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뉴미디어시대를 예견한 매체 비평서로, 성찰 없는 미디어세대를 위해 예언자적 메시지를 전한다. 저자는 21세기 가장 의미심장한 문화적 사실인 활자시대의 쇠퇴와 텔레비전 시대의 부상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매체 생태환경의 허상을 제거하고, 실체를 파악하도록 안내한다.
그리고 또 사람들은 새로운 소통도구와 문화를 그저 즐길 뿐 그것의 속성과 정체성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서, 지금은 사회적 상황에 대한 통찰이 필요한 때라고 역설한다.
죽도록 즐기기
▣ 저자 닐 포스트먼
닐 포스트먼은 20세기 후반 미국의 사회비평과 교육 분야 및 커뮤니케이션 이론가로서 가장 중요한 인물에 속한다. 그의 사상은 이해하기 쉬울 뿐 아니라 실제적이기에 전 세계에 걸쳐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그는 감화력이 큰 존경받는 스승이었으며, 40년이 넘도록 뉴욕대에서 교수로 봉직하며 명망 높은 미디어 생태학 이론을 정립하기도 했다. 초ㆍ중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가 주로 가졌던 관심영역은 미디어와 교육의 관계였다. 그는 미디어 포화상태의 사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지를 30여 년 넘게 지속적으로 전달했으며, 미디어 아이콘들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갖기를 조언했다. 텔레비전을 비롯한 영상매체가 엄청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그의 경고 메시지를 인터넷 시대인 오늘날에도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자동차의 전자식 작동 창문이나 개인용 컴퓨터 등 불필요하다고 생각해 신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TV도 거의 보지 않았으며 글도 손으로 직접 쓰는 등 대안적인 삶의 양식을 취해 왔다고 한다. 광범위한 분야를 아우르며 20여 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주요 저서를 살펴보면 교육 분야로는 『전복행위로서의 교육』과 『교육의 종말』이 있으며, 아동에 관해서는 『유년의 실종』, 언어 분야로 『정신 나간 말, 어리석은 말』, TV 뉴스에 관한 『TV 뉴스 어떻게 봐야 하나?』, 그리고 기술문명이 문화에 끼치는 충격을 드러낸 『테크노폴리』등이 있다. 『죽도록 즐기기』는 가장 널리 읽히고 회자되는 작품이며 10
여개 국가에서 번역 출간됐다. 포스트먼은 뉴욕주립대학과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했으며 2003년 10월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 Short Summary
불과 10여 년 사이에 온갖 매체가 우리를 뒤덮어 버렸다. 고개만 돌리면, 손만 뻗으면, 엄지손가락만 움직이면 온갖 즐길 거리가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이다. ‘죽도록 즐기기’ 딱 알맞은 세상이다. 그런데 죽도록 즐길 때마다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 죽어가고 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이 책은 뉴미디어시대를 예견한 매체 비평서로 성찰 없는 미디어세대를 위해 예언자적 메시지를 전한다. 저자는 21세기 가장 의미심장한 문화적 사실인 활자시대의 쇠퇴와 텔레비전 시대의 부상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매체 생태환경의 허상을 제거하고, 실체를 파악하도록 안내한다.
구체적으로 영상매체로 인해 정치, 교육, 공적 담론, 선거 등 모든 것이 쇼비즈니스 수준으로 전락하고, 사람들은 새로운 소통도구와 문화를 그저 즐길 뿐 그것의 속성과 정체성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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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다면서, 지금은 사회적 상황에 대한 통찰이 필요한 때라고 역설한다.
참고로 미디어 이론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마샬 맥루한과 닐 포스트먼이 있는데, 맥루한은 미디어의 긍정적 측면을 보는 반면, 포스트먼은 미디어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맥루한은 ‘매체는 곧 메시지’ 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는 매체가 달라지면 메시지도 달라지고 수용자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도 달라 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메시지 자체를 규정한다고 본 것이다.
이에 반해 포스트먼은 기술에 의해 지배당하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 또한 미디어, 그 중에서도 특히 텔레비전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텔레비전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즐거움을 줄 뿐이라며, 미디어의 단점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 두 학자의 상반된 견해는 하나의 공통점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강력한 미디어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미디어사회’이다. 이 강력한 영향력은 앞으로 급속한 변화 속에서 우리 사회에 더욱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 차례
2006년판 서문 역자서문 초판서문 일러두기
제1부 01 미디어는 메타포다 02 인식론으로서의 매체 03 인쇄시대의 미국 04 인쇄문화, 인쇄정신 05 삐까부 세상
제2부 06 쇼비즈니스 시대 07 자, 다음 뉴스는… 08 예배가 아니라 쇼!
09 이미지가 좋아야 당선된다 10 재미있어야 배운다 11 헉슬리의 경고
20주년 기념판을 내며 주해 참고문헌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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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즐기기
제1부
미디어는 메타포다 오늘날 우리는 슬롯머신과 코러스걸의 모양을 본딴 9m 높이의 입간판이 상징하는 라스베이거스라는 도시를 주목해야 한다. 이 도시는 20세기 말 미국의 특징과 열망을 상징하는 메타포와 같기 때문이다.
