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강계순
나, 그대를 만나
사랑은 슬픔으로 시작되고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날 오후, 조금 슬픈 듯한 눈과 따뜻한 미소를 하고 당신은 저만치서 나
를 쳐다보고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웃고 마시고 떠들고 하는 가운데 있으면서도, 당신의 지긋한 미소와 눈은, 그 모
든 소리와 사람들을 차단하고 나를 한 순간 진공 속으로 몰아넣는 듯했습니다.
사랑이 어떻게 나에게로 왔을까.
햇빛이 부어 내리듯, 꽃들이 눈처럼 내리듯
기도처럼 너에게로 왔을까-
그것을 말해 다오.
하나의 행복이 빛나면서
하늘에서 내려와
그 날개를 크게 펴고
내 불타는 영혼 위에 앉았습니다.
-R.M.릴케의 <사랑의 노래>
햇빛이 반짝이며 내 어깨 위에 내려앉듯이, 봄날 오후 수많은 꽃잎들이 하늘을 덮고 흩날리면
서 쏟아지듯이, 그렇게 사랑은 내게로 왔습니다.
갑자기 세상은 한 개의 금빛 종이 되어 쟁그랑 쟁그랑 노래 부르듯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자기와 닮았다고 생각되는 어떤 대상과 과감하게 결합하는 일이다”라고 어떤 철학자
가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무슨 따뜻한 빛이 나를 감싸는 듯했습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꼬집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치 오래 헤어져 있던 육친을 만
난 것 같은 느낌, 잃어버렸던 나의 일부를 찾아낸 것 같은 안도감이 나의 가슴을 서서히 밀고 올
라와 알 수 없는 충족감으로 나를 설레게 했습니다.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독신의 삶 속에서 일과 성취욕에 팽팽하게 부풀어 있던 여태까지의 나의
인생이 얼마나 많은 결핍으로 가득한 것이었던가를 깨닫게 해주었던 그날 오후 당신과의 만남은,
긴 여행의 끝에 도달한 안온한 가정의 평화와도 같은 느낌, 불완전한 외쪽의 바퀴로 타력에 의하
여 마구 달리던 수레가 다른 한쪽의 바퀴를 마저 달고 비로소 안정감을 얻은 것 같은 균형을 몸
으로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사랑은 운명이라고 흔히 말을 하지요.
나의 이성이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 나의 강한 이기심으로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운명
같은 것이 조금씩 나를 해체시키면서 따뜻하게 무너뜨리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느꼈습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왔던 나의 에고(ego)와 논리적인 사고, 자기 운명의 열쇠는 자기가 쥐고
있다고 믿었던 나의 철저한 자아가 그렇게도 쉽사리, 그렇게도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에 대
하여 나의 의지는 강하게 저항해야만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는 동안, 내 속에는 어이없게도 따뜻한 기쁨
이 움트고 있음을, 끝없는 평화가 내 가슴을 채워가고 있음을 자각하면서, 나는 이상한 행복감으
로 울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온화한 미소와 조금 쓸쓸한 듯한 분위기를 갖고 계셨습니다.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옷은 엷은 갈색과 진한 갈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귀밑에는 몇 올 쯤
의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흩날리듯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기 소개를 하면서
웃던 당신의 얼굴은 무언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였습
니다.
현세의 욕망이나 이해타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넉넉하고 자유로운 당신의 분위기,
마치 목적없이 떠도는 여행자와도 같이 보이는 당신의 조금 허탈한 눈, 내성적이고 세심하게 보
이는 당신의 손놀림, 한동안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가만히 건너다보고 있던 당신의 눈빛 속에
서 나는 나의 운명이 나래를 펴고 나의 몸 위로 내려앉는 것을 예감했습니다.
아벨라르.
그리하여 하나의 행복이 내 불타는 영혼 위로 내려앉았고 `정교한 조직의 이국 산물`과도 같은
사랑의 신비가 내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당신은 먼 이국에서 오셨고, 또 언젠가는 떠나갈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잠깐 머물렀다 떠나갈
당신이 내게 새롭게 발견된 또 하나의 `나 자신`인 것을 깨달은 그 날 오후, 한 몸의 연인을 반으
로 나누어 세상의 끝과 끝으로 던져 놓았다는 짖궂은 신화 속의 `베터하프(Better half)`를 상기했
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미소, 당신의 옷깃이 닿은 의자와 식탁의 모서리, 당신이 잡은
술잔에 이르기까지 내 관심의 촉각은 예민하게 일어서서 그 모두를 나의 눈과 귀 속에 생생하게
각인했고, 그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소리는 한 음계 높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빛깔은 은
빛 혹은 금빛으로 채색되었으며, 그 향기는 어찌 그리도 감미롭게 나를 감싸고 말았던지요?
뜰안의 나무들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조용히 그 키를 키워가고 나무들 너머로 바라보이는 하늘
에는 엷은 봄날의 아지랑이가 눈물 같이 어룽이었습니다.
아벨라르.
다시 한번 인생을 시작해 보고 싶은 열망이, 그것을 위하여는 그 무엇이라도 지불하고 싶은 열
정이 내 몸 속에서 강하게 피돌기를 시작한 그날 오후, 나는 기쁨보다는 더 많이 슬픔 쪽에 서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갖고 있는 성질 속에는 기쁨과 환희도 큰 비중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고통과 인내도 더
큰 비중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므로, 또 사랑이라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얼
마나 많은 눈물과 기도를 겪어야 하는지, 또 얼마나 자아를 희생해야 하는지를 나는 알고 있으므
로, 그리고 당신은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먼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아벨라르, 내
사랑은 슬픔으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과 슬픔의 다른 한쪽에서 다스릴 수 없이 솟아오르던 어린아이 같은
즐거움, 반짝이는 미소, 세상이 온통 경쾌한 음악으로 가득 차는 것 같은 율동감이 스스로를 가눌
수 없게 하던 저 불가해한 봄날 오후의 한때를, 나는 내게 내려주신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반생의 어둠을 밀어내고 빛처럼 내게로 오신 이, 세상의 온갖 사물과 냄새, 그 리듬을 바로
감각하고, 생의 곳곳에 숨어 있는 깊은 의미를 바로 이해하도록 해주신 이, 그리고 긴 밤을 눈 떠
서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줄 알게 해주신 이, 나의 아벨라르여.
사랑은 내게 기도처럼 왔습니다.
내 영혼을 깊이 울리면서 천상의 어느 곳을 향하여 손 모으고 무릎 꿇게 하는 겸손하고 맑은
기도처럼 그렇게 내게로 왔습니다.
내가 이 대지 위에 밭 붙이고 살고 있음을 감사하고 나의 영혼이 그리움의 고통으로 닳아가고
있음을 또한 감사하는 순정한 기도처럼 와서, 나뭇잎 하나에도 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시인 릴
케(Reiner Maria Rillke, 1875~1926, 독일)를 이해하게 해줍니다.
아벨라르.
나의 기도가 당신을 지켜, 생애의 어느 하루도 어두운 날이 없기를, 다만 행복하고 사랑에 가득
하기를 이 밤도 빌겠습니다.
당신이란 의미
세상의 많은 사물,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특히 내가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이나 사물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순한 사물이나 사람이 아니고 어떤 `의미`가 됩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이름을 갖고 있지만 그 이름은 세상에 자기를 나타내는 기호에 지나지 않
을 뿐 특별한 뜻을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나의 연인`이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보편적인 이름이 아니고 나의 운명
속에 자리잡은 하나의 특별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아벨라르.
당신은 나의 눈 속에, 마음 속에, 운명 속에 이미 분명한 하나의 존재로서 꽃 피기 시작했습니
다.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고,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견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나의 사고, 나
의 능력, 나의 시각, 나의 가치 기준 그리고 나의 생명, 그 자체에조차 깊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은 당신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색깔, 다른 향기, 다른 목적으로 바뀌어졌
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 의하여 깊이 영향받고, 그 생활의 설계를 바꾸고, 어떤 것을 꿈꾸게
된다는 것은 바로 그가 세상에 태어난 몫을 충분히 하게 되었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
다.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치루어야만 되는 어떤 것 -비속함을 초월하고 숭고하게 되는 것, 위대
한 것에 대한 헌신, 뜨거운 심장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이런 것을 치루기 위하여 당신은 내
게로 보내어진 사람입니다. 말로써가 아니고 가슴과 행위로, 안락과 휴식으로써만이 아니라 고뇌
와 투쟁으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지키는 일은, 그것을 통하여 내 영혼이 높은 곳으로 상승하는 작
용을 하게 해줍니다.
세상의 공리로부터, 타산으로부터, 이기심으로부터 나를 떼어내어 맑고 높은 어느 곳으로 나를
이끌어 주는 당신의 의미는, 마치 부싯돌끼리 강렬하게 부딪쳐 캄캄한 어둠을 한 순간 밝히고 그
불씨를 딴 곳으로까지 옮기는 일만큼이나 빛나는 무엇입니다.
아벨라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만남이 있지만 당신과의 만남처럼 강한 힘으로 나를 뒤흔들어 놓는 만
남, 기쁨과 고통의 극단까지 오가게 하는 만남이 또 있을까요?
아, 당신에게 가서 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요.
당신에 내게로 와서 이렇게도 큰 기쁨, 이렇게도 큰 희망, 그리고 이렇게도 큰 그리움과 슬픔이
되는 것처럼, 나도 당신에게로 가서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요.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무엇이라고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로 가서 가장 큰 기쁨과 위로, 최후에 나의 생명을 그것과 바꿀 가장 큰 사랑이 되고 싶습니다.
나의 아벨라르.
이 기쁨과 설레임은 나의 꿈 속에조차 따라와 긴 밤의 어둠을 물리칩니다.
아침에 일어나 뜰에 내려서면 상쾌하게 발목을 적시는 풀잎 위의 이슬들처럼 나의 육신과 영혼
을 맑게 적셔 줍니다.
이슬들이 이토록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을, 새벽 바람이 이토록 맑은 향기를 품고 있는 것을, 세
계가 이토록 내게 잘 어울리는 한벌의 옷처럼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을, 예전에 나는 미처 경험하
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향해 열린 창을 통하여 세계를 내다보고,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세계를 알고, 당신의 눈
과 마음을 통하여 세계를 인식하는 이 사랑의 신비한 감옥 안에서 아벨라르, 나의 삶은 마치 잘
익은 빵처럼 부풀고 감미로워, 나는 당신을 위하여 알뜰하고 깨끗한 식탁을 마련하고 기다리는
신부가 됩니다.
아벨라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이름, 특별한 향기로 나를 불러 주십시오.
나의 식탁으로 와서 정성들여 마련한 이 양식을 같이 나누고 붉게 익은 포도주를 따루어 다시
시작하는 나의 삶을 위하여 조용히 잔을 들어 주십시오.
같은 살 같은 영혼
아벨라르.
당신은 무용의 천재, 이사도라 던컨의 생애를 읽어 보셨겠지요. 본능과 직관이 시키는 대로 삶
의 리듬을 춤추다가 간 던컨을 떠올릴 때마다 사랑과 예술의 대립, 서로 융화하기 힘들며 둘 다
매우 강한 힘으로 한 사람의 생명력 전부를 요구하는 절대의 소명, 그것에 대하여 나는 생각하게
됩니다.
“내 삶은 오직 두 개의 동기를 갖고 있다. -즉 사랑과 예술이 그것인데, 사랑은 때때로 예술을
파괴했고 예술의 전제적 소명은 사랑에 비극적 종말을 가져왔다. 이 둘은 어울리지 못하며 끊임
없이 싸울 뿐이다. 왜냐하면 사랑도 그것을 위해 전부를 요구하고 예술도 그것을 위해 전부를 요
구하기 때문이다.”
오직 춤을 추면서 살다 간 무용의 천재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1878~1927, 미국)은 그
의 자서전에서 위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던컨은 여러 남자들과 사랑을 나누기는 했지만, 남자의 곁에 안주하여 단순히 한 여자가 되는
것을 거부했고 죽을 때까지 그는 자연과 그의 직관, 그리고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리듬을 춤추다
가 떠난 무용가였습니다.
그는 감사하거나 숭배하는 많은 예술가들 앞에서 춤을 춤으로써 그의 마음을 표현했고, 자유로
운 영혼과 빛나는 천재로서 한 시대를 춤추다가 갔습니다.
그는 고든 크레이그라는 젊은 무대 예술가를 만나서 “그에게서 나의 살과 같은 살을 만났고,
내 피와 같은 피를 만났다. 이것은 영혼끼리의 만남이었다”라고 감동하여,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
사랑을 나누고 그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제각기 자기의 일이 사랑 때문에 방해받
고 지연되는 것을 괴로워했습니다. 그와 함께 사는 것은 그의 예술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고, 그
자신의 존재 이유마저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그와 헤어진다는 것은 마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랑과 에술은 둘 다 그 사람의 전부를 요구합니다.
생명의 전부를 거기에 집중하고 걸지 않으면 안되는 전제적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흔히 사랑을, 그 창조력의 촉발제로써나 혹은 윤활제로써만 갖는 수가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정열은 창작생활에 빼
놓을 수 없는 강한 힘을 부여하므로 에술가의 생애에는 많은 사랑의 얘기가 따라다닙니다. 그러
나 진정한 예술가라면 그의 소명이 사랑보다는 예술 쪽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비단 예술가에게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아주 범속한 생활인에게도 `일`이란 그의 존재의
이유와 가치와 보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일을 가지고 있는 연인들의 사랑이 불행하게 끝나 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생땍쥐베리(Antoinc de Saint-Exupery, 1900~1944, 프랑스의 작가)가 사랑에 대하여 정의하기
를, “사랑은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가는 것
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사랑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동화`의 감정과 `전제적 힘`을 가리킨 것
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성질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 일 속에서 부단히 만나고 싸우고 화해하며 그들의 일과
사랑을 함께 키워 갈 수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끼리는 서로 동화하기가 매우 힘든 일이지요.
아벨라르.
나는 이미 당신과 동화하기로 내 삶의 방향을 결정했지만, 당신의 일과 나의 일은 사실상 거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혹시 전생에서 우리는 오누이로 살지는 않았을까 의심할 만큼 나와 같은 피, 같
은 성품, 같은 취미, 같은 영혼을 당신에게서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상적 반려자로서의 당신에게 나의 일, 나의 사랑, 모든 것을 주어도 결코 아깝
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주는 모든 것은 당신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느끼는 것은 곧 당신도 함께 느끼며, 내가 즐거운 일은 곧 당신에게도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의 오랜 방황은 이제 끝났습니다. 일과 함께 사랑을, 사랑과 함께 일
을 키워갈 때 배가되는 기쁨 속에서, 나는 무엇에고 감사하며 언제라도 겸손한 마음으로 당당하
게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른바 `자매혼`으로 얽힌 사람들이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가는` 사람들이므로 어떤
고난이 닥쳐오고 어떤 좌절이 온다 해도 당신과 나의 `본질로서의 맺음`은 결코 끊기지 않을 것
이라 믿습니다.
운명이 우리에게 허락한 이 소중한 만남을 어떻게 키우고 가꾸어 나갈 것인가, 일과 사랑을 어
떻게 조화시키며 삶의 결실을 맺을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지난한 과제로 남아 있긴
하지만, 우리는 결국 같은 생각, 같은 결말에 도달하게 될 것을 믿기에, 나는 내 미래의 열쇠를
당신에게 모두 맡깁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아벨라르.
당신은 청마 유치환(1908`1967) 시인을 알고 계시지요.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그는
여류시인 이영도에게 무려 5천여통의 사랑의 편지를 띄었고, 그가 작고한 후 그 편지는 이영도의
손에 의하여 책으로 엮어져 나와, 그 아름답고 절절한 편지 구절이 다른 모든 이들에게 널리 읽
혀졌습니다.
그 시절의 이영도를 가까이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는 나도, 그의 청초하고 수심어린 외모에
은연중 이끌렸던 적이 있습니다.
일찍이 혼자가 되어 오직 시를 쓰는 일과 딸 하나를 키우는 일에 전념하면서 어느 학교에서 교
편을 잡고 있었던 이영도는 그 당시의 많은 남성 문우들로부터 선망을 받고 있던 상당한 미인이
었습니다.
이영도가 혼자의 몸으로, 그렇게 꿋꿋하게 그의 시와 딸을 지키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청마
유치환과의 애정에 크게 힘 입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이영도로 하여금 외로움과 여러가지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받쳐 주는 든든
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청마를 향한 그리움은 그의 시를 시들지 않게 해준 충분한 자양이 되
었습니다.
청마의 편지는 마치 한 편의 산문시와도 같은 리리시즘(Lyricism)으로 가득차서 읽는 이로 하
여금 가슴 뿌듯한 감동을 느끼게 해줍니다. 후에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책으로 묶
여져, 그 수익은 이영도의 뜻에 따라 후진 양성을 위한 `시조시인상` 기금으로 희사된, 청마의 연
애편지 중 한 편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두 시인의 아름다운 사랑을 더듬으며 사랑이 가지고 있는 절절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한번
새겨 보면서 나의 사랑도 언제까지나 아름답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정향!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
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
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 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 같으면서도 만리길입니까? 끝내 만리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아벨라르. 이토록 애타게 울부짖는 청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죄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이
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와 하던 청마, 사랑하면서도 언제나 같이 있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손에
잡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 썼지요.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 <행복> 중에서
청마는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먼 길을 달려서 단 한두 시간을 이영도를 만나기 위하여, 그의
휴일을 온통 다 써 버렸던 정열의 시인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길들은 잘 포장되어 있지 않
았고, 버스는 느리기만 했습니다. 서로 다른 지방에서 직장을 가지고 있던 청마와 이영도는 일요
일이나 공휴일에 주어진 시간을 오직 서로 만나는 일로 가득 채우기 위하여 먼 길을 하루 종일
버스를 타야 하는 번거로움을 조금도 괴롭게 생각하지 않았고, 도덕적인 제약과 한국적 모럴 때
문에 어찌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사랑을 마음 깊은 곳에 성상처럼 모셔놓고 살았습니다. 이미 두
사람 모두 고인이 되었고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사랑은 후배를 키우는 확실한 결실로
서, 해마다 몇 사람씩 이 땅을 밝히는 시인으로 태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이토록 세상을 밝게 비추는 촛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깊고 아득한
의미에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아벨라르.
