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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물강토 [이광균]

by Casey,Riley 2023.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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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 사 소 설
      다 물 강 토
                                                     多 勿 疆 土




                             제 1 권












                             차 례





     1. 전   쟁  ......................................................................................................  5


     2. 화친(和親)도, 척화(斥和)도  ................................................................  64


     3. 남한산성(南漢山城)  ............................................................................  114


     4. 항   복  ..................................................................................................  173


     5. 왕 재(王 才)  ........................................................................................  222


     6.만주, 그 그리운 산하  .........................................................................  274







                    다 물 강 토 (多 勿 疆 土)


  이 이야기는 힘의 준비도 없이 문치(文治)제일 만을 부르짖던 관료들에 의해 나라를 송두리째 잃은 조선 인조시대의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이를 극복하고 국가전란으로 
인해 황폐한 조선에 새로운 힘, 새로운 희망을 불러 일으켰던, 조선사를 통털어 가장 큰 웅지를 펼치던 임금 효종(孝宗:인조의 둘째아들)의 강토수복(북벌:北伐)에 관한 이야기이다.

                                       * 다물(多勿)은 되찾는다, 회복한다는 뜻의                                                        옛 말로 강토수복의 염원이 서린 말이다.








































                           1. 전  쟁





  "이놈들이 기어코............!"
  벌겋게 달아오른 충혈된 눈의 임경업(林慶業)이 땀에 젖은 투구를 벗다 말고 전방이 트인 성루(城樓)로 튀어 올랐다.
  "강을 건넌 적의 기병(騎兵)이 삼만, 선봉장은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라 하옵니다."
  적(敵)의 동태를 낱낱이 파헤친 급보가 첩첩이 쌓이는 성루엔 비장한 모습으로 둘러선 부장들이 숨죽인 채 다음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
  "다시 삼만의 기병이 단동(丹東)에 당도했다 하옵고 그 뒤를 이은 본진 6만을 태종 홍타시가 직접 거느리고 조선을 향한다 하옵니다."
  "...............!"
  임경업의 시야에 적군(敵軍)의 실체가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과연 성루 아래로 까마득히 보이는 압록강에는 수천인지 수만인지 모를 인마(人馬)가 번뜩이는 창검으로 무장한 채 까맣게 까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병자(丙子:1936년)년 섣달 초아흐레(12월9일)............ 
  시월(10월)이 지나며 얼어붙기 시작하던 압록강은 동지. 섣달로 접어들며 두텁게 얼어붙었고 빙판의 압록강은 수 만 인마가 도열할 수 있는 연병장이나 다름없었다.
  그 연병장 한 가운데.....
 조선이 조선 개국이래 250여년 동안 성역으로 받들어온 위화도가 청나라 군사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 있었다.
  "..................!"
  임경업의 시린 눈으로 핏발이 다시 몰려들었다.
  위화도는 고려왕조에는 마지막을, 조선왕조에는 시작을 안겨준 역사의 섬이었다. 그와 함께 조선은 바다를 통해 일어나는 전쟁에는 강한 면역력을 보이면서도 유독 대륙
으로부터 밀려오는 전쟁에는 무력한 일면을 보였다. 그것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길 
수 없다는 관념론(觀念論)과 중화(中華)라는 문화론(文化論)이 새롭게 시작하는 조선
왕조의 정신을 지배한 까닭이었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
  발달한 주자학(朱子學)의 이념으로 무장한 명나라가 고려왕조를 지배하던 원나라(몽고족)를 무너뜨리자 고려를 뒤집고 일어선 조선은 그 명나라 이념의 근간인 주자학을 조선의 국교로 정하기에 이르렀고 조선의 유생들은 주자학의 본토 명나라를 대중화(大中華)라 우러르며 꿈의 나라로 동경하였다. 
  삼면이 바다인 그 잇점을 십분 발휘, 해상 왕국을 건설한 장보고도 있었건만 조선은조선이 삼면의 바다 속에 갇힌 작은 나라라 스스로 자처하며 소중화(小中華)로써 거듭나기만을 소망처럼 바라고 있었으니 그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조선의 피맺힌 현실 앞에 임경업은 뜨거운 오열을 속으로 삼키고 있었다.
  태평성대에야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칭송이 어찌 욕될 일이랴...........
  그러나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예(禮)를 고집 하는 학자들은 늘어 갔고 학문이 깊을수록 고집의 도는 더해만 갔으니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으리......
  그 도강하는 수 만의 적군들을 비감에 젖어 바라보던 충혈된 눈의 임경업이 숨죽인 채 둘러 서 있는 부장들에게 무거운 군령을 하달했다.
  "봉수를 올리고 전군은 전투 태세로 돌입하라!"
  순간 성루는 성루를 박차고 튀어 나가는 부장들로 갑자기 소란스러웠고 일순 임경업의 시야도 뿌우였게 흐려지고 있었다. 전쟁은 이미 이겨놓은 싸움을 군사로써 확인하
는 마지막 절차일진대, 그 승리를 확인하러 달려드는 청나라 군사들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임경업의 마음이 아프도록 쓰리고 참담했던 것이다.
  '단, 일만의 군사만이라도 있었던들............' 
 적이 도강할 주요목에 일만여 정예군사를 배치하여 놓는다면 적의 십만대군쯤이야 무에 그리 어렵겠느냐 자신하던 임경업이었다.
  그 비통한 사색에 잠겨있던 임경업이 성안팎 주요 지휘관들을 향해 뛰닫는 전령들의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눈을 떴다.
  "가자!"
 그 땀에 절은 투구를 다시 쓴 임경업이 호위 부장들을 이끌고 전선(戰線)으로 향하자 그 전선으로 투입되던 장졸(將卒)들의 핏발선 눈들이 번뜩이며 급기야 산성엔 폭풍전야의 공포(恐怖)가 몰려들고 있었다.

적군이 침투할 주요 목에 화약을 묻고 병사들이 매복되었으나 그러나 임경업이 거느린수하 군사라곤 창검을 잡을 수 있는 16세 이상의 농민 군과 부녀자를 포함해서 천여명 남짓.........  그 누구의 눈에도 기치창검이 정연한 십 수만 적군을 맞아 싸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 전율스러웠다. 
  "..............!"
 살을 에듯한 북만주의 모진 회오리 눈바람이 압록강 빙판을 휩쓸고 성채를 덮치자 고개가 빠져라 압록강변을 노려보던 조선 병사들의 사기도 그 눈보라 앞에서는 한풀 꺾
이고야 말았고 돌 틈에 몸을 사린 병사들이 결코 추위만이 아닌 이미 승산 없는 싸움
에서 오는 불안으로 떨기 시작했다.
  "조금도 두려워 말라!"
  "군령에 따라 움직이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니라!"
  "전군은 동요치 말고 나를 따르라. 우리는 이긴다!"
번쩍이는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임경업이 장검을 빼어 든 채 흰 백마에 오른 모습은마치 신장(神將)을 연상케 하는 위엄이 있었다. 그 임경업이 늠름한 모습을 한 무장들을  대동하고 일선의 병사들을 손수 독려하며 용기를 북돋우자 불안에 떨던 병사들이 그 임경업을 본 것만으로도 힘이 솟는지 다시금 눈빛을 빛내며 전의(戰意)를 가다듬어 갔다.
 손을 내밀면 푸른 물이 뚝뚝 흐를 것 같은 그 파아란 하늘로 다섯줄기의 하얀 봉수가 오르고 이있었다.
 봉(烽)은 횃불로 신호하는 야간용이고 수(燧)는 연기로 신호하는 주간용이다. 봉수대에 설치된 다섯개의 봉수는 각 고장이 평화로울 때는 하나를 켜고 국경밖에 적이 나타나면 둘을, 적이 국경에 가까이 오면 셋, 국경이 침범되면 넷, 그리고 다섯은 우리 군사와 접전 중이라는 가장 급한 신호였다. 
  "저, 저거이 뭐이요? 다섯줄기 아이요!"
  "이런, 니미! 터진다 터진다 하더니만서리 기어코 터지고 말았구만 기래!"
  "봉수로 보아 이미 강을 건넌 모양이요. 아이고, 이러구 있을 때가 아이요, 날래들 피하시라요. 날래들 피해."
  그 다섯줄기의 봉수에 놀란 의주, 선천, 정주간 요로(要路)의 백성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불안에 떠는 소릴 하다 곧 흩어졌다. 오랑캐의 침탈을 수시로 겪어온 변방민들이었으나 그러나 다섯줄기의 봉수는 근래 보지못한 10여년 만에 처음보는 큰 봉수였다.
  "이보라우 상구아버이, 저거이 어캐된기야요."
 심상찮은 마을 사람들의 수런 거림에 눈이 침침한 칠십 노파가 그 솟아오르는 봉수를 놀란 눈으로 보다말고 옆집으로 달려갔다.
  "할머이, 날래 피하시라요! 저건 뙈놈들 노략질로 올린 봉수가 아니올쎄다. 저건 노략질이 아니라 전쟁이외다. 전쟁!"
  "머시라. 저, 전-장?"
  "그렇수다, 전쟁!"
  "아이고! 이걸 우째. 우리 아덜이 사냥갔다 아적 돌아오덜 않했는데!"
  갑자기 사색이 된 노파가 안절부절 못하자 떨리는 목소리를 내던 사내도
이불을 들었다 뒤주를 들었다 하며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우쨌던, 피하고 보시라요. 저 봉수는 사방천지에서 다 보이는 거이끼니."
  "이걸.....우째. 이걸......우......째. 아이고......... 내아들."
  "아니, 할머이!"
  갑자기 마루에서 튀어 내려온 사내가 얼굴이 꺼멓게 죽은 채 모로 쓰러지는 그 노파를 부축해 일으키는데 북쪽 하늘이 까맣게 물들고 있었다. 검은 연기였다. 
  "아니, 벌.....써?"
  그 검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는 사내와 노파의 등줄기로 오싹하는 전율이 흘렀다. 그 오랑캐에게 남편과 자식 다섯을 잃은 노파였다.
  "이럴 수는 없수다래, 이럴 수는.......  내래 이 놈들을."
 아들이 사냥나간 그 산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노파가 사내의 부축을 뿌리친 채 꼬부라진 허리로 달려나가 단궁(檀弓)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뙈놈이라면 꿈에서도 이가 갈리는 노파에게 그 오랑캐는 단연코 원수였다.
 뿌리치는 노파를 기어코 따라가 피난짐을 거들던 사내가 발을 구르며 손짓하는 제 가족을 향해 달음박질 친 것은 치솟는 검은 연기가 바로 코앞 발치에서 일어나면서 부터였다.





                                  ㅇ


  의주는 이미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의주에 난입한 청나라 군사들이 지른 불이었다.
 검은 연기가 치솟을 때부터 발을 동동 구르던 산성의 의주 부민들이 충천하는 불길에의주가 휩싸이자 의주가 탄다, 우리집이 탄다며 오열하기 시작했고 그 울음은 곧 통곡으로 이어졌다.
  "저거이 도, 도대체 몇이나 되는 거이가?"
 방화(放火)를 끝내고 치달려 들어오는 청나라 기병의 모습이 육안으로도 식별 가능할 즈음 매복한 병사들이 놀라 외치는 소리에 부민들의 통곡 소리도 뚝 끊어졌다.
  "웬수 같은 간나새끼!" 
  성채위의 한 사내가 눈물을 닦으며 이빨을 악다물었다.
  "썅! 내래 오래 살 생각 없으니끼니!"
  "옳수다. 죽을때 죽더라도 한 놈이라도 더 까부셔 버리고 죽자우요!"
  성채위의 부민들이 그 짓쳐 들어오는 적의 기병들을 독오른 눈으로 노려보며 돌멩이를 움켜 잡았다. 또한 우- 몰려나온 남녀노소 부민들이 너. 나 없이 돌덩이를 쌓아 올리며 죽기를 다짐하는데 바윗돌을 깨트려 만든 날카로운 돌멩이를 주워 나르던 부녀자들의 두 눈에서조차 퍼런 불이 뚝뚝 떨어졌다. 그 눈앞에 무인지경 내닫듯 앞을 다투어 질주해 들어오는 청나라 기병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일때였다.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앞달려 내닫던 청나라 기병들이 하늘로 치솟는 모습이 보이더니 이어 천지를 깨뜨리듯 진동하는 화약폭발음이 울렸고 그와 동시에 연이어 폭발하는 시뻘건 불기둥들이 하늘 높이 치솟을 때마다 갑주로 무장한 청나라 기병과 군마의 사지가 수십길 밖으로 흩어져 떨어지는 모습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 장관에 동상에 얼어 터져 피고름이 흐르던 부민들의 손끝이 불끈 솟아오르며 저도 모르게 고함이 터져 나왔다.
  "죽여라!"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다 죽여라!"
  "죽여라 - 아"
  "우 - 와"
 솟구쳐 오르는 함성은 산성을 고동치게 했다. 그러나 화약 폭발의 굉음이 메아리지며물러간 그 뿌우연 먼지속을 헤치며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림자들이 또 다시 밀
려들자 함성은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써늘하게 식어 갔고, 돌팔매로는 턱없이 
먼 거리임에도 날카로운 돌멩이를 집어든 독오른 부민들이 손가락이 끊어져라 손아귀
에 바짝 힘을 줄 때였다. 그때 또 어디선가 "쏴라" 하는 악에 바친 고함소리가 났고 
이어 난자한 총소리에 놀라 갈팡질팡 하던 그 그림자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모
습이 분명하게 보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성채 위의 부민들도 놀라 돌멩이를 움켜쥔 채 벌떡 일어섰다. 분명코 그것은 그간의 고통을 까맣게 잊게 하는 믿지못할 광경이었다. 
  "이겼다!!"
  "우-와!!"
  "이겼다! 만-세!! 만-세!!!"
  자신도 모르게 지르는 함성이었고 또한 핏대가 터져 나도록 질러 대는 함성이었다.
  함성과 북소리에 산성이 진동하자 놀란 청나라 선봉장 마부대와 용골대는 뒤로 후퇴하여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임경업이오."
  마부대가 소리치며 물러났으나 용골대는 독오른 눈으로 전고소리 요란 한 그 백마산성을 끝까지 노려보고 있었다.
  "제깟것이 그래 봐야 독안에 든 쥐지요, 가면 얼마나 가겠습니까."
 전열을 가다듬은 용골대가 다시 산성을 포위하며 압박해 들어갔다. 숫적 우세함을 내세워 총공세에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용골대의 오판이었다.
  눈보라를 몰고 오던 북서풍이 때마침 세차게 불어 대자 결사 항전에 나선 부민들과 조선 군사들이 동문에 준비해 두었던 마른 풀 더미에 불을 붙여 성문 밖으로 힘껏 
내던졌다.
  불은 바짝 마른 갈잎과 나뭇가지에 옮겨 붙으며 삽시간에 큰 산불로 번져 갔고 불길을 미처 피하지 못해 허우적대는 적군을 기다린 듯 꿰뚫는 것은 조선군의 화살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서문 곳곳에 묻어 둔 화약 위로 적병들이 몰려들자 화약을 터트려 적병들을 격몰 시켰고 또다시 몰려드는 청나라 기병의 머리 위로 비격 진천뢰(飛擊 震天雷)가 우박처럼쏟아져 폭발하자 다시는 덤벼들 엄두를 못 내고 물러나는 청병들에게 이번엔 날카로운 돌팔매가 날아들었다. 성난 부민들의 비수같은 돌팔매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마부대와 용골대는 훤히 트인 남문을 바라보면서도 남문 공략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임경업의 용명이 허명은 아닌 듯 하오이다."
  "..........."
  마부대가 돌아설 뜻을 밝히자 뜻밖의 저항에 놀란 용골대도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지체 할 시간이 없소이다. 조금 있으면 구왕(九王:다이곤)의 본진이 곧 강을 넘을 것 아니겠소."
  "그럴 것입니다."
  "갑시다, 시간이 없어요."
  백마산성 공략이 어렵다는 것을 안 마부대와 용골대는 5천여 군사로 산성을 포위케 하고 나머지 군사를 빼돌려 이제 막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군사와 합세, 한양을 향해 치달리기 시작했다.
 적은 군사로 대군을 막아낸 백마산성에서는 승리의 환호가 북소리와 더불어 솟아오르고 있었으나 그러나 군사의 준비가 없던 용천, 선천, 곽산, 정주는 단 하룻만에 떨어
지고 있었다. 





                                  ㅇ


 다섯줄기의 봉수가 황주 정방산성(正方山城)에 전달되었던 9일 오전, 그 봉수를 바라보면서도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태연했다.
 "지금쯤 사신(使臣) 박노(朴 )가 압록강을 건넜을 것이니라. 오랑캐가 조선의 사신을 환영하러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 저건 임경업이 지레 봉수를 취한 것일 터이니 그리알라. 오랑캐 따위가 어찌 국경을 넘겠는가."
 도원수의 위엄을 앞세운 김자점이 임경업을 싸잡으며 다섯줄기의 그 봉수조차 무시하자 군관 신용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도원수 대감, 저것은 세줄기도 아니요, 네줄기도 아닌 다섯줄기의 봉수입니다. 임장군이 확인도 없이 다섯줄기의 봉수를 올렸다 보시옵니까?" 
  ".............?"
  "속히 방책을 세우소서, 일각이 급하옵니다."
  장수의 눈에 다섯줄기의 봉수는 위급하게 보였다. 그러나 뒷짐 진 김자점은 오히려 그 신용을 아니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방책이라니......?"
 "저 다섯줄기의 봉수는 적과 교전중이라는 화급을 다투는 봉수옵니다. 도원수께서 어찌 그 사실을 간과하려 하시옵니까!"
  "아니, 이자가!"
  순간 김자점의 두 눈이 부릅떴고 빨개진 눈알을 무엄하게 치뜬 군관 신용이 그 도원수의 두 눈을 맞받았다.
  "일각이 급하옵니다. 어서 속히 출진의 영(令)을 내리시옵소서."
  "고이헌! 어느 안전이라고 네 감히 함부로 나서는 게냐. 하급 무관 주제에!"
 평소 병법에 관해 바른소리 잘 하던 군관 신용을 마뜩찮게 여기고 있던 김자점이었다.그 신용이 이젠 눈알마저 빤히 치뜨길 대수롭지 않게 하자 김자점은 도원수의 위엄으로 고함부터 내질렀다. 그러나 눈에 불을 켠 신용이 김자점의 고함 따윈 한 귀로 날려보내며 또 한번 다급하게 외쳤다.
 "도원수 대감! 적의 날랜 기병이 조선의 대로를 따라 바람같이 내닫는 다면 이틀만에평양이 떨어지옵니다. 평양에서 황주까지는 채 반나절 거리도 아니되오니 우리가 지금출진한다 하더라도 저들을 막을 시간이 없사옵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했사오니 어서 속히 출진의 영을 내려 저들이 지나가는 주요 길목에 군사를 매복케 하시오소서. 한시가 급하옵니다. 대감!"
  "너희 무관들이 걸핏하면 병법을 들먹이며 아는 체 한다만 내 알기로 여진의 오랑캐 따위는 알 필요도, 또한 상대할 필요도 없느니라. 알 필요 없는 상대를 굳이 알고자 하는 것이 이미 병법에 어긋난 처사인 즉......."
  정곡을 찌른 신용의 말에 안색이 식어가던 김자점이 청나라를 굳이 여진이라 업신여기며 자신의 체면을 높이려 애썼다.
 "대감, 여진의 오랑캐는 이미 세종때의 그 오랑캐가 아니옵니다. 명나라와 대등한 군세를 가지고 명나라 공세에 나선 작금이올시다. 어서 출진의 영을 내리시오소서."
  신용이 김자점의 허세하는 말꼬리를 잡아 또다시 정정(訂正)하며 다가서자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도원수 해먹을 일이지 어째 내밑에서 밥을 먹느냐."
  하며 도끼눈을 아래위로 치뜨던 김자점이 그 신용을 냉정하게 뿌리쳤다.
  "아니, 대감!"
  더 무엇을 말하려던 신용의 입이 그 말 앞에 다물어 졌고 황망해 하는 그 신용을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던 김자점이 훽!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령부를 떠나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속이 쓰릴 때면 으레껏 찾는 침실이었다.
 '오랑캐 타도를 국시(國是)로 정한 마당에 오랑캐가 쳐들어오다니........  미친것들!'
 김자점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근래의 불측한 기운들은 자신이 이룩한 업적을 송두리째 뒤엎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청나라의 군세를 굳이 왜소하게 폄훼(貶毁)하는 것도 그 불온한 기운들을 어떻게든 외면해 보려는 마지막 발악 같은 자기 기만이었다. 또한 임경업의 공(功)과 그의 용명(勇名)이 조선 천지를 뒤덮으면서 병법을 앞세운 무장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 것도 볼썽 사나웠고 임경업의 명성이 자신의 이름보다 한발 앞서는 것도 참지 못할 일이었다.

  김자점이 임경업을 눈엣가시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세운 계획에 반기를 들면서 부터였다.
  정묘호란 이후 거듭되는 군사력의 부족과 물자 공급의 어려움을 들어 김자점은 청북(청천강 이북)포기를 구상하고 이를 곧 실행에 옮길 준비로 한때 골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4군6진을 포함, 압록.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을 내버리고 청천강 이남의 안주 중심으로 새 국경을 정함과 동시에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요새화 하여 유사시 임금이 있는 한양 도성만 방어 하겠다는 계획이 밝혀지면서 온 조선이 술렁 거렸고 특히이해 당사자들인 청북인들이 천둥에 놀라 뛰닫는 망아지 모양으로 입에 거품을 뿜으며 집단 반발의 움직임을 보이자 평안도 병마절도사였던 이괄(李适)의 난으로 호되게 놀랐던 인조는 허둥대기만 할 뿐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러한 때에 청북 포기는 조선의 주권 포기라는 충의와 절개로 눈물 바다를 이룬 의주부윤 임경업의 비장한 상소가 인조를 감동시키자 청북 포기의 주장은 한발 후퇴하였고 그로 인해 김자점이 애써 세웠던 계획은 그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김자점의 증오는 뼛속에 사무쳤고, 그때 또 조선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사태가 바다 건너 산동으로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명나라를 배반한 공유덕, 경중명의 9만 대군이 산동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는 바다 건너 조선의 용천, 철산 등지를 향하고 있다는 첩보가 조선 조정에 보고되었던 것이다. 9만 대병을 막아낼 힘이 없는 조선은 두려움과 공포속에 떨고 있을 뿐인데 이때 또 임경업이 명나라 수군과 합세, 철산 앞바다에서 그 9만 대군을 격몰 시키니 청나라에 투항하려던 공유덕, 경중명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공유덕과 경중명만이 간신히 살아 도망치게 한 임경업의 용명은 명나라와 조선, 그리고 청나라에까지 떨치게 되었다. 
  그 승리에 감격한 명나라 황제 의종이 그런 조선의 장수 임경업에게 총병(摠兵:사령관)이라는 명나라의 높은 관직을 내리고 놀랄 만큼의 많은 포상으로써 그의 대공(大功)을 치하하자 조선과 조선 조정은 전승(戰勝)의 기쁨에 젖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의주 부윤겸 청북방어사에 재 임명된 임경업이 인조 12년(1634년)에 다시 의주진 병마첨 절제사를 더하여 백마산성을 방어하기에 이르렀다. 
  압록강 맞은편의 송골산과 봉황산(鳳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며 의주 연변의 많은 유민(流民)과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자 조정에서는 그 공을 
또한 치하하여 가의대부(嘉義大夫)를 가자 했고 의주, 선천, 정주, 곽산, 안주 연변의 수많은 백성들은 그런 임경업을 어버이처럼 믿고 따랐다. 
  그 임경업이 두달전, 의주 부민들을 백마산성으로 피신시킨 후 국경을 수비 할 조선군의 열세를 들어 1만의 병력 증원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때 김자점은 '많은 군사
로 국경을 수비하는 일이야 누군들 못하겠는가.'라며 임경업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
절,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 보인 일이 있었다. 그러자 임경업보다도 국경이 무
너질까 염려하는 장수들이 더욱 목청을 돋구며 병법에 관한 한 도원수인 자신을 임경
업 보다 서너수 아래로 치부하는 데는 이가 갈렸다.
  이래저래 편치 못한 김자점의 속을 군관 신용이 병법을 들먹이며 긁어내리자 김자점의 속은 신물이 올라오도록 쓰리고 아팠다.
  "괘씸한 것들........."
  김자점은 가래침을 카악 긁어 올려 사령부 앞뜰에 퉤! 뱉고는 두말없이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ㅇ


  의주 통군정에서 시작된 봉수가 용천, 선천, 정주, 곽산, 안주, 숙천, 평양을 거쳐 조선군 도원수 김자점이 있는 황주 정방산성을 지나 사리원, 개성, 금촌을 경유, 한양 모악산에 당일로 당도해야 할 그 긴급을 알리는 다섯줄기의 봉수는 그러나 도원수 김자점의 제지로 황주에서 멈추고 말았다.
  도원수 김자점은 36세의 젊은 나이로 반정에 가담,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그 공으로 반정 1등 공신에 녹훈된 사람이었다.
패기의 김자점이 반정의 주역 영의정 김류(金 )의 후원까지 얻자 방약무인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3년전, 44살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도원수의 자리에 올라 정방산
성을 구축할 때 피골이 상접한 백성들을 강제로 끌어다 노역시키며 도원수의 위엄을 
형벌과 매질로써 세우려다 암행감찰에 걸려 징계를 받은것도 김자점이 처음이었다.
  의주로부터 오는 봉수는 도원수가 있는 정방산성에만 연락되게 하고 도성으로 향하
는 봉수는 차단, 봉수의 진위를 검열한다는 명분으로 그 봉수를 막았으나 김자점은 그 봉수조차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데 이용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남한산성을 지키는 군사들도 모두 영남군(嶺南軍)으로 배정하여 만에 하나 도성에 급변이 있을지라도 영남에서 미처 올 수 없게 했는데 이는 군사로써 다시는 무력 정변이나 반정이 일지 못하도록 사전에 그 뿌리를 차단하자는 계책이었으나 
그것이 수도 방위를 무력하게 하는 절대 요인이 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구나 유
사 이래로 압록. 두만강의 요충 지대엔 주요 목에 중진(重鎭)을 설치하여 철통같은 경계망을 이루어 놓았는데도 도원수에 오른 김자점이 이를 무시, 김류와 합심하여 철폐
해 버렸다. 그로 인해 의주의 진(鎭)은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옮기고 평양의 진은 
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황주의 진은 정방산성(正方山城)으로, 평산의 진은 장수산성(長壽山城)으로 옮겨 산성에서 큰길로 나오는데 가까운 곳이 30-40리가 되게 하고 먼
데는 하루나 이틀이 걸리는 거리가 되게 하여 양서(兩西)일대의 큰 진을 모두 무인지
경으로 만들었다.
적이 침투하는 주요 목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은 장수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병법을 모르는 김자점이 천하를 경영한다는 자만에 젖어 다만 이괄의 난 같은 내부 반란을 염려한다는 구실로 진을 옮겼으나 실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자 하는 술책으
로 군사의 발을 묶은 것일 뿐, 기동성이 강한 청나라 기병에 대한 대비책은 눈곱만큼
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조선군의 발이 묶인 틈을 타고 청나라는 청나라가 자랑하는 팔기군으로 조선의 큰길(大路)만을 골라 조선 공략을 감행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선봉장 마부대와 용골대가 이끄는 적의 대군이 안주를 함락시키고 숙천을 지나 질풍노도와 같은 여세로 다시 평양을 향해 치닫는 시각!
 한양 대궐의 신료들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오로지 척화(斥和)에 들뜬 열기만을 내뿜고 있었다. 특히 박노가 사신으로 떠난 사실을 놓고 척화론자들은 눈을 하얗게 
치뜨며 핏대들을 세우고 있었다.
  척화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김류, 김자점, 심기원(沈器遠), 김상헌(金尙憲), 등 반정공신들이었고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같은 젊은 신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어 조정은 그들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특히 반정공신 김류, 김자점, 김상헌 등의 주청은 강력한 것이었고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의 상소는 극렬한 것이어서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오랑캐 정벌의 척화를 조정의 공론으로 받아 들였으나얼마전 사신 박인범(朴仁範)이 청태종의 답서를 가지고 돌아온 뒤로 인조의 마음은 더욱 불안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답서에는 
  - 귀국이 산성을 많이 쌓으나 나는 당당히 대로를 따라 한양으로 향할 것인데 그깟 산성을 가지고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귀국이 믿는 것은 강화도이지만 내가 만일 팔
도를 유린한다면 조그만 섬하나로서 나라 노릇을 할수 있겠는가. 귀국의 유신(儒臣)들이 척화를 주장하나 그깟 붓을 가지고 나의 강한 군사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 했다.
  오만 무례한 청태종의 답서로 인해 조정의 실세 중신들이 펄펄 끓어오르며 청태종의 그 망언을 국치(國恥)로 규정, 국난극복에 온 백성이 나서 줄 것을 외치며 전에 없이 강경하게 대처하고 나서자 일선의 젊은 신료들은 한발 더 나아가 이 기회에 청나라를 아예 박멸하여 조선의 기개를 세계 만방에 떨쳐 보이 자며 목이 쉬도록 외쳐 댔다. 
  그러나 젊은 신료들의 기대와는 달리 창칼을 바로잡고 앞으로 내 달을 만한 의혈 남아는 조선 천지엔 없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철두철미한 신분제도 하에서 늘어만 가는 지배계급 사대부(士大夫)는 음풍농월(吟風弄月)에 노류장화(路柳墻花)라면 빠질 순 없어도 군사의 일이라면 하인 족속들에게나 떠맡기는 발뺌 속에 문치(文治) 제일주의가 또 한 꺼풀 포장되
어 조선의 힘이라고는 고작 지개작대기와 도리깨가 전부인 무장부재(武將不在)의 나라로 전락하고 만 뒤였다.
  척화를 주창하는 조정의 실세 중신들에 둘러싸인 무력한 인조가 비참한 심경에 깊은 탄식만 거듭하고 있을 때 신료들 가운데서 자신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영의정겸 체
찰사(體察使) 김류였다. 
 "전하, 군대의 사기가 높으면 능히 적군을 물리칠 수 있사옵니다. 엄명을 내려 군율
을 높이 세우소서. 또한 오랑캐가 깊이 쳐들어오면 도원수 및 부원수와 평안도, 황해
도 감사(관찰사)를 노륙( 戮:죄를 범한자의 처자까지 함께 처벌하는 극형)의 법에 따라 처벌한다면 저들이 힘써 막을 것이옵니다. 그리 하옵소서."
  어이없는 눈으로 그 김류를 노려보던 인조의 낯빛이 일순 노기를 띠었다.
  "어찌 그들만 노륙의 법에 따라 처벌하겠는가. 마땅히 체찰사도 그리 하리라!"
  인조의 노기에 찔끔한 영의정 김류가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어전을 물러나자 청태
종의 답서에 몸서리 치던 인조가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을 급히 불렀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대체 어찌하면 좋겠소."
  최명길은 정묘호란시 후금과의 화친을 이끌어 낸 그 장본인이었다.
  "전하...... 싸워서 지킬 계책도 정하지 못하고 또한 화(禍)를 면할 책략도 갖추지 못하였을 때 한순간 오랑캐의 대병이 달려 들어오면 백성들은 어육이 되고 종묘와 사
직은 파천하여 강화도로 들어가 지킬 뿐이오니 이런 화를 당하면 누가 장차 그 허물을 책임 질 것이옵니까. 신(臣)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홍타시에게 다시 한번 글을 보내어 군신(君臣)의 대의를 말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들의 정세를 정확히 살펴 국경을 든든히 방비하심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경의 충절을 과인이 어찌 모르리요. 허나 조정의 공론이 이미 척화로 굳어진 터에 이제 다시 화친을 도모코자 한다면 대간 들의 탄핵을 어찌 다 감당하겠소."
  "전하, 대간 들이 신을 공격하는 탄핵은 감내 할 수 있사오나 온 나라가 쓰러져도 
서로 쳐다 만 볼 뿐 별다른 방책도 없이 싸우기만 고집 하는 것은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
  "척화는 옳은 일이나 힘이 없고, 화친은 부끄러운 일이나 나라를 구하는 일이옵니다. 화친을 맺어 구차스럽게 살 바에는 차라리 의(義)를 지켜 망하겠다 하는 저들 척화
론자들의 주장은 신하된 자의 충절을 지키는 말은 될 지언정 종묘와 사직을 위하여서
는 아니될 말이옵니다. 군왕(君王)의 도(道)와 신하(臣下)된 자의 도가 같지 않은데 
어찌 감히 의(義)를 말할 수 있겠나이까."
  "..........옳은 말씀이오." 
  인조가 형형한 눈을 들어 그 최명길을 바라보았다.
  "전하, 조선의 국력은 날로 피폐해 가고 오랑캐의 국력은 날로 강성해 가는 이때에 강한 적과 화친하는 일이 반드시 그른 일만은 아니옵니다." 
  "............."
 "우선 정묘년의 맹약을 지켜 감으로써 오랑캐의 의심을 누그러뜨리고 그 동안에 군비(軍備)를 증강하여 놓았다가 오랑캐의 빈 틈을 엿보는 것만이 진실로 국가를 위한 계
책이 될 것이옵니다."
  ".............."
  "그러나 신료들 대개가 실리보다는 명분에 사로잡혀 척화만을 고집하오니 장차 나라가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 화를 일신에게 돌리기는 쉬워도 이익을 나라에 돌리기는 어
려울 것이 아니겠나이까?"
  "..............!"
  "늦긴 하였사오나 지금이라도 사신을 다시 보내 전쟁만은 막는 것이 심히 옳을 줄로 아옵니다."
  화친을 해서라도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최명길의 간곡한 주청에 인조는 힘이 났다. 





                                  ㅇ


  정묘호란시 힘도 없는 조선이 분기 탱천한 마음으로 척화만을 고집하다 나라를 송두리째 잃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조선의 실익을 따져 화친을 이끌어 낸 것도 최명길이었다. 그 최명길이 조정 대소신료들의 손가락질과 비웃음을 무릅쓰며 인조를 독대, 박노를 사신으로 정해 청나라로 보내자 눈을 하얗게 치뜬 수찬 오달제와 부교리 윤집이 극렬한 상소를 올려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 상소의 대략에
  - 근자에 일종의 간사하고 사특한 자가 아첨으로 전하의 귀를 가리고 아래로는 민심을 위반케 하여 장차 나라가 나라다울 수 없게 하고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도록 할 것이옵니다. 본래 화친이라는것이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하고 남의 종묘사직을 전복케 하는 것이지마는 오늘과 같이 심한 적은 없었나이다.  
  천조(天朝:명나라)는 우리나라에 대해 부모의 나라요 오랑캐는 부모의 원수이니 명나라의 신자(臣子)된 자가 부모의 원수와 형제의 맹약을 맺어 부모를 잊어버리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도 어찌 저리 태연할 수가 있겠나이까. 더구나 임진왜란 때의 일은 털끝 만한 것이라도 모두 명나라 황제의 은혜였으니 먹고 숨쉬는 동안에 우리나라에서는 그 은혜를 잊기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지난번엔 오랑캐가 북경을 핍박하여 황릉(皇陵)을 더럽혔다니 마음이 놀라고 뼈가 아파 그 참혹한 말을 차마 들을 수 없었나이다. 차라리 우리나라를 송두리째 바쳐 망할 지언정 의리상 구차히 보전할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미약한 힘이나마 우리의 군사를 모두 일으켜 중국을 따라 오랑캐를 치지는 못할 지언정 어찌하여 화친하는 의논을 차마 이때에 주창할 수가 있겠나이까. 하물며 최명길이 어전에 들어 갈 때에 승지마저 물리쳤다는 것은 아아, 너무도 심하옵니다. 
  나랏일을 의논하는 것은 귀에다 대고 소근거릴 말이 아니요,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비밀이 없어야 할 것이니 만일 말한 바 와 대답한 것이 의로운 것이라 할진댄 비록 천만인이 모두 함께 듣는다 할지라도 무엇이 해로울 것이며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할진대는 옥루(屋漏)도 오히려 부끄러울 것이니 하물며 하늘을 속이겠나이까.
  이제 안으로는 조정과 밖으로는 일반 백성들까지도 모두 명길의 고기를 씹어 먹고자 하는데 전하께서만 깊은 궁궐속에 거처하시어 홀로 알지 못하실 뿐이옵니다. 또한 대간(臺諫)의 의논이 이미 정하여 졌는데도 오랑캐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다 하였다니 그 조정을 업신여기며 대각(臺閣)을 업신여기는 것이 어찌 이다지도 극단에까지 이르렀사옵니까. 이 말이 또한 족히 전하의 나라를 망칠 것이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능히 그의 죄를 바로 다스리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 말을 받아들여 대간의 합계가 일어났는데도 국서(國書)는 이미 강을 건너갔다 하오니 아아, 국가에서 대간을 두는 것은 도시 무엇에 쓰려는 것이옵니까.
  장차 대간을 꺼리지 아니하고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시며 간사한 신하만을 의뢰한다면 마침내 전하께서는 나라를 잃어버리고야 말 것입니다. 
  정태화(鄭太和)는 사특한 의논에 부동(符同)하였는데 전하께서 특히 그를 가까이 하시니 이것은 여러 신하들을 아첨하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옵니다. 아아, 일찌기 당당한 수백년의 종묘사직이 마침내 명길의 한마디 말에 망할 것이옵니까. - 했다.
  상소를 읽어 내려가던 흥분한 인조가 그 상소문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이 사람(최명길)은 원훈(元勳)중신으로 사직에 공이 많은 사람이다. 승지를 물리치고 의논한 것은 대사(大事)를 경솔히 누설할까 염려한 까닭이었느니라. 허나 그의 말 가운데 혹 틀린 말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를 멸시하거나 능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될 일이었다. 헌데, 젖비린내 나는 어린 사람들까지도 모욕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니 오늘날 이 나라의 풍습이 가히 한심스럽다. 헛된 이름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실사(實事)에 힘쓰는 그를 애쓴다 한마디 말은 않고 위, 아래가 합심하여 어찌 모함에만 열을 올리는가.  ...............우선 이 둘을 파직하라!"
  척화와 화친론자간의 첨예한 갈등보다도 더욱 심각한 것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외환(外患)에는 대비 없이 무책임한 언동으로 조정에 혼란만 가중시키는 분별없는 관료들과 눈앞에 이익이 없으면 자신의 책무마저 내팽개치는 조정의 난삽한 세태였다. 그런 조정신료들의 세태에 환멸을 느낀 인조가 일벌백계(一罰百戒)의 본을 보이기 위해 그 둘부터 가차없이 잘라 낸 것이었다.
  최명길을 파직하라 상소했던 윤집, 오달제가 오히려 파직 당하고 나자 놀란 영의정 김류가 최명길의 손을 잡고
  "나라의 어려움을 어찌 공(公)께서만 다 감당하려 하시오."
  하며 은근히 최명길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러나 박노가 사신으로 떠난 사실을 놓고 갑론을박 하는 사이 평양이 청나라 군사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고 그 박노조차 마부대의 군진에 갇혀 평양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ㅇ


  "대감!  ..........도원수 대가 - 암!"
  중화군수가 버선발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크, 큰일 났소이다. 도원수 대감. 펴, 펴, 평, 평양이 무, 무너졌소이다. 평양이..........!"
  맨상투의 속옷 바람으로 뛰어드는 중화군수를 원수부의 일직 사령이 놀란 얼굴로 맞았다.
  "무엇이라 했습니까, 지금?"
  "아이고..........  김장군. 크, 큰일 났소이다. 큰일........  평양이...........  평양이 무너졌소이다. 평양이............." 
  다섯줄기의 봉수로 마음이 심란하던 터에 실신하여 자빠지는 중화군수를 보자 머리끝이 쭈뼛 솟은 일직 사령은 김자점의 처소로 바람같이 내달렸다.
  "도원수 대감! 평양이 무너졌다 하옵니다. 속히 방책을 세우소서!"
  일직 사령이 우뢰와 같은 소리로 김자점의 침실을 향해 고함을 지르자 만사를 잊으려는 듯 교성소리 요란한 기생 영화의 배위에서 있는 힘을 다 쏟던 김자점의 몸이 순간 멈추었다.
  "방금 무어라 했느냐."
  "평양이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함락되었다 하옵니다. 어서 속히 영을 내리시오소서."
  몽롱하게 젖어 있던 김자점의 눈이 번쩍! 했다. 정신이 든 것이었다.
  아뜩한 현기증을 느끼며 일어서는 김자점의 목에 기생 영화가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아서라, 나라에 변란이 일어났다지 않느냐. 어서 의관이나 준비하거라."
  맨 알몸의 기생 영화가 탱글탱글한 젖무덤을 심통 사납게 흔들며 김자점의 의관을 준비하는데 천둥 같은 고함소리가 또다시 들려 오자 깜짝 놀란 기생 영화는 의관을 냅다 던진 채 이불 속으로 숨고 갑자기 김자점의 손발도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흩어진 의관을 주워 든 김자점이 무언가 의젓한 영(令)부터 내려야 한다 생각하며 영을 내리려 했으나 무슨 영을 어떻게 내려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뿐 아니었다. 그 잘 들어가던 바지가랭이도 오늘따라 공연히 속을 썩이고 있었다. 
  한참 용을 쓰는데 별장(別將:정3품 당상군관) 이완(李浣)이 침실로 뛰어 들었다. 보니 김자점이 저고리 소매에 발을 들이밀고 허덕대고 있었다.
  "대감, 바지는 여기 있사옵니다."
  이완의 도움으로 의관을 갖춘 김자점이 그제서야 소리치며 영(令)을 내렸다. 
  "어서 속히 봉수를 막고 적군을 올리라!"
  순간 두눈을 뚱그린 이완이 겁에 질려 덜덜 떨며 내린 김자점의 영을 다시금 정정하여 소리쳤다.
  "봉수를 올리고 전군은 출진준비를 서두르라!"
  "이, 이 장군, 이를 어찌하면 좋소. 평양이 무너졌다면 평양에서 황주는 호흡 지간이요.  .........무슨 방책이 없겠소?"
  갑옷으로 무장한 이완을 까맣게 죽어 가는 얼굴로 바라보던 김자점이 그제야 허둥대며 발을 굴렀고 그 김자점에게 이완은 자신이 급히 준비해 둔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여 김자점을 진정시켰다. 그런데 이완의 계책을 다 듣고 난 김자점이 오히려 박장대소하며 깔깔댔다.
  "역시 난 복도 많다니깐, 이렇게 어려운 때에도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있으니깐 말이야."
  놀란 건 이완이었다. 임시방편에 불과한 약간의 방책을 믿고 이미 다 이긴 것처럼 경망을 떠는 도원수가 왠지 불안하여 꺼림직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 12만 대군이라는 엄청난 적군의 실체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김자점의 경박한 모습이 새삼 걱정스러워 이완은 자신이 준비한 전략을 다시한번 더 확인시켰다.
  "대감, 내일 오전이면 청나라 군사들이 동선령을 지날 것이옵니다. 이미 신 장군이 3천여 병력으로 매복 중에 있사오나 앞선 척후 부대는 진중으로 끌어들여 쳐야 하옵고 청군의 본진이 동선령에 다달았을때 총공세에 나선다는 전략을 잊지 마옵소서."
  "암! 그러지, 그러구 말구. 내걱정 말구 어서 가서 준비나 서두르시요, 이 장군."
  여전히 호들갑을 떠는 김자점을 뒤에 두고 이완은 동선령으로 향했다

  쓸쓸한 눈가루가 바람에 쓸려 가며 은빛으로 반짝이는 석양의 동선령 고개는 적막했다. 그러나 전운(戰雲)이 감도는 동선령 기슭에는 매복군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퍼런 살기가 그 적막을 가르고 있었다.
  "이미 준비한 대로 도원수 대감과는 군략(軍略)을 정했소이다.  .......허나........  저들의 공세를 잠시 차단한다 하여 이 싸움이 중단되는 것이 아니니...........  대비 없는 그 다음이 문제 아니겠소." 
  "그러하옵니다, 장군. 강을 건넌 적군만 해도 이미 6만 대군이라 하오니 우리의 일만오천 보병으로는.........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 해도 중과부적(衆寡不敵)이옵니다."
  "중.....과........부.............적!"
  순간 이완의 두 눈에 파란 불꽃이 일다 사라졌다.
  이미 처참한 최후가 보이는 싸움이었다. 일만오천여 병력으로는 12만 대군은 고사하고 적의 선봉을 맞아 싸우는 일조차 벅찬 일이었다. 더구나 보병으로 기병을 막는다는 것은 범람하는 홍수를 모래로 막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다섯줄기의 봉수를 접한지 이틀만에 평양이 함락되었다면 적군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 대단한 기세를 비웃기라도 하듯 조선군 도원수 김자점은 이틀 전까지 중화 군수와 술독에 빠져 밤이 새도록 기생질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김자점이 병력 이동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여 소수의 병력일지라도 그 움직임에는 반드시 감시를 붙였고 군사훈련중인 부대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길을 풀지 않았다.
  적의 침공에 대비한 훈련이나 전력증강을 위한 전술.전력에 힘써야 할 장수들이 의심에 찬 도원수의 눈길을 피해 가며 까지 장수의 본분에 충실하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군의 방위 태세는 허술해 질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럴 수는.......... " 
  "............"
  "도원수라는 자가.............  도원수라는 자가 대비는 커녕.........."
  "............"
  지략(智略)가도 아니요 장수도 아닌 자가 반정 공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선의 병권을 틀어 쥔 그 어처구니없는 처사에 늘 반발하던 신용이었다.
  말끝마다 들먹이는 것은 병법이나 사실은 자신의 무지를 가리기위한 수단으로 아는체 하는 것일 뿐, 그 아는 만큼 구사한다는 김자점의 병법 너스레에 또한 아부로 날을 새던 중화 군수가 실신이 아니라 지금 당장 죽어 자빠진대도 눈썹 하나 까딱할 신용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식할수록 목소리 크고 무능할수록 높이 되는 조정의 한심스런 작태는 패대기쳐야 한다며 입에 거품을 물던 군관 신용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울먹였다.
  "지금 이 추위에도 우리 군사들은 동상에 얼어 가면서 매복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매복이고 누구를 위한 죽음입니까.........."
  울분에 떨던 군관 신용의 질끈 감은 두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배어 나고 있었고 먼 하늘을 시리게 바라보던 이완의 어금니에서는 으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ㅇ


  "저, 저것이 무엇이냐?"
  퀭한 눈으로 동선령을 바라보던 도원수 김자점이 소스라쳤다. 
  기치 창검이 정연한 청나라 기병이 동선령 고개를 넘어서 달려오는 것이 보이자 등골이 오싹했던 것이다.
  "이 별장! 이 별장은 무얼 하고 공격을 하지 않는 거냐, 어서 저 적도들을 막으란 말이다."
  도원수 김자점은 이완과의 군략도 잊은 채 허둥대었다. 척후병이 동선령을 넘어 도원수가 있는 진중에 다다르고 본대가 동선령에 이르렀을 때 동시에 공격하기로 한 군략을 김자점은 동선령을 넘어서 진군해 들어오는 청나라 기병을 보자 군략이고 작전이고 갑자기 다 잊은 것이었다.
  "공격 하지 않고 무얼 꾸물거리느냐! 어서 공격하란 말이다!"
  청나라 군사들이 진중까지 들어오면 조선군은 다 죽을 것 같아 김자점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공격하란 말이다. 공격을!"
  벼락같이 질러 대는 김자점의 고함소리에 놀란 전령이 득달같이 내달려 매복 중인 이완에게 그 도원수의 명을 전달했다. 그러나 도원수가 잠시 착각한 것으로 안 이완은 적의 본대가 동선령에 이르거든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던 군략이었음을 차분하게 설명하고 아울러 도원수의 건투를 빈다는 말까지 더하여 그 전령을 돌려보냈으나 도원수 김자점은 막무가내였다.
  "그까짓 군략이 다 뭣이냐. 도원수가 군세를 살펴 공격하라면 공격할 일이지 무슨 변명이 그리 많다더냐. 지금 이 시각부터 작전 변경이라 일러라. 어서 저 적도들부터 막고 군략을 새로이 짜라 이르란 말이다!"
  청천 벽력같은 도원수의 명에 이완의 가슴이 철렁했다.
  적의 본대가 이르기도 전에 척후병을 공략한다면 적의 본대는 필시 다른길을 택하거나 아니면 역공을 가해 올 것이었다. 그러할 경우............  군사력의 열세에 있는 조선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고 한양 도성은 손한번 써볼 겨를 없이 유린당할 것이었다.
  '안돼!'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젓던 이완이 도원수를 다시 한번 설득해 보았다. 그러나 도원수 김자점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건방진 놈 같으니라구, 도원수의 명을 거역하고도 살아남길 바랬더냐! 다시 한번 가서 일러라. 적의 척후대가 동선령을 넘기 전에 공격하라고 말이다. 어서 속히 가거라!"
  불같이 노한 도원수의 고함에 이완도 지지 않고 맞섰다.
  "적의 본대를 공략하기 위해 준비했던 군사를 움직여 소수의 척후대를 공격한다면 조선군의 전략이 노출되어 적에게 역공 당할 우려가 있다. 이는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게 되는 격이니 처음의 전략을 그대로 이행하는 것만 같지못하다." 며 차갑게 전령을 돌려보냈다.
  "이런 고이헌 놈! 도원수의 작전 변경을 뭘로 알고 이리 방약하게 군다는 게냐. 내, 이놈을......  당장 군율로 다스릴 것이니 전령은 어검(御檢)을 가지고 가서 그놈의 모가지를......  뎅겅 잘라 오너라!"
  노기를 삭이지 못해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던 김자점이 임금 인조가 내린 어검을 전령에게 내주며 소리쳤고 그 전령이 전하는 말을 듣고 난 이완은 무릎을 치며 한탄했다.
  "승패는 이미 정해졌으니 사람의 힘으로야 어쩌겠는가."
  어검을 들어 보이는 전령 앞에서 이완은 참담한 심정으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만여 매복 군으로 4백여 척후병을 무찌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산기슭에 매복해 있던 조선 군사들의 활이 일시에 시위를 벗어나고 화약이 폭발하자 4백여 척후병은 반항 한번 못하고 말에서 떨어져 굴렀다.    조선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그 4백여구의 시체가 나뒹구는 동선령 고개를 마치 개선 장군처럼 나타난 김자점이 전장을 한바퀴 휘둘러보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대로만 싸운다면 적군은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잡아 놓고 보니 별것도 아니 걸 가지고 그렇게 겁을 내다니, 원...........'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 김자점은 잔치판부터 벌였다. 승리를 축하한다는 명분이었다.
  승리를 자축한다며 전장(戰場)뒷정리에 바쁜 장수들을 굳이 불러 모아 놓곤 김자점은 처음부터 제자랑이었다.
  "하 -, 내가 오늘과 같은 일이 있을 줄 알고 여러분의 훈련에 일일이 신경을 썼던 것이오. 내가 그렇게 감독하지 않았던들 오늘과 같은 대승이 있을 수 있었겠소?"
  ".............."
  "적이 자랑하는 철기병이 자그만치 사백이요, 사백! 그 사백을 내가 잡았다 그 말이요. 바로 내가!!"
  김자점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탁! 탁! 치며 좌중을 흩어 보았다.
  "여러분도 보았다시피 이번 싸움에서 우리 군사는 단 한사람도 다치지 않했습니다. 이는 분명 하늘이 이 사람을 도와 오늘의 승리를 이끌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오늘의 승리는 조선사에 다시없을 찬란한 대승으로 기록 될 것입니다."
  승리의 기쁨에 젖어 귓불까지 빨개진 김자점이 승리의 그 잔을 높이들어 걸쭉하게 들이켰다. 그 모습은 마치 갈증으로 목이 탔던 사람같았다.
  "봉화가 타오르고 평양이 무너졌다 했을 때부터 사실 나는 만반의 준비를 이미 다 갖추고 있었소."
  잔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던 김자점이 수염을 타고 흘러내리는 술방울을 손바닥으로 쓸어 닦으며 이완을 쓱 하고 스쳐보았다.
  "나는 적이 반드시 저 동선령을 넘을 것으로 알았다 이 말이외다."
  그 말에 장수들이 시큰둥한 눈을 치떴다.
  "병법에 이르기를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소이다. 그 정도의 병법이야 이 도원수가 어찌 모르겠소이까 마는...........  어험, 어쨌든 적들은 이 동선령을 재차 넘으려 할 것이오. 그러니 제장들은 오늘과 같이 매복해 있다가 내 명령에 따라 공격해 주길 바라오."
  "보시오, 잡아놓고 보니 별것도 아니잖소."
  김자점이 더욱 떳떳한 낯을 들었다.
  "오늘 같이만 싸운다면 청나라 팔기군인들 뭐 별거겠소? 우린 반드시 승리할 겝니다. 하늘이 나를 지키고 있는 한 적은 저 동선령을 넘지 못할 거다 이 말이외다."
  청나라군세를 턱없이 얕잡아 보는 도원수의 경박한 처사에 심사가 괴로운 이완이 제자랑에 바쁜 그 김자점을 망연(茫然)하여 바라보는데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시름에 잠겨 있는 별장 이완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종사관(從事官) 정태화(鄭太和)가 물었다.
  "이 별장께서는 오늘의 승리가 기쁘지 않으십니까?"
  수심 가득한 눈으로 그 정태화를 바라보던 이완이 긴 한숨을 내뿜기만 할 뿐 대답이 없자 정태화가 궁금한 얼굴을 했다.
  "오늘 이 승리는 이별장의 공이다 생각하던 차 올시다마는 이별장께서는 기분이 몹시 어짢은가 봅니다."
  "나는 공을 세운바 없소이다."
  "공이 없다니요. 이별장께서 미리 준비하지 않았던들 오늘과 같은 승리를 꿈이나 꿨겠습니까?"
  "글쎄, 이건 승리가 아니라 패전의 전주곡 올시다!"
  "아니, 이별장!"
  순간 정태화의 안색이 싸늘하게 돌변했다.
  "아무리 도원수가 이별장의 공을 가로챘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한말이 아닙니까."
  "공을 가로채다니 그건 또 무슨소리요?"
  오히려 이완이 눈을 뚱그렸다.
  "그럼, 아니란 말씀입니까?"
  "미안한 말씀이나 지금 이곳엔 가로챌만한 공은 고사하고 적의 강공에 대비한 그 어떤 계책도 강구된 바 없는 곳 올시다."
  "도원수의 말대로라면 승리가 눈앞인데 그 무슨 말씀이오이까?"
  이완이 코웃음치며 그 정태화를 쏘아 보았다.
  "종사관이라면 저 동선령을 재차 넘겠습니까?"
  ".............?!"
  정태화의 머리가 순간 무엇에 크게 얻어 맞은 듯 했다. 동선령에 매복병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적은 분명 다른 방법을 택할 것이었다. 그건 병법이 아니라 상식이었다.
  "그, 그렇다면.........?"
  "더이상 방법이 없어 내 평생 처음으로 무장이 된걸 후회하고 있는 중 올시다."
  낙심한 이완의 한숨이 길게 이어졌고 하얗게 식어가던 종사관 정태화의 목줄기에서는 꿀꺽 하고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기고만장했던 자신의 부끄러움보다도 당장 있을 다음의 싸움이 염려되었던 까닭이었다.
  그날 오후였다.
  조선군 도원수 김자점은 별장 이완이 진을 벌였던 그자리에 조선군을 똑같이 매복시키고 자신도 그 진의 중앙에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한번의 승리가 자신감을 안겨 준 때문이었다.

  삭풍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만이 횡행하는 동선령 고개는 또 다시 적막에 휩싸여가고 있었다.
  저녁나절이 지나도록 적의 침입이 없자 더욱 기가 산 도원수 김자점은 술을 동이째 들고 앉아 보란듯이 껄껄대며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선군의 매복을 두려워한 청나라 군사들이 산을 타고 넘어 매복군의 후방에서 기습 공격을 가해 온 것이었다.
  갑작스런 적의 기습에 일만오천여 조선군의 진지는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고 매복했던 조선군사들이 동선령 고개로 밀려나오며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막아라!"
  허를 찔린 조선군이 뒤로 밀리며 고함소리만 질러댔다.
  "도망가는 자는 내가 벨 것이니라! 막아라! 막아라......!"
  군관들이 장검을 빼어들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막아내고자 한 싸움이 아니라 죽고자 한 싸움이었다. 임금 인조의 피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육탄지연술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조선군의 기습으로부터 진행되어야 할 싸움이 오히려 적의 역습을 받는 싸움으로 전락하자 조선군에 비해 월등한 군세로 밀고 들어오는 청나라 기병들을 일만오천여 보병으로서는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총소리와 비명소리, 그리고 악에받친 고함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동선령은 조선군의 시체로 점차 뒤덮히기 시작했고 간신히 몸을 뺀 수백여 조선군이 뒤로 밀려 후퇴하면서 그제야 조선군의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놀란 것은 도원수 김자점이었다.
  어찌나 창졸간에 당한 일인지 손에 든 술바가지를 놓지도 못한 채 멀뚱한 눈으로 쳐다만 보는데, 번쩍이는 갑주로 무장한 청나라 기병이 긴 창을 꼬나들고 짓쳐 들어오는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자 도원수의 체면보다 기겁한 김자점의 두 다리가 먼저 내뛰었다.
  얼결에 말잔등에 올라 말고삐를 잡았으나 그러나 몇 발짝 내닫기도 전에 그 말조차 청나라 군졸이 쏜 화살에 맞아 꼬꾸라지자 땅바닥을 구르던 김자점이 튕겨 일어서며 뜀박질을 쳐대기 시작했다. 
  '어쩐지 승리가 손쉽더라니..........'
  조선군의 열세를 핑계로 좀더 일찍 달아났더라면.........  하는 때늦은 후회가 그 뛰닫는 김자점의 뇌리에 아쉬움으로 따라붙었다. 아니면 이완의 계책이라도 받아들였던가..........  지금쯤 안전한 곳에서 편히 쉬고 있을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 대자 김자점의 마음에 갑자기 그 작은 승리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 생각을 다하기도 전에 달아나는 조선군 도원수의 투구를 향하여 이번엔 독묻은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들자 혼비백산한 김자점이 도원수 휘장이 달린 투구를 활랑 벗어 내던지고 죽어라 앞만 보고 내 달렸다.
  도원수가 달아난 정방산성은 이내 청나라 군사들로 북적대기 시작 했고 그 청나라 군졸의 말발굽 아래 일만삼천여 조선군의 시체만이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조선군의 완전한 패배였다. 









                                  ㅇ


  "무, 무엇이...... 평양이 함락되었어?"
  평양 감사의 장계(狀啓)에 소스라치게 놀란 인조의 낯빛이 갑자기 하얘지고 있었다.
  "우리 군사들은.........  우리 군사들은 그 동안 어디서 무얼 했단 말이요. 평양이 함락되는 줄도 모르고............"
  "송구하옵니다, 전 - 하............"
  그 창백하게 식은 낯빛의 인조가 황망하게 소리치는 앞에서 민망한 우의정 이홍주(李弘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척화로 공론을 모은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적군이 평양까지 들어왔단 말이요. 대체 대.소 신료들은 그 동안 무얼 했길레 적군이 나라안까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요."
  "..............."
  "영상.......!  영상은 어디 있소. 어서 속히 영상을 들라 이르시오! 영상을.........."
  황황하게 소리치는 인조의 고함을 등뒤로 받으며 득달같이 내닫는 우의정 이홍주의 걸음이 허둥대고 있었다.
  청나라 군사 3만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임경업의 장계를 받아 든지 하루가 지난 13일에 청나라 군사 6만이 평양을 향하고 있다는 안주 목사의 장계를 인조는 차마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이어 도착한 평양 감사의 장계는 그런 인조의 기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린 비보였다.
  '평양이 무너지다니........  장차 이일을.........'
  대전으로 급히 달려온 영의정 김류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그리고 침통하게 앉아 있는 우의정 이홍주를 향해 인조는 있는 힘을 다해 쩌렁! 소리를 질렀다.
  "척화만이 살길이다 주창하던 그대들이 아니던가! 방책도 없이 척화만을 고집했었다면 이는 과인과 종묘사직을 업수이여긴 것이리라! 척화를 부르짖던 입들이니 그 잘난 입으로 어디 방책들을 말해 보시요!!"
  인조의 진노에 세 정승은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방책도 없이 적을 맞아 싸운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꼴! 평양이 무너졌다면 그 다음은 개성이 아니겠소!! "
  ".............!!!"
  "정승의 직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그리도 무심하단 말이요. 어서 나가 대책들을 세우시오!  ........대책을!!"
  발악같이 질타하는 인조의 진노에 놀라 뛰다시피 대전을 물러 나온 세 정승의 등줄기엔 진땀이 배어 나고 있었다. 인조의 지적대로 평양이 유린되었다면 그 다음은 개성, 그리고 그 다음엔 한양이었다.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한 일이었다. 
  "사정이 급하게 되었으니 일을 나눕시다."
  김류의 의견으로 세 정승은 각기 일을 분담해서 맡았다.
  영의정 김류는 육조의 판서, 참판, 당상들을 불러 모아 대책을 찾기로 하고 좌의정 홍서봉은 비변사의 당상들과 함께 군사의 일을, 우의정 이홍주는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강화도 파천에 대한 만반의 준비였다.
  세 정승이 밤을 세워 가며 동분서주하고 있던 14일 새벽녘, 여명을 가르며 일필단기의 준마가 쏜살같이 도성으로 날아들었다. 도원수 김자점의 장계였다.
  장계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내용으로 황주가 이미 적의 수중에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비보에 세 정승은 만사를 제처두고 강화도 파천을 의논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오늘 아침 안으로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평양이 함락된지 하룻만에 도원수 김자점마저 패했다는 소식은 처음 물 길러 나왔던 아낙네의 입을 통해 퍼졌고 이윽고 소문은 삽시간에 도성 안팎으로 흉흉하게 번져 가기 시작했다. 
  "아이고 세상에, 꼭두새벽부터 이 무슨 난리냐고요. 글쎄......  오랑캐가 쳐들어 오다니요.........?"
  "한양조차 지킬 군사들이 없다 하니 짐부터 싸라. 아니, 패물부터 챙겨라. 시간이 없다. 서둘러라, 서둘러!"
  "아, 대궐이 저리 조용한데 난리는 무슨 난리냐고요. 이건 분명 유언비어라고요. 글쎄......"
  "그리 믿으면 자네는 남게. 나는 저 대궐의 작당들 더이상 못믿겠으니까!"
  평양이 무너지므로 해서 비로소 알게 된 오랑캐의 침략 소식이었다. 그러나 평양이 무너진지 단 하룻만에 조선군 도원수마저 패했다는 소식은 한양 도성을 대공황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소식이었고 오랑캐의 침략 소식을 미리 알고 있었을 조정이 어찌 백성들 피난 갈 시간마저 빼앗으러 드는지 미덥지 못한 조정의 그 미온적 태도에 가득 분통을 터트리며 이를 가는 한양 부민들이었다.

  "그래서요, 과인더러 또 다시 몽진을 떠나라 이 말이요?"
  새하얗게 뜬눈으로 밤을 새워 가던 인조는 새벽녘, 도원수 김자점이 싸움에 져 패퇴했다는 비보를 받자 충격으로 잠시 혼절했었다.
  가뜩이나 혼란스럽던 대궐에서 인조의 혼절은 파란(波瀾)을 예고 하는 흉사(凶事)나 다름없는 일이었고, 발칵 뒤집혀진 대전의 소란 속에 재빨리 뛰어든 어의(御醫)들의 도움으로 인조는 곧 회복 되었으나 신료들의 불안은 가중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불안에 젖은 신료들로 비상소집 되어진 편전에서 인조는 힐문하고 있었다.
  "과인이 아무리 덕이 없기로.........  세 번씩이나 몽진을 떠나는 임금을 보았소......?"
  인조의 가느랗고 그 하얀 손가락이 떨고 있었다.
  인조반정 직후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임금 자리에 막 오른 인조는 충청도 공주로 몽진해야 했었고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몽진했었다. 이제 또다시 강화도로 몽진한다면 세 번째 가는 피난이었다. 
  "어찌 이런일이.....세.....번 씩이나 있을 수 있단........... 말이요."
  인조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필부(匹夫)보다도 못한 자신의 운명에 비애를 느끼던 인조가 어깨를 출렁이자 대.소 신료들도 숨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소.....  송구하옵니다....만........  전 - 하." 
  ".............."
  "우선 속히 세자 저하와 빈궁마마, 그리고 대군들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시오소서. 저들의 기세로 보아 아무래도 오늘을 넘기기가 어려울 듯......하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조금이라도 이에서 더 지체한다면 자칫 실기할까 두렵사옵니다."
  먼저 눈물을 거둔 우의정 이홍주가 인조의 그 울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려 강화도 파천을 간청하자 또한 영의정 김류가 동조하여 분위기를 일신했고 애써 감정을 추스리던 인조도 눈물에 젖은 채 그 세 정승들을 바라보았다.
  "강화도 수비를 책임질 검찰사(檢察使)는.......  정해 놓았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강화도 검찰사에는 한성판윤(漢城判尹:서울시장) 김경징(金慶徵)이 적임일 듯 하옵니다."
  다소 누그러진 인조의 하문에 우의정 이홍주가 기다린듯 나섰다. 밤새 몽진을 준비했던 이홍주였다.
  "한성 판윤이라면.........  영상대감의 자제 아니요!" 
  갑자기 눈물이 마른듯 허리를 곧추세운 인조가 그 낮게 엎드리는 김류를 향해 정색하고 물었다.
  "경의 아들이......... 이 어려운 소임을 감당할 수 있겠소?" 
  ".............경징이...........  다른 재주는 없사오나.........  적을 막고 성을 지키는 소임에 어찌 그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겠나이까.........."
  그러나 중신들은 김경징의 천거를 마뜩찮게 여기고 있었다. 
  한성판윤 김경징은 아버지가 영의정이라는 후광을 등에 업고 종횡무진으로 치달으며 매사를 제 뜻대로 처결하는 통에 육조의 관리들은 상하 구분도 할 줄 모르는 그를 망나니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우의정 이홍주가 굳이 강화도 검찰사로 천거 한데는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영의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강화도 파천이 결정되면서 조정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검찰사에 부제학 이민구(李敏求), 종사관에 수찬 홍명일(洪命一)을 임명하고 한양 수비를 책임질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심기원(沈器遠)을 임명했다. 그러나 심기원은 상(喪)중에 급히 불려 나왔기에 그 수하에는 군사가 없었다.
  몽진이 시작되자 원임대신 김상용(金尙容)과 윤방(尹昉), 예조참판 여이징(呂爾徵), 정랑 최시우(崔時遇), 사직령 민광훈(閔光勳), 종묘령 민계(閔 ) 등이 종묘사직의 위패를 받들고 길을 떠났고 뒤이어 승지 한흥일(韓興一)이 빈궁과 원손(元孫), 그리고 봉림(鳳林), 인평(麟坪) 두 대군과 부인 및 내명부의 여러 궁인들, 또 부마(駙馬:임금의 사위) 윤신지(尹新之)와 유정량(柳廷亮) 등을 인도하여 길을 떠났다. 그 뒤를 판부사 정광적(鄭光績), 전판서 이상길(李尙吉), 강석기(姜碩期), 박동선(朴東善) 등 늙고 병든 대신들이 승전(承傳)을 받들어 따라 나서자 급하게 피난 짐을 꾸린 사대부의 부녀자들과 도성안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피난길에 합류했다.

