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순간의 말로 세계사의 핵심장면을 간추린 역사인물스토리텔링 교양서이다. 이 책에는 세계 사의 주요 장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57명의 엘리트들이 등장한다. 그 인물의 면면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지도자 상을 연출해낸다. 고대사에선 철학사상가와 왕/여왕, 성인, 역사가, 장군들이 주연으로 활약했다면 중세사엔 이들 외에 과학자와 종교인, 문학예술인들이 당대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근대사로 접어들면 여기에 경제학자라는 특이한 전문가가 출현하게 되고 현대사에선 정치지도자와 발명가가 더 추가된다. 역사의 전면에 앞서갔던 엘리트들의 변화에서 우리는 각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적 소명의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결정적 한마디가 삶의 철학이 된다
▣ Short Summary
세계사를 읽는 것은 세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이 다르다. 논란의 소지가 많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에는 늘 “승자의 역사의 이면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는 반론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승자의 역사든 패자의 역사든 현장에는 늘 분투하고 도전 하는 역사적 인물이 있었다. 그리고 역사의 선각자가 활동한 역사현장에서 늘 당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말들이 있어 왔다. 때로는 그 한마디가 백 가지 역사를 웅변해 주기도 하고, 역사 앞에 홀로 선 선각자의 고독한 사투를 증명해주기도 한다. 세계사의 중요한 순간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시대를 앞서갔던 선각자들의 외마디 절규 같은 선명한 말들은 때로는 시대의 거대한 벽 앞에 막혀 어쩔 수 없이 내지르는 절망의 일성이었고, 때로는 시대의 험난한 벽을 넘어 역사의 변곡점을 낳았던 위대한 환희의 한마디였다.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넘어가는 고대의 역사엔 인간의 의지를 천명하는 수많은 선언들이 그리 스와 로마, 인도, 중국 등 문명의 발상지에서 터져 나왔다. 그 발생은 철학적 선언(너 자신을 알라), 인간의 본성(천상천하 유아독존), 과학 기술(유레카) 등 각양각색의 인간 발전을 위한 촌철살인들이었다.
인류 역사는 철학자의 아고라에서, 치열한 전장의 현장에서, 황제의 궁정에서 인류 발전을 위해 실천 하는 선지자들의 행동을 웅변으로 대변해줬다.
중세는 신의 그림자에 짙게 드리운 인류의 암흑시대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은 콘스탄티누 스의 기독교 승인으로 만인이 신 앞에 평등한 세상을 꾀하였지만, 신의 권능을 내세운 교황의 권위는 중세를 신의 천국으로만 작동하게 했다. 14세기에 서서히 싹튼 인간회복운동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과학혁명을 거치며 진정한 신성의 발현은 인간의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있음을 교회와 탐험가와 문학과 예술현장에서 눈부신 업적으로 보여주었다.
중세까지의 역사는 영웅과 지배자, 귀족과 남자들의 이야기로 출발했지만 근대 이후에는 노예, 농민, 노동자, 여성의 활약까지 끌어안았다. 역사 서술 행위에 대한 간섭과 통제가 사라진 덕분에 역사가들은 정치사, 경제사, 문화사, 예술사 등 인간과 사회의 모든 것에 대한 역사를 저마다의 관점과 방법으로 기록할 수 있었다. 인류사에 근대의 출발을 알리는 일성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합리 주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닫고, 천상의 음악을 만들고, 질풍노도의 문학을 질주하며 만국의 노동자까지 움직이게 하는 운명에 도전하는 근대적 인간관과 현대적 문명질서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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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하는 세계사의 주요 57장면 속의 인물들의 면면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지도자의 상을 연출해낸다. 고대사에선 철학사상가(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와 왕/여왕(알렉 산더 대왕, 아쇼카 대왕, 클레오파트라), 성인(붓다, 공자), 역사가(사마천, 키케로), 장군(한니발, 피로스, 카이사르, 스키피오)이 각각 고대역사를 이끈 주연으로 활약했다면 중세사엔 이들 외에 과학자(히파티아,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등)와 종교인(마르틴 루터), 문학예술인(다 빈치, 셰익스피어)이 다양한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 후 근대사로 접어들면 여기에 경제학자(애덤 스미스) 라는 특이한 전문가가 출현하게 되고 현대사에선 정치지도자(간디, 처칠)와 발명가(에디슨, 라이트 형제)가 더 추가된다. 역사의 전면에 앞서갔던 엘리트들의 변화에서 우리는 각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적 소명의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여실히 확인하는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 차례