다시 나는 청마의 시를 빌어서 나의 그리움을 당신께 보냅니다.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유치환 <그리움> 중에서
나의 닻을 내리고
아벨라르.
흔히 사랑을 환상이라고들 말합니다. 사람마다 그 마음 속에는 완전한 인간, 완전한 사랑에 대
한 환상이 있어서, 그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이 현실 속의 어떤 순간에 신기루처럼 나타나 영혼
을 사로잡고, 일종의 도취 상태를 빚는 것이 사랑이라고들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이상적 남성 혹은 여성상을 마음 속에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가 어느날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환상의 얼굴을 그 사람에게
씌워 놓고 그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현실 속에 있는 상대의 실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꿈꾸어 온 사랑의 환영을 사랑하
는 것이 보편적인 사랑의 시작이라고들 하지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해 가는 동안,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의 단점이 발견되고, 자기가 생각해 온
이상적 인간형에서는 거리가 먼 결함 투성이인 현실 속의 인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어떤
이는 실망과 환멸로 그 사랑의 막을 내리고, 다시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르는 이상의 사람을 찾아
방황을 하게 됩니다.
아벨라르.
언젠가 당신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이제 방황이 끝났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답고 슬픈 영화 속에서, 혹은 비극적인 소설 속에서, 또 감미로운 음악 속에서, 수없이 스
치고 간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처럼 찾아 헤매던 나의 사랑이 당신을 통하여 비로소 현신해 왔
고, 나는 이제 나의 닻을 내리고 당신 곁에 정박하려 합니다.
환영이 아닌 실재하는 사랑으로서의 당신을 나는 가슴 가득히 껴안고, 이 사랑을 키우고 가꾸
어 갈 것입니다.
당신의 단점이나 결함마저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맹목을 축복해 주십시오.
타인의 눈에는 단점으로 보이는 것까지도 내게는 소중하고 유일한 것으로 보이는 이 사랑을 축
복해 주십시오.
당신에게 결함이 있다면 나의 노력으로 그것을 보완하며, 또 나의 결함을 당신으로부터 보완
받으며 나는 이 삶이 끝날 때까지 나의 사랑을 지킬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을 가꾸고 키워 나가고자 하는 이 귀한 의지를 환상을 찾아 헤매는 도로에다 어
찌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유일하며 가장 밝고 높은 촛대로서 내 속에 계십니다.
우리의 고려가요 중에는 그의 님을 가장 높고 귀한 존재로 비유한 노래가 있습니다.
이월 보로매
아으 노피 현 등불 다호라
만인 비취실 즈이샷다.
(2월 보름에
아, 높이 켠 등불 같아라
만인을 비추실 얼굴이어라)
삼월 나며 개한
아으 만춘 들 욋고지여
느미 브롤 즈을 디녀 나샷다
(3우러 지나면서 핀
아, 늦은 봄달 오얏꽃이여
남들이 부러워할 모습을
지니고 나셨도다)
고려의 여인은 그의 님을 이토록 높이 칭송하며 기리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님은 어느 때고 등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봅니
다.
자기의 님이 혼자만 우르러 보는 사람이 아니고 `만인을 비추실 얼굴`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
는 마음, 혼자에게만 아름답게 보이는 얼굴이 아니고, `만인이 부러워할 모습`임을 흐뭇해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남에게 칭송을 들을 때 마치 자신이 칭찬을 받는 것만큼 으쓱하고 자랑스러운
기분, 언제나 남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얼마나 상대를 아끼
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심정입니까.
만인을 비출 등불과 같은 모습으로, 만인이 부러워할 의젓한 모습으로 그의 연인을 가슴 속에
새기고 있는 자는 복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벨라르.
사랑하는 방법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심정은 어느 시대고 같
은 감정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시나 노래 등 많은 작품과 일화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
다.
머언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노래하지 않았던 시대가 없었고, 사랑의 사건이 없
었던 시대가 없었으며, 오늘날처럼 삭막한 시대에서조차도 사랑은 아름답고 지고한 것으로 사람
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음을 볼 때, 인간이 그 생존을 지속하는 한 결코 사랑은 소멸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를 니지고 있는 듯합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며, 사랑한다는 것은 사는 것을 배우는 일`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에 나는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아벨라르.
사랑을 통하여 진실하게 사는 법, 충만하게 사는 법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
를 비춰 주고 인도하며 깨닫게 함으로써 `2월 보름에 높이 켠 등불 같이`, 어둠 속에서도 내가 당
신을 우러르며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높이 떠 계십니다.
나의 전부를 던져
나는 가끔 당신에게서 떠도는 사람의 고적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무언지 한 구석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허전한 분위기가 나를 강하게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
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고 있을까를 때때로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당신은 이 나라와는 아주 이질적인 유럽의 한 나라에서 성장했고, 거기에서 공부와 일
을 했으며, 그 나라에 적응하여 살아왔으면서도, 자신의 몸 속에 흐르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한국
인의 피가, 그 나라 사람들과는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없는 어떤, 극히 작으면서도 극히 절실한
무엇으로서 당신의 가슴 속에 자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당신의 먼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이어받은, 서양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동양인으로서의 유전인
자가 당신의 몸 속에서 결코 서양의 문물이나 풍습과 융화되지 않는 갈등으로 서서히 자라 드디
어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고향인 이 나라를 자주 찾게 했고, 이 나라에서 뿌리내리고 싶다는
소망으로 피어났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당신은 서양인도 동양인도 아닌, 마치 코스모폴리턴과도 같은 묘한 분위기를 갖고 계
시고, 그것이 당신을 늘 쓸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확실한 소속이 없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의미도 되지만, 자유란 사실상 매우 고독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어디엔가 예속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습니다. 친구에, 가족에, 일에,
사상에, 나아가서 특정한 나라에 소속되어 있으므로써 인간은 비로소 편안해지는 법입니다.
자기가 설 자리,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일과 이웃, 자기가 아니면 안되는 어떤 상황이 한 사람을
당당하게 만들고 생동감 있는 결단과 추진력을 갖게 만듭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고국에 머무르고 싶은 당신의 소망과, 당신이 살아온 그 나라로 돌아가야
만 편안해지는 당신의 생활습성과의 괴리 사이에서 방황하고 괴로와 하고 있습니다. 또 당신은
당신의 생활을 뒷받침하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엮어 주고 있는 당신의 아내-아름답고 성실하고
다정다감하지만 당신 속에 흐르고 있는 피와는 전혀 다른 피를 갖고 있는 이국 태생의 여자와,
당신과 같은 피, 같은 채취, 같은 감각을 지니고 있는 나와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어제 당신은 내게 이런 말을 했지요.
“내가 꿈꾸어 온 여자란 독립적이고 합리적이며 행동적인 여자가 아니고, 남자의 사랑 속에서
행복한 표정을 지을 줄 알며, 남자의 뜻에 조용히 따라올 줄 아는 그런 동양적 여성이었어요. 동
양의 여성은 무언가 모성적인 힘이 강하게 돋보이고, 남편에게도 거의 모성적 사랑을 쏟을 줄 아
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당신은, 일반적인 한국 여자들에 비해 매우 개성이 강하고 지적이며, 사
고방식조차도 아주 진취적이고 서구화되어 있는 것 같지만, 내게는 당신 속에 있는 동양 여성의
아름다움, 말하자면 순정적이고 복종할 줄 알며 상대의 마음의 변화에 예민하게 신경을 써주는
자상하고 다뜻한 모성적인 애정의 원천이 아주 깊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여요.
아마 그런 점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중요한 부분인지도 몰라요.
나는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여성에게서, 내 마음의 아주 섬세한 변화에도 마음을 써 주고 나를
보호해 주고 위로해 주고 싶어하는 여자를 한번도 발견하지 못해 왔어요. 그것이 늘 내게는 어떤
상실감을 주어 왔거든요. 나는 나의 어머니와 같은 여자를 아내로 갖고 싶었어요. 그런데 당신에
게는 나의 어머니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아요. 나는 이제 비로소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아요. 나의
상실감이 비로소 채워지는 것 같은-.“
아벨라르.
당신의 긴 고백을 들으면서, 나는 남자가 원하고 있는 여자란 어떤 여자인가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라고 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독일)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자신만만하고 당돌하며 유능하고 적극적인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예속될 줄 알고 섬세한 마음
씨와 헌신의 정신을 가진 여자, 사랑과 감사로 충만된 여자를 남자들은 원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
찌 보면 그것은 남자들의 독선과 지배욕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발할 수도 있는 성질의 요구 조건
이지만, 또 그런 반박이 `우먼리브(Woman lberation)` 물결의 원천을 이루기도 했지만, 나는 당신
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비록 독신으로서 일에 열중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는 여자이긴 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근
원적인 차이점을 인정하는 쪽입니다.
남성과 여성은 같은 별 아래 태어난 두 개의 얼굴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어느 쪽이 우월하지
도, 열등하지도 않으며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주고 존중하며 살아가야 하는 공존의 운명이며, 남
성은 남성 특유의 강인함과 꿈으로, 여성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충분한 사랑으로 서로 의지하
고 도우며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비록 사회에서 남자들과 어깨를 겨루고 일을 하고는 있지만,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남성
이 여성이 될 수 없으며, 여성이 남성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능력에 있어서 남녀의 우열의 차이를 인정할 수는 없지만, 일단 일
을 떠나서 개인적인 자리로 돌아왔을 때, 여성은 여성다워야 하며 남성은 남성다워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당신은 다시 나에게 “당신은 전 생애를 바치고 싶은 운명의 남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일
`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강한 힘에 이끌려 그것에 전념하는 기쁨, 하고자 하는 일을 달성하고야
마는 일종의 성취욕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어쩌면 자신의 본질 속에 있는 여성적 열망을 굳이 외면하고, 그것과 대립되는 `일`에 대
한 열망만을 불 태우며 불완전한 삶을 살아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만나는 순간,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내 속에 얼마나 강한 사랑에
대한 열망이 내재해 있었는지를 나는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늘 나를 허전하고 방황하게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나는 비로소 확실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
다.
그리하여 나는 한 남자를 사랑하는 가장 부드럽고 온전한 여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벨라르.
나는 나의 여성 전부를 당신에게 던져, 내 생애를 온전하고 균형 잡힌 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한 사람의 삶의 비중이란, 어쩌면 위대한 업적이나 공로에 의해서 가늠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한 사람의 인생 속에서 얼마나 크고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가늠될 성질의 것인지도
모르지요.
나는 당신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또 당신의 생애에 깊이 작용하면서 성장해 가는 내 삶을 가
장 높은 보람으로 알고 거기에 맞추어 내 삶을 다시 설계하려 합니다.
눈물과 함께 나의 그리움이
아벨라르.
참 이상한 변화가 내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신과 관련된 일에는 무엇이나 아주 단순한 감정으로 몰입하게 되고, 또 자주 눈물을 흘리거
나 서러워하게 되는 것은 내가 생각하여도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던 나 자신의 이런 변화에 스스
로도 놀라서 나는 당황해집니다.
사랑이란 사람을 이렇게도 단순하게 만들고 따뜻하게 만들어 사소한 일에도 곧잘 울게 하는 신
비한 힘을 가진 것인가 봅니다.
나는 문득 작가 이효석의 편지를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1907년 강원도의 산간벽지에서 태어나 1942년 서른 여섯의 나이로 요절한 작가 이효석은 심미
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작가로, 특히 그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정다감하고 낭만적이며 페미니스트였던 그는 많은 사랑의 편지를 썼을 것으로 짐작되나, 남
아서 전해 오는 편지는 한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한편의 편지를 통해서도 이효석의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씨, 자연에 대한 그의 관심,
연인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우리에게 보여 준 그 섬세하고 잔잔한 자연의 묘사를 그의 사랑의 편지
속에서도 발견하게 되어 마치 한편의 아름다운 수필을 읽는 듯합니다.
그렇게도 여리고 고운 이효석도 사랑의 열정에 몸부림치며 괴로와했던 것을 보면서, 사랑의 불
가항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을. 가까워 오는 가을! 아름답게 빛나면서는 안타깝게 뼈를 찌르는 가을. 새어 드는
가을과 함께 그대를 그리워하는 회포가 얼마나 나의 간장을 찌를까를 나는 겁내는 것이오. 물드
는 나뭇잎도 요란한 벌레소리도 그대의 자태가 내 곁에 없고야 무슨 값있는 것이겠소. 나는 그대
를 생각하지 않고 자연을 그리워한 적은 한번도 없었소. 벌레소리 그친 찬 새벽 침대 위에서 눈
을 뜬 채 나는 필연코 울 것이오. 자칫하다가는 어린애 같이 엉엉 울 것이오. 이 큰 어린아이를
달래줄 어머니는 세상에 없을 법하오. 사랑은 만족을 모르는 바다와도 같다고 할까. 가령 나는 진
달래꽃을 잘강잘강 씹듯이 그대를 먹어 버린다 하여도 오히려 차지 못할 것이며 사랑은 안타깝고
아름답고 슬픈 것. 아름다우니까 슬픈 것. 슬프리 만큼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가 우는 것은 오, 아
름다운 정을 못 잊어서지요. 사랑 앞에 목숨이란 다 무엇하자는 것일까. 욕망과 야심과 계획의 감
격이 일찍이 사랑의 감동을 넘을 때가 있었던가! 나는 사랑 때문이라면 이 몸이 타서 금시에 재
가 되어 버린다 하여도 겁나지 않으며 도리어 그것을 원하고자 하오.
사랑하는 님이여! 나를 태우소서. 깨뜨리소서. 와싹 부셔 버리소서. 그 순간 나는 얼마나 아름답
게 빛날 것인가!
- 이효석으로부터 XX에게
“나는 그대를 생각하지 않고 자연을 그리워 한 적이 한번도 없었소”라는 구절은 작은 벌레소
리나 바람소리, 꽃 한 송이에서까지도 연인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지극한 사모의 정을 나타낸 것
으로 보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의 여인은 곧 자연계 전체를 지배하는 절대자이며, 그 앞에 굴복하여 종이 되
어도 좋으며 그 앞에 불타서 재가 되어도 좋은 특권을 가진 자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완전한 특권을 조건없이 부여해 주고, 그 특권을 자기에게 행사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은, 마치 어린아이가 모든 일을 전적으로 엄마에게 의지하고 맡기는 심정과도
같으며, 엄마의 사랑을 혼자만 차지하고 싶어서 꾀병을 부리거나 투정하는 심정과도 같습니다. 사
랑에 빠지게 되면, 어떤 어른일지라도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순수해지며 세속적인 공명이나 야
심은 하잘것없이 생각되는가 봅니다.
아벨라르.
당신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요. 당신께서 내가 어린 아이처럼 단순해지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이효석의 편지에서도 “욕망과 야심과 계획의 감격이 일찍 사랑의 감격을 넘을 때가 있었던가!
”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속적인 공명이 하잘것없어진다는 이야기는, 한 사람의 영혼이 불붙어 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리고 탈 수 없는 유일한 것만을 남겨 놓은 상태가 된다는 뜻이겠지요.
그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 상태입니까?
“사랑하는 님이여, 나를 깨뜨리소서. 그 순간 나는 얼마나 아름답게 빛날 것인가!”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불타고 깨어져서 찬란하게 빛나는 축제일의 불꽃과 같을지도 모르지요.
길게 흘러서 더욱 아름다운 유성, 산산히 흩뿌려져서 하늘을 밝히는 불꽃의 현란함은 거의 슬
픔에 가까운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아름다운 것을 볼 때, 너무도 행복한 순간에 있을 때, 또 너무도 벅찬 감격에 맞
닥뜨려질 때 이유없이 슬픔과 같은 감정에 휩싸이게 되고 눈물을 흘리게 되지요.
눈물은 어떤 종류의 감정이 끓어올라 가슴에 가득차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넘쳐 흐르게 됩니
다.
마치 비가 와서 고이고 고여 더 이상 담겨 있을 수 없게 되면 홍수로 넘쳐나는 강물 같이, 우
리의 감정도 그렇게 넘쳐 눈물로 흐르는 것이지요.
눈물은 인체의 구석구석에 끼어 있는 모든 찌꺼기들을 함께 밖으로 내보내어 몸도 마음도 동시
에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해줍니다.
어떤 이는 연애를 하게 되면 자주 울게 되므로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다고 말했습니다.
원래 카타르시스라는 말이 `억압된 정신적 외상을 언어나 행위를 통해 외부에 배출함으로써 병
증을 없애려는 정신적 요법의 한 형태`라는 뜻으로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드에 의해서 명명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가슴 아픈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적절하고 필요한 치료방법인 듯합니다.
만일 불에 지지듯이 타는 사랑의 열병을 울지도 못하고 견뎌야 한다면, 아마 미치거나 자살을
하거나 하는 극단적인 방법만이 그 사람을 구원하게 될 것이므로, 결국 얼마나 끔찍한 사태로 몰
아가게 되겠습니까.
이효석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사랑의 편지 속에 눈물을 흘린다거나 운다는 말이 자주 등장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고통스러운 병을 주시면서 눈물이라는 치료법도 함께 주신 것은 얼
마나 은혜로운 배려인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죽음도 불사하는 사랑과 함께 언제나 눈물이라는 따뜻한 샘을 갖고 있는 자는 영원히 젊고 축
복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어랜애 같이 엉엉 울 수` 있었던 이효석이었으므로, 그는 그토록 아름다운 작품을
산출할 수 있는 능력을 사장시키지 않고, 한 작가로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은 울 수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합니다. 운다는 것은 감정이 고
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며 바로 감동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은 삭막한 이론이나 논리에 의해서만 사는 사람에 비하면, 언제나 손해보
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해도, 그러나 감동하는 순간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
나 슬픔으로 그의 생명이 가득차 있는 순간이므로, 그는 인생을 충만하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있
겠지요.