  아침 햇살을 등뒤로 받으며 떠나는 피난 행열은 끝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행열속에서도 김경징은 유난스러웠다. 이불 보따리에 작은 솥단지 하나, 그리고 쌀과 소금이 전부인 평민들의 가난한 피난짐에 비해 김경징의 피난짐은 보기에도 엄청났다.
  이미 우마차 동원령을 내리고 있던 김경징이 평양이 무너졌다 했을때 부터 짐을 싣기 시작, 60여대가 넘는 우마차에 짐을 바리바리 가득 싣고도 우마차가 모자라 안달하던 김경징이 그 아버지 김류의 첩과 그 자신의 첩들까지 차례대로 가마에 태워 호위군사를 붙이자 이불한채 쌀한줌 더 지고갈 힘없는 피난민들의 눈알에 핏발이 선건 그때였고 더욱이 김경징의 머슴과 종들조차 우마의 잔등에 올라 탄 그 위세로 피난민을 향해 겁도없이 호령해대는 꼴딱서니는 분노의 극에달한 피난민들에게 돌이라도 던지고픈 충동을 일게했다.
  대궐에서 나온 짐보다도 많은 김경징의 그 방자한 처사에 배신감을 느낀 피난민들이 치밀어 오르는 시뻘건 분노를 그래도 참으며 길을 가는데 자꾸만 눈알이 빨개지는것은 이미 신분에서부터 억눌려버린 그 짙은 설움때문이었다.
  "어린것들 조차 제 먹을걸 지고 가는 마당에 저것들은 첩년들 까지 처 싣고 놀이가듯 하고 자빠졌으니...... 원, 니미........" 
  젖어드는 눈시울을 팔둑으로 닦아내던 피난민들의 목구멍에서 악에받친 분노가 터져 올랐다. 
  "썅 놈들!"
  "씨 - 팔놈들!" 
  "육시(戮屍)를 해도 시원치 않을 개-새끼들!"
  엄청난 세도에 맞서 대항할 힘없는 피난민들이었으나 울분에 싸인 채로 내뱉어 지는 시뻘건 분노는 어느새 피난행열을 뒤덮고 있었다.
  울분과 분노에 싸인 그 피난행열이 김포를 지나 통진에 이르렀을때 짧은 겨울 해는 이미 서산에 붉은 낙조를 드리우기 시작했고 서울 장안의 피난민들이 한꺼번에 몰린 나루터는 인산인해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울분에 핏발선 눈동자들이 한꺼번에 쏠린 그 나루터가 또한 그 피난민들을 경악케 했다.
  "아니?"
  "배! 배가없다. 배가.......!"
  뒤쫓아오는 오랑캐의 험악한 칼날에 목이 달아날까 오금이 저린 피난민들이 저마다 비명같은 소릴 외쳤다. 
  "..............."
  나루터로 뛰쳐나간 피난민들이 아래위로 뛰달으며 열심히 배를 찾아보았으나 배 다운 배는 보이지 않고 다만 나루터 한구석에 풍랑에 떠밀려 온듯 한 고기잡이 조각배 세척만이 휑뎅그랗게 남아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이는 대로 파도에 출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황량한 모습이 추운 겨울날의 피난민의 마음들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하고 있었다.





                                  ㅇ


  "달리 배가 없으면 전함(戰艦)이라도 끌고 오란 말이외다!"
  "저, 전함을요?"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 했소이다. 어쨋든 건너는 가야 하질 않겠소이까."
  강화도 검찰사 김경징이 뒤에 늘어선 왕실과 피난민들을 힐끗 돌아보며 소리쳤으나 강화유수 장신(張紳)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하, 하오나 전선(戰船)을 움직이자면 ........"
  "이보시오, 유수영감! 내가 강화도 검찰사요. 어명을 받든 검찰사란 말이외다. 어명으로 전선을 움직이는데 그깟 절차가 다 무어요. 나는 왕실을 보호해야할 막중한 책무가 있는 사람이다 그말이외다. 장차는 저 피난민들 까지도 말이외다. 아시겠소?"
  눈알을 부라리며 어명을 들먹이는 김경징 앞에 목이 움추러 든 강화유수 장신이 더는 대꾸없이 강화도에서 전선(戰船)과 고기잡이배 수십척을 끌고 왔다. 그러나 왕실을 보호해야 한다며 큰소리 치던 김경징이 말과는 달리 그 배에다 제집 가속들과 제 짐을 먼저 싣고, 나머지 작은 배에는 절친한 그의 친구들과 그 식솔들을 부랴부랴 거둬 싣고는 온다간다 한마디 말도없이 배를 몰고 나가자 설마하고 끝까지 바라보던 원임대신 김상용이 그 광경에 놀라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저런, 고이헌! 종묘사직의 신주가 예 계시고 왕실의 지중하신 분들이 추위에 떨고 계시거늘. 저런 저, 저, 죽일 놈을 보았나!"
  "왕실을 먼저 보호해야 할 검찰사가 저래도 되는 겁니까?"
  김경징의 분수잃은 처사에 원임대신 김상용뿐 아니라 승지 한흥일도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격분했다. 그러나 배들은 이미 강화도를 향해 방향을 잡고 있었고 그때서야 놀란 왕실의 근위병들이 나루터로 내달으며 허세섞인 고함에 악에바친 욕지거리도 질러 보았으나 이미 떠난 배는 까딱도 없이 바다같은 강을 유유히 건너고 있었다.

  겨울 찬바람에 놀라 발악하듯 울부짖는 아홉달 된 원손(元孫)을 안고 있는 세자빈과 왕실의 부인들이 그 떠나는 배를 망연자실 바라보며 추위에 떨고 있었다.
  "빈궁마 - 마."
  궁녀들이 추위에 떨고있는 세자빈을 둥글게 감싸기 시작했다. 이미 온몸이 파랗게 얼어붙은 왕실의 부인들이 사시나무 떨듯 떠는 중에도 고개가 빠져라 강을 건너 바라보는 것은 건너갔던 배가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학수고대하던 그 배는 해가 한참 져서야 돌아왔고 그 건널준비로 부산을 떠는 왕실보다도 눈알을 부라리던 피난민들이 먼저일어서며 나루터엔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왕손과 대군들이 아직 건너지 못하고 있던 터에 김경징이 제집 가솔들을 먼저 피난시키고 돌아오자 "네깟놈만 잘났느냐."며 핏대를 세우던 가난한 백성들이 드디어 앞으로 내달린 것이었다. 그잖아도 김경징의 처사에 가득 불만을 품고 있던 피난민들이었다.
  무리지어 내달리는 것은 비단 가난한 피난민들 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술렁이던 군중들이었다. 체면으로 눈치를 살피던 사람들은 처음 몇 뿐이었고 사대부니 양반이니 하는 시절좋던때의 그 허울들도 죽느냐 사느냐를 가늠하는 기로에서는 겉치레에 불과했다.
  점잖게 내딛던 발걸음들이 뜀박질 쳐대는 피난민들에 뒤쳐지기 시작하며 그 또한 뛰달을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가 닥쳐 들기전에 저 강을 건널 수만 있다면 살 수 있다 믿는 마음들이었다. 차례를 기다려 배에 오른다는 것은 애초부터 싹수 없는 얘기였고 살려면 누구보다 먼저 배에 올라야 했다. 앞만보고 내닫는 그 절박한 마음들이 결국 나루터를 사태지게 했고 급기야 그 사태는 몇 척 아니되는 조각배를 사이에 두고 피튀기는 조각배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먼 발치에 세자빈과 왕자들이 엄연히 서 있는데도 피난민들은 막무가내였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는 반항 같은 반감의 표출을 피난민들은 그렇게 온몸으로 해대는 것이었다.

  "빨랑빨랑 삿대질을 하란 말이요, 자꾸 사람들이 더 타잖소."
  어느틈에 배에 먼저 오른 약삭빠른 한 사내가 짜증 섞인 소릴 내지르자 삿대든 사내가 눈자위를 힐끗했다.
  "언, 니미.......  누군 할 줄 몰라 안허우? 사람들이 뱃전을 놔야 삿대질도 할 거 아뇨."
  그 삿대 든 우락부락한 사내가 어물쩡 하는 사이 잽싼 몇몇 피난민이 더 올라탔고 배를 저어 나가려는 사람들과 그 배에 오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밀고 당기며 엎치락 뒤치락 하는 사이 드디어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싸움은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뱃전을 잡아끌며 시작되었다.
  "그 손 놔야 갈거아뇨, 이양반아!"
  "죽으면 죽었지 죽어도 못놔, 이손!"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요! 그 참 답답한 양반일세."
  "답답하면 내리면 될거 아냐. 내리라구, 내가 당장 올라갈테니까!"
  뱃전을 잡아끌던 사내가 당장 뛰어오를 기세로 눈알을 반들거리자 삿대든 사내가 
  "그 말같잖은 소리 작작하고 그손 놔! 존 말루 헐때." 하며 점잖게 위협했다.
  "뭐야, 좋은말?"
  "그래, 이작자야!"
  "못놔! 쌍놈아."
  삿대든 사내의 위협에 뱃전을 잡아끌던 사내가 보란듯이 더욱 거세게 뱃전을 잡아끌며 눈알을 디룩 거렸고 삿대든 사내의 인상도 점차 험악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노란 말이다, 이자식아!"
  "이새끼야, 못놔! 죽어도."
  오랑캐의 군병이 금방이라도 달려들것 같은 불안에 초조한 기색을 보이던 사내의 입에선 당장 거친 욕설이 튀어 나왔고 삿대든 사내의 핏발선 두 눈엔 노기가 몰려들고 있었다.
  "이런 죽일놈에 새끼!"
  갑자기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던 삿대든 사내가 그 삿대로 악착같이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는 피난민의 팔뚝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그러자 사내의 팔이 우둑! 소리를 내며 부러져 나가 너덜대는 것이 보였고 이어 죽는다 악을 쓰며 비명을 질러 대는 그 오싹한 틈에 우락부락한 사내는 삿대를 힘차게 저어 물 가운데로 나아갔다.
  애당초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심통으로 뱃전을 잡아끌다가 멀쩡한 팔만 잃은 사내는 죽을듯 버르적거리며 주위의 동정을 구하려 했으나 악머구리 끓듯 소란한 아귀다툼 속에서는 그런 울부짖음도 생판 모르는 남의 일이었고, 또한 기우뚱하게 기운 불안한 모습으로 물길을 잡아 나아가던 그 작은 고깃배도 강 한복판에 이르러 자꾸만 제자리를 맴돌더니 급기야 뱃전이 들리며 순식간에 뒤집어져 버렸다.
  허겁대며 뒤따르던 작은 배 한 척이 그 광경에 놀라 뒤로 내 빼는데 물에 빠진 피난민들이 허우적대며 그 작은 배로 몰려들었다. 살려 달라 애원하며 매달리는 사람들을 그러나 또한 살기 위해 내치는 사람들과의 애처로운 싸움이 반복되는 사이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험악한 인상의 우락부락한 사내가 배난간을 붙잡고 튀어 올랐고 이를 본 배안의 억센 몇 사람이 같이 죽을 순 없다며 그 사내를 밀쳐 내려 우 몰려드는 순간 중심 잃은 그 작은 배도 절규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전복되고 말았다. 의지 할 아무것도 없는 강 한가운데서 허우적대던 수십명의 피난민들이 물먹은 이불 보따리와 함께 차갑고 깊은 물 속으로 서서히 가라 않고 있었다.






                                  ㅇ


  이미 깨어진 무질서 속에서 세자빈은 울고 있었다. 
  구중궁궐 깊은 내실에서 추위를 모르고 지내던 귀한 몸의 세자빈에게 살을 에듯한 섣달의 갯바람은 잔혹스러웠고 살풍경한 눈앞의 현실도 가혹스러웠다.
  "빈궁마마.......!"
  동궁(東宮) 나인들을 지휘하여 그 세자빈을 둥글게 감싸던 지밀 상궁이안타까이 소리쳤다.
  "..............."
  그러나 파랗게 얼다못해 질린 세자빈은 이미 온전한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 법도있는 왕실의 체통과 세자빈으로서의 품위를 끝까지 지켜내려 무진애를 쓰던 세자빈에게 송곳같이 파고드는 혹독한 갯바람과 참담하게 능멸당한 왕실의 충격은 세자빈이 지녀야할 최소한의 품위마저 무자비하게 무너뜨렸다. 
  "마-아-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경련을 일으키며 떠는 몸뚱아리와 떨어져 나갈 것 같이 아픈 귀의 통증, 그리고 따다다다 하고 부딪는 이빨사이에서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신음소리와 헛소리가 바람막이로 둥글게 둘러싼 동궁 나인들에게 조차 안타깝게 들렸다. 
  "빈궁 마-아 - 마........"
  그 앞에 지밀 상궁이 또한번 소리치며 발을 굴렀다.
  "암만봐도 김경징의 처사는 잘못되었네!"
  원임대신 김상용이 그 세자빈을바라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죄송하옵니다, 대감."
  "자네가 죄송 할게 무에 있는가.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는 저 철없는 망나니가 가소로워 하는 말이니 괘념치 마시게나."
  세자빈을 보호해야 할 책무가 있는 승지 한흥일이 죄스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자 김상용이 그 한흥일을 위로하며 김경징의 처사를 나무랐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을 몸으로 격어낸 김상용이었다. 그 김상용의 눈에 신분을 남용하는 김경징의 처사는 차마 눈뜨고는 못볼 꼴불견이었다. 제 애비 김류를 믿는 터수일 것이나 그러나 난리가 평정되고 나면 왕실을 능멸한 처사는 극죄를 면치 못할 것이었다.
  '어리석은 놈..........'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 누구도 그 김경징을 제지할 수 없었다. 왕명을 받든 피난지의 수상 앞에 훈구대신이나 왕실의 왕자라 할지라도 감히 함부로 나설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김경징에게 참다 못한 열여덟살의 봉림대군이 준엄한 어조로 그 김경징을 불러 세웠다.
  "이보시오, 검찰사!"
  ".............."
  "빈궁마마와 원손께서 추위에 떨고 계신데 어서 속히 조처를 취해야 할 것 아닙니까!"
  질책하듯 준열하게 호통치는 봉림대군을 퉁명스럽게 쏘아보던 김경징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히 배어 나고 있었다. 대군이라 하여 무서워 할 김경징이 아니었으나 추위에 파랗게 얼어 떨고 있는 세자빈을 보자 김경징은 수하 무장들에게 호통치듯 영을 내렸다.
  "뭣들하느냐, 빈궁마마와 원손을 뫼시지 않고!"
  단지 그 말 한마디만을 남긴 채 김경징은 휑 - 하니 그 자리를 떠났고 날이 완전히 어두워 져서야 김경징의 군졸들이 배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횃불에 비쳐진 배는 전선이 아닌 고기잡이 작은 배였다.
  "아니, 이럴 수가!"
  놀란 봉림대군이 그 군사들을 노려보자 군사들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말만 남기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검찰사는 어딨느냐! 배를 바꾸라. 배를 바꿔오란 말이다. 배를!"
  그 도망치듯 달아나는 군사들을 몇발짝 쫓아가며 소릴 질러보았으나 소용 없는 일이었다. 날은 이미 어둡고 바람마저 세차게 불어 배를 띄울 수 조차 없게 된 그 절망보다 무너진 왕실의 존엄과 김경징의 모멸 가득한 독선에 대항할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에 봉림대군의 두 무릎이 꺽이었다.
  "이럴수는 없다. 이럴순 없어!"
  그 주저앉아 몸부림치는 봉림대군의 양 볼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도 심한 바람에 꼼짝할 수 없게 된 봉림대군과 세자빈 등이 어부들이나 쓰는 비좁고 냄새나는 컴컴한 초막에서 이틀 밤이나 불안하게 보내고 나서야 그나마 그 작은 배에 오르게 되었으나 코를 찌르는 역한 생선 비린내에 세자빈과 왕실의 여인 등이 또다시 심한 구역질에 시달려야 했다.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는 피난지에서 배를 바꾸라 명할 처지도 못되는 봉림대군과 궁인들이 그 작고 험한 배를 타고 간신히 강화도에 들어섰으나 수십리에 뻗쳐 있는 피난민을 스므척도 아니되는 작은 배로 실어 나르기란 처음부터 무리였다.
  "배를 잡아라! 배를."
  "강을 건너야 산다. 배를 잡아라!"
  그 뒤집힌 채로 달려드는 피난민들의 핏발선 눈은 흡사 아귀나찰의 눈이었다. 더구나 절박한 마음들이었는데 이삼일이나 논두렁에서 얼고 밭고랑에서 지치다 보니 그 몰골은 말그대로 산귀신의 모습이었고 그 인산인해(人山人海)의 인파가 또 다시 난투극이나 다름없는 조각배 쟁탈전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을 때 나루터가 갑자기 시끌 하더니 피난민들이 한쪽으로 급히 쏠리며 비명소리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이제나 저제나 가슴졸이며 뒤돌아보게하던 그 청나라 군사들이 기어코 들이닥친 것이었다. 
  무방비의 피난민들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청나라 군사들의 무자비한 칼날에 무참하게 도륙당하며 급기야 나루터는 끈적한 피비린내에 물씬 젖어가고 있었다.
  "빨리뛰어! 빨리-이."
  "아이고, 난 더 못뛰겠어요."
  "이대로 가다간 다 죽는단 말이야! 조금만 참고 뛰어, 조금만. "
  가족을 데린 사내들일수록 급했다. 어차피 강을 건너긴 다 틀린 일이었고 이젠 당장의 목숨부지가 더 급한 일이었다. 
  어디로든 뛰어가 가족의 몸을 숨겨야 할 가장으로서는 피가 마르는 일이었다. 
  '산속으로 숨어야해, 산속으로.'
  그러나 도망이 수월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랑캐는 말을 탄채 짓쳐들어오는 기마군단이요, 이쪽은 이고 진 피난짐에 줄줄이 가족이 달린 피난민이었다. 그 피난민을 상대로 청나라 기병들은 마치 사냥놀이 하듯 했다.
  말을 타고 휘두르는 청나라 기병의 날카로운 창칼이 번쩍일적 마다 피난민의 머리통과 몸뚱아리는 따로따로 떨어져 굴렀고 특히 남자는 무조건 도륙이었다.
  청나라 기병의 말발굽아래 남녀노소 구분없는 시체들이 쌓여가며 나루터는 이제 죽이기에만 혈안이 된 야차(野次)같은 군사들과 눈알이 뒤집힌 채 살고자 내튀는 피난민들로 뒤엉킨, 그야말로 피비린내와 비명소리가 진동하는 지옥도를 이루고 있었다. 이 난장판에서 강화유수 장신의 노모가 얼어죽었다. 장신은 장유(張維)의 아우였고 장유는 봉림대군의 장인이었다. 왕자의 사돈이 적군의 칼날을 피해 달아나다 논두렁에 처박혀 허리가 꺽인 채로 얼어죽은 것이었다.





                                  ㅇ


  "무, 무어라! 강화길이 막혔어!"
  영의정을 비롯한 대.소 신료들의 호종(扈從)을 받으며 세번째 몽진 길에 오른 인조의 어가(御駕)가 남대문을 막 벗어날무렵 소름이 오싹돋는 비보가 또한차례 날아 들며 그 급하게 내닫던 인조의 어가도 우뚝 멈추어 섰다.
  적진을 살피러 나갔던 도감장관(都監將官) 이흥업(李興業)과 80여 기병이 창릉(서오릉)밖에서 모두 전몰 당하고 초관(哨官) 두 사람만이 겨우 살아 돌아온 것이었다. 더욱이 마부대가 거느린 적의 대군이 이미 연서역을 통과하여 홍제원에 진을 친 채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모두 차단했다는 눈앞이 아찔한 소식에 순간 대.소 신료들의 창백한 낯빛은 절망으로 물들어 갔고 그 놀라 허둥대는 신료들의 대책을 채 듣기도 전에 인조는 남대문부터 닫아 걸게 하고 그 문루로 황급하게 뛰어 올랐다.
  "강화길이 막혔다니 대체...........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이요!"
  문루에 미처 다 오르지 못해 자리조차 잡지 못한 사색의 중신들을 돌아보며 인조가 창황하게 소리쳤다. 
  "그렇게 멀뚱히 서있지들만 말고 대책을 말해보란 말이오. 대책을!"
  파랗게 질린 인조가 발을 굴러가며 다급하게 소리쳐도 중신들은 주인앞에 죄지은 강아지마냥 머리만 조아릴 뿐 말이 없었다. 대책이 있을리 없었다. 그 묵묵부답의 중신들을 노려보던 인조의 눈에 또한번 분기(憤氣)가 솟구쳐 올랐으나 인조는 꾹 눌러 참고 답답한 가슴만 쿵쿵 소리가 나도록 주먹으로 울려댔다.
  '그래도 한나라의 대신이요 중신이라 하는 사람들이 어찌 이다지도 무력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인조의 가슴에서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위급한 국난(國難)에 처한 조선 중신들이 중지를 모아 세운 대책이라고는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鎭)으로 하여금 모화관(慕華館)에 진을 치게 하여 얼마간의 시간적 여유를 얻어 보자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걸 어찌 대책이라 할 수 있겠소!"
  어설픈 대안에 인조의 진노가 결국 폭발했다.
  "그래도 그대들은 이나라의 중신이요 대신이라는 사람들이오. 그런 그대들의 대책이 고작 그것 뿐이오?"
  인조의 고함이 남대문 문루를 쩌렁 하고 울렸으나 뾰족한 수가 없는 중신들은 꺽인 고개를 들 줄 몰랐다.
  그때 성루로 급히 뛰어드는 무장이 있었다. 철산부사(鐵山府使)를 거쳐 지금은 체찰부(體察府)의 편비( 裨)로 있는 지여해(池如海)였다.
  "전하, 저들은 천리길을 쉬지 않고 달려 왔기에 말과 군사가 모두 지쳐 있을 것이옵니다. 이 때에 포병을 동원하여 사현(沙峴)에 나가 적의 선봉을 무찌른다면 전하께서는 무사히 강화도에 이르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원하옵건대 신에게 정병 오백만 주시옵소서. 나아가 힘써 싸우겠나이다."
  목소리만 우렁찬 것이 아니었다. 엎드린 모습도 늠름해 보였다.
  고개를 쳐든 중신들이 그 지여해를 마치 지옥에서 부처 만난 듯 한 눈으로 반색해 바라보는데 그중 영의정겸 체찰사 김류가 가장 기꺼운 얼굴을 했다. 지여해가 자신이 수상으로 있는 체찰부의 무장이기도 했거니와 모두가 싸우기를 마다하고 도망가기 바쁘던 터에 죽음을 두려워 않고 결연히 나서서 싸우다 죽기를 청하는 수하 무장의 그 가상함 만으로도 손상된 자신의 체면이 만회되기에 충분하다 여긴 까닭이었다.
  "아, 그야 당연하지요. 오백이 아니라 오천의 군사라도 당장 대동하고 나가 싸워야지요. 암, 그래야지요. 그래야 하구말구요. 암 - 암."
  할금할금 인조의 눈치를 살펴가던 체찰사 김류가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 큰소리로 그 지여해를 두둔하자 절망감(絶望感)에 젖어 있던 인조의 낯빛도 어느새 밝아지고 있었다.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인조가 맑은 음성을 냈고 김류가 괜스리 뒤를 돌아보았다 말았다 하며 분주를 떠는데
  "전-하........"
  하고 중신들 틈에 끼어있던 이조판서 최명길이 정색하고 나섰다.
  "체찰부 편비 지여해의 용기는 가상하옵니다. 하오나 군사 오백으로 적의 십만 대군을 물리치기란 어려운 일이옵니다. 선봉의 기세를 약간 누그러뜨릴 수는 있겠사오나 저 오백여 군사가 순국하고 나면 대대적인 적군의 보복이 있을 터이온데 그 때는 무엇으로 대처하시겠나이까. 전하께서는 신중을 기하시어 대처하심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최명길의 지적에 밝았던 인조의 낯빛이 다시 어두워졌고 귀밑까지 째어지던 김류의 벌어지던 입도 다시 오므라 붙었다. 옳은 말이었다.
  "그,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전하, 오랑캐가 이미 홍제까지 내려 왔다면 일은 급하게 되었나이다. 한양 가까운 곳에서 방어할 만한 땅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만한 데가 없사오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께서는 수구문을 통하여 남한산성에 잠시 납시어 계시다가 사태의 추이를 보아 강화도로 몽진하심이 어떠하겠나이까."
  "도성이 이미 포위 당했다면 그 또한 어려운 일 아니겠소?"
  "유도대장 심기원과 도감대장 신경진이 적을 맞아 죽기로 싸워 준다면 다소간의 여유는 있을 것이옵니다. 전 - 하."
  최명길의 빈틈없는 제안에 비로소 힘을 얻은 듯 눈빛을 빛내며 앞으로 썩 나서는 좌의정 홍서봉을 체찰사 김류가 콧바람을 일으키며 쳐다보았다. 
  "그럴바엔 차라리 지여해가 나가 싸우는 것이 낫겠소이다. 원 - "
  ".............!"
  혀를 차며 눈홀기는 김류의 면박에 코가 뭉턱 해진 좌의정 홍서봉이 무안한 얼굴을 떨구고 다시는 더 말을 못하자 마땅한 대책도 없고 계책도 없는 중신들 틈에서 최명길이 다시 나섰다.
  "전하, 종묘사직의 존망이 경각에 달려 있사온데 이에서 더 무얼 망설이겠나이까. 신이 적진으로 달려나가 적장을 만나 보겠나이다. 윤허하여 주소서."
  인조가 결기세워 나서는 그 최명길을 기대와 불안 섞인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데 
  "이보시오, 이판! 적장을 만나 무얼 어쩌겠다는 것이요. 또 다시 그 잘난 입으로 화친을 논하겠다는 게요?"
  하며 그 때까지 잠자코 있던 예조판서 김상헌이 불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최명길을 노려보았다. 척화와 화친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굽힐 줄 모르던 두사람이었다.
  "나는 화친을 도모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발을 잠시나마 묶으러 가는 것이오이다. 가는 길에 오랑캐가 나를 죽인다면 나는 마땅히 저들의 말발굽 아래에서 죽을 것이나 다행이 서로 이야기가 성사된다면 조정을 향한 칼날을 잠시라도 머무르게 할 것이니 그 때에 전하께서 무사히 남한산성에 당도하실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이 어디에 있겠소이까."
  "................"
  노여움에 불타던 김상헌의 눈빛이 일순 누그러들었고 대.소 신료들의 눈빛도 온통 그 최명길에게 쏠렸다.
  "이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고맙소. 허나 저들은 금수만도 못한 오랑캐들이 아니오.......  그 무지막지한 오랑캐의 소굴로야 어찌 이판을 보내겠소." 
  "전하, 그 점은 너무 심려치 마시오소서."
  "..............?".
  "신은 일찍부터 화친을 주장해 왔나이다. 적장 마부대도 그 점은 익히 아는지라 신이 달려나가면 저들은 신을 반드시 진중으로 끌어 들일 것이옵니다."
  "그렇기만 하다면 오죽..........좋겠소."
  그러나 윤허를 기다리는 엎드린 최명길을 바라보는 인조의 눈빛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 심려치 말라는 말은 자신을 안위시키려는 최명길의 배려임을 안다. 정묘호란을 당했을 때도 최명길은 임금인 자신의 불안한 마음부터 위로하고 나서야 온몸으로 적진에 뛰어 들어 사태를 극적으로 반전 시켰었다. 10년이 지난 오늘도 또한 그 마음 변함없이 몸을 던져 희생을 자처하고 나서는 최명길을 보자 기대보다 오히려 그 최명길 마저 잃지 않을까 불안한 인조의 마음이 먼저 떤 것이었다.
  "위태로운 길임을 알면서도 종사를 위해 기꺼이 적의 진중으로 들어가겠다 하시니.........이 판,"
  "하교 하시오소서 전-하........."
  인조는 최명길의 손이라도 덥석 잡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감정을 억누른 채 부드러운 눈으로 최명길을 바라보는 인조의 눈시울이 어느새 붉어 있었다. 
  "사지로....... 보내야만 하는 과인을...... 용서...... 하시구려."
  "화, 황공하옵나이다. 전 - 하."
  적세가 도데체 얼마나 되는지, 지금 이 순간 어디까지 내려오고 있는지 염탐할 능력도 대처할 경황도 없는 쫓기는 긴박함 속에서 중신들의 의견조차 물어 볼 틈 없는 다급한 인조의 마음이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윤허하는 그 인조의 목소리는 메어져 떨고 있었고 그 앞에 머릴 숙인 최명길의 몸도 가늘게 떨고 있었다.
  "........ 몸성히 잘......  다녀와야 하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 - 하."
  "그리고 누굴......  부사로 삼았으면 좋을지......  말해.....보오."
  숨돌릴 경황조차 없는 가운데서도 임금으로 할 수 있는 성의를 다하려는 인조앞에 최명길의 눈시울도 이미 붉어있었다
  "..........하오면, 동중추 이경직(李景稷)과.....  함께 가겠나이다."
  동중추 이경직은 성품이 강개하고 기절(氣節)이 담대한 사람이었다. 
  인조는 금군(禁軍) 20명을 특별히 배정하여 만일에 있을지 모르는 사태에 대비케 하고 그 금군의 호위 속에 최명길과 이경직이 마부대가 있는 홍제원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서야 남한산성을 향해 재차 몽진 길에 올랐다. 그런데...........  임금의 어가를 메야 할 교군들이 없었다. 오랑캐가 한양 도성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다 달아 난 것이었다.
  황망하게 뛰닫던 어영대장(御營大將) 원두표(元斗杓)가 그 즉시 어마(御馬)를 대령했으나 고삐를 잡을 마부도 도망치고 없었다. 머리끝이 쭈뼛 솟은 원두표가 어영군(御營軍)의 군졸로 급히 고삐를 잡게 하고 남한산성을 향해 길을 재촉하는데 인조가 구리개길(동현)을 경유, 수구문(水口門)에 이르렀을 때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피난민들로 수구문 주변은 이미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임금의 행차임을 뻔히 알면서도 무엄함을 무릅쓴 이들 피난민들이 몰려든 수구문은 서로를 부르고 찾는 소리로 일대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고, 내닫는 그 행열에 혹여 낙오나 되지 않을까 엎어지고 자빠지며 뒤쫓는 피난민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수구문 길바닥을 온통 울음으로 뒤덮었다. 
  그 울음들을 뒤에 단 인조가 신천과 송파 두 나루를 건너 산밑에 이르렀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 캄캄했고 이경(밤10시경)이 지나서야 비로소 남한산성에 들어설 수 있었다.
  남한산성에 무사히 들어선 인조는 강화도로 떠난 사람들과 적진을 향해 떠난 최명길이 어찌 되었는지 그 궁금한 소식에 견딜 수 없어 불안에 들뜬 눈으로 밤을 밝히고 있었다.




























              2. 화친(和親)도 척화(斥和)도





  한편 홍제원을 지나 사현의 마부대가 있는 군진으로 향해 가는 최명길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이미 홍제원까지 내려와 진을 치고 있는 적군의 삼엄한 경계로 홍제원 이북은 마치 남의 나라 같은 쓸쓸한 느낌이었고 살기 등등한 기세의 청나라 군진 한 가운데를 두려움 무릅쓰고 쫓아오는 초라한 단 한 명 조선금군의 애처로운 모습도 그 최명길의 가슴을 자꾸만 아리게 했다. 
  임금의 명을 받든 20여명 조선금군조차 출발과 동시에 모두 달아나 버리고 난 그 황량한 사행 길을 끝끝내 남은 비장(裨將) 한 사람과 부사 이경직만이 적진까지 따라 온 것이었다.
  '어찌 그들만의 잘못이랴, 그들도 가족이 달린 한 집안의 가장인 것을.....'
  정묘호란을 당한지도 어언 10여 년........  강산이 뒤바뀌는 그 10여년 동안 청나라는 명나라 마저 정복할 야욕으로 그 군세가 다섯배, 열배도 넘게 늘어나고 있었는데 조선은 그나마 남아있던 힘마저 부질없는 권력다툼에 탕진해 버리고 국본(國本)인 백성들의 살림살이 조차 그 바닥을 들어내게 했다.
  권력유지를 위해서라면 헐벗은 백성들의 등골조차 서슴없이 우려빼고자 혈안이 된 권력가들의 착취를 피해 깊은 산속 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는 화전민이 늘고, 탐관들의 손길을 피해 멀리 바다 건너 섬으로 들어가는 유랑민이 늘면서 줄어드는 호구(戶口) 수에 놀란 조정과 지방관아가 그 실태 파악에 나서긴 했지만 한곳에 뿌리내려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부평초 같은 굶주린 백성들로 인해 그 실태는 파악조차 되지 못했다.
  이에 조정은 조정에 보고된 호구 수 보다 유랑민을 많이 낸 지방 수령들을 체직과 면직, 또는 해임 등의 강경한 방법으로 몰아세우는 일에만 몰두하자 이에 해당되는 지방수령들이 제한몸 건사하기에 바빠 지고한 임금의 왕명에 대해서 조차 편법으로 대처하는 일이 공공연 하게 진행되었고 그런 지방관들에게 목민(牧民)은 환상이요, 국력이니 국방이니 하는 말 조차도 아득한 먼 나라의 전설 같은 이야기로 간주되는 마당에 척화란 더더구나 씨알머리없는 얘기였다.
  척화는 입으로만 하는 정치구호가 아니요, 나라 운명의 사활이 걸린 현실의 문제인데도 나라가 어찌되고 백성이야 어찌 되든말든 안전한 자신들의 입지만 믿고 사방팔방에 척화 유시문을 남발하는 김류, 김자점의 행태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라의 백년대계를 내다 볼 안목을 지녀야 할 젊은 신료들 조차 나라안의 실상은 뒤로한 채 덩달아 달아 오르는 그 경박함에 최명길의 가슴이 찢어졌다. 김류와 김자점의 입김 탓을 아니할 수 없는 노릇이나 나라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젊은 동량들마저 시류에 따라 영합(迎合)하는 영악스러움이 안타까워 긴 한숨 끝에 하늘을 올려 보는 최명길의 눈시울이 시렸다. 
  '시대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나라와 백성의 안위조차 뒷전으로 팽개치는 시류의 영악함이 결국 사행길의 최명길을 울게 했다.
  하염없는 눈물이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가 얼룩지도록 닦아 내는데 어느덧 마부대의 군막 앞이었다.
  조선 사신의 행차 소식에 마주나 오던 마부대가 상대가 최명길임을 알자 껄껄 웃으며 맞이했고, 그러나 최명길은 웃지 못했다. 지금쯤 남한산성을 향해 허겁지겁 내닫고 있을 임금 인조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수가 없었다.
  "마대인, 귀국과 조선은 지난 정묘년에 형제의 의를 맺어 서로 군사를 일으키지 않기로 맹약하였소이다. 우리 조선은 그 약속을 금석맹약(金石盟約)으로 믿고 따랐는데 무슨 연유로 대군을 일으키어 이렇듯 깊이 들어왔소이까?"
  마부대의 웃음을 애써 외면한 급한 마음의 최명길이 마부대가 권하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 일 부터 따졌다.
  "그야 지난 정묘년의 약속 불이행 때문이지요..........  그 확답을 들으려 온 거외다. 우리는..........."
  "아니, 마대인. 조선이 맹약을 어기다니요? 그 무슨 당치않은 말씀이시오이까?"
  자리에 앉으며 최명길이 정색했다.
  "그럼 지금까지 정묘년의 약조를 잘 지켰다고 보시는 겝니까?"
  "그렇다 마다요, 우리같이 힘없고 나약한 조선이 어찌 먼저 약속을 어기겠소이까."
  "이것 보시오, 최대감. 조선 조정이 척화로 공론을 모으고 군사를 징발했다는 증거가 여기 있소이다."
  언성을 높이며 따지듯 쳐다보는 최명길을 향해 마부대는 인조가 평양 감영과 의주부윤에게 보냈던 척화유시문을 내보이며 차갑게 눈을 흘겼다.
  "어디 그 뿐이오? 우리 황제께서 나라이름을 후금에서 청(淸)으로 바꾸시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는데도 조선 조정에서는 그 숭덕연호를 따라 쓰질 않고 있소이다. 그리고 금년 가을까지 보내기로 했던 세폐(歲幣)는 왜 아직 보내지 않고 있소이까?"
  "................"
  "그것만 보더라도 조선은 이미 정묘년의 약조를 어기고 있음이 아니더이까."
  숨을 꿀꺽 삼킨 최명길이 마음을 가다듬었다. 마부대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또 있소이다, 최대감." 
  "..............?"
  "우리 황제께서 대청 제국의 제위(帝位)에 오르신 후 새로운 약조를 맺고자 화친할 것을 수 없이 요청했는데도 조선은 오히려 척화로 공론을 모으고 우리 사신들을 홀대했소. 그 바람에 우리 사신들이 여러 번 곤경에 처한 적도 있었소이다."
  마부대는 인조의 왕비 인렬왕후의 빈소에 조문 차 사신으로 왔다가 웃지 못할 봉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을 생각했음인지 마부대의 입가에 계면쩍은 웃음이 흘렀다.
  인조의 왕비인 중전 한씨가 인조 13년 12월에 42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후금의 조문 사절로 온 마부대가 홍타시의 국서를 가지고 온 것이 탈이었다. 그 국서의 내용인즉,
  - 국호를 청(淸)이라 하고 한(汗:칸)을 높여 황제라 하며 연호를 천총(天聰)에서 숭덕(崇德)으로 고쳤으니 조선은 군신(君臣)의 예를 다하라.- 였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그 국서로 말미암아 조선 조정은 한때 요동을 쳤다.
  오랑캐와 형제의 맹약을 맺은 것만으로도 치욕으로 여기던 조선의 사대부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 오랑캐를 임금으로 섬기라.............? 
  그야말로 온 조정이 발칵 뒤집히고 온 나라가 들먹 거릴 일이었다.
  조선의 청징(淸澄)함을 어찌 오랑캐 따위에게 더럽힐 까보냐며 눈을 하얗게 치뜨던 사대부와 조정 대.소 신료들이 드디어 그 조문 사절을 목베고 그 머리로 오랑캐 타도의 제물로 삼자는 흥분한 목청을 돋구기 시작했고 그와 때를 같이 하여 조선의 천지 사방에서는 한때나마 무찌르자 오랑캐, 때려잡자 홍타시를 부르짖는 구호가 집집마다 마을마다 흐르고 넘쳤다.
  조정과 나라 안팎의 분위기가 이렇듯 험악하게 돌아가자 빈전(殯殿)을 지키는 빈전도감들도 오랑캐의 조문을 가당찮게 여겨 금천교(禁川橋)에 장막을 치고 그곳을 빈소 인양 속였는데 그런 사실을 모르는 마부대와 용골대가 빈 장막에 제물을 차리고 제례를 올리려 할 때였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바람이 세차게 불어 장막이 들춰 진 것이었다.
  "아니!"
  "빈전이 비어 있지 않습니까?"
  놀란 마부대와 용골대가 소리치며 돌아섰고 사태의 전말을 눈치챈 마부대가 조문 사절을 능멸한 처사는 곧 황제를 능멸한 처사라며 격분해 뛰쳐나가는데 그때 또 숙위를 교대하려는 금군 부대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이들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머리끝이 쭈뼛한 마부대와 용골대는 그곳을 함정으로 알았다. 자신들을 해치러 달려나오는 군사들로 착각한 것이었다.
  순간 혼비백산한 마부대와 용골대가 괴성을 내지르며 그대로 튀어 달아났고 그 달아나는 발걸음들이 어찌나 잽싼지 영문을 모르는 금군들은 그들을 멀뚱한 눈으로 바라만 볼 뿐 이유를 몰랐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창덕궁의 담을 뛰어넘은 이들 마부대와 용골대는 그 길로 압록강을 건넜다. 도망 중에 조선군의 파발을 우연히 사로잡게 되어 보니 공교롭게도 그 파발은 인조가 평안 감영과 의주 부윤에게 보내는 척화 유시문이었다. 그 유시문을 마부대가 최명길에게 보인 것이었다.
  "조선의 왕자와 척화를 고집 하는 신료들을 우리 청나라에 보내 오면 우리가 그들을 설득하여 화친을 이루어 내려 무진 애를 썼소이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단 한번도 성의를 가지고 대한 적이 없었어요."
  "................"
  "지난달 초에도 본인이 의주의 임경업에게 말한바 있소. 우리의 대병이 압록강을 넘어 출병 중에 있을지라도 왕자와 대신들을 보내 화친할 것을 청한다면 우리는 그 즉시 출병을 정지하고 화친에 응하겠다고 말이지요." 
  "............"
  "기억 나시오이까?"
  마부대의 차가운 시선이 최명길에게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허나, 마대인.......  조선으로서는 그만한......."
  "내 말 아직 끝나지 않았소이다, 최대감!"
  갑자기 써느런 마부대의 언성에 말허리가 잘린 최명길이 그 차갑게 쏘아보는 마부대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내었다. 
  "척화로 공론을 모았으니 조선엔 척화를 주장하는 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 아니오?" 
  순간 마부대의 두 눈으로 파아란 살기가 모여 들었다.
  "우린 내일.... 그 자들을 색출해 내어 그자들이 보는 앞에서 한양 도성을......  쑥대밭으로 만들.......  작정이었소."
  어금니에 힘을 주어 잘근잘근 씹어 말하는 마부대의 눈빛에선 파아란 불꽃이 튀었고 그 눈빛에 놀란 최명길의 가슴으로 오싹 하는 전율이 흘렀다.
  "그런데 그토록 척화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어째 한사람도 아니 보이냔 말이오. 우리가 한양 도성을 포위하는 동안 내내 말이요."
  "............"
  "그자들 더러 우릴 막아 보라 해 보시요. 말로만 떠들지 말고 말이요."
  그 파아란 불이 흐르는 눈으로 마부대가 차갑게 웃었다. 조소(嘲笑)였다.
  힘이 있고서야 태평성대(太平聖代)도 보장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단 3만의 기병도 막아낼 힘조차 없는 조선이 눈만 뜨면 척화요, 입만 열면 문치(文治)제일이니 그 허장성세의 가소로움을 마부대는 가는 실눈 속에 담아 싸늘하게 조소하고 있었다.





                                  ㅇ


  "하오나 마대인........  우리 조선이 화친을 배척하고 척화로 공론을 모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최명길이 그 마부대앞에 공손한 태도를 보이자 싸늘하게 조소하던 마부대가 
  "이....유.........?"
  하며 가는 실눈을 치떴다.
  "그렇소이다, 마대인. 우리같이 작은 약소국이 조선에 비해 수십 배나 큰 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살면서 척화한다고 하는 일이 사리에 합당하다고 보시오이까?"
  "..............?"
  최명길의 말뜻을 선뜻 헤아리지 못하겠다는 듯 마부대가 눈알을 굴렸고
  "그것은 명분이외다."
  "명분.....?"
  이번엔 마부대가 최명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테를 내었다.
  "계란이 바위를 이길 수 없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니오이까."
  "그렇긴 하오만............  그것이 명분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오?"
  "지난 정묘년 이후로 귀국의 소인 잡배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조선의 민가를 약탈하고 조선의 부녀자들을 잡아가기를 수도 없이 했소이다. 심지어는 국경을 지키는 우리 군사들까지 해쳐 가면서 말이지요."
  "그, 그게 무슨 말이요, 최대감?"
  눈썹이 꿈틀하던 마부대가 잡았던 술잔을 한입에 털어 넣고 탁! 소리가 나도록 술잔을 내려놓았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두만강을 접경으로 하고 있는 회령 지방에서는 작은 부락이 아예 통째 폐허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아주 최근의 일이었소이다 마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참상이었지요."
  마부대가 어려워하는 것은 최명길의 인품이었다. 인품으로 보아 최명길은 거짓말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변방의 수령들이 이같은 사실을 어찌 아니 고할 수 있었겠습니까."
  "..............."
  "피에 젖은 한 맺힌 보고가 하루도 잘 날 없이 조정에 올라오니 조정은 조정대로 편치않아 이 사실들을 공론에 부쳤소이다."
  "............."
  "공론이 일자 혈기왕성한 젊은 신료들을 중심으로 무언가 일이 진행되었지요. 말릴 수 없는 일이었소이다."
  "............."
  "척화는 공론이었으나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화친을 주장하는 나도 척화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낯을 들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으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마부대의 숨소리가 점차 크게 울려 나고 있었다.
  "죄없는 내 동포가 원통하게 죽어 가는데 가만히 보고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나라의 녹을 먹는 신료 된 자가 이를 알고도 모른 척 한다면 장차 백성들은 무슨 낯으로 대하구요........."
  마부대가 손수 술을 따라 묵묵히 마시고 있었다.
  "온 나라가 들끓는데 혈기 왕성한 젊은 신료들이 가만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그 점에 있어 척화는 탓할 일이 아니라 보고 있습니다."
  그 말에 마부대가 무어라 말대꾸를 하려는데 최명길이 그 마부대를 먼저 불렀다.
  "마대인........"
  마부대는 마뜩찮은 눈으로 최명길을 쏘아보았다.
  "우람한 청년이 달려들어 네살박이의 목을 죄고 흔든다면 마대인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말렸겠지요."
  마지못한 마부대는 퉁명스런 대답을 했다.
  "우리 조선은 네살박이 젖먹이와 다름없소이다."
  그 말에 피식 하고 웃던 마부대가 어깨를 한번 으쓱 추스렸다.
  "조선은 공. 맹(공자, 맹자)의 학풍을 계승한 나라라 자처하는 자긍심이 강한 나라 오이다. 그에 따라 명분 또한 소중히 여기는 나라이기도 하구요."
  ".............."
  "............조선은 명분에 따라 목숨도 초개같이 버릴 줄 아는 세상에 몇안되는 나라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런 명분을 아는 사람들에게 변방의 일들은 너무도 파렴치한 행위들이었어요."
  "............."
  "그러니 우리 젊은 신료들이 명분을 앞세워 서로 죽으려 다투는 것인데...........  이를 누가 말리겠소이까."
  마부대가 조용히 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물리적인 힘은 없으나 이것이 조선의 저력이외다. 창칼보다 더 무서운 숨은 힘이지요."
  "................"
  "임진왜란때 우리 조선은 전 백성이 무섭게 일어 섰었습니다. 지난 정묘난 때에도 그러 했구요......."
  은근히 위협하듯 말하는 그 최명길을 향해 마부대의 가는 눈이 치떠지다 사라졌다.
  "명분이 바로 서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가 바로 우리 조선입니다. 이제 또 그 명분이 바로 설 때가 온 것이니.......... 마대인,"
  "..............?"
  "우리가 숭덕연호를 쓰지 않는다 하셨는데 아직 명나라가 건재하고 있소이다. 명나라는 우리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선뜻 나서서 피를 흘려 준 아주 고마운 나라 입니다."
  마부대의 가는 눈이 다시 하얗게 치떠졌으나 최명길이
  "허나, 또 다시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귀국이 선뜻 나서 도와준다면 우리 조선은 청나라를 명나라 대하듯 또한 그렇게 하고도 남을 것이외다." 하고 말하자 마부대의 치뜬 눈도 다시 사그라 들었다. 
  "..........그런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고 무지막지하게 창칼로 위협하며 청나라 연호를 쓰라면 죽어도 아니 쓸 나라가 바로 우리 조선이외다."
  어느새 마부대는 고심하고 있었다. 지난 정묘년에 조선 깊이 들어 왔다가 조선 의병들에게 악전고투 당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 것이었다. 한때 퇴로까지 차단 당하여 얼마나 당황했던가. 최명길의 말처럼 죽기를 작정한 조선 백성들이 이제 또 다시 충(忠)을 앞세워 벌떼처럼 달려든다면 이는 분명 눈앞이 아찔하도록 난감한 일이 될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마부대가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 뜨렸다. 새까맣게 몰려나온 성난 조선 의병들이 마부대에게 돌을 던진 것이었다. 너무도 생생한 환상에 마부대의 이마로 진땀이 배어 나고 있었다.
  "아니, 마대인!"
  최명길이 오히려 놀라 자신의 손수건으로 마부대의 옷자락에 묻은 술을닦아 내었다.
  "어허- 이런, 어쩌자고 이런 실례를........."
  일어선 마부대가 최명길의 두 손을 잡아 제지하며 극구 사양했다.
  "허허......  최대감. 최대감의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가 조선을 너무 얕보았던 것 같소이다."
  "얕보다니요, 우리가 힘이 없는 것은 사실이오이다."
  "허 - 그 힘이라는 것이 어찌 영원할 수 있겠소이까."
  "...............?"
  "그리고 정묘년의 일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소. 최대감의 말씀에도 일리는 있으니..........  최대감," 
  "말씀하시지요."
  처음에 비해 사뭇 부드러운 모습을 한 마부대가 최명길의 두손을 잡았다.
  "우리가 이렇게 깊이 들어온 까닭은 화친하자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
  "또.........  우리 황제께서 나라이름을 청(淸)이라 하셨고 또한 제위에도 오르셨으니 그 이전에 있었던 모든 사안들은 마땅히 새로 바꾸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
  "그래서 오늘과 같은 불행을 사전에 방지하고 양국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자 수 없이 많은 사신을 보내 화친 할 것을 요청했는데도 번번히 거절당하고 말았소이다. 그러니 황제께서도 화가 날만 하셨지요."
  "..............."
  "이제 우리 황제 폐하 께서 남하 중에 계시니 머잖아 한양 도성에 곧 당도하실 겝니다."  
  "아니, 황제께서 직접.......?" 
  흠칫 놀라다 말고 최명길이 그 마부대를 바라보았다.
  "그렇소이다, 최대감. 황제께서 손수 본진을 이끌고 남하 중에 계시오이다."
  "그, 그렇다면........"
  최명길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건 임금 인조의 피난 시간을 버는 그런 일만으로 끝날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최소한의 피해! 조선이 입을 최소한의 피해!'
  급한 최명길의 마음속이 그렇게 외쳤다.
  청나라 황제가 몸소 친정(親征)에 나섰다면 그 피해는 조선이 미처 감당치 못할 그런 가공할 피해가 될 것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절절하게 외쳐 대던 화친 주장도 조선이 입을 피해를 최소화 하자는 데 그 뜻이 있지 아니했던가.......  최명길이 안절부절 못하는데 마부대가 그 최명길을 바라보았다.
  "황제께서 친히 강림하셨다 돌아 가실 때에는 절대 빈손으로는 아니 가실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조선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염려해 주어 고맙소이다. 마대인........"
  최명길이 마부대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감사한 마음을 표하자 그 잔을 훌쩍 비운 마부대가 최명길에게도 술은 가득 따라 주었다.
  ".......마대인........"
  "말씀하시구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한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푸짐한 안주를 한입 가득 물던 마부대가 눈을 뚱그렸다.
  "부탁........  이라고요?"
  "그러 하오이다, 마대인..........."
  안주를 씹던 마부대가 머리를 깊이 숙인 그 최명길에게 오히려 재촉했다.
  "무슨 부탁이요, 어서 말씀해 보시구려."
  "도성 안엔 미처 피난하지 못한 우리 백성들이 많이 남아 있소이다. 이들의 생명과 재산을 강탈하는 일이 없기를 부디..........  간곡하게 부탁하오이다."
  말끝에 최명길의 눈시울이 붉게 젖어 가자 마부대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가슴을 썩 내밀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난 또, 무슨 특별한 부탁이라고.........  그런 부탁이라면 부탁이랄 것도 없지요. 황제께서 오신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는 일이나 그 때 까지만이라도 내 특별히 단속하리다. 염려 마시구랴."
  "감사하오이다, 마대인. 진정.....  감사.....하오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최명길이 그 마부대에게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해 하자 마부대가 겸연쩍어 했다.
  "허허......  별걸 다........."
  "우리 전하께는 귀국이 소망하는 바를 잘 말씀드려 성사되도록 노력하겠소이다."
  "고맙소이다, 최대감. 피차간에 유혈 사태는 없을 수록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 하오이다, 마대인........."
  마부대가 최명길의 두손을 다시 잡았다.
  "노력해 보십시다, 최대감."
  "그리 하오리다, 마대인.........  그리고 오늘 많은 신세를 지고 가오이다."
  "허허.......  신세는 무슨."
  마부대는 마치 오래된 지기를 보내는 듯 군영 밖까지 따라 나와 최명길을 배웅해 주었다.
  마부대가 최명길을 안지는 오래 되었다. 
  십여년 전, 정묘호란시 한양 도성이 후금군에 함락되자 강화도로 피난한 임금과 조정의 신료들 가운데는 나라가 망할 지언정 척화는 해야 한다며 분기탱천한 명분론자들이 임금 인조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때, 실리의 바탕 없이 명분만 주장하는 것은 그릇 된 유자(儒者)의 못된 고집이라며 명분론자들을 실랄하게 비판, 나라부터 구하고야 명분도 설자리가 있다는 최명길의 주장에 인조가 동조하여 최명길이 어렵게 어렵게 화친을 유도해 내었었다. 그 위기의 조선을 구해 낸 최명길의 충성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마부대였다.
  충성심과 함께 실리와 참된 명분을 아는 최명길을 마부대는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ㅇ


  남한산성은 텅 비어 있었다.
  영의정 김류와 도원수 김자점이 산성 수비군을 모두 영남 군으로 배정한 까닭이었다. 
  영남에서 군사가 오려면 며칠이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고 수비 군사가 없는 텅 빈 성에 머물러 있기란 불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수비군을 영남 군으로 배정하여 수도 방위를 무력하게 한 책임에 대해서는 자책하는 기미도 없이 영의정 김류는 불안에 떨고만 있었다.
  "전하, 날이 밝는대로 강화도로 향하시옵소서. 이곳 산성은 수비군이 부족하여 잠시라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을 듯 하옵니다." 
  "산성의 수비군을 영남 군으로 배정한 것은 영상이 아니오? 강화로 들어가면 안전하다는 것을 과인인들 어찌 모르겠소. 허나 이미 강화길이 끊겼다 하질 않소.  ...........어디로 간단 말이요! 영상은 날개라도 달렸소?"
  핏발선 눈으로 소릴 빽 지르는 인조 앞에서 영의정 김류는 더 말을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인조는 그 물러나는 영의정과 엎드린 공신들을 향해 조선군이 반항 한번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은 것은 탐욕에 눈 먼 반정 공신들이 권력 암투를 벌여 온 결과가 아니냐고 혹독하게 질타하고 싶었으나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기를 억지로 눌러 참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병조판서 이성구(李聖求)가 큰 소리로 엎드렸다.
  "전하, 새벽 야음을 틈탄다면 저들의 눈을 잠시 속일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그리하소서."
  무슨 큰 계책이라도 되는 양 떳떳하게 말하는 이성구를 보자 눈알이 반짝하던 영의정 김류가 이어 그 이성구의 계책이 참으로 묘안이다 응원하려 나서려는데 인조의 노성(怒聲)이 먼저 터졌다.
  "일국의 병조 판서란 자가 어찌 그 모양이요. 평지에서나 야음을 틈탈 일이지 이런 산꼭대기 비탈길에서 어찌 야음을 틈탄단 말이요. 답답들 하시오. 답답들 해....."
  경멸에 가까운 인조의 핀잔에 병조 판서 이성구의 목은 자라처럼 옴추러 들었고 돌아선 김류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였다. 
  "전-하, 위험 천만한 육로를 통하여 강화로 몽진하시기 보다는 먼저 인천으로 납신 연후에 뱃길을 이용하여 강화도로 들어가시는 것이 어떠하겠나이까."
  순간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던 인조의 낯빛이 밝아졌다.
  "듣던 중 옳은 소리요. 그리합시다."
  "...............!"
  "날이 밝는대로 인천으로 향할 터이니 그리들 준비하시오."
  대사헌 이식(李植)이었다.
  대사헌 이식이 침통하게 가라앉은 그 무거운 분위기를 뚫고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는데 뜻밖에 이식의 그 간언(諫言)을 인조가 가납하자 그제야 힘을 얻은 중신들이 비로소 고개를 들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바른 견해였다.
  남한산성은 이미 깊은 밤이었다.
  온 삭신에 알이 밴 듯 피곤한 몸인데도 인조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조뿐만이 아니었다. 가솔들을 미처 챙기지 못한 중신들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기는 마찬가지였다.
  문득 휘파람 소리가 괴기스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니 그건 휘파람 소리가 아니라 앙상한 나뭇가지를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일 터였다. 그 산등성이를 휘감아 몰아치는 겨울 밤바람은 전쟁의 공포에 움추린 마음들을 더욱 스산한 나락으로 떨구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인조는 말을 타고 남한산성을 나섰다. 어영대장 원두표와 건장한 체구의 어영군이 인조를 호종하고 그 뒤를 소현세자와 중신들이 따랐다.
  "아니, 이런!"
  음지의 비탈길은 온통 빙판이었다. 그 빙판길에 인조가 탄 말이 미끄러지며 앞으로 더 나아가질 못하자 말에서 내린 인조가 어영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길을 재촉했다.
  "어서 가자, 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내려가던 인조가 그러나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며 나뒹굴자 뒤따르던 세자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내달렸고 뒤이은 중신들이 비탈길을 구르며 달려왔다.
  "아바마마!"
  "전하!"
  인조가 비탈길의 빙판을 잘못 딛어 부축하던 장졸들과 함께 공중 방아를 찧으며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전하!"
  "전하! 괜찮사옵니까."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와 함께 원두표가 달려왔고 뒤이어 영의정 김류, 좌의정 홍서봉, 병조판서 이성구, 대사헌 이식 등이 울음같은 비명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전 - 하..........."
  "전 - 하..........." 
  몰려든 신료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일어서던 인조가 갑자기 허리를 짚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엉덩방아를 찧은 허리에 통증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이 사람이 아니었더면 큰일날뻔 했소."
  몸을 날려 자신을 구해 낸 장졸의 어깨를 두드리며 비탈길에서 빠져 나온 인조가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문득 산 아래로 보이는 올망졸망한 산봉우리와 깊은 계곡,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까마득한 비탈길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야 보니 남한산성은 높고 험준한 산악이었다.
  "................!"
  지금껏 이토록 높은 산에 올라 본 역사가 없는 인조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 높은 산을 다 올라왔는지 인조는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산 아래를 망연히 굽어보던 인조의 두 다리가 가늘게 경련하며 떨고 있었다. 며칠째 밤잠을 설쳤는지, 경황이 없어 음식은 몇 날을 걸렀는지 기억에도 없었고 다만 청나라 군사의 추격이 무서워 밤길의 남한산성을 허겁지겁 오른 것 외엔 아무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얼마나 급하게 올랐던지 두 발이 동상에 걸려 퉁퉁 부은 것도 몰랐고 나뭇가지에 찔리고 할퀴운 머리카락이 봉두난발(蓬頭亂髮)이 된 것도 몰랐다.
  이제껏 물한모금 입에 대지 못해 쓰린 속은 인조의 허리를 휘게 했다.
  허기 탓인지 팔다리도 자꾸 떨렸다.
  피로하고 지친 눈에 까마득이 보이는 비탈진 산길은 정녕 천리만리처럼 멀게만 보였다.
  '어쩌자고 이 높은 델 올라왔노.......'
  인조는 지쳐 있었다.
  화살처럼 찔러 오는 아침 햇살에 눈알마저 따갑자 인조는 그 자리에 눌러 앉아 눕고만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영의정 김류를 힘겹게 돌아보았다.
  "산성으로 돌아 갈 것이니........  다시 길을 인도하오."
  "예?"
  말하는 것도 힘에 겨운 듯 작은 소리였다.
  "저, 전하! 이, 인천으론 아니 가시옵니까?"
  불안에 젖어 있던 놀란 김류가 목소리를 떨었다.
  "나는 더.........  못 가겠소. 산성으로 돌아가 만전에 대비할 것이니...... 어서 길을 내도록 하오."
  힘에 겨운 작은 목소리를 내던 눈이 움푹 들어간 인조가 휘적! 하고 발걸음부터 옮기자 어영대장 원두표를 위시한 어영군이 산성을 향해 다시금 치닫기 시작했고, 줄을 이어 내려오던 긴 행열들도 그 어영군을 따라 꾸불꾸불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틈에 경기감사 서경우(徐景雨)가 도망을 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며 영의정 김류에게 보고되자 이빨을 뿌드득 갈던 김류가 욕설부터 퍼부었다.
  "더러운 잡놈의 새끼!  .........개만도 못한 놈이 경기감사를 맡고 있었으니 나라꼴이 이 모양이 되었지. 에이, 개 같은 놈!"
  욕을 하면서도 뒷맛이 개운치 않았는지 김류는 퉤! 침을 뱉으며 끝을 달았다.
  "전쟁이 무섭기는 다 마찬가지지...........  어이, 쌍놈 새끼!"
  그러면서 김류는 어깻죽지를 오싹 오므렸다. 그잖아도 겁이나 죽을 판이었는데 경기감사마저 달아나 버리자 김류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어 오줌 끝이 다 저렸다.





                                  ㅇ


  산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서둘러 방어 태세부터 갖추었다.
  도감대장 신경진에게 동성(東城) 망월대(望月臺)를 지키게 하고,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은 서성(西城)을, 호위대장 구굉(具宏)에게는 남성(南城)을, 총융대장 이서(李曙)에게는 북성(北城)을 맡겨 각각 지키게 했다. 또한 이영달(李穎達), 이확(李廓), 이직(李稷)을 중군으로 삼아 성루를 지키게 하고 수원부사 구인후(具仁 )를 부장으로 삼아 남한산성 방어에 총력을 기울여 나갈 때 경기 일원의 인근 수령들이 몽진 길의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군병을 이끌고 산성으로 몰려들었다.
  제일 먼저 여주목사 한필원(韓必遠)이 달려왔고 그 뒤를 이어 이천부사 조명욱(曺明 ), 양근군수 한회일(韓會一), 지평현감 박환(朴煥), 파주목사 기종헌(奇宗獻) 등이 군사를 이끌고 합세했다. 이렇게 모인 군사의 수가 1만 2천여 명이었고 문무 음관이 2백여 명, 종실과 삼의사가 2백여 명, 호종관이 인솔한 노복이 3백여 명이었다. 
  관향사 나만갑(羅萬甲)이 창고의 식량을 확인해 보았는데 쌀이 1만4천3백여 석, 피곡 5천8백여 석, 콩이 3천7백 석, 장이 2백20여 독이었다.
  "그 양이면 얼마나 쓸 수 있겠는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성안 1만3천여 군사가 한달보름정도 쓸 양식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허어 - "
  인조는 탄식했다. 이제 조선이 버틸 수 있는 최후의 시간은 50일이었다. 이 50일 안에 조선의 운명은 결정 될 것이었다.
  "식량은 곧 목숨과 직결된 것이니 한 톨의 쌀알이라도 아껴쓰라."
  "명심하겠나이다, 전하."
  인조가 남한산성 4대문에 수비군을 배치하고 병력과 식량에 대한 최종 점고를 끝냈을 무렵 석양을 등지고 최명길이 돌아왔다.
  "그래, 적의 동태는 어떠하더이까."
  반색해 맞은 인조가 그 두사람 최명길과 이경직의 노고를 치하한 뒤 적군의 동향에 대해 물었다.
  "이미 도성까지 진출한 저들의 군병으로 서대문과 동대문이 막혔사옵고 각 진에서 울려 대는 시끄러운 저들의 군악으로 도성 안팎이 떠들썩하옵니다."
  "백성들의 고초는요? 미처 피난하지 못한 우리 백성들이 도륙 당하는 일은 없는지............."
  인조의 입술이 바싹 메말랐다. 
  "불행중 다행스럽게도 도성 안의 백성들을 해치는 일은 아직 없었사오나 다만 우마(牛馬)와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은 보이는 대로 끌어가고 잡아 가기에 여인들의 고초가 클 것으로 보옵니다."
  입술을 깨물던 인조가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의 부덕의 소치였다. 그 밖에 또 무슨 변명이 있겠는가........
  "저들의 요구는...... 알아보았소?"
  인조의 그 수척한 눈이 최명길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방도를 찾는 눈빛이었다.
  "외람 되옵게도 전하, 저들은 화친을 요청해 왔나이다."
  "화..........친 이라............"
  인조는 천정을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화친하기 위해 협박까지 일삼던 저들이 아닌가.......
  "조선 깊이 들어온 이유는 단지 그 까닭이라 하더이까?"
  "그러하옵니다, 전하. 저들은 저들이 먼저 화친할 것을 요청하였는데도 우리 조선이 오히려 척화로 공론을 모았다며 불만을 나타내었나이다."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요. 이판!"
  처음부터 숨소리를 크게 내며 듣고 있던 예조판서 김상헌이 숭은전이 쩌렁 울리도록 큰소리를 질렀다. 예의 그 불이 뚝뚝 떨어지는 눈이었다. 그 눈으로 또다시 큰소리를 지르려 할 때였다.
  "가만있어 보시오, 예판! 이것이 어디 이판이 하는 소리요? 저들이 하는 소리지.  ............마저 들어봅시다. 마저 듣고 대책을 강구해도 늦질 않아요."
  영의정 김류가 김상헌을 막았다. 김상헌의 카랑카랑한 예봉을 사전에 막지 않으면 이 자리는 또 다시 난장판이 될 것이었다.
  "전하, 저들이 트집잡는 또 하나는 저들의 숭덕연호를 우리 조선이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사옵니다."
  파르르 몸을 떨던 예조판서 김상헌이 그 최명길을 후려 칠 기세로 다시 쏘아보았다.
  "그리고..........  세폐를 제때 보내지 않았다는 핑계를 들어 태종 홍타시가 직접 내려와 그 책임을 묻겠다고도 하였나이다." 
  "태종 홍타시가 직접..........!"
  "그러하옵니다, 전하."
  순간 인조와 중신들의 놀란 눈알들이 왔다갔다 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그야말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이었다.
  "전하, 저들은 지금이라도 화친이 성사 된다면 당장 회군하여 돌아간다 하였나이다." 
  간곡하게 주청하듯 하는 최명길에게 희망을 기대하는 눈들이 그 최명길과 인조를 번갈아 쳐다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 찬바람 일으키는 소리가 났다.
  "이판은 그 말을 믿소?"
  이미 눈에서 불이 철철 넘쳐흐르던 김상헌이 또 다시 고함을 질러 댄 것이었다.
  "정녕 저들이 화친에 뜻이 있다면 어째서 태종이 직접 내려오겠소. 이는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음모가 있음이예요, 음모가..........."
  김상헌이 인조를 향해 바닥에 엎드렸다.
  "전하, 지난번 국서에서 보신바와같이 저들은 우리 조선에 군신의 예를 강요하고 있나이다. 이미 저들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것 만으로도 수치이온데 하물며 군신의 예이겠나이까. 이는 저들이 우리 조선을 너무도 업수이 여긴 까닭이옵니다."
  "............."
  "지금이라도 우리 온 조선이 떨쳐 일어나 죽기로 나선다면 저들은 스스로 물러 갈 것이옵니다. 하오나 저들의 요구대로 우리 조선이 아무 스스럼없이 화친에 응한다면 싸워 보지도 않고 미리 항서를 쓰는 꼴이나 다름없사오니 장차 명나라에 대해선 무어라 변명해 올리겠나이까."
  "..............."
  "전-하, 하늘엔 두 해가 있을 수 없사옵니다. 우리가 저들을 임금이라 부른다면 명나라가 또한 어찌 가만있겠나이까. 이는 명나라와의 선린우호(善隣友好)를 우리가 먼저 깨는 일이오니 전하,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김상헌의 외침에 인조의 안색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어찌 김상헌의 주장을 틀렸다 하리요.........  그러나 청태종 홍타시가 대군을 이끌고 남진중에 있는 마당에서야 김상헌의 주장이 현책일 수는 없었다. 이미 도성마저 빼앗긴 인조였다. 그 도성으로 청태종이 입성한다면 사태는 조선이 미처 감당치 못할 방향으로 흘러 갈 것이었고 그때는 그 누구도 신변의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 질 것이었다. 그것이 인조를 전율케 했다.





