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모음
목차
01 달빛
02 심야에 찾아온 손님
03 조용한 여행자
04 최선책
05 피고측의 증언
06 속이거나 대접하기
07 벌레와의 대화
08 샤프 펜슬
09 한 단어에 천달러
10 프로
11 현실의 경계선
12 금연주식회사
13 당신의 마음을 갖고 싶어요
14 신의 은총
15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6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17 아주 특별한 재주
18 청소부 이그나티우스
19 살아있는 팔찌
20 피장파장
21 끔찍한 외침
22 대실패 (Fatal Error)
23 백만의 하나의 우연
24 소설을 읽은 사나이
25 피를 나눈 형제
달빛
( Moonshine )
W. Heidenfeld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휴가중인 병사들이 하는 짓이란 마시며 지껄여
대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 중 하나가 하모니카를 갖고 있어서 이따금 떠들
썩하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한껏 소리 높여 <프레토리아 행진>
을 부르면, 식당 열차의 급사들도 그 <행진>에 잠시 끼여들었다. 그들은
병사들의 파티를 여러 차례 겪었기에 그 진행 과정을 잘 알고 있었고, 감
독하는 사람이 없을 때는 그들과 한패가 되어 어울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하나씩 자기 객실로 돌아갔고, 텅 빈 식당차에는 아가씨와 나만
남게 되었다. 그날 밤 그녀는 근심스러운 듯 이따금 거울을 들여다볼 뿐 별
로 말이 없이 앉아 있었는데, 우리들의 거친 합창에 끼어들었을 때는 부드
러운 목소리가 좀 무리를 하는 것 같았다.
급사들이 불빛을 줄여 버리자 바깥보다 식당차 안이 더 어두워졌다. 창밖
에서는 영국 중부 지방 특유의, 기복이 심하고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전원
지대를 달빛이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달빛 어린 평지 저 너
머로 시꺼멓게 부풀어 오른 언덕은 친근감에 넘쳐 매혹적이었다. 눈앞에 가
로놓인 길은 달빛으로 인해 한결 더 새하애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길
양쪽 밭에는 희미한 안개가 달빛을 받아 은빛 베일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대위 제복의 내 모습도 돋보인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녀 또한 얌전한
고양이처럼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아가씨였다. 혹시 이 여자와 길거리에서
마주친다 해도 쳐다본다거나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다시 보려 하지는 않았
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 건
아니었고, 다만 알고 싶었을 뿐이다. 넓고 성실해 보이는 이마, 똑바로 상대
에게 향해 있음에도 상대를 바라보지 않는 멍한 회색눈, 그 속에 어떤 생각
이 스며 있는지 그게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라는 인간은 소년 시절부터 남들을 살피며, 그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든가
그들로 하여금 내게 말을 걸게 하겠다는 욕구가 있었다. 대학 시절에는 어떤
사전을 뒤진다 해도 답을 찾지 못할 질문을 꾸며 내어 교수한테 간 적도 있
었는데, 그 또한 교수의 심리 반응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나와 친하게 어
울렸던 여자애들 -- 그들은 키스 대신 계속 지껄여 대야만 했던 것이다. 지
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여자 -- 뭔가 복잡하고 성가신 사정으로 돌파구를 찾
고 있는 듯도 하고, 불확실한 문제와 맞붙어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 같
기도 한 여자... 그녀는 그런 나의 호기심의 대상인 셈이었다.
별안간 질실한 것 같은 연기가 열차내에 가득해지며 달빛을 지워 버렸다.
가까운 객실에서 흘러나오는 하모니카의 맬로디가 터널 벽에 부딪쳐 기묘한
음향으로 메아리쳤다. 우리는 심한 기침을 해댔고 그녀는 내가 내민 손수건
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그러나 어느 터널에도 반드시 끝은 있게 마련 -- 우
리는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달은 한결 높이 떠올라 한층 더 밝아진
듯이 보였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나는 그녀가 돌려 준 손수건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을 건넸다. 말붙일 계
기를 만드는 대사치곤 멋적기는 했지만, 터널을 통과하면서 혼이 났던 뒤인
지라 달이 몹시 아름답게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눈썹을 찌푸
렸다. 이어 그 떠름한 표정이 눈까지 옮겨 갔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거리감
을 두려는가 싶었으나, 그녀가 지껄이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꼭 오늘 같은 밤이었어요. 제가 애인을 조국에 바친 것은."
묘하도록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음향을 띤 말이었다. '조국에 바친다'라는 표
현은 어머니가 자식에 대해, 혹은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사용한다 해도 어마
어마한 느낌이 든다. 누군가를 조국에 바치다니, 마치 그 누군가가 자기 것
이므로 얼마든지 바칠 수도 있다는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그 거창한 언사는 조금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 이면에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듯이 여겨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눈은 어서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재
촉하기보다는, 오해 없기를 바란다고 그녀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꼭 누군가에게 얘기하지 않으면 마음에 걸려서요..."
그녀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저 얘기를 들어 주기만 하는 누군가에게 말이예요. 친구라면 당장 동정
을 하겠지요. 당신은 친구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오히려 말할 수 있는 거
예요....
저는 전쟁이 시작됐을 때 육군에 입대하여 어느 비밀 부대의 상사로 임명되
었지요. 거기서 어떤 일을 했는가는 아무래도 좋아요. 아무튼 일은 마음에
들었고, 막연하나마 그럭저럭 행복했어요. 그런데 사건이 생긴 겁니다. 난생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된 거예요. 남자의 이름은 제럴드, 그 사람은 참으로
동지다웠고 무척 다정했어요.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상대를 찾는 거야 쉬울
지 모르지만, 머리칼을 쓰다듬거나 손목을 어루만지는 정도로 몇 시간이나
잠자코 같이 있어 주는 남자란 드물거든요. 그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저는
제럴드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고요.
저는 그의 과거를 조금밖에 몰랐어요. 그는 잉글랜드 북부에 있는 어느 마
을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남아프리카에 올 ㄳ까지 그 고장을 떠난 적이 없다
고 했어요. 남아프리카에 온 건 전쟁 직전으로, 전쟁이 터지자 곧바로 입대
했다는 정도였지요. 그런데 그이가 고향에 편지 보내는 걸 한번도 못 봤어요.
그래서 왜 편지를 쓰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이는 약간 당황하면서, 편지를
쓰고 싶어도 상대가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사람이 어째서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는지 그 이유를 꼭 집어 말하기는 어
렵지만, 저는 제럴드의 여러 면을 사랑했어요. 그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
란 사람 치고는 놀랄 정도로 시야가 넓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 마음에
들었던 점은, 남의 일에 대해 거북해 하지 않는, 흥미라기보다는 열정을 품
고 있다는 것과, 남의 장점을 간파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상관인 소령에 관한 건데, 이름은 생략하겠어요. 제럴드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미덕의 표본이요, 지혜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란 거예요.
'어쩌면 그토록 훌륭한가.'하며, 그는 묘하게 귀에 거슬리는 타고난 사투리
로 소령의 공적을 극구 칭찬하는 겁니다. 제게는 그따위 공적이 뭐가 그리
훌륭한지 도무지 알 수 없는데도 말이에요. 그렇지만 제럴드가 저에게 자기
근무 상황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는 자체가 저를 높이 평가한다는 증거이기도
했지요. 물론 그는 제가 비밀 부대 소속이라는 걸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
다고 해서 군대 업무에 관한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이는 또한 이런
말도 했어요 -- '무심코 내뱉는 말이 해로울 때가 있는데, 대부분 병사들이
그걸 깨닫지 못한다. 스파이들은 엉겁결에 튀어나온 한마디나 눈짓등에서 조
금씩 정보를 모으는 것이다.'라고요. 그리고 제 상관 조차도 극비 사항이라
고 생각하는 상황에 대해 넌지시 말하여 저를 놀라게 한 적도 있었어요. 그
런 정보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가는 별로 문제될 게 없지만요. 머릿속으로
'둘 더하기 둘은 얼마'하는 식으로 산출해 냈을 테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우리는 <샘>이라는 클럽에 가서 춤을 추었어요. 그런데
다른 손님들이 너무나 떠들어대고 난폭해서, 그곳을 나와 조용한 벤치를 찾
아 다정히 앉아 달 구경을 하기로 했지요. 그는 오른팔로 제 어깨를 감싸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그가 즐겨 입에 올리는 그 소령 얘기를 하면서, 소령의
두뇌가 명석하다는 것을 제 눈앞에 펼쳐 보여 주었지요. 그러나 제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소령 얘기를 중단했습니다. 우리는 말없이 귀뚜라
미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주위의 고요함에 흠뻑 잠긴 채, 서로의 존재
와 삶의 기쁨에 취해서 자신의 실체를 잊고 있었습니다. 저는 달이 잔디 위
에 그려 낸 이상한 무늬가 갖가지 모습으로 변하는 걸 보고 있었어요. 아주
서서히 변하고 있었지요."
하모니카가 <샐리 마리>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날도 같은 보름달, 노래도 같은 <샐리 마리>였어요."
신음하듯 가냘픈 소리였다.
"하지만 그 밖의 것은 전부 달라요."
그녀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우리는 오랫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어요. 한참 있다가 제럴드가 하늘을
올라다보며 '그는 정말 근사하지 않습니까?'하고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누구 말인데요?' 나는 약간 졸린 듯한 상태에서 되물었지요.
'그야 물론 소령이지요.'라고 그는 대답했는데, 그때 그의 당황감이 제게,
보였다기보다는 느껴졌던 겁니다.
'소령 외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가 약간 반발하는 투로 덧붙이더군요. 그런데 그 말투가 전혀 그이답지
않았어요. 그는 자기가 열렬한 영웅 숭배론으로 저를 항복시키고 나면 언제
나 쇠약한 태도를 보였고, 혹시라도 제가 소령을 질투할까 봐 걱정되는지
변명 비슷한 말을 하곤 했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그렇지가 않았어요. 어렴풋
이나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일이 일어났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뭔가 형세
가 이상하고 개운치가 않았어요.
별일 아니다. 그런 건 사소한 일이며, 다만 달빛의 조화였을 뿐이다. 라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그 일은 며칠 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저는 그때의
정경을 머릿속에 그리며 장면 하나하나를 재현해 보았지요. 그가 어떻게 말
하고 어떤 표정을 지었으며, 어떤 몸짓을 했는지... 살아 있는 한 아마 그
일을 잊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잠시 이야기를 중단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하모니카는 아직도
연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 "우리는 공군, 무적의 공군 용사..."
그녀는 그 멜로디를 허밍으로 따라 부르다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결국은, 한시도 그 상태로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 부태 소속 정보 담당
관에게 면회 신청해서 그날 있었던 일을 그대로 얘기하고 제가 느꼈던 점도
말했지요. 그 부서 사람들은 정말 괜찮은 분들이었어요."
그녀는 엷은 웃음을 지었다.
"일은 바로 처리되었지요. 그리고 그들은 모든 진상을 파악 했어요. 게다가
제럴드의 경우는 간단 명료했으니까요. 그 사람은 독일 스파이였습니다. 정
보 담당관들은 제럴드가 받은 훈련, 맡고 있던 비밀 임무 등 모든 것을 알아
냈고, 그는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내가 자기를 당국의 손에 넘겼다는 사실
을 그 사람은 마지막까지 몰랐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먼곳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있
다가 잠시 후 이야기를 계속했지만, 그 어조에는 쓸쓸함이 깃들여 있었다.
"그 일로 저는 보상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얻은 것이 이것이지요."
그녀는 제복에 붙어 있는 별 셋을 가리켰다.
"유다가 얻은 돈이지요. 전쟁은 이제 지긋지긋해요!"
나는 묵묵히 앉은 채, 그녀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기를 기다렸다. 한번
더 그녀는 어떤 멜로디를 허밍으로 흥얼거렸다. 이번에는 그 계기가 되는 하
모니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는데... 그 노래는 한번 들으면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멜로디로, 슬픈 듯하나 아름답고, 채울 수 없는 동경이 서린 가락이었다.
"독일의 민요랍니다."
그녀는 내쪽으로 돌아앉으며 말했다.
"Guter Monde, de gehet so stille(아름다운 달이여, 그대는 너무나도 고요
해)...."
"하지만 도무지."
"모르시겠다는 말씀인가요? 실은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제가 비밀 부대에
소속된 건 독일어를 아주 잘했기 때문이었지요. 저는 독일어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다음 같은 사실도 알고 있었던 겁니다. ---
백인들이 사용하는 언어 중에서 독일 사람만이 달을 가리킬 때 '그녀'가 아
니라 '그'라는 대명사를 사용한다는 것을."
- ETERNITY -
.러브크래프트.
##### 심야에 찾아온 손님 #####
러브크래프트 : 1890-1937 그는 젊은 시절 주로 다른 사람의 작품을 고치거나
다듬는 일로생계를 유지했다. 서른살이 지나서야 자신의 작품이 팔리기 시작했는
데,살아있는 동안에 출판된 그의 책은 단행본 단 한권 뿐이었다. 죽은 후에 그의
친구들이 그의 작품을 모아 10권의 책으로 엮어내면서 그의 작품은 대단한 인기
와진가를 보상받게 되었다.
그는 초자연적인 우주관으로 과학 괴담소설의 문을 열었는데,'심야에 찾아온 손
님'은 영혼의 교환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마치 작가 자신이 주인공 인듯한 느낌
을 받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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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내정신으로 까닭없이 어릴때 부터 같이 자란 소중한 친구의 머리에 권총
을 쏘아 넣었겠는가.
권총을 쏜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은 내 소중한 에드워드의 원수를 죽이기 위해서
였다.
에드워드의 적을 무찔러 인간의 몸에서 몸으로 옮겨다니는 무서운 괴물을 이 지
상에서 쫓아내고, 우리들 인간에게 큰 해를 입히려는 악마를 없애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주위에 괴상한 악령이 붙어다니고, 기회만 있으면 사람의 몸속을
파고 들어가 무언가 무서운 짓을 하려고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무엇을 생
각할 것도 없이 먼저 그놈을 해치워 버릴 것이다.
에드워드 빅먼 더비는 나보다 여덟살이나 아래지만 무척 숙성해서 열 여섯살 먹
은 나의 말벗이 되고도 남았다. 정말이지, 에드워드처럼 머리가 좋고 성장이 빠
른 소년도 드물었다.
불과 일곱살때 지은 시가 어두운 마음의 고민을 읊어서 마치, 어른이 쓴 것 같았
으므로, 가정교사들은 모두 깜짝놀라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에드워드는 몸이 약해서 양친은 혹시 무슨일이 일어날까봐 학교에 보내지 않았
고, 여러학과의 가정교사를 집에 불러다가 공부를 시켰으며 밖에 나갈때는 언제
나 나이 많은 하녀가 따라다녔다.
자유로이 마음내키는 대로 다른 아이들과 놀 수 없었으므로 에드워드는 늘 혼자
서, 마음속으로 온갖 것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한 모양이다.
그리하여 보통 아이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어른 같은 일을 생각하고 아주 근사한
시를 지었으므로 나이 많은 나같은 사람은 너무나 감탄하여 할 말을 잊곤 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컴이라는 도시는 역사가 오랜 고장으로 다 허물어져가는 컴
컴한 건물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도시는 예부터 전해내려 오는 마녀와
요괴의 저주를 받은 전설 같은 것이 공연히 생각나곤 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열 여덟살때 훌륭한 시집을 내어 세상의 인정을 받아 버젓한 시인이
되었지만 양친의 응석받이로자라서 어린아이처럼 남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이 여전
하여 혼자서는 여행도 못했고, 자기일을 책임지고 행동하지도 못했다.
나같은 사람과는 달리 부잣집 도련님이라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금발에 파란 눈,
언제나 소년처럼 귀여운데다가 목소리마저 고와서, 정말로 보기드물게 아름다
운 청년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 곧 보스톤에 있는 건축사무소에 들어갔으며 결혼하여 조상
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에서 살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밤마다 이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어느새 나는 저녁을 먹고나면 에드
뭐드가 문을 두드리는 것을 기다리게 되었다.
" 안녕하세요."
에드워드는 언제나 현관문을 먼저 세번, 통통통 빨리 때리고 이어
천천히 탕탕 두 번 두드리는 것이 버릇이었다.
내겐 곧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므로 이 친구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였다.
" 형의 귀여운 아이에게 내 이름을 붙여줘서 기뻐요, 고마워 형."
에드워드는 파란 눈을 빛내며 기쁜 듯이 내 손을 잡았다.
그 때는 벌써 에드워드는 대학을 졸업하여 꽤 알려진 시인이 되어 있었지만, 타
고난 성품이 남과 사귀기에 서툰 데다가 게으른 편이어서 친구도 적고 아직 결혼
도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에드워드는 그만 맥이 쑥 빠지고 힘을
잃었으며, 마침내 까닭 모를 병이 생기고 말았다.
날마다 울적한 표정으로 아무일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앉아있는 아들을 보다못한
아버지는
" 어떠냐 에드워드, 나와 함께 여행이나 하고 오자꾸나."
하고 권했다.아들을 유럽에라도 데리고 가서 기분을 전환시켜
어떻게든 힘을 찾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에드워드 자신도 그전 같은 자신으로 되돌아 가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묵직하게 마음을 내리 누르는 우울증은 유럽여행을 하고 돌아와서도 가시지 않
았다.
그러다가 에드워드는 우연히 대학에서 마술이며 주술 같은 것을 연구하는 학생
그룹과 사귀게 되었다. 그들은 괴이한 일에 열중하고 있어서, 보통 학생들과는
달랐다.
이 그룹 속에 머리털이 검고, 눈이 조금 튀어나온 애시너스 웨이트라는 몸집이
작은 처녀가 있었다.
이따금 눈이 이상하게 번쩍이면서 사람을 멀리하는 듯한 이 처녀와 에드워드는
서로 친해졌다.
" 에시너스? 아, 알아요. 인스머스의 웨이트네 집안이래요."
대학에서 애시너스와 한 클래스에서 공부한적이 있는 내 아는 사람의 딸은 애시
너스의 이름을 듣더니 왠지 기분이 나쁜 듯이 목소리를 죽여서 말했다.
인스머스는 괴상한 전설이 가득 전해지고 있는 옛 도시로, 전에는 번창했던 모양
이나 지금은 완전히 황폐해져서 고기잡이 포구만 남아있는 쓸쓸한 곳이었다. 그
곳 주민들의 조상은 반드시 반드시 사람이었다고만 할 수 없는 소문이었다.
애시너스는 에플레임 웨이트라는 늙은 마술사의 딸인데, 그 어머니는 외출할때
반드시 베일을 푹 내려쓰고 다니는 기분나쁜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에플레임은 인스머스의 뒷거리에 있는 다 허물어져가고있는 낡은 집에서 살고 있
었는데 그 집을 본 사람은,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널빤지로 쳐서 막았고 저녁
때가 되면 집안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한 소리가 흘러나오더라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에플레임은 제법 힘이 센 마밥사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자유자재로 바다
위에 폭풍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고 가라 앉이기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릴때 나도 우리도시에 찾아온 에플레임을 본적이 있었다.
잿빛 턱수염을 기르고 이리같이 날카로운 괴팍스런 얼굴을 한 노인은 보기에도
웬지 으시시 한기가 들었다.
에플레임은 딸 애시너스가 대학에 들어가기 조금 전에 미쳐 죽었으며,
애시너스는 아버지의 충실한 제자로 아버지 못지않게 악마같은 거동을 할 때가
있었다.
" 자네 친구 에드워드는 요즘 어쩐지 기분나쁜 여대생과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더
군, 애시너스라는 그 여대생은 아버지를 잇는 마술사라는 소문이야."
자기딸이 마침 애시너스와 같은 반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사람은, 나를 보더니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실제로 애시너스가 친구들의 점을 쳐주면 모두 어김없
이 맞았고, 번개구름 같은 것 도 쉽게 불러올 수 있었다.개와 고양이는 애사너스
를 몹시 싫어하여 보기만 해도 큰 개는 겁을 먹고 마구 짖어댔다.
.러브크래프트.
##### 심야에 찾아온 손님 #####
러브크래프트 : 1890-1937 그는 젊은 시절 주로 다른 사람의 작품을 고치거나 다듬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서른살이 지나서야 자신의 작품이 팔리기 시작했는데,
살아있는 동안에 출판된 그의 책은 단행본 단 한권 뿐이었다. 죽은 후에 그의
친구들이 그의 작품을 모아 10권의 책으로 엮어내면서 그의 작품은 대단한 인기와
진가를 보상받게 되었다.
그는 초자연적인 우주관으로 과학 괴담소설의 문을 열었는데,'심야에 찾아온 손님'은
영혼의 교환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마치 작가 자신이 주인공 인듯한 느낌을 받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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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친구들은 애시너스가 이따금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요사스러운 눈짓으로 윙크하는 것을
보고 소름이 쫙 끼친 적이 있었지만 사람들이 무엇보다 무서워한것은, 애시너스가 남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마음대로 최면을 걸어버리는 일이었다.
애시너스가 가만이 응시하면, 마치 자기의 영혼이 애시너스의 몸속으로 빨려들어가버린 것처럼
방 저편에 있는 진짜 자가를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 마음과 몸은 아주 다른거야, 그래서 마음은 몸에서 떠날수 가 있는거야."하고 애시너스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자기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것을 몹시 원통해 하면서,
" 남자의 뇌는 큰힘을 가지고 있어, 내가 남자라면, 훨씬 더 크게 신비로운 힘을 가질 수 있고
아버지보다 훨씬 근사한 마법사가 될 수 있을텐데 원통해."
그런 때의 애시너스의 얼굴에는 언젠가 반드시 어떤 남자에게 옮겨가겠다는 확의가 여실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에드워드가 애시너스를 처음 만난것은 마침 그무렵이었다.
에드워드는 애시너스의 좀 색다른 아름다움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린 듯 우리집에
찾아와서는 설레는 가슴으로 열심히 애시너스의 이야기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매우 불안해지며 유감스럽게 생각했으나 공연한 소리를 해서 그를 더욱
흥분시켜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잠자코있었다.
그리고 한 참동안 에드워드는 시에관한 이야기따위는 한 쪽으로 밀쳐놓고 언제나
애시너스 이야기만 했다. 에드워드는 실제의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는 반면 애시너스는
그동안 점이니 마술이니 하는 데에 정신을 쏟아온 탓인지 얼굴에 나이보다 잔주름이 많았으므로
두사람은 꼭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어느날 에드워드의 아버지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 암만해도 그녀석이 요즈음 어떤 묘한 여대생과 사귀고있는 모양인데 자네가 좀 주의를
시켜주게나. 그런여자와 사귀지 말라고 일깨워 주게. 제발 부탁하네."
에드워드의 아버지가 마음속에 품고있던 걱정도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애시너스가 억센 힘으로 에드워드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후 한 달쯤 지났을때, 마침내 두사람은 우리들의 불안은 아랑곳없이 결혼해 버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나를 찾아온 에드워드를 보고 나는 그만 '아니!'하고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외쳐버렸다.
애시너스가 권한다고 콧수염을 싹 밀어버렸을 뿐 아니라 얼굴 모양까지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지금까지의 앳된데가 없는 대신 어딘지 어둡고 슬픈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 그래, 결혼을 했으니 어른이 되었나보지, 지금까지의 어린애가 버젓한 어른이 된거야.'
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일렀다. 그리고
" 신부는 어떻게 됐나?" 하고 혼자서 인사하러온 그에게 애시너스에 관해서 물었다.
" 애시너스는 아직도 인스머스의 친정에 있어."
에드워드는 이렇게 대답했는데, 인스머스라는 말을 할때 그의 얼굴이 왠지 겁에 질리면서
몸을 으시시 떠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 인스머스의 집에서 오랬동안 애시너스의 아버지를 섬긴 몹시 나이많은 늙은 부부와
어딘지 섬뜩한 느낌이 드는 살결이 검은 시골처녀 이 세사람이 새 가정의 하인으로 와있었다.
두사람이 결혼한 지 일년 쯤 지났을 때 지금까지 얌전하고 신중해서 자동차운전 같은 것은
하지도 못했던 에드워드가 애시너스의 고급차를 마구 몰고다닐 뿐만 아니라 혼잡한 거리의
사람들 사이를 무시무시한 소도로 예사롭게 누비고 나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게 어디로 여행을 갈 때라든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였는데 에드워드가
어디에 가는지 또 어디에 갔다 오는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다만 그럴때의 에드워드는
애시너스와, 아니 에플레임 노인과 꼭 닮았더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날 나는 에드워드 내외를 찾아갔던 어떤 여자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여자가 에드워드네 집을 찾아갔을때. 마침 자동차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차고에서
뛰어나왔는데. 핸들을 잡은 에드워드가 묘하게 자신만만했으며, 엷은 웃음마저 띄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그렇다면 애시너스나 만날까 하고 현관벨을 울렸다.
그러자 살결이 검은 하녀가 나와서
" 부인은 안계십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돌아서 나오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
" ....... 아, 글쎄, 에드워드씨의 서재창문에서 얼른 물러서는 얼굴이 있잖겠어요.
누군 줄 아세요? 애시너스 부인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얼굴이 어찌나 침울하고
절망에 싸여 있었던지 ! 평소에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사람인데...
그런데 말이에요, 놀라지마세요.. 그 슬픈 얼굴에서 눈동자만은 어김없는
내가 잘 아는 그 에드워드씨의 눈이었단 말이에요..."
" 그..그런 ..어이없는 일이 어딨습니까!!"
하고 나는 소리쳤다.
" 예, 하긴 그래요, 나도 뭐가뭔지 영문을 알 수가 없고 머리가 아찔해져서 집으로
부랴부랴 돌아왔죠.하지만 그 눈동자는 틀림없는 에드워드씨의 것이었어요."
조용한 여행자
( The very silent Traveler )
Paul Tabori
기관차는 땅딸막한 연통이 세찬 흐느낌을 질러대며 시커먼 밤하늘에 무수한
불꽃을 내뿜었다. 불똥들은 마치 혜성의 꼬리 처럼 타닥타닥 소리를 남기며
여자의 긴 머리채처럼 달리는 열차의 후미(後尾)까지 이어졌다. 기관차는
커브에서는 좁아지고 직선 구간에서는 넓어지며, 객차의 주행이 불규칙적인
간격을 만들 때마다 끊겼다가는 다시 나타나는 모습이 흡사 마법의 융단 같
았다. 열차가 떠난 자리에는 불똥들이 차가운 대지 위에 닿지마자 꺼져 버려
마침내는 하나씩 죽어 갔다.
어두운 밤하늘에 일렬로 나란히 불빛이 나타나자, 열차는 속도를 떨구었고
브레이크는 차륜을 물었다. 포효와 덜컹거림도 사그라들었고, 두번째 신호등
의 희미한 불빛을 뒷전으로 흘려 버리며 기적이 길게 울었다.
기관차는 아르헨티나의 광활한 초원 외곽 지대의 작은 역에서 부르르 떨더
니 증기를 내뿜고는 멈추었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몇 그루의 사과나무뿐,
플랫폼도 역사(驛舍)도 전신국도 없었다. 빛 바랜 흠집투성이의 철판이 겨울
강풍에 견뎌 내도록 두 그루의 사과나무에 철사로 매어져 있었으나, 기록된
역 이름은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팻말과 외로운 느낌을 주는 몇
개의 석유 램프를 제외하고는 역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시체를 반송하는 일은 상당히 비용이 드는데다 몹시 까다로
웠다. 관공서의 형식주의가 각기 다른 여섯 통의 허가서와 수십 통의 신고서
등 산더미 같은 서류를 요구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 해도 50마일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이곳 목장 지역에서는 그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가장
빠른 말을 이용한다 해도 시체의 보존이 가능한 2,3일 안에 필요한 서류를
모두 준비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설령 운이 좋아 허가서 모두를 손에 넣을
수 있다 하더라도, 철도 회사측은 죽은 자에게 살아 있는 승객의 열 배나 되
는 운송비를 청구했다. 회사 규정상 반드시 동행해야 하는 승객의 차비는 별
도로 내야 했다. 이 지방 목장주의 대부분은 약간의 현금, 그처럼 억울한 지
출을 했다가는 파산해 버릴 정도의 액수밖에는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
들은 가족을 목장에 매장하는 것을 싫어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족 묘지
가 있는 경우는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지방에는 어느 정도의 기지와 모험심이 남아 있어
서, 한적한 역에서 열차에 태워진 승객도 그런 기지 덕에 여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비탄에 젖어 있는 가족들이 죽은 이를 둘러싸듯 안아서 솜브레로를
깊숙히 내려씌운 후 꽉붙들어서 쓰러지지 않도록 하여, 누군가가 보더라도
취객쯤으로 여기게끔 살짝 열차에 태워 놓은 것이다. 가족 중 하나가 차장한
테 차표값을 지불하며 팁을 집어 주어, 가엾은 병자가 조용한 객실에서 여행
을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배려도 해 놓았다.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세 사람
중 하나가 말에 뛰어올라 2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제일 가까운 전신국을 향
해 달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삼촌에게 전보를 쳐서 고인(故人)이 타
고 있는 객차와 객실 번호를 알려 주면, 휄리페 삼촌은 종착역에 대기하고
있다가 그 뒤처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철로가에 서서 급속히 멀어져 가는
붉은 후미등을 바라보며 있는 남은 두 사람은,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둘다
내심 한시름 놓고 있었다.
다음 정거장 -- 앞의 역에 비해 훨씬 큰 역에서, 그로데크 대위가 열차에
올랐다. 그는 독일에서 육군으로 사회 첫발을 내디뎠는데, 동료들과 카드
게임을 하던 중 사소한 오해가 발단이 되어 부득이 퇴역해야만 했다. 그
후 몇 차례 시련을 겪는 동안 혁명이 일어난 상황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현재는 남아메리카와 중앙 아메리카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가 흡족한 성과를 올리고 파라과이에서 돌아오
는 길이었다.
짐은 많은데 짐꾼이 없는 고로 열차 안까지 직접 날라야만 했던 대위가
하찮은 잡일을 끝냈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고 상처 자국이 난 얼굴은
번질거렸다. 어지간히 화가 난 그는 아르헨티나 철도 회사. 특히 짐꾼이
부족한 상황과 객차의 높은 승강대, 야간 여행이 불가피한 남쪽행 급행이
한 대밖에 없는 것에 대해 한껏 소리 높여 욕설을 퍼부었다. 좌우로 흔들
리는 좁은 통로를 슈트케이스, 상자들, 그리고 무릎 덮개까지 끌고 가야
했는데도 빈 좌석을 찾을 수 없자, 만원 객실을 지날 때마다 또 한차례
욕설을 퍼부었다.
마침내 대위는 말없이 여행자가 혼자 있는 객실에 이르렀다. 챙이 넓은
검은 솜브레로를 코끝까지 내려쓴 이 승객은 연약한 몸을 웅크리고 어두운
구석에 앉아 있었고, 푸른 깃이 씌워진 독서용 램프가 그 머리 위로 희미
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행복한 꿈의 세계에 젖어 곤히 잠들어 있는
듯했다.
"실례 좀 하겠소. 세뇨르."
그로데크 대위가 인사를 건네도 응답은 없었다. 대위는 짐들을 객실 안
에 쿵쾅거리며 내던진 후, 중앙등을 켜고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승객을 쳐
다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머리를 깎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양손은 꿰매 붙인 커다란 호주머니에 찔러넣을 채 웅크리고
있는 몸이 열차의 리드미컬한 진동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로데크 대위는 맞은편 좌석에 자리 잡았다. 좀전에 격한 규탄으로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터여서 쉽게 잠들 수가 없자, 그는 잡담이나 즐기자고
마음먹었다. 서투른 스페인어로 정중하게 첫마디를 꺼냈지만 대답이 없자,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영어를 차례로 사용해 시도해 보다가, 마지막으로
모국어인 독일어로 말을 건넸으나 상대는 변함없이 잠자코 앉아 있었다.
대위는 담배 케이스에서 최상품인 하바나 시가를 뽑아 유혹하듯 내밀었
다. 그는 품질과 향기를 자랑하면서, 세뇨르가 우정의 표시로 받아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무언의 승객을 향한 대위의 노력은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했다.
대위는 긴 여행에 대비해 여러 가지 소지품을 준비했음에도, 가장 단순한
필수품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성냥이 없었던 것이다. 라이터는
기름이 떨어진 지 오래였다. 하는 수 없이 맞은편 승객을 향해 부탁했다.
"불 좀 빌려 주시겠습니까?"
역시 묵묵 무답이었다. 이 결정적인 무례는 그로데크 대위의 얼굴을 붉어
지게 했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말없이 사나이에게 달려들어 욕을 퍼부으며
힘껏 흔들어댔다. 이미 생명이 없는 머리가 수차례 의자 등에 부딪쳤다. 솜
브레로가 벗겨져 뒷통수에 걸쳐졌고 양손은 깊숙한 호주머니에서 비어져 나
왔다. 독일인의 손에 붙잡혔다. 풀려난 말없는 승객의 몸은 앞으로 기울어
지는가 싶더니, 모래 가마니처럼 쿵 하고 객실 바닥에 고꾸라졌다. 모자는
이미 벗겨져서 죽은 것을 확인하려고 얼굴을 들춰볼 필요가 없었다.
격하기 쉬운 성격 때문에 난처한 입장에 빠질 때마다 자신의 성격을 질책
했던 대위였지만, 이것은 너무나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홧김에 좀 세게 흔
들었다지만 의자 등에 머리를 좀 찧었을 뿐인데... 대위는 경악과 공포에
질려 시체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뿐 서둘러 바닥에서 시체를 들어올
려 창문까지 끌고 갔다. 창문을 열자 시체를 힘껏 어둠 속으로 밀어냈다.
열차는 굉음을 지르며 계속 달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 열차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휄리페 삼촌은 불안한
마음으로 한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있다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 전
보로 알려 온 객차를 찾았다.
모든 것은 계획되어 있었다. 열차에 올라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큰일났어
요, 도와 주세요." 하고 외치면 사람들이 몰려올테고, 이미 때가 늦었다고
판단될 터였다. 요컨대 사랑하는 조카는 가엾게도 여행 도중에 죽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휄리페는 조카를 찾지 못했다. 알려 온 객실뿐 아니라 다른 객실
어느 곳에도 조카의 모습은 없었다. 뭔가 착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다른 객차까지 찾아보았으나, 승객들은 모두 내리고 열차는 텅 비어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플랫폼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얼굴에 상처 자국이
있고 행동 거지가 군인 같아 보이는 사나이를 제외하고는... 사내는 조카가
타고 있어야 할 객실에서 마지막 짐을 옮기려 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이 객실에 다른 사람은 없었나요?"
"아, 있었소."
그로데크 대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그 사람 세 정거장 전에 내렸소이다."
그 말을 남기고 대위는 마지막 가방을 들고 내려가 당당하게 플랫폼을 빠
져 나가고, 휄리페 삼촌은 십자가를 세 번 긋더니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 ETERNITY -
최선책
( The Best Policy )
Perentz Mornard
어느 날 아침, 전국 농민은행장인 바이유 씨는 비서 필리벨을 불렀다.
"여보게 필리벨 군, 페르피냥 지점에 있는 프로리오라는 사나이는 어떤 인
물인가?"
"프로리오 말입니까? ... 그 사람은 출납계원입니다만 지금은 임시로 지점
장 대리를 맡고 있습니다. 르나르 지점장이 죽은 뒤 아직 후임이 결정되지
않아서요. 당분간 프로리오가 그 자리를 메우게 되어 있습니다. 페르피냥
지점은 그다지 바쁘지 않으니까요."
바이유 씨는 책상 위에 있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 사람이 아무래도 공금에 손을 대고 있는 모양이야. 페르피냥 지점에서
이런 편지가 날아왔네. 발신인의 이름은 없지만, 그래도... "
그는 필리벨에게, 상당히 흐트러진 필적으로 씌여진, 그다지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노트 한 장을 내밀었다.
전국 농민은행 행장 귀하
우리들 농민은 땀 흘려 번 돈을 귀하의 은행인 페르피냥 지점에 맡기고 있
습니다만, 어느 날 아침 잠이 깨어 보니 은행은 파산하고, 우리들의 예금이
고스란히 사라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대로 방치해 두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출납계의 프로리오 씨가 과거 수차에 걸쳐 공금을 착복하고 있는
것을 귀하께서는 모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가 착복한 돈은 이제는 상
당한 금액에 이르렀을 것이고, 파리의 높은 분들이 그 일을 알게 될 무렵에
는 때가 너무 늦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필리벨 군. 내일 페르피냥 지점에 회계 감사관을 파견해 주게. 다만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의하게나. 그 프로리오라는 친구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이 투서가 근거 없는 중상일 수도 있네."
페르피냥의 임시 지점장 대리 프로리오는 몹시 당황한 태도로 파리에서 온
감사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장부를 조사하신다고요? 지금 당장 말입니까? 월말도 아닌데요? 아무런 예
고도 없니? 이건 전례가 없는 일 아닙니까?"
감사관은 눈앞에서 격분하고 있는 작은 사나이에게 동정을 느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프로리오 씨. 어느 지점에서도 가끔은 이렇게 벼
락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은행장의 일시적 기분인 걸요. 뭐 그냥 형식적인
조사니까 삼십 분 정도면 끝날 겁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소문이 날 텐데요. 특히 이런 시골에서는 말입니다.
제가 뭔가 떳떳치 못한 짓을 했을 거라는 평판이 나겠지요. 제 체면은 완전
히 손상됩니다!"
프로리오는 울먹인느 소리로 말했다.
"감사는 비밀리에 하겠습니다."
감사관은 다소 짜증이 나서 말했다.
"대리께서만 잠자코 있으면 되는 일이잖습니까. 이제 장부를 보여 주십시
오."
이틀 후 필리벨이 행장실로 들어왔다.
"페르피냥 지점에 다녀 온 조사원의 보곱니다. 장부는 정확했고 한푼도 부
족하지 않았답니다."
"됐어. 정말이지 익명으로 편지를 쓰는 이 따위 비열한 무리를 상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수고했네, 자네."
그리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 은행장은 같은 용건으로 다시 비서를 불렀
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얘긴데..."
그는 화가 난 듯이 말했다.
"또 페르피냥 지점에 관한 익명의 편지가 날아왔네. 발신인 말로는 회계
감사에 실수가 있다는 거야. 아무래도 프로리오는 공범자가 훔친 돈을 번제
할 때까지 적당히 얼버무리려 시간을 벌고 있었던 모양이야. 좀 더 철저히
조사할 걸 그랬네."
"다시 한 번 감사를 시켜야 하나요?"
필리벨은 우울한 얼굴로 물었다. 은행장은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별로 내키지 않아. 그러나 예금주에 대한 의무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네.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길 경우 우리들이 두번이나 경고 편지를 받은 것이 알려
지면, 그야말로 치명적인 스캔들이 되겠지. 그러니 다시 한 번 감사관을 보
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이번에야말로 면밀하게 조사해 줘야겠네. 이 건을
속히 결말짓고 싶어."