조그만 일에도 쉽게 감동하고 눈물을 글썽이는 나를 보면서 당신은 가끔 어린애 같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벨라르.
내가 이렇게도 여리고 순수한 심정으로 돌아온 것은 당신의 부드러움과 사랑에 온 생명으로 닿
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랑은 물과 같은 것이어서 자의식과 고집과 자존심으로 꽁꽁 뭉쳐 있던 나의 매듭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되어 버리고 풍부하고 민감한 감수성과 눈물로 내 몸 속을 가득히 채워 버린
듯합니다.
내게 눈물과 충만과 기쁨을 돌려주신 나의 아벨라르.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영원히 울 수 있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어린 아이처럼 살아가고 싶어
요.
당신을 위하여,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나의 눈물이 결코 마르지 않기를, 눈물과 함께 나의 그
리움이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흘러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의 눈물은 사랑의 증거이며, 가득찬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에게 가는 길
인간은 어떤 종류의 결핍을 느낄 때 비로소 꿈을 꾸고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핍은 그것을
충족시킬 무엇을 필요로 하며 그러므로 결핍은 결국 창조를 낳게 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은 곧 많은 내적 결핍을 갖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
니다.
선량한 사람들은 안전하고 평화롭기를 원하나, 창조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파괴하고 앞으로 내
닫기를 원하므로, 회복할 수 없는 목마름이 늘 그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나는 자기가 충족할 수 있는 길은 그 목적이나 상대에게 있기보다는 훨씬 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행복이나 불행에 상관없이 자신이 전력투구할 수 있는 어떤 일이나 상대를 발견하고 거
기에 몰입해 있을 때 비로소 어떤 충족감이 그를 채워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목적은 그것이 돈이든 사람이든간에 그 끝에 가서는 다소의 실망과 허탈을 맛보
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의 당연한 결말이라고 생각하므로, 이 세상에는 완전한 목적이나 상대
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허탈과 실망조차도 엄격하게 관찰하면 사실은 그 목적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가지
고 있는 영원한 꿈, 즉 내적 결핍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완전한 만족, 완전한 행복의 상태란 영원히 가질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불가
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이며 아쿠다가와 상을 받은 바 있는 이시가와 다쓰조오가 쓴 소설 <충족된
생활>을 읽으면서 나는 한 사람이 충족할 수 있는 길이란 결국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 같았습니다.
아사쿠라 준코라는 한 독신녀의 일기체로 쓰여진 이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을 통하여 인간이
추구하는 충족된 생활이란 어떤 것인가, 또 거기에 따르는 투쟁과 고뇌, 그 공허를 예리하게 파헤
쳐 놓았습니다.
참되고 보람있는 생활은 어떤 것이며 사랑이란 과연 육체와 정신,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이 있
는가, 또 인간의 내부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에고이즘의 강인함, 인간의 끝없는 방황 등을 한 여
자의 섬세한 눈으로 바라보고 분석한 이 소설은, 특히 한 개성있는 여자의 방황과 행복의 추구를
매우 밀도있게 그려 놓았습니다.
매우 매력적이고 활기에 차 있으며 늘 꿈을 꾸고 살기는 하나 전혀 생활력이나 책임감이 없는
동화 속의 로맨티스트와 같은 첫남편과 이혼을 하고, 그의 주변에 있는 여러 남자들을 관찰하면
서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고 또 조금씩 경계하며서 주인공인 준코는 하쿠죠자라는 극단의 말단 배
우생활을 합니다.
그 극단의 유명한 인기배우인 다나베의 연극에 대한 필사적인 집념 속에서, 무언가 충족되지
않는 것을 메꾸기 위하여 악전고투하고 있는 극단적인 고독을 발견하고, 친구인 하루미에게서는
어린아이로만은 충족되지 않는 젊은 육체의 공허를 발견하고, 또 같은 배우인 모리시다 게이코에
게서는 사랑이 없는 타산적이고 생활적인 육체의 유희 뒤에 오는 파멸을 발견합니다.
드디어 그는 희곡작가이며 많은 정사와 두 번의 결혼 경험이 있는 이시구로에 대한 자신의 사
랑을 뒤늦게 깨닫고 다음과 같은 독백을 하게 됩니다.
“그와 결혼하는 것은 나의 행복을 약속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
한다. 사랑과 행복과는 별개의 것이다. 애정이 내게 고난을 줄지도 모른다. 고난 속의 사랑, 헌신
의 괴로움 속에 사랑의 보람을 느낄 수도 있다. 나는 행복을 추구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다른 것이 있을 듯하다. 그 무엇과도 바굴 수 없는 것. 하나의 생명감, 충족감. 육체의 충족
감과 같은 소모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건설적인 것, 평생을 두고 마음을 충족시켜 주
는 것... 남자는 여자만으로 충족을 얻을 수 있다. 허나 여자란 남자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사랑
은 남자에게 종국이며, 여자에게는 출발점이다. 나는 그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여
자의 승리다. 사랑이라는 것은 안이한 문제가 아니다. 살기 위한 투쟁이다. 나는 그의 자식을 낳
고 내 생애를 그 생명에 의해서 충족시킨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새로운 투쟁의 인생
이 시작된다...”
이 여주인공의 깨달음은 결국 총족된 생활이란 완전한 행복이나 평화가 아니고 투쟁과 헌신에
몸 바칠 수 있는 어떤 것.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불길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무엇을 위하여 한번도 치열하게 불태워 보지 않은 목숨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숨쉬고
있을 뿐이며, 한번도 생명의 독특한 빛깔을 가져 보지 못한 채 스러지는 하잘것없는 지푸라기 같
은 것이지요.
기쁨이나 슬픔에 가득차 있는 사람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 속에 그의 생명을 불태우고 있
기 때문입니다. 무엇에나 열중해 있을 때 사람은 가장 아름답고 빛나 보이니다.
예술이 위대한 것도 바로 이 집중에서부터 우러나왔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집중의 고통을 치
른 사람은 불의 가마에서 구워낸 도자기처럼 독특하고 아름다운 빛깔과 생명을 갖게 되는 법입니
다.
나의 아벨라르.
나는 고통과 헌신의 불길을 지나 당신에게 가는 길을 발견하게 된 것을 축복이라고 믿으며 나
의 방법, 나의 기준으로 충족된 어떤 것을 찾기 위하여 이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고통이 따르지 않는 즐거움은 단지 휴식에 지나지 않으며 극기의 뒤에 오는 기쁨이야 말로
참다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말한 앙드레 지드의 말에 흔쾌하게 공감하면서 가난하고 슬
픈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하느님께 나는 무릎 꿇고 이 슬픔과 고통의 사랑을 위해 빌고
또 빌겠습니다.
나의 기도는 현실적인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고, 순수한 영혼으로 이 사랑을 끝까지 지켜 나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사랑이 내 삶의 중심이 되어 풍요하고 아름다운 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
기를 비는 기도입니다.
사랑과 정열
아벨라르.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잠 못 들고 있을 때, 내 속에 이상한 힘으로 들끓고 있는 불길과 같은
감정을 나는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며,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성장하며 가꾸고 기르는 것이라
고 믿고 있으며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나의 내부에, 나의 믿음과 희망에 대립하여 일
어나고 있는 어떤 정열-나의 사랑을 완성하고 싶고, 당신을 온전히 내가 소유하고 싶으며, 나의
불길 속에 당신을 가담시켜 함께 불타서 죽어 버리고 싶은, 뜨겁고 강렬한 무엇이 나를 지지고
보채면서 괴롭히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정열을 수반하고 오는 것이긴 하지만, 과연 사랑과 정열은 동일한 것일까. 정열
이 사랑을 가열시키는 동력이기는 하지만, 그 속성에 있어서 사랑과 정열은 조금씩 다른 것이 아
닐까 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문해 보곤 합니다.
내가 정열과 사랑에 대해서 냉정한 마음으로 분석해 보고 싶은 이유는, 나의 이 정열이 혹시나
우리의 사랑을 손상시키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당신을 들볶게 되는 요인이 되지 않을까를 근심하
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열`이라는 말은 곧 프랑스의 작가이며 <적과 흑>, <연애론>등으로 유명한 스탕달을 연상시
킵니다.
그는 매우 향락적이고 자유분방하여 일생 동안 여러 명의 여자와 사랑을 나눈 사람입니다.
그는 연애를 일종의 `병`이며 `광기`로 보았습니다.
그는 연애를 정열 연애, 취미 연애, 육체적 연애, 허영 연애의 네 가지로 분류했으나 그가 추구
했던 연애는 `정열 연애`였습니다.
“사랑이란 열병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사랑이 싹터서 상대방에게서 어떤 미점을 발견
하는 마음, 즉 결정작용에 이르는 것이 완전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는 “사랑이란 것은 사랑할 만한, 그리고 우리를 사로잡는 한 대상을 전 감각으로 느끼고
바라보면서, 즐거움을 갖는 것이다”라고 자신에 차서 연애를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태리 미라노에서 만난 여인 마띨드에게 준 편지를 보면 이미 사랑의 쓴맛 단맛
을 다 알고 있는 연애의 베테랑답지 않게 순정적이고 절실한 연애에 빠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
다.
즐거움이 아닌 괴로움을, 쾌락이 아닌 진실을 마띨드를 통해서 발견한 스탕달이 글 한 줄도 읽
을 수 없는 사랑의 감방에 갇혀서 극단적인 정열에 지배되어 있었음을 보면 사랑이란 자기의 의
지대로 되어지지 않는, 전혀 낯선 힘으로 우리를 얽어매는 기이한 무엇인 것 같습니다.
마띨드는 폴란드계의 군인 뎀브로스끼 남작의 부인이었으나 남편과는 별거중이었고, 꿈꾸는 듯
한 눈매와 섬세한 용모를 갖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총명하고 이지적인 여인이었으므로 스탕달의 정열에 결코 휘말리지 않고 그의 두 아이들
을 위해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마띨드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여인이었으므로 더욱 스탕달을 열에 들뜨게 했고 괴
롭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이란 그것이 손에 마음대로 잡혀지지 않을 때 그 정열과 그리움이 배가되는 성질을 지녔으
니까요. 마치 우리가 갖고 싶은 물건을 어떤 이유 때문에 갖지 못하게 되었을 때, 오히려 그 물건
에 대한 애착과 집념은 점점 깊어져서, 실지로 그 물건이 갖고 있는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거기
에 부여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심리일 것입니다.
다음에 스탕달의 편지를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마띨드에게
정열을 지니지 않은 사나이가 늘 절도를 지키고, 신중한 체하기는 쉬운 노릇입니다. 나 역시 자
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일 때에는 신중해진답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슬픈 정열에 지배되어 버려,
이제는 나를 나 자신의 행동의 주인으로 내버려 두지 않는답니다.
부인을 만난 이래로, 이 정열이 내 생애의 큰 짐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어떤 종류의 흥미
도, 그 어떤 생각도, 그 열기 앞에서는 퇴색해 버리고 맙니다. 부인을 자주 만나고 싶은 슬픈 동
경이 나를 짓누르고 지배하고, 질질 끌어가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될 그럴 단계에 이른다고 하면, 살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을 이 고독하고 기나긴 밤에 몇 번이고 상상해 본답니다.
인간이 극단적인 정열에 지배되어 있으며, 어떤 특수한 정황 아래에서는 그런 짓을 능히 해낼
수 있다고 봅니다.(후략)
많은 여성 편력과 명성으로 자신에 차 있던 스탕달도 한 여인을 향한 애정 때문에 `나를 나 자
신의 행동의 주인으로 내버려 두지 않는` 슬픈 정열에 지배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라면 `살인이라도 불사할 것` 같은 상상 속에 깊이 갇히게 되었습니다.
정열이란 이토록 한 사람의 정상적인 사고력과 평균적 이성을 일시에 하잘것없는 것으로 만들
어 버리는 지극히 강한 불꽃인 것입니다.
평소에는 아주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사람도 사랑의 열정에 휘말리게 되면 스스로를 가눌 수 없
는 상태에 이르러, 전혀 딴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가령,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는 경우에 역으로 그를 파멸시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든가, 또는 그가 불행해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쾌감을 느낀다든
가 하는 일종의 복수심이 작용하게 되지요. 이런 것이 바로 정열이 갖고 있는 무서운 한 면모입
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을 똑바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그 정열로 인하여 파멸할 지경에
까지 휘말려 들어가 있다고 해도, 차라리 상대를 위하여 자기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행위에 도
달하게 됩니다.
사랑이란 그 본질에 있어서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순수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
니다.
사랑에는 정열이 필수적으로 수반되기는 하지만, 정열이 곧 사랑이라고 혼동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 아닐가요?
정열은 사랑 뿐만이 아니고 증오에도 수반되기 때문에, 사랑과 정열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칫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증오의 정열에 휩싸여 자신과 상대를 한꺼번에 상하
게 하고 파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과 정열은 아주 가깝게 있기는 하나 그 둘이 가지고 있는 성질의 내용은 조금씩 다른 듯합
니다.
사랑 속에는 겸손과 헌신, 안내가 있는가 하면 정열 속에는 증오와 파멸까지도 내포되어 있습
니다.
때때로 정열이 사랑의 촉진제가 되고 결실로 향하는 동력이 되기는 하지만 정열만으로 사랑의
높고 고귀한 자리에 이르기는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얘기를 동화 <인어공주>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인어공주는 자기자신이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는 사랑하는 왕자를 칼로 찔러 그 피로 자신
의 발을 적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리고 그 왕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자 가눌
수 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왕자를 죽이고 싶은 증오심이 타오르기도 하지만, 끝내 그는 사랑하
는 왕자를 위하여 스스로를 바다 속에 던져 단지 하나의 물거품으로 사라져 버리는, 슬프고도 아
름다운 사랑으로 막을 내리는 <인어공주> 이야기야 말로, 사랑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알
게 해주는 것이라고 나는 언제나 생각합니다.
아벨라르.
이렇게 진실한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도 맑고 아름다우며 높은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 도달하
기 위하여 나는 나의 욕망, 나의 괴로움, 나의 슬픔을 가라앉히고 절제하는 훈련을 뼈아픈 고통으
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토록 커다란 고통을 지불하면서 얻는 사랑이야 말로 당신을, 또한 나를 구원할 것이라
고 믿기 때문입니다.
열정과 광기
오늘 우연히 서양미술 전집을 뒤적이다가 강렬한 빛깔의 한 그림 앞에서 숨이 막히는 듯한 느
낌을 받았습니다. 빈센트 반 고호(Vincent van Gogh, 1853~1890, 네델란드)의 `아를르에 있는 고
호의 집`이었는데, 샛노란 색깔로 온통 칠해져 있는 그 집은 마치 햇빛에 전신을 드러낸 채 불타
고 있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개의 그림 `밤의 카페`는 마룻바닥도, 천정에 걸려 있
는 등불도 의자도 테이블도 모두 샛노랗게 타고 있어서 내 가슴에 이상한 전율 같은 것을 일으키
게 했습니다.
나는 문득 사랑에 있어서의 광기도 이런 전율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한 예술가의 내부에 지글지글 끓고 있던 광기는 오늘 내 눈 앞에 나타나서 내 마음 속의 광기에
불을 지르고 모든 것을 온통 태워 버릴 것처럼 무섭게 이글거렸습니다.
그의 그림은 뜨거운 정열을 내뿜으며 순식간에 모든 물체를 녹여 버릴 것 같은 강렬한 힘으로
사물을 수많은 점으로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피스톨을 쏘아 자살을 하고 만 그의 생애를 생각해 보면서, 나무도 풀잎도 구름도 하
늘도 교회마저도 꿈틀거리고 있는 그의 그림들을 들추어 보았습니다.
고호는 정말 정신분열증 환자였을까요? 그가 사랑했던 누이 케에를 만나게 해 달라고 램프 위
에 손을 갖다 대고 태웠다는 일화, 그가 광부들 속에서 신앙을 전도하러 다닐 때, 비참한 노동자
들 속에 완전히 뛰어들어 가진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나누어 주고 병자들과 함께 생활을 했던
일, 또 병들고 가련한 매춘부와 함께 남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동거생활을 한 일, 고갱(Paul
Gauguin, 1848~1903, 프랑스)와 다투다가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낸 일 등, 그의 광기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일화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고호를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가 미친 사람이었
다면 어떻게 저 그림자 하나 없이 불타고 있는 선명하고도 아름다운 많은 그림들을 그릴 수가 있
었을까요?
그는 다만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정열과 결벽증으로 극단적인 삶을 살다가 간 특이한 존재가 아
니었을까요? 어떤 일에 임하면, 그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극도로 단순한 정열에
휘말려 버리는 강한 집념이 그를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
까요?
보통사람의 눈에는 보통이 아닌 사람들이 미친 사람으로 보이는 법이므로, 자기와 맞지 않는
세상의 기준과 질서에 밀려난 고호는 결국 자기자신을 결산하는 일에서 자살이라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나는 고호의 정열과 광기를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속에 타고
있던 정열을, 그 광기를 어느 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식과 비상식, 정상과 비정상
과의 괴리는 특수한 예술가들이 흔히 겪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사랑이라고 하는 초월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과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사는 사
람과의 사이에 있는 시각의 차이, 사랑을 높은 곳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사람과 단순히 소유와
쾌락의 차원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과의 차이와 같이, 절대로 서로 융화할 수 없는 심한 이질감을
갖고 있습니다.
한 예술가가 창작의 모티브를 찾아 거기에 열중할 때는, 한 사람이 사랑의 열기에 닿아 거의
광기에 가까운 정열을 느끼는 것과 똑같은 상태의 도취감과 긴장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태양의 신 제우스가, 사랑하는 여인을 사로잡기 위하여, 그의 아
내 헤라의 질투를 피해 가면서 스스로 동물이나 바람 또는 비 같은 것으로 변신하여 목적을 달성
한 것이나, 그것을 알고 난 헤라가 질투의 화신이 되어 제우스의 연인들을 벌주고 파멸시킨 것이
나 모두 다 이 사랑의 광기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제우스는 반드시 헤라로부터 노여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사랑의 욕망을 단념할 수가 없었고, 또한 헤라도 그의 질투가 결코 제우스의
사랑을 제어하지 못하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번번히 그의 연적들에게 질투의 화살을 겨누었습니
다.