                                  ㅇ


  남한산성에 입성한지 3일째가 되는 날, 군사들이 아침 식사를 막 끝냈을 무렵이었다. 오랑캐가 나타났다는 급보가 전해지며 산성은 갑자기 불난 집처럼 부산했다. 
  장수들이 지르는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울려나고 활과 창을 찾아 든 병사들이 제 위치를 찾아 긴박하게 뛰달으며 급기야 산성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성을 전투태세로 몰고 갔던 그 오랑캐는 마부대가 보낸 일단의 차사로 확인되면서 전투태세는 곧 경계태세로 전환되었고 마부대의 화친요청에대한 긴급회의가 숭은전에 소집되었다.
  "화친을 논의할 왕자와 대신들을 보내라 하니........  대군들이 모두 강화도에 있질 않소."
  "..............?"
  "굳이 왕자라야 한다면 강화도에 있는 대군들을 불러와야 되지 않겠소?"
  긴 장마 끝에 햇살 같은 반가움이 이는 말이었다. 드디어 인조가 화친을 결정한 것이었다.
  "전하, 산성의 절박한 사정으로는 강화도에 가는 일 조차 여의치 않사오니 마부대에게 다시 한번 사신을 보내 절충안을 찾아보는 것이 어떠하겠나이까."
  그 희망에 부푼 눈들이 최명길을 바라보는데 돌연 큰소리가 났다. 또 그 김상헌이었다.
  "아니되옵니다, 전-하. 조정의 공론이 척화로 정해진지가 이미 오래되었사온데 이제 와서 화친하신다 함은 천부당만부당하신 처사이옵니다. 거두어 주소서, 전-하."
  김상헌의 척화 주장이 이젠 귀의 가시처럼 들리고 있었다. 척화에 동조하던 신료들 조차 그 김상헌을 건성으로 쳐다보는데 엎드린 김상헌이 최명길을 훽! 하고 쳐다보며 소릴 질렀다. 
  "저들이 두번씩이나 도성을 유린하였는데도 그대는 부끄럽지도 않소? 나라의 신하된 자가 마땅히 나가 싸우다 죽을 생각은 아니하고 어찌 화친에만 열을 올리시오. 정녕 하늘이 부끄럽지도 않소이까?"
  노려보는 김상헌의 두 눈에서 불같은 노기가 철철 넘쳐흘렀다.
  "이보시오, 예판! 그만 좀 고정하시오. 이곳이 어디 예판의 독무대요? 상감께서 계시온데 어찌 그리도 언성이 높으시오. 그만 좀 하고 일어나시오. 그만 좀............." 
  인조의 눈치를 살피던 영의정 김류가 발을 동동 굴러가며 김상헌을 나무랐다.
  "이 한목숨 바쳐 이 난국이 수습된다면 내가 먼저 나서오리다. 그러나 죽는 것만을 어찌 충(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을힘을 다하여 전하와 종묘사직을 보필할 수만 있다면 그 또한 신하된 자의 충이 아니겠습니까."
  최명길이 김상헌을 향해 그 동안 참았던 한마디를 했다. 눈물겨운 일이었다. 화친도 종사를 위한 계책이요 척화도 종사를 위한 계책이었다. 
  "전하, 마부대가 차사를 보내 화친을 독촉하는 까닭은 태종 홍타시가 한양 도성에 도착하기 전에 화친을 이끌어 내어 그 공을 독차지하려는 술수가 아니겠나이까.  ........하오니 그 술수를 역이용함이 어떠하겠나이까"
  "역이용..........?"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 소연한 틈을 비집고 좌의정 홍서봉이 조심스럽게 나서자 이번엔 왕방울 같은 눈들이 그 홍서봉을 쳐다보았다.
  "화친을 서둘러 맺으려는 마부대이다 보니 조선 사신의 왕래에는 별다른 의심을 갖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때에 왕자와 대신을 가장하여 사신을 보낸다면 마부대도 믿지 않겠나이까."
  입부터 벌어지던 영의정 김류가 납죽 찬동했다.
  "과연 그러하옵니다, 전-하. 좌의정의 묘안이 참으로 합당 하온데 신의 생각도 바로 그와 같사옵니다. 왕자와 대신을 가장한 사신이 자주 왕래하다 보면 적세도 살필 수 있을 것이오니 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겠나이까. 전 - 하."
  분에 가득한 김상헌의 두 눈이 그 김류와 홍서봉, 최명길을 돌아가며 쏘아보았으나 묘안중의 묘안이라며 이구동성으로 극찬하는 신료들의 찬동에 그 눈빛은 무시되었고 인조의 승인 하에 그 즉시 가짜 왕자와 대신에 대한 인선이 착수되었다.
  그러나 쉬운 일일 수가 없었다. 왕자의 풍모와 품위는 이미 몸에 배어 있어야 했고 대신에겐 남모를 위엄이 그득 넘쳐흘러야 했다.
  장시간의 논의끝에 왕자에게는 그럴듯한 품위를 갖춘 종실의 능봉수(綾峯守)가 뽑혔고 임시 우의정엔 형조판서 심집(沈 )이 뽑혔다.
  형조판서 심집은 누가 보더라도 위엄이 서려 있었다. 외모부터가 차가웠다. 일생 거짓을 모르고 살아온 그였기에 주변에선 그를 대쪽이라 불렀다.
  왕자답게 수려한 외모를 갖춘 능봉수와 꼬장꼬장한 외풍을 지닌 형조판서 심집이 성문을 나설때 좌의정 홍서봉은 심집의 손을 잡고 몇번이고 거듭 당부를 했다.
  "평생을 거짓없이 살아온 형판에겐 죄송한 일이나 종사의 행. 불행이 이번길에 달렸소이다. 부디 한번만 눈 딱 감고 넘어가 주시오.  ........부탁하오이다."
  ".............." 
  "정녕............  대감만 믿사오이다. 형판."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놓는 홍서봉의 얼굴엔 간곡함이 배어 있었다. 가짜 사신의 묘안을 발의한 홍서봉이었기에 그의 당부는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심집은 대답이 없었다. 한평생을 신의로만 살아온 자신이 종사를 위하는 길이라 해도 막힘없는 거짓말이 줄줄 나올지는 그 자신도 장담을 못한 것이었다. 
  그 대답없는 심집을 보내는 좌의정 홍서봉의 가슴 한구석이 웬일인지 불안하여 께름칙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ㅇ


  눈덮힌 산길을 힘겹게 내려온 능봉수와 심집이 적진 한 가운데서 잔뜩 주눅든 모습으로 떨고 있었다.
  "마장군을 뵈러 온 조선의 왕자와 대, 대....신 이외다."
  빤한 눈으로 그 두사람 능봉수와 심집의 위 아래를 훑어보며 묻는 기골이 장대한 청나라 장수 앞에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한 심집이 찾아온 용건을 간단히 말하자 놀란 그 장수가 마부대의 군막을 향해 득달같이 달렸고, 이어 조선의 왕자가 찾아 왔다는 전갈에 만면가득 희색을 띤 마부대가 그 두사람을 맞으러 바람같이 달려 나왔다. 그런데 그 마부대의 모습이 어찌나 위풍당당했는지 놀란 능봉수와 심집이 그 기세에 눌려 또 한번 주눅이 들었다. 
  이미 적진에 들어설 때부터 기가 죽은 두 사람이었다. 무시무시한 창검과 갑주로 중무장한 청병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그 가운데를 통과한다는 일 부터가 사람의 혼을 빼는 일이었는데 추위에 떨던 몸이 더구나 막강한 적의 군세에 놀라다 보니 신분을 가장한 자신들의 처지가 더욱 불안했던 것이다.
  "어느 분이 왕자분이시오이까."
  "내, 내가......  능봉.....군이요."
  카랑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능봉수가 자신을 능봉군이라 자칭하자 마부대가 능봉수 앞으로 나아가 고개 숙여 깍듯이 예를 표했다.
  "추운 날씨에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불안과 긴장에 몸이 굳은 두사람을 자리에 앉히고야 마부대도 자리에 앉았다.
  "조선국의 왕자와 대신을 뵙자고 청한 것은 화친을 의논하기 위함이었소이다. 이미 이조판서 최명길 대감에게 통고한 바도 있거니와 화친만 이루어진다면 우린 당장이라도 철군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즉, 두분께서는 마음을 풀고 허심탄회하게 화친 논의에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치 문관처럼 예를 존중하고 격식을 차리느라 애쓰는 모습의 마부대였으나 그러나 그 태도와 목소리는 딱딱 끊어지는 어쩔 수 없는 장수였다.
  "만일 이 자리에서 화친에 대한 결론이 얻어지지 않는다면 잠시후에 당도하실 황제 폐하께서 친히 화친을 매듭지으실 겝니다. 그때는 어떠한 환란이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니 두분께서는 그 점을 양지하시고 조선이 취해야 할 바를 말씀해 주십시오."
  "이보시오, 마장군. 우리는 다만 귀국이 원하는 화친의 조건만 들으려 온 것뿐이오. 이 자리에서 우리가 결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소이다. 마장군께서는 그 점을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애써 긴장을 풀던 능봉수가 자신의 입장과 조선이 바라는 화친의 조건을 분명하게 말하고 나서자 마부대의 눈꼬리가 치떠졌다.
  "왕자와 대신을 보내라 한 것은 결정을 짓자는 것이지 결정을 유보하자는 것이 아니었소이다. 이조판서 최명길도 그렇고 지난번에 사신으로 왔던 박인범도 그렇고, 어떻게 조선의 사신들은 한결같소이까. 입으로 바른말은 잘하면서 어찌 뒤꽁무니만 빼느냔 말이요."
  마부대가 다소 격앙된 표정을 짓다 말고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안을 향해 소리쳤다.
  "박난영(朴蘭英)과 박노를 이리로 모시고 오라."
  순간 능봉수와 심집의 머리끝이 쭈뼛 했다. 박노와 박난영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어찌 그들이 자신들을 몰라보겠는가.
  "지난번 박노와 박난영이 사신으로 왔으나 그때는 우리가 이미 출병한 뒤였소 .그래서 그들 사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왔는지 아직 듣질 못했습니다. 마침 그 두사람 다 내 진중에 있으니 불러서 그 말을 들어보고 괜찮으시다면 화의에 대한 논의를 같이해 보도록 합시다." 
  "하급 관료와 무슨 논의를 같이 하겠소이까. 그냥 두도록..........!"
  능봉수가 그 두사람의 동석을 막으려고 마부대를 제지했으나 허사였다. 능봉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노와 박난영이 이미 장막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능봉수가 아뿔싸! 하고 탄식하는 빛을 보였으나 심집은 이미 사색이었다.
  장막 안으로 들어서던 박노와 박난영도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박노와 박난영은 사지에서 부모나 만난 것 같은 얼굴로 반색하며 달려왔다.
  "능봉수 어른께서 어찌 이곳엘............."
  순간 마부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고 재빨리 일어난 능봉수가 박난영의 입을 가로막았다.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오라기에 나와 우상인 심집대감이 함께와 화친을 논의 중에 있으니 그대는 딴말을 말라."
  어리둥절한 박난영과 박노가 눈을 꿈벅이며 그 뜻을 몰라 하는데 마부대의 안색이 점차 험악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일국의 왕자가 앉아 있는데 뻣뻣하게 서서 들어오는 것도 의심스러웠지만 박난영의 첫마디가 '왕자저하'가 아닌 '능봉수 어른'이었다.
  "왕자저하가 아니고 어찌 능봉수 어른이요."
  순간 섬뜩한 찬바람이 능봉수와 심집의 가슴을 덮쳤다.
  "왜 대답이 없소!"
  "그, 그건......"
  마부대가 다시 그 두사람의 우물쭈물한 눈빛을 가로채며 소릴 질렀다. 
  "대답을 하란 말이다!"
  이미 석연치 않은 구석을 눈치 챈 마부대가 눈앞에 먹이를 둔 독사의 눈을 하고 그 두사람을 노려보자 그 눈빛에 놀란 심집의 다리가 후들대며 떨고 있었다.
 "이곳은 전장(戰場)이니라! 너희들 목숨이 내손에 달렸음을 아느냐 모르느냐!"
  "마, 마대인.........."
  "내가 진심을 담아 대했거늘 어찌 조선의 사신 따위가 나를 능멸하려 드느냐!" 
  이미 사신으로 대하던 예(禮)는 온데간데 없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마부대가 장검을 집어들며 소리치자 자지러질듯 놀란 심집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마부대 앞에 꿇어 엎드렸다.
  "마, 마대인. 하, 할, 할말이 있소이다."
  장검을 든 채 내려보던 마부대가 엄한 소리를 내었다.
  "무엇이냐, 할 말이란!"
  "마, 마대인의 마, 말씀이 옳습니다. 우, 우린, 왕자도..... 아니고, 대신도 아닙니다."
  순간 경악한 능봉수가 그 심집을 노려보았다.
  "나, 나는 평생 거짓을 모르고 살아온 조, 조선의 형조판서 심........집이외다. 내가 바, 바른말을 하는 것은 내 평생 거짓을 모르고 살아온 내 명예에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함이니........  마대인 께서는 미, 믿어 주시길 바랍니다."
  지켜보던 박난영과 박노의 눈빛이 왔다갔다했다.
  "또한 저분은 종실의 능봉수이지 진짜 왕자는 아닙니다."
  "이보시오, 우상! 이 무슨 해괴한 소리요."
  끝끝내 왕자의 품위를 지켜 내려 무지 애를 쓰던 능봉수의 등줄기로 써느런 전율이 흘렀다.
  "그만 하시지요, 능봉수 어른. 내 이미 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 우상!"
  "글쎄, 그만 하시래도요. 마장군이 솔직한 분인데 내 어찌 이런 분을 속이겠습니까."
  심집은 어느새 태연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보시오, 우상! 지금 제정신으로 말하는 것이요? 대군인 날보고 능봉수라니.......  정신 차리시오, 우 - 상.........!" 
  능봉수가 눈알이 시뻘개지도록 소리를 질렀으나 한번 돌아선 심집은 돌아설 줄 몰랐고 능봉수와 심집이 벌이는 심각한 언쟁을 들으며 박난영과 박노는 사태의 전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미 모든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 무얼 더 우겨 보려는 게냐."
  마부대가 경멸 가득한 눈으로 그 능봉수를 노려보는데 이번엔 뒤에 섰던 박난영이 앞으로 뛰어 나왔다.
  "아니오이다, 마대인. 이분은 왕실의 왕자이시고 종실의 능봉수는 따로 있소이다. 우상이 긴장한 탓으로 잘못 말한 것이니..........  이 앞에서 더 무례한 언동은 삼가해 주시기 바라오이다." 
  "뭐? 무엇이라? 능봉수가 왕자라고...........?"
  "그렇소이다, 마대인."
  순간 마부대가 그 박난영을 집어삼킬 듯 한 눈으로 노려보았고 심집이 코웃음을 쳤다.
  "네이놈! 박 난 영!"
  마부대의 고함이 쩌렁 하고 장막을 울렸다.
  "내 너를 사신으로 공대했거늘 네 감히 날 속이려 드는 게냐?" 
  "어찌 마대인을 속이려 함이겠소이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려는 것뿐이오이다."
  "이놈이 그래도...!"
  ".............?"
  "왕자와 종친을 구분치 못 할 네놈이 아닐 터, 어째서 첫대면에 능봉수 어른이라 했느냐. 대답을 해라!"
  순간 말문이 막힌 박난영을 노려보는 마부대의 눈빛이 써늘했다. 
  "어째 대답을 못해!"
  다시 마부대의 고함이 터졌고 급기야 박난영과 능봉수의 처지는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괘씸한 놈! 지금 이 시간부터 이놈을 포로로 취급할 것이니 이놈을 포로들 우리 속에 가두어라. 물과 음식은 하루에 한끼만을 주되 머리는 깎아 변발 시키고 만일 허튼 수작을 부리거나 반항하거든 나에게 알리지 말고 그 즉시 참형에 처하라."
  "아니, 마대인. 사신을 포로로 취급하다니요. 이건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니오이까."
  박난영을 감싸며 능봉수가 나섰으나 사신으로서의 예는 고사하고 죄인 노려보듯 하던 마부대가 그 능봉수에게마저 소리를 꽥! 질렀다.
  "네놈도 포로들 우리 속에 갇히고 싶은 게냐!"
  "...............!"
  "저 놈을 어서 끌고 나가라."
  마부대를 노려보며 완강하게 저항하던 박난영을 우람한 무사들이 달려들어 병아리 채듯 나꿔 채 나가자 그 뒤를 따라 박노가 또한 끌려나갔고 능봉수와 심집은 겁에질린채 덜덜 떨고만 있었다.
  "능봉수는 들어라. 네 오늘 운이 좋았느니라. 다행이도 조선에 형조판서와 같이 양심 바른 중신이 있었기에 오늘만큼은 살려 돌려보낸다." 
  "..............."
  "이 즉시 돌아가서 네 나라 임금에게 고하라. 만일 진짜 왕자와 대신이 달려와 오늘의 일을 사죄치 않으면 그 댓가는 열곱 스므곱으로 치루리라고 말이다. 알았으면 당장 돌아 가렸다."
  마부대의 군진에서 쫓겨나듯 굴러 나온 두사람이 산성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앞만보고 내닫는 두사람의 등뒤에서 마부대가 금방이라도 다시 부를 것 같은 착각에 자꾸 머리털이 곤두서는 전율을 느끼며 두사람은 허우적대었다.







                                  ㅇ


  "그래서요.........."
  "박난영은 조선인 포로들 속에 갇혀 변발 당한 채 치욕을 겪고 있을 것이옵니다."
  노기를 삭이지 못해 두 눈을 부릅뜬 인조 앞에서 능봉수는 꿇어 엎드린 채 일의 전말을 소상하게 고 하고 있었다. 때론 목이 메인 채 흐느끼고 때론 격정에 몸을 떠는 능봉수와는 달리 얼굴색 하나 변함없이 떳떳하게 앉아 있는 심집을, 인조의 노기 가득한 눈과 신료들의 능멸 가득한 눈들이 그 심집을 향해 독화살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이보시오, 형판! 무에 그리 잘 한일이 있다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소이까!" 
  ".............."
  "그것이 어째 종사를 위한 진실이오이까, 적장을 위한 진실이지. 원- 나라의 중신이란 사람이.........."
  영의정 김류는 임금 앞임에도 불구하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좌상이 거듭거듭 당부를 하질 않았소이까. 이번 길에 종사의 안위가 달려 있다고 말이요. 그런데도, 그런데도 이거이 도대체 뭡니까!"
  거친 숨을 몰아쉬던 김류가 심집을 향해 또 한번 소리를 질렀다.
  "형판의 명예가 종사의 안위보다 더 소중하다 이말이외까!"
  불거진 눈알을 디룩거리며 쏘아붙이는 영의정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고정하시지요, 영상 대감. 이번 일은 발의를 한 제게 책임이 있으니 적진엔 제가 다시 다녀오겠습니다. 가서 이번 일에 대한 사과부터 하고 저들의 의중을 깊이 알아보겠소이다." 
  "좌상! 아, 분명 좌상께서 다녀오시겠다 하셨소?"
  "그렇소이다, 영상 대감. 산성에 아니 계신 왕자를 굳이 고집하는 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 점도 알아보구요."
  "그럼 그렇게 하십시다."
  좌의정 홍서봉이 적진에 다녀올 소임을 스스로 자청하고 나서자 좀처럼 분기가 가라앉을 것 같지 않던 영의정 김류가 디룩거리던 눈알을 게눈 감추듯 감추고 당장 인선에 착수했다.
  "부사엔 누가 적임이라 보시오이까."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과 함께 다녀오겠소이다."
  "호판이요.......?  오! 그렇지요. 호판이라면 이번 소임에 적임일 것이외다."
  사행 길에서 자신이 빠진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기는 김류가 인조를 향해 바쁘게 엎드렸다.
  "전하, 정사엔 좌의정 홍서봉, 부사엔 호조판서 김신국으로 정해 이번....."
  "그렇게 하시오."
  퉁명스런 인조의 대답이 혼자 충성을 다하듯 하는 김류의 진언(進言)을 가로막았다.

  다음날 오전, 뼛속까지 스며드는 찬바람을 맞으며 마부대의 진영으로 들  어서던 좌의정 홍서봉, 호조판서 김신국도 오색 찬란한 깃발을 휘날리며 일사분란하게 내닫는 수백, 수천의 날랜 기병들의 공포스런 모습에 놀라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추리며 몸을 떨었다.
  "좌상 대감이 아니오이까."
  사신으로 내왕하던 마부대가 어느 틈에 홍서봉의 얼굴까지 기억하고 있었는지 마부대가 먼저 아는 체 하지 않았다면 홍서봉과 김신국의 뻣뻣하게 굳었던 긴장은 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분은 호조판서 김신국 대감입니다." 
  홍서봉은 자신을 먼저 알아보는 마부대에게 김신국을 소개했다.
  "본듯한 얼굴이오만 왕자는 어째 아니 보이오?"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은 모두 다 강화도에 계시오이다. 마대인 께서도 아시다 시피 강화길은 막혀서 우리로선 갈 수 없었소이다. 뿐만 아니라 설령 장군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 하더라도 두 분 대군 마마를 모시고 오는데는 며칠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는지라 만부득이 종실의 능봉수를 군(君)으로 봉하여 사신으로 보냈던 것이니 부디 너그러이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럼 왕자는 못 온단 말이요?"
  두 눈을 부릅뜬 마부대가 홍서봉의 사과는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오직 왕자만을 찾았다.
  "방금 말씀드렸다 시피 두 분 대군께서는 강화도에 계시고 또한 강화길은 끊겼소이다. 예서 강화까지는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먼길......!"
  "누가 대군을 말했소? 왕자를 말했지! 다음 대의 임금이 될 왕자 말이요, 왕자!"
  순간 경악한 홍서봉과 김신국의 등골로 오싹하는 전율이 흘렀다. 마부대의 말 대로라면 왕자는 소현세자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조선이 왕자들을 세자(世子)와 대군(大君)으로 구분하는데서 오는 작은 오해였을 것이다.
  사색이 된 홍서봉과 김신국이 말을 못하고 떨기만 하는데 두 눈을 부라리던 마부대가 오히려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이거 아무래도 안되겠소. 조선 조정을 믿고 있다가는 내가 큰 낭패를 당하겠소. 이렇게 어물쩍거리다 황제폐하께서 당도하시기라도 하는 날이면 내가 그 책임을 어찌 다 감당하겠소."
  마부대가 갑자기 초조한 기색을 띠며 안절부절못하자 홍서봉과 김신국의 마음도 덩달아 불안하고 초조했다.
  "더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소. 조선의 왕자를 빨리 보내시오. 왕자가 직접 정승들을 대동하고 이리로 온다면 그때 다시 화친을 논의하겠소. 그리 알고 돌아들가시오."
  단지 그 말만을 남기고 마부대는 장막 안으로 휑하니 사라졌다.

  "영상대감, 대체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아, 글쎄........  그게.......  난들 어쩌겠소. 세자저하께서 나서 주신다면 또 모를까."
  울상이 되어 버린 좌의정 홍서봉에 비해 영의정 김류는 코딱지까지 후벼파는 여유로움을 보였다.
  "이번 사행길은 저희가 다녀왔으니 다음번 사행길은 영상대감께서 다녀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뭐라!"
  놀란 김류가 그 김신국을 돌아보다가 갑자기 비명을 터트렸다.
  "앗 따따따.......  하이-고 따가워라."
  김류의 손톱 끝엔 굵은 코털 몇 개가 엉긴 채 박혀 있는 커다란 코딱지가 묻어 있었다.
  "에휴- 눈물이 다 찔끔 나네 그랴."
  멀 건히 코딱지를 들여다보던 김류가 그 코딱지를 빈청(賓廳)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퉁겨 버리고는 곧 김신국을 노려보았다.
  "아, 그런데 호판, 지금 뭐라 했소. 다음번 사행길엔 나더러 가라........  이 말이요?"
  콧구멍이 따가운지 김류는 연신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영상대감 말고 이 조정에 누가 더 있습니까. 당연히 가셔야지요."
  "아, 뭐. 뭐. 뭐. 뭐라, 당연......... 하다고요? 아, 그럼 전하는 누가 모시고요."
  "내관들이 있질 않습니까. 어영대장도 있고.........."
  호조판서 김신국이 눈을 흘기며 돌아앉자 김류는 당황했다.
  "내, 내가 가면 이 의, 의정부는 어떡하고요?"
  "우상과 좌상대감이 있지 않습니까."
  "어허! 그만들 두세요. 지금 어린애들 장난하듯 할 때입니까."
  보다 못한 좌의정 홍서봉이 그 두 사람을 뜯어말리자 눈을 뚱그린 영의정 김류가 손가락으로 김신국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저 사람이 나더러 다음번 사행길에 사지(死地)엘 다녀오라 하질 않소. 좌상도 듣지 않았소. 지금," 하고 홍서봉을 바라보았다.
  "방법이 없다 보니 한번 해본 소리지 그게 어디 그렇게 하란 소립니까? 영상께서 가시면 조정과 이 산성은 어떡하라구요."
  "헤-에......  그렇지요? 그렇지요? 내가 가면 이 나라 조정과 남한산성이 텅 비지요. 그렇지요?"
  그제서야 김류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아, 그런데 말이요. 그게 듣고 보니 그렇습디다. 이 나라 왕자를 보내라........ 하면 두 분중 한 분을 골라 보내면 될 일이지만 세자를 보내라....... 하면 골라 보낼 세자가 없질 않소이까. 아다시피......."
  김신국의 눈이 다시 씽그래 지자 김류가 헛기침을 했다.
  "에헴, 좋소이다, 좋아요. 세자저하를 보내라........고 한 저들이 심한 건 사실이외다. 허나, 그렇다고 아니 보낼 수야 또 없질 않소이까. 그러니깐...... 그게....... 에헴,  .........참 딱하다......이 말씀예요, 내 말은."
  "그러니까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 아닙니까."
  "세자저하께서 화친에 응했다가 인질로 잡히는 날엔 그땐 화친이고 뭐고 다 집어치고 이 나라 조선이 항서를 써야 된다 생각하니.........  에헴, 그 참.........  아, 딱해요, 딱해.........."
  달리 묘안이 있을 리 없는 김류가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고 눈알을 굴려 그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영상대감, 이 일을 공론에 부쳐 봄이 어떻겠소이까."
  홍서봉의 말에 김신국이 토를 달았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가만 있겠습니까?"
  "아, 그자는 안돼요. 그자가 이 회의장에 들어서면 공론이고 뭐고 다 깨지는 겝니다. 그 점을 명심하시구랴."
  영의정 김류가 김상헌의 입회를 손을 내 저으며 반대하자 회의는 자연 비밀 아닌 비밀리에 진행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영의정 김류의 주도하에 좌의정 홍서봉, 이조판서 최명길과 김신국, 이성구, 한여직(韓汝稷), 장유(張維), 윤휘(尹暉),홍방 등이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잔뜩 위엄을 갖춘 영의정겸 체찰사 김류가 지휘봉을 앞에 들고 회의를 이끌어 갔다.
  "이야기는 간단 하오이다. 저들의 요구에 순응하느냐, 아니면 불응하느냐."
  "............."
  "순응하여 종사를 보전시키느냐 아니면........  에헴, 에.......  그렇소이다.  여러분께서도 다 아다시피 저들은 조선이 세자저하와 대신을 보내 화친을 청할 때만 이에 응하겠다 했답니다." 
  ".............."
  "이는 우리 조선을 얕잡아 본 천인공노할 망언임에 틀림없소이다 마는,"
  지휘봉을 힘주어 잡은 김류가 중신들을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우린.......힘이 없소이다." 
  그렇게 말하는 김류의 어조엔 비장감이 내비쳤다.
  "위중지경에 처한 종사의 안위를 생각할 때 적장 마부대의 요구를 마냥 모른 척 할 수만도 없는 일이니 이 점을 유념하여 의견들을 세워 주시기 바라오이다. 에헴."
  김류가 지휘봉을 땅! 소리가 나도록 놓고 제자리에 앉자 의견이고 뭐고 가 없었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없는 회의는 만장일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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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뭐라 했소, 영상!"
  놀라 화등잔만한 눈을 치뜬 인조가 떨고 있었다.
  사색이 되어 돌아온 좌의정과 호조판서가 털어놓은 말, 즉 마부대가 말한 왕자는 대군이 아니라 세자였다는 믿지 못할 사실이 밝혀지며 숭은전은 한때 찬물을 끼얹은 듯 바싹 얼어붙었었고 마부대 또한 화친에 대한 책임으로 불안에 떨고 있더라는 홍서봉의 말에 인조는 어서어서 대책을 찾아보라 일렀었다. 그리고 곧바로 빈청에서 영의정 주도하에 회의를 열고 있다는 소식을 내관을 통해 들은 것이 저녁 무렵.........  그런데, 그런데.......  회의 결과는 너무도 뜻밖이었다.
  "전 - 하, 이는 모든 신료들의 한결같은 뜻이옵고 또한 종사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옵니다."
  "세자를.......  세자를 적진으로 보내는 길 외에 정녕 다른 방도는 없다, 이 뜻이요.......?"
  "송구하옵니다, 전 하."
  순간 숭은전은 인조가 토해 내는 고뇌에 찬 신음 소리에 천길 낭떠러지 같은 깊은 나락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전 - 하, 종사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려 있사온지라 달리 다른 방도는 찾지 못하였사옵고 또한 저들의 요구를 끝끝내 물리치기도 어려운지라..........."
  허리를 나직하게 굽힌 김류가 '마지못해 중론에 따랐나이다. 종사를 어지럽힌 죄 백번천번 죽어 마땅하오니 신을 죽여주소서' 하고 틀에 박힌 말로 인조를 위로하려는 찰나 세자가 나섰다.
  "아바마마, 소자가 다녀오겠나이다. 윤허하여 주소서."
  "세자가...........?"
  한숨 속에 묻혀있던 인조가 눈을 돌려 그 세자를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소자가 가서 저들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소상히 알아보고 오겠사옵니다."
  한치의 흔들림도 없어 보이는 세자였다. 종사를 구하고 아버지를 구하는 길이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역력히 배어나는 세자의 야무진 모습에 숭은전의 무거운 분위기가 뜻밖으로 풀어지는 듯이 보였다.
  "조정 중신들의 뜻이 그러하고 세자의 뜻이 또한 그러하다면 의당 그러해야겠지. 허나.........."
  인조의 한숨섞인 목소리 끝에 한없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짙게 묻어 나는 그때였다. 숭은전의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린것이었다.
  놀란 김류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중신들의 고개가 일제히 뛰어드는 김상헌에게로 쏠렸다.
  "전하! 신의 불충을 용서하여 주소서."
  인조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고 난 김상헌이 중신들을 향해 돌아앉자 마자 숭은전이 떠나가라 악을 썼다.
  "나라의 녹을 먹는 너희가 어찌 이리도 무도할 수 있느냐. 세자저하를 사지에 몰아넣고 그 덕으로 너희는 살아 남겠다 그 뜻 아니더냐. 진정 너희가 세자저하를 인질로 삼아 적진에 보내고자 한다면 나는 내손으로 너희들의 목부터 벨 것이니라. 내 어찌 금수만도 못한 너희들과 한 하늘아래 살수 있겠느냐. 종사가 위태로움에 처해 있으면 마땅히 나가 싸워야 하는것이 신료된 도리거늘, 어찌 세자저하를 인질로 보내면서 하찮은 너희들의 목숨은 부지하려 드느냐. 나를 따돌리고 얻은 결론을 중신들의 뜻이라 매도한 너희들이 역사의 이름앞에 떳떳할줄 알았더냐."
  딱 벌어진 입을 다물줄 모르는 김류와 홍서봉, 김신국및 그외의 신료들이 놀라 황당한 눈으로 그 김상헌을 쏘아 보고만 있었다. 자신들의 주장이 그른 것만은 아니었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김상헌을 상대로 맞상대를 한다면 외적을 앞에두고 내분만 가져올 뿐이었다.
  강한 외적을 눈앞에 두고 내분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자멸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그 자멸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  그것은 침묵이었다. 
  중신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또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의창군(義昌君) 광(珖)과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숭은전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의창군 광은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 소생으로 선조의 여덟번째 왕자였고 신익성은 전 영의정 신흠의 아들로 선조의 딸 정숙옹주의 남편이자 선조의 사위였다. 두 사람 다 왕실과 무관할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흰자위가 빨개지도록 눈 부릅뜬 의창군 광이 고래고래 악부터 썼다.
  "누구요! 누가 감히 세자저하를 적진에 보내자 했소!! 누가 감히 이나라 왕실을 욕보이고자 했소!!!"
  분하고 억울해서 못살겠다는 듯 의창군 광은 발을 동동 굴렀다. 
  "나오시오! 세자저하를 적진에 보내고자 발설한 자는 냉큼 앞으로 나오시오!! 내가 그자의 목부터 치겠소. 그리고 나도 세자저하의 발앞에 엎드려 죽으리다. 어느놈이요!! 어느놈인지 당장 나오란 말이요!!!"
  고래고래 악을 쓰던 의창군 광이 가쁜숨을 가다듬는 사이 이번에는 신익성이 격앙된 목소리로 인조앞에 엎드렸다.
  "전하, 우리조선이 척화로 공론을 모은지 이미 오래 되었고 오랑캐와는 국교를 단절한 지도 이미 오래 되었사옵니다. 그런데 임금의 신하된 자들이 시세에 따라 흔들리며 사사로운 이득에 눈이 어두워 화친을 서슴없이 주장하더니 마침내 세자저하를 적진에 인질로 보내자는 간악한 무리들까지 생겨났나이다. 이는 종묘사직과 왕실을 업수이 여기고 능멸한 처사가 아니겠나이까. 신하된 자가 왕실을 능멸한다면 이는 죽어 마땅하나이다. 지금 이자들을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효수 하시고 다시 한번 척화의 결기를 다지시어 이백오십여년 이어온 종묘사직의 틀을 공고히 하시오소서!"
  김상헌에 이은 의창군과 신익성의 일진 광풍과도 같은 무서운 일갈이 피바람 몰아치듯 숭은전을 덮치자 숭은전은 한동안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속에 갇혀 미동조차 없었다. 
  밖엔 밤바람이 스산하게 스쳐가고 있었다. 
  고개숙인 중신들은 아무말이 없고 용상에 몸을 기댄 인조는 괴로움을 이겨 내려는 듯 손으로 이마를 꾹 눌러 짚고 있었다. 그 손아래, 인조의 번민과 고뇌가 폭포처럼 흐르는 미간엔 내천(川)자로 깊게 패인 겹주름이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아바마마, 소자가 다녀오겠나이다. 소자가 직접 적장을 만나 그 속마음을 알아보겠나이다. 윤허하여 주소서."
  적막속에 갇힌 채 미동조차 없던 고요를 소현세자가 깨고 나섰다.
  "아바마마, 우리 조선이 척화를 주장해 오는 동안 저들은 오랫동안 화친을 요구해 왔나이다. 그 요구속엔 분명한 까닭이 있을 것이옵니다. 소자는 그것을 밝혀 돌아오겠나이다. 윤허하여 주시오소서."
  소현세자가 재차 주청하고 나서자 눈썹이 꿈틀하던 김상헌과 의창군 광, 동양위 신익성이 거의 동시에 세자 앞으로 달려나가 그 앞에 엎드렸다.
  "아니되옵니다, 세자저하. 저하께서 가시는 날엔 이 나라 조선의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집니다. 가셔서는 아니되옵니다. 세자저하..........."
  "그러하옵니다, 세자저하. 저하께서는 다음 대의 보위를 이어 가실 지중하신 몸이옵니다. 부디 그 청을 거두어 주소서. 세자저하........."
  김상헌과 의창군이 소현세자의 옷자락을 잡고 울며 만류하는 사이 신익성은 무릎으로 기어 나가 인조앞에 부복하고 울며 애원했다.
  "전하, 세자저하를 금수만도 못한 오랑캐의 소굴로 보내실 수는 없사옵니다. 말려 주소서, 전 - 하........."
  "............"
  "저들이 처음에는 왕자를 청하다가 이제 와서 세자저하를 보내라 하는 것은 계략이 있어서이옵니다. 저들의 계략에 말려들어서는 아니되옵니다, 전 - 하.........."
  신익성이 머리를 짓찧으며 피눈물로 호소하자 김상헌과 의창군이 다시 달려나가 가세했다.
  "전하, 신 예조판서 김상헌을 먼저 죽여주소서. 세자저하를 저들 오랑캐의 진중으로 보내고자 한 불충을 사전에 미리 막지 못한 죄만으로도 신은 죽어 마땅하나이다. 더구나 군신의 예를 강요하고 칸을 높여 황제라 부르라 한 저들의 오만불손한 작태에 이미 수치를 당한 터이온데 하물며 세자저하를 그 오랑캐의 진중으로 납시게 하다니요, 그런 치욕을 어찌 산 눈으로 차마 볼 수 있겠나이까.........  전-하, 신을 먼저 죽여주소서."
  김상헌이 진짜 죽기로 작정한 듯 마루바닥에 머리를 세차게 들이받자 경악한 중신들이 놀란 눈을 치켜뜨고 덜덜덜 떨기 시작했다. 사태는 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경황없이 사태를 지켜보던 김류가 어느덧 사태의 분위기를 간파해 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김상헌의 만류가 대세를 이끌어 가고 있다 여긴 때문이었다. 
  그 대세에 편승하기 위해 눈알을 굴리던 김류가 마루바닥에 머리를 들이받고 있는 김상헌을 애절한 눈으로 만류해 일으키며 눈물을 흘렸다. 눈물뿐이 아니었다. 섧디 섧은 흐느낌까지 토해 내었다.
  영문을 모르는 김상헌과 의창군, 신익성 등이 그 김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김류가 
  "전-하........  신 영의정겸 체찰사 김류의 불충을 대죄로..... 다스려..... 주....소서........" 하고 어깨까지 출렁이며 큰소리로 우는 것이었다.
  "실로 중신들의 결의는 신이 불충하고....... 용렬..... 했던 탓이옵니다. 전-하........ "
  "...............?"
  "신이 신료들의 수상자리에 있으면서 오늘날 같은 환란을 미처 방지하지 못한 죄.......... 백번 죽어 마땅......하나이다."
  김류가 굵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책망하자 고개 숙인 중신들이 하나같이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하오나 전-하, 이번 세자저하의 사행(使行) 논의는 신이 먼저 말렸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신들의 결의가 워낙 완고한지라 신으로서도 어찌 손써 볼 겨를이 없었나이다."
  "...............?"
  "전-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사오니 중신들의 결의를 철회하여 주시고 세자저하를 말려 주시오소서. 전 - 하..........." 하며 모든 책임을 중신들에게 뒤집어씌우고 그 자신은 대세가 기우는 쪽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는 것이었다.
  영의정의 주도하에 회의를 진행했던 중신들이 또한번 놀라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류가 바닥에 엎드린 채로 울음을 멈추지 않자 당혹감과 배신감에 몸을 떠는 중신들에 비해 김상헌, 의창군, 신익성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위기의 순간에 영의정의 출현은 천군만마보다 더한 구원군이었다. 
  영의정 곁으로 달려온 세 사람은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 동시에 엎어지며 간청했다.
  "전-하, 영의정의 주청을 가납하여 주시오소서."
  영의정이 가세하자 숭은전은 기를 쓰고 죽으리라 몸부림치던 세 사람의 절망적인 분위기에서 이제는 완연한 승자의 분위기로 뒤바뀌고 있었다. 전세가 역전 된 것이었다. 
  끝모르게 이어지던 인조의 절망 섞인 긴 한숨도 어느덧 안도의 한숨으로 돌아오고 결기 돋구어 나섰던 세자도 한발 뒤로 물러섰다. 모든 것이 없었던 일로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이 모두가 종사를 위한 충절임을 과인이 어찌 모르겠소. 영상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고맙소."
  임금도 자식 앞에서는 약할 수밖에 없는 부모였다.
  "전-하, 전하의 성의를 어지럽힌 신에게 대죄를 내려 주시옵소서. 전 - 하........"
  "당치 않아요, 그것이 어디 영상의 죄요?  ............아무말 말고 돌아들 가서 쉬도록 하세요, 밤이 깊었어요."
  인조가 용상에서 일어나 세자의 부축을 받으며 숭은전을 나서자 영의정과 세 사람이 벌떡 일어나 중신들을 쓱 하고 흩어 본 후에 인조의 뒤를 따라 나섰다.
  숭은전엔 영의정 김류의 뜻에 따라 움직였던 중신들만이 남아 어둠에 찬 밤공기에 젖어 가고 있었다.




























                   3. 남한산성(南漢山城)





  섣달 중순(12월18일)의 날씨 치고는 겨울답지 않은 푸근한 날씨였다.
  인조는 지난밤의 그 움추렸던 마음을 털어 버리고 새 출발을 다짐할 겸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백관들과 함께 성을 순시하고 있었다. 그 인조의 눈에 햇볕에 녹아내린 눈을 치우느라 가래질하며 법석을 떠는 병사들의 모습이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활기차 보였다.
  동문 망월대에 오른 인조는 중신과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종묘사직을 끝까지 싸워 지켜 내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과인의 부덕으로 죄없는 신민(臣民)이 고초를 겪고 있음이니, 이제부터 과인도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에 임할 것이요."
  그 말속에는 지난밤 왕실이 격어야 했던 그 참담함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었다.
  "화친과 척화의 양갈래 길에서 과인은 많은 번민을 하였소. 그러나 이젠 화친하는 길도 끊겼으니 오직 싸워서 지켜내는 길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인조의 눈빛은 어느때 보다 강렬했고 갑자기 장수들의 눈빛도 결연(決然)했다. 임금이 몸소 싸움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앞에서 장수들의 결심이 굳은 것이었다.
  "남한산성이 외로운 성이기는 하나 이제 밖으로부터 구원군이 당도하는 날이면 어찌 외로운 산성이라고만 하겠소. 과인은 종묘사직과 나라의 안위를 지켜낼 구원군이 오리라 반드시 믿고 있으니 문무백관들은 맡은바 소임에 그 역량을 십분 발휘해 주길 바라오."
  구원군이 오리라 굳게 믿는 인조가 사대문의 장수와 병사들을 하나하나 불러 굳이 일일이 어주(御酒)를 내리며 어깨를 다독이자 산성엔 일시나마 사기가 충천했고 아울러 인조는 각도의 감사(관찰사)와 도원수 김자점, 부원수 신경원에게 유시문을 보냈다.
  『과인은 바야흐로 외로운 산성 가운데 있으니 안으로는 믿을 만한 형세가 없고 밖으로는 응원마저 없어 국가의 존망이 경각에 달렸도다. 이에 경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급급히 달려와 종사의 위급함을 구원토록 하라.』
  그러나 이때의 김자점은 산속에 숨어 목숨부지에 여념이 없었다.

  인조가 결사항전의 의지를 선포하고 나선 직후 제일먼저 북문 수비대장 원두표가 군병을 이끌고 나가 징과 꽹과리를 두드리고 호적을 요란하게 불어대는 청병 여섯명을 쳐죽이고 수급을 베어오는 전과(戰果)를 올렸다.
  어영대장 원두표는 북문 수비대장 이서가 병으로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하자 후임으로 북문을 맡았는데 그 맡은 첫날에 적군의 수급을 베어오는 전과를 올린 것이었다.
  이에 감격한 인조가 원두표를 따라 같이 참전했던 병사들을 불러 또한번 어주를 내리고 그 공을 일일이 치하하며 그 각각에는 은 30냥과 2단계 특진의 영예까지 안겨주자 산성의 조선병사들은 싸움의 기회가 자신들에게도 주어지기를 눈빠지게 기다리는 상황으로 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청나라 진영에서는 그날 안으로 청병을 총도원, 산성을 두겹,세겹으로 겹겹이 에워싸며 민가를 불지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방화로 보이는 시뻘건 불기둥들이 하늘높이 치솟고 있었는데 이는 분명 그 여섯명 주검에 대한 분풀이였다.
  "비겁한 놈들!"
  "우리하고나 싸울 일이지 죄없는 민가는 왜 불을지르고 지랄들이야. 개같은 새끼들이........."
  "씨벌놈들! 이리로 오기만 왔담봐라. 이 쇠도리깨로 대갈통부터 박살내고 말테니까."
  산성의 조선 병사들이 이를 갈며 분통을 터트리는 동안에도 방화는 계속 되었다. 
  "아니, 저건 또 뭐야. 도성안에서도 불길이 치솟고 있잖아!"
  "아이구, 씨부럴놈들. 저 쌍놈들이 조선팔도를 모조리 불싸질러 버릴 모양일세."
  놀란것도 잠시, 이어 그 얼굴들이 파래지며 비명같은 한숨을 내질렀다.
  "아이고, 내집............아이구 가심이야.........  "
  늙수구레한 병사가 가슴을 주먹으로 치다가 그대로 주저 앉았다.
  "서울이 불바다니 우리집도 타버렸겠지." 
  하고 안타까운 소리를 지르던 그 병사가 갑자기 고개를 푹 꺽었다. 
  "아이구-우 하느님. 이제 우린 어찌 살라고요......."
  "그 집을 어찌 장만한 건데.........  그리고 우리 소는, 우리 황소는?"
  그제야 생각났는지 핏발선 눈을 다시들던 그 병사가 그 불길을 바라보며 정신없이 소릴 지르기 시작했다.
  "내집! 우리 소! 우리 누렁이.......  누렁아! 누 렁......아..........."
  막 뛰어 내려 갈듯 안타까이 지르던 소리끝에 결국 우는 소리가 났다.
  "어흐흐흐........  내가 어떻게 기른 황손데.......  누 렁.....아.........  우리 소야........"
  비단 그 병사 뿐이 아니었다. 정든 집, 정든 가족과 뿔뿔이 흩어져 졸지에 피난민이 된 조정의 문.무백관들도 입장은 마찬가지 였다.
  남한산성에서 송파에 이르는 직선거리의 모든 민가가 잿더미로 변하고 수도 장안에도 불을 놓아 그 불길이 장장 9일간이나 계속된 엄청난 규모의 방화속에 자신의 집만이 무사하길 바란다는 것은 차라리 엄동설한에 딸기 한송이 얻길 바라는 애처로운 소망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어휴우, 하늘도 무심하시지."
  "우쩌자고 이런일이 십년이 멀다하고 일어나는가 말이여, 내말은 시방."
  수도 서울에 난입한 청나라 병사들이 질러대는 불길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산성의 문.무백관들과 피난민들의 넋잃은 얼굴위로 핏물같은 눈물이 자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문.무 백관들과 피난민들이 눈물과 한숨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워 어느덧 아침해가 막 떠오를 무렵이었다. 
  느닷없이 진동하는 북소리, 징소리, 꽹과리소리에 설핏 들었던 잠마저 숭당구레 달아나 버리고 놀란 조선군이 동서남북 사주경계를 위해 콩튀듯 뛰달으며 산성은 또 한차례 전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남문 앞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남문 수비대장 구굉이 남문 성루위에 급히 올라 내려보니 백여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청나라 군사들이 떼로 몰려와 징을 두드리고 호적을 불며 시끌벅쩍하게 소란을 떨고 있었다.
  그 떼거지로 몰려들어 요란을 떠는 적군들을 내려보며 구굉은 생각에 잠겼다. 박자도 없이 두들겨만 대는 북소리, 징소리, 꽹과리의 시끄러운 소리에 산성이 더욱 어수선 스럽기는 했으나 이는 분명 그 여섯명이 당한 기습에 분풀이를 하려는 저들의 술책일 것이었다. 밤새도록 민가를 불태워 조선군의 마음을 산란하게 흔들어 놓고 아침도 먹기전에 호들갑을 떠는것은 겹겹이 에워싼 저들의 우세한 숫자를 앞세워 조선군의 사기를 떨구자는 계략일시 분명했다. 그 계략을 간파한 남문대장 구굉이 차분하게 작전을 세워 일전을 준비했다.
  단 여섯명의 수급일지나 조선군은 그 작은 승리로 마음들이 고무되어 있었다. 임금이 손수내린 은전과 두계급 특진이라는 영예까지 보장되고 보니 조선군은 서로먼저 출전하여 공을 세워 보리라는 마을들이 팽배해 있었고, 더구나 밤새 솟아오르는 불길로 조선군의 마음속엔 독한 보복심이 잠재해 있었다. 이런 마음들은 싸움의 훌륭한 원동력이 될 것이었고 구굉은 그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남문 수비대원들을 불러모은 구굉은 병사들을 일일이 점고한뒤에 1. 2. 3대로 진영을 나누었다.
  "저것은 우리조선군의 사기를 떨어 뜨리려는 술책임이 분명하다. 저들을 일시에 섬멸하려면 번개같은 기습만이 최선의 방책일 것이니라. 제군들은 나의 뜻을 알겠는가?"
  번쩍이는 갑주로 무장한 남문대장 구굉이 장검을 뽑아들고 힘주어 소리치자 눈에 바짝 독이 오른 조선병사들은 남문성루가 들썩하도록 힘찬 대답을 했다.
  이미 군사들의 마음속엔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는 사기가 충천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아차린 구굉 또한 큰소리로 영을 내렸다.
  "제1대에 속한 궁수들은 성곽으로 올라가 정조준을 하고 있으라! 화살 한대에 적병이 한놈씩이니라!"
  "제2대에 속한 돌격대는 말에 올라 문뒤에 바짝 숨어 있으라. 궁수들이 활을 쏘고 나면 달려나가서 보이는대로 베어라."
  "제3대에 속한 보군(보병)들은 적의 수급을 베어 돌아온다, 다들 자신 있는가!"
  구굉이 또한번 소리치자 나문성루의 대들보가 들쩍했다.
  "각자 위치로돌아가 신호를 기다리라!"
  구굉의 명에 따라 바람같이 내닫는 조선군사들에겐 이미 승리가 눈앞에 보였다. 제 위치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마음과 전신에 죄어오는 긴장감은 그 도를 넘어 가벼운 흥분까지 일게 했다.
  "쌍놈들, 어디 맛좀 봐라."
  이미 궁수들의 눈에 목표물이 정확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 살을 메긴 궁수들은 대장의 신호가 떨어지기 만을 마른침이 넘어가도록 기다리고 있었고 문뒤에 도열한 채 숨죽인 기병들은 긴창과 칼을 빼어들고 적군의 움직임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화살에 꿰인 적병들이 징과 호적을 냅다 던지며 혼비백산 하기만을 눈이 빠져라 문틈으로 내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구굉의 차분한 공격준비가 끝날때까지 청병들은 징과 호적을 불며 소란에 요란까지 떨고 있었다. 쑤왈라 거리는 소리는 듣기에도 역겹다 생각 하는데 순간 문틈을 내다보던 돌격대장의 목이 갑자기 쭈뼛했다. 분명 자신의 눈앞에 꼬꾸라지는 적병이 보였던 것이다. 징과 꽹과리를 내 던진 채 살길을 찾아 좌우로 달음박질 치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자   짜릿한 전율을 느낀 돌격대장은 저도모르게 소리쳤다.
  "돌격하라!"
  그와 동시에 하늘을 찌르는 함성이 천지에 진동하며 백여명의 돌격대가 짓쳐 나갔다. 
  화살에 꿰인 채 허둥대는 적군을 베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무뒤로 숨는 놈까지 달려가 단숨에 베어버린 전투는 조선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그 뒤를 보병이 뛰어나가 적병의 수급을 취하려는데 적의 복병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그 수급을 미처 다 취하지는 못했으나 백여명 적을 사살한 조선군사의 피해는 부상자 하나없는 깨끗한 완승이었다.
  이날 취한 적군의 수급은 20여두, 사살은 100여구, 미처 가져오지못한 적의 수급은 적병들이 끌고 갔다.
  이 승리로 산성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곧이어 두팔을 벌려 달려온 환한 모습의 인조가 구굉과 군사들의 대공(大功)을 입이 마르도록 치하 한뒤 그 군사들의 어깨를 일일이 쓰다듬으며 손수 어주를 따라 주자 임금의 성은에 감격한 군사들이 그 영예에 몸을 떨었다
  그 싸움 이후, 마부대가 보낸 차사가 역관(譯官) 정명수(鄭命壽)를 대동하고 하얀 백기를 든채 어제의 결전장이었던 남문앞에 다시 나타났다. 화친을 청하러 온것이었다.
  소식을 접한 김류는 결연한 얼굴로 소리부터 질렀다.
  "이는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충천해 있기에 저들이 놀라 화친을 청해온 것이니 굳이 응할 까닭이 없질 않소. 이제야 말로 조선의 기개를 보일때가 온것인즉, 그것들을 당장 물러가라 이르시오!"
  김류가 소리치며 김상헌을 돌아보자 소매속에 팔을찔러넣은 예조판서 김상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당연하다는 낯빛이었다. 이에 호조판서 김신국이 남문 성루로 달려나가 청나라 차사를 소리쳐 쫓아보냈다.
  "아름다운 우리조선이 어찌 금수와 다를바 없는 오랑캐들과 화친을 논의하겠는가. 우리는 결단코 싸워서 물리칠 것이니 차사는 지금당장 돌아가렸다!"
  말을 마친 김신국은 청나라 차사와 역관 정명수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그들이 미처 다른 답변을 하기도 전에 성루에서 사라졌다.
  그 청나라 차사가 역관 정명수를 대동한 채 반나절을 내리 기다리다 제풀에 지쳐 돌아간 그날, 인조는 성을 순시하던중 사대부의 이름있는 선비들과 당상관(정3품이상의 고급관료) 이상의 관원들이 얼굴이 퉁퉁부어 눈이 감긴채 성벽에서 기어내려 오는것을 보고 체찰사 김류를 향해 물었다.
  "어찌된 일이오?"
  "지금 성내엔 군사의 수가 부족하여 모든 관원과 사대부의 선비들도 일반 군사들과 똑같이 야간파수를 보고있사온지라 추위에 손발이 얼고 얼굴에 동상이 걸려 저리 되었사옵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기어내려오는 선비들을 향해 성큼 걸음을 옮긴 인조가 그 선비와 관원의 손을 잡아 부축해 일으켰다. 눈물겨운 참상이었다.
  손발은 물론 얼굴마저 얼어터져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몸으로 임금의 부축까지 받자 황망해 몸둘바를 몰라 하는 선비와 관원을 바라보는 인조의 목이 메어졌다.
  인조는 성벽에서 내려오던 그외의 관원들과 선비들을 모두 불러 세워 간곡한 어조로 그 노고를 치하한 뒤 그 자리에서 김류에게 명했다.
  "앞으로 관원과 선비들은 낮에만 성루에 올라 맡은 소임을 다하게 하고 밤에는 휴식을 취하게 하도록 하오. 다만 급박한 일이 있을때는 노소를 불문하고 동참해야 할 일이나 늙고 병든 이들은 감당치 못할 것이니 같이 다 휴식할 수 있도록 체찰사가 힘써 주오."
  인조의 간곡한 당부와 하명을 전해들은 백관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인조의 성은에 감복하여 눈물을 흘렸다.
  호조판서 김신국이 포상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군공청(軍功廳) 설치를 건의하자 인조는 이를 받아들여 이조참의 이경여와 병조참의 정기광(鄭基廣)에게 그 일을 전담케 했다. 군공청은 임진왜란시 나라에 세운 공을 공적에 따라 공정하게 포상하던 임시기구였다.





