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의 여행 3
14 악마와 기적
네명의 순례자
마한트지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바라나시에서의 남은 여정은 꿈결처럼 지나갔다. 마르트 고모가
세운 계획은 전혀 빈틈이 없었다. 7시에 기상해서 베드-티 한잔. 수면상태에 빠져 있는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눈뜨자마자 침대에서 진한 차를 마시는 영국식 습관이었다. 7시 30분,
올리브리우스 선생님과의 요가 연습. 8시 30분, 샤워 그리고 아침 식사. 9시부터 12시까지는
산책. 낮잠은 필수. 느지막한 오후에는 바라나시의 시장 부근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하루의
일정이 짜여져 있었다.
이렇게 사흘 정도를 지내고 나니, 테오는 날아갈 듯이 발걸음이 가벼워졌음을 느낄
수이었었다. 요가를 통한 근육 이완 운동이 벌서 효과를 내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호흡 훈련에
있어서는 애를 많이 먹었지만, 쿨카르니 선생이 끈기 있게 설득을 거듭한 덕분에 테오는 마침내
복식호흡 기법을 터득했다. 이로 인하여 테오의 허파가 크게 열리고 어깨도 곧아졌다. 1주일도
못되는 짧은 시일에, 테오는 요가 스승의 수제자가 된 셈이었다.
쿨카르니 선생은 테오 일행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동행했다. 아는 것이 만은 그는, 테오에게
진기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었다. 테오 일행은 시내에서 멀지 않은 카시라고 부르는 광대한
성역을 답사하기도 했다. 녹음이 우거진 카시는 바라나시의 원래 이름이기도 했다. 빛을 발하는
카시, 눈부신 카시, 빛의 도시 카시는 힌두교의 지리적인 중심부였다. 진정한 힌두교도라면,
순례자들을 위해 마련된 아주 오래 된 기숙사에 묵어가며 걸어서 이 지역의 모든 사원을
돌아다녀야 했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순례 여정 때문에 작은 마을들을 지나가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이 이상한 순례 행렬을 지켜보았다. 당당한 중년의
멤-사이브(영어의 '마담'이 변형된 데다가, 주인이라는 뜻의 '사이브'를 붙인 말로 인도인들이
영국 여자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됨)와 외국인들 틈에 낀 아름다운 인도 여인, 낡은 담요를
걸치고 평화의 상징으로 지팡이를 든 요가 수행자, 그리고 초록색 눈만 아니라면 크리슈나 신을
쏙 빼닮은 검은 곱슬머리 소년으로 이루어진 일행은 시골 농부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미 바라나시의 농부들은 서양 사람들에게 상당히 익숙한 편이었다.
네 명의 순례자들은 가는 곳마다 사원이란 사원은 모두 방문했으며, 그때마다 종을 울렸다.
쿨카르니 선생은 어디에 가든 두르가 신과 사바 신과, 그리고 가네샤 산에게 진심으로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 어느 신의 사원인지 분명치 않은 경우라면, 쿨카르니 선생은 정체 모를 신에게
경배를 드렸다. 때때로 물가에 세워진 사원을 지나게 될 때에는 물 속에 몸을 담글 수도 있었다.
여자들은 거기서 목욕을 하거나 빨래를 하고, 남자들은 잉어처럼 자맥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갠지스 강에서처럼 두 손을 모아 기도 드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이었다. 인도의 호수, 하다
못해 작은 시내라도 어머니 강가의 자식뻘 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근원인 물은 그 어느것이라도 성스러운 존재이므로 언제나 기도와 경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테오는 뭐니뭐니해도 석양 무렵 시장 근처를 산보하기를 제일 좋아했다. 골목이 어찌나
좁은지 암소 한 마리가 뿔을 곧두 세우고 달려나오기라도 하면 서둘러서 벽에 몸을 붙여
피신해야 할 정도였다. 안하무인격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테오는, 바라나시의 다른 아이들처럼
자나가는 암소의 엉덩이를 보기 좋게 한 대씩 대리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지만 암소들은 그까짓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했다. 테오는 보석가게에서 엄마에게 드리려고 코에 다는 보석을
하나 샀다. 마르트 고모는 고모가 좋아하는 비단가게에서 비단을 사느라 주머니를 톡톡 털었다.
하얀 광목을 드리운 가게에서 주인은 솜씨 좋게 실크 두루마리를 펼쳐 보였다. 손님 대접용으로
토기에 담아 내놓은 '라시', 즉 요구르트에 물을 타서 묽게 만든 음료수도 굉장히 맛있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즐거웠지만, 테오에게는 무엇보다도 신들의 포스터를 사는 일이 가장 흥미진진했다.
인도의 신들은 미소짓는 얼굴과 퉁퉁하게 살이 오른 두 볼로 미루어 볼 때, 건강미가 넘치는 것
같았다. 눈은 한결같이 검은색이었다. 테오는 자기가 고른 코끼리 신부터 시작해서 다른 신들의
포스터도 모두 수집하기로 결심했다. 코끼리 신 다음은 시바였다. 테오는 파란색 피부를 지닌
시바의 머리채에 갇혀 있는 강가의 예쁜 입으로부터 강물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담은 포스터를
발견했다. 화가 나서 삼지창을 흔들어대는 시바도 있고, 눈 덮인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두 눈을
감은 채 명상에 잠긴 시바도 있었다. 또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반쪽은 남자 반쪽은 여자로 된
아주 이상한 시바의 모습도 있었다. 쿨카르니 선생은 이 포스터에 대해 남성이면서 동시에
여성이기도 한 시바는,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 반대되는 성이 잠재해 있음을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저도 약간은 여자라는 말씀이세요?"
테오는 몹시 놀란 투였다.
"어디가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룩소르에서도 말이다, 춤을 추기 전에 주술사가 너더러 '약혼년'라고 했었잖니?"
마르트 고모가 상기시켰다.
테오는 그때 생각이 나자 몸을 바르르 떨었다. 바로 그 순간에 지하 세계의 쌍둥이 형제가
테오에게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마침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불그스름한 저녁
노을이 지나간 바라나시의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 밤이 다가오자, 둥지를 찾아가는 새들의
지저귐이 요란스럽게 들렸다. "나 여기 있어, 난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테요, 너 꿈꾸고 있니?"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고모의 말대로 테오는 꿈에 잠겨 있었다. 처음으로 테오는 이집트에서 춤을 추었을 때 아득한
심연으로부터 불현듯 떠오른 쌍둥이 형제가, 혹시 여자 형제는 아닐까 자문해 보았다. 잠시 후,
테오의 시선은 다른 포스터에 멈췄다. 한쪽에는 가네샤, 다른 한쪽에는 창을 든 젊은 청년을
거느린 시바였다.
"어, 이건 처음 보는 건데요, 이 사람은 누구죠?"
테오가 물었다.
두 명의 순례자
쿨가르니 선생은 마침내 자를 잡고 앉았다. 설명이 길어질 모양이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스칸다로 시바가 원치 않았던 아들이었다. 어느 날 신들은 악마를 무찌르기
위해 전사가 필요하게 되자, 시바에게 아들을 한 명 낳아 달라고 청하였다. 그 말을 들은 시바는
그러기로 하고 파르바티와 결혼했다. 그러나 시바는 금욕고행자였던 터라 파르바티와 1천 년
동안이나 결합했지만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잘 못 알아듣겠어요."
테오가 대답했다.
"1천 년 동안이나 결합하다니, 그게 무슨 얘기죠?"
쿨카르니 선생이 갑자기 가슴이 컹컹 울릴 정도로 기침을 해대자, 마르트 고모가 그를
구원하려고 나섰다.
금욕고행자들은 그 사정 시기를 최대한 늦춰 정액을 머리끝까지 올려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므로, 여자와 동침할 경우 아주 오랫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테오는
고작 그 정도만 이해할 수 있었을 뿐이다.
"갈 데까지 가질 않는다는 말이야."
일라가 얼굴을 붉히며 테오에게 속삭였다.
"아, 그럼 사정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죠? 진작 그렇게 말씀하셨더라면 금방 알아들었을
텐데... 나 참!"
테오의 말처럼 이론적으로는 명쾌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기다리다 못해 짜증이 난 신들은
이러한 수련을 중단시켰다. 하는 수 없이 시바는 몸이 시키는 데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시바의 정액이 불 속에 떨어지자 불은 강물에게 이 정액을 넘겨주었고, 강물은 다시
갈대에게 시바의 정액을 전해 주어 결국 스칸다가 태어났다. 이 이름은 '정액의 분출'을
의미한다. 그런데 강가 여신을 좋아하는 요가 수행자는, 이보다 훨씬 짧은 다른 전설을 더
신봉했다. 그에 따르면 강가가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본 시바가, 그녀의 예쁜 모습에 반한
나머지 그만 강물에 사정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스칸다는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시바는 뚱보 가네샤와 미남 스칸다라는 두 아들을 두게 되었다.
"가네샤에 관한 일화는 몇 가지나 되지요?"
테요가 물었다.
일화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이 코끼리 신은 더구나 이웃 나라로까지 전해졌으므로 그 일화는
무궁무진했다. 중국과 티베트에서는 뚱뚱한 배에 붉은 옷을 입고 시바의 창을 든 어린이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이런 나라에서는 주로 음식의 신으로 받들어진다. 일본에서는 인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행복의 신이면서, 동시에 쌀 두 가마니 위에 올라선 작달막한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부의 신으로도 추앙된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서든 가네샤는 반드시 문지기 역할을 빼놓지 않고
맡는다. 어머니 파르바티의 문을 지키거나, 혹은 사원의 문을 지키지 않으면 부엌문이라도
맡는다. 문의 반대편에는 역시 스칸다가 버티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문에는 아버지의 정액에서
태어난 미남 스칸다와, 어머니의 정사로 태어난 뚱보 가네샤라는 두 명의 수문장이 있는 셈이다.
한 수문장이 아버지인 불에서 태어났다면, 나머지는 어머니인 물에서 태어났다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벌써 중국에 거의 접근한 셈이야"
마르트 고모가 지적했다.
"중국에서는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의 원칙이 우주의 질서를 지배한다고 생각하거든. 양이
태양 즉 남성적인 의미를 지닌다면, 음은 그림자 즉 여성을 의미한다."
"가네샤 이야기나 또 해주세요, 네?"
테오가 간청하다시피 애원했다.
요가 스승은 이번에는 가네샤에게 상아가 하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는 일화를 들려
주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에 의하면, 가네샤는 자기의 상아 하나를 뽑아서 최초의 문인에게
선사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문인들의 신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또 다른
설명도 있었다. 어느 날, 가네샤가 들쥐를 타고 가던 도중 뱀을 만났다. 들쥐가 겁에 질려
자빠지는 바람에 가네샤는 그만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는데, 떨어지면서 배가 터져 그 때까지
먹었던 달콤한 사탕들이 모두 바닥에 쏟아져 버렸다. 이 사탕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코끼리
신은 뱀을 집어서 띠처럼 허리에 꽁꽁 둘러맸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달생원(인도에서 달은
남성신이다)이 깔깔대고 웃자, 화가 난 가네샤가 자기의 한쪽 상아를 뽑아 달에게로 던졌다.
그러자 상아에 맞은 달이 점점 까매지더니 사라져 버렸다. 이때부터 달이 주기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전 아직까지 그런 줄 몰랐어요"
일라가 이야기에 흘린 듯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어느 날 저녁인가 테오가 비슈누 신의 포스터 앞에 멈춰 서자, 쿨카르니 선생이 어째서 그가
거대한 뱀의 보호를 받으며 바다에서 잠을 자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태초에 굉장한 화재가 나서
땅이며 지옥, 하늘을 모두 삼켜 버렸다. 이것이 최초의 번제라고 할 수 있다. 그후 구름이
차츰차츰 쌓이더니 비가 쏟아져서 우주가 물 속에 잠겨 버렸다. 이 때 비슈누 신이 만물의
수호신이 되었다. 진흙과 불로 빚어진 우주 만물은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
비슈누 신은 영원히 우주의 대양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대양은 우유의 바다라고 할 수 있겠지."
쿨카르니 선생이 이렇게 결론지었다.
"우유의 바다라니, 그런 말은 네슬레사에게나 해주면 좋아하겠군요."
테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 그 우유는 여러 차례 격동을 겪은 우유니까."
마르트 고모가 이의를 제기 했다.
"그렇다면 버터라고 해야 옳겠군요."
테오가 딱 잘라 말했다.
그 말도 옳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도에서는 '기'라고 하는 정제된 버터를 먹기 때문이었다.
보통 버터를 다섯 번씩이나 긇여서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면 비로소 '기'가 만들어진다. 기는
이처럼 깨끗하게 걸러진 버터이기 때문에 신성하게 취급되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화장터로
운반되기 전의 시체 위에도 이 '기'를 바른다.
"그렇게 여러 번 끓이면 솔직히 맛은 별로 없겠네요."
설명을 듣고 난 테오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큰 뱀은 무얼 상징하죠?"
뱀은 물밑에 위치한 나가스라는 거대한 지하 왕국 소속이었다. 어째서 죽은 사람들의 재가
강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어째서 한 줌의 재를 갠지스 강 위에 뿌리는지, 그 이유가 이로써
설명된다. 즉 화장을 통해 정제시킨 제물을 물에 바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물밑 세계에 바치는 제물로 간주하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알았어요. 그러니까 버터를 잔뜩 발라서 통닭 굽듯이 굽는다는 얘기로군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듣고 보니 땅 속에서 썩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군요."
그러자 쿨카르니 선생이 테오의 말에 크게 반발했다. 육체에 일어나는 일은 영원불멸의
영혼과는 별개의 일이며, 각자의 영혼을 죽음에 대비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일이 자기의
임무라고 역설했다. 이처럼 화제가 자꾸 마르트 고모가 애서 피하려고 했던 죽음의 문제로
흘러가자, 고모는 이제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힌두교는 그쯤에서 접어두고 부처에 관해
이야기하자고 제안했다. 불교는 힌두교이 세계관과는 판이하게 다른 종교였기 때문이다.
부처에 관한 유명한 전설
다음날 테오 일행은 바라나시에서 약간 떨어진 사르나스를 찾았다. 현재 사르나스에서
'녹야원'이라고 일컫는 곳이 바로 부처가 최초의 설법, 즉 초전법륜을 베푼 곳이기 때문이다.
다르마(올바른 삶의 원리)에 입각한 가르침이 이때부터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녹야원은 거대한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아름다운 공원에 지니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폐허 근처에 벽돌로 지운 둥그스름한 기념물이 하나 있을 뿐이어서, 적지 않게 실망한
테오는 그늘 밑으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평화스럽기만 한 풍경 속에서 어떻게 부처를
상상할 수 있담?
마르트 고모는 아주 상세한 부분까지도 빼놓지 않고 법륜에 대하여 설명했다. 법륜은 불교의
중심 되는 상징으로서 생과 사, 회생의 영원한 순환을 가리킨다. 인간은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해탈에 이를 수 있다. 이 상징은 현대 인도의 국기 한가운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최초의 불교도 왕으로서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 왕을 위한 배려라고 한다. 여기까지 설명한
마르트 고모는, 수백 년 수령의 나무들 사이에, 세워진 벽돌 기념물을 가리켰다. 최초의 불교
'탑파'로서, 부처의 사리 일부분이 보관되어 있다는 설명이었다. 불교의 탑파에는 예외 없이
부처나, 그 제자들의 사리가 보관되어 있다고 마르트 고모는 덧붙였다. 테오는 지루한지 연신
하품을 해댔다. 고모는 이어서 정반왕(슈도다나)과 마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아들의
이름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 이름은 싯다르타로서, 이 이름은 '목적을 달성한
자'를 뜻한다. 자라면서 활 쏘는 능력을 보인 왕자는, 샤키아 부족에 속하는 가문의 이름을
이어받아 고타마('가장 탁월한 수소'라는 뜻)라고 불리다가 훗날 석가모니(석가는 샤키아 부족의
총칭이며, 모니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의 음사이다.) 즉 '석가족 출신의 성자'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붓다(부처), 즉 '깨달은 자'가 되었노라고 마르트 고모가 말을 마칠 무렵, 테오는 거의
졸고 있었다.
"내 얘기가 재미없으면 솔직히 그렇다고 말하렴."
마르트 고모는 몹시 언짢은 눈치였다.
"죄송해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무안해진 테오는 우물우물 변명을 늘어놓았다.
"쿨카르니 선생님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요."
마르트 고모는 한숨을 지었다.
고모의 말대로 모른 것이 없다는 요가 수행자는 순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싯다르트 왕자는
인도 북동쪽에 위치한 카필라국에서 탄생하였는데, 이때가 아마도 기원전 558년 4월이나 5월로
추정되며, 그로부터 80년 후에 입멸하였다. 열여섯 살 되던 해에 결혼하였으며, 스물아홉 살에
왕궁을 떠나 기원전 523년 혹은 기원전 517년에 해탈하였다고 전해진다.
"저는 전문가들이나 알 만한 그런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 없어요."
듣다못해 테오가 투덜거렸다.
"기원전 523년이건 517년이건 전 아무 상관없어요. 도서관에 틀어박혀 사는 학자들 말고는
도대체 누가 그런 연대에 관심이 있겠어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잖아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부처의 전설은 이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요소를 담고 있었다. 우선
훗날부터가 될 왕자가 스스로 자기의 부모가 될 사람을 선택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하얀
코끼리의 모습을 하고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를 통해 잉태되었다.
"말도 안 되요."
마르트 고모가 항변했다.
"우선 마야 부인이 실제로 있었던 인물인지도 확실치 않거니와, ks일 있었다 할지라도 부인은
다만 그런 꿈을 꾸었을 뿐이에요."
"쉿..."
테오가 고모의 말을 막았다.
그뿐 아니라 싯다르타는 어머니의 자궁이 아닌 보석함 속에서 자라났다. 태어날 때에도
정상적인 출산 경로가 아니라, 자기가 어머니의 몸으로 들어갔던 그곳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왕자는 사자처럼 포효하였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이며, 또한 세상의 가장 맏이로서 자기의 이 출생이 마지막 출생이라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제발 웃기지 좀 마세요."
마르트 고모가 빈정거렸다.
"사자처럼 포효하다니오? 불교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너무 멀군요."
"고모는 제발 좀 잠자코 계세요!"
테오가 소리쳤다.
"부처님의 서로 다른 이름보다 훨씬 재미있단 말예요!"
미래의 부처가 처음으로 사원에 들어서자, 사원에 모셔 놓은 여러 신들의 조각이 모두 일어나
그 앞에 절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또 하루는 히말라야부터 바람을 타고 날아온 선인이, 이
비범한 아이를 보겠노라고 찾아왔다. 아이들 팔에 안고서 선인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훗날 이
아이가 자라 설법을 전할 때까지 자신이 있을 수 없음을 서러워하였던 것이다. 왕이었던
아버지가 왕자도 자기처럼 어진 왕이 될 수 있겠는가고 묻자, 선인은 나중에 세계의 스승이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1주일만에 마야 부인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왕은
아들을 위대한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궁전에서만 생활하도록 결정하였다. 청년이 된 왕자는 두
명의 공주와 결혼하여 아들을 한 명 얻었다. 그리고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때, 세심한 신들의
배려로 왕자는 마침내 궁전이라는 호사스러운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왕자는 길에서 병자와 노인, 그리고 죽은 사람을 보았다.
"그런데 고모, 고모는 죽은 사람 이야기는 잊어버리셨었나 봐요."
지난번 비행기에서 고모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해 낸 테오가 예리하게 지적했다.
왕자는 또한 길을 가다가 평온한 얼굴의 한 사문을 만났다. 왕자는 그제서야 자산이
궁전에서만 지낸 까닭에 삶의 본질인 고통을 모르고 살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명상을 통해서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고 평정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왕자는 그날 밤 부인과 아들을 남겨둔 채 궁전을 빠져 나왔다. 부처의 탄생에 관한
전설은 이 정도에서 막을 내렸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마르트 고모가 말했다.
"예수님 이야기와 비슷해요. 왜냐하면 기적처럼 엄마의 몸 속으로 들어갔으니까, 아빠가
필요치 않았거든요. 먼 곳으로부터 아기를 보러 온 동방박사가 한 명 등장하는 것도 닮았구요."
하지만 그 뒤로는 두 이야기가 그렇게 비슷하지 않았다. 속세를 떠난 왕자는, 당시 유행하던
수련을 시작하여 1년만에 요가 수행자가 되었다. 그후 6년간은 은둔생활을 하명서 오랫동안
단식을 했다. 그 결과 아무 것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했다. 해골처럼 거의
벼만 남은 왕자는, 금욕의 열기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한 줌의 먼저처럼 가벼웠다. 그 무렵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왕자가 고행의 불필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왕자는 오랜 단식을
중단하고, 한 여성이 내미는 죽을 받아먹었다. 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정도여서, 왕자를 따르던 몇몇 제자들은 실망한 나머지 왕자의 수하를 떠나 버렸다. 금욕을
중단하다니! 이들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속세를 떠난 왕자는 이제 쾌락과 여자, 부정, 요가, 금욕까지 모든 것을 섭력하였으므로 명상의
단계로 넘아갈 수 있었다. 커다란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그는 그가 '깨달음(보리)'이라고 일컫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명상을 계속했다. 악마와 괴물의 형상을 한 죽음이 그를 유혹하였으나
꿋꿋하게 이를 물리쳤다. 다음으로는 벌거벗은 여인의 몸을 빌어 욕정의 유혹이 그를
시험하였다. 사실상 이는 마라라는 여신이 욕정과 죽음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새벽녘이 되자, 마라 여신은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갔다. 첫번째 날 밤 왕자는 정신적으로 온
세상을 두루 섭력하였으며, 이틀째 되는 밤에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인간들의 전생에 대해 거듭
명상하였다. 세번째 날 밤, 비로소 그는 어떻게 하면 출생과 회생의 순환을 멈출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새벽 동이 터올 무렵 그는 붓다, 즉 깨달은 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는
제자들을 현재 녹야원이 자리한 사르나스로 데리고 가서, 자비에 토대를 둔 자신의 법을
정식으로 설하였다.
자기의 설명에 만족한 쿨카르니 선생은 이렇게 말을 마쳤다.
마르트 고모가 전하는 불교의 가르침
"그 정도로는 교리를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해요!"
마르트 고모가 항의했다.
일라가 물었다.
"쿨카르니 선생님 말씀은 모두가 사실인데?"
마르트 고모는 자기의 힌두교 친구들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불교에 대해 지극히 편협한
관념만을 가지고 있다고 나무랐다. 부처는 이 세상에 진정한 철학을 전파했으며, 그의 철학은
잡신과 악귀로 엮어져 있는 여느 종교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고 마르트 고모는 역설했다.
부처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를 발견하였으며, 이 진리가 그의 출생에 얽힌 여러 가지
전설보다 열 배 백 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잘 들어, 테오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해. '모든 것은 고통이다'라는 깨달음이 그 첫번째
진리야."
마르트 고모가 설명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테오가 입속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 생각해야 해.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일지석이거든."
고모는 거듭 강조했다.
"행복은 잠시이고, 명상을 통해 얻는 기쁨도 일시적이지. 부처님께서 영속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씀하셨어. 이 말은 곧..."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저도 알아요. 그래서요?"
테오는 고모를 재촉했다.
"두번째 진리는, 모든 고통은 개인의 욕심에서 빚어진다는 사실이야.. 부처님은 이것을 가리켜
'집착'이라고 말씀하셨지. 열반을 체험하고자 애쓰는 것도 집착에 해당된단다."
"그래요, 그렇다고 치죠, 그런데 어떻게 해야 거기서 벗어날 수 있죠?"
테오가 물었다.
"바로 세번째 진리를 통해서야. 열반, 즉 깨달음에 이르면 영원할 수 없음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지. 마지막 네번째 진리는, 이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쳐 죽 있단다."
"어디, 말씀해 보세요."
하지만 테오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바로 중도를 가야 한다는 가르침이야. 쾌락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동시에 고행을 통해 평안을 찾으려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지,. 매사를 있는 그대로 옳게 보고,
극단으로 치우침이 없으면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지혜를 얻어야 비로소 자비심이 생겨날 수
있다는 이야기란다. 이 자비심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도 평등하게 적용되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일시적인 것이고, 이에 대한 인식마저도 영원할 수 없는 것이라면
결국 자아도 존재할 수 없으니, 편협한 이기주의가 발붙일 자리가 없는 거란다. 특히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건 말이지, 전생이나 다른 삶에 가서 니르바나(열반)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생에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야."
"니르바나라면 록 그룹 이름인데..."
테오가 중얼거렸다.
"그 이름만 빼면 정말이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내가 차근차근 설명해 줄께."
마르트 고모가 말했다.
"불도를 걷는 사람들은 명상을 마치면서 '오, 니르바나! 파괴, 평온, 이보다 더 좋은 도피처가
있을까!'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거야. 부처도 '집을 파괴한다'는 표현을 했거든. 물론 불도저로
집을 허물어 버린다는 말이 아니라, 보호해 주는 울타리로서의 가정이나 가족으로부터 마음을
비우라는 거야. 우리들 인간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가정도 영구적이지 못하거든. 이 말을 부처가
처음으로 생각해 낸 건 아니야. 힌두교에서도 우주와 인간의 육체, 그리고 가정은 모두 같은
질서를 따르며, 이 질서는 이미 각자의 출생 때부터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고 가르치니까 말야.
그렇죠, 선생님?"
"네, 맞습니다."
요가 수행자가 대답했다.
"그렇게 때문에 부처는 아무런 조건이 필요없다고 했지. 가정과 육체, 그리고 우주를 파괴할
수 있다면 힌두교의 오랜 금지사항인 카스트 계급 따윈 저절로 사라져 버리는 거지. 계급사회를
부정하게 되는 거야. 맞죠, 선생님?"
브라만 계급에 속하는 쿨카르니 선생은 이의를 달지 않고 동의했다.
"그러므로 누구나가 해탈에 도달할 권리를 부여받은 거지. 일부 특권층이 아닌 모든 사람이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네, 이제야 조금 이해가 돼요."
테오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부처와 힌두교의 관계는, 말하자면 예수와 유대교의 관계나 같다고 하면 되겠군요.
일부에만 속하던 것을 전체로 확산시켰으니까요."
"그래, 바로 그거야! 무상 철학에 대해서는 건너뛰었지만, 그래도 구 말은 아주 정확해.
마르트 고모가 테오를 추켜세웠다.
"그 유명한 부처의 미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일라가 지적했다.
"지금 당장 보러 가자. 그게 훨씬 빠를 테니까."
마르트 고모가 일행을 재촉했다.
그들은 공원을 나와 작은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명상중인 부처의 조각을 볼
수 있었다. 신비스럽고 평화스러운 부처의 미소는, 마르트 고모의 장황한 설명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테오는 돌로 만들어진 부처의 두 발을 쓰다듬으면서, 과연
어떻게 하면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집착이야말로 삶 그 자체라고 생각하던
테오였다.
"그런데 저, 뭘 좀 먹어도 괜찮겠지요?"
테오가 부끄럽다는 듯이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전 배가 몹시 고파요."
"아무렴, 너더러 단식하라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었어. 지나친 금욕은 오히려 나쁘다니까. 뭘
먹으러 갈까?"
마르트 고모가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폭군이 세운 모스크
바라나시에서 보내는 마지막날, 마르트 고모는 대사원을 꼭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업도시로서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바라나시에서, 이슬람교도 매우 번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칫 잊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고모는 덧붙였다. 게다가 바라나시 시
전체를 굽어보는 위치에 자리잡은 이 모스크는, 그 자체만으로도 풍부한 이야깃거리의 보고였다.
찬란한 분홍빛의 거대한 사원은, 힌두교 사원들과 갠지스 강을 내려보며 도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바리케이트로 입구가 봉쇄되어 있었다.
"힌두교 과격분자들 때문인가 봐."
당황한 일라가 변명이라도 하듯 우물쭈물 설명했다.
"도시 정화를 위해서 이 상원을 완전히 헐어 버려야한다고 주장하거든."
"1992년에도 아요디아에 세워진 모스크를 파괴시킨 적이 있는데. 그것 만으론 모자란다는
소린가?"
마르트 고모가 분개했다.
"왜 이 모스크를 못마땅해하는 거죠?"
테오가 물었다.
모스크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기보다, 이 모스크를 건설한 사람에 대한 불만이 크기
때문이었다. 바라나시의 모스크는 샤 자한의 아들 가운데 하나인 아우랑제브에 의해서 세워졌다.
너그러운 황제였던 샤 자한은, 죽은 부인을 위해 타지마할이라는 거대한 무덤을 건축하느라
국고를 거의 탕진해 버렸다. 아버지의 이같은 지나침을 바로잡기 위해, 후계자인 아우랑제브는
엄격한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힌두교 사원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으며,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는 힌두교 사원을 부순 돌로 이 거대한 모스크를 세웠던 것이다. 인도 역사상
아우랑제브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힌두교도를 박해한 폭군으로 기억된다. 오늘날에 와서는
인도에 힌두교 국가를 건립하고자 하는 과격정당들 사이에, 인도의 유명한 문화유산으로 추앙
받는 아우랑제브의 모스크를 부수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잘 봐, 테오. 바라나시의 모스크는 저렇게 거대한 반면, 아우랑제브의 무덤은 소박하기 짝이
없단다. 얼마 안 되는 작은 공간에 흰 천을 드리우고, 가운데에는 구멍이 파여 물풀이 자라고
있잖아."
테오는 가까이 다가갔다. 조각이 된 벽감 부분에 몹시 공격적으로 보이는 말벌떼가 모여
있었다. 마치 사원을 지키는 용맹스런 병사들 같아 보였다.
가네샤 그림엽서
테오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순간, 쿨카르니 선생은 짧게 울음을 터뜨렸다. 테오가 그의 목에
매달렸다. 요가 수행자도 테오를 얼싸안았다. 그로서는 아주 뜻밖의 행동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봄베이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사흘 후에나 봄베이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델리로 돌아오는
길은 우울하기만 했다. 룸바 기장이 몸소 부인 일라와 테오, 마르트 고모를 인디언 에어라인
비행기에 테웠으나, 조종석마저도 테오를 즐겁게 해주기에 역부족이었다. 바라나시를 떠나야
하는 아쉬움에다가, 병원에 가서 지겹도록 여러 번의 혈액 검사를 받아야 하는 일이 테오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사 결과, 증세에는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결과에 실망한 마르트 고모는 파리로 전화를
걸었다. 멜리나가 또 흥분할 테지..."
"멜리나, 잘 들어요. 정체상태예요!"
고모는 송화기에 대고 크게 외쳤다.
"테오의 병세에는 아무런 차도가 없다구요! 더 좋아지지도 더 나빠지지도 않았어요.
돌아오라구요? 뭐 하려구요? 물론이죠. 약은 꼬박꼬박 먹고 있어요. 바라나시에서요? 물은
어땠느냐구요? 생수만 마셨어요. 갠지스 강 물이오? 지금 농담하는 거죠? 못 믿겠다면 직접
물어보세요!"
마르트 고모가 테오에게 수화기를 넘겨 주었다.
"엄마? 한 방울도 안 마셨어요. 너무 더러워요. 무슨 구경했느냐구요? 무진장 많이 봤어요.
엄마. 나 요가도 배웠어요. 네, 선생님한테서요. 엄마, 엄마 등에 뱀이 한 마리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세요? 아뇨, 정신은 말짱해요. 여행을 구만두라고요? 싫어요. 계속하고 싶어요. 네,
알아요 어떻게 알다니요? 마르트 고모가 말해 주었으니까 알죠. 결과가 예전과 똑같다고
하셨어요. 그러면 됐잖아요. 전보다 더 아프지는 않다는 말이니까요. 콩에서 벌써 싹이 났다구요?
그럼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잠자기 전에 매일 엄마 생각해요. 아침에 깰 때도 생각하구요. 엄마,
사랑해요."
테오는 송화기 부분에 입을 맞춘 다음 전환를 끊었다.
"엄마는 불안하신가 봐요. 어쩌면 좋지요?"
"엽서라도 한 장 보내 드리렴."
마르트 고모가 제안했다.
고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테오는 이를 실행에 옮겼다. 배가 통통한 새끼코끼리 가네샤가
왕좌에 앉아 있는 엽서를 골랐다. 코끼리는 선명한 분홍빛이었다. 테오는 정성껏 엽서에 글을 써
내려갔다. '사랑하는 엄마, 나를 보호해 주는 신이랍니다. 가정을 지키는 신인데, 글을 쓰라고
엄니 하나를 뽑아 주었답니다.' 테오가 보낸 메세지를 이해하려면, 멜리나는 한참 동안 고심을
해야할 형편이었다.
15 축복받은 번개
소승, 대승에 얽힌 이야기
"그런데 고모, 부처가 중도를 설법한 곳이 바로 사르나스의 녹야원인데, 다르질링엔 왜 가는
거예요? 차 사시려고 그래요?"
테오가 안전 벨트를 매며 물었다.
"뭐라구? 아무래도너 정신이 나간 모양이로구나."
마르트 고모가 폭소를 터뜨렸다.
"다르질링에 가면, 또 다른 종류의 불교를 접할 수가 있어."
"그렇다면 불교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 모양이지요?"
테오가 놀란 듯이 물었다.
"그래, 먼저 '소승불교'라는 게 있어."
마르트 고모가 설명을 시작했다.
"네가 사르나스 공원에서 들었던 불교가 바로 그거야. 그리고 또 하나 '대승불교'라고 일컫는
게 있는데, 히말라야 산맥 부근 지역에는 이 불교가 주로 보급되어 있단다."
"티베트 같은 곳이겠군요."
테오가 결론짓듯 말했다.
"티베트 말고도 네팔, 부탄, 그리고 지금 우리가 가는 사람 같은 곳도 있단다."
고모가 덧붙였다.
"시킴은 인도 땅이잖아요."
"얼마 전부터 바뀌었단다. 오랜 역사를 지닌 작은 독립국이었다는데, 인도가 연합하였지. 이
독립국의 종교적인 수도가 바로 다르질링인데, 얼마 전부터 인도의 서벵골 주 북부 영토로
편입되었지. 내 말 아직 끝나지 않았어, 테오. 히말라야로부터 중국, 한국, 일본까지 전파되는
과정에서,이 불교는 대승불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단다."
"대승, 소승, 큰 수레, 작은 수레..."
테오는 꿈에 잠긴 듯 혼자서 중얼거렸다.
"종교에 난데없이 수레가 나오다니, 너무 이상해요."
"네가 말하는 그 '수레'는 '중도'에서 굴러가기 위해 필요한 거야."
마르트 고모가 응수했다.
"바퀴가 달렸거든. 사르나스 동산에서 부처가 행한 최초의 설법을 초전법륜이라고 하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법의 바퀴를 움직이게 한다는 말이야."
"네, 그렇군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테오가 기쁜 듯이 외쳤다.
"명상을 계속하다가, 부처는 생과 사가 맞물려 있으면서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그야말로 악순환이라고 할 수 있었어. 법이라고 하는 말은, 중도를 통해 번뇌의
고리로부터 벗어나는 걸 가리킨단다. 그러니까 법의 바퀴를 움직인다는 말은 이 번뇌의 고리를
또 다른 고리, 즉 바퀴를 통해 부순다는 말이지. 이때 바퀴는 가르침을 뜻하는 말이란다. 다시
말해서 첫번째 고리는 네 가지의 진리와 상관되는 것이고, 두번째 고리는 완전한 무와 관련지을
수 있지. 공사상이라고 하는 거야. 그런데 이 공사상은 유대교 가르침과 정반대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존재 그 자체였지. 스스로 충만하신 존재였어.
그런데 부처의 가르침은 그 반대야. 불교에서는 실재하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순수함이라고
하거든."
"유대인들의 하느님은 순수하지 않다는 말씀이세요?"
"그런 게 아니야."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부처의 생각으로는 존재란 언제나 가변적이었지. 너도 그런 얘기 들었던 기억나지? 집착이
없어질수록 공의 세계가 더 넓어지게 되고, 이렇게 되면 자비를 느낄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지게
되는 거지. 번뇌도 사라지고. 그렇게 되면 가르침이 교리가 빛나는 법의 문을 열어 주는 거야.
이게 바로 깨달음이란다. 다리질링에 가면 대승불교에 대해서 배우게 될 거야."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야... 모든 종교사에서 흔히 등장하는 사소한 갈등이 있었지."
마르트 고모가 약간 불만스러운 듯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부처가 입멸하신 다음 제자들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어. 부처는 처음부터 깨달은 자였을까,
혹은 점진적으로 깨달은 자의 위치에 도달한 것일까? 부처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리지
않은 채 입멸하신 게 그 분열의 발단이었지."
"그야 생각하기 나름일 테죠. 부처는 전설 속에서는 신격화되어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죠."
테오가 지적했다.
"바로 그 문제도 쟁점 중의 하나였어. 어떤 사람들은 현실에서 만난 부처는 진정한 부처의
환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지."
"쓸데없는 짓이에요. 부처는 신이 되고자 한 적이 없었잖아요."
테오가 항의했다.
"아니, 틀렸어."
"부처는 개개인이 신성과 접할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 주었지.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하나부터
열까지 안내를 받고 싶어하지. 그렇기 때문에 불교학자들은, 인류를 구원한다는 명분하에 궁극의
목표인 열반을 무한정 연기할 수 있는 성인들을 만들어 냈지. 이들을 '보살'이라고 한단다.
상당히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얻은 이 보살들은 헌신적이며 자비심이 넘치는 자들로서, 거의
신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어. 그러다 보니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높은 경지에 계신
부처의 이미지는 점차 빛을 잃게 되었단다. 이젠 테오 너도 내가 왜 쿨카르니 선생에게 전설만
거론한다고 화를 냈는지 이해하겠지?"
"혹시 고모도 불교 신자세요?"
"응, 약간은 그래."
마르트 고모는 그제서야 테오에게 사실대로 고백했다.
"불교가 신에 대한 언급이 없는 철학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구나. 마음의 안정을 위해 스스로
알아서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내 마음에 들어. 그런데 테오, 아마도 중도를 가려고 애쓰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거야. 요즘에는 전 세계적으로 불교도가 늘어나는 추세야. 무국,
캐나다, 스위스, 독일..."
"그렇지만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아니에요."
테오는 고모가 신기한지 빙글빙글 웃으며 장담했다.
"아니야, 프랑스에서도 그래! 다만 네가 잘 모르고 있을 뿐이야. 프링스인들에게라도 왜
범보편적인 자비심이 없겠니? 네 모국에도 불교도가 상당히 많단다. 일요일 아침 종교 방송
시간대에 불교에 관한 방송까지 나올 정도야. 내가 보기엔 좋은 징조 같아. 불교도들은 타인에게
자기의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 관용주의자들이란다. 물론 처음엔 네 눈에 이상하게 보일지도
몰라. 웃으며 기도문 통(기도문을 넣는 회전 원통. 원통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한 바퀴 돌릴
때마다 통 속에 들어 있는 기도문을 왼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절하는 모습들이
생소하겠지. 그렇지만 설명을 듣고 나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티베트에서는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아주 오래 된 토착 종교와의 마찰이 빚어져, 그 타협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지."
"티베트의 오래 된 토착 종교라면..."
테오가 중얼거렸다.
"바르도 토돌이 창안한 종교? 사자의 서?"
"아참, 테오 네가 벌써 그 책을 읽었다는 걸 내가 깜박 잊었구나. 하지만 그 책에는 종교에
관해서는 그다지 많이 나와 있지 않지. 그 종교를 '본교'라고 한단다."
"본교라구요?"
"그래, 티베트 고어로는 '본포'라고 하는데, 이는 선한 인간의 종교라는 의미야. 미리 말해
두지만, 본교와 불교가 융합되는 과정에는 신기한 점이 아주 많단다."
밧줄과 여섯 마리 원숭이
마르트 고모의 말대로 신기한 것들이 너무 많아, 그 이야기를 하느라고 두 시간 동안의 비행
시간이 다 지나가 버렸다.
고대 티베트이 종교 설화에 따르면 태초에 높은 곳의 신들은 산 속에 살았으며, 낮은 곳의
신들은 지하 세계나 물 속에 살았다. 그 중간의 공간이 인간들이 사는 곳이었다. 티베트 최초의
왕은 산신과 결합하였으며, 이들의 결합으로부터 최초의 인간들이 태어났다. 왕은 낮 동안에는
땅 위에 기거하다가, 밤이 되면 자기의 머리 꼭대기에 지니고 다니던 광선 빛깔의 마술 밧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전에 고모한테서 땋은 머리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테오가 지적했다.
"시크교도, 브라만, 삼손... 나디르인."
"나자르인!"
마르트 고모가 바로잡아 주었다.
인간을 천상의 세계와 이어 주는 밧줄은 여러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이다. 이
밧줄은 브라질의 인디언 설화에까지 등장하며, 이와 아울러 하늘로 올라가게 해 주는 밧줄을
끊어지게 만드는 서투른 사람도 반드시 등장하게 마련이다. 바로 티베트의 제6대 왕에게 이런
불행이 닥쳤다. 자만심이 대단했던 이 왕은 자신의 마부와 결투를 하게 되었는데, 그에게 자신의
신성한 권력을 전수해 줄 것을 거절하였다. 이는 부당한 행위였으므로 마부는 마술 밧줄을
끊으라고 요구했다. 왕은 오기로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마부는 결투장에 황소 1백 마리를 풀어
놓았다. 양뿔에 가시를 두르고, 재를 가득 실은 수레를 끄는 황소들이었다. 결투장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고, 마부는 이 경솔한 왕을 죽여 버렸다. 이렇게 해서 그는 최초로
살해당하는 왕이 되었다. 그 이후로는 그 어떤 왕도 마술 밧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오직 마술사들과 성인들만이 하늘에 오를 수 있었다. 이것이 간추린 티베트 종교 설화의
내용이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요?"
테오가 물었다.
지금도 본교도들은 결혼식이 거행되는 동안 신랑이 머리에 밧줄을 잡아매는 풍습을 간직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라싸의 포탈라 풍, 즉 거대한 다라이 라마 궁전 지붕으로부터 세
명의 남자들이 허공으로 밧줄을 던진 후 그 밧줄을 타고 내려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유입으로 말미암아 천사의 밧줄을 가진 왕의 전설은 무론, 인간의 탄생에 관한 전설까지도 모두
완전히 달라졌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태초에 커다란 원숭이 한 마리가 아발로키테스바라(관세음보살)라는
복잡한 이름을 가진 보살의 설법을 듣고 개종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보살은 이 원숭이를
티베트의 설산으로 보냈다. 하늘에 가까이 갈수록 훨씬 더 효율적으로 정신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숭이가 연민에 대해 명상을 거듭하는 도안, 여자 흡혈귀가 그곳을 지나다가
원숭이를 보고 사랑에 빠진 나머지 여자로 둔갑했다. 정절을 지키기로 맹세한 원숭이는 한사코
여자의 유혹을 뿌리쳤으나, 흡혈귀가 애원을 하자 하는 수 없이 자가의 옆에서 자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럼에도 원숭이가 계속해서 유혹을 뿌리치자, 흡혈귀는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괴물들을 낳아서 인간을 모조리 잡아먹어 버리도록 하겠다고 위협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원숭이는 이에 보살에게로 날아가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보살이 흡혈귀를 불쌍히
여겨 원숭이에게 결혼하도록 지시했다. 사실 보살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여섯 마리의 원숭이가 태어났으나, 이들의 어머니는 그 흡혈귀 근성을 버리지
못해 자기 자식들을 모두 잡아먹어 버리려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 원숭이가 자식들을 구해 내 숲
속으로 도망쳤다. 아버지 원숭이가 자식들을 숲 속에 남겨둔 지 3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여섯
마리의 원숭이들은 무려 5백 마리로 불어났으며, 늘 양식이 부족해서 굶주려야 하였다. 이에
불쌍한 아버지 원숭이가 또다시 보살에게 도움을 청하자, 보살이 산으로 올라가 5백 가지의
씨앗을 가져와서 땅 위에 뿌렸다. 아버지 원숭이는 5백 마리의 새끼원숭이들을 그 씨 뿌린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들은 씨앗을 먹을 때마다 차츰 털이 빠지고 꼬리가 없어져 갔다. 그렇게
해서 최초의 티베트인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티베트인들은 모두 그 원숭이의 자손이라는 이야기로군요."
테오가 결론지었다.
"너도 잘 아는 원숭이야."
마르트 고모가 말했다.
"바로 하누만이잖아."
"아하, 그렇게 연결이 되는구나!"
테오가 외쳤다.
"그렇다면 아발로... 뭐라고 하는 보살은요?"
"아발로키테스바라 말이니? 티베트 전체를 불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그 보살은 포탈라 산으로
올라갔지. 그의 손바닥으로부터 한 줄기 빛이 빠져 나와 원숭이로 변하였다는 구나."
"그것 참, 복잡하기 짝이 없군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하누만은 불보살의 손바닥에서 태어났고, 전혀 선해 보이지 않는 흡혈귀가 난데없이
등장하다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해."
마르트 고모는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네 말대로 흡혈귀는 본교에서 따온 거야. 마술 밧줄로 말할 것 같으면, 새 설화에서는 한
줄기 빛으로 바뀌었지. 어때, 여러 가지가 얽히고설켰지?"
"꿀꿀이죽같이 범벅이네요."
테오가 말했다.
"다르질링에서는 과연 무엇을 보게 될는지 궁금해요."
안개 속에 잠긴 도시
테오가 제일 먼저 본 것은 협소한 실리구리 공항이었다. 몸체가 불룩한 앰배서더 자동차 한
대가 테오와 마르트 고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풍기를 틀어도 차안은 후텁지근했다. 벌써
3월이라 날씨가 매우 더웠다. 하지만 마르트 고모는 다르질링으로 올라가다 보면 신선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한 공기를 맛보게 될 거라고 장담했다.
길은 끝없이 펼쳐진 연록색의 농장 사이로 꼬불꼬불 이어졌다. 농장 여기저기에서 챙 넓은
밀짚모자를 쓴 여자들이 찻잎을 따고 있었다. 차 농장이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를 만들어 내는 덤불이야."
마르트 모고가 창 밖을 가르키며 말했다.
"잠깐 멈췄다 가면 안 될까요? 찻잎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요."
테오가 간절하게 부탁했다.
여자들이 손톱으로 차나무의 꼭대기 쪽 잎사귀를 재빨리 따냈다. 잎사귀들은 연초록빛이었고
몹시 연해 보였다. 테오는 찻잎을 입 속에 넣고 깨물어 보았다. 쓰면서 풋풋한 맛이 났다. 테오가
찻주전자 속에 넣고 차를 우려내는 거무스름한 잎사귀와는 그 생김새부터가 많이 달랐다. 환영에
불과한 부처와 실재하는 부처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만큼이나 다르다고 해야할까. 마르트 고모는
다르질링에 가서 꼭 차를 한 통 사자고 약속했다. 자동차는 지표면을 구름처럼 뒤덮고 있는
녹색의 덤불을 해쳐가며 천천히 다르질링을 향해 달렸다.
테오는 차안에서 내내 잠이 들었다가, 다르질링에 도착했을 때에야 비로소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저녁 햇살을 받아 분홍빛으로 물든 눈의 장벽이 보였다.
"우아, 히말라야 산맥이다!"
테오는 황홀해서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정말 꿈만 같아요."
"지금이야말로 파카를 입고 털부츠를 신어야 할 때야. 입에서 입김이 나오는 것 좀 보렴. 자,
빨리 서둘러."
안개가 잔뜩 낀 데다가 집 바깥쪽으로 난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연기까지 합해져, 도시
전체가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공기는 온통 잿빛이었다. 안개 속에서 그림자들만이
조용히 움직이거나, 찻주전자를 오려 놓은 모닥불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석양 무렵의
다르질링은 마치 유령의 도시 같았다. 히말라야산맥은 밤의 깊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테오는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마르트 고모가 고른 호텔은 영국식
호텔이라서 벽난로에 기분 좋게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깊숙이 몸을 파묻을 수 있는
안락의자도 구비되어 있었다. 수다스러운 호텔의 여주인이, 자기 호텔에서 묵었던 유명인사들에
대해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호텔의 오래된 벽돌이 이들의 방문을 지켜본 말없는 증인이었다.
이들 저명인사들 가운데에는 여행가이자 티베트 정통학자가 된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도 끼여
있었다.
"그 여자는 티베트에 어찌나 정통했던지, 얼음으로 자기의 체온을 높이는 방법까지 터득했대."
마르트 고모가 덧붙였다.
"그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녜요. 자 보세요, 이렇게 불을 붙여서..."
테오가 말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나무도 성냥도 사용하지 않았거든."
마르트 고모가 이의를 제기했다.
"티베트 요가 숳애자들에겐 아주 고전적인 수련인가 봐. 눈 속에서 벌거벗은 다음, 아주
차가운 물에 담갔던 천을 몸에 두른 후 체온으로 그 천을 말리는 거야. 호흡을 조절함으로써 몸
내부에서 불을 만들 수가 있대."
"그런데 그 여자가 정말로 그렇게 했다고 믿어야 할까요?"
테오가 믿기지 않다는 투로 물었다.
"그거야 네 맘이지."
마르트 고모가 대꾸했다.
"알렉산드라 다비드 텔은 자기가 그렇게 했다고 하였으니까. 너는 네 침대 시트나 데워 놓는
게 어때?"
티베트 사원
다음날 테오와 마르트 고모는 도시 꼭대기에 위치한 사원을 찾았다. 길가에는 대나무 기둥에
달아 놓았거나, 플래카드처럼 실에 드리워 놓은 헝겊 조각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헝겊은 분홍색,
하늘색, 바다색 등 각양각색이었다. 시뿌연 먼지가 잔뜩 묻고 군데군데 찢어진 헝겊들도 눈에
띄었다.
"아니, 사원 앞에서 손수건을 말리는 거예요?"
테오는 몹시 놀란 듯이 물었다.
"가까이 가서 보렴."
마르트 고모가 테오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자세히 보면 헝겊에 글씨가 적혀 있는 게 보일 거야. 손수건이 아니라 기도문을 적은
깃발이지. 헝겊 위에 성구를 적은 다음, 그 헝겊이 바람에 날려 완전히 닳아 없어질 때까지
놔두는 거야."
"아하, 그래서 저렇게 낡았군요."
테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저기 좀 보세요. 빨간 새 헝겊도 있어요!"
"누군가가 신에게 기원을 하였나 보다."
마르트 고모가 중얼거렸다.
"어떤 신에게요?"
테오가 물었다.
"그거야 알 수 없지. 신들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니까."
테오는 이렇게 티베트 불교(라마교)에는 무시무시한 신들과 악마들이 득실거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들은 무시무시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평화로웠으며, 악마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환영들만큼이나 그 수가 많았다. 더구나 승리의 표시로 승자가 늘 패자의 형상을 하고
나타났으므로, 선한 신과 선한 신이 무찌른 악마를 확실하게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벽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마르트 고모가 장담했다.
"이젠 내 친구인 라마승 감포를 찾아봐야겠구나."
"이번엔 또 다른 프로그램이로군요."
테오가 한숨 지었다.
"노마님께 라마승 친구가 있는 줄이야..."
"라마는 '스승'을 뜻하는 말이야."
고모가 설명을 덧붙였다.
"라마는 수도원에서 배운 이론들을 전수한단다."
거대하며 어쩐지 불안한 기운이 감도는 사찰이 갑자기 시야에 들어왔다. 사찰의 꼭대기는
금칠이 되어 있었고, 벽은 하얗게 회칠이 되어져 있었으며, 가장자리는 빨간색으로, 그리고 그
안쪽은 솜사탕처럼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북소리에 맞춰 종소리가 쉬지 않고 사찰 내부에
울려 퍼졌다. 땡, 땡, 땡, 덩, 땡, 땡, 땡, 땡, 덩... 빨간 장삼을 걸친 어린 수도승이 종종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한 손에는 향로가 들려 있었다. 밖으로 나온 동자승이 향로를 든 손으로
헐떡거리는 강아지의 등을 한 대 치자, 다른 동자승이 이를 나무랐다. 그러자 둘이서 싸움을
벌일 듯하더니 그냥 장난으로 한 번 해보는 것인지, 곧 둘 다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갑자기 이
촌스러운 사찰이 초등학교 운동장처럼 여겨졌다. 마르트 고모는 한 손을 모자챙처럼 이마에
오리고서 두리번거리며 예의 그 라마승 친구를 찾았다.
친구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서 두 손을 비비대며 기쁜 표정으로 고모와 테오 앞에 나타났다.
삭발에 자두색 장삼, 그리고 가슴 윗부분에 선명한 노란색 천을 두른 라마승 감포는 코끝에
자그마한 쇠테 안경을 걸치고 있었는데, 마르트 고모와 인사를 나누는 바람에 그만 바닥으로
딸어지고 말았다.
"안녕!"
라마승은 고모와 테오를 얼싸안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몸은 좀 어때?"
"어! 프랑스어를 하시나 봐요?"
테오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물론이지."
라마승 감포가 대답했다.
"1959년 당시 다라이 라마가 망명길에 올랐을 때, 나도 그와 함께 티베트를 떠났었지. 다라이
라마는 인도의 다름살라에 정착했고, 우리는 세계 각지로 흩어졌지. 내 운명은 나를 프랑스로
이끌었어. 축복받은 나라지.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프랑스 중에서도 아니에르로 갔단다.
"1959년에 그러셨단 말이죠? 그렇다면 지금 나이가 굉장히 많으시겠네요?"
테오가 물었다.
"그야 알 수가없지."
라마승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니에르에 사신다면,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라마승은 거침없이 팔을 들어 히말라야산맥을 가리켰다. 이따금씩은 눈 덮인 투명한 공기를
느끼고 호흡함으로써 고향의 냄새를 맡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자, 들어가시죠."
라마승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하지만 테오가 막 회랑으로 들어서려 하자, 라마승이 테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실내로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기도문 통을 돌리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사찰 입구에 두 개의
기도문통이 놓여 있었다. 커다랗고 노란 이 기도문 통은 너무 무거워서, 테오가 있는 힘을 다해
보았으나 돌릴 수가 없었다.
"넌 우선 돌리는 방향이 틀렸어."
라마승이 지적했다.
"그쪽으로 돌리면 안 되지. 반대쪽으로 돌리면 불행이 뒤따른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야.
언제나 시계바늘 도는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
테오가 그 말대로 방향을 바꾸자, 요술처럼 기도문 통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휴, 이제 됐어요!"
테오가 소리쳤다.
"그런데 왜 이 통을 먼저 돌려야 하는 거죠?"
라마승은 이 통 안에 기도문이 적힌 두루마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경건한 마음으로 통을
돌리기만 하면 저절로 기도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것 참 편리하군요."
테오가 소감을 덧붙였다.
"그렇지.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돌려야 한단다. 게다가 진실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 테오의 마음은 순수하고 진실해?"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테오는 운동화 끈만 내려다보았다. 자기 스스로가 진실한 마음을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를 알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저는 잘 모르겠어요."
테오가 고백했다.
"그래. 아주 좋은 대답이야. 무지를 인식하면 알고자 하는 의문이 생길 테고, 그러다 보면
지혜를 얻게 되는 법이지."
라마승이 말했다.
"자, 이제 벽화를 보러 가도록 하자."
티베트 벽화를 생전 처음 보는 테오의 눈엔 검정, 혹은 빨강으로 그려진 무지막지한 형상들이
뒤범벅되어 있는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눈이 돌아간 무시무시한 형상들은 시커먼 먹구름
속에서 자기들끼리 칼부림을 해대고 있었다. 너무나 험상궂은 그림이라 테오는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한 구석에는 거대한 톱으로 사람의 몸을 토막내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철판 위에서 구워지는 사람, 창으로 인해 혀에 구멍이 뚫린 사람들도 그려져 있었다.
"이건 지옥이로군요!"
테오가 외쳤다.
"그렇지. 지옥이라고 할 수 있겠지."
라마승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옥이라기보다 악마의 패주 장면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것도 역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주제니까. 가운데를 봐 거기엔 지옥보다 천국에 가까운 묘사가 되어 있으니까. 테오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복잡한 기하학적 도형 중에서 두 개의 원과 그 안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부처, 그리고 팔이
여덟 개 달린 신들의 모습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 그림에 눈이 익숙해졌을 때,
테오는 한 가지 그림은 매우 단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여자의 뒷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고서 가부좌한 남자의 무릎 앞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그 남자의 목을 사랑스럽게
얼싸안고 있었다. 아마도 여신인 듯했다.
"이건 설명을 좀 해 주셔야겠어요."
테오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서로 싸우는 악마들, 원과 사각형으로 구성된 기하학적 그림, 게다가 이건 완전히
포르노그래피 같은 그림이네요."
라마승 감포는 커다랗게 미소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지옥을 연상시키는 장면은, 악순환을
거듭하는 존재의 고리를 점철하고 있는 악마와 선한 신들이 영원히 투쟁을 벌여야 하는 실존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기하학적 그림은 '만다라'라고 하는 전통적인 문양으로서, 문양의 한
가운데에는 신들이 가부좌를 틀고 있다. 원 안에 사각형이 들어 있고, 그 사각형 안에 다시 원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또 사각형이 들어가기를 거듭하는 만다라에는 네 개의 문이 있는데, 제일
가운데 위치한 가장 작은 원은 우주를 상징한다. 이 우주 속에서 진리가 기쁨의 바다 위를
떠다닌다. 만다라란 불교에서 여신이라고 일컫는 가장 이상적인 '신'의 거처를 상징하며, 이
한가운데에 포옹하는 한 쌍이 남녀가 그려져 있다.
만다라와 기쁨의 바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테오가 포르노그래피라고 평가한 벽화를 좀더
가까이에서 차근차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 그림은 확실히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체위로
성행위를 하는 남녀를 그리고 있다고 라마승도 인정했다. 그렇지만 성행위 자체가 이 그림의
본질은 아니었다. 이 탕카(탱화)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어디까지나 신과 샤크티라고 하는
여성적인 에너지와의 융합이었다. 순수한 성행위를 묘사함으로써, 그림은 사실상 끝없는 명상의
종착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적 원리와 여성적 원리의 완벽한 결합이야말로 정신 집중의
목적이며, 이를 통해 순간적으로 의식을 모두 삼켜 버리는 기쁨의 바다가 출렁거리게 된다.
"허리 아래쪽에 숨어 있다는 뱀의 이야기와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테오가 물었다.
"제 구루(정신적 스승)께서 그런 이야길 해주셨어요. 만다라 속의 한 쌍도 시바와
파르바티처럼 영원히 결합한 게 아닐까요?"
라마승은 테오가 제대로 잘 짐작했노라고 대견해하였다. 다만 여기서는 시바와 파르바티의
결합이 아니라, 명상을 하는 자가 자기 내부에 잠재한 여성적인 원리와 결합하는 것만이 다른
점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자니 이야기는 한결 복잡해졌다. 힌두교의 한 분파인 탄파라파에서는
사정 시점을 최대한 늦춰 가며 실제로 성행위를 하는 반면, 티베트 불교의 수도승들에게는
실재하는 상대방이 없기 때문이다. 성교중인 한 쌍의 남녀 형태로 부처가 표현된 것은 남녀간의
상호 보완성을 나타내기 위함일 뿐이었다. 남자가 자비를 상징한다면, 여자는 무를 뜻한다는
식이었다. 수도승은 영감의 원천인 여성적 에너지에 정신을 집중시켜야만 명상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테오는 파투에게 이 신성한 결합을 보여 주기 위해 벽화에 대고 사진을 찍었다. 테오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테오의 샤크티는 바로 파투였다.
"이제 안으로 들어갈까요."
라마승이 정중하게 안내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마룻바닥 위에, 자두빛 장삼을 걸친 어린 수도승들이 한 줄로 앉아
단조로운 기도문을 읊고 있었다. 한 손에 든 커다란 북으로는 장단을 맞추는 듯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구부러진 막대기를 휘젓고 있었다. 이 동자승들이 기도문을 잘못 외울 때면, 살찐
수도승이 회초리로 이들을 위협하곤 하였다. 실제로 그다지 심하지 않게 이들을 때리기도
하였다. 법당 한가운데에서는 한 라마승이 이상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선 채로 두
손을 모아 합장한 다음 머리 위로 올렸다가 목 정도까지 내리고, 다시 심장 높이까지 내린 다음
널찍한 나무 판자 위에 납작하게 엎드렸다가, 바닥에 놓인 벙어리장갑을 이용해 몸을 일으킨 후
처음부터 다시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이들은 무슨 기도문을 외우고 있는 중인가요?"
테오가 질문을 시작했다.
"보살들의 가르침을 외우지."
라마승 감포가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가 늘 외우는 기도문은, 여기저기 다니다가 순례자들의 입을 통해서 들은 적이
있을 거야. '옴 마니 반메 훔(om mani padme hum).' 부처는 무수히 많은 기도문을 남겨 주었지.
우리는 그걸 '만트라(진언)'라고 한단다. 조금 전에 내가 들려 준 기도문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만, 어린 수도승들이 외우는 기도문은 너무 어려워서 저렇게들 틀리지."
"그렇다고 해서 회초리로 때릴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테오는 몹시 분개했다.
"그건 규율 문제겠지. 하지만 저렇게 하면 수도승들이 등이 굳어지는 걸 방지한다는 장점도
있단다. 게다가 스승은 언제나 제자들에게 엄해야 하니까."
"그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도 들었어요."
테오가 거의 한숨에 가까운 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 저기 체조하는 분은요?"
"저렇게 절을 하면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 소용이 있으니까 하는 거란다."
라마승 감포가 대답했다.
"교만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지. 자, 한 바귀 돌아볼까?"
어둠침침한 경내에서 테오는 미소짓고 있는거대한 불상을 보았다. 금색의 불상은 두손을
내밀고 있었다. 목에는 색색가지 목도리를 둘렀으며, 어깨에는 노란 새틴 천으로 된 큼지막한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불상 앞 제단에는 여러 가지 색으로 채색된 머거리트 꽃 모양의 촛대가
늘어선 있었다. 마치 파란핀으로 조각한 것 같았다.
"부처님이시군요."
테오가 감격한 듯 속삭였다.
"아니, 보살이야."
라마승이 정정했다.
"그렇지만 네 생각대로 부처라고 해도 괜찮아. 왜냐하면 보살이란 깨달음의 경지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거든."
"꽃이 참 예뻐요."
테오가 말했다.
"응, 그건 버터로 만든 꽃이야."
마르트 고모가 설명했다.
버터라니? 테오는 자가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고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 가까이 다가가
둘째손가락을 꽃에 살짝 댔다가 자기의 입으로 가져갔다. 분명히 버터 맛이었다. 그러니 꽃
장식은 버터로 조가한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녹아 버리면 어떻게 하죠?"
테오는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쉿!"
마르트 고모가 나직이 주의시켰다.
"히말라야 산중에는 얼마든지 물이 있는 대신 날씨가 매우 춥지. 이곳에서 생존하려면 반드시
지방분이 필요해. 그러니까 버터도 아주 귀한 거야. 인도에서 물이 귀하듯이 말야. 이곳
기후에서는 버터가 녹지를 않는단다."
테오는 불상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묵직한 두 눈을 반쯤 감은 부처가 테오를 바라보는
듯했다. 육감적인 입술은 반쯤 미소를 지을락말락했으나, 영원히 침묵하고있었다. 어린
수도승들의 암송 소리가 높아졌는가 했더니 회초리 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징 소리가 법당의
마룻바닥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향냄새와 버터 냄새, 단조롭게 반복되는 음절, 어린 수도승들이
진지한 눈빛,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심각하게 여겨졌다. 테오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둔탁한
북소리가 어찌나 무겁게 짓눌러대든지, 테오는 두 눈을 반쯤 감은 불상이 자기에게로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리가 빙 돈다고 생각되는 순간, 테오는 미소짓는 불상 앞으로 쓰러졌다.
마침 라마승 감포가 쓰러지는 테오를 붙잡았다. 겁에 질린 마르트 고모는 테오가 코피를
흘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라마승은 침착하게 테오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고개를 젖힌 다음, 지붕
위에서 눈을 한 웅큼 뭉치더니 그것으로 테오의 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제 됐어요. 곧 코피가 멈출 거예요."
라마승이 침착하게 말했다.
"갑자기 고도가 높아져서 그럴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하지만 이 애는 환자라는 걸 아시잖아요."
마르트 고모는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병원은 어디에 있죠?"
"병원보다 더 나은 곳이 있지요."
라마승이 나직하게 말했다.
"좀 괜찮아지면 제가 그리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다르질링의 신비스러운 의사
"조금 전에 왜 그렇게 됐는지 말해 보렴."
라마승은 자동차에 오르자마자 테오에게 물었다.
"저도 잘 몰라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악마 이야기, 미소짓는 부처, 샤크티,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혼란스러워졌어요."
"으음..."
감포는 몇 차례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높은 산지에 왔기 때문만은 아니로군."
"네, 절대로 그게 아닐 거에요."
마르트 고모도 한 마디 거들었다.
"사찰 벽화에는 씩씩한 군대라도 겁에 질리게 하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서려 있다고 제가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자아에 대한 환상이 말들어 내는 세계란 그처럼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라마승은 담담하게 말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을 공포에 길들이기 위해 그런 그림을 그린답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공포일까요? 아마도 테오 혼자 힘으로 그 답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테오의 병을 치유하는 게 급선무겠죠."
얼마 후, 자동차는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선 작은 가게 앞에서 멈추었다. 라마승은 테오의
상태가 위급하다는 이유로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을 제치고 위험 있게 걸어 들어갔다. 테오의
코에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핏자국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의심치 않았다.
"급한 환자예요., 롭상 선생님."
라마승은 테오를 어두운 방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않아 있던 나이를 알 수 없는 여자가 아무 말 없이 테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자는 가슴 아래까지 올라오는 긴 모직 치마를 입고 있었다. 테오를 자기 앞에
앉혀 놓고 바라보던 여자의 고운 얼굴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는 듯했다. 여자는 라마승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라마승이 여자의 질문과 테오의 답변을 통역했다. 밤에 잠은 잘 자는지?
낮잠도 자는지? 하품을 자주 하는지 않는지? 둔부에 통증은 없는지? 현기증이 나거나 구역질이
날 때는 없는지? 그리고 나서 여자는 테오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구부려 보았다. 그때마다 딱딱
소리가 났다. 이어서 테오의 혀를 검사하고 난 여자가 뭐라고 한 마디 했다. 라마승은 여자의
말을 가감 없이 문자 그대로 옮겼다.
"테오는 공기 같은 체질이라는군요. 간 계통이 좋지 않는 것 같답니다. 맥을 집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랍니다."
롭상 의사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길은 호흡을 했다. 숨을 멈춘 뒤
의사는 자신의 오른손 둘째, 셋째, 넷째 손가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껏 태오의 왼쪽
맥박 손목 위에 올려놓았다. 몇 초가 지나고, 다시 몇 분이 흘렀다. 의사는 테오의 오른쪽 손목
위에 얹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의사가 마침내 눈을 뜨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서
라마승에게 긴 설명을 덧붙였다.
"예상했던 대로래요."
라마승이 통역했다.
"상태가 심각하다는군요. 하지만 음식이나 기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랍니다. 문란한 성생활
때문도 물론 아니구요. 우연한 사건에서 얻어진 병이 아니랍니다. 롭상 의사 선생님 말로는 아주
고약한 운명의 덫에 걸린 것이랍니다. 지하 세계의 망령이 테오의 건강을 해치고 있대요. 아마도
테오가 전쟁에 죽인 사람일거라는군요."
"그럴테지요. 제가 살인자처럼 생겼나 봐요."
테오가 빈정거렸다.
"그걸 척 보면 알 수 있는 모양이지요."
"맥박이 거의 뛰지 않는대요. 박동수도 일정치 않구요."
라마승이 통역을 계속했다.
"다시 말해서 신체 내부의 긴장이 심화되어 있다는 말이래요. 롭상 의사 선생님은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막힌 혈관이 잡혔답니다. 빨리 손을 써야 한다는군요. 첫째, 쓰고 신 음식은
피야야 하며, 차 마시는 양을 줄여야 한답니다."
"차를 안 마실 순 없어요."
테오가 단언했다.
"둘째, 설탕과 식초, 수렴제는 많이 마시래요. 레몬 음료수 같은 게 적합하다는군요. 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 의사선생님께서 손에 들고 계신 것이랍니다. 은과 질산칼륨, 철, 조개 가루,
말린 크로커스, 꽃, 돼지 간기름 등이래요."
"돼지 간에 은을 혼합한 크로커스에다가 각종 무기질, 그리고 뭐 조개 가루라구요?"
테오가 농담하지 말라는 투로 되물었다. 사실 테오는 겁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사겠어요."
벌써 의사는 약상자들을 열어 이름 모를 덩어리들을 꺼내 세심하게 무게를 달아 본 다음, 여러
봉투에 나누어 담고 있었다. 마르트 고모는 약을 받아든 후 값을 치렀다. 의사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테오의 볼을 살짝 두드렸다. 그리고는 다시 라마승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의사선생님께서 아보카도 기름 마사지도 병행해야 한다는군요. 이 처방대로 실행하면
틀림없이 병이 나을 거랍니다. 티베트 의술만이 테오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답니다."
불안에 사로잡힌 테오는, 티베트 의사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테오가 내민 손을 잡더니, 엄마의 반지를 낀 부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별다른 뜻이 없는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특별히 엄마의 반지에 한 만큼 테오는 적지 않게
위안을 받았다. 가슴이 저려 오는 듯했다. 의사는 또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대체 저 여자는 누구죠?"
마르트 고모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물었다.
"롭상 도르제 의사는, 티베트에서 가장 명망 높은 의사 가운데 한 분이랍니다."
라마승 감포가 대답했다.
"아주 먼 곳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올 정도이지요. 알고 계셨던 가요?"
"어떻게 그처럼 빨리 병세를 알아낼 수 있지요?"
"그게 바로 티베트식 진찰 기술이죠."
라마승은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양손목을 눌러서 혈관의 흐름을 따라가면 아픈 곳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충분히
정신을 집중시켜야 가능한 일이지만요. 그리고 같은 방법으로 기분까지 조절할 수가 있답니다."
"아,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는 말씀이죠.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숨을 참고 있었군요."
마르트 고모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렇죠. 환자의 신체 각 부분의 맥박이 어떻게 뛰고 있는지를 감지하기 위해서였죠."
라마승이 말했다.
"중국에서 오래 전부터 행해지던 방법이라고 합니다."
"꼭 마술 같아요."
테오가 한 마디 거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렇단단."
라마승이 웃으며 대꾸했다.
"마술이라고 해서 항상 비합리적인 눈속임이 아니라면 말이야. 육체는 완전히 그 정신에 달려
있는 거란다. 병을 치유하고 싶거든 식이요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지어 준 약도 꾸준히 먹어야
해.
아참, 깜빡 잊었군요. 제 생각에는 다른 처방은 모두 잊어버리시는게 좋을 것 같군요. 제가
보기에도 테오의 병은 양약으로는 손을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 다만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어려운 선택
다른 처방은 무시해 버리라고! 테오의 부모는 뭐라고 할까?
"그렇게 하려면 파리에 허락을 얻어야 해요."
마르트 고모가 중얼거렸다.
"아니 파리라니오?"
라마승은 불쾌한 표정이었다.
"서양 의사들은 속수무책이라고 마르트 당신이 벌써 여러 차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테오의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네, 그건 그렇군요."
라마승도 이해가 간다는 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테오의 부모님께서 동의하시도록 기도를 하겠습니다."
전화에서 멜리나는 가슴을 에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 사람들이 우리 테오를 죽이려 하는군요! 그렇지 않아도 이번 여행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어요. 테오가 그런 여행을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단
말예요."
"그렇다면 멜리나는, 테오가 파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더라면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마르트 고모가 매정하게 반박했다.
멜리나는 내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측은한 마음이 든 마르트 고모는, 최선을 다해 멜리나를
위로한 다음 자기 오빠를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과학작인 제롬과 얘기해 보면, 그나마 아직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제롬, 냉정해야 해요. 지금보다 더 나빠질 일은 없을 거예요. 검사결과 내내 차도가
없었잖아요. 네, 그야 그렇죠. 더 나빠지진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좋아지지도 않았어요. 한 번
시도해 보도록 허락해 줘요."
" 이 결정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는 알고 있겠지?"
제롬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걸 모른다면 왜 다르질링에서 전화를 했겠어요?"
마르트 고모가 대꾸했다.
"틀림없이 중대한 결정이에요."
전화 반대편에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좋아, 마르트 네 생각이 옳아. 게다가 최근 프랑스 의사들도 티베트 의술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지. 좋아, 동의하지. 다른 처방은 중단하렴."
"휴우, 이제 됐어요. 나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마르트 고모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이제부터는 1주일에 한 번씩이 아니라 하루에 한 번씩 전화를
해줘야겠어."
이로써 결정이 났다. 테오는 이제까지 먹어 왔던 알약들을 모두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티베트식 처방을 따르기로 했다. 다음날 테오는 한결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밤중에 테오는
이상하게 생긴 형체 속에서 있었는데, 그 속에 까만 팔과 하얀 다리들이 제멋대로 엉겨 있었다.
너무나도 촘촘하게 엉긴 나머지, 테오는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고승과 차, 버터, 그리고 기도
라마승은 평화로운 여신들에게 어둠의 악마를 물리쳐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기도문
통을 돌리기 시작했다.
"혹시 고모도 아세요?"
테오가 마르트 고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라마승은 '축복받은 번개'와 상당히 비슷해요."
"뭐라고? 축복받은 번개라니?"
마르트 고모는 영문을 몰라 놀라는 눈치였다.
"너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니?"
"'티베트에 간 땡땡' 만화에 나오는 스님... 몸이 공중에 뜨기도 하고, 가끔씩 환영을 보기도
하는 그 스님 말이에요. 라마승 감포가 안경만 쓰지 않았더라면, 둘이 아주 판에 찍은 것처럼
닮았어요. 정말이라니까요. 고모 생각에는 저분도 공중에 뜰 수 있을 것 같아요?"
"글쎄다."
마르트 고모는 한숨을 쉬었다.
"너 설마 그걸 물어볼 작정은 아닐 테지? 뭐, 그럴 거라구? 테오. 너!"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테오는 벌써 라마승에게로 달려가 궁금한 사항을 묻고 있었다.
라마승은 폭소를 터뜨렸다.
"얘가 철없이 한 말이니 양해하세요."
고모가 난처한 듯 변명을 늘어놓았다.
"땡땡 만화 때문에 이래요."
"하하, 벌서 다 양해했습니다. 프랑스에서 매일 겪는 일인걸요. 참, 테오 너는 아마
'다르질링'이 무슨 뜻인지 모를 테지. 바로 번개의 도시라는 뜻이란다. 자, 이제 우리 사원장을
뵈러 가자구."
사원장은 양철 지붕을 얹은 아주 작은 누옥에서 누운 채 생활하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사원장은 너무나 고령의 노인이었기 때문에, 테오 일행은 그의 축복과 차를 한 잔 대접받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낡은 장삼에 듬성듬성한 턱수염, 대머리에 꿈속을 헤매는 듯한 눈빛을
지닌 사원장은 테오 일행이 도착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피곤한 두 눈을 두루마리로 된
경전에 바짝 붙이고 독성에 열중해 있었다. 경전에서 발췌한 구절들을 손으로 직접 써내려간
두루마라에는 금빛 새틴 표지가 붙어 있었다. 라마승 감포가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하자,
사원장이 두 눈을 들어 가늘게 떴다. 이윽고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웃음을 지어 보인 사원장은
라마승에게 살며시 눈짓을 했다. 그러자 라마승이 당장에 사원장이 지시한 것을 가지러
달려가더니, 곁에 꽃무늬가 그려진 중국제 보온병을 들고 왔다. 보온병 안에는 버터를 넣은 차가
들어 있었다.
"어휴."
테오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카페오레에다가 소금을 친 것 같은 맛인데요."
"아닌게아니라 소금을 쳤어."
라마승이 설명했다.
"석회도 넣는단다. 오랜지색 기운이 도는 게 보이지?"
"네, 그렇네요. 제 눈에도 보여요."
테오가 수긍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바로 그게 버터야."
라마승이 덧붙였다.
"이건 차라기보다 더운 국물이라고 해야겠어요."
테오가 결론을 지었다.
"사실 그렇단다."
라마승도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추위를 이기는 데는 이만한 처방이 없어. 이틀만 지나면 테오도 이 차 없이는 못 견딜
거야."
"어쨌든 고맙다는 인사는 드려야 하지 않겠니?"
마르트 고모가 테오에게 넌지시 지시했다.
어떻게 인사를 애야 할지 몰라 테오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연로한 사원장의 얼굴이 금새
환해지더니, 떨리는 손으로 테오에게 축복을 내려주었다. 테오 일행은 사원장의 거처를 나왔다.
라마승과 손을 잡은 테오가 앞장을 서고, 마르트 고모는 여느 때처럼 뒤로 처졌다.
"저렇게 나이 많으신 분은 처음 뵈어요."
사원장의 거처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오자, 테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실제로 굉장히 나이가 많으신 분이지. 1백 살도 넘으셨거든."
라마승이 대답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 수가 있는 거지요?"
테오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 열다섯 살까지 살 수 있을 지조차 확실치가 않거든요."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삼갈 뿐만 아니라 열심히 기도하고, 그리고 버터차를
마시면 되지."
라마승은 단숨에 이같이 대답했다.
"테오도 그렇게 해봐.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그 국물이야 마실 수도 있겠지만,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테오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하소연을 했다.
"넌 기도를 잘 하였던 걸로 아는데. 지난번에 보살상 앞에서도 하지 않았니?"
"네? 코피가 터진 게 기도라는 말씀이세요?"
"아니지, 바로 그 전에 말이야."
라마승은 수수께끼 같은 말만 계속했다.
바로 그 전이라면? 무슨 일이 있었지? 불상이 쓰러질 것 같았는데... 그리고는...
"그리고는 테오가 그 불상이 미소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안 그래?"
"네, 맞아요. 그게 기도라면 저도 할 수 있어요."
라마승은 테오의 손을 꼭 잡고는 입을 다물었다. 주위에는 온통 평화가 감돌고 있었다. 테오는
가슴 가득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제서야 테오를 따라잡은 마르트 고모가 갑자기 침묵을
깨고 외쳤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하시죠? 설마 우리 테오를 신비주의자로 만드시려고
세뇌하는 건 아니겠죠?"
고모의 목소리는 참으로 낭랑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라마승이 말했다.
"테오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비주의자인걸요. 틀림없이 전생에 신비주의자였을 거예요."
번개단검
다음날 라마승은 테와와 마르트 고모를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몸짓으로 분주한 티베트
난민촌으로 안내하였다. 난민촌 입구에서는 기도에 필요한 갖가지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테오는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여덟 가지 종류의 금속 합금으로 이루어져 굉장히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심벌즈와, 나무막대기로 가장 자리를 문지르면 묘한 화음으로 공기를 진동시키는
대접 모양의 악기들이 있는가 하면, 조각되어 있는 손잡이를 돌리면 움직이는 구리로 된 소형
기도문 통도 있었다.
"한 번 열어 봐."
라마승이 테오를 부추겼다.
"기도문이 들어 있을 거야."
테오는 시키는 데로 했다. 손잡이 끝부분 안쪽에 작은 종이가 돌돌 말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펴 봐."
라마승이 지시했다.
"그걸 읽어야 해."
"전 티베트 글자는 읽을 줄 모르는데요."
테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한 번 읽어보렴."
뜻밖의 일로 어리둥절해진 테오가 떠듬떠듬 읽어 내려갔다.
'여러 개의 섬 중에서 가장 큰 섬, 그 섬 중에서 가장 큰 도시의 심장부에 몸을 숨기고 살면서,
나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지혜를 불어넣는다네. 나는 신도 성인도 아니라네. 나는 그저
참으로 못생긴 현자에 불과하다네...'
"상당히 복잡하군요."
테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 봐야겠지."
라마승이 말했다.
"이건 마치 기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너도 알겠지만."
"저도 기도쯤은 할 줄 안다고 믿고 있었어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여기에 와 보니, 그런 믿음이 사라졌어요. 마술에 홀린 것만 같아요. 악마, 여신,
미소... 이런 걸 생각하면 머리가 혼란스러워져요."
"그래, 아주 잘 말했어."
라마승이 말했다.
"그런 과정이 필요하지. 하지만 집중적으로 사고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한 훈련이야. 가만있자.
테오에게 줄 선물이 있었는데."
라마승이 선반 위에서 이상하게 생긴 도금한 청동 단검을 골랐다. 날이 세면으로 되어 있었다.
못생긴 얼굴 위에 죽은 이들의 두개골이 여러 개 조각되어 있는 손잡이는, 전체적으로 용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단검은 굉장히 무거웠다.
"정말 감사합니다."
테오는 신기한 듯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답례를 했다.
"약간 무시무시하지 않니?"
라마승이 물었다.
"내가 설명해 줄게."
티베트 승려들도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아주 많이 한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한 속에서 영원히 공중 분해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십중팔구 회생해야 할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거의 확실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기도에 사용되는 도구에 죽은 이들의 두개골이 자주 등장한다. 때로는 진짜 해골에
금속을 씌워 물컵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진짜 해골을 가지고 만든다는 말씀이세요?"
테오는 겁에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이었다. 이것으로 인간은 무사함을 실감할 수 있었으며, 육체야말로 인생무상을 표현하는
가장 성가신 수단이었다. 아마 라마승 감포의 두개골 또한 언젠가는 다른 라마승의 물컵으로
사용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삶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다. 보살들은 티베트 불교도들을 지혜의 길로 이끌기
위해 고심해 왔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확고할수록 죽음을 잘 받아들이는 법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죽음에 임하면서 기쁨까지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열성적인 카톨릭 신자들이 해골을 앞에 놓고 명상을
하기도 했지요. 근저에 흐르는 원리는 같았던 것 같아요. 성서에 나오는 해묵은 주제를 다시
상기시키는 거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마르트 고모가 말했다.
"그 생각과 우리의 철학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라마승이 지적했다.
"우리는 결코 절망감에 빠져 명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겠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허무에 대한 묵상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도 '모든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위대한 스승들께서는 환상과는 전혀 다른 회생의 길을 알려
주십니다. 스승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는 염습을 한 후 1년 동안 기다렸다가 그 주검을 땅에
묻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우리는 타계한 스승의 영혼을 몸 속에 물려받은 어린아이를 찾아
나섭니다."
"아, 그건 저도 알아요!"
테오가 반갑다는 듯이 외쳤다.
"티베트 사람들에게 적임자를 찾아내는 특별한 절차가 있더라구요."
"우리는 여러 어린이들에게 흔히 쓰는 물건들을 몇 가지 보여 주지요. 타계한 스승이 생전에
쓰던 유일한 물건을 스스럼없이 집어드는 어린이가 나타날 때까지 이를 계속합니다. 때로는 이제
겨우 걸음마를 할까말까 할 정도의 어린아이의 후계자로 인정되기도 하죠. 이제까지 수세기 동안
우리의 대스승은 그 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두개골도 일시적인 주거에
불과합니다."
"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어요."
테오는 단검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좀더 들어보렴."
라마승이 테오를 달랬다.
이제까지는 죽은 사람들의 머리장식에 대해서만 설명을 했다. 그 단검은 결코 남의 피를
흘리는 데 사용하던 것이 아니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모든 생명체에 대한 자비심이
있으므로 도저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땅에 꽂혀 있는 단검은 도저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땅에 꽂혀 있는 단검은 지하 세계의 악마들을 붙잡기 위한 무기였다. 이
단검을 푸르부, 즉 '번개단검'이라고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라마승 감포는 그림을 한 장 그렸다.