라스베이거스는 오락과 유흥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도시이기에, 공공담론조차 하찮은 오락거리로 변질시키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문화의식을 물들인다. 미국의 정치, 종교, 뉴스, 스포츠, 교육과 상거래는 별다른 저항이나 소리 소문 없이 쇼 비즈니스(show business)와 유사한 부속물로 변질 되었다. 그 결과 우리들은 죽도록 즐기기 일보 직전에 있다.
나는 의사소통(conversation)이란 용어를 포괄적 은유로 사용하는데, 담화뿐 아니라 특정 문화권의 사람들이 서로 메시지를 교환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기술체계를 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문화 자체가 의사소통 행위이며, 조금 더 명확하게는 상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 얽히고설킨 관계인 셈이다. 이제 여기서 공공 담론을 표현하는 형식이 어떻게 그 형식 자체로 인해 드러나는 내용을 규제하고 심지어 지시까지 하는지 주목해 보도록 하자. 이해를 위해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미국의 27대 대통령으로 다중 턱에 몸무게가 150㎏에 육박하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같은 사람이 요즘 시대에 대통령 후보로 부상하리라고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누구든 글이나 라디오, 연기 신호를 이용해 자신을 알릴 경우 외모가 그 사람의 지성을 가로막는 일은 없지만, 텔레비전에서는 보이는 게전부이기 때문이다. 150㎏ 가까이 되는 사람이 연설하는 TV 영상은 언어를 통해 전달하는 논리적이고 정신적인 민감성을 쉽게 압도해 버린다. 텔레비전에서는 공공담론이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기능하는데, 한마디로 텔레비전이 우리에게 이미지로 말을 건다는 뜻이다. 텔레비전에서 정치철학을 논할 수는 없다. 텔레비전의 의사전달 형식은 철학이라는 내용물을 배제시킨다.
이제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책은 20세기 후반 가장 의미심장한 미국의 문화적 사실(활자시대의 쇠퇴와 텔레비전 시대의 부상)에 대한 탐구와 탄식이다. 이러한 주력매체 간 전환은 공공담론의 내용과 의미를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극적으로 변화시켰는데, 이 두 매체는 너무도 달라 동일한 사고를 수용할수 없기 때문이었다. 활자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정치, 종교, 교육, 그리고 공공 비즈니스를 둘러싼 모든 분야에 걸쳐 그 내용을 텔레비전에 적합하게끔 바꾸고 새롭게 주조(鑄造)해야 했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매체는 생각하고 표현하고 느끼는 데 있어서 새로운 방향감각을 제시하기 때문에 독특한 담론형식을 만들어낸다. 이는 물론 맥루한이 매체는 메시지라고 말하면서 의미했던 바이다. 그러나 맥루한의 경구 그대로는 메시지와 메타포를 혼동할 수 있기에 개선할 필요가 있다. 메시 지는 세상에 대한 한정되고 구체적인 진술을 뜻한다. 그러나 의사전달이 가능한 상징을 포함하여, 우리가 접하는 매체유형은 제한적이고 명확한 메시지를 내놓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드러나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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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현실을 특정하게 정의하도록 암시를 투사하는 메타포와 같다. 우리가 말을 통하든 아니면 문자나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든, 우리가 접하는 매체가 방출하는 메타포는 세계를 분류하고 계열화 하고 틀 지우고 확대하고 축소하고 채색하여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름대로의 인식론을 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사람들은 매체가 개입함으로써 우리가 보거나 알게 될 것을 지정하는 역할에 대해 서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시계를 힐끗 쳐다볼 때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체계화하고 통제하는지 대체적으로 관심이 없으며, 책, 텔레 비전 또는 시계가 어떠한 세계관을 제시하는지에 대해선 더더욱 둔감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20세기 말에 이러한 사실을 알아챈 사람들이 있다. 이 위대한 관찰자 중의 한 사람이 루이스 멈포드였다.
『기술과 문명』에서 멈포드는 14세기 이래 어떻게 시계가 사람들을 ‘시간기록자’에서 ‘시간절약자’로, 그리고 지금과 같은 ‘시간의 노예’로 이끌었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태양과 계절을 무시하는 거만함을 터득해 왔는데, 이는 분과 초 단위로 엮인 세계에서 자연의 권위가 폐기된 탓이다.
멈포드가 지적했듯이, 시계의 발명으로 인해 사람들은 더 이상 영원성을 인간 활동의 목적과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똑딱 소리가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쏟아낸 모든 논문보다도 신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데 더 큰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 이는 말하자면 시계는 신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의사소통 형식을 소개한 셈이며, 거기에서 신은 패배해 온 듯하다.
한편 철학은 비평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데, 글쓰기를 통해 생각하는 바를 집중적으로 파고들 수 있으며 편리하기까지 하다. 글쓰기는 말하기를 동결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문법학자, 논리학자, 수사학자, 역사학자를 낳았다. 이들은 모두 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에 오류가 있는지, 지향점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위해 눈앞에서 언어를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하는 부류들이다.
