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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무의식에 있어서 문자가 갖는 권위 또는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

by Casey,Riley 2023.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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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끄 라깡 : 무의식에 있어서 문자가 갖는 권위 또는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

                                


 <개요>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한 이후 과연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 훗날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구조주의자들은 그것을 구조라 불렀고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라 했고, 철저한 프로이트주의자였던 라캉은 그것을 ‘언어’라 했다.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자들은 지나치게 과학적인 환상에 매혹되었고, 상징화된 것들에 매달렸다. 그들은 언어라는 것을 하찮게 여겼다. 이에 라캉은, 과감히 ‘정신분석학은 과학이라기 보다 수사학에 가깝다’라는 말을 내던지며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이비 프로이트주의자들이 간과한 것은 바로 언어가 무의식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전개했던 ‘꿈’과 무의식에 관한 주장들, 그리고 성에 관한 주장들, 이것에 라캉은 언어의 구조를 도입한다.(1)그것은 먼저 언어가 ‘기표’(signify)와 ‘기의’(signified)로 이루어져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기표가 기의를 나타낼 때 연관되는 관계로 ‘은유’와 ‘환유’ 두 가지를 제시한다. 즉 어떤 기표가 자신과 다른 기표로 나타내어질 때 그것을 은유, 인접한 대체물로 대체될 때 그것을 환유라 한다. 그리고 이 ‘은유’와 ‘환유’는 프로이트가 이야기했던 꿈의 작용의 두 축, ‘은축’과 ‘대체’라는 두 축을 나타낸다. 
 즉 자끄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언어의 작용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 셈이다. 그리고 언어가 무의식과 주체에 미치는 영향을 결코 작지 않게 다루고 있다. 
 1. 문자가 갖는 의미
기표와 기의;

 : 

기표와 기의는 서로 다른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의미작용에 저항하는 저항선에 의해서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욕망이론, 2장-1 )
기표들은 모두 주체 속에 자리잡을 때에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여기서 제기되는 관점은 주체가 마치 기의처럼 기능해야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기표 아래로 ‘미끄러진다는’ 사실이다. (욕망이론, 2장-1 )
진리는 언어 속에서 들려져야 하고 이해되어야 한다. 기표는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것이 의미화의 연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감지하는 사람에게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욕망이론, 2장-1 ) 



(1)라캉은 소쉬르의 언어학을 도입하였다. 하지만 그는 독창적인 차이점을 두었다. 소쉬르는 기표(signify)와 기의(signified)가 서로 대칭적이고 상호작용한다고 보았으나 라캉은 기표는 결코 완벽하게 기의를 대신할 수 없다고 보았다.

라캉에 의하면 기표는 기의가 의미하는 바를 언제나 완벽하게 나타낼 수 없다. 즉, 나무라는 말이 실제의 나무를 전부 대신할 수 없고, 말하려는 사람이 하는 말은 그 사람의 의도를 전부 나타내어주지 못한다. 즉 기표는 또다른 기표를 대신할 뿐이고 영원히 기의에 도달하지 못한다. 즉 기의는 위의 식에서 나타내어진 수식의 ‘의미의 저항선’에 걸려 기표를 뚫고 나오지 못하고, 기표는 기의 위에서 기의를 지배한다.

 은유와 환유:
기표들에 의해 생성되는 의미화의 연쇄 한쪽 끝에는 환유가 있고, 또 다른 한쪽 끝에는 은유가 있다.
인간은 사회적 검열이라는 장애물을 우회할 수 있는 힘을 환유 속에서 찾는다. 그러나 환유가 보여주려는 진리는 억압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인가? 환유는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노예상태(주체가 의미의 저항선이 갖는 무게에 짓눌려 있다는 의미)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욕망이론, 2장 )
 여기서 은유와 환유가 갖는 의미를 설명해보면, 은유는 유사성을 갖는 기표가 그 자리를 대신할 때이고 환유는 인접성을 갖는 기표들의 연쇄이다. 
  ‘그대는 태양’ ‘내마음은 호수’ 와 같은 표현은 은유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반면에 ‘한 잔을 마시다’에서 ‘잔’이 내용물을 대신하는 것, ‘30개의 돛이 온다. ’에서 돛이 배를 대신하는 것등은 환유라고 할 수 있다. 
 

2. 무의식에 있어서 문자의 기능
 지붕 위의 배, 이마 위의 문자와 같은 부자연스러운 이미지들은 모두 기표로서 간주되었을 때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기표들은 꿈의 수수께끼 구조가 제시하는 비유들을 설명하도록 해준다. 우리로 하여금 꿈의 판독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적 구조가 바로 꿈의 의미(또는 꿈의 해석)을 이루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욕망이론,2장-2)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을 가능하게 하는 일반적인 전제조건은 해독(distortion) 또는 변환(transposition)이다. 소쉬르식으로 말하면 담론 속에서 항상 작용하고 있는 기표 아래로 기의가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꿈이다. 무의식이란 기표의 활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욕망이론,2장-2)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은 꿈의 작용을 제시했다. 무의식은 ‘의식의 검열’을 뚫고 압축, 전치 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꿈이다. 프로이트는 꿈이 무의식적 욕망을 표현하는 것은 주로 두가지 작업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하나는 압축이며 다른 하나는 전치이다. 먼저 꿈의 구체적인 내용을 꿈의 내용이라 부르고 그 꿈의 밑비닥에 자리하고 있는 원래의 욕망을 꿈 사고라 한다면, 이 꿈 사고의 풍부함은 검열 작업 때문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매우 빈약한 내용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주로 압축의 결과이다. 압축이란 꿈 사상의 서로 다른 부분들을 하나로 묶어 버리는 일이다. 전치는 꿈 사상을 표현하는 꿈 내용의 여러 요소 중에 검열 작업을 피하기 위해 중요성의 강도가 차지하는 위치를 이동시키는 작업이다. 원래 꿈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 따라서 무의식적 욕망의 핵심적인 부분이 꿈에서 표현되는 때에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사소한 것인양 등장하고 오히려 그다지 중요성이 없는 요소에 심적 에너지를 부과해서 꿈 내용 전체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다음 그림을 보자. 






                              압축                  전치


                                      의식의 검열


                                       무의식


 
그리고 라캉은 이 작용이 언어의 은유와 환유작용과 같다고 보았다. 