고대사의 결정적 한마디 소크라테스의 인간선언 / 소크라테스의 변론 / 소크라테스의 죽음 / 피타고라스의 규율 히포크라테스 선서 / 알렉산더의 동방 정벌 / 알렉산더와 아펠레스 /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 알렉산더의 사냥개 / 디오게네스의 가래침 / 디오게네스의 등불 / 아리스토텔레스의 본능 다모클레스의 칼 / 붓다의 큰 울림 / 공자의 생애와 어록 / 아쇼카 대왕의 정법 사기를 남긴 사마천 / 피로스의 승리 / 아르키메데스의 원리 / 한니발, 알프스를 넘다 스키피오의 절제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결단 / 카이사르의 암살 / 키케로의 철인정치 클레오파트라의 향연
중세사의 결정적 한마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 /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승인 / 히파티아의 순교 샤를마뉴 대제의 중세 유럽 부흥 / 칭기스 칸의 대제국 / 단테와 베아트리체 성녀 잔 다르크 / 콜럼버스의 신대륙 개척 /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전방위 르네상스 예술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국 제패 / 엘리자베스 여왕의 영국절대주의 전성기 셰익스피어의 문학세계 / 갈릴레오의 종교재판
근대사의 결정적 한마디 근대철학의 창조자 데카르트 / 스피노자의 자유사상 / 파스칼의 《팡세》/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 모차르트의 천재적 음악세계 / 마리 앙투아네트의 진실 / 제국의 황제가 된 나폴레옹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 베토벤의 불후의 명곡 / 괴테의 고전주의 문학세계 조지 워싱턴의 독립 전쟁 / 찰스 다윈의 진화론 / 링컨의 노예 해방 /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 /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 / 그림에 미친 영혼, 고흐
현대사의 결정적 한마디 윈스턴 처칠의 위기 극복 / 발명왕 에디슨 / 라이트 형제의 비행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운동
- 3 결정적 한마디가 삶의 철학이 된다
알렉산더의 동방 정벌 고대 소아시아의 프리지아라는 도시국가에는 왕이 없었는데, 신탁에 따르면 이륜마차를 타고 오는 첫번째 사람이 왕이 될 거라는 예시가 있었다. 어느 날 농부의 아들이었던 고르디우스가 이륜마차를 타고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가 바로 신탁이 말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왕으로 추대했다. 왕이 된 고르디우 스는 자신이 타고 온 마차를 신전에 바치고 복잡하게 매듭을 지어 신전 기둥에 묶어 두었다. 그것을본 사제가 신탁을 받아 예언하였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 전역을 통치하는 지배자가 되라라.” 나중에 알렉산더 대왕이 아시아 원정길에 그곳을 지나다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관한 예기를 듣고는 자신이 풀어보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단칼에 매듭을 베어버렸다.
리더는 때론 과감한 능력 발휘를 통해 진정한 리더로 자리매김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과감하게 단칼에 끊어냄으로 진정한 리더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중국에도 이와 비슷한 고사가 있다. 남북조시대 북제의 창시자 고환은 아들을 여럿 두고 있었는데, 이 아들들의 재주를 시험해 보고자 한 자리에 불러서 뒤얽힌 삼실 한 뭉치씩을 나눠주고 풀어보라고 하였다. 다른 아들들은 모두 엉킨 실타래를 풀어보려고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양이라는 아들은 잘 드는 칼 한 자루를 들고 와서는 헝클 어진 삼실을 싹둑 잘라버렸다. 쾌도난마(快刀亂麻)란 고사성어가 생겨난 유래다.
다모클레스의 칼기원전 4세기 전반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시라쿠사는 디오니시오스 왕이 다스 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복종했고, 그의 궁전은 아름답고 값진 물건들로 가득했다. 디오니시오 스의 신하인 다모클레스는 이런 왕의 권력과 부를 부러워했다. 하루는 다모클레스가 왕에게 말했다.
“폐하, 얼마나 행복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누구나 바라는 것을 모두 가지고 계시니 말입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폐하의 부와 쾌락을 누려보는 것이 제 평생의 소원입니다.” “재미있군, 내일은 그대가 왕이네. 자네 뜻대로 이 자리에 앉아 마음대로 해보게나.”