특히 제우스가 탑 속에 유폐되어 있는 왕녀 다나에를 사랑한 나머지 황금의 소나기로 변하여
쏟아져서 탑의 균열 속으로 흘러들어가 다나에와 정을 통했다는 얘기는 화가들의 많은 동판화와
유화의 소재가 되었을 만큼 격렬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황금의 소나기`는 그 어휘 자체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찬란하며 광적인 빛을 띠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황금의 소나기 같은 사랑, 고호의 불타고 움직이는 열정에 휘말리고 있는 자신의 내
부를 두려움에 차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평소에 내가 늘 동경하고 사랑했던 물빛 평화와 안온한 정서는 고호의 그림 앞에서 마구 흔들
리고, 핵처럼 분열되어 나를 산산히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아벨라르.
나를 이 황금의 열풍으로부터 해방되게 해주십시오.
나는 결코 분열되거나 폭발하지 않고 오직 지순한 향기로써 내 사랑을 보호하고 싶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높은 곳으로 나와 나의 사랑을 끌어올려 다소곳이 지키고 싶습니다.
너에게로 가는 먼길
아가페와 에로스
아벨라르.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필이면 이룰 수 없는 사랑, 내가 소유할 수 없는 당신이라는 존재로 해서 눈 뜨게 된 나의
열정이 갑자기 원망스럽고 절망적인 심정 속으로 나를 밀어부치고, 사랑의 불가마 속에서 열에
들뜬 사람처럼 당신을 그리워 하고 당신과의 생활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는 나의 고뇌가 스스로
미워지기까지 합니다.
한 인간이 이성의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정신적인 사랑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육체의
사랑이란 꼭 불결하고 죄악시해야 할 성질의 것인가. 혹은 성애란 사랑을 더 깊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을 타락하게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나는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지고한 사랑에 그 정신이 닿아 있다고 믿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닿고
싶은 일정의 성애적 열망을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요. 오늘밤은 인간의 근
원, 존재의 근거로서의 사랑에 대하여 새삼 깊이 생각해 봅니다.
흔히 사랑을 아가페적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인격적 사랑, 하느님을 향하는 사랑, 혹은 인간 상호간의 형제애를 뜻하는 아가페는, 육체를 초
월한 헌신적이고 능동적이며 보상이 없는 사랑을 일컫는 말입니다.
에로스라는 말은 성애라는 의미와 함께, 철학에 있어서는 세계를 만드는 기본적인 원리의 하나
로 보기도 하고, 플라톤(Platon, 427~347 B.C. 그리스)은 그의 저서 <향연<Symposium)>에서 에
로스는 지혜, 미, 선을 사랑하며 추구하는 것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에로스가 내포하고 있는 성애의 의미는 쾌락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인간적인 사랑-즉 정신도 육체도 함께 하는 전인적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
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 신화에 에로스가 사랑의 신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육체와 정신을 함께 지니고 있는 이상, 정신을 완전히 육체에서 분리시킨다는 것은 매
우 어려운 일이며, 그러므로 인간의 사랑, 특히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서 플리토닉 러브를 지고의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아주 힘든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애가 엄마의 품에 안기고 싶어하는 마음, 엄마의 젖을 만지고 싶어하는 마음, 또 반가운 친
구끼리 오랜만에 만나면 저절로 서로 껴안게 되는 것, 이런 모든 것은,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육체
적 접촉을 본능적으로 원하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아름다운 물건을 보면 그것을 만지고 싶고 갖고 싶은 것과 같이, 좋아하는 사람의 옆으로 좀
더 가까이 가고 싶고, 그 사람의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듣고 싶고, 되도록이면 그 사람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은 곧 그와 나와의 사이를 공간적으로 좁히고 싶다는 애기이며, 공간적인
거리를 좁히고 싶다는 애기는 결국 그의 몸에 내 몸을 밀착시키고 싶다는 애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만나고 싶고, 손을 잡고 싶고, 안고 싶고, 하나가 되고 싶어
지는 것이겠지요.
두 사람이 그들의 가슴 속에 고여 있는 것을 아무리 말로 표현하고 글로 써도 확인되지 않던
사랑을, 잠깐 동안의 포옹으로 확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가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
이 아닐까요.
예를 들면, 사람이 화가 났을 때는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붉거나 하얗게 질리거나 하여 그 사람
의 감정이 밖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또 즐겁고 행복할 때는 눈이 반짝이고 온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고 혈색이 감돌아 아름답게 보
입니다.
무서울 때는 온 몸에 소름이 돋고 손과 발이 차갑게 되고 눈이 위로 치켜집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감정이나 마음의 상태는 모두 곧바로 육체로 옮겨져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얼굴이 예쁘게 보인다는 말도 바로 그런 뜻이지요.
한 사람에게 집중하여, 그에게 아름답게 보이려고 노력하고, 사랑의 감정이 고조되면 몸 속의
혈액이 빨리 돌게 되며, 또 그와 함께 있으면 행복해지므로 자연스럽게 표정이 사랑스러워지며,
모든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므로 경이와 즐거움으로 눈이 빛나게 됩니다.
민족시인 김소월(902~1934)이 쓴 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에서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모든
사물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을 간략하지만 절실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예전엔 미처 몰랐던 자연과 사물의 의미를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비로서 느끼게 되는 경
이가 어찌 사랑에 빠진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지 않겠습니까. 또 사랑은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기
도 합니다.
사랑의 신 에로스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탄생 축하연 때 태어났으므로 아름다움을 동경하
는 속성을 지니게 마련입니다. 또한 에로스는 가난의 신 페니아의 자식이기 때문에 늘 결핍을 의
식하게 되고 따라서 자기에게 모자라는 것을 채우고 싶어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종의 결핍감, 즉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자각하고 그것을 채우려
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정신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정신적인 존재인 동시에 육체적인 존재이기도 하므로 사랑이 전인적인 것일 때 그
사랑 속에는 당연히 정신과 육체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육체를 죄악시하고 사랑의 행위를 불결하게 생각하던 전 시대의 사고방식이 아직도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정신유산 속에서, 우리는 많은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사랑을 구시대의 잔재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사고방식과, 육체적인 사랑을 아직도
죄악시하는 기존의 질서 속에서 어떤 것이 올바른 사랑인지에 대한 확실한 주관을 정립하지 못하
고 있는 젊은이들 중에는 무엇이든지 재빨리 성취하고 감각적으로 즐기고, 고통을 외면하고 편안
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편안하게 살고, 즐기면서 인생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더 높은 것,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상위지향의 의지
는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본능입니다.
인간을 다른 하급동물과 구별하는 기준을 영혼의 있고 없음에 둔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맑고 추함, 높고 낮음은 그 사람의 품격을 가늠하는 유일하고도 중요한 기준
입니다.
아무리 늠름한 육체와 강한 힘, 또 우수한 두뇌와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영혼이 비열하고 천박하면 그 사고방식과 행위도 비열하고 천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아름답고 추함도 역시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의 높고 낮음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집니다.
헌신과 겸손과 인내의 자세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비록 그 사랑의 끝이 비극으로 끝난다 해도
아름다운 것이며, 욕망과 이해타산, 감각적인 쾌락만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결과가 어떻게
마무리지어진다 해도 그들의 영혼이 썩고 있는 냄새를 숨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가까이 있고 싶고 서로 소유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육체를 갖고 있는 인간의 본능이며, 결코 죄악이거나 불결한 것일 수만은 없겠지요.
다만 얼마나 진실한 사랑의 힘에 의해서 육체적인 접촉을 하게 되었느냐가 문제가 되겠지요.
간절하게 사랑하여, 그의 옆에 있고 싶고 그에게 모두를 주고 싶고 그의 모두를 갖고 싶은 사
랑의 정점에 도달하면 육체는 자연스럽게 그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
요.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나 방법으로 우리의 육체가 쓰여진다면 그 표현에 의해서 얻어지는 기쁨
과 환희는 육체를 넘어서서 영혼의 깊은 곳까지 울리고 감동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쾌락을 추구하는 도구나 방법으로만 우리의 육체가 쓰여진다면, 그것은 피부의 어느 부
분만을 스치고 지나갈 뿐 결코 감동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육체가 갖고 있는 능력은 어떤 정신적인 극복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있으며 육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육체 이상도, 이하도 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의 깊은 울음, 고뇌, 무한히 가변적인 세계를 육체의 능력으로는 결코 알 수도,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저 복합적이고 끊임없이 변하고 흐르는 인간의 총체는 영혼으로서만 이야기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불가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으로 결합된 육체는 충일한 기쁨과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해주며, 쾌락
으로 결합된 육체는 관능의 열기 뒤에 오는 허무와 외로움, 씁쓸한 회한밖에는 체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에로스가 세상을 만드는 기본적 원리의 하나가 된다고 보는 철학적 관점은, 곧 사랑이 세상의
기본이 되는 원리의 하나이며, 또 창조적 작업으로서의 사랑이 우리 존재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는 말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사랑과 슬픔
어둡고 가난한 골짜기 빈 꿈에 매달려
벌레처럼 밤 지키며
속 끓이고 있지만
빈 들판에 버려져 비 맞고
두엄더미처럼 썩어가고 있지만
사랑이여 끝내는
썩지 못하는 나의 희망
나는 너에게로 가서 모두가 되고 싶다
들판에 몸져 누워
깊은 병 얻고 상하여
세상에서 가장 큰 서름
가장 큰 남루가 되고 싶다
뼈와 껍질로만 남아
창칼같은 추위에 기대어 있는
겨울의 빈 나무
야위고 야위어서 사랑이여
얼어붙은 땅 한 뼘 마른 뿌리처럼
파고 들어가
눈만 남아서
눈만 남아서
한 자리에 묻히고 싶다
-강계순 <연가>
아벨라르.
나는 당신에게로 가서 모든 것이 되고 싶어요.
당신의 눈썹 끝에 매달린 수심, 귓가의 짧은 머리카락, 당신의 팔 안쪽에 숨겨져 있는 작은 얼
룩이 되고 싶어요.
당신의 손 끝마다 손톱으로 자라서 당신의 몸안의 확실한 한 부분이 되어 밤마다 당신을 지켜
보고 싶어요.
당신으로부터 몇 천 리 멀리 떨어져 있는 이 호숫가에는 깊은 안개가 내려 가로등도 슬픔에 젖
어 있는 듯 뿌우옇게 흔들리고, 모든 나무들은 여름밤의 뜨거운 열기에 몸져 누운 듯합니다.
이름 모들 새들의 우짖음, 작은 바람의 사운대는 입김, 호숫가에서 깊이 숙이고 있는 작은 풀잎
들, 허공에 묵묵히 떠서 혼자 저 무한대의 하늘을 순례자처럼 떠돌고 있는 달의 모습조차도, 그리
움에 상처입고 떠나온 내 가슴의 언저리를 아프게 건드리고 있습니다.
이 먼 곳까지 와서도 당신의 모습은 더욱 명료하게 떠올라 당신의 눈가에 가늘게 잡힌 작은 주
름살, 내 이마 위에 부드럽게 닿던 당신의 입김, 조용히 나를 지켜보던 당신의 눈에 고였던 눈물,
그리고 나를 늘 전류에 닿은 듯이 꼼짝없이 묶어 놓던 당신의 손길이 마치 지금도 내 옆에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아벨라르.
될 수만 있으면 나는 당신에게서 해방되고 싶어요. 당신 옆에 있기만 하면 온 세상이 정지되는
듯이 캄캄해지는 나의 이 격정으로부터, 당신을 내 옆에 묶어 놓고 싶어서 불에 데인 듯이 안타
까와지기만 하는 나의 이 끝없는 욕심으로부터, 어느 한 순간도 당신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
는 내 인생의 허황한 설계로부터, 그리고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어야만 실감있게 내 몸 속에 관
류하는 뜨겁고 치열한 기쁨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요.
그리하여 먼 곳에 당신을 두고 순수하고 헌신에 찬 사랑을 당신에게 보내면서, 당신으로부터
존경받는 소중한 목숨으로 있고 싶어요.
아벨라르.
나의 격정이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을 짜증나게 하며 당신에게 부담을 드린다면 그것은 결코 내
가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빛나는 존재로서 당신의 일생을 지배하는 유일한 여자
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하여 나는 나의 눈물을, 나의 격정을, 나의 그리움을 스스로 현명하게 다스려야 된다
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어떤 경우에도 불구하고 욕심의 끈을 달고 다니는가 봅니다. 언제나 끝없이
부족하여 목마르며 내 몸의 부피로 당신의 시야를 가리고 싶고, 내 목소리로 당신의 귀를 멀게
하고 싶은 이 욕심을, 당신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샅샅이 알고 싶은 이 집요한 관심을 내 의
지로는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아벨라르.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요. 당신의 머리칼과 채취, 심지어는 모공마다 배어나는 땀냄
새가 어떤 냄새인지, 그리고 당신이 잠들었을 때 당신이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당신의 몸 속에
흐르는 피는 얼마만큼 뜨거운 것인지, 당신의 가슴 속에는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쌓여 있는지, 그
많은 생각들 중에 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만큼이 되는지.
당신은 하루에 어느 정도의 물을 마시며, 몇 시간쯤 잠을 자며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나는
그 모두를 샅샅이 알고 싶어요.
내가 이렇게 내 열정에 스스로 데어 상처입고 있을 때마다 나는 저 유명한 작품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속의 열정적인 엘로이즈의 편지를 떠올립니다.
온 세상을 감동과 비애와 흥분의 도가니로 휘몰아 넣었던 슬프고도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의 편
지로 묶여져 있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라는 책은 중세에 있었던 실제의 사건과 인물에 근거한
것입니다.
중세의 유명한 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 박사는 엘로이즈와의 연애사건으로 불의에 남성의 성기
를 잘리는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결국 세속에서 격리된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고 사랑과 죽음의 그늘에서 온갖 박해와 고난
을 겪고 초췌하게 시들어 가면서 하느님에게로 가는 신앙을 단련합니다.
엘로이즈 역시 수녀원에 들어가 오직 아벨라르를 사랑하는 기도로써 하느님께 도달하려고 노력
합니다.
아벨라르가 교회의 종순한 자식으로서 그 기구한 생애를 마친 것은 그의 나이 63세 때였습니
다.
그는 그의 생전의 소원대로 엘로이즈의 손에 의해 파라클레 수도원의 땅에 묻혔습니다.
그후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영혼을 안고 무덤을 지키면서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다가 세
상을 떠났습니다.
엘로이즈가 죽은 뒤 그녀는 아벨라르의 관속에 합장되었습니다.
엘로이즈는 수녀원에서 침묵과 고행의 나날을 보내면서 한때는 그의 연인이었으며 남편이었고,
또 그를 하느님에게로 인도해 준 유일자인 아벨라르를 향해 뜨겁고 간절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아벨라르에 의해서, 아벨라르를 위해서, 하느님의 종이 되었으나, 감미롭고도 눈물겨운 사
랑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어서, 하느님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의 아벨라르를 향해서
사랑과 그리움의 고뇌를 호소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느님조차도 아벨라르를 통하지 않고는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수녀원의 고행도 아벨라르에 대한 간절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하여 견디어 낼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편지 중에서도 특히 사랑의 고뇌를 회상하며 아직도 열렬히 아벨라르의 사랑을 구하
고 있는 두 번째 편지와 제 번째 편지를 아낍니다. 이 애절한 엘로이즈의 편지를 당신은 알고
계신지요?
(두 번째 편지)
나의 주, 나의 아버지, 나의 남편, 나의 형제인 아벨라르에게
(전략) 제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을 것을 버렸는지, 또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파렴치한 폭
행이 당신을 앗아감과 동시에 저 자신도 얼마나 철저하게 파멸해 버렸는지, 또 손실 그 자체보다
도 그 손실의 수단, 방법이 얼마나 저를 괴롭혔는지에 대하여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
신도 알고 계실 거예요. 정말이지 고통의 원인이 크면 클수록 위로의 대책도 그에 비례해서 크지
않으면 안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저는 다른 어느 누구에게 서보다도 바로 당신에게서 위로를 받
고 싶은 것이에요. 당신이 슬픔을 불러일으킨 유일자라면, 위로를 주는 유일자도 당신이 아니어서
는 안되겠어요. 사실 당신은 저를 슬프게도 하고 즐겁게도 하고 또는 위로를 주실 수도 있는 단
한 사람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직 당신만이 그것을 제게 하실 수 있는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지요. 더군다나 저는 당신의 명령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무조건 맹목적으로 따랐으니까요. 정말
당신의 명령이라면 저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조차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요. 무슨 일에고 당신에
겐 거역할 수 없는 저에요. (중략) 제가 이제껏 당신 이외의 그 어느 누구도 구하고 있지 않았다
는 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계시겠지요. 오직 당신만을 구했을 따름이며, 당신에게 속한 물질
적인 것을 바라진 않았어요. 결혼의 서약도, 어떤 값진 결혼 예물도 저는 기대하지 않았던 거에
요. 당신도 알고 계시겠지만, 요컨대 저는 제 만족과 의지를 충족시키려고 하지 않았으며, 오직
당신의 만족과 의지만을 충족시켜 드리기에 힘썼던 것이에요. 그리고 아내라고 하는 명칭이 보다
신성하고 보다 건전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제게는 늘 애인이라는 호칭이 훨씬 달콤했었어요. 솔
직하게 말씀드려요. 저는 첩이나 창부라는 이름으로 불리어도 조금도 언짢게 여기지 않았을 거에
요. 우둔한 제 머리로는, 당신을 위해서 저를 천대하면 할수록 한층 더 당신의 총애를 받을 수가
있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또한 당신의 혁혁한 명성이 되도록이면 손상되지 않았으면 하고 생
각했었던 것이지요.(중략)
저는 당신이 받들고 있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제 소원을 말씀드려요. 무엇이든 가능한
방법으로 당신을 제게 보여 주세요. 말하자면 무엇인가 위로의 글월을 제게 써 보내 주세요. 적어
도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는 절로 용서가 솟구칠 것이고, 한층 열심히 하느님에게 봉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번째 편지)
(전략) 제 삶의 전 계단에 있어서-하느님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저는 하느님을 진노하게 하는
것보다는 당신을 노엽게 하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해 왔어요. 하느님 마음에 드시기보다는 당신
이 흐뭇해 하시도록 애써 왔어요. 제가 성의를 입은 것도 당신의 뜻에 좇은 것이지 하느님에 대
한 사랑에서 한 짓은 아니니까요.
