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윈터의 망명 - 로버트 린텔
----- 차 례 -----
작가 소개
제1부 초반전
제2부 응수(應手)
제3부 중반전
제4부 공격준비
제5부 종반전
제6부 버리는 말
작가 소개
작가 로버트 리텔은 이밖에도 '복명'(Debriefing)을
썼다. 내용은 '르윈터의 망명'과는 반대로 계획적으로
미국에 망명한 소련의 카이로 대사관 직원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것으로써, 진행이 명쾌하고 등장인물의
묘사가 생동감있게 나타난 작품이다. 로버트 리텔에
대해서는 영국 작가라는 것 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제1부 초반전
제 1 장
연극이 끝나고 이윽고 박수가 터져나오기까지의
사이에 막을 내려버린 듯한 정적이 실내를 덮었다. 그
정적에 마음을 빼앗긴 체이핀은 통로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미국인에게서
자신도 모르는 새에 한눈을 팔고 말았다.
오늘 처음 있는 실수였다.
체이핀은 뚱뚱한 사람이어서, 불구자가 성한 사람의
재빠른 움직임을 부러워하듯이 부드러운 동작을
부럽게 생각했다. 비교적 몸집이 작은 일본인
사이에서는 유난히 눈에 띄는 그의 커다란 몸을
딱딱한 나무의자에 올려놓고는 어깨를 흔들 듯이 크게
숨쉬며, 간제이치(觀世一) 좌(座)의 가면을 쓴
배우들이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다리 위를 지나서
사라지는 모습을 관능적인 기쁨에 가까운 그런
기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세밀한 분위기를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체이핀은 노(能)(일본
고전극의 하나. 가면을 쓰고 노래와 음악에 맞추어
춤추며 진행되는 극)에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특히 자기와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기묘한 취미처럼 생각되어 그 사실을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저 미국인은 어떤
점에 끌려서 이 노가쿠도(能樂堂)에 온 것일까 하고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저 미국인 !
언뜻 바라보니 통로 옆 그 자리는 비어 있고, 그
남자는 입구를 향해 양탄자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노의 흥취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체이핀은 자기를
감싸고 있는 상상의 세계에서 즉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커다란 몸을 마지못해 끌고 나가듯이 네 명의
일본인 앞을 빠져나가 손님으로 꽉 메워진 통로를
지나 로비로 갔다. 그의 체구나 나이에 비해서는
움직임이 재빨랐다. 그러나 그가 바깥으로 나가는
층계 입구까지 갔을 때는 이미 그 미국인은 도쿄의
번화한 사람물결 속으로 사라져 버린 뒤였다.
체이핀은 층계 입구에 서서 엉성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올렸다. 지난 몇 년 동안에 처음
당하는 일이고 보니 그의 프로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컨트롤(지령실)에서 크게 화낼 것이
분명하다. 전화를 찾느라고 부근을 두리번거리는데
문득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남자의
옆얼굴이 인도 옆을 떠나는 택시의 창문 안에 있었던
것이다.
체이핀은 다른 택시를 잡아타고 운전사에게 말했다.
"저 차를 따라가시오." 일본어의 경우에는 영어로
말할 때처럼 바보같이 들리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100미터 쯤 사이를 둔 두 대의 택시는 호랑이
문에서 미국 대사관의 검은 철문 앞을 지나,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서 요란스럽게 록폰기(거리 이름)로
가는 승용차, 버스, 트럭들의 혼잡속으로 들어갔다.
열어젖힌 창으로 흘러들어오는 저녁 무렵의 미풍이
체이핀의 얼굴을 스치고, 그 바람과 함께 지하철
공사로 파헤쳐놓은 거리의 붉은 흙먼지가
몰려들어왔다. 체이핀은 문득 운전사가 추적을 즐기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운전사는 핸들에 이마가 닿을
듯이 몸을 굽혀 덤프 트럭 앞으로 끼어들더니, 비탈길
꼭대기 부근에서 울퉁불퉁한 도전(都電 : 도쿄의
노면전차)의 석상(石床) 위로 차를 올렸다. 흰 장갑을
낀 왼손으로 핸들을 크게 왼쪽으로 꺾어서 록폰기의
교차점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앞서 가던 택시 바로
뒤까지 따라잡게 되었다. 체이핀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운전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당신은
베테랑 운전사요 -- 나이스 드라이빙."
교차점 저편에서는 배에다 노란 천을 두르고
머리띠를 한 노무자들이 움직이지 않는 덤프 트럭을
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힌 뒤차의
운전사들이 계속 클랙슨을 울려대고 있었다. 앞에
타고 있던 택시의 승객이 짜증스러운 태도로 차에서
내리더니 운전사에게 요금을 치르고 두 대의 택시
사이를 빠져나가 인도로 향해 걸어갔다. 그 얼굴이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을 때에 체이핀은 자기가
미국인을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단,
엉뚱한 미국인을.
체이핀은 운전사에게 돈을 치르고는 빠른 걸음으로
'기노 구니야' 슈퍼마켓 앞에 있는 공중전화로 갔다.
다이얼을 돌리기 전에 무가당 껌을 하나 까서
입안으로 던져넣고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돌돌 만
은박지를 손에 쥐고서 이리저리 굴렸다.
원하는 번호의 벨이 두 번 울렸다. 남자 목소리가
일본어로 말했다. "4, 9, 9, 6, 5, 2, 9."
체이핀이 자기 쪽 전화번호를 영어로 말하고는
수화기를 걸었다. 15초 뒤에 전화벨이 울렸다. "오,
조지, 나야." 헐떡거리며 체이핀이 말했다.
"자네하고 하니버켓은 어디 있었나?" 조지가
물었다.
"마루노우치야." 체이핀이 말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투로 말했다. "모두 이상 없어. 우리의
친구가 다섯 시간 반이나 노 연극을 구경시켜 주더군.
우리는 지금 록폰기에 있네. 하니버켓은 길 건너
골동품 상점에 있고. 저녁을 먹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지켜보겠네."
제 2 장
르윈터는 이 순간을 수십 번이나 상상해 왔지만,
수위에게 영어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유리로 칸을 막아놓은 테이블 저쪽에
앉아 있는, 고집깨나 있어 보이는 슬라브계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서 초조와 공포감이 솟아오르는
것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잘 들어봐요." 이번에는 좀더 참을성 있게 정중한
어조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사와
만나야 해요."
여러 번 되풀이하기만 하면 수위가 이해할 줄로
아는지 대사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리고는,
"나는 아메리칸스키요." 하고 덧붙였다.
대리석을 깔아놓은 대사관의 로비를 닦고 있던
일본인 청소부 아주머니 둘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새로 온 그 수위는 아직 자기 일에
자신이 없어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수화기를 들어서 당직책임자를 불렀다.
수위가 다이얼을 돌리고 있는 것을 보고 르윈터는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겨우 사태가
진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본인 청소부 아주머니들은 지금은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수위는 러시아 어
신문을 읽고 있었다. 레닌의 사진이 들어 있는
조그맣고 번쩍거리는 황금색 액자가 걸려 있고,
대리석을 깔아놓은 바닥은 금이 가 있었다.
샹들리에가 매달린 먼지투성이의 검은 전선은 칠이
벗겨진 천장으로 뻗어 있다. 상상과는 너무 달랐다.
당직책임자인, 눈썹이 짙고 생각에 잠긴 듯한
자그마한 아르메니아 인이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대리석 위를 발끝으로 걸어와서 르윈터 앞에 섰다.
"저 -- " 미소를 지으며 자기의 손목시계를
가리키면서 아르메니아 인이 말했다. "15분 전부터
여기는 업무가 끝났소."
"꼭 대사를 만나야겠소." 상대는 어느 정도나
영어를 할 줄 알까 생각하며 르윈터가 말했다. "나는
소련으로 가고 싶소."
"안됐습니다만 -- " 아르메니아 인이 말했다. "비자
업무는 5시에 끝났습니다. 내일 9시 이후에 다시 한
번 와주시지요."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모양이군." 르윈터가 말했다.
"나는 미국인이오. 소련에 영주하고 싶단 말이오 --
거기서 살고 싶단 뜻이오."
"영주?" 아르메니아 인이 되물어보고는 그 말의
뜻을 생각해 내려고 했다. 드디어 생각해 내고서
알아들었다. 이스탄불에서 근무하던 중에 서류를
사들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친구가 생각났다 --
지금은 트리비시에서 무료배달우편에 고무도장 찍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목을 한쪽으로 돌려서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고 복도를 걸어갔다.
싸구려 가구들로 가득찬, 퀴퀴한 냄새가 나는
거실에 혼자 남게 된 르윈터는 용수철이 망가져 버린
안락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지난 30분 동안에
인생에서의 결정적인 첫발을 내디뎠지만, 지금도
여전히 모든 것이 우습게 생각될 뿐이었다. 모두들
그렇겠듯이 사소한 점까지 조심해 가며 여러 달에
걸쳐서 망명계획을 짜왔다 -- 일본으로의 여행, 알약,
샴푸, X선 사진, 결행 직전에 모린 앞으로 보낸
쪽지에서부터, 모스크바행 비행기 안에서 읽을 책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결국은 히치콕 영화의 세트 --
볼품없는 대사관, 낡아빠진 방, 자기의 말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 -- 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그 세트
속에서 조금은 불안하고 얼빠진 얼굴로 의자에 앉아
끊임없이 다리를 바꾸어 꼬고는 천장을 바라보면서,
누구에게 감시를 받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르윈터는 정신을 차리고 아까부터 몇몇 남자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미국의 어느 대학 구내에서 방금 나온
듯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파이프를 물고 있지
않은 점 말고는 모두가 완벽했다. 여윈 어깨를
웅크리고, 나비 넥타이, 베이지색의 버튼 다운
셔츠(칼라에 단추가 달려 있는 셔츠), 팔꿈치에
수에드 가죽이 붙어 있는 양복 윗도리 앞은 벌어져
있고, 엉망으로 구겨진 바지에 되는대로 발에 걸친
듯한 신발 차림새였다. 고수머리는 길고, 양옆과 뒤가
텁수룩하다. 그리고 이마가 벗겨져 올라간 것이
인텔리 같은 느낌을 준다. 눈은 카키색이며, 그
눈에서 빈정거리는 느낌을 엿볼 수 있었다.
그가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웃음을 지으며 르윈터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겼다.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소?" 완벽한 영어로 말했다.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느냐가 무슨 뜻이오?" 의자를
뒤로 밀면서 르윈터가 말했다. 그는 갑자기 친근한 척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반사적으로 수상히 여기는
성미였다. "30분이나 기다리게 해놓고 밑도끝도없이
그런 질문을 하다니.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거요?"
"침착하시오." 러시아 인이 말했다. "겨우 20분
기다리게 했을 뿐이오. 이 친구들이 나를 대사관으로
부르느라 지체한 것이오. 그거야 어쨌든 고등학교에
대해서 물어본 데에는 이유가 있소. 어느 고등학교에
다녔는가에 따라서 미국인에 대한 여러 가지 것을 알
수 있지요. 내 경우를 예로 들면, 나는 호레스 만에
다녔소. 그곳 사람들은 모두 중류 이상의 부르주아요
-- 그들 중에는 업무를 마친 뒤에 소련 대사관에
찾아와서 망명을 요청하는 사람은 없소. 알겠소?"
그는 이마를 치며 웃어댔다. "당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나는 알고 있소 -- 게다가 내 머리는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소. 요주의인물이지."
르윈터는 이 러시아 인에게 친근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호레스 만 같은 곳에 가게
되었소?" 그가 물었다.
"우수한 공산당원이었던 아버지가 소련 외무성에서
계속 출세하여 리버데일에 살게 되는 지위에까지
올랐다오." 그가 말했다. "6년 동안 UN 사무국에
근무했소. 어느 고등학교를 다녔소?"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요." 자진해서 대답하게 된
자신에 놀라면서 르윈터가 말했다.
"그래요!" 르윈터의 무릎을 탁 치면서 러시아 인이
말했다. 그는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찔렀다. "프티
부르주아(Petit bourgeois, 소시민의 약칭), 두뇌는
명석, 지능지수는 적어도 135, 스포츠에는 소질 없고,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는 여자도 몰랐고 -- 하긴
대학에서도 여자를 알기나 했는지 모르지.
유태인이라고 하고 싶지만 얼굴 생김새가 다르고.
어떻소, 내 말이 틀렸소?"
"여자에 대한 부분을 빼고는 맞았소." 르윈터는
거짓말을 했다.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와 호레스 만의 우열을 밤새껏
토론해 봐야 결말이 나는 것도 아니겠고 -- 또한
내게는 그럴 만한 시간도 없소. 나는 이번 일의 성공
가능성을 신중하게 검토해 보았소. 당신네 8시
비행기로 일본을 떠나지 않으면 내게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요." 회중시계를 꺼내어 찰칵 하고 뚜껑을
열었다. "두 시간 15분 남았소. 어떻게 해서든지
대사를 만나보고 싶소."
"우리 생각으로는 당신이 누구보다도 만나는 것을
피해야 될 사람은 대사인데." 러시아 인이 빙긋
웃었다. "그는 개회식장에서 테이프 자르는 일은
잘하지만, 어려운 문제는 모두 내게로 미룬다오.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면 -- " 그는 두 손바닥을
가슴에 찰싹 갖다붙였다 -- "당신이 만나야 할 사람은
바로 나요."
르윈터는 상대방의 말을 믿었다.
러시아 인이 가슴에 달린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고 펠트 펜의 뚜껑을 뽑았다. "자, 나의 넘치는
매력으로 당신의 방어선을 돌파한 바에야 이제부터
슬슬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포고딘 -- 내 이름이오
-- 의 참 모습을 보여줘야겠군. 당신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4분의 1이 마르크스주의자, 4분의 1이
인도주의자, 2분의 1은 관료라 할 수 있는 인물이오."
그가 펜을 잡았다. "이름은?"
르윈터는 아프지 않게 치료하는 치과의사의 손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A J 르윈터. 머리글자 A,
머리글자 J, 대문자 L, 소문자 w."
"A는 무엇의 약자요?" 포고딘이 물었다.
"어거스터스. J는 제롬. 그런데 나는 머리글자밖에
쓰지 않소."
"알았소. 머리글자 A, 머리글자 J, 르윈터 씨.
나이는?"
"39살."
"주소는?"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포고딘이 얼굴을 들었다. "케임브리지에서 뭘 하고
있소?"
"나는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부교수로,
요업학(窯業學)이 전공이오. 지난 4년간 MIRV(다탄두
각개목표 재돌입 미사일)의 노즈 콘(탄두 부분)을
연구해 왔소."
러시아 인은 르윈터의 대답을 수첩에 받아적고는,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적어놓은 것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얼굴을 들지도 않고 그가 물었다. "무슨
볼일로 일본에 왔소, 르윈터 씨?"
"와세다 대학의 생태학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서요. 그래서 어제 거기서 논문을 발표했소. 노즈
콘에 관한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취미삼아
환경파괴방지에 관해서 연구를 하고 있소. 2년쯤 전에
국가적 차원의 고형(固型)폐기물처리 시스템을
발명했지요. 그 시스템은 경이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어요. 각 지역에서 고형폐기물을 모아 재생처리하여
다시 순환시키는 시스템이지요.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현재 그 점에서 굉장한 어려움을 안고 있는
미국이면서도 워싱턴 녀석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소
-- 그 모든 시스템에 들어간 비용이 35년 만이면
완전히 빠진다는 것을 내가 서면으로 계산해서
입증했는데도 말이오." 르윈터가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이야기가 너무 빠른가?"
포고딘이 쓰던 것을 멈췄다.
"왜 소련으로 가고 싶소?"
"그 질문에 대답하자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머리가 아플 정도요." 르윈터가 말했다. "미국인의
꿈이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좋겠군 -- 환경오염, 범죄, 정치의 부패, 지식인의
고립, 마약, 반대이론에 대한 억압 등등. 그러나 그
밖에도 이유가 있소. 나는 그 악명 높은
산군복합체(産軍複合體)의 일원(一員)이오. 그 안에서
살아왔소. 그 일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소. 우리
나라는 지금 선제공격용 핵무기를 거의 갖추어가고
있소. 머지않아 워싱턴의 장군들 중에서 누군가가
그것을 써서 선제공격을 하자고 제안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오. 나는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당신들에게 대등한 힘을 갖게 해주고
싶소. 다시 말하자면 당신들에게 MIRV를 주고 싶은
거요."
그 순간 포고딘은 혹시 자기가 미친 놈을 상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포고딘의
세계에서 첩보업무라는 것은 몇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제공하는 정보의 작은 한 조각에 대해 온갖
각도에서 검토에 검토를 거듭하여 커다란 그림의
한구석을 채우는 -- 그것도 잘되면 -- 가능성이 있을
듯한 퍼즐의 한 조각을 만들어내는, 대단히 시간이
걸리는 지루한 일인 것이다.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거리를 지나다가 문득 들어와서, 무지개 끝에
묻어둔 황금으로 가득찬 항아리를 가지라고 내미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렇긴 하지만......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겠소."
포고딘이 말했다. 수백 명도 더 되는 사람을 찾아다녀
본 경험으로, 오래 전부터 솔직한 태도가 아주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르윈터같이 그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의 경우에는 더욱
효과적이지. "당신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굉장한 행운이오.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것에 걸맞는 감사의 표시를 할 것이
확실해요.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그냥
들어온다는 것은 사실 믿기 어려운 것이오. 그러니까
나로서는 그밖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소.
당신은 자신이 그 정보를 정말로 갖고 있다고 믿을지
몰라요.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은 당신이
자신에게 그렇게 믿게끔 만들어서 그런지도 모르고.
또 한 당신이 스스로 알든 모르든 우리에게 가짜
정보를 받아삼키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보내진
사람일지도 몰라요. 아니면, 당신이 정말로 일급
비밀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골치아프니까 생략하겠소.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묻고 싶소. '가령 당신이 내
처지라면 당신을 어떻게 하시겠소?'"
"가령 내가 당신 처지라면 -- " 상대방의 말투를
흉내내어 르윈터가 말했다. "나는 적어도 내 스스로가
밝힌 것만큼 중요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인물일 가능성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실수는 하지 않겠소."
"그래, 당신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포고딘이
말했다. "당신은 이 세계의 규칙을 모르고 있으니까."
"어떤 규칙이오?"
"접근해 온 이 단계에서 당신이 진짜라는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어야만 하는 거요." 포고딘이 말했다.
"망명이라는 것은 -- " 망명이라는 말을 특별히
강조했다 -- "대단히 미묘한 문제요. 당신은 우리에게
판단해 볼 만한 재료를 주어야만 하는 거요."
유혹하는 먹이가 르윈터의 눈앞에 던져졌다. 그는
신분증명 카드, 대학의 신분 카드, 여권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을 보여준들
8시의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좋소." 그가 말했다. "MIRV의 미끼용 미사일
탄도에 관한 수식을 가르쳐 주면 되겠군. 그것을
모스크바에 전송하시오. 그 가치를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있을 거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포고딘이 수첩을
르윈터에게 내밀었다. "펜을 빌려 드릴까?" 그가
물었다.
"아니, 됐소. 나도 갖고 있으니까." 르윈터가
꼼꼼하게 쓰기 시작했다.
제 3 장
"잠깐 기다려. 여기서부터가 중요한 부분이야."
다이아몬드가 말하자마자 조각으로 장식된 소련
대사관의 높다란 나무문이 열렸다. "뒤에 있는 사람이
KGB(국가안보위원회)의 주일 책임자인 미키
포고딘이야. 오른쪽 남자는 그의 부하인 아르메니아
인 중 하나, 왼쪽의 땅딸막한 녀석이 르윈터야.
거기야, 로슨, 거기서 멈춰 주게."
약간 노출이 지나친, 입자가 거친 A J 르윈터의
얼굴이 방 한쪽 구석에서 조그만 화면 가득히 비쳤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는 기묘한 얼굴 사진이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불안한 듯 흘끗 옆을 보는 장면이
잡혔는데, 반쯤 열린 입가에는 자신에 넘치는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OK, 로슨, 끝까지 보여 주게."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카메라의 줌 렌즈가 쑥 앞으로 나가서 화면이
흐려지더니 곧 초점을 맞추었다. 지나가는 버스가
순간 화면을 가로막았다. 르윈터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리무진에 타려고 하다가 갑자기 포고딘을 보고는
대사관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녀석, 생각이 바뀐 모양이군." 누군가가 말했다.
다이아몬드는 그 말을 무시해 버렸고, 화면은
단조로운 사람 모습의 말없는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포고딘이 아르메니아 인에게 뭐라고 하자 그 남자가
대사관으로 다시 뛰어들어가서 비닐로 된 조그만
플라미트 가방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세 사람이
뒷자리에 올라타고는 차가 화면 밖으로 사라져 갔다.
화면이 하얗게 되고, 필름 끝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불이 켜지자 테이블 주위의 네 남자가 눈이
부신 표정을 지었다.
"저 가방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고 있나?"
스티브 페리가 물었다.
"전혀 모르겠는데." 다이아몬드가 대답했다.
"어째서 도쿄 컨트롤은......"
다이아몬드가 손을 저어 페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로슨, 미안하지만 되감는 건 나중에 해주게. 정말
고맙네."
영사기사가 나가고 문이 철컥 하고 닫혔다.