다음날 다모클레스에게 왕을 체험할 기회가 주어졌다. 향기로운 술과 아름다운 여인, 흥겨운 음악으로 그는 푹신한 왕좌에 기대어 오늘만큼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중 그는 우연히 왕좌의 천장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다. 날카로운 칼이 단 한 가닥의 말총에 매달려 그의 머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의 표정은 잿빛으로 변했다. 더 이상 술도 음식도 즐길 수 없었다. 음악도 즐겁지가 않았다. 그때 그의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고 디오니시오스 왕이 말했다. “뭐가 잘못되었나?” “저 칼….” “그게 뭐가 그리 대수인가? 나는 매 순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산다네. 나의 권력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칼처럼 항상 위기와 불안 속에 유지되고 있는 거지.”
한니발, 알프스를 넘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불굴의 의지와 지략을 갖춘 뛰어난 명장이었다. 그는 누미디아 기병과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누구도 생각지 못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공략하기로 했다. 이때 알프스 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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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눈앞에 두고 병사들이 낙담할 때 그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용기를 불어넣었다.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만들 것이다!” 더욱이 진군 도중에 눈병으로 한 쪽 눈을 실명했음에도 불구 하고 끝까지 진격하여 위엄을 떨쳤다. 알프스를 넘어 칸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한니발은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러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함으로써 카르타고의 운명은 점차 기울어진다.
“눈물 흘릴 눈이 하나뿐이라는 것이 원망스럽다.” 자마 전투에서 패한 한니발의 눈물의 명언이다.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한니발을 겨우 이기고 난 후에 한니발과 회담을 가졌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수를 누구라 생각하시오?” “우리 시대에 가장 위대한 장수는 역시 알렉산더 대왕이오.” “그 다음은 누구라 생각하시오?” “그것은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요. 그는 처음으로 숙영지의 중요함을 깨달은 자요.” “그 다음은 누구라 생각하시오?” 한니발은 계속되는 스키피오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나 한니발이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말에 조롱을 섞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패한 장수란 걸 잊었소?” 그러자 한니발은 서슴없이 스키피오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세 번째인 것이오. 당신에게 이겼으면 나는 첫 번째가 됐을 것이오.” 한니발은 전쟁에 패했음에도 자신감이 넘쳤으며 로마는 이러한 한니발을 두려워했다. 로마의 역사가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다. 로마는 한니발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스키피오의 절제 “로마인들은 졌을 때 주눅 들지 않았고, 이겼을 때 우쭐대지 않았다.” 이 말은 고대 로마공화국의 장군인 프블리우스 코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카르타고를 불태우자고 격앙된 목소리로 외치는 로마인들의 분노를 누르고자 한 말이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의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무찌른 장군으로, 제3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시켜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역사가들은 만약 스키피오가 없었다면 지중해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며 스키피오의 존재를 높이 샀다. 그가 없었다면 황제 아우 구스투스 이후 꽃피운 대제국 로마는커녕, 거꾸로 카르타고가 로마를 속국으로 지배하면서 지중해 대제국의 패권을 차지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고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는 500년 동안이나 전쟁을 지속해왔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로마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동안 카르타고와 한니발에 대한 원한이 뿌리 깊게 밴 로마는 카르타 고를 포위하고 불태우자는 의견으로 들끓었다. 로마는 관용의 국가이다. 그동안 주변 국가들과 수많은 전쟁을 했으나 적을 초토화시킨 예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에 대해서만큼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카르타고를 불태우고자 했다. 스키피오는 끝까지 반대했으나 증오와 분노의 여론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결국 로마는 카르타고의 포위된 성을 불태웠고, 스키피오는 그 불타는 카르타고를 보며 울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한 제국의 멸망이라는 위대한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을 채우고 있는 것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언젠가는 우리 로마도 이와 똑같은 순간을 맞이할 거라는 비애감이다.” 스키피오는 실로 위대했다. 스키피오의 예견대로 로마는 결국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 붕괴로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저항이 사라지면, 생명력도 사라진다.”