플라톤은 이 모두를 잘 알고 있었는데, 이는 글쓰기를 통해 인간의 언어처리기관이 귀에서 눈으로 이동하는 지각(知覺) 혁명이 도래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그러한 인지 전환을 촉진시키기 위해 학생들이 자신의 학파에 들어오기 전에 기하학을 익히도록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옳은 판단이었는데, 위대한 문학비평가 노스럽 프라이가 했던 말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기록된 글은 단순한 기억보다 훨씬 강력하다. 기록은 과거를 현재에 재창조하고, 익히 알고 있는 사실뿐 아니라 환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눈부신 긴장감을 선사한다.”
아무튼 내가 이렇게 의사소통 매체에 관해 언급하는 이유는, 이 책이 우리 족속 모두가 겪고 있는 글쓰기의 마법에서 전자기술의 마법으로 넘어가는 엄청나고 전율할 만한 전환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은, 글쓰기나 시계와 같은 기술을 문화에 도입하면 시간을 붙들어 매기 위한 인간의 능력을 단순히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은 물론 나아가 문화의 내용까지 변질시킨 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내가 매체를 메타포라고 부르는 의미다.
정확히 말하면, 메타포는 어떤 것을 그 밖의 무엇과 비교하여 어떻게 생겼는지 암시한다. 그리고 이런 암시의 힘으로, 메타포는 다른 쪽이 없다면 사람들이 그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도록 고정관념을 머릿 속에 침투시킨다. 예컨대 빛은 파동이고, 언어는 나무와 같으며, 신은 지혜로운 성인이며, 마음은 지식에 의해 조명되는 어두운 동굴과 같다는 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메타포가 더 이상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 같은 성질을 가진 것으로 이를 대신할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이를테면 빛은 입자이고, 언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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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같으며, 신은 미분방정식이고, 마음은 가꾸어지길 열망하는 정원과 같다는 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매체-메타포는 그렇게 분명하지도 않으며 훨씬 복잡하다. 메타포의 은유적 기능을 이해하려면 메타포에 관한 정보의 상징적 형태, 정보의 원천, 정보의 양과 속도 그리고 정보를 경험하는 정황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계는 시간을 독립적이며 수학적으로 정확한 순서로 재창조하고, 글쓰기는 마음을 경험이 기록될 서판으로 재창조하며, 전신은 뉴스를 하나의 상품으로 재창조한다는 식으로 파고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도구에는 본래의 기능을 넘어선 어떤 사상이 내재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탐구는 더 쉬울 것이다.
참고로 갈릴레오가 자연의 언어는 수학으로 기록된다고 말했을 때, 그는 단지 메타포로 표현한 것이다.
자연 그 자체는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이나 신체, 좀 더 이 책의 핵심에 다가가서 우리 국가도 마찬가지다. 자연이나 우리 자신에 관해 의사소통을 주고받을 때는, 어떤 것이든 간에 사용하기 편하 다고 여기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자연이나 지성이나 인간욕구나 사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언어로 드러나는 대로만 본다. 따라서 언어는 우리가 이용하는 매체이고, 언어라는 매체는 우리의 메타포가 되며, 이 메타포가 문화의 내용을 형성한다.
삐까부 세상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자 2가지 관념(전신과 사진술)이 등장하더니, 이 둘이 융합하면서 20세기 미국의 공공담론을 드러내는 새로운 메타포가 형성되었고, 두 관념이 짝을 이루어 설명의 시대를 무너뜨리고쇼 비즈니스 시대로 들어서는 토대를 놓았다. 먼저, 모르스가 발명한 전신은 주 경계선을 허물고, 지역을 와해시켰으며, 대륙을 한 가닥 정보 배전망으로 휘감아 미국의 담론이 일체화될 여지를 남겼다. 그러나 상당한 대가도 있었다. 모르스조차도 깨닫지 못한 무엇인가가 진행되었기 때문인데, 전신은 정보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깨뜨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공공담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러한 결과를 알아챈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는데, 그는 『월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메인 주에서 텍사스 주까지 자기 전신기를 가설하기 위해 엄청나게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메인 주와 텍사스 주 간에는 전신으로 주고받아야 할 만큼 중요한 게 없을 것이다. …우 리는 대서양 바다 밑을 뚫어 구세계(유럽)의 소식을 몇 주 빨리 신세계로 가져오려고 안달이 나 있다.
하지만 거기서 흘러나와 토끼처럼 쫑긋 세운 미국인의 귀로 들어갈 첫 번째 뉴스는 에덜레이드 공주가 백일해에 걸렸다는 소식에 불과할 것이다.” 소로우가 옳았음이 밝혀졌다.