세로로 된 블라인드를 등지고 윗자리에 앉아 있는
다이아몬드가 다른 동료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모두가 낯익은 얼굴이 분명했다 -- 하긴
벌써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동료들이다. 그러나
동료들과의 회의에서 그가 의장 역할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처음 앉아보는 자리에서
(다이아몬드는 지금 부차관보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테이블을 둘러보는 느낌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점은 밥 빌링스와 스티브 페리의
얼굴을 한 번 흘끗 본 것만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두 사람 다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로
다이아몬드와 상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여느 때와는 달리 엄숙하고, 거리감을 둔 채 시치미를
떼고 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완전히 친숙한 느낌을
주고 있는 사람은 부드러운 표정에, 불안정한 신분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린애 같은 미소를 띄운
고든 로저스뿐이었다. 다이아몬드는 로저스만은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가 있다. 그러나 빌링스와 페리,
엄숙한 옆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빌링스와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는 페리 -- 그래, 이 두 사람은 문제가
다르다.
다이아몬드가 지금부터 취급하려는 문제에 관해서는
그 성질상 취급방법에 관한 기본적인 원칙은 없다.
그는 어정쩡하게 말을 꺼냈다. "어쨌든, 여러분,
이번의 이 일은 큰 문제가 되겠어."
스티브 페리가 창 쪽으로 걸어가서 블라인드를
열었다. 비스듬히 들어오는 빛이 양탄자 위에 비쳤다.
"그렇게 결정해 버리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그가 물었다. 페리는 육군 장교로 12년 근무했으며,
그 사이에 악센트가 적은 어렴풋한 남부 사투리를
느끼게 하는 말투가 입에 배게 되었다. 이야기할
때에는 얇은 입술이나 턱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이를 꼭 다문 채 말하는 것 같았으며, 그로 인해서
말하는 것이 무척 권위가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만일 치프(chief)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 사건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판단하라고 했을 것이 분명해."
"자네만큼 부차관보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거야."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그러나 현재로선
그는 심내막염(心內膜炎)으로 육군병원에 입원중이고,
내가 그의 대리로 임명되었어." 그는 페리의 시선을
피했다. "잘 듣게. 지금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괴로운 처지에 있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 우리들
모두가 MIRV 계획의 기밀유지를 담당하고 있는데,
지금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만 거야."
다이아몬드는 자기에게는 좀 과분한 의자에 몸을
파묻고서 다리를 뻗었다. 40대 중반인그는 예사로운
행동에도 어딘지 품위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여유있게 몸을 앞으로 숙이고서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리고 있었으며, 이마에는 풍성한
갈색 머리칼이 늘어져 있었다. 모든 일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그
자신은 자신감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우선 열흘 전에 그의
사무실에서 부차관보가 양탄자 위에 쓰러져서 입을 딱
벌린, 도무지 믿기 어려운 사고가 있었다. 그 뒤
1주일도 채 안되어 대행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망명사건이다. 게다가 피할 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피하지 않기로 한 세알라
문제도 있다.
그러면서도 또한 중앙정보부(CIA)에 근무한 이후로
지금처럼 의기양양한 --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
기분이 되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된 셈인지 어려운
문제들이 영양소가 되어 그의 자부심을 북돋우어주고,
그의 야심에 활력을 넣어주었다. 그의 인생을
형성하고 있던 낡은 방정식이 갑자기 사라지고,
새롭게 떠오른 것이 훨씬 매력적으로 생각되었다.
이번 망명사건을 탈없이 무사히 처리한다면 국방부의
방첩담당 부차관보의 자리가 자기의 것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 얘기는 완전히 다른
일, 다시 말하자면 한낱 연애사건에 불과하며, 결혼한
뒤로 연애를 경험해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또 자네가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지원해 줄지 어떨지 눈치를 보아야 할
빌링스 쪽을 보면서 페리가 말했다. 그러나 빌링스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다이아몬드와 한판 승부를 건다면
그 시기는 페리가 아니고 자기가 직접 결정하리라
마음먹으면서.
"너무 거창하다고?"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이야기
내용이야 어찌되었든 어조만은 거칠어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이번 일은 처음부터 실패의 연속이란
말이야." 마닐라 종이철을 펴서 철해 놓은 얇은
복사본을 넘기기 시작했다. "여기 인사조사부에서
보내온 보고서가 있어 -- 자네 관할이야, 스티브.
르윈터가 일본의 심포지엄에 참석하는 허가를
신청하기 3주 전에 자네의 부하가 -- " 다이아몬드가
손가락으로 줄을 따라가면서 말했다 -- "그가
크롤트리메톤, 즉 고초열(枯草熱)에 쓰이는 알약
500정과 비듬 없애는 샴푸를 1다스 구입한 사실을
보고했어. 이 보고에 의하면 그가 단골 치과의사 --
보스턴의 도널드 피시킨이라는 의사 -- 에게 가서
자기의 치료기록을 찾아갔다는 걸세. 우리의 이
거대한 기밀유지조직의 어딘가에서 경보가 울렸어야만
했어.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 르윈터가 일본행
허가를 신청하고, 인사조사부의 부장인 스테파노
페리가 허가 서명을 했어." 다이아몬드가 종이의
주름을 손바닥으로 폈다.
"고초열 알약을 다량으로 사들인 것이 어째서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덤벼들 듯한 투로 페리가
말했다. "게다가 비듬 없애는 샴푸 -- 생각이 지나쳐,
리오. 이빨의 치료기록 쪽은 그가 되찾아간 이틀 뒤에
우리가 조사해 보고는 그 이유가 판명되었네. 때마침
르윈터가 그 피시킨인가 하는 의사와 말다툼을 해서
의사를 바꾸기로 한 것에 불과해."
"알약을 500정이나 산 사람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나?" 다이아몬드가 물었다.
"앞으로는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사는 사람은 없어. 내 짐작이지만
르윈터의 그 플라이트 가방을 열어보면 안에는 그
알약과 샴푸와 피시킨 의사의 X레이 사진이 들어 있을
것이 분명해."
"글쎄, 리오, 나는 아무래도 자네가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어." 고든 로저스가
말했다. "이번 일로 보아서 도쿄에서 대충 넘어가는
감시가 아니고 그를 좀더 철저하게 감시했어야 한다는
점은 인정해. 그러나 다량의 알약을 사들인 MIRV
관계자를 남김없이 가둬 버릴 수는 없잖은가?" 입술이
두텁고 부드러워 조금은 여성적인 느낌을 주는
로저스가 조리 있게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의견을
말한 것에 만족감을 느끼며 가벼운 기침을 했다.
"국방장관이 자네처럼 관대한 마음이 되어주기를
빌겠네."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그러나 그것만
바라고 있을 수는 없네. 어젯밤 늦게 내가 그의
사무실에서 나올 때, 그는 대통령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어. 냉방이 추울 정도로 들어오고 있었는데도
국방장관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이 배어 있었단
말이야. 우리도 다소 머리를 쓸 수 있다면 지금쯤
그와 마찬가지로 땀을 흘리고 있어야 하네. 우리들은
단일통합작전계획과 국가적 전략목표 리스트를
들여다보고 현존하는 것 중에서 국가안전보장상 가장
중요한 부문을 담당하고 있는 걸세."
"나는 분명히 땀이 나고 있네. " 머리글자가 새겨진
희고 부드러운 손수건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이마를
훔치면서 로저스가 말했다. "도대체 언제쯤 우리는
좀더 좋은 회의실이나 좀더 큰 냉방장치를 지급받을
수 있는 건가? 지난번 전략기획의 동료들은 이런
취급을 당하지는 않았어."
"사무실 공간의 재분배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페리가 거들었다. "치프가 입원하고 있는 사이에
분배가 시작되면 우리는 형편없는 제비를 뽑게 될
거야. 끊임없이 요구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일세.
기름을 넣어주는 것도 시끄러운 차량들뿐이야.
그렇군, 내가 치프에게 제출하려고 써둔 메모의
사본을 자네에게 주어야겠군. 내가 있는 곳에는
청소기구를 넣어두는 창고에 파일 캐비닛이 들어
있고, 부하들 중에서 셋은 워터 쿨러가 들어가야 할
사방 1.8m의 구멍 속에서 일하고 있다네."
다이아몬드는 강풍 속에서 요트의 방향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키를 잡아당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사무실의 정당한 분배를 누구 못지않게
바라고, 또 기다리고 있다네. 그러나 그 일은 당분간
뒤로 미뤄둘 수 없겠나?"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입구 옆에 있는 캐비닛 쪽으로 갔다. "이걸
들어보게." 테이프 레코더의 스위치를 올렸다.
"오, 조지, 나야." 터널 끝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가 말했다.
"자네하고 하니버켓은 어디에 있나?"
"마루노우치야. 모두 이상 없어. 우리의 친구가
다섯 시간 반이나 '노' 연극을 구경시켜 주었다네.
우리는 지금 록폰기에 있어. 하니버켓은 길 건너
골동품 상점에 있고. 저녁을 먹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지켜보겠네."
다이아몬드가 스위치를 내렸다.
"무슨 소리야?" 로저스가 말했다. "그 체이핀이란
놈, 얼빠진 녀석 같으니."
"체이핀만이 아니야."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도쿄
지령실도 마찬가지야 -- 그들은 모든 규칙을
위반했어. 체이핀은 르윈터를 놓쳐버린 뒤에 그가
호텔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느라고 세 시간 반이나
허비한 끝에 겨우 자기들이 실수한 것을 보고했어.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지령실은 르윈터가 소련
대사관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장면을 비디오로
찍었으면서도 그가 국외로 나간 지 48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필름을 현상했어. 자네가 직접 정한
업무규정에 따르면, 고든, 그 필름은 하루 세 번,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현상하기로 되어 있어. 내가
잘못 말했다면 그렇다고 말해 주게."
로저스가 순순히 인정했다.
"다음은 아주 단순하고 초보적인 암호전보에 의한
교신이야." 다이아몬드가 계속했다. "르윈터가 그
대사관에 들어가고 나서 45분 정도 지났을 때
근무시간 이후의 암호문 교신이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많이 모스크바와의 사이에 오갔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 그때 지령실 녀석들은 어디에
있었지?"
"소련 녀석들은 지난 달에도 열두 번이나 근무시간
이후에 암호문을 이용해 교신을 했어." 로저스가
말했다. 다이아몬드는 그 밖에도 다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좋아. 체이핀에 대한 것이나 필름에 대한 것,
교신에 대한 것은 잠깐 잊어버리기로 하세."
다이아몬드가 다른 보고서를 집어들었다. "르윈터가
대사관에 들어간 지 한 시간 45분 뒤 -- 르윈터와
포고딘을 태운 비행기가 모스크바를 향해 떠나기 꼭
한 시간 전 -- 에 지령실은 그 지방 정보원으로부터
보고를 받았어. 소련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는 일본인
청소부일세. 대사관 문이 닫힌 뒤에 미국인 하나가
들어왔으며, 당직 책임자가 서둘러 그 남자를 어떤
방으로 안내하고, 그 직후에 주교환대에서 흥분된
목소리로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걸어댔다고 그 청소부
여자가 보고했네. 그 청소부는 러시아 어밖에 몰라.
영어는 조금도 모른다네. 그 여자는 -- 여기를 잘
듣게나 -- 포고딘과 대사인 스탄체프 사이에서 있었던
논쟁의 일부를 엿들었다고 직접 지령실에 보고했어.
그 논쟁에서 대사가 지고 말았는지, 화가 난 얼굴로
나가고, 그 직후에 일본인 고용원들을 여느 때보다
빨리 퇴근시켰다는 거야. 이렇게 되면 이미
그림맞추기 퍼즐의 한 토막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아이들의 오려내기 그림처럼 분명해졌네."
로저스는 반론을 펼 방법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윈 귀족적 외모를 지닌 관리로서, 필요 이상으로
자질구레한 점까지 분명하게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로버트 빌링스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자네는 우리의 실수를 특히 강조하려는 듯이 그
청소부가 엿들었다는 이야기를 굳이 언급하고 있는 것
같네. 나도 그 보고서를 읽었어 -- 그런 종류의
보고서는 모두 내 손을 거치게 되지. 그 청소부는
미국인을 보았다고는 하지 않았어 -- 미국인이라고
여겨지는 남자를 보았다고만 했지. 그녀는 포고딘과
스탄체프가 논쟁하는 것을 들었다고도 하지 않았네.
복도에서 논쟁하는 소리를 들었고, 뒤이어 대사가
급하게 나갔다고만 했지. 화난 얼굴을 본 것도
아니야."
빌링스는 리오 다이아몬드에 대항하는 동료를
대표해서, 마치 자신들의 신념을 변호하는 처지라도
된 듯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정보국의
기밀유지기획부 부장인 그는 서열상으로는
다이아몬드의 다음 자리이며 최고참이어서, 기술적인
전문지식면에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모두에게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머리는 지극히
명석하고, 정보국 일에는 헌신적이며, 대학 교수를
연상케 할 만큼 꼬치꼬치 캐기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국장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절대로 허점이 없는 보안조직이었다면 망명하기
이전에 그의 의도를 알아냈어야 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그런 조직은 우리 나라에는 있을 수 없는
걸세." 빌링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것보다
자네는 중요한 점을 빠뜨렸어." 한마디 한마디에
무게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 빌링스는 아주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자네는 문제의 핵심을
빠뜨렸다고 나는 확신해. 지금 가장 중요한 점은 그의
망명을 둘러싸고 드러난 우리의 허점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가지고 갔느냐 하는 점이야 -- 물론 그 알약과
샴푸는 빼고 말일세.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상대방
녀석들에게 어느 정도의 이익을 줄 수 있는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주느냐 하는 점이야. 그
점에 대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제반 사실을
기초로 답을 내보자면 정말 하찮은 정도일세."
다이아몬드는 노란색의 줄이 쳐진 메모지에 연필로
여러 가지 크기의 S를 장난삼아 그리고 있었다.
"그럼, 자네가 알고 있다는 제반 사실이라는 것은 뭘
뜻하는 건가, 밥?" 메모지에 시선을 둔 채 그가
말했다. 빌링스가 말한 '핵심을 빠뜨렸다'는 말이 두
사람 사이의 허공에 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자네들도 알고 있는
사실들이야." 여전히 무심한 어조로 빌링스가 말했다.
"대관절 A J 르윈터는 누군가? 그의 신상조사서에
의하면 -- " 증거로 제출이라도 하듯이 돌돌 만
컴퓨터의 프린트 출력지를 테이블 위에 내놓았다 --
"별로 특징이라고는 없는 인물이야. 나이 39세.
지능지수 145.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는 앨프리드
대학 요업학부를 우등으로 졸업. 요업학 분야에서는
꽤 우수한 전문가. 결혼. 아이 둘. 이혼.
세라믹(陶器製) 노즈 콘 설계자로 4년 전부터 MIRV
계획에 참가. 연봉 17,500달러. 기밀취급자격을
인정받기 위한 신상조사에 나타난 자료일세. 빚 없음.
이성을 사랑함. 성도착증 없음. 정치적으로는 중간
노선보다는 약간 좌경인 편이지만, MIT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구경이라도 하고 싶네. 어쨌든
활동적인 편은 아니네. 그의 자료 중에서 단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환경보호에 굉장히 열심이라는 점이야 --
요주의사항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 이혼한
아내와 같은 형의 연구조수와 7개월 전부터 교제를
시작했네. 그 여자도 신상조사에는 합격했지. 빚
없음. 성도착증 없음. 정치적으로는 약간 좌경."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 중 다이아몬드 말고는
정보국 내에서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인물인 빌링스가 지금은 회의의 진행을
지배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미키 포고딘은 우리
르윈터에게서 정보를 듣게 되면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더없이 자신감에 찬 어조로 계속했다.
"우리는 무엇을 걱정하고 있나? 세라믹 노즈 콘
전문가가 망명해 버려서 낭패하여 허둥대고 있나?
세라믹 노즈 콘 분야에서는 소련이 우리에게
뒤떨어지기는커녕, 아마 우리 이상으로 앞서 있을
걸세. 르윈터 쪽에서 오히려 배울 점이 몇 가지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 아무 쓸모없는 인간을 소련의
우리 친구는 어째서 받아들였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이야."
다이아몬드는 특별히 굵게 그린 S를 검게 칠해
버리고는 입을 꽉 다물고서 얼굴을 들었다. 고든
로저스는 루스리프(묶지 않고 낱장으로 된) 노트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스티브 페리와 로버트 빌링스는
다이아몬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방안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냉방장치가 돌아가는 소리뿐이었다.
다이아몬드가 그 침묵을 깨뜨렸다. "나는 핵심을
놓치지 않았어, 밥 -- 놓친 것은 오히려 자네야."
그는 도전을 받고 일어섰다.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증거는 그런 신상조사의 내용이 아닐세. 그런
것으로는 르윈터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어 --
현재 살아 숨쉬고 피가 통하는 르윈터에 대해서는
말이야.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증거는 -- 그리고
현시점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단 한 가지는
-- 소련이 그의 망명을 받아들였다는 점이야. 그들은
그의 망명을 받아들였네. 일본에서 외교상의 문제를
들고 나올 위험을 감수하고도 말일세. 그들은
위장망명자, 거짓 정보 등 골치아픈 문제를 맞게 될
위험을 무릅썼어. 그리고서도 그를 받아들였네.
진상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걸세 -- 그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에서부터. 그들은 결코 얼빠진
녀석들이 아니야. 르윈터는 모스크바로 보내지기 전에
자기의 망명을 인정해 줄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걸세."
다이아몬드는 다시 S를 그리기 시작하다가 말았다.
"대사관과 모스크바 사이의 그 긴급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가 말했다. "그 아무 쓸모없다는
르윈터에 대해서 걱정해야 할 이유가 절대로 있다고
보아야 하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사람을 받아들였기
때문일세."
제 4 장
"난 물질주의자가 아니에요." 세알라가 말했다.
"여러 가지 것들을 좋아할 뿐이에요."
"그럴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그리고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빈 자리라고는
거의 없이 세알라의 '여러 가지 것들'로 메워져
있었다 -- 조개껍질, 색칠한 달걀껍질, 돌, 상아로 된
빗, 프랑스의 빈 과자깡통, 일본의 목각인형, 문진,
골동품 회중시계, 단추.
"나는 이런 곳에서는 절대로 살 수 없어. 묘한
일이지만, 이런 데서 살아가는 사람을 존경은 해.
그렇지만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세알라는 어린 소년처럼 앙상하지만 성숙한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침대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 튼튼한 줄기에 붙어 있다가 방금
잘라낸 꽃 같았다. 그녀는 색깔이 요란한 베개를
포개고 기대앉아, 오른쪽 엄지발가락을 시트 밑으로
내놓고 있는 리오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세알라는
다른 여자들처럼 여러 남자들과 사귀고 있었지만,
자기 집에 남자를 데리고 오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쩌다 함께 오는 남자들은 그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테스트를 했다 -- 자기의 수집품에 대해서 그들이
나타내는 반응으로 남자들을 판단했다. 리오를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의 수집품이 그의 마음에
들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가 좋아하는 것도
있고 싫어하는 것도 있어서 그만 흥이 깨지고 말았다.
갈색의 긴 머리칼을 그의 가슴 위에 떨어뜨리고서
침대 너머로 손을 뻗어, 침대 곁에 놓인 조그만 탁자
위에서 마호가니 재(材)의 자그마한 상자를
집어들었다.
"이거 어떻게 생각해요?" 그녀가 물었다. "지난번
출장갔을 때 파리의 벼룩 시장에서 찾아낸 거예요."
"뭔데, 그게?" 본능처럼 되어버린 어정쩡한 말투로
다이아몬드가 물었다. 그가 뚜껑을 열었다. 닳아서
떨어진 붉은 펠트에 놋쇠로 만들어진 구근(球根) 같은
것 여섯 개와, 강철 온도계가 박혀 있었다.
"뭔지 짐작도 안 가세요?" 자신의 농담에 웃으면서
세알라가 말했다. "당신은 뭔지 모르면서도 좋아할 수
있나요?"
"나는 당신이 좋아졌어." 다이아몬드가 다시 멍청한
척했다 -- 그런 자기 자신에 화가 났다. 그는
세알라를 상대할 때에는 경계심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른이 된 뒤로 마음속으로 정말 사람을
믿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지금에 와서는 그러는
것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래 보고 싶었다.
그 놋쇠로 만들어진 구근 모양의 물건을 하나
집어들고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돌리면서 부식해 놓은
글자를 읽어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아주 예쁘게
생겼는데. 하지만 대관절 뭐지? 살 때에는 이게
뭔지는 알고 샀을 테지?"
"아니, 그 점이 중요한 거예요, 리오." 그녀가
말했다. "그 점이 나의 '뭔지 모르는' 수집품의
중요한 점인 거예요. 그런 것이 하나 둘이
아니라고요. 아주 많이많이 있어요." 그녀는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가서 낮은 선반 여기저기를
휘젓더니그의 무릎 위에 상자며 여러 가지 모양의
물건을 쌓아올렸다. "특히 이 수집품에 낄 수 있는
조건은 파는 사람도 어디 쓰이는 것인지 모르는
것만을 사는 거예요."
"우리 정보국에 이런 것의 출처를 찾아내는
전문가가 있어."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그것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뿐만이 아니고, 누가 언제
만들었나까지 가르쳐 주지."
"고마워요,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려요.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알게 되면 내 마음에 들지 않게 될 것이고 --
갖고 있지도 않게 될 거예요."
다이아몬드는 지금의 아무 거리낌없는 마음과
마음의 접촉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지금이
그에게는 특별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 사랑의
행위를 끝낸 뒤의 이 한때가. 이제까지의 인생에
있어서, 아내까지 포함한 많지 않은 연애관계가
거북한 결과로 끝나버린 것은 성행위의 신선미가
없어졌을 때가 아니고, 행위 뒤에 이어져야 할 밀착된
마음의 접촉이 없어졌을 때였다.