                                  ㅇ


  청나라 사신이 역관 정명수를 대동하고 다시금 화의를 요청해 왔으나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 차갑게 돌려 보냈다.
  두번에 걸친 화친요청을 조선이 박절하게 거절하자 청나라 진영에서는 그 분풀이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기 시작했다. 남한산성을 겹겹이 에워싼 병력의 우세함을 내세워 산성을 공격해 들어온 것이었다. 
  "적이다! 적군이 나타났다."
  갑자기 놀라 외치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각 대문 성채위에서 동시다발로 울려 퍼졌고 동시에 각 대문 수비대장들이 외치는 큰소리도 들렸다.
  "전군은 놀라지 말고 응전하라! 응전하라! 적병은 오합지졸이니라!"
  "겁먹지 말고 응전하라!"
  이미 상승세를 타고 있던 승기(勝氣)였다.그 대장들이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소리에 각 대문에서는 미리 준비했던 폭약과 진천뢰, 조총, 화살등으로 차분하게 응전해 나아가기 시작했고 어영별장 이기축과 북문대장 원두표, 동문대장 신경진의 두드러진 활약으로 적의 드센 공격이 무위로 끝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청나라 군사의 희생자는 늘어만 가는데 조선군의 기세는 조금도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적군의 공세가 주춤한 것이었다. 조선 진영에서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사대문을 열고나가 적군을 격멸해 가기 시작했다.
  북문대장 원두표가 휘하의 군졸을 끌고나가 후퇴하는 적병을 후려치자 동문대장 신경진과 남문대장 구굉, 어영별장 이기축이 동시에 달려나가 적병을 찌르고 베었다. 이때 남문에서는 자원하여 싸움에 임한 선비 윤지원(尹之元)이 철편을 던져 말탄 적의 기병 둘을 때려죽이는 기예를 보이자 보고있던 조선군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냈다.
  조선군의 대승이었다.
  이날의 승리는 조선군이 남한산성에 고립된 이후 얻어낸 최대의 승리였다.
  승리의 여파는 대단했다. 피난만들 속에 낀 재야 선비들 조차 그 청나라 군사들을 오랑캐 여진족이라 비칭(卑稱)하며 주먹들을 씰룩 거렸다.
  "썅놈들! 여진족 주제에 어딜 감히 넘봐, 넘보길........"
  "우리가 그동안 참고만 있었더니 저것들이 우리를 봉놋방 샌님으로 알고 있었던 거야, 저 쌍놈들이........."
  "만주땅을 깔고 앉은 것만으로 감지덕지 해야지, 봉당(封堂) 빌려주니 안방까지 내노라 이뜻 아냐. 언 - 니미, 뻔뻔스런 잡새끼들."
  승리의 감격에 눈물을 닦던 훤칠한 키의 사내들이 주고받는 대화였다. 장대한 기골에 번뜩이는 눈매로 보아 김류, 김자점의 파행에 등을 돌린 재야인들이 분명했으나 위기의 조선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는 모두가 하나같은 마음들이었다.
  "해동선국(海東仙國) 조선을 어찌보고 감히.........."
  자신에 찬 선비들이 하는 말이었고 최악의 상황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조선군의 사기도 이날에 이르러 최고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저승사자와 같던 청나라 병사들도 막상싸워보니 별것 아니라는 자신감을 얻은 뜻깊은 승리임에도 불구하고 산성에는 그 자신감을 지탱해줄 여력이 없었다. 식량도 부족했지만 무엇보다도 말먹일 풀이 떨어져 말이 굶어죽어 나가는 것이었다.
  기병(騎兵)들의 상실감은 컸다.
  기병에게 있어 말은 자신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살붙이였다. 기병에게 말이 없다면 군사들에게 무기가 없는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더구나 그 살붙이 조차 식량으로 대용 해야할 형편이고 보니 군사들의 절망감은 곧 전의상실(戰意喪失)로 이어 졌고 그래도 부족한 식량이라 중신들이 전직 관원과 피난민에게는 식량의 배급을 중지해 줄것을 인조에게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과인을 믿고 따라왔는데 있으면 같이 먹고 없으면 같이 굶을 것이지 어찌 주지 않을 수 있겠소." 
  없는 식량이나마 끝까지 같이 나누어 먹자는 인조의 그 말을 전해들은 성안 피난민들과 전직 관료들이 또한 감복하여 울지 않는이가 없었다.
  그날밤 자정에 인조가 성을 순시하는데 서쪽하늘에 큰별 하나와 작은별 여럿이 모여들더니 가운데 큰별을 둘러싸고 오래도록 밝게 빛나고 있었다. 큰별이 움직이자 작은별들도 흩어져서 홀연히 서쪽으로 사라져 버렸는데 인조와 중신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기며 좋은조짐이 있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새벽이 되면서 짙은 안개가 끼고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경계를 보던 장수와 군사가 모두 그 비에 젖어 고통을 호소하기에 이르자 밤을 꼬박 세워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던 인조가 세자와 함께 뜰복판으로 내려가 서서 그 비를 맞으며 하늘에 빌었다.
  "하늘이시여, 오늘의 일이 이지경에 이른것은 우리 부자가 하늘에 죄지은 소치일 것이옵니다. 어찌 군사와 백성들에게 죄가 있겠나이까. 부디 이나라 억조창생들의 고초만은 덜어 주시오소서."
  그러나 비는 더욱 거세게 쏟아졌고 충혈된 눈의 인조도 그 비를 피하지 않았다.
  "전하, 우중이옵니다. 옥체를 보전하여 주시오소서."
  보다못한 중신들이 달려나와 끓어 엎드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내몸이 어찌 종사와 억조창생의 안위보다 소중하겠소, 경들은 염려말고 들어가 있으오."
  "아니되옵니다, 전-하."
  "전-하, 옥체를 보전하소서......"
  중신들 또한 뜰 복판에 같이 엎드려 겨울비에 젖어가는 가운데 간절한 소망을 빌고 또 비는 인조와 소현세자의 볼위로 빗물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인조가 오전내내 하늘에 빌고난 그날 오후, 신기하게도 비가 개이고 청명한 겨울 하늘이 보였다. 비온뒤라 하늘은 더욱 맑고 고왔다.
  그 하늘을 바라보며 성안 온 백성들이 임금의 간곡한 그 발원에 감동하여 또한 목놓아 울었다.
  "전-하, 이 무지한 백성들을 위해 그토록 성심을 태우시다니요."
  "전 - 하."
  "무엇으로 성은에 보답하겠나이까. 전-하........  으흐흐흐........."
  온 산성이 울음속에 잠겼다. 피난민도 울고 전직 관료들도 울고 경계를 보던 장수와 병사들도 그 성은에 감읍해 울었다.
  "이것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시오."
  인조는 자신이 깔고 덮던 산양피 이불과 방석등을 성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선뜻 내 주었다. 한사람의 군사라도 더 보호하려는 인조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임금이 몸소 이불을 들어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자 백관들도 모두 나서서 비에 젖은 군사들을 보호하려 애썼다.
  그러나 허사였다. 비온뒤 더욱 거센 찬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며 산하는 온통 빙판으로 덮혔고 성곽을 지키는 군사들의 몰골도 차츰 정상을 잃어갔다.
  팔다리가 뻣뻣하게 굳은 채 시체로 발견되는 군사가 둘, 셋인가 하더니 집단으로 동사(凍死)한 군사들도 부지기 수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의 날카로운 창칼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던 장졸들이 그 추위속에서는 손써볼 틈도없이 맥없이 쓰러져 구르는 것이었다.
  "아니되오! 아니되오! 우리군사들이 추위에 더이상 얼어서는 아니되오.  군사들을 보호하시오, 군사들을......"
  인조는 절규했다.
  "구원군.....!  구원군이 와야하오, 구원군이......"
  인조가 정신나간 사람처럼 소리치고 있었다. 추위와 배고품에 지친 이들을 구원해낼 손길은 오직 구원군이었다. 구원군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타게 기다리는 구원군의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인조는 다시금 도원수와 각도 감사와 관찰사들에게 유시문을 보냈다.
  『남한산성이 포위당한지 벌써 열흘이 넘었다. 성은 갈수록 위태롭고 급박한 형세가 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들은 대군을 이끌고 와 이 나라 종사와 억조창생을 구원토록 하라』
  그러나 그 유시문은 산성을 에워싼 적군에게 곧바로 빼앗겨 버리고야 만다.
  이미 남한산성은 청나라 병사들이 세워 놓은 송책(松柵:소나무 울타리)에 갇혀 이었다. 둘레가 백리가 넘고 높이가 서너길이나 되는 송책을 제아무리 높은 왕명을 지닌 사자(使者)라 하더라도 새처럼 가쁜히 날아 넘기 전에야 그 송책을 넘는다는 것이 쉬운일 일 수 없었고 또 그 송책을 가까스로 뛰어넘었다 하더라도 청나라 군사들이 이중 삼중으로 쳐 놓은 덫에 자연히 걸리게끔 되어 있어 외부와의 통로가 완전히 차단된 고립된 산성에서 그 송책을 무사히 빠져나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줄 모르고 구원군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산성에서는 급기야 구원군에 대한 기대가 원망으로 바뀌어 갔고 조선군의 사기도 점차 수그러들고 있었다.
  그 때 그 기죽은 산성으로 원주영장(營將) 권정길과 원주목사 이중길이 군사를 거느리고 종묘사직을 구원하러 왔다는 소식이 꿈인양 숭은전에 전해지며 산성엔 환호가 올랐다. 죽었던 부모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고립된 산성의 인조에게 구원군의 출현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었기에 그 기대는 참으로 컸다.
  "구원군이 왔다! 전군은 전투준비를 갖추라! 드디어 구원군이 왔다!"
  그 한마디 만으로 산성엔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전투준비를 서두르라!"
  그 말이 아니더라도 전투준비는 이미 저절로 이루어 지고 있었다. 얼마나 학수고대하던 구원군의 출현이었던가.
  이제야 살길이 열렸다 믿은 성안의 전 군사들이 성안에서도 호응하여 적군을 물리치려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데 돌연 검단산 쪽에서 폭약터지는 소리와 조총 소리가 난자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산성 군사들을 불안으로 몰고 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낭자해지는 총소리에 문득 써늘한 전율같은 것이 산성 군사들의 가슴을 훑으며 지나갔다. 혹시나 하는 불측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몇시간을 그렇게 들려오던 요란한 총소리가 잦아들며 궁금증에 몸이단 산성으로 거의 초죽음이 되어 달려온 초관이 "원주에서 올라온 구원군이 적병의 매복에 걸려 모두 전멸했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비보를 전하므로 성안은 다시 아득한 죽음의 공포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지막 믿었던 희망이 사라져 버린 성내 조선군의 사기는 곱절로 저하되고 있었다.
  추위와 배고픔앞에 장사는 없었다.
  조선군의 사기가 그예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었다.
  성안의 사정이 이러하자 답답한 김류에게 무녀 앵무(鸚鵡)가 찾아와
  『오늘은 화친과 싸움이 모두 길하다』고 하자 김류는 그말을 곧이듣고 중신들을 불렀다.
  "화친과 싸움을 함께 도모한다면 오늘 반드시 두가지 소망을 이룰것이니 제장과 제신들은 내뜻에 따라 움직여 주길 바라오."
  중신들은 어이없는 눈으로 그 김류를 바라보았다.
  "싸움을 하려거든 싸움을 하고 화친을 하려거든 화친을 할 것이지 하루안에 화친과 싸움을 어찌 같이할 수 있겠소이까. 노래와 곡(哭)은 같이할 수 없는 이치와 무엇이 다르오이까."
  나만갑이 퉁박하며 김류의 의견을 반박하자 중신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ㅇ


  날씨가 풀린 29일은 화창했다. 따뜻한 햇살에 몸들이 녹자 군사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영의정 김류가 인조의 명을 받들어 성을 순시하던중 남문성루에 이르자 남문아래로 보이는 적의 진영이 매우 허술하게 보였다. 김류는 적군이 비로소 피곤에 지친것이라 판단하고 사대문을 지키는 대장들을 불렀다.
  "지금보니 남문 아래로 보이는 적의 진영이 전과는 달리 몹시 허술하게 보이는데 이는 우리가 강공할 절호의 기회라 여겨지오. 제장들의 의견은 어떠하오?"
  "영상대감, 저것은 좌.우에 매복군을 숨겨둔 적들이 조선군을 유인해 내기 위한 술책입니다. 공격은 불가합니다."
  북문대장 원두표가 만류하고 나서자 김류는 성루에 서서 그 아래를 다시 내려보았다. 역시 허술해 보였다.
  햇볕 따사론 곳에 우.마와 함께 모여앉은 청병들의 모습은 한가로워 보였고 그 모습은 분명 산성의 조선 군사들에게 연전연패를 당해 전의를 상실한 무기력한 모습들로 보였다.
  "저길 좀 보시오. 저렇게 무기력한 병사들이 어찌 매복인들 했겠소이까. 이것은 하늘이 주신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강공해서 완전한 승기를 잡아야 합니다."
  김류의 전의는 점점 불타오르고 있었다.
  "영상대감, 어영대장께서 바로 보신겝니다. 적병들이 앉아있는 맞은편 계곡에는 필시 수많은 복병이 있을 것이니......  저것은 유인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남문대장 구굉마저 반대하고 나서자 김류는 장수들이 싸움을 회피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어 안색을 바꾸었다.
  "이거 아니되겠소이다. 승기가 보이는 싸움인데도 장수된 자들이 싸울생각은 않고 기피하려 들다니....... 이래도 되는 거외까?"
  "대감, 저것은 싸우러 가는 길이 아니라 죽으로 가는 길 올시다. 군사들을 어찌 사지로 몰아 넣겠소이까!"
  순간 김류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죽으러 가는 길이라니. 그럼 내가 할일없이 군사들이나 죽이는 그런 사람이란 말이오? 나는 지금 상감의 명을 받들어 조선군의 사기를 북돋우러 나온 영의정겸 체찰사란 말이외다."
  북문대장 원두표가 지지않고 맞서자 김류는 체찰사의 위엄을 내세우며 어검을 들어 보였다. 전장에서 체찰사의 영은 곧 임금의 영이었다.
  "군사들을 사지로 몰아 넣다니.........  같은 말을 해도.....내가 그럴 사람이요?"
  그 북문대장 원두표를 쏘아보며 김류가 빽 소리를 질렀다.
  "만일 상감께서 영을 내리셨다면 그때는 어쩔 것이오. 그때도 그대들은 꽁무니만 뺄것인가! 지금 군사들을 독려하지 않으면 두번다시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니 지금당장 전고를 울리렸다!"
  김류가 어검을 높이들고 성난 장수처럼 포효했다. 그래도 사대문 대장들이 말을 듣지 않자 자리를 박차고 나선 김류가 전고앞으로 달려가 북채를 잡아 들었다.
  "아니되오이다. 지금전고를 울리면 적진에 선전포고를 하는 격이지 않소이까!"
  뒤따라 달려간 원두표가 북채를 잡아 채자 김류의 안면근육이 살기로 부들부들 떨렸다. 체찰사의 위신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 체찰사의 비장 유호가 김류곁으로 다가서며 허리굽혀 아첨했다.
  "대감, 체찰사의 명은 곧 전하의 명이옵니다. 명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군률로써 다스리소서."
  "이를 말이더냐!"
  김류가 어검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너희가 나가 싸우지 않겠다면 내가 친히 군사를 독려할 것이니라!"
  눈에 독이 오른 김류가 사대문의 비장들을 불러 세웠다.
  "때는 지금이니라. 군사들을 이끌고 어서나가 싸우라!"
  체찰사가 뽑아든 어검 앞에서도 비장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대문 대장들의 견해가 옳은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는 비장들이었다.
  "어랍쑈? 너희마저 나의 명을 거역하겠다 이말이렸다!"
  김류가 어검을 비장 유호에게 주며 소리쳤다.
  "명을 거역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목을 쳐라."
  김류의 영이 있자 눈알을 반들거리던 유호가 가까이에 있던 동료 비장의 목을 후려쳤다.
  순간 땅바닥에 떨어진 비장의 머리통에서는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다 멈추었고 목이 달아난 몸뚱이는 분수같은 피를 내뿜으며 넘어진채 팔다리를 허우적 거렸다.
  처참한 동료비장의 죽음을 눈앞에 보고서야 비장들은 마지못해 공격에 나섰다.
  함성을 지르며 내리 쏟아져 달려가는 조선군의 비호같은 맹공에 무방비의 적군이 살기위해 도망가는 모습은 누가보더라도 조선군의 승리였다.
  "보시오! 저것 좀 보시오! 저런 저들이 무엇이 겁이나 도데체 공격을 망설였단 말이요."
  김류는 이미 승리한 장수처럼 껄껄거렸다. 북채를 빼앗아든 김류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북소리를 울렸고 비장 유호는 청색깃발을 좌우로 펄럭이며 신바람나게 흔들어댔다. 북소리가 천지사방에 진동하는 가운데 조선병사들은 도망가는 적병을 쫓아 적진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어떻소, 청나라 군사와 접전이래 오늘같은 대승을 일찍이 거둔적이 있었소이까?"
  ".............."
  "으하하하하하....  공격하라! 공격하라!"
  김류는 신이나 북을 두드렸고 비장 유호는 북소리에 맞춰 깃발을 흔들었다. 
  그러나 청색 깃발은 응원깃발이 아니었다. 청색 깃발은 적군과 접전시 아군에게 유리한 방향을 제시하는 신호용 깃발이었다. 깃발이 좌로 돌아가면 병사들은 왼쪽으로 몰려가야 했고 깃발이 우로 돌아가면 역시 오른쪽으로 돌아 공격해야 했다. 그런데 비장 유호는 청색 깃발을 조자룡의 헌칼쓰듯 마구 흔들어 댄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조선군사들은 깃발에 따라 좌로 우르르, 우로 우르르.....  다시 또 왼쪽으로 우르르, 오른쪽으로 우르르.....  수십번을 그렇게 뜀박질만 쳐대다 끝내 제풀에 지쳐 풀써풀썩 쓰러져 버린 군사만도 부지기 수였다. 그걸 모르는 유호가 이빨을 드러낸 채 북소리 장단에 맞춰 깃발을 흔들다 보니 결국 조선군의 힘만 쭉 빼놓은 것이었다. 더욱 가관인것은 북을 두드리는 김류의 방망이질이었다. 때에 따라 공격도 하고 후퇴도 시키는 것이 북이었다. 북소리로 신호하는 것이었다.
  조선군의 승기가 보이자 김류는 배고픈 강아지 언똥에 주둥이 쳐박는 격으로 급하게 급하게 서두르며 마구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북채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었다. 없는 것을 있게하고 죽은자를 되살려내는 그런 도깨비 방망이가 아닌데도 김류는 공격도 후퇴도 아닌 북소리를 혼자 신이나 마구 두드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깊숙이 들어간 조선군의 후방에서 갑자기 포성이 울리더니 조선군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연이어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굉음이 울리며 조선군은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 뿐 아니었다. 맞은편 계곡에 숨어있던 적병들이 일시에 달려나와 총을 쏘며 활을 날리자 조선군은 독안에 든 쥐모양으로 한쪽으로 몰리고 있었고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놀란 김류와 유호는 북질과 깃발짓을 멈춘 채 도륙당하는 그 조선군의 참혹한 광경을 멀건히 서서 구경만 할 뿐이었다. 
  "이, 쳐죽일놈들!"
  참담한 사태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며 몸을 떨던 북문대장 원두표가 칼을 빼어 들고 그 김류와 유호의 목을 베려 바람같이 달려나가는 것을 사대문의 장수들이 뛰어들어 기를쓰고 말리는 바람에 가까스로 하극상(下剋上)만은 막았으나 분한 마음은 삭이지를 못했다.
  흥분을 가라앉힌 원두표가 칼대신 북채를 빼앗아 들고 그때서야 비로서 후퇴의 신호를 보내니 이미 늦은 때였다.
  조선군의 대참패였다. 조선군의 사망자는 3백여명, 부상자는 2백여명이 넘었다. 지금껏 이루었던 전과들을 한순간에 날린 꼴이었다.
  땅에 떨어진 조선군의 사기는 재기불능 이었고 조선군의 유능한 장수 지여해, 신성립, 이원길 등이 이때 전사했다.





                                  ㅇ


  고개꺽인 김류에게 비장 유호가 달라붙어 또한번 아첨으로 김류의 비위를 맞추었다.
  "어영대장 원두표가 때맞추어 구원을 못했기에 지금과 같은 참변을 당했으니 그를 군률로 다스려 이번 패전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옵니다."
  "..............!"
  김류는 또 옳게 받아들였다.
  김류가 원두표의 죄를 논하기 위해 정승이하 중신들을 모두 불렀다.
  "너 원두표는 어찌하여 퇴각하는 조선군을 때에 맞춰 구원하지 않았느냐. 그 죄를 물어 군률로 다스릴 것이니라."
  "............?"
  "오늘 이 수치스런 패배는 처음부터 원두표에게 있었소이다. 출전하라는 체찰사의 명에 우선 불복했고 또한 우리군사가 퇴로를 찾지 못해 허둥댈때 어영대장으로서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하였소. 이에 본인은 원두표에게 극죄(極罪)를 논하고자 하니 중신들의 기탄없는 의견을 개진하기 바라오."
  김류가 또다시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 넘기려하자 그때껏 잠자코 있던 좌의정 홍서봉이 그 간사한 김류를 화살같은 눈으로 쏘아보며 소릴 질렀다.
  "영상은 말을 삼가시오! 사대문의 대장들이 적의 계략이라 출전을 그렇게 말렸는데도 출진은 누가 시켰소이까! 어찌 이번 책임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 하시오. 그게 영상이 해야 할 도리오이까!"
  ".............!"
  "그리고 또, 체찰사의 몸에 붙어 기생하는 체찰사의 비장 유호는 어떠하오이까. 우리 군사는 단 한사람도 상감의 군사 아닌 사람이 없는데 그 자가 어찌 감히 비장의 목을 함부로 치오이까. 그리고 그 깃발이 어디 응원깃발 이더이까...?"
  ".............."
  "이번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그자는 노륙의 죄를 면치 못할 것이외다."
  속이 후련한 좌의정 홍서봉의 일갈에 김류는 핼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숭은전 앞뜰에 머리풀고 끓어앉아 석고대죄에 들어갔고 비장 유호는 어영군사들에게 붙잡혀 개처럼 끌려 다니며 집단 구타를 당하던 끝에 맞아죽어 그 꺽이고 구겨진 시체가 성밖으로 내던져 졌다.
  그렇게 패전의 후유증으로 시끌시끌하던 산성에 기쁜 소식이 하나 날아 들었다. 유도대장 심기원의 장계가 도착한 것이었다.
  『호조참의 남선, 어영별장 이정길과 더불어 밤중에 애오개에 주둔한 적 4-5백명을 공격하여 쳐 죽였나이다』
  승전보였다. 
  인조는 기뻐하며 심기원을 제도도원수(諸道都元帥)에 제수하여 하사도(下四道)의 군사를 통솔케 하고 이정길에게는 가자(加資)를 내렸는데, 뒤에 들은 소문은 그게 아니었다.
  삼각산에 진을 치고 있던 유도대장 심기원이 야음을 틈타 성안에 주둔하고 있던 용골대를 공격했다. 예상밖의 기습을 당한 용골대의 병사들이 놀라 일단 후퇴하였으나 조선군의 전세가 미약하다는 것을 알고는 전열을 가다듬어 일대 반격을 가해왔다.
  조선군에 비해 수십배나 많은 적을 당해낼 재주 없는 심기원이 조선군사들을 거의 다 잃다시피 하고는 삼각산의 군진 마저 버린채 맨발로 뛰어 광릉으로 달아나 버리자 삼각산 진중에 옮겨 두었던 호조의 문서와 재물조차 모두 다 빼앗기고 그로인해 백악산(白岳山)에 숨어있던 피난민까지 몰살당하는 대참패를 당했다.
  광릉으로 숨어든 심기원은 곧 양근(楊根)의 미원(彌原)으로 들어가 전쟁이 끝날때까지 단단히 숨어 지냈는데 이런 사실을 알 까닭이 없는 산성에서는 유도대장 심기원이 하루속히 달려와 구원해 줄것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상중에 있던 심기원이 어찌 이런 큰 전공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다 하늘이 무심치 않았음이로다."
  인조는 그 승전보를 몇번이고 거듭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승전보에 힘입은 인조는 그날 밤늦게 김류의 죄를 용서해 주었고 석고 대죄에서 풀려난 김류는 원두표에 대한 보복으로 원두표의 부장 한사람을 골라 엉뚱한 누명을 씌워 거의 죽도록 때려 분을 풀고는 체찰부에서 올린 오백여 사상자 수를 박박 지우고 단 40명의 사상자만 난 것으로 고쳐 두었다.
  그러나 조선군이 패전을 당하던 그 시각, 한양엔 청태종 홍타시가 휘하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입성하고 있었다.
  마부대와 용골대, 다이곤 등의 영접을 받으며 들어서는 청태종은 과연 황제의 위용을 갖춘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수십, 수백명이 황금으로 치장한 황금 연(輦:가마)을 받든 위에 황금색 용포(龍袍)를 입은 청태종이 거기 높다랗게 앉아 있었다.
  그 청태종이 있는 본진을 가운데로 하여 전,후,좌,우로 늘어선 수만의 정예 군사들이 번쩍이는 기치창검과 휘황한 깃발을 날리며 늘어선 모습은 시작과 끝이없는 군사들의 물결로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었고 한양도성에서는 청태종의 입성을 축하하는 총포소리와 호악(胡樂)소리가 끝없이 울려나고 있었다.
  청태종이 한양에 입성한 바로 그 다음날, 홍타시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워낙 수가 많은 대군의 출발이었기에 이들은 세갈래로 나누어서 진군해 들어왔다.
  광나루(광진)와 마포, 헌릉(獻陵)은 쏟아져 들어오는 이들 청나라 군병들의 물결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해가 져서야 그 군병들이 송파에 진을 쳤는데 청나라 본진이 마부대의 진영으로 들어서는 그 모습은 남한산성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하루종일 이어지는 군사들의 이동을 망연하게 바라보던 산성의 조선군사들과 만조백관, 그리고 피난민들의 두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 내렸고 이젠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는 무력증이 만연해진 산성 곳곳으로 끝 모르는 자괴의 한숨소리와 비탄, 그리고 오열하는 소리가 전염병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청태종이 진을친 적진에는 눈가에 가득 눈물이 괸 조선여인들이 무수히 끌려 나와 그 청태종 영접에 강제 동원되었는데 그 눈물에 젖은 여인들의 눈길이 떠날 줄 모르는 바로 그 진 밖에는 어린아이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입에 문 채 얼어죽은 아이, 진흙창에서 제 에미를 부르다 두눈을 부릅뜨고 죽은 아이, 울다 지쳐 얼굴이 얼어터진 채로 죽은 아이 등등등, 주로 영아에서부터 다섯살에 이르기까지의 어린아이들의 주검이었다. 이는 처음 조선이 청나라와 화친한다는 소문을 듣고 피난하지 않았던 사대부의 부녀자들과 민간의 여인들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화친이 단절되고 싸움이 시작되면서부터 적병이 와서 죽이고 혹은 잡아간 것인데 그때 기습공격에 대한 분풀이로 아녀자들은 잡아다 진중에 가두어 두고 그 아이들은 귀찮아 진밖으로 내다 버린것이 그 참상이었다.
  그 진 가운데 청태종 홍타시가 기거 할 대전(大殿)이 세워졌다. 3층의 단위에 지은 정사(精舍)는 조선에선 미처 보지못한 대단히 화려한 전각이었다. 그에비해 남한산성에는 온갖것이 다 궁색해지고 말과 소가 모두 죽어 살아있는 가축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임금 인조는 침구가 없어 옷을 입은채로 자고 밥상에도 찬이 없어 닭다리 하나만을 놓았으나 인조는 그 닭다리마저 놓지 못하게 했다.
  그 산성이 청태종 홍타시의 입성소식과 송파에 진을 친 청나라 군사들을 바라보며 설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울하고 암울한 송년(送年)이었다. 
  이제 날이 저물면 병자(丙子)년은 가고 새해 정축(丁丑)년이 밝아 올 것이었다. 그러나 산성엔 희망이 없었다.
  청나라는 청태종까지 달려나와 진을 치고 응원을 하는데 텃밭인 조선에서는 산성에 고립된 임금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진정 우울한 날씨만큼이나 쓸쓸하고 외로운 세모 맞이였다.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조선과 외로운 산성............
  정녕 새해에는 희망도 가망도 없어보였다. 이제껏 오지않은 구원군이 새해라고 해서 선뜻 달려 올 것은 아니었기에............. 





                                  ㅇ


  정축(丁丑)년 새해가 밝았다.
  밝은 새해일 수 없었다.
  아침 일찍 광주목사(廣州牧使) 허휘(許徽)가 가져온 쌀떡 한 그릇이 아니었으면 그나마 새해 첫날 떡구경 조차 못할 형편의 산성이었다. 인조는 신료들의 신년 하례도 생략한 채 한자리에 모여 그 떡을 나누어 먹었다. 말없이 떡을 먹으면서 임금과 신하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적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과 또한 무모한 싸움은 오히려 더 큰 화만 자초하리라는 공통된 인식이 그것이었다.
  김류가 싸움에 대패한 이후 조선군의 사기는 걷잡을 수없이 저하되었을 뿐 아니라 추위와 기아에 시달리는 병사와 백관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이제 남은 길은 화친에 있었다.
  화친만이 조선을 구하는 길이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떡을 씹으면서도 인조와 신료들은 똑같은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화친을 이끌어 내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비록 적이지만 얼마간의 세찬은 보내야 되지 않겠소?"
  무거운 침묵을 깨고 인조가 먼저 힘없는 말로 운을 떼었다.
  "지금은 적이지만 한때는 형제국이었소. 형제국의 의를 생각하여 세찬을 보낸다면 저들이 굳이 마다 할 리야 있겠소."
  인조의 초라한 말 한마디가 억지로 떡을 떼어 입에 넣던 신료들의 눈시울을 붉게 했다.
  "만일 저들이 우리가 보낸 세찬을 받는다면 화친에 응할 의향이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에요. 그러면 그때 가서 경들이 화친을 이끌어 내면 되지 않겠소?"
  인조는 과인이라는 표현을 자제하고 우리라는 표현을 썼다.
  "지당하오신 말씀이옵니다, 전하."
  좌의정 홍서봉이 손바닥으로 입술을 닦으며 인조의 뜻을 받들었다. 그러면서 홍서봉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 했다.
  지쳐 핼쑥한 용안의 인조가 자신이야 어떻든 종사와 신민의 안위만은 구출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앞에서 경망스럽게 어두운 얼굴을 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누구를 먼저 보내면 되겠소?"
  좌의정이 밝은 얼굴로 동조하자 인조는 조금 힘을 얻은 듯 억양이 높아졌다.
  "전하, 지모도 있고 임기응변에도 능한 선전관 위산보(魏山寶)가 어떠하겠나이까?"
  "오! 그 사람이면 되겠어요. 그 사람을 속히 부르도록 하세요."
  좌의정의 추천에 인조는 힘이 났다.
 
  임금과 만조백관의 간곡한 기원이 서린 세찬을 들고 위산보는 적진의 마부대를 찾았다.
  그러나 청태종이 입성한 이후 청나라 진영의 경비는 삼엄했다. 황제가 있는 진영에서 선봉장에 지나지 않는 마부대를 찾는 일부터가 황제의 근위병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일이었고 그 업수이여긴 조선 사신의 초라한 세찬을 들여다보던 한 장수가 결국 그 세찬을 엎어 버리고야 말았다.
  그것도 세찬이냐는 경고를 주려는 것이었으나 위산보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
  순간 경악한 위산보의 마리끝이 쭈뼛 치솟아 올랐다.
  초라할 수밖에 없는 세찬이었으나 거기엔 임금과 만조 백관, 그리고 조선 전 백성의 꿈과 기원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 꿈과 기원이 사나운 장수에 의해 산산히 조각나 버린 것이었다.
  지모도 있고 임기응변에도 능한 위산보였으나 그 순간 눈이 하얗게 뒤집히지 않을 수가 없었고 또한 이성을 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달려들었는지는 모르나 그 위산보의 손에 그 장수의 멱살이 끄들려 있었고 그 멱살을 잡고 흔들던 위산보가 그 장수를 냅다 내동댕이치면서 싸움이 시작 되었다. 땅바닥을 구르던 그 장수가 눈알을 부릅뜬 채 일어서면서 난투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전장에서 뼈가 굵은 우람한 장수를 말 잘하는 선비가 이겨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관모가 찢어지고 상투를 잡힌 채 실컷 봉변만 당한 위산보는 어찌나 분한지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며 성으로 향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위산보의 눈과 목은 퉁퉁 부었고 얼굴과 목에는 심한 상처까지 나 있었다.
  꺽꺽 숨막히는 울음을 토해 내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 위산보의 설명에 경악한 인조와 중신들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두주먹만 부르르 떨 뿐이었다.
  분함을 참지 못해 몸을 떨던 호조판서 김신국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전하, 신이 다시 한번 적진에 나아가 마부대를 만나 보겠나이다. 윤허하여 주시오소서."
  김신국이 결기를 세우자 이경직이 따라 나섰다.
  "소신 또한 보내 주소서, 호조판서 김신국과 함께 다녀오겠나이다."
  두사람이 적진에 다녀오겠다 스스로 자청하여 나서자 인조는 말리지를 못했다.
  그 떠나는 두사람을 남문까지 따라나온 좌의정 홍서봉이 김신국의 손을 잡고 "너무 격분 마오, 냉정을 되찾아 순리로 일을 풀어 나가야 합니다." 하므로 김신국은 다소 분기를 가라앉히고 성문을 나섰다.
  "이게 누구이오이까, 호조판서가 아니오? 어서 오시오."
  마부대는 예의 그 장수다운 모습으로 두사람을 맞았다.
  "내가 화친을 청할 때는 오지 않더니 황제 폐하께서 오시니 스스로 찾아오시는구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소?"
  "황제 폐하께 새해 인사차 들렀소이다."
  "오호! 그래요. 허나 지금 폐하께서는 진중에 아니 계시오이다. 폐하를 알현하시려면 내일 다시 오셔야 겠소이다."
  "마대인께서 황제 폐하께 조선사신의 알현을 주선해 주실 수 있을런지요."
  "그야 그렇게 해야지요. 내일 누구누구 오실게요? 이왕이면 정승중에 한 분이 같이 오셨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시겠소?"
  "좌의정을 모시고 오겠소이다."
  "아, 그래요? 그러면 조선국의 좌의정이 알현을 청한다고 미리 말씀드려 놓겠소이다."
  "..........감사하오이다."
  전에 없이 화통한 마부대였고, 이때까지 김신국은 자신의 감정을 꾹 누르고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먼저 성사시켰다. 일을 매듭짓고 돌아가기에 앞서 자리에서 일어서던 김신국은 결국 오전에 있었던 위산보의 이야기를 꺼내고야 말았다.
  "마대인께서는 오전에 있었던 일을 알고 계시는지요?"
  김신국이 정색하고 묻자 마부대는 웃었다.
  "아! 그일 말이지요? 조금전에 들었소이다."
  "부족한 세찬이었으나 우리 전하께서 정성을 다하신 것이었소이다. 먼길 오신 황제 폐하께 올리는 우리 전하의 정성을 그렇게 박대해서야 쓰겠소이까."
  정색을 하고 따지는 김신국을 옆에서 조마스런 마음으로 지켜보던 이경직이 오히려 긴장되었다.
  "하하-- 그건 잘못 되었소이다. 그 세찬 문제는 이미 내가 황제 폐하께 말씀 드렸소이다. 우리 폐하께서는 그 세찬을 잘 받은 것으로 하겠다고 하셨으니 돌아가시거든 임금께 잘 전하시오."
  이경직은 안도했다. 또한 김신국의 마음에 어린 응어리도 풀렸다. 인조와 백관들도 통쾌하게 생각했다.
 
  꼭두새벽부터 서두른 좌의정 홍서봉과 김신국, 이경직은 아침 일찍 마부대 진영에 도착했다.
  "이미 말씀은 고해 올렸으니 가십시다."
  이미 긴장으로 다리를 떨고 있던 세사람이 마부대의 진영을 벗어나 청태종이 있는 진영으로 들어서자 그 진용의 위세에 눌려 더욱 오금이 저렸다.
  황제가 거처하는 진영의 위용은 가히 하늘을 찌를 만 했다. 전후좌우로 정돈된 진영하며, 번쩍이는 기치창검과 하늘을 가득 메운 오색깃발, 생전 보지도 못했던 철갑전차와 바퀴달린 화포.........  장비와 병장기 만큼은 조선에 비해 월등하게 앞선 것들이었다.
  그 가운데에 3층의 단이 보였고 그 단위에 궁전이 있었다. 이동식 궁전이었다. 3층의 단과 궁전은 모두가 황금색이었고 멀리서 보기에도 누렇게 빛나는 궁전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화려해 보였다.
  3층의 단을 올라 궁전에 들어서자 또한 작은 단이 보였고 그 단위에 청태종 홍타시가 황금빛 찬란한 용포를 입고 화려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오색찬란한 비단 휘장과 푹신한 붉은 융단만으로도 황제의 권위가 실감났다.
  황제 앞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화려함에 넋이 팔려 딴 세상에 와 있는 착각에 젖었을 때 문득 마부대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무엇들 하는게요, 예를 올리지 않고........"
  낮고 짧은 마부대의 외침에 비로서 정신을 차린 세사람은 화려한 황금빛 용포를 향해 네번 절하고 나란히 끓어 엎드렸다.
  좌의정 홍서봉을 가운데로 하여 그 좌우에 김신국과 이경직이 자리했다.
  "누가 좌의정이냐?"
  화려한 용포 속에서 굵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마치 화사한 꽃 속에 숨어 있는 굵고 날카로운 가시 같은 목소리였다.
  좌의정 홍서봉이 낮게 엎드렸다.
  "너희 나라의 문서를 보니 모두 우리를 노적(奴賊)이라 칭하였는데 우리가 누구의 종(奴)인가 말해 봐라."
  홍서봉뿐 아니라 김신국과 이경직도 그 말에 가슴이 떨렸다. 이런 위용의 황제가 종일 수는 없었다.
  "짐이 너희 나라와 약조를 맺은 후 나는 항시 광명 정대하게 행사했거늘  힘도 없는 변방의 조그만 나라가 어찌 이리도 방약하게구는가, 이따위 작은 일로서 짐이 이곳까지 꼭 내려와야 하는가?"
  ".............."
  "괘씸한지고!"
  ".............." 
  "너희가 진정 살기를 바라느냐, 죽기를 바라느냐!"
  "...............?"
  "진정 너희가 살고자 한다면 너 좌의정은 이 글을 가져가 너희 임금에게 전하라. 짐의 글을 읽고 보내는 너희들의 회답 여하에 따라 너희 나라의 존폐 여부를 결정할 것이니 명심하라."
  마부대가 누런 종이에 쓴 글을 받쳐들고 내려와 상위에 놓자 세사람은 네번절하고 그 글을 공손히 받들어 나왔다.
  그런데 황실을 나서는 그 세사람의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배어 나고 있었다. 인조와 백관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화친 논의는 고사하고 어찌 된 영문인지 높다랗게 앉은 청태종의 그 위엄앞에 세사람은 마치 가위라도 눌린 듯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마냥 머리만 조아리다 나온 것이었다
  산성을 향하는 세사람의 가슴이 허전했다.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만 싶었다. 그 기대에 찬 눈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꼭두새벽부터 세 사람의 장도를 애써 챙겨 주던 인조와 백관들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소망은 단 한마디도 못하였으니..........  빈손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가슴은 천근처럼 무겁고 쓰리고 아팠다.





                                  ㅇ


  "전 - 하, 신 등을 차라리 죽여주소서........."
  창백하게 굳은 안색의 세사람이 엎드린 채 울기만 하자 이들을 맞이하는 인조와 중신들의 창백한 낯빛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도승지는 그 글을 읽으라."
  인조의 명에 도승지가 그 청태종의 글을 펼쳐 들자 순간 숨을 삼킨 숭은전은 적막속으로 빠져들었다.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大淸國 寬溫仁聖皇帝)는 조선국 왕에게 조유하노라. 너희 나라가 명나라에 협조하여 우리 나라를 괴롭히고 해롭게 하므로 짐이 크게 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와 형제의 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무슨 까닭으로 척화로 공론을 모아 짐의 신하들을 핍박하는가. 너희가 짐의 신하들을 괴롭히므로 이제 짐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왔도다. 짐을 막아 볼 테면 막아보라.
  또한 짐의 모든 신하들이 이미 황제라 칭하거늘 너희가 어찌 이를 말리려 드느냐. 이 또한 방자한 일이로다.
  이제 짐은 너희의 팔도를 멸할 터인데 너희가 아비 섬기듯 하던 명나라가 장차 어떻게 너희를 구원하려는가 두고 보리라. 너희가 먼저 짐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으니 피하지는 못하리라. 짐은 너희를 아우로 대접하였는데도 너희가 먼저 패역(悖逆)하였으니 말이다.
  짐의 군사가 한양에 입성하던 날에 너희는 생민의 처자를 흩어지게 하여 놓고 겨우 단신으로 도망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숨어 있으니 비록 목숨을 연장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묘년의 욕됨을 씻고자 척화를 부르짖다가 스스로 화를 초래 한 것이니 이 욕됨은 장차 무엇으로 씻을 것이며 또한 웃음거리를 후세에 남기게 하였으니 무엇으로 그 부끄러움을 가리겠는가』
  도승지가 청태종의 글을 다 읽고 나자 인조와 중신들의 안색은 침통하게 굳어 갔고 간간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과인은 화친을 바라고 있었소. 헌데 화친하겠다는 소리는 끝끝내 없고 팔도를 멸한다는 소리만 있으니 대체 이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
  창백한 인조의 손가락이 떨고 있는 앞에서 고개숙인 중신들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어째 말들이 없소." 하고는 인조는 그 수척해 바짝 야윈 이조판서 최명길에게 눈길을 돌렸다. 화친을 해서라도 종사와 생민을 먼저 구하고자 했던 최명길의 뜻을 끝내 외면한 자신이 부끄러워 그 최명길을 바라보면서도 인조는 끝내 입을열지 못했다.
  "전하, 화친에 관한 한 이조판서 최명길보다 잘 아는 신료가 없사오니 최명길의 의중을 한번 들어 보시오소서."
  "그러하옵니다, 전하. 이판에게 좋은 방도가 있다면 이는 종사를 위한 계책일 터이니 그 의견을 들어 보시오소서."
  최명길을 바라보는 인조의 눈빛이 처연하다 못해 서글퍼 보이자 보다 못한 좌의정이 나섰고 그 뒤를 호조판서 김신국이 동조하고 나선 것이었다.
  좌의정과 호조판서가 자신을 거론함에 고개 들던 최명길이 순간 아연하여 몸둘 바를 몰라했다. 인조의 하염없는 눈길이 자신에게 쏠려있는 것이었다.
  "화, 황공하옵니다, 전하. 신에게 무슨 의견이 있겠나이까."
  최명길이 겸양하며 허리를 숙였다.
  "아니오, 이판. 일찍이 이판의 의견에 따랐던들 오늘과 같이 해괴한 글은 받지 않았을 것이오. 늦었더라도 이판의 의견을 따를 터이니 속마음이 있거든 기탄없이 말해보오."
  부드러움 담아 그윽히 바라보는 인조의 눈빛을 보자 영의정 김류의 실눈이 가늘게 찢어지고 있었다. 속셈을 하느라 머릿속이 분주한 모양이었다.
  "전하, 청태종의 글이 저러할 진데 이는 우리 조선으로부터 무언가 큰 것을 얻어내려는 계략이 숨어있는듯 하옵니다."
  "큰 것을 얻어내려는 계략.........?"
  "그러하옵니다, 전하."
  "하면......."
  "저들에게는 큰 것일 것이나 조선으로서는 치욕일 것입니다, 전하."
  "치 욕......?"
  "그러하옵니다, 전하."
  "경이 말하는 치욕이 무엇을 뜻하는지 소상하게 말씀해 보오."
  인조는 허리를 세웠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들의 국호를 후금이 아닌 청(淸)으로 고쳐 불러야 할것이옵고 또한 홍타시를 한(汗)에서 황제(皇帝)로 불러야 다시는 트집을 잡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옵니다.”
 인조는 한숨을 토해 내었다.
 “그 두가지 요구를 들어준다면 저들이 화친에 응해 올 것 같으오?”
 “우선 급히 취할 것은 그 두가지 이옵고 그 다음은 저들과 부딪치면서 풀어 가야 할 과제라 사료되옵니다.”
 “그 두가지 말고도 또 있다...... 이 말씀이오?”
  인조가 궁금한 눈으로 최명길을 바라보는데 좌의정이 다시 끼여들었다.
 “이판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사옵니다, 전하. 저들이 보낸 국서에도 우리 조선이 저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빌미로 트집을 잡은 적이 있었사옵니다.”
 “이제 전하께서 저들의 국호를 쓰시고 황제 앞으로 국서를 보내신다면 저들이 조선을 침공한 명분이 사라지게 될 것이옵니다. 명분이 사라지고 나면 저들도 서둘러 화친에 응할 것이니 그때 가서 화친을 논의해도 늦지 않으리라 사료되옵니다.”
 “화친만 이루어 낼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소. 내 경의 뜻을 따르리라. 대청국 황제에게 올리는 국서를 초해 주시오.”
  "화, 황공하옵니다, 전 - 하."
  밝아지는 인조의 낯빛에 비해 최명길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번의 국서는 조선이 그 동안 오랑캐로 적대해 온 후금을 대청 제국으로 높이는 일이요 홍타시를 황제로 높여 부르는 일이었다. 적국과 적국의 임금을 조선보다 높여 부르는 일이 어찌 치욕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오늘의 이국서는 종묘사직의 안위와도 직결된 일이요, 또한 기록으로도 영원히 남을 것이었다. 언제 어느때의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기록은 년년세세, 세세생생토록 이어져 그 후손들이 보고 또 볼 것이었다. 그 역사 앞에서 최명길은 갈등하고 괴로워했다.

  거처로 물러나온 최명길은 조용히 사색에 잠겼다. 어차피 국서를 써야 할 일이라면 상대의 기분을 흡족하게 하는 내용들로 가득 채워야 할 것이었다.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떳떳한 말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글이어야 했고 또한 지금껏 써 왔던 그 어떤 국서보다도 신중하고 정성스러워야 할 것이었다.
  정묘호란시 맺은 형제의 맹약을 깨뜨린 일과 공유덕과 경중명이 가도를 탈출하여 후금에 투항하려던 것을 방해했던 일, 청나라 사신을 푸대접하여 양국 관계를 소원하게 했던 일 등을 비교적 소상히 적고 그 잘못을 모두 조선에 돌려 사죄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약자의 설움이란 바로 이런것이 아니랴............
  옳은것을 옳다 못하고 그른것을 그르다 할 수 없는 약소국의 설움을 최명길은 입술을 깨물며 아파했다.
  조선에 잘못이 있다면 인조반정 이후 후금을 무지한 오랑캐로 본 것이었다. 여진족의 누르하찌가 만주에 흩어져 할거하던 부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건국 한 것이 광해8년(단기3949년,서기1616년)의 일이었고 새롭게 일어나는 신흥 제국 후금과 무너지는 제국 명나라 사이에서 조선에 유리한 중립적 실리외교를 펼치던 그 광해를 힘으로 몰아낸 인조반정의 주체 세력들이 후금을 배척하고 명나라 숭상을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으나 그 후금으로부터 정묘호란을 당했고 다시 병자호란을 당해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모를 겪고 있음이었으니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안목이 가져온 결과로는 너무도 참담하고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색에서 깨어난 최명길이 붓을 들었다. 조선의 흥망성쇠가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 글을 최명길은 차분하게 써내려 갔다.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께 말씀 올리옵니다. 소방(少邦)이 대국에 죄를 지어 스스로 병화(兵禍)를 초래하였나이다. 미련한 이 몸은 외로운 산성에 의지하여 있사오나 그 위태로움이 조석에 박두하였나이다.  어제 들으니 황제 폐하께서 궁벽하고 누추한 땅에 나오셨다 하므로 사신을 보내 마음속 정성을 전달하려 하였으나 칼과 창으로 그 길이 막히고 끊어져 통할 길이 없었나이다. 비록 늦긴 하였사오나 국서를 진달할 기회를 이제야 얻었으니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서옵니다.
  오늘 대국에서 옛 맹약의 내용을 밝게 가르쳐 주시고 책망을 주시어 스스로 죄를 깨닫게 하시오니 소방으로서는 그 고마운 마음을 어찌 다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지난날 공유덕과 경중명의 일은 비록 소방의 본심에서 비롯된 일은 아니었사오나 의심과 오해를 충분히 살 일이었습니다. 또한 소방의 신민들인지라 식견이 천박하여 명분과 의리만을 고집하다 마침내 대국의 사신들을 푸대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죄를 어찌 다 감당하오리이까.
  대국의 대군(大軍)을 염려하여 조선이 척화로 공론을 모았사온즉 소방은 그 죄를 이미 아나이다. 죄가 있음에 정벌하고, 죄를 깨우치면 용서하여 주는 것은 대국이 하늘의 마음을 본받아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오니 만일 폐하께서 소방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소방으로 하여금 마음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기를 용납하여 주신다면 소방이 나쁜 마음을 씻고 복종하여 섬기기를 오늘로부터 하겠나이다. 그러나 폐하께서 싸움으로 결판을 내고자 하신다면 시세가 극도에 달한 소방은 죽기를 기약할 따름이옵니다.』
  붓을 놓은 최명길은 그 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한줄 한자의 글이 행여 청태종의 비위를 상하게 할까 염려한 까닭이었다.
  날이 밝자 중신들은 숭은전으로 모여들었다. 최명길이 초한 국서의 내용을 듣기 위함이었다. 
  국서를 읽어 나가는 도승지의 목소리가 젖어 떨렸고 듣고 앉아있는 중신들의 숨소리도 잦아들었다. 도승지가 읽기를 마치자 숭은전은 또다시 고요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ㅇ


 “경들의 의향은 어떠하오?”
  인조가 힘없이 하문했고 중신들은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왜들 말이 없소.”
  침통한 인조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다른 말이 없다면 서둘러 국서를 보내야 하지 않겠소.”
 “전하, 신이 국서를 전달하고 오겠나이다. 윤허하여 주소서.”
  좌의정이 침통한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듯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자 이경직이 따라 일어섰고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더이상의 말은 없었다.
  최명길이 숭은전을 물러 나오는데 영의정 김류가 최명길 옆으로 바짝 다가와 최명길의 손을 잡고 그 최명길을 치하했다.
 “공의 노고가 컸어요, 어쩌면 나의 뜻과도 그렇게 같으오. 진작에 서둘렀어야 할 화친을......”
 “오늘 우리들은 만고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아 당치않소이다, 이판대감. 죄인이라니요? 오늘의 공은 다 이판대감께서 세운 겝니다. 그러니 죄인.....  어쩌고는 듣기 민망 하오이다. 앞으로 잘해 봅시다, 아직 할 일도 많고 하니...... 나 먼저 가오이다, 에헴.”
  김류는 척화를 주창하다 오늘 다시 화친으로 돌아서 최명길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최명길은 그런 그를 탓하지 않았다. 영의정 뿐 아니라 그 누구도 탓할 일이 아니었다. 휘적휘적 팔을 내저으며 멀어져 가는 영의정의 뒷모습이 다만 안쓰러워 보여 최명길의 가슴에 비애가 서렸다.
  그날 오후 사신으로 갔던 좌의정 홍서봉과 이경직이 산성으로 돌아오며 조정엔 또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청태종이 온 이후 더욱 삼엄해진 경비로 국서는커녕 마부대조차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눈을 동그랗게 뜬 인조와 중신들이 좌의정과 이경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적진을 지키는 장수의 말로는 지금 적진에는 청태종을 배알하러 온 몽고 왕들이 와 있으므로 돌아가 있으면 다시 연락하겠다 하였사옵니다.”
  마지막 걸었던 희망이 사라지는 듯 하자 인조는 낙담하여 얼굴빛이 사색이 되었다. 하루하루를 근근히 연명해 가는 산성의 사정으로는 다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위와 기아, 질병과 고통만이 남아도는 산성이었다.
  임금도 병이 났고 온전한 중신도 몇 안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척화는 전설 속의 옛 이야기가 되어 항전할 전의마저 상실한 조선이었고 그나마 살기 위해 적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입장으로 전락한 조선엔 아무런 기력이 없었다. 이러한 때에 협수사(協守使) 유백증으로부터 원임대신 윤방과 영의정 김류를 참형에 처해야 한다는 통렬한 상소가 올라와 조정을 들끓게 했다.

  『나라의 신하된 자는 평시에도 맡은바 소임에 충성을 다하여야 난을 당해서도 그 힘을 얻을 것이옵니다. 그런데 평소 무위도식하던 자들에게 난을 맡기셨으니 어찌 수습인들 온전히 할 수 있었겠나이까.
  지금 대신 가운데 오랫동안 정승 지위에 있는 자는 오직 윤방과 김류 뿐이옵니다.
  윤방은 묘당에서 무위도식하고 조당(朝堂)에서 자리나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이 웃거나 욕하거나 불구하고 제 지위나 보전하여 근근히 날짜만 보내고 있었나이다. 지난해 마부대, 용골대가 사신으로 왔을 때에도 정부의 수반 자리에 있으면서 처사를 잘못하여 양국간 싸움의 실마리를 만들었으니 오늘의 변은 실로 윤방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김류는 겁이 많고 꾀가 없으며 그 성질은 괴팍스러워 제 고집을 꺾을 줄 모르고 권세는 장수와 정승을 겸하여 있기에 그 집으로 끊임없이 뇌물이 들어와 저택이 사치스럽고 또한 재물이 넘쳐흘러 나라의 힘으로 제집 재물이나 지키는데 온 힘을 다하고 있으니 어찌 나라인들 온전하겠나이까. 임금의 피난길은 초라한데 김류의 피난짐은 무려 우마 60여필이 동원되었고 그 첩까지 가마에 태워 보냈다 하니 누가 임금이고 누가 신하이옵니까?
  척화와 화친 사이에 이간질을 일삼고 시세에 영합하여 어제는 척화로 또 오늘은 화친으로 매양 태도를 바꾸니 정책인들 제대로 펼칠 수 있겠나이까. 이런 자가 바로 조선의 수상이옵니다.
  괜한 고집으로 우리 군사만 축내고 사기를 땅에 떨어뜨리기만 할뿐이니 그런자는 마땅히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대에 달아야 할 것이옵니다.
  윤방 또한 목을 베어 효수 하시면 온 나라 신민이 감동하고 군률이 스스로 엄정해 질 것이오니 우리가 어찌 오랑캐보다 못하겠나이까.』
 
  상소로 인해 조정이 술렁이자 김류는 도망하여 절로 들어가 숨으려 했다. 김류가 조회에도 참석치 않고 모습 또한 보이지 않자 인조는 오히려 유백증을 파직하고 그 자리에 이목(李 )을 내정하여 협수사로 삼았다.
  한치앞도 분간할 수 없는 환란속에 내우를 자초할 수 없다는 인조의 고육지책이었으나 유백증의 태도는 오히려 당당했고, 참형은 면했으나 김류의 잘못을 지적하는 소리는 곳곳에서 넘쳐 나고 있었다. 
  다시 연락을 주겠다 하던 청나라로부터 수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자 기다림에 지친 인조가 12일에 이르러 좌의정 홍서봉과 최명길, 윤회, 허한등을 보내 두번째 글을 올리게 했다.
  홍서봉과 최명길등이 국서를 받들고 적진에 갔으나 마부대는 보이지 않고 다만 다른 장수가 대신 나와 내일 다시 오라고만 했는데 그 장수의 뒤로 보이는 적진에서는 군사를 이동하고 진을 옮기느라 분주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적의 주력부대가 대거 산성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 보였고, 주로 남문과 서문쪽에 집결하고 있는 걸로 보아 최후의 결전에 대비한 만전을 기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신을 맞이했던 장수도 바쁘다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그 자리를 떠나자 홍서봉, 최명길 일행은 허탈한 심정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 다음날, 홍서봉과 최명길등 일곱명의 사신이 적진으로 들어가 가까스로 국서를 전달했는데 군사의 이동과 진의 정비를 끝낸 적진에서는 용골대가 대신 나와 사신을 맞았다.
  국서를 받으면서도 용골대는 방약무인한 태도였다.
  도끼눈을 치뜨고 사신의 위, 아래를 흩어 보던 용골대는 사신들을 세워 둔 채 소리부터 질렀다.
 “정묘맹약을 어긴 잘못이 우리에게 있는가, 너희 나라에 있는가, 어디 한번 말해보라.”
  다리를 꼬고 앉아 죄인 취조하듯 하는 용골대의 방자한 처사에 사신들은 그 수모를 서서 삭일 수밖에 없었다.
 “장군! 잘잘못은 이미 국서에 밝혔소이다. 정묘약조를 어긴 잘못은 우리 임금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료들에게 있소이다. 장군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칼로 내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증명해 보이리라. 결단코 우리 임금께는 잘못이 없소이다.”
  가슴을 치며 분을 삭이는 최명길의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너희 나라엔 끝까지 싸우자고 떠드는 자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지금까지 왜 한사람도 나와 맞서 싸우는 자가 없느냐. 너희 임금은 말로만 싸움질하는 자들의 노리개냐, 허수아비냐, 그거나 한번 말해보라.”
  안하무인으로 떠들어대는 용골대의 흉언에 모골이 송연한 조선 사신들이었지만 마땅히 할말이 없었다. 
 “소방이 어찌 대국인 청나라에 대항할 수 있겠소, 언사가 지나치시오.”
  좌의정이 용골대의 언사를 제지하며 나서자 용골대의 입가에 비웃음이 흘렀다.
 “이 국서는 황제 폐하께 올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돌아가 마땅히 하회를 기다려라.”
  두루말이 국서를 손아귀에 들고 삿대질처럼 흔들어 대던 용골대가 그 말을 끝으로 장막을 빠져나가자 갑자기 텅 빈 장막에 조선 사신들만 우두커니 남게 되었다. 분하고 원통하고 억울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용골대가 앉았던 걸상이라도 한방 걷어차고 싶었으나 억지로 참아내는 조선 사신들의 얼굴로 분통함이 어리다 사라졌다. 비참했다.
  화친을 주도해 오던 최명길마저 적진의 장수에게 수모를 당하고 돌아왔는데도 산성에는 이제 더 분노할 기력마저 없는지 듣는 둥 마는 둥 이었다. 인조는 인조대로 병이나 드러누웠고 영의정 김류는 낯짝을 숨긴지 이미 오래였다. 멀쩡하다고 하는 중신 일곱이 적진에 다녀왔으니 이들이 격노하지 않으면 격노할 사람도 없었다.
  하루 한끼씩으로 주린 배를 채운다 해도 산성에 남은 식량은 고작해야 보름 치.......  임금도 신하도 모두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초인적인 인내로 참아 내고 있었으나 오래 버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다 갑자기 들이닥친 한파에 노천에서 기숙하던 장수와 군사들이 무더기로 동사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군사들의 손가락 발가락도 동상에 얼고 또한 썩어 문드러져 그 참상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참혹했다.
  산성은 고통의 신음 소리에 묻혀 서서히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청태종의 하회가 없자 홍서봉과 최명길이 적진으로 달려가 마부대를 찾았다.
 “홍대감, 최대감 어서 오시오. 추운 날씨에 어인 일이신지.....”
  마부대의 태도는 용골대와는 달랐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장수답지 않게 어색하나마 예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 최명길의 눈에는 다행스러워 보였고 홍서봉의 눈에는 편하게 보였다.
 “황제 폐하의 하회를 기다려도 아니 오시기에 이렇게 달려 왔소이다.  무례를 용서하시구려.”
  최명길이 청태종을 스스럼없이 황제 폐하라 높여 부르자 마부대는 웃었다.
 “아, 우리 용장군이 받은 국서 말이요? 이미 회신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니 받으셨단 말이요?”
 “그러 하오이다, 마대인. 우리 전하께옵서는 황제 폐하의 하회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오이다.
 “잠깐 기다려 보시구려, 내 곧 알아보리다.”
  마부대가 장막안을 향해 소리치자 장수 하나가 달려 나왔고 마부대의 지시에 그 장수는 다시 달려나갔다.
 “나라 사이의 국서는 절차가 있게 마련이라,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입니다.”
 “...............”
 “여러 나라에서 보내 온 국서를 받고 또한 황제 폐하의 답서를 여러 나라에 전하다 보면 다소 혼선이 있을 때도 있고요. 지금 가서 알아보고 오라 했으니 곧 연락이 올 겝니다."
  친절을 베푸는 마부대에게 홍서봉과 최명길은 웃음띤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대인께서는 황제 폐하를 가까이 에서 뫼시니 광영이 크시겠소이다.”
 “신하된 자가 임금을 보필하는 것이야 당연한 도리이지 그것이 어찌 광영이라 할 수 있겠소이까.”
 “우리 같은 소방의 신료들이야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것만으로도 일생의 광영이오이다.”
 “허허....... 그래요.”
  최명길의 몸낮춤이 기분 좋았던지 마부대는 껄껄 웃었다.
 “그런데 마대인, 황제 폐하의 어의(御義)가 어디에 계신지 마대인께서는 아시온지요.”
 “황제 폐하의 어의요?”
 “그러 하오이다, 마대인.”
 “허-허...... 황제 폐하의 어의라.......  이제 곧 아시게 되겠지요.”
  마부대가 즉답을 피해 나갔으나 최명길은 집요했다.
 “곧 알게 되다니요, 마대인. 그게 무슨......뜻입니까?”
  무언가 께름칙한 것이 최명길을 휘감는 것 같았다.
 “공유덕과 경중명이 대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소이다. 이제 곧 무슨 소식이 있겠지요.”
 “예-에.......?!”
  그때 나갔던 마부대의 장수가 국서를 받들고 들어왔다.
 “숙배하시고 받으시요.”
  장수가 소리치자 홍서봉과 최명길은 네번 절하고 그 국서를 받았다.
  국서를 받아 든 최명길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들이 강화도까지 공략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던 것이었다.
  공유덕과 경중명이 강화도로 향했다면 이는 큰일이었다. 만일 강화도가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아찔한 일이었다. 홍서봉과 최명길은 서둘러 마부대의 진영을 나섰다.   어서 속히 군령을 발동해 강화도를 막아야 했다.
 “강화도!  강화도!  강화....도!”
  최명길은 무엇에 씌인 사람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신발이 벗겨지고 관모가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급히 산을 오르는 최명길을 홍서봉이 그 최명길의 신발과 관모를 주워 들고 뒤쫓아가는데 최명길의 걸음이 어떻게나 빠른지 미처 쫓아가질 못했다.
 “전하!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어서 아뢰렷다!”
  까맣게 죽어 가는 얼굴의 최명길이 황급하게 서두르는 모습을 보며 내관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관절 무슨 일이길레 이판 대감이 저리 허둥대시는가........”
 “그러게 말이외다. 생전 차분하신 분이..... 오늘은 별일이외다.”
 “그나저나 빨리 모시게, 다급하신 모양인 게야.”
  대전 내관의 인도를 받은 최명길이 인조가 누워 있는 거처로 찾아 들었다.
 “전...하, 이 일을.... 이일을 어찌 해야만 좋사옵니까. 전 - 하.........”
 “아니, 이판 대감. 무슨 일인데 이리 되었소, 안색이 온통 사색이구려.”
  평소 최명길 답지 않게 쿵쾅거리며 달려와 엎어지듯 부복하는 최명길을 바라보며 오히려 인조가 놀라 물었다.
 “적의 대병이 강화도로 향했다 하옵니다. 어서 속히 서둘러 영을 내리시오소서. 검찰사 김경징에게 강화도 수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말이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자세히 좀 말해보오.”
  튕겨 일어선 인조의 안색도 굳어졌다.
 “전하, 마부대가 말하길 예친왕 다이곤이 공유덕과 경중명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했다 하옵니다. 이는 강화도마저 저들의 수중에 넣으려는 계략이 아니옵니까. 강화도가 먼저 함락되면 조선은.........  조선은 이제 정녕 길이 없게 되옵니다. 전 - 하."
 “그, 그게 사,사실이오?”
 “신이 어찌 거짓을 아뢰겠나이까, 어서 속히 군령을 하달하소서.”
  인조의 눈앞이 갑자기 깜깜했다. 어린 원손이 떠오르자 인조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숭은전으로 향했다.
  숭은전엔 급히 모인 중신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ㅇ


 “도승지는 체찰부에 명하여 전령을 띄우라! 검찰사 김경징은 죽음을 무릅쓰고 서라도 강화도를 사수하라고!”
  놀란 도승지가 체찰부를 향해 바람같이 달려갔다.
 “이를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이요, 설상가상이라 더니...... 엎친 데 덮친 격을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소.......”
 “.............”
 “저들이 이제 강화도마저 유린할 모양이요. 다이곤이 공유덕과 경중명을 이끌고 강화도로 벌써 향했다 하니.....  어허! 어찌하면 좋겠소, 이를 대체 어찌하면 좋겠어.”
 “...............!”
  인조가 불에 덴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자 경황이 없기는 중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인조와 함께 강화도 몽진을 나섰던 중신들이었다. 남한산성에서 발이 묶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중신들이 이제 그 강화도마저 함락될 위기에 놓이게 되자 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마음들이 급했다. 강화도가 함락 당하는 날이면 그날로 조선은 최후를 맞는 날이었다. 
 “어찌 대답들이 없소!”
  인조가 노기를 실어 소리쳤으나 중신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속수무책, 말 그대로 대책이 없었다. 강화로 가는 길이 이미 끓겼는데 어찌 대책인들 세울 수 있으리..........
 “허...허......허.........”
  용상에 기댄 인조가 공허하게 웃었으나 그 눈가엔 눈물이 괴고 있었다.
  그때 도승지가 돌아왔다.
 “지금 막 전령이 떠났나이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갈 수 없는 강화도로 전령을 보낸들 무엇하랴. 고인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렀다. 중신들 사이에서 숨죽인 흐느낌이 들려 오고 있었다.
 “도승지는...........  청태종이 보낸 답서를 읽으라.”
  거의 울상이 되어 버린 도승지가 청태종의 답서를 펼쳐 들었다.
  도승지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짐이 너희 나라에 사신을 보내 정묘맹약을 어긴 죄를 물어 징벌하러 가겠다 누차에 걸쳐 통보했거늘 너희는 진정 마이동풍이었다. 싸움의 실마리는 너희가 제공한 까닭에 짐이 군사를 일으켰으니 이는 하늘이 바른 심판을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척화를 주장하며 싸움을 준비한다기에 짐은 실로 많은 준비를 했었노라. 그런데 짐이 막상 군사를 일으켜 보니 너희는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무슨 까닭이냐. 또한 닭장에 갇힌 비루먹은 닭처럼 산성에 갇힌 채 조석으로 박두한 운명을 앞에 두고서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니 그것은 또 무슨 까닭이냐. 
  전쟁은 병장기로 하는 것이지 세치 혓바닥과 붓끝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너 조선 국왕은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니라. 
  천지의 도는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화를 내려 지극히 공정할 뿐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다. 이에 짐은 천지의 도를 본받아 진심으로 복종하고 항복하기를 청하는 자는 안전하게 하여 줄 것이고 악당이 되어 순종치 않는 자는 서슴없이 벨 것이니라. 교활하고 간사한 자는 말이 막히도록 그 혀를 뽑아 버릴 것이니 너 조선 국왕은 명심하라.
  지금 너희가 짐과 더불어 대적하는 까닭에 군사를 일으켜 이곳에 이르렀지만 만일 너희 나라가 모두 짐의 판도(版圖)안에 들어온다면 짐이 너희를 사랑하기를 어찌 적자(赤字)와 같이 하지 않겠는가. 너희가 살려고 한다면 성에서 나와 항복하고, 끝까지 싸우겠다면 지금 당장 나오라. 두나라의 군사가 서로 맞닥뜨리면 하늘의 바른 심판이 있을 것이다.』
  분노할 기력마저 잃은 중신들이었다. 다만 최명길이 인조를 향해 흐느끼며 
 “만일 이렇게 받아 들일 수 없는 청을 강요한다면 대국은 마침내 시체만 쌓인 빈 성을 얻을 뿐이니 그 또한 이로울 것이 무엇이겠나이까” 했다.
  최명길은 다시 답서를 써야 했다. 분기탱천하던 모습의 인조와 중신들..........  이제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련한 옛이야기였다. 허상일지라도 다시 한번 분기탱천하던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런 모습이 사는 모습이 아닐런지...............
  최명길의 마음속으로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적의 칼날이 목줄기에 닿아 있는 지금 상책이란 있을 수 없었다.
  결론은 하나.........  두손을 번쩍, 하늘 높이 드는 일 이었다. 이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일이었다. 부지런히 적진을 오가며 방법을 찾는 체 해도 이미 지금은 그 과정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남은 것은 결론에 도달하는 시간,  ......시간이 문제였다.

  마음을 가다듬은 최명길이 붓을 들었다.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께 글을 올립니다. 소방은 10년이나 된 형제의 나라로서 대국이 흥하는 초창기에 실로 많은 죄를 지었나이다. 돌이켜보면 지난날의 잘못은 소방이 우매하고 용렬하여 지은 죄업이었나이다. 이제야 비로서 그 죄업을 깨달아 참회하고 스스로 반성하고 있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부디 황제 폐하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오늘날 소방의 간절한 소망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지난날의 죄를 깨끗이 씻고 황제 폐하의 명을 쫓고자 할뿐입니다. 이를 허락하여 주신다면 모든 절차와 의식을 행하여 따르겠나이다. 다만, 하루바삐 성을 나오라는 명은 실로 사랑하는 뜻에서 하신 것이지마는 아직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의 노여움이 절정에 이르시어 안에 있어도 죽고 밖에 나가도 죽게 되었으니 이런 까닭으로 아직 성에 머물러 있사오니 정상을 헤아려 주시오소서.
  삼가 생각하건대 황제의 덕은 하늘과 같아 소방을 불쌍히 여겨 반드시 용서하실 것이라 믿사옵니다.』
  쓰기를 마치자 최명길은 비변사로 향했다. 중신들과 더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국서의 초안을 조목조목 짚어 가며 읽어 가던 김상헌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 초안을 북북 찢어 팽개쳐 버렸다.
 “이것이 항서이지 무슨 국서요.”
 “아니 대감, 이것은 국서올시다. 이 무슨 해괴한 망동이요?”
  오랜만에 자리에 나온 김류가 눈을 하얗게 치뜨며 김상헌을 꾸짖었다.
 “여보시오 이판! 이판의 선 대부(先大夫)께서는 선비들 사이에서도 지조 있는 선비로 추앙 받았었소. 그 사실을 잊었소? 그런데 그 피를 이어받은 이판은 어찌 그 모양이오!”
  김상헌의 노기에 병조판서 이성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먼저 손가락질부터 퍼부었다.
 “어찌 대감을 옳지 않다 하겠소이까. 허나 이는 부득이한 일이 아니오이까. 대감은 전부터 화친을 배척하여 나랏일을 이 지경에 이르도록 방치하고도 한일이 무엇이오이까. 비록 후세에 이름은 남을지 모르나 임금과 사직을 배반한 패덕이 아니오. 지난날 형판이 제 자신의 명예를 지키겠다고 적장 앞에 고변한 일이나 대감이 입으로만 떠벌이는 일이나 무엇이 다르오. 입이 있으면 어디 말해 보시오. 예판!”
  병조판서 이성구가 양볼을 파르르 떨어가며 일갈하자 김상헌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말 한번 잘했소. 내가 나가 죽으라면 못 죽을 줄 아시오. 대감이 나를 묶어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 주시오. 그러면 나는 가서 열번이고 백번이고 마땅히 죽으리다.”
 “누가 나가서 죽으라 했소? 척화를 고집했으면 마땅히 오랑캐 진영에 가서 의(義)로써 대적해 보라 이 말이외다. 안에서만 무찌르자, 무찌르자 하지 말고 말이외다. 우물안 개구리도 유분수지 어찌 대감만 깨끗한 척 하시오이까!”
  최명길이 두사람을 말리며 찢어진 국서를 주워 들었다.
 “대감께선 찢으셨으나 나는 다시 붙여야 하겠습니다.”
  최명길은 구겨진 국서를 펴 풀로 찬찬히 붙여 나갔다. 자존심이 강한 김상헌이 이성구로부터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하자 눈에 독을 품운채 비국을 뛰쳐 나갔고 화가난 이성구 또한 밖으로 뛰쳐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그 이성구를 보며 신익성은 
 “화친을 주장하는자는 내가먼저 칼로 베겠다.”며 눈을 부라렸으나 그 말은 힘 잃은자의 독백에 지나지 않는 말이었고 이제는 그 신익성을 눈여겨 보는 사람도 없었다.
  이때 강화도로 출발했던 전령이 되돌아 왔다. 적의 매복에 걸려 초죽음이 되다시피 되어 돌아온 처참한 몰골의 전령을 보자 산성 사람들은 두려워 자포자기의 극단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날부터 김상헌은 식음을 전폐한 단식에 들어갔다. 굶어 죽겠다는 것이었다.





                                  ㅇ


  다음날 새벽, 좌의정 홍서봉이 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우의정 이홍주와 최명길, 윤휘가 적진을 향해 출발했다. 어젯밤, 우여곡절을 겪은 눈물로 얼룩진 그 국서였다. 적진에서는 용골대가 맞았다.
 “마장군께서는 출타 중이오이다. 부득이 내가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리 아시오.”
 “.............”
  지난번에 비해 다소 상냥하게 맞았으나 성질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애써 겸양을 떠는데도 목소리와 행동은 거칠었다.
 “자리에 앉으시오.”
  용골대는 자리에 앉은 채 사신에게 자리를 권했다.
 “언제쯤 조선의 임금이 성을 나올 꺼요, 그거나 말해 보시오?”
  사나운 언사에 행동거지는 순 쌍놈이었다. 사신이 가져간 국서에는 관심도 없이 다리를 꼬고 앉아 연신 이빨만 쑤셔 댔다.
 “성을 나오시다니요......?”
 “그럼 굶어 죽을 꺼요?”
  사신들은 기가 찼다. 개트림이나 득득 해대며 이빨만 쑤시고 있는 놈의 코빼기를 한대 갈기고 싶은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보시오, 용장군. 언사가 너무 지나치시오, 굶어 죽다니요.”
 “왜, 내말이 틀렸소? 산성엔 지금 잡아먹을 개도 없잖소.”
  흘겨보던 용골대가 트림을 꺼억하며 숨을 훅 내쉬자 역한 기름 냄새가 사신들 코앞까지 풍겨 왔다.
 ‘에이 더러운 쌍놈의 새끼!’ 하며 벌떡 일어선 최명길이 용골대의 면상을 오른발로 냅다 걷어찼다. 그러자 코피를 쏟으며 뒤로 나가자빠진 용골대가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와 잘못 했다며 벌벌 떠는 모습이..........  환상처럼 보이다 사라졌다. 꼭 그러고 싶었다.
  최명길은 어금니를 꾹 물었다. 앞으로도 이런 수모는 얼마든지 당할 터였다.
  조선 사신들이 눈에 가득 독을 품고 미동도 않자 용골대는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채 손으로 최명길을 가리켰다.
 “이보시오, 최대감. 국서를 이리 가져와 보시오.”
  최명길이 국서를 공손히 받쳐들고 가자 용골대는 그 국서를 누운 채 왼손으로 덥석 집어들었다.
 “잘 썼겠지요? 황제 폐하의 노여움을 살 만한 대목은 없겠지요?”
  대답 대신 조선 사신들이 이빨을 앙 다물자 머쓱한 용골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서 기다리시오. 황제 폐하를 배알하고 올 것이니.....”
  조선 사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했다. 용골대가 조선의 국서를 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기다리는 사람의 애간장은 녹아 내렸다. 황제를 배알하러 간 용골대가 네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불안, 초조, 긴장이 극도에 달한 세사람은 생병이 날 지경이었다
  이홍주와 최명길, 윤휘는 배고픔도 잊은 채 목을 빼어 차례로 그 장막 안쪽을 바라보았고 그러다 진이 빠져 지칠대로 지친 세사람이 늘어져 있을 때 용골대가 씩씩대며 들어왔다. 반색하며 일어서던 조선 사신들이었으나 그러나 그 얼굴에 날아든건 불안의 그림자였다.
 “뭘 잘못썼길레 황제 폐하께서 저리 노하신 단 말이요!”
  그 한마디에 세사람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잘못쓰다니요? 우리들로서는 극존칭을 썼소이다.”
 “극존칭?”
  노려보던 용골대가 그 국서를 홱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이것이 극존칭이라는 거요?”
 “..............?”
 “당신들은 명나라에 국서를 보낼 때도 그 따위로 써 보냈소? ”
 “..............?”
 “그깟 죽어 자빠지는 명나라에는 신(臣)칭을 하면서 죽고 사는 명줄을 죄고 계시는 우리 황제 폐하께는 왜 그다지 뻣뻣하냐 그 말이오.”
 “...........!”
 “......원 니미.......”
  그 국서로 말미암아 용골대는 청태종에게 무려 네시간 동안이나 들볶였다. 그까짓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거라면 당장 옷 벗으라고............
 “돌아가시오. 돌아가서 잘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다시 잘 써 가지고 오시오........  알겠소, 내 말?”
 “.............”
 “명나라에 보내듯 하란 말이오!  .........이 말도 못 알아들었으면 뒤질 날만 기다리든가...........”
 “...............!”
  조선 사신들의 목구멍으로 쓴 물이 올라왔다. 용골대의 흉폭한 언사에 목이 메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용골대의 그 말뜻을 모를 리 없는 조선 사신들이 마치 죄진 사람처럼 용골대 앞에 고개 숙인 채 그 용골대의 화가 누그러들기만을 기다렸다. 황제가 노여워했다면 그 앙화가 곧 조선 조정에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뭣들 하는 게요, 돌아들 가지 않고!"
  용골대가 또 한번 꽥! 하고 소릴 지르자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고 조선 사신들은 뒷걸음쳐 나왔다. 
  이홍주, 최명길, 윤휘 등이 청나라 진영을 무사히 벗어나 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짧은 겨울 해는 이미 중낮이 겨워 해거름에 있었고 점심조차 거른 허기진 배의 조선 사신들이 그 아련하게 보이는 산꼭대기 남한산성을 핏기 잃은 얼굴로 바라보는데 조선 사신들의 두 다리가 자꾸 떨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만 싶었다.