그날 안에 은행에서도 가장 신뢰받는 세 사람의 감사관이 페르피냥으로 출
발했다. 이번에는 프로리오도 완전히 기습을 당했다. 한 사람이 그를 감시
하는 동안 다른 두 사람이 네 시간여에 걸쳐 철저한 조사를 했다. 그러나
부족액은 발견되지 않았고, 장부의 기입도 완벽했다.
"다른 지점도 이와 같이 정확하게 되어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 주임은 의기 소침한 프로리오를 향해 칭찬을 한 다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필리벨이 행장실로 들어와 알렸다.
"페르피냥 지점의 프로리오 대리가 오셨습니다."
바이유 씨는 평소의 습관을 깨고 일부러 의자에서 일어나, 양팔을 활짝 펴
고 방문객을 맞이했다. 그러나 프로리오는 굳은 표정으로 머리 숙여 절을 했
을 뿐이다.
"사표를 가지고 왔습니다."
"뭐야, 사표?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프로리오. 대체 어찌된 일인가?"
"행장님께서는 두 차례나 제 장부를 조사시킬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항간에서는 그 일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다행히 제가 정직한 사람
이라는 것은 증명되었으나, 그 소문이 좋지 못한 인상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본점에서 두 번이나 감사관이 왔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
가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젠 저도 젊지 않고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습니다."
바이유 씨는 크게 감동했다.
"내가 책임지고 자네 결백을 증명해 주겠네. 잠깐 기다려 주게.. 야, 그렇
군. 지점장 자리가 아직 비어 있는 상태지. 그 자리를 맡아 주면 어떻겠나?
그렇게 되면 이제는 누구도 자네의 결백을 의심하지 않을 걸세. 게다가 사실
상 봉급도 오르게 될 테고... "
"설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
프로리오는 말이 막혀 우물거렸다.
"물론 진심이야. 은행으로서도 자네 같은 양심적인 직원이 있다는 건 행운
이라네."
페르피냥의 자택으로 돌아온 피엘 프로리오는, 아내가 꺼내준 편안한 슬리
퍼를 신으며 유쾌한 듯 큰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해냈다! 아무리 정직하고 열심히 일해도 그 소문이 상사의 귀에
들어가지 않으면 애써 봤자 소용없는 일이야. 내 올바른 근무 태도가 본점에
있는 높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앞으로 몇 년이고 일개 출납
계원으로 눌러앉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제야 겨우 인정받게 됐군요!"
미세스 프로리오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존경의 눈길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정말 멋져요, 당신의 그 편지 아이디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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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측의 증언
Graham Greene (1904 ~ )
법원을 오래도록 출입해 왔던 고참 기자인 나로서도 이제껏 본일이 없는,
그것은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 극적인 재판이었다. 신문 지상에서는 '파커
살인사건'으로 알려져 온 그 강력사건의 재판을 방청한 나로서는, 어쩌면
일생에 한두 번이나 있을까 말까한 기묘한 경험을 한 셈이었다.
검사측이나 변호인 측에서 채택한 정황 증거에 따라 재판의 결과가 결정
적으로 달라질 만한 상황에서는 간혹 배심원들의 무거운 침묵이 법정의
분위기를 좌우하곤 한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불쑥
제기된 하나의 정황 증거에 따라 재판의 결과가 백팔십도 달라진 예가,
특히나 간혹씩은 결정적인 오심(誤審)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예가 이제까
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누가 봐도 이번 사건은 그럴 만한 소지가 없는 경우였다. 피고가
살인을 저지른 상황을 그대로 목격한 증인이 있는 마당이니까 뭐 더 할
말이 필요하겠는가. 검사의 논고가 진행되는 동안,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남자가 무죄를 선고받게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고는 눈이 벌겋게 충혈된, 하지만 떡 벌어진 체격을 가진 남자 였다.
그는 특히나 언뜻 보기에도 튼튼한 하체 근육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어느
모로 봐서도 살인을 저지를 만큼 흉칙한 인상을 충분히 풍기고 있었다.
그러한 점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던지, 검사는 이례적으로 네 명이나 되는
현장 증인의 출석을 요구하고 있었다. 피고인은 노스웨드 거리에 있는 조
그만 빨간색 집에서 도망치는 것을 목격당했던 것이다. 그때의 시간은 대
략 새벽 두 시쯤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었다.
그 시간, 노스웨드 거리 15번지에 살고 있는 사몬 부인은 마침 잠이 오
지 않아서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그녀는 현관문에 달린
장식용 방울이 딸랑거리며 울리는 소리를 얼핏 들었다. 이 밤중에 누구일
까 싶어서 창문쪽으로 다가간 사몬 부인은, 지금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아담스'라는 사내가 파커 부인의 집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던 것
이다. 그는 막 그 집에서 나온 것처럼 보였는데, 장갑을 낀 손에는 망치
가 들려져 있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근처의 수풀 속으로 던지는 것을 사몬 부인
은 분명히 보았다. 게다가 그 사내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직감
으로 언뜻 사몬 부인네 창쪽을 올려다 보았는데, 그 순간 불운하게도 그
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 아래 고스란히 드러나고만 것이었다.
부인은 침착하게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채찍을 높이 치켜든 조련사
앞에 선 동물의 그것처럼, 사내의 눈은 격렬한 공포의 빛을 띄고 있었다.
사내의 야수와 같은 그 눈빛을 기억하고 있는 네 명의 증인들은 하나같이
오래도록 겁에 질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헨리 마크듀라는 증인은 사건 당일 심야에 차를 급하게 몰고 가다가, 노
스웨드 거리 모퉁이에서 피고인 아담스를 칠 뻔했던 사람 이었다. 그는
무엇엔가 홀린 사람마냥 멍한 표정으로 길 한복판을 걷고 있더라는 것이
었다.
또 다른 증인은 윌리 노인이었는데, 파커 부인 집과는 이웃인 12번지에
살고 있는 그는 그날 밤 어디선가 의자가 넘어지는 듯한 소리를 듣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 그는 저만치 서 있는
아담스의 등을 보았고, 이내 뒤돌아 선 그의 툭불거져 나온 눈을 보았다.
사내를 목격한 사람은 로렐 아베뉴에도 또 한 명이 있었다. 그러니 그
날 밤 사내는 지독히도 운이 없었던 셈이다. 마치 멀건 대낮에 범행을
저지른 것이나 진배가 없었던 것이다.
검사의 말은 자신에 차 있었다.
"피고측에서는 증인들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피고 아담스는, 사건이 일어난 2월 14일 새벽 두 시엔 집에 있었다고 주
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네 증인의 증언과 피고인의 불량스럽기 그지없
는 용모를 참작하신다면, 배심원 여러분들께서 그같은 터무니없는 주장
의 가능성을 인정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상황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이제 교수형이 떨어질 일만 남았
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을 모으고 있었다.
시체를 처음 발견했던 경관과 부검을 한 의사가 나와 으레 그렇듯 판에
박힌 증거를 제출한 후, 첫번째 증인으로 사몬 부인이 불려 나왔다. 정
직하고 착실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얼굴 생김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그녀는, 일단 증인으로서는 퍽 적절한 사람으로 보였다.
검사가 천천히 말을 이끌어내자, 약간 스코틀랜드 말씨를 쓰는 그녀는
확고한 어투로 증언을 계속했다. 어떤 감정에 휩싸여 있지도 않고, 붉은
색의 법원 옷차림의 판사와 속기사 앞에서 필요 이상의 거드름을 피우거
나 하지도 않았다.
"저는 그를 목격한 후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경찰에 전화를 했습니
다."
"그때 목격하신 그 남자가 지금 이 법정 안에 있습니까?"
검사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피고석에 앉아 있는 덩치 큰 사
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내는 짐승처럼 커다란 눈으로 무심히 부인쪽
을 마주보고만 있었다.
"예, 바로 저 사람입니다."
"확실합니까?"
"틀림없습니다."
정말이지 간단하게 마무리가 된 일이었다.
"사몬 부인, 대단히 감사합니다."
검사는 이 말을 끝으로 의기양양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변호사가
반대심문을 할 차례였는데, 나처럼 많은 살인사건을 취재해 본 경험이 있
는 기자라면 그가 어떤 식으로 반격을 해올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는 일
이었다.
처음 어느 만큼까지는 나의 예상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사몬 부인, 당신의 중언에 한 사람의 생명이 달려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시력은 좋으신 편입니까?"
"이제껏 안경을 껴본 적은 없습니다."
"연세가 쉰 다섯이시지요?"
"쉰 여섯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당신이 목격하셨다는 남자는 길 건너편에 있었다는 거지
요?"
"그렇습니다."
"그때가 새벽 두 시였는데요. 그렇다면 상당히 눈이 좋으신 편이로군요.
사몬 부인?"
"그건 아닙니다. 달이 훤하게 떠 있었던 데다가, 그 사람이 이쪽을 올려다
볼 때 마침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에 비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목격하신 남자가 바로 여기 있는 이 피고인이 틀림없다
고 자신할 수 있으신 겁니까?"
마지막에 던진 변호사의 그 질문이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지 나로선 알 도
리가 없었다. 새삼스럽게 그같은 질문을 해봤자 부인의 대답은 뻔한 것이
아닌가.
"예,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잘못 보거나 할 만큼 특징없는 얼굴
도 아니니까요."
그러자 변호사는 잠시 법정 안을 휘 둘러본 후 다시 물었다.
"사몬 부인,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법정 안을 둘러 봐 주시지 않으시겠습
까? ... 아니오, 피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스씨, 잠시 일어나 주
시기 바랍니다."
변호사의 말에 방청석 뒤쪽에서 한 사내가 일어섰다. 떡 벌어진 체격과 근
육질의 팔뚝, 툭 불거져나온 두 눈, 그리고 심지어는 꼭끼는 푸른색 셔츠와
넥타이까지도 똑같은, 그 사내는 피고인의 혐의자와 판에 박은 듯이 닮은
모습이었다. 그들 둘은 바로 쌍둥이 형제였던 것이다.
"자 이제 잘 생각해 주십시오, 사몬 부인, 파커 부인의 집 뜰에다 망치를
버린 사람이 바로 피고인과 동일 인물이라고 당신은 여전히 확신할 수 있으
십니까? 혹시 저기 있는 쌍둥이 동생의 짓이었다고 말하실 수도 있는 것 아
닙니까?"
부인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비교해 볼 뿐 한마디도 더 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피
고석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있는 짐승처럼 거대한 사내, 그리고 방청석 뒤
에 서 있는 그와 똑같은 모습의 또 다른 사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사몬
부인을 마주보고 있었고, 부인은 종내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재판은 이미 결말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을 목격한 사내가 피고인
이 틀림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증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쌍둥이
동생에게도 알리바이는 있었다. 그도 그 시간에 아내와 함께 집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피고는, 많은 증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증거 불충분으
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물론 살인을 저지른 것이 동생쪽이 아닌 쌍둥이 형
쪽이었다는 전제를 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피고가 벌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
를 지금의 나는 알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 기묘한 하루는 또 다른 결말
로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사몬 부인을 따라 법정을 나온 나는, 몰려드는 인파들 속에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들은 물론, 보기 드문 재판의 주인공들인 쌍둥이 형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경찰이 나서서 군중들을 해산시키려 했지만 역부
족이어서, 차도쪽을 통제하는 게 고작이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재판부는 그들 형제를 뒷문으로 나가도록 조치
를 했는데 형제쪽에서 그것을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형인지 동생인지 알 수
없는 형제 중의 한 사람이 손을 흔들며 정문을 나서다가, 이렇게 큰 소리를
쳤다고 한다. "나는 무죄가 된 거지?"
사고가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2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
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 상황을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는데, 쌍둥이 중의 한
사람이 밀려드는 군중들에 의해 달려오는 버스 앞쪽으로 떠밀쳐졌다는 것이
었다.
사내는 생쥐같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을 뿐,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는 마
치 피살된 파커 부인마냥 두개골이 박살난 채 죽고 만 것이다.
그것이 신의 복수였을까? 만약 가능한 일이라면 나는 것을 알고 싶다.
남겨진 또 하나의 아담스는 시체 곁에서 일어나 사몬 부인쪽을 똑바로 쳐
다보았다. 그의 툭 불거진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울고 있
는 그가 진짜 범인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여전히 알 도리가 없는 일이었
다.
만약 당신이 사몬 부인의 입장이었다면, 당신은 그저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가 있었을 것인가?
- ETERNITY -
- 속이거나 대접하기 - ... 주디스 가너
현관 초인종이 울렸을 때, 나는 미국인 친구 밤비와 함께 지하 부엌에 앉
아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집세를 물지 않는 대신 잡다한
일을 도맡아야 하는 내 신세를 한탄한 적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0월 30일이었지만, 인색한 아담스 부인은 아직 이르다며 난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벌써부터 냉기와 습기는 격렬한 겨울을 예고하고 있었다.
거리로 난 문을 열자, 작고 기이한 차림의 사람이 노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여덟이나 아홉살 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였는데, 길다랗고 새까만 대학
가운과 웨일스 모자로 보아 마녀로 분장한 듯 싶었다. 이 건물에 세들어 사
는 사람의 자식은 아니었지만, 유모차를 끄는 유모와 함께 공원에서 노는
모습을 몇 번 본 것 같았다. 아이는 미국인으로, 아버지는 대사관에서 일했
다. 예쁘장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아이의 낡은 유모차에는 유행이 한참 지난
고무 인형이 실려 있었다.
『속일 거에요, 대접할 거에요?』
아이가 물었다.
『대접하지.』
나는 순순히 대꾸해 주었다.
아이는 기대에 찬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내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 있어요?』
『뭐 말이냐?』
『절 대접한다면서요, 만약 대접하지 않으면 아줌말 속일 거에요.』
그 말을 듣자, 나는 심사가 뒤틀렸다.
『당장 꺼져! 도대체가 미국인들은 하나같이 다 날강도들이라니깐!』
문을 쾅 닫은 나는 적의에 찬 아이의 얼굴을 뒤로 하고 지하실로 내려왔다.
밤비가 담배를 또 한 대 피워 물었다.
『속이거나 대접하기야.』
『오! 영국에도 그런 관습이 있는지는 몰랐는데?』
밤비가 탄성을 내질렀다.
『여긴 그런 게 없지. 미국에서 하는 게 아냐?』
『오, 물론이지. 멋지게 차려입고 즐긴다구.』
『속이기에는 어떤 게 있을까?』
『음, 우리 어머닌 밀가루가 가득 든 양말을 건네주곤 하셨지. 그걸 문에
던지면 아주 멋진 자국이 난다고.』
『계단을 내려올 때 쿵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 하지만 그건 밀가루가
든 양말을 던져서가 아니라 발로 차서 난 소리 같던데?』
『요즘은 미국에서도 할로윈을 두고 말이 많아. 기분 나쁜 일이 너무 많이
벌어진다고 말이야. 1달러를 주지 않았다고, 유리창을 깨뜨리고 타이어를
펑크낸다면 기분이 어떻겠어?』
나는 그 관습이 난폭한 행동을 부추기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투덜거렸다.
『어쨌든 할로윈은 내일이니깐.』
밤비는 자기 나라의 관습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나를 애써 무시하는 눈치였
다.
『우후! 지난 한달 동안 가이를 위해 동전을 모았어. 가이 포크스는 좀 남
다른 구석이 있어. 불에 타는 사람 차림을 했지 뭐야!』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나는 간신히 혀를 붙들어맸다. 오
늘 밤은 밤비에게 무척 화가 났다. 개인적으로는 그녀가 가여웠지만, 그녀
의 화려한 배경만은 질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혼자서 여행하는 꿈
을 얼마나 꾸었던가!
나는 밤비에게 차를 한잔 더 따라 주었다. 그녀는 쇼 비즈니스를 하다 생
긴 재미있는 일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리고 내 남편인 론이 합세해서, 11시
까지 도미노 놀이를 했다.
다음날 아침 6시에 일어난 나는 론에게 차를 갖다주고, 온수를 받기 위해
보일러에 불을 붙였다. 7시 30분이 되자, 나는 우유를 가지러 1층으로 올라
갔다. 우유 배달원이 막 떠나려다 말고 내게 말을 건넸다.
『아주 독특한 장식을 하셨군요.』
그의 손가락이 현관을 가리켰다. 그의 말을 틀리지 않았다. 문에 인형의
손이 못으로 박혀 있었다. 살갗은 고무로 솜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추하
고, 소름끼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우유 배달원이 다시 말문을 떼었다.
『브릭튼이나 켐덴 타운에서 이걸 보았다면, 제가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
습니까? 누군가 부두교를 믿고 있구나, 했겠죠. 하지만 이 근처에는 그런
걸 믿는 사람이 없어요. 글로체스터로드도 그렇고.』
나는 그 추악한 물건을 떼내 쓰레기통에 던졌다.
『공원 위아래로 온통 이 지경입니다. 갈기갈기 찢긴 인형 조각들이 문에
못박혀 있더라구요.』
미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우유를 나눠주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들녀석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 나는 건물 청소를 시
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절단된 인형과 전날밤 찾아온 계집아이를 연관시키
지는 않았다. 장을 봐달라는 아담스 부인의 부탁에, 집을 나선 나는 뉴튼
교수가 현관 문에서 인형 상체를 떼네는 것을 목격했다.
『소름이 끼치죠, 그렇죠?』
내가 그에게 인사 겸 말을 건넸다.
『할로윈을 잘못 받아들인 아이놈이 한 짓입니다. 속이거나 대접하기! 제
대로 된 가정이라면 아이들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죠. 적대감이 사회 전
반에 만연하는 현상도 문제구요. 부모들에게 공식적인 항의를 할 참입니
다. 그리고 [타임스] 에 외국의 관습, 해로운 외국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항의 편지도 보낼 생각입니다.』
어렵사리 못을 제거하고 소름끼치는 선물을 손에 든 채 교수는 문을 쾅 닫
고 안으로 사라졌다.
인형 머리는 길 모퉁이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아스에이트 부인이 흥미로
운 눈길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다가가자, 그녀가 중얼거렸다.
『꼭 중세 때 같구먼, 안 그래요? 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쟁 때 말
고는 이런 일은 본 적이 없다우. 요즘엔 플라스틱 살갗이 꼭 진짜 같다니
깐. 손녀가 갖고 놀던 인형하고 아주 닮았는데 그래.』
부인의 얘기를 고스란히 들어주며 서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쌀쌀했다. 하
지만 그녀의 소박한 말투에 가슴 속에 남아있는 찜찜함이 사라져 버렸다.
장을 보고 돌아온 나는 아담스 부인의 점심을 준비했다. 날이 어두워질 때
까지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거리에서 바람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늘은 매우 어두웠고, 위협적이었다.
그때 아들녀석이 학교에서 돌아와, 나는 뜨거운 코코아를 컵에 담아 주었다.
한기가 녀석의 뼛속에 들어가지는 않았을까 걱정되어서였다. 아들은 몸이
약한 편이었다.
5시를 넘어서자, 비가 추적 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30분 후에 문을 열고
들어선 남편은 흠뻑 젖어 있었다.
『할로윈이야. 마실 것 좀 주겠소?』
나는 그가 좋아하는 위스키와 레모네이드를 섞은 음료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새로 불을 지핀 보일러에 상체를 들이민 채 웅크리고 앉았다. 나는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고기를 엷게 썰고, 감자를 튀기고, 디저트로 과일
샐러드와 커스터드를 준비했다.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투덜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꼬마 미국인이 서 있었다. 해적 차림으로.
『속일 거에요, 아니면 대접할 거에요?』
계집아이가 물었다.
유모차에는 남자동생인 갓난아이가 실려 있었다......☜
《주디스 가너》 뉴욕 출신으로, 예기치 않은 죽음을 당할 때 까지 영국에
서 살았다. 저널리스트, 모델, 인구조사원, 발레회사 의상담당직원 등 다채
로운 이력을 가졌다. 위 작품은 1975년 엘러리 퀸의 추리잡지가 선정한
<BEST 3> 가운데 하나로 뽑힌 바 있다.
벌레와의 대화
( Conversation with a Bug )
Jack Sharkey
"살려 줘요! 살려 줘요!"
찍찍거리는 가냘픈 소리가 연거푸 구원을 요청했을 때, 헨리는 너무 놀라서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방금 집 근처의 이류 극장에서 < The Fly >를 보고
온 터라, 맨 먼저 떠오른 것은 클라이맥스에서 파리가 거미줄에 걸려 요동치
는 광경이었다.
"말도 안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어디 있니?"
"방 구석, 천장 가까이요!"
목소리가 말했다. 다급한 음성이었다.
들은 대로 구석을 살펴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하기애 방에 불이라고는
15와트짜리 스탠드 하나뿐이었으니 그도 당연했다. 그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벽과 천장이 만나는 틈서리를 자세히 보았다. 조그만 말벌이 얽히고 설킨 거
미줄에 감겨 몸부림치고 있었다. 날개를 파닥일 때마다 거미줄에 구멍이 뚫
렸으나, 오히려 끊어진 실이 끈적끈적한 해초처럼 달아붙어 몸을 움직이기
어렵게 하고 있었다. 거미줄 한모퉁이에는 거미 한 마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유리알처럼 반들거리는 눈에는 온갖 착잡한 감정이 서려 있는 듯싶었다.
"네가 말했니?"
헨리는 신기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네."
가냘픈 소리가 울먹였다.
"날 구해 주세요. 저 끔찍한 것이 덮치기 전에!"
헨리는 손을 뻗어 거미줄을 치우려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살려주면 뭘로 보답할래?"
"제발!"
목소리가 찍찍댔다.
"먼저 구해 주고 나서 얘기해요."
"안 되겠다."
헨리가 말했다.
"살려 준 뒤 네가 컴컴한 구석으로 도망치면 난 뭐냐. 닭 쫓던 개 꼴에 손
만 더럽힌 게 되게?"
"당신은 참 빡빡하군요."
애처럽게 찍찍거리는 소리가 말했다.
"천만에, 너무 물러서 탈이야. 그게 고민인 걸. 난 자신이라곤 통 없는 사
람이야. 사회 생활도 그렇고 생김새나 몸매도 그래. 평생을 보디 빌딩과 인
기를 얻는 비결에 관한 책만 읽었지만, 내 꼴을 좀 봐라."
잠시 대답이 없다니 목소리가 미안한 듯 말했다.
"하긴 좀 그러네요."
"아무렴."
헨리는 불만이라는 듯 동의했다.
"키는 160밖에 안 되지, 몸무게는 45킬로지, 여드름투성이에 눈에는 힘이
없고, 머리까지 자꾸 벗어져. 네가 날 크게 도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
시 조금이라도 보템이 될지 누가 아니."
"사실 난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목소리가 말했다.
"이래뵈도 다른 애들하곤 달라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도 할 수 있는 거죠.
실은 난 요정이랍니다. 라이벌 요정의 마술에 걸려 이 꼴이 되긴 했지만요."
"요정이라구?"
헨리는 숨을 들이켰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것 같은 요정 말이냐? 소원을 들어 주고 뭐 그
러는 마법사 말이지?"
"맞아요!"
작고 가냘픈 소리가 숨이 넘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저 끔찍한 게 날 덮치기 전에 어서 죽여 줘요. 소원을 들어 드릴 테니!"
"네게 그런 마술이 있다면 왜 저놈을 단숨에 날려 버리지 못하지?"
헨리는 의심스럽다는듯 물었다.
"요정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마법을 쓸 수 없어요. 오직 주인을 도울 때
만 쓸 수 있답니다."
벌레가 말했다. 외워서 하는 말 같았다.
"너희도 서약 같은 걸 하니?"
"그럼요. 자기를 위해 마법을 쓰면 요정이 될 수 없어요. 우주의 질서라든
가 뭐 그런 것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만약에 서약을 어기면?"
"모든 능력을 잃고 그저 떠도는 영혼이 되는 거지요. 무슨 일이건 눈앞에
뻔히 보면서도 손 하나 까딱 할 수 없는 거예요. 끔찍한 일이지요."
"상상이 간다."
헨리는 동정했다.
"하지만 왜 소원을 하나만 들어 주지? 보통은 세 가지 소원을 들어 주는
걸로 아는데."
말벌은 거미줄에서 벗어나려고 한결 맹렬히 날개를 파닥였다. 거미는 그
모양을 지켜보며 황급히 다른 구석으로 물러났다.
"사람들은 욕심이 너무 많아요. 소원을 빌 때도 너무 영악하고요. 그래서
소원을 한 가지로 줄인 겁니다. 그뿐이에요."
"목숨을 살려 주는 데 세 가지 소원도 안 들어 줘?"
헨리는 끈질겼다.
"도리가 없어요. 하나라도 초과하면 서약을 어기는 게 되어 모든 힘을 상실
하는 걸요."
"젠장!"
헨리는 한숨을 쉬었다.
"뭘 빌어야 할지 알 수가 있어야지."
"우선 살려 놓고 나중에 생각해요!"
"싫어. 요정들은 꾀가 많거든. 소원부터 들어 주면 살려 주지. 만약을 위해
서 말야."
"알았어요, 알았어!"
요정이 소리쳤다.
"어서 생각해요!"
헨리는 열심히 생각했다. 생각에 잠긴 동안 행여 자기 소원을 들어 줄 요정
이 죽을세라, 눈앞 벽 한구석에서 전개되는 극적인 장면을 초조한 마음으로
주시하면서... 그러나 즉석에서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지독히 힘든 일이
었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게 좋겠지."
그는 천천히 말했다.
"제아무리 못 생겼어도 돈만 있으면 인기가 좋을 테니 말야."
"돈이요?"
요정이 말했다.
"알았어요!"
싯누런 번갯불이 눈부시게 번쩍이고, 한 차례 뜨거운 바람이 몰아치더니,
펄럭이는 지폐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중에는
번쩍이는 에메랄드도 한두 개 섞여 있었다. 부엌 식탁에는 왕족들이나 끼는
반지가 수북이 쌓였는데, 보석도 루비에서 마노에 이르기까지 각가지였다.
또한 싱크대에는 옛 스페인 금화가 꽉 차 있었다.
"이제 날 구해 줘요!"
요정이 부르짖었다.
"그렇지만... "
그 모든 금은 보화를 보자 눈앞이 아찔하고 숨이 막힐 듯 가슴이 두근거리
면서도 헨리는 머뭇거렸다.
"돈이 전부는 아닌데... "
"뭐라구요?"
이제는 목이 쉰 찍찍거리는 소리가 거의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한 나라의 왕이 될 만한 재산을 갖고도 아직 부족하단 말인가요?"
헨리는 자꾸만 숱이 줄어 가는 머리칼을 쓸어 보고는, 앙상한 몸매와 보기
흉한 똥배를 내려다보았다(똥배랬다 작은 호박덩이만 했지만, 그래도 그나마
의 몸매마저 망치고 있었다). 그는 근시인 눈을 껌벅이며 코웃음을 쳤다.
"흥! 돈이 있고 권력을 쥐면 뭘해. 친구들이 생겼댔자 그저 없는 것보다는
나은 아첨꾼들뿐일 걸. 내 눈엔 여전히 내 몸이 뵈고, 이 몸 갖고 살아야 할
텐데.... "
"좋아요, 그럼...."
요정이 울먹였다.
"갑니다!"
뜨거운 바람이 다시 한 번 몰아치고 번갯불이 번쩍이자, 느닷없이 헨리의
머리가 쿵 하고 천장을 들이받았다. 쉭쉭 하는 회오리 바람과 함께 금은 보
화가 사라지면서, 그의 키가 190센티미터로 늘어난 것이다. 어깨는 떡벌어지
고 배는 철판처럼 탄탄했으며, 손을 뻗어 머리를 만져 보니 풍성하게 물결치
는 머리칼이 잡혔다. 앞머리를 끌어당겨 살펴보니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
은 머리였다. 충치 때문에 이빨에 숭숭 뚫린 구멍도 어느 틈에 매워지고, 이
가 빠진 자리에는 희고 튼튼한 이가 새로 돋아났으며, 여드름도 감쪽같이 사
라져 구리빛 탄탄한 피부가 만져졌다.
"나, 어떻게 보여?"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록 허드슨 같아요."
요정이 소리쳤다.
"이젠 날 구해 주세요. 제발! 왜 또 그래요?"
"아까 그 돈도 있었으면 해서... "
헨리는 말했다.
"어떻게 안 될까? 두 가지 소원을 같이 들어 줄 수는 없니? 미남에다 동시
에 백만 장자로 말야, 응?"
"불가능해요."
요정은 신음했다.
"돈하고 생김새는 전혀 차원이 다른 걸요. 그렇겐 안 됩니다. 어느 쪽을
원하세요?"
헨리는 몸을 비비꼬며 솔직히 말했다.
"모르겠어! 아무리 잘 생겨도 가난뱅이면 뭘 해."
"좋은 수가 있어요!"
요정이 열심히 말했다.
"영화 배우가 되는 거예요. 큰 돈을 벌 수 있어요!"
헨리는 한숨을 쉬었다.
"영화계에 미남이 어디 한둘인가?"
"좋아요, 그럼..."
목소리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돈으로 미모를 사는 겁니다. 성형 수술에 가발을 쓰고, 일류 헬스 클럽에
다니며, 구두굽을 높이면... "
"그래 봤자 록 허드슨처럼 보이지는 않아."
헨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원판하고야 같겠니."
"그럼 인기는 어때요?"
요정이 애절하게 외쳤다.
"인기만 있으면, 정말로 인기만 좋다면, 생긴 건 문제가 안돼요. 사람들은
그리고 돈 문제는... 인기가 좋으면 언제든지 돈을 빌려 쓸 수 있으니까..."
"좋아."
헨리는 그 생각을 곱씹으며 말했다.
"록 허드슨도 매일 밤 데이트는 못했겠지. 하지만 인기만 있다면다..."
"됐어요!"
요정이 말했다. 또다시 번개와 바람이 몰아치고, 헨리는 바람빠진 풍선처럼
줄어들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특별히 달라진 점도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인가가 있을까?"
그는 희망을 품고 뇌까렸다.
그 순간 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하고, 방문이 부서져라 활짝 열리며, 여자들
이 떼를 지어 환성을 울리며 몰려 들어왔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따스하고
붉은 입술로 합창하듯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는 여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가장 가까운 여자를 붙들고는 막...
"돌아와요!"
요정의 가냘픈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려왔다.
쿵! 우지끈! 뚝딱!
헨리는 방바닥에 나자빠졌다. 품안은 텅 비어 있었다. 방안에는 여자들의
그림자도 없었다.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는 몸을 일으켜, 어정걸음으로 구석
에 있는 의자로 가서, 다시 그 위에 올라섰다.
"미안해."
다시 거미줄을 마주하자 그는 맥없이 말했다.
"그만 깜빡 잊었어."
"그게 뭡니까!"
요정이 야단쳤다.
"나도 이젠 못참겠어요! 어서 아무거나 하나 정해요. 빨리 하지 않으면 다
끝장이에요!"
헨리는 거미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태는 정말로 심각했다. 말벌은 거미
줄을 온통 뒤집어쓴 채, 거미 바로 앞 1센티미터도 못되는 곳에 대롱대롱 매
달려 있었다. 거미가 흉칙한 이빨을 드러냈다. 벌은 미칠 듯이 붕붕거리며
몸부림쳤다.
"좋아... "
"널 믿어 보자. 살려 주면 틀림없이 소원을 들어 주겠지?"
"그럼요! 그럼요!"
요정은 흐느꼈다. 흉칙한 두 벌레 사이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뭐든지! 어서!"
헨리는 결단을 내렸다.
"좋아."
그는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천장 서랍에서 망치를 꺼내 들고는, 대결의 현
장으로 쏜살같이 되돌아왔다.
"움직이지 마! 자칫하면 빗맞으니가!"
"알았어요."
요정이 흐느꼈다.
헨리는 있는 힘을 다해 망치를 내리쳤다...
거미는 찍! 하고 뭉개어져 벽지에 역겨운 얼룩을 남겼다. 헨리는 부르르
몸을 떨고는 망치를 손에서 놓았다.
"이젠 살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침묵.
"이젠 괜찮다니까."
그는 되풀이하며, 앙상한 손가락으로 말벌을 찔러 보았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손을 울리고, 그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기가 막
혀서 말이 안나온다는 얼굴로, 벌에 쏘여 퉁퉁 부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화가 치밀어, 그는 쿵쾅거리며 의자에 올라섰다.
"무슨 짓이야! 어쨌든 거미한테 먹힐 뻔한 걸 살려 줬잖아, 응? 요정아?"
잠잠...
문득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전화 있는 데로 달려갔다. 잡아채듯
수화기를 들어서는 과학 박물관 번호를 돌렸다.
"거미한테도 천적(天敵)이 있습니까?"
담당자가 나오자 그는 물었다.
"물론이지요."
상대가 대답했다.
"새가 그렇고 두꺼비가 그렇고, 그 무서운 나다니벌이나 말벌이 그렇고...
아, 그중에서도 사냥말벌이란 놈이 있지요."
"맙소사."
헨리는 전화를 끊었다.
벌레 두 마리를 상대로 이야기를 할 ㄳ 곤란한 점은, 도대체 어느 놈이
입술을 움직이는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뒤 헨리는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벽에 물든 그 얼룩을 볼 때마다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ETERNITY -
샤프 펜슬
( The Pencil )
Edmund Crispin
드디어 그들이 엘리엇을 잡으러 몰려온 것은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좀더
일찍 오리라고 예상했던 그는, 늦으지는 것이 마음에 안들어 안달하고 있던
참이었다. 결코 사치스러운 편이 아닌 그였지만, 이곳 크라이켄웰에서 빌린
방의 더러운 침실은 도저히 견뎌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살금살금 계단을 올
라오는 그들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는 청동 손목 시계를 힐끗보고
몸에 숨긴 물건을 재확인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의자를 움직여 문 쪽을 등
지고 앉았다.
그들이 등뒤로 살그머니 다가왔을 때 그는 당황하며 권총을 뽑으려 했는데,
그 행동이 너무도 실감나서 그들 중 한 명은 헉하고 숨을 삼킬 정도였다. 그
들은 재빨리 그의 양발을 잡아 비틀어 목덜미에 총구를 들이대는 소인배다운
행동을 했다. 엘리엇은 몸부림 치는 척하면서 '어리석은 패거리'라고 내심
비웃었다. 그들에 대한 경멸은 결코 잘난 체하는 데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프로 살인 청부업자로서 숱한 역경을 견디어 온 그의 완강한 마음에 그 따위
자만심이 들어올 여유는 없는 것이다. 엘리엇은 딱 한 번 자신을 위한 살인
을 했다. 당시의 상황이 매우 위태로웠기 때문이었는데, 그 후로 그는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의 몸을 수색한 뒤 아래층으로 끝어내려, 대기하고 있는 차 안으
로 밀어넣었다. 한밤중이라 사람 하나 없는 길거리를 큼직한 세단이 미끄러
지듯 조용히 달렸다. 얼마쯤 가서 자동차는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잡초
가 무성한 사격장 옆에 멈추었고, 차창에서 블라인드가 내려졌다. 거기서 그
들은 엘리엇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눈을 가리고는 양손을 뒤로 묶었다. 엘리
엇이 순순히 응하자 그들은 의기 양양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차 안에서
그는 이 패거리와 에디슨 일당 사이에서 다른 해결책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양쪽 모두 창고털이 전문인 소악당 패거리로 세력권 문제로 충돌 중이었고,
엘리엇이 이렇게 붙잡혀 가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차가 가는 방향을 속으로 짐작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부탁받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직업 살인자로서 엘리엇의 큰 장점은 하찮은
호기심을 품지 않는다는 것과 청탁 받은 일 외에는 결단코 손을 대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차는 런던의 밤거리를 질주했다. 그는 쿠션에 몸을 기댄 채 에
디슨의 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홀든 일당이 제멋대로 날뛰어서는 곤란해."
두목치고는 젊은 편인 에디슨은 교만한데다 머리는 늘 번쩍번쩍 윤이나게
하는 등, 헐리우드 영화에나 나옴직한 인물처럼 꾸미고 다녔다.
"홀든이 죽으면 그 일당은 흩어지게 돼 있어. 그게 자네가 할 일이야. 홀든
을 없애라구."
엘리엇은 단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구구한 설명을 듣는 것도 그로서는
지루한 일이었다.
악당 두목은 계속 지껄여댔다.
"한데 문제는 홀든 녀석을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단 말야. 녀석의 은신처를
모르거든, 그러니까 녀석을 유인해 내야 돼. 자네는 그 미끼가 되는 거야."
말하며 그는 빙그레 웃었다.
"독을 품은 미끼로군."
엘리엇은 한마디했다.
뒤이어 두목은 엘리엇이 자기 수하에 갓들어온 졸자로서 홀든이 몹시 원하는
정보를 쥐고 있으며,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라고 했다.
엘리엇은 자기와 직접 관계가 있는 말만 귀담아 듣고 다른 사실은 무시했다.
에디슨의 계획은 꽤 그럴 듯해서 저쪽 패들이 달려들 것은 틀림없다고 판단되
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놈들은 제대로 걸려든 것이었다.
긴 드라이브가 계속되었다. 무엇보다도 홀든의 부하들이 경계하는 것은, 미
행당하는 일과 엘리엇에게 그들의 은신처에 관한 단서를 주는 것이라라. 그런
고로 그들이 어떤 루트를 택한다해도 목적지로 직행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
었다.
마침내 그들은 도착했다. 그들은 엘리엇을 이층으로 밀어올리더니, 방으로
들어가자 난폭하게 침대 위에 내동댕이쳤다. 낌새로 보아 이곳에는 곰팡내 나
는 이 방 외에는 없을 것 같았고, 게다가 침대까지 있으니 아주 잘 됐다고 그
는 생각했다. 계획이 성공할 확률이 더욱 높아진 것이다.
그는 몇 차례 얻어터질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소년 시절부터 육체적 고
통에는 단련돼 있는 데다 보수를 듬뿍 받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나서야
그는 그들이 알고 싶어하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그것은 에디슨에게 지시받은
꾸며 낸 이야기로, 상대방이 믿게끔 상당한 진실이 섞여 있었다. 엘리엇은 교
묘히 해냈고, 자신의 연기를 즐기기까지 했다. 거기에 눈을 가렸기에 상대방이
그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유리한 조건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홀든은 퍽이나 만족해 하는 듯했다. 목소리로 판단컨대 홀든은
런던 빈민굴 태생으로 신경질적이고 꽤 나이가 든 사내 같았다. 머지않아 홀든
과 에디슨, 그리고 일당 모두가 경찰에 검거될 것이고, 놈들의 쓸데없는 세력
다툼도 깨끗이 끝장나리라는 사실을 엘리엇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부탁받은 대로 처리하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얼마 동안 의논한 후 그들은 제안을 해왔다. 예상했던 바였지만 엘리엇은 잠
시 망설이는 체 하다가 승낙했다. 보수만 넉넉하다면 양다리 걸치기도 마다하
지 않는 그였다. 그들도 엘리엇의 조건을 받아들였고 저쪽에서 캐내야 할 정보
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눈 뒤, 그의 터진 입술에 담배를 물리고는 불을
붙여 주었다. 엘리엇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그러나 그들은 눈
가리개를 풀어 주지는 않았다. 거기까지는 신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를
풀어 놓아 주기는 하겠지만 협력하지 않을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자기들의 정보
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리라.