"자, 이렇게 다섯 개의 해골이 달려 있어. 왜냐하면 모든 요소들은 다섯 개가 한 쌍이기
때문이지. 다섯은 지혜를 나타내는 숫자야. 텅 빈 두개골은 살아 생전 머릿속에서 번뇌를
일으키던 집착을 떠난 상태를 의미한단다. 늘 여러 가지 상념에 골몰하던 우리의 뇌 말이야."
"그러고 보니 쉴레이만 이맘도 예루살렘에서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테오가 소리쳤다.
"그러셨을 테지. 그렇지만 자기의 생각을 멈춘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 생각이란
환상이야, 테오. 가장 중요한 건 제일 꼭대기. 즉 우리가 지보라고 부르는 곳에 있단다. 두개골
자체는 껍데기에 불과하지. 지보야말로 실재이며, 광명이란다."
"제가 고통받지 않도록 저에게도 그걸 좀 주세요."
테오가 속삭이듯 간청했다.
"테오는 나를 '축복받는 번개'로 생각하는 모양이군."
라마승은 부끄러운지 우물우물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마워요."
테오가 대꾸했다.
"이 번개 단감이 네가 평온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 줄 거야. 내가 장담하지."
"네, 알겠어요."
테오는 선물로 받은 보물을 손에 쥐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해골은 사지 않는 게 좋겠어요."
라마승은 빙그레 웃었다. 난민촌 입구의 관광객들을 위한 기념품 상회에서는 다행히 해골은
판매하지 않았다. 티베트 난민들을 돕기 위해 세워진 이 상점에서는 위험스럽지 않은 물건들만을
판매하고 있었다.
"망명생활이라..."
라마승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망명이라고 하시니까. 새로 받은 메세지가 떠올랐어요."
테오가 그제서야 생각난다는 듯이 말했다.
가장 못생긴 현자
호텔로 돌아온 테오는 이 궁리 저 궁리에 여념이 없었다. 여러 개의 섬 중에서 가장 큰 섬...
군도. 테오는 지도책을 펼쳤다. 군도는 굉장히 많았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메시지의 설명에
가장 잘 들어맞는 곳은 일본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행선지는 도쿄일까?
"하지만 일본에는 이민 공동체가 없단다."
마르트 고모가 지적했다.
"이민 공동체가 뭐예요?"
"자기 조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기로 한 사람들의 집합체이지."
"그렇다면 인도네시아겠군요."
테오가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죠?"
"대개가 이슬람교도들이야."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힌두교도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지. 전에는 주민 전체가 정령 숭배자들이었단다. 아프리카에도
이런 지역이 있지. 그런데 타지 사람들이 장사를 하려고 이곳으로 몰려와서 그대로 눌러앉았던
거야."
"그럼 그 상인들이 이민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디에서 흘러 들어왔을까?
"가장 못생긴 현자가 누굴 가리키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렴."
마르트 고모가 힌트를 주어다.
"네가 가진 종교사전을 찾아봐."
못생긴 신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혐오감을 주는 그리스의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
소름끼치는 인도의 칼리, 우스꽝스런 티베트의 악마, 그 외에도 멕시코, 브라질, 아프리카 등지에
끔찍한 신들이 산재해 있었다.
"메시지에는 신이라고 적혀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마르트 고모가 테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렇다면 신이 아니라 인간이 걸까?"
테오는 한 장 한 장 세심히 살펴보았다. 소크라테스는 망명생활을 하지 않았지. 예수는
미남이었고, 그러다가 테오는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일어서고, 두 눈은 툭 불거졌으며, 삐드러진
앞니 두개가 아랫입술까지 와닿는 큼지막한 얼굴 사진을 찾아냈다.
"이 사람은 정말 못생겼는데요."
테오가 평했다.
"이름이 뭐지? 공자? 뭐 하는 사람일까? 중국인이네. 그렇다면 고모가 말씀하신 상인들은
중국에서 온 사람들인가요?"
바로 맞혔다. 이제 남은 일은 인도네시아 군도 중에서 가장 큰 섬에 있는 가장 큰 도시를
알아맞히는 일뿐이었다. 자바 섬의 자카르타.
"아주 잘 맞혔어. 이번에 굉장히 빨리 알아맞히는 구나."
마르트 고모가 테오를 추어주었다.
"보셨죠?"
테오도 자랑스러운지 우쭐거렸다.
"축복받은 번개의 효과가 슬슬 나타나나 봐요."
"그런데 새로 먹기 시작한 약은 어떠니?"
"맛이 아주 고약해요."
말하면서 테오는 얼굴을 찡그렸다.
"자카르타에 가서도 의사선생님을 만나게 되나요?"
"응, 중국인들이 있는 곳에는 항상 뛰어난 의사들이 있게 마련이란다."
마르트 고모가 자신 있게 말했다.
"다르질링에서 만난 여의사와 비슷한 종류의 의사들이지."
"그렇다면 직접 중국으로 가면 되잖아요? 그게 훨씬 간단할 텐데요."
테오가 물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종교는, 시간과
공간에 토대를 두고 있었으므로 눈으로는 잘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첫번째 이유였다. 물론
타이산 성소에 있는 7천 개의 계단을 올라간 다음, 그로부터 1545미터 높이에 있는 비석을 볼
수는 없었다. 역대 왕조들이 그곳을 다녀갔노라고 기록한 비석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텅 빈 공간만이 끝없이 펼쳐질 뿐이었다. 이 '하늘의 계단'을
오르는 것이, 중국에서는 가장 중요한 순례행사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 꼭대기로부터 영혼이
지상 세계로 날아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테오에게는 여러 시간 동안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 이 순례가 무리였다. 이곳에서는 별도의 기도가 필요 없이,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기도였다.
"그렇다고 쳐요. 그런데 거기 말고 다른 곳은 없다는 말씀이세요?"
마르트 고모는 의자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다른 성지가 몇 군데 있긴 하지만, 아마
입국 비자를 얻을 수가 없을 거야. 마르트 고모가 몇 년 전 베이징에서 불법 시위 대열에 섞이게
되는 바람에, 그만 주먹을 휘둘렀던 일이 어쩌면 서류상에 기록되었을 거라는 설명이었다.
"고모도 참 한심하네요. 그래서 이렇게 복잡하게 되었다. 말씀이죠?"
그렇다고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중국의 종교는 외지로 전파되어 그 명맥을 이어가기도
하므로, 자카르타에 가면 중국 종교의 면모를 편안하게 구경할 수 있을 터였다.
"고모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테오는 그래도 못마땅한 투였다.
"베이징에도 가보고 싶은데...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저 혼자서라도 가보겠어요. 그런데
파리에 전화해야 할 것 같지 않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아빠가 노발대발하실 거예요."
마르트 고모는 테오가 처음으로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걸 느꼈다.
두 개의 흰 머플러
출발에 앞서 테오는 중앙 광장 주변에 밀집해 있는 조그만 상점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광장에는 체구는 작지만 다부져 보이는 금색 갈기의 말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테오는 차들
살 예정이었다. 자신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차! 진열대에서 마르트 고모는 갈색빛이 나는 원추
모양의 물건을 집어 테오의 손에 주어 주었다.
"우습게 생겼네요."
테오가 이리저리 냄새를 맡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한 냄새가 나요. 이게 뭐죠? 담배인가요?"
"네가 찾는 차야."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테오는 원추 모양의 차를 보고 또 보았다. 티베트 사람들은
찻잎을 차곡차곡 쌓아 단단한 원추 형태를 만든다고 고모는 설명했다. 바로 이 갈색 잎으로
버터를 곁들인 독특한 차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어째든 신기한 차임엔 틀림없었다.
"이건 건 말고, 다르질링에서 나는 향기 좋은 차를 사고 싶어요."
테오는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그런 차는 구할 수 없었다. 인도에서 나는 가장 좋은 차는 모두 외국으로 수출된다고 하였다.
실망한 테오는 다른 기념품을 사기로 마음을 바꿨다. 하드지트 메타라는 간판이 붙은 기념품
상회에서, 테오는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 듯한 악마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얼싸안고 있는
한 쌍의 남녀를 헝겊에 그려 넣은 한 폭의 그림을 샀다. 자그마한 크기의 도금한 청동 여신상도
하나 골랐다. 가부좌한 채 미소를 짓는 멋진 금관을 쓴 여신의 이름은 타라(다라보살)였으며,
매우 상냥해 보였다. 타라 여신만큼이나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하드지트 메타 씨는, 자신은 불교
신자가 아니라 힌두교 신자라면서 타라 여신이 어떤 의미에서는 아발로키테스바라
보살(관세음보살)의 여성 배우자에 해당된다고 애써 설명하였다. 타라 여신은 보살의 눈물에서
태어나 보살의 선행을 도운 여신이기 때문이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간호사 같긴 하지만, 그래도 사겠어요. 그리고 저기 저 큰 불상은
부처님인가요?"
조각이 테오의 키만큼이나 되는 크기였으므로 마르트 고모는 버럭 화를 냈다.
"너, 그런 거 사면 비행기 탈 때마다 추가로 운송비를 내야한단 말야!"
고모가 소리를 질렀다.
"너무 무거워서 안 돼."
테오는 포기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라마승 감포는 아직도 테오에게 줄
선물이 있었다. 몸체가 튀어나온 자동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라마승은 테오의 두 손에 아주
가벼운 하얀 머플러를 쥐어 주었다.
"자, 이건 우리가 인사를 나누는 방법이란다."
라마승이 말했다.
"네가 도착했을 때 전해 주었어야 했는데, 내가 깜빡 잊었어. 게다가 너에게 인사를 하려다
내가 안경을 떨어뜨렸잖아. 그래서 지금이라도 그때 못 준 걸 전해주는 거야."
"이거 받아, 테오"
마르트 고모가 가방에서 똑같이 생긴 머플러를 꺼내면서 테오에게 속삭였다.
"스님께 이걸 드리렴. 티베트에선 전통적으로 머플러를 주고받는 관습이 있거든."
정중하게 테오는 머플러를 자기의 양손에 얹은 다음 라마승에게 내밀었다. 라마승은 머플러를
집으며 깊숙이 몸을 굽혔다.
"스님이 보고 싶어질 거예요."
테오는 체념하듯 한숨을 쉬었다.
"스님이 안 계실 땐 어떻게 하지요?"
"그럴 땐, 이 축복받은 번개가 네 꿈속으로 찾아갈게."
라마승은 활짝 웃으며 테오를 안심시켰다.
"약속해."
16 하늘과 땅 사이
캘커타 경유
자카르타로의 여행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실리구리로 돌아와 항공편으로 캘커타까지
간 다음, 방콕행 첫 비행기를 타고 다시 자카르타로 가는 두번째 비행기를 타야 했다. 신중한
마르트 고모는 캘커타에서 제일 좋은 호텔에 방을 잡아 두었다. 하룻밤을 그곳에서 보낼
계획이었다.
테오는 산을 내려오는 동안 내내 바깥 풍경에 몰두했다. 소꿉놀이 기차처럼 작은 기차가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파란 바다 빛깔의 기관차가 끄는 이 기차에는 깔깔거리며 웃어대는 어린
꼬마들이 하나 가득 타고 있었다. 눈 덮인 산봉우리들이 하나씩 둘씩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사찰과 사리탑도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아주 멀리 은빛의 한 줄기 곡선이 꾸불꾸불 벌판을
가로지로고 있었다. 지류가 유난히도 많다는 브라마푸트라 강이었다. 공기는 점차 건조해졌고,
땅은 노르스름한 빛깔을 띠었다. 캘커타로 가는 비행기에서 테오는 곧 잠이 들어 버렸다.
"이제 내려야 해."
마르트 고모가 테오를 흔들어 깨웠다.
"어디예요?"
잠에서 덜 깬 테오가 중얼거렸다.
"캘커타."
"별로 재미없겠군요, 아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 가운데 하나라지요?"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구나. 그 바보 같은 소린 그만 하고 공항이나 우선 살펴보시지."
마르트 고모가 대꾸했다.
웅장하고 현대식이며, 빨강, 파랑 천으로 리본을 둘러놓은 캘커타 공항의 로비는 눈이 부실
정도로 청결했다. 마르트 고모는 택시를 잡으려고 공항 밖으로 나와 벌떼처럼 달려드는 걸인들을
보기 좋게 물리쳤다. 걸인들 중에는 한쪽 팔이 없거나, 다리가 하나 없는 처참한 불구자들도
적지 않았다.
"제 말이 맞잖아요."
테오가 속삭였다.
"바라나시에서도 마찬가지였어."
고모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지만 마한트지는 종교적인 관습 때문이라고 그러셨어요."
"그건 그래."
고모도 테오의 말을 어느 정도 시인했다.
"인도에는 구걸하는 사람이 많지. 속세를 떠난 사람들에게는 구걸이 그 의무이기도 할 테지.
이들이 모두 속세를 떠난 사람들이라고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말야. 어쨌든 이제 캘커타에 대한
편견을 버렸으면 좋겠구나. 걸인들은 관광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모여들게 마련이지. 아마
관광객이 호구로 보이는 모양이지. 그거야 어쩌겠니? 넌 부유한 나라에서 사는 데에만 익숙한
아이니까..."
"제가요? 전 환자예요."
테오는 고모의 말에 크게 반발했다.
"저 사람들도 그래."
마르트 고모가 냉정하게 대꾸했다.
"게다가 저 사람들한테는 병을 낫게 해주려는 고모도 없단다. 알겠니? 지구의 반쪽은 이렇듯
가난하고, 나머지 반쪽은 너무 많이 먹어서 이제는 날씬해지려고 법석들을 떨고 있지."
"그러면 저 사람들한테 돈이라도 주시면 되잖아요?"
테오도 기분이 상해서 고모에게 짜증을 냈다.
"구걸할 생각도 않는 저기 노인한테라면 좋아."
마르트 고모가 지폐를 꺼내며 말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마피아들이 갓난아기의 팔까지 잘라서 걸인을 만든다는 사실을
너도 알고 있니? 이 점에 있어서 만큼은 내 인도 친구들도 완강하단다. 그런 종류의
불구자들에겐 절대로 돈을 주지 말아야 마피아의 관행도 근절될 거라는 말이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을 체포하진 못하나요?"
"물론 체포할 때도 있지."
고모가 노인에게 지폐를 건네주며 투덜댔다.
"하지만 한두 명 잡아들여도, 천 명쯤이 계속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데야 당해 낼 재간이
있겠니? 자, 앞으로 가자."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가 연못들에 많은 어린아이들이 나와 노닐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
곳곳에 '캘커타, 기쁨의 도시'라고 쓴 거대한 광고판들이 내걸려 있었는데, 이 광고 내용이 거의
사실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도 이디엘 가든 길거리에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으며,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웃는 것 같았다.
캘커타에서는 다른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원래 도시 전체가 수소 모양의 악마를 물리치는
여신 두루가, 또는 두르가의 쌍둥이 자매인 끔찍한 칼리 여신의 세력권 안에 있었는데, 테오는
이 두 여신을 몹시 싫어했으므로 구경을 못했다고 해서 그다지 애석할 것도 없었다. 마르트
고모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저녁 식사를 중국식으로 하자고 제안했으나, 테오는 즉각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중국이라면 그 정도로 충분해요. 게다가 인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밥인데..."
테오를 설득하다 지친 마르트 고모는 하는 수 없이 조카에게 양보했다. 결국 그들의 저녁 식사
메뉴는 오랜지빛 콩죽에 따뜻한 빵, 신선한 라시와 백반이었다.
다수와 소수
"그러고 보니 벌써 전체 여정의 절반 가량은 마친 것 같구나, 테오. 네 소감은 어때?"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글쎄요."
테오가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서요. 신의 이름으로 대량 학살이 자행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제가 살인 만행이 몇 차례나 자행되었는지 세어 볼까요? 첫째 유대교도, 둘째 바하이교도,
셋째 시크교도, 넷째 근대 인도의 이슬람교도, 다섯째 그리스도교의 순교자, 여섯째 카타르파,
일곱째 히파티아, 그리고 또 제가 잊어버린 것도 많을 거예요."
"거기에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는 것 같지 않니?"
"새로운 종교가 싹틀 때마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그래, 거의 들어맞았어. 근대 인도의 이슬람교도들은 예외겠지만..."
"그 사람들은 자기네가 사는 나라에서 수적으로 열세하였기 때문이겠죠."
테오가 이유를 설명했다.
"그래, 그 말이 꼭 맞는구나. 소수민의 종교는 항상 푸대접을 받아왔지. 이 점은 종교 외의
일상 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단다. 남과 너무나 다른 사람은 고생을 좀 하게 마련이거든."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학교 선생님들께서 늘 저더러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따돌림을 당하진 않았어요."
"그래? 그렇지만 예전 같았으면 아마도 넌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을지도 모르지.
프랑스에서도 17세기까지는 한쪽 눈은 갈색인데 다른 한쪽 눈은 파랗다는 이유만으로
장작더미에서 불타죽는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어. 여자들의 경우엔, 악마의 색인 녹색 치마를
입으면 종교재판소에까지 끌려가 곤욕을 치르는 수도 있었지."
"프랑스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구요?"
테오는 깜짝 놀랐다.
"너, 종교전쟁에 대해서 안 배웠어? 바르톨로메오, 생각 안나니? 개신교도들을 몰살시킨 사건
말야."
"알아요."
테오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물론 지금이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 그렇지만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
"그러니까 숫자가 많은 쪽이 언제나 그 숫자가 적은 쪽을 말살시키려 한다, 이 말씀이죠."
테오가 다시 한 번 고모의 말을 정리했다.
"말 좀 제대로 해보렴. 그 숫자가 많은 쪽을 '다수'라고 하고, 적은 쪽을 '소수'라고 하면
좋잖니?"
"다수는 언제나 소수를 증오한다."
테오는 순순히 반복했다.
"그러다가 소수가 다수가 되면 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죠. 그리고 이들은 패자에게 가차없이
복수를 하게 되는 거예요. 고모도 그리스도교도들의 경우를 들었지요? 오타비오 예하가 잘
설명해 준 적이 있잖아요. 우선 순교자를 낸 다음 전쟁을 한다구요. 처음엔 카타르파라고
자처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격이지요."
"최근까지만 해도 힌두교도들이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는 경우는 없었지."
마르트 고모가 지적했다.
"티베트 불교도들도 마찬가지고, 넌 어떻게 생각하니?"
"그건 그래요."
테오가 정곡을 찔렀다는 표정으로 시인했다.
"그러고 보면 전쟁을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뿐이네요."
"유대교도들도 이따금씩 그런단다."
마르트 고모가 덧붙였다.
"순교자들이 있다 보니 그렇게 되는 모양이죠."
"아니, 그들은 유일신을 섬기기 때문이야, 테오. 그들은 오직 하나의 신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지. 유일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대체로 타협할 줄 모른단다. 예루살렘 생각나지? 저마다
자기들의 신만 옹호하고, 다른 사람들의 신에 대해서는 너그럽지 않았잖니. 그 신이 하느님
아버지이건 알라이건, 혹은 아도나이 엘로힘이건 다를 바가 없었어.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힌두교의 과격분자들은 그 신들의 숫자를 줄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야
신자들의 결속력이 강화될 테니까 말이지. 수백만 가지 신들 중에서, 그들은 라마야나의 라마를
선택해서 힌두 국가의 유일신으로 삼으려고 한단다."
"지금 고모는 여러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좀더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말하고 싶으신
거로군요."
테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는 왜 그런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통합주의란?
마르트 고모는 의무인 양 실제 보기를 들어가며 통합주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16세기에
들어와 최초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힌두교도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성인들을
힌두교도들의 무수히 많은 신들에게 대입시키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예수는 크리슈나에
해당하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1만 1천 명의 여자 친구들은 제외해야겠지요."
테오가 지적했다.
그야 물론 테오의 말이 옳았다. 마리아는 두르가가 수소 모양의 악마를 잡은 것처럼, 뱀을
자기이 발 밑에 굴복시킨 여신이라고 설명했다. 삼위일체로 말하자면 식은 죽 먹기였다.
왜냐하면 힌두교도들도 브라마와 비슈누, 시바를 하나로 묶어 트리무르티(산스크리트로 '세 가지
형태'라는 뜻)라고 일컬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에는 수염 난 신(성부)과 미남
청년(성자), 그리고 비둘기(성신)가 포함되므로, 힌두교도들은 그리스도교가 되기 위해서는 세
명의 신을 하나로 묶은 다음, 여기에다가 여신을 한 명 더하여 주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비둘기는 무시해 버린 모양이죠?"
테오가 물었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승불교 역시 기존의 종교를 타파하지 않고 취할 것은 취해 짜집기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악마 이야기를 취하고, 저기에서는 눈물 흘리는 여신들의
에피소드를 첨가하는 등, 종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지역마다 그 지역의 형편에 어울리는 맞춤
종교가 된 것이다. 이 같은 독특한 전개 과정을 통합주의라고 하며, 그리스어로는 '다른 것과
합친다'는 뜻을 지닌다. 통합주의의 기수는 단연코 마하트마 간디였다. 그는 늘 이슬람교의
'코란', 그리스도교의 '성서', 힌두교의 '바가바드기타' 등 세 권의 경전을 한꺼번에 가지고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바가바드 뭐라구요? 전 그게 뭔지 잘 모르겠는데요."
테오가 물었다.
"그럴 리 없어, 테오. 너도 이미 잘 알고 있는 거란다. 크리슈나 신이 인간들끼리 서로 싸우게
하기 위하여, 신으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결정적인 순간을 가리키는 말이잖니?"
"네, 듣고 보니 생각이 나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전쟁에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간다가 왜 하필이면 그런 책을 가지고 다녔죠?
성경이나 코란은 또 그렇다고 쳐요. 하지만 바바르다지타는..."
"바가바드기타!"
고모가 신경질적으로 테오의 말을 바로잡아 주었다.
"너무 어려우면 기타라고만 해도 돼."
인간에게 전투심을 불러일으키는 경전은 기타만이 아니었다.
'코란'에서는 지하드를 선동하며, 복음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같은 모골을 송연케 하는 예수의 말씀을 담고 있다. 인간들은 이런
구절들을 전쟁의 의미로 해석했다. 신에 대한 믿음은, 대상이 된 신이 누구이든간에
신자들로부터 군대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충성심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니다.
예수는 무엇보다도 사랑을 전파했으며, 마호메트는 정의를, 기타는 신성이 세상을 밝혀 준다고
가르친다. '코란'에서 말하는 지하드란, 인간이 범하기 쉬운 불편부당을 막기 위해 벌여야 하는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의미한다. 예수의 위협 섞인 공격적인 발언은 그리스도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함이며, 기타는 힌두교도들에게 우주의 질서로부터 광명을 얻을 수 있다고 격려한다.
"그런데 마하트마는요?"
테오는 집요하게 추궁했다.
간디도 나름대로 진정한 의미의 전투사였다. 비록 평화주의자인데다가 비폭력을 주장하긴
했지만 매일 아침 자기 자신과, 또 점령자와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말하자면 그는 전쟁이라는
관념에서 가장 본받을 만한 두 가지 덕목, 즉 규율과 용기를 취한 것이다. 또한 종교 경정에서
정의와 사랑, 신에 대한 변함없는 경배의 마음을 취한 간디는 나름대로는 통합주의를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인도인들을 단결시키는 데는 아주 유용한 방법이었지."
마르트 고모가 덧붙였다.
"이 점은 너도 쉽사리 이해할 수 있겠지?"
"만약 그런 식으로 한다면, 통합주의를 통해서 전 세계를 통일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되겠네요.
서로 싸울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테오가 내린 결론이었다.
새벽녘, 창문 아래서 싸워대는 인력꾼들의 소리에 잠을 깬 테오는, 벌써 자동차들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 일종의 그리스 신전 같은 건축물과 어정쩡한
고딕 양식의 교회당이 보였다.
"저것도 통합주의라고나 해야겠군."
테오가 중얼거렸다.
"고모, 저기를 좀 보세요. 두르가 여신을 위해 고딕 교회를 지었나 봐요."
하지만 그 교회는 캘커타가 영국령 인도 제국의 수도였던 시절에 세워진 캘커타 성당이었다.
한편, 그리스 신전은 빅토리아 여왕의 기념관이었다. 제국주의 유산에 이다지도 연연해하는
캘커타 인도인들의 자세는, 테오의 말과는 반대로 오히려 통합주의와 상반된다고 볼수 있었다.
제국주의 시대는 이마 막을 내리지 않았던가.
제물의 변천사
방콕으로 가는 기내에서, 마르트 고모는 비행기가 떠나갈 정도로 코를 골았다. 테오는 수첩을
꺼내 인도 여행의 기념으로 그림을 몇 개 그려 넣기로 작정했다. 시바와 삼지창, 크리슈나와
그의 애인인 양치기소녀, 두르가와 사자, 네 개의 머리를 가진 브라마 신을 그렸다. 그리고 이
신들을 결합시켜 보려 하였으나 불가능했다. 통합주의 정신을 되살려 재칼 신 호루스와 코끼리
신 가네샤, 원숭이 신 히누만을 적당히 배합하려 시도해 보았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의 여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테오는 아바라함의 제물에 생각이 미쳤다.
바로 그 사건이 벌어질 종교간 각축전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이삭 대신 양의
번제가 시작되었으며, 십자가에 제물로 바쳐진 예수와 갠지스 강가에서 죽은 자의 시체를 제물로
바치는 화장 의식이 비롯되었다. 테오는 순간적으로 전율을 금치 못했다. 십자가형이나 화장
풍습은 결국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아닌가! 반면 이슬람교와 유대교, 시크교에서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바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기 위해서,
테오는 두 개의 가지가 달린 나무를 한 그루 그렸다. 한쪽 가지에는 제물로 바쳐진 육체를
그렸고, 다른 한쪽에는 불에 태워진 짐승으로부터 올라오는 연기에 둘러싸인 책을 그렸다.
책으로부터 글자들이 제못대로 빠져 나와 하늘로 날아가는 그림이었다.
"마르트 고모!"
테오가 고모의 팔을 흔들었다.
"으음... 무슨 일이니?"
고모가 잠결에 중얼거렸다.
"별일 아녜요."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어 테오는 얼버무렸다.
"요즘에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나요?"
"뭐라구?"
고모는 벌컥 화를 냈다.
"겨우 그런 일로 날 깨웠어?"
"죄송해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마르트 고모는 앉은 자리에서 자세를 고치더니, 휴지를 한 장 꺼내 얼굴을 닦고 나서 두 잔의
차를 주문했다.
"할 수 없지."
고모는 잠을 포기한 눈치였다.
"그게 도대체 무슨 얘기야? 인간 제물인가 뭔가..."
테오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내보이며 설명을 했다.
"생각을 더 가다듬어 보렴. 출발점은 잠시 접어두고, 나중에 무엇을 제물로 바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봐.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 대신 빵과 포도주를 바치잖니? 그게
중요한 거야. 무슨 종교든지 인간 제물을 이렇듯 다른 종류의 제물로 대체했지."
테오는 목록을 작성했다.
그리스도교 = 빵과 포도주.
불교 = 버터와 향.
힌두교 = 우유와 꽃, 과일.
유대교, 이슬람교, 시크교 = 제물은 없고, 경전만 있음.
"그런대로 잘 정리했구나."
마르트 고모도 인정했다.
"그런데 말이다. 요즈음엔 그 의식이 사라졌지만, 율법에 따라 유대교 제사장들이 수소와
가금류를 제물로 바쳐야 했던 시절이 있었지. 그런데 90년대 말, 이스라엘에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몸 전체가 완전히 다갈색인 암송아지가 태어났거든. 성경에 의하면, 제사장들은 맑은
샘물에 다갈색의 암소의 재를 섞은 용액으로 몸을 정화시켜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어. 다른
빛깔의 털은 단 하나도 섞이지 않은, 온통 갈색인 이 짐승은 하도 귀해서 예루살렘 성전 건축
이후 일곱 마리밖에 태어나질 않았었다는구나. 그래서 타향살이하는 율법학자들이 여덟 번째로
그런 짐승이 태어난다면, 이는 분명 메시아의 강림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결론 지었대."
"그러니 이스라엘의 율법학자들은 이 현대적인 소마저도 불태워 버렸겠군요."
테오가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논쟁이 많았을 테지. 나도 그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는 몰라. 하지만 현재의
이스라엘은 예전과 상당히 많이 다르지. 성경 속의 유대인들은 사냥꾼들이 아니라 가축을 기르는
목축업자들이야. 그런데 암소란 농가에 있어서 아주 소중한 존재잖아. 자기가 가진 소중한 물건
아닌 다른 무엇을 하느님께 바칠 수 있겠니?
대답 좀 해보렴. 아들을 바치던 시대는 지나갔으니, 송아지를 많이 낳아 줄 수 있는 이 종자의
소를 바치는 거지. 그래서 요즈음에도 전 세계적으로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꾸준히
지속되는 거야. 네팔에서는 힌두교도들이 물소의 목을 베어서 바치고, 캘커타에서는 칼리 신에게
목을 자른 염소를 바친단다. 원칙적으로 인도에서는 50년대부터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금하고 있지."
"그렇듯 최근에 와서야 그러한 법이 정해졌나요?"
테오가 놀랍다는 듯이 재차 확인했다.
"그래. 하지만 요즈음에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려는 움직임이 다시 일고 있단다. 너, 조금 전에
아직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느냐고 물었지? '그렇다'가 내 대답이야. 이따금씩 인도의 매스컴에는
소름끼치는 일단의 기사들이 소개되곤 한단다. 이를테면 아들을 갖기 위해 사제에게 딸을 목
졸라 죽요 달라고 부탁한 부부라든가..."
"요새도 그런 일이 있단 말씀이세요?"
테오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 사람들은 감옥에 보내 버리면 되잖아요."
"물론 그렇게 하지. 게다가 이런 사건은 인도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냐. 미국의 사교집단들도
60년대까지는 이와 비슷한 행태를 보였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게 절대로 아닌 것 같아."
"그래도 요즘에는 식인종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죠."
테오가 한숨을 쉬었다.
"넌 그렇게 생각하니? 브라질의 어떤 종족들은 적군의 몸을 먹음으로써 이들이 가지고 있던
장점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대. 그러나 어쩌겠니? 패배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죽기는 마찬가지 아니겠어? 죽어서 남의 뱃속으로 들어가나, 땅 속에
묻혀서 밥이 되나 다를 게 없잖아. 안 그러니?"
"맙소사."
테오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인간 제물에 반대하는 종료로는 유대교와 이슬람교밖에 없겠군요. 이 사람들은
딱부러지게 거절 의사를 밝혔으니까요. 그런데 예수의 경우는 분명치가 않네요. 아버지 하느님은
이 세상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그 아들 예수를 죽도록 내버려두셨으니까요."
"참 희한하기도 하다."
고모가 지적했다.
"테어 너, 프로이트의 책은 읽어 보지 않았어?"
"모세를 이집트인이라고 했다는 그 남자 말씀인가요?"
그렇다 문제의 '그 남자'는 인간 제물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했으며, 그 자신이 직접 우화를
쓰기도 했다. 태초에 원시 부족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은 강력한 권력을 가진 우두머리의
지배를 받았다. 이 우두머리는 자기의 절대적인 권력을 믿고, 여자란 여자는 모조리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질투심에 불탄 부하들이 그 우두머리를 살해한 뒤, 시체를 모두
먹어치워 버렸다. 그러나 곧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어, 마침내는 살해당한 우두머리를 숭배하는
의식을 마련했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우두머리를 지칭하게 되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하면, 신의 기원은 이같은 최초의 희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로군요."
테오가 그 나름대로의 소감을 말했다.
그렇게 말하기는 시기상조다. 그후 인류는 진화를 거듭했다. 우선 유대인들은 보이지 않고,
절대로 패배하지 않으며, 따라서 잡아먹을 수도 없는 아버지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인간의 희생의 금지했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은 번번이 그 아버지의 계명을 어겼다. 이 점에
대해서는 프로이트는 나름대로 이렇게 해명한다. 즉 보이지도 않는 아버지의 율법을 준수하는
일이 너무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애초에 저지른 아버지 살해행위도 모순되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은 이집트 노예 시절 때의 기억을 되살려 금송아지에 다시 매달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금송아지라면 하토르 여신이겠군요."
테오는 미래의 이집트 학자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보이지 않는 신보다는 먹을 수 있는 동물을 숭배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훨씬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신이 보낸 전령을 완전히 무시하는 경솔한 짓이었다. 하느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아 시나이 산을 내려온 모세는 회한과 피에 대한 갈증, 다시금 많은 신을 모시고 싶어하는
욕망이 들끓고 있는 히브리 민족 내부의 용광로에 강제로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영원하신
존재가 내리는 벌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모세는 불충한 3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칼날을
들이댔으며, 3천 명은 흑사병에 걸려 죽고, 또 다른 3천 명은 문둥병에 걸렸다. 이를 지켜본
히브리 민족은 다시는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정식으로 출범할 무렵, 인류의 역사에는 또다시 인간 희생이라는 명제가
부각되었다. 이번에는 원시 부족의 우두머리가 아닌, 그 아들을 희생시킨다는 점이 달랐다.
우두머리 격인 하느님이 자기의 자식을 희생시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편이
아버지를 희생시키는 것보다는 덜 죄스럽다고 여겼기 때문에, 새로이 생겨난 그리스도교는 놀랄
만한 성고을 거두었다.
"아니, 덜 죄스럽다니오?"
테오가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의 생각에는 원초저인 아버지 살해를 언제까지나 억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억압이라면 경찰들이 자주 쓰는 말 같은데요."
"비슷한 말이야. 여기서 억압이란 거부한다거나 억제, 또는 잊어버린다는 뜻을 모두 포함하지.
그렇지만 잊어버렸다고 생각되는 사건도 언젠가는 반드시 기억의 표면으로 떠올라 심한 타격을
주게 마련이야. 평소엔 전혀 그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모르고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해묵은
비밀이 폭발하듯 분출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심한 병이 될 수도 있고, 그 때문에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지. 실제로도 이런 사례는 많이 있어. 경찰들이 시위군중을 힘으로
억누르려고 하면 대번에 상황이 험악해지는 거나 마찬가지야. 안 그러니?"
"잘 알겠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신을 살해했다는 죄책감을 억누르고 살았다는 말씀이죠?
그러면 그리스도교도들은요?"
"유대인들보다는 훨씬 덜했지. 독생자의 희생과 더불어 애초의 죄책감이 상당히 탕감되었다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아직도 아기들을 산 채로 여러 명 더 희생시키면 완전히 탕감된다는 말씀이세요?"
테오는 분개했다.
"프로이트 그 사람, 이제 보니 인간 희생의 길을 활짝 열어 준 사람이로군요."
그게 아니었다. 그리스도교의 지대한 공헌은 살을 빵으로 피를 포도주로 대체시켰다는
점이었다. 인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던 암흑시대를 거쳐
수세기 동안 계속해서 말을 제물로 바치다가, 마침내 인간 모습을 한 작은 조각품을 제단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그 나머지 제물은 꽃이나 과일, 꿀 또는 우유로 충당되었다. 결국
그럴듯한 대체물을 찾아내는 것이 문제였다.
"전 그런 것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유대교나 이슬람교처럼 말이에요."
테오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교나 이슬람교가 너그러운 관용의 종교는 아니지."
마르트 고모가 지적했다.
"어쩌면 그 두 가지가 서로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니?"
마침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기 때문에, 이 물음은 미결인 채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천국으로 가는 길
방콕에서 자카르타까지 가는 동안, 테오는 내내 열심히 기록하고 그림을 그려 넣었다. 밧줄과
땋은 머리가 기록의 주제였다. 테오는 그 수첩에 터번 속에 긴 머리채를 말아 올린 시크교도를
그려 넣었다. 뒤통수에 밧줄을 매단 티베트 왕도 그리고,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브라만도 그렸다. 마지막으로 머리가 제멋대로 헝클어진 삼손을 그리고, 그 옆에 쩍 벌려진
가위를 덧붙였다.
"천국과 지옥도 그리렴."
마르트 고모가 참견을 했다.
테오는 순순히 하늘에 떠가는 둥글둥글한 뭉게구름과 지옥의 불길을 그려 넣었다.
"테오, 네가 택한 나무 형식은 꽤 괜찮은 생각 같구나."
마르트 고모가 제법 진지하게 테오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평하였다.
"모든 종교는 예외 없이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려고 하지. 그 연결고리가 머리카락이건
밧줄이건 사다리건, 그건 중요하지가 않아. 신화에 보면 항상 나무에서부터 하늘로 통한 계단을
올라가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와 더불어 하늘로 통하는 길을 끊어 버리는 아둔한 인물도 반드시
있게 마련이지."
"그러고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도 나무로군요."
테오가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지적했다.
"물론이지. 이슬람 사원의 미나레트(기도 시간을 알려 주는 탑)도 하늘을 향하고 있어. 아마
신과의 접촉을 용이하게 하려는 바람의 한 표현일 거야."
"제 생각에도 그래요. 그렇다면 지옥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요?"
"사람들에게 겁을 주지 않으면 모두들 제멋대로 행동하거던. 부처는 중도와 해탈의 기쁨만을
설파하였지만, 티베트의 사찰 벽화에는 여신들과 환상이라는 이름의 악마들이 싸움을 벌이는
광경이 그려져 있었지. 이처럼 끔찍한 채벌, 또 유대인들이 말하는 어두운 암흑의 구렁텅이
'셰올', 아니면 끝없이 회생을 반복해야 하는 힌두교도들의 불행, 이런 모든 것들이 같은
발상이라고 볼 수 있을 거야. 인간들은 벌을 받기를 원한다고도 할 수 있어."
"원한다면야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다행스럽게 벌 말고 다른 것도 있지요."
"그래? 그게 뭔데?"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저도 몰라요."
테오가 조용히 물었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들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예를 들면 만남의 순간 같은 거...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런 확신이 들어요."
"만남이라면, 신과의 만남을 뜻하는 거니?"
"오히려 신을 믿는 사람들과의 만남이겠죠."
테오가 대답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마르트 고모는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테오를 병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이러한
만남에 대해 함부로 놀려대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중국
생각에 잠긴 테오는 수첩을 넘겨 십자가 모양의 나무를 그렸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태양을
향해 두 팔을 벌린 곱슬머리 어린아이를 그려 넣었다.
"중국인들은 어때요?"
테오는 수첩을 덮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아주 다르지."
마르트 고모의 대답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절대적인 질서를 원칙으로 삼고 있단다. 네가 그 질서와 일치하는 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 그렇지만 일단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면 아무 것도 되는 게 없단다."
"그렇다면 힌두교와 비슷하겠네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해. 나름대로의 우주관을 포함하지 않은 종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다시 말해서 모든 종교는 천지창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단다. 유대교와
그리스 도교의 천지창조설은 너도 잘 알고 있겠지?"
"하느님이 에덴 동산을 만드셨다는 이야기 말인가요?"
"넌 정말 무식하구나."
마르트 고모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 들어. 태초에는 온통 흑암뿐이었지. 지상에 생물이라고는 없었으며, 하느님의 성령만이
수면 위를 굽어보고 있었어. 그러다가 하느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있었고,
이렇게 해서 '낮'과 '밤'이 생겨났지. 그 다음에는 하늘과 바다를 갈라 '물'이라고 이름을
붙이셨어. 땅이 생겨난 거야. 그리고는 식물과 별자리, 짐승들을 차례차례 이름 붙이시고 나서,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셨어. 만들어 낸 인간이 잠을 자는 사이, 그 신선한 육체로부터 갈비뼈를
하나 꺼내 여자를 만드셨지. 이렇게 하는데 엿새가 걸렸고, 일곱째 날에는 하느님도 휴식을
취하셨단다."
"그건 저도 알아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죠!"
테오가 소리쳤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때 이후 완전히 잠들어 버리셨다고 믿는 종족들을 만나게 될 거야.
하지만 힌두교도들의 경우는 약간 달라. 이들은 알로부터 우주가 태어났다고 믿는단다. 알속에서
조물주가 우주와 유사한 물체들, 즉 집과 인간의 육체 등 우주와 똑같은 구조를 가진 존재를
꺼냈다고들 하지. 중국인들도 비슷한 원리로 세상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을 거야. 세상은 거대한
복합체로서 산과 생물, 색과 방향, 음식물과 계절의 순환, 이 모든 것들이 빈틈없이 유기적으로
짜여져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즉 아무 것도 이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란다."
"그게 무슨 뜻이죠?"
"예를 들어 산이 만드는 곡선은 곱사등에 난 혹의 곡선과 보이지 않는 관계에 의해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식이지."
"산에도 혹이 있기 때문에요?"
그것이 바로 중국인들의 유추 원리였다. 중국인들은 유사성의 총체를 계산으로 풀어내었던
것이다. 즉 물은 북쪽에 위치하고 계절은 겨울이며, 네번째 음계에 숫자 6으로 해석되었다. 불은
남쪽에 위치하고 계절은 여름이며 다섯번째 음계에 숫자 8, 쇠붙이는 서쪽에 위치하고 계절은
가을이며 세번째 음계에 숫자 9...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흙은 중앙에 위치하고 사계절은
주이며, 첫번째 음계에 숫자 10을 배치했다. 이 숫자 10은 1+0=1로 다시 해석될 수 있었다.
"저도 알아요. 엄마가 '엘르'잡지를 보면서 자주 하시는 거예요. 숫자점이라고 하지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떠난 숫자점은 단순화된 점성술에 불과할
뿐이다. 이 거대한 천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깊이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중국
철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잘 짜여진 하나의 통합체를 이룬다. 절기가 바뀌는 것처럼 순환하는
시간은 원을 이루며, 이와 대조적으로 공간은 시간으로 표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 전체가
모두 사각으로 분리될 수 있었다. 집의 벽, 도시의 성벽, 논과 밭, 신자들의 집회소 등 모든 것이
사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사각은 중국 제국 전체, 다시 말해서 온 세상을 상징한다. 한편
시간은 농사 절기에 맞추어 조정되었다. 씨를 뿌리고 김을 매는 바쁜 농번기에 이어, 수확하고
이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잔치의 계절이 뒤따른다. 또한 해마다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모여
'만년! 만년!'을 외쳐대는 집회를 가졌다. 이집트인들이 인간이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믿었듯이, 중국인들도 봄에 집회를 갖지 않으면 시간이 정지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 대원칙이 시간의 두 주기를 좌우했다. 음은 습하고
어두운 달 그리고 여성적인 성격을 지배하는 원리였으며, 반대로 건조하고 환한 태양과 남성적인
성격은 양이 지배하에 놓였다
"전에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아요."
테오는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맞아요, 가네샤와 관계되는 이야기였어요. 불의 아버지 스칸다와 무의 어머니 가네샤..."
"그래, 바로 그거야."
마르트 고모가 칭찬했다.
"그 두 가지는 상호보완적이지. 이제 너도 알게 될 거야."
건조하고 습한 계절이 교대로 찾아오는 것도 이 두 가지 원칙에 의해서였다. 빛을 가득 머금은
양은 음의 어둠에 매료되어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가, 발뒤꿈치로 땅을 세차게 걷어차며 지상으로
다시 올라와 얼음을 깨고 잠들었던 샘물을 깨운다. 이처럼 양과 음은 완벽하게 결합하여 삶의
전체를 생성한다. 이 음양 원리는 아주 멋진 그림으로도 표현된다면서, 마르트 고모는 수첩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쁜 모양이네요."
테오도 인정했다.
"여기이 두 점은 뭘 나타내죠?"
서로 상대편 원리의 꼬리를 문 문양 속에 들어 있는 두 점은, 각각 남성적인 원리 양 속에
내포된 여성적 음의 원리, 또한 여성적인 원리 속에 내포된 남성적인 양의 원리를 상징한다.
"인도에서 들었던 얘기가 계속되는 거로군요!"
테오가 소리쳤다.
"정말 저한테도 여성적인 면이 있다는 말씀이세요?"
마르트 고모는 최근에 유전학자들이 모든 인간들에게 반대되는 성의 유전자를 발견했음을
상기시키면서, 이 발견으로 말미암아 아시아권 종교들의 직관이 옳았음을 재확인하였다고
지적했다.
"정말 그래요?"
테오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엘리제르 랍비도 베일을 쓴 여인에 대해 이야기했었어요. 하느님의 여성적인
면이라구요."
그렇지만 랍비의 이 말은 성서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었다. 베일을 쓴 여인, 즉 셰키나는
타향살이중인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첨가한 일화였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이 공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테오가 반문했다.
사실 그랬다. 공자는 단순히 현자에 불과할 뿐, 중국 종교 사상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종교를 지칭하는 이름은 도교이며, 이는 질서 또는 길을 의미한다.
도교
음양의 원리를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도교였다. '음의 원리와 양의 원리, 이것이 도교이다.'라고
경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도교는 이 두 원리의 공존과 완벽한 조화를 뜻한다.
도교는 아무 것도 창조하지 않으므로 창조신을 섬기는 종교는 아니다. 도교는 질서를 부여한다.
도교, 즉 세계의 질서를 믿는 도가자류들은 시간과 공간을 유일한 관심사로 여긴다. 예를 들어
7천여 개의 계단을 한 단 두 단 올라가는 행위도, 시간을 들여 무한의 공간에 도달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몇몇 신실한 도가자류들은, 군중들과 한데 어울리는 순례보다
동굴이나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고독 속에 잠기는 것을 선호한다.
"명상을 하는 거로군요."
테오가 결론짓듯이 말했다.
"그런 거라면 그다지 특별한 것도 없잖아요."
"하지만 그들이 명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하는 건 아냐."
마르트 고모가 이의를 제기했다.
"해석까지 하는 거지."
음양의 전조를 보다 정확하게 읽기 위해서 도교 철학자들은 복잡한 계산과 수학체계를
발명했다. 이 체계는 물리, 화학의 과학적인 토대를 이룰 뿐만 아니라, 경탄할 만한 의학체계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한 가지 우스꽝스러운 괴벽이 있었다. 유럽의 연금술사들이
죽을 때까지 영원의 원천인 화금석을 찾느라 연연해하듯이, 도가자류들은 무슨 수를 서서라도
다시금 젊어질 수 있는 철학적 깨우침을 얻기 위해 고심했다. 이들이 말하는 장수의 비결은 아주
독특하다. 우선 세 마리의 벌레로 표현되는 악마로부터 원기를 몸에 난 구멍을 통해 밖으로
빼돌린다. 그리고 난 후에는 이슬을 마시고, 우주의 기운을 호흡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달과
태양과 별의 기운을 몸 안에 받아 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외에 흔히 방사라고들 일컫는
성행위의 체위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다. 사정 시기를 최대한 늦춤으로써 정자가 머리까지
올라가서, 그 머리를 맑게 해줄 수 있도록 성행위를 해야 한다고 한다.
"뭐라구요?"
테오는 몹시 놀랐다.
"그 이야긴 언젠가 이미 들었는걸요."
도가자류들은 이러한 비법에다가 영원불멸을 보장해 주는 광물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양의 성질을 띤 금과 옥은 부패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며, 피처럼 붉은 빛깔의 진사는
재생을 도와준다고 한다.
"진사라니, 그게 뭐죠?"
테오가 물었다.
"광물이지. 주사라고도 하고, 황화수은이라고도 해."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테오 너, 수은은 본 적 있니?"
"네. 언젠가 제가 오래 된 온도계를 깨뜨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수은이 얼룩말 무늬처럼
흘러내렸어요. 엄마가 그게 은색이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아마 굉장히 흥미진진했을 거야. 그렇기 때문에 도가자류들이 진사에 관심을 갖는 거야.
진사로부터 수은이 얻어지거든. 중국의 어떤 유명한 연금술사가, 진사로 만든 환약 열 개와 꿀을
1년 동안 먹으라는 처방을 내렸대. 그렇게 하면 머리털이 다시 까매지고, 빠졌던 치아도 새로이
난다고 했다는 구나."
"중국인들은 정신이 나갔나 봐요!"
테오가 소리쳤다.
"바다에 버려진 쓰레기에서 나온 수은 중독으로 얼마나 많은 일본인들이 죽어갔는데, 그런
소릴 하면 어떻게 해요."
"아주 소량만 섭취할 경우엔 수은도 약이 될 수 있겠지. 특히 유황과 함께 산화된 질 좋은
진사는 인체에 중독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구나. 생선, 닭고기, 심지어 산딸기에도 아주 소량의
수은이 포함되어 있단다."
"아닌게아니라 산딸기도 빨간색이지요."
테오도 시인했다.
"그런데 진사는 단순한 핏빛 광물이 아니란다. 세계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뇌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으며, 이 부분은 서해 바다에 솟아 있다는 전설적인 영산과
연결되어 있지. 도가자류들은 따라서 우리 뇌의 이 부분에 정자를 도달케 함으로써 진사의
효과를 촉진시킬 수 있다고 믿는단다. 그렇게 될 경우, 마치 천지창조 이전의 평화스러우면서
행복에 찬 혼돈과 유사한 상태에 돌입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야."
"근사하긴 하지만 꽤 복잡한 이야기로군요."
테오가 논평했다.
"이렇게 마술적인 비법 때문에 도교 의식이 때로는 집단 혼음으로 번지기도 했지."
"집단 혼음이라구요? 그건 말도 안 돼요."
테오는 되는대로 말했다.
못생긴 현자와 은거한 현자
"그렇게 하다 보니 문란해진 게 사실이야."
마르트 고모가 말했다.
기원전 6세기, 공자가 나타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공자는 절대로 불멸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마술과 몽매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다. '신비를 캐내고 기적을 행하며, 후대에 비법을 전수한
자로 기억되기를 원하는 행동은 추호도 하고 싶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공자가 원한 것은 무엇일까? 질서를 준수하는 것이야말로 공장의 가르침의
근간이었다. 그는 늘 우주의 법칙에 준하여 규범을 제정하였으며, 군주에 의해 수호되는 사회의
규범을 준수하라고 가르쳤다. 세계의 질서를 나타내는 전조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찰이
필요하였으며, 공자는 그 뛰어난 관찰가였다. 그는 화석에 정통하였으며,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짐승의 이름까지도 샅샅이 알고 있었지만 절대로 '나는 안다'고 말하지 않고 '사람들이 내게
가르쳐 주었다.'고 말하곤 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가 스스로 창조해 낸 것이라곤 없었다. 다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할 뿐이었다. 공자는 사람들에게 오로지
인간다운 질서만을 요구했을 따름이었다. 이는 즉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성실성과 어짊,
능률을 겸비함을 의미한다. '군자는 자기 자신을 가꾸며, 이와 아울러 다른 사람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고 공자는 말했다.
"그게 전부란 말예요?"
테오가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공자의 제자들도 테오와 똑같은 질문을 그 스승에게 던졌다. 그러자 공자는 '군자는
자기자신을 가꾸며, 타인에게 평안함을 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는지 곧 '군자는 자기 자신을 가꾸며, 모든 사람에게 평안함을 주어야 한다'고 고쳐 말했다.
사물의 질서를 존중하면 사회 전체가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공자의 이러한 입장은, 도교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 노자의 사상과는 전혀 달랐다. 정통 도가자류인 노자는, 불멸의 문제와 고독한
명상에 큰 관심을 보였다.
"별로 못 들어 본 사람인데요."
테오가 말했다.
중국 최고의 경전인 '도덕경'의 저자로 알려진 노자의 성은 이, 이름은 이였지만, 흔히들 그
자를 따서 담이라고 일컬었다.
"그렇다면 이름이 세 개나 되네요."
테오가 지적했다.
그렇기는 하나, 흔히 노자라는 이름으로 신격화되었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노자도 주공이
세력을 잡은 후, 주나라의 장서 관리인을 지냈다.
"주공은 또 누구예요?"
테오가 물었다.
주공은 후일 위대한 왕이 된 인물이었다. 포악한 독재자들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을
세운 사람이 바로 그였다. 노자는 주공의 곁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떠나 유명한 저서를 구술했다.
그는 장수의 비결을 누구보다도 잘 터득하고 있었으므로 2백년을 살고 나서, 허물을 벗는
매미처럼 시체를 내팽개쳐 버리고 홀연히 세상을 떠나갔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매미 또한
성스러운 곤충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 그래서 프로방스 지방에서 내가 매미를 한 마리도 못 잡았구나!"
테오는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매미를 그렇게 애지중지하다니, 프로방스 지방 사람들도 약간 중국화된
모양이로구나."
마르트 고모가 테오의 농담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제 내 얘기 계속해도 되겠지?"
두 사람이 지도자, 즉 명상가 노자와 행동파 공자를 화해시키기 위해 중국인들은 한 가지
전설을 꾸며냈다. 노자가 아직 생존해 있을 당시, 공자는 두 차례 노자를 방문했다.
처음 방문했을 때, 노자는 매우 불쾌한 태도로 공자를 맞이했다. '우선 그대의 자만심을
버리게. 모든 욕망과 자신만만한 태도, 그대의 모든 행동에 깃들여 있는 열성적인 자세를
제거하게. 이는 그대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성품이기 때문이네. 그대에게 해줄 말은
그뿐일세.' 말문이 막힌 공자는 제자들에게로 돌아와 자기는 이 세상의 동물 이름을 다 아는
줄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노자라는 용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노라고 전했다. 노자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까지 올라간 용이라고 공자는 덧붙였다.
두번째 방문 때, 공자는 노자가 마치 시체처럼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공자가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 노자가 눈을 떴다. '제가 잘못 보았는지 모르겠으나,
선생께서는 조금 전까지 마른 나뭇조각 같았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 닿을 수 없는 고독 속에
자리잡으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고 공자가 말했다. 이에 노자가 '그랬지. 난 모든 사물의
근원지에 노닐러 갔었다네'라고 대답하였다.
"배짱도 좋으시군요. 사물의 근원지에서 노닐다니오!"
테오가 소리쳤다.
"제가 보기엔 꽤나 잘난 척하는 사람 같아요. 고모는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좋으세요?"
마르트 고모는 잠시 망설였다. 공자는 아무래도 고모의 생각에서 보자면 지나치게 규율을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명상가 노자도 위대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황홀경으로 입문을 강조하는
그이 사상으로 말미암아 인간 세계의 관리가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었다. 도가자류들은 노자에
대해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사실상 이 모든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공자가 실존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한데 비해서, '은군자'라고 불리는 노자의 실존 여부는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 중에서 누군가를 골라야 한다면, 마르트 고모는 공자를 택한다는 입장이었다.
"어쨌든 그는 인본주의자니까."
마르트 고모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위대한 현자였어."
"또한 못생긴 현자였죠."
테오가 덧붙였다.
"그 점을 제외하면 부처와 공통점이 많은 것 같아요."
천만의 말씀이었다. 부처는 계급의 고하를 떠나 모든 중생에게 중도를 열어 주셨다. 그러나
공자는 뛰어난 선비로서 불의와 불평등, 부당한 형벌 등이 난무하는 현실 세계에서 선비로서
누릴 수 있는 권한만큼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런데 살아 있는 동안의 행동 지침을 말하면서, 왜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테오가 짖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얘기했지."
마르트 고모는 아무런 경계심이 없이 대답했다.
그것 보세요. 그러니까 비슷하다고 할 수 있잖아요."
테오가 단정지었다.
"두 사람이 모두 가운데로 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거라구요."
"그렇지만 공자에게는 계시가 필요없다니까!"
마르트 고모는 마침내 역정을 냈다.
"그렇게 화내실 것까진 없어요. 전 부처에게 유감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수수께끼 같은 인물
자카르타 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항 같아 보였다. 분홍빛 기와로 장식된 전통
건물과 그 건물을 에워싼 정원으로 이루어진 공항은 공항이라기보다 방문객들을 위해 영문자로
EXIT, LUGGAGE, SECURITY, CHECK 등의 화살표를 달아 놓은 일련의 사찰 같았다. 테오는
이번에는 또 어떤 괴짜 인물이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자못 궁금했다.
"남자예요, 여자예요?"
테오가 물었다.
"남자, 중국인이야. 그러니까 정각에 나와 있을 거야."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아닌게아니라 고모의 예상대로 그는 정확하게 시간에 맞춰 나왔다. 나이는 40대, 작지만
다부진 몸매에 정장을 차려입은 수하르토 씨는 악수하기 위해 내민 마르트 고모의 손을 힘껏
잡아 흔들었다.
"테오를 소개할게요."
마르트 고모는 테오를 앞으로 떠다밀며 말했다.
"저어 선생님, 성 말고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테오가 물었다.
"인도네시아에는 이름이란 것이 없단다."
멋진 신사가 대답했다.
"그러니 날 그냥 수하르토라고 부르렴. 오랫동안 비행기를 타고 몹시 고단하겠구나. 내 차가
저기 있으니 어서 가자.
보로부두르 컨티넨탈 호텔에 수이트를 잡아두었어요, 마르트. 방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보로부두르 호텔까지는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끔찍한 교통체증에다가 대기오염 또한
심각했다. 테오는 굳게 닫힌 차창 밖으로 가로수를 심어 놓은 반듯반듯한 대로와, 고층 건물과
자동차들이 앞다투어 진행하고 있는 원형 로터리를 바라보았다. 멀찌감치 거대한 둥근 돔이
보였다.
"저기 사원이 있어요!"
테오가 소리쳤다.
"중국 사원인가요?"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교가 가장 비중 있는 종교란다."
수하르토 씨가 설명을 시작했다.
"저기 보이는 건 잇키탈 이슬람 대사원이란다. 저 사원 하나에만도 1만 2천 명의 신자가
들어갈 수 있지. 물론 여자, 남자 따로 따로 말이지."
"1만 2천 명이라구요? 그럼 세계에서 제일 큰 이슬람 사원이겠군요."
"아마 그럴 거야. 요사이 이슬람교에서는 사원 건축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단다."
"그럼 선생님은 이슬람교 신자가 아니세요?"
"이 나라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니까."
수하르토 씨는 우회적으로 대답했다.
"테오 네가 자꾸만 질문을 해대서 수하르토 씨가 귀찮아하실까 봐 걱정이로구나."
마르트 고모가 끼어들었다.
"왜요?"
테오가 뜻밖이라는 듯 반문했다.
"글쎄 이렇다니까. 제발 질문 좀 그만 해두렴."
고모가 단호하게 못박았다.
이유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지만, 테오는 어렴풋이 자기가 실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일행은 호텔에 도착했다. 야자수와 바나나나무,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 협죽도류로 둘러싸인
웅장한 건물이었다. 키르타마니 정원은 우거진 재스민 관목림과 키 큰 종려나무로 알려져
있었다. 하늘을 향해 잎을 벌린 종려나무는 적어도 그 높이가 3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런데 아까 제가 뭘 잘못했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테오는 걱정이 되어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수하르토 씨에게 물었다.
"너야 물론 알 수가 없을 거야, 테오. 인도네시아에 사는 모든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수하르토 씨도 이름을 바꾸었어. 원래 이름은 쿤타이콴이지. 이곳에 사는 중국인들은 몹시
조심스럽단다."
마르트 고모가 대신 대답했다.
"네, 그랬군요."
테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설마 심한 박해를 받는 건 아니겠죠?"
"아니야, 그럴 때도 있었어. 196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세력이 커지자, 당시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마오쩌둥과 공모해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단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군대가 공산당을 모두 체포했지. 그 일로 1백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어. 이들
중에는 인도네시아에 살던 중국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지."
"그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들이었나요?"
테오가 물었다.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 오래 전부터 상업에 종사해 왔지만 다
소용이 없었다. 단지 중국 혈통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배신자라는 의심을 받아 대량으로
학살당한 것이다. 이같은 의심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서, 말 한 마디 잘못 하면 중국인들의
가게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중국인들이 지나치게 부지런한데다 일을 많이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부자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여유돈으로 사채놀이를 하는 것도 미음을 사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이런 일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겠지."
마르트 고모가 결론처럼 말했다.
"수하르토 씨는 섬유와 목재 분야의 다국적 기업을 소유하나 대기업가란다. 그렇지만 만일을
대비해 공항에 자가용 비행기를 항상 대기시켜 놓고 계셔."
"만일을 대비한다면?"
"긴급한 탈출해야할 사태가 발생하면, 즉시 떠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지."
"그게 모두 종교 때문인가요?"
"어느 정도는."
마르트 고모가 나직이 말했다.
"이곳에서는 이슬람교도로 사는 게 속 편할 거야."
17 조상과 불로장생
뱀피를 섞은 칵테일
그건 절대로 안돼! 자카르타에 도착하자마자 테오는 병원으로 향하여야 했다.
"다르질링의 의사선생님이 절 치료해 주셨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테오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항의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지난 한 달간 테오는 한번도 혈액 검사를 받지 않았다.
마르트 고모는 혈액 검사만은 정기적으로 받는다는 조건하에 롭상 도르제 의사의 처방을
따르기로 맹세했음을 상기시켰다. 테오는 하는 수 없이 고모가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탈지면, 주사바늘, 이름표가 붙은 조그만 비닐 튜브에 채워지는 검붉은 피... 수하르토 씨는
채취한 혈액을 싱가포르의 한 전문병원으로 보내는 일을 자청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우수한
설비를 갖춘 병원이기 때문이었다. 며칠만 기다리면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어휴, 정말이지 지겨워서 못 살겠군."
테오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걱정 마라. 테오."
마르트 고모는 어느 정도 안심이 되는 듯한 투로 테오에게 속삭였다.
"전 걱정 안해요!"
테오가 소리쳤다.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구요!"
"기분 전환도 할 겸. 제가 사는 동네에 있는 탑 구경이나 가면 어떨까요?"
수하르토 씨가 넌지시 제안했다.
"아 네. 그거 좋은 생각이로군요."
마르트 고모가 대번에 찬성했다.
답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러나 극심한 교통체증 때문에 중국인 구역까지 가는 데
거의 한 시간 가량이나 소요되었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빨간색 삼륜차와 보라색 난을 파는
상인, 고기파이 장수, 이름 모를 음식을 만드는 커다란 냄비 등으로 몹시 혼잡했다. 이쪽저쪽
신기한 듯 둘러보던 테오는 갑자기 온몸을 떨었다. 어느 가게의 진열장 앞에서 한 남자가 뱀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껍질이 벗겨진 그 징그러운 짐승은 사방으로 몸을 버둥대고 있었다.
"고모도 봤어요?"
잔뜩 겁을 집어먹은 테오가 고모에게 속삭였다.
"뭐 말이니? 아, 뱀! 조리사가 곧 뱀의 목을 자른 다음, 거기서 나오는 피를 유리잔에 받을
거야, 뱀피에 코냑을 섞은 다음 단숨에 마셔 버리지. 원기회복제로는 아주 직효라더구나. 너도 한
번 마셔 볼래?"
"싫어요! 난 절대로 안 마셔요."
테오는 갑자기 딸꾹질까지 해댔다.
"그렇다면 소스 친 호랑이 불알이나 구운 곰 발바닥 요리가 낫겠니?"
고모는 장난스럽게 테오를 눌려댔다.
"전 그냥 스파게티나 먹겠어요!"
테오는 고래고래 소리쳤다.
"토마토 소스를 듬뿍 친 스파게티 말예요!"
"테오, 너 혹시 국수 먹고 싶어?"
수하르토 씨가 끼어들었다.
"그까짓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수하르토 씨는 한 음식점에서 국수를 한 그릇 주문했다. 노르스름하면서 독특한 향기가 나는
국수를 테오는 전혀 거리낌 없이 단숨에 거뜬히 먹어치웠다. 그리고 나서 일행은 널찍한
광장에서 있는 탑의 입구로 향했다. 노란색과 흰색으로 장식된 높다란 입구에는 중국식으로 굽은
지붕이 얹혀져 있었다.
탑 안에서 점쳐 본 미래
탑의 내부는 벽과 거대한 양초, 그리고 불 켜진 초들을 받쳐 놓은 촛대 할 것 없이 온통 핏빛
같은 붉은색이었다. 안쪽에는 괴상하게 생긴 금색 조각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향을 피우는
모래가 담긴 향로 앞에, 웬 여자가 가느다랗게 자른 대나무 조각이 잔뜩 들어 있는 긴 통을 들고
서 있었다. 여자는 통을 들어 향불 위에서 한 차례 돌린 다음, 그 통을 약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더니 곧 통을 흔들어 그 안에 들어 있던 대나무 조각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여자는
얼른 그 대나무 조각을 집어서 끝의 거무스름한 부분에 씌어진 글귀를 읽었다.
"무슨 놀이예요?"
테오가 물었다.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쳐 주세요, 수하르토 선생님."
"저 여자가 놀이를 하는 중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
수하르토 씨는 설명을 시작했다.
"아마 저 여자는 점을 쳐보려고 왔을 거야. 아들녀석이 승진을 하게 될는지. 아니면 중병에
걸리게 될는지.... 하여간 저 여자는 앞날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아보고 싶어서 왔을 거야."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앞날에 일어날 일들이 저 대나무 조각에 씌어 있다는
말씀이세요?"
테오가 조그맣게 물었다.
"중국인들은 점치는 방법을 아주 다양하게 고안해 냈지. 가장 잘 알려진 방법이 아마 저
여자가 하던 방법일 거야. 자, 내가 먼저 해볼게. 이 용기를 이렇게 잡은 다음 방향을 잘
맞추어야 해. 그 다음에는 악귀들을 몰아내기 위해 향불 위에서 한 차례 돌린단다. 그리고 난
다음에 흔드는 거지. 이것 봐. 저 혼자서 점괘가 나오지 않니?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야. 이렇게
해서 점괘가 나오면 나오는 대로 읽기만 하면 된단다. 그러면 내가 알고 싶었던 문제에 대한
답을 얻게 되는 거야."
수하르토 씨는 바닥에서 주운 점괘를 읽기 위해 옆으로 몇 발짝 옮겼다. 그의 얼굴이 이내
환해졌다.
"운수대통이군."
수하르토 씨가 나직이 말했다.
"아주 좋은 말씀이 씌어 있었단다."
"선생님은 그 말을 정말로 믿으시나 보죠?"
테오가 물었다.
"그야 물론이지. 조상들도 모두 그렇게 해왔는데, 나라고 왜 믿지 않겠니?"
수하르토 씨가 오히려 반문을 했다.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이렇게 해왔단다."
"테오 너도 한 번 해볼래?"
마르트 고모가 테오를 부추겼다.
"하긴 전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으니까요.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지요."
이윽고 테오가 통을 잡고 세차게 흔들어댔다. 대나무 조각이 떨어졌다. 테오가 얼른 그것을
주워 들고 있어 보려 하였으나, 중국어로 씌어 있었기 때문에 수하르토 씨의 통역이 필요했다.
"연마하는 시기, 진정하는 시기."
수하르토 씨가 읽어 준 내용이었다.
"전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테오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
"그런데 혹시 아까 향불 위에서 통을 돌리는 걸 잊어버리지는 않았겠지?"
수하르토 씨가 넌지시 물었다.
"네, 맞아요. 다시 해야겠어요."
테오가 대답했다.
마르트 고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테오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방향을 정한 다음, 향불
위에서 통을 돌리는 절차를 명심한다...
"이번엔 천천히 해야지."
두 번째 대나무 조각이 떨어졌다. 수하르토 씨가 테오의 손에 쥐어진 대나무 조각을
받아들었다.
"다시 한다는 것은 우리 관습과 상치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젊은 친구의 소원이니 들어
주어야겠조. 잘 들어보십시오. '양기가 부르고 음기가 화답하도다.'"
테오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양은 태양이고 음은 달, 양은 건조하고 음은 습하다. 양은
남자고, 음은 여자다....
"이제 알았어요! 양은 바로 저예요. 제가 파투에게 전화를 하는 거죠. 그 애는 음이구요.
그러니까 제게 대답해 주죠. 다시 말해서 저는 이 다음에 파투와 결혼을 하게 될 거라는 말인
거죠."
테오가 좋아서 껑충껑충 뛰었다.
"너, 너무 성급하게 단정짓는 것 아니니?"
마르트 고모가 테오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게다가 이 말대로 라면 저는 곧 완쾌될 거예요. 아시겠어요, 고모?"
"그렇다면 처음에 나온 점괘는?"
이번에는 수하르토 씨가 물었다.
"그건 너무 쉬워요."
테오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연마하는 시기란 제가 여행하는 기간을 뜻하구요, 진정하는 시기란 이 여행을 마치고 파리에
돌아가는 걸 뜻하지요, 안 그런가요?"
테오의 말에 할 말을 잃은 마르트 고모는 조카를 얼싸안았다.
"이거, 아주 마음에 드는데요. 이런 게 바로 도교라면 저도 이걸 택하겠어요."
테오는 내내 흥분된 상태였다.
주위에 있던 몇몇 여자들이 불쾌한 표정으로 테오 일행을 돌아다보았다. 승려도 눈살을
찌푸렸다. 몇몇 신도들은 테오 주위로 몰려와 노골적으로 눈을 흘겼다. 수하르토 씨가 테오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
"테오, 너의 기쁜 마음을 한껏 발산할 수가 없어서 안됐지만, 이곳은 경건하게 공양을 드리는
곳이야. 그러니..."
무안해진 테오가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나서 곧 뒷짐을 지고 향연으로 가득 찬 탑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저 커다란 양초 말예요..."
테오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 양초는 1년 내내 쓸 수 있는 거란다."
수하르토 씨가 대답했다.
"해가 바뀌면 새것으로 바꾸어 놓지."
"시간을 새로이 창조한다는 뜻인가 봐요."
테오가 대꾸했다.
"저기 저 조각들은요?"
악귀들과 선한 신들
조각들 중의 일부는 선한 신을 닮은 것 같았고, 나머지들은 악마를 닮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공통된 정기가 있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다는
점이었다. 사실상 악마들은 '귀'라고 부르는 귀신들로서, 수하르토 씨가 그 몇몇 이름들을
거론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귀신들이나 회생한 못된 짐승들이 산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는 거란다."
수하르토 씨가 설명했다.
"눈으로 보기엔 아리따운 젊은 아가씨지만, 사실은 구천을 떠다니며 시체를 파헤치는 만년
묵은 여우의 혼이지. 왼쪽 눈썹에 난 보랏빛 털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단다."
"만일 귀신이 화장을 하면 속을 수도 있겠네요."
테오가 대꾸했다.
"또 험상궂게 생긴 노파의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컴컴한 밤중에 어린아이들의 뱃속을 들어가
그 영혼을 갉아먹는 귀신도 있지. 귀신들은 이처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혼을 몹시 좋아한다
더구나."
"재미있는 이야기예요. 그런 이야기가 많은가요?"
테오가 물었다.
무궁무진했다. 무척 호감이 가는 이야기들도 적지 않았다. 늙은 잉어가 상을 당한 젊은 처녀로
둔갑하여 물가에서 슬피 울어댔지만 실은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들어서 유익한 이야기도 있었다. 또한 오래 사용해서 닳아버린 금화 귀신이 빨간 발을
가진 처녀로 변신하여 한 손에 횃불을 들고 가고, 은화 귀신은 총각을 변신하여 길가에서
물고기와 더불어 노닐었다는 한가로운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 이야긴 하나도 무섭지가 않네요."
"선한 신들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악귀들의 욕구를 저지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지."
수하르토 씨가 설명을 계속했다.
"아주 옛날에는, 도교의 현자들이 자기 몸으로부터 하늘이 내려주신 강력한 부대를 나오게
했단다. 노란 천 위에 붉은색으로 부적을 그린 다음, 이를 태워서 그 재를 삼키면 되었지.
그리고는 유명한 '우의 춤'을 추었어."
"잘 알려지지 않은 춤인가요?"
"아니, 아주 널리 알려진 춤이지. 홍수를 막기 위해 우는 온 우주를 돌아다녔어. 그렇지만 댐을
건설하다 보니, 우는 그만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지. 그러니 '우의 춤'이라는 건 한쪽 발로만 추는
춤을 말하는 거란다."
"이렇게요?"
테오가 한쪽 다리로 깡충깡충 뛰면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테오 넌 도교 제관도 아니잖니?"
마르트 고모가 테오를 나무랐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저도 원한다면 귀신을 쫓아낼 권리가 있다구요. 아, 그러고 보니 TV에
나가서 '우의 춤'을 소개하면 멋지겠어요. 람바다 춤처럼 말예요. 인기가 굉장할 것 같은데요."
"넌 정말 경박하기 짝이 없구나."
마르트 고모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또 뭐죠? 아주 예쁜데요."
테오는 부드러운 얼굴을 거대한 새의 날개로 감싼 형태의 조각 곁으로 다가갔다. 여신의
주위에서는 금으로 만들어진 하인들이 촛불을 밝혀 놓고 춤을 추고 있었다.
"이건 절대 귀신이 아닐 거예요. 제가 장담해요."
테오는 조그맣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인지 말해 주세요, 수하르토 선생님."
"깃털 옷을 입은 부인 말이지."
수하르토 씨가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서왕모라고 하지.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여신이야. 어느 날 주나라의 목왕이 이 서왕모를
만났지.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서왕모가 마음에 들었던지, 목왕은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단다."
"아름다워요, 지금 하신 이야기 말예요."
테오가 감격한 듯이 말했다.
"마치 한 편의 시 같아요."
"서왕모는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신이지."
수하르토 씨는 자못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은 옥으로 된 궁궐에 금으로 된 담을 치고 기거하신 단다. 불로장생하는 사람들이 그
안에 살고 있었지. 남자들은 궁궐의 오른쪽, 여자들은 궁궐의 왼쪽에서 각각 살았지. 그러나
오늘날엔 여왕만 홀로 남아 있어. 예전에는 이 여왕에게 동왕공이라고 하는 쌍둥이 남매가 하나
있었지. 똑같은 새가 왼쪽 날개로는 동왕공을, 오른쪽 날개로는 서왕모를 감싸주었어. 그러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은 점차 동왕공을 잊었고, 그래서 여왕만 혼자 남게 된 거란다."
"그럴 수가! 여왕에게서 쌍둥이 남매를 없애다니오! 그럴 수 없어요."
테오가 분개했다.
"아마 동왕공도 신통력을 지녔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서왕모만큼은 확실히 장수의 비결과 기적을 낳는 복숭아의 비결을 알고 있었을 거라고 말할 수
있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국에서는 복숭아가 불로장생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단다."
"저도 복숭아를 굉장히 좋아해요!"
테오가 반갑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러니까 저도 불로장생을..."
"그런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오직 기적을 낳는 복숭아만이 그 신비의 힘을 지녔지.
하지만 서왕모의 복숭아나무는 3천 년 만에 한 번 그 열매가 맺힐 뿐이란다."
실망한 테오는 환한 곳을 향해 달음질쳐 그 붉은 핏빛 탑 내부에서 바깥으로 나왔다.
수하르토 씨 집에서의 점심 식사
항구에는 거대한 푸른 빛깔의 어선들이 뾰족한 주둥이를 부둣가로 향한 채 정박해 있었다.
배가 생겨나기 시작한 때부터, 이곳 항구에는 항상 골치가 아플 정도로 독특한 향을 지닌 귀한
목재들을 내려놓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이곳에는 매우 흥미진진한 역사가 있단다."
수하르토 씨가 설명했다.
"인도네시아에 맨 처음 침입해 온 무리는 베트남인들이나 중국인들로서, 이들은
몬순(계절풍)을 타고 자바 섬까지 몰려왔단다.. 이 침략자들은 당연히 각자 자기네들의 종교를
전파했지. 이렇게 해서 도교와 유고, 불교가 이곳까지 흘러든 거란다. 그리하여 훗날 몰루카
제도에 정향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지."
"꽃무가 열리는 나무 말씀이세요?"
테오가 물었다.
"아니지."
마르트 고모가 수하르토 씨 대신 대답했다.
"정향나무에서는 정향 열매를 얻을 수 있지. 쇠고기 야채 스튜를 할 때 넣는 향신료야. 너도
알 텐데... 사과 퓨레에도 넣지."
"알아요. 엄마는 가끔씩 오렌지에 그걸 박아 놓기도 하셨어요. 물기 없이 바짝 마르면 아주
향긋한 냄새가 나죠."
테오의 말대로 향신료 덕분에 우리 인생에도 향취가 더해질 수 있었다. 중세 때부터 이미 서구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아 온 정향은 몰루카 제도로부터 자바 섬으로, 자바 섬에서 인도로, 그리고
인도에서 대상들의 낙타에 실려 아라비아 사막을 거쳐 베네치아에 이르기까지 항해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15세기에 이르러 베네치아 공화국이 정향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들은 인도네시아
제도에 아예 정착해 버린 이슬람 거간들의 막강한 조직망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이같은 독점행위가 가능했다. 그로부터 1백 년 후, 이처럼 눈에 거슬리는 독점체계를 파기하고,
베네치아의 부귀에 종지부를 찍을 뿐 아니라 이슬람교도들과의 교역을 피하려는 목적에서
포르투갈의 정복자들은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다. 아프리카 대륙을 도는 이 항로 덕분에 이들은
희망봉을 발견하였으며, 이들 역시 인도네시아의 군소 제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몬순이 보르네오 섬을 휩쓸자 배들은 오랜 기간 발이 묶이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종교를 퍼뜨릴 시간도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인도네시아에는 같은
섬이라고 할지라도 갖가지 종교가 공존하게 되었다.
"흠흠, 그러고 보니 정말 정향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테오가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흥, 정향은 커녕 제발 콜타르 냄새나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마르트 고모가 이의를 제기했다.
"요즈음에도 정향 때문에 싸움질을 할 것 같지는 않구나."
"콜타르건 정향이건 간에 전 배가 몹시 고파요."
테오가 하소연했다.
"어디에 가서 점심을 먹을 거죠?"
"걱정할 것 없어. 이미 계획이 다 세워져 있으니까."
수하르토 씨가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테오와 마르트 고모를 우리 집으로 초대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단다."
일행은 다시금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골목 안에는 테오의 입맛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증기로 쪄내는 만두, 잘게 썬 레몬 향초가 둥둥 떠다니는 뜨거운 수프,
반짝거리게 윤이 나도록 튀겨낸 당면 만두.... 모든 것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테오는 점점 더
배가 고파왔다. 수하르토 씨는 갑자기 길모퉁이를 돌아서더니, 장대한 벽에 붙은 작은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문을 들어서니 처음 것보다 약간 규모가 작은 또 하나의 벽이 나타났다. 한 번은
오른쪽 한 번은 왼쪽, 이렇게 지그재그로 벽을 돌아야 했다.
"집까지 가는 통로가 복잡해서 죄송합니다."
수하르토 씨는 애써 사과를 했다.
"이렇게 하면 악귀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가 있지요. 악귀들은 항상 직선으로
움직이거든요. 자,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죠."
수하르토 씨 집이 누추하다고? 사각형의 정원 주위에는 건물이 세 채나 자리잡고 있었으며,
정원 한가운데에 있는 둥그스름한 연못에서는 잉어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정원이 끝나는 곳에
집의 본채가 얌전히 들어서 있었다. 마치 나이 많은 여인의 조신한 자태 같았다. 내부는
어두웠으며, 흑단에 자개를 장식한 큼지막한 가구들이 집 안을 메우고 있었다. 장중한 맛은
있었지만 명랑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래도록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라고는 전혀 들지 않는
딱딱한 의자의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친 테오는, 마치 교회당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멋진 집이로군요."
테오는 예의 바르게 말했다.
수하르토 씨는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수하르토 씨는 같은 거부들에게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지 않는 것이 훨씬 현명한 처사였다. 집은 예전에 조상들이 살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노라고 그는 설명했다. 본래 중국의 역학 법칙에 따라 정원 내부에 파놓은 원형의 연못, 그
연못에서 헤엄치는 행운의 물고기. 집은 마치 여러 줄로 서서 알아들을 수도 없는 기도문을
읊조리며 행진하는 주름투성이의 노인네들 같은 느낌이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랑 전혀 달라진 것이 없군요."
마르트 고모가 숄을 벗으며 말했다.
"완전한 새 위성 안테나를 하나 장만했습니다."
최신 TV 수상기 옆에서 테오는 희한한 물건을 보았다. 노란색 비단을 깔아 놓은 자개 테이블
위에 자그마한 탑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탑의 열린 문 사이에 배가 불룩이 튀어나온 터키석
빛깔의 신령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는 틀에 넣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엄격한
표정을 한 대머리 영감님과 뒤로 단정하게 쪽을 찐 부인, 한 손에는 꽃을 들고 미소짓는 또 다른
여인, 넥타이핀까지 꽂을 정도로 말쑥하게 차려입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젊은 남자의
사진 등이었다. 작은 탑의 앞쪽에는 모래가 담기 향로가 놓여 있었으며, 향로 안에서는 향연이
피어올랐다. 또한 바로 옆에는 은으로 된 점괘 상자가 놓여 있었다.
"아니, 집에도 탑을 세워 놓으셨어요?"
테오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럴 리가 있니?"
마르트 고모가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것은 조상의 신주를 모신 제단이란다. 그렇지요, 수하르토 씨?"
"네, 하지만 테오의 말도 옳아요."
수하르토 씨는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저 제단은 실재하는 탑의 모양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거든요. 물론 우리 집
제단에서는 우리 집안 조상들만 모신다는 점이 보통 탑과 다른 점일 테죠. 그게 우리 중국인들의
관습입니다."
"중국인들의 관습니라구요?"
마르트 고모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째서 테오에게 유교 사상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 거지요?"
"그건 저..."
수하르토 씨는 설명을 시작했으나 상당히 복잡한 내용이었다. 조상을 섬기는 관습은 웃어른을
공경하고 사회의 질서를 준수하라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지만, 터키석 빛깔의
신령은 두꺼비 위에 앉아 있는 달의 여신으로서 이는 도교 사상으로부터 따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도교와 유교의 통합주의를 실현하신 셈이로군요."
테오가 결론을 이끌어냈다.
"아니, 뭐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것까지는 없어. 신령들이 들으실까 봐 겁나는구나. 나는 그저
누구나 다들 지키는 관습에 따를 뿐이란다."
수하르토 시가 담담하게 말했다.
"신령들이라니오?"
테오가 물었다.
"중국인들에게도 신이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런 식으로 딱 잘라 말하기는 곤란했다. 그러나 경전을 읽다보면, 도교의 기원에 신적이
존재들의 계보가 길게 이어져 내려옴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내 아들녀석이 좀더 상세하게 설명해 줄 겨야."
수하르토 씨가 혼잣말처럼 줄얼거렸다.
"만리! 거실에 손님 오셨다!"
그러자 젊은 청년이 쏜살같이 나타나더니 편하게 앉기 위해 청바지를 걷어올린 다음, 신고
있던 농구화를 벗어서 테이블 밑에 놓았다.
"헬로우!"
청년은 마르트 고모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잘 지내시죠?"
"제발 좀 단정하게 앉으렴."
수하르토 씨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 아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만리는 시카고대학교에서 비교신학을 공부하고 있지요."
수하르토 씨가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들아, 맥캐리 부인은 너도 잘 알고 있지? 오늘은 조카 테오와 함께 오셨단다. 이분들이
우리 나라의 신들에 대해 알고 싶어하시는구나. 네가 설명 좀 해 드리지 않을래?"
혼돈, 알, 인간과 군주
청년은 잠시 생각하더니 두 다리를 쭉 폈다.
"그렇게 시간이나 끌지 말고 어서 말해 보렴. 그리고 제발 좀 단정하게 앉거라."
수하르토 씨는 계속해서 아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네, 아버지."
만리는 긴 다리를 다시 오므리며 대답했다.
