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도 가끔은 섬의 그림자를 들여다본다
한창훈
차례
1. 나그네는 다시 섬으로 들어간다
여객선
최초의 항해
그 시절의 배
폭풍과 태풍
섬, 섬들
2. 가난한 어머니의 젖, 섬
꿈
옛날 사람들
나룻배
잠을 깨우는 아련한 소리 통통통
그물
섬의 먹을거리-항각구국
귀보시탕과 감국
장어탕
생선회-보리멸
삼치회
모자반에 대하여
군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삼부도
구죽
성게
비말(말전복)
거북손
백도
저녁
3. 섬의 에로티시즘
잠녀들
어떤 여름
육지에서 오신 손님, 1-작부들
육지에서 오신 손님, 2-남과 여
4. 서도기행
뒷산으로
잊지못할 냄새 몇 개
토끼와 낙하
거듭되는 고난
울고 간다 울릉도야 앓고 간다 아랫녘아
밤바다의 불야성 축제-멸치배
산 위에 홀로서서
거문도 동백꽃
해수욕장과 이내창
거문도 사건
5. 동도기행
바다건너 마을로
우리집
캐리
행란네
호야
작은아버지
껌
달걀
총
학교
귀신
전축
길
나무가 있는 곳
마무리하면서
1. 나그네는 다시 섬으로 들어간다
여객선
이른 아침 기운은 몹시 쌀쌀하고
바람도 사납다 첫 배 손님을 기다려 개지하려고
과일 좌판 아주머니들이 붙여놓은 드럼통 속의 장작불도 바람
따라 함부로 제 몸
을 길게 뽑아뎄다. 모래가 바랍에 날린다. 나는 목도리를 이마부터 두른 석 달 열
흘 말라비틀어진 모과보다 더 꼬장꼬장 말라 있는 할매에게서 배와 글, 그
리고 단감을 公다 외할머니 드리는 것이라고 하니
"성님 준다니께 나가 좋은 것 줘야제 "
하며 재빠르게 골라 넣었다 반죽좋기는 이런 할매
따라갈 사람이 없다. 서둘러 집어넣은 것 중 껍질이 물컹물컹한 배를 다시 꺼내 내가
고른 것과 바꾸는 것으로 우리 흥정은 끝났다. 할매는 식전 개시가 쏠쏠해 얼굴이 벙
글어지고 맞은편 좌판에 구부려 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아주머니는 더 추워한다
항구의 아침은 물색이 바뀌면서 온다. 어슴푸레한 기운이 사방에 퍼지면 밤새 도
시의 불빛에 반짝이던 검은 바다는 점차 제 모습을 드러냈다. 청동색이 넓게 퍼지
면서 언뜻 황금색도 비친다. 항구의 바다답게 기름띠가 흘러, 보는 각도에 따라 온
갖 잡색이 다 나타난다. 가장 부지런한 것은 역시 새다. 갈매기가 벌써부터 어지럽
게 난다.
나는 이곳 여수에서 중학교를 나왔다. 일학년 겨울방학 정기소집일에 학교에 간
적이 있다 몹시 차가웠던 날이었고 난방도 없는교실에 한스무 명 앉아 있자니 더
욱 추워 우리는 오돌돌 떨었다 그때 국어선생님이 들어왔다.
"이것들 봐라, 떨어?"
"추워요."
"추워 ?"
"예 ."
"다들 일어서서 이리 와 "
그분은 덜덜 떠는 우리를 창가로 데리고 가서 커튼을 젖혔다. 우리 학교는 여수역
과 오동도, 저 멀리 남해도와 그 사이 파란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다.
"저기 오동도 바다에 갈매기 보이지? 이새끼들아, 갈매기는 이 겨울에도 양말도
안 신고 바닷속에 들어가 앉었는디 양말 신고 우와기 돋바까지 껴입고도 추워?"
"으"
"한 번만 더 춥다고 하면 양말 벗겨서 바닷물에 처넣어버릴 거다. "
그분은 이른바 '한다면 하는' 양반이었기에 우리는 입을 딱 다물었다. 그때 학교
에 가서 무엇을 했을까,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갈매기는 여전히 양말도 없이 차가운 바다에 떠 있다가 파다다닥 몸을 날려 솟아
올랐다. 그 아름다운 떠오름 한순간에 바다에서 허공으로 몸을 옮기는 새.
선표를끊었다 순풍호.한번도타보지 못한 쾌속선이다 거문도까지 두시간삼
십 분 걸린다는 배는 여객선 터미널 유리창너머에서 잔잔하게 떠 있다. 이슬에 젖
어 출발하기도 전에 지친 모습이다.
내가 섬으로 들어가는 항해는 이번이 몇 번째쯤 될까...
최초의 항해
내가 맨 처음 여수에서 뱃길 1백 17킬로미터를 따라 여러 섬을 거쳐 거문도로
간 것은 삼십육 년 전 생후 팔개월 때였다.
때는 피냄새 가시지 않은 격동의 1963년. 전라남도하고도 해남군하고도
땅끝마을이 지척인 화산면에서 나는 태어났다. 그러나 세상에 쉬 나오지
못했다. 저 우주너머에서 시차원을 넘는 여행 끝에 비로소 한 여인의 뱃속에서
잠시 쉬고 있었던 나는 힘이 들기도 했거니와, 무슨 이유에서인지 세상에 나오기
싫었던 것이다. 전생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미련이거나 다시금 저 험난한
사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해서 그랬던 것 같은데, 하여 어머니는
지독한 난산의 고통을 겪으셔야 했다.
시골 벽지 의사는 고개를 저었고 아버지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멀고먼 서울까지 피를 구하러 가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어머니는 가
까스로 회복이 되었고 제 어미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나는 뭐 잘난 게
있다고 바득바득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의 공기를 받아 마셨다. 드디어 또 한 번의
삶이 시작되었는데 미루어보면 전생에 악업 지어놓은 게 너무 많아 그랬던 듯하다.
어쨌든 나왔기에 한세상 살아야 했고 살기 위해 나는 어미 젖을 빨며 지냈다. 그
리고 이사. 시골 초등학교 선생의 이사. 가난한 아내의 이사. 생후 팔 개월짜리의
이사. 이불과 농짝과 냄비와 수젓가락의 이사. 황토 먼지 날리는 이사. 금붕어 다섯
마리의 이사(이 금붕어는 몇 년 뒤 나와 기가 막힌 조우를 하게 된다) .
산 넘고 강 건너고 드디어 바다마저 건너 멀고먼 섬마을로. 이삿짐 보따리를 여객
선 객실 구석에 처박아두고 파도를 헤치며, 바람을 가르며 섬마을로. 죽을 작정이
나 해야 들어간다는 저 궁하고 외롭고 척박
한 곳으로. 내 눈앞에 처음으로 바다가 따
악, 하고 다가섰다.
바닿. 바? 바7. 신라의 탈해왕과 가락국
의 허 왕후가 건너온 곳 피안의 세계. 풍요
와 생명력의 세계. 두려움의 세계, 용이!,사
는 곳. 가랑이 넷을 본 처용의 고향. 고려 '왕
조의 시조인 용녀(龍女) 할머니가 태어난
곳. 보타락가산에서 난 해수관음(海來朧촐)의 도량 문무왕이 새로이 살 곳으로 정
한 곳. 환생의 장소. 불로초(不老草)가 나는 삼신산(三神山)이 있는 곳. 심청이가
죽었고 다시 태어난 곳. 지국총 지국총 노좇에 침 발라 어사와,의 마을. 포세이돈의
영토. 오시리스(나일강 삼각주)와 결흔한 달의 여신 이시스의 또 다른 이름. 우라노
스의 잘려진 남근이 거품을 일으켜 아프로디테를 탄생시킨 자리. 성적 욕망의 공
간. 버지니아 울프와 프로이트가 인간의 영흔(물고기)이 끌려 들어가는 흐름, 죽음,
시간으로 본 상징의 대상.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 살어리랏다 나마자기 구조개
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의 장소. 그 끝없는 푸른색. 그 한계 없는 넓이 .
아, 세상이란 것은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였다.
가난한 이삿짐을 풀어놓은 곳은 거문도 덕촌초등학교 관사였다. 그곳은 외할머니
와 외삼촌네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금붕어 다섯 마리는 운동장 끝 자그마한
연못 속으로 들어갔고 나는 철봉과 그네와 미끄럼틀이 바닷바람에 녹을 의우는 그
운동장에서 첫 발자국을 떼었다.
아직도 용케 남은, 명함만한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면 한 세 살 먹은 사내아이가 밑
창에 동그랗게 구멍난 내복 하나 입고 웃는 듯 우는 듯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고
추 내놓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흐뭇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관사는 판자를 밑에서부터 붙여 올라간 띠집 형태로 판자 끝이 약간의 각도를 두
고 바깥쪽으로 휘어져 물 흐름만큼은 훌릉한 집이었다. 토종 국화(어머니가 좋아하
는 꽃이다.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는 처녀 시절 광주의 신문사 기자들이 소문을 듣
고 미스코리아에 내보내자고 섬까지 찾아을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셨다 그러나 기
│
면 하늘 같은 바다가 온 천지로 퍼져 있었다 │
말이나 생각이나 이런 것을 배우고 익히기 전에 바다를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
그때 아예 바다를 통한 명상으로 내 인생의 진로를 잡았으면 이미 환골 탈태하여
못 해도 절간이나 하나 차지하고 에헴스럽게 지내고 있뜰 것이나 바다란 또 갈치나
고등어나 이런 비런 것들의 고향이기도 해 아마 그 맛 때문에 바다를 바라보는 버
릇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그 시절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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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니까 가능했을 것이다.
삼산호 하면 떠오른 것이 배 냄새이다.
그 배는 고물이 등그스레해서 마치 엉덩이만 잔뜩 튀어나온 과부 같았으며 그 엉덩
이 쪽 객실에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부모님도 꼭 그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유는 스
크루가 있는 곳이라 가장 파도를 덜 탄다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죽을 맛이었다.
일본식 다다미가 깔린 객실에는 한 팔 간격으로 깡통이 놓여 있었다. 요즘말로는
위생용 봉투 정도라 할 수 있으나 그것처럼 비위생적인 게 없었다 그것들은 배멀
미하는 사람들보다는 주로 노인과 어른들이 담뱃재를 떨거나 가래침을 뱉는 데 쓰
였다
미군부대 같은 데서 유출된 커다란 깡통이라 본시는 파인애플이나 초콜릿이나 뭐
이렇게 향내나고 폼나는 것을 담았던 것일 텐데 팔자 드센 탓에 어디 적당한 여염
집 꽃병이나 종자 단지나 하다못해 소금이나 고춧가루 단지로도 못 쓰여보고 여객
선 다다미 방에서 촌로 가래침받이로 낡아가는 중이었다. 아이들이란 유행에 민감
해 하나가 토하면 옆자리 애도 따라서 토하기 마련이어서 금방 깡통들이 찼고 아이
어미나 할미가 그것을 들고 나가 바다에 붓고 씻어오면 크어어험 크악 퉤, 할배들
이 침을 뱉었다.
좌우로 흔들리는 배. 끝이 없는 기겟소리. 드르르르 떠는 손바닥만한 창문. 어둠
침침한 실내. 여기저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한 담배연기. 가래 器는 목소리 , 아무
리 들어보아도 재미라곤 없는 이야기들. 토하는 아이. 칭얼대는 갓난이. 소주 마시
며 화투를 치는 사내어른들 지독한 냄새 냄새 냄새 .
그러면 나는 결국 견디질 못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뱃속이 울렁울렁하고 머리
가 혼미해지다 못해 뭐가 울컥거려서 부랴부랴 신발 꿰차고 밖으로 나오면 잠자기
달려드는 넓은 바다의 그 맑은 공기. 하얗게 퍼져나가는 파도 배를 따라 비행하는
물새. 파란 하늘과 깨끗한 섬 그건 천국과 지옥의 사이였다. 맑은 바닷바람을 쐬면
정신도 맑게 들고 울렁거리는 속도 진정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있는 나를 어
른들은 그냥 두지 않았다.
"아니, 뭐하러 나왔냐. 멀미한다. 얼룽 들어가라."
보는 어른들마다 그 냄새나는 깡통과 담배연기 사이로 들어가라고 내 어깨를 밀
었다. 미칠 지경이었다.
그 다음에 나온 배가 신라호였다. 신라호는 삼산호처럼 목선이었지만 새 배인 만
큼 조금 빨라져 거문도까지 일곱 시간이 걸렸다. 신라호와 관련하여 내가 고생한
이야기 한 대목
초등학교 오학년 겨울에 나는 그 배를 타고 거문도로 가게 되었다.
"너 어디 가니?"
"외갓집요."
"이 사람은 누구냐?"
"외삼촌요."
"그럼 수박삼촌은 어디 있냐?"
"외삼촌이 있으은 수박삼촌도 있을 거 아니냐."
"을냐? 그라은 복숭아삼촌은 어디 있냐.'
조타실에서 나는 짓궂은 선원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곤욕을 당했는
데 이유는 신라호 사무장이 바로 외삼촌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놀려놓고
껄껄거렸으나 그런 장면이란 흔한 거여서 나는 빨리 이 난감한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조타실 안 풍경만 기웃거렸다. 내가 가장 맘에 들어하는 게 거의 사람 크
기만한 나무 키(자동차로 말하면 핸들)였다. 어른들은 그것을 돌리며 뭐라고 지껄
이길 좋아했고 나도 선원들 없을 때 슬쩍 돌려보곤 했다.
그 항해 때 큰 풍랑을 만났더랬다
폭풍과 태풍
우리는 겨을 밤바람을 거슬러 나가다가 나로도를 거쳐 손죽도에서 멈췄다. 폭풍
주의보가발령되었기 때문이었다 오후에 출발했던 배라서 어느덧 해는 저물고 바
람이 몹시 사나워졌다. 무선통신이 뜨고 조타실에서 외삼촌과 선장이 한참 의논을
했다. 돌아가는 걸로 대충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문제는 여객 손님들이었다. 이렇
게 저렇게 되어 배가 최소한 나로도로 돌아가 피항을 해야 하겠다는 요지의 설득을
하러 객실로 내려간 삼촌이 되레 손님들에게 설득을 당해 올라왔다.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날이 사납다고 외삼촌의 손에 의해 나는 조타실
에 딸린 비좁은 사무장 방에 가둬진 존재였다) 오늘 꼭 거문도로 가야 되는 손님들
이 무조건 가자고 우, 들고일어났다는 거였다 선장은 고민 끝에 강행하기로 하고
직접 키를 잡았다.
컴컴한 방 안에 구겨지다시피 누운 나도 혹시 되돌아가면 어쩌나 가슴이 조마조
마했다. 파도가 그렇게 높이 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이 큰 배가 파도 좀 친다고 돌
아가다니. 그러나 손죽도를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배는 요동을 치기 시작했고
얼마 안 있어 그냥 강행하기를 희망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뼈저리게 느
끼게 되었다.
배는 곤두박질을 치며 냄비 속의 콩처럼 제멋대로 움직였다. 나는 한쪽으로 인정
사정 없이 쏠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꼭 가야 한다고 덤벼든 손님들이 누군지
꼭 저주를 받을 거라고 이를 갈아야 했다(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은 벌써 잊어
버린 튀였다) .
배는 좌우로 급하게 흔들리고 그럴 때마다 파도가 조타실 있는 이층까지 쳐 올라
오는 소리가 들렸다. 파도와 엔진 소리 무전기 소리가 뒤섞였다. 견디다 못해 문을
열고 나왔파 죽을 땐 죽더라도 컹참한 방 안에 혼자누워 있는 것은 도저히 못 견
딜 노긋이었다. 귀신은 늘 등뒤에 나타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공포란 눈으로 확인
하지 業할 때 너 커지고 깊어지기 마련이다.
아닌게 아니라 파도가 손을 뻗어 유리창을 때렸고 닫아건 문 통 사이로도 새어 들
어와 조타실 바픽은 흥건했다. 주변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웠고 배의 될빛을 받은
파도는 마치 살아 있는 집승처럼 이겨폈다. 미쳐 날뛰는 거대한 괴물의 이빨이나
혀나독침 같았다. 엔진 소리 때문에 배파 어니인가로판다는 것만 알지, 이건 도무
지 어느 쪽으로 어떻게 가고 있는 긴지 =1'분을 하지 못할 지 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맛보기 정도였다. 초도를 지나 거문도를 항끓자 바다는 말 그대로
아예 미쳐서 날뛰었다. 파도는 조타실을 넘어 반대쪽으로 떨어졌다. 그곳은 폭풍우
없는 날에도 큰 파도가 흔한 곳치다 바야흐로 태평양이 시작되는 곳인데, 가뜩이
나 폭풍주의보까지 내렸으니 할말 다한 셈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지
옥이란 게 있으면 불교가 뒤섞인 옛적 할머니 이야기나 크리스마스 이브 때 파고
다 단팥빵 얻어먹으러 찾아갔던 제일교회 목사 말처럼 죽어도 죽지 못하고 살아도
살지 못하는 아수라 야차의 지옥이 있다면,그것은 내 눈앞에 있는 폭풍이 영락없
이 그거였다.
"뭐 하러 나왔냐, 얼른 안 들어가냐!"
삼촌의 일갈에 구역질 두 번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을 수밖에 없었다. 밤은 계속
되었고 나는 좁은 방 안에서 좌우로 ◎굴었다. 흔들림이 얼다나 강했던지 몸뚱이에
서 영혼이 빠져나가려고 딜트는 듯했다.
지옥이었고 그렇다면 기토라도 해야 했지만 그러나 기도라는 것도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이들이나 하는 겉로 알고 있었던 나는 이게 꿈이기를 마라며 두려움에 音끙
論기만 했다 앓으띤서 순간순간 옛날로 돌아가곤 했던 걸로 보아 아마 정신이 나
간 상태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섬으로 태풍이 몰려왔다. 한여름과 초가을이 만나는 시절이
되면 해마다 거르지 않고 태풍이 몰려왔지만 그 해의 기억이 유난히 남아 있는 이
유는바로 '해일' 때문이다.
거문도 중에서 동쪽섬 죽촌리 산중턱에 우리 집이 있었다(덕촌리 관사에서 살다
가 이사간 곳이다) 바다가 끝나는 부분에 자갈밭이 있고, 자갈밭이 끝나는 부분에서
마을이 시작되어 넓게 퍼진 사람들의 집이 점차 모아지다가 산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마감되었는데, 우리가 살던 학교 관사는 마을의 거의 꼭대기에 있었다.
마당에서 보면 누구네 누구네 집의 뒤통수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몇 집 빼고는 모
두 판잣집이었다 당연히 우리 집도 그랬기에 붉은 색 양철을 군데군데 머리에 인
판잣집은 바람에 몹시도 시끄러웠다. 집은 매우 부실했고 부실함이 한눈에 드러날
정도로 바람이 매서웠다.
판자 지붕이 바람을 버터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어 보는 사람이 다 애가 탈 정도
였다. 빗방울이 후려갈기고 산의 나무나 마당의 국화는 옆으로 기울어지다가 빠지
직 소리를 내며 숫제 누워버렸다. 바다는 푸른색이 오간 데 없이 온통 하얗게 부서
지고 뒤집어졌다.
태풍에 집이 흔들리다 못해 뽑혀나갈 지경에 이르자 여기저기를 보수하던 아버지
는 마침내 피난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당장 필요한보따리 몇 개를 싸서 들고 우
리 식구는 생존을 위한 장도의 길로 나섰다. 우리는 비에 젖은 피난민이 되어 고개
잔뜩 숙이고 골목길을 따라 내려와 축항(방파제) 안쪽 바닷가와 이마를 맞대고 있
는 하네(할아버지)네 집으로 갔다.
그곳은 내 외할머니 남동생네로 시멘트로 지은 튼튼한 곳이었으며 내 이모뻘이자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 집이기도 했다. 안방에 몰려 앉아 피해걱정들로 두런두런
말들을 나누는데 나는 아무래도 방이 답답해 절대 나가지 말라는 엄명을 어기고 슬
그머니 밖으로 나와 벽에 달라붙어 서서 바다 구경을 했다.
바다에서 올 것이라고는 새하얀 파도밖에 없었다 집채만한 그것이 축항을 타고
올라 미친병 도진 것처럼 포효하며 날뛰고 있고 마을에서는 땅에 붙어 있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하늘로 치솟았다. 채 걷어들이지 못한 미역줄기며 옷가지며 판자때기
따위가 회오리를 타고 올랐다.
노젓는 뎀마(돛이 없는 거룻배)들은 이미 감풀로 끌어올려 놓았고 그렇지 못한
어선들은 배에 있는 밧줄이란줄은 모두사용해 이렇게 묶어놓고 저렇게 얽어놓았
으나 파도를 못 이겨 줄은 순간순간 팽팽하게 뻗대졌고 그럴 때마다 배는 위아래로
솟구치다 말고 몸뚱이를 파르르 떨어댔다. 마치 악마의 저주를 받아 몸 안에서 긴
창자들이 뽑아져 나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파도가 밀려오는 거문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나는 그 자리에서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어선 한 척이 면소재지가 있는 거문리에서 내가 살고 있는 동도로 오고 있었는데
그 옆구리는 태평앙을 항해 툭 터져 있는 곳이라 어마어마한 파도가 매섭게 몰려오
고 있었다 어선은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순간 푹 꺼져 내 눈에서 사라졌다.
아아, 혼자 그것을 본 것이다. 배가 저 파도 속에서 그냥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나는귀신에 홀린 아이처럼 멍하니 서 있을수밖에 없었다. 또사람이 죽었구나.지
금 저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선원들은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지금 바닷
속에서 숨도 못 쉬고 막 쏠려 다니며 괴로을 텐데, 싶어 내 숨이 딱 막혔다.
그도 그럴 것이 여름에 물에서 놀다가 큰 파도에 쓸리면 힘 한번 못 써보고 물속
에서 ◎굴림을 당해 바닥에 얼굴이 깎이고 사방 천지 구분도 못하는, 꼭 죽을 것 같
은 경험을 여러 번 해봤기 때문이었다
지금쯤 죽었을까. 나는 어린 나이에도 차라리 그 선원들이 쉬 죽기를 바랐다. 그
러면서 이따 저녁쯤이면 저 사람들의 가족들은 또 얼마나 슬프게 울까, 싶어 눈앞
이 캄캄해졌다.
식구들은 아이고 데고 울고, 선원들은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속에서 해류에
떠밀려 다닐 것이다 어른들 말대로 하자면 갈치나 복쟁이 (복어) 같은 게 뜯어먹고
해삼이나 고동 따위가 빨아먹어 종내는 허연 뼈다귀만 나◎굴 거였다(그 어패류를
사람들이 다시 잡아먹으니, 그것을 일러 고깃덩이(肉)의 순환이라고 한다면, 가히
틀린 말이 아닌 듯하다) .
그런데 그러고 있자니 배가 다시 파도 위로 불쑥 솟아오른 게 아닌가. 이번에는
아, 저들이 아직 살아 있구나, 싶어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것도 잠시 배는 다
시 바닷속으로 처박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선 조타실 위에 세워둔 부표용 대
나무까지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가라앉은 것이다.
그러다 다시 어선은 솟아올랐다. 그러니까 그 배는 파도를 타고 있었고 파도가 얼
마나 높고 깊었던지 바닥으로 처박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씩 가까워졌
고 나중에는 그 배를 옆에서 볼 수 있었다. 치솟았던 몸뚱이가 다시 곤두박질을 치
면 뱃부리가 거의 파도 속으로 파고 들어갈 정도였고 처박힌 끝에 자지러지게 떨며
다시 치솟아 오르면 감판에서 허연 바닷물이 좌우로 뿜어져 내렸다.
배는 우리 마을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옆마을 유촌리 쪽으로 멀어져 갔
다. 나중에 들으니 그 배 선장과 선원이 죽을 각오를 하고 바다를 건너왔다고 했다.
일부러 소주를 한 사발씩 마시고.
불안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채로 변소 갔다오는 척 방으로 들어가 슬그머니 앉았
다. 이번에는 라디오를 듣고 있던 아버지 얼굴이 무거워졌다. 기상예보에 해일이
일어나 그 파도가 거문도 쪽으로 온다고 했단다. 해일이 뭐냐고 내가 삼촌들에게
묻자 지진이나 태풍 때문에 생겨난 어마어마한 파도인데, 파도라고 말할 수 없을
정토로 어마어마하게 크고 세고 높아서 이 섬을 단번에 덮어버리는 그런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다시 떨기 시작했다. 내가 부은 세숫물에 빠져 쉽쓸림을 당하는 개미들이 순
간 떠오른 거였다. 섬보다 더 큰 파도. 세상에 그런 게 있었다니. 정말이지 어쩌자
고 그런 게 다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 친구들 마을사람들 집들 배들이 모두 개미처럼
바닷속으로 빠져 뒤엉켜 흩어지떠 없어져 버린다는 말인가. 그렇지, 그 말이겠지.
우리가 살았던 섬도 없어져 버린다는 말인가 딱딱한 돌바윈데? 돌로 되었으니까
섬은 사라지지 않겠지. 하지만 섬만 남으면 뭐하나, 사람들이 모두 바다로 쓸려가
버리면‥‥‥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또 살아? 집 짓고 밭 만들고 학교 짓고
고기 잡으며 살아? 살다가 어느 날 또 해일이라는 것이 와서 쓸어가면, 또 죽고. 또
다시 와서 살고. 그럼 무엇 때문에 산단 말인가.
혼자서 도(道)의 끝자락을 붙잡고 ◎구는 수도승처럼 고민에 빠졌고 고민 때문에
겁에 질렸다. 꿈꾸다가 가위눌리면 내 몸은 아주 작아지고 반대로 주변의 작은 게 아
주 커지곤 하는데, 예를 들어 밥알 하나가 산처럼 커져 나를 압박해 오곤 하는데, 그
때 느꼈던 무서움이 그대로 살아났다. 말짱 깨어 있으면서도 가위에 눌리고 있었다.
나는 신라호 조타실 방에 잡혀 누워 있으면서 똑같은 기분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아니 더했다. 그때는 그래도 육지에 발을 붙이고 있었다. 허나 지금은 뭔가 폭풍
속에 흘로 떠 있는 것 아닌가.
나는 나가지도 못하고 어둠 속에서 좌우로 구르기만 했다. 배가 옆 파도를 탄 덕
에 왼쪽으로 구르면(그래봤자 반 바퀴이지만) 몸 안의 피와 배와 살이 모두 몸 바깥
으로 빠져나가려는 듯했고 곧 이어 반대쪽으로 급하게 쏠렸다.
파도는 거듭 조타실 까지 파고들어 물 부딪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고
그 소리와 기겟소리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급기야 밖으로 나가볼 엄두도 내
지 못했다. 문을 열고 나가면 조타실에 있던 삼
촌이랑 선원들이 모두 사라진 다음이라는 것을 확인할 것 같아
이제는 그게 더 무서워서 문을 열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파도에 쉽쓸려 사라져
버리고 칠흑 같은 밤바다 폭풍우 속으로 여객선만 홀로 가는데 어린 것 하나 그 속
에 누워 있다고 상상해 보라
물뱀 창자 속 같은 시간이 지났다. 얼이 빠져 있다가 무슨 소리가 들려 정신을 차
려보니 배는 어느새 수평을 되찾았고 기계의 떨림도 부드러워져 있었다. 한 삼천
년 굳어 있다가 우주를 한 바퀴 돌아보고 온 영혼을 맞아들인 미라처
럼 멍청하게 나가보니 벌써 부두에 접안을 준비하고 있는 게
보였다. 겹에 질려, 섬으로 들어가면서 울렸을 뱃고동
소리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림)
나중에 순풍호보다 휠씬 큰 이층짜리 부양선인 데모크라시호가 나와 7객=a
페리호는 여객보다는 짐을 주로 싣는 화물선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버티며 부두에
내리자 객실에서 사람들이 나오는데 하나같이 된통 당한 얼굴들이었다 장년 남자
들이야 바다와 배에 익숙한 이들이라 덜한 편이지만 여자들과 애들, 그리고 육지에
서 온사람들은 아예 초주검이 된 모습이었다. 산발한 머리에 아직도 토하느라 걸
어가지를 못하는 형국이었다.
마중 나온 사람들이 모두 이런 날씨에 어떻게 왔냐고 깜짝 놀랐다. 나는 매섭고
차가운 겨을 밤바람에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어쨌든 고난의 끝은 결국 있기 마련
이고 또 그해 늦여름의 태풍처럼, 해일이 도중에 소멸해 버렸듯이, 우리가 예견하
는 최악의 상황은 쉬 오지 않는 법이기는 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이 온다고 가정해 보면, 요즘 들어 부쩍 잦은 기상이변이 끔찍
하다. 지진이나 태풍이 빈번하고 가뭄과 장마가 더욱 혹독하다. 더운 지방에 눈이
내려 사람들이 죽고 추운 지방은 반대가 되어간다 오존층 파괴로 인한 지구 온난
화, 그래서 나타나는 엘리뇨와 라니냐, 끝도 없이 쏟아지는 쓰레기로 인한 생태계
파괴 때문에 그렇다. 누가 벌여놓은 것인가. 다 사람들이 벌여놓은 것이다.
나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간혹 일부러 태풍을 한번 정면에서 구경해 보라고
권하곤 한다. 사람들이 자랑하는 철골철근 콘크리트의 견고함도, 아스팔트의 미끈
함도, 대형 승용차의 화려함도, 고속 여객선의 당당한 위풍도 그 앞에서는 한낱 부
러진 나무젓가락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태풍이 쓸고간 자리에는 뭍 생물들
의 영장(靈裏)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우리가자랑하는 능력의 비참함만 범람할
뿐이다.
요즘 들어 특히, 태풍이 단지 열대성 저기압이 발달한 기상현상의 한 부분으로 보
이지 않고 마치 인간의 삶을 관장하는 거대한 존재의 (창조를 앞질러버린 우리의 소
비와 낭비에 대한) 엄중한 경고처럼 보이는 것은 꼭 세기말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
다. 끝없이 덩치를 부풀리기만 하는 인간의 초만과 아집을 더 이상 참아줄 수 없다
는 신호로 보인다(공룡은 몸을 너무 부풀렸고 인간은 자만심을 너무 부풀려서 멸망
했노라고 먼 미래의 어떤 후손 생물들이 말한다면?) .
쓰레기 내다놓으면 미화원들이 가져가 주는 편리함과 빠르고 화려한 TV에 익숙
한 사람들은 지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연' 의 속성과 힘에 눈을 돌려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쉽게 얻고 쉽게 버리는, 소비의 속성부터 배운 젊은이들은
(하긴 그걸 누구에게 배웠겠는가. 다 어른들에게서 배웠지) 더욱 그러하다. 자연의
세계는 인내력이 강하지만 반대로 그 끝은, 최악의 상황은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다. 이것은 과거 멸망의 역사를 통해 충
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때 내 몸에서 뽑혀나간 영혼의 잔 조각들이 배어 있을 목선 신라호는 지금은 어
디에 있는지‥‥‥ 십중팔구 해체되어 태워졌거나 아니면 조각조각 부서져 어느 바
닷가자갈밭의 쓰레기에 한몫 거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나무의 일생인
가. 불평 한마디 없이 살다가 베어진 다음 긴 세월을(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보다 더 많은 기간을) 사람을 위해 존재하다가 해체 당하고 버림을 당해 표류
하던 끝에 이름 모를 해안가에서 바짝 말라 끝내 불쏘시개로 쓰이는 나무. 불평 한
마디 없는 나무의 일생. 아, 나무처럼 살아가는사람이 어디 있는가. 어쩌면 이 땅
의 착한 사람들의 전생은 나무가 아니었는지 .
신라호 다음에 나온 배가 덕일호라는 철선이었다. 신라호보다 약간 컸던 덕일호는
주등이에 멋지게 무의를 그려 넣은 덕에 여수항에서는 한동안 최고의 여객선 자리를
차지했다. 시간도 단축되어 여수에서 거문도까지 여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두어 달 한일3호라는 최고급 여객선이 다니다가 다른 곳
으로 옮겨가고 얼마 있지 않아 1천2백 마력의 중고속 엔진을 단 페리호가 나왔다
페리호는 이른바 현대적인 개념의 여객선으로 우선 덩치가 일반 여객선의 세 배
가량이나 되고 조타실이 삼층에 위치하여 어디서 봐도 한눈에 쏙 들어오는 멋진 배
였다. 비로소 여객선다운 여객선이 등장한 것이다. 그 사이 덕일호 선장을 하던 외
삼촌은 페리호 선장으로 배를 옮겼다. 신라호나 덕일호 모양의 여객선만 있는 여수
항에 페리호가 들어오면 그것만으로도 훌릉한 구경감이 되었다. 키 낮은 배들 사이
로 삼층 높이의 여객선은 학처럼 당당해 보였다. 여러 해 덕일호가 가지고 있던 권
위를 한층 뛰어넘어, 여객선의 우두머리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배가 커지는 것만이 첨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혀 뜻밖의 새로
운 여객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때 나온 배가 순풍호이다. 페리호가 현대적인
느낌이라면 순풍호는 신세대적인 개념의 배로 키 낮고 등글넓적한 공기 부양선이
었다
일반 배들이 마름모 꼴을 하고 바다 밑으로 아랫배가 잠겨서 다니는 반면 부양선
은 잠기는 부분이 별로 없는,그래서 물의 저항을 최소로 줄인 쾌속선이었다. 페리
호가 섬까지 네 시간 반, 순풍호는 두 시간 반 정도 걸렸으니 삼산호 시절에 비하면
참말로 그 발전의 양상이 눈으로 확인되는 셈이었다.
외삼촌이 선장으로 계셔서 그러기도 했지만 나는 쾌속선보다는 페리호를 좋아해
서 섬에 들어갈 때면 늘 그 배를 이용했다. 나중에 순풍호보다 훨씬 큰 이층짜리 부
양선인 데모크라시호가 나와 승객들을 독차지하고 페리호는 여객보다는 짐을 주로
싣는 화물선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버렸지만 그런 뒤에도 언제나 그랬다. (배 이름
에 대하여 한마디. 신형 쾌속선들이 나왔을 때 모두 폼나는 외국이름을 달고 있었
다. 순풍호의 원래 이름은 타코마였다. 듣기에 거제의 어떤 쾌속선은 이름이 페레
스트로이카였다. 헌데 촌노인네들에게 그 발음이 어디 쉬운가. 그래서 두등실호로
바뀌었다고 했다. 순풍호도 그 어름에 바뀌었다. 데모크라시는 발음이 쉬운지 그대
로이다) .
섬, 섬들
여수에서 출발하는 페리호 갑판 벤치에 떠억 앉으면 배는 평균 16노트 정도의 속
도로 바다를 가른다. 여러 해 내가 일했던 가막만을 정면으로 지난다 화양면 쪽에
서 길게 이어지는 산자락들이 이제 기진맥진해 바닷속으로 빨려들었다가 서운한
듯마지막 용심을 써서 토해 놓은,그래서 이름도 아름다운 백야도가 오른쪽으로
가까워지고 왼편으로는 여수에서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돌산도가 길게 누워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양식장 부이들이 밭고랑처럼 떠 있는 바다를 한 시간 가량 지나 화도와 낭도 사이
를 빠져나가면 해창만이 나온다 해창만을 통과하여 가장 먼저 닿는 곳이 고흥반도
와 연륙교로 연결되는 나로도이다. 나로도는 일찍부터 떡장사들이 유명했다. 아마
도 거문도 사람 치고 그곳에서 떡을 사먹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떡은 언
제나 비닐봉지에 오도카니 들어 있어서 돈을 주면 속전속결로 거래가 이뤄졌다.
콩고물이 묻은 인절미였기에 그런 음식이 귀했던
섬사람들은 그걸 재미이자 별미로 쳤다. 하여 나로
도만 들르고 나면 한동안 선실과 갑판에서 다들 떡
먹는 풍경이 벌어졌다. 배가 들어오기도 전에 함지
를 인 아주머니들이 산파시 (여객선 대는 뜬부두)로
몰려들었다가 접안을 하는 것과 동시에 배 옆으로
달려들면 내리려는 사람과 타려는 사람, 파는 사람
과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외할머니가 여
수 우리 집에 오시는 날은 예의 그 떡봉지가 가방에
서 나왔다.
그러나 점차 떡장수 아주머니들도 줄어들어 갔
다 1990년엔가 페리호를 타고 거문도로 가다 보니 아주머니 단 두 명이 장사를 하
고 있었다. 옛 생각으로 사고 보니 떡이 아니고 삶은 계란이었고 여러 번 재차 삶았
는지 딱딱하고 맛이 없었다.
이제는 그 명맥마저도 끊어져 나로도에 배를 대도 함지박 이고 찾아오는 아주머
니나 할머니는 하나도 없다 한다.
다음이 손죽열도, 그 다음이 초도군도, 그리고 맨 끝이 거문도이다.
나로도에서는 배가 항에 접안을 하지만 손죽도와 초도는 마을이 작아 그렇지를
못했다 그곳에서는 나룻배가 여객선 탈 사람들을 싣고 바다로 나왔다. 마을이 저민
치 보이는 바다에 여객선과 나룻배가 만나 옆구리를 대고 사람들과 이런저런 짐을 옮
겨싣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역사 속의 항해와 물물교환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삶이란 어차피 어떤 형태로든 생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서 외진 바다 멀리 어
떤 섬 앞바다에서 담배와 배추씨와 밀가루 포대와 소주 박스와 기저귀용 천과 양말
을 받아 싣고 있는 모습은 그 생생함에 마음이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거기에다 나
룻배로 내리는 사람 중에 애 업은 젊은 아낙네나 제대병이 보이면 쓸쓸찬 느낌이
생기기도 한다 그 사람들의 머나먼 과거와 미래가 보이는 듯도 하다.
닿고 뜨고 할 때마다 구경거리도 구경거리지만 조타실 구경도 재미났다. 외삼촌
은.견장에 황금색 선이 빛나는 흰 선장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썼기에 여간 멋있지
않았다. (즉 마도로스. 선글라스 낀 마도로스. 파이프 담배 문 마도로스. 아아, 쌍고
동 우는 항구에서 아침마다 뜨겁게 이별하는 그 마도로스. 빨간 손수건 흔드는 항
구의 아가씨야, 감작사랑에 영 이별이 우리의 운명이란다,물새 우는 가을이 되면
혹시 또 다른 항구에서나 만나보자, 저 파도에 내 사랑을 띄워 보내마, 하는 그 마
도로스.) 출항할 때도 신라호나 덕일호와는 달랐다.
외삼촌은 조타실 양쪽에 난 높은 의자에 앉아 말로만 지시했다(이 의자는 선장
전용이라 그 누구토 앉지 못한다) .
"을 스테이션 스탠-바이 "
출발 초 분 정도 전에 전 선원 제 위치에서 출항 준비하라는 지시다. 준이가 끝나
면 본격적인 출항이 시작된다
"메인 엔진 스탠-바이 "
"메인 엔진 스탠-바이 ."
그때부터 항해사가 말을 그대로 반복하며 기계 조작을 한다 그 옆에는 조타수가
키를 잡고 있다.
"을 라인 네코." (배의 모든 줄을 걷어내라)
"을 라인 네코."
"슬로 아스턴." (천천히 후진. 출발하는
배는 토두 후진부터 한다. )
"슬로 아스턴." (이때 선미 쪽에 있는
다른 배들에게 후진을 알리는 기적소리
세 번이 터져나온다)
"스톱 엔진." (후진하던 배가 정지 한다)
"스톱 엔진."
"슬로 엔진." (전진하기 시작한다)
"슬로 엔진."
"하프 엔진." (중속으로 전진)
"하프 엔진."
"풀 아이드 엔진." (고속 전진)
"풀 아이드 엔진."
그러니까 선장은 기계를 만지지 않는다.
그런 폼나는 선장님 바라고 좀 자발맞게 찾아모는 이들이 있다. 주로 여수에서 출
항하기 직전 고만고만한 중년 여인네들이 梁르르 산파시로 달려와 무작정 선장을
부른다.
'오빠 오빠 "
"선장님 , 오빠 선장님 ."
외삼촌은 출항 준비를 하다가 창으로 고개를 내민다.