중세사의 결정적 한마디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승인 “모든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믿음을 가질 권리를 부여하노라.” 콘스탄티누스 1세가 313년에 모든 사람에게 기독교를 포함한 신앙의 자유를 선포한 리키니우스의 밀라노 칙령의 전문이다. 많은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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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기독교의 공인을 계기로 로마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서양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세계사에 명멸한 수많은 황제 중 역사상 가장 안정적으로 통일과 균형을 이룬 황제로 콘스탄티누스 1 세만 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도 국가 안정을 위한 통치술의 일환으로 볼 수있다. 콘스탄티누스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사두정치체제에서 이뤄진 기독교 박해 이후이다. 아버지(콘스탄티우스 1세)가 영국의 에보라쿰에서 병사하자 그의 휘하의 장병 들은 즉각 콘스탄티누스를 정제로 추대하였다. 병사들에 의한 콘스탄티누스의 정제 승계는 당시 사두 정치체제 아래에서 적법성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동방 정제인 갈레리우스에게 자신의 권좌 승계에 대한 확인을 요청하였고,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영토를 승계하도록 하되 부제로 인정하고 서방 정제로는 세베루스를 임명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듬해 공동 황제이던 막시미아누스로 하여금 자신을 황제로 인정해달라고 하고 그의딸 파우스타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311년 동방의 황제이자 기독교 박해의 원흉이던 갈레리우스가 죽자 처남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312년 초콘스탄티누스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고 투린과 베로나에서 막센티우스군을 차례로 무찔렀다. 이후 벌어진 유명한 밀리우스 다리 전투로 결국 막센티우스군은 콘스탄티누스에게 대패하고 막센 티우스는 전사했다. 이 전투로 인해 제국 서방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유일한 강자이자 정제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밀리우스 다리의 전투를 앞둔 하루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는 꿈을 꾸었다. 그의 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내일의 전투에서 이긴다고 하였고 기독교도를 나타내는 문자 가운데 X와 P를 합친 문자 라바룸을 병사들의 방패에 그리게 하라고 조언하였다고 한다. 이를 충실히 따른 콘스탄티누스가 결국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수석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초에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공동 으로 칙령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바로 자유롭게 기독교를 믿을 수 있도록 한 밀라노 칙령이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가 막시미아누스를 제거한 뒤 동방의 황제로 등극하자 또다시 그와 전쟁을 벌였다. 전쟁에서 패한 리키니우스는 사형당하고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타이누스 황제의 4인통치를 종식시키고 유일한 황제로 올랐다.
칭기스 칸의 대제국 “행동의 가치는 그 행동을 끝까지 이루는 데 있다.” 세계 대제국을 이룬 칭기즈 칸이 세계 제패를 위해 초원을 누비며 병사들의 용맹을 독려하며 한 말이다. 칭기즈 칸은 1155년 몽골 고원이 온통 전쟁의 광풍이 휘몰아칠 때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자신이 죽인 적장의 이름을 따서 아이에게 ‘테무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몽골의 유목부족들을 통일하려던 예수게이가 부하들에게 독살당하면서 이때부터 어머니 오에른과 테무친을 비롯한 자녀들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나무 열매와 풀뿌리로 굶주림을 달랬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여 그럭저럭 살아나갔다.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말꼬리 말고는 채찍도 없다.” 테무친의 어머니는 이렇게 탄식하면서도 아이들에게 위대한 카불 칸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몽골 귀족으로서의 긍지를 갖도록 교육하였다. 테무친은 17세 때 아버지와 동맹관계에 있던 케레이트 부족의 족장 완 칸의 신뢰를 얻었다. 그는 완 칸의 원조를 힘입어 뿔뿔이 흩어져 있던 아버지의 부하들을 다시 모으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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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메르키트 부족의 습격을 받아 갓 결혼한 신부 보르테가 납치당했다. 테무친은 메르키트 부족에 대한 복수전을 펼쳐 아내를 구출하고, 메르키트 부족을 복속시켜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이에 더해 장차 자신을 반역할 기미가 있는 부족은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결코 배후에 적을 남겨놓는 경우가 없었다. 이때부터 몽골 부족의 지도자들이 테무친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12세기 말에 이르자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테무친을 몽골족의 칸으로 옹립하고자 제의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전쟁과 수렵에서 테무친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1206년은 몽골과 세계의 역사에 일대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라의 체제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은 세계 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몽골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군대는 10진법체제로 나뉘어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들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자들이었다. “능수능란하고 용감한 자들은 군지휘관으로 길렀다. 민첩하고 유연한 자들은 말을 다루도록 했다. 능숙하지 않은 자들은 작은 채찍을 주어 양치기가 되게 하였다.”