소로우가 암시했듯이, 전신은 관련 있는 것들을 관련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도처에 흘러넘치는 정보는 이를 접하는 사람과는 거의 또는 전혀 관련이 없다. 즉, 사람들의 생활과 밀착된 사회적, 지적 상황과는 무관한 정보라는 뜻이다. 도처에 널려 있지만 마실 물은 한 방울도 없다는 콜리지의 유명한 글이 탈상황적 정보환경에 대한 메타포로 유용할 듯싶은데, 사실 정보의 바다에서 쓸 만한 것은 거의 없다. 메인 주에 있는 사람과 텍사스 주에 있는 사람이 전신으로 대화한다 치더라도, 한쪽 편만 알고 있거나 고민하는 내용을 뉴스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었다. 전신으로 전국이 ‘하나의 이웃’으로 바뀐 듯하지만, 실은 서로에 대해 피상적인 사실밖에 모르는 낯선 사람들로 이루어진 괴상한 이웃이었다.
참고로 구두문화나 인쇄문화에서 정보의 중요성은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수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전신으로 인해 삶과 무관한 정보가 도처에 흘러 넘쳐 ‘정보 대비 행동비율’이 극적으로 낮아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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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의 시대에 들어서기 전에는 사람들이 접하는 정보는 대체로 특정한 행동을 결정하는 데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우발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나름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즉 행동-가치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신이 빚어낸 정보세계로 인해 온 세계가 뉴스를 위한 배경으로 전락하자 사람들은 일말의 통제감마저 상실해 버렸다.
공공담론에 있어 전신이 기여한 것은 허상을 위장하고 무기력을 증폭시켰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전신으로 인해 공공담론은 산산조각 나 버렸다. 루이스 멈포드의 표현을 빌자면, 전신으로 인해 시간이 단절되고 주의력이 결핍된 새로운 세계가 조성되었다. 전신의 주된 능력은 정보의 운송량이지 정보를 수집하고 설명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전신은 인쇄 술의 정 반대편에 있었다. 이제 정확하며 순차적이고 연속적인 인쇄형식은, 지식을 얻고 세계를 이해 하는 길이었던 (그동안 누려왔던) 메타포로서의 공명을 서서히 상실하기 시작했다. 사실을 ‘안다는 것’ 이 이제는 그 속에 숨은 함의나 배경, 연관성까지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기에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모르스가 정보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골몰하고 있던 비슷한 시기에, 루이 다게르는 자연의 의미, 나아가 실재 자체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고민하고 있었다. 1838년에 다게르는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 쓴 안내문에 이렇게 표현했다. “다게르의 은판 사진술은 단순히 자연을 그려내는 도구가 아닙 니다…. (이 기술은) 자연이 스스로를 재생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합니다.” 다게르가 한 말의 본뜻은, 인쇄기가 기록된 글을 복제하는 장치이듯 자신이 세계 최초로 시각적 경험을 복제하는 장치를 발명했 다는 의미였다. 참고로 ‘사진술(Photography)’이라는 명칭은 유명한 천문학자인 존 F. W. 허셸 경이 붙인 이름인데, 문자적으로 ‘빛으로 쓴다’는 뜻을 지닌 색다른 명칭이었다.
그런데 사진으로 경험을 기록하는 방식은 언어와는 다르다. 언어는 순차적인 서술방식으로 표현할 경우에만 뜻이 통한다. 어떤 낱말이나 문장이 문맥을 벗어나면, 즉 읽거나 듣는 사람이 앞뒤에 읽은 것을 잊어버리면 의미가 왜곡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진의 경우에는 전후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기에, 언어와는 달리 맥락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한편 전신기와 마찬가지로, 사진술도 일련의 특이한 사건 으로 가득 채워 세계를 재창조한다. 사진의 세계에는 시작과 과정, 종착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전신이 내포하는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그 세계는 원자 단위로 조각나 있다. 사진의 세계에는 오직 현재만 있기에 세간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이야기의 한 터럭조차 차지할 필요가 없다.
한편 그림은 글에 비해 세 곱절 넘게 오래 되었으며, 의사소통 기술에 있어서 형상의 역할은 19세기에도 곧잘 수용되었다. 그런데 19세기 중엽에 새로웠던 사실은, 사진을 비롯한 여타 도해(그림이나 이미지 등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기법)가 상징 환경 속으로 급격하게 대량 유입되었다는 점이다. 이사건이 바로, 대니얼 부어스틴이 『이미지와 환상』에서 일컬은 ‘그래픽 혁명’이다. 이 말에 담긴 의미는, 언어에 대해 격렬한 맹공을 퍼부으며, 아무런 제재 없이 미국문화 전반에 퍼지고 있는 기계적으로 재생산된 이미지 형식(사진, 도표, 인쇄물, 포스터, 그림, 광고)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부어스틴이 말한 ‘그래픽 혁명’이 내포하고 있는 핵심을 드러내기 위해 앞에서 ‘맹공’이란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이제, 사진을 필두로 한 새로운 이미지 형식은 단순히 언어의 보조수단으로 머물지 않고, 현실을 해석하고 검증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언어를 대치하고자 했다.