  인조와 중신들이 모인 숭은전엔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용골대가 한말을 그대로 전하지 않을 수 도 없어 그대로 고했으나 다 듣고 난 인조와 중신들은 고개를 깊이 떨군 채 어깨만 가늘게 떨고 있었다.
  "..............."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이 칠흑같이 어두운 절망만을 몰고 올 뿐인 듯.
  그렇게 정지된 시간은 깨어날 줄 모르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인조가 무거운 고개를 천천히 들고 최명길을 바라보았다.
 “그일은......  용골대가 바라는 대로...... 하시구려........  방법이.... 없...질..않소.”
  그 한마디에 중신들은 엎어지며 통곡을 쏟아 놓았다.
 “망극하옵니다, 전 - 하.”
 “전 - 하........”
  중신들의 통곡 소리를 뒤로 한 채 인조는 숭은전을 나섰다. 이제야 비로서 모든 것이 홀가분해진 것이었다.
  이제 청나라는 임금의 나라요 조선은 그 신하국이 된 것이다.
  울음을 그친 중신들이 비변사에 모여들어 국서를 새로이 초하기로 했다.    그 첫머리가
 『조선 국왕 신(臣) 이종(李倧)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로 시작되었다.
  병조판서 이성구는 김상헌을 빗대어 괜한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놈의 늙은 여우가 아침부터 울어대더니 일이 이지경이 되었소. 그 놈의 늙은 여우부터 베어 없애야 나라가 성할 것인데......  이놈의 늙은 여우를 그냥!”
  책상을 내리치며 분통을 터트리는 이성구의 과격한 언사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의창군과 신익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피했다. 잘못하면 허명만 탐한 무리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죽을 때까지 결코 함부로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바뀐 세상이었다. 갈수록 저들의 요구는 거세어 질 것이고 또한 거칠어 질 것이었다.
  척화를 부르짖던 신료들을 잡아 보내라고 할 것은 당연한 순서일 것이고 또 그 다음은 왕족을 보내라 할 것이었다.

 























                            4. 항 복 





  강화도........  
  정월 초순부터 수만의 적군이 삼강(三江)에 진을 치고 가옥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작은 배를 만들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 큰배를 만드는데, 그 의도는 강화도에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이 강화도를 휩쓸고 있었으나 강화도 검찰사 김경징은 콧방귀도 안 뀌었다.
  불안한 소문이 김경징의 귀에 조금이라도 들릴라 치면 김경징은 
 “어느놈이 그따위 헛소문을 퍼트려 민심을 교란하려 드느냐, 이곳 강화도는 금성탕지(金城湯池: 방비가 아주 견고한성)와 같은 곳이니라. 제놈들이 날아 들어오지 못하는 한 얼음을 깨고 오겠느냐, 아니면 헤엄을 쳐서 들어오겠느냐. 이런데도 불구하고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놈이 있다면 그 즉시 참형에 처할 것이니라.” 하며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소문은 그런 엄포를 무서워하지 않고 파문처럼 자꾸만 퍼져 나가자 그 소문의 진위를 파악해 내려 김상용, 한흥일, 봉림대군 등이 바삐 다니며 동분서주 하는데도 김경징은 오히려 그들을 비웃었다. 뿐 만 아니라 김포와 통진에 있는 나라 곡식을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싣고와서는 그 곡식으로 가난한 피난민들에게 고리의 돈을 받고 팔거나 술을 빚어 친구들과 방자히 마시고는 큰 소리 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나라가 어찌 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지경에 다다랐는데 대군(大君)이라 하여 어찌 내일에 참견하려 하며 피난 온 대신이 어찌 감히 나를 지휘하려 하는가. 나는 그래도 나라의 대임을 맡은 중신(重臣)중의 중신이 아니더냐. 아버지는 영의정에 체찰사를 겸하였고 아들은 검찰사이니 우리집안이 아니면 누가 이 나라의 환란을 책임지겠느냐.”
  그러나 매양 술에 젖어 횡설수설하는 김경징을 꼬장꼬장한 선비들이 마냥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별좌 권순장과 생원 김익겸, 진사 심희세와 윤선거등이 함께 몰려가 김경징을 책망했다.
 “검찰사 대감, 지금이 술마시고 풍악을 울리며 노류장화에 젖어 있을 때요? 지금은 나라의 형세가 풍전등화와 같이 위급지경에 이른 비상시국이오이다. 피난지의 수상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은 못할 망정 이것이 다 무엇이요. 어서 치우고 맡은바 소임을 다해 주시오. 검찰사 대감!”
  한상 걸판지게 차려 놓고 친구들과 함께 한참 흥에 겨웠던 김경징이 떼로 몰려온 선비들에게 일침을 당하자 귓구멍이 가시에 찔린 듯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네까짓 이름 없는 천한 것들이 나더라 무엇이라? 너희가 정녕 나를 모른단 말이더냐?”
 “.................”
 “아버지는 영의정에 체찰사를 겸한 나라의 어른이요, 나는 그 아들이자 강화도 검찰사이니라. 이런 나에게 네깟 것들이 찾아와 감히 무어라 방정맞게 입방아를 찧는 게냐!”
  노기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던 김경징이 급기야 명을 내렸다.
 “저놈들을 당장 형틀에 잡아 묶어라!” 
  그 한마디에 마당 분위기는 갑자기 살벌하게 식어 갔다.
 “내 오늘 매에 못이겨 죽어 가는 저놈들의 꼴을 보아 가며 한잔해야겠다. 나를 모욕하려 들면 저 꼴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 줄 것이니,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들을 당장 잡아 묶지 않고!”
  군졸들이 달려들어 선비들을 묶고 일변 형틀을 내오고 하며 어수선을 떠는 사이 김경징이 사람 잡는다는 소문이 뛰닫고 내달아 원임 대신들과 봉림대군의 귀에도 들렸다.
  눈을 하얗게 치뜬 김상용이 뛰어들어 보니 가관이었다.
  형틀에 묶인 선비들은 선비들대로 악바쳐 지르는 소리에 동헌 뜰은 악머구리 끓듯 시끄러웠고 동헌 마루엔 술에 취한 남녀가 또한 그들대로 한데 어우러져 한참 춤판을 벌이고 있었다.
  관원들의 제지를 뿌리치며 달려든 김상용이 그 술판이 벌어진 마루 위의 술동이를 번쩍 들어 걸판진 상위에다 냅다 메쳤다.
  상과 술동이가 천둥 벼락치는 소릴 내며 박살이 났고 놀란 기생들은 저마다 내 뛰기에 바빠 춤판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술에 취해 멍롱한 눈을 치뜨는 김경징을 향해 김상헌은 분기에 가득찬 노성을 지르며 준열하게 꾸짖었다.
 “네이놈! 네애비가 영의정에 체찰사를 겸한 줄은 세상이 다 아느니라.  네놈이 네애비를 믿고 천둥 망아지처럼 날뛴다만, 하늘 무서운 줄 왜 모르느냐.” 
 “................”
 “다 늙은 네 애비가 상감을 뫼시고 외로운 산성에 갇혀 그 위기가 조석에 박두해 있거늘 네놈은 이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 
 “................” 
 “네놈이 어명을 앞세워 무엄하게 날뛴다만 그 어명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살피라는 어명이지 어째 이런 술잔치나 벌이고 바른말하는 선비들이나 잡아다 족치라는 어명이더냐!  네 이노-옴!”
  노재상의 분기는 대단했다. 김상용은 김상헌의 형으로 꼿꼿하기가 김상헌 보다 더한 사람이었다. 보다 보다 더이상 못참겠는 불의는 목숨을 내어놓고 싸우는 김상용인지라 나라안에서 그 이름은 김상헌 못지 않게 드높았다. 그런 김상용이 피난지임 을 감안, 김경징의 처사가 다소 못마땅하더라도 참고 넘기려 했으나 도저히 참고서는 못 견딜 지경에까지 이르자 예의 그 목숨을 내어놓고 싸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 봉림대군도 뛰어들어 그 광경을 목도하고 있었다.
 “나라에 닥친 위기가 경각에 달려 있음은 네놈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더냐!”
 “...............”
 “어명을 받든 네놈이 삼남의 군병을 모아 상감을 구원하러 가야 옳은 일이거늘 어찌하여 너는 삼남의 군졸을 모아 강화도로 오겠다는 장수들의 의논마저 묵살하여 그 일을 저지하였느냐. 그러고도 네놈이 무사히 살아남길 바랬더냐!”
  김상용이 대갈일성을 터트리며 동헌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준엄하게 꾸짖자 뜰에 남아 있던 놀란 군졸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도망을 쳤고 김경징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찰사의 인(印)을 풀어 마당에 던지며 맞고함을 쳤다.
 “그렇게 잘났으면 노인네가 해먹으면 될꺼 아뇨!”
 “무어라?”
 “인을 저어기 풀어 놨으니 가져다 해먹으쇼, 언-니미........”
  술에 취해 눈동자가 풀린 김경징은 턱으로 그 인을 가르키고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하품을 늘어지게 해댔다.
 “무어라 했느냐, 네 이놈 ! 정녕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그 말에 김경징은 하늘을 멀뚱멀뚱 쳐다보고는 빈정거렸다.
 “대감은 저 파아란 하늘이 두렵소?”
 “무에야?”
 “죄많은 사람은 하늘이 두렵겠지......  그러나 난 하나도 두렵지 않소.  파아란 하늘이 얼마나 좋은데 두렵다고 하쇼. 엉? 대감.”
 “무.. 무엇이, 네 이노옴!”
  술에 취해 방약무인으로 떠들어대는 김경징과 더불어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라 여겼음인지 김상용의 꾸짖음은 처음에 비해 노기가 많이 누그러들었다.

  그날 이후로 김경징은 강화도 외곽의 수비나 작은 섬의 정탐에는 아예 손을 놓은 채 술타령만 벌였고 봉림대군과 김상용 등, 일부 전직 고관들이 사병을 풀어 강화도 밖의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21일 오후 해가 진 어스름에 통진가수(通津假守) 김정(金 )이 김경징에게 화급을 다투는 전령을 보냈다.
 『적병이 수레에 배를 싣고와 나루에 배를 띄우고 있으니 밤사이 강화도에 상륙하려 함입니다. 속히 조처를 취하시오소서.』
  전령이 전한 보고서를 책상 위에 펴 놓고도 김경징은 오히려 빈정거렸다.
 “이 겨울에, 그것도 이 야밤에 적병이 강을 건넌다?”
 “필경 그러할 것이오이다.”
 “허--  이 놈이 유언비어를 퍼트려 군정을 더럽게 어지럽힐 놈일세.”
 “...............?!”
 “야, 이놈아! 너라면 이 밤에 저 강을 건너겠느냐?”
 “...............?”
 “이놈은 필경 나를 모함하기 위해 헛소문을 퍼트리려 온 놈이 분명 한 게야!”
 “...............?”
 “우선 네놈을 군령으로 다스리고 볼일이렷다!”
 “아니, 검찰사 대감! 적병이 강건너에 가득 찼소이다. 어찌 확인도 없이 생사람을 잡으려 하시오이까.”
 “시끄럽다, 이놈아! 네놈과 같이 얕은꾀를 쓰는 놈들 때문에 늙은 대신들과 나이 어린 대군까지 나를 업수이 여기는 것 아니냐. 내가 네놈의 목부터 베어 다시는 이런 요언이 판치지 못하도록 그 뿌리를 뽑고야 말겠다.”
 “검찰사 대감, 확인부터 해 보시오소서. 이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나이다.”
  다급해진 전령이 사력을 다해 외쳤고 그 외침은 절규에 가까웠다.
 “아니, 이놈이? 그래도 그따위 주둥일 함부로 놀렷!”
  안면 근육이 실룩거리던 김경징이 전령의 따귀를 힘껏 갈기자 전령은 얻어맞은 따귀를 감싸안으며 원망스런 눈초리로 김경징을 쏘아보았다.
 “네놈이 째려보면 어쩔 테냐. 고-얀놈, 여봐라!”
  김경징이 소리치자 호위 무사들이 달려나왔다.
 “이놈을 잡아내어 유언비어와 허위사실 유포 죄로 효수하렸다.”
  새파랗게 질린 전령이 호위 무사들에게 끌려가며 악을 썼다.
 “확인부터 하고 날 죽여도 늦진 않소이다. 검찰사 대감! 강화도의 수많은 생민들을 생각해 보소서. 검찰사 대가암!”
  그 전령이 문턱을 막 넘기 전에 숨넘어가는 급보가 또다시 전달되었다.  갑곶 파수장이었다.
 “거, 거, 검찰사 대감. 크, 큰일났소이다. 갑곶나루 십여리 안팎이 온통 적선들로 꽉 찼소이다.”
 “뭣이야!”
 “어서 서둘러 방책을 세우소서. 화급을 다투는 일이오이다.”
  그제서야 놀란 김경징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오만과 안이함에 젖어 있던 김경징이 갑자기 닥친 환난에 방비책이 없음을 한탄하며 급한 대로 주변의 가까운 사람부터 불렀다. 그리고 끌려가던 전령도 불러 세웠다. 한사람의 군사라도 아쉬운 때였다.
  평소 작전에 관심 없던 김경징이 더구나 급한 때를 당해 제대로 된 작전을 세울 리 없었다.
  급보를 받고 달려온 사람에게 그저 하나씩 임무를 부여할 뿐이었다.       제일 먼저 달려온 갑곶파수장 이일상(李一相)과 박종부(朴宗阜)에게 군병과 화약, 철환등을 나누어주어 파수에 만전을 기하라는 당부를 하는데 윤신지가 달려왔다.
  해숭위 윤신지에게는 대청포(大靑浦)를 지키게 하고, 그 다음 전창군 유정량에게는 불원(佛院)을, 또 그 다음 이경(李坰)에게는 가리산을 맡아 지키게 하고선 자신은 진해루(鎭海樓)에 나가 갑곶을 바라보며 싸움을 독려할 생각이었다.
  뒤이어 강화유수 장신이 달려오자 장신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삼아 광진에 묶어 두었던 선단을 갑곶으로 불러오게 했다. 경황중에도 적의 선단이 강화에 상륙하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이때 다행이도 충청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晋昕)이 수군과 함선 일곱척을 이끌고 오자 김경징은 사지에서 구원군 만난 듯 기뻐하며 그 배들을 갑곶에 배치시켰다.
  또한 우르르 몰려든 원로 대신들과 봉림. 인평 두 대군들에게 김경징은 사세의 위급함을 설명하고 원로 대신이라 할지라도 죽기로 싸워 성을 지켜 줄 것을 요청, 이에 결연히 나서는 한흥일과 정백형에게 성첩(城堞)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연미 서쪽은 풍덕군수 이성연(李聖淵), 연미 북쪽은 개성유수 한인(韓仁)과 도사(都事) 홍정(洪霆), 갑곶이하는 첨지 유성증, 선원(仙源)이하는 유정량, 광성(廣城)이하는 윤신지에게 다시 맡겨 지키게 했다. 이에 따라 한흥일과 정백형, 임선백(任善伯)등은 집에서 데리고 온 하인들과 함께 남문을 지키고, 회은군이 여러 종친을 거느리고 동문을, 민광훈. 여이홍등 여러 조신(朝臣)들이 서문 성루에 앉았으나 그나마 북문은 사람이 없어 지키질 못했다.
  그러나 성을 지키겠다고 성루에 오른 사람들이나 이를 지켜보는 아녀자들이나 서로가 민망하여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성루에 오른 사람들은 병장기라곤 잡아 본 역사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요 조총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맨손으로 성루에 올랐으나 나오는 건 헛웃음뿐이었다.
 “하다못해 창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오이까. 창고에 있는 창과 활은 언제 쓸려고 저렇게 아껴 두는 것이오. 지금 곧 나눠주시오. 맨손으로야 어찌 성을 지키겠소이까.”
  한흥일이 김경징을 찾아가 무기 공급을 요청하자 김경징은 엉뚱한 소리로 그 한흥일을 돌려보냈다.
 “그건 우리 아버지가 만들어 논 것인데 어찌 내가 맘대로 쓰겠소. 기다려 보시오. 우리가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하늘이 도와 좋은 수가 있겠지요. 기다려 봅시다.”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이 도울 것 같았으면 전쟁이 나지 않아야 했다. 병장기를 나눠 달라는데 하늘이 도울 것이라니..........  한흥일은 하염없이 실소하며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한흥일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상용은 가슴을 치며 분해했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말인가, 하늘이 도울 것이라니......  아이고 이 미친놈의 두 부자가 기어코 나라를 절단 내는구나. 애비는 나라를 그르치더니 그 자식놈은 강화도마저 말아먹으려 작정을 했어.....  어이구.......”
 “대감, 고정하소서.”
  입술이 파랗게 죽어 가던 김상용이 비틀하자 놀란 한흥일이 달려들어 그 김상용을 부축했다.
 “나 같은 늙은이야 지금 죽는다 한들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마는 이대로는 안되겠네. 저 미친 망아지에게 강화도를 맡겼다가는 모두가 생귀신이 되고 말겠어.”
 “...............”
 “아무래도 봉림대군을 만나야겠네. 저놈의 미친 망아지를 감찰할 수 있는 사람은 조선에선 오직 봉림대군 뿐이네. 봉림대군 밖엔 없어......”
 “어리신 대군께서 무얼 하겠습니까?”
 “19세라면 어리달 수만은 없지. 대장부 아니신가. 이러한 때에 무지렁이라 하는 저 민초들의 고통 또한 두눈으로 똑똑히 보아들 필요도 있으실 걸세.  ............어디 계신가.”
 “빈궁마마께 다녀오신다 하셨으니 곧 돌아오시겠지요. 잠시만 기다려 보오소서.”
  그러나 호랑이 제말하듯 한흥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봉림대군이 들어섰고 김상용이 반색하며 다가갔다.
 “대군마마, 대군께오서 친히 진지를 한번 살펴보시지요. 대군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진지를 살펴본다 하면 김경징이 반드시 말릴 것입니다. 김경징의 독단을 막고 다른 방책을 세우실 분은 이곳에 대군밖에 아니 계십니다.”
 “.................?”
 “한번 다녀오시지요. 세밀히 살펴보고 오시면 저희 같은 늙은일지라도 모든 꾀를 내어 적을 물리칠 계책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김상용의 간곡한 청을 곁에 있던 한흥일이 눈빛으로 동조하자 봉림대군은 흔쾌히 승낙했다.
  두려운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봉림대군이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횃불을 밝혀 든 19세의 봉림대군은 김경징과 함께 순찰에 나섰다.
  그러나 그 용기 백배하여 나섰던 봉림대군의 두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진지에는 장수 몇 사람과 눈에 독이 오른 초급 무관 몇 명만이 남아 있을 뿐 병사들이 없었다. 김경징으로 인하여 무너진 기강 위에 적의 대군이 밀려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기겁한 병사들이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진 것이었다. 허탈하다 못해 기가 막힌 봉림대군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봉림대군의 이야기에 넋이 나간 김상용과 한흥일의 볼 위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ㅇ


  사람이, 군사가 있어야 싸움이고 전쟁이고 치러 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싸움을 치러 낼 군사가 없었다.
  무지렁이라 불리우는 저 수많은 민초들이 이제 더이상 나라에 충성과 무모한 희생은 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내 보인 것이었다. 잘난 너희들이나 잘해 먹어 보라는 무지렁이 민초들의 성난 돌팔매질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
  민초들의 그 단단한 등돌림에 봉림대군은 숨죽여 밤새 오열했다.
  군대의 기강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민심이 떠난 것이었다. 그 민심이 떠난 현장을 봉림대군은 두 다리가 떨리고 가슴이 터지도록 보고 또 보고 분명하게 확인까지 한 것이었다.
  숨죽여 오열하는 봉림대군의 눈앞에 병사들이 사라진 그 텅빈 진지가 자꾸 어른거렸다.
  동녘 하늘이 어스름 밝아 올 무렵, 여명을 가르며 작은 배 한 척이 진해루 아래로 미끄러지듯 들어오고 있었다. 적군의 순찰 조였다.
  배에서 내린 일곱명의 적군이 사방으로 흩어져 해안을 샅샅이 살펴본 끝에 매복한 군사가 없음을 확인하자 백기를 흔들었다. 그 신호를 시작으로 적의 선단이 새까맣게 강을 덮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몰려드는 적의 선단을 발견한 충청수사 강진흔은 일곱척의 전함을 몰고 앞으로 나아갔다. 강진흔이 천자총통을 쏘아 맨 앞서 달려나오던 적선 두척을 침몰시키며 대접전을 벌이자 사기가 오른 조선 수군들은 7척의 배를 몰아 수백척의 적선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포를 쏘아 적선을 침몰시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도 없이 밀려드는 적선을 단 일곱척의 배로 상대하기란 처음부터 무리였다. 일곱척에 의해 수십척이 침몰되었으나 적 선단은 겁을 먹기는커녕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포위해 들어왔고 어느새 조선 수군은 독안에 든 쥐의 형세로 몰리고 있었다.
  포탄과 화약이 떨어져 더 쏠 수 없이 된 배들이 포위한 적 선단의 노리개가 되어 가고 있을 때 적이 쏜 화포에 강진흔의 배도 부서지고 조선 수군의 배 한 척도 침몰 당하자 강건너에서 응원하던 몇 되지 않는 조선 군사들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때 장신이 거느린 조선군의 선단이 갑곶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를 본 강진흔의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육지의 조선군은 환호를 올렸다. 강진흔의 선단이 구원되길 바란 것이었다.
  그러나 주사대장 장신의 선단이 당연히 나서서 싸워 줄 것으로 알았던 강진흔과 육지의 응원군 얼굴에 실망과 분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장신이 나서서 싸우길 꺼려하는 것이었다.
  장신의 선두에 섰던 정포만호(井浦萬戶) 정연(鄭 )과 덕포첨사(德浦僉使) 조종선(趙宗善)이 가까이에 있던 적선 1척을 침몰시키고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장신은 징을 쳐 그들조차 회군시키고는 서서히 도망을 치고 있었다. 이를 본 육지의 군사들이 이를 갈며 분개했고 사지에 몰린 강진흔은 죽을힘을 다하여 싸운 끝에 포위망을 벗어나 일단 후퇴하는데 성공했으나 수군들의 그 몰골은 비참하기 그지없었고 그 수군들의 악바쳐 치뜬 두 눈에서는 파란 살기가 광선처럼 폭사되고 있었다.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서도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느냐. 이놈, 장신아!"
  강진흔의 선단이 후퇴하자 적 선단에서는 강화도를 향해 일제히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쏘아 대기 시작했다.
  천둥 벼락같은 대포 소리에 놀라 겁먹은 육지의 조선 군사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날아온 포탄이 바로 옆에서 작열해대자 으잌! 하고 놀란 군사들이 창칼이야 어찌되던 말던 맨손으로 치뛰고 내리뛰다 그 길로 달아나 도망쳐 버렸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잖아도 겁이나 죽을것 같았는데 그걸 참고 미련을 쓰고 앉아 있다가는 포탄에 맞아 죽는 데야 내 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포탄은 진해루에도 떨어졌다 
  진해루에 당당하게 나타난 김경징이 이민구와 호위 장졸들을 거느리고 근엄하게 자리잡고 앉았는데 하필이면 포탄이 진해루 마당에 떨어져 폭발했다. 얼마나 놀랐던지 김경징은 한길이나 치뛰었고 뒤로 자빠진 이민구는 일어날 줄 몰랐다.
  단 일격의 포탄에 겁을 집어먹고 정신없이 파고든 것이 진해루 마루 밑이었다. 마루 밑에 납작 엎드린 김경징과 이민구가 좀더 안전하게 숨을 곳을 찾느라 눈알을 굴리는데 눈앞에 나루 창고가 보였다. 누각보다는 창고가 훨씬 더 훌륭하게 생각되었다.
  마루 밑의 두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창고를 향해 뜀박질을 쳤다.    마침 그곳엔 두 대군과 김상용, 박동선, 조익 등이 먼저와 있었고 호조정랑 임선백이 눈에 불을 켠 채 숨을 씩씩대고 있었다.
 “다들 어디 계신가 했더니 나보다도 먼저와 계셨구랴”
  김경징이 다른 사람들도 마루 밑에 숨었다 도망온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먼지를 함빡 뒤집어 쓴 김경징과 이민구가 눈알을 반들거리며 창고 안의 사람들을 휘둘러 본 후에 먼지를 털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안되겠소이다. 나는 성안으로 다시 들어가 성을 지킬 계책을 세우겠소. 이러다간 정말 큰일나겠소이다.”
 “큰일은 이미 났질 않았소이까?”
  휘휘 거리며 먼지를 터는 김경징을 향해 돌연 큰소리가 났다.
  호조정랑 임선백이었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천혜의 요새인 장강을 버리고 어찌 허물어진 성안에 들어가 숨으려고만 하시오이까. 나라의 존망이 이번 한 싸움에 달려 있는데도 대장된 몸으로 나아가 싸울 생각은 아니하고 어째서 후퇴할 생각만 하여 군사의 사기를 떨구오이까!”
  눈에 불을 켠 임선백의 나무람에 김경징은 먼지 털던 손을 멈추고 그 임선백을 빤히 올려 보았다. 그때 또한번 포탄 터지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 듯 하자 놀란 김경징은 또 다시 창고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끓어오르는 분노보다 당장 살길이 급했다.
  그런 김경징은 쳐다도 안보고 임선백은 봉림대군에게 고해 올렸다.
 “적선은 빠르기가 날으는것 같고 우리 배는 썰물때는 움직이기 곤란한 큰배이오니 수군만 믿고 기다릴 수는 없사옵니다. 지금이라도 진해루 아래에 진을 펴시고 지세가 좁고 험한 곳에 매복군을 두어 마지막 혈전을 준비하시는 것이 도리일 듯 싶습니다. 이미 허물어진 성을 지킨다는 것도 아이들 장난과 같은 말이오니 성안에 있는 군사를 모두 불러내어 모든 병장기를 다 쓰더라도 나루터에서 전력을 다해 상륙하는 적을 막는 것이 우선 상책이라 사료되옵니다.”
 “그리하소서.”
  김상용이 눈에 힘을 주며 봉림대군을 바라보자 봉림대군은 선뜻 나섰다.
 “그리하리다. 지금 곧 성에 들어가서 모든 군사와 병장기를 총동원해서 이끌고 오겠소.”
  봉림대군이 말을 타고 성을 향해 달려갔는데도 김경징은 여전히 창고 바닥에 엎드려 일어날줄 모르고 있었다.
  봉림대군이 말을 몰아 성에 들어 섰을 때에는 그러나 성안엔 군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성문을 지키는 파수꾼도 수문장도 없었다. 성안을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군사라고는 단 한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적의 대포 소리에 놀란 군사들이 이미 모두 도망쳐 버린 것이었다.
  "이럴 수가!"
  낙심한 봉림대군이 나루 창고로 다시 돌아와 모두를 성으로 피신시키고 났을 때 무턱대고 홍이대포를 쏘아 대던 적선들도 해안에 조선 군사들이 없음을 알고는 앞을 다투어 상륙전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청병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성을 향해 진격해 들어가자 그 앞엔 거칠 것이 없었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단숨에 성앞까지 진격해 들어온 그 위용에 넋을 잃고 쳐다보던 김경징의 손끝이 싸아 하게 시렸다. 온몸으로 돋는 오싹한 소름에 한기를 느낀 것이었다.
  그때 성루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며 벼락치듯 포탄이 또한번 작열하자 김경징의 혼이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보다도 두 다리가 먼저 내 뛰었다.
  말 잔등에 납죽 하고 달라붙은 김경징은 뒤돌아보는 법도 없이 그 길로 달아나 장신의 선단에 숨어 버렸다.
  검찰사가 달아난 성안은 금새 아수라장이었다. 군사가 없으니 군령이 설 까닭도 없거니와 늙은 재신과 늙은 부녀와 늙은 궁인들만이 남아 있는 성안은 죽음의 그림자로 가득 차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대부의 드높은 기품을 자랑하던 여인들도, 다음 대의 중전이 될 세자빈도 돌보아 주고 막아 줄 사람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비바람에 고개꺽인 한낱 들꽃의 신세에 지나지 않았다.
  세자빈이 있는 행궁의 사정은 더욱 비참했다. 궁녀들조차 도망가고 없는 텅 빈 행궁엔 내관 몇 사람과 급히 달려온 봉림, 인평 두 대군이 세자빈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열달이된 세손을 안은 채 눈물범벅이된 세자빈은 발만 동동 굴렀다. 배행할 신료도 없이 성문밖으로 나선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엄동설한에 여자의 몸으로 적병의 포위망을 뚫는다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이 한목숨 버리는 일이야 무엇이 아깝고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마는 세손만은..........  세손만은 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고고한 자태를 끝끝내 잃지않으려던 세자빈이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자신이야 어떻든 자식만은 살려내려 애를 쓰는 그 진한 모성 앞에 봉림대군의 눈시울이 뜨거웠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성을 나간다 하더라도 청병의 추격과 엄동설한은 여자의 몸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발빠른 사람을 시켜 세손만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숨길 수 있다면........
  봉림대군의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봉림대군이 젖은 눈으로 그 세자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압니다. 여자의 몸으로 어찌 저 강한 청병의 추격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튼튼한 내관들을 가려내어 세손을 맡길 수 밖에요.”
  세자빈이 자신의 속을 마치 들여다 본 것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봉림대군은 급히 내관들을 불러 모아 그중 건장해 보이는 김인(金仁), 서후행(徐後行), 임우민(林友閔), 권준(權俊), 유호선(兪好善)등 다섯 사람을 가려내어 세자빈 앞으로 나아갔다.
 




                                  ㅇ


 “너희는 내말을 명심해서 듣거라. 어리신 세손은 장차 이 나라의 보위를 이어 나가실 귀하신 몸이니라. 세손을 너희들에게 맡기는 것은 우리는 이곳에서 죽으나 이 나라는 장차 다시 일어설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이곳을 빠져나가 주상전하의 품으로 세손을 뫼셔야 할 것이니라. 알겠느냐?”
 “명심하겠나이다. 빈궁마-마”
  세손을 받아 안은 김인의 목소리가 떨려 났고 이를 지켜보는 봉림. 인평 두 대군의 양볼에도 굵은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김인이 잠든 세손을 품에 안고나서자 세자빈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참았던 울음을 다시 터트렸고 봉림. 인평 두 대군이 성문까지 따라 나섰다.
  성문을 지키던 전장령 송국택(宋國澤)과 민광훈, 여이홍, 민계, 유정, 이의준, 민우상 등이 자신들도 세손 아기씨를 보호하겠다며 따라나서자 봉림대군이 송국택의 두손을 말없이 꼭 잡았다.
  송국택은 그런 봉림대군에게 머리숙여 절한 뒤 바쁘게 말을 몰아 앞길을 터 나갔다.
  관원들이 합세하여 세손을 보호하겠다 나서므로 용기백배한 내관들은 나는 듯이 말을 달려 해변에 닿았다. 이들 관원들의 목숨건 도움으로 세손은 그 즉시 교동으로 옮겨지고 다시금 주문도(注文島)로 갔다가 그날 안으로 청나라 군병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당진(唐津)으로 무사히 옮겨갔다.

  그 원손이 빠져나간 직후 지키는 사람이 없던 북문으로 적의 대병이 물밀듯 밀려들었고 흰옷으로 갈아입은 사대부가의 부녀들은 스스로 목을 메거나 은장도로 가슴을 찔러 자결하는 사태가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게 뭐야!"
  성안에 산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널브러진 하얀 시체만이 눈에 들어오자 이리떼처럼 달려들던 청나라 장졸들도 눈을 홉 뜬 채 걸음들을 멈추었다. 야차와 같이 히죽버죽 대던 청나라 장졸들이 죽은 시체를 보고서야 욕심을 낼 까닭이 없었다.
  "이런, 제-기. 오늘은 재수에 옴붙은 날이구마."
  청나라 군사들은 그렇게 떠들어댔다.
  쓰러져 울고 있던 세자빈의 귀에도 청나라 군사들이 질러 대는 낯선 괴성은 생생하게 들렸고 그 즉시 세자빈은 은장도를 꺼내 자진을 시도했으나 세자빈을 지키던 내관의 재빠른 제지로 목에 약간의 상처만 입은 채 목숨은 구하게 되었고 또한 일이 이미 틀린 것을 안 원임대신 김상용이 남문 화약고로 득달같이 달려나가 산처럼 쌓인 화약고의 화약궤에 걸터앉자 그 앞에 눈물 범벅이된 가솔들과 성문 아래까지 따라오던 윤방이 그 김상용을 말렸다.
 “상공(相公)께서는 어찌 꼭 죽으려고만 하십니까. 상공께서 분사하시겠다면 나도 따라 죽겠소이다.”
 “나는 나라의 은혜를 두텁게 받은 몸이요. 이제 나라가 위중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한몸 죽음으로써 저들의 극악무도함을 잠시만이라도 저지할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깝겠소.  ........나는 살만큼 살았으니 공(公)께서는 공연히 죽음을 자처하지 마시고 살아 뒷일을 처리해야 하실게요. 내 걱정 마시고 어서 가시오.”
  오히려 김상용이 윤방을 만류하자 윤방은 곧 성문을 벗어나 하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민가에 숨었다.
  김상용은 또 따라온 가솔들을 애써 타일러 돌려보내고 그중 믿음직한 하인에게 입었던 옷을 벗어 주며 부탁했다.
 “네가 만일 살아남거든 이옷을 내아이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하는 제구로 쓰도록 하거라.”
 “대감마님......”
 “어허! 어찌이리 경망스러운고......  울지 말고 어서 가거라......  지체할 시간이 없느니라.  어서, 어서 가래두.....”
  피눈물을 쏟으며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는 충복을 향해 김상용은 그 꺼칠한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마지막 보여주는 정이었다. 
  그리고 또 끝까지 남아 있는 별좌 권순장과 성균관 생원 김익겸 그리고 열세살 난 손자 김수전과 평생의 수발을 들어온 노복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권별좌와 김생원은 가서 할 일이 있지 않던가. 어서 가서 할일 마저 해야지.”
 “대감! 온 나라에 청나라 군사들로 꽉 찼사옵니다. 저희들더러 어디로 가라 하시옵니까. 저희는 끝까지 대감을 따르겠사옵니다.”
 “허어, 그 사람들......”
  더이상 말이 없었다. 말이 필요치 않았다. 더 무슨말을 할 수 있으랴......
 “자넨 수전일 안구 어서가게, 예 있을 자리가 아니야, 어서 멀리 피하도록 하게.”
  노복이 김상용의 손자를 안고 나가려 하자 손자는 할아버지의 옷자락을 꼭 잡고 울며 놓질 않았다.
 “할아버지, 저도 끝까지 남을래요. 할아버지랑 같이 죽을거예요.”
  김상용은 그 손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엉엉 소리내어 우는 손자의 등을 쓰다듬는 김상용의 노안에도 눈물이 고여 흐르고 있었다.
  바라보는 노복도 울고 권별좌와 김생원도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전쟁이 아니라면 손자의 재롱에 맘껏 행복에 젖었을 김상용이었다.
  그때 남문이 부서지며 청나라 병사들이 불개미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눈물에 젖은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던 김상용이 드디어 부싯돌을 치기 시작했다. 쏟아져 들어오던 청나라 병사들이 남문 주변에 가득 찼던 것이다.
  마른 쑥잎가루에 붙은 불을 화약궤의 심지에 붙이자 심지는 파지지직 소리를 내며 삽시간에 타 들어갔다.
  순간 김상용은 손자를 감싸안았고 노복이 그 김상용과 수전을 두팔로 감쌌다. 권별좌와 김생원이 그 김상용을 감싸려 달려드는 찰라 천지를 깨트리는 굉음과 함께 시뻘건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것도 잠시, 화약고에 있던 화약에 불이 옮겨 붙으며 연쇄 폭발이 일어나자 남문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청나라 병사들에게도 그 폭발은 엄청난 타격이 되었다.
  굉장한 폭발음에 놀란 공유덕과 경중명이 진 밖으로 뛰쳐나갔다. 진중에서 작전회의를 주도하던 예친왕 다이곤도 그 폭음에 놀라 뛰쳐나와 그 두 장수에게 폭음의 경위를 알아 보라 지시했고 오래지 않아 폭음의 진원지와 분사한 조선대신, 그리고 몰살당한 청병의 숫자까지 정확하게 파악한 보고가 올라왔다.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다이곤이 눈쌀을 찌푸렸다. 얻은것에 비해 잃은 청병의 숫자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허탈한 심정이던 다이곤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강화도에서 일이 잘못되어 남한산성에서조차 제2, 제3의 분사가 일어난다면 이는 조선은 물론 청나라에도 치명적인 상처가 될 것이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을 곱씹어 되새겨 보던 다이곤은 공유덕과 경중명을 불러 살인. 약탈. 방화 및 강간 등을 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지시를 내리고 아울러 인질로 쓸 포로들은 잘 보호하라는 엄명도 내렸다.
  그토록 살기 등등하던 청나라 병사들의 기세가 다이곤의 단 한마디 명에 의해 거짓말처럼 수그러들며 수색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민가에 숨어있던 윤방이 초라한 몰골로 잡혀 나왔고 이어서 세자빈 강씨와 내관들이 잡혀 나왔다. 봉림대군 내외와 인평대군, 그리고 사대부와 관료들도 잡혀서 뜰 가운데로 나왔다.
  모두가 죽지 못해 살아있는 애처로운 모습을 한 궁색한 모습들이었다.
  강화도의 위기는 고려 때에도 있었다. 삼별초의 항쟁으로도 유명한 몽고와의 39년 전쟁을 끈질기게 싸워 지켜 낸 그 역사의 섬 강화도였다. 금성탕지의 그 강화도가 청나라의 공략 단 하룻만에 처참하게 함락되었던 것은 무능한 관료의 책임 불감증이 빚어낸 이미 예상되었던 참화였다.
  조선은 명나라가 지켜 줄 것인즉 자주국방이 웬말이냐는 명나라 사대주의와 문약에 빠진 문치 제일주의...........  그리고 2-30년 권력을 독점해 온 몇몇 공신들의 '고인 물은 썩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묵살한 채 재목이 될 만한 인재들은 그 싹부터 철저하게 잘라 내 버리는' 치밀한 족벌정치에 조선은 새로워 질 기회마저 잃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뭉뚱그려져 결국 강화도 함락이라는 비극으로까지 치닫게 되었고 강화도 함락은 남한산성의 인조에게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하는 결과를 안겨 주었다.
 




                                  ㅇ


 “무, 무어라, 가, 강화도가 함락되었어!”
 “소, 송구하옵니다, 전 - 하............”
  적진을 다녀온 좌의정 홍서봉, 이조판서 최명길이 눈물, 콧물이 뒤섞여 범벅이 된 얼굴로 적진에서 듣고 본 바를 소상하게 고해 올리고, 강화도에서 잡혀 온 내관 나업과 종실인 진원군을 만나 들은 이야기며 또 봉림대군이 손수 쓴 서찰과 원임대신 윤방과 승지 한흥일의 장계를 인조에게 전하자 사색이된 인조가 창황망조하여 떨고 있었다.
  그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펼치던 인조가 또한번 놀라며 소리쳤다.
 “어허! 하늘이...... 하늘이 정녕 조선을 버리시는구나, 허 허허.......”
  분명한 봉림대군의 서체였다.
  인조가 체모도 잊은 채 봉림대군의 서찰에 얼굴을 묻으며 웃음소리 같은 울음을 터트리자 시립해 있던 소현세자도 무너지듯 땅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처연한 울음을 터트렸고 부황기에 누런 얼굴들을 한 중신들도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임금을 부르나 눈앞에 어른거리는 부모와 처자식을 생각하매 통곡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던 구원군의 소식은 끝내 없고 난공불락의 요새로 믿었던 강화도는 또 어떻게 함락되었는지......
 ‘그 동안 김경징은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중신들의 의문이 거기에 이르자 차츰 울음이 잦아들었다. 인조도 궁금한 것이 있었다.
 “이보시오 이판, 어린 우리원손은 어찌되었다 하더이까, 또 빈궁은 어찌되었고......”
  말끝에 또 울컥 하고 울음이 물렸으나 인조는 그 울음을 참느라 몇번인가 어깨가 출렁했다.
 “어리신 세손께오선 성이 함락되기 전에 동궁 내관 김인 에게 맡겨져서 전장령 송국택, 민광훈등의 호종을 받으며 강화도를 탈출했다 하옵는데 지금까지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다 하옵니다.”
  최명길의 이야기가 끝나자 인조는 또한번 탄식하며 털썩 하고 용상에 등을 떨궜다.
 “빈궁 마마와 두분 대군, 그리고 왕실의 부인들은 모두 인질이 되어 내일이면 적진에 당도한다 하옵니다.”
 “종사의 신위는 어찌되었다 하오?”
  다소 진정을 찾은 인조가 눈물을 찍어내며 하문했다.
 “윤방이 민가에 숨었다 체포되는 바람에 신위의 행방은 묘연하다 하옵니다.”
 “검찰사 김경징은 어찌되었는지 모르오?”
  인조의 하문에 중신들의 귀가 쫑긋했다. 김경징의 처사는 분명 번듯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김...경...징은 싸움이 채 시작 되기도 전에 도망하여 아직도 그 자취를 찾지 못하였다 하옵니다.”
  돌연 인조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인조뿐만이 아니었다. 중신들도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빛들이었다.
  영의정겸 체찰사의 안색은 사색이 되었고 그의 사지는 부들부들 떨다가 이윽고 덜덜덜덜 떨기 시작했다. 분명코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었다. 피난짐이 왕실보다 많았다고 이미 탄핵을 받고 있던 처지가 아니던가......
  인조는 말없이 어금니를 욱! 하고 물었다. 결단코 그냥 넘기지 않으려는 눈빛이었다.
 “그 외 다른 말은 없더이까!”
  문득 인조의 음성이 냉정해졌고 갑자기 찬바람 몰아치듯 숭은전도 조용해졌다.
 “전 우의정 김상용이 열세살난 손자를 안고 화약궤에 앉아 분사했다 하옵는데 그로 인해 남문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청병 천여명도 사상자를 냈다 하옵니다. 그리고 빙고별좌 권순장과 성균관 생원 김익겸도 김상용과 함께 분사했다 하옵니다.”
  김상용이 분사했다는 내용에 이르러 인조는 두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자신의 손발이 잘려나간듯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이어 순절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자 숭은전의 분위기는 더욱 침통하게 가라앉았다.
 “이상길, 심현, 이시직, 송시영, 윤전, 홍명형, 김수남, 정백형, 민성, 강위빙, 이돈오, 이돈서, 이가상, 이중규, 이사규, 황선신, 구원일, 강흥업, 김득남, 이삼, 안몽상, 이사후, 기패관, 이광원, 서언길, 고의겸, 차명세, 송영춘, 황대곤과 사가집종 이국화와 송해수 등이 순절했다 하옵고 자결한 사대부의 부인들은 다음과 같사옵니다.”
  부인들의 이름을 발표하려 하자 중신들의 안색이 바짝 긴장되었다.
 “김류의 아내 유씨와 첩 신씨, 김경징의 아내 박씨와 첩 권씨, 김진표(김경징의 아들)의 아내 정씨, 윤선거의 아내 이씨, 이성구의 아내 권씨와 두딸과 며느리 구씨, 이일상과 한오상의 아내, 권순창의 아내 장씨와 권순정의 아내 장씨, 특히 선비 심지담(沈之湛)은 그 어머니와 아내, 첩, 아들들이 모두 죽었는데 몸으로 그 어머니의 시체를 가리고 죽었다 하옵니다.”
  듣고 있던 김류가 그대로 꼬꾸라져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혼절했고 병조판서 이성구도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꿇어 엎드린 채 엉덩이를 들먹이며 울부짖고 있었다. 숭은전의 중신들은 너나할것없이 초상집의 상주가 되어 소리 죽여 울부짖기 시작했다.
  강화도에 피난 갔던 중신들과 사대부의 기품 있는 부인과 딸, 며느리들이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사람이 많았으나 미처 자결하지 못해 포로가 된 여인들도 많았다.
  그러나 특히 강화도 부사 이민구의 부인과 두며느리와 같이 추하고 더러운 짓으로 사람들로부터 침튀기는 욕을 먹는 여인들도 있었다.
  욕을 먹는 것은 정절을 잃은 여인뿐 아니었다. 강화도를 지키지 못한 김경징, 이민구, 장신 등은 욕을 먹다먹다 못해 종내엔 죽음을 당하여 그 집안들이 풍지박살 났고, 강진흔은 열심히 싸우고도 적의 도강을 막지 못했다 하여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나 그의 칭송은 영원히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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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가 함락 당했다는 소문이 산성에 퍼지며 산성은 이내 곡성으로 진동했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는 사이 이번엔 무인과 장수들이 들고 일어났다.
 “오늘의 이 사태는 모두가 문사들의 세치 혀끝이 만들어 낸 재앙이오이다. 이런 문사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 나라엔 잠시도 바람잘 날 없을 것이외다.”
 “일찍 서둘러 화친을 이끌어 냈으면 나라가 적에게 무릎꿇고 항복하는 일만은 없었을 것 아닙니까. 싸움이 어디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입니까?”
  수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있는 장수의 수장은 체찰부 중군 신경연과 남양군 홍진도였다
  이들은 구굉과 신경진의 진중을 왕래하며 울분을 토로하던 끝에 일을 벌였다.
  굶주리고 추위에 언 장수들과 병사들로 꽉 들어찬 숭은전 앞뜰에 척화를 주창하던 문관 몇이 개 끌리듯 끌려나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병졸들 앞에 죄인처럼 꿇렸다.
 “난 너희들 같이 조동아리만 달고 사는 문관들을 보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라가 항복하면 우리 같은 무인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내 죽기전에 세치 혀끝으로 나라와 생민을 우롱한 못된 네놈들부터 처치하고 죽을 터인즉 너희는 나를 원망치 말라.”
  사태가 심각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흡사 고려 때 무신의 난인 정중부, 최충헌의 난이 재발하듯 하자 체찰사 김류가 무서움 무릅쓰고 나서서 떨며 말렸으나 핏발선 눈의 중군 신경연이 그 김류조차 서슴없이 베려 하므로 기겁을 한 김류는 그 길로 달아나 숨어 버렸고 김류가 달아나자 척화를 주창하던 신료들도 도망하여 빈 절간의 마루 밑으로 숨어 버렸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급히 달려나온 최명길이 혀가 마르고 손발이 달토록 거듭 거듭 만류한 끝에 내란만은 막았으나 울분에 떠는 무인들의 분노는 삭이지 못했다.
  1월 26일 밤, 인조는 대소 신료들이 모인 숭은전으로 나아갔다. 누렇게 뜬 중신들의 얼굴을 보며 인조는 가슴이 아팠다. 그들 중에는 졸지에 처와 자식들을 잃은 사람들이 많았다. 자신을 보필하던 사람들이 당한 슬픔은 인조에겐 자신의 팔다리가 잘리는 고통과도 같았다. 어찌 슬프고 원통하지 않으랴.
  인조는 강화도 함락 이후 순절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거의 매일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김상용의 분사는 인조의 가슴에 한을 남게 했다.
  입안이 꺼칠하고 입맛이 써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죽음을 달게 맞이한 김상용을 생각하매 인조는 차마 입에 음식을 댈 수 없었다.       창백하게 야윈 인조의 움푹 들어간 두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 없었고 튀어나온 광대뼈가 나날이 불거지는 그 수척한 인조의 용안을 우러르며 대소신료들은 자신의 슬픔도 잊은 채 또한 눈시울을 붉혔다. 숭은전은 침통했다.
  그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을 인조가 거두며 입을 열었다.
 “이 모두가 과인이 부덕한 탓이요......  위로는 종묘사직과 아래로는 신민의 생명을 책임진 과인이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죽음으로써 용서를 빌어야 할 것입니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지나치신 말씀 거두어 주오소서.”
  엎드린 신료들의 어깨가 다시 출렁했다.
 “과인은 이제 조선의 살아남은 신민을 위해 기꺼이 성을 나가 청태종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오.”
 “전 - 하.......”
 “전 - 하...... 신 등을 차라리 죽여 주시오소서...... 전 - 하.”
  침통하던 숭은전이 다시 오열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인조가 항복을 결심한 것이었다.
 “이것은 과인이 쓴 항서입니다...... 도승지는 이것을 받아 읽으라.”
  눈물에 얼룩진 얼굴의 도승지가 항서를 받아 들었다. 항서를 펼친 도승지의 눈에 다시 또 눈물이 고였다.
 『조선국왕 신(臣) 이종(李倧)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생 략
  이제 들으니 폐하께서 며칠 안으로 환궁하신다 하심에 신이 스스로 달려 나아가 용광(龍光)을 우러러 뵈옵지 못한다면 정성을 보일 도리가 없사오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이까. 오직 신은 조선 3백년의 종묘사직과 수천리의 백성들을 폐하게 우러러 부탁할 뿐이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참다운 정성을 굽어살피시고 인자하신 분부를 명백히 내리시어 신이 안심하고 복종할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항서를 읽고 나자 통곡 소리는 더욱 거세어 졌다.
 “전 - 하.......”
 “전 - 하.......”
  이젠 숭은전이 발을 구르며 목놓아 울부짖는 중신들의 울음소리로 떠나 갈듯 했다.
  병색이 짙은 신료들은 울다 쓰러졌고 힘이 남은 신료들은 다시 일어나 울고 또 울었다. 나라가 망하는 마당이었다. 나라가 망하는데 어찌 일신인들 온전할 수 있으리......
  까무라치는 중신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을 밤새 울고난 다음날 퉁퉁부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우의정 이홍주, 이조판서 최명길, 호조판서 김신국은 항서를 받들고 적진을 향했다. 마부대가 맞이하자 최명길이 나섰다.
 “우리 전하께서 일찍이 나와서 폐하를 뵙고자 하였으나 대청국 군사의 위엄이 하도 두려운지라 미처 와서 뵙지를 못하였습니다."
  "..................."
  "다행히 용서하여 주신다면 내일이라도 성을 나와 뵙기를 간절히 원하오니 성스러운 황제 폐하의 은덕을 조금이라도 입을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다행은 없다 하겠습니다."
 “허허허....... 그렇게 하시지요. 황제 폐하께는 그렇게 전해 올리리다. 가셔서 기다리시면 곧 연락을 드리지요. 허허허허.....”
  예전의 마부대와 최명길이 아니었다. 이제는 승자와 패자의 입장이었다.    예우를 달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최명길은 그 마부대에게 깍듯한 경어를 썼다.
  이날 산성에서는 각사(各司)의 문서를 불태워 버렸다. 그것은 조선이 청나라를 일컬어 썼던 노(奴)니 적(賊)이니 하는 문서가 많이 남아 있던 까닭에 그 문서가 청나라에 다시 또 들키는 날이면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몰라 사전에 미리 소각 하는 것이었다.
  이젠 철저한 패자였다.
  패자는 또한 패자다워야 했다. 패자가 패자답지 못할 때에는 얻어맞는 일밖에 더 없었다. 공연히 터지고 나서 울고 불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제 남은 것은 항복의 절차와 척화론자들을 묶어 적진에 보내는 일이었다. 항복의 절차는 청나라와 상의하면 될 일이나 척화신을 보내는 것이 문제였다. 이는 오로지 조선 조정의 문제였다.
  척화신을 잡아 보내라는 요청은 청나라에서 한일이지만 조선 무신들은 그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며 벼르고 있던 터였다.
  달아났던 김류가 슬그머니 돌아와 무장들에게 그들을 모두 잡아 압송하겠다 약속한 터여서 김류의 입장은 난처했다.
  청나라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 살기 등등한 조선 무신들의 주장도 묵살할 수만은 없어 일단 척화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다 잡아 보내기로 했다. 좌의정, 우의정도 이에 동조, 세정승의 합의하에 정한 내용을 가지고 이들은 인조를 배알했다.
 “모두가 종사를 위해 애썼던 사람들이온지라 누굴 빼고 누굴 취할 수 없었나이다.”
 “누구 누구요?”
  인조의 퉁명스런 하문에 김류는 다시 납죽 엎드렸다.
 “예조판서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 전대사간 윤황 부자와 오달제, 윤집, 김수현, 김익희, 정뇌경, 이행우, 홍전 등 모두 열한명 이옵니다.”
 “..............”
  인조는 말이 없었다. 척화와 화친으로 양분된 신료들의 의견과 주장이 서로 달랐다 하나 이는 모두 인조의 신하들이었다. 어찌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던 신하들을 적에게 선뜻 내줄 수 있었겠는가. 인조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했다. 인조의 대답이 없자 탑전을 물러나온 세정승은 11명을 그대로 잡아 압송하는 절차를 진행하려 할 때였다.
  관향사 나만갑이 그 세사람을 만류하며 나선 것이었다.
 “열한명은 너무 많소이다. 종사를 위하는 충정으로 본다면 척화나 화친은 다 같은 것 아니오니까. 조선의 인재를 열한명씩이나 골라 적진에 보내 생죽음 당하게 한다는 것은 너무도 억울한 일이오이다. 빼낼 수만 있다면 다믄 몇 명이라도 빼내어 아까운 인재의 유실은 막아야 하오이다.”
 “공의 말에도 일리는 있소.”
  세정승은 그 나만갑에게 기대를 걸었다.
 “보내야 할 사람과 말아야 할 사람의 판단 기준이 있다면 알려 주시오.  그러면 공의 의견을 따르리라.”
  김류가 나만갑의 의견에 따르겠다 하자 옆에 있던 대사간 박황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제 생각에는 몇 사람만 보내도 될듯 싶사옵니다. 자고로 모든 주장에는 주장자가 한둘 있게 마련인지라..........  예를 들면 화친의 주장자 하면 이판 최명길대감 인것처럼 척화의 주장자는 당연히 예판 김상헌 대감 아니겠습니까. 그 외는 모두 주장을 따르는 무리들이니 그야 얼마든지 변명할 여지도 있는 문제이고......”
 “영감의 말을 들으니 그 또한 일리 있는 말이오. 어디 계속해 보시구려.”
  세정승은 대사간 박황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예판대감이야 연세도 많으시고 병석에 계시니 주장자이면서도 어찌 해볼 도리 없는 분이고..........  오달제와 윤집은 당초부터 줄곧 척화만을 주장해 왔으니 이 두사람을 보내는자는 말도 차마 입에 담지는 못할 일이나 끝끝내 아니 보낼수 없다면 이 두사람만을 보내는 것만 하겠습니까.”
  일리 있는 박황의 주장에 힘을 얻은 듯 다시 또 김류가 나섰다. 
 “묘당에서도 보내야 할 사람에 대한 의견이 영감의 말과 같았다면 내가 어찌 많은 사람을 보내려 했겠소. 이제 영감의 말을 들어보니 그 말이 옳소, 그대로 합시다.”
 “오달제와 윤집의 자제들이 반드시 나를 원망할 것이나 조정에서 본다면 오히려 다행한 일이니 이 또한 근심이 덜어지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당연히 그렇지요. 그 두사람은 어차피 갈 사람 명단에 있던 사람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아홉명에 대해서는 영감이 그들의 은인이오이다. 에헴!”
 “은인이라고 공치사 받자는 것은 아니나 어쨌든 근심이 줄어들었다 하시니 다행일 뿐입니다.”
  적진에 보낼 척화신의 일이 매듭지어지자 중신들은 항복의 절차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했다. 



                                  ㅇ


 “입에 담긴 민망한 일이나 그 일은 청장 마부대나 용골대와 의논해야 옳지 않겠소이까. 저들의 의향을 따르는 것이 순서상 도리일 테니까요.” 
  최명길의 그 말은 옳았다. 김류는 인조에게 고하여 좌의정 홍서봉과 이조판서 최명길, 호조판서 김신국을 다시 적진에 보냈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마부대가 웃으며 맞자 세 사신은 공손히 절하고 답했다.
 “항복의 절차를 의논하러 왔습니다.”
 “허허-  그래요. 요며칠 날씨가 춥던데 수고롭지 않을런지요......”
  마부대가 근심어린 낯빛을 띄우자 홍서봉이
 “황제 폐하의 칙지(勅旨)를 받드는 일인데 어찌 수고로움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큰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 같습니다.” 했다.
 “허- 그렇다면 날짜를 정하지요. 이 달 그믐이면 어떻겠소. 마침 삼전도(三田渡)에 수항단도 완성되었으니 말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따르겠습니다.”
  조선 사신들이 청나라의 의견에 따르겠다 하자 마부대는 항복의 절차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항복의 예(禮)에는 옛날부터 두 가지 규례가 있소이다.
  첫번째 절차는 너무 참담하니 그만두고 두번째 절차로서 행하도록 하시구려.”
  그 첫번째 절차라는 것은 무엇인가. 항복한자의 정신과 혼을 빼앗아 영구 불멸토록 종으로 삼겠다는 함벽여츤(銜璧輿 )의 의식이었다. 사형수와 같이 수의를 입고 두손을 묶은 뒤 자기가 죽어 들어갈 빈 관을 짊어지고 식장으로 들어가는 항복례를 말하는 것이다. 관을 메고 가는 것은 언제 어느때 아무데서나 죽여도 좋다는 뜻으로 종신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참담한 의식이었다.
  조선의 사신이라 하여 어찌 그 의식을 모르겠는가. 조선의 사신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었다. 첫번째 절차를 면해준것만도 감읍한 처사였다.    홍서봉과 최명길, 김신국은 마부대에게 깊이 머리 숙였다
 “예를 행한 뒤에는 곧바로 서울의 대궐로 돌아가게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고 출성할때는 호행인 5백명만 거느리되 군사는 거느리지 마시오.”
 “우리 전하께서는 늘 곤룡포를 입고 계시는데 곤룡포를 입고 출성하셔도 되올는지......”
  홍서봉이 나직하게 말하자 마부대는 껄껄 웃었다.
 “그것은 아니될 말이오. 그 자리는 임금끼리 외교하는 자리가 아니라 죄인이 항복하는 자리예요. 남색 복장으로 하시오.”
 “우리 전하께서 성을 나오실 때 어느 문으로 나오시는 것이 옳겠습니까.”
 “죄있는 사람은 감히 정문(남문)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니 서문으로 나오면 될 것이오.”
 “강화도에서 붙잡힌 포로들은 어찌 처리하실건지......”
 “황제 폐하께서 처리하실 문제이나 현재까지는 세자와 대군, 공경(公卿)의 자제와 척화신만을 데리고 가기로 결정되었소이다. 허나 때에 따라서 데리고 갈 포로의 수가 많아질 수도 있을 것이니 그건 그때 가 봐야 알것같소이다. 그러나 모르긴 해도 사대부의 부녀들은 많이 데려갈 것으로 보아요. 뭐........ 그건 그리 아시고 국새인 국보(國寶)는 새로이 주조해 줄 것이니 앞으로는 그것을 쓰면 될 겝니다. 그밖의 상세한 것은 이제 곧 황제 폐하의 친서가 전달될 것이니 그리 아시고 준비들 하시지요.”
  세사람은 공손히 절하고 물러 나왔다. 이제 며칠 후면 새로운 하늘을 보게 될 것이었다.
  그날 저녁, 마부대와 용골대가 직접 청태종의 친서를 들고 와 남한산성에 전하자 산성에서는 전에 없이 융숭한 대접을 하느라 분주를 떨었으나 식량은 고사하고 땔감마저 없어 빈 절간의 행랑채를 헐어 그 재목으로 땔감을 삼았다.
  마부대와 용골대가 돌아간 그날밤, 숭은전엔 대.소 신료들이 모여 이제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청태종의 그 답서 앞에 무릎을 끓었다.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하노라. 지난번 너의 글을 보니 짐의 마음이 매우 흡족하도다. 이제 짐은 너와 맺는 군신간의 신의를 대대로 지켜 갈 것이니라. 이에 너는 명나라에서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바쳐 죄를 청하고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되 그 연호를 버리고 앞으로는 나의 연호를 쓰라. 너와 모든 대신들은 장자와 차자를 인질로 보내야 할 것이니라.
  그리고 짐이 명나라를 정벌할 때에는 너에게 조서를 내릴 것이니 너는 기마병과 보병, 수군을 준비하였다가 차질 없이 응전에 임하도록 하라. 이제 짐은 돌아가는 길에 가도를 공략할 것이니라. 너의 충성심을 이번 기회에 볼 것이니 너는 배50척을 보내도록 하라. 또한 설날과 동지, 성절(聖節)과 경조사에 사절을 보내고, 사신을 맞이하고 보낼 때에는 명나라에 하던 옛 예를 어기지 말도록 하라. 우리가 잡은 포로들이 훗날 압록강을 건너 도망쳐 가거든 너는 그들을 잡아 짐에게 보내야 할 것이며 포로들을 속환 하고자 한다면 이는 짐이 들어줄 것이다.
  내외의 여러 신하들끼리는 서로 혼인을 맺어 화친을 굳게 하고 성을 새로이 쌓거나 수리하는 것은 허락치 않으니 그리 알라.
  너희 나라에 잡혀와 있는 올량합(兀良盒)의 종족은 모두 돌려 보내 주되 일본과의 무역은 그전대로 하라. 너는 이미 죽었던 몸이었느니라. 이제 짐이 너를 살려내어 너희 종묘사직과 흩어진 너의 처자까지 다시 찾아 주었으니 너는 짐의 은혜를 생각하여 훗날까지 신의를 어기지 않도록 하라.
  세공(歲鞏) 바칠 물목은 다음과 같으니라.
  황금 1만냥
  백금 1천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00부(副)
  단목(丹木) 200근
  환도(環刀) 20자루
  표피(豹皮) 100장
  녹피(鹿皮) 100장
  차(茶) 1000포,   
  수달피(水獺皮) 400장
  청서피(靑黍皮) 300장
  호초(胡椒) 10근
  요도(腰刀) 26자루
  종이 1천 500권
  오조용문석(五爪龍紋席) 4벌
  백저포(白苧布) 200필
  세주(細紬) 2천필
  마포(麻布) 400필
  색면포(索麵布) 1만필
  포(布) 1천 4백필
  쌀 1만포(包)
  등을 기묘년(2년후) 가을서부터 바치도록 하라.』

  도승지가 읽기를 마치자 엄청난 물목의 수량에 대.소 신료들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부녀들을 포로로 잡아간다는 것과 대.소 신료들의 장남과 차남 은 물론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와 차남인 봉림대군, 삼남인 인평대군까지 인질로 잡아간다 하자 숭은전은 놀람과 분노, 두려움과 공포가 한데 뒤섞인 채로 흉흉하였다. 그러나 어쩌랴, 이젠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정축년 1월 30일,
  이대로 영원히 떠오르지 않길 바라던 아침해가 기어코 떠오르고야 말았다. 아침 일찍 나오라고 하던 저들의 요구를 묵살할 수만 없어 새벽부터 서두른 인조와 소현세자는 푸른 남색 군복을 갖추어 입고 서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나갔다.
  인조는 성을 나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45일전 산성에 입성할 때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하더니 다만 그 사이에 군사들만 죽어 나갔고 자신의 의복만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산 위엔 해가 떴으나 산 아래로 내려 갈수록 안개가 자욱했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농짙은 안개로 인조가 부축을 받으며 하산하자 그 뒤를 따르는 3공6경과 5백명의 수행인들도 입을 굳게 다문 채 묵묵히 따랐고 남한산성을 거의다 내려왔을 때 안개는 산중턱에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시야가 훤히 트인 가운데 청병들이 두줄로 길게 늘어서 이미 인조와 그 배행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조는 그 사이를 고개 숙이고 걸었다.
  고개 숙인 인조의 머릿속으로 온갖 악몽같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임경업의 장계를 받고 놀라던 일과 도원수 김자점의 패전에 놀라 혼절했던 일, 몽진길이 막혀 남대문 문루에서 허둥대던 일과 밤길의 남한산성을 허겁대며 오르던 일 등이 마치 꿈속의 일이었던 양 한발짝 한발짝 내딛는 인조의 무거운 걸음 그 발자국 속에 이젠 기억 저편으로 아스라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서서히 12만 대군의 위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수한 깃발과 바둑판같이 정리된 적의 진중은 과연 명나라를 함몰시킬 만한 위용이었다. 막강해 보이는 철갑 기병과 철갑전차,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병장기가 가지런히 정돈된 채 그 예리한 창끝에서 번쩍이는 날카로운 광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만 같아 가뜩이나 움추러 든 인조의 가슴을 전율케 했다.
  적의 진중 가운데로 들어서자 섬뜩한 북소리와 함께 9층 단이 보였다.
  그 위에 펼쳐진 황금빛 일산(日傘)과 황색 장막은 떨리는 가슴에도 화려하게 보였고 그 좌측으로 보이는 3층 단위에 지어 놓은 대궐같은 황금빛 전각은 설핏 보기에도 조선 천지에서는 아직껏 보지 못한 대단히 화려한 전각이었다.
  이윽고 인조의 행렬이 수항단인 9층 단 앞에 당도했다.