칭기즈 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 그의 군대는 사료가 필요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대로는 다른 유목민들은 굴복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몽골족들은 곧 조랑말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군사 전략을 갖추었다. 유목민족의 특성에 강력한 군사기술을 더해 재무장한 몽골군은 규모가 큰 성읍은 투석기ㆍ쇠뇌ㆍ사다리와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함락시켰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아 홍수를 일으키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항복하는 자는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이들은 전멸시킬 것이다.”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 잡고 있던 금나라를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 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연경을 함락시켰다. 칭기즈 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호라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몽골족은 가는 곳마다 도시를 불태웠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칸은 주변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하늘의 도움으로 너를 위해 거대한 제국을 세웠노라. 그러나 세계정복을 달성하기에는 내 생이 너무 짧구나. 이 일은 이제 네게 맡기노라.” 1226년 가을, 서하 원정에 나선 칭기즈 칸은 사고로 말에서 낙마한 뒤 열병을 앓았지만 원정을 강행했다. 칭기즈 칸은 우선 서하에 사신을 파견해 서정에 동반하지 않고 그 자신을 모욕한 것을 책망하며 항복을 제의했으나, 서하는 이를 거부했다. 칭기즈 칸은 서하의 도시 대부분을 점령했고, 1226년 여름에는 서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몽골군은 서하의 수도 흥경을 포위했다. 그러자 서하는 칭기즈 칸에게 사신을 보내 한 달 뒤 주민들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와 항복하겠다고 제의했고, 칭기즈 칸은 이를 허락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절대로 곡을 하거나 애도하지 말라. 탕구트의 군주와 백성들이 기간에 맞추어 밖으로 나오면 그들을 모두 없애 버려라!” 칭기즈 칸은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1227년 8월 18일 또는 8월 25일, 칭기즈 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서하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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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흥경은 함락되고 그 주민들을 학살당했다. 칭기즈 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금나라의 성들이 단단하니 남송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해서 남쪽으로 공략하라.”
칭기즈 칸의 유언을 충실히 받든 아들들은 황하 이남의 개봉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금나라를 남송과 함께 공격하였다. 결국 금나라와 남송은 멸망하고 중국 대륙에는 칭기즈 칸의 원나라가 들어선다.
또한 칭기즈 칸의 후예들은 유럽까지 진출하여 역사상 최강의 정복자의 명성을 떨쳤다.
“집안이 가난하다고 탓하지 말자. 나는 9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도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하였으며, 전쟁이 나의 직업이요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 따져도 10만, 백성은 어린아이에게 노인까지 200만이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도 살아날 수 있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안에 있었다. 나는 나에게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모두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칭기즈 칸이 되었다.” - 칭기즈 칸
근대사의 결정적 한마디
조지 워싱턴의 독립 전쟁 “어려울 때 우리는 가장 많이 성장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미국 독립 전쟁을 치르면서 전장에서 한 말이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으로 건국 이전 영국과 치른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기도 하다. 조지 워싱턴이 활약할 당시 미국은 유럽의 식민지로, 영국과 프랑스가 각축전을 벌였다. 유럽에서 최초의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는 7년 전쟁이 벌어지자 아메리카 신대륙에도 그 영향이 미쳐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지 워싱턴은 다른 영국계 식민지 유지들과 함께 영국군을 지원하는 식민지 의용군에 가담하여 나름의 공로를 세웠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 정부는 식민지 전쟁에 많은 예산과 국력을 소모하자 이 적자를 보충하기 위해 식민지에 세금을 늘리고, 새로 편입된 식민지의 원주민을 다독이려는 정책으로 식민 지인의 구 프랑스 식민지 지역으로의 개척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불만들이 쌓여 영국과의 독립 전쟁이 발발하였다.
“미국인들은 자유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노예가 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지금은 우리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지켜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시기이다. (중략) 앞으로 태어날 수백만의 미국인의 운명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우리 부대의 용기와 행동에 달려 있다. (중략) 우리는 이 상황을 극복할 것인가, 아니면 굴복하여 죽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독립전쟁 때, 롱아 일랜드 전투에 앞서 워싱턴의 부대원들에게 한 연설 중에서
마운트 버넌의 농장에서 조용히 지내던 워싱턴은 미국의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군 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명석한 판단력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온갖 악조건과 싸우면서 끝내 승리를 거두어 미국의 독립을 쟁취하였다. 하지만 독립 전쟁의 승리는 순탄치 않았다. 독립 전쟁의 막바지인 1783년 3
월, 대륙회의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장교와 사병들이 전문을 돌려 의회로 쳐들어갈 것을 선동했다. 워싱턴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 나가 장교들에게 민간 정부에 도전하는 것은 스스로의 자유를 버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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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행위와 같다고 역설하면서 즉각 중지할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들의 불만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3 월 15일, 수백 명의 장교와 사병들이 모였다. 워싱턴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자리에 직접 찾아가 장문의 연설을 하며 이 반란의 부당함을 역설했다. 하지만 군사들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무기력함을 느낀 워싱턴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한 의원이 반란의 부당함을 지적하려고 워싱턴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려 했다. 편지를 읽기에 앞서 늙은 워싱턴은 말했다. “여러분, 제가 안경을 좀 써야겠습니다.