참고로 전신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낯선 곳으로부터 날아드는 사실(facts)로 가득 찬 바다 속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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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을 밀어 넣으려 했다면, 사진은 특유의 방식으로 사방에서 전신을 통해 홍수처럼 밀려드는 이러한 뉴스거리에 제대로 된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왜냐하면 사진으로 인해 시의성(時宜性)과 무관한 뉴스거리에도 생생한 현실성이 부여되었으며, 뉴스에 비치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사진까지 곁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사진은 ‘뉴스기사’가 적어도 사람의 지각(知覺) 경험 혹 무엇인가와 관련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은 ‘오늘의 뉴스’가 필요로 하는 외관상의 배경을 만들었 으며, 역으로 ‘오늘의 뉴스’는 사진이 필요로 하는 정황을 만들어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이 같은 전자기술이 함께 어우러져 새로운 세상(사건이 눈앞에 나타났다 가는 곧바로 사라져버리곤 하는 삐까부 세상, peek-a-boo world)을 출현시켰다. 이는 일관성과 판단력이 결여된 세계이며,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실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가로막는) 세계이며, 숨어 있다가 ‘까꿍’하고 아이들을 놀래주는 삐까부 장난처럼 완전히 따로 노는 세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린애들의 삐까부 놀이와 마찬가지로 끝없이 즐기는 오락이기도 했다.
전신기와 사진술을 주축으로 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의사소통 매체로 인해 삐까부 세상이 출현 했지만, 우리가 그 속에서 살게 된 때는 텔레비전이 등장하고 나서였다. 텔레비전으로 인해 이미지와 즉각성의 상호작용이 위험하리만치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전신과 사진이 인식론적 편향성이 최대한 강력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게다가 텔레비전으로 인해 그러한 편향성은 가정에까지 파고들었다.
이제는 텔레비전이 최초의 친구이자 가장 가까운 선생이었고, 가장 믿을 만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그어린이들의 자녀세대가 되었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텔레비전은 새로운 인식론의 지휘소인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공적 관심사에 관한 진지한 논제(정치, 뉴스, 교육, 종교, 과학, 스포츠)는 텔레비전의 소통과정에서 배제되어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즉, 이러한 논제에 대한 모든 공적 식별은 이미 텔레비전의 편향성으로 말미암아 변형되었다는 뜻이다.
텔레비전은 또한 좀 더 미묘한 방식으로도 지휘소 역할을 하고 있다. 예로, 우리가 다른 매체를 이용할 때도 대체로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는다.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는 어떤 전화회사를 이용해야 할지, 어떤 영화를 볼지, 어떤 책을 음반을 잡지를 사야 할지,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어야 할지를 배운다. 텔레비전은 그 어떤 여타 매체도 해낼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의사소통 환경을 조성한다.
한편 그래픽과 전자혁명으로 유발된 골칫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된 세계가 우리에게 낯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점이다. 낯설게 느끼는 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은 길들여졌다는 신호이며, 길들 여져 온 만큼 우리가 변해왔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는 이제 텔레비전의 인식론에 거의 다 길들여졌다. 즉,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규정되는 진실, 지식, 사실을 너무도 철저하게 받아들이기에, 쓸모없는 것들이 중요한 것인 양, 그리고 모순된 것들이 대단히 합리적인 양 우리 안에 가득 들어앉게 되었 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회적 관습이나 제도 중 일부가 시대적 규범과 잘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이제는 시대적 규범을 문제 삼기보다는 본래의 관습이나 제도가 이상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여긴다.
제2부
쇼비즈니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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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TV방송이란 매일같이 수천 개 이미지를 쏟아 부어 만드는 멋진 구경거리나 시각적 환희와 다를 바 없다. 방송화면에서 한 장면이 머무는 평균시간이 3.5초에 불과하기에, 우리 눈은 쉴 새 없이 새로운 볼거리를 접하게 된다. 더욱이 시청자는 텔레비전에서 온갖 볼거리를 접하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감정적인 만족을 목표로 하게 된다. 심지어 일부에선 골칫거리 정도로 여기는 광고조차도 신나는 음악과 함께 시각적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정교하게 구성한다. 따라서 현재 텔레비전 상업광고에 나오는 장면이 세계 최고의 사진작품이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다.
미국의 TV방송은 시청자에게 즐길 거리를 쏟아 붓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다. 물론 텔레비전이 오락적 이라는 것은 흔해빠진 말이다. 여기서의 논점은 텔레비전이 오락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인해 모든 경험적 표현이 자연스럽게 오락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통해온 세상과 교감을 유지하지만, 이는 인격이 사라진 무표정한 방식일 뿐이다. 문제는 텔레비전이 오락 물을 전달한다는 점이 아니라 모든 전달되는 내용이 오락적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별개의 쟁점이다.