세알라가 그를 마주보고 침대 위에 앉았다. 골동품
반지를 줄줄이 낀 손가락으로 눈앞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걷어올리고는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시선을
끌었던 조심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땠어요?"
부끄러운 듯이 물었다.
"당신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야. 내가 해야
하는 거지. 멋있었어 -- 당신은 아주 멋졌어." 그저
건성으로 하는 듯한 말투였다.
"점점 좋아져요." 세알라가 말했다. "언제나
그래요. 내 말의 뜻은 좀더 서로를 깊이 알게 되면,
다른 일도 하게 될 것이고......" 그 뒤가 끊겼다.
한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우리는 물건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정말." 그녀가 말했다.
"물건?"
"그래요. 물건 말이에요. 물질주의와 물건,
잊어버렸어요?"
"아니, 천만에. 당신은 물질주의자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물건을 좋아하지. 그렇게 미묘한 걸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여자뿐이야. 당신은 물건을 모으는 것이
아니야, 세알라. 수집품을 모으고 있는 거지. 먼지를
털어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당신은 그런 걸 물으면 안돼요." 장난스럽게
그녀가 말했다. "먼지를 털어내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시지요? 흑인 아주머니가 1주일에 한 번
와요. 그 여자가 내 물건들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먼지를 털어내죠. 자칫 깨어지기 쉬운 것 -- 예를
들면 저기 있는, 가루를 반죽해서 만든 체코의 조그만
인형 등 -- 은 손도 대지 않아요. 입김으로 불어서
먼지를 털어낸답니다."
"세알라, 당신은 인형의 집에 살고 있는 소녀야."
얼굴을 갖다대면서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그녀가 얼굴을 돌렸다.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리오. 나는 단순한 대학생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나는 물질주의자가 아니에요.
그 점이 분명히 다른 거예요. 물질주의자라는 것은
경제학이나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와 관련이 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물건은 부리예요 -- 나무가 부리를
뻗어가는 것과 같은 그런 거예요. 어떤 사람의
아파트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부리가 보이지요. 그
방에 대한 친근감 같은 것이......방을 그 사람의
독자적인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그야 어떤 아파트라도 한 번 이상 가게 되면
친근감을 주는 것이 있기 마련이지."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세알라가 말했다. "내
말은 특별한 것, 특별한 부리를 말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어요. 아무것에도
미련을 갖지 않고 문득 생각나면 모든 것을 그냥 놔둔
채 어디론가 가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어요."
다이아몬드는 '뭔지 모를' 상자 하나를 집어들고
살펴보면서 말했다. "나는 들은 적이 있어. 모든 것을
그대로 놔둔 채 떠난 어떤 사람을 알고 있지 --
고초열에 쓰는 알약 한 병과 비듬 제거 샴푸 한 다스
말고는 모두 그냥 두고 갔어."
다이아몬드는 화제가 바뀐 것과, 직업상의 신분을
세알라에게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기뻤다.
"망명자인데, 그것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어." 괜스레
풀죽은 듯한 어조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직
신문사에서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니까 자세한 것은
말할 수가 없어. 며칠 전 그 사람 -- 어떤 과학자 --
이 소련으로 도망쳐 버렸어. 그가 아주 중요한 비밀을
가지고 갔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견딜 수
없어."
세알라는 정말 호기심이 생겼으며 -- 게다가
재미있어 했다. "망명자......과학자......진짜
러시아 인......난 비밀스러운 것을 제일 좋아해요,
리오. 당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
"이런 경우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가 무엇을
가지고 갔는가를 정확히 알아내는 일이야. 태어난
날부터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탄 날까지의 그의 인생을
재현해 보는 거지. 하나하나 단편들을 이어나가는
거야 -- 왜 망명했는가, 기밀정보 취급자격의 정도,
상대편에 어느 정도의 정보를 줄 수 있는가 하는
것들."
"무슨 수로?"
다이아몬드가 침대에서 내려와서 방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몸인 것을 알고 있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잊어버리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았다. "우리가 쓰는 방법에 CPP라는 것이
있어 -- 포괄적 성격분석이라는 뜻이야. 대개 8만
달러의 비용과 열흘 간의 시간이 필요하지. 보통은 두
단계로 나누어서 하게 되고......"
지금 세알라로서는 그가 하는 말의 내용보다도,
말하는 태도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리오 다이아몬드였다.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인 듯한 냉담한
태도와 말투였다.
"......대여섯 번밖에는 쓴 적이 없었어. 실제로는
상당히 정공법적(正攻法的)인 방법이지. 몇 사람을
각처에 파견하여 그들이 그 인물의 생활에 관한 온갖
단편들을 진공청소기처럼 그러모으는 거야. 다음에는
뉴욕에서 전문가로 팀을 짜는 거지. 심리학자,
자연과학자, 현직 경찰관, 경우에 따라서는 그 밖에도
하나둘 더 추가되고. 그들이 자료수집반이 모아온
자료를 받아서 -- "
전화벨이 울렸다. 다이아몬드와 세알라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 그리고 서로의 얼굴에 떠오른
놀란 표정을 보고 웃었다. 그녀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 세알라가 말했다. "아닙니다.
안됐지만 여기는 그런 사람이 없어요. 별말씀을."
그녀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았다. "어떤 사람이 마담
데파르지와 이야기하고 싶다는군요. 나를 아마 놀렸나
봐요. 그런 이름으로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요."
전화벨이 또 울렸다. "내가 받아보지."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왼손으로 수화기 구멍을 막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마침내 차디찬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야, 해리. 비열한
녀석.나는 그런 것을 장난으로 생각지
않아......아니, 아무것도 아니야......우리가 알고
있는 한 놈은 아무것도 갖고 가지 않았어......그건
일상적인 절차에 불과해......부정, 거절, 자네 쪽
사람을 그 그룹에 넣을 수는 없어......자네 마음대로
차관보를 찾아가 보시지. 그러나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피차 마찬가지야. 자네 같은 인간은
꺼져 버렸으면 좋겠어." 다이아몬드가 때려부술 듯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폭발하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이아몬드의 기분에 이끌려 세알라도 침대로
뛰어올라가 그와 함께 웃어대기 시작했다. "자,
이야기해 줄 거예요, 말 거예요?"
"잘 들어,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니야 --
되도록이면 일어나지 않기를 나는 빌고 있어. 지금 그
사람은 중앙정보부에 있는 오랜 동료야. 전화는 그의
독특한 못된 장난이지 --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마치 등에 나이프를
꽂아서 간단히 해치우는 그런 방법이야. 그것이 보란
듯이 뭔가를 알려주는 그의 수법이지."
"하지만 당신은 그 망명자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더군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어. 사태가 분명해질 때까지는 사건을 외부에
알려서는 안되거든 -- 게다가 우리 정보국이 나와
같은 인간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니까."
"내게 비밀을 말해선 안되겠지요?"
세알라가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어느
편이라도 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가능하지 -- 그러나 그렇지 않아. 당신은
백(白)으로 판정이 나버렸어."
"백으로 판정났다고요?"
다이아몬드는 직관적으로 입을 놀린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저번에 함께 버지니아 비치로 수영하러 간
뒤에 국방부의 취직 지원자 이름 중에 당신 이름을
몰래 넣어두었지. 그랬더니 신상조사 결과가 지난
주에 나왔더군."
"너무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는 조금 뒤에
말을 이었다. "보여주시겠어요?"
다이아몬드가 웃었다. "벌써 없애버렸지만,
기억하고 있는 것은 말해 주지. 당신이 지금까지
사귀어 온 어떤 남자보다도 나는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부모의 이혼, 대학에서의 성적 -- 당신은
불어를 전공했더군. 오빠가 콜게이트에서 저지른 큰
실수. 낙태. 지난해 TV의 추가출연료 건으로 다툰 일.
첫번째 진짜 애인은 대학시절에 사귄 에드워드 뭔가
하는 굉장히 마음씨가 고운 남자였던 것......"
"에디라." 세알라가 말했다. "놀랍군요. 그 사람에
대한 건 벌써 몇 년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가 지금 뭘 하고 있을 것 같아?" 다이아몬드가
물었다.
"그런 것까지 알고 있어요?"
"월 가(街)에서 증권회사의 외무원을 하고 있지."
"어머, 놀라겠군요. 에디 하먼이 월 가에서! 그의
단편소설을 몇 편인가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하먼과 헤어진
이후 대체로 1년에 두세 명의 남자친구를 사귀어
왔어. 그 중에서 진지하게 사귄 것은 둘밖에 없고.
케네스 솔렌센과 작년의 남자야."
"피터."
"솔렌센은 아주 멋지게 해냈어. 공산주의자 같은
독점 게임을 고안해 냈지. 돈을 잃어버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게임이야. 제일 먼저 파산한 사람이
이기지. 그 방법으로 큰돈을 벌어서 남프랑스에서
지내고 있어. 피터는......"
"그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요." 불쾌한
어조로 세알라가 말했다.
두 사람 모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세알라가
말했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옳은지 어떤지
확인해 봐야겠어요. 당신은 보안부 사람들에게 내
신상조사를 시켰어요. 그것은 나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것에 상당히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2와 2를
보태어 4라는 답을 얻기라도 한 듯이 목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런 이유로 이 자연발생적인 요소가
상당히 퇴색되는 거지요, 그렇죠?" 구겨진 시트,
바닥에 흩어져 있는 옷가지들을 몸짓으로 가리켰다.
"그렇지 않아."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잘 들어봐,
그것이 워싱턴 생활의 현실 중 한 토막이야. 대통령
이하 관공소에서 일하고 있는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정사를 즐기고 있어. 그러니 그 상대
여자들의 신원을 알고 있지 않으면 곤란하단 말이야.
당연한 경계조치지."
"여자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남자가 경계조치를
강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 " 세알라가
말했다. "이번의 그 이야기는 최고로 웃기는
거로군요."
"아마 그런 이유로 해리는 내가 있는 곳을
알아냈겠지." 자기의 생각을 더듬어가며 다이아몬드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왜 그는 당신을 마담 데파르지라고 부르죠?"
"전쟁 때 내 암호명이야."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지금은 어처구니없게 들리지만, 런던에서 내게
지령을 내릴 때는 언제나 BBC 방송을 통해서 마담
데파르지 앞으로 통신을 보냈어. 야릇한 것은 내가
그런 일에 말려들게 된 것이 단순한 착오 때문이라는
점이야. 녀석들은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소집했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누군가가 내 출생지
난에 UK(영국)가 아니라 UKR라고 써넣었던 거야."
"잘 모르겠군요."
"UKR는 우크라이나의 약자야. UK는 연합왕국 --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런던에 살고 있었어.
어쨌든 육군 정보부가 그 UKR를 한번 보자마자 크게
기뻐하고 나를 러시아로 보내서 잠입요원으로 만든
거야. 그런데 프랑스 어를 다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녀석들이 나를 마리팀 알프스에다 떨어뜨려
버렸지. 격추당한 조종사의 탈출 루트를 설치하기
위해서 말이야. 나는 겨우 14주밖에 견디지 못했어.
겁쟁이 조종사에게 배신당한 거지. 어쩌면 그는
독일의 스파이였을지도 몰라 -- 지금도 모르고 있어.
그거야 어쨌든 나는 그 루트를 이용해서 내 자신이
탈출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고, 아슬아슬하게
도망쳤지. 영국 조종사 두 사람과 함께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막 스페인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비시
정부(1940년 6월 히틀러의 나치스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은 뒤 오베르뉴 산간도시 비시에 주재한 프랑스의
친독일정부)의 국경경비대원이 낌새를 챈 거야.
그들의 개가 우리의 발자취를 쫓아 어떤 가축
우리까지 찾아오게 된 거지. 나는 모두에게 창밖으로
오줌을 누라고 했어. 그것을 본 개들도 오줌을 누어
냄새를 뒤쫓을 수가 없게 되었지. 우리는 그가 축
우리의 뒷문으로 도
망쳤고, 개들은 제각기 어디론가 가버렸어. 우리
세계에서는 흔히 쓰는 수법 중 하나에 불과해."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군요." 큰소리로 웃어대면서
세알라가 말했다. 그러다가 차츰 웃음이 사라졌다.
"당신, 사람을 죽여본 적 있어요? 너무 평범한
질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때요, 죽여본 적
있어요?"
"전쟁중에는 없었어." 다이아몬드의 어조가
바뀌었다. "전쟁이 끝나고 대학을 나와 나는 정보국에
들어가서 동유럽의 첩보망을 담당했어.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야. 1956년 헝가리 사태가 한창일 때
어떤 사람이 --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까 전화를
걸어온 그 남자가 -- 그 계획을 생각해
냈어......빌어먹을......" 악몽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다이아몬드가 고개를 격렬하게 좌우로
흔들었다.
"이야기 안해도 돼요."
"아니, 이야기하고 싶어. 그때는 아주 좋은
생각이다 싶었지. 그것이 성공했더라면 나는 지금도
정보국에 있었을 거야. 어쨌든 그 사람이 당시
헝가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일이
체코에서도 추진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그러니 그전에 소련 녀석들을 안심시켜서
방심하게 할 필요가 있었지. 그래서 우리는 일부러
세르뉴 첩보조직을 소련에 알려주었어 -- 이쪽 공작원
27명을 배반한 거야. 우리는 소련의 처지가 되어
생각하고, 그렇게 해두면 그들은 이제 프라하에서는
큰 소동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었던 거지. 그러나 소련은 우리의
속셈에 넘어가지 않았어. 녀석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처형해 버린 거야. 남자 26명과 여자 한 명을. 더구나
그로 말미암은 결과는 하나도 없었어 -- 그 작전
실시를 구두로 허가받은 사실을 입증하지 못한 채
내가 정보국에서 슬그머니 쫓겨나게 된 것 말고는."
"뭐 먹을 것 갖다드릴까요?" 조금 지나서 세알라가
말했다. "차가운 스튜가 냉장고에 있어요."
"아니,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아."
"몇 시까지 돌아가면 되나요?"
"대개는 밤중까지."
"부인은 어떤 분이에요, 안 가르쳐 줄 거예요?"
"아니,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왜, 아기가 없나요?"
"글쎄. 둘 다 아이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서로 상대방에게 '아이를 갖자'고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이에 관해서는 한 번도 의논해 본
적이 없어. 아이가 없는 것이 자연스럽게 생각되었을
뿐이야."
"그런데 지금은 후회하고 있나요?"
"아니, 별로 그렇지 않아. 아이는 귀찮을 뿐이야."
"리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보안부에서 내 신상조사를 해보고 위험인물이라고
하면 어쩔 셈이었어요?"
"그래도 당신을 침대로 끌어들였겠지 -- 그러나
아무 말도 안했을 거야, 알겠어?"
"잘 알았어요." 세알라는 웃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제 5 장
"아주 재미있었어." 엔진의 소음 속에서 듀크스가
말했다.
옆의 젊은이는 페달을 가리키며 입만 움직였다.
"들리지 않아요. 페달을 눌러요."
듀크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페달을 눌렀다.
코에 걸린 듯한 금속적인 소리가 헤드세트로 전해
왔다. "재미있었어."
프레드 밴 에이벌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연접전화(連接電話)로 엿듣고 싶었는데요.
그런데, 해리, 그가 어떻게 거처를 알아냈는지
물어보았습니까?"
"아직까지 인정해 줄 만한 구석이 있었어." 해리
듀크스가 말했다. "물어보지 않을 정도의 프로 의식이
아직 남아 있더군. 그런데 굉장히 화를 내던데."
버지니아의 시골 상공에서 헬리콥터가 에어
포켓(항공기의 양력이 감소되는 하강기류 구역으로,
난기류라고 함)에 들어가게 되자 조종사 뒤에 있는 두
사람은 무릎 사이에 손을 쑤셔넣고서 좌석을
붙들었다. 인터컴(헬멧에 달려 있는 통신장치)을
통해서 조종사의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있었던 건
미안합니다. 아직 거기 있습니까?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이 앤드류스 비행장입니다."
"방콕에서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해리?" 밴
에이벌리가 물었다.
"어떻게든 결말을 내고 2주 안이면 돌아올 수 있을
테지." 듀크스가 말했다. "잘하면 이번 일도 아무도
모르는 실패 중 하나가 될 거야."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그것이 아무 근거 없는
추측만은 아니라는 것을 밴 에이벌리는 알고 있었다.
듀크스는 옷차림에 무관심해서 칠칠치 못하게까지
보였다. 사무실에서는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마치 친구 집에서 라이터를 놓아둔 자리를 잊어버린
듯한 얼굴로 목적도 없이 서성거린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멍청한 듯하고 호인처럼 보이는 겉모습 뒤에는
모든 조건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남자가 숨어 있었다
-- 게다가 그는 그 조건을 언제나 정확히 알고 있다.
2주 안으로 돌아온다고 하면 듀크스는 반드시 2주
이내에 돌아온다.
헬리콥터가 앤드류스 공군기지의 중앙정보부
전용구역에 내렸다. 그려놓은 동그라미 옆에서 한
중사가 검은 리무진의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 있지?" 듀크스가 말했다. "중국 방문단에
함께 갈 학자를 찾아놓게.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포괄적 성격분석에 참가한 학자 중 누구에게든 알아낼
수 있을지 만나보도록 하게. 다이아몬드는 뭔가를
쥐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다면 포괄분석을
요구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게. 세르뉴 사건을 알고 있지?-- 그 녀석은 너무
서둘러서 실패를 저지른 전력이 있어."
"당신도 세르뉴 사건에 관계가 있었습니까?" 밴
에이벌리가 물었다.
"그래, 있었다고 해야겠지. 다이아몬드가 첩보망을
소련에 알려주면 녀석들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거든. 그 계획이 실패하자 모든
것이 내 착상이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어." 쓴
것이라도 깨문 말투로 바뀌었다.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수법이지 -- 성공하면 자기의 실적으로 하고,
실패하면 가공의 구두명령이라는 구실 뒤로 숨는
거야. 대대적인 조사를 해본 결과 그가 서류에 의한
명령이나 허가를 전혀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서류에 의한 보장 없이 그렇게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짓은 여간 어리석은 자가 아니고서는
하지 않는 일이지. 당시 그가 애인에게 쓸데없이
지껄인 혐의는 있었지만, 그건 불문에 붙여졌지. 그는
정보국에서 쫓겨났어 -- 애인에게 떠든 기밀유지에
관한 규칙위반 때문도 아니고, 작전 실패의 책임추궁
때문도 아니고, 단지 실패의 책임을 내게
덮어씌우려고 했었기 때문이야."
지금은 듀크스도 그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밴
에이벌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빅터에게 한 짓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빅터는 누굽니까?" 밴 에이벌리는 세르뉴 사건에
대해서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정보국의 젊은 요원들이 취침 전에 한잔 마시려고
모였을 때 가장 좋은 화제가 되곤 했었다.
"모두에게 잊혀진 이름이야. 빅터는 빅터
레이널드야. 체코와 프랑스의 혼혈이지. 1944년에
프랑스에서 우리를 위해서 일했고, 그 뒤 그와
다이아몬드와 내가 한동안 유럽에서 어정거렸지. 그와
다이아몬드는 굉장히 친했어. 우리들 모두 그랬지.
다이아몬드가 동유럽의 첩보조직을 담당하고 있을
때에 빅터를 채용했어. 빅터는 다이아몬드가 소련에
넘겨준 첩보조직의 책임자였거든."
"그 빅터 뭐라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탈출하려고 했지만, 결국 잡혀서 벽 앞에
세워진 채 벌집처럼 되고 말았지. 만의 하나 일하는
도중에 다이아몬드와 접촉할 일이 생기면 항상
조심해야 하네, 프레드. 그에게 친구 같은 것은 없네.
모든 사람을 이용하는 인간이야. 그는 빅터를
이용했어. 나를 이용하려고도 했지. 세르뉴 사건에서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아직도
있고, 그 때문에 나는 굉장한 손해를 보고 있어. 그는
사람을 조종하는 기술에 능한 인형극 전문가 같은
녀석이야."
조종사가 뒤를 돌아보고서 듀크스가 헬기에서 내릴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밖에 물어보고 싶은 것은 없나, 프레드?" 팔팔한
말투로 되돌아온 듀크스가 말했다.
"없습니다. 그 르윈터에 대한 건 지금으로서 소련은
전혀 내색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녀석들이
그에 대해 공개할 경우에는 누가 담당하게 되는
겁니까?"
"그 일에 관해서는 걱정할 것 없네.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이 그에 관해서 평범한
행방불명자 수색을 하고 있으며, 보스턴 경찰이
배경자료를 적당히 꾸미고 있으니까 -- 미성년자에
대한 추행죄나 호모 강요죄 중 이번에는 어느쪽을 쓸
것인지 아직 듣지 못했어. 소련에서 망명사건을
공표하면 시치미 딱 떼고 자기네 손으로 취급하도록
내버려두면 되네. 우리가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세상에서는 A J 르윈터를 성도착증 환자로 인정해
버리고는 골칫거리가 사라졌다고 좋아할 거야."
낡아빠진 캔버스천 가방을 들고 듀크스가 헬기에서
내렸다.
"그래, 프레드." 그가 입구에서 소리쳤다.
"포괄분석 팀의 누군가와 줄이 닿으면 예산문제를
잊지 않도록 해야 하네. 이번에는 2,500달러를 넘지
않도록 하게."