"누구냐?"
"오빠, 나요 나."
"아이, 너 누구네 딸 아니냐? 뭐 한다고 오빠, 오빠 불러쌌냐."
여인네들이 유난히 살갑게 외삼촌을 부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잘 지 냈습니까?"
"그래 잘 지냈다. 왜 그러는데?"
"나 좀 잠깐 봅시다 "
"뭔 일 때문에 그러는데?"
"우리 엄니한테 이 편지하고 가방 좀 갖다주시요."
한고향사람이라 외삼촌에게는 그런 심부름형 청탁이 곧잘 들어왔다. 선장 백이
라 믿을 만한 데다 수화물 물표 끊는 비용을 줄이려는 속셈이다(물론 수화물표 끊
어야 될 정도로 큰 물건은 아니다) . 인정이 인정이라 삼촌은 일을 잘 맡아 해주지만
상대가 여인네들이라 한마디 아끼지 않는다.
"썩을것들이요, 소주 한 잔도 안 받아준 것들이 꼭 이럴 때만 오빠, 오빠. 한다니
께. 이리 가지고 올라와 봐."
그러떤 여인네는 조타실로 榮르르 올라와 적잖은 웃음을 뿌려대며 이를 것 이르
고 당부할 것 당부하고는 고맙다, 다음에 놀러 오시라, 언제 술 한 잔 받아드리겄
다. 말르 한 대접 차려주고는 내려간다. 그렇게 청탁 받은 편지며 서류며 , 자그마한
보따리 따위가 한아름이 되곤 했다.
이럴 때도 있다 말했듯이 손죽도나 초도에 도착하면 접안할 곳이 없어 마을 앞바
다에서 배와 만나 사람과 짐
을 내려준다. 그런데 간혹 마
을에서 나오는 배가 늦을 경
우가 있어 여객선이 도착해
트 기다리는데도 그제야 사공과
. 배 탈 사람들이 마을 앞으로
줄달음을 놓기도 했다
트 "하프 엔진.
? "하프 엔진."
"슬로 엔진.
'슬로 엔진.
"스톱 엔진
스톱 엔진." (배가 멈출 때도 단계적으로 밟아 내려가야 한다. )
배를 바다 한가운데 세워놓고 기다리던 외삼촌은 시동을 거는 나룻배를 지그시
빈◎다가 괄괄한 뱃사람 표시로 한 번씩 장난을 치곤 한다. 앰프를 켜고 마이크
를 플어 한마디한다.
"아이 새끼야(사공에게 하는 소리인데, 사공들이란 으레 삼촌의 친구거나 후배들
이기 십상이다),뭐하고 자빠져 있다가 인자사 난리냐. 얼릉 안 오은 그냥 가뿐다이
누가 뭐랄 사람이 있겠는가. 배에서는 선장이 왕이요 법인데. 그러다가 진짜로 가
는 척하기도 한다. 그러면 달려오는 나룻배는 늙은 기관을 최대로 돌려대며 쫓아오
는데 마치 죽음을 앞둔 할배가 마지막 힘을 쏟아됫는 듯 보인다.
거문도로 들어갈 때는 나로도, 손죽도, 소거문도, 초도에 차례대로 들를수록 배가
가벼워지고 사람도 드물어졌고 여수로 나을 때는 반대가 되었다. 그러니까 예전에
여객선을 한번 타면 하루종일을 섬과 섬 사이의 바다에 떠 있는 셍이었다. 들렀던
섬은 점차 멀어지고 그만큼 아스라이 멀어 보이는 섬이 조금씩 가까워지다가 마침
내 눈앞에 다가서고, 이윽고 마을과 밭과 배와 사람들이 보이고, 다시 조금씩 멀어
지는 게 종일 보는 풍광이었다.
파란 바다와 이런저런 섬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섬의 뒤쪽 벼랑 위까지
나 있는 밭. 소나무 숲. 망망대해에 흘로 떠 있는 어선. 그것들처럼 처연하
고 또렷하고 조용한 게 또 있을까. 그것은 그것을 바라
보고 있는 이로 하여금 아주 작아지고 수굿해지게 만든다.
그러나 갑판에 앉아 느린 속도로 그것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이제는 없어져 버렸
다. 얼마전 페리호는거문도에서 백도로 다니는 관광선으로제 품격을낮추어 별의
별 사연으로 나가거나 들어오는 이들과 서을 사는 아들네나 부산 사는 딸네로 가는
7◎이나 얼린 생선 짐, 또는 반대로 고향 사는 노인에게 보내는 겨울용 내의나 우황
청심환 등이 들어 있는 소포 대신에 노랫가락 흩날리며 사진 찍어대는 관광객들을 실
어 나르고 있다고 한다.
삼촌도 은퇴하여 지금은 거문도 출장소 소장으로 계신다. 이제는 데모크라시와
늙다리가된 순풍호, 이렇게 쾌속선 두 가지만다니니 이 배들은 빠르기는 하되 갑
판이 없어 나가지도 못하는 것이라 영 재미가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섭섭하다고 모두들 옛날로 돌아가자고 할 수 없는 노룻이다. 이른바 경
쟁사회의 와중에서 불안함 때문에 다들 급하게 사는데 그 사람들에게 예전처럼 하
자고 하면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일의 효율성을 위해 이동수
단의 고속화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충분히 이해된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시간과 돈을 가지
고 다시 재투자를 해서 더 급하게 가는, 그
악순환에 있다. 궁극적인 목표가
무언지 모호해진다. 도달점은 결국 행복 아닌가. 평과 아닌가.(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웃기 잘하는 나라 중에 방글라데시가 있다. 말
낚하고 사람들은 꾀죄죄하기 이를 데 없고 늘상 터지는 홍순와 전염
나는 秀이 그 나라이다. 참으로 머떻게 살까 싶은데 핼복인지도똔諦
7위가 바로 방글라데시라는 사실이 매우 인상적이다. 결국 행복이 머
를 생각하게 한다. )
덧붙여, 평화(平和)의 화(和)는 벼 화(希)에 입 구(fl)가 블은 글◎· 결국 사
람의 밉으로 밥이 똑같이 들어가야 불화건퍼토가 없다는 소리이다(우리나라 쏙담
에 풍년거지가 더 설다,쓴 게 있다) , 결국 인맥파 학맥, 지연 따위를 치용해서, 불법
련법으로 이득을 챙기는 이들끼 있는 이상 사람들의 조급증이 사라지지는 않을 -
이다(金한 강대국들히 침탈, 식민지, 군사독재의 역사좌 천민자본준의/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하다. 경제의 발전에는 -
짜연뜰 바라도는 시간'띠
나
강
을 잊골 하는데 도시가 나투
이
다.
느림은 많은 것을 준다. 아무렇게나 박혀 있는 바위도 뭔가 이유가 있는 듯하여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바위 틈새에서 자라는 이끼들의 오밀조밀한 살림을 발견차게
된다. 바람이 불 때 나무의 잎이 어떻게 움직이는피 보다보면, 가지 끌에다 잔물결
을 눔기고 있어 나무는 바다가 아너면서도 파돗소리를 탠다. 는 시인의 눈도 할 수
배우게 되고 다람쥐가 놓친 알밤도 줍고 이 땅에 사람 말고도 얼마나 많은 생명들
이 꿈틀대고 있는지도 느끼게 되고(그래서 외롭지 않고)물의 색짤이 보는 각토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도 알게 되고 건강에도 좋은 것이다.
이름하여 느럼의 미학. 현대가 빠를수륵 어떤 부분만름뜬 아주 느런 행보, 그게
있어야 가속도 때문에 종내는 우주로 튐겨 나가는 것을 방지할 수 畿지 않겠는가.
란다.
데섬
까꾹었온 것이다
수펀 년 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그대로이다. 누가 그 앞에·
서17!7- 년 살지만 저
도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변하지 않는 저 바다. 나는 아직 외국에 나가보지 못했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아,
싶어지는 게 있다. 각 나라마다사람들 생김새가 다르고 음식이나 말이 다르고 노
래 밥그릇, 집이나 옷차림도 다르고 하다못해 산을 보더라도 솟았다는 것만 닮았
지 크기나 분위기가 다르고 그곳에 사는 나무와 짐승들도 모두 다른데, 세상 어디
를 가나 똑같은 모습을 지닌 게 있으니 그게 바다였다. 세상 어느 곳의 바다를 보아
도 내 곁의 바다를 보는 것처럼 그 파란 빛이나 파도치는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처럼 한결 같은 게 또 있을까
가난한 어머니의 젖, 섬
꿈
예전에 한가지 꿈을오랫동안 꾼 적이 있다. 꿈속에서 거문도와는 다른 어떤 섬
7l하나등장을 하는데 그곳에서는사내 혼자서(어떤 때는 여러 채 집이 등장하기
도 한다) 쓸쓸하게 살고 있다. 그곳에 가기도 어렵거너와 한번 가면 돌아오기가 수
월치 않아 나는 꿈속에서 그곳에 가서 잠시 지낸 다음 돌아와야 하는가 말아야 하
는가를 곧잘 고민했다.
그 섬은 언제나 파도가 치고 막상 가보면 갈수록 더 멀어지기도 하는 섬이라 몹시
고독하고 외로운 곳으로, 그곳에서 사는 사내는 키가 호리호리하게 크고 참으로 담
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찾아가면 그다지 반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게 적
대감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제 일만 할 뿐이었고 나는 그런 사내 옆에
諦아서 몇 시간을, 또는 며칠을 덩달아 조용히 지내다가 다시 돌아갈 건가 말 건가
를 궁리하다가 깨곤 했다.
꿈속에서 그 섬에 가면 마음이 몹시 잔잔해지면서도 아스라한 슬픔이 저 깊은 어
느 곳에서 먹물 번지듯 스멀스멀 올라오곤 했다. 그게 바깥세계의 좌충우돌을 견디
다 못한 내 영흔이 스르르 도망을 친 곳인지 아니면 짐작할 수 없는 어떤 강렬한 유
혹의 변이인지, 또는 먼 미래의 예언인지는 잘 몰랐으나 業든 좋든 그 꿈은 내 탈색
된 청춘의 시간과 같이 존재했다.
툭하면 그 꿈을 꾸었고 아침마다 깨고 나면 그 스산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에 사로
잡혀 망연자실 앉아몸은 바깥에 있되 눈은 깊은 어둠의 저편을 바라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희망이 없던 청춘의 시절 나는 번번이 대폿집의 파리똥 앉은 형광등 아래 앉아 막
걸리에 취하며 친구나 후배들에게 그 꿈속의 섬 이야기를 했다. 반대로 치자면 꿈
속의 섬 이야기밖에 할 이야기가 없었다. 내 청춘은 피어보기도 전에 무거운 것에
눌려 시들고 있었다. 푸른 꿈을 익히기 전에 좌절이 몸에 배어버렸던 관계로 남들
다하는 짓도 못하고 그저 먼 시공간 너머로 사라지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던 나날들
이었다.
여러 도시를 떠돌았다. 대학생도 못 되고 그렇다고 튼튼한 고졸도 못 되었다. 사
랑하던 여자는 떠나버렸고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었기에 가출이 잦았다 한여름 무
더위 속의 노동에서 내 육신은 지쳐갔고 바람 부는 황량한 대지 위에 나 홀로 외로
웠던 시절이 그 꿈과 함께 살았던 때였다.
얼마 전 모 잡지에 산문을 한 편 쓴 적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저에게는 '호'라는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적당히 큰 키,마른 몸에 안경을 얼굴
에 붙이고 있는 이였지만 그게 큰 특징은 아니라서 여럿 사이에 세워두면 고만고만해
보이는, 여러 날 지내봐야 진가를 알 수 있는 그런 이였습니다 .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마을에는 큰 저수지가 하나 있습니다 한낮에는 승승, 낚싯대
.던지는 꾼들이 모이고(요즘 들어서는 조용히 물만 바라보고 있는 초짜들이 자주 보입
니다) 그들이 돌아가면 호수는 슬슬 물안개를 피어 올리곤 합니다. 해 진 다음 그곳에
가면 여수 오동도 방파제가 떠오릅니다. 파란 물이 한동안 멀어지다가 끝내 저 먼 어
둠 속으로 미끄러지는. 그 막막하고 광활한 느낌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벌써 십오륙 년 정도 되었는데 그때 호와 저는 툭하면 오동도 방파제에 무슨 관싱
사주궁합보는 이처럼 턱하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바다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러
니까 바다의 관상을 살피거나 아니면 물안개에 비춰지는 저의 사주쯤이나 골똘히 들
여다보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랬습니다 우리는 저 너른 바다처럼 장하게 뻗어볼
꿈도 꾸지 못하고 주눅들어 있었고 소주와 과자로 그것을 달래곤 했습니다 우리는
집안에서 천덕꾸러기들이었습니다. 하긴 흔해 빠진 대학도 못 들어가고 그렇다고 봐
줄 만하게 돈을 버느냐 하면 그것도 못 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멀고 길게 타지를 다녀와서(家出과 出家의 중간 정도 되는) 눈칫밥이나 얻어
먹으며 회망보다 절망을 먼저 배웠으며 세상을 앞당겨 살아버리는 몹쓸 버룻이 그때
생겼습니다. 나가서는 몸의 고생이, 들어와서는 눈치보느라 정신의 고통이 그야말로 자
심했지요. 집안의 썩은 이빨 같은 상황은 친구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만 그는 사는 방식
이 저와 달랐습니다. 제가 툭하면 다시 나갈 궁리만 하는 축이면 그는 꾸역꾸역 집 안에
서 버티고 앉아 있는 편이었습니다.
"뭐 하러 집 나가요? 나는 죽어도 안 나가요. 오늘도 우리 대빵(아버지) 출근하는디
돈 좀 달라니까 죽어도 안 줍디다. 그래서 졸졸 따라가서 돈 달라고 했지다. 서교동에
서 중앙동까지 따라가면서 좀 주시요, 좀 주시요. 한께 나중에는 기가 막힌지 웃습디
다. "
우리가 마시는 술은 그렇게 힘들게 얻어온 친구 돈으로 산 거였습니다. 암담한 나
날이었으며 그래도 그는 건대 축산과에 가서 좋은 축산인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습니
다만 불쌍하게도 저는 뭔가를 하기는 해야겠는데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 몰라서 괴로
웠습니다.
우리의 외로움은 극한점을 향해 치달렸습니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채여본 경험만
충분했던 우리는 아침마다 전화로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이라야 별다른 게 아니고 오
후 다섯시까지 오천 원씩 재주껏 구해서 구봉다방에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또 진드기 노룻을 해야 했고 저는 죄 없는 동생들을 볶았습니다(그때 형에게 돈
빌려주다 한시절 가난하게 살아버린 내 동생은 돈이란 저축해서는 안 되는 물건임을
저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은 사실 아주 단순했습니다. 착한 여자와 데이트 좀 해보는 거
였죠. 이제 막 의자 내리고 있는 포장마차 51번 나로도집에 가서 안주는 안면으로 깔
아뭉개고 막소주 한잔 걸친 다음 두당(頭當) 천오백 원씩 하는 디스코텍에 가서 흔들
며 만만한 것으로 한번 골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눈으로 수천 여자를 찍었다가
곧바로 멀리 떠나보냈으며 결국은 뭐 새로이 볼 게 있다고 마주보며 비틀고 있는 자
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극히도 한심했죠.
그러다 어디 가겠습니까? 다시 나로도집 들렀다가 구봉다방에서 우리와 친했던 미
스 박 언니와 커피 마시고 갤러그 한 판 하고 헤어졌죠.
생각나는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황준선 씨라고 여수의 이외수라는 별칭이 있었던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직업이 거지였습니다. 머리카락과 얼굴, 손, 손톱, 외투가 때
에 절어 간단명료하게 한 가지 색깔인 양반으로, 거지치고는 높은 기상이 있어서 그
랬는지 어쨌는지 이 양반의 구걸은 좀 색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붕어빵이나 담배를
얻어도 딱 하나씩만 잡고 나머지는 돌려주는,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직업의식이
바로 그것이 었습니다.
우리는 그 형님을 사랑하여 술을 자주 마셨습니다. 비가 오는 어느 날은 만화방 주
인에게서 3천 원을 빌려 네 홉짜리 소주 두 병과 새우깡을 사 이제 막 공사가 시작된
돌산 연륙교에서 밤을 한하고 또 마셨습니다. 잔은 비우기가 무섭게 빗물로 가득 차
고 내 가슴에는 알 수 없는 미래의 시간이 무섭게 다가오고 형님 입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노래와 기침이 끝없이 터져 나왔습니다(이 형님은 당시 여고 삼학년이던 내 여
동생에게 프로로즈를 하여 저를 조금 슬프게 하였으며 한 칠 년 더 그렇게 살다가 어
느 순간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족을 찾아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만 그게 아니라면 더
좋은 곳으로 갔겠지요.필경, 죽었겠지요)
실비 바르탕의 (홀리데이)를 듣고 호와 저는 영영 헤어졌습니다. 젊은 날들이 가고
있었던 거죠. 여러 해 뒤 저는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고 그는 축산과 엄청 동뜬 호남정
유에 입사를 했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전화해 보니 그만두었다는 겁니다. 어디로 갔는
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저는 또다시 여러 해 착실히 바람 부는 광활한 사막을 헤매다
녔고,그러다가어찌어찌 작가가 되어 마음속 또아리 틀었던 것들을 한 꺼풀씩 벗겨
보고 있는데 그는 회사도 그만두고 집도 이사가 버린 그는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 물안개를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하, 하, 어색하게 웃음
부터 날리는 말투.혹시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사투리 세상에, '호'였습니다. 십수
년 만이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보고 출판사에 전화번호를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곧장
만나기로 하고 끊었습니다. 왜 이리 시간이 더딜까요. 저 거듭 태어나고 죽어가는 물
안개의 마지막 거처는 어디일까요.
그걸 쓰고 며칠 있다가 호를 만났다. 호는 뜻밖에도 나와 지척인 대전에서 살고 있
었다. 우리는 십여 년 만에 유성 톨게이트에서, 오는 뎃줄기도 아랑곳없이, 껴안았고
술집으로 자리를 옳겼다. 한두 잔 들어가면서 들떴던 기분이 점차 가라앉았고 그 동
안의 이력과 고행을 주고받은 뒤 이제 서로 긴 숨을 내쉴 때쯤 불쑥 그가 물었다.
'◎런데 그 섬은 찾았소?"
"뭔 섬 말이오?"
"노상 말하던 섬 안 있소."
섬? 섬? 아!
순간 뜨거운 어떤 기운이 내 뒤통수를 崙고 올라왔다. 맞다, 그런 게 있었지 . 나는
한동안잊고 있었던 것이다. 유랑의 세월에 내가그를 대폿집에 앉혀두고주절댔던
그몽환의 장소. 정신적 도피의 가련한 곳. 대가리 굵어지면서 잊고 있었는데 그는
그때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거였다
'◎걸 기억하고 있소?"
"왜 잊겠소. 날마다 그곳을 찾아갈 거라고 하지 않았소?"
"나는 그 동안 당신 생각이 날 때마다 말하던 그 섬이 같이 생각났었소. 아마 그
사람은 그 섬을 찾았을 거라고."
"글쎄 ."
섬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높은 봉우리, 깎아지른 절벽, 섬 가장자리 바닷
가에 집 한 채, 왜 그 꿈을 잊었을까. 아니 왜 그 꿈을 꾸지 않았을까? 내가 잊은 걸
까, 아니면 그 어떤 것이 나에게서 그 꿈을 빼앗아갔을까. 그것도 아니면 아직 정신
이 자리잡지 않았던 시절에 만들어진 가벼운 공상이어서 시간이 가면서 저절로 잠
재의식의 주변으로 흩어져 가버린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아쉬운 게 많다. 아마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스물
일곱부터 그 꿈꾸기가 멈춰졌지 않았나 싶은데 그렇다면 소설 쓰기가 그것을 지우는
행위인가, 아니면 급기야 바깥으로 표출되어 소설 쓰는 행위로 굳어졌다는 것일까.
잔뜩 취해 그와 헤어진 다음 나는 어디 찾아들기도 귀찮고 하여 그대로 차 속에
몸을 눕혔으나 그 시절과 섬에 관해 생각하느라 잠들지 못했다. 꿈속에 등장하던
섬. 내 잠재의식에서 만들어진 곳이라 실제로 있지는 않기에 그가 묻는 것은 흔시
근 섬이라 할 만한 곳을, 또는 할 만한 것을 찾았느냐는 질문이지는 않았을까. 그렇
다면 내가 찾았을까? 그'섬을
옛날 사람들
점이 선이 되었다가 면으로 변하고 이윽고 삼차원 입체가 되는 곳. 섬 . 배는 두 시
간 반 만에 거문도에 나를 내려놓았다.
거문도(巨文島). 중국사람들이 거마도(巨磨導)라고 부르다가주민들의 해박함
에 놀라 文자를 넣어서 불렀다는 곳. 삼도(三島)나 왜도(侵島)로 불리던 곳. Port
Hami◎n이라는 영국 이름이 있는 곳. 전남 여천군 삼산떤 소재지 . 동경 12◎ 19',
북위 3◎ 1'에 위치한 곳. 서도(西島) 동도(東島) 고도(古島: 거문리 면 사무소가
있음)세 곳으로 이루어진 총면적 약 3백34만평의 섬. 여섯 개의 마을이 있으며 섬
과섬의 가운데에 1백여만 평 넓이의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해서 최고의 피난항인
곳. 내가 크고 자라 떠나왔던 곳
참으로 시간을 실감하게 된다. 아무래도 현대라는 것은, 이른바 발전된다는 것은,
속도의 개념이다. 여壽 시간씩 걸리던 삼산호 시절부터 쾌속선까지 내 젊음의 시간
동안에 그것은 그렇게 변했다.
노랫말대로 바람에 돛을 맡겨 오갔던 이들은 얼마나 많이 걸렸던가. 옛 기록에 제
주도에서 육지까지 순풍을 받으면 사흘이 걸렸다고 하니 거문도에서 육지까지는 못
해도꼬박 하루 반이나 이틀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순탄한 항해였을 때 그랬다.
영조 47년 장한철(張漢喆: 호는 녹담거사)이라는 사람이 쓴 『표해록(漂海緣)7을
보면 이 바닷길 가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내용을 대략 간추려보
면 이렇다.
그는 영조 46년, 1770년 12월 25일 일행 28명과 함께 제주도에서 육지로 과거길
에 올랐으나 뭍을 70리 두고 서북풍에 밀려 망망대해를 헤매며 삼 일을 표류한 끝
에 유구열도(瑞球列島. 현 오키나와)의 호산도(虎山島)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지나
가던 배를 보고 불을 지르고 흰 옷을 장대에 매달아 구원을 요청했는데 다가온 이
들은 다름 아닌 왜구. 왜구들은 칼을 빼어 휘두르고 큰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일
행의 짐과 옷을 모두 빼앗은 다음 발가벗겨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두고 가버렸다.
간신히 나무에서 풀려난 녹담거사는 '아아, 왜노(侵奴)는 원수다. 마땅히 하늘 아
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다‥‥‥ 대저 하늘이 내린 생물들은 모두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다. 비록 태호(泰虎)가 모질다 하나 그 가죽에서 자면 가히 우리 몸을 온전히
해주고 영사(永蛇)가 독(毒)이 있다 하나 먹이로 쓰이면 가히 우리 병을 낫게 할 수
가있다. 그런데 오직 저 왜놈이란종자는사람에게 터럭 만한 이로움도 주지 못하
고 그 해독으로 말하면 태호, 영사보다도 더 심하다. 하늘이 어찌 이런 종자를 만를
어냈을까. 직접 조물주를 허물하려 했으나 그렇게 할 수는 없구나.' 하고 탄식한다.
왜구, 왜구 해서 우리는 역사책에서 문자로 배웠으나 당하는 사람은 이리도 분하
고비참했던 것이다. 그들은며칠 뒤 안남(安甫: 베트남)상선의 구조를 받았다 청
나라에 밀려 안남으로 들어간 명나라 상인의 사층짜리 배였다. 제주도 쪽으로 오던
중 시비가 일어나 그들이 타고 왔던 배와 함께 다시 망망대해에 버려졌고 혹독한
날씨에 표류를 계속하게 된다.
다음날 남풍이 불어 흑산도 쪽으로 떠내려갔다. 비와 눈이 번갈아 내리고 도중에
바람이 제멋대로 바뀌어 갈피를 못 잡았다. 큰 물결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치고
회오리바람은 바다를 체질하듯이 들까불어 댔다. 다들 울어젖혔다. 사공이 먼저 포
기하고 속장(몸을 얽어매고 얼굴을 덮어 싸는 것으로 이를테면 죽은 뒤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스스로 염을 하는 것이다)을 하니 남은 사람의 마음은 어찌되겠는가.
녹담거사가 정신을 차리고 일행에게 사공이 놓은 키를 붙잡으라고 하니 두 사람
인 망금엉금 기어가 제멋대로 노는 키를 잡았으나 곧바로 바람에 쉽쓸려 바다에 빠
져죽고 만다. 배가 깨지고 물이 새어들어 왔다. 정신나간 상태에서 고인 물을 퍼내
다 보니 배가 암초를 향하여 돌진하고 있다 이제야말로 죽는다고 다시 울음을 터
뜨리며 아이고 데고 한다 충돌 직전 요행히 바람이 바뀌어 암초와 멀어졌다. 배는
다시 강풍에 함부로 떠밀려 급기야 청산도 절벽에 부딪혔다. 부딪힐 때 죽기도 하
고 절벽을 타고 올라가다 떨어져 죽기도 하고 해서 모두 21명이 죽고 겨우 8명이
살아남았다는 내용이다.
그보다 앞선 시대에 최보(崔潛)라는 사람은 제주에서 나주로 나오다가 풍랑을 만
나 표류하다 중국 영파부(寧波府)에 도착하여 베이징을 거쳐 의주,서울로 6개월
만에 돌아와 『표해록』을 써서 성종에게 바치기도 했다
바다를 거슬러 뭍으로 한번 가기가 이렇듯 목숨을 거는 항해였으니 섬사람들의
생사 운명은 바로 변화무쌍한 날씨에 달린 것이었다. 나도 많이도 보고 듣고 자랐
다. 섬에서의 죽음은 원초적이다. 농촌이나 도시처럼 시름시름 앎다가 죽는 이들도
물론 많지만 어제까지, 조금 전까지 팔팔하던 사람이 시체가 되어 물을 뚝뚝 흘리
고 있는 장면이 흔했다. 어부들이 그랬고 물질 나간 여인네들이 그랬고 내 또래 애
들이 그랬다. 그러나 시체라도 건질 수 있는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다. 먼 바다로
나가 풍랑에 죽은 이들은 바다가 그대로 무덤이 되곤 했다. 무덤이라면 거대한 무
덤이겠다. 살아 움직이는 무덤이겠다.
나룻배
배는 쉽게 섬에 도착했다. 섬에 막 도착할 때의 기분. 산을 몹시 흠모하는 이들이
여러 날을 벼르다가 비로소 인간세상의 여러 가지 복잡하게 刻히고 설킨 것들을 잠
시 미뤄두고, 숨겨놓고, 줄 서서 차 타고, 밥 먹고 걷고 하여 마침내 깊은 산 입구에
섰을 때의 기분과 무어 다르겠는가 눈에 익음과 동시에 낮선 느낌.
바람이 불어 공기는 맑고 주변에는 오가는 어선들과 바위에 부딪히는 잔 파도 소
리만 그득하다. 그 소리처럼 듣기 좋은 것도 드물다. 자연의 소리 중에서 엔돌핀을
가장 많이 만들어주는 게 잔 파도의 찰싹거리는 소리라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맞
고도 남는 소리다.
선착장에서 외삼촌을 뵈었다. 언제나 유쾌한 삼촌은 나이가 드셔도 활달하신 모
습 그대로이다. 거문리가 있는 고도와 외갓집이 있는 맞은편 서도의 덕촌리 사이에
는 이미 다리가완공이 되어 걸어갈수도 있지만 옛날 재미로 나룻배에 올랐다 지
금 나룻배는 기계배인데 예전에는 노를 저어 다녔다.
옛날 나룻배는 사람을 많이 태을 욕심으로 옆으로 잔뜩 퍼져 있어 둔하고 무거웠
기에 배 안의 사내들은 다 달려들어 노를 저어야 했다. 사내가 부족하면 아낙들도
달라붙고 젊은 아낙들도 수가 부족하면 아이들까지 한몫 거들었다 나도 종종 달라
붙어 힘을 보탰다.
노라는 게 밀고 당기고 해서 지그재그로 젓는 것으로 바닷물에 잠겨 있는 노의 날
이 밀려갔다가 반대쪽으로 되치는 순간 수면에는 자그마한 소용돌이가 만들어졌
다. 나는 양쪽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소용돌이와 삐그덕 삐그덕 하는 소리가 좋았
다 사공이 일이 있어 어디로갔거나한잔두잔 걸친 술이 겨워 잠이 들었거나해서
내 또래들끼리만 노를 저어 갔다오기도 했었다.
어린 우리들끼리 젓다보면 노씹에서 노좇이 빠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러면 어
른들은 손으로 퉁겨서 다시 맞추곤 했는데 우리는 힘이 약하기도 했거니와 나룻배
노가 워낙 컸기에 누구 하나가 배 뒤창에 발 벌리고 서서 빠진 노를 들어 들어가고
나온 곳을 맞추었고 그럴 때마다 낄낄대곤 했다. 나도 적잖이 그 짓을 했다
그당시 나룻배는늘사람이 가득했고탔다하면 가만히 있는 법이 없었다. 사내
들은 노를 젓고 아낙들은 앉은 와중에 말들이 풍성했다. 마을 대소사에 걸린 이야
기가 다 그곳에서 나왔다. 운명공동체라 하더라도 남자 노는 곳 여자 노는 곳이 다
르고 재미있어 하는 부분도 틀려 서로 공론하고 의논하는 것이 제각각이기 마련인
데 나룻배만큼은 남자 여자 가리지 않는 곳이라 아주 다양한 말들이 나왔고 그만큼
값론을박도 흔했다. 그러나 이제는 말또◎謙도 다 어디로 가버리고 나룻배도 사라
진 지 옛날이다. 기계로 움직이는 나룻배에는 나와 짐 든 아주머니 한 분만 歌다.
· 덕촌리에 도착하니 이모가마중을나오셨다 부산에 사는 이모는 할머니와 삼촌
도 뵐 겸 갯것도 할 겸해서 여러 날 먼저 들어온 것이다. 할머니도 뵈었다. 두 분 다
작년 사촌동생 결혼식 때 뵙고 처음이다. 한동안 앓으셨던 이모는 건강을 되찾은
모습이다. 할머니는 여든이 넘으셨지만 평생의 바지런함이 지금도 꿋꿋하게 남아
정정하시다. 아니나다를까, 얼른 밥 먹고 바다로 나가자 하신다. 외삼촌이 오토바
이로 섬을 건너오셨다.
잠을 깨우는 아련한 소리, 통통통
외갓집에 들어서서 인사할 것 인사하고 선물 꺼낼 것 꺼내고 나서 주변을 한번 둘
러보았다. 부삽과 호박 넝쿨. 장독대. 양동이. 벽에 세워둔 고무신. 돌 절구통. 대여
섯 개의 확돌. 변소 담벼락의 이끼. 담 밑의 오래된 두름박(잠녀들이 쓰는 물건. 동
그란 스티로폴 아래로 자루 모양의 그물을 댄 것으로 그 속에다가 바다에서 딴 것
을 넣는다). 빨랫줄에 걸린 몸뻬. 야생란과 국화 화분. 옥상에서 말라 가는 미역과
모자반. 배를 가르고 하늘을 향해 뒤집어져 있는 양태(생선 종류) . 모든 게 그대로
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잔잔하게 감동시킨다.
덩덩,시계 소리도 난다. 내가아주 어렸을 때부터 있던 시계인데 아직도 탈이 없
다. 옥상 계단에서 나는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벽과 담 사이 작은 밭의 글나
무에 세상에 , 어른 주먹만한 글이 두 개나 열려 있는 게 아닌가.
"어, 할머니. 이거 열렸네요f"
종종 심심풀이로 키우는 글나무를 보기는 했지만 열매를 직접 본 것은 드물었다
"뭐 말이냐?"
할머니가 수돗가에서 뭔가를 쉬, 소리 내며 닦고 오다가 내 쪽을 돌아다봤다
◎요 글. 와따 큰 놈도 열렸다. "
그런데 마루에서 이모가 호호 웃었다 할머니가 대답했다
"이 년째 그것이 꽃만 피지, 열매 하나 매달줄몰라서 이거 봐라, 이렇게 연단다
7l, 하고 내가 묶어왔다. 좀 보고 열으라고 "
"71?"
글나무한테서 열매가 안 나오자 시범조로 큰 글 두 개를 묶어놓은 것이다 나는
과저 이모를 쳐다보며 웃었다.
외갓집은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졌지만 그래서 오가는 배의 기겟소리가 은근하되
더 똑똑히 들렸다. 다들 고속엔진을 달아서 소리가 부아아앙, 이다. 나는 문득 예전
의 통통거리던 기겟소리가 그리워졌다
배의 기겟소리는 오랜 세월 동안 통통통으로 굳어져 왔다 아이들이 으레 배 하면
통통배, 했듯이 . 내 어렸을 적 새벽잠을 깨우는 것도 그 소리였다.
무더운 여름밤에는 시금시금한 보리밥으로 저녁들 때우고(때운다고 했지만 부삽
에 구운 생선이 흔해 주로 그 반찬으로 먹었다) 일찌감치 상 치우고 모깃불(섬의 모
기는 유명하다 특히 무인도의 모기는 더욱 그러하다. 껴입은 바지 위를 그대로 찌
르고 들어오는 것이 예사이다. 오죽했으면 거문도 근방에 모구(모기)섬이 다 있을
까. 어떤 사람 말로 모구섬의 모기는 모기약을 정면으로 맞아도 고갯짓 서너 번으
로 털어버리고 바로 덤벼들더라고 했다) 피워 올린 다음 멍석 위로 둘러앉았다. 그
때쯤이면 햇살에 탄 등과 목덜미가 더욱 따끔거렸다.
밥을 먹었으나 그놈의 입은 조금이라도 가만히 있으면 몹시 서운해지는 고약한
물건이라 뭐 얻어먹을 것 없나 금세 두리번댄다. 운이 아주 좋으면 수박이나 참외
가 얻어 걸렸고 비교적 좋은 편이면 옥수수나 우무(우뭇가사리로 만든 묵 주로 콩
물에 넣어 먹었다) 그룻이 손에 쥐어졌고 그렇지 않은 날은 열심히 모기나 손바닥
으로 때려잡아야 했다.
그때 문 밖에서 머시기야, 부르기만 하면 그냥 뛰쳐나갔다. 종일 바닷물에서 놀던
몸이라 피곤하지만 놀자는 소리에는 힘든 것도 말짱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밤이라서 딱히 놀 게 없었다. 그러면 우리는 늘 바닷가 방파제께로 나갔
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저녁을 일찍 물핀 다음 제각기 자리 하나씩 들고
바람 좋고 모기 없는 그곳으로 모였다. 외할머니나 외숙모가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
하신 까닭에 나는 흔자 동무들 자리를 옳겨다니며 놀았다.
먼 곳에서는 배의 불빛들이 반짝거리고 가까운 곳에서는 파도가 철썩거리는 밤바
다에서는 돗자리 깔고 앉은 곳마다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낮의 것과 달리 왠지 흥
분되고 뭔가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아주 오래된 옛날이야기, 적당히 된 옛날이야
기, 별로 오래되지 않은 옛날이야기, 작년에 있었던 이야기, 어제 있었던 이야기,
오늘 저녁밥 먹을 때 있었던 이야기 바다이야기,육지이야기,누구네 각시 시집온
이야기,어디로 시집가서 살고 있는 누구네 딸이야기,도시 나간 아들네이야기,귀
신이야기 따위가 자리마다 한무더기씩 쌓이고 있었다. 그곳처럼 시원하고 재미있
고 풍성한 풍경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다가 졸려 구석지에 슬그머니 몸을 눕히면 하늘에서 사태난 듯 쏟아지던 별
들 여름밤을 한하고 쏟아지던 별들. 잔잔한 파돗소리와 별, 별, 별. 밤하늘에 끝없
이 퍼진 아름다운 별. 은하수의 유장한 흐름과 구석에서 자울자을 졸고 있는 외로
운별 그러면 귀에 들리는 이야기와 별을 보며 내 흔자서 만들어내는 생각이 뒤섞
이다가 슬그머니 잠이 들곤 했다. 말소리가 아심아심 들리고 별들은 더 낮게 낮게
내려와 이마와 가슴에 반짝반짝 떨어져 내리는데 그 별들을 품으며 드는 잠 물장
구 칠 때 반짝 살아나는 물방을 속의 잠. 그 잠의 달콤함.
그러나 외갓집으로 올라가서 자야 했다. 한번 감겼던 눈을 다시 억지로 뜨고(내
돗자리가 아니므로) 외갓집으로 올라온 나는 그 혼미한 와중에도 별들이 그대로 잘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새벽에 내 잠을 건드리는 소리 .
통통통 기계배 소리 ,
예전의 소구기관은 같은 디젤이라도 3사이클 행정이라서 요즘처럼 부아아앙,으
로 들리지 않고 통통통 귀엽게(혹은 힘겹게) 들렸다. 시동 거는 것도 천차만별이었
다. 일명 야키다마 엔진 시절에는 작은 배들은 손으로 돌려 시동을 걸었지만 힘으
로 할 수 없는 큰 배는 엔진을 버너로 구운 다음 돌리기도 했고 핫도그 모양의 폭약
을 쓰기도 했다. 그러다 압축공기를 이용하는 방식토 나왔다. 요즘은 대부분 자동
차처럼 세루모터로 시동을 건다
참으로 그리운 소리 통통통. 섬과 섬 사이에 가득하던 그 소리들. 마치 童마들이
달려가는 소리 탕탕. 꼭 뒤란에 감 떨어지는 소리 퉁퉁. 흡사 양철지붕에 소나기 내
리는 소리 토도도통. 어쩌면 개살구가 떨어져 구르는 소리 팅팅. 간혹 아이고 이놈
의 먼지 좀 봐라, 엄마가 아이 엉덩이 때리는 소리 텅텅. 그 중에서도 고무공 튀는
소리 통통통.
바다 나갔다가 들어오는 배들끼리 종종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있는 대로 엔진을
뽑아 올리면 조용한 바다는 한순간에 요란해졌다. 배 두 척이 서로 나란히 서서 기
를 쓰며 바다를 가르는데 사람은 안달이 나고 기계는 기계대로 있는 힘 없는 힘 용
을 써가며 통통거렸다. 이게 운동장 같은 데서 하는 달리기 시합이라면 다르겠지만
시합은 시합인데 정작사람은 할 일이 별로 없어 지고 있는 편에서는 조바심 때문
에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이긴 쪽은 환호성을 지르고 진 쪽에서는 뭐라고
욕을 씨부렁거리다가 싸움도 나고 그러다 서로 깔깔 껄껄 웃어젖히는 풍경도 그리
드물지 않았다.
그물
외삼촌은 페리호 선장을 할 때부터 됫날을 염두에 두고 그물을 만들었다. 조타실
로 올라가 보면 한가한 시간에 언제나 새 그물을 만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은퇴하고 나면 배 한 척 사가지고 그물 놓으러 다니자고 해서 잔잔한 내 가슴을 뒤
흔들어놓곤 하셨다.
그런데 진짜로 자그마한 동력선 한 척을 중고로 사놓았단다
점심 먹고 삼촌 이모 나 이렇게 셋이 바다로 나갔다 바람이
그물을 놓았던 가짜뫼 앞으로 쏜살같이 바다를 갈랐다.
차가웠다. 배는 전날
배 속도가 줄자 나는 삿대를 잡고 서서 그물 표시용 공을 잡아 올렸다. 그 기분.
파란바닷물에서 그물을 막 건져 올릴 때의 기대감으로 충만한 기분 바람이 거세
덩치 작은 배는 마구 흔들리고 물은 갑판 위로 치솟아 올라 우리 옷은 금방 젖었다.
