서 내내 여자라는 게 싫었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어.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내 손을 잡은 채.
  --왜 네 앞에서는 내가 꼭 여자여야 하니. 그냥 친구여도 되고 그냥 사람이어도 
좋은 거 아니니?
  --그래서?
  --그런데 그게 잘 안 돼.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내내 생각했어. 이렇게 해서 나는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 '여자'라는 틀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들어가나 보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저래야 한다 하는 그 틀.
  --그렇게 생각하지 마. 나는 여자란 말야,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야.
  여자가 뭔지, 그게 얼마나 난해한 구조를 가진 동물인지, 그리고 때때로 그가 
얼마나 열등하며 때때로 얼마나 초월적인지... 자기가 뭐 안다는 거야.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여자란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해. 
크면서 하나씩 만들어지는 건 오히려 남자야. 시몬느 보봐르가 여자는 만들어진다고 
말했지. 그건 아마 그 여자가 동양의 여자를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동양의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완벽해.
  --그건 또 무슨 소리?
  --남녀평등을 주장하지만, 그건 서구의 이론이거든. 동양의 여자들은 절대 
남녀평등을 원하지 않아. 나는 그렇게 봐. 그들은 소유되거나 지배할지언정 결코 
평등을 원하지 않아. 동양의 여자는 딸이거나 어머니야.
  --넌... 그럼, 나를 딸이거나 어머니로 생각하니?
  --끔찍한 소리 하고 있네.
  우리는 둘 다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그에게 잡혀 있던 손을 뺐고 그는 술잔을 
잡았다. 나는 그의 손은 내려다보면서 남자의 손은 세가지를 하는구나 생각했다. 
여자의 손을 잡거나, 술잔을 잡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을 하거나.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들어. 네가 말하는 그것, 여길 오면서 네가 여자인 것이 
싫었다는 건 어쩌면 딸로서의 네가 어머니로서의 네가 되는 그 과정은 아니였을까. 
그게 싫었던 건 아니었을까.
  내가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
  --아, 우린 늘 너무 말을 많이 해.
  조금씩 우리들은 취해갔다. 주인 여자가 방문을 열고 들어선 건 내 눈밑이 많이 
붉어졌을 때였다.
  --이거야 샘이 나서 살겠나. 어디, 청춘남녀 방에 들어가서 훼방 좀 놓아 볼까.
  그러면서 주인여자가 들어섰다. 여자는 내 옆에 앉았고, 반쯤 남아 있는 내 술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말했다.
  --마시고, 나도 한잔 줘.
  옆에 앉았던 그가 자신이 잔을 비우고 여자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가 따른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여자가 내게 물었다.
  --오늘 왔나 보지요?
  --네.
  --이 사람, 아주 순총각이야. 숫총각도 아닌 순총각.
  숫총각이면 어딘가 좀 덜떨어진 거고, 순총각이란 진짜 총각이라는 뜻일까.
  --잘 잡아요. 참 쓸 만한 청년이니까.
  --그래요? 전 별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요.
  내가 웃었고, 여자는 그런 나를 보면서 슬그머니 눈을 흘겼다. 그것은 천천히, 
슬그머니 흘기는 그런 눈흘김이었다.
  --잡아 두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세상에 믿을 거 못 되는 게 남자 마음이라니까. 늦췄다 땡겼다 잘 해야지. 
그리고 남자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애라구 애. 애들 집안에 안 있고 나가려고 
하는 거나 똑같애.
  --나갈 테면 나가라지요 뭐.
  --정말? 이 아가씨 좀 봐. 제법 얘기가 되네.
  --그렇잖아요. 가고 싶으면 가야지, 갈 맘 먹은 남자가 못 가고 남아 있어 봤자 
뭐하겠어요.
  --아 그렇다고 남 줘? 못 먹는 밥에 침이라도 뱉어야지.
  말해 놓고 나서 아주머니는 내 무릎을 치며 웃었다. 그 남자가 말했다.
  --자신 있다 그 얘기겠지요 뭐.
  --남자 여자 사이에 자신 있고 없고가 어디 있어. 여자는 그저 내돌리면 안 되고, 
남자는 그저 이건 애다하고 쫄쫄 따라다녀야지.
  그렇게 앉았던 여자는 술 한잔을 받아마시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자리를 떴을 
때 내가 말했다.
  --저 아줌마, 웃긴다. 돈 못 벌 여자 같애.
  --잘 봤어. 마음이 착해. 아들 하나 있는데, 툭하면 형무소 들락거리고 그러나 봐.
  --나 어때? 저 아줌마한테 잘 말해서, 여기서 아르바이트 좀 할 수 없을까. 제법 
얘기가 통한대잖아.
  술집을 나왔을 때는 많이 늦어 있었다. 마신 양으로 보아 그도 취했고 나도 
취했을 텐데 나는 머리가 이상하게 맑았다.
  밤안개가 내리고 있었다. 잿빛의 거리와 캄캄하게 문닫은 가게들과 그 위를 
희뿌옇게 감싸고 있는 안개 속에 서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안개 속에 서면 우리는 혼자. 하나 하나다. 숲은 사라지고 나무들만 남는다. 그런 
말들이 떠올라왔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이 안개 속에 각자로 서 있는 건가. 우리가 
함께라면 얼마나 깊이 우리가 얽혀 있다는 건가. 나와 너, 그렇게 만나 우리라는 
이름으로 공유하는 공간은 얼마만한 넓이를 가지고 있는 걸까.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밤안개 속을.
  --공룡은 왜 다 죽었을까. 왜 커다란 것은 하나씩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걸까.
  --너 취했니?
  --취하고 싶은데 그게 안 돼.
  --바로 그게 취한 상태야. 어떤 술꾼도 나 취했다 하지는 않아.
  --이 세상에는 정말 너무 큰 것이 없어.
  --경기도 용문사에 가면 거기 아주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어.
  말해 놓고 나서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취했다.
  내가 말했다.
  --난 이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얘 우린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지금 태어난 거나 우선 좀 살고 보자. 다음에 또 
태어날 만한 건지 어떤지도 지금 모르잖아.
  --난 하루살이로 태어날래.
  --왜 하필 하루살이냐.
  --어제랑 오늘이 다를 것도 없고, 그렇다고 뭐 내일이 별다를 날도 아니잖아. 
매일 매일 똑같은데 뭐 그렇게 오래 살 것도 없잖아.
  --그래도 그런 좀 슬프다. 하루만 사는 건.
  --그럴까. 슬픈 걸까.
  걸음을 멈추고 나는 하늘을, 밤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슬픔...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건 뭘까.
  --하루살이.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우리들. 지금 우리들. 버스에서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이라는 유행가를 
들었어. 거기 이런 가사가 있드라. '밤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전차'. 꼭 우리 
같애. 갈 곳 없는 밤전차.
  그때의 우리들은 슬픔이었을까. 왜 갑자기 나는 슬픔이란 말을 떠올렸을까. 
무엇이 나에게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하루살이로 태어나겠다는 말을 하게 
만들었을까. 그 거리가, 잠시 쓰다가 버리고 가기로 마음 먹으며 지은 것 같은 
건물들이나, 아무도 그곳이 고향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들어 언젠가는 떠날 것을 
약속한 채 살아가는 것 같았던 그곳 사람들이나... 마치 버림받은 아이들처럼 만나 
그곳을 걷던 우리들에게도 어떤 슬픔이 묻어 있기는 했다.
  그때 내가 느끼고 있던 슬픔이란, 왜 우리는 겨우 이렇게밖에 살아가지 못하는가 
하는 그 서글픔 때문이었다. 더 수수하고 더 조그맣게 작아질 수는 없는 것일까. 
아니면 더 크게 엄청나게, 그래서 찬란하게 그 나이를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까맣게 얼굴이 탄 남자가 이차대전을 무대로 한 영화의 어느 포로같은 얼굴을 
하고 나타났을 때, 그렇게 만나야 하는 우리들이 슬픔이 아니라면 무엇이 
서러워해야 한단 말인가. 손님들의 마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흘러간 가요를 내내 
틀어대는 시외버스와 불친절에 시달리며 한 여자는 그렇게밖에 한 남자를 만나러 갈 
수 없는 것일까.
  탄식처럼 검은 색깔의 장미를 한아름 안고, 아니면 풀꽃 한웅큼을 모아 쥐고 
그렇게 만날 수는 없는 것일까. 젊디 젊은 우리들이 이니었던가.
  어느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렇게 멀리 멀리 사라져가는 한 남자와 여자처럼 
우리는 그 밤안개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내 안에서 말이 하나 떠다녔다. 어느 희랍인이 했던 말, 참된 슬픔은 고통이 
기대는 지팡이라고 했었지.
  --정직하게 말하자면, 넌 여기 와서 내 꼴을 본 게 싫은 거지? 그걸 슬픔이니 
뭐니 하고 있는 거지.
  밤안개를 바라보았다. 만져지지도 않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분명히 우리를 감싸고 있는 그 밤안개.
  --그래. 숨기지 않을께. 처음엔 그랬어. 폐인이 되었거나 타락했거나, 그런 사람 
같았어. 어디에서도 예전의 널 찾아볼 수가 없었어.
  --사람이란 결국 두 가지 길을 가지고 있을 뿐이야. 무엇에든 익숙해지든가 
아니면 그것과 싸워서 지든가, 그래. 내한테 익숙해지든가 아니면 지든가 할 거야. 
진다는 건 네 식으로 표현하자면 포기하는 게 되겠지.
  그러고 싶었다. 이 남자를 만난 내 슬픔에 익숙해져 버리든가 아니면 거기에 
지든가. 그리고 이제 혼자 돌아간 서울 거리를 혼자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 난 
진 걸까 익숙해진 걸까, 그걸 헤아리고 있을까.
  고통의 지팡이. 고통이 기대는 지팡이. 슬픔아, 너는 참 밤안개 같구나. 나는 
고개를 흔들며 그의 팔을 꼈다.
  --영국시인 콜리지라고 있지. 그 사람이 한 말이 있어. 사람들이 만나고, 알게 
되고, 사랑하고, 헤어져 버리는 것, 그것이 인간이 가지는 슬픔의 모든 것이래.
  --만나서, 알게 되었다가, 사랑하고, 헤어진다. 슬픔의 모든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것이겠지. 그런데 넌 너무 서구편향이야. 칵테일 파티야.
  --그럼 너는?
  --나야 민속주점이지.
  --거짓말 마. 너는 이거잖아. 우흘려고 내해가 왔던가. 짜라짜라짠짠짠.
  나는 그의 팔을 꼈던 손을 빼 앞으로 내밀며 젓가락 장단 치는 흉내를 냈다. 그가 
말했다.
  --손톱은 슬플 때마다 돋고, 발톱은 기쁠 때마다 돋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속담. 사람 살아가는 데는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다 그 소리지. 발톱은 
손톱보다 더디게 자라잖아.
  --아, 그건 좀 너무했다. 어떻게 사람의 슬픔을 손톱에다 비유한담. 게다가 
기쁨이라는 것과 발톱은 안 닮았다 뭐.
  --누가 알아. 손톱에 매니큐어 칠하듯 사람들은 슬픔에도 그렇게 매니큐어를 
칠하는지.
  --발톱에 칠하는 여자도 있어.
  --그럼 그 사람은 행복에도 매니큐어를 칠하며 사나 보지.
  --미국에 이민간 사람들 가운데 여자들 손톱 손질해 주고 사는 한국여자들 
많거든. 그럼 그 사람들은 미국여자들 슬픔 손질해 주러 갔나 보지.
  안개, 밤안개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갑자기 모든 일에 막연해져서 그런 말들을 
떠들고 있었다.
  --내가 칵테일 한번 더 할까. 독일 속담에 있는 말인데, 슬픔은 사랑 없이도 
생겨나지만 그러나 사랑은 슬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대.
  슬픔 없는 사랑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독일인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밤안개 속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키 큰 남자를.

    10

  이제 어디로 가지. 어디에 가서 이 밤을 보내지. 나는 그러나 그렇게 묻지는 
않았다. 어디에도 좋지 않을까. 헐벗고 굶주리고 어딘가에 내던져진 것만 같은 이 
남자의 옆에 내가 있을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어도 되는 거 아닐까.
  여관은 단층 건물이었다. 밤안개 속을 걸어서 우리들이 찾아간 그곳은.
  안개 속으로 뿌옇게 빛나는 여관 간판을 보았을 때 나는 단 한번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이곳이 전방부대 옆의 거리가 아니라고 하자. 그냥 서울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이 남자를 두고 돌아갈 수 있을까.
  내일 다시 만날 수도 없는 남자다. 검고 까칠한 얼굴을 하고 그는 다시 부대로 
돌아가야 하는 남자다. 그리운 것은 혼자의 일로 남겨서 가슴에 묻고, 내일부터는 
다시 혼자가 되어야 하는 우리들이다. 그런데 이곳이 서울이라 한들 이 남자에게 
등을 돌리고, 또 만나 하는 말을 남기고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서 혼자 잠들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고, 가만히 말했다. 마치 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밤안개에게 
도움을 청하듯이.
  --우리 저기 들어가면... 안 되는 거야?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내 말이 토막토막 끊어져서 새어나왔다.
  --모르겠어. 그냥. 어디든 들어가. 너무 늦었어.
  안으로 들어서니 가운데에 마당이 있고 그 마당을 중심으로 빙 둘러가며 복도로 
연결된 방들이 있었다. 마당에는 조그만 동산에 복도에서 새어나오는 형광등 불빛을 
받고 있는 꽃들은 칙칙한 보라빛이었다.
  복도로 올라서는 우리를 돌아보며 종업원이 말했다.
  --도배를 새로 해서 방은 깨끗합니다. 신발은 가지고 오세요.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내 뒤에서 군화를 벗고 마루로 올라서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없이 자신의 군화와 내 구두를 집어들었다.
  종업원을 따라 우리는 마루가 삐걱거리는 복도를 걸었다. 끝쪽 방으로 우리를 
안내한 종업원은 방안의 조그만 나무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발은 저 통에 넣으시고, 숙박계 여기 있으니까 써서 내놓으세요. 요금은 
선불입니다.
  그는 조그만 나무통의 뚜껑을 열고 내 구두를 넣었다. 그러나 그 통은 높이가 
낮았으므로 그의 군화는 들어가지가 않았다. 나무통 위에 군화를 얹어놓고 그는 
숙박계를 적었고, 구겨진 돈을 손바닥으로 펴면서 그에게 여관비를 건네주었다.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불과 요와 베개 두 개 그리고 그 옆으로 조금 찌그러진 
물주전자와 물컵이 놓인 쟁반, 벽에는 삼성전자 대리점의 달력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방은 좁았다.
  드넓은 방이 아니어서 좋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주 작고 초라하기에 여기서 더 
어딘가로 내팽개쳐질 곳도 없을 것 같았다. 어쩐지 자꾸만 서러워지는 내게 차라리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들 사이에 놓이는 작은 탁자와 의자 두 개. 방안을 둘러보며 그런 것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네 개의 벽과 지붕,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해서는 그런 방이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아 이래서 방이라는 게 이 세상에는 있어야 하는구나.
  장마 지나고 나서 도배를 새로 했다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소리없이 웃었다. 
그러면 이 집 천정의 어딘가에 비가 샜던 것일까. 그러나 새로 바른 천정에는 아무 
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방문 옆 구석에 놓여진 그의 군화가 나를 뻔히 올려다보는 것 같았다. 왜 구두를 
방안에 놓아두라는 걸까. 신발을 훔쳐 가는 도둑이라도 있다는 걸까. 여긴 아주 
다른 세상인 걸까.
  --나 좀 닦고 올께.
  그가 말하며 방을 나갔다. 대한민국 육군 병사는 청결하다. 나는 텅 빈 방안에 
다리를 뻗고 앉았다. 잠 자고, 물 마시고, 담배 피우고... 그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 것. 그렇게 말하듯이 놓여져 있는 이불과 주전자와 재떨이를 나는 
바라보았다.
  비로소 둘만이 남았다는 그런 느낌도 들었다. 움집에 기어든 짐승들 같았다. 그 
방이 어쩐지 우리들과 참 많이 닮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를 
피해서, 바람불고 추운 벌판을 피해서 그렇게 들어와 웅크린 아주 착한 짐승들처럼 
그렇게 이 방에 누웠다가 나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 방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가 들어왔다.
  --화장실과 세면장은 왼쪽 끝이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 괜찮아, 닦고 와. 밖에 아무도 없어.
  나는 또 고개를 저었다. 무엇이 이 남자는 괜찮다는 건가. 나는 어쩐지 이제 이 
방을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이불을 깔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그가 말했다.
  --똑같구나, 베개에 뭘 까는 건.
  그때, 그가 입대를 하기 며칠 전의 밤에도 나는 여관의 베개에 스카프를 깔았었다.
  우리는 나란히 누웠다.
  무슨 말이든 해. 나 잠들 때까지 아무 이야기나 해. 전에는 내가 그렇게 말했었지. 
네모진 천정이 무늬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들의 머리 쪽으로 난 조그만 창으로 
자동차가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물었다.
  --매일 뭘 하고 살아?
  --하루 일과가 짜악 짜여져 있어.
  --매일 훈련을 받아?
  --훈련만 받을까. 청소도 하고 운동도 하고 검열도 받고... 구두도 닦고, 혁대 
장식에 광도 내지.
  --모르겠어. 어딘가 아주 다른 사람 같애. 낮에 만날 때도 그랬고 아직도 그래.
  그가 낮게 웃었다.
  --아침에 일어나 이닦고 세수하고, 저녁에 발닦고 자는 건 똑같아. 우리도 김치 
먹고, 냉수 마시고 속도 차리고.
  그래. 그렇겠지. 잘 하고 있겠지. 이 남자는 그런 남자니까. 노트필기도 깨끗이 
하고, 도서관의 책은 대출기한을 넘기는 법이 없고, 제일 안 나오는 성적이 B이고, 
약속 시간에서 30분쯤은 불평없이 기다려 주고, 그리고 늘 뭔가를 읽고 있지. 뭐든 
늘 가지런하게 놓아야 하는 그런 남자지. 그런데 저 부대라는 그 울타리 안에서 이 
사람은 무엇을 하며 그 가지런함을 살아갈까.
  그러나 나는 그것을 묻는 대신 천정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요전에 어떤 책을 읽었는데, 인도 사람들은 다음 세상에서 자기가 무엇으로든 
태어난다는 걸 진짜 믿는대.
  --그래서 네가 하루살이로 태어날 거라는 둥 그런 얘기를 했구나.
  --몇 억의 사람들이 믿는다면 그건 진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
  --힌두이즘이지. 윤회를 믿는.
  --만약 다시 태어나서 딱정벌레라든가 매미라든가 그런 게 되면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하니. 기든가, 울든가, 그러면 되지.
  --무슨 대답이 그렇게 간단해. 이렇게 생각해 봐. 다음에 나는 새로 태어났는데 
자기는 지렁이로 태어났다. 그럼 어떻게 하니.
  --뭘 어떻게 해. 난 땅 속을 기고 너는 하늘을 날고 그러면 되지. 뭐 우리 사이에 
빚진 것도 없을 테니까 서로 모르는 체하고 살면 되지. 그런데, 지렁이라... 그건 좀 
너무하다. 난 지렁이 할 바에야 자살할란다.
  --지렁이가 어떻게 자살을 하니.
  자살한 지렁이. 그런 지렁이도 있을까. 하긴, 어느 여름날 그 뜨거운 햇볕 속으로 
기어나와 실처럼 말라 죽은 지렁이들을 볼 때가 있다. 왜 그 지렁이는 축축한 땅 속 
그의 터전을 버리고 죽음의 땅, 햇빛 속으로 기어나온 걸까. 그 지렁이가 바로 
자살한 지렁이는 아닐까.
  --단 하나만은 분명해. 난 우리 아버지 아들로는 또 태어나지 않을 거야.
  --왜? 아버질 좋아하지 않아?
  --아버지를 좋아하는 아들도 있을까.
  --아닌데. 우리 오빠는 안 그런데. 아버지랑 아주 친해. 낚시도 같이 다니고, 
야구장에도 같이 갔다가 포장마차에도 들리고. 보신탕 먹으러도 둘이서 잘 다녀.
  --난 어려서부터, 내가 왜 이 사람의 아들이어야 하나. 이 사람은 어쩌자고 내 
아버지였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참 싫어했고.
  --그래, 하여튼 아무리 다른 것으로 태어나더라도 우리 지렁이는 되지 말자.
  --바퀴벌레 같은 것으로 태어나도 큰일이지. 끈끈이 같은 데 붙어서 꼼짝달싹 
못하고 죽어 봐. 그건 그야말로 개죽음이지.
  --개죽음이 아냐. 바퀴벌레의 죽음이지.
  --난 이다음에 불로 태어나야지.
  --불? 왜?
  --넌 하루살이로 태어난다면서. 그럼 내가 불로 태어나야 네가 나한테 날아와서 
타 죽지.
  --그렇게 되면 뭐야? 하루살이와 불의 정사가 되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겠지. 전생에서 서로 사랑했던 사람들이 남자는 불로 
태어나고 여자는 하루살이로 다시 태어나서 그 여자는 불에 뛰어들어 타 죽는다. 그 
긴 사연을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때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렁이의 자살. 하루살이의 정사. 누가 그 밤에 우리들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진짜 지렁이와 하루살이가 만나 떠드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우리 참 바보 같다.
  --바보 같지 않고 진짜 바보야.
  --왜?
  --여잘 옆에 두고 안지도 않고 있으니까.
  --차암 못 됐어.
  안아 줘. 그를 돌아보면서 나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남자는 몸을 
엎드리면서 머리맡의 담배를 집어들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나서 담배연기를 
내뱉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배를 깔고 엎드렸다.
  그는 가슴 밑에 나는 턱 밑에 베개를 깔고, 우리는 그렇게 엎드려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재떨이를 가져다놓았다. 내가 말했다.
  --어떤 여자 이야긴데, 그 여잔 누굴 아주아주 그리워해서, 그래서 가슴이 아파서 
똑바로 누워서는 잠을 잘 수가 없대. 그래서 잘 때는 엎드려서 잔대. 그러면 조금 
가슴이 덜 아프대.
  --네 이야기는 아니겠지.
  --또 이런 여자도 있어. 발레리나야. 아주아주 춤을 잘 춰. 정말 백조 같아. 
조그맣고 마른.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하반신이 불구야. 휠체어에서 살아야 해.
  --마고트 폰테인. 그 여자야.
  --이런 사람도 있어. 마라톤을 아주 잘 뛰었어. 맨발로 뛰어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어. 그런데 그 남자도 훗날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구가 됐어. 세상에서 
가장 빨리 뛰던 남자가 걷지도 못하게 된 거야. 그 남자도 휠체어에서 살았어.
  --이디오피아의 아베베, 그 사람이야.
  --이런 영화가 있었어. 한 여자가 한 남자와 재혼을 했는데, 그 여자는 먼저 
부인의 아들과 사랑에 빠져. 형식상으로는 아들과 어머니, 근친상간이자. 그래서 
아들은 차를 몰고 가다가 죽고 어머니는 독약을 먹고 자살해.
  --그 여자 이름은 페드라야. 희랍비극을 영화화한 거야.
  --이런 소설도 있어. 혁명을 하던 아들이 총에 맞아 죽어. 그러자 그 피가 방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가서, 길을 따라 달려서, 장미넝쿨이 우거진 담을 넘어, 
양탄자 밑을 기어서, 부엌 문틈을 지나 그 아들의 어머니 앞에 가서 서. 그러자 
어머니는 돌아서면서 소리쳐. 아 이 화약냄새!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이야.
  --이런 사람도 있었어. 반역을 했다고 집안 사람들을 잡으러 한밤에 군사들이 
쳐들어 와. 그 소란 속에서도 부인은 집안의 대를 이을 핏줄만은 남겨야 한다고 
마음먹어. 아이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유모에게 담을 넘어가라고 해. 그리고는 
갓난 아이를 담너머로 던졌어. 아이는 그렇게 해서 난을 피했지만, 담너머에서 
아이를 받던 유모의 손가락에 눈이 찔려서 한쪽 눈이 멀어.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박팽년의 이야기야.
  나는 그에게 돌아누우며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낮은 목소리로.
  --안아 줘.
  어둠이 그렇게 왔다가 갔다. 그와의 두번째 밤이.
  그리고 우리는 사랑했다.
  그가 내 옷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무슨 남자가 그렇게 침착하게 단추를 
푼담 하고 생각했었다. 그때의 그는 마치 내 옷을 가지고 매일 연습이라도 한 사람 
같았다.
  다만 브래지어의 후크를 푸는 일만은 내가 했다.

  그리고 몇 가지를 기억했다. 그의 입술이 내 젖가슴에 닿았을 때 나는 그가 아주 
뜨겁게 느껴졌었다. 그가 두 팔을 돌려 나를 힘주어 안았을 때 나는 내가 
찌그러지기라도 하는 듯이 숨이 막혔고 그 힘찬 껴안음이 어쩐지 나에 대한 그의 
열정같이 생각되었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이 작아져서 그의 안으로 조그맣게 박혀 드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지나갔다. 그렇게밖에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이, 그랬다, 
무엇인가가 지나갔다. 나를.
  이것이 또 하나의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지는 것, 다시는 만날 수도 
없고, 돌아보아도 바라볼 수 없는 것, 망각의 강을 건너 영원히 떠나는 것 그것이 
죽음이라면 이것도 또하나의 죽음이라고 그렇게.
  또 다른 의미의 이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무엇과 헤어지고 있었던가. 
정확하게 무엇으로부터의 헤어짐인지 그것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어쩐지 이전의 나와는 스스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고, 그런 마음의 
바탕에는 내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거나 나를 둘러싸고 있던 많은 것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새벽이 왔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사람들은 이 사랑에 
순결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일까. 적어도 나는 그 무엇에도 더럽혀진 것이 없지 
않은가. 차라리 더 순결해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었다.
  그리고 분명하게 하나가 남았다. 나는 이 처녀라는 데서 얼마나 불안해 했으며 
까닭없이 조바심쳤던가. 때때로 그것은 어쩐지 하루라도 빨리 벗어야 할, 철늦게 
입고 있는 겨울코트처럼 무거워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때로는 그런 무거움을 내가 
왜 껴안고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지 않았던가.
  한 여자가 한 남자와 자고 났을 때, 도대체 그 다음 맞는 세상이 무엇이 
달라진다는 것이지 묻고 싶을 때도 있었다. 언젠가는 그것 또한 일상적인 게 되는 
것이 아닐까. 밥을 먹듯이, 그렇게는 아니라고 해도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듯이, 
때때로 어딘가로 떠나고 싶듯이 그렇게 당연하고도 중요한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는 것이 아닐까.
  성이라는 것을 나는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율법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구 쓰다가 버리는 일회용의 무엇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었다. 
나는 성이나 처녀성이라는 것을 빼앗거나 훔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빼앗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주었다거나 바쳤다는 표현도 지극히 싫어했었다. 그거야말로 남성들이 
만들어낸 자기 위안이거나 아니면 대단한 오류이며 착각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품고 있던 생각에서 볼 때, 그것은, 함께 가지는 것이었고 함께 치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래야 한다고 믿었었다.
  어느 날 한 남자를 만나 이제까지 가져 보지 못했던 정서의 흔들림에 빠져들고, 
그 속에서 그 사람과 서로 닮은 점을 아니면 다른 점을 확인하면서 깊어지고, 
그리고 어느 때 '사랑해' 하고 말하게 되는 것과 아무것도 다를 게 없이, 그렇게 
치르고 겪어나가는 한 과정은 아닐까. 그렇다면 두 사람이 나누는 성의 시간도 또 
하나의 성장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말하듯, 손을 잡듯, 바라보듯 그 
모든 것과 아무것도 다를 게 없는 또하나의 아름다운 언어는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믿었었다.
  그랬기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거기에 성이라는 이름이 통행금지나 출입금지의 
팻말이 되어 서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하며 열아홉을 맞았었다. 
성이라는 것이 다 큰, 누군가를 사랑하게도 된 여자에게 어떻게 죄악이나 
부끄러움이나 금지된 땅이 되어야 하는가.

  새벽에 잠이 깨어, 빗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잠깐 눈을 붙였던가. 머리맡에 
풀어놓은 손목시계에는 아침이 와 있었지만 그러나 방 안은 어두웠다.
  빗소리는 여전히 우리들의 머리쪽 창에서 들려왔다.
  그는 내 쪽으로 알몸의 등을 돌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남자의 완강하고 드넓은 
어깨와 등을 나는 바라보았다. 숨을 쉴 때마다 그 어깨가 보일 듯 움직였다.
  군복을 입었을 때와는 달리 그 등은 튼튼했고 힘차 보였다. 나는 가만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등에 입술을 댔다. 무언가 그의 등에서 남자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도대체 나를, 내 몸을 그가 어떻게 느꼈는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떤 말로 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몸을 떼고 나서, 나는 손가락 
하나를 뻗어서 가만히 그의 등에다 썼다.
  바보.
  그때 남자가 등을 돌린 그 자세로 말했다.
  --너 지금 내 등에 바보라고 썼지.
  --놀래라.
  나는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누웠다.
  --깨어 있었어?
  --응. 벌써부터.
  --그런데 왜 등을 돌리고 있어?
  --너 좀 자라고.
  --밖에 비가 와.
  --그래, 밤새 내리고 있어.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눈에 조금 핏발이 서 있었다. 한잠도 자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잠든 여자의 곁에서 그는 무엇을 했을까. 캄캄하게 불 끈 
방에서 그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한잠 안 잤어?
  --조금 잤어. 너 자는 건 마치 석고 같더구나,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게.
  이불을 걷어차며 마구 쑤셔대며 자지는 않았나 보다 싶어, 나는 소리없이 웃었다. 
그런 말을 먼저 해주는 그가 좋아져서 나는 딴소리를 했다.
  --밤새 저쪽 방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던데, 자기도 들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마작을 하는 소리야.
  마작이 어떻게 생긴 건지 몰랐기 때문에 아하 마작이라는 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나 보다 하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가만히 내 입술을 눌렸다.
  밖에는 비가 와. 어려서 그런 노래를 불렀지. 있으라고 이슬비. 가라고 가랑비.
  옷을 입고, 세수를 하고 그리고 이부자리를 갠 방안에 벽을 등지고 앉았을 때 
나는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내 가슴의 양철지붕을 때리는 것 같았다. 하룻밤을 
잤지만 여관방은 여전히 낯설었고, 이제는 그 남자만이 아니라 나까지도 까맣고 
비썩 말라 버린 것 같았다.
  문득 갈 곳이 없는 여자. 떠나야 하지만 갈 곳이 없는 여자.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되었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하나. 이상스레 피폐해지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면서 나는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내가 우산을 사 가지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여기서? 이 방에서... 나 혼자?
  --그래. 둘이서 비 맞고 나다닐 건 없잖아.
  그가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해?
  몰라. 어제는 내가 이 방을 나간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 같았듯이 이번에는 
네가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 같애. 넌 없고 나 혼자 여기 남겨져서, 버려진 
여자처럼 그렇게 혼자 여관을 나가야 할 것만 같아.
  일어서서 나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잿빛 거리와 지붕들이 바라보였다. 등 뒤에서 
나는 그가 우산을 사러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부터... 아주 바보처럼 살아가겠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상을 안다는 
일이니까. 세상을 안다는 게 뭘까. 그건 많은 일에서 그늘과 양지를 아는 거겠지. 
우리가 흔히 더럽다고 말하는 것들 속에도 눈부심이 있고 슬픔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을 수도 있다는 그것을 아는 일이겠지. 나이를 든다는 것이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차라리 많은 것에 순응하고, 많은 것에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 나는 조금씩 
조금씩 세상에 놓여 있는 징검다리를 건너갔으면 좋겠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란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일이니까. 자기의 발걸음이나 
다리의 크기가 문제가 되지 않아. 누군가가 놓아놓은 그 돌 위를 넓은 곳은 넓은 
대로 좁은 곳은 좁은 대로 그렇게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은 말하지. 어른이 되는 일이라고.
  나는 혼자 여관방을 나섰다. 마루 바닥이 삐걱거리며 소리를 내는 복도를 걸었다.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야 나는 방안에 구두를 놓고 온 것을 알았다.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고, 어제 저녁 나무 통 속에 집어넣었던 구두를 
꺼내들었다. 방안을 돌아보았다. 무심하자.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런 방 
모양까지 내 젊은 날의 어느 구석에 화인처럼 찍혀 남아 있게 하지는 말자.

  내 앞에 와 선 그가 말했다.
  --왜 나왔니?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서울로 가 버릴까 했어.
  내가 싫어서 그래. 이런 내가. 뭔가 너한테 매달리는 거 같고, 자꾸 기대고 있는 
거 같은 내가 싫어서 그래. 그러니까 넌 몰라도 돼. 그런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나는 그의 얼굴을 피했다.
  그는 내 손에서 가방을 받아들었고 사 가지고 온 또하나의 비닐우산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가 빗속으로 나서며 말했다.
  --지금부터 할 건 다 할 거야. 밥 먹고, 차 마시고, 영화도 보고...
  영화를 보다니. 이 시골구석에서 무슨 영화를 본담. 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기 극장이 있어?
  --아니, 버스를 타고 좀 나가야지.
  흐흥. 나는 웃었다. 어떨까. 조그만 시골 읍내에 있는 영화관에서는 무슨 영화를 
틀고 있을까. 어떤 사람들이 모여 이 비오는 날 영화를 보고 있을까.
  영화라는 말에 나는 입술을 한 번 꾸욱 다물었다 놓으며 말했다.
  --좋아, 그래. 뭐든 해 우리.
  비닐우산을 펼치고 나는 빗속으로 나섰다. 바람에 실려오는 빗발이 내 한쪽 
어깨를 적셨다.
  빗속을 걸어나가며 그가 말했다.
  --한식, 중식, 일식 뭐든지 다 있으니까 말씀만 하시지요.
  --이런데 무슨 일식이 있담.
  --한식이라면 된장찌개 김치복음, 중식이라면 짜장덮밥에 오향장육까지 있고, 
일식? 일식이야 라면이지. 라면의 원조가 일본이니까.
  --괜찮아, 나. 뭔가 공연히 재미 있게 만들어 보려고 애쓰지 마. 그냥 이러고 
있어도 재미 있으니까.
  --쭝국집이 그래도 그 중 낫겠다.
  우리는 늘 일찍 문을 연다는 버스터미널 앞 중국집으로 갔고 그는 우동 하나와 
짜장면을 시켰다. 주문을 받고 돌아서 가는 종업원에게 내가 말했다.
  --짜장면은 곱배기로 주시고, 군만두도 하나 주세요.
  --아침부터 때려먹냐?
  탁자에 팔꿈치를 얹고 그에게 몸을 숙이면서 내가 말했다.
  --나도 이런 내가 싫지만, 모성본능인지 뭔지 아니면 덜떨어진 여자의 
노예근성인지는 모르겠어. 하여튼 자기 살 좀 찌워주고 가고 싶어. 이런 기분 나도 
처음이야. 그냥 그래. 그리고 만두 좋아하잖아. 그냥 그런 거야.
  --알았어. 그냥 그렇게 먹어 둘게.
  곱배기 짜장면과 군만두를 천천히 그러나 그는 다 먹었다. 그런 그를 김이 오르는 
우동국물을 후룩후룩 마시며 바라보면서, 나는 이 남자의 어디까지를 알고 있는 
걸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어젯밤 내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그를 떠올리며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11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그렇게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우선 그날 아침에 들른 다방이 그런 것을 내게 가르쳤다. 중국집을 나와 
들어간 다방에서 그는 여자종업원에게 말했다.
  --모닝커피 둘.
  모닝커피는 뭐람. 원두커피점처럼 이런 저런 커피를 준비하고 있는 집도 
아니었다. 텁텁하고 맛없는 동서식품 인스탄트 가루커피를 물에 타 내올 것이 뻔한 
집이었기에, 나는 그에게 물었다.
  --모닝커피가 뭐야?
  --맞아, 너 그런 커피 모르지. 그래서 여길 데리고 온 거니까, 일단 마셔 봐.
  잠시 후 우리들의 탁자에 설탕그릇과 함께 날라져온 커피를 나는 이마를 찡그리며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야? 이 가운데 들어 있는 거.
  커피 잔 안에는 암갈색 커피 안에 무언가 동그란 것이 담겨져 있었다. 흐흐흐 
하고 그가 웃었다. 못 된 짓이라도 해놓고 숨기고 있는 거 같은 그의 얼굴을 나는 
건너다보았다.
  그가 찻숟가락으로 그것을 휘휘 저었다. 커피의 색깔이 뿌옇게 변했다.
  --달걀 노른자위야. 마셔 봐.
  --아니... 커피에 달걀 노른자를 넣어서 마신단 말이야?
  그가 또 흐흐흐 하며 웃었다. 그리곤 그 희뿌연 커피를 소리를 내며 마셨다. 얘가 
군대 나오더니 별 야만스런 짓을 다 하고 있네 싶었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잖아.
  --이야아, 별 희한한 로마도 다 있네. 씨저나 부르터스가 이렇게 커피를 마시다가 
로마를 망쳐 먹었대?
  --그런 게 아니고, 그냥 마셔둬. 나도 처음엔 이상했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몸에 좋대. 다 건강을 위해서래.
  --넌 건강을 위해서 군대 나왔니? 건강을 위해서 날 만나니?
  나는 보통 커피를 다시 하나 시켰다. 그런 내 앞에서 그는 내 몫으로 놓여 있던 
날달걀 노른자 커피, 그 모닝커피라는 것까지 다 마셨다. 어딘가 이 남자가 많이 
변해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달라졌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새로 깐 푸른빛 도는 
식탁보 같았던 남자, 자디잔 이파리를 바람에 날리고 서 있는 나무 같았던 남자. 
어딘가 그는 옛날의 그와는 달라 보였다.

  밖으로 나왔을 때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거리는 더욱 어둡고 초라해 
보였다. 마치 비를 맞은 한 마리 들짐승처럼.
  난감해 하며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는 내 옆에서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나 목욕탕에 좀 갔다 올께.
  --갑자기 목욕탕은 왜?
  --살쪘을 거 같아서. 짜장 곱배기에 만두에 모닝커피까지 먹었으니, 좀 달아 
보려구. 거기 가야 체중계가 있거든.
  이 남자는 나를 뭔가 즐겁게 하려고 또 애쓰고 있구나. 내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랬을 거야. 너 그래서 그렇게 까맣게 되고 살도 비썩 마른 건 아니니. 그 
이상한 커피 때문에.
  그가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뚜벅뚜벅 빗속을 걸어나갔다. 내가 따라가며 소리쳤다.
  --왜 우산도 안 쓰고 그래?
  --넌 어제부터 계속 내 가죽의 색깔이며 질감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데, 여기서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어. 그런 너 때문에 내가 몇 번이나 화가 나는 걸 참았는지 
알기나 하니?
  --미안해. 한 세번쯤 화났어?
  --아냐.
  --그럼?
  --지금 처음이야.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며 얼굴을 찡그려가며 웃었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난 널 보면 이따금 화나고 싶어져. 넌 알 수가 없어. 말랑말랑 한가 하면 딱딱하고, 
꺼칠꺼칠 한가 하면 부드럽고.
  내가 눈으로 말했다. 그건 우리 둘 다가 마찬가지야.
  비닐우산을 쓰고 우리는 터미널로 갔고, 거기서 서울쪽으로 나가는 버스를 탔다. 
영화를 보러가기 위해서라고 우리는 거기에 실로 문화적인 팻말을 붙였다. 그러나 
그건 부대가 있는 그 거리를 떠나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조금이라도 더 
은성한 곳이 우리들에게 필요해서는 아니었다. 그런 번거로움이라도 받아들이기로 
한 건, 도대체 그 거리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에 앉아 빗물이 흘러내리는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면서 나는 
말했다.
  --시외버스 타고 영화 보러가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네. 무슨 영화를 하는지나 
알아?
  --알 수가 없지. 토요일하고 일요일만 하는 극장이거든.
  여긴 아주 이상한 멀고 먼 다른 나라 같아. 주말에만 하는 극장, 달걀노른자를 
타서 주는 커피. 밖을 내다본 채 내가 중얼거렸다.
  --그냥 이렇게 앉아서 멀리 갔으면 좋겠다.
  --귀대시간에 갇혀 있는 몸이야, 난.
  --탈영을 해버리면 될 거 아냐.
  --탈영은 애인이 마음 변해서 면회도 안 오고 그럴 때 하는 거야. 면회 온 여자랑 
탈영하는 군인은 없어. 애인이랑 내빼는 건 탈영이 아니라 탈옥이야.
  --애인과 탈영한 최초의 군인, 그런 남자가 되어 보는 것도 그럴듯할 텐데... 
싫어?
  --나는 단 하루도 더도 덜도 말고, 법이 정한 기간만 복무할 거야. 마음 흔들리게 
하지 마.
  --아, 영화관에서 그런 영화나 했음 좋겠다. 애인이랑 탈옥해서 내빼는 그런 
영화. 그런 프랑스 영화.
  그러나 버스를 내려 우리가 우산을 쓰고 찾아간 극장에서는 프랑스 영화를 하고 
있지도 않았고, 그런 내용의 영화는 더욱 아니었다.
  --이거라도 봐야 할까?
  그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영화는 두 팔을 앞으로 뻗친 시체들이 관에서 나와 
나돌아다니는, 말도 안 되는 '강시' 영화였다. 닭의 목을 잘라 그 피로 부적을 써서 
붙이면 죽은 듯 제자리에서 다시 조용해 지는... 그 시체들.
  무언가 포기하는 그런 심정으로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말했다.
  --미안해.
  --자기가 미안해 할 게 뭐 있어. 이 극장 주인 아들도 아니면서.
  --그래도 이 동네는 내 동네잖아.
  그 말처럼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 또 있을 수 있었을까. 그랬다. 그는 내가 알던 
그 남자가 아니라 이 동네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이 동네는 내 동네. 그 말이 왜 
그렇게도 구슬프게 느껴졌을까.
  비 오는 날 시체들을 보러, 그랬다 그것밖에 할 것이 없었기에 우리는 극장으로 
들어갔다. 극장 안은 비내리는 밖이나 별로 다를 것 없이 썰렁했다. 드문드문 몇 
사람의 남녀가 나란히 앉았고, 몇 명씩 무더기로 앉아 담배를 피워대고 있는 
군인들도 있었다. 금연 같은 건 아예 지켜지지도 않은 극장이었다.
  상영시간을 기다리며 앉아 그가 말했다.
  --여기 말이야, 이 의자 밑으로...
  그가 좌석 밑을 가리켰다.
  --쥐가 막 돌아다닌다. 엄청 큰 쥐야. 검정 고무신만 해.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그때 누구랑 같이 왔었는데? 여자야? 그 여자가 쥐를 보고 꺄악 하면서 
소리라도 질렀어?
  --안되겠군. 무슨 여자가 쥐가 나온대도 놀라지도 않는담.
  --지금 뭐라고 했어? '무슨 여자'라니... 그럼 자기는 옆에 있는 여자가 쥐 
이야기에 놀라야 직성이 풀려?
  --어쩐지 오늘은 아침을 길게 먹더라니. 가만 있다가 본전이나 찾자.
  벨이 길게 울리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낡은 화면이, 필름이 상했는지 이상스레 
푸른 빛깔 가득하게 펼쳐졌다.
  아버지 시체와 어머니 시체와 아기 시체가 길을 떠나는 데서 영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앞의 이야기가 있고 이 영화는 그 속편인 듯 싶었다. 변발을 한 아기 
시체를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앞자리에서 군인 하나가 큰소리로 떠들었다.
  --아니, 자동차 타고 가다가 일가족이 교통사고를 만났나? 한 식구가 전부 
시체야.
  극장 안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시체들을 지키며 밤샘을 하게 된 사내가 꾸벅거리며 졸았다. 그를 기다리다 못한 
애인이 그를 찾아왔다. 관이 즐비하게 늘어선 사이에 두 사람이 안고 노는 장면이 
이어졌다. 군인들은 좋아라 떠들면서 휘익휘익 휘파람을 불어댔다.
  사내가 애인과 그러는 사이 꼬마 시체마저 밖으로 나갔다가 부모를 잃고 거리를 
헤매게 되었다. 꼬깔모자를 쓴 꼬마시체가 울면서 거리를 깡충거리며 뛰어갔고 풀쩍 
담을 넘으려다가 걸려서 넘어진다. 웃음소리가 극장 안에 퍼졌다. 내가 중얼거렸다.
  --귀엽다, 쟤 참.
  --시체를 귀엽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니?
  --그래도 귀여운 걸 어떻게 하니.

    12

  그리고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다. 비는 여전히 내렸다.
  극장을 나온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랬다. 어쩌면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동물적인 시간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고, 
사랑하고, 먹고, 마시고 그리고... 즐거움으로 이야기한다. 그것밖에 없다.
  지극히 본능에 가까운 그런 것들을 두 사람이 나누어 가지는, 사랑이란 그런 것은 
아닐까. 아니면 지극히 생리적인 것만을 사는 시간인지도.
  그러므로, 사랑이란 지금 이 자리, 여기에서의 두 사람 사이의 그 순간에만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내일이라든가 먼 어느 날을 위해서 남겨두거나 
감추어야 할 그 무엇이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보낸 스물네 시간을 
통해서 나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런 것이 사랑이구나 하고. 지극히 
동물적인 어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로구나 하고.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이 남자에게 있어 나는 무엇일까. 어떤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대상일까. 그의 가슴 
얼마쯤이 나로 채워져 있는 걸까. 그리고 그 깊이는 어디까지 일까.
  군인보다도 학생이 차라리 부자인 나라잖아. 그런 말을 하며 계산을 하고 
나오다가 내가 말했다.
  --사실은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또 뭐도 뭐도 많이 많이, 그렇게 해주고 
싶었는데, 미안해. 여긴 너무 해줄 게 없어.
  우리는 각자 우산을 든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산은 하나만 쓰자.
  그가 마치 화난 사람처럼 들고 있던 우산을 접어 길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곤 내가 들고 있던 우산을 잡으며 내 어깨에 팔을 돌렸다.
  그의 팔 안에 갇힌 듯이 서서,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비닐우산의 푸른 빛 
때문에 그의 얼굴이 조금 푸르스름하게 바라보였다.
  --군인이 이렇게 여자를 안고 걸어도 되는 거야?
  --군인이 뭐 죄수인 줄 아니. 신성한 국토방위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야.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야 할 사람이 이러면 안 되잖아.
  --군인은 뭐 토요일 일요일도 없는 줄 알아.
  --없어야지 그럼.
  그가 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면서 나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바람에 빗긴 빗발이 우리들의 한쪽 어깨를 적셨다. 천천히 우리는 그 낯선 거리를 
걸었다.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로터리를 지나고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을 건너면서 계속 똑바로 앞쪽으로만 걸었다. 마치 그렇게 이어진 그곳 
어딘가에 우리가 찾아가는 곳이 있기라도 한 듯이.
  --여기서 이제 끝인가 봐. 저쪽은 논이야.
  길가의 건물들 뒤편으로 빗발에 젖고 있는 들판을 우리는 바라보았다. 한손에 
우산을 들고 다른 팔로 내 어깨를 감싸 안고 그는 말없이 그 들판을 내다보았다. 
그가 말했다.
  --반쯤까지만 따라가 줄께.
  --무슨 소리야.
  --서울, 너 가는 버스에 같이 타고 한 시간 쯤만 함께 갈께.
  내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큰 키가 들고 있는 우산의 높이 때문이었을까. 
빗발이 내 구두를 적시며 흩뿌렸다.
  --그랬다가?
  --반쯤만 같이 갔다가... 나는 내리고 너는 그냥 타고 가면 되잖아. 나는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부대로 가고.
  --길거리에서 그렇게 헤어지자는 거야?
  나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그가 말했다. 먼 들판에 눈길을 준 채.
  --여기서 널 버스에 태워 보내는 건 내가 못할 짓이야.
  갑자기 그의 말이 내 가슴에 무언가를 뒤집어씌우듯 다가왔다. 슬픔. 아프게 와 
박히는 슬픔의 조각들. 만났었구나. 그러니까 이제 헤어져야 하는구나. 어떤 이별도 
아무리 작은 헤어짐도 슬플 수밖에 없는 우리들, 혼자인 우리들.
  나는 흐려오는 눈으로 그가 바라보고 있는 먼 들판을 바라보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슬픈 이야기, 그런 생각들은 이제부터 하지 않기. 
그냥 눈물이 나게 마구마구 웃으면서만 있기. 그렇게 손가락 걸기.
  내가 말했다.
  --다시는, 정말 다시는 면회 같은 건 안올 거야.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다만 나를 안고 있는 한쪽 팔에 힘을 주었다. 우리는 
온 길을 다시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곧 휴가야, 서울에서 만나게 될 거야.
  --마찬가지야.
  --뭐가?
  --부대로 돌아가는 자기를 봐야 하기는, 마찬가지야.
  시내로 들어와 그는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두 장의 차표를 샀다.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는 나를 보며 그가 말했다.
  --신발이 다 젖어버렸구나.
  --자기가 키가 커서 그래. 우산은 쓰나 마나잖아.
  --미안해.
  --여자들은 왜 키 큰 남자를 좋아하나 몰라. 내 경험으로는 도대체가 그 남자의 
큰 키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데. 쳐다보자면 목만 아프고.
  --딱 하나 쓸모있는 데가 있지. 어디에 서 있어도 찾기가 싶거든. 사람들 목 위로 
얼굴이 쑤욱 올라와 있으니까.
  서울로 가는 버스가 들어와서 우리는 대합실을 나왔다. 일요일이어서있까. 
버스에는 빈좌석이 없었다. 겨우 자리 하나 잡아서 나를 앉게 하고 그는 내 옆에 
섰다. 그를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나도 서서 갈까 봐.
  --서울까지 가야 하잖아. 장거리 손님께서는 그냥 앉아 계시지요.
  --싫어, 나 혼자 앉아 있는 건. 이야기하기도 불편하고.
  나는 뒤쪽에 서 있는 아주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아크릴 손잡이를 잡고 그의 
옆에 섰다. 차창에는 빗물이 얼룩져 있거나 김이 서려서 밖은 아무것도 내다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정류장을 빠져나간 버스는 이내 시내를 벗어나 비내리는 들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고마워. 함께 가다가 내리겠다는 생각을 다 해주다니. 이렇게 이별도 여러 개로 
조그맣게 나누면 그 헤어짐의 농도도 묽어지는 걸까. 그렇지만 나는 오히려 더 
진해지는 느낌이 드니 어쩌니.
  어제의 만남, 그리고 저녁. 그와 함께 보낸 밤. 새벽부터 내리던 비... 그와 함께 
보낸 시간들을 떠올리며 나는 물었다.
  --어디 쯤에서 내리면 되는지 알고 있어?
  --말했잖아, 내가 여기 사람이라고.
  --난 그 말이 참 싫었어. 여기 사람이라는 말. 사람이 아주 변한 것만 같고 
그렇게 느껴져서.
  우리는 버스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손잡이를 잡고 나란히 서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요즘 학교는... 어때?
  --좀 힘들어. 시위도 많이 거칠어졌고...
  --시대상황에 대한 역작용이겠지. 민주화가 점점 어렵게 느껴질수록 이쪽의 
대응이 강해질 수밖에 없잖아. 어느 쪽이 사회의 진실이냐는 너무나 확실한데, 
현실에서는 그 진실이 죽어가고 있으니까. 넌 어때? 다 괜찮아?
  --나야 그냥 도서관에나 죽치고 있고... 시험 공부나 해. 그렇다고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지만 나 자신을 내가 잘 알아. 나는 투사가 되고 싶지는 않아. 할 수 
있다면 나는 장인이나 탐구가로 살고 싶어.
  잠시 후 그가 말했다.
  --난,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벌써?
  그가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나 싶었다. 그가 
더듬듯 내 손을 찾아 움켜쥐었다.
  --건강해야 해.
  나는 안타깝게 그를 쳐다보았다.
  --나도 내릴까 봐.
  --자꾸 힘들게 만들지 마. 난 이제 부대로 돌아가야 해.
  --그럼 부대 앞까지 따라갈까?
  고개를 저으며 그가 말했다.
  --고마웠어. 많이 즐거웠고.
  --무슨 표창장 읽듯이 그렇게 말하지 마.
  버스가 조그만 읍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부탁이야, 다들 하는 군대라면서도 하루하루 너무 힘들어 하지마. 얼굴이 참 안 
됐어. 많이 안 좋아 보여.
  --괜찮아. 극기훈련 중이다 생각하니까.
  버스가 섰다. 나는 내리는 사람 사이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버스를 
내려 창 밖에 와 섰다. 내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부대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뭘 해야 하는지 알아?
  --뭔데?
  --화장실 청소. 애인 만난 벌이야.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달려내려가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 으스러지게 그를 안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힘주어 입술을 다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금 가늘어진 빗발을 맞으며 그가 나를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천천히...나도 그를 따라 손가락을 펴서 이마에 붙이며 경례를 했다. 그리고 
소리없이 입만을 벌려서 말했다.
  사. 랑. 해.
  문이 닫히고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몸이 조금씩 차창 밖으로 
밀리며 멀어져갔다. 버스가 방향을 바꿨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나를 향해 그가 
번쩍 손을 쳐들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13

  비오고 눈 내리고, 노래가 아니다. 비라든가 눈이라든가, 흐린 아침이나 안개 낀 
저녁까지 그것이 마음에 와 닿을 때 그때 나는 알았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멀어져 가는 그 낯선 읍내의 모습도 그리고 이어진 논과 밭도 내게 남아 있지 
않았다. 서서 손을 들어 나를 보내던 그의 모습만이 남았다. 한 남자가 나를 위해 
빗속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한 
밤까지.
  비는 계속 내렸다. 그와 함께 있던 곳에도, 그와 헤어지던 곳에도 내리던 그 비는 
나 혼자 서울에 섰을 때도 내렸다. 다시는 면회 같은 건 가지 않을 거야 하고 
말했던 그 여자, 나는 서울의 빗속에 서서 자꾸만 눈시울이 흐려져서 고개를 숙였다.
  왜 눈물이 흘렀을까. 왜 그 남자를 그 벌판에 버려두고 오는 것 같았을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혼자 생각했다. 아무도 내가 저 전방부대 옆의 
거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온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리라. 그렇다. 몇 시간 만에 
이렇게 다른 세상에 내가 설 수 있는 것처럼, 몇 시간 안에 그렇게 다른 세상에서 
한 남자는 아주 다른 세상을 살아 갈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그 남자는 그렇게 거기 있으리라. 그 헐벗고 바람찬 곳에. 총천연색으로 
화장을 한 여자들이 술을 팔고, 라면을 일본음식이라고 웃으며 먹고... 언제나 
은방울 자매가 마포종점을 노래하고, 그 노래처럼 전차는 서 있고...
  이제 나는 돌아가서 웃으며 대학구내를 오갈 테고, 친구들과 맥주잔을 기울이기도 
할 테고, 밤늦은 영화관을 나와 돌아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리라. 그러면서 틈틈이 그 
남자를 떠올리리라.
  이것이 사랑인가.
  그때 나는 말하리라. 아냐. 아니라고.

  제대를 하고 돌아온 그가 내게 한 말을 기억한다.
  --나 돌아왔어.
  전화고 듣던 그 목소리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는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어디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돌아왔어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가 떠났던 자리는 어디였지?
  내가 그의 전화를 받은 곳은 종합상사 기획실의 한쪽에서였다.
  언제나 말단사원의 자리이기 마련인 출입문 앞쪽의 작은 내 책상에서 나는 컴퓨터 
단말기를 바라보면서 사내회람용 문서를 작성하며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잿빛의 
제복. 어깨 위에서 자른 생머리. 그런 모습을 하고.
  전화를 끊고 나서 복도로 나온 나는 자동판매기에서 커피 하나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종이컵을 든 채 복도를 걸어서 탈의실과 함께 붙어 있는 여자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서는 엘리베이터 걸 하나가 얼굴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모자를 쓴 
인형 같은 얼굴로.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은 근무시간에 내가 한가롭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 탈의실과 여자화장실 사이의 창문 앞.
  빌딩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내 사무실은 12층에 있었다. 바라보이는 맞은 편 
빌딩에는 밤이 되면 캄캄하게 어두워지는 창문들이 벌집처럼 나 있었고, 아주 
조그맣게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거의가 블라인드로 창을 가리고 
있었다.
  저 건너편 어디쯤에서 나 같은 여직원이 나처럼 화장실에 서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사랑했던 남자가 제대를 했을까. 그리고 
'나 돌아왔어'하고 말했을까.
  그가 돌아온 곳이 공간이라면, 서울이라는 이 도시라면 나는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타의에 의해서, 나를 떠나 군대라는 세계 속으로 걸어들어갔던 그 시간 
속에는 이미 내가없지 않은가. 그때의 나도 우리들도. 나이든 여자가, 직장여성이, 
앞날을 막막해하며 유학을 갈까 문득 떠올리고, 상대도 없으면서 결혼을 해야 하나 
남의 일처럼 중얼거리는... 그 여자는 그가 떠나갔던 곳에는 없지 않았던가.
  나는 다시 자신에게 물었다. 그는 어디로 돌아온 걸까. 군대에 갈 때까지의 
시간과 제대를 해서 돌아온 시간의 그 두 끝을 밧줄처럼 묶어서 살아가겠다는, 그런 
뜻으로 그는 '나 돌아왔어'하고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또, 무엇을 시작해야 할까.
  복학생과 직장여성이 되어... 무엇을 우리는 이어가야 할까.
  우리들만이 아니었다. 그가 다녀야 할 대학도 내가 몸 담고 있는 기업도 그리고 
우리들이 살아가며 부대끼고 있는 사회도, 우리들의 나이까지 옛 우리들이 거닐던 
그곳은 아니었다. 그는 어디로 돌아온 걸까.
  대학 앞을 지나자면 모두가 손수건을 꺼내어 눈과 코를 가려야 하는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광화문에서도 신촌에서도 최루가스에 시달리며 사람들은 길가에 
서 있는 전경들의 닭장차를 바라보았다.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가 하는 전투적인 용어로 나는 현실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누가 우리들이고 누가 남인지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 남들 속에 도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출근을 하는 아침마다 그리고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는 
밤이면 나는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이 기우뚱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가 복학을 했고, 그가 돌아왔다고 말한 자리가 어디쯤인지를 내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또 떠났다. 그 돌아온 자리에서.
  두 번 다... 그가 떠나는 자리에는 나라가 있었다. 금수강산 삼천리. 우리 나라가. 
그러나 이제는 서로 오갈 수 없이 반으로 잘린 이 땅이.
  하나가 국민으로서의 병역의무였다면 다른 하나는 실정법을 어긴 국민으로서였다. 
이십여일이나 계속되었던 학교 안에서의 농성이 전경들의 진입으로 강제해산되던 날 
그는 체포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멀고 인연없는 타인처럼 그의 이름을 보았다. 겨우 
자리를 잡고 펼쳐든 신문에서 나는 구속자 이름 속에 들어 있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그가 주동이 되어 농성을 하며 반정부 민주화 구호가 
씌어진 긴 걸개를 내걸고 있던 학교 도서관 건물의 모습을 나는 텔레비전의 뉴스를 
통해서 바라보아야 했다. 그곳은 폐허와 같았다. 전경들의 진입을 막느라 불을 질러 
온통 벽은 검게 끄슬러 있었고, 부서지고 나뒹굴고 뒤엎어진 집기들이 격앙된 
취재기자의 목소리를 깔며 비춰지는 화면을 나는 무릎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앉아서 
지켜보았다.
  그렇다. 저 현실이 우리들의 형이상학이다. 풋풋했던 젊음이다. 젊음을 막는 
수많은 철책들, 그렇다, 강변에서 박살이 나던 수박이 우리들의 형이상학이었듯이, 
'나야'하고 말하며 그가 원하던 그 첫 입맞춤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형이상학은 
저렇게 피를 흘린다. 젊다는 그것 때문에. 나는 그렇게 어금니를 물면서 신음처럼 
소리치고 있었다. 소리 없이.
  그리고, 대학 앞을 지나자면 모두가 손수건을 꺼내어 눈과 코를 가려야 하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여전히. 광화문에서도 종로에서도 신촌에서도.
  그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공판일을 알면서도 회사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회사의 
잿빛 제복과 스커트를 입고 서서 나는 결재서류에 부장이 사인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쯤 재판이 시작되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본 사무실 벽의 둥그런 
시계는 마치 무슨 절망의 구멍 같았다.
  겨우 한 번, 법정에 선 그를 보러갔던 날은 밖에 비가 내렸다. 그 빗발이 그가 
있던 전방부대로 면회를 갔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법정에서의 그는 담담했다. 당당하기보다는 담담하게 그는 걸어들어와 앉았고 
재판 내내 몸을 꽃꽂이 하고 앉아 있었고 대답은 정중했다. 그 담담함이 나를 
흔들고 떨리게 해서, 도대체 나는 그에게 무엇이었던가를 수없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저 남자를 사랑했던가. 나는 저 남자의 어느 끄트머리 부분 쯤에 묻어 
있었단 말인가. 무언가를, 그것이 생각이든 물건이든 가지런하게 정리해 놓아야 했던 
남자로서 그는 여전히, 그 수의 속에서도 가지런했다.
  재판이 끝나고 호송차로 실려 돌아가는 그를 보려고 기다렸지만 나는 끝내 그를 
만나지 못했다.
  우산을 쓰고 법원 앞길을 걸어나오며 나는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고 있었다. 부대 
앞의 그 거리는 얼마나 헐벗고 한산했던가. 그러나 그때의 우리는, 그와 나는 
새순처럼 연하고 푸르렀다.
  지금 이 법원 앞 거리는 얼마나 은성한가. 늘어선 빌딩과 간판들,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두껍게 껍질이 자라고 가지가 휜 
나무와 같다.
  무엇이 우리들의 사이에서 이렇게 질겨지고, 거칠게 무성해진 것일까.
  1년 반의 복역이 끝나고 그가 풀려나던 날 나는 싱가폴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그곳 지사에 상사를 모시고 출장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그리고 그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그가 결혼하기로 한 여자는... 나도 아는 후배였다. 작고 바싹 마른 체격에 눈 
밑으로 주근깨가 있고 좀 턱이 긴 여자애였다.
  --나 결혼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차림으로 호텔 커피숍에서 그 말을 
내게 전해 주었다.
  --이미 알고 있어.
  --미안해.
  --뭐가?
  그는 오래 대답이 없었다. 내가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말했다. 왜였을까. 내 말을 
듣고 있는 남자의 표정을 바라볼 힘이 그때 나에게는 없었다.
  --다시는 난... 너를 사랑했듯이 그렇게 많이는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거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은 진정이었다. 차라리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영원해 말하고 싶지 않은 내 진실이었다.
  --내가 너한테만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
  --그런 잘못은 없어. 서로 무슨 죄의식 느껴야 하게 살지도 않았고.
  그의 넥타이만큼만 단정하게, 나도 물었다.
  --다만 하나 알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왜 그 애랑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한 거야. 그 여자의 무엇이 널 결혼을 
하도록까지 만든 거야.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래야 하다니. 그 여자 임신했어? 그래서 책임지는 거야?
  그가 고개를 저었다.
  --결혼해야 할 거 같아서야. 그것뿐이야.
  --난 뭘 추궁하자는 게 아냐. 그냥 듣고 싶을 뿐이야. 생각해 봐. 내가 듣고 싶지 
않겠어?
  --그걸 꼭 내가 말해야 하니?
  --다만, 다만 사실적인 걸 묻는 거야.
  --사실?
  --그래. 리얼리티. 이건 언제나 네가 나한테 주장했던 거 아니니. 천박하더라도 
리얼하게 살아야 한다고.
  --면회를 많이 왔어.
  --누가? 그 여자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면회를 온 여자. 그것도 많이 온 여자. 그것과 결혼이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건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여자가 무슨 면회를 왔다는 거야? 구치소로 말이니?
  --그래.
  --어느 여자가 면회 몇 번 오나 그거 세어서 그 숫자가 제일 많은 여자하고 
결혼하려고 넌 형무소엘 갔던 건 아니잖아.
  --가족보다도 더 많이 면회를 오더구나. 어떤 때는 어머니와 함께도 오고.
  --누구 엄마? 네 엄마... 아니면 그 여자 엄마?
  --우리 어머니랑.
  화살처럼 내 속에서 뜨거운 것이 금을 그으며 지나갔다.
  --처음엔 그런 걸 느끼지 않았어. 고맙다는 정도였지. 그런데 여러 가지 물건을 
그애가 넣어주기 시작했어. 그때마다 내가 꼭 필요로 하는 걸, 마치 내가 부탁한 
것처럼 알아서 넣어 주는 거야.
  나는 탁자 바닥을 내려다보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조금씩 남다르게 그것이 느껴졌고... 그 여자에게 가는 내 마음도 그렇게 변해 
갔어.
  울에 갇힌 동물과 사육사 같은 건가. 나는 그렇게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사랑이란 어느 순간 별똥이 여름 하늘을 긋고 가듯이 그렇게만 오는 것은 아니다. 
보고 싶던 책을 알아서 골라 넣어 주는 여자. 필요할 때면 언제나 옆에 있어 주는 
여자. 다만 사람이 그리울 때 그 사람으로서 다가서 주는 여자. 그에게 그런 여자가 
될 수 있었다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이리라.
  고개를 끄덕이며 또 끄덕이며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고개를 끄덕이는 그 숫자만큼 나는 말하고 있었으리라.
  그래, 가렴. 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가려무나. 내가 너에게, 그리고 너에게 
내가 무엇이었던가를 이제와서 묻지는 말기로 하자. 그것들은 이제 시간의 강물에 
떠서 흘러갔으니까.