조국을 위하여 전쟁을 하다 보니 이제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눈은 장님이 될 정도로 침침해졌습니 다.”
이 말에 그곳에 모여 있던 수백 명의 장교와 사병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물론 군인들의 쿠데타는 실현 되지 않았다. 후일 토마스 제퍼슨은 이 일을 언급하며 워싱턴이 아니었으면 미국의 자유는 수호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술회하였다.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조지 워싱턴은 1787년에 버지니아 주 대표가 되고, 약 2년 후에 치러진 초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하게 만장일치로 당선되어 취임한다. 마침내 미국이 탄생되고 그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직도 대통령이란 자리가 무엇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더러, 그가 선출된 국왕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인 자신도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국왕이라고 생각하여 국왕처럼 행동하였다. “공동의 합의에 의해 정의된 법이 절대 개인에 의해 짓밟혀서는 안 된다.”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한 1789년 이후 약 10년간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만들려는 알렉산더 해밀턴이 이끄는 연방주의자와 주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려는 토마스 제퍼슨이 이끄는 반연방주의자의 대결로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분열과 정쟁으로 점철되던 때였다. 그때 워싱턴은 내각에 두 파의 인물 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균형을 잡았다. 자칫하면 유혈충돌로 번질 수 있는 사태를 조정했는가 하면 수천 명의 농민들이 납세거부운동으로 일으킨 위스키 반란을 단호하게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해 정부의 위신을 세웠다. 그렇게 억압과 조정을 정교하게 배합하여 지도자로서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다.
“……타국에 대해 습관적 증오나 혹은 습관적 호의를 품은 국민은 자신들의 증오심이나 애착심의 노예 이다.” -조지 워싱턴의 고별사 중에서
1797년 두 번에 걸친 임기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종신 대통령직에 머무러 줄것을 간청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자신이 3번이나 임기를 맡는다면 장기집권을 위한 무서운 권력투쟁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2번의 임기만을 수행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워싱턴은 대통령직을 떠나면서 유명한 ‘고별사’를 발표하였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미국인들의 신념에 신성한 정신의 지표로 살아있다. 이 고별사에서 미국 국민들에게 대내적으로는 정당 및 지역 간의 대립을 경계하고, 대외적 으로는 외국의 분쟁에의 개입을 경고하며, 경제적 확립을 위하여 국가의 재정적 신용을 높일 것을 당부했다.
“정계를 떠나고자 하는 내 선택이 주의와 분별의 잣대에 비추어 바람직할 뿐 아니라 애국심의 잣대에 비추어서도 그릇되지 아니한 선택이라 믿는다.” 권력을 잡았다가 놓기란 정말 쉽지 않다. 당시 미국법 어디에도 대통령직은 2번까지만이라는 말이 없었지만, 워싱턴이 2번만 하고 물러난 뒤 이후의 미국 대통령들도 2번 넘게 대통령직을 하지 않고 1선과 2선에 한해서만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 그러다가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4회 연임을 한 뒤에 1951년에야 법으로 4년 중임제가 명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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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은 2번의 임기 후에도 미국에서 인기가 많았고, 더군다나 당시 시대적 상황을 봐도 세계 최초의 대통령이었기에 전례도 없는 대통령직(사실상 봉건국가의 왕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식이 강했다) 수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본인이 2번 넘게 집권하게 되면 왕권이 된다는 생각에 주저하지 않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왔고, 워싱턴의 결단이 오늘의 미국의 민주주의와 대통령제가 문제없이 돌아가는 이유라고 볼 수도 있다.