젖어도, 추워도 좋았다.
이모는 우리 뒤에 쭈그려 앉아 그물 받을 준비를 하고(올라오는 대로 고기를 꺼
내거나 단단히 꼬였을 때는 한쪽으로 밀쳐두어야 한다. 고기가 요동을 치면 그물
이 복잡하게 峯여버리기 때문이다)삼촌과 나는 배쌈에 발을 걸치고 서서 그물을
끄집어 올리기 시작했다.
고깃배를 따라오면 나는 늘 그게 그리도 재미났다. 깊고 푸른 물속에서 착착 줄지
어 올라오는 고기를 기다리는 재미는 낚시와는 또 다른 게 있었다. 첫번째 올라오
는 고기는 무얼까로 내기를 하기도 했다. 참으로 모처럼 만에 그 재미를 보고 있는
것이다.
"나온다 나와."
"저것은 뭐냐아."
물에 잠긴 그물 속에 희끄무레한 게 보이더니 점차 가까워졌다. 흥이 오르고 따라
서 손도 바빠졌다. 일착으로 올라온 놈은 쏨벵어라는 놈이다 경골어류 횟대목 양
볼락과인 이놈은 구워도 맛있지만 매운탕을 끓이면 딱 알맞다. 한두 마리씩 연이어
올라오면서 고기를 추려내는 이모가 바빠졌다. 보다 못한 삼촌이 이모자리로 가고
이번에는 이모와 내가 그물을 끄집어 올렸다. 역시 삼촌은 손이 재서 그물과 뒤엉
켜 있는 놈들을 금방금방 끄집어낸다. 볼락도 올라오고 놀래미, 쥐치, 인상어(늘씬
미끈하게 생긴 이놈은 참으로 별난 생선으로 다른 놈들과 달리 알을 낳지 않고 배
로 직접 새끼를 낳는 태생이다. 쏨벵어도 그렇다) , 숭어, 소라, 해삼 따위가 다양하
게◎러나 옛날에 비하면 훨씬 적은 양이다) 올라왔다.
숭어는 힘 좋게 몸을 퉁기고 놀래미나 볼락은 팔딱괄딱한다. 돌게는 죽어 있는 민
어 옆에서 꼼지락꼼지락한다. 광어는 바람맞은 책받침처럼 퍼덕거리고 도미는 이
빨을 내보인다. 소라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성게는 무슨 일이 있었나 꼬물꼬물하고
해삼은 벌써 흥분해서 꼿꼿해졌다. 보기만 해도 넉넉하다. 누구 말마따나 이래서
바다가 아름답다.
다들 귀중한 먹거리들이다. 섬사람들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바다를 보듬고 살고 있
는게 이렇게 먹을 게 나와서이다 저 바다가사람들을 앗아가긴 하지만이것들이 대
대손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나 파닥거리는 이 삶의 율동.
그러나 섬도 흥년을 모지락스럽게 겪어야만 했다. 산(山)사람 감자 구워 먹고, 섬
사람 생선 구워 먹는다지만 그건 노래가사 같은 소리이다. 섬의 홍년은 육지보다
더 혹독했다. 곡식이 워낙 귀해서 그렇다.
옛날 흥년 이야기를 들으면 뻔히 나오는 것이 덜 우린 소나무 속껄질을 삶아 먹고
독 때문에 몸이 퉁퉁 부었다는 말이다. 그때 들었던 의문이 생선 잡아먹으면 될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선이 훌릉한 단백질이라고 해도 역시 사
람은 곡기가 들어가야 하는가 보다.
또 하루 세 끼씩 그 긴 날들을 꼬박꼬박 생선만 먹는다면 질리기도 할 뿐더러 곯
은 배로그렇게 많은 생선을 잡을수도 없었다. 그러니 여러 해초를 뜯어먹으며 버
틸 수밖에 없어 자연스레 육지와 다른 음식이 발달하게 됐다.
섬의 먹을거리-항각구국
쌀농사는 없고(예전에 신추라는 산너머 마을에서 논농사하는 집이
있었으나 거문도 간첩사건으로 섬 안쪽으로 강제로 이주당하면서 없어
졌다) 밭농사와 바다에서 나는 것으로 식량을 삼되 바깥과 교통이 어려
운 까닭에 오랫동안 고립된 섬의 특이한 음식이 발달되어 왔다. 거문도
의 독특한 음식을 알아보려면 섬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 더 빠르다
육지로 나와 육지의 풍습에 젖어들면 자연히 가까이하는 음식도 달라져
한참을 그러다 보면 몹시 먹고 싶어지는 고향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이 첫째로 꼽는 것이 항각구국이다
항각구란 다름아닌 엉겅퀴이다. 씁쓸한 나물국 하나만으로는 별날 게 없지만
다들 그리 못 잊고 그리워하는 까닭은 국에 신선한 갈치가 들어가 특별한 맛을 내
는 데 있다. 제주도를 찾은 육지 사람들이 갈치로 국을 끓이는 것을 보고 놀란다는
말을 들었는데 항각구국은 갈칫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주도에서는 갈칫국에 호
박 따위를 털고 誇이는 반면 거문도에서는 엉겅퀴를 렇되 이릉을 풀에서 따온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엉겅퀴는 국화파의 다년생 풀로 가시나물이라고도 하며 들이나 야산에서 자란다.
가시나물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전체에 흰 털과 더될어 거미줄 같은 털이 있기 때문
이다. 6월에서 8월 사이에 자주색에서 적색의 꽃이 피고 연한 식물체를 나물로 하
고 성숙한 뿌리는 약용으로 쓰인다.
이것으로 국을 譜여놓으면 짙은 녹색의 풀파 흰 고기가 아주 잘 어우러졌다. 갈치
고기의 달콤함과 엉겅퀴의 쌉싸래한 맛이 業화를 띠루고 고기의 부드러움과 나물
가시의 까슬까슬한 느낌이 희한하게도 맞아떨어진다.
나는 아직 제주도에도 못 가봤고 그래서 제주도 갈칫국을 못 먹어보았지만 거문
도의 것은 참므로 보기드문 맛을 낸다. 섬을 떠난 노인네들이 허전함에 지쳐 속이
헛헛해지면 항각구국이나 한 그럭 씨원하게 묵었으은 좋겄다, 하고는 막연히 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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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분포한다. 나는 지금까지 갈치 싫어하는 이들을 못 만나보았다. 그러니까 싫
어했던 사람은 어렸을 적의 나 혼자였다. 그것도 맛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갈치가
너무 크고 살이 너무 많아 뭔가 헤픈 느낌을 주어서 그랬다.
갈치는 주로 저인망이나 주낙으로 잡지만(그물에 잡힌 잔 갈치는 주로 어묵 재료
로 들어간다) 손으로 낚는 게 진짜배기이다 갈치도 밤에 집어등을 켜놓고 잡는다.
그런데 이놈은 이빨이 워낙 날카롭고 단단한 데다 성질마저 아주 포악해서 주의해
야 할 게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낚시 채비이다. 아무리 단단한 낚싯줄이라 해도 갈치 이빨에 살짝만 탕으면
툭 끊어지기에 바늘에 약 오십 센티미터 정도의 철사를 대고 철사 끝에 줄을 묶는
다. 낚아 올리면 얼른 대가리를 뒤로 잡아채 목뼈를 분질러 놓아야지 그렇지 않으
면 이게 제가 무슨 뱀인 줄 알고 기어와서 사람 다리나 어구 채비통이나 닥치는 대
로 물어뜯는다.
그렇게 잡아놓은 갈치는 비취빛이 도는 맑은 청동색이 난다. 그런 빛깔은 무슨 색
이다. 고 이름하기보다는 말그대로 살아 있는 생명의 빛이다,라고 말할수밖에 없
다. 아름다운 원색의 빛깔.그 상태의 갈치로 꾼들이 최고로 치는 갈치회를 해먹는
다. 그 빛깔이 점차 사그라들면서 은색으로 변하는데 말하자면 갈치에게는 은색이
죽음의 색깔이다. 표피를 덮고 있는 은색 가루는 구아닌이라고 하며 여자들 입술연
지나 모조진주의 재료가 된다.
이 생선은 도무지 버릴 게 없다. 굳이 대라면 대가리와 꼬리인데 대가리는 몸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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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게) 기 부리야 잔디잔디 부리야
느그 할아부지가 담뱃대 물고 나오란다
노래를 부르면 고만고만한 게가 올망졸망 매달려 올라왔다. 그리 오래 되지 않아
갈치 꼬리는 너덜너덜해지고 내 낡은 주전자에는 게가 반 너머 찼다. 주전자에 귀
를 대보면 스사삭 스사삭 가느다란 발이 스테인리스 벽을 긁는 소리가 간지럽게 났
다. 자기들끼리 뭐라고 지껄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개중에는 제딴은 화났다고 거품
을 잔뜩 무는 놈도 있다
내 간식거리는 그거였다. 그걸 많이 먹은 다음날은 똥눌 때 찢어지게 아팠다. 예전
에 육지의 바닷가에 흥년이 심하게 들면 사람들이 방게나 농게 같은 작고 흔한 것들
을 잡아먹었는데 너무 많이 먹어 똥구멍에 껌질이 가득 차서 숟가락으로 파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도 틈만 나면 게를 잡아 삶아먹었다. 맛보다는 재미였다.
귀보시탕과 김국
곡물이 부족한 곳이라 섬은 탕이 발달한다. 반찬
이기는 하되 어느 정도는 밥의 역할도 할 수 있어서
그렇다 탕의 종류도 다양해서 굴로 하는 굴탕, 고동탕,
배말탕, 문어탕 등 여러 가지인데 아마 하려고만 하면
사람 먹는 것은 모두 다 탕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특
이한 것이 귀보시탕으로 제사에 꼭 쓰이는 음식이다.
귀보시란 목이버섯을 말한다. 마치 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木耳라는
이름부터가 '나무의 귀'라는 소리다). 목이버섯은 이형담자균류에 속한다. 아교질
이던 게 수분을 흡수하면 부풀어올라 반투명한 젤리 모양의 버섯으로 되는데 마르
면 수축하여 단단한 연골질이 된다. 중국음식 좋아하는 이들은 많이 먹어보았을 것
이다. 틈나는 대로 이것을 따뒀다가 필요하면 조갯살과 전분을 넣고 걸쭉하게 탕을
만들었다. 마른 버섯 씹히는 맛이 별미다.
굴통국이라는 게 있다. 바닷가 바위에 붙어 있는 따개비 통으로 碧인 된장국으로
아주 시원한 맛이 난다. 재미 있는 것으로 김국이 있다
연등 후사리(진도 바다가 갈라지는 때가 이날이다)가 되어 물이 한정없이 나면
나는 외할머니 뒤를 따라 유림해수욕장 너머 돌밭으로 갔다. 물이 저만치까지 빠져
섬은 오래간만에 몸집이 커졌고 드러난 부분에서는 노랗고 파란 해초가 잔뜩 달라
붙어 있어서 아주 새로운 풍경이었다. 벌써부터 바위 사이에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
고 있고 이쪽저쪽에서 박박박 바위 긁는 소리가 났다. 돌김을 音는 중이다
이럴 때 빛을 발휘하는 물건이 있다. 육지에서 들어온 물건 중에는 내용물과 상관
없이 그 뚜껑이나 껌데기가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 중 김 긁을
때 돋보이는 게 하나 있었다. 바위에서 김을 긁을
때 무엇을 사용하면 가장 좋을까?
바로 구두약 뚜껑이었다. 캥거루
표 구두약 뚜껑 하나면 그날 작
업은 오케이였다. 손으로 쥐기
편하고(이게 없으면 주로 전복 껍
질로 한다) 모서리가 너무 날카롭지
않아 굴껍질 가루가 잘 들어가지 않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나도 할머니를 따라 열심
히 뚜껑질을 했으나 간간이 따라 들어온 파래를 건져내느라 할머니는 나 때문에 일
이 더였다.
발목까지 물에 잠긴 채 돌아다니다 보면 생전 보도 못한 해초들이 머리를 풀고 이
리저리 물살에 쉽쓸리며 낯선 햇볕을 받고 있고, 그사이로 제법 굵은 쥐놀래미들
이 혜엄쳐 다니다가 내 발목에 부딪히며 놀라 표르르 사라지기도 했다.
물이 들어오면 할머니는 김 담은 함지박을 이고 일어섰고 나는 뒤를 따랐다. 지금
이야 모두 기계화되었지만 당시 김 뜨는 것은 구경감으로도 훌릉했다. 우선 김발
(김밥 싸는 발보다 약간 크고 길다)을 김과 물이 뒤섞인 함지박에 띄우고 네모난 나
무 형틀을 살짝 올려놓은 다음, 밥그릇으로 적당량 김을 건져 발 위에 놓고 손으로
편다 그 다음 틀을 제거하고 발을 건져 올리면 김은 형틀 크기대로 네모반듯한 모
습이 된다
물이 적당히 빠지면 발을 들어다가 담벼락에 차례차례 놓는 게 내 일이었다. 햇살
을 받아 김은 말라가고 오가는 사람들이 뜯어먹기도 했다. 한 이삼 일 바짝 마른 뒤
뜯어내면 반듯하고 윤기 도는 김이 되는 것이다. 할머니는 그것을 백 장씩 보기 좋
게 묶어 보관하기도 하고 친지들에게 부치기도 했다.
김국이란 그렇게 뜯어온 자연산 김을 가지고 국을 業인 것이다. 달고 시원하면서
도 담백한 맛이 난다. 이 국이 가지고 있는 사연은 좀 우습다. 원래 이 국은 눈 밖에
난 사위가 싸우고 친정에 내려와 있는 딸을 찾으러 왔을 때 장모가 아무 말 없이
일부러, 욕 좀 보라고 사위에게 誇여 내놓는 것이다
김7海蓄)으로 崙인 국은 김(수증기)이 나지 않는다. 아주 미세한 기름이 표면을
감싸고 있어서 그렇다. 하여 별 생각없이 후르륵 마시면 뜨겁기가 이루 말할 수 없
어 입 속이 홀랑 벗겨진다. 어쩌겠는가, 주는 국 얻어먹고 데인 입인데. 제가 분별
없이 먹어서 그런 것인데.
장어탕
이십대 후반, 일 다니며 혼자살다보니 몸에서 늘 기름기가부족했다. 그렇지 않
아도 '남의 살' 좋아하는 체질이 하루 세 끼 라면이나푸성귀로만 배를 채우다보면
몸이 허해지기 마련이었다
잠이나 일찍 자자 하면서 드러누우면 천장에 아슴아슴하니 그림이 그려지고 그릇
에서 김이 나고 후루룩 쩝쩝 먹는 모습도 보이고 입맛 다셔지며 입에 침이 고이고
배가 더욱 고파져 종내는 쓰리게 하는 음식이 하나 있으니 바로 장어탕이다.
장어탕은 글자 그대로 장어로 碧인 찌개식의 탕이다. 항구 식당에서 파는 것도 좋
지만 내 눈앞에는 거문도의 붕장어탕이 떠올랐다 탕 만드는 재료는 흔히 아나고라
고 부르는 붕장어인데 섬에서는 성어가 된 놈, 즉 어른 팔뚝만한 놈만 붕장어라고
불러 대접을 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풍경 하나. 언제였는지, 누구네였는지(아마 외갓집이나 그
근처의 누구네였던 것 같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커다란 솥을 걸고 한바탕 붕장어
탕을 崙이는 장면이 선명하다. 일 미터가 훨씬 넘는 장어를 자르고, 말려놓은 고사
리와 녹두나물을 넣고 갖가지 양념을 하여 한솥 가득 崙이면 주변에서 사내들이 땀
을 뻘뻘 흘리며 먹는다.
육고기도 그렇지만 특히 생선은 오래 器이면 딱딱해져 맛이 없다. 요리의 포인트
는 배합과 타이밍 아닌가. 특히 생선요리는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그런데 유독 장
어탕만큼은 오래 끓이면 器일수록 맛이 더 나는 별난 음식이다. 오래 業이면 살이
풀어져 걸쭉한수프처럼 된다. 맛이 고소하고 진하기가가히 으뜸이다 먹고 나서
이빨끼리 딱딱 달라붙는 그 느낌이라니 나에게 보양식을 대보라면 이것을 꼽는다.
비린내 자체가 몹시 그리을 때도 있었다. 스물일곱의 가을로 기억된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돌아오는중간에 갑자기 생선 비린내가몹시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예
전에 먹었던 숱한 생선들이 눈앞에서 떼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름이 자르르 흐
르는 돌돔 구이가 내 코를 스쳐가고 맑은 기름 뜬 장어탕이 빈 뱃속을 마구 半셔댔
다. 나는 거의 허천병 환자가 되었다.
섬처녀 갈치 뱃진데기 (창자) 맛 못 잊어 육지로 시집 못 간다,는 말이 섬에 있다.
비린 맛에 길들인 입에서 벗어나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전 한복판
에서, 가뜩이나 없는 돈에 어떻게, 무엇으로 솟증을 달랜단 말인가. 하루 고생해서
번 것 헐어먹을 각오하고 동태찌개나 한 그릇 사먹을 수도 있고 임연수어를 사다가
가스불에 이리저리 구워볼 수도 있었지만 당최 그런 종류는 내키지가 않는 데다 준
비할 여유도 없었다.
싸고 금방 먹을 수 있는 것 중 무엇으로 이 증세를 달래나 궁리를 하며 슈퍼를 들
어서자홀연히 눈에 쏙들어오는 게 있었다. 일금육백 원짜리 정어리 통조림 어렸
을 때 어머니는 그것을 국물 약간 있게 하여 양념찜을 한 다음 상추와 함께 저녁상
을 차려주시곤 했다 이름하여 정어리 상추쌈,
통조림 겉에 붙은 정어리 그림을 보자마자 나는 그것을 떠올렸고 무조건 샀다. 남
의 집 담 밑에서 기진맥진 크고 있는 호박잎 몇 장 몰래 뜯어온 것과 마늘 두어 쪽
갈아넣고 앉은뱅이 냄비에 그걸 끓였다. 갑자기 세상 너른 천지에 축복처럼 퍼져
나오는 비린내(정어리는 비린내가 유독 강하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은 그 통조림
이 보이지 않는다) 곯은 자는 이것으로 능히 양식을 삼으리라 아마그때 누가그
것을 빼앗아갔더라면 내 입이 한쪽으로 돌아갔을 거다.
그때 후배 하나가 찾아왔다. 마침 좋은 거 끓이고 있는데 너 잘 왔다고 후배 얼러
소주 두어 병 사다가 구색까지 맞춰 먹었다. 마치 입덧을 하는 양 입에 착착 들러붙
는 게 아닌가. 얼마나 맛있었으면 남은 것에 물 普고 간장 타고 하여 또 崙이고, 다
시 남은 것에 붓고 타고 하여 器이고, 그렇게 내리 여섯 끼를 그것으로만 먹었겠는
가 그런데 그날 난생 처음으로 정어리 통조림을 먹어보았타는 후배는 밤새 양치질
을 세 번이나 하고도 냄새가 지독해 밤새 고생했다고 훗날 알려왔다.
생선회-보리멸
섬이라당연히 생선회가흔해 회 이야기는 되레 재미가 적지만두어 개만 건드려
보면 우선 소박한 것으로 보리멸이 있다.
거문도의 동도초등학교를 삼학년쯤 다니다가 여수로 이사를 했었다. 섬놈이 도시
인이 된다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섬에서 삼학년을 다니다가 이사를 왔으나 생
일이 늦은 애가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간 탓에 적령 나이가 안 맞아(도중에 몇 달
7◎낄도 했다) 다시 삼학년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따라 처음 가보았던 시내 초등학교는 왜 그리 크고 운동장은 뭐 그리 넓
던지. 등교 첫날, 집에 오는 길을 잊어버려 온 시내를 빙빙 돌다가 밤중에야 간신히
찾아 들어오는 것으로 흑독한 신고식을 치렀던 나는 시내의 생활에 쉬 정을 붙이지
못했다. 도시 아이들은 편을 짜서 벌써부터 권력과 세력의 재미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고 나는 그런 애들과 친해지지 못했다. 싸움도 잦았다.
여수로 와서 내가 가장 그리워한 것은 섬의 잔잔한 풍경과 동무들, 그리고 낚시였
다. 그 중 섬의 풍경과 동무들은 그리워만 해야 되는 풍경이었으나 낚시는 내 손으
로 할 수 있었다.
이삿짐에 따라온 잡동사니 중에 내가 꿍쳐둔 낚싯줄 묶음이 여러 타래 있었다 그
걸 새로 나무통에 감고 낚시를 매달았다. 납덩어리 봉은 구할 수 없어서 비슷하게
생긴 돌을 매달았다.
잇갑 살 돈도 물론 없어 시장에서 버린 새우를 줍기도 하고(간혹 훔치기도 했다)
쌀물 때를 기다려 바닷가 참나무 기등 위에 판자로 지어놓은 싸구려 횟집촌 밑으로
기어들어가, 야이 쌍놈의 새끼들아 어디를 파고 있어, 집 무너지은 느그들이 지어
줄 거냐? 개새끼들, 얼릉 안 가냐‥‥‥ 욕을 먹어가며 지렁이를 파기도 했다. 그걸
가지고 선창가와 멀리 종화동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놀래미를 낚았다.
그러나 어른 뼘만한 것부터 아이들 손가락만한 것까지 한 삼십 마리를 낚아도 내
마음은 언제나 흉족하지 못했는데 그럴 때마다 저 섬의 맑은 바닷물에서 보리멸 낚
던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거문도에서 못치, 또는 모래망치라고 부르는 생선이 보리멸이다. 보리멸은 농어
목 보리멸과로 우선 깨끗한 외모부터가 사람을 즐겁게 한다. 등 쪽에 아주 연한 황
색이 나지만 전체적으로는 투명한 느낌을 주는 담색으로 주등이는 길고 型족하며
7은 작은 편이다. 양 턱에는 좁은 이빨띠가 있고 아가미 뚜껑뼈에 약한 가시가 하
나 있으며 뺨의 비늘은 등글다 성질이 급해 잡아놓으면 곧바로 죽는다.
◎淇서도 잘어 중에서는 으뜸 횟감으로 치는 이것을 나는 참으로 많이도 낚으
러 다녔다. 섬에 들어가면 으레 새벽바람으로 갯지렁이를 파러 가는 것도 이것을
낚기 위해서였다. 뭍에 살면서 섬에서의 낚시가 그리워지면 돔이나 농어 같은 고급
낚시보다는 보리멸 낚시가 먼저 그리워지곤 했을 정도로 친했던 것이다.
이것을 낚으러 가면 언제나 즐거웠다. 워낙 잘 잡혀서 그렇기도 하고 낚기 편해서
그렇기도 하고 체구에 비해 입질이 세어 낚는 재미가 빼어나서 그렇기도 하다. 보
리멸은 맑은 모래밭에서 산다. 그래서 한여름 해수욕장에서 수영을 하다가 그대로
낚기도 했다.
낚싯대를 들고 허리쯤 찬 곳으로 들어가 저만치 던진 다음 슬슬 끌다보면(모래밭이
라서 걸릴 위험이 전혀 없다) 한순간에 투르르륵 채고 들어간다. 그 짜릿한 기분.
어쨌든 횟감중에 쉬 잡아먹을 수 있는 것의 첫째인데,섬에 들어가면 우선 이것
몇 마리 낚아서 초장찍어 먹어야만 일단 직성이 풀리곤 했다. 배가그리 단단하지
않아 뼈째로 샐어서 먹으며 맛이 달보드레하다. 이것도 듣자니 근자에 들어 귀해졌
다고 한다. 어디 갔겠는가. 다 먹어 없앴겠지
앞의 내용과 큰 연관은 없지만 먹는 이야기 나와서 생각나는 게 있다. 예전에 '사
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모두 다 성스럽다 는 말로 개고기 먹는다고 타박하는
이들에게 대꾸하곤 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어떤 때는 아니다 싶을 때가
있다. 특히 먹는 만큼 힘을 무언가 쓸 만한 자리에 써야 하는데 움직이기는 귀찮아
하면서 맛있는 것 탐만 해대는 아이들이나 음식을 너무 쉼게, 함부로 버리는 어른
들을 볼 때 그렇다
먹거나 버리는 것 자체를 야단할 수는 없지만 걱정이 드는 게 저러다가 그 음식이
하늘에서 비 떨어지듯 저절로 생겨난 것으로 여기지나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래서
미국 하류영화에 자주 나오는, 음식 갖고 장난치는 장면이 자꾸 걸린다(미국인 한
사람의 하루 사용 에너지량은 티벳인 한 사람의 육 개월치와 맞먹을 정도로 소비의
왕국이다) . 음식이 놀잇감이 되다니.
삼치회
섬주민들은 젖 테고 곡기 맛보는 순간부터 거의 동시에 생선 맛을 보며 컸던 관계
로물에서 나는 것들의 모습이나 생태,성질, 맛을 훤히 케뚫고 있는 이들이다. 꼬
리 달린 것만 보면 칼을 들고 덤벼들지만 회에 판한 것이라면 도사급인 탓에 미세
한 맛의 차이로 급을 매기기도 했다.
동네 어른의 환갑잔치나 또 다들 모여 마시고 떠들며 꼭 기념하고야 넘어갈 만한
날이면 상에 좋다는 회가 여러 가지 오른다. 평생 회를 밥먹듯 먹고산그들이 여러
회 중 무엇부터 먹나 살펴보면 열에 아흡 먼저 손 가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삼치회이다.
삼치는 농어목 고등어과로 보통 몸길이 약 일 미터 정도이다. 몸이 가늘고 길며
극히 작은 비늘로 덮여 있어 마치 단단하고 재빠른 전사(戰士)를 보는 듯하다 4, 5
월에 산란하며 여름에는 얕은 곳, 겨울에는 깊은 곳에서 산다.
요즘은 밤에 집어등 켜놓고 한자리에서 낚는다고도 하지만 원래는 배가 가면서
낚는다. 일정한 간격마다 가짜 잇람과 낚시 매단 줄을 길게 늘어 ┬
뜨리는데, 배가 가면 잇갑이 물속에서 빙빙 돈다. 삼치가 멸 ┼
치 따위로 알고 쫓아와서 문다. 귀한 것이라 낚아놓으면 돈도
되고 보람도 있는 대신 낚싯줄의 무게가 워낙 무거워 사람
이 다치기도 하고 죽기까지 한다.
이놈은 잘 상하는 것이라 보관이 쉽지 않아 횟감으로는 더
드물어 육지 사람들 중에 바다와 별 연분이 없는 사람들은 평생
에 한두 번 먹어보기 힘든 것이다. 삼촌네에서 해물 보내준 것을 어
머니가 냉동 보관하여 두었다가 내가 여수 가면 한 짐 싸주시곤 하는데, 운이 좋
으면 횟감으로 삼치가 들어 있다(오십 센티미터 정도 크기가 횟감으로 좋아 거문도
에서는 고시라고 따로 부른다) ,
좋은 것이라 혼자 먹기에 아깝고 아는 얼굴 다 부르다 보면 모여든 입에 맛보기
기름칠 정도로 끝나버리기 일쑤라 날 잡는 것도 고역이었다. 고역이라면 별 해괴한
고역이겠으나 어쨌든 주변 사람 중에 맛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다.
좋다는 회를 사놓아도 생살 먹는 것 싫어하는 이 있고 또 몇 점 먹다보면 돼지고
기 볶아놓고 앉은 정도로 여기기 쉬운데 삼치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맛에 대한 칭
송이 끝나지 않았다
우선 들리는 말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 이다. 그 녹는다는 말은 아주 맛있다는 표
현으로 흔히 쓰이는 말인데 삼치회는 말 그대로 녹아버린다. 이빨을 사용하지 않고
혀만으로 먹을 수 있다. 기름기가 많아 아주 고소하고 부드럽다. 살이 약해 아주 숙
련된 사람 아니면 뜨기가 어려운 까닭에 살짝 얼려 회를 뜨며 겨자간장에 찍어 먹
는다.
모자반에 대하여
섬사람들이 섬 떠난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부치는 토산품은 가짓수가 출중해 김
미역 말린 것부터 고등 거북손 배말 소라 전복과 꽁치 민어 문어처럼 크고 작은 건
어나 얼린 것 등 셀 수 없을 정도인데 다 훌릉하고 맛있는 것이지만 항각구국처럼
받는 사람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게 만드는 것이 또 하나 있으니 이곳 말로는 몰, 즉
모자반이다.
나도 어디 가나 좀 마신다는 축에 끼어왔던 터라 마시고 난 다음날은 좋다는 해장
국집을 꼭꼭 따라다니며 간밤의 술좌석 끝을 맺곤 했다. 술꾼들이 각자 해장으로
찾는 콩나물국(일명 아스파라긴산탕) , 올갱이국(내륙 사람들이 좋아한다) , 살얼음
긴 냉면(면 좋아하고 열 많은 사람들이 밝힌다), 시래깃국(입맛이 소박한 이들이
좋아하며 성장과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 선짓국(시래깃국과 이유가 비슷한데. 가
난하되 고기 밝히는, 불행한 팔자들이 좋아한다), 북어국(나이든 이들이 가까이한
다), 곰탕이나 설렁탕(알뜰히 몸 살피는 축들이 찾는다), 조개탕(이것만 원하는 이
들이 꼭 있다), 복국(아무나 먹는 게 아니다), 그냥 맹물(돈이 없어 누가 먼저 해장
국 산다고 말하기를 기다리는 중이거나 비위가 약하거나 둘 중 하나다) 따위가 각
자 입맛대로, 주머니 사정대로 칭송을 받는데 내가 먹어본 해장국 중에 가장 으뜸
으로 칠 만한 것이 바로 모자반국이다.
갈조식물 모자반과의 바닷말인 모자반은 조간대(해안선에서 간조와 만조 사이의
부분)하부에서 자라며 외견상 뿌리, 줄기 잎 구분이 뚜렷하고 뿌리에서 한 개의
辨땐 중씸가지가 뻗어나와 삼 미터 크기까지 자란다. 위쪽 잎 가장자리에 톱니모
양의 돌기가나며 온몸에는 줄기로부터 공기방울이 생긴다. 바다에서 이것들을 보
명 마치 바닷속의 작은 숲처럼 보인다. 연안동물들이 먹이를 얻거나 산란하기에 아
주 좋은 곳이다. 먹기도 하지만 알긴산 등 해조공업의 원료로 이용되거나 비료로도
쓰인다.
할머니는 초겨울부터 갯가로 떠밀려온 참모자반을 잘 말렸다가 팔아 목돈을 만들
기도 했다. 돈이 되는 까닭에 인기가 좋다. 그러나 예전처럼 흔하지가 않다.
어렸을 적 바다에서 이것을 뜯어오는 날이면 애들까지 손을 거들었던 기억이 있
다. 뎀마 같은 데에 수북히(수북히, 갖고는 부족하다. 아예 배가 안 보일 정도라 마
치 작은 섬이 하나 떠내려오는 듯한 모습이다. 사람이 그 위에서 천천히 노를 젓는
다. 그런 날은 바다가 아주 잔잔한 날이다) 쌓아오면 애나 어른 구분 없이 달려들어
갯돌 위에 말렸다.
돌 위에 널면서 딱딱하고 거친 개모자반을 가려내는데 이것은 따로 갈 데가 있다.
어디로 갈까?
바로 변소이다. 개모자반은 변소 안에 쌓아놓고 일 보고 난 다음 뒤 닦는 것으로
쓰였다. 지금도 내 엉덩이에는 그 까실까실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 남아 있다.
땅으로 올라 사람 엉덩이 한 번 한아보고 통 속으로 들어간 개모자반은 똥과 섞이
어 삭다가 밭으로 가서 거름이 되었다. 해초가 원래 좋기도 하지만 거기에 소금기
까지 들어가 아주 훌릉한 거름이 되었다.
참모자반국을 認이려면 꼭 있어야 할 게 있다. 바로 소 내장이다. 양쪽 궁합이 아
주 찰떡이다. 혹 소 잡는 잔치가 있으면 이 국을 원없이 먹을 수가 있었다. 꼬들꼬
들한 내장과 부드러운 모자반을 섞어 집어먹는 맛도 훌릉하지만 기름기가 뜬 국은
고소하면서도 시원해서 해장으로 딱 좋았다.
예전에 우리 집에 오신 손님들이 해장용으로 이 국을 허겁지겁 먹고 마신 것을 여
러 번 보기도 했고 내가 머리 굵어진 뒤 쓰린 속을 달래려 직접 마셔봐도 영락없다
몇 해 전 할머니가 보내주신 모자반으로 그 국을 한 번 끓여먹어 보았다. 서툰 솜씨
에도 비슷한 맛이 나왔다. 딱히 다른 비법이 필요없다는 소리이다
군소
오륙 년 전 늦게 장가드는 거문도 친구를 찾아 광주엘 간 적이 있다. 아주 오랜만
에 섬 어른들과 동창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자, 거문도에서 올라온
겆들이 여러 접시 있어 눈이 먼저 반가웠다. 그 중에 내 젓가락이 딱 멈춘 곳이 있
었다. 바로 군소를 삶아 무쳐놓은 접시였다
군소는 연체동물 무순목(無循目) 군소과의 복족류로 족보부터가 벌써 깔끔 떠는
이들이 싫어할 종류인데 생김새 또한 애매하여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한마디로 움
직이는 얼룩덜룩한 말똥 같다. 섬에서는 굼벵이라 부르나 매미 유충인 굼벵이하고
는 전혀 연관이 없다. 녹조나 갈조류를 먹으며 바다 얕은 곳 바위 밑이나 돌 틈에서
사는데 건드리면 몸에서 자색의 점 액을 내어 근처 물을 물들인다.
이게 생긴 것도 시원치 않고 노는 것도 영 엉성하지만 맛이 좀 기특한 데가 있다.
이것을 잡아서(노를 젓다가 삿대 끝 現족한 갈고킬로 잡기도 하고 간조가 심한 날
은 그냥 손으로 줍기도 했다) 창자 떼어내고 살짝 삶으면 근 사십 센티미터 되는 몸
뚱어리가 손가락만하게 줄어든다 그걸 잘라서 간장 양렴으로 무쳐놓으면 쫄깃쫄
깃한 맛이 참으로 별나다.
몇 개 놓여 있지 않은 것을 눈치보고 말 것도 없이 순식간에 집어먹고 창피 불문으
로 혹 더 있냐고 물어보니 아쉽게도 조금밖에 가져오지 않아 없다고 했다 보기 좋
은 게 먹기도 좋다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아니게 생긴 게 뜻밖의 맛을 내
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근 삼십 분 들여 그물을 걷어올리고 시간 반 넘어 들여 고기 빼내고 그물 손질할
다음 배를 몰아 이번에는 저만치 등대섬(서도와 가늘게 연결되어 있어 독립된 섬은
아니다) 아래로 가서 그물을 놓았다. 잡아놓은 것 보니 그럭저럭 반 광주리는 되었
다. 없다 없다 해도 그래도 바다에는 아직 고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별
로 머지않뜬 훗날에 이것마저 없어져 버릴 날이 오지 않겠는가. 꼭 그럴 것 같아 가
슴이 먹먹하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욱 작은 그물코를 써서 치어까지 잡아야 생계가 되고 그러기
때문에 바다에서 고기 씨는 더 말라가는, 제 살 깎아먹기의 악순환이 계속 되풀'
되다보면 그 끝은 무엇이겠는가 육지에서 들어.온 자본가들은 축약양식장 지어놓
고 편하게, 합법적으로, 고기 키워 돈을 벌지만 그럴 힘이 없는 어부들은 어떻게 된
단 말인가.
등대섬의 깎아지른 절벽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좋지만 배에서 이렇게 올
려다보아도 절경이다.
섬은 재미있는 지명이 많다. 덕촌리부터 등대 쪽으로만 보아도 마을 저편은 조금
전에 그물을 거뒀던 가찌뫼가 있고 마을 이쪽으로는 건너짝(유림해수욕장) , 새끼
메, 신너리, 후리너리, 앞문에(새로 그물을 놓은 곳이다. 등대섬을 문에라고 부른
다), 목너메(서도와 등대섬이 만나는 곳으로 8자의 가운데처럼 얕은 바위 밭이다) ,
무지개통안(등대섬의 한 부분으로 민물이 흘러내리는 까닭에 간혹 자그마한 무지
개가 생기는 곳이다), 배추밭끄터리(보이지 않는 등대섬의 저편이다),큰여, 작은
여, 기와집몫랑(다들 바다와 만나고 있는 부분의 이름인데 이것만은 산봉우리 이름
이다), 짚은개 그리고 신추이다 신추는 이야기했듯이 덕촌리에서 고개 너머 뒤편
의 마을이다.
그물을 새끼메부터 해서 목너메 너머까지 놓고 우리는 돌아왔다.
"물 났지야? 언능 묵고 가보자."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재촉을 한다 왕년의 뛰어난 잠녀가 삼부도로 갯것을 가
지는 것이다.
외할머니
할머니는, 주변의 중늙은이들이 노인네가 좀 극성맞다,고 고시랑거릴 정도로
임없이 믐을 움직인다 윽심도 많으시고 자존심도 높다. 타고난 천성이 워낙 부?
런하고 깔끔하셔서 그렇기도 했지만 생활이 그렇게 만들기도 했다.
외할머니는 물해꾼, 즉 잠녀였다. 할머니 따라 밭에도 가고 산에도 가고 거문리
가고 김 따러도 다녔지만 어릴 적의 나는 그 중 물해질(잠녀질)을 가장 많이 따
畿다
겅님에, 물해질 채비 다 됐소야?"
윗길에서 할머니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그건 틀림없이 동료 물해꾼 할매였고 간
조시간이 되었으니 두름박 메고 바다로 나가자는 거였다
"어이 다 됐네. 가세."
할머니는 허리에 찰 납덩이롸 두름박, 물옷과 물안경, 낫 따위를 헝설이에 넣고
고응, 일어섰다. 그러면 나는 마들가리를 등에 지고 뒤를 따랐다. 이 골목 저 골목
에서 하나둘씩 물해꾼들이 나오면서 금세 한무리가 되었다 시간에 쫓기다 온 사람
들은 몸뻬 차림으로, 준비가 제대로 된 사람은 아예 물옷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요즘이야 잠녀 구경하기가 어 렵지만 그때는 아예 운신 못할 노할머니나 물정 모르
는 소녀들 빼고는 거진 다 그것으로 벌어먹고 살았기에 (물론 못하는 여자들도 있었
71만) 흔해 빠졌었다
여인네들은 늙은 축과 젊은 축, 또 그 사이 어중간한 축으로 나뉘어 뭐라고 떠들
며 거리나 바닷가 길을 걸었다. 그것도 참으로 보기에 나쁘지 않은 장면이었다
중년층들은 제일 앞에 서서 좀 무게 있는 말들을 나누며 가고 20대 처녀들과
새댁들은 헐겁게 까르륵거리며 가운데를 메우고 꼬리에 늙은 층들이 뒤
따르며 주로 누구네 며느리
나 딸년을 고시랑거리며 흠
집 내고 있는 사이에 사내
것은 나 혼자였다.
널찍한 곳에 도착한
그들은 물속으로 들어
갔다. 듣기에 따라 휘
우,나쒸우,나 쥐우,하는 휘파람 소리를 내며 점차 멀어져 갔다 수달처럼 풍덩 든
어갔다가 한참만에 머리를 내놓더니 얼마 있지 않아 섬 모롱이를 돌아 사라졌다.
그러면 끝없는
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됫산의 나무들과 수만 년을 한하고 파도에 구애를 당하는
위와 그것을 집 삼아 낳고 자라고 늙어가는 방게 사이에서 나는 혼자였다.
바람과 파도마저 없는 날은 고요의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들어보면 쉐, 하는
것은 가히 수만 년 묵은 침묵의 소리였다 그러나 아직 어리기도 했기에, 몹시 무」
해지는데 내 일이란 게 그들이 벗어놓고 간 옷가지들을 지키는 것이라 어디 멀
놀러 가지도 못했다.