(중략) 저는 쉴 새 없는 기도에 의해 당신으로부터 도움받지 않고서는 배겨날 수 없어요. 정말
이지 제가 건전하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당신에게서 치유할 약의 혜택을 받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있어요. 제발 제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지
금 역경에 처해 있어 곧 구원을 받지 않으면 안돼요. 행여 저를 강한 여자로 보지 말아 주세요.
저는 당신이 받들어 주지 않으면 쓰러질지도 몰라요.
이렇게 간절한 엘로이즈의 편지에 대해 아벨라르는 다음과 같은 기도로써 답하고 있습니다.
주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 마음대로 합치게도 하고 떨어지게도 하실줄로 아옵나이다. 주님이시
여! 당신이 자비로써 이루어 주신 것을 자비로써 성취하게 하옵소서 당신이 이 세상에 떨어지게
한 무리들을 하늘에서 당신 곁에 다시 맺게 하옵소서. 주님이시여! 당신은 우리의 소망이요 기대
요 위로이옵나이다. 주님이시여! 우리를 축복해 주옵소서. 아멘.
엘로이즈는 아벨라르를 부를 때 `그리스도에 버금가는 나의 유일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나의
주, 나의 아버지, 나의 남편, 나의 형제인 아벨라르에게`라고 쓰고 있습니다.
엘로이즈에게 있어서 아벨라르는 바로 우주 그 자체이며 죽은 다음 내세에까지 이어질 오직 하
나밖에 없는 사랑이며 종교며 기도이며 또한 슬픔과 고뇌와 그리움입니다.
수녀원에서조차 그의 연인을 그리워하며 뜨거운 열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엘로이즈를 당신은
부정하고 나쁘다고 욕하시겠습니까?
진실한 의미의 사랑을 체험해 본 사람이라며, 참으로 한 사람을 열망하고 그를 통해서 세상을
내다보고, 그를 통해서 고통과 기쁨의 의미를 체득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리움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강렬하게 사람의 오관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무서운 힘을 가진 것인지를 겪어 본 사
람이라면, 결코 엘로이즈를 부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로이즈는 그의 편지 속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
다.`(로마서 7장 25절)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 사람을 사랑하는 기쁨을 알게 해주신 초월자인 하느님에게 그는 감사했
습니다. 비록 사랑이 곧 고통이며 암흑일지라도 그 사랑이 진실하고 순수한 것이라면, 그 사랑과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에게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그는 이미 깨닫고 있었으며 초월자의 품 안
에서 그와 그의 연인이 일체가 될 수 있음을 감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도 그가 높은 곳으로 아름답게 승화되기 위하여 그는 욕심의 고통, 관능의 고통을 치르
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아, 나도 엘로이즈처럼 이 열망으로 하여 초월자에게 도달할 수 있다면, 욕심이나 질투, 관능과
눈물을 지나서 당신의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면 나의 사랑은 얼마나 순백의 향기를 뿜는 빛나
고 고귀한 것이 될까요.
아벨라르.
그러나 나는 아직도 당신의 모든 것을 갖고 싶고, 당신에게로 가서 당신의 모든 것이 되고 싶
으며, 당신과 함께 땅 속에라도 같이 묻히고 싶은 열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의 시체를 손수 묻고 그 무덤을 지키고 살았으며 끝내는 그 자신조차도 아
벨라르와 같은 관 속에 합장된 것은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합인하여 죽음에까지, 아니, 신의 나라
에까지 도달한 사랑이라 믿어집니다.
엘로이즈는 지상에서의 사랑을 죽음에 이르러서라도 이루고 싶었고, 지상에서 갖지 못했던 아
벨라르의 육신을 죽어서 비로소 소유한 것입니다.
나도 엘로이즈처럼 당신을 완전히 가질 수가 있다면 죽음에까지라도 따라가 작은 땅 한 평을
골라 나란히 묻히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완전한 소유, 완전한 성취를 이룰 수만 있다면, 나는 비
록 그것이 죽음의 문이라 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
아벨라르.
세상의 모든 이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람에게는 성성과 수성, 선성과 악성이, 자연속에는 양과 음, 강과 약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감정 속에도 영적이고 정신적인 요소와 관능적이며 육체적인 요소가 아울러 있습니다.
이 영혼과 육체의 싸움, 밝음과 어둠의 싸움을 가장 심각하게 그린 작품이 괴토의 <파우스트>
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두 가지 혼이 아! 나의 가슴에 깃들어 있다.
그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떨어지려고 한다.
하나는 격렬한 애욕으로 진드기처럼 현세에 붙어 있고,
또 하나는 속세를 떠나,
높은 영에 오르려고 한다.
-괴테 <파우스트> 중에서
이렇게 파우스트 박사는 괴로와 했습니다. 쾌락과 만족을 위하여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젊음을
누리고 순결한 처녀 그레첸(Gretchen)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파우스트, 그러나 결국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인간의 선성에 귀의하여 천국으로 가서 다시 그레첸을 만난다는 이 희곡은, 그 줄거리
나 몇 마디의 설명으로는 불가능한 인간의 갈등과 고뇌, 선과 악, 육체와 정신의 싸움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정신적인 것만을 가지고 있다면 괴로움이라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신에 대립하는 육체의 본능이라는 반작용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은 그 갈등과 고뇌를 통
하여 창조와 지양을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일찍이 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덴마크)가 말한 바 `야누스와 같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우리들은 천국과 지옥, 고뇌와 행복, 육체와 정신의 사이에서 끝없는 갈
등을 겪으면서 인간의 한계에 부딪쳐 좌절하기도 하고, 또한 인간만이 지닌 지고한 영혼의 자리
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기도 합니다.
저 유명한 지킬과 하이드(Dr.Jekyll and Mr.Hyde. Robert louis Stevenson. 1855~1905, 영국)가
한 사람이면서 밤과 낮을 전혀 별개의 사람으로 살았던 것을 보면 인간의 내부에는 매우 강렬한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였으며 도학자였던 장자의 저서 <장자>에는 `류`라는 짐승이 나오는데,
이 짐승은 암놈의 역할도 하고 수놈의 역할도 하는 양성 공유의 동물입니다.
이 `류`가 암놈의 역할을 할 때는 얼굴이 예쁘게 되고 수놈의 역할을 할 때는 사나워집니다.
이것 또한 두 개의 얼굴 혹은 양면적 속성을 가진 만물의 근본을 상징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흔히 육체와 본능을 악의 편에, 정신과 영혼을 선의 편에 두는 많은 학자들이 그들 나름의 생
각을 서술하고 제시하고 있지만,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 독일)은 “정신과 자연(육
체) 서로가 서로를 동경하며 같이 거닐면서 이룩하는 고귀한 만남”이 곧 인간의 사랑이라고 말
한 바 있습니다.
또 몽떼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 프랑스)는 그의 수상록에서, “육체의 욕망은 천하
고 정신만을 높이 쳐드는 학자들의 가르침 때문에 사람들은 도덕적인 생활을 매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육체를 천하게 보고 정신을 희생물로 삼으려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라고 말
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물질로 환원한다면 아무리 큰 한국인이라고 할지라도, 비누 일곱 개의 지방, 한 사발 정
도의 설탕, 성냥 2천개피 분의 인, 장난감 총알 한 발 분의 포타슘, 3센티 정도의 쇳조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현시가 십여 만원어치 남짓한 값어치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어느 물리학자의 말을
생각해 보면, 물질로서는 인간의 가치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초라한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이, `영혼`이라고 하는 무엇과도 환치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비로소 인간일 수 있으며, 따라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심과 동시에 선악과를 창조하셨고, 또 하와로 하여금 그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한 사탄(Satan)까지도 창조하신 것은 바로 인간에게 육체와 영혼, 죄와 선을 동시에
불어 넣으시고, 그 영혼과 육체로써 신에게 가까이 가는 방법을 우리가 선택하도록 하신 것이 아
니겠습니까.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1863~1952, 스페인 태생 미국 철학자)는 “완전한 육체의 결합은
그 자체가 곧 정신의 결합이다”라고 <아킬레스의 상 앞에서> 중에서 언급한 바도 있거니와, 인
간은 신이 창조한 정신과 육체 어느 쪽도 경멸하거나 내버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인간에게 악이나 육체가 없다면 선이나 영혼의 고귀함을 알 수가 없을 것이며 추악함이
없다면 아름다움 또한 인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D.H.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 영국)는 그의 <서간집>에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적나라한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서 완전히, 그리고 맹목적으로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곧 화해하는 일이며, 이 화해야말로 정신과 육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우주의 만물에까지도 그 의미를 확대해서 적용할 수 있는, 우리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
요.
아벨라르.
적극적인 화해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자유를 나는 갖고 싶습니다. 그 기쁨과 자유야
말로 내 생명을 완성하는 길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맹목과 무아의 상태로 돌아가는 선으로서의 화해, 아름다움으로서의 화해를 나는 결코 포기하
지 않고 기다리며 추구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갖고 싶어요
아벨라르.
일본의 신문학사상 가장 천재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는 다지이 오사무가 쓴 <사양>이라는 소설
을 읽고 나는 매우 충격적인 감동을 얻었습니다.
이 소설 속에는 가즈코라는 여자가 등장하고 있는데, 패전 후 몰락하고 도태되어 가는 귀족의
비극적 삶이 가즈코의 독백과 그의 동생인 나오지의 수기로 엮어진 소설입니다.
이야기는 가즈코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 동경의 니시가다 거리의 집을 팔고 이즈(일본 태평얀
연안 지방명)의 중국식 산장으로 이사오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때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해의 겨울, 이를테면 일본의 전후 귀족의 몰락을 뜻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버지도 죽어 버렸
으므로 생계는 오직 한 사람의 육친인 와다 아저씨가 돌보아 주었지만 세상이 바뀌자 별로 신통
하지 못했고 더욱이 어머니는 중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동생인 나오지는 흡사 불량소년처럼 굴다 대학 재학 중에 소집되어 남방의 섬으로 출정한 후
소식이 끊긴 채 종전이 되죠. 결국 행방불명이어서 죽은 걸로 단념하고 있었습니다.
가즈코는 동생의 마약 중동으로 인한 약국의 빚이 원인이 되어 전 남편 야마기와 이혼하고 아
기를 사산한 후 혼자 살기로 결심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동생의 스승인 우에하라 지로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는 어느날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어머님 나는요, 이 근래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인간이 딴 동물과 전연 다른 점이 무엇일까
요? 말도, 꾀도, 생각도, 사회의 질서도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물들도 모두 갖고 있잖아
요? 그런데 다만 한 가지가 있어요. 그건 말이지요. `간직하는 일`이라는 것이에요.”
가즈코는 아내도 자식도 있는 애인의 사랑을 간직하는 것이 삶의 최대의 보람이었습니다. 그녀
는 몇 차례고 애인에게 사랑의 편지를 씁니다. 물론 답장도 없고, 보내기만 하는 간절한 글월입니
다.
“최초로 드렸던 글월 속에 저는 가슴 속에 걸린 무지개 이야기를 썼습니다만, 그 무지개는 반
딧불의 빛깔이나 또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그렇게... 저의 가슴 속의 무지개는 불꽃의 다리입니다.
가슴이 터져 없어질 것 같은 간절함입니다. 마약 중독자가 마약이 떨어져서 약을 구할 때의 마음
도 이렇게 괴롭고 간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즈코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어느날 그녀는 우연히 동생이
마약 중독으로 괴로와 하고 있을 무렵의 일기를 발견하고 읽게 됩니다.
가즈코는 이때부터 동생의 죽음을 예감합니다.
얼마 후 어머니가 죽고, 이어 나오지가 애틋한 유서를 남긴 채 누이가 없는 틈을 타 산장에서
전혀 사랑하지도 않는 댄서를 옆에 두고 죽어 버립니다.
“누님! 나는 내가 왜 살아 있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전연 모르겠어요. 살아 있고 싶은 사람만이
살면 되지, 인간에게는 살 권리가 있는 것과 똑같이 죽을 권리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애절한 장문의 유서에서 나오지는 어느 중년의 화가 부인에 대한 자기의 사랑
을 고백하면서, `누님만이라도 나의 오늘날까지의 생명의 괴로움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
다.
동생이 이룰 수 없는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좌절로 괴로와 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된 것
을 알게 된 가즈코는 그가 사랑해 왔던 우에하라 지로에게 거의 전투개시를 하는 것과 같이 전격
적으로 그에게 자기를 내어던지기로 합니다.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다. 나에게는 기필코 싸워 찾아야 할 것이 있다. 새로
운 윤리라고나 할까,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사랑 그것 뿐이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그 슬픔 때문에 몸과 영혼을 게헤나(Gehena, 지옥)에 멸망시킬 수 있는 자. 아. 나야
말로 그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라고 독백하면서 결국 아내도 자식도 있는 그의 애인을 찾아갑
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다름과 같은 편지를 애인에게 씁니다.
“그리웠던 사람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제 도덕혁명의 완성입니다. 저의 가슴에 도덕적
혁명의 무지개를 걸어 주는 이는 당신입니다. ...저는 한결 같이 사랑의 모험적 성취만이 문제였습
니다. 그 소원이 완성되어 이제 저의 가슴 속은 숲속의 호수처럼 조용합니다. 저는 이겼다고 생각
합니다.
저에게는 낡은 도덕을 무시하고 좋은 아이를 얻었다는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사생아와 그 어
머니 - 하지만 우리들은 낡은 도덕과 어디까지나 투쟁하면서 태양처럼 살아갈 것입니다.“
여자의 모성으로서의 본원적인 소원을 강력하게 피력하면서 기존의 도덕에 도전하고 있는 이
대담한 가즈코의 편지는 섬짓하리만큼 자학적으로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수했다고 생각하고, 그 뒤에 오는 모든
타인의 질시와 사회의 냉대를 감수할 것을 각오한 한 여인의 용기와 모럴은 매우 강하고 새로우
며 도전적으로 보입니다.
아벨라르.
한 남자를 사랑해 본 여자라면 당연히 그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구를 자연스
럽게 느끼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그의 아기를 갖게 되었을 때의 기쁨과 감동은 여
자가 아니고는 맛볼 수 없는 매우 귀중하고도 강한 경험입니다.
물론 남자의 편에서도, 사랑하는 여자의 몸 속에서 그 자신의 분신이 잉태되고 있다는 것은 큰
감동이 되겠지요. 그러나 여자의 기쁨에 비하면 남자의 기쁨은 아무것도 아닌 미미한 것에 불과
할 것입니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완전히 그 남자를 소유하는 것 같은 만족감
과 성취감에 이르게 되며, 그 아이를 통하여 그의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고 사랑하는 남자와
의 끊을 수 없는 결속을 확인하게 됩니다. 여자는 아이로 인해서 스스로 그의 세계를 좁히고, 그
의 자유를 고정시키며, 작은 우주 속에 안주합니다.
이 자유를 속박하는 일, 세계를 좁히는 일, 작은 우주 속에 안주하는 일은 한 여자가 어머니로
서 성숙되고 위대해지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만일 범속한 한 여자가 어떤 남자를 사랑하면서 그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고 아마도 단순한 우정에 지나지 않거나 쾌락을 향유하고자 하는
감정에 불과할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유의 정신에 닿아 있고 끊임없이 그 자유를 확인하고 살아
가면서 지적 작업에 몰두해 있는 사람이나, 혹은 현세를 철저하게 즐기고자 하는 일부 서양사람
들에게서 아이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더러 발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편의에 의해서
아이를 가지려 하지 않을 뿐이지 그 본능에 있어서 아이를 갖고 싶은 감정이 없는 것은 결코 아
닌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이나 감정보다 이성과 편리를 더 많이 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본능은 성적 충동과는 전혀 다른 매우 깊은 사랑의 근저에
서 우러나오는 열망입니다.
그와 가장 깊이 맺어지고자 하는 열망, 그와 결코 끊어지지 않는 끈을 이루고 싶은 소망이 여
자로 하여금 그의 아이를 갖고 싶게 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사랑을 시작한다”라고 어느 작가가 말한
것처럼 아이는 여자에게 있어서 거의 그 사랑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특히 그것이 열렬히 사랑
하는 남자의 아이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다시 소설의 얘기로 돌아가지만 가즈코의 모럴이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하는 판단은 개인마다
다를 것이겠지만 나는, 가즈코의 강렬한 모성 본능과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집념을 이해할 수 있
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잉태하는 일은 그 남자와 여자를 근원적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사랑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벨라르.
기존의 도덕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일어선 가즈코의 용기에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은 여자가 어찌 가즈코 혼자 뿐일까요. 모든 사랑에 빠진 여자
들은 아마도 한번쯤은 그런 강한 욕구를 자기 속에서 느낄 것입니다.
그와 나를 하나로 이어 줄 아니, 그의 모습이 투영된 새로운 생명이 내 몸 속에서 자라고 있음
을 확인했을 때의 그 황홀하고 만족한 상태야말로 사랑하는 남자를 가진 여자가 도달하고 싶은
최고의 소원이며 성취감의 정점일 것입니다.
행복이란 바로 그런 순간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내 가슴 속이 서늘하게 비어가
는 것을 느낍니다. 아무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한 가슴으로 시계의 초침소리를 헤아리며 나
는 이 밤을 뜬눈으로 아프게 보내고 있습니다.
숨어 있는 신기루
오늘 아침 신문에는 어떤 유명인사의 이혼사건이 크게 실려 있었습니다.