                                   은유   (징후)         환유   (욕망)


                                       의식의 검열

 
                                         무의식


즉 압축과 전치라는 두 과정이 언어의 은유와 환유라는 두 축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은유의 개념은 '징후'(관련 기표를 통해 다른 기표를 대체시키기)의 본질을 예시해주며, 환유의 개념은 욕망의 기원을 분명히해 준다는 것이다(기표가 가지는 기의의 감각과 결합적 관계를 통해서 이것은 그같은 과정이 미지의 영역으로 무한히 확장해 감을 의미). (1)

  
 이것은 환유구조를 보여주는 연산식이다. 끊임없는 기표의 연결은 결국 기의를 드러내지 못하고 결핍(-)을 드러낸다. 성교나 성적 충동이 그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인접되어 있는 다른 기표로 치환되는 것이 그렇다.(-)는 이처럼 치환을 야기하는 저항을 표시한다. 그리고 결국 그 저항으로 인한 결핍을 메꾸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욕망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욕망하지만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욕망의 끝, 곧 ‘채워짐’은 죽음뿐이다.

  
이 연산식은 은유구조를 보여준다. 하나의 기표가 또하나의 기표를 대체하고, 그것은 시적으로 표현되어 창조적 의미가 만들어진다. 곧 여기서 의미는 기표를 뚫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남근이 칼이나 생선 등의 길다랗고 매끄러운 물체로 대체되어 나타나는 현상 같은 것이 그것이다. 다만 이 경우 환유와는 달리 의미 작용에 저항하는 저항선이 존재하지만 그 저항선은 대체라는 우회적인 방식으로나마 뚫리게 되어 의미가 생성된다. 이를 라깡은 저항선의 관통(+)으로 표시한다. (2)
 의미 저항선을 뚫고 나아가는 은유는 억압된 기표가 저항선 아래로 내려가 기의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체 역시 예비적이긴 하지만 기의의 구실을 한다.(욕망이론,2장-2)

예를 들어서 "나는 학교에 간다"라는 문장은 '나', '너', '우리', '그' 등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가', '는', '이' 등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그것을 결합시키는 것과 같은 조작의 반복이다. 즉 선택과 결합이 주요한 조작이 되는 것이다. 선택은 여러 유사한 기표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며 결합은 명사에 조사가 붙듯이 서로 접근한 관계에서 결합된다. 선택이 유사성에 기초를 두는 것이라면 결합은 인접성에 기초를 둔다. 이를 수사학의 범주에 연결시키면 선택은 서로 유사한 것끼리의 관계인 은유에 해당하고 결합은 서로 인접한 것끼리의 관계인 환유에 해당한다. 도시적으로 본다면 앞에 꿈의 경우, 압축은 유사성에 기초한 것이고 전치는 인접성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이트가 분석한 꿈의 작업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분석이 가지는 두 가지 축과 매우 밀접하게 연걸된다. 이와 같은 구조 언어학의 특징들은 라캉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재구성하는 주요한 매개들이다.(3)
결과적으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무의식은 은유와 환유라는 과정을 통해 그 모습을 상징계에 드러낸다.


3. 문자, 존재, 그리고 타자
 데카르트는 몇십 년 동안 사람들을 사로잡아 왓던 중요한 명제를 제시햇다. 그것은 ‘주체’의 존재에 관한 것이었으며 절대적인 명제라고 생각되어져왔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가?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
라고 라캉은 제시한다. 
  상상계에 있는 아기는 어머니와의 완전한 합일을 체험하며 욕망한다. 하지만 아기가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 아기는 자신이 욕망해왔던 것이 허상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상징계로 진입하는 순간이며 프로이트에 있어서는 거세공포를 느끼게 되는 시기이다. 아기는 언어로서 욕구를 ‘요구’하게 되고 그 ‘요구’는 아기가 본래에 의도했던 욕구와는 다르다. 곧 그 ‘요구’에는 빈 자리가 있고 이것은 채워지지 않는다. 상상계는 곧 뒤로 침전하게 되고 이것은 무의식으로 남는다. 그리고 주체가 형성되는데, 그리고 어머니의 남근이 되고자 하는 욕망, 즉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그것은 곧 어머니의 욕망이기도 하다. 주체의 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인 것이다. 즉  타자의 담론으로써의 욕망이다. 욕망은 결핍으로 남고, 주체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기표를 찾아 떠돌지만 거기에 완전한 ‘자기’란 없다. 즉 라캉은 외부의 명령 혹은 영향을 받는 ‘주체’를 제시한다. 그리고 또한 무의식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고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 
즉 언어의 구조는 주체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으며 언어가 존재하지 않으면 무의식도 없다. 무의식은 ‘기표’이며 주체는 ‘기의’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1)라깡과 언어
(2)라깡과 무의식
(3)라깡과 언어


4. 결론
라캉의 이론은 무한성과 상대성에 근거해 있다. 근대에 절대성을 강조하던 철학이 중심을 이루던 반면에, 라캉은 이 절대성에 의의를 제기한다. 즉, 완전한 체계 내에서 그 완전함을 증명해 줄 명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는 ‘외부의 존재’를 본다. 
 프로이트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는 그래서 언어를 끌어들인다. 언어가 무의식을 구조화시키고, 또 기표로써 지배한다. 은유와 환유는 이 구조의 두 축을 이루어 무의식의 작용을 나타낸다. 또한  언어에 있어서 기의를 나타내는 기표의 한계는 욕망의 한계를 나타낸다. 무의식은 끊임없는 결핍을 가지고 있고, 이 결핍으로 인해 욕망한다. 즉 주체란, 불완전하게 분열되어 있다. 주체는 끊임없이 욕망하며 그것은 타자로부터 권위를 얻기 위한 ‘타자로부터의 욕망’이다. 여기서 ‘타자’는 언어‘이다.
 즉 주체의 존재를 보는 것은 주체가 아닌 주체 뒤에 있는 또다른 나이다. 이것은 선험적 주체 이전에 선험적 무의식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무의식은 끊임없이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따르게 된다. 즉 주체는 무의식에 기본해 있고 무의식은 구조화되어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

참고:
라깡과 무의식
라깡과 언어
알기 쉬운 자끄 라깡
은유와 환유; 라캉의 이론을 중심으로 (현대비평과 이론 1996,5)
라깡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홍준기, 문학과 사회1996,2)
무의식의 이중구조와 주체화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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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깡의 욕망이론
 - 정신분석 경험에서 드러난 주체기능 형성모형으로서의 거울단계
(The mirror stage as formative of the function of the I as revealed in psychoanalytic experience)


1. 들어가면서

많은 인간들은 괴롭고 힘든 삶을 살면서도 대부분 끝까지 그 생을 살아낸다. 과연 그 고난의 인생을 꿋꿋이 버티고 살수 있도록 해주는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누군가는 그 이유를 바로 나르시시즘에서 찾았다. 자신에 대한 끝없는 ‘도취’ 덕에 인간은 평생 스스로 자살을 택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일견 의미 있어 보이는 통찰이라 생각된다. 특히 라깡의 거울단계를 보면서 나는 이 점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었다. 라깡의 거울 단계에 대한 발상은 바로 나르시시즘의 근원에 대한 하나의 의미 있는 연구라 생각된다.