때는 간조라 바닷물이 저만치 물러났다. 해초를 잔뜩 몸에 붙인 돌이 참으로
모처럼 햇살을 받고 있어 그게 내 놀이터였다. 게를 잡아 싸움도 붙이고 깊은 곳에
가면 빠져죽을까봐 돌 사이에서 노는 게 분명한 고기들을 쫓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무슨 소리가 나면 고개를 들어 저만치 지나가는 어선을 보며 저건 또 어디로 가
는가, 언제쯤 돌아오는가, 점을 쳐보기도 했다. 어쨌든 시간이란 놈은 가기는 가는
것이라 그들이 돌아왔다.
"아이, 심심해서 워쩐다냐.
"짐 잘 지켄냐아?"
각자 배가 잔뜩 부풀어오른 두름박을 메고 물을 뚝뚝 흘리며, 파란 입술에 턱을
덜덜 떨며 다가왔다
구겯하고 싶어했다. 그곳에는 구죽, 간밤 좋은
꿈을 꾼 이에게만 걸린다는 전복, 자연산 홍합,
A띤들과 궁합이 맞아떨어지는 해삼, 밤살이라
고 쑤르는 성게 따위 외에 청각과 미역 등이 그
득 늘어 있었다.
할머니는 청각 다발 속에서 소라와 흥합을 꺼내 불가
예 놀고자그마한 전복을 낫으로 도려내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게 이를테면 내
7당이었다. 나는 그들이 뭐라고 콜짝이는 소리를 들으며 전복을 오물거렸고 소라
斗 퐁합이 내뿜는 김을 바라보았다.
◎리고 돌아오는 길. 머리에 한짐씩 인 여인네들이 노을을 배경으로 걸어가는 길.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흔적을 만드는 길. 피곤한 노동의 끝. 이제 캐온 것 달
이 넘기고 부리나케 집으로 쫓아 올라가 노인네나 남편이나 자식들을 건사시켜야
하는 길. 철썩철썩 밀물 들어오는 소리 요란한 길. 바다에게 무언가 미안해지는 길.
외할아버지
?긴부지 (할아린
죄수를 ?
죠로 설하꼬 시
7가지美) 인추받은 건더. 나하오 재맹인
그비 자네 하나부지가 그래갖교
먼침◎◎◎ 타고 추 어른은 태성이 보다 먼첨 죽
當어. 신
7쎈 죽은 태성이허콰 신춘 어른하고 같이 냐은 하사관이여. 배에·
항미 훠
우리가 말하자은 登병
◎지 그 양반은 남방띠었는디 남 노릇을 豫어들 같은
는 께일루 데가리여. 그래서 인자
77? .
하은 선윈치 모찌래서 집이 하나분지가 욱
누가 하나 뜬야
. 을러쓴 기판부라
채서 으랬냐
우리각 나중에 탄 것쓴 어; 구고 동문께. 그라고 앞전에
7보고 가자 그캤어 . 익은 선원인 친= 사람은) 고완부억.
? 그란은 정열이 그 처른이 탔어, 거그는◎1
7척익 틀레. 우러는
오르자 거그는 데러자 그랬어 , 둘씩 꾸롤거든, 땍간 썰물이란
77가 닻을 겪왔는디 일산(일똔산) 굵은 떠는 닻을
닉 7이 앵겼어(엉켰머) . 그래서 로 사람이 일등 세라(값판뭔)i
다◎ 슨가락을 대쳐(다척) 부렀어. 그
7처서 거그쓴 내리고 우리:
고요선(전시 글물를 띠거나 전쟁웅으로
熱어. 흐란더 출발할 적에 꾸질 배가
열엔전 부채로 덤잔드는
하고 대답을 했다.
어른은 거7◎ 까지 말허 롤고 쏭을 촐렸긴 니
고요선 간다교 그캤소.'
씰7닉는 '맞全. 그때
쿨럭. 그래서 대판가서 철물을 실었어, 거그서 다시 나와갖고 고요선 된다고 그
랬어. 갖다오은 고요선 임명받는다고. 말하자은, 고요선 간다면 군대에 입대하는
것하고 같은 것이라서 이별을 한다고 가족을 다부르게 됐거든.살림 있는사람은
다 불렀어, 부산으로. 그때 집이토 통지 있었을 것이요
할머니는 연락을 받지도 못했고 가지도 않았다고 조용히 대답했다.
이게 부산 와서 고요선이 되는디 긍께 저놈들이 급할 때 아녀? 고요선이 되은 한
국 선원들이 도망치고 그라니께 대판 가서 짐을 푸고 돌아와서 정식으로 됐다 그
말이여. 새 배라도 배가 느려 대판까지 닷새가 걸렸는디 일본 군항이 어디어디 있
냐 허은 사세포라는 데 있고 구레, 요항, 쓰라구가 있고 또 요꼬스까이가 있고.
선장이고 사관은 모두 일본놈이여 한국 사람은 몇이 (몇 명)밖에 안 돼 .
한국사람이야 하라은 하라는 디로,죽으라은 죽으란 디로, 한국 사람처럼 많이
죽은 디가 옳어 .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서 거시기 구레 가서 다 장비를 허는디 일본놈들 재력이 다 엎어질 판이라 대
포도 음이 야포를 실었어. 그때는 석탄을 땠어 , 지금은 기름이잖어? 선원만 해도 서
른너이가 됐어 . 지금은 사만 톤 오만 톤 되도 스물너댓밴이 안 쓰지만 말이여 . 그라
교그리고)군인을 열서이(13)를 실었어. 그놈들은 기관총 거시기 끈인(네 명)하고
또 쓸데을는 대포지만 그거 손질하고 다꾸라야라고 도라무깡보담 豊깜 작은 것인
7,우리말로 하자은 폭뢰라고, 잠수함 잡는 거 , 그것도 손질하고 그랬어
7관 딱 조정해서 바다로 떠냉기은(떠넘기면) 속에 까랑져서(가라앉아서) 터지
는그것을 니 개(네 개)나실었어 그리고 갔어‥‥그리고 인자 한국까지 못 돌아
와진消‥‥‥ 그리 못 돌아오과‥‥‥ 나 혼자만 돌아와서‥‥‥ 살어서·
나는 혹 염려되어 할머니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별 표정 없는 얼굴
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하긴 그 시절이란 게 새삼 얼굴로 올라
올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숱하게 외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했지만 한번도 외할머니
가우는것을본 적은 없다. 딱 한 번. 환갑잔치 때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그리면서
잠깐 우셨다.
어째서 못 왔는고니 (왔는가 하면) 구레 항공대에서 휘발유를 싣고 남양까지 몰고
뻐 사이판마리아나군도까지 몰고가야돼 화물선하고,호위선하고모두서른
야덩 퍽이여. 우리 배가 제일 늦었어 , 구 마일로 가니께. 죽고사고(죽자사자) 갔어.
? 라인루 가니께 죽어나. 그러나 잘 갔어 , 무사히 사이판까지 갔단 말이여 . 간 도
중에 배 두 척밴에 안 해졌어 (당했어). 미국놈들 거슥에 .
도중에 공습을 받았느냐고 내가 물었다.
공습이 아니고 잠수함헌티 무기 싣고 가던 두 척이 당한 거여 . 인자 사이판까지는
잘 갔는디 도라꾸섬이라고 하는 디까지 갈 예정이었는디 그 도라꾸도는 사이판서
메칠 더 가야 되는 디여 도라꾸 항공대에 기름 퍼줄라고 말이여.근디 우리 배 선
장이 무서워서 꾀를 냈어. 거슥(거시기)도 옳다 물도 모지랠(모자랄) 뿐만 아니라
석탄을 더 실어야 허는디 우리 배는 당까(탱크)라 더 못 실어 , 가기는 하지만 돌아
오지를 못한다, 억지를 쓴 거여. 그람 할 수 옳다, 해서 따른 배를 한나(하나) 그리
돌리고 사이판으로 들어간 거여. 그래 사이판에서 기름을 푸고 나서 돌아을 판이
라. 돌아을 건디 일이 뫼얀게 (묘하게) 되베린단(되버린단) 말이여.
사이판 슴(섬)이 수십 개로 돼 있는디 그 근방 댕기던 객선이 공습을 받았든가 으
챘든가 깨져부렀어 . 배들 중에 우리 배가 천오백 톤으로 제일루 즉어 (작아) 그래서
우리 배를 객선으로 쓰겄다고 사이판 남양청에서 딱 끊어베렀다(정해 버렸어) 그
말이여 . 그랑께 일본 안 보내주고 그냥 준저앉아 베렀다고. 그래서 거그서 한 달이
나 또 있었어 . 항내에 배를 달아매놓고‥‥‥
나는 다시 할떠니를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깊어지고 길어진다는 것은 결국 할이
버지가 돌아가신 때가 가까워져 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여전히 주
름 깊은 얼굴로 같은 표정이었다. 할아버지와 헤어지던 당시를 생각하는지 아니면
오래간만에 찾아온 손자놈 갈 때 뭘 좀 더 해주어 보내야 할까,를 궁리하는지 알 수
없었다.
으짠(어떤) 수가 있는 고니‥‥‥ 우리 배가 참 어중간해. 사이판에서는 팔구백 톤
짜리가 객선을 해야 좋은더 천오백 톤짜리를 객선으로 쓰자니 登깜(조금) 어중간
타고. 더군다나 객선도 아니고 화물선이라놔서, 배도 늦고 그래논께. 그래서 우리
를 바라오 본청에 넹게부렀어. 즈그들도 한 번 온어논(얻어놓은) 건께 처분이 안
돼. 반납이 안 돼. 가랑께 할 수 옳이 갔어. 바라오 본청으로.
사이팔에서 바라오까지 사흘 걸려. 제1차대전 때 독일이 관리하던 딘디. 바라오
에서 또 짐을 싣고 인도네시아 바리코파발이란 디를 갔어 그 전에 화란 영톤디 , 보
루네오 이짝(이쪽)은 영국 영토고 저짝은 화란 영토고, 거그는 두 가지로 갈라져 있
어. 거그서 짐 퍼주고 다시 바라오로 오다가 사고가 났어.
응, 기뢰 . 미국놈들이 이렇게 바다에다가 띄워논 것. 자석이 들어서 쐬꼿(쇳덩이)
이 절에(곁에) 붙으은 폭발하게 돼 있거든.그것에 걸려서 우리 배 한쪽이 깨졌어.
같이 오던 다른 배는 예인선하고 경호선을 부르러 바라코파발로 다시 가고 우리 배
는 이렇게 무인도에 型짝(바짝) 붙여왔어 왜 그런 고니 폭격기가 공습을 할라은 툭
터져 있어야 하는디 그라니께 배가 숨는 것도 되고 폭격기가 섬에 부딪힐까 싶어
공격을 잘 못 해.
다음날 밤에 미국 B25 폭격기가 왔어 . 츰(처음)에는 이렇게 폭격을 할라다가
뒤에 섬에 의지를 하고 있어서 공격을 잘 못 하고 이번이는 이짝으로 돌아서 공격 을
했어 , 폭탄 시 개(세 개)가 떨어졌어 .
나는 배 이물 쪽으로 도망을 갔는디 가은서 본께 자네 하나부지하고 재맹이 즈
성하고 기관실로 들어갔어 . 기관부라 놔서 그리 들어간 거여 .
한나는 바다에 떨어지고 또 한나가 딱 기관실로 떨어졌어 , 그것이 터지은서 ◎
하늘로 튕겨져서 정신을 놔베리고 말었어 .
내가 상처가 있으셨냐고 묻자 어른은 낡은 러닝셔츠 목구멍 부분을 끌어내려 흥
터를 보여주었다. 목 부분에서부터 아랫배까지 쟁기질 해놓은 것 같은 굵은 흥터가
살을 찢고 솟아나 있었다
"야(얘) 하네(할아버지) 죽었다는 기별 듣고 딱 일 주일 있으니께 해방됩디다. "
어른이 다시 속옷을 고쳐입는 것을 보며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모기 피해 바닷가
나갔던 아이들이 토란도란 골목길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할머니의 나이 스물여섯. 청상에 혼자 되어 지금까지 혼자 사시며 재가도 안
하고 자식 삼남매를 물해질과 장사로 키우셨다. 바지런하지 못하고 억척스럽지 못
하면 살기 어려운 외딴 섬에서 어떻게 자식들 키우면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3
일이 몸에 배어 여든 넘은 지금까지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신다.
할머니는 여수에 나오셨을 때도 섬으로 들어가려고만 했다. 섬은 일이 있기 때문
이다 밭도 매고 염소도 키우고(언젠가 다 키워놓은 염소를 누가 훔쳐가서 몹시 속
상해 한 적이 있었다)쑥 캐고 물 나면 미역 따서 말리고 갯것 해서 삶고모자반거
둬 팔고 하신다. 그렇게 번 돈은 오래도록 손자들, 증손자들 용돈으로 변하며 지내
오는 중이다.
삼부도
삼촌은 키를 잡고 나는 조수를 하고 이물 쪽에는 모자와
뻬로 몸을 두른 세 여인네가 앉았다. 할머니와 이모,그
리고 홍주네 이모. 그물 손질할 때 꽁꽁 언 손과 몸을 푸
느라 숭어 한 마리 썰어놓고 앉아소주 한잔한 우리는
이번에는 거문도와 십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큰 삼부도
로 가는 중이다.
삼부도는 소, 대, 이렇게 두 개로 된 무인도이다.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역
시 여러 척 보인다. 꾼들이 가파른 섬 옹두라지를 올라타고서 늘씬하게 빠진 낚낏
대를 획, 획, 던지고 있다 그 사람들 덕에 먹고사는 섬사람들이 여럿이지만 막상
그 모습을 보면 씁쓸한 느낌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최신형 장비를 가
지고 있으며 너무 당당하다 섬을 낚시터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을 지나 섬
밑등에 배를 댔다.
홍주네 이모는 외할아버지 둘째형님의 딸로 사촌형제들 사이에서 흘로인데 사람
좋은 순한 인상에 성품도 너그러워 싫어하는 이들이 없다.
어른(홍주네 이모의 아버지)이 일본에서 모자공장을 하다 돌아가시자 외할아버
지 바로 밑의 어른이 이모를 맡았다. 이 어른은 일본에 유학하여 돌아온 다음 평양
에서 어떤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는데 그때 데리고 가 이모는 한때 평양에서 살았
다. 교사였던 어른은 좌익을 하셔서 여순반란 사건 때 돌아가셨다(내 외가는 여순
사건 때 여러 분이 돌아가셨다. 이 글에서 그 이야기까지는 할 수 없으나 그 사건으
로 인해 생겨난 결핍과 연좌의 고통은 몹시토 오래 갔고 아직도 남아 있다) .
이모 뵙는 것도 즐겁지만 이모부 뵙는 것도 한가지 기쁨이다. 이 이모부는 신추
마을 출신이다. 사람 푸근하고 넉넉하지만 소주를 너무 좋아하셔서 이분과 연관된
일화가 많다.
홍주이모네는 외갓집 바로 윗집이다. 외갓집은 할머니와 외삼촌만 살기에(외삼
촌네는 일찍 여수로 이사를 나갔다. 페리호 선장 시절 외삼촌은 하루는 여수에서 ,
하루는 거문도에서 지냈다. 지금은 출장소 소장을 하시기에 거문도에서만 계신다)
늘 집이 비어 있다시피 한다.
이모부는 자기 집으로 올라가거나 바닷가로 내려가다가 일삼아 들러 탁자 위의
소주병에서 한 잔씩 홀짝홀짝 하곤 해서 할머니한테 잔소리를 잘 벌어들인다. 낡고
작은 배 한 척을 가지고 있어 그것 가지고 이런저런 일을 하며 밤에는 장어를 낚으
러 나간다. 흔자 밤바다에 떠서 낚시를 하자면, 그것도 재미가 아니고 직업으로 하
자면, 노곤하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해서 또 소주를 드신다. 옆에서 말리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어서 취해 갑판에 눈워 잠이 들어버리기 일쑤이다.
장어가 한 마리 물어도 쿨쿨, 또 한 마리 물어도(낚시가 여럿인 채비이다) 쿨쿨,
그러다 바닷속에서 잡아끄는 힘에 놀라 깨어나기는 하지만 어떤 경우는 그 힘이 너
무 세어 잡아 올리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줄을 끊을 때도 있다.
할머니와 이모, 흥주네 이모,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은 간조가 되어 섬 밑등이 까맣
게 드러난 큰 삼부도에 내렸다 이제 갯것이 시작된 것이다. 세 여인네는 각자 흩어
져 능숙한솜씨로 바위에 붙어 있는 것들을 딴다. 이게 또오래된 섬사람들의 일이
다. 사내들은 늘 어장 나가서 고기잡이하던 것을 이야기하지만 아낙들은 갯것 하던
때를 말한다. 여수나 부산에서 바닷가에 있다보면 물 빠진 걸 보고 거문도 출신 여
인네들은
"물 빠진 거 봐라, 어이 오늘이 멩물(몇물)이것는가? 아이고 삼도 가서 갯것이나
했으은 좋겄다. "
소리를 자주 했다
저 바위에 달라붙어 있는 것은 하루의 반은
물속에서 살고 반은 햇빛 아래에서 산다(그
7서 맛이 찰지다). 바위와 바위의
틈새에서 산다(그늘이 저들
을 키운다) , 조용히
다(모여 있는 것들 중에서 사람처럼 시끄러운 생물이 어디에 또 있는가)
▲ 맨 오른쪽이 구죽, 그 위가 성게, 맨 왼목이 거북손, 가운데가 비말이다.
구죽
구죽은 깊은 물속에 살아 잠녀질이나 그물로 잡는다(섬에서는 꾸죽이라 부른다).
태생적으로 나는 패류를 싫어하여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 와중에도 유일
하게 맛이 괴로운 것이 껍질 달린 것들이었다.
사람들과 술집에 가게 되면 으레 안주를 무엇으로 할까, 말이 나온다. 아무거나
상관없어, 소리를 한 십 년 넘게 해오다가 종내는 조개탕 앞에 모셔두고 마늘과 "
추로만 안주했던 경우가 왕왕 있어 근래에는 조개만 빼고 아무거나,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어 달다. 으 시원하다. 소리를 하는 조개가 내 입에 들어가면 참으로 견
디기 힘든 맛이 되는데 어렸을 때에는 참고 많이 먹긴 했다. 그 중에서 그래도 달게
먹었던 것이 구죽이었다.
『자산어보』에 구죽은 '큰 것은 그 껍질의 높이와 너비가 각각 대여섯 치 정도 되
며, 입구 바깥의 나선형 골이 끝나는 가장자리를 둘러싼 곳에 칼날같이 날과로운
성(城)이 있다 문(입구)에서 곧 하나의 골이 시작되고 있고 이 골의 안쪽 골 언덕
띠것은 안팎이 있다)은 험하게 깎여져 날카로운 각을 이루고 있으며 각의 끝도 역
날카롭고 바깥 골의 끝도 역시 모두 높이 솟아 있다. 이것을 잘 갈아서 술그릇이
나 등기(燈誤)를 만든다' 고 나와 있다
글만 보면 무슨 사람 해치는 표창 같은 느낌이나 눈으로 보면 뿔 달린 동그란 껍
질에 은색 벽면이 눈부시고 입구를 막은 두터운 마개가 참으로 예쁘다. 맛 또한 독
이 없고 순하고 맑아(조개 종류의 美는 맛이 덜하다) 생것으로 즐겨 먹는다. 할머니
가물해꾼 시절에 숱하게 잡아와서 온 식구 심심찮게 먹었던 것이다. 일전에 구죽
7l 멸종을 하여 잠녀들 벌이가 뚝 떨어졌는데 근래에 들어 다시 나온다고 한다.
성게
성게,일명 밤송이조개는가시가나 있다. 『자산어:조에 '방은 다섯 판으로원을
이루고 있고 전진할 때에는 온몸의 털이 다 흔들리고 굼틀거린다. 꼭대기에 입이
있으며 손가락으로 들어갈 정도이다‥‥‥ 알의 모양은 응결되지 않은 쇠기름7牛腦
같고 색은 노랗다‥‥ 맛은 달고 날로 먹기도 하고 혹은 국을 器여먹기도 한다'고
설명이 나오는 게 바로 성게이다 .
이진 정말 맛이 뛰어나다 셉어봐야 심심하기만 한, 그래서 맛보다는 이름 값으로
먹는 전복보다 훨씬 낫다. 밤송이 같은 그것을 까만 가시 피해 칼로 梁개놓으면 내
장 사이에 노란 알이 보인다. 한 마리에 잘해야 한 수저 정도 나오는 것을 입에 물
면 그 고소하고 황흘한 맛 덕분에 잠시 딴 세계에 다녀오는 듯했다.
나는 바다 돌 틈에서 나는 것들 중에 맛의 으뜸으로 이것을 친다. 그러나 워락 양
이 적어 한 열 마리 먹어보았자 입 속에 고소한 됫맛만 남고 껍질은 수북해서 괜히
미안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의 사촌으로 승률성게가 있다 성게보다 가시가 훨씬 짧고 가늘며 노란색이
다. 씨산어보』에 재미있는 말이 있다. 이 승률성게가 변하여 파랑새鑛◎鈴脚가된
다는 것이다. 1998년 전남 신안군에서 나온 『자산어보』 개정판에는 전혀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당연히) 나와 있다.
그러나나는 믿기로 했다 믿고 싶다 성게가 변해서 새가되다니.그것도바닷속
에서 사는 밤송이 같은 조개가 푸른 하늘을 날며 아름답게 노래하는 파랑새가 된다
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런 아름다운 변신은 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승률
성게가 파랑새가 된다는 것을 믿기로 했다. 산에서 사는, 그 부리와 다리가 붉다는,
상서롭다는, 어여쁜 새의 고향은 푸른 바닷속이다.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그
자유로운 날개의 모태(母胎)는 날카로운, 검은 가시 속인 것이다.
비말
섬에서는 배말이라고 부른다. 전복의 종류로 『자산어보』에 '흑립복(黑笠獲)이라고
하며 외모는 삿갓과 비슷하나 삿갓 자체는 곧 껍질이다. 체색은 흑색이며 안쪽은 윤
택하고 평평하다. 고깃살은 전복과 같이 등글다'고 나와 있다. 바위에 붙어 산다.
칼로 생살을 오려내어, 그 자리에서 오물거려 보면 별미이다. 껍질 안쪽에 시커먼
내장이 있는데 변비에 좋다. 껄질이 예뻐서 예
전의 아이들은 소꿉놀이로 쓰고 어른들은 윷
놀이용 말로 썼다.
거북손
일명 대감감투라고 한다. 생긴 게 꼭 거북의 발톱이나 에헴거리는 대감들의 감투
처럼 생겼다.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면 느려터지기가 한이 없다는 것과 도무지 생산
적인 것을 하는 게 없다는 점에서. 또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 몸집만 늘어난다는 점
에서 그 둘은 매우 닳았기는 하다.
그러나 생긴 것과는 달리 맛이 좋다. 섬에서 살다가 여수로 이사 나간 뒤 할머니
는 꼭꼭 챙겨서 이런 것들을 보냈다. 한솥 삶아 빙 둘러앉으면 고등, 배말, 홍합 등
속중에서 가장먼저 이것에 손이 갔다. 할머니의 공수는지금도 연연히 이어져 우
리 집 벙장고에 한두 뭉텅이 아직도 들어 있다.
간혹 섬의 먹을거리들이 그리을 때 데쳐먹기도 하고 식구 중 누가 감기 몸살로 앓
아 누을 때 무와 함께 맑은 국물을 우려내기도 하고 손님들이 찾아왔을 때(육지 손
님들이란 늘 먼 섬에서 온 것들 먹기를 원한다) 탕이나 찌개를 器여내기도 한다 팔
십 넘은 할머니가 북두갈고리 같은 손으로 무인도를 들쑤시며 몸뻬 자락에 바닷물
묻혀가면서 딴 것이 육지 먼 곳의 손자들 술안주와 반찬이 되는 것이다.
이게 좀 일이 많은가. 따오는 데 반나절 꼬박 걸리고(그나마 남의 배를 타고 가면
삯을 내야 한다) 삶아 밤 이슥토록 일일이 까서 씻고 적당한 크기로 냉동시켜 놓는
다 그게 어느 날 여수 어머니께로 가고 그곳 냉동실에서 날을 보내다가 마침내 우
리들에게 옮겨오는 것이다
일의 노고를 잘 알고 있는 데다 할머니의 연세가 웬만하시기에 늘 마음에 걸리지
만 그러나 걸리는 상태로 머물고 만다 할머니는 일을 손에서 놓는 순간 돌아가실
것이다. 이 땅의 할머니들. 봉건시대의 마지막 세대. 고달픈 식민지 치하를 겪었고
처참한 전쟁을 치른 다음 산업화로 밀어닥친 전통가족의 붕괴를 고스란히 맛보는 이
들, 격동과 흔란의 시간을 보낸 이들 그들을 버티게 하는 게 무엇인가. 남은 가족들
을 위한 끊임없는 노동. 그 지루한 노역을 이용해 충돌과 분해를 이겨내는 이들.
할머니는 긴긴 오후 해 내내 섬파 바다가 만나는 곳에 엎드려 계셨다.
백도
밀물이 차오르기 시작하고도 한참이나 갯바위를 돌아다니다가 이윽고 배에
올랐다. 햇살 푸르던 하늘에서는 어느덧 하루가 늙어가고 있는 중이다. 삼부도
를 빠져나오자거문도 반대편으로 아득히 전설처럼 서 있는 백도(自島)가보
인다. 섬 중에서도 정말 아름다운 곳. 이름다운 것을 넘어 신비롭기까지
한 섬. 사적 및 명승 제7호.
7..
백도 관광의 그 백◎柔 서른차홀 개와 무인도이며 거문도의 자랑
거리이다. 상백또군招邦과 하백도군이 비슷하게 널려 있으며
있다. 바위가
쪽나무, 동백
주민들이고 바
다제비 , 가마우지 들이 과객들이다
이곳은 전설이 아주 많아 나도 자주 듣고 자랐다.
옛날에 진시황의 명령으로 불로초를 찾으러 왔던 이들이 탐라국을 가는 도중에
심한 안개를 만나 바다에서 길을 잃었다 그때 샛바람이 살짝불어왔는데 바람 속
에 어떤 향내가 섞인 육지 냄새가 났다. 아주 향기롭고 은은한 향내였다 냄새를 따
라가 보니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절경의 섬이 나타났다 향기는 섬의 벼랑에 피
어 있는 풍란(風蘭)에서 나는 거였다. 하여 그들은 풍란을 불로초로 여겼다조 한다
거문도 풍란(風蘭)은 키가 작은 대신 자태가 곱고 향기가 뛰어나다. 함부로 캐가
버린 바람에 일찌감치 씨가 말랐다. 어찌 안 그러겠는가. 참말로 그악스럽기 이를
데 없다. 이게 들판의 질경이처럼 널려 있는 것도 차니고 사람 손 닿기 어려운 절벽
틈새 같은 곳에서 이슬만 받아먹고 사는 것인데 잘도 찾아내어 멸종을 시켜버린 것
이다.
나는 도대체가 불만이다. 다 제가 좋아서 자리잡은 돌이나 나무나 풀을 왜 그렇게
집으로 옳겨대는가 말이다. 보고 싶으면 가서 보면 될 것을. 보러 가기 어려우면 그
리워하면 될 것을.
(생각나는사람이 있다 충남 태안에 사는분으로 나무를심고가꾸는 게 직업이
다. 그래서 나무박사다. 어쩌다 산에서 귀한 나무를 발견하면 이분의 고행은 시작
된다. 극성스런 이들리 혹 캐가지 않을까 싶어 이틀이 멀다고 산을 찾아올라 잘 있
는 것을 확인한다 그렇게 길게는 근 일 년 노심초사 기다렸다가 마침내 열매 맺어
씨앗이 터지면 그것을 받아다가 농장에 심는다. 그분은 욕심으로 인해 산이나 나무
를 상하게 하지 않는다. 나무나 꽃이나 돌멩이까지 본디 자연의 것이고 그보다도
먼저 저 자신의 것이다. 캐는 게 임자라고 누가 그러는가. 몰래 캐고 뽑아가는 사람
이 그러는 거지.)
억지로 옮겨놓은 것은 죽기도 잘하고 산다 해도 건강하기가 어렵다(지극 정성으
로 잘 키우면 그나마 괜찮다). 특히 풍란은 그렇단다. 살아 있는 것을 자연으로부터
함부로 탈취해 몇 번 자랑거리로 써먹다가 죽게 만들어놓고 아이들 다마고치가 어
떻다고 말들 한다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한다. 애들이 누구보고 배우는데?
백도의 백자를 흰 백(白)으로 쓰는 이유가 두어 가지 있다.
먼저 저녁 노을이 질 때 백도를 보면 백지처럼 하땅게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설
이 있고 다음은 전설이다.
옛날 옥황상제가 아들을 이곳으로 보냈는데 때가 지나도 올라오지를 않았다. 용
왕의 딸과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아들은 당장 올라토라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했
다. 화가 난 옥황상제가 가서 데리고 오라고 신하를 보내기 시작했다.
염려 마십시오, 하고 내려간 신하들도 가는 족족 이곳 경치에 반해(또 다른 이유
도 있찌 않을까, 용왕의 딸이라면 공주인데 시녀 없는 공주가 있을까?) 되돌아오지
않아 싱히 염려를 끼쳤다. 모두 97면의 신하를 보냈는데도 똑같았다. 화가 머리끝
까지 난 상제가 97명의 신하와 까들. 그리고 결코 며느리필 허락할 수 없는 응황의
딸을 모두 바위로 만들머버렸는데 그게 백도이다. 그래서 百에서 일획을 뺀 白을
쓴다고 한다(95명이므로) ,
백도의 바위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전설이 거짓말 같지 아니하다. 저문도에서
볼 때 운쪽에 있는 게 하백포로 그곳의 바위들은 모투 남성적이초 거칠다. 그러니
까 옥황상제 아들과 신하들의 현화다. 서방바위(남자 성기를 빼어 닮았다) 궁성바
위 감투바위 칼등바위 도끼바위 곰바위 등이 있다.
반면 상백도는 아주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병품바위 형제바위 매바위(매
의 모습과 똑같이 생겼으며 십 년 전쯤에 이것을 훔쳐간 이가 있었으나 지금은 복
원되었다) 쌍둥이바위 물개바위 등이 있고 오리섬, 나루섬, 노적섬, 탕근대가
있다.
예전에 거문도에서 백도 가는 유람선의 선장이 바위틀을 소개하다가,
‥‥‥씬리고 저것은 야구글러브 바위입너다. 꼭 야구글러브를 닳아서 나가 짓습
니다(지었습니다) ."
해서 사람을 뭇겼다던가,
백토는 부시i
절해고도는 바다와 연관되어 크고 작은 인명피해가 잦다. 백도 못 미쳐 삼부도에
서는 어선이나 낚시꾼들에게 사고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동안 백도에서 사고
당한 이는 아무도 없다.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다.
사람들이 대대로 일러 그곳은 영험한 곳이라 한다. 아주 선량한 신(神)이 산다.
예전에 백도에 어장 와서 일을 하다보면 갑자기 바위 위에서 자그마한 돌이 와르르
쏟아지며 배 옆으로 퉁퉁 떨어지는 때가 있단다. 그러면 뱃사람들은
"얼른 닻 올려라 돛 달아라 "
해서 부리나케 거문도를 향해 노를 저었다. 하늘온 맑고 바람도 없지만 대대로 이
어져 내려오는 지혜이자 가르침이다. 그런 날은 얼마 있지 않아 급작스런 돌풍이
일거나 폭풍이 불어닥친다. 백도의 신(神)이 신호를 보내주어 섬사람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켜 준 것이다. 이상한 것은 백도에는 그렇게 떨어질 만한 잔돌이 없다는 데
있다.
간혹 아기 울음소리나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운 처량한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지금
도 전북 전주지역 불교 신자들이 일 년에 한 번씩 찾아와 재(齋)를 올린다고 한다
저녁
"후 후, 마을회관에서 주민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지금 꽁차배가 들어왔으니
꽁치가 필요하신 분은 바께스를 갖고 산파시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
려드립니다‥‥‥‥
그 소리에 핏 웃음이 나왔다 방송을 시작하겠다는 뜻의 그 후후, 입바람 소리와
다시 한 번 알려드리겠다는 판에 박은 소리가우습기도 했지만 여러 해 전 이곳에
서 들었건 방송이 떠올라서였다.
아마 청년회 회원이 방송을 하는 듯했는데 술술 말 잘하는 이들도 마이크만 쥐어
주면 왜 그렇게 딱딱하게 변해 버리는 것일까 일제식민지 때부터 군인들이 나라를
주무르고 백성은 군 · 관(軍 官)에 쩔쩔맸던 억울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
"후후, 아아, 삐이- 후후, 아아아. 마을회관에서 덕촌리 주민 여러분께 알려드립
니다. 금일 상오 십시 공분부터 해군기지에서 파견나온 이발병께서 만 육십 세 이
상 되시는 마을 어른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이발을 시행하고자 하오니 이발코저 하
시는 분들 중에서 금년 만 육십 세 이상 되시는 분들께서는 금일 상오 십시 공분까
지 공히 마을회관 앞으로 모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아, 다시 한 번 알려드리
겠습니다‥‥‥
그때가 생각나서 나는 웃고 이모는 방송을 듣자마자 대야를 이고 바닷가로 달려
나갔고 조금 있다가 학꽁치를 수북하게 사왔다. 학꽁치는 회로 먹어도 맛있지만 등
쪽으로 길게 칼을 넣어 창자와 등뼈를 없애고 넓게 펴서 말려놓으면 아주 훌릉한
건어포가 된다. 이모부가 좋아하신다 하여 이모가 적잖은 양을 사온 탓에 저녁상을
물리고 모두 덤벼들었다.
섬에 밤이 내리고 3대(代)는 전깃불 아래 신문지 깔고 앉아 꽁치를 손질하기 시
작했다. 댕댕, 오래된 시계는 여전히 게으름 피을 줄도 모르고 여덟시를 알린다.
"한 꼬푸 하라은. 꽁치 사시미에다가."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며 청한다
"밥 묵었는디요."
"사다 놓은 거 있다. 한잔해부러라."
이모까지 거들어 나는 한잔하기로 한다. 이모가 회를 떠 접시에 올려주며 조금 전
71 보니까 먼 친척 되는 누구네 아들이 왔더라고 말을 했다
"아직 안 갔구나. 어디서 봤냐?"
"갱번(바닷가)에서 봤소."
겨기서 산다고 집 보러 왔단다. "
◎ 집도 그란답디 여 ?"
"이 너메 삼밭 해묵고 산다고 그라드라. 좀 좋냐, 겡치(경치) 좋고."
"그 집 어른이 여수 살었지다?"
'나포 잘 몰라. 여수 살다가 언진가(언젠가) 사울로 이사갔다고 그래. 아. 이
방에
불 좀 질러놔라(보일러 좀 켜라) ." ◎
"요즘 다시 살러 들어온 사람들 많어요?"
내가 한 잔 카, 하고 나서 물었다.
"저짝에 누구네 아들이 또 와서 산다고 그려고, 한 멘이 있는갑드라. 아이고 이
은 메납다(나쁘다)."
할머니는 한쪽이 밟힌 꽁치를 저만치 밀어놓으며 나를 향해 말을 이었다.
"너도 온 짐 (김)에 꽁치 좀 만 원어치 사서 짱커 갖고(잘라 가지고) 몰래주래(말
려줄까)?"
"아니에요. 옛날에 주신 것도 남었는디요."
"그것이 안직까지 남었어?"
"71."
"그래도 온 짐에 좀 갖고가은 좀 존냐? 친구들하고 술 묵을 때 안주도 하고
라은 "
그71
술 한 잔을 따라 드리자 할머니는 반 잔쯤 마시고 가볍게 도리질을 쳤다. 할머니
의 주량은 딱 그 정도였다.
"너가 데모크라시 타고 왔다고 했냐?"
"순풍호 타고 왔어요."
나는 다시 할머니 잔에 술을 채웠다
머니는
"오매, 안 해. 안 묵어 . 너나 많이 묵으
라은(먹어라). 취한다 취해 "
하다가,
"엄마, 손주가 따라준 건께 한
더 하시요야."
하는 이모의 권에 못 이겨 반의 반 잔을 더 마시고 다시 에헷, 도리질을 쳤다
"페리호 안 댕기고부터 비쌈도 비싸야."
'◎어요. 밑구녕이 물속에 안 들어간 배 주제에 비싸기는 더 비싸다니께요."
"뭔 소리냐?"
이모가 호호 웃으며 물었다.
"데모크라시 첨 나왔을 때 보고 할머니가 했던 말이요. 그냥 등등 떠 있는 배라
71"
할머니가 말을 받았다.
'배가 밑구녕이 이렇게 물속으로 쑥 들어가야 쓴단 말이제 뭔놈의 배가 이층으로
는 지논 것이(만들어놓은 것이) 미자발이 불안해서 꼭 넘어가 베릴 것 같드냐안."
그쯤에서 나는 한 잔 마신 덕 좀 보려고 할머니께 옛날 노래 한자락 청했다 할머
7잠시 칼손을 놓고 가락은 다 잊어버리고 노랫말만 기억하는 걸로 창가가락과
암송을섞어놓은 것처럼 한자락 뽑았다. 멀고 먼 옛날, 할머니의 소녀 시절에(할머
니 친정은 동도이다) 유학 나갔던 동네 토빠들이 방학 때 들여와 학도가에 가사를
따로 만들어 불렀다는 노래이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오늘이 우리 기쁜 날이다
깊으든 정 정신 채려서
동무들과 같이 운동해 보자
마영산이 솟으니 솟아오르니
동도 소년아 동도 소년아
전라남도 거문도 경치 좋은 곳
바다 가운데 솟아 있는 저기 저 산
아무리 대판이 좋단뽄로(좋다고 하나)
거문도 경치에야 대할쏘냐
오래된 시계 종소리가 들리고 또 들렸다.
섬의 에로티시즘
잠녀들
이야기했듯이 나는 어렸을 때 잠녀들의 물해질을 많이 따라다녔다. 반나절 물속
에서 잠수질하고 나온 그들은 추위에 입술이 파랗게 얼어 있었다. 배가 잔뜩 부른
두름박을 짊어지고 물 뚝뚝 흘리며 개신 개신 내가 짐 지키고 있는 곳까지 와서 맨
처음 하는 일은 마들가리를 쌓아두고 불을 붙이는 거였다.
탁탁탁 소리를 내며 장작이 불꽃을 피워올리면 찬물 속에서 일하느라 오그라붙었
던 손을 앞으로 내밀며 모여들었다. 이빨 부딪치는 소리 , 코 훌쩍이는 소리 , 성님네
가 딴 그 전복은 내가 몬야(먼저) 본 것잉께 반씩 노눕시다(나누자), 소리에 잠시
바글거렸다.
얼었던 몸이 적당히 녹으면 그들은 옷을 갈아입었다. 처녀나 새댁들은 그래도 내
가 남자라 저만치 뒤로 돌아갔다. 언뜻 돌아보면 바위 사이에서 하얀 등짝이나 엉
덩이가 슬쩍슬쩍 보였다. 부드러운 어깨선. 젖먹이 딸린 이의 퉁퉁 불은 젖. 유행가
가사에 바닷물에 씻은 살결 옥(却같이 뭐 어떻다는 소리가 나오는데 사실 바닷물
은살을트고 타게 한다 그러나그들의 맨살을보고 있노라면 마치 바닷물에 씻어
서 그렇게 捉얗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그들이 시커먼 바위 틈에서 옷 갈아입는 모습은 한마디로 눈부심 그 자체였다. 양
극단이, 거친 바위와 젊은 아낙의 매끈한 살이 이상하게도 서로 어우러지고 있어
더욱 그러했다. 그럴 때 만약 어른 사내들이 우연히 지나간다면 그들은 먼저 알고
돌아가거나 기다렸다가 지나가지만 아이들은 이게 웬 호재냐 싶어 마치 못 본 척
다가오다가 욕을 한바가지 얻어먹고 쫓겨가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비해 나는 훨씬 자유스러운 존재였다. 반나절 내내 그들의 짐을 지키고 앉
아 세월아 네월아 했으니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하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나를 피해
멀어졌고 그래서 나는 더욱 감질이 났다.