이런 기사를 대할 때마다 나는 몹시 불쾌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전체에 대하여 적이
실망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그런 사실이 왜 세상에 드러나고 추한 소문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하물며 공공 보도기관에 의하여 보도까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남녀의 일이란 그 두 사람밖에는 알 수 없는, 결코 타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문제
들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아주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이는 한 쌍의 남녀가 별스런 큰 이유도 없이 헤어지는
것을 보는가 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녀가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어울리는 데는 정신적인 일체감과 육체적인 일체감을 동시에 갖지 않으면 매우
기형적이고 심한 갈등이 생겨나게 마련이지요.
유교사상에 젖어 있던 조선조 오백년 동안의 대부분의 우리나라 여성들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그들은 다만 집안의 일을 돌보고 자손을 낳기 위해서만 그들의 육체를 필요로 했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늘 애정에 대한 갈구와 그 애정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한이 맺혀 있었고, 남자와 사회
제도에 의하여 늘 억압되고 갇혀 있는 성의 갈등으로 괴로와 했습니다. 그들의 성은 오직 자손을
번성하는 생식의 역할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원시적인 모권제도의 풍습이 미미하게나마 남아 있던 신라나 고구려, 백제에서는 더러 자
유연애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는 향가나 설화를 찾아볼 수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고대소
설속에서 다룬 남녀의 문제는, 정절을 목숨 같이 여기는 여자의 얘기였고 또, 근대소설에서 다룬
남녀의 문제도 거의가 가정 중심의 윤리관을 바탕으로 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서구의 문화가 흘러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의 여성들도 매우 개방적인 성도덕에 점점 익
숙해지고 있는 것이 또한 염연한 현실입니다.
D.H.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영국에서 일어났던 외설물
시비와 출판금지 사건은 세계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흔히 성의 문제는 비도덕적이며 죄악
이라고 비난을 받기가 쉬운 일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모두 그것에 대한 은밀한 욕망을 갖고는 있으면서, 백일하에 드러내기는 부끄
러워하는 내방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작가로서 성의 문제를 매우 아름답게 다룬 작가로는 아마 이효석을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이효석은 자연주의 작가로서 매우 감각적이고 향토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인간 본연의 건
강한 생명의 동력과 신비성을 추구하고자 한 작가였습니다.
야생의 건강미와 인간 본연의 것을 추구하기 위하여는 성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었고,
감각과 관능이 자연과 교류하고 있는 화음의 상태, 교감의 상태를 그는 즐겨 다루었습니다. 그에
게 있어서 성이란, 모든 생명과 인간이 나누는 단순한 본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설은 서
정적이고 아름다운 리듬이 가득히 깔려 있고 그의 문장은 매우 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효석과 거의 같은 연대에 살았던 D.H.로렌스의 작품은 이효석보다 훨씬 농도 짙은 성의 문제
를 다루었지만, 그 역시 성을 단지 쾌락으로서 다룬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떤 초월적 세계, 이상
적 세계에 이르는 지름길로 보았습니다.
현대의 기계문명과 산업주의에서 인간이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육체에 뿌리박은 성의 법
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그는 남녀의 욕망을 자연의 질서라고 했으며, 남녀의 결합을 우주의 리듬과 합치하는 부드러움
이라고 했습니다.
로렌스나 이효석보다 먼저, 그러니까 연애를 성애와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었던 19세기 전
반의 철학자인 쇼펜하워(Arthur Schopenhauer. 1788~1860, 독일)는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습
니다.
“모든 연애란 그것이 아무리 영묘함을 가장한다고 하더라도 성 본능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
또 프로이드는 `연애는 리비도(Libido. 애욕)가 승화된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을 지나치게 성적인 존재로 규정한 프로이드나, 정신적인 연애를 무가치한 것으로 본 소펜
하워의 설에 나는 결코 전적인 동의를 할 수는 없지만, 남녀의 관계에 있어서 성의 문제는 필연
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이라는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이 자신의 결핍을 메꾸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에서 나오는 것인 이상 정신
뿐 아니라 육체에도 그 결핍에 대한 의식이 있기 마련이며 그 모자람을 충족하고자 하는 욕구가
당연히 따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정신적인 존재인 동시에 육체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전인적인 것일 때 정신적인 것 뿐만이 아니고 육체적인 부분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벨라르.
나는 사랑에 있어서 육체적인 결합이 곧 완전한 결합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
나 건강한 사람이라면 정신적 사랑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육체의 욕망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
며, 그 욕망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사람의 정신세계는 제삼자로서는 결코 들여다볼 수 없는 미묘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마찬
가지로 사람의 육체에도 개개인의 비밀이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한 남자와 여자의 결합과 헤어짐에 대하여, 어떻게 제삼자가 옳고 그름을 논할 수가 있겠습니
까.
연애란 가장 인간적인 정신생활의 정수라고 나는 믿고 있으므로, 사랑과 사랑 아닌 것과의 분
별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사랑은 신적인 것이어야 하며 상대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또, 창조하기도 하며 상
대를 위하여는 어떤 것이라도 헌신하고자 하는, 거의 신앙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적인 것이라든가 신앙에 가까운 것이라고 해서 인간이 갖고 있는 육체적인 조건을 외면하자
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온 정신과 온 육체로 전인적 사랑에 몰두함으로써, 그들만의 초월적인 세계
로 도달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은 숨기고 가꾸며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또 반드
시 지켜져야 합니다.
마치 신앙이, 남에게 과시하거나 자신의 장식적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되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한 성경의 말씀처럼, 남에게 자랑하지 않고 선과 덕을 쌓으면서 신의
사랑 안에 닿아야 하듯이, 사랑 또한 그렇게 지켜져야만 하며, 사랑하는 두 사람만의 전 재산으로
온전히 보전하고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남녀의 문제는 그들끼리 해결하고 마무리지어야 할 만큼 미묘하고 복잡한 여러 가지 감
정의 얽힘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남의 말이나 생각으로 결정되고 비난받을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숨어 있
을 때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세상에 드러나면 비천한 사람들의 입과 생각에 의하여 때묻고 긁히어
손상되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사랑은 상식을 뛰어넘는 어떤 초월의 세계이므로, 상식적인 사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의당 그
것은 한낱 웃음거리가 되거나 불결한 것으로 보이게 되는 거지요.
그러기에 사랑은, 사랑을 해 봤거나 사랑하고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이며, 타산적
이고 공리적인 세상의 눈으로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생애 동안, 그 이상한 신기루를 발견한 사람이야말로 지복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
합니다.
돌에 새겨진 사랑
지난번 친구들과 함께 경기도 금촌에 있는 어느 작은 산엘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조선시대의
기생 홍랑의 시비 제막식이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홍랑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이름이지만, 그의 시조 한수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홍랑이 함경도 경성에서 기생으로 있을 당시, 북해 평사로 그곳에 와 있던 최경창과 가까이 사
귀었는데,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홍랑은 시조 한 수를 지어, 꺾어 온 버들가지 하나와
함께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시비에 새겨진 홍랑의 시조는 이런 것입니다.
묏버들 갈해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대
자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떠나는 임을 위하여 버들 한 가지 잘 가려서 꺾어(갈해 꺾어) 임에게(임의 손대) 보내고, 그 임
이 주무시는(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기를 바라는 마음. 혹시 그 버들잎이 비를 맞고 새 잎이 돋
아나면 자기를 보듯 생각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보낸 홍랑은, 그 후 최경창이 병들었다는 소식
을 듣고 함경도 경성에서 서울까지 7주야를 달려왔다는 애기를 그날 거기서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홍랑은 최경창이 죽은 후 오랜 세월을 무덤을 지키며 수절했으므로, 최경창의 자
손들이 홍랑을 최경창의 무덤 옆에 묻어 주었고, 그 후 무려 4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무덤 앞에 홍랑의 시비를 세우고 그 시비 뒷면에는 최경창의 공덕비문을 새겨 주기로 최경창의
후손들이 합의했고, 많은 문인들과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분들의 뜻도 함께 모아 그렇게 시비가
세워진 것입니다.
돌 한 조각의 앞뒷면에 서로 사랑하던 두 사람의 비명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내게 준 감동은
너무나 컸습니다. 나는 그날 호젓한 산마루에 앉아 그 시비를 보면서 그리움이나 사랑이라는 것
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대의 한량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기생이 한 남자를 지아비로 모실 것을 작정하고 일편단심
을 보낸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그 지아비가 병들었다는 소식에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모든 호화
로운 생활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7주야를 달려온 그 외골수의 사랑과, 또 그 사랑에 감동하여 한
낱 기생의 시신을 벼슬에 올랐던 그 조상의 무덤 옆에 묻어줄 줄 알았던 최경창 후손들의 넉넉하
고 따뜻한 마음씨를 새기면서, 마치 세상의 온갖 혼탁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아름답고 순수한 작
은 낙원을 발견한 듯 마음이 훈훈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요한 물질, 많은 사람들의 찬사, 손에 잡히는 쾌락 같은 것들이, 소박한 한 기생
의 그리움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퇴락해 버리는 저 지순한 사랑이 몇백 년의 세월을 건
너뛰어 내 앞에 와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었습니
다.
아벨라르.
그날 오후 산의 공기는 얼마나 맑고 고요했는지... 전설과도 같은 사랑의 애기가 눈 앞의 돌 위
에 새겨져 있고, 현학이나 과장을 전혀 모르는 그곳 촌로들의 소박하고 구수한 입담에 취해 있으
면서, 얼마나 간절히 당신이 보고 싶었던지, 당신과 함께 이 작은 산에서 마른 솔가지를 지펴 밥
을 짓고 산나물을 캐서 식탁에 올리면서 은둔자처럼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전혀 현실성 없는 꿈
을 꾸어 보았습니다.
아벨라르.
당신은 영화 `의사 지바고`의 한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눈이 쌓인 황량한 들의 외딴 집에서 지바고와 라라가 승냥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사랑의 대
화를 나누던, 그 아름답고 고독한 영화의 한 장면이, 한 순간 내 눈 앞에 크게 확대되어 왔습니
다.
당신과 함께라면 승냥이의 울음소리나 온 들을 뒤흔드는 바람소리가 조금도 무섭지 않을 것 같
은 감정이 그 순간 나를 무섭도록 강하게 흔들었습니다. 가능하다면 나는 당신과 며칠만이라도
함께 생활하고 싶다는 욕망이 밀물처럼 간절히 일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당신과 함께 생활할 수가 있다면 그것이 다만 며칠뿐인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아무것과도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아벨라르.
그것은 나의 꿈에 지나지 않는 일이겠지요. 다만 나 혼자 꿈꾸고 설계하며 그리고는 뭉개어 버
리는, 허망한 모래성처럼 슬픈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지요.
그리움의 새는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아침마다 내 창문 앞에 와서 울고 있는 이름 모를 저 새는 무엇을 저렇게 울고 있는지요.
아벨라르.
당신은 아침 일찍 창 밖에서 울고 있는 새 소리에 가슴 아파 본 적이 있습니까?
가장 밝고 상쾌해야 될 아침,작은 새 한 마리 내 속 깊은 곳에 울음을 옮겨 주고 갑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온 세상은 안개에 휩싸여 있고 그 안개 속에서 밤새 숨 죽이고 있던 새 한
마리. 눈을 뜨자마자 우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새 한 마리. 우는 일만이 표현의 전부인
저 새의 시름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일까요.
아벨라르.
내 가슴에 고이고 고여 때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당신은 아십니까.
당신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솟구치는 눈물이. 아무리 감추려 해
도 감추어지지 않고 흘러나오고 맙니다.
그것을 꼭 슬픔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눈물이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또 행복할 때도 흘
리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기쁨이, 당신 곁에 앉아 있는 행복이, 당신을 절절
하게 그리워하는 안타까움이, 또 미래의 어느날, 홀연히 당신과 헤어져야 할 것이라는 슬픈 예감
이 모두 눈물이 되어 흘러 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온 몸과 마음이 따뜻한 물처럼 되어 버리는 것일까요. 당신을 생각하면 언제
나 뜨거워지는 내 가슴의 밑바닥에는 눈물의 샘이 마르지 않고 솟구치고 있습니다.
안개 속을 걸어 새벽마다 나는 산책길에 나섭니다. 아무도 다니지 않은 거리, 새벽의 찬 공기와
어디선가 불어오는 산바람 냄새, 눅눅하게 내 머리를 적시는 습기찬 대기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따라오며 울어대는 저 새와 함께, 홀로 걷는 이 새벽 길에서 나 또한 한 마리 시름에 찬 새가 되
어 울며 걷습니다. 이 새벽에 왜 당신은 내 곁에 계시지 않은가요.
밤새 깊이 잠들었다가 이른 새벽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옆에 계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조
용히 당신을 안고 이제 시작되는 하루를 설계하고, 그 기쁨에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
어날 수 있다면, 그리고 당신에게 무엇인가 봉사하면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아벨라르, 당신은
이런 꿈을 꾸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 어느날, 나의 이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지금까지 내 가슴 속에서 슬픔으로 울고 있던 새는
아마 너무도 행복하여 다시 끝없는 울음을, 행복한 눈물을 쏟을 것입니다.
감미롭고 나즈막한 울음을 울며, 그런 자신을 돌아보면서, 당신 옆에서 나는 편안하고 사랑스런
여자가 되어 다소곳하게 머리 숙이고 살 것입니다.
이 소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새벽마다 울고 가는 저 새처럼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입니다.
비록 죽음의 골짜기에 가서도 당신이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울면서 당신을 찾아 헤매일 것입니
다.
아벨라르.
그러한 나의 울음소리를 들으시면 당신은 필경 내게로 달려와 주시겠지요. 설령 이승에서 내게
로 오시지 못한다면 저 세상에서라도 내게로 달려와 주십시오.
당신이 오실 때까지 나는 이 뜨거운 울음을 멈출 수 없는 그리움의 새입니다.
우러라 우러라 새여(울어라 울어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자고 일어나면 울어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자고 니러 우니노라(자고 일어나면 울면서 지내노라)
-<청산별곡> 2연
작가도 연대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이 고려가요는 슬픔에 차서 날마다 울음으로 보내는 자신의
처지를, 우짖는 새와 견주어 노래 부른 것 같습니다.
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울어라 울어라`라도 말한 것은 새의 울음이 마치 자신의 울음과 너무
도 흡사하게 느껴져서 탄식하듯 내뱉은 싯구이겠지요.
새의 울음소리조차 서러움으로 받아들인 작가의 심중을 어떤 이는 지배계급에서 탈락되거나 소
외된 사람들의 노래로 해석하고 있지만 나는 이 노래를 사랑에 상처입은 사람의 심정을 노래한
애절한 노래로 보고 싶습니다.
이 고려가요 속에서 울던 새는 이즈음 나의 창문 앞으로 날아와 내 가슴을 쪼아대며 아프게 울
고 있습니다.
시름과 그리움, 슬픈 소망을 울음으로밖에는 나타낼 줄 모르는 눌변의 사랑을 당신은 알고 계
십니까.
배반 아닌 배반
어제는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비엔나 국립 발레단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저 유명한 누레예
프가 출연하는 공연으로서 국내 팬들의 열렬한 요청을 받아 모 신문사의 초청에 의한 내한했다고
합니다.
그 나라를 여행해 본 사람도 미리 예약을 하지 못하면 잘 볼 수가 없다는 유명한 공연이므로
무용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요행을 놓치고 싶지 않은 공연이지요.
그 공연이 시작되기 한 시간쯤 전에 우리는 만났지요.
커피를 마시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당신은 당신의 가족들과 함께 발레공연을 가기로 한
약속을 어쩔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게 미안한 표정을 하고 일어섰습니다.
일어서서 저만큼 걸어가시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왠지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
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또 내가 아무리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당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위하여 그 약속장소에 가야 하고 그들과 함께 아름다운 무용공연을 보면서 행복
을 음미해야 할,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가정을 가지고 있는 한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특히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끈으로 묶여 있는 당신과 당신의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비
집고 들어갈 한 치의 틈도 없다는 것을 어제처럼 절실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느껴 본 적이 없었
습니다.
과연 나는 당신에게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일까요.
당신이 내게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유일하고 전체적인 것인 데 비하면, 나는 당신에게 있어서
당신의 아이들과 아내 다음에, 남아서 비어 있는 조그맣고 이차적인 자리를 겨우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어제는 얼마나 선명하게 내 가슴에 부딪쳐 왔던지, 공허하고 억울한 감정에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싶었습니다.
아벨라르.
나의 이런 생각이 잘못인 줄은 물론 압니다.
당신은 당연한 일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나를 쓸쓸하게 하는 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과 질투의
감정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어찌 그리도 왜소하고 비참하며 억울해지기까지 했는지...
마치 내가 당신에게 희롱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참담함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당신을 열렬히 희구해도, 또 당신을 나의 남자라고 굳게 믿고 있다고 해도, 엄연하
게도 당신은 다른 여자의 남편이며 두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마치 전혀 모르고 있던 일에
접했을 때처럼 강한 충격으로 나를 쓰러뜨리려 했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가려고 준비했던 발레공연의 입장권 두 장을 찢어 버리고 하릴없이 밤 거리
를 헤매다가, 우리가 함께 자주 들르던 카페에 들려 술 한 잔을 청하고 망연히 앉아 있었습니다.
카페에는 마침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그 도입부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 밤, 이 시간에 운명교향곡인가요?-라고 나는 소리지르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그 비통한 울림에 짓눌리어 다시 한번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아니 나는 쓰러지고 싶었습
니다.
마구 흐트러진 내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내쏟아 나의 참담한 배반감에서 헤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요.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결코 당신이 나를 배반한 것도 아니며, 당신은 그들 쪽으로 가지 않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충분히 양해하고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묘한 배반감으로 괴로와지는 것은
왜일까요?
사랑의 전제적 힘-상대에게 모두를 요구하며,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절망하게 되는, 강렬한
전제적 힘이 나의 몸속에서 불길처럼 끊어올랐고, 끝내 나의 욕구는 눈물로 터져나오고 말았습니
다.