    14

  그렇게 겨울이 갔다. 내 추억 속의 계절에서는... 언제나 숲에는 푸르름이 
가득했고 꽃들이 피고 있었다. 새들은 높게 날았고 나비들은 들꽃 사이를 
너울거렸다. 그러나 그때의 시간을 펼쳐들던 내 계절은 겨울이었다.
  지나간 것이 아름답다고는 말하지 않으리라. 지금 이 시간도 훗날 또 그렇게 
화석처럼 굳어진다. 표본실 어딘가에 압핀으로 꽃혀 있는 나비 같을 뿐, 그 지난날도 
다만 아름답지만은 않다. 아니다.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내가 자랐을 뿐인지도 
모른다.
  은퇴한 장군이 이따금 훈장을 꺼내어 닦듯이 나는 내 지난날들을 돌아보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자신에게 중얼거린다. 너는 아직 네 젊은 날의 금도금을 닦고 
있을 나이는 아니란다.
  헤어짐보다는 헤어짐 이후가 힘들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그렇게 내 젊은 날들이 
내게서 지나갔다. 지나가고 있다.
  젊다는 것에, 시간의 매듭이나 무슨 이정표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다만 내게 
묻는 것으로 젊음에 잣대를 대어 보곤 한다. 아직도 몇 센티는 젊구나. 아니야 벌써 
몇 미터는 늙어버렸어.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던 날을 적는 것으로 이제 이 겨울 이야기를 끝내기로 하자.
  그날 저녁을 약속하면서 우리는... 그도 나도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겨울 안개가 내렸다. 그 날은.
  내 퇴근 시간에 맞추어 그는 나를 기다렸고 우리는 감정을 눌러가면서, 마치 이 
식당을 나가면 또다른 어딘가로 가야 할 약속이 있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마주앉아 
저녁을 먹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궁여지책으로 했던 출판사를 망해 먹고 나서 얼마를 그는 놀았다. 그러다가 특채 
케이스로 어느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저녁이 끝났을 때 우리는 약속이나 했던 듯이 전에 만나곤 하던 그 거리로 갔다. 
그곳은 서로의 집으로 가는 버스와 지하철이 함께 있는 로터리였다. 거기까지 와서 
우리는 헤어질 때면 서로의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었다. 늘 내가 먼저 버스를 
탔고 그는 그런 나를 지켜봐 주곤 했다. 내가 떠나는 걸 바라보아 주고 나서 그 
다음에 그는 자기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만날 때도 늘 약속장소가 그곳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도 나도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그곳에 와 내리면 되었기에.
  로터리 뒤편으로 돌조각 몇 개가 놓여 있는 공원이 있어서, 헤어질 때 아직 이른 
시간이면 그곳을 거닐곤 했었다.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찍 나온 쪽에서 그 
공원을 거닐고 있으면 되었다. 벤치에 앉아 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늦게 온 사람이 
그곳으로 가면 되었고.
  그러나 그곳은 우리가 만나거나 헤어질 때나 필요한 장소였다. 학교로 가는 
길목도 아니었고 시내쪽과는 오히려 방향이 반대였기 때문에 그를 만나지 않는다면 
그곳에 와야 할 일이 없는 곳이었다.
  우리가 그곳을 찾지 않은 몇 년 동안 그곳은 많이 변해 있었다. 재벌회사가 지어 
올린 드높은 빌딩이 로터리의 양쪽을 에워싸고 있었고, 그 건물 때문에 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도 단장을 해서, 바닥에는 무늬를 이루며 돌이 깔리고 새로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 변화를 바라보면서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서 지나간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으리라. 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를.
  --이렇게 변한 줄은 몰랐어.
  겨울 안개가 내리고 있는 공원입구에 서서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그곳 
어느 빌딩을 사러온 사람쯤이나 되는 듯이.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모르겠어.
  --많이 변해서 그래.
  --그 만두집은 어디로 갔지? 그 건물 말야. 벽돌건물.
  --저쪽 자린데... 그 건물이 헐리고 빌딩이 들어선 건가.
  --그래. 맞아.
  우리들을 묶어 주면서, 이제는 사라진 만두집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안개 속으로.
  그 만두집. 통만두를 시켜놓고 먹다가 마지막으로 하나가 남으면 서로 먹으라고 
상대편 쪽으로 밀어놓곤 하던 만두집.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했었다. 짝수인 날은 
마지막 만두를 내가 먹고 홀수인 날은 그가 먹기로.
  그랬지만 이상하게 거기서 만두를 먹는 날은 짝수 날일 때가 많았다. 마지막 
만두를 먹으면서 나는 늘 말하곤 했었다.
  --내가 살 찌는 건 순전히 짝수날 때문이야. 이거 바꾸기로 하자 응. 네가 짝수 
하고 내가 홀수 할께.
  --그건 안되지. 홀수는 남성의 이미지고 짝수는 어디까지나 여성의 이미지라구. 
의미의 기호체계가 그렇다구.
  그 자리는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만 박제가 되어 남아 
있었다.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벤치도 잎 떨어진 나무들도 돌조각도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공원은 그대로일 텐데...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
  --안개 때문이야. 안개에 가려서 그래.
  안개가 내리고 있었지만 그날 따라 날씨는 포근했다. 마치 땅이 녹기 시작하는 
어느 봄날의 저녁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야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돌조각과 
나무들 사이를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그가 물었다.
  --회사일은 어때?
  --다닐 만한 정도. 우수한 여직원일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자신을 걸고 해보자 
할 만한 그런 일도 아니고. 맡고 있는 일의 분야가 그런 거야.
  --넌 아직도 뭘 걸면서 사니?
  --할 거면, 할 수 있는 한 다하는 성격인 걸 어떻게 해. 그렇지만 다 예전 같지는 
않아.
  그래 예전 같지가 않다. 안개 속에 바라보이는 돌조각에게 말하듯 나는 속삭였다. 
그래야겠지. 예전 같아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겠어.
  그 돌조각 뒤편의 나무는, 그 늙은 후박나무는 예전 것 그대로였다. 내 마음이 
다가가 기대며 안겨들었다.
  생일이었어. 언젠가 저 나무 밑에서 그는 나에게 장갑을 선물했었지. 안개 속으로 
다가오는 나무에게 나는 말했다. 그때 나는 꽃이나 음악을 받고 싶었는데. 이 
남자는 무얼 움켜쥐라고 내게 장갑을 선물하는 걸까. 몸이 아닌 마음에 걸치는 옷, 
그런 의미에서 음악이나 꽃을 받고 싶은 내 마음을 그는 그때도 몰랐었지.
  --안개가 점점 심해지네.
  --괜찮아.
  무엇이 괜찮은가. 저 안개는 다만 안개가 아닌데.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까를 
생각해야 하는데. 저 안개 속에서.
  그가 말했다.
  --겨울 안개는 깊지 않아.
  나는 돌아섰고 그리고 말했다.
  --이제 다시는 우리가 만날 일이 없겠지.
  잠시 후 그가 대답했다.
  --모르겠어.
  --난 알아.
  --뭘?
  --네가 남의 남자라는 걸.
  내가 아니었다. 나이가, 내 나이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는 남의 남자야.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되는 거야. 그리고 나이든 여자는 남의 남자를 만나서는 안 되는 
거야.
  그때 그가 말했다. 그 겨울 안개 속에서. 그 마지막 말을 적는 것으로, 이제 이 
겨울회상을 끝내기로 하자. 그가 했던 말.
  --나는 끝내 너를 잊지 못할 거야.

  그리고 다시 삼 년이 흘러갔다. 아니, 내 곁을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그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그가 말했다.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었오. 단지 그것 뿐이오.
  그의 말투가 삼 년을 삼십 년처럼 느껴지게 했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전화를 들고만 있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나야.
  내가 대답했다.
  --네. 저예요.
  
    두번째 이야기 밤기차
  
    1. 1989년 9월 9일 나리타 공항의 비

  다시 가을이 온다. 9월이 온다.
  다 용서했단다.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거란다. 그걸 믿고 있지 않느냐. 
그때의 그 말들이 다가온다.
  자작나무를 보렴. 저렇게 살아 있지 않니. 희디흰 껍질을 벗겨 가면서 이 깊은 산 
속을 살고 있지 않으냐. 나무는 얼마나 묵묵하냐.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아무것도 
서두르지 않는다. 다만 살아서, 제 뜻을 다해 가고 있지 않느냐. 가을... 하고 가만히 
속삭여 보는 가슴속으로 그런 말들이 안개처럼 깔린다.
  그 밤에 만났던 들개도 잊지 못한다. 흐리게 달빛 깔린 길을 끝없이 뒤따라 오던 
그 들개... 저 개를 보려무나. 어디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저것은 저렇게 밤길을 
달려가겠느냐. 그러나 저 개는 알고 있단다. 누가 보아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그걸 
시키는 것도 아니란다. 그가 가야 하기에, 다만 저 개는 그렇게 제가 가야 할 길을 
가는 게 아니겠니.
  이제 돌아가거라. 가서 다만 살거라. 그래서 네가 경영하는 시간 안에 이제부터는 
평화가 움트고 조금씩 가지를 뻗게 하거라. 내가 언젠가 너를 쓸 날이 있을 때, 그때 
네가 일어서서 다가올 수 있으면 좋겠지. 그렇게 준비하거라. 날을 갈고, 깨어 
있어라.
  캄캄한 어둠 속으로, 작은 빛이 한줄기 새어들어와 내 가슴에 꽂힌다. 그리고 
나는, 아 평화... 라고 중얼거린다. 그 산에서 만났던 평화, 가득한 햇빛. 그리고 
길고 긴 밤기차.
  가을이 온다.
  덜그럭덜그럭 기차가 가는 소리가 내 의식의 레일을 흔들며 다가온다. 9월이 오고 
있다.

  나리타 공항에 나와, 중국민항의 탑승권을 들고 나는 앉아 있었다.
  그해 9월의 중국 여행은, 그랬다, 거의 예정에 없던 갑작스런 떠남이었다. 오랜 
만에 인사나 드리려고 찾아갔던 도쿄의 연구원에서,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을 때가, 떠나기 닷새 전의 일이었다. 텅 빈 벌판 하나가 갑자기 내 앞에 놓이는 
것 같았다.
  일본 도쿄의 중국대사관에서 입국 비자를 받는 것은 오히려 쉬웠다. 저쪽 
연구소의 초청장에 내 이름 하나를 더 추가하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국내에서의 여행허가였다. 미수교국 여행허가는, 특히 재외공관에서 신청할 경우 
최소한 한달은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 남은 시간은 닷새였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영사업무 담당관리의 결단을 얻어내기까지, 서류를 들고 뛰어다니면서도 이렇게 
하면서라도 중국엘 가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은 마지막까지 남았다. 관리는 웃으며 
농담도 했다.
  --뭐 그렇다고 북한으로 넘어가실 것도 아니잖습니까.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항 대합실에서 내다본 활주로는 뿌옇게 흐려 있었고 
비행기들은 빗물로 번들거렸다.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일정표를 다시 떠올렸다. 북경, 장춘, 길림, 연길, 백두산, 
상해, 서안... 그런 이름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져갔다. 중국대사관에서는 
비자를 내주면서 여권에 스탬프를 찍지 않았다. 따로 조그만 서류 한 장을 
건네주었었다. 그것을 중국 체류기간 중에 가지고 다니라는 이야기였다.
  누구와 함께 어디를 어떻게 다녀올 것인지,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한 채 떠나는 
여행이었다. 도쿄의 연구원에서 팩시밀리로, 함께 여행을 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보기는 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름을 보아서는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직업도 
다양했다.
  모두가 한국인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국적은 많이 달랐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둘, 캐나다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둘이었다. 그들은 부부였다. 
그리고 의아한 것이 신부 한 사람과 두 명의 수녀가 끼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명단을 보여주는 연구원 원장은, 그 특유의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잊지 
않았었다.
  --수녀와 신부는, 재미 없는 사람들이니까 자기들끼리 놀라고 그러고, 이 
사람들은 부부니까 그렇고... 자네랑 나랑 술이나 마시면 될 거야.
  술을 마시러 중국까지, 아직은 미수교국인 먼 나라를 찾아갈 거야 없는데요.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따라 웃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여행이 아무래도 좀 기이한 
여행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신부에 수녀라니.
  할 수만 있다면 하얼삔까지 갈 수 있기를 바랬지만 이번 여행에서 그것은 
제외되어 있었다. 안중근 윤봉길 등 일제시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었다. 나까지 아홉 사람이 떠나는 여행이었다.
  시월에 들어서면 눈이 내리기 시작하므로 금년에 백두산을 오르는 것도 이것이 
거의 마지막이 될 거야. 그런 말을 하면서 원장이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이제 들어가 볼까?
  --다른 분들은, 어디서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그 사람들은 서울에서 와서 우리가 탈 비행기로 갈아타니까 비행기 안에서나 
만나게 될 걸세.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게 여전히 마음 속에 걸림돌로 
남았다. 국제회의나 심포지엄 같은 이름으로 딱 두 번 단체로 해외여행을 한 적이 
나에게도 있기는 했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다시는 어떤 여행도 단체라면 
피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여행은 자유와 발견의 시간이었다. 그것들이 켜를 이루며 쌓여서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여행에서 자유로움과 무엇을 만나는 놀라운 체험을 
뺀다면 무엇 때문에 내가 먼 길을 떠나야 하겠는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나를 보며, 자 일어나세, 하고 원장이 말했다. 
손가방을 들며 나는 빗발에 흐려 있는 활주로를 내다보았다. 자유... 하고 나는 
되뇌였다. 그렇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떠났던가.
  --원장님.
  --왜?
  --그 가방 절 주세요. 제가 들겠습니다.
  --그래. 그러지.
  양 손에 가방 하나씩 들고, 비는 오는데... 9월인데, 중얼거리며 나는 일어섰다. 자 
중국이다. 누런 종이 쪽지 한 장을, 그 비자를 들고 중국이란다.
  탑승권을 내려다보다가 게이트 이름이 빈 칸인 것을 안 게 그때였다. 몇 번 
문으로 나가야 하는지가 안 적혀 있네요. 그러면서 고개를 드니 원장이 말한다. 
자네랑 내가 안 타면 이 비행기 안 떠나니까... 깜짝 놀라서 내가 묻는다.
  --아니. 안 가시려고요?
  --안가긴. 나는 1등석이야.
  이제 또 떨어져야 한다. 나는 이코노믹, 3등석이다.
  차라리 잘 됐다 싶다. 가서 아홉 명이 함께 만나더라도 일단 중국까지는 혼자 갈 
거 아닌가.
  단체여행이란 아주 단순했다. 방을 둘이서 함께 써야 하는 것이었다. 어디서 나서, 
어떻게 살아서, 지금 어떤 여자와 살고 있는지 모르는 어떤 사람과 어느 날 갑자기 
방을 함께 써야 한다는 그것이 단체여행이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나는 
처음에 몰랐었다.
  단체여행에서 제일 먼저 먼저 만나야 하는 것이 욕실이다. 방으로 들어서면 
손이라도 씻어야 하기 때문에, 자 우리 이렇게 이렇게 지냅시다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 욕실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거기서부터다. 둘이 뜻이 맞아서, 형이 먼저 쓰세요 하고 남은 사람이 
서울에 편지라도 쓰고 있으면 또 좋다.
  나 한 잔 마시고 자야겠어요. 잠깐 나 손만 씻고요.
  그러면, 얼음 갖다 줄까 하던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그런 룸메이트를 
만나는 게 힘들던가.
  욕실엘 들어가 보면... 슬리퍼는 다 적셔놓았지. 수건이란 수건은 전부 젖어서 손 
닦을 것도 없다. 게다가 욕실 바닥은 물 투성이, 돌아가는 비행기 있으면 거기서 
그냥 가방 싸가지고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다.
  --술안주로 우황청심환을 먹은 적이 있어요.
  --뭐라구?
  안내방송과 모니터로 겨우 출구를 확인하고 걸어가면서 내가 말했다.
  --중국을 간다니까 전에 대만 갔던 생각이 나서요. 그때 술안주로 우황청심환을 
먹었잖아요.
  내가 킬킬거렸다.
  대만에서였다. 잠들 안 오거든 내 방으로들 오세요. 저녁을 먹고 시내엘 나갔다가 
돌아오며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렇게 말했던 건 나였다. 비행기에서 산 양주가 
한 병 있어요. 그런 말도 했었다.
  그랬는데, 대만에 왔으니 대만술을 마셔야지 하면서 술을 들고 이방 저방에서 
사람들이 내 방으로 모여든 게 밤 열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어디에나 부지런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어서 누군가는 시장에 가서 풋고추 멸치볶음에 오이소박이까지 
사들고 들어왔다.
  마흔 안팎의 사내들 예닐곱이 모여 앉아서 떠들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뻔했지만 다행이 내 방에 모인 사람들은 화투를 칠 줄 몰랐다. 몇 사람이 포커를 
하기는 했지만.
  떠들며 마시는 것으로 그렇게 시작된 술판이, 취한 사람은 내 침대에 누워 
떨어지면서 1시를 넘었을 때였다. 술은 남았는데 안주가 떨어지고 말았다.
  침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벌겋게 취했을 얼굴을 하고 앉아 있다가 보니, 앞에서 
얼씬거리는 친구의 뒷주머니에 뭔가가 찔러넣어진 것이 보였다. 그 친구도 취해서 
휘청거리며 화장실에 들어가는 사이 내가 뒷주머니에 있는 것을 뽑아 보니 
우황청심원이 아닌가.
  --이거 진짜지요? 가짜 아니지요? 이거 진짜 진짜지요?
  그런 소리를 해가며, 관광객 전문의 선물가게에서 샀던 약이었다. 친구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내가 곽을 열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말했다.
  --손가락 빨고 있을 수는 없고, 이거라도 안주해서 먹읍시다.
  우리는 양주잔의 얼음을 달그락거려가면서 우황청심환을 안주로 우물우물 
씹어댔다. 화장실에 다녀온 친구에게도 하나를 건넸다.
  --안주로 괜찮은데, 먹어 봐.
  누구 약이냐고 묻지도 않고, 자기가 검도 몇 단이라는 걸 언제나 자랑하는 친구는 
내가 건네주는 약을 받았고 다 함께 우황청심환을 우물거려 가면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얼마나 지나서였다. 그 친구가 뒷주머니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가만 있어 봐. 나도 우황청심환 샀는데, 쭝국 동심당인가 어디꺼로 샀는데.
  --이게 바로 그거야.
  --우리 어머니 약을 처먹다니! 너희들 다 이리 나와.
  화장실로 도망을 치는 내 어깨를 그가 던진 베개가 날아와 내리쳤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회의는 어제로 끝이 났고 오늘은 가까운 곳을 돌아보는 
시내관광이 계획되어 있었기에 좀 늦게 식당으로 내려갔더니, 이게 웬일인가. 어느 
새 누가 그 이야기를 했는지 사람들의 화제는 술안주 우황청심환이었다.
  나이든 선배 하나가 내 눈알을 기웃거리며 물었다.
  --괜찮아, 자네?
  --뭐가요?
  --우황청심환을 먹었다면서, 술안주로.
  --네, 두 알이나 먹었는데요. 그 약 덕분인지 아침에 일어났는데 가뿐하던데요.
  --허어허어.
  선배는 웃는 건지 탄식인지 허어허어 하더니 중얼거렸다.
  --죽을려면 무슨 짓을 못 해.
  결국, 그 우황청심환이 가짜인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 저 녀석들이 살아서 
온전할 리가 없다는 것으로 결론이 나기는 했지만, 그 약을 안주로 먹었던 우리들 
몇은 그날 내내, 쟤들이 이제 비실비실 하다가 나가 자빠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반 
호기심 반의 눈길을 하루종일 받아야 했다.
  --거 봐. 가짜지.
  --맞어. 가짠가 봐.
  --어머니한테 가짜 갖다드릴 뻔했잖아. 우리가 먹어치우길 잘했지.
  --그러니까 결국 그 약이 가짜였다 그건가.
  --아니지. 가짜 진짜지.
  --가짜 진짜나, 진짜 가짜나... 가짜이긴 마찬가지잖아.
  우황청심환은 그렇게 해서 우리들에게 '가짜 진짜'냐 '진짜 가짜'냐 하는 논쟁 
아닌 논쟁거리를 만들어주기는 했지만,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웃을 수밖에 없는 
나였다.
  원장이 말했다.
  --그래, 가짜는 가짜였나 보다.
  --아니예요. 그냥 가짜가 아니라, 진짜 가짜였던 거 같아요.
  보안검색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드넓은 대합실 한 쪽을 가리키면서 
원장이 말했다.
  --저어기 있는 저 사람들인데. 우리 일행이야.
  원장이 가리키는 곳에 남자 셋이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 몇 
주일을 함께 보내야 할 그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들이 든, 
초로의 남자들이었다. 가방이나 열심히 들어드리면 되겠구나.
  우황청심환은, 그러고보면 단체여행의 절품이었다.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들이 
많았던가.
  치약에 면도기까지 내 것만을 쓰는 사람과 함께 며칠을 지낸 적도 있었다. 물론 
그는 담배도 철저하게 내 것을 피웠었다. 같은 방을 쓰게 된 사람이 잠옷을 입지 
않고 호텔방안을 오락가락 하는 것을 참아주는 데는 또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했던가.
  무엇을 샀다 하면 내게서 돈을 꾸는 것까지는 그럴 수도 있으려니 생각한다. 미쳐 
챙겨가지고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 돈은 잃어버린 돈이지 꾸어준 
돈이 아니다. 갚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에게, 저어 샹제리제에서 18불 꾼 
거... 혹은, 저 면세점에서 30불 빌렸던 거 좀 갚을래요? 했을 때, 아주 태연한 
얼굴로, 그랬던가? 내가 꿨단 말야? 할 때의 난감함이라니.
  어디 그것 뿐인가.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거기서 또 벌어진다. 남의 
가방을 풀어보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들고 간다, 뭔가 내 가방에서. 그렇게 
잃어버린 술이 프랑스에서 있었고, 그렇게 잃어버린 책이 인도에서 있었다.
  왜 그렇게 되어가는 것일까. 종로 어디를 걷다가 서로 점심을 사겠다고 하고, 
영동의 술집에서 한잔을 끝냈을 때 이차를 자기가 사겠다고 먼저 앞장서던 
사람들이, 이상스레 외국에 나가면 한순간에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어제밤 잠을 자지 못했던 나는 원장의 옆에 걸음을 멈추면서 말했다.
  --저 잠깐 가서 뭘 좀 마시고 오겠습니다. 어찌나 목이 마른지.
  스낵바로 걸어가면서 나는 지금 저기 앉아 있는 남자들이 제발 편한 사람들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물은 쏟아진 거 아닌가. 아니 이미 막이 올라버린 연극이 
아닌가 말이다.
  많지 않았던 그 단 두 번의 단체 해외여행, 정말 다시는 이런 부자유와 불쾌를 
스스로 찾아나서지는 않으리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쩌다가 이번에 이런 
단체여행에 또다시 내가 발을 담갔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번에 이런 단체여행에 
또다시 내가 발을 담갔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번에 함께 가는 사람들은 정말로 그가 
누군지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오렌지 쥬스 두 잔을 거푸 마시면서 갈증을 달랜 나는 원장이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원장의 뒤쪽에 가 섰다. 서울에서는 잘 떠났는지, 
여기 와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원장이 그들 가운데 흰 
머리칼이 가장 많은 사람에게 물었다.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은 어디?
  여자들이라니? 등 뒤에 서서 원장의 말을 들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왜 그 생각을 이제까지 못하고 있었던가 싶었다. 이 
여행에는 여자들이 있었다.

  낯선 사람들과의 단체여행이라는 것 때문에 나는 내내 그것만을 생각했었다. 그 
불편함만을. 그러나 함께 가는 우리들 아홉 사람 가운데는 여자들이 네 명이나 끼어 
있었다. 부부여행을 떠나는 부인들이 둘 그리고 수녀가 둘이 아니었던가. 그것을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가 하얀 사람과 원장은 서로 말을 놓는 사이였다. 머리 흰 남자가 말했다.
  --여자들은 안에 있고 우리만 잠깐 나왔어.
  --비행기 안에서 뭘해, 갑갑한데 나와 있지 않구.
  중얼거리듯 말하고 나서 원장이 물었다.
  --수녀님도 다 왔고?
  --아 그럼. 그분들이 지금 얼마나 중요한 일을 가지고 거길 가는데. 제일 
설레면서 보챈 분들이라구.
  나는 원장의 나이가 얼마나 될까를 잠깐 생각했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보다는 
물론 밑일 것이다. 그러나 원장에게는 내 나이쯤 되는 아들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여기 함께 가는 이분들도 모두 지금 예순 안팎의 나이들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비로소 생각난 듯이 원장이 몸을 돌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웃으며 손짓을 해 나를 불렀다.
  --미스터 한. 자네 이리 와 인사하지 그래.
  내가 다가서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고개를 숙이며 낮게 내 이름을 말했다. 
원장이 그들을 내게 소개했다.
  --이쪽이 우리랑 함께 갈 사람이고... 누구부터 소개를 할까. 여기 계시는 분이 김 
신부님이시네.
  신부. 그러나 그는 로만컬러가 하얗게 드러나는 검정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노타이차림이었다. 얼굴도 온화해 보인다기보다는 어딘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나이도 원장이나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이쪽은 조윤상 선생이고 이쪽이 박영수 선생이시네. 우선 이름이나 
알아놓고, 하루 이틀 함께 있을 것도 아닌데 다른 건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지.
  점잖아 보인다는 말처럼 부정확한 아니 불확실한 표현도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 
두 사람의 얼굴에서, 점잖게 늙어가고 계시는 분들이구나 하는 인상밖에 더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이 신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일어나지. 더 있으면 뭐해. 들어가지.
  중국행이어선가. 비행기에 오르며 나는 손님들이 거의 동양사람이라는 것에 우선 
놀라고 있었다. 서양사람은 10퍼센트 정도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좌석번호를 확인하고 나서, 나는 일행들과 떨어져 뒤쪽으로 걸었다. 비행기 
안에서의 좌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원장을 빼놓고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걸 그때 나는 알았다. 모두들 앞쪽의 금연석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는 거의 만석에 가까웠다. 흡연석만이 드문드문 빈자리가 보이고 맨뒤쪽 
화장실 앞 자리들도 비어 있었다.
  나는 혼자 흡연석인 내 자리로 찾아가며 담배 때문에 고생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무심히 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의 불편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낯선 사람들. 금연자들. 부부와 수녀 그리고 신부. 어쩌면 이렇게 불편함의 팀을 
짜기도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이거야 함께 여행을 하기에 가장 껄끄러운 사람들이 
아닐까. 게다가 이 사람들은 나이까지도 나보다 훨씬 위가 아닌가.
  좌석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매면서 나는 불이 들어와 있는 금연사인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인사를 나눈 일행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르지. 전부 
술이라고는 한잔도 못할지도 모르지. 뭔가 잘못 걸렸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머리가 하얗던 박영수 씨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뼈없는 사람 같은 웃음을 
웃었었다. 몸도 좀 난 편이었고, 웃옷으로 긴팔 셔츠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조윤상이라는 분은 그가 입고 있던 옷차림만큼이나 얼굴도 아주 단정해 보였었다. 
그는 잔 물방울 무늬의 넥타이에 양복을 입고 있었다. 어딘가 좀 엄격해 보이던 
신부의 얼굴이 그 위에 겹쳐졌다.
  방법이 없었지 않냐. 이제 와서 어쩌자는 거야. 나는 스스로를 달래듯 자신에게 
속삭였다. 언제 중국과 국교가 이루어질지 모르는 상태고, 이렇게 갈 수 있는 기회도 
쉬운 게 아니니까. 그래서 작은 불편을 감수하면서라도 가고 싶다는 생각에서 
결정했던 일이 아니냐.
  비행기가 곧 이륙하겠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올 때까지 나는 그렇게 앉아서 비 
내리는 나리타 공항 활주로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수녀들은 어디 있는 거야. 목을 빼고 앞 좌석 이쪽 저쪽을 흘끔거렸지만 
어디에도 수녀들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제주도의 이시돌 목장에서 만났던 
수녀의 얼굴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아... 그 수녀님.

  그때 수녀님을 만났던, 그날도 비가 내렸었고 앞이 안 보이게 짙은 안개가 
한라산을 휘감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는 이슬비가 엷게 뿌리고 있었다. 제주에 살고 있던 그 무렵, 한가한 
때 늘 가곤 하던 제주도의 서쪽에나 좀 다녀올까 하는 생각에서 차를 몰고 나섰던 
길이었다. 그랬던 것이, 가는 도중에 갑자기 한라산 쪽으로나 올라가 볼까 하는 
생각에서 들어선, 처음 와 보는 낯선 길이었다.
  라이트를 켜도 2, 3미터 앞도 안 보이는 안개가 길 위에 휘몰리고 있었다. 
무섭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안개였다. 그 안개 속을 클랙슨을 울리며 
올라가다가였다. 이런 길을 간다는 게 아무래도 무리가 아니가 싶어서 길가에 차를 
세웠다. 내년이면 유치원에 들어갈 딸 아이는 옆자리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안개가 걷히기 십여 분 기다렸을까, 마치 환풍기로 연기를 뽑아내듯 차 주변의 
안개가 밑으로 휘몰려가면서 시야가 드러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이 어딘가 
싶었다. 나는 목장 한가운데 들어와 있지 않은가. 길 옆으로는 목책이 둘러쳐져 
있고 거기서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멀리 얼룩무늬의 젖소도 보였고 
앞쪽으로는 빨간 지붕을 한 건초창고도 바라보였다.
  낯선 길을 천천히 차를 몰아 샛길로 들어섰을 때였다.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목책 
저편으로 갑자기 서양식 묘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야기로는 듣고 있었다. 이시돌 
목장은 어떤 수녀원에서 운영을 하는 곳이라고.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양털로 짠 
의류들은 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묘지의 돌비석을 바라보며 조금 더 돌아가자 크지 않은 성당이 바라보였다. 이제 
안개는 걷혀있었다. 잠시 깬 딸아이를 데리고 나는 차에서 내렸다. 바람도 쐬일겸 
작은 그 성당 주변이나 한바퀴 돌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니 차 
안에서는 듣지 못했던 오르간 소리가 성당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빠. 우리 들어가 보면 안 돼?
  딸애가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 우리가 천천히 성당 입구로 다가가는 것과 함께 
오르간소리도 점점 크게 들려왔다. 곡명을 알 수 없는 그 성가는 어딘가 소리들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는 것 같은 그런 부드러움으로 우리를 감쌌다.
  오르간소리는, 입구에서부터 계단을 이루며 지하로 이어진 성당 안에서 울려오고 
있었다. 제단 가까이 아랫쪽에서 몇몇 수녀들이 띄엄띄엄 앉아서 윗몸을 숙인 채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바라보였다.
  그때였다. 한 여자가 다가오며 물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여자는 검정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수녀복은 아니었다. 여자의 눈이 참 
맑아 보였다.
  딸애의 손을 잡고 서서 내가 말했다.
  --지나가다가 그냥 들렸습니다. 오르간소리가 좋아서.
  --올라오세요.
  --그래도 됩니까.
  여자의 얼굴에 낮게 웃음이 번져갔다.
  --그럼요. 저쪽 방에 들어가 쉬었다가 가세요.
  그럴래? 나는 딸아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 
낮선 친절에 놀라워하면서 여자가 안내해 주는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십자가 
하나가 걸려 있을 뿐인 벽면은 담백했다.
  흰 색이었다.
  창가에 화분이, 무슨 풀인지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자라고 있었다. 길게 소파가 
놓여진 옆으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어서 마치 무슨 상담실 같은 느낌을 주는 
방이었다.
  창밖의 안개와 화분에 심어진 풀과 희디흰 방안의 벽을 둘러보면서 나는 
딸아이에게 여기가 수도원이라는 곳으로, 수녀님들이 살고 있다는 말을 해주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였다. 좀전의 그 여자가 두 잔의 흰 우유와 과자가 든 
접시를 가지고 들어섰다.
  아이 앞에 과자를 놓아주면서 그녀가 말했다.
  --잠시 후 원장 수녀님이 오실 거예요.
  --아닙니다. 이렇게 폐를 끼치려던 게 아닌데요. 무슨 불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얼굴을 붉히며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여자는 또 소리없이 방을 나갔다. 
흰 우유를 마시며 잠시 앉아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는데도 노크소리를 내며 수녀 
한 분이 안으로 들어섰다.
  --제가 원장 수녀입니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세속적인 아름다운의 기준으로 볼 때도 그랬다. 그리고 다만 
눈과 코와 입모양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이름할 수 없는 힘이 도금되어 
있었다. 교양이랄까, 무엇을 이룩한 사람의 자신감 같은 것이 잔잔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그렇게 평화스럽게 보이도록 할 수가 없었다. 나이는 서른 중반쯤일까. 
그러나 전혀 무엇으로도 나이를 가늠할 수는 그런 모습을 나는 황홀해 하면서 
바라보았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고, 나는 내 소개를 하면서 제주에 내려와 있게 된 그간의 
사연 같은 것을 지나가는 말처럼 했다.
  수녀가 말했다.
  --자기가 자신을 유배시키셨네요.
  스스로를 유배시킨 자,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을 이 먼 섬으로 유배시키고 있었던가. 
수녀님의 말을 들으며 나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안개가 또 
짙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관상 수도원이랍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수녀님의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아름다운 눈을 
바라보았다.
  관상수도원. 기도만으로 하루를 보내는 수도원을 그렇게 불렀던가. 기도만으로 
하루하루가 쌓여서 네 계절이 가는 수도원이었다.
  관상이란, '직관'으로 하느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을 가톨릭에서 그렇게 
불렀다.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 하느님에게로 가는 행위였다. 그래서 흔히 영적 
생활의 가장 높은 경지라고들 말했었다. 많이 알려진 카르멜 수도원도 관상 
수도원이었다. 이곳 글라라 수도원처럼.
  고독과 침묵 속에서 기도와 명상만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쳐가는 
이들의 수도생활은 그래서 외부와 폐쇄되기 마련이었다. 교회의 일을 한다던가 다른 
사회적 봉사활동을 하는 수녀들과는 달리 이들 관상 수도회는 사도직 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수녀님 개인적인 것으로 옮겨갔다.
  --저는 학교 다 다니고, 미국에 유학가 공부하고 있다가 수녀가 된 걸요.
  그 말 끝에, 저는 안동 권씨예요, 하고 수녀님이 말했다. 나는 세속을 떠나 사는 
수녀에게 안동 권씨라는 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생각하며 소리없이 웃었다. 
그때 수녀님이 딸아이에게 물었다.
  --우유 맛 있지?
  딸아이가 흰 우유를 마시느라 입가에 하얗게 우유를 묻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 
마셨기에 내 앞의 우유컵은 비어 있었다.
  --참 신선하네요.
  --그렇지요? 이 과자도 우리가 여기서 다 만드는 거예요. 꼬마야, 우리가 만든 
과자란다. 맛 있지, 그렇지?
  딸아이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수녀님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여기는 우리들이 자급자영을 해요. 모든 걸 우리 수도원에서 만들지요. 물론 
목장 일도 전부 우리 수녀님들이 하고요. 트랙터 같은 것도 전부 수녀들이 몰고, 
물론 젖소 새끼 낳는 것도 우리가 다 받지요.
  딸아이가, 정말? 하며 깜짝 놀라듯 나를 쳐다보았다.
  글라라 수도원.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자기들 손으로 하면서 기도와 
묵상으로 살아간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일까지 하는가 싶었다. 아이를 보며 
수녀님이 말했다.
  --정말이란다. 어제는 한밤에 자동차 헤드라이트 켜놓고 젖소새깨를 받았단다. 
그런데 참 놀랍지요. 마악 낳은 새끼가 비척비척 넘어지는가 하더니 금방 똑바로 
서서 젖을 빨고, 그러니까요.
  청바지 입고 장화도 신고... 목장에서 일하는 수녀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이곳에서 
기른 양털로 짜내는 옷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다. 마을의 아주머니들도 그런 일들 
한다고도 했다. 그 아주머니들의 세상 사정을 들어주면서,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이슬비 내리듯 가슴을 적셔가면서 들었다.
  여전히 오르간 소리가 들려왔다. 안개 속에서 잘못 들었던 길, 갑자기 눈에 띈 
양떼와 성당, 그리고 오르간소리에 뒤섞이는 아주 나즈막한 수녀님의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울려, 길을 잘못들어 찾아들어오게 된 우리를 따뜻이 감싸주는 
것 같았다.
  --이 자연과 나와 하느님과의 일치, 그 하나됨이 제 뜻이랍니다. 나와 하느님과 
이 자연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한답니다.
  후두둑 후두둑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그 말이 내 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수녀님의 그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오래 있었던 
건 아닐까. 수녀님은 남은 과자를 종이에 싸서 딸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밖으로 나와 인사를 하고, 나는 딸아이와 함께 성당 한쪽에 세워 놓은 차를 향해 
빗발을 맞아가며 뛰어갔다. 차를 몰아 성당구내를 빠져나오며 바라보니 수녀님은 
아주 연하게 쑥색빛이 도는 옷에 검정스웨터를 걸친 모습으로 성당 문앞에 여전히 
서 계셨다.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이 백미러로 바라보였다.
  목장을 옆으로 끼고 천천히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문득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난 여름 교리 공부를 하며 성당엘 나가다가 
그만둔 예비신자입니다 하고. 두 달쯤 계속되었던 일이었다. 매주 목요일 저녁 
사제관으로 가 교리공부를 할 때의 노트가 9회까지 이어지고 끝나 있는 것을 나는 
기억했다.
  이 자연 속에서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 비 내리는 한라산을 끼고 산을 
내려오며 나는 몇 번이나 그 수녀님의 말을 떠올렸다. 나와 자연과 하느님과, 그렇게 
셋이서 하나가 된다. 그건 얼마나 크고 엄청난 말인가.
  그래 그 수녀님을 떠올리며, 나는 비내리는 활주로를 내다보았다.
  그 말은 오래 가슴 속에 남았었다. 무엇과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이 무엇이어도 좋다. 저 강물과 아니면 저 
바람과 하나가 된다고 하자. 풀과 바람과 안개와... 자연 속에서 그 분은 하느님과 
자신이 하나가 되기를 꿈꾸며 묵묵히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며 나 아닌 
무엇과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진정한 모습이 아니랴. 이따금 
그 수녀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글라라 관상 수도원은 내 
기억 속에 어떤 환상처럼 아름답게, 불로 지지듯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활주로 저편에 서 있는 비행기들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런데. 중국까지 여행을 가고 있는 얼굴조차 모르는 일행 속의 수녀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활주로로 빠져나가기 시작한 중국민항기가 태국항공 옆을 지나갔다. 저 짙은 
보랏빛 로고가 양란이었던가. 태국항공 비행기 동체에 그려진 꽃무늬를 나는 
바라보았다.
  태국이라면 나와는 아무 구체적인 인연이 없는 나라였다. 유일한 만남이라면 몇 
번인가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서 그곳 방콕 공항에서 기다린 것이 전부였다. 
시간을 보내느라 아무것도 살 생각이 없으면서도 공항 안 면세점을 돌아다니자면 
어떻게 한국인임을 알아봤는지, 점원 아가씨들이 서툰 우리말로 말하곤 했다.
  --상아. 상아.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린가 했다. 아하 그렇구나. 한국사람들이 여기서 상아로 된 
도장들을 많이 사가는 모양이구나. 작고 가무잡잡한 얼굴로 아가씨들은 그렇게 
상아를 외쳐댔고, 때로는 '지이갑 지이갑' 하면서 손짓을 하기도 했다. 지갑도 많이 
사나 보다 싶었다.
  그런 태국이었지만, 나에게는 '착한 태국소년'이라는 좀 긴 별명이 있다. 어느 
연극배우가 붙여 준 별명이었다. 얼굴 까맣고 눈이 커서 그런 별명을 붙였겠지만 
그래도 그 분이 그 앞에다 착하다는 말을 얹어 주어서, 이따금 나쁜 태국소년은 
어떻게 생겼을까, 혼자 웃곤 했었다. 그러고 보면 검은 피부의 큰 눈, 거기다 
여름내내 제주 바닷가에서 까맣게 탄 내 얼굴 때문에 누군가는 처음 만나 인사를 
하면서 내가 '폴리네시안'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폴리네시안. 남방계 인종의 
하나였다. 얼굴 까무잡잡한.
  창 뒤쪽으로 멀어져가는 그 보랏빛 꽃모양을 보며 나는 혼자 웃었다. 정말로 
태국사람이 된 적이 있지. 그때 서울로 돌아오면서 방콕에서 갈아탄 비행기가 바로 
저 태국비행기, 타이에어라인이었다. 착한 태국소년이, 별명이 아니라 말 그대로 
태국사람이 되었던 순간이었다.
  방콕 공항을 떠난 비행기가 얼마쯤 날고 있을 때였다. 음료 서비스를 하러 온 
스튜어디스가 내게 무어라고 말을 거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멀거니 그 가무잡잡한 얼굴을 쳐다보다가, 내가 영어로 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갑자기 스튜어디스가 얼굴을 붉히더니, 익스큐스미 하고 말했다. 통로 건너편에 
앉았던 태국인이 킬킬거리며 웃어댔다. 스튜어디스와 그 남자가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떠들기 시작했다.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 스튜어디스는 나를 자기네 나라 사람 태국인인 줄 알고 
태국말을 해버렸던 것이었다.
  그때는, 한 달 넘게 인도를 헤매고 다니느라 얼굴은 더 까맣게 탔고 머리까지 
길게 기르고 있었을 때였다. 자기네 나라 사람처럼 보였다는 게 어이없어서, 나는 
한국인입니다 하고 말하면서 웃고 말았지만 결코 기분 좋은 체험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태국사람이람, 더 그럴 듯한 나라도 이 세상에 많은데.
  활주로로 나선 비행기가 이륙을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비행기가 뜰 때와 내릴 때가 가장 기분 나쁜 시간이었다. 
몸이 어딘가 끝도 없는 곳으로 가라앉는 그런 느낌 속에서, 가능한 한 비행기는 
타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언제나 그때였다.
  어떤 나라를 떠날 때, 내가 다시 이곳에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는 막연한 느낌 
속에서 조금은 우울해지는 때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면, 언제든 다시 오리라 
하는 약속을 자신에게 하면서 낯선 것들에 눈 뜨게 해준 그 나라에 고마워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그네의 쓸쓸함마저도 비행기가 뜰 때의 그 불쾌감을 억눌러 
주지는 못했다. 언제나 그랬다.
  고도를 높인 비행기가 경쾌한 금속성 소리를 내면서 금연사인을 껐다. 기다렸다는 
듯 나는 담배를 꺼내물었다. 비행기가 뜨고 나서 피워 무는 첫 담배, 이건 기내에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 아닐까.
  천천히 연기를 뱉아내며 생각했다. 중국은 어떤 땅일까.
  오랜동안 중국특파원을 지낸 어떤 미국 언론인이 썼던 중국에 관한 책의 첫줄을 
나는 인상깊게 기억했다. '쥐털 같은 어둠'이라고 그는 썼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밤의 북경은 쥐털 같은 어둠으로 감싸여 있다고.
  그럴까. 이제 나를 맞을 북경도, 그 밤도, 쥐털 같은 어둠이 감싸고 있을까. 
먹물처럼 짙은 것도 아니고 안개가 휘몰리는 듯한 그런 어둠도 아닐 것이다. 쥐털 
같은 어둠이란.
  쥐털 같은 어둠으로 감싸여 있을 북경을 떠올리려 했지만, 그 무엇도 확실하게 
떠올려지지가 않았다. 공해에 찌든 하늘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쥐털 같은 
어둠이란 무엇일까.
  앞자리의 두 중국인이 떠드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행기 
안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몇 가지밖에 없다. 하늘 위에 갇혀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만큼 제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화장실과 통로와 자기 좌석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공간이다.
  비행기에 타고 있을 때처럼 무언가를 읽는다는 행위에 대해 고맙게 느껴질 때가 
또 있을까. 사람이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렇게 한정되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도 그때이다.
  무언가를 읽고 있는 일을 빼고 나면, 날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세 가지였다. 술을 마시거나, 자거나, 떠들었다.
  그런 속에서, 주변을 흘끔거리며 지갑을 꺼내 돈을 세는 사람들이 있다. 아 저 
사람은 남의 나라에 가는 비행기 여행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해서 틀릴 
게 없다.
  지친 듯 잠에 골아떨어진 사람도 있다. 아무데서나 잘 자는 사람, 부러울 뿐이다. 
시골여행을 가서 베개만 바뀌어도 잠을 못 자는 나 자신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는 
순간이다.
  내내 옆 사람과 떠드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다만 소음일 뿐이다.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자기네 나라의 말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나는 두 가지를 했었다. 뭘 읽고 앉았거나 술을 마셨다. 그러나 동경에서 
북경은 겨우 세 시간이다. 겨우 세 시간 남짓이라는 생각을 하자 술을 마실 마음은 
아니었다.
  음식냄새를 풍기며 스튜어디스들이 기내식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뭘 먹으면 좀 
졸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음식을 받아 놓고 앉아서 나는 포도주를 마셨다. 
스튜어디스가 입고 있는 중국옷을 보며 문득 생각한다.
  나에게 있어 중국은 무엇이었던가.
  내 안에 있는 중국이란... 겨우 짜장면집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 중국집 할머니의 
작은 키도 중국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는 입고 다니던 검정옷과 뒤뚱거리던 
안짱다리 걸음도 나의 중국이었을 것이다. 중국집에서 먹던 군만두도, 손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떠들어대던 중국말도, 그렇다. 나의 중국이었을 게다.
  장정... 하고 그때 나는 문득 떠올렸다. 먼 길과 긴 싸움, 긴 추격과 도주, 기나긴 
배고픔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길. 내 의식 속에 가장 깊이 박혀 있는 중국은 책으로 
읽은 그 기나긴 싸움들이 아니었을까. 옛 중국의 역사만이 아니었다. 가깝게 일본이 
물러간 다음에 이어지는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과의 긴 싸움도 중국이라는 대륙의 
크기를 느끼게 했었다. 말을 달리면 경주에서 부여까지 며칠이나 걸릴까. 이 좁은 
땅에서는 그러므로, 장정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기나긴 싸움이 있을 수 없다.
  짜장면이나 군만두 같은 구체적인 것을 벗어났을 때 내 의식 안에 자리잡은 
중국은, 그러한 크기는 아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영화감독 나운규와 그의 
시대를 생각했다.
  한때 나운규에 관한 글을 쓰려고 그가 살았던 그루터기들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취재였다. 그가 자란 곳, 그가 살았던 곳을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에 그를 되살려내는 일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어린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느꼈던 것도, 중국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넓이와 같은 그런 크기였다. 집에서 돈을 훔쳐 도망을 가면, 종국이나 
러시아였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그들은 그렇게 갔다. 스무살도 되지 않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중국땅과 러시아를 오가며, 성병을 체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 
산간지방의 민가에 숨어들어 매독을 치료하며 겨울을 보내기도 했었다.
  이제는 돌아가신 충암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학교앞 중국집에 앉아 
배갈을 마셔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분은 나운규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분이었다.
  그 시절의 청춘은 넓이가 있었구나 하는 감동을 그때 느꼈었다.
  집을 나가서, 하룻밤만 자면 와 닿는 서울역이 아니었다. 두만강을 건너가서 
그들은 중국땅을 헤매고 러시아를 들락거리며 비단장사도 했었다. 대학입시 
학원이나 오가는 청춘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어깨를 쳤다. 올려다보니 원장이었다. 기내에서 벌써 한잔 마셨는가. 
버얼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원장이 말했다.
  --한잔 하지 그래? 술을 마시려면 독한 걸 마셔야지.
  --좋습니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는지 궁금했다.
  비행기가 갑자기 흔들렸다. 이어서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상관계로 기체가 
흔들리고 있으니 손님들은 자리에 앉아 주시고 안전벨트를 매라는 투박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비어 있는 내 옆자리에 앉는 원장에게 내가 말했다.
  --북경에 내리면 바로 호텔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네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로 가는 도중에 어디선가 저녁을 먹어야 할 걸. 이 시간의 이 비행기를 
타면 언제나 그렇더라구. 안내하는 사람들이 나와 있을 테니까, 그 사람들에게 
맡기면 돼.
  우리가 나누어 받은 일정표에도 첫날은 북경에 도착해서 잠을 자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었다. 밤에 내리니까, 밤에 내리는 도시에서는 늘 그렇지. 
어둠과 불빛밖에 아무것도 만날 수가 없지.
  비행기가 또 기우뚱거리듯 흔들렸다. 원장이 장난스레 웃었다. 늘 느끼는, 특이한 
웃음이었다. 함정을 파놓고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빠지기를 기다렸던 아이들의 
웃음이 저렇지 않을까 싶은.
  --수녀들이 비행기 떨어지나 하고 겁먹겠군 그래.
  --어느 쪽에들 앉으셨나요?
  --저쪽 앞에. 내리거든 그때 서로 인사하면 될 테고... 그래 기분이 어때? 중국을 
간다 하니까 뭐 특별하게 생각나는 건 없어?
  --다른 거 보다, 우선 참 중국을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옛날 중국이야 
역사로나 아는 거고, 그 이후의 중국은 우리와는 아주 그렇게 멀 수 없는 
나라였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원장이 말했다.
  --워낙 나라가 크니까 사람들도 커. 그렇게 생각하면 돼. 예의 바르고. 사는 거는 
물론 못 살지. 우리 나라 육이오 끝났을 때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만 그렇다고 못 
산다는 거 때문에 자존심이 없다거나 하지는 않고. 내가 더 얘기하지 않는 게 
좋겠지. 자네가 직접 볼 테니까.
  크다는 건 사람들의 키가 크다는 뜻은 아니리라. 그렇다면 무엇이 그곳 사람들을 
커다랗게 느끼게 하는 것일까. 스케일을 두고 그렇게 말하는 건가.
  중국과 일본과 한국을 비교하면서 늘 그 문화의 바탕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었다. 
무엇이 같고,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것이 건축물이었다. 
건축물로 상징되는 삶의 재료였다.
  중국의 돌, 일본의 나무 그리고 한국의 흙. 그 세 가지를 나는 늘 세 나라의 
특징으로 이해하려 했었다. 흙과 돌과 나무. 이 세 가지처럼 동양의 세 나라를 
선명하게 구별짓는 것도 드물지 않나 싶었다.
  한국은 흙의 문화였다. 집을 보아도 흙집을 짓고 살았다. 흙으로 된 집에서 
흙으로 구워낸 그릇에 밥을 담아 먹으며 살았다. 벽도 바닥도, 한국의 건축에서는 
흙이 주로 쓰였다.
  그와 달리 일본은 우리가 흙을 쓰듯 나무를 많이 썼다. 집은 목조건물이었다. 
일본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 네 가지라는 게 옛부터 전해져 왔다. 지진, 화재, 천둥, 
아버지가 그 넷이었다.
  가부장제 아래서의 아버지의 권위 같은 것은 다 무너져내린 일본이기에 아버지는 
이제 결코 무서운 존재가 아니겠지만 화재만은 아직도 무서운 것의 하나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 이유도 목조건물이므로 화재의 위험성이 그만큼 높다는 데 
있지 않나 싶었었다.
  일본에서는 벽에 흙을 바른 집을 짓는 일이 드물었다. 그대신 목조건축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들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그 건축기술이나 건물의 
규모 어느 면에서 보아도 그랬다.
  그런 두 나라와는 달리 중국은 문화를 돌로 만들어간 나라는 아닐까 하는 의문을 
나는 늘 가져왔었다. 사진으로 혹은 어쩌다 만나게 되는 글로 이해되는 중국이란 
나라는 세 나라 가운데 그 어느 나라보다도 돌로 만들어진 건축이 많았었다. 바닥에 
돌을 깐 길, 돌다리, 돌계단... 그런 것 없이 중국의 건축물을 상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던가.
  이런 비교는 작은 생활도구에서도 드러났었다. 우리가 흙바닥에 기름을 먹인 
종이인 장판을 바르거나 갈자리를 깔았다면 일본은 다다미라고 하는 풀을 깔았고 
중국은 일찍이 의자와 침대생활을 해왔었다. 무엇이 그런 문화적인 차이를 
만들어갔느냐를 생각하자면, 거기에서 그들이 사는 땅의 나무들, 풀, 추위, 비, 바람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바로 그 속에서 함께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곳에 산 사람들 각자의 지혜가 아니었던가.
  내가 말했다.
  --중국엘 가면 돌을 보고 싶습니다. 돌의 문화.
  갑작스런 내 말에 무슨 뜻이지를 이해하지 못한 걸까. 원장이 말했다.
  --우린 백두산엘 가는 거라네.
  --알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 바고 북경을 떠나는 것도.
  나는 시계를 보았다.
  --이제 한 시간쯤 남았군요.
  