2. 오인에서 생겨나는 환상, 집착, 사로잡힘, 포획

거울 단계는 1936년에 라깡이 마리앵바드(Marienbad)에서 열린 제14차 세계정신분석학회에서 제기한 개념이다. 이것은 일단 침팬지와 어린아이와의 비교실험에서 착상되었다.

침팬지는 거울 속의 이미지에 익숙해지고 그것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의 이미지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반면 아이는 일단 이미지를 습득하고 나면 그 이미지가 사라진 후에도 일련의 행동들 속에서 인식행위가 가져오는 즉각적인 반향들을 보여준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서 자신의 이미지 속에서 가정되었던 행동들과 그 행동을 반영하는 주변상황이 갖는 관계를, 다시 말해 허구적인 합성물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현실(자신의 신체와 주위의 사람들이나 사물들과 같은)간의 연관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권택영>

아이의 관심은 자신의 실제 몸뚱이와 거울 속에 비친 몸뚱이 사이의 공간적 관계에 집착하며, 그 몸뚱이와 거울 이미지 속의 환경 사이의 공간적 관계에 몰두한다. 그러니까 아이는 거울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라캉은 집착이나 사로잡힘이라는 용어보다는 별도의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그것은 도덕적이면서도 법적인 의미를 내포하여 포괄적인 뜻을 가진 포획(捕獲)이다. 즉 몸뚱이, 환경, 거울의 복잡한 기하학이 아이에게 하나의 사기, 기만, 유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거울은 아이에게 위안을 주고 또 유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함정이면서 유인(誘因)이라는 것이다. <라캉> 

이 기간은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로 여겨지는데, 이 거울단계에서 주체는 자신의 이미지에 영원히 매료되고 사로잡히고 만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서 자신의 이미지 속에서 가정되었던 행동들과 그 행동을 반영하는 주변 상황이 갖는 관계를, 다시 말해 허구적인 합성물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현실(자신의 신체와 주위의 사람들이나 사물들과 같은) 간의 연관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이러한 형태는 이상적인 자아(Ideal-I)라고 불리워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자아가 사회화되기 이전에 허구적 성향을 갖도록 해준다. 
그러나 의식의 자기충족성은 자아형성시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오인(meconnaissance)으로부터 생겨난 환상일 뿐이다. 정신분석 분야에서 이러한 환상으로의 도피는 기이할 정도로 실존적 정신분석의 주장 속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거울 단계>

즉, 거울 단계에서 유아는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 이미지에 포획되게 되고 그 오인으로부터 생겨난 환상이 인간의 내부 깊숙이 자리하여 그 개인의 일생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조잡한 형태이긴 하지만 하나의 자율성 또는 개인의 통제력이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울 이미지는 이제 막 태어나기 시작하는 자아의 아주 자그마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작은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아이는 자아의 나중 모습이나 저 멀리 아득한 지평선 너머에 있는 ‘성숙된’ 자기, 자수성가한 어른, 그리고 사회적 성공의 희망 등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라캉>


3. 게슈탈트(Gestalt), 파편화된 신체(fragmented body)

이 때 아이는 자신의 모습을 파편화된 신체가 아닌 전체적인 통일적 형태로 이해하게 된다. 즉, 타인의 도움 없이 온몸을 완전히 자기 의지대로 주체할 수 없는 유아로서는 파편화된 신체의 느낌밖에 가질 수 없는데, 어머니의 도움으로 거울 앞으로 들어올려진 자신의 모습은 완전히 하나의 통일된 게슈탈트를 이룬 모습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유아의 환상이요, 자기자신에게 반해버리는 일이다. 

거울단계는 동일시의 과정을 거쳐서 자아의 형성을 설명하고 있다. 자아는 자신의 거울상을 동일시한 결과이다. 이 현상의 핵심은 어린아이의 미숙성에 있다. 생후 6개월에 아이는 여전히 협동운동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의 시각계통은 상대적으로 발전되어 있어서 아이는 자신의 신체운동에 대한 통제를 획득하기 전에 거울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아이는 자신의 이미지를 전체로 보며, 이 이미지의 통합은 조각난 신체(fragmented body)로 경험되던 신체의 협동운동 실조(uncoordination)와 대조되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라깡 사전>

아이는 신체의 파편화를 야누스의 얼굴을 한 환상 구조로 파악할 뿐, 실제로 몸이 파편화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라캉은 말한다. 주체가 자아를 향해 앞을 내다보든 또는 파편화된 신체를 되돌아보든, 주체는 하나의 구성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며, 그 구성이 상태만 바뀌어서 나타나는 것이다. 신체가 파편화될 때 뜯어져 나가는 것은 구체적인 신체기관이 아니라 ‘상이한 마네킨, 바로크 인형, 사지(四肢) 트로피인 것이다. <라캉>

허상(mirage)속에서 주체가 자신의 성숙함을 기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신체의 통일적 형태(Gestalt)이다. 통일적 형태는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가고 있는 외면적 형태(exteriority)이다. 거울 속에서 드러나는 통일적 형태는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아이(주체)의 혼란스러운 동작과는 대조적으로, 고정된 이미지로 그리고 전도된 대칭적 형태로 아이(주체)에게 다가온다. <거울 단계>

파편화된 신체는 개별주체 속에서 공격성을 띠고 분열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항상 꿈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것은 다시 단절된 사지의 형태로 혹은 외골격을 관찰할 때 드러나는 기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파편화된 신체에서 날개가 자라나기도 하고 장의 고통으로 팔들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환상을 쫓는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그의 그림 속에서 15세기로부터 현대인의 가상적인 정점으로 날아오르는 파편화된 신체조각으로 형상화하려 했던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된 형태가 유기체적 차원에서는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정신분열증(shizoid)이나 히스테리(hysteria) 발작에서 드러나며 환상의 구조를 결정하는 일련의 정신현상 약화과정(fragilization)이 그 예이다. <거울 단계> 


4. 자아의 소외

이 때, 유아가 거울 속의 이미지에 푹 빠져서 그 허상이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느껴지는 환상 속에 빠져 있을 때 바로 자아는 그 허상에 의해 소외당하는 현상이 발생된다. 