얼마 동안을 울고 있던 나는, 나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비참해져서 그 카페를 나와
다시 어둠 속을 지향없이 걸었습니다. 마주 보이는 아파트의 창에는 따뜻한 불빛들이 새어 나와,
그 속에 인간의 생활이, 낮은 웃음소리와 다정한 눈짓과 평화로운 분위기의, 안정된 인간의 삶이
있다는 것을 내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것은 살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마음과 몸을 섞으면서,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하기도 하면서, 서로 위안하고 위안받
고 의지하면서, 질기고 건강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따뜻한 증거였습니다.
아벨라르.
나는 그 많은 창문의 불빛들을 바라보면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생활... 그래요. 나는 생활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애가 아닌 당신과 함께 하는 생활을 나는
열렬히 염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옷을 손질하고 아침 커피를 끊이고 당신과 함께 외출하고 돌아오면서 누리는 생활을 내
가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밤마다 창에 불을 밝히고 서로 자기의 일에 열중하기도 하고, 그러다 지치면 편안히 잠들
수 있는 생활. 아무 불안이나 긴장감이 없이 자연스럽게 풀어져서 서로를 바라보고 안심할 수 있
는 생활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견고한 울타리를 만들어 그 속에서 서로를 확인하고 서로를 도우며 두 사람이
하나의 `우리`가 되는 것을 나는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늘 당신에게서 뭔가 불만 같은 것을
느끼고 목말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가정을 이룰 수 없는 우리의 관계에서 오는 결핍감 때문입니
다.
그러나 아벨라르.
내 속에서 강렬한 힘으로 자라고 있는 이 두려운 소망을 내가 어찌 당신 앞에 내보이겠습니까.
우리가 늘 주장하고 있듯이 지적 반려, 영혼의 반려자로서 우리는 자족해야 하며, 그 이상을 원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나는 비애와 좌절로 맥이 풀려 집으로 돌아와, 캄캄하게 불이 꺼져 있
는 나의 방, 내가 외출을 하고 나면 사람의 체온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나의 방에 돌아
와서 `외로움`의 의미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어둠 속에 그냥 쓰러졌습니다. 전에는 그처럼 편안하
고 자유롭던 나의 방이, 왜 어제는 내게 그토록 무섭고 외롭고 차디차게 느껴졌던지, 나는 덜덜
떨면서 온 몸을 움추리고, 꽉 다문 입 사이로 새어나오는 울음을 밀어넣으며 나 자신을 힐책했습
니다.
아, 그렇게도 절망적이었으면서도 아벨라르. 나는 당신이 마냥 그립기만 했습니다.
행여 당신이 전화라도 걸어 주지는 않을까, 밤 늦게라도 내 문을 두드려 주시지는 않을까, 기다
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아벨라르.
어제는 내게 있어 참으로 최악의 날이었습니다.
나의 질서에서 완전히 이탈되어 걷잡을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내닫는 듯한, 최악의 상태로 하얗
게 밤을 지새웠습니다.
당신 곁에서 죄인 되리라
이광수와 부인 허영숙이, 집안의 반대를 끝내 이겨내고 매우 어렵게 결혼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게도 어렵게 결혼한 부부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벌써 중년이 되어 당당하게 한 사회인으로
서의 몫을 하면서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를 보면서 나는 이광수가 허영숙에게
보낸 열렬한 사랑의 편지를 꺼내어 읽어 보았습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엄격한 윤리관을 갖고 있던 1910년대의 우리나라는, 비록 개화의 물결이 서
서히 밀려오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연예의 자유가 허용되기에는 너무나 아득한 시기였던 것 같습
니다.
<사랑> <무정> 등의 많은 소설을 써, 우리 신문학의 개척자로 공헌한 춘원 이광수는 자유연
애의 실천자로서도 한 몫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그의 아내가 된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랑의 고통과 또 새로운 도
덕관과 낡은 도덕관 사이에서 괴로와 한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편지입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허영숙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열렬히 구애했던가를, 그
의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었으며, 한 작가가 사랑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생각은 어떤 것이었는
가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내 영에게
-(전략)- 우리의 사랑이 만일 진실로 절대한 것일진댄, 그것이 무엇의 지배를 받고 억압을 받
겠습니까? 자연의 힘이, 즉 죽음이나 증오가 우리를 떼기 전에 뉘가 능히 우리를 떼겠습니까? 설
혹 그것이 죄악이 되어서(죄악이란 말이 벌써 어떤 표준을 세운 뒤의 말이지만) 우리의 몸과 영
이 함께 지옥의 화염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지옥의 화염이 우리를 온통 살라 버리기까지 뉘가
우리를 떼겠습니까?
영이여 만일 우리의 사랑을 죄악이라 하거든 영이여! 죄인이 되어 주십시오. 나를 떠나서 선인
이 되려 말고 나와 함께 지옥의 죄인이 되어 주십시오!
1918년 7월
이광수
지옥의 불도 무섭지 않고 죽음도 무섭지 않으며 죄악도 그의 사랑을 해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사랑. 사랑의 성취를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불사하려는 외골수의 사랑을 그의 편지에서 발견하
게 됩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예술가들의 사랑이란 하나 같이 열정적이기는 하지만, 동양의 나라, 특히 엄
격한 유교적 윤리가 그 근간을 이루고 있던 한국의 1910년대에도 이렇게 열정적인 편지가 은밀하
게 교환되었다는 사실은, 사랑이라는 불길이 한 사람의 영혼에 점화되었을 때 작용하는 열도와
도취의 무분별성, 강인성이야 말로 시대와 연대를 초월하여 늘 그 본연의 모습을 띄고 있다는 사
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시대가 삭막하고 감각적이고 물질만능주의가 팽배되어 있는 시대라고 해도, 사
랑이 갖고 있는 본연의 모습은 어디엔가 숨어서 젊은 영혼을 불태우고 상처 입히며 끝없는 동경
과 열망으로 거기에 도달하고자 하는 높은 자리를 엄연히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벨라르.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낱말은 아마도 이 지구상에서 결코 소멸되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유일하
게 신선한 낱말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말은 존재라는 말과 같은 뜻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한, 사랑 또한 존재하며, 불멸의 빛깔과 향기를 가지고 우리의 영혼을 감동 속으로 몰아넣는
가장 영원한 이름입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판도라`의 상자 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과 같
이 우리를 끊임없이 일깨워 주는 어떤 것입니다.
빈 껍질 같은 시간들
당신은 지금 병석에 누워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교통사고로 인하여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
태로 누워 있습니다.
전화로 그 소식을 듣고,나는 마치 나를 얽어매고 있던 질긴 끈이 단숨에 끊기어 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신과 만나면서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이 바로 당신이 건강을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신이
고통 당하는 것이 내게 주는 괴로움이나 안쓰러움도 견딜 수 없는 일이지만, 그보다 괴로운 일은
당신이 완쾌할 때까지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건강을 잃고 나면, 아무리 높은 뜻,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할 능력
이 없어집니다. 건강은 곧 자유의 원천이며, 건강을 잃는 것은 자유를 상실한다는 뜻과 동일하다
고 나는 생각합니다.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며, 자리에 누운 채 공상과 안타까움으로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
다.
더구나 당신과 나와 같은 관계의 연인 사이에서 당신의 병은 곧 우리의 만남을 단절시키는 일
입니다. 당신 곁에서 당신을 간호하고 돌보아 드리고 싶은 나의 소박한 희망은 다만 상상 속에서
만 허락될 뿐입니다. 당신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보살핌과 관심 속에서 당신의 병을 치유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라고 굳게 믿어 왔던 나의 생각이 결국 완전한
착각에 불과하다는 확인이 뚜렷한 절망으로 와 닿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벽의
두께가 얼마나 두터운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고,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빠진 채 나는, 이 엄연한 현실을 인식하기 위하여 몇 날 밤을 뜬눈으로 지
새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벨라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머리와 가슴으로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정열을 태우는 것이 사랑일까요!
그것은 다만 관념적인 사랑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뿌리 내리지 못하고 안개처럼 떠
도는, 비실질적이고 허황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지불하고 노력하며 자아를 희생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
이 아닐까요?
고통을 통하여 서로 결속하고, 그 고통을 함께 뛰어넘는 것, 서로가 서로를 위해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일, 또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고 보호하는 행위, 바로 이러한 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닐까요?
감미롭고 열정적인 사랑의 첫단계를 지나고 나면, 두 사람은 서로 익숙하게 길들여지고, 상대의
아픔이나 결함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느껴지고, 그를 위해서는 온갖 더러움이나 치졸함마저 스스
럼없이 거두어 주는 자세,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그러나 나의 사랑은 당신을 위해 무엇인가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일을 해 보고 싶은 기회마저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앓아 누워 외롭고 불편할 때 내가 곁에서 당신을 보살펴 주고, 아픈 상처를 간호하며
또 당신께 음식물을 떠 넣어 주면서 당신의 고통을 나눌 수가 있다면, 그래야만 마땅히 나는 진
정한 `당신의 여자`가 될 수 있는데, 또 이렇게 간구하는데도, 당신의 고통과는 먼 자리에 떨어져
앉아 나는 하릴없는 근심과 안타까움만 지니고 있을 뿐이며, 초라하고 빈 껍질 같은 시간들을 소
모하고만 있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나란, 나의 존재나 비중이란, 이렇게도 하잘것 없고 무용한 것이라는 생각에
참담하고 비통해져서 나는 나 자신을 가눌 수조차 없습니다.
아벨라르.
나는 갑자기 우리의 사랑에 대해 짙은 회의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 이상은 절대로 좁혀질 수 없는 거리, 이 이상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시간이 견고한 문이
되어 내가 보는 앞에서 둔중한 소리를 내며, 결코 두번 다시 열리지 않을 듯 완전하게 닫혀 버린
것 같은 이 절망감은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공포감으로 나를 떨리게 합니다.
물론 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부터 이미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하여 절망했었고, 그 이
후로도 줄곧 그 절망을 인식하면서 당신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마음 속에서 이상하게도 그 절망의 인식은 점차 엷어지기 시작했고, 현실
을 뛰어넘는 이 고귀한 영혼의 사랑이 너무나 아름답고 진실하게 여겨져 어떤 의미로는 사랑이야
말로 가장 값지며 영원할 수 있다고도 생각해 왔었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면서 나는
우리의 사랑을 미화하고, 경건한 자리로 끌어올리려 했고, 또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습
니다.
그러나 막상 당신이 건강을 상하여, 나와는 별개의 공간에서, 다른이의 보살핌 속에 누워 있다
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구체적인 상황에 맞닥뜨리자, 말이나 생각으로만 아름답게 채색하여
높은 자리에 올려놓은 나의 사랑의 초라함과 무용한 역할에 대하여 나는 실의에 빠지고 좌절당한
느낌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자신이 이렇게 초라하게 보이고 이렇게 미미한 존재로 생각되어, 어디
숨을 곳이 있다면 깊이 내 몸을 감추어 이 부끄럽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떠나 버리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벨라르.
이 고통마저도 나의 욕심에서 비롯한 것일까요?
다른 사람의 손에 당신을 맡기고 싶지 않은 나의 이 심정은 유치하고 무분별한 나의 욕심일까
요?
“사랑하면서도 또한 현명해지려는 것은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신만이 비로소 겸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한 셰익스피어는 참으로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잘 꿰뚫어 보았습니다.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결코 현명해질 수 없습니다. 우둔하고 유치하며 단순한 감정의 상태
로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모든 이성과 지성을 팽개치고 오직 당신에게로 향한 외골수의 감정에만 사로잡혀 욕심과
고통으로 단금질 당하고 있는 것도, 결코 현명하고 이성적으로 될 수 없는 사랑의 단순성 때문입
니다.
부디 몸 조심하세요. 하루라도 빨리 완쾌하여 당신 특유의 다정하게 웃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
습니다.
천년을 떠도는 사랑
낯선 땅에서 더욱 가까이
나는 지금 여행 중입니다.
낯선 땅을 헤매며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떨어져 진정한 자기 자신의 정직한 모습을 발견하기
위하여 멀리 떠나 왔습니다.
나와는 다른 언어, 다른 모습, 다른 풍습의 낯선 도시에서 기차를 타고 달리면서 내게 가장 소
중한 것은 무엇이며, 내가 가장 원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앞으
로 내가 가야 할 길을 다시 확인하기 위하여 나는 길을 떠나고자 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약간의 설레임과 두려움, 그리고 조금은 쓸쓸함을 느끼면서 자신을 번거
로운 사회의 결속으로부터 해방시켜 고독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이 여행 속에서
나는 도처에 산재해 있는 모험과 경이, 현실과의 괴리에서 빚어지는 자유로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습니다.
여행을 통하여 경험하는 고통과 불편, 새로운 것을 점했을 때의 신기로움, 무엇이나 나 스스로
의 판단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완전한`고독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을 회복하
고 싶었고, 긴장과 갈등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역사가 잠들어 있는 여러 고적들과 새로운 풍물들을 보면서 또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스치고 지나가면서 나의 시야를 넓히고, 세계의 광대하고 신비스런 갖가지 모습에 부딪치면서 내
가 갇혀있던 작은 세계로부터 이탈하고 싶었습니다.
집요하게 당신에게 매달려 있는 나의 감정과 생활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변화할 수 있
기를, 아니 잊어버릴 수는 없다 할지라도 어느 만큼만이라도 가라앉힐 수 있기를, 그리고 다시 이
전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서 규칙적으로 일에 얽매이고 남은 시간을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 쓸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나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내게 허락된 이 여행의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즐기고, 온갖 아름답고 신기한 것을 대하고
다니노라면, 오직 당신을 향해서만 달려가던 나의 감정, 나의 사고가 새로운 체험세계에 의하여
조금은 분산되고 엷어지리라 기대하면서 떠나왔습니다.
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물과 경험, 새로운 지식에 대하여 탐욕스러우리 만큼 호기심을 갖고 있
는 내 본질의 일부가 이 여행을 통하여 더 많이 개화되고, 더 넓은 안목과 세계관을 갖게 됨으로
써 한 개인에게로 치달아 집착하는 감정이나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
습니다.
그러나 아벨라르.
떠나면서부터 나는 어쩐지 후회 비슷한 감정이 자꾸만 마음 속을 어둡게 하는 것을 느꼈습니
다.
당신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감미롭고 황홀한 빛에 싸이는 듯한 나의 시간을 송두리째 파내어
버려도 괜찮을 것인가. 과연 나는 당신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나의 아집 속으로 되돌아갈 수 있
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과연 이전처럼 자족하는 생활을 누릴 수 있을까. - 이런 여러 가
지의 상념들이 나의 발길을 무겁게 했고, 당신을 통하여 얻은 기쁨과 생명력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솔직한 감정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아예 단념하고 다른 생활을 찾아 충실을 기해야
한다는 이성이, 서로 대립되어 내 마음은 혼란의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아벨라르.
나는 이 여행을 통하여 나의 운명을 자연에 맡기고자 합니다.
아무리 당신과 헤어져 있더라도 내가 결코 당신으로부터 완전히 떠날 수 없다는 확신을 얻게
되면, 그 확신에 따라서 나는 당신 곁으로 달려갈 것이며, 혹은 이 긴 여행을 통해서 내가 당신과
의 인연의 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다면 나는 나의 예전의 자유로운 생활로
돌아갈 것입니다.
`시간이 약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들을 믿어 보기로 하고, 일단 나는 당
신으로부터 빈 공간에 떨어져서 다시 한번 자기성찰의 시간 속에서 나 자신의 인생을 골똘히 생
각해 보려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지금, 이 테이블의 건너편에 홀연히 당신이 와 앉는
듯한 환상이 역력히 스쳐 나는 잠시 몸을 떨었습니다.
아벨라르.
차를 타고 달릴 때도, 커피를 마실 때도, 음악을 들을 때도 우연히 길 모퉁이를 꺾어 돌 때도
갑자기 당신의 환영이 내 앞에 불쑥불쑥 나타나서 나를 놀라게 합니다.
어떤 외국인이 검은 색안경을 쓰고 내게 말을 걸어 오면, 안경 속에 가리워진 그 외국인의 눈
과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당신으로 착각되는 경험을 수없이 하면서 순간순간 나는 짙은 슬픔에
잠기기도 합니다.
다정한 부부들이 똑같은 디자인의 T셔츠를 입고 거리를 거니는 모습을 보면 불현듯 당신과 저
렇게 같은 무늬의 옷을 입고 함께 여행하고 싶다는 욕심이 내 안에 치밀어 올라 스스로 아연해집
니다.
끊임없이 나를 쫓아다니는 당신의 환영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나는 일부러 바쁜 일정을 짜
놓고 잠시라도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시간을 피하려고 노력해 봅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밤
이 오면 지쳐서 아무 생각도 없이 쓰러져 단잠을 이루기 위하여 나는 무리한 도보여행을 강행하
기도 합니다.
이 여행 중에 나는 여행 이외의 일을 깡그리 잊고 이 무한한 자유와 완전한 고독을 즐기며 다
시 시작될 내일의 내 인생에 대비하려 합니다.
내일의 내 인생이 과연 어떤 방향으로 결정지어질 것인지 아직은 알수 없지만 나는 이 여행의
끝에 얻어질 내 미래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기 위하여 불안과 근심을 모두 보류한
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여행의 피로에 한껏 빠져 볼 생각입니다.
샌프란시스코 해변에서
금문교의 도시에 왔습니다. 햇빛은 따스한 초가을 같은 금빛 나래를 내리고 건조한 바람이 쾌
적하게 불어오는 샌프란시스코의 화창한 일기속에서 그 거대한 붉은 철의 금문교가 마치 공중에
걸린 듯 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은 몇 번을 가 보아도 갈 때마다 다른 표정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
다.
새벽 안개 속을 달려서 가 본 금문교는 가히 절경이었습니다.