"전 지금 중국에 전해지는 그 많은 창조 신화를 어떻게 일목요연히 설명할 수 있을지를
궁리하던 참이었어요."
"그러니 어서 설명해 보렴."
만리는 머리를 몇 번 긁적거리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태초에는 온통 형체도 없고 어두운
안개만이 존재했다. 그러다가 도를 통해 하나가 태어났으며, 이 하나는 곧 둘로 나뉘었다. 둘은
다시 셋을 낳았으며, 셋으로부터 1만 개의 존재가 태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음을 등에 업고, 양을
얼싸안았다. 하지만 어둠으로부터 두 명의 신이 나타났다는 설도 전해진다. 한 명은 하늘을 맡고
나머지 한 명은 땅을 보호하였는데, 이들이 나중에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었다.
"잠깐만요."
테오가 말을 막았다.
"그러니까 '둘'이란 부모를 뜻하는 숫자이고, '셋'은 자식을 포함한 가족을 뜻하는 모양이죠?"
테오의 지적은 정확했다. 이외에 세상의 탄생을 설명하는 다른 방식도 있었다. 남쪽 바다
군주가 중심 부분, 즉 혼돈 지역에서 북쪽 바다 군주를 만났다. 손님을 맞은 혼돈 지역 군주는
극진하게 예의를 갖추어 이들을 대접했다. 그래서 감사를 표하기 위해 남쪽, 북쪽 바다 군주들은
혼돈 군주의 몸에 구멍을 뚫어 주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 혼돈 군주는 구멍이 없어서 보지도
듣지도 먹지도, 또 숨을 쉴 수조차 없는 딱한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다면 그 군주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지요? 그저 둥그런 공같이 생겼나요?"
테오가 몹시 궁금한 듯 따져 물었다.
혼돈이란 정의 상으로 볼 때 형태가 없어야 마땅했다. 그는 둥글지도 네모나지도 않았으며,
또한 윤곽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므로 혼돈에게 구멍을 내주기로 한 것은 굉장히 대담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레째 되는 날 혼돈 군주는 이로 인해 그만 죽고 말았다.
"좀더 간단하게 얘기해 보렴."
수하르토 씨가 아들의 말을 가로막았다.
"넌 아직 교수가 아니라는 걸 명심해야 해."
간단히 말해서 혼돈은 우주를 담은 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최초의 인간인 반고가
태어났다. 1만 8천 살에 반고가 죽자 그 눈은 해와 달이 되었으며, 머리는 산, 몸에 낀 지방은
바다, 머리카락과 털은 각각 나무와 풀이 되었다. 그의 눈물이 흘러 청하와 황하가 생겨났으며,
그의 입김은 바람이 되고, 목소리는 천둥이 되었다. 검은 눈동자로부터 벼락이 생겨났으며,
만족한 마음으로부터 맑은 하늘이 솟았고, 그의 분노로부터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러니까 신이 아닌 인간이 세상을 창조한 셈이로군요."
테오가 결론처럼 말했다.
신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
최초의 인간 반고와 도교의 현자 노자가 하나의 신으로 융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은군자의
왼쪽 눈은 해가 되었고, 오른쪽 눈은 달이 되었으며, 머리카락은 별, 뼈대는 용, 살은 네발짐승,
내장은 뱀, 배는 바다, 목에 난 털은 식물, 그리고 그 심장은 영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천자라고 하는 존재가 나타나 하늘과 땅 사이의 접촉을 두절시켜 버렸다.
"또 시작이로군요."
테오가 고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통로를 끊어 놓는 바보 같은 인물이 나타났잖아요."
"그러게 말이야. 감초 없는 약방이 어디 있겠니."
마르트 고모가 테오의 말투를 흉내내며 맞장구를 쳤다.
도교에 얽힌 신화라면 그런 정도였다. 여기에다가 위대한 몇몇 왕들의 계보까지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고 만리는 덧붙였다. 이 계보는 신적인 것이나 초자연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공자가
정리했다고 한다. 우선 세 명의 황제가 계보의 첫 자리를 차지한다. 두 명은 남자고 한 명은
여자다. 가장 수위를 차지하는 황제 복희는 새의 깃털과 우주의 다양성 및 자신의 신체 각
부위를 관찰한 예언서를 펴냈으며, 그의 아내 여와 또한 그런 남편과 마찬가지로 등 아래쪽에
뱀의 꼬리가 달려 있었다고 한다.
"쌍동이 신이었나 봐요."
테오가 말했다.
세 번째 황제인 신농은 농업을 창시했다. 그리고 이 세 황제의 뒤를 이어 다섯 제왕이
등장한다. 첫 번째 제왕인 황제는 의술서와 성의학서, 점술서, 병서 등을 남겼다. 두 번째
제왕(전욱)은 하늘과 땅을 분리시킨 업적을 남겼으며, 세 번째 제왕 제곡은 열 개의 태양을 낳은
어머니와 열두 개의 달을 낳은 어머니를 그 아내로 취했다. 네 번째 제왕(요)은 계절의 순환을
조정했으며, 가장 덕망이 높은 인간인 순에게 그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신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덕망 높은 인간이라니, 참으로 마음에 들어요."
테오가 주석을 달았다.
순은 여느 사람들과 매우 달랐다. 그를 후계자로 선택하기에 앞서 제왕은 여러 차례에 걸쳐
그에게 매우 혹독한 시련을 내렸다. 불길 속을 뚫고 지나간다거나, 홍수를 막아내야 한다거나,
땅속에 파묻혔다가 가까스로 빠져 나오기, 폭풍우와 대항해서 싸우기 등이 그에게 부과된
시련이었다. 그러나 가장 잔인한 시련은 자기 자신의 친부모로부터 죽도록 얻어맞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은 부모에 대한 공경심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상을
숭배하는 관례를 창시했다. 그후 순은 우주의 네 개의 문을 통해 네 명의 악귀를 추방한 후,
여섯 번째 제후에게 권력을 승계했다. 우라고 하는 이 여섯 번째 제왕은 돌에서 태어났으므로
사신이라고도 불리었다.
"한쪽 발로 춤추는 바로 그 우와 같은 인물이라구요?"
테오가 깜짝 놀랐다는 듯이 재확인했다.
테오의 말대로였다. 우의 등장과 더불어 세 황제와 다섯 제왕으로 이루어진 계보는 끝이 났다.
그 다음으로는 잔인한 형별이나 음주가무를 일삼은 퇴폐 군주, 그리고 포악한 독재자의 계보가
이어졌다. 어떤 군주는 자기에게 훈계하는 현자가 보기 싫어 그를 두 토막으로 베어 버리기까지
하였다. 현자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길래, 그토록 자기를 귀찮게 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범한 무모한 짓이었다. 이에 노한 주공이 군대를 일으켜 이 포악한 군주의 목을 벤 후, 백색의
군대기에 그 목을 매달았다고 한다. 그 이후 이야기는 중국의 역사로 넘어간다.
"어휴, 테아노 할머니께서 들려 주셨던 이야기만큼이나 복잡하군요."
테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황한 마르트 고모는 테오가 그리스계 혈통도 이어받았으며, 테아노 외할머니께서 테오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 신화를 끊임없이 들려 주었노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수하르토 씨가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테오에게 그리스 신화를 몇 가지만 들려 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했다.
"너무 길어요."
테오는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게다가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어 버렸어요."
이렇듯 무례한 언동에 질겁한 마르트 고모가 매몰차게 테오의 팔을 꼬집었다.
"아얏, 아프단 말예요!"
테오는 신음하듯 볼멘소리를 냈다.
"제가 뭘 어쨌다구 이러세요?"
수하르토 씨는 웃으면서 이제 식사할 시간이 되었노라고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행은 둥근
식탁 앞으로 옮겨 앉았다. 가운데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쟁반이 부착된 중국식 식탁이었다.
중국식 산해진미
"고모, 설마 호랑이 불알을 먹지는 않을 테죠?"
테오는 적정스러운 표정으로 마르트 고모에게 속삭였다.
"응, 너무 걱정 마."
마르트 고모가 테오의 표정을 보고서 재미있다는 듯 미소지으며 짧게 말했다.
"이 고모가 이미 메뉴를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투명하면서 오독오독 씹히는 해파리 절임, 마늘과 파슬리로 조리한 개구리 요리, 계란
수프, 설탕에 절여 증기로 짜낸 닭발, 게살과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오믈렛이 나오자 테오는
극구 사양을 했다.
"그렇게 하면 예의에 어긋나는 법이야."
마르트 고모가 테오를 나무랐다.
"그러지 말고 맛이라도 좀 보렴."
테오는 젓가락으로 어렵사리 오믈렛을 갈랐다. 둥그런 나무통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이것도 먹는 거예요?"
테오에게 경게하는 빛이 역력했다.
"우선 열어 보기라도 하렴."
수하르토 씨가 웃으며 말했다.
테오는 손을 닦은 다음 나무통을 열었다. 안에는 자그마한 종이조각이 들어 있었다.
"설마 다음 행선지에 대한 메시지는 아닐 테죠."
테오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왜 아니겠니?"
마르트 고모가 대꾸했다.
"아가 메뉴까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한 이유를 이제 알겠지?"
'나는 태양이며, 익히지 않은 말고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성소를 지키고 있는 나를 보려거든
언제든지 이곳으로 오라!'
익히지 않은 말고기? 태양? 이렇게 괴상망측한 신은 도대체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 걸까?
"이번엔 좀 어려울걸."
마르트 고모는 테오의 황당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척이나 재미있어했다.
"완전히 빵점이에요. 전혀 모르겠는데요."
테오가 대답했다.
"만리 네가 좀 도와 주렴."
수하르토 씨가 아들을 부추겼다.
"그러고 싶지만, 사실은 저도 잘 모르긴 마찬가진 걸요."
만리가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조상님들께 여쭈어 보는 건 어떻겠니?"
수하르토 씨가 장난기 섞인 투로 제안했다.
두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오는 엄숙하게 점괘통을 향불 위에서 돌린 다음 흔들었다.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것 같아 보이는 막대기가 빠져 나왔다.
"'이제 나는 물러간다. 세상에는 밤이 찾아올 것이다.' 이건 예언이 아니잖아요."
테오는 내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아하, 난 이제 알았다."
만리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장 오래 된 여신..."
"이제 그만 말했으면 좋겠구나."
마르트 고모가 만리를 나무랐다.
"이건 속임수예요. 예언을 날조하더니, 이젠 만리더러 설명조차 못하게 하시잖아요. 정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저도 파투에게 전화해 볼래요. 어, 내 휴대폰이 어디로 갔지? 아참, 호텔에
두고 왔지."
"그럼 내 전화를 쓰겠니?"
수하르토 씨가 주머니에서 작은 전화기를 꺼내며 물었다.
생선으로 잔치하는 나라
"파투? 응, 잘 지내. 그런데 메시지를 통 못 알아맞히겠어. 뭐? 그럴 줄 알았다구? 그래, 그럼
힌트 좀 줄래? '물고기는 어린아이들을 축하하고, 벚나무는 봄을 축하한다.' 그렇게 알쏭달쏭한
힌트 가지고는 도움이 안 돼. 익히지 않은 말고기는 도대체 무슨 소리지? 껍질을 벗긴다구?
갈수록 태산이군. 다른 힌트는 없니?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래, 잘 지내. 더운 편이야. 아니,
땀이 날 정도는 아니구. 응, 너도 안녕!"
테오는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파투가 글세 말이 껍질이 벗겨졌기 때문에 익히지 않았다고 하는 거래요. 만리, 무슨 말인지
알겠어?"
"물론이지."
만리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여신의 남동생이 껍질을 벗긴 말을 동굴에 내던졌거든."
"그래도 어느 나라인지 도저히 모르겠어."
"넌 알아낼 수 있어."
마르트 고모가 테오를 격려했다.
"헝겊으로 물고기를 만들어 어린아이들을 축하해 주는 나라가 어디지?"
"그것도 모르겠어요. 멕시코?"
"아니."
만리가 대답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움 벚꽃을 구경할 수 있는 나라는? 벚꽃 구경을 위해 일도 제쳐놓는
나라는?"
"일본!"
테오가 소리쳤다.
"그래도 알아맞히긴 하는구나.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탈이지."
마르트 고모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익히지 않은 말고기를 싫어한다는 그 아가씨는 누굴 말하는 거죠?"
문제의 답을 빨리 알아맞히지 못해서 약이 오른 테오가 대들 듯한 기세로 물었다.
그 여신의 이름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였다. 엄격하고 정절심이 강한 아마테라스는 시중드는
여인들과 동굴에서 살았다. 여신의 시녀들은 날마다 시간의 빛깔로 된 기모노를 짜서 여신에게
입혔다. 그러면 아마테라스는 매일 아침 지상을 밝히기 위해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달의 신이며 바다의 왕인 여신의 못된 남동생 스사노오 노 미코토가, 그 누나를 골탕먹이기
위해 기모노 짜는 시녀들을 향해 껍질 벗긴 말을 내던졌다. 깜짝 놀란 시녀들이 소란을 피우는
동안, 시녀들 중 한 명이 자기 베틀의 북이 성기를 관통하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 익히지 않은
말을 좋아하지 않았던 아마테라스는, 이 일로 몹시 노한 나머지 바깥 출입을 일체 삼가고 동굴
속에만 머물렀다. 그러자 지상에서 빛이 사라져 버렸다.
"멍청이 같은 동생녀석."
테오가 분개했다.
아마테라스 여신의 진노는, 땅에 사는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도니
하늘의 남신과 여신들마저도 두려워서 동요하기 시작할 정도로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아연실색한 신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의논 끝에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여신들
가운데에서 가장 남을 웃기는 아메노우즈메 노미코토에게, 아미테라스의 닫힌 동굴 앞에서
자기네들을 웃겨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아메노우즈메는 그런 일이라면 자신있었다. 자기의 옷을
들어올려 엉덩이와 그 성기를 보여 주면서, 또 얼굴로는 온갖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어 가면서
아메노우즈메는 신명나게 춤을 추었다. 이 모습이 너무나 익살스러워서 동굴 앞에 모인 신들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갑자기 들려 오는 웃음소리에 호기심이 동한 아마테라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동굴 문을 막고 있던 돌을 슬쩍 밀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때를 놓치지 않고 신들이
아마테라스 쪽으로 거울을 내밀었다. 거울 속에 담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놀란 아마테라스는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 사이 신들이 아마테라스의 기모노자락을 붙잡았다. 이렇게
해서 아마테라스는 영원히 동굴 밖에서 살게 되었으며, 어둠 속에 잠길 뻔했던 세상은 구원을
받았다.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로군요."
테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아마테라스가 그렇게 화내길 잘했어요."
"일본에는 이외에도 비슷한 설화가 많이 있어."
만리가 덧붙였다.
"일본에 가게 되다니, 넌 운이 좋구나."
그러나 일본으로 떠나기에 앞서 검사 결과를 기다려야 했으며, 그보다 먼저 낮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테오는 내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수하르토 씨의 집을 나와 호텔로
향했다. 테오와 마르트 고모가 떠나자마자 수하르토 씨는 제단으로 달려가, 테오의 운명에 관해
조상들의 자문을 구했다. 막대기에 적힌 답을 읽은 수하르토 씨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만족스러운 답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결과
싱가포르에서 날아온 검사 결과는 먼저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테오의 건강은 여전히
답보상태였다.
"지난번과 마찬가지예요."
마르트 고모가 전화통에 대고 말했다.
"별 차도가 없어서 마음이 답답해요. 무슨 처방이오? 아, 그렇지...."
손에 들었던 전화통을 내려놓으며, 마르트 고모는 실신할 뻔했다.
"테오! 너도 들었지? 검사 결과에 변화가 없어!"
고모가 소리쳤다.
"그렇다면 뭐 기뻐 날뛸 필요까진 없겠군요. 그전이랑 마찬가지라는 소리니까요."
테오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게 아니야. 넌 이제까지 먹던 약을 다 끊고, 새 처방대로 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다르질링의
그 여의사의 처방이 성공적이라는 말이야. 내 말 알아듣겠니?"
"아참,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도 놀라우세요?"
마르트 고모는 너무나 기뻐서 뺨이 얼얼해할 정도로 마구 테오에게 입을 맞추어댔다. 고모와
손을 맞잡고 날아갈 듯이 춤을 추었다.
"그런데 마르트 고모, 전화통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요."
테오가 멈춰 서며 말했다.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수화기를 내려놓는다는 걸 깜빡 잊었네."
그 틈을 타서 테오는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18 일본의 어머니와 딸들
발이 묶인 마르트 고모
제롬은 전화를 통해 들려 오는 동생의 설명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첫 번째
검사 결과가 굉장히 고무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티베트식 처방이 서구식 처방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우선 안심이 되었다. 테오의 아버지는 자카르타에 1주일
정도 더 머무르면서 다시 한 번 검사를 받으라고 종용했다. 마르트 고모가 도쿄에서도 얼마든지
검사를 받을 수 있다면서 반대했지만, 제롬은 막무가내였다. 무슨 수를 써도 오빠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고모가 양보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 아빠 때문에 골치 아프게 됐어."
마르트 고모가 전화를 끊으며 투덜거렸다.
"1주일씩이나 여기에 있어야 하다니 말도 안 돼. 까딱하다간 일본 벚꽃놀이 시기까지
놓치겠어."
"하지만 전 여기도 좋은 걸요. 시간이 많아졌으니까, 만리를 다시 만날 수도 있구요. 그런데
고모 일본에서 또 어떤 사람이 나타나도록 마술을 부리실 거죠?"
"네 맘에 곡 들 거야, 여자야."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예요. 오랜만에 여자 안내자와 다니면 기분도 새롭겠네요."
테오가 대꾸했다.
"그런데 이제 뭘 하죠? 이슬람 사원을 구경하면 어떨까요?"
그러나 이곳에서는 이슬람교됴가 아니면 사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특히 여자인 마르트
고모에게 이슬람 사원은 금지 구역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그날은 여자들이 기도할 수 있는
날이긴 했지만... 비신도는 사원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그 입구에서 구경은 할 수 있었다. 사원
안에서는 흰색 옷을 입고 흰색 베일을 쓴 1만 2천 명의 여신도들이 박자를 맞춰 가며 동시에
절을 하고 있었다. 수놓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자들의 질서정연한 기도 광경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에는 이렇듯 과격한 요소는 없었지만, 그래도 (코란)의
가르침은 엄격하게 따랐다.
"언젠가 고모가 인도네시아에는 정령 숭배자들도 있다고 하셨지요?"
테오가 사원을 나와 길을 걸으며 마르트 고모에게 물었다.
"물론이야. 그 중에서도 가장 독특하다고 일컬을 수 잇는 바드위족은, 자카르타에서 세 시간
쯤 떨어진 곳에서 숨어 산단다. 이들은 이슬람을 거부하고 늘 흰 옷을 입고 지내지. 자기 종족이
현대의 문명 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허용하기는 하지만, 이런 사람은 흰 옷이 아니라 푸른 옷을
입어야 해. 이따금씩 대통령에게 사람을 보내 수호 부적을 전달한 후, 한 마디 말도 없이
슬그머니 사라지기도 하지. 다른 종족은 누구도 바드위족의 영역에 들어가 수가 없단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참 희한한 사람들도 많아요. 그런 사람들을 모두 만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그렇다면 테오 넌 민족학자가 되어야겠구나."
마르트 고모가 말했다.
"그 말은 들어 본 적이 있는데, 뜻은 잘 모르겠어요. 민족학자가 뭐 하는 사람이죠?"
"특정 부족을 선택하여 그 사람들의 습관에 맞춰 살면서, 그들의 사고방식이며 신앙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민족학자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거와 다름없네요. 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니까요."
테오가 의아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기는 했다만, 특정 종족을 본 적은 없었어. 앞으로도 그럴 기회는
없을 거구. 그들의 생활방식은 지금의 네 건강상태로는 버텨낼 수 없을 만큼 원시적이거든.
물질적으로는 거의 헐벗은 사람들이니까."
"도교 성지에도 못 가보고, 특정 종족도 만날 수 없고, 계단에도 못 올라가게 하고... 아직도
저한테 금지시킬 일들이 많으신 건가요?"
테오가 잔뜩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네가 빨리 나으면 되잖니, 배은망덕한 녀석 같으니!"
마오쩌둥 사상과 도교
그럭저럭 1주일이 지나갔다. 마르트 고모는 그 사이에 그림자 인형극으로 연출된 라마야나
공연에 테오를 데리고 갔다. 처음 얼마간의 호기심이 충족된 후부터 테오는 지루해서 몸을
뒤틀었다. 테오와 마르트 고모는 금색으로 치장한 무용수들의 공연장에도 갔었다. 무용수들은
잠자리처럼 우아하고 몸놀림이 가벼웠지만, 어쩐지 지나치게 기교적이라고 테오는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인도네시아 전통 공연보다 오히려 만리와 토론하기를 훨씬 좋아했다.
어느 날엔가 테오는 빨간 소스에 날것으로 먹는 수마트라식 육회를 맛보다가, 문득 진짜
중국에 가보고 싶은 욕구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악독한 황후들과 마오쩌둥의 나라,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떼지어 거리를 걸어다니거나 밭일을 하는 나라, 신비스럽기만 한 경극과 현대식 건물,
상하이와 베이징의 신세대... 테오는 언젠가 어른이 되면 반드시 중국에 가보리라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만리 너는 중국에 대해 잘 알겠지?"
테오가 물었다.
"조금 알지."
만리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거기 가면 중국 종교에 대해서 뭘 볼 수 있지?"
"전부를 볼 수 있어. 그렇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말도 맞을 거야."
만리가 알쏭달쏭하게 대답했다.
"내 조국 중국에는 변동이 많았거든. 1911년의 최초 혁명(신혜혁명)으로 중국 제국이 멸망했지.
그리고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세계가 완전히 바뀌었어. 마오쩌둥이 등장했으니까."
"조로처럼 말이지. 대장정이라면 나도 알아."
"마오쩌둥이 주동이 도니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도 아니?"
마르트 고모가 끼어들었다.
"중국에서는 바로 그것 때문에 종교가 거의 말살되었다고 봐야 해."
"문화대혁명이오?"
테오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마오쩌둥이 무슨 일을 했는데요? 모든 사람들에게 미술 공부를 시켰나요?"
"아니, 세상에! 그 무시무시한 일도 모르다니!"
마르트 고모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숨을 지었다.
"벌써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질 정도로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러갔나? 잘 들어 봐."
마오쩌둥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술 공부를 시킨 것이 아니라, 문화대혁명에 앞서 급진적인
경제개혁 방안을 추진했다. 대약진 운동이라는 이름의 이 개혁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기근이
중국에 몰아쳤다. 완연한 정책의 실패였다. 그러다가 1966년 마오쩌둥은 다시 정계 일선에
나서면서,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정당하다'고 호소했다. 이 말에 고무된
젊은 청년들이 전국에서 들고 있어났다. 공산당 간부들을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아 동원된 수천 명의 학생들은 마오쩌둥의 어록을 흔들어대며 열광했다. 마오쩌둥이
홍위병이라고 명명한 이들 학생 부대는 전 중국을 누비며 공산당 간부들을 비판했다. 이로
인하여 일반 학교와 대학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정확하게 누구를 비판하는 거예요?"
놀라움을 금치 못한 테오가 물었다.
마오쩌둥은 홍위병들에게 '구시대'의 네 가지 상징을 타파하라고 선동했다. 낡은 사고방식과
오래 된 관습, 케케묵은 습관과 해묵은 전통이 그가 말하는 네 가지 타파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홍위병들은 중국인들에게서 미신을 뿌리뽑겠다고 나섰다. 국방장관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측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자를 인용했다는 이유로 모질게 비판을 받았다. 홍위병들이 보기에
공자야말로 봉건적인 불평등 제도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권력을 행사한다는 흥분과
희열에 사로잡힌 열성적인 젊은이들은 사찰과 박물관, 조각 등을 닥치는 대로 때려부쉈으며,
과거의 유산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 약탈했다. 개인의 재산도 침해당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마오쩌둥은 이런 젊은이들을 계속해서 부추겼다. 학자와 문인, 지주 할 것 없이,
중국의 과거를 기억한다 싶은 사람들은 모두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씌워 동네마다 돌아다니게
하는 모욕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는 이들을 죽도록 두들겨 패기도 했다.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어린 사람들이 장유유서의 관례를 깨고 어른들을 박해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중국 전역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과격분자들 사이의 분쟁이 내란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마오쩌둥은 자신의 홍위병들을 농민들과 더불어 들판으로 쫓아냈다. 이 광란의
가간 동안 죽음을 당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관측가들은 수백만 명은 되리라고
짐작한다. 이렇듯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계속되다가, 1976년 마침내 마오쩌둥은 숨을 거두었다.
"제가 보기엔 맥캐리 여사께서 문화대혁명의 의미를 약간 왜곡하시는 것 같아요."
만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주석이었던 마오쩌둥은, 혁명에 필요한 힘을 얻기 위해 나라를 감정적으로
사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지요. 젊은층에 호소하면 부패하지 않은 청렴한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런 과정에서 어느 정도 변질되거나 과장된 행동이 자행되었음은
명백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처음부터 그 의도가 나빴다고만은 할 수 없어요."
"아니, 뭐라구?"
마르트 고모가 분개했다.
"온 국민을 재교육시키는 막중한 임무를 애송이들에게 맡기고, 그것도 모자라 재판하고
숙청하는 권리까지 부여했다는 건 완전히 언어도단이야!"
"고모는 왜 그렇게 젊은 사람들을 싫어하시죠?"
테오가 물었다.
"싫어할 이유가 없지. 젊은 사람들이 무기를 가지고 함부로 장난만 치지 않는다면 말이야.
독재자 할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결국 자기 아버지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다니, 이게 어디 말이
되는 소리니?"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테오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테오, 너 말 다했니? 당시 그 일을 저지른 장본인들도 오늘날엔 후회를 한다더구나. 특히
노인과 여자들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면서 기쁨을 맛보았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고 끔찍하다고
고백했다고 들었어. 그런데 넌 종교전쟁이라면 치가 떨린다는 애가 어떻게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단 말이니? 마오쩌둥 사상은 그야말로 살생을 가르치는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던 거야."
"조상 숭배를 거절했다는 건 아닌게아니라 가히 혁명적이었죠. 하지만 유고 사상이 이따금씩
젊은 사람들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건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그처럼 지독한 만행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어."
"그야 물론 그렇지요."
만리도 인정했다.
"마오쩌둥은 몇 가지 실책을 범했어요. 그가 내놓은 정책 중 약 30퍼센트 정도는
실패작이었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나."
마르트 고모는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시체를 방부처리해서 신격화시키더니,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그 유명한 톈안먼(천안문) 광장에
모셔 놓고서 오며가며 절을 해대다니, 나원참. 마오쩌둥을 완전히 신처럼 섬기더군. 하루에 두
번씩 중국인이면 직업에 관계없이 모두 마오쩌둥을 기리기 위하여 충성춤을 추어야 하는 건 또
어떻고. 만인의 붉은 태양이라는 호칭까지 얻었으니, 기가 막혀도 한참 막힐 지경이야."
"다시 말해서 붉은 태양이 중국의 새로운 신으로 부상했다는 얘기로군요."
테오가 마르트 고모의 말을 정리해서 결론지었다.
"그래 맞았어!"
마르트 고모는 신랄하게 말했다.
"권세 좋고, 운을 타고났으며, 영양을 공급하는지는 모르겠다만 거칠고 잔인한 신임에는
틀림없지. 퇴락한 황제야."
"고모도 참, 허풍 좀 그만 떠세요."
테오가 말했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쫓겨나시는 것도 당연해요."
"맥캐리 여사, 부인은 요즈음의 중국 젊은이들은 알지 못하시죠."
마리가 테이블을 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중국은 대국입니다. 과거 역사쯤은 얼마든지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처럼 중국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시는 거죠?"
"살인을 일삼는 종교는 좋은 종교가 못 되지. 마오쩌둥 사상도 예외일 수는 없어. 중국인들이
요즈음에는 자본주의 신을 섬긴다고 하던데, 차라리 그건 나도 반대하지 않는단다."
"저어, 죄송하지만 무슨 신을 암시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만리가 물었다.
"어려울 것 하나도 없어."
마르트 고모가 대꾸했다.
"그거야 물론 돈이지."
"맥캐리 부인.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무례하게는 생각지 마십시오. 중국 사람들은 역사상
부귀를 멀리했던 적이 이제까지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제 아버님은
부자이시지만, 그 사실은 전혀 수치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 그건 좀 미안하구나."
마르트 고모가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단다, 만리."
"그렇지만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만리가 따질 듯이 말했다.
"부인 자신도 걱정 없이 여행을 다닐 정도로 재산을 많이 가지고 계시잖아요."
마르트 고모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 빨간 건 참 맛있네요."
테오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필요 이상의 수선을 떨었다.
벚꽃 무용론
그날 이후 만리를 만날 수 없게 되자, 테오는 몹시 시무룩해졌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났다. 새로
받은 검사 결과도 지난번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싱가포르 병원의 전문의들은 소견서에
결과가 매우 '고무적'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마르트 고모는 즉시 전화통 앞으로 달려가
일본으로의 출발 허가를 얻어냈다.
"저한테도 엄마 좀 바꿔 주세요."
테오가 부리나케 수화기를 잡으며 말했다.
"왜 좋은 소식은 맨날 고모가 전하시죠?"
"응, 그래?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자."
"아빠? 네, 괜찮아요. 엄마 좀 바꿔 주세요. 엄마! 이제 좀 마음이 놓이세요? 너무 그러시지
마세요. '고무적'이라면 아무 말도 없는 것보다 훨씬 좋잖아요. 마음 푹 놓으세요. 전 이제
괜찮다잖아요. 수업은 좀 어떠세요? 그래요? 휴가중이시라구요? 혹시 어디가 아프신 건 아녜요?
아, 피곤하시다구요. 머리가 어지럽구요. 의사선생님한테는 가보셨어요? 과로라구요? 제 생각에는
의사선생님 말씀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저한테도 선물 하나쯤 사다 주시겠죠? 왜냐하면 전
엄마에게 드릴 선물을 한 트럭은 샀을 거예요. 네, 걱정 마세요. 엄마, 사랑해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테오는 수심에 잠겼다.
"엄마가 병가를 내셨대요. 엄마도 자꾸만 머리가 어지러우시대요. 하지만 심한 것 같지는
않아요. 아빠가 엄마 좀 쉬시라고 주말에 여행을 떠나실 거래요. 어디로 가는지 아세요?
브뤼헤로 가신대요. 거긴 두 분이서 신혼여행을 가셨던 곳이거든요."
"그것 참 잘 됐구나. 네 엄마 아빠한테도 기분 전환의 계기가 되겠구나."
"그런데 이제 보니 고모도 엄마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엄마가 어떻게
하셨길래 그렇게 걱정을 하세요?"
"아무 일도 없었어. 하지만 너도 네 엄마가 얼마나 예민한 사람인지 잘 알잖니? 아빠랑
둘이서만 있다 오면 괜찮아질 거야."
"엄마 아빤 브뤼헤에 가시는데..."
"우린 일본에 가잖아. 진작에 떠났어야 했는데."
"고모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꽤나 좋아하시나 봐요."
"넌 벚꽃이 만발하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상상도 못할 거야. 평생에 한 번은 꼭 볼 만한
장관이란다."
"죽더라도 일본의 벚꽃이나 한 번 보고 죽어라, 이런 식이군요."
"멍청이 같으니라구. 너도 이젠 네가 점점 회복되어 가고 있다는 걸 잘 알잖니."
"네, 저도 그런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자카르타에 머무르면서 만리와 사이가
틀어져서 속상한데, 지하 세계의 쌍둥이 형제까지도 도통 그 모습을 드러내질 않아요. 이건 좋은
징조가 아녜요. 어쩐지 마음이 언짢아요."
"음, 그런데 말이야 테오, 한 가지만 말해 주렴."
마르트 고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쌍둥이 형제 말인데, 너한테 그 애가 무슨 역할을 하니?"
"그건 저도 몰라요."
테오가 혼잣말처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저를 안내해 준다고나 할까? 제 기분이 좀 좋아졌다 싶을 때면, 그 애가
어김없이 말을 걸어와요. 그 애가 말을 하지 않으면, 검사 결과가 늘 제자리걸음이에요. 그런데
벌써 여러 주일째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 애에게도 침묵이 필요한 건 아닐까?"
마르트 고모가 조심스럽게 테오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글쎄요. 어쩌면 그럴는지도 모르죠."
테오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맞장구를 쳤다.
"아마 일본에 가면 침묵할 수 있을 거야. 침묵을 숭배하는 나라가 있다면 바로 일본일 테니까.
벚나무는 말이 없지. 하얀 벚꽃이 흩날리면, 그 앞에선 누구나가 침묵하게 되지."
"벚꽃 핀 건 저도 벌써 봤단 말예요!"
테오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랬을 테지. 하지만 일본에선 완전히 하나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야. 일본에 가면
너도 느끼게 될 거야. 그 사람들은 자연의 소리를 들을 줄 안단다."
테오의 표정은 한없이 서글퍼 보였다.
동요하는 테오
가루다 에어라인의 비행기 앞머리 부분에는, 비슈누 신의 상징인 독수리 무늬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림과는 달리 늙은 독수리였는지, 자카르타에서 도쿄로 가는 비행기는
여러 시간이나 연착하였다. 테오의 우울한 기분은 비행기 안에서도 여전했다. 영어 잡지를
뒤적거리다가 로큰롤을 듣는가 싶더니, 이내 시들해졌는지 하품을 하면서 영화를 보다가 마침내
잠이 들었다. 마르트 고모는 이제 바야흐로 티베트식 처방이 그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조카녀석이 왜 그렇게 우울해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일까? 파리를 떠나온 이후 테오는 예루살렘의 세 가지 유일신 종교를 비롯해서 바티칸
교황청의 의미, 인도 전역, 소승, 대승불교, 도교에서 공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이해하려는
왕성한 호기심을 보여왔다. 그런데 이제 여행이 지겨워진 것일까? 탑 구경을 할 때 좋아서
깡총거리던 테오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렇게 즐겁고 활기차 보였는데, 갑자기 매사에
시들먹하다니, 마치 불꽃이 다 타버린 것 같았다. 이런 상태로 테오가 일본의 엄격하고 까다로운
의식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제 와서 포기할 순 없어."
마르트 고모는 혼잣말을 했다.
"어떻게 하면 이 녀석에게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담?"
잠을 자면서 테오는 심하게 몸을 흔들어댔다. 무슨 소린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잠꼬대를 하는
것 같았다. "저도 데리고 가세요, 엄마. 난 너무 외로워요..." 마르트 고모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엄마와 떨어져 있는데다가 쌍둥이 형제마저도 자취를 감추고 나니, 테오의 마음이 심란해진 것이
분명했다. 이런 병은 티베트 의수로도 어쩌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테오 엄마를 오라고 해야
하나? 안 돼. 여긴 너무 멀어. 게다가 멜리나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울기나 할거야.
아무 도움이 안 될 거야. 더더구나 마음의 준비도 안 되어 있을 텐데... 마르트 고모는 연신
혼자서 중얼거렸다.
일본을 믿어 보는 수밖에 없지. 테오에게 숲과 꽃을 숭배하는 일본 관습을 알려 줘야지. 녹차
맛도 보게 하고. 아참, 아침마다 강제로라도 요가를 시켜야지. 등이라도 쫙 펴질 테지. 생선회도
많이 먹여야지. 인 성분이 많다던데. 마르트 고모는 우연히 유럽 의약품이 들어 있는 가방을
뒤져보았다. 약은 유사시에 대비해 언제든지 다시 먹을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마르트 고모는 자신도 불안에 시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녀석은 자면서까지 내 간을 이렇듯 콩알만하게 만들어 놓는 다니까."
아시코 양
카메라를 둘러멘 한 무리의 일본인들 틈에서, 마르트 고모는 연신 두리번거리며 만나기로 한
여자를 찾았다. 약속 장소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기분이 상한 마르트 고모는 안내 방송을
부탁하기로 결심했다.
테오는 얌전하고 주름살 많은 선하게 생긴 할머니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갑자기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마르트 고모의 친구분들은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좋으신 분들이야. 하지만 나이가
조금 덜 들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다가 모처럼 만리 같은 젊은이를 만났다 싶었더니,
공교롭게도 고모는 말다툼까지 벌이셨지. 기대랄 것도 없이 그저 무심하게 테오는 여자 노인들의
얼굴을 살폈다. 과연 누구일까?
"안녕!"
갑자기 테오의 등뒤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실례해도 될까?"
테오는 몸을 돌렸다. 일본 소녀가 웃으면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웃는 눈매에 동그란 입,
엉덩이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검고 윤이 나는 머리채... 미니 스커트에 빨간 점퍼를 입은 저
소녀는 열세 살? 아니면 열 다섯 살?
"안녕!"
테오는 넋이 빠진 사람처럼 엉겁결에 인사를 했다.
"아니 뭐, 실례될 건 없지만 난 이제 막 도착했어. 고모와 같이 왔고, 우린 지금 누굴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넌 도쿄에 사니?"
"아니, 교토."
소녀가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나도 누굴 기다려. 너처럼 프랑스 여자분을 기다리지. 어린 남자아이와 같이 오신다고
했는데, 통 보이질 않아. 혹시 그런 사람 못 봤니?"
"어떻게 생긴 부인인데?"
테오는 소녀의 손을 잡으며 서둘러 물었다.
"내가 도와 줄게."
"항상 이상한 차림으로 다니시는 분이야. 평소에 티베트 모자를 잘 쓰셔."
"그것 참 희한하군. 우리 고모도 그러시거든!"
테오가 소리쳤다.
"그렇다면 이 공항엔 이상한 부인네가 두 명이나 있다는 얘기군. 아, 저기 우리 고모가 오신다.
내 말이 맞지? 저 모자 말야."
소녀를 보는 순간, 마르트 고모의 얼굴이 환히 빛났다.
"어머, 이제야 찾았네!"
고모가 반갑다는 듯이 소리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맥캐리 부인, 죄송해요."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택시를 타고 오는데, 길이 너무나 막혀서 그만 이렇게 늦고 말았어요."
"그래도 용히 테오를 찾았구나."
마르트 고모는 손에 손을 맞잡고 있는 두 사람을 곁눈질하며 심하지 않게 툴툴댔다.
깜짝 놀란 테오는 입을 벌린 채 마르트 고모와 일본 소녀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소녀의
눈도 휘둥그래졌다. 그렇다면 일본 친구는 바로 이 소녀로구나!
"그렇다면 댁이 바로 테오로군요."
소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말 반가워요."
"아 네, 저두요."
테오가 소녀의 손을 슬며시 놓으며 말했다.
"전 좀더 어린 소년을 연상했어요."
소녀가 얼굴을 붉혔다.
"맥캐리 부인이 늘 '우리 꼬마'라고 말씀하셨거든요."
테오가 제의했다.
"넌 이름이 뭐니?"
"이제 보니 얼굴도 모르면서 서로 잘도 만났군."
마르트 고모가 깔깔대며 웃었다.
"그것 참 잘 된 일이야. 테오, 아시코 오카라 양이야. 불문과 학생이지."
"뭐라구요? 벌써 대학생이라구요?"
테오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아시코는 아주 뛰어난 아가씨거든. 아직 열 여섯 살밖에 안 되었지만 대학생이지."
마르트 고모가 덧붙었다.
열 여섯 살이라구? 테오는 약간 실망스러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쩌면 우린 동갑일 거야."
아시코가 수줍어하며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난 이제 겨우 열네 살이야."
약간 자존심이 상한 듯 테오가 맥없이 말했다.
"난 네가 열 여섯 살은 되었는 줄 알았어."
아시코가 말했다.
"그렇다면 넌 키가 굉장히 큰 편이로구나."
"뭐? 테오가 큰 편이라구?"
마르트 고모는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 키 정도밖에 안 되는데 뭐. 어디, 테오 너 이리 좀 와 보렴."
이렇게 말하면서 마르트 고모는 테오의 어깨를 잡아 자기 옆에 세웠다. 아니나다를까, 테오는
고모보다 머리 하나만큼이 더 컸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테오는 여행중에 그만큼 키가 자랐던
것이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믿을 수가 없구나. 혹시 내가 작아졌나?"
"여행은 심신을 살찌우는 법이죠, 노마님."
테오 역시 몹시 기쁜 표정이었다.
"그래, 이제부터는 널 '꼬마'라고 부르지 않고 '꺽다리'라고 불러야겠구나."
고모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자 얘들아, 이제 가자."
호텔은 물론 마르트 고모의 취향에 맞게 적당히 오래 된 고즈넉한 분위기에 안락하고 포근한
느낌을 풍겼다. 목욕 가운과 실내화를 제외하면 일본적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
매트리스도 두텁게 솜을 둔 요와는 거리가 멀었다. 칸막이도 종이가 아니었으며, 호텔 건물
자체도 목조가 아니었다.
"전 일본인들은 모두 다다미에서 생활하는 줄 알았어요."
테오는 완전히 뜻밖이라는 투로 말했다.
"그건 옛날 얘기지."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너 같으면 다다미에서 사는 게 좋겠니? 우스운 얘기지. 일본인들이 다다미에서 살아 보려고
하는 서양인들을 뭐라고 부르는 줄 아니? '다다미족'이라고 한단다."
"하지만 이 방에서 일본적인 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 꽃병에 꽃을 딱 한 송이만 꽂아 놓은 것도 아주 일본적이야."
"엄마도 그렇게 잘하세요. 이카나를 배우셨거든요."
"이카나가 아니라 이케바나(생화. 전통적인 의미로는 일본의 고전적인 꽃꽂이 기술. 후에
의미의 폭이 확대되어, 꽃을 이용한 일본의 다양한 예술양식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겠지."
마르트 고모가 테오의 말을 정정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알려다 보니 넌 너무 성급하게 굴 때가 있어. 꺽다리 총각."
"그런데 고모, 아까 그 여자애는 인상이 무척 좋아요."
"난 그 애가 갓난아기였을 적부터 알고 지냈단다. 예전엔 동글동글한 복슬강아지 같았는데,
이제 보니까 아주 예쁜 처녀가 되었더라. 네가 보기에도 예쁘지?"
"네, 굉장히 예뻐요. 소피 마르소랑 비슷해요. 그런데 대학생인 것 말고, 뭐 다른 일 하는 건
없나요?"
"차차 알게 될 거야. 그러니 지금은 티베트 약이나 먹고 푹 좀 쉬렴."
그렇지만 테오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시코 양과 같이 벚꽃 구경을 하게 되다니....
추기경과 바티칸을 돌아다니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아닌가? 테오는 아시코의 흑단처럼 검은 긴
머리위에 벚꽃이 내려앉는 광경을 그려 보았다. 아시코의 약간 차가운 듯한 작은 손을 내가
따뜻이 녹여 줘야지.
생선회
오후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마르트 고모는 테오를 깨웠다. 기지개를 켜면서 테오는
그제서야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음을 알았다.
"이제 겨우 저녁 여섯 시밖에 안 되었는데 저녁이에요?"
고모가 장난기 어린 눈으로 테오를 쳐다보았다.
"너, 또 시차가 있다는 걸 잊었나 보구나?"
"아참!"
테오는 얼른 손목시계를 일본 시간에 맞게 고쳤다.
"아무래도 이렌느가 준 자명종을 써야겠어요. 이제 여섯 시라면 저녁 식사까진 아직도 한참
남았네요. 그 동안 뭘하죠?"
"생선 요리를 잘하는 식당이 나올 때까지 슬슬 거리 구경이나 하면 어떨까? 너도 괜찮겠지?"
"생선 초밥을 먹을 계획이시라면, 전 벌써 먹어 봤어요."
테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네가 그렇게 노상 뾰로통해 있으니까, 나도 슬슬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구나. 아시코와 함께
저녁을 먹는다고 해도 싫어?"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죠."
테오도 인정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전 생선회는 싫어요."
호텔 밖으로 나서자마자 테오는 상점에 진열된 신기한 아이디어 상품에 현혹되었다. 마르트
고모는 예산을 정해 주고, 그 한도 내에서만 물건을 사도록 허락했다. 테오는 최신식 극소형 TV
모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다 시장기가 돌기 시작하자 테오는 분홍빛
윤이 나는 대하와 섬세한 장미 모양으로 깎아 놓은 당근, 그리고 별 모양으로 자른 오징어로
덮인 밥 한 공기를 진열해 놓은 식당의 진열창 앞에 오랫동안 멈춰 서 있었다.
"군침이 도는 모양이로구나."
마르트 고모가 참견했다.
"하지만 저런 모조품이야. 플라스틱으로 만든 음식물 모형이라니까."
테오는 그러한 까닭에 실제로 먹을 수 없는 모조품 채소와 해산물, 얼음 띄운 코카콜라로
눈요기를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누나와 동생이 알면 얼마나 재미있어할까? 마르트
고모는 길거리에서 커다란 보랏빛 새를 수놓은 하늘색 기모노와 검은 무쇠 주전자를 샀다.
"아니 고모, 비행기 운송료는 어쩌시려고 그렇게 무거운 걸 사세요?"
테오가 만류했다.
"걱정 마, 네 엄마 드리려고 샀어."
고모는 참견 말라는 투로 말했다.
"그 파란 기모노는 보기 싫은데."
테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엄마에게 드릴 거라면, 기모노는 제가 고를게요."
마르트 고모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이미 테오가 재빠르게 고상한 바탕에 작은 금색 꽃이
수놓인 기모노를 골라잡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쉰 마르트
고모는, 그 미운 기모노를 구깃구깃 접어들고서 택시를 잡았다.
"걸어가기로 하셨잖아요."
테오가 놀라서 물었다.
"나도 가끔씩 지치고 피곤할 때가 있단다."
마르트 고모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불쌍한 고모. 테오는 갑자기 고모가 측은하게 느껴져서 그 손에 살짝 입을 맞췄다. 마르트
고모는 요란스럽게 코를 풀었다.
"그래도 주전자에 대해서는 타박을 하지 않는구나."
테오는 아무런 대구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벌써 똑같은 주전자를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난
생선회도 싫어하는데.... 하지만 다행히 아시코도 나온다니까."
이번에는 얌전한 감청색 원피스에는 귀여운 흰 칼라가 달려 있었다.
"넌 기모노는 입지 않니?"
테오가 섭섭한지 아시코에게 물었다.
"입을 때도 있지."
마르트 고모가 대신 대답했다.
"아주 특별한 종류의 기모노를 입을 때가 있어. 테오 너도 곧 볼 기회가 있을 테니 너무
조바심 내지 마라. 어서 음식이나 고르렴."
"생선구이."
테오가 결정을 내렸다.
유감스럽게도 구이는 없었다. 도마 위에서 토막토막 잘린 후에도 얼마 동안은 살아 있을
때처럼 꿈틀거리는 해산물들을 모두 날것으로 먹어야 했다. 테오는 아시코가 아직도 굼틀거리는
생낙지를 먹는 모습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나 곧 토할 것만 같아서 길가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불이 환하게 켜진 술집으로 손님들이 무리지어 드나들었다. 멀리서 먹은
것을 토하는 술취한 사람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테오는 배가 몹시 고팠다.
"어디 안 좋니, 테오?"
아시코의 목소리였다.
"나랑 같이 들어가자."
"싫어, 살아 있는 물고기를 어떻게 먹으란 말이야."
"그럼 익혀서 먹는 건 덜 야만적이고?"
마르트 고모가 화난 음성으로 테오를 나무랐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테오가 소리쳤다.
"그걸 보고 있을 수가 없어요. 속이 울렁울렁거린단 말예요. 그런데다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구요!"
아시코가 앞장서서 다른 식당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식사도 주문했다. 얼마 후 뜨거운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난 테오는, 파란 불꽃으로 데워지는 커다란 무쇠 용기 속에서 얇게 저민
쇠고기 조각이 익어가는 광경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젓가락으로 익은 고깃점을
집어서 계란을 푼 물에 담갔다가 먹으면 되었다.
"일본인들은 참 잔인한가 봐요."
테오가 한 입 먹은 후 말을 꺼냈다.
"익은 고기는 그래도 인간적이지요."
"날것으로 먹든 익혀서 먹든 어쨌거나 살아 있는 걸 잡아먹기는 매한가지 아니니?"
마르트 고모는 내내 테오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래도 저는 테오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험악한 분위기에 당황한 아시코가 참견을 했다.
"아니, 무슨 소리야."
마르트 고모가 반발했다.
"전통 고수라면 두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이 이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다니, 이거 일본인답지
않은걸."
"아주 여러 세기 동안 우리 일본 문화는 무사들의 지배를 받아 왔지요."
아시코가 말했다.
"무사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잔인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는 건 맥캐리 부인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셋푸쿠 말이군. 테오 너도 일본 무사들의 자살 의식은 알고 있지? 유럽에선 하라키리, 즉
할복 자살이라고 하지."
"아빠도 (하라키리)라는 잡지를 많이 모으셨어요."
테오가 말했다.
"그렇지만 일본의 자살 의식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어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셋푸쿠란 일본의 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최후의 행위를 가리킨다. 그 명예를
더럽혔다거나, 전투에서 패배했다거나, 혹은 자기 편을 배신했다거나, 아니면 상급자로부터
명령을 받았을 경우 철저하게 정해진 법도에 따라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흰 옷을
입고 동료 무사들이 보는 가운데서 손잡이가 짧은 단도로 자기의 배를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르는 것이었다. 훨씬 오래 전에는 이 의식을 지켜보는 이들 가운데서 선택된
사람이, 셋푸쿠를 하는 무사의 목을 베어 그 고통을 덜어 주기도 했다.
"그런 게 하라키리라구요?"
테오는 놀란 빛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셋푸쿠라니까."
아시코가 정정했다.
"이젠 거의 완전히 사라진 관습이야."
"하지만 아직도 일본에서는 대장의 원수를 갚는 의무를 다하고 나서, 한 병씩 셋푸쿠를 한
마흔 일곱 명의 무사를 추모하는 행사가 해마다 열리고 있잖아."
마르트 고모가 아시코의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아, 그건 말이죠. 그 사람들이 충성심의 표본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아시코가 웃으며 말했다.
"그 무사들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했지요. 자기들의 대장이 죽었으니 더 이상 부하들을 먹여
살릴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러니 무사들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게 된 검을 차고 이곳저곳을
방황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아주 분명한 임무를 부과한
거예요. 우리는 그들의 명예를 중요시하는 마음과 충성심을 공경할 뿐, 셋푸쿠를 했다는 사실을
추모하는 건 아녜요."
"그거야 알 수 없지."
마르트 고모는 계속해서 자기의 주장을 고집했다.
유명한 소설가였던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 자살한 것도 최근의 일이거든. 아주 굉장한
사건이었지. 잘 들어 봐, 테오. 미시마는 그날 육상 자위대 본부에 들어가 총감실을 점거했어.
그리고 나서는 TV 카메라 앞에서 일본의 전통적인 가치관이 사라져 감을 통탄한 뒤, 자기가
영광스런 그 전통 문화를 되살리겠노라고 선언했지. 연설을 마친 후, 미시마는 칼로 자기의 배를
갈랐어. 그러자 곁에 있던 친구가 미시마의 목을 친 후, 자기도 곧 따라 죽었지. 그게 70년대에
일어난 일이야..."
"미시마는 지나간 과거 속에서 살던 사람이었죠."
아시코는 주석을 달았다.
"그렇지만 우리 젊은이들은 현대에 살고 있어요."
"언제부터 그렇지?"
테오가 물었다.
"그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마르트 고모가 참견을 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기억할 테지?"
"그런데 극 언제였는지는 잊어버렸어요."
테오가 멋쩍어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미국은 이 신무기를 일본에 실험하였다.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래, 일본은 나치 독일 및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유럽 두 나라는 먼저 항복하였으나, 일본은 매일같이 적국의 전함 위로 가미카제를 파견했다.
"가미카제라면 저도 알아요."
테오가 자신 있게 말했다.
"'자살 부대'라는 말이죠."
"꼭 그렇지는 않아."
아시코가 말했다.
"'가미카제'는 말 그대로 하면 '신의 바람'을 뜻하지. 그렇지만 조종사들이 목표물에 폭탄을
투하함과 동시에 자폭했으니까, 자살 부대라고도 할 수 있겠지."
"정말 대단한 용기로군."
테오가 평했다.
바로 이것이 사무라이 정신이었다. 19세기 이래, 천황은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직계 자손인 신으로 대접받았다. 천황이 곧 신이었으므로 모든 일본인들은 천황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히로시마 원폭사건으로 천황이 항복을 결정하자, 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일부 군인들은 태평양 군도로 들어가 몇 년 동안 투쟁을 계속했다. 이들이
보기에 신의 자리에 앉은 천황은 절대로 패배할 수 없으며, 그를 섬겨야 하는 일본인들은 절대로
천황을 저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또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로군."
테오가 이같이 결론지었다.
"그런데 아리따운 아마테라스 여신은 전쟁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요? 동굴에서 나온
다음부터는 내내 세상을 환히 비추어 주는 줄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물론 테오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아마테라스는 슬픈 건국 신화를 남긴 두 신의 결합으로
생겨난 딸이었다. 이 한 쌍의 슬픈 사연은 모든 일본인들의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다. 일본의
건국 시조신은 이자나기였고, 그의 부인은 이자나미 여신이었다. 아직 땅이 생겨나기 전, 하늘의
신들은 일본을 만들라고 이 두 신을 무지개 다리 위로 밀었다. 이자나기가 어찌나 미남이었던지
이자나미 여신은 그만 투명한 일곱 빛깔 무지개 다리 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춘 다음, 그에게
'나와 결혼해 주시겠어요?'라고 물었다. 이렇게 해서 이 두 신은 결합하였으나, 이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자식은 너무나 괴물처럼 생겨서 부모 자신들도 놀랄 지경이었다. 말미잘, 문어,
그 외에 끈적쯘적거리는 생물체가 바로 이들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 농사는 자연
실패로 돌아갔다.
크게 실망한 두 신은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그러자 다른 신들이 이번에는 제발 관습대로
하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 두 신을 다시 무지개 다리로 돌려보냈다. 무지개 다리 한가운데에
서서, 이번에는 남신인 이자나기가 걸음을 멈추고 이자나미 여신에게 '나와 결혼해 주겠오?'라고
물었다. 이처럼 두 번째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을 하였으므로 이들의 새 결합부터는 잘생긴
자식들이 태어났다. 바로 일본 군도의 건국이었다.
"여기까지는 별로 슬프지 않은데..."
테오가 평했다.
그러나 마지막 아이를 낳던 도중 이자나미는 그만 숨을 거두었다. 너무도 큰 슬픔을 견디다
못한 이자나기는 지옥으로 이자나미를 찾아 나섰다. 기적적으로 이자나기는 이자나미를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뒤를 돌아다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자니 기는 이 조건을 어겼다. 그러자 이자나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자나미는 보기 흉하게 해체된 시체로 변해서, 이자나기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고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자나기는 머리에 꽂았던 빗을 던져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하였으나, 그
이후로 다시는 이자나미를 만날 수 없었다.
"듣고 보니, 테아노 할머니께서 들려 주셨던 이야기랑 비슷해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여자가 에우리디케였고, 남자는... 생각이 잘 안 나요."
남자는 마술사이자 시인이며 뛰어난 연주가인 오르페우스였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는 신비주의의 원조가 되기는 하였지만 자식을 남기지는 않았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뱀에게 물린 에우리디케가 아기를 낳을 겨를도 없이 죽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반면 이자나미는
지옥 밑바닥에서도 괴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위대한 어머니로 기억된다. 최고의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공포의 상징이기도 한 이자나미는 자신의 형태를 그대로 닮은 자연을
낳았으며, 이것이 바로 일본이라는 나라였다. 신도에 따르면, 이자나미의 딸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일본의 초대 천황에게 그 남동생 스사노오의 검을 맡겼다고 한다. 검은 신의
상징이었다. 스사노오는 과격한 성품을 지닌 신으로서 우주의 밤을 상징하며, 아마테라스는
광명의 세계를 각각 상징했다.
아마테라스 여신으로부터 스사노오의 검을 전해 받은 진무천황은, 그러므로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을 모두 물려받은 셈이다.
"결국 천황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만들어 낸 이야기로군."
테오가 중얼거렸다.
아시코는 테오의 말에 반발했다. 종교사가들에 의하면, 아마테라스 여신이 은신했던 동굴은
십중팔구 일본인들이 죽은 사람을 동굴에 장사지내던 시대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자나미 여신의
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그 동굴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따라서 빛을 되찾았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 다시 사는 것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태양처럼 사람들도
다시 환생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흔히 불평하는 유령의 형태로 나타나는 죽은 자들의
영혼은 달래 주어야 한다. 그리고 신검의 보유자인 천황은 일본의 영원불멸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한 가지 질문이 있어요. 신도가 뭐죠?"
테오가 물었다.
신의 길.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종교인 초기 신도의 숭배자들은 단순한 형태의 신, 즉 태양,
바람, 바위, 산, 꽃봉오리, 나무, 구름 등을 섬겼다. 그 외에도 신도에서 '가미'라고 일컫는
자연적인 신들은 곳곳에 널려 있어서 인간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신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면 많은 제물도 필요치 않았다. 옷 위에 줄을 하나 맨다거나 플래카드를 세운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저 기도를 드리면 그만이었다. 오랫동안 신도는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소박한
종교로 남아 있었다. 이는 화산 지형의 위협을 받기는 하지만, 동시에 푸르르고 평화스러우며
안개와 눈이 잦고, 남쪽은 열대 북쪽은 극지방의 기후를 가진 일본의 다양한 자연을 찬미하는
단순한 종교였던 것이다.
"신도가 그런 종교였다구요?"
테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그렇다면 많은 변화가 있었던 거로군요."
그렇다고 봐야 했다. 중국의 대승불교처럼 다른 곳으로부터 유입된 종교의 무게에 눌려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도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다만 새로운 종교와 결합하여 그 모습을 달리한 것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신도와 불교의 혼합이었다.
"통합주의의 기치하에서 새출발한 거로군요!"
테오가 소리쳤다.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토착 종교와 융화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더구나
이 토착 종교라는 것이 체계화된 아무런 철학도 없이, 단순히 자연 속에 깃들인 신을 섬기는
종교였기 때문에 화합은 한결 수월했다. 그러므로 초기의 불교 승려들은 '부드러운 광명의 신'을
섬기기 위해 마련된 신사에서 불경을 외웠다.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곧이어 승려들은
신도에 등장하는 신들이 어떻게 해서 사실은 보살들이었는지를 설명하는 전설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몇 가지 모순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한 예로, 살아 있는 모든 생물에 대한 자비와
신사에 바치는 죽은 물고기는 양립시키기가 어려웠다.
"아주 좋은 질문이로군요."
테오도 인정했다.
이렇게 되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심하는 고승에게 신들은 숙고하지 않고 행동하는
인간들의 잘못을 모두 떠맡는다는 설명을 계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들이 그 수명이 다한
물고기를 모아 인간들에게로 보내면, 인간이 신의 의지에 따라 이 물고기들을 잡아서 신에게로
돌려보낸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불교의 가르침과 모순될 것이 없다는 논리였다.
"아주 기묘한 논리로군요."
테오는 감탄했다.
그렇지만 불교 신자들 사이의 내분까지 피할 도리는 없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불교
신자들은 투쟁심이 강한 여러 종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일본 무사들의 명예 규약은 이 무렵에
생겨났다. 여러 세기에 걸쳐 계속된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천황은 재집권에 성공하고,
이어서 신도를 공식 종교로 선포했다. 그 날 이후 일본의 종교는 천황의 종교와 일치하게
되었다. 스사노오의 신검 덕분에 천황은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직계자손으로서
숭배를 받았으며, 천황의 이같은 절대적인 권력은 1945년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유지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일본 천황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말씀이로군요."
테오가 결론처럼 말했다.
"하지만 TV에서 보니까, 아직도 별의별 예의를 다 갖추어서 천황을 대접하던데요."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항복 문서에는 천황에게서 신격을 박탈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으나,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 열정까지 강제로 박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본인들은 다른 왕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왕으로 전락한 천황을 의회민주의의
수장으로 앉혀 놓고 계속해서 숭배했다.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복잡했다.
왜냐하면 '자유'라는 말이 고대 일본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이라는 말
또한 다를 바 없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일본 전체가 신이자 천황인 오로지 그 한 사람만을
섬기고 살았기 때문이다. 천황은 곧 일본 그 자체였다.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라는 개념은,
유일한 신이자 나라 자체인 천황이 군림하는 나라에서는 파고들 자리가 없었다. 또한 맥아더
장군은 여성의 투표권까지 요구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굉장한 물의를 빚었다. 이자나미의
딸들에게 투표를 하라고? 만일 그렇게 했다간 일본은 다시 무지개 다리 위에서 버릇없이
남자보다 먼저 구애한 여자의 재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 뻔한데? 이제 완전한 남성 우위
사회는 막을 내려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나가다간 일본은 여지없이 망해 버릴 텐데.
"그렇지만 일본은 망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건재하죠."
아시코가 침착하게 말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테오 네가 말했던 잔인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은 알겠다고 했던 거야.
여자를 천대하는 오랜 관습이 아직도 판을 치고 있거든."
"그거 잘됐군."
마르트 고모가 전혀 뜻밖의 말을 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렇게 신도를 유지하느라 열을 올리지?"
"그런 말이죠. 신도가 자연과의 동화를 꾀하는 종교이기 때문이지요. 가미란 생명에 대한
존중을 의미해요. 해안에만 바글바글 인구가 모여 살아야 하는 나라에서 나무와 풀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산소의 공급원이 사라진다면 심각한 일이잖아요. 이 도시를 좀 보세요. 온통
콘크리트와 유리뿐이죠. 질식하기 딱 알맞다구요. 자연에 정말로 신들이 깃들여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어쨌든 열렬한 신도 숭배자예요."
"그럼 넌 불교 신자가 아니로구나."
테오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어떤 점에서는 불교 신자라고도 할 수 있어. 예를 들어 꽃을 관조한다거나 다도를 따르는
점으로 보면, 나도 불교 신자야. 또 전술을 세우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참선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야."
순간 테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참선? 전쟁? 다도? 이 모든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일까?
첫 번째 참선 연습
"잠깐만!"
테오가 중얼거렸다.
"이제까지 나는 '참선'이라면 굉장히 근사하고 좋은 거라고 생각해 왔어.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성적이 떨어지면 참선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들 했었거든. 다시 말해서 걱정거리가 있을 때
참선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런데 전쟁이라니, 그건 무슨 소리지?"
"그대 일본은 더 이상 치밀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전투 기법을 완벽하게 가다듬었단다."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그 과정에서 참선이 개입한 거야. 내 생각엔 아마 테오 넌 그게 뭔지 모를 것 같구나. 공사상.
다시 말해서 생각에 대해 생각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야."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어요. 생각에 대해 생각지 않는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만일 네가 너는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넌 계속해서 생각을 하는 거지. 그렇지?"
고모가 물었다.
"테오 너도 졸업반에 올라가서 테카르트 철학을 배우면 알게 될 거야.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생각하므로, 결국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참선에 있어서는 그 반대야. 생각이 모두
사라지는 완전한 공백에 도달하는 것이 선의 이상이지."
"나는 내가 이 그릇을 집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릇을 집는다...."
테오는 그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 가며 고모의 말을 흉내냈다.
"이건 완벽한 행동일 뿐이지요."
"아니 그렇지도 않아. 차를 몇 방울 흘렸으니까."
마르트 고모가 테오를 놀려댔다.
"그 행동이 완벽하려면, 네가 그 그릇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야 해. 네
손이 너와는 상관없이 저 혼자서 그릇을 집어야 한다는 말이지."
테오는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시킨 다음 한참을 망설이다가 손을 뻗었다. 찻잔에 담긴 차가
온통 쏟아졌다. 아시코가 깔깔대며 웃었다.
"웃지 마! 너도 한 번 해봐. 그렇게 쉬운 일이 아냐."
무안해진 테오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런 환경에선 곤란해."
아시코가 대답했다.
"선은 조용하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방에서 하는 거야."
"어쨌든 저로서는 찻잔하고 전쟁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테오가 젖은 소매를 훔치며 투덜거렸다.
"그렇다면 테오에게 활 쏘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떨까? 테오가 굉장히 좋아할 텐데..."
선 전통으로부터 유래된 전술로는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잊는 훈련을 꼽을 수
있다. 궁도의 경우, 화살이 완벽한 몸의 움직임에 의해 저 혼자 활시위를 떠났을 때 그 목표물에
가장 근접하게 도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머릿속이 공백상태였을 때, 가장 명중시킬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목표물을 향해 화살을 겨누었을 경우에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 목표물을 빗나가기가 쉽다. 그러나 반대로 화살과 자기의 몸을 일치 시켰을 경우라면,
정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이 활과 화살이 움직여 그 목표물에 도달할 수 있다. 이처럼 완전히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있어야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제야 좀 알겠어요."
테오가 대답했다.
"운동선수들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연습 때마다 하는 소리죠. 올림픽 경기 내내 들었어요."
"참선은 국경을 초월하거든."
아시코는 어쩐지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요즈음은 아무 때나 다 선을 끌어들이는 것 같아. 바쁜 비즈니스맨들의 스트레스 해소책인가
하면, 운동선수들의 긴장완화제 역할도 하고, 풍기문란을 통제하기도 하지. 일본에서조차도 선은
이제 잘 나가는 상품 취급을 받으니까."
"어라, 어라. 얘좀 보게나. 아시코 너는 평화주의자니까, 전쟁 기술이 사라져 간다고 슬퍼할
것까진 없지 앓을까?"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제가 보기에 참선은 다도와 어울렸을 때 가장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아요."
아시코가 대답했다.
"그것 참 반가운 얘기로군."
테오가 말했다.
"차를 마실 때도 따로 의식이 필요하단 말이야?"
"필요한 정도가 아니란다."
마르트 고모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직접 보고 난 다음에 좋아해도 늦지 않을 거야. 그 이야긴 그 때 가서 하자."
"왜요?"
아시코가 놀라서 물었다.
"지난번 다도 예법에 따라 차를 마셨을 때 별로 좋지 않으셨어요?"
"물론 좋았어. 좀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말야."
"맥캐리 부인, 부인은 아직 선의 정신을 습득하지 못하신 모양이에요. 이것저것 걱정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신다는 걸 저도 잘 알아요."
"참으세요, 고모!"
테오가 소리쳤다.
"참선을 하셔야 한다니까요."
"아이쿠, 너 때문에 정말 골치로구나."
고모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같은 녀석이랑 함께 있으면서 어떻게 머리를 비울 수 있겠니?"
"네 생각에 테오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시코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뛰어난 지적 능력과 남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이 필요한데, 테오는 그걸 모두
갖추었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머리도 나쁜데다가 남을 불신하는 여자라는 소리로구나."
마르트 고모가 투덜거렸다.
"난 벌써 선의 원리는 알고 있어. 다만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싶을 뿐이지."
"그런데 마르트 고모, 자아를 버리라는 말은 아시코가 지금 처음으로 한 게 아녜요.
예루살렘에서 이맘도 똑같은 말을 했고, 바라나시의 요가 스승도 매일 같은 말을 반복했지요.
라마승 감포도 제가 불상 앞에서 기절한 순간, 그게 바로 기도라는 말씀을 하셨잖아요."
"테오 너 언제 불상 앞에서 기절했었어?"
아시코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것 보세요, 맥캐리 부인."
"아닌게아니라 테오는 아시아가 체질에 맞는 모양이야."
마르트 고모도 마지못해 시인했다.
"그렇지만 여정이 모두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
"맥캐리 부인은 자아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못마땅하신가 봐요."
아시코가 말했다.
"그래,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 난 자유롭고 싶어!"
마르트 고모가 큰 소리로 말했다.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시코가 물었다.
"자기를 통제하는 거겠지, 꼬마 아가씨. 우리 나라에선 자기 자신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분명하게 사고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런데 참, 왜 프랑스어를 공부하지?"
"직업을 구하려구요."
아시코가 대답했다.
"그리고 제가 프랑스를 약간 알기 때문이죠. 그것에서는 자기 마음에 맞는 신랑감을 고를 수
있지만, 여기서는 불가능하거든요."
"마음에 맞는 남편을 자유로이 선택하고 싶단 말이지?"
마르트 고모는 비웃는 투로 말했다.
"그건 조금 전에 한 이야기와 모순인걸. 남편에 관한 한 부모의 결정에 자기 자신을 맡길 수
없다. 이런 말이겠지? 아까 말하던 자기를 버리는 마음은 그새 어디로 도망간 모양이네."
그러자 아시코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테오가 아시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고모는 저렇게 생각나는 대로 마구 말을 하지만 심술은 전혀 없으셔. 언제나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고 싶어하시지. 난 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
"정말이니?"
아시코가 두 눈을 감은 채 조그맣게 속삭였다.
"넌 일단 네 행복을 선택한 다음에 너 자신을 잊어버리려 하는 걸 테지."
테오가 조용히 말했다.
"자, 날 좀 봐."
아시코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망설이다가 마침내 테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것보다 더 집중해야 해."
테오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아시코는 빛나는 눈길로 테오를 바라보았다.
"자 보세요, 마르트 고모. 이게 바로 참선이에요!"
테오가 기쁜 듯이 외쳤다.
"엉큼한 건달녀석 같으니라구."
고모는 입 안에서 우물우물 투덜댔다.
"자 꼬마 연인들, 난 이제 피곤해서 호텔로 돌아가야겠어."
무안해진 아시코는 보란 듯이 테오에게서 손을 뺐다. 테오도 얼굴이 빨개졌다. 날더러
건달이라구?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젊은 아가씨를 도와주려 한 것뿐인데, 그걸
가지고 아가씨를 꼬시려 한다니 말도 안 돼!
19 꽃, 여자, 차
아시코의 비밀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마르트 고모는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쾅 닫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테오는 재빨리 옷을 벗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자는 시늉을 했다. 이윽고
검은 실크 파자마 차림에, 머리에는 주름이 많이 잡힌 분홍빛 레이스 커버를 쓴 마르트 고모가
굳은 표정으로 욕실에서 나왔다. 테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너 정말 못쓰겠구나!"
마르트 고모가 테오의 베개를 치며 소리쳤다.
"너 계속 이러면 여행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돌아가는 거야, 알겠지?"
"도대체 뭘... 왜 이러시는 거예요?"
영문을 모르는 테오가 더듬더듬 고모에게 물었다.
"왜 이러는냐구? 넌 변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럴 수 없이 나한테 상냥하게 대하더니,
이젠 완전히 네 멋대로 구는 구나. 나한테 선전포고를 하고선, 어린 계집애와 짝짜꿍이하고서
나를 놀려대기야?"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예요? 우리 둘 다 젊었다는 게 그렇게 못마땅하세요?"
"또 시작이로구나.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부터 넌 줄곧 나를 늙은이 취급하더구나."
"고모는 나이에 비해 훨씬 젊으세요. 그건 고모도 잘 아실 거예요."
테오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아시코와 전 거의 동갑이에요. 제 말이 틀렸어요?"
"아시코가 너보다 두 살이 많지. 그러니까 그 애는 거의 성인인 셈이야, 넌 아직 아니고."
"우리는 생각하는 게 비슷해요. 친구라는 말씀이에요."
테오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 애 조심해야 한다."
마르트 고모가 갑자기 언성을 낮추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왜요? 그 애도 어디가 아픈가요?"
"아니, 그런 건 아냐."
마르트 고모는 몇 차례 헛기침을 했다.
"이런 소리 하면 안 되는데... 너만 알고 있겠다고 약속하면 말해 줄게."
아시코의 이야기는 결국 일본의 이야기와 중첩된다.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시코의
조부모는 나가사키 원폭을 피해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하여 3만 9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마르트 고모는 히로시마에서 매년
거행되는 평화 기념 행사장에서 아시코의 조부모를 처음 만났다. 마르트 고모 역시 그들만큼이나
전쟁을 증오했으므로 곧 오카라 씨 부부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 오카라 씨 부부에게는
애지중지하는 외동아들 히로가 있었는데, 그 나이 스무 살 되던 해 자기 나이 또래의 많은 일본
젊은이들처럼 미국의 한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대학에서 히로는 프랑스 여학생과 열애 끝에
결혼을 했고, 젊은 오카라 부인은 곧 임신을 해서 아시코를 낳았다.
"그렇다면 아시코는 50퍼센트는 프랑스인이로군요. 전 전혀 짐작치 못했어요."
테오가 깜짝 놀란 투로 말했다.
"아직 내 얘기 덜 끝났어."
마르트 고모는 비밀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비록 아기까지 낳긴 했어도 이들의 결혼은 순탄치 못했다. 프랑스 부인은 일을 하고
싶어했으며, 일본 남편은 절대로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혼을 한 후, 히로는
어린 아시코를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히로의 부모는 일본의 관습대로 그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아들을 다시금 결혼시켰다. 히로의 두 번째 부인은 아시코를 자기 친딸처럼 곱게 길러,
아시코는 나이 또래의 불량스런 아이들처럼 머리카락을 빨갛게 물들이는 일도 없었고, 용돈을
벌기 위해 전화방에서 매춘행위를 하는 일도 없었다. 아시코는 오히려 일본의 전통적인
가치에다가 정절까지 덧붙인, 그런 아이였다. 아시코는 자기 친엄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이런 아시코의 성격은 더더욱 신기하게 보였다. 아마도 아시코는 프랑스어를
공부하기로 결정한 무의식적인 이유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 만나 보니까 예전의 아시코가 아닌 것 같아."
마르트 고모가 말했다.
"전에는 한번도 일본의 사회의 경직성을 비판한 적이 없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순종적이고 전통만 고집하던 아이였는데..."
"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조심할게요, 약속해요."
고모의 이야기에 약간 흥분한 테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한테도 조심성 있게 굴 테지?"
마르트 고모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물론이죠. 그럼 이젠 화해한 거죠?"
대답 대신 마르트 고모는 테오의 곱슬머리를 온통 엉망으로 흐트러뜨렸다.
이상한 연극
다음날 테오는 고모의 기분을 맞추느라 여러 모로 노력했다. 아침 식사를 고모의 침대에까지
가져다 드렸으며, 고모가 잔소리를 하기도 전에 티베트 약을 깨끗이 먹어치우고 나서는, 고모의
부츠와 화장품까지 척척 가져다 드렸다.
"너무 그럴 것 없어, 그러다간 나도 버릇될까 겁난다."
마르트 고모는 싫지 않은 투로 말했다.
"난 괜찮으니까, 오늘 스케줄에 대해서나 준비해 두렴."
"왜요? 사찰 구경을 갈 건가요?"
"어떤 의미에선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지. 사실을 연극을 보러 갈 거야."
"일본어로 하는 연극이라면 전 완전히 귀머거리라는 걸 잘 아시죠?"
그렇다면 귀머거리로 있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오늘 보기로 한 연극은 일본어로
노래를 부르는 연극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공연예술인 '노'를 보러 갈
예정이었다.
"그래도 좌석표를 사서, 앉아서 보는 거겠죠?"
테오가 물었다.
"원한다면 미사드릴 때처럼 책을 펴놓고 눈으로 대사를 따라 읽을 수도 있지."
고모가 웃으며 말했다.
"대충 무슨 이야기예요. 그 노라는 연극은요?"
테오가 제법 흥미를 느끼는지 진지하게 물었다.
"유령 이야기."
"하얀 도포자락을 뒤집어쓰고 쇠사슬을 칭칭 감은 유령이라면, 전 너무 좋아해요."
테오가 노에 나오는 종류의 유령을 좋아할는지는 두고 봐야 알 것이다. 마르트 고모는
처음으로 노 공연을 보았을 때 너무나 지루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끝나갈
무렵에는 아예 반쯤 잠이 든 상태에서 이상하게 신비스런 연극의 시적인 분위기에 이끌렸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마르트 고모는 다음날 다시 그 극장을 찾았다. 하루 종일 계속되는 공연
일정은 몇 가지의 노 연극과 저속한 대중 희극인 교겐이 번갈아 가며 짜여져 있었다. 일본
관객들이 교겐을 보며 눈물이 나도록 웃어대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마르트 고모는
교겐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반면 노의 형언하기 어려운 마술적인 분위기에 매료된 마르트
고모는 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테오까지 단번에 노 공연을 좋아하게 될는지는
의문이었다.
마르트 고모는 아시코를 불러 테오에게 노에 대한 사전지식을 주도록 부탁했다. 호텔의
찻집에서 만난 이들은 향취 그윽한 녹차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녹차의 맛에 반한 테오는
새끼손가락을 공중으로 향한 채 조금씩 음미하듯 차를 마셨다.
"그 손가락은 왜 그렇게 하니?"
마르트 고모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를 마실 때에는 격식을 차려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요?"
테오가 물었다.
"절대로 아니지. 새끼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내버려두고 아시코 이야기나 들으렴."
"우선 노 연극에서는 무대가 굉장히 단순해. 언제나 똑같은 무대야. 뒤쪽에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다리가 있어. 갈대도 드문드문 있고. 측면에는 검정색과 회색 옷을 입은
악사들이 자리잡고 있지. 전체적으로 노 무대는 완전히 나무로 되어 있어. 그래서 신사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 거기도 전부 나무로 되어 있거든."
"그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니?"
"응, 왜냐하면 20년마다 신사를 완전히 해체해서 다시 세우거든. 신사의 특징이라면, 아마도 그
사당이 영원하지 않다는 점일 거야. 우리는 제단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가면서 신들을 숭배해.
자연에서처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건 없는 법이거든. 계절과 시대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하니까."
"그럼 일본에는 오래 된 유적이 없단 말이니?"
테오가 뜻밖이라는 투로 물었다.
"물론 있지. 오래 도니 불교 사찰이나 궁궐, 대저택 같은 건 남아 있지. 하지만 신사 중엔
없어. 노 연극의 무대도 비슷해. 언제나 똑같은 것 같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바뀌고 있거든. 극 중
이야기는 집 안이 아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지. 액션은 주로 강가나 길가, 혹은
나룻배에서 일어나. 강을 건너야 할 일이 자주 있거든. 등장인물은 대략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어.
줄거리를 진행하는 사람, 그 이야기에 대해 주석을 다는 사람, 그리고 고통을 받는 사람, 이렇게
말야. 나레이터가 진행과정을 말하면,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합창단이 주석을 붙이는 거야. 극의
주인공, 다시 말해서 고통을 받는 사람은 나무 가면을 쓰고 등장해. 입 부분에도 구멍이라곤
없는 가면이야."
"입 부근에도 구멍이 없으면 어떻게 대사를 하지?"
테오가 물었다.
"노의 주인공은 언제나 불행을 당한 사람이야. 가면 때문에도 그렇지만, 주인공은 늘 짓눌린
듯한 목소리로 말을 하지. 그래야 고통을 당한다는 느낌이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잖아. 노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음성은 아주 특별해. 원초적인 외침처럼 배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나 할까?
주인공은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냐."
"인간이 아니면, 그럼 신이야?"
테오가 물었다.
"여자일 수도 있고 남자일 수도 있지만, 좌우지간 너무나 큰 괴로움에 시달리기 때문에 그
하소연이 마치 다른 세계로부터 전달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노의 주인공은 거의
신성불가침이라고나 할까? 주인공은 무대에서 열광하기도 하다가 신음하기도 하고, 또 통곡을
하기도 하지. 아참,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었어. 내가 방금 통곡을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기
소매 끝을 눈으로 가지고 가면 그게 우는 거야. 다른 동작은 필요 없어. 때로는 춤을 추기도
하지. 예전에 일본 사람들이 신도에 모신 신들 앞에서 춤을 추었던 것처럼 말야."
"그리고 또 어떻게 하지?"
테오가 열심히 귀담아듣다가 물었다.
"그게 전부야."
아시코는 미소를 지었다.
"나레이터는 눈물짓는 주인공에 대해 계속 연민의 정을 표하고, 합창단도 마찬가지야.
주인공은 춤을 추다가 어둠 속으로 서글프게 사라져 버리지."
"시시할 것 같은데...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볼 연극의 내용은 뭐지?"
가엾은 미친 여자의 이야기였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이상한 짐승이라도 대하듯 여자를
흘끔흘끔 곁눈질했다. 나레이터는 여자를 배에 태워 강을 건네 주는 뱃사공이 맡는데, 뱃사공
역시 강가에서 방황하며 소리를 지르는 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미친 여자는 배에
오르자 뱃사공에게 자기는 노예상인들에게 잡혀간 아들을 찾아 헤매는 중이라고 설명한다.
갑자기 나레이터는 이 강둑에 버려져 있던 어린아이를 기억해 낸다. 탈진해서 숨을 거두기
직전에 어린아이는 자기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 위에
버드나무를 심어달라고 부탁한다. 이 말을 듣고 미친 여자는 통곡한다. 그 아이가 바로
행방불명된 자기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레이터는 여자를 무덤으로 안내한다. 엄마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자, 아이가 다시 나타난다. 엄마와 아이는 서로 손을 내민다. 하지만 곧 아이는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고, 엄마만 그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홀로 앉아 있다.
"별다른 재미는 없겠군."
테오가 말했다.
"지루하면 중간에라도 나오자, 테오"
마르트 고모가 서둘러서 제안했다.
"엄마 역을 맡은 배우는 유명한 배우예요?"
"노 공연에는 남자 배우들만 출연할 수 있어."
아시코가 대신 대답했다.
"그러니까 엄마 역을 맡은 배우도 물론 남자지. 하지만 아주 완벽하게 연기를 잘해."
"그렇다면 성도착증 환자 아냐?"
테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가서 보면 그런 말은 쏙 들어갈걸."
아시코가 장담했다.
"아시코, 그런데 노에서 한 가지 설명을 빠뜨린 것 같아."
마르트 고모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 그렇군요."
아시코도 시인했다.
"테오, 연극 도중에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자주 들릴 거야. 그건 일본인들이 자주 외우는
불교식 기도문이야."
"그렇다면 그 연극은 도대체 신도 연극이니, 불교 연극이니?"
테오가 종잡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면서 물었다.
"둘 다. 일본에서는 모든 게 그런 식이야."
아시코는 이렇게 말을 마쳤다.
어린 유령
극장 안은 입추의 여지없이 꽉 들어찼으며, 대본을 챙겨든 관람객이 대부분이었다. 막은
내려져 있지 않았다. 배경 천에 세심하게 그려진 소나무는 나무로 만든 다리 너머로 가지들을
드리우고 있었고, 무대 전면에는 녹색 베일로 덮인 대나무가 배치되어 있었다. 가느다란 가지
하나가 위로 비쭉 솟아 있었다.
"무덤과 버드나무야."
아시코가 설명했다.
"무대장치 하는 데에는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겠군."
테오가 주석을 달았다.
악단이 입장해서 관중석을 향해 인사를 한 다음, 무대 측면에 자리를 잡았다. 북소리에 이어
굉장히 높은 음색의 피리가 연주되자, 곧이어 약간 쉰 듯하면서도 장엄한 합창단의 노래가
뒤따랐다.
"꼭 고양이 울음소리 같아."
테오가 아시코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그렇지만 아시코는 웃지 않았다. 아시코는 정신을 바짝 집중해서 노의 서곡을 듣고 있었다.
어둠침침한 소나무 앞에서 주문을 읊는 장면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윽고 뱃사공과 엄마가
등장했다. 커다란 모자를 쓴 엄마는 손에 대나무 가지 하나를 들고 있었다.
"손에 든 저 대나무 가지는 미쳤음을 의미하는 거야."
아시코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제 잘 봐."