라캉 이전에는 정신분석학에서 별 의미가 없던 소외(alienation)라는 용어가 핵심어로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라캉은, 거울에 사로잡힌 아이는 망상적인 자아 형성의 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정신병원의 광기에 노출된다고 주장했다. <라캉>

‘나’의 ‘소외적 방향’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개인(아이)이 영구히 자기 자신과 불화(不和)한다는 것이다. <라캉>

이런 대조(참고:통합된 형태의 거울 속 이미지와 파편화된 기억으로 남아있는 신체간의 대조)는 처음에 어린아이에 의해 자신의 이미지와의 경쟁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이 이미지의 전체성은 조각난 주체를 위협하며, 따라서 거울단계는 주체와 이미지 사이에 공격적 긴장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격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주체는 그 이미지를 동일시한다. 유사자(counterpart)와의 이런 원초적 동일시가 자아를 형성해 주는 바로 그것이다. 주체가 자신의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는 동일시의 순간을 라깡은 환희의 순간으로 묘사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통달(mastery)이라는 상상적 의미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기쁨은 그가 아직까지도 실제로 성취하지 못했던 근육의 협동운동을 어느 정도는 예기할 수 있다는 상상적 승리 때문이다”(Lacan). 그러나 아이가 자신의 불안정한 통달감을 어머니의 전지전능함과 비교할 때, 이러한 환희 뒤에는 우울반응이 동반될 수도 있다. 이러한 동일시는 이상적 자아와 관련되는데, 이상적 자아는 예기에 차 있는 자아를 유지시키는 미래의 전체성에 대한 약속으로서 기능한다.
거울 단계는 자아가 오해의 산물이며, 주체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장소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주체가 상상계로 진입되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거울단계는 또한 중요한 상징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징계는 아이를 붙잡고서 데리고 다니는 어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주체가 자신의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기쁘게 취하고 난 순간, 그는 마치 이 이미지를 확인해 달라는 듯 대타자를 의미하는 이 어른을 향하여 머리를 돌린다. <라깡 사전>


5. 자아와 주체

그렇다면 거울 단계를 통해서 라깡은 자아와 주체에 관해 어떤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가. 그는 통일된 자아란 결코 존재할 수 없으며 단지 분열된 자아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정신분석 경험에서 드러나는 주체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된다는 점과 연관하여 오늘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해볼 필요가 있다. 정신분석학적 경험은 우리가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사고주체(Cogito)'에 근거한 어떤 철학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거울 단계>

자아는 고정된 점이면서 동시에 과정이고, 여기 지금 존재하는 자급자족적 구조이지만, 또한 끊임없이 그(자아의) 과거를 재규정한다는 것이다. <라캉>

라캉은 전기의 프로이트에 집중하여 자아의 분열 쪽을 더 강조했다. 즉 자아는 거울 단계에서 거울 이미지와 동일시함으로써 생겨난 구조라는 주장을 폈다. 따라서 자아는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되어 대상물로 변형되는 장소이고, 이렇게 하여 소외된 자아는 구조적으로 편집증(혹은 광기)과 비슷한 상태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분열된 자아는 그 활동 무대인 상상계에서 벗어나 언어에 의해 상호주체성이 보장되는 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하면, (그 광기 때문에) 오히려 자살적 희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아는 상상계를 돌파하여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 그렇게 할 때에만 비로소 주체가 생겨난다. 라캉은 이처럼 자아의 분열상을 강조하기 때문에, 기존의 정신분석학자들이 완결된 구조 또는 통합 조정의 구조를 가진 자아를 상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라캉>


6. 동일시(identification), 나르시시즘

결국 거울 단계가 가리키는 바는 거울 속의 허상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동일시의 과정이 어떻게 나르시시즘적인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결과가 뿌리내린 한 개인이 나중에 성장했을 때 보이는 신경증 현상에서 그 원인과 치료의 근원을 찾아가는 과정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거울 단계의 오인과 포획이다.

‘거울의’(specular) 순간에 대한 라캉의 설명은 자아의 탄생 신화와 자아의 타락 신화를 동시에 마련해 준다. <라캉>

라캉이 재조정한 ‘동일시’와 ‘나르시시즘’은 종종 한가지 개념으로 사용된다. <라캉>

그(라캉)는 어린아이의 자기애와 어머니 상(像)에 대한 집착을 절묘하게 균형잡아 놓은 프로이트의 균형을 깨트렸고, 그리하여 나르시서스 신화에 라캉 자신의 강조점을 두 가지 설정해 놓았다. 라캉에게 나르시서스의 비극적 이야기는 망상적인 자기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주인공은 자기의 얼굴을 비추는 표면의 막강한 힘에 매료되었고, 또 그 표면에 비친 어머니를 자기 파괴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사랑한다. 라캉은 이 신화를 이론의 수준에서 다시 설명하면서, 그 신화의 원래 연대기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며 독특한 설명을 해 보인다. “이런 성애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은 그 자신을 소외시키는 이미지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관계 속에서 자아가 형성되는 에너지와 형태를 얻게 되며 또 자아는 바로 이 관계에서 비롯된다.” <라캉>

동일시의 원초적 행동은 이제 원초적 나르시시즘적 선언이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자아가 형성되는 바로 그 순간에 자아의 파괴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라캉>

이처럼 자아는 주체 속에서 형성됨과 동시에 소외되고 소외됨과 동시에 파괴된다. 이러한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하고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정신, 마음속의 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7. 나오면서

결국 거울 단계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는 아래의 글이 도움이 될 듯 하다.

상상계는 거울 속에 비친 영상과의 동일시 혹은 원초적인 질투가 벌이는 극적 사건에 의해 이루어진다(double 관계). 이제 유아는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에 종속시킨다. 라캉에게 ‘실제계(the Real)'는 상상계와 상징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의식은 출발을 상상계라는 오인(meconnaissance)의 구조로부터 시작하기에 자아를 완벽하게 조정하는 절대적 주체란 없다. 그러므로 주체의 형성에서 거울단계의 설정은 데카르트의 이성절대주의는 물론이고 실존주의나 현상학이 암시하는 실존적 자아까지도 거부한다. 그들은 모두 이 오인의 구조를 바탕에 깔고 있지 않은 흠집 없는 이성, 혹은 현실원칙에만 굳건히 서 있는 의식의 체계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권택영> 