달리 말하면, 텔레비전 세계에서 오락은 모든 담론을 압도하는 지배이념과 같다. 무엇을 묘사하든, 어떤 관점에서 전달하든, 가장 중요한 전제는 즐겁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재미’ 때문에 매일같이 뉴스에서 재난이나 잔혹한 장면을 접하면서도, 뉴스진행자가 하는 한마디 “내일 다시 뵙겠습 니다”에 걸려들고 만다. 왜냐고? 아마 TV에서 몇 분 정도 살인이나 무차별적 상해사건을 보면 1개월 정도는 잠을 못 이룰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은 ‘뉴스’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재미삼아 보게 될 것임을 잘 알기에 뉴스진행자의 초대에 기꺼이 응한다. 뉴스쇼에서 온통 우리가 보고 듣는, 잘 생기고 상냥한 뉴스진행자, 유쾌한 재담, 자극적인 타이틀 음악, 생생한 현장 장면, 그리고 매혹적인 광고… 이 모든 것들이 방금 본 장면을 슬퍼할 필요가 없음을 암시한다.
영화, 음반, 라디오도 미국문화를 오락거리로 만드는 데 한몫했지만, 이로 인해 의사소통 형식까지 심각하게 손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다르다. 텔레비전은 모든 종류의 담론형태를 포괄한다.
정부정책을 알기 위해 극장에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야구경기 결과나 엊그제 살인사건 소식을 알려고 음반을 사는 사람도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연속극이나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들으려고 라디오를 켜는 사람도 없다(텔레비전이 가까이 있으면). 하지만 사람들은 이 모든 경우를 막론하고 텔레비전으로 달려가는데, 이러한 점이 텔레비전이 모든 문화를 아우르며 그토록 강력하게 공명하는 이유다.
텔레비전이야말로 우리시대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으뜸가는 문화 양식이다. 그리고 치명적인 사실은, 실제 세계가 텔레비전이라는 무대를 통해 상영되는 모습을 본떠 점차 각색된다는 점이다. 이는 단지 브라운관 속에서만 모든 담론이 오락적 요소로 전락한다는 뜻이 아니다. 현실세계에서도 동일한 메타 포인 오락적 요소가 활개친다는 뜻이다. 법정이나 교실, 회의실, 교회에서도 미국인들은 더 이상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고 제각기 따로 논다. 사람들은 생각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교환한다. 더이상 설명하려 하지 않고 잘생긴 얼굴이나 유명인사, 상업광고 따위를 입에 올릴 뿐이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는 일종의 메타포로서, 온 세계가 라스베이거스의 쇼 무대라고 속삭이는 탓이다.
예를 들면, 시카고에선 스렉 사코위츠 신부가 록큰롤 음악과 설교를 뒤섞어버렸다. 그는 숌버그(시카고 인근) 성령교회의 부교역자인 동시에 WKQX방송의 디스크자키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자신이 맡고 있는 〈마음의 여로〉라는 방송에서 그는 가족 간의 화목이나 책임에 대해 부드럽게 말하면서, ‘빌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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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10’ 음악이 흐르는 사이사이에 설교를 끼워 넣는다. 사코위츠 신부는 자신은 설교를 ‘교회 식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경건해지기 위해 따분함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서는 에드워드 디트리히 박사가 버나드 슐러라는 환자의 심장 관상동맥 삼중 우회수술에 성공하여 성가를 높였다. 당연히 이 수술 장면은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는데, 미국 내 50여방송사는 물론, 영국의 BBC방송도 나섰으며 결과는 흡족했다. 수술 장면을 중계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여하간 방송으로 인해 디트리히 박사와 슐러 씨의 심장은 유명세를 탔다. 그리고 슐러 씨는 텔레비전에서 의사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너무 많이 봐서인지, “TV로 생중계되는 마당에 의사가 나를 죽게 내버려두겠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수술결과에 대해 의외로 낙관했다. 한편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강간사건에 대한 재판이 TV로 방영되어 꽤나 흥미를 끌었는데, 시청자들은 재판과 연속극을 거의 분간하지 못했다. 그리고 플로리다에선 여러 흉악범죄 사건의 재판과정을 방송했는데, 어느 법정 드라 마보다도 더 흥미진진하게 인기를 끌었고 이 모든 일은 공공교육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1984년 대선을 앞두고 두 후보가 ‘TV토론’에서 맞닥뜨렸는데, 이 행사는 그 어떤 토론과도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이를테면, “중앙아메리카에 대한 귀하의 정책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에 답하는데, 후보마다 5분 남짓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상대방은 불과 1분 이내에 반론을 마쳐야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복잡한 설명, 증거서류의 활용, 논리적 전개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실제로 어법에 전혀 맞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었지만 별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두 후보는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강한 인상을 심는 데’ 더 신경을 썼는데, 결국 이 점이 TV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토론 후 논평에서도 후보들의 견해를 가급적 평가하지 않으려 애썼는데, 사실 평가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사람들은 TV토론을 마치 권투경기 정도로 여겨서 누가 누구를 KO 시켰느냐고만 물었다. 각 후보가 어떤 식으로 보였으며, 시선처리가 어땠으며, 어떻게 재치 있는 답변을 했는지가 중요했다. 두 번째 TV토론에서는 레이건 대통령이 자신의 나이와 관계된 질문을 받았을 때 의기양양하게 재치 있는 답변을 날렸는데, 다음날 몇몇 신문에는 레이건이 유머 한방으로 먼데일 후보를 KO 시켰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러므로 자유세계의 지도자는 텔레비전을 ‘보는’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다.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사회적 관심사가 문화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어져 왔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 문화담론의 본질도 무엇이 쇼 비즈니스고 무엇이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성직자와 대통령, 교육자와 뉴스진행자들은 자기분야의 훈련보다 쇼맨십을 갖추는데 더 안달이 날 지경이다. 만약, 어빙 베를린이 자신의 히트곡(There's Nothing But Show Business)에서 한글자만 살짝 바꿨더라면, 헉슬리 못지않게 예언자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불렀다면 말이다. “세상만사는 쇼 비즈니스로 통한다(There's No Business But Show Business).”