이제는 석방시켜 주겠다는 말이 나오자, 때는 바로 지금이라고 판단한 엘리엇
은 침대에 엎드린 채 상대가 눈치채지 않도록 윗옷 끝단 밑으로 살짝 손가락을
넣어, 가늘고 매끄러운 물건이 침대 위로 굴러 떨어지도록 했다. 그리고는 몸
을 약간 움직여 손목을 묶은 줄이 허락하는 한 손을 뻗어, 그 물건을 베개 밑
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은 작지만 꽤 쓸 만한 물건으로, 겉보기에는 흔한 샤프
펜슬에 지나지 않았으나 속에는 강력한 시한 폭탄이 들어 있었다. 에디슨이 독
일 점령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파괴 전문가로부터 얻은 것으로, 독일군
사령관저나 그 밖의 중요 지점에 놓아 두고는 하던 정교한 폭탄의 일종이라면
서 엘리엇에게 준 물건이었다. 전쟁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폭발물에 대해
서는 흥미를 품고 있던 엘리엇은 매우 감탄하기는 했지만, 살인 수단으로서는
확실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홀든이 제 시간에 당하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다, 침대를 정리하러 온 하녀가 죽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엘리엇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돈을 받고 부탁받은 대로 실행할 뿐이니
까.
돌아오는 길도 갈 때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참을 달리다가 사격장 옆에서
눈가리개와 결박을 풀어 준 후, 얼마 더 가서 하숙집 앞에 내려 주었다. 엘리
엇은 어스름한 새벽길을 급히 달려가는 홀든의 차를 배웅하고는 이층의 자기방
으로 올라갔다.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그다지 화난 기색도 없이 거울에 비춰 보고 나서 짐을
꾸리려는데,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와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샤프 펜슬은
여덟 시에 폭발하도록 장치되어 있었다.
엘리엇이 눈을 뜬 것은 여덟 시 십오 분 전이었다. 밖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
우선 짐을 챙겨 놓은 다음 에디슨을 만나서 보고하는 거다. 그리고 열차에 타
기 전에 석간 신문을 보면 홀든의 생사 여부는 알게 될 테고...
그가 낡고 커다란 슈트케이스를 침대 위에 놓으려고 베개를 치우려는데, 세인
트 존스 성당의 시계가 여덟 시를 알리는 종을 울렸다.
샤프 펜슬을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순간 어리벙벙했지만 곧 사정을 깨달았
다.
그래, 그랬었구나, 놈들은 은신처의 비밀이 누설될지도 모를 모험 같은 건 애
당초 하지도 않았다. 놈들이 자동차로 빙빙 돌아서 나를 끌고 간 곳은 바로 이
곳이었던 거다. 여기서 놈들은 나를 심문했던 거다. 바로 내 방에서...
공포가 그를 덮쳐왔다. 그는 도망쳤다. 침대에서 문까지는 겨우 3초가 걸리는
거리였다. 그러나 그의 몸은 폭발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그 손이 문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 ETERNITY -
한 단어에 천 달러 (One Thousand Dollars A Word)
by 로렌스 블록(Lawrence Block)
편집장 이름은 워런 주크스였다. 그는 여위고 선이 날카로운 사내였다. 기
다란 손가락이 달린 긴 손을 가졌으며, 입술도 얇았다. 그의 검은 머리는
정수리와 관자놀이 쪽이 잿빛으로 변해 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조끼까지 갖춘 정장을 입고 있었다.
반면 트레배썬은 편집장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모습이 꼭 통나무같고 매끈
하지가 못하다고 느끼면서, 마치 겨울잠에서 깨어나서도 아직 잠을 다 털어
버리지 못한 곰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크스가 입을 열었다.
"앉아요, 짐. 당신을 만나는 건 언제나 즐겁지요. 벌써 다른 원고를 가져
왔나요? 당신이 글을 써내는 속도는 변함없이 나를 놀라게 하는군요. 도대
체 그런 이이디어가 어디서 나옵니까? 나의 이런 질문이 이젠 식상할 때가
되었겠죠."
제임스 트레배썬은 정말로 짜증이 났다. 사실 트레배썬이 짜증스러워 하는
것은 그것 한 가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속마음과는 좀 다
른이야기가 나왔다.
"아니오, 워런. 새로 원고를 써온 게 아닙니다."
"그래요?"
"난 지난번 원고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할까 하고 왔어요."
주크스는 당황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어제 이미 전화로 이야기를 했잖아요. 좋은 작품
이고, 잡지에 실을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그런데 그 제목이 뭐였
더라? 말장난을 좀 한 제목이었는데... 금방 떠오르지가 않는군요."
"<범죄의 바느질 한 번>이었지요."
"맞습니다, 맞아요. 괜찮은 제목이고 좋은 이야기였지요. 그리고 당신의
독특하고 짜임새 있는 문체가 작품 전체에 일관하고 있어서 좋았지요. 그런
데 뭐가 문제지요?"
"돈입니다."
편집장이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돈이 좀 급하신가 보지요? 제가 오늘 오후에 증서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
니다. 그러면 다음 주, 초에는 수표를 손에 쥐실 수가 있을 겁니다. 안됐지
만그것이 제가 해들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 짐. 우리의 협조가 이 정도면
아주 빨리 되는 것 아닌가요?"
"시간 문제가 아닙니다. 액수 문제이지요. 그 작품 고료가 얼마입니까, 워
런?"
단어 수량에 따라 원고료를 계산하므로, 워런은 트레배썬이 쓴 작품의 단
어수를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평소와 같지요, 뭐. 그 작품이 얼마나 길었더라? 3천 단어 아니었던가
요?"
"3천 5백 단어입니다."
"그러면 얼마가 되는 거지? 한 단어에 5센트씩, 3천5백 단어면? 175달러
가 되는 건가?, 맞아요?"
"맞습니다."
"당신이 그 액수를 다음 주 초, 가능한 한 빨리 받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뭐, 원하신다면 내가 전화를 걸어드릴 테니까 직접 와서 가져가셔도 좋고,
그러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바쁜 우체부 아저씨들을 통해서 보내는 시
간인 이틀을 절약할 수 있겠지요."
"그걸로는 충분치가 않습니다."
"뭐라 그러셨어요?"
"액수말입니다."
트레배썬이 말했다. 그는 이 대화를 계속해 가는데 큰 곤란을 겪고 있었
다. 트레비썬은 오는 길에 주크스에게 얘기할 원고를 마음 속에 써놓았었
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는 원고에 쓰인 대로 말이 나오지를 않고 있었다.
그는 억지로입을 열었다.
"난 돈을 좀 더 받아야겠어요. 한 단어에 5센트라... 그건 돈도 아닙니
다."
"그게 우리가 주는 고료요. 짐, 이제까지도 그렇게 지불해 왔고."
"맞습니다."
"그런데요?"
"내가 이 잡지에 얼마 동안이나 글을 써왔는지 아시나요, 워런?"
"꽤 오래 됐지요."
"이십 년입니다, 워런."
"정말요?"
"꼭 이십 년 전인 지난 달에 '실을 매달리다'라는 작품을 당신들에게 팔았
지요. 그건 2천 2백 단어짜리였어요. 그 때 당신들이 고료로 110달러를 주
었지요."
"그런데요?"
"워런, 나는 20년 동안 일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때 받는 단가와
똑같이 받고 있어요. 내 수입만 빼고 모든 물가는 오른 셈이지요. 내가 당
신네 잡지에 처음 글을 실었을 때는 5센트면 캔디바 하나를 살 수 있었습니
다. 워런, 최근에 캔디바를 사본 적이 있나요? "
주크스는 허리띠를 만지며 말했다.
"내가 캔디바를 사먹으면, 이 옷에 맞지 않게 될 거요."
"지금 캔디바는 40센트입니다. 물론 어떤 것은 35센트 짜리도 있어요. 그
런데 나는 여태 한 단어에 5센트를 받고 있습니다. 캔디바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그게 좋겠소, 짐."
"대신 잡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당신이 내 '실에 매달리다'를 사주
었을 때 가판대에서 당신네 잡지가 한 권에 얼마였는지 기억납니까? "
"내 기억엔 35센트였던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25센트였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에 35센트로 올랐지요. 그
다음엔 50센트. 그 다음엔 60센트, 그 다음엔 75센트였어요. 지금은 얼마에
팔립니까?"
"한 부에 일 달러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거래 작가들한테 한 단어에 5센터를 줍니다. 정말 탐욕
스럽게 돈을 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안 그래요, 워런?"
주크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팔꿈치를 책상에 올려놓고는 양손으로
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푹 낮추어 말했다.
"짐, 당신이 잊고 있는 것도 있어요. 우리 잡지는 20년 전만큼 이익이 남
지않습니다. 사실은 그 때보다 지금이 더 빡빡해요. 당신 종이 값에 대해서
좀 압니까? 내가 그 이야기를 하면 당신은 곧 캔디바 값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는 셈이라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나도 종이 값에 대해서라면 몇 시간 동
안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 외에도 인쇄비,우송비, 또 내가 이야기하
고 싶지도않고 당신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들이 아주 많아요. 당신은 잡
지 값이 한권에 일 달러 하니까 우리가 많은 이익을 남기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사실 비용들이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단 말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 한 가지만 빼고요"
"그게 뭔데요?"
"자료에 대해 지불하는 비용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당신 잡지 독자들이
잡지를 사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 아니겠어요. 이야기,플로트와 인
물들, 산문과 대화,단어들,이런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이런 것들
에 대해서는 20년 전과 똑같이 지불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와 똑같은 가격
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지요."
주크스는 입에서 파이프를 떼더니, 파이프 속을 청소하기 시작하였다.트레
배썬은 자신의 생활 비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집세,식료품값...그
가 숨을 돌리기 위해 말을 멈추었을 때 워런 주크스가 말했다.
"수요와 공급이오, 짐."
"그게 무슨 말 입니까?"
"수요와 공급이란 말입니다. 내가 한 단어에 5센트 주는 걸 고집한다면 우
리 잡지에 글을 싣기가 힘들어질 것 같소? 저기 있는 저 종이 뭉치들이 보
이시오? 저게 다 오늘 아침 우편으로 들어온 것들이오. 저 원고들 열 개 가
운데 아홉 개는 잡지에 실리기만 한다면 돈을 안 받아도 좋다는 신인 작가
들 것이오. 나머지 10퍼센트는 프로들이 쓴 것이지요. 이 프로들도 원고를
다시 반송 받는 것보다는 한 단어에 5센트라도 받는 쪽을 간절히 바라고 있
소. 그런데 당신도 아시다시피, 난 당신이 쓴 거라면 거의 뭐든지 사고 있
어요, 짐. 한 가지 이유는 내가 당신 작품을 좋아한다는 거지요. 그러나 그
게 유일한 이유는 아니오. 당신은 우리와 함께 20년 동안 일을 해왔소. 우
리는 엣 친구들과 함께 일을 하고 싶어하는 거요. 그러나 당신이 우리한테
분명하게 단어 당 5센트 이상을 달라고 요구한다면, 우리도 분명하게 어느
누구에게도 5센트 이상은 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소. 첫째로 예산이
넉넉치 못하기 때문이오. 둘째로 그 이상 지불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
오. 따라서 난 당신에게 5센트 이상을 지불하는 대신에, 당신의 원고를 되
돌려줄 수밖에 없소.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오."
트레배썬은 이 말을 몇 분 동안 곰곰히 씹어보았다. 그는 할 말이 몇가지
떠올랐으나,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주크스에게 편집장의 보수는
그 동안 얼마나 올랐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
용이 있단 말인가? 5센트를 받고 쓰느냐,아니면 안 쓰느냐 하는 두 가지 선
택밖에 없다. 그것이 이 문제의 마지막 결론이었다.
"짐! 증서를 보낼까요? 아니면 '범죄의 바느질 한 번'을 되돌려 줄까요?"
"내가 그걸 돌려받아서 뭘 하겠습니까, 워런? 그냥 한 단어에 5센트를 받
겠습니다."
"내가 더 줄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아니, 다 이해하겠습니다."
"당신네 작가들도 조합을 만들어 놓았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좀 집단적인
힘이 생겼겠지요. 아니면 당신이 다른 걸 써보던가. 아시다시피 우리 잡지
사는 간신히 버텨가고 있는 중이오. 만일 우리가 원고료를 더 인상해야 한
다면, 아예 잡지사 문을 닫아버릴 수밖에 없소. 하지만 원고료가 더 후한
분야도 있어요."
"워런, 나는 추리소설만 20년 동안 써 왔습니다. 내가 아는 건 그것뿐이
오. 나원참, 난 그래도 내가 이 분야에서는 명성이 있는 줄 알았는데. 확고
한 기반이 있는 작가인 줄 알았는데..."
"물론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도 당신 작품을 우리 잡지에 싣는 것 아니
겠소. 내가 편집 일을 하는 한, 그리고 당신이 글을 쓰는 한, 나는 기꺼이
당신작품을 살 거요."
"한 단어에 5센트를 주고 말이지요."
"그게..."
"워런,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요즘 생활이 좀 어려워서요. 그게 전부
입니다."
주크스는 일어서더니 책상을 돌아 트레배썬에게로 다가섰다.
"짐, 이제 잊읍시다. 이제 다 털어놓고 보니 속이 좀 후련해지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런 말을 함으로서 우리 사이의 분위기를 한번 새롭게 해본 것뿐이
지, 뭐 다른 게 있었겠소? 이제는 당신의 위치를 알게 되었을 거요. 그럼,
이제 집에 가서 뭔가 충격적인 것을 써가지고 나한테 가져와요. 만일 그 작
품이 당신이 평소에 써왔던 전문 작가적 수준에만 도달해 있다면, 당신은
또 돈을 받을 수 있어요. 그게 수입을 두배로 늘리는 방법이 아니겠소? 생
산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이오."
"좋은 생각입니다."
"물론 좋은 생각이지요. 그렇게 하면서 또 다른 시장을 겨냥한 작품도 한
번 써보도록 해요. 짐, 나는 당신이 분야를 확대해 나가는데 너무 늦었다고
는 생각하지 않아요. 또한 당신을 잃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당신이 우리
가 지불하는 고료를 가지고 문제를 삼는다면, 그 때는..."
"일리가 있는 말씀이오."
'한 단어에 5센트.'
트레배선은 낡은 타자기 앞에 앉아 흰 종이를 응시했다. 종이는 작년에 한
묶음 당 일 달러가 올랐다. 그러나 트레배썬이 보기에는 틀림없이 질은 낮
아졌다.
'내가 정성을 다해 선택한 단어들을 제외하면 모든 게 다 올랐어. 내 단어
들만 계속 5센트에 거래되고 있는 셈이야.'
트레배썬은 생각했다.
'당신의 분야를 확대해 나가는 데 너무 늦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주크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말하긴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트레배썬도 다른 시장을 겨냥해 써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
지만 그가 재주가 있었던 것은 추리소설뿐이었다. 그의 사고는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생생한 소설적 아이디어들을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또
좀 긴 장편을 써보려고 하면 번번이 중간에서 무력하게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단편 작가였다. 단편으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종종 중요 작가 선집 같
은 데도 끼어 있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그런 대로 많
이 써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나 이제 그는 이렇게 한 편을 써내고 또 한편을 써내야 하는 최저 생
활로 살아가는 데 지쳐버렸다. 그리고 한 단어에 5센트씩 받아서 생활하는
데도 질려버렸다.
한 단어에 얼마나 받아야 제대로 받는 것일까?
만일 한 단어에 25센트를 받는다면 최소한 캔디바의 인상율은 쫓아가는 셈
이 된다. 물론 20년이란 세월 동안에 발전도 없은 늘 똑같이 사는 것으로만
만 족할 수도 없었다. 만일 한 단어에 1달러를 받는다고 쳐보자. 실제로 그
만큼버는 작가들도 있었다. '빌어먹을.' 그 이상으로 벌어대는 작가들도 있
는 것이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작가들, 영화 대본을 쓰고 여섯 자리
숫자의 돈을 받는 작가들, 글을 써서 부자가 되는 작가들...
'한 단어에 천 달러.'
이 구절이 마음 속에 떠올랐다. 그 단순한 말이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무
의 식 중에 그는 앞에 있는 타자기에 그 구절을 두드렸다. 그리고 트레배썬
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음 줄로 옮겨 가서 다시 한 번 그 구절을 두
드렸다.
'한 단어에 천 달러.'
트레배썬은 그 구절을 다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 속에서 아이
디어가 용솟음처럼 치솟았다. 평소의 판에 박힌 사고 방식을 넘어선 아이디
어였다.
'그래, 왜 그래선 안 되겠는가? 왜 내가 한 단어에 천 달러를 받으면 안
되는가? 왜 내가 새로운 분야로 나아가면 안 되는가?'
'왜 안되겠는가?'
그는 타자기에서 종이를 빼서 구겨 쓰레기통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집어던
졌다. 트레배썬은 새 종이를 타자기에 끼우고 그 흰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그리고 생각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한 단어씩 한 단어씩
천천히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트레배썬은 좀처럼 자기가 쓴 단편을 고쳐 쓰는 일이 없었다. 한 단어에 5
센트씩 받고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더욱이 그는 오랜 세월 이 일을 하면서
단 한 번에 넘겨줄 만한 원고를 만들 정도로 숙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트레배썬은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정확하게 원고를 다듬을 필요를 느꼈다. 그는 종이를 새로 끼우고,그것을
다시 빼서는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지고 하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마음에 드는 글을 찍어낼 수 있었다.
트래배썬은 그것을 네댓 번 읽은 후에 타자기에서 꺼내서, 다시 한번 읽
어 보았다. '이제 됐어.' 그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이면 간략,명료하고 요
점이 분명했다.
트레배썬은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주크스가 나오자 그가 말했다.
"워런이요? 당신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소."
"새 작품을 하나 썼나요? 반가운 소식이군요."
"아니 그것 말고 다른 충고 말입니다. 나는 새로운 분야로 확대해 나가기
로 했습니다."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 정말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어요. 좀 큰 일을 하기
로 했습니까? 장편소설?"
"아니, 짧은 겁니다."
"좀 더 돈벌이가 되는 분야인가 보군요?"
"물론입니다. 내가 오늘 오후에 할 작업으로 난, 한 단어에 천 달러를 받
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천 달러 라구요? ..."
주크스는 웃음을 터뜨리며 놀란 개가 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글쎄, 난 당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군요, 짐. 하지만 엄청난
행운이 따르기를 기대합니다. 한 가지만 말해두지요. 당신이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게 너무 기쁩니다."
트레배썬은 자기가 쓴 것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나는 총을 가지고 있다. 이 종이 봉투에 십 달러, 이십 달러, 오십 달러
짜리 헌 지폐로 삼만 달러를 넣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의 어리석은 머
리를 내 총알로 날려버릴 수밖에 없다."
단어 수는 모두 30개 였다. 트래배썬이 말했다.
"물론 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지요. 워런? 내가 뭘 하려는지 알아요? 난
껄껄 웃으면서 은행으로 갈 거요."
- THE END -
프로
( The Pro )
Robert H. Cuttis
미세스 헨리에타 마셜은 흐릿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거울에
맺힌 영상은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것이 못 되었다. 거들을 벗고 목욕 가운을
입어도 넘치는 군살과 늙은 몸매는 감춰지지가 않았다. 평소에 낙천적이고
활동적이어서 비에 따위의 감정과는 무관했었는데, 뉴욕을 떠나려는 지금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이 비즈니스
호텔과는 사십 년 동안이나 알고 지내왔으니까, 호텔 분위기가 침울해서 그
런 것도 아니었다.
미세스 마셜은 아이오와 주의 작은 마을에 있는 자택에 있을 때보다는 여행
을 하는 편이 더 많았다. 그러니까 전국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이
런 호텔을 전전하면서 지내온 셈이다. 그런데 뉴욕에는 오래 사귄 친구들이
많기 때문인지, 이곳을 떠날 때는 언제나 미련이 남았다. 미세스 마셜은 한
참 동안 추억에 젖어 있다가. "그래도 은퇴하려면 아직 10년은 남았어."하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방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다가 떨어진 샌드위치처럼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었다. 짐을 챙겨 넣던 여행 가방에 시선이 멈추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열한 시 사십오분이었다. 내일 아침까지는 일 관계로 시카
고에 돌아가야 한다. 미세스 마셜은 다시 거울 앞에 섰다. 바로 그때 도어의
손잡이가 돌아가더니, 천천히 문이 열리는 것이 거울에 비쳤다.
서른 살 가량의 마르고 혈색이 좋지 않은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미세스 마셜은 방을 잘못 찾았다고 말하려는데,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사
내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해! 현금과 보석을 내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이빨을 몽땅 뽑
아 버릴 테다."
"값나가는 것은 없어요."
목욕 가운을 꼭 여미면서 미세스 마셜은 대답했다.
사내는 들고 온 가방을 침대 위에 놓더니 뚜껑을 열며 말했다.
"꾸물대지 말고 핸드백을 이리 가져와."
미세스 마셜은 시키는 대로 했다. 사내는 그녀의 여행 가방을 재빠르게 뒤
지면서 왼손으로 핸드백을 받았다. 여행 가방 속에 값나가는 것이 없자. 화
를 내며 핸드백 안의 물건을 침대 위에 쏟아 놓았다. 그 모양을 미세스 마셜
은 어쩔 수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사내는 지갑을 들고 안에 있는 돈을
세어 보았다.
"250달러라, 당신도 똑같구만. 멍청이 할멈들은 대개 많은 돈을 갖고 다니
지. 하긴 침대 매트리스를 껴안고 여행할 순 없으니까 말야(침대 매트리스에
돈을 숨겨 두는 사람이 많다)."
사내는 빼앗은 돈을 자기 지갑에 넣어 상의 안주머니에 집어 넣고, 금으로
만든 자그마한 콤팩트는 가방 속에 넣었다.
"삼십 분내로 공항에 가야 되니까 택시값 정도는 남겨 두어요."
미세스 마셜이 불평을 하자.
"여행자 수표가 있잖아."
사내는 딱 잘라 말하더니,
"당신은 운이 좋은 거야. 나는 현찰 외에는 가져가지 않는 주의니까, 당신
도 중요한 것은 뺏기지 않고 끝날 테니 말야."
하고 투덜거렸다.
"하긴 가끔은 큰 고기가 걸리기도 하지. 이것 좀 보라구."
사내는 가방을 열어 보였다. 미세스 마셜이 들여다보니, 도둑질용 연장 일
곱 개와 얄팍한 보석 상자가 하나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내가 보석
상자 뚜겅을 열어 보았을 때, 그녀는 엉겁결에 숨을 삼켰다. 검은 비로드
위에 선명하게 떠올라 있는 것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훌륭한 진주 목걸이
였다. 그 매혹적인 광채에 미세스 마셜은 만져 보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꼈
다.
"당신 돈을 몽땅 털어도 이 진주 세 알맹이도 사지 못할 걸."
사내는 입가를 실룩거리며 웃더니 보석 상자를 닫고 가방 뚜껑도 닫았다.
그리고 경대로 가서 서랍을 뒤져 보더니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투덜댔다.
"믿을 수가 없군. 보석 하나 가진 게 없다니!"
"내가 가진 걸 몽땅 빼앗았잖아요. 그만하면 충분하잖아요."
미세스 마셜은 그렇게 말하며 벽장 쪽을 살짝 훔쳐보았다. 그 눈동자의 움
직임을 사내가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성큼성큼 벽장으로 가서는, 안에 걸
려 있는 옷을 하나 하나 한쪽으로 치워 가며 조사했다. 마침내 카메오 브로
치를 찾아냈다. 그는 브로치를 옷에서 떼어내려 했지만, 고리 핀이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사내가 브로치와 씨름하는 사이에 미세스 마셜은 슬금슬금
침대 쪽으로 다가가서 그 위에 놓인 가방을 살짝 만졌다. 그와 동시에 사내
는 브로치 핀을 억지로 비틀어 고리에서 벗기고는, 힘들여 획득한 브로치를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가방이 있는 침대 쪽으로 가는데, 문득 미
세스 마셜이 카페트에 발이 걸려 비틀 거리며 부딪쳐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둘이 함께 넘어질 뻔했다.
"어머! 미안해요."
미세스 마셜이 사과했다.
"바보 같으니라구!"
사내는 화를 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군. 십 분 이내에 전화를 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했다
가는, 이번에는 사과 정도를 끝나지 않을 거야!"
미세스 마셜은 그가 남기고 간 말을 감히 거역하지 않았다.
사내는 비상구를 통해 단숨에 계단을 내려가서는,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호텔 로비의 붐비는 사람들 틈에 끼였다. 거기서부터는 여유 있게 회전문을
통과해서 렉싱턴 거리의 한낮의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로부터 삽십 분 후, 그는 3번가 90번지에 있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 올
라 있었다. 사 층에서 내리자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소파에 털썩 주저않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여느 때보다 실적이 좋은 오전중의 수확을 이제부터 천
천히 음미할 수 있다는 즐거움에 싱글벙글했다.
이럭저럭 기분이 가라앉자 그는 작업에 들어갔다. 가방의 걸쇠를 벗기고 뚜
껑을 연 순간, 사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어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
다. 자신의 도구도, 금 콤팩트도, 진주 목걸이가 들어 있는 보석 상자까지도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대신 표지가 검은 책이 한 권 들어 있을 뿐
이었다. 사내는 한동안 완전히 넋이 빠졌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목걸이
는 호주머니에 넣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주머니를 뒤지는 동안 식은땀
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목걸이뿐만 아니라 지갑까지도 없어진 것이었다.
당황해서 다시 가방 속을 들여다 보았다. 검은 책을 끄집어 내서 표지를 보
니 기디온 협회에서 발행한 성서였다. 책장을 넘기니 표지와 첫 페이지 사이
에 두터운 종이가 끼여 있었다. 종이는 석판 인쇄로 된 다소 현란한 느낌의
그림과 문자로 꽉 차 있었다.
실물보다는 젊고 날씬했지만 한눈에 미세스 마셜임을 알 수 있는 여성이 시
계, 지갑 등을 양손 가득히 쥔 채 높이 쳐들고 빙그레 미소짓고 있으며, 그
앞에는 고풍스런 야회복 차림을 한 여러 명의 남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
다. 그림 밑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었다.
특별 공연
미국 제일, 신비의 마술사
마담 헨리에타 마셜
좌석 예매중
- ETERNITY -
현실의 경계선
제프 스위트
"아시겠죠? 난 어떻게든 막아야 했어요."
"막는다구요? 서더랜드 부인,뭘 막는단 말입니까?"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그앤 죽었어요.그 남자가 죽였을 거라구요!"
"누굽니까,서더랜드 부인? 그 남자가 도대체 누굴 죽인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렇게 날 쳐다보는 걸로 봐서,도통 믿기지 않는다는 이야기 같군요.폴리 부
장,날 미친 노파로 생각하지요?"
"아니,천만에요.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침대 밑에 간첩이 숨어 있다고 항상 경찰이나 FBI를 불러대는 그런 노인으로
생각하나요?그렇죠?"
"서더랜드 부인,그건 오햅니다."
"아니면 왜 믿지를 않죠?"
"그건 말이죠,부인.믿지 않는게 아니구요.에,뭐랄까? 글쎄,하신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요.그렇군요,사실이 이해가 안 됩니다."
"질문에는 전부 대답해 드렸어요.폴리 부장."
"예,그건 됐습니다.하지만 아직.."
"또 뭔가요?"
"자,이렇게 합시다.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해 주시는 거예요.도중에 말을
막지는 않으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그래요,그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그럼 콜다와 딤 얘기부터 시작
하지요.콜다와 딤 프랭클린,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이에요.그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죽은 남편과 나의 젊은 시절들이 생각나지요.정말 사이가 좋은 부부라구요.
물론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예요.결혼했을 샔 여잔 이미 임신중이었어요.
그런 상태에서 결혼 하는건 그다지 좋은 일은 못되죠.게다가 아이는 딤의 아이가
아니었으니까.방탕아 파스의 아이었어요."
"저,서더랜드 부인."
"도중에 말을 막지 않는다고 약속했죠?
"네.알고 있습니다.하지만 좀 혼란스럽군요.해링턴 파스가 누굽니까?"
"폴리 부장,듣고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되요.어쨌든 잠자코 있어주세요."
"네"
"어디까지 말했더라?"
"해링턴 파스입니다."
"아,그랬지.해링턴은 부잣집 망나니 아들이죠.아버지는 파스 일렉트로닉스의 사장이
구요.잘 아시죠? 수완 있는 유명한 사업가죠.하지만 해링턴은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
았어요.정말 그같은 아들을 둔 파스 부인은 큰 걱정일 거예요.늘 이상한 차를 몰고
다니며 사고를 일으키니까.
아버지는 1년 내내 뒤치다꺼리에 바쁘죠.나라면 내쫓는 한이 있더라도 바르게 교육시
킬 텐데..자기 책임은 자기가 지게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다 술고래인걸요.
참,콜다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면,그땐 아직 딤과 결혼하지 않았어요.딤은 스탠튼이
란 여자를 사귀고 있었으니까요.길게 속눈썹을 붙인 아주 화려한 여자였어요.
그런 여자가 뭐가 좋다고,글콅.
아,어쨌든 콜다 말이에요,어머니가 몇번씩 수술을 받다 죽어 혼자 외톨이가 되었을
때죠.의지할 데가 없어 아무한테나 기대고 싶은 꽤 위험한 상태였다구요.
그걸 저 방탕아 해링턴이 알아차리고 접근한 거죠.그래서 저 좋을 데로 가지고 놀다
가 탁 차버리더군요.콜다가 임신한 것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이죠."
"그건 파스의 아이였나요?"
"그러니 그렇게 말했죠.폴리 부장,이야기를 좀 더 주의 깊게 들어주세요.
어쨌든 그 즈음 스탠튼이란 여자도 딤을 떠나 해링턴과 친해졌어요.
내 생각엔 끼리끼리 잘 만났지 않나 싶지만요.한편 딤은 실연을 당해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상태였어요.그런데 어느날 콜다를 만난 거예요.
딤이 산부인과 의사라는 건 이미 말씀드렸지요?"
"아뇨."
"오,그랬나요? 하여간 딤은 산부인과 의사예요.또,병원 아가씨들은 의사 중에서 딤이
제일 핸섬하다고 했어요.그러나 딤 자신은 그런걸 전혀 문제삼지 않았지만요.
그런데 어느 날 아까도 말했듯이 콜다가 진찰을 받으러 왔지 뭐예요.
딤은 콜다에게 임신이라고 가르쳐줬죠.그 말을 듣고 콜다는 애써 눈물을 감추러 했지
만 참을 수가 없었어요.그래서 비틀거리다가 그만 딤의 팔에 안겨 어린애처럼 울고
말았어요.딤은 엉겹결에 콜다를 안아준 것인데 그 순간에 사랑이 싹튼 모양이에요.
그샔 사정은 잘 이해가 가요.내가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런 식이었으니까요.단
난 임신하지 않았고 서더랜드는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었지만요.내가 말하고 싶은건,
누군가 자신에게 부딪쳐 왔을때 그게 자신의 짝인지 아닌지 생각해서 결정하는게
아니라 직감적으로 안다는 사실이죠.서더랜드와 내가 그랬고 콜다와 딤이 그랬어요.
딤이 프로포즈하던 날은 잊을 수가 없군요.콜다는 임신 8개월로,그동안 두 사람은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나와 결혼해줘요.>딤이 말했죠.<그럴 수 없어요.이렇게 다른 사람의 아이까지 임신
해서 당신과 결혼한다면 당신 입장이 곤란해져요.>라고 거절했어요.난 함마터면 큰소
리를 지를 뻔했어요.<안 돼,콜다! 딤은 너를 사랑하고 있어! 바보같이 행복해질 기회
를 놓쳐선 안 돼!>하고 말이죠.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어요.딤이 똑같은 말을 했
거든요.딤은 <난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어요.<당신이 있어 난 용기를 얻었소.만일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난 살아갈 의미를 잃는거요.>그래서 결국 콜다는 프로포즈를
받아들였고,곧 두 사람은 결혼을 했어요.딤은 아이를 자기가 받아냈죠."
"부인,그것이 이 사건과 무슨 관계가..."
"폴리 부장,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어요."
"아이구,미안합니다."
"두 사람은 아주 행복했어요.아이도 전혀 해링턴을 닮지 않았구요.
하지만 난 아직 안심할 수 없었어요.언젠가는 비극이 일어나리란 예감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언제 어떤 식으로 닥칠지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더군요.
사실 난 그 불길한 예감 때문에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어요.
삼조이 선생한테 가서 수면제를 받아왔을 정도죠.수면제를 지나치게 먹다 죽은 노인
을 알고 있어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지만 말예요.
노인만이 그런건 아니죠.젊은 사람도 마찬가지예요.술에 취해 마시는 것이 제일 위험
하지요.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요.
어쨌든 난 콜다와 딤이 걱정되었어요.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꼭 일어난다는 생각에 꼬박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어요.그러다 하루는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어요.뭐라고 할까,여자의 직감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난 무슨일이 일어나게 될지 짐작하게 되었죠.해링턴이 자동차 사고를 일으켜 콜다를
죽인다,그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어요.해링턴은 얼마 전 스포츠카를 샀어요.굉장한
소리를 내는 외제차죠.사람들은 이미 그가 무서운 속도로 온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그러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죠.
어떻게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아야 했어요.서더랜드가 교통사고로 죽었을때
난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몰라요.물론 우리 그이가 받힌 것은 외제차는 아니었지만
요.
난 슬퍼 죽을 지경이었죠.대체 이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사고가 일어날 줄 뻔히
알면서도,아무 대책도 없이 두고 볼 수만은 없었어요.어떻게든 해야죠.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오늘 정말 깜짝 놀랐어요.이런 우연한 일이 있다니! 조카 생일 선물을 사러 5
번가에 나왔다가 47번지 레스토랑에 들어갔어요.라디오 시티와 록펠러 센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 말이죠.아시죠,거기?
그런데 그 레스토랑 안에 해링턴이란 녀석이 있지 뭐예요! 나는 옆으로 가서 <파스
씨죠?>하고 물었어요.그러자 그자는 빙긋 웃더군요.막돼먹은 사내지만 웃는 얼굴은
호감이 갔어요.<파스 씨,잠깐 할 얘기가 있어요.>내가 이렇게 말하자,해링턴은 몸을
잘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했지만 일어나 의자를 권하더군요.난 자리에 앉았죠.
<파스 씨,분명히 말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난 잘 알아요.><어떻게 되죠?>그가 또
웃으면서 말했어요.<당신,그 이상한 외제차로 콜다 프랭클린을 죽일거죠?><맞아요.>
그는 인정했던 거예요.빙글거리면서 말이죠.그 악마같은 얼굴에는 죄의식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었어요.그저 살인을 즐기는 거죠.정말 지독한 악당이에요.그러다가
그자가 잠깐 실례하겠다며 화장실로 들어갔어요.
그때 난 어떻게 해야 될지를 깨달았어요.삼조이 선생한테서 받은 수면제를 꺼냈지요.
그리고 그걸 그자의 커피속에 넣었어요.그런 다음 곧장 집으로 돌아와,모든게 끝났다
는 걸 확인할 때까지 기다렸죠.그리고 여기 이렇게 자수하러 온 겁니다.내 이야기는
이것뿐이에요."
"알겠습니다."
"내 말을 믿어주시는 거죠?"
"예,믿지요,부인."
"한 가지 알아주었으면 하는 건,이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는 점이에
요.딤과 콜다와 아이를 위해서죠.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요.아시겠죠,폴리 부장?"
"예,알 것 같군요."
그 뒤 서더랜드 부인이 연행되어 나가자,폴리 부장은 조금 떨어져 서있던 워렌 형사
를 향해 말했다.
"이제 이 사건의 수사는 끝났네."
"부장님,전 머리만 아프군요."
워렌 형사가 말했다.
"아직 수사가 덜 끝난 것 아닙니까? 맥스웰의 커피에 약을 넣었다는 얘기는 사실과
일치해요.그리고 아까 그분은 보이가 보았다던 여자와 똑같구요.
하지만 테일러 맥스웰을 왜 그녀가 <해링턴 파스>라고 부르는지 도무지 납득이 안 갑
니다."
"워렌,테일러 맥스웰은 배우라구."
"그게 무슨..."
"신상명세서를 보았는데 말야,그는 얼마 전 TV드라마 <살아가는 의지>에 나왔더군."
폴리 부장이 말했다.
"그 드라마에서 그가 맡은 역이 바로 해링턴 파스였다네."
----------^^
모리슨은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비행기 연착 때문에 늦게 도착하는 어떤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술을 한잔 하던 도중 모리슨은 바 끝에서 눈에 익은 얼굴을 발
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지미? 지미 맥칸 맞지?"
지미 맥칸이었다. 지미는 작년에 애틀랜다 전람회에서 보았을 ㄸ보다 약간 몸이
불어있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아주 건강해 보였다. 지미는 대학 다닐 때에는
커다란 뿔테 안경으 쓰고 줄담배를 피우는, 여위고 창백한 청년이었다. 지금
은 안경을 안 쓴 것을 보니 콘택즈 렌즈를 끼고 있는 것 같았다.
"딕 모리슨이지?"
"맞아, 자네 참 좋아보이네."
모리슨은 손을 내밀었다. 둘은 악수를 했다.
"자네도 그런데."
맥칸이 말했다. 하지만 모리슨은 그 말이, 맥칸이 그저 지나치는 인사말로 하
는 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요사이 과로에, 과식에, 담배도 만힝 피
워대고 있었던 것이다. 맥칸이 물었다.
"자네 뭘 마시고 있나?"
"버번 앤드 비터즈일세."
모리슨이 대답했다. 모리슨은 바 밑의 의자에 다리를 얹고 담배에 불을 붙였
다. 모리슨이 물었다.
"누굴 만나기로 했다, 지미?"
"아니, 회의가 있어서 마이애미에 가는거야. 중요한 고객을 만나야 하거든. 6백
만 달러짜리 상담이야. 가서 그 사람을 꽉 붙잡아야 하네. 내년 봄에 아주 큰일
을 벌여야 하거든."
"자네 아직도 크레거 바튼 회사에서 일하나?"