안개는 다리의 허리쯤에 걸려 그 밑을 흐르는 물도, 땅도 보이지 않고, 다만 포물선을 그리면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금문교의 붉은 색깔, 조금씩 움직이며 풀려 가는 안개는 마천루처럼 서 있
는 금문교를 싣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듯했습니다. 깊은 안개에 머리를 적시며 잠든 도시를 가로
질러 뿌우옇게 트여 오는 새벽길을 달려갈 때 안개처럼 부드러운 당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바닷가의 어느 작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환하게 트인 창 밖으로 옥빛 바닷물
이 흰 거품을 일으키며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건조한 날씨 때문인지 샌프란시스코의 바다는, 바다
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비린내와 소금 냄새조차 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처럼 맑고 빛나는 도시를 헤매며, 나는 오래 꿈꾸어 오던 동화의 세계 속에 비로서 들어와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바다로 향한 창가에 앉아 읽고 싶은 책들을 읽고 음질이 좋은 라디오를 듣는 아름다운 꿈의 세
계를 설계하면서, 완전히 자유로운 나 혼자만의 방을 갖고 싶었던 유년 시절의 소망이 이 도시에
와서 참으로 간절하게 되살아났습니다.
만일 나의 소망이 이루어져서 나의 방, 나의 공간을 갖게 된다면 나는 그 방으로 우선 당신을
초대하여 뜨거운 차를 같이 마시며 진지하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술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소살리토라는 마을은 조용하고 아담한 집들이 마치 동화
속의 그림들처럼 숲속에 띄엄띄엄 서 있었습니다.
숲이 이루고 있는 그늘 속에서 작은 창 밖으로 흔들리고 있는 은은한 색깔의 커튼, 감미롭고
평화로운 생활들이 그 속에는 반드시 있을 것만 같은 창들을 바라보며 안정되고 따뜻한 가정을
가지고 싶은 나의 욕망이 안타까움과 가슴 저리움으로 아프게 전해져 왔습니다.
아벨라르.
만일 우리가 이 도시로 함께 여행을 할 수가 있다면 나는 꼭 소살리토의 언덕 위에서 며칠쯤
머물고 싶습니다.
한적한 오솔길을 함께 산책하며, 시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인생의 온갖 경이로움과
신의 은총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서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마주보고 미소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새벽의 금문교 앞으로 달려가 마천루 같은 우리의 사랑을 함께 이
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도시의 바람과 햇살, 안개와 숲은 잠자던 내 영혼을 일깨워 눈뜨게 합니다. 그리고 마성의
그리움으로 나를 뒤흔들어 긴 밤 내내 잠 못 이룬 채 뒤척이게 했습니다.
나는 이 도시에서 다시 꿈꾸기 시작했으며 다시 소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짝이는 이 도시의 어느 해변에 나는 꿈으로 가꾼 방 하나를 마련하고 당신과 함께 따스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어느 먼 날을 위해 나의 그리움 하나를, 나의 소망 하나를, 이곳에
심어 두고 갑니다.
만일 가능하다면 나는 내 신혼의 방을 이곳에 꾸미고, 바닷소리에 귀 기울이며 멀리 보이는 금
문교의 붉은빛처럼 아름다운 설계를 실현할 것입니다.
새벽 안개를 밀고
금문교에 가 보아라
건조한 바람 속
온 밤을 뜬눈으로 달려서
안개 속에 반쯤 허리를 묻어 두고
빈 가슴으로 서 있는
새벽의 금문교에
가 보아라.
허물어져 누운 바다
마성의 머리칼을 날리며
천지사방 훨훨 떠돌아
눈도 귀도 멀게 하는
새벽의 안개.
깊이 잠든 혼을 불러 내어
아프게 흔들어 눈 뜨게 하는
안개는 드디어
칼이 되어 날아 들고
그리움의 다리만이
거기에 남아
구천을 헤매는 넋으로 일어선다.
-강계순 <금문교>
사화산을 지나며
아벨라르.
일본에 가 본 사람은 누구나 그 나라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배어 있는 생활문화의 수준을 느끼
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문화권에 속해 있고, 매우 가까운 지리적 조건 속에서 우
리와 얽힌 역사의 매듭들을 아직 다 풀지 못하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흔히 그 경제수준으로
전후의 강대국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 나라의 뒷골목 작은 찻집이나 여관을 눈여겨 본 사람은
어떻게 일본이 강대국이 될 수 있었는가, 그 열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명이 서민생활의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스며 있어 빈부의 차이가 그다지 심하지 않다는 사실
을 한눈에 알 수 있고, 겉치례보다는 실리와 편리를 추구하고 있는 그들의 강한 생활관을 잠시
동안의 여행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나는 줄곧 함께 여행을 했던 C 여사와 함께 하코네 관광을 하기 위하여 떠난 길에 잠시 오다
와라의 작은 여관에서 묵었습니다. 일본식 가옥의 작은 여관에서 우리는 정갈하고 섬세한 노부인
의 친절한 대접을 받으며, 마치 내 집에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한 밤을 보냈습니다.
깨끗이 손질된 이부자리, 다림질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깨끗하게 세탁된 자리옷, 그리고 아
침 식탁 위의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음식 등이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었던, 그 작은 여관
의 하룻밤은, 내게 보여 준 가장 전형적인 일본의 인상이었습니다.
조금 습기가 배어 있는 듯한 밤 공기와 사방이 나무와 종이로 되어있는 벽, 작고 아늑한 방의
그 조용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한 가정의 분위기를 충분히 풍겨 주어, 우리는 여행의 무거운 피
로와 조금 들뜬 기분을 충분히 풀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가정이라는 것은 그렇게 편안하고 아늑한 것이지요.
함께 있으면서 서로 편안하게, 다른 잡다한 일들을 잊고 있는 사이 진심으로 서로를 위해 봉사
하고 따뜻하게 감싸면서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뜨겁지도 무료하지도 않
은 평화로운 분위기- 이런 것이 가정일 테지요.
아벨라르.
나는 마치 오래 동경해 오던 가정을 찾은 듯했던 그 여관의 은은하고 정결한 분위기를 결코 잊
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하코네 관광을 하면서 보고 느낀 아름다움은 여느 여행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과 별
로 큰 차이가 없었지만 로프웨이(ropeway)를 타고 지났던 사화산의 풍경은 매우 이채로왔습니다.
일본은 자주 지진이 일어나는 나라임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지요. 곳곳에서 사화산의 누우런
유황 연기가 뭉긋거리면서 올라오고 로프웨이를 타고 가는 우리의 코에도 유황냄새가 짙게 스며
왔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의 위협, 노여움처럼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면서 나는 내 속에서 타고
있는, 겉으로는 내보일 수 없는 억제된 감점의 불길을 보는 듯했습니다.
"사랑은 가슴 속에 숨겨 둘 수 없는 불덩이다. 모든 것이 나타나고야 만다. 그리고 이 불덩이는
불완전하게 덮으면 불길은 더욱 강해질 뿐이다"라고 한, 라신느(Jean Baptiste Racine. 1639-1699,
프랑스)의 말을 떠 올리면서, 언제까지라도 불완전연소를 할 수밖에 없고, 그 연소를 불완전하게
덮고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고 열렬하게 희구하는 내 사랑의 노여움이 사화산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유황연기처럼 가슴의 밑바닥에서 무럭무럭 자라서 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
다.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사화산의 연기는 그것이 아름다운 경치라기 보다는 깊이 내 가슴 속에
스며들어 마치 연기와 같은 내 사랑을 자책하고 한탄하게 했습니다.
가슴 속 불길 칭칭 붕대 감아 눌러 놓고
침묵의 자물쇠 굳게 잠그고
몇 줄기의 연기 낮게
띄어 올리면서 살아 있음.
친구여 우리는 알지
겨울 강 풀리고
얼음 벽 쩍 갈라지며 드러눕는 날
죽었던 얼굴 밀어내고 일어서서
세상에 떠도는 유황냄새에 확-
불 당기며 솟아오를 불기둥, 친구여
가라앉히고 있는 속쓰림
고이고 고여 물로
풀릴 날 있을까.
사방에 대못 박고 앉은
사화산을 지나면
우리의 가슴 속 녹슬고 있는
작은 벨이
떨면서 울고 있는 것을
알지.
-강계순 <사화산>을 지나며
아벨라르.
우리의 사랑이 물처럼 풀려 어우러질 날이 있을까요?
세상의 온갖 것에 불지르고 타올라 본래의 모습, 본래의 뜨거움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밀 날이
올 수 있을까요?
가슴 속에 고여 있는 불기둥은 사화산처럼 안으로만 타 들어가서 영영 터져 오를 수 없이 연기
로만 떠오르고 말 것인가요?
내 속의 화산은 언제나 꿈틀거리면서 터져날 것 같은 긴장으로 부풀어 있습니다.
늘 위험하고 불안하여 움츠리고 있는 내 속의 불길은 무엇으로 덮어도 그 타는 냄새가 온 세상
에 번져가는 듯합니다.
신화의 거리에서
고대문명의 발상지 그리스의 아테네는 남국의 정취와 무성한 꽃들, 고대의 신전들과 원형극장
등, 수많은 고적들로 여행객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아벨라르.
나는 그리스 땅에 발을 딛자마자 마치 신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신비한 기분으로 거의 꿈을
꾸고 있는 듯했습니다.
현실의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몇 천년 전의 고대로 되돌아가 신화 속에 나오는
님프가 된 듯한 황홀한 상상 속에서 나는 몹시 자유롭고 신선한 느낌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경제를 거의 반 이상 관광수입으로 지탱하고 있을 만큼 아테네에는 세계 각 나라로부터
많은 관광객들이 와서 붐비고 있었습니다.
반나의 차림으로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바쁜 일이 없는 것처럼 한가하게 보였고, 아
침 일찍 가게 문을 여는 곳도 퍽 드물었으며, 해가 지기 전에 일찌감치 문을 닫아 버리는 상점들
의 표정은 돈을 많이 벌어 보겠다는 욕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습니다.
신전으로 오르는 길에는 곳곳에 대리석들이 깔려 있었고 무너진 성터에는 그 성터마다 아름다
운 신화가 살아서 숨쉬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정교한 조각, 웅대한 건축양식에서 유럽문화의 발상지였던 옛 그리스의 영화를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소크라테스(Socrates. 470?~399 B.C.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소포클레스(Sophocles.
496?~406 B.C. 고대 그리스의 시인)가 걸었을 아테네의 거리에서,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고전으
로 남아 있는 진리와 예술의 위대함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도 가졌습니다.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제국도 그리스의 문화를 수행했다는 사실은 이나라의 문화가 어떠했는가
를 증명해 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아름답고 밝고 우아한 에게(Aegean) 문명의 발상지였던 에게해, 거기에는 여러 개의 작은 섬들
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옛날의 건축양식이 제일 많이 남아 있다는 에기나(Egina), 포르스
(Poros), 히드라(Hydra) 등의 섬은 정말 그림 같은 풍물이었습니다. 당신도 편력하셨다던 그 섬들
을 둘러보기 위하여 배를 타고 에게해 위를 떠다니면서 잘 익은 포도 빛깔과도 같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잉크빛과도 같은 바닷물 가운데서 갑자기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Aphrodite)가 불쑥 일
어설 것 같은 상상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그 바다와 그 햇살은 능히 신화가 탄생할 만큼 아름다와서, 나는 갑판 위에 올라가 뜨거운 햇
빛에 몸을 태우면서, 표류하는 오디세우스(Odysseus:호머의 작품 <오딧세이> 속에 나오는 주인
공)가 듣던 사이렌(Siren)의 노래를 듣는 듯했습니다. 반인반수의 사이렌이 신비하고 매혹적인 노
래를 부르면 우리는 그 노래에 도취되어 드디어 뱃길을 잃고 표류하는 오디세우ㅜ스의 선원들처
럼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꿈 같은 상상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어디선가 들려올 것 같은 하프
의 음률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에게해를 건너다니는 바람소리조차 신전에 바치는 음악소리처럼 들리던 그 오후의 갑판 위에서
나는 당신이 쏜 큐피트의 화살로 가슴을 앓으며, 수많은 고난을 견디어 낸 다음 비로소 사랑을
성취한 프시케(Psyche)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벨라르.
에게 바다 위의 뜨겁고 감미로운 바람 속에서 나는 반나의 몸으로 눈을 감고 누워서 빛나는 날
개를 달고 내 옆에 오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프시케가 캄캄한 밤중에만 그의 신랑을 맞이해야 하고 그 모습은 결코 볼 수가 없었던 것처럼,
눈을 감고 누워 나는 상상 속에서 당신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디오니소스(Dionysos. 술과 연극의 신)의 축제 속에서 마음껏 포도주에 취하여 음악의 신 아폴
론(Apollon)이 어디선가 아름다운 하프를 켜면서 다가올 것 같은 환상적인 방에는 나 또한 고대
그리스의 산야에서 자유와 기쁨의 생활을 누리던 작은 님프가 된 듯했습니다.
그리스의 신들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사랑과 질투, 그리움과 용서, 전쟁과 복수 등, 인간이 가
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신화에 대하여 깊이 공감하게 되
는 것이지요.
그 중에서도 사랑의 신화로 유명한 올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
져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바 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신묘한 황금 하프를 켜면서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와 행복
하게 살았던 올페우스는 그의 아내가 먼저 죽어 저승으로 떠나자 그 슬픔과 그리움을 이기지 못
하여 죽음의 나라에까지 찾아가서, 죽음의 신 하데스(Hades) 왕에게 간청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해낼 수 있었으나, 인간의 나라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뒤를 돌아다보지 않겠
다는 약속을 어겼으므로 영영 아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이 신화는, 사랑의 아름다움과 그리움,
또 사랑을 위해서는 죽음의 나라에까지도 찾아갈 수 있는 용기와 모험을 암시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의 음악은 반드시 하프로 연주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합니다. 신화 속에는,
하늘의 지배자인 제우스신의 막내 아들 헤르메스가 갓난아이였을 때 거북의 껍데기에 소의 힘줄
로 줄을 매어 그것을 퉁기고 놀았던 것이 바로 하프의 시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
니다.
그 후 아폴론이 헤르메스로부터 하프를 얻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하프를 켜면서, 음악과
노래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프가 갖고 있는 특이한 음색과 울림은 아름다운 그리스 신화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분위기를
갖고 있지요.
거리 거리에서 혹은 신전으로 오르는 길에서 만난 조각 같은 그리스인들을 보면 그들이 모두
신화 속에 나오는 신들의 자식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나 하프의 음률이 들
리는 듯하여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곤 했습니다.
아벨라르.
이 신화의 나라에서, 나는 올림프스 산의 신에게 간청하여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신탁을 얻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제단 앞에 꿇어앉아 고요히 신탁을 기다리고 싶었습니다.
아모르(Amor. 큐피트)와 프시케처럼, 올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부드러운 풀들이 흔들리는 언
덕 위에서 하프의 멜로디를 들으며 사랑의 나날을 보낼 수 있다면, 비록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
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얼마나 황홀할까요?
아벨라르.
당신이 만일 에게 바다의 바람을 맞고 허물어진 신전의 대리석에 발을 디디게 되면, 아마 당신
속에서도 이상하고 신비스런 소망이 우러 나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리스는 신화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나라이며, 곳곳에 그 신화의 흔적이 남아 있으므
로 에게 바다의 바람에 닿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 속에서 몇 천 년 전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허망하고 불가능한 꿈을, 그 햇살과 바람 속에서 가능한 것으로 바꾸어 놓고 싶은 열망을 어찌
할 수 없게 됩니다. 유일신인 그리스도교의 엄격한 계율과는 달리, 얼마든지 인간적이고 얼마든지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이 그리스 신화 속에서는 우리의 사랑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쓸
쓸히 웃어 보았습니다.
지구의 끝, 사막에서
아벨라르.
나는 불타는 사막, 끝없는 지평선, 습기 한 방울 없는 메마른 태양의 나라 요르단에 와 있습니
다.
양떼를 몰면서 치렁치렁한 옷을 발끝까지 내리고 사구의 군데군데에 천막을 치고 살다가 어느
때든지 다시 그 천막을 걷어 치우고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의 나라 요르단의 황량한 사막에서 거의
한나절을 차를 타고 달려서 가 본 요르단 강에는 이끼 낀 작은 강물과 볼품없이 자란 잡풀들만이
세례 요한의 추억을 회상케 해주었습니다.
이 강물에서 세례를 주던 요한, 그의 고행의 순례, 드디어는 살로메에게 목이 잘린 순교자 요한
의 자취는 검푸른 이끼와 낮게 흐르는 더러운 강물, 이스라엘과의 국경 분계선을 이루는 철조망
등으로 성스러운 분위기는 조금도 지니지 못한 채 폐기되어 있었습니다.
지능도, 문명도, 모두 외면한 채 당나귀의 등에 짐을 싣고 양떼를 몰고 다니는 유목민들은 더러
운 손과 발, 검은 눈을 내리뜨고 이방인들을 경계하는 듯했습니다. 성서 속의 가나안 땅에는 회교
사원들이 우뚝 우뚝 솟아 묘한 아이러니를 느꼈습니다.
다시 몇 백 킬로를 달려가 본 페트라(Petra)는 거대한 바위로 된 자연 요새로서 그 바위의 오
묘한 빛깔과 암벽면에 새겨져 있는 사원, 무덤 등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은 비록 지금은 폐기
되어 있지만, 로마가 세계를 장악했던 당시의 찬란했던 문화와 웅장한 비잔틴 문화의 잔재를 고
스란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 `페트라`라는 말은 바위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오랜 옛날에 `페트라`는 거대한 바위로 된 하나의 도시였습니다.
그 거대한 바위가 갈라져 있는 좁은 길을 통하여 옛날 대상들이 지나다녔다고 하는데, 우리는
관광용으로 길들여진 말을 타고 그 길을 둘러보며 지나갔습니다.
마치 아라비아 사막을 달리는 대상이 된 기분으로, 한 필씩의 말을 타고 좁은 자갈길을 끄덕끄
덕 흔들리며 지났습니다. 오묘한 색깔로 물들어 있는 이 자연의 바위 틈에서 우리는 마치 몇 세
대를 거슬러 올라가, 기원 전의 옛 사람이라도 된 듯 화려하고 장엄한 옛 문화의 숨결을 깊이 음
미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대 제국에 쫓기고 지배당했던 이곳 원주민 나타비언들의 몰락이 눈에 보이는 듯하여 도
도한 역사의 흐름과 그 무상함에 절로 가슴이 사무쳐 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끝없는 황야 속을
차를 타고 는 거대한 사구...
니다.
아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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