헉슬리의 경고 문화적 풍조가 황폐화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문화가 감옥이 되는 오웰식이다. 두번째는 문화가 스트립쇼와 같이 저속해지는 헉슬리식이다. 지금 세계가 오웰이 비유적으로 묘사한 감시문화로 인해 손상되었다는 생각은 현실성이 없다. 반면 헉슬리는 기술문명이 발전된 시대에는, 정신적 황폐화가 의심과 증오로 가득한 적보다는 미소를 머금은 적으로 인해 야기될 가능성이 크다고 가르 쳤다. 대중이 하찮은 일에 정신이 팔릴 때, 끊임없는 오락 활동을 문화적 삶으로 착각할 때, 진지한 공적 대화가 허튼소리로 전락할 때, 한마디로 국민이 관객이 되고 모든 공적 활동이 가벼운 희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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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udeville)과 같이 변할 때 국가는 위기를 맞는다. 이때 문화의 사멸은 필연적이다.
미국에서 오웰의 예언은 별 개연성이 없다. 그러나 헉슬리의 예언은 제대로 실현중이다. 현재 미국은 전기 플러그를 꼽으면 기술적으로 구현되는 오락에 스스로를 적응시키고자 세계에서 가장 야심 찬 실험에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유래 없이, 미국인들은 너무 급하게 앞서나가다 활자시대가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그 결과 사회 전반에 텔레비전의 통치가 만연하게 되었다. 결국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 하면서 헉슬리가 예언한 미래상의 단면이 미국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선 철학자들도 아무런 지침을 제시한 적이 없기에 두렵기까지 하다.
과거 알파벳이 도입되어 문화에 접목되면서 사람들의 인식습관, 사회적 관계, 공동체의 개념, 역사와 종교까지 변했다. 그리고 인쇄기가 도입되어 책이 유통되자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또 이미지를 빛의 속도로 전송하는 기술이 도입되자 문화적 대변혁이 일어났다. 논쟁은 물론 소규모 국지적 저항조차 없었다. 이데올로기만 있었다. 조용하진 않았지만 확실했다. 말이 없는 이데올로기였으나 말보다 더 강했다. 진보의 불가피성을 열렬히 신봉하는 무리만 있으면 이 이데올로기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책과 같은 부류의 책을 집필해 온 사람이나 몇 가지 특효제로 이런 증상의 근원을 종식시 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헤어나기 힘든 어려움에 처한다.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특효약이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도 반드시 있으리라는 확고한 신념을 간직한 전형적인 미국인으로서, 다음의 몇 가지 제안으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일단, 골수 러다이트(Luddite) 추종자와 같은 입장, 이를테면 제리 맨더의 『텔레비전을 버려라』와 같은 터무니없는 견해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미국인들은 텔레비전을 절대로 끄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조금이나마 진지한 매체로 변모시킬 수 있을까 하는 기대 역시 거의 비현실적이다. 법으로 텔레비전 방영시간을 제한하여 공공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경감시키는 나라도 제법 있기는 하다. 하지만 미국에선 불가능하리라 확신한다. 일부는 여전히 이러한 방편을 고민하기도 한다.
이 글을 쓰는 무렵,〈뉴욕 타임즈〉(1984년 9월 27일자)에는 코네티컷주 파밍턴 도서관협회가 기획하고 후원한 ‘TV끄기 운동’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이는 1개월간 TV시청을 중단하자는 운동이다. 이운동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정말 보잘것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들의 노력을 성원 했다. 텔레비전에서 일부 내용(과도한 폭력이나 어린이 시간의 상업광고 등)을 제한하여 한숨 돌려보 려는 노력은 그래도 박수 받을 만하다. 담배와 술 광고를 제한하듯 정치광고도 텔레비전에서 제한하자는 존 린지의 제안을 개인적으로 선호한다. 이 같은 금지조치는 수정헌법 1조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절충안을 하나 제시하고 싶다. 즉, 정치광고 방송 전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내보내도록 하자. “일반적으로 정치광고 시청은 지역사회의 지적 건전성을 해칩니다.”