"이제 부사장이 되었네."
"이야! 축하하네! 어떻게 그렇게 승진을 한거야?"
모리슨의 뱃속에서는 질투심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모리슨은 그것을 위산과다
때문이라고 합리화하면서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었다. 모리슨은 제산제 한 알을
꺼내 입에 넣었다.
"지난 8월에 승진했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일이 있었거든."
맥칸은 생각에 잠긴 눈길로 모리슨을 바라보더니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도 관심이 있을 걸세."
모리슨은 속으로 움찔했다.
'맙소사, 지미 맥칸이 종교를 가지게 됐다니....'
모리슨도 술을 한 모금 꿀꺽 들이키고 나서 대답했다.
"물론이지."
"난 당신 상당히 안 좋은 상태였었네. 샤론과의 개인적인 문제, 아버지의 죽
음.... 아버진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네. 그리고 마른 기침... 어느날은 보비 크레
거 사장이 내 사무실에 들르더니 자기가 뭐 내 아버지나 되는 것처럼 나한테
격려하는 이야기르 ㄹ해주었네. 자네도 크레거 같은 사람들이 어떤지 알지?"
"물론이지."
모리슨도 지금의 모톤 에이전시로 옮기기 전에 그레커 바튼에서 18개월 동안
일한 적이 있었다. 모리슨이 대꾸했다.
"겉으론 뭐라 그러든, 사실 그치들이 하는 얘기는 일을 제대로 하든가 아니면
나가라는 얘기지."
맥칸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도 아는구먼.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의사는 나한테 초기 궤양 증세가 있다
고 했다네. 그러면서 담배를 끊으라고 하더군."
맥칸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차라리 숨을 끊으라고 하는 게 낫겠다 싶었지."
모리슨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뜨덕였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
들은 담배를 끊으라는 말을 아주 쉬운즛이 말한다. 모리슨은 자기 손에 들려 있
는 담배를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나서 그것을 눌러 껐다. 그러면서도 5
분후에 또 새 담배에 불을 붙일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모리
슨이 물었다.
"그래서, 끊었나?"
"끊었네. 처음에는 나도 못 끊을 줄 알았지. 내가 어디 담배를 끊으려고 한두
번 시도해 본 사람인가. 그러다가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친구가 46번가에 있는
패거리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더구먼. 전문가들이라고 하면서. 나는 속는 셈 치
고 한번 가보았지. 그런데 거기 갔다 온 다음부터 끊게 되었네."
모리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데? 무슨 약을 먹이던가?"
"아니."
맥칸은 지갑을 꺼내 뒤적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여기 있네. 뒹굴어 다니던 걸 하나 가지고 있었네."
맥칸은 하얀 명함을 바 위에 올려 놓았다.
금연 회사
담배를 끊게 해드립니다!
46번가 동부 237번지
예약 요망
"가지고 싶으면 가지게. 거기 가면 담배 끊을 수 있어. 장담하네."
"어떻게 끊게 하나?"
"그건 말해줄수 없어."
"아니, 왜?"
"처음에 가면 서명하는 계약서에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어쨌
든 거기 한번가서 만나보면 그 사람들이 얘기해줄 거야."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고?"
맥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나한테 말을...."
"그렇네"
맥탄은 모리슨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모리슨은 생각했다.
'나, 참, 이 친구도 그 담배 안피우는 점잖은 자식들 틈에 끼어들었구먼.'
모리슨이 비꼬듯이 물었다.
"그렇게 훌륭한 일들을 하시는데 어째서 비밀로 하시나? 텔레비젼 광고에서도
한번 본 적이 없고, 광고판에서도, 잡지 광고에서도...."
"그 사람들은 입으로하는 선전을 통해서 고객들을 모으네."
"자네 선전원 다 됐군, 지미. 원래 광고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말을 안믿
는 법이지."
"난 믿네. 그들은 98퍼센트의 치료율을 가지고 있어."
"잠깐만."
모리슨은 술을 한잔 더 주문하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이 자네를 묶어좋고 질릴 때까지 담배를 피우게 하던가?"
"아니."
"무슨 약을 주어서 자네가 담배를 피울 때마다 구역질이 나게...."
"아니, 전혀 그런게 아니야. 직접 가서 만나 보게나."
맥칸은 모리슨의 손에 있는 담배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자네도 정말 그 담배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물론 안 좋아하지만...."
"담배를 끊고 나서 정말 모든게 바뀌었네. 남들도 그러리라고는 말 못하겠지
만, 하여간 나한테는 그게 꼭 도미노 같은 거였어. 그 문제가 해결되자 다른 문
제들이 저절로 해결되었지. 기분이 나아지니까 샤론과의 관계도 좋아졌네. 몸에
힘이 나니까 일의 능률도 훨씬 올라갔지."
"이봐, 계속 내 호기심을 끌어당기는데, 자네 정말 거기에 대해 조금만 알려
줄 수 없나."
"미안하네, 딕. 난 정말 거기에 대해 말할 수가 없네."
맥칸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몸 무게가 늘지는 않았나?"
잠시 모리슨의 눈에 맥칸이 무서운 표정을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맞아. 사실 좀 많이 늘었지. 하지만 다시 줄였네. 지금은 괜찮지 않은가. 전에
는 뚱뚱했었어."
"206번 비행기는 9번 출입문으로 탑승합니다."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내 비행기야."
맥칸이 말하면서 일어났다. 맥칸은 5달어짜리 지폐를 바에 던지며 말했다.
"생각 있으면 한잔 더 하게. 그리고 내가 한 이야기도 생각 좀 해봐, 딕. 진심
이야."
그러고 나서 맥칸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러 가버렸다. 모리
슨은 명함을 들고 생각에 잠겨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런 뒤, 모리슨은 명함을
지갑에 넣고는 얼마 후 그것에 대해 잊어버렸다.
한달 후, 그 명함은 그의 지갑에서 떨어져 다른 바 위에 놓였다. 모리슨은 일
찍 사무실에서 나와 바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오후를 보낼 생각이었다. 모튼
에이전시에서의 일은 잘 풀려나가지 않았다. 사실 아주 끔찍한 지경에 이르
러 있었다.
모리슨은 바텐더 헨리에게 10달러를 지불하고, 돈을 꺼낼 때 우연히 함께
떨어진 명함을 집어 다시 읽어 보았다.
'46번가 동부 237번지라? 여기서 두 블록만 가면 되는군.'
ㅂ깥은 10월이래서 그런지 화창하긴 했지만 쌀쌀했다.
'좋아, 한번 웃음거리를 만들러 가보지, 뭐.'
헨리가 잔돈을 가져오자 모리슨은 술잔을 마저 비우고 일어나서 나왔다.
금연 회사는 새로 지은 빌딩에 있었다. 모리슨은 그 빌딩의 한 달 사무실
임대료가 아마 자신의 일년 연봉과 맞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리슨은 로
비에 들어가 사무실 안내판을 보고 나서 금연회사가 한층을 전부 사용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청난 돈이 들 텐데......
모리슨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을 나오자 카페트가
깔린 휴게실이 우아하게 끄며진 대기실로 이어지고 있었다. 대기실에는 커다
란 창문이 나 있어서 그 아래로 거리에서 사람들이 벌레 같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남자 셋과 여자 하나가 벽을 따라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
다. 모두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인 듯 했다. 모리슨은 책상으로 다가가
명함을 내밀면서 말했다.
"내 친구가 나한테 이걸 주었소. 내 대학 동창이지요."
안내원은 미소를 지으며 타자기에 양식 용지를 말아넣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리차드 모리슨이오."
찰칵, 찰카닥, 찰칵. 타이프 치는 소리는 그렇게 시끄럽지 않았다. IBM사 제
품이었다.
"주소는?"
"뉴욕, 클린톤, 메이플 레인 29번지요."
"기혼이십니까?"
"예."
"자녀는요?"
"하나요."
모리슨은 아들 앨빈을 생각하며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하나'라는 것은 사
실 틀린 말이었다. '반'이라는 것이 더 정확했다. 모리슨의 아들은 정신박약아
였으며, 뉴저지에 있는 특별학교에 가서 살고 있었다.
"누가 선생님께 여기 오시도록 권했지요, 모리슨씨?"
"옛 학교 친구요, 제임스 맥칸이라고 하지요."
"좋습니다. 좀 앉아 계시겠습니까? 좀 바쁜 날이라서 기다리셔야 하겠습니
다."
"괜찮습니다."
모리슨은 여자와 남자 사이에 앉았다. 여자는 짙은 푸른 색 정장을 입고 있
었다. 젊은 남자는 오늬 무늬 재킷과 유행하는 짧은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었
는데, 관리자 타입이었다. 모리슨은 담배갑을 꺼냈다.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재떨이가 없었다. 도로 담배갑을 집어넣었다. 담배를 좀 못 피운다고 안 될
것은 없었다. 여기서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다 지켜본 다음에 나가
면서 피워도 늦지 않았다. 정 오래 기다리게 한다면 여기서 그냥 피우다가
재를 이 고급스러운 양탄자 위에다 털 수도 있는 일이었다. 모리슨은 '타임
즈'를 들고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한 15분쯤을 기다렸다. 모리슨은 푸른 색 정장을 입은 여인 다음 순서였다.
그의 몸속의 니코틴 센터에서는 지금 니코틴을 보내달라고 난리였다. 모리슨
뒤에 온 사람도 담배갑을 꺼냈다가 재떨이가 없는 것을 보고 도로 집어넣었
다. 모리슨은 그 사람이 약간 죄의식을 느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
을 보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마침내 안내원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들어가세요, 모리슨씨."
모리슨은 접수대 뒤편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안은 조명이 흐려 어
둡게 느껴지는 복도였다. 꼭 가발처럼 보이는 백발의 건장한 사내가 손을 내
밀어 악수를 하면서 상냥하게 웃었다.
"나를 따라오십시오, 모리슨씨."
그 사내는 모리슨을 데리고 아무 표지도 없는 문을 여러 개 지나갔다. 문들
은 다 닫혀 있었다. 사내는 복도를 반쯤 내려가더니 그 문 가운데 하나를 열
쇠로 열었다. 문 안에는 꾸미지 않은 작은 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벽에는 구
명으로 뚫린 코르크 판들이 붙어 있었다. 책상 하나와 양편에 놓인 의자가
유일한 가구였다. 책상 뒤의 벽에는 작은 직사각형의 창문같이 보이는 것이
있었지만, 짧은 녹색 커튼이 그것을 가리고 있었다. 모리슨의 왼쪽 벽에는 그
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강철 색깔 같은, 회색 머리를 가진 키가 큰 사람이었
다. 그의 손에는 종이가 한 장 들려 있었다.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건장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믹 도나티라고 합니다. 모리슨 씨가 우리 프로그램을 따르겠다고 결
정하는 경우, 내가 모리슨 씨를 담당하게 됩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모리슨이 말했다. 모리슨은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앉으시지요."
도나티는 아까 안내원이 기재한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 놓더니, 서랍에서
또 하나의 서류 양식을 꺼냈다. 그러고 나서 거침없이 모리슨의 눈을 마주보
았다.
"담배를 끊고 싶으십니까?"
모리슨은 목을 가다듬고 다리를 꼬았다. 좀 모호하게 대답할 수 있는 방법
을 생각해 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예."
"여기에 서명하시겠습니까?"
도나티가 모리슨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모리슨은 빠르게 그 서류를 훑어보
았다.
"아래 서명한 자는 방법이나 기술을 누설하지 않겠으며...."
"좋습니다."
모리슨이 대답하자, 도나티가 펜을 넘겨주었다. 모리슨이 자기 이름을 긁적
거리자 도나티가 그 아래 서명을 했다. 잠시 후 그 서류는 다시 책상 서람으
로 들어갔다. 그는 냉소적으로 혼자 생각했다.
'내가 서약을 했단 말이지.'
그는 전에도 그런 서약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틀 동안 담배를 안 피
운 것이 최고 기록이었다.
도나티가 말했다.
"좋습니다. 여기에서 일하는 우리들은 선전 문구로 선생을 괴롭히지 않습니
다, 모리슨시. 건강이나 비용에 대한 질문도 없고, 굳이 사교적인 분위기를
만들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선생이 왜 담배를 끊으려 하는지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실용주의자들입니다."
"좋습니다."
모리슨은 별 생각없이 대꾸했다.
"우리는 약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 데일 카네기 같은 사람을 불러 선생에
게 설교하지도 않습니다. 별다른 식이요법을 권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선생
이 일년 동안 담배를끊을 때까지는 돈도 안 받습니다."
"맙소사."
"맥칸 씨가 말씀드리지 않던가요?"
"아니오."
"아, 그런데 맥칸씨는 어떠십니까? 잘 지내십니까?"
"자 ㄹ지냅니다."
"잘 됐군요. 아주 잘 됐습니다. 자, 이제 몇가지 질문을 좀 하겠습니다, 모리
슨씨. 이 질문들은 약간 개인적인 것이지만, 선생이 하신 답변에 대해서는 철
저히 비밀을 지켜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예?"
모리슨은 대답하는 듯 묻는 듯 애매하게 대꾸했다.
"부인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러신다 모리슨입니다. 처녀 ㄸ 이름은 램지구요."
"선생은 부인을 사랑하십니까?"
모리슨은 고개를 들고 도나티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도나티는 온화한 표정
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 물론입니다."
"결혼 생활에 뭐 문제는 없었습니까? 예를 들어 별거라든가........"
"그게 담배 끊는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모리슨이 되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가 의도했던 것보다 더 화나게 들렸다.
모리슨은 정말로 지금 이 순간 담배가 절실했다.
"아주 큰 관계가 있지요. 자, 나와 함께 한번 얘길 해봅시다."
"없습니다. 그런 건 없습니다."
사실 최근 들어아내와의 관꼐에서 약간 갈등이 생겨나고 있었다.
"자녀가 하나 뿐이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앨빈이라고 하죠.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어느 학교입니까?"
모리슨은 화난 얼굴로 말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좋습니다."
도나티는 선선히 대답했다. 도나티는 모리슨을 향해 자기는 아무런 무장도
안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선생이 하고 싶은 질문에 대해서는 내일 첫 치료 때 답변해 드리겠습니
다."
"좋습니다."
모리슨은 대답하며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 한 시간 동안 담배를 안피우셨
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모리슨은 거짓말을 했다.
"참 잘됐군요!"
도나티가 탄성을 질렀다. 도나티는 책상으 ㄹ돌아나와 문을 열면서 말했다.
"오늘 밤에는 담배를 즐기십시오. 내일부터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될
테니까요."
"정말입니까?"
"모리슨씨, 장담합니다."
도나티가 엄숙하게 말했다.
다음날 오후 세시 정작, 모리슨은 금연 회사의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모리
슨은 하루종일 안내원이 지정해준 약속을 그냥 넘길까, 아니면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면서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지킬 것인가 고민했었
다.
결국 지미 맥칸이 한 말, 그것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는 말 때
문에 모리슨은 약속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내 인생도 바뀔 것인지 혹시 알
아?, 그리고 사실 모리슨은 금연회사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모리슨은 엘리
베이터를 타기 전에 담배를 필터까지 타도록 한 대 피웠다. 만일 이것이 마
지막 담배라면 이 얼마나 악몽 같은 일일가. 그러나 담배 맛은 아주 나빴다.
이번에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전번보다 짧았다. 안내원이 들어가라
고 해서 들어가니 도나티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나티는 손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모리슨한테는 그 미소가 아주 호전적으로 보였다. 모리슨은
약간 긴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담배 생각이 났다.
"자, 갑시다."
도나티는 말하고 나서 전번의 작은 방을 향하여 앞서 걸어나갔다. 방안에
들어가서 도나티는 전번처럼 책상 뒤의 의자에 앉았고, 모리슨은 맞은 편에
앉았다.
도나티가 입을 열었다.
"다시 오셔서 매우 기쁩니다. 많은 분들이 첫 번째 면담 이후에 다시는 나
타나지 않지요. 아마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자기가 실제로는 그렇게 담
배를 끊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겠지요. 하여간 선생과 함
께 일을 하게 되서 기쁩니다."
"치료는 언제 시작합니까?"
이렇게 물어보면서 모리슨은 치료 방식이 최면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틀림없어, 최면술일 거야.'
"아, 이미 시작한 것입니다. 아까 복도에서 악수를 할 때 시작한 것이지요.
지금 담배 가지고 계십니까, 모리슨 씨?"
"예."
"이리 주시겠습니까?"
모리슨은 어깨를 으쓱하며 도나티에게 담배갑을 주면서 중얼거렸다.
'저 담배갑에야 담배가 두 개빈가, 세 개비밖에 안 남았으니까, 뭐.'
도나티는 담배를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러더니 모리슨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도나티는 주먹으로 담배갑을 쾅
쾅 내리쳤다. 담배갑은 찌그러지더니 곧 납작해졌다. 끊어진 담배 끝이 밖으
로 튀어나왔다. 담배 가루가 흩어졌다. 그렇게 세게 내리치면서도 도나티는
얼굴에서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모리슨은 그 모습을 보고 섬찟함을 느꼈
다.
'아마 나한테 바로 이런 섬찟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려고 하는 행동인 모양
이군.'
마침내 도나티는 두드리는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고 나서 형편없이 찌그러
져버린 담배갑을 집어들어 쓰레기통에 던지면서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한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선생은 모르실 겁니다. 이
일에 뛰어든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이 일은 아직도 즐겁습니다."
"하지만 치료로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 빌딩 아래 로비에 신문
가판대가 있더군요. 거기서는 온갖 종류의 담배를 다 팝니다."
모리슨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도나티는 그 말은 들은체도 안하고 손을
펴면서 딴 소리를 했다.
"선생이 말씁하신 아들, 앨빈 도즈 모리슨은 장애아르르 위한 페터슨 학교
에 다니고 있더군요. 선천적으로 두개골 손상증세고, 아이큐는 46, 교육 가능
한 지체아 범주에는 들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생 부인은......"
순가 ㄴ모리슨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놀라기도 하였고 화가 나기도 하였다.
"어떻게 그걸 알아냈꼬? 당신이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내 주변을 조사......"
도나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모리슨의 말을 끊었다.
"우린 선생에 대해 많은 것을 압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그 비밀은 철
저하게 지켜드리겠습니다."
"난 여기서 나가겠소."
모리슨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일어섰다.
"잠깐만 더 앉아계십시오."
모리슨은 도나티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그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
다. 어떻게 보면 즐거워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모리슨과 같은 반응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보아온 사람의 표정이었다.
"좋습니다. 하지마 ㄴ앉아 계시는 게 기분 좋은 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도나티는 의자 등받이로 등을 기댔다.
"물론입니다. 난 선생한테 우리가 실용주의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실용주의
자로서 우리는 니코틴 중독이 얼마나 치료하기 힘든가를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닙다. 담배의 경우, 끊었다 하더라도 재발하는 비율이 85퍼센트입니다.
헤로인 중독도 그것보다는 낮습니다. 따라서 니코틴 중독은 특별한 문제입니
다. 정말 특별합니다."
모리슨은 쓰레기통 안을 슬쩍 들여다 보았다. 그 중 한 개비는 비록 찌그러
지긴 했지만 아직 피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나티는 선량하게 웃으며 쓰레
기 통 안을 뒤져 그 담배마저 손가락으로 두 동강을 냈다.
"때때로 사람들은 교도서 안에서 일 주일마다 담배 배급하는 것을 없애야한
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제안은 늘 묵살됩니다. 실제로 어떤 주
에서는 그런 법률을 통과시켰는데, 그러자 교도소에서 격렬한 폭동이 일어났
다비다. 폭동입니다, 모리슨씨. 상상해 보십시오."
"난 별로 놀랍지 않은데요."
"하지만 그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감옥에 갇힐 때는 그 사람의
정상적 성생활, 술, 정치, 움직이는 자유가 다 박탈됩니다. 그러나 폭동은 일
어나지 않습니다. 아니 감옥의 숫자에 비하면 거으 ㅣ없는 편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지요. 하지만 담배를 뺐었더니, 쾅!, 폭동이 일어났단 말입니다."
도나티는 "쾅"을 강조하기 위해 책상을 쳤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했다.
"1차서계대전 당시 독일 후방에서는 아무도 담배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독일 귀족들이 하수구에서 꽁초를 줍는 것은 보기 흔한 광경이었답
니다. 2차세계대전 대는 담배를 피울 수 없게 된 많은 미국 여인들이 담배
대신 파이프를 피우게 되었답니다. 진정한 실용주의자에게느 ㄴ아주 매력적
이고 도전해 볼 만한 문제 아닙니까, 모리슨 씨?"
"치료로 돌아갈까요?"
"잠깐만 이리 와보시겠습니까?"
도나티는 일어나서 모리슨도 어제 본 적이 있는 그 녹색 커튼 쪽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는 커튼을걷었다. 그러자 네모난 유리창이 드러나고, 그 안으로
빈방이 들여다 보였다. 그러나, 완전히 빈방은 아니었다. 바닥에서 토끼 한
마리가 접시에 놓인 작은 알약들을 먹고 있었다.
"귀여운 토끼군요."
모리슨이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 토끼를 보십시오."
도나티는 창가에 있는 단추를 눌렀다. 토끼는 먹는 것을 멈추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더 높이 뒤어오르는 것 같았
다. 토끼의 털이 마치 가시처럼 사방으로 뻗쳤다. 눈빛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만두시오! 저 토끼를 감전시켜 죽이려는거요?"
도나티는 단추에서 손을 뗐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닥에는 아주 약한 전기가 흐르고 있을 뿐입니다.
모리슨 씨, 토끼를 보십시오!"
토끼는 알약이 든 접시로부터 한 10피트쯤 떨어진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토끼의 코가 벌름거렸다. 갑자기 토끼는 아예 구석으로 뛰어가버렸다.
"토끼가 저걸 먹는 동안 반복해서 자극을 받으면, 토끼는 곧 그 자극과 음
식을 연관시키게 됩니다. 먹으면 고통이 온다고 생각하는거죠. 다라서 토끼는
안 먹게 됩니다. 충격을 몇번 더 주면, 토끼는 음식을 앞에 놓고도 굶어 죽습
니다. 이것을 혐오 훈련이라고 부릅니다."
모리슨의 머리 속에 갑자기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모리슨은 문
쪽으로 물러나며 말했다.
"고맙지만 난 사양하겠습니다."
"기다리십시오, 모리슨 씨."
그러나 모리슨은 멈추지 않았다. 모리슨은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손잡
이느 ㄴ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문을 여시오."
"모리슨 씨, 잠깐만 앉아계시면...."
"이 문이나 어서 여시어. 아니면 당신 앞에다 경찰을 불러다 놓겠소."
"앉아!"
갑자기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모리슨은 도나티를 바라보았다.
모리슨의 갈색 눈은 겁에 질려 눈동자가 흐려져 있었다.
'맙소사, 여기서 정신병자와 함께 갇혀 있게 되었구나.'
모리슨은 입술을 핥았다. 그는 평생 그 어느 때보다도 담배가 절실하게 피
우고 싶었다.
도나티가 입을 열었다.
"치료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죠."
모리슨도 도나티의 태도에 맞추어 차분하게 말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하시나 본데, 난 치료를 받고 싶지 않다는 겁
니다. 난 치료를 안 받기로 결정했어요."
"아닙니다, 모리슨 씨. 이해 못하시는 건 선생입니다. 선생한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내가 선생한테 치료가 이미 시작됐다고 말씀ㄷ렸을 때, 나는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린 겁니다. 난 이제 선생이 그 정도는 아실 걸로 생각했는데
요."
"당신 미쳤소?"
"아닙니다. 난 실용주의자일 뿐입니다. 이제 치료에 대해 다 말씀드리겠습니
다."
"좋소, 다만 한가지만 알아두시오. 난 여기서 나가느닉ㄹ로 담배 다섯 갑을
사서 결찰서까지 가는 동안 그걸 다 피울 거요."
모리슨은 문득 자기가 업지 손가락을 물고 그것을 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그는 얼른 손을 내렸다.
"좋으실 때로. 하지만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시면 마음이 바뀌실 거라고 생각
합니다."
모리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깎지를 꼈다.
"치료의 첫 한달 동안, 우리 직원들이 선생을 항상 감시할 겁니다. 선생이
그 가운데 몇 명은 보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다 보실 수는 없을 겁니다.
어쨌든 그들은 언제나 선생과 함께 있습니다. 언제나. 만일 그들 눈에 선생이
담배를 피우는 게 보이면, 난 그들로부터 연락을 받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나를 이리 불러다저 토끼처럼 만들겠다는 말이군요."
모리슨이 말했다. 모리슨은 자기 말이 차갑고 냉소적으로 들리도록 하려고
애를 썼지만, 갑자기 끔찍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건 악몽이야...
"아닙니다. 선생 부인이 토끼처럼 되는겁니다. 선생이 아니죠."
모리슨은 멍한 눈으로 도나티를 바라보았다. 도나티는 미소를 지었다.
"선생은 그냥 구경만 합니다."
도나티가 내보내 준 뒤에 모리슨은 완전히 정신이 멍한 생태에서 두 시간
동안 걸어다녔다. 전날처럼 날씨가 화창했지만, 모리슨은 그런 것을 느낄 여
유가 없었다. 괴물 같은 도나티의 웃는 얼굴이 다른 모든 것을 가리고 있었
기 때문이었다. 도나티는 이렇게 말했었다.
"선생은 실용적 문제가 실용적 해결책을 요구한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
다. 또한 우리가 선생의 가장 큰 관심사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을 ㄲ달으셔
야 합니다."
도나티 말에 따르면 금연 회사는 일종의 재단이었다. 벽에 걸린 초상화 주
인공이 시작한 비영리 조직이라는 것이다. 그 초상화 주인공은 몇 가지 가족
사업에서 아주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 사업이란, 대체로 슬퍼트 머신과
같은 도박이나 뉴욕과 터키 사이의 암거래 같은 것들이었따. 초상화의 주인
공인 모트 '세 손가락' 미넬리는 골초였다. 하루에 담배 세 갑을 피웠다. 초상
화에서 그가 들고 있는 서류는 의사의 진단서였다. 폐암이라는 진단이었다.
모트는 죽기 직전에 자기 돈으로 금연 회사를 설립한 뒤, 1970년에 죽었다.
도나티는 말했었다.
"우리는 가능한 한 회사를 파산 직전의 상태로 유지하려고 합니다. 돈보다
는 사람들을 돕는 데 더 관심이 있으니까요. 물론 그렇게 되면 세금 문제도
원활해지죠."
치료는 아주 간단했다. 한번 담배를 피면 아네 신디가 그 '토끼의 방'으로
들어간다. 두 번 피면 모리슨 자신이 그 방으로 들어간다. 세 번 피면 둘이
함께 그 방으로 들어간다. 네 번까지 핀다면, 그것은 상호 협조 관계에서 심
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간주하여, 좀더 단호한 방법이 취해진다. 금연 회
사의 직원이 아들 앨빈의 학교로 가서 앨빈을 때리는 것이다.
도나티는 웃으면서 말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그 아이한테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누가 설
명해 주어도 아이는 이해 못할 것입니다. 아이는 그저 아빠가 나쁘기 때문에
자기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계
속 겁에 질려 있을 것이구요."
"나쁜 새끼."
모리슨이 힘없이 말했다. 모리슨의 눈에서 눈물이 막 쏟아지려고 했다.
"이 지저분한 새끼."
도나티는 동정한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
다. 우리 고객 가운데 40퍼센트는 전혀 아무런 징계를 가할 필요도 없었습니
다. 그리고 오직 10퍼센트만이 세가지 이상의 벌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 정도
면 신뢰할 만한 숫자 아닙니까?"
모르신한테는 그것이 전혀 신뢰할 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더욱 겁에 질리게
하는 숫자일 뿐이었다.
"물론 선생이 다섯 번 피우면......."
"어떻게 한단 얘기요?"
도나티는 환하게 웃었다.
"선생과 선생 부인이 각각 방에 한번씩 들어가고, 아들은 또 한번 맞고, 또
부인도 맞습니다."
이제 이성적 사고의 한계점을 넘어버린 모리슨은 도나티를 향해 돌진해 들
어갔다. 그러나 도나티는 매우 편한 자세로 앉아 있던 사람 치고는 놀랄 정
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도나티는 의자를 뒤로 밀어젖히면서 일어나더니 책상
위로 넘어와 모리슨의 배를 걷어찼다. 모리슨은 헉헉거리고 기침을 하며 뒤
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도나티는 여전히 상냥하게 말했다.
"앉으시지요, 모리슨 씨. 이성적인 사람답게 이야기를 합시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있게 되자, 모리슨은 도나티가 시키는 대로 했다. 아무리
무서운 악몽이라도 언젠가는 끝나겠거니 생각하고서.
도나티의 설명에 따르면 금연 회사에는 열 단계의 벌칙이 있다고 했다.
6,7,8 단계는 토끼의 방에 더 자주 들어가게(전기도 더 세지면서), 또 더 심하
게 맞는 것이었다. 9단계에 이르면 아들의 팔이 부러진다.
"얼 번째는 뭡니까?"
모리슨은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도나티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우리도 포기합니다, 모리슨 씨. 그렇게 된다면 선생은 재활 불가능
자 2퍼센트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포기합니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도나티는 서랍을 열더니 소음기가 달린 45구경 권총을 책상 위에 올려 놓았
다. 그는 모리슨의 눈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 2퍼센트의 재활 불가능자들조차도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합니
다. 장담합니다."
금요일 밤의 영화는신디가 좋아하는 '불리트'였다. 그러나 한시간 동안
이나 모리슨이 안정부절못하면서 투덜대는 바람에 신디는 영화에 정신
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선전이 나오는 동안에 신디가 물었다.
"당신 무슨 일 있어요?"
모리슨은 툴툴거렸다.
"없어... 아니 모든 게 문제야. 나 담배 끊었어."
신디가 웃었다.
"언제부터요? 오 분 전부터?"
오늘 오후 세시부터."
"그 때부터 정말 담배를 한 대도 안 피웠단 말예요?"
"안 피웠어."
모리슨은 말하고 나서 엄지손가락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피부가 벗겨
지면서 생살이 드러나고 있었다.
"정말 멋져요! 뭐 때문에 끊으신 거예요?"
"당신. 그리고..... 그리고 앨빈."
신디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다시 영화가 계속되었지만 신디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딕은 지체아인 아들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거의 없었
다. 신디는 모리슨 가까이로 다가와서 빈 재떨이를 본 다음, 모리슨의
눈을 보았다.
"당신 정말 끊으려고 하시는 거예요, 딕?"
"정말야."
그 다음 말은 모리슨의 머리 속에서 이어졌다.
'내가 경찰을 부르면, 동네 깡패들이 몰려와서 당신 얼굴을 짖이겨 놓
겠대, 신디...'
"정말 기뻐요. 설사 당신이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앨빈하고 나는
당신의 그 생각만으로도 고마워할 거예요, 딕."
"아냐, 난 성공할 거야."
모리슨은 자기 배를 걷어차던 도나티의 냉정한 살인자 같은 표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모리슨은 그날 밤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계속 잠이 들었다 깼다 했던
것이다. 세시쯤에는 완전히 잠이 달아나 버렸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그의 욕구는 마치 심하지 않은 열병을 같았다. 모리슨은 아래층 자기
서재로 내려갔다. 서재는 집안의 중앙에 있었다. 창문도 없었다. 책상
맨 윗 서랍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자, 너무나 기쁘게도 담배갑이 있었
다. 그는 주위를 둘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첫 한달간은 끊임없는 감시를 한다고 도나티는 말했었다. 그 다음 두
달간은 하루에 열 여덟 시간이다. 그러나 어느 열 여덟 시간일지는 결
코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넉 달째는 대 부분의 고객들이 다시 담
배에 손을 대고 싶어하는 때이기 때문에 다시 스물 네 시간 감시로 들
어간다. 그 다음 여덟 달 동안은 매일 띠엄띠엄 열 두 시간씩 감시한
다. 그런 다음에는? 고객이 살아 있는 동안 아무 때나 골라서 감시한
다.
'살아 있는 동안!'
도나티는 중얼 거렸다.
"우리는 격월로 선생을 감시할 수동 습니다. 아니면 격일로 할 수도
있지요. 아니면 지금부터 2년 뒤에 계속 일부일간 감시할 수도 있죠.
중요한 점은 선생이 결코 감시 받는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란 점입니다.
따라서 만일 담배를 피우신다면 주사위로 도박을 하시는 것이나 비슷
한 기분이 들 겁니다. '그 자들이 지금 보고 있을까? 지금 그 자들이
내 아내를 데러갔을까? 아니면 당장 내 아들찬테로 사람을 보냈을까?'
어떻습니까, 근사하죠? 그런데도 몰래 담배를 피우신다면 그 맛을 고약
할 겁니다. 마치 선생 아들의 피를 빠는 기분이겠죠."
하지만 그 자들이 지금은 보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칠흙같은 밤
중에, 내 성재에 나 혼자 있는데... 집안은 무덤처럼 조용했다.
모리슨은 거의 2분 동안 담배갑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눈길을 돌
릴 수가 없었다. 그런 다음 그는 서재 문으로 다가가 텅 빈 홀을 바라
보고는 다시 돌아와 얼마 동안 더 담배를 바라보았다. 끔찍한 생각이
떠올랐다. 앞으로도 살아갈 날은 많이 남아 있는데, 담배를 한 깨비도
피울 수 없다니. 손가락 사이에서 끊임없이 피러오르는 담배 연기가 없
다면 어떻게 짜증나는 고객에게 차트와 서류를 놓고 웃는 얼굴로 설명
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담배가 없다면 어떻게 신디의 쉼없이 떠들어대
는 잔소리를 견디어낼 수 있단 말인가?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읽을 때
담배 한 대가 없다면 어떻게 아침에 일어나 새 날을 맞을 수 있단 말
인가?
모리슨은 자기가 이런 일에 발을 디딘 데에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부
었다. 또 도나티에게도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누그보다도 지미 맥칸
을 저주했다. 어떻게 그 자식이 이럴 수가 있어? 그 개자식은 이런 걸
다 알고 있었잖아. 모리슨의 손은 배반자 지미 맥칸의 멱살을 잡고 싶
은 욕망에 부르르 떨렸다.
모리슨은 다시 살그머니 서재를 바라보았다. 그는 책상으로 다가가 담
배를 한 개비 집어 올렸다. 그는 그것을 가슴에 안고 어루만졌다. 그
옛날 신문 광고에 뭐라고 써있었더라? 매우 둥글고, 매우 단단하고, 매
우 알차게 말려진...... 세상에 그것보다 더 진실한 말을 없었어. 그는 담
배를 입에 물었다가, 문득 동작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작은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뭘 들어올리는 희미한 소리
가 난 것 같은데? 아냐, 그럴 기 없어. 하지만....
머리 속에 끔찍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 토끼가 전기에 충격을 받아 미
친 듯이 방안을 뛰어 다니는 모습. 신디가 그 방에서........
그래서 그는 필시적으로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가서 작은 방 문을 열어보면 되지 않겠냐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발견할지도 모르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하고 있었
다. 모리슨은 담배를 포기하고 침대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랫동안 잠들
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엊저녁에 언짢았던 기분과는 상관없이 식욕은 좋
았다. 잠시 망설인 뒤에 그는 평소에 먹던 콘플레이크에 달걀까지 깨넣
어서 먹었다. 그가 언짢은 표정으로 그릇을 닦고 있을 때, 신디가 가운
차림으로 아래층에 내려왔다.
"리차드 모리슨! 당신은 헥토르가 강아지였을 때 이래로 아침에 달걀
을 먹은 적이 없었잖아요."
모리슨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신디의 그 '헥토르가 강아지였을 때'
란 말이, 그녀가 자주 하는 '난 돼지에게라도 미소를 지으며 키스를 하
겠어요'라는 말 못지 않게 어리석은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여
간 그녀는 기뻐하고 있었다.
"담배 피웠어요?"
신디가 오렌지 쥬스를 따르면서 물었다.
"아니."
"오늘 정오면 다시 손을 댈 거예요."
신디가 거만한 표정으로 주장했다. 모리슨은 화를 벌컥 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게 날 도와주는 짓이야! 당신이나, 아니면 누구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은, 모드 생각하는 것이...... 아, 미안해."
모리슨은 신디가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신디는 좀 놀랐다는
표정으로 모리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정말 진지한 마음으로 담배를 끊을 작정으로 하고 있군요. 정말
쯚을 생각이에요."
"내게해도 좋아."
'당신은 내가 지금 얼마나 진지한지 모를거야. 앞으로도 모르기를 바
래.'
신디가 그에게 다가서면서 말했다.
"불쌍한 사람. 당신은 다시 데워놓은 시체 같은 얼굴이에요. 하지만
난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모리슨은 그녀를 꼭 껴안았다.
10월에서 11월 사이의 리차드 모리슨의 생활의 몇 장면....
모리슨은 라킨 스투디오에서 일하는 한 친구와 잭 뎀시의 바에 함께
앉아있다. 그 친구가 담배를 권한다. 모리슨은 술잔을 줜 손에 힘을 주
며 말한다.
"난 담배 끊었어."
친구는 웃으며 말한다.
"일 주일이나 갈까?"
모리슨은 기차를 기다리며 '타임즈'지를 보다가 신문 너머로 파란 양
복을 입은 한 젊은이를 바라본다. 요사이 모리슨은 ㄸ로 장소는 다르긴
하지만 그 젊은이를 거의 매일 아침 보곤 한다. 모리슨이 고객을 만나
고 있던 온드 가게에서도 보았다. 모리슨이 샘 쿠크의 레코드를 찾던
샘 구디 가게에서 그 젊은이는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한번은 동네
골프 코스에서 골프를 치던 모리슨의 패거리 뒤의 패거리들 속에 그
젊은이가 끼어 있었다.
모리슨은 파티에서 감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취한다. 하지
만 진짜로 한 대 피울 만큼 취하지는 않는다.
모리슨은 아들을 찾아가서 커다란 공을 선물한다. 꽉 쥐면 삑소리가
나는 공이다. 이들은 침을 흘리며 기쁜에 겨워 입을 맞춘다. 전처럼 그
모습이 역겹지는 않다. 모리슨은 아들을 꼭 껴안는다. 그러면서 도나티
와 같은 사람들이 자기보다 먼저 냉소적으로 깨달았던 것을 진심으로
깨닫는다. 도나티는 말했다. 사랑은 가장 유해한 약이다. 낭만주의자들
은 사랑의 존재를 놓고 논쟁한다. 하지만 실용주의자들은 사랑을 받아
들이고 사랑을 활용한다.
모리슨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육체적 욕구를 점차 잃어간다. 하지만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싶은 심리적 욕구, 혹은 뭔가를 입에 넣고 싶은
욕구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기침할 때 먹는 사창, 알약, 이
쑤시개 등을 입에 넣는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가 못하다.