제 6 장
나무 그늘 밑에서도 숨이 막힐 듯한 더위였다.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포고딘은 끝을 잡아서 나비
넥타이를 풀어버리고는 셔츠의 목덜미를 헤쳤다. 길
건너 저쪽 멀리에는 옆으로 한 줄로 서서 밭일을 하고
있는 여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엎드렸다가는 허리를
펴고서, 마대자루에 뭔가를 계속 넣고 있었다 --
도시에서 자란 포고딘은 그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아래쪽 도로 끝에서는 고장이 난
KGB 전용차 옆에 수리공이 웅크리고 앉아 엔진에서
떼어낸 부품을 커피 깡통에 담긴 벤젠 속에 넣고서
씻고 있었다.
"수리공, 고장난 곳은 찾아냈나?" 포고딘이 위에서
소리쳤다.
"연료 펌프 같은데요." 얼굴도 들지 않고 수리공이
말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리겠나?"
수리공이 부품을 깡통 안에 던져넣고는 포고딘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재촉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리로 보내진 것만으로도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어이없는 말이로군." 포고딘은 영어로 말하고서
옆에 있는 남자 쪽을 보고는 같은 내용을 러시아 어로
말했다.
"적어도 KGB쯤이면 차의 정비는 해둘 만한데
말이야. 어쨌든 자이체프, 이제 곧 고쳐지겠지.
이야기나 계속하게."
스토얀 알렉산드르비치 자이체프는 호감이 가는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옆얼굴은 조각을 해놓은 듯한 모습이라는
표현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생김새가 부식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보기만 해도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기저기 눈에 거슬리는 점이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핏발 선 눈이 조그맣고,
커다란 콧구멍에서는 털이 삐죽 나와 있으며, 약간
색깔이 변한 이빨이 입 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이야기의 다음 장면을 떠올리고는
큰소리로 웃었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게 -- 후르체바가 스커트를
들어올리고 볼쇼이 무대에 올라가서 돼지 목따는
소리를 낸다고 말일세." -- 여기서 자이체프가 코를
쥐고 높은 가성(假聲)으로 흉내를 냈다 --
"여기저기에 젖꼭지가 나와 있잖아요! 나는 문화부
장관이에요. 이런 것은 너무 퇴폐적이에요. 의상을
다시 만들어요. 그렇잖으면 프레미야는
중지하겠습니다." 자이체프가 무릎을 꿇고 윗몸을
세우고는 두 팔을 벌렸다. "발레 단장은 훌륭하더군.
후르체바의 독단론에 굳어진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소리쳤어 -- '의상은 이 발레의 정신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의상을 바꾸라면 나는
그만두겠소.'"
"어느쪽이 이겼나? 후르체바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자이체프가 신난다는 듯이 다시
나무에 기댔다. "첫번째 공연하는 날 밤 가보니까
무대 위에서 우리의 새로운 자유주의가 뛰어다니고
있더군 -- 유방의 대홍수, 어디를 보아도 젖꼭지였어.
그리하여 우리 사회주의는 살아남은 거야."
두 사람은 정말 우습다는 듯이 큰소리로 웃었다.
"우리의 친구 자이체프여, 자네는 여전히
원기왕성하군." 포고딘이 말했다. "모든 일이 다
순조로운 모양이야, 그렇지?"
"나는 불평할 게 없어.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지.
지금은 나도 체스의 그랜드 마스터로서 안락하게
살아갈 정도의 봉급도 받고 있어. 매일 아침 10시에
일어나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는 네 시간 일을 하지.
일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제법 높은 수준의
학생을 몇 명 가르치고 있어. 그 중에 하나, 아주
유망한 녀석이 있지. 그리고는 1년에 서너 번
토너먼트 시합에 나가지 -- 물론 언제나 우승이야.
작년에는 또 책을 한 권 썼어 -- 이번에는 '공격적인
폰'이라는 제목이야. 사실 그 책에는 멋있는 부분이
몇 군데 있지. 내 저서가 프랑스에서 번역되어 인세를
받는 게 허락되었다네. 나는 그 번역작업을 지도하고,
거기서도 돈이 들어와. 그 외화로 내가 필요한 것은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네. 나를 만나러 왔을 때 그
아파트 방을 보았지?-- 서독제 스테레오, 이탈리아
양복, 프랑스의 신간서적, 게다가 생긴 건 이래도
원하는 대로 여자도 차지할 수 있지." 자이체프가
일행 쪽으로 고개를 젖혔다. 천의 구김살 같은 주름이
살결의 여기저기에 보이는 튼튼한 체격의 갈색
머리였다. 여자는 근처 냇가에 다리를 늘어뜨리고는
자수를 놓은 손수건으로 코를 풀고 있었다.
"자네가 일종의 돈 주앙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포고딘이 말했다. "나비처럼 이 여자에게서
저 여자로 옮겨다니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나?"
"오, 나의 순진하고 구식이고 고지식한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자이체프가 소리를 질렀다. "자네가
부르주아인 것을 나는 그전부터 알고 있었어.
만족하고 있느냐고? 배설을 즐기고 있느냐고 묻는 게
차라리 낫겠군. 폴란드의 고급 보드카 한 병으로
즐거울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야 하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그렇다면, 자네의 그 멋진 생활주변의 정치적
분위기는 어떤가?"
"흐흠!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언제나 그래. 가끔
우울해지면." -- 돌아보고는 여자에게까지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이체프가 낮은 목소리로
계속했다 -- "때로는 계집애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놓고는, 나치의 스테레오를 끄고서 러시아의 보드카로
바꾸어 소논문(小論文)을 쓰는 거야. 그건 자네에게도
보여주고 싶은데."
"그게 어디 있나, 푸시킨(1799~1837, 러시아의
시인)?"
"소련 국내에서 써진 훌륭한 문장이 다 모여 있는
곳이야. 내 책상 서랍 안이지. 물론 녀석들도 그
원고에 대한 것을 알고 있어. 그러나 서랍 안에 들어
있는 한은......"
두 사람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뒤편 냇가 쪽에서 아가씨의 겉모습으로는 상상도
못할 음악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자이체프, 달링,
내가 없어서 쓸쓸하지 않나요?" 그렇게 말하고 또
손수건으로 입가를 누르고는 재채기를 했다.
자이체프가 목소리를 죽여서, "요런 암소 같으니."
라고 중얼거리고는 활짝 웃는 얼굴을 하고서 손으로
키스하는 흉내를 냈다. 그는 포고딘 쪽으로 돌아섰다.
"여자가 옆에 있으면 제대로 이야기할 수가 없어 --
특히 고초열에 걸려 있는 여자가 있으면. 자네,
자네는 어떤가? 어째서 돌아왔나?"
"모스크바와 오브닌스크 중간인 배나무 그늘에
앉아서 자네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야."
"좀더 진지하게."
"진지하게 말해서, 자네에게 알려줄 수가 없다네."
"뭐라고? 내게 알려줄 수가 없다고!" 자이체프가
소리쳤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나? 사람을 속이지
않는 솔직함이 자네 무기라는 걸 모르나? 자네는 그
무기를 써서 사람의 경계심을 풀게 하고는 상대방을
정복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 경계심을 풀도록
해주게." 두 팔을 들어올려서 항복 자세를 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나?"
포고딘이 말을 꺼냈다.
그러나 자이체프가 가로막았다. "또 시작이군. 그
솔직성은 인민위원이 될 자격이 있어."
포고딘은 꽤 기분이 상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이체프, 자네와 이야기할 때는 다르단 말일세. 내
솔직성은 무기가 아니라, 우리 둘의 우정의 증거란
말이야." 그리고 그 말을 실제로 증명하기 위해서
포고딘은 지난 2주일 동안 한 순간도 그의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는 그 남자 -- A J 르윈터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라서, 그와 관계되는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신이 없어.
그러나 이 말만은 할 수 있네. 나는 그 미국인과
잠자리에서 일어난 뒤부터 시작해서 14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완벽하게
연습을 쌓은 보기드문 명배우라는 거야."
자이체프가 무슨 생각인지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이 잘만 되면 자네의 출세에 큰
도움이 되겠군, 그렇지?"
"그래,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어."
"그 사실이 자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나?"
"그런 것 같아." 두 사람은 큰소리로 웃었다.
"서랍 안에 넣어둘 수상록에 그것을 쓴다면 뭐라고
쓰지?"
"서랍용 원고로는 너무 복잡한 일이야.
오브닌스크에서 르윈터로부터 정보를 알아내고 있는
전문가들은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네. 그는 암기한
수식을 차례차례 뱉어내고 있는 거야. 그 수식이
탄도를 나타내는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더구나
그 탄도가 핵탄두와 미끼용 탄두라는 것도 분명해.
그러나 미국이 실제로 미사일을 날려 보내오지 않는
한, 그것이 MIRV가 정말로 지나올 탄도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그 정보가 진짜인지 아닌지 알아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거로군?"
"그렇다네." 포고딘이 말했다. "그 정보의 뒷받침이
될 만한 것이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을 확인하는 일뿐이야. 그런데 모스크바 녀석들은
그를 믿지 않아. 모든 것이 지나치게 간단해. 너무
잘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돈을 주고 얻어낸
정보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 그러나 그는 그냥 제발로
찾아온 거야."
"그럼, 자네는 어떤가, 그의 이야기를 진짜라고
생각하나?"
포고딘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자기의
정보가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어......그 점을 나는
믿어."
"우리의 솔직한 친구여, 여전히 자네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는군. 그래, 좋아, 그냥 넘어가기로
하지. 단, 그 미국인이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것은
가르쳐 주게."
"그는 자네가 함께 술을 마시고 싶어할 그런 남자는
아니지만, 아주 흥미 있는 인물임은 틀림없어.
모순투성이의 감정이 한데 뒤범벅되어 있어. 금방
굉장히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가도 곧바로 무척
자신없는 태도로 변해 버린다네. 방금 전에는 손톱을
줄칼로 다듬고 있었는데, 그 다음 순간에는 그 손톱을
이빨로 물어뜯는 거야. 모스크바에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 중 절반은 내게 생태학 강의를 했지......"
"무슨 강의?" 자이체프가 물었다.
"에콜로지(생태학) 말일세. 내게 환경보호에 대해
강의를 했다네. 강의를 하지 않을 때에는 우리 쪽에서
자기를 영웅으로 볼 것인가 배반자로 볼 것인가를 몇
번이나 물어보더군. 자기네 나라에 대해 말할 때에는
슬로건을 인용하고 말이야. 특정한 정치적 논점에
관한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여자와 놀아나는 데 익숙한 인간답게 스튜어디스가
지나갈 때마다 히히덕거리더군.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나서는 내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우리 쪽 아가씨를
하나 붙여주었는데, 나중에 그 아가씨 말로는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리고 그보다 훨씬
이상한 일이 있어. 그는 갈아입을 옷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네 -- 칫솔마저
가져오지 않았어. 그런데도 반년분의
항(抗)히스타민제와 비듬 없애는 샴푸는 가방 가득히
가져온 걸세. 그래, 그것과 이빨의 X선 사진 몇 장
하고 말이야. 그런데 우습게도 그가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내가 그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다네 -- 그런 것
중에 뭐가 들어 있을지 알 수가 없잖겠나."
자이체프는 일어나서 손발을 뻗었다. "재미있군.
아주 흥미로워. 언제고 한번 만나보고 싶네. 그럼,
그는 무엇을 피해 도망친 건가 -- 아니면, 무엇인가를
찾아서 도망친 건가?"
"분명한 것은 모르지만, 자기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후회하고 있는 사람 같은 인상을 받았다네."
"자네의 일이 그렇게 정신적인 것인 줄은 몰랐네."
자이체프가 말했다. 늘 그렇듯이 비꼬는 듯한 투로
들렸지만, 그로서는 칭찬을 한 셈인 것이다.
"이제 겨우 알게 된 모양이군." 포고딘이 말했다.
그도 일어났다. "사실은 자네와 나는 대체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거라네. 내 직업은 스파이는 아닐세
-- 교묘한 솜씨를 서로 경쟁하는 일이지. 나는 자네가
말하는 '공격적인 폰'일세. 나는 미국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알아내는 일을 하고 있어.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내려고 하지.
그래서 나는 우리가 무엇을 하려 한다고 그들이
생각하는지를 알아내려 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녀석들은, 자기들이 우리가 무엇을 할 생각인가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내려고 하지.
그것이 끝없이 계속되는 거야."
"그 소리를 듣고 보니 어떤 의미로는 체스(서양
장기)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드는군 -- 자네가 게임을
끝내는 방법이 대개는 내 경우보다는 고통스러운 점을
제외하고는 말일세." 자이체프가 밝혔다.
아래쪽 도로 위에서는 수리공이 기름투성이의
걸레로 손을 닦고 있었다. "고스포딘." 그가 왼쪽을
보고 말했다 -- 일반적으로 잘 쓰이는 '동지'라는 말
대신에 혁명 이전의 '시민'이라는 말을 썼다 --
"운전석에 앉아서 악셀을 밟아보세요. 이젠 엔진을
걸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포고딘과 자이체프가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와서
먼지를 털었다. 이윽고 엔진이 가벼운 진동음을
내면서 시동이 걸리고, 자이체프가 클랙슨을 울려서
아가씨를 불렀다. "별장에 우리를 내려주고, 잠깐
들러서 차라도 마시고 가지 않겠나?" 그가 물었다.
"아니, 그만두겠어." 포고딘이 말했다. "나는
3시까지 오브닌스크에 가기로 되어 있거든. 이미 꽤
늦어 버렸네."
"그럼, 모스크바로 돌아갈 때 들르게 -- 언제나
친구들이 우글거리고, 보드카는 얼마든지 있고,
여자는 입맛대로 있으니, 자네 같은 독신자에게는
안성맞춤이지. 누군가가 대마초를 갖다주겠다고도
했다네."
"형편을 보아 들르겠네." 포고딘이 말했다. "적어도
앞으로 10일은 걸릴 걸세.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모스크바와 오브닌스크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했어. 나는 전에도 그런 일을
보아왔다네 -- 대개의 경우에는 끊임없이 계속되지."
"자네는 빠져 버리고 자기들끼리 계속하라고 하고는
되도록 빨리 오게나."
"그런 짓을 할 여유가 없어. 내 장래를 좌우하는
중대한 사건이니까."
아가씨가 살이 통통하게 찐 허벅지를 가터 벨트
근처까지 들어내고는 둑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자이체프와 포고딘은 아주 재미있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2부 응수(應手)
제 7 장
[극 비]
포괄적 성격분석 327호
대상 : A J 르윈터
총괄 : 로버트 빌링스
고문 :
첨부자료 : 8월 12~13일 실시된 면담 내용
[극 비]
N 윌슨 부원과 하버드 대학 중국 연구부 연구보조원
모린 싱클레어의 대화 내용 요약. 8월 12일.
피면담자는 이혼여성, 33세. 약 8개월 전에 르윈터와
사귀었고, 그가 일본에서 열린 생태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하기 전까지 약 2개월간 동거.
[윌슨]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불구하고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싱클레어] 인사까지 하실 건 없어요. 어디에든
좀 앉으시지요. 그거 테이프레코더인가요? 그럼,
이쪽을 치우지요. 이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셨을
거예요. 언제나 이렇게 어질러져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정말이에요. 다만 늘 청소를 해주는
아주머니가 몸이 아파서 쉬고 있어요.
풍진이라는군요. 또 아기가 생긴 건 아니었으면 좋을
텐데.
[윌슨] 어질러졌다고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내
방에 비하면 잘 정돈된 편입니다.
[싱클레어] 어머, 당신은 예의바른 분이시군요.
중국인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예의는 허용이
가능한 유일한 위선이다.' 라는 거예요. 원문(原文)은
-- 당신, 중국어를 아시나요? 그렇겠군요.
모르시겠지요 -- 원문이 더욱 매력적이에요.
위선이라는 말이 다른 뜻으로도 --
[윌슨]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싱클레어 양, 지금부터 --
[싱클레어] 당신네들은 이번 일을 가지고 목이
달아난 황새처럼 뛰어다니는군요. 또 한 분에게도
말했지만,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관광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해요.
[윌슨] 또 한 사람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
[싱클레어] 그런 이야기를 어디선가 분명히
읽었어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은 전혀 모른다는
그런 것 말이에요. 하지만 실제로 경험해
보니까......
[윌슨] 어떤 남자였습니까, 싱클레어 양?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싱클레어] 얼른 생각이 안 나는군요. 그래요,
엊그제였어요. 엊그제 여길 왔었어요. 키가 작고 50이
채 못 된, 인상이 좋은 사람. 아니, 아주 인상이 좋은
분은 아니었어요. 여러 가지 질문을 하더니
어거스터스가 일본에서 탈출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리고는 어거스터스의 서류를 가지고
돌아갔어요.
[윌슨] 서류를 가지고 갔다고요 ?
[싱클레어] 네, 그래요. 한 상자 가득히. 맥스웰
하우스 커피의 빈 상자였어요.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는 당신과
같은 부에서 온 거죠, 그렇지 않은가요 ?
[윌슨]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싱클레어 양, 일이
겹쳐진 모양입니다. 틀림없이 그랬을 겁니다. 그가
명함 같은 것을 주고 가지는 않았습니까 ?
[싱클레어] 아뇨.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자기 이름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네요. 당신네들은 왜 어거스터스에 대해서
걱정하시죠? 당신 동료도 마찬가지고요. 어거스터스는
관광여행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지금 이
순간 그가 이 방에 들어온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거예요.
[윌슨] 어째서 그가 관광여행을 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생태학회는 1주일 전에 이미
끝났는데요.
[싱클레어] 어거스터스가 쪽지를 보냈어요.
보시고 싶다면 가지고 오겠어요. 당신은 아마 그
쪽지를 가지고 가고 싶겠군요 ?
(윌슨의 메모 -- 그 쪽지는 8월 3일자로 되어 있음.
한쪽 면은 도쿄 상공에서 찍은 사진. 필적은 르윈터의
것이 틀림없음을 G 무어러 부원이 확인. 내용은
다음과 같음.)
'사랑하는 모린, 논문은 회의에서 굉장한 관심을
끌었소 -- 지금까지는 구경하고 다닐 틈이 없었지만,
오늘 오후에는 '노'를 감상했소. 큰 손해 없이
비행기표를 교환할 수 있다면 며칠 묵으면서 관광을
할 작정이오. 직장에서 누가 나에 대해서 물어보거든
소련으로 도망쳤다고 대답해 두면 되겠군. 언제나
당신 생각을 하고 있소.
(메모 -- 나머지 부분은 시를 쓴 것이라고 여겨짐.)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능력으로 나 자신을 평가받고
싶다.
그러나 조심하라 --
(쪽지에는 A J라고 머리글자로 서명이 되어 있음.
메모 끝.)
[싱클레어] 그는 농담을 한 것에 불과해요. 내
말은 그의 망명 얘기를 뜻하는 거예요. 설마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니겠죠? 어머, 정말이라고
생각하고 있군요.
[윌슨] 이 시에 대해서 좀 가르쳐 주지
않겠습니까, 싱클레어 양 ?
[싱클레어] 예를 들어서 어떤 것을 말하나요 ?
[윌슨] 먼저, 왜 이 쪽지에다 썼을까요? 어쩐지
기묘하다고 할까, 이상한 느낌이 드는군요, 이렇게
엉뚱한 것에 써넣은 게.
[싱클레어] 솔직히 말해서 나도 놀랐어요. 그가
그 시를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요. 실은 어거스터스와 나는 8개월 전에
대학의 도서관 열람실에서 처음 만났어요. 하지만 그
일은 이미 아시지요? 그때 나는 '케니욘 레뷰' 잡지의
과월호를 읽고 있었어요. 문학잡지예요. 그 잡지에
중국 근대시의 예가 몇 편 실려 있었거든요 --
모택동에 관한 불쾌한 소문 같은 것도요. 번역은
엉망이었어요. 하지만 그 점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군요. 어쨌든 갑자기 어거스터스가
들여다보더군요 -- 그와 친해지면 알게 되겠지만,
그건 전혀 그답지 않은 방법이에요 -- 그가 내게
다가오면서 뭘 읽고 있느냐고 묻더군요. 나는 엣날
시를 다 읽고 그 근대시, 즉 이 쪽지에 써 있는 시를
읽고 있었지요. 작가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그런데
어거스터스가 그 잡지를 들고는 꼭 한 번 그 시를
읽었지요. 그는 웃었어요 -- 그가 웃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어쨌든 그게 전부예요. 그가 그
시를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그렇게 쪽지에 써보내다니 정말로 자상한 사람이에요.
[윌슨] 그가 그날 밤 도서관에서 베껴두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아니면 나중에 --
[싱클레어] 만일 그렇다고 하면 지금까지 그것을
비밀로 할 수는 도저히 없었을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는 갑자기 그 시가 생각났거나 -- A J는 유난히
기억력이 좋은걸요 -- 아니면, 도쿄에서 우연히 그
시가 실린 과월호가 눈에 띄어, 사람이 꽃을
선물하듯이 그 쪽지에 써보냈을 거예요.
[윌슨] 그럴 것도 같군요. 그런데, 싱클레어 양,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그가 고민하거나, 슬퍼하거나,
무엇에 화를 내는 것 같은 눈치는 없었습니까?
사사로운 일까지 너무 캐묻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만, 중요한 일이라서요.
[싱클레어] 그런 적은 전혀 없었어요.
