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고전 명작들에는 대단한 위상을 자랑하는 책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빨간 머리 앤』이 가지는 위상과 가치는 매우 특별하다. 가장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랑스러움과 매력도가 줄어들거나 퇴색하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고 강해져 가는 독특한 소설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낡은 신발짝 같은 신세가 되지만 아무리 암담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원전 속 오리지널 ‘빨간 머리 앤’ 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나오는 현대판 ‘단발의 빨간 머리 앤’은 매 순간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주위에 ‘용기 바이러스’를 퍼뜨리며 독자에게 감동과 행복을 선사한다.
삶의 용기가 필요할 때 읽어야 할 빨간 머리 앤
▣ 저자 루시 모드 몽고메리
1874년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섬의 클리프턴 마을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우체국을 경영하는 조부모 손에 자랐다. 샬럿타운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 대학과 핼리팩스 댈하우지 대학에서 공부한 뒤 교사가 되었다. 스물네 살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외할머니를 위해 캐번디시로 돌아와 우체국 일을 도왔다. 틈틈이 글을 써서 잡지에 시와 소설을 발표했으며 신문 기자로도 활동했다. 18개월 만에 완성한 『빨간 머리 앤』 원고를 우여곡절 끝에 보스턴 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수많은 독자 요청에 따라 후속작도 썼다. 첫 작품『 빨간 머리 앤』의 성공 이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1935년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 년 토론토에서 타계했으며, 캐번디시의 묘지에 묻혔다. 평생 20여 권의 소설과 1권의 시집을 남겼다.
▣ Short Summary
세계 고전 명작들에는 대단한 위상을 자랑하는 책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빨간 머리 앤』이 가지는 위상과 가치는 매우 특별하다. 가장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사랑스러움과 매력도가 줄어들거나 퇴색하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고 강해져 가는 독특한 소설이다.
『빨간 머리 앤』을 유난히 사랑하는 독자 중에는 이런 궁금증을 품는 이도 있지 않을까. ‘100년도 더전에 프린스에드워드섬에 태어나 아무리 절망적이고 비참한 상황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는 긍정 마인드로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었던 앤 셜리가 2019년 바로 오늘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어떤 말과 행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한 번쯤 이런 궁금증을 가져 본 독자라면 이 책에서그 궁금증을 해소하게 될 것이다. 이 책에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원작 『초록 지붕 집의 앤(Anne of Green Gables)』의 내용이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문장으로 완역되어 수록돼 있다.
111년 만에 다시 태어난 ‘빨간 머리 앤’. 그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선, 달라진 헤어스타일이 눈에 들어온다. 1908년생 원전 속 ‘빨간 머리 앤’은 양 갈래 땋은 머리를 하고 있지만, 2019년생 ‘빨간 머리 앤’은 그라폴리오 인기작가 출신 깨깨 작가의 탁월한 그림, 글 솜씨에 힘입어 산뜻한 단발머리에좀 더 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고난을 단숨에 친구로 만들고, 절망도 희망으로 바꿔 버리는 긍정의 아이콘으로서의 앤의 면모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낡은 신발짝 같은 신세가 되지만 아무리 암담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원전 속 오리지널 ‘빨간 머리 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대판 ‘단발의 빨간 머리 앤’은 매 순간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주위에 ‘용기 바이러스’를 퍼뜨리며 독자에게 감동과 행복을 선사한다.
- 2 -
▣ 차례
1. 레이철 린드 부인이 놀라다 2. 매슈 커스버트가 놀라다 3. 마릴라 커스버트가 놀라다 4. 초록 지붕 집에서 맞이한 아침 5. 앤의 이야기 6. 마릴라가 마음을 정하다 7. 앤이 기도하다 8. 앤의 교육이 시작되다 9. 레이철 린드 부인이 기절초풍하다 10. 앤이 사과하다 11. 앤이 주일 학교에서 받은 인상 12. 엄숙한 맹세와 약속 13. 기대하는 기쁨 14. 앤의 고백 15. 학교에서 일어난 소동 16. 다이애나를 초대했지만 비극으로 끝나다 17. 새로운 재미가 생기다 18. 앤이 생명을 구하다 19. 발표회, 큰 실수, 그리고 고백 20. 지나친 상상에 혼쭐이 나다 21.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다 22. 앤이 목사관에 초대받다 23. 앤이 자존심을 지키려다 사고를 당하다 24. 스테이시 선생님과 학생들이 발표회를 준비하다 25. 매슈가 퍼프소매를 고집하다 26. 이야기 클럽을 만들다 27. 허영심과 마음고생 28. 불행한 백합 아가씨 29. 앤 인생의 획기적인 사건 30. 퀸스 대학 입시반이 생기다 31. 시내와 강이 만나는 지점 32.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다 33. 호텔 발표회 34. 퀸스의 여학생 35. 퀸스에서 보낸 겨울 36. 영광과 꿈 37. 죽음이란 이름의 신 38. 길모퉁이에서
- 3 -
삶의 용기가 필요할 때 읽어야 할 빨간 머리 앤
초록 지붕 집에서 맞이한 아침
잠에서 깨어난 앤은 침대에 앉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창밖을 멀뚱히 내다보았다. 벌써 환한 대낮이었다. 상쾌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밖으로 하얗고 깃털 같은 것들이 파란 하늘을 가로질러 흩날렸 다.