마지막 장면. 모리슨은 차를 몰고 가다 미들타운 터널에서 교통 체증
의 한가운데 들어서 있었다. 터널 안이라 깜깜했다. 차들은 크랙션을
울려댔고,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길은 금방 뚫릴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모리슨은 차 안의 장갑 넣는 서랍을 열어보다 담배가 반쯤
들어 있는 담배갑을 발견했다. 그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담배 한 개
비를 뽑아냈다. 차에 설치된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설사 무슨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이건 신디의 잘못이야. 담배는 몽땅
내버리라고 말했잖아.'
한 모금 빨자 모리슨은 기침을 하며 연기를 토해냈다. 두 모금 빨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세 모금 빨자 머리가 핑 돌았다. '맛이 없군.'
그러다 문득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 '맙소사, 지금 내가 뭘하고 있
는거지?'
뒤에서 크랙션이 빵빵 울려댔다. 앞에서 다시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모리슨은 재털이에 담배를 눌러 끄고, 앞 창문 두 개를 다 열
었다. 공기구멍도 열어놓고 팬도 돌렸다. 마치 화장실에서 처음 담배를
핀 아이같은 모습이었다.
모리슨은 급히 차를 출발시켜 앞차들을 따라잡아 집으로 돌아왔다.
"신디, 나 왔어."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신디? 어디 있어?"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신디야?"
"여보세요, 모리슨 씨.
도나티의 목소리였다. 듣기 유쾌할 정도로 활발하면서도 사무적인 목
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좀 볼일이 있는데, 5시면 괜찮습니까?"
"내 아내를 데리고 있소?"
"예, 물론이지요."
도나티는 껄걸 웃었다.
모리슨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봐요, 신디를 보내줘요. 다신 그런 일이 없을 거요. 잠시 실수한 거
요. 단순한 실수였단 말입니다. 세 모금밖에 안 빨았어요. 정말이지 맛
도 아주 나빴단 말입니다!"
"창피한 노릇입니다. 5시에 만나뵙도록 하지요."
모리슨은 거의 눈물을 흘릴 지경이 되어 흐느꼈다.
"제발...제발....."
그러나 이미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오후 5시, 대기실에는 안내원밖에 없었다. 안내원은 눈을 깜빡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모리슨의 창백하고 엉망이 된 모습을 무시해 버리는 미
소였다. 안내원은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도나티 씨? 모리슨 씨가 오셨는데요."
안내원은 모리슨에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들어가세요."
도나티는 아무런 표지가 없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곁에는
스마일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사내가 38구경 권총을 들고 서
있었다. 고릴라 같은 몸집의 사내였다.
모리슨은 도나티에게 말했다.
"이봐요, 문제를 달리 해결할 수도 있지 않겠소? 내 , 돈을 드리리다.
내가....."
"시끄러."
스마일 티셔츠를 입은 사내가 말했다. 도나티가 그 뒤를 이었다.
"뵙게 되서 기쁩니다. 하지만 이런 안 좋은 조건에서 만나게 된 것은
유감입니다. 나와 함께 가시지요. 가능한 한 간략하게 끝내도록 합시다.
선생 부인이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는."
모리슨은 도나티에게 달려들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
다. 그러자 도나티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요, 이봐. 선생이 그러시면, 여기 정크라는 친구가 선생을 총으로
내려칠 것이오. 그리고 또 선생 부인은 변함없이 그 방에 들어가야 할
거요. 어느게 낫겠소?"
"지옥에서 썩을 놈."
모리슨의 욕설을 들은 도나티는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런 말을 들을 ㄸ다마 동전 한 푼씩을 모았으면, 지금쯤은 은
퇴해서 편히 살아도 될거요. 자, 교훈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모리슨 씨.
낭만주의자가 뭔가 좋은 일을 하려다 실패하면, 사람들은 그에게 상을
줍니다. 한데 실용주의자가 성공을 하면 사람들은 그에게 지옥에나 가
라고 욕을 해요. 자, 가실까요?"
정크가 총으로 재촉했다.
모리슨은 앞장 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멍한 느낌이었다. 조그만
녹색 커튼은 걷혀 있었다. 정크는 총대로 모리슨의 들을 쿡 찔렀다. 이
건 꼭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목격하는 것 같다고 모리슨은 생각
했다.
그는 창문 안을 들여가 보았다. 신디는 당황한 듯 주위르 ㄹ둘러보고
있었다. 모리슨이 비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신디! 신디, 이 자들이....."
"부인은 선생 말을 들을 수도 없고 선생을 볼수도 없소. 한 쪽에서만
보이는 유리지요. 자 빨리 끝냅시다. 정말 아까 선생이 하신 행동은
작은 실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30초면 충분할 거라고 생가합니다.
자, 정크?"
정크는 한손으로 단추를 누른 채 다른 한손으로는 여전히 모리슨 등
뒤에 총을 겨누고 있었다.
모리슨의 생애게서 가장 긴 30초였다.
30초가 지나자 도나티는 모리슨의 어ㄲ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포기하실 겁니까?"
"아니오, 포기 안 할 겁니다."
모리슨은 작은 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그는 이마를 유리창에 기대 있
었다. 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몸을 돌렸을 때 정크는 사라
지고 없었다.
"나와 함께 갑시다."
"어디를요?"
모리슨이 애처롭게 물었다.
"선생이 부인찬테 좀 설명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신디를 마주본단 말이오? 어떻게 내가 신디한테, 내
가...... 내가........."
"내 생각엔 선생이 놀라실 것 같습니다."
도나티가 말했다.
방에는 소파 하나밖에 없었다.
신디는 소파에 앉아 울고 있었다. 모리슨이 상냥하게 불렀다.
"신디?"
신디가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눈이 눈물 때문에 확대되어 보였다. 신
디가 속삭이듯 말했다.
"딕? 딕이예요? 오.... 오, 하나님....."
모리슨이 신디를 꼭 껴안았다. 신디가 모리슨의 가슴에 대고 말했다.
"두 남자가 집으로 들어왔어요. 처음에 난 그 사람들이 강도인 줄 알
았어요. 날 강간하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 눈을 가리고 어딘가로
데려가는데.... 그리고...... 너무 무서워요....."
"쉬........쉬......"
모리슨이 신디의 말을 막으려 하였다. 신디가 그를 올려다 보며 물었
다.
"그런데 왜? 왜 그 사람들이......."
"나 때문이야, 신디. 해줄 이야기가 있어...."
모리슨은 모든 이야기를 끝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당신은 날 미워하겠지? 당연한 일이야."
모리슨은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디는 두 손으로 모리슨의 얼굴
을 감싸 자기 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아니예요,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
모리슨은 놀라서 말없이 신디를 바라보았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예요. 이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이예요.
당신을 감옥에서 꺼내준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신디는 그에게 키스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집에 가도 되나요? 기분이 훨씬 나아졌어요. 아니,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아요."
일주일 뒤 저녁에 전화벨이 울렸다. 모리슨은 그것이 도나티의 전화라
는 것을 알자마자 말했다.
"당신네 아이들이 잘못 안 겁니다. 난 담배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어
요."
"우리도 압니다. 선생과 아야기할 것이 하나 남아 있어서 전화한 겁니
다. 내일 오후에 들러줄 수 있겠습니따?"
"혹시....."
"아니, 심각한 건 아닙니다. 그냥 관례적인 일입니다. 그건 그렇고, 승
진을 축하드립니다."
"아니, 어떻게 아셨소?"
"언제든 알 수 있지요."
도나티는 모호하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모리슨은 작은 방으로 들어서자 도나티가 말했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무도 해치지 않으니까요. 이쪽으
로 좀 오십시오."
모리슨은 몸무게를 다는 평범한 저울이 한 놓인 것을 보았다.
"이봐요, 난 몸무게가 좀 늘었소. 하지만...."
"압니다. 우리 고객 가운데 73퍼센트가 몸무게가 늘지요. 저울에 올라
서보십시오."
모리슨이 올라서자 바늘이 174파운드에 가서 멈추었다.
"좋습니다. 내려오십시오. 키가 얼마나 되시지요, 모리슨 씨?"
"5피트 7인치입니다."
"좋습니다. 어디 봅시다."
도나티는 가슴 호주머니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카드를 한 장 꺼내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 나쁜 편은 아니군요. 선생한테 불법적인 살빼기 약의 처방을 써
드리겠습니다. 조심해서 지시에 따라 복용하도록 하십시오. 선생의 몸무게의 최대 한계는...
어디보자... 182파운드로 정해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이 12월 1일이니까 매달 1일에
체중 검사를 받도록 하십시오. 꼭 그 날짜가 아니더라도 미리 연락만 주시면 관계 없습니
다."
"만일 182파운드를 넘으면요?"
도나티는 웃음을 흘렸다.
"사람을 보내서 선생 부인의 새끼손가락을 자를 것입니다. 자, 이쪽 문으로 나가시면 됩니
다, 모리슨 씨. 안녕히 가십시오."
여덟 달 후.
모리슨은 뎀시 바에서 라킨 스트디오에 있는 친구를 우연히 만난다. 모리슨의 몸무게는 신
디가 계체량이라고 부르는 167을 향해 내려가로 있었다. 모리슨은 일부일에 한번씩 몸무게
를 재보고 있으며, 지금은 회초리 같이 늘씬한 모습이다. 반면 라킨 스투디오의 친구는 뱃속
에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가 앉은 듯한 모습이다.
'우와, 어떻게 담배를 끊었나? 난 이 몹쓸 습관에 더욱 빨려들고 있는데...'
친구는 정말 혐오스럽다는 듯이 담배를 끄면서 술잔을 비워버린다.
모리슨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 친구를 바라보다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친구 쪽
으로 내민다.
"이 친구들이 내 인생을 바꾸어 좋았네."
열두달 후.
모리슨은 우편으로 계산서를 한 장 받았다.
금 연 회 사
46번가 동부 237번지
뉴 욕
1회 치료 $2500.00
상담자(빅터 도나티) $2500.00
전기 $ .50
총계(이 금액을 지불하세요) $5000.50
이런 개자식들! 모리슨은 화를 버럭 냈다. 이 자식들이 나한테 전기료까지 물렸어. 자기들
이 신디한테.....
"그냥 지불해요."
신디가 말하면서 모리슨에게 입을 맞추었다.
스무 달 후.
정말로 우연히 모리슨 부부는 헬렌 헤이스 극장에서 지미 맥칸 부부를 만났다. 곧 서로 소
개를 하였다. 지미는 아주 오래 전에 공항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 나아지진 않았지만, 그때만
큼 건강해 보였다. 모리슨은 지미의 아내를 처음보는 것이다. 지미의 아내는 예뻤다. 평범한
생김새이긴 했지만, 아주 커다란 행복감 때문에 얼굴이 황해져서 예뻐 보이는 것이었다.
지미의 아내가 손을 내밀었다. 모리슨은 악수를 했다. 그런데 모리슨의 손을 쥐 그녀의 손
이 어딘가 이상했다. 모리슨은 두 번째로 쥔 손을 흔들면서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이 없었던 것이다.
* END *
????? <당/신/의/마/음/을/갖/고/싶/어/요> ?????
? 패트리시아 A.매튜즈 ?
앨리스터 휴는 옛날을 그리워했다.옛것을 숭상하고 오래전의 것을 존중했다.종종
멍하니 앉아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는 레너다인 루 르 클레어를 사랑했던 것이다.
아니,그녀는 할머니가 아니다.천만의 말씀이다.대단히 아름다운 젊은 아가씨다.
앨리스터에게 있어서 그녀는 먼 옛날의 미인이 지니고 있던 모든 매력의 소유자였다.
그 아름다움은 드레스덴 도자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머리칼은 옅은 금발이고,
몸매는 아담하게 균형이 잡혀 있다.매일 오후 3시에 차를 마시고,충격을 받았을때는
자주 의식을 잃었다.
앨리스터는 일요일 오후마다 그녀를 방문했다.테라스에서 차를 마시고 고상한 잡담을
즐겼다.
꽃을 선물할 때도 있었다.언젠가는 레너다인이 구식 하프형 피아노로 연주한 <월광
소나타>에 깊이 감동해서 '그처럼 흰 상아의 손'이라는 제목의 14행 시를 지어서 그
녀에게 바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레너다인은 품위있게,그리고 조용히 그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 사이는 미뉴에트처럼 우아하게 진행되었고,앨리스터는 행복했다.그녀가 언젠
가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때야말로 오랜 세월에 걸친 미술품
수집이 정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어느 상쾌한 날 오후,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면서 앨리스터는 오늘이야말로 마음을 털
어 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바람은 부드럽고 공기는 뜰의 꽃 향기를 머금어서 향기로웠다.앨리스터는 레너다인의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않았다.
"레너다인."
녹색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앨리스터는 뜨겁게 말했다.
"레너다인,나는 당신을 사모하고 있습니다.부디 나의 아내가 되어서 나에게 영광을
가져다 주십시오.
"오오,앨리스터."
그녀는 감격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마음을 주실 날을 저는 오래 전부터 학수고대하고 있었어요."
"마음도,영혼도,목숨도 모두 당신의 발 아래 바치겠소."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고풍스러운 결혼식을 올리고,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조용한
결혼식을 올리고,그녀가 전 남편에게서 상속받은 옛날 저택에 살림을 차렸다.
레너다인은 여성에게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옛 저택은 사랑스러운
과거의 유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결점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레너다인이 남편의 취미
에 어떤 관심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애당초 수집가에게 자기 수집품 말고 다
른 수집품에 흥미를 느끼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주문일지도 모른다.그럼에도 불구하
고,한 가지 취미에 미친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지만,그렇게 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날,앨리스터가 말했다.
"레너다인,당신은 골동품에 흥미가 없는데 취미를 한 가지쯤 갖는 게 좋을 거요."
레너다인은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그가 항상 찬미하는 언제나 귀여운 그 미소였다.
"어머,제게도 취미는 있어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대답하더니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여성 특유의 변덕일 거라고 앨리스터는 생각했다.여성은 예측할 수 없는 창조물이니
까,그냥 내벼려 두자.
어느날, 앨리스터는 꽉 잠겨 있는 문을 발견했다.두꺼운 문은 튼튼하게 보강되어 있
었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그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물어보았다.
레너다인은 말을 얼버무렸다.
호기심만 자꾸 늘어날 뿐이었다.앨리스터는 캐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으나 호기심은 더욱 강해졌다.자물쇠를 부수고 그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레너다인과 하녀가 잠이 든 다음 재빨리 결행
하기로 했다.
그날 밤,앨리스터는 조금은 죄책감을 느껴서 여느 때 이상으로 상냥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그날 밤 따라 그녀는 몹시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이런.나의 귀여운 아가씨,어째서 오늘 밤은 그렇게 조용하오?"
"될 수 있으면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요,오늘 밤은 전남편의 기일이라서요."
하며 그녀는 레이스 손수건을 눈가에 대고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불쌍하게도!"
그녀의 전남편이 까닭모를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앨리
스터는 동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이해하오.당신이 전남편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오.나는 신경쓰지 않소.
자아,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서 자도록 해요."
레너다인은 품위있게 미소를 짓고 남편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한 다음 침실로 들어갔
다.
이것으로 그 비밀스런 방을 자유롭게 조사할 수가 있었다.앨리스터는 손전등은 싫어
서 양초를 들고 그 비밀 문으로 다가갔다.
손쉽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자물쇠는 굉장히 복잡하게 되어 있었다.한참 만에야 겨우
문을 열 수가 있었다.
앨리스터는 양초에 불을 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들어가고 나서 천천히 문을 닫았다.
희미한 양초의 불꽃은 희미하게 흔들리면서 을씨년스러운 검은 얼룩이 묻은 제단과
같은 돌덩어리와 선반위에 한 줄로 똑바로 늘어서 있는 기묘한 둥근 병을 비췄다.병
은 액체로 가득 차 있었고,그 한가운데 무엇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떠 있었다.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앨리스터는 촛불을 높이 쳐들고 병으로 다가갔다.
양초의 불빛이 위태롭게 흔들리고,누군가가 문을 연 듯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그러나
촛불이 꺼지기 전에 앨리스터는 병 속의 내용물을 똑똑히 보았다.
불이 꺼진 직후의 공포스런 암흑 속에서 앨리스터는 상쾌한 오후의 테라스에서 레너
다인이 한 말을 생각해 냈다.
"오오 앨리스터,당신이 마음(heart=심장)을 주실 날을 저는 오래 전부터 학수고대
하고 있었어요."
신의 은총
로렌스 트리트,찰스 M.프록
4월 3일
주디.
이곳에 온지도 벌써 만 1년이 되었소.당신 없이 살아온 지난 1년이 퍽 길게 느껴지는
구료.1년 동안,나는 고양이가 물을 피하듯이 성가신 일은 멀리하고 얌전한 모범수로
살았소.내년 4월이면 가석방이 될 거라고 하니,아이크 아저씨나 당신은 모내기 걱정
은 하지 말고 내가 돌아갈 때까지 참아주기 바라오.다만 염려되는 것은,당신에게서
소식이 두절된 것이오.어찌 된 일인지 무척 궁금하오.
주디,나는 차만 운전했을 뿐이지 다른 나쁜 짓은 안했소.그 놈들이 권총을 갖고 있었
다는 것도,그러한 흉계가 짜여져 있었다는 것도 몰랐소.그저 바에서 얼굴을 마주 대
했을 뿐 아는 사이도 아니었소.우연히 수다를 떨다가,내가 자랑삼아 하트레이 지방에
서 개조승용차의 레이서였다고 하고,차로 벽을 이쪽에서 올라가 저쪽으로 내리는 정
도의 솜씨는 언제든지 보여줄 수 있다고 말했소.그랬더니 그들은 그걸 보고 싶다고
말했소.
그들은 나에게 다음날 자기들을 은행까지 태워다 주고,돌아올 때는 길이 없는 뒷산을
차로 넘어주면 지금 당장 돈을 주겠다고 했소.그래서 얼마를 줄 거냐고 물었더니,그
액수가 지금 갚아 나가고 있는 은행융자 금액과 거의 맞먹는,질겁을 할 정도의 액수
였소.나는 그들이 은행에 많은 돈을 예금하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
는데,사실은 구좌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오.
그러니 나 같은 바보가 어디 또 있겠소? 하지만 운은 그리 나쁘지 않은가보오.그들과
같이 있었다면 나도 죽었을 테니까.하여간 나는 돈을 받고 그들을 마을에서 산까지
보내준다는 약속을 지킨 후 곧바로 당신에게 갔던 것이오.
아이크 아저씨는 라디오에서 뉴스를 듣는 순간,운전을 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안 듯
했소.그거야 경찰차보다 빨리 달리며,잘 빠져나갈 수 있는 운전사는 나 말고 없었을
테니까.나라면 멕시코까지도,아니 마음만 먹는다면 중국까지도 도망갈 수 있었을 테
니까.그들처럼 공항에서 당하면 끝장이지만.그러나 나는 받은 돈 때문에 일을 끝마치
고 집에 온 것이오.신문에 보도된 것처럼 그들이 5만 달러를 훔쳤는지,10만 달러를
훔쳤는지는 모르는 일이오.나는 밖에 세워 놓은 차에서 기다기고 있었기 때문에 본
것이라곤 당신에게 준 그 돈뿐이었소.아까도 말했지만,은행에서 훔친 돈이 아니라 그
전날 받은 것이었소.
보안관은 내게 훔친 돈이 어디에 있느냐고 다그쳤소.하기야 은행강도는 죽었고,어디
에서도 돈이 나오지 않으니 보안관으로선 의심할 곳이 나밖에 없었겠지.약간 차를 잘
몬다고 이런 쓸모없는 짓을 한 바보스런 농부는 나밖에 없을 거요.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있겠소? 당신에게 걱정만 끼칠 뿐이지.당신이 없으니 쓸쓸해서 못
견디겠소.면회는 언제 올 거요? 건강은? 또 아이크 아저씨는 어떻게 지내고 농사일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구료.
당신을 사랑하는 남편 월트.
주 형무소에서.
4월 10일.
월트.
편지 받아 보았어요.당신을 만나러 가지 못하는 것은 여비가 없어서예요.그리고 지금
은 무슨 일이든 저 혼자 해야 하니까요.아이크 아저씨는 다시 류머티스가 도져 누워
계세요.손더스 선생님은 봄이 무르익을 때까지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어요.5월이 되
어야 일어날 수 있다는 거죠.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하루 종일 잔소리를 하고 들들
볶아대요.언젠가 조지가 새 차로 드라이브를 하자기에 잠깐 농장 밖에 나가 기분전환
을 하려고 따라 나서는데 아저씨가 쫓아내려고 했어요.
조지는 무척 친절하게 대해 준답니다.당신이 없어 쓸쓸하지 않느냐고 묻기에,도움이
필요해도 옆에 아이크 아저씨 밖에 안 계셔서 쓸쓸하다고 했어요.조지는 내 말을 조
금 오해한 모양이에요.하지만 알아듣게 설명했죠.그후,나는 융자금을 갚지 않으면 농
장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니 은행 차장인 당신이 편의를 봐 달라고 했어요.생각해
본다고 하더군요.아직 아무 언질이 없지만.그런데 난 잠깐이라도 아이크 아저씨와 떨
어져 있고 싶어요.조지가 읍내 새 식당에 데려가서 식사를 시켜주었을 때에는 정말
살 것 같더군요.
월트,당신도 은행가였으면 좋았을 거예요.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 주디.
하트레이 무료 배달구 2호.
4월 15일
주디.
당신이 수고하는 건 정말 잘 알고 있소.게다가 아이크 아저씨까지 보살펴야 하니 정
말 고생이 많구려.아저씨는 기분이 좋을 때도 화를 잘 내시는데 몸이 불편하시니 오
죽하겠소.아마 성인군자라도 참기가 어려울 것이오.그렇지만 주디,참고 기다리면 주
님이 살펴주실 거요.내가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오.
그리고 조지한테 부탁한 상환 지연건,이런 문제는 종이에 써두는 것이 좋소.또,혹시
조지를 만난다면 루시 왓킨스라는 여자를 아느냐고 물어 보시오.그 이야기는 여기
같이 있는 어니 테일러한테 들었소.어니는 헌 편지를 받고 팔았는데,우리 집에 소 한
마리나 밀 한 부셀이 있으면 그걸 받고서 편지를 팔겠다고 했소.
우리 두 사람은 이런 데 들어오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었소.그런 점에서도 어니와 나
는 마음이 잘 맞는다오.그래서 어니는 조지가 왓킨스에게 보낸 편지 이야기를 했소.
그러니 이번에 조지를 만나면 꼭 그 이야기를 해보시오.
월트.
주 형무소에서.
4월 22일.
월트.
조지가 또 식당에 데려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어요.당신이 편지에 쓴 대로 루
시 왓킨스 이야기도 했는데,다음날 당장 은행에서 상환 연기를 허가한다는 편지가 왔
더군요.그러나 이것도 소용 없어요.왜냐하면 그 다음번 조지와 외출했을 때,아이크
아저씨가 당나귀에 먹이를 주다가 이 사실을 엿들어 버렸거든요.그래서 힘이 났는지
갑자기 트랙터를 타고 일을 하게 되었는데 서쪽 큰 도랑에 빠져 버렸어요.아이크 아
저씨는 두세 군데 상처가 났지만 트랙터는 엉망이 되었어요.그러니 가을이 된들 무슨
수로 수확을 하며 빚을 갚겠어요?
나는 이제 지쳤어요,월트.지쳐서 아무것도 할 기력이 없군요.주님이 살펴 주신다고
하였지만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도와주시는 거죠,네?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 주디.
하트레이 무료 배달구 2호.
4월 28일.
주디.
전에도 말했지만 어떻게든 참아야 하오.꾹 참고 있으면 반드시 주님이 살펴주실 것이
오.꿈속에 주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남쪽 밭에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 묻혀 있
다고 하였소.그러니 아이크 아저씨더러 류머티스 같은 건 털어 버리라고 말해 주오.
나머지 형기는 이제 1년이오.형기가 끝나면 남쪽 밭에 묻혀 있는 그것을 파내면 되니
까 앞으로 무슨 걱정이 있겠소?
당신을 사랑하는 남편 월트.
주 형무소에서.
5월 4일
월트.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하여튼 있었던 그대로를 쓰겠어요.아시겠지만 당신
이 끌려가고부터는 아이크 아저씨는 법이라면 이를 갈지요.그런데 어제 보안관이 부
하 여섯 명을 데리고 들이닥쳤지 뭐예요.화가 난 아이크 아저씨는 그들을 쫓으려고
침대에서 내려와 온 방을 다 뒤졌지요.그러나 권총은 내가 감춰놓아서 끝내 찾지 못
하고 그냥 소리를 지르고 욕을 퍼부어대니까 그들이 잡아 묶어 버렸지요.그들과 옥신
각신하는 바람에 몸이 풀려 아이크 아저씨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어요.그런데 그들이
뭣 때문에 왔고,무엇을 하려고 사람들을 데려왔는지 통 모르겠어요.
월트,그들은 당신이 말한 남쪽 밭으로 가서 하루종일 땅을 팠어요.그리고 다음날도
와서 밭 전체를 구석구석 파헤친 후,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화를 내며 투덜거리더군요.
내가 하도 꼬치꼬치 캐물으니까 그 중 한 사람이 당신이 있는 형무소에서 왔다고 하
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당신이 내게 보내는 편지를 검열하다가 남쪽 밭에
무엇이 묻혀 있다고 쓰여 있기에 그걸 찾으려고 파헤쳤다는 거예요.
월트,왜 당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군요.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 주디.
하트레이 무료 배달구 2호.
5월 7일
주디.
자,여보,빨리 모내기를 시작하시오.
당신을 사랑하는 남편 월트.
주 형무소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아이작 로먼나는 지금 비상계단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그 자가 매일 밤 이 곳을 지나기 때문이다.대개 가장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았다가 이 비상계단을 사용하는 까닭은 주차장에 한대 남은 자기 차에 가는 게 가까워서였다.그러나 오늘 밤은 그러지는 못 할 것이다.그 자는 오늘 주차장에 가지 못한다.계단은 가파르고 각이 져 있다.게다가 딱딱한 금속제이니 말이다.그자가 내려올때,난 여기서 기다리다가 왁 하고 소리를 지르며 팔을 내뻗는 거다.팔이 그 자를 계단 밑으로 곤두박질시켜 버린다.그래도 죽지 않으면 머리를 계단 모서리에 짓이기면 되는 거다.(쌀벌하군요^^;)그렇게 하면 아무리 보아도 사고다.이런 가파른 계단을 급히 내려올때 일어나기 쉬운 불행한 사고.모든 것은 오늘 아침,유딕-옛 스코틀랜드의 고지인의 이름이라고 언젠가 자신이 말했다-유딕 마크가 내 책상 앞으로 와서 구부정하게 섰을 때부터 시작되었다.마크는 늘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지 못해 그가 그렇게 서 있다는걸 알아채기까지는 몇 분이 걸렸고,또 죽을 상이 되어 있음을 알아채기까지는 다시 몇 분이 걸렸다."탈미지,안 좋은 소식이 있다네.""안 좋은 소식?"나는 별 흥미 없다는 듯이 말했다.마크는 뭐든 부풀려 말하는 버릇이 있다.그래서 나는 전표를 가려내는 일을 쉬지 않았다."그래.스트론버그가 지금 나를 해고했다네."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고개가 번쩍 들려지고 공포의 그림자가 심장을 덮쳐왔다.<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였다.내일은 바로 내 차례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해 왔다.그래,유딕 노인을 쫓아내는 건 나를 쫓아내는 것과 똑같다.스트론버그가 이런 식의 관리를 계속해 가는 이상,도미노식으로 다음에는 누가 쓰러지느냐의 문제일 뿐이다.게다가 마크의 모습이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작고 초라해 보이는 보잘것없는 풍모,민틋한 어깨 위의 머리에는
성격을 새기는 판이 너무 약하게 눌러졌든지,
아니면 판이 닿는 순간 스르르 미끄러져 내리고 만 듯한 희미한 윤곽의 얼굴이
실려 있었다.그러나 얼굴 주위에는 다람쥐 털 같은 겆이
최신 유행처럼 턱까지 자라 있어,다른 부분의 체제 순응형 스타일과는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마크의 이야기는,그의 풍모가 늘 다른 사람들의 동정을 사는 점과 함께
나를 자극했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소리쳤다.
"자넬 그만두라고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마크!
자넨 우리 과에 꼭 있어야 할 사람 아닌가? 그래,정식 통고라도 받았나?"
"이따가 보내겠다고 했어.저 핑크색 종이쪽지 말야.
그때 쇼크로 기절하지 않게 먼저 방으로 불러 구두전달을 한 셈일세."
"오,그렇다면 아직 괜찮군.통고를 받기까지는 정식이 아니니까 말일세.
놈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둘 건가,마크? 어떻게든 해 봐야 되잖아?"
"도대체 뭘 해야 되는 거지?"
마크는 어깨를 움츠리고 서 있었는데 이미 불쌍한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다시 한 번 방으로 가서,자네가 없어지면 일이 어떻게 될 지
분명하게 얘기하라구.정말이지,자네 기술 없이 회사가 어떻게 될 건가?"
"아니,그런 일은 할 수 없어.자기를 자랑하는 말은 난 못해.
"마크는 절망적으로 말했다."또,다른 사람이 한다면 모를까,
제 스스로 말하는 걸 신용한다고 생각하나?"
"어쩔 수 없지.그럼 내가 말해 주겠네."내가 말했다.
물론 가까이 앉은 다른 사원들의 찬탄의 눈빛을 의식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내가 가서 스트론버그에게 말하지.걱정 말라구,
마크.오늘 중으로 일을 처리해 줄 테니까."
그리고 나는 바깥쪽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들의 무언의 성원을 받으며
저 불길한 녹색 문으로 걸어갔다.
문 맞은편에는 문보다 더 불길한 스트론버그가 앉아 있는 것이다.
용기가 필요했다.돌아설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사실 난 돌아섰다.그러자 거기에는 희망에 부풀기 시작한
땅딸한 유딕 마크의 얼굴이 있었다.
난 결심했다.용기를 떨쳐 다시 앞으로 나가 스트론버그의 비서
미스 프리스비의 항의를 무시하고 문을 세게 열었다.
그 순간 책상 위의 핑크색 쪽지를 보던 스트론버그가,
마치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이자는 회사 안 곳곳에 스파이를 심어 놓았다)빙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쪽지를 보니 아직 이름이 적히진 않았다.
절호의 찬스다!
나는 방 안으로성큼 들어서서,스트론버그가 뭐라 하기 전에 선수를 쳐서 말했다.
"스트론버그 씨,당신의 그 해고 용지는 회사에서 몇 안되는
우수한 사원을 쫓아내게됩니다.
마크는 아주 유능한 자예요.
그를 그만두게 하는 것은 당신 오른팔을 잘라내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3일 지나면 입금전표가 일주일치나 쌓여 버립니다.
그는 우리과의 기둥이니까요.
"나는 그런 식으로 과대 선전을 계속했다.
스트론버그는 잠자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잠깐 내가 말을 멈추고 숨을 내쉬자,
스트론버그는 재빨리 나를제지했다.
"이젠 됐네.자넨 좋은 사람이군."
그리고 전화를 앞으로 당겨 사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미스 프리스비가 나오자,스트론버그는 짖듯이 말했다.
"마크를 대줘!"통화를 기다리는 사이,
스트론버그는 지그시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이윽고 연결이 된모양이었다.
"아,자네인가? 오늘 아침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해줘.
그래,해고는 하지 않겠네.알았나?
이제 쓸데없는 걱정일랑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게."
스트론버그는 수화기를 탁 놓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정말 감격했다.
"결코 후회는 안 하실 겁니다.마크는 훌류한 인재니까요.
여덟 개를 주면 아홉 개를 가지고 오는 사람이죠."
"여길 오다니 자네도 용기있는 사람일세."
스트론버그는 짤막히 대답하고 앞에 둔 해고용지에 뭔가 적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건가? 불쌍한 마크가 잔혹한 농담거리가 되어 버렸나?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스트론버그는 지금 막 쓴 종이쪽지 사본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그런데 거기 쓰여진 건 바로 내 이름이 아닌가!
2주일 후 해고라는 통보.내가 해고된것이다!
나는 그 자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기분이었다.
"마크나 자네 둘 중 하나를 택할 작정이었네."스트론버그가 말했다.
"자네가 들어와 그 놈 선전을 하기 전까지는 마크를 해고할 셈이었지만 말야."
"그건..."난 이야기할 힘도 없이 울고만 싶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죠."
"안돼! 마크를 그만두게 하라고 설득한다면 모를까,다시 생각할 필요는 없지."
스트론버그는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와,나는 동료들과 함께 해고를 면한 마크를 축하해주고
여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내가 대신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모두득의양양해 하는 축제 분위기를 나 때문에 망쳐 버릴 수는 없었다.
하물며 스트론버그의 자비를,
날 살리기 위해 거부해 달라고 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꾸미고 있었지만,
통로 저 쪽에 툭 튀어나온 녹색 문에 눈이가자 참을 수가 없어졌다.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쇼킹하긴 하지만 매우 만족할 만한 행동.
내가 이 비상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는건 그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꺼림칙하기 이루 말할 나위 없지만,
살아남고자 하는 일념이 날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아주 양심적으로 한 시간을 더 남아 일하고 있다.
그리고 스트론버그는 조금 전에 돌아갔으니
이 건물에 남아 있는 것은 마크와 나뿐이다.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라.빌어먹을.
------------------------(여기 나오는 스트론버그는 제가 얼마전에 올린
'상자'에 나오는 스트론버그인것 같죠?
같은 작가 작품이거든요.어딜가나 나쁜 놈이네요.^^ )
=============================== 16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앤소니 길버트
"간호사! 어디 있나, 간호사!"
파렌 부인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곧 갑니다."
엔스트루더 간호사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 잠시 후에는 '병실'로 기
세좋게 달려갔다.
이 파출 간호사는 작은 몸집에 생기가 넘치는 깔끔한 여자인데도,
파렌 부인은 쇠막대기처럼 뻣뻣한 여자라고 투덜대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세요?"
"베개를 고쳐줘." 파렌 부인은 신음하듯 말했다.
"그리고 열이 있는 것 같아."
엔스트루더 간호사는 베개를 바로잡고 환자의 체온을 쟀다.
예상대로 체온은 정상이었다.
그녀는 차를 한 잔 마시로 아래층으로 내려간 참이었다고 부인에
게 말했다.
"차는 나한테는 독이야." 파렌 부인은 신음소리를 냈다.
"약 먹을 시간이 안됐나?"
"약은 세 시에 드시면 돼요."
"계속 누워만 있으면 좀처럼 시간이 가질 않아.
조이는 아직 안들어왔나?"
"따님은 점심을 먹으로 나갔어요, 잊으셨어요,마님?"
"이렇게 늦게 돌아온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내가 저를 얼머나 걱
정하고 있는지 알면서... 요즘 젊은 애들은 그저 자기밖에 모른다니
까."
"2시 45분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가 돌아오기에는 이른 시간이에
요. 그리고 조이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벌써 서른살인걸요."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는 언제나 어린애야. 점심식사는 집에도 잔
뜩있으니까 밖으로 먹으러 나갈 필요도 없었고...나는 새처럼 식
욕이 왕성하니까."
'새도 새 나름이지.당신은 닥치는대로 모조리 분탕질하고 다니는
독수리야' 하고 간호사는 생각했지만,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에요. 마님도 아시다시피, 조이는 워터 하우
스대위님과 점심을 같이하고 있으니까요."
"그건 몰랐는걸." 파렌 부인은 나른함을 잊어버렸다.
"그애가 자네에게 그렇게 말하던가?"
엔스트루더 간호사는 웃었다.
"요즘 대위님 말고 누가 조이와 점심을 함께 먹겠어요? 두 사람
은 마지막 계획을 세우고 있을 거예요."
"계획이라니, 무슨계획?"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건 장님도 알 정도인걸요. 대
위님은 이 댁 현관 앞에 살고 있는 거나 마친가지예요."
"자네는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군, 고맙게도 워터하우스 대위
는 내달에는 식인종과 호텐토트족이 득실거리는 임지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 그렇게 되면...뭐가 그렇게 우스워?"
"안 그래요. 케냐에는 식인종도 호텐토트족도 없다구요, 제 여동생
이 케냐에 가 있는데..."
"조이는 절데로 케냐 같은 데 가지 않아. 내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
까"
"그래도 가버릴 거예요. 마님도 조이를 노처녀로 늙게 하고 싶진
않으시겠죠? 지금까지만 해도 마님은 조이를 넘 오랫 동안 마님
곁에 붙잡아 두셨어요, 자, 약 드실 시간이에요, 제가 따라드릴까
요?"
"내 약은 내가 직접 따른 다는 걸 자네도 알면서 그래. 난 그게 더
좋아. 인생 경험을 쌓은 덕에 나는 조심성이 많아졌지. 요즘 사람
들은 너무 부주의해서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약병을 뒤죽박죽으로
섰어놓았다가 엉뚱한 약을 주면 곤란해."
"그럴 염려는 별로 없어요."
간호사가 말했다.
그녀는 한번도 파렌 부인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화를 내고 있다가는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저는 25년 동안 간호사 생활을 했지만 환자분한테 독약을 먹인 적
은 아직 한번도 없는걸요."
파렌 부인은 손을뻗어, 바로 옆 탁자 위에서 길쭉하고 둥근 병을
집어들었다. 그것이 '내 약'이고, 6시간마다 머도록 되어 있었다.
파렌 부인은 모양이 전혀 다른 약병을 또 하나 갖고 있었는데, 거
기에는 수면제가 들어 있었다. 강장제와 수면제는 겉보기에 아주
비슷했기 때문에, 주치의인 샘프슨 박사는 약을 혼동하지 않도록
모양이 다른 병에 따로 담아주었고, 게다가 각각의 약봉에 눈에
잘 띄는 딱지까지 붙여 주었다.
간호사는 파렌 부인이 주의깊게 1회 복용량을 따른 다음 약병의
코르크 마개를 닫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 이젠 내 커피를 끓여줘." 부인이 말했다.
"그리고 조이 말인데, 자네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애
는 나이에 비해서 아주 젊지만, 그런..그런 모험가한테 걸려들 만큼
젊지는 않아."
조이 파렌은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키가 큰 금발 아가씨였고, 그
얼굴은 행복감으로 환히 빛나고 있었다. 10년 전에는 상당한 미인
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하고 있는 지금, 그녀의 얼굴에는 젊음이 되살아나 있었다.
"늦었구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라
도 할 것이지...."
"아직 세 시밖에 안됐는걸요. 우린 의논할 게 너무 많아서 시간이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렸지 뭐예요."
"우리라니?"