주인공이 쓴 가면은 타원형의 얼굴 모양이었으며,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바탕에 가느다란
눈썹과 빨갛고 얇은 입술이 그려져 있었다. 배우는 체격이 매우 컸으며, 손 또한 굉장히 컸다.
도저히 여자 역할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심기가 불편해진 테오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았다. 이건 어른들을 위한 인형극 같아. 꽤나 지루하겠군.
엄숙하기만 하던 주인공은 천천히 발뒤꿈치를 들고 몸을 돌려 관중석을 향하더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장을 뚫고 나오는 듯한 음성을 듣자, 테오는 자기도 모르게 전율했다. 불행한 미친
여자는 죽을 정도로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어떤 울음이나 눈물도, 이처럼
비인간적인 울부짖음으로부터 전해 오는 심연의 깊이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주인공의
목소리가 어찌나 처절하면서도 다정다감한지, 테오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대사의 내용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눈으로는 배우들의 느린 움직임을 열심히 따라다니고 귀로는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들었다. 극의 흐름에 몸을 맡긴 것이다. 곧 기분 좋게 머리가 빙빙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합창단의 노래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려 오는 듯했고,
북소리는 점점 숨가쁘게 울렸다. 엄마가 흔들어대는 종소리가 끝없이 귓가를 맴도는가 싶더니,
갑자기 죽었던 곱슬머리 아이가 나타났다. 아이는 쉬지 않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외웠다.
테오는 정신이 몽롱해졌다. 죽은 아이가 자기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형!" 그러더니 어린
유령은 무덤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했다. "나는 형과 함께 태어났지. 난 형과 더불어
산다네.... 엄마에게 말해 줘. 나무아미타불...."
깜짝 놀란 테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서 벌린 손가락 사이로 무대를 응시했다. 마치
마술처럼 어린아이의 하얀 몸체는 무덤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엄마는 울면서 무대를 떠나갔다.
아시코의 말대로 소매 끝이 눈 가장자리를 스치고 있었다.
"테오, 일어나, 테오."
마르트 고모가 속삭였다.
"이제 끝났어."
"테오는 자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아시코가 말했다.
"안색이 몹시 창백해요."
"테오, 말 좀 해봐."
마르트 고모는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했다.
"괜찮니?"
"아뇨."
테오는 신음하듯 가까스로 대답했다.
"정신이 멍해요."
"빨리 의사를 불러야겠어."
마르트 고모가 아시코에게 부탁을 했다.
"얘, 여기 좀 누워. 너, 또 정신을 잃고 기절한 거니?"
"으음..."
테오는 계속해서 신음 소리를 냈다.
"머리가 어지러워요. 아시코는 어디 있어요?"
"현기증이 나는 모양이로구나. 난 네가 현기증이 날 때마다 간이 콩알만해진단다."
마르트 고모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아, 저기 의사가 오는 구나."
의사는 테오를 긴 의자 위에 누이고 나서 맥을 짚어 보고, 심장에 청진기를 댔다. 심전도
측정기를 작동시킨 후 테오의 피부를 살피고 복부를 만져 보더니,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서 주머니에서 사탕을 한 개 꺼내 테오의 입에 집어넣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아시코가 마르트 고모에게 말했다.
"약간 저혈당기가 있나 봐요."
"다른 데는 괜찮고?"
마르트 고모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아무 데도 이상이 없대요, 맥캐리 부인."
아시코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제가 맹세할게요."
"의사한테 테오 얘길 다 했는데도?"
"제가 전부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병 때문이 아니라 혈액 중에 당이 모자라서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아시코가 숨김없이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자, 테오 너도 들었지?"
마르트 고모가 테오에게 소리쳤다.
"휴우."
테오는 입안의 사탕을 빨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샹...이...."
"입에 음식물 넣고 말하지 말랬지."
고모가 테오를 나무랐다.
"얼른 깨물어서 삼키렴. 자, 다시 말해 봐."
"제 쌍둥이 형제를 봤어요."
사탕을 완전히 삼킨 테오가 그제서야 확실한 발음으로 말했다.
"무대에 있던 아이, 걔가 바로 제 쌍둥이 형제예요. 저한테 그렇게 말했다니까요."
아시코는 경악을 금치 못한 표정으로 마르트 고모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맥캐리 부인은 놀라는
눈치가 아닌걸. 오히려 그 반대야...
"이제까지는 그 애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지. 안 그러니?"
마르트 고모는 테오를 품에 안으며 중얼거렸다.
"오늘 처음 봤어요."
테오가 나직이 속삭였다.
"저처럼 곱슬머리예요. 그 앨 보게 돼서 기분이 참 좋아요."
"그 심정은 나도 이해가 가는구나."
마르트 고모가 맞장구를 쳤다.
"좀더 누워 있으렴. 그 애가 널 지켜 줄 거야."
그리고 마르트 고모는 조용히 발끝으로 걸어 테오에게서 멀어졌다. 아시코는 마르트 고모를
한쪽으로 데려갔다.
"맥캐리 부인, 무대엔 아이가 없었어요."
아시코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노 연극에선 그 엄마만 아이를 알아보는 것으로 되어 있고, 관객들은 그저 아이의 음성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거든요."
"그건 나도 알아."
마르트 고모가 아시코의 말을 끊었다.
"그렇다면 부인도 아이를 보셨어요?"
"물론 아니지. 난 정신이 말짱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테오는 어떻게 해서 아이가 나타났다고 하는 거죠?"
"테오는 그저 아이를 본게 아니라, 지하 세계에 사는 자기 쌍둥이 형제를 만난 거야."
마르트 고모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테오를 따라 다니는 유령이 있다는 말이야.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니?"
"그렇다면 테오가 환영을 본다는 말씀이세요?"
아시코는 걱정이 되는지 계속해서 꼬치꼬치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
마르트 고모는 말꼬리를 돌리며 막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도 확실하게는 몰라."
"혹시 부인은 유령이 있다고 믿으세요?"
"그런 건 왜 묻지? 그럼 유령이 없을 것 같아?"
마르트 고모는 아시코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되물었다.
홀로 피었다 지는 꽃
당분을 섭취한 테오는 원기를 되찾았다. 방금 전까지의 현기증은 잊은 듯 테오는 다시금
활발해졌다. 이제까지 마르트 고모가 관찰한 바로는, 테오가 정신을 깊이 잃으면 잃을수록
깨어난 후 더한 허기증을 느꼈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행은 근처 간이식당에서
무꽃을 동동 띄운 감칠맛 나는 수프를 먹었다.
"좌우지간 노 공연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요."
테오가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그 절묘한 노래는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죠?"
"배로부터 나오는 노래란다."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요가의 '옴'이랑 마찬가지 원리겠지."
"아, 그렇군요!"
테오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소리쳤다.
말을 마치자마자 테오는 턱을 안쪽으로 깊이 잡아당기며 '아-오-우-움-미-아-오-우-이...'를
거듭했다.
"더워서 헐떡이는 고양이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삐걱거리는 문소리 같기도 하구나."
마르트 고모가 테오를 놀렸다.
"노는 아주 어려운 예술이에요."
아시코가 입을 열었다.
"뱃속으로부터 소리를 끌어낼 수 있으려면 오랜 연습이 필요하지요. 무대에서는 평소의 자기
목소리는 잊어버려야 해요."
"오페라도 마찬가지지."
마르트 고모가 덧붙였다.
"누구나 다 그런 목청을 타고나는 건 아니란다."
"반드시 소질의 문제만은 아닐 거예요. 명상도 중요해요. 어떤 배우들은 30년 동안이나 연기를
한 후에야, 비로소 꽃의 철학을 터득하기도 한 대요."
"도대체 꽃이 어쨌길래, 노상 꽃 타령이지?"
테오가 물었다.
꽃과 노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15세기에 신비한 노 연극이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불교와 신도가 융합되어 새로운 종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신들이 추는
가구라와 유사한 교겐의 몸짓에서 신도의 자취를 읽을 수 있다. 특히 이 가구라는 아메노우즈메
여신이 아마테라스 여신을 동굴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추었던 춤으로 유명하다. 노 예술의
창시자인 제아미 모토키요는, 신도 외에도 참선에서 크게 영감을 받아 노를 정착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이야기는 다 좋아. 그런데 꽃과는 무슨 상관이 있냐니까?"
테오가 조바심을 치며 재차 물었다.
마침 그 점에 대해 설명을 하려던 참이었다. 제아미에 따르면 노 예술은 일시적으로 피었다
지는 꽃들의 덧없음을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손을 놀리는 동작이나 나무 가면
위로 비추이는 조명, 목놀림, 느린 걸은 등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활짝 피었다가 시들려고 하는
꽃이 주는 안타까운 감동을 관객들에게서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급하고
충동적인 젊은 시절을 보내고, 아직 노년기에 접어들지 않은 나이야말로 노 전문 배우들이 가장
성숙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순간은 공백의 순간, 즉
아무런 연기도 하지 않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서, 수년간의 공연으로 달관의 경지에 이른 배우가
무대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극 전체를 이끌어 가는 그런 순간을 말한다. 따로 연기를 하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 무대를 충만케 만드는 뛰어난 배우들이 있게 마련이다. 배우가 감정
표현을 절제할수록 관객들이 느끼는 감동의 깊이는 더해진다. 꽃은 표현하려 들지 않는다.
피었다가 지면 그뿐이다. 이것이 바로 노 연극의 본질이다.
"그런 이야기는 고모한테나 해드려. 아직 노년기에 접어들지 않은 우리 고모한테 말야."
테오는 하품을 하며 말을 마쳤다.
"테오 너, 약속했잖아!"
고모가 갑자기 목청을 돋우어 소리를 질렀다.
놀란 아시코가 얼른 주인공은 손에 부채를 쥐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춤동작에 따라 균형을
맞추기 위해 부채를 접기도 펴기도 한다는 설명이었다. 접었다 폈다 하는 쥘부채의 동작을 통해,
꽃의 이미지가 시적으로 표현됨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정신을 비움으로써 배우의 몸에서
나뭇잎과 줄기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배어 나오게 되며, 부채는 꽃잎의 자태를 재현한다. 노
연극에 쓰이는 커다란 쥘부채는, 일본의 부채 중에서도 으뜸으로 칠 만큼 아름답다. 나무 가면
또한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원한다면 테오도 마음에 드는 가면을 살 수
있다고 아시코는 덧붙였다.
"글세."
테오는 반쯤 잠이 든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 목소리..."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테오는 식탁에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다.
"이번엔 정말로 자는 것 같군."
마르트 고모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마 감정을 추스르기가 무척 어려웠을 거야."
"유령 때문에요?"
아시코가 물었다.
"그렇다면 테오는 그것 때문에 병이 난 건가요?"
"틀림없이 그럴 거야."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테오는 자기도 잘 모르는 비밀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게 확실해. 비밀이란 건 건강에
치명적이지."
"네, 그건 저도 알아요."
아시코가 얼굴을 붉히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타고 갈 택시 좀 불러 주겠어?"
마르트 고모는 깊은 상념에 잠긴 채, 이제 막 핏기 시작하는 벚꽃을 바라보았다. 도시를
배경으로 피어 있는 꽃들은 테오가 산 코카콜라 병만큼이나 인위적으로 보였다.
멜리나와의 통화
테오는 오래도록 내처 잤다. 마르트 고모도 그렇게 하고 싶었으나,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에
오가는 통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테오가 자꾸 쌍둥이 형제를 본다는 사실은, 그만큼 테오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얘기는 아닐까? 마르트 고모는 마침내 멜리나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음을 다잡은 마르트 고모는 욕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단호한 태도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마르트예요. 아뇨, 걱정 마세요. 테오는 잠들었어요. 네? 매일 오후면 그렇게 자는걸요. 한
가지 아주 중요한 말을 해야 하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잘 들어야 해요, 멜리나. 테오의 병세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맹세해요. 뭐에 대고 맹세하느냐구요?"
마르트 고모는 잠시 송화기를 떼고 생각에 잠겼다.
"테오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어요. 그러면 되겠어요? 좋아요, 그럼 잘 들으세요. 테오는 내내
자기 쌍둥이 형제 얘기를 해요. 오 멜리나,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말아요. 제발 부탁이에요. 내가
테오에게 말한 게 아니라니까요. 아니라면 그 애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구요? 테오는 아무것도
몰라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의논을 하려는 거예요."
멜리나가 어찌나 큰소리로 흐느끼는지, 마르트 고모는 수화기를 잠시 귀에서 떼어놓고 있어야
할 형편이었다.
"멜리나, 제발 이러지 좀 말아요."
마르트는 멜리나를 달랬다.
"몇 가지 분위기가 갖추어지면, 테오에게 쌍둥이 형제의 목소리가 들리는 모양이에요. 네,
테오가 그렇게 말한다니까요. 지하 세계에 있는 쌍둥이 형제라구요. 어떤 분위기가 되면 그런
소릴 하느냐구요? 글쎄요. 우선 평온한 분위기여야 해요. 종소리나 음악 소리... 아뇨, 나도
설명할 도리가 없어요. 그러더니 오늘은 그 형제를 봤다는 거예요. 그래요, 제대로 잘 들었어요.
봤다고 말했어요. 아니, 실제로 본건 아니지요. 연극 무대에서 봤다고 하더군요. 죽은 아들을
찾아 헤매는 엄마의 이야기였어요. 왜 그런 걸 봤느냐구요? 굉장히 유명한 노 공연이었거든요.
못 보게 말렸어야 했다구요? 이봐요 멜리나, 테오는 이제 코흘리개 어린애가 아녜요. 제발 좀
냉정하게 생각해 봐요."
기분이 상한 마르트 고모는 다시금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진정됐어요? 내 이야기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쌍둥이 형제가 나타나면
테오가 눈에 띄게 반가워하는 것 같았어요. 잠도 더 잘 자구요. 꿈속에서 만나는 거냐구요? 그건
아녜요. 내면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 같은가 봐요. 물론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잠깐만요. 내
생각엔 테오가 분명히 그 이야기를 물어볼 듯싶어요. 그래서 미리 알려 드리는 거예요. 제발
울지 좀 말아요. 그러면 테오가 더 심한 충격을 받을지도 몰라요. 그래요, 이제야 알아듣는군요.
사실대로 말해야 하느냐구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요. 제롬하고 의논해 보세요. 나요? 나야
물론 잠자코 있어야지요. 테오가 저 혼자 지레짐작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구요? 그거야 또 다른
문제지요. 네, 그래요. 전화 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 마르트 고모는 욕조 가장자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멜리나가 마르트
고모의 설득을 받아들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머지 않아 자기의 비밀을 모두 털어놓을지도 몰라."
"누구 말이에요?"
테오가 욕실 문을 열며 물었다.
"비밀이라니, 그건 또 무슨 얘기예요?"
"으음, 테오 너로구나."
당황한 마르트 고모가 얼버무렸다.
"언제 깼니? 저어, 아시코 엄마와 얘길 나누고 있었어."
"고모도 잘 아는 분이세요?"
"으응, 아주 조금 알지."
마르트 고모는 거짓말로 둘러댔다.
"고모는 아시코가 자기 친엄마를 알게 되기를 바라세요?"
"그렇게 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해. 집안에 비밀이 있으면 언제고 불화가 생기는 법이지.
오랫동안 쉬쉬하면서 숨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들통이 나게 되면 비수처럼 깊은 상처를
내거든."
"우리 집엔 비밀이 하나도 없어서 다행이에요."
테오가 반색을 했다.
"정말 그렇게 확신할 수 있겠니?"
마르트 고모는 경솔하게도 테오에게 반신반의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 것 같은데요."
어리둥절해진 테오는 그만 순간적으로 자신 없는 투의 대답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제가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르죠."
"무슨 일이 있었니?"
마르트 고모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테오에게 물었다.
"제 쌍둥이 형제 말예요."
테오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 애가 난데없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궁금해요. 엄마한테 한 번 물어봐야겠어요."
"그 생각은 나중에 하렴. 지금은 저녁 먹으러 갈 준비를 해야하니까. 그리고 오늘밤엔 일찍
자야 해. 교토행 기차를 탈 예정이거든."
"아시코도 함께 가나요?"
"그야 물론이지. 이번에야말로 아시코의 동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그 앤 교토 출신이니까."
여사제와 무당
유명한 고속전철 신칸센은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집들이 떨리는 것
같았다. 마침 가느다란 실비가 유리창을 적시고 있어서, 나뭇가지들이 사방팔방 제멋대로 팔을
뻗쳐대는 것처럼 보였다. 아시코는 일본에서 비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열심히 설명하였으나,
테오는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차창에 이마를 기댄 채, 테오는 이어지는 도시와 잿빛 산의
자태만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벚꽃 구경은 언제쯤 하게 되나요?"
테오가 물었다.
"아직 좀더 기다려야 해."
아시코가 대신 대답했다.
"물론 교토에도 멋진 벚나무들이 있긴 하지만, 아마 하코네 부근 호숫가에서 보는 벚꽃이 훨씬
아름다울 거야."
"그렇다면 교토에서는 뭘 할 거지?"
"다도를 익힐 거야."
아시코가 대답했다.
"차 좀 마시는데, 뭐 그리 특별한 방법이 있다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군."
"넌 이것저것 하도 따져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구나."
마르트 고모가 테오의 말문을 막았다.
"도대체 뭐가 불만이니?"
"전 비가 싫어요."
테오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일본에서는 제아무리 장사라도 어쩔 수가 없단다. 비가 오는 데야 어쩔 수 없잖니?"
마르트 고모가 딱하다는 듯이 테오를 달랬다.
"오랫동안 내리지는 않을 거야."
아시코도 거들었다.
"교토는 항상 날씨가 좋아. 너도 깜짝 놀랄 거야. 그리고 또 한가지. 맥캐리 부인께서 하코네에
일본식 숙소를 예약해 놓으셨어. 여관이라고 하는 곳에 말야."
"종이 벽에 다다미 바닥이 있는 방?"
"게다가 다른 방 손님들과 공동으로 목욕하는 대중탕도 있단다."
마르트 고모가 덧붙였다.
"그게 정말인가요?"
테오는 깜짝 놀라 한동안 입을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그렇다면 아시코랑 함께 목욕하는 거예요?"
"꿈도 야무지구나."
마르트 고모가 테오를 놀려댔다.
"남자들끼리만 벌거벗고 하는 거야."
"그럼 재미없겠는데요. 왜 늘 이렇게 남자랑 여자를 갈라놓으려고 하죠?"
"남자들이 그렇게 정했으니까. 남자들 눈에는 여자가 위험스러운 존재로 보이는 모양이야.
칼리만 해도 그렇잖아? 벵골인들이 생각하는 여성상은, 칼리처럼 피를 줄줄 흘리면서 싸우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전사의 이미지야. 그래도 그들은 칼리 여신을 숭배하지."
"여기라고 해서 그보다 나을 것도 없어요."
아시코가 말을 이었다.
"여자가 귀신으로 변해서 길가는 사람들을 죽이는가 하면, 여우가 예쁜 여자로 변신해서 그
남편의 목을 물어뜯기도 하죠. 태고의 일본에도 여사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예요."
"정말 그래?"
테오가 그제서야 관심을 보였다.
"일본에도 여자 제사장들이 있었단 말야?"
"신도에서는 오로지 여자들만이 신의 정기를 받아들일 자격이 있었어."
아시코는 설명을 계속했다.
"이런 여자들은 대부분 주술사였지. 영매를 통해 신의 정기를 표현하며, 가미의 이름으로 말을
하지."
"영매라니?"
테오가 물었다.
"마녀 같은 거니?"
"테오 너 혹시 (엑소시스트) 영화 때문에 그런 소릴 하는 건 아니지?"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맞아요. 입에서 초록색의 이상한 물질이 나오기도 하고, 무덤 속에서 소리가 나기도 했었어요.
굉장히 재미있었는데."
"정 그렇다면 입에서 나왔다는 초록색의 그 이상한 액체 따위는 잊어버리고, 대신 무덤 속에서
났다는 소리나 염두에 두렴. 역사가 오래 된 종교에서는 예외 없이 여자 예언자들의 역할이
중요하지. 참, 테오 너는 델포이 신전에도 갔었잖니? 그 신전에서 누가 제사를 모셨었는지
잊어버렸니?"
"피티였어요!"
테오가 소리쳤다.
"냄비 위에 올라앉은 미친 여자였지요."
"미친 여자라니, 말 좀 잘 골라 쓰렴."
마르트 고모가 테오에게 핀잔을 주었다.
"한동안 피티가 월계수 잎을 태우는 연기에 중독이 되었다고들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해. 반면에 피티가 신의 이름으로 말을 했다는 점만은 틀림없어.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여자 예언자였지."
"피티 말고 다른 예언자도 있었나요?"
테오가 뜻밖이라는 듯이 물었다.
"아프리카에 가면 지금도 있지."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인도에서는 이런 여자 예언자들을 '어머니'라고 부르지. 그리고 이곳 일본에서는 여자
무당들이 신도 제사를 모셔 왔단다."
"무당이라구요?"
아시코가 물었다.
"저는 모르는 단어예요."
"난 아는데."
테오가 참견을 했다.
"미국에서는 무당 대신 마녀라고 하지."
"그건 그렇지 않아."
마르트 고모가 즉석에서 테오의 말을 반박했다.
"샤머니즘 이론은 야쿠트족의 신앙으로부터 유래한 거야."
"야... 다음에 뭐라구요?"
아시코와 테오가 합창이라도 하듯 동시에 물었다.
야쿠트족은 동부 시베리아에 살던 민족으로 '샤먼', 즉 무당이라고 불리는 마녀들은 이들 민족
내에서 묘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야쿠트족은 신체에 약간의 결함이 있는 사람들을 주로
무당으로 점찍었다. 이를테면 사팔눈을 가진 사람이나 절름발이, 또는 노상 공상에만 잠겨 있는
사람들이 주로 이 부류에 속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간질병 환자들을 신의 계시를 받은 인물로
간주했던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그러한 발작을 신이 계시를
내리는 증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어쩌면 카이사르 또한 자기의
간질병 발작 시기를 그럴듯하게 이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말이 맞아요! 영화에서 보니까,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카이사르의 입에 나뭇조각을 물리는
장면이 있었어요. 발작 때문에 카이사르가 자기의 혀를 물지나 않을까 염려되어서 그렇게 한
거였지요."
그 점에 있어서는 테오의 기억력이 정확했지만,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는 하늘이 내린 이
병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유럽에서는 여러 세기 동안 간질병을 가리켜 '중대한
병'이라고 일컬었으며, 몹시 경외했다. 그리하여 간질병 환자들은 쉽게 무당이 될 수 있었다.
갑자기 실신상태에 들어가거나, 꿈을 꾸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풀을 달인 음료를 마신 후, 이곳저곳을 여행하기 마련이었다. 지옥에
내려가면, 무시무시한 악마들이 해골을 조각내어 그 뼈를 일일이 바꾸어 주었다. 이 머나먼
여행길로부터 무당은 쇠로 된 해골과 초능력을 선사받고 돌아온다. 초능력을 부여받은 무당은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한 춤을 통해 지하 세계 악령들의 이미지를 찾아내며, 미래를
예언하기도 하고, 병자들을 고치기도 한다. 환자의 몸 안에 깃들여 있던 악성 환부가 입을 통해
일단 액체의 형태로 배출되고 나면, 환자는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테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정말 그럴 수가 있단 말이야?"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환자들이 치료되는 것은 그만큼 이들의 믿음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야쿠트족의 샤머니즘 외에 다른 예도 얼마든지 있었다. 민족학자들은 신비스러운 물질을 이용해
지옥으로의 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통틀어 '무당'이라고 지칭했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피티도 신도의 여사제들도 모두 무당에 해당되었다.
"그렇지만 조금 전에 일본에는 여자 무당만 있다고 말씀하였잖아요."
아시코가 지적했다.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그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불분명한 경계지역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도, 남녀의 구분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옥 여행에서
돌아온 무당의 모습은 달라져 있게 마련이었다. 원래의 성별과는 상관없이 그때의 무당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 무당이 여자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하고, 반대로
여자 무당들이 흡사 아폴론의 목소리처럼 낮은 음성으로 신탁을 전하기도 하는 것이다.
샤머니즘은 성의 구별을 넘나듦으로써 가능하다. 왜냐하면 무당이란 보통 인간과 같은 부류에
속하지 않는 예외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통해 무당들은 인간과 신 사이의 매개
역할을 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변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악령들을 몸밖으로 쫓아낸다거나,
환자들을 광적인 춤의 세계로 이끌어 짧은 순간 동안이라도 지하 세계를 여행하도록 하는
신통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씀을 하시니까 말인데요, 룩소르에서 만난 그 주술사도 이따금씩 무당이 되는 건가요?"
테오가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떠니?"
마르트 고모가 되물었다.
"글쎄요, 제 생각엔 그런 것 같아요. 연기가 피어올랐고, 춤을 추었지요, 지하 세계, 내 쌍둥이
형제... 그런데 저한테 '약혼녀'라고 했었어요. 그렇다면 혹시 저도 무당이라는 말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아닌게아니라 너도 신비스런 여행을 했으니까...."
"그럼 저는 어때요?"
아시코도 끼어들었다.
"의식을 마치면 혹시...."
"쉿."
마르트 고모가 얼른 아시코의 말을 끊었다.
"잠자코 가만히 있어야 놀라움이 큰 법이에요."
테오는 아시코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시코는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아시코가
속으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마다 발갛게 달아오르는 두 볼이 더할 나위 없이 예뻐
보였다.
벚나무 아래에서 빚어진 오해
교토에서 묵을 호텔은 다다미를 깐 전통 가옥이 아니라, 미카요라는 절충식 건물이었다.
건물을 에워싼 잔디 한가운데에는 애수에 잠긴 듯한 수양버들과 키 큰 소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한쪽 옆에는 흡사 눈송이로 뒤덮인 듯한 하얀 나뭇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무는 생전 처음 봐요!"
테오가 소리쳤다.
"벚나무야."
마르트 고모가 일러주었다.
"이렇게 큰 나무가 벚나무라구요?"
테오는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프랑스에서 본 벚나무는 이보다 훨씬 작았는데..."
"내가 얘기해 줄 때는 통 믿으려 들지 않더니..."
마르트 고모는 가볍게 한 숨을 내쉬었다.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꽃들이 만개한 벚나무들의 장관..."
"정말 그래요."
테오도 시인했다.
"엄마한테 보여 드리게 사진을 찍어야겠어요."
테오는 순식간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더니 찰카닥 셔터를 눌렀다. 이로써 벚나무의 순결한
자태는 영원히 고정된 셈이었다.
"그러지 말고 제발..."
아시코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됐어."
테오는 만족한 듯 카메라를 흔들며 말했다.
"이번엔 초점을 잘 잡았어. 아시코 너한테도 한 장 보내줄게."
"응, 고마워 테오."
아시코는 마지못해 조그만 소리로 대답했다.
"사진 찍는 것도 좋지만..."
"왜 그래? 넌 싫어?"
테오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런 게 아니라..."
아시코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고맙지만..."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니?"
테오는 아시코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우리 일본인들은 말이지. 벚꽃이 흩날리는 광경을 거의 경외한다고나 할까?"
아시코가 빠른 속도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테오는 내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 거니?"
"아니, 아무런 문제 없어."
아시코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너도 꽃잎이 흩날리는 걸 그냥 바라만 보고 있으면 안 되겠니?"
테오는 전혀 반발하지 않고 순순히 아시코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건드렸지만 하얀 꽃잎이 천천히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란 말이지?"
테오는 그래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라는 거니?"
"우리들 인생처럼 벚꽃도 사라져 가는 거야."
아시코가 조용조용 말했다.
"아주 일시적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순간이지. 저기에도 신의 섭리가 깃들여 있다고 생각되지
않니? 꽃봉오리가 벌어져 눈부신 백색을 발하다가, 한순간이 지나고 나면 벌써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아. 꽃잎은 하나씩 하나씩 떨어지고, 바람이 그 꽃잎들을 대번에 앗아가 버리지.
우리들 삶처럼..."
이 말에 깜짝 놀란 테오가 아시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커다란 두 눈동자가 마치 무한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테오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아시코의 볼에 입을 맞췄다.
"벚꽃은 바로 너야, 아시코"
테오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현재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사진을 찍어서 영원히 보존하는 건 어쩐지
신의 섭리를 배반하는 느낌이 들거든. 꽃의 아름다움에 몰입해 봐, 테오."
"네가 바로 꽃이라고 했잖아."
테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테오, 그만 좀 해두렴. 아시코는 지금 너한테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마르트 고모가 참견했다.
"여기서는 아름다움이란 지속될 수 없는 데서 찾아진다고 생각한단다."
"알았다구요."
테오가 아시코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투덜댔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늙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얘기잖아요. 아시코는 언젠가는 지금의
마르트 고모처럼 주름살투성이가 될 거고, 나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는 영감이 될 거다. 이런
말이죠?"
"너 정말 고약한 녀석이로구나."
마르트 고모는 아시코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조카를 나무랐다.
"너 때문에 아시코가 울잖니!"
"나 때문이라구요?"
테오는 기가 막히는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아시코, 너 정말로 우는 거니? 그러지 좀 말구... 자, 봐. 내가 이렇게 꽃잎만 바라보잖니. 다른
건 하나도 안 쳐다본다구. 꼭 흰 나비 같애. 이렇게 하면 네 기분이 좀 나아지겠니?"
"응, 그래."
아시코가 눈물을 닦으며 부끄러운 듯 대답했다.
"우리 나라에선 벚꽃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거든."
"이제부터는 입 꼭 다물고 있어야겠어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넌 그렇게 못할걸."
마르트 고모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테오는 할 수 있을 거예요."
아시코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반발했다.
"자, 보셨죠?"
테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도 아시코는 저를 이해해 준다니까요."
"전혀 그런 게 아닐걸."
마르트 고모는 내내 테오의 말에 트집을 잡았다.
"아시코는 예절바른 일본 젊은이로서 깍듯이 손님 대접을 하고 있을 뿐이야. 참 그런데 다도
약속은 몇 시로 되어 있지?"
"두 시간 후에 아세키 부인고 만나기로 했어요."
아시코가 대답했다.
"뭐? 두 시간밖에 안 남았다구?"
마르트 고모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짐 풀고, 목욕하고, 옷 갈아입으면 ... 얘들아, 서둘러야겠다."
차에 담긴 네 가지 덕목
호텔 종업원이 방문을 닫자마자 마르트 고모는 샤워를 하고, 보기 흉한 파란 기모노를 걸쳤다.
테오게는 있는 옷 중에서 제일 멋진 검정색 진바지 위에 감청색 점퍼를 입으라고 권유하며,
가방에서 예의 그 점퍼를 꺼냈다.
"이 꼴도 보기 싫은 옷을 입으라고요? 싫어요."
테오는 대번에 거절했다.
"싸울 시간이 없어, 부탁이다."
고모는 더 이상 반발할 수 없을 만큼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도에 참석하려면 단정하게 차려 입어야 해."
"이걸 입으면 꼭 잘난 체하는 원숭이 같겠군."
테오가 투덜거렸다.
"진자 하누만 같을 테지."
고모가 결론이라도 내리듯 이렇게 말하며 테오를 얼싸안았다.
"빨리 내려가자. 아시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시코는 기모노 차림이었다. 그렇지만 요란스런 새 무늬 때문에 살찐 몸집을 더욱 드러내
보이는 고모의 기모노와는 달리, 아시코의 자두색 기모노는 가냘픈 아시코의 체구를 한층 더
날씬하게 보이는 듯했다. 붉은 공단 끈으로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얼굴에는 흰 분을 바른
아시코에게서 젊음의 여신 같은 신비한 자태가 엿보였다. 테오는 아시코에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렇게 하고 계시니까, 감히 아가씨의 목에 입을 맞출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테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렇게까지 조심하지 않으셔도 될 텐데요, 선생님."
아시코가 장난기 섞인 상냥한 어조로 응수했다.
"그렇지만 이제 다도 입문을 해야 할 시간이로군요."
아시코는 우선 테오에게 절대적으로 침묵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또한 의식이 끝날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리가 저려 와도 가만히 참고 있어야 하므로,
테오에게는 이보다 더 큰 고역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아시코는 덧붙였다.
"얼마 동안이나 이렇게 해야 하지?"
테오가 물었다.
"두 시간밖에 안 걸려."
아시코가 대답했다.
"차 한 잔 마시는 데 두 시간이라구?"
테오는 기가 막혔다.
"머리가 어떻게들 된 거 아니니?"
다도의 묘미는 바로 그 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도 선생님은 손님들을
맞은 다음, 주전자에서 물이 끓을 동안 다구를 닦아서 가루로 된 차를 넣은 후 물을 부어
우려낸다.
"난 단 10분이면 그렇게 할 수 있는데..."
테오가 말했다.
"그 중에서 찻종을 닦는 데는 몇 분이 걸리지?"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요."
갑작스런 질문에 테오는 당황한 듯했다.
"한 10초쯤?"
"다도 선생님은 아마도 20분 정도는 닦는 것 같더라."
고모가 슬쩍 일러주었다.
"슬로비디오로 하는 모양이죠?"
테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도 말할 수 있었다. 차를 준비하는 예법을 맨 처음 가르친 이는 센 리큐라는 16세기
사람이었다. 그는 "다도란 아주 간단한 것이다. 물을 끊인 후, 차를 넣고 적당히 마시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건 저도 동감이에요."
테오도 맞장구를 쳤다.
"그까짓 걸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할 까닭이 없지요."
그렇지만 리큐 선생은 차를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일본의 통치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셨으며, 히데요시는 위대한 다도 선생들에게 의당 베푸는 예와 존경심을
다해 리큐를 대접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좌우지간 리큐 선생은 히데요시의 눈밖에 났다. 화가 나 전쟁터에서 쓰던 장검을
휘둘러대던 히테요시는, 어느 정도 화를 누그러뜨린 후 이 다도 선생을 귀양보내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양지에서 리큐는 할복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이 명령을
취소하고 그를 용서하겠노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리큐는 이미 죽음이야말로 자기의 군주가
자기에게 하사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베를 갈랐다.
"차 한 잔 때문에 자살을 했단 말씀이죠?"
테오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게 바보 같은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죠?"
다도 선생들은 거의 전적으로 자신들의 고용주인 군주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때로는 존경을 한
몸에 받다가, 때로는 버림을 받기도 했다. 이들을 키우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리큐
선생은 차에 있어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위대한 예술가였으며, 바로 그러하였기 때문에
남보다 상처받기 쉬운 위치에 놓여 있었다. 리큐의 결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 단순히 사무라이들의 명예 규약에 복종했을 뿐이라는 시각과, 반대로 셋푸쿠야말로
명상으로 점철된 오랜 시간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두 가지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가 일생을
바친 다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차에 담긴 신의 섭리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택했다는 두번째 관점이 좀더 설득력 있게 여겨진다고 아시코는 설명했다. 요즈음 일부
일본 철학자들이, 이 다도를 가리켜 '다도교'라고 하는 종교의 일부라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고 아시코는 덧붙였다.
"듣자듣자 하니, 정말 모든 것을 다 종교적으로 해석하려고 드는군."
테오가 말했다.
테오의 말에 몹시 당황한 아시코는, 지식인들이 다도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현상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물을 끓여서 적당히 마시기만 하면 된다는 것도 그릇된 말은
아니지만, 무슨 일이든지 완벽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랜 수련이 필요한 법이었다.
다도에서는 조화와 존경심, 순수함과 평온함이라는 네 가지 덕목이 각각 물질적, 비물질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조화라고 하면 우선 차를 마시는 방의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겠으나,
함께 차를 마시는 사람에게만 전달되는 감정이 아니라, 찻종과 찻숟가락, 나무 주걱 등 다도에
쓰이는 물건 하나 하나를 모두 존경해야 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수수함은 우선 깨끗하게 닦인
다기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겠지만, 동시에 차를 마시는 사람이 지녀야 할 마음의 순결함과
정신의 소박함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말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평온함은, 앞서 열거한 세
가지 덕목이 모두 갖추어졌을 때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도달하면 자의식을 잊고
마음의 공백상태에 이른 셈이다.
"공백이니 여백이니 하는 건 선에서 쓰는 말 같은데."
테오가 지적했다.
"그런데 왜 두 시간씩이나 해야 하지?"
손님이 있을 때에는 두 시간, 차의 정신에 접근하려면 10년, 다도를 완벽하게 수행하려면,
평생이 걸릴 수도 있었다. 열심히 수련을 거듭할수록 자신의 결점을 쉽게 발견할 수도 있다.
묵직한 육체, 서투른 손놀림, 무딘 손재주 때문에 물건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찻종을 엎기도 하는
것이다.
"지난번에 저도 그랬었잖아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찻종을 하나만 놓지요?"
다도란 원래 마음이 조화를 추구하는 의식이므로,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찻종이
옮겨지면서 차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원칙이다.
"이제 좀 알겠니?"
마르트 고모가 끼어 들었다.
"지금 한 말 잊지 않았겠지? 이처럼 나눔이라는 말이 종교의 상당 부분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리스도교들이 미사 시간에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유월절에 유대인들이
양고기와 쓴 나물을 나누어 먹는가 하면, 라마단 때 이슬람교도들이 저녁이면 금식을 끝내고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것도 다 같은 이치야. 먹고 마시는 행동이 사실은 종교적인 것과 상당히
많이 연관되어 있어."
"어쨌든 제게 있어서 차란, 엄마가 늘 침대 머리맡에 가져다주신다는 데 그 의의가 있지요"
테오가 말했다.
20 벚나무에 담긴 우수
아세키 부인의 다도 강습
마침내 아세키 부인의 집으로 다도 강습을 받으러 갈 시간이 되었다. 밤이 되자, 교토 시에
한바탕 추위가 몰아쳤다. 테오는 두툼한 파카 속에 몸을 움추리며 몇 시쯤에나 저녁을 먹게 될까
궁금했다. 아시코는 침침한 등불이 달린 어두컴컴한 길 입구에서 택시를 세웠다. 잘 다듬어진
정원을 가로질러 가며 돌들이 깔려 있었다. 잔디 위에 덜어진 몇몇 꽃잎으로 미루어 근처에
벚나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당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목조 건물은 흡사 인형의 집 같았다.
대기실에서 아시코가 외투를 벗자, 마르트 고모와 테오도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나서 대나무로
된 가벼운 국자로 물을 떠서 손과 입을 씻었다. 잠시 동안 몸을 녹일 수 있었다. 마르트 고모는
긴의자에 다리를 벌리고 앉으며, 그제서야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는 듯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테오는 자기의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고, 아시코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자, 이젠 슬슬 가볼까?"
겨우 1분쯤 시간이 흘렀을 때, 테오가 말했다.
"잠자코 있으렴. 아시코가 다 알아서 할거야."
마르트 고모가 테오에게 핀잔을 주었다.
추워서 몸이 약간 얼얼한 테오가 멍하니 공상에 잠겨 있을 때, 아시코가 자라에서 일어나더니
아주 작은 문 곁으로 다가갔다. 문이 너무나 낮아서 들어가려면 몸을 한참 구부려야 했다.
"조심해요, 몸을 숙여야 해."
아시코가 작은 목소리로 테오에게 주의를 주었다.
"아야!"
테오는 기어이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고약한 문이로군."
"겸양의 문이야. 내가 미리 경고했었잖아."
다실에는 넉 장의 다다미가 깔려 있었으며, 그 한쪽 옆으로 자그마한 공간이 붙어 있었다.
구석 벽에는 긴 부리의 학이 그려진 족자가 있었으며, 검은색 탁자 위에는 아직 꽃봉오리가
벌어지지 않은 백합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아시코는 테오의 손을 붙잡고 선반을 가리켰다.
선반 아래쪽에는 도자기 그릇 속에 찬물이 담겨 있었으며, 위쪽에는 녹색 찻가루가 담긴 붉은
자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자세히 봐도 될까?"
테오가 물었다.
"원래는 안 되지만, 넌 특별히 보여 줄게."
아시코가 조심스럽게 뚜껑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두툼한 찻가루는 아주 선명한 녹색이었다. 덧문을 칠하는 페인트 빛깔과 흡사할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테오는 집게손가락을 상자 속에 넣었다가 입으로 가져갔다. 찻가루는 몹시 씁쓸했다.
"지금 네가 얼마나 몰상식한 행동을 하고 있는 줄 아니?"
아시코가 테오를 나무랐다.
"다도 선생님만이 찻가루에 손을 댈 자격이 있는 거야
"궁금해서 그랬어."
테오가 뻔뻔스럽게 말했다.
"쉿! 무쇠 주전자에서 나는 소리나 들어보렴. 저 안에다가 아세키 부인이 반질반질 잘 닳은
자갈을 넣어두었기 때문에 물이 끓으면서 저런 소리가 나는 거야."
"그런데 그 부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테오가 궁금한 듯이 아시코에게 물었다.
"저기."
아시코가 미닫이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이 네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보실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때 마침 문이 열리더니, 몸을 깊숙이 숙이고 양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자세로 다도
선생님이 나타났다. 아세키 부인이 미소를 짓자, 수천 개의 잔주름이 선해 보이는 그녀의 눈
주위에 자글자글 잡혔다. 이윽고 부인은 정확하게 계산된 듯이 몸을 꼿꼿이 세운 채로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님들도 그대로 따라 했다. 침묵만이 흐르는 가운데 의식이 시작되었다.
여자 선생은 헝겊을 펴서 찬물 속에 담갔다가 꺼낸 다음, 그 헝겊으로 다구를 닦았다. 이윽고
다구를 다 닦은 후, 젖은 헝겊의 가운데 부분을 잡아 다시 접었다. 그러더니 검은 비단으로 다시
한 번 다구를 닦고 나서, 역시 그것을 접은 다음 금빛이 섞인 적갈색의 커다란 도자기 그릇을
돌려 사방으로 금빛이 반사되도록 했다. 곧이어 천천히 붉은 자개 상자를 열고, 깃털처럼 가벼운
나무 주걱으로 녹색 찻가루를 떠서 찻종 바닥에 부었다. 그리고 무쇠 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소리나지 않게 도자기로 된 판 위에 사뿐히 내려놓은 후, 끓고 있는 물을 떠서 찻가루 위에
살며시 부었다. 그런 다음 끝이 가느다랗게 여러 갈래로 갈라진 대나무 거품기로 물에 젖은
찻가루를 저었다. 찻종 위로 거품이 일어 오르면 비로소 차가 다 준비된 것이었다.
대단히 정확하면서도 나는 새의 날갯짓처럼 가벼운 아세키 부인의 동작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어졌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차를 준비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르트 고모는 재빨리 손목시계를 보았다. 어느 새 30분이라는 시간이 꿈결처럼
지나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 30분 동안 테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고 양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앉아 있는 테오는, 다도 선생의 동작 하나 하나에 홀린 것
같았다. 마르트 고모는 앉은 자세를 달리했다. 무릎이 저려 왔다. 아세키 부인은 흰 수건 위에
찻종을 올려놓았다. 마르트 고모는 신중하게 그 차로 입술을 적신 후, 찻종을 테오에게
건네주었다.
테오는 찻종 가까이까지 코를 들이대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씁쓸한 맛이 났기
때문이었다. 테오가 어찌나 빨리 차를 마셨던지, 녹색 거품이 턱에까지 묻었다. 아시코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테오가 무섭게 아시코를 바라보다가 찾종을 넘겼다. 아시코는
찻종을 돌려 거품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나서 조용히 한 모금을 마셨다. 이로써 제1부 순서가
끝났다.
개인의 찻종에 따로따로 부어진 두번째 차에는 물이 많았으며, 거품은 물에 섞였는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차의 맛도 달라졌는지 이상하게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밀려드는 듯했다.
차맛에 감탄한 테오는 차를 더 마시려고 찻종을 내밀었다. 아세키 부인도 기꺼이 테오의 청에
응했다. 이어서 아세키 부인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검은 자개 쟁반 위에 식사를 내왔다.
식사라고 해봐야 꽃 모양으로 자른 당근 아홉 조각과 생무로 깎은 꽃으로 조각한 삶은 계란 세
개, 돌돌 말린 새우 한 마리가 전부였다. 그 다음에는 빨간 공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담아 내왔으며, 이어서 금빛 접시에 담긴 생선알 카나페가 하얀 부채 위에 놓여져서 나왔다.
마지막으로 햐얀 케이크 세 조각이 사무라이 모양을 한 병에 담긴 정종과 함께 나왔다. 식사를
마치자 대화의 시간이 되었다. 아세키 부인이 테오에게 정중히 물었다.
"차 마시는 시간은 즐거웠나요?"
"물론입니다. 아세키 부인. 선생님의 동작은 매우 우아하면서도 균형이 잡혀 있더군요. 특히
나무 국자를 잡기 위해 손을 내미실 때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차맛은 어땠어요?"
"아주 좋았어요. 전 이제까지 찻가루 맛은 본 적이 없었는데, 먹어보니 아주 싱싱하고 살아
있는 것 같았어요. 마치 숲을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다도 의식의 의미는 이해했니?"
"재가 느낀 대로 말씀드리자면, 차를 마시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았어요."
테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가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세키 부인은 온화한 미소로 테오를 칭찬하였다.
"이 아이는 다도를 잘 깨우쳤어요."
아세키 부인은 아시코에게 테오처럼 영특한 손님을 모시고 와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아시코는 겸손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마르트 고모는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깜짝 놀라 테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니, 저 무례한 녀석이 군소리 없이 의식 절차에 따르다니! 게다가 벌써 오래
전부터 다도 선생의 제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사람처럼 척척 대답을 하다니! 난 무릎이 아파
죽을 지경인데, 저 녀석은 어떻게 저렇듯 태연하담. 마르트 고모는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에게는 다도가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아요."
아세키 부인은 말했다.
"서양 아이들에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경우예요. 이 아이를 얼마 동안만 제게 맡겨 보실 수
있으세요. 맥캐리 부인? 그렇게 하신다면, 이 아이는 다도를 훨씬 더 완벽하게 익힐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게, 저어..."
당황한 마르트 고모는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고모는 제가 환자이기 때문에 주저하시는 거예요."
테오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 병이 다 나으면, 그때 다시 와서 기꺼이 다도를 익히겠어요."
"저 녀석 때문에 말이 다 안 나오네."
마르트 고모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가야 할..."
"우리가 함께 나눈 복된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 테오에게 이 부채를 주고 싶어요."
아세키 부인은 고모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옷소매에서 접혀진 부채를 꺼낸 아세키 부인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테오에게 부채를 내밀었다.
테오는 감사의 인사를 하며 부채를 받아 펼쳐 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테오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음 행선지에 대한 메시지로군요."
"맞았어요."
아세키 부인이 말했다.
"답을 알아맞히려면 다도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해요. 그렇게 실망할 것 없어요. 우리 다도
의식에 참석했기 때문에 이렇게 부채도 드리는 것이고, 메시지도 받게 된 거예요. 원한다면 지금
읽어보아도 좋아요."
'시간을 재는 낫과 같이 생긴 도구에 베어 쓰러진 나는 망치 아래에서 살아남았노라. 내가
너를 기다리는 도시에는 내 이름 중의 두 글자가 들어 있도다.'
"하지만 지금은 메시지 따윈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테오가 부채를 다시 접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럴 기력도 없어요."
"그게 옳은 생각이에요. 생각이라는 환상보다 다도가 우선이니까요. 그렇지 않니, 아시코?"
"네, 그래요."
아시코가 대답했다.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저에게 차를 준비하도록 허락해 주셨을 때만 해도, 전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동작 하나 하나에 신경을 많이 썼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손이 더 떨려서
다다미에 온통 찻가루를 쏟고 말았지요."
"자기 자신을 잠시 잊어버려야 하는 법이지요."
아세키 부인은 진지하게 말했다.
"가장 좋은 차는 정성으로 달여지는 법입니다."
"선생께선 정성이 대단하신 분이지요."
마르트 고모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다도에 입문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게 제 직업인걸요."
아세키 부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즈음에는 다도 선생들이 돈을 받고 의식을 지도하도록 의무화되어 있지요. 하지만 저는
진정한 다도 정신에 따라 살기를 결심한 사람이에요. 오늘 저녁 여러분들께서 얼마간의 평화를
맛보셨다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무척 기쁩니다."
이미 두 시간이 경과하였으므로 이제 작별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아세키 부인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로 몸을 굽혀 인사한 후, 미닫이문 뒤쪽으로 사라졌다. 테오의 일행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테오, 솔직히 말해서난 널 보면서 깜짝 놀랐단다."
정원을 돌판을 걸어 나오며 비로소 마르트 고모가 입을 열었다.
"너와는 거리가 먼 이 다도의 세계를 어떻게 그처럼 빨리 이해할 수 있었는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침묵을 통해서 이해했어요."
테오가 한숨을 쉬며 나직이 말했다.
"그 침묵이 조금만이라도 더 계속되었으면 좋겠으니, 말 좀 시키지 말아 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놀라운 신도 의식
다음날, 마르트 고모에 따르면 아주 뜻깊은 날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원 한가운데에서 열리는
신도 의식에 참석하기 때문이다. 물론 관광객들을 사로잡기 위해 소박하기보다는 화려하게
재구성한 의식이므로, 초창기의 순수함을 맛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가 의식을 지켜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라고 고모는 덧붙였다.
"깜짝 놀랄 거라니까."
고모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러니 좀 서두르렴."
"늘 이렇게 허겁지겁 서둘러야 하다니... 고모는 언제쯤이나 천천히 여유를 갖고 처신하게
되실는지요?"
"보자보자하니까, 너 정말 그 사이에 아주 많이 변했구나."
"아시코 때문인가 봐요. 아니, 다도 때문인지도 모르죠. 아시코도 오나요?"
"그야 물론이지."
마르트 고모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여느 때 같으면 시간을 어기는 법이 없는 아시코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웅장한 붉은 문 앞에 한 무리의 사제들이 벌써부터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문 색깔과 같은
빛깔의 사제복이 뒤쪽으로 치렁치렁 끌렸다. 검고 뾰족한 두건을 쓰고 꼼짝도 하지 않는 이들
사제들은 마치 조각 같았다.
"저 사람드은 뭘 기다리는 거죠?"
테오가 물었다.
"여사제들을 기다리는 거야."
마르트 고모가 나직이 속삭였다.
드디어 여사제들이 나타났다. 빨간 치마에 흰색 주름이 풍성하게 잡힌 상의를 걸치고, 검은
머리는 단정하게 묶어 등 쪽으로 넘긴 차림이었다. 신비스런 피리 소리와 둔탁한 북소리에 맞춰
여사제들이 한 줄로 늘어서더니, 아주 느린 동작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때 뒤쪽에서 마지막
여사제가 나타났다. 옷이 너무 무거운 탓인지 떼어 놓는 보폭이 몹시 좁았다. 빛 바랜 분홍색
기모노를 금색 자수가 놓인 기모노 위에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금빛 기모노 속에 또 다른
기모노를 입었는지, 수단과 비단, 리본 등으로 장식된 밑단들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여사제의
발뒤꿈치 부근에서 흰색 베일이 너풀거렸다.
"도대체 저 여사제는 기모노를 몇 벌이나 껴입은 거지요?"
테오가 물었다.
"열두 벌."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모두 다 아주 오래 된 옷들이지. 머리 모양 좀 봐. 무릎까지 내려오는 이상한 끈 같은 게
보이지?"
"그것 때문에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속상해요."
테오가 투덜거렸다.
열두 벌의 기모노를 입은 육중한 여사제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공손한 자태로 아름다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테오는 아시코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꼭 꿈만 같아요!"
테오가 소리쳤다.
"내가 깜짝 놀랄 일이 있을 거라고 미리 말했잖아."
마르트 고모가 재미있어하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아시코가 여사제란 말이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다른 많은 대학생들처럼 아시코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야. 의식에 참석함으로써 용돈을 버는 것 뿐이야. 하지만 테오 너도 알다시피 아시코는
무엇이든 일단 하기로 결정하면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실행하는 성격이지. 내가 보기엔 아마 이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정성을 다할 것이 틀림없어. 내기를 해도 좋아."
"이젠 겁이 나서 아시코에게 말도 못 붙일 것 같아요. 지난번에 기모노 한 벌만 입고 있을
때에도 기분이 이상했는데, 열두 벌씩이나 걸치고 있으니..."
의식이 끝나자, 아시코는 뒷걸음질쳐 사라졌다. 기모노 무게 때문에 어깨가 한없이 처진 것
같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아시코가 미니 스커트에 땋은 머리 차림으로 테오 앞에 나타났다.
"휴우."
아시코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무거웠어. 난 이번엔 정말 쓰러지나 보다 생각했었어."
"이 일을 자주 하니?"
"응, 1년에 두 번 정도."
아시코가 대답했다.
"아빠가 좋아하셔. 나도 좋아하구."
"사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배우라고 해야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도?"
마르트 고모가 지적했다.
"종교 의식이라기보다는 순전히 구경거리 같더라."
"물론 그러셨을 거예요."
아시코도 인정했다.
"1868년 신도가 국교로 공인된 것은, 순전히 군주가 자기의 권력을 신격화시키기 위해서였다는
사실 정도는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같은 칙령을 통해 사찰로부터 불교를 추방하고,
가미들을 부처와 동일시하는 행위를 금지하였으며, 카톨릭 사제들 또한 추방하였지요."
"정말 잘 알고 있구나."
마르트 고모는 감탄하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위험스러울 정도로 민족주의적이면서 외국인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인 종교
행사에 참석하는 데 대해 오히려 거부감이 일 것 같은데, 안 그럴까?"
"제가 생각하는 신도는 그런 국수주의적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 오늘
제가 입었던 기모노만 해도 이곳이 일본의 수도였을 당시의 영화를 상기시켜 주지요. 그때만
해도 아직 교토라는 이름이 아니었어요. 헤이안쿄라고 했죠. '평화와 고요의 수도'라는 뜻이지요."
"오늘 입었던 기모노가 그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옷이지?"
마르트 고모가 확인하려는 듯 물었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옷들이에요."
아시코는 자랑스러운 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옷을 입어 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지요."
"너 정말 일본의 여신 같더라."
테오도 부추겼다.
테오의 말에 아시코가 깔깔거리며 웃어대자, 뒤로 땋아 내린 머리체까지 덩달아 흔들거렸다.
그러더니 아시코는 갑자기 슬픔에 잠겨 고개를 떨구었다.
"전 사라져 버린 옛날을 기념하는 뜻에서 오랫동안 이 도시에서 살고자 했는데."
아시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났어요."
"그게 무슨 소리지?"
마르트 고모가 언짢은 투로 물었다.
"물론 자연 숭배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녜요. 또 어제 저녁에 참석했던 다도 강습의 고요한
분위기도 늘 좋아하구요. 그렇지만 우리 나라에선 여자들이 자유롭지 못해요."
"혹시 아버지께서 네 결혼을 서두르시는 건 아니니?"
마르트 고모가 짐작이 간다는 투로 넌지시 물었다.
"아닌게 아니라 벌써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아시코는 길게 한숨을 지었다.
"그러면 넌 어떻게 할 건데?"
테오가 아시코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여길 떠날 거야. 사실은 그래서 프랑스어도 배우는 거야."
"그럼 이제 다시는 여사제 역할을 할 수가 없겠구나."
테오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기모노도 입지 않을 테고, 차를 달이는 일도 없을 테지."
"그럴 리가 있니? 왜 그렇게 못한다는 거지?"
아시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파리에도 녹차는 얼마든지 있을 텐데. 안 그래? 난 파리에 가서 살고 싶어."
"일종의 배은망덕이로군."
마르트 고모가 한숨을 지었다.
"그래도 설마 그 아름다운 머리까지 자르지는 않을 테지?"
"그럼요, 안 자를 거예요."
아시코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다른 곳에서 산다고 해서 일본을 완전히 잊어버릴 리야 있겠어요?"
"이세신궁까지 우리와 함께 가주겠니?"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물론이죠. 제가 테오를 이곳에 버려 둘 리가 있겠어요."
자동차 안에서
이세신궁은 일본에서 가장 큰 신사이다. 교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자동차로 서너
시간만 달려가면 당도할 수 있었다. 가는 길에 마르트 고모는 테오로 하여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메시지 내용을 해독하도록 재촉했다.
"에이, 귀찮아요. 창밖에 펼쳐진 풍경 좀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데 지금 메시지를 풀라는
거예요?"
"테오. 네가 일본에 매료되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무를 순 없는 노릇
아니니?"
마르트 고모의 태도는 단호했다.
"오늘 저녁 침대에서 누워서 할게요, 약속해요."
"네가 하는 약속은 믿을 게 못 돼. 그러지 말고 지금 당장 시작해."
"맥캐리 부인 말씀이 옳아."
보다 못해 아시코가 끼어 들었다.
"네가 원한다면 나도 널 도와줄게."
'시간을 재는 낫과 같이 생긴 작은 도구에 베어 쓰러진 나는 망치 아래에서 살아남았노라.
내가 너를 기다리는 도시에는 내 이름 중의 두 글자가 들어 있도다.'
테오는 접힌 메시지를 펴면서 다시 한 번 소리내어 읽었다.
"도대체 어느 도시에 가야망치를 찾아낼 수 있담?"
"그리고 낫도 있어."
아시코가 덧붙였다.
"시간을 재는 도구."
"시계?"
테오가 물었다.
"중세의 망루 같은 데서 본 적이 있어. 낫을 든 해골이 나와 시계종을 치는 거야."
"그렇지만 망치를 들진 않았을 걸."
"그렇지만 망치를 들진 않았을걸."
마르트 고모가 지적했다.
"게다가 메시지에 등장하는 사람은 자기가 낫에 베어 쓰러졌다고 말하고 있어."
"그렇다면 죽었다는 말이 되겠네요."
아시코가 추론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다고 하지요?"
"바로 그게 문제야."
마르트 고모가 말했다.
"아마 쉽사리 답을 알아맞히기는 힘들걸."
"도시에 들어가는 알파벳 두 개라..."
테오가 중얼거렸다.
"혹시 마오 아닐까? 아니지. 그렇게 하면 M-A-O 세 글자가 되지. 그렇다면 누굴까?"
"잘 모르겠으면 파투에게 전화해 보렴."
마르트 고막 말했다.
"파투가 누가예요?"
아시코가 물었다.
"학교 친구야."
테오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내가 잘 모를 때마다 파투에게 전화를 하면, 그 애가 내가 힌트를 주기로 되어 있어."
"너 핸드폰 가지고 있지? 어서 걸어 봐."
마르트 고모가 집요하게 테오를 재촉했다.
"자동차 잠깐 세우고 걸면 되니까."
"안 돼요."
테오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지금 시간이면 자고 있을 거예요."
"뭐라구? 인도에서는 자는 파투를 잘만 깨우더구나.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네 애인인데도
말이다."
마르트 고모가 테오를 놀렸다.
"애인이라구?"
아시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냐."
테오는 변명처럼 우물우물 말했다.
"내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 뿐이야. 내가 여자애하고 얘기만 해도 고모는 멋대로
상상한다니까."
마르트 고모는 토라진 척하며 자동차 안쪽으로 몸을 기대고는 두 젊은이들을 힐금힐금
곁눈질했다. 이 두 아이는 서로 사랑하는 게 분명해. 마르트 고모는 자는 척하면서 테오와
아시코가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가엾은 파투!
아마테라스의 베일
자동차가 이제 막 신사가 위치한 야마다 근교에 접어들 무렵, 두 젊은이는 조심스럽게 서로를
애무하고 있었다. 마르트 고모는 다짜고짜 아시코에게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690년 이래로 이 성소는 20년마다 한 번씩 파괴되었다가
재건축되기를 거듭했답니다. 이런 전통을 '센구'라고 하지요. 처음엔 더러움으로부터 성소를
정화시킴으로써 세상을 쇄신한다는 의미로 시작된 전통이지요. 특히 군주가 죽었을 때 주로
거행되었어요. 이 신사를 마지막으로 재건한 때가 1993년인데, 그때 예순한번째로 센구를
맞았지요. 그렇지만 너무나도 엄청난 경비가 소요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대시 재건축되는 일은
없을 거에요."
"아마 정신이 온통 다른 데로 가 있는 모양인데, 안내책자에 다 나와 있는 이야기만 하면 재미
없잖겠어?"
마르트 고모가 툴툴거렸다.
"죄송해요. 맥캐리 부인."
아시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해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성소의 베일을 들추어보면 안 된다거나, 또는 1889년 모리 자작이 지팡이 끝으로
그 베일을 들추어보았다가 6개월 후 광적인 초등학교 교사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이야기 등이 더
흥미롭지 않을까? 살인자는 죽었지만, 일본인들은 아직도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있잖니. 또
이세신궁이 바로 아마테라스 여신을 모시는 신도 사원이라는 점을 빼놓아서는 안 되겠지."
"오직 천황만이 이 신사에 들어갈 자격이 있어요."
그제서야 아시코가 서둘러서 한 마디 덧붙였다.
"테오, 조심해. 사진을 찍으면 안 돼. 경비원들이 널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안에 뭐가 있길래 그러는 거지?"
테오가 물었다.
"두 가지 상징이 보관되어 있어."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아마테라스 여신이 동굴 밖으로 나올 때 아메노우즈메가 들이댔다는 거울과, 여신의 남동생
스사노오가 지녔던 신검. 이 두가지야. 일본의 영구한 삶을 상징하는 물건들이지."
"고모는 보셨어요?"
"아니, 책에서 읽고 알았어."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테오 넌 거대한 목조 건물만 보게 될 거야. 새로 지었지만 아주 아름답고 단순한 건물이지.
그렇지만 원한다면 베일에다 동전을 던질 수 있어. 기도문을 바칠 수도 있고."
"제 메시지를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테오가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는 듯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아마테라스 여신이 도와줄지도 모르잖아요. 답을 해주실까요?"
"글쎄다, 한 번 시도해 보렴."
마르트 고모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다리를 하나 건너가자, 그 첫번째 문이 나왔다. 문 옆에는 높이가 6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커다란 녹나무가 자라고 있었으며, 그 문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신사의 본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듬지 않은 목조 구조물에 짚으로 된 지붕이 얹혀져 있었는데, 높이는
녹나무와 거의 비슷했다. 울타리 위로는 이중으로 경사진 지붕이 삐죽이 솟아 있었으며,
합각머리를 가로지르는 막대기드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순례자의 방문을 기다리는 듯 연못은
고요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우선 몸을 깨끗이 해야 해."
아시코가 말했다.
"손과 입을 씻어야 해. 대나무 국자를 집어. 그렇지만 입은 열지마. 이 물은 흙투성이거든."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테오는 그런대로 씻기를 마치고 소매 끝으로 물기를 닦았다.
"이제 그 점퍼를 벗어."
아시코가 자신의 점퍼를 벗으며 테오에게 말했다.
"그게 관례야. 이제부터 우리는 여신에게 경배를 드릴 텐데, 절대로 우리하고 여신을 갈라놓는
베일을 들추어보면 안 돼."
신사의 계단마다 무릎을 끓은 순례자들이 그 이마를 바닥의 돌에 대고 있었다. 아시코도
차례가 되자 몸을 굽혔다. 마르트 고모와 테오는 꼼짝도 않고 가만히 서서 신비스런 베일이
가볍게 떨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시코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테오와 고모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자 됐어, 이게 전부야. 신도에는 책이나 조각, 그림, 경전 따윈 아무 것도 없어."
"그저 커다란 집 같은 걸."
테오가 말했다.
"그렇지만 사실은 이런 게 훨씬 더 나은 것 같아."
"뭐보다 낫다는 말이지?"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에요."
테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예루살렘에도 공백을 가리기 위해 휘장을 쳐 놓은 곳이 있었어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신 신사로부터 도요우케 오미카미를 모신 신사까지는 약 6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두 젊은이는 거뜬히 6킬로미터를 뛰어갔으나, 마르트 고모는 한참 뒤에 처져서
헐떡거렸다. 뛰어오느라 숨이 찬 테오와 아시코는 커다란 향나무 밑에서 멈춰 섰다.
순례자라고는 아무도 없었고, 주위에는 기적처럼 정적만이 감돌았다.
"우리끼리만 있으니까 참 좋다. 넌 안 그래?"
테아고 아시코의 양손을 잡으며 말했다.
"맥캐리 부인은?"
아시코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걱정 마. 곧 오시겠지."
테오는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우리 또 뛸까?
멀리서 마르트 고마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엾은 고모 같으니라구. 저렇게 걸음이 무거워서야..."
"이렇게 하면 안 돼."
아시코가 한숨을 지었다.
"우리가 기다려서 같이..."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두번째 신사의 지붕도 먼젓번 것과 동일했다. 하지만 테오는 신사 따윈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 대신 나무 뒤로 돌아가 아시코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이러면 안 돼."
아시코는 거듭 이 말을 반복했지만, 테오에게서 빠져 나오려는 아시코의 몸짓은 소극적일
뿐이었다.
"뭐가 어때서 안 된다는 거야?"
테오가 자신의 입으로 아시코의 입을 막았다.
아시코도 테오가 하자는 대로 몸을 맡겼다. 테오는 두 눈을 감았다. 바야흐로 금지된 여신의
베일을 들춘 것 같은 기분이었다. 테오는 아시코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왜 아시코는 갑자기
지렁이처럼 몸을 비비 꼬는 것일까?
"맥캐리 부인이야."
아시코가 테오에게서 몸을 빼며 다급히 말했다.
"바로 우리 뒤에 계셔."
두 눈이 휘둥그래진 마르트 고모는 더 이상 소리칠 기운도 없었다. 위협이라도 하듯이. 테오와
아시코를 향해 주먹을 흔들던 마르트 고모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르트 고모! 다치지 않으셨어요?"
테오가 놀라서 소리쳤다.
"이 불한당 같은 녀석아."
고모는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제 잘못이에요, 맥캐리 부인."
아시코가 고모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제가 싫다고 했어야하는 건데..."
"아니, 제 잘못이에요."
이번에는 테오가 나섰다.
"너희들끼리 무슨 짓을 했던, 그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 우선 나 좀 일으켜 다오."
테오와 아시코는 마르트 고모를 부축해 일으킨 다음 서둘러서 먼지를 털었다.
"내 구두 좀 봐. 먼지 좀 털어 줄래? 그만하면 됐어. 자, 이제 너희 둘 내 말 잘 들어. 아시코,
난 네 아빠한테 전부 다 이야기할 수도 있어. 아니 그렇게 겉으로만 회개하는 표정 짓지마, 다
필요없어. 어쨌거나 난 전부 말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너희 둘이 이제부터 얌전히 있겠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 그리고 테오 너, 앞으로 또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면 난 당장 여행을
그만둘 거다. 알았지? 난 분명히 말했어."
"휴우, 되게 겁나는군."
테오가 조심성 없이 중얼거렸다.
찰싹! 마르트 고모가 순식간에 테오의 뺨을 때렸다. 얼굴이 새빨개진 테오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기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 녀석이 정말 보자보자하니까 너무 버릇 없이 군단 말야."
마르트 고모는 팔짱을 낀 채 호통을 쳤다.
"내가 왜 아시코 너한테는 방금 테오에게 한 것처럼 하지 않는지 모르겠구나. 나 몰래 둘이서
뽀뽀한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불편한 내 다리 생각은 조금도 안 해 주고,
너희들끼리만 달려가서 날 넘어지게 한 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
테오와 아시코는 앞으로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누가 너희들 속마음을 모를 것 같아 그러니? 건성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아."
"아닌게아니라 우리 둘 다 버릇이 없는 편이에요, 맥캐리 부인."
아시코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잘못을 시인하면 벌써 반쯤은 용서받을 수 있지."
마르트 고모는 너그럽게 말했다.
"오는 길에 부적을 팔길래 너 주려고 하나 샀다, 테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네가 메시지를
해독하고 난 다음에나 줄 거야."
"알았어요, 고모."
테오는 유순하게 대답했다.
남자의 정절
그날 저녁부터 테오는 사전과 한바탕 씨름을 하였으나, 망치를 상징으로 하는 도시 이름은
찾아내지 못했다. 죽은 다음까지도 살아남은 인물 역시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알파벳 두 개도
고약하게 머리를 괴롭히기는 마찬가지였다.
"파투에게 전화해 보렴."
마르트 고모가 넌지시 테오를 부추겼다.
"어떻게 파투에게 전화를 할 수가 있겠어요?"
테오는 수치심 때문에 안절부절 못 했다.
"아무렴. 양심이 있다면 넌 절대로 전화 못할걸."
고모가 약을 올리자, 테오는 화가 난 듯 전화번호를 눌렀다.
"파투? 응, 나 테오야. 나도 알아. 시간이 없었어. 정말이라니까. 이곳저곳 구경하러 다니느라
바빴어. 물론 나도 네 생각 자주 하지. 그런데 다음 행선지가 어디인지 몰라서 고민이야. 네
도움이 필요해. 그거야 너 좋을 대로 해. 힌트 좀 줄래? 뭐? 내 목소리가 어때서? 내 목소리야
노상 그렇지, 안 그래? 자, 얼른 힌트나 줘. 내가 말도 안 돼. 어떻게 내가 널 구박하겠니? 절대
그럴 리 없어. 약간 흥분하긴 했지만, 별일은 아니야. 이제 그만 좀 할래? 어서 힌트나 달라니까,
파투!"
테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전화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파투가 전화를 끊어버리다니..."
테오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것 봐라. 여자애들은 눈치가 빠른 법이야. 어서 빨리 다시 걸어 봐."
"파투가 화났나 봐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시간 끌지 말고 어서 다시 걸어."
"파투? 미안해. 응, 좀 피곤해. 그래, 많이. 아니 별일 아니야. 춥고 비도 안. 일본? 응, 괜찮아.
제발 부탁인데 힌트 좀 줄 수 있겠니? '내가 너를 기다리는 도시에는 내 이름 중의 두 글자가
들어 있도다.' 그렇게 빨리 말하니까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세번째 글자는 이 도시 이름 철자
중 두번째 글자이다. 내 별명은 에로 시작한다...' 너 지금 나 골탕먹이려고 작정 한 거 아냐?
머리 속이 어떻게 된 거 아니냐구? 뭐, 일본에 계속해서 머무를 예정이냐구? 가끔씩 넌 참
이상한 소릴 하더라. 나도 몰라. 글쎄, 두 세 달 후... 그래, 길긴 길지. 물론이구말구. 나도 그래.
점점 더. 그래, 아주 세게."
테오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마음속에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테오, 넌 누가 더 좋아?"
마르트 고모가 엄격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발 그만두세요!"
테오가 소리쳤다.
"파투가 마음 아파할 거예요."
"아시코도 그럴 테지."
마르트 고막 덧붙였다.
"1주일 후면 너를 못 만나게 될 텐데."
"1주일이라구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고약한 노릇이로군요."
"테오 너도 드디어 고통이 뭔지를 알게 되려나 보다."
마르트 고모가 측은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메시지나 잘 연구해 봐."
투덜대면서 테오는 탁자 앞에 앉았다. 도시 이름의 첫 세 글자라... 도시를 뜻하는 V. I. L. L.
E. 다섯 글자 중에서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V. I. L. 사전에서 V자를 찾아보았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추리하면 안 될걸."
마르트 고모는 논평했다.
"그것보다는 시간과 관계되는 작은 도구라는 말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봐."
"작은 도구? 작은 낫?"
"맞았어. 망치와 낫"
"그렇다면 공산주의 국가겠군요!"
테오가 소리쳤다.
"아냐, 이젠 공산주의 국가가 다 없어졌는데... V. I. L? 바츨 라프 하벨?"
"그건 아냐. 별명을 생각해야 해."
"흔한 별명이 아닐 거야. 여성이라고 했으니까."
"누가 그런 소릴 하든?"
마르트 고모가 놀라서 물었다.
"파투가 그랬어요. 내 별명은 엘(프랑스어에서 엘은 3인칭 여성 단수, 혹은 복수를 나타내는
대명사이다)로 시작한다고 했거든요."
"엘이라고? 아,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그렇게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니? 파투가
전화로 말했기 때문에 네가 3인칭 대명사 '엘(elle)을 생각했나 보구나. 그런데 그게 아니라
알파벳 철자 'L'로 생각해야 해."
람페두사, 라팔리스, 리페루즈, 로렐, 레핀, 아니지... 맞아. 레닌!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랴노프,
줄여서 레닌. V. I. O. 애칭 L.
"하지만 도시 이름은 아직 못 찾아냈어."
마르트 고모가 지적했다.
"그야 물론 모스크바겠지요. 두번째 철자가 O자 맞잖아요."
"좋아, 약속은 약속이니까."
마르트 고모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며 말했다.
"자, 너 주려고 산 부적. 일본어로 씌어 있어. '남자의 가장 큰 덕목은 정절이다.'"
"고모는 너무하셨어요. 일부러 이렇게 써달라고 주문하신 게 틀림없어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안 그럴 수도 있고, 어쨌든 신의 계시가 아니겠니?"
후회하는 테오
도쿄로 돌아오는 길은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아시코는 애써 테오를 피하려고 했고,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었다. 마르트 고모는 짐짓 점잖은 태도로 앉아서 내내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여정은 끝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다음날, 검사를 위해 병원을 찾았을 때도 서먹서먹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검사 결과가 나 올 때까지 사흘을 기다리는 동안 아시코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낙담한 테오는 하릴없이 박물관을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즐거운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였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서 푸석푸석한 얼굴로 깨어나기
일쑤였다. 이런 테오를 딱하게 여긴 마르트 고모가 파투에게 전화나 해보라고 부추겼다.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파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고모 말씀이 맞아요.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렇게 노상 축 늘어져 있지만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거 아냐? 네
쌍둥이 형제는 어떻게 됐니? 네가 이렇게 궁상이나 떨고 있으면 좋아할 것 같니?"
"그 애는 요즈음 잠자코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시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너 이제사 후회가 되는 모양이로구나."
마르트 고모는 테오가 측은히 느껴졌다.
"아직 기회는 있지. 호숫가에서 멋진 산책을 한 뒤에 감동적으로 작별을 고하는 거야. 작별
인사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두고 보렴."
할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테오는 방 한구석에 놓인 소파에 틀어박혀서 내낸 TV만
시청했다. 마르트 고모는 시간이 흘러가기만 기다렸다. 우울하게 이틀을 보냈을 때, 검사 결과가
도착했다. 먼저보다 약간 진전이 있었다. 테오가 병에 걸린 이후 처음으로 접하는 기쁜
소식이었다.
"꿈만 같구나. 테오, 넌 이제 나을 수 있어!"
마르트 고모가 소리쳤다.
"네, 그래요."
테오에게는 별반 기쁜 기색이 없었다.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죠?"
"기운을 추스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재발할 수도 있을 테니까."
"차라리 그렇게 되는 편이 낫겠어요."
테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두자."
마르트 고모는 단호하게 테오의 말을 가로막았다.
"우린 내일 아시코랑 하코네에 갈 거야. 제발 나를 위해서라도 그 애와 마지막으로 보내는
날들을 엉망으로 만들지 말아 다오 그리고 우선 엄마한테 전화나 하자. 지금 당장!"
"그러고 싶지 않아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아니 너, 그렇듯 열심히 익힌 다도 정신을 벌써 잊었니? 그러지 말고 좀 침착하렴."
하는 수 없이 테오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전화를 통해 전해들은 소식은 모처럼
반가운 내용이었지만, 그 소식을 전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너무도 풀이 죽어 있어서 멜리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걱정 마세요, 엄마. 아무 일도 없다니까요."
테오는 열심히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마르트 고모랑은 괜찮느냐구요? 네, 뭐 그럴 때도 있죠. 아녜요, 정말로 심각한 언쟁은
없어요. 어제만 해도 고모는 뒤에 처져 있는데, 제가 좀 빨리 달려서 화가 잔뜩 나셨었어요. 왜
웃으세요, 엄마? 웃기는 얘기라구요? 고모한테는 그 반대예요. 고모한테 한방 얻어맞기까지
했는걸요. 그 다음에요? 그 다음엔... 고모가 절 어르셨죠. 그것 보세요. 별일 없다니까요. 아참
엄마, 얼마전 제 쌍둥이 형제를 봤어요. 엄마는 놀라지도 않으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집안에 유전이 있다구요? 그거 흥미있는 얘기네요. 제가 동생 생기는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세요?
아뇨, 지금 당장 말씀해 주세요... 엄마?"
테오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엄마도 피투처럼 전화를 끊어 버렸던 것이다.
"뭐라고 하시든?"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엄마도 심기가 불편하신가 봐요. 엄마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고 할 때면 전화를 끊으시거든요.
검사 결과도 좋은데, 또 왜 그러신담!"
"마음이 너무 벅차서 그랬을 수도 있지."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그렇게밖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구나."
"네, 그런 것 같아요."
테오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하지만 좀 이상해요."
"엄마 얘긴 그쯤 해두렴. 모스크바엘 가는데 신나지 않니? 금색 돔 모양의 대성당과 근사한
제의를 걸친 사제들, 그리고 다성 합창곡..."
"레닌의 미라도 있지요."
테오가 덧붙였다.
"그래, 네 말도 맞는구나."
마르트 고모는 한숨을 쉬며 응수했다.
"뭐니뭐니 해도 인류가 창조해 낸 마지막 신을 만날 수 있으니 좋지."
아시노 호에서의 작별
아틀 후, 테오와 마르트 고모는 아시코와 함께 하코네 지방으로 떠났다. 미소가 가득 담긴
얼굴로 아시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테오의 두 볼에 입을 맞추었다. 테오는 그래서
거제서야 활기를 되찾아 아시코의 손을 잡았다. 마르트 고모는 아시노 호 부근의 여관에 방을
예약했다. 날씨가 좋으면, 여관에서 전설적인 후지 산의 만년설을 감상할 수도 있었다.
테오는 방 한쪽 병을 차지하는 미닫이문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고, 방바닥에 깔린 요를
보고도 무척이나 좋아했다. 테오는 이내 양말 바람으로 다다미방을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기모노
차림이 종업원들이 소리 없이 조용히 다녀갔으며, 풍성한 냄비요리 덕분에 생선회를 먹어야 하는
고역도 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식 실내복을 입고 돌아다닐 수도 있었으므로,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잠잘 시간이 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그런데 고모, 이 침대는 너무 딱딱해요."
테오는 자리에 누운 지 5분도 못 돼서 투덜대기 시작했다.
"일본식 베개 하나 줄까?"
마르트 고모가 웃으며 물었다.
"원한다면 하나 가져오도록 할게."
테오는 종업원으로부터 도자기로 된 육면체를 받아들었다. 위에는 푸른 빛깔의 작은 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이 괴상한 물건은 뭐예요?"
테오가 고모에게 물었다.
"이게 바로 베개야."
고모가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너한테는 이상하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일본인들은 단 하루라도 이 베개 없인 잠을 못 잔대.
자, 한 번 누워 봐."
테오는 베개를 목 밑에 받치고 말없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다리를 웅크리려 하자 목이 몹시
아팠다.
"아파 죽겠어요."
테오가 신음 소리를 냈다.
"그것 봐, 괜히 다다미방에서 자고 싶어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제 잘 알았겠지.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사는 법이야. 네가 생각하기에 베개란 부드러우면서 네가 원하는 대로 구부렸다
폈다 할 수 있는 쿠션이겠지만,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베개는 목에 가해지는 일종의 극기 훈련인
셈이지."
"그러니까 잠자는 방식도 지역에 따라 가지각색이다, 이런 말씀이신가요?"
"물론이지. 너도 지금 경험하고 있잖니. 아마 어딜 가나 같은 방식으로 잠을 자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일걸."
"아무리 그래도 남자애들이 오줌 누는 방식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일걸요."
테오는 자신 있게 말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 서서 누는 곳도 있고, 쭈그리고 앉아서 누는 곳도 있거든."
"그러면 애 낳는 법은요?"
"그것도 다르지. 어떤 지역에서는 여자들이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애를 낳는가 하면,
드러누워서 애를 낳는 곳도 있고, 또 서서 애를 낳도록 하는 곳도 있지."
"하지만 허파로 숨을 쉬는 거야 어디에서나 공통이겠죠!"
테오가 소리쳤다.
"넌 쿨카르니 선생한테 배운 걸 벌써 잊었니? 배로 호흡하는 법을 배운 걸로 아는데."
"네, 그건 그래요."
테오도 아차 싶었는지 순순히 시인했다.
"그러고 보면 죽는 방식만 만인 공통이겠군요."
"그것조차 틀렸어."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요가 수행자들은 열반상태에 있는 육체를 떠남으로써 스스로 죽는 순간을 결정할 수가 있어."
"그럼 생각하는 능력은요?"
"그것도 다르지."
마르트 고모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선뜻 말했다.
"생각이라는 것도 곳에 따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단다. 사고작용은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지. 한편에서는 사고를 통제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해방시킨다는 차이가 있지만 생각을 한다는 사실은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으로 적용된다고
해야겠지. 자, 이제 일본 베개를 베고 눕든 빼버리든 네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 잠이나 자렴."
다음날은 일본에서 보내는 마지막날이었다. 마침 하늘은 맑게 갠 가운데, 가벼운 새털구름 몇
점만이 언덕 위에 만개한 벚나무에 약간씩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긴 배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감이 없어 보이는 세 개의 돛을 단 배의 옆구리는 진홍빛이었으며,
배이 뒤쪽에는 금빛 장식이 달려 있었다.
"꼭 피터팬의 배 같아요!"
테오가 소리쳤다.
"저 배도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배예요?"
"디즈니랜드풍의 배란다."
마르트 고마가 한심하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표 사줄 테니까, 너희 둘이서 타고 와.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자, 어서 다녀와."
"왜 그러시는지 알겠어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아시코, 가자."
마르트 고모는 이들 두 젊은이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소로 돛단배를 선택했다. 피터팬의 배는
물위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테오와 아시코는 후지 산 정상을 바라본다는 구실로 갑판
위로 올라갔다.
"벗꽃이 정말 아름답구나."
테오가 말했다.
"그래, 굉장히 멋있어."
"햇빛도 근사해."
테오가 덧붙였다.
"응, 테오.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나도"
테오가 아시코의 말을 막았다.
"저 말이지..."
"말 안 해도 난 다 알아. 하지만 넌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어."
"너도 마찬가지야."
테오가 서둘러서 말했다.
"파투라고 생각나니? 지난번엔 내가 거짓말을 했어. 파투는 그렇고 그런 학교 친구가 아니라,
내 애인이야."
"그럴 거라고 짐작했어."
아시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실은 나도 애인이 있어."
"그럴 리가 없어!"
"일본 사람?"
"아니, 프랑스 사람이야."
아시코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대사관 서기관이지. 우리 아빤 아무 것도 모르셔. 그런데 올리비에가 우리 엄마 편지를
나한테 전해 주었어. 내 생모 말야."
"그렇다면 넌 진실을 다 알고 있었겠구나. 그래서, 엄마를 만나 볼 거니?"
"아직 잘 모르겠어."
아시코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울기도 많이 울었어. 난 내 일본 엄마를 굉장히 좋아하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올리비에가 나를 위로해 주느라 애를 썼지."
"그러다가 널 좋아하게 되었겠지."
테오가 짐작이 간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거니?"
"여길 떠날 거야."
아시코가 한숨 섞인 투로 짧게 말했다.
"올리비에는 나랑 결혼하고 싶대."
"그게 정말이니?"
테오가 물었다.
"장난이 아니고 진심이래?"
"물론이지."
아시코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상해서 쌀쌀맞게 말했다.
"그런데 나랑은 어째서..."
"넌 상냥하고 아주 프랑스적인 애였어. 게다가 환자니까. 난 그저..."
아시코는 말하기 거북한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잖아. 너한텐 파투가 있고, 내겐 올리비에가 있으니까."