  9층 단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면으로 수만의 병사들을 일사불란하게 배치하여 놓아 그 장엄하기가 마치 인(人)의 바다 같았는데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압도된 인조와 3공6경들은 숨조차 쉬는 것을 잊을 정도였고 햇빛에 번뜩이는 병장기의 섬광이 마치 번개처럼 번쩍거리자 마음을 그렇게 먹어서 그런지 청군의 위용은 가히 하늘과 땅을 덮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 인조와 3공6경들이 넋을 잃고 있는데 별안간 큰 북소리가 울렸다. 그 북소리가 또한 얼마나 컸던지 인조와 3공6경들의 가슴이 서늘하여 서로를 쳐다보는데 그때 용골대가 외쳤다.
 “상층에 계신 황제 폐하를 향하여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하시오”
  짧고 낮았으나 근엄한 목소리였다. 그제야 북소리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의식(儀式)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인조와 3공6경들이 세번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를 행한 다음 인조 혼자만이 아물거리는 9층을 향하여 힘겹게 힘겹게 올랐다.
  그날 따라 햇살은 어찌 그리 밝은지 9층 단 아래로 보이는 인의 바다는 이제 번쩍이는 빛의 바다였고 위로 올라 갈수록 그 장엄함은 더했다.
  의식의 주재자(主宰者)에서 의식을 붙좇아 거행하는 복종자로 전락하고 보니 무슨 의식의 절차가 그리 복잡하고 까다로운지 그 일일이 다 정신차려 행하기도 어려웠지만 예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데도 눈알이 돌고 머리가 어지러워 속이 다 울렁일 지경이었다.
  분명 힘차게 울리고 있을 군악소리였으나 인조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이 아른거려 몇 층을 어떻게 올라왔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자신이 그 화려하게 보이던 일산 아래까지 올라와 있는 것이었다.
  일산 아래에는 역시 황금색 용포를 차려입은 청태종이 근엄하게 앉아 미소인지 조소인지 모를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때 또 인조를 깜짝 놀라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예관의 근엄한 목소리였다.
 “삼배구고두례!”
  얼마나 긴장했던지 예관의 목소리에도 흠칫 놀라는 인조였다.
  인조는 다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 숙였다. 청태종은 그 절하는 인조를 보며 껄껄거렸다.
  동북아시아의 패자(覇者)로서 당당하게 웃는 웃음일 것이었다.

  조선이 오랑캐라 그토록 멸시하던 여진족의 우두머리 홍타시.......  세종때 김종서 장군이 사군육진을 설치하여 발호하는 여진족을 눌러 다스렸고 가까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신립 장군이 변방을 어지럽히는 여진족을 소탕하여 그 호전적인 여진족을 다스려 지금껏 여진족은 조선을 상국으로 받들어 왔다. 그러기에 조선은 그 여진족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대어 주었다. 그런데 불과 40여년만에 조선은 그 여진족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어처구니없는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의식이 끝나자 청태종은 인조에게 돈피 갖옷 두벌을 선물로 주었다. 인조는 그 한벌을 입고 뜰에 엎드려 다시 세번 절하므로서 그 성은에 대한 감사와 이제 청나라는 진정으로 조선의 상국(上國)이 되었음을 몸으로 표현해 보였다.
  청태종이 또한번 호쾌하게 웃었고 그 웃음소리가 조선의 방방곡곡 골 골에 까지 퍼져 흐른 것은 물론이었다.


                                  ㅇ


  좌우로 빼곡이 들어찬 청나라 진중 사이를 고개가 꺾인 수행인 오백을 이끌고 인조는 휘적휘적 걷고 있었다.
  어쩌다 항복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황겁결에 치른 항복이긴 하지만 의식은 또 어떻게 치루었는지, 어지럽게 난무하는 상념들로 인조는 방금 전의 일도 기억하질 못했다.
  신료들이 허리 숙여 무어라 하는데도 그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다만 빈 껍데기 같은 몸뚱아리가 신료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 가고만 있었다.    땅만 보며 걷는 인조의 귓속에 아직도 또렷한 것은 청태종의 오만 방자한 웃음소리와 청태종의 동생들이라 하는 아홉명의 왕(9왕)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웃어제끼던 낭자한 모습만이 머릿속에 남아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청태종의 진영이 가물가물 보일때까지 인조는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휘청거리며 걷던 인조의 그 눈앞에 선녀들이 보였다. 언제 날아왔는지 구름떼 처럼 모여든 선녀들이 인조의 눈앞에서 너울대며 춤을 추었고 인조는 그 선녀들에게 다가가 무언가 하소연을 하고 싶었다.
 “전하, 우리 좀 구해 주소서. 우릴 풀어 구해 주소서. 전하.......”
 “우리가 무슨 죄가 있나이까. 우릴 살려 주소서. 전하, 살려주소서......”
  이상한 선녀들도 다 있다 인조는 생각했다.
 ‘선녀가 날 도와야지, 날더러 살려 달라니......?!’
 “전하, 저희를 버리지 마옵소서. 우릴 구해 주소서, 전하......”
 “.......!  ......!!  ......!!!”
  경악한 인조가 고개를 뒤로 뺏다. 정신이 든 것이었다.
  구름떼 처럼 날아들어 너울대던 선녀들이 포로로 잡힌 조선인 부녀자들이란 걸 그제사 안 것이었다.
  피에 젖어 찢어진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발버둥치는 부녀자들의 모습이 엉켜 있던 인조의 머리를 맑게 했다.
 “저 좀.......  저 좀 풀어 주소서 전하.........  우리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나이다. 전하.........  저 좀 풀어 주소서........”
  한눈에 해산한 부인으로 보이는 퉁퉁부은 얼굴의 여인이 온힘을 다하여 절규하던 끝에 눈을 뒤집으며 쓰러져 굴렀으나 여인들은 쓰러진 그 여인을 쳐다도 안보고 허우적대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울며 뛰어 나오던 몇 사람이 발에 걸려 넘어졌고 그 넘어진 사람에 걸려 다시 여러 사람들이 무더기로 넘어지며, 밟고 밟히며 울부짖는 참상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전하, 저희를 구원하여 주소서.”
 “우리 좀 살려 주소서, 전하. 전-하. 전 - 하.........”
  소복 차림의 조선인 부녀자들이 머릴 풀어 산발한 채 목놓아 울부짖는 귀곡성(鬼哭聲)같은 울음소리는 조용하던 청나라 진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진중에 가득 울려 퍼지자 성을 왈칵 돋군 청졸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손에 채찍을 찾아 든 것이었다.
 “이것들이...... 씨양!”
  마치 짐승몰이 하듯 했다.
  사정없이 휘갈기는 청졸들의 채찍에 등줄기가 갈라지고 앞가슴이 찢어지며 비명 소리가 터져 솟구치자 구름떼 처럼 몰려들었던 부녀자들이 짐승떼 처럼 쫓겨갔다.
  매에 못이긴 조선인 부녀자들이 우리와 같은 진중에 다시 갇힘으로써 발을 구르며 아우성치던 그 소란도 이내 잦아들었으나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인조의 한숨 소리는 눈물에 젖어 있었고 수행하던 오백여 신료들도 갈가리 찢어 내듯 하는 채찍의 파열음에 놀라 전율하며 몸을 떨었다.
  그 인조의 행렬이 도망치듯 강을 건너 동대문에 이르렀을 때 해는 지고 벌써 저녁 어스름이었다.
  이때 청군의 진영에 포로로 잡혀있던 수많은 부녀자들이 또한 달려나와 인조의 행렬앞에 엎어지며 울부짖었다.
  난장판이 된 청나라 진영에서는 청졸들이 몰려나와 채찍과 몽둥이로 그 부녀자들을 두들기며 쫓아내 몰았으나 이제 가면 영 이별로 아는 포로들은 차라리 임금의 발앞에 엎어져 죽을 지언정 청나라엔 가지 않겠다며 몽둥이에 맞서 맨몸으로 저항하였다.
  이에 약이 오른 청졸들은 오히려 인조의 행렬을 후려패며 소리쳤다.
 “네놈들이 은근히 선동을 하니까 저것들이 난동질을 부리는 것 아니냐, 항복했으면 안보이는 길로 조용히 물러갈 것이지 어찌 대로를 따라 들어와 저 난리를 치게 만드느냐.”
  하며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다.
  이때 인조를 배행하며 뒤따르던 전 참의 이상급이 청졸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즉사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조선인 부녀자들 중에는 팔이 부러지고 살가죽이 터진 부상자가 백여명이나 속출했다.
  청졸들의 난동이 극악무도하게 발전하며 기승을 부리자 인조를 배행하던 오백여 수행원들이 인조를 둘러싸며 몸으로 막아낼 필사의 각오를 다지는데 인조와 배행원 오백명을 호송하던 마부대의 기병 백여명이 칼을 빼어 들고 달려와 난동 부리는 청졸 십수명을 그 자리서 목베자 그제서야 청졸들의 난동도 수그러들었다.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 인조가 동대문을 벗어나 대궐에 들어섰을 때는 날이 완전히 어두웠을 때였다.
  그러나 횃불을 밝혀 든 청졸들은 그때까지도 대궐안 집기와 귀중품들을 약탈해 내고 있었고, 도성 안엔 청나라 군졸외에 조선 사람이라고는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향교동의 어구로부터 좌우에 있던 붓가게의 행랑과 광통교 근처의 크고 작은 인가들이 불에 타 모두 무너졌고 길가엔 수북히 쌓인 썩은 시체들을 개들이 뜯어먹으며 날뛰고 있었다.
  목불인견(目不忍見)........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참혹한 참상이 그 인조를 전율케 했다.

  인조가 환궁하자 청태종도 곧바로 철군에 들어갔다. 신속한 철군이었다.    그 철군을 환송(歡送)하기 위해 초췌한 몰골을 한 백관들을 대동한 인조가 다시 동대문 밖까지 나가 초라한 모습으로 전송하는데 황금색 연(輦)을 탄 청태종 홍타시가 그 화려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인조의 환송을 느긋이 받고는 그 느린 걸음으로 양주를 거쳐 익담령(益潭嶺)을 넘고서야 곧바로 심양으로 향했고 조선의 세 왕자는 예친왕 다이곤의 예속하에 두어 2월 초 여드렛날(8일)에나 심양으로 출발할 것이라 했다.
  청태종이 먼저 철군한 그 다음날인 2월 3일, 휑뎅그랗게 텅 빈 대궐로 용골대. 마부대가 역관(통역관) 정명수를 이끌고 입궐하자 영의정과 좌의정이 바람같이 달려나가 그들을 영접했는데 그 자리에서 영의정 김류가 웃는 낯으로 허리를 납죽 숙였다.
 “이제 두나라는 부자(父子)의 나라가 되었으니 무슨 말씀인들 따르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가도를 공격하고 명나라를 공격하는 일에도 솔선하여 앞장서겠습니다. 명령만 내리소서,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아첨이었다.
  정명수가 통역하자 용골대는 흡족하게 웃었고 마부대는 비웃었다.
 “한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좌의정 홍서봉이 역관 정명수의 소매를 잡으며 다정한 얼굴을 했다.
 “황금은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니 황제께 아뢰어 감면하게 해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소이다. 이것은 온 나라 신민이 희망하는 바이니 부디 청을 거절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정명수는 두 정승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정명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궁금해 하는데도 정명수는 통역보다 면박을 먼저 주었다.
 “조선과 청나라가 조공바칠 물목을 의논할 때는 무얼 하고 지금에야 내게 말한단 말이요. 조선이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내가 어찌 용. 마 두장군께 말할 수 있으며 용. 마 두장군인들 어찌 감히 황제 폐하께 아뢸 수 있겠소.”
  좀더 친근한 모습을 보이려 했던 좌의정 홍서봉의 딱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랫사람 꾸짖듯 하는 정명수의 언사에 능욕을 느낀 것이었다.
  정명수의 신분은 관노(官奴:관가의 노비)였고 정명수가 맡은 통역(역관) 또한 중인들이나 할 수 있는 하급직의 낮은 벼슬이었다.
  종 8품의 하급 관원인 역관은 정1품 정승 앞에서 감히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신분이었다. 허리 숙인 채 통역에 실수만 없으면 그것만으로 광영으로 알던 역관들이었다. 그러나 정명수는 고개를 세우고 두 대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선의 목을 죄고 있는 용골대와 마부대의 신임을 얻은 정명수가 그 신임을 무기 삼아 창처럼 내질러 보고 있는 것이었다.
  일국의 대신들에게 통역관으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언사를 함부로 지껄이는 정명수를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던 좌의정 홍서봉의 얼굴에 수모와 비애가 서리고 있었고 정명수는 신분에의 설움을 설욕이라도 하듯 쾌재 어린 얼굴로 두 대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영의정 김류는 달랐다. 정명수의 신분이야 어떻든 현실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청나라 진중에 잡혀 있는 자신의 첩의 소생인 딸의 방면이 무엇보다 급했다.
  김류가 용골대와 마부대를 번갈아 바라보며 딸의 방면을 애걸하자 정명수는 김류의 청을 용. 마 두장수에게 말했고 용. 마 두장수는 서로 쳐다만 볼 뿐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김류의 소청은 집요한 것이어서 용. 마 두장수가 인조를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김류의 딸의 석방 문제가 거론 되도록 유도했으나 인조 앞에서 조차 용. 마 두장수의 입은 열리지 않았고 김류의 첩의 딸 문제로 임금이 오히려 능멸당는 꼴이 되자 참다 못한 좌의정 홍서봉이 꾸짖으며 나섰다.
 “이보시오, 영상대감! 지금 세자저하 내외분과 봉림대군 내외분이 인질로 잡혀가시는 판국이외다. 영상께서 어찌 세자저하와 대군들을 구원해 내려는 의지는 보여주지 않고 영상의 서녀만 구원하려 애쓰오이까. 영상의 서녀가 세자저하의 안위보다 더 급하다...... 이말이외까.”
 “허-!  그 참, 과인의 꼴이 우습게 되었구려.”
  인조는 씁쓸한 얼굴로 김류를 흘겨보았다.
  김류의 고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좌의정의 질책과 임금의 눈흘김도 받았으나 돌아가는 용. 마 두장수와 정명수에게 끈질지게 따라붙어 용골대의 진중까지 쫓아 들어갔다.
 “이보시오 정판사, 제 딸을 방면만 시켜 주신다면 은 천냥을 드리리다.  용장군께 잘좀 말씀드려 주시오.”
  김류는 하위직인 종8품 역관의 벼슬을 종1품격인 판사로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판사(判事)는 왕명을 받아 중죄인을 추국하며 재판하는 의금부의 수장으로 정2품직인 6조 판서보다도 1품계 위인 정승의 반열이었다.
  김류가 비굴도 서슴치 않고 아첨하자 정명수의 목이 갑자기 빳빳했다.
 “정판사, 이제 정판사와는 한 집안과 같은 사이니 공이 청하는 바를 내가 어찌 따르지 않을 것이며 내가 청하는 바를 공 또한 어찌 거절하시겠소. 내딸을 구해 내는 일에 극력 힘써 주시면 내 정판사에게 뭐든지 해 드리리다. 그깟 은천냥이 대수겠소?”
  하며 김류는 정명수를 끌어안았다.
  믿음과 정을 나타내려는 김류의 의도였으나 그러나 정명수는 김류를 밀쳐 내며 앞섶을 털었다.
  김류는 그 앞에서 두손을 모으고 애원했다.
 “정판사, 정판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요. 판사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이 몸이 임금앞에 엎어져서라도 정판사의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하겠소이다. 정판사, 정...판.....사.......”
  영의정 김류가 몸을 떨며 애걸해도 이미 꼿꼿하게 굳은 정명수의 목은 휠 줄 몰랐고 그 정명수가 김류의 붙잡은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휑하니 사라져 버리자 그 멀어져 가는 정명수를 망연자실하여 바라보던 축 쳐진 김류가 곧 죽을 것 같은 얼굴로 휘청거렸다.
  "저, 정........ 정판........사..........."

  김류가 정명수의 소매를 잡고 늘어지며 조선 포로들의 속환 값을 부추기고 다닌다는 소문에 병조판서 신경진(申景 )이 이를 갈며 일어섰다.
 “쥐새끼 같은 놈이 나랏일을 이따위로 그르치고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려 저러고 다니다니...... 에익!”
  일어선 신경진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며 분통을 터트리자 남문 수비대장을 맡았던 호위대장 구굉이 팔뚝을 걷어올리며 맞장구를 쳤다.
 “옳은 말씀이외다, 대감. 그 자는 시류에 영합하여 자신의 영달이나 꾀하는 간특한 자일뿐만 아니라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이오이다. 산성에서 하는 꼴을 똑똑히 보지 않으셨소이까. 윤황이란 자는 또한 어떠 하오이까. 그자는 척화 주장하기를 밥먹듯 하면서 하는 말이 만일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자신의 여덟 아들을 이끌고 나가 싸워서 오랑캐를 물리치겠다 매양 큰소리 치던 자올시다. 그런데 그자들이 지금 어디에 있소이까? 평양이 무너졌다 하니까 왕실이 파천을 결정하기도 전에 먼저 내뺀 자들 아니오이까. 지금도 종적이 묘연하여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실정이외다. 진정 이런 자들을 앞서 베지 않는다면 무슨 낯으로 나라의 안정을 꾀하겠소이까.”
  병조판서와 호위대장이 언성을 높여 그 김류를 타매 하자 김류에게 붙어 아부하던 자들조차 김류의 추태에 혀를 찼고 살기 등등한 무장들의 눈치를 살피던 좌의정 홍서봉, 우의정 이홍주 등이 외환으로 인해 가뜩이나 살얼음판 같은 조정에 내우마저 자초할 수 없다 하여 관료들의 자숙을 재삼.재사 당부, 동분서주한 결과로 긴장된 정국을 다소간이나마 진정 시켰으나 돌발적 사태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 속의 아슬아슬한 정국은 불안하기만 했다



























                        5. 왕  재(王才)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으로 들어가기 이틀 전인 2월 6일에 인조는 예친왕 다이곤의 진영을 찾았다. 다이곤에게 볼모로 잡혀가는 두아들 내외와 인평대군의 신변안전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아이구, 국왕 전하. 전하께서 이 누추한 곳을 다 찾아 주시다니요."
  연락을 받고 마주나오던 다이곤이 활짝 웃으며 그 인조를 맞이했다.
  "예친왕 전하. 일찌기 찾아뵈었어야 했을 것을 이제야 찾아 뵙게 되어 송구하옵기 이를 데 없습니다."
  "별말씀을요. 이렇게 찾아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26세의 아들 뻘이나 다름없는 다이곤에게 인조가 깊숙이 허리 숙여 예를 올리자 붉어진 얼굴로 그 인조의 두손을 잡아 일으키는 다이곤의 태도가 정중했다.
  "산성에서 고생이 많으셨다 얘길 들었습니다. 또한 입궐하신 대궐의 형편도 어려우시단 얘기 들었구요."
  청나라 병졸들이 대궐을 약탈한 그 사실에 민망한 얼굴이던 다이곤이 말없이 고개 떨군 인조와 그 신료들을 인도하여 군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 군막 안으로 들어선 다이곤이 이어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인조와 그 신하들에게 성의를 다해 베푸는 호의를 보이자 그 호의에 고개 숙인 인조의 두 볼위로 눈물이 보였다. 그 눈물에 또한 민망해 하던 다이곤이 조선의 왕자들이 기거하고 있는 막사로 인조를 안내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방문에 놀란 초췌한 몰골의 세 아들이 구르듯 달려나왔고 그 인조의 발앞에 엎어지며 통열하게 울부짖는 세 아들의 모습에 더욱 민망해 하던 다이곤은 그 즉시 자리를 피했다.
  막사 안은 두왕자 내외와 인평대군 등 그 왕자들을 배행할 신료들의 눈물과 울음으로 가득 메워지고 있었다.
  인조는 특히 세손의 행방을 몰라 얼굴이 반쪽이 된 세자빈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세손의 일은 너무 심려치 말라. 이제 곧 궁으로 돌아올 것이 아니겠느냐. 궁으로 돌아오면 내 바로 너희 품으로 보내 줄 것인즉 마음놓거라.”
  그리고 인조는 세자를 돌아보았다.
 “심양이 예서 멀기도 하거니와 날씨도 몹시 춥다 하니 부디 몸조심하거라.”
 “아 바 마 마 .......”
  인조의 그 말에 소현세자는 참았던 울음을 다시 터트렸다.
  “그리고...... 적진이기는 하나 너는 조선국의 세자임을 잊어서는 아니되느니라.”
  눈물 범벅의 소현세자가 울음을 그치고 아버지를 올려 보았다.
  비록 젖어 있기는 하나 국왕으로서의 체통을 세운 형형한 눈빛이 거기 있었다.
  눈물을 거둔 세자가 머리 숙여 대답했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아바마마.”
 “너희들도 건강해야 하느니라.”
  인조는 형형한 눈빛으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바라보았다.
 “예, 아바마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 형을 잘 보필해야 할 것이야.......  그곳이 적진이긴 해도 너희가 있는곳은 곧 조선의 왕실이 아니겠느냐......  왕실의 체통과 법도는 한시도 잊어서는 아니되느니라......”
  "예........."
  봉림과 인평대군의 대답을 끝으로 인조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기약도 할 수없는 적진에 세 아들을 인질로 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복받쳐 오른 것이었다.
  청나라는 지금 명나라 정복에 혈안이 되어 막바지 총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변덕 많은 청태종이 세아들을 언제 전쟁터에 참관시킬지 모를 일이었고 만일 세아들을 전쟁에 참전시킨다면 그때는 생명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었다.
  왕실에서 금과 옥처럼 자라 온 세 아들이 거친 황야에서 전쟁의 포성에 놀라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인조의 눈앞에 불현듯 떠오르자 인조는 세아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끌어안은 인조의 어깨가 떨고 있었다.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그 참혹한 전쟁터에 인질로 보낸단 말인가......’
  인조는 자신의 무력함에 치를 떨며 자신보다 더 큰 세 아들을 가슴에 꼭 안았다.
  입술을 깨문 인조의 두볼위로 핏물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에 놀라 병을 얻은 제 어미 인열왕후의 사랑도 맘껏 받지 못한 세 아들이었다. 아비의 가슴에 그것이 자꾸 걸렸다.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는 인조의 목에서 끅,끅, 하는 소리가 났다.
  울음을 속으로 삼키는 아버지의 몸 떨림에 세 아들은 아버지를 부둥켜 않고 다시 또 울었다. 며느리들이 따라 울었고 배행할 신료들이 또한 울자 막사 안은 온통 눈물로 바다를 이루었다.
 
  이날 소현세자를 따라 볼모지로 떠날 신료들이 결정되었다.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관료들과 익위사(翊衛司)의 관원 및 선전관(宣傳官),사복시(司僕侍),의관(醫官) 등등이었다.
  세자 시강원은 왕세자를 위하여 경서(經書)와 역사(史籍)를 강의하며 도의(道義)를 가르치는 기관이었고 익위사는 왕세자를 호위하는 기관으로 이들은 소현세자의 볼모 생활이 끝날 때까지 왕세자를 보필해야 할 임무를 지닌 신료들이었다.
  춘성군(春城君) 남이웅(南以雄)을 임지의 재상으로 삼고 대사간 박황(朴潢), 참의 김남중(金南重)의 직위를 높여 시강원의 대빈객(大賓客:정2품)과 부빈객(副賓客:종2품)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때 마부대의 진영에 있던 박노가 석방되어 돌아오므로 김남중 대신 박노가 그 임무를 맡았는데 이는 박노가 청나라 사람들과 안면이 더 있다 하여 김남중이 체임 되고 박노가 부빈객으로 승차한 것이었다.
  무재(武宰)에 박종일(朴宗一). 이기축(李起築)이 임명되었고 시강원 보덕(輔德:정3품)에 황일호(黃一皓). 겸보덕(兼輔德:정3품)에 채유후(蔡裕後), 필선(弼善:정4품)에 조문수(曹文秀). 겸필선(정4품)에 이명웅(李命雄), 문학(文學:정5품)에 민응협(閔應協). 겸문학에 이시해(李時楷), 사서(司書:정6품)에 서상리(徐祥履). 겸사서에 정뇌경(鄭雷卿), 설서(說書:정7품)에 유계(兪棨). 겸설서에 이회(李檜)가 임명되었다.
  익위사의 익위(정5품)에 서택리(徐擇履). 양응함(梁應涵), 사복시(정3품)에 정이중(鄭以重), 선전관(정3품)에 위산보(魏山寶)와 변유(邊宥). 구오(具 ), 부장에(部將)에 민연(閔 ), 의관(醫官)에 정남수(鄭楠壽). 유달(柳達)등을 임명하여 적진일지라도 조선왕실의 체통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게 했다.
  그러나 임지로 떠날 신료들이 결정된 그날 저녁, 천리 타국의 전쟁터에 끌려가는 것이 두려워 시강원의 보덕 황일호는 친구의 병을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핑계로 빠졌고, 익위사(翊衛司)의 관원 양응함도 병을 핑계삼아 빠지며 그 자리에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하급 무관들을 강제로 선임했다.
  병을 빙자하여 자신의 소임을 하급 무관에게 억지로 떠맡긴 익위사의 그 처사에 반발, 항의하던 하급직 무관들이 급기야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이르렀고 그 사실에 접한 비변사의 무장들은 격분한 채 다투어 일어섰다.
 “이런 쳐죽일......!”
  한 무장이 과격한 언사를 내뱉으며 책상을 박차고 일어서자 다른 무장들도 따라 일어섰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것이 저들의 본마음 아니외까.”
 “내, 이것들을!”
  분별 잃은 몇몇 관료들의 지각없는 행동이 관료들의 자숙으로 잠잠하던 정국에 결국 회오리를 몰고 왔다.
 “시대가 편안하면 좋은 벼슬은 제놈들이 다 차지하고 나라가 어려워지면 우리 무인들에게 책임을 지워 구렁텅이로 몰아 넣는 간교한 저들아니오이까....? 이런 잡스런 인간들이 어찌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라 할 수 있겠소이까!”
 “일국의 수상이라는 영의정 김류부터가 그렇소이다. 이번 세자 저하의  배행길에 김경징을 다시 천거하니까 제에미 상(喪)중이라 못 보낸다고 했다지 않소이까. 제 아들놈이 못나 제 마누라 죽은걸 모르고 영의정이란 자가 아직도 제 자식놈만 감싸고도니 이런 파렴치한 사태가 빚어지는 것 아니겠소이까.”
  말이 한 마디씩 보태어 질 때마다 격분한 무관들의 분기는 더욱 충천하고 있었다.
 “지금 신료들 가운데 상당한 사람이 어디 저 혼자 뿐이랍디까? 강화도에 들어갔던 사람 중에 이민구 마누라를 빼고는 살아 나온 사람이 없질 않소이까. 도성에 남아 있던 부인들도 목매어 순절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올시다.  ......헌데, 제 마누라 죽었다고 제아들놈 못 보내겠다 하는 것은 왕실을 업수이 여긴 것이 아니오이까, 세자 저하께서 인질로 잡혀가는 마당에 마누라 상타령이라니요.”
 “영상이라는 자가 저 모양이니 나라꼴이 이지경이 아니겠소이까. 병을 핑계하고, 친구를 팔아 북행길을 면하려고만 드니 어찌 이들이 입만 가진 신료라 아니할 수 있소이까.”
 “말로만 충성, 충성,  ........입으로 하는 충성이야 누군들 못하오리까,  썅......놈들!”
  맨 처음 일어섰던 무장이 자리를 박차고 나서며 다른 무관들을 이끌었다. 
 “갑시다, 이런 자들을 요절내지 않으면 누굴 요절내겠소. 이놈들을 요절내어 천하에 본보기로 삼읍시다. 갑시다!”
  뒤따르는 무장과 무관들의 기세는 살벌했다.
  무인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며 김류에게 붙어 아부하던 자들과 북행길에 빠져 달아나려 했던 자들을 잡아 끌어내어 걷어차고 발로 밟으며 몽둥이로 무작정 후려갈기자 피투성이가 된 육조의 관리들이 길바닥과 육조의 뜰 앞에서 힘없이 나딩굴었다.
  그 광경에, 무서워 공포에 떨던 문신들이 달아나고 혹은 도망치며 소문을 퍼트렸다.
 “무인들이 난을 일으켰다...  드디어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소문은 삽시간에 치닫고 내 뛰어 병조판서 신경진의 귀에도 들렸다.
 “무에야, 무신정변!”
  기겁을 한 신경진이 병조의 군사를 풀어 소문의 진상을 급히 파헤치자 그 소문은 곧 허위임이 밝혀졌고 이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육조의 관아를 누비던 무장과 무인들이 붙잡혀 왔다. 그러나 사태의 전말을 전해들은 신경진은 의분에 떠는 그 무인들을 오히려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문신들의 수난이 극도에 달하자 지방의 관아에서도 부패한 정치 관료들을 몰아내고 강직한 무인들이 들고일어나야 한다는 의견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ㅇ 
 

  8일 아침, 예친왕 다이곤이 홍제원을 경유하여 창릉을 지나 심양으로 향할 것이라는 전갈을 받고 인조는 홍제원으로 향했다.
  과연 다이곤의 행차는 청태종의 행차만큼이나 화려했다.
  청태종에게 아들이 있었으나 영민 하기가 아홉번째 동생인 다이곤에게는 미치지 못하므로 청태종은 그 아홉번째 동생인 다이곤을 신임하여 사랑했다. 그 사랑에 힘입은 다이곤의 세력은 청태종 다음으로 막강했고 그 막하에 조선의 세자와 두대군이 인질로 있는 것이었다.
  화려한 다이곤의 행차에 인조가 정성을 다하여 배웅하자 조선의 살림살이를 아는 다이곤은 성대한 인조의 그 환송을 웃음으로 답했다.
  다이곤이 조선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청나라가 정복한 여러나라 중에서 지조와 절개를 그 중 제일로 치는 조선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맘껏 취한 까닭이었다. 절조(節操)와 예를 아는 조선의 많은 여인들을 품에 안고서야 창과 칼밖에 모르던 다이곤의 마음이 녹아 내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이곤의 행렬 뒤로 세자와 대군의 행렬이 보였다.
  말에서 내린 소현세자와 봉림.인평 두대군이 아버지 인조에게 엎드려 마지막 하직 인사를 올린 뒤 눈물을 뿌리며 북행 길로 접어들었고 그 뒤로 포로로 잡힌 조선의 여인들이 통곡하며 따랐다.
  포로로 잡힌 조선 여인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청태종이 철군하던 그 첫날부터 이어지는 행렬길이 7일째인 오늘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앞으로 남은 5일 동안에 다시 또 수십만명이 끌려 갈 것이었다.
  그 애처로운 행렬을 눈물로 바라보던 인조가 가슴이 아파 더이상 보지 못하고 환궁길에 올랐다.
  눈물겨운 행렬을 차마 볼 수 없다 하여 인조는 큰길을 버리고 작은 길을 따라 서산과 송천을 경유, 신문(돈의문)에 들어섰으나 그 길 위에 중년의 여인이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 또 보였다.
 “여러해 동안 강화도를 수축하여 백성들의 피난처를 마련했는데 나라의 책임을 맡은 높은 사람들은 어찌하여 날마다 술로 소일하여 오늘날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하였습니까. 백성을 모두 죽이고 그 위에 높이 앉은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나이까.”
 “............” 
 “나는 남편과 아들넷 모두를 적의 칼날에 잃고 이제 늙은 이 한 몸만 남았으니 장차 이 일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
 “누굴 믿고......  누굴 의지하고 살란 말입니까......  아이고, 하늘이여 땅이여. 당신도 귓구녘이 있다면 어디 한번 말해 보시오. 이 허물이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 원통함은 누가 풀어 줄 것입니까.........”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여인에게로 다가간 인조는 어가에서 내려 그 여인을 위로하고 같이 눈물을 흘렸다.
  조선의 천지 사방엔 눈물이 마를 날 없었다. 가여운 이 여인뿐 아니라 잡혀가는 사람들도 또한 남겨진 사람들도......
  조선의 임금을 비롯한 조정의 신료라 하는 모든 이들도 똑같은 입장의 한 많은 피해자들이었다.

  환궁한 인조는 나라를 이 지경으로 끌고 간 인사들을 척결하기 위해 극단의 조치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먼저 승정원에 전교를 내렸다.
  이번 사태에 책임 있는 자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 죄를 물을 것이라는 추상같은 내용이었다. 이에 의정부의 신료들은 전전긍긍했고 그와 때를 같이하여 대간 들의 탄핵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날로 거칠어지던 양사(사헌부.사간원)의 상소는 급기야 걷잡을 수 없는 극렬한 내용으로 바뀌어 탄핵의 대상이 된 신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고 양사의 상소가 날개 돋친듯하자 이번엔 재야 사림(士林)의 상소가 또한 빗발치듯 날아들어 그 신료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그 내용의 대강은
 『나라를 절단낸 간흉 김류와 이번 전쟁에서 싸워 보지도 않고 스스로 패한 평양 감사와 도원수 김자점, 임금을 근왕하지 않은 팔도의 감사와 관찰사, 강화도 수비를 책임졌던 검찰사 김경징과 나라가 이 꼴이 되도록 방치한 조정의 무능한 신료들을 모두 잡아내어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실로 어마어마한 내용의 탄핵들이었다.
  상소에 젖어 가던 인조의 두눈에 어느덧 살기가 돋기 시작했다.
  사헌부. 사간원의 상소와 재야 사림에서 죄인으로 언급한 공통된 인물은 영의정 김류와 그 아들 김경징, 도원수 김자점과 유도대장 심기원, 원임대신 윤방, 각도의 감사와 관찰사, 강화유수 장신과 부사 이민구, 그리고 충청수사 강진흔 등이었다.
 “이자들의 죄는 과인이 직접 물을 것이니 먼저 의금부에 하옥토록 하라.”
  인조는 친국을 선언하고 나섰다.
  의금부는 역모나 역적 등의 중죄인만 다루는 곳이었다. 한번 들어가면 그 누구라도 성해 나올 수 없는 곳이 의금부였다. 그 의금부에 죄인들을 하옥시켜 가혹하게 다루고자 했던 인조의 의도는 나라의 대임을 맡은 관료들이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드는 관행에 쐐기를 박고 그 책임을 직접 추궁하므로 써 일벌백계의 본을 보이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의금부의 앞마당엔 쇠사슬에 손발이 묶인 죄인들이 끓어 엎드려 있었다.
  어금니를 악 다문 인조의 양옆으로 무장한 의금부의 관원들과 조정의 백관들이 시립 했고 죄인들은 상투를 풀어 산발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너희는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자들로 나라의 보살핌과 나라의 녹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은 자들이었느니라. 그런 너희들이 나라가 위급한 지경에 당했음에도 그 책무를 다하지 아니하고 일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꾀했느니라.”
 “..............”
 “......너희 같은 자들의 죄를 다스리지 않고서야 이 나라를 어찌 아름다운 나라라 할 수 있겠느냐.”
 “...............”
 “이제 과인은 하늘과 백성들의 눈물을 대신하여 그 죄를 벌하고자 하노라.”
  인조의 싸늘한 의지에 의금부 앞마당은 얼음장같은 냉기로 덮혀 갔다.
  제일 먼저 도마에 오른 것이 김류와 김경징 부자였다.
  인조는 핏발선 눈으로 김경징을 노려보았다.
 “먼저 네놈의 언사와 행실이니라.”
 “.............”
 “네놈은 이 나라 조선에 네 애비 영의정만 있는 줄 알았지 그 위에 상감이 있는 줄은 몰랐으니 어찌 네가 과인의 녹을 먹은 신하라 할 수 있겠느냐.”
 “.............”
 “너는 네 입으로 버릇처럼 말하길, 너희 두 부자가 아니었다면 나라의 어려움을 구해 낼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 했다는데 과연 네말대로 너희 두 부자가 이 나라 조선을 구했느냐, 아니면 망쳤느냐, 어디 말해 보거라.”
  노기 충천한 인조의 목소리가 의금부 앞마당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래도 네 애빈 반정에 조금 공이 있는 자였니라. 그 공을 잘 보전하여 자손만대에 길이 전했으면 오죽 좋으랴 만 네놈은 3대를 못 가 네 대에서 그 공의 뿌리를 아주 뽑아 버렸느니라.”
 “.............”
 “괘씸한 놈! 그러구도 네놈이 강화도를 책임진 검찰사였더냐.”
 “.............”
 “강화도 수비를 그르치고 검찰사로서 직무를 유기한 죄!”
 “.............”
 “너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죽어 간 생령이 그 얼마인 줄 아느냐. 이노옴!”
  인조의 추상같은 호령에 넋이 나간 김경징은 무서워 덜덜덜 떨고만 있고 시립해 있던 백관들과 의금부의 무장들까지 그 준엄한 꾸짖음에 목을 바짝 움추렸다.
 “억울하게 죽어 간 백성들의 원혼을 달래자면 네놈의 머리가 필요할 것인즉!”
  순간 인조의 두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죄인 김경징을 효수(죄인의 자른 머리를 장대에 달아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내거는 형벌)토록 하라.”
 “............!!!”
  그 순간 의금부 앞마당은 숨이 멎은 듯 했다.
  반정 1등공신 영의정 김류의 아들이 설마 죽음이야 당하랴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 설마 했던 기대가 얼마나 가당찮은 기우였던 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한사람의 목숨을 잘라 낸 인조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시퍼런 칼날이었다.
 “곤경에 처한 강진흔의 선단과 위급 지경의 강화도를 구출할 생각은 아니하고 저 살 궁리만으로 비겁하게 도망을 친 강화유수 장신, 네놈도 듣거라.”
 “.............”
 “네놈의 형인 장유가 공조판서니라. 네 형의 공을 생각해서라도 너를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 네놈 목숨 중한 줄만 알고 왕실을 업수이 여긴 죄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죄는 백번을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느니라.”
 “...............”
 “죄인 장신을 사형에 처하라.”
 “............!!!”
  두사람의 목숨이 각각 효수와 사형으로 결정되자 죄인 김경징과 장신은 그 자리에 꼬꾸라진 채 미동이 없었다. 그대로 혼절한 것이었다.
  인조의 싸늘한 눈길이 쓰러진 두 사람은 쳐다도 안본 채 영의정 김류와 도원수 김자점을 향했다. 그러나 김류와 김자점은 이미 인사불성이었다.
  김류는 자신의 아들이 효수로 결정 날 때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고 유난히 겁이 많은 김자점은 의금부 앞마당에 끌려 나올 때부터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죄인 김류는 듣거라.”
  시립해 있던 백관들의 목에서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너는 나라의 수상으로 이번 난을 사전에 방지하지 못한 죄가 크다.”
 “...............” 
 “네아들 김경징을 강화도 검찰사에 임명할 때도 과인은 네게 그 소임을 맡겨도 되겠느냐 물었었다.”
 “..............”
 “그때 너는 네 아들놈이 강화도 방비만은 누구보다도 잘 할 것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은 네놈 부자의 재산을 도피시키기 위한 하나의 술책이었음을 과인은 늦게야 알았느니라.”
 “................”
 “네놈 부자의 재산 도피가 이 나라 왕실의 존엄보다 앞선단 말이더냐?”
 “..............”
 “어찌 원손을 제쳐두고 네놈들의 재산이 먼저 강화도에 들어갔느냐 이 말이다.”
 “................”
 “잘난 네 아들놈의 무능으로 원손의 행방은 아직 모르고 있느니라.“
  인조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을 이겨내려는 인조의 몸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며 떨고 있었다.
 “정녕 너희 두 부자는 효수 하여 세상의 본보기로 삼아야 마땅할 것이나 네놈이 반정의 공신이기에 목숨만은 붙여 두노라.”
 “..............” 
 “죄인 김류의 공신훈작을 모두 거두고 삭탈관직하여 원지(遠地)에 유배하되 위리안치토록 하라.”
  위리안치란 귀양보낸 곳에 죄인이 기거할 움막을 가시 울타리로 에워싸고 그 가시울타리속에 죄인을 가두어 두는 극한 형벌을 말하는 것이다.

  인조는 냉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반정 공신이라 하여 그 죄를 가벼이 다룬다면 제2. 제3의 이같은 일들이 반복될 것이었다. 그것을 우려하여 인조는 목소리에 다시금 결기를 돋구었다.
 “죄인 김자점은 듣거라!”
  김자점이 고개를 들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네놈 또한 반정의 공신이나 봉수를 사사로이 가로막고 적의 침공 사실을 사흘이나 늦춘 죄 죽어 마땅할 것이니라.”
 “..............”
 “또한 싸움은 해보지도 않고 도망부터 하였으니 어찌 너를 조선군의 도원수라 할 수 있겠느냐.”
  김자점은 고개를 든 채 멀뚱한 눈만 꿈벅거렸다.
 “너를 사랑한 과인의 마음이 태산과도 같았는데 고작 너는 네 목숨이 아까워 도망만 하였단 말이더냐.”
 “..............”
 “산성에 외로이 숨어 있는 과인은 생각이 나지도 않더란 말이더냐 이.....괘씸한 놈!”
  인조는 무릎을 치며 또다시 몸을 떨었다.
 “너를 어떠한 형벌로 다스려야 과인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 수 있겠느냐.”
  터져 오르는 분노를 참아 누르던 인조의 몸이 다시 경련했다.
 “네놈도 공신의 훈작을 모두 거두고 삭탈관직 할 것이니라.”
 “...........!”
 “죄인 김자점을 원지에 유배시키되 위리안치토록 하라.”
 “...........!!!” 
  순간 고개가 푹 꺾인 채로 히죽대며 중얼거리던 김자점이 그대로 꼬꾸라졌고 그 꼬꾸라진 김자점은 미동조차 없었다. 삭탈관직과 위리안치의 유배에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평생을 가꿔 온 온갖 부귀영화가 마치 꿈속의 일이었던 양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자 허망함을 이기지 못한 김자점의 넋이 먼저 나간 것이었다.
  김자점이 쓰러지건 말건 단호한 인조의 의지는 멈추지 않았다.
  유도대장 심기원과 강화부사 이민구, 원임대신 윤방은 각기 맡은바 소임을 다하지 못한 죄로 삭탈관직과 원지유배에 위리안치를, 부원수 윤숙, 부원수 신경원, 강원감사 조정호, 경기수사 신경진(申景珍), 충청감사 정세규, 충청수사 강진흔은 임금을 근왕하지 않은 죄로 원지에 유배토록 했다.
  그러나 강진흔은 끝까지 싸우지 않아 적이 바다를 건너게 했다는 누명을 쓰고 귀양지에서 다시 잡혀 와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피난지 강화도에서 강진흔만큼 힘써 싸운 장수도 없었으나 죽임을 당하게 되자 충청 수영의 군관과 군졸들이 대궐문앞에 엎드려 그의 죄를 면하여 주길 빌고 또한 비변사에 탄원하기도 하였으나 원손의 행방을 모르는 인조의 노기에 눌려 결국 아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또한 함경감사 민성휘, 황해감사 이배원, 황해병사 이석달과 전라감사 이시방, 전라병사 김준룡, 경상감사 심연, 경상병사 허완, 충청병사 이의배, 북병사 이항, 남병사 서우 등 주요 외직의 수령들이 삭탈관직 당하고 귀양지로 유배되었다.
  조정의 이름 있는 권세가들과 조선 팔도 각 지방의 세도가들이 한꺼번에 삭탈관직 당하거나 원지에 유배당하고 난 조선의 정국은 꽁꽁 얼어 가고 있었고 들고 일어나려던 무인들의 기세도 한풀 꺾인것은 물론 이었다.

  인조는 여러날동안 슬픔에 잠겨 있었다.
  한때 그들에 의해 임금에 추대된 인조였다. 그런 그들을 죄질에 따라 죽이거나 혹은 멀고먼 외진 곳으로 귀양보낸 인조의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었다.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의 그 넓은 빈방에 홀로 외로이 남은 노회한 인조는 허전한 마음을 가누질 못했다.
  인열왕후가 세상을 뜬지 3년..........
  그 3년이 되도록 비어있는 양화당에서 둥지잃은 새처럼 외로워 하는 인조를 후궁 귀인(귀인:내명부의 종1품직 첩) 조씨가 달래고 있었다. 때론 상처입은 새를 어루만지는 마음으로, 또 때론 중전이었던 인열왕후의 후덕한 마음으로...........
  그렇게 인조의 외로움을 다잡아 가던 귀인 조씨가 어느날부터인가 그 비어있는 양화당의 틈을 엿보기 시작했다.
  3년이 되도록 새 중전의 간택이 없자 인조의 늦사랑을 독차지한 그 위세로 욕심을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인조의 정실 자식인 세자와 대군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전쟁터에 인질로 잡혀갔고, 세자 내외가 기거하던 동궁전도 텅 비어 있었다. 자신의 아들인 숭선군(崇善君)과 낙선군(樂善君)이 인조의 사랑을 함뿍받고 있던 터에 전쟁터에 나간 세자와 대군들에게 변고라도 생겨 보위를 물려받지 못할 일이 생긴다면 그 자리는 당연히 제자식이 물려받아야 했다.
  귀인 조씨의 입술이 바싹 타지 않을 수 없었다.
  귀인 조씨의 자가당착적인 논리의 비약이 꿈을 갖게 했다.
  자신은 중전이 되어 조선의 국모가 되고 자신의 맏이인 숭선군이 당당하게 보위를 물려받아 조선의 임금이 되는 꿈......... 
  텅 비어 있는 대궐에서 안 꾸어 본 꿈이 없도록 온갖 꿈을 다 꾸어 본 귀인 조씨의 그 꿈은 희망과 상상이 한데 어우러진 환상 같은 꿈이었다.
  그 꿈이 귀인조씨의 마음에 야심을 불러 일으켰다.
  못할 것도 없다 여긴 귀인조씨가 꿈을 현실로 이루어 보려는 뜻을 세우기 시작하자 눈치빠른 관료들이 도왔다. 출세 가도를 달리기 위해 줄설 곳을 찾던 조정의 관료들이 그 귀인 조씨앞에 경쟁적으로 줄을 서가며 그 귀인 조씨의 야심에 불을 당기기 시작 한 것이었다.





                                  ㅇ


  "방금 무어라 했습니까?"
  "어젯밤 동사자(凍死者)가 삼백여 명이나 발생했다 하옵니다."
  "삼백여 명이나?"
  "그러하옵니다, 세자 저하."
  놀란 소현세자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봉림대군이 숨을 삼켰다.
  만주 심양(瀋陽)의 조선인 포로 수용소......
  강화도에서 잡힌 왕실 및 문무 양반의 부녀자들과 서울,개성,사리원,평양 등지에서 붙잡힌 칠십만 조선인 부녀자들이 눈보라 몰아치는 광활한 눈밭 위에 개미떼처럼 운집해 있었다.
  코끝에 고드름이 달리는 혹한의 포로 수용소에서 살을 찢듯한 대륙의 찬바람이 칠십만 포로들의 머리카락까지 하얗게 얼어 붙이자 그 바람 앞에 너덜대는 천막으로 바람만 겨우 막은 임시 수용소의 참상은 빙산지옥(氷山地獄), 웅크린 여인들을 산채로 얼어 붙이는 빙산지옥의 참혹한 현장이었다.
  소현세자를 대신 하여 간밤 숙직 자인 시강원 보덕 정태화(鄭太和)와  문학 정뇌경(鄭雷卿)을 대동한 봉림대군이 그 빙산지옥의 현장인 포로 수용소를 향해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보덕 정태화는 친구의 병을 핑계로 빠진 황일호를 대신 하여 임명된 사람이었고 문학 정뇌경은 세자의 북행 길에 처음부터 자청하여 따라나선 그 공으로 사서에서 문학으로 승격한 사람이었다
  삼백여구의 시신이 마치 통나무 등걸처럼 나뒹구는 참담한 현장에서 봉림대군은 차마 두 눈을 바로 뜰 수 없었다.
  발가벗겨진 채 뻣뻣하게 굳은 시신들의 음부와 눈, 코, 입은 얼어 하얀 성애가 끼어 있었고 갑작스런 봉림대군의 행차에 몸둘 바를 몰라 하는 몇몇 여인들을 제외하고는 한쪽 구석에서는 그 주검을 앞에 두고서도 눈물은커녕 사람의 눈이라 할 수 없는 핏발선 야수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이제 막 들것에 실려 나온 시체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죽은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을 벗겨 먼저 차지하려는 아귀다툼이었다.
  그 소란 속에서 산처럼 쌓인 시체 더미를 바라보는 봉림대군의 눈시울이 뜨거워 지고 있었다.
  모두가 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 죄 없는 사람들이 이역 만리 험한 곳에 끌려와 부모와 남편과 자식만을 오매불망 그리워하다 파랗게 얼어붙어 치뜬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숨져간 것이었고 그리고 모질지 못해 순박하기만 하던 사람들이 살기 위해 성난 야수로 돌변한 것이었다. 그 통한(痛恨)의 그 현실 앞에서 봉림대군은 숨을 삼켰다.
  그때 또 들것에 실려나온 시체가 그 즉시 발가벗겨 졌고 알몸의 시체는 곧바로 나부등걸처럼 던져졌다 그 시체더미를 바라보는 봉림대군의 눈시울로 강화도의 텅 빈 진지와 김상용의 분사가 겹쳐지더니 갑자기 시야가 뿌우였게 흐려졌다.
  "아니됩니다. 이에서 희생자가 더 나와서는 아니됩니다."
  눈물에 젖은 봉림대군이 그 역시 처연하게 고개꺽인 정태화와 정뇌경에게 말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조선 사람들이 모두 동사하고 말겠습니다."
  "........"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동포(同胞)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소리치던 봉림대군이 어느새 그 야수들의 싸움터로 뛰어들고 있었고 봉림대군을 미처 말리지 못한 놀란 정태화와 정뇌경이 달려가는 그 봉림대군을 소리쳐 부르며 뒤쫓고 있었다.
  "대, 대군마마, 아니되옵니다. 돌아오소서, 대군마 - 마."
  "대군 마-아-마"
  그러나 봉림대군은 찢어진 시체의 옷가지를 조금 더 차지한 여인의 품안에 든 천 조각을 다시 빼앗으려 이리떼처럼 달려드는 여인들로 인해 입술이 터지고 머리채를 휘둘린 선혈이 낭자한 여인이 찢어지듯 질러대는 비명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처절한 싸움의 현장 한 가운데로 들어섰다.

  뺏고 빼앗기며 몸부림치던 사람들의 냉혹한 눈빛에 비해 살고자 내뿜는 숨소리가 오히려 뜨겁게 느껴지던 싸움이 그러나 누가 말린 것도 아닌데 잦아들고 있었다.
  송파와 동대문 밖에서 인조 앞에 엎드려 애원하던 여인들이었다. 그 여인들이 눈물에 젖은 채로 서 있는 왕실의 봉림대군을 보자 피터지게 싸우던 여인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달아났고 무언가 희망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봉림대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여러분이 겪는 고통...... 어찌 말로......위로가 되겠습니까."
  봉림대군이 두 눈을 꾹 눌러 젖은 눈물을 털어 버리고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 할 때 시체 더미 속에서 앳되어 보이는 소녀의 주검이 봉림대군의 눈에 뜨였다.
  봉긋하게 갓 솟아오른 젖가슴으로 보아 십오-륙세나 되었을까.......
  살아 있었다면 갸름한 얼굴에 청초하게 보였을 아름다움을 지닌 소녀였다.
  "고국을 떠나 이역 하늘 아래까지 끌려 온 것만으로도 고통 인줄...... 압니다. 더구나 이곳의 날씨는 조선과 같지 않아 변화가 무쌍하다고 하니 기온이 다시 급랭하기 전에 각별히 유의하셔서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무사하셔야 할 것입니다."
  "........."
  "부디, 무사하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하고 나자 갑자기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소현세자와 자신은 볼모의 신세요 여인들은 포로의 신세였다. 누가 누구를 위로할 그런 처지가 아니었으나 그러나 평소 무심했던 말, 즉 무사하길 바란다는 그 소망어린 말 한마디가 이토록 간절할 줄은 몰랐다.
  죽어 그 산처럼 쌓인 가엾은 사람들과 그 안에 어린 소녀의 주검이 눈시울 붉어 가던 봉림대군의 가슴을 다시 뜨겁게 달구었다. 
  무덤이라도 쓸 수 있다면 그 앞에 머리 숙여 추도의 향이라도 사루겠건만 무덤은 고사하고 시체의 처리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 앞에 봉림대군은 솟구쳐 오르는 오열을 억누를 수 가 없었다.
  갑자기 봉림대군의 두 어깨가 출렁 했다.
  봉림대군이 여인들의 앞임에도 불구하고 흐느낌을 토해 내자 둘러섰던 여인들이 그 봉림대군앞에 엎어지며 울부짖기 시작했고 곡성이 짙어지면서 가련한 동포들의 죽음이 그제야 애달파 여인들은 서러운 피눈물을 한없이 쏟아 내었다. 살아도 산목숨이 아닌 자신들의 처지가 죽도록 서글펐기 때문이었다.
  곡성이 진동하는 가운데 봉림대군의 두 눈이 무엇에 놀란 양 흠칫했다.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여 거듭 눈을 씻고 다시 살펴보는데 정뇌경이 소스라치며 소리를 질렀다.
  "살아 있습니다. 대군마마! 사람이 살아 있사옵니다!"
  소스라친 정뇌경의 외침보다도 봉림대군의 두 발이 먼저 달려가고 있었다.
  그 소녀였다.
  시체 더미 속에 버려진 소녀의 손가락이 움찔움찔 하더니 이젠 팔꿈치를 들어 움직이고 있었다.
  "어서 빨리!"
  봉림대군이 정뇌경을 재촉했다.
  놀란 여인들이 우르르 쫓아 나갔고 봉림대군과 정태화, 정뇌경이 그 소녀를 시체 더미 속에서 끄집어내었다.
  다른 시체들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뻣뻣하게 굳어 있는 몸이었으나 그러나 미약하나마 가느다란 숨결이 되살아나고 있었고 파랗던 입술이 점차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소생의 빛이었다.
  봉림대군이 두루마기를 벗어 그 소녀를 감싼 채 소녀의 어깨와 팔을 문지르며 주무르기 시작하자 정태화, 정뇌경과 우 둘러선 여인들이 저도 모르게 달려들어 소녀를 감싸안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어 들것이 대령했고 소녀는 들것에 실려 다시 천막 안으로 옮겨졌다.
  기적이었다.
  막혔던 기혈(氣血)이 햇볕에 녹으며 되돌기 시작한 것이었고 천막 안으로 옮겨진 후 여인들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소녀는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그 깨어나는 소녀를 바라보며 봉림대군은 소현 세자가 있는 군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올 때 비해 한결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ㅇ


  삼백 여구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수용소의 그 정황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소현세자는 숨죽인 채 두 눈을 꾹 눌러 감았고 이어 그 시체 더미 속에서 한 소녀가 다시 살아났다는 대목에 이르러 소현세자의 두 눈도 번쩍 떠졌다. 암울하기만 하던 조선인 포로 촌에 소녀의 소생은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의 전령이 찾아 온 것만 같은 소식이었다.
  "그래, 정녕 소생했단 말입니까?"
  "그러하옵니다, 세자 저하."
  놀라움에 두 눈을 부릅뜬 소현세자앞에 정태화가 부복했다.
  "그 추위 속에서 다시 살아나다니......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니신가?"
  "저도 처음엔 믿기지 않아 몇 번인가 다시 보았는데 이 두 사람과 손수 그 소녀를 천막 안으로 옮겨 뉘인 다음에야 그 사실이 꿈이 아닌 줄 알았사옵니다."
  약간은 상기된 봉림대군이 놀라움에 들뜬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소현 세자에게 당시의 상황을 다시 한번 소상하게 피력하자 고개를 끄떡이던 소현세자가
  "그렇다면 의원을 보내 그 소녀의 용태부터 살펴 주어야 될 일이 아니신가."
  하므로 그 말에 봉림대군과 정태화, 정뇌경의 그 스산했던 마음이 녹아 내리고 있었다.
  "하온데....  세자 저하."
  봉림대군이 기쁨에 잠겨 가는 그의 형 소현세자를 조신(操身)하게 부르며 허리를 낮추자 소현세자가 그 봉림대군을 돌아보았다.
  "수용소의 낡은 천막으로는 언제 또 희생자가 날지 모르는 일이온지라......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강구되어야 할 줄 아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세자 저하. 수용소의 천막은 청나라 군병이 임시로 세워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옵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수용소의 천막으로는 이 추위를 감당해 내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옵니다."
  봉림대군에 이어 수용소의 참상을 몸으로 겪은 정태화가 허리 굽혀 간곡하게 아뢰자 동감을 나타내던 소현세자가 긴 한숨을 내 뿜으며 수심 가득한 낯빛을 띠었다.
  "그걸 어찌 모르겠습니까. 허나.... 방도가 없질 않습니까?"
  "저하, 찾아보면 방법은 있을 것이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다시금 수심에 젖어 가는 소현세자를 그러나 봉림대군이 위로했고 위로하는 그 봉림대군을 처연한 눈으로 바라보던 소현세자가 문득 낯빛을 밝게 했다.
  "무슨 방법.... 이라도.......?"
  "저하, 예친왕을 만나 보는 것이 어떠하겠나이까?"
  "예친 왕.......다이곤 을....?"
  "그러하옵니다, 저하. 예친왕 다이곤에게 수용소의 참상을 숨김없이 알리고 청나라가 나서서 대책을 세우도록 설득하는 것이 우선 순서가 아니겠나이까?"
  "우리가 저들의 포로인데 저들이 우리의 말을 듣겠는가?"
  낙망한 목소리였다.
  "만일 저들이 우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나서는 수밖에 없질 않겠사옵니까?"
  "스스로 나서다니......?"
  소현세자가 눈을 뚱그렸다.
  "들판에 널려 있는 갈대를 꺾어다 이엉을 엮어 보온이라도 해야 되질 않겠나이까?"
  ".........?"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것이 차라리 나으리라 여겨지옵니다."
  실망한 소현세자가 가라앉은 무거운 목소리를 냈다.
  "아녀자들이 그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보시는 겐가?"
  "아녀자라 할 지라도 힘을 합치면 적어도 지금 보다는 나을 것이옵니다."
  "세자 저하, 청나라에서 허락만 한다면 갈대를 꺾어 오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정태화가 다시 동조하고 나서므로 어두운 낯빛을 했던 소현세자가 타오르듯 하는 봉림대군의 두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그렇다면 이번일, 누가 적임이라 보시는가?"
  "굳이 신료들을 보내기보다는 제가 직접 가서 만나 보겠나이다."
  "아우님이?"
  포로들의 기숙(寄宿)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자청하고 나서는 봉림대군을 보자 소현세자의 놀란 눈이 다시 뚱그래졌다.
  "굳이 아우님이 가실 일이 아니지 않으신가"
  "저하, 예친왕은 청 태종의 동생이옵니다. 가벼이 신료들을 보낼 일이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
  "허락하여 주소서, 저하."
  눈빛만 아니라 생각도 깊었다.
  그 사려 깊음에 소현세자가 안도했다. 자신보다 일곱살 아래인 열아홉살의 봉림대군이 갑자기 어른스러워 보인 까닭이었다.
  "하면.......  누구와 함께 가는 것이 좋으시겠는가?"
  "보덕 정태화와 문학 정뇌경이 수용소의 참상을 보았으니 함께 가는 것이 어떠하겠나이까?"
  "지당하신 말씀일세, 그렇게 하시게."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격려의 눈빛을 보내는 소현세자앞에 정태화와 정뇌경이 다시 바닥에 엎드리며 부복했다.
  "최선을 다 하고 돌아오겠나이다, 저하."
  "다녀 오겠사옵니다, 저하."
  세자의 군막을 나서는 봉림대군의 머리 위로 밝은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알수 없는 무거운 책임감이 온 전신을 휘감고 도는 느낌에 전율하던 봉림대군이 포로 수용소의 참상을 두눈으로 목격한 이후 그 책임을 스스로 자임하고 나서면서부터 갑자기 가슴속에서 알지못할 자신감이 용솟음쳐 오르기 시작했다. 





                                 ㅇ


  봉림대군과 보덕 정태화, 문학 정뇌경이 예친 왕 다이곤의 군진(軍陣)을 찾았다.
  다이곤의 군진은 청태종 홍타시가 있는 궁궐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다이곤의 군진은 청태종의 위용에 버금 갈 만큼 정돈이 잘되고 정비(整備)를 잘갖춘 군진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담장 안에서는 수천인지 수만인지 모를 군사들이 오(伍)와 열(列)을 정돈한 채 창칼을 휘두르며 훈련하는 모습이 보였고 야트막한 야산에서는 조총과 활을 든 궁수들이 쉴 사이 없이 총과 활을 쏘며 훈련하는 모습도 보였다. 또 지평선이 아른대는 너른 들판에서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포술(砲術)훈련과 기마병(騎馬兵)의 기마 조련술이 다이곤을 찾아가는 세사람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조선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장비와 병력의 절제된 훈련 모습이어서 추위 속에 찾아가는 세사람의 마음이 더욱 움추러 들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포술 훈련과 기마 조련술이었다.
  포병이 포탄을 수없이 쏘아 대고 나면 곧 바로 수천의 기마병이 공격을 감행하는데 처음에는 다섯 줄기의 종대로 치닫던 기마병들이 어느 순간 횡대로 전환하는가 하더니 포탄이 작열 하여 연기가 치솟는 그 일대를 다시 학익진의 진용으로 포위하며 긴 창을 휘둘렀다. 그 진(陣)의 전개가 어찌나 신속하고 빠른지 눈이 미처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고 그 당당한 모습은 더이상 그들 앞에 거칠 것이 없어 보이는 그야말로 천하무적의 위용이었다.
  이 훈련은 이제 곧 진행될 명나라와의 싸움에서 그대로 전개될 싸움의 전법이 될 것이었고 끊임없이 훈련에 임하는 이들의 기세로 보아 싸움은 곧 청나라의 승리로 이어질 것이었다.
  명나라 숭상은 관습이요 습관처럼 몸에 밴 이들 세사람의 가슴이 무거웠다.
  '조선은 고사하고 명나라 마저 어찌 이들에게 멸망의 위기를 맞게 되었는가.......'
  비탄의 감회에 젖어 가던 봉림대군이 문득 정신을 수습했다.
  만면에 웃음 가득한 예친왕 다이곤이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게 누구요, 봉림대군이 아니신가.....?"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호들갑에 가까운 다이곤 이었으나 봉림대군은 긴장으로 몸이 굳어 가고 이었다.
  예친왕 다이곤은 봉림대군보다 일곱살 많은 소현세자와 동갑이었는데도 소현세자에 비해 훨씬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전장에서 뼈가 굵은 탓 도 있겠거니와 호색가로 소문난 그의 주변에 아름다운 여인들이 무수히 있는 것도 한가지 이유일 것이다.
  소현세자 보다 두배나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어른 같은 예친왕 다이곤 앞에서 봉림대군의 긴장이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여긴 조선보다 추운 곳인데......  세자는 잘 있소?"
  "황제 폐하와 예친왕 전하의 염려 덕분으로 건강하게 잘 있습니다."
  봉림대군이 공손한 태도를 보이자 다이곤은 허허 하고 웃었다. 진짜 나이 든 사람 같았다.
  "아, 편히 앉으시오, 편히들......."
  호피(虎皮)깔린 용상에 깊숙이 앉은 화려한 모습의 다이곤이 의자 끝에 걸터앉아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 봉림대군과 정태화, 정뇌경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 나라에 온 뒤로 적조(積阻)했는데 이렇게 찿아주시니 고맙소."
  그때 궁녀들이 찻상을 들고 들어왔다.
  "자, 드시면서 이야기합시다. 자, 자, 드십시다."
  궁녀들이 봉림대군 앞으로 가져온 찻상에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찻잔이 세잔 놓여 있었고 따로 잔을 받은 다이곤은 조선의 세 사람을 향해 잔을 들어 보였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승자의 여유로운 모습을 바라보던 봉림대군의 시린 가슴이 갑자기 뭉클했다. 아버지 인조의 허전한 모습이 다이곤의 모습 위에 순간 어리다 사라졌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핏발선 여인들의 눈빛이 봉림대군의 눈앞에 매달리다 사라졌다. 
  소현세자와 자신이 기거하는 군막도 추워 솜바지 저고리를 몸이 둔하도록 껴입었는데도 몸은 자꾸 떨렸다.
  세자가 있는 왕실의 사정이 그러할 진대 수용소의 참상이야 말해 무엇하리.......
  봉림대군의 콧등이 시큰하며 눈시울이 붉어지는데 무럭무럭 오르는 찻잔의 김으로 인해 다이곤이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다이곤은 차를 마시는데도 열심이었다. 기름이 둥둥 뜨는 우윳빛 차를 김을 후후 불어 가며 열심히 마시는데 후르륵 짭짭하는 소리가 듣기에도 맛나게 들렸다.
  봉림대군이 차를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셔 보았다. 구수한 향에 비해 맛은 비릿했고 조금 있자니 속이 매슥매슥 하며 당장 구역질이 올랐다.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무슨 보약이라도 마시듯 후르륵 짭짭대는 다이곤을 김너머로 바라보던 봉림대군은 그 차를 구역질을 꾹꾹 눌러 가며 억지로 다 마셨다.
  마시고 나니 가슴이 답답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차 맛이 어떻소?"
  다이곤이 달아오른 봉림대군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으나 봉림대군은 머뭇거렸다.
  "처음 마시는 사람은 속이 편치 않을 거요."
  "........?"
  "이 차는 내가 특별히 주문해 만든 것이라 맛도 효과도 모두다 특별한 것이오."
  "........."
  "특히 정력에는 그만이고 추위를 이겨내는데도 탁월한 효과가 있지요."
  다이곤이 웃고 있었다.
  "나를 따르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좀 많아야지........"
  다이곤이 좀더 소리내어 웃었고 봉림대군은 가슴이 답답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남성의 양기(陽氣)를 촉발시키는 강정제(强精劑)를 다이곤이 차처럼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 그 강정제를 믿고 양기를 무작정 뽑아 내 쓰다 보면 몸은 쉬이 쇠락(衰落)을 가져올 뿐이었다. 다이곤의 얼굴이 초로(初老)의 증세를 보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다이곤은 많은 여인들을 거느린 것이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양 떠벌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맨 처음 몽고를 점령했을 때 그중 미인을 골라 데려온 여인이 있는데 지금도 그 짓 할 때는 꼭 짐승같이 하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명나라 귀족 출신의 여인들과 동침 할 때는 목욕을 같이 하며 여인의 몸을 손수 씻겨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와 바다 건너 멀리 왜국에서 데리고 온 여인들은 그 짓 할 때 소리를 하도 질러 사람의 혼을 우려 뺀다는 이야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쏟아 놓았고 그중 최근에 조선에서 데리고 온 여인들과의 동침 이야기가 나올 때는 봉림대군과 정태화, 정뇌경의 얼굴이 무안하여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여인들만 능욕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들이 능욕 당하는 것 같아 가슴 한구석에서는 주먹 같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껄껄거리는 다이곤을 봉림대군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봉림대군의 마음이 한담(閑談)이나 듣고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예친왕 전하."
  문득 정색한 다이곤의 얼굴이 봉림대군 눈앞으로 다가왔다.
  "전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이곳 날씨는 조선과 사뭇 다르옵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라는 듯이 정색한 다이곤의 두 눈이 봉림대군을 쏘아 보고 있었다.
  "날씨뿐만 아니 오라 생활 환경도 많이 다른지라........."
  "........."
  "온돌을 사용하던 조선에서는 하루 두번 아침 저녁으로 불만 지피면 한겨울 추운 날씨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으나 이곳은 바람도 찬데다 맨바닥에서 생활을 해야 하고 또 수시로 천막 안에다 불을 지펴야 하는 어려움으로 뒤바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사옵니다."
  "그야 그렇겠지요, 그런데.......?"
  "천막 안에서 불을 지펴 본 경험들이 없는지라 첫째는 연기에 질식해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이 많고, 두번째는 불을 너무 많이 지펴 천막을 태운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또 밤에는 불이 꺼져 추위에 언 채 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이니 추운 날씨에 웅크리고 있는 그 참상이 너무도 딱하여......."
  봉림대군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난 게요?"
  정색하여 바라보던 다이곤이 그 붉게 젖어 가는 봉림대군의 두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저께 밤, 저희 수용소에서 동사.... 자가 무려 삼백여 명이나 발생했사옵니다."
  순간 다이곤의 두 눈이 번쩍 하는 듯 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요. 소상히좀 말해 보시요."
  생각보다 다이곤의 반응이 크자 조심하던 봉림대군의 목소리에도 힘이 올랐다.
  "폭설이 내린 뒤 땔감 없는 저희 수용소에 강추위가 몰아닥쳐 동사 자가 발생한 것이니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닙니다만 그 참상이 너무도 참혹하여 차마 두 눈을 뜨고는 바로 보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 이번 추위에 삼백여 명이나 떼죽음을 당했다 그 말이요?"
  "그러하옵니다, 예친왕 전하."
  "허---"
  다이곤이 탄식했다.
  "이번 추위야 이곳에서는 끝물 추위로 여기는 대단찮은 추윈데 그 추위에 얼어 죽다니........."
  "전하, 앞서서도 말씀드렸듯이 조선 사람들은 따뜻한 온돌을 사용하던 사람들이옵니다. 또 이번 추위는 일찌기 조선에서는 겪어 보지 못한 추위이기도 하구요."
  "허허---"
  다이곤이 쓴 입맛을 다셨다.
  "이 정도 추위도 견디지 못하고 죽어 버린다면 야........."
  "전하, 아무리 강추위가 몰아친다 하더라도 하룻밤쯤이야 어찌 이겨 낼 수는 있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그 추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떨고 지치다 보면 종내 에는 작은 추위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
  "이 추위를 천막 한 장에 의지하여 감내 해 내기란 어려울 듯 하오니..."
  "우리 군사들도 똑같은 천막을 쓰고 있소."
  갑자기 다이곤이 봉림대군의 말을 가로막았다. 더이상의 물자 공급은 어렵다는 뜻을 알리려는 저의였다.
  "전하, 수용소의 포로들은 모두가 아녀자들이옵니다. 굶주리고 추위에 지쳐 얼어죽어 가는 것을 차마 두눈으로는 보지 못하겠나이다."
  봉림대군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현장은 가 보았소?"
  "그러하옵니다, 전하. 
  "........."
  "천막 생활에 익숙치 못한 저들인지라 천막 안과 밖의 기온 차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사옵고 또한 입고 덮고 자는 천조각 마저 부족한 형편 이온 지라 .......부디 대국의 선처만을 바랄 뿐이옵니다."
  다이곤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 지는 듯 했다.
  "그렇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추위가 풀리자면 아직도 멀었는데...... 허--그것 참."
  "전하, 갈대라도 꺾어 보온이라도 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이까?"
  "그런 임시방편으로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소. "
  ".........?"
  "잠시 기다려 보시오, 내가 황제 폐하께 품의(稟議)하여 방도를 찾아 볼 것인즉."
  황제에게 품의 하여 방도를 찾겠다는 다이곤의 말에 봉림대군과 정태화, 정뇌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절하고 바닥에 엎드렸다.
  "감사하옵니다, 예친왕 전하. 이 은혜를.......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하올지......."
  "은혜랄 게 무에 있겠소. 이제는 다 같은 황제 폐하의 백성인데......."
  "........."
  "조선국을 대신하여 백성들의 고초를 내일처럼 애달파 하는 대군의 모습이 정녕 보기 좋소이다."
  말끝에 다이곤은 껄껄하고 웃었다.