앤은 순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잊었다. 처음엔 아주 좋은 일이 있었던 듯 짜릿한 설렘이 몰려왔다.
금세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여기는 초록 지붕 집이고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나를 원하지 않았어! 하지만 어김없이 아침이 왔고 그래. 창밖에는 벚꽃이 만발했지, 앤은 침대 에서 뛰쳐나와 방을 가로질러 창가로 갔다. 창문을 들어 올리는데 오랫동안 닫혀 있었는지 뻑뻑하고 삐걱거렸다. 창은 꽉 끼어서 무엇인가로 받쳐 두지 않아도 괜찮았다.
앤은 무릎을 꿇고 6월의 아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눈이 찬란한 기쁨으로 반짝였다. 아, 정말 아름다워! 너무나 멋진 곳이야! 이런 곳에서 살 수 없다니! 앤은 여기서 사는 걸 상상해 보았다. 상상할 거리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밖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벚나무가 무척 가까이 있어 나뭇가지가 집에 거의 닿았고 꽃이 가득 피어나 잎은 보이지도 않았다. 집 양옆 큰 과수원의 사과나무와 벚나무도 꽃을 흐드러지게 매달았으며 풀밭은 민들레 천지였다. 아래쪽 정원에서 자줏빛 꽃을 피운 라일락의 짙은 향기가 아침 바람을 타고 창가로 밀려왔다.
정원 아래로 클로버가 뒤덮은 초록 들판이 골짜기까지 비스듬히 이어지고 시내가 흐르는 골짜기에는 하얀 자작나무 수십 그루가 서 있었다. 덤불 속에는 고사리와 이끼, 숲 속의 수많은 식물이 덤불 위로 살그머니 뻗어 올라 있을 것이다. 그 너머 언덕은 가문비나무와 전나무의 초록빛 깃털 같은 잎으로 뒤덮여 있고 그러한 풍경 사이로 반짝이는 호수 맞은편에서 보았던 작은 집의 회색 지붕 끝이 보였다.
앤은 무릎 꿇고 앉은 자세 그대로 주변의 사랑스러운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누군가 어깨에 손을 얹어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작은 몽상가는 마릴라가 들어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옷을 갈아입어야지.” 마릴라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마릴라는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정말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과 달리 딱딱하고 무뚝뚝한 말투가 나온 것이다.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아침을 먹어야지. 세수하고 머리를 빗어라. 창문은 열어 두고 이불은 침대 발치에 개어 놓고, 잘해 보렴.”
앤은 10분 만에 옷을 단정하게 입고 머리를 빗고 가지런히 땋아 내리고 세수를 하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마릴라가 시키는 걸 빠짐없이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했는데 사실 이불 정리는 깜빡 잊었다. “오늘 아침에는 무척 배가 고파요!” 앤은 마릴라가 준비해 둔 의자에 살며시 앉으며 말했다. “세상이 어젯 밤처럼 그렇게 스산한 황무지처럼 보이지는 않거든요. 화창한 아침이라서 정말 기뻐요! 저는 비 내리
- 4 -
는 아침도 참 좋아하지만요. 어떤 아침이든 모두 흥미로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상상의 나래를 펼칠 거리가 아주 많잖아요. 그래도 오늘은 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이에요. 맑은 날에는 기분이 좋아지고 괴로움을 견디기가 더 쉬우니까요. 제겐 견대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아요. 슬픈 이야기를 읽고 주인공처럼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좋아요. 그렇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겪으면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렇죠?”
“제발 입 좀 다물어라. 어린아이가 어쩜 그렇게 말을 많이 하니?” 마릴라가 말했다. 앤은 곧바로 순순히, 그리고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앤은 계속 침묵을 지키자 마릴라는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아 오히려 초조해졌다. 매슈 역시 말하지 않았지만 그건 그래도 자연스러웠다.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식사가 끝나자 앤은 설거지를 돕겠다고 했다. “설거지를 제대로 할 줄은 아는 거니?” 마릴라가 미덥지 않은 듯 물었다. “꽤 잘해요. 아이들 돌보는 일을 더 잘하긴 하지만요. 그 일을 아주 많이 했거든요. 여긴 제가 돌봐 줄 아이가 없어서 정말 아쉬워요.” “지금 함께 있는 아이 말고 더 많은 아이를 돌보고 싶지 않구나. 네 문제만으로도 골치가 아파. 너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라버니처럼 대책 없는 사람도 없을 거야.” “아저씨는 정말 좋은 분이에요. 이해심도 많고요. 제가 말을 많이 해도 싫어 하시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좋아하시는 것 같았어요. 저는 아저씨를 보자마자 저와 통하는 분이라고 느꼈어요.”