    2. 북경 달빛속의천안문

  쥐털 같은 어둠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막막한 어둠이었다. 한 도시의 야경이 
드러내는 휘황한 불빛도 은하수처럼 흘러가는 자동차의 행렬도 없었다. 다만 
어둠이었다.
  곧 북경입니다.
  안전벨트를 다시 한번 확인하십시오.
  담배를 삼가해 주십시오.
  그런 어나운스먼트를 문밖을 오가는 바람소리처럼 들으며 나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내가 만나는 북경의 얼굴을 간직하고 싶었다. 숨막히던 뉴델리의 
그 습기찬 어둠... 나일 강을 끼고 흘러가던 카이로의 불빛은 얼마나 오래 내 마음의 
갈피에 남아 있었던가. 언제나 그 모습은 그 도시에 얹혀 있는 내 추억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고리가 되어 주었었다. 그렇게 북경의 옆모습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것은 훗날 북경으로 들어가는 손잡이가 되어 주리라.
  그러나 창밖으로는 그 무엇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환상처럼 내게 자리잡고 
있는 그 거대한 도시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둠에 감싸인 것이 아니라 어둠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듯이 창밖은 캄캄했다. 그리고 그런 암흑의 바닷가에 불시착하듯이 
비행기는 활주로에 내렸다. 어딘가 야전군이 설치한 임시 비행장에 내리듯이. 
등화관제 속에 몰래 숨어들듯이.
  갑자기 기내가 소란스러워지며 중국인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머리 위의 짐칸에서 
자신의 가방이며 보따리들을 꺼내느라 한순간에 비행기 안을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아직도 비행기는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랬다.
  무엇이 동양인들을 이렇게 만들어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전히 안전벨트를 
매라는 사인에 불이 들어와 있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라는 어나운스먼트가 
흘러나오지만 사람들은 짐을 내리고, 부산하게 통로에 나와 선다.
  동경에서는 일본인들이, 홍콩이나 타이페이에서는 중국인들이 똑같은 모습들을 
보여준다. 서울 또한 다르지 않다. 가방을 챙겨들고 비좁은 통로에 주욱 늘어서서 
비행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그런 소동을 피운다고 해서 결코 다른 사람보다 
빨리 공항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데도, 그런다. 이럴 때 언제나 묵묵히 앉아 
항공기의 안내를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서양인들이다.
  그들 속에 섞여 나도 비행기를 내렸다.
  이제 중국인가. 다른 탑승객들과 함께 비행기를 내리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여기가 중국인가. 여권검사, 세관 통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절차들이, 
미수교국에 왔다는 사실과 함께 긴장으로 다가와 조금은 목을 뻣뻣하게 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여권에는 고무도장이 찍힌 특정국가 여행허가서가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주일본대사관이 발행한 것이었다.
  여권법 시행규칙 제19조에 의거, 하기 국가의 여행을 허가함. 허가번호 374. 
허가일자 SEP--8.1989. 여행국가명. 중국.
  승객들과 함께 입국심사장이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나는 발밑을 내내 
내려다보아야 했다. 공항 건물은 비좁고 더럽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두웠다. 
구불거리며 계단까지 줄을 선 속에 끼어 기다리면서 나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뺨을 맞는 기분이었다. 그 거대한 나라, 그 국토의 넓이와 인구를 
생각했다. 그런데 수도인 북경 공항의 꼴이 이렇단 말인가. 고개를 돌리며 살펴보니 
한쪽 벽면이 가건물처럼 나무로 되어 있었다. 줄의 흐름을 따라 조금씩 밑으로 
내려갔다. 여권을 꺼내들고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조명이 어둡기는 마찬가지여서 
여권에 씌어 있는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나는 갑자기 코를 킁킁거릴 수밖에 없었다. 거리의 공중변소에서나 맡을 수 
있었던 크레졸 냄새가 갑자기 코를 싸아하게 하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지금은 맡을 수도 없는 냄새,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오며 어느 날 
사라져 버린 냄새, 작은 펌프에 집어넣어 뿌려대던 파리약 냄새까지 뒤섞여서 
떠다녔다.
  내가 이 냄새를 마지막으로 맡았던 것이 언제이더라. 나는 무심히 그런 생각을 
했다. 문화방송이 여의도로 이사가기 전, 정동에 있던 시절이리라. 문화방송에서 
라디오 드라머를 쓰던 그 선배는 만나기만 하면 언제나 술을 마시러 불광동 쪽으로 
나를 끌고 갔었다. 거기 술집들이 늘어선 거리가 있었다.
  술값은 샀다. 그러나 그곳에 움크린 그 많은 술집들은 한결같이 더러웠고 
들어서면 곰팡이가 썩는 것 같은 냄새가 났다. 쥐가 탁자 밑으로 기어다니곤 했던 
그 술집들에는 무언극 배우처럼 하얗게 화장을 한 여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화장실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늘 이 냄새를 맡아야 했다. 크레졸과 파리약이 뒤섞인 
이런 냄새.
  빌어먹을. 나는 중얼거렸다. 북경하고 불광동이 무슨 자매결연이라도 맺었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부두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직업소개소 앞에 줄을 
서 기다리듯이 나는 그 어둠침침한 입국심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낯익은 
옷차림을 보았다. 모택동도, 지식인으로서 내가 좋아하던 주은래도 언제나 
공식석상의 사진 속에서 입고 있던 그 국민복, 그것을 입은 관리가 조금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차례가 되어 나는 여권과 함께 일본의 중국대사관에서 발급받은 조그만 
입국사증을 그 국민복 관리에게 내밀었다. 관리는 여권을 들척거리며 무엇인가를 
적었고 조그만 종이쪽지인 그 입국사증을 핀으로 내 여권에 꽂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미수교국이어서였을까. 여권의 어디에도 도장을 찍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원장이 관리와 중국말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나서 내게 말했다.
  --이건 잘 보관하라는군. 출국할 때 공항 관리에게 주면 된다는군.
  여권을 받아들며 조금 멍한 기분이었다. 이건 너무 쉽지 않은가. 어려서부터의 
반공교육과 끊임없이 북한의 침략위협을 정권안보에 이용해 온 정부 밑에서 몇 
년인가. 청춘이 갔고 중년이 또 그렇게 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중공에 
들어서는 것치고는 이건 너무 간단해서 맥이 빠지지 않는가.
  제주 공항에 내리는 것과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는 여권검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조그만 분노 같은 것이 가슴에 심지를 내리고 타들어왔다. 국내의 
어떤 정보도 중국이 이미 이렇게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 있었다. 
냉전시대의 중국이 이미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 정부는 또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겁주려고, 국제적으로는 유일하게 북한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나라 중국의 
이런 변화를 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있는 것인가.
  이제 짐을 찾아야 할 차례였다. U자 모양의 레인이 돌면서 이미 짐이 하나하나 
빠져나오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일제 텔레비전이며 음향기기들이 눈에 띄었다. 
들고 다닐 수 있는 전자제품들이 SONY, PANASONIC, NATIONAL 같은 일제 
상표가 찍힌 포장을 자랑하며 가방들 사이사이로 실려나왔다. 그것 또한 중국의 
개방화가 얼마나 깊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피부에 와 닿게 했다.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함께 간다는 수녀님들은 어디 있는 거야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나리타 공항에서 인사를 나눴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내게 다가서며 물었다.
  --이게 무슨 냄새지요?
  --크레졸 냄새 아닌가요?
  옆에 서 있던 오십대의 여자가 말했다.
  --파리약 냄새도 나잖아요.
  그의 아내인가 보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공항시설이 말이 아니군요. 못 산다고는 들었는데, 중국이 어떤지 알만 하군.
  이 사람이 미국에 이민을 가 산다던 그 사람인가. 모르겠다. 캐나다에 산다던 
사람인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 나라에서도 크레졸을 공항에 뿌려대는 일은 없는가 
보다.
  여자가 뛰어가면서 말했다.
  --아, 저기 우리 짐 나오네요.
  미국인지 캐나다인지 알 수 없는 남자가 뒤를 따라가고 나자, 또한 사람의 
미국인지 캐나다인지 알 수 없는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우린 다 찾았는데, 한 형 짐은 아직 안 나왔습니까?
  --네, 그런데요. 먼저 나가시지 그러세요.
  --원장 이야기가, 함께 나가는 게 세관통과에도 편하답니까.
  그 남자가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셨어요? 공항이 공사중이군요. 아마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에 대비해서 
공항시설을 대대적으로 고치는가 봐요. 새로 짓는 건지. 어쨌든 이 건물은 가건물 
같거든요.
  그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조용 그런 말을 했다. 말굽모양의 레인을 타고 내 가방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가방을 찾으러 가다가 돌아보니 먼저 짐을 찾으러 갔던 여자가 
의자에 앉아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가방을 찾아가지고 일행의 짐을 모아놓은 
곳으로 왔을 때였다. 좀 몸이 뚱뚱한 편인 미국인지 캐나다인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수녀님들 짐이 왜 이렇게 안 나오지.
  짐은커녕 수녀들의 모습도 아직 보지 못한 나는 그 남자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어디 계시는데요, 수녀님들. 보이지가 않는데.
  --저어기.
  손으로 가리키며 그가 소리없이 웃었다.
  --아니 그 앞에 가 있지 않으면 누가 짐을 어쩔까. 하여튼 수녀님들이라구.
  그의 손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랬었구나. 탄식처럼 내 안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짐이 나오는 그 레인의 맨앞에 마치 실려나 오는 짐을 하나하나 
세기라도 하듯 몸을 숙이고 서 있는 두 명의 수녀가 바라보였다. 잿빛 제복을 입고 
있었다.
  잠시 후였다. 수녀들이 끌어내리는 짐에 눈길이 가 멎었을 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가방이 아니었다. 도대체 저렇게 큰 짐을 어떻게 꾸렸을까 싶은, 
그것은 이불보따리 두어 개를 합쳐 놓은 것 같은 부피의 직사각형 모양을 한 
보따리였다. 두 수녀가 힘들게 그것을 내려놓는 모습이 레인 건너편으로 
바라보였다. 이어서 더 놀라운 일에 눈에 띄었다. 그들이 보따리를 가져다놓은 
곳에는 이미 찾아놓은 똑같은 크기의 보따리가 또 하나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자 짐을 찾아가지고, 우리는 세관을 통과하기 위해 모여 섰다. 자기 몸보다도 큰 
짐 보따리를 끌고 수녀들이 다가왔다. 그랬다. 그건 짐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질질 끌며 왔다. 도대체 무슨 짐을, 저렇게 커다란 걸 가지고 다니시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수녀들을 바라보았다.
  한 분은 할머니였다. 아무리 보아도 예순은 넘어 보이는 그 분은 키가 작고 좀 
뚱뚱한 편이어서, 나는 까닭없이 웃음이 나왔다. 여기는 바로 중국이 아닌가. 
중국에서 그 분을 본다는 게 그렇게 우스울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어려서 본 
중국집 할머니와 어쩌면 저렇게 닮아 있을까 싶은 용모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옆에 서 있는 원장에게 내가 킥킥거리며 속삭였다.
  --저 수녀님은 꼭 중국사람 같네요.
  --그렇지. 서태후 같지.
  서태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여튼 그 수녀님은, 이 분은 
한국사람입니다 하면 오히려 화를 낼 것 같이, 중국 할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잿빛 수녀복이 또 원피스 모양이어서 더욱 중국할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또 한 분의 수녀님은 오십대로 보였다. 그분은 마른 몸매에 어딘가 좀 날카로운,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안경을 낀 모습이 더욱 그렇게 
느끼게 했다.
  짐은 엑스선 검정대를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하나씩 각자의 짐을 올려놓고 
밖으로 나가 각자의 짐을 찾으면 되는 식이었다. 다른 분들을 앞세우고 맨 뒤에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수녀들의 짐이 엑스선 검색대를 지나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기계가 덜컥덜컥 
하더니 짐을 운반하는 벨트가 멈춰섰다. 반쯤 들어가다가 만 그 어마어마한 
수녀들의 짐이 엑스선 검색대 입구를 터억 가로막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직원이 
벨트 위로 올라가 무언가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기계의 동력장치를 열어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가 중국말로 뭐라고 소리쳤다. 이 따위로 커다란 짐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누구야 하는 것만 같아서 나는 공연히 어깨를 움찔거리며 서있었다. 
기계는 아예 작동을 하지 않았다. 직원이 수녀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냥 들고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 커다란 짐을 수녀들이 벨트 위에서 내리느라 절절 매기 시작했다. 내가 
다가서며 말했다.
  --수녀님. 제가 옮겨 드릴 테니 먼저 나가세요.
  --아이구. 놀래라. 웬 한국사람이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인사도 없는, 나는 낯선 한국사람을 뿐이었다. 두 
수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내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함께 여행을 할 사람입니다.
  짐을 옮기느라 그랬던지. 수녀들은 이마에 땀까지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몸이 
마른 수녀가 말했다.
  --일본에서 만나 함께 가는 사람이 있다더니, 그 양반인 모양이네. 거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원시원한 것도 아니고. 그런 수녀의 말투에 오히려 내가 
놀라면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무슨 글 쓴다는 분이에요?
  조금 전에는 '양반'이라더니 이번에는 '무슨 글'이라네. 조금 어이없어 하면서 내가 
웃었다.
  --네, 글 써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수녀들의 짐을 들어내렸다.
  --먼저 나가세요. 짐은 제가 옮기지요.
  그때였다. 마치 내가 '무슨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무슨 날치기'라도 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 뚱뚱한 수녀가 나머지 짐을 껴안듯이 하면서 말했다.
  --이건 됐어요. 우리가 들고 갈게요.
  고맙다고 그냥 한마디 하면 될 일이지, 참 묘한 사람들이네 싶었다. 나이 든 
수녀들을 만나 본 경험이 없었기에 더욱 그런 기이한 느낌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성당이나 예비교리 시간에 만날 수 있었던 수녀들은 거의가 젊은 분들이었다. 
나이 든 수녀라고 해도 삼십대의 수녀가 전부였다.
  짐을 가지고 밖으로 나오면 그뿐, 가방을 뒤지는 일도 없이 우리는 세관을 나왔다. 
또 한번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귀국할 때의 만나곤 하는 김포공항의 세관검사와 
비교할 때, 도대체 어느 쪽이 폐쇄사회인가 묻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라는 것이 얼마나 왜곡돼 있는가. 그렇게 사실을 왜곡시켜 퍼뜨려가면서 우리가 
남의 나라를 잘못 이해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또 한번 우울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를 맞으러 나온 중국인 두 명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여행사에서 나온 
사람들이 가방을 하나씩 밖으로 옮겨 차에 싣기 시작했다.

  공항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달빛이었다. 공항 밖 주차장을 뒤덮고 있는 달빛. 그러나 그것은 달빛이 아니었다. 
내게는 그랬다. 납빛이었다. 납빛이라고나 말해야 할 달빛이 은회색으로 가득 깔려 
있었다.
  문닫은 상점들의 거리처럼 공항 앞은 한산했다. 휘황찬란한 불빛, 거대한 전광판 
아니면 늘어서 있는 차량들의 행렬... 다른 공항에서 만나는 그런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광장에는 띄엄띄엄 가로등이 서 있기는 했지만, 그곳은 하루의 
일을 끝내고 문을 닫은 상점들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다만 달빛만이, 잿빛과 푸른 색이 엷게 뒤섞인 듯한 달빛만이 고즈넉하게 깔려 
있었다. 그 달빛 속을 나는 가만히 내다보았다. 거기에서는 마악 무엇인가가 
잉태되기 위하여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순간, 달빛에 
뒤덮인 대지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난 후의 정적 혹은 그 먼지에 뒤엎인 폐허처럼 
느껴졌다.
  크레졸 냄새와 납 색깔 같은 달빛이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내 손을 잡는 듯했다. 
어서와. 여기가 북경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버스에 짐이 실리고 나자 우리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짐은 버스편으로 먼저 
호텔로 보낸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주차장에서 다른 버스에 올랐다. 차에 오르며 
보니 버스에는 '청년여행집단'이라고 씌어있었다.
  중국에서 '집단'이란 영어의 group을 뜻했다. 그러므로 한국의 기업, 삼성 그룹은 
중국에 오면 '삼성집단'이 되었다. 우리와는 같은 한자 문화권이면서도 서로 그 
쓰임새가 다른 말 때문에 한참 애를 먹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차에 올랐다.
  누가 이 길을, 포플러와 달빛 가득한 이 길을 국제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공항을 빠져나온 차는 포플러가 늘어선 길을 달리고 
있었다. 청주 부근의 어딘가, 여주 어디쯤의 시골길, 양평에서 강원도로 향하는 어느 
지방도로... 그런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 길과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은 너무나 닮아 
있었다.
  포플러가 양쪽으로 늘어서서 가로수를 이루고 그 옆으로는 드문드문 꽃들도 
심어져 있었다. 코스모스인가. 달려가는 차창 밖의 어둠 속으로 달빛을 받으며 
그렇게 무리지어 피어 있는 꽃도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가이드가 설명을 하고 있었다.
  --중국은 대단히 넓은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말이라든가 생활풍습까지 서로 다른 
지방이 많습니다. 특히 중국은 다민족 국가입니다. 여러 민족이 중국이라는 한 
나라에 속해 있기 때문에, 중국은 소수민족을 위한 여러 가지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랬던가. 단일민족으로만 살아온 우리로서는 다민족 국가가 가지는 어려움을 
모른다. 말도, 음식도, 옷도 다 같은 우리들로서는 같은 나라 사람들이 서로 다른 
말을 쓴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공용어라는 것을 정해서 
정부의 공식용어로는 그 말만을 쓰는 나라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중국이 다민족 국가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아 그랬던가 
싶었다. 내 안의 중국, 내가 알고 있는 중국은 여전히 중국집 할머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족은 중국 안의 오십여개가 넘는 소수만족 가운데 그 우수성이 
인정된 대단히 뛰어난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런 달콤한 말까지는 안 해도 좋은데 혼자 버스 뒷자리에서 중얼거리고 있는데, 
이 말에 감탄을 한 조금 뚱뚱한, 미국인지 캐나다인지가 말했다.
  --아, 조선족이 그렇게 우수합니까?
  --네.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소수민족 무용대회라든지 그런 게 있으면 언제나 
일등은 조선족입니다.
  겨우 춤이나 잘 추고 노래나 잘 부르나. 춤추고 노는 데야 어느 민족에게 지겠어. 
왜, 소수민족 대항 화투치기라도 하면 조선족이 압도할 텐데. 중국의 조선족도 
화투를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나는 혼자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달빛에 젖은 어둠이 
가로수 저편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 소수민족을 한 울타리 안에 넣어서 함께 살아간다는 
뜻에서 일찍이 동화정책을 펴 왔습니다. 소수민족을 함께 껴안는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나중에 보시게 되겠지만 중국 안에는 다른 도시의 이름을 딴 거리가 참 
많습니다. 가령 상해에 남경로가 있다든가 하는 경우입니다.
  좀전의 그 남자가 또 말했다.
  --그거 좋네. 우리도 그런 거리 이름을 붙이면 좋을 텐데. 광주에다 대구길 
부산길 그런 것도 만들고, 부산에 금남로니 전라길이니 그런 것도 만들어 놓으면 
좋겠는데 그래.
  이민을 갔으면 간 건고, 그러면 됐지 뭐가 또 부족해서 대구에 광주로를 만들면 
좋겠다는 둥 그런 말을 하고 있담. 까닭없이 심사가 뒤틀려서 나는 앞에 앉은 
남자의 뒷머리를 흘끔거렸다.
  가이드가 이제 우리들이 찾아가게 될 중국의 이곳 저곳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들에게 일정표가 적힌 종이 한장씩을 나눠주고 나서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나는 흐린 불빛 아래 그가 준 예정표를 읽어내려갔다.
  북경에서 장춘까지는 비행기로, 장춘에서 연길까지는 기차로 간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연길에서 자동차로 여덟시간 가량을 달려서 백두산에 오르게 되어 있었다. 
백두산을 내려와서 다시 들르게 되는 도시가 둘 있었다. 상해와 서안이었다.
  서안. 백두산이 가 보고 싶기는 했다. 그러나 이 중국여행에 따라 나서게 만든 
또하나의 도시는 서안이 아니었던가. 중국역사 안에서 그렇게 많이 만나야 했던 
꿈의 도시, 당 나라의 수도 장안... 그곳이 지금 서안으로 이름이 변해 있었다. 
진시황의 그 거대한 무덤과 거기서 출토된 흙으로 빚은 병사들도 떠올랐다. 이제 
한발 중국에, 그 역사의 땅에 내 현실의 발이 닿는 느낌이었다.
  가이드가 말했다.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30년 전의 중국을 보려면 상해로 가라. 3백년 
전의 중국을 보려면 북경으로 가라. 그리고 3천년 전의 중국을 보려면 서안으로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30년 전의 중국과 3백년 전의 중국과 
그리고 3천년 전의 중국을 만나시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리에 앉기 전에 한 마디 했다.
  --물론 여러분들은 백두산에 오르기 위해서 오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가이드의 말이 끝나자 누가 먼저인지 박수를 쳤다. 터덕터덕 몇 번 박수를 
쳐주면서 나는 여전히 창밖의 달빛을 내다보고 있었다. 달빛 속에서 중국을 
시작하는구나. 한가위가 멀지 않은 때였다. 그러니까... 예정대로라면 추석을 아마 
백두산을 내려와서 맞게 되겠지.
  밤의 북경은, 드넓다는 느낌뿐...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드넓은 길을, 높지 
않은 건물들이 늘어선 길을 가로등만이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가로등만이 빛나고 
있는 거리도 그 불빛들로 해서 휘황하다거나 화려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은성함과는 거리가 먼, 이상스런 고요함과 견고함이 거기에는 있었다.
  또한 가로등이 이어져서 환하게 켜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의 가로등이 
밝혀주는 둥근 빛의 둘레가 끝나면 잠시 어둠이 있고 이어서 또하나의 빛의 둘레가 
시작되었다. 그만큼 가로등은 띄엄띄엄 서있었다.
  그 미국인이 '쥐털 같은 어둠에 감싸인 북경'이라고 말했다면 내가 처음 만나는 
북경은 '딱딱하고 고요한 어둠'이 내리누르고 있는 도시였다. 차량의 통행이 많지 
않아서이기도 했겠지만 그 드넓은 길을 우리들을 실은 버스는 소리를 내면서 
달렸다. 마치 화난 짐승처럼.
  소음 가득하게 차가 달려나가는 사이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지금부터 천안문 광장 앞을 지나가겠습니다. 지난 6월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바로 그곳입니다.
  --우리 좀 내렸다 갑시다.
  --죄송합니다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천안문 광장 앞은 현재 자동차를 세울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간에는 통행도 불가능합니다.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으니까요.
  다만 하룻밤의 잠자리. 밤의 북경. 그렇게 떠나가야 할 북경이었다. 버스는 시속 
80킬로는 넘어 보이는 속도로 빠르게 천안문 앞 광장을 달려나갔다. 가이드가, 저 
쪽이 자금성이고 저쪽이 학생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던 중심부이고... 하는 설명이 
이어질 때 우리는 광장 앞을 이미 벗어나 있었다.
  그렇구나. 갈 길이 먼 나그네에게는 여기저기 한눈을 팔 겨를이 없다. 이게 함께 
하는 단체여행이다. 애초에 북경에 들러 자금성이나 만리장성을 본다는 일은 
계획되어 있지 않은 여행이었다. 그러나 막상 북경에 들렀다가 내일 아침 다시 
비행기로 떠나야 한다는 것이, 일행들은 아쉬운 모양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북경엘 들르면 안 될까?
  --그러지, 중국까지 왔다가 만리장성도 못 보고 갔다면 중국 온 게 아니잖아.
  --비행기 표만 바꾸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돈이야 더 내면 될 거고.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그런 말들이 하나씩 오가기 시작했다. 듣고만 있던 원장이 
말했다. 이 여행의 모든 걸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원장이었다.
  --우린 백두산엘 가는 거라구. 그리고 이 나라 체제가 그렇게 스케줄을 쉽게 
바꾸고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 우린 손님으로 온 거니까 이쪽 사람들의 방식을 
따라줘야지.

  아침에 잠이 깨었을 때 나는 침대를 내려와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열었다. 
아직 새벽이었다. 어둠이 걷혀 가고 있는 거리가 내려다보였다. 호텔 앞은 새로 
뚫은 게 분명한 길이 드넓게 뻗어 있었다.
  어제 호텔에 들어서며 서로 인사를 나눈 일행을 떠올렸다. 조윤상 씨는 오래 
은행원으로 근무했고 지금 캐나다에 이민을 가 있다고 했었다. 공항에서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화장을 하던 여자가 그의 부인이었다. 부부가 함께 조금 
뚱뚱하고 머리가 흰 분이 박영수 씨라고 했다. 언론인으로 있다가 지금은 미국에 
이민을 가 있는 부부였다. 그리고 수녀들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이었다. 그리고 이 신부가 있었다.
  서둘러 욕실엘 들어갔다 나와서 나는 방을 나왔다. 여행 때면 늘 그러듯이 아침을 
먹기까지의 시간에 나는 두 가지를 하는 것으로 보냈다. 하나는 어제의 일을 
적어두는 것이었고 또 하나가 일찍 거리로 나가 주변을 걷는 것이었다.
  호텔은, 그것 또한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만들어진 게 확실하게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호텔을 나와 로비를 둘러보면서도 그랬고 밖으로 나와 정원을 거닐어 
보면서도 한결같이 느껴지는 것은, 이 호텔의 내장이며 정원을 손질해 놓은 것이며 
어느 것 하나도 자본주의 사회의 그것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다는 놀라움이었다. 
나는 내 예상 속의 중국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나는 내가 예상하고 
있었던 내 상상 속의 중국을 하나하나 부수는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호텔을 나와서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선지 오가는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길은 드넓었지만 달려가는 차량의 숫자가 적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거닐고 있는 곳이 북경의 어디쯤인지를 나는 모르고 있었다. 
밤에 도착한 여행객이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북경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텔레비전의 화면을 통해 보곤 했던 중국의 거리모습이 
그렇게 꿈틀거리며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이제 호텔에 돌아가 봐야 하지 않을까. 아침이 마악 시작되고 있는 거리를 뒤로 
하고 나는 새로 깐 보도블록을 밟으며 호텔로 돌아왔다.
  그때 저만큼 호텔 앞에 나와 거닐고 있는 수녀의 모습이 보였다. 몸이 좀 뚱뚱한 
그래서 중국사람 같다고 생각했던 그 수녀였다. 호텔 앞으로 다가가면서 나는 저 
수녀의 이름이 무엇이더라 생각해 내려했다. 그러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녀의 
옷차림은 어제의 그 잿빛 원피스 모양 그대로였다.
  --안녕하세요?
  다가서며 내가 인사를 했다.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있던 
수녀가 놀라듯 뒤를 돌아보았다.
  --일찍 어딜 다녀오시네요.
  --그냥 산책을 나왔던 길입니다. 너무 일러서인지 거리엔 아무도 없군요. 여기가 
어디 변두리 같기도 하고요.
  가만히 나를 쳐다보면서, 키가 작아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모습으로, 그녀가 
말했다.
  --아침 미사에 나오시지 그러셨어요.
  --미사요?
  --조금 전에 마악 끝났는데. 찾아도 없더군요.
  --저는 신자도... 뭐도 아닌데요.
  --신자 아니라도 미사에 나오시면 어때요. 다 좋지요.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아니... 그런데 수녀님. 미사를 어디서 본단 말입니까?
  --신부님 방에서요.
  --호텔 방에서 미사를 올린다는 이야깁니까?
  --네에.
  이 수녀님은 한평생 거짓말은 안 하고 사셨을지도 모른다. 그 조금 뚱뚱한 몸매나 
작은 키가 만들어 내는 분위기와는 달리 조그마한 그러나 아주 맑아 보이는 눈으로 
수녀는 또 나를 쳐다보았다.
  --주욱 매일 아침 미사를 드리니까 내일 아침에는 꼭 나오세요. 우린 신부님이 
함께 와 주셔서 매일 성사를 볼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는데.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매일 미사를 드리면서, 그것도 
신부님이 묶은 호텔방에서 모여 미사를 드리며 하루의 여행을 시작하자는 건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하고, 흔히 비신자들이 말하는 그 파리쫓는 손짓을 
해 가면서... 여행을 하자는 말인가. 그건 정말 하느님 맙소사였다.
  해외여행이란, 나에게는 매일밤 술 취해서 잠이 들고 그 숙취를 깨느라 새벽부터 
욕조 속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게 아니었던가. 세상에, 이런 여행이 다 있을까. 
아침마다 호텔방에서 신부님을 모시고 미사를 올리는 그런 여행을 내가 하게 
되다니.
  수녀님과 함께 호텔 앞을 거닐면서, 나는 동경에서 느꼈던 어떤 예감을 떠올리고 
있었다. 시작에서부터 그렇지 않았던가. 전혀 예상에 없던 갑작스런 여행 그리고 
낯설기만 한 일행들. 그것은 어떤 불길함은 아니라 해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저편에 서서 나를 가다리고 있는 것 같은... 낯설고 예측할 수 없는 기다림이 내 
살갗에 와 섬뜩하게 닿는, 그래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런 느낌을 나는 
동경에서부터 가지지 않았던가. 그 예감이 이렇게 시작되는 건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여행으로 말이다.
  수녀는 호텔 건물을 올려다보며 몇 번이나 참 잘 지은 건물이네요. 그렇지요? 
하는 말을 했다.
  공산권 여행은 이번이 처음인 나로서는 그곳들의 숙박시설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몰랐다. 다만 상식이 가늠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리라고 상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때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나라라고 믿었던 중국에 와서 처음 만나는 이 호텔은 나의 그런 상상을 완벽하게 
배반하고 있었다 그렇지요? 수녀님 나는 그렇게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시내로 들어오면서 특히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요, 우리를 안내하던 그 
가이드말입니다. 중국의 현실이나 정치문제에 대해서 아무 거리낌없이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아요? 상황 설명에도 뭐 지금 정권을 무서워한다거나 하는 게 전혀 안 
보여요.
  --그러게요. 서울에서 교육받을 때, 큰일 난다면서 중국에 가서 천안문 이야기 
같은 건 절대 꺼내지도 말라고 하던데.
  --무슨 교육을 받으셨는데요?
  --미수교국에 여행하는 사람들이 받는 소양교육이 있어요.
  --아하, 그랬군요.
  요즘도 그런 교육을 하고 있나. 십여년 전이었다. 유럽에 처음 나갈 때 그런 
소양교육이라는 것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앉아 있기조차 부끄럽게 한심한 
내용들이었다. 반공이 어떻고, 여러분 하나하나가 외교관이라 생각하고 국가체면을 
지키라는 둥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한 강사가 말했었다.
  유럽에 가면 화장실에 '비데'라는 것이 있는데, 그걸 먹는 물인 줄 알고 마시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들 조심하세요. 그건 여자들이 몸씻는 물입니다.
  그랬겠지. 중국에 가서는 정치적인 이야기는 묻지 말아라. 그런 교육을 해댔겠지.
  몸이 좀 마른 수녀가 안에서 나왔다. 그녀도 어제의 옷차림 그대로였다. 아니, 
여행 보따리는 그렇게 크던데 왜 옷들도 안 갈아입는 걸까. 언뜻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 수녀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여기들 계셨네.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해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중국에 와 보니까 언론의 자유는 우리보다도 더 자유스럽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예요. 수녀님은 못 느끼셨어요?
  --그래요. 천안문 사태 이야기도 가이드가 먼저 말을 꺼내잖아요.
  --저도 그건 놀랐어요. 우리가 뭘 잘못 알고 있었구나 싶더군요.
  호텔 입구에서였다. 나는 두 수녀를 그 자리에 서 있게 하고 카메라를 들면서 
말했다.
  --수녀님. 사진 한 장 찍으시지요.
  --우리 같은 사람이, 사진은 뭐하게.
  수학여행을 온 시골 여학생처럼 수줍어 하면서 두 수녀는 호텔 입구에 차렷 
자세를 하고 섰다. 저 분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나는 구체적으로 아는 게 없다. 
카메라 파인더 속으로 두 수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게 두 분은 
익숙하지 않는 기념사진을 찍는 소녀들 같았다.
  우리는 나란히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커피숍으로 향하면서 나는 두 수녀의 
이름을 다시 물었다. 몸이 마른 분이 임 수녀였고 키 작고 뚱뚱해서 중국 여자처럼 
보이는 분이 강 수녀였다.
  임 수녀가 말했다.
  --글을 쓰신다구요? 어디서 몇 번 본 것도 같아요.
  --수녀님이 다 제 글을 읽으셨다니, 오세요. 커피는 제가 살 테니까요.
  --그런 건 왜 마셔. 돈 들여가면서.
  강 수녀가 중얼거렸다. 임 수녀가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 유명한 사람이야. 돈 많고.
  말투가 참 재미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어딘가 세상 욕심을 떠난 달관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그 말투는 마치 어린아이들 같았다. 아주 조그만 소녀가 어느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까 갑자기 노인이 되어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틀리셨어요. 유명하지도 않고 돈도 없어요.
  우리는 커피숍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호텔 로비에 놓여 있는 커다란 도자기며 
병풍 같은 것을 강 수녀는 아주 재미 있어 하며 바라보았다. 별 걸 다 신기해 
하시네 싶으면서도, 저것이 저분에게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겠구나, 덧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 수녀가 방에 무엇인가를 가지러 간 사이 우리는 커피숍에 가 앉아 차를 
마셨다. 아침마다 미사를 드린다는 그 이야기가 이제는 마음에 부담이 되어 있었다. 
다들 가톨릭 신자인데 나만, 이방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침에 미사 보셨다고 하더군요.
  임 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이네요. 저는 가톨릭 아닌데.
  찻잔을 든 채 가만히 나를 건너다보면서 임 수녀가 말했다.
  --가톨릭이 아니면 어때요. 안 믿으면 더 좋지요.
  --네에?
  나는 어이없이 하며 임 수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길거리에서도 '예수를 믿으라' 
하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고, 서울 거리에 한밤에 반짝이는 건 전부 교회 십자가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닌 나라에서 우리는 살았다. 그런데 이 수녀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가. 안 믿으면 더 좋다니.
  --믿는 사람이 행복한 거 아닌가요?
  --안 믿는 사람들 보면 재미 있게 잘들 살던데요 뭐.
  그래. 무슨 신학논쟁을 이 아침에 수녀님과 할 건 아니지 않으냐.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면서 중얼거렸다.
  --어쨌든 미사를 드리신다는데, 저만 빠지는 게 어쩐지 죄송한 생각이 들어서요. 
함께 하는 여행인데.
  --세상 사람이 뭐든 다 그렇게 함께 하는 것도 아닌데요. 하느님도 마찬가지지요. 
안 믿는 사람은 안 믿고, 믿는 사람은 믿고.
  또 그 도인 같은 말투였다. 달관한 것도 같고 아이들 같기도 하고.
  이 말투로 어떤 대답이 나올까 궁금해 하며 내가 물었다.
  --수녀님도 백두산이 보고 싶으셨어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임 수녀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백두산에 가는 줄 알아요?
  내가 놀라며 되물었다.
  --백두산에 가시는 거 아닙니까? 아하... 역시 수녀님들은 어디 다른 데로 
가시는군요. 수녀님들까지 백두산 보러간다 하니까 어쩐지 좀 이상했어요.
  --아니요. 우리도 백두산에 가요.
  --네에? 지금 그러셨잖아요. 백두산에 가는 줄 아냐고요?
  --백두산에도 가고... 다른 볼일도 있고.
  나랑 스무고개를 하자는 것은 아닐 테고. 찻잔에 남아 있는 커피를 마저 마시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수녀님 가만히 보니까 꼭 누구 약올리듯 말씀을 하시네.
  뒤쪽에서 원장이 다가오며 말했다.
  --여기들 있었군. 아침들 하고 떠나야지요.
  밤 9시에서 아침 9시. 이건 또 무슨, 나인 투 나인이람. 나는 소리없이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12시간의 북경이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비행기로 바로 장춘입니까?

  아홉 사람이 함께 하는 여행이다. 구성원이 저마다 색깔이 달라서 조심스럽고 
조금은 불편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특이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최소한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교양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흡연석에 앉아 북경까지 날아오며 문득 제주 시절을 떠올렸었다.
  어느날 눈을 떴을 때, 나는 나 자신의 생활이 길을 잘못든 등산객 같다고 
생각했었다. 어딘가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야할 길을 오른쪽으로 잘못 들어선 
것같이.
  원했거나 원하지 않았거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밖으로 비취지는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내가 껴안고 있는 현재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게 문닫고 내부수리하듯 그렇게 떠났었지, 그때.
  "신장개업" 따위의 간판을 새로 내걸겠다는 생각도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생활을 되찾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때나 이제나 나는 왜 늘 자신이 
때묻어 더러워져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림엽서라도 사서 몇 자 적어 보낼까 싶어 공항로비를 돌아다녔지만 여행객을 
위해서 팔고 있는 그림엽서가 없다. 이런 것에서 겨우 사회주의를 느낀다. 그러나 
천안문 광장 앞에서 차를 내릴 수 없었던 때나 겨우 통제된 사회라는 느낌을 
받았을까, 자본주의의 물결은 이 땅의 여기저기에서 넘쳐나는 것이 보인다.
  북경은 훗날 만나기로 하자. 훗날 언제든. 북경의 옆모습조차 만나지 못하고 
떠나지만 웬지 서운하다거나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일까. 옛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가기 위해서 그리고 백두산엘 오르기 위해 떠났던 여행이기 
때문인가.
  하룻밤 풋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내 하룻밤의 북경에게 무슨 말을 남겨주면 
좋을까. 중국이여, 나는 네가 다만 넓고 깊기만을 바란다. 그러면 된다. 어딘가는 
스쳐지나가도 좋게 다만 넓고 깊기를.
  어제밤에 입국을 했던 곳과는 비교할 수 없게 출국장은 넓었다.
  천정도 드높았고 파리약 냄새도 없었고 크레졸을 뿌리고 청소를 한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여기서도 공사가 진행중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공항청사 안의 한쪽은 
아예 베니어판으로 막아놓고 있었다. 칸막이 틈새로 바라본 공사장에서는 
번쩍거리며 철근 용접공사가 한창 이었다. 그러나 공사가 진행중이어서인지는 
몰라도 공항 안 어디에도 사람이 앉아 기다릴 의자가 없었다. 베니어 칸막이 
저편에서 들려오는 공사장의 소음에 시달리며 아래 위층을 연결하는 비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식당입구에 있는 매점을 보았다. 간단한 선물들을 팔고 있었다. 
지구상의 관광지 어디에서나 팔고 있는 열쇠고리를 거기서 보았을 때 나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열쇠. 어떤 동물도 자신의 집을 짓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집에 
자물쇠를 잠그는 건 인간만의 일이 아닌가.
  --웬 여자들이 이렇게 커요?
  비행기에 올랐을 때였다. 옆자리에 앉게 된 박영수 씨가 지나가는 스튜어디스를 
흘끔거리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키만 
큰 것이 아니라 풍만한 몸매들을 하고 있었다. 옷도 마찬가지였다. 몸에 들어붙게 
입은 원피스 모양의 그 전통의상은 허벅지가 드러날 정도로 치마 한쪽을 타놓고 
있었다.
  --체격들은 잘 빠졌는데... 전혀 웃지를 않는군요.
  --사회주의 국가에서, 친절이나 서비스를 기대하지 말아라, 그 말 몰라요?
  박영수 씨가 흰 머리를 쓸어넘기며 낮게 웃었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 20년 
가까이 되는 사람이었다.
  --저게 치파오라고 하는 중국여자들 전통의상이랍니다.
  --그러고 보니까 중국의상이 상당히 육감적이네요.
  우리 여성들의 치마저고리와 비교할 때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치마저고리는 가능한 한 여성의 몸매를 감추는 옷이었다. 일본의 기모노와도 또 
달랐다. 기모노나 저고리가 여성의 젖가슴을 되도록 감싸는 것과 달리 중국의 
치파오는 훨씬 도발적이라고나 할까.
  --중국이라고 우리가 이야기하지만, 사실 중국의 역사란 중앙의 한족과 변방 여러 
민족 간의 투쟁 아닙니까.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도 만주족들이 중국 땅의 중앙을 
점령하고 세워 2백여년 이어져 내려왔던 나라니까요.
  --그러니까 저것도 만주족의 옷이로군요.
  지나칠 때마다 희디힌 허벅지가 언뜻 드러나는 치파오 차림의 스튜어디스를 
보면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한족의 저항을 막기 위해서 청나라는 철저하게 만주식의 변발이라고 
하는 머리모양과 저 옷을 강요했거든요.
  국내선 비행기여서 일까. 의자와 의자 사이가 좁아서 다리가 불편할 정도였다. 
비행기가 뜨고 나서 얼마 있을 때였다. 기내식인가 보았다. 스튜어디스들이 밀차를 
끌고 나타나 캔 음료수와 함께 종이 상자 하나씩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무엇일까 싶어서 나는 앞의자 등받이에 붙어 있는 간이식탁을 펼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스튜어디어스가 다가왔다. 그녀는 마치 상자를 집어던지기라도 하듯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 아가씨가 나한테 무슨 시비를 거는 건가 싶었다. 게다가 
그것은 내 것만이 아니라 옆자리의 두 사람 것까지 합쳐서였다. 나보고 옆사람에게 
전해 주라는 이야기였다.
  아름답고 육감적인 치파오에 감싸인 여인의 이미지가 유리인형처럼 좌르르르 
깨어져내리는 순간이었다. 기가 막혀서 나는 스튜어디스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닭 모이나 소 여물 주듯 하는구나.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거나 똑같군. 이게 어디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건가. 화나는 것을 누르며 나는 얌전히 내 탁자에 놓인 
종이상자를 옆자리의 박영수 씨와 부인에게 건네주었다.
  통로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스튜어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에게만 음식상자를 
팽개치듯 던져주었던 건 아니었다. 모든 손님들에게 그녀는 그렇게 했다. 전혀 
웃음기 없는 얼굴에서는, 아 이건 얼마나 지겨운 일인가 하는 말이 금방이라도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게 그 유명한 사회주의 국가의 서비스며 봉사정신이로구나 싶었다.
  서비스란 자본주의에나 있는 겁니다. 아무리 많이 팔아도, 아무리 많이 일해도 
급료는 똑같은데 누가 남보다 더 일을 하려 합니까. 그런 사회에서 거기다가 또 
친절까지를 바랬다가는 하루도 못 삽니다.
  통로 옆자리의 수녀들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강 수녀는 종이 상자를 열고 안에 
있는 것이 보였다. 둥글고 누런 빵이 두 덩어리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식욕이 
아니라 호기심 때문에 나는 내 상자를 열었다. 손을 닦는 종이 물수건과 함께 빵이 
두 개 들어 있었다. 빵을 만져보았다. 이상하리만큼 빵은 딱딱했다. 반을 
갈라보았다. 옥수수 가루로 만든 빵인가 보았다.
  종이상자를 다시 닫고 나서 나는 캔음료를 땄다. 오렌지였다. 그러나 그 오렌지 
음료는 너무 달았고 그리고 너무 엷었다. 오렌지는 바지 걷어올리고 그냥 걸어 
지나가기만 했나, 뭐 이렇게 싱거워.
  소리없이 중얼거리며 나는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그러나 중국 안에서 
국내선은 모두 금연으로 되어 있었다. 빵은 던져 주면서... 담배는 또 피우지 말라네.
  스튜어디스의 불쾌함이 가시지 않아서 나는 빵에는 손을 댈 생각도 없이 박영수 
씨를 돌아보았다. 그는 한입 빵을 베어물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맛이.
  --여엉 아니구만.
  박영수 씨가 캔음료를 입에 대고 목을 젖히며 말했다. 옆자리의 수녀들을 손으로 
빵을 찢어서 먹고 있었다. 임 수녀에게 내가 물었다.
  --맛 있으세요?
  인 수녀가 눈을 흘기듯 하며 말했다.
  --못 됐어.
  --뭐가요?
  --주는 거니까 고맙다 생각하고 먹어 둬요.
  저 여자는 또 왜 오지? 스튜어디스 둘이서 밀차를 끌고 이번에는 앞쪽에서 
나타났을 때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균형잡힌 몸매며 시원시원하게 자리잡은 눈과 입모습... 그리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희게 드러나던 허벅지는 이제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또 무슨 불쾌한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기다렸다. 이번에도 또 던져주기만 해봐라. 
한국말로 소리쳐 버려야지. 그런데... 뭐라고 야단을 친다?
  야 너는 예의도 없니?
  아니지. 그랬다간 저 아가씨나 나나 다를 게 뭐야. 말을 하려면 아주 품위 있게 
해야지.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가씨. 조금 친절하게 주실 수 없어요. 우린 손님이잖아요.
  나는 탁자 위의 빵상자를 들어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야, 야단을 쳐야 
하니까 그렇게 부드러울 거까지 없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아가씨, 아가씨 회사에서는 예절교육도 안 시킵니까.
  옆자리의 박영수 씨가 내 팔을 툭 쳤다.
  --한형, 지금 뭐하는 겁니까?
  혼자 빵상자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는 내가 오히려 박영수 씨는 이상했나 보았다. 얼굴이 벌개지면서 내가 
더듬거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아가씨들 하는 짓이 하도 마음에 안들어서요.
  스튜어디스들이 다가왔다. 이번에 그녀들이 나누어주는 건 작은 봉지에 든 
땅콩이었다. 그러나 그 태도는 빵을 나누어줄 때와 아무것도 다르지 않았다. 
털컥털컥 손님의 탁자 위에 스튜어디스들은 땅콩봉지를 던져놓았다.
  정말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한마디 하기 위해서 스튜어디스를 올려다보았다. 
내 눈빛이 고왔을 리 없다. 그 순간, 1미터 70은 훨씬 넘어보이는 스튜어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나보다 먼저 박영수 씨의 목소리가 내 팔을 잡았다.
  --다 그런 거예요. 이 여자들, 서비스라는 게 무언지 몰라요. 한형, 아무 말 
마세요.
  그래 참아 주자. 여기는 중국이다. 중국에서는 스튜어디스가 음식을 던져서 
준단다. 나는 스스로를 달래면서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아주 바보처럼 웃었다.
  얘가 아침에 뭐 잘못 먹었나? 그런 얼굴로 스튜어디스는 나를 흘깃 내려다보고 
나서 아무 표정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땅콩봉지를 앞의자 등받이의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비행기는 장춘을 향해 날고 있었다.
  
    3. 장춘 긴 봄이라는 도시의 짧디 짧은 봄

  길림성은 지리적으로 중국의 동북부에 있다. 인구 2백만의 길림성 중심에 있는 
도시가 장춘이다. 길림성의 수도이다. 북위 44도의 내륙지방에 있으므로 장춘의 
겨울은 춥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나날이 계속된다. 장춘의 겨울은 그렇게 
얼어붙어서 지나간다. 귀를 싸맨 방한모와 안에 털을 넣은 누비옷들을 입어야 한다.
  저녁도 빠르다. 오후 4시면 이미 어둠이 거리에 깔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장춘에 내리는 눈은 싸락눈일 때가 많다. 수분이 적은 눈이다. 그래서 
장춘의 눈은 손으로 뭉쳐도 잘 뭉쳐지지가 않는다.
  다만 이 눈이 맑은 날 바람이 불면 지붕이나 거리에서 겨울하늘로 날아오른다. 
미세한 얼음의 입자가 햇빛 속을 반짝이며 날아다닌다. 마치 반딧불이 반짝이듯이.
  봄은 5월에 시작된다.
  이때가 되면 이 고장에 많은 은행나무가 잎을 열고 복사꽃 또한 아우성치듯 
피어난다. 이곳 라일락이 특히 아름답다. 이들이 한순간에 꽃을 피웠다가 또 
한순간에 떨어져 간다. 이것이 장춘의 봄이다.
  두 주일쯤, 장춘의 봄은 그렇게 짧다. 그리고는 이내 여름으로 접어든다. 긴 
봄이라는 뜻의 장춘은, 그러므로 사람들이 짧기만 한 봄을 보내며 그 아쉬움 속에서 
붙여준 이름인지도 모른다. 이 도시를 부르는 또다른 이름에 '춘성'이 있다. 
거리에도 나무가 많고 수목이 우거진 공원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이 이름을 더 
친근해 한다.
  --봄이 짧으니까 오히려 '장춘'이지요.
  찾아온 나그네에게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춘은 일본이 괴뢰정권을 세웠던 곳이다. 중국 지배를 꿈꾸며 
군국주의 일본이 세웠던 옛 '만주국'의 수도가 바로 장춘인 것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로 알려진 중국 마지막 황제(폐제) '푸이'가... 그 파란의 
생애를 보내며 영욕을 함께 했던 곳이 바로 장춘이다.
  그때 일본은 이곳을 새로운 수도라는 뜻의 '신경'으로 이름짓고 대담한 도시계획을 
진행시켰었다. 길을 내고 거리를 만들고 건물들을 세웠다. 그래서 옛 만주국의 
국회의사당은 일본 동경의 국회의사당과 그 모습조차도 비슷하다. 건물들만이 
아니다. 가로수들도 그때 그렇게 심어졌다. 이 나무들이 지금은 5층 건물의 창을 
가리게 자라 있다. 도시계획 속에 세워졌던 옛 건물들도 그 자리에 옛 모습을 담고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용도들이 달라졌을 뿐이다. 만주은행 본점은 인민은행이 
되었다. 옛 관동군 사령부는 이제 당 길림성 위원회가 들어 있다.
  --'린 메이나'라고 합네다.
  장춘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오르자 한 아가씨가 앞자리의 마이크를 잡으며 
말했다. 유창한 한국어였다.
  --이제부터 여러분을 모시고 관광과 안내를 맡게 되겠습네다. 잘 부탁합네다.
  아니, 저건 북쪽 사투리 아냐. 조윤상 씨 부인이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목에 
맨 스카프 좀 봐, 여간 세련된 게 아니네. 박영수 씨 부인이 그렇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랬다. 단정한 양장 차림의 여자는 옷모습부터 많이 세련되어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명함을 한 장씩 우리들에게 돌렸다. 한자를 읽어 보았다. 린 
메이나라고 하던 이름은 '임미나'라로 씌어 있었다. 중국청년여행사 집단 길림성 
공사의 통역이었다.
  버스가 호텔로 향하는 사이 나는 뒷자리에 앉아 이 낯선 도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첫 만남은 중요했다. 어쩌면 나는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거리에 가득한 가로수를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 밑을 달리고 있는 자전거의 행렬도.
  길은 드넓었다. 일본이 무슨 마음으로 이토록 넓은 길을 닦으며 새로운 도시를 
만들려고 했는지 그 음흉한 뜻이 이해가 되었다. 차도와 인도의 구별도 분명했다. 
그 사이에 인도 저편의 건물들을 가리며 가로수가 치솟아 있었다. 그 밑으로 길거리 
어디에도 줄을 지어 세워놓은 자전거들이 보였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어서일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보다도 그렇게 길가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가 
인상적이었다.
  박영수 씨가 물었다.
  --미스 임은 조선사람입니까?
  --저는 조선족이 아닙네다. 조선말을 공부했습네다. 여기서 제가 배운 것이 
북선에서 쓰는 조선말이라서 남쪽에서 오신 손님들은 불편한 점이 많으실 것입네다. 
양해해 주시지요. 저는 대학에서는 일본말을 전공했습네다.
  일행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렇게 우리말을 잘 하네.
  --결혼도 했고요?
  --네. 스물 여덟살입네다. 중국에서는 부부가 함께 일하지 않으면 밥 못 
먹습네다.
  일 하나 생겼군. 저 여자 말할 때마다, 합네다 입네다 있습네다 하는데 저거부터 
고쳐줘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혼자 웃었다.
  --저것이 길림성 공산당 위원회 건물입네다.
  메이나가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박영수 씨가 소리쳤다.
  --우리 내려가서 보면 안 됩니까?
  공산당 위원회. 그 말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낯설고 놀라웠다. 중국 공산당 위원회 
건물 앞에 서다니. '반공'이 곧 생존이 되는 사회체제 아래서 몇십 년이었던가.
  서울로 수학여행을 온 섬 어린이들처럼 우리는 우루루 버스를 내렸다. 지난날 
관동군 사령부 청사로 사용되었다는 건물이었다.
  우람한 건물의 규모에 놀라면서 우리는 줄지어 서서 사진을 찍었다. 공산당이라는 
말의 그 첫 자만 나와도 온몸에 닭살이 돋는 세월을 살아야 했던 우리들에게 있어, 
그 공산당 위원회 건물 앞에서, 그것도 정문의 현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게 
이상스레 우리들을 흥분시켰던가. 우리는 아주 커다란 소리로 떠들어 가면서 몇 
번씩 셔터를 눌렀다.
  우리들의 왁자지껄함에 놀라듯 경비 초소의 군인이 밖으로 나왔다. 그는 총을 
메고 있었다. 건물 모양이며 느낌을 빠르게 메모하고 있는 내 옆에 와 서며 
메이나가 속삭였다.
  --이제 올라가시지요. 너무 오래 있으면 저 군인이 뭐라고 합네다.
  버스에 오르며 내가 말했다.
  --합네다...가 아니고 합니다. '니'라고 발음하세요. 합니다.
  --합니다.
  --잘 하시네요.
  메이나가 웃었다. 그 웃음이 커다란 눈과 함께 아주 맑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에 비행기에서 만났던 스튜어디스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럴지도 몰라. 
중국여자들이 다 그런 게 아니라 그 스튜어디스가 그런 여자였던 거였는지도 몰라.
  다시 버스에 올랐다. 동경을 떠날 때 가지고 온 일본어 가이드북을 들여다보는 
내게 임 수녀가 물었다.
  --'사다림로'라는 게 뭐예요. 길 이름인 거는 알겠는데...
  옆에 서 있던 메이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스탈린 거리입네다. 스탈린을 그렇게 쓰지요. 한국에서도 스탈린을 
사다림이라고 부릅네까?
  --아니요. 우리도 스탈린이라고 말하지요. 저기 거리 표지판에 써 있는 걸 읽으면 
사다림이 된다는 얘기예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임 수녀와 내쪽으로 몸을 숙이며 지도 위의 
거리를 손가락으로 짚어 나갔다.
  --이쪽이 해방대로, 여기가 신민대로, 그리고 여기가 자유대로입니다. 지금 가는 
곳은 여기 남호공원 옆입니다.
  숙소에 짐을 푼 뒤 우리들은 저녁까지 자유로웠다. 이곳 초청자인 
'동북아연구중심'과의 만남은 저녁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피곤한 사람은 자유롭게 
호텔인 '남호빈관'에 남아 있기로 하고 우리들 몇은 메이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 나무들을 양수라고 부르지요. 포플러와 같은 종자입네다.
  메이나의 설명을 들어가면서, 우리는 버스를 내려 사다림이라고 쓰고 
스탈린이라고 읽는다는 그 거리를 거닐었다. 가로수가 뒤덮고 있었다.
  은행나무처럼 이 나무는 암수가 다르다고 했다. 6월을 전후해서 암나무에서는 솜 
같은 털이 씨앗에 붙어서 날아다닌다. 이 흰 털들이 바람에 날려 하늘로 
날아오른다. '여름 눈보라'라고들 불리는 장춘의 명물이다. 흰 털들이 바람에 날려 
하늘로 퍼져올라가는 것만은 아니다. 거리를 희게 물들이며 휘날리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행인의 코를 막는다. 눈보라처럼 거리를 쓸며 바람에 날려서 보도나 후미진 
곳에 눈처럼 쌓인다.
  --아름답겠네요. 하얗게 저 나무들에서 흰 것들이 떨어져 날린다면...
  --여름 온 사람에게는 그렇습네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건 나그네의 감상일 뿐일까. 흰 털들은 창을 타고 
집안으로도 날아든다. 솜털 같은 것들이 식탁에까지 날아와 앉는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여간 골치가 아니다.
  이것 또한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우고 일본이 이 도시를 설계를 하면서 
심었던 나무다. 중국정부에서는 요즈음 이 나무에서 날아다니는 흰 털 때문에 
가로수 갈아치기가 한창이다.
  --하얀 털이 나오는 건 암나무만 그렇습네다. 그래서 암나무를 베어버리고 숫놈 
나무로 갈아심고 있지요.
  넓은 보도와 차도 사이에는 자전거만 다닐 수 있는 길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길가에 서서 나는 늘어선 가로수를 쳐다보았다. 내가 소리없이 중얼거렸다. 아무 
이유없이... 나는 이 도시가 좋아질 것 같아요.

  마지막 황제, 푸이가 살게 되었을지도 모를 건물 앞을 우리는 지나갔다. 만주국 
황족의 관저로 지어지던 이 건물은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일본의 패전으로 끝났다.
  --이쪽이 옛날 일본인들의 고급 주택가지요.
  그 후 중국 인민정부가 완성하였다는 건물은 우람했다. 다만 왜 그랬는지 모르게 
청기와 색깔보다 좀더 진한 푸른 색 칠이 덕지덕지 발려져 있었다, 그 건물에는. 
지질학원이라고 커다랗게 씌어진 건물현판을 바라보면서... 역사란 덧없다는 감회는 
떠오르지 않았다. 완성된 그 건물의 모습 어디에서도, 황족의 은성한 영화가 느껴질 
곳이 없었다.
  아... 일본이라는 나라. 그들의 역사 안에서 주변국가에게 베푼 것이 무엇이었던가.
  일본의 식민지정책에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달리 특이한 점이 있다. 말살과 
투자라는 양극, 칼의 양쪽이 다 날이 서 있는 것이다.
  일본의 말살정책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조선에서 나타난 창씨개명과 
한글금지였다. 식민지 통치를 한 그 어떤 나라도 그 나라 사람들의 이름을 자기네 
식으로 고치는 일을 한 역사가 없다. 그러나 일본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야만적인 
행위를 부끄러움도 없이 해나갔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한 후 나카무라에게 
토머스라는 이름을 쓰도록 했다면 그건 얼마나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었을까. 
하루코라는 일본 여자에게 어느 날 너는 이제부터 엘리자ㅂ이라고 하거라 했다면, 
그것이 정책이었다면, 얼마나 야만적인 행위인가.
  그러나 일본은 그런 일들을 했다. 말살정책, 식민지배의, 그 땅의 역사나 문화를 
깡그리 없애려는 발상, 인간의 두뇌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비열한 방법을 
그들은 썼었다.
  또 하나가 그들이 식민지에 만들어 세운 건축물, 철도를 비롯한 간접자본의 
투자이다. 착취를 위한 방법으로 철도를 놓고 통신시설을 설치하고 건물을 
지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다 같은 착취를 했다 해도 일본처럼 철저하게 
자기네의 식민지에 그처럼 많은 투자를 한 나라가 없다.
  영국이 식민지였던 나라엘 가면 그때의 총독부 건물을 거의 찾아 보기 힘든 
경우가 많다. 일본이 한 것처럼 철도에서부터 감옥까지 벽돌 구워가면서 지어놓은 
나라가 없다. 이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특색이다. 영원토록 그들은 그 땅이 자신들의 
땅이 되었다고 믿었던 것일까. 몽매하기도 하여라. 민족이란 수천년 같은 말 같은 
옷 같은 음식을 먹으며 하나가 되어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 미련함이라니.
  시들고 지는 역사의 들풀의 알고 있을까, 그 계절이 가고 오는 것을. 다만 
무지막지하게 큰 건물이구나 하는 느낌 뿐, 지은 사람의 뜻도 아름다움도 느낄 수 
없는... 그 건물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내 옆에서 임 수녀가 물었다.
  --실제 푸이가 살았던 곳은 어디지요?
  --그곳은 다음에 가지요. 영화를 찍은 바로 그 장소입네다.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냐는 내 말에 메이나가 대답했다.
  --지금은 박물관입네다. 작가선생님이라면서요... 박물관에 흥미가 많겠습네다.
  --제가 글쟁이라는 건 어떻게 또 아셨담.
  --한국에서는 작가를 글쟁이라고 합니까? 쟁이는 노동계급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골아파지는데. 내가, 자기 일을 스스로 낮춰서 부르느라 그렇게 
말한다고 했지만 메이나는, 작가가 노동자일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임 수녀가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
  --이분은 아마 노동자급 작가인가 보지요.
  그 말에 메이나도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장춘에는 일본의 괴뢰정부 만주국의 
수도였던 신경 시절, 그 한때의 서글픈 영화가 지금도 끝나지 않고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지금도 장춘은 일본과도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옛 시절을 더듬어 보려고 
오는 일본 관광객이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많은 곳이 또한 장춘이었다. 그리고 
길림대학 일본어학과는 중국내에서도 우수한 학생들이 모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안에서의, 일본어 교육의 발신지라고나 할까.
  거리의 간판이며 도로표지판을 보던 조윤상 씨 부인이 말했다.
  --그런데 미나 씨. 한자로 '기차'라고 써놓은 게 그게 자동차라면서요?
  --네. 중국에서는 한국에서 기차라고 하는 것이 '화차'이지요.
  --하긴. 일하는 걸 '공작'한다고 하는 게 중국말이라니까. 미나 씨 지금 공작하고 
있는 거지요?
  --네, 저는 지금 여러분과 공작 중입네다.
  우리는 다 함께 소리내어 웃었다. 지나가던 중국인들이 우리들을 힐끗거렸다. 
웃음 끝에 내가 임 수녀에게 물었다.
  --중국말로 '동서'라고 써 있으면 그건 물건, 상품이라는 뜻이래요.
  간판들을 쳐다보면서 조윤상 씨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중국사람들 한문 참 잘 쓰네요.
  우리는 아이들처럼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럼, 중국사람 한문 잘 쓰고 미국사람 
영어 참 잘 쓰지.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미국에 가면 아이들도 양담배만 
피더라는 이야기와 다를 거 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떠들면서 우리는 걸었다.
  --법원이나 경찰에 '고소'한다는 말 있잖아요. 그렇게 써 있으면 조심하세요.
  내 말에 임 수녀가 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린데요?
  --수녀님이야 고소 당하실 일 없으실 텐데요 뭐.
  --무슨 뜻인데 그래요?
  --이야기하는 걸 중국에서는 '고소'한다고 쓰거든요.
  --아이구, 저런.
  --그리고 더 지독한 것도 있어요. 마로.
  나는 임 수녀에게 말 마 자와 길 로자를 한자로 써 보였다.
  --이건 말이죠 말다니는 길이 아니라, 큰길이라는 뜻이에요.
  --말다니 던 길이 옛날에는 넓었나 보지.
  뜻만 다른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거리에 읽을 수 없는 한자가 많이 눈에 
띄었다. 어려운 한자여서가 아니었다. 한자를 전부 쉽게 고쳐 놓아서 오히려 옛날 
한자를 아는 우리들로서는 저게 무슨 글자인가, 퀴즈를 해야 할 판이었다.
  --1958년부터 시작했습네다. 인민들은 편리하지요. 한자가 쉬워졌으네까요.
  조윤상 씨 부인이 말했다.
  --미나 씨. 우리 어디가 앉아서 고소 좀 합시다. 다리들 안 아프세요?

  만찬장으로 향하면서 메이나가 차창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이는 트럭들이 다 장춘에서 만듭니다. '해방'이라는 차인데 중국 어딜 
가나 보실 수가 있지요.
  저쪽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서 건배, 또 한 사람이 몇 마디 하고 또 건배... 
거기다가 또 옆 사람이 우리 마십시다 하며 건배, 그렇게 저녁이 시작되었다.
  더군다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 건, 내가 음식 접시를 깨뜨린 일이었다. 
취해서만도 아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앞에 놓인 접시를 건드렸고, 돌을 깐 
바닥에 사기접시 떨어지며 내는 소리라니.
  그때였다. 죄송하다면서 고개를 숙이는 내게 한 중국인이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게 중국말로 떠들어댔다.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는 내게 메이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깨어지는 건 좋은 거랍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중국인이 좌중을 향해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옆에 몸을 숙이며 서 있던 
메이나가 통역을 해주었다.
  --깨어진다는 건 헤어진다는 것. 헤어진다는 건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 그러므로 
사람은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깨어져야 한다.
  통역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그가, 다시 술잔을 들며 말했다.
  --이 행운을 위하여 건배.
  음식 접시를 깨도 행운이라니. 메이나가 속삭였다. 좋은 징조랍니다. 앞으로 뭔가 
잘 될 거 같다는.
  --길조란 뜻인가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예. 저 분이 한 선생님이 접시를 깬 게 길조랍니다.