"가이와 저 말이에요. 그이는 다음달에 임지로 떠나라는 명령을 받
았는데, 그때 저도 함께 떠날 수 있도록 당장 결혼하고 싶대요. 오
오, 어머니. 다시 한번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
어요."
파렌 부인은 팔꿈치를 괴고 몸을 일으켰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워터하우스 대위와 결혼하겠다
니, 그건 말도 안돼."
"아무리 그래도 저는 할 거예요. 결혼 한다구요! 오오, 어머니. 너무
나 멋진 일이잖아요!"
"당치도 않은 일이야." 파렌 부인은 짤막하게 말했다.
"사실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되어버렸어. 워터하우스는 내가
사위로 삼고 싶은 남자가 아니야. 그리고 너는 어떻게 그런 무정한
말을 할 수 있지? 나를 환자 두고 가버리겠다니..."
"저는 가이와 결환해야 돼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기회는 영영 다
시 오지 않아요."
"대위가 그렇게 변덕스럽다면!"
"이건 변덕 문제가 아니에요, 하지만 저는 앨런 피어스도, 그 다음
에 만난 모리스도 잊지 않았어요. 요컨대 어머니는 저를 결환시킬
마음이 전혀 없는 거예요."
"내가 너라면 에미를 고맙게 생각할 거다. 간호사, 거기 멍하니 서
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앞으로 한 시간 동안은 자네한테 볼 일이
없어. 조이하고 단둘이 의논할 게 있으니까 잠깐 자리를 비켜줘요."
엔스트루더 간호사는 조이 옆을 지날 때 "잘돼면 좋겠어"하고 속삭
였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파렌부인은 자기 뜻을 관철 시키는 일에 관해서는 명수였고, 지금
까지 여러 해 동안이나 조이를 좌지우지해 왔다.
그녀가 문을 닫자마자 말다툼이 시작되었고, 한 시간 뒤에 돌아왔
을 때도 말다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추는 이제 파렌 부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간호사가 들어갔을 떠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어. 내가 죽어
도 결혼하겠다면 해도 좋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내가 죽으면 네
양심은 평생 짓눌리게 될 텐데. 그건 아마 너도 싫을거다. 아마 나
중에는 네가 바보같은 짓을 하지 않도록 구해준 나를 고맙게 생각
하게 될거야."
그후 며칠이 지나는 동안, 조이가 패배를 맛보리라는 것은 점점 분
명해졌다.
파렌 부인은 그 문제를 더 이상 논하기를 거부했다.
"이런 식으로 말다툼만 하고 있으면 나는 죽어버릴거야. 내가 얼마
나 건강에 조심해야 하는지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그러면서 부인은 이제 기력이 좀 생기면 본머스 같은 데로 함게 여
행이나 떠나자고 덧붙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엔스트루더 간호사는 놀라운 결심을 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파렌 부
인은 말했다. '내가 죽어도 결혼하겠다면 해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
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고 간호사는 결심을 굳혔다. 그녀의 계획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약병의 내용물을 바꿔놓고, 파렌 부인이 6
시에 약을 먹을 때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도록 하는 것이다.
부인은 언제나 6시부터 7시까지는 혼자 있고 싶어했기 때문에, 7시
에 발견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서 손쓸 수 없게 될 것이다.
조사 결과, 진상은 부인이 수면제를 약으로 잘못 알고 먹은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왜냐하면 간호사는 의사를 부르기 전에 약을 원래
대로 돌려놓을테니까.)
간호사는 자기가 하려고 하는 일에 파리 한 마리 죽이는 정도의 죄
책감밖에는 느끼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 상황이 그녀의 계획을 도왔다. 드디어 실행하기로 결
심한 날, 파렌 부인에게 손님--크리스티부인--아 찾아왔다.
손님 덕에 자칭 환자('환자라니,가소롭기 짝이 없어'하고 간호사는
생각했다.
'내가 스스로 내 일을 해나갈 수 있는 것처럼, 부인도 얼마든지 혼
자서 해나갈 수 있어!') 의 정신이 산만해져서, 부인의 주의를 끌지
않고 약의 내용물을 바꿔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파렌 부인은 손님에게 줄곧 딸의 태도를 한탄했다.
"나이를 먹어서 나는 이제 쓸모없는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어요, 내 인생은 무거운 짐이었어요. 그 짐을
벗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크리스티 부인은 떠날 때 간호사에게 말했다.
"파렌 부인은 우울증에 빠져 있어요. 침대 옆에 수면제를 놓아두어
도 괜찮을까요? 내가 당신이라면 부인한테서 눈을 떼지 않을 거예
요. 저런 기분으로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요."
"그건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앤스트루더 간호사는 솔직하게 말했
다. "일부러 주의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간호사는 3층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파렌 부인의 방을 들여다보았
다.
환자는 눈을 감고 베개에 기대앉아 있었다. 부인은 간호사를 보고
말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줘. 조용히 있고 싶으니까. 크리스티 부
인 덕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더, 어떻게든 잠을 자도록 해봐야
지."
약 한 시간 동안 집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리고 6시 15분 전,
파렌 부인의 초인종이 울리고, 부인이 온 집안의 사람들을 거만하
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온 집안의 사람들--조이와 간호사와 요리사인 파머 부인--이 모두
침대발치에 늘어서자, 부인이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모두 잘 들어둬요. 그러면 서로 상대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조이, 너는 결국 네가 하
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됐구나. 나는 다만 네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럼 우리 결혼을 승낙해 주시는 거예요?"
조이는 자기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엔스트루더 간호사도 마찬가
지였다.
"이렇게 된 마당에 반대는 하지 않겠다는 것뿐이다. 이것밖에는 해
결책이나 탈출구가 없는 것 같아.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 무거운 짐
이 되고 있어. 그래서 수면제를 정량보다 세 배 더 먹었지 그런 얼
굴을 하면 안돼, 조이. 이미 때가 늦었드니까 의사를 불러도 소용없
어. 결혼생활을 마음껏 즐기도록 해라. 결국 그 때문에 나는 목숨을
잃는 거니까."
조이는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파머 부인이 외쳤다.
"간호사, 의사를...빨리 의사를 불러와요."
파렌 부인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미 늦었어."
오직 엔스트루더 간호사만 침착했다.
"허둥댈 필요는 없어요, 위험은 전혀 없으니까. 마인께서는 치사량
의 수면제를 먹은게 아니에요. 평소에 늘 드시는 약을 정량보다 세
배 더 먹은 것분이죠, 그걸로는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해요, 사
실은 이렇게 된 거예요."
그녀는 사정을 설명했다.
"마님께서 몹시 우울해 하신다고 크리스티 부인이 주의를 주셨기
때문에, 나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약병의 내용물을 바꿔놓았어
요
그러니까..."간호사는 다시 환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마님께서는'수면제'라고 적혀 있는 병에서 정량의 세 배를 드셨지
만, 사실은 강장제를 정량보다 좀 많이 드셨을 뿐이에요.
물론 약은 나중에 다시 원래대로 돌려 놓을 작정이었죠."확실히 그
녀는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 못된 할망구가 막판에 속임
수를 쓰다니!
"아니, 왜 그러세요,마님? 갑자기 안색이 변하시고..."
환자는 갑자기 등을 꼿꼿이 폈고, 얼굴은 포로 하애져 있었다.
"그게...정말...이냐?"
"물론 정말이죠. 그러니까 연극은 그만두고 주무세요."
그런데 파렌 부인은 자기를 눕히려고 하는 간호사의 손을 뿌리쳤
다.
"건드리지 마, 이...이 바보 같은 살인자. 자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나 알아? 자네가 그런 짓을 하리라는 걸 내가 알 도리가 없잖아?
나는 당신들과 조이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어. 단지 그것뿐이야. 그
래서 약을 먹기 전에 약병의 내용물을 바꿔놓았어. 이제 알겠어?"
이 사건이 법정에 올려졌을때, 배심단은 엔스트루더 간호사에게 무
죄 평결을 내렸고, 판사는 그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비극을 예
방하기 위해 유별난 조치를 취했을 뿐이라고 논평했다. 그리고 판
사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본 법정은 당신이 파렌 부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앤스트루더 간호사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자기가 살인자인
지 아닌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 17
아주 특별한 재주
by Magaret B. Maron
"하지만 그 사람은 걸핏하면 나를 때렸어요."
안젤라는 그때 멍들었던 곳이 생각난 듯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해요?"
"이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람이 이혼은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이 주에서 이혼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당신도 아시잖아요. 당신은 내가 얻어맞은 것이 아무렇지도 않으세
요?"
비록 아내를 만나기 전의 일이긴 하지만, 그 짐승같은 놈이 사랑스럽고
연약해 보이는 아내를 두들겨 팼다는 사실에 나는 물론 화가 났다.
"하지만 일에는 원칙이 있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안젤라는 항변하듯이 말했다.
"그건 그 사람 잘못이었어요. 그 사람에게 술에 취한 상태로 욕조에 들
어가서 라디오를 너무 가까이 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황소 앞에서
붉은 천을 흔드는 격이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것 처럼 고집을 부
리더라구요."
아내는 실제로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갑자기 키득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7년동안 같이 행복하게 살면서 귀여운 아
이를 둘이나 낳은,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내. 그 아내가 자신을 싫
어하는 사람은 모두 죽여 버리는 냉혹한 살인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
남편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난 살인마가 아니에요.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아니
면 절대 죽이지 않아요."
안젤라는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그때 뒷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붉은 머리칼과 주근깨까지 나
를 꼭 빼어닮은 다섯 살 난 샌디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대들듯이 말했
다.
"왜 이러고 있어요? 매트가 우는 소리가 안 들려요? 조지가 매트를 때
려서 피투성이가 되었어요!"
안젤라는 급히 샌디를 뒤따라 갔고, 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
네살 난 매트는 뒷문 밖 층계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아이의 찢어진 아
랫입술에서 피가 흘러 흰 셔츠에 떨어지고 있었고, 샌디와 제일 친한 크리
스 코피가 어색하게 매트의 등을 토닥여 주고 있었다.
아이 중의 누가 다쳤을 때마다 안젤라는 아주 침착했는데 나는 그점이 무
척 좋았다. 나는 아이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면 극도로 당황하지만, 안
젤라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아이를 달래곤 했다.
아내는 매트를 안아들고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본 뒤에 꿰맬 필요는 없겠
다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부엌으로 가서 아이의 부은 입술에 찬 물수건을
대 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다시 뒷문이 벌컥 열리며 옆집에 사는, 안젤라와 아주 친한 질 코피가 뛰
어 들어왔다.
"조지 이놈의 자식! 내가 다 봤어! 매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조
지가 다짜고짜 때린거야!"
"그래요, 아빠."
샌디가 맞장구를 쳤다.
"조지가 그네를 못타게 했어요. 크리스와 내가 만들었으니까 우리 타잔
놀이인데도 말이예요."
매트는 다시 울기 시작했고, 질은 고래고래 소리치고, 안젤라까지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샌디까지 고함을 지르기 시작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잠깐만! 한사람씩 얘기합시다."
나는 소리쳤다.
여러사람의 말을 종합해 보면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우리 동네를 개발하던 당시에 우리 집의 뒷마당으로 흐르던 시냇물을 막
아 버렸는데, 그 바람에 지름이 8피트나 되는 도랑이 생기게 되었다. 그
위로 개발업자들이 자르지 않고 내버려 둔 크고 오래된 버드나무 가지가 늘
어지게 되었다. 도랑 주위의 넓은 땅이 모두 개발되어 집이 세워지자 동네
아이들이 그 도랑에 와서 놀게 되었다.
아이들은 나이에 따라 서로 다른 곳에서 놀았다. 우리집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곳에서는 청소년들이 모여서 놀았는데, 그쪽의 도랑이 다른 곳보다
더 가파른 데다가 크고 뾰족한 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우리집과
코피의 집 사이의 도랑은 경사도 완만하고 풀도 많이 나 있어서 어린아이들
이 주로 그곳에서 놀았다.
샌디와 친구 녀석들은 도랑 위로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에 로프를 매달아
놓고는 정글 속에서 덩굴을 타고 이나무 저나무로 날아다니는 타잔처럼 도
랑 위를 건너며 위험한 놀이를 즐겼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언제나처럼 조
지 왓슨이 나타나서 로프를 빼앗고 매트를 때린 것이다.
뒤룩뒤룩 살이 찐 아홉 살 난 조지는 전형적인 동네 깡패였는데, 자기 또
래의 아이들에게는 꼼짝 못하면서도 여섯살 아래인 아이들에게는 공포의 대
상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조지의 욕을 했다. 최근에는 또
어떤 짓을 했다는 얘기와 그 아이의 심리적인 동기가 무엇일까 하는 얘기는
결국 '그 부모에 그 자식이지 뭐.'라는 말로 끝나곤 했다.
도시계획법으로 정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동네든지 골칫거리인 집이
꼭 하나씩 있다. 왓슨네 집이 바로 그런 집이었다. 시끄럽고 천박하고,
잘난 체 하는 데다가 다른 사람들의 권리나 요구는 깡그리 무시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주중에 파티를 열어 새벽 1시쯤 소란스럽게 떠들며 헤어지거나,
토요일에 시내에서 밤늦게까지 놀다가 새벽 2시에 요란한 차 소리를 내며
와서는 아기보는 여자더러 나오라고 클락션을 울리기도 했다.
밤중에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었으면 다음날인 일요일에는 숙취때문에라도
늦잠을 잘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았다. 왓슨은 아침 7시에 마당에 나와 세
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잔디깎는 기계를 켜 놓고는 2층에 있는
마누라와 큰 소리로 얘기를 하는 것이다.
왓슨 부인도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포기한 뒤에 낳게 된 조
지를 애지중지했다. 그래서 조지와 나이가 같거나 나이많은 아이가 조지를
건드리면 야단법석을 치면서도 조지의 잘못은 모른 척 했다. 왓슨 부인은
조지가 때려서 피를 흘리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화를 내는 아이 엄마를 똑
바로 쳐다보면서 점잖게 말하곤 했다.
"조지는 저 애를 때리지 않았대요. 난 그 애를 믿어요. 그리고 조지는
절대로 싸움을 걸지 않아요."
"그 녀석은 우리 동네 골칫거리예요."
안젤라는 세 아이에게 레몬쥬스를 주어 텔레비전 앞에 앉혀놓고 나서 화
를 내며 말했다. 우리는 뒤뜰에 앉아 있었는데 안젤라는 아직도 화가 풀리
지 않았는지 저녁 준비를 하다가 콩 다듬는 칼로 도마를 내리찍었다.
"그래도 의사들은 그 애를 좋아할 거예요. 여름방학한지 이제 겨우 5일
밖에 안 됐는데 내가 아는 것만 해도 그 녀석이 네 명이나 샔려서 피를 봤
거든요."
질은 안젤라를 도와서 콩을 까며 심술궂게 말했다.
"도트네 아이는 조지가 던진 돌에 맞아서 세 바늘이나 꿰맸죠, 낸시 스미
스를 떠밀어 깨진 병 위로 쓰러뜨렸죠. 그리고 어제는 우리 크리스의 다리
를 걸어 넘어뜨려서 아이 얼굴이 찢어졌고, 오늘은 매트도 두들겨 팼어요.
이러다간 여름이 가기 전에 우리 아이들을 전부 병원에 입원시키겠어."
"누군가 그 아이에게 어떻게 손을 써야겠어요."
안젤라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빼 줘요. 지난 번에 조지 때문에 따지러 갔더니 그 애 아빠가 내
얼굴앞에 렌치를 들이대면서 애들 일은 애들끼리 해결하게 놔 두라고 합디
다."
질은 좋은 생각이라도 났다는 듯이 소리쳤다.
"이러면 어떨까요, 12살짜리 애들을 시켜서 그 녀석을 두들겨 패주는 거
예요."
"왓슨 부부가 당장 고소할 걸요."
안젤라는 그런 건 생각도 말라는 듯이 말했다.
"왓슨 부부가 이번 여름에 아이를 캠프같은 곳에 보낼 지도 모르지."
나는 좋은 생각이 아니냐는 듯이 말했다.
"어림도 없어요. 왓슨 부인이 아이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으려
고 하지 않을 거예요."
안젤라는 콩을 다 다듬고 나서 청바지에 칼을 문질러 닦고는 무심코 칼손
잡이를 돌리면서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도랑쪽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갑자기 안젤라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 났어요. 이번에는 조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한 건지도
몰라요."
질과 나는 어이가 없어 마주 보았다.
"저 로프는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안젤라가 말했다.
"하지만, 로프는 안전하고 튼튼해요, 바레트 아줌마."
크리스가 문 앞에서 말했다. 어린이 프로가 끝나자 세 아이는 뒤뜰로 나
와 있었다.
"맞아요, 엄마. 아빠가 가르쳐 주신 대로 로프를 나무에 맸어요."
샌디가 덧붙였다.
"맞아요."
로프를 어떻게 묶는 지도 모르는 매트도 한마디 거들었다. 안젤라는 씨
익 웃으며 매트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매트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랬더라도 아빠하고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봐야 안심이 되겠구나."
그래서 우리는 벌써 이슬에 젖은 잔디를 밟으며 밖으로 나가 도랑을 건넜
다. 내가 로프가 닳아지지 않았나 확인하는 사이에 안젤라는 고양이처럼
버드나무 위로 올라갔다. 두 아이의 엄마로써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나무
에 걸린 연을 내려주려고 선뜻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거나 공을 내려 주려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 엄마때문에 샌디와 매트는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로프는 튼튼해 보이는데, 매듭은 어떻소?"
나는 어두워진데다가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안젤라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별로 튼튼한 것 같지도 않아요. 알렉스, 좀 더 튼튼한 로프로 달아주시
겠어요?"
아내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매듭은 잘 묶여져 있구나. 하지만 너무 낡았어. 아빠가 내일 새 로프
를 사다주실테니까 그 때까지는 이 로프에 매달리지 말고 네 친구들도 매달
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아내가 샌디에게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크리스."
질이 말했다.
"흥! 난 마찬가지가 아니예요!"
비꼬는 듯한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서보니 우리가 때리지 않으리라
는 것을 알고있는 악동, 조지가 비웃고 있었다. 아내가 차갑게 말했다.
"아냐, 너도 마찬가지야. 작은 애들이 매달리기에도 튼튼하지 않으니까
넌 당연히 매달려서는 안 되지."
조지는 자신의 뚱뚱한 몸을 비꼬는 말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건 녀석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아줌마는 우리 엄마가 아니예요. 아줌마 말은 듣지 않겠어요!"
조지가 소리쳤다. 참다 못해서 한 대 때려주려고 내가 한발짝 앞으로 나
서자 아내가 나를 잡았다.
"이건 위험해, 조지. 그러니 너도 매달리지 말아라."
아내는 그렇게 타이르고 로프 끝을 잡아 나무 위로 던져 올렸다.
"그래도 난 다시 꺼낼 수 있어요."
조지가 대들듯이 말했다. 그러나 내가 버티고 서있는 것을 보고는 나무
쪽으로 가지는 않았다.
그 때, 왓슨 부인이 저녁을 먹으라고 조지를 불렀고, 질도 냉동실에서 고
기를 꺼내는 것을 깜빡 했다며 크리스와 집으로 갔다. 안젤라와 샌디와 나
는 매트에게 먼저 출발하라고 하고 누가 집까지 빨리 뛰어가는지 시합을 했
다.
침대에 들고 나자 조지 왓슨녀석과 씨름을 하며 긴 여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과 두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하는 일상의 부산함으로 잊고 있
던 안젤라와의 대화가 생각이 났다. 갑자기 묻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경찰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소?"
나는 침실의 어둠 속에서 물었다. 안젤라가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경찰은 제게 아주 동정적으로 잘 대해 줬어요. 그들이 보기에도 그가
욕실 문을 안으로 잠근 게 확실했거든요. 사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선반
끝에 아슬아슬하게 라디오를 걸쳐놓은 것 뿐이예요. 그리고는 그저 일이
잘 되기만을 바랐죠."
그걸로 이야기가 다 끝났다는 듯이 안젤라는 돌아누우며 머리를 베개속으
로 파묻었다.
"아니, 잠깐!"
나는 갑자기 또 다른 생각이 나서 베개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 완벽한 표본은 어떻게 된거야?"
"쉿! 애들 깨겠어요."
아내가 속삭였다.
"그럼, 그것도 당신이 한거야?"
나는 목이 잠겨 중얼거렸다.
우리는 결혼 후 2년 동안 시내의 한 연립주택 2층에 세들어 살았다. 오
래되고 아주 낡아서 더러운 곳이었지만, 값도 싸고 방도 크고, 벽이 두꺼워
서 방음도 잘 되었기 때문에 젊은 부부 몇이 더 세들어 살고 있었다.
우리는 인생에서 결혼은 처음이었고 그 쪽에서 모두 성공하고자 하는 패
기에 차 있었기 때문에 늘 못마땅한 눈초리를 하고 돌아다니는 주인 여자만
없었다면 그 낡은 집도 우리에게는 행복한 곳이었을 것이다.
주인여자는 3층에 살고 있었는데, 현관 문이 열릴때 마다 계단으로 나와
낡아서 흔들거리는 난간에 기댄 체 밑을 내려다 보곤 했다. 그건 혹시라도
누가 금지한 애완동물을 데리고 들어오지 않는지, 누가 쓰레기로 현관을 더
럽히지나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자는 남편을 쥐고 흔들었고 세 딸을 들들 볶았고, 입주자들을 서로
이간질 시키면서, 굉장한 기쁨을 느꼈다.
"난 D호에 사는 여자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요. 나는 당신 옷이 아
주 단정하다고 생각하는데..."
주인 여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새로 이사온 입주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충
동질 하곤 했다.
나는 두어 달이 지난 뒤에야 주인 여자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며 거짓
말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치 서클에 처음 가입한 학생들
의 연수기간 같았다. 그 기간이 지난 후에야 우리는 서로 모여서 주인 여
자가 또 어떤 거짓말을 하고 다녔는지, 언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사람들
의 화난 표정을 보고 알았다는 등의 얘기를 하며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주인 여자는 그래서는 안 되는 아내상의 완벽한 표본이었으므로, 우리는
등뒤에서 주인 여자를 <완벽한 표본>이라고 불렀다.
이웃간을 서로 이간질하는 것도 나쁘지만,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기 시작
하자 더 이상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우리가 거기 사는 동안 두 부부가 주
인 여자의 뱀같은 혀에 놀아나 가정 파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첫번째
부부는 서로 헤어질 것이 분명했다고 하더라도 두번째로 당한 부부는 서로
아주 사랑하는 어린 부부였는데, 부모의 반대와 인생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주인 여자가 무슨 짓을 하는 지를 깨달은 안젤라가
불문률로 되어있는 것까지 깨어가며 <확실한 표본>의 수법을 그 젊은 부부
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늦었다. 소녀는 부모집으로 가 버렸
고, 소년도 화가 나서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안젤라가 그토록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주인 여자는 계단 난간에 기대어 거미줄을 치고는 들락날락 거리는 우리
파리새끼들 중에 누가 걸리는 가를 지켜보는 크고 살찐 거미같은 여자예요.
그런 사람을 처벌할 법이 왜 하나도 없죠?"
아내는 울먹이며 말했다.
이틀후, 난간에 기대는 순간 난간이 부서져 <완벽한 표본>이 3층 아래로
떨어져 죽었을 때, 우리는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경찰이 사
고사로 처리하자마자 주인집 남자는 집을 팔고 딸들을 데리고 고향인 캔사
스 주의 옥수수 밭으로 가 버렸다.
"당신이 꾸민 일이오?"
나는 안젤라를 흔들며 다시 물었다.
"오, 알렉스. 지금은 한밤중이예요."
아내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알고 싶소."
"주인 여자도 집이 낡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수리하는데 돈 한푼 쓰
려고 하지 않았어요. 경찰도 그 난간이 언젠가는 부서졌을 거라고 했던 얘
기 들으셨죠? 난 그저 난간이 좀 더 빨리 부서지게 했을 뿐이에요. 그리
고 내가 주인 여자에게 난간에 기대는 것은 위험하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었
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참 좋은 일을 했구려. 그 여자에게 얘기했다는 것으로, 그렇지? 모든
것이 괜찮다는 거군! 안젤라, 말 좀 해봐. 안젤라! 당신 부모님은 당신
이름을 꽤나 재미있게 지었군 그래. 천사라고 지었으니 말이오.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거요? 힘없는 인간에게 기쁨의 빛을 선사하는 복
수의 화신쯤으로 생각하는 거요?"
안젤라가 한 쪽 팔을 짚고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말하죠. 알렉스 바레트 씨. 나는 이제 5, 6시간 후면 일어나서 아침밥
을 달라고 조를 두 아이의 엄마예요. 당신은 피곤해 죽겠는데도 오래 전에
일어난 사소한 사건 하나를 가지고 귀찮게 구는 한 남자의 아내를 보고 있
단 말이예요!"
아내는 다시 침대에 누워서 베개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두번씩이나 베
개를 벗겨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내는 자꾸 귀찮게 굴면 좋지 않을거라
고 말할 지도 모른다.
"아주 사소한 사건. 기가 막히군!"
나는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는데, 아내를 교수형 시키기로 결정한 판사
와 경찰들 앞에서 나는 아내를 변호하고 있었다. 나는 아내가 현모양처임
을 강조했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아내는 전혀 살인자처럼 생
기지 않았다고 덧붙이자 그들은 화를 내기까지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
건을 쓴 간수가 낡은 로프에 어깨를 걸고 샹들리에에 매달려 흔들거리며 외
쳤다.
"우린 그녀를 로프에 매달거야! 로프에 말야! 우린 그녀를 로프에 목매
달거야! 로프에!"
그 꿈의 편린들이 하루종일 나를 괴롭혔다. 나는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가 없었는데, 가게에 들러 샌디에게 줄 새 로프를 살 때는 나도 안젤라의
공범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후 늦게 차를 차고에 넣는데, 샌디가 공구상자
를 뒤지고 있었다.
"네 타잔 로프 사 왔다."
나는 샌디에게 소리쳤다. 샌디가 낡은 군용 텐트를 끄집어 내며 말했다.
"고마워요, 아빠. 하지만 우린 군대놀이를 할 거예요. 크리스와 매트와
내가 도랑 옆에 텐트를 칠 건데 이걸 써도 되겠어요?"
"그래라. 하지만 조지가 와서 부숴버리면 어떻게 할거냐?"
"우린 이제 조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샌디는 쾌활하게 말하고는 내가 말문이 막혀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집모퉁
이를 돌아 사라져 버렸다.
아, 안 돼.
"안젤라!"
나는 고함을 지르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을 부서져라 열어 젖혔
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경찰이 그녀를 데려갔으면 샌디가 말을 했을텐데."
나는 냉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중얼거렸다.
"안젤라!"
그 때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나 질네 집에 있어요. 이리 오세요!"
아내가 소리쳤다. 내가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질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자축하고 있었어요. 한 잔 드릴까요?"
여자들이란! 아무리 애가 미운 짓을 많이 했어도 애를 죽이고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잠시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보, 오늘 힘드셨어요? 얼굴이 창백해요."
"조지는 어떻게 됐지?"
나는 안젤라를 쏘아보며 다그쳐 물었다. 질은 진정하라며 나에게 찬 음
료수를 큰 컵에 담아 건네주었다.
"샌디가 얘기 안하던가요? 타잔 로프를 타다가 줄이 끊어졌어요. 두 다
리가 다 부러졌죠. 한쪽 다리는 두 군데나 부러졌구요."
질은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죽지는 않구요?"
나는 맥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이죠, 여보. 어떻게 죽겠어요? 밑에는 돌도 없고 대부분 잔디가
깔린 곳이잖아요. 잔인한 말같지만, 이제 이번 여름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겠어요. 그 녀석이 석고한 걸 풀고 지팡이 없이 걸어다닐 때 쯤에는 개
학일테니까요."
질은 안젤라를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여름 방학 내내 조지 왓슨이 어린 애들을 때리는 꼴
을 안 보게 되었으니 말예요!"
"경사 났군!"
나는 비꼬듯이 중얼거렸다. 지난 밤에 안젤라가 살펴보았던 매듭이 풀려
서 조지가 떨어진 것은 물어보나 마나일 것이다.
"그럼요. 왓슨 부인에게도 말했지만, 그건 순전히 조지 잘못이예요. 새
로프를 달 때까지는 절대 매달리지 말라고 안젤라가 경고까지 했었잖아요."
질은 떳떳하다는 듯이 말했다.
"안젤라는 아주 생각이 깊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안젤라에게도 양심은 있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토요일인 다음 날, 나 자신조차도 이번 여름은 참 평화로운 방학을 보내
겠구나 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한 번도 조지가 때렸다면서
울며 뛰어 들어오는 일 없이 하루종일 평화롭게 적군을 물리치며 도랑에서
놀았다.
오후에 그 누구의 훼방을 받지 않고 야구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여름
내내 할 수 없이 갇혀 지내는 것도 조지 자신에게는 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잠이 깬 나는 이미 무의식중에 상황을 합리화시켜 놓고
있었다. 아내들 중에는 특별한 재주를 가진 여자들이 있지 않은가? 아내
가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하면 가족들이 쓰는 차의 카뷰레터를 청소하게 하
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내가 페인트 칠을 하고 싶어 한다
면, 취미로 옷을 만들어 보겠다고 한다면, 또는 막힌 하수구를 고치겠다고
한다면, 간단히 말해서 아내의 재주가 가족의 안락과 평화에 도움이 된다
면, 그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면 남편이 그것을 막을 필요가 있겠는가?
일단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난 후에 나는 다시 돌아누워 잠 속에 빠져
들었다. 그 때였다. 잔디깎는 기계의 발동이 걸리는 큰 소리가 아침의 정
적을 깼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보고는 신음했다. 7시 20
분인데!
머리를 베개속에 파묻었지만 소음은 더 커졌다. 소리를 피할 방법이 없
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아내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왜요?"
아내가 잠에 취해 중얼거렸다. 나는 아내에게 속삭였다.
"안젤라. 왓슨에게 아침 9시 이전에 잔디를 깎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해
줄 수 있겠소?"
- 히치콕 서스펜스 걸작선 중에서...
이그나티우스 아갈비가 나이지리아의 재무장관에 임명되었을 때,그 일에 각별히
관심을 갖는 사람은 적었다.나이지리아의 재무장관은 17년 사이에 17명이나 바뀌
지 않았는냐고 빈정꾼들은 지적했다.
이그니티우스는 의회에서의 첫 중요한 시정방침 연설에서 공무원의 오직과 부패
를 근절할 것을 약속하고,공직에 있는 자는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지 않는한 마음
편히 있을 수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그는 다음의 말로 첫연설을 매듭지었다.
"나는 나이지리아의 아우게아스 왕의 우사(牛舍) 청소부를 자청해서 나갈 생각입
니다."
장관이 연설이 준 충격은 '라고스 타임지'가 그것을 기사화하지 않았을 만큼 미
미한 것이었다.아마 '라고스 타임지'의 주필은 과거 16명의 장관들 연설을 상세히
보도해왔으므로 독자가 똑같은 것을 전에도 읽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배려에
서 싣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그나티우스는 이런 신뢰의 결여에도 꺽이지 않고 단호한 결의하에 정
력적으로 새 직무에 몰두했다.취임후 열흘이 채 지나기도 전에 벌써 곡물수입에
관한 서류를 위조한 하급관리를 교도소로 보냈다.
갓 쓰기 시작한 이그나티우스의 빗자루로 제거된 다음 대상은 레바논인 은행가였
다.그 인물은 외환관리법으로 재판에 회부되지도 못하고 국외추방처분을 받았다.
그 1개월 뒤 그처럼 대단한 이그나티우스도 이것은 자신의 단독 쿠데타라고 작정
을 한 사건,즉 뇌물을 받은 경찰청장의 체포라는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여하
튼 라고스 시민은 그때까지도 뇌물수수를 경찰청장의 직무가운데 하나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4개월 뒤에 경찰청장에게 18개월금고형이 선고된 후에야 새 재무장관은
'라고스 타임즈' 제1면에 겨우 등장했다.'라고스 타임즈'의 논설은 켕기는 데가
있는 모든 인간이 두려워 할 새 빗자루 '청소부 이그나티우스'라는 별명을 그에게
바쳤다.
이그나티우스의 청소부로서의 평판은 잇달은 체포와 더불어 국가 원수인 오토비
장군까지도 자신이 임명한 새 재무장관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유포됨에 따
라서 더욱더 높아졌다.
1억 달러를 넘어서는 외국과의 계약을 상세히 점검하고,최종 허가를 내리는 것은
이그니티우스의 단독적인 역할이었다.그리고 그의 모든 결정이 정적(政敵)에 의해
서 엄밀히 탐색당했지만 조그만 스캔들도 어렴풋한 기색조차도 그의 이름과는 연
관을 지울 수 없었다.
이그나티우스의 재무장관 취임 2년째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취임 초기에 야유의 눈
길을 보내던 무리들도 그의 업적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오토비 장군이 이그나티우스를 불러 예정에 없는 회담을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
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국가 원수는 장관을 다덴 병영에서 맞이하여,연병장이 내려다 보이는 서재의 안
락한 의자를 권했다.
"이그나티우스,나는 최근 예산보고서를 읽었는데 재무부는 외국기업에 의해서 중
개인에게 뇌물형태로 매년 몇백만 달러나 계속 잃고 있다는 자네의 지적에 놀라고
있네.도대체 누가 이 돈을 주머니에 넣고 있는지 짐작이 가는 데가 있나?"
이그나티우스는 국가 원수를 주시한 채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돈의 대부분은 스위스 은행의 익명구좌에 흘러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유감스럽게도 현재는 증명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밝혀내는 데 필요한 특별 권한을 자네에게 주지.그 악당들을 찾
아내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면,어떤 수단을 써도 괜찮네.우선 시작으로,
과거 및 현재에 이르는 내 각료들부터 조사해주게.그들의 지위와 연줄은 일체 고
려하지 말고 조사하도록 부탁하네."
"이런 임무를 성공시키려면 각하의 서명이 있는 특별 위임장이 필요할 것 같은데
요......."
"오늘 저녁 6시까지 자네 책상에 그것이 도착하도록 하지."
국가 원수는 보증했다.
"그리고 외국여행중에는 전권 특명대사 직함도 필요합니다."
"그것도 내주지."
"감사합니다."
이그나티우스는 회담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이것도 필요해질 거요."
장군은 함께 문쪽으로 걸어나오면서 말했다.그리고 소형 자동권총을 이그나티우
스에게 건넸다.
"아마 자네에게는 지금 나 못지 않게 많은 적이 있을테니까."
이그나티우스는 익숙치않은 손놀림으로 권총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우물쭈물 중
얼거리듯 인사말을 했다.
두 사람은 그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이그나티우스는 국가 지도자와 헤어져
재무부로 돌아왔다.
이그나티우스는 나이지리아 국립은행 총재가 관여하지 않는 곳에서 고급관리들에
게 방해받는 일도 없이 의욕에 차서 새 임무에 착수했다.조사는 남의 손을 빌지
않고 밤동안만 했고,대낮에도 그 성과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3개월 뒤에는
사냥감에게 덤벼들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
장관은 예정에 없는 해외여행을 위해서 8월을 골랐다.이 달은 대부분의 나이지리
아인이 휴가를 즐기기 때문에 그의 부재가 화제가 될 염려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무차관에게 자신과 아내와 두 아이들의 네덜란드행 비행기 좌석 예약을
지시하고,요금은 자신의 구좌에 청구시키도록 못을 박았다.
플로리다에 도착해서 일가족은 그곳 마리오트 호텔에다 방을 잡았다.그리고 이그
나티우스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 때문에 여러 날 뉴욕에 다녀온 뒤에 나머지 휴
가를 가족과 함께 보내겠다고 아내에게 알렸다.
다음날 이그나티우스는 가족을 디즈니랜드로 보내고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라가
니아 공항에서 택시로 케네디 공항으로 가서,거기서 옷을 갈아입고 비행기 표를
사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쥬네브행 스위스 항공편을 탈 수 있었다.
스위스의 수도에 도착하여 눈에 뜨이지 않는 호텔에다 숙소를 정하고,곧 침대로
들어가 8시간 숙면을 취했다.다음날 아침식사를 하면서 나이지리아에서 조사를 끝
낸 뒤에 신중히 만든 은행 리스트를 보았다.
그리고 우선 호텔 방에서 밖을 내다보며,길 건너편에 우뚝 서 있는 당당한 건물
겔바 은행에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그리고 전화번호를 문의하여 겔바은행에 전화
를 걸었다.
장관은 12시에 은행장과 만날 약속을 했다.이그나티우스가 낡아빠진 서류가방 하
나만을 들고 약속시간 전에 도착한 것은 희한한 일이라고,대리석 현관 홀에서 그
를 기다리고 있던,깔끔한 회색 정장에다 흰 와이셔츠에 회색 실크 넥타이를 맨 젊
은 남자는 생각했다.
젊은이는 은행장 비서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은행장실로 이그나티우스를 안내했
다.문을 가볍게 노크하자 '들어오라'는 소리가 나왔고,젊은 남자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나이지리아의 재무장관을 모시고 왔습니다."
은행장이 손님을 맞기 위해서 일어나 나왔다.은행장도 회색 정장에다 흰 와이셔
츠에 회색 넥타이를 맨 복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장관 이쪽으로 앉으시죠."
그는 방 깊숙한 곳에 쾌적한 의자로 둘러싸인 낮은 유리 탁자로 이그나티우스를
안내했다.
"커피를 시켜두었으니까 괜찮으시다면 드시도록 하시죠."
이그나티우스는 끄덕이며 그 낡아빠진 서류가방을 의자 옆 바닥에 놓고,커다란
한 장의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창문으로 보이는 장려한 분수의 근사함을 칭찬하
는 동안에 젊은 여자가 세 사람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여자가 방에서 나가자 이그나티우스가 용건을 꺼냈다.
"저는 나이지리아 국가원수의 요청으로 조금 이례적인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
다."
은행장도 젊은 비서도 전혀 얼굴에 놀라움을 나타내지 않았다.
"오토비 장군은 나이지리아 국민 가운데 이쪽 은행에 익명구좌를 갖고 있는 자를
조사할 임무를 제게 명령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은행장이 도중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예금주 이름을 밝히려면........"
"아아,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장관은 손을 내저으며 상대를 제지했다.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만,저는 우리나라 정부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받고 있
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그 이상은 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과장된 손놀림으로 안주머니
에서 한 통의 봉서를 꺼냈다.그것을 받은 은행장은 개봉하여 천천히 안에 든 편지
를 읽었다.다 읽고난 은행장은 헛기침을 했다.
"유감스럽지만,이 서류는 저희 나라에서는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는 편지를 봉투에 다시 넣어 이그나티우스에게 돌려 주었다.그리고 덧붙였다.