어거스터스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아주
즐거워했는걸요. 우리들이, 음, 뭐라고 할까요. 이
아파트에서 동거하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해도 좋아요. 어거스터스에게 있어서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9월에
결혼하기로 했어요. 오늘부터 꼭 3주일 뒤에요.
[윌슨] 그럼,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싱클레어] 잘 되어가고 있을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자세한 것은 몰라요. 어거스터스는 일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안하니까요. 하지만 고민하거나
비관한 적이 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는 고형폐기물 처리 장치에 관한 일로 아주
신이 나 있었죠. 그 장치에 관한 거 아시나요? 정말로
혁명적인 장치예요. 그는 얼마 전에 하원인가
상원인가 하는 의원과 만나고는 신이 나서
돌아왔어요. 그 의원이 어거스터스의 제안을 기초로
해서 고형폐기물 처리공단을 연방정부에 설치케 하는
법안을 제출해 주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되면
어거스터스에게는 대단한 업적이 되는 거지요. 그런
법안에 대해서 혹시 들어본 적 없으세요 ?
[윌슨]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런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서요, 싱클레어 양.
그러니까 르윈터 씨에게 고민거리는 하나도 없었다는
거로군요?
[싱클레어]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는 괴로움 --
즉, 돈 말이에요 -- 그것 말고는 없었어요.
어거스터스는 이혼수당 지불이 좀 늦어지고
있었거든요. 아주 많이 늦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고민을 할 만큼 늦어졌어요. 그의 아내는, 그러니까
전처는, 이렇게 말해서는 좀 뭣하지만 지독한
여자예요. 어거스터스는 매주 일요일이면 아이들을
만나러 갔는데, 아이들이 그에게 대들도록 어머니가
뒤에서 부추기는 거예요. 그녀가 아이들에게 어떤
거짓말이나 지어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요. 하지만 그것 보다도 어거스터스는 그녀가, 즉
전처가 이혼수당을 들고 나와 소란을 피우지나 않을까
걱정했답니다. 그런 이혼수당 같은 것은 필요도 없는
여자인데도 말예요.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매월 많은
액수의 생활비를 받고 있거든요.
[윌슨] 그는 어째서 이혼수당의 지불이 늦어지고
있나요? 급료도 꽤 많이 받고 있고, 지출도 별로 많지
않을 텐데요?
[싱클레어] 그것이 돈이라는 거예요, 윌슨 씨.
어거스터스와 돈. 그의 호주머니에 구멍이 나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유야 아무도 모르지요. 왜
그런지 몰라도 그는 돈을 넉넉하게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하긴 우리들 모두가 다 그렇긴
하지만. 내 생각엔 그는 돈 관리가 서툰 모양이에요.
지금도 여기저기에 꾼돈을 갚고 있어요 -- 차나
케이프에 있는 조그만 별장 때문에 진 빚과
이혼수당으로 봉급에서 상당한 액수를 떼고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일본으로 떠나기 1주일쯤 전에
어거스터스는 창피를 무릅쓰고 어느 금융회사에
갔었지요. 빚을 한데 뭉뚱그려 주는 회사 말이에요.
아시죠?-- 보스턴에 있는 뭐라나 하는 금융회사인데.
[윌슨] 부채정리 금융회사를 말하는 겁니까 ?
[싱클레어] 그래요, 그거예요. 중국인들이 돈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윌슨 씨? 돈은
어디로든 데려다 주는 날개를 사람에게 준다 -- 다만
천국에는 못 간다. 그런데 중국어의 천국이라는
것은......
D 매시스 부원과 루퍼트 브룩 르윈터의 대화 요약.
8월 12일. 피면담자는 45세. 노튼 제약회사의
연구원이며, 르윈터의 하나뿐인 형이다.
[르윈터] 대단히 미안한 말씀이오만, 성함을
잊어버렸소.
[매시스] 매시스입니다.
[르윈터] 그래, 매시스였지. 전화로 당신이
신분을 밝혔을 때, 사람들이 없는 곳이 좋겠다고
생각했었소. 여길 찾는 데 힘들지 않았소 ?
[매시스] 당신이 잘 가르쳐 주셔서요.
[르윈터] 제리에 관한 일이로군요, 그렇죠? 그
MIT 녀석들 덕분에 재미없는 일이 생길 줄 알았소.
그에게 입이 닳도록 말했었지요. 제리, 그
반미(反美)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녀석들과는 사귀지
마 하고 말이오. 제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녀석들과 사귀고 있는지 알게 되면
당신들에게 미움을 사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요. 내 생각이 틀림없지요, 그렇죠? 제리에게
귀찮은 일이 생겼군, 그렇소 ?
[매시스] 괜찮으시다면, 르윈터 씨, 순서대로
말씀을 해주시지요. 동생의 생활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어린 시절에는
행복했었는지 하는 것들 말입니다.
[르윈터] 솔직히 말해서, 매시스 씨, 제리는 --
[매시스] 말씀 도중에 실례입니다만, 르윈터 씨,
다른 사람은 모두들 그를 머리글자로 부르는 것
같은데, 어째서 당신은 그를 제리라고 부릅니까 ?
[르윈터] 제리는 가족들 사이에서 부르는
이름이지요. 고등학교에서는 그를 어거스터스라고
불렀고요. 대학에 들어갔을 무렵에는 A 제롬이었지만,
상급생이 되었을 때 머리글자로 바꾸었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제리라고 부르고 있답니다. 그냥
단지 제리라고만. 그는 별로 마음에 안 들어했지만,
어릴 때의 버릇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안 그렇소 ?
[매시스] 그렇겠군요. 당신은 그가 어렸을 때에
대해 말씀하시려다 말았습니다만.
[르윈터] 그래, 어렸을 때 이야기였지. 솔직히
말해서, 매시스 씨, 제리는 아주 응석받이로 자랐는데
그것이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고는 나는 생각지 않소.
그는 무엇이나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상태에서
자랐소. 그가 장난감 보트나 비행기나 기차를 보았다
하면 그 다음날엔 벌써 그걸 갖고 놀았지요. 그러니까
욕구불만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다는 의미로는
행복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보다 넓은 의미로
행복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말할 수가
없소. 즉, 모든 욕구가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는 무슨 일에나 별로 고마움을 모르게
되어버린 거지요. 내 말 아시겠소?"
[매시스] 예, 알겠습니다. 계속해 주십시오.
[르윈터] 재미있는 것은 우리 부모님이 --
아버지는 일종의 발명가였는데 -- 내게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는 거요. 제리와 나의 두 경우는
어린이를 기르는 면에서 전형적인 사례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답니다. 물론 나이로는 내가 위고
내가 태어났을 때에는 집안 형편이 아주 어려웠어요.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생활에 있어서의 욕구불만은
당연한 일로 참아내는 것을 배웠지요. 제리가
태어나기 직전에 아버지에게도 행운이 찾아와서, 별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부자가 되었다오 -- 가정용
쓰레기 분쇄기를 발명한 거요. 페달을 밟아서 빈 깡통
이외의 쓰레기를 분쇄하는 장치지요. 들어본 적
있소?-- 르윈터 쓰레기 처리기인데. 시어스 로버크
카탈로그에 실려서 통신판매되던 물건이라오. 지금도
농가 같은 곳에서 가끔 볼 수 있지요. 어쨌든 우리
부모님은 제리에게만은 전혀 불편 같은 것을 모르고
자라게 하겠다고 결심한 겁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말했죠. '조금도 불편함이 없게 해주겠다.' 내가
보기에는 부모님이 여러 가지 면에서 오히려 불편함을
준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 나중에 역경이나
욕구불만에 대응하는 마음가짐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는 뜻에서 말이지요.
[매시스] 아주 흥미 있는 이야기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그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은 어린
시절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로군요 ?
[르윈터] 오해는 마시오. 제리는 아주 착실하고
머리좋은 아이였소. 놀라운 기억력도 가지고
있었지요. 아주 어렸을 때, 얼마나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부모님이 의사에게
보였을 정도니까. 언젠가 아버지가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제리가 그 지갑에 들어 있던 사람들의 명함에 있는
전화번호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기억해 낸
일이 생각나는군요. 또 어떤 때는 책을 받아온
다음날, 그 4학년 책의 문장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암송한 적도 있었어요. 놀라운 재능이었지.
[매시스] 어땠습니까 ?
[르윈터] 뭐가 말이오, 매시스 씨 ?
[매시스]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의사가
인정했습니까 ?
[르윈터] 가지고 있기도 했고 -- 가지고 있지
않기도 했지요. 묘하게 들릴 줄 압니다만, 어찌된
셈인지 그는 의사와 만났을 때는 기억력의 뭐라고
할까, 스위치를 꺼버렸다가 집안의 누군가를 놀라게
하고 싶을 때에는 다시 스위치를 넣곤 했어요. 나는
가지고 있었다고 믿고 있소 -- 그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오.
[매시스] 불행한 일 ?
[르윈터] 그래요. 그가 여덟 살쯤 되었을 때일
거요. 여덟이나 아홉이었죠. 차고의 지붕에서
떨어져서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겁니다. 이틀
가까이 의식을 잃었었죠 -- 사경을 헤맸던 겁니다.
물론 회복은 되었죠. 그러나 그 뒤로는 그 기억력
게임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그 뛰어난 기억력을 잃고 말았다고
나는 생각해요. 확실히 그렇게 믿습니다. 그 기억력이
그대로 있었더라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는지 상상할
수도 없어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까? 본래부터 아주
머리가 좋은 아이였지요. 거기에 남다른 기억력까지
가지고 있었더라면......
[매시스] 그의 부인, 헤어진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
[르윈터] 그 여자는 훌륭한 어머니에 훌륭한
아내였고, 개성적인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으며,
제리의 출세에 관해서는 대단히 야심적이었지요. 그
여자는 제리에게 여러 가지 것들을 요구했어요, 우리
부모님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을. 제리가 다소라도
세상에서 인정받는 인간이 되었다면, 그것은 수잔이
그 녀석의 엉덩이를 두들겨 준 덕분이라오.
[매시스] 아무래도 그의 생각은 당신과는 다른 것
같군요. 그는 왜 이혼했습니까 ?
[르윈터] 나도 모르죠. 제리는 그녀가 훌륭한
아내라는 것을 몰랐던 거요.
[매시스] 그는 재혼할 모양인데, 그 여자를
아십니까 ?
[르윈터] 그건 처음 듣는 말이오. 그 여자와 꽤
친하게 지내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결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 그랬었군, 제리는 재혼할
생각이었군. 재미있는데. 그 여자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군요.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고 있어요. 그가
고안한 고형폐기물처리장치를 어느 의원에게 가져가
보라고 그녀가 권한 모양이더군요. 규모를 키운
르윈터 쓰레기 처리기에 불과하다고 늘 내가
말했었는데.
[매시스] 아까 말씀 중에 나온 MIT라는 그 그룹에
대한 것 좀 말씀해 주시지요.
[르윈터] 별로 이야기할 만한 것이 없어요. 나는
한두 사람 만난 적이 있지만 -- 시끄러운
녀석들인데다가 무슨 일이나 최악의 상태에 있는 듯이
해석하는 것이 전문인 친구들이더군요. 내가 말하는
뜻을 아실 줄 압니다만. 나는 제리에게 말해
두었습니다. 그가 몸담고 있는 직업에 있는 사람들은
-- 잘 들어두시오, 그가 하는 일이 아주 비밀이라는
것 말고는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 어쨌든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그런 녀석들과 사귀면 안된다고
말이오.
[매시스] 그런데 그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게로군요? 제 짐작입니다만.
[르윈터] 제리는 그전부터 내가 하는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니까.
[매시스] 그는 소련을 어떻게 보고 있었습니까 ?
[르윈터] 점점 더 걱정이 되는군요. 왜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매시스] 뭐 특별한 뜻이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르윈터 씨. 질문 항목에 올라 있기 때문에 물어보는
것뿐입니다.
[르윈터] 제리는 그 나름대로 아주 이상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 생각에 러시아 인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입디다.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소. 제리는 동조자는 아니오. 전혀
달라요. 그가 소련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면, 아마도
자기의 폐기물처리계획에 관심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그저 막연한 생각 때문일 거요. 제리는 그 계획에
대해서 꽤나 초조해 하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여기저기에 설명하고 다녀도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모양이오. 그 폐기물처리계획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그에게는 아주 중대한 문제였던
거지요.
R 그로턴 부원과 수잔 비드굿 르윈터의 대화내용
전문(全文). 8월 13일. 피면담자 37세, 르윈터와
이혼한 주부.
[르윈터] 나는 보드킨 씨라는 분이 올 줄
알았어요. 당신이 온다는 말은 듣지 못했거든요.
[그로턴] 보드킨의 부인이 어젯밤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람 대신 가라는 명령을
받았지요.
[르윈터] 아들, 딸? 아들인가요, 딸인가요 ?
[그로턴] 모르겠습니다. 아무 말도 못
들었습니다.
[르윈터] 요즘 세상에서는 아들이 훨씬 다루기
쉬워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그로턴 씨? 아기가
있으신가요 ?
[그로턴] 그래요, 예, 있습니다.
[르윈터] 아들인가요, 딸인가요 ?
[그로턴] 예, 하나씩 있습니다. 그런데, 르윈터
부인 --
[르윈터] 말하는 중에 가로막아 미안하지만,
그로턴 씨, 나는 '미스'라고 하고 있어요, 이혼한
뒤로는. 미스 르윈터.
[그로턴] 그래요. 물론 그래야겠지요. 그런데,
르윈터 양, 괜찮으시다면 전 남편에 관해서 두세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르윈터] 그것은 이혼수당과 관계있는 일인가요?
지난 주에 법원에 신청했습니다만, 어거스트는
부양료를 3개월이나 주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법원에서는 담당직원을 내게 보내겠다고 하더군요.
[그로턴] 실은 나는 --
[르윈터] 그렇다고 궁지에 몰려 있다는 것은
아니에요. 내가 말하는 것은 돈에 대한 거예요.
다행히 내게는 다급할 때 쓸 수 있는 별도의 수입이
다소 있거든요. 하지만 문제는 도의적인 점이에요.
조정서에는 그가 매주 125달러를 주기로 분명히 써
있어요. 결코 부당한 액수는 아니지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요즘 세상에서 집을 하나 가지고
아이들을 둘 기를 경우 매주 125달러는 결코 넉넉지
않답니다, 그렇지요 ?
[그로턴] 우리는 법원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르윈터 양. 보드킨이 당신과 만날 것을 약속해 놓았을
때 우리 쪽에서 그 점은 잘 설명해 놓은 것으로만
알았죠. 이것은 기밀취급자격에 관한 정기적인
신상조사입니다.
[르윈터] 하지만 그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났어요. 어거스트가 처음 이리로 왔을 때에 그들이
조사해 간걸요.
[그로턴] 그건 알고 있습니다, 르윈터 양. 그
조사는 시일이 너무 지나서 다시 새로 하고 있는
겁니다. 안심하십시오, 지극히 일상적인 절차 같은
것이니까요. 그래서 두세 가지 물어보려고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
[르윈터] 그러니까, 당신은 이혼수당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군요 ?
[그로턴] 그렇습니다.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르윈터] 알았어요.
[그로턴] 하지만 그가 부양료 지불을 미루고
있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있습니다. 당신은 아까
3개월이나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법원에 신고하는
것을 어째서 지금까지 늦추었습니까, 르윈터 양 ?
[르윈터] 어거스트가 늦게 줄 때마다 법원에
찾아가면 나는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게 될 거예요.
당신은 어거스트를 몰라요. 그는 건망증이 아주 심한
남자예요. 툭하면 생일, 결혼기념일, 저녁 먹을
약속이며 청구서 같은 것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
부양료 지불도 그렇고. 그런 사소한 일에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로턴] 당신은 그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나요?
즉, 부양료 지불에 대해서 말입니다.
[르윈터] 그야 몇 번이나 했죠,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등기우편, 전보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실제로 찾아가는 것 말고는 모든 수단을 다했어요.
아무래도 찾아갈 마음은 안 생기더군요. 그 여자가
거기서 살고 있는 줄 아는 이상. 그렇다고 내가 그
여자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아니에요. 어거스트는
자기 나름대로의 생활을 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여자하고라니. 그런 여자의 어떤 점이
좋은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로턴] 그럼, 만나본 적이 있었군요 ?
[르윈터] 꼭 한 번, 이혼하기 전에 파티에서지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그래요,
그녀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녀와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은 모두들 같은 말을
해요. 즉, 마구 떠들어대는 여자라고요.
[그로턴] 반갑잖은 질문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르윈터 양, 무슨 이유로 이혼하게 되었습니까? 어떤
점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
[르윈터] 사정이 아주 복잡해요. 당신, 시간
있으세요? 그러세요? 그렇다면 그 긴 이야기를 요점만
추려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번
해보겠어요. 파국의 원인이라면 어거스트가 평소에
언제나 자기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생각하는
점이라고 여겨져요.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 점은 오해하지 마세요. 다만 그는
가공의 사실을 기초로 해서 자기에 관한 환상을
만들어낸 거예요. 좋은 예가 그 폐기물 처리
장치예요. 참신한 계획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치 자신을 이
세계에 증기 엔진을 갖다주려는 레오나르드 다
빈치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느낌이에요. 다 빈치가
증기 엔진을 발명했는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어거스트는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되기를
열망했어요. 언제나 자기를 중요한 인물로 만들어 줄
일을 찾아다녔죠. 그 중에는 반밖에 사실이 아닌
것이나, 여러 가지 과장도 들어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가 꾸며놓은 사실에 하나라도 구멍을 내어
김을 빼버리면 그는 실망하고 낙담해 버리는 거예요.
옆에서 보기에도 애처로울 정도로요.
[그로턴] 그가 정치문제에 관계한 적은 없습니까
?
[르윈터] 한 번도 없어요. 어거스트가
정치문제에? 그런 건 그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어요.
그는 현실적인 일밖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 일,
자신이 생각해 낸 계획에 관한 일. 정치 같은 건
거들떠 보지도 않았어요.
[그로턴] 그는 일에 만족했었나요 ?
[르윈터] 내가 보기에는, 예, 만족했어요.
MIT에서의 그의 상사가 누군진 모르지만, 그 상사에게
좋게 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자기의
새로운 제안을 언제나 호의적으로 들어준다고
말했어요.
[그로턴] 그가 소련에 관해서 무슨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
[르윈터] 소련? 천만에요,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인지조차도 모르는 것은 아닌지.
T 브루멘탈 부원과 도널드 피시킨 의사의 대화
요약. 8월 13일. 피면담자는 르윈터가 치료받던
치과의사.
[피시킨] 르윈터라고요! 그 거짓말쟁이 소란꾼.
어째서 르윈터에 관한 것을 내게 묻는 거요? 사기나
횡령이라도 하려다가 걸려들었나? 정말 그 가짜배기를
내 손으로 잡아다 주고 싶소. 말 그대로 가짜고 미친
놈이오. 머리의 나사가 헐거워진 미친 놈, 넋나간 놈,
사람이 아니에요. 그 녀석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히
맞춘 미치광이 구속복(拘束服)이오. 잘 들어요. 그
미친 놈에게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오. 나는
4년 동안 그를 치료해 주었소, 4년 동안이나. 그래,
4년이나 여기 와서는 좋은 치과의사를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고 떠들어댔지. 그래요. 그런데 어느 날
유유히 들어와서는 느닷없이 나를 내 눈앞에서
매도하더니 자기의 X선 사진을 가지고 가버린 게요.
그래요, 그것도 많은 환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브루멘탈] 그가 무슨 --
[피시킨] 빌어먹을 놈, 그 녀석은 미친 놈이오.
거짓말이 아니오. 자기의 X선 사진을 가지고 두말없이
사라져 버렸다니까. 빌어먹을 녀석, 125달러의 돈도
다 치르지 않고. 4년. 그래요,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분명히 말해 두겠소. 놈은 미쳤소.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완전히 미쳐버린 거요.
제 8 장
"편집증(編輯症) 같은 느낌이로군요." 하품을
하면서 캐플란이 말했다.
"르윈터 말이오?" 건조한 얇은 입술 끝이 약간
휘어지면서 빌링스가 물었다.
"아니, 그 뭐라나 하는 치과의사 말입니다."
"우리는 그 뭐라나 하는 치과의사의 성격을
분석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오." 우거지상을
하고서 빌링스가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그가 두
손으로 대모갑(玳瑁甲)으로 만든 테안경을 벗고 --
그전에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벗어야 테가 오래
간다고 그에게 일러주었다 -- 면담보고서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이번의 포괄적 성격분석의
대상이 정신이상자일 가능성은 고려해 볼 필요가
없다고 보아도 좋은 거요 ?"
캐플란은 모두들 불안한 듯이 침착성을 잃기 시작할
때까지 침묵을 끌고 가다가 겨우 대답했다.
의사로서의 경험에서 몸에 익힌 테크닉이었다 --
절대로 서둘러 대답해서는 안된다. 신중한 척해 가며
말을 고르고, 침묵을 통해서 자기의 의견에 거의
찬성하는 데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여라.
"정신의학에서는 정신이상이라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가 침묵을 깨뜨리고는 단정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정신이상이라는 것은 본래
법률용어이며,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없는 것을
어정쩡하게 표현하는 거지요. 지금은 법률상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선악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느 정도 정신의학에 관련 있는 용어를
쓰는 게 좋겠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뜻이 맞지 않았다. 빌링스는
자기가 하는 일의 분야는 물론이고 온갖 다른 분야에
있어서도 규율과 복종이 매사를 성공시키는 기본이며,
서열과 서류가 절대적인 권위라고 믿고 있는,
세심하고 꼼꼼한 정보업무의 전문가이다. 반면에
캐플란은 규율은 평범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직관에 의한 번득임을 존중하는 아주 우수한 젊은
정신의학자다. "무슨 소리요, 유태인이 아닌
정신의학자는 없단 말이오?" 이번의 포괄적
성격분석에 참가한 사람들의 명단을 부하에게서
받아든 빌링스가 군소리를 했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단정치 못해요."