거울 단계는 아직 이성의 영역에 활발한 발달이 일어나지 않은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유아를 그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다. 이같은 거울 단계가 보여주려 하는 것은 이러한 유아기 시절에 순수하게 감정적으로 자신의 모습에 푹 빠져드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모든 인간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자기애(自己愛), 즉 나르시시즘이 어떻게 그 인간의 평생에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트와 라깡의 연구가 제기한 대로 ‘오인’으로부터 출발한 환상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나르시시즘을 형성하고 있고 그 나르시시즘이 유아기 때부터 인간내부에 깊이 뿌리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자명한 의식이라는 것은 (이런 모든 정신분석적 경험에 의해) 전복될 수밖에 없다. 이미 프로이트와 라깡의 세계관에서는 Cogito란 부정되고 만다. 그 완벽하리라 믿어지던 이성은 이미 그 뒤에 놓여진, 게다가 유아기 시절부터 이미 뿌리내려 버린 무의식의 계속되는 교란(?)으로 인해 결코 완벽할 수 없는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거울 단계는 비활동성 혹은 고착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신경증환자는 모두 이 단계에 머물러 자아와 상황을 구별하지 못하고 소외된다. 그는 대상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타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구별하지 못하는 오인 혹은 환상의 단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에 타자의식이 전혀 없다. 여기에 광기가 존재한다. 그 광기는 수용소의 경험으로 남아 있는 광기 뿐 아니라 세상을 귀먹게 하는 광기까지도 포함한다. 오인의 구조를 실재계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킴으로써 라깡은 의식이 지닌 환상을 강조하기에 히틀러와 그 외 자기 의견만이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독선적인 정치가 혹은 사람들을 환자의 범주에 넣는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은 허구적 이미지에 사로잡힌 주체를 인정함으로써 고착에서 빠져 나오게 하고 존재의 본질을 읽을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 물론 분석가 자신도 신경증의 원인을 진리로서 규명해내지는 못한다. 다만 거울단계에서 빠져 나오게, 고착으로부터 해방되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권택영>


* 참고 서적

자끄 라깡, 권택영 엮음,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1999
딜런 에반스, 김종주 외 역, <라깡 정신분석 사전>, 인간사람, 1998
맬컴 보위, 이종인 역, <라캉>, 시공사, 1999
 
나지오, 임진수 역, <자크 라캉의 이론에 대한 다섯 편의 강의>, 교문사, 1999
김종주, <라깡 정신분석과 문학평론>, 하나의학사, 1996
수잔 헤이워드, 이영기 역, <영화 사전>, 한나래, 1999


* 약어 설명

<라깡 사전> : <라깡 정신분석 사전>
<라캉>      : <라캉>
<권택영>    :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 중의 권택영의 해설부분
<거울 단계> : 위 책의 글 중
               “정신분석 경험에서 드러난 주체기능 형성모형으로서의 거울단계”

* 발표자 - 인문학부 4학년 9701547 박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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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캉의 유혹:라캉 언어모델과 기표의 좌절



이 동연(중앙대 강사, 영문과 박사과정)


1. 

라캉의 복잡하고 때로는 독해불가능하기까지한(unreadable) 이론은 사실 그 목적에 있어서는 프로이트의 무의식론과 구조주의 언어학의 만남이란 분명한 기획을 가지고 있다. 물론 라캉의 마술을 통해 프로이트의 무의식론은 좀 더 철저한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한정되고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혹은 욕망이론)을 구성하는 항목등은 생물학적 욕구, 본능적 충동, 쾌락원칙, 비본능적 충동, 소망, 유전적 잠재소망들이다. 이 항목은 프로이트의 욕망이 생물학적인 본능과 생래적인 욕구, 문화적/후천적 충동과 추동, 소망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라캉은 프로이트의 이러한 무의식의 영역을 구조론적인 체계, 특히 언어체계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것을 과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좁혀서 보려는 듯하다. 또한 제인 겔럽(Jane Gallop)이 언급하듯이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선언하면서 정산분석학과 심리학을 구분하고자 한다. 라캉이 생각하기에 미국의 정신분석학이 프로이트를 배반한 이유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구성물인 심리학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동일시하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도정일 ?무의식과 욕망?, ?문화과학?, 1993년 봄(통권 3호), 110-111쪽, Jane Gallop, Reading Lacan, Cornell University Press:Ithaca & London, 1985, 서문을 참고 바람).
, 구조주의 언어학은 기표/기의의 이항관계에서 기표의 미끄러짐(sliding)의 의미작용 관계(기표의 욕망의 연쇄)로 변형되지만, 기본적으로 라캉의 이론은 좀더 분석적인 무의식론이고, 좀 더 정교한 구조주의 언어론이다 라캉의 언어론은 처음에 구조주의의 이항 모델을 받아들였다가 그 이항모델을 해체하는 점에서 구조주의로부터의 결별을 시도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는 구조주의의 구조적 안정성(요컨대 기표/기의의 이항대립, 통시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그 자체의 정태적인 틀)을 완전히 뒤업기보다는 무의식론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하는 의도(요컨대 가상계/상징계/현실계의 삼분법이나, 모든 것을 기표의 욕망으로 환원하려는 일원론적인 관점 등)를 가지고 있다.
. 라캉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를 냈던 아니카 르메르도 라캉의 독창성에 대해 프로이드 무의식 이론을 최근의 양식으로 새롭게 규정했다는 점, 최근의 구조주의적 방법에 따라 프로이드의 무의식론을 분석하고 그 이론에 언어학을 도입한 점을 들고 있다 아니카 르메르, ?자크라캉?, 이미선 역, 문예출판사, 1994, 31쪽.
. “프로이드에게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라캉의 이단적인 선언(라캉은 전통정신분석학계로부터 파문당한 자이다)은 온전히 프로이트의 모든 것을 닮자는 것도 아니고, 오직 정신분석학으로의 집중을 말하려 한 것도 아니다. 역설적으로 라캉의 선언은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의 방법론의 거부이자. 프로이트 초기이론인 무의식 이론의 집중적인 분석에 의한 정신분석학의 변용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라캉의 새로운 정신분석학은 “프로이드에게 언어학을 선물하는 것” 이진경, ?자크라캉:무의식의 이중구조와 주체화?, ?철학의 탈주?, 이진경 외 역음, 새길, 1995, 13쪽.
이나 “정신분석학의 통합학문 내지 통합담론적인 전략이 프로이트 담론의 진정한 성격이고 방법이었다는 주장” 도정일, 위의 글, 98쪽.
을 그 이면에 내포하고 있다. 
라캉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가장 귀중하게 발견한 것은 바로 ‘무의식의 영역’이다. 프로이트는 “과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존재와 대상과의 관계를 무의식의 발견을 통하여 과학의 영역으로 끌여들였다” J. Lacan, Ecrtis: A Selection, W.W. Norton, 1977, 175쪽. 이후로는 본문에서 쪽수만 표시.
 라캉이 관심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언어의 구조로 설명하려는 데 있다. 그의 유명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명제는 무의식의 존재 방식이 언어의 존재 방식과 같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의 구조화’와 ‘언어의 구조화’의 관계는 그냥 비유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있어 결정하는 관계라는 점이다(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명제는 언어는 무의식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역명제를 가능케 한다). 라캉의 문제의식은 무의식의 구조를  언어의 구조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손쉽게 이해시키려는 데(마치 예수가 천국을 모르는 자들에게 천국을 비유를 통해 쉽게 설명하는 것)에 있기 보다는 무의식의 구조를 언어의 구조와 동일시하려는 데에 있다. 언어의 구조는 무의식의 구조에 있어 비유의 대상이 아니라 실체 그 자체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극단적으로 말해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이며, 언어는 무의식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라캉은 무의식론과 언어론을 거의 동일시함으로써 무의식을 담지하고 있는 주체의 본성이나, 무의식에 의해 생기는 주체에 대한 타자의 존재를 역시 언어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라캉의 언어모델은 현대의 언어론 일반 모델(요컨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그대로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인 해석에 의거한 것이며, 자신이 언어론을 통해 설명하려고 했던 프로이트의 무의식론에 오히려 크게 의존하는 모델이다. 라캉의 주체이론(타자론을 포함해서)과 욕망이론은 그런 점에서 언어의 상징 질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요컨대 코워드와 엘리스의 지적대로 라캉에게 있어서 무의식은 주체가 상징적 세계로 들어가는 동일한 운동하에서 생산되며, 의미작용의 과정은 주체의 과정 그 자체가 된다. Rosalind Coward & John Ellis, Language and Materialism, Routledge & Kegan Paul:Boston, London, and Henley, 1977, 94쪽.
 이는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의 혁명성, 즉 표상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운동적 에너지를 언어적 상징질서로 구속하려는 면이 있다. 라캉의 언어모델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말년에 이데올로기론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알튀세르의 후기 글과 발리바르의 ‘프로이트 맑스주의’의 논의, 그리고 들뢰즈의 ‘안티외디푸스론’에서 이루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에크리?에 실린 그의 대표적인 두 논문인 ?주체기능 형성모형으로서의 거울단계?(The mirror stage as formative of the function of the I as revealed in psychoanalytic experience, 이하 “거울단계”)와 ?무의식에서 문자가 갖는 지위, 또는 프로이드 이후의 이성?(The agency of the letter in the unconsciousness or reason since Freud, 이하 “문자가 갖는 지위”)의 내용을 살펴보겠다. 