마릴라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좋아, 설거지를 해 보렴. 뜨거운 물을 충분히 쓰고 반드시 그릇을 잘말려야 해. 나는 오늘 아침에 할 일이 많단다. 오후에 화이트샌즈에 가서 스펜서 부인을 만나야 하니 말이다. 설거지를 마치면 2층에 올라가서 침대를 정리하렴.” 앤은 능숙하게 설거지를 해냈다. 마릴라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어 앤은 침대를 정리했지만 설거지만큼 잘하지는 못했다. 깃털 이불을 요령껏 다루는 걸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이불을 단정하게 해 놓자 마릴라는 앤이 있는 것이 신경 쓰여서 점심까지 밖에 나가 놀라고 말했다.
앤의 교육이 시작되다
마릴라는 다음 날 오후까지도 앤이 초록 지붕 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앤은 점심 설거지를 마치자 최악의 소식이라도 들을 준비를 끝낸 듯 단단히 작정하고 마릴라에게 다가갔다. 작고 여윈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고 있었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 검은 눈동자가 다 보이도록 눈을 크게 뜨고는 두 손을 맞잡고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커스버트 아주머니, 저를 돌려보낼 건지 아닌지 말씀해주세요. 아침 내내 참으려고 애썼지만 더는 못 견디겠어요! 너무 두려워요! 제발 말씀해 주세요.”
더 미룰 만한 핑곗거리를 찾지 못한 마릴라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말해 주는 게 좋겠구나.
오라버니와 나는 널 데리고 있기로 했다. 너는 착한 아이가 되고 감사하는 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해 야겠지. 아니, 얘야, 왜 그러니?” 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전 지금 울고 있어요.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말할 수 없이 기뻐요! 아, 기쁘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새하얀 환희의 길과 벚꽃을 보았을 때도 기뻤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 기쁨 이상이에요. 너무 행복해요! 착한 아이가 되도록 노력할 게요. 물론 쉽지 않겠죠. 하지만 최선을 다할게요. 그런데 제가 왜 울고 있을까요?”
마릴라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너무 흥분하고 들떠서 그럴 게다. 저 의자에 앉아서 마음을 차분히 가
- 5 -
라앉히렴. 너는 너무 쉽게 울고 웃는 게 탈이다. 그래, 넌 여기에서 살고 우리가 널 잘 키우려고 노력할 거야. 학교에도 가야 한단다. 방학까지 2주밖에 안 남았으니 9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면 그때 가는게 좋겠구나.” “아주머니를 어떻게 불러야 하죠? 마릴라 이모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니, 그냥 마릴라라고 불러라. 미스 커스버트나 커스버트 아주머니는 익숙하지 않아서 거북해.”
앤은 사과 꽃이 담긴 꽃병을 살짝 기울여 꽃봉오리에 달린 분홍 꽃받침에 살짝 입맞춤한 다음 아까보다 조금 더 오랫동안 열심히 기도문을 외웠다. “아주머니, 저도 에이번리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요?” 앤이 잠시 뒤에 물었다. “어, 어떤 친구 말이니?” “단짝…. 친한 친구 있잖아요.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요. 저는 지금껏 그런 친구를 만날 수 있기를 꿈꿔 왔어요.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요. 제 소중한 꿈들이 한꺼번에 실현되었으니 어쩌면 그 꿈도 이루어질지 모르겠어요. 그럴 것 같지 않으세요?”
“비탈길 과수원 집에 다이애나 배리가 살고 있는데, 네 또래일 거야. 아주 착한 아이란다. 그 아이가 집에 오면 네 친구가 될 수도 있겠구나. 지금은 카모디에 있는 숙모네 놀러 갔거든. 하지만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배리 부인은 무척 까다로운 사람이라서 착하고 얌전한 아이가 아니면 다이애나와 함께 놀지 못하게 할 거야.”
앤은 사과 꽃 틈새를 통해 마릴라를 바라보았다. 앤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다이애나는 어떤 아이예요? 머리카락이 빨갛지는 않죠? 오, 빨간색만 아니면 좋겠어요. 제 머리카락도 빨간데 단짝까지 빨간 건 정말이지 못 참을 것 같아요.” “다이애나는 아주 예쁜 아이야.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검은색이고 뺨은 발그레하단다. 게다가 착하고 똑똑한데, 예쁜 것보다 그 점이 더 훌륭하지.”