  만찬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박영수 씨가 말했다.
  --중국말 얘길 하다 보니 생각이 나는데... 내 자랑 하나 할까요.
  --자랑하시겠다고 허가 받고 하는 건 자랑이 아닌데요.
  우리는 소리를 낮춰 웃었다.
  --내가 신문에 있을 때 만든 말 가운데 지금도 한국에서 잘 쓰는 말이 있어요. 
그게 앞지르기라는 말입니다. 자동차 운전할 때, 앞 차를 앞질러 가는 걸 늘 
추월이라고 썼거든요. 그게 오이코시라는 일본말을 그냥 발음만 우리 식으로 바꾼 
거잖아요. 그래서 뭔가 우리말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만들어 낸 게 '앞지르기'랍니다.
  --몰랐네요. 그걸 처음 쓰신 분이 선생님이신 줄은.
  우리들을 초청한 동북아연구소 사람들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왔을 때였다. 키를 
찾아들고 방으로 올라가려는 내게 말했다.
  --미국에 오시거든 저희 집에 꼭 들르세요.
  --시애틀이라고 하셨나요?
  --그래요. 오시면 좋은 한국사람들도 소개시켜 드리고 그러지요.
  여행이 가지는 힘이었으리라. 만나서 이틀이 지났는데 어느새 우리는 그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고백을 하자면, 전 아직 한번도 미국엘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건 왜요?
  --지배라면 이상하지만, 하여튼 우리가 너무 미국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만들어내는 영향권 안에 갇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선지 전 
미국유학하고 온 사람들에게는 이상스레 반발감 같은 게 들고, 안 좋은 편견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거든요.
  --그럴 수도 있지요.
  --반미감정이라든가 그런 것과는 달리, 미국이라는 나라가 상징하는 문화가 싫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나라의 실용주의랄까 하는 것도 그렇고. 선생님은 왜 
이민을 떠나셨나요?
  --짧게 이야기하기 힘들긴 하지만 뭐랄까, 자유라든가 평등에 대한 충동이었을 
겁니다. 식민지시대, 자유당 정권 그리고 군사정권... 우리 세대는 너무 많이 
억압받고 살았거든요. 무엇보다도 그게 억울했거든요.
  --편하세요? 미국생활...
  --줄 서면 되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줄을 서면 되는 나라. 기회에 있어서의 자유와 
평등.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단 하나일지 모른다. 줄을 서는 사회와 줄이 없는 
사회.
  --그렇게 생각하자면, 우리가 중국이나 아직도 줄을 안 서는 나라겠지요.
  아침은 신부와 함께 보는 호텔방에서의 미사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저녁은 원장이 
주선하는 중국인들과의 만찬으로 끝났다. 극과 극이라고나 할까. 아침은 경건하고 
선명했으며, 흔들면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날 듯이 해맑았다. 그러나 저녁은 독한 
중국술과 기름기 넘치는 요리와 중국인들과 나누는 푸지근한 이야기로 질펀했다.
  이 못사는 나라의 사람들이 이렇게 먹어도 되는 건가 싶은 그런 자리였다. 
그야말로 때려먹는 듯한.
  그리고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 부드러운 손길을.
  담배곽만한 공산당원증을 내보이며 첸 씨가 웃었다. 다음날 영화사와 열차의 
객차를 만드는 공장을 방문하러 떠나면서였다.
  그는 북경 공항에서부터 우리와 동행이었지만 전혀 한국어를 하지 못했었다. 
여행사의 남자가 일어로 안내를 하고, 메이나가 한국어로 우리를 도와 주는 사이에 
그는 다만 웃고만 있었다.
  공산당 공작원증이라는 글씨와 함께 마치 출입증처럼 이름과 함께 사진이 붙어 
있는 그 조그만 증명서를 내려다보면서 처음에 나는 왜 그가 그것을 내게 보이고 
싶어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관청에서 나온 사람이오 하고 내게 겁을 줄 아무 
이유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는 늘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다만 허어허어하며 웃었다. 우리가 불편해 해도 허어허어였고 우리가 너무 새로운 
풍물에 너무 놀라워하며 웃어도 허어허어였다.
  첸 씨의 그 허어허어하는 웃음과 공산당 공작원증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나도 
허어허어 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 앞에서 우리들이 마실 음료수를 싣고 있던 
메이나에게 손짓을 하며 내가 말했다.
  --메이나 씨. 이분이 왜 이걸 나에게 보여주나 모르겠네요.
  메이나가 무어라 첸과 중국말을 했다. 메이나의 얼굴이 웃음인지 난처함인지 
모르게 일그러지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이분이, 한국말을 못해서 미안하답니다. 뭔가 자기도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뭐라고 해야하지요 한국말로, 재미 있게 하려고 그걸 보였답니다.
  옆에 있던 수녀와 부인들이 작은 탄성을 질렀다. 어머, 이 사람이 
공산당원이라네요. 조윤상 씨 부인이 말했다.
  --애기 같네요. 자기도 뭔가 재미 있는 게 없을까, 우릴 뭐 재미 있게 할 게 
없을까... 그래서 그걸 보여주나 봐요.
  내 생각도 그랬다. 영화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첸과 내가 메이나를 통역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어제의 건배이야기도 나왔다. 밤새도록 그렇게 
건배만 하다가 어쩔 거냐, 나는 어제밤 호텔로 돌아가서 술 때문에 아주 괴로웠다. 
그런 이야기 끝에 첸 씨가 말했다.
  --건배할 때는 언제나 자기 잔을 상대방보다 낮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한다는 겁니까.
  내가 두 손을 가지고 흉내를 내보였다.
  --아니지요. 더 밑으로, 이렇게 자기 잔을 상대의 잔 밑에다 부딪쳐야지요.
  --그런 걸 어제 가르쳐 주었어야지요.
  내 말에 첸씨 또 허어허어 하고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오늘도 또 건배 많이 해야 합니다.
  중국영화의 거대한 산맥 가운데 그 양이나 질에서 특히 알려진 지방이 두 곳 
있었다. 그 가운데 한 곳이 서안이었고 또 하나가 장춘이었다.
  장춘은 특히 사극을 많이 만드는 곳으로, 장춘영화촬영소의 규모가 그것을 
짐작하게 했다. 우리의 경복궁 근정전 규모의 세트가 널려 있었다. 중국인이 
해방전쟁이라고 말하는 일본과의 싸움이나 국민당 정권과의 국공내전을 다룬 영화 
또한 인근에 산악지대가 많으므로 해서 장춘영화촬영소가 만들어내고 있다는 설명을 
하면서 메이나가 말했다.
  --장백산에서 많이 찍습니다.
  장백산, 백두산을 두고 그들은 장백산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많이 찍습네까?
  --저녁에 텔레비죤 보시라요. 어제 밤에도 했습니다.
  --했습네까?
  그때야 메이나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어제밤 연습 많이 했습니다.
  옆에 있던 부인들이 따라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말씨가 처음 만날 때보다 많이 바뀌었네요.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나무 옹이를 깎아서 만든 인형들을 파는 
선물판매소를 마지막으로 영화사를 돌아보고 났을 때 빗발은 조금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기차 대가리는 내일 보아야겠습니다.
  메이나의 말에 우리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의 일정에 의하면 그날 
오후 기관차 생산공장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기차 대가리 만드는 데를 보러 가야 하는데, 비가 와서 내일로 바꾸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기차 대가리가 뭔데요?
  --기차가 가려면 맨 앞에서 기차를 끌고 가는 게 있지 않습니까.
  객차가 아닌 기관차를 이 여자가 기차 대가리라고 하는구나. 우리가 차마 웃을 
수도 없어서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 메이나가 말했다.
  --제가 전화를 좀 하고 오겠습니다. 우산도 준비하겠습니다.
  기차 대가리 만드는 곳을 보러 가는 일이 내일로 미루어지면서 우리는 시간에 
억매일 것 없이 늦은 점심을 먹었다. 개구리 다리 튀김이 거기서 나왔다. 첸 씨가 
허어허어하면서 설명을 했다.
  --이것이 장백산에서 나는 겁니다.
  --백두산에서 개구리를 기르나요?
  --양식하는 겁니다. 천연적으로 기릅니다.
  아마 공해가 없다는 뜻이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먹어 본 개구리 다리는 
참새구이 비슷했다. 먹어는 보고 싶은데, 개구리라니 차마 손이 안 간다면서 
부인들이 얼굴을 찡그리는 한쪽에서 우리는 추적거리며 내리는 가을비를 내다보며 
배갈을 마셨다.
  --캐나다에서 지내시기는 어떤가요?
  --캐나다도 두 곳으로 나눠서 얘기해야 되지요. 영어권하고 불어권으로. 나는 
불어권에 사는데, 복지 문제는 참 잘 되어 있어요.
  박영수 씨와 조윤상 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듣기로는, 아이들의 교육이 특히 그렇다면서요?
  --교육문제는 아무 걱정을 할 게 없으니까요. 나라에서 다 책임을 지니.
  --그래요. 한국 학생들이 불쌍하지요. 그저 공부....
  내가 물었다.
  --조 선생님은 은행에 오래 계셨다면서요?
  --그랬지요. 여기 와서도 느끼는 건데, 우선 숲이 많으니 공기가 얼마나 
좋습니까.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면 이런 건 불가능하지 않았겠어요. 땅을 국가가 
관리하니까요. 서울 참 큰일이더군요. 숨이 막혀요.
  무엇을 책임지지 않아도 좋은 자리였다. 사람 못 살 데라고 해도 좋았고, 나라도 
아니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나라, 우리가 쓰고 있는 말, 우리 몸을 
흐르고 있는 피... 그 우리들의 나라, 한국.
  빗발을 내다보며 그렇게 앉아 있을 때였다.
  조윤상 씨 부인이 말했다.
  --한 선생님도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시면... 가톨릭 믿으세요.
  갑작스러워서, 나는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았다.

  중국이 변화하고 있구나 하는 걸 전해 준 곳은 시장이었다. 사람들의 삶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일까. '광복시장'이라는 이름의 새로 생긴 시장을 돌면서의 
일이었다.
  생선장수나 고기장수들이 뿜어내는 비린내는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물건을 깎아야 하기도 마찬가지였다. 수녀들은 시장에서 콩가루를 묻힌 
인절미를 샀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 인절미 하나에도 무언가 추억이 있나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둘러본 그 시장이 그토록 드넓은데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푸성귀를 가지고 나와 있는 사람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광복시장'을 둘러보고 났을 때 메이나가 말했다.
  --저 사람들은 여기 사람이 아닙니다. 다들 남방에서 온 사람들이지요.
  --남방이라면?
  --복건성이라든가 저 밑 남쪽 사람들입니다. 저 사람들은 시 외곽에 모여 살면서 
저렇게 장사를 합니다. 마음대로 이사를 왔기 때문에 국가에서 집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생활이 되는 모양이지요.
  --아주 장사가 잘 된다고 합니다. 전에는 개인이 장사하는 것은 금지되었지만 
최근에는 다 허용됩니다. 배추나 무우를 파는 사람들도 자기가 기른 겁니다. 땅을 
빌어서 그렇게 하지요.
  자기가 길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땅을 빌린다니, 
어디에서 누구에게 빌린다는 건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토지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더 일하고 싶은 사람은 국가에서 땅을 더 빌려 줍니다. 그렇게 해서 농사를 
짓거나 돼지를 기릅니다.
  비로소 노동력의 문제가 이해되었다. 남보다 더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많은 
농토를 빌릴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중국은 인위적으로 산아제한을 하고 있는 
나라였다. 아이는 하나밖에 가질 수가 없다. 아이를 많이 두면 진급이 안 된다든가 
취직이 어렵다고 했다.
  --그래도 조선족은 막 아이를 낳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해서 그렇습니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벌금을 내야 하는 데도 조선족은 특히 
그렇습니다.
  광복시장을 나오니 그 앞이 바로 푸이가 살았던 궁전이었다. 영화에서 낯익은 
바로 그 건물.
  황제의 궁궐... 그렇게 부르기를 그 건물을 외관부터 거부하고 있었다. 관공서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길림성 박물관이라는 지금의 쓰임새에 
더 어울린다고나 할까.
  안으로 들어갔을 때의 첫 느낌 또한 그랬다. 어딘가 잘못 쓰여지고 있는 
건물이라는 느낌이 그것이었다. 윗층과 커다란 원통모양으로 터져 있는 메인홀로 
들어섰을 때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나온 박물관 가이드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도 
그녀의 첫 말이 나를 놀라게 했다.
  이곳은 박물관입니다, 하는 의식이 그녀에게는 없어 보였다. 그녀는 이곳에 살았던 
푸이와 그 아내들의 이야기로부터 박물관 안내를 시작했다. 그녀가 설명을 하면 
메이나가 통역을 하며 우리는 전시실을 돌았다. 박물관은 길림성을 중심으로 이곳 
지방의 고대사에서부터 현대까지를 보여주는 식으로 전시물이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내양의 설명은 그런 전시물과는 무관했다.
  광개토대왕비의 실물 탁본을 나는 처음으로 거기에서 보았다. 그러나 설명을 하는 
아가씨는 그 거대한 광개토대왕비의 탁본 옆을 그냥 지나쳐가면서 말했다.
  --이쪽이 식당이었습니다. 푸이는 여기서 밥을 먹었는데, 양식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이 화장실입니다.
  메이나가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부인이 화장을 하던 방이라는 말입니다. 옷도 갈아입고.
  안내양의 설명은 그쯤에서부터 점입가경이었다. 그 어떤 출토품에 대해서도 
그녀는 설명이 없었다. 마치 집을 보여주는 부동산 중개업자처럼 그녀는 이 방은... 
저 쪽 방은... 하며 걸어나갔다. 푸이는 결혼을 몇 번 했으며 그 부인 가운데 누가 
제일 미인이었으며, 구불거리는 계단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자 이번에는 밖이 
내려다보이는 베란다를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여기가 바로 푸이 부인이 일광욕을 즐겼다는 장소입니다. 부인은 여기서 옷을 
하나도 입지 않고, 발가벗은 채 일광욕을 했다고 합니다.
  운전수와 불륜의 관계를 맺어 임신을 했던, 정신이상이 된 부인도 있었던가, 
푸이의 생애를 어렴풋이 떠올리며 나는 안내양을 벗어나 혼자 밑으로 내려왔다.
  박물관 부속 옆건물은 이 지방의 현대사를 설명하는 기념관이 되어 있었다. 
도표와 사진들 그리고 모형들도 가득찬 전시장의 맨끝에 마지막 황제 푸이에 관한 
기록이 있었다. 박물관 안내양은 그런 설명을 할 것이 아니라 이곳으로 가게 하면 
되는 것을.
  전쟁범죄자 수용소에 갇혀 있던 그의 모습, 농작물을 기르고 있는 허리 구부정한 
장년의 남자, 저 사람이 젊은 날의 황제였던가. 전시물의 맨 마지막에 주은래가 한 
말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황제를 인민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위대한 일이다."
  밖으로 걸어나오며 나는 옆에 서 있는 메이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저쪽 박물관에서는 왜 안내를 그렇게 하지요. 진열품에 대한 설명은 
없고 맨 푸이에 관한 이야기 뿐이니.
  --일본관광객이 많이 찾는데 그 사람들이 그런 것만 물어대서 그래요.
  일본 사람들, 이곳에 괴뢰정권을 세운 것도 그들이었는데 이제는 또 관광객들이 
몰려와서 자신들의 옛 자취를 기웃거리는가.
  어제 영화사를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우리는 일본인 관광객 십여 명과 
함께 영화사 관계자의 설명을 들었었다. 장춘 영화촬영소에서는, 세트시설을 
관람시키기 전에 먼저 한 자리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촬영소의 규모나 내용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궁금한 것이 더 있으면 물으라고 했다. 행색으로 보아 어느 
시골에서 단체로 온 것이 분명한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 물었다.
  --외국영화를 많이 보고 연구한다고 했는데, 혹시 일본영화도 보십니까?
  남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일본인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남자는 괴로워"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때 약속이나 한 듯이 일본인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설명을 하던 
중국인이 그들을 둘러보며 차가운 눈길로 고개를 저었었다.
  "남자는 괴로워"란 떠돌이 장사꾼을 주인공으로 그가 엮어내는 유랑의 애환을 
그려가는 영화였다. 매 편 그가 벌이는 연애의 상대가 되는 여주인공에 당대의 
톱스타를 쓴다는 것도 특징의 하나였다. 그 영화는 일본서민의 정서를 그려내 
보여주면서 세계 영화사상 속편으로는 기록을 세우고 있는, 예술과는 거리가 먼 
오락영화였다. 계속되는 속편이 40편을 넘어서서 기네스 북에도 오른 영화였다. 그 
영화의 이름을 대면서 키들거리는 일본인들을 바라보며 느껴졌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속물근성 같은 것.
  세계를 휩쓸며 돌아다니면서 섹스관광을 일삼는 사람들, 그들을 보며 더욱이 알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느껴지는 그런 모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매춘이란 
인류가 존재하면서 아마 거의 동시에 있어 왔던 행태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콜걸과 낮에도 함께 돌아다니는 남자들이 일본인밖에 더 있을 것인가.
  박물관 건물을 나서며 메이나가 말했다.
  --이제 오늘로 장춘도 마지막이군요. 저녁을 드시고 나서 기차를 타게 됩니다.
  --연길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12시간쯤... 저녁에 타서 아침에 내리니까요. 침대차니까 주무시면서 가면 
됩니다.

  밤기차. 나는 가만히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밤차를 타 보는 게 얼마 만인가. 내가 
마지막으로 밤기차를 탔던 건, 잊기 힘들게 슬픈 일과 함께였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밤기차를 바라보기만 해도 그때의 일이 떠오르곤 했었다.
  이제 밤기차로 떠나야 할 장춘의 거리와 다가오고 있는 저녁 어스름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북경을 거쳐서 왔다고는 하지만 장춘은 내가 만난 천 도시는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도시를 걸었고, 이곳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그리고 서로의 마음에 
작은 기억의 손자국들을 만들지 않았던가. 연구소의 사람들, 여행사에서 나와 
우리들을 도와 준 이들 그리고 매일을 함께 한 메이나까지 이 도시의 품 속으로 
나를 끌어당겨 그의 곁에 걸터앉게 해준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객차를 만드는 공장이나 시장에서 만난 젊은이들도 있었다. 한결같이 머리를 뒤로 
묶는 포니테일 헤어스타일을 하고 지게차며 커다란 중장비들을 운전하던 중국의 
아가씨들은 건강하고 밝았다. 두 볼을 붉게 물들이며 웃곤 하던 그들.
  정리한 가방을 호텔방 앞에 내다놓고 나는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숲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이제 잠시 후면 이 호텔을 떠나 역으로 나가야 한다. 한 
도시와의 짧은 만남 그리고 헤어짐... 서글픔도 그 만남 만큼이나 짧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담배를 피워물며 생각했다.
  문득 노래소리 하나가 떠올랐다. 오페라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
  장애자 학교에서 만났던 젊은이들을 기억하며 나는 뜻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가 방문했던 장애자 학교는 옛 신경대학 안에 설립되어 있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학교 교사는 새 것이었지만 교정은 아직 정리가 안 되어 질퍽거리는 웅덩이와 
흙더미가 널려 있었다.
  그곳에서 눈이나 귀가 부자유한 젊은이들이 특수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놀라웠다. 그들이 배우고 있는 교육과정은 단순한 직업훈련이 아니라 예술창작 
교육이었다. 청각장애자들이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시각장애자들이 노래며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들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중국화였는데 예술성과는 다른 의미에서, 그 기술적인 
면은 놀랍게 성숙해 있었다. 세필화에 있어서 특히 그랬다.
  --이 호랑이는 꼭 살아 있는 거 같아요.
  조윤상 씨 부인이 그런 말을 했고 강 수녀는 무리지어 핀 꽃 그림을 보면서 
탄성을 질렀다.
  안내를 하던 학장은 우리들을 위해 시각장애자 교실에서 한 학생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연습실은 직사각형의 좁은 방이었다. 거기서 피아노 반주로 우리는 그 
앞이 안 보이는 청년이 부르는 오페라 아리아를 들었었다. 그 노래가 "아이다"에 
나오는 '별은 빛나건만'이었다.
  우리들 앞에 서서 당당하게 노래를 부르는 그 청년이 끼고 있던 검은 안경. 그 
조그맣고 동그란 안경알은 또 왜 그렇게 가슴에 아프게 와 닿았던가.
  오페라 아리아를 중국땅 장춘에 와서 듣다니. 나는 방안을 한번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백두산 일정이 끝나면 다시 이곳에 들러 한번의 회의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 이곳 길림성 성장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
  호텔 복도로 나서는 나를 메이나가 불렀다.
  --다 준비 되셨나요?
  --네.
  --그러면, 가방은 거기 두시고 밑으로 내려가시지요. 가방은 다른 차로 역으로 
갑니다.
  나는 메이나와 함께 계단을 걸었다. 내가 헤어지는 인사를 했다.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친절하셨고요.
  --또 만날 건데요.
  --네에? 또 만나다니요.
  --장백산에 갔다 오시는 날은 제가 역에 나가서 마중해야 합니다.
  --다시 우리 담당이군요.
  --가실 때까지입니다.
  밑으로 내려와보니 여행사 버스에 짐들이 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공항에서 내 눈을 끌었던 수녀들이 가지고 온 그 무지무지 하게 커다란 두 개의 
짐도 버스에 실리기 위해 내려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내려올 때를 기다리며 나는 어둑어둑하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숲을 바라보았다. 역으로 나갈 시간을 기다리며 앉아서 그러나 그때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어찌 알 수 있었으랴.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그 운명의 손길을.
  호수 옆의 숲 속에 자리한 이 호텔은 외국인에게는 최근에야 개방이 된 곳이었다. 
전에는 국가귀빈의 숙소였다고 했다. 숲을 내다보고 서서 내가 메이나에게 말했다.
  --여기 와서 첫날이었던가요, 제가 그랬었지요. 이곳을 좋아하게 될 거 같다고 
말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아지셨나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군요. 떠난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그래요, 마음에 저린다고 할까요. 나는 그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마음에 저렸다. 그러나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그것이 
살아가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그것 때문에 만남을 늘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옆에 서 있던 메이나가 혼잣말을 했다.
  --다른 분들을 왜 안 내려오시나. 올라가 봐야겠네요.
  --내가 올라가 보고 오죠.
  --제 일인데요.
  --여기서 쉬세요, 조금.
  내가 그녀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다리가 아픈 모양이더군요. 구두를 벗었다 신었다하는 걸 보고 있었어요.
  그녀가 소리없이 웃었다.
  메이나를 로비의 소파에 않아 있게 하고 나는 2층의 우리들 방으로 올라갔다. 
조윤상 씨 부부가 마악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밑에서 차가 기다리던데요.
  --한 형이... 그럼 우릴 데리러 올라오신 겁니까?
  --알려드리려고요. 짐은 보내셨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조윤상 씨 옆에서 부인이 말했다.
  --고맙네요, 이렇게. 박 선생님 방은 저쪽이고, 수녀님들 방 아시지요?
  --네, 앞쪽 방이시잖아요.
  수녀들 방을 두드리고 나서 내가 말했다.
  --수녀님. 다 정리 되셨으면 밑으로 내려오세요.
  문을 열며 임 수녀가 말했다.
  --6시에 떠난다더니 벌써 가나요?
  --빨리 나갔으면 하는군요. 연구소 사람들이 역에 나와 있어서 그 사람들과 좀 
시간이 걸릴 거랍니다.
  임 수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만큼 건배를 했으면 됐지, 역에까지 또 나온대요?
  임 수녀가 작은 손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뒤에 서 있는 강 수녀에게 내가 
물었다.
  --뭐 들어드릴 짐은 없으세요?
  --우리가 뭐 가지고 다니는 게 있어야지.
  무슨 소리람. 짐 보따리는 누구보다도 제일 큰 걸 가지고 다니시면서.
  수녀들이 묶었던 방 안으로 들어서며 내가 말했다.
  --도대체 주무시기는 하신 거예요?
  그렇게밖에 할 말이 없었다. 침대며 의자며, 사람이 이 방에서 자고 나갔다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이 정리가 되어 있었다.
  제주에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시골에서 와 호텔에 처음 투숙을 한 신혼부부가 침대는 그냥 놓아두고 
바닥에서 자고 가는 일이 더러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방과 다를 것 없었다. 침대 
시트며 베개마저 구겨진 자국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오랜 이분들의 생활이 이렇게 호텔방을 정리하게 만든 걸까. 이렇게 사는 분들도 
이 세상에는 있었던가 싶었다.
  --그럼 먼저 내려가세요. 전 박 선생님 모시고 갈 테니까요.
  박영수 씨 부부가 들어 있는 방에 노크를 하고 나는 밑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전했다. 안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래요? 지금 나가는 길입니다.
  박영수 씨가 여행가방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짐은 절 주세요.
  내가 가방을 받아들었다. 크기와는 달리 꽤 무게가 나갔다.
  --부치실 걸 그랬잖아요.
  내 말에 박영수 씨 부인이 말했다.
  --그거 무거운데, 당신이 들지 그러세요. 다리미가 들어 있어서 그래요.
  우리는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부인이 물었다.
  --밤기차라면서요? 몇 시간이나 간대요?
  --내일 아침에나 내린답니다.
  어두워오는 거리를 달려 버스가 역 앞에 닿았을 때 조윤상 씨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하이구. 저 사람들 또 떼거리로 나와 있네요.
  연구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야말로 떼거리였다. 오랜 은행생활을 
마감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간 조윤상 씨는 말씨도 조용조용했고 여행을 하면서도 
많은 것에 대해 탐구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떼거리라는 말을 썼을 때 나는 
웃음이 나왔다.
  --중국사람들에게 질리셨군요.
  --한 형은 안 그래요? 사람들 저렇게 몰려나오는 건, 난 아주 질색이에요.
  떼거리로 몰려나온 사람들과의 떼거리 헤어짐이 끝났을 때 메이나가 다가왔다. 
저녁 날씨가 차가워서인지 그녀는 머리에 스카프를 하고 있었다.
  --장백산에까지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인사를 하는 메이나에게 내가 손을 내밀었다.
  --부탁한 거 잊지 마세요.
  --알고 있습니다. 지도, 역사책. 그리고 테이프요.
  가늘고 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놓으며 나는 돌아섰다.
  붉게 드리워져서, 솟아 있는 역사 건물 뒤편의 하늘을 물들이고 있던 놀이 
사라지면서 역광장에 어둠이 서리기 시작했다. 배웅 나온 연구소 직원들을 뒤로 
하고 우리는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여행사 직원들이 우리를 일반 승객과는 다른 
출구로 안내했다.
  역사를 나섰다. 플랫폼이 없이, 기차는 역사를 나서는 우리 앞에 길게 서 있었다. 
어두워 오는 하늘을 뒤로 하고 수증기를 뿜어대며 서 있는 검은 색 기차를 나는 
작은 여행가방을 든 채 바라보았다.
  왜 가방을 부치지 않고 들고 나오셨어요? 메이나는 물었었다. 여기 술이 들어 
있거든요, 기차에서 마실 거.
  그냥 자면 되지 않습니까? 눈으로 그렇게 묻고 있는 메이나에게 나는 말했었다. 
비행기나 차 안에서 거의 자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술이나 마실 수밖에요.
  기차에 올랐다. 좁은 통로가 창을 따라 한쪽으로 나 있고 다른 쪽이 
침대칸이었다. 안에는 아래 위로 침대가 네 개 놓여 있었다. 우리 일행 아홉 명에 
동행하는 중국인이 세 명이었다. 여행사에서 나온 사람이 둘이었고 연구소의 첸 
씨가 허어허어 하면서 또 함께였다.
  수녀와 부인들 넷이 한 칸에 타기로 하고 우리들은 넷씩 나뉘어서 방을 잡았다. 
결국 나이가 제일 밑인 내가 세 명의 중국인과 함께 한 칸에 타게 되었다.
  
    4. 가톨릭 3수생

  기차가 장춘을 떠났을 때 밖에는 이미 어둠이 가득했다.
  나는 통로에 나와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달이 뜨지 않아서인가. 
창밖으로는 캄캄한 대륙이, 불빛도 산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들판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침대칸의 열차 통로는 두 사람이 겨우 비켜가게 좁았다. 그 통로의 창가 쪽으로, 
접어서 밑으로 내리면 벽에 붙는, 조그마한 탁자가 있었다. 긴 직사각형의 이 탁자를 
사이에 하고 양쪽으로 똑같은 형식으로 벽에 붙게 되어 있는 1인용 의자가 있었다.
  함께 가면서 좁은 침대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수도 없기에 나는 그 통로의 
탁자를 펴놓고 앉아 중국 대륙을 내리덮고 있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술을 했던 탓일까. 화장실엘 가고 싶었다. 흔히 모든 열차가 그렇듯이 
객차의 연결부분 쪽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통로를 따라 걸어나가 보았다. 통로 
끝에서는 어딘가에 유리창이 깨어졌는지 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왔다.
  천장의 등도 꺼져 있어서 캄캄할 뿐이었다.
  나는 가이드에게 찾아가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내가 이미 갔다 온 그곳의 
왼쪽이라는 설명이었다. 그 캄캄하고 바람 부는 곳의 어디가 화장실이라는 것인지. 
투덜거리며 나는 다시 통로 끝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바람을 가리며 
라이터를 켜 보았다. 언뜻 켜졌다가 꺼져가는 불빛에 화장실 모양으로 보이는 
공간의 눈에 들어왔다. 그쪽으로 몇 걸음 더듬거리며 내디뎠을 때였다. 오물의 
악취가 거의 참을 수 없이 덮쳐 왔다.
  어이 없어하며 나는 화장실을 포기하고 다시 통로의 의자로 돌아왔다. 탁자에 
팔을 고이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어둠을.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나 또한 그 이상을 참을 수 없이 오줌이 마려워 왔다. 
방법이 없다 생각하고 나는 다시 그 화장실이라는 컴컴한 공간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미리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라이터를 몇 번인가 켜 가면서 나는 
화장실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거기에는 문짝도 달려 있지 않았다. 하나 둘 셋, 
마치 무엇엔가 뛰어놀란 듯이 나는 화장실에 들어갔고 숨을 쉬지 않는 채 소변을 
보았다.
  겨우 오줌 누기를 마쳤을 때 나는 숨이 막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건 
오줌은 누는 게 아니라 잠수를 하는 거군. 중얼거리며 내가 그 냄새를 뒤로하고 
통로로 돌아왔을 때였다.
  --어디 갔었어? 한 형을 찾았는데...
  오줌 누는 일도 마치 특공대처럼 해내야 하는 곳이 중국의 기차였나. 무슨 큰 
일이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에게 흐뭇해 하며 서 있는 나를 박영수 씨가 불렀다.
  --이리 좀 와 봐요.
  --무슨 일이신데요?
  박영수 씨가 갑자기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한 형에 대해서 회의를 했는데, 이쪽으로 좀 와 봐요.
  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서, 마음 편하게 고생을 모르고 늙은 것같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박영수 씨가 침대칸의 문을 열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그쪽으로 
다가갔다.
  회의를 했다더니, 정말인가. 거기에는 수녀 둘과 조윤상 씨 부부까지, 원장과 
신부를 뺀 우리 일행이 다 모여 있었다.
  큰일 났어요. 누구 화장실 갔다 오신 분 안 계시지요? 제가 가 봤는데 이건 
문짝도 없고 불도 없이 캄캄해요. 게다가 냄새가 어찌나 나는지 코를 막고 있어야 
해요. 화장실엘 가는 게 아니라 잠수를 하는 거예요. 누구 큰 거라도 일 보셔야 할 
분은 할 수 있는 한 참으셔야 할 거예요. 하지만, 아마 나오려던 놈도 거기에 가면 
도로 들어갈 걸요.
  모두들 모여 있는 게 반가워서 나는 그런 실없는 소리라도 떠들어 댈 생각이었다. 
그런데, 모두들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생각보다 굳어 있었다.
  회의를 했다더니, 내일부터는 절대 중국사람과 건배는 하지 말기로 하자! 그 
사람들이 주는 술 다 받아 먹다가는 명대로 못 살 것 같다. 뭐 그런 결의라도 하신 
건가. 침대칸 안을 둘러보는 나를 조윤상 씨 부인이 옆에 와 앉게 했다.
  박영수 씨가 내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우리가 지금, 한 형에게 영세를 주도록 신부님한테 부탁하기로 결정을 했어요. 
그런데 한 형 생각은 어때요?
  조윤상 씨 부인이 말을 덧붙였다.
  --가톨릭 3수생. 그건 내가 나 자신에게 붙인 이름이었다. 종종 누군가에게서, 
종교가 무엇입니까? 하는 물음을 들을 때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던가. 신앙은 
없지만... 제가 가톨릭 3수생입니다.
  임 수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만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가톨릭 삼수생. 그건 조금 전 장춘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먹고 났을 때 내가 했던 
말이었다.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였다. 조윤상 씨 부인의 말 때문이었다.
  --처음 한 선생이 동행한다고 할 때 우린 좀 싫었어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다 
또 교우도 아니라니까. 우리는 서울의 세계 성체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외국에서 
왔다가 신부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길이었거든요. 며칠 함께 다녀보니 좋은 분인 
거 같네요. 이제 한 선생님도 돌아가시면 꼭 교회에 나오시도록 하세요. 제가 
기도할께요.
  --제가, 가톨릭 삼수생입니다.
  --예비자 교리를 하셨단 말이에요?
  --그럼요. 두 번이나 그 과정을 했지요. 출석표에 도장도 꼭꼭 받아 가면서요.
  그것은 어쩌면 내게 또하나의 상처는 아니었을까. 내 영혼의 살갗이 벗겨지던 때. 
조금은 가슴에 피가 흘러 딱지가 앉기도 하던 나날. 그러나 결국 나는 궁지에 몰린 
내 영혼의 가난을 신앙으로 얽어매지는 못했었다. 그렇게도 싫었던 내 가슴의 
불결을 교리로서 빨아내지도 못했었다. 그렇게 해서 세례성사를 받는 것을 포기할 
때마다 나는 겨우 중얼거리지 않았던가.
  영세가 무슨 운전면허증인가, 일찍 딴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따만 둔다고 해서 
무슨 무사고 운전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부인이 활짝 웃었다.
  --그럼 됐네요. 어쩐지 우리하고 잘 맞는다 생각했더니. 그럼 이제 조금 더 
공부해서 꼭 영세 받도록 하세요.
  조윤상 씨 부인 때문에 불쑥 튀어나오게 되었던 가톨릭 3수생이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내가 물었다.
  --신부님께 저한테 영세를 주라고 부탁하신다면, 제가 귀국한 후에나 될 텐데요. 
전 지금 동경에 살고 있잖습니까.
  --훗날로 미룰 거 없이 이번 여행 중에 어느 날 영세를 받도록 부탁하겠다는 
말이에요. 예비자 교리도 했던 사람이니까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우리가 증인이 될 
테니까 이제부터만 잘 하시면 되지요.
  --공연히, 가방도 번쩍번쩍 잘 들어나르고 하니까 잘못 보신 거 아니세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나는 갑자기 혀가 말려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그때 임 
수녀가 말했다.
  --신부님이 해주신다면 받도록 하세요. 형식에 매일 거 없어요. 가르침에 의하면 
가톨릭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건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은 모두 
단죄를 받는다는 뜻은 아니예요. 구원이 가톨릭을 통해서 그리고 가톨릭 안에서 
온다는 의미이지요. 비가톨릭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양심과 명령에 따르면 은총 
안에서 산다면 그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가톨릭 안에 있는 거지요.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나라. 일행이 모여 있는 침대칸을 빠져나와서 
나는 열차 통로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에게 영세를 주도록 신부님에게 부탁하러 
가면서 박영수 씨는 말했었다.
  --믿어서만이 아닙니다. 믿다가 보면 믿게 되지요. 우린 40년 가까이 믿어 오지만 
그렇다고 내가 뭐 하느님을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한형이 가톨릭이 된다면 난 참 
그렇게 기쁠 수가 없겠어요.
  이분들이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나는 철그덕철그덕 기차가 가고 있는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무엇이 이분들에게, 내가 이 기회에 영세를 받도록 
하자고 입을 모으게 만들었을까.
  밤기차는 어디가 끝인지 모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사이를 그 밤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예비자교리를 시작한 이후 두 번이나 끝내 그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날들을 
나는 떠올렸다. 첫번째 그만두게 된 건 예비자교리 과정의 중간쯤에서였다. 그때의 
포기는 나의 선택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한 주일에 한 번, 저녁이면 사제관에 십여 명이 모여서 시작한 교리공부였다.
  두 달이 조금 넘어서였을까. 그때의 노트를 펼쳐보면, 아홉번째 시간에서 끝나 
있으니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그때 살고 있던 제주에서 국가 
특수기관원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었다. 서귀포에서 동쪽으로 조금 나간 곳,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목장에서 비어 있는 집을 빌어, 글을 쓰고 있던 때였다.
  어느 날, 드넓은 삼십만평 풀밭 위로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나는 창 밖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황금가지"라는 책을 읽고 있다가였다. 그들에게 끌려 나는 
서울로 올라오는 비행기에 실려졌다. 그리고 무엇이 있었던가.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짐을 찾아들고 내리려던 손님들은 모두 제자리에 앉혀졌다. 문을 열고 
올라온 요원 하나가 내 자리로 다가왔다.
  --나가지. 날 따라와.
  그는 이십대의 청년이었다. 그의 반말이 섬뜩하게 목덜미에 와 닿았다. 자리에 
앉아 있는 손님들을 뒤로 하고 나는 혼자 먼저 비행기를 내렸다.
  잠시 후 사복의 건장한 사내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양쪽에서 내 팔을 완강하게 
잡아 자신들의 몸에 붙였다. 나머지 하나가 등 뒤에서 내 혁대를 잡아쥐었다. 나는 
그들에게 달랑 들리다시피 공항청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차에 실려지기에 앞서 
그들은 내 눈에 안대를 씌워, 눈을 가렸다.
  그리고 무엇이 있었던가. 두 달이 지나서 다시 그 포구가 내려다 보이는 목장의 
그 집으로 돌아왔을 때, 고문으로 피멍이든 내 가슴처럼 빈 집에는 곰팡이가 뒤덮여 
자라고 있었다.
  고문의 가장 비열한 점은, 그것이 인간성을 파괴시킨다는 데 있다.
  사람에게는, 사람이기에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다. 
사랑, 가족, 일, 국가, 자유 그리고 평화... 이것들은 결국 그 무엇도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그래서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최소한의 
사유의 그루터기들이다. 고문은 그것을 인간에게서 빼앗아간다.
  인간을 사랑하지 못할 때, 어떻게 사람의 삶을 글로 그려낼 수 있을까. 용서라는 
말의 크나큰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이 만들어가는 일상생활을 사랑하지 
못할 때, 어떻게 자신의 글 안에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평화라는 이름의 저 깊은 바다를 열망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것이 거룩하고 청결한 시간만으로 짜여질 수가 
없다. 그렇기에 글을 써 왔다.
  한 여자와 남자가 있다고 하자. 사랑해서, 그래서... 이제부터는 혼자일 수 없어, 
우리는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돼. 그렇게 해서 결혼을 했을 때, 거기에 저 세상의 
잡다한 현실과는 담을 쌓은 듯한 모짜르트의 소나타와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바그너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거문고 산조의 둔중함과 가야금의 애절함이 
만들어내는 남자와 여자의 가락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침마다 꿈같이 우유빛으로 안개가 내리고, 저녁 무렵은 피빛으로 놀이 물들며 
사그라지는 그런 황혼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집안에서는 바퀴벌레가 기어다닌다. 
행주는 자주 빨아 말리지 않으면 냄새가 나고, 수도꼭지에서 한 방울씩 물이라도 
새면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다. 여름이면 모기향이 필요하고, 튀김을 하기 위한 
기다란 젓가락도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생활이라는 이름의 하루하루다.
  쓰레기 통도 필요하고, 걸레도 필요하고, 공과금 낸 쪽지를 모아두어야 할 
종이상자도 필요하고, 그런 잡다한 시간의 갈피에서 우리는 산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면서 우리는 마지막까지 양보하거나 용서할 수 없이 지켜가야 하는 것이 
있음을 안다. 그것이 '인간이기에'라고 표현되는 그 인간성이라는 것이다.
  이 '인간이기에'에 대한 사랑, 나에게 있어 '글 쓰기'란 결국 그것이었다. 그 
인간에 대한 사랑과 애정 그리고 함께 나누는 연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고문의 가장 비열한 점은 바로 그러한 인간성에 대한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다는 점이었다.
  온몸을 발가벗겨 쇠의자에 묶어놓고 행해지던 그 가지가지 고문들, 열 손가락에 
전선을 이어놓고 그 충격으로 온몸의 피가 살갗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몸의 일부를 찢어 피를 흘리게 해놓고 행하는 전기고문, 퍼덕거리던 내 육체, 젖은 
물수건을 얼굴에 뒤집어 씌우고는 눈 코 입이 일그러질 정도로 압박해서 호흡이 
막히며 기절하기 바로 그 몇 초 전에 그것을 풀어놓는 순간, 동물처럼 비명을 
지르며 숨을 들이마시는 그 순간 콧구멍으로 들어붓는 물, 기절해서 묶여 있는 
의자와 함께 쓰러지면 그들은 물을 부어 의식을 되돌리게 했다. 그리고는 플래시 
불을 비추며 눈을 까뒤집어서, 아직 정신이 있나 없나를 확인했다. 그리고 또 무엇 
또 무엇... 고문은 그렇게 끝없이 계속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날조된 가설을 놓고 
거기에 동의를 받아내기 위해서.
  고통에 못이겨 짐승처럼 울부짖어야 하는 것은, 아픔은 잊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산산히 찢어져 내린 자기자신은 무엇으로 어떻게 치유가 된다는 것인가.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행위를 가할 수 있다는 그 사실 앞에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나 
사랑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건가. 나에게는 불가능했다.
  잠을 못 이루며, 혼자 앉아 있으면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정신상태에 시달리며, 잠들어 있는 다섯 살의 딸아이와 아내를 바라보는 
한밤에 느끼던 그 막막함 그리고 분노. 새벽 바닷가를 울부짖으며 헤매고, 젖은 모래 
위에 앉아 고깃배가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던 새벽의 그때 그 나에게, 아... 예비자 
교리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그것 또한 허위, 그것은 아니었던가.
  밤기차가 가고 있었다. 열차의 뒤쪽에서부터 두 명의 여승무원이 걸어오며 창의 
커튼을 내리기 시작했다. 커튼은 천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비닐 막을 씌운 마대 
같은 것을 칸막이처럼 창의 위에서부터 끌어내려 창틀 밑에 걸고 나서 제복차림의 
여자는 무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짓으로 보아, 창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뜻 같았다. 그렇게 커튼이지 
칸막이인지 모를 것을 내려치면서 두 여자는 사라져갔다. 가득 차 있던 어둠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창밖이었지만, 갑자기 그것마저 닫히고 나자, 마치 무엇엔가 
갇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허락을 받아오면, 영세를 받으시겠어요? 그분들이 물었었다. 내가 
아니었다. 내 안에서 누군가가 대답했다.
  --네, 받고 싶습니다.
  기차는 밤의 한가운데를 달려가고 있었다. 통로의 의자에 앉아서, 커튼이 내려진 
창 밖에는 무엇이 지나가고 있을까. 나는 막막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들이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무엇을 사는 걸까. 시간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시간을 사는 것일지도.
  스무살의 어설픔과 눈뜸, 서른살의 도전, 마흔에 맞이하는 성숙함 그리고 그만큼의 
실의... 그것을 살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장소일까. 이 공간을 살아가는 것일까. 서울을 살고, 여자는 모두 제복을 
입어야 하는 것만 같게 사무실 가득한 서소문과, 길잃은 사람들이 널려 있는 것만 
같은 대학로와, 모두가 갓 상경한 사람들만 같은 청량리와, 아무것도 외롭지 않아 
보이는 압구정동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아마 우리들이 살아가는 건 사람을 사는 건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여자를, 때로는 멀고 때로는 내 안에 있는 부모를, 그는 늘 거기 있을 것만 같은 
형제를, 어느 날 흘러간 팝송을 들려주는 FM방송에서 그 여자와 함께 듣던 음악이 
흘러나올 때면 한순간 마음의 언저리에서 풍경이 울리듯 잠깐의 떨림이 스치고 가며 
떠오르는 이제는 헤어져 소식을 모르는 그 여자를, 그를 만나 사귀어서 자랑스러운 
친구를, 늙어 가는 얼굴의 주름만큼이나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식을, 그렇게 
우리들은 사람을 사는 것은 아닐까.
  어떤 배반도 치욕도 그리고 영광도 결국은 사람으로부터 그렇게 다가오는 것을.
  그래. 우리는 사람을 사는 건지도 몰라.
  침대칸의 닫힌 문이 한쪽 벽면을 이루고 있는 통로 저편을 바라보며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은 나를 사는 거겠지. 나 자신.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쓰고 가는 
것, 그것이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결국 나 자신을 자식으로 친구로 연인으로 과장과 부장으로 아버지로 선배로 
그리고 세상에서 불러주는 그 어떤 이름으로... 그렇게 쓰고 가는 것이겠지.
  하느님. 나는 가만히 불러보았다. 이런 우리들에게 있어, 당신은 무엇인가요. 
사슬인가요, 아니면 날개인가요. 바닥인가요. 아니면 하늘인가요.
  두번째로 교리공부를 시작했던 건 다시 몇 년이 흘러서였다. 저녁 무렵 성당으로 
찾아갔을 때는 계단 입구에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어쩐 일입니까?
  명동성당의 사제관에서 만났을 때가 벌써 몇 년 전이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로 신부님이 다가와 말했다. 그 동안 얼굴은 늙고 야위었지만 
어딘가 걷는 모습이며 말투는 더 젊어진 것 같은 활기가 느껴졌다.
  영혼을 빨아널고 싶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스스로의 삶이 왜 이렇게 천박하고 
더럽게 느껴지는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때묻어서 남루하게 너덜거리는 것만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난 수없이 묻습니다. 아무 확신도 
없습니다만, 종교가 저를 여기서 건져줄 수만 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영혼을 빨아널고 싶다는 제 마음을 이해하시겠어요?
  스스로에게 수없이 중얼거렸던 말을 떠올리면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희미하게 
비쳐드는 저녁햇살을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이 왔네요.
  신부님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면서, 무엇인가를 어루만지듯 더듬거리는 내 말을 
들었다.
  --시작해 보지요. 어떤 방법이 좋겠어요? 물론 주일 미사에는 나오도록 하시고, 
문제는 교리공부인데, 집에서 통신교리를 하는 방법도 있고, 여기 나와서 다른 
분들과 함께 배울 수도 있는데.
  --수요일의 예비자 교리시간에 나오면 되지 않을까요?
  --아주머니들이랑 함께 해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첫걸음이기는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다른 분들과 함께 나와서 
배우겠습니다.
  그리고 세 달이 지나갔다. 신부님을 찾아갔을 때는 가을이었는데,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수요일의 예비자 교리 그리고 주일이면 낮 미사가 끝난 후 
성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또다른 예비자 교리 시간을 나는 담담하게 오갔다. 그리고 
이제 영세를 받아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교리공부를 시작하며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바오로 
서점"엘 가는 시간이었다. 기독교 관계 책만을 취급하는 그 서점에 가서 이것저것 
필요한 책을 찾는 시간이 그렇게 편안하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상스럽게 
지난 날과는 달리 교리공부를 시작하고 나자 그 서점을 메우고 있는 어떤 정신과 
내가 작은 끈으로 얽어매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많은 성가들을 그리고 여러 
작곡가의 레퀴엠을 들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더 이상 그곳으로 다가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아무것도 나는 달라져 있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내 영혼은 여전했다. 여전히 
더럽고 낡고 허물투성이였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무엇으로 내가 '그분' 
앞에 서겠다는 것인가. 그것을 가질 때와 가지지 않았을 때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신앙이 필요하겠는가.
  나뭇잎이 하나씩 떨어져 가던 그 가을도 깊어서 나는 주일미사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그 일요일, 마당에 나와 바라본 모과나무에는 벌레가 먹은 모과 하나가 
앙상하게 잎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매달려 있었다. 무심히 중얼거렸었다. 나 
같구나.
  교회에서는 몇 번 전화가 왔다. 마지막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영세를 받도록 
하라는 연락이었다.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서요. 제 어디에도 하느님이 와 계시질 않는데요.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그러나 다음 주일에도 또 그 다음 주일에도 나는 미사에 
나가지 않았다. 내가 받기로 예정되었던 세례성사 날은 크리스마스 며칠 전이었다. 
그날 저녁을 나는 밖에서 술을 마시는 것으로 보냈다. 끝 모를 저 깊은 연못 
하나에서 또 다른 저 깊은 연못까지, 그 사이에 내 삶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무렵의 나 자신도.
  그때, 어둠의 강을 건너가듯 가고 있던 밤기차가 멎었다. 열차의 연결부분이 있는 
통로로 나가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열차의 뒤쪽 부분이 바라보이는 곳에 켜져 
있는 몇 개의 등불이 바라보였다. 조그마한 역사의 모습이 그 어둠 속에, 아주 
비현실적으로 바라보였다. 불빛 밑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다시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안으로 들어오는 나를 박영수 씨가 
불렸다.
  --한 형. 신부님이 뵙자는데요. 영세를 주시기로 약속했습니다. 축하해요 한 형.
  축하라니. 이것이 축복받아도 좋은 일이라면 축복받고 싶었다. 신앙을 갖게 되면 
이제부터는 '외롭다'는 생각만이라도 없는 나날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소리없이 웃었다.
  김 신부가 있는 침대칸으로 들어섰을 때 조윤상 씨가 또 같은 말을 했다. 
축하합니다. 한 형.
  --이런 사람을 영세 안 주면 어떻게 하냐고들 하시니. 나도 며칠 함께 지내보니까 
영세 받아도 좋을 분 같고...
  그런 이야기 끝에 신부가 말했다.
  --다만 약속이 있어요. 주기도문 하나는 할 줄 알아야 해요. 그리고 영세받는 
날까지 시간 나는대로 수녀님께 교리공부를 하세요. 그래서 내가 이만하면 됐다 
싶으면 그때 영세받도록 해 드릴 테니까요. 지금부터 빨리 하세요.
  이 덜거덕거리는 열차에서 주기도문을 외우라니. 여행을 하면서 교리공부를 
하라니.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런 말들이 거북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게 다가와서 나는 감싸는 느낌이었다.
  흰 옷을 입었던 아내. 결혼식 날의 아내. 왜 갑자기 그녀가 떠올랐을까. 김 신부가 
있는 침대칸을 나오며 박영수 씨에게 말했다.
  --박 선생님. 저 사실은 혼배성사를 한 사람입니다.
  아내와 함께 찾아갔던 그 성당을 나는 커튼이 내려진 차창 저편으로 떠올랐다. 
그녀는 말했었다. 내가 영세를 받았던 그 성당에 가서 결혼을 하고 싶어. 아냐. 
그래야 해. 내가 태어난 거나 결혼을 하는 거나... 다 같은 거야. 내가 영세를 받았던 
건.
  결혼을 해도 자신이 어려서 영세를 받은 바로 그 성당에 가서 하겠다는 게 아내의 
뜻이었다. 산사태라도 크게 나면 다 쓸려내려갈 듯한 가파른 언덕을,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양, 택시 기사에게 사과의 말을 하면서 
어려서 그녀가 다녔던 성당을 찾아갔을 때 아내는 왜 그렇게 환한 얼굴이었을까. 
서울에서 2시간 거리인 지방도시의 조그만 성당이었다.
  그날 아내는 늘 보던 그녀가 아니었다. 이제는 없어진 교적(천주교 신자임을 
증명하는 명부)도 복원하고, 성당에서의 결혼 준비를 이것저것 약속하고, 신부님도 
만나 인사하고 이야기도 하고 그리고 나오는 우리들에게 그때 수녀님이 말했었다.
  --신부님 꽃 준비 하는 거 잊지 마세요.
  --네? 제 꽃이요?
  --아니요. 신부님 꽃이요.
  바싹 마른 얼굴에 돋아 있는 주근깨가, 이상스레 '누나'하고 불러 보고 싶게 
만들던 그 수녀가 저녁 햇살이 길게 그늘을 만들고 있는 성당 앞에 서서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결혼의 주례를 보실 성당의 신부님과 이제 결혼을 할 자기 자신인 
신부를 구별하지 못하는 아내를 끌고 그 가파른 길을 내려오며, 결혼할 신부와 
성당의 신부는 발음이 어떻게 다른 거지? 하며 흘끔흘끔 뒤돌아서 그 성당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때 신부님께 약속을 했었다.
  --네. 아내와 함께 성당에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결혼을 한 후에도 성당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 여자가 
어느 날 나를 끌고 성당에 가자고 하기 전에... 하고 몇 번인가 생각한 적은 있었다. 
아이를 낳고, 집을 사고, 살아가면서. 다만 하나 이제와서도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단 한번도 결혼을 하러 찾아갔던 그 성당의 신부님과 했던 약속을 마음의 짐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거다.
  학교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가, 공연히 문방구에도 기웃거리고, 세탁소 
아줌마 지나가는 거 보면서 희죽이 웃기도 하고, 시동이 안 걸리는 중국집 배달원의 
오토바이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러면서 집으로 오는 그런 아이 같았다고나 할까.
  그랬었지. 그랬었지. 그렇게 결혼이라는 걸 했었지. 밤기차 안에서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어쩐지 아내가 친구처럼 아니면 동생처럼 
그렇게 생각되었다. 이미 자정을 넘은 시간이었다.
  수녀님께 가서 교리공부를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가 자야 할 
침대칸으로 향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첸 씨도 가이드도 잠이 들어 있었다. 
다만 함께 가야 할 낯모를 중국인이 아직 잠을 자지 않고 있다가 이층 침대에서 
나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가 무어라고 말을 했다. 내가 아는 중국어라고는 두 가지의 안녕밖에 없었다. 
만날 때의 안녕, 헤어질 때의 안녕. '니이하오'인지 '니하우'인지 모를 그 말하고 또 
하나 '자이지엔'.
  비어 있는 내 잠자리를 살펴보고 나서 나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중국인에게 
말했다.
  --좀 나갔다 올께요.
  그가 무슨 말을 하는가 싶은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소리없이 중얼거렸다. 
특공대 하러 간다구. 화장실에.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뒤쪽에서 침대칸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희디흰 머리카락이 더욱 허옇게 드러나는 박영수 씨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걸어나왔다.
  --웬일이세요?
  --잠이 안 와서.
  --다른 분들은요?
  --다들 자네요.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이 창가의 의자에 마주앉았다.
  --술 한잔 하시겠어요?
  --우리 짐은 저 중국사람들이 어딘가로 다 부쳤나 보던데요 뭐.
  --제가 들고 탄 가방에 한 병 있는데요.
  박 선생의 말을 들을 것도 없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밤시간, 끝없이 
덜거덕거리며 달리고 있는 기차 안에서 잠들지 못하는 사람 둘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에게 영세를 주시겠다고 하는 하느님도 아마 이건 이해하시리라.
  침대칸의 내 가방을 열어 나는 마시다 남은 술과 말린 조갯살을 안주로 들고 
나왔다. 밤기차를 타고 중국대륙을 가면서 누구와 술을 나누리라고는 생각도 못해 
봤군요, 그런 말을 하면서 박영수 씨가 내게 물었다.
  --저 수녀님들, 왜 중국에 왔는지 한 형 아세요?
  --수녀님들 일이 좀 궁금하기는 했어요. 특히 그 이사짐 보따리 같은 가방을 볼 
때마다 저건 뭔가 싶었거든요.
  박영수 씨가 웃었다.
  --사연이 아주 길답니다. 자세한 거는 나중에 수녀님들에게 직접 들으시고요.
  내가 건네는 종이컵의 술잔을 받으며 박영수 씨가 말했다.
  --저 수녀님들이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회 수녀분들이잖아요. 아주 의미가 
큰 여행들을 하고 계신 거랍니다.
  박영수 씨가 내게 잔을 건넸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그런 말이 고린 도서에는 있어요. 아마 저분들은 그것을 정말로 믿고 
따르는 분들이 아닐까 싶어요.
  기차는 달리고 있었다.
  --아마 한 형도 알 거예요. 전에는 간도라고 했지요? 우리가 이제 찾아가는 곳 
말입니다. 전에는 그렇게들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 간도 땅에 살던 한국사람에게 
처음으로 그리스도교가 전해진 건 1896년으로 전해지고 있어요. 원산 본당의 브레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김영렬 요한이라는 분이 다른 열두 명과 함께 간도 땅에서 
하느님의 일을 시작하니까요. 1922년부터 간도지방은 가톨릭 원산교구 
관할이었답니다. 그러던 것이 1928년 연길지목구로 분리가 되었지요. 이때 
연길교구는 간도성의 연길 화룡 훈춘 왕청 네 곳과 길림성의 두 곳 그리고 목단강 
쪽의 빈강성 세 곳을 관할했지요. 그때 신자 수가 만 천명 정도 되었다고 해요.
  기차는 달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그러던 중 1930년 만주지방에도 선교 수녀회가 있어야겠다고 그 필요성을 
절감한 백 테오도르 신부가 스위스에 있는 베네딕도 수녀원에 수녀의 파견을 
요청하게 되지요. 이때 부탁을 한 곳이 스위스의 캄 수녀원인데, 총원장 슈빗터 
수녀는, 캄 수녀회가 선교수녀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수녀를 파견하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1935년이라고 하지요, 첫 서원자 네 명이 나오게 된답니다.
  기차는 달리고 있었다. 밤의 한 가운데를.
  --그렇게 복음수녀원으로 활동하던 연길의 베네딕도 수녀원에 시련이 다가온 건 
해방과 함께랍니다. 남의 나라 땅에서 나라 잃은 사람들의 벗이었던 수녀회가 
오히려 조국의 해방과 함께 수난의 날을 시작하다니, 그런 아이러니가 없지요. 
시련의 시작은 1945년 러시아군이 진주하면서였답니다. 한형, 지도 있으세요?
  주머니에 꼽고 있던 볼펜을 꺼내들며 박영수 씨가 말했다.
  --기왕에 나온 이야긴데, 아는대로는 말씀을 드려야지요.
  술기운에 조금 붉어진 얼굴로 박영수 씨가 웃었다. 내가 침대칸의 가방에서 
지도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쪽이 연길입니다. 우리가 간도라는 하던 곳도 여기가 되지요. 해방이 되자 
북쪽에 러시아군이 들어오면서 시작된 시련으로 끝나는 게 아니지요. 1946년 
5월부터 만주를 지배하게 된 건 중국 공산당입니다. 중국 공산당은 수녀회 건물이며 
시설 일체를 몰수했어요. 그리고는 수녀들을 연금시켰다고 해요.
  --연금을 시키면, 그냥 수녀원 건물에 감금을 시켰다는 뜻인가요.
  --그렇지요. 가둬둔 거지요. 그러나 어디 그것만으로 끝나나요. 일체의 
종교활동을 금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또 다른 조치가 내려졌지요.
  박영수 씨가 지도에 동그라미를 치면서 말했다.
  --한국 수녀들은 연금으로 끝났지만 외국 수녀들은 남평이라는 곳의 수용소에 
갇히게 되지요.
  성 베네딕도는 서기 480년 로마의 동북부 노르치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했으나 그 무렵의 대학에 환멸을 느끼고 더 이상 공부 할 것을 포기한 그는 
유모와 함께 구도의 길에 나서게 된다. 이곳저곳의 은둔생활을 거쳐 그의 주변에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 그는 12명으로 된 작은 수도원 12개를 세웠다. 그의 
가르침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것이었다.
  일하고, 그리고 기도하라. 하느님을 위해 기도하고 하느님을 위한 글을 읽으며 
스스로의 생활을 위해 일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 정신은 그 후 베네딕도 
수도회의 규칙이 되었다.
  --몬떼 까시노에 가면 지금도 그 수도원이 있답니다. 성 베네딕도가 마지막까지 
은거하던 수도원이지요.
  --그 건물이 그대로요?
  속된 호기심을 가지고 내가 물었을 때, 박영수 씨는 내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530년에 세웠다고 알려진 수도원인데, 거기서 베네딕도 자신이 생을 마감한 
곳으로 알려진 수도원이 있답니다. 그런데 이차대전 때 그만 파괴되었지요. 다행히 
64년에 다시 세웠지요. 아무튼 그렇게 해서 연길 수녀 공동체는 1944년까지 스무 
명의 수녀들을 배출했다고 해요.
  --그때는 일제시대인데요.
  --그러니 얼마나 어려운 일들을 하고 있던 거겠어요.
  --와서 일한 분들이 서양분들 아니었겠어요?
  --물론이지요. 서양 수녀들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동양과 서양의 
문화의 차이, 말의 어려움, 풍습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 속에서 그래도 연길 
공동체는 수녀회로서의 면모와 기반을 닦아나갔던 거 같아요. 특히 그때 수녀들을 
전교 의료 교육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아갔지요.
  박영수 씨의 말을 들으며 나는 열차 통로 저편을 바라보았다. 젊은 중국인 둘이 
무어라 떠들면서 지나갔다.
  --그때 수녀회 지원으로 말이지요, 용정을 비롯하여 이쪽 간도 땅에만도 아홉 
개의 본당이 차례로 설립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특히 교육에 힘을 기울여서, 
대부분의 본당에는 "해성학교" "해성학원" 그리고 "유치원" 같은 것들이 있었다고 
해요.
  박영수 씨가 나는 건너다보면서 손을 내저었다.
  --어디 연길 뿐이겠어요.
  --그런데 박 선생님. 지금 말씀하시는 연길이라는 데가,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거기지요?
  --아이구 한 형. 밤새도록 울다가 누가 죽었냐고 하겠네.
  오래 나라를 떠나 있던 사람이 하는 이런 우리말에 나도 함께 웃었다.
  --연길 뿐이 아니지요. 훈춘, 팔도구, 용정, 명월구... 그곳까지 진료소를 두어 
환자들을 치료하고 그랬다고 하니까요.
  내가 박 선생의 잔에 술을 따랐다. 박영수 씨가 잔을 비우고 나서 네게 건네며 
말했다.
  --해방이 되고, 러시아군이 몰려오고, 그러다가 중국공산당에 집권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수도회는 시련을 맞지요.
  몇 시쯤 되었을까. 두텁게 커튼이 내려진 차창을 바라보면서 나는 깊대 깊은 연못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어가는 것 같았다.
  덜그럭거리며 밤기차는 가고 있었다.
  --외국인 수녀들은 수용소에 갇히고, 조선인 수녀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 
식으로, 다들 내려오게 되지요.
  --그러면, 그렇게 해서 다시 자리 잡은 게 지금 부산의 그 수도회가 되는 건가요.
  --물론 그 과정에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지요.
  --그런데요?
  --그 어려운 때에 피난을 떠났는데...
  박영수 씨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 과정에서 수녀 한 분이 간도에 남았던 겁니다. 물론 조선인 수녀지요.
  --네에?
  박영수 씨가 내게 몸을 숙였다.
  --저 수녀님들이 말이지요. 그때 남하하지 못하고 남아 있던 한 수녀님을 만나러 
간답니다.
  당연히 종교가 금지된 중국 공산당 아래서 그 수녀는 무엇을 하며 살았다는 건가.
  --그러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겠어요. 그 수녀님이 스위스로 여러 곳으로 
연락을 한 끝에 지금 중국에 남아 있다는 게 알려졌어요.
  --지금 중국이라니요?
  내가 술잔을 들다 말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가는 중국이오.
  내가 웃었다.
  --아니. 박 선생님. 우린 지금 중국엘 가는 게 아니라 중국엘 와 있잖아요.
  --아이구 참. 그러고 보니 이야기가 그렇나. 그 수녀를 만나 보러 저렇게 가는 
길이랍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은, 이곳 간도에서 수녀생활을 했는데 그때 헤어졌던 
가족들이 살아계시다는 거 안 거예요.
  --그러면 저...
  내 말을 막으며 박영수 씨가 손을 내저었다.
  --그래요. 저 조금 마르신 수녀님은 해방 후 여기 남았던 선배수녀를 만나러 
가시는 길이고, 다른 분인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겁니다.
  