나의 감질을 풀어주는 이는 따로 있었다 젊은 여인네들이 멀리서 숨어 갈아입는
데 반해 동작 느린 아주머니들은 그냥 앞에서 갈아입었다. 그래도 사내 눈이라는
게 하나 있어 피한답시고 몸을 돌렸다. 하여 쌍방간에 편한 자세가 나왔다. 등돌리
고 몸을 구부려 엉덩이를 내 쪽으로 하고 고쟁이를 내리니 아주머니들은 내가 안
보여서 좋았고 나는 참 거시기한 그곳을 뒤에서 정면으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잠녀들은 이제 하나둘 없어지고 섬에서도 몇 남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이들도
다들 중늙은이들로 예전의 그 젊은 처녀나 새댁은 이제 아예 자취도 없어 머잖아
잠녀란 직업이 사라져버리지 않나 싶기도 하다(해물이 있는 이상, 또 해물 값은 계
속 올라가기 마련이어서 물론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잠수 장비를
갖춘 스쿠버들이 그 일을 많이 한다) .
고등학교 일학년 여름에 처녀 잠녀를 마지막으로 본 적이 있다.
어떤 여름
그 해 여름에는 홀로 섬에 들어갔고 또 이상하게도 섬 친구들도 없었다. 몹시 심
심하던 어느 날 나는 해수욕장 너머, 내가 지렁이를 팠던 돌밭 뒤, 큰 갯바위가 펑
퍼짐하게 퍼져 있는 새끼메로 낚시를 갔다. 해는 중천에서 뜨겁게 내리쪼이고 고기
는 물지 않았다.
혼자 심심하게 갯바위에 앉아 있었다. 저만치 해수욕장에서는 사람들이 헤엄치고
있고 욕장 가운데 바다에서는 놀러온 배들이 닻을 놓고 좀 촌스런 노래를 틀어대고
있었다. 뱃사람들은 자기가 뽕짝을 틀어놓은 게 대단히 훌릉한 일이나 되는 양 어
깨를 으쓱거리기도 했다. 한참이나 무료해 하고 있는데 두름박 하나가 천천히 다가
왔다.
물해꾼은 떼로 몰려다니기 마련인데 그는 혼자였다. 물해질하기에 마땅치 않은
시간에 누구라서 흘흘 단신으로 오는가 싶어 바라보자 뜻밖에 젊은 여인네가 쑥 을
라오더니 휘파람을 내갈기고는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머 너 영훈이 (내 어렸을 적 이름이다) 아니냐?"
살던 곳 일찍이 떠난 이들은 이럴 때가 난감하다. 저쪽은 이쪽을 아는데 이쪽은 저
쪽을 잘 기억 못한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무조건 인사부터 하고 본다.
그보다 며칠 전 나는 길에서 아이를 업고 어르다가 오다(어머나), 하고 나를 알아
보는 젊은 아낙네를 만났다. 인사부터 하고 보았다.
"너 왜 나한테 인사를 하냐?"
그럼 인사를 해야지 어떡하란 말인가. 나는 뭐가 잘못되었다 싶어 가만히 있었다.
"너 나 모르겄냐?"
아, 둔해빠진 내 감각이여. 그 여인은, 여인이 아직 못 된 또래 소녀였고 내 동창이
었다. 오래되어 얼굴이 기막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얼토당토 않은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알아보는 듯한 얼굴에 인사부터 하고 보는 게 가히 나쁜 방법은 아니었다.
물 위로 고개를 내민 여인네가 물었다.
"방학이라고 놀러 왔냐?"
"71, "
"많이 컸다. "
그는 휘유, 숨을 내뿜고는 다시 자맥질을 했다. 그런데 옷차림새가 달랐다. 물해
꾼들은 검정색 물옷으로 온몸을 두르다시피 하는데 이 여인네는 그렇지가 않고 미
끈한몸매의 수영복 차림이었다. 이십오륵 세 정도? 이런 경우도 있다니. 가만 저
여인네를 무엇으로 불러야 하나, 물해꾼이라 하기에는 수영복을 입었고 두름박을
타고 뭔가를 뜯어 올라오고 있으니 아니라고 하기에도 뭣하고. 나는 낚싯대를 걷어
올리며 조금 혼란스러웠다. 여인네는 다시 올라와 쥐유우, 휘파람을 불었다.
"뭐 많이 있습니까?"
"그냥 재미삼아 해보는디 통 음다'
변명조로 말하는 그의 목 뒤로 묶은 생머리가 바닷물에 젖어 가지런히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물안경도 하나짜리 원형을 쓰고 있었다
물해꾼들은 물안경을 양쪽으로 달린 두 개짜리를 썼다. 어렸을 적 무슨 날인가 나
와 동생들은 궁리궁리 하다가 선물로 원형 물안경을 사드렸으나 외할머니는 한 번
쓰고 나서 고개를 휘휘 내둘렀다.
"못 쓰겄다야. 뭐가 잔뜩 크게만 보이고 멀미만 나드라."
그런데 그는 현대식으로 원형 물안경을 쓰고 있었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내
눈이 휘등그래진 건 그 순간이었다. 매끄러운 어깨와 브래지어 끈, 그리고 곧이어
잘록한 허리와 보기 좋게 퍼진 엉덩이, 늘씬한 다리가 허공으로 솟구쳐올랐다가 물
방울만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내 눈앞에 환한 빛이 지나가는 듯했다.
인어(人魚). 미끈하게 잘 빠진 한 마리 인어. 신화 속에 산다는 그것이, 저 바다
깊숙한 곳에서 옛이야기처럼 산다는 그것이 바로 눈앞에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나는 급작스레 흥분되기 시작했다. 물결에 나풀거리는 긴 머리 잡살 없는 완벽한
몸매, 햇살에 빛나는 살결. 바닷물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부드럽게 휘어감는동
작. 나는 돛대 기등에 묶은 몸을 빼내려고 죽을 용심을 썼던 율리시즈의 그 강렬했
던 윽구와 그를 바다로 이끌었던 사이렌의 유혹을 맛보고 있었다.
아무도 내 몸을 잡아주는 이 없어 나는 낚싯대를 집어던지고 물안경을 쓴 다음 풍
덩 자맥질을 했다. 하늘과 바람의 세상이 파르르 깨지면서 물방울이 잔뜩 일었고
곧 이어 파란 바닷속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저 밑으로 한참 들어가는 중
이었다. 머리와 어깨와 엉덩이와 두 다리가 오도카니 한곳에 뭉쳐져 있었다.
난 용궁이나 뭐 이렇게 이름 붙여야 될 어떤 즐거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바르펀
떨며 자맥질을 한 나는 그의 옆까지 내려갔고 그 와중에도 흰 피부와 너풀거리는
여인의 머리카락의 아름다움에 취해 하마터면 물을마실 뻔했다 낫으로 미역 밑등
을자르던 그는나를 보더니 옆에 있는돌을손가락으로가리켰다. 내가돌을들어
올리자 밑에서 자그마한 해삼이 나왔다 그는 웃었고 우리는 같이 솟구쳐 올랐다
심심한 게 다 뭔가. 같이 자맥질하며 나는 꿈결 같은 환상 속에 빠진 듯 뭔가에 취
해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우리의 배경으로 신화 속의 지중해가 펼쳐졌고 전설
같은 남태평양의 맑고 푸른 기운이 모아졌다. 나는 포세이돈이 되어 그를 희롱하고
아폴론이 되어 뜨거운 태양의 열기만큼 그를 애무하고 있었다 사모아나 폴리네시
아의 자그마한 섬의 소년이 되어 그를 따라 헤엄치고 아틀란티스에서 온 건장한 수
칫 인어가 되어 그를 이끌고 물결을 歌다.
그렇게 헬헬대고 있는데 순간 어디선가 우리의 공간을 깨는 게 나타났다. 영화 같
은 환상이 그대로 지속되려면 돌고래 같은 게 와서 우리 둘 사이를 빙빙 돌거나 아니
면 상어나 바다뱀 같은 게 습격을 해서 내가 여인을 껴안고 피하든지 해야 말이 되는
데 이건 웬 엉뚱한 남자가 냅다 우리 둘 사이로 자맥질을 해 들어오는 게 아닌가.
사내는 나보다 더 능숙한 솜씨로 그를 따라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난 기가 막혔고
그의 능란한 몸 동작에 기가 질려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두 남녀는 이제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같이 들어가고 같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밀려났다. 신화는 깨지
고 전설은 흩어졌다. 저 사내가 사악한 용이나 의뭉스런 문어 따위가 변한 것이라
면 모를까 아무리 보아도 병역 필한 대한민국의 건장한사내로 전혀 하자 없어 보
인 탓에 나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잔병이 되어 물위로 올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잠시 생각하다가 내 즐거움을 깨버린 사내를 너그럽게 용서하기로 마음
먹었는데 이유는 바위 위에 또 다른 수영복 차림의 늘씬한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위로 올라왔다. 물 밖의 여인네가 살풋 웃었다. 팽팽한 가슴과 간신히 그
곳을 가리고 있는 가느다란 팬티 . 아, 나는 더 어리거나 더 들었거나 둘 중의 하나
가 되었어야 했다. 어쩌자고 열일곱의 나이 앞에 이렇게 아름답게 벗은 여인네들이
줄지어 나타난다는 말인가
"어디서 오셨어요?"
"삼천포에서 예 ."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여인네는
"어떻게 오셨어요?"
"신혼여행 왔는데예 ."
행복해하는 얼굴로 다시 살풋 웃었다. 신혼여행이라니. 그러니까 결혼식을 올리
고 첫날밤을 지내기 위해 떠나는 신혼여행을 이 섬으로 왔다는 말인가 나는 다시
기가 막혔다.
"신흔여행요, 신흔여행이라면 설악산이나 제주도 같은 데를 가는 것 아닙니까?"
내 불만은 왜 남들 다 가는 데로 안 가고 또 안 간다면 방구석에 쑤셔박혀 있을 일
이지 왜 하필 이 섬으로, 그것도 이 시간에 와서 내 기쁨을 깬단 말인가, 였다.
"저 사람이 여가 좋다 캐서 왔어예."
여인은 저만치에서 푸우, 고개를 내미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저 나쁜
자
나는 환장
식은 갓 결흔한 아내를 두고도 부족해 내 곁의 여자를 빼앗은 것이었다
할 지경이 되었으나 여인의 살풋함에 예의를 지키기로 했다. 하여 말이 생각과는
다르게 나왔다.
"수영을 잘하시네요."
"원래 선수 출신이라예. 스쿠바도 다니고예."
어쩐지. 나는 질투까지 느꼈다. 물해꾼 여인네도 어린 것보다는 노련한 남자가
들러붙는 게 좋은지 저만치 가야 될 시간인데도 한자리에서 계속 자맥질을 하고 있
었다.
정말이지 절망의 열일곱이었다. 저자식은 아름다운 두 여인네를 다 살관하고 있
는데 나는 무어란 말인가.
아아, 몸둘 곳 없는 청춘아. 태양은 저리도 환하게 불타고 있는데
육지에서 오신 손님, 1
-작부들
거문리에는 작부집이 깥아 작부들이 많았다. 멀고먼 육지의 어디어디에서 별의'
사연을 가슴속에 담고 이 먼 성까지 작부질 온 그들을 두고 동백꽃을 갖다붙여
래한 시편들도 여러 개이지만 어린 우리들 눈에는 그 작부플이 동백보다 예뻤뜨
체뻤지 못하지는 않았다.
단지, 내가 어렸을 적의 작부틀은 아무래도 조금 낡아뵈는 이들이었호 70년딕애
서 80년대로 넘어오면서 그것도 물갈이가 되어 도시 번화가에 어울릴 만한 차림재
의 아가씨들이 더 많아졌다. 굳이 子분을 하자면 6.70년대의 작부들은 어떤 면에서
는 마을의 일원으로 녹아들었는데 비해 이후의 아가씨들은 섬을 악간 깔보는 눈치
이며 (사춘기 시절의 내 눈으로 보기에도 새바람을 몰고 온 아가씨들은 도시의 세련
됨을 갖추고 있었고 뱃사람이나 아이들이 신기해하는 그 선망의 눈초리를 은근히
즐기는, 값싼 우월심이 킨어 좌였다),그래서 할머니들에게 뒤에
곤 하였다.
어쨌거나 항구란 작부가 없으면 이미 항구고서월 기늘곽 역
. 긴 시간을 바다에서 퐈도와 일에 시달리
괴. 배는 결국 항구로 돌아을 수밖에 없고, 그자서
난도 예전에 바다 멀리 桑땁뜰 나간 적이 있었다.
할이 없어졌다는 소
1 간철해지기 마젼띠
다걸면 여자 생각이
작부는 있게 된 것이다.
여러 날 지나 외로움
것과는 조금 다른 것지다. 워낙 힘든 일곽
刻다. 그 왹로움이란 육지의 그 -을 느꼈더
경떼 시달리다보면 불편한 환
여자가 있는 안온한 그 어떤 것, 여자와 함께 있을
푸근한 그 어떤 것에
대한 그리움이 치솟아 오르기 마련이었다.
거기에다 일하느라 몸은 죽어나지만 먹는 것 하나는 최고급 자연산 활어를(선원
처럼 싱싱한 회를 먹을 수 있는 직업은 세상을 다 뒤져봐도 없다) 먹어대니 (힘든 어
선 생활은 먹는 것으로 버틴다1 그게 어디로 가겠는가. 다 제자리 찾아 몸의 어느
부분에 모이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배들이 들어오면 항구는 작부의 노랫소리도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거문리로가면 외할머니의 언니집이 있어 종종들르곤 했다(어머니의 이모가되
신 관계로 이모할머니라 불렀다. 그분은 간혹 덕촌리로 건너오셔서 할머니와 함께
나를 데리고 고구마밭을 매러 가곤 했다. 그러나 내 호미질에 고구마가 생채기가
나기 일쑤라 그분은 품에 지닌 장도리칼로 고구마를 玲아주시고 일을 시키지 아니
하셨다. 아주 인자하신 성품의 그분은 오래 전 암으로 몹시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
가셨다).
밭 이야기 나와서 우선 한 대목.
섬의 늙은 아낙들은 비위 좋기가남다르다 누구네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나
이 든 아주머니가 밭을 매다가 큰 지네를 발견했다. 지네는 말려서 팔 수 있는 것이
다. 일은 해야 하고 지네를 잡아놓자니 마땅한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 아주머
니는 아주 기가 막힌 방법을 썼다. 지네 머리를 잡아 손가락으로 독니를 빼고는 그
7로 속셔츠 속에 집어넣었다.
그걸 본 오후 내내 나는 지네가 내 아랫배를 스물스물 기어다니고 있는 상상 때문
에 괴로웠다.
이모할머니집 주위에 작부집이 많았다. 머리를 위로 틀어올린 여자, 늘 한복만
7고 있는 여자(시쳇말로 가오마담), 주근깨가 잔뜩 낀 여자, 통통하니 키가 작았던
여자,그리고 이모할머니네에서 알몸으로 목욕하다가(한여름이면 제 집 목욕탕을
언니들에게 빼앗긴 젊은 작부들이 널찍한 그 집 마당으로 목욕을 하러 왔다. 어디
서나 작부의 집이란 좁고 불편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나한테 들켰는데도 놀라지도
않고 너 누구니? 물어와서 나를 더 당황하게 했던 여자 등 여러 여인네들 구경도 재
미났다.
그 .척인네를 한꺼번에 볼 기회가 있었다.
초등학교 오학년 여름방학 때 나는 섬에 있었다. 가랑비가 가슬가슬 내리는 한여
름이었다. 동무들이 낚시도구를 가지고 내게로 왔다.
"괴이 (고기) 낚으러 가자."
"어디로, 건너짝으로?"
"야(이 애) 즈그 뎀마 타고 가자. 못치 낚으러 가자,"
별 일도 없고, 여름이지만 비가 내려 온 동네가 조용한 날이었다. 우리 넷은 각자
차비를 차리고 바닷가로 내려갔다 한 아이가 자기네 뎀마에 올라타 줄을 풀었다
(물론 그 애 아버지 몰래 타는 것이었고 결국 그 애는 된통 혼나게 된다)
7:7;'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여름에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에 더 낚
시가 잘 된다는 것을. 우리는 마을 앞을 벗어나자마자 낚싯줄을 내렸다. 바로 입질
이 시작되었다.
같은 낚시라도 나는 그날의 그 낚시를 잊지 못한다. 들고 나는 배도 없이 아주 고
요한 섬에 가랑비는 오다 그치고, 그치다 오고, 바람도 없는 데다 갈매기 울음소리
마저도 조용한 그날. 네 아이가 천천히 노를 저으며 하는 낚시 바다는 마치 우리를
위해 따로 준비된 듯했다.
바다는 그날만큼은 어른들이나, 기계들이나, 학교, 가게, 그물 따위를 밀어두고
태초의 모습으로, 생산을 위한 혼돈의 시간을 끝내고 바야흐로 평온의 시간을 맞이
하는 바로 그때로 돌아가 어린 네 명의 아이들을 받아들였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이중섭의 그림에 나오는 애들처럼 옷을 홀랑 벗고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며 자그마
한 고추를 바닷물에 씻으며 놀았다. 어미의 뱃속에서 헤엄치는 오래 전의 몸이 되
어 아무 걱정 없이, 어떤 어려움도 없이 평화롭고 즐거웠다.
물방울처럼 놀다가 배에 올라보면 여전히 가랑비는 오락가락하고 여전히 춥지도
덥지도 않고 여전히 배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여전히 고요했다. 갈매기들은 아예
마취당한 듯 졸고 있어 주위에는 까르르 헤헤, 우리들 웃음소리뿐이었다. 다시 지
렁이를 끼어 방금 우리가 자맥질하고 놀았던 바다에 던지면 투르륵, 입질이 왔고
당기면 보리멸이나 쏨벵어 , 놀래미가 물어 있었다. 물고기들마저도 우리와 함께 먼
과거로 거슬러가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배는 유림해수욕장까지 떠밀려왔고 문득 뚝, 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뭔 소리냐?"
"어디냐, 어디서 난 소리냐?"
"아이가(아이고) , 노 좀 봐라."
"워매, 노 뿐질러져 부렀다야."
까르르 떠들다가 배는 떠밀려왔고 노는 여전히 노씹에 노좇이 박혀 있는 상태여
서 각도를 두고 물속으로 뻗어 있었는데 날이 바닥에 닿아 휘어지다가 탄력을 못
견디고 끝이 부러져 나가버린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배 임자의 아들을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다가, 배 임자의 아들도 가득 겁나는 얼굴을 하다가,결국은 다시금
깔깔거리며 물로 뛰어들었다 노를 걷어올린 배는 파도에 떠밀려 모래밭을 타고 앉
았고 우리는 백사장을 ◎굴었다. 우리는 섬의 원주민들이었다. 토인들이었다. 모래
를 잔뜩 바르고 바다로 뛰어들면 무수한 물 알갱이들이 만들어지며 모래 알갱이와
섞여 솟아올랐다. 해수욕장 뒤로 서 있는 나무들도 한여름 비를 맞으며 한 치의 흔
들림도 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다시 배를 밀어 바다로 조금 나가 닻을 내렸다. 바다에 떠서 밥을 먹었다.
꾹 누른 보리밥 덩어리와 무 짠지, 그리고 삶은 고구마는 훌릉한 성찬이 되고도 남
았다. 육지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등대 쪽으로 가면서 낚시를 했다. 이번에는 쥐치
가 물었다. 등대섬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니 하나가 말했다.
"우리 큰 놈 좀 낚으러 가자."
"=177자."
"어디로 가끄나(갈까)?"
"안놀섬 뒤로 가자."
안노루섬은 자그마한 바위섬으로 거문리 옆에 있다. 옛적에 고등어 풍어제를 을
린 제단이 있는 곳으로 옆으로 흐르는 물살이 세었다. 안노루섬 뒤로 가서 닻을 내
렸다. 닻은 줄을 다 잡아먹고서 간신히 바닥에 닿았다. 물살이 세어 바닥이 깊었다.
추를 하나씩 더 달았지만 물살 덕에 낚싯줄은 하염없이 들어갔다.
그런 곳은 낚는 수는 적지만 대신 큰 놈이 물었다. 작은 놈은 물살에 떠내려 가버
려 물살을 버틸 만한 놈들만 살고 있었다. 이윽고 어른 팔뚝만한 놀래미나 우럭이
올라왔다. 그러기를 한참. 닻을 뽑아 조금씩 물살을 따라 내려가고 있을 때 동무 하
나가 나머지를 불렀다.
"저기 좀 봐라."
"어디 , 뭔디?"
"저기 이섬 (거문리의 또 다른 이름) 독바구(바위) 옆에."
동무가손가락질하는 곳은 거문리 옆구리 쪽으로큰 바위들이 양쪽에 포진된,가
운데가 자그마한 해수욕장처럼 자리잡은 몽돌밭이었다. 탯속처럼 고요한 섬에서 깔
깔거리며 까불거리는 이들이 우리 말고또 있던 거였다. 애들이란 게 어른보다키도
작고 힘도 약하지만 딱 하나 눈만은 맑은 데가 있어 한 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그
곳이 참으로 뚜렷하게 보였다. 그곳에서는 작부들이 놀러와 몸을 씻고 있었다.
위아래 다 입은 이들과 위만 벗은 이들, 위아래를 흘랑 벗은 이들 열댓 명이 몽돌
밭에서 물에 들고나며 뭐라고 까불거리며 놀고 있었다. 그들도 보아하니 작부가 되
기 전이나, 또 사람것으로 태어나기 전의 어떤 상태로 되돌아가는 중인 듯싶었다.
서로물장구를 치고, 벗은 이들은 아직 안 벗은 이에게 엉겨붙어 억지로 옷을 벗기
고, 물속으로 집어넣고, 엄마야, 언니야, 질러대고, 깔깔 호호 시끄럽고, 시원타 수
영하고, 물 무섭다고 다 벗겨지고도 바깥으로 도망을 치고, 아랫도리에 털 단 여인
네가 쫓고, 젖통이 원시적으로 출렁거리고, 서로 거기를 꼬집고, 아야 언니야, 투정
을 해대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그들 중 하나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야트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서둘러
모두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조금 있다가 우리가 뭐 어찌어찌할 줄 모르는 애들이라
는 것을 알고 손짓으로 빨리 가라고 손사래도 치고 거꾸로 출렁거리는 젖통을 보여
주며 오라고 손짓을 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애들이라서 가까이 다가갈 배짱이 없는
대신 그들이 쫓아올수 없는 곳에 있는 덕에 닻놓고서서 헤헤거리며 구경은 할수
있었다.
여전히 몸을 아끼는 이들도 몇몇 있었으나 몇은 볼 테면 보라는 식으로 다시 물장
구 치고 꼬집고 도망가고 쫓고 했다. 그러다가 자기들끼리 뭐라고 속닥였는지 일제히
우리를 보면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豫다 아마 우리가 한 십 년 뒤에 찾아오겠노라고
예약쯤은 해둘 예비 선원들이기에 에라. 서비스 차원이다, 팼지 않았을까 싶다.
원초적인 하루는, 발가벗고 헤엄치고 수렵하던 그 먼 과거는, 그리하여 우리의 근
본들과 만나 완결의 구도를 갖게 되었다 가랑비 내리는 고요한 섬의 바닷가에서
물장구 치고 노는 여인네들파 바다 한가운데서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 위로 옅은
비구름만 슬겅슬겅 지나갔다.
우리는 각자 한 바구니씩 고기를 담아 집으로 돌아가면서 가슴에는 또 한 덩어리
의,여인네들이 홀랑 벗은 몸으로 아이들처럼 깔깔거리며 뛰어노는 팡면을가늑 담
아갔다.
그러나 저 벗떠젖히고 갈짤거리는 아름다운 작부들은 바다에 지친 사내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어 위포를 해주기도 하지만 간간이 사랄 못 산게 만특어버리기
도 했다. 아무리 거친 바닷가라 하더라도 순진한 순성까 선익이 꼭 있페 미린이어
서 개중에는 작부와 정이 득어 살림을차린 이들토 있었다. 적글 들어옻은 것(순정
파들은 성실하니까 적금을 잘 든다) 해약하고 집안에 있는 돈 없늘 돈 그러또아 보
다가 꾸기도 하여 작부의 뒤꿈치를 묶어놓고 있는 빛 갚아주고 사랑방 하나 얻어
여인네가 사과도 깎아주고 손톱토 밀어주는 살림의 재미를 보게 된다. 그러나 으레
오래가지는 못하는데 작부란 어디론가로 떠나는 게 몸에 배어 있는 존재들이라주
변 눈이 헐한 날 육지로 가버리기 마련이었다.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와 산다지만 아무리 사랑하여 빛을 청산해 주고
아껴해도 작부 출신의 신분을 유지한 채 섬에서 누구의 아낙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거였다. 배신당한 남자는 술에 취해 이를 갈고 자유의 몸이 된 여인
17◎ 훨훨 육지의 도시에서 익명으로 살아갈 것인데, 잘살면 그나마 나쁘지 않을
것을 꼭 들리느니 또 같은 직종의 일을 한다는 것이 보통이었다.
육지에서 오신 손님, 2
-남과 여
섬은 그런 식의 에로티시즘만 있는 게 아니다. 피서지니까 생겨나늘 경우도 있
었다.
눈 쌓인 배경으로는 으레 껴입은 이들이 어울리듯이 , 물과 태양을 가까이하는 섬
에서는 가급적 벗게 마련이다.
태양이 잡티 하나 없는 하늘에 홀로 떠서 뜨거운 햇살을 내리쬐면 노인네들은 덥
다고 타박이었지만 아이들은 제철을 만나 한시라도 방구석에 붙어앉아 있지를 못
했다 모래밭이나 축항에 매놓은 뎀마에서 자맥질을 해대는 아이들은 새까맣게 타
서 몇 겹씩 껍질을 벗겼다(그래야 겨울에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조금 큰
머슴아들도 차이가 없었다. 골격이 제법 자라난사춘기 소년부터 장가 안 든 청년
들까지 구릿빛 맨살을 내놓고 다녔고 여자애들도 시원하게 너풀거리는 勢은 원피
스를 입고 하냥 어울려 다니며 깔깔거렸다.
한여름에 목덜미 색깔을 보고 그사람이 어떤 이들인지 구분을 할수 있다 완벽
한 청동색이면 섬사람이고 어중간하게 탄사람이면 피서 온 지 여러 날 된 관광객
들이고 새하야면 이제 막 들어온 이들이었다.
중학교 때 여름이었다. 여객선이 도착하면(그때는 다리가 놓이기 한참이나 전이
다) 와글거리는 거문리 부두에서 사람 실은 나룻배가 덕촌리로 넘어왔다. 낚시꾼과
주민들 사이에 눈에 띄는 쌍이 있었다. 무거운 배낭을 맨, 대학생 차림의 남자와 여
자 어린 눈으로보기에도 어른스럽지 않운 잘해야 일학년 정도였다. 처음보는풍
경에 여기가 좋다. 저기도 좀 봐라, 어머 저건 또 뭐야, 좀 경박스럽게 떠드는 쪽은
7자였고 남자는 아무래도 짐꾼 쪽에 가까운, 여자의 호들감에 주변 사람들 눈치나
살피는 순한 얼굴이었다. 방학철이면 종종 있는 풍경이었다. 둘은 바닷가에서 어슬
렁거리는 우리들에게 해수욕장이 있는 곳을 물었고 우리가 가리키는 쪽으로 걸어
사춘기가 시작되는 나이라 나에게는 먼 곳까지 호젓하고 다정하게 여행을 오는
청춘남녀가 부러운 시절이었다. 다음날 새벽 버릇처럼 변소 벽에 걸어둔 호미를 찾
아들고 동무 두엇과 지렁이를 파러 갔다 새벽과 아침의 중간쯤인 그 시간은 동이
트면서 생겨난 색깔들이 자지러지면서 바야흐로 밝은 햇살이 막 생기를 뿌리기 시
작하는 때였다 방파제를 지나 해수윽장으로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두 사람이 우
리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어저께 그 사람들 아니냐?"
"맞다. "
"왜 벌써 나간다냐?"
"운다야."
"어 디?"
"봐, 여자가 울잖어 ."
아닌게 아니라 짐꾼처럼 보였던 남학생은 역시 그 무거운 배낭과 가방을 홀로 메
고지고하여 앞서 걸어오는데 죄짓고 잡혀온죄인의 얼굴처럼 무겁고 괴로운표정
이었고 아무것도 들지 않아 편안한 몸인 여학생은 그게 미안해서인지 두 손으로 얼
굴을 받쳐들고 울고 있었다. 아무리 어려도 적잖이 까진 축에 들었던 우리는 간밤
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곧바로 짐작했다. 두 사람은 우리와 눈도 맞추지
않고 몹시 느린 걸음으로 스쳐 지나가 나룻배 타는 곳으로 갔다
"어저께 따묵었는갑다. "
'◎랬는갑다. "
"근디 여기까지 와서 왜 벌써 나간다냐?"
"긍께. 나 같으은 더 놀다가겄다. "
밝히기 거시기한, 몹시도 구체적인 장면들을 추측하며 우기는 그들과 반대쪽으로
걸었다. 간밤의 일. 그들은 해수욕장에 텐트를 쳤을 것이고, 밥을 지어먹었을 것이
고, 술도 마셨을 것이고, 마시면서 떠나오기 전에 했던 약속(간단히 말해 선을 넘지
말자는)을 다시 확인했을 것이고, 밤하늘의 별을 세고, 밀려오는 파돗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일. 동무 말대로 따묵었다는 그 일 선이란 넘을 수도 있다는
가정과 어차피 넘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그어지기 마련이지만,이 있었을 것이다.
걸으면서 나는 심란해졌다. 헌데 왜 운단 말인가. 그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둘다
울든지 둘다 울지 말아야 되는 거 아닌가. 태양의 계절에 남쪽의 섬까지 찾아와서
둘만의 비밀스러운 일이 생겼다면 그게 울 일이란 말인가. 기껏 와서 하룻밤 자고
울며 되돌아가면 무슨 수가 생긴단 말인가, 싶어 걸음이 잘 안 걸어졌다.
서도기행
뒷산으로
저녁내 꽁치를다듬으며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늦게 잠이 들었는데도 일찍 일어
났다. 간밤에 폭풍주의보가 내렸다. 여객선이 가고 오지를 않는 랄이라 오전에 다
시 그물을 걷으러 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생길이 훤했으니 다름아건 개상어라고
부르는 돔발상어 덕이다
'돔발상어는 참상어 종류 중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기름상어를 닮았으며 몸은 짧
고 머리는 남작하고 고깃살의 빛깔은 약간 불그스레하고 횟감으로 좋다' 라고 『자산
어보에 나와 있는 놈이다.
간혹 육지의 횟집 수족관에 이게 한 마리 있으면 명색이 상어 족보인 데다 생김새
도 틀림없는 상어라 즐거워하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뱃사람들 입장에서
는 별 반가운 존재는 못 되었다. 그런데 이놈들이 밤 사이에 잔뜩 걸린 것이다.
바다에서 고기가 가득 잡힌 것을 '마이구리'라 한다. 고기 잡는 배가 고기 가득
잡은 게 당최 흠이 될 일도 아니고 그런 고생은 고생이 아닌데도 우리는 재미가 적
었다.
우선 그물을 올릴 때 이런 것 저런 것 골고루 올라와야 재미가 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돔발상어 한 종류로 도배를 해왔으니 가뜩이나 험한 날씨에 말 그대로 고생
만죽으라고 했던 것이다. 예전에 여수 해안가에서 일할 때 이것 한마리 얻어걸리
면 뜨거운 물을 普거나 하여 껍질 벗겨내고 뼈째 회를 떠서 소주 한 잔씩 걸쳐본 경
험도 여러 번이라 싫어할 일이 아닌데, 말이어서 말이지,그것도 한두 마리지 이렇
게 떼로 걸리면 어쩌자는 것인가.
자그마치 수백 마리가 자그마한 그물에 걸렸으니 그물이 열 냥이라면 고기가 백
냥인 셈으로 거의 하얗게 그물을 수놓은 것이다. 더군다나 폭풍 때문에 몹시 찬바
람이 불며 파도가 쳤고 거기다 비까지 내렸다.
이것들이 떼로 걸려든 이유가 있다. 폭풍이 불어 거문도 내항으로 피항온 십여 척
의 중선배들이 버린 것들이다. 산소호흡도 하는 이놈은 공기 중에서 워낙 오래 사
는 것들이라 그때까지 그물 속에서 살아 있었던 것이다. 피항 들어온 선원들이 그
물을 손질하털서 이것들은 바다로 버렸고 다시 우리 그물에 걸린 거였다
그물을 손질하는 데만 세 시간 넘게 걸렸다. 찬바람 속에서 일을 하자니 나중에는
손가락이 얼어서 곱아버렸다. 그래도 개상어 먹을사람 가져가라고 기별을 띄우자
영감 할매들이 광주리를 들고 내려와 이고 지고 올라들 갔다. 근래 들어 생선이 통
안 나서 굼굼하던 끝에 이것이라도 많이 얻게 되어 고맙다고 다들 인사를 톡톡히
차렸다.
외삼촌이 그물질을 하기 시작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워낙 고기잡이를 좋아
하기도 했지만 동네사람들 자질구레한 부탁 들어주고 마을 일에 신경을 썼던 여꺽
선 선장 시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생선을 많이 얻어 드신 것이다(삼촌을 통해 그런
샘선이 나에게도 여러 차례 건너왔다). 이제는 갚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많이들 나
눠준다
두 노인네 단출하게 사는 집에서도 한 광주리 얻어갔다. 돔발상어는 회를 떠서 술
안주 하지 않으떤 야채와 초고추장 버무림 (이게 원래 전통식 회다. 요즘 우리가 회
라고 하는 것은 일본식 사시미이다)을 하여 밥반찬으로 하는데 두 노인네가 얼마나
먹겠는가. 저것도 다들 말려 자식 손자나 친지네로 갈 것이다.
나눠줄 것 다 나눠주고 우리 몫으로 한 광주리 들고 들어오자 점심때가 한참 지나
점심 먹고 나니 세시 반이었다. 삼촌은 다시 사무실로 나가고 나는 마을 길을 오르
기 시작했다 얼었던 몸이 풀리고 주렸던 배가부르자 몸이 노곤했으나 섬의 바람
은 사람의 그런 피곤을 쉬 풀어준다.
바닷가에서 마을의 중심을 따라 올라온 행길은 외갓집 앞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
며 하나는 적당한 각을 계속 유지하고 하나는 급하게 솟았다가 곧바로 편평해진다.
굴곡 심한 길을 걸어 공동우물이었던 곳을 거쳐 너댓 집 지나면 다시 만난다
만나는 곳에서부터는 골목이 시작되고 골목이 끝날 때쯤 덕촌초등학교가 나온다.
거문도로 이사 와서 맨 처음 살았던 곳이 바로 이 학교 관사였다.
운동장으로 올라섰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흔한 공놀이 하는 아이들도 없다. 내가
살았던 관사 자리에 집이 있기는 하나 벽돌건물로 보아하니 숙직실인 듯싶다.
이곳에서 네 살 때 여동생이 태어났고 그때부터 기사 노릇은 시작되었다. 언젠가
부터 나에게는 세발자전거가 있어 노상 하는 일이 뒤에 동생을 태우고 운동장을 다
니는 게 일이었다. 운동장은 바다만큼 넓었고 자전거의 정비상태는 열악했다.
그러나학교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연못도 메워진 상태이고 내가동생을 태우고
돌았던 그 넓은 운동장은 몹시도 좁아져 있었다. 그 자전거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관사가 있던 곳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옛날그 집.학교관사 그동안
내가옮겨다녔던 수많은 집들 중에 기억속에 있는 맨 처음의 집. 그 집을 생각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냄새가 몇 개 생각난다.
잊지 못할 냄새 몇 개
먼저 아침 부삽에서 어머니가 밥 지으며
아궁이 에 동생의 속옷을 말릴 때 나는 냄새.
지린내인데도 희한하게 고소한 내음새 . 탁탁탁, 참나무 소
나무 동백나무 따위가 타들어가는 아궁이 주등이 앞에 그것을 들고 있으면 型얀 수
증기가 올라왔고 나는 그 옆에 旻그리고 앉아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꿈결처럼 따
라불렀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청상에 과부 되어 평생 물질로
살아오신 외할머니의 노래. 딸의 노래. 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플랫폼. 고소한
지린내와노래 섬 하늘로올라가는 연기 솥뚜껑 아래로흐르는 밥물.
다음은 콩가루 냄새. 콩가루에 밥을 비벼 먹을 때마다 나는 그 냄새. 창(窓) 밖으
로 퐁퐁퐁 날아가는 새들의 깃털 같은 냄새 . 빨리 안 삼켜지는 냄새 입가에 가루로
남는 냄새.
그리고 바다 냄새. 아침에 운동장에 올라서면 사방 바다에서 불어오는 그 맑은 냄
새 (혹자는 어촌이나 항구의 갯비린내를 바다 냄새로 착각하고는 하는데 엄청 차이
가 난다. 갯비린내가 변소 냄새라면 바다 냄새는 방아 찧어놓은 쌀 냄새다) . 그러니
까그것은 아무 맡아질 게 없는 무색 무취의 냄새.그냥 티없이 맑은 냄새. 그러니
까 그것은 어쩌면 냄새보다는 코끝에 스며드는 그 맑은 느낌 같은 것, 유리창에 어
린 물방을 같은 냄새.
토끼와 낙하
학교 뒤는 아마 예전의 흙이 그대로겠지만 기억이 흐릿하기에 마치 변한 듯했다.
여기 또한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있으니 내 최초로 생살이 찢어졌던 곳이다
아버지는 토끼를 키웠다. 아침밥 전에 종종 학교 됫산으로 토끼풀을 뜯으러 가곤
할 때 늦잠 자지 않는 날은 네 살배기 아이가 잘도 뒤를 따랐다. 어느 날, 나는 조용
히, 소리 소문 없이, 풀 뜯으러 가는 아버지 뒤를 따라나섰는데 조금 늦게 흘로 나
섰던 탓에 아버지는 내가 집에 있으려니 하고 어머니는 따라갔으려니 했다. 풀 뜯
어 돌아온 사람은 아버지 혼자였다.
"영훈이 어디 갔는가?"
"집에 없는데요, 당신 따라서 간 것 아녜요?"
"나 흔자 갔다왔는데 ."
"엄마야, 당신 가고 바로 없어져서 데리고 간 줄 알았어요."
"이 런 ."
아침 밥상의 국은 홀로 식고 내외는 증발해 버린 아특윽 찾아 학교 뒤고 뛰었다.
나무나 불이나 달아가는 새나 다 또른 처 흔들거리퍼나 포_칠흐 하고 있떴다. 영훈
아, 영훈아, 부그며 길피기를 얼마 둘은끝네 착아갰다 다른 아이쫄처런 장롱이나
이런 데서 잠이 들었거나 아너련 토끼장 옆에서 얼출테 똥칠 해가떤서 니름패고 놀
고 있으면 좀 폴으련만, 위 훌릅한 스카이다띠버쫌이나 한런 피어보겠다고 팜시 허
촐메 날아본 다음 파필 뒤 개골창에 쑤셔박혀 ◎.먼디 직긴 긴힌 숙테가 있고 축대
위로 난 길을 혼자 겉어가파가 한순판에 꺼져 포랑애 처박힌 거였파.
거내놓고 런니 얼팔미 피투성이. 내 시현은 언탈에서덕터 밖타. 지 혈옳 하핀 이약
축을 찾았다 마옳 아래쏙에 삭초 있는 그가 바곤까 실. 떠규고프곤텡 따뛰논 폰호
판호사노 민이 (당인하I-T- .◎는 치사파 아니라 랄 .-7대핀 악국 히는 띠나) 온가오는
뉘고 소긱옳 펀해돈은 뵈 한씨니가 꾸기나피 뛰어오셨나.