마릴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공작부인처럼 도덕 규범을 좋아했고, 자라는 아이에게 하는 모든 말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앤은 도덕 규범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 제쳐 두고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에만 집중했다.
기대하는 기쁨
“앤이 들어와서 바느질할 시간인데.” 마릴라는 시계를 흘끗 보고는 밖을 내다보았다. 8월의 누르스름한 오후 열기에 지쳐 만물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듯했다. “허락한 시간보다 30분이나 더 다이애나와 놀고 와서는 이제 아예 장작더미에 걸터앉아서 오라버니에게 잠시도 쉬지 않고 말을 하고 있네. 일할 시간 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야. 오라버니는 앤의 말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얼빠진 바보처럼 열심히 듣고 있지. 오라버니는 뭔가에 저렇게 빠진 모습은 처음 봐. 저 애가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오라버니는 더 재밌어한다니까. 앤 셜리! 당장 들어와라, 알겠니?”
마릴라는 서쪽 창문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려 대는 소리에 앤은 집 안으로 부리나케 들어왔다. 두 눈은 반짝이고 뺨은 발그레 상기되었으며 땋지 않고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렸다. “마릴라 아주머니, 다음 주에 주일 학교에서 소풍을 간대요. 반짝이는 호수 바로 근처에 있는 하먼 앤드루스 아저씨네 들판으로요. 벨 아주머니와 레이철 린드 아주머니가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줄 거래요. 마릴라 아주머니, 아이스크림이요! 아, 아주머니, 저도 가도 돼요?” 앤은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앤, 시계 좀 봐라! 내가 몇 시에 들어오라고 했지?” “2시요. 하지만 소풍을 간다니 정말 멋지지 않아
- 6 -
요, 아주머니? 제발, 저도 가게 해 주세요. 저는 소풍을 가 본 적이 없어요. 소풍 가는 걸 꿈꾸기는 했지만 한 번도 못 가 봤어요.” “그래, 내가 2시에 들어오라고 했지. 그런데 지금은 3시 15분 전이다. 왜내 말을 듣지 않았는지 궁금하구나, 앤.”
“저, 시간을 지키려고 했어요. 정말로요. 하지만 한가로운 황야가 너무나 환상적이었어요. 그리고 매슈 아저씨에게 소풍 이야기를 해 드려야 했고요. 아저씨는 제 이야기를 정말 잘 들어 주세요. 저도 가도 돼요?” “너는 그 한가로운 어쩌고의 유혹을 뿌리치는 법부터 배워야겠구나. 내가 몇 시까지 오라고 하면 그 시간을 지키라는 말이지, 30분이나 지나서 오라는 게 아니다. 또 들어오는 도중에 멈춰 서서 말잘 들어 주는 사람과 이야기 나눠서도 안 되고, 소풍이라면, 물론 너도 가야지. 너도 주일 학교 학생이고 다른 아이들이 다 가는 내가 왜 너만 못 가게 하겠니?” “아, 마릴라 아주머니, 정말 고마워요! 아, 아주머닌 저한테 정말 잘해 주세요. 아, 정말 고맙습니다!”
기쁨의 탄성을 연발하는 앤은 마릴라의 품으로 뛰어들어 마릴라의 창백한 뺨에 열정적으로 입을 맞추 었다. 어린아이가 자진해서 마릴라의 얼굴에 입을 맞춘 건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깜짝 놀랄 만큼 갑작스럽게 와 닿은 달콤한 느낌에 마릴라는 다시 한 번 전율을 느꼈다. 마릴라는 앤의 충동적인 입맞 춤에 속으로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더 무뚝뚝하게 말이 나왔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앤은 목사님이 단상에서 소풍을 간다고 말했을 때 너무 흥분 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마릴라에게 털어놓았다. “마릴라 아주머니, 짜릿한 전율을 느꼈어요! 그전까지는 정말로 소풍 가는 거라고 완전히 믿지 않았었나 봐요. 제 상상 속에만 있는 일이 아닐까 두렵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목사님이 단상에서 말씀하셨으니 틀림없겠죠?” “너는 뭐든 마음을 너무 쏟아서 탈이야, 앤. 앞으로 살면서 실망할 일이 많을까 봐 걱정이다.”