    5. 백두산 가는 길

  부시럭거리며 침대를 내려와 통로로 나섰다.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내리며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차창 밖은 아직도 어둠이 깔려 있었다. 창에는 여전히 
커튼이 내려진 채였다.
  이 기차의 종점이 연길이든가, 아니면 어디를 더 가든가. 어제 그거라도 물어 둘 
것을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객차 사이의 통로에 서서 불어들어오는 새벽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첸 씨가 허어허어 하며 다가왔다. 부지런도 하지. 이 사람은 아침부터 허어허어 
하는구나. 둘이서 전혀 말이 안 통하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우리는 웃으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일본말을 하는 그 가이드 녀석은 어디로 간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첸 씨가 등 
뒤에서 가이드가 다가왔다.
  내가 다가가며 물었다.
  --이 기차가 여기서 또 어디로 갑니까?
  --아니요. 여기가 종점이에요.
  --그럼 천천히 내려도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럼요..
  첸 씨와 가이드가 무어라 중국말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아침에 만나도 
호떡집 불난 거 같다니까. 가이드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조선말을 많이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간판도 다 조선말로 
되어 있는데요.
  중얼거려 놓고 나서, 가이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조선말이 아니라... 참 한국말이지요.
  조금씩 밖이 개어오고 있었다. 나는 가이드와 담배를 나눠 피우면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제부터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저기 여자분들은 연길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마중을 나와 있을 거예요. 그 일이 끝나면, 차가 준비되는 대로 장백산으로 
올라가지요.
  장백산, 백두산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얼마나 걸리는데?
  --차에 따라 다른데, 여기 회사에서 어떤 차를 준비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빠르면 
한 여덟 시간...
  첸 씨가 무어라고 말에 끼어들었다. 가이드가 웃으면서 나에게 첸 씨의 말을 
전했다.
  --여덟 시간쯤 걸린다고 했더니, 첸 씨 말이 이틀 걸릴 수도 있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가다가 차가 고장나면, 다른 차를 불러야 하거든요. 다른 차가 오는 걸 
기다리고, 그러자면 이틀이 걸린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실없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가이드 말처럼, 조선말을 하는 아낙네들이 또 
옆을 지나쳤다.
  --그런데, 뭐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이 첸 씨 말인데요. 이 사람은 왜 내내 
우리들을 따라오는 겁니까. 그냥 연구소로 돌아가도 될 텐데요.
  --모르셨어요?
  깜짝 놀라듯 가이드가 내게 속삭였다.
  --길림성에서 나온 장백산 안내서를 쓴 사람이 바로 이 첸 씨예요.
  새벽 거리가 멀리 바라보이기 시작했다. 짙게 안개가 깔린 듯한 어둠뿐. 그 
사이로 건물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드러나고 있었다.
  짐을 든 사람들이 통로 쪽으로 하나 둘 빠져나가고 있었다. 내릴 준비를 하기 
위해 우리도 짐을 내렸다. 침대칸 윗층에 올려두었던 여행 가방을 내리는 나에게 
조윤상 씨가 말했다.
  --괜찮아요? 어제는 아주 늦게 자는 거 같던데.
  이 방에서 자느니 차라리 저쪽 어른들이 있는 방에 가는 게 났겠다 싶었는데, 
그래서 비어 있는 조 선생 옆자리에 가 자려고 올라가는데, 안 주무시고 있던 조 
선생이 말했다.
  --추우니까 뭘 좀 덮어요.
  --네 잠을 못 자서... 술을 좀 마셨습니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바로 백두산으로 떠난다는데, 한 형 너무 피곤하겠어요, 그런 
말을 하면서 통로로 나서던 조윤상 씨가 말했다.
  --어젯밤 신부님 자던 칸에는 중국사람인데 김일성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한 
사람이 함께 있었는데, 그 사람 이야기 듣고 놀랐어요. 북쪽이 그렇게 못 산다니요. 
이쪽에 사는 조선족들이 중국에 친척이 있어서 찾아보러 가자면 돈이 많이 든대요. 
그래서 왜 그렇냐고 물었더니... 일단 식량사정이 안 좋다는군요. 시골로 가면 실제 
먹고 살기도 힘든데, 그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는군요.
  여기 와서 접하는 북한 소식은 한국에서 알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안 좋은 
소식들이 많았다. 북한을 다녀온 중국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그 오랜 기간, 
그만큼 통제된 사회를 이끌어오면서 어쩌자고 북쪽은 사람들이 먹고 살 것도 없는 
나라를 만들어 온 것일까. 그런 탄식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들리는 소리마다가 그랬다. 중국인들이 이제 우리도 먹고 사는 건 해결했습니다 
하는 것과 그렇게 대조적이었다.
  조윤상 씨와 함께 통로로 나와 서서 담배를 피우면서, 나는 이제 만나게 될 
백두산을 생각했다. 백두산만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북쪽 땅은 또 어떤 
모습일까. '도문'에 가면 작은 강 건너로 북쪽 땅이 보인다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서 있는 사이, 기차가 멎었다.
  가방을 들고 우리는 중국인들 뒤를 따라 기차를 내렸다. 희미한 새벽 어둠 속으로 
역사가 서 있었다. 플랫폼이 없이 기차에서 내리면 바로 역사 건물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그것 또한 내 평생에 첫 여행인 열두 시간의 밤기차 
여행을 하게 해 준 기차를 나는 조금 감격해 하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역사로 다가갔다. 그때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나를 놀라게 
하는 두 글자가 있었다. "연길". 이럴 수도 있었던가. 분명 중국 땅에 세워져 있는 
역사 지붕 밑에 역이름이 커다랗게 한글로, 그것도 붓글씨체로 써 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더욱 놀란 것은 집찰구 입구에 있는 안내문이었다. 줄을 서서 순서를 
지키라는 거나, 뛰어가지 말라거나 하는 말들이, 그것 또한 모두 한글로 씌어져 
있었다.
  젊은 날의 언제였던가, 내가 썼던 시에 이런 말들이 있었다.

  밤기차가 가 닿은 도시
  그 새벽에 서면
  이제 나는 떠날 때의 내가 아니다.

  새벽거리가 뿌옇게 바라보이는 역사를 나서며 왜 문득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그것은, 중국으로 떠나면서 전혀 내 여행일정표에 들어 있지 않은 도시와 
만나는 감격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내가 듣고 있던 한국인의 
중국여행에는 연길이란 이름은 아무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백두산엘 가면 그 
부근에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다더라 정도의 이야기들이 여행객들의 이야기였다.
  어느새 내려서 밖으로 나간 것일까. 수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일 
마지막으로 역사를 나온 나는 역앞 광장을 두리번거렸다. 박영수 씨도 그 부인도 
보이지 않았다. 중국인 첸 씨와 가이드가 우리들의 짐을 한곳으로 모아 놓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원장과 조윤상 씨의 모습이 보여서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넥타이를 고쳐 매면서 원장이 말했다.
  --참, 한 군 자네는 저쪽에 안 가보나? 서태후 수녀가 난리가 났어요.
  조윤상 씨가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주차장 쪽이었다. 아직 어둠이 다 걷히지 
않은 시간이었다.
  --강 수녀님이 40년 만에 조카랑 친척들을 만났어요, 저쪽에 가족들이 나와 
있어요.
  아, 그거였나. 나는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웅기중기 모여 있는 속에서 강 수녀가 누군가와 부둥켜 안고 있었다. 
40년. TV화면에서나 보았던 저 시간의 강을 건너온 만남들. 그것이 거기 있었다. 
뚱뚱하고 작은 키의 강 수녀 뒤에서 같은 옷차림의 임 수녀가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일행 속의 부인들도 그들 뒤에 서서 눈시울을 
닦고 있었다.
  아, 그리고 거기서 나는 보았다. 저들이 나누고 있는 슬픔과 기쁨의 저 막막함처럼 
놓여 있는 두 개의 짐보따리를. 북경에서부터 그렇게도 이상하게 생각했던 수녀들의 
어마어마하게 컸던 짐보따리. 그것은 바로 이들과의 만남을 위해 준비했던 수녀들의 
선물이었던가.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헤집고 올라왔다.

  용정, 안도... 그런 이름들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른 옥수수 밭이 지나가고, 지붕과 마당에 빨갛게 고추를 널어 말리는 집들이 
지나가고,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마당을 달려가는 닭들이며 지붕이 없는 돼지 
우리에서 크고 있는 검정색깔 돼지도 바라보였다. 그렇게 우리의 산하의 닮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니다. 우리의 땅이 이렇게도 이 백두산 오르는 길목과 닮아 
있었던가. 그것은 강원도 태백산맥 줄기의 그 어느 곳에 가더라도 만날 수 있는 
모습들이었다. 나 또한 어린 시설을 저런 곳에서 보내지 않았던가.
  다만 우리에게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씨가 여물어 가는 해바라기였다. 
해바라기가 밭을 이루며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멍한 얼굴로 길가에 나와 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바로 우리들이었다. 50년대의 한국 흑백사진 속에서 
아무것이나 하나 핀셋으로 집어서 그곳으로 가져와 세워 놓는다면 바로 저 모습들이 
아닐까.
  내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아, 그랬구나. 우리는 이곳 
자손들이었구나. 나는 소리없이 중얼거렸다. 좀더 솔직하자, 나는 이곳의 종자였던 
거다. 나는 가슴이 눅눅해져서, 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들을 하나라도 더 가슴에 
찍어두려고 어금니를 물었다. 탯줄을 찾아가는 그 무엇처럼.
  그때였다. 갑자기 운전기사 옆에 매어단 텔레비전이 찌지직거리면서 움직이더니, 
잡음 가득한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를 비춰주기 시작했다. 얼룩얼룩 떨리고 화면 
속에 선이 계속 오르내리는 그것은, KBS의 "가요무대" 녹화테이프였다.
  참을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조차 보지 않던 프로그램이 아닌가.
  누군가가 또 저런 따위를 선물이라면서 이곳까지 가져다준 모양이었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엘 오른다고 가면서 화투나 가지고 가서 선물이라고 내미는 것들. 
중국에 사는 조선족이 화투를 갔다 주니까 그렇게 좋아하던데요 하는 말을 무슨 
자랑처럼 하는 것들. 더 좀 마음이 담긴 좋은 것을 선물로 가지고 가지는 못한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내가 소리쳤다.
  --그것 좀 끌 수 없어요.
  조윤상 씨 부인도, 그 옆의 박영수 씨도 같은 생각이었던가 보았다. 그들이 
앞자리에 앉아 있던 가이드에게 말했다.
  --그럽시다. 저건 좀 틀지 맙시다.
  들판이 점점 멀어져 가면서 차안의 사람들은 하나 둘 잠이 들었다. 어제의 긴 
기차여행에서 다들 피곤했던 것 같았다.
  길가에는 드문 드문 식당임을 알리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상점 이름을 크게 
써붙인 간판이 아니었다. 개고기를 파는 식당들이 "개장국"이라고 작게 세 글자를 
써붙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 것까지 닮아 있다니 싶었다. 그리고 
가만히 떠올려보니, 어려서 동네의 어른들도 개를 잡아 먹는 것을 가지고 개추렴을 
한다거나 개장국을 먹는다고 했던 것 같았다. 그것까지도 그토록 닮아 있었다.
  차가 낮은 경사길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이내 짙은 녹색의 숲이 차창에 나타났다. 
어떻게 나는 그렇게도 백두산 가는 길목과 닮아 있는 마을에서 살았던 걸까. 그런 
감동을 되새김질하며 나는 숲길을 달려가는 차창 밖을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임 수녀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또 공부할래요?
  --백두산 오르는 길목이나 보시지 뭘 또 가르치시려구요. 저렇게 좋은데요.
  --하느님을 알면 더 좋거든요.
  자는 줄 알았던 앞자리의 조윤상 씨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참, 그래서 어제 수녀님과 교리공부를 하긴 했습니까?
  --그럼요. 안 할 수가 있어야지요, 얼마나 깐깐한 선생님인데요.
  주기도문 외우는 것만이라도 끝내자고 해서, 그거 외워 가지고 신부님께 검사도 
받았는데요.
  --아니, 어제 저녁 기차에서 주기도문을 다 외웠단 말입니까?
  내가 웃었다.
  --옛날에 했던 게 있어서... 바로 외워지던데요. 그보다도 수녀님. 연길에 있던 
수도회 이야기를 좀 들려 주세요. 그때 여기 남아 있는 어떤 수녀님을 마침내 
찾아내셨다면서요.
  임 수녀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
  1939년까지 전부 21명의 수녀를 스위스 캄 수녀원에서는 파견하게 된다. 그러던 
가운데 연길에도 이제 한국인 수녀들을 양성하기 위한 수녀원이 설립된다. 그때 
초대 원장이었던 베로니카 라우어 수녀는 방문진료중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훈춘에서 
선종했다. 그때 훈춘에서 선종한 베로니카 수녀의 장례는 한국풍습대로 행해졌다. 
상여에 실려서 그렇게. 연길 수도원은 일찍부터 선구적인 데가 있어, 그때 이미 
미사를 우리말로 올리고 있었다.
  백두산을 찾아 올라가며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서안'은 당나라의 수도였던 도시, 그 옛날 장안이라고 불렸던 땅이었다. 지금도 
중국의 그 어느 곳보다 많은 유적과 함께 진시황이나 양귀비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이곳에 내렸을 때였다. 밤비행기로 공항에 내려 버스에 
올랐는데, 오르자마자 들려온 노래가 한국 유행가였다. 오, 중국인의 친절이여.
  미스 김도 잘 있어요.
  미스 리도 안녕히.
  짠짜라 쟌짠 짜라짜라쟈.
  도대체 한국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런 한국 유행가를 중국 최대의 역사 
고도에 내리자마자 들어야 하는 서글픔이란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그게 다 
한국인이 선물로 주고 간 것이라니.
  그렇지만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수녀님과 함께 앉아 교리공부를 해야 
하는 내 백두산행도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비포장 도로를, 우리들의 엉덩이를 반쯤은 짓무르게 덜커덩거리며 차는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임 수녀가 옆에 있는 동안이나마 베네딕도 수녀원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었다.
  --수녀가 될 때, 무슨 서원인가 약속을 하시지요?
  --하지요.
  --듣기는 했는데... 정결을 지킨다는 것과... 또 뭐지요?
  --이런 신자가 영세를 받겠다니, 원.
  임 수녀가 소리없이 웃었다.
  --가난, 정결 그리고 순명을 약속해요.
  가난이란 일체의 재산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순명이란 하느님과 
교회의 뜻에 복종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연길 수도원에서 예비 수녀들의 수련시간은 지원기 1, 2년을 지나서 1년의 
청원기가 있고 다시 수련기 1년의 과정으로 짜여져 있었다고 했다.
  수녀공과 매일묵상 기도문 옮겨 쓰기 같은 것이 첫 지원자들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때는 특히 우리말로 된 신심서적이 아주 귀했을 때였다. 그 때문에 수련자들이 
직접 중국어나 일본어로 된 서적들을 우리 말로 번역해서 읽기도 했다고 한다.
  차창 밖의 나무들이 점차 침엽수로 변해 가고 있었다. 어디에 벌목장이 있는 
것일까. 나무를 실은 차들이 내려오곤 했다. 지름이 2m도 넘어 보이는 나무들이 
벌채되어 트럭에 실려 내려가고 있었다.
  말을 탄 산부. 만주의 그 흙바람 부는 속을 말을 타고 가고 있는 신부나 수사들을 
떠올린다는 건 즐거웠다.
  임 수녀에 의하면, 그때 만주에서는 신부나 수사가 주로 말을 타고 다녔다고 했다. 
말을 타고 먼 공소(상주하는 신부가 없는 곳)에 오는 신부를 맞는 신자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었기에 그렇다고는 해도, 어딘가 어떤 종교도 겪는 
초기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연길 수도원에서 성당으로 가는 길에는 백양나무가 주욱 심어져 있었대요. 
거기에 까마귀 때가 날아들어서, 성당으로 가는 수녀들의 머리나 옷에 배설물을 
떨어뜨리곤 했대요. 그래서 원장 수녀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미리 3층에서 딱총을 
쏘아 까마귀들을 쫓아버렸다는 일화도 전해져요.
  그때 만주에서는 모두들 돼지를 놓아서 길렀다. 정해진 돼지 울이 없으니 
돼지들은 마음대로 여기 저기를 파헤치며 나돌아다녔다. 이 방목 돼지가 떼지어 
돌아다니는 한 옆으로 수녀들은 산책에 나서곤 했다고 한다. 추운 겨울 긴 망토를 
입은 수녀들 옆으로 달려가는 방목 돼지들의 행렬은 그 무렵 수도원의 모습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40년, 1936년 간도에 천주교가 전래된 4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는 
2만여 명의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가운데 초기 연길 수녀원을 지키던 수녀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갔다.
  지금의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본원이 있는 부산 광안 3동의 
본원 묘지에는 연길에서 선종한 여섯 수녀의 묘비가 있다. 무덤이 아닌 묘비인 
것이다. 아그네스 원영선. 루치아 조상옥 같은 수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46년 5월 20일. 중국 국민당과 공상당의 싸움에서 만주를 완벽하게 지배하게 
된 중국 공산당은 수도원의 모든 건물과 재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성직자들을 
연금시켰다.
  다행히 스위스 국적의 수녀와 한국 수녀는 해당 지역구에 연금되는 것으로 
끝났지만 다른 성직자들은 달랐다.
  1947년 8월 '사상', '통일', '공작'이라는 중국 공산당 정책에 의해 수도원은 
또다시 2차 청산이라는 것을 맞아야 했다. 연길에 남아 있던 수녀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들에 나가 품을 파는 김을 매거나 뜨개질에서부터 나귀 대신 연자방아를 
돌리는 일까지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독일과 이태리 국적의 성직자들은 남평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서른 세 명의 
수도자들은 두만강 가까운 국경지대에 자리잡은 남평의 수용소에서 중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은 벌채작업에 끌려나갔으며 베어낸 나무의 하역작업을 해야 
했다. 연자방아의 맷돌을 돌리고 토목공사장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종교가 가지는 이상한 힘은, 결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운명의 사슬이 그들을 
묶어 준다는 것이다 두만강 가의 남평에 수용된 서른 세 명의 수도자들은 그러나 그 
안에서도 그들의 믿음은 아무 흔들림이 없었다. 이 안에서도 그들은 서로 해야 할 
일을 나누어 규칙적인 생활을 했으며, 믿음의 나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프렌치스카 
수녀는 식사준비를, 데오닷다 수녀는 바느질을 비롯한 의복손질을 그리고 레낫다 
수녀는 사람들의 간호를 맡았다.
  한편, 그들은 조합창고에서 가져온 밀을 가지고 하느님을 위한 제병을 만들었다. 
제병이란 흔히 밀떡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밀가루 빵이다. 이 빵은 누룩이라든가 
하는 다른 어떤 것도 섞지 않고 순수한 밀가루로만 만드는 빵이다. 성서에서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과 함께 먹었던 빵도 바로 이 제병이었다. 지금 미사에서 
사용되는 것은, 상징화되어 둥글고 종이처럼 얇다. 이 제병은 가톨릭에서 제사를 
올릴 때, 예수의 몸으로 변화되고 그것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신자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신비를 체험한다.
  이들은 또 산에 올라가 머루를 따다가 미사에 쓸 술, 미사주를 만들었다. 그것은 
예수의 피였다. 그렇게 해서 봉헌하는 미사성제는 이들에게 있어 가장 커다란 
위로였으며 희망이 되어 주었다.
  또 그것은 무슨 우연이었을까. 수용소의 중국인 감독이 신부들에게 담배를 말아 
피울 때 종이로 쓰라고 갖다 준 것이 '성무일도'라는 기도서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서로 돌아가며 기도를 바칠 수 있었다. 수녀들에게 있어 이 시간은 고된 
억류생활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이 되었다.
  원장수녀는 1946년 수도원이 몰수되고 성직자들이 수난을 당할 때 수녀원의 
해산을 명령했다. 삶의 자리, 영혼의 자리, 기도의 자리. 그 모든 터전을 잃은 
수녀들은 저마다 머나 먼 남하의 길에 올랐다.
  제복을 벗고 부녀자들의 옷으로 갈아입은 수녀들은 혹은 방물장수로 비누장수로 
변장을 했다. 머리에는 팔러다니는 물건 보퉁이 같은 짐을 이고, 그들은 길을 
떠났다. 38선을 넘어서는 그들이 머리에 인 보퉁이에는 기도서들이 들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장엄한, 수난에 찬 먼 길이었다. 이때 성직자와 수녀들이 남하할 수 
있도록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도와준 신부로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가 있다.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녀는 이때 열네 명이 남하했는데 그 가운데 열 명이 이광재 
신부의 도움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북녘에 남아 있던 그는 1950년 10월 8일 원산에서 순교하였다.
  차가 산으로 올라가면서 주변의 나무들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마을 주변 
어디서나 눈에 띄던 떡갈나무나 상수리 나무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여기저기에 바라보이던 미류나무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함께 삼나무 같은 것들이 
짙푸르게 바라보였다. 푸른 빛으로 보아 멀리 있는 그 나무들이 전나무거나 
잣나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백두산의 안내서를 썼다는 첸 씨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는 운전기사 
옆자리에서 입을 벌린 채 자고 있었다. 차에 탔다 하면 자고 눈을 뗬다 하면 
허어허어하고만 있는 사람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조금 쉬었다가 가자는 말에, 차를 세우고 우리들은 
밖으로 나왔다. 훅 하고 몸에 와 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차갑고 그리고 무언가 
단단한 그런 느낌을 주는 공기였다. 건너편 기슭에 짙푸른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데 와 보는 거 첨이지요?
  이게 백두산의 바람인가. 스쳐지나가는 바람결에 깊이 숨을 들이 마시고 서 있는 
내게 다가서며 임 수녀가 물었다.
  --제가 촌놈인 거 모르세요. 이런 데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인데요. 강원도거든요.
  --그랬군요.
  --여기까지 오면서 내내, 아 고향 같다 내가 자라던 그곳 같다 그러면서 
왔는데요.
  임 수녀도 내 옆에 서서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팔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수녀님. 그런데... 그때 남하하지 않고 만주에 남았던 수녀들은 그후 어떻게 
됐나요?
  --돌아가신 분도 있고, 소식이 끊긴 분도 있고.
  임 수녀가 잠시 말을 끊었다.
  --내일 모레... 이 백두산에서 내려가면, 그때 헤어진 수녀님을 한 분 만나게 
될지도 몰라요.
  놀라며 나는 임 수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헤어졌다니. 그때라니.
  그때, 중국공상당 정부에 의해 수도회가 완전히 파괴되면서, 원장 수녀가 모든 
수녀들에게 남하할 것을 지시했을 때, 마지막까지 두 수녀가 남았다. 함정선 
스콜라스띠카 수녀와 감정옥 안나 수녀였다. 그들은 집이 만주에 있었으므로 
남하하지 않고 그곳에 남았다.
  남아 있는 수녀를 위해서는 함정선 스콜라스띠까 수녀가 원장대리로 남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는 이 수녀가 그 후 북한에 억류되어 
살아오다가 1971년 회령에서 사망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방의 여러 종교 
소식통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의 수녀 감정옥 안나 수녀의 소식은 확인이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수도회 쪽으로 소식이 닿은 것은 1958년이 마지막이었다. 그 편지를 
끝으로 만주의 감정옥 수녀와는, 영원처럼 소식이 끊겼다.
  --그 수녀분을 만나신다는 겁니까? 이번에요?
  임 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느님이 도와주실 거예요...
  --확실히 연락을 하고 오시는 게 아닌가요?
  --80년대부터 스위스를 비롯한 여러 채널로 그 분을 수소문해서 마침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했어요. 또 서로 연락도 닿았구요. 그렇지만 생각해 보세요. 신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당 치하의 중국에서 그분이 어떻게 살아내셨을지. 그리고 지금 
중국 정부가 가톨릭을 인정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신자들이 미사를 드리는 
행위까지만 인정하는 거예요. 종교도 교회도 정부에 속해 있어요. 중국정부는 
바티칸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건 저도 알지만요.
  --약속이 되어서 오기는 하지만, 정말 그 분을 만날 수 있을지... 아직 믿어지지가 
않아요.
  등 뒤에서 차에 오른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자, 그만 갑시다. 이제 거의 다 왔답니다.
  우리는 차에 올랐다. 길 양쪽으로 나무들이 우거지고, 우리들이 탄 차는 나무들이 
에워싼 길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순간 저녁 햇살이 비껴들면서 차창 
밖으로 자작나무 숲이 나타났다.
  창 밖은 푸른 색에서 갑자기 흰색으로 바뀌었다. 하얗게 껍질이 벗겨지면서 
자라는 자작나무. 그 흰 나무가 하늘을 향해 팔을 들어올리듯 그렇게 숲을 이루며 
서 있었다. 마치 가느다란 연필로 그려놓은, 그 모습은 정지된 시간 같았다.

  자작나무. 내 청춘에 상처처럼 박혀서... 하얗게 불로 지진듯 남아 있는 자작나무. 
스스로 그 흰 껍질을 벗어가면서 하얀 나뭇가지를 바람에 떨며 자라는 나무. 열아홉 
살 그때, 자살을 꿈꾸면서 자작나무 가득한 강원도 내지의 눈쌓인 산허리를 헤매던 
때, 내가 기대어 울던 그 나무, 자작나무.
  내가 열아홉이었던 그해 겨울, 나는 혼자였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나는 
겨울나무처럼 혼자였다. 잎 떨어진 나무들이 앙상하게 하늘을 향해 팔을 들어올리듯 
서 있는 산에 눈이 내리고, 그 내린 눈이 쌓여서 깊고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아 
가던 그때, 그 열아홉에 나는 혼자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기다려야 할 그 무엇도, 가야 할 길도, 찾아갈 사람도 나에게는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때였다.
  열아홉을 청년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그때 그 나이의 청년에게 진실이란 
무엇이었을까. 대학. 군입대. 귀향. 시골에서 올라와 소도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청년이 껴안을 수 있는 것들은 그런 몇 개의 단어로 축약된다. 그것이 
겨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길이 아니었다. 남들은 입시공부를 하는 도서관에서 그들과 
함께 앉아 나는 소설을 읽었다. 그때 읽어 가던 거친 문장의 번역 소설들.
  저녁 무렵 3층 도서관에서 옥상으로 나서면, 바로 밑으로는 미군 유도탄 
기지사령부의 병영이 내려다보였고, 때때로 거기에서는 성조기를 내리며 그들의 
국가가 울려 퍼지곤 했었다.
  앙드레 지드를 읽다가 밖으로 나와, 그 이방인들이 자기네 나라의 국기를 내리며 
국가를 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자면 철조망이 휘돌아간 병영 뒤편 서쪽으로는 
가난에 찌든 역앞의 판자집들이 쭈그리고 있었고, 저녁이면 몸을 팔러 나오는 
여자들이 그 앞을 서성거렸고, 그 위로 저녁해가 진홍빛으로 떨어지곤 했다.
  하나씩 하나씩 자신이 쥐고 있던 희망이라든가 가능성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덧없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며 나는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뜻모르게 
중얼거렸었다. 서른세 살까지는 살지 않을 거야.
  그랬다. 서른세 살까지는 살지 않겠다는 것... 그것이 내가 부여안고 있던 단 
하나의 희망이었고, 그렇게 중얼거릴 때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가장 드높은 진실로 
생각되었다.
  왜 서른세 살이었던가. 서른세 살은 예수가 죽은 나이였다. 그 사람보다 더 오래 
이 땅에 살아야 할 아무것도 나는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했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속의 알리사. 이 땅의 어딘가에 그런 여자가 살아 
있으리라고도 믿지 않았다. "좁은 문" 속에서도 그녀는 죽으니까. 그녀는 다만 죽고 
살아남은 사람의 추억 속에서 살아 있을 뿐이다. 살아서 추억을 기르기보다는 
죽어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나를 추억으로 기를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어딘가에 나의 
알리사가 있어 나에게도 좁은 문 속에서처럼 그런 구원과 살아서의 재생이 찾아올 
수 있으리라고 또한 믿지도 않았다.
  내가 믿었던 것은 구약 예레미아의 슬픔이었고, 좁은 문이 가지는 허무 그것밖에 
없었다. 그 열아홉 살의 청년은.
  자작나무와 한밤의 라디오. 그 무렵 내가 껴안고 있던, 아니 내 일상을 버텨주던 
두 개의 기둥은 자작나무 숲과 한밤에 듣는 라디오 방송이었다.
  강원도 오지의 눈깊은 겨울, 산에 오르면 무릎이 차게 눈이 덮여서, 녹지 않고 
봄을 기다리던 그 눈밭에 자작나무가 꿈처럼 들어서 있었다. 내가 매일 오르곤 하던 
그 산길에서 자작나무 아래 쌓인 눈을 집어 서걱서걱 씹어 먹으며 쳐다보던 
하늘에는 솔개 하나 날지 않는 빈, 텅 빈 자리뿐이었다.
  낮에는 종일 그 산에서 보냈다. 그리고 저녁이면 배를 깔고 엎드려서 라디오를 
들었다. 한밤에 들을 수 있는 방송이란 솨악솨악 파도가 밀리듯 들려오는 일본어 
방송과 북한의 대남방송과 그리고 어쩌다가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게 다가오는 
중국어 방송이었다.
  세 방송이 다 '바벨 탑'의 진실을 내게 가르치고 있었다. 서로 말을 다르게 
만들어서 그들이 함께 어울려 나쁜 짓을 못하게 하느라, 하느님과 인간에게 그토록 
여러 가지 말을 쓰도록 만들었다던, 그때 내 바벨 탑. 그랬다. 나는 그 방송의 어느 
것도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북한 방송은 끊임없이 숫자를 읊어댔다. 3. 5. 2. 9. 4. 7. 4. 몇 시간이고 그렇게 
되풀이되는 그 숫자는 남한에 잠복중인 간첩에게 내려보내는 암호라고 했었다. 
그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 방송이나 파도소리에 섞여 오는 중국어 방송이나 
무엇 하나 다를 게 없었다.
  그 한밤에 라디오로 음악을 들었다. 곡명도 누가 불렀다는 것도 모른 채.
  유일하게 하나, 낯익은 음율로 다가와 내 귓가에 얹히던 노래가 있었다. 영화 
"OK목장의 결투"의 주제곡. 오케이, 크으럴, 오케이. 크럴... 하는 그 노래. 
박박깎은 고등학생 머리를 숨기느라 모자를 뒤집어 쓰고 몰래 영화관에 들어가서 
보았던, 학생입장 불가의 그 영화 주제곡이었다.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배우 스티브 맥퀸을 보았었다. 아주 훗날, 그가 암에 걸려 
재혼한 부인이자 "러브 스토리"의 여주인공을 맡았던 알리 맥그로우와도 헤어져서, 
무슨 민간 식이요법을 하러 멕시코로 내려갔다는 해외토픽을 읽었을 때, 내가 
싸아하게 가슴 아파했던 것도 그때, 그 열아홉의 겨울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자살을 하겠다는 것은 무슨 달콤한 속삭임처럼 내 주변을 떠돌았다. 
눈덮인 산을 오르며, 자작나무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끊임없이 자살을 
생각했었다. 뭔가 더 살아야 할, 그래야 할, 아무것도 나에게는 없었다. 그냥 가만히 
그 눈밭에 파묻히면 될 것 같았다. 자작나무 아래 가만히 묻히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몇 십년이 흘러서, 너덜너덜 해지고 때묻어 펄럭이는 영혼을 끌고 이 
백두산에 와서... 나는 자작나무 숲을 만나고 있었다. 울지 않으려고 눈을 
깜박이면서 나는 오래오래 차창 밖으로 멀어져가는 자작나무 그 흰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백두산에 닿았다. 산의 처음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백두산에서 백두산까지 왔다,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완만하게 경사진 
길을 하루종일 올라와서 버스가 멈춘 곳은 호텔 앞이었다.
  우리가 하루를 자야 할 호텔 뒤쪽으로는 중국인들이 세운 장백산 입구라는 문이 
볼품없이 칙칙한 원색으로 치장을 한 채 서 있었다.
  
    6.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해 빌으소서

  짐을 풀고 밖으로 나오는 내게 첸 씨와 가이드가 다가왔다. 첸 씨가 중국어로 
뭐라고 말했고 가이드가 통역을 했다.
  --장백산이 어떻습니까? 좋습니까?
  --그냥... 우리 고향 같네요. 내가 어려서 자란. 저는 아주 산이 많은 마을에서 
자랐거든요.
  --허어허어허어.
  --그런데 하나가 다른 게 있어요. 왜 그렇게 해바라기를 많이 심는 거지요?
  --아, 해바라기씨는 기름도 짜지만 그냥 먹습니다. 여기서는, 손님이 오면 
해바라기씨를 내놓습니다. 그걸 까먹으며 얘기도 하고 그러지요.
  무슨 생쥐도 아니겠고, 손님이 오면 마주앉아 해바라기 씨를 까먹는다는 말에 
내가 클클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오다가 보니까, 길가에 사람들이 앉아서 무슨 트럼프 같은 것을 
하던데요.
  --예, 그게 차를 기다리는 동안 모여 앉아서 도박을 하는 건데, 참 큰일입니다. 
여기 조선족들 가운데 제일 큰 문제가 도박이에요.
  그 피가 어디 가겠나 싶었다. 모여 앉으면 동양화에 서양화에, 장례식 
밤샘에서부터, 멀쩡한 사람들이 점심시간에 음식 들어오기 전에도 잠깐, 여름휴가 
가는 봉고차 안에서도 두들기고, 산으로 피서 가서도 자리 펴기 무섭게 두들겨 대는 
그 버릇들.
  같은 종족인데, 백두산 기슭에 사는 사람이라고 다를 리가 없지.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천천히 호텔을 빠져나왔다.
  저녁해가, 말 그대로 뉘엇누엇 기울고 있었다.
  백두산 안내판을 등지고 서서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산 밑을 내려다보았다. 
중국인에게는 장백산인, 그 장백산 입구 공사가 아직 진행중이어서 주변은 마치 
어느 아파트나 운동장 공사판을 연상시켰다. 여기저기 파헤친 자죽이 그냥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공사차량이 들락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산속 깊이 올라왔다고는 해도 주변의 나무들은 별로 크지가 않았다. 키만 
멀쑥하게 큰 나무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을 뿐, 주변은 한적했다. 여기가 
백두산입니다 하지 않는다면, 서울에서 한두 시간 차를 타고 간 어느 산속, 하루쯤 
쉬러 올라온 곳 같은 분위기였다. 넘어가는 햇빛조차 따뜻했다.
  백두산에서의 첫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석양빛이 사라져가는 호텔 주변을 나는 
서성거렸다.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곳.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더욱 가고 싶었던 자리. 기차를 
타고도 자동차를 타고도 지도 위에는 있지만 갈 수가 없었던 땅. 지금 그곳에 내가 
와 있는 것인가 하는 실감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하다는 말이 남다르게 않다는 뜻이라면, 내가 묵게 될 백두산 정상 아래의 그 
숙소 주변은 그렇게 평범했다. 그 무엇도, 이제까지 만났던 다른 어떤 산과도 다를 
것이 없었다.
  --한 형.
  마치 중국 음식점 입구처럼 장식을 한 커다란 문 옆에서 박영수 씨가 부르고 
있었다. 그 문에는 "장백산 입구"라고 금색 칠을 한 현판이 흉물스럽게 걸려 
있었다. 내가 다가갔다.
  --이것 보세요. 백두산 천지가 이렇게 잘려지는군요.
  백두산 안내도였다. 두 나라의 국경에 걸쳐 있는 천지를 중심으로 백두산 주변의 
행정구역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분명하게 중국 영토와 북한의 영토로 천지 
물을 선으로 그어 갈라놓고 있었다.
  천지 안의 물이 한쪽은 퍼렇고 한쪽은 진흙빛일리도 없으리라. 물은 그냥 하나가 
아닐까. 그건 다만 하나의 호수가 아닐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호수의 물마저도 
갈라놓고 거기에 국경을 만드는구나. 이건 우리 물, 저쪽 건 네 물.
  --북한이 백두산 천지를 중국에게 팔아 버렸다느니 했던 신문기사 생각나세요?
  --네. 그건 저도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그 보도가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이 지도는 분명히 자기네 땅과 북한 땅을 표시하고 있으니까요.
  우린 너무 무엇을 모르고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또 들었다.
  '죽의 장막'이니 하는 소리만 들어왔던 북경, 그러나 그 거리는 얼마나 
쾌활했던가. 장춘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보여준 그 편안한 삶, 그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어쩌면 6공화국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서울에서의 우리보다도 더 
'말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나라가 이 꼴이 된 건 모두가 정부관리 때문이라는 
말을 그들은 쉽게 입에 올렸었다.
  이 높은 산에 올라서도 우리는 또 국가를 생각하고 체제를 이야기하고 정치의 
거짓말에 화를 내고 있었다.
  저 나무 이름이 뭔지 아세요? 백두산에 피는 꽃에는 이런 것도 있답니다. 왜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걸까.
  그때였다. 김 신부가 다가오며 말했다.
  --내일 영세를 드리지요. 본명을 뭐라고 하셨으면 좋겠어요? 생각해 두세요.

  방마다 하나씩 불이 꺼지고, 밤이 깊어갔다. 창문을 열어놓고 나는 산을 감싸고 
있는 어둠을 내다보고 있었다.
  내일 영세를 받는다. 내일.
  산에 깃들어 있는 평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들판에 가득한 고통.
  그런 이분법으로 지상의 모든 것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산과 들판만을 우리가 
살아 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들에게는 강도 있지 않았던가.
  내게 강 같은 평화 있으리.
  언젠가 들었던 그 노래를 나는 기억했다. 그 가사가 '네게 강 같은 평화'인지 
'내게 강 같은 평화'인지를 나는 몰랐다. 다만 강을 평화로 표현한 그 말을 나는 
이해했다.
  어쩌면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저녁 강이야말로 평화라는 이름의 그 무엇이 
아닐까, 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조그맣지만 그러나 간절하게 품고 
있는 희망이 있었다. 그것은, 더 늙어서 이제 이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날마다 피를 
흘리지 않아도 좋은 나이가 되었을 때, 강가에 가서 살겠다는 것이었다.
  저물어 가는 강을 내다보며 고요하게 있으리라. 고기가 튀고 물살도 소리를 
죽이는 그 저녁 강. 아침 안개가 걷히는 강가를 거닐며 아직도 내게 무엇이 남아 
있는가를 헤아려 보리라. 여울물 소리는 밤에 씻겨서 한결 청아하게 들려오리라.
  그러나 산은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그곳에 평화가 있다고 늘 말해왔을까. 더 
크고 높은 것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은 언제나 산으로 갔다. 기도를 하러 사람들은 
산을 올랐으며, 혼자이고자 하는 사람들도 언제나 산으로 떠났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산은 신화의 마을, 신들의 마을이었다.
  저물어 가는 백두산 안에 갇혀서, 아니 거기 그렇게 감싸여서 나는 나무와 능선과 
깃을 찾아들며 우짖는 새들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했었다. 산에 있는 
평화란, 산에서 살고 있는 평화란... 이런 것일까.
  산에는 평화가 깃들어 있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들판에는 언제나 갈등만이 
가득해서, 나도 너도 우리도 다들 분쟁의 나날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다만 하나, 그 하나만은 분명했다. 내가 지금 산 속에 안겨 있다는 
것, 그의 품 속에 조그맣게 파고들어 있다는 것.
  내일 영세를 받는다. 가만히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호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바람이 소나무 숲을 스치고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다가왔다간 내게, 물방울이 떨어지듯, 파문을 그리며 지나갔다. 이 밤에 나 혼자 
깨어 있구나. 아니다. 저 바람도 숲도 함께 있구나.
  나는 벽에 이마를 기대고 조그맣게 몸을 구부렸다. 오래오래 그렇게... 있었다.
  밤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섞여 이따금 무슨 비명처럼 우짖고 가는 
새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새소리일까. 아닐지도 몰랐다. 이 깊은 산에서 살고 있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어떤 동물의 소리인지도 모른다.
  바람소리가 또 창을 타고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무릎을 꿇고 벽에 이마를 댄 
그 자세로 나는 가만히 불러보았다.
  하느님.
  겨우, 겨우, 동굴을 찾아들어온 상처입은 짐승처럼 나는 그렇게 조그맣게 몸을 
꺾은 채 소리없이 속삭였다.
  하느님.
  비로소 말 하나의 가슴 속에서 스며나왔다. 나는 말했다.

  하느님.
  제 옳음이 옳지 않을 때,
  그것을 고칠 지혜를 주소서.
  그리고 그 지혜가 하느님과 함께 하신다면
  저를 버리지 마시고, 그 길을 끝까지 가게 하소서.
  지켜 주소서.

  몇 시나 되었을까. 나는 아주 단순해져서 몸을 일으켰다. 몸을 닦아야겠구나. 
이상한, 무어라 모습을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라왔다. 목욕을 해야겠구나. 내일은 
하느님 앞에 선다. 그렇게도 멀었던 길, 한 발짝을 떼어놓기가 그렇게도 힘들었던 
밖으로 나왔다. 너울거리며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는 창가에 와서 섰다. 예비자 
교리를 마치지 못하고 끝내 돌아서야 했던 지난날이 떠올라 왔다.

  그 고문사건이 있고 나서 여름이 갔었다. 가을이었다. 한밤에 바닷가로 나가는 
일은 여전했다. 밤의 파도소리는 모래 위에 앉아 있는 내게 으르렁거리듯 다가오곤 
했다.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렀다. 그리스 신화의 그 새들처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프로메테우스는 죽음의 신을 잡아 
가둔다. 그리고 지상에서는 죽음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은 질서에의 파괴였다. 
죽음이 얼마나 큰 질서인지를 그들은 몰랐다. 이제 땅 위에서는 아무것도 죽지 
않았다. 화살을 맞은 새는 끝없이 피를 흘리며 하늘을 날아야 했다. 죽을 수가 
없으므로. 창을 맞은 멧돼지는 다리를 절름거리며 피를 흘리며 동굴 속에서 영원히 
신음해야 했다. 죽음이 없어졌으므로. 목이 잘린 사슴은 울컥울컥 쉴새없이 피를 
쏟아내면서 그러나 죽을 수가 없었다. 죽음이 사라졌으므로.
  종일 불을 켜야 하는, 창문 하나 없는 그 수사실에 갇혀 있던 때였다. 어느 날, 내 
고문 담당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는 다른 수사관이 맡고 있는 누군가를 
고문하러 지하 고문실에 내려가 있었다. 지하에서는 살을 ㅉ는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으아아 으아아 하는 처절한 울부짖음이 끊임없이 내 방의 철제 출입문을 타고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있어서였다. 내 담당수사관이 숨을 헐떡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벌겋게 상기된 그의 얼굴은 마치 몽둥이로 소라도 한 마리 때려잡고 온 사람 
같았다. 그가 누군가를 고문하느라 가빠진 숨을 여전히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야, 이 새끼야. 나 어디 좀 나갔다 올 테니까 너 그 진술서 계속 쓰고 있어!
  그가 또 숨을 헐떡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이거 씨팔... 요새 결혼하는 데 얼마나 내면 되는 거야.
  이 사람이 지금 누군가의 결혼식장에 가려는 건가. 사람의 살을 찢고, 거꾸로 
매달아 놓고 때리고, 전기고문으로 사람을 까맣게 태우고, 콧구멍에 물을 쏟아부어 
기절을 시키다가... 지금 누군가의 결혼식에 간다는 건가.
  올려다보고 있는 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그가 물었다.
  --야, 요새 결혼식에 갈 때 봉투에 얼마나 넣어가지고 가면 되냐?
  내 눈 앞에 사람은 없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가만히 그와 
마주보던 시선을 나는 책상 위로 내렸다.
  --금방 갔다 올 거니까, 너 이 새끼, 똑바로 앉아 있어!
  쇠문이 덜컹 닫히며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찾아가서 이제 결혼 축의금을 전할 그 신부를 나는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희디 흰 드레스에 감싸여 있을 신부, 그녀는 백합 같을까. 가슴 두근거리는 내일이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겠지만, 길러주신 어머니 아버지를... 함께 뒹굴던 형제들을 
떠나는 마을에 신부화장이 지워질까 애쓰며 눈물짓고 있을까.
  그러나 그녀는 알까. 조금 전 지금 여기서 인간의 살을 찢고, 가죽을 벗기고, 목을 
비틀던 자가, 그녀에게 축의금을 전하기 위해 가고 있는 걸... 그녀는 알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인간이라는 이름의 그 무엇도 나는 이제 사랑하지 
못할 것 같았다. 추악한 위선 덩어리. 이 땅에, 저 하늘에, 살아서 날아다니고 
기어다니고 걸어다니고 바람에 나부끼는 그 어느 것이 인간보다 악한 것이 있으랴. 
더 더러운 것이 있으랴.
  그것이 늦봄이었다. 가을이 왔지만 내 상처는 여전했다. 날마다 피가 흘렀다.
  가을이 왔지만, 목장 한가운데 있던 서재에 가는 일도 없었다. 여전히 피가 
흘렀다. 글을 쓰지 못하는 내 서재에는 여름장마를 지나며 책상과 벽을 뒤덮으며 
곰팡이가 피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릎을 덮으며 자랐다.
  다 포기하자. 포기하자. 이제 너는 없다. 밤이면 어둠 속에서 더 가까이 다가서는 
한라산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에 젖은 종이가 마르듯, 그렇게 일그러지고 변색되고 구겨지면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고문이라고 하는 정치적 폭력이 내 영혼에 지져낸 상처는,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사람을 미워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먹고 
살자면, 어디 가서 세차장이라도 차려야 할까봐. 제주는 비가 많이 오니까 차를 자주 
닦아야 하거든. 물에 젖은 종이가 마르듯... 그런 생각도 했다.
  인간이란 이다지도 비열하고 포악한 동물이었던가. 국가라는 것은 이렇게 
비인간성의 극악함을 통해서야 겨우 유지가 되는 그런 체제였던가. 그런 깨달음도 
왔다.
  그 가을, 예비자 교리를 공부하던 사제관을 찾아갔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제관으로 
신부를 만나러 갔던 것은 아니었다.
  한밤의 바닷가, 밤에는 파도까지도 검게 보였다. 검은 파도가 밀려 오는 모래밭에 
앉아 울부짖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둠 가득한 길가에 잠시 서 있었다. 
가슴 속에서 누군가가, 나는 아닌 거 같은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기도를 하고 
싶어. 누구에게여도 좋아.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
  문득 성당엘 가고 싶었다. 그랬다. 무엇에건 기도하고 싶었다.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 기도를 하고 싶어졌다는 것, 그것은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조그맣게 싹을 
틔우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두운 거리에 서서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그랬구나. 기도는... 그것은 사람만이 
하는 것이었구나.
  그 성당으로 향했다. 가로등 밑을 지날 때마다 내 그림자는 길게 늘어났다가 아주 
조그맣게 줄어들어서 발 밑에 깔렸다가 다시 길어지곤 했다. 까닭없이 그것이 
가슴에 와 닿았다. 길어졌다가 짧아졌다가, 그림자도 그렇게 변하는 것을.
  예비자로서 교리공부를 하며 드나들던 성당 뜰로 들어섰다. 그러나 성당 문은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성당 앞을 지나 사제관으로 갔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십여 번을 그렇게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을 때였다. 안에서 불이 켜지며,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오?
  귀에 익은 박 신부의 목소리였다. 나는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성당 문을 줌 열어 주시겠습니까?
  --뭐요?
  --기도하려고 왔는데, 성당문이 잠겼습니다. 좀 열어 주십시오.
  버럭 역정을 내면서 신부가 말했다.
  --아, 기도를 하려면 낮에 오지 왜 밤에 와서 이래요. 낮에 와요. 낮에.
  그리고 사제관 불이 꺼졌다.
  성당 뜰을 걸어나왔다. 캄캄하게 문닫은 성당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달빛도 없는 
하늘에 십자가가 치솟아 있었다. 천천히 걸었다.
  스무 살 그때, 지방에서 대학을 다닐 때, 한밤에 하숙집 근처의 교회에 가곤 하던 
일이 떠올랐다. 무엇 때문에 그때 그 한밤에 교회엘 들어가곤 했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기에 그 캄캄한 교회에 들어가 꿇어앉아 있곤 했을까.
  그때 그 교회에 한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넌 
참 나쁘구나. 네가 기도하는 싶으면 그냥 하면 되는 거지, 왜 남을 괴롭히니. 잠자는 
신부를 깨워야 꼭 기도가 되는 것도 아니잖니. 밤에 돌아다니는 건 벌레들이나 하는 
거야. 밤에는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이 오면 이부터 닦고, 그러면서 살아. 남들은 
다 그러잖니.
  사람이 많이 다니면 그게 길이 되는 거야. 처음부터 길이 있는 게 아냐.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게 살아가는 길이야.
  집으로 돌아왔을 땐 뿌옇게 새벽이 다가와 있었다. 잠든 아내와 딸아이를 
내려다보고, 걷어찬 이불을 덮어주고 거실로 나왔다. 문득 글을 쓰기 위해 서귀포에 
빌어놓고 있던 그 집에 가보고 싶었다. 서울로 끌려갔다 온 후 단 한번 그곳엘 
갔었다. 책상 위에도, 소파에도, 내가 읽다가 그대로 끌려갔던 책 "황금가지" 위에도 
장마를 지나며 퍼렇게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그곳엘 가고 싶었다. 가서 문부터 열어제끼고, 물걸레 빨아가며 청소부터 하고 
싶었다. 이제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어쩌면 많은 것을 
용서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눈에 다래끼가 나듯, 간지럽고 아프면서 가슴 속 저곳에서 무엇인가가 살을 찢고 
비어져 나올 것도 같았다. 용서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더 큰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목욕물이 다 받아졌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개어오고 있는 백두산의 숲을 
내다보았다. 그때 그 새벽처럼 밖이 개어오고 있었다.
  새벽이 오고 있는 숲을 내다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그 모든 것은 지난 
일이어야 한다. 탐구하는 사람으로, 창조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부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들 살아가는 이 세상에 무엇인가 
하나를, 덧없다 해도 아낌을 받을 무엇인가 하나를 얹어놓고 가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느냐. 이제 다 끝났다.
  많은 시간이 흘러가야 했지만... 이제 나는 다 잊고 있었다. 더 미워할 무엇도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K. 331번 1악장을 반복해서 들으며, 어느 날 새벽 
나는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모든 것을 잊었다. 이 땅도, 이 나라도, 죽어간 모든 
것들까지도 다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푸릇푸릇 이끼가 돋고 있었다. 사랑하거라. 다 사랑하거라 하며.
  담배가 하루 3갑씩 피워야 할 정도로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제는 혼자 
앉아 있으면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그 신경쇠약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내가 살아갈 날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고, 이제부터는 남아 있는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나는 회복되어 있었다. 그 건강은, 몸의 건강만이 
아니었다.
  욕실에 틀어놓고 온 물은 온수였지만 그러나 호텔에는 더운 물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욕조 가득 담겨진 물에 손을 담갔던 나는 마치 불에 덴 사람처럼 놀라며 
손을 뺐다. 얼음물이라도 그보다 더 차가울 수 없게 물은 차가웠다.
  머리라도 감을까 생각하다가 나는 그냥 욕실을 나왔다. 괜찮아, 됐어. 하느님이 다 
아실 텐데 뭐. 너 한잠 안 자고 밤 새운 거까지도 다 아실 텐데 뭐.

  밖이 개이기를 기다려 새벽산책을 하고 돌아왔을 때였다. 호텔 밖을 거닐고 있던 
김 신부가 말했다.
  --세례명이 아주 좋은 게 있어서 이야기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가능하면 본명(세례명과 같은 뜻. 가톨릭에서 자신이 원하는 성인 성녀의 
이름을 교회에서 지어주는 것으로, 하느님과 함께 새로 탄생함을 의미함. 세례명의 
성인 성녀를 본받고 그 분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임)을 한국 성인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었다. 우리도 그처럼 많은 성인을 낸 나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어떤 이름인데요? 신부님.
  --오늘이 바로 그 성인의 축일이에요. "요한 크리소스토모"라고 합니다.
  기도와 고행의 오랜 수련을 했고 훗날 주교의 자리에 오르지만 끝내 유배되어 
흑해의 해변에서 생을 마감하신 성인이었다. 특히 그의 웅변과 설교는 불멸의 
것으로 알려져 왔다. 크리소스토모란 '금으로 된 입'이라는 뜻으로 그의 이 불멸의 
말씀에 대한 찬사였다.
  김 신부가 말했다.
  --글을 쓰시는 분이니까, 널리 복음을 전파한 크리소스토모라는 이름과는 의미도 
서로 닿고, 참 좋네요. 그리고, 대부는 어느 분으로 하시겠어요?
  --이 여행을 오게 된 계기가 된 원장님이니까, 원장님께 제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침을 끝내고 우리는 두 대의 소형차에 나누어 타고 백두산 정상으로 향했다. 
천지까지 올라가는 도로공사가 한창이었다. 산을 오르던 중간쯤에서였다. 앞차에 
타고 가던 나를 불러 김신부가 뒷차로 옮겨 타게 했다.
  수녀들이 탄 뒷차에서는 로사리오를 하고 있었다. 나도 로사리오를 하며 백두산에 
오르라는 뜻이었다(라틴어로 장미꽃다발(ROSARIO)이라는 뜻. 묵주를 가지고 하는 
성모에게 드리는 기도의 하나. 가톨릭의 묵주는 로사리오를 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한국 영화나 TV드라마에서 이것을 목에 걸고 나오는 장면이 흔히 있는데, 잘못된 
것임.)
  임 수녀가 손을 뻗어 내게 소형차 뒷자리에 오르게 했다. 그녀는 자리를 좁혀 
나를 옆에 앉게 하면서 말했다.
  --기도를 하면서 올라가니까, 우리 같이 해요.
  나는 그녀를 따라 성모송을, 로사리오를 올렸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도다

  묵주를 돌려가며 드리는 기도는 천지로 향하는 길 내내 이어졌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 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해 빌으소서

  차창 밖으로는 활엽수들이 조금씩 그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나무들은 
관목으로 바뀌면서 키들이 작아졌다.
  도로공사에 나와 있는 인부들의 숙소가 찌그러질 듯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바라보였다. 여자들이 나와 이른 아침인데 빨래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때묻은 
옷을 입고 지나가는 우리들의 자동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위는 갑자기 툰드라 지역으로 바뀌었다. 나무나 풀이 사라지고 이끼가 
뒤덮인 구릉이 검푸른 모습으로 멀리멀리 이어져 있었다. 길 옆으로도 나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툰드라 지역을 마악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일 수녀가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했다.
  --물을 떠와야 해요.
  임 수녀가 보온병처럼 둥글고 흰 물통을 들고 차를 내렸다. 세례성사에 쓸 
물이었다. 샘물로 가는 그녀를 따라 박영수 씨와 나도 차를 내렸다.
  싸아하게 차가운 공기가 몸을 스치며 다가왔다. 수정처럼... 그렇게 말해야 할까. 
아주 단단한 질감이 느껴지면서 투명하게, 빛나는 것 같은 공기가 감싸왔다. 차고 
정갈하게 느껴지는 바람이 머리칼을 날리며 지나갔다. 나는 도로 옆을 돌아 물이 
흐르는 곳으로 걸어나갔다. 임 수녀는 물을 뜨기 위해 윗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물이 흘러내리는 곳에 가 몸을 구부렸다. 두 손을 오므려 물을 받으며 바라보니 
이직 9월인데도 물이 흐르는 옆으로는 고드름이 얼어 있었다. 물을 받아 얼굴을 
씻었다. 손이 시리게 찬 물이었다.
  고드름을 따 어적어적 씹으면서 나는 산밑을 내려다보았다. 나무들의 바다였다. 
숲이 바다처럼 이어져 있는 저 끝은 안개인가, 부옇게 흐려져서 보이지 않으며,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해 빌으소서.
  나는 소리치고 있었지만 그러나 목소리는 아주 가느다랗게 새어나왔다.
  차는 다시 천지를 향해, 두껍고 커다란 시멘트 블록을 깐 포장길과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아 비포장인 길을 덜컹거리며, 우리들의 엉덩이를 깨어져라 들어올렸다 
놓으며 올라갔다. 끊임없이 기도소리는 이어지고, 나는 그 모든 것에 마치 잔칫날 
아침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져 있었다. 이렇게 흔들어 놓아서야 엉덩이는커녕 
허리가 남아 날까 싶었다.
  나는 웃으며 뚱뚱한 몸집의 강 수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 수녀는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있었다. 저 수녀님은 종일 심각하시다니까. 주무실 
때도 심각하고, 음식을 드실 때도 심각하고, 천년쯤 전의 유적을 구경하러 가도 저 
수녀님은 구경을 나오신 게 아니라 마치 이 사람들이 잘 만들고 있나 시찰을 나오신 
거 같다니까. 북경에서 장춘으로 오던 비행기가 몹시 흔들린 때가 있었다.
  --아이구 이러다가 떨어져 죽는 거 아녜요.
  내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을 때도, 뒷자리의 강 수녀는, 죽으면 좋지 하느님한테 
가니까, 하고 마치 무슨 선언문을 읽는 듯한 얼굴로 말했었다.
  장백폭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한번 차가 멈추고 나서 우리를 태운 소형차는 
단숨에 백두산 천지 밑에 닿았다. 하늘에는 몇 가닥의 구름이 무슨 자죽처럼 스치듯 
떠 있을 뿐 푸르게 개어 있었다. 밟으면 푸석푸석 부서져내리는 모래언덕이 우리들 
앞을 막아섰다.
  뒤쪽에서 원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끄러지면 큰일이니까 조심들 해요. 내가 
이번에 아홉번째 백두산엘 오는데, 이렇게 날씨가 좋은 건 처음이야.
  모래의 언덕 같은 가파른 길을 우리는 올라갔다. 천지를 병풍처럼 둘러싼 
화산암이었다. 그 모래산을 오르자, 아 하는 순간... 백두산 천지가 눈앞을 뒤덮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네.
  네.
  네.

  모든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으리라. 그리고 한번, 믿습니다 하고 대답했으리라.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내 이마에 기름이 발리워지던 일을, 임 수녀와 
대부가 된 원장이 내 손을 잡아가며 세례를 받는 나를 도와주던 일을... 그리고 김 
신부가 내 이마에 물을 부을 때 이마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던 그 뜨거움을, 마치 
부서진 모자이크의 몇몇 조각처럼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떨리는 내 혀 위에 밀떡이 놓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피의 
잔, 붉은 포도주가 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모든 이의 죄사함을 위하여 흘릴 피니라.