"그럴 테지."
테오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나랑 키스했잖아."
"그 정도야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또 할 수가 있어."
말을 하면서 아시코는 테오 쪽으로 입술을 내밀며 발끝을 모아 세웠다. 테오는 아시코를 와락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자, 이제 그만..."
아시코가 테오에게서 몇 발짝 물러나며 나직이 말했다.
"마치 벚꽃 같아. 꽃잎은 날아가지만, 꽃잎에 대한 기억은 영원히 남으니까."
마르트 고모는 테오와 아시코가 손에 손을 맞잡고 돌아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편으로는
슬프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유쾌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면서
테오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작별 인사는 잘 했니?"
마르트 고모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테오에게 물었다.
"아무 말도 하기 싫어요!"
"내가 선문답 하나 들려줄까? 어느 날 수도승이 그 스승을 찾아가서 '저는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했더니, 그 스승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니? '그렇다면 그걸 여기 내려놓게나'
그러더래."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있다는 거야.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무엇인가를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 그렇지만 이 수도승은
그걸 이해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몹시 화를 냈대. 그러자 스승이 침착하게 '제발 부탁이네. 그걸
도로 가지고 자네 집으로 돌아가게나'라고 말했단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네 마음을 여기
놓고 가렴, 테오. 그런다고 해서 네가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있어요. 벚나무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을 테죠. 이번엔 정말로 꽃잎이 지는 의미를 알 것
같아요."
저자와의 대화
'테오의 여행'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대령에 올랐으며, 카트린 클레망에게는 엄청난
질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중 일부만 간추려 싣는다.
카트린 클레망, 당신은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저는 완전히 물질주의자입니다. 하지만 나는
신앙인들을 깊이 존경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이 책에 나오는 마르트 고모와는 반대로
반교권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 책을 썼습니까?
만약 제가 종교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것은 바로 인류학적 관점에서였습니다. 제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학생이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또한 그가 신화를 연구했듯이, 저는 종교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종교성이란 매우 중요한 현상입니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나 공통적인
관점으로 세계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사와 결혼한 저는 지구의 많은 곳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현재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 살고 있다.) 제가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들입니다.
당신은 특히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종교를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지요. 저는 그들이 한두 개의 종교를 아는 것보다는 가능한 많은 종교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들은 절대성을 부인하고, 서로 상대화하여 볼 줄 알게
되는 동시에 교조주의를 피할 수 있습니다. 종교에 관한 세계 여행을 하면서, 저는 교조주의가
단지 이슬람교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든, 유대교든, 힌두교든, 기타 모든 종교 속에
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것과 싸우는 것이 도덕적 의미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입니다. 이 책에서 종교의 신화적 형태들에 동정적인 입장을 보이는데요. 당신이
다른 종교에 비해 선호하는 어떤 종교가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비주의에 관하여, 저는 철학적 소양으로 그것에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 종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양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들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대량학살을 야기시키기도 합니다. 제 책 속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하고자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관용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결코 비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설명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이성론자입니다. 하지만 모든 종교를 가로지르는 이 소설의 결과로 당신은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믿지 않습니까? 어떤 기능이 종교를 완성시킬까요? 인간들의 의문에 자발적인
응답일까요, 아니면 어떤 도움, 혹은 탈주일까요?
무신앙자인 저는 명확하게 신자들에게 속하는 것인 신앙을 취급하기 위해 지명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기능에 대해서는 유능한 사람들, 즉 3615종교(종교단체)에 문의하기 바랍니다.
그와는 반대로, 보편적인 확신을 가지고 '믿음에 대한 필요성'은 설명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아주 지적인 방법으로 '마력적인 사상' 혹은 '사상의 전지전능함'이라고 일컬은 바 있습니다.
헤겔이 철학을 '야회복을 가지고 현실의 구명을 막는 것'이라고 정의했을 때, 동일한 필요성이
문제가 됩니다. 다시 말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구멍을 메우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이 이 책을 쓰기 전의 제 생각이었지만, 제가 생각하는 그것이 '테오의
여행' 그 자체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 그것이 바로 나다'라고 말한 것처럼,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는 대담성을 저는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것에 관해서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생각이
전지전능함이겠지요.
당신은 철학자이자 소설가입니다. 이 책에서 소설과 철학의 위치는 어떤 것입니까?
저는 너무나 오래 전부터 그 질문을 생각해 왔습니다. 어떤 소설이든 우리는 소설을 철학의
일부로 쓰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끄럽지 못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소설에 대해 고전적이고
압축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등장인물을 만들면서 소설을 씁니다. 그들이 가상인물이든
실존인물이든 그들에게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면 말이지요. 이런 점에서 '테오의 여행'은 엄밀히
말해 제 개인적인 기준에는 극히 예외적입니다. 신들과 주인공의 만남은 그의 난치병이나 출생의
비밀, 그의 사랑 그리고 그의 불안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는 전 세계의 종교를 만납니다.
그것들이 철학적인가요? 물론 애초부터 그렇지는 않습니다. 철학은 좀더 늦게, 헤겔의 말을
빌리면 황혼에 옵니다. 회색빛 배경에서 명상에 잠기기 전에 낮의 색채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도
헤겔의 말이지요. 일반적으로 철학은 낚싯줄을 던지듯이 글쓰기의 양극단의 긴장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 이상은 아닙니다. 반대로 저는 지속적으로 정신분석과 인류학에 대해
배워왔고 연습했던 것을 사용합니다. 근본적인 것은 이러한 지식적 요소들이 이야기의 감정을
위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토대를 지워 없애야 합니다.
라만차 해안을 거의 떠나지 않았던 돈키호테와 달리 당신은 많은 곳을 여행하였습니다. 테오의
여행에서 당신이 직접 체험한 내용은 어디에 나타납니까?
만일 제가 묘사한 것의 거의 전부를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더라면, 저는 감히 이와 같은
소설적 모험에 뛰어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직접 체험하지 않은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4년 반을 인도에서 5년을 오스트리아에서 살았고, 프라하는 충분히 알만큼 살았으며,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들인 자카르타, 도쿄, 모스크바, 바이아, 예루살렘, 뉴욕, 이스탄불은 1년
정도, 가장 경탄할 만한 애니미즘 의식을 발견해 온 세네갈에서는 약 3주간을 보냈습니다. 작품
속의 영적 '안내자들'중 어떤 이들은 실존인물이거나 제 친구입니다. 여행 동안 저는 '테오의
여행'의 안내 원칙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 테오는 건물들, 의식들, 몸짓들을 보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때 안내자가 나타나서 이러한 장식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고, 이야기하며,
실연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실제로 겪은 체험'이란 말을 생각해 봅시다. 저는 이 의식을
체험했고, 신화와 신앙의 거대한 틀을 배웠습니다.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지적 도구로 이해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교, 결코 어떤 형태로도 '황홀'을
경험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지적 도구'가 당연히 제 동의하에 견고히 보호해 왔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신분석과 종교 사이를 잇는 가교가 있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당신의 책이 암시하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인데.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종교와 신성은 서로 다른 두 심급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성을 정의하고자 할 때에는 일반적인 종교의 구성 원칙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신분석과
종교 사이를 잇는 수많은 가교가 있지만, 지어야 할 다리의 기둥들과 건축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겨우 작업이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예술 작품이!
이러한 정신적 탐험은 종교들을 생각나게 합니까?
제 자신의 여행을 돌아보면 종교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엄격히 말해
우리는 '종교성'아니 '신앙심'을 언급할 수 있지만, 저는 '믿음'이나 '열정'을 더 선호합니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러한 열정의 형태들은 분명히 서로
다르고, 또한 상반되기도 해서 유일한 심급인 종교로 일반화시키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의 방식은
활력이 있고 분석될 수 있습니다. 결코 완전하지 않지만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라집니다.
종교의 형태는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종교라는 '것'을 묘사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정확히 어떤 것을 말해야 하나요? 신의 존재를? 물론 그것을 종교로 볼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랍비가 당신에게 그것을 말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신을
믿는지 물어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는 적응해야하는 명령들을 보냅니다. 종교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사회 속에서 삶이 가능하도록 신의 제약을 숭배하는 의무일까요?
만일 모든 종교가 특별한 제약방식으로 완강히 버티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잘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일상생활의 제약에 매우 이끌립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유대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한꺼번에 행해 보십시오. 당신은 쓴 나물을 먹고 유월절의 양고기를 먹을 것이며,
이슬람교에서는 금지된 화장될 권리가 당신이 그럴 의무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힌두교는 그것을
요구합니다.
당신이 이 퍼즐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것입니까? 내 느낌에는 당신이 계획한 백과사전의
의도를 넘어서 당신의 많은 부분이 '테오의 여행' 속에서 나타나는데요.
그렇습니다. 어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후로 제 친구들은 저를 '마르트 고모'라고
부릅니다. 그 말은 저를 화나게 하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예쁘긴 하지만 살이 좀 쪘거든요. 그럴
줄 알았다면 좀 날씬하게 만들어 주었을 텐데. 하지만 내심 저는 그들이 옳다고 믿습니다. 저는
신앙이 없지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려고 합니다. 내적 충동에 신중해야 하고,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가 관대하다고 확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은 종교 교육을 받았나요? 종교나 신에 대해 자문해 보셨습니까?
저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조부모는 1945년
아우슈비츠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그때 저는 6세였습니다. 그것이 신에 대한 인식을
단순화시키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반유대주의 공포 때문에 어머니는 저를
카톨릭 학교에 넣었고, 저는 거기서 예절만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매우 좋지 않은 기억입니다.
그후 17세쯤에 저는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카톨릭에 대해 '신앙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 신앙에 대한 확실성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의 진정한 행복이었습니다. 저는 전 세계 종교에 대해 항상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달리 그 이유를 찾지는 마십시오. 그 이유는 아우슈비츠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누가 그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두었을까요? 신은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때마다 인간들은 고비를 넘깁니다. 그것은 결코 인간의 잘못도 신의
잘못도 아닙니다. 어떠한 종교도 열렬한 권유를 통해서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죽이는
무장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확인하는 것이 힘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나쁘지는 않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거나 지금도 죽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내 유일한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서평
세계 문명이 눈뜨다.
그리스어로 '신의 선물'이란 의미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 테오는, '악마처럼 예쁘게 생겼다'고
감탄할 정도로 잘생기고 똑똑하고 호기심 많은 열네살짜리 소년이다.
어느 날 갑자기 현대의학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된다. 집안은 슬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지만, 결국 병원에서의 치료를 포기하게 되고, 세계 각지의 신비스러운
현자와 성인, 주술사, 치료사들의 의술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여행가인 괴짜 고모와 함께 세계
여행에 나선다.
죽음의 그림자를 동반한 채 신을 찾아 떠나는 그들은 예루살렘과 이집트, 로마, 인도 등지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수피교는 물론 그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수많은 종교의 성자들을 만나 그들의 신화와 종교 의식, 문화적 관습 등을
배운다. 또한 이집트 룩소르에서는 주술사의 도움으로 그 동안 자신에게 숨겨져 왔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어 가족들을 놀라게 하는 등 갖가지 사건을 겪게 된다. 가는 곳마다 별난
체험들을 하게 되고, 많은 친구와 현자들을 만난다. 결국 그들의 도움으로 테오는 마음과 정신의
문을 열게 되고, 세계의 종교와 문명에 대한 균형된 시각을 갖게 된다.
신화와 제식의 세계 여행
19세기말에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였다. 혹시 그 독일 철학자는 지나치게 위험을
무릅썼던 것은 아닐까? 급진전인 그의 예언과는 반대로 종교적 심성은 오늘날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문화적으로 보아 '작은 기적'이라 평가받고 있는 '테오의 여행'은, 몇천 년 동안 계속되어 온
인간들의 두려움에 맞서 희망을 증언하고 추구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다.
아주 똑똑하고 호시심 많은 주인공은 '지상의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신을 믿고 있는가'에
대해 이해하고자 끊임없이 놀라워하고 질문한다. 그리하여 그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 곳곳의 성소를 찾아 나선다. 가는 곳마다 많은 친구와 온갖 종교의
성자들을 만나 그들이 무엇을, 왜 믿는가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과
같이 신앙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결코 신학을 위한 모든 종교의 역사를 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수로 몸을
적시듯이 테오의 여행에 흠뻑 빠져들어야한다. 마침내 우리는 '무관심이 곧 모든 의심의
시작'임을 이해하게 되고, 또한 현명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종교의 역사는
관용의 역사이기도 하다'라는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짚더미에서 보석을 찾듯이 세상의 모든
것들 속에 존재하는 '진실의 알곡'을 찾을 수 있다는 것도 배우게 될 것이다. 마침내 '야유하지
말고, 한탄하지 말고, 악담하지 말라. 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라'고 한 스피노자의 말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열고 영혼을 진정시키는 책
정신분석학, 인류학, 철학의 경계에 있는 '테오의 여행'은 그야말로 세계와 동반되는
문명소설이다.
카트린 클레망은 우리를 거대한 정신의 오딧세이로 인도한다. 그녀는 화려하면서도 치밀하게,
그리고 아리러니하면서도 심학하게 '위대한 물음'의 책을 썼다. 그리고 그녀는 설명하고
이야기하며, 무대에 등장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준다. 결국 이 백과사전과 같은 책을 통해 그녀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한 '종교성'이나 '신앙심'이 아니라, 진정한 삶에 대한 '열정'과 '믿음'이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신화와 종교에 대한 모든 생각들을 아주 자유스러운 목소리로 뒤엎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 여행을 통해 여러 문화들의 서로 다른 차이를 존중하고 신앙의 자유를 가질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이 아량과 관용을 가질 것을 호소한다. 이 책은 교육을 위해 아주 귀중할
뿐만 아니라,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나 신자들을 위해서도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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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의 여행4
지은이: 카트린클레망
출판사: 동문선
21 고통의 종교
슬픔속에서
새벽 2시쯤, 테오의 흐느낌 소리에 마르트 고모는 잠을 깼다. "테오, 너 섬라 밤새도록 우
는 건 아니겠지?" 고모는 전등을 켜며 조심스럽게 테오를 나무랐다. "진정제라도 줘야겠구
나." "그만두세요. 이제 곧 괜찮아질 겨예요." 테오는 훌쩍거리면서 우물우물 얼버무렸다.
"음, 그럴 것 같니? 하지만 그런 종류의 슬픔은 쉽게 지워지지가 않는 법인데..." "제가 뭐
슬퍼서 이러는 줄 아세요?" 무안해진 테오는 공연히 큰소리를 쳤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오니까..." "그깟 풋내기 사랑 때문에 말이니? 앞으로도 그런 일은 숱하게 많이 겪을 텐
데..." "제발 설교 따윈 그만두세요." "그런데 말이다, 내 생각엔 슬프의 고통을 느껴 보는 것
도 그다지 나쁠 것 같지는 않구나." 마르트 고모는 침착하게 말했다. "테오 너 말이지, 이전
에도 이런 식으로 고통을 느껴 본 적이 있었니?" "지금처럼 심했던 적은 없었어요." "지난번
로마에서 네 엄마와 헤어질 때도 엄청 울었었잖아? 이별이란 이렇듯 언제나 고통을 동반하
는 법이란다. 마음 함 구석에 고백이 생기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공백으로 위
안을 얻을 수도 있을 거야." "고통이 위안이 될 수도 있다구요? 누구 약올리려고 일부러 그
러시는 거예요?" "물론 내 말을 믿기가 어려울 테지. 너한테 커다란 슬픔이 휘몰아쳤으니...
하지만 어느 날엔가 너도 모르게 네 마음이 안정을 뒤찾을 거야. 슬픔에 잠기면 우선은 식
욕도 없고 주위에 늘어선 아름드리 나무나 꽃들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지. 그러다가 어느
날 새롭게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을 맛보게 될 거야.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되고
나면 다시 자기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거지. 이렇게 시련을 거치면서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거란다." "제발 부처님 같은 말씀일랑은
그쯤 해두시죠." "아냐, 절대로 그런 게 아니야." 마르트 고모는 안타까운 둣 진지한 어조로
다시 한 번 말했다. "이건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거치게 마련인 인생의 평
범한 진리에 불과해." "고모가 뭘 안다고 그러세요?" 테오는 마치 대들기라도 할 듯이 공격
적인 어투로 물었다. "잘 생각해 보렴. 난 가장 사랑했던 남편을 잃었단다." "그러고 보니
고모부에 대해선 지금 처음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마음이 찡해진 테오는 그제서야 부
드러운 어조를 되찾았다. "고모, 그때 많이 슬프셨어요?" "그렇게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디 있
니. 나도 참 한심하지, 널 위로한답시고 이렇듯 멍청한 얘기를 꺼내다니..." 그러나 갑자기
테오가 경련하듯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마르트 고모는 한참 동안이 테오르 얼싸안고
달래야 했다. 울음 끝에 테오는 너무나 많이 울어 딸꾹질까지 해대는 어린아이처럼 지쳐 잠
이 들었다. 마르트 고모는 살며시 테오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서, 대신 베개 위에 테오의 어
리를 위었다. "이제서야 팽글팽글 돌아가던 녀석의 머리가 잠잠해지고, 대신 가슴이 요동을
치기 시작한 모양이야." 마르트 고모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테오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에다가,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양 같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마르트 고
모는 이런 테오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짐을 챙긴 다음, 별 생각 없
이 TV를 켰다. 테오는 창 밖으로 지나는 사람들이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아시
코가 눈에 띄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포기한 듯 TV 앞에 와서 앉았다. "무
슨 프로지?" 마르트 고모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그냥 시시껄렁한 거예요. 프랑스
프로에 일본어 자막을 넣었는데요." "누가 나오는 영화지?" "브리지트 바르도 할멈이 나오는
건데요. 저 바글바글 볶은 머리꼴하고는 ... 참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었요." "나도 저런 머
리를 했던 적이 있었어." 마르트 고모는 옛일이 생각나는지 다소 부드럽게 말했다. 테오는
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푹 떨구고는 땅이 꺼져라 한 숨을 쉬었다. 마르트 고모는 호텔 프런
트에 연락해서 짐을 내려가도록 부탁했다. 짐을 내리는 데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꽤 걸렸
지만, 테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 이제 가자. 이 게으름뱅이야." 마르트 고모가 테오
의 어깨를 잡으면 말했다. "얼마 동안만 더 머무르면 안 될까요?" "그러면 모스크바 일정은
어쩌구? 거긴 얼마난 복잡하고 까다로운지 네가 아직 몰라서 그래." "거기 가면 얼어죽기밖
에 더하겠어요." 테오는 투덜댔다. "우울하기 짝이 없겠죠." "그래, 지금의 네 심정과 딱 맞
을 거야." 마르트 고모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지금 그 기분이라며, 성스러운 러시아의
정취를 완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구나."
러시아와 소련의 역사
기내에서 테오는 식욕을 외찾았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말수가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먹기
는 잘 먹었다. 마르트 고모가 조심스레 그 눈치르 살피며, 테오에게 첫 번째 유도신문을 시
도해 보았다. "테오 너. 러시아에 대해서는 좀 아니?" 고모가 물었다. "전 지금 얘기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요." "너 이제 보니 당나귀 고집이구나. 그래도 날 봐서 말 좀 해보렴. 이
제 우리가 가려는 나라에 대해서 뭘 알고 있니?" "예전엔 소련이라고 물었어요." 테오는 마
지못해 입을 열었다. "스탈린이라는 지독한 독재자 때문에 전체주위 국가가 되었지요. 모스
크바 요새처럼 보이는 곳 어딘가에는 붉은 별이 달려 있구요. TV특파우너들이 늘 그 앞에
서 말을 하기 때문에 기억나요. 크렘린 궁도 있어요." "좋아. 그렇다면 베를린 장벽의 붕괴
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그때 전 너무 어렸거든요. 그 무렵 엄마 아빠는 TV 앞을 떠
나지 않으셨지요. 사람들이 기뻐 날뛰며 큰 크리트 조각을 주워 모은던 것까지는 기억해요."
"스탈린 이전에는?" "레닌 같은 차르들이 있었지요." 테오는 자신 있다는 투로 대답했다.
"저런 저런..." 라므트 고모는 혀를 끌끌 찼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야." "전쟁이 막 끝나갈 무렵이었지요." 테오가 대꾸했다. "러시아의 상황은 아주 나빴어요.
레닌은 노동자 계급을 선동해서 봉기ㅣ토록 한 다음, 차르를 총살하고 그 권력을 쟁취했어
요. 레닌은 이를 가르켜 공산주의라고 일컬었지요. 그렇지만 러시아인들은 차르 치하나 공산
주의 치하를 말곤하고 내내 불행하기만 했어요. 저희 선생님께서는 레닌을 최초의 공산주의
차르라고 하셨어요. 전 잘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레닌이 대단한 독재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 보렴.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얘기를 잘하잖니." 마르트 고모는 흡족한 듯 말했다. "그
런데 넌 러시아 공산주의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고 있는 거야?" "아주 고약했어요. 수용소
군도만 생각해 봐도 다 알 수 있어요." 테오는 흥분해서 소리였다. "강제수용소투성이였죠.
사람들은 자유를 빼앗겼어요. 생각하는 대로 솔직히 말했다간 정신병원으로 보내지가 일쑤
였지요. 하지만 아빠가 그러시는데 요즈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쩍 늘었대요." "ㄴ[ 아ㅃ
말이 맞아. 그런데 종교에 대해서는 뭘 알고 있지?" "전혀 몰라요. 그래도 TV에서 보니까,
미트라[의식 때 쓰는 모자]를 쓴 사제들이 있던데... 맞아요, 대주교라고 하지요. 그리스도교
의 일종이지요, 맞죠?" "넌 이미 그 정확한 명칭까지 알고 있을 텐데, 테오. 정교회라고 하
잖니." "아녜요, 정교회는 그리스에나 있는 거예요." 테오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스나 러
시아에 있지." 마르트 고모의 주장은 단호했다. "예루살렘을 기억해 봐. 성묘를 찾아갔을
때..." "성묘야말로 이제까지 본 중에서 가장 복잡한 곳이었어요." 테오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네댓 집단의 교회가 그 내부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니 까요."
"그때 뒤부르 신부님께서 그리스도교도들간의 분열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지. 생각나지? 서
방 교회와 동방 제교회가 분리된 것은 상당한 초기였어. 서방 교횐느 교황을, 동방 제교희는
자기들의 춍대주교를 따랐던 거야." "동방 제교회라면, 동방 교회가 여러 집단으로 이루어졌
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리스, 콥트, 시리아..." "시리아 쇼회는 처음 들어요." "당연히 그럴
테지. 레바논과 인도에 주로 퍼져 있는 교회야. 시리아 교회에서는 아주 특별한 언어를 사용
하기 때문에 다른 교회와 확연히 구별되지. 이들은 예배 의식 중간중간에 아람어라고 하는
팔레스타인 고어를 쓰거든. 아마 당시에 예수님이 쓰셨던 언어일 거야." "그 말을 들으니 괜
히 어깨가 으쓱거려지는 것 같아요." 테오가 신기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러시아 정교
회는 어떤 특징이 있는 거지요?" "러시아 전체가 바로 그 특징이야. 이건 굉장한 거란다."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어요. 우린 지금 러시아를 보러 가는 건가요, 아니면 러시아 정교회
를 공부하러 가는 길인가요?" "그 두 가지는 서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느 거야."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70년 동안이나 공산주의 정부가 이 둘을 불리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었지.
사제들을 발새하고, 러시아 종교를 타파했거든 하지만 공산 제국이 붕괴하자마자, 이 신비스
런 러시아 종교는 대번에 그 마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어." "아무리 그래도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라면 다른 그리스도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섬길 거 아녜요." "그야 물론 그렇지만,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대지 전체를 공통받는 자신들의어머니로 생각한다는 점이 다르지. 예
수가 공통을 당한 것처럼 자기네 조국이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는거야. 말하자면 고난은
본질적인 것이라는 입장이지." "고모가 좋아하는 부처처럼 말인가요? 부처도 모든 것을 고
통의 연속이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바보 같은 소린 이제 그만해 두려무나. 그건 네 가지
거룩한 진리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부처도 나머지 세 개의 진리를 통해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 셈이지. 그렇지만 러시아에서는 고통을 경배한다고 하는 편
이 옳은 거야." "그것 참 아주 근사한 생각이로군요." 테오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렇
다면 그들은 고통받기 위해 무슨 일들을 하나요?"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단다. 그저 삶에 몸
을 내맡기는 거야. 하지만 독실한 러시아 신자들 가운데에는 그보다 훨씬 과격한 행동을 하
는 사람들도 있지. 가령 불 속에 뛰어든다거나 하는 기이한 행동도 서슴지 않거든." "설마
그런 일을 직접 목격하게 되지는 않을 테죠?" 아연실색한 테오가 소리쳤다.
붉은 주검
테오가 모스크바에서 그런 종류의 자살극을 목격하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17세기경 프랑스에서 태양왕 루이 14세
의 치세가 막을 내려갈 무렵, 수천 명의 러시아 신도들은 목조 건물 내부에 자진해서 감금
된 후 그 건물을 불을 질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신앙을 저버리느니 차라리 불꽃
속에서 타죽는 편을 택한 것이었다. "박해받던 순교자들이로군요." 테오가 주석을 달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말해도 부방했다. 그런데, 이 사진의 경우, 가장 이상한 점은 박
해를 가하는 자의 정체였다. 독실한 신자인 알렉세이 차르는 귀족들, 혹은 사제들의 부추김
을 받아 러시아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온갖 종류의 변칙적인 작태가 교회 내부에 난무한
다는 이유에서여싿. 황제는 노브고로트의 수도대주교인 니콘에게 이 일을 전적으로 위임하
였으며, 마침내 니콘 총재주교는 황제로부터 자신에게 완전한 주권을 위임한다는 동의까지
얻어냈다. 니콘 총대주교가 선택된 이유는 그가 러시아 정교회의 지도자답게 그리스 정교회
와 대립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완강하게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즉 교황의 존재를 인정하는 서방 가톨릭 교회와 영원한 라이벌인 그리스 정교회가
러시아 정교회의 두 적수였다. 특히 비잔틴 제국을 계승한 그리스 정교회와는 이미 오래 전
부터 단교상태였다. 그런데 개혁의 임무를 맡게 도자, 니콘은 자기 편을 배신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교회의 몇몇 의식을 그리스 정교회식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었다. 신도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러시아 교회는 소박하고 겸허한 러시아 독립자치교회로서, 이들의 열정으로 교회
가 번창해 나간다고 신도들은 믿고 있었는데, 바로 자기들의 총대주교가 전례서와 의식을
개혁한다는 명목하에 독재자로 탈바꿈한 격이었다. "그래서요? 그 사람이 어떤 개혁을 실행
하였길래 그런 분열이 생겼지요?" 테오가 물었다. 개혁 이후부터 신도들은 그때까지 두 번
씩 반복하던 '할렐루야'를 세 번씩 하여야 했으며, '사도신경'에서 단어하나를 삭제하여야 했
다. 어떻게 보면 매우 하찮은 일들이었다. 그러나이 하찮은 변화의 하나로 니콘 총대주교는
성호를 긋는 방법을 바꿨다. "그렇다면 성호를 긋는데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
세요?" 테오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물었다. "손으로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항 일이잖아요!"
손이라고는 하지만 어떤 손가락을 사용해서 십자가 성호를 그을 것인가? 그때까지 러시안인
들은 두 개 손가락만으로 성호를 거었다. 그런데 개혁자는 그리스 정교회 신도들처럼 검지
와 장지.약지의 세 개 선가락을 모아 서호를 그을 것을 명하였다. 예전에 비해 약지가 하나
더 첨가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복고전례파, 또는 복고신앙파로 일컬어지는 기득권층의 저항
이 시작되었다. 니콘의 전례 개혁을 거부했던 아바쿰 페트로비치라고 하는 대사제에 의해
시작된 저항의 물결은 상인들과 귀족층의 지지를 얻어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나, 마침내는 신
도들의 집단 자살로 그막을 내렸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 몸을 던진 이들의 죽음을 가리켜
'붉은 주검'이라고 한다. 흰 옷으로 차려입은 신도들이 각자의 손에 불 붙인 양초를 들고 불
가마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십자가 성호를 긋는 데 손가락 하나 더 사용하도록 했다고
죽어 버리다니, 그건 좀 심했군요." 테오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총대주교의 전
례 개혁으로 야기된 약지 문제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모든 정통성이 담겨 있었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러시아 교회의 서민적인 신앙심은, 시골 마을의 소박한 인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위로부터 내려온 개혁령은, 그 갑작스러운 강제성으로 말미암아 적잖은 물
의를 빚었다. 이에 반대한 복고신앙파들은 비단 성호만을 보존하려 했다기보다, 러시아 땅에
굳건히 뿌리 내리고 있는 자기들의 신앙 전체를 온전히 지키려 하였던 것이다. 어느 날 갑
자기 중앙의 권력층이 자기들을 대신해 이를 바꾸려 하자 이들은 반대투쟁에 가담하였으
며, 분신 자살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20년 동안무려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야말로 완전히 대학살이로군요." 테오가 주석을 달았다. "그러고 보면 일본에서는 참 좋
았어요. 무사들이 자기 혼자서 배를 가르고 죽었으니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서는 겨우 손가
락 하나 때문에 그토록 떼죽음을 하였다니..."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택한 것
은 물론 아니었다. 복고신앙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성호 긋는 방식을 고집하였으며, 이는
중앙 정부에 대한 자신들의 자유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살아남은 러시아의 복
고신앙파는 3백만 명에 달하였으며, 이들은 한결같이 정부의 공식적인 개혁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러시아 교희의 파격적인 개혁을 추진했던 니콘은 결국 추방당하였으나, 그의 추방
은 시기적으로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새로 등극한 표트르 대제는 투철한 군인정신의 신봉
자로서 프로이센을 이상향으로 삼았으며, 조국을 현대화시키고 시구 사회와 접근시키려는
야심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표트르 대제가 사제르
전혀 임명하지 않았으므로, 러시아 교회는 전적으로 정부의 세력하에 예속되었다. "그게 무
슨 상관이죠?" 네오가 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라니. 어떻게 그런 한심한 질문을 할 수 수
있는 거지?" 마르트 고모가 테오를 나무랐다. "너 프랑스에서도 정교 분리 때문에 내란이
일어날 뻔했었다는 사실을 잊었니?" "신교도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 말이나가요?" "나
원, 이런 무식한 녀석 같으니라고. 아주 최근에 있었던 일이야. 1905년 의 이야기니까... 그때
까지만 해도 가톨릭 교회의 권력은 어마어머했어. 특히 국가의 교육면에 있어서는 그 영향
력이 대단했지. 그런데 공화주의자들이ㅣ 프랑스 혁명정신의 후계자 답게 국가와 교회 사이
의 탯줄을 환전히 끊어 버리기로 결단을 내렸던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사제들은 국가로부
터 녹을 받았지." "그래요?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예요?" 테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물었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가톨릭이 프랑스의 공식적인 종교라는 이야기가 되는 거지.
그 경우 가톨릭이 아니 소수 종교집단은 어떻게 되겠니? 생각 좀 해보려무나. 1905년까지는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가톨릭 교리를 배워야 했다는 말이지. 네가 좋아하는 파투도 어쩔 수
없이 가톨릭 신자가 되어야 했을 거라는 말이야. 이제 알아듣겠니?" "그러면 어때요? 우리
둘 다 재미있어했겠지요." 테오는 그다지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넌 파투를 그리스도교도
로 개종시키고 싶니? 테오 너, 이스라엘에 갔었을 때 정교 일치론자와 분리론자 중에서 누
가 더 좋았어?" "그야 물론 분리론자이지요." 테오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교
에서 종교를 가르치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여러 가지 종교에 대해서 가르친다면 물론 그
렇지. 나도 고등학교 정도에서라면 종교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렇
지만 특정 종교 한 가지가 아니라 모든 종교에 대해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고모, 고모의 말대로였다면 지금 이렇게 저를 데리고 여행을 다니실 필요가 없었겠네요." 테
오가 지적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종교에 대해서 좀더 많이 알고 있었더라면, 요즈음처럼
과격분자들이 세계를 폭탄 공포에 떨게 하는 일도 없었을 거야. 사이비 종교 때문에 죽어가
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았을 테고..." "자기네 초가삼간에 불을 붙여서, 그 안에서 타죽는 얼
빠진 사람들도 없었겠죠." 테오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이제 그렇게 정신 나간 사람들 이야
기라면 지긋지긋해요. 도시를 옮겨갈 때마다 고모는 늘 그런 이야기를 하시군요." "하긴 나
도 자꾸만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그러는 기분이야. 하지만 어쩌겠니? 실제로 그런 일
이 번번히 일어났던게 사실인데... 종교로 인한 대량학살이야말로..." "전 이제 졸려요" 테오
가 신음하듯 하소연을 했다. "하긴 그럼 만도 하겠구나."
닭발 위에 세운 집
그러나 마르트 고모가 잠을 청하려고 두 눈을 감은 순간 테오가 고모의 팔을 흔들어댔다.
"잠이 안 와요." 테오가 속삭였다. "그렇다고 나까지 못 자도록 할 참이니? 자려고 애를 좀
써보려무나." "잘 안 돼요." 테오가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워요." "무섭
다고?" 마르트 고모는 깜짝 놀란 듯 허리를 곧추세우며 되물었다. "뭐가 무섭지?" "러시아
엔 혹시 마녀들이 없을까요? 어렸을 때 엄마가 거시아 동화를 읽어 주셨는데, 닭발 위에 세
워진 집이랑 어린아이들ㅇ르 못 살게 괴롭히는 노파들이 자주 등장했거든요." "그건 또 처
음 듣는 이야기로구나. 티베트 악마니 인도의 신들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깜짝 안하던 녀석
이 신들린 닭은 무섭단 말이지? 테오 너, 그럼 요정들도 무서워하니?" "아뇨, 그렇지만 러시
아 마녀는 달라요." "하나도 다를 게 없단다. 프랑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요정이나 난쟁이들
은 로마 신화로부터 유래되었고, 러시아의 바바야가(러시아 민화에 나오는 마귀할멈)와 닭발
위에 세운 집은 정교회가 말살시킨 토속신앙의 유물이라는 차이일 뿐이야. 그래도 토속신앙
이 그런 식으로나마 명맥을 이어가는 게 얼마나 다행이니 재미있는 얘기잖아." "재미있는
소린 제발 그만두세요. 전 그것 때문에 얼마나 자주 악몽을 꾸었는데요." "너희 엄마가 숲
속에 사는 루살카 요정 이야기를 읽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다른 여러 지역에서와 마
찬가지로 러시아 평원동 이민족의 침입을 자주 받았지. 정복자들의 왕래가 잦다보면, 그 민
족의 신앙까지도 덩달아 전파되게 마련이고... 러시아는 상당히 오랫동안 몽골족의 지배를
받았어. 그 덕분에 권선징악적인 성격이 강한 몇몇 가지 멋진 전설이 전해지게 되었던 거란
다. 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마땅히 징계해야죠. 모처럼 쉬운 질문을 하시네요."
"악을 뿌리뽑기 위한 방편으로 악을 의인화하려는 경향이 있지. 악마, 마녀, 이단자, 우대인,
이슬람교도 등 '나쁜 사람들'의 명단은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어. 그런가 하면 악을 의인화
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서 과거로 돌아가 보는 것도 있을 수 있지. 유령을 등장시킨다거나,
죽은 신을 부활시키는 수법이 여기에 해당된단다. 착한 요정과 나쁜 마녀, 착한 유령과 심술
궂은 귀신, 선한 성인들과 못된 악령들의 이야기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존재
하지. 러시아도 그리스도교화하기 전에는 정령숭배의 경향이 강했어. 하긴 이런 풍습이 완전
히 자취를 감추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겠지."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약간씩은 아프리
카인들의 기질을 가졌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누구나 예외 없이 모두가 그렇지." 마르트
고모는 장담하듯 거리낌 없이 말했다. "다신교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구나. 다신
교도란 여러 신들을 동시에 섬기는 사람을 가리키지." "고모는 만날 어려운 말만 하더라."
테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간단한 종교는 없을까요? 이를테면 악마는 등장하지
않고, 호감 가는 서너 신만 섬기는 그런 종교 말이에요." "유감스럽지만 그런 물건은 팔지
않습니다. 러시아에 뿌리내린 고통의 종교로도 알고 보면 그리 복잡한 게 아니란다." "또시
작이로군요." "맹세코 테오 너는 러시아에서 닭발 근처에도 갈 일이 없을 거야." 마르트 고
모는 짐짓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지만 러시아에서는 닭박을 볼 일
이 없는 대신, 다른 곳에서는 보게 되리라는 점 또한 밀 약속해 놓겠어." "어쩐지 다음번 메
시지 냄새가 나는데요." "아니, 그런얘기를 하기에는 좀 이르잔니. 아직 모스크바에 도착 조
차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지금 가는 곳은 그다지 마음에 들 것 같지가 않아요."
테오가 투덜거렸다. "그런 게 아니라 일본에 좀더 머물렀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말이겠지."
"그렇지 않아요. 아시코한테는 이미 애인이 있는걸요." "이제야 사실대로 말을 하는 구나.
그래서 그렇게 풀이 죽어 있었니? 난 테오 네가 러시아를 좋아하리라고 확신해. 이제 봄기
운이 돌기 시작했으니까, 버드나무에도 부드러운 솜털이 덮인 잎눈이 돋았겠지." "벚꽃을 구
경한 끝이라 버드나무쯤은... " "넌 아시코를 만나기 전까지는 일본의 벚나무에 대해서도 그
렇듯 시큰둥해하더구나." 마르트 고모가 정곡을 찔렀다.
알렉세이 에브라이모비치
육중한 모스크바 공항은 테오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살벌 했다. 몰상식하다 싶을 정도
로 주위사람들과 부딪히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행자들은 짐을 찾느라 분주했으나, 이와
는 대조적으로 세관원들의 태도는 너무나도 무관심했다. 마르트 고모는 가방을 하나하나찬
찬히 살폈다. "난 정말 소련이 너무너무 싫었어." 마르트 고모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래
도 그땐 남의 가방을 터는 일은 없었는데..." "누가 가방을 터는데요?" 테오가 놀라서 물었
다. "질서가 붕괴되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이지." 마르트 고모가 단언하듯 딱 잘
라 말했다. "예전에는 여권 검사 한 번 받으려면 한도 끝도 없이 기다려야 했단다. 게다가
세관원들이 이잡듯이 짐을 뒤졌더랬어. 깐깐하고 성가시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는 무엇을 도
난당하는 일은 없었지. 이것 좀 보렴. 난 아예 모든 짐에다가 이렇게 자물쇠를 채워 버렸단
다." "그런데 고모, 이곳 모스크바에도 확실히 친구분들이 있으신 거죠?" 테오는 근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럼 당연하지. 저기 어디쯤 마중 나와 있을 거야." 마르트 고모는 창 너머
공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짐이나 잘 감시해. 나와 있는지 살펴보고 올 테니까." 마르트 고
모는 이내 고양이같은 귀엽게 생긴 갈색머리 여인과 함께 나타났다. "알료샤는 못 들어오게
하더구나." 숨을 헐떡이며 돌아온 마르트 고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이분은 알료샤
의 부인 이리나야." "그루스 고트!" 아리땁기만 한 여인이 감격스러운 듯 두 눈을 가느다랗
게 뜨며 인사를 청해 왔다. "테오, 마인 킨트... 이히 빈 조 글뤼클리히!" "지금 이 말이 러시
아어예요?" 테오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이리나느 오스트리아에서 독일어를 배웠어." 마르
트 고모가 설명해 주었다. "너를 만나게 되어 무척 기쁘다는 구나." "이히 이투." 테오가 고
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죠?" "이리나의 남편 알료샤는
프랑스어를 아주 잘하니까, 걱정할 거 없어. 알료샤는..." "알료샤, 마인 만." 이리나가 둘째손
가락을 자기의 가슴에 '갖다대며 고모의 말을 끊었다. "운트 이히, 자인 프라우." "그래요, 알
고 있어요." 마르트 고모가 테오와 이리나를 출구 쪽으로 떠다밀며 말했다. "자, 어서 가서
남편이나 데려와요." 잠시 후, 키가 크고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알료샤가 나타나 마르트
고모를 세차게 얼싸안았다. "마르타 그리고리에브나, 도로가이아. 다시 만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알료샤는 그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며 목메인 소리로 속삭였
다. "아, 다정한 알료샤." 마르트 고모도 남자를 얼싸안으며 말했다. "너무 기뻐서 그만주책
을 떨었군요." 알료샤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저분은 왜 저렇게 울죠?
눈병이라도 났나요?" 테오가 소곤거렸다. "쉿... 나중에 말해 줄게." 마르트 고모가 나직이
말했다. "테오는?" 알료샤가 테오에게 그 금빛 머리카락을 기울이며 물었다. "잘 견디고 있
니? 우리 집에 저녁 식사를 준비해 놓았단다. 따뜻한 잠자리도 마련해 두었지." "자동차는
요?"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의 자동차가 대기해 있어요." 알료샤가
열쇠를 흔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물론 짐 때문에 택시를 한 대 불러야겠지만요." 이라나가
짐과 함께 택시에 올라탔고, 마르트 고모와 테오는 알료샤와 함께 블라디미르의 고물 자동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가는 거죠?" 테오가 안개 속에 늘어서 있는 건물들을 힐끗힐끗 곁눈
질하며 물었다. "우리 아파트로 가는 길이야." 알료샤가 대답했다. "마르트 고모는 구석방을
쓰시고, 테오는 내 서재에 있는 침대에서 자면 될 거야." "그러면 호텔에서 묵는 게 아니로
군요." "친구들을 호텔에서 재우다니 말도 안 되지." 알료샤는 금바이라도 화를 낼 듯이 말
했다. "마르타 그리고리에브나는 모스크바에 올 때마다 우리 집에서 모셔야 하구말구." "그
런데, 고모. 이분은 왜 고모의 이름을 이상하게 부르시는 거예요?" 테오가 슬며시 물었다.
"러시아에서는 누구나가 그 이름 뒤에 아버지에 이름을 붙여서 부른단다." 마르트 고모가
설명을 시작했다. "네 할아버지 이름이 조르주였으니까, 러시아식으로 하면 그리고르가 되
지. 그리고르의 딸아라고 해서 '그리고리에브나'가 되는 거야." "그렇다면 저는 테오 제로모
비치라고 해야 하나요?" "표도르 예레메이예비치." 알료샤가 테오의 말을 정정하였다. "그것
참 근사해요. 그러면 아저씨 이름은 어떻게 되지요?" "알렉세이 에브라이 모비치. 그렇지만
이렇게 긴 이름보다는 애칭을 주로 사용하지. 그냥 알료샤라고 부르면 돼. 그리고 내 아내한
테도 절대로 이리나 보리세브나라고 부르지 마라. 아마 무비무지하게 하를 낼지도 몰라."
"그래요?" 테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대꾸했다. "보리스라는 명칭이 좋지 않은 건가
요?" "쉿..." 마르트 고모가 또다시 테오의 말을 끊었다. "나중에 말해 줄게." 거듭되는 비밀
때문에 맥이 빠진 테오는 , 붉은 석양 아래 멀찌감치 솟아 있는 성채들만 불끄러미 바라보
았다. 찻길 양옆으로는 아직도 희끗희끗 눈이 쌓여 있었지만, 길이 진흙탕이어서 행인들의
발걸은을 유난히 더디게 만들었다. 저물어 가는 태양의 마지막 남은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어느새 차츰차츰 핏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올해는 운이 좋아요. 다행히도 날씨가 무
척 좋군요." 알료샤가 말했다. "화창한 봄이 오려나 봐요." "이 진흙탕은 어쩌구요." 테오가
무심코 참견을 했다. "그래도 눈은 녹아야 할 테지." 알료샤가 허둥지둥 변명하듯 대꾸했다.
"진흙을 러시아어로는 라스푸티차라고 하지. 진흙은 곧 해빙을 뜻한단다. 겨울이 가고 사람
들 마음도 활짝 열리면 다시 금 삶이 시작되는 거지." "올 겨울에는 기온이 볓 도까지 떨어
졌나요?" 마르트 고모가 끼어들었다. "영하 15도 정도였죠. 그렇게 춥지는 않았어요." "지금
은 몇 도나 되는데요?" 테오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영하 2도" 알료샤가 대답했다. "요
즈음은 햇빛이 아주 좋단다." "하지만 아직도 스키장 기온인걸요." 테오는 추운 둣 파카를
추스려 입으며 결론처럼 말했다. 그렇지만 알료샤의 아파트는 기분 좋은 정도로 훈훈했으며,
갈색 벨겟 덮개를 쓰워 놓은 테오의 침대는 안락하고 포근했다. 벽에는 책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으며, 복도에는 기타와 바이올린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비스듬하게 꺾인 복도 구석
구석에는 가방이 여러 개씩 쌓여 있었고, 가구란 가구에는 예외 없이 향긋한 꽃이 꽂혀 있
었다. 테오는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알료샤의 아파튼 ㄴ진실한 주인과 손때 묻
은 악기가 자리잡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집이었다. 식탁의자의 팔걸이마다 걸쳐 놓은 레이
스 덕분에, 식당은 마치 동화 속 나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이리나가 꽃무늬 쟁반에 찻주
전자를 들고 나타나자, 테오는 그만 기쁨에 차서 환호성을 질렀다. "차니, 오데르 키르셴콘
피튀레 미트 봐세르?" 이리나가 물었다. "저는 차가 좋아요." 테오가 조심스럽게 말해따. "키
르셴이라면 버찌라는 말이죠?" "그래, 한 번 마셔 봐. 아주 향긋해." 마르트 고모가 권유했
다. "버찌잼을 물에 탄 거야." "어쨌든 뭐라도 좀 먹어야겠어요." 테오가 혼잣말처럼 중얼겨
렸다. 알료샤는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곧 훈제 생선에다가 커다란 피클을 잔뜩 두른 접시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나타났다. 그렇게 서너 차례 주방으로 왔다갔다하자 식탁에는 이내 빵
과 햄, 소시지, 삶은 달걀 등이 풍성하게 마련되었다. 잠시 동안 식당에 감미로운 침묵이 감
돌았다. 이어서 이리나가 새의 날갯짓처럼 우아한 동작을 곁들여 가며, 러시아어와 독일어가
섞인 장황한 연설을 늘어 놓았다. 이에 마르트 고모도 최선을 다하여 정중히 답사를 모냈다.
알료샤는 멋쩍은 듯 미소를 지으면 테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자들끼리 얘기하도록 내
버려두자구. 서로 의사가 잘 소통되는 모양이니까. 자. 우린 음식이나 먹을까?" 테오는 사양
하지 않았다. 식당 안은 그다지 환하지는 않았지만, 뱀프의 불빛이 묘하게도 편안한 부위기
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중 창문을 통해 밤하늘에 걸린 작은 불빛들이 보였다. 알료샤의
집은 마치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절대적인 안식처럼 느껴졌다. 이리나의 노래하는 듯한
듣기 좋은 음성이 감미로운 음악처럼 주위를 감쌌다. 알료샤는 테오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테오는 어느 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 녀석, 벌써 졸린가 봐요." 알료사가 나직이 말햇
다. "내가 이 애를 누이고 오겠습니다." 알료샤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침대 덮개를 젖힌 뒤,
테오가 옷을 벗을 수 있도록 도와 주엇따. 테오가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벼 임대 속으로 미
끄러지듯 드러눕자, 이리나는 고양이 같은 입술을 내밀어 테오의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
춘 후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방을 나왔다. 테오는 포근한 축복 속으로빠져들었다. 위협적
인 대도시 모스크바가 테오의 뇌리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듯했다.
기쁨의 눈물
이른 아침, 집이 떠나갈 둣한 무시무시한 소리에 테오는 잠이 깼다. 때마침 마르트 고모가
테오의 침대 머리밭에 와서 앉으려는 순간이었다. "이게 부슨 소리예요? 설마 지진은 아닐
테죠?" "건물의 난방용 파이프에서 나는 소리야. 스탈린 시대에 지은 낡은 건물이니 감수해
야 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야." "말이 나왔으니까 묻겠는데요, 외 어제 공항에서 두
번씩이나 제 말을 막았죠? 한 번은 알료샤가 어디 아픈가고 물었을 때였고..." "좋아, 말해
주지. 러시아식 재회의 감격에 제동을 걸어서는 안 되겠기에 그랬어. 여기 사람ㄷ르은 다시
만났을 때 눈물을 흘리는 걸 지극히 당연스럽게 여긴다." "아, 그랬었군요."테오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여기 사람ㄷ릉느 기쁨이라는 감정을 알지 못하는 건
가요?" "오히려 그 반대야, 테오. 러시아인들의 눈물은 만족감, 향수, 고통, 축복, 이 모든 감
정을 함축하고 있다고 봐야 해.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맛보는 영혼의 표시라고 할 수 있겠
지. 러시아어로는 영혼을 '두샤'라고 한단다. 참으로 푸근하고 감미로운 말이지. 프랑스인들
이 건조하게 다감하다면, 러시아인들은 촉촉하게 다감하다고 말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알료샤
는 아픈게 아니라 건강상태가 지극히 양호하다고 봐야겠지. 그렇게 눈물을 펑펑 쏟을 수 있
으니 말이야." "저 같으면 어색해서도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테오가 당황스러운 듯 말했
다. "그건 그렇고 대체 알료샤는 무슨 일을 하지요?" "대학에서 음악사를 가르치고, 이리나
는 번역가로 일하고 있어." "그리고 또 한 번은 이리나와 보리스라는 명칭 때문에 고모가
제 말을 막았어요. 알료샤가 그 명칭은 사용하지 말라고 했었잖아요." "그건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어." 마르트 고모가 웃으며 말했다. "이리나는 러시아 정부를 열정적으로 지지하였
다가 몹시 실망하고 말았지. 자기가 좋아했던 보리스 옐친 지지에 나섰다가, 다른 모든 사
람들처럼 격력하게 그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어 버렸거든." "엄마랑 비슷하네
요." 테오가 측은하다는 듯이 논평했다. "글쎄 말이에요... 고모도 생각나실지 모르겠는데요.
엄마는 선거 기간 동안 여러 개의 접시를 깨뜨렸을 정도엿다구요." "러시아 사람들은 말이
지, 특히 거의 1백 년 동안이나 자유로이 토론이라고는 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해. 경찰이 도처에 동청장치를 해놓고소, 정부에 저항하는얘기가 조금이라도 들릴라치면 당
장에 그를 정신과의사에게로 보내 버렸단다. 그러면 의사들은 자동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사
회성이 결여된 자라는 진단ㅇ르 내리게 되지. 일단 이렇게 진단ㅇ르 받으면, 온잦 종류의 약
물 투여해서 사람들ㅇ르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정신분석가들은 그동안 뭘 했나요?"
테오가 물었다. "완전히 금지 도었어. 프로이트의 책은 번역조차 되지 못했지. 소시민을 위
한 과학이라고 해서 모두 불태워 버렸거든. 하지만 이 금서들은 몰래몰래 손에서 손으로 옮
겨다니며 읽혀졌지. 당시는 이렇듯 무저선적인 침묵이 강요되었던 시기였어." "저는 그런 비
극은 전혀 경험하지 못했어요. 입을 다물고 산다는 건 상상도 못하겠어요." "제발 앞으로도
네가 독재정치가 뭔지조차 모르고 살게 되었으면 좋겠구나, 독재 치하에서는 제대로 살 수
가 없어. 그러니 아무 위험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며 살 수 있다고 상상해 보렴.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거야. 너무 멋지지 않니?" "제 생각은 약간 달라요." 테오는 입
을 비쭉거리며 이의를 제기했다. "어찌되었든간에 전 싸우는 건 싫어요. 이제까지만 하더라
도 가는 나라마다에서 고모는 종교로 인한 대량학살 이야기를 빼놓지 않으셨어요. 거기다가
이제는 정치까지 가세해야 한다는 말씀이세요?" "민주주의란 원래 토론에 바탕을 둔 체제
아니겠니, 테오너는 노상 남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녀석이니, 그런 것쯤이야 잘 알 테지?"
"네, 알아요. 하지만 전 아무것도 부수지 않았어요." 테오는 자부심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
"학교에서도 저는 서로 싸우는 친구녀석들ㅇ르 하해시키느라 바쁘다구요. 그러다가 오히려
제가 얻어맞기도 하는걸요." "아무렴, 그럴 테지." 마르트 고모는 생각에 잠긴 듯한 목소리
로 나직이 말했다. "자, 우선 약부터 먹고, 아침 식사나 하렴. 그리고옷 갈아입고 나서 엄마
한테 전화를 해야겠어. 잊지 말고 엄마에게 아파트는 난방도 잘 되고, 파카랑 털구두도 잘
챙겨 다닌다고 말해야 해. 걱정 많은 네 엄마 안심시켜 드리려면 꼭 그렇게 해양해. 그리고
난 다음에는 크렘린 궁 구경이나 가자." "와! 좋아요." 테오가 기쁜 듯이 소리쳤다. "드디어
현대판 미라를 볼 수 있겠군요." "어딜 가나 그놈의 말 때문에 공치로구나. 미리 말해 두겠
는데,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할 거야." "카이로 박물관의 미라실 앞에서도 줄을 서야
했어요.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꼭 보고야 말겠어요!" 테오는 침대에서 뚜
어내리면 큰 소리로 외쳤다.
고통-수난자
그러나 미라에 대한 알료샤의 견해는 사뭇 달랐다. 방부처리된 레닌의 시체는 1917년 동
안 러시아를 짓밟아 온 독재의 상징이라는 것이 알료샤의 기본 입장이었다. "난 다만 테오
가 미라를 한 번 보고 싶다니까 데려가는 것 뿐이에요!" 설득에 지친 마르트 고모가 발악하
듯 소리쳤다. "그건 절대로 안 된다니까요." 알료샤는 말도 안 된다느 투로 계속해서 같은
말만을 되풀이했다. "우리 가족이 공산 치하에서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는 마르트 당신도
잘 알잖아요. 난 도저히 레닌의 미라 관람을 용납 할 수가 없어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
요." 테오도 애원하다시피 설득에 나섰다. "본다고 해도 제가 그자를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
고 약속해요." "이건 내 아버지의 여혼ㅇ르 더럽히는 일이에요." 알료샤는 진지한 표정을 말
했다. "아버지는 공산당들 때문에 20년 동안이나 수용소 생활을 하셨어요. 집으로 돌아오셨
을 때에는 이미 늙은 몸이셨지요." "나도 알아요, 알료샤." 마르트 고모는 알료샤의 거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테오는 모든 종교에 대해 궁금해해요. 그걸 이해하겠어요?" "공
산주의가 종교라구요?" 알료샤는 몹시 어처구니없어하였다. "그렇게 심한 모욕이 어디 있어
요." "그만두세요, 고모." 테오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알료샤, 전 아버지의 일은 전혀 몰
랐어요. 죄송해요." 이렇게 해서 이날 일정은 크렘린 교회의 방문부터 시작되었다. 교회는
청명한 하늘 아래 그 금빛 돔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대대로 교회 앞의 넓은 광장에서는
성대한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었었다. 대제사장들로부터 머리에 제관을 수여받은 항제들은
이와 동시에 러시아라는 광대한 짐을 짊어져야 하였으며, 이때부터 황제들은 권력으로 인한
고통의 멍에까지 떠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이 가공할 만한 영예를 받기
에 앞서 오래돌고 망설이는 황제들도 없지 않았다. 귀족들로부터 추대된 예비 황제는 수도
원에 칩거하면서 한사코 제관을 거부하다가, 군중들이 몰려와애원을 하면 마지못해 승낙하
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에는 거짓으로 겸손을 가장하는 위선도 담
겨 있었겠지만, 일단 수도원의 칩거생활을 택하는 데에는 하늘의 뜻을 타진해 보려는 일마
의 진실도 포함되어 있음을 배제할 수 없었다. 수놓인 망토 아래 모피옷과 모피모자를 갖춘
차르는, 그리하여 민중의 아버지로 군림하였다.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인자한 아버지처럼,
러시아의 차르는 경우에 따라 이따금씩 민중을 향해 매를 들었다가 다시금 다정하게 얼러
주어야 하였다. 이 역할이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에 황제 중에는 속세를 떠나 수도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16세개의 뇌제 이반 4세는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비난을 받자, 황제직을 포기
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금과 비단이 넘치는 궁궐 대신 수도사의 검정옷을 택한 그는 고
행에만 전념하였다. 그러자 황제 시절에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비난하던 러시아 민중들이
무릎을 끓고서 그의 환궁을 빌었다. 민중들의 애원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딘 후에야 비로
서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며, 이제 더욱 강력해진 권력을 토대로 러시아 역사상 그 유례
를 찾기 힘들 정도로 혹독한 치세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러시아를 지켰다는 업
적만큼은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러시아라는 무거운 짐은 황제들에게 고통을 부여
하였다. 민중을 벌하면 반드시 고통이 따랐으며, 치세에 실패하면 그또한 고통스러웠다. 러
시아의 희생양인 차르는 벌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러
시아의 차르는 온갖 모욕적인 언사로 스스로를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예, 무자격자, 죄
인, 무능력자 드듣이 러시아 황제가 자기를 비하시킬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그
의 권능은 이러한 고통에서 비롯되며, 고통이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인명을 살상할
권리까지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황제의 오랜 역사는 모함과 피비린내나는
암살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다. 레닌이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
에게 부여한 비극적 최후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논리적인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단지 임명받은 군주였다는 이유 하나만을 온 가족과 함께 처형당하는 혹동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마침내 아버지는 죽었다. 그러나 레닌이 죽은 후, 그뒤를 이은 스탈린이 '여러 민중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아들였다.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었으므로 민
중이 복수로 탈바꿈하였을 뿐, 아버지의 권위는 다시금 명백하게 강화되었던 것이다. "잠깐
만요, 무슨 말씀인지 잘 못 알아듣겠어요." 테오가 고모의 설명을 중다시켰다. "사람들이 황
제를 죽였다는 거예요, 황제가 다른 사람들을 죽였다는 거예요?" 테오의 이 질문이야말로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핵심이었다. 여러 명의 러시아 황제가 자신들의 친아들을 죽인 전력
이 있었으며, 이반 4와 표트르 대제는 이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바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력의 요구 앞에서 순순히 물러 설 수는 없었다. 차르는 상속자인 아들이 정신적으로 허약
하거나 반항아적인 기질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의 처형ㅇ르 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한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르는
곧 인격화된 하느님이었으며,민중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져야 하였다. 따라서 차르의 상속자
인 차레비치에게는 원칙적으로 고난당하는 예수의 역할이 부여되는 것이다. "참 대단한 가
족이로군요!" 테오가 놀라서 소리쳤다. "프랑스 왕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단다."
마르트 고모가 이같이 상기시켰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군주들에게는 고통스러워해야 할 의
무가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순교라고 당하듯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 사정은 러시아
만의 특유한 전통으로서, 이는 러시아 신비주의의 오랜 관습에서 연유한다. 최초의 러시아
성인은 젊은 두 왕자 보리스와 글레브로서, 이들은 모두 암살당하였다. 두 왕자를 죽인 범인
은 이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형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을 범하는 자로서의 차르의 이미지
는 순교당한 두 왕자의 이미지와 중첩되었다. 두 왕자는 사실상신의 유순한 어린 양처럼 아
무런 저항 없이 목베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자 곧 러시아 민중은 폭발적으로 달아올랐다.
죽임을 당한 두 왕자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재현한 것이라는 믿음이 러시아 민중들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이 두 왕자를 기리기 위하여, 다른 어느 언어에도 존재하지 않
는 새로운 합성어인 고통-수난자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그때부터차르가 자신의 친아들인 차
레비치를 처형하면 처형당한 아들은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러시아 문중은 이들을 하느님
의 아들과 동등하게 대우하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관습은 정교회의 교리에는 부합되
지 않는 것이었다. "어린이의 권리는 완전히 묵살당하는군요." 테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분개하였다. "고모가 말씀하시는 러시아 황제들으 모두 명백한 어린이 살해자들이잖아요!"
헤로데 왕 같은 사람들. 러시아 민중들은 그러한 차르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막
기 위해 팔레스타인에서 맨 처음 낳은 어린아이들을 모조리 죽인 그 왕과 다를 바 없다고들
웅성거렸다. 16세기경. 불행했던 어느 황제는 사실상 아무런 책임도 없으면서 한 젊은 왕자
의 살인자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보리스 고두노프 황제는 고통을 당하는 것이 황제의 직무
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으나, 이를 후희하며 임종을 맞았다. 그리고 이처럼 독특한 지배방
식에 또한가지 보충적이 요소가 첨가되었다. 이상하게도 살해당한 차레비치들이 자주 부활
하였기 때문이다. "정말인가요?" 테오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잖아
요!" 물론 당연히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다. 그
리스도의 수난을 그대로 겪은 이들인데,왜 부활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이에 따라신의 섭리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어, 자신을 죽인 범죄자 차르를 벌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돌아다닌다는
수상한 왕자들의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그리고 이들 중 한 명은 실제로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그의 진정한 과거는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황후는 그가 부활한 자기 아들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황후 역시 죽어
가는 아들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음에도, 이렇듯 생면부지의 남자를 가르켜 막무가내
로 죽었던 아들이 부활했음에 틀림없다고 우렸던 것이다. 결국 그는 크렘린 궁에서 드미트
리 황제로 즉위하였다. 비우느이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의 뒤를 잇는 황제였다. 보리스 고두
노프는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간 불운한 황제였다. 그 이후로
도 여러 명의 협잡꾼들이 황제로 즉위하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부활한 왕자처럼 행세하였으
며, 민중들 또한 맹목적으로 이들을 추대했다는 어처구니없는 공통점을 지닌다. 순교당하는
어린이의 힘은 어린이 본연의 천진성에서 비롯된다. 예수는 '어린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느님의 왕국은 그런 아이들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천진한 아이들
은 감추어져 있는 진실을 겉으로 드러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활한 차레비치 역시 진
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살해당한 왕자들에게 부여되던 거룩
한 성정은 점차 모든 민중에게로 확대 적용되었다. 허약하고 나이 든 사람이나 여자와 어린
아이 들이 모두 고통-수난자로서의 역할을 수용하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대가로서 오로지
이들만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가 있었다. "제 생각도 그래요." 테오가 맞장구
를 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처럼 고통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달랐다. 허약한 사람들의 고통으로부터 러시아 종교의 가장 특이한 인물 중의
하나인 주로츠보, 즉 예수의 형상을 한 광인이 태어났다. 미친 사람 같아 보이는 이 인물은,
실제로는 반드시 미친 것도 아니었다. 미친 사람인 척하기로 작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도 있었다. 이들은 우선 남의 시선을 끌기 위해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누더기를 걸
친다거나,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반쯤은 아예 벌거벗은 채로 목에는 묵직한 쇠사슬을 늘어뜨
리는 식이었다. 때로는 조롱당하는 예수처럼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기도 하였다. 절거덩 절
거덩 쇠사슬을 끌며 거지처럼 차려입은 '광인 예수'는 공공장소를 배회하면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번영이나 재난을 예언하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간홀 그를 놀려대며 돌멩이르
던지는 수도 있었지만, 감히 이 광인 예수를 죽이려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오로지 그만이 황제의 면전에서도 거리낌없이 진실을 말할 수가 있었으며, 오로지 그만이
권력의 남용을 비난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주로츠보는 뇌제 이반 4세 앞에 피범벅
이 된 살코기를 들이대면서 황제가 저지른 만행을 상기시켰는가 하며, 보리스 고두노프 황
제에게 유아살인죄를 범하였노라 대놓고 비난한 광인 예수도 있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사
실 유아살인이라는 죄를 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광인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
라고 당부하기까지 하였다. 아무도 광인 예수의 말을 의심치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더기를 걸친 채 피부 사이로 스며드는 러시아의 매서운 추위를 견뎌낼 각오
만 되어 있다면, 이 신적인 광대는 완전한 면책특권을 누리는 셈이었다. "내 생각엔 공산 치
하 때 이 광인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같아." 마르트 고모가 말했다. "고모는 공산 치하
가 끝났다고 해서, 벌거벗은 채 쇠사슬을 절거덩절거덩 끌고 다니는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으세요? 경찰들이 당장에 정신병원으로 끌고 갈걸요." 테오가 마르트 고모에게 핀
잔을 주었다. "그러지 말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보렴." 알료샤가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테오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더기 차림의 노파가 낡은 구
두를 신고서 한쪽 발목에만 묵직한 쇠사슬을 건 채 교회당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망치와 초
승달, 그리고 십자가를 수놓은 깃발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노파는 아무 말도 하지않았고, 소
리또한 지르지 않았다. 다만 그곳에 머무르며 그날 나타날 세도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아니, 이런 수가!" 마르트 고모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광인 예수들이 다시 돌아오다니!"
"민중의 열기는 원래 한도 끝도 없는 법이지요." 알료샤가 말했다. "요즈음 모스크바 곳곳에
서 교회 재건축 공사가 한창입니다. 크렘린 바로 뒤에 있는 구세주 대성당도 공산당에 의해
완전히 초토화되어 수영장으로 개축되었었으나, 지금은 예전 모습 그디로 복원되었지요."
"저 노파가 들고 있는 깃발은 무얼 뜻하지요?"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공산당 상징과 십자
가를 동시에 들고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마르트 고모는 줄곧 의아스러운 표정
이었다. "정상일 리가 없는 저 노파는, 예수는 세상을 구하러 지상에 내려왔고 공산당은 인
민을 구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믿는 모양이지요. 공산당은 파멸하였지만 예수는 다시 돌아왔
으니, 지나가 버린 시대와 새시대를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저 노파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을 테지요." "그렇다면 저 노파는 기억을 상실했다는 말씀이신가요?" 테오가 물었다. "그
런 게 아니지." 알료샤가 대답하였다. "단지 저 노파들은 세상을 재는 잣대를 잃었을 뿐이
야.제2차 세계대전 동안, 러시아는 나치 침략군에 대항하기 위해 수백만 명의 젊은 군인들을
희생시켰단다. 그럼에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탈린은 인민의 아버지로 숭상받았지. 하지만
스탈린은 인민을 노예로 전락시켰어. 비록 자유는 말살되었지만 누구에게든지 일자리가 보
장되었고, 퇴직 연금 또한 보장되었지. 무상으로 의료 혜택도 주어졌고..." "그건 그래요." 마
르트 고모도 수등하였다. "그렇지만 너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잖아요." "끔찍한 대가를 치
렀지요. 공산 정권이 폭삭 붕괴되었을 때, 저 노파들은 미리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죠.
불과 몇 달 사이에 저들이 알고 있던 세계가 사라져 버린 거예요. 공산당은 와해되었고, 각
종 연금 또한 지불되지 않은데다가 투기는 절정에 달하였지요. 노인들은 모두 가난한 형편
들이었으니 정신이 나갈 수밖에요. 그러니 십자가와 망치.초승달이 뒤범벅되어 나타난다 해
도 크게 놀랄 것도 없겠지요. 그게 바로 저들이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따지고 보면 저 노파들은 독실한 신자임에 틀림없을 거예요." 마르트 고모가 중
얼거렸다. "해묵은 과거가 가장 러시아적인 형태로 부활하는군요." "신자이건 신자가 아니
건, 그와는 상관없이 저 노파들은 민주주의를 혐오하는 사람들이에요." 알료샤가 서글픈 표
정으로 단언하였다. "그래서 나는 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딱한 노인들이네요." 테오
가 말했다. "테오 너 러시아의 고통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더니, 이제 속이 시
원하겠구나." "러시아 종교에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알료샤가 덧붙였다. "아름다움
에 대한 경배도 중요한 특징이지요. 성가와 성화, 그리스도의 오묘한 시선, 천사들의 형상...
이제 곧 이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러시아인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여
태까지 모르고 있었어요!" 마르트 고모가 놀라운 듯 소리쳤다. "교회를 주제로 한 오페라만
도 굉장히 많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 음악은 지나치게 종교적이에요." 알료샤가 사과라
도 하는 듯한 태도로 조심스럽게 설명하였다. "들어가 볼까요?" 테오가 물었다. "상트세르게
이 삼위일체 수도원에 갈 때까지는 좀 참으렴." 알료샤가 대답하였다. "크렘린보다는 그 수
도원에서 더한 신앙의 참뜻을 느낄 수가 있을 거야. 여긴 관광객이 너무 많거든."
무신론자의 박물관
"마침 잘 되었네요." 마르트 고모가 말했다. "테오에게 레닌이나 보여 주도록 하죠. 바로
이 근처니까요." "난 빠지겠습니다." 알료샤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붉은 광장 반대
편에 새로이 세워진 교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새로이 세워진 교회라니오?" 마
르트 고모가 물었다. "난 무슨 교회를 가르키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마르트 당신이 이곳
을 마니막으로 다녀간 지가 꽤 오래 되었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저기 오른쪽을 보세요." 녹
색 빛이 도는 검물 옆에, 자그마한 교회당의 장미빛 아치와 들쭉날쭉한 종탑이 보였다. 둥그
런 돔에서는 아직도 새 지붕의 체취가 물씬 풍겨 나오는 듯했다. 여러 줄로 늘어선 관람객
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저 교회는 갑자기 어디서 생겨난 거지요?"
마르트 고모는 뜻밖의 광경에 놀란 빛이 역력했다. "땅 속에서 솟았지요." 알료샤가 웃으며
대꾸하였다. "자유가 가져다 준 선물이에요. 러시아의 부활과 함께 생겨났거든요. 저곳은 언
제나 저렇게 사람들도 들끊는답니다." "늘 저렇게 사람들이 많다구요?" 마르트 고모가 놀라
움으 금치 못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한 가지 상기하여야 할 것이 있어요. 마르타 그리고리
에브나." 알료샤가 말했다. "1903년 이래, 러시아 교회는 온갖 박해 속에서도 비밀리에 그
명백을 유지해 나갔어요. 초기 그리스도교도들과 비슷한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그 이름까지
카티콤 교회라고 붙였답니다. 무신론자 동맹이 성직자와 신자 들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는데,
1918년부터 1938년 사이에만도 4만 명의 사제와 6백 명의 주교 들이 살해당하였지요." "나
는 그같은 숫자는 처음 들어요." 마르트 고모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러시아 민족을 송
두리째 무신론자 집단으로 개종시키겠다는 목적 때문이었죠. 공ㅇ산 치하의 레닌그라드에서,
공산당원들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남김 없이 약탈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무신론주의 박물관을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라면 나도 잘 알
아요." 마르크 고모가 대답하였다. "60년대에 구경했었요. 교활하고 악랄해 보이는 수염투성
이의 대제사장 그림이 잔뜩 걸려 있었지요. 유치함의 극치였어요."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로 나타났지요. 러시아인들의 신앙심이 더한층 돈독해졌으니까요. 공산주의의 허위선
전이 자취를 감추면서 카잔 성당은 다시금 정교회의 중심 교회로 자리잡았고, 레닌그라드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지요. 공산주의 사회에서 창고로 개조되었던 교회
당에, 성급한 나머지 합판 위에 그린 성화를 걸어 놓은 경우도 있었어요." "붉은 광장엔 그
래도 그것보다는 잘해 놓은 것 같던데요." 마르트 고모가 지적하였다. "딸기 케이크 같던데
요 뭘." 테오가 신랄하게 평했다. 알료샤는 테오의 머리르 한 차례 쓰다듬더니 말없이 멀어
져 갔다. "너 때문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야." 마르트 고모가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어쩌
면 그렇듯 쉽게 화를 내지요?" 테오가 투덜거렸다. "러시아 사람들은 예민한 편이지." 마르
트 고모가 대답하였다. "러시안인들에 비하면, 우리는 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일 거야.
알료샤는 아주 독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자기 나라를 몹시 사랑하는 사람이지. 그래서 기분
이 나빴을 거야." "알겠어요. 이제 그 어르신이나 보러 갈까요?" 테오가 짐짓 너스레를 떨었
었다.
레닌의 미라
어두운 빛깔의 대리석으로지어진 기념관 앞에는, 군인들이 지루한 표정으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몇 안 되는 방문객들이 발걸음을 재촉하여 기념관 아느오 들어갔다. 레닌의 미라를
보려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주위는 한가롭기만 했다. "금석지감이라더니! 예전에 보았던 이
곳 풍경과는 너무나도 다르구나." 마르트 고모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그때는 관
람객의 행렬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이어졌었는데... 어두운 색 양복을 입슨 신랑과 흰색 옷
을 입은 신부들이 순례하듯 이곳을 들르곤 했었는데, 정말 많이 변했구나." "사람들이 이제
는 레닌을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에요." 테오가 사려 깊게 말했다. "그런데 왜 이곳에 그대로
놓아두고 있는 걸까요?" "스탈린의 미라는 아무도 모르게 슬쩍 가져다가 매장해 버렸단다.
하지만 레닌은 스탈린과는 다르지. 혁명을 일으켰고, 희망을 안겨다 준 사람이거든. 네 사고
방식대로라면 우리는 애 파리에 나폴레옹의 무덤을 그대로 남겨두었겠니. 안 그래?" "그거
야 그 사람이 좋은 생각도 많이 하였기 때문일 테죠." 테오가 결론짓듯 말했다. "나폴레옹도
처음엔 꽤 괜찮은 인물이었잖아요 자, 이제 가보실래요?" 하지만 테오는 곧 실망하고 말았
다. 누렇게 뜬 레닌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읽을 수 없을 정
도였다. 테오는 드러누운 작달막한 시신 앞에 오래도록 서있으면서 일말의 신비스러움이라
도 찾아내려 하였지만, 미라에는 아무런 자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사람 앞에서 온 러시
아가 벌벌 떨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요." 테오가 한참 만에 탄식조로 말했다. "왜 이 노인네
를 내내 이곳에 모셔 놓는 걸까요?" "성인들이 죽으면, 그 시신을 나누어 가지려는 그리스
도교도들과 같은 연유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가 이곳에 레닌의 미라를 보관하는 데 대해서
찬성하는 거 아니야. 그러한 반면 이 미라를 치워 버리자고 단호히 결단 내리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엇단다. 유해에 대한 애착은 이렇듯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구나. 아마도 육신
은 썩어 없어지는 것만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지 않나
싶다." "정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식이라면 그리스도교도들은 미라보다 훨씬
더 그럴듯한 생각을 해냈다고 볼 수 있어. 최후의 심판이 오면, 우리 모두가 부활하리라고
믿으니 말이야. 게다가 한나도 다치지 않은 깨끗하고 영광스런 육체로 다시 태어났다고 믿
거든. 그렇다면 육체의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겠니?" "그런데 고모, 이사람 말이에
요." 테오는 레닌을 가리키며 우물거렸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교도가 아니었나요?" "물론
아니었지. 마오쩌둥도 마찬가지고. 공산주의 창시자들의 미라를 보면, 공산주의도 러시아에
서 발생한 종교임에 틀림없ㅇ르 거사는 생각이 든단다. 암, 당연히 그렇고말고." "왜 당연히
그렇다는 거죠?" 테오가 되물었다. "1918년, 그러니까 레닌이 정권을 장악한 이듬해 러시아
의 한 위대한 시인이 혁명을 찬양하는 시 한 편을 지었단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벌판에
12병의 바참한 병사들이 걸어가고 있었지. 머리에는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입에는 담배를
문, 총대를 둘러멘 병사들이었단다. 혁명동지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성스러운 러시아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외쳤지. 그리고 이 들은 통나무집으로 들어찬 러시아를 가리켜 '엉덩이
만 커다란 러시아'라고 빈정거렸어.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총을 쏘아 대고는, 곧 후희의
눈물을 흘리면서 구시대를 진흙탕으로 몰아간 이들을 누가 인도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
니?" "레닌이었겠죠!" 테오가 소리쳤다. "장미꽃 왕관을 쓰고, 피로 물든 깃발을 흔들어대는
예수 그리스도였지. 러시아에서는 예수만이 저들을 구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렇지
만 러시아인들은 전지전능하다는 아버지 하느님조차도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불의 앞에서,
예수가 보였던 적개심을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였다고도 볼 수 있어." "레닌은 그래도 괜찮
은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저도 평소부터 생각해 왔었어요." 테오가 맞장구를 쳤다. "어
떤 의미에서는 예수의 생각과 상당히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지. 만민평등이나 빈부격
차 타파, 이상적인 행복, 지상에서의 낙원을 건설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총대를 휘둘
러 낙원을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는 아주 다르지." "그런데 고모가 말씀하신 그 시인은 누구
죠?" "알렉산드르 블로크. 하지만 그의 시는 성공작이 못 되었지. 그가 그토록 찬양하던 혁
명은 곧 변질되지 시작하였고, 마침내 그 시인은 '추잡하고 콧소리나 흥흥거리는 빌어먹을
나의 생모 러시아는, 제 새끼를 잡아먹는 암퇘지처럼 나를 온통으로 갉아먹었도다'라는 글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단다." "고모는 그 사람 글을 아주 줄줄 외우고 계시는 군요." 테오가 경
탄스러워하였다. "물론이지. 난 원래 생모라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편이지. 아참. 그러고 보니
프랑스이 공포정치를 찬양한 힌두교 신비주의자도 생각나는 구나. 혁명이라는 어머니의 의
무는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것이라고 노래한 사람이지." "너무도 멋져도 하마터면 기절하겠
네요." 테오가 빈정거렸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도 저를 양파아 곁들여 오븐에 구워 잡수실
수도 있겠군요." "인신공양!" 마르트 고모가 테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상기시켰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여전히 뿌리 깊이 남아 있다는 증거야." "그래도 레닌은 식인종은 아
니었잖아요." 테오가 변호하듯 우물거렸다. "단지 생각을 약간 잘못하였을 뿐이지요." "그런
소리 마라. 수백만 명이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어떻게 잠깐의 실수라고 말할 수 있겠
니? 물론 레닌이 자기관리에 엄격한 사람이었다는 점에는 너와 동감이야. 화려한 마차를 타
고 거들먹거리지도 않았고, 왕들처럼 호의호식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너무나 많은 피
를 흘리게 하였지. 생각은 근사했지만.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수단은 범죄적이었어. 대량
학살과 독재가 70년 동안이나 이어졌으니 말이야." "그거야 뭐 러시아인들이 정말로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테오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그리스도처럼 고
통받는 사람들이라고 해야지. 그 두 가지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해." 마르트 고모가 이같이
지적하였다. "이런 쓰레기를 방치하다니..." 테오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레닌의 미라를 바
라보며 말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못 써. 다른 사람들이 무덤을 만
둘어 주지 않는 게 어째서 레닌만의 잘못이겠니?" 마르트 고모가 조심스럽게 테오를 나무랐
다.
22 어머니격인 대지와 눈물
피곤에 지친 마르트 고모
알료샤가 정성껏 마련한 점심 식사를 마친 테오는, 잠시 낮잠을 자야 할 것 같다고 조심
스럽게 청하였다. "몸이 안 좋니?" 마르트 고모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뇨." 테오는 나
지막이 대답했다. "조용히 책 좀 읽고 싶어서 그래요 병원에는 언제쯤 가는 거예요?" "병원
에는 안 걸 거야."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월급이 줄어들어서 의료 수준이 형편 없어 저
하되었거든. 다른 곳에서... 그때 가면 알려 줄게." "왜 말씀을 하시려다 마는 거예요." 테오
가 반발적이 태도로 말했다. "그리고 다음번 메시지는 언제나 주실 거죠?" "내일. 네 아빠가
이곳에 오래 머무르는 걸 싫어하셔." 마르트 고모가 해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그러니 메시
지를 해독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을 거야." "알았으니, 그럼 좋은 책이나 읽다가 한숨 자
겠어요." 테오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러나 마르트 고모가 테오에게 읽힐 만한 소설책을
고르는 동안, 테오는 어느 새 잠이 들어 버렸다. 이리나와 알료샤는 식탁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테오의 방에서 나온 마르트 고모도 이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 마르트 고모가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다시피하면서 의자에 풀썩 주저앉자, 이리 나가 마르트 고모의 손
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도로가이아 마르타 그리고리에브나, 벨크아이네 트라우리게자
크..." "뭐라구요?" 마르트 고모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요. 아녜요, 이란 그렇게 슬퍼할 상황은 아니에요. 난 테오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확신해
요. 난 다만 가끔씩 슬프다기보다 몸이 조금 피곤할 뿐이에요." "어떻게 테오가 나아지고 있
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거죠?" 알료샤가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여행을 너무도 잘 견뎌내고
있기 때문이죠. 그 때문에 내가 희망을 갖는 거예요." 마르트 고모가 대답하였다. "오히려
이제는 내가 지쳤는걸요, 테오는 기운이 펄펄한데... 아마도 두 달쯤 전에 시작한 티베트 요
법 덕분에 병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것 같아요." "러시아에도 그런 요법이 전해지지요."
알료샤가 말을 받았다. "우리 나라 학자들도 때로는 의과의술보다 더 큰 효험을 발휘하는
최면 요법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였지요. 아마 테오늬 병은 육체가 아닌 마음의 병인 모양
이지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마르트 고모는 한숨을 지었다. "동양 치료사들을 만나도 나
면 병세 어느 정도 호전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테오의 병을 고
쳤다고 결론을 내리기엔..." "원래는 성화를 보러 박물관에 갈 예정이었지만..." 알료샤가 시
계를 보며 말했다. "그대로 내처 자도록 내버려두는 게 좋겠습니다." "괜찮다면 나도 한숨
잘까 봐요. 참 이상하기도 하지요. 테오의 잠든 모습을 보고 나면 이상하게 나도 잠이 마구
The아지거든요." "그게 바로 그리스 어원적인 의미에서의 공감이겠지요. 마치 테오의 엄라
고 된 것처럼 말이죠." "그 얘긴 그쯤 해두세요. 난 그런 함정엔 빠지지 않는다구요. 테오의
엄마 멜리나는 아직도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젊어요. 좋은 일이죠. 아뇨, 난 절
대로테오의 엄마가 될 수 없어요. 글쎄요,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영혼의 인도자'라고나 할까
요." "테오를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싶으신 게로군요." 알료샤가 말했다. "전혀 잘못 생각하셨
어요. 그거야 테오 스스로가 알아서 결정할 문제이지요. 더구나 테오는 종교보다 신비주의자
들에게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두 비스트 알소 아인 비쉔 미스티슈." 이리나가 웃으면
서 마르트 고모의 말을 거들었다. "나도 신비주의자라구요?" 마르트 고모는 그럴 리가 없다
고 반박하였다. "물론 관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녜요. 어쨌든 인간이
언제나 신에게로 가서 안식을 찾는다는 사살은 수긍하기 어려워요. 이해할 수가 없으니, 거
듭 탐구해 보는 수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신비주의자들의 습성이지요." 알료샤가자신 있
게 말했다. "그런 다시 말해서..." 마르트 고모는 잠시 주저하였다. "자꾸 그렇게 나를 곤란
하게 만들 작정인가요? 그렇다면 난 가서 쉬어야겠어요." 이리나와 알료샤는 재미있다는 듯
이 서로 눈짓을 하였다. 마르트 고모는 벽에 몰렸다. 깊으면이렇듯 토라지는 버릇이 있었다.