빌링스는 '단정치 못해' 라는 말을 정신적인 의미로
썼지만, 캐플란을 한번 보기만 하고도 같은 말이
외모에도 적용이 된다고 확신했다. 캐플란은 코가
크고, 말을 할 때면 튀어나온 목의 갑상연골이 수면에
뜬 부표처럼 아래위로 오르내리고, 장발은 바람에
흩날리기라도 한 것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400달러나
하는 고급 양복의 조끼 단추가 전부 풀어져 있어서
캐플란이 타이 시티에서 산 89센트짜리 물방울 무늬
넥타이가 다 들어났다.
"좋소, '정신이상'이라는 말은 쓰지 않기로
합시다." 빌링스가 말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자료가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것은 알고 있어요 --
면담기록 중 중요한 것이 아직 도착되지 않아서
말이오 -- 그러나 어쨌든 이 상태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어때요, 예비평가를 시도해
보기로 하는 것이......"
"다소, 뭐랄까, 항문기적(肛門期的) 충동 같은
느낌이 드는군." 포괄분석에 가담한 물리학자인 에릭
신들러가 말했다. 니코틴으로 검어진 이빨이 튀어나와
다람쥐 같은 느낌을 주는 작은 체구의 남자로서,
안경을 쓴 것도 아니고, 또 필요도 없는 듯한 안경
너머로 보는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서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항문기적 충동'이라는 말을
하기까지 그가 입을 연 것은, 느닷없이 '그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는 마음과, 그 본질을 움직이는 데
있는 몸의 데카르트학파적 견해에 의한 특질'에
관해서 한바탕 떠벌였을 때뿐이었다. 있지도 않은
안경 너머로 쳐다보듯이 바라보면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명심하시오, 당신. 사람의 발끝을
밟아주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소만 -- 당신은 몸의
어느 부분에 대해서 언급한 것에 신경을 쓰는 성미는
아니겠지요?-- 어쨌든 나는 오래 전에 누군가를
항문기적 충동성향이라고 단정해 버려도 빗나가지
않은, 적어도 아주 빗나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소, 그렇게 생각지 않소?"
"옳은 말입니다." 캐플란이 동의했다. 그는 툭하면
생각이 옆길로 빠져버리고 전문가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것을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신들러를
좋아했다. 캐플란은 신들러 같은 고명한 학자가 이런
작업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크게 놀랐지만,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학자들 간에
말하는, 이른바 사례금에 매력을 느껴서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항문기적 충동은 정신의학에 맡겨진 책임이지요."
캐플란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것은 긴장에 의한 신경질적인 상태를 품위 있게
표현한 말에 지나지 않으며,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지요." 그는
똑바로 빌링스 쪽을 바라보았다. "들어보십시오." --
산더미처럼 쌓인 면담보고서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
"아직은 너무 일러요. 한없이 공허한 일반론적인
검토를 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시작해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빌링스가 말했다.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 침묵이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한 순간에 캐플란이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당신들은 내게 돈을 주는 거겠지요.
자, 그럼,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하기로 합시다.
사람들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달려가는 데에는 대개 그
이유가 세 가지가 있지요. 첫째로." -- 캐플란이
나서서 열심히 말하기 시작했다. 갑상연골이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말이 8분음표처럼 튀어나왔다 -- "그들은
빚, 이혼소동, 여자문제, 직업상의 문제, 발각 직전의
나쁜 짓, 참기 어려운 압력, 가혹한 운명, 말하자면
인생의 일반적인 일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망명합니다.
자기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생각이
없고, 그런 건 어찌되든 상관없습니다. 하여튼
도망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는 거지요. 그래서
말인데, 르윈터를 이 그룹에 넣어도 무방하다고
여겨지는 사실이 몇 가지 있어요. 그
폐기물처리계획에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은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현재의 일에
만족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게다가
빚에 대한 문제도 있지요. 또한, 지금까지 해온 면담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여러 가지 의미로 헤어진
아내의 분신과 같은 여자와 결혼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져 있어요. 어쩌면 그 사실을 깨닫게 되어
더 늦기 전에 도망친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골칫거리를 피해 달아나 버린 사나이의
전형적인 한 예라는 말이로군?" 빌링스가 요약했다.
그 개인으로서는 대단히 편리한 결론이다.
"그런 말은 아닙니다. 그가 그런 부류에 속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몇 가지 있다고 했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가 다른 두 가지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두 가지 부류라는 것은 뭐요?"
당장에라도 입술에서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모습으로
처지게 물고 있는 담배를 빨면서 신들러가 물었다.
"첫번째 그룹은 도망자입니다, 알겠습니까? 두 번째
그룹은 정신분열증 환자고요. 전문적인 말로 하자면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개인적인 환상이
특징인 정신기능장해가, 때에 따라서는 그 환상 중
하나로 인해 자신을 세상을 개조하는 상징이라고 믿게
되는 상태로 나타날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도
정신분열증 환자였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어쨌든
과격분자들 중에는 그런 부류가 많아요. 그들은
자신을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생각하고서 자신을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어낼 수 있는 하나의 행동 --
암살, 자살, 자기희생, 망명 -- 을 환상하게 되지요.
그래서 그의 형이 말했듯이 그가 과격분자와 사귀고
있었다고 하면, 그는 망명을 자기의 인생이나 사상을
각광 속으로 밀어올리는 극적이고도 상징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캐플란은 문득 자기의 열기 어린 어조를 깨달았다.
그 힘을 빼버리려는 듯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하품을 깨물었다. "그럼, 다음이 세 번째 부류로서,
적어도 내게는 가장 흥미 있는 그룹입니다. 이 그룹에
속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망명이란 말하자면 일확천금,
혹은 그와 유사한 정신적인 소망을 실현하는, 즉
일시에 유명한 존재가 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르윈터가 이 그룹에 속했을 가능성을 꽤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근거가 있어요. 아직은
조금밖에 모르고 있지만, 그의 인생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유명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에 앉게 될 방법을 기를
쓰고 찾아헤매고 있었던 것 같아요. 몇 년마다 이름을
부르는 방법을 바꾸어오다가 결국 머리글자만을
사용하기로 낙착이 되었는데, 이름을 어떤 식으로
부르느냐 하는 것은 유명인이 부리는 멋 중
하나이지요. 인류가 쓰레기 더미로 꼼짝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거창한 구상과 그 실현에
열중한 점. 아내로부터 도망쳐서 다른 여자와
생활하고 있는 점 등도 그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의 전처 -- 그를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고
있는 여자 -- 가 말한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잠깐
기다려요, 이겁니다. '어거스트는 평소 언제나 자기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크게 생각해 왔다.' 또 이런 말도
했군요. '가공의 사실을 기초로 해서 자기에 관한
환상을 만들어냈다.' 물론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중요성을 과대시하는 경향이 있지요." 또다시
캐플란이 의식적으로 빌링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그러나 그 상태가 르윈터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심했었나 하는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령
상당히 심했다고 하고 -- 지금까지 알게 된 모든 것이
이 가정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 이 사회에 있어서의
그의 업적이 그런 자기과대시와는 상반되는 것이라면
-- 여기서 또 내 나름대로의 표현을 쓰자면-- 일거에
지명도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서 그가
저쪽으로 도망쳤다, 즉 망명했을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그는 그쪽에 도착하자마자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중요 인물로 평가받을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갔을 테죠. 그래서 르윈터에 대한 그런
견해가 타당한지의 여부, 그 귀중한 정보가 그 자신의
육체인가, 아니면 그 폐기물처리계획인가, 아니면
세라믹 제(製)인 노즈 콘에 관한 비밀정보인가는
지금부터 판정해야만 할 사항이지요."
"굉장히 뒤죽박죽이로군, 그렇잖소? 당신의 의견에
따라서-- " 물리학자인 신들러가 말머리를 꺼내놓고는
다 피운 담배꽁초로 새 담배에 불을 붙이는 동안
사이를 두었다 -- "내가 받은 인상이라고 할까,
선입관이라고 할까, 모든 것이, 즉 면담기록 말이오.
전체가 <나쇼몬>(羅生門) -- 일본의 <나쇼몬>의
줄거리를 알고 있소?-- 아니면 다렐의 <알렉산드리아
카르테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겁니다. 대단히 멋진 책이지요, <알렉산드리아
카르테드> 말이오. 여러 종류의 잡다한 인간의 무리가
같은 사건이나 같은 인물을 보고, 모두들 거기서 다른
진실을 찾아내지요. 르윈터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혹은 시각이라고 해야 할는지도 모르지만, 각각 다른
인간으로 비치고 있어요. 즉, 피시킨이 말하는
르윈터는 르윈터의 형이 말하고 있는 인간과는 전혀
다르며, 그 형의 시각과 아내의 시각이 또 다르다는
점입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 음, 뭐라고 할까,
휴지더미로부터 진정한 르윈터를 찾아내라는 건지.
그래! 휴지더미라는 것이 아주 적절한 표현이로군.
나는 그걸 알고 싶소. 어떤 방법으로 진정한 르윈터를
찾아낼 것인가 하는 것 말이오."
"모순이나, 연기, 위장, 자만 등을 파헤쳐서
르윈터의 본질, 진정한 인간에 가닿는 겁니다."
빌링스가 말했다. "그것이 포괄적 성격분석이지요 --
바깥쪽 껍질을 벗기고, 그가 조국에 해를 끼칠 마음을
가질 만한 인간인지, 가령 조국에 해를 끼칠 마음이
생겼을 경우, 그것을 실현할 만한 방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학식이나 경험에 기초를 둔 추측을
하는 거지요."
"그거 아주 어려운 주문이로군." 그룹의 네 번째
사람이 말했다.휴스턴 시(市)의 전직 형사과장으로서
포괄분석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프레드
팬스워스였다.
"이의가 없으면 조금이라도 검토를 해나가기로
합시다." 시계를 보고서 빌링스가 말했다. 그가
캐플란 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
전반적으로 느낀 것은 없었소? 그의 형은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캐플란은 그 질문을 받고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형이라는 사람이 한 말은 거의 모두
무시해도 좋습니다." 이윽고 그가 대답했다. "그
면담을 통해서 아주 분명하게 느낀 것은, 동생에 대한
그의 질투심이지요. 형이 갖지 못했던 온갖 것이
동생에게 주어져서, 그는 그것에 대해 대단한 반감을
갖고 있더군요. 지금도 분하게 여기고 있고요. 형의
질투심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르윈터를 관찰한다는
것은 소극적인 표현이지만, 지극히 위험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이 별로 진척되지 않겠군."
빌링스는 이 원탁회의에 의한 검토를 좀더 자료가
수집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었나 보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부모의 양육방법이 잘못되었던 것은 분명해요."
마침내 자기 자신이 말한 이야기의 반응을 즐겨
가면서 캐플란이 자진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문제는 말입니다, 그 잘못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무슨 뜻이오, 어떤 식으로라니?" 전직 경관인
팬스워스가 물었다.
"자녀 양육방법에 대해서는 나도 독자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어요." 팬스워스를 놀리고 있는 것을
알리듯이 신들러 쪽으로 윙크해 가며 캐플란이
말했다. "부모가 정말로 악의에 찬 마음에서가 아니고
무의식중에 응석받이로 만들어 버렸는지, 아니면
벼락부자가 된 중산층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응석받이로 키웠는지 확실한
것을 알아낼 필요가 있어요."
팬스워스가 보기좋게 미끼에 달려들었다. "어떻게
틀리다는 겁니까?"
"놀라겠군요. 정말, 모르고 있습니까? 의식적으로
응석을 받아준 경우에는 그 징후를 밝혀내기가
간단하지요 -- 조울증, 병적 도벽, 성도착증, 혹은
사디스트같이 뭐든지 정신과 의사가 그 증세에 따라서
제대로 병명을 붙일 수가 있지요. 그런데 무의식중에
응석을 받아준 경우에는 복잡하고 기묘한 양상을
보이는 겁니다 -- 즉, 여러 가지 형태의 노이로제나
이상을 나타내지요. 단골 정신과 의사가 겨우 어떤
특정한 병명을 붙이려고 하면 환자는 또 다른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정신과 의사는 교과서를 끌어안고
큰소리로 아우성치며 쫓아가서 필사적으로 그 환자의
정신적 발자취를 찾아보려고 하지요. 물론 찾아낸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만. 부모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응석받이로 키운 사람들 중에는 천재로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좋은 예가 바로 이
접니다. 그러나 그건 지금 이 경우에는 관계없는
이야기고. 아니! 이걸 보시지요." -- 캐플란이 '더 뉴
리퍼블릭'의 광고 페이지를 넘겼다. "'아름답고,
건강하며, 교육을 받았으며, 인정 있고, 고독하고,
쓸쓸하고, 두뇌명석한 흑인여성, 공동생활을 목표로
하는 남성 지식인 그룹과의 대화 기회를 원함. 피부색
불문.' 연락해 보면 어떨까요, 일종의 실내
스포츠로서 말입니다, 예? 어떻습니까, 모두들?"
빌링스가 격렬하게 화를 냈다. 피부가 엷은
귀족적인 얼굴이 새빨개졌다 -- 다만 입술은 바짝
마르고 핏기가 사라져서, 인도에 깔아놓은 포석 같은
색이 되었다. 그 순간에 그는 캐플란뿐만 아니라
선임순서를 무시하고, 경험을 멸시하고, 지도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입증케 하는 일을 끊임없이 강요하는, 정보국
안이건 바깥에서건 어울리지 않게 출세한, 입만 살아
있는 젊은 녀석들을 마음속 깊이 증오했다. "캐플란
씨." 빌링스가 매정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좌중의
흥을 돋구는 재주가 아주 비상한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소 -- 그러나 당신의 달변은 일을 진행시키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고 있소."
"그러나 시간을 보내는 데는 도움이 되죠!"
캐플란이 말했다. 신들러와 팬스워스가 킥킥거리고
웃었다. 캐플란은 좀 지나쳤나 하고 걱정되었다.
뭐니뭐니 해도 정부에서 나오는 사례금은 무시해 버릴
정도는 아니다. 그의 우쭐해진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말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빌링스가 당장 그
건방진 말투의 유태인 정신과 의사를 쫓아내 버리려는
바로 그때, 언뜻 보기에 소탈하면서도 우아하고
냉철한 분위기를 풍기는, 외모 못지않게 자신에
넘치는 마음으로 리오 다이아몬드가 방으로 들어왔다.
"오, 밥." 그는 빌링스에 이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눈으로 인사를 보냈다. "여러분."
"어서 오게, 리오." 빌링스가 말했다 -- 그러나
상대방의 이름에 확신이 없어서 그러는 것처럼 잠깐
사이를 두었다. 아주 의미 있는 사소한 행동 중
하나였다 -- 누가 상대에게 한 발자국 양보할
것인가를 알리는 미묘한 신호였다.
"아직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가죽을 입힌 회전의자에 품위 있게
기대앉으면서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어젯밤
면담기록의 사본을 받아보았어. 좀더 자료가
갖추어지지 않고서는 검토할 것이 없더군."
캐플란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을 얕보는 듯한 태도를
순간적으로 바꾸었다.
빌링스가 두 손으로 서류 위에서 안경을 집어들고는
손가락으로 귀를 매만지듯이 썼다.
"한구석만 조금 건드려 보고 있었어. 지금 어떤
자료에서 다소라도 단서가 잡힐까 하고." 빌링스는
다이아몬드의 말에 동의함으로써 캐플란을 기쁘게
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당신은 캐플란 씨 아니오?" 의자를 돌려 상대방을
보면서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계속했다. "'에스콰이어' 지에 실린
당신 논문을 보았소 -- 어떻게 발음해야 하지?--
키브칭 증후군. 아주 굉장한 주장이었소. 단숨에 다
읽어버렸지."
그 찬사에 캐플란은 싱글벙글한 얼굴이 되었다.
"발음이 틀려요. 키비칭 증후군, 첫번째 음절에
악센트를 주어야 합니다. 이디시 어(語)죠."
다이아몬드가 두세 번 발음을 해보았다. "실은 그
논문을 읽고 난 뒤로 그런 증후를 수없이 보았소 --
나 자신에게서조차. 방관자가 자기가 방관하고 있는
대상에 어떤 미묘한 모습으로 끼어들게 되는데,
그것을 스스로도 억제키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
아니오? 어떤 계기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소?"
"직관이겠죠. 매주 수요일 밤에 우리 가족은 모두
브롱크스에 있는 어머니의 아파트에 모여 1센트 내기
포커를 합니다. 벌써 몇 년째 계속되고 있죠. 일종의
관례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작년엔가부터
어머니가 게임에 가담하지 않게 되었지요 -- 나이가
들어서 게임 진행을 방해하시기만 하는 처지가 된
거예요. 어느 날 밤 나는 어머니가 게임을 하고 있는
가족들 중 하나하나의 뒤를 돌면서 손에 있는 카드를
보고는 소곤거리기도 하고, 충고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웃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모두들 다른 사람이
쥔 카드를 읽는 데에 그 당사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판단을 하게 되어버린 거지요.
결국 어머니는 직접 게임을 하는 것보다는 구경을
하면서, 즉 키비처하는 것이 훨씬 즐거웠던 거죠. 그
뒤로 나는 어디를 둘러보아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장사, 예술, 그 밖의
모든 세계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포커 테이블
주변에 모여서 직접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조언도
해주고 하면서 자신은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고
한껏 즐기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시작했지요.
거기서 키비칭 증후군이 생겨난 겁니다."
"물론 나야 비전문가의 처지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명쾌한 주장이라고 생각됩디다."
다이아몬드는 이렇게 해서 캐플란을 아군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고 확신했다.
"르윈터는 -- " 다이아몬드가 신중하고 올바르게
발음을 했다 -- "키비처였을까?"
"틀림없어요. 그의 형이 편견에 사로잡혀서 말한
그와 과격파와의 관계는 분명히 게임을 구경하고 있는
키비처적 입장일 겁니다. 다른 점에서도 그런
것을......"
캐플란이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그것은 실제적으로
그가 빌링스에게 거부한 일, 즉 얼마 안되는 자료를
뒤적여서 르윈터의 정신생활에 관한 단서를 찾아내는
일을 자진해서 하게 되고 말았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빌링스는 다이아몬드와 캐플란 사이의 말없는 유대를
느낌으로 알아차리고는, 다이아몬드가 회의를 완전히
지배해 버리기 전에 의장으로서의 자기의 존재를
분명히 해두어야만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이아몬드
같은 녀석들은 지옥으로나 떨어져야 옳다고 생각했다.
자기의 직업적인 전 생애를 그들과 같은 인간들을
상대로 해서 지위를 다투는 일에 허비해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 자신은 전쟁중의 세월을 책상머리에서
하는 일로 보내며, 기록이나 정보가 완비되어 있는
쪽이 끝내는 승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되십으며, 또한 그런 생각이라야 견딜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첩보활동이라는 무미건조한, 아무도 고맙게
생각해 주지 않는 일상업무를 담당해 왔었다. 그
전쟁이 끝나자, 그들을 내보낸 교회로 돌아오는
순례자처럼 현지 첩보원들이 연이어 돌아와서는
선임순서에 따라서 그때까지 빌링스네들이 해오던
책상머리의 일에 끼어들게 되었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들과 승진을 겨룰
수밖에는 달리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게임에 가담해 있는 입장에
있었던 것 같이 생각되고, 이......"
빌링스가 공세를 취했다. "우리들 모두가
'에스콰이어' 지의 당신 논문을 읽은 것이 아니오,
캐플란 씨. 그러니까 당신의 그런 증후론이 이번
분석의 대상 인물이 망명한 이유, 나아가서는 그가
중대한 비밀을 가지고 갔는지 아닌지를 알아낼 단서를
가져다 줄 것인지를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해 주었으면
하오. 뭐니뭐니 해도 그것이 이번 조사의
주목적이니까."
"대강 해두시지요." 캐플란은 다이아몬드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 빌링스는 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옆에서
말참견이나 해서 남의 이야기를 방해만 하고 있군요."
그 시점에서 그 주도권 싸움 같은 게임에 마무리가
지어졌다. 그것은 리오 다이아몬드가 밥 빌링스,
포괄분석, 정보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수를 썼기 때문이다. "당신의 직업적인 명성에는
대단히 경의를 표하지만 -- " 그가 더 논의해 볼
여지도 없다는 어조로 캐플란에게 말했다. "밥
빌링스는 오랫동안 이 일에 종사해 왔소. 그는 시간이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소. 당신이
표현한 그의 말참견으로 아주 많은 인명이 구제되고
있는 거요. 우리는 이번에 아주 중대한 문제를
취급하고 있소. 러시아 인들이 품속에 뛰어든
르윈터라는 궁지에 몰린 새를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데,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이유를
알아내지 않으면 안되오. 그것도 되도록 빨리. 설령
밥이 다소 서둘렀다고 해도 그것은 사태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다이아몬드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활짝 웃었다. "어떻습니까?" 어조를
바꾸어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처음 서로의 의견이
엇갈린 것은 열성이 지나쳤기 때문으로 치고서
넘어가고 -- " 다이아몬드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면서도 실은 빌링스를 견제하고 있는 것을
캐플란은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어때요? 모두들 어떻습니까?"