  천지의 물빛은 가을햇살 아래 에머랄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깊이를 모를 그 
가없는 신비, 그 호수는 영원이었다. 살아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영원과의 첫 
만남이었다. 미사는 그렇게 이어졌다.
  그것은 얼마나 순정한 한순간 순간들의 엮음이었던가.
  세례는 재생의 성사였다. 물에 의해서 이제까지의 삶을 씻어내는 만남이었다. 
나는 그것을 믿었고, 네 하고 대답했다.
  이때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된다. 태어나서, 태어난 것들이 마침내 돌아갈 
하나의 원천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모든 탄생은 물과 함께 하며 그 생명의 
살아감도 또한 물을 통하여 이어진다. 그러므로 물은 또한 모성이었다. 우리들의 
피가, 어머니의 태내에서 우리들을 감싸주던 양수가, 작은 점 하나처럼 우주의 신비 
속을 달려가 만나는 정자와 난자의 만남이... 물이었다.
  미사가 끝났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나는 그 이름으로, 하느님과 만났다.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고름처럼... 환희의 울부짖음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토록 내 안팎의 모든 것이 고요할 수가 없었다. 어깨를 들먹이며 내 흐느낌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나는 조금씩 더 조금씩 가벼워져서 땅 위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내 팔뚝에 가슴 여기저기에 손톱만한 비늘들이 돋아나는 것도 같았다.
  --축하합니다.
  김 신부가 그렇게 말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대부가 눈물 젖은 내 얼굴을 가슴에 안으며 말했다.
  박영수 씨가, 조 선생이, 부인들이 내게 다가와 어깨를 안았고, 축하의 손을 
잡았다. 그 속에서 찬송가가 이어지고 있었다.
  고마워라, 나를 도와주신 분들. 축하를 받으며 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일까. 왜 이들이 울고 있는가. 대부는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있었다. 남편과 
나란히 서서 찬송가를 부르며 조 선생 부인은 연신 남편과 자신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박영수 씨는 이마에 손을 댄 채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었다. 미사 도구를 챙기며 부르는 임 수녀의 찬송가는 목이 
메어서 자꾸만 끊어지고 있었다.
  백두산과 이어져 있는 산봉우리들이 멀리 멀리 겹쳐지며 바라보였다. 흰 화산석의 
모래산이, 아무것도 자라고 있지 않는 툰드라 지역이 그 밑의 관목들이 그리고 
나무들의 숲이 점점 멀어지면서, 봉우리와 봉우리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주먹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자신이 작은 모래알처럼 느껴졌다. 발아래 밟혀서 푸석푸석 부서지는 화산석 
모래알처럼.
  재생, 새로 태어남. 그 벅찬 아름다움에의 공감 때문이었을까. 눈물을 그치고 나서 
우리들은, 백두산 정상에 내리고 있는 햇살을 받으며 모여 앉아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찬송가를 불렀다. 아홉 사람이 하나인 듯이.
  마지막으로, 푸르게 납빛으로 빛나고 있는 천지를 내려다보고 나는 인사했다. 잘 
있거라. 네 안에 안겨 내가 지금 이토록 따뜻함을 너는 알리라. 재생과 속죄의 
비늘을 달고 이제 내려가마. 잘 있거라. 내 삶의 물굽이에서 함께 해준 너... 내 
뒤에서부터 내 앞으로 흘러가고 있는 너.

  백두산에 오르는 길을 안내하던 조선족 청년 박 군이 우리가 타고 온 자동창가 
있는 산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는 게 중국의 기상관측소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 관측소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날씨가 하도 좋아서 올라왔다는군요. 20년 넘게 근무를 하는데 이렇게 
좋은 날씨는 처음이랍니다.
  아침에 숙소를 떠나며 백두산 정상은 훨씬 기온이 낮은데다가 날씨의 변화가 심할 
것에 대비해서 우리는 모두 두터운 파커를 입고 떠났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더워서 다들 파커를 벗어들었고,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것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쌓아놓고 돌로 눌러 놓지 않았던가.
  기념으로 돌 몇 개를 주워 천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었다. 그 주머니는 호텔 
기념품 판매대에서 산 것이었다. 돌을 주워가는 한국사람들을 위해 어느새 
주머니까지 만들어 팔고 있었다.
  앞서서 하산을 하던 조 선생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백두산 꼭대기까지 약장사가 올라와 있네요.
  --뭘 파는데요?
  --한약재래요. 산삼도 있어요.
  옆에 있던 박 군이 화난 얼굴로 말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사지 마세요.
  --하여튼 장사꾼들이란.
  예비군 훈련을 가서, 포복을 하랴 장애물에 은폐를 하랴, 나뭇가지에 살을 
긁히면서 정상까지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면, 풀숲에서 불쑥 들리는 목소리가 있다. 
박카스, 야쿠르트 있어요. 목마른데 드세요. 물건 파는 아주머니들이 이미 거기 와서 
숨어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남북 분단 초기에도 장사꾼들은 38선을 넘나들었다지 
않던가.
  그리고 우리는 산을 내려왔다.
  숙소에 돌아오니, 우리들이 타고 돌아갈 버스는 이미 짐을 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까지 연길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서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민족의 산이었다, 백두산은. 영산이라고 했다. 신화의 땅. 그것은 다만 높은 
땅덩어리만이 아니었다. 다른 의미로는 민족의 성지가 아니었던가.
  나와는 또다른 의미의 꺾쇠 하나가 견고하게 맺어진 산, 백두산을 떠나며 나는 
가만히 호텔 뒤편의 단풍든 산기슭을 바라보았다. 중국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기주의가 이 산을 또 얼마나 할퀴고 갈 것인가.
  호텔을 떠나기 전, 바쁘다는 안내원의 재촉을 들어가면서도 우리는 버스를 
기다리게 하고 기념품 판매대 앞을 서성거렸었다. 우리는 여기엘 왔다갔다는 
의미로서 무언가 기념이 될 만한 물건들을 사고 싶어했다. 호텔에는 그러나 
기념품다운 물건이 없었다. 겨우 팔고 있는 것이 배지 정도였고 그것마저도 다른 
조잡한 물건들과 다를 게 없었다.
  불로초라는 까아맣게 말린 풀을 보며 김 신부가 말했었다.
  --이게 진시황이 찾았다는 바로 그 불로초래요. 술을 담가서 먹는 답니다.
  우리는 웃었고, 강 수녀는 중얼거렸다.
  --누가 잘도 거짓말은 지어내는군.
  --그래도 선물하기에 좋겠는데. 이게 바로 진시황이 찾던 건데, 백두산으로 안 
오고 한라산으로 가는 바람에 그만 먹어보질 못하고 아깝게 죽은 바로 그 풀이다 그 
말이거든. 설명이 재미 있잖아요.
  원장이 말했고, 가져가자면 다 부서져 버리겠는데 뭘... 중얼거려가면서 우리는 
그걸 한두 뿌리씩 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온 한국의 아들들답게.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잠시 물이 치솟고 있는 온천에 들렀었다. 개울 바닥을 
뻘겋게 물들이며 더운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을 넣어보았다. 그대로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이 물은 뜨거웠다. 무럭무럭 김이 솟아오르는 사이로 다 찌그러져 가는 
헛간 같은 가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그 밑으로 누군가가 세웠던 휴양시설은 손님이 
없어서 문을 걸어 잠근 채 비바람에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깝네. 여기다 그냥 호텔을 세우고, 온천 휴양 관광지를 만들면 그야말로 
절경이 아니겠어.
  누군가가 아쉬운 듯이 말했었다. 뜨거운 온천물이 흘러내려가고 있는 산에는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길러낸 머리 속에는 돈벌이밖에 떠오르는 게 
없는 것일까.
  숲 사이로 곧게 뻗어 있는 길을 버스는 달려나갔다. 길게 벤치처럼 된 맨 
뒷자리에 앉아서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나무들이 도열하듯 늘어서 있었다. 어제 
올라왔던 길을 이제 거슬러 내려가리라.
  자작나무가 하얗게 늘어서겠지. 내 열아홉에, 철없이 죽음을 꿈꾸던 그때, 조금은 
죄에 덜 물들어서 헤매던 그때 내 영혼 속에 들어와 껍질을 벗곤 하던 그 나무들을 
다시 만나겠지.
  다시는, 그래요 다시는 누구를 미워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것도 같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말했다. 다시는 누구를 미워하지 않으며.
  주욱주욱 늘어선 침엽수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계획 아래 수종을 골라서 
식목을 한 게 분명한 숲이었다. 그 검푸른 숲이 끝나고 나자, 희디 흰 자작나무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어제보다 이른 시간의 그 햇빛 때문이었을까. 나무는 더 희게 바라보였다. 나는 
갑자기 종이처럼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다 용서했다.
  어디선가 말이 하나 다가왔다. 어디서 오는가. 다 용서했다. 그 말이 다가와 내 
어깨에 앉았다. 흰 자작나무들이 점점 더 희게 변하면서 나무의 형태는 사라지고 
다만 흰 빛의 바다처럼 변해갔다. 다 용서했다. 그 말과 함께 나는 내 어깨에 와 
얹히는 손을 느꼈다. 무게와... 온기를 그리고 감촉을.
  지나간 것들, 그것마저도 다 사랑하거라. 아끼거라. 네가 부딪고 있는 그 많은 
것들 다 용서했으니 이제 그렇게 돌아가면 된다.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니.
  아, 하고 나는 부르짖었으리라.
  아 당신이시군요.
  투명하게 그러나 휘장처럼 내려져 내 앞에 펼쳐졌던 흰 빛들이 멀어지면서 
자작나무는 다시 우뚝우뚝 숲을 이루며 다가섰다.
  당신이 함께 계셨군요. 나는 가만히 그 손이 얹혀졌던 바른 쪽 어깨에 왼 손을 
올려놓았다. 너는 이제 나와 함께 있다. 그 말이 손에 잡혀져 왔다. 이제 족쇄를 
풀고... 저 어제를 잊거라.
  제가 그토록 빨아널고 싶어했던 그 영혼 말인가요.
  나는 간절하게 흰 나무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 한 걸음. 그렇게 살아가거라.
  자작나무 숲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흰 띠를 두른 듯 검푸른 숲 속에 그 나무들은 
그렇게 모여 있었다. 차가 커브를 돌면서 숲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깊이 몸을 숙이고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당신이 
와 주셨군요. 이 때묻고 너덜거리는 하찮은 터, 여기까지 당신이 와 주셨군요.
  임 수녀가 옆에 와 앉으며 물었다.
  --왜요? 어디 아파요?
  고개를 드는 내 얼굴에 가득한 눈물을 임 수녀는 보았을까. 누이처럼 가만히 내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임 수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좋아요. 그냥, 뭔지 모르게. 좋아요. 함께 있다는 게.
  누구와 함께 있다는 것일까. 나 또한 그 뜻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말했다.
  --멀미를 하는 줄 알았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눈물 때문에 핏발이 서 있었을까. 그건 내가 
살아오면서 가질 수 있었던 가장 맑은 얼굴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우린 뭐 전부, 요한 크리소스토모 영세 주러 여기 왔다 가는 거 같다.
  임 수녀가 장난스레 말했다. 내가 소리없이 웃었다.
  --고마워요. 수녀님.
  --어젯밤 자기 전에 이 말을 해줬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안타까웠는데, 
진정으로 중요한 건 말이지요, 세례 전의 속죄예요. 영세란 일종의 허락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제 잘못을 이렇게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허락해 
주세요. 이때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자면 스스로 깊이, 남김없이 속죄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많이 기도했습니다, 어젯밤. 그리고 제 잘못들... 많이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용서해 달라고는 말하지 못했어요. 그 분은 아실 거예요. 나는 그러나 임 수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바라보면서, 어려서 죽은 누이... 내게 몇 개의 
추억들을 손톱자죽처럼 남겨 놓고 간 그 누이가 이 세상을 살아서 지금 이렇게 
나이든 모습으로 내 앞에 와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가 말했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축하해요.
  나는 조그맣게 말했다.
  --왜 그렇게 뜨거웠는지 몰라요.
  뭐가? 하고 묻듯이 인 수녀가 눈을 크게 떴다.
  --물이 제 이마에 부어질 때 말예요. 저는 제 이마가 타는 줄 알았어요.
  임 수녀가 말했다.
  --우리가 물로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창조의 때, 새 생명의 탄생이에요. 
약속의 땅을 향해, 성서 안에서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요. 물을 건너 새롭게 태어나는 
거지요. 노아의 때에도 그래요. 물로서 지상의 생명체는 전부 멸망하지만 그러나 새 
생명으로 새 땅에 새 인류를 만들었어요.
  하오의 햇살이 뒷유리를 통해 우리들의 몸에 뒤덮이고 있었다.
  차는 빠르게 숲 사이로 뚫린 경사진 길을 내려갔다. 앞자리에서 누군가가 중국인 
첸 씨에게 묻고 있었다.
  --백두산에 아직 호랑이가 있나 한번 물어보세요.
  안내하던 박 군이, 허어허어하는 첸 씨와 통역을 해서 대답을 들려주고 있었다.
  --백두산에도 이젠 호랑이가 없다는데요.
  --그럼, 그 안내책자에 나와 있는 사진은 뭐야? 거기에는 분명히 '장백산 
호랑이'라고 설명이 붙어 있던데.
  --그건 말입니다. 장춘의 동물원에 있는 것을 장백산까지 끌고 와서 사진을 찍은 
거랍니다.
  앞쪽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뒤에까지 들려왔다.
  --그저 어디나 똑같구만, 사람들 하는 짓이란. 중국도 마찬가지군 그래.
  --아니, 그럼 그 호랑이는 진짜라는 거야?
  --네. 그 동물원에 두 마리의 장백산 호랑이가 있는데 그건 순종이랍니다.
  사람들은 하루종일 하느님만으로 사는 건 아닌가 보다. 나는 멀리 이어져 있는 
숲과 조금씩 조금씩 변해 가는 바깥 풍경들을 내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조금 
전에 그렇게 흐느끼면 찬송가를 부르던 분들에 지금은 또 호랑이 이야기를 하며 
저렇게 즐거워한다.
  --이 첸 씨가요 장백산을 헬리콥터까지 타고 답사한 게 전부 스무 번이 넘는 
답니다. 그런데도 호랑이가 서식하는 건 발견하지 못했다는군요. 그래서 이제 
백두산에도 순종 백두산 호랑이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강 수녀가 말했다.
  --우리 돌아가는 길에 장춘에 들린다면서요? 그때 우리 진짜 백두산 호랑이를 꼭 
한번 봐야겠네요.
  나는 가만히 웃었다. 수녀님도. 연세 저만하신 분이 또 무슨 호랑이를 보고 싶어 
하신담.
  산에서 침엽수들이 조금씩 사라지면서 저녁햇살이 서서히 숲 저편으로 가려지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두 시간이 넘게 달려내려와서 우리는 작은 읍내에서 차를 
세웠다. 거리에서는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게 한눈에 느껴졌다. 한글로 된 간판 
때문이었다.
  이 깊은 산간에 들어와 자리들을 잡았었구나 하는 놀라움과 나라를 잃었던 시대와 
그때를 산 사람들의 노고가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시장 안으로 들어가니 장아찌며 콩가루를 묻힌 인절미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백두산에서 난다던 개구리 요리를 파는 집도 있었다. 개장국집은 여기저기 널리듯 
눈에 띄었다. 우리 민족들이구나. 그 느낌 하나만으로도 왜 마음이 훈훈해지는 걸까. 
이게 피라는 것이 확인해 주는 같은 종족에의 친화감인가.
  시장을 돌아나올 때였다. 서울에서 왔다는 말에, 인절미를 팔던 아주머니 한 분이 
말했다.
  --남선에서 왔구만요. 저기 저 할머니도 남선에 갔다 왔이요. 친척이 남선에 
살지요.
  남선. 휴전선 밑의 대한민국을 이곳 중국 동북부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중국인도 조선족들도. 그들은 북한을 북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줄여서 북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무엇일까. 그들은 중선이 아닐까. 
중국에 사는 조선인.
  서서히 황혼이 다가왔다.
  잿빛의 망사 천이 느려뜨려지듯 밖은 조금씩 어두워져 갔다. 그리고 올 때는 
만나지 못했던 풍경이 차창 밖으로 떠올랐다.
  나무들 사이로 뚫린 길. 가파르고 좁던 길이 아니었다. 차창 밖은 넓게 넓게 
이어진 들판뿐이었다. 누렇게 시든 풀들이 무리지어 그 들판을 뒤덮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도 넓은 들판이 넘실거리며 이어진 산봉우리들 안에 있을 수가 
있나 싶었다. 서해안의 어느 갯벌에 나와 있는 것 같았다.
  드넓은 땅 저 너머로, 산이 사라지고 난 지평선 저편으로 마악 떨어진 해가 
핏빛으로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대륙. 그렇게밖에 부를 수 없이 드넓은 땅 위로 
황혼이 스러지면서, 그 너머에서 땅이 불타고 있듯이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른 풀들이 널린 들판이 노을 빛을 받아 주황색의 바다 같이 펼쳐졌다.
  불타버린 자리에 혼자 남이 있듯이 길가에 서 있는, 이제는 고목이 되어 앙상한 
나무가 그 황혼 속으로 까아맣게 음각되었다가는 멀리멀리 사라져갔다.
  --수녀님.
  임 수녀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보세요. 아름다워요.
  내 눈길이 가리키는 쪽으로 임 수녀가 눈을 돌렸다.
  --아.
  그녀가 조그맣게 부르짖었다.
  그녀도, 나도, 말없이 지평선 저편을 물들이고 있는 노을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대지는 조금씩 어둠에 뒤덮이고, 붉은 노을은 엷게 더 엷게 어둠 속으로 
풀려들어갔다.
  서서히 어둠이 다가왔다. 라이트를 켜고 버스는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차 
안의 불이 꺼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잠이 들었다. 나와 함께 버스 맨 뒷자리의 
구석에 앉아 내내 밖을 내다보고 있던 임 수녀도 몸을 꼬부리고 잠이 들어 있었다. 
스웨터 차림의 그녀가 추울 것 같았다. 나는 가방에서 파커를 그녀에게 덮어 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운전석 쪽을 등지고 차 뒤편을 향해 의자 위에 올라앉은 나는 등받이에 팔을 
올려놓고 그 위에 턱을 기댔다. 넓은 뒷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며 앉아 있었다. 
자동차 뒤쪽 라이트에 비춰서 어둠에 감싸인 길이, 먼지가 날리는 비포장길이 
끊임없이 뒤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연길을 떠나 백두산으로 오르던 그 길이 아니었다. 드넓은 들판이 나타났던 
그때부터 자동차는 갈 때와는 다른 길을 따라 연길로 돌아가고 있었다. 추석을 앞둔 
달이 떠올랐다. 평야라고나 말해야 할 그런 드넓은 벌판이 잿빛으로 펼쳐지고 그 
끝에 하늘과 맞닿아 작은 봉우리들이 바라보였다. 그 어디에도 불켜진 집이라든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다. 길 옆으로는 여전히 스러져가고 있는 
마른 풀이 달빛에 비춰 넘실거리며 펼쳐져 있었다.
  그때였다. 차 뒤쪽으로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그 개는 
끊임없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버스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차와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더 떨어지지도 않고 더 다가오지도 않으면서.
  이상하네. 나는 소리없이 중얼거렸다. 여기는 사람이 전혀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이 먼 곳까지 저 개는 무슨 일로 나왔던 걸까. 자동차 뒤쪽으로 흙먼지가 
휘날리면 잠시 개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곤 잠시 후 개는 마치 연기 
속을 뚫고 튀어나오듯 다시 모습을 나타내곤 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나는 흰 종이 하나를 앞에 놓고 앉아 있는 아이처럼 물었다. 어디선가, 아니다, 내 
안에서였던가. 말씀 하나가 다가왔다. 물방울이 떨어져서 고이듯이 그렇게 말이 
스며 나왔다.
  저 개를 보아라.
  네 보고 있었어요. 어디에도 전혀 인가가 없는 벌판인데... 저 개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개는 여전히 피어오르는 비포장도로의 흙먼지 속을 따라오고 있었다.
  저 개를 보아라. 그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너는 모른다. 그러니 보아라. 그는 
무엇도 의심하지 않는단다. 그도 그렇게 하지 않니. 다만 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까.
  나는 환희에 차올라 두 손을 깍지 껴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젓고 
있었다. 무엇을 향해서였을까. 끊임없이 의심하며, 아무것도 내일의 그 무엇도 믿지 
못하는 나 자신을 위해서였을까.
  네가 이제 혼자가 아님을 알겠니.
  다시 한번 나는 그 말을 들었다. 무엇 때문인지 그 순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잠들어 있는 차 안에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뿐,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 오래 차 뒤를 
따라오던 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놀라면서 나는 차 옆쪽을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장이 뒤틀리듯 울렁거리며 그것이 말이 되어 새어나왔다.
  그리고... 준비하거라. 언젠가 내가 너를 부를 때 네가 쓸 수 있는 사람이도록 
준비하거라.
  아니었을까, 그것은. 준비하겠습니다. 언젠가 당신께서 저를 부르실 때 그때 
당신에게 쓰여질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 말은 아니었을까.
  깍지 껴서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어 얼굴을 감싸며 나는 여전히 흙먼지가 날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떠오른 달이 이제는 드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자동차가 
덜컹거리며 돌더미 가득한 개울을 건너갔다. 말라붙은 개울 한복판에 겨우 흐르고 
있는 물줄기가 달빛을 받아 기름처럼 빛났다. 나는 꿈처럼 중얼거렸다.
  언젠가 저를 써 주시기를 바래요. 그러자면 저를 쓰실 수 있도록 되어 
있어야겠지요. 그렇게 살아가면 되겠지요. 그렇지만 그것 또한 당신 뜻이지요. 이제 
그걸 안답니다. 당신의 뜻이라는 걸.
  그가 말했다.
  네가 잠자지 않은 걸 나는 안단다.
  어젯밤 말인가요?
  그는 언제나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말했다.
  이제 자거라.
  기쁨 때문에 잠이 안 와요.
  넌 늘 밤에 너무 오래 깨어 있더구나. 남이 일할 때 일하고, 남이 쉴 때 쉬도록 
해라.
  그 안에서 정갈해야겠지요?
  나는 이제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몸을 바로 하고 눈을 감았다. 옆자리의 
임 수녀가 몸을 움직이자 서걱서걱하고 파커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달빛이 가득 깔려 있는 한밤에 우리는 연길로 돌아왔다. 숙소인 호텔로 들어섰을 
때 우리는 많이 지쳐 있었다.
  아침 일찍 올랐던 백두산, 거기서 있었던 미사, 아홉 시간이 넘게 걸린 긴 자동차 
여행... 무엇보다도 연로한 강 수녀가 괜찮으실까 염려될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특히 
강 수녀는 그 전날 사십년 가까이 떨어져 있던 가족을 만나느라 전혀 잠을 못 
주무셨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런 걱정은 더했다.
  그러나 여전히 강 수녀는 심각했다. 피곤까지도 심각하게 피곤해 하시나 봐.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는 인사를 호텔 로비에서 나누며 나는 놀라듯 혼자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3층의 방으로 올라가면서 조윤상 씨 부인이 말했다.
  --새로 영세 받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면 그건 하느님이 전부 들어드려요. 
기도발이 쎄거든요.
  내가 웃었다. 애들처럼.
  --정말이에요.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해 주셔야 해요.
  그러고 싶었다. 이 모든 분들을 위해 그렇게라도 내 고마움을 드릴 수 있다면, 
무엇을 어려워하랴. 나는 지금 기도발도 쎄다고 하지 않나. 방으로 돌아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뭐, 기도가 무슨 한약재도 아니겠고. 약발이 없을 때도 있고, 있을 때도 
있나요. 그렇지만 나는 벌써 얼마나 이기적인데요. 차마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는 
것조차 그것을 더럽히는 것처럼 소중해서, 나는 임 수녀에게조차 내 어깨에 내려와 
앉던 그분의 손이며, 그토록 오래오래 따라오고 있던 개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잖아요. 그래요. 언제가 편지로 그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으면 해요.
  저 강 이름이 무엇일까. 호텔 창밖으로 가로등이 서 있는 강가의 공원이 내려다 
바라보였다. 백두산으로 떠나기 전날 아침 이 호텔에 들러 아침을 먹을 때 바라본 
강가에는 수양버들이 길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무리지어 서 있었다.
  문득 제주에서 교리를 공부하러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함께 예비신자로 
사제관을 드나들던 사람 가운데 건축자재상을 한다는 사람이 있었다. 교리공부가 
끝나고 신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면 그는 늘 말했었다. 우리가 천주교 
신자끼리 서로 봐주지 않으면 누굴 봐줌수까. 그러니까 자재 쪼금이라도 쓰실 일 
있으면 제 꺼 갖다 씁서게. 저도 잘 해 드림수다.
  사람들끼리 편 가르고, 그래서 싸우고 헐뜯고... 그게 싫어서 더 큰 무엇을 찾아 
여기까지 왔는데 저이는 또 천주교랑 천주교 아닌 거랑 편 가르자네. 교리서며 
기도서가 널려 있는 탁자 건너편으로 말없이 그를 건너다보며, 그때 그런 생각도 
했었지.
  욕실에 가 물을 받아 놓고, 나는 다시 방으로 나와 갈아입을 옷을 찾기 위해 
가방을 열었다. 딱딱한 여행가방의 뚜껑을 여는 순간 나는 앗차 싶었다. 가방에서 
술냄새가 코를 찌르게 풍겨나왔기 때문이었다. 속옷으로 둘둘 말아 집어넣었던 
술병들을 꺼내보았다. 장춘에서 만났던 중국인들이 선물로 준 술이었다. 알콜 
도수가 80%가 되는 술도 있었고, 병모양이 용을 닮아서 꿈틀거리는 것도 있었다. 
모두 세 병인 그 술병들이 전부 병뚜껑이 새어 술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반 
넘게 새어 버린 술병도 있었다.
  혹시 가방이 흔들려서 깨지기라도 할까 봐 런닝셔츠며 잠옷이며 되도록 부드러운 
웃가지로 싸서 넣었던 것이었다. 어제 백두산에서 잘 때까지도 몰랐었는데... 이 
일을 어쩐다.
  눅눅하게 배갈에 젖어서 술냄새를 풍겨대는 속옷들을 나는 호텔방 여기저기에 
널리 시작했다.
  이게 웬일이에요. 방안이 술냄새로 가득차게 생겼잖아요. 문을 열어놓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을 테고... 이거야말로 술독에 빠진 
꼴이네요.
  혼자 중얼거려가면서 창틀에, 침대 모서리에, 출입문 손잡이에, 욕실 
수건걸이에까지 술이 밴 속옷들을 널어놓고 나니 방안은 완전히 수재민 임시 
수용소였다.
  이건 뭐 장마철 쌍둥이 기르는 집 기저귀 널린 안방 꼴이네요. 중얼거리며 나는 
욕실로 갔다. 따뜻하게 목욕을 했다. 그런데 막상 물기를 닦으며 밖으로 나와 옷을 
갈아입으려니, 술에 젖지 않은 옷이 없었다. 이 옷 저 옷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지만 어느 옷에서도 배갈 냄새가, 마시지 않아도 취할 정도로 풍겨나왔다.
  방법이 없었다. 옷가지들 가운데 그래도 냄새가 덜 나는 것으로 속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나 차마 잠옷은 입을 수가 없었다. 제일 많이 새어나온 술병을 
감쌌던 게 잠옷이었기 때문에 우선 축축해서 입을 수가 없었다. 속옷만 입고 잠이 
들어서는 아무래도 감기가 들지 않을까 싶게 방안이 냉랭했다.
  하는 수 없었다. 다림질을 못한 채 가방구석에 잔뜩 구겨져 있는 와이셔츠와 돌돌 
말아서 넣었던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나서 방의 불을 껐다. 훤하게 밖의 가로등이 
호텔 창문을 비췄다.
  잠자리에 들었다. 머리속이 맑아 오는 것이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이불을 
풀적댈 때마다 속옷에서 풍기는 술냄새가 소올소올 새어나왔다. 나는 가만히 천정을 
쳐다보며 말했다. 하느님. 죄송해요. 이건 첫날부터 술에 젖어서, 술냄새를 풍기며 
기도를 드리게 되었네요. 전 하는 일이 전부 이 꼴이랍니다.

  다음 날이 추석이었다. 식당에 모여 앉아 우리는 죽을 먹었다. 멀건 미음에 
밥알이 둥실 떠가는 것 같은 죽이었다.
  중국에 와서 매일 아침을 우리는 죽이 아니면 속이 없는 밀가루 찐빵을 먹었었다. 
중국 호텔에서는 아침에 밥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아침만은 특별한 것이 
있었다. "월병"이라는 중국의 추석떡이었다.
  --나야 아침을 별로 안 먹으니까 됐지만, 한 형은 이거 명절날 아침에 죽이나 
먹고 앉아서 되겠어요? 월병이나 많이 드세요.
  박영수 씨가 껄껄거리면서 말했다. 강 수녀가 가운데 놓여진 커다란 죽그릇에서 
국자로 죽을 뜨며 말을 받았다.
  --죽이 얼마나 좋아요. 소화도 잘 되고.
  겉이 약간 딱딱하게 구워진 갈색의 월병을 뜯어먹으며 원장이 말했다.
  --이 월병이라는 게 보통 떡이 아닙니다. 몽고민족에게 점령당한 한족들이, 
청나라 그 수백년 동안 나라를 되찾겠다는 비원이 맺혀 있는 떡이거든. 무슨 
거사계획이 있을 때면 이 떡에다가 사발통문이나 기밀사항을 넣어서 옆집에 돌리곤 
했거든.
  아침을 먹고 났을 때였다. 따뜻한 엽차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임 수녀에게 
물었다.
  --오늘은 다들 따로따로네요.
  임 수녀가 눈을 깜박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수녀는 오늘 1958년 이후 
소식이 끊겼던 같은 수도회 소속의 수녀님을 만나러 가게 되어 있었다. 수녀들만이 
아니었다. 오늘은 모두들 몇 군데로 나뉘어져서 일들을 보게 계획되어 있는 
날이었다. 김 신부가 이곳 나병환자들의 치료시설을 보러 가게 약속이 되어 있었다. 
원장은 연길시와 공산당 간부들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고.
  두 부부와 나까지 다섯은 한중 국경 도시 "도문"을 다녀올 계획이었다. 거기 가서 
북한 땅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는 것 때문에 북한에 고향을 둔 조윤상 씨 부부는 
아침부터 조금 들떠 있었다.
  그리고 각자의 일을 끝내고 저녁에 만나, 우리는 다시 그 긴 열두 시간의 밤기차, 
장춘으로 가는 기차에 오르게 되어 있었다. 도문으로 갈 사람들이 먼저 차를 타고 
떠나야 했다. 임 수녀에게 다가가 내가 물었다.
  --연락은 되었나요? 그 수녀님과는...
  --어제 저녁 도착하니까 소식이 와 있었어요. 그 분이 이쪽으로 오시기로 했어요.
  그 만남은 어떤 것일까. 다만 가슴 벅차서 긴 이별을 이겨낸 기쁨만이 넘치는 
그런 만남일 수는 없으리라. 희롱 당한 운명에의 서러움도, 가슴 저미며 보내야 했던 
기구한 삶에 대한 처절함은 또 얼마였으랴. 그러나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는 법. 
살아서 만날 수 있었던 그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까.
  도문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임 수녀가 만나게 될 그 힘든 재회를 생각하고 
있었다.

  길가에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줄을 잇듯이 가고 있었다.
  --성묘를 가는 조선족들입네다.
  어제 백두산을 안내했던 박 군이 오늘도 함께였다. 중국 정부에서는 묘지를 
만드는 장례법을 금하고 있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읽었던 것 같아서 나는 이런 
풍습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박 군이 말했다.
  --조선사람은 말 안 듣습니다. 부모 묘도 못 쓰고 살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면서 
막 밀고 나가면, 중국사람들도 나중엔 아무 말 못하지요. 그냥 모르는 척 
내버려두지요. 아 저쪽에 많이 보이네요.
  그가 차창 밖의 높지 않은 야산을 가리켰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하얗게 산을 
물들이며 오르고 있었다. 드문드문 묘지가 바라보였고 가족들이 모여 둘러앉아 있는 
모습도 보였다.
  --화장을 하고 나서 뼛가루 가져다가 저렇게 묘지를 만듭네다. 비석도 만들고 
하지요. 관리들이 나와서 비석 못 만들어 세우게 막 뽑아버리고 하지만, 
어림없습니다. 조선사람들은 또 만들어 세웁네다. 중국사람이 아무리 그래도 
조선사람들이 조상 모시는 고집 하나는 못 꺾지요.
  개성 옆, 백산온천이 고향이라던 조윤상 씨가 그 말에 감격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족이라는 게 무섭게 끈질기군요. 음식, 말, 조상 모시는 풍습까지 하나도 안 
잃어버리고 이렇게 남의 나라 땅에서들 살아내고 있으니.
  산을 넘어가자 송화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상류 쪽으로 강줄기가 휘돌아간 그 
끝에 아슴푸레하게 보이는 도시가 도문이었다.
  --저기가 도문입네다. 이제 곧 북선을 보실 수 있지요. 추석이라 뭐 색다른 게 
보일까 모르겠습네다.
  도문은 단층집들로 이어진 평퍼짐한 그런 도시였다. 곳곳에 길을 넓히느라 
도로공사가 펼쳐져 있었다. 공사중이라는 안내 간판도 없이 갑자기 길이 막히곤 
하는. 시가지를 뚫고 나간 차가 민가 뒤쪽의 공터에 섰고, 우리는 차를 내렸다.
  --저쪽이 두만강입네다.
  쓰레기 더미 너머를 가리키며 박 군이 말했다. 차를 세워도 이런데다가 세운담. 
투덜거려 가면서도 우리는 두만강을 만난다는 생각에 그 쓰레기 더미들을 피해서 
강가로 다가갔다. 제방이 나타났다. 그 제방을 오르자 휘돌아간 강물 위로 놓여진 
두 개의 다리가 다가섰다.
  이것이 두만강인가.
  강물은 지저분했다. 강의 넓이도 헤엄을 쳐서 충분히 건너갈 수 있을 그런 정도의 
거리였다. 누렇게 색깔이 변해 가는 수양버드나무가 강가에 늘어서 있었고 강을 
막은 제방을 따라 새로 단장을 한 듯이 우람하게 큰 가로등이 줄을 지으며 서 
있었다.
  두만강. 젊은 시절 영화사 초기의 천재로 알려진 나운규의 취재를 하면서 
처음으로 가슴에 와 닿았던 강, 한만 국경도시 회령에서 따난 그들은 두만강을 
건너서 도문으로 들어가곤 했었다. 잉크빛으로 푸르를까, 그 강은. 백두산에서 
찍어내린 나무를 엮어 뗏목을 만들고, 그 뗏목을 저어 하류로 타고 내려온다던 
뗏부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때 그렇게 꿈꾸어 보던 두만강... 그 건너편의 
중국 땅 도문.
  그러나 흐린 강물과 쓰레기가 널려 있는 강가를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국경... 나는 가만히 불러보았다. 그것만이 실감이 났다.
  강의 위쪽으로 철교가 멀리 바라보였다. 그리고 밑으로 내려오며 북한과 연결된 
육로로서의 다리가 있었다. 다리의 이쪽 편에 세워진 건물이 국경 검문소였고 
세관이었다.
  다리는 두 가지 색깔로 칠해져 있었다. 강의 반을 잘라서, 이쪽 중국 쪽으로 
놓여진 다리와 그 저쪽 북한에 놓여진 다리의 색깔이 달랐다. 다릿발도 다른 색을 
칠해 놓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라가 강을 반으로 자르고 물을 가르고 그 위에 세워진 
다리까지 반으로 나누고 있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저것도 유람선인가 싶게 낡은 배가 벙긋벙긋 웃고 있는 사람들을 싣고 강 밑으로 
내려갔다.
  휘돌아간 제방에는 즉석사진을 찍는 사진이며 동전을 넣으면 멀리 강건너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다.
  --안 보고 갈 수는 없잖아요.
  망원경은 마치 북한 쪽을 향해 겨냥을 한 대포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동전을 
집어넣고 나서 나는 무쇠덩어리 같은 커다란 망원경을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초점을 
맞추었다.
  검고 조그맣게 겨우 모습이 바라보이던 건물들이 갑자기 눈 앞에 다가왔다. 
강변을 따라 위쪽에서부터 밑으로, 그리고 나서 천천히 이곳저곳으로 옮겨가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사람의 그림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커다란 현수막에 
씌어진 글씨가 앞 건물에 반쯤 가려진 채 바라보였다.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물러서는 나에게 박 군이 말했다.
  --이따금 사람 모습이 보이긴 합네다. 무슨 일이 있어서 온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그럴 때는 한꺼번에 아주 많은 사람이 보이지요.
  다리 위 국경초소에 서 있는 군인은 청년이었다. 젊은 군인은 약간 연두빛이 도는 
푸른 제복을 입고 한가하게 다리 위를 오가고 있었다.
  그때 내 옆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들 인민은 누구나 통일을 원하지요.
  조윤상 씨 부인이 마악 국경을 넘어와 세관창고 앞을 서성거리고 있던 북한 
여자와 철조망을 사이에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지요? 빨리 통일이 돼야지요? 저는 평양서 여고를 다녔어요.
  --우리 인민은 아무 문제가 없습네다.
  여자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물을 기르고, 다리발을 가리고... 땅 위의 
국경은 그렇게 있지만, 우리들 마음의 국경은 또 얼마나 견고한가. 분단으로 밥을 
먹고, 분단을 이용해 정권을 유지하고, 분단으로 영화를 누리고. 어금니를 굳게 물며 
나는 두만강을 등지고 돌아섰다. 터덜터덜 쓰레기 더미를 넘어서 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혼자 걸었다.
  우리들이 도문에서 돌아왔을 땐 오후였다. 각자가 흩어졌다가 기차시간까지 
모이기로 하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여기저기 건설공사가 
어지럽게 진행중인 거리를 걸었다. 한국이나 똑같군 싶었다. 뭐 하나 짓는다 하면 
온갖 자재로 길바닥을 메우고, 지저분하게 되는대로 내가 쌓아놓고, 지나가는 사람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마구 파헤치고...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 싶었다.
  박 군과 함께 북한과 합작으로 지었다는 호텔로 냉면을 먹으러 찾아갔지만, 
식당은 문을 닫고 있었다. 요즘 장사가 잘 안된다는 이야기였다. 박 군과 함께 시장 
쪽으로 걸었다.
  --북선 사람들, 다리를 건너올 때는 빈 손으로 오지만 건너갈 때는 달구지에 
물건을 잔뜩 싣고 갑니다. 뭐든 여기서 사 가지고 갈 수만 있다면 돈을 번다고 
합니다. 여기 조선족 생활도 2, 3년 전부터 먹는 건 해결이 됐지요. 그렇지만 
조선사람도 아니고 중국사람도 아니고, 그냥 소수민족이지요. 조선족들은 중국말도 
조선말도 둘 다 잘 하는 게 없어요. 두 마을 섞어서 하지요.
  그가 불쑥 말했다.
  --요즘에는, 남선에 누구 친척이라도 있으면 돈 많이 법니다. 그런 사람들 
많아요. 나도 서울에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
  --박 군은 집안에서 무슨 일을 하세요?
  --아버지요? 대학교숩니다. 여기 연변대학.
  그리고 나서 그는 피식 웃었다.
  --대학교수 월급이 얼만 줄 아세요? 저기 저 사람보다도 못 합니다.
  길거리에 나와 앉아 땅바닥에 몇 가지 물건을 벌여놓고 있는 아주머니를 그의 
손이 가리키고 있었다. 중국 사회주의 계급사회에서 지식인은 노동자 저 밑에 있는 
열등한 사회구성원이었다.
  백화점엘 가서 조선족이 부르는 민요나 가요 테이프 몇 개를 사가지고 호텔로 
돌아오며, 나는 이제 이곳도 많이 변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언제 다시 
이곳엘 오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스스로 이곳을 다시 찾아오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7. 밤기차

  어둠이 찾아들면서 하나 둘 흩어졌던 일행들이 호텔로 돌아왔다. 그러나 역으로 
나가기 위해 짐을 버스에 실으며 두리번거렸지만 임 수녀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다. 임 수녀님 아직 안 보인다는 말에 조윤상 씨 부인이 말했다.
  --역으로 먼저 나갔어요, 그 수녀님이랑.
  --그 수녀라면... 아, 그 수녀님이요?
  --그래요. 여기서 만난, 그 베네딕도회 수녀님이요.
  언제 다시 백두산엘 오게 될까. 그 산에 가 다시 설 때 나는 또 얼마나 많이 늙어 
있을까. 그러나 그 모든 생각은 덧없었다.
  장춘으로 돌아갈 열차가 떠나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승강구가 있는 통로에 나와 
밖을 바라보았다. 연길 역사 뒤편으로 어둠이 풀리면서, 검은 휘장이 내려지듯 
시가지의 건물들을 감싸고 있었다.
  시간에 늦은 손님들이 짐보따리를 들고 열차를 향해 뛰어오곤 했다. 
저녁하늘이었는데도 나에게는 어쩐지 그것이 비라도 쏟아지려고 흐려 있는 듯 
바라보였다.
  물결처럼 숲을 이루고 있던 희디 흰 자작나무 숲, 천지의 물빛과 짝을 이루며 
드넓게 개었던 하늘, 내 어깨에 내려와 앉던 손, 달빛이 깔린 어둠 속으로 끝없이 
뒤따라 오던 그 개 한 마리... 그것들이 이미 내 안에서 살아 있었다. 다시 그 산에 
오른다고 한들 어디서 그것들을 찾을 것인가. 늙은 몸으로, 뼈와 가죽 사이에 밖으로 
불룩불룩 자죽이 드러나게 추억을 담고 그곳을 찾아가서, 그때 나는 무엇이 되어 
거기 서 있을까.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루처럼 부서져서, 
바람에 날려서, 그렇게 사라지며 살아야 하겠지. 그 무엇도 담아 두지 않으면서 
살아가야겠지, 이 세상에.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강구의 난간을 잡고 서서 나는 멀어져 가는 역사와 
선로 저편으로 바라보이는 연길 시가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사가 그 주변의 
건물들이 조그맣게 작아졌다가 눈에 보이지 않게 사라져버렸다.
  어둠이 내리고 있는 들판이 바로 차창 밖으로 다가왔다. 사라져버린 걸까. 연길도 
역사도 다 사라져 버린 걸까. 아니다. 사라진 것은 먼 바다를 건너 찾아왔던 나일 
뿐이다.
  연길은 여기 있고, 사람들은 오래오래 그렇게 살아가리라. 지금처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면서.
  장춘에서 올 때와는 달리 손님이 적어서 침대칸은 많이 비어 있었다. 통로를 걸어 
나는 임 수녀가 있는 방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안 보이시기에 전 또 수녀님은 그냥 중국에 남기로 하셨나 했지요.
  임 수녀와 나란히 할머니라고 해야 할 노인 한 분이 앉아 있었다. 길고 깡마른 
얼굴이었다. 인민복 비슷한 검정 옷을 입고 있는 그 분에게 임 수녀가 나를 
소개했다.
  --감 안나 수녀세요. 이 양반이 바로 백두산에서 영세 받은 그 사람이랍니다. 
욕심도 많지.
  남은 평생에 한번도 올까 말까 한 데서 영세를 받다니.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하는 
임 수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기쁘시겠어요.
  --다 여러분이 도와주셔서...
  안나 수녀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40년이 넘어서 이렇게 만나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임 수녀가 장난스레 말했다.
  --이 분이 글을 쓰는 사람인데요, 뭐 나는 읽어 본 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그래요, 뭐 유명하다나 뭐라나.
  --수녀님이 읽으실 글이나 썼으면 여기 올 여비도 못 벌었을 거요, 아마.
  --글쎄 저렇다니까요.
  --알아요 수녀님. 이제부터는 죄 안 짓는 글만 쓰도록 할께요.
  나는 즐거워져서 아이들처럼 말했다.
  --그래도 오늘 밤은 안나 수녀님이 계시니까, 저보고 교리공부 하라는 말씀은 안 
하시겠네. 임 수녀님이요, 기차 안에서도 자동차 안에서도 저 붙들고 교리 가르치신 
분이에요.
  --서울 가면서 비행기 안에서도 가르칠 건데.
  나는 웃으며 안나 수녀에게 인사했다.
  --그럼 편히 쉬세요.
  내 침대칸으로 돌아가 잠자리를 정리하고, 김 신부와 원장이 있는 방에 들로 
이야기도 나누다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텅 빈 통로 저 
끝에 캄캄한 창 밖을 내다보며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임 수녀였다.
  내가 옆에 가 서며 물었다.
  --어쩐 일이세요.
  --다음 역에서 안나 수녀가 내려야 해요.
  비로소 나는 임 수녀가 울고 있는 것을 알았다. 찬장의 희미한 불빛에 그녀의 
얼굴에 번져 있는 눈물이 번들거렸다.
  --날 만나러 오셨던 거예요. 그 분 계시는 데로 이제 돌아가셔야 하거든요.
  1945년 연길수녀윈에 해산명령이 내리면서 남하하지 않고 중국 땅에 남았던 
감정옥 안나 수녀였다. 1957년을 마지막으로 그녀와 베네딕도 수녀회와는 소식이 
끊겼다. 40년. 저 드넓은 대륙에, 종교의 자유가 사라진 땅 중국공산당 아래 혼자 
남아, 부서진 배에서 찢어져 나온 세월. 한 사람이 태어나서 중년이 되는 그 세월을 
건너와서, 정결 청빈 순명의 길을 따라 하느님과 함께 하던 한 수도회의 정신 아래 
맺어져 있는 그들이 이 짧은 만남은, 차라리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
  나는 임 수녀의 침대칸으로 가 문을 열었다. 내릴 준비를 마친 안나 수녀가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오려는 중이었다. 내가 가방을 받아들었다.
  --무겁지 않은데...
  --다음 역에서 내리신다고요?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차가 천천히 멈춰섰다, 어디에도 불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두 수녀는 서로의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안나 수녀의 가방을 들고 나는 통로를 
빠져나왔다. 승강구가 있는 곳의 문을 열었다. 고개를 밖으로 내밀어 불빛이 있는 
곳의 문을 열었다. 고개를 밖으로 내밀어 불빛이 있는 곳을 찾았다. 우리가 탄 쪽은 
기차의 뒷부분이어서 멀리 앞쪽으로 환하게 역사가 바라보였다.
  임 수녀의 두 산을 부여잡은 채 안나 수녀가 내 등 뒤로 밖을 내다보았다.
  --여기가 아니네요. 너무 빨리 나왔어요.
  --이 역이 아니세요?
  --네, 다음 역이에요.
  말없이 두 수녀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소식처럼 역사 앞의 화안한 불빛은 가까워졌다가 열차 뒤쪽으로 조그만 불씨처럼 
사라져갔다. 승강구 옆의 깨진 유리창으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안나 
수녀의 가방을 들고 통로 쪽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얼어붙은 듯 멈춰섰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 수녀들은 한 몸이 되어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눈과 입으로 무언가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통로 문을 닫고 거기 등을 기대고 섰다. 바람이 쏟아져 들어와 내 
머리카락을 뽑아버릴 듯이 휘날리게 했다. 볼이 얼얼하게 얼어왔다. 찝찔하고 
미적지근한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 내 입가를 적실 때마다 나는 아랫입술을 더욱 
힘주어 악물었다.
  다음 역에서 열차가 멈출 때까지 나는 그렇게 서 있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찬바람에 얼어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그러나 막혀서 터질 것 같던 
어딘가가 삐거덕거리며 열리듯 가슴은 차갑게 개어오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나는 통로의 문을 열었다.
  --수녀님. 내리세요.
  승강구의 계단을 뛰어내려 나는 밖으로 나왔다. 열차 계단은 선로쪽 바닥과 무릎 
높이는 되게 떨어져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안나 수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위험한데 저를 잡고 내리세요.
  안나 수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안나 수녀의 손을 잡아 안듯이 그녀를 
부축했다. 안나 수녀의 손은 내 손보다도 더 억세고 크게 느껴졌다. 갈퀴 같았다.
  열차 난간을 잡고 서서 두세 번 손을 흔들던 임 수녀가 견디기 힘든 듯 난간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열차로 뛰어올라 계단에서 몸을 돌렸다.
  --수녀님.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손을 흔들면서 안나 수녀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멀리 역사 앞에 켜진 불빛만이 그녀의 등 뒤로 빛나고 있을 뿐 사위는 
어둠뿐이었다. 열차 밑에서 선로를 뒤덮으며 허옇게 김이 솟아 올랐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어금니를 물며 나는 안나 수녀를 
내려다보았다.
  열차에는 흘러나간 불빛이 그녀의 등굽은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안나 수녀가, 그 
할머니가 입고 있는 검은 노동자 옷이 어둠보다도 더 검게 바라보였다. 버리고 가는 
것 같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 또 하나의 캄캄한 어둠의 덩어리 하나를 버리고 가는 
것만 같았다. 순간 나는 난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열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안나 수녀 앞으로 다가서면서,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손에 집히는 
대로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모두 꺼내 모아 쥐었다. 그것은 내가 환전을 
해가지고 있던 모든 중국돈이었다. 그게 얼마쯤이나 되는지조차 나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손을 잡아 돈을 쥐어 주면서 나는 말했다.
  --아프실 때도 있으실 거예요.
  --뭡니까?
  --편찮으실 때, 그때 쓰세요. 그럴 때 도움이 되실지도 모르잖아요.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또 난간을 잡으며 열차 계단으로 뛰어올랐다. 
천천히 안나 수녀의 모습이 뒤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열차 위에서 바라본 그녀의 
키는 너무 작아 보였다. 손을 흔들며 나는 소리쳤다.
  --건강하셔야 해요.
  그녀는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까아맣게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잘못 내려진 짐 
보퉁이 하나처럼 서서히 멀어져 갔다.
  불빛 환한 역사 건물이 스쳐 지나가고, 열차를 내린 손님들이 그 앞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언뜻 떠올랐다가는 사라지며 열차 밖으로 불빛이 
사라졌다. 달빛이 깔린 대지를, 뿌연 빛으로 하늘과 맞닿은 곳에 드러나는 희미한 
지평선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어둠의 들판을 기차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엔가 화를 내듯 중얼거렸다. 그게 겨우, 제가 가졌던 전부였습니다. 몸을 
돌리며 나는 덧붙였다.
  하느님.
  객차 통로로 들어섰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임 수녀가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듯 그렇게 서서 임 수녀가 울고 있었다. 나도 말없이 그 옆에 가서 
섰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둠이 발리워진 창이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어려서 죽은 그 누이가 
살아서 이렇게 늙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지. 문득 그때를 떠올렸다. 누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집을 나갔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임 수녀를 바라보던 때를.
  우리는 우두커니, 우두커니 그렇게 서 있었다. 오래 오래.
  거울처럼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차창을 마주보았다. 거울 속의 사내가 
눈물이 번들거리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고 있었다. 그가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옆에 서 있는 여자에게 건넸다. 그녀가 그것을 받았다.

  동경의 겨울은 바람만 가득한 채 지나갔다. 지난 해에도 두번밖에 눈이 내리지 
않았었다. 기온은 영상을 웃돌고 있었지만 체감온도만은 추워서 나는 을씨년스레 
어깨를 움츠린 채 동경의 겨울을 살았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더욱 어깨를 
수그리면서.
  그리고 몇 달이 지나서 나는 임 수녀에게서 온 편지를 받았다. 중국의 안나 
수녀가 수도회의 초청으로 부산에 와 계신다는 이야기였다. 편지를 접어 놓으며 
부산 수녀원으로 전화를 했다. 임 수녀가 말했다.
  --당신을 찾았어요.
  그 말이 그렇게 기쁘게 들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안나 수녀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수녀회에 남기고 간 말이 오래오래 그 밤기차의, 
대지를 뚫고 달려가는 밤기차의 불빛처럼 가슴에 남았다.
  "이곳에 와 보니 정말 좋고 여기서 머물면서 조용히 기도하며 지내고 싶지만 
아직도 저를 필요로 하는 신자들이 있으니 돌아갑니다. 그들에게는 수녀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큰 희망이고 의지가 되나 봅니다."
  1989년 12월 29일, 자신을 지탱해 온 영혼의 움터, 부산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를 찾았던 감정옥 안나 수녀는 다음해 2월 16일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에게는 수녀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큰 희망이고 의지가 되나 봅니다 하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두 해가 갔다. 그리고 가을, 나는 조금 긴 편지를 부산의 수녀님께 썼다.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에서 한 사형수를 대신해서 죽어간 성자 맥시밀리안 
콜베 신부에게는, 1912년에서 40년까지 조금씩 적어놓은 묵상노트가 있습니다. 
일역본으로 된 그 책을 구해 요즈음은 책상머리에 놓아두고 읽곤 합니다. 짧고 
명료하고 그래서 더 깊은 마디마디 영혼의 말들을 읽고 있으면 마치 링거주사가 
방울방울 혈관으로 타고 들어가는 듯한 말이 가지는 힘과 신비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지2년이 되어버린 이제까지, 성경을 한번도 끝까지 다 
읽지 못하고 있는 믿음도 믿음이라고나 할 수 있는 것인지.
  레티치아 수녀님.
  이렇게 또 89년의 그 가을 이후 어느새 두번째의 가을을 맞습니다. 2년이라면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알았고, 제 신앙도 뿌리와 줄기를 이루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중국을 떠날 때보다 한 걸음도 더 
나아간 것이 없다는 느낌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어디로 어떻게 무엇을 하며 
나아가야 조금이라도 더 그 분의 가까이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인지.
  그러나 주일이면 성체를 받으며 눈물겹고, 언제나 어깨 한쪽에 그분의 손이 
내려와 잡고 있는 것 같은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나날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이야기 사막에서 쓴 편지
  
    1. 다만 하늘에 별이 있었다. 나는 아직 그렇게 내 가까이에 와 있는 별을 본 
적이 없단다.

  아들아.
  북아프리카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이 글을 쓴다. '리비아'의 사막에 와서 보내는 
첫밤이다.
  밤이 깊어서 숙소를 나가 밤의 모래벌판을 바라보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바다... 하늘도 모래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우리들이 
숨쉬고 있는 이 공간도 모든 것은 어둠뿐이었다. 다만 하늘에 별이 있었다. 
투명하게 빛나면서. 나는 아직 그렇게 내 가까이에 와 있는 별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내 생애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본 별처럼 생각되었었다.
  별들 뿐, 그렇게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사막의 한가운데서 이 글을 쓴다.
  그 무엇도 움직이는 것은 없다. 다만 별들이 살아서 움직인다. 저녁에 보았던 
별들이 어느새 자리를 옮겨 저만큼 있는 것을 보는 감동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고개를 쳐들어 바라보던 북두칠성이 지평선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좀더 많은 별자리를 알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말이다.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했었다. 어떤 위대한 원리나 지극히 편리한 생활의 
기능보다도, 어쩐지 이 세상에 있는 저 수많은 꽃 이름들을 알았으면 했다. 그리고 
여름 밤이면 더 많은 별자리를 알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중얼거렸었다.
  그렇지만 한국에 살며 우리가 별을 바라보는 건 거의가 여름이다. 가을이 오고 
겨울을 자나며 나는 여름의 그 바램을 잊어가곤 했다. 다시 여름이 와 푸르게 
흘러가는 은하수와 쏟아질듯 빛나고 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똑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더 많은 별자리를 알았으면 하고.
  그런 반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나날이 아닌가 싶다. 매일 뉘우치고 
매일 새로 시작하고, 언제나 오늘을 살아가면서 내일을 꿈꾸고... 그렇게 말이다.
  새벽이다. 멀리서 회교도들의 아침 기도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닭우는 소리가 
들린다. 회교도들의 마을에서 들리는 닭우는 소리를 듣고 있는 이 사막에서의 
새벽...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살아 있다는 것이 형광물체처럼 빛나며 가슴에 
와닿는다고나 할까.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닭우는 소리 하나도 
소중해 하며 귀를 기울인다. 살아 있다는 것, 그보다 더 아름답고 뜻있는 것은 
없다는 절절함으로 가슴이 아리다.

  언젠가 해외여행에서였다. 유럽과 중동을 거쳐 귀국하게 되었을 때였어. 긴 
나그네길을 함께 했던 친구와 함께 귀국을 앞두고 동남아의 어느 도시의 식당에 
앉아 있었다.
  남의 나라를 여행하며 늘 느끼는 것이지만, 나라가 바뀐다는 것은 우선 세 가지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단다. 우선 말이 바뀌고 돈이 바뀌고 그리고 음식이 달라진다. 
단순히 나라의 이름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나라가 바뀌면서 제일 먼저 
여행객의 피부에 와 닿는 것은 그 나라의 역사도 정치도 아니란다. 바로 이런 
것들이 변하는 것이지.
  제일 먼저 공항을 나서며 말이 달라졌음을 만나야 한다. 그 나라말로 씌어진 
간판들이 늘어선 거리를 지날 때 비로소 '아 또 다른 나라에 왔군' 하는 느낌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달그락거리고 있는 동전은 이미 아무 가치가 
없는 쇠붙이임을 또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 그건 이미 떠나온 나라의 돈이며, 동전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외국돈으로 바꿔주지를 않으니까. 그리고 나서 이제 나라가 
달라졌음을 알려주는 게 우리의 이 짧은 혀가 겪어야 하는 불편함이다.
  왜 그럴까. 우리 몸의 여러 기관 가운데 혀만큼 폐쇄적인 것도 없다. 민족주의에 
깊이깊이 길들어 있는데다가 또 지극히 국수주의적인 게 이 짧은 혀라는 녀석이다. 
해외 여행에서 느닷없이 김치 생각을 해서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언제나 이 조그만 
혀라는 '살덩이'란다.
  빠리의 골목길을 걷다가도 문득 뚝배기에 담겨서 팔팔 끓고 있는 저 새빨간 
순두부를 떠올리게 하지를 않나, 몇만 피트 상공을 날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소주 한잔에 곁들여 먹는 보쌈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게 만드는 게 이 혀라는 
것이거든. 입맛에 맞는 세계의 어떤 음식을 먹고 나서도 그렇다. 맛있게 먹고 나서 
이 혀가 한다는 소리, '맛있어.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 음식이 제일이지' 하고 
중얼거리거든.
  6.25 때 북한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그렇게도 북쪽에서 먹던 음식을 못 
잊어 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혀처럼 오래 어머니의 맛을 기억하고 고향을 
잊지 않는 것도 없으니까.
  그때 그 낯선 나라의 식당에 앉아서 또 나라가 바뀌는 것과 함께 또 달라진 
음식을 입맛 없어하며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 친구가 말하는 거였어.
  '세계 어디를 가나 파리는 똑같군.'
  세계의 어디를 가도, 그렇지, 윙윙거리며 날고 있는 파리는 있지. 바퀴벌레 같은 
것은 나라에 따라서 조그만 것도 있고 매미만큼 큰 것도 있는데, 이 파리만큼은 
거의 모든 나라가 크기가 같아. 파리만큼은 잘 평준화가 되어 있다고나 할까.
  너는 어떻니? 구약 창세기를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면서 이 
세상을 만드실 때 왜 이런 것까지 만드셨을까 싶은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생각을 나는 이따금 한단다. 파리도 그 가운데 하나이겠지.
  파리잡이 끈끈이를 만드는 공장장님이나 파리채 만들어 파는 시장님을 위해서 
파리가 이 세상에 있을 기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파리를 죽이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이니까. 제 종족의 씨를 말리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무려면 파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야 하겠니. 게다가 파리가 자기들을 죽이는 무기를 만드는 그 
사람들이 아들 학원비도 벌고 이따금 호텔 부페도 먹게 하기 위해서 그토록 종족을 
번식시켜 가며 살아갈 리야 없을 테니까.
  남의 나라 식당에 앉아서, 아 이 세상에 있는 파리는 모두가 똑같애 하고 무슨 
대단한 진리라도 발견한 듯이 중얼거린 그 친구의 말에는 무슨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
  이 친구는 지금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의 신비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나는 
아주 거룩하게 생각해 버렸다. 세계를 돌고 나서 겨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파리는 
모두 똑같아' 하고 설파한 그 친구가 가지는 상상력의 가난을 난 조금도 나무라고 
싶지는 않았거든.