2. 
라캉은 “거울단계”에서 주체의 형성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라캉은 생 주체 형성에 대해 항상 과정 중에 있는 것이며, 거울단계에서 어린아이가  주체로서 자기를 인지하는 것이 거울 속에 있는 자기를 타자로 인정하면서 이루어지듯이 늘 “허구적인 이미지”에 사로잡힌 채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이들이 도구를 사용하는 지적 능력에 있어 침팬치보다 못한 나이일 때에도 아이는 이미 거울 속에 자신의 이미지를 인식할 수 있다. 침팬치는 거울 속의 이미지가 허상임을 알게되면 더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아이들은 일단 이미지를 습득하면 그 이미지가 사라진 후에도 일련의 행동들 속에서 인식행위가 가져오는 즉각적인 반향들을 보여준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서 자신의 이미지 속에 가정되었던 행동들과 그 행동을 반영하는 주변상황이 갖는 관계를, 다시 말해 가상적인 복합물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현실(자신의 신체와, 주위의 사람들이나 사물들과 같은) 간의 연관성을 경험하는 것이다(231쪽). 
라캉은 거울단계를 완전한 의미의 동일화(그것은 주체가 어떤 이미지를 가정했을 때, 그에게 일어나는 변형을 의미한다)로 이해 할 수 있으며,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가정하고 뛸듯이 기뻐한다는 사실은 주체가 이미 처음부터 상징계 속에 빠져있음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고 말한다. 허상 속에서 주체가 자신의 성숙함을 기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신체의 통일적 형태(Gestalt)이다. 통일적 형태는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가는 외면적 형태이다. 거울 속에서 드러나는 통일적 형태는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아이(주체)의 혼란스런 동작과는 대조적으로 고정된 이미지로 그리고 전도된 대쳉의 형태로 아이(주체)에게 다가온다. 외재성 고정된 영상(imago)을 특징으로 하는 통일적 형태는 정신적 측면에서 거울단계의 “나”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이 소외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예시해준다. 통일적 형태는 계속 거울 단계인 나를 인간이 그 속에 스스로를 투사한 고정된 상이나 인간을 지배하는 환상들과 결합시키려 한다. 라캉은 영상들이 어떤 것과 관련이 있든지 간에 육체의 영상이 환상이나 꿈 속에서 거울이란 장치의 특성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면 영상들에게 있어 거울 이미지는 가시적인 세계로 들어서는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232쪽). 
거울단계에서 나타나는 공간적인 이미지가 유기적으로 완전하지 못하고 아직 인간적인 현실을 구현하지 못하는 주체에게 사회적인 변증법 이전의 단계에도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라캉은 거울 단계가 갖는 기능을, 영상이 갖는 특별한 기능 중의 하나, 즉 유기체와 유기체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 간의 어떤 관계, 다시 말하면 정신세계와 주위세계 사이의 어떤 관계를 수립하는 것으로 본다. 거울단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매혹되어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파편화된 육체의 이미지들로부터 통합적 형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있는 일련의 환상들과 관련을 갖는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환상들은 자기 동일성을 가정하는 자기방어적인 갑주의 형태를 띠고, 주체를 소외시키는 역할을 한다. 파편화된 신체는 개별 주체 속에서 공격성을 띠고 분열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항상 꿈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223-4쪽). 르메르는 거울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거울단계는 자신의 신체를 단편적으로 느끼던 아이에게 총체적인 주체성이 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체의 반영은 총체적이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규정된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그러나 거울단계는 동시에 주체를 소외시키는 자기애적 동일시(1차 동일시)의 단계이다. 주체는 자기 자신이라기 보다는 자신과 유사한 존재일 뿐이다(?자크라캉?, 134쪽). 

거울단계에서의 파편화된 신체가 일으키는 ‘정신분열증’ ‘히스테리증상’과 같은 환상의 구조는 ‘이드’를 상정함으로써 주체의 반사회적 성향이 야기시키는 데, 라캉은 그것을 억제되는 하나의 과정을 상징계의 과정으로 보는 것 같다. 상징적 환원은 거울단계에서 일어나는 발생학적 질서인 자아의 자기방어 속에서 확립된다. 거울단계가 끝나는 바로 그 순간에 거울 속의 나를 사회적 상황과 연결시키는 변증법이 시작된다. 바로 이 순간에 인간의 모든 지식은 타자의 욕망을 통해 결정적으로 병합되며, 타자와의 협력에 의한 추상적인 등가물 속에서 자신의 대상을 구하게 된다. 거울 단계가 끝나는 순간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성장해 나간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아니라 바로 이러한 정상적인 성장이 문화적 중재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성적 대상의 경우 외디푸스 컴플렉스가 이 사실을 예증해 준다(235쪽). 
라캉은 실존주의 철학이 존재론적인 부정성을 자기충족성의 한계 내에서만 이해하려했다고 말하고 그러한 의식의 자기충족성은 자아형성시 필연적으로 개입되게 되는 오인으로부터 생겨난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오히려 오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 라캉의 이러한 지적은 주체를 어떤 실체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으로 정의하기보다는 “가상적인 이미지에 사로잡힌 주체”로 정의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3. 
“문자의 지위”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째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문자의 의미를 밝히려는 것이고, 두번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응축(condensation)과 대체(displacement)과정을 언어의 은유와 환유과정과 연관시켜 무의식에서의 문자의 기능을 보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무의식과 문자의 속성을 통해 주체 형성과정을 가늠해보려고 한다. 