축축한 대지의 해빙
저녁 10시쯤, 이리나는 테오를 깨워 더운 국물을 마시게 하였다.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더운 국물을 마신 테오는, 이내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르트 고모는 저녁 식사 무렵
식당으로 나왔으나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다음날 테오 일행은 자동차를 타고 상트세르게
이 삼위일체 수도원으로 향했다. "흥, 상트세르게이라고?" 마르트 고모는 자동차 뒷좌석에
몸을 기대며 투덜거렸다. "뭐 하러 이름은 바꾼담? 자고르스크도 멋진 이름이었는데." "그래
도 원래 이름이 아니잖아요." 알료샤는 약간 불쾌한 투로 말했다. "수도원이 세워진 도시이
름을 소련 공산당이 제멋대로 바꿔 버렸던 거예요. 자고르스크는 혁명가였습니다. 성자의 이
름 대신 혁명가의 이름을 쓰다니 말이 됩니까? 지나간 잘못을 바로잡은 건 천번 만번 잘한
일이죠." "이름을 붙였다가 없애고, 또 다른 이름을 붙이고... 그렇게까지 요란을 떨 필요가
있나요? 세대가 바뀔 때마다 길 이름까지 바뀐다고 상상해 보세요.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구요." "그렇다면 고모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파리 시내에 독일어 표지판이 남아 있는 게
좋다는 말씀이세요?" 테오가 조롱 섞인 어투로 고모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테오 넌 이해력
이 참 빠르구나." 알료샤가 테오를 추켜세웠다. "우리도 마치 무력 점령시대에서 해방된 듯
한 기분이거든." 마르트 고모는 더 이상 항변하지 핞고 고개를 돌ㄹ 버렸다. 도시를 벗어나
면서 히색 건물들이 차츰차츰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반면, 들판과 지붕을 덮은 눈 때문에 눈
이 시렸다. 마르트 고모는 마치 껍질을 벗은 것처럼 새하얀 자작나무의 자태를 황홀한 눈으
로 바라보았다. 서글픈 풍경이었다. 때마침 이리나가 애조 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마
냥 늑장을 부리는 봄기운을 재촉하는 듯한 애달픈 노래였다. "해빙기의 자연이라니,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군." 알료샤가 경탄하는 투로 말했다. "우리 나라에서 해빙만큼 중요한 것도
없을 거예요. 긴긴 겨울 동안 움추러들었던 영혼이 깨어나도다." "어디서 많이 듣던 표현인
데..." 마르트 고모가 중얼거렸다. "어디에서 나오는 구절이죠?"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오페
라 키테슈에 나오는 곡이지요." 알료샤가 대답하였다. "페브로니아가 그 마지막 막에서 얼음
속으로 빠져 들어가며 부른 노래예요. 멋진 해방의 장면이지요." "꽁꽁 얼어죽는 게 멋진 해
방이라구요?" 테오가 분개한 듯 외쳤다. "참 희한한 해방도 다 있군요." "그러니까 전설을
알아야 얘기가 되는 거란다. 페브로니아는 숲 속에 산ㄴ 처녀였는데. 그 순수하고 고운 마음
씨에 이끌린 키테슈 대공과 마침내 성대한 결호니식을 올리게 되었지.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릴 무렵, 도시는 타타르족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어. 하지만 신의 마법 덕분
에 키테슈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되어, 그 주민들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지.
멍청이한테 납치당한 페브로니아만 제외하고 말이야. 그러는 한편 멍청이한테 끄려가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였지만, 페브로니아는 그 착한 마음을 잃지 않았어. 그러다가 결국 고통스
런 나날을 마감하기 위해 페브로니아가 스스로 얼어붙은 연못 속으로 몸을 던졌을 때. 마침
보이지 않게 된 키테슈로 돌아오게 되어 그곳의 여왕이 되었단다." "알았어요. 하지만 여자
는 죽었을 거 아녜요." 테오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연거푸 항의를 하였다. "아니지. 죽지 않
았어. 페브로니아는 해빙의 상징이야. 봄이 돌아왔을 때. 대공은 동물들과 꽃들에 둘러싸여
있는 페브로니아를 발견하였지. 페브로니아가 물 속으로 사라지면서 겨울은 끝이 났어. 얼음
이 녹았으니까. 다시 말해서 페브로니아는 겨울이면 얼어붙고, 봄이면 푸르러지는 러시아의
대지란다. 천상의 이상향을 꿈꾸는 곳이지." "남의 나라에서 귀양살이하는 유대인들이 그리
는 예루살렘에 비교할 수 있겠지." 마르트 고모가 덧붙여 설명하였다. "시대가 바뀌면 세상
도 바뀔 테지. 새해는..." "테오는 아마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후,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
로 지명된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로군요." 알료샤가 말을 이었다. "맨 처음의 로마는 물론 성
자 베드로의 로마이고, 두 번째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세 번째는 모스크바였지요." "그
외에도 또 있나요?" 테오가 물었다.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그
리스도교도들에게 있어서 로마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과 같은 운명을 거쳤으니까. 하나의
도시를 건설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예루살렘을 조금씩 떼어간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삼중
의 의미로 볼 때, 성지인 예루살렘과 마찬가지로 로마도 세 차례나 그 자리를 옮겼지." "하
지만 도시 하나를 건설하는 것만도 엄청나게 힘든 일인데, 어떻게 신에 대한 걱정까지 할
겨를이 있었겠어요." 테오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건 완전히 잘못 생각
하는 거야. 도시 건설의 예식은 항상 신의 의지와 관계가 있게 마련이야. 중국 도시들 생각
나니? 도교의 가르침에 따라 원 안에 사각형 모양을 짓는 도시 말이야. 장소를 결정하기에
앞서 우선 신성한 요소를 수집하는 거야. 기적의 샘물이나 초자연적인 현상 같은 것들 말이
야. 필요하다면 없는 걸 새로이 만들어 내기도 하지. 제물로 바쳐진 성녀를 위해 세워진 성
벽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단다." "러시아의 대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성한
제물이랍니다." 알료샤가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전쟁터에서 대량으로죽어가는 자
식들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지모신이라는 말이죠.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전에는 이교도의
신인 축축한 지모신이 있어서, 반드시 신으로부터 '눈물을 거두어라. 너는 인간등을 먹여 살
려야 한다. 그와 더불어 너는 인간 모두를 집어삼킬 것이다'라는 말씀을 전해들은 날만 땅을
파도록 정해져 있었지요. 우리 러시아인들은 이 여신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모시고 산답니다.
바로 우리의 대지이니까요. 우리는 땅을 어루만지기 위해 몸을 굽히고, 존경의 마음을 담아
땅에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대지에게 용서를 빌기도 하지요." "러시아인들만 그렇게 하는
건 아니에요." 마르트 고모가 지적하였다. "브라질로 끌려간 흑인들이 어떻게 자살하였는지.
혹시 알고 있나요? 자기들의 땅을 빼앗겼다는 절망감 때문에 흙을 집어삼키고 스스로 목숨
을 끊었다더군요." "우린 흙을 먹지는 않습니다." 알료샤가 불쾌하다는 듯이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우리 러시아인들은 대지와 신의 어머니를 동일시하는 것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대
지에 눈물을 뿌리는 것도 성스러운 행위로 간주하지요." "참으로 희한한 관개 농업도 다 있
군요." "그러지 말고 알료샤의 설명을 들어 보세요." 테오가 마르트 고모의 말을 말았다. "이
제는 너까지 큰소리를 치는구나." 마르트 고모가 투덜거렸다. "그래, 지모신 이야기가 넌 그
렇게도 재미있니?" "네, 아주 흥미로워요." 테오가 대답했다. "엄마도 자주 눈물을 흘리세요.
기쁠 때도 말이에요. 그때마다 테아노 할머니께서는 그리스 혈통이라 그렇다고 말씀하셨어
요." "테아노 할머니는 테오의 외할머니신데, 그리스인이세요." 마르트 고모가 부연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테오가 러시아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에요." "어쩌면 우리 러시아인들은 그
리스인들에 비해 신앙심이 약간 덜할지도 모르겠군요." 알료샤가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지
모신이 침략자들을 남김 없이 잡아먹어 버리거든요. 나폴레옹과 히틀러 등. 모두 봉변을 당
하였지요. 이렇듯 대지는 우리를 지켜 주는 수호신이랍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
군데군데에서 금빛 별이 빛나는 푸른 돔을 보고, 테오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반짝거리게
광채를 발하는 거대한 십자가 때문에 푸른 빛이 한층 더 두드러져 보였다. 상트세르게이 삼
위일체 수도원은, 수도원이 자리한 언덕 위에 온 인류를 집결시켜 놓을 수도있을 둣한 위용
을 자랑하고 있었다. 테오는 느린 걸음으로 수도원 내부에 들어섰다. 눈 덮인 관목들이 늘어
서 있는 길을 따라 걸어가니 교회당이 보였다. 머리에 머플러를 쓴 나이 많은 여인들과 천
진하게 웃음짓는 젊은 처녀들, 그리고 진지한 표정의 청년들이 교회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잘 차려 입은 사제들이 짐짓 점잔을 빼며, 가슴에 건 십자가 장식을 만지작거리면서 신자들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자들은 사제의 손에 입을 맞추거나, 혹은 성화를 내밀며 축복을 부탁
하기도 했다. "정말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로군요." 마르트 고모가 중얼거렸다. "지나번에 왔
을 때는, 기껏해야 두세 명의 바부슈카만 왔다갔다했었던 걸로 기억되거든요." "바부슈카가
뭐예요?" 테오가 물었다. "나이 든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지." 알료샤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란다. 자, 앞으로 가보자."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기란 그다
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교회당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앞으로 헤쳐 나가는 도중. 테
오는 가지각색의 신비스런 기도 소리를 들었다. 심오하게 들리는 속삭임도 있었고, 연민을
자아내는 애절한 목소리도 들려 왔다. 이와 아울러 테오는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수
천 개의 양초를 보면서 사슴이 사뭇 후련해짐을 느꼈다. "이 음악 소리는 어디에서 나오는
거죠?" "신도들이 여러 성부로 나위어서 부르는 노래 소리란다." 알료샤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하였다. "마치 천사들의 목소리 같아요." 테오가 황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슴
을 치며 기도를 올리는 신도들 앞을 지나면서, 테오는 후광이 그려진 인물들의 거대한 패널
을 보았다. 인물들은 한결같이 검은 눈동자에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눈에는 눈물이 가
득 고여 있었다. 마치 천사와 성자 들이 신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저
것이 바로 성화란다." 알료샤가 나지막이 설명하였다. "그리스도를 알아보겠니? 저 가운제서
키가 제일 큰 사람이 그리스도란다." "저를 보면서 눈으 더욱 크게 뜨시는 것만 같아요." 테
오가 그림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님. 즉 그리스어의
'판토크라토르'란다. 신이 바라보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일 테지.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
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다리며, 그 고통을 감내하는 사랑의 얼굴이야. 이렇게 그리
스도의 시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의 고통과 거룩하심이 마음속에 녹아내리는 듯하지."
"기분이 아주 묘해요." 테오가 온몸을 떨며 말했다. "마치 몸에서 열이 날 때 같아요." "당여
난 현상이란다." 알료샤가 테오를 안심시켰다. "성화를 바라보면서 성가를 듣고, 촛불에 둘
러싸여 향연을 맡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성삼
위일체의 신비에 의해 모든 감각이 동요된ㄴ 거야. 아버지 하느님은 계시지 않지만 그 아들
되는 분이 사랑으로 우리르 바라보고 계시며, 눈물ㅇ르 흘리는 어머니는 바로 테오 자신이
란다. 우리 러시아에서는 이를 '가르켜 고통스러운 기쁨'이라고 표현하지." "정말 이상한 일
이에요." 테오가 코를 벌름거리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자꾸 눈물이 날 것만 같아요." "눈물
을 억지로 참을 필욘 없어." 알료샤가 말했다. "그냥 흘러내리도록 내버려둬. 그렇게 울고
나면 마음이 한결 후련해질 거야." "왜 그런 거죠? 일부러 울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저도
모르게 자꾸만..." "네 감정이 이끄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알료샤는 같은 말으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그게 바로 기쁨이란다." 성가가 끝났을 때, 테오의 밝게 빛나는 뺨 위로 굵은 눈
물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 이거." 마르트 고모가 테오에게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코 좀 풀어야겠다."
눈물의 근원과 두 번째 세례
교회당 계단 앞에는 마치 개미군단의 움직임처럼 신도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시골
장터를 연상시키는 분위기 속에서, 신도들은 작은 성화와 십자가 등을 사려고 가게 주위를
바쁘게 오갔다. 군중들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는, 코피투성이의 한 젊은이가 머리를 움겨쥔
채 신음 소리를 내며 앉아 있었다. "저 사람은 왜 저러는 거죠?" 테오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아마도 누구한테 얻어맞았나 보군요?" "일요일에는 저렇듯 볼썽사나운 젊은이들이
눈에 많이 띈단다." 알료샤가 멋쩍은 얼굴로 대답하였다. "토요일이면 술을 잔뜩 마시고는
그 밤에 싸움질을 해댄단다. 다음날 예배에 나와 참회의 기도를 올리지만, 다시 토요일이 되
면 어김없이 똑같은 행위를 되풀이하지." 안타까운 마음에 테오는 다시금 울기 시작했다.
"테오, 너 정말 너무하는구나." 보다 못해 마르트 고모가 끼어들었다. "계속해서 이렇게 칭
얼대다니, 행여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니?" "마르트 그리고리에브나, 당신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테오의 감정상태는 머리에서가 아니라 가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당황한 알료샤
가 테오를 두둔하고 나섰다. "러시아적인 신앙심은 머리를 무시하도록 요구하는 셈이지요."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잠깐 그 사살을 잊고 있었나 봐요." 마르트 고모가 볼멘소리로 사과
를 하였다. "그것을 표현하는 말이 있었던 걸로 기엇하는데... 마음속의 머리라고 하던가요?"
기도를 하는 동안이 머리로부터 가슴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하죠." 알료샤가 마르트 고모
의 말을 바로잡았다. "머리는 지능을 관장할 뿐, 모든 감정의 근원은 마음이지요. 지능만으
로는 참다운 기도를 올릴 수가 없습니다. 기도란 결코 몇몇 단어의 뜻에 정신을 집중시킨다
고 해서 되는 게 이나니까요. 어린아이처럼 더들머기면서 반복하는 가운데 마음으로 샘솟아
야 하지요."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로군요. 정교회 수도사들이 기도를 드린다는 명목
하에 얼마나 기인한 행동을 하는지 아니, 테오? 그들은 숨을 멈춘 채 몸을굽혀 자기의 배꼽
만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그 의식을 잃을 때까지 예수의 기도문만 하염없이 외우기도 한
단다." "황홀경에 도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에요." 알료샤가 반박
하였다. "첫째 그러한 수행방법을 맨 처음 고안해 낸 수도사들은 그리스 출신이었어며, 둘째
숨을 멈추는 목적은 정신을 머리로부터 가슴으로 내려보내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배꼽은 왜 쳐다보아야 하는 거죠?" 테오가 물었다. "배꼽은 배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지. 다시 말해서 우리가 모태로부터 떨어져 나온 곳이란다. 탯줄이 끊어진 다음에는
어떻게 하여야 다시 접속될 수 있을까? 배꼽은 배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중심이기도
하지. 따라서 황홀경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호흡과 기도의 리듬을 같이 맞추기만 하면 된단
다." "요가의 원리랑 똑같네요!" 테오가신기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렇죠. 마르트 고노. 올
리부리우스의 '옴'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요가 수행자들은울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점
이겠지." 마르트 고모가 반바하였다. "오히려 요가 수행자들은 미소를 짓더구나, 어쨌든 난
우는건 딱 질색이야." "마르타 그리고리에브나, 당신은 내 말은 전혀 동의할 마음이 없나 보
군요." 알료샤가 노기 띤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다시 한 번 눈물이 은총에 대하여 설
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끊임없이 외쳤듯이 이 세상은 고통의 연속이며,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한 예수야말로 고통의 화신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인
들은 항상 신에게서 부여받은 슬픔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러
번 들었던 이야기에요." 테오가 말했다. "모든 것은 고통이다." 그러나 인간의 슬픔은 눈물
덕분에 기쁨으로 승화될 수 있다. 그렇지만 육체적인 근엄함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슬픔을
메마른 상태로 간직하는 수밖에 없다. 반면 혼자만의 우수에서 탈피할 수 있는 눈물의 은총
에 몸을 맡길 수 있다. 눈물은 흘리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다. 오직 마음이
순수한 사람만이 눈물을 흘릴 수가 있는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성자들이 눈물을 자아내는
능력을 지녔다고 여겼다. 그 덕분에 성자들은 신도들을 치유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능력을
지닌 성자들을 가르켜 '스타르치', 즉 영적 안내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단수일 경우에는 '스
타레츠'라고 일컬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러시아에는 아주 유명한 스타르치가 나타났다. 15
세기 정치적 소용돌이가 온 나라에 휘몰아쳤을 때, 19세기 러시아 교회가 국가의 시녀로 전
락하였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련 공산당에 의해 박해받은 때가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아무런 구원도 청할 수 없는 딱한 처지의 러시아 민족 앞에, 이 영적 안내
자들이 나타나 불아르 잠재우고 신아의 열기를 북돋웠다. 이들은 다른 정교회 사제들처럼
결혼을 하지도 않았으며, 마치 예수나 모세처럼 광야로 떠나갔다. "눈 덮인 벌판으로 말인가
요?" 테오가 놀라서 물었다. 눈밭이건 사막이건, 광야는 고독이라는의미와 맞닿아 있다. 움
막에 칩거하는 스타레츠 주위에는, 곧 그이 선함을 나타내는 빛나는 시선을 따라 군중들이
몰려들었으며, 그는 이들로부터 극진한 숭배를 받았다. 그 어느 유명인사나 사제, 심지어는
차르보다도이들 영적 안내자는 러시아인들을 결집시키는 능력이 뛰어났다. 가슴으로 내려온
메라른 정신을 촉촉히 적셔 줄 수 있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
었다. "내가 보기엔 안전히 감상벽이라고나 해야 할 것 같아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다니,
그건 정신이 나약하다는 증거가 아니겠어요!" 마르트 고모는 내내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
다. 어쩌면 나약함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원래부터 나약하고, 또한 죄를 범
하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는 건 절대로아니었다.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이란, 오히려 잔인할 정도의 무관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눈물이란, 어디까지나 두번째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기도를 드릴 때 흘리는 건 절대로 아니
었다.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이란, 오히려 잔인할 정도의 무관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누눌이란, 어디까지나 두 번째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기도를 드릴 때 흘리는 눈
물처럼 순간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 눈물은 마음으로부터 불결한 찌꺼기를 모두 씻어내리며,
마음을 보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만든다. "어떠니, 테오? 울고 나니 기분이 한결 개운하지 않
니?" 알료샤가 결론을 대신해서 테오에게 물었다. "네, 그렇다고 해야겠죠." 테오가 심드렁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다리가 떠렁져나갈 것만 같아요, 전 지금 몹시 피곤해요."
"그것 보세요!" 마르트 고모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당신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잔하
요, 알렉세이 에브라이모비치! 건강하지도 않은 애를 데리고... 아주 잘 하셨어요." 고모의 화
난 모습에 놀라 테오는 세차게 코를 풀었다.
세 개의 이름을 가진 도서
"살살 좀 하려무나. 그렇게 소란을 피울 것까진 없잖니? 잠시 흥분했기 때문일 거야. 난
흥문하면 배가 고프던데, 뭘 좀 먹을까?" "피모쥬키스는 어떻겠어요?" 알료샤가 황급히 물
었다. "수도원 입구의 기념품 가게 근처에 가면 있거든요." "속에 고기르 ㄹ넣은 작은 만두
야." 마르트 고모가 설명해 주었다. "괜찮겠니?" 테오는 코카콜라를 마셔가면 피로쥬키스를
꾸역꾸역 벅으면서도 눈은 연상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으로 향하였다. 자잘한 수레국화와 보
리이삭 화관을 쓴 인형, 차르의 형상을 본뜬 거대한 마트리오슈카, 검은색 술이 달린 꽃무늬
숄 들이 가게 진열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마트리오슈카를 사면 어떻겠니?" 마르트 고모가
넌지시 테오긔 의견을 물었다. "저기 저거 말이야. 통통한 볼에 파란 눈을 한 인형..." "어휴,
고모가 벌써 세 개나 선물해 주셨는걸요." 테오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숄이나 살래요.
엄마 하나, 아티 하나, 이렌느 하나..." "그러렴. 하지만 난 너한테 마트리오슈카를 꼭 사주고
싶은데." 마르트 고모는 끈질지게 테오를 설득하였다. "사줄 테니 곧장 열어 보아야 해." "아
무래도 이 안에 메시지를 감추어 놓으신 모양이로군요." 테오가 조립식 인형을 해체하면서
툴툴거렸다. "자, 보세요. 제 말이 맞지요." '나는 두 개의 대륙을 연결시키고 있는 까닭에
자주 정복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름도 세 차례나 바뀌었다.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을 보면,
합리적인 이성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으리라.'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테오는 메시지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식구들에게 선물할 숄을 골랐다. "너 벌썩 알아낸 거야?" 마르
트 고모가 놀라서 물었다. "고모도 참, 성미 한 번 급하시네요." 테오가 숄을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불이 난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서두르세요?" "아무렴, 서둘러야 하고말고, 지난번
에 이미 언급해 두었듯이, 우린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해. 그러니 메시지를 해독하려면 단
하루밖에 시간이 없단다." "정 그렇다면 자동창에서 하면 되잖아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테오가 말했다. "대신 숄 값 좀 내주실래요?" 바로 그 순간, 주위의 공간을 가르며 힘차고
장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작은 종들의 높은 음색이 한데 어우러 졌다. 마치 온
하늘에서 종소리가 울리는듯한 느낌이었다. 테오는 경타을 금치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마동
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손에는 여전히 숄이 들려 있었다. "러시아의 종들은 살아 있는 생
명체란다." 알료샤가 입을 열었다. "러시아 교회의 태동기에는 종을 만드는 일이 더할 나위
업이 성스러운 작업으로 여겨졌지. 종소리를 타고 하느님의 음성이 울려 퍼진다고 믿었기
때문이야." "전 이렇게 아름다운 종소리는 생전 처음 들어 봐요." 테오가 말했다. 상트세르
게이 삼위일체 수도원의 아름다움을 뒤로 하고, 테오를 자동차 안에 끌어다 앉히기란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마지못해 자동차에 몸을 실은 테오는 투덜거리며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
던 메시지를 꺼냈다. "할 수 없지. '두 개의 대륙'이라면 지도를 펼쳐 보아야만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테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주 정복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부분은
별 특징이 없으렷다. 어디, 다음 문장은... '이름도 세 차례나 바뀌었다' 이걸 어떻게 안담?
끝으로갈수록 골치로군. '합리적인 이성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으리라'니?" "사실 쉽지는 않
을 거야." 마르트 고모도 수등을 했다. "두 대륙 사이라면, 멕시코나 탕헤르가 있겠군." 알료
샤가 거들었다. "그리고 러시아와 미국 대륙 사이의 베링 해협도 해당되겠는걸." "그렇게 자
꾸 힌트를 주면 안 돼요." 마르트 고모가 알료샤에게 경고했다.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그
렇다면 이스탄불이겠군요!" "시간이 좀더 오래 걸릴 줄로 예상했었는데..." 마르트 고모는 분
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세 개의 이름은 뭔지 아니?" "고모는 어떻게 만족해하는 법
이 없으세요." 테오가 투정이라도 부리듯이 대꾸했다. "어떨 땐 너무 빨리 알아맞혔다고 불
만이시고, 어떨 땐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나무라시죠. 이름 세 개를 대보라, 이 말씀이
죠? 그거야 식은 죽 먹기죠. 콘스탄티노플, 비잔티움, 이스탄불. 어때요? 이제 숙제를 끝냈으
니 잠 좀 자도 되겠죠?" 이윽고 테오는 알료샤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일본
을 떠나온 이흐로 테오가 참 자주 울어요." 마르트 고모가 중얼거렸다. "실연을 당했다고 생
각하는 모양이에요." "정이 많은 아이라고 그렇죠." 알료샤가 대꾸했다. "이곳에서 흘린 마지
막 눈물이 테오의 영혼을 치유해 주었을 테니, 두고 보세요."
작은 비둘기
작병의 저녁 식사를 장만하느라 이리나는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훈제 황새
치, 보드카, 사탕무 수프, 오렌지향 아이스크림... 식탁 위에 촛불을 켜니, 식당은 여느 때보
다 훨씬 더 훈훈해 보였다. "건강을 위하여, 갈로우브치크!" 알료샤가 보드카 잔을 들어올리
며 외쳤다. 테오도 알료샤가 하는 대로 따라 한 다음 단숨에 잔을 비웠다. "어휴, 이건 무지
무지하게 센 술인데요." 테오는 숨이라도 넘어갈 듯 신음 소리를 냈다. "그래도 한두 잔 더
마셨으면 싶어요. 온몸이 화끈해지는데요." "오트힌 에트바스 보르츄?" 이리나가 속삭였다.
"다스 이스트 제어 구트!" "스트라트보우티에, 이리나. 이히 하베 게누그." 마르트 고모가 대
답했다. "계속해서 그렇게 지방방송만 하실 거예요?" 테오가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그렇
다면 저 나가서 엄마한테 전화나 해볼래요." 전화는 복도 끝에 놓여 있었다. 마르트 고모는
멀찌감치서 두 모자간의 일상적인 대화를 전해 들었다. 잘 지내고 있다. 감기는 걸리지 않았
다. 이스탄불에 가서 검사를 받을 예정이다. 목소리가 이상한 건 보드카 때문이다. 두 잔밖
에 안 마셨는데도 온몸이 화끈거릴 만큼 무지무지하게 센 술이다. 러시아는 굉장히 아름답
다. 파투도 잘 지내는지. 아니라구요? "내일은 파투에게 전화해 봐야겠어요." 테오는 전화를
끊고 식당으로들어서자마자, 자기의 결심한바를 말했다. "힌트를 구하는 척하면서 한 번 걸
어 볼래요." "무엇 때문에 그렇듯 구차스런 절차가 필요하지?" 마르트 고모가 뜻밖이라는
듯이 물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걸어 보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요." 테오가 나지막이 말
했다. "오늘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안 되겠어요." 침울한 표정으로 식당을 나선 테오는
비틀거리며 침실로 향했다. 이리나가 뒤따라와서 테오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알료샤
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테오의 손을 잡았다. "알료샤, 조금 전에 저를 어떻게 부르셨
지요? 갈로우 뭐라고 하였는데..." "갈로우브치크이라고 하였지." 알료샤가 부드러운 목소리
로 말했다. "러시아어로 '작은 비둘기'라는 뜻이란다." "아주 예쁜 말이에요." 기분이 좋아진
테오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비둘기는 하늘을 날 수가 있잖아요."
23 신에게 몸을 맡기는 이슬람
테오의 거짓말
다음날 아침, 테오는 주춤주춤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파투의 전화번호쯤은 눈을 감고도
얼마든지 누를 수 가 있었다. "파투? 응, 나. 아함, 응 하품을 해서 그래. 지금 깼거든. 눈뜨
자마자 너한테 전화하는 거야. 뭐? 지금 밤이라구? 미안해. 뭐라구?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확실해? 내가 3주 동안 한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단 말이야? 정말 오래 기다렸겠구나. 너, 설
마 그것 때문에 마음이 울적한 거야? 아무려면 그런 일쯤으로 상심해서야 되겠니? 널 잊어
버렸느냐구? 목에다 네가준 목걸이르 두 개씩이나 걸고 다니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 난 너
랑 언제나 함께 있다는 걸 잊지 마. 자, 그건 그렇고 힌트 좀 줘야겠어. '빙글빙글 도는 사람
들을 보면, 합리적인 이성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으리라.' 이게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어. 내
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언제가 좋을까? 아침 먹고? 알았어. 일본? 응, 좋았어. 누가 안내
하였느냐구? 여자였어. 뻔하지 뭐. 노인네였어. 물론 나도 네가 보고 싶어." "순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구." 등뒤에서 마르트 고모의 힐난 섞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도 어쩌는 수가 없
었어요." 수화기를 내려 놓으며 테오는 한숨을 지었다. "그 말 한 마디에 벌써 파투의 기분
이 좋아져 버렸는걸요." 진한 차와 잼으 잔뜩 바른 크루아상으로 기운을 차린 테오는, 어떻
게 이 곤란한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을는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메시지르 해독하였
노라고, 파투에게 다시 전화를 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파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테오
의 사랑하는 무녀 피티가 없었더라면 도저히 여행을 계속 할 수가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이번 여행의 의미는 파리로 다시 돌아가는 데 있다. 그리고 나서 파투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마랳야지. 그런데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스탄불에 가면 춤추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나요?" 테오가 물었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다고도 할 수있지." 마르트 고모가 대
답했다."내가 한 가지 힌트를 줄까? 그 사람들은 흰 옷을 입었어." "흰 옷을 입고 돈다..." 테
오는 생각에 잠겨 호나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길까? 무용수들은 너나 할
것 엇이 다들 빙빙 도는데..." "팽이처럼 저 혼자 돌지는 않아. 하앙 도는 거 ㄴ더더구나 아
니지." 마르트 고모가 덧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 혼자 힘으로는 알아맞히기 못할걸. 빙
글빙글 도는 데르비시들이라고 해. 자, 이젠 너의 그 사랑스런 애인한테 전화나 해보렴."
사랑에서 광신으로
예상했던 대로 공항에서의 작별은 눈물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리나와알료샤는 꼭 붙어선
채로 아주 오랫동안 손을 흔들었다. 마르트 고모는 착잡한 마음으로 짐가방을 점검하였으며,
테오는 파투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비행기 안에서 무심코 터키 항공의 기내 잡지르 뒤적이
던 테오는, 그 잡지에 실린 사진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스탄불에는 정말 모스크
천지로군요." 테오가 놀란 듯 눈이 휘둥그래지며 말했다. "아마 수적으로도 가장 우세하겠지
만, 질적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들일 거야." 마르트 고모가 장담하듯 말했다. "너도 하
여금 이슬람교의 참뜻ㅇㄹ 깨닫게 하는 데에는, 이곳이 가장 이상적인 도시일 거야." "가장
이상적인 곳이라면 당연히 메카가 아닐까요?" 테오가 반문하였다. "그야 물론 그렇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슬람교도다 아니면 절대로 그곳을 방문할 수가 없단다. 그러니 너나 내가
어떻게 메카에 갈 수 있겠니? 그건 절대로 불가능해." "신사인 척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
래도 안 돼. 메카 근처에 다다르면, 벌써 '정지, 제한구역. 이슬람교도만 통행 가능' 이라고
써붙인 표지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어.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그리고 괜한 시도를 한다
는 건 이험천만한 생각이야. 해마다 순례절기 동안 군중들에 깔려 압사하는 신자수만도 끔
찍할 정도로 많단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죠? 참으로 몹쓸 종교로군요." 테오가 울분
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렇듯 쉽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 인도에서는 1천 2뱁여만명의 갠지스
강 순례객들 가운데 수백 명이 그렇게 목숨을 잃는다더라, 대군중이 밀집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일 뿐, 종교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현사이야. 이슬람교와는 전혀 무관하
지." "그래도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요." 테오에게 미심쩍어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아마
모든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만난 이맘 같지는 않을 테죠." "힌두교도라고 해서 전부
마한트지 같지는 않은 것과 똑같은 이치겠지. 어떠한 종교든지 광신자들이 있게 마련이야.
또 어느 정도의 관용이 뒤따르지 않는 광신주의도 사실상은 불가능하지. 그게 바로 세상 사
는 이치란다." "다만 문제라며, 고모가 아는 분들은 모두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하다는
점일 테죠. 전 이제까지 가장 훌륭한 분들만 만나왔어요. 속 좁은 사람은 한번도 못 만났지
요."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런 사람들은 모든 종교를 다 이해
해 보겠다는 마음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을 테니까. 자기네들이 믿는 종교만이 옳다고 생
각하는 사람들이거든." "원리주의자들은 어째서 그렇게 관대하지 못하죠? 전 그게 몹시 불
만스러워요." "네겐 불만스러운지 몰라도, 한편으로는 아주놀리적인 귀결이지. 광신자들은
대부분 빈곤이라는 토양에서 생성된단다. 전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는 봄베이
나 카이로의 빈민가를 생각해 보렴. 자기 마을에서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이 머여 사는 곳이 바고 그런 곳이야. 지난번 가뭄으로 가축으 모두 잃고, 파종을 했
어도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그들이지. 일거리가없어져 식량을 구할 길이 없자,
할 수 없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도시란 환상에 불과하단다. 마을과 가축,
나무들과 논밭, 그 모든 걸 잃고 나서야 환상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지. 그 사람들에게 유일
하게 남은 것이라고는 종교밖에 없단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지 참으로 궁금해요." "종교를 통해 자기 주의에 그런 대로 일관성 있는 세계를
구축할 수가 있지. 사원이나모스킁서는 공동체를 구성할 수가 있지 않겠니? 또한 자신의 집
에 양탄자나 초상화. 경전 같은 신앙과 관련되는 소품들을 차려 놓을 수가 있지. 그리고 사
제들이 불쌍한 사람들을 돌봐 준다는 사실도 중요해. 대체로 원리주의자들은 빈민구제 사업
에 놀랄 만큼 열성적이거든." "그래요? 그 사람들이 정말로 그렇게 좋은 일도 한다는말씀이
세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래, 네 말대로그렇게 좋은 일도 한단다." 마르트 고모가
수긍했다. "다만 이들이 베푸는 선행은 거의 언제나 대가를 요구한다고 봐야 해. 불행한 사
람들이 경제적으로사제들에게 의존하다 보면 광신자 집단으로 변질되기 십상이지." "다시
말해서 종교 지도자들이 그 사람들을 이용한다는 말이로군요." 테오가 결론을 지어 말했다.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아. 종교 지도자들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대도시 주변에서의
빈곤이 퇴치될 수 없다는 사실이야. 2020년에는 이 지구상의 인구가 60억이 될 텐데. 이 가
운데 절반 가량이 대도시에 밀집할 거라는구나. 30억 명이 말이다. 상상이나 할 수 있겠니?"
"그렇게 많아요?" 테오도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야 아직 아
무도 모르지. 그러니까 빈민가의 헐벗은 사람들이 종교에 매달릴 수밖에, 종교만이 비참함으
로부터 이들을 위로해 줄 태세를 갖추었다고 믿으니까. 종교가 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이
감싸 주고, 희망도 선사한다는 말이야. 이해할 수 있겠니?" "영악한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
을 이용한다느 사실만큼은 이해하겠어요." 테오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니
까." 마르트 고모가 반박하였다. "새로운 사회정의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얼마든지 이
해할 수 있지 않니?" "손에 손에 폭탄을 들고서 말인가요?" 테오는 내낸 불만스러운 둣 퉁
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넌 마치 내가 그 사람들에게 동조하기라도 한다는 투로 말하는구나.
나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건 완전한 전쟁이나 다를 바 없어." "신의 사람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하에 저질러지는 전쟁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테오가 단호히 말했다. "적
어도 저는 사랑한다면 남을 죽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꼭 그럴까? 테오 너, 트리스탄
과 이졸데의 전설을 알고 있니? 그 두사람은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결국 둘 다 죽고 말았다
지." "결혼했으면 되었을 텐데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 이졸데는 트리스탄의 삼촌과 결
혼한 사이였거든." "그런 사이라면 가엾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군요. 숙모와 조카사이에는
사랑이 성립될 수 없어요. 고모가 제가 사랑한고 상상이나 해보셨어요? 애초부터 사랑하지
말았어야 해요." "물론 그렇게 노력했지. 사랑이란 때로 아주 치명적일 수도 있는 거야. 테
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엄마가 자기 자식을 너무나 끼고도는 바람에 아이가 그만 질식해서
죽는 수도 있잖니. 그리고 사랑이란 전쟁이 될 수도 있어." "아녜요, 제 생각은 달라요." 테
오가 또 한 차례 단호히 말했다. "사랑은 평화예요. 그렇지 않다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
흉내내기에 불과해요." "조금만 더 생각해 보렴. 만일 파투가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면 말이다. 넌 그 아이의 마음을 돌려 놓으려고 사랑을 강요하려 하진 않을까?" "그건 말도
안 돼요." 테오는 얼굴을 붉히면 얼른 세차게 부인했다. "우리 둘은 확고해요. 가끔씩 다투
기는 하지만, 절대로 쿠게 싸우는일 따윈 없어요." "다툰다..." 마르트 고모는 혼자서 중얼거
렸다. "그래도 조심해야 해. 사소한 말다툼이 전재의 시작이거든. 비잔틴 제국의 분열도 하
찮은 말다툼에서 비롯되었으니까. 종교간의 대립을 야기시키는 것이 바로 이 언쟁이지. 같은
편 끼리 진지하게 토론을 벌이다 보면 어느 날 의견이 갈라져서 서로 등을 돌리게 되고, 급
기야는 무장한 채 전쟁을 치르게 되는 거야. 신과 사랑의 이름으로 말이야." "억지 소리 같
아요. 그렇게 단순할 리가 있나요. 고모의 말은 도저히 못 믿겠어요." "너 좋을 대로 생각하
렴." 마르트 고모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스탄불의 역사를 알게 되면 아마
생각이 달라 질걸."
이슬람 신자 나스라
가방 챙기기, 짐꾼 부르기...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의 절차는 늘 이와 비슷했다. 카이로에
서처럼 이스탄불에서도 일부여자들이 베일을 썼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이들도 상당수나 되
었다. 사람들도 혼잡한 틈바구니에서 마르트 고모는 새로운 안내자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테오, 네가 날 좀 도와 줘야겠다. 피부색은 짙은 편이고, 눈은 아주 까만 여자야." "젊지는
않나요?" 테오가 사뭇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중년이라고 해야겠지. 아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아주 멋진 여자거든." "저 여자예요?" 테오가 웃는 얼굴의 뚱뚱한 아줌마를 가리
키며 물었다. "나스라는 꼬챙이처럼 말랐어." 마르트 고모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대강의 생김
새를 설명하였다. "저기 오는 구나. 자 보렴, 내 말이 맞자?" 고모의 말대로였다. 나스라는
숨이 막힐 정도로 예뻤다.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과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모슬린 베일,
그리고 그 귀에 에메랄드 귀걸이를 길게 늘어뜨린 나스라는 마치 그림 속에서 금방 빠져 나
온 것 같았다. 입이 헤벌어진채, 테오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안혹 나스라만 멍하니 바
라보았다. "헬로우!" 나스라는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테오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모한테
서 네 얘기 많이 들었어. 내게 환영 키스해 주지 않을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테오는
나스라의 요구를 실행에 옮겼다. 나스라에게서는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게다가 한쪽 콧방
울에는 자그마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인도 분이신가 봐요." 테오가 나스라의 목에 기댄 채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조그만 다이아몬드를 다신 걸 보니." "난 파키스탄인이야." 나
스라가 웃으면서 테오의 말을 정정하였다. "그러면 그 나라 종교는 뭔가요?" 무안해진 테오
가 얼른 질문을 던졌다. "나중에 말해 줄게. 이렇듯 복잡한 곳에 언제까지나 서 있을 순 없
잖아." 나스라가 대답하였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나스라에게는 어떤 위엄이 있었다. 짐
꾼들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해대는 나스라는, 그야말로 완전히 군대의 대대장 같아 보였다. 나
스라의 위엄에 기가 질린 택시 운전사는 두말 않고 시동을 걸었다. 하역 인부들, 자옫차, 스
레를 끄는 새끼나귀, 통행 지체, 클랙슨 소리... 이 모든 혼잡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언덕 위
이슬람 사원의 미나레트는 뿌연 먼지 속에서 그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자동차는 시
장과 이슬람 사원, 우아한 철제 장식이 달린 목조 가옥, 콘크리트 건물, 화려한 상점, 조잡한
구멍가게를 차례차례 지나쳤다. 그리고 시내 어느곳에서나 예의 그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마르트 고모와 테오는 나스라의 아파트에서 묵을 예정이었다. 8층에 위치한 나스라의 아파
트에서 경관 좋은 테라스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아스라는 소파와 월하향을 좋아하는 모양이
었다. 집에 도착하자 베일과 하이힐을 벗어 버리고,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지 또한 흔들어서
빼놓고는 양탄자 위에 우아하게 앉았다. 잠시 후, 검은 옷차린의 여인이 말없이 설탕을 넣은
진한 커피를 가져왔다. 나스라는 여자에게 아랍어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코에 다이아몬드를 단데다, 월하향까지 집안 구석구석에 꽂아 놓으시고도 인도인이
아니라니 참 이상해요!" 테오가 소리쳤다. "파키스탄과 인도는 1974년까지만 해도 한 나라였
다가 분열된 거란다." 마르트 고모가 설명해 주었다. "인도의 북서쪽이 파키스탕인데, 대부
분의 국민이 나스라처럼 이슬람교도이지." "그래서 조금 전에 파키스탄 이슬람어로 말하였
군요." 테오가 알겠다는 듯이 대꾸했다. "난 집에서는 우르두어를 쓴단다." 나스라가 말했다.
"이스탄불에서는 터키어를 쓰지만, 내 친구 마리암과는 아랍어로 이야기를 나누지. 마리암은
팔레스타인 출신이야. 그리고 네가 말한 이슬람어라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단다." "하지만
나스라, <<코란>>은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잖아." 마르트 고모가 반론을 제기 하였다. "신
은 신자들 각각의 마음속에 깃들여 신자들의 언어로 말씀하시지." 나스라가 단호하게 말했
다. "모세에게는 히브리어로 말씀하셨고, 예수와 마호메트에게는 아랍어로 이야기하셨지. 내
생각에는, 언어란 신의 사랑보다 덜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 이 과자 좀 먹어 볼래, 테오?
조심해. 속에 꿀이 잔뜩 들어 있으니까." "바클라바로군요!" 테오가 반가운 듯이 소리쳤다.
"꿀을 먹으니 꼭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에요." "그렇게 시간만 끌지 말고 계속해서 이야
기해 봐, 나스라." 마르트 고모가 재촉하였다.
코란
나스라는 다시 두 가리를 모아 앉았다. "그럼 그럴까? 나더러 <<코란>>에 대해 설명하
란 말이지?" "그러실 필요가 전혀 없을 텐데요." 테오가 놀라서 말했다. "예루살렘에 갔었ㅇ
르 때, 이슬람 이맘께서 벌써 다 이야기해 주셨는걸요. 알라, 마호메트, 마브라함... 전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어디 정말인가 확인해 보자꾸나." 나스라가 웃으며 응수하였다. "<<코란
>>이 무슨 뜻인지 기억나니?" 놀란 테오가 엉겁결에 입을 벌리자, 그만 꿀이 턱까지 흘러
내렸다. "우리 친구 쉴레이만이, 어쩌면 벌써 잊어버렸을 거라고 나한테 알려 주었는걸." 나
스라가 말을 이엇다. "그분과 나는 상당히 잘 아는 시이란다. 넌 까마득힐 몰랐겠지만 말야.
그분이 테오 너한테 분명히 <<코란>>은 '낭송'을 뜻한다고 말씀해 주셨을 거야. 그렇다먄
최소한 <<코란>>에 등장하는 이블리스가 누구인가는 알고 있을 테지!" 이버에도 테오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면 내가 대신 설명해 볼까? 조물주께서는 진흙으로 아담을 만
드신 후, 모든 천사들에게 자신의 창조물 앞에 몸을 굽혀 복종할 것을 명령하셨지. 그때 한
천사가 그 명령을 거역하졌는데, 그 천사가 바로 이블리스야. '전 절대로 복종하지 않겠습니
다. 그것은 인간보다 제가 더 우수하기 때문입니다. 조물주께서는 불로 저를 만드셨지만, 인
간은 기껏해야 진흙으로 만드신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이 말을 마치자마자, 조물주는 곧
하늘에서 이블리스를 추방해 버렸어. '당장 이곳을 떠나라. 최후의 심판일까지 저주를 면치
못하니라.'" "하지만 그 천사의 말이 옳잖아요." 테오가 의아해하였다. "그렇지 않아. 천사는
그 주인의 말씀을 거역하였던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블리스는 조물주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지. 그 사이에 인간들을 유혹에 빠뜨리려는 속셈이었어. 이에 알라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내렸지. '너는 유예 기간을 허락받은 자들 가운데 속하리라'고 하셨거든. 결국 허락하
신다는 이야기였지. 이렇게 해서 조물주는 실추한 천사에게 인간을 지옥으로 유혹할 수 있
는 권능을 부여하신 거나 다름없게 된 거야. 최초로 신의 명령ㅇ르 거역한 이블리스의 또
다른 이름은 샤이탄이란다." "아, 악마로군요." "그렇지만 이브리스는 어디까지나 신의 도의
를 얻었어.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에 말하는 악마[사탄]와는 약간 다르다고 해야겠지. 신
자들 각자가 이블리스와 예언자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해. <<코란>>에서는 마호메트의 말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이 되었을 때 불가마와 펄펄 끊는 송진을 면치 못하리라고 엄중
히 경고하고 있지." "늘 하는 소리인걸요." "아니, 그보다 더 강력한 말씀이지. <<코란>>에
는 지옥의 고통에 대하여 상당히 길게 언급되어 있어. 그런가 하면 천국의 끝없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오래도록 묘사하고 있지. 우유와 꿀의 강이 곳곳에 흐르는, 아름다운 정원인 천국
에서는 모든 소원이 충족될 수 있다고 실려 있어. 초록빛 새틴 옷차림의 소년들이 감미로
운 과즙을 대접하고, 천녀들은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황홀한 춤을 추는..." "천녀라니오?"
"천상의 미녀들을 말한단다. 눈 주위를 미묵으로 단장한 젊고 아리따운 처녀들이지." 마르트
고모가 나스라를 대신하여 대답했다. "교도들의 동반자들로, 영원히 처녀로 남아 있는 여인
들이란다." "이제 보니 알라의 천국은 정말 신나는 곳인가 봐요." 테오가 주석을 달았다. "아
무 일도 생기지 않는 그리스도교도들의 천국보다 훨씬 더 근사하게 느껴지는데요." "이런
건 모두 비유란다." 나스라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들에게 꿈을 꾸게 만드는 거지. 지옥
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이르기 위한 방법은 아주 간단해 이스람의 다섯 기둥만 충실히
준수하면 되는 거야. 첫째,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마호메트는 그의 예언자이다. 이 신
앙 고백을 '샤하다'라고 하지. 둘째, 열심히 기도한다. 셋째, 매년 부자들에게 의무적으로 부
과되는 십일조를 납부한다." "십일조라고요?" 테오가 놀라서 되물었다. "역사 시간에 배운
건데, 프랑스 혁명 전의 구체제하에서는 성직자들이 농부들의 수확량에서 미리 십일조를 제
하였다고 하던데요." "하지만 이슬람교에는 성직자가 따로 없단다. 신자들이 직접 나서서,
그 자신이 섬기는 신에게 이를 바치는 거야." 마르트 고모가 다시 끼어들었다. "말하자면 가
난한 사람들이 나누어 가질 수있도록 희비를 납부하는 셈이지. 자발적으로 헌납하는 겨우도
있는 건 같던데. 안 그래, 나스라?" "그렇게 하도록 권유하지. 넷째, 라마단(이슬람력으로는
9월) 동안에는 단식해야 한다. 동이 틀 무렵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철저히 금식해야 하며,
이때는 빵부스러기 항 입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말아야 해. 침을 삼켜서도 안 된다고 할
정도야." "말도 안 돼요!" 테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항의를 하였다. "그렇다면 굉장히 힘들
겠네요." "아닌게아니라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야." 나스라도 선선히 수긍했다.
"그렇지만 저녁에는 가족끼리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단다. 자, 이제 그 다섯 번째
실천 의무만이 남았구나. 신체적. 경제적으로 순례의 능력이 있는 모든 이슬람교도들은, 반
드시 메카를 순례하여야 해. 테오 너도 들었다시피 이 가르침은 아주 단순하지. 그러나 여기
에다가 몇몇 가지 상세한 가르침이 더하여지기도 해. 모세가 유대인에게 전한 율법만큼이나
그 가짓수가 많지." "이를테면 유대교 가르침과 이슬람교 가르침은 일치하는 경우가 자주
있단다." 마르트 고모가 지적하였다. "돼지고기르 금한다거나, 정해진 의례에 따라 피를 흘
리게 짐승이 아니라면 못 먹는다거나,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점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야."
"게다가 여자아이들의 음핵제거술이 더해지기도 하는데, 이건 완전히 잘못된 관행이지." 나
스라가 분개하며 말했다. "아프리카 풍습일 뿐인데. 그걸 이슬람 전통주의자들이 이슬람교
원칙으로 만들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예언자 마호메트는 이 할례를 거부하였다구!"
"그렇게 까지 흥분할 건 없잖아, 아스라." 마르트고모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포도주에
관해서라면 마호메트만이 유일하게 금지 시켰을걸. 확실해." "차츰차츰 금지시켜 나간 거
지." 나스라가 마르트 고모의 말에 부연설명을 달았다. "처음에는 마호메트도 그 그윽한 맛
을 알라의 자비에 비교할 정도로 찬미했었어. 그러다가 초기 신도들이 술에 취해 무절제한
행동을 거듭하게 되자, 하는 수 없이 규율대장이 되는 수밖에 없었지. 고르바초프가 '80년대
에 소련을 장악했을 때와 다를 바 없었던 거야. 그 사람이 처음으로 내린 결정이 알코올 판
매를 금하는 조치였으니까. 또한 마호메트는 돈놀이에 대해서는 훨씬 더 업격했었지. 허무하
고 위험한 우상이라 하여 가차없이 벌을 내렸어." "포도주만 예외로 한다면, 놀랍게도 <<코
란>>과 <<성서>>는 금지하는 음식물에 있어서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
을 테지?" 마르트 고모는 계속해서 그 점을 강조하였다. "물론 부인하지는 않아. 예언자 마
호메트는 자신이 나타나기 이전에도, 이미 알라께서 인간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메시지를
전하셨노라고 거듭 말씀하셨지. 자신보다 앞서서 세상에 온 예언자들의 말씀을 존중하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기 위하여, 알라께서 자신을 보냈다고 하셨으니까. 마호메트는 유대인
과 그리스도교들에게도 사절을 보냈지만, 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어. <<코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어." "쉴레이만 이맘께서도 그렇게 말했어요. 이제는 예언자가 더 이상 오지 않
을 건가요?" 테오가 물었다. "<<코란>>대로라면 아무도 오지 않을 테지." 나스라가 대답하
였다. "그렇지만 예언자의 언행인 '순나'에 대해서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주석, 즉<<하디스
>>가 존재하거든. 어떤 주석에 따르면, 올바른 안내자라는 의미를 지닌 '마디'가 올 거라고
도 하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 같은 역할을 하실 분이라는 거야. 대체로 이슬람교
도인들은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정도로 이 사람을 기다리지는 않지. 또한 그리시도
교도들처럼 인격화된 신이라고 믿지도 않아. 이슬람교도들은 최후의 심판만을 기다린다고
볼 수 있어. 그날이 오면 진실한 신자들은 상을 받고, 불충한 사람드은 지옥으로 보내지리라
고 믿는 거야."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우리 불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 해볼까?"
마르트 고모가 회제를 돌렸다. "<<코란>>에 의하면, 비신도들과의 투쟁은 의무적인 것이라
고 되어 있잖아." "성스러운 전쟁을 뜻하는 지하드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는 말인 거야?"
나스라가 되물었다. "우선 그 말이 문자 그대로 '신의 길로 가기 위한 투쟁', 그리고 '분명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거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채
찍질을 의미하지요." 테오가 대답하였다. "이래봬도 제가 들은 이야기를 전부 다잊어버린 건
아니라구요." "테오 너, 아주 제법이로구나. 네 고모보다 훨씬 잘 이해하는 것 같은데. 더구
나 불충한 사람이라고 해서 보두가 비이슬람교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단다." "그건 나도 알
아." 마르트 고모가 말을 이었다. "아마 같은 경정을 가진 다른 종교, 즉 유대교도들과 그리
스도교도들은 일정한 세금만 낸다면 이슬람교도에서도 용인된다는 점을 말하여는 모양이로
군. 1492년 가톨린 군왕드의 추방령 때문에 유럽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을 기꺼이 받아들인
터키 제국의 술레이만 술타을 예로 들 작정일 테지. 나도 그 정도쯤은 알고 있어. 그렇지만
정령숭배자나 불교도. 힌두교도들에 대해서는 죽음 아니면 개종을 택하라고 강요하였잖아!"
"유감스럽지만 사실이야. 사람에 따라서는 그 가르침을 이슬람의 여섯 번째 기둥으로 꼽기
도 하지. 지하드는 천국의 입구라고 할 수 있어. 나는 위대한 철학자 알 가잘리의 말을 인용
하고 싶어. '가정을 떠나지 않고도 지하드의 전사가 될 수 있다.'" "너무 단순한 설명 같아
유감스럽군. 나스라, 그 얘긴 그쯤 해두고, 여자에 대한<<코란>>의 가르침이나 테오에게
들려 주면 어떨까? 그것 때문에 여기저기서 논란이 분분하니 말이야." "그러지. 테오, 원칙
적으로 말하면 난 네 앞에서 베일을 벗으면 안 된단다." 나스라가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너는 내 아버지도 오빠도 동생도 친척도 아닌데다가, 또 아주 어린아이도 아니기 때문이야.
잘 생각해 봐. 이제부터 '무지의 시대', 다시 말해서 신의 계시가 내려지기 이전 시대를 상상
해 봐야 해. 마호메트는 다른 누구보다도 우선 과격하고 사나운 남자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였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부인과 이혼을 해서는 안 되며, 또한 부득이해서 이혼을 할 경
우 물질적으로 여자에게 보상해 주어야 하며, 부인에게는 선하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어,
간혹 부인을 때리게 되더라도 너무 심하게 구타해서는 안 된다고도 하였지. 이이야기로 미
루어 보면, 마호메트가 메시지르 전할 무렵 아라비아 지역에서의 여자들의 생활환경ㅇ르 짐
작할 수 있겠지. 베두인족은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산 채로 매장해 버리기도 하였다니..." "잘
알았어." 마르트 고모가 나스라의 말을 끊었다. "그렇다면 마호메트가 여자들에게도 설교를
했겠네." "아, 그래." 나스라가 짧게 긍정의 뜻을 표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코란
>>이 상당히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여자들은 덕성스럽고 착한 아내여야 하며, 또한 현
명한 어머니로서 단정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베일은 가슴까지 내려쓰고, 가족끼리 있을
때에는 베일을 벗어도 된다고 하였지. 이런 가르침은 전혀 터무니없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안 그래? 파리의 패션쇼에서 가슴을 온통 드러내고 다니는 여자들이 더 보기 좋니?" "여인
드의 나체는 아름답지요." 테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테오,
너희 엄마는 가슴을 다 드러내고서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시니?" 나스라는 직설적으로 테오
에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절대로 그러실 리가 없지. 하긴 이 두 입장이 모두 과장되어 있다
고 해야겠지." "이슬람측 입장이 어째서 그렇듯 과장되었는가를 테오에게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어." 마르트 고모가 나스라에게 주심스럽게 청하였다.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코란>>
을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결정해 줄 교황도 사제도 없단다. 신도들의 공동체
인 움마에는 절대적인 권한을 지닌 우두머리가 존재사지 않거든. 그러다 보니 몇 세기를 전
해 내려오는 동안 학식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저마다 나름대로의 주석을 덧붙였지. 여자들은
가슴만 가려야 하는 게 아니라, 머리카락과 얼굴까지 가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나온
거야. 프랑스어판 <<코란>> 중에도 간혹 이런 주석이 붙어 있는 판본이 있단다. 그렇지만
원전에는 이러한 언급이 전혀 없어." "그렇다면 왜 제 앞에서 베일을 벗으셨죠?" 테오가 놀
랍다는 투로 물었다. "나는 그 상황에 따라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예를 들어
인도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는 베일을 쓰지 않거든.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야. 하니만
이런 융통성이 용납되지 않는 나라에 가게 될 경우에는 머리에 베일을 써야겠지. 물론 난
원리주의자는 아니야. 테오." "그러시리라고 짐작했어요." 테오가 대답하였다. "나스라의 남
편은 부인을 여러 명 두셨나요?" "아니." 나스라가 말했다. "여러 명의 ㅂ인으 ㄹ거느리는
제도를 일부다처제라 하고, 한명의 부인만 두는 제도를 일부일처제라 한다는 건 테오 너도
잘 알고 있을 테지. 마호메트가 살아 있을 당시 베두인족은 일부다처제의 관습에 젖어 있었
어. 마호메트 자신도 부인이 열두 명이나 되었지. 그래도 첫부잉니 죽고 난 후에 그렇게 되
었다는 점은 분명해 해두겠어. 다시 말해서 예언자 마호메트는 오랜 기간 일부일처제를 따
랐다는 말이야. 그런데 왜 그 이후로는 그의 태도가 달라졌을까? 아마도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리는 것이 세력 있는 우두머리의 특권이었기 때문일 거야. 마호메트는 당시로서는 부기
드물게 일부다처제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규칙을 제정했어. 부인의 수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네명을 넘어서는 안 되며, 여러 부인을 부양할 만한 능력이 있는 신자에게만 이를 허영하였
지. <<코란>>에 따르면, 그 남편은 정지적으로 모든 부인들과 공평하게 잠자리를 같이 해
야만 해. 돌아가면서 하룻밤씩 말이야." "만일 아빠가 그런 식으로 사신다면 엄마가 어떤 표
정을 지으실지 눈에 선해요!" 테오가 기가 막히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시겠지." 나스라가 말했다. "그리고 그건 지당한 처사이시지. 물론 요즈음에도 일부다처
제를 옹호하는 이슬람 학자들이 있다는 건 나도 잘 알아. 일부다처제가 프랑스의 사회보장
제도 정신에 할결 잘 들어맞는다. 여자들에게는 확실한 사회보자이 도니다. 만일 일부다처제
가 폐지도니다면, 여자들은 고독과 빈곤 속에서 살게 될 터라는 것이 이들의 논리란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여자들은 금전적으로 독립해선 안 되므로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주
장이 깔려 있다고 봐야겠지. 이런 논리는 적어도 나한테는 적용될 수 없어. 난 일을 하거든.
난 내가 벌어서 생활해. 게다가 내 남편은 이슬람교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도야." "이제 보
니 완전히 이단이로군!" 마르트 고모가 소리쳤다. "나스라가 발 그 불충한 사람이었네. <<
코란>>대로라면 이슬람교도 남자가 유대인 여자나 그리스도교도 여자와는 결혼 할 수 있어
도, 그 반대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을 텐데." "그건 <<코란>> 해설가들의 사고방식이 아직
진화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스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자들에 관한 가르침은, 마
호메트 이래로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그래도 나라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시대에 맞게 이
가르침을 조정하기도 했지. 어떤 나라에서는 딸들에게 교육을 시킬 수 없도록 되어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여자아이들에게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식이야. 정부에
따라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제정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단다. 알라는 유일하지만, 그
신도들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있어." "이슬람교도들은 그래요?" 테오가 놀라서 물었다.
이슬람교도의 여러 종파
이슬람교도 여느 종파와 다를 바 없었다. 예언자 마호케트가 죽은 후... "더 말할 필요도
없으세요." 테오가 나스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제가 계속해 볼게요. 그이 후계자들은 권력
을 장악히가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테오의 말대로였다. 누가 이슬람 공동체를 지휘할 것
인가? 누가 신도들의 지휘자인 칼리프가 될 것인가? 632년 6월 8일 마호메트가 숨을 거둔
그 밤, 그의 부인 아이샤가 아직도 통곡을 그치지 않은 그 자리에서 메디나인들과 마호메트
의 교우들, 그리고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사촌으로 그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인 알리를 중심
으로 세 분파가 맞섰다. 가장 먼저 알리파, 즉 시아파가 분리되어 나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알리가 신도들의 공동체를 이끌기에 역부족이라는 이유로 또 다른 파가 생겨났으며, 이
들은 스스로를 '하와리스'라고 칭하였다. 얼마 후 이들 하와리즈 가운데 한 명이 알리를 독
검으로 찔러 살해하였으며, 경쟁관계에 있는 분파들 사이의 전투과정에서 알리의 아들 후사
인마저도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이 예언자 마호메트의 손자를 살해하는 비극이
최초로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슬람교도들은 도조히 하해할 수 없는 두 종파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는 예언자의 전통을 따르며 공동체의 만장일치를 통해 칼리프를 추대하
는 순나와 살해당한 합법적인 후계자 알리를 지지하는 시아파이다. 그 이후 순나를 지지하
는 이슬람교도들은 '수나파', 그리고 알리으 지배를 지지하는 이슬람교도들은 '시아파'가 되
었다. 수니파 칼리프들은 학자들에게 신도들간의 평화와 연대감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슬람
규율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오늘날 이슬람 세계의 중심 세력은 이 수니즘이다. 그러나 그
렇다고 해서 피로 인해 초래된 분열이 무마된 것은 아니다. 수니파에게 있어서 후사인은 전
장에서 목숨을 잃은 전투지휘자에 불과한 반면,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은 예언자 마호메트의
합법적 후계자인 후사인을 순교성인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은 매해
후사인의 참혹한 순교를 기리기 우해 장엄한 행진을 실시함으로써 지나가 ㄴ상처를 상기시
킨다. 고통 속에서 죽어간 후상인처럼 피를 흘리기 위해, 이들은 스스로의 몸을 채찍질하기
도 하고 살점을 도려내기도 한다. "그런 또 다른 이야기로군요." 테오가 투덜거렸다. "제발
그런 일들이 지금은 일어나지 안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테오의 바
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가난과 궁핍 때문에 신앙심이 비정상적으로 고취된 나라에서는,
신앙을 통해 고통을 밖으로 표출시킴으로써 일시적으로 가난마저 물러서게 하는 경우도 있
었다. 시아파에 얽힌 이야기는 후사인에 대한 열정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초기에는 이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이맘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이맘들의 임종 같은 위기의 순간이 올
때마다. 시아파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분파로부터 여러 가지 다른 분파가 분리되어 나오는
것이 상례였다. 어김없이 후계자를 정하는 첨예한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었다. 예언자 마호
메트의 진정한 후손은 누구인가? 제7대 이맘이 죽었을 때. 일부는 다른 사람들가 달리 이스
마일이라는 이맘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스마일이 그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 불상사가 발생
하자, 후계자의 문제는 더욱더 복잡해졌다.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죽은 이스마
일의 지지자들은 이스마일이 죽지 않았으며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어처구
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심정어었나 보군요." 테오가 주석을 달았다.
아닌게아니라 이스마일ㅇ르 지지하는 '이스마일리야'는, 그의 재림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
던 가운데 하산 이맘은, 1090년 마라단 기간중에 지금의 이란에 해당되는 지역에서 그의 재
림을 대대적으로 선포하였다. 이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었다. 하산 이맘은 알라무트
요새의 대광장에 메카를 향해등을 돌리는 방향으로 단상을 쌓도록 한 다음, 귀신과 사람 그
리고 천사 들로 이루어진 군중을 향해 '부흥자'가 존재함을 알렸으며, 바로 자신이 그 부흥
자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단식을 중단하도록 지시한 후 잔치를 벌였다. 이로써
그는 두 차례나 이슬람의 지침을 거역한 셈이었다. 메카와 반대 방햐에 단상을 쌓도록 한
점과 라마단을 중단시킨 점이 그의 두 가지 과오였다. 하지만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하산
이맘은 명실공히 지도자로 자리잡았으며, 유일한 교리 전수자가 되었다. "정말로 권력의 유
혹을 견뎌내는 종교는 없나 봐요." 잠자코 듣고 있던 테오가 개탄하듯 말했다. "유일한 권력
자가 되는 게 그렇게도 좋은가 보죠." 이렇게 해서 이스마일리야는 주류에서 완전히 분리되
어 나왔다. 서구에서는 이들을 '아사신'이라 일컫는데. 이는 극도의 혼란기에 알라무트 부활
파로부터 분리된 한 집단이 테러 행위를 신앙 행위로 간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때는 이
'아사신파'가 대마초 기운으로 거친 행동을 하며, 이들의 명칭조차도 이 기운에서 비롯되엇
다고 믿엇으나, 아사신이라는 단어가 분파를 뜻하는 아럽어의 '하사시'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도 있다. "혹시 그들이 요즈음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테러리스트들에게 영감을 준 건 아닐
까요?" 테오가 물었다. 이스마일리야의 집단 폭력시위는, 아마도 부활이 임박하였다는 전제
하에서는 그 해명이 가능할 것이다. 즉 전혀 새로운 유형의 이슬람교도들인 이들은, 부호알
이 닥쳐왔으므로 서둘러 행동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들이 따르는 교리 중 공적인 부분은 일곱 시대로 나뉘어진 순환적인 역사에 기초하고 있었
다. 이 일곱 시대는 각각 하나의 예언자, 즉 나티크에 의해 예고되며, '토대가 되는 인물'에
이어 감추어진 진실을 밝혀 주는 이맘에 의해 형상화된다. 한편 공적인 부분을 제외한 나머
지 부분은 비의적이다. <<코란>>의 숨은 뜻은 최후의 순간에나 알려질 깃이지만, 선각자들
은 생존시에 그 의미를 해독할 수도 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이스마일리야는 19세기 인
도의 봄베이로 피신하였으며, 이때 이들의 지도자는 아가 칸이었다. "그런데 마르트 고모.
고모는 인도에 갔었을 때 이스마일리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무 말씀도 안해 주
셨잖아요." 테오가 지적하였다. 마르트 고모는 이스마일리야가 아무리 독자적이라고 해도 이
슬람교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며. 게다가 그들만이 제 나름대로의 사실에는 변함이 없
으며, 게다가 그들만이 제 나름대로의 예언자를 추대한 건 아니라느 sakf로 테오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시아파도 제11대 이맘이 후손 없이 운명하자. 후계자 문제를 해결할 방
안이 없어 그와 같은 궁여지책을 고안해 냈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제12대 이맘이 되어야
할 것인가? "시크교도처럼 경전을 택하면 안 되나요?" 테오가 기발한 제안을 하였다. 그건
안 된다고 나스라가 대답하였다. 시아파는 제12대 이맘이 나자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단
지 인간들의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추정하였기 때문이다. 어
쩌면 때로는 익명으로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기도 할 터인데,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르는 노룻이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세상의 표면으로 나타날 터였다. "두번째
이유도 있겠지요." 테오가 넘겨짚었다. 첫 번째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는 이유가 있
었다. 드루즈파로 말할 것 같으면, 앗 다리지 이맘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맘은 아주
기묘한 인물로서,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숙소로부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드루즈파에게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경전인 <<지혜의 책>>도 있었다. 이 책은 순수한 형제들의 서한집이라
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관습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드러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시아파에게는 이스마일리야의 성급한 행동주의 적 기질도, 또한 드루즈파의
비교적인 성향도 없었다. "이스람의 역사에는 이렇듯 놀랄 만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
어야 한단다, 테오." 나스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시아파가 오래도록 제12대 이맘을 기
다리는 동안 유일신과 마호메트의 계시,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사촌인 알리 후손들의 합법성
에 근거한 신학이 정립되었으며, 제12대 이맘이야 말로 이러한 신학체계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인물일 것이라고 이들은 믿었지. '12'라는 숫자 때문에 때때로 이들을 '12이맘파[이스나
아샤리야]'라고도 부른단다. 이들이 신앙심은 수니파의 신앙심보다 훨씬 급진적이었으며, 이
들의 희망 또한 훨씬 터무니없는 것이었어.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시아파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지극지존의 종교 지도자이며 순교자 후사인의 후손인 성스러운 이맘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 그러므로 이같은 자질을 갖춘 이맘에 대한 복종은 성스러운
의무로 간주되었단다." "그 대목은 영 마음에 걸리는데요. 맹목적인 복종 뒤엔 언제나 찜찜
한 일이 생기게 마련이더라구요." "표현을 좀 점잖이 하는 게 좋겠구나, 테오." 나스라가 테
오를 가볍게 나무랐다. "이란에서는 제12대 이 에 대한 오랜 기다림이 혁명적인 평등에 대
한 소망을 야기시켰고, 마침내 1979년 아야톨라[물라중에서 종교심과 학식이 뛰어난 사람에
게 주는 존칭] 호메이니가 비행기를 타고 이란으로 돌아오자 이슬람 혁명으로 종결지어 졌
어. 호메이니가 공항에 내리자. 테헤란 군주들은 시아파 신학의 규율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
맘이 오셨다'고 오쳤댔지." "다 좋아요. 하지만 이건 순전히 메시아 신앙과 그 아류에 불과
해요." 테오가 불만을 토로하였다. "전 마호메트가 마지막 예언자라고 알고 있었어요." "바로
그러한 태도가 수니파으 입장이지. 수니파 이슬람교도는 한편으로는 <<코란>> 전체를 준
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디스>>의 전통도 따르는 사람들이란다. <<코란>>에는 궁
극적으로 이슬람의 성법인 '샤리아'가 담겨 있지. 그렇지만 <<코란>>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워낙 광범위한 작업이거든. 게다가 이슬람교도에는 <<코란>>의 실천 지침을 내려줄
절대적 존재로서의 교황이 없거든." "그렇게 말씀하시니 교황이 조금은 좋게 여겨지는데요."
테오가 문득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톨릭 교회에서도 여자들은 천대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제회한다면 말이에요." 나스라는 20세기의 이슬람 세계에는 앞서 말한
분열과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두 개의 주류가 형성되어 있다고 설명 하였다. 첫 번째
유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코란>>을 문자 그대로 실행에 옮기며, 아주 사소한 일에서
도 샤리아를 철저히 준수하고자 하는 유형이다. 이러한 종교적 방침에 동조하는 무리들은,
말하자면 전체로서의 <<코란>>에서 출발하여 <<코란>>으로 인한 일종의 전체주의자로
변질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을 개혁파라고 불리는 두 번째 주류는, 마호메트 자
신이 시대와 사회엥 맞게 말씀으 조율하였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코란>>을 현대 사회에
맞도록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다. "그 사람들은 목소리가 작은가 봐요. 그런 이야긴 거의 못
들어 봤거든요." 테오가 애석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폭탄을 장치하느 게 아
니라, 조용히 책을 집필하인까 그럴 수밖에. 내가 보기에는 그들의 말을 경청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들은 분열된 이슬람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거든. 그런 이
유 때문에 첫 번째 유형을 따르는 교도주의자들과는 도저히 화합하기 힘든 난맥상을 보이고
있어. 교조주의자들은 <<코란>>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위험천만이라고 생각하기 때
문이지. 그리고 테오, 마지막으로 이스람의 한 부류가 더 있음을 말해 주고 싶어. <<코란
>>만큼이나 오래 되었으면서도, 전혀 분열과정을 겪지 않으면서 이때까지 이슬람의 역사를
같이해 온 부류야." "두 귀를 바짝 세우고 들어야 해, 테오." 마르트 고모가 테오에게 주의
를 주었다. "나스라가 이제부터 말하려는 내용은 굉장히 중요하단다." 이제부터 언급하고자
하는 이슬람교도들은, 오로지 알라에 대한 사랑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
든 종교는 신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 부류의 이슬람은 관용의 이슬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은 무력이나 강요된 설교로 비신도들을 개종시키려 하지 않으며, 이맘을 기
다리지도 않고, 부활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는다. 다만 어떻게 하면 직접적인 방식으로 신의
사랑과 만날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습득 할 뿐이다. "직접적으로라고 하셨어요?" 테오가 되
물었다. "니자무딘의 수피교도들처럼 신비주의자들인가 보군요." 테오의 말대로 나스라가 소
개하는 이슬람의 마지막 부류는 바로 그 수피주의였다. 이 수피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각각
의 신도로 하여금 자유롭게 자기 나름의 방식을 통해 신의 사랑을 표현하도록 이끄는 것이
었으므로 같은 수피주의라 할지라도 그 형태가 매워 다양하였다. 인도에서 테오는 카발라를
들었지만, 터키의 수피주의는 춤과 괴성지르기라는 두 가지의 이색적인 방법을 통해 신과
교감한다. 전세계적으로 수피주의는 신에 대한 사랑과 관용. 그리고 '지크르' 즉 알라의 이름
부르기, 이 세 가지만을 공통적으로 추구한다. "그런데 나스라는 그 많은 이슬람 중에서 어
느 이시르람에 속하세요?" 테오가 불쑥 물었다. "제일 마지막 부류." 나스라가 대답하였다.
"난 수피자의야." "수피주의일 뿐만 아니라 춤도 춘단다." 마르트 고모가 덧붙였다. "빙글빙
들 도는 춤을 추신단 말이에요?" 테오는 무척 놀라운 표정이었다. "어디, 정말인가 보요 주
세요." "우리 춤은 서커스 공연과는 달라." 나스라가 엄격한 어조로 단호히 말했다. "빙글빙
글 도는 행위 자체가 신을 사랑하는 행위이거든. 테오 넌 아직도 이슬람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게 아주 많아. 이슬람교가 얼마나 위대한 종교인지 알고 있니? 순수한 사랑, 평등, 정
의..."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좀더 평등하다는 점은 예외로 하여야 겠지요." 기분이 상한 테
오가 약간 빈정거리듯이 꼬집었다. "예전 같았으면 여자들은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는 데
르비시가 될 자격이 없었지. 하지만 난 버젓이 그 자격을 얻었잖니. 이슬람도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어."
메카로의 순례 여행
"그럼 메카까지 순례 여행도 다녀오셨어요?" 테오가 물었다. "아니, 아직 다녀오지 못했
어." 나스라가 무안한 듯 짧게 대답하였다. 나스라에게 메카로의 순례 여행은 약간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었다. 원래 메카의 순례는, 일생에 한 번만 의무적으로 다녀오면 되도록 정해
져 있었다. 마호메트조차도 두 번밖에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순례 문제에 대해 마호메트
는 평소처럼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다. 누군가가 마호메트에게 '매해 순례를 하여야 합
니까?'라고 묻자,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세 번씩이나 계속해서 같은 질
문을 던지자, 마침내 마호메트는 '내가 만일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것이 의무조항이 되어 벌
릴 텐데, 그대는 그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라고 응수하였다. 그런 연유
에서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만 메카 순례가 의무 조항으로 부과된 것이다. 나스
라는 돈은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인 남편과 동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보
호자의 동행없이 여자 혼자서 순례 여행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놓고, 경전주석가들의 논
의가 한창인 마당에 혼자 가겠다고 나설 수 도 없는 형편이었다. 나스라는 메카 지역에 들
어갈 수 있는 허가를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지역의 성지는 군주들에 의해 철저히 감시되
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스라의 아버지는 '하즈', 즉 메카 순례를 수행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순례의 대역정을 모두 마쳤으며, 순례자 여행을 위해 기회만 엿보고 있는 딸에게도
그 이야기를 소상히 들려 준 바 있었다. "듣고 보니, 순례 절차가 굉장히 까다로운 모양이에
요." 테오가 말했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모든 게 질서정연히 조직되어 있는 건 사실이야.
메카 순례의 네 가지 지침을 독실하게 이행하기만 하면 디는 거지." "거기에도 또 지침이
있다고요?" "이슬람은 주춧돌을 쌓듯이 단계적으로 세워져 있는 종교란다." 나스라가 말했
다. "우리 아버지께서 들려 주신 이야기를 해줄게. 먼저, 순례 첫날의 지침은 '이람'. 즉 신성
화라고 한단다. 이것이 바로 순례의 진정한 출발점이지. 순례자가 사우디아라비아 영토에 일
단 들어서게 되면, 신도들의 지리적 출신지에 따라 마호메트가 정해 놓은 장소에서 본인이
순례에 참여할 의삭 있음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거야. 그렇게 하고 나면 순례자간의 평등을
의미하는 표시로 누구나 자기가입고 온 옷을 벗고, 대신 이음매가 없는 흰 천 두 개씩을 공
급받게 돼. 하나는 허리 부근에 동여매고, 나머지 하나는 어깨에 걸치는 거지. 누구나 다 똑
같은 차림을 하게 되는 거야. 그 다음에는 기도를 한후, 손톱 발톱을 깎고 몸에 향수를 뿌린
단다. 그러나 이날 이후 순례가 끝날 때까지는 이런 행동이 금지된단다." "그런데 아버님께
서는 이집트 쪽에서 도착하셨나요, 아니면 이라크 쪽에서 메카로 들어가셨나요?" "성급하
긴." 나스라가 테오에게 바볍게 핀잔을 주었다. "예전에는 기나긴 대상들의 행렬이 세상 끝
으로부터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이어졌지. 중국 간수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들이 메카까지
오는 데만도 꼬박 3년이 걸렸었대. 요즈음에는 연례적인 순례 기간으로 정해진 달에 메카를
찾는 신자의 수가 2백만 명에 이른다고들 하더구나. 우리 아버지는 비행기편으로 도착하셨
어. 지다 공항에서 옷을 바꿔 입으셨대. 메카에 도착해 보니, 사막의 모래산들 사이상이로
고층 빌딩과 첨탑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어서 몹시 노라셨다더구나. 오래된 도시 같은 흔적
은 아무곳에도 남아 있지 않더래. 그렇지만 호텔과 여관은 말할 것도 없고, 벌판에까지 수첮
개의 하얀 텐트가 마련되어 있었대.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지, 이곳을 관리하는 서
우스러운 임무를 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점점 더 늘어나는 군중들로 인한 각종 사고의
대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지. 사실 이따금씩 사고가 나거든. 어쨌든 우리 아버지는 아
무 탈 없이 잘 다녀오셨지만..." "운이 좋으셨나 보군." 마르트 고모가 거들었다. "혹시 나스
라 혼자서 가게 된다면 아주 조심해야 할걸." "그건 가기로 결정한 다음에나 생각해 볼 문
제야." 나스라가 말했다. "난 이맘들의 지식에 복종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어서 탈이야.
우리 아버지께서는 대만족이셨지만, 아버지야 남자니까 아무 어려운 점이 없으셨겠지. 순례
의 두번째 날은 무척 인상 적이셨대. 그날은 아랍어로 '인식'이라는 듯을 가진 아라파트에
가는 날이었다는구나.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한 후, 다시 만난 곳이 바로
그곳이래. 아담은 인도 땅에 떨어졌고, 이브는 예멘에 떨어졌다가 서로 다시 만났다는 말이
지. 이 두사람의 재회를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들은 조물주를 향하여 선 다음, 그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고 장래에 구원과 도움을 줄 것을 청해야 한 대. 이것이 바로 메카 순례의 두
번째 지침이래. 전 세계의 하즈가 인류 최초의 조상들이 재회 한 곳에서 모두 모인다는 사
실이 굉장히 인상적이셨다는구나. 아버지 말씀으로는, 아라파트는 전세계 언어ㅢ 집합장 같
아서 일종의 바벨탑 같더라고 하시더구나. 셋째 날 아침에는 그곳에서 무즈달리파로 가서
자갈돌 70개를 주워 오셨대." "웬 조약돌이 그렇게나 많이 필요하셨대요?" 테오가 놀라서
물었다. "먹을 것도 아닐 텐데..." "먹는 게 아니라 던지는 거래. 나흘째 되는 날에는 메카에
서 멀리 않은 미나라는 곳에서 악마 이블리스의 상징인 세 개의 둥그스름한 기둥. 즉 '샤이
탄'에 일곱 번씩 돌을 던져야 한 대. 그곳에서 아담이 돌멩이를 던져 이블리스를 쫓아보냈다
더구나. 이블리스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설도 있어. 어쨌든
우리 아버지도 악마를 쫓아 내신 셈이지. 같은 날 양 한 마리를 희생으로 바친 다음, 머리를
깎고 나니 신성화 과정은 그것으로 끝이 났대. 그렇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메카에 가서'타와
프', 즉 카바 주위을 일곱 번 도는 의식을 행할 수가 있으셨대. 카바란 지상에 임하신 신의
오른손을 상징하는 '검은 돌'이 보관되어 있는 조형물이야." "테오 너도 분명히 카바의 사진
을 본 적이 있을걸." 마르트 고모가 덧붙였다. "전혀 기억에 없어요." 테오는 기억을 더듬는
둣한 표정이었다. "검은 돌이라구요? 어떤 모양으로 생겼는데요?" "내가 설명해 줄게." 나스
라가 대답했다. "카바는 상당히 높은 건축물로서, 겉에는 금실로 수놓은 검은 천[키스와]을
씌워 놓았지. 그런데 정작 검은 돌이라고 하는 거은 지름이 3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돌에 지나지 않아. 약간 붉은 기운이 도는 세 개의 평범한 돌덩어리야. 가브리엘 천사가 던
졌다는 이 돌을, 마침 카바를 짓고 있던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받았대. 이슬람교
도들은 이 검은 돌을 숭배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앞에서 절을 하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앟고,
다만 기도문을 외우며 그 주위를 시계바늘 반대 방향으로 도는 거야. 우리 아버지는 그 돌
에다가 입을 맞추시고, 또한 영원토록 이슬람에 충실하겠다는 징표로 신의 오른손에 당신의
두 손을 포개셨대. 이렇게 하면 순례 여행의 핵심이자 세 번째 지침인 타와프가 끝나는 거
지." "어휴, 이젠 거의 끝난 걸 테죠?" 테오가 조바심이 난 듯 물었다. "응, 거의 끝났어. 이
제 마지막 지침만 남았어. 사파 산과 마르와 산 사이를 연이어 일곱 차례 왕복한 거야. 한가
운데 지점에 이르렀을 때에는 매번 깡충깡충 뛰어야 한 대." "그건 또 왜요? 너무 우스꽝스
러운 이야기 같아요." "바로 네 말대로야." 나스라도 테오에게 동조했다. "이 괴상한 의식이
생겨나게 된 연유 또한 아주 이상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감동적이란다. 아브라함이 그 아내
[첩] 하갈을 사막 한가운데로 데려갈 때 생긴 일이야. 아브라함이 하갈과 그들의 아들 이스
마엘을 전능하신 신의 처분에 맡기고 돌아가자, 가엾은 엄마는 목말라 하는 어린아이에게
줄 물을 찾아다니느라 이 두 산 사이를 종종걸음치며 왔다갔다하였대. 아이는 곧 죽을 것만
같았지. 그런데 기적적으로 샘이 솟았다는구나." "물론 그랬을 테지요." 테오가 짐작하고 있
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순례 여행에 동참하지도 않
았을 테지요." "아이를 구한 샘물은, 이젠 성역이 된 잠잠 우물에 보관되어있지. 물을 구하
려는 하갈의 필사적인 노력을 기념하기 위해 신자들도 그 상황을 그대로 연출해 보는 거야.
테오 너도 짐작했겠지만 하갈이 동분서주했던 구역은 더 이상 허허벌판 사막이 아니란다.
사파 산에는 커다란 돔 사원이 들어섰지. 우리 아버지는 일곱 차례 그 길을 왕복한 다음, 미
나로돌아가 사흘 동안 매일 일곱 번씩 주워 온 돌멩이를 샤이탄에 던지셨대." "그런 용도라
면 정말 돌멩이가 많이 필요했겠어요." 테오가 이해가 간다는 듯이 말했다. "커다란 자루르
ㄹ하나 준비해 가면 좋겠네요." "그리고 나서 아버지는 메디나까지 가셨어. 이슬람의 제2의
성지지. 그곳에서 순례자들은 몸을 씻고 향수를 뿌린 다음, 예언자의 사원에 가서 기도르 올
린대. 사원은 건물도 아주웅장하고, 바닥에는 붉은 바탕에 회색 무늬가 들어 있는 양탄자가
길게 깔려 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이 사원이 굉장히 인상적이셨다더구나. 마호메트의 무덤에
가서도 역시 기도를 드리셨대." "그러면 이제 순례 일정은 다 끝난 건가요?" "그래, 아버지
말씀으로는 이 모든 지시사항이 너무 까다롭고 번거롭게 보이지만, 네 가지 지침만 잘 지키
면 순례의 본뜻은 다 준수하느 거라고 하시더구나. 즉 신성화 단계, 검은 돌쥐위를 일곱 차
례 돌기, 두 개의 산 상이를 일곱 차례 왕복하기, 아라파트에서 기도하기. 이 네 가지 말이
야. 이렇게 하면 아담과 이브,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 지상에 찍힌 신의 오른손 상징.