“아, 아주머니, 뭔가를 몹시 기대하면 그것이 이루어진 순간 얻게 되는 기쁨의 절반을 미리 느낄 수 있어요. 그걸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기대하는 동안 얻는 즐거움은 그 무엇도 막지 못하거든요. 린드 아주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다. 실망하지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다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 동안 초록 지붕 집에서는 손님맞이 준비가 한창이었다. 목사님 부부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은 대단히 진지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마릴라는 에이번리의 어떤 주부보다도 더 잘 대접하 겠다고 마음먹었다. 앤은 신이 나서 들떠 있었다. 앤은 화요일 밤에 땅거미가 질 때 다이애나와 드리 아드의 물거품 옆에 있는 커다란 붉은 돌 위에 앉아 전나무 향유에 담가 둔 작은 가지로 물속에 무지 개를 만들면서 목사 부부를 초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이애나, 죽비는 다 됐어. 케이크만 구우면 돼. 케이크는 아침에 만들 거야. 베이킹파우더 비스킷은 마릴라 아주머니가 차 마시기 직전에 만들기로 했어. 목사님 부부를 초대하는 일은 엄청난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야. 난 레이어 케이크 생각만 해도 초조해져. 아, 다이애나, 케이크를 제대로 못 만들면 어떡하지!”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2주 전 점심에 네가 구운 케이크를 한가로운 황야에서 먹었잖아.
완벽한 맛이었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친구답게 다이애나가 격려해 주었다.
- 7 -
수요일 아침이 되었다. 해가 뜨자마자 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흥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이 었다. 전날 아침에 샘에서 물장난을 한 탓에 심한 감기에 걸려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설사 폐렴에 걸렸다 해도 그날 아침 요리를 하고 싶은 앤의 욕심은 식지 않았을 터였다. 앤은 아침을 먹고 나서 케이 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앤은 마침내 오븐 덮개를 닫고 나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릴라 아주머니, 이번에는 분명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어요. 베이킹파우더가 안 좋으면 어떡하죠?
새 통조림에 든 걸 썼거든요. 린드 아주머니가 요즘에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물건이 없어서 좋은 베이킹파우더를 샀다고 절대 장담할 수 없다고 했어요. 정부가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보수당 정권이 그런 일에 나설 리가 없다고 하면서요. 마릴라 아주머니, 만약 케이크가 부풀어 오르지 않으면 어떡하죠?” “다른 게 얼마든지 있잖니!” 마릴라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는 듯 말했다.
앤이 만든 레이어 케이크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앨런 부인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다양한 음식을 이미 먹고 난 상태라서 케이크를 사양했다. 마릴라는 앤의 실망하는 얼굴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앨런 사모님, 케이크를 꼭 드셔야 해요. 앤이 사모님을 위해서 특별히 만든 케이크 거든요.” “그렇다면 무조건 맛을 봐야겠군요.”
앨런 부인은 웃으면서 잘 부풀어 오른 삼각형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케이크를 한 입 먹은 앨런 부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조각을 다 먹었다. 마릴라는 그 표정을 보고는 얼른 케이크를 먹어 보았다. “앤 셜리! 도대체 케이크에 뭘 넣은 거니?” 마릴라가 소리쳤다. “요리 법대로만 한 걸요, 마릴라 아주머니. 맛이 없나요?” 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맛이 없냐고? 아주 끔찍한 맛이다. 앨런 사모님, 애써 드시려고 하지 마세요. 앤, 네가 먹어 봐라. 대체 여기에 어떤 맛을 넣은 거니?” “바닐라요. 바닐라만 넣었어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틀림없이 베이 킹파우더에 문제가 있을 거예요. 아무래도 그 베이킹파우더가 의심….” 케이크를 맛본 앤이 창피해서 홍당무가 된 얼굴로 말했다. “베이킹파우더 때문이라니 말도 안 돼! 가서 네가 쓴 바닐라 병을 가져와 봐라.”
앤은 얼른 달려가 갈색 액체가 들어 있는 작은 병을 들고 왔다. 병에는 ‘최고의 바닐라’라는 노란 딱지가 붙어 있었다. “맙소사! 앤, 케이크에 진통제를 넣었구나. 지난주에 진통제 병을 깨뜨려서 남은 약을 오래된 빈 바닐라 병에 넣어 두었거든. 내 잘못이 크다. 너에게 일러 주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냄새를 맡아 보지도 않았니?” 앤은 부끄러움이 밀려와 울음을 터뜨렸다. “냄새를 맡을 수 없었어요….
감기에 걸렸거든요!”
앤은 도망치듯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던지고 어떤 말로도 위로받지 못할 사람처럼 펑펑 울었다.