어진 자식이 샘산이 찢거 괴파푹쿤 나고 이패근 찢어진 생실을 꿰매야 하는데 빤
히 논여파닥 부틴가 어디 있긴근가. 한17B니파 네 왔다피글 덕늑호 껴안았파. 그러
내가탁쁠부들 먹띤시 梁넌 깐 '할뚜니, 나죽피 긱소.졸 샅레구시요‥
이윽호 내 핀차 친족 락이 란나? 7, ◎룩 늘어판 곳에 길게 흥터파 닙 았타. 허나 핀
떤서 마온리 논낄이나 나쭌파지에 살이 씬어전딘 피쳐이 내 하나밸이겠쓴파 다곯
고난윽 닐긴펀서 77늘 댄이나
거듭되는 고난
남도(南島)는 한겨울에노 눈이나 얼을 구곁하기가 어폅다. 피섯 살 되던 괘 몸시
는 이미 포기한피가 이떤에는 숏느껴이나 최기스체이텅 쪽으펄 진풀해 보려핀 혼
자 얼뜸 뒤펀 올하섰과 러잖아 연똔 바팍에 롬을 굽히게 되었다.
학친 아래 사는 누구네 힝 (납시 육학년)이 산에 소 먼이퍼 파다가 우연히 연못 쪽
으고 걸어 특어왔고 깨어진 얼옳파 그 덴 팥봉어 사는 곳에서 누인 있는 나글 박견
한 것이다. 시골아이늘은 씩씩함 하나만큼은 출중해 봄을 탈려 나를 끄집어냈다.
긱구늘이 견랴부라 ',!,·i!,.떠 손가팍 집떠덫어 물 토하페 하고 인곧호흙7-해 걱끼
산◎·,: 가러는 닌::- 1 1시 i :토학교 판사포 되녹려놓았다. 아, 인7띠 식_,1_슷:_ 건
이계 나는 서서히 학교를 뒤로 두고 산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섬의 나무는 우선 그 크기에서 뭍의 것들과 확연히 구분이 된다. 씨앗이 터지고
잎이 나면서부터 바람과 평생을 부딪히며 사는데 그 덕에 키가 자라지 못하는 데다
가지와 잎도 한쪽으로 쏠려 딱한 모습이다. 흑백필름 속의 키 작은 차력사풍이다.
시달리느라 키 클 여력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섬의 안쪽 바닷가는 바람을 덜 타는 곳이라 굵은 동백 소나무들이 있기는 하지만
언덕배기나 등선의 나무들은 한번 잘못 잡은 자리 덕에 평생을 그렇게 살고 있다.
나무는 죽어 이세상에 대하여 무어라 말하겠는가. 아마 저 삶의 세상에는 바람만이
가득하다고 말할 것이다.
울고간다 울릉도야, 앓고 간다 아랫녘아
나무들의 상태가 그러하니 섬의 주요 무역품 중에는 나무가 꼭 포함되었다. 기계
배가 들어오기 전에 거문도 사람들은 돛단배 하나에 몸을 싣고 멀리 울릉도까지 다
녔다.
울릉도는 포항에서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2백10킬로미터, 죽변항에서 1백40킬로
미터 떨어진 섬이다 남해,그것도 위치상서해남부 해상에 들어 있는 만큼 서쪽으
로 치우친 바다의 한가운데 섬 거문도에서 우리나라 남단을 돌아 강원도 북단의 멀
고먼 울릉도까지 다닌 것이다. 한 번 가고 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반 년.
동네 어른들께 간혹 들어보았던 그 이야기는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로만 남는다.
그때 돛과 노를 이용해 먼 곳까지 다녀왔다는 노인분들은 다 돌아가신 뒤다. 언젠
가 기회가 되면 한번 재현을 해보아도 괜찮을 듯싶다.
반 년이나 걸리는 항해를 목숨 걸어가며 했던 이유가 몇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게 나무였다.
거문도의 나무는 키가 작아 쓸모가 약한데다
따뜻한 곳의 물건이라 오래 가지를 못했다. 집을 지으면 십 년 이내에 썩기 때문에
굵고 단단한 추운 곳의 참송을 구하러 울릉도까지 다녔던 것이다. 집이나 배 지을
목재만 가져오는 게 아니었다. 미역이나 쌀, 소금을 싣고 가서 홰 만들 송진을 얻느라
소나무 뿌리와 오징어 대구로 바꾸어 왔다.
목재와 송진을 구하기 위해 섬 사람들은 그 위험하고 지루한 항해를 했던 것이다.
갈바람을 타고(돌아을 때는 높새바람을 타고 온다)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한려수도
를 관통한다. 그 뱃길은 섬들이 많아 섬을 보고 가는 지문항해를 한다. 남풍이나 서
붕을 받으면 쉽게 가지만 동풍을 받으면 아주 어려워진다. 그러나 돛배의 위력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맞은편에서 바람이 불면 마냥 반대편으로 떠밀려갈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돛의 각도 조절로 지그재그로 나아간다. 돛배란 어떤 형태든지 바
람만 불면 항해가 가능하다. 돛이 무서워하는 것은 무풍지대이다.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젓는다. 그렇차 해서 부산 근방에 가면 남해가 끝나고 망망대
해 동해가 등장한다. 알다시피 동해는 섬이 없는 곳이라 그곳부터는 별을 보고 가
는 천측항해를 한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늘에 판판이 박혀 있는 별을 보고 가는 돛단배의 항해. 나무
와 송진을 얻기 위해 파도를 署고 가는 항해. 저 아스라한 별빛만이 유일한 도구인
항핸. 갑판에 등 대고 누워 삼촌아 조카야 북극성이 어딨냐, 십자성은 보이냐, 캄캄
한 바다 한가운데 우리 흘로 떠 있구나, 이번에 돌아가면 나도 장가 좀 가보자꾸나,
울고 간다 울릉도야 앓고 간다 아랫녘(울릉도를 지칭함)아,의 항해.
나는 간다 나는 간다
에이야아 술비야
울릉도로 나는 간다
에이야아 술비야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에이야아 술비야
이번 맞고 금쳐놓세
에이야아 술비야
당시 울룽도를 다니며 거문도 뱃사람들이 불렀던 노래다.
서도 중에서 덕촌리의 북쪽에 서도리라는 큰 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서 어떤 어른
을 뵌 적이 있는데 그분은 울릉도를 찾아가 가장 나이든 노인을 만나고 왔다고 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당시 울릉도 사람들은 거문도 배를 몹시 반겼다고 한다. 쌀
때문이었다(거문도 사람들은 서쪽으로는 미역 따위를 가지고 군산을 다니면서 쌀
을 싣고 왔다) . 울릉도와 거문도는 아주 밀접한 관계였으며 거문도 출신으로 울릉
도 도주를 지낸 사람도 있었다 한다.
그때 거문도는 해양무역의 중심지였다. 어느 섬이 동남서해를 자유스럽게 다니면
서 정기적으로 무역을 했겠는가. 세력도 대단했다. 고흥이나 벌교에 논을 장만하고
사람을 보내어 관리하던 집들도 있었다.
그때 울릉도에서 가져온 것 중 특이한 것이 송진이었다. 그저 집에서 쓸 양이면
근처에서도 구할 수 있었으나 굳이 울룽도까지 가서 가져와야 할 정도의 양이면 어
딘가에 따로 쓸 데가 있었다는 말이다. 송진으로 만든 횃불을 어디에 썼을까?
밤바다의 불야성 축제-멸치배
홰는 밤에 고기잡을 때 썼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멸치이다.
밤에 활동하는 어류를 꾀기 위해 주로 오징어나 갈치 , 멸치를 잡기 위해서는 집
어등이 필요하다. 기계배가 나오기 전이라 불을 밝히기 위해 그 많은 양의 송진이
필요했던 것이다. 송진 횃불 켜고 고기를 잡는 풍경은 워낙 오래 전이라 나도 본 적
이 없다 내가 본 것은 배의 배터리로 켜놓은 불이다. 기계배 집어등 밑에서 일을
하면 그 뜨거운 열기에 머리 가죽이 다 벗겨질 것 같지만 밤바다의 불배는 구경감
으로는 최고이다
한여름의 활기는 멸치떼에게서 왔다. 람자기 마을이 어수선거리고 한여름 밤바다
에 환하게 불이 밝혀지면 그게 왔다는 소리였다
뜨겁게 내리쪼이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가닿을 수 없는, 우주의 힘이 농축되어 있
는 강렬한 태양은 세상천지 뭇것들에게 튼튼한 생명력과 에너지를 주는 존재이며
밤하늘의 서늘한 달은 더위를 식혀주고 넘쳐나는 기운에 너무 멀리 갔던 것을 되돌
아오게 하고 불같이 일었던 용트림의 세계를 찬찬히 가라앉혀 주는 존재이고 별빛
은 넓고 거대한 것들이 놓치기 십상인 자질구레한 것들을 조잘대는 존재라면 저 밤
바다의 불배들은 그 사이에서 사람들끼리 모여 옥시글거리며 하늘에 대고 꾸무럭
거리는 그 어떤 행위인 것이다
밤바다의 불야성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누가목이 쉬면 으레 '너 어제 멜배(멸치배) 갔다왔냐?'고 묻곤 했다. 그만큼 멸
치잡이는 바쁘고 정신없고 힘든 일이다. 허나 그게 벌이가 되었다. 섬이 살아남으
려면 그래야 했다. 어장이 잘되는 엇.섬 전체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것. 생산의 기
운이 넘치는 것
우리 배 동무 재수가 좋아서
어랑선 가래야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멸치잡이 비친 달아
어랑선 가래야
이놈을 싣고 저놈을 싣세
어랑선 가래야
이게 멸치잡이 할 때 하는 가래소리이다. 전남 무형문화재 제1호인 거문도 뱃노
래는 노동요이자 넘기고 받는 식이며 노래가 주가 되고 동작이 곁들어진 형태로 전
체 5부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고사노래)는 용왕에게 풍어를 비는 내용이고 둘째 (놋소리)는 어장을 향하여
노를 저어가며 부르는 노래이며 셋째 (월래소리)는 그물을 끌어올릴 때 부르는 노래,
넷째가 (가래소리)인데 그물에 든 고기를 배에 옳겨 실으여 부르는 노래, 마지막 다
섯째는 (샐소리)라 하여 만선이 되어 기쁨에 넘쳐 돌아을 때 부르는 노래이다.
살살 비 벼라 梨시 락든다
에이야아 술비야
중간 사람은 잘 봐주소
에이야아 술비야
여섯 가지를 고루 돌리소
에이야아 술비야
이번 맞고 금쳐놓세
에이야아 술비야
이것은 배 닻줄을 만들 때 부르는 노래다
멸치떼가 왔다 하면 짝수로 패를 묶어 고기떼를 둘러싼 다음 끌어올리고 그것을
바닷가 멸막에서 삶아 널어 말리는 게 순서였다. 한밤중에 불을 환하게 켜고 양쪽
배쌈에서 그물을 걷어올리는 어부들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면 머리 속에 그림이 잘
그려지리라. 아름답게 보이는 그 장면은 그러나 그물을 놓친 당숙에게 조카가 욕을
퍼부어도 아무도 못 알아차린다는 정도로 고되고 정신없는 일이다
거의 끌어올려 이제 멸치만가득 찬그물이 되면 배에 묶어놓고사람이 내려가서
퍼올렸다. 그러면 삼치나 방어 같은 게 그물 속으로 튀어오르기도 했다. 사람들은
허허 웃었다. 까짓 먹으라지, 제가 먹고 나서 어디로 가겠는가, 그물 속에 잡혀 있
지. 하여 멸치배가 오면 먹을 게 많았다.
이 멸치 맛이 또 유별나다. 가장 기본적인 국거리가 되고 김장김치의 젓갈이 되니
그 맛과 영양은 충분히 보증받고 있는 셈이지만 가장 맛있을 때가 따로 있다 잡아
온 멸치는솥에서 한소끔 삶아 말린다 하루 정도 말라 껌질이 고들고들해졌을 때
가 가장 맛있다.
바닷가에서 멸치를 말리면 나는 또래들과 그걸 훔쳐먹으러 갔다. 심하지는 않지
만 너무 많이 집어먹고 앉았으면 꾸지람 한마디쯤은 있었으니 표시 안 나게 빙 돌
아가면서 집어먹었다. 그만 먹자, 그만 먹자, 해도 계속 손이 가는 게 그것이다. 먹
으면 가장 살로 잘 가는 게 메르치,라는 노인네 말도 있었다.
요즘은 선판이 꾸려져 (빠치망이라고 부른다) 어군탐지기로 고기를 쫓는 배가 있
고 잡아들이는 배가 있고 아예 삶아서 말리는 배가 따로 있어 재미도 적고 또 멸치
가 그전처럼 해마다 잘 나지가 않아 가까운 바다에서는 구경하기도 어렵다.
이렇듯 갈수록 사라져 버리는 예전의 풍경이 뭍이나 바다나 적지 않다. 그 중 아
쉬운 것이 여름밤의 멸치잡이배 풍경이다. 대부분 기능의 소박함이나 생활 환경의
변화로 사라져들 가지만 이 풍경은 오염파 해류의 변화로 인해 생선이 잘 나지 않
기 때문에 없어진 것이다. 생선이 풍성해질 수 있는 환경은 만들 생각 없이 워낙 잡
아먹기만 해서 그렇기토 하다.
그래서 조업의 현대화는 더욱 가속도가 붙는다. 그러나 바다의 복원력보다 인간
의 포획이 더 높고 빠르다. 각종 기계가 나온다. 첨단기계가 나온다고 없는 생선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어장은 점점 멀어지고 그물의 코는 더욱 촘촘해진다 거듭되
는 남획(濫獲)이다. 이렇게 나간다면 생선 한 마리 없는 바다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생선이 모두 사라진다면 괴로운 것은 생선인가, 사람인가) 방법은 딱 하나. 공존
(共存)하는 것이다. 같이 사는 것이다. 소비를 덜 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마음껏 번
식할 수 있도록 바다를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복잡하고 힘들고 골치 아프지만 어획량 감소는 이미 한참이나 진행중에 있다. 있
을 때 잘해야 한다는 우스개 말이 아주 실감이 난다.
산위에 홀로 서서
풀과 잡목이 우거진 오솔길을 걷다보니 돌담으로 된 막이 하나 나왔다. 소나무 그
늘 아래 쌓여진 창고이다. 들어가보니 비어 있다. 비오면 피하기가 딱 좋다. 산날맹
이를 오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탁, 하니 바다와 만난다. 산을 오르면 바다와 만난
다. 섬이니까 가능하다.
마른 풀 포기와 나뭇가지와 돌담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세상은 한순간에 바뀌어
사방 끝간 데 없이 트여 있는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섬의 꼭대기에 오른 것이다.
남쪽은 간간이 트여 있는데 북쪽은 구름이 첩첩이다. 간혹 겹진 구름 사이가 벌어
지면서 한줄기 빛이. 무슨 조명처럼 동그랗게 바다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그리고
바람. 햇살을 받은 곳에서는 용접봉 쇳가루가 날리는 것처럼 빛이 반사되고 있고
그 나머지 부분은 푸르스름하게 변해 가고 있는 와중에 하늘과 바다 사이에 바람만
이 그득했다. 아, 세상에 넘쳐나고 있는 것은 바람인 것이다. 아무리 흘러가도 다할
줄 모르는 바랗인 것이다.
풀은 한쪽으로 일제히 모가지를 꺾어 파도와 방향을 맞춘다. 햇살도 바람을 탄다
바람 따라 햇살이 옳겨다닌다.
이 풍경.
배 한 척 없이 동서남북 환하게 트여 있는 바다 한가운데 섬 하나 있고 그 섬 꼭대
기에 나 홀로 서서 바람을 맞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그러니까 저 드넓은 우주와 喪
막껄질 같은 사람살이의 중간에 생기는 틈 같은 곳이다. 서로 만나서는 안 될 거대
한두 세계 사이에 내가서 있는 것이다. 갑자기 세상천지에 나 홀로 되어 저 무거
운 시공간의 중력에 눌리고 있는 것이다.
먼 옛날 이 땅은 저 천길 바닷속에 잠겨 있다가, 물고기차 해초를 키우다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 무슨 애틋한 그리움 있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용트림하여 외롭
게 몸을 드러내 놓았던 것인데 수만 년 식어도 부족하여 아직도 파도와 바람에 몸
을 씻고 있는가. 그러면서 삶을 키우는가.
살아 있는 것들이란 결국 제 죽을 곳에서 서식하나, 저 풀 한 포기가 이곳까지 와
서 뿌리내리려면 얼마나 힘든 비행을 했을 것인가 저 소나무의 조상은 생명을 잉
태만 한 채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다에서 표류를 하였고 짠맛에 시달려야 했을 것
인가.
이것들의 고향은 다 어디인가. 풀이나 소나무나 동백이나 바람에 휘어져 다시금
내려가는 갈매기나 돌이나 바다나 사람것의 고향은 저 하늘 너머, 그 너머, 거기에
서도 더 너머 어느 한지점이었을 것이니 우리들은 어쩌자고 그곳에서 폭발되어 이
먼 우주의 변방까지 밀려 내려와 꼬물거리고 움트고 헤엄치고 모가지를 꺾어대고 있
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것인가.
허나 사람으로서는 저 나무나 돌이나 바닷물이 갖는 기억의 세계를 추측조차 할
수 없으니 수만 년 전 걷는 것들이 이곳에 들어와 볼 계획도 없을 때 이곳은 파도
치고 바람 불고 잎이 날리고 했을 것이고 수만 년 뒤에도 똑같을 것이니 그 미래가
되면 사람들의 삶은 고스란히 어디로 흘러가 버리고 말 것인가. 저이들은 아마도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자는 침묵하는 법이다. 저것들은 그래서 말하지 않고 그저 흘러다
니고 파도 치고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훗날 나는 무엇으로 변해 있을까 늙은 것이 되었다가 項뻣하게 죽은 시체가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무엇이 될까. 썩어 혼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된다면 그 다음
에는 무엇이 될까,
몸뚱이와 영혼이 분리가 된다면, 그리하여 영혼의 주인이었던 몸뚱이가 뻣뻣하게
굳었다가 점차 즙이 흐르고 살이 문드러지고 그러다가 마침내 배만 남고, 더 많은
시간이 흘러 뼈까지도 가루가 되어 마침내 누가 보아도 그게 먼 옛날에는 영혼을
담는 틀이었다는 것을 도저히 모를 지경이 되었을 때, 그때는 몸뚱어리의 주인이었
던 영혼은 틀을 벗은 채로 어디쯤을 지나가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어떤 것이 되
어 있을 것인가
나는 시간을 뛰어넘어 예전의, 태풍을 맞닥뜨리고 골몰하던 망상에 똑같이 잠겨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의 나는 어디로 가버리는 게 아니고 이렇듯 내
영흔의 깊은 곳에 차곡차곡 채워져 있는 거였다.
거문도 동백꽃
바람을 뒤로 하고, 기와집몰랑(봉우리 양끝이 솟아나 있고 가운데가 적당한 각을
이루어 꼭 기와집 지붕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을 옆으로 두고 들판을
걷다가 숲을 만났다 섬의 머리부분이라 숯은 유난히 키가 낮았다. 낮은 대신 옆으
로 퍼져 아주 촘촘한 데다 덩굴까지 장해서 마치 성벽을 보는 듯하다. 사람이 다니
는 곳은 꼭 동굴이라고 해야 좋을 만치 시커먼 구멍이다.
들어서는 순간 바람은 잦아들고 대신 동백나무 가지 가르는 소리만 날카로웠으나
춥지도 않고 음습하기도 해서 아득한 맛까지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저 산마루 위 바다가 보이는 바람 부는 곳은 우리가 날아온 우주의
공간 같고 이곳은 어머니의 자궁같이 여겨져 비로소 생각들도 낮아지거나 좁아져
서 느긋해졌다. 등걸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웠다.
거문도에는 동백나무가 많다. 겨울에는 바람 때문에 몹시 추운 대신 눈은 잘 내리
지 않아 흰눈을 배경으로 하는 핏빛 동백의 재미는 없지만 대신 육지보다 훨씬 일
찍 핀다. 육지에서 살면서 동백 좋아하는 이들을 참 많이 보았다 어떤 이들은 나무
를 가까이해 화단에 심고 어떤 이들은 꽃을 흠모해서 툭하면 선운사나 오동도로 달
려가곤 했다.
그러면 나는 좀 슴슴했다 내 기억에는 동백나무나 꽃이 너무 흔해빠진 거였다.
늘 동백 숲에서 살고 꽃을 따먹었고(동백꽃 꽁무니를 빨면 달콤한 즙이 나왔다) 동
박새를 뒤쫓았으며 잎을 길게 이어 왕관을 만들어 썼다. 부삽에서는 동백나무를 때
서 밥을 지었다.
동백은 차나무과 상록교목이다. 잎은 타원형이고 잎 가장자리에 물결 모양의 잔
톱니가 있고 윤기가 있으며 털은 엄다. 마치 참기름을 발라놓은 듯해 옛날 아이들
소꿉놀이할 때 그릇은 전복껌질을. 밥은 이 잎을 주로 썼다. 이른봄 가지 끝에 한
개씩 崙은 꽃이 피는데 5∼7개의 꽃잎이 밑에서 비스듬히 퍼진다. 횐 수술들이 있
어 꽃이 떨어질 때 같이 떨어진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눈물 한 방울씩 떨어
뜨려 본 이들이 인류 역사 이래로 얼마나 많을까.
겨우내 찬바람을 버터 피웠다가 어느 날 어느 시 갑자기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끝
났다는 듯, 너무 쉽고 허망하게 툭 떨어져 버리는 붉은 꽃. 거문도의 동백꽃은 어디
로 지는가
꽃은 바람에 흘로 진다. 동박새의 부리질에 진다. 아이들의 거친 손장난에 진다.
그것만이 아니다. 새 근무지 찾아 들어오는 등대장의 발등에서 진다. 사람 없는 곳
을 피해 깊숙이 찾아들어 온. 발갛게 얼은 볼에 입맞추는 처녀 총각의 머리맡에서
진다. 사랑하여 비상을 꿈꾸는 연인들의 머리 속에 이별의 예언처럼 진다. 동지나
해를 건너온 물새의 지친 울음에 진다. 뭍에서 들어온 젊은 작부의 한숨소리 너머
로 진다. 뭍으로 나가고 싶은 섬소년 소녀의 눈물어린 눈동자 너머로 바르르 떨며
진다 섬으로 도망쳐 들어온 혁명가의 비통한 주먹 위로 진다. 새로 전근 온 선생님
을 사모하는 처녀의 손아귀에서 진다. 오늘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간 이가 벗어놓은
신발 위로 진다 술 취해 돌아오는 늙은 어부의 주정 사이로 진다. 아니 놀지는 못
하리라, 설탕 탄 막걸리 한 잔에 장구 두드리는 할매들의 치맛자락에 미끄러지며
진다. 여 여 여어어허 여어 여라리 너어엄차 너하넘, 모진 세상 풍파 겪다 이제야
눈감은 이의 상여소리에 춤추듯 진다. 그러니까 그 꽃은 세월의 모진 바람 앞에서
홀연히 진다.
꽃도 꽃이지만 나는 동백, 하면 종자에서 짠 맑은 기름이 떠오른다. 할머니는 종
종 나룻배를 타고 맞은편 거문리로 가시곤 했다. 그럴 때도 내가 뒤따랐다. 거문리
로 가기 전 머리를 곱게 빗으며 동백기름을 발랐다. 그러면 고구마밭 두렁의 하얗
게 마른 풀 같던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달라붙으며 윤기가 흘렀다. 할머니는 볼일
준비를 마치고 뎃질할 때마다 모아둔 머리카락을 마지막으로 챙겼다.
할머니 따라서 가는 거문리 나들이는 즐거웠다. 머리에 기름 바르고 깨끗한 한복
을 차려입은 할머니는 참으로 보기에 좋았다. 아주 좋은 햇살 가운데를 우리는 앞
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바닷가로 내려갔다.
나룻배가 저쪽 거문리 쪽에서 꾸물꾸물 오고 있다. 그러면 할머니와 나는 가까운
그늘을 찾아들었고 그곳에는 언제나 네댓 명이 먼저 와서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섬 가시요7"
"어이 . 어디 간가?"
"나도 거문리 가요."
"이번에 많이 했든가?" (물해질 잘했냐고 물어보는 말이다. )
"통 금이 안 나잠디다. " (물해질로 잡아온 물건은 저울로 달아 넘기는데 눈금이 통
안 올라간다는 말이다. )
"그러데. 금도 금도 짠정스럽게도 안 나가데야."
"그랑께 말이요."
"은자남 들어왔는가?"
(은자 아빠란 소리다. 거문도 말 중에 아무개납과 아무개늠이라는 말이 있다. 남
이 붙으면 아무개의 아빠고늠은 엄마다. 나암,느음 발음한다. 아이를 낳은 다음
거문도에서 어른들이 부르는 내 호칭은 딸애 이름을 빌려와 단하남이다. )
"다음 배로 들어온답디다. "
"돈 많이 불었단가?"
"뭐 많이 불었겄소 경비 산고 이것 제하고 저것 제하고 나은 남는 것이 뭐 있겄
소
'좋은 세상에 많이 좀 벌어보소."
"많이 불어야지라. 저기 나룻배 오요, 갑시다. "
오기 싫은 것 억지로 오는 셈으로 나룻배는 느릿느릿 축항 옆으로 댔고 내리는 사
람들과 타려는 사람들은 각각 이섬 가시요? 어이 갔다온가? 인사들을 주고받고 또
생각났다는 듯이 다시 불러 전할 말 이르고 하느라 잠시 소란스럽다. 사공 흔자만
주름 깊은 얼굴로 말도 없고 표정도 없다. 자세히 보면 날도 더운데 이놈의 나룻배
확 때려치우고 저기 술집에 가서 시원하게 한잔하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있어 보
이기도 했다
사내들은 처음부터 노 옆으로 가고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갑판 위로 걸쳐놓은 나
무에 가지런히 앉고 젊은 여인네들이 배쌈에 각도 맞추어 앉으면 나룻배는 다시 출
발이었다. 말은 거기에서도 끊이지 않아 이러쿵저러쿵 중요한 듯한 것부터 시시콜
콜한 것까지 주고받고, 그러다가 까르르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그러은 쓴다냐 젊은
것이, 하는 노인네들의 꾸중도 튀어나오고 했다.
거기에토 느림의 미학이 있다. 물이 흐를 때는 흐름을 거슬러 길게 원을 그리며
가는데 나는 숱하게 그 배를 歌으면서도 급하니 빨리 가자고 서두르는 사람을 통
못 崙다. 노질 자체가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더 안 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들은 느
려야 할 때는 느릴 줄 알았다. 물살보다도 더 느리게. 바람보다도 더 천천히. 그걸
아는 사람만이 빨라야 할 때를 잘 안다.
나룻배에서 내리면 동도나 서도의 한가한 것과는 판연히 다른 장면이 나타났다.
면 소재지인 고도, 즉 거문리는 공장도 있고 수협공판장도 있어 언제나 사람이 북
적댔고 장사치들도 많았다. 당시는 가발 공장이 성행해서 낙도에서까지 머리카락
을 샀다. 할머니는 머리카락 판 돈으로 내게 붕어빵을 사주었다.
나는 붕어빵을 일부러 나룻배 타는 내내 먹으려고 천천히 먹었다. 맞은편에 祭아
서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코에서 콧물이 길게 흘러내린 것도 그때였다.
해수욕장과 이내창
덤불을 헤치며 섬 아래쪽으로 내 려갔다. 길은 있다가 없어지고 또
' 헤매다보면 나오고 했다. 등걸이 우거진 부분을 간신히 빠져 나오자 자그
마한 풀밭이 나왔다 보니
이곳의 주인들이 있다. 염소떼다. 어미 염소가 나를 향해 독기 있는 목소리로 메에
에에 울었다. 나에 대한 경고이다. 새끼들이 제 에미 뒤로 숨는다.
재미있어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어미 염소가 신경이 날카로워졌는지 씩씩대
며 신경질을 부렸다. 내 동무가 아직 살고 있는 저쪽 동도는 아예 방목을 해버려 야
생염소로 변해 버렸다. 이놈들은 목에 줄이 묶여 있는 것을 보면 주인이 있겠지만
늘 이렇게 산에서 살다시피 했는지 제법 야성의 기운이 있어 보인다
아니나다를까 두두두 소리가들려 돌아보니 제법 덩치가 있는수놈이 갑자기 반
대편 언덕 쪽에서 나타나 나를 향해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親족한 뿔을 잔
뜩 숙인 채. 예전에 염소와 뿔싸움도 하면서 컸기에 한바탕 힘겨룸도 해볼 만했지
만 나는 마누라와 새끼들 앞의 그 수짓으로서의 자존심을 생각하고 등걸 아래로 뛰
어내렸다 놈은 한 발쯤 위에서 메헤헤, 아주 의젓하게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나와
염소는 한동안 같잖다는 눈으로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유림해수욕장이 나왔다. 사람 없는 모래밭. 파도는 모래톱을 만나 쏴아쏴아 길게
부서지고 그 너머로 중선배들이 떠 있다. 걷는다. 사람 하나 없는 해수욕장 걷기는
참으로 편하고 아늑하고 처연하다. 바닷물이 신발로 옮겨온다. 돔발상어처럼 중선
배에서 버려진 희멀건하게 생긴 게가 떠밀려와 꾸물꾸물하고 있다. 한 아주머니가
나타나 그것을 줍는다. 물어보니 삶아서 개나 좀 주려고 그런단다.
이곳에 오면 가슴 한편이 저리면서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이내창이다
중앙대 안성 캠퍼스 총학생회장으로 1989년 여름 바로 이곳 해수욕장에서 익사
체로 발견되었던 이(거문도 근방 해류의 특성상 해수욕장으로 떠밀려온다) . 갸름히
니 순해 보이던 인상 그는 전대협 간부로 임수경 방북사건과 관런하여 안기부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 안기부 인천분실의 요원 도연주와 함께 거문도에 나타
났고 그리고 죽은 것이다.
당시 한겨레신문의 특종이었던 이 사건의 여파는 대단했다 수배중이던 학생이
안기부 요원과 섬에 들어가서 시체로 발견됐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겠는가. 그러나
목격자들은 끝내 진술을 번복했고 도연주가 한겨레신문을 상대로 형사고발과 손해
배상청구소송을 낸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대전시 변두리 자취방에서 살고 있던 나는 신문에서 그의 죽음을 보고 어떻
게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을 오랫동안 받았다. 운동권 학생의 의문사는 당시로는 툭
하면 일어나던 일이었으나 특히 그가 내 마음을 끈 것은 다름아닌 내 고향에서 죽
반 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눈에 익은 곳이지만육지 출신의 학생에게는 이곳이 얼마나 낮설고 황
잔 량한 곳이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곳엘 갔는지 모르지만(안기부 요원
은 알고 있을 것이다) 아는 이 하나도 없는 외딴 섬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고(왜 죽
긁 었는지토 안기부 요원은 알고 있을 것이다) 파도에 떠밀려다렸다고 생각하니 너무
. 가슴이 아파 그를 소재로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가 온전히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이곳을 떠돌지는 않을까. 억울함이 한(恨)
으로 남아 아직도 이곳을 배회하며 울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아직도 그가 편
히 눈감지 못하는 시절이라는 소리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소리다.
해수욕장을 지나 새로 난 길을 걸어 등대섬으로 갔다. 여전히 바람이 불고 사람이 은
없다. 고도와 서도 사이에 다리가 놓일 때 서도와 등대섬이 만나는 부분까지 시멘
트로 포장이 되었다. 나
나는 목너메, 즉 서도와 등대섬이 만나는 약 이십 미터 정도의 바윗덩어리에 앉아
얽박고석에 등을 기댔다. 사람은 없고(그러고 보니 됫산을 오르고부터, 게 줍는 아 긴
주머니 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바다에서는 파도만 밀려오고 있다 산 위에 ,
서 만난 것이 바람이라면 이곳에서는 파도를 만난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나는
이번에는 사방 파도치는 곳의 정중앙에 홀로 있는 셈이다. 프
맞은편으로 등대섬이 웅장하다. 저곳 등대섬에서 산으로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
면 또 동백나무 숲이 나온다. 그곳부터는 기가 막힌 길이 된다. 두셋 정토 어깨를 ?
나란히 할 정도의 넓이 위로 양쪽에서 올라온 동백나무 가지들이 서로 만나 엉켜
터널을 만들고 있다. 그 동백나무 터널은 산 저쪽 너머띄 등대까지 한참이나 이어
져 가히 환상의 길이라 할 만하다.
그렇게 땀흘리며 한참걷다보면 값자기 나타나는 흰 건물.등대.파도를 모으고
어두운 밤 뱃길을 열어주는 곳. 그리고 다가오는 수평선. 남해연안 해류와 쿠로시
오 난류의 지류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 그대로 보이는 곳.
등대섬 옆으로 한 덩어리 뚝 떨어진 바위섬 이름이 선바위이다. 그냥서 있는 바
위라는 뜻으로 오래 전 사람들 사이에서 저절로 지어진 이름인데 글은(『諦꼴 본명
은 김유. 거문도의 유학자. 뒤에 나을 러시아 함대에서 만회 (H劍每)와 더불어 필담을
나눈 이로 추측된다)이 이름이 천박하다 하여 노인바위라고 붙였다고 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공룡이(또는 해룡이나 괴상하게 생긴 바닷짐승의 새끼가) 앉아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선바위가 낫지 노인바위는 좀 그런 느낌이다. 선바위 . 서
있는 바위. 집념과 의치의 느낌을 주는 바위가 좀 귀한가.
내 앉은키로 보면 파도는 내 키와 같다. 저 파도들토 산 위에서 만났던 바람과 같
은 나이를 먹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저 파도들은 이 두 섬 사이를 연결하고 았는
바위를 향해 몰아쳐 왔고 연모를 받은 바위는 조금씩 구멍이 났다(받기만 원하면
이처럼 제 몸이 먼저 상하는 법) .
나는 파도에게 묻는다. 나처럼 이렇게 이옷에 앉아 하염없이 밀려오는 너를 바라
보고 있던 이가 또 있었을 테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던 이도 있었을
테지. 가슴을 치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이도 있었을 테지. 아아 어쩌면 그대로
네 품속으로 걸어 들어가 버린 이들도 있었을 테지?
거듭 나는 혼자다. 내가 저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 버린다고 해도 누가 알 것인
가. 내 몸뚱이가 떠올라 돌아다닌다면 모를까 어떤 기가 막힌 흐름이 있떠 나를 물
속 깊숙한 곳으로 끌고 들어간다면 내가 어디로 갔는지 누가 알 것이며, 혹 아는가,
그속에 이름하여 용궁이 있고그곳에서부터 새로운삶이 시작하는지. 별주부하나
마중을 나와 다정하게 맞이할지. 물위에 육신을 벗고 떠난 사람들이 사실은 기가
막힌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지 않다고 누가 증명하던
가. 그곳이 싫다고 돌아온 이들이 없는데 말이다.
나는 다시 어떤 사람을 생각했다. 먼 옛날 최초로 이 섬에 들어온 어떤 누구. 바람
과 파도와 풀과 나무와 새들의 영토에 맨 처음 발을 들여놓은 사람
기록으로는 이곳에서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거문도에 대
한 확실한 최초의 기록은 『명종실록(明宗實錄)7에 명종11년 7월 제주 목사가 왜선
오 척을 불태우고 격퇴했으며 이때 왜구의 잔당들이 거문도(三島)에 침범했으나 이
를 섬멸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동도 죽촌리에서 돌도끼와 고려 고분, 또 서도에
서 당대(唐代)의 오수전(五鈴錢)이 출토된 것으로 보면 훨씬 옛날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삼국시대부터 살았지 않나 추측된다
이렇듯 쓸쓸한 곳이고 사람보다는 바닷물과 바람만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역사란 사람의 짓거리라 이곳도 풍파가 참으로 많았다. 그 파도에 그 바위와 흙. 그
러나 그 위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은 시대마다 다르고 사연 또한 제각각이었다. 그
게 사사로운 개인의 일일 때도 있지만 격변의 우리나라 역사를 찾아보면 거문도가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시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적이 있었다 이름하여
거문도 사건이다.
거문도 사건
늦깎이로 대학에 들어갈 때 역사시험에 거문도의 위치
를 물어보는 문제가 나와 한 문제 거저 줍는 덕을 보기도 했지만
시험에 나을 만큼 거문도 사건이란 게 별다른 의미가 있었다.
거문도 사건이란 한마디로 1885년 4월
부터 1887년 2월 28일까지 2년 간 영국의 동양함대가 거문도를 무단 점령한 사건
을 말찬다.
제국주의 서구 열강들의 세력 싸움에 봉건 말기의 노쇠한 조선은 그야말로 접시
위의 피자 조각처럼 손만 뻗으면 먹을 수 있는 만만한 쫀재라 바람 앞의 등불 같아
땅을 점령당해도 혼자서는 親족한 방법이 없었으나 외국 군함에 의해 점령을 당한
거문도는 그 사건으로 외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기도 했디
우선 그 당시의 정세를 잠깐 건드려보면 이렇다.
당시 영국과 러시아는 첨예의 대립 상태였다. 러시아는크리미아 전쟁 이후동아
시아에 대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바꾸었고 그 여파로 1800년대 후반 영국은 러시아
의 남하정책에 긴장하고 있었다(1856년 파리회의와 1878년 베를린회의는 모두 러
시아의 남하를 저치하기 위한 회의였다) . 러시아는 부동항을 찾아 지속적으로 남하
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발트해에서 대서양으로 진출하려는 노력이 영국의 간섭으로
실패하자 다음에는 흑해에서 지중해로 남하하려고 시도했다. 그렇게 대결하게 된
두 나라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1885년 2월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의 메르베에 이어 펜제를 정복하자 영국의 최대 식민지인 인도의 관문 헤라트가위
험하게 되었다. 영국은 그 위기를 러시아에 대한 선제공격, 즉 블라디보스토그를
공격할 수 있는 거문도 점령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거문도는 이미 1845년 영국
의 항해가이며 사마란호 함장인 베르체르라는 이가 우리나라에 와서 남해안과 제
주도 수역을 조사할 때 그에 의해 해밀튼항이라고 이름 지어진 바 있다)
많고 많은 섬 중에 거문도가 찍힌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우선 일급 피난항이다. 18세기에 작성된 흥양군 지도에 천여 척의 배가 능히 정
박할 수 있다. 고 나을 정도로 천혜의 피난항이다. 서도 동도 고도 세 섬이 등글게
원을그리고 있어 어느쪽 바람도피할수가 있다. 논은거의 없지만 물이 그다지
귀하지 않고 40만 평의 밭이 있어 신선한 야채를 구하기가 쉬운 곳이었다.
거기에 거문도의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전략적 가치도 빼놓을 수 없었다. 거문토
는 영국의 극동아시아함대 본부인 홍롱과 일본의 나가사키를 잇는 직항로 위에 놓
여 있고 러시아에게는 태평양으로 밀고 내려오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이자 영국에
게도 역시 블라디보스토그로 진출하기 위한 주요 거점이었다.
영국은 아편전쟁 직후부터 거문도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이 이 섬을 차지하게 되
면 중국 일본 조선을 지배하고 황해 해상권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내려오는 함대를 막을 수 있는 군사 요충지로 보았고 북동계절풍에 의
한 난파선 구조의 중요한 위치로 보았다. 거기에다 통상적인 면으로 거문도를 극동
의 싱가포르나 홍콩으로 만들어(즉, 물류기지로 만들어) 아시아를 상업적으로 지배
하려는 야욕이 있었다.
영국은 1885년 4월 11일 거문도 점령을 의결했다. 그리고 거문도는 4월 15일 점
령당하게 된다. 러시아는 물론 중국과 일본 등 우리나라 주변국들이 들고일처났다
우리 정부는 그러나 점령 통고를 20일이 지나서 받게 되는데 그 전에 청국을 통해
소문으로 알게 된 고종과 대신들은 5월 11일 빌린 청국 군함을 거문도에 보내 항의
를 한다. 그리고 조선 정부를 포함해 국제적인 반영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하기 훨씬 전인 1854년 4월 4일 러시아 푸차친 제독(해
군 중장)이 이끄는 기함 팔라다호가 거문도에 무단 입항한 적이 있다. 그날은 그들
이 같은 함대인 보스톡호와 상해에서 오는 멘시코프호와 만나기로 된 날이었다. 그
들은 4월 19일까지 11일 간 거문도에 있었으며 당시 푸차친을 수행한 작가 곤차로
프(1812∼1891. 『평범한 이야기』 『초브로모프』 등의 저자)가 기행문을 써놓았다
그들의 눈에 이곳 주민들이 어떻게 비쳤는가 궁금해 거문도와 관련된 부분만 대략
살펴보면 다음파 같다
‥‥ 끼침내 해밀튼에 닿았다. 섬의 전체 길이는 약 3마일. 바위가 많고 섬 그 자체
도 바위 위에 있으며 군데군데 성글게 숲파 나무가 나 있다
"저런, 이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상자 같군."