"물론 당신이 재무장관 및 특명 전권 대사로서 국가원수의 전면적인 지지를 받고
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만,그렇다고 은행의 규칙은 움직일 수 없습니
다.별로 도움을 못 드려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만,이것은 현재에도 장래에도 굽힐
수 없는 우리 은행의 규칙인 것입니다."
은행장은 이것으로 회견을 끝났다고 생각하고 일어섰다.하지만 그는 청소부 이그
나티우스의 만만치 않음을 몰랐다.
"우리나라의 국가원수는,"
이그나티우스는 분명히 알 수 있을만큼 부드러운 말투로 바꾸었다.
"우리나라와 스위스 사이의 모든 상거래에서 댁의 은행에게 중개인 역할을 다 하
도록 공작할 권한을 제게 주었습니다."
"저희 은행을 그렇게까지 신뢰해 주시다니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장관님."
은행장은 선 채로 대답했다.
"그렇지만,그렇더라도 예금주의 비밀에 대한 저희들의 자세를 바꿀 수 없음을 이
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겔바씨,유감스럽지만 쥬네브에 주재하는 우리나라 대사에 지시하여,댁
은행이 나이지리아 국민에 관한 정보제공 요청에 비협조적이라는 사실을 스위스
외무부에 공식 협조 형식으로 전하게 할 수 밖에 없군요."
그는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이 침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계속했다.
"물론 겔바 은행에 구좌를 가진 우리 동포의 이름과 그 금액을 제게 가르쳐 주시
는 것만으로 그 성가신 사태를 쉽게 피할 수 있습니다.저는 정보원을 밝히지 않을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공식 협조든 뭐든 부디 뜻대로 하십시오.그렇지만 저희 나라의 외무장관은 댁의
대사에게 정중한 외교용어로 스위스 외무부는 스위스 법률 하에서 그런 정보제공
을 강요할 권한이 없음을 전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저는 우리나라의 무역장관에게 지시하여 예금주의 성명이 밝혀질 때까
지는 앞으로 나이지리아에서 스위스인 상대의 모든 거래를 중지시키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죠."
은행장은 동요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또 우리는 현재 나이지리아에서 스위스인에 의해 교섭중인 모든 계약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렇게 될 경우에 계약위반 패널티가 부과되지
않도록 제 자신이 할 수 있는한 손을 쓸 생각입니다."
"그런 행동은 좀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겔바씨,저는 이 결정을 잠시라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 이름을 알기 위한 내 노력이 귀하의 나라를 굴복시키게 되더라도 저는 동정같
은 것을 하지 않을테니까요."
"뭐라고 하시든 고객 비공개 의무에 관한 우리 은행의 방침이나 자세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오늘 중으로 우리나라 대사에게 지시하여 나이지리아 대사
관을 페쇄시킴과 동시에 라고스의 스위스 대사를 바람직하지 않은 인물로 지정하
겠습니다."
은행장의 눈썹이 비로소 치켜올라갔다.
"게다가,"
이그나티우스는 계속했다.
"저는 런던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 은행의 태도에 나이지리아 국가원수가 노여
워하고 있음을 전세계 신문에 밝힐 생각입니다.그것이 알려지면 분명이 은행의 예
금주의 상당수가 구좌 해약을 원할 것이고,과거에 이 은행을 안전한 피난처로 생
각하고 있던 사람들도 다른 은행을 찾을 필요를 느낄겁니다."
장관은 이야기를 끝내고 기다렸지만 여전히 은행장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럼 하는 수 없군요."
이그나티우스는 일어섰다.
은행장은 장관이 이제야 체념하고 돌아가려는구나 생각하며 한 손을 내밀었는데
상대가 주머니에서 소형권총을 꺼내는 것을 망연자실한 채 지켜보는 꼴이 되었
다.
두 스위스 사람이 얼어 붙은듯 서 있는 동안에 나이지리아 재무장관은 은행장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갖다댔다.
"이름을 가르쳐 주시오,겔바씨.아시리라 생각하지만,나는 절대로 단념하지 않습
니다.지금 곧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방안에 온통 당신의 뇌수가 튀어 있게
될 겁니다.아시겠습니까?"
은행장은 이마에 구슬같은 땀을 흘리며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은 저 사람입니다."
이그나티우스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말도 못하고 쇠사슬로 묶인 듯 서 있는
비서를 가리켰다.
"이 은행에 구좌를 갖고 있는 모든 나이지리아인의 이름을 제출하게."
이그나티우스는 냉정한 말투로 젊은 남자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은행장의 뇌수가 이 폭신폭신한 융단에 튀게 된다.알았나? 지금
당장 제출해!"
젊은 남자는 은행장쪽을 보았다.은행장은 떨면서도 명료하게 말했다.
"안돼,피엘.절대로 안돼."
"알겠습니다."
비서는 꺼질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마라."
이그나티우스는 공이치기를 원위치로 하며 말했다.
은행장의 얼굴엔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비서는 엉겁결에 눈을 딴데로 돌리고 두
려워 떨면서 총성이 나기를 기다렸다.
"아주 좋소."
이그나티우스는 그렇게 말하고 은행장의 관자놀이에서 권총을 떼어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두 은행가는 여전히 말을 못하고 떨면서 숨가빠하고 있었다.장관은 의자 옆의 그
낡아빠진 서류가방을 유리탁자위에 놓았다.그리고 물림쇠를 벗기자 가방이 저절로
열렸다.
두 은행가는 차곡차곡 쌓인 백달러짜리 지폐다발을 뚫어져라 보았다.가방에는 지
폐뭉치가 꽉 차 있었다.은행장은 아마 5백만달러는 될거라고 재빨리 계산했다.
"가르쳐 주시오."
이그나티우스가 말했다.
"이 은행에 구좌를 개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작품은 미스터리매거진 제1호에 실린 작품입니다.
-------- 끝 --------
============================ 19
살아있는 팔찌
- 로버트블로크-
찌는 듯이 무더운 밤이었다.
인도에서도 이런 더위는 드물다. 비커리가 진토닉을 만들고 있을
때, 호텔 객실문을 조용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세라?" 그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들어온 것은 사내였다. 사네는 재빨리 들어와서, 문에 빗
장을 걸었다.
"나는 페나야. 세라의 남편이지." 사내는 의자에 앉아 있는 비커
리를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어때? 놀랐나? 세라는 놀라던데."
"정말 놀랍소." 비커리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손님 접대는 필요없으니까 그대로 앉아 있어." 페나가 말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싱글거리면서 자켓에서 권총을 꺼내 비커리의
배에 들이댔다.
"움직이지 않는 표적인가?" 비커리가 말했다. "이건 공정하지 않
아."
"스포츠맨 정신을 들먹이다니 훌륭하군. 남의 마누라를 건드린
주제에. 그 허여멀건 피부에 맹세코 명포수라는 건가? 옆방까지
빌린 걸 보니, 꽤나 거창한 사냥이었던 모양이지?"
비커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해도 소용없을 것 같군. 빨리 쏘아버리고 교수형이나 당하
는게 어때?"
"바로 그게 문제야. 나는 교수형을 당할 생각이 추호도 없거든.
그러니까 쏘지는 않아."
페나는 한 손으로 권총을 겨눈 채, 다른 손으로 자켓 주머니를
뒤져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는 주머니 입구를 조
심스럽게 벌려서, 비커리의 발치에다 선명한 색깔의 무언가를 떨
어뜨렸다. 얼핏 보기에는 작은 산호 팔찌 같았지만, 살아 있는 생
물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껄. 이놈은 크라이트야. 몸집은 작지만 세
계 제일의 맹독을 가진 뱀이지."
"페나, 잠깐만 내 말도 좀 들어주..."
그 작은 산호 팔찌가 갑자기 또아리를 풀었다. 비커리가 미처 뒷
걸음질칠 새도 없이 분홍색 섬광이 그를 덮쳤다. 독사는 얇은 바
지 헝겊을 통해 비커린의 오른쪽 다리에 몇 번이나 독니를 꽃았
다.
비커리는 헐떡 거리면서 눈을 감았다. 뱀을 밟아 뭉개려고도 하
지 않았다. 뜻밖에 뱀은 얌전해져서, 양탄자 한가운데에 다시 또
아리를 틀었다. 페나는 꿀꺽 침을 삼키고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권총을 탁자 위에 나던졌다.
"이걸 놓고 가지, 자네가 쓰고 싶어질 테니까. 10분도지나기 전
에..."
비커리는 쿡쿡 웃기 시작했다.
"이봐, 페나 자네는 정말 얼간이로군!"
"그건 무슨 뜻이지?"
"원주민 노점상한테 속아서 독도 없는 뱀을 산 거야. 그놈말을
곧이 듣고, 이게 독사라고 믿었으니...질투가 심한 여자말을 곧이
듣고, 그 여자와 내가 관계를 맺었다고 믿었듯이 말이야. 사실은
내가 그 여자의 어느 부분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 여자가 자존
심이 상해 화가 난거라구!"비커리는 다시 쿡쿡 웃었다. "이런 말
을 하면 부인에게 실례가 되겠지만..."
"그런 말을 내가 곧이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곧이 듣든 말든, 좋으실대로." 비커리는 손을 흔들며 말을 이었
다.
"아아, 잠깐만. 여기 앉아서 한 잔 하지 않겠나?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아. 이제 곧 알게 돼. 보라구."
확실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페나가 비커리와 술을
마시면서 얘기하는 동안, 비커리가 융단 위에 또아리를 틀고 있
는 작은 뱀과 마찬가지로 결백하고 무해하다는 사실을 납득했을
뿐이었다. 헤어질대 페나는 비커리에세 진심으로 사과했다.
세라를 런던행 첫 기선으로 귀국시켰다고 말하고, 자기도 내일
아침에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비커리는 여행이 무사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
였다
"저 권총을 가저가게. 그리고 저 뱀도. 가죽 주머니에 넣을 필요
는 없을 걸세, 옷주머니에 직접 넣어도 돼. 뱀이란 놈은 온기나
신체 접촉을 좋아하니까."
지금까지 그의 아내가 묵고 있던 옆방으로 페나가 물러가자, 비
커리는 잠잘 준비를 시작했다. 머리는 계산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세라가 런던에 도착해서 이쪽으로 전화를 걸때까진 시간이 얼마
나 걸릴까. 남편이 죽으면 유산이 얼마나 들어완다고 했더라?
앞으로 얼마쯤 지나면 그 크레이트가 페나의 주며니에서 날뛰기
시작하요, 옷감을 통해 그놈의 살찐 몸뚱이를 물어뜯을까? 이 마
지막 의문에 대한 대답은 곧 주어졌다.
얇은 벽을 통해 옆방에서 비명이 들려온 것이다. 그가 침대에 걸
터앉아, '오른쪽 다리의 의족'가죽끈을 푼 바로 그 순간.
변호인 측 입장에서 보면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는게 살인 사건 이라지만 밀러의
경우가 정말 그랬다. 상당한 명성을 지닌 지방 실업가 로드니 제이 밀러가 피살자
와 한 방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치명적인 총성이 울리기 전만 해도 두 사람은 동
업자 관계에 있었다.사무실 밖에 있던 회사 직원 몇 명은 그들의 격앙된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몹시 화가 난 목소리였
던 것만은 틀림없다고 진술했다.그리고 처음에 밀러가 한 말 역시 크게 도움이 되
지 못했다.
"내가 죽였어."
놀라 경악을 한 직원들이 불러온 순찰 경관에게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고,들고 있
던 총을 경관에게 건네 주며 또 이렇게 중얼거린 것이다.
"사고였어.하지만 내가 죽였소."
이렇듯 거의 손도 못댈 정도로 사건을 망쳐놓은 뒤 밀러는 처음으로 분별있는 행
동을 취했다.경험과 기지를 겸비한 훌륭한 변호사 노만 브리튼을 선임한 것이다.
"선생의 살인 동기가 결코 명분이 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브리튼변호사는 의기소침해 있는 로드니 제이 밀러의 맞은편에 있는 방문객용 의
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여론이 선생을 구할 수 있습니다.배심원들 역시 인간입니다.그 사람들도 스캔들
은 좋아하니까요."
"스캔들?"
밀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습니다,스캔들."
브리튼이 분명하게 다시 말했다.
"하지만 우린 사업상의 일로 다퉜습니다.그 친구한테 내가 농락당하고 있다는 확
신이 들었기 때문에 총으로 위협했던 겁니다.당연히 죽일 의사는 없었습니다."
로드니 밀러가 말했다.변호사는 그의 진술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이것 보세요! 당신,결혼했습니까?"
"했습니다.하지만 이제 집사람은 보나마나 내 사건에 연루되길 싫어할 겁니다.보
통 꼬장꼬장한 성격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당신이 사람을 죽이기 전까지는 같이 살지 않았습니까?"
변호사가 그렇잖냐는 듯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당신의 살인 동기를 불문율(정조 유린 또는 개인,가족의 명예 침해에
대하여 복수할 권리를 인정하는 원칙)로 몰고 가는 겁니다.당신 동업자는 당신 아
내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겁니다."
"말도 안돼요! 두 사람은 딱 한 번 만났을 뿐인걸요.게다가 내 동업자는 여든 다
섯살이나 먹은 데다,한쪽 눈은 멀고 지팡이까지 짚고 다녔습니다."
밀러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배심원들에게 불문율을 내세워야 합니다. 불문율로 밀고 가서 승
소하지 못한 사건은 없었으니까요."
"집사람이 모든 걸 부인할 겁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성질이 사나워서 자신의 정
조를 공격하는 증언을 하면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자신을 모욕하는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밀러의 지적이었다.브리튼 변호사가 차분히 말했다.
"그래도 우린 배심원들에게 불문율로 밀어 부쳐야 합니다."
변호사는 접견을 끝내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밀러는 자신이 선임한 변호사
의 말도 못알아 들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다음날 그는 특별 기자 회견에서 자신이 숨기고 있던 이야기를 공개했다. 비통한
어조로 자신의 동업자가 자기 아내와 불륜의 관계에 있었다고 말한 것이다.그리고
진작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기때문에 감추고 있었다며 이
렇게까지 덧붙였다.
"저는 집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는 기자회견을 마무리 짓기 위해 몇 시간을 보낸 뒤, 비통한 목소리로 끝을 맺
었다.
"아무튼, 아내의 사랑스런 얼굴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전 아내를 오늘이라도 기
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터뷰내용이 실린 신문이 가판대를 강타하기가 무섭게 사랑스런 아
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그러나 아내가 그를 찾아온 것은 그의 사정을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당신의 인터뷰 내용이 거짓말이었다고 말해요!"
밀러 부인이 오만하게 말했다.여자는 마치 항공모함의 선두에라도 서 있는 듯 너
무도 당당한 태도였다.갈라지는 목소리는 진동하듯이 카랑카랑했다.
"제발,에블린! 난 지금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러는 거요."
밀러가 말했다.
"내 얼굴도 생각했어야죠.만약 거짓된 이야기라고 밝히지 않았다간, 당신 후회하
게 될거예요."
밀러 부인이 고집스레 말했다.
"재판이 끝나는대로 취소하겠소."
"그땐 너무 늦어요,당장 취소해요!"
"미안하오,에블린."
"당장 취소하지 않았다간......"
에블린 밀러가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예요!"
이런 대화가 오간 뒤 밀러 부인은 기자 회견을 신청했고, 그 자리에서 모든 사실
을 부인했다.자신은 남편이 전기의자형을 받거나 그렇게 안 될 경우에는 무기징역
에 처하는 선고를 받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밀러 부인의 증오에 찬 태도는 자신이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대부분의 기자들이 밀러 부
인은 죄책감 때문에 그런 증오심이 생겼을 거라 믿으며 회견실을 나왔던 것이다.
기자 회견장에서 쏟아져 나온 에블린 밀러의 악의에 찬 성명 덕분에 노만 브리튼
변호사는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배심원들이 로드니 제이 밀러를 석방하는 데는
정확하게 12분이 걸렸을 뿐이다.
무죄 방면 선고를 받은 로드니 제이 밀러는 방청석 앞으로 나와 방청객들과 악수
를 나누고 있었고,브리튼 변호사는 조금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거리로 이어지는
길다란 대리석 층계 맨 위에 다다랐을 때 밀러는 기자에게 방송에 한 마디 해달라
는 부탁을 받았다. 자신을 유죄로 몰고 가려던 아내의 집요한 노력이 떠올랐지만,
그는 기자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제 혐의를 벗게 해주고 제 이야기를 모두 진
실로 받아들여줘서 감사드린다는 것 뿐입니다."
밀러의 말이었다.방청석에서 분노한 고함소리가 났고 밀러 부인이 자기남편을 향
해 달려나왔다.그는 아내의 공격을 피하려다 맨 윗계단에 발이 걸렸고, 그 바람에
아래쪽으로 곤두박질쳐져 떨어졌다.그가 바닥에 떨어진 직후 의사가 달려왔고, 의
사는 그가 즉사했다고 말했다.
쥐죽은 듯한 침묵이 뒤따르는 가운데,밀러 부인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건 사고였어요.내가 민게 아녜요."
밀러 부인이 주장했다.
"설마 사람들이 그 말을 믿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옆에 섰던 구경꾼이 물었다.널브러진 자기 남편의 시체를 내려다 보던 밀러 부인
의 굳은 얼굴에 표정 변화가 일었다.
밀러 부인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말했다.
"내가 남편을 속였던 건 사실이예요!남편은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를 죽였어
요.그래서 난 남편을 죽인 거라구요!"
바로 곁에 서 있던 노만 브리튼 변호사는 부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머
리를 끄덕였다.승소할 자신이 없는 사건이란 걸 알면서도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는
피고인을 만날때마다 느끼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품은 미스터리 매거진 제3호에 실린 작품입니다.
-------- 끝 --------
============================== 21
끔찍한 외침 1
에티 리베스
나는 신부님이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신부님을 5살 때부터 알고 있으니까 이제
벌써 8년이 된다.신부님은 설마 감옥에서 나를 만나리라고는 생각치도 않았을 것이?
다.보호감찰이라고는 했지만 나에게는 진짜 형무소 같았다.
지금까지 2년동안 나는 이곳 작은 창문을 통해 밖을 보고 있다.보이는 것은 하늘과
때때로 지나가는 비행기뿐이었다.침대는 청결해서 좋았지만,마루는 시멘트 바닥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특히 문은 더 그랬다.회색의 철문이었는데 내 다리에 붙어 있는
것과 똑같았다.문에 달린 창문은 너무 높아서,나는 아직 복도를 내다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복도에는 높은 책상이 있고,거기에 남자가 앉아서 모든 문을 여는 버튼을 누
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에 앉아서 신부님이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신부님은 여러가지
내게 해주었다.그리고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는지 말하라고 했다.
"말해 봐라,아가.어째서 그런 끔찍한 짓을 했는지 말해 봐."
디어즈 신부님이 말했다.신부님은 내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옆으로 저었다.어떻게 이런 내가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걸까? 이유를 말?
해 버리면 그 일은 의미가 없어진다.그래서 나는 신부님이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있
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무릎을 꿇어라.나에게 얘기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 얘기해라.용서를 해 주실 거다."
'싫어요,신부님.저는 무릎을 꿇을 수 없어요."
신부님은 갑자기 내 머리에서 손을 뗐다.나는 그 손으로 때리는 건 아닐까 하고 생?
각 했지만,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용서를 빌지 않는 아이는 버림을 받게 된다."
신부님은 철문으로 가서 작고 검은 버튼을 눌렀다.철로 된 부목 때문에 똑바로 편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전에는 리타가 집으로 와서 철 부목을 풀고는 다리를 문질?
러 주었다.부드러운 리타의 손은 다리의 뻐근함을 잘 풀어 주었다.그리고 밖의 일도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었다.리타는 언제나 그날 그린 내 그림을 보여 달라고 했다.
종이와 뎃생용 연필을 사준 것은 리타였다.크리스마스에는 그림 도구까지도!
얼마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비싼 것은 확실했다.
나는 눈이 젖어 오는 것을 느꼈지만 울고 싶지는 않았다.디어즈 신부님의 검은 옷을
다시 한번 보았다.양 손을 날개처럼 옆구리에 붙이고 서 있는 모습은 마치 까마귀
같았다.눈물이 흘러내렸다.나는 리타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철 부목이 구부러지지 않아 무릎을 꿇을 수 없다고 디어즈 신부님에게 말하기로 마?
음 속에 결정했다.그러면 신부님은 이해를 해줄 것이다.그렇지만 이미 늦었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신부님은 밖으로 나가 버리고 나는 닷 혼자가 되었다.
이제 곧 식사가 올 시간이다.누들과 치즈가 섞인 음식은 싫었다.누들과 치즈와 바싹
마른 잎사귀처럼 부스러지는 둥근 보리빵.그 옆에는 정말로 싫은 피너츠 버터.그것?
은 풀 같아서 혀를 이빨에 들러 붙게 해 버린다
나는 언제나 리타가 가져다 준 음식을 생각했다.
매일 밤 일하러 가기 전에 리타는 집에 들러서 내가 놀랄 만한 것들을 가져다 주었?
다.리타는 철 부목을 풀고 다리를 문질러 준 다음 갈색 주머니를 내 무릎 위에 놓았
다.우리는 머리를 마주하고 아나에 어떤 즐거움이 숨어 있는지 열어 보았다.
사탕이라든가,석류라든가,새 미술 연필이라든가.그 안에 든 멋진 것을 보고 고개를
들면,리타의 커다란 눈은 항상 생긋생긋 웃고 있었다.그러면 나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꼭 다물어야 했다.리타는 내가 우는 것을 싫어했다.내가 우는 것은 리타를 좋?
아 하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알고 있을까?
때때로 엄마와 나밖에 집에 없을 때가 있는데,그럴 때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고
창 밖을 바라보곤 했다.내 방에서는 사각형으로 둘러싸인 땅에서 생겨난 나뭇가지를
볼 수 있었다.그 나무는 병들어서 잎사귀가 별로 붙어 있지 않았다.나는 나뭇잎 사?
이로 나왔다 숨었다 하는 태양을 보았다.태양이 지기 시작할 때가 내가 가장 좋아하
는 때였다.기다란 빛줄기가 나를 가리키고,바람이 불면 모든 것이 금색으로 빛나며
흔들렸다.그것은 하루의 마지막을 알리는 하나님의 신호이며,그것은 곧 리타가 방에
찾아오는 시간이기도 했다.
"패피트" 리타가 부른다.
"나,왔어.너의 못생긴 누나!"
내가 모른 채하면,리타는 뒤에서 눈을 가리며 목소리를 바꾸어 말한다.
"누구게?"
"나의 못생긴 누나!"
나는 웃음을 터트린다.
리타 누나는 절대 못생기지 않았다.때때로 쉬는 날이면 나의 그림의 모델이 돼 주었
다.나는 창가에 조용히 앉아 있는 리타를 그리곤 했던 것이다.리타를 보고 있으면
그림을 그리고 잇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어 버린다.목이 길고 가는 리타는 검은 머?
리를 뒤로 해서 하나로 묶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그리기 힘든 것은 눈이었
다.
그눈은 웃고 있어서 당장이라도 농담을 할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그리고 어찌 보면
남을 울고 싶게 만들게 하는 그 무엇이 있기도 했다.내가 12살 때 정말로 울어 버린
일이 있었다.그때 리타는 놀라서 달려와 나를 꼭 안아주었다.
"패피트,어떻게 된 거니?"
리타는 내 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다리가 아프니? 누나가 열심히 일해서 병원에 데리고 가 줄께."
"아니야."
나는 동정을 원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 싫었다.
"운 것은 누나가 좋아서야.누나는 마치 일요일날의 노래 자랑 같애."
리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수요일이자만 일요 노래 자랑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리타만큼 엄마와 아빠를 좋아했다.그렇지만 엄마는 언제나 한숨을 쉬며 투덜대
고,리타처럼 밝은 색의 옷이 아니라 검은 색의 옷만 입고 있었다.오래 전이지만 마?
을에 처음 왔을 때는 그렇지 않았었는데.그때 엄마는 언제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빠와 미래를 설계하거나 아빠 손을 잡고 산책을 하기도 했다.
"이제 잡동사니 운반 트럭도 끝이야."
아빠가 말했다.
"루체노 일가는 편해질 거야."
아빠는 조지 엠필드싸 밑에서 트럭 운전 일을 마친 후에 야학에 다녔다.나는 다리가
아프기 때문에 긴 의자에 누워 있었는데,밤에 눈을 뜨면 곧잘 아빠가 부엌 테이블에
앞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모든 것이 조용했다.잠자는 숨소리와 시계의 딸깍딸깍 소?
리만이 들릴 뿐이었다.책을 덮은 후 아빠는 의자를 밀어넣고 침대로 향했다.
형들,칼로스와 미코스는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로자는 아직 3살.리타는 로자를 '꼬마 자두'라고 불렀다.엄마와 아빠는 뒤쪽 현관을
사용하고 있었다.아빠가 그곳을 침실로 개조했는데,그때 엄마가 말했다.
"당신,난방은 어떻게 할 거예요? 겨울이 오면 큰 일이잖아요."
아빠는 큰 소리로 웃으며 지나가려고 하는 엄마를 꼭 잡고 말했다.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언제니처럼."
"당신,애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엄마는 화가 난 듯이 아빠 손을 뿌리쳤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엄마는 내가 죽 집?
안에 있으니까,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때 온 세계가 기타 소리로 울려퍼져도 시내에
나가지 못해 세상 사는 맛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마을로 이사왔을 때는 나도 학교에 다녔다.하지만 학교에는 계단이 있고,또 거
리가 멀어서 곧 그만 두었다.리타가 업서 주려고 했지만 쇠 다리가 무거워서 리타는
곧 지쳤으며,한번은 나를 떨어트려서 쇠가 구부러져 다리에 찔린 일이 있었다.
나는 공부는 별로 하지 않았다.글을 읽는 것이 서툴렀지만,선생님도 나를 별로 지적
하지는 않았다.
리타는 그때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내게 글자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그래도
나는 잘 쓰지 못했다.나는 말하고 싶은 것을 그림으로 그렸다.그쪽이 간단했기 때문
인데,학교에서는 그런 그림을 벽에 붙이기도 했다.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엄마에게 학교에 오라는 편지를 리타에게 건넸다.엄마 대신
아빠가 갔는데,아빠는 교장실에서 한참 있다가 나왔다.고 우리들은 함께 돌아왔다.
아빠의 발걸음은 무거웠다.그리고 길을 건널 때 내 손을 잡아 주지도 않았다.집에 ?
도착하자 아빠는 나를 안아올려 엄마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 주었다.아빠는 나를 꼭
안고 있었기 때문에 표정은 볼 수 없었으나,아빠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아빠는 학교에서 나를 맡을 수 없으니까 가정교사를 불러야겠다고 엄마에게 말했
다.선생님은 잠시 동안밖에 오지 않았다.한번은 어떤 사람이 어머니에게 돈 문제로
왔다가 나를 보고 특수학교에 넣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그래서 아빠가 그곳에 갔?
었는데 돌아올 때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결국 나는
집에서 그림만 그리게 되었다.
식사 당번을 하고 있었다.문을 발로 차서 열고는 쟁반을 가지고 들어왔다.녀석은 음
식을 어디에 놓을지를 찾고 있었다.
"저녁밥이야,절름발이."
그 녀석이 말했다.
"어디에 놓을까?"
나는 일어서서 뭐가 놓여 있는지 보았다.붉은 젤리와 찌꺼기 고기 소스 안에 들어 ?
있는 검은 빵 두 조각.나는 종이 팩에 든 우유만 마신 다음 가져가라고 말했다.
그 녀석은 걱정스럽게 나를 보았다.
"이봐,멕시코놈."
녀석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먹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돼."
내가 고개를 흔들고 침대에 눕자,그 녀석은 나갔다.나의 작은 회색방은 이미 어두워
져 있었다.전등을 켜도 괜찮을 것 같았다.전등은 그물 같은 철사 바구니에 든 채 어
른거리고 있었다.하지만 그것을 켠다 해도 볼 것은 없었다.그래서 나는 일어서서 몸
을 돌벽에 꼭 붙이고 창문으로 이제 곧 밤이 될 하늘을 보려고 했다.
하늘에는 어렴풋하게 줄이 쳐져 있었다.비행기가 지나가고 남긴 흔적이엇다.비행기?
는 작은 무당벌레 같았다.그것은 멀리 있어서 작은 점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밤이 된 줄도 모르고 둥지로 돌아가는 것을 잊은,창가로 날아온 새가 훨씬
커 크게 보였다.
그것은 아빠가 새로운 일을 찾고 나서 돌아온 날부터 우리 집에 살며시 다가온 어둠
과 비슷했다.학교에서 번쩍거리는 글자로 '교욱을 수료했습니다'라고 씌어 있는 화?
려한 졸업증을 받고 돌아온 다음,아빠는 상당히 오랫동안 새로운 일르 찾았다.
"자,이제부터다."
아빠는 말했다.
"고등학교의 졸업증을 받아온 것은 내가 맨처음이다.봐라,애들아.이 작은 종이 조각
이 새로운 인생을 사작하는 패스포트란다."
그날 밤 우리는 훌륭한 요리를 먹고 엄마가 건배의 말을 했다.
"수고했어요,당신.이제 교육을 받았으니까 대통령도 될 수 있어요."
아빠가 엄마에게 키스를 했다.그날 리타는 춤을 추었다.리타는 15세로 다음에 그런
증서를 받아올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빠의 졸업증은 그저 종이조각일 뿐이었다.누구 한 사람 아빠를 끌어당겨 주는 사?
람이 없었다.밤에 돌아오는 아빠의 얼굴은 항상 술로 찌들어 있었다.그리고는 드디?
어 옛날로 되돌아갔다.그것은 대형 트럭을 운전하는 일로,아빠는 예전처럼 고물 자?
동차나 고철 쓰레기,파이프 따위를 운반했다.아빠는 매일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
왔고,엄마는 언제나 울면서 지내게 되었으며,리타는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리타가 어느 날 돌아오더니 돈을 벌 좋은 일을 찾았는데 밤에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빠가 고용주에 대해서 묻자,리타는 부자들이사는 곳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리타는 매일 아침 늦게까지 자게 되었는데,그녀가 일을 나갈 때 왠지 슬프게 보였다.
언제나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어느 날 리타와 엄마가 심한 말다툼을 시
작했다.리타가 일터 가까이로 이사하고 싶다고 말했는데,엄마가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리타는 나갔다.매일 얼굴을 보이는 일,매주 돈을 가지고 오는 일 따위를 라?
타가 약속했다. 동안 집안은 죽은 듯이 조용해지고,엄마가 어린 로자를 무릎에 안고
지내는 시간이 늘었다.엄마도 로자를 '꼬마자두'라고 불렀다.
그리고 리타가 매일 저녁 찾아오는 생활이 시작되었다.어느 날 리타가 와서 우리 둘
은 카라멜콘을 먹었다.그 다음에 리타는 비밀을 갖자고 말했다.그것은 나를 철 부목
없이 똑바로 걷게 해주겠다는 계획이었다.
"페피트."
리타는 내 손에 3달러를 쥐어 주었다.
"이걸 몰래 저금해 둬.이제부터 매주 줄 테니까.가득차면 다리를 치료해 줄 의사에?
게 가는 거야."
우리는 비어 있는 오트밀 상자를 찾아서 등군 뚜껑 한가운데에 돈이 들어갈 만한 구
멍을 뚫었다.그것이 우리의 비밀을 숨기는 장소였다.
나는 그것을 내가 자는 긴 의자 밑에 밀어넣었다.리타는 매주 돈을 넣어주었다.
때때로 3달러보다 많은 적도 있었다.
우리 집은 이제 즐거운 곳이 아니었다.리타와 함께 웃음도 사라져 간 것이다.칼로스
와 미코스는 크게 자랐다.칼로스는 고등학교에 갔는데,자퇴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
아빠와 싸웠다.칼로스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버지! 나도 누나가 몸판 돈으로 먹고 사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는 아빠가 놀라서 칼로스의 입을 막으려 하는 것을 보았다.아빠의 커다란 손이 칼
로스를 향해서 뻗어 나갔지만,칼로스가 더 재빨라서 그는 이미 계단을 뛰어 내려가
거리로 나가고 있었다.나는 처음으로 아빠가 우는 것을 보았다.엄마가 들아와서 이?
유를 물었지만,아빠는 어떻게 된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나는 몸판 돈으로 밥을 먹고 있다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거리를 걷다가 돈을 지불해 주는 남자에게 몸을 맡긴다는 것이다.
칼로스와 미코스가 하는 이야기를 잠결에 들은 적이 있었다.그들은 여자 이름들을 ?
말하면서 듣기 거북한 말을 하고는 숨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웃었다.나는 웬만한 것
은 알 만큼 자라 있었다.포장도로의 시든 나무에 붙어 있는 새싹처럼.
그날 밤 리타의 얼굴이 떠올랐다.매끈매끈한 피부와 발랄한 몸놀림,그리고 부드러운
유방.나는 리타가 마음도 몸도 아름답게 자라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도화지에 리타?
의 몸의 곡선을 그려 본 적도 있었다.동생이 누나를 보는 눈 이상의 것으로 보고 있
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주기를 바란다.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이 죄가 되지는 않는다.
리타의 진짜 이름은 마르가리타이다.하얀 꽃잎 한가운데에 금색의 싹이 있는 꽃의
이름이다.
다음날 저녁 리타가 왔을 때,나는 칼로스가 말한 것을 전부 이야기하고 함께 웃은 ?
뒤 칼로스를 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나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왜 말이
없냐고 리타가 물었을 때도 거짓말을 해 버렸다.다리가 아프다고.
"자,이상자를 열어서 돈을 세어 보자."
리타가 말했다.
우리는 뚜껑을 열고 리타의 무릎 위에서 돈을 세었다.
"더 필요해.더 일해야겠어."
나는 질문을 하는 것도,잠자코 있는 것도 두려웠기 때문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처음으로 리타가 가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주일인가 지나자,나는 다시 잘 잘 수 있게 되었다.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거짓말?
의 증거를 찾기라도 하려는 듯이 리타를 가까이에서 찬찬히 보게 되었다.
결국 어느 날 나는 말을 꺼냈다.
"몸을 파는 여자를 뭐라고 불러?"
말을 하면서 나는 넘어져 구를 듯한 느낌이 들었다.
리타는 나를 힐끔 보더니 입을 꽉 다문 다음 미소를 지었다.
"싫어,어린 페피트가 어른이 된 거니!"
리타는 손을 내 머리 위에 얹고 내 머리를 들어올렸다.
"뭐라고 불러?"
나는 다시 물었다.
"매춘부."
리타는 휙 몸을 뒤로 돌리고 손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런 일 하면 안 되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
리타는 내 쪽을 향하더니 커다란 주머니를 들어올렸다.
"자,오늘 가지고 온 걸 봐!"
커다란 오렌지를 먹은 뒤 리타는 머리를 내 머리에 기대고 말했다.
"너는 더러운 것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너는 깨끗한 것만 보고 그것을 종이 위에
그리는 거야.나는 매춘부 따위는 몰라.너도 몰라."
그리고 곧 집을 나갔는데,그날 밤 나는 잠자기 전에 칼로스와 그의 나쁜 혀를 실컷
저주해 주었다.
리타와 나는 예전처럼 됐다.이제 곧 리타의 생일이 온다.앞으로 1주일 있으면 18세.
나는 선물을 사기로 했다.엄마가 여자의 18세는 특별한 해라고 말했고,나도 멋진 생
일이 되게 해주고 싶었다.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긴 의자 밑의 오트밀 상자에 들어
있었다.리타의 생일 선물을 사는 거니까 거기에서 좀 써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가 계단을 내려가서 거리로 나가겠다고 했을 때 대단히 놀랬지만,이유를
듣고 나서는 나를 이해해 주었다.나는 저축해 둔 돈이 있다고 말하고,주머니에 있는
20달러를 엄마에게 보여 주었다.엄마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도와주고,가게들이 즐
비한 거리로 걸어가는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가게에는 아름다운 것이 잔뜩 진열되어 있어서,나는 쇼윈도우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하마터면 소형 라디오를 살 뻔했다.곧 나는 리타에게는 사랑스러운 드레스가 좋지 ?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리타의 검은 머리가 깜깜한 밤보다 더 까맣게 보일
하얀 드레스.리타의 금색 피부와 어울려서 눈보다 하얗게 보일 드레스.
그리고 드레스를 팔고 있는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길 맞은편에 있는 화단처럼 드레?
스를 장식하고 있는 커다란 가게가 있었다.교차점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내 뒤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나는 길을 건너지 않고 그들?
의 뒤를 쫓았다.
한 사람은 분명히 루이스라고 했다.루이스는 리타보다 연상이었지만 학교는 함께 다
녔다.때때로 그를 칼로스가 집으로 데리고 왔었다.루이스가 리타의 이름을 입에 담?
는 것을 들은 순간,나의 발은 자연스레 그들 쪽으로 향했다.
"아아,그래,그 리타."
그들 중 한명이 말했다.
"사창가에서 몸을 팔고 있지.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고 돈을 번다니까."
"확실히는 모르지만 나쁜 포주한테 말려들었다는 거야.지금쯤은 돈을 꽤 벌었을껄."
그들은 크게 웃었다.
나의 피! 나의 피가 전부 몸에서 튀어나가 도로에 흡수될 것 같았다.
모두 지옥으로 떨어져 버려! 나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그들은 모퉁이를 돌아 모
습을 감추었다.내 마음은 죽었다.나는 이제 두려워하고 있던 것을 의심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의심하는 것조차----.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에게 부딪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나는 움직일 수 없?
었다.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나는 천천히 길을 되돌아갔다.목 안에 아무리 해도
삼킬 수 없는 무언가가 착 들러붙어 있었다.소리 없는 두려운 외침 같은.
머리가 아팠기 때문에 멈추어 서서 나는 얼굴을 쇼윈도우의 반들반들한 유리에 기댔
다.그것은 화끈한 볼에 차갑게 전해져 기분이 좋았다.나는 눈을 꼭 감았다---아플
정도로 꼭.여러 가지 색깔들이 머리 속에서 춤추기 시작했다.그리고 그것은 곧 나?
의 심장을 단번에 찔렀다.고통의 음악은 다리 안에서도 울리고 있었다.
더 이상 아픔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눈을 떴다.그러자 그곳에,내 눈 밑에
권총이 떨어져 있었다.사령관의 명령을 기다리고 금방이라도 행진하려 하고 잇는 군
대처럼.껍질 안에 죽음을 가지고 있는 검은 달팽이는 조용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권총을 보고 있었다.디어즈 신부님은 죽음은 또 하나의 생으로 이어?
진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더 좋다고?
나는 가게 문 쪽으로 다가갔다.나는 양쪽 손으로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단단하고 차
가워서 그 촉감이 권총 같았다.나는 손잡이를 밀어 문을 열었다.