워싱턴은 독재자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상기했듯 민중의 지지도 있었고, 정부 권력을 확고히 쥐고 있었으며, 군대마저 그의 통솔 하에 있었다. 본인이 군인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대통 령의 개념이 잡히지 않았을 시기라 마음만 먹었다면 종신집권까지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그 모든 권력욕과 유혹을 이겨냈다. 그 때문인지 아직까지도 미국에서 최고의 대통령을 꼽으 라고 하면 톱 5위 안에 반드시 들 정도로 많은 미국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이제 나는 죽는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 워싱턴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 2년 후인 1799년 12월 14일에 사망했다. 워싱턴의 공식 사인은 ‘무리한 과다출혈’이다. 워싱턴은 눈 내리는 날 무리하게 말을 타고 산책하다가 폐렴에 걸렸고, 치료를 하기 위해 무리하다고 생각될 만큼 많은 피를 뽑았다. 결국 5파인트(약 2.35리터)나 되는 피를 뽑은 워싱턴은 폐렴에 걸린 지 3일만에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현대사의 결정적 한마디
윈스턴 처칠의 위기 극복 “성공이 마지막이 아니며 실패 또한 치명적이 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 끌고 갈 수 있는 용기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수상 윈스터 처칠의 유명한 격언이다.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고 하지만, 난세가 낳은 영웅이 시대의 진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처칠이 그러했다. 그의 불굴의 용기와 리더십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아마도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윈스턴 처칠은 1874년 11월 30일 옥스퍼드셔에서 출생하였다.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는 재무장관까지 지냈던 대정치가 랜돌프 처칠이고 어머니는 월가의 유명한 금융인이었던 레너드 윌터 제롬의 딸 제니 제롬이다. 명문가 출신이지만, 아무도 그를 귀족적 이미지로 기억하지 않았다.
처칠은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공부를 엄청나게 못했으며,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도 3수끝에 겨우 들어갔다.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갈 때 아버지는 병과를 보병으로 받길 원했으나, 처칠은 수학을 하지 않고 입학 커트라인이 낮은 기병을 원했다. 당시 기병은 발라클라바 전투 이후로 위상이 추락한 데다, 말 관리에 돈이 많이 드는 병과라서, 공부에는 담을 쌓은 돈 많은 자제들이나 가는 곳으로 여겨졌다. 그래도 처칠은 입학 후엔 기병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보여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군인과 종군기지 신분으로 여러 전쟁에 참전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직접 노를 저어라.” 1899년 처칠은 종군기자로 보어 전쟁에 참전하여 당시 처참한 전황 등을 생생히 본국에 전달했다. 원래는 민간인 신분으로 종군기자 역할만 했지만 몇몇 모험을 겪은 뒤 군인으로 동시에 복무하기로 하였다. 전쟁 도중 보어인 코만도(게릴라부대)에 붙잡혔으나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였다. 그는 적군으로부터 추격을 따돌렸지만 남아공 지리를 몰라 당황했다. 처칠은 무작정 어느 집에 들어가 문을 두드려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집은 그 지역에서 유일한
- 10 ? 결정적 한마디가 삶의 철학이 된다
영국인 이주자인 존 하워드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워드는 조용히 처칠을 안으로 들여보내 식사를 대접하고 처칠을 보어인처럼 위장시키고 말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처칠에게 먹을 것이나 물을 싸준 다음에 길도 가르쳐줬다. 처칠은 이렇게 보어군인 척 위장하고 태연히 초소를 통과한 후 기차의 대차
(바퀴축) 부분에 몸을 동여매고서 그곳을 탈출했고 중립지대인 포르투갈령 모잠비크까지 무려 480km 를 걸어가서 완전히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영국으로 귀환한 처칠은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겁먹지 말게. 전쟁은 웃으면서 하는 것이야.”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장관을 맡고 있었다.
처칠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군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어 속도를 빠르게 향상시키는 등의 국방개혁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었으나, 독일이 잠수함을 개발하는 바람에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현재 터키공화국)의 무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영국군을 파병한 작전도 인명과 재산피해가 커서 사실상 실패한 작전이 되었다. 작전 실패에 대한 문책으로 장관직을 사퇴한 처칠은 처제의 권유로 우울증을 잊기 위해서 시골에서 수채화를 그렸다. 그후 처칠은 제1차 세계대 전이 발발하자 중령으로 복귀하여 참전하였다. 당시 그는 유머를 활용하고 복지를 개선하여 군인들의 사기를 높였는데, 모든 장병들이 목욕을 할 수 있도록 하여 만연해 있던 피부병을 치료하게 했으며 군인들의 정신적 고통을 진정시켰다.