이 모든 것에 대한 경배가 모두 포함되는 셈이지. 난 어디까지나 아버지께서 들려 주신 말
씀을 반복하는 것 뿐이야." "메카로의 순례 여행은 무지무지 복잡하군요." 테오는 한숨을 내
쉬었다. "다른 순례 여행보다 더 복잡할 것도 없지." 마르트 고모가 테오의 말에 이의를 제
기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순례 때 끝도 없어 보이느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기도 하
지. 그런가 하면 힌두교에서는 신도들로 하여금 아주 여러 날 동안 걸어다니도록 규정해 놓
기도 했어. 중국에서는 또..." "성소의 7천 계단을 올라가야 하지요." 테오가 마르트 고모의
말을 끊었다. "모두 육체를 고단하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느데, 그건 어째서인지 궁금해
요." "신 앞에 섰을 때, 다른 잡념일랑은 모두 사라지도록 하기 위함일 테지." 나스라가 미
소지으며 대답했다. "테오 너 '코란'의 뜻은 몰랐었지만, 혹시 '이슬람'은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니?" "그러고 보니 그 말 또한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었어요." 테오가 고백했다. "아럽어
로 '이슬람'이란 말의 뜻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지. 이슬람은 '신에게 모든 것을 내맡김'을
의미한단다. 또한 조물주는 순종을 요구하시므로 이슬람은 '복종'을 뜻하기도 하지. 아마 이
슬람만이 신자들의 순종을 요구하는 종교는 아닐 거야. 전 세계의 모든 종교 의식들이 육체
를 구속한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거야. 피곤이 황홀경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라는 걸 혹시 알고 있니? 반드시 그리스도교나 불교도. 이슬람교도가 되어야만 황
홀경에 도달할수 잇는 건 아냐. 육상선수나 등반가. 도보여행가 같은 사람들도모두 그런 현
상을 경험할 수 있거든. 몸이 지쳤을 때 계시를 얻는 경우가 자주 있지. 육체는 고통에서 벗
어나고, 정신은 바짝 긴장했다가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갑자기 섬광 같은 것이 지나가
는 거야. 빙글빙글 돌면서 어떻게 몸을 지치게 할 수 잇는지, 너도 곧 보게 될 거야." "우리
의 상식으로는 몸이 피곤하면 쉬어야 해요. 그런데 일부러 몸을 지치게 만들다니, 그건 또
무슨 괴상한 소리지요?" "서구는 정신수양의 전통을 잃어버렸단다." 나스라가 진지한 투로
말했다. "모든 것을 편의 위주로 살다 보니 점점 힘든 걸 싫어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 삶
또한 왜소해졌지. 그런 판국이니 젊은이들이 사이비 종교에 탐닉한다고해도놀라운 일이 아
니야. 오히려 당연하다고 해야겠지." "그런데 한 가지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요." 테오가
몹시 긴장한 듯한 투로 말했다. "만일 제가 기절을 했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춤을
춘다면, 그걸 정신수양이라고 할 수 있을 까요?" "물론이지." 나스라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
고 대답했다. "아마도룩소르에서 여자 주술사와 춤을 추었던 걸 말하는가 보구나." "이건 너
무해요. 어떻게 저에 관한 모든 걸 알고 계시죠?" 테오가 거세게 항의 했다. "난 마치 감시
당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참 안됐구나." 마르트 고모가 테오르 나무라는 투로 빈정거렸다.
"하지만 이 세상 천지에 너만큼 수호신을 많이 거느린 애가 또 있는 줄 아니?"
이스탄불
테오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바깥 공기는 점차 청명함을 잃어가고, 창 밖 너
머로 보이는 하늘에는 어느덧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이슬람은 소나기가 쏟아지려 할 무렵
의 먹구름을 잔뜩 머금은 하늘처럼 무시무시한 형태로 다가왔다. <<코란>>의 가르침이 그
토록 단순해 보임데도 불구하고, 그처럼 폭발적인 과격함과 피비린내나는 투쟁이 있어 왔다
는 사실을 상상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생각하다 지친 테오는 테라스에 팔을 괴었다.
시내로부터 유조탱크의 둔한 움직임 소리와 수증기 폭발력 있는 흐니낌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들이 전해져 왔다. 이따금씩 갈매기의 힘없는 울부짖음이, 마치 오케스트라의 합주에 묻
혀 가냘프게 몸부림치는 플루트 소리처럼 테오의 귓전을 때렸다.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화물
선과 요트.낚싯배.연안 무역선, 그리고 만국기오 호화롭게 장식한 순항 유람선 등 온 온갖
종류의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이스탄불은 해협 건너편에서 아치 기품 있는 왕비처럼 무관
심을 가장한 자태로 도시의 모든 소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스탄불의 언덕에서는 전설이
묻어 나오는 듯했고, 언덕에 자리한 이슬람 사원은 서사시를 간직한 듯 위용을 풍겼다. 세
개의 이름을 가진 고도 이스탄불은 그렇게 걱정근심 없는 평안한 장속으로 빠져들고 있었
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태양의 회귀를 취해 기도드리지 않았다. 태양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닌
이스탄불은 자신의 과거를 베개삼아 잠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내일이 오면 새벽의 찬미를
받을 것이다. "다른도시의 이슬람은 이보다 훨씬 근엄한 모습이지." 마르트 고모가 나직이
속사였다. "이슬람교도 유대교처럼 사막에서 생겨난 종교란다. 하지만 물이 있으므로 해서
모든 것이 바뀌는 거야. 부드럽고 유연해진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착각하면 안
돼. 어둠 속에서 광채를 발하는 저 돔 내부에서도 신의 이름으로 이루 말 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사건들이 벌어졌지. 저렇게 아름답고 조화로운 이슬람 사원이 세워지기 이전에는 이
도시가 비잔티움으로 불렸으며, 그 비잔티움은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해." "참 아름답지?" 언제 왔는지 나스라가 테오의 목덜미에 양손을 얹으며 조용히 말했다.
"네." 테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마르트 고모는 침묵이란 걸 모르세요.
언제나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려 하지요."
24 열광적인 사랑
테오의 꿈속에 나타난 라마승 감포
다음날 테오는 몹시 흥분한 상태에서 잠을 깼다. 라마승 감포가 꿈속에 나타났기 때문이
었다. 라마승은 처음엔 뭔지 알 수 없는 숫자가 잔뜩 씌어진 종이를 흔들며 웃더니, 곧이어
갑자기 몸이 커지면서 마침내 불상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감포와 아빠가 어
쩐 일인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이 장면은 확실치가
않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분 좋은 꿈이어서 조금도 불쾌한 응어리가 남아 있지 않았
다. "그래? 약속대로 되었구나." 마르트 고모가 결론짓듯 말했다. "네 꿈속으로 테오 널 보
러 오겠노라고 약속했었잖아." 그러나 왠지 마음이 불안해진 테오는, 엄마에게 별일이나 없
는지 알아보기 위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 별일 없으세요? 요새는 조금 덜 피곤하
세요? 결혼 기념일 여행은 좋으셨어요? 브뤼해 말이에요. 근사했다구요? 참, 그런데 엄마,
혹시 다리 괜찮으세요? 가끔씩 아프시다구요? 약간씩 말이죠? 왜 그렇대요? 부었대요? 조
심하세요. 어떻게 알았으냐구요? 아마제가 말씀드려도 믿지 않으실걸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라마승이 꿈속에 나타나서 가르쳐 주셨어요. 정말이라니까요! 증거는 제가 정확하게 짐작했
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이지요. 또 다른 얘긴 하지 않으셨냐구요? 이건 제 생각인데요, 아
주 좋은 소식을 알려 주신 것 같아요. 물론 제 추측이긴 하지만요. 그분 말씀이 맞다구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엄마, 그 쌍둥이 형제 말인데요. 그 얘기 좀 자세히 들려 주실
수 있으세요? 아뇨, 잠깐만요. 지금 당장 말씀해주세요. 네,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에요. 그럼
요, 전 잘 지내요. 저도요. 엄마, 사랑해요." "옆에서 듣고 있자니, 네 엄마도 잘 지내시는 것
같구나." 마르트 고모가 안심한 듯 말끝을 맺었다. "그래도 다리가 묵직하시대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라마승께서는 어떻게 그걸 아셨을까요?" "난 라마승 감포가 누군지 잘
모르겠구나." 두 사람의 대화를 귀기울여 듣고 있던 나스라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아마
도 대단한 초능력을 지닌 분이신 것 같구나. 우리 수피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지. 우리
성인들 중에는 서로 다른 두 장소에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들고 계셔." "그
런 말을 저더러 어떻게 믿으라는 말씀이세요." 테오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대꾸했다. "전
마술 따윈 믿지 않아요."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나스라는 순순히 단념하는 듯했다. "다음
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 이제부터는 이슬람성소들을 구경해 보기로 할까?" "성 소
피아 사원부터 가기로 하지." 마르트 고모가 끼어들었다. "오래 되어서 헐긴 하였지만, 그래
도 난 테오에게 비잔티움의 풍취를 한껏 느끼게 해주고 싶어."
십자가와 초승달 사이에 놓인 성화
밖에서 보았을 때, 성 소피아 사원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념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외관상으로는 싸움에 진 덩치 큰 동물 같은 형상이었으나, 내부로 들어서니 색유리
의 아름다움이 한결 돋보였다. 커다란 눈을 지닌 천사들이 조각된 웅장한 돔은 흡사 천사들
의 날개 위로 우뚝 솟아오른 듯 하였으며, 정면 벽에는 제의를 걸친 기다란 인물들이 빛 바
랜 금빛 바탕색 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굉장히 아름다운 모스크로군요." 테오가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나스라는 테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성 소피아
사원은 단순한 모스크 이상이었던 것이다. 전 로마 제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을 뿐만
아나라,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도시명을 선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최초로 건축된 성
소피아 사원에서는, 정작 순교당한 소피아 성녀에 대한 경배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리스
어로는 '하기아 소피아'라고 불리는 이 사원은 지혜의 극치, 즉 신의 영혼 중 여성적인 면모
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반은 여자 반은 천사를 뜻하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동방 정교
회에서 가장 큰 사원이었다. 이 사원은 허물어졌다가 다시 세워지고, 불에 타서 파괴되었다
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1만 명의 일꾼이 동원되어 537년 마침내 재건축되었
다.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완공된 바실리카양식의 대성당 안으
로 들어서면서 '나로 하여금 이와 같은 대역사를 성취하도록 맡겨 주신 하느님께 영광 있으
라. 오 솔로몬이요, 나는 그대를 이겼노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아니, 경박한 황제 같으
니라구." 테오가 못마땅해하였다. 그 20년 후 지진으로 성당이 무너져 버렸으니, 테오의 말
대로 황제의 언동은 경박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후로도 20년 마다 대성당은 지진으로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새로이 건축될 때마다 더욱 아름다워진 동방 정교회의 보석 성 소
피아 대성당은 세계의 중심, 즉 콘스탄티노플에 임하시는 하느님의 대질서를 고양시킨다. 비
잔틴 제국의 체제는 지극히 단순했다. 가장 높은 곳에 지상에서의 신의 재현인 황제가 자리
하며, 백성들은 이 황제를 비현실적일 정도로 성대한 방식으로 극진히 섬겼다. 그러한 만큼
비잔틴 제국의 의식은 특별히 아르다웠다. '그리스도는 지상의 황제들에게 모드 ㄴ권력을 부
여하셨다'고 당대의 연대기작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신은 절대권력자이시다. 따라서 지상의
군주는 절대권력자의 이미지를 재현하여야 한다.' 비잔틴 황제를 감히 비판할 수 잇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으며, 황제 앞에 서면 누구나가 침묵을 지키고 절을 올렸다. "말하자면 요즈
음의 민주주의와는 정반대로군요." 테오가 주석을 달았다. 사실 비잔틴 교권 피라미드만큼
독재적인 체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종교에 토대를 두 체제 가운데, 예술의 아름
다움을 위하여 그토록 열과 성르 다 바친 체제가 드문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성화를 그
리고, 교회를 세우며, 모자이크를 제작하는 등, 이 모든 작업이 황제와 신을 동시에 섬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 무렵 이슬람 세력이 점차 비잔틴 제국 주위로 전파되었으며, 특히 신의
형상화를 금하는 이슬람 관습이 국경으로부터 차츰차츰 비잔틴 양식을 파고들기 시작하였
다. 이로 이나여 초대 황제인 레오 3세는, 비잔틴 제국 전역에서 성화 주위로 군중을 집결시
키는 민중들의 신앙 열기가 지나치다고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성경에서도 우상 숭배르
금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표현해야 할 것인가, 혹은 단순히 십자가만으
로 대체할 것인가? 이 정도로 사려 깊었던 황제는, 궁전 정문에 설치해 두었던 그리스도의
성화 대신 십자가를 세우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성화를 파괴하는 대대적인
움직임이 비잔틴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가게 되면서, 신자들은 그림을 파괴하는 성상파괴자
들과 그림을 숭상하는 전통주의자들로 분열되었다. "성상파괴자들은 마치 짐승과 다를 바
없었어." 마르트 고모가 참견하고 나섰다. "그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예술품들이 파괴
되었는지 모른단다." 하지만 나스라의 의견은 달랐다. 초상화를 십자가로 대체함으로써, 성
상파괴에 앞장선 황제들은 비잔틴의 교리를 이슬람에 조율시켰다. 모든 그리스도교도를 하
나로 묶는 상징인 십자가는, 비잔틴의 그 어떤 훌륭한 성화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법으로 이
슬람의 초승달 깃발과 맞설 수 있었다. 당시에 이미 국경 너머 지역에서 통용되던 화폐에는
그리스도의 얼굴 대신 십자가가 찍혀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전통주의자들의 승리로 귀착되
었다. 여러 해 동안 성상파괴자와 옹호자간에 벌어졌던 전투 끝에 성화가 십자가에 대해 승
리를 거두었다. 궁전 입구에는 다시금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등장하였으며, 후광이 비치는 그
리스도의 상체가 화폐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로써 성상파괴자들의 문화혁명은 완전히 실패
로 돌아갔다. 역사상 유례 없는 영광으로 빛나는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으 끊임없는 공격
으로부터 서구 세계를 바어해 주는 역할 또한 울륭히 수행하였다. 대성당의 그림자 밑에서
신권을 누리는 황제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없어 보였다. 적어도 1453년 터키의 정복자가 말
을 타고 성 소피아 대성당으로 들어선 종말의 날이 오기까지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그 정
복자는 정교회 신자들을 싫어하였을 테지요." 테오가 추측하였다. 정복자 메메드 2세는 열렬
한 이슬람교도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동방 정교회의 수도를 함락히키겠노라로 맹세한 사람
이었다. 철통 같은 성벽으로 둘어싸인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도교 국가 연합에서 파견한 지
원병들의 두움으로 계속해서 저항 하였다. 공격은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여겨졌다. 에디르네
에서 주조되어 4백 마리의 황소에 의해 전쟁터로 운반된 무시무시한 대포 '챠히'가, 폭탄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해 버려도 메메드 2세의 의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를 고무시키
는 한 가지 믿음이 있었다면, 바로 나이 든 한 이맘의 꿈이었다. 이맘은 꿈에서 마호메트의
동반자로서 메디나에서 마호메트 앞에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서 있었는데, 마호메트가 얼굴
위까지 빨간 숄을 들어올리며 '나는 너 메메드에게 에이읍 엘 안사르의 깃발을 맡기겠노라'
고 말하였다. 그러자 빨간 숄은 녹색 깃발로 바뀌었으며, 이와 동시에 비잔틴의 마리아 성화
들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나 버렸다. 꿈 이야기를 들은 메메드 2세는 땅을 파보
도록 지시하였으며, 그리고 꿈에서 본 대로 성인으 무덤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메메드 2세는
비잔틴을 바다 반재쪽에서부터 공격하기 위해, 거대한 나무판을 이용해서 전함들을 모두 언
덕으로 끌어올리도록 하였다. 무수한 작업 절차를 거쳐 정복자의 함대는 마침내 콘스탄티노
플의 취약자구로 이동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해서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전투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는지, 오로지 금실로 수놓인 황제의
견장으로 미루어 황제의 시체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메머드 2세는 무제한으로 도시르 ㄹ약탈해도 좋다고 허락하였으며, 이에 따라 콘스탄
티노플은 극도로 유린되었다. 전쟁과 약탈의 회오리가 일단 잠잠해졌을 때, 이슬람 정복자는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는 성 소피아 대성당으로 유유히 입성하였다. 이튿날 십자가는 초승달
로 바뀌었으며, 대성당은 모스크로 탈바꿈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다시 태어났
다. 성전의 천사와 성인의 조각에는 흰 벽토를 발랐으며, 알라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섬기는
신부터 경배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례 절차도 바뀌었다. 성 소피아 사원은 1935년
근대 터키의 아버지이며 확고한 정교분리자였던 케말 아타튀르크가, 비잔틴 모자이크에 덮
여 있던 회벽을 제거할 때까지 이슬람 사원으로 남아 있었다. 그 이후 성 소피아 사원은 박
물관으로 개조되었다. "이따금씩 이 장엄한 대사원을 다시금 이슬람 예배소로 개조하자는
이야기가 거론되기는 하지마, 아직 정론으로 확립되지는 않았단다." 나스라가 말했다. "이스
탄불을 통틀어 하기아 소피아만큼이나 동방 정교회에서 이슬람교로 넘어간 과정을 상징적으
로 보여 주는 유적은 없기 때문이지." "나스라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테오가 물었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나스라는 이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이 점만 확실하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아. 비록 박물관으로 전용되었다고 해도, 난 지금 그대로의 자태속에
서도 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 알라의 이름과 비잔틴 천사들, 초승달과 십자가를 동시에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하루에 다섯 번
테오는 상념에 잠겨 있었다. 도대체 그리스도의 얼굴과 십자가라는 상징 사이에 무슨 차
이가 있다는 말인가? 무슨 불가사의한 문제가 가로막혀 있다는 것일까? "나스라,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왜 이슬람교에서는 그림으 금지하는 거죠?" "유대교에서 신으 형
상화를 금지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지." 나스라가 대답하였다. "그 누군가에 의해서 탄생한
분이 아니신 조물주를 형상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유대인들의 하느님은 절대로 신다즐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신 적이 없지. 음성만으로그 존재를 알리셨어. 이 차이는 현격하다
고 봐야겠지. 성경에 다르면, 하느님의 형상화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이슬람교에서도 마
찬가지야. 신은 인간 위에 계시는 분이셔. 그러데 만일 인간이 그르시도의 얼굴을 그린다면,
그 신은 인간이 되어 버리는 셈이거든." "바로 그거예요!" 테오가 외쳤다. "그리스도의 슬픔
에 잠긴 눈을 보면 훨씬 빨리 그 느낌이 전해지거든요." "만일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땅에 오신 신이라고 네가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런 사실을 용납
할 수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신에 대한 모둑이야. 극단적으로 말한
다면 무지하던 시대, 즉 우상을 섬기고 신당을 만들던 시대로 퇴보한 거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참, 아직 초승달의 의미는 가르쳐 주지 않으셨어요." 테오가 덧붙였다. "이슬람교에
서 신의 초상화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겠지요. 그러데 그 조각달은
뭐죠?" "이제 차차 알게 될 거야. 예언자 마호메트는 다신교도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태양
숭배에 대해 몹시 심한 거부 반응을 보였지. 그러한 나머지 이슬람의 상징으로 아예 달을
택한 거야. 달 중에서도 초승달이니까, 태양과 혼동할 우려도 없을 테지." "제가 보기엔 아
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기도를 하기란 참 힘들 것 같아요." "그렇지도 않아." 나스라가 말했
다. "아주 쉬운 일이지. 이 광장 건너편에 있는 푸른 모스크에 가보면 그것을 알 수 있을 거
야. 이슬람의 아라베스크 문양이 신성한 환희의 세계로 안내해 주거든..." 거대하며, 엎으로
는 여섯 개의 품위 있는 미나레트를 거느리고, 위로는 크고 작은 웅장한 금빛 돔으로치장한
푸른 모스크는 아직도 원래의 용도대로 기능하고 있었다. 기도 시간이 되자, 사원의 책임자
들이 관광객들의 출입을 제한하였다. 나스라가 이들을 열심히 설득하는 동안, 테오와 마르트
고모는 비둘기들을 바라보며 기도 시간을 알리는 신호가 들려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
루의 중반에 행하는 기도가 시작될 참이었다. 곧이어 확성기로부터 직직거리는 잡음에 섞여
'알라 오 아크바르...' 하는 소리가 흘러 나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무슨 소리죠?" 테오가
물었다.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 나스라가 대답했다. "알라 외에는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도이시다. 즉 신앙 고백[샤하다]이라고 할 수 있겠지." "니자무
딘의 성가대들이 부른 노랫말과 같은 거야." 마르트 고모가 거들었다. "그 사람들 노래는 듣
기가 아주 좋았어요." 테오가 대꾸했다. 나스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자 음향기기가
없었을 때에는 기도 시간을 알리는 무에진의 목소리도 낭랑하고 듣기가 좋았었는데... 샘가
에서 신도들이 기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얼굴과 손, 그리고 팔꿈치까지 물을 축여
씻은 손으로 물을 받아 머리에 붓고는, 마지막으로 발에서 발목까지를 씻었다. "때빼고 광내
는 사람들 같아요. 매번 저렇게 해야 하나요?" "기도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를 하여야 해."
나스라가 말했다. "신 앞에 기도르 올리기 위해서는 모든 오물을 말끔히씻어 내야 하는 거
란다. 하지만 물이 없는 지방에 여행중이라면 모래로 대신해도 괜찮아. 물론 청결한 모래여
야 하겠지..." "별로 위생적이진 못하겠군요." 테오가 지적했다. "그렇지만 불순물이 받드시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지. 오히려 정신적인 면이 더 강조된다고 생각해야 해. 하루
에 다섯 번씩이나 몸을 씻어야 하니. 이슬람교도들이 그리스도교도들보다 훨씬 앞서 청결에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겠지." "하루에 다섯 번이라구요?" 테오가 깜짝 놀라 물었다. "하늘
이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할 무렵에 드리는 아침 기도, 한 번." 나스라는 손가락을 꼽아 가
며 기도 회수를 세기 시작했다. "정오 기도 두 번, 3시와 5시 사이에 드리는 오후 기도 세
번, 저녁 해질 무렵에 드리는 석양 기도 네 번, 그리고 새벽이 되기 전에 드리는 밤 기도.
자, 다섯 번 맞지?" "그러면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요?" 테오가 이의를 제기
했다. "잠시 혼자가 되어 메카를 향해 작은 깔개를 깐 다음, 그 기도 장소에 어떠한 짐승도
지나가지 않도록 하면 그것으로 준비가 끝나. 기도가 그렇게 오래 계속되지는 않으니까. 우
리 살짝 들어가서 구석에 서 있을까?" 자카르타에서처럼 신도들은 감탄을 자아낼 만큼 잘
훈련된 태도로, 제단 앞쪽에 서 있는 이맘의 인도에 따라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하였다. 손바
닥을 위로 향하게 펴서 그 손을 어깨에 살짝 댄 다음 왼손을 오른손에 포개고 기도문을 외
우며, 그 손바닥이 무릎에 닿을 때까지 등을 굽힌 후 기도한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키며
기도문을 외운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무릎을 끓은 채로 몸을 완전히 굽혀 땅에 이마를 댄
후 일어서서 기도한다. "왜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거죠?" 테오가 속삭이듯 물었다. "밖에
나가서 설명해 줄게." 마르트 고모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여기서 말하다간 봉변을 당할 수
도 있거든." 얌전히 선 채로, 테오는 보이지 않는 유일신을 경배하기 위해 푸른 광선 아래
여러 줄로 가지런히 늘어선 굽힌 등줄기들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기도문을 읊는 소리가
들리는가싶더니 신도들이 모두 일어섰고, 어느 새 낯익은 삶의 무질서한 모습들이 테오의
눈앞에 펼쳐졌다. 기도가 끝난 것이었다. "이젠 질문해도 될까요?" 테오가 목소리를 맞추며
물었다. "그래, 해보렴." 나스라가 대답했다. "사원에서 어느쪽이 메카 방향이죠?" "아주 간
단해." 나스라가 대답했다. "이맘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메카 쪽이야." "왜 모두들 한결같이
똑같은 방식으로 기도를 드리나요? 교회에 가면 무릎을 끓는 사람, 앉아 있느 사람, 고해성
사를 하는 사람, 하지 않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잖아요." "하지만 사제가 축도를 드린 후, 그
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성체를 들어올리는 순간에는 모든 신도들이 고개르 ㄹ숙여야 하지.
이슬람교에서는 신도들이 단일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의식을 공유하기 위해, 이렇듯
함께 기도를 드리는 거야. 그리스도교 의식과 크게 다를 바 없지." "글쎄요." 테오는 반신반
의하는 표정이었다. "하루에 다섯 번씩이나 기도를 하니, 그 사실을 잊어버릴 수는 없겠네
요." "네 말대로야. 기도를 드리면서 신도들은 자신이 단일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느 ㄴ
사실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거지.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런 기도 방식을 택했다고
도 볼수 있겠지." "그렇다면 혼자서는 절대로 기도를 드릴 수가 없겠네요." "물론 혼자서도
기도를 드릴 수 있지. 예를 들어 밤에나, 혹은 여행중에는 혼자서 할 수밖에 없잖니. 그런
특별한 경우 외에도 원할 때마다 얼마든지 혼자서 기도를 드릴 수 있지. 그렇지만 <<코란
>>에 따르면, 이렇게 사원에 와서 다른 신도들과 더불어 함께 드리는 기도가 가장 이상적
인 기도라는구나." "그럼 나스라도 그렇게 하세요?전 나스라가 몸을 굽히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 "으음, 난 내 나름대로 기도하는 방식이 따로 있어." 나스라는 테오의 질문
을 회피하듯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수피주의자라서 그런가요?" 테오가 결론짓듯
되물었다. "틀림없이 그렇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다고 하시는 걸 거예요." "내 나름
대로의 방식을 오늘 저녁이면 너도 보게 될 거야." 나스라가 장담하였다. "이젠 네 고모의
지시대로 널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도록 해야겠구나."
에테르 냄새
테오를 맞이하여 준 퉁퉁한 의사는 굉장히 친절한 사람이었으나, 너무 수다스럽게 말을 계
속하다가 그만 주사바늘을 잘못 찌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주사바늘을 다시 찔러야만 했
다.
하얀 타일이 깔린 실내에서는 에테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테오는 이를 악물었다. 세 번째
실패에 이어 네 번째로 주사바늘을 찌르던 의사는, 그제서야 에테르 병 뚜껑이 열려 있었음
을 알아차리고 여러 차례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의사는 입을 다물고 정신을
집중해서 거칠게 주사바늘을 혈관에 찔렀다.
"재수 없는 의사 같으니."
테오는 마침내 검사가 끝나자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애꿎은 내 팔에 멍만 잔뜩 들게 하
다니...."
"말이 좀 많은 게 탈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진지해 보이던데." 나스라가 테오의 눈치를 살
피며 말했다. "그런 의사라면 결과에 대해서는 확신해도 될 거야. 자, 네처방전이야."
"처방전이라니요? 전 제 약이 따로 있어요." "그래도 한 번 일거보기나 하렴. 프랑스어로 씌
어 있잖아." 나스라가 테오를 설득하였다.
"누가 아니,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특별한 처방이 씌어있을지....."
"치료 방법은 바꾸지 않기로 정해 두었는걸요." 테오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테오 넌 호기
심도 없니?" 마르트 고모까지 테오를 부추겼다. 하는 수 없이 테오는 처방전을 읽어 내려갔
다. 병원의 이름과 주소 아랫부분에 짧고 성급하게 쓰여진 메시지가 있었다. '너의 피붙이들
에 의해 우리가 수백만 명씩 강제 이주되어야만 했을 때, 우리가 떠나온 그곳으로 가라.'
"이건 그 수다쟁이 의사 솜씨가 아니로군요.' 테오의 얼굴이 일순간 창백해지며 말했다.
"다음번 행선지에 대한 메시지인가요?" "물론이지."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왜 기분 나쁘
니?" "이번 메시지는 사실 그렇게 유쾌하진 않아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내 피붙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켰다구요? 그렇다면 프랑스 사람들을 말하는 건
가요?"
"잘 생각해 봐." 나스라가 말했다. "그 메시지는 거짓이 아님을 내가 장담하지."
"이민 온 사람들은 자진해서 온 거니까 강제 이주가 아닐테고...." 테오는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도형수도 수백만 명까진 되지 않으니까 그것도 아닐 테고.....수백만 명이 틀림없
어요?"
"그보다도 많을걸?" 마르트 고모가 지체없이 대답했다.
"너도 잘 아는 이야기야."
테오는 이상하리만큼 마음을 동요시키는 이 메시지를 일고 또 읽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프랑스인 들이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켰을까? 갑자기 역사적 사실이 머리를 스
치고 자가면서 테오는 목이 메는 것 같았다. 아프리카 노예! 프랑스 함대들의 노예 무역! 파
투의 고향 아프리카.... 테오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로구나." 테오를 유심히 살피던 마르트 고모가 말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중에서도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아맞히면 되겠는데."
"세네갈이겠죠." 테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언젠가 파투가 쇠사슬에 묶인 노예들을 배
에 태웠다는 그곳에 가 있을 거야."
교서로 인한 심한 충격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니스라는 이스탄불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
이는 근사한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기로 결정하였다. 푹신한 긴 의자는 파랑과 노랑 체크무
늬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식당의 분위기 또한 더없이 즐겁고 명랑하였다. 분주해 보였으
나, 어쩐 일인지 테로는 시종일관 긴장된 표정이었다. 나스라가 구운 황새치 요리를 주문하
였지만, 테오는 깨지락거리기만 할 뿐 통 입맛이 없어 보였다. 걱정이 된 종업원이 여러 종
류의 맛보기 음식을 가져왔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게다가 팔까지 아파요."
테오는 자꾸 투덜대기만 하였다. " 그 메시지 때문이니?"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아닌게아니라 가혹한 내용임에 틀림없어. 안 그러니? 뭐라고 말 좀 하렴. 혹시 피곤해서
이러는 건 아니니?"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테오는 오히려 점점 더 창백해져 갔다. 그러다가 급히 화장실로 달
려간 테오는 얼마 먹지도 않은 음식을 모두 토해 내었다. 나스라는 침착하게 테오의 이마를
받치고서 턱을 닦아주었다. 한구석에서 마르트 고모는 피가 바싹바싹 마르는 듯한 초조감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테오의 상태가 다시 악화된 것일까?
"자 앉아." 나스라가 테오를 자리에 앉혔다. "아마도 조금 전에 충격이 켰던 모양이야. 그럴
땐 물을 마시는 게 좋아. 아주 많이 마시렴. 주머니에 혹시 사탕 넣어둔거 있니? 그걸 빨아
먹으면 좋을 텐데."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어요.: 테오가 힘없이 말했다. "집에서 마시는 것 같은 진짜 차 말이
에요." 테오의 주문에 응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나스라가 식당 주인에게
아무리 부탁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이스탄불의 시장에서는 얼 그레이 차를 구할 수가 없
었다. 하는 수 없이 테오는 차와 유사한 향의 음료수를 한 잔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오후엔
서둘러서 나스라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테오는 이내 잠이 들었
다. "일본을 떠나온 이후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마르트 고모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일까?" "그렇게 상심할 필요 없어." 나스
라가 자신 있게 대꾸했다.
"에테르 냄새 때문이야. 그 망할 놈의 의사가 에테르 병 뚜껑을 열어 놓았거든. 나도 하마
터면 기절할 뻔했어." "정말 그럴까? 난 너무 겁이 나서........"
"그래, 나도 알아." 나스라가 마르트 고모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어쨌든 토하는 건 테
오의 증세가 아닌 걸로 아는데."
"그건 그래."
마르트 고모도 인정했다. "하지만 혹시 간염이라도 걸렸다면?" "그랬다면 몹시 열이 났을
거야." 나스라가 지적했다.
"토하는 아이들이 늘 그렇듯이 이마가 아주 차던데. 필요할 땐 토하는 게 좋다는 걸 잘 알
잖아. 몸 안에 있는 나쁜 기운을 밖으로 내보내고 나면 속이 한결 깨끗해질 테니까. 내가 보
기에는 테오가 정상적인 반응을 보인 것 같은데. 에테르 냄새에다가 끔찍한 내용의 메시지
까지 받았으니, 동시에 받아들이기가 너무 벅찼겠지."
"저녁까지는 나았으면 좋겠는데............."
마르트 고모는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빙글빙글 도는 데르비시들의 춤을 보면, 상태가 더 나빠질지도 모르겠어."
"가만히 지켜보자구." 나스라가 말했다. "그리고 그 애를 죽어 가는 사람 취급하진 마. 누
구라도 가끔씩 몸이 안 좋을 때가 있는 법이잖아."
모직 외투
나스라의 말이 옳았다. 하루가 저물어 갈 무렵, 테오는 시장한 탓인지 생각보다 일찍 잠에
서 깨어났다. 나스라는 테오가 원하는 차를 끓여 주고서, 겸하여 쌀밥까지 한 접시 더 먹도
록 권하였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오늘 저녁 외출하실 거죠?" 테오가 말했다. 그리하여 일행은 테케[자
위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테케란 데르비시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마룻바닥 앞에 세워진 제단위로 자리를 잡는다. 마룻
바닥에서는 그 스승이 의식의 여러 동작을 지시하였다. 데르비시들의 춤 역시 엄연한 종교
의식이기 때문이었다. "데르비시라는 말에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나요?" 테오가 물었다.
"제자, 모든 데르비시는 그 스승인 세이크에게 순종해야 해." "빙글빙글 도는 목적은 뭐죠?"
테오가 또다시 물었다. "어지러워지기 위해서인가요?" 그렇지 않았다. 테르비시의 춤은 현기
증 나게 만드는 여느 왈츠와는 전혀 달랐다. 춤이 끝난 후에도 데르비시들은 몸을 비틀거리
는 법이 없었다. 제대로 도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의 수련이 필요하며, 이
관습은 이미 여러 세기 전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어떻게 하는 건지 보고 싶어요. 제발 부탁
이에요." 테오가 간청하였다. "조금이라도 괜찮아요." 그러자 나스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
발을 벗은 다음, 한 발을 다른 한 발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한쪽 팔을 들어 그 손바닥
이 하늘을 향한 상태로 두고, 다른 손바닥은 땅을 향하도록 한 다음 팔을 옆으로 쭉 폈다.
이윽고 포개진 두 발을 축으로 하여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더 빨리는 못하겠어." 나스라가 멈춰 서며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돌기 전에 음악이 있어
야 하거든. 더구나 스승도 안 계시기 때문에 난 지금 기도를 드릴 수가 없는 상황이야. 그렇
지만 왜 한 발을 다른 발 위에 포개는지는 설명해 줄 수 있단다."
이야기는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르비시의 창시자이자 흔히 마울라나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앗 딘 알 루미는, 신에 대한 사랑으로 뭉친 자기의 열성 제자들을 불러모았다. 이
들 중에는 요리사도 한 명 끼여 있었다. 어느 날 데르비시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고
있을 때, 갑자기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에 사로잡힌 나머지 요리사는 그 요리하던 것을
잠깐 잊었다. 그 바람에 뜨거운 음식 접시가 발에 떨어져 몹시 데고 말았다. 하지만 데르비
시들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덴 발 위에 다른 한 발을 올려놓는 것으로 아픔을 달
래야 했다. 이 요리사의 심성에 감복한 스승은 그를 기념하기로 하였다. 데르비시들이 한 발
을 다른 발 위에 올려놓고 춤을 추는 것은, 이처럼 단순히 한 요리사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런데, 잠깐만요." 테오가 나스라의 말을 끊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을 섬기
는 거예요. 아니면 그 스승을 섬기는 거예요?"
이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수피들은 살아 있는 스승의 인격을 통해 신에 대한 사랑
에 도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수피 정신을 일깨워 주는 스승 없이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말하자면 스승 없이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말하자면 스승 없
이는 수피가 존재할 수 없었다. 스승은 신이 계신 방향을 안내해 주는 매개체였다. 제자들은
그 스승이 상식과 합리적인 이성에 어긋나는 말을 할 때라도 그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여야
했다. 스승의 그 같은 해괴한 말씀을 통해 신의 메시지가 전달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이상스럽기도 하군요." 테오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참선에서 볼 수 있는 불합리성과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사랑, 그리고 이슬람 본연의 순종 정신이 모두 혼합되어 있는 것 같아
요." "그뿐 아니라 요가에서처럼 몸을 완전히 내맡기는 자세도 들어있지." 나스라가 덧붙였
다. "우리끼리 이야기할 때에는, 제자들은 오로지 그 스승의 처분에 달려 있다고 하거든. 마
치 시체의 운명이 무덤을 파는 인부의 손아귀에 전적으로 달려 있듯이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테오 너 요가를 배웠다고 했지? 제일 마지막 자세가 뭔지 기억나니? 바로 '시체' 자세
아니었어?" 이스마일리야나 시아파와 마찬가지로 수피들로 이슬람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서
정신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부활을 기다리지도, 아담의 출현을 고대하
지도 않는다. 수피들의 스승은 수피를 지도할 능력을 전수 받은 일련의 스승들의 가문에서
배출되며, 이슬람 초기부터 이미 신의 광영을 증거하는 특수한 집단을 형성해 왔다. 오직 남
다른 계시를 받은 이들만이, 신의 외적인 형상과 내적인 세계를 결합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피들은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은둔생활을 하며, 기꺼이 가난한 삶
을 영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나스라를 보면 그럼 말들이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져요."
테오는 나스라의 호사스러운 팔찌를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테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엄연한 사실을 극단적으로 과장할 필요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수피 의식은 지극히 검
소하였으며, 수피 자신들도 소박한 외투를 입어야 했다. 수피들에게 낡은 천조각을 잇대어
만든 이 외투를 아랍 용어로 '수프'라고 한다. 즉 모직 위주로 되어 있었으므로, 시나이 산에
서의 모세처럼 모직 외투를 입은 사람이라는 뜻의 '수피'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외투 이야기가 나오니까 생각나는 일화가 있어." 나스라가 말했다.
"가장 유명한 <코란>의 해설판 가운데 하나에는, 법열상태에 들어간 마호메트가 천국에 도
착하는 일화가 나오지. 가브리엘 천사가 문을 열자, 마호메트의 눈에 상자 하나가 들어왔어.
상자의 내용물이 궁금해진 마호메트는, 상자 속에는 정신적인 청빈과 외투가 들어 있었단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너와 너의 민족을 위해 선택한 두 가지 귀중한 보물이다. 나는 이
보물을 내가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주느니, 내가 창조한 것들 가운데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으리라' 고 말씀하시는 신의 목소리가 들려 왔지. 마호메트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와 그 외
투를 자신의 사위이자 사촌인 알리에게 주었고, 알리는 그후 후손들에게 이를 물려주었단다.
"그렇다면 나스라도 그걸 입으세요?" 테오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의식이 시작되
기 전에 입을 거야. 그건 의무적이니까. 흙처럼 갈색으로 된 단순한 외투지. 데르비시들이
등에 걸치고 있는 걸 너도 곧 보게 될 거야. 머리에는 가운데가 불룩 튀어나온 높은 모자를
쓰지. 무덤을 상징하는 모자인데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 된단다. 옷은 온통 흰색이야. 메카
순례자들이 입는 옷과 같은 색이지. 세간에서 흔히들 말하는 것과 달리, 우리 수피들은 독특
한 기도 방식 때문에 박해도 많이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적인 이슬람교도란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신을 사랑하며,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들이지. 그렇지만 원칙적으
로 우리는 신의 겉모습만이 나라와 민족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단다. 신의 내면으로
이끌어 준단다. 거죽에 나타나는 거추장스런 세부와는 거리가 먼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거야." 나스라의 상투적인 설명에 약간 짜증이 나기 시작한 마르트 고모는, 스승과 제자간의
긴밀한 관계는 비단 수피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임을 지적했다.
이 말에 테오는 얼굴에 붉히며 하를 냈다. "이건 짚고 넘어 가야겠어요!"
테오가 외쳤다.
"지금 우리는 세계 종교 일주를 하고 있는 중이죠? 그렇죠? 그런데 고모가 이것저것 다 섞
어 버리면, 제가 어떻게 서로 다른 종교를 알 수가 있겠어요?" "이렇게 그럴듯한 중언부언
에 현혹되지 않고 종교 공부를 해야 할 텐데......." 고모는 두 입술을 질끈 깨물며 불만스러
운 표정을 지었다. "마르트 고모는 지나친 무신론자인 것 같아." 나스라가 상냥하게 말을 받
았다. "수피의 가르침 때문에 약간 신경이 거슬린 모양인데,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교에 대
해서까지 나쁘게 말한 필요는 없잖겠어."
"그것 참 옳은 말씀이에요." 테오가 나스라 편을 들었다. "질문 좀 더해도 될까요?"
'나'와 '너'를 넘어서
나스라는 대답 대신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혼의 중심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
이죠?" "내가 시 한편 외어 볼게. 수피인 샤비스타리가 지은 시야. '나'와 '너'는 지옥이 짜놓
은 베일이라네. 당신 앞에 드리워진 이 베일이 걷힐 때 우리를 구속했던 종파와 주의가 사
라지리니. 모든 법은 육체와 영혼으로 묶여진 너의 '나' 위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뿐. 우리사
이에 '나'와 '너'의 구분이 사라진다면 모스크와 교회. 유대교 회당의 구분이 무슨 소용 있겠
는가?" "그럴듯해요" 테로가 선선히 시에 대한 감상을 말하였다.
"하지만 우리사이에 '나'와 '너' 의 구분이 사라지는 순간은 과연 언제일까요?" "사랑의 순간
일 테지." 나스라가 대답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여 하나가 되는 순간, 테리비스의 창시자인 마울라나에게
도 그런 경험이 있었단다. 젊었을 때, 마울라나는 매우 전통적인 이슬람 신학자였지. 신비스
러운 방랑자였던 타브리즈 출신의 데르비시 샴스 앗 딘[아랍어로 '종교의 태양' 이라는 뜻]
을 만날 때가지만 해도 그랬어. 어디서 왔는지 조차 모르는 샴스 앗 딘은 , 신에 취해 갈대
피리소리만 듣고도 춤을 추며 법열상태에 빠져들곤 하였지. 마울라나는 이러한 샴스에게 반
하여 그와의 사랑에 빠졌단다. 그러나 어느 날, 샴스는 자취를 감춰 버렸어. 마울라나는 신
을 찾아 나선 사람처럼 그를 찾아 나섰지만 허사였어. 샴스는 경쟁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는
지, 그 이후로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단다. 마울라나는 자신이 그에게서 느낀 사
랑의 감정을 성스러운 결합이라거나, 인도하는 결합 같은 아주 강렬한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지."
"동성연애자였나요?" 테오가 눈이 휘둥그래지며 물었다.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그 정도의
사랑이라면 성을 초월할 테니까. 또한 이슬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피는 이란 출신의 여
자라는 점도 놀랍지?"
"이란 출신?" 마르트 고모도 전혀 뜻밖인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투로 되물었다. "정말 놀
랍군." "잘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겠지. 라비아는 9세기 무렵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성녀였어. 라비아는 평생 동안 가난하게 살면서 신에 대한 사랑을 불태웠지. 이슬람 국가 군
주들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 아주 먼 곳으로부터 찾아왔으며, 학자들 또한 모두들 라비아를
칭송하였지만, 정작 라비아는 이런 사람들을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어. 어느 날 눈에 가시가
박혔는데도 라비아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단다.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거든." "크리스트
교에도 그런 성녀들이 많지." 마르트 고모가 빈정거렸다. "그런 이야기는 이슬람교에만 고유
한 일화가 아니란다." "수피들이 말하는 사랑은 범종교적이라고 이미 말했던 걸로 아는데."
나스라도 마음이 언짢은지 언성을 높였다. "신에 대한 사랑 이야기는 그쯤 해두죠, 혹시 남
녀 사이의 사랑도 금지되어 있나요?" 테오가 물었다.
"왜 그렇겠니? 테오 너 이슬람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뭔지 아니?"
"말만 들어도 근사해요 그런 이야기가 있다니!" 테오가 기쁜 듯이 외쳤다. "빨리 이야기 해
주세요!" "서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두 젊은이가 있었지." 나스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녀의 이름은 라일라였는데, 관습이 따라 굉장히 어린 나이에 그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다
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지. 상례대로라면 이럴 경우 라일라의 애인은 물러서는 게 도리
였겠지." "왜요?" "왜냐하면 아랍 사회에서는 항상 그 아버지가 딸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가지
고 있었기 때문이지. 아버지의 선택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결혼
으로 완성될 수 없는 사랑은 금지되어 있고, 게다가 이슬람법에 따르면 간통은 사형으로 다
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뭐라구요? '다스릴 수도' 있다구요?"
테오는 분개하였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광경을 담은 사진을 본적이 있어요. 사랑하는 사
람들을 정말로 죽이더군요." "하지만 모든 이슬람 국가에서 그렇게 하는 건 아니란다. 어쨌
든 그 소년은 라일라를 단념하는 편이 나았으리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사회의 관습을 무시한 채 소년은 라일라를 단념하지 않았던 거야. 날이면 날마다
라일라의 집 주위를 맴돌며 절망에 찬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를 불렀지.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들이 그 소년을 정신 이상자로 취급하게 되었어. 메쥬노운, 즉 광인이 되어 버린 거지."
"예루살렘에서도 어린아이들이 자기를 메시아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외치더군요."
테오가 말했다. "메시아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메쥬노운은 마치 메시아를 찾아 헤매듯
이 라일라를 찾아 헤맸지. 별들을 향해 라일라에 대한 사랑을 털어놓기도 하면서 사막을 헤
매다가 결국은 죽고 말았어. 라일라도 죽었고, 경직된 아랍 사외는 이를 계기로 육체를 탐한
다기보다 광적인 신성한 불길로 타오르는 사랑의 힘 앞에 굴복하였지. 메쥬노운과 라일라의
일화는 지금까지도 아랍 이슬람 지역에 전해 내려오고 있어. 사랑이란 바로 그런 거란다."
"그렇다고 해두죠. 하지만 전 로미오가 되는 편이 훨씬 좋겠어요. 로미오는 그래도 줄리엣
과 동침이라도 해봤잖아요." "로미오에게는 신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지. 그렇지만 수피들
은 어떠한 형태로 표현되든 신의 사랑을 열렬히 간구한단다. 페르시아 출신의 수피 하티프
이스파하니는, 그리스도교도인 한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함께 교회로 갔지. 그는 미사 도중
'오, 나의 영혼을 올가미에 잡아 가두는 그대. 내 머리카락 한올 한올은 그대의 허리띠에 묶
여 있습니다. 그대는 아직도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이신 그분께 삼위일체라는 수치스러움을
강요하시려 합니까? 유일하신 진정한 신을 어떻게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는 말입니까? 라고 여자에게 물었대." "그러자 그 여자가 뭐라고 대답하였대요?"
테오가 성급하게 물었다. "아무 말도 안 했을 테죠?" "아니 대답을 했지. 부드러운 미소와
시럽 같은 달콤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였노라고 시인은 묘사했어. 잘 들어봐. '당신이 신
의 일체성의 깊은 뜻을 아신다면, 우리에게 불충한 신도라는 낙인을 찍지 마십시오. 세 조각
거울로 이루어진 영원한 아름다움은 하나의 순수하고 눈부신 빛을 발합니다. 그분의 빛이시
죠.' 그때 마침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시인은 '그의 노래가 우리에게 말하는 도다.
그는 하나이시며, 그는 유일하시다. 그 외에 다른 신은 없도다' 라고 말했어."
"그러니까 남자가 결정타를 날린 거로군요." 테오가 말했다. "그렇다기 보다 여자가 한 대답
을 남자가 이해하였다고 말할수 있겠지." 나스라가 미소지으며 테오의 말을 수정했다.
"우리가 말하는 관용이란 게 바로 그런 거야." "자, 이제 테오도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데르
비시들을 볼수 있을 정도의 기초는 갖추었을 텐데......" 마르트 고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
했다. "아직은 아냐." 나스라가 고모의 말에 반대의 뜻을 나타내었다. "두가지 사실만은 분
명히 해두어야 해. 이제부터 테오 네가 보게 될 의식은 '사마' 라고 하는 것인데, 번역하기가
상당히 곤란한 말이지. 아쉬운대로 '오디션' 또는 '감상' 이라고 해두자. 사마에 들어가면 자
기도 모르게 뜻밖의 행동을 하는 수가 있어. 데르비시 중에는 사마상태에서 울부짖으며 자
기의 옷을 찢는 사람까지 있단다. 이라크에서는 불타오르는 장작더미에서 구리거나 그 장작
을 집어삼키는 사람도 있고, 팔이나 볼을 뚫어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람도 있대."
"고모, 설마 우린 그런 광경을 보게 되진 않겠죠?" 테오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그래,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염려마." 나스라가 테오를 안심시켰다. "우리식 사마 때는 그런 광란은
일어나는 법이 없으니까. 우린 성스러운 피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바로 이 음악이 우리의
중심에 놓인 원 주위로 얽혀 있는 데르비시들을 인도하는 거야. 말하자면 우리는 보이지 않
는 신을 상징하는 중심 천체 주위로 원을 형성하는 거야. 데르비시들이 자기 자신을 축으로
하여 도는 이유는, 마치 항성들이 광대한 우주에서 자전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
어. 한 손바닥은 하늘을 향하게 하고, 다른 손바닥은 땅을 향하게 하는 것도 바로 우리 몸이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축이기 때문이지." "회로를 연결하는 사람이란 말이죠." 테오가 주석
을 달았다. "전기전도체 역할을 하는 금속 같은 셈이지." 나스라가 결론을 내렸다. "내가 강
조하고 싶은 나머지 한 가지는 춤에 앞서 부르게 되는 노래의 의미란다. '이성에게 작별을
고하라. 안녕, 안녕, 안녕....." "아하, 제가 받았던 메시지 내용이로군요." 테오가 기쁜 듯이
말했다. "합리적인 이성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으리라. 전 정말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
요. 다시 한 번 정신을 잃어야 할 판 이로군요." "오히려 그 반대야. 이제 그 정신을 되찾게
될 거야."
별들의 원무
마침내 데르비시들의 춤을 보러 갈 시간이 되었다. 모직 외투로 몸을 감싼 나스라는 도통
말이 없었다. 마르크 고모와 테오는 감히 나스라의 침묵을 깨뜨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테케
입구에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선 채 소리 없이 들어가고 있었다. 내부에 들어
간 사람들은 나무로 조각된 발코니 뒤 제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스라가 마르트 고모와
테오에게 미리 귀띔을 하였다. 자신의 스승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은 자신의 테케가 아
니라고 설명하면서, 나스라 자신은 춤을 추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직 눈과 마음만으로 의식
에 동참한다는 말이었다.
맨발 차림에 팔짱을 끼고서, 등뒤에 갈색 외투를 걸친 데르비시들이 줄지어 입장했다. 지도
스승은 흙 빛깔의 모직 외투를 입고서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나스라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하게 빛났다. "네이라고 하는 갈대피리
야. 데르비시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지. 이별을 서러워하는 내용의 곡이란다."
맑은 비올라의 음색과 둔한 북소리, 심벌즈의 자제하는 음색이 어루러지면서 사마가 시작
되었다. 스승은 마룻바닥의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데르비시들이 한 명씩 차례차례 외투를
벗고서 스승 앞으로 걸어 나와, 각자 원 궤도 위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가 섰다. 어깨가 드러
났다. 모두가 동시에 발을 포개고 나서, 한 손바닥은 하늘로 향하도록 팔을 올리고 다른 손
바닥은 바닥으로 향하도록 팔을 내렸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폭이 넓은 흰
치마가 화간처럼 서서히 부풀었고, 이성에게 작별을 고해야 할 순간이 점차 가까워졌다. 데
르비시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태양 주위를 도는 빛나는 천체이자, 사라져
버릴 운명을 타고난 벚꽃 잎이었으며, 강물 위를 떠내려가는 촛불임과 동시에 부처의 오묘
한 미소이면서 순간적으로 빛을 발하는 섬광이었다. 정신이 멍해진 마르트 고모는 두 눈을
감아 버렸다. 하지만 테오는 한 장면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느리게 돌아가는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한 채, 테오는 마음속으로부터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는 쌍둥이 형제의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피리 소리도 점점 차분해졌으며, 흰 화관도 서서히 오므라들었다. 나스라는 미동도 하지 않
았다. 마르트 고모는 그제서야 감았던 두 눈을 뜨고, 테오의 초점을 잃은 듯한 시선을 응시
했다. "저것좀 봐." 마르트 고모가 나스라를 툭툭 치며 말했다. "테오가 어떤 상태인지 좀
보라니까." "가만히 내버려둬." 나스라가 크게 놀라는 기색 없이 담담히 말했다. "저절로 정
신을 차릴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야 해." 데르비시들이 한 명씩 퇴장하기 시작했다. 별들의
원무는 텅빈 마룻바닥 위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추었다. 테오는 머리카락
을 긁적거리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꿈에서 깨어났다.
"너 어디 갔었어?"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여기에 있었죠. 바로 이 가운데에요. 당연하잖아
요." 테오는 마르트 고모의 질문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투로 대답하였다.
"쌍둥이 형제랑 같이 있었니?" 마르트 고모가 다시 물었다. "네" 테오는 기쁜 듯이 외쳤다.
"안그래도 다시 올 때가 되었는데 하고 생각했었어요." "우린 누구나 양면적이지." 나스라가
말했다. "누구에게나 밖으로 드러나는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이 있거든."
25 말과 글
신비주의자
테오는 아무런 말없이 자리에 누웠다. 마르트 고모도 이불속에 몸을 누인 다음 전등을 끄고
잠들 준비를 하였다. "고모, 얘기 좀 해도 될까요?" "그러렴. 불 다시 켤까?" "아뇨 이렇게
어두운게 더 좋아요. 저어 나스라는 신비주의자인가요?" "확실히 그럴걸. 데르비시인 걸 보
면 틀림없이 그럴 거야.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지?" "직업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을 하지요?" "나스라는 제네바에 있는 국제난민사무국에서 일해. 전세계적의 난민을
돌보고 있는 유엔의 한 분과지." "할 일이 참 많겠네요." 테오도 인정했다. "그렇다면 이스탄
불에서는 무얼 하는 거죠?" "나스라는 휴가를 얻으면 스승을 뵈러 온단다. 하지만 핸드백
속에 늘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지. 나머지 시간에는 대부분 출장을 다녀야 하니까." "그러니
까 신비주의자이면서도 직업을 가질 수 있다. 그 말씀이시죠?" 테오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
정으로 말했다. "전 그러려면 세상과는 아예 단절하고 살아야 하는 줄 알았어요." "이슬람
세계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단다. 신도들의 공동체라는 개념이 워낙 확고하다 보니, 고립
이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지. 가장 훌륭한 기도란 여럿이서 함께 드리는 기도라는 얘길 너
도 들었고, 실제로도 봤잖아. 다른 종교에서는 속세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과 고적한 곳에 칩
거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크리스트교 수사들 가운데에는 수도원에서만
살면서 말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단다. 수녀들의 모임인 몇몇 여성교단들도 마찬가지야.
자기들에게 어울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크리스트교 전통에 따르며, 이런 수
사들을 가리켜 '명상파'라고 한단다. 기도만이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거든." "별로 쓸모가 없
는 사람들이로군요." 테오가 지적했다. " 다른 사람들은 농사일도 하잖아요."
"하지만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단다. 명상파들의 기도는 기들 자신의 이름뿐만 아
니라 '활동파' 들의 이름을 대신해서도 하늘에까지 전달된다고 생각하지. 말하자면 약간 관
점이 다른 공동체 개념이라고 할 수 있어. 각자 신을 위해 맡은 바 본분이 따로 있다는 입
장이거든. 힌두교들을 생각해 보렴. 거리를 배회하는 '고행자' 가 될 수도 있지. 그뿐만이 아
니야. 불교도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수도원이 있고, 도교를 닦는 사람들은 고독한 은둔생활을
즐기지. 하지만 나스라는 달라. 나스라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일이 있어. 이스탄불에서는 신
을 경배하기 위해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고, 다른 곳에서는 직장을 가진 이슬람교도로서
한 남자의 아내이기도 하지." "남편은 무슨 일을 하지요?"
"스위스 출신의 사업가야. 나스라에게 자유로운 생활을 허용해 준 아주 관대한 사람이지. 나
스라가 스승을 만나러 올 때는 절대 따라 나서지 않나 봐." "그래요? 그 남자는 질투심도
없나 봐요." "자기 아내를 그만큼 잘 아는 거겠지. 넌 나스라가 남편 몰래 부정한 짓이라도
하고 다닐 거라고 상상할 수 있겠니? 말도 안 되지." "제 생각에 나스라는 신을 섬기느라
그 남편을 배신하고 있는 거예요." 테오가 단호하게 말했다. "테케에서 나올 때 나스라의 눈
을 보셨어요?" "맙소사,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수백만 명의 독실한 여성신자들이 신을 빙자
해서 그 남편을 속이고 있는 셈이 되겠구나........... 테오 넌 아예 수녀들이 훨씬 낫다는 투로
구나." " 네 그래요." 테오가 동의했다. "수녀들이야 정식으로 하느님과 결혼한 사람들이니까
요. 그런데 고모, 저도 신비주의자라고 할 수 있나요?" "넌 말이지...넌 아주 희한한 녀석이
야. 난 자주 네가 공상의 나라로 떠나는 걸 느껴. 그런데 너, 지금은 정상적인 상태에 있다
고 봐도 되겠니?" "그거야 누가 알겠어요. 그런데 전 공상에 빠져들 때면 기분이 아주 좋아
요. 아참, 그러고 보니 고모한테 굉장한 소식을 알려 드리지 못했군. 제 쌍둥이 형제 말이에
요, 사실 그 앤 여자 아이 에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마르트 고모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큰 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에 그 애가 내 마음속으로 찾아와 말해 주었거든
요." 테오가 평온한 어투로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한테 그 애의 이름을 물어봐야겠어요. 제
생각에는 엄마가 저한테 뭔가를 숨기고 계신 것 같아요. 고모가 보시기엔 안 그래요? 어쩌
면 죽은 사촌 여동생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쓸데없는 소리를 다하는 구나." 마르트 고모는
갑자기 발작적으로 기침을 해대며 가까스로 말했다. "그것도 다 네 병 탓인가 보다." "아이
참, 전 이제 다 나았다니까요!"
마르트 고모는 졸립다고 수선을 떨며 다시 자리에 누었다. 그러나 사실은 새빨간 거짓말이
었다. 테오는 대화를 계속해 나가려고 시도해 보았지마, 마르트 고모는 이내 코고는 시늉을
하였다.
계시
다음날 나스라는 수다쟁이 의사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검사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
는 것이었다. 테오의 병이 갑작스럽게 후퇴했다는 것이었다. 나스라는 이슬람 가르침도 무시
한 체 테오에게 연방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달려가 이 기쁜 소식을 축하할
준비를 하였다. "그것 보세요. 제 말이 맞죠?" 테오도 기쁜 듯이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라마승 감포가 그래서 그렇게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나 봐요. 제가 꿈에서 본 종이는
검사 결과 였었나 봐요." "그만 떠들고 얼른 엄마한테 전화나 하렴." 마르트 고모가 테오를
재촉했다.
통화를 하면서, 테오는 애써 의연한 체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멜리나가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마르트 고모는 갑자
기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엄마, 그러니 대답해 주실 수 있죠?" 테오가 물었다.
"아 그래요? 엄마도 그 애를 아세요? 제 쌍둥이 여동생이라구요? 그건 저도 알아요. 고마워
요. 진짜냐구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잠깐만요.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아, 알겠어요.
아뇨, 대단한 일도 아닌데요. 뭘, 왜 진작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괜히 엄마 혼자서 걱정
만 많이 하셨잖아요. 아뇨, 전 화 나지 않았어요. 아니, 엄마 잘못이 아네요. 울지 마시라니
까요. 엄마도 어쩔 수 없었잖아요. 그럼 또 하나 낳아 주시면 되잖아요. 뭘 하나 낳느냐구
요? 그야 물론 제 여동생이죠."
수화기를 내려놓는 테오의 안색이 약간 창백했다. 마르트 고모의 옆으로 와 앉은 테오는,
고모의 목에 고개를 파묻었다. "제 쌍둥이 여동생은 태어나자마자 죽었대요. 저보다 조금 늦
게 세상에 나왔는데............" 테오가 중얼거렸다. "고모도 알고 계셨어요?" "그래 하지만 난
그 애가 여자아이였는지는 몰랐구나." 마르트 고모가 사실대로 고백했다. "엄마가 너한테 그
렇게 말했니? 그거 잘 됐구나. 이제 테오 너도 왜 네 내부에서 자꾸만 그 애가 속삭이는지,
그 이유를 알았겠구나." "그렇지만 그 애가 자꾸 말을 거는 걸 보면, 그 앤 아마도 죽지 않
은 것 같아요. 아니, 제 말은 완전히 죽은 게 아니라구요." "넌 그러고 보니 놀라는 기색조
차 없구나." "저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구요. 다만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인
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해서 제몸 속에 들어올 수가 있는 걸까요?"
"아프리카에서는 그런 일이 도처에서 일어난단다." 마르트 고모가 대답했다.
"어쩌면 아프리카 사람들이 옳을는지도 모르지." "고모의 생각에는 그 아이가 평생을 저와
함께 할 것 같으세요?" 테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 아이가 있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만, 그래도..........." "네 병이 완쾌되면, 그때는 그 애도 떠나겠지." 마르트 고모가 테
오를 안심시켰다. "아마도 널 도와주려고 온 게 분명해." "그럴 수도 있겠죠. 어제 저녁 그
애는 이미 검사 결과를 알고있는 것처럼 아주 차분했었어요." "자, 그 정도로 해두자꾸나."
마르트 고고가 테오의 말을 가로막았다. "죽은 사람의 세계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면 못써.
그 때문에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거 아냐."
"꼭 그렇진 않아요. 이번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보니까, 어디서나 모두들 죽은 사람에 대
해서 신경을 많이 쓰더라구요. 물론 프랑스는 빼구요. 테아노 할머니만 해도 노상 공동묘지
에 가시는데 우리는 한번도 못 가봤어요. 그렇게 하면 안되지 않을까요?"
"아프리카에 가서 잘 보려무나. 거기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할걸." 마르
트 고모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이스탄불에서는 고무적인 검사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도 없었으나, 파리에
서는 이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10분쯤 후에 제롬은 파리 검사소로부터 테오에게 다시 전
화를 걸어 검사 결과 용지에 나타난 수치를 전부 다 일거 달라고 한 다음, 수다쟁이 의사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검사 결과가 아무래도 미덥지 않으니 다시 한 번 검사를 받아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롬의 제의에, 테오는 수다쟁이 의사가 주사바늘을 잘못 꽂아 시퍼렇게 멍이
든 팔뚝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음으로써 아버지를 굴복시켰다. 점심 식사 무렵에는 누나와
여동생이 기쁜 나머지 또 테오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유명한 관광지로 손꼽히는 이슬람 군
주들의 후궁들이 거처하였던 곳을 구경하고 돌아오니, 이번에는 파투 차례였다. 파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꾸 웃기만 하였다. 행복한 웃음이었다. "왜들 이러는 거죠?" 테오는 어리
둥절해서 반문하였다. "모두들 정신이 좀 이상해진 모양이에요." "조금 지나면 잠잠해질 텐
데 뭘" 마르트 고모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하였다.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이잖니."
"파투는 그렇지 않아요." 테오가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전 지금도 파투가 준 부적들
을 목에 걸고 있는 걸요....." "부적들이라구?" 나스라가 되물었다. "내가 보기엔 네 목에 부
적 하나와 <코란>이 걸려 있을 뿐인데. 그 두 가지는 전혀 다른거야. 이슬람 신앙이 널 보
호해주고 있는 거란다. 테오." "잠깐, 잠깐만요. 전 그런 식의 감언이설은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나스라는 알라의 천국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천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한테 사탕발
림을 해도 좋은거 아니라구요." "저런, 말버릇 한 번 고약하구나." 나스라가 웃으면서 말했
다.
이스탄불에서의 나머지 일정은 감미로운 산책으로 채워졌다. 나스라는 테오와 마르트 고모
를 에이윱 엘 안사르의 성소로 안내하였다. 그곳에서 이슬람교도들은, 니자무딘에서의 신자
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성인의 무덤 벽에 다닥다닥 붙어서 구경에 열중하고 있었다. 비둘
기들은 제단에 바친 음식으로부터 간혹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을 쪼아먹느라 분주했다. 테오
는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알라라고 씌어져 있는 멋진 서첩을 하나 샀다. 그리고 앞이 뾰
족한 배를 한 척 빌려 강가를 유람하며, 물가로 발코니를 낸 오래 된 별장들을 감상하기도
했다. 공동묘지는 매우 시적으로 보였으며, 이슬람 사원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화기애애하였
고, 황새치는 입에서 살살 녹을 듯이 감칠맛이 났다. 수다쟁이 의사와 여러 차례 끝없는 논
쟁을 벌인 끝에, 마침내 제롬의 우려도 진정되었다. 제롬은 테오의 병이 나은 지금, 여행은
이것으로 끝을 내도 좋지 않겠느냐고 제의하였다. 하지만 마르트 고모는 엄격한 태도로 출
발 당시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만일 테오가 이 상태에서 파리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병이 재
발하리라고 마르트 고모는 확신하였던 것이다.
아프리카 이슬람에 대한 논쟁
며칠 후, 마르트 고모는 검은 아프리카로 떠날 때가 되었노라고 선언하였다. "아프리카 이
슬람을 의미하는 거겠지." 나스라가 정정하였다. "세네갈은 이슬람 국가야."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 된 민주주의 국가야." 마르트 고모가 덧붙였다. "이슬람 국가가 아니라 종교색이
없는 나라지." "그럴는지는 몰라도 전국민이 이슬람교도야." 나스라도 지지 않았다.
"그건 사실과 달라. 크리스트교도 있고, 정령숭배자들도 엄연히 존재하니까." 마르트 고모가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그럴 테지. 하지만 세네갈 인구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일 뿐만 아니
라, 그중에서도 수피주의야." "수피주의가 거기에도 있어요? 그러니까 아프리카에도 있단 말
씀이죠?" 테오가 뜻밖이라는 듯이 큰 소리로 물었다. "그래" 나스라가 짧게 대답했다. "글쎄
그렇지 않다니까!" 마르트 고모가 신경질적으로 반발했다. 이윽고 두 친구간에 격렬한 언쟁
이 벌어졌다. 나스라는 세네갈 이슬람교도들이 정통파 수피라고 계속해서 주장하였고, 마르
트 고모는 이름만 수피 일뿐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우겼다. 나스라가 세네갈의 이슬람 이맘
들은 신에 대한 사랑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고 하자, 마르트 고모는 그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말을 제자들의 순종이라는 말로 대체 하였노라고 반격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토론은 격앙
되었다. "이보세요, 여성분들, 이제 그만들 하세요!" 테오가 소리쳤다. "저도 이젠 혼자서도
사리판단을 할만큼 컸다구요. 그러니 제발 그만들 하세요. 아니면......."
테오의 갑작스런 호통에 두 여자는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서로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
다보았다. "하필이면 헤어지기 전날 저녁에 이렇듯 두분 이서 과격분자가 될 필요야 없지
않겠어요?" 테오가 무안한 듯 우물 거렸다.
위기는 모면한 셈이었다. 나스라는 맨발 바람으로 종종걸음쳐 달려와 마르트 고모를 얼싸
안고 화해를 청하였다. "가고 나면 금새 보고 싶어질 텐데 어떡하지?" 나스라는 테오에게도
손을 내밀며 애교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셋이서 참 즐겁게 지냈는데......"
"마르트 고모, 고모도 들으셨죠?" 테오는 기뻐서 외쳤다. "이제까지 만난 분들은 한결같이
그런 말씀들을 하셨어요." "녀석 잘난척은...." 마르트 고모도 밉지 않은 듯이 테오를 바라보
며 중얼거렸다. "너스레 그만 떨고, 이제 병도 나았으니 가서 짐이나 챙기렴."
"나스라는 눈 주위를 미묵으로 단장한 저의 천녀세요." 테오가 나스라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이자, 나스라가 배를 쥐고 깔깔 웃어댔다.
이스탄불에서의 출발도 다른 여느 곳에서의 출발과 비슷했다. 자그마한 체구의 나스라는,
비행기의 날개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공항에서 열심히 머플러를 흔들었다. 처음으
로 마르트 고모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테오는 마지막으로 마르마라 해를 다시 한 번
바라다보았다.
땅콩과 기도
다카르에 착륙한 비행기의 트랩을 걸어 나오며, 테오는 뜨거운 공기가 얼굴에 와 닿는 것
을 느꼈다. "모자 꼭 써야 한다." 마르트 고모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집트에서
처럼 태양열이 뜨거운 곳이야. 자, 빨리 좀 가자꾸나. 약속에 늦겠다."
"남자예요, 여자예요?" 테오가 물었다. "남자. 너도 잘 아는 분이야."
놀라움치고는 아주 기쁜 놀라움이었다. '약속'에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파투의 아버지 압
둘레 다옵 씨였다. 디옵 씨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회색 정장 차림에 넥타이까지 매고서, 테오
와 마르트 고모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떠냐? 몸은 괜찮아?" 디옵 씨는 종잇장처럼 가뿐히
테오를 들어올리며 물었다. "부모님께서 널 잘 부탁한다고 하시더라. 마르트, 당신도 별일
없으시죠?" "네, 아주 잘 지내요. 감사합니다." 마르트 고모가 상냥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가족들도 모두 안녕하시고요?" "네, 덕분에." 디옵 씨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자, 짐을 챙겨 우리 집으로 갑시다.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다카르 시내에는 카프탄[긴소매에, 허리에 띠를 매는 길이가 긴 옷]을 입은 남자들과, 살집
좋은 어깨를 드러낸 부부[밝은 빛깔의 낙낙하고 긴 의복] 차림의 여자들이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 또한 여자들은 머리에 커다란 터번을 두르고 있었다.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땅콩을
볶는 여자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냄비에 뜨거운 모래를 담아, 그 안에서 땅콩을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이 퍽 이색적이었다. 상인들은 플라스틱 물뿌리개와 형광 빛깔의 슬리퍼, 그리고
봉투에 가득 담긴 사과며 모기장, 라이터 등을 사라고 아우성이었다. 교차로가 나올 때마다
측은한 눈망울을 한 어린아이들이 구걸을 하기도 했다. 디옵씨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고,
마르트 고모는 투덜대기 시작했다. "테오, 너도 봤지? 여기서는 저렇듯 어린 거지들을 타리
베라고 부른단다." " '학생'이라는 뜻이지." 압둘레 디옵 씨가 얼른 설명을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쓰는 탈리반과 같은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설마 저 아이들이 길에서 구
걸을 하며 공부를 한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을 테죠?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에요." "물론 아니
죠. 저 애들은 공부를 하는 게 아니지요." 압둘레 디옵 씨도 한숨을 내쉬며 고모의 말을 시
인했다. "그렇지만 우리 수피의 전통이 저런 소수의 방랑아 만으로 요약된다고는 생각지 마
십시오." "참 이상하네요." 테오가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이스탄불에서도 고모랑 고모의 친구 나스라가 비슷한 논쟁을 벌였거든요. 어떻게 된 영문
인지 말씀해주세요. 압둘레 아저씨." "물론이지." 압둘레 씨가 흔쾌히 말했다.
"네 개의 수피 교단이 세네갈을 공유하고 있단다." "그 가운데 하나는 TV에서 봤어요." 테
오가 말했다. "중세인들처럼 차리고 모여 앉아 포도주를 마셨어요. 하지만 잘 되어 가는 집
단 같아 보이진 않았어요." 테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름 그대로 교단이라고 하며, 공통
된 신앙을 중심으로 모인 신자들이 모임이어야 하였다. 물론 프랑스산 포도주를 음미하기
위해 모여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이슬람 신앙은 극보다는 진지한 주제를 가지
고 세계 각국의 신자들을 결집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아프리카의 이슬람 지역에는, 한 명의
지도 스승아래 무수히 많은 추종자들이 딸리는 수피 교단이 상당수 있었다. 세네갈도 여기
에 해당되는 나라로서, 세네갈의 수피 교단은 여러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풀라니
족[페올족]과 투쿨로르족.레부족.만데족.월로프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가장 유서 깊은 카디라야 교단은 바그다드 수피와 같은 계열이며, 12세기에 융성했던 수피
결사집단의 전통을 잇고 있다. 두 번째는 명망 있고 존경받는 '타지안' 교단으로서, 알제리에
서 태어나 모로코의 패스에서 사망한 이슬람 이맘의 지도하에 마그리부 지역으로부터 전파
되었다. 20세기 들어 티지안 교단의 가장 위대한 영적 스승은 말리 출신의 티에르노 보카르
로서, 명철한 생각을 지닌 '반디아가라의 현자'라고도 불린다. 세네갈의 세 번째 교단은 '라
옌'으로서 아프리카가 낳은 새로운 예언자, 즉 신께서 흑인종들을 위해 19세기에 아프리카로
파견하셨다는 세이디나 라예를 추종하는 무리들이다. 마지막 교단으로 말하자면 앞의 세 가
지와는 다른 유형의 것으로서, 아흐마두 밤바는 '무리디스'의 창시자로서, 무리드는 '종교에
대한 갈망'을 의미한다.
마르트 고모는 이 설명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확실히 네 교단의 수장들이 막대한 영
향력을 행사하며 민주 정부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각각의 개인적은 영성에
는 전혀 하자가 없다고 할지라도, 계급체제를 통한 추종자들의 조직력에 있어서는 교단간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무리디스로 말하자면, 교단의 창시자가 프랑스 식민
정책에 대해 최초의 반기를 든 장본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마르트 고모는 지적했다. 그
일 대문에 그는 가봉으로 강제 추방되었으며, 이점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마르트 고모는 강
조했다.
천만의 말씀! 압둘레 씨는 고모의 말에 당장 이의를 제기했다. 아흐마두 밤바에게는 식민
주의에 대항할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그의 유일한 목표는 오로지 추종자 추종자들의 신앙
심을 고취시키는 일이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임종때 그 아들에게 이슬람교도
들의 앞날을 부탁하였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젊은 아흐마두 밤바는 가장 유서 깊은 카디
리야 교단의 대표적 신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명상에만 전념하고자 했던 그는 숲 속으로 들
어가 그 장소를 물색하였다. 그에게는 틀림없이 거룩한 설지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묘한 광선에 이끌려 하염없이 걷다가 바오밥나무 아래
멈추어 섰다. 광선이 바로 그곳에서 멈추었기 때문이다. 나무 그늘에서 그는 자신의 영혼의
중심에 도달하였음을 깨달았다. 그때 비로소 '자기만의' 계시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만족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그의 주위 반경 30킬로미터 범위 내에 있던
농부들까지도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바로 그날 모하메드라고 하는 그의 아들이 태어났
다.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재미있고 신기한 것임엔 틀림없다. 그렇지만 다카르 시내 곳곳에
서 가짜 성자와 협잡꾼들이 득세하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마르트 고모는 반박하였다. 언젠
가 세네갈 친구 한 명이 오래도록 교훈이 될 만한 광경을 보려 주었노라고 고모는 덧붙였
다. 근사한 의식용 부부를 차려입은 가짜 성자 한 명이 길 입구에 들어서자, 그 반대편에 대
기해 있던 세 명의 동료가 그를 보고서 '위대하신 성자님' 하며 몸을 굽혔다. 이를 본 행인
들이 발걸음 멈추자, 가짜 성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장황하게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
기는 돈도 필요치 않으며, 또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는 워낙 부자라서 벌써 세
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있으며, 오직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아낌없이 도움을 주
는 것이 자기 삶의 목표라는 내용이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사람이로군요." 테오가 말했다. "그런데 고모는 왜 그 사람을 비난하시는
거죠?"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가짜 성자는 더도 말고 딱 8명만 자기 곁으로 오라고 하였
다. 그러자 사람들이 재빨리 그 앞으로 모여들었다. 가짜 성자는 그 중에서 8명을 골라 자기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그 사람들 각각에게 축복을 내려줄 테니 돈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손가락. 발가락 하나마다 아프리카 프랑으로 5백 프랑이 공적가격 이었
다. 선택받은 사람들은 그에게 돈을 지불하였다. 그런데 마르트 고모의 친구가 못마땅한 표
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안 가짜 성자는, 그를 따로 지목하고서 '너를 위해 특
별 기도를 올리겠다.'고 말한 뒤, 고모의 친구를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손에 2천 프
랑을 쥐어 주었다. 입을 다물라는 대가였다. 고모의 말이 끝났음에도, 압둘레 씨는 어깨만
한 차례 으쓱해 보일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론 종류의 이야기라면 귀가 닳
을 정도로 여러 차례 들어온 터였다. 사기꾼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이비
성자를 교단을 대표하는 진정한 현자와 혼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압둘레 씨의
입장이었다. 굉장한 특권을 누리며 만인의 숭앙을 받는 이들 현자들은 오로지 교단의 수장
이라는 절대 권위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절대로 돈을 갈취하지 않으며, 제자들은
교육. 지휘하고, 공동체의 복지를 위해 신자들의 돈을 모금할 따름이다. 진정한 세네갈인 이
라면 진실한 현자를 가려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쩌다가 신앙심 없는 멍청이가 있다면, 그
야 본인에게는 안된 노릇이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두 분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고 있던 테오의 귀에, 갑자기 고막을 찢을 듯한 커다란 탐탐
의 리듬이 들려 왔다. 널찍한 대로 한가운데를 누비며, 한 무리의 괴짜들이 하얀 이가 드러
나도록 웃으면서 신명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이 괴짜들은 색색가지 외투를 입고서 목에는
가죽끈 목걸이를 걸었으며,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린 채 겨드랑이에는
곤봉을 끼고 한 손으로는 악기를 두드리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호리병박 바가지를 내밀었
다. 꼬마 악마들처럼 때때로 얼굴을 잔뜩 찌푸려가며 깡충깡충 뛰어다니기도 하였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이네요!" 테오가 외쳤다. "거리의 악사들인가요?"
"아니지" 압둘레 디옵 씨가 대답하였다. "저들은 바이 폴이라고 하는 아주 특별한 무리디즘
의 한 분파란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흐마두 밤바의 제자들이라고 할수 있지." "아니, 왜 사
실대로 말씀하시지 않는 거죠?" 마르트 고모는 몹시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항의하였다.
"바이 폴은 축산업자들로부터 농부들은 보호하는 일종의 종교 용병이 아니던가요?"
참을성 있는 태도로 압둘레 디옵 씨는, 바이 폴에 얽힌 내용은 마르트 고모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설명하였다. 왕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브라 폴이라는 왕자가, 세네갈
어디엔가에 위대한 신비주의자가 칩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왕자는 무려 9년 동
안이나 그를 찾아다녔다. 워낙 남을 돕기를 좋아하는 성품을 지닌 왕자인지라, 마을을 지날
때마다 여자들을 위해 물을 길어 주거나 나무를 베어 주는 등, 때로는 1주일 가량이나 걸려
야 할 일들을 혼자서 거뜬히 해치우곤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다시 현자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이렇듯 힘들게 일하면서 여러 해를 방랑한 끝에 이브라 폴은 마침내 그를 찾아내었
다. 그 장소가 훗날 무리디스의 성지가 된 투바였다. 왕자를 만난 현자 아흐마두 밤바가 '신
에게로의 희귀'라는 뜻을 가진 월로프어를 따서 붙인 이름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다니
던 스승을 만난 이부라 폴은 앞장서서 그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틈입자들의 접근을 막았으
며, 규율을 도입하였다. 그러다가 왕자는 마침내 아흐마두 밤바로부터 아주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즉 그는 기도를 면제받는 대신, 그 시간에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머지않아 그
는 독자적인 제자들을 두게 되었으니 그 제자들이 바로 바이 폴이며, 그의 제자들이 그를
'예언자'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기억해 둘 만하다.
점차 일에 대한 숭배는 열광적으로 변해 갔다. 힘든 일을 해낼 수만 있다며, 바이 폴은 기
도를 면제받는 것이었다. 이같은 특권의 대가로 바이 폴은 천조각을 구걸하여야 했으며, 이
것들을 모아 꿰매면 다름 아닌 수피의 외투가 되었다. 맹목적이라고 할만큼 헌신적인 이들
바이 폴들은 호된 수련과정을 거쳤다. 이들의 중요한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
는 점이다. 이는 세네갈의 오랜 관습과도 일치한다. 이들은 밤이면 입문자들끼리 모여 앉아
수피의 기도문[지크르]을 반복적으로 암송하면서 황홀경에 빠져들기도 한다.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라고 마르트 고모는 반박했다. 바이폴은 오히려 치안유지대를 길러낸
다는 편이 옳은 말이라고 고모는 주장했다. 일에 대한 숭배는 무리디즘의 본질을 이룬다고
말할수 있다. 세네갈의 무리디스는 상당히 교묘한 체계를 고안해 냈다. 일하는 것과 기도하
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굉장한 행운이었다. 제자들과 스승 사이의 협약도 지극히 간
단했다. 스승은 제자들의 구원을 책임지는 대신, 제자들은 스승을 위해 무보수로 일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현금으로 그 대가를 지불 받지 않는 제자들의 무궁무진한 노동력을 이용하
여, 무리디스는 세네갈의 부의 주요 원천인 땅콩 경작을 발전 시켰다. 이어서 이들은 상점을
사들였고, 판로를 확장하였다. 한 마디로 무리디스는 뛰어난 상인들이었다.
이야기가 이쯤에 이르자, 마르트 고모가 기성을 제압한 듯이 보였다. "무리드 체계가 지니
는 경제적 이점을 제일 먼저 간파한 사람들은 프랑스의 식민 통치자들이었죠." 압둘레 디옵
씨가 분개한 듯이 말했다. "그들이 무리디스를 이용해 땅콩 수확에 나선 거였다구요. 이슬람
스승을 그런 일과는 무관했어요!"
"프랑스가 무리디즘을 이용하였다구요?" 마르트 고모가 되물었다. "프랑스인들이 아흐마두
밤바를 추방하였는데요." "그렇게 하였다가 다시 돌아오게 하지 않았습니까." 압둘레 씨가
말했다. "지금 마르트 당신은 식민지 정책과 계시를 받은 한 현자의 신비탐구 과정을 혼동
하고 있어요. 아흐마두 밤바는 진정한 의미의 수피로서, 프랑스 정부와 협력할 것을 거부했
어요. 왜냐하면 수피들은 정치권력에는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죠. 술탄. 왕. 황제. 총독. 대통
령,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아흐마두 밤바는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한 사람인
걸요!" "도대체 누가 그런 얼빠진 소리를 믿는단 말이에요?" 마르트 고모가 투덜거렸다.