금방 계단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 마릴라 아주머니,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망신을 당했어요. 에이번리에 소문이 쫙 퍼지겠죠. 다이애나도 제게 케이크가 잘 구워졌는지 물을 테고, 저는 사실대로 말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전 케이크에 진통제를 넣은 아이라고 영원히 손가락질받게 될 거예요. 남자애들이 두고두고 저를 놀릴 거예요. 사모님의 얼굴은 두 번 다시 못볼 것 같아요. 아마 사모님은 제가 당신을 독살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하지만 진통제에는 독이 없잖아요. 진통제는 케이크에 넣어 먹는 건 아니지만 복용하는 약이기도 하고요. 사모님께 그렇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일어나서 네 입으로 직접 말하렴.” 상냥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앤이 벌떡 일어나 보니 앨런 부인이 침대 옆에 서서 웃는 눈으로 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귀여운 꼬마
- 8 -
아가씨, 이렇게 울지 않아도 돼. 그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재미있는 실수에 지나지 않는걸. 자, 이제 그만 울렴. 나와 함께 내려가서 네 꽃밭을 구경시켜 주겠니? 미스 커스버트가 네가 손수 키우는 작은 꽃밭이 있다고 하시더구나. 꽃밭을 보고 싶어. 나는 꽃에 관심이 아주 많거든.” 앤은 앨런 부인을 따라 내려가면서 위로받았다. 누구도 더는 진통제 케이크를 언급하지 않았고, 손님들이 가고 나자 앤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것 치고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즐겁게 저녁 식사를 보냈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마릴라 아주머니, 내일이 아직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새로운 날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 않으세 요?” “넌 내일도 분명히 많은 실수를 저지를 거다, 앤. 네가 실수하지 않는 날을 못 봤으니까.” “네, 저도 잘 알아요. 그래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는 거 아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저는 같은 실수를 두 번 저지르지는 않아요.” 앤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늘 새로운 실수를 저지르니 너의 다행스 러운 점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머, 그거 모르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거예요. 제가 그 끝에 이르면 더는 실수하지 않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요.”
불행한 백합 아가씨
앤과 다이애나는 그해 여름의 대부분을 연못 주위에서 놀았다. 한가로이 황야는 이제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벨 씨가 봄에 집 뒤편 목초지에 있는 작은 나무들을 무자비하게 베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앤은 잘려나간 그루터기에 앉아 지난 일을 생각하며 엉엉 울었지만 곧 진정했다. 다이애나와 이야기한 대로 곧 열네 살이 되는, 열세 살이 다 큰 여자아이들이 소꿉놀이 집 같은 걸 가지고 노는 건 너무 유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연못 주위에서 더 신나는 놀이를 얼마든지 찾아서 할 수 있었다.
일레인 역할을 넣어 연극을 해 보자는 제안은 앤의 아이디어였다. 앤과 친구들은 지난겨울 학교에서 테니슨의 시를 공부했다. 교육감이 프린스에드워드섬에 있는 모든 학교의 영어 과정에 테니슨의 시를 넣었기 때문이었다. 여자아이들은 테니슨의 시에 숨은 의미가 남아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울 만큼 치밀하게 분석했다. 그러다 보니 아름다운 백합 아가씨와 랜슬롯과 귀네비어와 아서 왕이 실존 인물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앤은 캐멀롯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마음속으로 매우 안타까워하기에 이르렀다.
앤은 그 시절이 현재보다 훨씬 더 낭만적이었다고 말했다.
앤의 계획은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아이들은 배를 나루터에서 밀면 배가 물살을 따라 다리 아래로 떠내려가다가 결국 연못의 굽이진 곳에 있는, 더 낮은 지대의 또 다른 곳에 좌초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배를 타고 종종 그런 식으로 좌초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배를 타고 종종 그런 식으로 하류로 내려갔다. 일레인 연극을 하는 데 거기처럼 안성맞춤인 곳도 없었다. “좋아, 내가 일레인을 할게” 앤은 마지못해 승낙했다. 주인공 역을 하는 건 기뻤지만 앤의 예술적인 감각으로는 자신이딱 맞는 인물은 아니었다.
“루비, 네가 아서 왕을 하고 제인이 귀네비어, 그리고 다이애나가 랜슬롯을 하면 되겠어. 하지만 우선 너희가 형제들과 아버지 역할도 해야 해. 배에 한 사람이 누워 있으면 두 사람이 탈 공간이 없거든. 우리는 아주 검은 천으로 배를 완전히 덮어야 해. 너희 엄마의 낡은 검은색 숄이 딱 좋은데, 다이애나.”