1)문자가 갖는 의미
라캉은 먼저 언어는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의미작용을 만들어낼 뿐이다라는 진술을 증명하길 원한다. 라캉은 그 진술의 이유를 의미작용의 끝없는 지속과정으로 설명하는데, 그 논의를 극단적으로 밀고나가면 언어(랑그)가 기의의 전 영역을 대신할 수 있다는 명제가 생겨난다. 기의는 기표로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이 때 기표는 필연적으로 기의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모든 욕구들을 충족시킨다. 기표는 기의를 재현하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다라는 환상을 계속 추구하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150쪽). 라캉은 화장실 문 위에 쓰여진 Ladies과 Gentleman이란 기표를 예를 들면서 이들 기표들의 차이가 기의로서의 사회법칙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기표는 비물질적이거나 추상적인 형태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방식으로 기의에 침투한다. 기표들은 의미생성을 위해서 다른 기표 속에 침투하고 또다른 기표를 포섭하기도 하며 상대방에게 서로 의존한다. 궁극적으로 기표들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소로 환원되고 동시에 완결된 체계를 이루려는 목적으로 서로 결합하기도 하는 이중운동을 수행한다 문자란 통합된 의미를 불가능하게하고 총체적인 의미를 분산시켜버리는 기표들의 구조이다(152쪽).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의미는 어떤 특별한 기표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기표들의 연쇄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라캉은 그 이유를 의미화작용을 대신할 만한 어떤 초월적인 기표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으로 들고 있다. 이제 우리는 기의가 끝임없이 기표 아래로 미끄러져갈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된다고 라캉은 강조한다(154쪽). 
라캉은 주체와 기표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표들은 모든 주체 속에 자리잡을 때에만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주체는 기표와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주체가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의미화의 연쇄구조는 주체가 언어를 사용한, 다시말해 주체가 다른 주체와 공유하는 언어체계 속에 있는 한 자신의 말 속에서 주체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것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어는 주체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 이상이다. 의미작용은 주체의 의도나 진리에 의존하기는 커녕 오히려 언어체계 내에서 주체의 위치를 지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155쪽). 

2) 무의식에서의 문자의 기능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을 가능하게 하는 일반적인 전제조건은 왜곡(distortion)또는 변환(transposition)이다. 소쉬르 식으로 말하면 담론 속에서 항상작용하고 있는 기표 아래로 기의가 미끄려져 내려가는 것이 꿈이다. 무의식이란 기표의 활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라캉은 기표가 기의에 미치는 두가지 효과를 은유와 환유 은유란 한 단어에 고유한 의미가 그것에 내포된 비유에 의해서 다른 의미로 옮겨가는 비유법이다. “수송하다” 혹은 “전치”에서 유래된 은유는 수사학에서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체계로 바꾸는 비유법이다. 한 대상이 유츄관계가 있는 다른 이름으로 지칭된다. 현대언어학에서는 유사성의 관계에 의해서 연관된 기표들 사이의 대체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되는 것을 은유라고 정의한다. 이런 정의는 기의로부터 독립된 기표의 자율성 속에서 은유가 하는 역할을 보여준다. 예> 그의 볏단은 인색하지도 심술궃지도 않다(볏단이 남근으로 대체). 환유는 어떤 단어로 의미파악이 가능한 다른 단어를 대체하는 수사학적인 비유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환유는 모든 비유법에 공통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예> *원인으로 결과를 나타내는 것: 그는 노동으로 먹고 산다. * 내용물을 담고 있는 용기로 내용물 자체를 나타내는 것:컵을 마신다.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것:30개의 돛
로 들고 있다. 그 두 효과를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의 두 측인 응축과 대체와 연결시킨다. 압축은 기표들의 포개짐이다. 대체는 의미작용의 방향전환과 관계가 있다. 방향전환은 환유 속에서 가능해진다. 환유는 프로이트가 말했던 것처럼 무의식이 검열을 피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기도 하다. 환유와 은유에 대해 라캉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한다. 


                     f(S...S')S = S(--)s

환유작용은 기표와 기의의 연결구조 속에서 발생하는데, 이 끝임없는 기표의 연결고리 속에서 대상은 스스로를 완전하게 구현하지 못하고 결핍만을 드러낸다. 바로 그 결핍을 메꾸기 위해 의미작용은 대상 대신에 욕망을 등장시킨다. 처음의 연산식에서 기표가 기의로 단순히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저항선(--)은 그대로 남아 의미에 저항하는 저항선이 된다. 


                     f(--)S = S(+)S
                     

하나의 기표가 또 다른 기표를 대체할 때, 창조적이고도 시적인 의미가 만들어 진다. 의미작용을 만들어내는 S'는 환유 속에서는 잠재해 있지만 은유 속에서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 라는 기호는 저항선을 뚫고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라캉은 이 지점에서 주체의 기능을 말하려한다. 그는 테카르트적인 주체관(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을 초월적 주체의 의심할 나위없는 투명성으로 보고 그 명제를 무의식에서 문자의 기능(즉 은유와 환유의 과정)을 통해 거꾸로 전복한다(환유축과 마찬가지로 은유축의 의미추구도 주체의 인식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진행된다. 내가 나의 존재의 실현에 모든 주의를 다 기울일 때도, 또한 은유의 과정을 의식하지 못할 때에도 나는 이미 은유의 과정 속에 들어와 있다). 의미를 만들기 위한 은유와 환유의 놀이는 아주 능동적이고도 강렬한 측면을 가지고 있어 횡선아래로 억압되어 의미를 거부하는 기표와 존재의 결핍 사이에서 나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이 놀이는 돌이킬 수 없는 미묘함에서 그만이라고 선언될 때가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 놀이 속에서 나는 내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놀이 속에서 나의 고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 라캉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자유자재로 사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나는 항상 내가 아니며 의식적으로 사고 할 수 없는 곳에서만 나는 나일 수 있다(166쪽). 
무의식적 욕망은 결코 소멸될 수 없다. 결코 만족될 수 없으며 단순히 소멸되지도 않는 욕구가 없다면 욕망도 가능하지 않겠지만, 그러한 상태는 곧 유기체의 파멸을 의미할 뿐이다. 무의식은 기원이나 본능으로 설명할 수 없고 기표의 요소들로 이루어졌다(170). 