"당신 자신이 무리드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거죠?" 압둘레 디옵 씨도 몹시 화를
냈다. 사료가 전하는 내용을 틀렸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한편 제자와 스
승간의 교환체계에 대해서 말하자면, 스승의 입장은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교육이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제자에게 교육을 베풂으로써 스승은 소중한 자산을 물려주는
것이며, 일을 요구함으로써 제자로 하여금 인생을 헤쳐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수련과정 동안 스승은 제자에게 숙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결혼까지 책임졌다. 게다가 스
승은 일하기를 원치않는 제자에게는 일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교단을 구성
함으로써 스승이 되는 이슬람 이맘은, 갖은 폭력과 전쟁으로 시달리는 사회에 질서와 교육
을 부여함으로써 공헌하였다. 이같은 스승 덕분에 프랑스의 식민 정책으로 민심이 동요되었
을 때에도 세네갈인 들은 단결하여 자기들의 토지를 경작하였으며, 지배자와의 타협점을 찾
아 나라의 부를 키워 나갔던 것이다.
"듣고 보니 전부 경제와 관계되는 이야기 뿐이로군요." 테오가 말했다. "도대체 이슬람과
경제가 무슨 상관이죠?" 압둘레 디옵 씨는 마침내 기회가 왔다 싶은지, 마르트 고모에게 신
비주의 경향의 이맘 아흐마두 밤바가 지은 시들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
"<천국으로 가는 여정>이라는 시를 읽어보셨는지요?" 아니라는 고모의 대답에, 디옵 씨는
시를 외우기 시작했다.
"명상의 시간을 연장하게나, 친구여 땅과 하늘, 그리고 별에 대해서 해와 달, 또한 나무들에
대해서 물과 불, 심지어 돌멩이들에 대해서 그리고 밤과 낮같은 다른 모든 만물들에 대해서.
그렇게 하면 마음의 평화와 광명을 얻으리라." 이번에는 압둘레 디옵 씨가 승점을 딴 듯이
보였다. "시를 짓는 거야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마르트 고모가 계속 툴툴거렸다.
"게다가 당신은 신비주의자니까 그 방면에 더욱 조예가 깊으실 테죠." "그렇다면 무리디스
의 성지인 투바에 직접 가보시지요." 디옵 씨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투로 말했다.
"기념비적이라 일컬을 만한 모스크에서 정통 수피 성가를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아흐마두 밤바에게서 영감을 은 시들이지요." "제가 판결을 내리겠어요." 테오가 분연히 나
섰다. "자, 두 분 모두 대답해 보세요. 신도들에게 일을 하도록 하지 않는 종교가 단 하나라
도 있나요?" 침묵이 흘렀다. "그렇지" 압둘레 디옵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단 하나의 예외
도 없이 모든 종교가 그러하지. 하지만 일을 강요하는 종교 또한 하나도 없어. 각각의 종교
는 이처럼 그 나름대로 신에게로 가는 길을 모색하는 거란다." "아니지요" 마르트 고모도
지지 않고 맞섰다. "착취를 위한 도구로 변하지 않은 종교는 없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전
카를 마르크스의 생각과 동감이에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라고 하였거든요. 민중으로
하여금 피땀을 흘리도록 하기 위해 그럴듯한 이야기로 세뇌한다는 말이죠." "그 정도 답변
만으로도 제 생각이 많이 진전됐어요. 자, 이번엔 또 다른 질문이에요. 무리디스는 어떤 점
에서 아프리카적이라고 할 수 있나요?" 두 번째 침묵. "우선 검은 아프리카는 어떠한 초강
력 종교세력하에서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봐야겠지." 마르트 고모가 먼저 답변을 시
작했다.
"세네갈의 여러 이슬람 교단들은 월로프족을 완전히 이슬람화하였어. 월로프족은 교단이 생
겨나기 전에는 땅을 경작하는 일에서만 삶의 가치를 추구했었지. 아흐마두 밤바는 이슬람신
앙을 아프리카에 맞도록 자기 방식대로 약간씩 수정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단다. 그러니까
무리디즘하에서는 월로프족의 전통적 가치가 그대로 살아 있다고 봐야겠지." "제 생각은 조
금 다릅니다." 압둘레 디옵 씨가 설명에 나섰다. "월로프족에게는 계급과 노예가 존재하였지
요. 한 예로 아흐마두 밤바는 딸 자나이다를 일부러 노예 출신에게 시집보낸 예언자 마호메
트를 본받으려다 큰 곤혹을 치렀습니다. 무리디스로부터 원성이 높자, 아흐마두 밤바는 이슬
람이 추구하는 평등원칙을 상기시켰지요. 다음날 아흐마두 밤바는 하위계급에 속하는 일단
의 사람들을 지도급 인사로 격상시켰습니다. 말하자면 아흐마두 밤바는 평등을 모르던 월로
프족에게 평등의 개념을 일깨워 준 장본인인 것입니다." "제가 요약해 보겠어요." 테오가 말
했다.
"'세네갈의 이슬람= 수피+계급+노예+땅콩.' 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아프리카에 계
급과 노예가 존재하였다니오?" 테오는 이로써 백인종이 아프리카에서 노예제도를 고안해 내
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월로프족의 사회는 귀족과 자유민. 노예로 구성
된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가사노예는 그 안주인의 소유로서, 주인집 가족과 함께 살았으나
천대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깥주인 소유의 노예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었으며, 신분
상으로 볼 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한편 족장의 노예들은 전쟁터까지 족장을 수행
하며 전리품을 배당 받았고, 마을을 노략질 할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이들 때문에 '자유민
'인 농부들은 불행하게도 파렴치한 무장 노예들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이러한 체제를 유럽 봉건사회와 비교해 볼 수도 있겠지." 디옵 씨가 덧붙였다.
"농민은 그 영주에게 복종하는 '농노'에 해당되지. 여기에다가 바깥주인 소유의 노예까지 합
하면, 이슬람을 통해 평등을 찾게 된 두 부류의 가엾은 사람들이 누구였는가를 잘 알 수 있
을 거야." "그보다 더 고약한 경우가 있었어요." 마르트 고모가 다시 나섰다.
"아프리카의 군주들은 주민들을 강탈해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지요. 이런 사람들이 없
었더라면, 백인들이 흑인들을 사고 파는 일로 돈을 벌 생각은 하지 못했을 거라구요. 바로
이들 아프리카 군주들이 백인들에게 현지에서 물품을 조달한 사람들 이라니까요." "유감스
럽지만 그건 사실입니다." "아프리카를 정복한 이슬람의 결정적인 결함이, 바로 19세기까지
지속된 흑인 노예무역 이었습니다. 노예들을 근간으로 세워진 아프리카 왕국이 무수히 많았
지요. 현재의 세네갈 남부로부터 사하라 사막에까지 이르던 광대한 영토의 가오 제국이며,
황제인 콩고 무사가 어마어마한 수의 흑인 노예를 이끌고 순례 여행길에 올랐던 말리 제국..
이들은 노예를 말과 바꾸거나 밭일에 동원하였습니다. 우리는 백인들이 우리 흑인들을 강제
로 끌어갔다고 비난하지만, 사실상 아프리카 스스로도 얼마간의 수치심을 느껴야 하지요. 저
도 그 점은 인정합니다."
시체의 후손
이윽고 디옵 씨댁에 도착하였다. 열대식물들 사이에 숨어 있는 백색 주택이었다. 압둘레
디옵 씨는 테오를 식당으로 떠밀 듯 서둘러 안내하였다. 머리에 터번을 두른 세 명의 여인
이 벨벳 소파에 앉아서 조용히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와 작은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안타입니다." 디옵 씨는 여인들을 마르트 고모에게 차례차례 소개하였다. "애들은 자
러 갔나?" "네, 하지만 아직 잠이 들지 않았을 거예요." 가장 젊어 보이는 여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미나타는 특히 잠자는 데 애를 먹어요. 요즈음 한창 새이가 나거든요."
"그 나이엔 당연한 일이지." 디옵 씨가 대꾸했다. "만일 울거든 이리로 데려와, 안타."
오가는 대화가 소박하면서도 가정적 이어서인지, 테오는 금새 자기 집에라도 온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디옵 씨는 잠시 자리를 떴다가 백색의 멋진 부부를 입고 다시 나타났다. 발에는
옷과 아주, 잘 어울리는 가죽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휴우.....저녁 준비는 어떻게 되었나
요?" 그가 풀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나이든 디옵 씨의 어머니가 말없이 위엄 있게 일어나시
자, 앉아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수북히 담긴 조 쿠스쿠스와 양파
소스를 곁들인 닭구이, 삶은 채소. 테오는 몹시 식욕이 동하였다. 여자들은 별 말이 없었다.
그나마도 아주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기만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르트 고모까지 그 여
인들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었다. "한 가지 여쭈어 볼 게 있어요." 테오가 음식 접시에서 눈
길을 거두며 말문을 열었다. "조금 전 세네갈의 계급제도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으셨어
요. 세네갈도 인도와 비슷한가요?" 테오의 질문에 디옵 씨는 한쪽 눈썹을 찌푸렸고, 작은어
머니라는 분은 당황한 나머지 들고 있든 포크를 떨어뜨렸다. 아미나타의 어머니는 아기가
운다면서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러더니 잠시후 아이를 안고서 다시 자리에 와 앉았다. "괜
찮다면 그 이야기는 저녁 식사를 끝낸 연후에 하도록 하자." 다옵 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설명하려면 좀 길거든." "네, 그러세요." 테오가 대답했다. "그런데 디옵 아저씨 가족은
무슨 계급에 속하세요?" "제발 그만 두라니까." 마르트 고모가 작은 소리로 테오를 나무랐
다. "어머, 아기가 참 예쁘네요. 지금 몇 살이죠? 몸무게는 얼마인가요?" 화제는 곧 아미나
타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졌다. 졸린 눈을 깜빡이면서 새로 나오는 치아 때문에 입을 뾰로통
하게 내민 여자아이는, 주위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어른들에게 눈길을 주긴 하였으나
실제로 쳐다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의 어머니가 겸손한 태도로 미소짓는 모습이 몹시
보기 좋았다. 테오는 아이의 귀여운 모습에 이끌려 계급제도에 대한 질문을 까마득히 잊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후식으로 수박과 계란 푸딩이 나왔다. 세 여인은 아미나타를 재우러 가
고, 압들레 디옵 씨는 다시 소파로 옮겨앉았다. "자, 이젠 우리의 얘기를 해볼까?" 포만감에
찬 한숨을 내쉬며 압둘레 씨가 말했다. "세네갈 사람들은 계급 문제를 들추어내는 걸 달가
워하지 않지." "특히 애송이 '투바브'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단다." 마르트 고모가 덧붙였다.
"투바브란 바로 저를 가리키는 건가요?" 테오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혹시 '바보. 머저리'
라는 뜻인가요?" "투바브란 외국인은 가리키는 말이야. 유럽 백인을 뜻하는 말로 널리 사용
되지." 디옵 씨가 웃으면서 설명하였다. "고모의 말씀대로 우리 세네갈 사람들은 외국인 앞
에서 계급제도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아주 드물지. 게다가 이론상으로는 계급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아직도 어느 정도 통용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 "어느 정도라구요?" 아기를 재우고 난 안타가 소파에 와 앉으며 대화 속
에 끼어 들었다." "오빠는 파리에서 일하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테지만, 저는 여기서
사니까 그와는 달리 얻어듣는 얘기가 많답니다. 사회학자나 역사학자 등의 근사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그리오 집안 딸들에 대한 험담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요. 제 강의에서만 하더
라도, 전 계급제도의 부당성을 납득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어요. 그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또한 제 의견을 설명하고, 옳지 않다 싶은 점은 비판하지요. 나날이 노력을 더하
여 가지만, 그게 과연 소용이 있을는지는 미지수예요." "안타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교수랍니다." 디옵 씨가 말했다. "테오에게도 설명해 주렴. 아무래도 네가 나보다 훨씬 잘할
것 같구나."
계급제도는 아프리카의 상당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는 말로 안타는 설명을 시작하였
다. '높은' 계급에 대해서는 감히 이름조차 붙이지 않았다. 한쪽에는 자유민들이 위치해 있었
고, 다른 한쪽에는 가장 천대받는 집단, 즉 대장장이. 도공. 신기료장수. 세공사. 직조공. 그
리오 등, 처녀들이 결혼 상대자로 매우 수치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오
라면 노래를 부르는 일종의 마술사들을 말하는 거지요?" 테오가 물었다. "파투에게서 들었
어요. 아주 재미있는 사람들 같던데요."
그리오는 아닌게아니라 매우 특별한 경우에 해당되었다. 우두머리들의 영광스러운 족보를
알리는 역할을 맡은 그리오들은, 마치곡마단의 바람잡이들처럼 추운 집 밖에서 손님을 끌어
모으는 데에만 필요하기 때문에 집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는 처량한 사람들이었다. 때로는
음유시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거리의 곡예사 노릇도 하며, 저자거리의 약장수처럼 여러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 이들 그리오는, 자신의 악기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불
러가며 사람들을 끌어 모으지만, 정작 집안에 들어갈 권리도 땅에 매장될 권리도 없는 사람
들이었다. 그리오들은 땅 속에 묻힐 수가 없었다. 그러한 까닭에 커다란 바오밥나무 구멍에
그 시체를 일으켜 세운 뒤, 진흙으로 덮어씌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세상에" 테오가 언짢은
마음에 혀를 찼다. "요즈음에도 그렇게 하나요?" 오래 된 이 관습은 민주주의에 밀려 퇴보
하였으며, 그리오 역시 신분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전시회를 개최할 경우, 그리오들은 당당
히 그 맡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외에도 공식적인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그
리오들이 나타났다. 예전의 다양했던 기능에 비해 지금은 군중들 앞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찬가를 부르는 것만으로 그 역할이 축소되긴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들의 존경을
받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것 참 이상한 얘기로군요" 테오가 놀라는 눈치를 보였다.
"존경한다면서 왜 천민계급으로 못박아 도외시하였죠?" "그리오의 근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
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단다." 안타가 말했다. "그리오 중에서도 가장 신기한 전설을 지닌 부
류는 니욜이라고 하는 부류지. 이 니욜들은 그리오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급으로 분류해야
할지, 혹은 그보다 한 단계 높여 주어야 할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전설 자체는 굉장
히 흥미진진하단다. 너도 알아두면 좋을걸." "그렇게 궁금증만 더하지 마시고 어서 얘기나
해주세요." 테오가 어린아이처럼 졸랐다.
"어느 날, 아마 사헬지대에서 일어난 일일 거야. 어떤 남자가 갑자기 병이 났어. 무슨 병인
지도 도무지 알 수 없었고, 그러니 아무도 그 병을 고쳐 줄 수가 없었지. 남자는 점점 야위
어 갔고, 마침내 죽고 말았지. 그렇게 되자 이웃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여들었지
그런데 이들은 죽은 사람의 성기가 정상적이지 않은 걸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단
다." "왜요? 더러웠나요?" 테오가 물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안타는 무안한지 머뭇
거렸다. "발기 중이었거든. 사람들은 그 남자의 아내가 아주 미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고들 하였지. 그때 한 노인이 남자의 아내에게 작별 인사도 할 겸 마지막으로 남편의
시체와 정사를 하도록 충고하였지. 남자의 아내는 순순히 그 말에 따랐어. 그렇게 하자 모든
것이 순조로워져서, 사람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사히 죽은 사람을 매장할 수 있었지.
그렇지만 죽은 남자의 아내는 그 일로 임신을 하게 되어, 딸 하나 아들하나 이렇게 쌍둥이
를 낳았어." "둘 다 살았나요?" 테오가 물었다.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이 믿기지 않은 기적에도 불구하고, 쌍둥이의 출생은 아무런 어려
움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쌍둥이는 성장해서 결혼도 하고, 자손 또한 번창하였다. 그
러던 어느 날 월로프족은 시체와의 정사로 인하여 태어난 후손들에게 내려진 엄청난 저주를
확인하게 되었다. 숨을 거두자마자 이들의 시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부패해 버리는 것이었
다. 우선 피부가 보기 흉하게 갈라지고, 이어서 살이 썩어 들었다. 그리오 들은 완전한 인간
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다른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이들 '시체의 후손들'과의 결혼
을 철저히 금지하였다. 죽은 그리오 들은 서둘러 바오밥나무 속에 가두고 진흙으로 발라 버
리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풍습이었다. "우웩!" 테오가 눈살을 찌푸리며 구역질나는
시늉을 하였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어째 찜찜한데요." "혹시 다른 얘기 생각나는 거 없
니?"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별로 없는데요. 아니, 있어요. 오시리스의 죽음과 비슷해요. 가
엾은 이시스는 영영 오시리스의 남근을 발기시킬 수가 없었다는 점만 다르구요."
안타는 믿을 만한 학설에 따르면, 아프리카인의 조상은 다름 아닌 이집트인들이었다고 말
했다. 이들이 바로 검은 아프리카의 조상이었으며, 그들 역시 흑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세네갈 종족들은 이집트로 떠났다. 산 넘고 사막을 건너 이들은 검은 대륙을 가로
지르는 대행진을 시작하였다 인도양으로부터 대서양 쪽을 향해 이동하면서, 이들은 아프리
카의 한끝 브라질과 마주 보는 곳에 이집트인의 터전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발기
중인 그리오의 시체에 얽힌 일화처럼, 아프리카 신화에 이집트적인 요소가 간간이 등장한다
고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리오의 경우는 대장장이. 도공. 신기료장수. 세공사 등, 다른 천민들이 모
두 손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 장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더욱 특수하게 여
겨진다. 그들은 한결같이 뛰어난 기술자인 반면, 그리오는 오로지 찬가를 부르는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간혹 이들 중에 뛰어난 목소리와 타고난 감수성을 지닌 우수한 예술가
로 인정받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저주받은 자의 신분을 답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우두머리를 따라 전쟁터에 나갔다가 전사하는 그리오들도 있었으나,
그런 경우에도 정상적인 매장을 바랄 수는 없었다. 이들 또한 여느 그리오들처럼 바오밥나
무에 갇히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압둘레 디옵 씨는, 이슬람 신앙은 이 모든 계급사상을 거부했노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였
다. 모든 신자들에게는 차별 없이 똑같은 무덤에 묻힐 권리가 허용되었고, 그리오들 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도 배우들은 카톨릭 묘지에 묻힐 권리가 없었지." 마르트 고모도 거들었다.
"교회의 이 같은 금지 수칙은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단다. 대혁명 이후로 계급이 사라진지 이
미 오래 되었는데도 말이다. 그렇지만 지금 말씀하신 그리오 이야기는 제게는 그다지 설득
력이 없어 보여요. 제가 보기엔 이건 단순히 말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 같
아요. 그리오나 배우는 그 점에 있어서 모두 똑같은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언어를 구사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은 모두 위험한 존재로 간주되었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슬람은 시인들
을 존중하는 종교지요." 압둘레 씨가 말했다. "정말 그럴까요? 20세기가 끝나 가는 마당에,
작가 살만 루시디에게 파트와[이슬람교의 법률 권위자가 개인이나 재판관들이 제기한 질문
에 대해 밝히는 공식적인 법적 견해. 파트와는 보통 경전의 해석이나 판례집 외에<코란>과
하디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내릴 수 있으며, 문제가 된 법적 사건에 대한 최종 판결일수
도 있다]를 내린 사람들이 누구였던가요? 제 말대로 언어를 수단 삼아 일하는 사람들은 묘
한 두려움을 야기시키는 게 분명해요.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플라톤은 도시에서 시인
을 추방하려고 했었죠. 이외에도 시인들의 입을 봉하고자 하는 시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어
요. 어느 종교든 자기네들이 언어를 독점하지 못할 경우, 이를 구사하는 다른 사람들을 박해
하기 마련이죠. 전 그리오를 배척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봐요." "그런데, 이 그리오
들을 불명예로부터 복권시켜 줄 만한 이야기도 있어요." 안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압둘 오
빠도 생각나실 걸요. 젤와르 신화 말예요." "공주와 그리오, 그 이야기 말이지." 압둘레 씨가
말을 받았다.
세네갈을 구성하는 여러 종족 중에서, 세레르족은 외국 출신의 혈통으로 왕가를 수립한 유
일한 민족이다. 타 지역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젤와르들이, 14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세레르
족 영토에서 지배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들의 혈통은 수치스러움으로 얼룩
져 있었다.
13세기 무렵 한 공주가 살았는데, 이 공주는 말리 제국 대와의 딸이었다. 그런데 공주의 뱃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는 누구의 자식일까? 공주의 약혼자? 이복동생? 어쨌든 공주의 부
친인 대왕은 딸의 임신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태어날 아기는 사생아가 될 공산이
컸다. 이에 수치스러움을 이기지 못한 공주는 동이 트기 전, 절구에서 조를 빻는 둔탁한 소
리에 온 마을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도망을 쳤다. 하지만 공주는 혼자가 아니었다. 공주를
흠모하던 그리오 한 명이 동행하였던 것이다. 혹시 그가 바로 태어날 아기의 아버지였을까?
그렇지만 이를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 어찌되었든 두 도망자는 4백 킬로미터를 달려온 끝
에,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있는 석조 동굴로 몸을 피할 수가 있었다. 7년 후 이 지역의 사냥
꾼들은 공주와 그리오, 그리고 그 딸들을 발견하였다. 그 사이에 두명의 아기가 태어난 것이
었다. 이일은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사냥꾼들은 이들 도망자 가족이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오히려 이를 신의 가호로 간주하였다. 그리하
여 공주는 여왕으로 즉위하였으며, 젤와르 왕가를 세웠다. 젤와르는 '수수께끼'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공주를 흠모하던 그리오는 어떻게 되었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가 없
었다. 오직 용감한 공주만이 백성들의 경탄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오랫동안의 잠적, 동굴
이라는 피신처, 사냥꾼들에 의해 기적적으로 발견된 점, 이 모든 요소들이 흔히 신비스러운
출현 앞에서 느낄 수 있는 무궁무진하게 호기심을 충족시켰으며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그렇
다고 해도 왕가의 초대 여왕이 낳은 자식들은 사생아, 아니 그리오의 자식이라는 사실까지
소멸되지는 않았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로군요." 마르트 고모가 그 소감을 피력하였다.
"그리오가 중간에서 사라진게 좀 유감스럽긴 하지만요." "그래도 자기의 소임을 다하였잖아
요."
안타가 대꾸했다. "공주의 몸 속에 언어의 재능이라는 씨를 뿌렸으니까요, 그 이후로는 시체
가 즉석에서 부패하는 일이 없어졌대요. 공주가 그리오를 깨끗이 순화시켰다고들 하지요. 젤
와르 왕가의 여자들은 언제나 굉장히 강력한 권능을 지닌 여왕들이었거든요."
탐탐의 소리와 말의 힘
"오늘날 세레르족은 어떻게 되었지요?"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일부는 카톨릭으로 개종하
였으나, 대다수는 이슬람교도로 남아 있지요." 안타가 대답하였다. "그렇지만 카톨릭이건 이
슬람이건, 그들에게 있어서 고대종교들이 완전히 그 영향력을 잃어버린 건 아니죠. 바이 폴
월로프족만 하더라도 그래요. 그들이 불 주위에 모여 앉아 온 정신을 집중해서 성가를 부를
때를 한 번 보세요. 그 넋을 놓은 듯한 시선이라.... 탐탐 덕분에 그들은 아프리카 리듬을 이
슬람에 접목시킬 수가 있었지요. 이 리듬 덕분에 그들이 아프리카 특유의 황홀경을 지켜 나
갈 수 있나 봐요." "황홀경이 무슨 말이에요?" 테오가 물었다. "깨어 있는 것과 꿈을 꾸는
것, 이 중간쯤에 해당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야." 마르트 고모가 말했다. "그런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의식을 잃고 몸이 떨리며,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춤을 추기도 하고, 또
춤을 추다가 갑자기 쓰러지기도 한단다. 네가 네 자신이면서 동시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거라고 할 수 있어." "우리 반에 간질 환자가 한 명 있거든요." 테오가 중얼거렸다.
"한 번은 그녀석이 쉬는 시간에 발작을 일으켰어요. 그런것도 황홀경에 빠졌다고 할 수 있
나요?" "전혀 아니지. 간질은 뇌의 균열로 인한 질환이야. 완쾌되는 경우란 거의 드물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약을 복용하면 어느 정도 상태를 조절할 수는 있지. 그런데 네가 황홀경에
빠져드는 건 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야. 넌 다만 의식의 다른 단계로 들어가는 거니까.
그럴 땐 약도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네 병이 저절로 낫게 되는 수가 있지."
"왜, 자꾸 저를 지목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테오가 근심 어린 투로 물었다. "제가 언제
그런 상태에 빠져들었던 적이라도 있나요?" "물론이지. 룩소르에서 그랬었잖아." 마르트 고
모가 기억을 상기시켰다. "아하, 그때 그 일 말이죠?" 테오도 생각난 듯 소리쳤다. "그렇다
면 제게도 아프리카의 피가 흐르고 있는 모양이죠?" "절대로 그렇지는 않아." 마르트 고모
가 노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별 소리를 다하는 구나." "전 왜 테오를 나무라시는 건지 모르
겠군요." 압둘레 씨가 참견을 하였다.
"어째서 테오에게 아프리카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다는 건지도 이해하지 못하겠구요. 저는
아메리카. 아시아, 그 어느 곳을 막론하고 가는 곳마다에서 황홀경 상태가 있음을 목격하였
어요. 제가 보기에 그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벌써 테오도 경험한 적이
있으니, 마르트 당신도 언젠가는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서양에서는 그러한 현
상을 보신 일이 없을 거라고 전 확신해요. 안타 말이 맞아요. 아프리카식 황홀경은 아주 특
별한 현상이에요." "불쾌해하지 않으신다면, 전 그 의견에 반대하고 싶습니다." 압둘레 씨가
점잖게 마르트 고모의 말을 반박하였다. "유럽에서 열리는 테크노 음악 콘서트에서도, 아프
리카에서 버금가는 황홀경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는 저도 전적으로 동
감이에요." 테오가 참견하고 나섰다. "하지만 마르트 고모는 테크노 음악의 테자도 모르시는
분이거든요." "야만인들의 음악이지." 마르트 고모가 투덜거렸다. "마르트 당신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다니 뜻밖이군요." 압둘레 씨가 놀리듯 말했다. "그런데 이곳 다카르 교외에서
만도, 유럽 여자들이 세네갈의 오랜 예식을 보다가 황홀경에 빠져드는 일이 자주 있다는 사
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프랑스에서도 분명히 이런 일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동생 분께서
도 분명히 아프리카식 황홀경이 있다고 말씀 하셨잖아요. 제 귀로 똑똑히 들었다구요. 무슨
뜻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가요, 안타?" "글쎄요." 안타는 어쩔 줄 몰라하며 우물쭈물 대꾸
했다. "우리들은 서구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춤을 추거든요. 리듬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것 보세요." 마르트 고모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테크노 콘서트에서 비실비실 술 취
한 듯 꿈틀거리는 허여멀건 한 아이들의 춤과, 당신네들의 춤다운 춤하고는 비교할 생각도
마세요." "황홀경에 이르는 방법은 물론 지역에 따라 다를 테지요." 압둘레 씨가 침착한 어
조로 말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예요. 몸은 서로 다르게 생겼을지라도, 일단 황홀경에
빠지면 눈이 뒤집힌다는 사실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아프리카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
겠지요. 그건 무엇 때문일까요? 춤을 추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탐탐의 소리겠지요. 아
프리카 식은 결국 리듬에서 그 특징을 찾아야 할 거예요." "겨우 그것뿐이에요?" 테오는 실
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는 암탉의 피나, 캄캄한 밤 모닥불 주위에 떼지어 둘러앉은 가
면들의 무리, 주술, 그리고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어떤 희한한 일들을 상상했어요.
파투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었거든요." "참으로 그 애다운 얘기야." 압둘레 씨는 잠깐 딸을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언제나 비밀인 양 말하기를 좋아하지. 아닌게 아니라 다른 요소들도
개입된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테오 네가 상상하는 그런 것들은 아니야. 리듬 외에 또 한 가
지 중요한 요소는 말이란다. 아프리카 전통사회에서는 말이 곧 행동이었지. 말은 어떠한 메
시지를 전하는 도구가 아니라 말 그 자체가 세상을 재창조하고, 우리 인간들을 끊임없이 새
롭게 탄생시킨단다. 경전들은 명령을 내리지. 그렇지만 말은 이와는 다른 거야. <코란> 이
나 <성서> 같은 위대한 경전들은, 그것들이 지닌 크나큰 가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지는 못하지. 아프리카 사람들이 예언자 마호메트나 예수에게 아무리 기도를 드려
도 소용이 없단다. 이들을 고쳐 주는 건 오직 이들이 신용하는 원초적인 언어뿐이니까." "전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도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 "벌거
벗는다는 것은 말이 없음을 뜻한다." 압둘레 씨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졌다. "요즈음에도
말리 출신들은 반디아가라 절벽 위에서 이런 말을 한단다." "그렇다면 제가 말을 하면 전
옷을 입는다는 건가요?" 테오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죄송해요. 전 지금 몹시 졸려요. 졸리
니까 이렇게 아무 말이나 마구 지껄이게 되는 거예요...." "어서 가서 자렴." 안타가 단호하
게 말했다. "압두 오빠가 거창한 얘기만 늘어놓아서 테오를 졸립게 만든 거라구요. 테오, 내
게 기대렴. 네 방은 여기서 아주 가까워." "중요한 건 테오의 말이 백번 옳다는 점이지요."
압둘레 씨가 멀어져 가는 테오를 바라보며 결론짓듯 말했다.
26 조상들의 삶
슬픈 아프리카
다음날 테오 일행은 이슬람 대사원, 카톨릭 대성당, 이슬람 소사원 등 시내 일주를 하였
다. 하늘은 창백해 보였고, 태양은 차가운 백색으로 얼어붙었으며, 바다는 잿빛이었다. 멀찌
감치 떨어진 섬에 분홍빛 지붕을 얹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 광경이 테오의 시선을 끌었다.
"저기가 바로 고레 섬이야. 흑인 노예무역의 상징적인 장소지." 마르트 고모가 말했다.
"저긴 나중에 가보도록 하자. 테오." 압둘레 씨가 이론의 여지가 없도록 단호하게 못박았다.
"난 네가 우리들의 아프리카를 우선적으로 이해하였으면 좋겠구나. 어떤 상태로 우리가 다
른 곳으로 끌려가게 되었는지를 볼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거야." "그럼 우린 내내 다카르에
머물러 있을 건가요? 하지만 여긴 프랑스의 여느 도시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걸요. 그래서
여쭈어 보는 것예요." "시청이며 역사. 병영 등, 도청 소재지가 될 만한 요소는 모두 갖추었
지. 프랑스인들이 다카르를 건설하긴 하였지만, 우리가 이 도시를 우리 식으로 길들였지."
무심하게 부부나 카프탄을 걸친 사람들이 인도를 미끄러지듯 바쁘게 왕래하고 있었다. 어
디를 보아도 벌집처럼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앵무새와 가면. 부적을 파는 상인들
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가로수가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대로변에서 쉴새없이 일을 하
고 있었다. 파투가 말하던 아프리카와는 거리가 멀었다.
파투는 바오밥나무와 말뚝 위에 세워진 오두막집, 선수 쪽에 커다랗게 눈을 그려 넣은 카
누, 조개무지[패총], 하늘을 날아다니는 펠리칸, 또 바오밥나무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리
고 파투는 토지의 붉은 빛과 바나나나무의 초록빛, 사향망고의 독특한 맛, 해변의 백사장,
바오밥나무의 흰색줄기에 대해서도 상세히 묘사하였다. 반쯤 눈을 감은 파투는 신령처럼 떠
받들어지는 나무들과 낚시에서 돌아오는 어부들, 소나기가 몰아치기 전 검은 먹구름을 얼룩
말 무늬로 갈라놓는 번갯불의 장관을 그리워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또다시 바오밥나무에 대
해 이야기하곤 하였다. "알았어요. 파투의 얘기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재미있어요." 테오가
말했다. "그런데 바오밥나무는 어디에 있죠?"
줄지어 늘어선 트럭들 틈을 비집고 요리조리 빠져나가 일행은 나무를 보러 갔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가로수가 늘어서 있지도 않고,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상점들도 거의
없는 밋밋한 교외 마을을 통과하여야 했다. 그리고 강아지를 붙잡기 위해 갑작스레 찻길로
뛰어 나오는 어린아이들을 비켜 가는 요령도 필요했다. 여행객들을 잔뜩 태운 채, 문이란 문
은 모조리 열어젖뜨리고 달리는 소형 승합차 때문에 길이 막혀 한동안 열어젖뜨리고 달리는
소형 승합차 때문에 길이 막혀 한동안 길바닥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발이 묶이기도 하였다.
백로들이 유유자적 먹이감을 사냥하는 안개 낀 호숫가를 지나고, 소금을 만드는 염전만이
군데군데 마련되어 있는 황량한 지역을 지나기도 하였다. 여린 나뭇잎들이 휘휘 늘어져 있
는 오솔길 가에서는 산처럼 쌓인 망고와 이상스런 모양의 찻봉지, 각양각색의 대바구니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조랑말과 나귀가 끄는 소형 마차에는 어린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금빛의 탐스런 열매를 주체하지 못하는 듯한 망고 과수원도 보였다. 그리고 멀
찌감치서 수상한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하고 육중한 몸집에 제멋대로 뒤엉킨 팔 때
문에 혼란스러워 보이는 유령의 숲 같았다. "저게 바로 네가 찾던 바오밥나무야." 마르트 고
모가 말했다. "저게요?" 놀라서 소리쳤다. "저렇게 못생기고 헐벗은 나무가 바오밥이라구
요?" 순간 압둘레 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자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내면서 자동차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우리 나라에서는 바오밥을 무척 신성시한단다." 압둘레 씨가 말했다.
"바오밥나무의 껍질은 밧줄을 엮는데 쓰이고, 잎으로는 소스를 만들지. 열매는 마치 껌처
럼 부드럽고 연한 점액질의 과육으로 꽉 차 있어. 빨아먹거나 물에 담갔다가 먹으면 아주
별미지. 이제 한1주일쯤 지나면 바오밥나무 꼭대기에 잎사귀가 무성히 돋아날 거야. 그때가
되면 지금은 이렇게 보기 흉한 벌거숭이 나뭇가지 끝에도 물기를 잔뜩 머금은 하얀 꽃들이
조랑조랑 매달릴 거야. 이 나무줄기의 껍질은 지나간 시절의 자취를 충실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어쩌다가 그 둥치를 베게될 때에는 우유를 부어 주어야만 화를 면할수 있단다."
"제가 큰 실수를 한 거로군요." 테오가 무안해하면 말했다. "실수는 무슨...." 압둘레 씨가 대
꾸하였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모든 사물들을 관찰하는 눈이 필요하지. 테오 넌 바오밥
나무도 감상할 줄 모르는데, 우리 나라 촌락들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는지 궁금하구나." "저
기저 큰 나무는 혹시 그리오의 무덤이 아닐까요?" 테오가 아주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물
었다. "그야 알 수 없지." 압둘레 디옵 씨가 장난기 있게 웃었다. "우리 나라처럼 야만인들
이 사는 나라에선...."
테오는 입을 다물었다. 대지는 건조했고, 바닥에서는 먼지가 풀풀 일었으며, 하늘은 불타
듯이 뜨거웠다. 바오밥나무는 무시무시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행인들은 인도에서처
럼 목에 천을 감고 있었다. 먼지 나는 길가를 딸 여자들이 부부자락을 바람에 내맡긴 채, 머
리에는 짐을 이고서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테오는 순간적으로 목이 메었다.
"8월에 비가 오면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단다." 압둘레 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가 되면
세네갈은 온통 연둣빛으로 뒤덮이지. 꽃들이 만해하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거야.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떠다니고, 소나기가 지나가고 난 후의 청명함을 되찾게 되지." "아닌게 아니라
이 고장은 몹시 건조하군요." 마르트 고모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 그럼 바오밥나무
숲으로 들어가 볼까? 보여줄 게 있어." 압둘레 씨가 제안하였다.
세계의 씨앗
숲에는 잎사귀라고는 없었다. 따라서 몸을 피할 만한 곳도 그늘도 없이 사막에 동그마니
떨어진 마법의 숲 같았다. 염소들은 키 작은 관목 덤불을 우물우물 씹고 있었으며, 옆으로
길게 누운 혹소들은 하루가 저물어 가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압둘레 씨는 그 거대한 줄기
가 약간의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바오밥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일행은 그곳에 앉았다.
마르트 고모는 손수건을 꺼내 깊게 파인 옷 밖으로 드러나는 부분의 땀을 닦았다. "여긴 이
렇지만 산에 쌓이는 눈 때문에 고생하는 지역도 있단다." 압둘레 씨가 말했다.
"우리 세네갈은 모래 천지야. 거의 20년 동아이나 비각시가 우리를 아예 잊고 있었단다.
사헬 지대가 야금야금 습한 땅을 잠식해 갔지. 그러다가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 이제 2
개월 후에는 씨를 뿌릴 수 있을 거야. '씨앗은 생명이다.' 사헬지대의 주상들이 우리에게 늘
그렇게 말했지. 사헬 지대 중에서도 특히 도곤족이 즐겨 쓰는 말이란다."
그 고장에는 마을들이 주로 바위구릉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또한 지대가 너
무 높아서, 물을 길러 낮은 곳으로 내려오려면 깎아지른 듯한 계단을 통과하여야 했다. 그러
나 이들은 조금이라도 굴곡이 진 곳이나, 바위 사이의 아무리 작은 틈새라도 모조리 양파를
재배하는 텃밭으로 이용하였다. 이 종족들이 자기네들의 신앙과 종교를 철저히 보존한 까닭
에, 여행객들이 마치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찾아가는 마음으로 이곳 도곤족을 방문하였
다. 도곤족과 그들의 가면. 춤. 거처 등은, 아프리카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가야 하
는 통과의례가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도곤족들이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이들은 다행히 이러한 시류 덕분에, 자기들의 고유한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면서 나름대로
득을 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도곤족들이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졌어요.!" 마르트 고모가 외
쳤다. "그들의 신화가 그리스-라틴 문화의 토대와도 상당히 유사하다던데, 맞는 말인가요?"
"이봐요, 마르트. 내 마음 같아서는 당신네 민속학자들이 우리의 종교를 당신네들이 종교와
비슷해지도록 짜 맞췄다 해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우리를 야만인 취급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테니까요. 하지만 도곤족은 아프리카 출신이고, 그 아프리카는 그리스-라틴만이
아니라 모든 신화의 모태가 되는 곳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야겠어요."
"테오 너,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야 할 것 같구나. 바야흐로 아프리카 우주론이 시
작될 모양이니까...." 마르트 고모가 말했다.
압둘레 씨는 먼저 심호흡을 하였다. 도곤족의 신화는 굉장히 긴 서사시였으므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태초에 조물주께서 가장 작은 우주의 씨앗을 창조하셨단다. 우리는 이 씨앗을 포니오라고
부르지. 이 '세계의 씨앗'은 아주 강력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폭발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세계
의 알이 되었지. 그 모태가 되는 알의 안쪽에서 두 쌍의 물고기가 자라고 있었는데, 이 물고
기들은 곧 두 쌍의 쌍둥이로 변했어. 알은 천천히 성숙해졌지. 엄마의 뱃속에서 아기가 자라
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다가 달이 다 차기도 전에 오고라고 하는 남자아이가 혼자서 세상
밖으로 나왔어." "아니, 저 혼자서 나왔다구요?" 테오가 되물었다.
"그렇다니까. 물론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지. 게다가 이 영특한 미숙아가 태반의 한쪽 끝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만 태반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지. 그게 바로 땅이란다. 이렇게 되자
오고는 과감히 땅 속으로 들어갔지. 자기와 함께 태어났을 쌍둥이 누이인 야시기를 찾기 위
해서였지. 그리하여 우선 포니오를 태반으로 이루어진 대지의 더럽혀진 핏속에 심었으나, 끝
내 야시기를 찾을 수가 없었어. 왜냐하면 조물주께서 야시기를 알의 나머지 부분 속에 남겨
두셨기 때문이지." "불쌍한 오고 같으니." 테오가 중얼거렸다. "쌍둥이 누이를 잃는다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못 되죠." "불쌍한 오고라고? 바보 같은 녀석이라면 또 몰라도. '세계의
씨앗'을 불순한 피로 더럽힘으로써, 녀석은 땅위의 먹거리를 모두 망쳐 버렸거든. 그래서 조
물주는 이 못된 오고를 '창백한 여우'로 둔갑시켜 버리셨지. 우주의 불행은 모두 그 녀석 탓
이었어. 이어서 그르친 일을 바로 잡기 위해 알속에 남아 있던 다른 쌍둥이 남매를 제물로
삼으셨지. 다시 말해 이 남매를 예순 여섯 조각으로 잘라서, 이 조각들로 인간을 빚으셨던
거야. 태반을 이용해서 그 조각들을 붙였단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최초의 인간이 '마시게
한다.'는 뜻을 가진 놈모였어. 놈모는 말과 물의 지배자가 되었지." "제물이 되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건 마찬가지로군요." 테오가 지적했다. "이따금 조물주는 같은 일을 너무 여러 차
려 반복하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속단하면 안 되지! 어쨌든 조물주는 여우가 사는
불결한 땅의 위로 네 쌍의 남자. 여자 쌍둥이 남매를 보냈지. 이들은 자기네들의 태반을 이
어서 만든 아치의 네 귀퉁이에 각각 정착했어. 그러자 별들이 그 운행을 시작하였고, 마침내
태양이 순결해진 땅 위를 비추었지. 이로써 실패작 천지창조로 인한 악몽은 끝이 났어. 조물
주의 치밀한 계산대로 신성한 쌍둥이 남매들은 둘씩 둘씩 그 수가 불어났단다." "그건 참
마음에 드네요." 테오가 소감을 말하였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쌍둥이 남매가 있다는 말씀
이잖아요." "하지만 그런 상태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어. 왜냐하면 새로 만들어진 세
계 속에도 아직 저주받은 태반이 흘린 필 더럽혀진 포니오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
지. 넷째날, 처음으로 일식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야시기가 여자의 모습을 하고 땅으로 내
려왔어." "아참, 야시기가 있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네요." "누가 아니래, 그러면 안 되는
데.... 땅으로 내려온 야시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쌍둥이 중의 한 명과 결혼한 다음, 그
남편에게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 묻은 포니오를 먹도록 하였지. 말하자면 대지를 깨끗이 정
화시키기 위해 자기 남편을 희생시킨 거야."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어요." 테오가 모래를
한 줌 움켜쥐며 말했다. "두 번째 희생된 인간이로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 뒤로 아주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 임신한 여자 쌍둥이들이 모두 쌍둥이가 아닌 외둥이를
낳았거든. 인류는 쌍둥이 임신이라는 귀중한 능력을 상실하게 된 거지." "저런." 테오가 안
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몹시 애석한 일이지. 이처럼 일장춘몽 같은 신화 덕분에, 우리들 각
자는 비록 몸은 하나지만 쌍둥이처럼 두 개의 영혼을 지닐 수 있는 거야. 하나의 영혼은 우
리의 육체를 지배하지. 남자일 경우에는 남자의 영혼이 그 역할을 맡고, 여자일 경우에는 여
자의 영혼이 몸을 조절한단다. 하지만 나머지 또 하나의 영혼도 절대 육체로부터 멀어지지
않지. 조각조각 이어서 살려냈다는 조상인 놈모가 지키는 늪의 밑바닥에서 여자의 영혼은
남자의 육체에 깃들어 있는 남자의 영혼을 보호해주고, 반대로 남자의 영혼은 여자의 영혼
을 지켜 주고 있단다. 각각의 영혼이 나머지 반쪽 영혼을 남몰래 인도해 주고 있는 거지. 왜
냐하면 모든 인간은 죽었다가 남녀 쌍둥이로 다시 태어난 원초적 존재인 놈모로부터 비롯되
었기 때문이지." "그 때문에 누구나 어딘가 에서 자기를 부르는 것 같은 쌍둥이 영혼을 만
나게 되나 봐요." 테오가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저도 그랬거든요. 전 제 쌍둥이 영
혼을 찾았지만요. 그러니까 저는 '창백한 여우'와는 경우가 다르지요. 그런데 이상한 점은
요...... 전 도곤족이 아니라 프랑스인 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죠. 압둘레 아저씨?"
"그야, 어쩌면 도곤족이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진실을 먼저 알았는지도 모르지. 아프리
카 전체가 쌍둥이 라는 개념으로 엮어지거든. 쌍둥이를 귀하게 여기거나 혹은 두려워하기
때문에, 쌍둥이들에게 첫수확을 바치거나 아니면 태어났을 때 아예 둘 중 하나를 죽여 버리
기도 하지. 어쨌거나 쌍둥이에게 무관심한 경우는 절대로 없단다." "그런데 누가 감히 쌍둥
이 중 하나를 죽일 수 있죠?" 마르트 고모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듯했다.
"아, 그건 옛날 일이에요. 요즈음엔 더 이상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죠. 하지만 쌍둥이가 우리
인류의 조상이었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마십시요. 요새 와서는 쌍둥이를 낳는 일이 오히려
초자연적인 현상 취급을 받지만 말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저와 제 죽은 쌍둥이 여
동생은 정상적이었다기보다 오히려 신에 가깝지 않았을까..." 테오가 머뭇거렸다.
"오히려 그 반대지." 압둘레 씨가 단호하게 말했다. "넌 혼자니까 정상적인 거지. 테오 네
경우가 특별하다면, 그건 죽은 네 여동생이 너한테 말을 건다는 사실이겠지." "아니, 어떻
게? 아저씨도 알고 계셨어요?" 테오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마르트 고모가 또 소문
을 낸 거로군요." "그걸 알기 때문에 내가 놈모의 이야기를 꺼낸 거란다." 압둘레 씨가 대답
하였다. "인류의 아버지이자 마시고 말하게 하는 희생당한 쌍둥이 놈모는, 물과 말이라는 우
리 삶의 본질적인 두 요소를 의미한다고 하였지. 난 어제 태오가 네가 말을 하면 옷을 입는
거냐고 물었을 때, 네 말이 맞다고 하였어. 벌거벗는 것이 말이 없음을 뜻한다고 한다면,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말이 인간에게 옷을 입힌다는 말이지... 조상의 이름으로 말은 옷을 짜는
거지. 구원은 언제나 죽은 조상을 부터 오는 법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까짓 신분증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거란다. 사람은 아무개의 아들, 형제, 조카, 사촌이
아니면서 자기 자신일 수가 없는 거지. 남자건 여자건 절대로 독불장군처럼 혼자서 세상에
나올 수는 없었지. 돌아가셨건 살아 계시건 부모가 그 사람의 몸에 옷을 입히는 거야."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되는 거지요?" 마르트 고모가 물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뭐라
고 설명하실 거죠?" "사랑이라..." 압둘레 씨는 한동안 망설였다. "글쎄요. 야시기가 불결한
오고를 찾아간 것처럼, 반쪽 짜리 영혼이 잃어버린 나머지 반쪽을 찾아가는 게 아닐까요?"
"전 알아요." 테오가 말했다. "사랑이란, 조상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덜어 달라고 부
탁드린다고 말해야겠지.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거든." 말을 마친 압둘레 씨는 일어나서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나서는 팔을 들어 연한 나뭇가지를 휘어지도록 감았다. 연 노란색 작
은 잎사귀가 돋아나고 있었다. "이걸 보여 주고 싶었어요." 나뭇가지를 일행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바오밥은 물이 없어도 저 혼자서 싹을 틔우지요. 우리들처럼 나무도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는 모양이에요."
죽음의 절차
다음번 일정은 물과 관련된 것이었다.
세레르족 영지가 가까워짐에 따라 촌락의 모습도 달라졌다. 아카시아 덤불 사이사이로 회
칠을 한 네모난 집들이 보였다. 파투의 묘사 대로라고 테오는 생각했다. 조알에 도착한 일행
은, 차를 세운 다음 걸어서 나무다리를 건넜다. 다리 밑으로 진흙투성이의 망구로브 뿌리가
드러나 있었다.
파디우트는 아주 놀라운 마을이었다. 말뚝 위에 세워진 원두막들은, 굴이 다닥다닥 달라붙
은 망그로브를 찰싹찰싹 때리는 검은 물을 굽어보는 것 같았다. 마을에서 가장 특색 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강 반대편에 쌓인 깨끗한 조개무지[패총]였다. 군데군데 하얀 십자가와
수백년 수령의 바오밥나무들이 서 있었다. 파디우트 마을 주민의 대다수는 카톨릭 교도로서,
세레르족의 토착신앙으로부터 이 신기한 조개무지를 물려받았다.
발자국을 떼어놓을 때마다 바닥에서 소리가 났다. 잘 정돈된 석회암 더미처럼 무덤들이
봉분 주위에 정렬해 있었다. 마르트 고모는 갑자기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으나, 곧 투덜
대며 몸을 추스렸다. 반면 테오는 어찌나 날렵하게 올라가는지, 마치 한 마리 백로가 세레르
족 영지를 유유히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봉분은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조개 껍데기가 쌓인
거싱 아니었다면, 영원불멸을 위해 건축한 피라미드와도 다를 바가 없을 듯 했다.
"테오 네 표현이 정확하겠구나." 압둘레 씨가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거대한 십자가
앞에서 멈춰 서며 말했다. "왜요? 이 무덤들도 피라미드인가요?" 테오가 놀란 듯이 물었다.
"세레르족 영지에서는 우두머리가 죽으면, 그가 살았던 집의 지붕으로 만든 관속에 그 시체
를 안치하였어.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부근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봉분 쌓는 일을
도왔단다. 이 봉분 속에 부채꼴 야자수로 만든 장대 하나를 세우는데, 이 나무는 너도 알다
시피 썩지도 않거니와 사람 손바닥 같은 잎이 달려 있지. 후에 이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한
후에는, 세레르족의 카틀릭교도들은 죽은 조상들의 세계로 가기 위한 긴 여행 동안에 먹을
양식까지 묻혀 있는 조개무지 위에 자기네들의 무덤을 마련하였지." "신기한 일이군요." 테
오가 지적하였다. "이곳 사람들도 이집트인들처럼 저승으로 가는 여행길을 위해 음식을 마
련하였다는 말씀이시죠?" "세레르족 영지와 이집트 사이에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닮은 점
이 있단다. 여기서도 수소는 인간의 대체물로 여겨져, 우두머리들의 시체는 수소 가죽을 씌
어 매장하였지. 뿐만 아니라 여기서도 이집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
하지 않으면, 그 영혼이 평안하지 못하다고 믿었지. 죽은지 나흘째 되는 날부터 죽은 사람에
게 살았을 때의 식성에 따라 쿠스쿠스나 물, 또는 우유 등을 바쳐야 해. 어떤 부유한 세레
르족의 족장은, 죽은 후에 그 후손들이 자기에게 충분한 양의 우유를 제공할 수 있도록 살
아 생전에 가축의 수를 대폭 증가시키기까지 하였다는 구나." "충분한 양이라면, 뭘 하기에
충분하다는 거지요?" "그야 물론 앞서 죽은 조상들이 살고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을 만큼
일 테지. 당연한 거 아니니? 저승으로 가는 여행도 이집트인들의 여행과 매우 비슷해. 양식
을 두둑이 챙겨 가지고 떠나야지. 그렇지 못하면 제대로 죽을 수도 없다니까. 조금 전에 말
한 세레르족의 족장에게는 11명의 추앙 받는 조상들이 있었지. 그래서 그 족장은 자손들이
우유만 충분히 가져다준다면, 자기가 열 두번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였던
거였어." "뜻대로 잘 안 되는 수도 있는 모양이죠?" 테오가 물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죽었
다고 해서 저절로 조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조상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으려면 우선 살아
생전에 성공을 거두어야 하며, 지식이 있어야 하고, 제물로 소를 잡을 있을 만큼 장례를 성
대하게 치를 수 있어야 했다.
한 마디로 지켜 주어야 할 후손이 번성하여야만 했다. 왜냐하면 일단 조상이라는 자격을
부여받게 되면, 죽은 사람은 후손들의 일상 속에 계속해서 살아 있게 되는 것이었다. 죽은
자와 산 자와 삶이 서로 의존적이었다. 조상은 병든 후손을 고쳐주기도 하였으므로, 후손이
없는 사람은 죽어서도 조상이 될 수가 없었다. 조상은 자손과 신을 이어 주는 가교 역할을
담당하였다. 물론 이는 자신의 가족들이 사후의 여행이 지속되는 기간 내내 그를 동반할 경
우에 한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산사람과 죽은 사람간에는 나름대로의 규율과 질서가 존재
하였으며, 이들은 상호 협동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이집트에서와 전혀 다른 점이
있다면, 공주와 그리오의 후손인 젤와르족의 장례 방식이었다. 젤와르족은 두 번씩 매장되었
다. 첫 번째 장례는 죽은 사람의 집에서 치러졌다. 죽은 사람을 수소 가죽으로 꿰맨 다음,
그 시체를 관속에 넣어 세운 채로 우물 속 3미터 정도 깊이까지 내린다. 죽은 자는 이곳에
서 수소 신으로 변하는 과정을 겪게 되며, 장소는 극비에 부쳐진다. 이어서 열리는 두 번째
장례는 공식적인 것으로서, 흙과 부적으로 잔뜩 채운 관을 놓고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
운데서 거행되었다. 이 관에는 시체가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불사신으로 변해 가고 있는 비밀의 우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그래요?" 테오가 놀랍다는 듯이 외쳤다.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가 보죠?" 참을성 많은 압둘레 씨는, 아프리카에서는 인간의 삶의 어느 한 부분이
라도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법이 없노라고 대답하였다.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 있는 태아도
단지 9개월 사이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뱃속에서부터 벌써 가문의 몇몇 사람 몫을 차곡
차곡 간직해 두었다가 세상에 나오면서 이들의 이름을 이어받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할례에
서부터 성인식에 이르기까지, 그 아이가 거쳐가야 할 성장과정이 미리 준비되어 있는 것이
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었다. 두 번에 걸
친 장례식의 의미도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빈 관을 놓고 우두머리의 사회적
죽음을 애도하기는 하지만, 사후 세계로까지 이어지는 삶이 우물 속에서 지속되는 것이다.
"전 무슨 얘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테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도대체 죽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말씀이세요?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으면 심판을 받는다고 하
였죠. 그뿐이었어요. 그런데 아프리카에서는 뭐가 어떻다는 것예요?" "다른 예를 들어보자.
베냉 남부에 사는 요루바족 이야기를 해줄게." 압둘레 씨가 말을 이었다. "가족들은 우선 죽
은 사람을 묻었어. 그렇게 매장하기에 앞서 죽은 사람에게 새옷을 입히고, 고인이 평소 몸에
지니고 다녔던 물건도 몇 가지 챙겨 넣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새것과 낡은 것 두 가지를 다
지니게 되는 셈이란다. 그리고 나서 나머지 것은 모두 태워 버리지. 그래야 고인이 과거로부
터 쉽게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이어서 새로운 삶의 시작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인단
다. 그렇게 하고 나면 비로소 기나긴 기다림이 시작되는 것이야." "무엇을 기다린다는 말씀
이세요?" 테오가 물었다. "육체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이 사리지기를 기다리는 거란다. 죽음
은 그 출생과는 반대 경로를 밟아간다는 말이야. 차츰차츰 살이 부패해 가다가 어느 날, 그
러니까 5,6년 후에 마침내 준비가 완료되지. 그렇게 되면 비로소 죽음의 입문 의식을 시작할
수가 있는 거야."
"잠깐만요." 테오가 압둘레 씨의 말을 가로막았다.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죠?
죽은 사람이 땅속에서 '까꿍'이라고 하나요?" "거의 그렇다고 봐야겠지. 가족 중의 누군가가
아프다거나, 부부의 불화가 잦아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우환이 생기거든. 그렇게 되면 아마도
고인이 신호를 보내는 거라고 생각하지. 시간이 되었는가 보다고 느끼는 거야. 그러면 무덤
에서 해골을 꺼내 정화력이 뛰어난 식물을 이용하여 깨끗이 닦은 다음, 산 닭을 잡아 제물
로 바치는 거야. 해골 위에 닭의 피를 뿌린 후 그 닭을 두 토막은 고인이 나누어 가진단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입문 의식이지." "이미 죽은 해골이 또 무슨 입문을 한다는 거예요?"
테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외쳤다. "도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린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만 입문임에는 틀림이 없지." 압둘레 씨가 재차 강조했다. "입문이라는 말은 비밀로 안내한
다는 뜻이니까....말하자면 죽은 사람에게 새로운 의례 절차를 알려 주는 과정이야. 예를 들
어 젊어서 죽은 남자일 경우, 해골에 흰옷을 입힌 해골을 닭의 멀리와 함께 가방에 넣어서
죽은 사람의 관에 안치하지. 아직도 끝이 난 게 아니야. 두 번째 장례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죽은 사람이 돌아오긴 하였지만, 그는 아직 혼자이니까. 하지만 마지막 의식을
통해 마침내 마을 공동체와 다시 만나게 된단다." "마르트 고모, 우린 이렇게 복잡한 장례식
은 한번도 본 적이 없지요." 테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죽는 데에도 훈련이 필요하
네요." "글쎄, 계속해서 더 들어 봐." 마르트 고모가 테오를 나무랐다. "다 듣고 나서 네 개
똥철학을 늘어놓아도 늦지 않을 테니까." "다음 단계에는 여러 가족들이 모이지. 각 가정은
자기 집안에서 고인이 된 이의 해골을 바구니에 담아 조상들을 공동으로 모셔 놓는 움막으
로 가져온단다. 이제 정말로 중요한 절차가 시작되는 거야. 의식의 진행을 담당한 사람은 해
골들을 정성껏 씻은 후, 그 물을 받아 소중히 보관하지. 또한 해골들을 항아리 속에 담기 전
에 마지막으로 제물을 바친 다음, 이들에게 옷을 입혀서 마을을 거닐게 한단다. 그리고 나서
음식을 먹이고, 여러 마을을 돌며 소개를 시키지. 갓난아기가 태어났을 때와 거의 다를 바
없단다." "죽은 신생아라구요?" 테오가 확인 삼아 재차 물었다. "그게 정확한 표현이겠구나.
그러고 난 다음 비로소 이 해골들을 묻는 거야. 매장 장소는 비밀에 부쳐지지. 이렇게 되면
죽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먼바다로 떠났다고들 한단다." "휴우, 이제야 끝이 났군요." 테오
가 긴 한숨을 토해 내었다. "아니, 아직도 남은 절차가 있어. 죽은 사람에게도 마을 안에 자
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거든. 조상들을 모신 움막에 고인의 이름을 새긴 우산을 하나 꽂아
놓으면 비로소 조상이 되는 거지." "이제 진짜 끝인가요? 우아, 무지무지하게 기네요." "프랑
스에서는 하루에 묻어 버리면 그걸로 끝이지. 그러니 그 이후 고인에 대해 무엇이 남겠니?
만성절 때 무덤에 꽃다발 한 번 가져다 놓으면 그걸로 전부지. 다시 말해 죽은 사람에 대해
서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단 말이지. 이처럼 서구인들은 혈통이라는 의미를 잃어버린 지 이
미 오래 되었어. 내가 보기엔 그 때문에 불행해진 것 같아. 아프리카에서는 조상을 잊고 살
수가 없지. 조상들이 우리를 지탱해 주고, 우리는 조상들을 보살피지. 그런데 서구인들은 조
상들의 보호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르고 살고 있으니... 서구인들은 참으로 외롭게 사록 있어."
"그렇지 않아요." 테오가 항변하였다. "우리도 가족끼리 모여 살아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그 다음에는? 과거와의 연속성이 어디에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서
도 어디 한 번 이야기해 보자. 서양에서는 가족도 파괴되다시피 하였잖아. 몇 안 되는 구성
원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배에 비좁게 몸을 싣고는 망망대해로 멋모르고 떠나가는
형국이지." "그렇다고 해서 저더러 할아버지의 유골을 꺼내 닦으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건
설마 아닐 테죠?" 테오가 화가 나서 대들었다. "물론 그건 그곳 관습에 어긋나는 일일 테니
까. 불행한 건 오늘날 유럽에는 더 이상 관습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야. 유럽인들에게는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신다는 유일한 신이 한 분 있을 뿐이지. 하지만 우리는 조상들과
더불어 우리를 나름대로의 신을 만들어 가지. 이게 더 확실한 방법 같아 보이지 않아?"
마르트 고모는 이미 오래 전부터 조개무지 위에 만들어진 무덤들 사이에 앉아 아픈 두 다
리를 쉬고 있었다.
지칠 줄 모르는 신
"우리 아까 조알에서 본 식당에 내려가 굴이나 먹으면 어떨까요?" 고모가 제안하였다. "
이 조개 껍데기 때문에 엉덩이가 아파 죽을 지경이에요." 당황한 압둘레 씨는 아닌게아니라
이 장소가 앉아 있기에 편한 곳은 아니라고 시인하였다. 검은 왜가리와 조심성 많은 마도요
가 나타났다가 몸을 숨기기를 반복하는 갯벌에는 내내 바람이 불어왔다. 테오 일행은 조심
스럽게 조개무지를 내려와 다시 두 개의 다리를 건넌 다음, 망그로브에 붙어사는 굴을 먹기
위해 식당까지 차를 몰았다. 식사가 끝난 후에 압둘레 씨는 붉은 참소리쟁이로 만든 음료수
를 마셨고, 테오는 코카콜라, 마르트 고모는 백포도주를 한 잔 마셨다."그런데 어째서 크리
스트교들은 이 봉분을 그대로 남겨두었을까요. 압둘레 아저씨?" 테오가 물었다. "넌 정말 질
문이 끝이 없구나." "내가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이 애는 머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해댄다구요." 마르트 고모가 예전에 한 말을 상기 시켰다. "이 녀석은 아주 KO를 시
켜야 해요." 무안해진 테오는 애꿎은 야자수 잎사귀를 바라보기도 하고 굴 껍데기를 살펴보
기도 하다가, 마침내 의자에 앉아서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심심해 죽겠어요." 테오가 한숨
을 몰아쉬며 고백했다. "식탁에서 일어나도 될까요?" "모자 쓰는 거 잊지 마라!" 마르트 고
모가 외쳤다.
테오는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마르트 고모와 압둘레 씨는 술을 한 잔씩 더 마시면서 모
처럼 만의 평온함을 음미했다. 목이 탔던지 마르트 고모는 백포도주 4분의 1병을 추가로 주
문했다. "테오가 아주 많이 달라졌어요."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압둘레 씨가 입을 열
었다. "예전의 테오가 아니에요. 체격도 훌쭉 커졌고, 혈색도 아주 좋아 졌어요. 그렇게 큰
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아무도 믿지 않을 걸요." "이젠 아프지 않은걸요." 마르트 고모가 압둘
레 씨의 말이 내심 불만스러웠는지 퉁명부리듯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렇기만
하다면야..." "정말 확실 하다니까요." 마르트 고모가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별로 말할 기
분이 아니신 것 같군요, 마르트. 무슨 일이 있으세요?" "포도주 때문인가 봐요." 마르트 고
모가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술 때문에 멍청해졌나봐요."
뜻밖의 대답에 어색해진 압둘레 씨는 술잔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가 술을
한 모금 들이키는 동안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엎드린 마르트
고모는 천연덕스럽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딸꾹질 때문에 고개가 들먹들먹하다가,
급기야 마르트 고모는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하였다. 압둘레 씨가 그녀를 일으켜 고개를
다시 테이블 위에 괴어 주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시간이 꽤 지난것 같았다. 그런데 테오 이
녀석은 왜 안 돌아오는 걸까? " 아, 이제 오는 구나!" 압둘레 씨가 테오를 보자 반갑게 소리
쳤다. "도대체 어딜 갔다 온거야?" "시장 에요....마르트... 아니, 코를 골고 계시잖아요!" "술
이 과했나 보더라." 압둘레 씨가 계면쩍은 얼굴로 해명하였다. "앉으렴. 조금 전에 내게 했
던 질문 말이다. 왜 그리스도교도들이 이 봉분을 그대로 남겨두었느냐는 질문 말이야." "아
참, 그랬었죠. 전 깜박 잊고있었어요." "하지만 난 잊지 않았단다. 아프리카에서는 낡은 것과
새것을 혼합하는 데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어. 그러니 그리스도교도들의 하느님이 아프리카
조상들을 방해하실 리가 없지. 오히려 그 반대야. 예수의 부활이라는 대목은, 죽은 자들이
하게된다고 믿는 여행의 개념과 상당 부분 일치하거든." "마르트 고모 좀 보세요!" 테오가
소리쳤다."의자에서 굴러 떨어지시겠어요!" "걱정 마라." 압둘레 씨가 마르트 고모를 다시
일으켜 앉히며 말했다. "내 말 이해하겠지?" "아뇨, 지금 하신 말씀이 신과 무슨 상관이 있
는 건지 통 모르겠어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믿는 신은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법이 거의 없
단다. 도곤족들은 자기네들의 신을 암마라 부르고, 세레르족은 루그 센이라고 하지. 하지만
루그 센이든 암마든간에, 이들의 신은 세상을 만드신 조물주에 해당된단다." "그것만해도 굉
장한 일이지요!" 테오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전하지 못하지. 신은 악의에 찬 분
이 아니라 아주 합리적이고, 당신의 능력이 닿는 데까지 창조를 하시는 분이란다. 피조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창백한 여우'를 추방해 버리고, 또다시 고쳐 만들면 되지. 그렇지만 신
이 인간의 삶에 간섭하지는 않아. 그 일은 혼령이나 조상들이 맡아서 해야 할 일이야. 조물
주는 결정적인 재앙이 있을 경우에만 이를 수습하기 위해 나타나시는 거란다." "홍수 같은
재앙이요?" 테오가 물었다. "세레르족 영지에서는 그보다 더 혹독한 일도 있었지." 압둘레
씨가 말했다. "태초에 숲 속에서 인간들과 동물들, 그리고 나무들이 살고 있었지. 그러다 서
러 싸우기 시작했어. 어느 날 인간과 동물이 숲에서 서로를 죽이게 되자, 곁에 있던 나무들
까지 살인자가 된 거야. 이 시절에는 나무들이 말도 하고 알아듣기도 하며, 또한 걸어다니기
도 했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해. 이렇게 되자 나무와 동물. 인간간의 전쟁은 완전히 전면
전으로 확대되었어. 하는 수 없이 신이 나서야 했지. 신은 우선 나무들에게 벌을 내렸어. 벙
어리에다가 장님. 그리고 전신마비라는 무서운 벌이었지. 이때부터 나무들은 영원히 한 자리
에서만 살게 되었단다. 그렇지만 루그 센은 나무들에게 귀만은 그대로 남겨 놓았지. 그렇기
때문에 나무가 신성시되는 거란다. 모든 이야기를 듣거든." "그래도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해서 들려주지는 못하잖아요." 테오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건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거란다. 나무에 관해서는 언제나 신중하여야 해. 그리고 그 다음, 동물들에게는 광기를
불어넣으셨지. 동물들이 지저분하고 제멋 대로인 까닭을 이제 알겠지. 하지만 루그 센은 동
물들에게서 본능만큼은 제거하지 않으셨어. 사람으로 말하자면, 키와 수명은 대폭 줄이셨는
데 정신만큼은 원래 크기대로 놓아두신 거야. 그리고 그 이후로는 루그 센이 이 같은 간섭
을 한 적이 없단다." "그러니 이젠 그 신을 경배하지도 않겠군요." 테오가 결론을 내리듯 자
신 있게 말했다. "경배하고 말고, 정원에 보면 나무로 된 루그 센 기념비가 자주 눈에 뛸 거
야. 지나는 사람들이 뿔로 된 바가지에 나무 뿌리나 돌을 담아 그 기념비 밑에 바치고 가곤
하지. 수확이 좋은 해에는 족장이 기념비 위에 우유를 뿌리기도 한단다. 그렇지만 요즈음엔
루그 센이 아니라 팡골에게 도움을 청하지." "팡골이라구요?" 마르트 고모가 테오의 놀란
목소리를 듣고서 벌떡 일어섰다. "고모, 코고는 소리가 한 번 굉장하던데요." 테오가 마르트
고모를 놀려댔다. "뭐라구? 내가 잤다구?" 마르트 고모는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 몇 시나 된 거지?" "팡골 보러 갈 시간이에요." 압둘레 씨가 자리에서 일
어나며 말했다.
인어 가죽
조알에서 부터는 유카리나무 숲으로 난 길을 딸 바다에 면한 광대한 면적의 푸른 물이 나
올 때까지 달렸다. 잔잔한 수면은 먹이를 사냥하는 따오기의 움직임으로 간간이 동요되었다.
"이게 팡골인 거예요?" 테오가 물었다. "아니, 팡골은 정령이란다. 세레르족의 한 위대한 시
인이, 이 연못으로 인어들이 물을 마시러 온다고 노래하였지. 이곳 어부들은 인어들의 생리
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단다. 바다에서 인어를 낚으려면, 이들의 팡골을 잘 구슬려야 하였어.
노래와 제물로 인어들을 달래고 나면, 그제서야 어부들에게 잡혀 주었다는 구나. 어부들이
후대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말이야." "정말 인어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진짜로 여자 젖
가슴에 물고기 꼬리를 가진 인어 말이에요." "그렇게 생긴 인어는 아냐. 바다소라고 하는 물
고기 종류지. 이 덩치 큰 수중동물에게 젖꼭지가 달려 있었던 까닭에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어로 생각한 거란다. 이곳 전설에서는 바다소의 흔이 흰옷을 입은 여자로 포장되었지."
"저도 보고 싶어요." 테오가 연못 쪽으로 몸을 굽히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봐, 인어 바
다소! 만일 네가 이곳에 산다면 올라와서 네 모습을 보여라!"
테오의 소리에 놀란 따오기가 푸드득 하늘로 날아오르자, 연못 전체가 바르르 전율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테오는 한 손을 물 속에 첨벙 집어넣었다가 이
내 꺼냈다. 테오의 손에는 어느 새 검은 진흙이 묻어 끈적거리는 생선 껍질 한 조각이 들려
있었다. "인어 가죽이에요!" 테오가 소리쳤다. "혼령의 가족인가 봐요." "어쩌면 뱀이 벗어
놓은 허물일는지도 모르지. 어찌되었든 둘 다 행운을 가져다준단다. 뱀의 혼령도 역시 팡골
은 팡골이야." "냄새가 아주 고약하구나." 마르트 고모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 깨
끗이 씻어야겠다. 그때까지 임시로 이 비닐백에 넣어두렴." "이곳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신령
시 되는 나무 위에 걸쳐놓을 겁니다. 바로 이것처럼 말이에요." 압둘레 씨가 오래 된 나무
등걸에 걸쳐놓은 빛바랜 헝겊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팡골과 한편이 된다고들
하지요. 테오, 네 뱀껍질을 이 나무에게 선사하면 어떻겠니?" "절대로 그렇게는 못하겠어
요." 테오가 망설일 여지없이 대답하였다. 이렇게 해서 테오는 진흙 투성이 '트로피'를 흔들
며, 기세 좋게 마을의 첫 번째 오두막까지 압둘레 씨를 따라갔다. 오두막 앞에 있는 세 그루
의 커다란 나무사이에 치료사가 서 있었다. 두 명의 조수가 그를 보호하기라도 하려는 듯
호위하고 있었다. 압둘레 씨는 문을 지키는 사람과 세네갈식으로 수없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안녕하세요? 네, 잘 지냅니다. 가족들은? 모두 잘 지냅니다. 어머님도 안녕하시구요? 네, 그
렇습니다. 건강도 좋으세요? 네, 좋아요." 상대방 쪽에서도 물론 같은 내용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장황한 인사가 끝나자, 문지기는 압둘레 씨와 테오를 오두막 안으로 들여보
냈다. 마르트 고모는 술기운이 가실 때까지 연못가에 남아 있겠노라고 자청한 터였다.
세 그루의 켜다란 나무가 지탱해 주는 어두운 오두막은 손바닥 크기만큼이나 작았다. 야
자수 잎으로 이은 지붕과 생울타리, 그 울타리에 걸어 놓은 시트 한장... 중앙에는 초록 빛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호리병박이 놓여 있었다. 여러 개의 닭발과 칼집을 낸 닭의 모래주
머니도 한구석에 쌓여 있었다. 치료사는 어둠 속에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 다리밖에 없는 나이 든 치료사는 털모자를 쓰고, 목에는 빨간 목도리를 둘렀으며, 손
에는 군데군데 조각된 지팡이를 짚었고, 그 의족은 점잖이 바닥을 딛고 있었다. 주름이 잔뜩
그의 얼룩에는 경계심과 장난기가 동시에 어려 있었다. 이 애송이 투바크가 과연 무엇을 알
아들을 수 있을까? 인사가 시작되었다. 노인은 내내 의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압둘레 씨는
농담을 하였다가 애원을 해보는 등,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길고 긴 협상
끝에, 외다리 치료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소.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소."
치료사는 진료를 할 때마다 그 첫 번째 절차로 암탉을 한 마리 잡았다. 둘로 자른 모래주
머니를 통해 환자를 괴롭히는 병의 원인을 읽어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환자에게
커다란 호리병박 안에서 상징적인 목욕을 하도록 지시했다. 욕조치고는 아주 작은 욕조에서
벌거벗고 들어간 환자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치료사가 나무 국자로 온몸에 끼얹는 치료액
을 뒤집어썼다. 이 액체는 어쩐지 이상하고 신비스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그런 것이었다.
"이 물 속에는 뭐가 들었어요?" 테오가 물었다. "손을 넣어 보면 알수 있을 텐데?" 압둘레
씨가 대답하였다. "그렇게 해봐도 괜찮아."
지체없이 물 속에 손을 넣은 테오는 희한하게 생긴 회색 자갈 몇 개를 건져냈다. 물의 표
면에는 작은 나뭇조각이 둥둥 떠 있었는데, 이는 목욕을 마친 환자들이 보호의 표시로 가져
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갈은? 이 자갈은 이미 오래 전에 숲에서 벼락을 맞은 돌로서,
벼락 맞은 바로 그 자리에서 치료사의 초자연적인 영감에 의해 발견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벼락 맞은 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오로지 치료사만이 그 돌이 지닌 신비한 신통력
을 알아볼 수 있었다. "또 다른 것들도 들어 있나요?" 테오가 약간 실망한 듯 다시 물었다.
"그렇단다." 나이 든 치료사가 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자신의 입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흘려 넣은 말들이 있지. 또 원한다면 이곳을 지켜 주는 팡골을 보여 줄 수도 있어."
치료사는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두막의 바로 뒤쪽, 돌을 완전히 걷어낸 원
형의 터에 건조시킨 우유를 덮어씌운 작은 말뚝이 세워져 있었다. 팡골이었다. 땅바닥에 세
워진 조를 빻던 절굿공이의 비밀은, 벌써 여러 세대를 통해 삼촌으로부터 조카에게로 전해
져 온 터였다. 우유를 머금은 정령의 주위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팡골은 세 그루의 나무가
만들어 주는 그늘 아래 세워 놓은 낡은 절굿공이에 불과하였으나, 정령의 힘이 절굿공이 깊
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테오는 팡골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으나, 치료사
는 사력 다해 이를 거부하였다. 팡골에 대한 언설이 금지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세레르족의 별
아프리카에서는 하루가 매우 빠르게 지나갔다. 벌써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자동
차는 올 때와 반대 방향으로 귀가를 재촉했다. 종려나무와 아카시아 덤불이 시야에서 사라
져 갔다. 마르트 고모는 잠이 들었다. 도시에 가까워지자, 커다란 바오밥나무들이 다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저기 우리 바오밥나무가 있어요!" 테오가 소리쳤다. 압둘레 씨가 자동차를
세웠다. "가서 그리오가 들어 있는지 보고 오너라." 압둘레 씨가 테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네 의사는 묻지 않겠어. 어서 다녀오너라, 테오." 테오는 손에 인어 가죽을 든 채 발끝으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이윽고 나무 앞에 다가가서 쩍 벌어진 구멍 속으로 신중하게 고개를 들
이밀었다. 바닥에 돌돌 만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그리오 이야기를 하셨더랬는데. 겨우 메
시지밖에 보이지 않는데요!" 테오가 소리쳤다. "그래? 하지만 성스러운 나무잖아? 바오밥나
무에게 깍듯이 대해야 한다." "어째서 성스럽다는 거죠? 조금 전까지도 그런 말씀은 안해주
셨잖아요." "어쩌면 네 바오밥나무는 마법에 걸렸을지도 몰라. 저기 나뭇가지 사이로 저녁
노을이 보이지? 보인다구? 바로 그럴 때 혼령이 나타난단다. 어느 날 두 명의 세레르족이
바오밥나무 꼭대기에 걸려 있는 노을을 보았지. 그런데 그들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까, 바오
밥나무가 사라지고 없는 거야. 그래서 두 사람은 여자 점쟁이를 찾아갔지. 점쟁이는 두 사람
이 일러 준 장소에 가서 관찰을 하다가, 석양 무렵 바오밥나무 한 그루가 바닥으로부터 천
천히 올라오는 광경을 보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그렇다면 나무가 숨바꼭질이라도 하였단 말씀이세요?" "그 바오밥은 수줍음을 매우 잘 타
는 나무였어. 그래서 밤이 오면 땅 속에서 올라와 그 형제 바오밥들과 함께 지냈지만, 아침
이 되면 다시 땅 속으로 숨었지. 그러자 점쟁이는 그 바오밥나무가지 끝에 헝겊을 매달았단
다. 그 이후로 바오밥은 바닥에 고정된 신세가 되고 말았지." "아!" 테오가 소리쳤다.
"저기 꼭대기에 헝겊이 있어요. 갈기갈기 찢어진 헝겊이에요. 바로 저 나무였나요? 마법에
걸린 바오밥 말이에요." "그걸 누가 알겠니?" 압둘레 씨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세레
르족 영지에서는 남성의 상징처럼 생긴 나무 그루터기만 봐도, 또 반대로 엎어진 항아리도
마찬가지지...아니, 그것보다 우선 내 말을 잘들어, 테오. 팡골이니 루그 센이니 하는 것들은,
테오 네가 세레르족의 별을 알지 못하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어. 잘 봐."
압둘레 씨는 쭈그리고 앉더니, 잔가지를 집어 모래 위에 단번에 다섯 꼭지가 있는 별 하
나를 그렸다.
"자, 여기 이 별의 꼭대기가 루그 센의 자리고, 이 밑부분의 두 가지 사이의 빈 공간이 인
간의 자리지. 인간은 세상의 축에 의해 신과 연결되어 있어. 별 한가운데에서 안전하게 자리
잡고 있지. 또한 언제나 우주의 중심이기도 하지. 자, 이제 바오밥나무 아래 앉아서 메시지
나 읽어보거라, 어서." "흰 살결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나는 물의 여신이니. 나는 나의 영
토인 인어의 나라에서 너를 기다리노라." 테오가 읽은 메시지였다. "그런데 저는 이미 이렇
게 인어의 나라에 와 있는걸요." 테오가 다시 자동차에 올라타며 중얼거렸다. "그러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점쟁이들에게 물어보렴." 압둘레 씨가 은근히 권유했다. "이 고장
에는 아주 뛰어난 점쟁이들이 많은데... " "속임수는 어림없어요." 마르트 고모가 잠에 취해
묵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입 좀 다무세요." 테오가 짜증난 듯한 투로 성마르게 말했다.
"고모는 지금 완전히 고주망태라니 까요." "너 고모한테 그게 무슨 버릇없는 소리야!" 압둘
레 씨가 버럭 화를 냈다. "부끄럽지도 않니? 어서 고모님께 사과 드리렴" "아저씨가 참견하
실 일이 아녜요." 테오가 당돌하게 내받았다. "제 고모지 아저씨 고모가 아니잖아요." "아프
리카에서 그런 몹쓸 짓은 허용되지 않아. 어서 내 말대로 해. 버르장머리없는 녀석 같으니라
고."
테오는 투덜거리면서도 마지못해 마르트 고모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마르트 고모는 그제
서야 안심이 된 듯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이제 메시지나 생각해 봐라.
짐작이 가니?" "모르겠어요." 테오는 손가락으로 인어 가죽 부적이 든 비닐백을 톡톡 치며
뚱하게 대답했다. "사전이 있어야 해요." "그렇다면 내가 힌트를 좀 줄까. 이곳 말고 또 다
른 인어의 나라가 있지. 여기에서 아주 먼 곳이야. 하지만 아주 가깝기도 하단다." "내내 아
프리카 대륙에 속한 나라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또 하나의 아프리카지. 내가
힌트를 너무 많이 주는군." "그런 말씀 마세요." 테오는 냅다 휘파람을 불었다. '저를 도와
줄 혼령이 필요해서 불러 보는 거예요. 안 그러니, 인어가죽아?"
다가온 충격요법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마르트 고모는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압둘레 씨는 어머니께 마르트
여사가 산책 도중 몸이 불편해서 일찍 자리에 누웠으나, 약초를 달여 마시게 할 필요는 없
다고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테오가 인어 가죽을 내보이며 자랑을 하자, 모두들 어서 가서 씻
으라고 아우성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테오는 인어 가죽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서
베개 밑에 넣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식당에서는 안타와 압둘레 씨가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테오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오빠, 오빠는 그 애를 잘 아시잖아요, 어때요?" 안타가 물
었다. "내가 보기엔....." 압둘레 씨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나도 잘 모르겠어.
그 아이는 아주 영리해서, 종교적인 것을 믿지 않으려고 기를 쓰면서 야유 섞인 반응을 보
이지. 하지만 실제로는 열심히 듣고 있어. 반면에 마르트는 이제 기진맥진한 것 같더라."
"피곤할 테죠, 확실히." 안타가 말했다. "의기소침해진 것 같아. 테오의 병이 나아가니까. 이
젠 긴장이 풀어져서 될 대로 되라는 식인가 봐. 아무래도 마르트 때문에 걱정이야." "그럼
어쩌죠? 이제부터가 정말로 고비일 텐데...." "나도 알고 있어. 내일 아침부터는 계획한 대로
실행해야지." "하지만 아무래도 모레가 제일 힘들 거예요. 잘 버텨 주어야 할 텐데..." "테오
가 무서워하면 그만두어야 할걸." 압둘레 씨가 말했다. "너무나 큰 모험이거든."
그리고 나서 이들 남매는 테오가 모르는 언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화 도중 이따금
씩 '주요 병원'. '외상'. '졸도'. '전기충격' 등의 프랑스어 단어가 들렸다. 전기충격? 테오는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내일 아침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나를 어디로 데려가
려는 걸까? 이제까지 겪었던 것 가운데 가장 겁나는 치료방법일까? 마르트 고모에게서는
사전에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테오는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하지만 철제 창문에는 빠져
나갈 틈이라곤 없었다. 방문도 살짝 열어 보았으나, 몇 발짝 옮겨 놓지도 못하고 안타와 압
둘레 씨에게 들키고 말 것이 뻔했다. 마르트 고모의 코고는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테오
는 불안에 떨며 정원의 담벽 위에서 흔들거리는 불빛과 맹수 같은 털빛의 거대한 박쥐가 소
리 없이 날아가는 모습, 그리고 순결한 밤의 한 귀퉁이에서 수줍게 반짝이는 별 세개를 뚫
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를 지켜 줄 보호신 이라고는 인어 가죽 밖에 없구나!
제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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