프랑스식 창밖에 플라타너스의 자르고 남은 가지에
앉아 있던 울새가 자기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다른
울새를 향해서 맹렬히 지저귀고 있었다. 그것을 본
다이아몬드는 지난번 세알라와 둘이서 센트럴 파크의
동물원에서 본 새들이 생각났다 -- 뒤섞인 새들
소리가 나무들이나 널찍한 공간에서 격리된
강제수용소의, 타일을 붙인 우리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팔을 잡고 세알라가 말했다. "난
동물원은 끔찍해요."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생각을 떨쳐버렸다. "오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일이 둘쯤 있소. 첫째는 --
어젯밤 보고서의 복사본을 읽고서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인데 -- 싱클레어라는 그 여자의 아파트에서
르윈터의 서류를 가지고 간 사람은 대체 누구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조사를 해나가고 있는 것은
우리들뿐인데." 빌링스가 말했다. "우리 쪽 조사원인
윌슨과 마찬가지로 부원에 대한 지시가 중복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빌링스는 평소의 권위를 그
어조에 나타내려고 애썼다 -- 그리고 거의 성공할
단계에까지 갔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문제일세, 밥. 르윈터를
조사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우리들뿐일까?"
다이아몬드가 물었다. "왜냐하면 르윈터의 과거에
비상한 관심을 가진 그룹이 또 하나 있기 때문이야."
"러시아 인들이로군요, 그렇죠?" 침묵을 깨고
팬스워스가 끼어들었다. "놀라운데. 엉뚱한 생각은
아니오. 2~3년 전에 세균전 전문가가 망명한 사건이
있었죠. 기억들 하겠죠? 매코머라는 사람 말입니다.
그때 우리들 중에서도 러시아 쪽에서 그의 과거를
조사하고 있다고 확신하던 사람들이 몇 명 있었지요.
어허, 참, 이거 놀라운걸."
"적어도 하나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확실해요."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그 서류를 가지고 간 인물이
정말 우리 쪽 사람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선결문제요.
'노'라는 답이 나오면 대상을 러시아 쪽으로 좁힐
수가 있지요."
"제기랄." 팬스워스가 말했다. 그는 러시아의
스파이가 살짝 들어가서 르윈터의 서류를 훔쳐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전국의 시, 주,
연방기관에 긴급연락을 보내겠소. 그 인물이 우리 쪽
사람이라면 24시간 내에 확답을 얻을 수 있을 거요.
이거 정말 멍청한 짓을 했군."
"좋소." 다이아몬드가 말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자네만 반대하지 않는다면, 밥, 지금
여기서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일 중에 그 기억에 대한 얘기가 있어."
"기억에 대한 얘기라니, 리오?" 빌링스가 겉으로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나도 생각나는군요 -- 그 기억에 대한 얘기가."
캐플란이 빌링스를 무시해 버리고 직접
다이아몬드에게 말했다.
그러나 빌링스는 그리 간단히 무시당하지는 않았다.
"그 기억에 대한 얘기는 물론 모두들 알고 있어 --
종이에서 툭 튀어나와 있을 정도로 눈에 띄지. 그러나
자네도 기억하고 있을 줄 알지만 르윈터의 형이
동생은 일곱인가 여덟 살 때 지붕에서 떨어진 뒤로는
기억력을 잃었다고 했어. 또 그 말은 비상한 기억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 신상조사기록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뭐라고 표현을 했더라 -- 그래, 사소한 일에는 머리가
안 돌아가서, 약속 날짜나 시간, 나중에는 이혼수당의
지불 날짜까지 잊어버린다고 불평한 헤어진 아내의
증언과도 일치해. 여러분, 르윈터는 건망증이 심한
사람이었소. 그의 기억력이 -- 그 뛰어난 기억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 보통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지극히 분명합니다."
"먼저 -- " 캐플란이 말했다.
"첫째로 -- "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두 사람이 공모자처럼 함께 소리내어 웃었다.
또다시 빌링스의 입술에서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가 캐플란 쪽을 보고 손짓을 했다. "말해
보시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소?"
"먼저 첫째로 정보나 경험을 기억하는 능력과,
기억한 것을 다시 생각해 내는 능력을 분명하게
구별해서 생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의 두뇌는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죠. 적어도 보통의 자극에 의해서 생각해 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신의학적인 수단이나 최면술을 걸어서, 대개의 경우
기억은 되어 있지만 묻혀져 있는 것을 캐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각해 낼 수가 있는 거죠.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우리들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르윈터의 기억력이 아니고 생각해 내는
능력입니다. 그것에 관련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지요."
캐플란은 기억력에 관해서 그 반대의 주장도 같은
설득력을 가지고 얘기할 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빌링스의 말을 공박하는 것밖에 머릿속에 없었다.
"하나는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차고의 지붕에서
떨어질 때까지는 그는 분명히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알기로는 그
능력을 잃었어도 뒤에 가서 다시 그것을 영속적으로,
혹은 단기간, 아니면 장기간에 걸쳐 어느 기간까지는
회복하는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는 그가 현재
기억했던 일들을 완전히 다시 생각해 내는 능력을
되찾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놀라운 증거가 있다는
점이고요."
"혹시 그 시에 관한 것이라면......" 빌링스가 말을
꺼냈다.
그러나 캐플란은 이야기에 가속이 붙어서 멈춰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 시가 바로 그겁니다. 그의
여자친구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그 시를 한 번밖에
읽지 않았다고 합니다. 난해한 시를 우연히 읽고 나서
8개월이 지나, 결혼을 약속한 여자를 이제 곧
버리려는 때에 애정의 표시로, 혹의 죄의식의
표시로서 보내기로 생각했어요. 게다가 '케니욘 리뷰'
잡지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일본에서-- "
"그 점은 아직 뭐라고 말할 수 없소 -- " 빌링스가
입을 열었지만, 캐플란의 거침없는 목소리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 -- 그가 그 시를 기억해 낸 겁니다.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죠."
"사소한 일에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
헤어진 처의 말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팬스워스가
물었다. "또,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
어째서 그 일이 신상조사서에 빠져 있을까요?"
"팬스워스 씨,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기억해 내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기억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도 -- 뭐라고 하면 좋을까?-- 기억을 완전히
제어할 수가 있는 거지요. 골치아프다거나,
쓸데없다거나, 시간의 낭비라고 생각되는 일을 생각해
낼 수는 없어요. 다시 말하자면 기억의 밑바닥에
묻어버릴 수가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결혼기념일이라든가 생일 같은 거. " -- 캐플란이
논란의 매듭을 지을 결정적인 수라도 있는 듯이
힘주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혹은 이혼수당의
지불이라든가. 기밀취급자격에 관한 신상조사서에
대해서는, 그를 의사에게 데려갔을 때 그의 비상한
기억력을 교묘하게 숨겼었다고 말한 형의 증언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지요 --
그는 정상이 아닌 아이로 보여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런 반응을 나타내지요."
"그 점을 다시 조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소."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가령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 그는 망명의 선물을
가져가는 데 무엇인가를 사진으로 찍거나, 사본을
만들거나, 훔치거나, 외우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이해할 필요조차 없었던 거지."
"그렇군, 흘끗 보기만 하면 일은 끝나는 거지."
패배자의 마지막 자존심인 양 한껏 비꼬는 투로
빌링스가 말했다.
"옳은 말입니다." 비꼬는 말을 액면 그대로 태연히
받아들이며 캐플란이 말했다.
"OK, 이것으로 의견이 일치되었다고 보아도
되겠소."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빌링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시에 초점을 맞추기로 합시다. 나는 그의
여자친구의 사고방식을 인정하겠소 -- 다시 말하자면,
가령 그 시를 외우고 있었더라면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 비밀로 해둘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 말이오.
그러나 그가 일본에 있는 동안에 마침 '케니욘 리뷰'
잡지의 그 달치를 볼 기회가 과연 있었을는지? 그리고
기억력을 잃었다가 회복했다가 하는 점에 관해서
전문의사의 의견을 들어서 확인해 보면 어떻겠소?
이것이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9 장
[극 비]
포괄적 성격분석 327호
대상 : A J 르윈터
총괄 : 로버트 빌링스
고문 :
첨부자료 : 8월 15~17일 실시된 면담 내용
[극 비]
A 보드킨 부원과 오하이오 주 갠비아 소재 케니욘
대학 문학부장 휘트먼 핀치 교수의 전화내용
전문(全文). 8월 15일. 피면담자와 르윈터는
지금까지의 조사로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알지도
못함.
[핀치] 솔직히 말해서 별로 좋은 시는 아니죠.
이런 것이 아주 주관적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소. 내 말은, 이런 시를 누군가가 글자
그대로 읽고서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뜻이오. 즉, 시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요 -- 우리 학생들은
그런 표현을 하겠지 -- 시가 내 귀에 무엇인가를
속삭여 주고 있다고. 그러나 굳이 말하자면, 의견이
공정하고 경험이 풍부한 비평가들 중 대부분은 지극히
평범한 시라는 견해에 찬성할 거요 -- 형태가 대단히
파생적이기 때문이오. 독창성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소. 테마가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혼란해요. 작가는
처음에 인간과 섹스의 영적인 관련에 대해서 이야기해
나가지요. 그러다가 사이버네틱스(인공두뇌학)의
취급법에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어버렸을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한쪽의 형태라는 것과 다른 쪽의
내용과의 사이에 분명한 엇갈림이 있으며, 조잡한
느낌을 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비예술적이라는 거죠.
운율에 다소 희망을 걸 수 있다는 점이 엿보이는군요.
그러나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애석하지만 아주 평범한
시라고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보드킨] 지금 말씀하시는 내용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오해하진 마십시오. 그러나, 교수님, 제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시가 '케니욘 리뷰' 잡지의 그 달
이외의 간행물에는 실린 적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겁니다.
[핀치] 천만에, 그런 생각을 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소.
재(在) 도쿄 미국 대사관 문화담당관 리처드 매시스
하딩에게서 온 극비 암호전보 전문. 8월 15일 아침
수신. 해독. 이 사람과 르윈터는 서로 아무런 연고가
없을 것 같음.
EX 하딩, 121352Z.
이것은 우리가 여지껏 받은 것 중에서도 가장
기묘한 조사의뢰라고 아니할 수 없음. 도쿄 주변
150km 범위 안의 도서관을 조사한 결과 단 한 군데 --
교토 대학 -- 가 '케니욘 리뷰'의 과월호들을 갖추고
있는 것이 판명됐음. 교토에서 보내온 보고에 의하면
1964년 9월호가 분실되었는데, 언제 없어졌는지는
불분명함. 반복함, 불분명함. 사서(司書)의 말에
의하면, 조심성없는 남자가 가져가 버리는 영문잡지의
과월호는 몇백 권에 이른다고 함. 개인적인 장서를
조사하는 일은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광범위하게
문의해 본 결과 '케니욘 리뷰' 지의 과월호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결국 발견하지 못했음.
이것으로서 도움이 되기를 바람.
하딩
R 그로턴 부원과 클리멩거 정신병원장 루이스
클리멩거 박사와의 면담 내용 요약. 8월 16일.
피면담자와 르윈터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알지도
못함.
[클리멩거] (기침) 당신, 담배를 피우시오?
해로운 것은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끊을 수가
없어요.(기침) 그런데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그래,
당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해요. 대단히
드물지 -- 그러나 있을 수 있는 일인 것만은
분명해요.(기침) 1934년에 유명한 사례가 있었소 --
에바스인가 하는 여자가 잃어버렸던 비상한 기억력을
회복한 겁니다. 실증자료도 충분히 갖추어졌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 환자가 있다면 무료로 진찰해
주겠소. 아주 흥미 있는 논문을 쓸 수 있을 게요.
F 루프트웰 부원과 베레뷰 병원 정신과장 겸
워싱턴의 프로이트 문고(文庫) 관장 거하드
글루네버그 박사의 면담 내용 요약. 8월 16일.
피면담자는 르윈터와 아무 관련도 없고, 알지도 못함.
[글루네버그]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어리석을 게요. 그러나 일단 잃어버린 기억력을
회복했다는 실례는 아직 한 건도 들은 일이 없소.
[루프트웰] 아니, 그럼, 1934년의 그 예는 --
[글루네버그] 그래요, 모두들 인용하는 유일한
사례지. 에바크라는 여자요. 완전한 속임수지. 그녀는
서커스에서 초인적인 기억력을 연기했었소. 그런데 그
초능력을 잃었다가 다시 회복했다는 게요 -- 선전을
위해서 시종 그렇게 말했지. 1934년에 어느 불쌍한
의사가 그녀의 이야기를 곧이듣고서......
S 에커트 부원과 하원의원 프레드 월터스의 면담
내용 요약. 의원의 뉴욕 사무실에서. 8월 16일.
피면담자는 연방정부의 고형폐기물처리장치
설립제안에 대한 일로 르윈터의 방문을 받았다고 함.
[월터스] 나는 가능한 한 당신들에게 협력할
생각이오. 나도 전쟁중에는 육군 정보부에 있었소.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그런 이름은 기억에 없소. 몇
달 전에 누군가가 귀찮은 이야기를 해온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긴 하오만 -- 허허, 귀찮다는
것은 농담이오 -- 뭐라더라, 유리나 쇠 같은 폐기물을
파이프를 통해서 펌프로 지구처리(地區處理) 센터로
보내서 재생한다는 엉뚱한 이야기였소. 하지만 단지
꿈 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지. 어때요, 중요한
일이라면 우리 직원들에게 파일을 조사해 보라고 해도
되는데 ?
(주 -- 파일을 조사한 결과, 등사판으로 인쇄된
르윈터 명의의 고형폐기물처리장치 설립제안서가
나왔음. 그 제안서는 첨부자료 17C로 되어 있고, 표지
및 그 뒤에 붙어 있는 14쪽의 매 쪽 오른쪽 위
귀퉁이에 그의 머리글자가 써져 있었음.)
A 보드킨 부원과 부채정리금융회사 보스턴 지점장
토머스 A 오즈본의 면담 요약. 8월 17일. 피면담자는
르윈터의 융자신청에 대해서 본인과 면담했다.
[오즈본] 잘 들으시오, 우리는 원칙적으로 고객에
관한 정보는 제공하지 않고 있소. 사람들이 성직자를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심하고 우리에게 털어놓을
마음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오.
[보드킨] 그 점은 잘 알고 있으며, 그 원칙을
우리 때문에 무시해 가면서 협조해 주시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부에서도 감사해 하고 있지요.
[오즈본] 여하튼 그의 신청서가 이거요.
당신에게서 전화를 받고 꺼내놓았소. 이것이
이름이오, 이젠 됐소? 머리글자 A, 머리글자 J,
대문자 L과 소문자의 W로 르윈터.
[보드킨] 그겁니다.
[오즈본] 이건 상당한 급료를 받고 있는 사람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소 -- 질문의 제12항,
이거요, 연봉 17,500달러 -- 그래, 상당히 많은
액수의 급료를 받고 있으면서도 지출에 계획성이 없는
거요. 다시 말하자면 돈의 취급방법을 모르는 거지.
우리에게는 이런 부류의 손님이 많으며, 그들의 빚을
하나로 뭉뚱그리기 위해서 융자해 주고 있소.
이야기가 옆길로 샌다고 할지 모르지만, 보드킨 씨,
사람들을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구해 주는 일에 우리는
대단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소. 잘 들으시오, 우리는
항간에 있는 돈 꾸어주는 것만을 업으로 삼는 곳과는
전혀 달라요.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깃든 장사를 하고
있는 거라오.
[보드킨] 르윈터에게는 얼마나 꾸어주었습니까 ?
[오즈본] 그런데, 결국 최종적으로는 융자해 주지
않기로 했소.
[보드킨] 꾸어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
[오즈본] 그래요, 꾸어주지 않았소. 이유는 이
신청서엔 써 있지 않아요.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좀
다른 게 있었지요. 그에게서 이상한 것을 느끼고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이런 장사에는 육감에 의한 것이 크게 작용하지요,
보드킨 씨. 그 육감이 내게 말하더군요 -- 조심해, 이
사람은 성격이 불안정해 -- 하고 말이오. 어째서 그에
대한 것을 조사하고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없겠소?
빚을 갚지 못했나? 내 전재산을 다 걸어도 좋소,
채무불이행이 틀림없어요.
A 보드킨 부원과 PEACE(지구개선을 염원하는
교수들의 모임) 창립위원이며, 보스턴 대학 화학과
부교수 제임스 조지 스타이론의 면담 내용
전문(全文). 8월 17일. 피면담자는 PEACE에 관계하고
있을 무렵의 르윈터와 안면이 있었음.
[스타이론] 비드킨 씨인지 보드킨 씨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나를 찾아냈구먼.
[보드킨] 보드킨입니다. 저를 만나고 싶지
않으셨던 모양이군요.
[스타이론] 물론 마음내키지 않았소. 그러나
언제고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 내게
녹음을 맡겨주시오. 이 카세트는 대체 어떻게
끼워넣는 거요 ?
[보드킨] 반대로 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스타이론] 당신이 온 이유를 추측해 보겠소.
당신은 우리의 PEACE가 보스턴 지역을 제압해서
젊은이들을 나라에 대해 반역자로 만들고, 수돗물에
환각제를 집어넣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단체라고
생각하고 있소. 어때요, 내 말이 맞았소? 당신의
상사들은 체제 안에 있으면서 체제의 변혁에 뜻을
두고 있는 나 같은 적극론자들을 이해하지 않는 게요.
[보드킨] 스타이론 씨 --
[스타이론] 미안하지만 교수라고 불러주시오.
우리 그룹의 이름을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PEACE라는 이름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인정하오. 나
자신도 좀더 수수하고 차분한 이름을 원했었소.
당신이 마침내 나를 찾아낸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소. 어쩌면 당신이 우리의
인본주의(人本主義)적인 사고방식과, 인본주의자를
활동가로 바꾸는 정신작용을 다소라도 이해하고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당신은
인본주의적인 전통에 대해서 다소라도 지식이 있소,
비드킨 씨 ?
[보드킨] 보드킨입니다, 스타이론 교수님.
브라보의 B, 오스카의 O, 다이아몬드의 D, 킹의 K,
인디아의 I, 노벰버의 N, 보드킨.
[스타이론] 당신은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꽤
신경질적인 데가 있군.
[보드킨] 교수님, 당신 비서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PEACE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 일 자체에 대해서는 말이지요.
당신 그룹의 회원이었던 MIT의 르윈터 교수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어서 온 겁니다.
[스타이론] 르윈터?
[보드킨] 머리글자 A, 머리글자 J, 르윈터. 그에
대해 잘 알고 계시지요 ?
[스타이론] 르윈터에 대한 것을 물어보기 위해서
이런 곳까지 일부러 오다니, 허 참, 놀라겠군. 그를
아시오?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그는
정식으로 우리 그룹의 일원이 된 것이 아니오. 우리
모임에 네댓 번 참석은 했지만, 우리는 MIT의
동료과학자를 환영한다는 뜻으로 그를 기꺼이 맞았을
뿐이오.
[보드킨] 그에게 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까?
솔직하게 말을 하던가요 ?
[스타이론] 그 점이 아주 기묘했소. 그는
마지막으로 참석했을 때까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소.
우리는 그때 과학자들 사이에서 연쇄편지를
시작하기로 의논했었지요. 별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니까 분명하게 말하겠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적극론자였소. 길거리의 우매한 일반시민이 아니고
과학세계의 엘리트들이 서명한 편지가 10만 또는
50만이나 화이트 하우스에 쇄도하게 되면 대통령인들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잖겠소? 어쨌든 그 이야기를
듣고서 르윈터는 완전히 흥분해 버렸소 --
[보드킨]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
[스타이론] 느닷없이 팔을 휘두르며 우리들을
엘리트주의자라고 매도하기 시작한 거요. 나중에 그는
우리가 의논하고 있었던 일보다 훨씬 더 과격한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듯한 인상이 내 머리에 남아 있다오.
그날 밤을 마지막으로 그는 두 번 다시 우리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로
애석하다고는 생각지 않고 있소. 그런 사람들에게서
괴로움을 당하지 않으면서 구체적으로 운동을
펴나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보드킨] 그 뒤 그에 대해서 들은 거라도
있으신지요 ?
[스타이론] 물론 있지요. 단지 소문에
불과하지만, 그는 하버드의 MDL 그룹에 끼게 되었다고
누군가가 말하더군요. 그 녀석들이야말로 당신들이
찾아내야 할 사람들이오. 우리가 아니고.
5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지 못해 폭발물
불법소지죄로 찰스 가(街) 유치장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낸시 미트갱과 G 브랜트 부원과 면담
내용 요약. 8월 17일. 피면담자는 르윈터와 관계가
있었다고 보고된 기간에 MDL(전투적 민주연맹)의
일원이었음.
[미트갱] 꺼져 버리시지. 무슨 일이 있거나간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이것뿐이오. 다른 녀석들이
이야기한 것 이상으로 행크에 대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완전히 오산이오. 그러니까
내게 매달릴 생각은 말아요. 돌아가시오.
[브랜트] 나는 당신이나 행크나 MDL에 관한 것을
알아보려고 온 게 아니오.
[미트갱] 그럼, 뭘 물어보려고 온 거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신학론>? 형이상 시인의
성적심상(性的心傷)에 대해서? 그것도 아니면 뭐요 ?
[브랜트] 르윈터. A J 르윈터. 그를 기억하시오 ?
[미트갱] (배꼽이 빠지게 웃으며) 르윈......