  아들아.
  어찌 파리나 모기뿐이겠느냐. 무언가 살아있는 것에는 그것이 있어야 하는 자연의 
질서가 있는 법이다.
  가령 지렁이를 생각해 보자. 지렁이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나 그 컴컴한 땅속, 
더럽고 습기찬 어둠 속을 헤매며, 손도 발도 눈도 귀도 없이 한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렁이가 그렇게 땅속을 파헤침으로써 땅을 부드럽게 
하고 미생물이 살아가기 좋은 환경을 만들며, 공기와 온도의 순환을 비롯한 많은 
유익한 일을 농작물에게 하고 있단다.
  귀도 없으니 평생 음악 한번 들어볼 수 없는 지렁이. 땅속만 기어다니니 저 
하늘의 아름다운 무지개도 흘러가는 구름도 볼 수 없는 지렁이.
  살아가는 많은 것들에는 그렇게 저마다의 뜻이 있다는 걸, 늘 잊지 않는 그런 
아들로 네가 자랐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는 왜 하느님이 이런 것을 '있게 하셨을까' 싶은 것은 얼마든지 많다. 
전쟁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전쟁영화를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이제까지 어쩔 수 없는 경우를 빼고는 
내 스스로 전쟁영화를 보러 간 적이 없다. 내가 전쟁영화를 싫어하는 것은 수없이 
죽어 나자빠지는 그 엑스트라들 때문이다. 그것이 영화가 아닌 현실이라고 하자. 한 
사람의 주인공, 그 영웅을 그려내기 위해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죽어가는 많은 
이름없는 병사의 삶을 생각해 보아라.
  돌격! 하는 한 마디에 달려나가다가 혹은 잠을 자거나 보초를 서다가 아무 죄없이 
죽어가는 그 병사들에게도... 얼마나 눈물겹고 아름다운 삶이 있었겠느냐. 그에게도 
물 묻은 손으로 그를 키워낸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었을 테지. 전장으로 떠나는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해 했던 가슴 풋풋한 여인도 있었을 거야.
  그러나 모든 전쟁만큼 인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현장도 없다. 삶과 
죽음이 함께 어슬렁거리며, 함께 담배도 피우고, 걷기도 하고, 함께 잠을 자는 곳, 
그곳이 전쟁이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삶의 자리에 함께 하는 곳, 그런 
전쟁을 하느님은 왜 우리들에게 마련해 주셨을까.
  아니면 인간은 그렇게 끊임없이 신의 뜻, 하느님의 영광을 배반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 속에 놓여져 있는 것일까. 그것을 원죄라고 이름하는 것일까.
  아들아.
  살아 있는 모든 것, 그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우리는 더 많은 마음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을 여기 와서 한다.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아프리카의 '리비아'는 아프리카 안에서도 좀 특이한 
나라이다. 그러나 리비아를 설명하기 전에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은 
해야겠지. '아프리카' 하고 네가 혼자 가만히 중얼거렸다고 하자. 그때 너는 무엇을 
떠올리니?
  밀림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 타잔이 넝쿨을 타고 오가는 그런 밀림 말이다. 
아니면 어린 시절 어느 만화에서 본 식인종쯤이 살아 있는 곳으로 기억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피부색이 검다는 것 때문에, 아프리카 하면 흑인들을 
떠올리리라 믿는다. 그렇다. 아프리카는 흑인들의 고향이다. 그들의 검은 눈물과 
검은 환희... 그리고 검은 희망이 살아 숨쉬는 땅이다.
  모래뿐인 벌판, 그 위에 뒤덮여 있는 어둠... 그리고 아, 쏟아질 듯이 하늘을 
수놓고 있는 벌들. 그 별들을 쳐다보고 있자면 그들이 물결처럼 솨아하고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고, 그러나 그들은 또한 조금도 움직임이 없는...
  그 밤의 한 가운데에서 생각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의 집, 생각의 종탑, 생각의 길, 생각의 거리를 이제 
버려야 한다고.
  내가 이런 감동에 젖었던 것은 이번이 두 번째가 아닌가 싶었다. 처음 인도에 
갔을 때 그랬었다. 이제 돌아가면 나는 마음 속에 아주 다른 거리, 다른 길, 다른 
성벽을 가지고 살아가리라고. 그러나 그후 인도의 노래를 듣고 인도의 향을 피우며 
한 해를 보내고 다음 해 다시 인도를 다녀오고 나서, 나는 그 생각을 버렸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율법이 있었고, 나에게는 내 삶의 옷이 있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도 그렇다.
  이곳으로 떠나오며 내가 떠올린 아프리카의 이미지에는 '노예'가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집에서 기르는 저 소나 말처럼, 기르고 부리고 또 팔 수 있었다니. 인류의 
역사에 이처럼 야만적인 행위가 또 있었을까.
  인류가 지금 함께 하고 있는 문명이나 문화라는 것의 대부분은 백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20세기로 넘어오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는 이 노예제도라는 것을 생각할 때면 백인의 문화라는 것의 그 폭력과 
야만성을 지울 수가 없다. 흑인들에게는 그토록 참혹할 수밖에 없는 노예제도. 
백인들 혹은 기독교로 상징되는 서구문명의 만행을 이토록 속 깊게 드러내주는 것이 
또 있을까.
  그러나 내가 와 있는 이곳 북아프리카는 흑인들의 땅이 아니다. 밀림도 아니고 
식인종이 살지도 않는다. 북아프리카는 회교도의 땅이다. 중동지방과 함께 이곳은 
사막과 올리브와 양들의 땅이다. 그리고 콧수염을 기른 얼굴 가무잡잡한 사람들이 
산다.
  사막에 와서의 첫밤이 개이고 있다. 이제 밖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다.
  아침을 사는 사람이 되어다오. 그렇게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나날을 살아다오. 
이 세상 모든 것에 '때늦은 것'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 다오.
  오늘은 사막의 한가운데... 모래언덕엘 간다. 모래가 바람에 물결처럼 무늬를 
이루면서 날리고 언덕이 있고 그 언덕을 낙타를 타고 가는 그런 모습은...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잘 있거라. 내일 다시 쓰마.

    2. 너는 이해하겠니. 이 사막이, 저 몇만 년 전에는 바다였다는 사실을. 사막의 
한가운데서는 그래서 지금도 조개의 화석이 나온단다.

  아들아.
  어제 저녁 늦게 숙소로 돌아와서 나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사막의 한가운데를 다녀왔다"
  그리고 나서, 나는 더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생각했다. 
사막은 내가 가졌던 모든 시간관념을 허물게 했다고. 공간에 대한 의미조차 버리게 
했다고.
  모래 위를 달릴 수 있는 특수한 차를 타고 우리는 사막으로 나갔었다. 사막에서, 
또 사막으로 나갔다는 게 조금은 정확한 표현일까.
  사막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아스팔트 길들이 뚫리고 그 길 위를 차들이 달린다. 
모래의 바다 위를. 그 길을 상상해 보아라. 하얀 백지 위에 검게 직선 하나를 
그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이 사막 위의 길이다. 모래 뿐인, 모래의 들판에 
까아맣게 뻗어 있는 직선도로 그리고 그 옆을 때로는 나란히, 때로는 엇갈려서 
뻗어있는 또 하나의 직선, 유전으로 가는 송전탑의 행렬... 그것이 사막이다.
  그러나 이렇게 길이 뚫려 있지 않는 곳, 그곳을 찾아 떠났던 거다. 도로에서 
벗어나 우리는 길이 없는 모래벌판 위를 달렸다. 오직 보이는 것은 수없이 많은 
자동차의 타이어 자죽뿐이었다. 우리가 방향을 잡도록 도와주는 것은 오직 
그림자밖에 없었다.
  사막에서 방향을 잡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단다. 하나가 햇빛이고 다른 하나가 
별이다. 낮에는 햇빛과 그림자에 따라 동서남북을 분간하고 밤이면 별자리가 그것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저녁 무렵, 해도 떨어지고 별빛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시간에 
방향을 잃었다면, 거기 머물러서 기다리는 길밖에 없다. 사막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이므로.
  그렇게 해서 모래언덕이 있는 곳에 가 닿았다.
  언덕이 움직이고 있었다, 모래언덕이.
  거기 그렇게 서서 오래오래 사막을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모래가 날려서 그 거대한 모래언덕이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간다.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가루처럼 날리는 그 모래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모래언덕은 움직여 다닌다.
  그 언덕 위에 서니 바람 때문에 내가 서 있는 발밑의 모래들이 순간순간 
쓸려나가고, 모래는 역류하며 치솟아서 눈을 아리게 했다. 내 몸이 바람을 
막아주므로 모래가 치솟는 역류현상을 보이는 거지.
  거기서 기억했다. 이 사막이... 수만년 전에는 바다였다는 사실을.
  너는 어떻게 이해하겠니. 이 사막이, 저 몇 만년 전에는 바다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일 수 있겠니.
  아들아.
  저 무스한 시간의 언덕을 넘어 몇 만년 전 어느 날에 바다가 지각 변동을 
일으키면서 치솟아 땅 위로 올라왔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땅, 그곳이 사하라 
사막이다.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그래서 지금도 조개의 화석이 나온다.
  어떻게 무엇으로 너는 이 시간의 무한한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겠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위에서 우리는 얼마나 작고 약한 존재인가.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기만 해도 네 무릎에서는 피가 흐른다. 그러나 그토록 아주 작고 약한 존재인 
우리들이 함께 하고 있는 이 시간이란 얼마나 멀고 긴 것이냐. 저 시간의 고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어찌 눈물겹지 않으냐. 몇 만년 전 어느날 이 땅에 살았던 
조개의 화석을 들여다보며 비로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점 하나가 되어 우리는 이 시간의 흐름 속에 떠가고 있다는 것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흐려지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눈물은 
감동이었을까 아니면 허무였을까. 이 세상의 모든 한없음에 대해 나는 그렇게 
조용히 무릎 꿇고 있었다.

  아들아.
  언젠가는 바다였던 그 드넓은 자리가 어느날 치솟아서 사막이 되어 버리는 자연의 
신비를, 너에게 전하기에는 내 언어의 가난함이 먼저 서글프다.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우리들이 가지는 말의 가난함.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눈물이 있고 절규가 있고 그리고 껴안음이 있는지도 모른다. 
말이 가난할 때, 우리는 운다. 그 무엇으로도 말할 수 없기에. 차마 말로 말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다만 소리친다. 아아 또는 오오 해도 좋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이 가지는 부족함을 알 때 우리는 서로를 껴안는다. 아들아.
  훗날 커서 누군가를 사랑해 보아라. 사랑한다고 하는 그 말이 얼마나 자신의 
가슴을 표현하기에 부족한 것인가를 너 또한 알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말을 
넘어서서 서로의 젖가슴을 부비며 껴안는 것이란다. 그렇게 해서 육체 또한 하나의 
말이 되는 것이란다.

  사막에서 만난 여우 이야기를 할까 한다. 생태계의 놀라운 신비라고 해도 좋겠지.
  사막은 죽어 있는 땅이 아니다. 사막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이 숨쉬며 아우성치며 
살아 있는 그런 땅이다. 생명으로 가득찬 그 아득한 대지... 모래 위를 씨앗들이 
날아다닌다.
  다만 물이 없을 뿐이다.
  사막에는 물만 뿌리면 생명이 자란다. 수만년 동안 무엇을 심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자리지 않은 땅이기에 오히려 그 땅이 기름지다고 생각해 보기 바란다.
  원유 채취시설이 있거나 대형공사가 진행중인 곳에서 사람들이 쓰고 버린 물이 
사막으로 흘러들어가면, 그때부터 놀라운 생명의 합창이 시작된다. 물을 버리면 
거기에서 갈대가 자라기 시작한다.
  어디에서 어떻게 씨앗이 날아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씨를 뿌리지 
않아도 갈대가 자라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이 있다면 그 물 속에 고기가 
자란다는 거다.
  씨앗이라면 바람에 날아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물고기가 어떻게 그곳에 
찾아와 살기 시작하는 것인지. 갈대와 고기가 자라기 시작하는 그 습기찬 땅을 찾아 
이번에는 달팽이가 찾아온다. 그 느린 달팽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사막을 가로질러 
온 것일까.
  그리고 그 달팽이를 먹이로 삼으며 여우가 살기 시작한다. 생명을 가진 그 무엇도 
눈에 띄지 않던 모래언덕에서의 감동이 허무와의 만남이었다면 갈대 숲에서 만나는 
생명의 찬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신비와 지혜로움을.
  사막에서 만난 여우는 그 몸의 크기가 토끼만 했다. 나는 처음에 토끼인 줄 
알았는데 그게 여우였어. 색깔까지도 닮아서, 눈처럼 흰 털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상스레 귀가 컸다. 무엇을 듣기 위해 그렇게 큰 귀를 가져야만 했는지 
모르겠다. 어른들 손만한 크기에 삼각형 모양을 한 귀를 가지고 있더구나. 이 
여우가 모래에 굴을 파놓고 거기 들어가 살고 있었어.
  놀라운 것은 이 여우의 지혜란다. 여우는 달팽이를 다 잡아먹어 버리는 바보짓을 
결코 하지 않아. 그 달팽이들이 결코 멸종이 되지 않고 계속 살아 있도록 얼마쯤을 
남겨 놓고, 나머지만 조금씩 잡아먹는 거야. '먹이사슬'의 놀라움. 그렇게 해서 모든 
생명체는 서로 고리를 이루며 이 지구 위를 살아가고 있었다.
  희고 큰 귀를 한 이 여우를 이제 누가 잡아 먹을까. 불행하게도 그게 바로 우리들, 
사람들이었다.
  사막에 저녁이 왔다. 저물어 가는 모래벌판을 바라보며 나는 사람들이 사막의 
여우를 잡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막의 여우는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경계심이 별로 없어. 이 여우를 
어떻게 잡는가 하면, 여우가 지쳐서 더는 도망을 못 가고 주저앉을 때까지 차를 
타고 끝없이 뒤쫓아가는 거야.
  재미 있는 건 여우가 빙글빙글 돌면서 도망을 간다면 차를 타고 쫓아가기가 힘들 
텐데, 사람이나 차를 거의 만나지 않고 살아온 이 여우는 직선으로 밖에 달리지를 
않아. 또 십여미터 달려가서는 더 가지 않고 서서 자기를 쫓아오나 안 오나 살피고 
있어. 그러니 사람들이 쫓아가기가 더 쉬워지지. 이렇게 2시간 가량 뒤쫓으면 
여우는 지쳐서 움직이지를 못한다는구나.
  그렇지만 이렇게 여우를 뒤쫓느라 몇 시간을 헤매고 났을 때 닥쳐오는 게 
무엇일까. 이번에는 사람이 방향감각을 잃고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는 거야.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어버린 그는 그때부터 누군가가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지. 대충 짐작해서 길을 잡았다가는 점점 더 틀린 방향으로 갈 염려가 
있기 때문이야.

  여우를 만나고 황혼에 물들어가는 사막을 달려, 숙소로 돌아왔다. 지평선 
쪽에서부터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길이 없는 모래벌판, 자동차 타이어 자죽만이 
뒤덮인 가없는 공간에 휘장을 치듯 어둠이 내리더구나.
  무엇이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마치 누군가와 헤어져 돌아가는 것같은 이상스런 
외로움이 가슴에 깔려 왔다. 마치 기차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혼자 플랫폼을 
걸어나오는 것 같았다. 한없는 모래의 바다 위에 켜를 이루듯 내리던 그 어둠의 
자락들.
  사막이 아니라, 모래벌판이 아니라, 삶을 생각했던 거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바다가 지금 가고 있는 사막의 저녁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혼자인 길,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는 길... 시간이라는 이름의 사막. 그러나 누구에게나 가야 하는 길이 
있고 지켜야 하는 약속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그래서 늘 마음 속에 새겨두는 사명대사의 시 하나가 있다.

  눈덮인 들판을 걸을지라도
  네 발걸음을 어지럽게 말라.
  지금 걷는 그 발자욱이
  뒤에 오는 사람에게는 길이 되느니.

  다시 태어나 사막의 양치기가 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덧없이 하면서 
사명대사의 그 시를 생각했다. 아니다. 우리들의 한 생애란 그렇게 덧없는 것이 
아니다, 고개를 저으면서.
  하얗게 눈 덮인 들판, 아무도 가지 않은 그 길을 걸을 때라도 발걸음을 어지럽게 
하지 말라는 건 무슨 뜻이겠니? 곧게 바르게 걷도록 하라는 그 말 뒤에 있는 뜻을 
생각해 보아라.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사람은 누가 보지 않는다 해도 언제나 곧은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다. 처음 무엇을 시작하는 사람이 어지럽게 해 놓으면, 훗날 다른 사람도 또 
그렇게 그 뒤를 따르게 된다는 의미이다.
  아들아.
  길고 긴 시간의 흐름, 무한한 대자연의 신비를 이 사막에 와서 바라보면서 그리고 
이 거대한 자연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작고 하찮은 인간사를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다만 작고 덧없는 것일까. 아니다. 작고 보잘 것 없고 순간적이라고, 
상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막에는 모래벌판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스텝지역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는 가시덩쿨 같이 거센 풀들이 자란다.
  너무도 놀라운 것은 사막지대의 양들은 이 가시덩쿨을 먹고 자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가장 순박하고 평화스러운 동물로 양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양들이 사람이 손으로 꺾으려 하면 긁히거나 찔려서 피가 나는 그런 억센 풀들을 
먹고 자란다. 더구나 사막지대의 양은 얼마나 위장이 튼튼한지 비닐봉지를 다 
먹어버리기 때문에 '사막의 청소부'라는 별명까지 얻어 듣고 있단다.
  사막의 양치기들은 도시락과 물 한 통을 들고 하루종일 이 양들을 몰며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사막을 헤맨다. 담요 하나를 망토처럼 걸치고.
  모래바람이 불어오면 양치기는 이 담요를 뒤집어 쓰고 몸을 엎드린다. 모래바람은 
어찌나 강한지 얼굴에 맞으면 볼이 파일 듯 따갑고, 심한 경우는 자동차의 유리가 
부옇게 파여나갈 정도란다. 담요는 또 급격히 내려가는 사막의 밤기온을 막아주는 
데도 쓰인다.
  하루종일...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스텝지역의 벌판을 헤매며, 때로는 
모래바람에 시달리며, 양치기는 무슨 생각을 할까. 절대의 폐허, 적막함의 극치 속을 
양들과 함께 오가며.
  마치 수도자처럼 살아가는 그들의 하루를 바라보면서, 나는 아주 감상적이 되어 
생각했었다.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이 사막에 와 양치기가 되었으면... 하고 
말이다.
  아침을 사는 사람, 그렇게 자라 달라고 나는 너에게 가르쳤다. 남들이 다 간 길, 
남들이 다 자리잡은 거리를, 그런 인생을 살지 말라는 뜻이다.
  두렵고 혼자이지만 그러나 아침을 사는 사람들의 발자국은 후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길이 된단다.
  아들아.
  훗날 너도 배우게 되겠지만 세계 2차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미국에는 세 명의 
위대한 작가가 있었다. "무기여 잘 있거라"로 잘 알려진 헤밍웨이와 "9월의 빛" 
같은 좀 어려운 소설을 쓴 포크너와 그리고 "천사여 고향을 보라"의 작가 토마스 
울프가 있었다. 그 가운데 헤밍웨이와 포크너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이다.
  언젠가 "파리마치"라고 하는 잡지의 인터뷰에서였다. 기자는 포크너에게 미국의 
현대작가 가운데 누가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런 식으로 
예술가에게 순위를 매기거나 뽑는 일이야말로 가장 비문화적인, 저급한 저널리즘이 
저지르는 일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 기자는 아마 헤밍웨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 포크너의 대답은 의외였다.
  현대 미국의 작가 가운데 위대한 작가는 토머스 울프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헤밍웨이는 불가능에 도전해 본 적이 없는 작가다. 그는 자신이 가능한 것만을 
썼고 그리고 모든 작품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울프는 언제나 그로서는 불가능한 
일에 도전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그러므로 나는 창조자로서의 위대성에서 울프를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대강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기억한다.
  사막으로 나아가는 정신, 바다로 나아가는 정신, 더 먼 산으로... 들판으로 
떠나보는 정신이란 이러한 불가능에 대한 자신과의 싸움이다.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의 영혼은 아름답고 고결하다.
  남이 하는 공부해서, 남이 가는 직장에 가고 그래서 남처럼 살다가 남처럼, 그렇게 
살아가겠느냐. 이름이 난다거나 크게 되라는 뜻이 아니다. 네가 하고 싶은 일,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걸으라는 의미이다. 사막에 와서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하나도 
이것이란다.
  아들아.
  언제나 잊지 말아다오. 불가능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오늘은 이만 쓰마. 잘 자거라.
  꿈속에서 네 등에 날개가 달렸으면 좋겠다.

    3. 사막의 양치기들은 악수를 참 좋아한단다. 가없는 벌판, 그 막막한 대지 
위에서의 생활이니까 무엇보다도 사람이 그리울 수밖에 없겠지.

  움직이는 건 다 잡아먹는 사람들, 이렇게 이야기하려니 웃음부터 나와서 
미안하다만, 그런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아들아. 너는 언제 네가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깨달았니.
  고난 가득했던 나라에서 태어나, 넘치는 은혜 속에서 누려갈 수 있는 것보다도 
앞으로 네 손과 어깨로 해내야 할 것만 가득한 나라에서 태어나, 그렇게 자라고 
있는 너희들이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고난을 헤치고 온 수없이 빼어난 것들이 
많이 있단다.
  이 사막에 와서도 또 그러한 한국인을 만난단다. 믿음직스럽고, 활달하고, 쓰러질 
줄도 포기할 줄도 모르는 한국인들을. 그리고 그렇게 유쾌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웃을 말이다.
  한국인이 중동지방에 일을 하기 위해 나온 건 벌써 오래 전의 일이란다. 많은 
건설공사장에서 땀 흘려 일을 했다, 그들은.
  그 무렵부터 중동에 나간 한국인들의 왕성한 식욕은 그곳 나라들에게 화제가 
되었고 나중에는 외교문제까지 일으켰었단다. 야생 들개 같은 걸 마구 잡아먹지 
않나, 술을 담가 먹지 않나 해서 생겼던 일이지 (회교 국가에서는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
  이 식욕이 사막에 왔다고 달라질 까닭이 없지. 그러니 그냥 보이는 건 닥치는 
대로 먹어대는 거다.
  사막에 뭐가 그렇게 잡아 먹을 게 있겠냐고? 많지, 얼마나 많은데. 여러 종류의 
들개. 귀 크고 하얀 그 사막의 여우. 도마뱀... 어디 그뿐이니. 지중해 쪽으로 나가면 
바다에는 해삼이 그냥 널려 있단다.
  회교도들에게는 음식에 있어 몇 가지 계율이 있다. 우선 그들은 죽은 것을 먹지 
않는다. 죽지 않은 것을 어떻게 먹느냐고, 산 것을 마구 깨물어 뜯어 씹어먹느냐고 
의문을 가지겠지. 그건 아니다. 그들은 우선 산 것을 붙잡아다 놓고 알라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나서야 그것을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만약 병들거나 사고로 죽은 양이나 낙타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사람들은 비늘이 없는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 모든 생선에 
비늘이 있는 건 아니란다. 예를 들어 오징어나 문어는 비늘이 없는 물고기니까 
회교도들은 이런 생선을 먹지 않아. 물론 바다의 인삼이라고 하는 해삼 같은 걸 
먹을 리가 없지.
  그런데, 살아서 움직이는 낙지를, 입가에 쩍쩍 들어붙는 그놈을 그냥 초고추장에 
찍어서 어적어적 씹어먹는 한국인을 보며 이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겠니? 안할 말로 
무슨 저런 식인종 같은 사람들이 있나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렇지만, 우리가 
무슨 식인종이니? 예의를 숭상하고 이웃을 아끼며 어른을 아끼며 어른 모시기를 
하늘같이 알던 민족이 아니냐. 다만 그곳 사람들과 식성이 다를 뿐 아니겠니.
  사막에 온 한국의 근로자 아저씨들의 이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식욕은, 
사막이라고 변할 리가 없지.
  우선 들개를 잡아 드신단다. 보신탕이야 한국에서도 먹는 사람이 있고 안 먹는 
사람이 있지만, 그걸 먹는 사람에게는 보신탕 같은 별미가 또 없거든. 여우, 사막의 
여우도 얼마나 맛있게 잡아 먹는데. 게다가 사막의 여우야 크기가 겨우 토끼만 
하니까 요거야 그냥 굽거나 튀겨서 한끼 감이지.
  게다가 뱀이 있지 않니. 뱀집이야 우리 나라 어디에도 있어서, 그걸 먹는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몸 보신용으로 사랑 아닌 사랑을 받거든. 거기다가 그들은 
먹지 않는 낙지며 해삼을 그것도 산 채로 드시는, 굳세여라 한국인의 위장이여.
  들개를 잡으면 그걸 숙소 옆에 붙들어 매 두었다가 쉬는 날이면 회식을 하는 
거다.
  사막 한가운데, 그 막막한 모래벌판으로, 눈을 들어 바라보기만 해도 바늘에 
찔리는 듯 강렬한 그 햇빛 속을... 개를 끌고, 그걸 잡아먹으러 나가는 한국인을 
상상해 보아라.
  그들은 마치 무슨 혁명이라도 하러 나가는 사람들처럼 개 한 마리를 끌고 
사막으로 나선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그들이 돌아올 때는 개는 없다. 개는 그들의 
뱃속에 들어가 있는 거지.
  들개, 여우, 뱀... 눈에 띄는 것치고 안 잡아먹는 게 없으니, 사막에 살고 있는 
그곳 사람들에게 있어 한국인처럼 기묘한 종족도 다 있을까 싶겠지. 도마뱀으로 
김치찌개까지 끓인다는 말을 듣고는, 아빠도 그냥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맛이 
닭고기 비슷하다더라.
  하루는, 근로자로 고용되어 있는 리비아 사람이 사막 한가운데로 일을 하러 
나가라니까, 자긴 절대로 못 가겠다고 하더래.
  '한국사람과는 일하러 안 나가요'
  '왜?'
  '한국사람들은 건드려서 움직이지 건 다 잡아먹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도 움직이는데, 사막 한가운데서 날 잡아먹을려고 하면 어떡하라구요.'

  사막의 양치기들은 악수를 참 좋아한단다. 만나면 손부터 내밀어. 처음엔 왜 
이럴까 생각했는데, 이것도 사막이라는 자연환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가없는 벌판 그 막막한 대지 위에서의 생활이니까 무엇보다도 사람이 그리울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누군가를 만나면 손부터 잡는 거야.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아무런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도 돼. 나는 너와 
친구일 뿐 너를 해칠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지.
  양치기들의 천막을 찾아가도 그래. 이 사람들은 양치기들이 먹을 물이나 식량을 
보관하고 있고 그래서 트레일러 같은 것을 세워놓고 생활하기도 하는데, 웃으면 
손부터 내밀어. 사진을 찍자면 한결같이 내 어깨에 팔을 얹어놓지. 다들 그래.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아주 오랜 친구처럼 말이다.
  담요를 뒤집어 쓴 채 걷고 있는 벌판의 양치기를 찾아가도 그 억센 손을 내밀고, 
낙타치기를 만나도 마찬가지란다(낙타치기라니까 어딘가 이상하지 않니? 양치기는 
안 그런데).
  이런 사막에서의 사람살이는 그래서 몇 가지 불문율을 만들어 놓고 있단다. 그 
하나가 길을 잃은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달려가 구해 준다는 거야. 도움을 주기 
위해 달려가. 조난을 당한 사람을 구조하지 않고 못본 체 가버린 사람을 이곳에서는 
살인죄로 다스려.

  아들아, 생각해 보렴.
  광활한 대지 위를 붓으로 길게 선을 하나 그어놓은 듯이 아스팔트 길이 뚫려 있을 
뿐, 바라보이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그 무엇도 없는 사막에 자동차 한대가 서 
있다고 하자. 그때 구조를 요청하면 그 옆을 지나가는 차는 모두 멈춰서. 그때 그냥 
지나친 차가 있으면 후에 차량번호를 알고 있다가 신고를 하면 구조요청을 거부했던 
그 운전수를 이곳에서는 범죄행위로 다스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막에서 길을 잃거나 조난을 당했다는 건 이미 죽음 
속으로 한발 들어선 거나 같기 때문이야.
  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물과 먹을 것을 아껴가면서 누군가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지. 걸어서 그 사막을 횡단한다는 건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니까. 더우니까 낮에는 자동차 밑에 들어가 누워 있어. 그늘이라고는 그곳밖에 
없지 않니. 그리고 밤이면 급격하게 기온이 내려가니까 담요를 뒤집어 쓰고 
차안에서 잠을 자는 거야. 먹을 물이 떨어지면 나중에는 자동차 엔진, 라지에이터에 
있는 물까지 빼내 마시면서.
  이런 극한상황에 있는 사람을 못본 체 가버렸다면 그는 그 사람을 죽인 거나 같지 
않니. 왜 그들이 조난 당한 사람을 지나쳐 버린 자를 살인죄로 다스리는지 이제 
이해가 가겠지.
  양치기가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먼저 손을 내밀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마냥 기쁨으로 가득한 나날을 살아갈 수는 없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시는 저 사막과 무엇이 다르다는 걸까. 옆에 무수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남과 나 사이에서 사막의 
모래언덕보다도 더 넓고 견고한 벽들이 쳐져 있는 이 도시, 그렇게 생각하자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보다 더한 사막이 어디에 또 있으랴 하는 감상에 조금은 
우울할 수밖에 없었단다.
  아들아.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면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기쁨으로 가득찬 
나날들을 만들어 가기 바란다.
  사막의 목동들은 그 억센 손으로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던 거란다.

    4. 꿀벌도, 아프리카의 꿀벌은 게으르단다. 일년 내내 꽃이 있으니까 꿀을 
모으는데 부지런해야 할 까닭이 없지 않니.

  사막에 와서 너에게 전하고 싶었던 많은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아버지, 그 세대의 이야기란다.
  나이를 잊고 살았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마흔을 넘으면서 남들이 다 그렇듯 
세월의 속도에 놀라고 있었고 그래서 이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도 절실해 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렇게 살았단다.
  그런데 아버지의 나이가 얼마니. 안할 말로 무슨 대형사고가 나서 다친 사람들의 
명단이 실렸을 때, 그 가운데 아빠 나이와 같은 사람을 보았다고 하자. 혹시 그 
나이를 보며, 살만큼은 살았네... 하고 중얼거리지는 않았을까. 나 자신이 어느새 그 
나이가 되어 있단다.
  사진 속에 보여지는 '늙은 얼굴'은 차라리 마음을 편하게 했다. 살아온 내력이 그 
얼굴에 배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남의 눈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될 '나이 
든 사람'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40대, 오늘 나이 마흔 몇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40대는 누구인가. 이들은 이제 
어리다는 말로 무엇을 용서받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어리다고 하는 미숙성이 
저지를 수 있는 어떤 불성실이나 결핍이 용서될 수 없다. 또한 이제는 젊지도 않다. 
그러므로 젊다고 하는 것이 가져다주는 과감함이나 파격 혹은 어떤 돌파력도 이제는 
이들에게서 믿음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 40대에는, 쉽게 떠오르는 몇 가지 세대로서의 특징이 있다.
  풍요라든가 소비가 미덕이라든가 하는 말이 떠오르기 시작하던 시대에 젊은날을 
시작한 첫 세대가 이들이다. 격하시키자면, 겨우 배곯지 않고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해 
낸 한 나라의 열매를 처음으로 먹은 그 맏아들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소지사회의 첫 주자가 되며, 궁핍이 보편화된 삶이었던 시대의 막내가 된다.
  또한 이 세대가 젊은날을 시작했을 때 사회는 대중문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통기타와 청바지 그리고 생맥주로 상징되던 청년문화가 바로 이 세대에 의해 
만들어졌다.
  '주간 무엇무엇'이라는 이름으로 읽고 버려도 좋은 인쇄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때도 이때이며,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것도 이 세대와 함께였다. 소비와 
대중문화라는 두 축을 가지고 있는 세대인 것이다.
  계획경제에 의해서 한 국가정책이 무엇을 '해내자'는 기초 위에 있었고 그 속에서 
자신도 무엇을 해낼 수 있다는 성장우선주의에 길들여져 간 사람들도 지금의 
40대임은 분명하다. 그것이 신중하고 정확한 일처리와 끈기있는 기다림을 
죄악시해서, 한 사회의 정신적인 기초를 '건설공사 이윤내기'처럼 만들어간 것도 이 
세대와 함께였다. 무엇이든 빨리, 서둘러 끝을 내는 것이 성과였고 업적이었다. 
건설공사에서 공기단축 이상의 이윤내기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여러 
분야에서 사회적 혹은 정신적 정밀도를 떨어뜨리는 나쁜 쪽으로 영향을 미친 것도 
이 세대였다.
  이 사막에 와서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은, 문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란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기독교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란다. 세계적으로 
그렇지 않니. 기독교적 윤리, 기독교적 원칙,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어.
  그런데 몇 곳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곳을 찾아가서 아빠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단다. 왜 문명의 발상지에는 지금 가난밖에 들끓고 있지 않은 것일까. 어디엘 
가도 그렇단다.
  이집트의 나일강가에 가 보아도 그랬다. 널려 있는 가난... 그것밖에 보이는 것이 
없단다.
  학교에서 배웠으리라고 믿는다.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곳들 말이다. 
중국의 황하문명, 인도의 갠지스 문명 그리고 저 나일강가의 이집트문명 말이다. 그 
어디엘 가도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가난이란다. 헐벗은 사람들이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잠을 자고 길에서 죽어간단다. 그곳이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발상지였어.
  황하문명이 장구하게 흘러내려 바다에 가 닿는 곳, 그 상하이에 가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쌀 배급을 받으려고 사람들은 줄을 서고, 자전거의 행렬이 길을 
메우는데 거기서 만난 중국인이 말하더구나.
  저기 걸어가는 사람들이 7할은 여기 사람이 아니예요.
  그러면요?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지요.
  갠지스 문명을 이루어냈던 인도엘 가 보이는 그렇다. 그 강가에서 사람들은 
죽어간단다. 인도에는 흔히 이야기되는 일곱 개의 성지가 있어. 강을 따라가며 있는 
그 성지는 얼음이 녹아 흐르기 시작하는 히말리아 근처에서부터 저 남쪽까지 
이어진단다.
  물론 성지는 언제나 강이 만나는 곳, 두 개의 지류가 만나 삼각주를 이루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 강가에서 사람들이 죽어가. 죽기 위해서 찾아와.
  경찰은 긴 대막대기를 들고 계단에 쓰러진 사람들을 툭툭 건드려. 그래서 
움직임이 없는 사람은 죽은 거야.
  꿀벌도 아프리카 벌들은 게으릅니다.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이 내게 들려준 
말이다. 게으른 꿀벌도 있는 것일까. 그 말을 들었을 때 참 많은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환경이 주는 풍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렴. 왜 꿀벌도 아프리카 꿀벌은 게으를까.
  문명의 발상지에 지금은 가난이 넘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단다. 지난 날의 그 
땅들을 풍요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거기에서 인류는 삶을, 
생활을 시작했던 거지. 그것을 우리는 문명이라고 말한다.
  기름진 땅, 적당한 기후 그 속에서 결코 가혹하지 않은 자연을 누리며 그들은 
살았어. 추위에 떨어야 할 겨울도 없었고, 개간해야 할 드높은 산이 있었던 것도 
아니란다.
  모든 것이 있었다는 것, 그 풍요로운 환경이 지금은 그들을 헐벗고 굶주리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안할 수가 없었단다.
  아프리카의 꿀벌이 그것을 보여준다. 일년 내내 꽃은 있으니까 아프리카의 꿀벌은 
바빠야 할 이유가 없단다. 꽃은커녕 풀도 만날 수 없이 얼어붙는 추운 겨울이 
있어서 그 겨울을 나기 위해 꿀벌들은 여름내 꿀을, 그 먹이를 구해 나르는 게 
아니겠니.
  그런데 일년 어느 계절에도 꿀이 널려 있는데 무엇 때문에 꿀벌이 꿀을 구해와야 
하겠니. 그냥 먹고 싶을 때 나가서 먹으면 되는 것을. 무엇인가를 구해다 저장해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거야.
  가혹한 자연환경이라는 것이 그것을 살아낼 수 있도록 오히려 인간에게 지혜를 
요구하고 그것을 극복해 내는 용기를 심어준다는 것을 역으로 아프리카의 꿀벌은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자원도 없는 우리 나라란다. 자연환경이 다른 나라보다 풍요로운 건 더더욱 
아니란다.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가 이 땅을, 이 나라를 살아내야 할 또 다른 의미가 
생겨나는 거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으냐. 이룩해야 할 일이 
또 어디 하나 둘이냐. 그러므로 오히려 살아낼 가치가 있다는 이 역설을 언젠가는 
네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가로수가 너울거리는 도시의 어느 거리도 아니었다. 찻집이 있고 음악이 있는 
장소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우리는 무엇일까, 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나날들이었다. 그것이 사막에서의 나흘 내내 
짓눌렀다고나 할까.
  꿈을 잃지 말라는 말을 그래서 하고 싶었다.

    5. 낙타는 스스로 자기의 콧구멍을 열고 닫고 할 수가 있단다. 모래바람이 
불어오면 낙타는 이 콧구멍을 막아. 사막을 살아가는 놀라운 지혜가 아니겠니.

  하루살이는 아침에 태어나 저녁이면 죽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하루살이는 밤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저녁은 어떻게 오고, 새벽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를 그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한밤의 그 깊은 시간에는 무엇이 이루어지는지를 그는 알 수가 없는 거야.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그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나 공간에 지배될 수밖에 
없어. 땅속에 집을 만드는 개미가 하늘을 나는 새들의 나날을 알 수 없기도 
마찬가지겠지.
  사막의 저 정적 안에서 햇빛과 모래와 바람 속을 늠름히 가로질러 가며 살아가는 
낙타를 이야기하지 않고, 아들아, 어찌 사막을 말한다고 하겠니. 무엇보다도 사막을 
사는 낙타에게는 여러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남아 있단다.
  낙타는 수맥을 안다고 해. 어디에 물이 있는지를 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물줄기가 있는 곳에 도착하면 낙타는 움직이지를 않는데, 그때 그곳을 파면 반드시 
물이 나온다는 거다.
  물만이 아니다.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또 낙타는 미리 알아. 그래서 
바람이 불어오려고 하면 낙타는 몸을 숙이고 주둥이를 모래 속에 파묻어. 
모래바람이 불어온다는 뜻이지. 그러면 사람들은 그가 숨을 쉴 수 있게 모포로 그의 
머리를 감싸주지 않으면 안 된단다.
  이런 것도 동물들이 가지는 지혜이지. 어떤 공간을 살아가는데는 그렇게 자기만의 
생존의 지혜들이 있는 거란다.
  이건 누군가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만, 가령 전쟁터에서 커다란 군화발이 
개미집을 밟고 지나갔다고 하자. 그때 개미들은 그 커다랗고 딱딱한 것이 사람들이 
신는 신발이라는 걸, 지금 그들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걸 또한 알 
수가 없겠지.
  어떤 새로운 세계에 눈 뜨기 위해서는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세계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그래서 고향을 알기 위해서는 타향을 살아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게 되는 거란다. 
집을 떠난다거나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단순히 자신을 옮겨가는 것만이 아니라, 정신의 변화랄까 의식의 전환을 
가져다준다는 뜻이다.
  길을 떠난다는 것이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의 집, 그 틀을 바꾸는 의미가 
있는데도 한국인에게 있어 길을 떠난다는 건 조금은 불행의 냄새가 난단다. 
타향살이라는 말이 서글프고 구차한 생활을 나타내듯이 말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길을 나선다던가 집을 떠나는 건, 피할 수 있는 한 피해야 할 것으로 오랜 동안 
이해되어 왔던 거다.
  어쩌면 우리가 농경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농경사회 속에서 살아오면서 
그런 의식이 싹튼 게 아닐까 싶어. 말을 타고 떠돌며 살아온 유목민족과는 다른 
의식이지.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우리의 아름다움을. 숟가락으로 밥먹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그 이야기를, 그것을 통해 인류를 말하고 싶었단다. 서양사람들이란 
'무기'를 가지고 밥을 먹는 사람들이다. 삼지창, 칼... 그게 포크와 나이프 아니겠니. 
그러며 포도주를 마시지.
  아빠는 언제나 아주 작게 그리고 신음하듯 생각한다. 저들은 유목민이기에 저렇게 
흉기를 써서 밥을 먹을 수밖에 없다고.
  한 곳에 붙박아 살며 농토를 가꾸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었던 농경민과 
끊임없이 떠돌아야하는 유목민은 그렇게 의식이 다를 수밖에 없어.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에 살았으면서도 바다가 만들어 낸 
별다른 문화가 없어. 해양문화가 전무란다.
  모험이나 개척이 나그네가 가질 수 있는 정신의 하나라면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한곳에 안주해 살아온 민족인 셈이다. 자식을 타향으로 내보낸다거나 길을 떠나게 
하는 걸 그래서 피해왔다.
  길 떠나는 걸 두려워하며 살아오다 보니 나그네에 대한 속담마저 그렇게 적을 
수가 없지. 그뿐이 아니란다. 나그네에 대한 속담도 아주 부정적인 게 많아.
  '나그네 보내고 점심한다'는 말에는, 나그네에게 밥 한끼를 주기 아까워하는 
가난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드러나는 것 같아 서글프기까지 하단다. '주인 보탤 
나그네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지. 나그네가 오면 아무래도 손해가 난다는 뜻이니까. 
또한 '열흘 나그네 하룻길 바빠한다'는 말에도 나그네에 대한 부정적인 눈길이 있어.
  나그네 길은 우리의 노래에서도 구슬픈 하루하루이기만 하지.
  아들아.
  그러나 이제 우리가 사는 사회도 농경사회는 아니란다. 길을 떠나는 의지가 없이 
무엇인가를 이룩하려고 할 수 없단다. 그런 뜻에서 네게 말해 주려는 거야. 타향을 
사는 정신을 잊지 말기를 말이다.
  저녁 어스름 속을 낙타가 떼지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떠도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찾아 헤매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낙타는 발가락이 두 개란다. 발바닥 끝이 둘로 갈라져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그러나 이 발바닥이 넓기 때문에 사막에서 생활하는 데는 아주 편리할 
수밖에.
  재미있는 것은 낙타의 콧구멍인데 스스로 이 콧구멍을 막을 수가 있어. 또한 귀 
옆으로 귀 주변에 긴 털이 나 있는 걸 볼 수가 있다. 이런 특징이 바로 낙타를 
사막에서 살아내게 하는 거야. 털은 모래바람을 막아 주고, 막을 수 있는 콧구멍도 
그런 역할을 하니까.
  낙타는 또 길고 짙은 속눈썹을 가지고 있지. 이 속눈썹이 태양광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해. 사막의 태양이 얼마나 강렬한가 하면 선글래스를 쓰지 않고는 눈이 아플 
정도란다. 게다가 차에 앉아 있었는데도 하루를 사막에 나갔다 오니까 햇빛이 있던 
볼이 쓰리고 경련이 날 정도였거든.
  낙타는 한 번에 한 마리씩밖에 새끼를 낳지 못해. 임신 기간은 길어서 1년이 더 
걸리기도 한단다.
  아프리카 낙타는 혹이 하나인 낙타란다. 이 혹에 물을 담아 두는 게 아니다. 등에 
나 있는 이 혹은 지방질로 되어 있어서 일종의 영양저장소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오랜 동안 먹이를 먹지 못하면 이 혹은 점점 줄어들어.
  이런 모든 걸 알았을 때 낙타의 몸은 차라리 신비롭게까지 생각되었단다. 
사막에서 살아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동물로 진화를 거듭해 온 거겠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가지는 이런 신비를 생각할 때, 그것은 또 다른 감동이 
되더구나. 생명의 존귀함이랄까 그런 것도 느껴지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란 이토록 아름다운가 싶었다. 동물뿐이 아니다. 식물도 
그렇거든. 우리의 지혜로는 상상도 되지 않는 신비 속에서 그들은 살아가거든. 
자연이란 이토록 불가해의 신비로 둘러 싸여져 있는 거란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얼마나 연약한가 싶었다. 우리들의 머리, 그 지능을 빼고 
나면 지구 위의 그 어떤 동물보다도 연약한 것이 사람이 아닌가 싶다. 다른 
동물들보다 연약하다는 것은 아기들을 보면 안다. 인간만이 태어나서 일년이나 
되어야 겨우 걸을 수가 있어. 다른 동물은 태어나며 바로 걷는 것들도 있으니까. 
게다가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이란 스스로 먹이를 구하고 먹을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니.
  아프리카의 꿀벌을 이야기했듯이 인간이 육체적으로 이토록 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은, 두뇌라고 하는 그 살아가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일년 내내 
꽃과 꿀이 있기에 게으를 수밖에 없는 아프리카의 꿀벌처럼.
  나는 사막에서 무엇을 만났던가.
  검게 하늘을 물들이며 불어오던 사막의 그 모래바람... 거대한 날개가 지나가듯이 
사막 위에 물결치는 무늬를 이루며 쓸려가던 그 모래바람. 모래에 맞으면 따끔따끔 
아파서 차 안으로 달려들어가야 했었다. 명상을 하는 사람처럼 모포 하나를 뒤집어 
쓰고 앉아 묵묵히 양을 지키던 사막의 양치기. 그리고 낙타를 기르는 목동도 
있었다. 성큼성큼 걷는 낙타들의 발걸음 때문에 그들이 움직일 때면 함께 뒤를 따라 
뛰어야 했던 그 사람들.
  모래언덕을 찾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모래바람을 맞아 곱게 마모가 된 그 색깔 
아름다운 사막의 돌들을 주우며 앉아 있던 시간도 있었다. 물이 있는 곳이면 갈대가 
자라고 달팽이가 자라고 여우가 굴을 파고 엎드리던 모습도 만났었다.
  아들아.
  다시 쓰마, 너의 젊은 날이 낙타처럼 기 인내와 지혜로움으로 단련되기를, 나는 이 
사막에서 꿈꾸어 본다.

    6. 이 세상의 모든 길이란, 오아시스에서 오아시스를 찾아가는 길었다. 그렇게 
문명은 길 위에서 시작되었어.

  오아시스를 아느냐. 생명의 근원처럼 이야기되는 그 말, 오아시스.
  내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는, 작은 마을이었다.
  오아시스란 사막에 물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오아시스란 
'샘물 오아시스'를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아주 여러 종류의 오아시스가 있어. 강물 
오아시스도 있고 산록 오아시스도 있다. 비가 많이 오는 곳의 강물이 사막을 흘러 
지나가면 그것을 하천 오아시스라고 부른다. 또 높은 지역에서 흘러내린 물이 
사막을 지나며 산록을 만들면 그것을 산록 오아시스라고 부르지.
  우리가 오아시스라고 좁혀 말하는 샘물 오아시스는, 물이 나오므로 해서 사람들이 
집을 짓고 모여 마을이 되고, 낙타를 모는 대상들이 쉬어가는 곳이다.
  하천 오아시스의 대표적인 것이 나일강이다. 사막을 흘러가는 이 강을 따라 
도시가 건설되고 땅은 비옥하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인류가 만들어낸 4대문명의 발생지는 다 오아시스였단다. 
문명은 오아시스에서 시작되었던 거야.
  또 하나 중요한 건, 세계의 곳곳에 이렇게 짐처럼 널려 있는 오아시스와 
오아시스를 사람들이 오가면서 거시 길이 뚫리기 시작했다는 거야. 사막의 작은 
오아시스에서부터 나일강이나 중국의 문명이 시작된 곳이 다 그렇단다. 영화롭던 옛 
문명을 자랑하다가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간 사막 불모지대의 도시, '로오란'도 
그런 도시의 하나였다.
  실크로드란 바로 이 오아시스에서 오아시스를 찾아가는 무역상들의 길이었던 
거야.
  문명이 시작되면서 지구 위에는 세 가지의 큰 길이 만들어졌단다.
  유목민들이 이동해가며 만들어진 길이 그 하나이고, 바이킹 같은 해양민족이 배를 
타고 더듬어 간 바닷길이 그것이고, 또 하나가 바로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이 
오아시스 길이란다.
  그 오아시스에서 내가 만난 놀라움이 하나 있단다.
  마을로 찾아갔던 나는 거기서 아주 오래된 모스크(회교도들의 사원)를 만날 수 
있었다. 마침 기도시간이어서 사원의 확성기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며 코란을 
음송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어. 어디서나 느껴지던 것인데 회교사원에는 
확성기를 달아서 코란을 외우는 기도소리를 마을이 다 들리게 커다랗게 틀어놓아. 
새벽부터 밤까지 그 소리를 들어야 하지.
  이때가 이교도라는 말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오면, 나와 저 
사람들이 이토록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안 들 수가 없다. 
말이 틀리고 모습이 틀린 데다 기도하는 방법도 그 대상도 이토록 다르니까 말이다.
  거기서 만난 사원은 리비아 안에서도 아주 오래된 사원이었다. 물론 조그마한 
마을이라 사원의 크기는 아주 작았어.
  놀라운 것은 그 사원의 모양이었다. 중서부 아프리카에 가면, 마치 움집처럼 
땅위에 세워진 개미집들이 있단다. 그 사원의 형태가 거기서 만날 수 있는 개미집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거였어. 이 개미집은 높이가 1미터가 넘으며 아주 딱딱한데, 
부셔서 보면 벌집과 거의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단다. 그런데 회교사원이 어딘가 그 
개미집과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니.
  이 회교사원을 보며 놀란 또 하나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건축가 '가우디'의 
건축물과도 또 그렇게 닮아 있을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에 
짓고 있는 '성가족 교회'로 특히 유명한 사람이지. 앞으로 백년이 걸릴 지 2백년이 
걸릴 지 모르는 그 교회! 그가 죽은 후에도 건축공사가 계속되고 있는 그 교회!
  그런데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만난 조그만 회교사원에서 내가 가우디의 이미지를 
떠올렸다는 건 무엇일까. 흙으로 지어진 사원의 그 둥글둥글한 선이며 지붕의 
처리는 가우디의 건축과 어딘가 그렇게도 닮아 있었단다. 고대의 조형물이나 문양이 
현대에 와서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 새롭게 변형되는 것을 많이 보아왔던 
우리들이다. 피카소가 한 일련의 작업이 그렇지.
  회교사원과 개미집과 가우디의 건축물... 너무나 먼 공간과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이 세 가지가 왜 닮아 보였을까. 이 셋이 품고 있던 
같은 이미지를 나는 오래오래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인류의 정신은 서로가 서로를 물들이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인류는 그렇게 서로 다른 것들을 모아 하나가 되려고 만 해 온 것은 
아니란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 땅위에서 서로를 나누어 갔다. 너와 나. 우리와 저들. 
그 사람들과 이 사람들...그렇게 땅위에 금을 긋고 벽을 쌓으면서 서로 등을 돌렸던 
거야.
  국가로 나뉘고 민족으로 나뉘고...그렇게 세계가 나뉘어 있는 거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그러나 말이다, 우리처럼 아래 위로 나뉜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는 이 부끄러움을 
어떻게 생각하니. 세계의 147개 나라 가운데 오직 하나인 나라. 누가 원해서 
나뉘었니. 제 나라 제 땅 제 사람들인데... 우리 나라 우리 땅 우리들인데... 못 가는 
나라. 가면 안 되는 나라. 나라를 버리고 이민 간 사람만 가는 나라가 저쪽이란다.
  그 다음에 인류를 나누는 것이 종교란다. 인류는 어쩌면 그렇게 종교로 나뉘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방법에 서로 다름이야 있겠지만, 모든 종교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있어왔어. 그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기는커녕... 말살하기 위해 지금은 존재해. 
이라크 전쟁을 기독적인 눈으로만 보면 안되는 것은, 그것은 회교도에 대해서는 
참벌이란다. 왜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당해야 하니.
  이교도에 대한 학살이 아니라면...그 작열했던 폭탄과 미국식 세계관이 어떻게 
그다지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겠니.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 또한 이 세계를 지배하는 다양성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서로 같아지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그것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정신이다. 내 것의 중요함만큼 남의 것을 
소중하게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자라나면서 나는 네가, 우리의 것과 남의 것을 결코 단순하게 비교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의 것이 그것으로서의 절대적 가치가 있듯이 남의 나라 문화에는 그들이 
몇 천년을 살아오면서 가꾸고 길러 낸 가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길가에 난 작은 풀 하나, 땅바닥을 기는 딱정벌레 한 마리, 하늘을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그가 존재하는 까닭과 깊이가 있음을 언제나 잊지 말아라. 그렇게 
해서 그 모든 것들이 생명이라는 놀라운 신비 속에서 시작되고 끝남을 마음 기울여 
생각해 주기 바란다.
  집을 떠나온 지 벌써 며칠인가.
  그것을 어디서 확인하는 줄 아니. 달력을 바라보면서가 아니다. 취재 수첩의 
페이지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아니란다. 문득 저녁에 잠이 들려다가 많이 
자라있는 손톱을 내려다보며 그것을 확인한단다.

  자라 있는 손톱을 보니
  집 떠나온 지 오래임을 알겠다.

  아빠는 오늘 일기의 마지막에 그렇게 적었다.

    7.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눈물겨움을 너는 아느냐. 그들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이 어디 있겠니.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가 잔 잠자리는 자기가 갤 것. 식탁에서 물은 언제나 자기가 
떠다 먹을 것. 벗은 옷은 자기가 빨래통에 넣을 것.
  떠나오면서 너에게, 지키기를 바라며 했던 약속들이다. 늘 그랬듯이, 일하는 
즐거움을 네가 알았으면 해서였다.
  저 살아 있어요, 하고 말하는 것과 저 지금 일하고 있어요, 하는 말은 물론 같은 
말은 아니다. 살아 가는 일 속에는, 일도 있고 휴식도 있고, 사랑도 분노도 배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한다고 하는 것과 살아 있다고 하는 것에는 
어딘가 동의어의 냄새가 난단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사막의 밤을 거닐었다.
  세계의 어디엘 가도 이제 거기에는 한국인이 있지만, 리비아 사막에서 내가 만난 
한국인들은 좀더 신선해 보였다. 다른 말로 하면 한국인의 원형이랄까. 아, 우리들이 
이런 사람들인데 하는... 깊이와 따듯함과 활력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이 사막의 한가운데는 '무공해의 남자'들이 산단다.
  처음 이곳 건설현장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의 일이란다. 사무실 벽의 틈새를 온통 
종이로 발라놓았어. 그 모습을 보며 난 참 '한국인'이 싫었다. 왜 벽 하나쯤 깨끗이 
칠을 해 산뜻하게 하지 못하고 저렇게 덕지덕지 종이를 바르고 무심하게 살아야 
하나 싶었거든.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건 건설현장 가건물의 벽과 천정의 틈새로 끊임없이 
스며드는 아주 미세한 모래가루들을 막기 위한 한 방법이었던 거야. 이 모래가루는 
눈에 보이지도 않아. 그냥 스며들지.
  나는 부끄러웠고 그리고 깨끗함에 대한 내 고정관념의 어딘가에 아주 큰 잘못이 
있구나 생각했었다.
  무공해의 남자들이라고 말했지. 그렇단다. 이들이 마시는 공기야말로 무공해란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 때문에 하루종일 일을 하고 나면 입 안에 아주 미세한 
모래가 지걱지걱 씹힌다고는 해도 그건 공해가 아니라 자연이지.
  아직은 공해를 일으킬 공장도 그런 시설도 없으니까. 이제부터가 시작이겠지만 
인간이 일으킬 공해는 사막의 그 광대함에 비교하면 티끌 같으니까. 자연이 스스로 
그것을 정화시켜 나가겠지.
  이들이 먹는 것도 무공해의 식품뿐이다. 지중해의 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먹고 
물만 주면 자라 주는 이곳에서 스스로 기른 채소를 먹어. 그리고 회교나라에는 
기본적으로 술을 팔지 않는단다. 비공식적으로는 회교국가가 수입하는 술의 양이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래. 더구나 사회주의 국가인 이곳 
도시에 유흥장을 찾는다는 건 사막에서 물을 구하기만큼 어렵지 않을까.
  무공해의 태양과 무공해의 공기와 무공해의 식품과... 그런 남자들이기에 무공해의 
남자라는 말을 쓰는 거다. 아마 무공해 남편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오래 기억에 남으리라, 이 사막에서 만난 원형질의 한국인들. 그런 생각을 하며 
밤의 사막을 거닐었다.
  이곳 사막의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사람들이 전에는 아주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이랄까, 이제는 힘든 일을 통해서 자기자신의 능력을 실험하며, 
결과의 성취로 기뻐하겠다는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든다. 아니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벌겠다는 젊은이들조차 없어져 가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는, 조금 일하고 더 많이 놀아야지 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란다. 어차피 누군가가 해내지 않으면 안될 어렵고 힘든 일을 두고 더 쉬운 
일을 찾아 떠나가는 사람만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란다.
  사막에서 만난 '무공해의 남자들'을 보며 나는 매일 그것을 확인했다.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한 눈물겨움이 어디 있겠니. 그들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이 어디 있겠니.
  일이란 살아있다는 것에의 확인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다. 다른 말로 한다면 
일이란 인간의 살아 있음에 대한 자기확인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일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자신을 만들어내고 보여주고 그리고 밖으로부터 자신을 옹호할 
수밖에 없단다. 일이 아니고 무엇으로 자신의 내일을 약속할 수 있겠니.
  성서에서는 우리가 땀을 흘려 일하는 것을 '이마에 소금을 절이며'라고 쓰고 있지. 
그렇단다. 그렇게 이마에 소금을 절이는 일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일한다고 하는 것은, 장미가 꽃을 피우는 것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일한다고 하는 것은 벌이 꿀을 찾아 날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을 이룩한다거나, 마친다거나, 해낸다는 표현들이 있다. 이것이 노동이며 
삶이란다. 그렇게 해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숙명이며 완성이며 필연이 
되는 거란다.
  아들아.
  마당에 나아가 보아라. 그리고 거기 아빠의 서재 밑으로 잎을 틔우고 있는 
라일락을 바라보거라.
  지난 여름 가지는 찢어지고, 제일 굵은 가지 하나는 말라서 잘려나간 그 늙은 
라일락을 바라보려무나. 옆집의 그늘, 돌조각 투성이의 땅...살아가기에 척박한 환경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는 라일락이다. 그러나 봄이면 어김없이 그 라일락은 
잎을 틔었고 꽃을 피워왔다. 여름이면 늘 그 너울거리는 잎사귀들 밑에 않아 소주를 
마실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지 않더냐. 그것이 일이란다.
  자신의 노동에 대해 경멸하는 사람은 자신을 경멸하는 것이 된다. 자신이 삶 
그것을 경멸하는 사람이다. 그것보다 더한 불행은 없는 거란다.
  행복이라는 말의 그 깊이를 나는 아직 모른단다. 겨우 내가 이해하는 것은, 
평화라는 거란다. 가장 행복한 시간 그것은 평화와 함께 하는 시간이라고.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나는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안단다. 행복이라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그것을 보통명사로 불러볼 때의 그 '행복한 
사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니?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란다.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자기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란다. 너무 쉽기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란 먼 어느 곳에나 있는 줄 아는지도 
모른다. 자기 일을 사랑하면 되는데.
  네 일을 사랑하거라. 그 일 안에서 즐겁거라. 그때 너는 행복할 테고, 그런 너를 
바라보며 나는 평화롭지 않겠니.

    8. 사막을 거닐었던 나. 모래바람 속에 갇혔던 나. 낙타떼를 물고 나는 사내를 
오래오래 바라보았던 나.

  이 세상에서 처음 엽서를 만든 사람은 누구였을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을까. 부지런하기 짝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그리운 것이 너무 많았던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까. 책임감이 넘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
  이제 마지막 엽서를 써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 거 같다.
  남의 나라를 여행하며 늘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외국에서 부친편지가 서울까지 
가는데는 적어도 1주일씩은 걸리기 때문에, 돌아가기 한 주일 정도부터는 편지 쓰는 
걸 안해 온 나였다. 서울의 집에 도착해서도 얼마나 지난 어느 날 내가 쓴 편지가 
그때야 배달이 되니까.
  자기가 쓴 편지를 받아들 때의 느낌은, 그렇게 낯설 수가 없단다. 누가 낯설게 
느껴지냐구? 그 편지를 쓴 또 다른 사람인 나.
  아들아.
  어쩐지 그게 내가 쓴 글 같지가 않을 때가 많아. 아주 다른 남이 나에게 편지를 
보낸 거 같아. 언제가 소설에서도, '밤에 쓴 편지를 믿지 않기로 하자' 하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아마 같은 이야기이겠지. 이국의 어느 거리를 거닐다가 들어가 앉은 
카페에서, 그림엽서를 놓고 서울을 생각하며 썼던 글 속의 나. 그리고 이제는 서울로 
돌아와 생활의 옛 껍질 속에 가만히 엎드린 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 같아서. 그것이 
나는 언제나 싫었다.
  저 낯선 어느 거리에서 내가 살아갈 삶의 갈피를 넘겨가면서, 이제 돌아가 이 
거리에서의 감동으로 살아가리라 다짐하던 나는 다만 하나의 그림자였을까. 퍼렇게 
가슴 저 밑바닥에 멍이 들어서 꿈꾸듯 보라빛으로 앉아 있던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아닐 것이다. 저 멀고 낯선 거리에서 내 삶의 척박함에 눈물겨워 하던 나는 결코 
어디론가 사라진 게 아니리라. 내 가슴의 어딘가에 가만히 턱을 괴고 앉아 
있으리라.
  그렇지만 그게 얼마나 두려운 체험인지 너는 모를 거다.
  저 이국의 거리에서와는 아주 다른 얼굴을 하고, 멀쩡한 얼굴을 하고, 똑같이 
때묻어 너덜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서울에서의 나... 그러나 지금의 이 나야말로 
진정한 내가 아니었던가. 오히려 이국의 거리에서 그림엽서를 부치던 내가 또다른 
허상은 아니었을까.
  사막을 거닐었던 나, 모래바람 속에 갇혔던 나. 낙타떼를 몰고 가는 사내와 
양치기를 오래오래 바라보던 나... 그는 내 안의 어디쯤에 남아서 이제 서울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렇다. 나는 또 옛 껍질로 돌아가겠지. 교통체증은 모두 남들의 탓인 양 짜증을 
내고, 원고마감에 쫓기면서 거짓말을 하고, 모든 잘못은 저 세상 때문이라고 욕을 
퍼대며 살아갈 수밖에 없겠지. 그러면서 아주 작은 기쁨에 즐거워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지금 밤의 사막을 내다보고 있다.
  그것이 지금 나에게 얼마나 두려운지를 너는 모를 거다. 이제와는 다르게 살 수도 
있을 거야. 새로 시작해도 늦지 않은 거야. 네 앞에는 얼마나 많은 나날이 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를 잃어버린 것이 두려운 거란다.