3) 문자, 존재 그리고 타자
라캉은 프로이크의 발견이 목표로 하고있는 것은 “나는 무의식이 있던 그 자리로 가야만 할 것이다”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다고 말한다. 주체가 자기 내부에 자기가 의식하고 규제하지 못하는 이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정신분석학적 통찰이 갖는 질서와 방법 모두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발견했던 진리요 안간의 근본 존재조건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자기 내부에 스스로 지배할 수 없는 이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을 때 정신분석학은 단순히 타협적인 전술에 불과한 것이 되고 프로이트의 작업이 갖는 문자성과 정신적 측면 모두를 부인하게되는 결과를 초래한다(171쪽). 
나는 나 자신보다도 이 타자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스스로 자기동일성을 확증하려는 바로 이 순간에도 나를 동요시키는 타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타자는 단순히 나와 다른 또 하나의 주체가 아니다. 타자의 존재는 타자성의 두번째 단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타자는 또다른 주체가 아닌 주체가 환기할 수 없는 이질성으로 이해될 때에야 비로소 나와 다른 주체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라캉의 타자는 푸코의 타자론과 그 맥을 달리한다. 푸코에게 그것은 동일자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동일자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된 것을 뜻한다. 반명 라캉에게서 타자는 주체의 범주에서 들어갈 수 없는, 그것의 밖에 있는 주체의 외화된 무의식이며 상질질서이다. 라캉의 타자론은 근본족으로 동일자에서 나온 동일자의 다른 이름이다.    
 무의식이 타자의 담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개별 주체들을 넘어선 어떤 차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거기서 욕망은 타자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망이 된다(172쪽). 욕망은 환유일 뿐이다 라캉의 언어론이나 무의식론이나 타자론이 결국은 욕망으로 귀결되는 것을 이 대목에서 발견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그의 욕망이론이 무의식론과 언어론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욕망 이론은 마치 기표의 끝없는 미끄러짐과 같이 환유작용을 통해 영원히 유보된다. 인간이 상징질서 속으로 편입됨으로써 대상의 사물성은 언어 기호의 기표로 바뀌게 된다.욕망의 발생은 욕구가 언어적 요구에 의해 부정되고 욕구대상이 환유로 전환될 때이다.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 환유적 기표의 사슬위를 영원히 떠돌게 된다(도정일, 위의 글, 114-7쪽 참고).
(175쪽). 

4. 
라캉은 프르이트의 무의식이 갖는 위력을 분명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비판하려는 주체론의 관념적 견해들, 요컨대 “초월적 주체의 투명성”이니, “통합적 개인성”과 같은 견해들을 비판하는 데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유용한 틀거리를 제공해 준다. 그는 계속해서 그의 무의식 이론이 단순하게 심리학적인 범주에 기초한 기술의 문제로 환원되어서는 안된다고 누차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 무의식을 전유하려는 라캉의 프로젝트는 제대로 이루어진 것인가? 
라캉과 같이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던 알튀세르가 라깡과 프로이트 사이에서 동요한 사실은 라캉의 프로이트 전유의 오류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알 수 있다. 1964년에 쓴 ?프로이트와 라캉?이란 글에서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라캉을 따라 독해하고 있는데, 그의 논지는 라캉의 상상계/상징계, 은유/환유 장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소위 중심없는 주체의 위치를 제기한다. 그러나 1976년에 쓴 ?맑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라는 글에서는 여전히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주목하면서도 라캉의 논지가 거의 들어가 있지않은데, 그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스피노자식의)육체이론과 결합했다는 데 있다(“프로이트의 무의식은 비정신적인 것, 혹은 비정신적인것에 의해 파생되는 어떤 효과와 동일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정신적인 어떤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하나의 물질적 실재도 아니고, 하나의 사회적 실체도 아니다......그는 생물학적인 것에 의해 본질 규정되는 모든 무의식적 소망으로부터 충동을 해방시킨다. 즉 충동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의 하나의 경계 개념이다” 알튀세르, ?맑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 ?맑스주의의 역사?, 운소영외 역, 민맥, 121쪽.
). 알튀세르는 결론적으로 프로이트 무의식을 언어적 표상체계로 환원하려는 것을 거부했고, 무의식의 육체적 잠재력(혹은 이드의 잠재력)에 대해 주목한 것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표상체계로 설명하면서 그 무의식의 혁명적 잠재력을 그 체계 안에 가두고 말았다. 
요컨대 들뢰즈와 가타리가 무의식과 욕망의 문제를 놓고 비판하는 것은 그것들 자체라기 보다는 그것들의 표상체계이다. 우리가 공격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실제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정신분석학의 관념론이고 부르는 것은 그 분석의 이론과 실제 실제상의 환원 축소 체계입니다. 욕망하는 생산을 이른바 무의식적 표상의 체계로, 그리고 대응적인 표현 이해 등 인관관계로 축소시키고 무의식의 기계공장들을 외디푸스. 햄릿과 같은 하나의 연극무대로 축소시키는 것이라든가, 리비도의 사회적 투자를 가족적 투자로 축소시키고, 욕망을 또 외디푸스와 같은 가족적 좌표로 환원시킨 것 등을 말합니다. 정신분석학이 외디푸스를 발명했다는 예기가 아닙니다. 외디푸스는 사람들이 가져왔고, 정신분석학은 그 질문에 응한 것이지요. 하지만 외디푸스는 가족적이건 분석적이건 간에 근본적으로 욕망하는 기계에 대한 억압장치이지, 무의식 자체의 형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의식의 힘들을 따돌리는 상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외디푸스를 공격하지요. 그것을 용납하지 못할 사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너무나 잘 용인하고 있는 우리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 말입니다(들뢰즈/가타리, ?대담?, 솔, 김종호 역, 1993, 44쪽).     
 
 이들이 공격하는 것은 기호의 체계, 코드의 체계이고, 욕망을 기호로 억압하려는 표상체계이다(대표적인 정신분석학의 표상체계가 외디푸스론이다). 이들이 욕망의 자생적인 흐름과 탈코드화하는 유목민적인(nomadic) 생활, 기계론적 일원론을 내세우는 것도 모드 주체를 표상체계로 결정하려는 것에 대한 반대이다. “얼마나 라캉주의의 많은 해석들이 구조적 외디푸스화를 환기시켰는가” G. Deleuze/F. Gauttari, Anti-Oedipus, Univ. of Minnesota Press:Minneapolis, 1983, 82쪽.
라고 말하는 이들의 지적은 라캉의 상징 질서의 표상체계를 비판하는 것이다. 라캉이 옳은지, 들뢰즈 옳은지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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