다이애나가 검은색 숄을 가져오자 앤은 배 바닥에 숄을 깔고 누웠다. 눈은 감고 두 손은 포개어 가슴 위에 얹었다. “어머나, 앤이 정말로 죽은 사람 같아.” 루비 길리스가 꼼짝 않고 있는 작고 하얀 얼굴을
- 9 -
내려다보며 초조해야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 이제 일레인은 준비가 다 됐어. 우리는 일레인의 이마에 조용히 입을 맞춰야 해. 다이애나, 너는 ‘잘 가, 누이’라고 말해. 루비는 ‘잘 가, 사랑스러운 누이’라고 말하고, 너희 둘 다 최대한 슬프게 말해야 해. 맙소사, 앤, 살짝 미소를 짓고 있어야지. 일레인이 ‘마치 미소를 짓고 있는 듯 누워 있다’는 대목 알잖아. 그래, 훨씬 나아졌어. 이제 배를 밀어.” 그러자 배는 떠밀려서 오래전부터 박혀 있는 말뚝을 스치며 나아갔다.
앤은 천천히 떠내려가면서 몇 분 동안 그 낭만적인 상황을 한껏 즐겼다. 그때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일레인은 재빨리 일어나서 황금 덮개와 검은색 천을 집어 들고 배 바닥에 생긴 커다란 틈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틈으로 물이 콸콸 들어오고 있었다. 선착장에서 배가 말뚝의 뾰족한 부분에 부딪히면서 널빤지 하나가 부서져 버린 것이다. 앤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자신이 위험한 곤경에 처해 있음을 금방 깨달았다.
배는 다리 아래로 떠내려갔고 순식간에 물줄기 한가운데로 가라앉았다. 벌써 저지대 곶에서 배를 기다 리던 루비와 제인과 다이애나는 눈앞에서 배가 사라지는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세 친구는 앤이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그런 비극적인 일을 목격하자 잠시 꼼짝 않고 서있었다. 안색은 창백해지고 공포감에 몸은 얼어붙었다. 그런 다음 친구들은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숲을 달렸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큰길을 건너 다리가 있는 쪽을 얼핏 보았다. 앤은 말뚝에 위태롭게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친구들이 부리나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친구들의 비명을 들었다.
앤이 팔과 손목이 너무 아파서 정말로 한시도 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였다. 길버트 블라이드가 하먼 앤드루스 씨의 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다리 아래로 오는 것이 아닌가! 길버트가 무심코 올려다보니 커다란 잿빛 눈에 작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쌀쌀맞은 표정으로 자기를 경멸스럽다는 듯바라보고 있었다. “앤 셜리! 도대체 왜 거기에 있는 거야?” 길버트가 외쳤다. 앤은 길버트 블라이드의 손을 꼭 잡고 엉금엉금 기어 내려와야 했다. 흙투성이가 된 앤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배 뒤쪽에 앉았다.
앤은 다급하게 연못을 향해 돌아오는 제인과 다이애나를 길 중간쯤에 만났다. 다이애나는 기겁하면서 앤의 목덜미를 덥석 안으며 안도감과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아, 앤. 앤… 우리는… 네가 물에 빠져… 죽은 줄… 우리가 살인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왜냐하면 우리가… 너한테 일레인을… 하라고 했으 니까. 그리고 루비는 발작했고… 앤, 거기에서 어떻게 나온 거야?” “말뚝에 매달려 있는데 길버트 블라 이드가 앤드루스 씨의 배를 타고 와서 나를 땅 위로 내려줬어.” 앤은 힘없이 설명했다.
오후에 일어난 사건이 알려지자 배리 가족과 커스버트 가족의 놀라움과 걱정은 무척 컸다. “도대체 언제 정신을 차릴거니, 앤?” 마릴라가 핀잔을 주었다. “아, 네, 앞으로는 정신을 차릴 것 같아요, 마릴라 아주머니. 이번 일로 그럴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커졌어요.” 앤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미 혼자 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실컷 울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소대로 다시 쾌활해졌다. “글쎄다.” 마릴라가 말했다.
“오늘 새삼 귀중한 교훈을 얻었어요. 저는 초록 지붕 집에 온 뒤로 여러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럴 때마다 저의 큰 단점을 고칠 수 있었죠. 자수정 브로치 사건을 겪으면서 제 것이 아닌 물건에 손대는 버릇
- 10 -
을 고쳤어요. 유령의 숲을 통해 지나친 상상력은 해로울 수 있다는 걸 배웠고요. 진통제 케이크 사건 에서는 요리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염색 사건을 겪으면서 허영심을 버려야겠다고 생각 했고요. 지금은 제 머리카락과 코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요…. 적어도 거의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오늘 저지른 잘못으로 지나친 낭만 타령은 그만하기로 했어요. 에이번리에서는 낭만을 추구하려고 노력해 봐도 소용없다고 결론 내렸거든요. 수백 년 전에 탑이 있던 캐멀롯에서는 그런 것이 아마 어렵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낭만이 우대받는 시대는 아닌 것 같아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 점에서는 조만간 제가 크게 나아진 모습을 틀림없이 보게 되실 거예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구나.” 마릴라가 미심쩍어하며 말했다. 마릴라가 밖에 나가자 구석에서 말없이 앉아 있던 매슈가 앤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수줍게 속삭였다. “그렇다고 낭만을 완전히 저버리지는 말아라, 앤. 낭만은 좋은 것이란다…. 물론 지나치지만 않으면….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은 추구하는 거다, 앤.”