“하늘에 나는 연은 순풍이 아니라 역풍에 가장 높이 날아오른다.” 1918년 말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19년 1월에는 영국의 육군 및 공군상이 되어 이전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한다. 한편 그가 속해 있던 자유당이 몰락하고 노동당이 새롭게 떠오르자, 그는 다시금 보수당으로 복귀한다. 이 때문에 철새 소리를 들었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것은 당의 정책이 자신의 주장과 반대될 때만 당을 옮겼기 때문이다.
“비관론자는 수많은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찾고, 낙관론자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기회를 찾아낸다.”
처칠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에 대해 부과한 천문학적인 전후배상금 징수를 반대하며, 이것이 새로운 전쟁을 불러올 것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전후배상금으로 인해서 독일 경제가 피폐해진 것이다. 처칠은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하자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이 평화 무드를 유지하기 위해 유화정책을 펴고 있는 동안 히틀러의 야망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처칠의 주장은 호전광 취급을 받으며 정치판에서 외면되었다.
“우리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열쇠는 결코 힘이나 지혜가 아니다. 바로 끊임없는 노력뿐이다.” 나치 독일이 영국을 공격해오자 처칠의 견해가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영국 정부는 처칠을 다시 해군장관에 임명하였다. 이후 평화주의자 체임벌린이 외교문제에 책음을 지고 사임하고, 조지 6세의 승인을 얻어 처칠이 총리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전시내각에 모두 참여한 영국 유일의 정치인이 되었다.
그런데 곧이어 벌어진 프랑스 전역에서도 프랑스군의 무능함과 독일군의 빠른 작전에 영국군도 대패하고, 덩케르크 철수작전 이후 사실상 영국은 유럽에서 고립된 채 독일과 홀로 맞서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처칠은 국민의 사기를 고취시키고자 애를 썼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독일군은 내시체를 집무실 의자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이다.” 처칠은 자신의 말대로 독일군의 공습이 가해져도 끝까지 런던에 머물렀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오. 절대, 절대, 절대, 절대로!
엄청난 일이건 작은 일이건, 크건 하찮건 상관 말고, 명예로움과 분별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는 경우 들이 아니라면, 절대 포기하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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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처칠은 영국의 2대 명문고등학교인 해로우 고교 졸업식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어 연설문을 준비해 왔으나, 전시인 상황이다 보니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겨 금방 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 연설할 시간이 없다는 보좌관들의 전언이 왔었다. 그러자 처칠은 연단에 올라 이 말만을 남기고 떠났다. 이는 후일 사람들에게, 처칠 자신이 2차 대전의 승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비춰지기도 한다. 처음엔 학생들이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그의 뜻을 이해한 청중들의 박수갈채와 함성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가 떠난 뒤에도 그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보시다시피 영국 수상은 미국 대통령 앞에서 숨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처칠이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갔을 때 했던 말이다. 숙소에서 목욕을 마치고 수건만 두르고 있는 처칠 앞에 루즈벨트가 나타났다. 몸을 일으키던 순간 처칠의 허리에서 수건이 흘러내리고만 것이다. 알몸이 된 처칠과 정장 차림의 루즈벨트. 서로 간에 얼굴이 뜨거워질 민망한 장면이다. 이때 처칠이 빙그레 웃으며 위와 같이 말했다. 처칠의 태연스런 유머에 박장대소한 루즈벨트 대통령이 마음속으로 그를 존경하게 되어 정상회담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장비를 주면, 우리가 끝장내겠습니다.” 1941년 2월 9일, 영국 BBC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처칠의 연설 일부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국은 전쟁 물자를 구입할 돈도, 운송할 여력도 없었다. 믿을 것은 오로지 미국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무기수출법은 대금 선불과 구입자 운송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처칠의 호소는 ‘무기를 그냥 달라. 뿐만 아니라 운송까지 책임져 달라’는 뜻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의회를 설득해 무기대여법을 통과시키고 1941년 3월 11일에 서명했다. 미국 방위에 필요하다고 인정 되는 어떤 나라에도 무기를 대여할 수 있는 획기적인 법안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은 310억 달러어치 무기를 공급받았다. “그럼 우리가 이겼군.”
- 12 ? 결정적 한마디가 삶의 철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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