                                  ㅇ


  "정녕 다이곤이 그렇게 말했다 이 말씀이신가?"
  "그러하옵니다, 세자저하."
  놀라는 소현세자 앞에 봉림대군이 웃는 낯으로 부복했다.
  "청나라에서 나서 준다면야 그보다 다행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아우님이 큰일을 하셨네, 참으로 큰일을 하셨어......"
  소현세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고 이었다. 
  동사자의 보고를 받은지 꼭 하룻동안 소현세자는 가슴을 짓누르는 부담에 식사조차 제대로 못해 초췌하고 꺼친 모습이었다. 이제 그 마음의 짐을 벗어 홀가분 한 듯 소현세자의 목소리가 명랑했다.
  "이제는 저들이 하루속히 조치를 취하기만을 기다려야 하겠구먼."
  "그러하옵니다, 세자 저하. 다이곤이 직접 황제를 배알하고 품의 한다 하였으니 곧 무슨 소식이 있을 것이옵니다. 기다려 보오소서."
  봉림대군이 그 환하게 밝은 얼굴을 한 소현세자를 향해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나 다이곤의 조치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봉림대군 일행이 다이곤의 군진을 막 나선 직후 다이곤은 곧바로 청태종 홍타시를 배알했고 그 자리에서 태종 홍타시는 조선인 포로들을 이번 전쟁에 공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급으로 나누어 주라 명한 것이었다.
  재물로 간주되던 포로들이 죽어 없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던 청나라로서는 오히려 급한 일이었다. 그날로 논공행상(論功行賞)이 단행되었고 이미 준비하고 있던 대로 조선인 포로들은 전쟁의 공신들에게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승리자의 전리품(戰利品)이 된 것이었다.
  단 며칠만에 70만명의 포로들이 전쟁에 참여했던 군사들에게 상급으로 나누어지고 수용소는 텅 비게 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청나라의 신속한 조처는 이에서 멈추지 않았다.
  조선인 포로들을 양반과 상민으로 나눈 뒤 양반 중에서도 왕족과 이름난 사대부의 부녀자들은 전쟁 1등 공신인 청태종의 동생들과 마부대, 용골대, 공유덕, 경중명 등에게 골고루 나뉘어 지고 이름 없는 양반 부녀자들과 상민의 부녀자들은 전쟁에 참가했던 하급 병졸들에게까지 빠짐없이 나누어졌다. 이어 청태종은 그 포로들을 속환(贖還)하라는 명을 내렸고 그 명은 곧바로 조선에도 통보되었다.
  그러나 포로 속환의 소식에 접한 조선의 사정은 달랐다.
  전 영의정 김류가 속환비를 부풀려 놓을 대로 부풀려 놓은 뒤라 속환비 마련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한 집안의 어머니요 딸이요 며느리들인 이들 포로들이 하루라도 일찍 집으로 돌아와야 했으나 조선의 속사정은 그렇게 암울하기만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속환에 대비해 이미 재물을 마련하고 있던 일부 부유층의 아들과 남편들은 속환시(贖還市)가 열리는 심양의 조선인 포로촌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갔다.
  바람같이 달려온 조선의 남정네들로 심양의 속환시장은 북새통을 이루었고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가족의 얼굴들이 마주치는 순간 속환시장은 기쁨과 부끄러움, 환희와 비애가 서로 교차하는 눈물의 상봉장이 되었다.
  대대로 조선은 예의도덕(禮義道德)의 나라요 윤리강상(倫理綱常)의 나라이며 효자열녀(孝子烈女)의 나라였다. 자신의 어머니와 처와 딸과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그 아들이요 남편이요 아버지인 조선의 남정네들이 자신이 살던 집을 팔고 논과 밭을 팔고 조상 대대로 물려 오던 선산(先山)마저 팔아 속환비를 마련해 갔으나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부녀자들의 몸값에  조선의 남정네들은 이역 만리 외로운 심양 땅에서 또 한번 닭 쫓던 개의 신세가 되어 복받쳐 오르는 피눈물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왕실의 부녀자들과 이름 있는 사대부가의 나이든 부녀들 몸값은 부르는 것이 값이었고 그에 따라 덩달아 일반 부녀자들의 몸값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조선 남정네들의 가슴을 허허롭게 했다.
  조선인들의 효심(孝心)을 아는 청나라 사람들이 조선의 그 효심을 악용, 일확천금을 우려 빼고자 했던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통사정에도 불구하고 속환이 어렵게 된 일부 조선인들이 속환을 포기한 채 되돌아가는 사태가 속출하며 속환시가 소강 상태를 보이자 잇속에 밝은 청나라 사람들은 어머니를 찾으러 왔다는 그 자식들에게만 엄청난 양의 재물을 요구하여 조선의 살림이 바닥이 나도록 박박 긁어 치부를 한 연후에 그들의 아내요 딸들은 인심쓰고 준다는듯 돌려주고 그들의 며느리들은 엄청 손해보고 준다는 듯 그 아니꼬운 능청으로 마치 파장에 떨이하듯 조선인 포로들을 돌려주자 이에 허리가 휜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는 치욕으로 얼룩 진 수모를 또 한번 당하고 돌아 와야 했다.
  왕실과 사대부의 전 재산이 이미 청나라로 빠져나간 이후에 가난한 양반이나 이름 없는 선비들, 그리고 민초라 불리우는 상민들의 속환은 아예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그 엄청난 속환 비를 마련 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 중에도 60여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이 비싼 속가를 치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꿈에도 그리던 가족의 품이었다. 
  그러나 금의환향(錦衣還鄕)이 아닌 금의야행(錦衣夜行)이나 다름없는 환향은 처음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절개와 지조를 으뜸으로 아는 지체 높은 사대부의 집안에서는 많은 비용을 들이고 찾아온 아내와 며느리들을 대문으로 들어오게 할 수 없다 하여 하인들이나 쓰는 쪽문으로 들어오게 했고 더 심한 사대부나 양반 선비들 집안에서는 그 여인들을 아예 친정으로 보내거나 대문 밖에서 살게 했다. 이미 집밖에 나가서 더럽혀 진 여자라는 이유였다.
  친정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시집을 갔으면 그 집안의 귀신이 될 일이지 애꿎게 친정은 웬말이냐며 내지르는 추상같은 문전 박대에 쫓겨난 여인들이 대문 밖을 전전하다 논두렁에 쪼그린 채로, 또 마을앞 당산 나뭇가지에 목을 맨 채로 그렇게 싸늘하게 죽어 갔다. 꿈에도 그리던 가족의 그리운 정을 손끝에 미처 묻혀 보기도 전에.........
  조선의 힘없는 남정네들로 인해 나라가 망했음에도 오히려 책임은 그들의 아내요 딸이요 며느리가 지고 죽어 가야 했던 기막힌 사연을 여섯 갑자 전에 일어났던 병자호란은 바로 어제 일 처럼 생생하게 기억 하고 있다.
  여자의 절개가 도덕의 척도로 평가되었던 시대의 슬픔........
  설령 그것이 패전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할 지라도 순절은 커녕 죽지도 못했냐는 가당치 않은 억지가 엄연했던 시절의 가슴아픈 비극이었다.
  따지자면 비극은, 누대에 걸쳐 임금과 신하들이 관습적으로 저질러 온 부정(不淨)과 패륜(悖倫)의 소산이었다. 중전보다 후궁이 많고 부인보다 첩이 많아 유독 질투와 흉계가 많았던 어두웠던 시절, 정실 자식보다 서출 자식들이 많아 불목과 골육상쟁은 일삼아도 화목과 인화단결을 모르던 암담했던 시대, 싸질러 놓기만 할 뿐 거둬 들일 줄은 몰라 서로가 책임을 미루기만 하던 병색 짙던 사회........
  다시는 무능한 남자들로 인해 이 땅의 순결한 아낙들이 공포에 질린 채 무참하게 죽게 할 순 없다는 각오를 되뇌이면서도 돌아서면 그 책임 질줄 모르는 남정네들이 저질러 놓은 병든 사회가 내지르는 팔둑같은 시뻘건 손가락질에 짓눌려 비싼 속가를 치르고 환향한 여인들이 화냥년이라는 억울한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옹이진 한을 풀지 못하고 또 그렇게 쓰러져 굴렀다.
  지금도 잠실의 석촌 호숫가에는 히매가리 없던 조선의 남정네들과 책임질 줄 모르던 그 사내들을 향해 청태종의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청태종의 넘치는 힘을 자랑이라도 하듯 불끈 솟은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 있다.

  "이래서는 아니될 일이요. 어찌 이 여인들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음이겠소."
  조선의 천지 사방이 때아닌 환향녀들의 시체들로 홍수를 이루자 지방 각 관아에서 올라온 소(疏)를 읽어 가던 인조가 안타까운 얼굴로 이조판서에서 좌의정으로 승차한 최명길을 돌아 보았다.
  "비록 환향한 여인들이라고는 하나 모두가 절개를 잃은 것도, 또 모두가 몸을 망쳤다고도 볼 수 없는 일이지 않겠소."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전하."
  "이 모두가 과인이 덕이 없어 일어났던 일이니 죄를 묻는다면 의당 과인에게 물어야 할 것이 아니겠소?"
  "저, 전하, 지나치신 말씀 거두어 주옵소서."
  최명길이 놀란 눈으로 황급하게 머리를 조아리자 인조가 그 최명길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좌상."
  "하교 하시오소서, 전하."
  "어찌 이들을 두번 죽게 할 수 있겠소."
  ".........!"
  "이들을 살릴 수 있는 현책이 있거든........  말씀해 보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인조의 하명에 허리를 일으키던 최명길이 나직하게 아뢰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우선 사대부들의 그 가슴에 쌓인 의심부터 씻어내야 할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사대부들의 의심.........?"
  "그러하옵니다, 전하."
  "사대부의 의심이라............"
  "전하께오서 하교하신 바와 같이 조선 여인들 모두가 절개를 잃은 것은 아닐 것이옵니다. 이는 다만 조선 여인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그 사실에 미루어 당연히 몸도 더럽혀 졌을 것이라 믿는 사대부들의 그 석연찮은 의심에 있을 것이오니 무엇보다 급한것은 그렇게 믿는 사대부들의 마음을 먼저 돌이키는 일 일 것이옵니다."
  인조가 골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와 먼저 여인들을 새롭게 하여 다시 거듭날 수있도록 성은을 베푸신다면............."
  "새롭게......거듭난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무슨 말이요, 자세히 말씀해 보시구료."
  인조가 궁금한 얼굴을 했다.
  "우선 먼저 그 여인들을 흐르는 맑은 물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게 하여 새롭게 한 연후에 그 정성을 사대부들에게 보이므로써 돌아선 사대부들의 마음을 되돌아 서게 하고, 또한 이들이 순결하게 거듭 났음을 정결한 의식을 통하여 증명케 하시옵고 동시에 성은(聖恩)을 베푸시어 사대부와 그 여인들을 함께 위로 하여 주신다면 지금과 같은 불미한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옵니다."
  순간 인조가 무릎을 치며 반색했다.
  "과연 그러하오, 그리 하십시다. 그게 좋겠어요."
  인조가 동의하여 어명을 내린 최명길의 제안은 이러했다.

  - 도성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경상도는 낙동강, 충청도는 금강, 전라도는 영산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각각 회절강(回節江)으로 삼을 것이니 환향한 여인들은 다시 태어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으라. 또 각 도의 수령들은 정결한 그 의식을 어명에 따라 엄숙하게 치르되 다시 태어난 순결한 여인들을 또 다시 박대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국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니 이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각별히 유념토록 하라. -

  인조의 추상같은 엄명을 굳이 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국법을 어긴 사례를 보고하는 수령들에게는 특별 진급의 기회까지 주어진다 하자 눈에 불을 켠 지방의 수령들이 특별 반을 편성해 가며 까지 사례 수집에 나섰고.........  그러나 그 환향한 여인들을 구박했다는 사례가 단 한 건도 보고되지 않으면서 환향녀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던 흉흉한 민심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ㅇ


  심양의 텅 빈 조선인 포로 수용소에는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속환을 거절당한 사대부가의 부녀들과 쇠꼬챙이 같은 뼈대만을 고집 하는 카랑카랑한 선비가의 부녀들, 그리고 속환 비가 없어 속환을 하지 못한 절대다수의 이름 없는 양반들과 서민의 부녀자들이 개같이 끌려나와 전율스러운 수용소에 다시 갇힌 것이었다.
  재물로 간주되던 포로들이 오히려 귀찮은 짐이 되자 청나라에서는 이들 포로들을 수용소에다 다시 내다 버린 것이 그 사태의 전말이었다.
  "언, 니미. 개만도 못한 이년의 팔자......."
  햇볕이 내리 쬐는 양지쪽에 쭈구리고 앉은 여인들 가운데 한 여인이 팔자 타령을 늘어놓았다.
  "조선에 있을 적에도 디리 구박만 받고 살았는데 니미 씨발, 눈구덩이 속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못 면하니......."
  누군가 맞장구를 쳤다.
  "언 년은 팔자가 좋아 서방이 둘씩이나 찿아와설랑 서로 찾아가겠다 쌈박질을 했다는데 이년의 팔자는 원 니이미, 내 발로 내가 찾아가겠다는 데도 오질 말라니...... 이런 환장 할 데가 어딨냔 말이야, 네미 우라질!"
  그때 누군가가 악에 바친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벌통에 대가리를 처박아도 시원찮을 개새끼들!"
  그러면서 그 여인은 조선을 향해 칵! 가래침을 내뱉고는 다시 조선을 향해 커다란 팔뚝 질을 해 대었는데 그 여인의 눈에서는 파아란 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야 얼음 구덩이에서 뒈지건 말건 즈이놈들은 뜨뜻한 아랫목에다 새 계집 들여놓고 히히 낙낙하것다 이말이것제, 썅-놈들!"
  "내가 죽어 귀신이 돼서라도 느이같은 놈들 두발 뻗고 편히 자게는 안 놔둔다 이 쌍놈들아..... 개새끼들아!"
  그렇게 악에 받쳐 욕을 해 대던 여인의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하고 매달리고 있었다.
  학수 고대하며 기다렸던 기대와는 달리 조선으로부터 차가운 버림을 당해 수용소로 다시 내 몰리자 여인들의 그 쓰린 가슴에는 한이 서렸고 그 쓰린 한은 시퍼런 저주가 되어 조선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눈밭 위에 너덜대는 빈 천막의 괴기스런 모습들이 남겨진 여인들의 가슴을 더욱 스산한 나락으로 떨구고 있을 때 청태종 홍타시는 조선의 세자와 대군들이 기거 할 조선관(朝鮮館) 건립을 예친왕 다이곤에게 명했다. 그러자 다이곤은 수하 장수들에게 그 일을 다시 명했고 조선관의 공사에 착수한 다이곤의 장수들은 그 토목 공사에 추위에 바짝 언 조선인 부녀자들과 사대부의 장. 차남들을 강제 동원시켰다. 너희가 살집 너희가 짓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장수들의 눈 부라림에 수용소의 조선인들은 너나없이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톱이며 나무를 깎아 다듬는 자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사대부의 장. 차남들에게 조선관 건축에 쓰일 대들보와 서까래를 들어올리고 기둥을 나르는 일이란 힘들고도 고된 일이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선 소나기가 쏟아 질 지라도 차마 뛸 수 없는 것이 양반들의 체면이었다. 그러나 하루에도 서너 명씩 죽어 자빠지는 포로수용소에서야 그 뻣뻣한 양반의 체면이 있을 리 없었다.
  서까래를 들어올리다 혹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쌍것들이라 멸시하던 그들로부터 심한 눈흘김도 받아야 했고 간혹 간 큰 여자들로부터는 삿대질에 욕설도 들어야 했다.
  속환을 거절당한 사대부의 여인들은 여인들대로 고초가 컸다. 
  몸치장에 몸단장밖에 모르던 여인들이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며 강제 노역을 감수해 내기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남정네 못지 않은 힘으로 공사에 악착같은 상민의 부녀자들에 비해 돌멩이 하나 들어 나르는 일도 힘겨워 입으로 신음만 토해내는 그 뽀오얀 살결의 사대부 여인들은 그잖아도 눈독들이던 청나라 장수들의 육욕(肉慾)의 대상이었는데 임자 없는 나룻배로 간주되면서부터 그 사대부의 여인들은 밤마다 그들의 욕정의 노리개가 되어 몸으로 가슴으로 피를 쏟으며 또 그렇게 쓰러져 죽어 갔다.
  때아닌 폭설로 눈사태를 만난 그 포로 수용소에서 거미줄 같이 가느다란 생명 줄을 부여잡고 처절한 삶에 몸부림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것은 민초요 무지렁이라 불리우는 저 잡초 같은 상민들이었다.
  그들이라 하여 아프도록 시린 혹한의 찬바람이 비켜 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억척스럽게 버티며 고통을 참아 내는 것은 그래도 살다 보면 부모요, 남편이요, 사랑하는 그 가족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단 하나의 희망 때문이었다.
  그러한 때 삼학사라 불리는 윤집, 오달제, 홍익한의 죽음이 포로 수용소에 전해졌다. 
  그들의 죽음을 가슴 저리도록 애달파하는 소현세자와 봉림, 인평대군이었으나 죽음이 목전에서 아른대는 수용소의 포로들은 그들의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지 오히려 분통들을 터트렸다.
  "제깟것들 뒈진다고 우리 고생이 끝나는 거야?  .......씨팔놈들!"
  동상에 언손이 트고 갈라져 괴로운 듯 손등을 비비던 여인이 흙가루를 거북등처럼 갈라진 손등에 뿌리다 말고 악에 바친 욕설을 침이 튀도록 퍼부어 대자 추위에 웅크리고 있던 다른 여인이 맞장구를 쳤다.
  "아, 싸우자고 했으면 뭔가 그럴듯한 준비라도 하고 있던가. 아니면 첨부터 싸우지를 말던가. 이건 니미 콩나물 대가리만큼도 힘없는 것들이 주뎅이만 살아 가지고 이 지랄을 떨어 놨으니......  네미 씨부랄것들."
  욕끝에 퉤! 하고 침을 뱉고 난 웅크린 여인은 추운지 목을 잔뜩 움츠렸다.
  "그 쌍통들은요, 임금 앞에 엎어져 뒈지라면 뒈지는 숭내(흉내)는 잘 내도요 진작 이런 개고생 앞에서는 아예 맥을 못추거덩요."
  누군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끼여들었다.
  "그런 것들이 무신 놈에 척화를 한다고 난리 버꾸녕이냔 말이야."
  "월래 그런 것들일 수록 꼴깝들은 더 잘 떨드라고......  뒤지기도 참 잘 뒤지고......."
  웅크린 여인이 어젯밤에 죽어 빳빳하게 굳은 사대부 여인의 시체를 마치 그 사대부들을 노려보듯 째려 보다가 또한번 카악! 하고 가래침을 내밷았고, 손등이 얼어터져 악을 쓰던 여인이 또다시 신경질을 터트렸다.
  "씨팔놈들, 터진 주뎅이라고 떠들어대긴 잘들 떠들어대도 바른 대책 세울 줄 아는 놈 한놈 없으니 어휴, 씨팔! 우리만 맨날 개 같은 고생을 당하는 거 아냐."
  "그런걸 알 만한 대가리들이 있었다면 나라가 망했겠어?"
  "그 씨팔, 똥집인가 뭔가 하는 새끼는 나라를 통째 들어 망하자고 했다니 글쎄........"
  "그랬다두만."
  "아, 그런 간신이 어딨냔 말이야.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지만 그럴 수가 있는 거냐고. 제 나라 임금이 주는 봉녹은 따박따박 받아 처먹으면서 어찌 남에 나라 말 하듯 그렇게 쉽게 말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야 내말은,"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더니........  꼴갑들은 니-미."
  "그런 것들이 신하라고 떡 버티고 있으니 나라가 안 망하고 어떻게 배겨나겠냐고......"
  "언, 병신같은 새끼들. 하여간 씨발놈들이라니까!"
  "어이구.....  개 같은 새끼들! 제 집구석 망한다 하면 눈알이 쌔빨개지도록 치뜨고 덤벼들 새끼들이......"
  분통이 터지는지 손등이 얼어 터진 여인이 손에 들고 있던 돌맹이를 빈 천막에다 냅다 던지자 얼어붙었던 눈들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지말대로 나라가 통째 망하고 나니까 이제 와서 뭐?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원, 지랄 병신 같은 새끼. 소가 웃다 아가리 터질 소리지 그게 어디 말 같은 소리야? ......응?"
  "개새끼들......!"
  "지까짓 새끼 하나 뒈진다고 망한 나라가 다시 일어나느냐고.....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이 고통, 이 고통은 어떡할 거야, 누가 책임지고 누가 해결 할 거냐고.........  어휴우, 씨팔놈들."
  여인은 손등이 쓰린지 손등을 연신 문지르며 호호 불었다.
  약이 있을 리 없는 수용소에서 흙가루를 약삼아 뿌린 것이었으나 터서 갈라진 손등의 아픔이 가라앉을 리는 없었다.
  몸이 괴로운 만큼 여인들은 그 분풀이를 삼학사에게 퍼붓고 있었다.
  "나라가 망한 뒤에 오는 환란을 조금이라도 생각 해 본 놈들이라면 그따위 망발은 하지 못했을 거야. 어찌 감히 나라를 통째 들어 망하자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느냔 말이야, 신료라는 자가......."
  "누가 아니래."
  "만에 하나 일이 잘 됐을 때를 생각해 제놈들 출세길 보장받으려 엎어졌다 저 꼴이 된 것이니 그것도 다 업보를 받은 거겠지,  .......메가지를 비틀어도 시원찮을 개새끼들........."
  왕실에서는 그들을 감쌌으나 처절한 삶에 몸부림치는 포로들은 그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연일 거듭되던 관료들의 정쟁(政爭)이 천심이라 일컫는 민심을 그렇게 잃어 간 것이었다.
  그때 그들의 이야기를 제지하며 나서는 여인이 있었다.


                                  ㅇ


  "듣자듣자 하니.........  이것들 봐요, 그만좀 해요. 그 죽은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이것도 다 나라에 힘이 없어 당하는 설움인데 이게 어디 그들만의 죄인 가요?"
  햇볕에 오종종 하게 모여앉았던 눈알들이 한꺼번에 그 소리나는 쪽을 향했다.
  제법 고와 보이는 여인이었다. 
  "아니, 저년은........?"
  웅크리고 있던 여인이 눈꼬리를 치뜨며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저런 쌍년 같으니, 뙈놈 하고 배때기가 맞더니 갑자기 공자 씨알머리가 박혔나 어따 대고 점잖은 소릴 내 째고 지랄이야."
  "모예요?"
  그 한마디에 기가 질리는지 고와 보이는 여인이 당황해 하자 이번엔 손등이 얼어 터진 여인이 벌떡 일어서며 삿대질을 퍼부었다.
  "그래, 이 쌍년아. 니 어저께 그 뙈놈하고 벤소 깐 뒤에서 뭘했어, 뭘했냐구 이 더러운 년아."
  ".........!"
  "술집 작부로 더럽게 살던 년 주제에 뙈놈 살맛좀 보더니 뭐가 어째?"
  ".........!"
  "우리가 아무리 개 같은 고생을 해도 네년같이 개같이는 안 산다. 이 쌍년아!"
  하얗게 질린 여인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뒤로 주춤하자 손등이 얼어 터진 여인이 더욱 악을 썼다.
  "어떻더냐, 이 더러운 년아. 뙈놈 살맛이......."
  하얗게 질린 여인이 바들바들 떨며 어찌 할 줄 몰라 하는데 이번엔 얼굴에 화장끼 있는 여인이 일어서며 그 여인을 감쌌다.
  "야, 이년아! 뙈놈 살맛이 궁금하면 니년도 가서 맛을 보면 될거아냐."
  화장끼 있는 여인의 갑작스런 출현에 손등이 얼어 터진 여인이 주춤 했다.
  "개살(심통)떨걸 가지고 개살을 떨어야 보아 넘어 가지, 니년 주제에는 그 짓도 할 재주가 없으니 개 같은 생고생을 사서 하는 거 아냐 이년아!"
  그 말에 웅크리고 있던 여인이 튕겨 일어서며 대판 싸움이 벌어질 찰나였다.
  "뭐 이런 년이 다 있어, 씨꾸녕을 열어 놓고 다닌 것도 자랑이라고 떠드는 거냐, 이 쌍년아?"
  "그래, 난 쌍년이다. 그래도 니들처럼 너저분하게 지지궁상 떠는 것 보단 나아 이것들아."
  "뭐야 이년아?"
  도끼눈을 한 여인이 한 발짝 다가서며 화장끼 있는 여인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여차하면 머리채를 잡아 끌 태세였다. 그러나
  "과부면 어떻고 기생이면 어때, 살아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너희같이 너저분하고 지저분한 것들이 살아 돌아 갈 수나 있을 것 같아? 이 병신들아?"
  하는 화장끼 있는 여인의 비수 같은 말에 한 발짝 다가섰던 여인의 어깨가 갑자기 쳐져 내렸다.
  "그래, 이 쌍년아. 나는 죽으면 죽었지 니들처럼은..... 안 산다. 이..... 더러운 쌍년들아........"
  그때 뒤에서 누군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신들..... 오늘 죽을지 낼 죽을지도 모르는 것들이 지랄 육갑들은.....니미."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는 쿨쩍이며 눈물 닦는 소리도 들렸다.
  분하고 원통하기는 다 마찬가지였다. 낯선 이국땅 설한풍 드센 곳에 굴비 엮이듯 줄줄이 끌려와 이유도 모르는 채 죽어 가야 하는 똑같은 여인들이었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여인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네편 내편 가르며 누구의 잘잘못을 가린다는 일부터가 허황하기 짝이 없는 포로 수용소였고 이런 일로 옥신각신 승강이하는 것도 심신만 더욱 심난하게 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악착같이 살아남아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여인들이 갑자기 엄습해 오는 무거운 현실에 짓눌려 주저앉으며 끝내 참았던 눈물을 흘릴 때였다.
  "어...?...저게..... 무슨 일이지.....? 또 뭔... 일이... 난 거야.......?"
  목을 있는대로 빼 내다보던 여인이 소리나는 곳을 향해 그대로 뛰어 갔고 우 몰려든 군중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는 점차 여인들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 왔다.
  쭈그려 앉아 눈물 닦던 한 여인이 궁금한 얼굴로 일어서며 그 군중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 나가자 다른 여인들도 눈을 껌벅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봉, 봉림대군이 왔나 봐요."
  "뭐야, 봉림대군이?"
  "아, 어서 일어나요. 빨리 가 보게."
  미처 일어나지 못한 여인의 손을 끌며 여인들은 바쁘게 그 군중들 사이로 뛰어 들었다.
  틀림없는 봉림대군이었다.
  먼발치에 까마득하게 보이는 봉림대군은 그 앞에 있는 여인들의 손을 잡아 주며 위로하는 모습이었고 그 뒤를 관복 입은 두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하늘과 땅만 큼이나 멀게 느껴지던 왕실의 사람들이었으나 지난번 소녀의 소생 이후 여인들은 왕실의 봉림대군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그리고 가장 따뜻한 사람으로 알고 기꺼워하였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빈손으로나마 손수 찾아와 따뜻한 말로 위로 해 주는 봉림대군이야 말로 낙심한 여인들에게는 더 할 수 없는 위안이자 크나큰 힘이었다.
  임금은 아닐지라도 세자에 버금가는 왕실의 봉림대군이 하잘것없는 천민들의 두손을 손수 잡아 주고 위로 해 주는 것만으로도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수용소의 천막을 개조해서 보다 따뜻한 움막을 짓게 한 일이라거나 각 취사장에 조선 여인들을 쓰게 하여 음식 맛을 조선인 입맛에 맞게 한 일 등은 봉림대군이 예친왕 다이곤을 직접 만나 담판한 결과라고 굳게 믿고 있기에 그 감격과 감동은 버림받은 여인들의 마음을 가득 울리고도 남았다.
  봉림대군이 위로차 찾아와서 하는 말은 화려한 말장난이 아니었다. 같은 볼모와 포로들이니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것과 힘을 내라는 것,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아 고국으로 같이 돌아가자는 것, 단 세마디였다.
  언제부터인가 여인들의 입에서 그 세마디는 구원의 기도문인양 되었고 하루라도 그 봉림대군을 보지 못하면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되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봉림대군은 형편없는 몰골을 한 여인들에 둘러 싸여 그 여인들의 손과 어깨를 두드리며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여인들은 서로가 가까이 가려고 안달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봉림대군의 손이라도 잡았던 여인들은 이런 꿈같은 영광이 평생에 어찌 두번 오랴 하며 그 손을 씻지도 않은 채 들고 다니며 자랑하기에 바빴고 다정한 말 한마디라도 들은 여인들은 그 말이 구세주의 무슨 복음이라도 되는 양 길을 걸을 때나 일을 할 때, 또 밥을 먹을 때나 잠자리에 들 때에도 그 말을 되풀이 되풀이 되뇌이며 가슴속에 고이 간직 하기도 하였다. 어떤 꿈많은 여인은 밤마다 봉림대군을 만나 다정하고 오붓한 둘만의 시간을 보내노라고 털어놓는 여인도 있었다.
  여인들은 그렇게 꿈속에서라도 봉림대군을 만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버려진 사람들로 북적이는 심양의 포로 수용소는 어느덧 봉림대군으로 인하여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어 가고 있었다.

















                  6. 만주, 그 그리운 산하 





  힘겨운 공사끝에 드디어 조선관은 준공되었고 이상 기후의 난동으로 폭설과 한파 속에 움추려있던 수용소에도 봄은 찾아 들었다.
  군막이 아닌 그럴듯한 관소에서 소현세자 내외와 봉림대군 내외, 인평대군등이 안정을 찾아가자 움막 속에 온돌을 까는 등 새단장을 한 수용소에도 들판에 피어나는 파아란 새싹 만큼이나 상큼한 여유가 찾아 들고 있었다.
  "아우님 이것좀 보시게, 정말 신기하지 아니한가?"
  천리경(千里鏡)으로 멀리 다이곤이 있는 군진을 바라보던 봉림대군이 놀란 얼굴을 했다.
  "아니,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게나 말일세."
  "이 조그만 것이 무슨 술법을 부리는 것은 아닐테고요....."
  하며 봉림대군은 그 천리경을 들어 이번엔 수용소를 살펴보았다.
  역시 잘 보였다.
  까마득히 먼 곳의 점으로 보이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명나라 북경엔 서양인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는데 그 서양인들에겐 이보다 더한 것도 있다 하니........"
  "..........?"
  "도대체 서양은 어떤 나라길레 이처럼 귀한 물건이 날 수 있는 걸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서양을 향해 더욱 궁금한 얼굴을 하는 소현세자에게 그 천리경을 유심히 살펴보던 봉림대군이 의외의 말을 했다.
  "저하. 이런 천리경이 많은 나라는 전쟁에도 그만큼 유리 할 것 아니겠습니까?"
  "...........?  .........그럴... 테지."
  놀라는 봉림대군으로 부터 천리경을 건네 받은 뜨악한 소현세자의 눈이 그 천리경으로 다시 갔다. 
  "아우님 말씀따나 청나라는 각 군진마다 이름난 장수는 이 천리경을 모두 소지하고 있다 하네."
  "예....?"
  다시 놀라는 봉림대군이었고 그 놀라는 봉림대군을 무시하듯 소현세자가 천리경을 들어 밖을 다시 내다보고 있었다. 능숙한 솜씨였다.
  천리경은 조선관 준공식때 예친왕 다이곤이 소현세자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세자빈에게는 향기 짙은 서양 화장품을 가지각색으로 맞추어 선물하자 소현세자와 세자빈은 그곳이 적지인줄도 모르고 기뻐 좋아했다. 함부로 구할 수도 없던 화장품은 그 가치가 금.은 패물에 비해 열곱, 스므곱도 넘던 귀중품중의 귀중품이었다.
  천리경을 선물 받은 그 다음날부터 소현세자는 그 천리경의 매력에 흠뻑 젖었다.
  처음 천리경을 접한 소현세자는 그 천리경을 믿지 않았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멀리 있는 사물을 끌어당겨 가까이 볼 수 있다니.........  무슨 축지법(縮地法)도 아니고.........'
  다이곤의 말을 믿을 수 없어 소현세자는 내관 한사람을 멀리 가 서게 했다. 직접 확인 하려는 것이었다.
  맨눈으로는 얼굴 식별이 어려운 거리에 내관이 가 섰다.
  그러나 천리경을 들어 그 내관을 살펴보던 소현세자는 기겁하고 놀라 하마터면 그 천리경을 떨어뜨릴뻔 했다. 멀리 있던 내관의 머리통이 갑자기 소현세자 눈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었다.
  어찌나 놀랐던지 소현세자는 둥당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우황청심원 까지 먹었었다.
  그 내관을 보다 더 먼 거리에 가 서게 한 후 설마 하고 다시 들여보던 소현세자가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점처럼 가물거리던 그 내관의 몸통이 또 다시 소현세자 눈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었다. 가까스로 진정한 가슴이 다시 둥당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이는 필경 사람의 마음을 미혹케 하려는 잡술임이 분명한 게야.'
  소현세자는 천리경을 처음 대한 소감을 그렇게 단안(斷案)했다.
  그러나 세자빈에게 선물로 준 화장품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케 하는 잡술 이나 술법의 소산물이 아니었다. 맡을수록 향긋하고 바를수록 아름다워 보이는 진짜 화장품이었다.
  명나라에 다녀오는 사신들의 입을 통해 신비한 화장품의 이야기는 일찍부터 들은 터였고 일부 고위 관료들의 부인들은 그 고급 화장품을 비싼 값에 사다 쓴다는 소문도 들은지 오래여서 처음 보는 화장품이었으나 그 화장품에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리경은 보느니 처음 이었다.
  이걸 도대체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믿자니 체면이 상할 것 같고 안 믿자니 눈앞의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소현세자는 그 천리경을 앞에 놓고 몇 날 며칠을 고민에 빠졌었다.
  천리경을 들어 눈으로 보고는 곧 회의(懷疑)에 빠지고, 다시 또 들어보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도대체 저 조그만 대나무 빈통같은 것을 어떻게 믿는 가였다.
  머릿속에 든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배워 온 모든 학문을 총 망라 하여도 그 물건에 대한 해답은 없었고 가끔 보아 오던 도덕 경이나 불경 등에서도 이에 대한 해답은 없었다.
  소현세자는 자신의 머릿속에 든 지식을 총 동원해도 천리경에 대한 의문을 풀 길이 없자 시강원으로 그 물건을 들고 갔다.
  나라안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학문과 식견을 두루 갖춘 쟁쟁한 실력의 석학들이었는데도 그 천리경을 보고는 가타부타 말들이 없었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와 진배없는 얼굴들을 할 뿐이었다. 허탈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동안 혼자 고심에 빠졌던 소현세자는 드디어 그 천리경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어렵게 결단하기에 이른다.
  -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것 -
  그 외에 다른 어떤 말로도 그 천리경을 설명할 수 는 없었다.
  일단 그렇게 '새로운 것' 이라고 단정을 내리고 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것 - 천리경을 들고 소현세자는 열심히 뛰어 다녔다.
  조선 관소의 젊은 내관을 대동하고 다니며 청태종이 있는 궁궐도 바라보고, 청나라 군사들과 화포도 보고, 말도 보고, 또 조선인 수용소의 여인들도 살펴 보았다.
  그렇게 새로운 것 천리경에 흠뻑 취했을 때 청나라 군진의 이름난 장수들은 그 천리경을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고 청나라 장수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식으로 간주된지 오래인 그 천리경을 소현세자는 봉림대군에게 자랑스럽게 보여 준 것이었다.
  봉림대군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였으나 그러나 봉림대군은 그 즉시 천리경의 활용 가치를 들먹이며 나왔다.
  자신의 고민과 고심의 흔적이 역력히 배어있는 그 결론을 동생인 봉림대군이 너무도 쉽게 그 새로운 것을 인정해 버리자 내색은 안했으나 속으론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라도 지어야 그 물건에 대한 설명을 자랑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한 배에서 난 형제인데도 저렇게 다를까.....'
  자신은 놀라 청심환까지 먹었는데 동생인 봉림대군은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그 새로운 것 천리경으로 인해 소현세자의 심기가 자신도 모르게 불편해 지고 있었다.
  청나라 군진의 이름난 장수들에게는 이미 상식화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난 다음부터 조선관소의 신료들도 그 천리경을 들어 바라보며 신비에 싸인 감탄을 쏟아 놓을 때였다.
  갑자기 조선관소의 공기가 급랭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 조선에 군량미 이 만오천석을 마련할 여력이 어디 있다고 그런 영을 내렸다는 게요. 그리고 병력 오천에 전함 오십척이라니.....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요?"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조선으로서는 받들기 어려운 하명인 듯 하옵니다."
  지금 막 청태종의 사신이 조선을 향해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정뇌경에게 소현세자는 오히려 뚱그런 눈을 뜨고 반문했다.
  "그런 요구 백날 해 봐야 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니오. 그런데 이제 또 다시 받들지 못할 요구를 한다는 것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음이 아니겠소?"
  소현세자가 미간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나 앉자 옆에서 듣고 있던 봉림대군이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세자저하, 대대적인 명나라 공략에 앞서 우리 조선의 태도를 시험하고자 하는 청태종의 숨은 저의가 아니올른지요."
  "숨은 저의?"
  듣고 있던 소현세자의 눈이 힐끗하며 그 봉림대군을 찔러 보았다.
  "그러하옵니다, 세자저하.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애매한 태도를 보고자 하는........."
  "이보시게, 아우님. 군량미 이만 오천석에 병력 오천, 전함 오십척이라는 것은 명나라 공략에 우리 조선도 함께 참여하라는 청태종의 명령이지 조선의 태도나 보고자 하는 그런 숨은 저의는 아닐세."
  "조선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고 있는 다이곤과 청태종일 것이옵니다. 그런 청태종이 받들 수 없는 명 을 하달하였다는 것은......"
  "세자저하, 이제 곧 본국에서 좌의정 최명길 대감이 나서지 않겠사옵니까. 화친을 이끌어 냈던 분이니 좋은 방도가 있을 것이옵니다. 기다려 보옵소서, 세자저하."
  보덕 정태화가 형제간의 이야기를 막으며 나섰다. 형제간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그런 자리가 되어서는 아니될 자리였다.
  "그렇기만 하다면 야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또 다시 근심에 싸이실 아바마마를 생각하니......."
  봉림대군과의 이야기는 잊은 듯 소현세자의 눈시울이 금새 붉게 물들어 갔다.
  조선관이 깊은 근심에 싸여 있을때 청나라 사신이 돌아온지 오래지 않아 본국에서 사신으로 출발한 좌의정 최명길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조선관에는 한가닥 희망의 빛에 마음들이 부풀었다. 최명길의 역할에 기대하는 바가 컸던 만큼 최명길의 도착이 애타도록 기다려 진 것이다.





                                 ㅇ


  최명길의 심양성(瀋陽城) 입성에 청태종 홍타시는 많은 신경을 썼다.
  일찍이 조선은 공. 맹의 학풍을 계승한 나라 라 자처하며 자부심을 부풀리기도 한 나라였거니와 최명길은 청나라와의 화친을 이끌어 내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최명길을 환대하는 일이 전란에 흉흉해진 조선의 인심을 잠재우는 일이기도 했으므로 청태종은 그 최명길의 입성을 북적거리며 요란스럽게 맞았다.
  청태종이 직접 성문밖에까지 나가 조선의 좌의정 최명길을 반가이 맞이하자 청나라 신료들은 청나라 역사에 일찌기 없던 일이라며 그 최명길을 극히 존대하기를 주저치 않았고 또한 황제가 몸소 동관문 까지 나가 조선의 사신을 맞이한 것은 혈맹으로 맺어진 군신간의 예를 다한 표본이라며 침튀기는 장광대설을 몇 날을 계속하여 줄기차게 쏟아 내었다. 이에 심양성 동남쪽에 웅크리고 있던 조선관에도 그 소식은 전해져 조선관을 들뜨게 했다.
  "온 청나라가 떠들썩 한걸 보니 역시 최명길 대감인가 보옵니다."
  "실로 오랬만에 들어보는 상쾌한 소식일세......."
  "최명길 대감은 실리에 밝은 명신(名臣)이니 본국의 아바마마께도 좋은 소식을 안겨 드리리라 보옵니다. 사신 한사람의 행차에 저렇듯 온 청나라 조정이 떠들썩한걸 보면 말이옵니다."
  "그렇기만 하다면야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봉림대군이 그 안도하는 소현세자를 바라보며 기쁨에 들떠
  "이번 기회에 저 수용소에 남겨진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나 많이 거두어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며 해맑게 웃자 소현세자가 그 봉림대군을 외면해 툭! 내던지듯 한마디를 뱉었다.
  "그깟 무지렁이들..........  우리나 빨리 돌아가야지."
  "..........??"
  소현세자의 퉁명스런 언사에 해맑았던 봉림대군의 낯이 뭉턱해졌다.
  남한산성에서의 그 처참했던 기억들이 또렷하게 남아 있던 소현세자였다.
  임금을 구하려 뛰어들지 않던 사람들임에 그들의 고통에 굳이 애써 귀 기울이려 하지 않던 세자였고, 관복 입은 신료들 이외의 백성들은 타국 사람들처럼 낯설게만 느껴져 정이 잘 붙지도 않았다. 그러나 봉림대군의 뇌리엔 강화도에서의 텅빈 진지와 민심이 떠난 자리가 너무도 강렬하게 남아 있어 어떻게든 떠나는 민심만은 막아 보려 온몸으로 절치부심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다음 대의 보위에 오를 세자가 그 백성들을 무지렁이라 치부하며 외면하려 하자 가슴 속이 갑자기 울먹해 봉림대군은 고개를 숙였다. 벌개지는 눈시울을 소현세자에게 보이기 민망해서였다.
  그렇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사이가 소리없이 벌어지고 있을때 청태종은 청나라가 자랑하는 문인들을 대거 동원하여 최명길과 함께 시를 짓게도 하고 서로 학문의 깊이를 논하게 하여 그 경지를 탐지하게 했다.
  평생 먹과 붓으로 살아온 최명길에게 글을 짓고 학문을 논하는 일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으나 청나라의 학자들은 연신 놀라는 눈빛에 감탄하는 낯빛이 역력했다. 조선이 청나라의 새로운 병장기에 놀라는 만큼이나 청나라는 조선의 깊은 학문에 놀라는 것이었다.
  그 싸움 같지도 않은 싸움에서 쉽사리 항복을 한 조선에 어찌 이런 깊고도 심오한 학문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에 찬 눈빛들도 있었다. 그들은 마치 최명길을 진흙 속의 진주처럼 생각하고 있음인지 그런 학자들의 입놀림에 홍타시는 더욱 흡족해 하였고 홍타시의 기분이 좋은 만큼 환대 또한 날로 극진할 수 밖에 없었다.
  의외의 환대에 당혹한 건 최명길이었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소방의 조선국 좌의정 최명길은 감히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래, 먼길의 노독(路毒)은 이제 풀리었소?"
  "폐하의 깊고도 넓으신 아량이 바다와 같사온데 어찌 노독인들 있을 수 있사오리이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과연 듣던 대로다. 핫하하하하........"
  지극히 공손한 최명길의 태도에 홍타시의 흡족한 웃음이 숭정전(崇政殿)에 가득 넘쳐흘렀다. 숭정전은 청태종 홍타시가 거처하는 궁궐이었다.
  "짐이 보낸 문서는 읽어보았는가?"
  "그러하옵니다, 황제 폐하."
  그래,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는가?"
  "갖출 수 있는데 까지는 갖추고 있사오나...... 하오나...황제 폐하." 
  최명길이 웃고 있는 그 청태종을 올려 보았다.
  중원 대륙을 넘볼 만 한 넉넉한 웃음이 거기 있었다.
  "소방이 어찌 황제폐하의 뜻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하오나 거듭되는 흉년과 전쟁에 지쳐 쓰러진 조선으로서는........." 
  "무언가, 속시원히 말해 보라." 
  갑자기 웃음 가셔진 홍타시가 굵은 목소리를 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 시피 이번 포로들의 속환으로 국고는 바닥이 났고 백성들의 가계도 재정이 바닥난지는 이미 오래 되었나이다. 또 근래 드물게 이어지는 흉년과 전쟁을 피해 달아났던 젊은 농부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어 폐하께서 하교하신 군량미 이만 오천석은 아무리해도 마련할 길이 없사온지라 죽음을 무릅쓰고 신이 이렇게 달려왔나이다."
  순간 홍타시가 근엄한 낯빛을 띠었다.
  "짐이 알기로 너희 나라 삼남 지방은 곡창 지대로 알고 있느니라."
  ".........."
  "짐이 이미 삼남의 곡창 지대를 알고 있거늘 그대가 감히 짐을 속이려 드는가?"
  "황공하옵니다, 황제 폐하. 소방의 보잘것없는 작은 소신이 어찌 감히 황제 폐하를 속이겠나이까. 하오나 그 삼남의 농부들이 지난 병자년의 동원령을 피해 달아난 이후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나이다."
  "그런 허황한 말로 짐을 속일 수 있다 보는 겐가?"
  홍타시의 눈가에 노기가 서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 소방의 보잘것없는 신이 어찌 황제 폐하를 속이겠나이까. 하오나 폐하께서 지난 병자년에 조선 땅에 입성 하실 때에 황제폐하의 앞길을 가로막은 조선의 군사가 한사람도 없었던 사실은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
  "병자년에 전란(戰亂)이 있을 줄 미리 예견하신 조선의 우리 전하께서 전국에 군사 동원령을 내렸으나 이에 응하여 달려온 군사는 단 한사람도 없었나이다."
  ".........."
  "오히려 우리 전하의 명을 받고도 산 속으로 달아나 숨고, 멀리는 바다 건너 섬으로 도망하여 숨은 이후 아직껏 돌아오지 않고 있사와 그 밀려 있던 농사도 남아있던 연약한 여인들이 겨우 뒷마무리를 했던 것이 온데 그 여인들 마저 포로로 잡혀갔다 비싼 속가를 치르고 이제야 돌아왔으니 신이 어찌 거짓으로 폐하의 성심을 흐리겠나이까."
  "........."
  "지금 조선의 현실은 피폐 할 대로 피폐해 신이 말씀드린 것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사오니 부디 너그러우신 황제 폐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을 바랄 뿐이옵니다. 
  그때 승지 한사람이 들어와 태종 홍타시에게 작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조선의 군사 오천이 전함 이십 척과 함께 통원보를 향하고 있다?"
  "어찌 또 전함은 이십척이더냐, 짐이 분명 오십척이라 일렀거늘........."
  "폐 - 하........  사람이 있어야 농사도 짓고 배도 만들 것이 아니옵니까......."
  최명길은 울고 있었다. 
  부복한 채로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우는 최명길을 청태종은 묵연한 눈으로 내려보고 있었다.
  쪽지와 바닥에 엎드린 채로 흐느껴 우는 최명길을 말없이 바라보던 청태종의 노기 띤 눈도, 근엄하게 굳어 있던 얼굴의 표정도 어느덧 풀어지고 있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최명길을 밉다 할 수만은 없었다. 
  포로들의 속환으로 조선의 재정이 바닥났음은 사실일 것이었고, 군량미는 고사하고 군사 오천을 보내는 일도 조선으로서는 힘에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조선에 전함 오십척 까지 마련하라 했던 것은 조선의 태도를 보고자 했던 태종 홍타시의 숨은 뜻이었던 것이다.
  우려했던 점과는 달리 조선은 자신의 명(命)을 충실히 이행하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고 그런 조선의 태도에 마음이 흡족하게 젖어 가던 홍타시였다.
  "최대부의 충절은 가히 놀라운데 가 있도다. 그만 일어나라."
  뜻 아니한 청태종의 하명에 놀란 최명길의 울음이 순간 멈추어 졌다. 그리고 흡족하게 웃고 있는 그 청태종을 눈물을 거둔 최명길이 올려 보았다.
  "과연 최대부로다. 그대가 한말은 조선의 현실과 한치도 틀림이 없으니 짐은 최대부의 말을 그대로 믿을 것이야."
  "화, 황공하옵나이다, 황제 폐하."
  "허허--  조선엔 최대부와 같은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큰 다행인가."
  ".........."
  "내 최대부의 말은 그대로 믿으리니 조선은 이제 근심을 말라."
  "황공하옵니다, 황제 폐하."
  무거웠던 최명길의 마음이 조금씩 덜어지고 있었다.
  "조선이 짐의 명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니 짐의 마음이 즐겁도다."
  ".........."
  "짐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으니 짐도 한가지 선물을 줄 것이야. 최대부는 조선이 바라는 소원 한가지를 말해 보라."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항제 폐하."
  일어섰던 최명길이 황급히 자리에 다시 꿇어 엎드렸다. 그 엎드린 최명길이 혹,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여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는데 청태종의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최대부는 염려 말고 조선의 소원을 말해 보라."
  "소방의 소원이야......... 무슨.......다른 것이...... 있겠나이까.........."
  너무도 뜻밖의 하명에 최명길의 마음속이 바빴다.
  "허허-  체면을 따질 일이 아니질 않은가. 어서 말해 보라."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폐-하........."
  "그래, 말해 보라."
  넉넉하고, 너그럽기 한량없어 보이는 품새의 청태종앞에 초라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조선의 사신 최명길이 조용하게 아뢰었다.
  "송아지를 잃은 어미 소의 슬픔이나 어미 소를 잃은 송아지의 애처로움이 어떠하겠나이까?"
  ".........?"
  "조선이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조선 왕실의 왕자들과 아직 방면이 안된 포로들의 송환일 것이옵니다, 폐-하."
  최명길이 조선 왕실이 바라는 소원을 조신한 태도로 고해 올리자 청태종이 껄껄 하고 웃었다.
  "과연 최대부 다운 요청이로다. "
  청태종이 다시한번 호쾌하게 웃고 나서 
  "조선 왕실의 왕자들의 방면은 짐이 제왕들과 상의하여 통보 할 터이니 그리 알라. 그리고 조선의 포로들이라 했는데 짐이 알기로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조선에서 송환을 거부한 사람들이야."
  하며 청태종이 그 최명길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 지금 남아 있는 십만의 포로들중 일부는 속환비가 없어 송환을 못한 사람들도 있사옵니다. 그 사람들만이라도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런 사람이 있다면 데려가도 상관없는 일이나 그 외의 일은 짐이 모르는 일이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 폐-하........" 
  그 너그러운 미소를 만면에 가득 짓고있는 청태종 홍타시를 향해 최명길은 사은숙배(謝恩肅拜)를 올리고 또 올렸다.







                                  ㅇ


  최명길이 청태종을 대면 한 자리에서 얻어낸 결과는 참으로 컸다.
  조선 왕실의 왕자들의 방면은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황제의 서면 통보를 받았으나 때가되면 곧 방면하겠다는 단서가 달려 있었으므로 그 시린 마음이 어느 만큼은 위로가 되었고 군량미 이만 오천석과 전함 삼십 척을 면제 받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부 포로들의 송환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에 조선관은 감격했고 수용소의 여인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최명길이 조선관의 소현세자를 방문하고 배알하는 자리에서 소현세자는 그 최명길을 극구 칭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역시 대감이십니다. 대감이 아니시면 어찌 그 무겁고도 어려운 문제를 그토록 통쾌하게 해결 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나치신 말씀 거두어 주소서. 이 몸은 단지 신료로써 본분을 다 하고자 했을 따름이옵니다."
  "과찬이 아닙니다, 대감."
  소현세자가 밝게 웃었다.
  "하오나 세자저하, 이번 청태종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세자저하와 두분 대군의 방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나이다."
  "아닙니다, 대감. 우리들의 방면이 쉽게 이루어지리라 보는 사람도, 또 믿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
  ".........."
  "우리들의 방면 문제는 명나라 문제가 해결되어야 풀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송구하옵니다, 세자저하."
  "그런데 이번 포로들의 송환은 본국에서 송환을 원한다면 그 누구도 상관없이 석방한다 이 말씀이시죠?"
  "그러하옵니다, 세자저하."
  "그 참, 잘 되었습니다. 그들이라도 하루속히 본국으로 돌아가야지요."
  옆에서 조마스럽게 듣고 있던 봉림대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 지며 조선관소가 갑자기 분주하기 시작했다. 포로들의 석방을 한 사람이라도 더 하기 위해 급히 본국으로 파발을 띄우고 또한 수용소로 뛰어가 명단을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래지않아 본국에서 송환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명단이 올라왔고 그 명단대로 수용소의 사람들이 분류되었다.
  근 삼만명에 가까운 포로들이 분류되었다.
  모두가 서민들이었고 이름 없이 가난하게 사는 양반 선비들도 상당수 끼어 있었다.
  뼈대니 체통이니 하는 거추장스런 명분보다는 지금 당장이라도 빨리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그런 가슴이 따스한 사람들이었다.