스쿠너 함장인 코르사코프가 말했다.
섬의 후미진 물가. 잠자는 듯 조용한 물 위쪽 군데군데에 한국인의 작고 허름한 집
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 있었다. 그저 초가 지붕이 보일 뿐이었지만 가끔 어디를 가는
지 아래위 횐 옷을 입은 주민이 걸어가곤 했다. 우리는 마침내 이 극동지역 마지막 나
라의 사람을 旦게 된 것이다
우리의 보트가 프리게이트함을 떠나 기슭으로 향하고 있을 때, 마을 여자들 한 무
리가 심한 두려움 속에 산을 향해 달음질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을 입구 기슭에서
는사나이들이 떼지어 몽등이와 손으로 우리를 저지하면서 우리가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한자(漢字)로 '여자들은 안전하다 러시아인은 해안을
조사하고 그리고 약간 산책하기 위해 왔을 뿐이다. ' 라고 써 보였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의 보행을 막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동료들은 되도록 마을에
서 멀어지도록 애썼다. 한 시간 뒤에 동료들이 돌아왔다. 마을의 어른으로 보이는 두
노인을 데리고 왔다. 그들 뒤로 한국의 작은 배가 하나 왔다. 그것은 일본의 배와 비
슷했지만 단지 잘라버린 것 같은 선미(777署)는 없었다.
배 안에는 그 밖의 노인 서너 명과 맨발에 머리칼이 더부룩한, 불결해 보이는 녀석
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평민인 것으로 보였다. 평민이거나 그링지 않은 자도 모두 한
결같이 횐 무명이나 풀의 섬유로 짠 헐거운 상의를 입고 있었다. 신분이 위인 자는 청
결한 백색이고 신분이 낮은 자는 같은 백색이라도 다소 더러웠다. 그리고 몇몇 사람
은 밝은 노란색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들의 신발은 일본에서 본 것과 아주 비슷했다. 어떤 자는 갈대나 짚으로 삼은 것
을 신었고 또 다른 자는 무명으로 만든 것을 신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것은
그 머리칼을 묶은 방법이었다. 그들은 머리칼을 유구인(琉諦人)과 마찬가지로 머리에
달라붙게 위로 텟어 올려서는 하나로 묶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모자를 썼다.
그런데 그 모자라는 것이 아주 희한했다. 꼭대기는 겨우 머리칼 묶은 것이 가려질
만큼 조그맣고 그런가 하면 그 차양의 넓기란 마치 양산 같았다. 토자는 듣자니 갈대
를 마치 머리칼처럼 잘게 만들어 짠 것이라 한다.
사실 그것은 털오라기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검은색이니 그들이 무엇 때문
에 그런 모자가 필요한지 이해가가치 않았다. 그것은 투명해서 비로부터도, 태양으
로부터도 또 먼지로부터도 머리를 보호해 주지 못했다. 하지만 형태와 종류가 다른
7자도 또한 많았다. 예컨대 나무껄질로 만든 것이라든가해초로 만든 테 얼는 모자
등이다. (중략)
한국인은 어느 쪽인가 하면 유구인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들은 몸집이 작은데 비해
한국인은 대조적으로 체격이 완강하욱 억세다 또한우리 배의 객인(客人)들을 보니
그들은 수염을 길렀는데 그 수염은 대개의 경우 길고 딱딱한 것이 마치 말의 갈기털
같았다. 어떤 자의 수염은 볼과 얼굴 아래쪽을 모두 덮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자
r에 는 턱 위에만 나 있다
많은 이들이 끈으로 머리에 고정시킨 구리 테의 커다란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근시
때문이 아니라 눈병 때문에 안경을 끼고 있는 것 같았다.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눈병
에 걸린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중략)
두 우리는 내객들을 식탁으로 안내하여 홍차와 빵과 비스켓과 럼주로 대접을 했다. 구
뒤 한자(漢字)로 필담을 나누었다. 그들은 붓글씨를 미처 눈길로 따를 수 없을 만큼
재빨리 썼다.
우선 먼저 그들은 우리에게 어느 고장에서 온 이국인인가, 즉 북쪽에서 왔는가 남
쪽에서 왔는가를 물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암탉이나 야채, 생선
등을 갖다준다떤 거기에 돈을
지불하거?나 豊는 럼주, 베輦脚 기닥 다른 물건과 교
환해도 된다고 滅다. 아마도 장로(長老)로 생각되는 노인이 우리가 쓴 것을 집어들더
니 노래하듯 목소리를 길게 끌여 읽71 시작: 頭다. 군계군데에서 그 목소리는
우리나라
상(聖緣)을 旦고 물첬다. "저건 누굽터까?·, 그
구. 그러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건하게 그
7나 되는 한국인들이
찬 동백 泰민
특푸 약갈인직만 벼!
럭랑괄
보쳤다. 난먼지는
黎꼭먼다-
오늘 운킬 천료 생선
,』
마리와 네 통의 물이 반입되었다. 그러고 나서 장로는 품에서 말린 해삼을 싼 종이 뭉 들
치를 꺼냈다. 우리는 그에게 푸른색 무명 약간과 눈병을 앓는 아들을 위해 물약을 선
사했다. 며
주위에 나무들이 나 있고 마치 호수가 두 개 가지런히 있는 것 같은 후미진 기슭에 있
는 섬 북쪽을 약간 걸어보고 나서 우리는 마을로 되돌아왔다 우리 가운데 사냥꾼은 도 ◎
중에서 서너 마리의 새를 美아 맞추었다. 마을에는 해안에 돗자리가 깔려 있었으며 그
위에 이미 우리 배를 방문한 적이 있는 두 장로가 앉아 우리에게 앉기를 권했다 .
거의 모든 마을 주민이 진기한 손님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또
보고 그러고는 우리가 입은 상의와 머리칼과 피부를 만져보았다. 우리가 신은 장화를 .
벗으라 하고는 들여다보았고 그러고는 양말, 우산, 모자 등도 들여다보았다. 대화는 이 .
바쿰 신부와 고시게비치(중국어 통역)를 통해 한자에 의한 필담으로 이루어졌다.
"당신은 몇 살입너까?" 1
그들이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물었다
"삼사십 세 정도."
라고 그가 대답했다.
"실례입니다만 당신은 육칠십 세 정도라고 생각했습리다. "
라고 그들이 지얼이기 시작했다. 이건 참으로 동양적인 인사치레이다. (중략)
어제 다소 불쾌한 사건이 발생했다 동료 중 세 사람이 뭍에 올랐다. 그러자 한국인
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더 앞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우리의 동료를 위협했으
며 도랑으로 밀어넣기까지 했다. 동료들은 프리게이트함으로 되돌아왔지만 이번에는
무장한 수병을 데리고 다시 갔다. 강행수단을 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 일찍, 마을 장로가 와서 긴 문장의 사과문을 썼다. 그 속에서 그는 어제
사건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또한 우리가 범인을 지적할 수 없음을 애석친게 생
각하고 있다고 썼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자들을 엄중하게 처
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는 부디 화를 내지 않기를
부탁한다면서 그 이유로써 한국인은 사해(四海)안(세상) 물정
에 아주 어둡다는 점을 들었다. (하략)
곽영보의 책 『거문도 풍운사』를 빌려 살펴보면 당시의
거문도 행정 ·군사는 전라도 흥양현(지금의 고흥)에 속했
으며 속칭은 왜도(侵島), 행정관명은 삼도(三島), 풍
(風憲)을 두어 행정을 수행했으나 때로는 군사책임
자인 수방장(守防將)으로 하여금 겸임케
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풍헌은 없는
듯했고 도민의 추천으로 삼도」
(三道絲滯떫吏)의 인준을 받은 별
장(別將)으로 하여금 행정, 군사 등의 통보임무를 담당하게 했다고 짐작된다. 당시
거문도 주민들도 삼도해혈에 이양선이 나타났다고 각 마을 존위(尊位: 마을 대표)
인 서도 덕촌리의 남진익 (南振益) , 서도 장작리의 정만열(鄭萬列) , 동토 죽전리의
김성목(金性濫), 동도 유전리의 박윤경(朴允京), 등과 김염보(金廉甫: 別將인 듯
함)의 이름으로 급보를 보랬다.
하여 급보를 받은 관리들이(발포진 만호 이재호, 보성 군수 윤규석, 흥양 현감 윤
치성, 전라 좌수영 우추 최명호 등) 쫓아왔으나 이미 러시아 함대는 떠난 뒤였다. ◎fi
무능한 조정이 아랫것들 죄 묻는 것 하나는 확실해서 흥양 현감은 문책을 당하고
발포진 만호 이재호는 실명(失名) 유배를 당했다고 한다.
다음이 영국군이다.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했을 때 주민들은 어떻게 대처했을
까 사마랑호가 제주도에 입항하자 주민들이 20일 간이나 산으로 대피했다는 데 비
해 거문도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양측은 아주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거문도에는 관청이 떰었다. 조선시대 지도에도 거의 안 나온, 버려지다시피 한 섬
이었다(그럼에도 정부가 거문도 주민들에게 遂박꼬박 세금은 거둬갔다고 찬다. 역
시나). 이 섬으로는 귀양 온 이들도 드물었다. 관청이 없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일
종의 자구책으로 영국군에게 우호적이었고 촌장을 중심으로 협상을 했다. 일을 해
주고 쌀이나 돈을 받았다. 2년 간 연인원 5천여 져이 주둔했으나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사진과 그림으로 영국에 널리 알려졌다. 서구사회에 널리
알려진 조선의 최초 모습이기도 했다.
영국은 철수하기 전 청나라에 러시아가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아
달라고 요구했고 러시아는 약속을 했다. 1887년 2월 27일 거문도 주둔 영국군의 철
수가 영국 의회에서 결의되었다. 28일 거문도에서 유니온잭이 내려졌다. 그러니까
그 당시 거문도는 한동안 영국의 땅이었던 것이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던 청은 거문도 철수 건을 담당하게
되면서부터 더욱 크게 강화하게 된다. 이때 청은 조선을 병합하려는 의도도 있었
다. 아울러 거문도 사건으로 말미암아 러시아의 아시아령 방위정책이 바뀌게 된다.
해군력에 의지하던 러시아의 아시아 정책은 육군력에 의존하게 되며 육군에 의존
하면 철도를 놓아야 했고 그 철도가 시베리아 철도였다. 철도의 방향은 아시아였고
러시아의 아시아 침략이 명백하였다. 따라서 청일전쟁을 촉진하게 되고 러일전쟁
의 계기가 되었다. 두 전쟁이 우리나라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러시아와 영국의 주요 목적은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다. 거문도는 아프가니스탄을
연결해 주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와 영국두 나
라의 긴장이 완화되자 영국군은 철수하기에 이른다.
1999년 4월 19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우리나라에 왔었다. 국빈이니만큼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그런데 여왕의 행적을 좇는 뉴스를 바라보고 있자니 슬슬 벨이
꼴리기 시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왕은 자기 나라 군대가 함부로 우리의 땅
을 점령한 것에 대해 사과 한마디 없었다.
어떤 잡지를 보니 그가 안동의 박필술 할머니네에 들어가면서 신발을 신고 들어
갔다가 다시 벗었다고 하면서 여왕이 해외 나들이에서 신발을 벗은 것은 이번이 처
음이라고 소개했다(이런 식의 호들갑이 우습기도 하거니와 다른 나라의 문화와 풍
습을 사전에 알지도 않고 온 여왕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세로 일관한 우리도 참
으로 한심할 뿐이다. 우리나라처럼 백인을 대접하는 곳도 드물 것이다j그게 아니라
면 여왕이 높아서? 이른바 유명인사 효과 때문에?) .
거문도를 찾아오지는 못하더라도 주권국가의 땅을 제멋대로 침범한 선대의 잘못
은 사과를 했어야 옳았다(물론 나는 국수주의자도, 그렇다고 꼬장꼬장한 촌로도 아
니다) . 하지 않는다면 하게끔 유도를 했어야 했다. 침략을 거듭 환기하고 확인시켜
놓아야 제국주의의 망령이 살아나지 않는다.
아무튼, 어쨌거나, 내가 앉아 저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은 지구 반대
편에서 온 영국의 수병이 두고 온 아내나 애인을 그리며 앉아 있던 바위일 수도 있
었다. 여순사건 때 도망치던 좌익 인물이 잠시 거쳐간 곳일 수도 있었다. 이내창이
바라보았을 수로 있었다 이 바위는 숱한 사연을 받쳐들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흘
러가고 그 흔적은 이렇게 남는 것이다.
동도기행
바다 건너 마을로
덕촌에서 사십오 도 각도를 왼쪽으로 두고 늠·
파. 고도와서도는 이미 다리로 연결이 되어 _
도 다니고 밌어 오가기 편한 반면 아직도 홀로
는 곳띠 그곳이다.
여객선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오는 연
학생들이 타고 다닌 까닭에 통학선이라고도 i
다. 연락선은 앞으로 나아가고 물방울씨 1-77-
번지는 창문을 통해 동포가 가까워건 는 배포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내가 처음으로 학교를 갔고 처음으로 동무를 알았
던 곳.
덕촌 관사에서 살던 우리 식구는 내가 여섯 살 나던 해에 동도초등학교 란사로 이
사를 갔다. 아버지께서 전근을 가신 것이다. 동도에는 죽촌리과 유촌리, 두 마을이
있다. 학교는 유촌리에 있고 관사는 죽촌쾨에 있어서 우리는 죽촌리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나는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여 추억이 참으로 많다.
마을은 아주 조용하다. 방파제를 오가는 사람도 드물다. 사내 둘이서 바람을 그대
로 맞으며 매어놓은 어선 갑판 위에서 어구를 만지고 있다. 서로 모르는 얼굴이지
만 조금만 이야기를 해보면 누구네 사촌, 오촌 또는 하다 못 해 사돈네 누구네로 이
어지기 십상일 것이다. 섬은 그런 곳이다. 결혼으로 인해 이렇게 맺어지고 저렇게
맺어진 관계가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탓이다.
나는 잠시 마을 입구에서 숨을 고른다. 내 체취가 묻어 있는 곳.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을 이제 막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한다. 옛날 친
구를 오랜만에 만나기 직전의 그 가슴 떨림이 그대로 내게 생긴다.
우리집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도다 왔토다 왔도다, 노래를 부
르며 하는놀이가 있다 아슁게도 나는그놀이를 한번도하지 못했다 언제나주
변에서 슬쩍 쳐다보기만 했기에 아직도 하는 방법을 모른다.
우리 집이라는단어를들을때마다나는 '가족이 살고있는집'보다는 '가족이 소
유하는 집'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가족이 집을 '소유' 하게 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 내가 이십대가 되면서였다. 그래서 해보지 못했다
나는 이사가 싫었다. 이사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 집' 으로 들어간다는 것들
의미했다. 작가가 된 다음에도 그렇다. 도무지 어디로 옮겨간다는 것이 탐탁치 않
는 데다 우선 이사 일을 하기가 귀찮다.
우습게도 나는 한때 이삿짐 센터의 직원이었다. 1988년 2학기 때 그만두었던 대
학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벌어먹고 사는 것이 어려웠다. 스물일곱의 나이
에 처음으로 소설을 써보겠다고 마음먹고 학교엘 돌아왔고 지금은 재개발되어 찾
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둔산동 산동네에 월 2만 8천 원짜리 집을 구했다. 학교를
다녀야 했기에 시간이 나는 것은 토요일 일요일 이틀뿐이었다. 일 주일에 이틀만
다닐 수 있는 공사 현장은 없었다. 7곤차로7를 보다가 이삿짐 센터가 주말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돌아다니면서 우스개로 자주 하는 이야기 중에 '바다의 일'과 '뭍의 일'의 차이
에 관한 게 있다.
농사짓고 사는 뭍의 일을 설명하기에 딱 좋은 장면이 하나 있다. 물론 객토하고
매고 물 대고 심고 뿌리고 잡초 제거하는 등등의 갖가지 일거리가 그곳에 해당되지
만한가지로 설명하라면 나는삽이나호미 하나자전거 뒤에 매달고 잠방이 걷은
노인네가 뜨거운 햇살 아래서 논이나 밭으로 가는 장면을 댄다. 급하게 가는 법 없
이 왼쪽 오른쪽 적당한 각도를 그리며 가다가 저만치 논에서 누가 허리 굽히고 있
으면 잠시 서서 '여이, 그짝은 이번 참이 약했다나? 뭐라고, 아녀 우덜은 아직 못
했네그랴.' 그런 소리 몇 마디 나누다가 슥, 슥, 오래된 자전거 바퀴를 굴리며 다시
가는 그 느릿한 풍경 .
뭍의 일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기 전에는 도무지 바쁜 맛이 없다. 아니 왜 바쁘지
않겠는가. 바쁘기는 한데 그러나축축 늘어진 상태로 바쁜 게 종일 이어지기 때문
에 바쁘고 안 바쁘고가 별 표시가 나지 않는다. 농사일이란 건 작업 시간이 따로 정
해져 있는 치 아니라서 꾸무럭꾸무럭 꿔를 띄우고 해를 지우기 마련이다 움직이기
는 하되 급하지 않은 것. 자전거를 타고 논이나 밭으로 가는 노인네. 그게 '뭍의 일'
의 모습이다.
처음으로 노가다를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가 '해만 지면 내 돈이다' 이
다. 현장에서 돗내기(일을 시간으로 맡는 게 아니라 양으로 맡는 것)를 맡아 한순간
에 후다닥 해치워 버리는 경우가 아주 없지 않지만 잡부나 조수들은 결국 해가 질
때까지 꼼지락거리다가 땡, 종이 쳐야 옳게 일당벌이가 된다.
언젠가 내가 그런 형태의 일을 타박하자 같이 잡부 일을 하던 한 아저씨는 맞장구
를 치며 말했다.
"저것들은(집 주인과 감독) 우리가 하룻밤에 집 한 채를 지어주어도 고마운지도
모르는 것들이여. 대신 뭘 좋아하느냐? 담배 한 대 피워도 서서 피우는 걸 좋아한다
니까. 앉아서 쉬는 꼴을 못 봐.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 그건 상관없어. 빈 질통이라
도 지고 그저 실실 돌아댕겨야 일 잘한다고 해. 여, 한씨. 슬슬 왔다갔다말 해. 노가
다판에서 뛰면 삼 년 재수 없어. 일 열심히 하지 마. 배 골아."
해만 지면 내 돈이다. 라는 소리는 바꾸어 말하면 해가 져야만 내 돈이다. 소리다
뭍의 일이란 그러니까 작업 시간으로 말한다
바다의 일은 반대이다. 일할 시간이 굳어져 있지 않다. 일의 대상이 눈에 훤히 보 를
이는 게 아닌, 잠복해서 돌아다니는 어류들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패류나 해초들을
따는 일도 간조 만조의 물때에 맞춰 일을 해야 하기에 그렇다. 바다에서의 실제 작 는
업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대신 한번 시작하면 매우 바쁘다. 담배 피을 시간도 없고
심지어는 오줌 눌 시간도 없다. 아니 오줌이 마려운지 어쩐지도 모르고 넘어가기 ◎
일쑤이다. 그 정도로 한번 시작됐다 하면 정신없이 진행된다. 그러다가 일이 끝나
면 긴 휴식시간이 보장된다. 』
뭍에서 그나마 바다 일과 같은 성질의 것이 이삿짐 센터 일이었다. 전화가오면
사장이 순번대로 기술자에게 우리 같은 왔다갔다 하는 패들을 붙여 내보냈다. 일의
경중에 따라 일당이 차이가 있으며 운이 좋으면 하루에 세 탕을 뛰기도 했다. 일이
끝나면 수고료 받은 데서 삼심 퍼센트 떼고 일당이라고 받는다.
요즘은 무슨 무슨 무빙이니 해서 포장형 고급 이삿짐 센터가 즐비한 까닭에 예전
같이 사람들이 밧줄 들고 덤벼드는 풍경은 거의 없어진 상태이다(밧줄은 곤도라가
없는 아파트에서 창문으로 장농을 올리는 수단이다) .
이사를 해보면 짐의 내용과주인의 성격이나수준이 딱들어맞는다. 짐이 검소한
이들은 사람도 실실해 보이는 반면, 이것저것 복잡한 데다 소비재(주로 옷)가 주종
인 이들은 끝까지 사람을 부려먹으려고만 한다. 자기 핸드백도 안 들고 가는 여자
를 본 적도 있다.
그렇게 주말 이틀을 센터에서 보내고 일요일 어스름 저녁에 산동네를 오르면 나
는 저 먼산 너머로 퍼지는 해지는 모습과 동네 입구에 하나둘 들어오는 백열등 가
로등 빛의 그 쓸쓸한 기운에 지곤 하여 동네 입구 슈퍼에서 소주 한 병과 고등학생
이 만든 일금 삼백 원짜리 햄버거를 좌판(아버지가 입원하고 어머니가 간호하기 때
문에 대신 맡은)에서 샀다.
그렇게 한잔 마시고 나서 그저 죽도록 일이나 하거나 세상 너른 천지를 가랑잎처
럼 마냥 ◎굴거나 하는 꿈에 가위눌리다가 깨어나면 죽도록 싫은 게 학교 가는 것
이었다. 학교까지는 버스 시간만 오십 분이 걸렸다. 그러나 꼭두새벽과 마찬가지인
월요일 1, 2교시 문예창작론 수업은 빠지지 않고 바득바득 가곤 했는데 바로 소설
쓰는 방법을 배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곳에서 만난 분이 바로 채진홍 선
생님이고 그리고 그분께 배웠다
선쟁님은 본시 단아하고 말수가 적은 분이라 '열강의 재미'는 없었지만 조용조용
지나가다 생각났다는 투로 한두 마디 건네주시는 것들이 바로 계명 같은 가르침이
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뭐가 뭔지 갈팡질팡 오리무중이었으나 흐르는 시냇물에 나
뭇잎 띄워보내듯 일러주시는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내 둔한 머리가 조금이나마
깨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 여수에서 살면서 주민등록등본을 떼어보면 열 개의 칸이 모두 꽉 차고 넘
쳤다. 우리는 이사를 다니면서 살아온 셈이다. 나는 이사가 싫었다.
그래서 그런가. 내 기억 속에 우리 집의 느낌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 바로
동도의 집이다. 그 집 다른 말이 필요없는 우리 집(물론 관사였지만 나는 그때 관 구
사가무엇인지 몰랐다). 내 유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 마루에 서서 마당을 향
해 오줌을 美면 잠결이라 어른어른한 탓에 마치 저 너머 바다에 내 오줌발이 먹혀 민
들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던 곳. 내 집. .
바닷가에서 시작된, 너무나도 좁아져 버린 골목을 따라 올랐다. 동무들의 집이 하
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포클랜드로 나가는 오징어배를 타다가 지금은 조선소에서 용접공으로 있다는 까
불이. 천안에서 옷가게를 하고 있는, 왕년에 누런 코가 일품이었던 애. 포크레인으
로사업을 하다가지금은 연락이 안 되는 애. 대기업 사원이 된 애. 페리호 선원이
었던 애. 체육선생이 된 애.오래도록 소식 끊어진, 나 때문에 얼굴에 홍터가 남은
애. 아, 끝내 바다에서 제 목숨을 마쳐버린 애. 그러나 어찌 그 애들뿐이겠는가. 부
산으로 여수로 광주로 서울로 營뿔이 을라가 뿌리내리고 사는 애들 거문도가 친정
인 그 애들의 집도 보인다.
거듭 떠로른다
되들이 소주 한 잔씩에 톳나물로 안주하고 마을에서 가장 큰 녹음기 빌려다가 누
구네 마당을 통째로 빌려 놀던 부녀회 아주머니들. 바하마 바하마 마마(팝송이다)
만 합창으로 따라하다가 다음 가사부터는 일제히 입다물고 몸을 흔들어 먼지를 피
워대던, 그래서 바라보고 있던 날 가슴 아프게 했던, 일에 치여 노는 것도 서툴던
아낙네들. 그들의 집도 보인다.
저쪽에서 올라오는 골목과 만나는 곳을 조금 지나자 우물터가 나왔다 우물이 이
를테면 마을의 로터리 같은 길이라 우리 집 쪽으로 나 있는, 산으로 가는 길과 저쪽
산으로 뻗어 있는 길, 튀밥 기계 하나 가지고 벌어먹고 살았던 외팔이 아저씨네 가
는 길이 여전히 그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밟히고 버무려진 소똥이 시간의 무게에 눌려 벽돌 業가리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
던, 그러나 지금은 풀만 무성한 고샅길을 걷자 바로 우리 집이 나왔다
집은 없다. 대신 옛날 한때 훌릉했다가 풍파에 쉽쓸려 과거는 없어지고 현재만 남
은 무슨 절처럼 집터만 반듯하게 남아 있다 돌담도 그대로이고 담의 이끼는 수대
를 더 내려오면서 몹시도 짙어졌다. 흔한 판자쪼가리나 주춧돌도 誠이 말끔하여 터
에는쑥만가득하다. 쑥밭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나무로 얼키설키 막아놓은 곳
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섰다.
캐리
이곳에서 처음으로 동무들을 만남과 동시
에 좋은 친구가 하나 생겼다, 캐리라는 개로
이름은 내가 지었다.
네모 길쭉한 눈을 하고 언제나 각진 파이
버 쓴 독일군들을 향해 총을 榮는, 그
리고 독일식 군용코트와 목 긴 장화가 등
장하는 만화의 주인공이 캐리였다 그 만화가 뀨행했던 까닭에 같은 이름의 개가
동네마다 많았다. 초등학교 일학년, 그것도 도대체 놀이감이 따로 없는 그 시절의
섬에서 집에 개 한 마리 있다는 것이 얼마나 흐뭇하고 즐거운 것인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잡종 뽕개인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매우 영특했던 걸로 기억된
다 몸이 사각형으로 잘 빠진 데다 개 흔한 동네에서 그래도 똑똑하다고 내 동무들
에게 칭찬을 자주 들었다.
밥 주는 것이야 어머니 일이었지만 데리고 노는 것은 내 차지였다. 나는 책가방을
내던지기가 무섭게 캐리를 데리고 바닷가로 들로 쏘다녔다. 유독 나를 잘 따랐다
수영도 잘해 혓들이 일부러 물에 빠뜨리기도 해 어린 내 마음을 아주 아프게 만들
71도 했다
치끝에서 진대를 낚을 때도 꼭 따라와서 잘도 바위를 타고 다녔다. 캐리는 내 친
구였고 자랑거리였다.
한번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누가 나를 부르며 마당을 가리켰다. 캐리다, 캐리
다. 아이들이 나보다도 먼저 한눈에 알아보고 운동장으로 몰려갔다 캐리는 몰려나
오는 조무래기들을 일변 반기고 일변 피하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와락 달려와서 무
릎 崙고 앉았다 그 뿌듯함. 캐리가 나를 찾으러 고개를 넘어 학교까지 온 것이다.
다시 수업이 시작되고 나는 캐리를 보냈다. 수업 끝나 청소하고 그네 타느라 해찰
부리고 하다가늦게 나섰는데 학교 정문 아래 옆으로 길게 누운 밭에서 캐리가 나
왔다. 그때까지 나를 기다린 것이다 점심때가 지나 배고픈 시간인데도 나는 배고
픈 줄도 모르고 나를 기다린 캐리가 좋아서 한참이나 쏘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들이닥치며 하던 대로 캐리를 찾았으나 없
었다. 어디 갔느냐고 물어도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찾았다. 뒤란도 찾고 뒷
집 마당도 찾고 도랑도 뒤지며 불렀으나 반응이 없었다. 그러니 자꾸 물어볼 수밖
에. 못 들은 척하다가 내가 자꾸 재촉하자(아마 울 듯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화난
음성으로 대답했다.
"느그 삼촌이 친구들이랑 와서 잡아묵어 부렀단다.
어머니의 말을 요약할 것도 없이 외삼촌이 친구들과 찾아와 캐리를 밥 대신 먹었
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화가 나 있었고 나는 극도의 상실감을 맛보아야 했다. 어머
니가 화가 난 것은 그러나 나와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삼촌이 친구들과 와서
캐리를 먹기는 먹었는데 공짜로 먹어치워서 화가 난 것이었다.
나는 그날 오후 내내 혼자 바닷가에 서 있었고 몇 달 동안 친구들의 꽁무니를 따
라다니는 남의 집 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행란네
바다 일은 속도감 있게 빨리 끝나는 대신 늘 위험했다. 섬사
람들은 험하고 척박한 곳에서 뿌리내리고 살기에 위험한
일이 많았고 또 그만큼 얼토당토않은 죽음도 흔했다.
대표적인 것이 떼초상이다. 섬에는 제삿날 같은 집이 여럿이다. 한
배를 타고 어장 나갔다가 풍랑에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우리 됫집이 행란네로 딸 세 자매였다. 막내딸이 내가 초등학교 1, 2학년 때 고학
년이었다 나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위였으나 집이 가깜기도 했고 어띠니들끼리 친
했던 관계로 나는 종종 그 집에 놀러가곤 했다.
밤에 놀러가면 침침한 호야불 아래 누나 세 자매가 뭔가를 하며 놀고 있었고 아주
머니는 잉, 왔냐, 밥 묵었냐? 놀아라, 하고는 구석에서 바느질을 했다. 집이 가난하
여 석유 한 방울이라도 아끼고자(아저씨는 이미 돌아가신 뒤이다) 호야 심지를 조
금만 올렸기에 간신히 물건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인데도 아주머니는 어두운 곳에
서 불편하다는 말 없이 바느질을 했다
거문도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내가 유독 좋아하는 게 몇 가지 있다. 아이를
보면 내 자식 남의 자식 구분 없이 끌어안고 하는 소리가
"오매 오매, 내 천금아."
이다. 천 냥의 금 같은 아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귀하다는 소궈. 무한
대의 애정이 담겨 있는 말이라서 지나가다 들어도 마음이 벙글어진다. 또 하나가
"놀아라"이다. 내 기억에 누구네 집에 놀러갔을 때 이래라, 저래라,뭐 해라, 뭐 하
지 말아라,소리를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자식들에게야 야단이나 싫은소리가 없
지 않겠으나 친구가 오면 으레 입에 붙은 소리가 "그래 놀아라'였다
"놀아라"의 반대로 칠 만한 것이 "아이고, 이 사재 같은 년아"이다. 화가 난 어머
니들이 딸을 때릴 때 했던 말로 추측해 보자면 사자는. 즉 저슬사자를 이르지 않나
싶다
누나들이 논다고 해봤자 별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껄이 귀했고 환대 받던 시절
이라 껌 하나 생기면 여자애들은사나흘 벽에 붙여놓고 씹었다. 그 누나들도 예외
가 아니어서 그 질긴 고무를 본전을 빼다 못해 되레 남는 장사할 양으로 여러 날 씹
어댔고 아우가 물려받아 씹기도 했다.
"영훈아, 이것 볼래?"
그 중 하나가 호야를 살짝 들어올려 씹던 껌을 구웠다. 그러면 호야불꽃은 길게
모가지를 뽑으며 그을음을 냈다. 누나들은 까맣게 변한 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양
손가락으로 길고 넓게 늘인 다음 등글게 말아서 내 귀에 대고 눌렀다. 따다닥 소리
가 났다. 나는 그게 신기하여 이 누나에게도 귀를 대고 저 누나에게도 구를 댔다.
한번은 학교 파하고도 한참이나 놀다 오니 어머니가 사립문에 몸을 기대고 몹시
슬프게 울고 계셨다. 나는 새초롬한 기분이 되어 눈치를 살피다가 왜 우냐고 물었
다. 행란네 아주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다고 했다. 삼부도로 갯것을 갔는데 벼랑 한
쪽에서 빨갛게 익은 보리수 열매를 보고 자식들 먹일 욕심으로 그걸 따러 갔다가
낙상을 했다는 것이다.
삼부도는 거의 위로만 치솟아 있는 무인도라 그곳에서 떨어지면 죽기 십상이었
다 그 집으로 갔다 마당에는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걱정스런 얼굴을하고 있
고 굳게 닫힌 방문 안에서는 누나들 울음소리가 을고 있었다. 주워들어 보니 강약
국이 지금 방 안에 있기는 한데 워낙 야무지게 부딪혀 놔서 소용이 없다고들 했다.
아주머니는 그날 밤에 돌아가셨고 나는 잠결에도 어머니의 불쌍해서 어떡하냐, 숨
죽이는 울음과 하늘이 찢어져라고 악을 써대는 누나들의 울음소리를 밤새 들었다.
호야
호야불을 기억하는가? 흔히 남포등이라고 부르지만 밑 터지고 준등이 긴 윤리 항
아러를 우리늘 호야라고 불렀타. 그때 가게마다 우산살 뒤집러놓은 것 같은 철사예
호야를 하나씩 끼워놓고 팔았다. 워낙 勢기포 해서 잘 캐졌기에 호야나 全주 피들
이 병에 파는 석유를 사러 가는 게 내 중요한 심부름이었다.
간혹 채로 산 호야를 깨거나 석유병뜰 떨어뜨려 야란물 맞기토 豫다. 호야. 하면
생각나는 게 있다.
어느 날 무슨 일인가로 우리 일가족은 밤늦어 집안에 들어서게 되었다. 큰방에 어
머니와 작은아버지와 내가 있었다. 내가 호야불을 붙이려고 여러 번 성냥을 그어
들띠대도 불뽄은 꾼물꾸물하다가 금방 죽어버렸다. 무언가를 치우던 어머니가 일
어서서 보더니 기름이 떨어졌다고 했다. 작은아버지가 부엌에서 기름병을 들고 들
어와조대를 대고 기름통에 따랐다. 그러나 아무리 불을 붙여도 점화가 되지 않았
다. 나는 작은아버지와 머리를 맞대고 끙끙대기 시작했다
심지를 더 빼보고 어쩌고 하던 작은아버지한테 어머니가 물었다.
"삼춘, 섹유 맞소?"
"정지에 있는 것 갖고 왔는데요."
"어디 냄새 좀 맡어봅시다. "
어머니가 코를 들이대더니 호호 웃었다.
"이거 간장이요."
"예, 간장이요?"
"깜깜해서 잘못 찾은 모양이요."
작은아버지가 부엌을 더듬어 간장이 든 되들이 병을 들고 와 따른 것이다. 부랴부
랴 그걸 버리고 새로 석유를 따르고는 불을 붙이자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불꽃이 올라왔다. 그날 밤 우리 가족은 짭쪼롬한 불빛 내음을 맡으며 잠이 들었다.
작은아버지
나는 지금도 국방색 무의가 가장 맛있는 색깔로 보인다. 단순한 국방색 무의보다
도 壽은 카라멜색, 또는 카키색만 보면 무언가 맛있는 것에 대한 기대가 생기곤 하
는 게 시레이션 때문이었다. 전후세대 중에서도 한참이나 뒤진 내가 육이오 세대처
럼 그런 느낌을 갖은 것은순전히 작은아버지 덕분이다.
작은아버지는 월남 파병 군인이었다. 이제 막 배운 글씨로 연필에 침 묻혀 가며
작은아버지에게 편지를 쓸 때 나는 꼭 백지 한 장에 따로 그림을 그려 보내곤 했다.
그림이라야 별것 아니고 작은아버지를 그린답시고 얼굴 동그랗고 몸집 네모난 남
자 모양에 달고 다니기 벅찰 정도로 커다란 잠지를 그려 넣은 것이다 그 그림이 소
대 내에 인기가 아주 좋아서 상품인가 뭔가(답장 경연대회 같은 것을 했을 것 같다)
로 받았다며 그 카라멜색 통조림을 소포로 붙여왔다. 통조림을 열기 전의 그 기대
감. 노상 다른 게 나왔기에 이번에는 무엇이 나올까, 하는 그 감칠맛 나는 기대감으
로 나는 온몸이 다 간지러웠다 그거 하나 들고 나가면 동네 또래들과 강아지들이
다 들러붙었다(그런 종류의 것이 또 하나 있다. 나는 글을 구경해 보기도 전에 외국
산 커다란 오렌지를 여러 개 먹어보았다. 외국배 선원을 하던 이모부가 보내주신
것이다. 맨몸으로 말단 선원부터 시작한 이모부는 집념 하나로 나중에는 당시 우리
나라에 몇 되지 않은 갑1종 선장, 그러니까 몇 만 톤짜리 배를 모는 진짜배기 마도
로스가 되셨다).
그러나 작은아버지는 월남에서 병을 얻어왔고 증세가 심해지자 우리가 살고 있는
거문도로 요양을 왔었다. 덕분에 나는 작은아버지와 한동안지낼 수 있었다. 아주
큰 키에 호리호리 마른 체격인 데다 병을 앓아 더욱 흘쭉한 얼굴에 수염이 금방 자
라곤 해서 외국 배우처럼 근사한 모습이었다. 덕분에 작은아버지를 흠모한 섬 아가
씨들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훗날 작은아버지가 계신 광양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는 풍문이 있었다.
작은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서로 깊이 언약을 한 아가씨가 있었고 그 인형처럼
생긴 작은어머니와 결혼을 했다(아아, 우리 집안 한씨의 성질에 관한 이야기가 나
올 때 작은아버지가 등장을 하는데 단지 결혼을 반대하는 처갓집 대청마루에 도끼
를 휘둘러 박아놓고 딸을 빼왔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
어쨌든 그건 됫날 이야기이고 당시 작은아버지는 몹시 앓았다. 갑자기 고열이 을
라 사람을 못 알아볼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말라리아를 앓았다고 했는데 훗날 생
각해 보니 고엽제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여수에서 중학교를 마친 나는 광주로 고등학교를 갔다.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작
은아버지 꿈을 꾸었다. 어디 먼 데로 간다고 잘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는 쓸쓸한 모
습으로 뒤돌아 서서 멀어졌다. 집에 물어보니 그날 밤에 돌아가셨다 한다.
그때 여러 날 말을 않고 지냈다
껌
껌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다. 아니 껌에 대해서가 아니라 껌과 관련해 어떤 사내에
게 야속함이 아직 남아 있다. 어떤 사내가 나에게서 껌을 강제로 빼앗았다거나 또
는 껌을 이용해 나를 괴롭혔구나(예전에 극장 의자에 껌을 붙여놓아 사람을 골탕먹
인 것처럼) , 짐작하겠지만 정반대이다.
문제는 쑥이 었다.
남도는 봄이 일찍 왔다. 봄이 일찍 온다고 해서 포근한 날씨가 일찍 시작하는 것
은 아니었다. 이월 몽등이바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겨울의 기운이 남아 있는 동안은
늘 차가운 바람이 일고 툭하면 풍랑이 불었으나 양력 일월만 되면 봄을 이끄는 것
들, 쑥이나 달래, 냉이 따위의 나물이 일찍 피었다.
하여 이른 봄철부터 쑥을 받는사람들이 육지에서 들어왔고 그러면 동네 별다른
일거리 없는 노인네 아이들 여자들은 들로 산으로 쑥을 캐러 나갔다(지금도 그렇
다) 내 기억에 당시 일 킬로그램 캐오면 십 원을주었다 십 원은큰돈이었고도통
돈을 만져보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것처럼 재미난 게 따로 없었다. 나도 예외가 아
니었다
그러나 일학년 때 난생 처음 쑥 캐러 들로 나간 나는 아무리 학교 다녀온 오후 내
내 캐 모아도 늘 일 킬로그램에서 조금 모자랐다. 사내가 저울에 대충 달고 돈을 계
산해 주는데 촌사람이 눈이 약고 재빠른 장사꾼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개중 노
인네들은 바늘 저울을 볼 줄 모르는 이들도 적잖아 뻔히 짐작하면서도 섬에 사는
게 죄인 관계로 눈금사기를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어쩐지 나는 그
해 봄 여러 번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지전을 쥐어보지 못했다.