나는 매트에 걸려 넘어졌다.일어났을 때는 철 부목 때문에 매트가 찢어져 있었다.
작은 벨이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이 조사하러 왔을 때,나는 고개를 저었다.소년 재판소에서 재판이 진행되는 도?
중 아빠와 엄마는 계속 울었다.재판관이 왜 생일날 누나를 죽였는지 이유를 물었을
때도,나는 잠자코 있었다.재판관은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이해해 주지 않을
것이다.13세 때에 자기 별을 잃는다는 것은 장님이 돼서 지구를 걷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자기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진흙투성이가 되는 것을 보는 것보다 이편이
훨씬 낫다.나에게 마르가리타는 언제나 그 이름처럼 금색의 싹이 있는 더럽지 않은
하얀 꽃잎의 꽃이다.
이무도 없는 어두운 밤,이 작은 방안 침대에 뒹굴고 있는 내가 살인자라고 불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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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 리베스] ===> (미국,?)
<EQMM>의 1976년 5월호에 퍼스트 스토리로서 본편이 게제되었을
한다.이 여성 작가에 관해서는 다른 자료는 거의 없다.
"나는 메인주 벽지를 헤매고 다니며,부르클린에서 뉴욕의 마천루를
엿보듯이 올려다보고,시카고 여기저기의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 사태를 무서워하고,아이오와에서 사랑에 빠지고,동텍사스의
시냇물에서 물고기를 잡고,코네티컷에서 과부생활을 한 뒤,캘리포?
니아에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그 후 뉴욕과 달라스에서 드레스
디자이너를 하고,주립 정신병원에서 연극을 상연했을 때에는 긴장?
병 환자들을 배우로 훈련시켰고,주립 형무소에서 일했을 때에는
여죄수들과 랩 디스커션을 계속하고,미국에서는 빈곤의 본질을 찾?
아냈습니다."
본편의 배경을 엿보게 하는 작은 인생 드라마 같은 자기 소개라
에 두편의 이야기밖에 기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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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실패 (Fatal Error)
by 프레드릭 브라운(Fredric Brown)
월터 백스터씨는 오래 전부터 범죄소설과 추리소설을 열심히 읽고 있
는 편이었다. 그러므로 자기 큰아버지를 죽이려고 결심했을 때, 조그
마한 실수도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실수를 피하려면 첫째 줄거리가 단순해야 한다고 생각했
다. 철저하게 단순해야 한다. 모호한 알리바이는 만들어내지 말 것.
복잡한 수법도 안된다. 용의자도 필요없다.
그런데 잠깐---가벼운 용의자는 어떨까? 그것도 아주 단순한 녀석이
라면.... 가는 길에 큰아버지네 돈을 몽땅 훔쳐오는 게 좋겠군. 그렇
게 하면 절도범이 죽인 것으로 알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자신이
큰아버지의 유일한 상속자니까 혐의를 받을 게 뻔한 일이다.
월터는 들키지 않도록 고심하여 작은 쇠지렛대를 손에 넣었다. 이것
은 흉기 겸 도구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신중하게 아주 세밀한 일
에 이르기까지 계획을 짰다. 하나라도 실수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이
다. 그 점에서는 스스로도 확신이 있었다. 그는 세심한 주의를 하여
일을 결행할 밤과 시간을 정했다.
쇠지렛대 덕택으로 창문은 소리도 내지 않고 감쪽같이 열 수 있었다.
그는 거실로 들어갔다. 침실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었으나 아무 소리
도 들리지 않았으므로 곧 강도짓을 해치우기로 마음먹었다. 큰아버지
가 늘 돈을 넣어두는 장소도 알고 있었다. 손을 댄 흔적이 나도록 흩
뜨려 놓아야만 한다. 달이 밝아서 발밑이 잘 보였다. 그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두 시간 뒤 집으로 돌아오자 월터는 급하게 옷을 벗고 잠자리로 기어
들었다. 이 범죄는 내일 아침까지 경찰에 발견될 염려가 없다. 그러
나 그보다 빨리 발각된다 하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돈도 쇠지렛대도 다 치웠다. 수백 달러의 돈을 처분하기는 매우 어
려웠지만 그것이 몸의 안전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5만 달러, 아
니 그 이상의 상속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왔나?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문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보안관과 부보안관이 거침없이 들어왔
다.
"월터 백스터요? 당신의 체포영장이오. 옷을 입고 같이 가줘야겠
소."
"나의 체포영장이라고요? 대체 내가 무엇을 했다는 거요?"
"가택침입및 절도죄---당신의 큰아버님이 문 앞에서 보고 있었으므로
당신이라는 것을 안 거요. 당신이 나갈 때까지 보고 있다가 경찰에 와
서 증언하고...."
월터 백스터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결국 그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완전범죄를 꾀했는데, 훔치는 데만 열중한 나머지 큰아버지를
죽인다는 중요한 일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 The End -
=========================== 23
백만의 하나의 우연
새무얼 홉킨스 애덤스
배실의 눈앞에는 꼼꼼한 글씨로 적힌 계획서가 놓여 있었다.
만약의 실수를 막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개요를 적어두는 것은
그의 과학적 훈련의 하나이다. 이렇게 하여 당국에 도전하려는 것이다.
제 1차 자료--화확자인 에이드리언 골 박사. 일요일 오전9시에 자택
실험실에서 시체로 발견됨. 사인은 클로로포름. 범행 시각은 6시 49분,
쓰러졌을 때 망가진 피해자의 회중시계로 입증됨. 서류가 들어 있던
2대의 자동차 가운데 하나가 사라짐.
제 2차 자료--서류나 기구는 전혀 없어지지 않았음. 사망자 이외의
지문은 검출되지 않음. 사라진 '쿠페'이외의 자동차 타이어 자국도 없
음.
현장 및 상황--골 박사의 집에 있는 전용 실험실은 뉴저지 주 나트레
에 있는 골 화학공장에서 8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음.
토요일이면 박사는 거기서 밤새 연구를 계속하고, 아침식사 때까지 작
업을방해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음.
시체는 아침 식사를 알리러 간 고용인에게 발견됨.
예상되는 결과--사라진 쿠페는 나중에 융커스 시 근처의 폐차장 앞에
있는허드슨 강 바닥에서 빈 채로 발견됨. 물의 부식작용으로 운전자를
알아낼단서가 될 만한 흔적은 모두 사라짐.
배실은 이 서류를 봉투에 넣어 봉한 다음, 금고에 넣고 잠궜다. 나중에
일이 한 걸음씩 진전될 때마다 그것과 맞춰보면서 지적 만족을 맛보려
는 것이다.
백만에 하나, 나에게 불리해질 가능성이 있다면... 과감히 맞서는 거야.
나도 백만 명 가운데 하나 있을까말까 한 천재라구. 내 뛰어난 재능을
갈고다듬어, 뒤늦게나마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쟁취하기 위한 무기
로 만든 거야.
그거야 어쨌든, 박봉을 참고 그토록 열심히 일했는데로 골이라는 놈한
테 쫓겨나다니! 골의 귀중한 화학식 사본이 내 서류속에서 발견되면?
그렇다 해도 그게나한테 불리한 증거는 안돼. 적어도 법적으로는.
골 박사의 조수는 이렇게 '차용한' 기록 속에서 채산을 맞출 수 있는
광맥을찾아냈다.
그가 일을 할당받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부차적 화학식의 도움을 얻
어,막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얻어낸 이 정보는 그가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것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전부 였을뿐,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빠진 부분이 있을 만한 곳은 그 노인의 전용 실험실밖에 없었다.
그 완전한 화학식과 실용화에 관한 자료를 손데 넣기 위해서라면, 전
세계의어떤 고무회사도 거액을 아낌없이 투자할 터였다. 바로 그 큰돈
을 배실은 자기돈으로 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5시. 전략상 첫번째 수를 써야 할 시간이다.
아파트 1층에 있는 도먼 의사의 진료실을 찾아간 그는 갑자기 현기증
이 나고 숨이 가쁘다고 호소했다. 그의 초췌하고 창백한 얼굴과 꿈틀
꿈틀 경련을 일으키는 뼈만 앙상한 손가락을 본 의사는 신경성 소화불
량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처방전을 써주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심장이 나쁜 게 아닐까 하고 걱정했거든요." (완
벽해!)
그는 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허드슨 강의 뉴저지 쪽 다
리 기슭에 인부들이 색전구를 장식하고 있었다.
"오늘 밤인가?" 하고 묻는 버스 운전수의 목소리가 배실의 귀에 들어
왔다.
"틀림없어." 집표원이 대답했다.
배실은 뉴어크에서 버스를 내렸다. 그리고 파세이크행 야간 열차를 탔
다
걸어서 골 박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새벽 2시였다. 실험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쿠페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쪽의 차고 문이 열려
있었다.
이거 운이 좋은걸! 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차를 차고 밖
으로 밀어 낸 다음, 비탈에서 차를 굴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밀고 가서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해놓고, 이층으로 올라가서 문을 두드렸다.
"배실입니다, 선생님."
노인이 문을 열고 말했다. "무슨 일인가?"
"일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골 박사는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이 몇 시인 줄이나 아나? 돌아가게."
이렇게 말하고는 홱 고개를 돌렸다. 배실은 그에게 덤벼들었다.
장갑 낀 손으로 기다란 헝겊을 크로로포름에 적셔서 맥없이 늘어진
골 박사의 입과 콧구멍에 친친 감았다.
정신없이 뒤진 끝에 문제의 화학식을 찾아낸 배실은 열심히 그것을 베
꼈다.
그 일이 끝나자, 죽은 노인의 회중시계를 꺼내 6시 49분으로 맞춰놓고
유리뚜껑을 깨뜨렸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현장을 점검한 뒤 문을 닫고, 신중하게 계획한
이 '사건'에 작별을 고했다. 차는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그는 고속도로로 차를 몰았다.
다리를 건너 뉴욕 쪽으로 들어가면, 사전에 충분히 답사해둔 혜차장으
로 가서 쿠페를 강에 밀어넣도록 되어 있었다.
그 일이 끝나면 귀가하여, 아침 7시에 의사에게 전화를 건다.
"또 심장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빨리 좀 와주세요."
7시라면 범행이 일어난 지 11분 뒤가 되고, 그 시각에 그는 범행 현장
에서 40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게 된다. 알리바이는 완벽하다.
다리의 삼광이 그의 눈을 찔렀다. 색전구가 다리 기슭에 모여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섬뜩하게 비추고 있다. 다리를 경비하고 있는 경찰
관, 주 경찰청에서 나온 기마경찰, 그리고 일반 시민 몇 명. 그는 브레
이크를 밝고, 거스름돈이 필요없도록 잔돈으로 준비한 통행료를 내밀
었다. 그러자 누군가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환성과 박수갈채가 일
어났다. 갑자기 플래쉬가 터져서 시야를 가렸다.
두 번, 세 번 플래쉬가 터졌다.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이름과 주소를 말씀해 주십시요."
자동차 번호를 적은 경찰관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물었다.
무슨일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 이게 정말 내 목소리 일
까?
바싹 말라버린 듯한 이 목소리가?)
상냥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그의 질문에 대답하여, 어리둥절한 그의
마음을 더더욱 혼란시켰다. 백만? 백만? 백만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경팔관이 설명해 주었다. 당신의 통행권은 이 다리에
서 백만번째로 발행된 것입니다. 내일 기념식이 열리고, 당신은 금시계
를 기념품으로 받게됩니다. 아아, 그랬구나. 그럼 내일 신문에 내 사진
에 실리겠군.
피해자의 자동차를 탄 살인범의 사진이. 백만번째의 차.
백만에 하나의 우연!
수사 당국은 배실의 금고 안에서 그 계획표를 발견했다. 계획은 충실
히 지켜져 있었다.
줄거리에 명기외어 있듯이, 골 박사의 쿠페 자동파는 허드슨 강바닥의
진창 속에처박혀 있었다.
계획에서 어긋난 점이 딱 하나 있었다. 그 차 안에 배실이 있었던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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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딕슨 카의 소설을 읽은 사나이
윌리엄 브리튼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에드가 골트의 인생은 그 나이 열두살 때 동네
대본점에서 무심코 존 딕슨 카의 <테니스 코트의 살인>을 집어 들었을 때
그 목표와 방향이 정해졌다. 그날 저녁밥을 먹은 뒤 그는 책을 들고 앉아
잠자리에 들 시간까지 읽었다. 종내는 책을 몰래 자기 방까지 들고 가 이
불속에서 회중전등을 비쳐가며 읽었다.
다음날 대본점에 책을 반납하러 가서는 카가 쓴 다른책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을 빌려왔다. 이것을 다 읽는데는 이틀이 걸렸는데, 보모가 회중전등
을 압수했기 때문이다. 일주일도 못되어 그는 대본점에 비치된 존 딕슨 카
의 추리소설을 모조리 독파했다. 마지막 책을 끝낸 날 우울했던 그의 기분
은, 좋아하는 작가가 '카터 딕슨'이라는 필명으로도 책을 썼다는 사실을 알
고는 곧 밝아졌다.
다음 10년이라는 세월동안 에드가는 '기디언 휄 박사', '헨리 메리베일
경'등의 명탐정을 따라, 존 딕슨 카 및 카터 딕슨의 명의로 된 모든 밀실
사건을 섭렵했다. <겁이 무언지 모르는 사나이>를 읽던 중 저자가 슬슬 사
건을 해명할 때가 되었을 즈음, 고등학교 물리시간에 배운 도피점의 지식을
이용하여 한 발 앞서 수수께끼를 풀었을 때는 정말 그 기쁨이란 말로는 표
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에드가가 중대한 결단을 내린 것은 십중팔구 그때
였으리라.
'이 몸 에드가 골트께서는 언젠가는 밀실 살인을 행해 보리라. 그 방면
의 대가인 딕슨 카 본인조차도 아리숭하게 만들 그런 범행을.'
고아였기에 에드가는 버몬트의 한갓진 구석 다 쓰러져 가는 큼직한 집에
서 삼촌과 함께 살았다. 집에는 추리작가에게는 혜택이랄 수 있는 서재뿐
만 아니라, 현대식 주택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몇가지 시설도 있었다.
그렇지만 서재의 창문들은 빗장을 지르게 되어 있었고, 안으로 열리게 된
5센티미터 두께의 떡갈나무 문 또한 양쪽 벽에 단단히 박힌 두 개의 강철고
리 사이로 육중한 나무 빗장을 질러 넣어야만 잠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비밀통로 같은 건 없었다. 요컨대 이 방은 카의 명탐정중 누구라도 만족시
킬만 했으며, 에드가에게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희생자는 물론 삼촌인 다니엘이 될 터였다. 편리하게도 늘 곁에 있을 뿐
만 아니라, 에머슨의 '자립철학'의 신봉자였던 까닭에 조카인 에드가 또한
그와 같은 행복한 상태를 이루도록 돕고자, 머지않은 장래에 이 몄은이를
자기 뜻에 맞춰 인생길을 걷게 하려고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드가는 삼촌이 평생 쌓아올린 부정 축재를 마음껏 탐닉할 준비가 100퍼
센트 되어 있었으므로, 노인네가 유언장을 변경하기 전에 그를 해치우는 것
은 전적으로 본인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었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해서 이른 봄의 어느 화창한 날, 에드가는 서재의 벽
난로 속에 들어서서 검댕이를 뒤집어써 가며 굴뚝 안쪽을 반짝반펊 닦고 있
었다. 굴뚝은 물론 에드가가 밀실에서 탈주하는 수단이었다. 그것은 그의
날씬한 몸이 빠져 나가기에 딱 좋으리만큼 넓었으며, 청소하기에 편하도록
안쪽에 쇠사다리가 달려 있었다. 굴뚝을 통한 탈주 경로는 에드가를 다소
실망시켰다. <세개의 관>에 실린 저 유명한 밀실 강의에서 기디언 휄 박사
가 그런 방법은 제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용가능한 유일한
탈출구였기에, 에드가는 존 딕슨 카 조차도 틀림없이 인정할 수 있도록 이
를 멋지게 이용할 계획을 생각해 냈다.
'어쩌면 에드가 어르신네도 본인의 범죄에 관해 기술한 책을 한권 증정받
게 될 지도 모른다. 카의 <에드먼드 고드프리 경 살해>와 같은.'
자신이 즉각 범행의 용의자로 의심받으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에드가는 걱
정을 하지 않았다. 그의 준비 작업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니엘 삼
촌은 사업차 출장중이고, 요리사와 정원사는 휴가중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범행이 일어났을때, 에드가는 나무랄 데 없는 증인을 둘이나 확보하고 있을
터였다. 이 몸은 고사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범인이 될 가능성이 없노
라고 증언해 줄 사람을.
굴뚝 청소를 마치자 에드가는 양동이 하나 가득한 물을 부엌으로 가져가
하수구로 흘려 버렸다. 그리고 나서 온몸을 구석구석 씻어 검댕을 없애고
는, 이불장으로 가서 새로 빨아놓은 이불호청을 꺼내 가지고 서재로 되돌아
갔다. 이불호청으로 온몸을 감싸고는 쇠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꼭대
기에 이르자 다시 내려오면서, 툭하면 걸음을 멈추고 일부러 이불호청을 굴
뚝 안벽에 문질러 댔다. 서재로 돌아나오자 창문으로 가서는, 이불호청을
벗어 햇빛에 쳐들어 보았다. 주름은 좀 갔지만 여전히 하얗게 반짝이고 있
다. 에드가는 싱긋 웃으며 이불호청을 뚜껑달린 광주리에 넣었다. 그리고
는 이충으로 올라가서 굴뚝 옆 다락방의 창문 걸쇠를 벗겨 놓았다. 이것이
끝나자 자기 방으로 돌아와, 범행을 위해 특별히 선택한 의상으로 갈아입었
다. 흰 와이셔츠에 흰 바지, 그리고 흰 운동화 차림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벽에 걸린 기병대용 군도를 내려 서재로 가져가서는, 어
두컴컴한 구석에 세워 놓았다.
준비는 거의 완료되었다.
그날 이른 저녁 음악실의 소파에서, 에드가는 삼촌이 귀가하는 소리를 들
었다.
"에드가, 집에 있냐?"
뉴잉글랜드 지방 특유의 콧소리를 내는 다니엘 삼촌의 음성은 200년 동안
명맥을 이어온 버몬트의 모든 조상을 대변하고 있었다.
"저 여기있어요, 삼촌. 음악실이요."
"또냐?"
문틈으로 들여다보며 다니엘은 말했다.
"넌 그게 탈이란 말이다, 이놈아. 세상에 나가 출세할 생각은 않고, 허
구헌 날 그 놈의 기타나 두드려 대니.... 이놈아, 일이 먼저야. 대성공을
하려면 일밖에 없어."
"삼촌도 참, 하루종일 일때문에 뛰어다녔는 걸요. 끝난 지 한 시간도 안
됐단 말예요."
"아무튼 내가 유언장에 관해 말한 건 정말이란 걸 명심해. 그렇지 않아
도 오늘 저녁 스토퍼가 놀러오면 그 문제를 얘기할 생각이다."
다니엘 삼촌과 레뮤얼 스토퍼, 그리고 해롤드 크라울리 의사가 주말마다
벌이는 브리지 게임에, 내기키는 않았지만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대개는 에
드가도 끼었는데, 이 게임조차도 '계획'의 일부로 들어있었다. 완전범죄일
지라도 그 완벽함을 보아줄 목격자를 필요로 하는 법이다.
얼마 후 에드가가 서재의 벽난로에 장작을 한아름씩 세 번 갖다놓고, 마
지막으로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병을 땔감에 보탰을 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육중한 노크 소리가 세 번 울렸다. 이것을 시보로 삼아 그는 시계를 맞췄
다. 일곱시 정각이다.
"손님들을 음악실로 안내하고 편히 모셔라."
다니엘 삼촌이 일렀다.
"마실 것을 대접하고 게임 준비를 해 놔. 내 곧 가마."
"왜 손님들이 늘 삼촌을 기다려야 하죠?"
에드가가 물었다. 제 딴에는 이마를 찌푸린다는 게 능글맞은 표정이 되
어 있었다.
"내가 원한다면 저 사람들은 언제까지라도 기꺼이 기다릴게다. 자기들의
수입이 대부분 어디서 나오는 지 잘 알고 있으니까."
이리하여 에드가가 세운 계획의 일부가 또 한번 멋지게 들어맞았던 것이
다.
낡은 저택에 들어서며 레뮤얼 스토퍼는, 늘 그렇듯이 다니엘 삼촌의 막대
한 재산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노골적으로 헐뜯기 시
작했다.
"흰 옷에 흰 신발이라. 온통 하얗구만."
그는 에드가의 옷차림을 보고 빈정댔다.
"자네 꼭 식당 웨이터 같네 그려."
"그 친구 말에 신경쓸 거 없네."
바깥에서 다른 음성이 말했다.
"좋은데 뭘 그래. 테니스 치고 있었나?"
크라울리 의사가 흐느적거리며 들어와서는 상냥하게 웃었다. 그를 보면
에드가는 언제나 큼직한 해파리가 생각났다.
"꼬마한테 알랑거려 봤자 이젠 소용없어."
스토퍼가 말렸다.
"다니엘은 오늘밤 유언장을 바꿀 생각이라구."
"그래?"
크라울리는 놀랐다.
"그거 안됐는 걸, 꼬마, 아니 자네."
"그렇습니다. 삼촌도 이미 그 결정에 대해서 말해 주셨지요."
에드가는 말했다.
"저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이 마당에 동기를 너무 눈에 띄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손님들을 음악실로 안내하면서, 에드가는 평소와는 달리 그들을 서재쪽으
로 끌고 갔다.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중대한 변경이다. 그는 문앞에서
소리쳤다.
"삼촌, 크라울리 선생님과 스토퍼 아저씨가 오셨는데요."
"알고 있어."
다니엘이 으르렁거렸다.
"음악실로 모셔라. 내 곧 갈테니까."
이것으로 두 손님은 다니엘 삼촌이 펄펄 살아있는 것을 목격한 셈이다.
이제 준비 완료였다.
음악실에 가자 에드가는 술을 따르고 게임 준비를 했다. 그러더니 문득
눈을 크게 뜨며 손가락을 딱 튀겼다. 방금 뭔가 생각난 사람의 표정을 완
벽하게 연기한 것이다.
"카드를 이층에 두고 왔나 봐요. 가서 가져올께요."
그리고는 손님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방을 나갔다.
일단 문을 나서자 에드가의 걸음은 빨라졌다. 8초 후에는 서재 문 앞에
이르렀다. 삼촌의 놀란 얼굴은 무시하고 구석에서 칼을 집어들고는 성큼성
큼 삼촌이 앉아있는 책상 앞으로 갔다. 다니엘은 아직도 손에 신문을 든
채로였다.
"너 이게 무슨....?"
한마디 말도 없이 에드가는 칼을 뻗어 힘껏 삼촌을 찔렀다. 칼끝은 다니
엘의 칠면조 같은 목을 턱 바로 밑에서 뚫고 들어가, 목을 관통하여 의자등
에 박혔다. 노인의 몸은 그대로 고정되었다. 카아의 <뉴게이트의 신부>에
비슷한 장면이 있던 것이 생각나, 에드가는 쿡쿡 웃었다.
그는 몇 초 동안 칼을 쥔 채 그대로 있었다. 이윽고 조심스레 죽은이의
맥을 짚어 보았다. 없었다. 살인은 계획대로 정확히 수행된 것이다. 70
초 만에.
서둘러 벽난로로 가자 에드가는 아까 미리 놓아 두었던 작은 병을 집어들
었다. 그리고는 풍성하게 쌓여있는 장작과 불쏘시게를 헤치고 들어가, 난
로 앞의 큼직한 칸막이를 제자리에 밀어다 놓고는, 굴뚝을 오르기 시작했
다. 꼭대기에 이르자 시계를 보았다. 스토퍼와 크라울리 곁을 떠나온 지
2분이 경과하고 있었다.
굴뚝 옆 지붕 위에 서서, 에드가는 병 속에서 작은 종이쪽지를 몇개 꺼냈
다. 이것은 2차 대전 당시의 파괴공작에 관한 책을 보고, 거기 적힌 제조
법대로 그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명함'이라고 일컬어진 이들 종이
쪽은 공기중에 노출되면 이내 불이 붙도록 되어 있었다. 전쟁중 그들은 이
것을 비행기에서 뿌려 적의 밀밭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에드가는 불붙는
시간이 한결 단축되도록 만들었으므로, 이 종이쪽들이 서재의 벽난로에 떨
어질 즈음에는 불이 붙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종이쪽들을 굴뚝 아래로 떨어뜨리고 잠시 기다렸다. 애쓴 보람이
있어서 이윽고 일진의 뜨뜻한 바람이 굴뚝을 통해 불어 올라왔다. 3분 10
초. 정확히 예정대로다.
에드가는 경사진 지붕을 따라 움직여 조각으로 장식된 큼직한 처마 밑에
이르렀다. 거기 다락방 창문이 있었다. 지붕 가장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조
금씩 발을 옮기며, 창을 밀어올리고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먼지나 흙이
옷에 묻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이윽고 자기 방으로 가서는 미리 놓아 둔
새 카드를 집어 들고는, 발소리도 요란하게 층계를 내려가 음악실로 갔다.
그는 방을 나간 지 5분이 좀 못되어 다시 두 손님과 어울렸다. 역시 예정
그대로다.
에드가는 잠시나마 자리를 비운데 대해 사과하며, 검댕하나 묻지 않은 자
기 옷을 살펴보고는 내심 흐믓했다. 어떻게 이 몸이, 바야흐로 연기를 풀
풀 뿜어대고 있는 굴뚝 속을 방금 지나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랴.
곧 스토퍼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이 친구 대체 뭘 하는 거야?"
"가서 데려와야 겠군."
크라울리도 말했다. 두 사람이 일어서자 에드가는 보란 듯이 하품을 했
다.
"전 여기 그냥 있겠습니다."
태연한 척 애썼지만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존 딕슨 카도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거야.'
스토퍼와 크라울리가 방을 나가자 에드가는 생각했다. 그는 이 범죄의
수사과정에서 무슨 초자연 이론 따위가 끼여들지 않기를 바랐다. <화형 법
정>을 읽을 때 해결부에서 마술을 강조한 걸 보고는 실망했던 기억을 떠올
렸던 것이다.
'이상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고함소리도 문을 부수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두 노친데가 육중한 서재 문을 뚫고 들어가려면 무언가 소리가 나
야할 게 아닌가.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었다. 계획은 완벽해서 물샐틈 없
었으니까. 이야말로....
음악실 문간에 레뮤얼 스토퍼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곤하고 지친 몰골이
었다. 손에는 다니엘 삼촌의 책상에서 꺼내 온 권총을 들고 있었다.
"삼촌의 재산이 그렇게도 탐나던가?"
스토퍼는 물었다. 충격과 분노로 떨리는 음성이었다.
"그래서 일을 저질렀나?"
일순간이었지만 에드가는 스토퍼가 어떻게 그리도 빨리 서재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자 불현듯 짚이는 게 있었다. 화살같
이 흘러가는 한순간, 정신병자로 행세하면 혹시 괜찮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모처럼 계획한 완전범죄를 누가 인정해
주랴. '휄 박사'는 이제 날 어떻게 볼 것인가? '헨리 메이베일 경'은 또
뭐라고 할까? 아니, '존 딕슨 카'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밀실 살인이랍시고 저지른 범인이 문을 잠그는 것을 잊었다면, 대관절 사
람들은 뭐라고 할까?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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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나눈 형제
by Charles Beaument
"그럼 시작하실까요."
정신과 의사는 노트에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자신이 죽었다는 걸 께닫게 된 건 언제지요?"
"죽었다는 게 아닙니다. 죽지를 못한다는 거죠."
검은 옷을 입은 창백한 사내는 말했다.
"차라리 죽은 몸이면 고맙게요. 그게 문젭니다.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
는 거예요."
"왜 못 죽지요?"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니까요."
"하긴 그렇군요."
의사는 민첩한 솜씨로 노트를 했다.
"그럼 스미스 씨, 자초지종을 말씀해 주실까요."
창백한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농담 마십시오. 상담료가 한 시간에 25달러나 되는데, 언제 얘기를 다
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돈이 없어서 지금 입고 있는 망토도 한 달에 한 번
세탁 할까말까 한데요."
"그렇지 않아도 물어 보려던 참입니다. 그건 왜 입습니까?"
"망토없이 다니는 흡혈귀 얘기 들어봤습니까? 다 각본대로지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진정하십시오."
"진정하라니! 진정하게 됐습니까.... 선생님, 정말 미칠 것 같습니다.
이걸 좀 보세요!"
스미스라고 자칭한 사나이는 두 손을 내밀었다. 핏기 하나 없이 희멀건
두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또 이 눈 좀 보십시오!"
빨간 실핏줄이 거미줄처럼 얽힌 충혈된 눈이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그는 쓰러지듯 쇼파에 몸을 던지며 부르짖었다.
"이 상태로 며칠만 더 있다간 정신병원에 갈 겁니다."
의사는 책상 위에 있던 마호가니 페이퍼 나이프(종이를 자르는 칼)를 집
어들어, 짜증이 난다는 듯 손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스미스 씨, 처음부터 말씀해 주셔야겠는데요."
".... 여자를 만났지요. 도르카스라고.... 그 여자가 날 물었습니다."
"도르카스라.... 흔치 않은 이름인데...."
"그렇지요. 그 여자가 선생님께 가보라더군요. 아는 여잔가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하던 얘기나 계속하세요. 여자가 당신을
물었다.... 그리고는요?"
"그뿐이에요.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다 아시는 얘기잖아
요."
정신과 의사는 안경을 벗고는 눈을 비볐다.
"그러니까 선생은.... 자신이 흡혈귀라고 생각하신다 이거죠?"
"생각이 아닙니다. 나야 내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요. 한데 사실은 흡
혈귀란 말입니다. 그게 고민이에요. 도대체가 적응을 할 수 없으니...."
"적응이라뇨?"
"예를 들어 시간이에요. 저는 원래 규칙적인 생활을 했었습니다. 아홉
시부터 다섯 시까지 일하고, 집에 와서 TV 좀 보다가, 열 시 반쯤 자리에
들어 여섯 시 반에 일어나곤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는 맹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흡혈귀가 어떻게 사는지 아시잖아요."
"모른다고 칩시다."
의사는 달래듯 말했다.
"말씀하세요. 어떻게 살지요?"
"아까 얘기한 대로, 시간이 문젠데.... 밤낮이 싹 바뀌는 거예요."
"왜죠?"
"말씀 잘 하셨습니다. 나도 영문을 몰라 도르카스한테 물어 봤지요. 알
아봐 준다고 했는데, 이유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 통 없나 봐요. 그야 도르
카스는 원래 밤귀신이니까 별 문제가 안 되겠지만, 난 미칠 것 같아요. 여
덟 번이나 직장을 바꿨는데도 그때마다 쫓겨났다니까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설명할 것도 없어요. 그냥 눈을 뜰 수가 없는 거에요. 매일 밤, 아니
매일 낮이면 한나절을 졸음하고 씨름하다가, 마침내는 지쳐서 잠이 들 때쯤
해서는 싹~하고 밤이 오는 거에요. 그럼 그땐 또 관에서 나와야지요."
"관?"
"예. 그게 또 웃기는 얘긴데.... 일단 흡혈귀가 됐다 하면, 침대를 못쓰
고 관에서 자게 돼 있어요. 아 그런데, 기분은 둘째치고라도 돈이 너무 깨
져서...."
스미스는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 우선 그놈의 관부터 사야 할게 아닙니까. 요새 관값이 얼만지나 아
세요?"
"글쎄요...."
"천문학적 숫자라고요! 터무니없어도 유분수지, 이건 그냥 사람을 생으
로 말아 먹는 거에요! 조금이라도 품위를 갖추려면 큰 거 다섯 장은 그냥
날아가는 거에요. 그것도 시작에 불과하죠. 이번엔 또 흙을 깔아야 해요.
그냥 관 속에 들어가 자면 되는 게 아니라, 뭐 가족 묘지에서 퍼 온 흙을
살짝 깔아야 한다나요. 가족 묘지라니!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습니
까. 선생님은 있으세요?"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거에요. 어쩝니까? 어디 가서 사 와야죠. 그래 흙을 두어 되
사다가는 관 속에 골고루 뿌리는 거에요. 밤중에 일어나서 온통 흙투성이
가 된 꼴을 보면...."
스미스는 약이 오르는지 혀를 끌끌 찼다.
"아, 그나마 잠옷 바람으로 잘 수 있다면 또 괜찮게요. 이건 뭐 규칙이
랍시고 완전 정장을 하고 자야 하니,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
딨습니까. 구두도 벗으면 안 된대요. 내가 미쳐!"
그는 오락가락 방안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게다가 핏자국이 고민이에요. 한 달에 스무 번은 와이셔츠를 갈아 입어
야 하거든요. 세탁비야 한 벌에 2달러 50센트라지만, 그것도 쌓이니까 무
시 못할 액수더라구요. 혹시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 아 왜, 식사할
때 좀 조심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야 나도 하느라고 조심은 하죠. 하지
만 이건 토마토 쥬스를 마시는 거 하곤 달라요. 아시잖아요."
창백한 사내는 보일듯 말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또 있어요. 그 식사라는게.... 그야 물론 나도 좀 덜익은 고기
를 좋아하긴 했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에요. 아침에도 피, 점심에도
피, 저녁애도 피니, 이거야 원 속이 메스꺼워서 살 수가 있어야죠!"
스미스는 다시 소파에 몸을 던지며 눈을 감았다.
"게다가 또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이라는 게.... 생각 좀 해보세요. 햄
버거가 먹고 싶을 때마다 길가는 사람을 덮쳐야 한다면 그게 대채 무슨 꼴
입니까! 한데 그게 내 팔자라니까요. 그래 냉장고에 쌓아 놓고 먹어 보기
도 했지만 영 제 맛이 나질 않아서, 이삼 일 지나면 결국은 또 진짜를 찾아
나서게 되는 거에요. 아무리 골백번 다짐했어도 소용없어요."
"진짜라...."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군요."
스미스는 고개를 돌려 벽을 향했다.
"난 사실 아주 민감한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다정한 성격이에요. 폭력
이라면 딱 질색이었지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는걸요. 그런데 이젠...."
그는 서럽게 흐느껴 울더니, 발딱 일어나서는 다시 서성대기 시작했다.
"내가 사람들을 물어뜯는 걸 좋아하는 줄 아세요?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르는 줄 아세요? 한데 그만둘 수가 없는 거에요! 사흘에 한 번
은 이 끔찍한 충동이 일어나서.... 그래 그 때문에 누구나 날 미워한단 말
입니다!"
"그럼 학대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무렴요."
스미스는 말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이유는 간단해요. 실제로 학대받고 있기 때문이지
요. 그게 이유에요. 흡혈귀를 좋게 말하는 거 들어본 적 있으세요? 평생
에 한번이라도 있냐 말입니다. 없죠? 왜냐? 사람들이 우릴 미워하기 때
문이지요. 한데 또 웃기는 일은, 그러면서도 또 우릴 무서워한단 말이거든
요!"
창백한 사내는 으하하하 웃어젖혔다. 거칠지만 서글픔이 깃들인 웃음이
었다.
"세상에 우릴 무서워하다니! 이 지구상에 가장 힘없고 나약한 존재가 바
로 우린데! 아 뭐, 무기까지도 필요없어요. 우린 그냥 건드리면 쓰러진답
니다. 거울을 안 보니 면도를 하다가 자칫하면 제 손으로 목을 베기 십상
이죠.... 보면 뭘 합니까. 얼굴이 비쳐야 말이죠. 아랫집에서 마늘이라도
삶으면 멀쩡히 서 있다가도 그냥 졸도하죠. 흐르는 물만 보면 가슴이 두근
거리죠. 은으로 만든 총알은 또 어떻구요. 햇빛이야 말할 것도 없죠. 그
냥 끝내주니까요! 행여 날이 밝기 전에 그놈의 빌어먹을 관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휙! 그냥 파리 목숨인 거에요. 그리고 이걸 좀 보세요...."
그는 처음으로 싱긋 웃으며, 큼직한 송곳니 두 개를 드러냈다.
"우리라고 충치가 안 생기는 줄 아세요? 이 왼쪽 이는 아마 스무 번도
더 때웠을 겁니다. 의사 말이, 차라리 몽땅 뽑고 새로 박아 넣는 편이 싸
게 먹힐 거라더군요. 누군 몰라서 안하나요. 아, 흡혈귀가 의치로 사람
목을 물어뜯는 꼬락서니, 상상이나 갑니까? 그냥 가관이지요. 그리고 그
왜, 나무 말뚝 얘기 아시죠? 원래는 그게 비밀이었는데, 그놈의 거지같은
삼류 공포영화 때문에.... 아, 이젠 세 살 먹은 애도 다 아는 얘기가 됐잖
아요. 한 번 우리 입장이 돼 보세요. 아, 동네 사람 모두가 눈에 불을 켜
고 '어디 흡혈귀 한 놈 없나? 가서 나무 말뚝 좀 박아주게!' 하면서 좀이
쑤셔 근질거리는 판에, 어디 잠이 오겠습니까? 정상이 아니라니! 누가 정
상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 사람들이야 말로 비정상이예요!"
그는 또다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참 그렇지. 십자가 얘길 또 빼놓을 수 없죠. 솔직히 말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덜컹 하지만요. 왠지 아세요? 아 글쎄, 외출 한 번 하려면 그놈의
교회때문에 세 정거장이나 돌아가야 한다니까요! 그것도 전엔 내가 일요일
마다 나가던 교회예요. 한데 십자가가 교회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요. 그
냥 사방에 널려 있는 거예요. 덧셈표만 봐도 식은땀이 나지요, 누가 밥을
먹고 나이프에 포크를 포개 놓은 것만 봐도 난 혼비백산해서 창밖으로 뛰어
내릴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구요?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겠죠. 그렇죠? 한데 그런다고 내가 죽습니까? 아니거든요.... 선생님,
제발 좀 도와 주십시오! 선생님이 안 도와 주시면 난 그냥 돌아버릴 거에
요. 뻔하다니까요!"
의사는 노트를 덮고는 빙그레 웃었다.
"스미스씨.... 이런 말을 들으면 놀라시겠지만, 선생의 고민은 비교적 단
순한 겁니다. 치료법도 비교적 간단하구요."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의사는 무심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마호가니 페이퍼
나이프를 집어들더니, 느닷없이 푹 찔렀다. 칼은 자루만 남기고 스미스의
심장 깊숙히 박혔다.
몇 초 후, 그는 전화기를 끌어당겨 다이얼을 돌렸다.
"도르카스 양 계십니까?"
말하면서 그는 목에 난 아련한 잇자국을 무심코 긁적였다.
"약혼자라고 전해 주십시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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