  최명길의 귀국 길은 대단했다.
  삼만여명의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는 추색이 완연한 가을이었고 그 가을 따사로운 볕에 의주 부민들이 뛰어나와 사지에서 돌아오는 이들을 반가이 맞이하고 있었다.
  최명길은 귀국하자마자 영의정으로 승차했고 영의정에 오른 최명길은 난마와 같이 얽혀 있는 조정의 대소사를 하나씩 풀어 가기 시작했다.
  다시 그 겨울이 지나고 싱그러운 봄이 찾아오기를 두어 번.......
  천리경의 신비에 매료되어 있던 소현세자에게 어느덧 서양의 둥그런 지구본이 전해졌고 소현세자는 천리경을 처음 접했을 때 만큼이나 그 지구본에 매달려 서양 글을 해독해 내는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청나라 귀족의 부인들과 교우가 깊어진 세자빈 강씨의 침실에는 색조 짙은 화장품과 향수, 그리고 형형색색의 보드라운 비단들이 가득 쌓여 가고 있었고 봉림대군은 예나 지금이나 그 수용소의 버려진 사람들을 위로하며 위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평화로운 나날 들이었다. 
  조선관이 그 평화로움에 젖어 갈 무렵 명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던 청나라는 급기야 대대적인 공습을 결행하기에 이르고 그 전쟁에 소현세자도 참전하라는 청태종의 명령이 조선관에 하달되었다.
  평화롭던 조선관에 청태종의 그 명령은 천둥 번개와 같은 회오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됩니다. 세자저하를 전쟁터로 보내시다니요, 이는 아니되는 말씀입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봉림대군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조선관이 떠나가라 큰소리로 외쳐 대도 누구 하나 나서서 청태종의 부당한 명령을 시정해 내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 두시게, 청태종의 명이 아니신가."
  "아니되옵니다, 세자저하. 아바마마께서 그토록 당부하신 일이 아니옵니까."
  ".........."
  "이것은 잘못된 처사이옵니다."
  봉림대군이 이미 포기한 사람처럼 고개를 떨군 소현세자를 남겨 두고 단신으로 예친왕 다이곤의 군진을 향해 달려가자 그 뒤를 정뇌경이 바쁜 걸음으로 따랐다.
  "예친왕 전하, 황제 폐하의 전교를 거두시게 하여 주소서."
  예친왕 다이곤 앞에 부복하면서 부터 눈시울이 붉어지던 봉림대군의 목소리에 울음이 물리자 늙수구레 한 예친왕이 무어냐고 물었다.
  "이번 명나라 공략에 우리 세자저하도 함께 참전 하라시는 황제 폐하의 전교가 계셨사옵니다."
  ".........?"
  "그 전교를 거두어 주시오소서, 예친왕 전하."
  "이보시오, 대군. 대군이 형을 생각하는 그 마음은 갸륵하다고 할 수 있소 만 이미 조선과 우리는 군신지간이 아니요."
  ".........."
  "임금이 출정하면 신하가 따르는 것은 이치인데 어찌 세자가 황제 폐하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소. 이는 불가하오."
  "아니되옵니다, 전하......."
  붉어지던 봉림대군의 두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져 굴렀다.
  "세자저하는 다음 대의 보위에 오르실 분이옵니다. 차라리 신을 보내 주소서, 전하......."
  "대군이 대신 참전하겠다는 게요?"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렇게라도 해서 우리 저하께서 빠질 수만 있다면 신이 열번, 아니 백번이라도 참전하겠나이다, 전하......."
  예친왕 다이곤이 고개를 뒤로 뺀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그 봉림대군을 저윽이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진정 세자를 대신해서 대군이 참전하겠다 이 말이지요."
  "그러하옵니다, 전하. 신을 참전시켜 주소서."
  또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봉림대군을 묵연히 바라보던 예친왕 다이곤이 흔쾌히 "알겠소. 폐하를 알현하고 그 문제를 상의 할 것이니 가서 하회를 기다리시오." 하고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틀뒤, 소현세자에서 봉림대군으로 바뀐 참전 명령서가 조선관에 통보되었고 봉림대군은 준비하고 있던 갑주를 찾아 들었다.
  이미 전시체제로 돌입해 있던 심양은 삼십만 대군의 출병을 앞두고 더욱 부산하게 움직였고 도처에서는 말울음 소리가 진동하고 있었다.
  갑주로 무장한 봉림대군이 홀로 흰 백마에 올라 다이곤의 군진을 향하자 그 뒤를 정뇌경이 홀홀 단신으로 따랐다. 정뇌경과 호흡이 잘 맞던 정태화가 인조의 부름으로 최명길과 함께 귀국 한 후로는 봉림대군의 뒤를 오직 정뇌경 혼자서 그림자처럼 쫓고 있었다.
  이번 출정에 제외된 이십만 병력까지 포함하면 도합 오십만 대군......... 
  그 오십만 대군의 위용은 가히 태산을 뽑고 바다를 메울 만 했다. 청군 십이만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조선이고 보면 오십만 대군을 준비시켜 공략 하고자 하는 명나라는 과연 대국이었다. 그러나 그 대국이라는 명나라도 청나라의 강력한 기병 오십만 대군은 막아내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봉림대군의 눈에 청나라의 철기병은 그야말로 천하무적으로 보인 것이다.
  드디어  삼십만 대군의 출진이 시작되었다.
  일차 공격 목표인 금주성은 청태종이 십오만 대군으로 공략하기로 하고 이차 공격 목표인 산해관은 다이곤이 십만 대군으로 공략하기로 했다. 나머지 오만 병력으로는 후방의 지원을 맡게 했다.
  봉림대군은 용병의 귀재로 알려진 다이곤의 군진에서 다이곤과 함께 출진했다.
  삼십만 대군이 동시에 출진한 그 날은 뽀오얀 먼지가 심양 하늘을 내내 덮었고 출진 시작 하룻만에 삼십만 대군은 심양을 모두 빠져나갔다.
  조선인 포로들로 인해 톡톡히 재미를 본 군사들이었다. 
  속환을 통해 금전적 기쁨을 누리게 한 그 청태종을 위하는 길이라면 타는 불속일지라도 뛰어 들 그 용맹으로 뛰닫는 군사들이고 보니 그들의 출진은 신속할 수밖에 없었고 그 앞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닫는 삼십만 대군이 지평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진 만주와 중원 대륙은 넓고도 광활했다. 흙먼지가 아니라면 석양의 그 광활한 대륙에서 삼십만 대군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정예의 십오만 대군을 바람같이 휘몰아 간 청태종이 금주성에 진을 치고 금주성 공략을 감행하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문득 포성이 울리는가 하더니 청태종이 진을 친 그 자리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연달아 치솟으며 폭음이 작열 했다.
  한순간 청태종의 진지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무참한 피범벅과 흙먼지 속에 당황하던 청태종 홍타시가 또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구르자 황급히 달려든 공유덕과 경중명이 그 쓰러진 청태종을 들쳐업고 그 길로 퇴각했다.
  사방 십여리가 불바다를 이룬 그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은 군사의 수는 오만여명............
  참담한 패배였다.
  산해관을 공략 하기 위해 바람같이 치닫던 다이곤도 산해관에 채 다다르기도 전에 명나라 군사의 매복과 포위에 걸려들어 고전하고 있었다.
  폭약이 폭발하여 치솟는 불기둥과 고막을 찢듯한 굉음 속에 갑주로 무장한 봉림대군과 정뇌경이 다이곤 곁에 바짝 붙어 만일에 있을지 모를 사태에 대비하며 그 싸움을 예의 주시하는데 그 혼란과 소란 속에서도 다이곤은 침착했다.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청나라 군병들 사이를 다이곤이 일필단기로 뛰어다니며 쓰러진 군사는 다시 일으켜 세우고 투구가 벗겨진 병사는 투구를 씌워주며 용기를 북돋운 끝에 다시금 진두에 서자 청나라 군사의 사기는 다시 솟아올랐고 봉림대군도 그런 다이곤의 용병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명나라의 복병을 눈치챈 다이곤이 예정된 진군로를 버리고 새길로 접어  들자 명나라의 저항도 끈질긴 것이어서 새길로 접어든 다이곤의 행로를 차단한 채 그 다이곤을 괴롭혔다.
  산해관을 공략 하고자 달려드는 청나라 군사와 이를 지키고자 맞대드는 명나라 군사간의 치고 받는 혈전이 계속되는 사이 양군간의 피해는 속출하기 시작했고 그 전쟁 속에서 불꽃같은 봉림대군의 두 눈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일전일퇴를 거듭하던 끝에 갑자기 명나라 군사가 무너지며 후퇴하기 시작하자 청나라 군사가 그 뒤를 쫓으며 맹렬히 추격하기 시작했고 그때 갑자기 추격을 중지한 다이곤이 급하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승기가 보이는 싸움에서 갑작스럽게 퇴각 명령을 내리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하여 땀에 젖은 봉림대군이 그 다이곤을 쳐다보는데 공격해 들어갔던 청나라 군사들이 미처 다 퇴각하기도 전에 그 일대가 폭약의 폭발로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순간 머리끝이 쭈뼛 솟은 봉림대군의 등줄기로 써늘한 전율이 흘러 내렸다.
  다이곤이 추격을 중지하고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쯤 저 불바다 속에서 십중팔구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었다.
  놀라움에 젖은 봉림대군이 용병의 귀재 그 다이곤을 존경담은 눈으로 올려 보는데 화약이 폭발한 곳으로 명나라 군사가 다시금 모습을 보이자 때를 놓치지 않은 다이곤이 출격 명령을 내려 삽시간에 그 명나라 군진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다이곤의 대승이었다.
  일차 저항선을 뚫고 나자 청나라 군사에 대항하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대로의 진격이라면 청태종의 전략대로 산해관 공략은 시간문제로 여겨질 무렵이었다.
  다이곤이 갑자기 철군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그것도 무조건 적인 철군이었다.
  봉림대군은 이것도 무슨 계략이 있어서인가 하여 궁금해하는데 청태종이 사경을 헤맨다는 급보를 받은 것이 무조건 철군의 배경이었다.
  봉림대군이 그 처절한 싸움터에서 무사히 조선관으로 돌아왔으나 청태종이 사경을 헤맨다는 소문은 과장이었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금주성 공략에 나섰던 청태종은 공격 한번 못해 보고 대참패를 당해 공유덕, 경중명의 도움으로 목숨만 겨우 건져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줄초상이나 다름없는 청나라였으나 조선관에는 조선 본국으로부터 경사스런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새 중전이 간택되었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경축해야 할 경사스런 중전의 간택이었으나 소현세자의 얼굴엔 수심의 그늘이 어리다 지나갔다. 새 중전을 맞이한 것 까지는 좋으나 중전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십오세의 중전이라면 아버지 인조의 춘추와는 이십 구년이나 차이가 났다. 
  임금의 며느리인 세자빈 강씨 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의 새 국모가 탄생했으니 소현 세자의 가슴에 수심이 어릴 만도 했다. 더구나 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귀인 조씨의 표독스런 질투와 질시를 무슨 수로 감당할지 그것도 걱정이었다.
  귀인 조씨의 성정으로 보아 반드시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근심과는 달리 조선관은 겉으로라도 새 중전의 간택을 경하하는 분위기였고 새 국모의 탄생을 경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때 또 얘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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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림대군이 수용소의 여인들을 위로하고 돌아오는 길에서였다.
  많은 여인들이 몰려들어 수군대고 웅성대는 가운데 한 움막에서 찢어질 듯한 여인의 비명 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봉림대군과 정뇌경이 여인들의 틈을 비집고 그 움막 앞으로 다가서자 여인들이 길을 트는 한편으로 봉림대군 앞에 엎어지며 움막 안의 여인을 살려주길 애원했다. 
  그 움막은 사대부가의 여인이 사는 움막이라 정뇌경도 눈여겨 보아오던 움막이었다.
  봉림대군의 출현으로 살길이 열린 줄 안 여인들이 그 움막의 문을 번쩍 들췄고 움막 안으로 들어서던 봉림대군과 정뇌경, 그리고 우 둘러섰던 수많은 여인들이 움막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경악하여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부 여인들은 낯을 가린 채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내가 역시 벌거벗기운채 바닥에 쓰러져 뒹구는 여인을 가죽끈으로 사정없이 후려갈기고 있었다.
  여인은 얼마나 맞았는지 등과 가슴이 벌겋게 부풀어올라 빨간 피가 촘촘 솟아오르고 있었고 비명을 지르다 지르다 지쳐 늘어진 여인의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움막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봉림대군인걸 알고서야 여인은 정신을 잃은 듯 했다.
  득달같이 달려든 정뇌경이 그 사내를 밀쳐 내며 가죽끈을 빼앗았는데 땀에 젖어 씩씩대는 사내의 얼굴은 무엇에 씌인양 온전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여인들이 달려들어 쓰러진 그 여인을 부축했고 정뇌경이 사내의 옷을 던져 주었다. 발길질이라도 하려던 정뇌경이 상대가 역관 정명수임을 알고 참은 것이었다.
  역관 정명수의 비행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었으나 봉림대군과 정뇌경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문이 사실로 들어 난 것이었다.
  역관 정명수는 옷을 추려 입은 뒤 왕실의 왕자인 봉림대군 앞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오히려 그 봉림대군을 노려보며 움막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우 몰려든 여인들이 웅성대시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은 앞에서 오히려 봉림대군이 봉변을 당한 꼴이었다. 
  직급으로 보면 역관은 종팔품의 하급직에 불과했다. 그런 정명수가 자신보다 일곱직급 위인 정오품 문학쯤은 어찌 무시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왕실 의 봉림대군 앞에서는 엎드려 죄를 청했어야 옳은 일이었다. 그래야 왕실의 위신도 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명수는 오히려 뻣뻣하게 그 봉림대군을 능멸하듯, 조소하듯 하며 나간 것이었다.
  조선관으로 돌아온 봉림대군은 입을 다물었고 의분에 떨던 정뇌경이 급기야 조선관의 재신 들을 불러 모아 그 사건을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세상에 그런 간악한 자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청나라 사람도 아닌 같은 조선 사람으로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느냐 그말입니다."
  "이 사람아. 참게, 참아. 이곳은 적지가 아닌가. 조선이라면 또 몰라도 이곳에서 사건을 만들면 만든 사람만 곤욕을 치른다는 것을 왜 몰라."
  의분에 떠는 정뇌경을 대빈객 박황이 두손을 흔들며 그 정뇌경을 만류했다.
  "대감! 그자는 지난번 본국에서 애써 보내 온 육만 개의 과일 중 절반을 절취해 간 악질 아닙니까. 그런 자를 어찌 두고도 못본척 하란 말입니까?"
  "정문학의 말이 옳사옵니다, 대감. 그 자의 비행은 온 천하가 아는 사실이 온데 여기서 더이상 덮어둘 수 만은 없사옵니다."
  강골로 소문난 서리 강효원이 정뇌경을 두둔하고 나섰다.
  "허허-  그 사람들, 그러다 자네들이 다치네, 자네들이 다쳐....."
  "아니, 대감?"
  정뇌경의 핏발선 두 눈이 그 박황을 향해 날아들었으나 박황이 무시했다.
  "정명수가 어떤 사람인가, 용골대의 심복일세, 심복.......  그런 그를 자네들의 그 의분만으로 이겨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뇌경은 단호했다.
  "의관들에 따르면 본국에서 보내 오는 귀한 약재와 인삼, 녹용 같은 것도 그 자가 먼저 빼 가고 찌꺼기만 남겨 둔다 하옵니다. 그 약재가 어떤 약재인데 감히 짐승만도 못한 놈이 함부로 손을 댄답니까. 이는 세자저하를 능멸하고 조선 왕실을 업수이 보는 처사가 아닙니까. 도저히 그냥 보고 넘어 갈 수는 없사옵니다, 대감."
  박황이 더 말을 못하고 침통한 한숨만 내쉬는데 서리 강효원이 부빈객 박노를 충동질했다.
  "대감께서는 강직한 성품을 지닌 청나라 신료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그야 모른다고 할 순 없지만 지금은 때가 아닐세, 청태종이 싸움에 지고 와 눈에 살기를 뿜고 있질 않은가. 잘못 심기를 건드리면 정명수는 물론이고 그 여파가 세자저하께도 미칠 수 있으니 자제하는 것이 온당 할 것이야........ " 
  "........."
  "굳이 하겠다면 지금이라도 그자의 비리를 낱낱이 기록했다가 이번 전쟁이 끝난 연후에나 그 죄를 묻는다면 모를까........."
  박노의 지적은 옳았다. 지금 정명수의 비행을 들쑤시고 다니면 적장 용골대가 들고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이었다.
  정뇌경이 솟구쳐 오르는 울분을 한풀 접고 정명수의 비행을 전 조선관원을 통틀어 가며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비행을 기록한 일지가 책한권의 분량이 되어 갈 때였다.
  정명수가 조선관에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정명수의 태도는 오만방자의 도를 넘어 안하무인이었다.
  전 영의정 김류가 정명수앞에 엎드려 아부를 한 이후 정명수의 눈에 조선의 관원쯤은 아예 먼 발꿈치의 때정도로 알기가 일쑤였고 세자 앞에서도 정명수의 고개는 숙여질 줄 몰랐다. 용골대, 마부대, 다이곤, 청태종을 제외한 어느 누구 앞에서도 숙일 줄 모르는 정명수의 고개였다.
  "정뇌경이란 자가 내 뒤를 캔 담서?"
  정명수가 조선의 정이품 대빈객 박황을 앞에 두고 반말 지꺼리를 해대자 박황은 아예 고개를 돌려 못본 체, 못들은 체 하였고 다른 관원들도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래, 내 뒤를 캐서리 어카겠다는 거이야. 말해 보라우."
  정명수는 평안도 은산현의 관노(官奴) 출신이었다. 그 아버지도 관노 출신이었고 그 할아버지도 은산현의 관노였다. 대대로 은산현의 관아에 뿌리박고 살면서 관아의 잡일에서부터 현감의 잔심부름까지 도맡아 해 오던 관아의 노비(奴婢) 정명수가 이십대 청년 시절 광해군의 밀명을 받고 출병하는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만주에 갔다가 후금의 포로가 되었는데, 포로의 잔류병으로 남은 정명수가 후금의 말을 배워 조선의 사정을 소상히 밀고 한 덕으로 용골대의 눈에 들었다. 정묘호란시 용골대의 길잡이가 되어 공을 세운 것이 인연이 되어 용골대의 통역관이 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마부대의 신임까지 한 몸에 받게 되자 정명수는 가슴에 못이 되어 남아 있던 사대부들에 대한 포한(抱恨)을 통렬하게 풀어 가기 시작했다.
  포로 속환 문제로 조선의 삼공 육경들이 정명수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무렵 조선에서는 정명수의 고향인 은산현을 은산부(시)로 승격시켜 그의 비위를 맞추려 했고 사대부들에 포한이 남은 정명수는 포로들의 속환이 미처 이루어지기전 이름난 사대부가의 부인이나 며느리들만 골라 겁간(劫姦)을 자행했다.
  신분에의 멸시가 뼈에 사무쳤던 정명수로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사대부들을 욕보이려 했고 이젠 수용소의 임자 잃은 나룻배 신세가 된 사대부의 부녀들만 골라 마음껏 겁간하며 희롱하는 것을 하나의 낙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조선의 왕실마저 욕보일 수 있다면 누대에 걸친 원한을 속시원히 갚는 일이요 좀더 나아가 조선 왕실의 공주쯤을 하나 선사 받아 자신의 첩으로 삼는다면 자자손손이 그 광영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으리라 혼자 생각하던 정명수였다. 그런 생각이 그를 안하무인으로 만들었다.
  "와 말들이 없어야, 썅!"
  정명수가 서슬 퍼런 낯으로 탁상을 걷어차며 난동을 부리자 안에 있던 소현세자가 뛰어나왔다.
  "어서 날래 말해 보라우, 그래서 뭐이 어카겠다는 거이야."
  정명수는 소현세자가 뛰어나오자 짐짓 더 큰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의자마저 들어 메쳤다.
  "말해 보라우 썅!"
  또 하나의 의자를 집어 들려는 것을 서리 강효원이 제지하며 뿌리쳤다.
  "이런 잡놈 같으니, 은산 촌구석에서 아전 놈들 똥구멍이나 쳐다보며 살던 미천한 노비 주제에 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소란을 떠는 게냐."
  괄괄한 성질의 서리 강효원이 그 정명수의 멱살을 틀어잡고 밖으로 끌고나가 조선관 뜰 앞에다 메 꽂았다.
  "네놈이 은산현의 관노였다면 나는 세자저하의 관노다. 관노이기는 다 마찮가지다만 어째서 네놈은 위로 주상 전하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으며 세자저하마저 안중에 두지 않느냐. 이 더럽고 천한 놈, 은산 관노야!"
  신분상의 설움에서 벗어나려 화려한 꿈을 꾸던 정명수가 강효원으로 부터 비수와도 같은 일침을 당하자 정명수의 눈언저리가 꿈틀하며 입가로 비열한 웃음이 흘렀다.
  "청나라에 이미 항복했으니 그걸 어찌 살아 있는 조선이라 할 수 있더냐."
  "무어라? 에라이 잡놈."
  강효원의 억센 주먹이 정명수의 턱주아리를 모질게 내지르려는 찰라 였다.
  "멈추어라."
  소현세자가 나섰다. 그의 두 눈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대가 알고자 하는 그 일은 없던 것으로 할 것이니 그대는 그리 알고 돌아가라."
  "아니, 세자저하. 이런 자를, 이런 자를 그냥 돌려보내옵니까?"
  "보내라."
  강효원이 분에 떠는 눈으로 소현세자를 올려보았으나 소현세자는 그 말과 함께 돌아섰고 강효원은 그 자리에 엎어지며 주먹으로 땅바닥을 내리쳤다.
  "어흐흐흐........  세자저하, 이런 일을 어찌 보고만 있어야 하옵니까........."
  땅바닥에 엎드린 강효원이 통곡을 쏟아 내자 조선관의 관원들도 숨죽인 채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조선관에 우연히 와 있던 청나라 형부아문(刑部衙門)의 관원 심천로(沈天老)가 사태의 전말을 자신의 상관인 형부상서 질가(質可)에게 본 그대로 고해 버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형부상서 질가는 이일을 곧 용골대와 상의하기에 이르고 아울러 예친왕 다이곤에게도 고해 올리고 말았다.
  정명수와는 실과 바늘과 같은 관계인 용골대가 다이곤의 문책을 받을 것임은 자명했다.
  몸이 단것은 용골대였다.
  정명수의 목이 뻣뻣하게 굳은 것은 정명수가 용골대에게 무한한 뇌물을 바치고 얻어낸 결과였는데 문제는 정명수의 비리를 낱낱이 기록했다는 장부였다. 그 장부가 세상에 알려지는 날이면 정명수는 물론 용골대 또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것이었다.
  용골대는 자신의 호위 군사들을 보내 정뇌경과 강효원을 잡아오라했다.
  죄없는 이들이 잡혀가는데도 조선관에서는 이들을 말릴 힘이 없었다. 
  용골대는 그 두사람을 문초부터 했다.
  "너희가 조사했다는 그 장부는 어디 있느냐?"
  "없소이다."
  "없다니? 이미 내가 다 알고 있거늘........"
  "그 장부는 정명수가 왔다간날 세자저하의 지시로 태워 버렸소이다."
  정뇌경이 사실대로 말하자
  "무어라?"
  하며 놀란 용골대의 두 눈이 바쁘게 깜짝거렸다.
  "태워 버려 없다 하질 않소이까."
  그 태워 버렸다는 말에 살벌하게 일그러졌던 용골대의 얼굴로 생기가 돌았다.
  "그렇다면 그 장부를 태우는것을 본 사람이 있는가?"
  "........."
  "증인이 있는 갈 묻는 것이다. 왜 대답이 없느냐."
  "나도 함께 태웠소이다."
  강효원이 선뜻 나서자
  "더 본 사람은......?"
  하며 용골대가 음흉스럽게 웃었다.
  "우리 둘이 태웠으니 더 본 사람은 없소이다."
  정뇌경의 대답에 용골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고함부터 질렀다.
  "너희는 정명수를 조사한다면서 사실은 나를 모함하려 했음이렷다!"
  "그 무슨 당치않은 말씀이요."
  정뇌경이 용골대의 고함쯤은 가볍게 받아 내며 그 모함이라는 말에 신경을 썼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듯 했다.
  "우리가 용장군을 모함하려 하다니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황당무계한 말씀을 하신 단 말이오이까."
  "이미 너희가 그 증거를 태워 버리지 않았느냐."
  "뭐, 뭐라고요?"
  비웃듯 한, 용골대의 그 음흉한 웃음 앞에 두사람의 머리끝이 순간 아찔했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ㅇ


  정명수의 농간으로 정뇌경과 강효원의 문제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정명수가 함정을 파고 용골대가 전면에 나서서 처리해 간 사건의 결과는 그러나 너무도 엉뚱했다. 그 두사람을 사형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유인즉,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정예부대의 선봉장 용골대를 모함하려 했던 것은 청나라 전력에 차질을 야기코자 했던 적국(명나라) 간자(간첩)들의 소행이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용골대는 전시체제임을 들어 그 두사람을 즉결 처분 해야 한다며 역공을 가해 왔고 다급해진 조선관에서는 봉림대군이 사력을 다해구명운동에 나섰다. 
  "예친왕 전하, 이는 결코 음모가 아니옵니다. 정뇌경은 단지 정명수의 비행만을 조사한 것 뿐이옵니다."
  "..........."
  "부디 사형만은 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그 간절하게 애원하는 봉림대군을 묵묵한 눈으로 바라보던 예친왕 다이곤이 의외의 말을 했다.
  "양국 관계에 이간질을 놓는 소인 잡배들은 때가되면 깨끗하게 정리 할 생각이었소.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요. "
  ".........?"
  "그런 사소한 일로 전력에 차질을 가져오게 할 수는 없는 일, 대군은 이번일 모르는 것으로 하고 돌아가 세자와 함께 출진 준비나 서두르시요."
  "예......?"
  놀란 봉림대군이 일어섰다.
  .........출진 준비라 하오시면......?"
  "명나라를 다시 공략 할 것이요."
  다시 봉림대군이 물었다.
  "세자저하께서 꼭 참전하셔야 되는 일이옵나이까?"
  "황제폐하의 명이시니 따를 수 밖에!"
  "..........."
  다이곤의 군진을 나서는 봉림대군의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정뇌경과 강효원의 목숨구명(救命)은 고사하고 갑작스런 세자의 출진도 막지 못했다. 또한 은산현의 관노인 정명수가 조선관에까지 들어와 흉폭한 언사와 의자를 집어던지고 탁자를 걷어찬 일과 수용소 움막에서의 비인간적인 일등이 봉림대군의 머릿속에서 겹쳐지며 눈앞이 어찔했다.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조선관에 들어서는 봉림대군을 빈객 박노가 맞았다.
  "아니, 대군마마. 안색이 안좋으십니다.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신지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별일 아닙니다." 
  그러나 박노가 보기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봉림대군은 위태롭게 보였다.
  "대, 대군마마, 아니되겠사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옵소서."
  박노가 달려들어 봉림대군을 부축했다.
  봉림대군을 자리에 뉘인 박노는 급히 의원을 불렀다.
  "너무 심려 마옵소서, 마음이 크게 놀라고 심신이 허로하여 온 몸살이오니 탕약을 드시고 하루쯤 푹 쉬시면 곧 쾌차 하실 것이옵니다."
  의원 정남수가 진맥한 결과를 박노에게 고하는데 언제 일어났는지 봉림대군이 그 말을 제지했다.
  "지금 그럴 시간 없습니다. 세자저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대군마마, 아니되옵니다. 좀더 누워 계시오소서."
  "아닙니다, 다이곤이 세자저하와 함께 출진 준비를 서두르라 하는 것을 보니 내일 아침 바로 출진할 것 같습니다. 세자저하좀 찾아 주시고 출진준비를 서둘러 주세요."
  박노가 놀라다 말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들어와 있던 서양인 선교사를 만나 그들 나라의 선진 과학 이야기에 몰두해 있다 헐레벌떡 달려온 내관에 의해 급히 조선관으로 돌아왔고 이미 박노를 통해 소집된 조선관의 신료들도 모두 모여 출진에 대한 의논들을 나누고 있었다.
  "세자저하, 그 두사람.....  구명은 고사하고 세자저하의 출진조차 막지 못하였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명나라 공략을 눈앞에 둔 청나라로서는 황제가 신임하는 선봉장 용골대를 죄 주기가 어려웠을 것이네. 전쟁을 눈앞에 두고서야 선봉장의 사기를 어찌 꺾을 수 있겠는가."
  "........저하......."
  "그리고 황제가 명했다면...... 가야지...... 어쩌겠는가."
  "저하......."
  봉림대군이 그 낙심해 하는 소현세자 발앞에 다시 꿇어 엎드렸고 
  "힘내시게.........  그 동안 애 많이 썼네."
  하며 소현세자가 그 꺼칠한 봉림대군을 위로했다.

  갑주로 무장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다이곤의 군진으로 향하자 그 뒤를 무장한 익위사의 무관들이 입을 굳게 다문 채 뒤따르고 있었다.
  청태종이 소현세자를 굳이 출진시킨 이유는 지난번 싸움의 참패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한 화약의 폭발은 누군가 첩보를 제공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의심을 풀지 않은 청태종이 이번엔 산해관을 공략할 것이라는 대대적인 소문을 퍼트리게 하여 연막전술을 펼치자 마침내 명나라의 관심도 온통 그 산해관으로 집중되었고 그 때를 놓치지 않은 청태종은 자신의 두 동생 대선과 다탁에게 십만 대군을 주어 삼십만 대군으로 위장케 한 연후에 산해관으로 치닫게 했다.
  승리의 기쁨에 들떠 있던 금주성의 병력들이 그 삼십만 대군을 막기 위해 급히 산해관으로 떠난것은 대선과 다탁이 출진하던 같은 시각이었고 그 본진이 떠난 금주성은 텅 비게 되었다.
  그 텅 비어 있는 금주성을 향해 다이곤과 합세한 청태종의 이십만 대군이 질풍노도와 같이 내달리자 수천 명에 불과한 명나라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던 금주성의 명나라 장수 홍승주와 진홍범이 결사 항전을 벌였으나 성난 파도와 같이 밀려드는 청태종의 이십만 대군 앞에 그 항전은 항전다운 항전일 수 없었고 백 대 일이 넘는 싸움을 막아낼 재주가 없던 홍승주는 끝내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익위사의 관원들과 함께 소현세자옆에 바짝 붙은 봉림대군은 항복하여 그 문이 활짝 열린 금주성으로 입성했다.
  과연 금주성은 요새(要塞) 다웠다. 금주성이 든든하고 서야 산해관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었고 산해관을 통하지 않고서는 북경 공략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 금주성의 전략적 가치가 봉림대군의 눈에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싸움마다 승리하는 용병의 귀재 다이곤을 따라 전장을 두루 누빈 생생한 경험은 그대로 산지식이었고 화약이 폭발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치열한 혈투의 현장에서 봉림대군은 자신도 모르게 다이곤의 병법을 온몸으로 흡수해 내었던 것이다. 그 눈으로 다시 보는 금주성은 역시 요새 다웠다.
  홍승주의 항복으로 금주성을 쉽게 얻은 청태종은 명나라의 명장(名將) 오삼계(吳三桂)가 굳게 지키고 있는 철옹성 산해관(山海關)을 격파하기 위해 다시 심양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기 위함이었다.
  심양은 연일 잔치였다.
  금주성을 얻은 청태종의 기쁜 마음이 그의 충복들에게 은전과 상으로 표현되자 수십만 군사들로 빼곡히 들어찬 각 군진마다에서는 그 충복들이 내는 잔치로 군막이 다 들먹들먹 했다. 
  그런 잔치 속의 청나라 군진과는 달리 조선관은 우울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전쟁에 참전한 사이 정뇌경과 강효원이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그 두사람의 신위 앞에 선 소현세자는 고개를 숙였고 봉림대군은 엎어져 통곡을 했다. 자신의 뒤를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 주던 든든하고도 고마운 사람을 잃은 데 대한 슬픔이요 기개 있는 조선의 인재들을 잃은 데 대한 눈물이었다.
  그러나 그 눈물이 미처 마르기전, 한참 흥이 돋아 무르익어 가는 청나라 군진의 잔칫상에 찬물을 끼얹는 경천 동지 할 사건이 조선으로부터 날아 들고 있었다.
  정뇌경과 강효원으로 부터 수모를 당한 정명수가 조선관과 조선에 안길 치명적인 복수를 생각하던 끝에 금주성이 함락되자 금주성의 명나라 상인들과 밀무역을 하고 있던 선천부사 이규(李 )를 용골대에게 일러바친 것이었다.





                                  ㅇ


  "그것이 사실이렸다 !"
  "어느 안전이라 거짓을 아뢰겠사옵니까."
  두 눈을 부라리며 되묻는 용골대에게 정명수가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이런 괘씸한 것들이 있나."
  "지난 번 패전의 원인도 혹, 그자들의 소행이 아니 올지........"
  "무엇이?"
  순간 놀란 용골대의 안색에 핏기가 사라졌고 그 앞에 정명수가 더욱 나직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그것을 왜 이제야 고하느냐, 진작 알리지 않고 !"
  "소인은 단지 선천부사 이규가 명나라 상인들과 상거래를 하던 중에 혹, 지난 번 같은 첩보를 미리 전해 주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
  "생각은 무슨 놈에 생각! 바로 그것이니라!"
  정명수의 말을 가로채듯 가로막은 용골대가 주먹으로 책상을 쾅! 소리가 나도록 치고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 나가자 그 달려가는 용골대를 바라보는 정명수의 얼굴로 회심의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선 왕실의 공주를 반드시 하나쯤 취하고야 말리라........."

  청태종 홍타시가 격노하고 있었다.
  지난번 패전의 자초지종을 조리있게 설명해 가는 용골대의 고변에 머리끝이 쭈뼛 하던 청태종이 어찌나 노발대발 하는지 급히 연락을 받고 달려온 다이곤도 경황이 없었다.
  "당장 잡아들이라! 선천부사 이규와 관련 있는 자들은 모조리 잡아들여 엄히 문초하라!!"
  승리의 기쁨에 취해 흥청이던 청나라 군진의 잔치 분위기도 청태종의 격노에 놀라 이미 살얼음판이었고 그 싸느랗게 식은 청나라 군진 한 가운데서 조선을 향해 급하게 뛰닫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만이 청나라 진중을 무겁게 울려 대었다.
  "세자저하, 크, 큰일 났사옵니다."
  소현세자의 놀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젠 누가 자신을 급하게만 불러도 깜짝깜짝 놀라는 소현세자였다.
  "용골대가 호위 군사들을 이끌고 선천부사 이규를 압송하러 지금 막 출발했다 하옵니다."
  "뭣이라고요?"
  가쁜 숨을 꿀꺽 삼켰다 몰아 내쉬는 빈객 박노의 창백한 낯빛을 바라보며 소현세자의 안색도 창백하게 식어 갔다.
  "아니, 대체 어찌 된 영문입니까. 소상히 좀 말씀해 보세요."
  봉림대군이 그 박노를 진정 시켰다.
  "선천부사 이규가 금주성의 명나라 상인들과 밀무역을 하고 있었는데 지난번 금주성 전투에서 청나라가 패한 원인이 그 이규가 명나라에 첩보를 제공한 까닭이 아니겠느냐며 정명수가 용골대에게 이른 것을 용골대가 다시 청태종에게 고하여 청태종이 크게 격분하다 쓰러졌다 하옵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조선관에 급히 몰려든 대.소 신료들의 얼굴위로 사색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조선엔 또다시 엄청난 재앙이 밀어닥칠 것이었다.
  조선관에서는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청태종이 얼마나 놀랐으면 쓰러지기까지 했겠는가..........' 
  조선관엔 숨소리마저 잦아들고 있었다.
  우려 한대로 청태종의 상처가 다시 도지고 있었다. 금주성 일차 공략때 입은 상처였다.
  의심은 하고 있었으나 감히 그럴리야 있겠는가 싶어 청태종은 금주성을 함락시킨 이후 일차공략때의 그 부끄러운 패전은 가급적 잊으려 했다. 그런데, 그런데..........
  욱씬욱씬 쑤셔 오던 옆구리가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그 설마하던 악몽의 정체가 현실로 드러나면서 이성 잃은 청태종의 흥분이 폭발했고 그 솟구쳐 오르는 혈압을 못이겨 결국 옆구리의 상처가 터지고 만 것이었다.
  "네놈들.....이..감히.......짐을.....속이....다......니,  이놈....들......."
  까맣게 몰려오는 통증을 이기지 못한 청태종이 그 터진 옆구리를 감싸안고 구르자 놀란 의관들이 달려들어 쓰러진 그 청태종을 구급 치료 했으나 곧 일어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이번엔 대궐이 떠나가라 악을 쓰던 청태종의 수족이 뒤틀려 돌아가고 있었다. 

  "창고를 샅샅이 뒤져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모두 가져 나오라."
  먼저 선천부사 이규가 용골대 앞에 꿇렸고 이어 말린 인삼과 금, 은 패물. 그리고 명나라산 비단과 향료 등이 쏟아져 나왔다. 엄청난 양이었다.
  놀란 건 선천부사 이규였다. 금주성이 함락되었다고는 하나 비밀리에 진행되어 온 밀무역이 어떻게 발각되었는지........  이규가 놀란 눈으로 서슬 퍼런 낯의 그 용골대를 올려 보았다.
  "홍승주가 이미 다 털어놨느니라." 
  ".........?"
  "또 네뒤엔 누가 더 있는지도 이미 다 알고 있고.........."
  ".........!"
  "괘씸한 것들! 그러구도 네가 감히 살길 바랬더냐?"
  홍승주가 이미 다 털어 놨다는 말에 이규의 낯빛이 순간 창백하게 바래졌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용골대의 입가에는 음흉한 웃음이 흐르다 사라졌다.
  "더 볼 것 없느니라, 이미 증거가 드러났으니 저자는 이자리에서 참수하라."
  "장군!"
  두손이 뒤로 묶인 이규가 장검을 빼어 드는 청나라 장수를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잘못이 있다면 임경업일 것이요, 영의정 최명길 대감과 평안 감사 정태화는 죄가 없소이다."
  "어찌 최명길과 정태화가 죄가 없겠느냐. 내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거늘........."
  "아니오, 장군. 밀무역을 선두에 서서 자행한 것은 이몸이나 그것은 명나라 부흥에 앞장섰던 임경업을 도우려던 것 뿐이오, 믿어 주시오 장군."
  "...........!!!"
  "이미 장군께서 다 알고 계시다 하니 더 말은 않겠소이다 마는 기필코 최명길 대감과는 무관 한 일이오이다."
  "너는 어찌 최명길과 정태화만을 고집 하느냐, 이미 홍승주가 폭로한 명단이 여기 있느니라."
  하며 용골대는 품속에서 종이 쪽지를 꺼내 들고 흔들어 보였다.
  이규가 또한번 고개를 꺽으며 한숨석인 소리를 털어놓았다.
  "내가 더 무엇을 속이리이까. 동양위 신익성(申翊聖)과 그 동생 신익전(申翊全), 그리고 이경여(李敬輿)와 허계(許啓), 이영한 등이 죽기를 작정하고 이 일에 뛰어들었으나 그들은 가담만 하였을 뿐, 이번 일에 앞장섰던 것은 나와 임경업뿐이외다. 그러니 그들은 죄가 없소이다."
  용골대가 펼쳐 흔든 종이는 선천부사 이규를 압송해 오라는 청태종의 명령서일 뿐이었다. 그런데 용골대의 계략에 선천부사 이규가 완벽하게 속아 넘어가 이번 일에 연루된 사람들을 모두 말해 버린 것이었다.
  용골대는 청태종이 가장 신임하는 장수중의 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꾀도 뛰어난 장수였다. 이미 정명수로 부터 밀고를 받는 순간 이번 일의 각본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펼쳐지며 신바람이 났었다. 또 한번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긴 때문이었다.
  "너의 말이 홍승주의 말과 얼추 비슷도 하다만 어찌 중요한 사실은 빼먹었느냐?"
  "........중요 한.... 사실....이라니요....?"
  "지난 번 금주성 공략때 홍승주에게 첩보를 미리 제공 해준 사실 말이다."
  "그 그 그건, 자 잘 모르는 일이오이다.
  멀뚱한 눈만 꿈벅이던 이규가 순간 핼쓱한 낯을 돌리며 부인하려 들자 용골대는 쓴웃음을 지었다.
  "임경업이 홍승주와 진홍범에게 미리 연통하여 성주변 사방 십리에 화약을 묻게 하고 산해관의 병력까지 동원시켜 금주성을 지켜 내지 않았더냐. 홍승주가 이미 실토한 사실을 네가 모른다?"
  용골대는 코웃음을 쳤다.
  "그 화약의 폭발로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황공하옵게도 상처까지 입으셨단 말이다. 이러구도 네놈들과 조선이 무사하길 바랬더냐?"
  "명나라 장수들이 임경업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나 그렇다고 그 깊은 내막까지야 이 몸이 어찌 알겠소이까. 내가 아는 것은 다만 임경업이 명나라 장수들과 내통하여 명나라 부흥에 앞장섰다는 것 외엔 잘 모르오이다."
  "그 말이 그 말 아니더냐. 네말과 홍승주의 말이 하나도 틀림없으니 내 너를 굳이 죽이지는 않겠다. 다만 이 사실은 황제 폐하 앞에서 다시 한번 복명해 올려야 하는 중대 사안이니 만큼 너를 심양으로 압송해 가겠다."
  그러나 심양으로 끌려온 이규가 홍승주와 대질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도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이규에 비해 홍승주는 지나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즉답을 피해 나가자 그 모른다고 잡아떼는 홍승주를 가소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이규의 등줄기로 순간 섬광 같은 전율이 흘러 내렸다.
  '이간 책......!'
  경악한 이규가 그때야 속은 것을 눈치 챘고, 능글스레 웃고 있는 그 용골대를 이규의 핏발 서린 눈이 노려보았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어찌 이럴 수가........"
  땅을 치며 한탄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자신은 만고의 충신들을 밀고 한 반역자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ㅇ


  조선관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대.소 신료들의 놀라움은 컸다.
  "저하, 최명길 대감은 화친론의 태두(泰斗)가 아니옵니까, 그런 분이 어찌 명나라 부흥에 앞장 서셨겠사옵니까."
  "..........."
  고개 숙인 소현세자는 말이 없었다.
  속단하기도, 또 그렇다고 액면 그대로 믿기도 어려웠다.
  그 고개숙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깊은 수심(愁心) 속으로 빠져 드는데 다시금 조선을 향해 치닫는 말발굽 소리가 심양 하늘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최명길과 정태화등 이번일과 관계 있는 자들은 모두 잡아 압송하고 특히 임경업은 포박하여 압송하라는 엄명을 받은 용골대가 또다시 조선을 향해 질풍같이 내닫는 말발굽 소리였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렸던지 불안 속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진저리를 쳤고 그 진저리 끝에 오싹하는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가슴이 뻥 뚫린듯 했다. 
  허허롭고  .........그리고..........  외로웠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도와줄 구원의 손길은 그 어디에도 없고..........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그 두사람의 눈앞에 하나의 영상이 떠 올랐다. 칠흑 같이 어두운 긴 한숨속에 묻혀 안절부절못하는 아버지 인조의 모습이었다.
  "아바마마........."
  끝내 소현세자가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트렸고 봉림대군 또한 꿇어 앉으며 눈물을 흘렸다.
  조선이 명나라와 내통하여 명나라 부흥을 꾀했다는 소문이 심양에 퍼지며 조선관을 찾던 청나라 황족들의 발길은 뚝 끊어졌고 한층 더 강화된 청나라의 감시 속에 조선관을 드나들던 서양 선교사들의 발길조차 끊어지자 근심중에도 소현세자는 당황 했다. 그 동안 공부해오던 천문학과 수학, 태양력법과 천주학의 진도가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답답한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던 소현세자가 그 돌파구로 낮밤없이 세자빈의 침실을 파고들었고 때 아닌 애정의 홍수에 불이 붙은 세자빈 강씨도 서양의 진귀한 화장품과 향수로 무장하여 그 세자를 열심히 끌어안았다.   
  볼모의 신세인지라 후실을 들일 수 없는 처지였으나 세자가 보위를 물려받으면 분명코 후궁을 들일 것이었다. 그 때를 대비하여 세자빈 강씨는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자신만의 독특한 화장술과 자태로 그 세자의 사랑을 흠뻑 쇠뇌 시켜 나가고 있었다.
  세자빈의 방이 더욱 화려해지고 서양의 진귀한 화장품과 물건들로 쌓여 가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
  소현세자도 그런 세자빈이 더욱 사랑스러운지 세자빈의 온몸 구석구석에서 나는 향기에 얼굴을 묻기가 일쑤였고 여인의 은밀한 부위에까지 얼굴이 가는 횟수도 점차 늘어났다.
  날마다 환희에 젖는 세자빈이었고 그 환희를 지탱 하기 위해 세자빈은 본국(本國) 모르게 많은 경비를 지출하고 있었다.
  소현세자가 세자빈의 사랑의 향기에 빠져 은밀한 사랑을 탐닉해 가고 있을 그 즈음 숭정전에서는 청태종의 깊은 신음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 나고 있었다.
  조선의 영의정 최명길이 명나라와 내통하여 명나라 부흥을 꾀하였다는 믿을 수 없는 용골대의 보고를 다시 듣는 순간 청태종의 눈앞이 깜깜했다. 노기를 참지 못해 발악하던 청태종의 옆구리가 재차 터진 것이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청태종의 터진 옆구리에서는 흥건한 피고름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긴급히 달려든 어의들이 치료에 몰두는 하고 있었으나 그러나 한번 재발한 상처는 쉬이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지난번의 재발 이후 홧병에 중풍기미까지 가세한 합병증세가 더욱 난조를 보이고 있어 그 환부를 들여다 본 이름난 명의들 조차 입을 굳게 다문 채 난감한 얼굴들을 했다.
  고열에 들떠 신음하던 청태종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몇 번인가 까무라치기를 반복하다 깊은 혼수상태로 빠져 들자 급기야 심양은 무언가 알지 못할 무겁고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가고 있었다.
  그 극도의 긴장감 속에 숨죽인 조선관도 바짝 엎드린 채 심양으로 잡혀 온 최명길, 정태화 등과 또 잡혀 오다 탈출한 임경업의 소식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오로지 심양엔 청태종의 생사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회복 할 것인가 아니면 못 할 것인가.
  만일 회복하지 못 한다면 후계자를 누구로 정 할 것인가.
  그러나 그 누구도 그에 대한 물음에는 답을 못했다.
  청태종의 동생들로서 가장 강력한 인물은 다이곤이었다. 그러나 청태종의 심복 장수들은 그 다이곤 보다는 청태종의 아들을 더 옹호하는 것 같았다.
  다이곤이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는 어렵지 않을 일이었으나 명나라와의 대치 상황에서 황제의 충복 장수들과 일대 혈전을 벌인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어서 그 후계 문제에 가장 긴밀히 대처하면서도 다이곤은 짐짓 뒤로 빠지는 듯 했다.
  그러나 사력을 다한 어의들의 도움으로 청태종이 다시 회복 할 기미를 보이자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해 오던 팽팽한 긴장감도 서서히 가라앉았고 용골대가 다시 조선의 치죄문제를 들고 나왔다.
  밧줄에 묶인 최명길, 정태화, 이경여 등 여러명의 조선 신료들이 그 용골대 앞에 꿇렸다.
  "명나라 병부상서 홍승주에게 독보라는 중을 밀사로 보낸 사람이 누구냐?"
  "그 일은 내가 했소이다."
  용골대의 독오른 눈이 스스로 자인하고 나서는 그 최명길을 노려보았다.
  "영의정인 네가 한 일이라면 네나라 임금도 모르지는 않았을 터! 병자년의 약조를 어기고도 네 나라가 무사할 줄 알았더냐."
  송파의 마부대 군진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개트림 득득 해대며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던.......  그 생각에 잠시 젖던 최명길의 시린 가슴으로 소름이 끼쳤다.
  "우리 전하께서는 모르시는 일이오이다. 이번 일은 영의정으로서 내가 주관하였고 그때 마침 임경업이 평안병사로 있었기에 그에게 승려 독보의 편의를 좀 봐주라 한것외엔 다른 어느신료들도 모르는 일이오이다."
  "정태화라는 자가 명나라 사람들에게 쌀을 보내 주었다는 것도 내 이미 알고 있거늘, 나를 속이려 드느냐?"
  "쌀을 준 것은 사실이나 그 일은 영상 대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오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정태화가 의연하게 나서자 용골대가 싸늘한 눈으로 그 정태화를 쏘아보았다.
  "명나라는 우리 청나라의 적국이거늘 네가 그 명나라를 도와주고도 살길 바랬더냐!"
  용골대의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건 명나라를 도와 준 것이 아니오이다."
  "무어라?"
  "그 배는 양곡이 떨어진 배였소이다. 우리가 아무리 쫓아내도 가다가는 돌아오고 가다가는 또 돌아 오고하여 이것이 청국에 발각이라도 되는 날이면 마치 우리가 명나라와 무슨 내통이라도 하는 것 같이 보일 우려가 있어 어쩔 수 없이 쌀을 조금 주어 쫓아 보낸 것인데 그것도 죄라면 내가 그 죄를 달게 받겠소이다."
  그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보는 용골대를 정태화가 정면으로 응시하자 그 눈길을 피해 용골대는 다른 말을 했다.
  "임경업이 탈출했다 하는데 이는 필시 명나라로 도망해 들어가기 위한 술책이 아니더냐. 임경업이 지금 어디 있는지 말해 보라."
  "..........."
  "말해 보라지 않은가. 왜들 말이 없는가."
  용골대가 책상을 내리치며 눈알을 부라렸다.
  "딱도 하시오이다, 용장군. 우리가 임경업보다 먼저 잡혀온 사람들인데 우리보다 뒤에 오던 임경업이 도망쳐 달아난걸 우리가 무슨 수로 알겠소."
  정태화가 다시 정색하며 용골대를 쳐다보자 용골대가 머쓱했다. 옳은 말이었다.
  "임경업은 기필코 내 손으로 잡고야 말 것이니라, 이 손으로 반듯이 요절을 내고 말 것이야."
  용골대가 주먹을 쥐어흔들며 괜한 과장을 하는데 사색이 된 전령 하나가 뛰어 들며 용골대의 귀를 나꿔채자 순간 튕겨 일어선 용골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 달려나가는 용골대의 낯빛이 사색이 되는 걸로 보아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흡사 급변이라도 난 것같았다.
  용골대가 숭정전에 미처 다 다다르기도 전에 숭정전이 갑자기 시끌하며 분주하더니 이내 통곡 소리가 그 숭정전을 뒤덮기 시작했다.
  회복 기미를 보이던 청태종이 갑자기 숨을 거둔 것이었다. 어의들이 달려들어 손 쓸 틈도 없이 급사를 한 것이었다.
  후계 문제가 매듭지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청태종의 급사는 청태종의 친자를 옹립하려는 친위 세력과 청태종의 동생들인 형제 세력간 골육상쟁으로 비화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청태종의 제1 왕자인 호격(豪格:34세)이 돌연 사퇴 의사를 밝히자 청태종의 정비 소생인 여섯살의 제9 왕자 복림(福臨)을 옹립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을 처음부터 예의 주시하고 있던 다이곤이 그 혼란스런 상황을 일시에 제압하며 신속하게 나섰다.
  "형님이신 황제 폐하의 제9왕자 복림을 새 황제로 옹립할 것이니 제왕과 제장들은 새 황제 폐하께 충성을 다하라."
  새 황제의 자리에 오른 복림의 섭정은 자연히 다이곤에게 돌아갔으나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의 충복들로부터 명분을 얻는 일이었고 형제간에도 불목할 일이 없었다.
  섭정왕이 된 다이곤은 어수선한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명나라 공략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용골대가 사건을 일으켰던 선천부사 이규의 문제는 조선의 문제이니 이규와 정태화 등은 석방하여 조선으로 보내 처리하라 이르고 다만 최명길만은 심양옥에 가두어 두게 했다. 심양옥은 사형수를 가두어 두는 곳이었다.
  그 심양옥에 일년 전 올라온 전 예조판서 김상헌이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김상헌은 인조가 삼전도로 향할 때 차마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꿇는 것은 볼 수 없다 하여 인조를 따라 가지 않고 고향인 경상도 안동으로 내려갔었다. 삼전도 치욕 
이후 청태종의 징병 요구에 반대하는 극렬한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용골대에
게  잡혀 온 것이었다.
  쇠사슬에 손발이 묵인 채로 옥문을 열고 들어서는 최명길을, 백발을 풀어헤친 
김상헌이 감격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선의 영상께서 이곳엔 어인 일이오?"
  절그렁대는 소리를 내며 휘적휘적 걸어 들어오는 최명길을 보고 74세의 김상헌이 58세의 최명길을 영상이라 높여 부르며 공대하는 말이었다.
  "만주가 본래 조선의 옛 땅이니 조선의 영의정이 못올곳은 아니지요."
  "옛 땅을 그리워하는 걸 보니 세월이 무던히 흐르긴 하였나 보오이다."
  "때가 되면 둥지를 찾는 것은 만물의 본성 아니옵니까."
  최명길이 백발을 풀어헤친 채 앉아 있는 김상헌의 옆으로 가서 털썩 소리가 나도록 앉았다.
  "그래도 혼아 앉아 지내시는 것 보단 둘이면 좀 나을 겁니다."
  "당최 등이 가려워 못살 줄 알았는데 오긴 참 잘 왔소이다."
  김상헌이 심양옥에 갇혀 있는 것을 가슴아파 하던 최명길이었다. 그리고 임금도 
꺽지못하는 김상헌의 고집이었으나 최명길이 임경업과 함께 명나라 부흥을 주도했다는 믿을 수 없는 그 사실 앞에 김상헌은 감동했었고 그 책임을 혼자 짊어지는 선비다움
에 김상헌의 마음이 또한 울었다. 
  죽기 전에 그 얼굴 다시 못 볼까 얼마나 가슴 조이던 김상헌이었던가. 
  의연한 모습의 최명길을 다시 봄으로써 김상헌은 그 마음에 남아 있던 앙금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을 수 있었고 최명길 또한 죽음이 눈앞에 임박한 가운데서도 한점 흔들림 없는 김상헌을 보고 변함없는 그 절의에 깊이 탄복했다.





                                  ㅇ


  섭정왕 다이곤이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며 절치부심하고 있을 때 서양의 새로운 문물과 서학에 깊이 심취된 소현세자는 조선관 옆에 보다 새로운 양식의 건축물을 짓고 있었다.
  서둘러 급하게 지어진 지금의 조선관에 비해 훨씬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그 화려하고 멋진 건물 안에서 좀더 세련된 모습으로 집무를 보고 싶어하는 소현세자였고 무엇보다 세자빈이 그 아름다운 건물에서 단 하룻만이라도 화려하게 살아보길 소원하므로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공사임에도 소현세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제 서양을 꿈의 나라로 동경하는 소현세자였다.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와 사랑을 서양인 선교사들을 통해 온 몸으로 느끼던 소현세자였고 그 선교사들을 스승 이상으로 공경하던 소현세자였다. 지금 짓고 있는 건축물도 그 서양인 선교사들이 설계를 해준 것이었고 이번 공사가 끝나면 그 
옆에 아담한 서학 당도 지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조선관의 궁핍한 재정으로는 소현세자와 세자빈의 그 개방된 욕구를 충족시
킬 수가 없었다. 더구나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복잡한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뇌물이 정명수와 용골대에게 전해져야 했고 그런 자금은 소현세자의 
명에 의해 평안감사나 의주부윤이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부족한 조선관의 
재정이었다.
  그 궁핍한 재정으로 애가탄 소현세자의 얼굴이 꺼멓게 죽어 가고 있었다.
  "저하,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써야 할 곳은 많고.......  재정은 부족하니 허-  그 참........."
  수심 속으로 파묻혀 가는 소현세자를 온 몸 향기 가득한 세자빈이 그 소현세자를 등뒤에서 감쌌다. 포근한 감촉이었다.
  "제주도에서 가져온 백랍과 망건도 이제 다 떨어졌고 평안감사가 보내 온 인삼도 바닥이 났으니 무슨 수로 빈 재정을 채워 나갈지.........."
  "저하, 너무 걱정 마시옵소서. 궁하면 통한다는 옛 속담도 있지 않사옵니까?"
  "이곳이 조선이 아닌데 별다른 방법이야 있겠소."
  "저하......"
  세자빈이 소현세자의 얼굴에 자신의 볼을 살짝 대었다.
  "심양은 들이 너르지 않사옵니까."
  "...........?"
  "그 들을 이용하면 어떻겠사옵니까?"
  "들을....이용.......?"
  그러하옵니다, 세자저하. 그 너른 들에 곡물과 작물을 심어 청나라 시장에 내다 
팔면 본국의 도움 없이도 해결이 가능하지 않겠나이까?"
  "............!"
  소현세자의 머리가 쩡하며 맑아졌다.
  "그런데 농사는 누가 짓소. 신료들이 못 할 일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웃는지 팽팽하게 당겨지는 세자빈의 볼 감촉이 소현세자의 얼굴에 전해졌다.
  "수용소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여자들......?  여자들이 어찌 그런......."
  실망한 숨소리가 났다.
  "저하, 지금의 조선관도, 수용소의 움막도 모두다 그 사람들이 만들고 지은 것 아니옵니까? 그에 비하면 농사는 아무일 도 아니지요. 더구나 그들에게도 소득이 돌아가는 일이 온데........."
  "...........!"
  소현세자가 돌아서서 아직 웃고 있는 그 세자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역시 아름다웠다. 수용소 여인들의 투박한 맨 얼굴에 비하면 빨간 입술에 발그스름
한 두 볼은 정작 선녀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세자빈의 옷소매가 스치울적마다
 피어나는 자극적인 향기..........
  소현세자가 그 세자빈을 와락 끌어안았다.
  낯간지러워 하듯 수줍어하는 세자빈이었으나 그러나 세자빈의 두 팔은 소현세자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꼬옥 끌어당기고 있었다.
  세자빈의 겉옷이 하나씩 벗겨질 적마다 피어오르는 더욱 짙은 향기는 소현세자의 가슴을 더욱 고동치게 했고 그 숨가빠하는 소현세자의 눈에 드러난 세자빈의 탄실한 
가슴은 소현세자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아이 셋을 낳은 여인의 몸임에도 
군살이 붙지 않은 세자빈의 허리는 가늘었고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한 몸매였다.
  은밀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향기에 도취된 듯 억세게 휘어 감는 소현세자의 팔 안에
서 이제 더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자빈이 희열에 들뜬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해서 거둬들여진 농산물이 조선관 앞에 산더미처럼 쌓였고 시장보다 싼값에 매매되는 농산물은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경제적으로 여유를 찾은 소현세자는 다시 건축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선교사들
이 권하는 서양의 물건은 무엇이든 사들였다. 애당초 계획했던 서학당도 같이 짓기로 하여 토목공사의 분량은 그만큼 더 늘어났다. 그러자 시강원에서 그런 세자의 무분별
함을 소(疏)를 올려 지적했다.

  - 지금 조선의 형국은 날로 어려워 가고 있는데 서연청 뜰을 꽃벽돌로 쌓아 장식
하고 서연청의 각방은 청나라 황족들의 집에서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대단히 화려한 장식들로 가득 치장하셨다 하오니 저희 신료들의 놀란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차마 
감추지 못하겠나이다.
  그 건축 공사비에 얼마나 많은 경비가 조달되었나이까. 그런데 그 옆에 새건축물을 다시 짓는다 하시니 저희 신료들의 눈앞이 어두워지고 숨이 막히어 세자저하의 속마음을 감히 짐작하지 못하겠나이다.
  군왕의 덕은 근검 절약하는데 있사옵니다.
  비록 진심은 화려한 공사에 뜻을 두지 않았다 하시더라도 이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지금이 어느 때이며, 이 땅이 어느 땅이고 더구나 저하의 처지가 
어떠 하온데 그와 같은 물력을 낭비하여 부질없는 공사를 벌이시는 것이옵나이까. 
성덕에 누가 됨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또한 청나라 사람들이 볼 때는 관소의 물력이 풍부한 것으로 알아 이로 인해 앞으로 강요당하는 폐단 또한 더욱 심해질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검소한 마음을 가지시어 다시 시작한 공사는 중지하시고 옛 성인의 지혜를 본받으시어 이 어려운 처지를 부디 슬기롭게 헤쳐 나가 주시옵소서. -

  그 소로 인해 심기가 불편해진 소현세자가 두문불출하고 조선관 출입을 삼가자 당황한 빈객 박노가 그 소현세자를 찾았다.
  "저하, 저하께서 이곳에 머무신지 벌써 육년이 되어갑니다. 그간 겪으신 고초에 
대하여 저희들은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
  "저흰 오로지 늠름하신 저하께서 충실하게 왕도를 닦아 나아가시는 것을 보는 것 만으로 낙을 삼으며 하루속히 본국으로 환궁하실 날 만 기다려 왔나이다."
  빈객 박노가 훌쩍 하며 눈물을 훔치자 소현세자는 그 박노를 짐짓 외면하며 돌아앉
았다.
  "그런데 저하, 이번에 또 재목을 사들이신다 하시니........."
  "또 그말입니까........?"
  소현세자의 목소리에 짜증이 실렸다.
  "저하, 비록 무엇에 쓰시려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하........ 저하께서 본조에 계실때에는 학문연마에 영일이 없으셨사옵고 금상전하이신 주상전하께 효도를 다하는 그지없는 세자저하이셨사옵니다.
  "............"
  "하온데 만리타국에서 이 어인 변모이십니까. 더구나 이때가 어느 때이옵니까. 
  "............"
  "빈궁마마의 처소는 청나라 황실보다 더 화려하다 하오시니 저하........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본국에 계시는 주상전하를 생각 하시오소서, 저하........"
  빈객 박노가 흐느끼며 부복하자 이번엔 선전관 구오가 엎드렸다.
  "저하, 앞으로는 청나라에서 지급하던 봉록도 철폐할 것이라 하옵니다."
  그 말에 소현세자의 눈자위가 치떠지다 사라졌다.
  "지출만 있고 수입이 없는 관소의 실정으로는 한푼의 비용이라도 아껴야 하옵니다. 사세가 이와 같사오니 무리한 확장 공사는 오히려 관소에 무익할 뿐이옵니다. 하오니 목재를 새로이 구입하랍시는 명은 거두어 주시오소서."
  "그러하옵니다, 세자저하. 명을 거두어 주시오소서."
  박노의 주청에 구오가 가세하여 다시 바닥에 엎드리자 소현세자도 지지 않고 맞섰다.
  "내 한가지 묻겠습니다."
  ".............."
  "천리경의 원리를 아십니까?"
  ".........예?"
  두사람이 동시에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저하.... 그, 그건......."
  "왜 말씀들을 못하시는 겁니까."
  소현세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굵어졌다.
  "주자의 가르침에 없는 내용이니 서양의 학문은 이단이요 서양의 문물은 괴물이라 
하시겠지요."
  "저, 저하........."
  "왜, 내말이 틀렸습니까?"
  질타하듯 쏘아보는 소현세자의 눈빛에 그 두사람의 목이 움츠러 들었다.
  "저 조그만 천리경의 원리도 모르는 조선의 학문을 어찌 살아 있는 학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공. 맹의 학문만이 천지의 바른 도라 할 수 있습니까. 조선에 홍이대포같은 큰 대포가 있습니까?"
  "............"
  "내가 여기 와서 비로소 학문에 눈을 떴습니다."
  움츠린 두사람의 놀란 가슴에 소현세자의 마지막 말은 비수가 되어 날아들었다.
  "두분도 나의 스승이요 서양의 선교사들도 나에게는 스승입니다. 그 스승들이 거 할 수 있는 서학당을 짓는 것이 어째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소현세자에게 호되게 질타를 당한 두사람이 쫓겨난 이후 소현세자와 세자빈의 생활
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농사의 규모가 더욱 방대하게 늘어났다는 것 외엔.........





                                  ㅇ


  건물이 완공되고 나자 청나라에서는 그곳을 작은 조선이라 불렀고 세자빈의 거처를 내전이라 불렀다. 소현세자와 세자빈에게는 더없이 화려한 나날들이었고 이국에서 만
끽해 보는 행복한 순간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들을 조선의 귀인조씨가 모를 리 없었다.
  중전을 새로 맞긴 하였으나 어린 중전보다는 농염하여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귀인조씨의 품에 늘상 안기는 인조이고 보니 그 사랑을 독차지한 귀인조씨의 힘 또한 임금못지 않았다. 그 귀인조씨가 음지에서 허덕이고 있던 몇몇 신료들을 길들여 놓으므로서 조선관소는 물론 포로수용소의 일까지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어 보고 있던 귀인조씨였다.
  "어쩌자고 그런 철없는 짓을 저지르시는지........."
  "............"
  귀인조씨의 뭉클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인조의 귀가 쫑긋했다.
  "세자빈의 처소가 청나라 황실보다 더 화려하다 하질 않나........"
  "............"
  "듣고 계시옵니까, 전하?"
  "듣고 있.......소."
  "............?"
  "아유 간지러워라, 이 손좀 놓으세요. 원, 애기처럼......"
  "얘길 마저......하오."
  "어머, 어머 망측해라. 손가락이 어딜 들어 오는 거예요."
  귀인조씨가 몸을 뒤틀며 깔깔대었다.
  "얘길 마저 하라니까........"
  "이 손을 치워야 말을 하든 말든 하지요, 전하."
  총기잃은 게슴츠레한 인조의 눈이 깔깔대는 귀인조씨의 도톰한 입술을 올려 보고 있었다.
  "글쎄, 청나라 관원들이 새로 지은 관소를 보고 작은 조선이라 한다지 뭡니까. 그리고 내관들은 세자빈의 처소를 내전(內殿)이라 부르고......."
  순간 인조의 눈앞이 아찔 하는 것 같았다.
  "방금 뭐라 했소?"
  "서학을 통째 들여오시려는지 방방엔 천주상이 그득하고........."
  "아니, 그 전에 한 말 말이요."
  인조의 말소리가 점차 또렷해지고 있었다.
  "세자빈의 거처를 내전이라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무, 무엇이!"
  갑자기 벌떡 일어선 인조가 고함을 질렀다.
  "이런 괘.........씸...한!"
  노년으로 접어들며 잦은 피해망상증을 보여 오던 인조였다. 세번씩이나 궁궐을 버리고 피난해야 했던 아픈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가 지어내는 병일 것이었다. 그 병으로부터 벗어나려 안간힘을 쏟으며 열심히 파고들던 귀인조씨의 품이었으나 그러나 지금까
지지 단 하룻동안도 귀인조씨의 속살거림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인조였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잠도역위(潛圖易位)가 아니더냐!"
 잠도역위란 다음 대의 보위를 이을 왕자가 살아 있는 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려는 음모를 일컫는 말로 임금인 인조가 차마 입에 담을 말이 아니었다.
  "전하의 사랑이 지극하신 터에 장성한 세자가 어찌 그런 흉칙한 마음을 내었겠습니
까? 고정하소서."
  "삼전도의 치욕을 잊은 것만으로도 그 죄가 분명하거늘........" 
  "..........."
  "과인이 두눈 부릅뜨고 살아 있음에도 감히 내전이란 말을 함부로 참칭했다니, 이는 중전이 저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업신여긴 것이 아니겠느냐."
  귀인조씨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분노하는 인조의 진노가 고마웠다.
  "전하....... 밤이 깊사옵니다. 그만.......고정하소서........"
  떨려고 해서 떠는 것은 아니었으나 귀인조씨의 목소리에는 간살기가 배어 나고 있었다.
  "심양관소에서 청국의 간섭 없이 토목공사를 일으킨다 할 때부터 의심스러웠느니라. 사소한 일에도 일일이 간섭을 일삼는 청나라가 어찌 세자에게는 그토록 관대할 수 있었겠느냐."
  "........."
  "이는 이미 세자가 청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밤마다 속삭이는 귀인조씨의 이야기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 인조는 세자내외의 행위를 역모로 간주했다. 며느리인 세자빈 강씨가 자신의 거처를 내전이라 했다면 이는 명백한 흉계의 증거가 아니랴 여긴 것이었다.
  조선이 바라고 인조가 바라는 세자의 상은 와신상담(臥薪嘗膽), 바로 그것이었다.
 포로수용소의 그 참담함을 굳건히 이겨내고 두눈엔 오로지 복수의 일념만이 이글거리는 투지의 세자상!
  그 외는 없었다.
  조선과 인조의 기대가 한껏 서린 결기에 찬 세자상은 그러나 들려 오는 소문마다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가슴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세자가 뒤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는 것으로 여겨 기다려 주던 그 기대도 유수같이 흐르는 세월 속에 설마로 바뀌어 갔고 그 설마가 이제는 커다란 분노가 되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넘고 있었다.
  "천륜(天倫)의 떳떳함이 부자(父子)의 도리에 있거늘........."
  "..............."
  "인륜(人倫)을 저버리고서야 어찌 태양의 밝음을 다시 기약할 수 있으리.........."
  임금을 배신하는 행위는 그것이 자식이건 대신(大臣)이건 관계없이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인이 되었다. 그 죄인이 걸어야 할 마지막 길...........
  그 길은 비참한 길이었다.
  진노한 인조가 흥분과 고열의 들뜬 눈으로 밤잠을 설칠 때 돌아누운 귀인조씨의 입
가엔 싸늘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제 2 권으로 계속..........







                            제 2 권


                             차   례


                         1. 등        극

                         2. 혁        명

                         3. 우리도 할 수 있다.

                         4. 저        력

                         5. 승        리

                         6. 다 물  강 토





                         - 제 2권 줄거리 -
 
  귀인조씨의 도움으로 귀양지에서풀려난 김자점은 한성판윤(서울시장)으로 복직되고 다시 병조판서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오른다. 더욱이 귀인조씨가 좌의정에 오른 
김자점과 사돈을 맺자 김자점의 세도는 더욱 욱일 승천하고, 최명길과 임경업의 명나
라 부흥 운동으로 놀란 청나라는 그 김자점을 적극적으로 회유, 친청(親淸)세력의 핵
으로 만들어 가자 김자점의 권세는 가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조정의 대소사가 그의 손에서 좌우된다.
 이러한 때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란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명나라 황제 마저 죽음을 당하자 다급해진 산해관의 명장 오삼계는 청나라 섭정왕 다이곤에게 원군을 요청, 북경
의 이자성을 몰아내 줄 것을 간청하고 산해관의 그 활짝 열린 문을 통하여 다이곤의 
강력한 기병(騎兵) 30만 대군이 출격하여 이자성이 함락한 그 북경을 다시 점령한다.
  꿈에도 그리던 중원 정복을 이루어 낸 다이곤은 북경을 청나라의 새 수도로 정하기
에 이르고 소현세자는 새로운 문물의 보고(寶庫) 북경에서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독일
인 신부(神父)아담 샬을 만나 서학에 더욱 심취하게 된다.
  명나라 숭상의 관념이 무너진 그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에서 다이곤의 병법을 
자신도 모르게 터득한 봉림대군은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용병술의 환영(幻影)에 자주 놀라곤 하는데 그것은 다이곤의 용병술에 헛점을 발견하고
부터 일어나는 변화였다.
  중원정복을 이룩한 다이곤은 조선의 두 왕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석방하기에 이
르고 그 석방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소현세자는 명나라 황제가 쓰던 용연(벼루)을 얻어 귀국길에 오르고 봉림대군은 오갈 데 없는 조선의 포로들을 방면 받아 귀국을 준비하는데 조귀인의 꾐에 빠진 인조가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의 귀국 문안 인사를 뿌리친다. 
  낙망한 소현세자가 식음을 전폐한 채 인조의 노기가 풀어지기만을 학수고대하며 눈
물로 날을 보내던 중 학질에 걸리게 되고 학질에 걸린지 나흘만에 소현세자는 의문에 싸인 죽음을 맞는다.
  포로들과 함께 귀국 준비를 서두르던 심양의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 그 귀국을 이번엔 인조가 두손을 들어 반색해 맞는다.
  인조의 대대적인 환영(歡迎)에 영문을 몰라 하던 봉림대군이 이어 새 세자에 책봉되고 때를 기다리던 조귀인과 영의정에 오른 김자점이 조정의 대소사를 전횡하기에 이른다. 이때 명나라 부흥을 주도하던 임경업이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돌아오자 김자점은 그 임경업을 장살(때려죽임)하여 버리는데........  조선의 명장 임경업을 살릴길이
 없어 발을 구르던 봉림대군은 그 임경업의 죽음이 애달파 피눈물을 흘린다.
  마침내 인조가 붕어하고 봉림대군이 새 임금(효종)자리에 오르자 마침 청나라에서는섭정왕 다이곤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어 조선과 조선조정을 감찰하던 청나라의 감시가 뜸해졌고 그 틈을 이용, 효종은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에 임명하여 다물강토의 
의지를 밝힌다.
  효종의 마음속에 군사력의 증강과 조선의 주권회복(강토수복)이 있음을 안 이완이 
조선의 회천(回天)을 위해 불철주야로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재야에 묻혀 있던 새로운 인재들이 속속 등용되어(송시열, 송준길등) 김자점의 전횡을 탄핵, 김자점을 삭탈관
직시킨다.
  이에 김자점과 조귀인이 합심하여 청나라 세력을 등에 업고 다시 한번 군사를
 일으켜 무력 정변을 일으키려 준비를 한다.
 조귀인의 아들 숭선군을 보위에 앉히고 자신은 영원무궁토록 권력을 독점하여 영화를 누리리라는 김자점이 조정의 군사력보다도 월등한 군세로 무력 정변을 준비했으나 조귀인 처소의 무수리들의 발설로 인하여 그 역모의 가닥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고 발칵 뒤집힌 조정의 놀람 속에 드디어 역모 가담자들이 의금부 관원들에 의해 일망타진되기에 이른다.
  이에 구시대의 간신들을 과감히 몰아내고 신진기예들을 대거 등용한 효종은 보다 잘사는 나라, 보다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몸으로 익힌 병법을 손수 구사하며 이완을 독려했고 임금의 그 안목에 놀란 이완은 사력을 다해 군사력을 증강시킨다.
  강토수복(북벌:北伐)준비를 차질 없이 진행시켜 나아갈 때 흑룡강 일대에 러시아 군사들이 부동항 건설을 위해 자주 출몰하여 청나라와 마찰을 빚고 있었는데 그 러시아
의 발달된 총포의 위력에 청나라가 거듭 패전을 겪게 되자 드디어 조선에 원군 파병을 요청하기에 이르고 이에 조선은 150여 명 의 조총수들을 파병하여 보낸다. 
  파병된 조선군사의 수가 적음에 분개하는 청나라였으나 패전만 거듭하던 그 전쟁에 조선군 150여명이 러시아의 대군을 흑룡강에 깊숙이 격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자 청나라는 그 150여 명 조선군사들을 신병(神兵)이라 우러르며 공경하기에 이른다.
  다물의 정신으로 단련된 조선군사의 용명과 저력이 드디어 서서히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 한 것이었다.
  30만에 달하는 대군을 증강시킨 효종과 이완, 송시열 등이 북진의 날을 정하고 송시열을 군사(軍師)로, 이완을 도원수로 삼아 최종 점고를 끝낸 그 날밤 30만 대군을 진
두 지휘하는 효종이 그 심양을 점령하고 북만주를 수복 한 후 다시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과 중원을 접수하는 생생한 꿈을 꾼다.
  길몽으로 여긴 효종이 드디어 말안장에 올라 어검(御劍)을 높이 치켜들자 햇빛에 번쩍이는 검광이 눈부시고 출진의 북소리가 힘차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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