일 킬로가 못 되면 오 원 하는 왔다껌을 한 통씩 주었기 때문에 날마다 흙에 긁힐
대로 긁힌 손에는 껌만 한 통씩 들려지게 되었다. 벌어보고 싶었던 돈은 못 벌어보
고 봄철 내내 껌만 씹다 다 보냈으니 참으로 한심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이
틀치를 모았다가 한 번에 달아보는 머리를 왜 쓸 줄 몰랐을까.
달걀
언제나근처에 있어도 애정이 가지 않
아 서로 친해지지 못하는 동물이 있으니
바로 計이다.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따
라을 줄도 모르고 염소처럼 보기에 귀엽
지도 못하고 소처럼 든든하지도 못하는 것이 자발맞게 파닥거릴 줄이나 알고 아무
데서나 물개똥을 찍찍 갈겨대는 통에 토무지 한가족으로 여겨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잡아먹어도 서운하지가 않았다. 어느 일요일 우리 집에서도 닭을 잡아먹
자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누가 잡느냐다.
한 번쯤 잡아보려고 생각하고 시도를 해보았던 이들은(주로 시골에서 할머니나
어머니, 또는 장모님이 시켜서 마지못해 손을 대보았을 것이다) 알 것이다 실제 닭
모가지를 비틀기가 얼마나 쩨름칙한 것인지 . 나와 동생들은 당연히 제외되었고 어
머니는 고기를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데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살아 있는 닭
7가지를 비틀어본 적이 없기는 아버지도 매일반이었다.
그렇다고 이웃집에 잡아달라고 부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잡지도 못하는 주제
에 먹으려 드는 심사가 스스로 걸리고 또 닭 잡아준 이에게 됫다리 한 개쯤은 안 줄
수 없는 노룻이라 일만 거창하니 커지기 마련으로 남는 게 없는 장사였다. 아버지
는 고민 끝에 총으로 美아서 잡기로 했다. 마당에서는 네 마리가 놀고 있었다. 아버
지는 한 마리를 고르라고 했다. 우리는 그 중 한 마리를 골랐다(그것도 모르고 고갯
짓만 하고 있으니 닭은 닭이다) .
총소리가 나고 우리가 손가락질했던 놈은 화들짝 놀라 나자빠졌는데 한 방에 툭
떨어지는 새와 달리 덩칫값 하느라 사방팔방을 꼬꼬꼭 넘어지고 달리고 날아오르
고 하여간난리가났다 놀란 것은 닭뿐만 아니었다 우리 식구도 모두 놀랐다. 아
버지는 다시 조준을 했고 결국 놈은 세 방을 맞고서야 쓰러졌다.
닭고기 맛은 기억나지 않으나(당연히 맛있었겠지) 고기 사이에서 총알을 찾느라
조심스럽게(삼키지 않으려고) 먹었던 기억은 새롭다.
당시에는 닭고기보다 달걀이 더 귀했다.
거문리 술집 작부들이 애써 구했던 게 바로 달걀이었다. 늘 배에서 살다시피 하는
손님들에게 해물로만 상을 차려주는 것은 정육점 주인에게 고기 대접하는 셈이라
색다른 안줏거리를 찾게 마련이었다. 마침 맞는 게 달걀이다. 선원들은 술상에 달
걀 프라이가 올라야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허나 요즘같이 양계장이 있어 흔하면 모를까 닭이 낳고 싶을 때 낳는 것이라 구하
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작부들이 꾀를 낸 게 바로 학생들에게 사는 것이었다. 수고
비를 한 개당 얼마씩 쳐서 주기만 하면 되므로 고생스럽게 집집마다 돌아다닐 필요
도 없고 또 한꺼번에 여러 개를 구할 수 있었다. 주로 머리 請은 여학생들이 구해서
술집에 팔았다. 공부보다는 장사에 재미를 붙이는 애들이 있기 마련이었고 더군다
나 뻔히 이문이 보이는 쉬운 장사였다. 문제는 그 재미를 보고자 하는 애들이 너무
많은 데 있었다.
처음에는 학교가 파하고 나서 집집마다 더듬어 달걀을 그러모았는데 장사꾼들이
불어나자 경쟁이 붙어 공급이 달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자 다른 친구들이 움직
이기 전인 새벽바람으로 동네를 도는 애들이 늘어갔다. 그때 집마다 들리던 소리 .
"있쇼(계세요)?"
"식전부터 누구냐?"
"달걀 낳소?"
"참나. 가만있어 봐라. 낳는가 보자."
...
"아직 안 놨다. "
"어저께도 안 나등만 어째서 아직 못 논다요?"
"지가 안 낳는 걸 나가 어찌 안다냐7"
"오늘은 꼭 놔주시오, 예?"
"너도 참 벨하다(특이하다) . 닭이 저 낳기 싫어서 안 낳는 걸 으쩠게 한다고?"
"하여간 나 학교 갔다 올 동안 꼭 놔줘야 돼요, 예? 딴 것들(다른 아이들)한테는
절대 주지 말고."
"오다, 벨한거 "
"하여간 나한테 놔주시요 예?"
아마 요즘 유행하는 주문 생산제의 시초가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닭과 연관된 이
야기 하나 더
같은 삼산면 관내이며 거문도와 여객선으로 한 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초도에
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집 딸이 나이가 들어 서울로 식모살이를 갔다가 몇 달 지나서 내려왔다. 어
느새 도시 물이 들어 위아래로 확 빼입고 나타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입에 달고 다
니던 사투리까지 완벽하게 걷어내고 서울말로 새로 입단장을 했더랬다 반가운 마
음에 선착장으로 달려간 어머니는 어머나, 너 왜 그러니, 잘 지냈니?, 식의 딸애 말
투가 마뜩찮았어도 참았다. 짐 진 어머니를 뒤에 붙이고 집으로 올라온 딸애는 아
휴 힘들어, 하고는 마루에 사뿐 앉았다. 마당에서는 닭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어머니, 저 새는 무슨 새예요?"
그때까지 참고 있던 어머니는 하도 같잖고 기가 막혀서 일갈을 내질렀다
"니에미 셉새,다, 이년아."
그 달걀 때문에 내가 마음고생을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오후 우리 집 닭이 꼬꼬
댁, 뭔가를 자랑하는 목소리로 유난히 울어댔다. 그게 알 낳고 뻐기는 것이란 걸 나
는 알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뒤란에 반질반질하고 탐스러운 달걀이 하나 놓여 있
었다 막 몸에서 빠져나온 것이라 따뜻했다.
이렇게 단단하고 탱탱한 것이 저 살 속메서 만들어지다니, 고작 배추 業가리나 지
렁이 잡아먹고 이렇게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것을 만들어내다니,의 생명과 탄생에
대한 경외감은 코딱지만큼도 느끼지 못하고 나는 순간 갈등에 쉽싸였다.
아버지가 날계판 잠숫던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나도 구멍을 내고 날것의 닭을
먹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유혹은 몹시도 크고 강한 것이라 이름하여 어미라고
할 암탉이 저만치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무시하고 어떤 힘에 이끌려 송곳너
로 구멍을 내고 平죽 빨아먹었다. 그리고 찾아오는 배신감. 도대체 프라이나 삶았을
때의 부드럽고 고소한 맛은 어디에도 없고 몰캉거리는 그 이상한 느낌파 비릿한 냄새
(맛에 대하여 몹시 기대를 하다가 배신감을 맛본 게 세 가지이다. 하나가 날계란이고
다음은 여수로 이사 가서야 비로소 맛볼 수 있었던 소시지와 바나나이다)
배신을 당했든 말았든 나는 어머니가 아주 아끼는 계란을 통째로 먹어버린 나쁜
어린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겁이 나기 시작했다 껍
질을 던지고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밖에서 해를 저물리고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가 물으셨다.
"니가 계란 묵었냐?"
"아뇨."
나는 당황되어 거짓말을 했다
"니가 묵은 거 아니여? 이것 봐라."
어머니 손에는 한쪽에 구멍이 동그랗게 나 있는 달걀 껍질이 들려 있었다.
"분명히 계란 낳을 때가 되었는디 , 아무리 봐도 계란이 음어. 그래서 찾아보니께
이렇게 누가 빼묵고 껌질만 있잖어 니가 안 묵었어?"
나는 순간 껌질을 그대로 두고 나온 것을 후회했다. 밟아서 가루로 만들든지 멀리
풀밭으로 던지든치 해서 완전범죄를 해야 했었다. 너무도 생생한 증거물에 결국 실
토를 했으나 야단을 맞지는 않았다
"묵고 싶으은 말을 해야지. 꼭 놈(남)의 집처럼 돌라묵냐(훔쳐먹냐)?"
어머니는 웃으셨고 그제야 오후 내내 나를 짓눌렀던 찝찝한 기분에서 빠져나을
수 있었다.
총
집에 사냥용 공기총이 있었다. 아버지는 사단 사격 대표 출신답게 총을 잘 美셨다
(담에 산비둘기 두 마리가 앉아 있으면 포복으로 다가가 우선 한 마리 美아 떨어뜨
린 다음 재빨리 다시 장전해서 날아가는 놈까지 떨어뜨렸다), 총을 한번 들고 나가
면 동네 아이들은 출출거린 뱃구레를 하고 졸졸 따랐다. 어렸을 때 그것처럼 환상
적인 게 또 있는가. 참새 , 멧새 , 흑비둘기 따위, 그리고 한겨울에는 바다로 나가 청
등오리를 곧잘 잡아왔다. 나는 생선만큼이나 두 다리 짐승을 자주 먹고 컸던 것이
께 다. 지금도 잊지 못할 맛이, 살진 참새의 탄탄한 가슴살 맛이다. 새를 잡아오면 물
을 器여 털을 뽑고 프라이팬에 양념을 하여 지져 먹었다
아버지는 일요일이면 가끔 담장 위에 다 쓴 건전지를 세워놓고 사격 연습을 했다.
그걸 주우러 가는 일은 내 몫이었다. 총에 맞은 것을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아이들
장난감이라고는 팽이나 연같이 수고가 많이 들어가는 것들뿐이라, 건전지 앞됫면
동그란 판이 노리갯감(이게 많은 애들이 부자였다)으로 훌릉해 그걸 빼내기 위해서
였다. 건전지는 한쪽이 쏙 들어가 있었다. 간혹 동그란 판에도 흠집이 나 있었는데
그러면 친구들 사이에서 그게 귀물로 대접받았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는 총알을 장전하고 나에게 美아보라고 했다. 총이 엄청 무겁
기도 했거니와 가르쳐준 가늠자와 가늠쇠가 구분이 되지 않아, 도대체 담 위에 세
워둔 건전지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보이지도 않고 낑낑 흔들흔들하고 있을 때 갑자
기 하늘 위로 어마어마하게 큰 새가 나타났다. 비행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12시. 12시면 제주도에서 서울로 가는 여객기가 거문도 상공을 지나갔다. 나는
그때 알았다. 여객기처럼 맞추기 좋은, 만만한 목표물이 다시 없다는 것을. 덩치 크
고 느린
건전지 따위가 대수냐. 새를 맞추려면 최소한 저 정도는 맞춰야 되는 건지 마는
건지 아무튼 나도 모르게 즉흥으로 총 끝을 뽑아 올려 비행기를 향해 발포를 하기
에 이르렀다. 아버지가 깜짝 놀라 총을 빼앗았으나 총알은 이미 떠나버린 상태,
비록 공기총이지만 사냥용으로 나온 것이라 제법 힘깨나 쓰기도 했고 또 그런다 치
더라도 비행기 높이까지 올라가지는 못하지만은 사람 마음이 어디 물리학으로클 움
직이는가. 듣자니 비행기 쪽으로 무슨 쇳조각이 날아오면 비상이 걸리고 난리법석이
난다고 하니 아버지는 혹시나, 놀라고 나는 내가 무슨 대단한 죄 지었다고 놀랐다. 그
것도 경험이라고 중학교 때 뜻하지 않게 사격 선수로 뽑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
섬의 자식으로 파도와 햇살 속에서 까맣게 살던 나는 아주 우연찮게 학생이 되었다.
학교로 놀러갔다가 그냥 학생으로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입학식도 없이 봄철
몹시 따스했던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은 날 이후 내 기억에는 낡은 책상과
기계충 먹은 대갈통의 아이들이 동무로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학교가 유촌리에 있어 우리는 고개를 넘머 학교를 다녔다. 고갯길을 윗길이라 불
렀고 갯바위를 타고 다니는 바닷가 길을 아랫길끼라 불렀다. 등교 길은 으레 윗길
이었다. 동네 일학년 코찔찔이부터 제법 머리 굵은 육학년까지 위아랫집, 형제나
사촌, 또는 친한 동무들로 너덧씩 저절로 묶여 고갯마루를 올랐다.
고개를 다 오르면 커다란 굴이 딱 버티고 서 있었다. 일본군이 만들어놓은 방공호
로 일제 말기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일본군에 의해 사살된 곳이다. 그곳에서 한
참이나 놀았고 도중에 십여 기 있는 무덤에서 삐비를 뽑으며 또 게으릉을 부렸다.
설령 학교에 늦었다 해도 나 흔자서라도 무슨 일수 찍는 이처럼 꼭 들여다보고, 매
만져보고 지났으니 지각은 맡아놓은 당상이었다.
학교에서도 세숫대야 같은 앞바다와 맞은편 서도 너머의 너른 바다가 보였다. 그
곳으로 계속 가면 청산도와 완도가 나오고 더 멀리 가면 중국 대륙이 나온댔다. 미
술시간에는 오 원이나 십 원 하는 크레용으로 늘 서도 끝에 있는 등대를 그렸다. 선
생님이 다른 것을 그려보라고 하면 배를 그렸다. 이제 배는 그만 그리라고 하면 다
시 등대를 그렸다.
어떤 여선생님은 우리를 개울로 데리고 가서 조약돌로 손등의 때를 벗겨주기도
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봄날 쉬는 시간에는 전교생이 한편에 모여 해바라
기를 했다. 그러다 저절로 하게 되는 놀이가 '기름짜기' 이다.
햇살이 정면으로 비추는 판자 벽에 전교생이 다 등을 댈 수는 얼었다. 양 끝에 서
있는 이가 가운데를 향해 밀기 시작하면 기름짜기가 시작됐다. 옆에서 밀고 들어오
는 것을 가운데에서 서로 맞붙은 두 명이 버터보다가 밀려나면 다시 꼬리에 들러붙
어 미는 놀이이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구분이 없었다. 어떤 때는 접점의 지점에
서 육학년을 맡고 있던 아버지와 내가 만나기도 했다. 교장선생님부터 사환까지 그
놀이를 했으니 수업시작 종은 누가 치겠는가. 종을 쳐야 수업을 하지,
깔깔거리며 한 시간씩 기름짜기를 하고 섭섭한 마음 금치 못하며 교실로 들어가
수업을 하면 옆 사학년 반에서는 이런 풍경이 벌어졌다.
글씨를못 인는 학생이 있었다 기름짜기 하던 기분이 남아서 떠들다가선생님에
게 걸렸다. 국어시간이었다. 화난 선생님이 읽어보라고 시켰다 학생은 코를 떨어
뜨리고 옆에 앉은 친구에게 물어 그날수업하는 부분을 폈다 그러자그림이 나왔
다. 염소 두 마리가 외나무 다리 위에서 싸움을 하다가 강물에 떨어지는 그립이었
다. 빨리 읽어 ! 선생님의 고함이 떨어졌다. 학생이 인었다
"멤소 두 마리가 다리 우게서(위에서) 항꾼에(함께) 쌈하다가 물속으로 자뿌라졌
습니다‥‥‥‥
나는 유난히 아랫길을 좋아했다. 등교 때에는 우, 몰려가는 길이라 덜했지만 하교
길에 샐물 때를 만나면 내 길은 찬정없이 늘어나기 일쑤였다. 그나마 동무들과 같
이 오는 하교길은 배고픈 애들이 끌어서 일찍 왔지만 한둘이거나, 또 조르다 못해
아이들이 먼저 가버리고 나면 나는 학교나 집을 아예 잊어버리고 혼자 바닷가에서
놀았다.
물이 나면 갯바위가 드러났고 자그마한 웅덩이가 생겼다. 웅덩이 속에 있는 자그
마한 물고기를 잡아 고무신에 집어넣었다. 돌 틈 사이에서 사는 방게는 왜 그리도
귀여웠던가. 그것을 잡아보려고 고등 깬 것을 주운 낚싯줄에 어찌어찌 묶어가지고
틈새에 밀어놓고 기다려보지만 그놈은 언제나 근처 잡히지 않을 만큼만 와서 두 눈
을 길게 뽑고 눈치를 살피기만 했다.
나는 날마다 조급증이 났다 어떤 때는 화가 나서 작대기로 찔러보기도 했다. 역
시 게는 한여름에 갈치 꼬리 가지고 물속에 발 담그고 잡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흘러 물이 들어왔고 그러면 나는 웅덩이들이 하나둘씩 바다의 품속으로 들
어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뜩 정신이 나면 벌써 한참이나 바다의
손끝이 밀려와 있었고 그제야 나 혼자 오래 있었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
말없이 늦었다고 꾸중을 날마다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병이 없어지지 않았다.
우리 마을에서 거문리 쪽으로 길게 갯바위가 드러나는 곳이 치끝이었다(지금은 방
파제가 길게 나있다) . 초등학교를 다니고부터도 내 놀이터는 그곳이었다. 나뭇가지
에 낚시 맨 줄을 달고 고등 깬 것을 미끼로 돌과 돌 사이에 넣으면 진대라는 고기가
물었다. 사리 철에 물이 하염없이 나면 치끝은 길게 災리를 드러냈다.
하루가 저물어 고기 낚던 아이들은 하나둘씩 돌아가고 해초 따던 여자들도 보이
지 않으면 멀리 삼부도 너머로 노을이 붉게 탔다. 잔파도는 몽실몽실 흐물거리며
바다로 빠져드는 태양 있는 곳까지 한정이 없었고 바다색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갔
다 나는 홀로 남아 그 아스라한 노을과 가없는 바다와 변화무쌍한 색깔과 먼 곳의
섬과 갈매기를 뒤에 붙이고 돌아오는 어선을 다스리는 깊고 넓은 시간대의 휘장에
감겨 망연자실했다
나를 부르는 동무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먼 과거나 먼 미래가 나를 누르고 있
었다. 나는 어디 먼 곳으로 여행하는 중인데, 이름하여 순례자라 할 만한데, 잠시
이 바닷가에서 쉬고 있는 듯도 하고 반대로 무거운 물리적 공간대를 막 시작하고
있는 듯도 했다
생각해 보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지난한 일인 듯하다. 애 늙은 게
어른이라,그저 죽지 않고 살아만 있다면 저절로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기는 하지
만(잘나서 나이 더 먹는 것은 아니므로) 어른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
와 선택의 기로에서의 갈등과 다짐과 반성과싸움과 후회와 희망과 견딤의 뒤범벅
속에서 지내야 했나, 그리고 아울러 얼마나 자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아픔
을 주고 지냈나, 싶어 그렇다.
아이의 연장선상에 어른이 서 있는 것인데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제가 잘못하고
부족했던 옛적은 잊어버리고 경험의 세월로 얻은 것들을 기준으로만 사는 것은 아
닌지. 그 척도로만 타인들을 보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토 든다
사실 무서운 단어이다. 어른은. 성장했다는 것은 무겹다. 나이만 들어가고 허우대
만 컸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아직도 망연자실의 자리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하
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치끝에서 노을을 바라보던 때가 불과 몇 년 전인 것
같다 (아,나는 꿈속의 섬이라 할 만한 것을 찾았을까?못 찾았다면 앞으로 찾을
수 있을까?)
▶ 어릴 적 추억은 생생한데
당시의 집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 있다
귀신
거문도는, 육지와 거리가 너무도 먼 거문도는 사람이 감히 타지로 떠나지 못하는
곳이었다(1960년대 이미 이농 현상이 일어났으나 섬은 그런 유행도 늦어 1970년
중반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고향을 버리고 육지의 빈민가를 형성하는 일훤들이 되
어갔다). 그 외롭게 고립되어 있는 현상은 귀신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 하
여 섬에는 귀신이 많았다.
내가 듣고 자란 귀신 도깨비 이야기는 너무도 숱해 여기서 다 풀어놓을 수 없지만
섬이라는 특색 때문에 그 뜬것(커신) 이야기가 여느 육지 것들의 '전설의 고향'과
는 색다른 맛이 있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모모 사내가 있었다. 머리가 조금 후미진 반면 힘이 진취적인 바 있는 그는 죽촌
리 사람이었다. 이 사내는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 어떤 연유로 잠시 광주로 올라
와 벽돌공장에 나가고 있었다. 그때 몇 밤을 함께 잔 적이 있었는데 그때 들은 이야
기다
사내는 섬 옆구리 쪽 너덜컹으로 밤낚시를 갔다. 달이 뜨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잔파도만 찰싹거리고 있었다. 한동안 입질이 畿다가 같자기 천대(통 대나무
로 만든 낚싯대. 이건 탄력이 그 어떤 고급 릴대보다 뛰어나 사람이 통째로 끌려 들
어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끝이 쉭 빨려 들어갔다 고기 중에 간혹 덩치만크고
감각이 없어 무조건 바늘을 물고 들어가는 종자가 있는지라 왔구나, 싶어 낚아챘다.
그런데 밀고 당기는 힘도 없이 무겁기만 된통 무거웠다. 천대가 구십 도로 휘어지
고 사내는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끄집어올렸다.
한참만에 올라온 것은 고기가 아니었다. 머리가 물에 촉촉이 달라붙어 있는 여자
였다. 사내는 한동안 참으로 별난 물고기구나 싶어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게 먹는
종류가 아닌 것을 알았고, 그리고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그냥 들고 있었디 .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 올라왔다면 옷에 낚시가 걸려 올라왔거나 해야 말이
되는데 이건 여자가 낚시 바늘을 입에 물고 두 눈을 똑바로 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 물건은 물고기 아닌 사람이었고 사람 아닌 물귀신이
었던 것이다
확실히 늦는 부분이 있어 사내는 한동안 여자를 낚아놓고 있는 상태로 있다가 그
제야 뭔가가 잘못되어도 확실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이는 네가 본 바로 ◎
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 평도 그렇고 타고난 팔자에 겁이란 것이 없는 이였다). 그러 ◎
고 있는데 여자가 허공을 밟고 가까이 오더니 덤벼들었다 사내 또한 무엇이든지
달려드는 것 두고 등을 보여본 적이 없는지라 부등켜안고 ◎굴기 시작했다. 여자가 ◎
목을 조르면 머리끄덩이를 뽑았고 눈알을 빨아 마시려 들면 턱을 깨물었다 저쪽이 근
올라타고 누르면 끄응 힘을 써 뒤집어 탔다.
그러기를 한참. 여자는 기진맥진해서 슬슬 물러가더니 숑,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 렌
다. 사내는 모처럼 힘다운 힘을 쓴 덕에 터벅터벅 걸어와서 소주 한 되 마시고 잠을 ◎
잤다.
뭐 이런 내용이다. 귀신 이야기란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쉬 부풀려지기 마련이지만
이 대목에서 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의 정신적 특징을 되새겨보면 도대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낼 만한 총기가 없었고 남에게 들은 것을 재편집해서 옮기는 법도 없
었다(그럴 능력이 없었다) . 그렇다고 겁이 많아 부지깽이 보고 뱀이다, 하는 호들갑
도 없었다. 언제나 본 대로 말하고 또 그것밖에 모르는 이였다. 나는 그게 사실이라
고 믿었다. 그는 무서웠다고 숨을 내쉬거나 이건 분명 실화라고 꼭꼭 심어주는 말
도 없이 한다는 소리가
"겁나게 씨등만 나가 폴목(팔목)을 꺾어불은 남자들도 다 돌아가 부른디 그년
(귀신)은 딱 버티등만. 딱 버티각고 이번이는 나 폴목을 꺾어불등만이 겁나게 씨 ,
심이 뭣 묵고 그리 씽가 몰르겄당께 "
뿐이었다. 믿었다. 이제 찬찬히 확인해 보려 해도 확인할 길이 없다 아내가 폐병으
펄 죽고, 수태를 하지 못했던 관계로 어디에선가 데려와 키웠던 아이는 집을 나가
버렸다. 듣자니 홀로 섬으로 돌아와 술로만 살다가 아낄 따라 가버린 뒤였다.
어머니의 당숙 되시는 어른이 한번은 밤에 흘로 배를 몰고 나갔다가 안개를 만났
다. 태풍이나 해일, 돌풍, 파랑 모두 다 무섭지만 특히 안개가 사람을 괴롭힐 때는
속수무책이다. 동서남북 구분이 없어져 길 잃어버리기 딱 좋다(안개 속을 항해하는
배끼리 부딪힌 사고가 뉴스에 자주 나온다) .
여기가 어디쯤일까 고민하고 있는데 안개 저쪽에서 홀연히 배 한 척이 다가왔다.
살았구나 싶어 반가웠다. 헌데 좀 이상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키가 크고 눈이 부
리부리했다. 그 사람들이 말했다.
"솥단지에 물 좀 담아주시요."
어른은 어떤 기운에 눌려 고물 쪽에 걸어둔 솥을 들어내고는 물을 부었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슬쩍 살펴보니 그 사람들이 타고 온 배에는 밑창이 없는 게 아닌가 배
의 바닥에 파란물이 넘실거리고사람들은모두물 위에 서 있는 거였다 오싹.한
기가 돋으면서도 옛날 어른들이 일러주었던 말을 기억해냈다.
밤에 밑창 터진 배가 와서 솥단지에다가 물을 달라고 하은 구멍을 내서 줘야 쓴 들어」
다이 ."
어른은 송곳으로 솥에 구멍을 낸 다음 물을 담아주었다. 그 사람들은 몹시 고마워
하며 말했다.
"고맙소. 여기서 닻을 놓고 기다리다가 샛바람이 터지면 가시오."
시키는 대로 했다. 이윽고 샛바람이 터져 배가 방향을 바꾸고 안개가 걷히자 어른
은 깜짝 놀랐다. 배 저쪽으로 보일락말락한 암초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냥 계속 갔 아.
더라면 분명 암초를 받았을 터였다.
그것 말고도 귀신은 흔했다. 얼마나 흔하냐 하면, 참으로 웃기에는 뭣하고 안 웃
자니 웃음밖에 안 나오는 이야기인데, 다른 게 아니고 바로 내 흥내를 낸 귀신까지
있었다.
내가 젖먹이였을 때다 외삼촌이 뭔가 된통 속상한 일이 있어 밤중에 마을 됫산에
올라간 모양이다(산불이 한 번 크게 났다 하여 이름이 불탄봉이다) . 산꼭대기 바위
에 앉아 멀리 지나가는 배 불빛이나 바라보며 부아 치미는 속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등뒤에서 내가 울더란다. 걱정되어 여동생이 따라올라온 것으로 생각하고
"추운디 밤에 뭐하러 애기 뎃고 따라왔다냐. 얼릉 내려가거라."
자연스럽게 야단을 쳤다. 그러나 대답은 없이 아기만 그악스럽게 울어댔다. 아무리
들어봐도 영락없이 갓 돌 된 조카 영훈이 울음이었다. 한두 번 더 야단을 치다가
아, 귀신이 붙었구나, 싶어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마을로 내려왔다(외삼촌도 겁이
전혀 없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조카 우는 소리는 뒤따라오고. 첫번째 집이 나오는
곳에서야 더 이상 안 따라왔단다.
거참, 귀신이 내 흥내를 내다니. 허, 그것 참.
전축
모든 것은 흘러가 버렸고 빈터에 나 홀로 서 있을 뿐이다. 나는 시간의 틈바구니
에 끼어 뜻밖의 음악을 듣는다
아버지께서 전축을 사오셨다 음악을 몹시 좋아하신 아버지의 소원은 전축을 사는
거였고 누가 중고를 판다기에 큰맘 먹고 사온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었다. 그
전축의 이름이나 회사명은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모양새는 뚜렷이 기억난다.
그것은 꼭 가족이 야외로 소풍 갈 때 쓰는 도시락 가방처럼 생겼다. 손잡이가 위
에 있어 들고 다닐 수 있는 데다 손잡이 아래로 불룩하니 각을 지어 붙어 있는 몸체
를 떼면 양쪽의 스피커가 되었다. 밑판이 턴테이블이었다. 전기 없던 시절이기도
했고 어차피 휴대용이라 건전지로만 작동되었다 뚱뚱한 건전지 (그때는 그 건전지
뿐이었다) 여壽 개가 들어갔던 것 같다, 아마
그리고 점차 LP레코드 판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나는 그것으로 트위스트를 알았
고 김세레나, 남진 나훈아, 헨델, 비틀즈, 에디트 피아프, 밀바를 들었다
판이 수십 장 되었지만 네가 재밌어 하는 깃은 고춘자, 장소팔, 서영춘 그리고 또
누군가가(아마 구봉서가 아닌가 싶다) 나와 만담을 하는 것이었다. 그 레코드의 표
지도 재미있다 등장인물 얼굴은사진인데 몸은 그림이었다 뚜렷이 기억나는 것은
왕대포 참새구이가 적힌 대폿집에서 서영춘이 고춘자를 무릎에 안고 앉아 있는 장
면이다.
그때 들었던 내용 대부분은 잊어버렸지만 지금도 생각나는 게 모유가 우유보다
좋다는 만담이다. 따지고 들어오는 고춘자에게 장소팔이 노랫가락으로 흥얼거리며
대답을 하는데 이런 것이다.
'첫째, 신선하고(이때 고춘자가 그래요 신선하고,를 토달 듯이 따라한다) 둘째,
깨끗하며 셋째(이때부러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릇이 아름
다우며(고춘자가 아이구흐,를 한다) 휴대가 간편하고 넷째, 고양이에게 도둑 맞을
염려가 없고 치가지가장장(고춘자가 또 비웃는다) 다섯째, 떨어뜨려도 깨찔 염려가
없고‥‥‥
고춘자가 아이고 그만해요, 소리를 다섯째에 했는지 몇 개 더 나온 다음에 했는지
는 모르겠다.
또 있다. 레코드의 맨 끝에 있어 아무도 모르고 있다가 작은아버지가 부르는 것을
듣고 알게 된 유명한 노래. '시골 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라 아 차표 파는 아가씨
와 실랑이하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 차표 좀 깎아 달랬더니
화를 더 내네 와하하하‥‥‥‥ 하는 노래.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전축으로 인해 받은 강렬한 느낌은 따로 있었다. 작은아버
지가 재미나는(만담 레코드도 작은아버지가 뭍에서 사오신 것이다) 것만 듣는 데
반해 아버지는 품위 있는 것을 즐겨 들었다. 무언가를 하다가 우연히 돌담에 붙어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에서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타부, 시노메모로, 키스로 봉한 편지, 황야의 휘파람 같은 영화 음악. 그 감미로운
음악은 한순간에 내 어린 정서를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음
악으로 인한 슬픔을 맛봤다. 내가 내 자신이 아닌 것 같고 이곳이 이곳 아닌 것 같
은 기분. 아련하되 아주 촉촉하게 밀려들던 슬픔의 기운. 하늘의 색깔이나 바다나
음악이나 모두 같은 것이라는 느낌, 먼 훗날의 나는 몹시 쓸쓸할 것 같은 예감‥‥‥
흔적은 없고 기억은 또렷하고 느낌은 아련하다.
길
집에서 나와 산으로 나 있는 길을 걷는다 길은 마을 뒤 망재 쪽으로 나 있다. 산
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과 만나는 곳이 있다. 예전에는 고무신을 물에 적셔야만
산으로 갈 수 있었으나(어른들은 훌쩍 뛰어넘었다) 지금은 시멘트로 포장 복개가
되어 있다.
마을은 끝나고 산은 마을이 끝나기도 전부터 시작되고 있다. 아니 섬은 이미 산이
다. 물위의 산. 극도의 편편함과 극도의 가파름이 만나 있는 곳, 그게 섬이다. 배에
서 내려 바로 산을 오를 수 있는 곳. 꼭대기에 올라 너른 바다를 앞뒤, 좌우로 모두
볼 수 있는 곳 그게 섬이다.
첫번째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를 내고 어느 정도 지난 뒤 친구 하나가 전
화를 해왔다.
"야, 너 책 냈다메, 제목이 뭐냐?" 고
자기 책 제목을 일러줄 때처럼 어색한 게 또 있을까?
"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
"뭐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
"1래 ."
"야 임마 뭔 소설 제목이 그러냐?" 欲
"제목이 어째서?"
"새끼야, 꼭 애들이 지어놓은 것 같다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임마 그걸 모르는
사람이 워딨다고 그런 것 제목으로 달았냐?"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가 뭔데?"
"그런 건 쬐간한 애기들도 안다. "
"뭐냐니까?"
"임마,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가 뭐겄냐? 소주 안주로 댓길인 횟감이 살고 또 여자
들이 수영복 입고 돌아댕기니께 아름답지 안 그러냐?"
"그래 맞어 ."
"씨발놈아, 그란디 그리 쉬운 걸로 제목을 달어?"
"그럼 뭘로 달어야 되냐?"
'고상하고 폼나는 것으로 달어야제. 앞으로는 제목 달 때 이 성님한테 꼭 물어보
고 달어라이?"
뭐라고 한참이나 타박을 하고 전화를 끊었던.친구는 일 주일 뒤 다시 전화를 걸어
왔다.
"야, 근디 니 소설책 제목이 바다, 뭐라고 그랬냐◎
(이 친구에 대하여 한마디 덧붙이자면, 단편 「우리가 산다는 것은」에 나오는 용이
의 모델이다. )
부끄러운 그 책에서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로
‥‥‥처리도 너른 바다가 도무지 끝간 데를 알 수 없이 너른 바다가 똑같이 잔잔
했다. 중뿔나게 대가리를 밀고 올라오는 놈도 없고 아이고 무서워라, 혼자 겁먹고
바닥으로 꺼지는 놈도 없었다. 저러다가 일어서면 약속이나 한 듯 우르르 한 치 착
오도 없이, 설치는 놈 없으니 당연히 뒤떨어진 무녀리도 없이 들고일어나 우당탕탕
치솟았다. 휘웅휘웅 바람이 불면 제각기 모가지가 꺾였다. 꺾이다가 와르르 서로
한몸이 되어 집채만한 너울이 되고 그렇게 폭풍의 밤을 보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수면 아래로 내려가 숨을 죽이는 바다. 저리도 너른 것이 저리도 평평했
다‥‥‥‥
이렇게 층(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의 모습을 들었으나 사실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가 그것뿐이 아니다. 회화의 눈으로 보면 그 변화무쌍한 색깔의 변화가 있고
공간구조의 눈으로 보면 섬이 있기 때문이다. 뭇 인간들이 그곳에 입을 대고 있어
서 아름답다. 이렇게 크기를 짐작할 수 없어서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길이 있어서
아름답다.
시멘트 포장을 해놓은 길은 얼른 가기가 쉬워 더 힘들다. 마을 됫산 고개인 망재
에 올라섰다
동도의 지명도 유별나다. 죽촌리 앞에서 거문리 쪽으로 돌아보면 첫번째로 나오
는 데가 치끝이고 다음이 하도 경사가 가팔라서 이름 붙여진 '가랑이찢어진데'이
다. 거기서부터 머들밭, 넓대이 , 큰골앞에 , 마당여 , 아달, 새말 설도동끄터지 지나
남쪽 끝이 다래끝이다. 그곳에서 뒤쪽으로 가보면 설은개, 칼등밭끄터리, 키새이
골, 딱밭을 지나면 마을 뒤 움푹하게 파여진 몽돌밭인 개안통이다. 개안통 옆으로
삐죽이 나온 데가 잘지끄터리이고 연등. 당끝. 가무여를 돌아 다시 섬 안쪽으로 들
어오면 유촌리 이다.
이곳 망재에는 성황당이 있어 예전부터 노구솥(발이 셋인 솥)에 밥 지어 제사를
드렸다. 그곳을 돌아 고개에 올라 땀을 식힌다. 사람들의 마을은 이제 완전히 사라
지고 눈앞에 또 다른 바다가 펼쳐진다
저 아래로 개안통이 양팔을 넓게 벌리고 있고 저만치 작은 삼부도, 큰 삼부도, 그
리고 희미하게 백도가 보인다
담배를 피우며 풍경을 바라보다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뭔가 내 깊은 속에서 스멀
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뭔가, 이것은. 그러다 서서히 숨이 막힌다. 큰 삼부도 풍경
때문이었다. 봉우리 세 개가 現족 솟아 있는 모습.
갯것하러 직접 다녀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각도토 다르고 섬의 생김
새도 다르다. 그럼 지금 보이는 모습은 무엇인가 그러다 갑자기 나는 아하, 싶어져
서 잠시 동안 머리 속이 진공상태가 된다.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그캤다. 그 섬은 다름 아닌 내가 꿈에서 꾸었던 바로 그 섬인 것이다 청춘의 피폐
와 외로움에 지쳤을 때 본능적으로 찾았던 곳. 환상의 장소. 내 자의식의 공간
저 섬이 내 깊은 기억 속에 남아 있다가 꿈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 섬이 실제로 있
었던 것이다. 나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기분에 빠져들었다 어렸을 적에 망재에
자주 올라왔던 것이 새삼 떠올랐다. 나는 이곳에서 저 섬을 보면서 바다와 그 뒤에
있을 뭍의 세계와 미래에 대하여 궁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사를 나가 뭍의 생활
을 시작하고 나서 외롭고 힘들었을 때 은연중에 이곳을 떠올렸던 것이다
나는 자꾸만 아하, 싶어졌다 자그마한 숙제가 하나 풀린 기분이다. 말하자면 나
는 환상과 망상으로 젊은날의 힘겨움을 이겨내려 했던 것은 아니었던 거다. 그렇다
면 그 섬에 살고 있던 사내는 누구였을까?
기억 속에 숨어 있는 어떤 사람일까,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어떤 존재일
까, 아니면 훗날의 내 모습일까 그건 아직 모르겠다.
나무가 있는 곳
색다른 충격으로 한동안 앉아 있다가 나는 일어섰다. 그런 걸 깨달았다고 해서 몇
시간씩 그곳만 쳐다보고 있는 것도 볼썽사나운 짓인 거다. 너무 사색적이고 철학적
이어서 꼴불견인 것이다. 개안통으로 내려가려다가 고개를 돌려 고갯마루 절골을
바라보았다.
절골에는 나의 나무가 있다. 절골 어디인가에서 크고 있다 나는 사실 진작부터
그 나문를 만나고 싶었다. 나의 이름을 달고 섬에서 크는 나무.
한 삼십 년 되었으니까 매우 컸을 것이다 작은아버지와 산에 올라 심은 나무. 나
무를 심고 나서 작은아버지가 그랬다.
"이 나무는 이제 네 나무다. 한창훈 나무다 " (작은아버지는 나에게 영훈이란 이름
을 안 썼다)
눈이 가는 게 여러 그루 된다. 어떤 게 그때 심었던 나무인지 언뜻 알 수는 없다.
개안통으로 내려가는 것을 뒤로 미루고 절골로 걸었다. 아마 옆에 앉아보면 나의
나무가 말을 걸어오겠구나싶다.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아래에서 잠시 앉아 있고 싶다. 못 만났던 삼십 년의 시간을 이야기하고 싶다.
너는 이곳 한곳에서 바람을 맞으며 지내는 동안 나는 이런 곳과 저런 곳을 떠돌아
다녔고 이런 일과 저런 짓을 했으며 이런 생각과 저런 고민을 하며 살았노라고 말
하고 싶다. 내 꿈에 나타나던 저 섬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무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
바람이 전해 오는 저 먼 곳의 이야기들은 도대체 어떤 내용들이며 네 키가 일 년
에 얼마씩 자랐으며 그 동안 저 마을에서는 몇 명의 노인들이 죽었고 몇 쌍의 남녀
가 결혼을 했으며 또 몇 명의 아이가 태어났는지에 관하여. 삼십 년 동안 네 키를
키워오면서 같이 키워온 생각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앞으로 이어질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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