물론 이런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TV프로그램의 수준을 향상시킬 제안을 내놓을 생각도 없다. 이 책 앞부분에서 시사했듯, 텔레비전은 쓰레기 같은 오락물을 방영할 때 가장 쓸모 있게 기능한다. 반대로 심각한 담론 형식(뉴스, 정치, 과학, 교육, 교역, 종교)을다룰 때는 최악으로 기능하여 이들 담론을 제멋대로 오락 프로그램으로 변질시킨다. 어쨌든 텔레비전 에서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늘 텔레비전을 본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따라서 해결책은 텔레비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텔레비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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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무엇인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정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 문화를 이끄는가에 대해 폭넓은 공감대는커녕 의미 있는 논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정보란 과연 무엇일까?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어떤 것들을 정보로 간주할 수 있을까? 뉴스와 같은 일반적 취득정보, 금언이나 교훈, 그리고 배움을 통한 지식은 각각 우리 의식 속에서 어떠한 개념을 형성하기에 작용하는 방식이 다를까? 이렇게 형성된 개념으로 인해 각각 다른 정보유형을 무시하 거나 배제시키는 현상은 왜일까? 정보와 판단력 간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어떤 정보유형이 사고력을 가장 촉진시킬까? 혹시 각 정보유형마다 어떤 도덕적 편향성이 내재해 있진 않을까? 정보가 그 출처나 전달형식, 빠르기, 그리고 접하는 환경을 통해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어떤 식으로 재정의할까?
정보유형에 따라 작용하는 방식은 어떻게 다를까? 신문의 ‘독자’는 텔레비전의 ‘시청자’와 과연 다른가? 각각의 정보 전달형식은 최종적으로 표현되는 내용을 어떤 식으로 규정할까? 이와 같은 질문 십여 개를 던져보면 니콜라스 존슨이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텔레비전에 되묻기’도 가능할 터이다. 매체의 위험성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다면 어떤 매체도 크게 위험스럽진 않기 때문이다.
강조하고자 하는 요점은, 정보가 조직되는 체계와 그 영향에 대한 깊이 있고 확실한 자각으로 매체의 신비를 벗겨내야만,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어느 정도 통제할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매체에 대한 그러한 분별력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딱 두 가지 방법이 떠오르는데, 하나는 바로 집어치워야 할 터무니없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절망적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해법이다.
터무니없는 방법이란 TV시청을 금하는 대신 텔레비전을 어떤 식으로 봐야 하는지 TV프로그램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텔레비전으로 인해 뉴스, 정치쟁점, 종교적 묵상 등에 관한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재설정되고 저하되는지 TV로 방영한다는 뜻이다. 기왕이면〈토요일밤의 현장〉이나〈몬타 파이돈〉방 식을 따라 패러디 형식으로 방송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면 TV가 공공담론을 좌지우지한다는 내용을 보고 온 국민이 배꼽을 쥘 것이다.
그러나 최후에 웃는 자는 당연히 텔레비전이다. 시청자 한 사람을 확실하게 움직이려면 방송을 텔레비 전에 걸맞게 엄청 재미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종국에는 비평행위 자체도 텔레비전에 휘둘리게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패러디를 만든 사람은 유명인사가 되고, 영화의 스타로 등장하고, 마침내
TV광고에도 출연하게 될 것이다.
절망적인 방법이란, 이론적으로 이 문제에 대처 가능한 유일한 대중 의사소통 매체인 ‘학교’에 의지하는 일이다. 이 방법은 위험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마다 등장했던 미국인들의 전통적인 해법이었 으며, 당연히 학교교육이 효과적이라는 순진하면서도 맹목적인 믿음에 근거한다. 그러나 학교교육은 거의 효과가 없다. 제대로 보면 이러한 기대를 당연시할 만한 이유도 없다.
그러나 아직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교육자들이 상당한 고심을 한다.
덧붙이면 교육자들도 다소나마 ‘매체’를 의식적으로 자각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의식수준이 “교육을 통제하기 위해 텔레비전(또는 컴퓨터나 워드프로세서)을 어떻게 활용할까?” 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음이 사실이다. 아직까지는 “텔레비전(또는 컴퓨터)을 통제하기 위해 교육을 어떻게 활용할까?” 묻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문제해결을 위한 우리의 발돋움은 현 수준의 이해력이나 지향점조차도 넘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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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청소년들이 자기시대의 문화적 상징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학습을 지도하는 일도 학교의 공인된 책무였는데, 이제는 청소년들이 자기시대의 정보매체와 스스로 거리를 두도록 지도해야 하는 책무로 바꿔도 그리 낯설지 않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새로운 책무를 정규교육과정에 편입하길 기대할 수도 없고, 교육의 중점과제로 채택하길 희망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여기서 제안하는 해결책은 올더스 헉슬리가 시사한 바와 차이가 없다. 그리고 헉슬리 이상의 해결책도 없다. 우리 모두는 교육과 예기치 못한 재앙 사이에서 경주를 벌이고 있다는 H.G. 웰즈의 말을 헉슬리는 확신했으며, 매체 인식론과 매체 정치학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글을 끊임없이 썼다. 헉슬리가 우리 모두에게 경고하고자 했던 마지막 메시지는 이렇다. “멋진 신세계에선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 없이 웃고만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웃는지, 왜 생각을 멈추 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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