  해가 뜰 때, 해가 질 때, 그리고 정오. 이렇게 회교도들은 기도를 드린다. 오후와 
밤에 드리는 기도를 합쳐서 하루 다섯 번이 된단다. 기도라기보다는 예배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사막을 지나가다가도, 그 모래바람 속에서도 이 사람들은 
메카를 향해 몸을 숙여.
  아무 불빛도 보이지 않는 사막의 어둠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내 등뒤로 이 
시간이면 오늘도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마을에서 드리는 예배소리다. 회교도들이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야.
  왜 그 땅에는 그 땅을 다스리는 저마다의 신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세계의 어떤 
종교를 보아도 그 종교는 지역적으로 그 터전이 크게 나뉘어지거든.
  회교도에게는 그들이 지켜가야 할 다섯 가지의 믿음의 길이 있단다. 무엇보다도 
알라의 계시, 코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말로 여러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된단다.
  그리고 나서는 신자로서의 의무를 실행해야 해. 그 실행의 제일 첫번째가 
기도라고 할 수 있지. 그들의 기도는 단순해.
  '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나는 마호메트가 알라의 사지임을 
증언합니다.' 그렇게 기도한단다. 그러면서 하루 다섯번 예배를 보는 거야.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사원)에 모여야 하지. 그러니까 내가 오아시스에 들렀던 때는 이 
사람들의 예배시간인 금요일 정오였던 거야.
  그 다음에 해야 하는 것에는 '회사'라는 것이 있단다. 가진 사람은 없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서 또 여러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도록 많은 것을 희사해야 해.
  그리고 또 해야 하는 것에 내가 만났던 '라마단'이 있단다.
  밤에만 무엇을 먹을 수 있다고 했지만, 그렇다면 낮과 밤은 무엇으로 구분하면 
좋을까. 그 표준이 재미 있단다. 검은 실과 흰 실의 구분이 어려운 시간이 되면 
그때는 음식을 먹어도 좋다고 한단다.
  그렇지 않은 때, 검은 실과 흰 실이 구분이 되게 햇빛이 있는 시간에는 담배를 
피워서도 안 되고 음식을 먹어도 좋다고 한단다.
  마지막으로 회교도는 최소한 일생에 한번 성지인 메카를 순례하지 않으면 안 
된단다. 그래서 성지 메카에는 해마다 2백만명 이상의 신자들이 모여 든다. 나는 
메카를 다녀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회교도를 그래서 쉽게 만날 수 있지.
  다른 어떤 종교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도 회교의 특징의 하나야. 그렇게 해서 
'인솰라' 모든 것은 '신의 뜻이다'라고 하는 이 사람들의 신앙이 시작된단다. 최후의 
심판의 날은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회교도들도 이 최후의 심판이 올 
때의 구원을 믿으며 살아 간단다. 하루 다섯 번 예배를 드리고 라마단이 오면 
음식을 먹지 않고 메카를 순례하면서.
  하나의 어머니에게서 나온 두 아들, 마치 낮과 밤처럼 아니면 어둠과 밝음처럼 
이해해야 하는 것에 창조와 파괴라는 것이 있단다. 왠지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해 
왔다. 창조와 파괴는 하나의 어머니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가는 자동차의 불빛이 사막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또한 같은 생각을 했단다. 밤은 절망일까 아니면 내일을 위한 
창조일까.
  사막의 밤은 폐허와 같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의 극치이다. 그러나 그 
사막의 밤을 내다보고 있자면 또 한편으로 이제 거기에서는 무엇이 움트기 시작할 
것만 같고... 창조의 자궁같이 느껴지는 거야. 또 회교도들의 밤 예배 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어떤 종교나 민족과도 달리 이 사람들은 밤의 문화를 사는 
사람들이고 회교라는 종교조차도 밤과 사막이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사막이라고 
하는 빛과 밤이라고 하는 어둠이.
  생활을 보아도 마찬가지란다. 사막을 중심으로 회교국가의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이들은 낮이 아닌 밤의 문화를 사는 것이 아닌가 싶어. 라마단이 끝나고 
축제가 시작되면 밤을 새워가며 춤을 추고 노래를 하거든.
  회교도들에게 있어 밤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 어떤 종교도 낮과 밤을 생활 안에서 구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회교도들에게는 
낮과 밤이 그 율법 안에까지 존재하거든. 이들이 하루 다섯 번 올리는 기도도 해의 
움직임을 따라 그 시간이 정해져 있어. 사막이 아니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니.
  가령 우리에게 그런 율법이 있다고 하자. 깊은 산에는 어둠이 일찍 내리지만 
바닷가에는 해가 수평선으로 떨어진다. 그렇다면 산에 사는 사람들이 지키는 율법과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의 율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단다.
  그런 생각을 하며 회교도들을 보고 있자면 그것이 느껴지는 거야. 낮에는 무엇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계율만 해도 그렇다. 이 세상의 어떤 다른 종교에 이처럼 낮과 
밤이 구분하는 교리가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검은 실과 흰 실을 구별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라마단의 계율이 그것을 보여주지 않니. 밤과 
낮을 구별하는 종교...
  낙타가 사막의 여우가 가지는 삶의 지혜를 너에게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그들이 살고 있는 자연과 가깝게 적응하고 있는지도 말이다. 종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고... 사막을 오가며 끊임없이 생각했었다.
  그 땅에 가 보았을 때, 비로소 아 이곳을, 이 땅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종교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사막이 
느껴지는 회교도들의 신앙이 그랬다.
  알라신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이 이슬람교의 시작이었다. 평등이란 
무엇이겠니. 이제까지 신분의 차이를 가지고 사회를 다스려오던 지배층에게 있어 
평등이란 자신들의 이익에 대한 배반이었던 거다. 이슬람에 대한 박해도 그렇게 
시작되었어. 모든 종교가 당대의 지배층, 가진 자들의 박해 속에서 뿌리를 
내려간다는 것도 다른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단다.
  그러면서도 종교는 또 다른 종교를 용납하지 못해. 그것을 지배하려 한단다. 
인류가 저지른 많은 전쟁의 밑바닥에는 왜 종교가 깔려 있는 것일까. 종교마다 신 
앞에서의 평등을 내세운다. 종교마다 땅위의 모든 것은 하나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일까.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바이블과 코란의 싸움이 아니겠니.
  아라비아인들이 사는 땅은 뜨겁다. 그리고 사막지대가 많다. 마호메트가 
이슬람교를 이룩할 때도 그는 사막을 가로질러 가면서 싸웠었다. '한 손에는 칼, 
다른 손에는 코란'이라는 말로 우리들은 회교도를 보아 왔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사람들이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그들을 표현한 말이라는 걸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단다.
  회교도들이 부인을 여러 명 둘 수 있다는 것을 두고 그들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도 그 땅을 살고 있는 사람들과 무관할 수 없겠지.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으리라는 거다. 자신의 문화적 잣대로 남의 문화를 재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마호메트부터가 여러 번 결혼을 했고, 
죽을 때도 '아이샤'라는 또 다른 부인 옆에서 죽기는 했지만 말이다.
  마호메트를 이들은 '라슐라'라고 부르더구나. 예언자라는 뜻이 된다. 그는 
자기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많은 미망인 하디자와 결혼을 했단다. 그때까지 그는 
하디자가 하는 가게의 점원이었어. 혼자가 된 가게집 주인아줌마와 결혼을 한 
셈이지. 그 후 마호메트는 40세까지 3남 4녀 아이들까지 두며 평범하고 행복한 
생활을 했단다.
  그러던 그가 동굴로 들어가 명상에 잠기는 생활을 시작한 게 마흔 살이 
되면서였어. 그후 그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알라의 말씀을 받아 적었다고 알려져 
있다. 코란 9장에 나오는 말이다.
  그의 최초의 신자는 부인 하디자였단다.

  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땅에 신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진리가 와서 
허위를 멸했다'고 코란에 적혀 있는 서기 622년 7월 16일까지 마호메트는 많은 
전쟁을 통해 승리자로서 성지 메카에 닿게 된다. 이것이 회교력, 회교의 원년이다.
  이슬람교란 유대교라든가 그리스도교 같은 중동에서 있었던 여러 신앙을 완성한 
유일신이라는 것이 이 사람들이 주장이기는 하다. 물론 이런 종교만이 아니다. 
아라비아 사람들은 그 이전부터 돌이라든가 별 혹은 샘물을 신으로 섬기기도 
했으니까.
  여기서 떠오르는 것이 있다. 사막이기에, 사막이므로 생겨난 종교가 이슬람교는 
아닐까 하는 의문, 바로 그것이다.
  사막에서 별은 단순히 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하나의 빛으로서의 별이 아니다. 
그것은 방향이며 이정표가 아니겠니. 별을 보며 길을 찾아가는 사람에게 그것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신일 수밖에 없으니까. 똑같은 생각으로 샘물도 마찬가지다. 이 
땅에서 샘물을 잃는다는 건 죽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이 되는 거란다.
  결국 자신을 지배하는 것, 그것이 기대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게 연약한 인간이 
아니겠니.
  '동도 서도 알라의 것. 어느 쪽을 향해도 알라의 얼굴은 거기에 계신다. 골고루 
존재하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코란 속의 말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겠니. 결국 
종교란 이 땅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자에 기대려는, 그리고 기댈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가난한 마음을 토대로 한다.
  사막에 와서, 어쩌면 하늘과 땅이 가장 가깝게 만나는 듯한 이 땅에 와서 왜 
인간에게 신이 필요했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거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말이다.
  아들아.
  이제 내일이면 사막의 한가운데를 떠나 지중해 연안으로 나갈 생각이다. 
해안가로만 나무와 풀과 곡식이 자라는 비옥한 땅이 있다고 북아프리카를 상상하면 
된다.
  거기에 BC 2, 3세기경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고 하니까 들러볼 생각이다. 
모래뿐인 곳의 삶과 나무와 물이 있는 곳의 삶이 어떻게 달랐을까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한다.
  짐을 꾸리면서 문득문득 한국의 산과 강을 떠올린다. 네 계절의 변화가 옛 
우리들이 살아가기에 힘겹기는 했겠지만, 산과 강이 있는 곳의 삶이란 차라리 
은혜로운 것은 아니었을까. 시야가 트여 있는 곳에서 산 사람들과 시야가 갇혀 있는 
곳에서 산 사람들은 무엇부터 달라지는 것일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
  지친다는 뜻일까, 집이 그립구나. 잘 자거라.

    9. 파도가 때리고 가는 해안에 그 클레오파트라의 목욕통이라는 게 있었단다. 
커다란 바위를 누군가가 드넓은 직사각형으로 파냈어.

  클레오파트라의 목욕통, 거길 가자는 거야. 사막을 빠져나와서의 일이었어. 
유적지를 한두 곳만 돌아보고 이제 돌아가기로 했을 때였다. 함께 이 여행을 하며 
나를 도와주던 분이 그렇게 말하는 거야. 클레오파트라의 목욕통이 있는 데를 
갈가요, 그럼.
  사막이라는 이미지와 클레오파트라의 목욕통은, 어떻게 해도 화해 할 수 없는 
극과 극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지중해에, 바닷가에 있다는 그 목욕통.
  사막의 끝, 사막이 바다와 닿아 있는 곳 그곳에 세워진 신전과 도시를 찾아갔던 
거란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밑에서 올려다보면 거의 
절벽처럼 깎아지른 언덕 위에 있는 고대의 마을이었다. 저 밑으로는 올리브 나무가 
자라는 들판이 이어지고.
  천천히 그 돌무더기들 사이를 거닐었다. 남아 있는 몇 개의 문, 몇 개의 돌기둥... 
그리고 원형극장을.
  이런 도시국가(폴리스) 형태의 유적이 사막과 지중해가 맞닿은 해안에 세 곳이 
남아 있었다. 그들이 가지는 공통점이라면, 어디에나 돌기둥이 장중하게 둘러싸고 
있는 광장과 계단식 원형극장과 그리고 목욕탕이 있다는 점이었다.
  광장은 물론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장소란다. 그러니까 이 광장은 사람들에게 
있어 정치와 종교의 장소가 된다. 극장은, 그들에게 있어 영혼의 자리, 오락문화가 
숨쉬는 곳이겠지. 그렇다면 어디에나 빼놓지 않고 있는 목욕탕은 무엇일까. 육체의 
자리, 휴식의 공간이었을까.
  어쩌자구 그렇게 드넓고 많은 목욕탕을 그 옛날에 지었나 모르겠더라. 심지어 
냉탕 온탕까지 그 유적이 남아 있어. 온탕은 불을 때서 흙으로 구운 파이프를 통해 
그 뜨거운 온기를 불어넣어서 (우리의 온돌처럼) 목욕탕 안을 뜨겁게 만들었더구나.
  욕탕 옆으로는, 밑으로 물이 흘러가게 되어 있는 수세식 화장실까지 만들어 놓은 
곳도 있었다. 환락의 극치, 육체를 위한 공간으로 로마가 만들어 낸 것이 목욕이라는 
즐거움이었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생각도 했었다.
  그곳을 내려와 바닷가로 향했다. 지중해는, 손을 담그면 잉크빛으로 그 바다가 
손가락을 적시며 묻어날 듯이 개어 있었다. 푸르게, 파아랗게, 퍼렇게. 그러나 그 
어떤 형용사로도 그것을 그려내기에는 부족하게.
  파도가 때리고 가는 해안에 그 클레오파트라의 목욕통이라는 게 있었다. 해안에 
비스듬히 물에 잠겨 있는 아주 커다란 바위를 누군가가 드넓은 직사각형으로 
파냈어. 거기에 파도가 치면 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해. 누군가가 들어가서 풀장처럼 
썼을 듯 싶은 그런 모양이기는 했다. 어느 말 좋아하는 녀석이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클레오파트라가 여기서 목욕을 즐겼다고. 그녀의 목욕통이라고.
  그걸 어이 없어하며 내려다보고 서 있는데, 파도는 바위를 때리고, 튀어오른 
물방울이 어깨 위로 솨르륵 떨어지더구나.
  천천히 저녁이 오고, 바다와 사막이 맞닿는 곳, 그 풀과 나무와 도시들 사이로 난 
길을 천천히 돌아왔다. 이제 떠나기 위하여.
  돌아오는 내 가슴 속에도 그 고대도시가 보여준 돌기둥들이 우뚝우뚝 서는 
느낌이었다. 사막은 뿌옇게 흐려지면서 어둠 속에 잠겨 가고, 언듯언듯 보이곤 하던 
지중해도 어둠에 묻혀가고, 거리에는 여기저기 불이 켜지고 있었다.
  역사란 무엇일까.
  인간의 자취, 여기서도 사람이 살았었다오 하는 그 무엇도 남아 있는 것이 없던 
사막. 그러나 풀과 나무가 자라는 곳에는 돌로 만들어 세운 도시들이 저 세월의 
비바람에 깎여가면서도 여전히 서 있었지. 지배와 착취의 역사를 증언하면서.
  이 유적들에는 어디에나 협궤열차의 레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고대유적들, 
거대한 돌조각이나 기둥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놓았던 기차길이란다. 빨갛게 녹이 
쓴 그 작은 레일을 밟고 걸으면서,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유적들을 
약탈해 간 자는 누구인가. 그들, 유럽 사람들.
  기차길까지 놓아가며 이 돌덩이들을 약탈해 간 사람들이, 그것을 제 나라 
박물관에 진열해 놓고 문화의 우수성을 자랑한다니.
  여기에 와서 돌로 된 도시를 지었던 사람들도 그들이었다. 다만 지배자로서 
그들은 이곳 사람들을 노예로 부려가면서, 돌을 깎고 세우고 치솟게 했겠지. 그것 
또한 약탈의 역사일 뿐, 저 사막과 지중해 연안을 사는 사람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한낮 재배자의 유희일 뿐이었다. 건축 양식이 그렇고 그들이 세운 신전이 그렇다.
  유럽의 도시들을 장식하고, 문화라는 이름으로 번쩍이게 하는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아라. 그 가운데는 그들이 재배했던 나라에서 강탈해온 물건들이 넘친단다. 
대영박물관에서부터 빠리의 그 오벨리스크까지.
  저물어 가는 밖을 내다보며 내 가슴에 우뚝우뚝 서던 그 돌기둥들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저 신전에서 만났던 돌기둥들이었다.
  아들아. 너는 알겠느냐.
  결국 우리는, 기후 혹은 풍토라고 말해지는 이 자연과... 그리고 신, 그 종교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음을 이제 깨닫는 거다. 자연과 종교, 그 땅과 그 신. 그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를 둘러싼 자연과 종교 속에서 살다가... 그 신의 뜻에 
따라 누군가는 묻히고 누군가는 불태워져서 저 땅으로 사라져 간다. 그것이 
우리들이다.
  사막이 그것을 가르친다. 내게. 말없이 다만 거기 있으면서.
  돌아오는 밤길에서였다. 누군가가 내게 묻더구나.
  --'인솨알라'라는 말을 아세요?
  인솰라. 나는 어둠을 바라보며 입속으로 되뇌었다. 사막을 사는 사람들... 회교도를 
알려면 제일 먼저 만나야 하는 말. 인솰라.
  --아랍어로,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말, 아닌가요?
  --아시는군요.
  --모든 것을, 신의 뜻대로 하소서 하는 의미도 되겠지요.
  잠시 후 내가 말했다.
  --가톨릭에도 그런 말은 많습니다.
  피아트. 나는 입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단다. 가톨릭의 '피아트'라는 말도 그런 
의미지. 모든 것은 신의 뜻, 당신 뜻대로 하소서 하는 의미이니까. 그래서 자동차에 
'피아트'라는 이름을 붙일 때 그 회사에서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
  --처음엔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모든 것이 다 신의 뜻이라니. 사람이 죽어도 
신의 뜻, 낙타가 다쳐도 신의 뜻, 교통사고가 나도 신의 뜻이라니. 이런 숙명론이 다 
있나 싶었지요. 그것이 이 사람들이 가지는 삶에 대한 일종의 체념 혹은 한계는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나는 그분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젖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의식은 이 자연이 가르쳐 준 게 아닐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 가없는 모래벌판,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들을 묶어주는 신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알며 그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사막을 생활할 수가 있으랴.
  그런 생각을 했던 거다.
  문득 떠올린단다. 성서(바이블)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막이라는, 저 
황량한 공간을 거닐며 헤매본 사람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고 한 누군가의 말을.
  자연은, 그 가없는 사막에서 바라볼 때, 조금도 인간의 편이 아니다. 묵묵히 다만 
존재하는... 그 사막에서 바라볼 때 자연은 너무나 강해서 인간이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없으리라는 운명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 속에서 신은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적고 있었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단다. 이곳으로 오며 올리브 
나무와 돌산을, 그곳을 무리지어 오가고 있는 양떼들을 바라볼 때, 갑자기 내가 
구약성경의 세계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듯이 말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안에 있는 풍습에서부터 저 드높은 종교까지...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이 땅에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사막은 나에게 속삭인단다. 저 바람이, 저 
흙이, 저 햇살이 그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땅에서 태어나고 땅으로 돌아가면서, 그 사이의 긴 시간을 우리는 하늘을 
생각하며 산다.
  너와 나를 맺어주고 있는 끈 또한 그러하겠지.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가면서.

    10. 이 나라 사람들은 국기를 걸면, 그게 더러워지고 찢어져서 버릴 때까지 
그냥 걸어둬. 밤이 와도 비가 내려도.

  이 세상에서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이상한 깃발이 있다면 그건 이곳 사막의 나라 
'리비아'의 국기란다. 나는 처음에 저게 뭔가 했었다.
  우리도 복덕방이나 어떤 사무실에 가면 책상이나 탁자에 푸른 천을 깔고 그 위에 
유리를 얹어 놓은 사람들이 많지. 녹색 천 말이다. 그때의 바로 그 푸른 색이 이 
나라의 국기란다.
  아무 그림도 무늬도 없어. 그냥 퍼런 천 그것 뿐이야. 게다가 이 나라 사람들은 
국기를 걸면 그게 더러워지고 찢어져서 버릴 때까지 그냥 걸어둬. 밤이 와도 비가 
내려도. 그러니 그 퍼런 천이 얼마나 더럽고 너덜거리겠니. 또 한 장만 거는 게 
아니라 여러 장을 마치 우리가 운동회 때 만국기 걸 듯 줄레줄레 달아매서는 길 
이쪽에서 저쪽까지 늘어뜨리기를 좋아해.
  처음에 그걸 보고, 리비아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무슨 퍼런 기저귀 같은 
걸 걸레조각처럼 저렇게 늘어뜨렸나 했다. 그것도 색이 바래고 너덜너덜 찢어지고.
  그 다음에 어느 사무실에 가니까 벽에 걸린 액자 안에 그 퍼런 천이 또 들어 
있어. 아하 저기에 뭘 써넣었다가 이제 바꾸려고 빼냈나보다. 아니면 저건 그냥 
바탕색이고 저기에 무슨 구호라도 써서 넣을 모양이지. 그랬지 뭐냐.
  그런데 그 퍼런 천이 국기라지 않니. 퍼런 천 하나 걸어놓고 그게 다 된 국기래. 
무슨 일 나면 국기하나 만들기는 쉽겠다 싶었다. 퍼런 천 사다가 쭉쭉 찢어서 
들고나서면 될 테니까.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식탁 위에 이 퍼런 천을 깔고 유리를 덮거나 
비닐을 깔아놓으면 막 화를 낸단다. 남의 나라 국기를 이렇게 깔고 국물 흘려가면서 
밥을 먹을 수 있냐는 거지. 바닥에 그 퍼런 색 융단을 깔면 더 화를 내지. 남의 
나라 국기를 밟고 다니며 모욕할 수 있냐는 거야.
  그러나 왜 이렇게 푸른 색으로 국기를 만들었느냐를 생각하자면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이 사막을 사는 사람들의 비장함이 전해져 온단다. 물만 있다면 사막이 
옥토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내가 했었지.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물을 운반해서 
이 사막을 푸른 옥토로 가꾸겠다는 의지, 이 녹색혁명에 대한 의지가 국기에까지 
나타난 거야.
  사막을 푸르게. 리비아를 푸르게.
  그런 함성처럼 국기마저 아무 무늬도 형태도 없이 다만 푸른 색으로, 녹색으로 한 
그 간절함을 그렇게 해서 나는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단다. 녹색의 깃발을 줄레줄레 
걸어놓고 '리비아를 푸르게'라고 소리치고 있는 나라가 이 사막의 나라 '리비아'란다.
  그리고 또 하나, 아들아, 이 나라에는 눈여겨 보아두어야 할 것이 있단다.
  외국인은 뒤로 가. 어디에서도 같아. 내국인 우선주의라고나 할까. 모든 
사회질서나 관행 안에서 자기네 사람들을 우선한단다. '외국인은 저 뒤로! 우리 사람 
모여라'라고나 할까. 어쨌든 리비아에서만은 리비아인은 '우리 나라 만세'란다.
  비행기를 탄다고 하자. 좌석이며 순서며...그런 게 없단다. 자기네 나라 사람들을 
다 태우고 나서 자리가 남으면 외국인을 태워. 그뿐이 아냐. 이미 비행기에 타고 
앉았는데도 자기 나라 사람이 늦게 와서 비행기를 타려고 하면, 아무나 외국인 하나 
불러내서 내리라고 하고 자기네 나라 사람을 태워.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나 싶지. 
그런데 그런 나라가 이 사막의 나라, 리비아란다.
  버스는 한술 더 뜨지. 앞자리가 있어서 미리 가 앉아 있으면, 경찰이 올라와서 저 
뒤쪽으로 가라고 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뒤로 가 쭈그리고 앉으면 그 자리에 
자기네 사람을 태우질 않나... 이런 곳이란다. 내국인들끼리는 안 그래. 일단 
외국인은 자기네 나라 사람들이 끝난 후로 밀어내.
  '외국인들아, 저 뒤로 가거라' 그런 거지.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항의를 하지 왜 가만히 있느냐구? 하지. 안할 까닭이 없지. 
이곳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 정중하게, 이럴 수가 있느냐구 말을 하지. 그러면 
저쪽에서 총알이 들어 있는 기관총을 든 군인이 와서 그 기관총으로 아랫배를 쿡 
찔러. 뒤로 가라고.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을 하는데도 외국인은 맨 나중이야. 짐을 찾아들고도 
외국인은 하염없이 끝없이 그 현지사람들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려야 해.
  사막에서 만났던 감동은... 아 혼비백산, 어디론가 달아나서 돌아오지를 않고, 
무사히 이 나라를 빠져나가기나 하려나. 그 생각밖에 없어진단다. 사막에서 만났던 
귀엽게 귀 큰 여우야, 어쩌면 너를 다시 볼 날이 없겠구나.
  정당한 권리가 보장되지 않고 기본적인 질서도 지켜지지 않으며 외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건 불쾌하고 이해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나는 이런 정책이 나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제3세계의 약소국들에게는 
이건 깊이 생각해 볼 문제를 던져 준다고 말이다.
  그저 외국인이라면 뭐든지 떠받들어 모시는 그런 속없는 나라들이 또 이 지구 
위에는 얼마나 많니. 우리도 그 가운데 하나는 아닐까.
  용산의 미군기지를 생각해 보아라. 이젠 집을 지을 땅마저 모자라는 서울이다. 
그런데도 수도 한복판의 그 드넓은 땅을 외국인에게 내주고 있는 우리들이 아니냐.
  지구 위를 살아가는 여러 나라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의 특징들이 있단다. 먹고 
살아간다는 생존의 문제, 그 식량에 시달리는 나라가 없는 게 아니란다. 세계에는 
아직도 그렇게 어려운 나라들이 얼마든지 많아.
  그러나 그러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나라들에는 또다른 문제들이 엉켜 있어. 
범죄라든가 마약이라든가...성(섹스)의 혼란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그런 나라들의 
젊은이들을 만날 때 느껴지는 것의 하나가 꿈이 없다는 거야.
  풍요의 극치여서일까. 무엇을 해야 하겠다는, 그 정신이 없어. 놀고 여행하고 
노래하고... 그리고 허무해 해.
  꿈이란 별 게 아니다. 그렇게 해야 할 것, 기다릴 것을 우리는 꿈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겠니.
  세계는 너에게 열려 있어. 서울에서 부산, 강릉에서 광주까지만이 너의 세계가 
아니란다. 그 넓이를 네 젊음 안에서 살아가 달라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 사람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라는 게 있단다. 사람은 몇 
가지에서 그 어떤 동물과도 다르단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존엄성인지도 모르겠다. 
명예라든가 아름다움이라든가 약속이라든가, 그런 것들에 싸여서 우리는 살아가는 
거란다.
  예를 들어 지구 위를 살아가는 모든 동물 가운데 아마 사람만이 요리를 하는 
동물이 아닐까 싶다. 모든 동물은 그냥 있는 그대로를 먹어. 그러나 사람은 음식을 
만들어서 먹는단다. 익히기도 하고 향료를 쳐서 맛을 내기도 하면서 말이다. 다른 
동물을 잡아 먹기도 열매를 따 먹기도 마찬가지이지만 바로 거기에 인간의 남다름이 
있단다.
  그리고 사람은 차를 마신단다. 향기있는 풀로 혹은 씨앗으로 물을 더욱 향기롭게 
해서 마시는 것도 인간만이 하는 일이야. 그 모든 것이 또한 인간이 가지는 
존엄성인 거다.
  사람들이 차를 마신다는 건, 단순하게 물을 마신다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단다. 차에는 우리들이 마시는 음료로서의 의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영역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차는 크게 나누어 잎을 원료로 하는 것과 열매를 원료로 하는 것, 그리고 꽃의 그 
향기를 마시는 것으로 나뉘어질 거다. 커피는 그 열매가 될 테고 우리의 옛차인 
녹차는 잎을 물에 타 마시는 게 된다. 꽃을 재료로 한 차는 향료를 특히 많이 
사용하는 나라에서 많이 마신단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 했던 것은 홍차와 향료를 가져가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차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술의 역사보다도 길지 않을까 
싶다.
  사막의 사람들은 주로 꽃으로 된 차들을 많이 마시더구나.
  우리의 차는 옛부터 절간에서 많이 마셔왔다. 스님들이 정진을 하며 머리를 맑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져 있어.
  그런데 일본의 차도 비슷하단다. 다만 마시는 물로서 차를 생각한 것이 아니었어. 
거기에 정신을 함께 하게 함으로서 '도'라는 것으로 발전시켜 갔지. 다도에서 쓰는 
일본차는 우리가 흔히 말차라고 이야기하는 가루로 된 차란다. 그것을 뜨거운 물에 
타 마시는데, 이때 차에 거품을 내느냐 안 내느냐로 일본차의 유파가 갈린단다.
  의례나 형식을 중요시하는 일본문화답게 우리보다는 차를 마시는 격식이나 절차가 
많이 복잡하지.
  다만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일본사람들이 만들어낸 차 마시는 곳 그 '다실'이라는 
것의 크기이다. 다다미라고 하는 일본의 자리 네 개 반의 크기이다. 게다가 그 
다실로 들어가는 문은 어찌나 작고 좁은지 몸을 구부리고 기어들어가듯 가야 
한단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와 학설이 있어. 자신을 버리고 모두가 하나라는 평등의 
정신이 깃들어야 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문부터 몸을 굽혀야 하게 작게 
만들었다든가...그러나 그 어떤 주장이나 학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차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만들어낸 그 정신의 
세계란다.
  앞에 마주하고 앉아서 차를 마신다고 하는, 그 차에 정신의 영역을 얹은 
지혜야말로 사람들의 고결함이며 존엄성이 아니겠느냐.
  명예라는 것, 존엄성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기에는 네게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것을 네가 알게 될 때 비로소 너는 한 사람의 어른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때는 네가 나를 떠나 있으리라. 명예와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지를 가슴에 품고 떠나가는 네 뒷모습을 나는 막막히 바라보고 싶구나. 그때 
아버지로서의 나도 다하는 거겠지. 그 황홀한 마감을 아빠는 기다리고 있단다.

    11. 흑인들 얘기로는, 자기들은 껍질이 있는 사람들이고 백인들은 껍질을 
까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희다는 거야. 황색인종은 드문드문 대충 껍질을 까놓은 
거고.

  오늘은 새벽별을 보러 나갔었다.
  숙소를 나와 모래 위에 서서 오래오래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라보이는 별의 
숫자가 좀 작아졌고, 지난 밤보다는 좀 멀리 떠 있는 것 같고 그리고 별자리가 
옮겨가 있어구나.
  아들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 하느님이 저 별들을 가지고 장기를 두시나 보다, 그런 
느닷없는 생각이 떠오르는 거야.
  이쪽에 있던 별이 저쪽으로, 저쪽에 있던 별이 요쪽으로...그렇게 옮겨가 있는 
거였어. 흐트러져 있다고나 할까.
  어렸을 때 생각을 했다. 북두칠성의 그 국자처럼 꼬부라진 곳에 있는 별에는 바로 
옆에 또 조그만 별이 하나 있지. 그게 바라보이는 사람은 눈이 놓은 사람이라고 
해서, 여름밤이면 늘 북두칠성을 바라보곤 했지. 그래서 그 작은 별이 보이면 아 
나는 눈이 좋구나 하며 기뻐했었단다.
  오늘 새벽하늘에서 그러나 나는 그 별을 보지 못했다. 그 조그만 별이 몇 번째 
별자리 옆에 있더라 그것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 거였어. 하늘이 흐려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내 눈이 이제는 그만큼 나빠져서였을까.
  그렇게 서 있는 내게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나라 어디에서나 들리는, 
아무것도 다를 거 없는 풀벌레 소리. 찌르르르 하는 그 소리.
  서울에서도 보이는 그 별들을 이 사막의 한가운데 와서도 본다. 그리고 또 똑같은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 같다는 것,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 그것을 확인하며 가슴이 
서늘해져서 서 있었다. 내 가슴에도 새벽이 내리는 것처럼.
  사막이 가지는 절대의 평화와 고요 그리고 그 절대의 허무... 그러나 그것과는 먼 
저편에서 살고 있는 이 나라에 대해 어제는 이야기했었다. 자국인 우선주의 말이다. 
물론 이거야 법도 기본질서도 없는 야만인들의 행위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정신, 자신들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거기에는 어딘가 기품있는 자존심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게 아니었어.
  이런 나라가 된 가장 큰 이유의 하나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집권자의 
정책에서 비롯된단다. 그리고 미국과의 외교분쟁으로 지금 서방세계와는 고립되어 
있다는 데도 그 원인이 있고.
  리비아는 1951년 식민지에서 독립한 왕국이었다. 그런 나라였는데, 69년 국왕이 
외국여행중에 가다피가 이끄는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단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자들이 다 이렇단다. 공공의 것을 제것처럼 아는 권력에 눈 먼 
자들.
  사람이란 결국 두 가지에 의해서 살아간단다. 동물과 열매. 이렇게 말하는 게 
가혹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현실이 그래.
  사람이라는 우리들도 결국은 동물을 잡고 식물의 열매를 따서 먹으며 살아가는 
거야. 쌀도 과일도 식물의 열매이듯이 우리가 먹는 고기라는 건, 우리가 잡은 
동물이니까.
  생선을 좋아해서 늘 회를 먹는 내 친구는 그래서 어느날 이렇게 중얼거렸단다. 난 
아마 이 다음에 용궁으로 끌려가서 혼날 거야. 생선을 이렇게 많이 먹었으니.
  동물을 잡아먹고 열매를 따먹는다는 식으로 생각할 때, 이 나라는 자연조건에서는 
그렇게 가혹할 수 없는 나라다. 국토가 리비아 사막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씨를 
뿌려 무엇을 기를 수 있는 땅이 겨우 국토의 1.4퍼센트밖에 안 된단다. 더구나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은 국토의 6.8퍼센트밖에 되지 않아. 다른 땅은 사막 그리고 
불모지야. 무엇보다도 사람은 물이 없어서는 살지 못하니까.
  저 옛날, 그 어느 때에 그곳에 물이 흘렀던 자리가, 강처럼 파여 있는 곳이 지금도 
사막 여기 저기에는 눈에 띈단다. 물이 흘렀던 모습은 아직 남아 있지만 그러나 
지금은 다만 메마르고 움푹 파인 계곡이 되어 있지. 이런 곳을 '와디'라고 부르는데, 
이곳을 지나가자면, 그 어느 땐가는 여기에서 사람들이 살았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단다. 참 막막한... 부질없는 생각의 부스러기들이지.
  모래벌판에 내려 쪼이는 햇빛, 밤이면 급격하게 내려가는 기온, 몰아치는 
모래바람... 그 속에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는 거란다.
  이 지구 위에서 가장 더웠던 기록이 몇 도인지 아니. 이 기록을 가지고 있는 곳이 
또 리비아 사막이란다. 섭씨 58도였대. 섭씨58도의 더위 속에 무엇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는 건 또 부질없는 짓이지. 강물이 흘렀던 자리 '와디'를 바라볼 
때의 느낌이나 다를 게 없어.
  이 사막이 사람들에 의해서 최초로 탐험된 게 1819년이라니까... 3.1 독립운동이 
나기 꼭 100년 전이구나. 그러나 그때도 리비아 사막의 서쪽을 횡단했지 그 
중앙부를 건너가지는 못했어. 서쪽이란, 트리폴리라는 이 나라의 수도가 있는 곳에서 
아프리카의 서쪽을 건너갔다는 뜻이란다.
  아직도 이 사막의 중앙부는 신비의 깊은 못, 영원한 침묵 속에 있단다. 누구도 
그곳을 횡단한 사람이 없으니까.
  한낮에는 섭씨 40도 50도까지 올라가는 기온이 밤이면 영하 20도로 떨어지는 이 
급격한 기온의 차는 결국 사막을 더욱 사막화시키는 작용을 한단다. 이러한 기온의 
격변과 그 반복은 암벽의 붕괴를 더욱 빠르게 해서 더 많은 사막의 모래를 만들어 
가는 거지.
  196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리비아의 가다피는 이후 여러 가지 정치제도를 
바꿔가면서 국가 최고 통치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해왔다. 수도인 트리폴리에서 
박물관을 찾아가다가 그가 산다는 관저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최고 
통치자의 관저라기보다는 전쟁중인 벌판의 사령부 같았다.
  온 건물 주변이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군일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거대한 대포와 
장갑차까지 눈에 띄었으니까. 무엇이 두려워서 저토록 경계를 하며 저 속에 갇혀서 
살고 있는 걸까 싶었다. 어쩐지 그곳이 오히려 감옥처럼 생각되었거든.
  가다피가 집권한 이후 리비아는 아랍민족주의와 이슬람 사회주의를 국가정책으로 
해왔다. 아랍 민족의 단결을 그래서 그 어느 아랍국가보다도 더 강조하는 나라가, 
리비아란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큰 공장이라든가 큰 
상점까지가 전부 국유화되어 있지.
  그러나 여기에도 자본주의의 물결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인지, 최근 사유재산을 
인정하기 시작했단다. 길거리 여기 저기에 상점들의 건축공사가 한창인 것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로 말하자면 고속도로 휴게소쯤으로 생각하면 좋을까. 그런 건물들도 많이 
들어서고 있었어. 사막 한가운데에 마치 콘테이너를 하나 세워놓은 듯이 네모난 
건물들이 서고, 조금은 시원하게 느껴지라는 장식이겠지만 갈대 같은 걸 꽂아놓고 
거기서 음료며 간단한 음식을 판단다.
  사막이, 낙타를 탄 대상들이 모래언덕을 넘어가는 그런 모습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이 바뀌어 가고 있는 거지. 끝없이 뻗어 있는 아스팔트 길과 불타는 햇볕 속에 서 
있는 휴게소와 자동차의 행렬로... 그렇게.
  이 나라는 1970년 3월 영국의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6월에는 미국을 내쫓으면서 
친소 정책을 펴 왔단다. 중동지방이 전쟁에 휘몰렸을 때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강경하게 석유를 무기화하자는 주장을 했던 나라도 리비아란다.
  그래서 아랍 여러 나라 가운데서는 가장 온건하고 친미노선을 유지해온 
이집트와는 두 번이나 단교를 했던 나라가 또 리비아란다. 그런데 왜일까. 이런 
군사정권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일수록 이상스레 공무원의 부패가 코를 찌른단다.
  사막 한가운데서 검문소를 통과할 때였다. 운전을 하던 사람이 차를 세우더니 
트렁크에서 모기약, 에어스프레이로 치익 뿌리는 모기약 말이다, 그걸 한 통 가지고 
내리는 게 아니겠니. 말하자면 그게 뇌물이야. 뭔가 구실을 붙여서 지나가는 차량을 
괴롭히기 때문에 그렇게 모기약이라도 하나 주어야, 손가락을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착 꼬부리면서, 통과! 하고 말하거든.
  한 사회의 부패라는 것은 그렇게 인간성을 말살시켜 가는 거란다. 그들은 아무 
죄의식도 없어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모른단다. 군사정권 아래서 청춘을 
보내야 했던 내 지난날을 그 사막의 한가운데서 생각한다는 건 참 많이 괴로운 
것이었단다.
  아빠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 5.16이라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교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학교 앞길을 무장을 한 차들이 종일 달려가고, 그리고 
며칠 후 담임선생님은 말했어. 모두 이것을 외워라.
  그게 혁명공약이라는 거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이 국민한테 내세운, 
거짓말의 금실로 수놓았던 그 말들, 그것을 외우면서 아빠의 젊은 날들은 
폭압정치에 짓눌려 갔던 거란다.
  쿠데타라는 이 프랑스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도 모를 때였다. 그렇게 해서 
삼십년의 세월이 가버린 거란다.
  그 세월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의 자유가 규제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고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권리인 유린이 아무 두려움없이 횡행한 그런 
세월이었다. 아버지 세대들은 그 속에서 신음하고 쓰러지고 상처받으며, 무엇을 
기다렸던가.
  그 속에서도 꿈과 믿음을 잃지 않으려고 잠 못 이루던 나날들... 너희들에게만은 
이런 세상을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가. 누구는 잡혀가고 
누구는 끌려가고...그러나 한 사회란 그렇게 그늘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어둠 때문에 오히려 양지를 사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그들에게서는 낙원이었겠지. 
부패의 빵으로 배를 불리며 부정의 잔을 들어 건배를 하며 그들은 영화로운 그 
세상을 기뻐했겠지.
  아들아,
  네가 더 커서 아빠가 산 현대사를 이해할 때가 있기를 바란다. 어떤 죄악이 
거기에 있었으면, 어떤 눈먼 자들이 국가를 제것처럼 유린했는지는 그때 네가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만 지금 아빠가 말해주고 싶은 것은, 그렇게 해서 인간이 인간을 
혐오하는 시대를 그들이 만들었다는 점이다.
  사람이란 무엇을 사랑하기 위해서 산다. 그것이 다른 어떤 사람이어도 좋고, 
아니면 발견하기 위해 찾아나서는 진리여도 좋고, 작은 희생이나 봉사여도 좋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사랑이란다. 그러므로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를 혐오해서는 
살아갈 수가 없단다. 그러나 그들, 군사정부를 만들어 간 자들은 우리가 끊임없이 
누군가를 혐오할 수밖에 없이 만들었던 거다.

  크게 나누어 인류는 세 가지의 피부를 가진 사람들로 나뉘어지지 않나 싶다. 
우리가 흔히 서양사람이라고 말할 때의 흰 색, 흑인들의 검은 색 그리고 동양인의 
황색 피부가 그것이다. 물론 아주 검은 것이 아니라 약간은 검은, 인도나 
아랍사람들의 피부도 있지만 말이다.
  피부를 가지고 여러 가지 재미 있는 이야기가 있다. 가령 백인들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자랑하기 위해 지어낸 말 가운데는 창조주가 인간을 구워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창조주가 인간을 흙으로 만들어서 구워낼 때 아주 잘, 제대로 구워낸 게 하얀 
백인이고 황인종은 조금 탄 상태이며 흑인은 아주 타서 검뎅이가 되어 버렸다는 
우스개이다.
  그런데 피부색깔을 가지고 흑인들에게는 더 재미 있는 말들이 있단다. 그들은 
창조주가 구워낼 때 색깔이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란다.
  흑인인 자기들은 껍질이 있는 사람들이고 백인은 껍질을 까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희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황인종은 껍질을 듬성듬성 깐 
상태라고 해도 좋겠지. 껍질이 있는 온전한 상태가 자신들, 흑인이라는 거야.
  신이 잘 구워낸 물건이라고 말하는 백인들의 농담과 자신들은 껍질이 있는 완전한 
인간이기에 검은 것이고 백인들은 껍질을 벗겨놓은 사람들이라는 우스개를 되씹어 
보자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인류는 하나. 혹은 모든 인류는 형제라는 말이다.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 말을 거꾸로 놓으면 의미가 아주 
이상해진다는 거란다. 모든 인류는 형제라고 할 때는 아무것도 우스꽝스러울 게 
없다. 그러나 이 말의 앞뒤를 바꾸어 보자. 모든 형제는 인류다, 라고 말이다. 
이러면 갑자기 말이 되지를 않아. 모든 형제가 인류라니.
  이 사막을 떠돌며 많은 생각을 했지만 끝내 의문으로 남는 것이 있었다. 정말로 
모든 인류는 형제일까. 인류는 하나이면서도 또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곳이 지금 '라마단'이라고 하는 회교도들의 금식 기간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불편을 생각하면서도 그런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단다. 라마단이란 회교도들이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 기간을 부르는 이름이다. 저녁에 해가 지고 
나야 음식을 먹어. 물론 여기에는 단순하게 음식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란다. 
금식, 금욕 그리고 행락을 삼간다는 것도 포함이 돼.
  금식과 금욕으로 스스로를 자제하며 헐벗은 이웃을 생각하자는 이 '라마단'은 
그러나 낯선 이방인에게는 그렇게 힘든 나날일 수가 없단다. 우선 굶는다는 
것만큼의 형벌이 어디 있니.
  물론 호텔 같은 곳에서는 아침을 판단다. 회교도가 아닌 사람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면 되지. 그러나 점심을 먹을 곳이 없단다. 햄버거 같은 걸 호텔 주방에 
부탁해서 싸가지고 차에 싣고 사막으로 떠나야 하는데... 거기서 또 문제가 되는 건 
어디서 먹느냐는 거란다.
  먹을 곳이 없어.
  숲이 있을 리 없고 강가가 있을 수 없지 않니. 모래벌판 어딘가에 차를 세우고 
이제는 그 더위 때문에 말라 비틀어진 햄버거를 씹어 먹어야 하는 것이 라마단을 
맞는 외국인들의 모습이란다.
  그것까지는 좋다고 하자. 그렇게 먹고 있다가 이곳 사람들에게 들키기나 하면 
그때부터는... 이건 지옥이란다. 먹을 때는 개도 안 때린다는 건 우리에게나 있는 
이야기지. 긴 막대기를 들고 쫓아오지를 않나, 돌을 던지지 않나.
  라마단 기간의 어느 공항에서 자기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다가 옆에 있는 회교도에게 따귀를 맞은 사람도 있어. 느닷없이 옆 사람에게서 
따귀를 얻어맞을 때의 그 외국인의 얼굴을 상상해 보아라.
  이 라마단이 한 달간 계속된단다. 이 기간이 끝나면 집안의 누이들은 오빠나 
동생들의 손에 희게 무늬를 그려주고 모스크에서는 대규모의 기도회가 열린단다.
  라마단 기간만이 아니다.
  하루 다섯 번을 올리는 이 사람들의 기도를 나는 사막을 오가며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타고 가던 차를 세우고 융단 하나를 사막의 그 모래벌판에 깔고 가족이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만났었다.
  그때는 마침 저녁 무렵에 모래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을 때였다. 앞이 거의 안 
보이는 그 속에서 차를 세우더니 가족들이 내리는 거야.
  메카가 있는 쪽, 그러나 지금은 그냥 모래바람뿐인 벌판을 향해 온 몸을 바닥에 
대며 몸을 엎드리는 그 가족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겠니. 이런 믿음 이런 
종교마저 없었다면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 사막을 살아낼 수 있었으랴.

  독재자의 나라가 어떻게 사람을 '웃기는가'를 이야기 하자면, 리비아의 박물관을 
빼놓을 수 없겠지. 어느 나라에 가든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동류의식 
속에서 박물관을 찾아가곤 했던 게 내 여행이었다.
  그래서 사막을 빠져나와 리비아의 수도로 들어섰을 때, 박물관엘 갔단다. 그런데 
이일을 어쩌면 좋니.
  멀쩡하게 남자 여자 그려놓고, '젠틀맨', '우먼'이라고 써놓았기까지 했는데, 층마다 
화장실은 문이 잠겨 있는 거야. 3층에서 '문이 잠겼네요. 어디엘 가야죠?' 그러면 
한층 위를 가리키거나 한층 밑으로 내려가래. 그 말을 듣고 올라가거나 내려가서 
직원한테 물으면 거기서 똑같은 말을 해. 똑같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또 
올라가거나 내려가래.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월급타는 사람들이 이러는 거다.
  처음에는 손을 닦으려고 화장실을 찾았는데, 나중엔 정말 일을 보아야 하게되지 
않았겠니. 맨 밑, 입구에 가면 거기 매점도 있어 보이던데... 그러면서 내려왔어.
  '층마다 화장실이 잠겼던데... 어딜 가야 합니까?'
  손으로 가리키더라. 저쪽으로 가라고. 거기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또 잠겨 있어. 
참고 이해하는 데도 그 한계라는 게 있지 않니. 마음 같아서야 발길질이라도 하고 
싶은 걸, 꾸욱꾸욱 눌러가면서 다시 입구로 가서 말했지.
  '저기도 잠겨 있는데요.'
  그때 들려온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아니.
  '밖으로 나가시죠.'
  밖에 따로 화장실이 없다는 건 들어올 때 이미 알았던 거야. 이것이 
국립박물관이고, 그곳의 관리들이었단다. 미개라든가 야만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기로 
한다. 화장실 문을 열어놓으면 청소를 해야 하니까 아예 닫아걸고 있는 거였으니까.
  이 박물관엘 가면 저쪽 박물관 책을 팔고, 저 박물관엘 가면 또 자기네 박물관 
책은 없고 저쪽 거를 팔고... 영어로 된 거 없어요 하면 불어로 된 거 꺼내놓으며 
이거라도 가져가라고 하고.
  도시로 나와서 이런 일들을 몇 차례 당하고 났을 때, 나는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고 싶구나. 저 모래벌판...사막으로. 그 정적의 평화 속으로. 아, 
사막은 폐허였던가. 원형이었던가, 나에게.
  아들아.
  남은 엽서 몇 장에 너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엽서는, 모자라면 다시 사면 되지만 우리들의 삶이란, 시간이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수가 없단다.
  잘 자거라.

    12. 이 세상에는 아주 특이한 죽음이 두 가지가 있단다. 자살과 순교가 
그것이다.

  떠나는 일, 헤어지는 일. 이것 또한 작은 죽음들이란다.
  이제 이 사막의 나라를 떠나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과도 헤어져야 한다. 
작은 죽음들이 그렇게 나에게도 다가와 있다. 다가오고 있는 이별을 생각하며 문득 
떠올린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죽음 가운데는 아주 특이한 죽음이 둘 있다고. 자살과 
순교가 그것이지.
  이 죽음에 공통점이 있다면, 자기 의지로 죽는다는 거란다. 병도 사고도 전쟁도 
인간을 자기 의사로 죽게 하지는 않아. 죽음이 찾아와서 그렇게 실려가는 거란다. 
저 무한의 폐허 속으로. 아무도 그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아직은 모르는 그곳으로.
  그러나 둘 다 자기의사로 선택하는 죽음이기는 한데 자살과 순교는 또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단다. 자살자는 자기만 생각해. 그의 죽음에는 자기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나 아닌 다른 것이 그에게는 없다는 뜻이야. 그런데 순교자에게는 
내가 없어. 그는 나 아닌 다른 것만을 생각해. 그에게는 내가 없는 거야. 한쪽은 
남이 없고, 한쪽은 내가 없는 죽은이라는 말이다.
  또 하나 아주 다른 것은, 순교자의 죽음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죽음이야. 
그로부터 무엇인가가 새롭게 시작할 것을 그는 믿는단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러나 자살자는 그것으로 해서 모든 것이 끝날 것만을 믿을 뿐이야. 다만 무엇을 
끝낼 뿐이다.
  순교자는 자기를 버림으로서 궁극적으로는 다른 무엇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들을 기리면서, 순교자에게 바치는 존경에는 바로 이런 
마음이 담겨 있는 거다. 그들은 죽음으로서 새롭게 무엇을 시작했다는 그 정신의 
고결함을 말이다. 그러나 자살자는 다만 파괴할 뿐이란다. 그와 그의 주변을 감쌌던 
모든 관계들을 말이다.
  하루하루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이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의 오늘은 순교의 
하루였나 자살의 하루였나 하고 말이다. 우리의 하루하루도 하나의 끝이고 
시작이란다. 그러므로 그것 또한 작은 죽음인 거야. 네 오늘은 순교였을까 
자살이었을까.
  헤어진다는 것은, 작은 죽음. 떠난다는 것 또한 그렇다.
  헤어지는 것이 사람과의 이별이라면 떠난다는 것은 장소와의 이별이겠지.
  시간처럼 이 공간도 그렇다. 시간은 끊임없이 사라지지만, 테네시 윌리엄스의 
말처럼 손목시계는 '상실, 상실' 하면서 째각거리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공간만은, 이 
땅만은 언제나 거기에 그렇게 있을 것을 믿는다. 고향은 그렇게 해서 우리들에게 
굳건하다.
  그러나 정말로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아니란다.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 
공간도 함께 사라지는 거란다. 다음에 다시 그곳을 찾는다 해도, 이미 그 공간은 옛 
그 자리는 아니란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짐을 꾸려야 하는데, 정리해야 할 게 많은데...그런 
생각만 가득할 뿐,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다. 떠나야 할 일들이 두렵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부터의 출발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인데도 
말이다.
  떠난다고 하는 건 무엇일까. 하나의 장소에서 하나의 장소로의 이동, 그렇게 
단순화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떠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어쩐지 식물성이 
된단다. 떠난다는 게 나는 언제나 나이테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란다.
  단순한 여행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느 쪽이 행복한 삶인지는 말하지 말자. 다만 태어난 그 땅에서 살다가 거기 
묻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혼의 
할례'처럼 아니면 곤충이나 파충류가 허물을 벗듯이, 그렇게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지. 어떤 운명을 사는 가는 자신이 선택하는 거란다. 애벌레가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어 부화해 가는 그 과정에 고향을 떠나야 하는 의식이 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그가 화려한 날개를 하고 떠나가기만 하는 건 
아니란다. 이내 잡혀 죽는 좌절이 없는 게 아니란다.
  그러나, 많이 떠나거라. 그렇게 해서 네 정신의 나이테가 굵어진다면 언제나 
떠나거라.
  떠나는 것이 배반이 아니라면, 떠나거라.
  떠나는 것이 도피가 아니라면, 떠나거라.
  그것이 오히려 문제를 피해가는 게 아니라 너 자신과 맞서는 길이라면, 언제든 
떠나거라.
  떠난다는 건 안락을 버리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낯익은 것들과의 
이별이니까. 서럽고 고달프게 혼자가 되어야 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떠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다만 장소만이 아니다. 네 영혼이 
짓무르고 있고, 안락의 먼지가 쌓이고, 편안함의 이끼가 자라거든 언제나 스스로에게 
속삭일 수 있어야 한다. 자, 이제 떠나야 할 때야 하고.

    13. 잘 있거라. 사막이여. 네 안에서 행복했었다. 그리고 이제 떠난다.

  마지막 날 아침이다. 어제 늦게 잠이 들었었는데, 잠깐 눈을 붙였었는가. 밖에서 
들려오는 회교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소리, 이제는 어느 새 낯설지 않은 그 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닭우는 소리도 다가왔다.
  밖으로 나아갔다. 밤새 내려간 기온이 섬뜩하게 목덜미에 와 닿았다. 아침에는 
언제나 조금은 추위를 느끼게 기온이 내려간다.
  아직 해가 뜨려면 먼 새벽이었다. 기온만 내려간 게 아니라, 살갗에 와 닿는 
새벽바람에 습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마치 밤새 비라도 내렸던 것처럼.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제 밤 바라보았던 그많은 별들은 이제 없었다.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띄엄띄엄 흩뿌려진 별이 조금 바라보였다. 별자리들도 많이 변해 있었다.
  마치 그 별들을 가지고 밤새 신들이 장기라도 둔 것 같다고 했었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별자리들은 장기판의 말들이 옮겨가 있듯이 여기 저기 어제밤과는 
다르게 흩어져 있었어. 그리고 서로의 별들을 다 따먹은 걸까 싶게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단다. 마치 다 끝나가는 장기판처럼 말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 있었다. 오늘은 육로로 종일 
달려서 국경을 넘어가야 한다. 그렇게 이 나라를 떠나 낯선 옆나라에서 하루를 자고 
공항으로 나가는 게 내 일정표이다.
  맑고 투명한, 차갑게 가라앉은 새벽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내가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늘 영원이라는 말을 쓴다. 무한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무한한 것, 영원한 것... 그것을 우리는 언제나 가치있는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곤 한다. 영원이란 게 뭘까.
  아닐지도 모른다. 영원이란, '다시...'라든가 '언젠가는...'이라는 약속이 없는 
헤어짐인지도 모른다. 다시 만날 그 언제가 없는, 그것이 영원이 아닐까.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그 실현이 없는 헤어짐, 그것이 영원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 새벽에 나는 하나의 영원을 치르어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다시 이 땅엘 올 것인가.
  어쩌면 이 헤어짐은 영원인지도 모른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그 언제라도 
이곳에 올 수 없는.
  참 많은 영원을 거치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었던 것을!
  헤어진 사람, 그후 다시는 만나지 못 한 사람, 어디에서도 다시는 내가 바라볼 수 
없는 사람, 사람, 사람들. 그 많은 영원들, 나를 스쳐간 헤어짐들.
  사막이 나에게 가르친 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내 살아온 나날 속에 있는 많은 헤어짐처럼, 그래서 저 하늘 어딘가에 찍혀 있을 
작은 점 하나처럼 사라져간, 그 작은 영원들을 생각하며 사막을 내다보았다. 저 
가없는 벌판 그 허무가 내게 가르친 건 무엇이었을까.
  한국인이기에 할 수 있었던 깨달음도 있었단다. 그건 말을 바꾸면, 아 나는 
이제까지 산에 갇혀서 살았구나 하는 놀라움이었단다.
  바다를 본 게 소년기를 넘어설 무렵으로 늦었으니까, 어쩌면 나는 산에 갇혀서 
자란 게 된단다. 언제나 해는 산에서 뜨고 산으로 졌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산을 넘어서 사라져갔고, 어딘가에서 오는 사람은 산을 넘어서 마을로 들어섰단다.
  그리고 지평선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단다. 눈이 가 닿은 가장 
높은 곳에는 산이 있었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건 언제나 산이었어. 시야는 언제나 
산으로 가려지고, 해는 언제나 그 너머로 넘어가고 또 떠올라왔어. 광활함이라는 
형용사는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준 게 없었단다.
  사막에 와서, 그 어디에서도 막힘이 없는 광막한 모래의 바다에 서서, 아무것도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는 그 무한함 속에 서서 비로소 그런 생각을 했단다. 
그랬었구나. 나는 산에 갇혀 태어나고 자라고 이제 늙어 가겠구나.
  지평선이 없는 땅에서 살았던 거란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달라진 게 없다. 
고속도로를 달려도 눈길이 가 닿는 곳에는 어디에나 산이 있다. 산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길을 달린다. 한강엘 나가 보아도 마찬가지다. 어디를 바라보아도 거기에는 
산이 가로막고 있단다. 아니, 둘러싸고 있다고 말해야겠지.
  신이 없는 땅에서 살았구나 하는 깨달음도 있었다. 신이 없어도 좋은 땅에서 
자랐다고 말해도 되겠지. 사막에 와서, 이 거대한 자연의 두려움 앞에서 왜 신이 
있어야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제 잊어야 할 시간이다. 살아가면서 많은 것과 헤어져야 하듯이 또 
그렇게 우리는 많은 것을 잊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슬픔만이 
아니다. 기쁨도, 복받치는 감동도 조금씩 조금씩 잊으면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단다. 
내일은 늘 새날이니까.
  잘 있어라.
  가만히 그렇게 말했다. 새벽 어둠 속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막을 향해. 아니, 
여기에서 행복에 감싸였던 나를 향해.
  잘 있어.
  잘 있거라. 사막이여. 네 안에서 행복했었다. 그리고 이제 떠난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이런 헤어짐에 눈물겨워 하지는 않으리라. 다만 오래오래 네가 내 안에 남아서 
살아 있기를 바란다. 뒷곁 어딘가에 이끼가 자라듯, 그렇게 네가 내 가슴의 
어딘가에서 푸릇푸릇 살아 있기를 바라면서, 이제 헤어짐을 받아들인다.
  마지막으로 노트에 그렇게 적고 나서 취재가방의 지퍼를 잠갔다.
  아들아.
  그렇단다. 어느 날 문득 내 안에서 살아 있는 사막이 말하지 않을까. 저 
지평선으로 떨어지던 저녁해를 기억하려므나... 하고 말이다.
  모래바람을 맞아 몸을 엎드리던 낙타가 생각나니? 그렇게 어느 날 사막은 내게 
속삭일지도 모른다.
  그 양치기는 어디에 갔을까. 어느 도회로 나가 자동차 수리공이라도 되진 
않았을까. 그의 검고 깊었던 눈을 떠올리며, 모포를 뒤집어 쓰고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던 양치기를 생각하기도 하겠지.
  또 잊지 못하겠지. 커다란 귀를 하고 미동도 없이 모래굴에서 나를 올려다보던 
사막의 여우, 그이 반짝이던 눈빛도.
  그 모든 것은 남아서, 내 안에 또 하나의 사막으로 살아 숨쉬겠지.
  나와 함께 이 사막을 떠돌며 모래바람을 맞고, 별을 바라보던 그 사람들을... 
그들도 또 하나의 사막으로 내 기억의 뜨락에서 언제나 서성거려 주겠지.
  아들아.
  우리가 한없는 것을 사랑함은 우리 자신이 유한하기 때문이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내일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내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헤어져 
사라지는 것들만이 영원일 뿐, 우리는 다만 무엇무엇의 앞에 혹은 무엇무엇의 뒤에 
살고 있을 뿐이란다. 그 사이에.
  나는 너희들을 낳고 기르면서, 그러나 너희들이 살아갈 세상이 아빠가 산 
세상보다 더 아름답고 좋은 세상이 되리라는 믿음이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그가 사는 세상은 가장 나쁜 세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말을 마지막으로 쓴다.
  내가 늘 말해 왔듯이 언제나 뜻을 가지고 살아가다오.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 높이 오르기 위해서도 아니어야 한다. '인간은 자유다'라고 하는 그 뜻을 
살아가야 한다.
  잘 있으렴, 사막이여.
  겪어도 겪어도 길들여지지 못하고 힘든 건 헤어짐이었던 것을.
  지금 내 안의 사막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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