퀸스 대학 입시반이 생기다
앤은 난로 앞에 까는 깔개 위에 웅크리고 앉아 기쁘게 타오르는 불빛을 응시했다. 100년 동안 여름마다 내리쬔 햇볕이 단풍나무 장작에 응축되어 있다가 발산되는 것이었다. 앤은 책을 읽고 있었지만 어느새 책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제 앤은 입을 벌리고 미소를 띠며 꿈을 꾸고 있었다. 마릴라는 다정한 표정으로 앤을 바라보았다. 난로 불빛과 어둠이 교묘하게 섞여 있는 것보다 더 밝은 불빛에서는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마릴라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잿빛 눈을 한 이 깡마른 여자아이를 전보다 훨씬더 깊고 열렬히 사랑했다. 앤을 사랑한 나머지 지나치게 너그럽게 대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앤, 오늘 오후에 네가 다이애나와 밖에서 놀 때 스테이시 선생님이 다녀가셨단다.” 마릴라는 불쑥 말했다. 앤은 깜짝 놀라서 한숨을 지으며 다른 세계에서 돌아왔다. “선생님이요? 어휴, 제가 없을 때 오셨다니 정말 아쉬워요! 마릴라 아주머니, 저를 부르지 그러셨어요. 다이애나와 저는 멀리 있지 않고 유령의 숲에 있었어요.”
“스테이시 선생님은 퀸스 전문대학 입학시험에 대비해 공부할 생각이 있는 상급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반을 만들고 싶어 하더구나. 방과 후 그 학생들에게 한 시간 더 공부하게 할 생각이라고. 그래서 선생 님이 너를 그 반에 넣어도 되는지 매슈 오라버니와 나에게 물어보려고 온 거야. 앤, 네 생각은 어떠니? 퀸스에 가서 선생님이 되고 싶니?” 앤은 벌떡 일어나서 두 손을 맞잡았다.
“아, 마릴라 아주머니, 그건 제 평생의 꿈이에요. 루비와 제인이 입학시험 공부 이야기를 시작한 뒤부터 지난 6개월 동안요. 하지만 저는 그 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말해 봐야 소용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학비가 어마어마하게 비싸지 않을까요? 앤드루스 씨가 프리시를 퀸스에 입학시키느라 50달러가 들었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프리시는 기하학을 못 하지는 않았어요.”
“그 점을 네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오라버니와 내가 너를 키우겠다고 데려왔을 때 우리는 너를 위해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고 좋은 교육을 하겠다고 결심했거든. 나는 여자가 생활비를 벌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꼭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야.
오라버니와 내가 여기에 있는 한 초록 지붕 집은 언제나 너의 집이야. 하지만 이 불안한 세상에서 앞
- 11 -
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 잘 준비해 두어야 해. 그런 의미에서 네가 원한다면 퀸스 대학 입시반에 들어가도 된단다, 앤.”
앤은 두 팔로 마릴라의 허리를 덥석 안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마릴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 마릴라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두 분이 자랑스러워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할게요. 그런데 기하학은 기대하지 말아 주세요. 열심히 공부한다면 다른 과목은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너는 충분히 잘 해낼 거야. 네가 무척 똑똑하고 부지런하다고 스테이시 선생님이 말했어. 앞으로 책읽을 시간이 없다고 급하게 책을 읽을 필요는 없어. 서두를 이유가 없거든. 시험을 보려면 아직 1년반이나 남았으니까. 하지만 제때 시작해서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스테이시 선생님이 그러 더구나.”
“이제는 공부에 더 관심을 둘게요. 삶에 목적이 있으니까요. 모든 사람은 삶에 목적이 있어야 하고, 그목적을 충실하게 추구해야 한다고 앨런 목사님이 말씀하셨어요. 다만 앨런 목사님은 우선 그 목적이 가치가 있는지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세요. 저는 스테이시 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되는 것을 가치 있는 목적으로 삼을 거예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지 않아요, 마릴라 아주머니? 저는 선생님이 아주 고귀한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앤이 무척 행복해하며 말했다.
- 12 -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네가 올 때마다 주워 간다 (0) | 2020.06.10 |
---|---|
죽도록 즐기기 (0) | 2020.06.10 |
코로나 이후의 세계 (0) | 2020.06.09 |
인생을 어떻게 살면 좋겠냐고 묻는 딸에게 (0) | 2020.06.09 |
당신도 불통이다 (0) | 2020.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