(계속 웃는다) 설마, 제정신으로야...... (계속
웃는다)
[브랜트] 뭐가 우스운지 가르쳐 주지 않겠소 ?
[미트갱] 르윈터. 당신 같은 건달이 그 사람같이
기분나쁜 남자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소이다. 대체 그가 무슨 짓을 했소?
8센트짜리 편지에 6센트짜리 우표라도 붙였나? (또
배꼽이 빠지게 웃는다.)
[브랜트] 생각해 보았소 --
[미트갱] (계속 웃는다.)
[브랜트] 나는 --
[미트갱] 뭘 생각했다는 거요? 날 따라다니면
무슨 정보라도 얻게 될 거라는 생각이라도 했다는
거요? 안됐지만 정보 같은 건 하나도 없소. 할
이야기도 없고. 르윈터는 그 운동에 정식으로 가담한
것도 아니란 말이오. 한동안 그 근처에서 어정거렸지.
그래, 그랬을 뿐이오. 당신, 여기에 찾아오는 것은
번지수가 틀렸소. 그런 더럽게 고지식한 녀석,
긴의자에 눕기만 해도 정신과 의사가 기절할 만한
인간이지. 해안에서의 집단감수성훈련에 누군가가
그를 데려왔는데, 모두들 홀랑 벗고 헤엄치기
시작했더니, 그 양반 금방이라도 졸도해 버릴 것
같더라고. 그 다음에 계집애 하나가 그와 자기로
했는데, 그녀가 불을 끌 때까지 옷을 벗지 않더라나.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막상 일을 시작한 다음에는
솜씨가 꽤 좋더라고 그 계집애가 그러더라는군. 정말
알 수 없는 거지, 그렇게 생각지 않소? 당신도 불을
끄는 쪽이겠군. 틀림없이 그럴 거야 !
[브랜트] 그 해안에서의 모임 이후로 그를 본
적이 있소 ?
[미트갱] 한동안은 본 것 같소. 하지만 어디에고
깊이 빠져들지는 않았소.
[브랜트] 왜 ?
[미트갱] 뭐가 ?
[브랜트] 왜 그는 한동안 모임에 나타난 거요?
그가 그토록 고지식한 사람이라면 당신들은 왜 동료로
넣어주었소 ?
[미트갱] 행크의 생각이었을 거요. 그는 르윈터가
장차 큰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때로는 잘못
짚을 때도 있잖소, 안 그래요 ?
제 10 장
몸을 낮추어 무릎을 구부리고, 손가락을 촉각처럼
뻗은 왼손을 앞으로 내밀고서, 권총의 손잡이 같은
나이프의 자루를 잡고 있는 오른손을 바짝 끌어당긴
채 해리 듀크스는 헐떡이며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본능과, 손가락이 원을 그리고 있는
칼끝처럼 상대를 죽일 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듀크스의 경우는 내용이 없는 겉모양에 불과했다 --
신축성에 있어서 탄력과 예민함이 모자라는 재고품
용수철이었다. 상대방에 틈이 생기면 듀크스는
꼴사납게 쳐들어갔다. 젊은 남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른 손놀림으로 그 칼끝을 부리치고는, 활
모양을 그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파고들어가서
듀크스의 겨드랑이 밑을 나이프로 찔렀다.
"제기랄." 고무로 된 칼날이 자신의 피부 위에서
구부러지는 것을 느끼고서 듀크스가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거친 호흡 사이로, "다시 한 번." 하고
말했다.
문제는 몸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머리 쪽이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밴 에이벌리의 표정이 풍부하고
수려한 이목구비를 앞에 하고 있으면 거기에 진짜
위험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자기 자신의 기억 속에서 위험에 처했던
순간을 생각해 보려고 듀크스는 마음먹었다. 남자는
때로 한 여자의 허리를 안으면서 다른 여자를 떠올릴
경우도 있는데, 그것과 마찬가지로 밴 에이벌리를
다른 사람과 바꾸어놓는 것이다. 다시 몸을 낮추고서
자기에게 살해당하기 직전에 있는 어떤 남자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콧수염 말고는 얼굴 모양이 떠오르지
않고, 소름끼치는 위험만이 떠올랐다. 그때의
위기감을 다시 되살려 보려고 했으나, 그 순간의
단편적인 광경이 잠깐씩 떠오를 뿐 그때의 기분을
재현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걸쳐서
열심히 애써 보았지만, 듀크스는 과거의 생애에서 몇
번인가 목숨을 걸고 싸웠을 때 느꼈던 공포와
명쾌함이 뒤섞인 기묘한 그 기분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밴 에이벌리가 신음소리를 내면서 발길질을 하는
척하고는 왼손으로 듀크스의 눈을 노리고서 속임수
동작을 취했다. 나이프를 쥔 듀크스의 오른팔이
상대방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번개처럼 위로
올라갔으나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다급히 그 팔을
내리려는 순간 밴 에이벌리가 고무로 된 칼날로
내리그었다. 굵고 푸른 힘줄이 튀어나와 있는
듀크스의 손목에 옆으로 난 칼자국이 지렁이같이
튀어올라왔다.
"처음 10분 동안이야." 듀크스가 말했다. 다락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레슬링 매트 위에 밴
에이벌리와 나란히 누워 있는 지금은 호흡이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다. "만일 실제로 해야 할 경우, 처음
10분 사이에 상대를 이겨야만 해. 10분 이상 지나면
굉장히 빠른 속도로 피로가 닥쳐와."
전문가적인 의견에 대해 밴 에이벌리가 전문가적인
반대의견을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해리. 상대가 프로라면 당신이 10분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것을 미리 짐작하고서 피로해지기를
기다리겠지요.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럴 겁니다. 나 같으면 어떻게 할지 아십니까?"
"어떻게 하겠나?" 듀크스는 젊음이라는 것은
움직임은 빠르지만, 머리의 움직임은 둔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긴 그 정도로 몸이 빠르면 머리의 움직임
같은 것은 필요치도 않겠지만.
"상대가 이쪽 정체를 모르게 딴청을 부리는 것이
제일입니다. 어정쩡한 자세로 버티고 서서 풋내기처럼
두 주먹을 올려쥐고는 자, 덤벼라 하고 태세를 갖추는
겁니다. 그리고 틈을 보아 번개처럼." -- 밴
에이벌리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 "이쪽이 프로라는 것을 눈치채기 전에."
"잘못된 점이 둘쯤 있군." 해리 듀크스가 말했다.
배의 근육을 바짝 끌어들이며 자신의 몸을 발끝까지
훑어보았으나, 그래도 배언저리가 조금 나왔다. "내가
누군지 모른다면 어째서 그자가 나를 죽이려 하겠나,
응? 나를 죽이려 했다면 상대방에서는 내 이름, 계급,
번호, 그리고 나이까지도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하네.
나는 역시 처음 10분 동안에 전력을 다하겠어."
"만일 그래도 안된다면?"
"그래서 안되면 단념해야지." 듀크스는 자기 집
다락에서 밴 에이벌리를 상대로 한 연습과,
단념하겠다고 한 그 말에 온몸의 힘이 몽땅 빠져
달아나는 듯했다. "사람이란 조금씩 조금씩 어느
사이엔가 나이를 먹어버리는 모양이야. 어느 땐가
체육관에서 커리를 상대로 격투에 대한 훈련을 두
시간, 두 시간 반, 경우에 따라서는 세 시간이나
했어. 그것이 어느덧 30분도 채 못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되고 말았네." 듀크스가 상체를
일으켜 땀복 셔츠를 벗어버리고는 벽에 기댔다.
"어때? 프레드, 그 진토닉을 다 마셔 버리기로 하세.
그리고는 샤워를 하고서 숯불을 피우는 거야. 오늘은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와주어서 고맙네.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갈 불고기가 준비되어 있다네." 바깥
어디선가 잔디 위에서 레슬링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높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다치기 전에 그만
두지 못해?" 열려 있는 다락방 창으로 듀크스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 고함소리가 조용해졌다.
듀크스가 밴 에이벌리 쪽을 보았다. "애들은 언제나
애들이군."
듀크스는 젊었을 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손가락을 펴서 오른손을 들어올리고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 살이 찐 커다란 손이었다. "나는 이
손으로 셋을 죽였어." -- 듀크스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 "둘은 나이프로, 하나는 기포(氣泡)가 멎을
때까지 물속에 밀어넣었지. 그들 중 어느 누구라도
내게 같은 짓을 했을 게 틀림없어. 이렇게 다락방에
앉아서 지금부터 바베큐 준비를 하려는 때에 하필 그
생각이 나다니 기묘하군. 정말 기묘한 일이야."
"나는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요 -- 너무
늦게 이 길로 들어선 것 같아요." 밴 에이벌리가
말했다. 그 어조에는 억울해 하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어 있었다.
"자네는 해낼 수 있을 거야. 냉철하고, 몸놀림이
민첩하고, 게다가 신경도 굵직해. 필요하다면 해낼
거야. 나는 그렇게 믿어."
"고맙습니다, 해리. 하지만 실제로 해보기 전까지는
뭐라고 단정할 수 없겠지요."
"어쨌든 그런 시대는 영원히 끝난 거야. 이미
끝까지 싸우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우리는 친숙한
세계에 살고 있는 거야."
"해리!" 화난 것을 익살스러운 어조로 얼버무린
듀크스의 아내 목소리가 마룻바닥 사이로 들려왔다.
"벌써 5시 반이에요. 숯불을 피우려면 30분은 걸려요.
해리, 들었어요?"
듀크스가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곧 가겠어,
클래라." 그가 소리쳤다. 그러나 움직이는 기색은
없었다.
밴 에이벌리가 일어나더니 사이공에서 근무할 때
대만의 공작원에게서 배운 태극권(太極拳)을 하기
시작했다. 공수도(空手道) 비슷하게 우아한
움직임인데, 보는 사람이 답답해서 괴로울 정도로
느린 동작이 계속되었다.
"방콕...... 쪽의...... 일은...... 어땠......
습니까...... 해리?" 동작 사이사이에 그가 물었다.
"간단했어." 듀크스가 대답했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아무도 모르는 실패 하나로 끝남 -- 그렇게
바라고 있어. 방콕 지령실이 친구가 한두 사람 많아진
지역 공작원에 대해 '완전말살' 지령을 내렸다네."
"그
사람의......친구들도......없애버린......겁니까?"
"하나는 매수하고, 하나는 없애버렸어." 듀크스는
밴 에이벌리가 뒤꿈치로 받치고 천천히 방향을
틀고는, 마치 슬로 모션으로 보는 피스톤처럼
어깨에서 주먹을 내뻗는 동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중국 방문단에 넣을 교수를 찾아냈나, 프레드?"
밴 에이벌리가 다시 매트에 앉았다. "파일에 올라
있는 A에서 Z까지를 만나보고, 한번 고려해 보겠다는
버클리 대학의 미술사(美術史) 교수를 겨우 한 사람
찾아냈을 뿐입니다. 믿어지십니까? 결국 누군가를
찾아내게는 되겠지만, 예정보다 많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어처구니가 없군." 듀크스가 말했다. "그
사람들이 그런 일을 간절히 바라던 때가 생각나는데.
그 무렵에는 우리라면 한 수 접어주었지. 부탁하기도
쉬웠어 -- 그들의 책이나 논문의 출판에 대한 주선도
해줄 수 있었고, 꼭 필요할 때에는 대학에 직장을
마련해 줄 수도 있었지. 정말 세상이 많이 변했어.
그것도 학자들뿐만이 아니야. 우리가 마지막으로 1급
부원을 신규채용한 것이 언제인가? 우수한 젊은이들은
이제 정보관계의 일을 희망하지 않네. 어딜 가나
넉넉한 급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야."
"반드시 돈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해리.
요즘 대학에서 쏟아져 나오는 개인주의자들에게
우리가 하는 일은 집단적 색채가 너무 짙은 겁니다.
그 녀석들은 팀웍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상급자들이 나한테 2류
인재들을 데리고 큰일을 해내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뿐이야 -- 현재의 단짝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세,
프레드.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 내가 소련의
신문을 요약한 것이나 매일 읽어야만 할 정도여서는
안되는 걸세. 좀더 중요한 일이 얼마든지 있단
말이야. 문제는 이제 우수한 인재를 얻을 수 없다는
점이야. 자네가 첫번째 임무에 대한 지시를 받으러
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네. 일을 하고 싶어서 마치
문을 밀어 넘어뜨릴 듯한 기세로 들어왔었지.
며칠씩이나 밤늦게까지 일하기도 하고, 휴가를 얻지
못했을 때에도 자네는 한마디도 군소리를 안했어."
듀크스가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내가
가장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는 것은 학자 타입의
녀석들이야. 그들은 어느 쪽에서 불어오든, 그때의
바람 방향에 따라서 배를 달린단 말이야.
다이아몬드의 포괄분석에 참가하고 있는 학자 중
누구와도 교섭이 안되었지? 내 말이 틀림없지?"
밴 에이벌리가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등을
꼿꼿이 세우고는, 마주잡은 두 손에 힘을 주어가며
근육운동을 시작했다.
"교섭은 되었습니다 -- 그러나 돈 액수는 묻지
마십시오."
"2,500달러 이상인가?"
"정확히 3,000달러입니다."
듀크스가 휙하고 휘파람소리를 냈다. "그만한
돈이면 아무리 큰 저택이라도 구석구석 빠짐없이
도청장치를 할 수 있는데, 상대는 누군가?"
"물리학자인 신들러입니다. 4년 전에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형식뿐인 심포지엄에서 한몫
거들어준 것을 잊으셨습니까?"
"그때 일을 이용해서 거저로 협력케 할 수는
없었나? 신문사에 그 사실을 폭로하겠다든지 그렇게
겁을 주어서 -- "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그 사람도
호락호락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사실이 신문에 새어
나가면 아마 자신은 비난의 대상이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앞으로 우리들에게 협력할 학자가 하나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우리 쪽에서도 또한 학자를 상대로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으므로
도리없이 달라고 하는 대로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라뇨?" 밴 에이벌리가 물었다.
"포괄분석에서 뭘 하고 있다는 건가?"
"아, 그 일 말이군요. 그것이 아주 묘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해리."
"어떤 식으로 묘하다는 건가? 청소부들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단 말인가?"
"정보는 잔뜩 끌어모았지요 --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아무도 짐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르윈터는 빚을 너무 져서 꼼짝 못할 처지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법정에서는 이혼수당 지급을
독촉하고 있는 형편이고."
"그럼, 그는 빚을 피해서 망명을 했다는 건가?"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보스턴 지역의
과격분자와 가까이 지냈었습니다 -- 먼저 PEACE
녀석들과 -- "
"녀석들에 관한 파일은 있었을 테지?" 듀크스가 밴
에이벌리처럼 두 손을 맞잡고 힘껏 내뻗기 시작했다.
"그 지역 FBI가 그들의 집행위원회에 부원을
잠입시켜 놓았습니다. 그렇게 힘껏 뻗으면 안됩니다,
해리. 살짝 힘을 넣어야 합니다. 그래요, 그렇게 하는
겁니다. 르윈터는 MDL에도 관계했었는데, 어느 정도
깊은 관계였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 밖에
쓰레기에 대한 미친놈 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쓰레기?"
"아마 르윈터는 몇십억 달러나 드는 국가적
고형폐기물 처리계획을 추진하려고 했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의원에게까지 그 이야기를 가지고
갔었던 것 같습니다. 그 계획은 르윈터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었는지 -- 이 점이 재미있습니다
-- 꽤 분별이 있어 보이는 그의 형 말에 의하면
동생은 소련이라면 그 계획을 이해하고 정책으로
받아들여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는 겁니다."
"그거 정말 전대미문의 웃음거리로군...... 쓰레기
처리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소련으로 망명했다니!"
"그것만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 점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인데요, 아무래도 르윈터는 8~9살 때에
잃었다는 초인적인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망명한 날 소련 대사관으로 가기 직전에 시를
인용한 쪽지를 여자친구 앞으로 보냈습니다."
"녀석은 인텔리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야. 하나도
어렵게 생각할 것 없잖나?"
"그는 그 시를 꼭 한 번, 그것도 8개월 전에 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유로 해서 그 초인적인
기억력으로 이야기가 되돌아간다는 말인가? 어쩌면
일본에서 같은 시를 찾아냈을지도 모르지 -- 그곳에도
도서관이란 것이 있다네."
"아닙니다. 포괄적 분석반에서 이미 조사를
했습니다. 도쿄의 문화담당이 알려온 바에 의하면
도쿄 주변에는 그 시가 실려 있는 잡지는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 분석반이 전문의에게서
초인적인 기억력에 관한 의견을 듣는 바람에 더더욱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은 그런 초능력이 회복되는 수가 있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회복 같은 건 있을 수 없다고 한 겁니다."
"그래서 분석반에서는 그런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가?"
"그러니까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그 분석반을
책임지고 있는 빌링스는 분명히 가장 안전한 답을
끌어낼 생각인가 봅니다 -- 즉, 르윈터는 빚이나 그런
골칫거리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망명한 것이지, 중요한
정보를 가져간 것은 아니라고. 빌링스의 그런 생각은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기네
정보국이 중요한 일로 오점을 남기는 건 일체 피하고
싶겠지요. 게다가 르윈터가 MIRV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갔다고 하면 MIRV의 기밀유지에 관한
직무가 우리 쪽 아니면 다른 정부기관에 옮겨지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위험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겠지요. 저도 거기까지는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다이아몬드가 나타난 겁니다 -- 그는
분석반의 모임에 거의 다 참석하고 있으며, 그
3,000달러어치의 정보를 제공해 준 인물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가 작업의 진행을 관리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인 듯합니다. 더구나 그는 최악의
사태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 전념하고 있는 듯합니다.
예를 들면 그 초인적 기억력에 관한 조사를
진행시키기도 하고, 르윈터와 과격분자의 관계를
자세히 조사해 보라고 명령을 내린 것도
다이아몬드라고 합니다. 그 그룹 중 한 사람인
정신의학자는 철두철미하게 다이아몬드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우리 쪽 정보제공자인
물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얼굴을 대하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로 빌링스를 혐오하기 때문일 뿐 특별한 이유는
없나 봅니다."
"구더기 소굴 같군, 그렇잖나?" 듀크스가 말했다.
밴 에이벌리는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빌링스가 보다 안전한 답을 내놓으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다이아몬드는 왜 최악의 사태라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걸까요? 그를 잘 아시지요, 해리?
당신이라면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다락방 벽에 머리를 기대고서 듀크스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일어나서는
따라오라고 밴 에이벌리에게 손짓을 했다.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어." 다락방 층계 가까운 한쪽
구석에 듀크스가 일할 때 쓰는 방이 있다. 조그만
나무책상과 국무성의 정기간행물로 가득 메워져 있는
책장, 전기 스탠드, 거기에 소형 금고가 놓여 있다.
듀크스가 다이얼을 돌려서 금고를 열고는 오려낸
기사와, 사진을 붙여둔 스크랩 북을 꺼냈다.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 몇 장 넘기더니, "이걸 봐,
다이아몬드와 내가 영국에서 낙하산 훈련을 받을 때의
사진이야. 이것은 프랑스의 피점령지에 있었던
다이아몬드와 빅터의 사진이고 -- 빅터에 관한 것은
알고 있지? 체코에서 죽은 남자야. 이것이 칸의
크루아제트에서 세 사람이 찍은 거야."
"뒤쪽에 보이는 것은 독일병인가요?"
"그래. 나는 한동안 런던에 있으면서 다이아몬드를
뒤에서 지시만 했었는데, 그 뒤 마리팀 알프스에서
그와 합류하게 되었네. 그 사진은 독일측의 우리
첩보망이 발각되기 직전에 찍은 거야. 이것은 종전
직후의 사진이야 -- 여기도 빅터와 다이아몬드와 나
세 사람이지. 지금은 그곳 이름조차 잊어버렸지만 --
당시, 우리 세 사람은 꽤 설치고 다녔었지."
듀크스는 이제는 오래 되어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그
자신을 분노와 향수가 뒤엉킨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알겠지, 프레드?"
"저는 둔한 편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해리,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고는 모르겠는데요."
"다이아몬드가 최악의 사태로 만들어 내려는 것은
그가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기 때문이야. 우리들은
둘 다 48시간 눈 한 번 붙이지 않고도 졸음을 느끼지
않던 무렵, 공포로 말미암아 생기는 에너지와
흥분만으로 일주일 동안 계속 일하던 무렵, 우리들이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을 무렵, 위험한 계획을
생각해 내서는 힘과 용기만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던
무렵의 그 지나간 좋았던 시절이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는 거라네. 나는 중앙정보부에 있기 때문에 아직도
조금은 그런 기회를 얻게 되지 --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그 세르뉴 사건 이후로 한직으로
쫓겨났어. 그것을 이번 르윈터 사건으로 다시
되살려보려고 하는 걸세. 프레드, 잘 듣게, 그는
최악의 사태로 일을 꾸밀 생각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야. 그것으로 끝낼 리는 절대로 없어. 그 녀석은
이 일을 대규모적인 작전행동으로까지 확대시킬
생각일 거야. 이번에도 세르뉴 사건 때와 같은 안을
생각해 낼 것이 틀림없어."
그런 다음 상당히 시간이 지나, 진토닉을 마시고,
불고기를 해치우고, 돌 아가야 할 가족들을
불러모으고 있던 밴 에이벌리가 듀크스의 팔을 잡고서
철조망으로 둘러처진 포치로 나갔다.
"당신들은 언제나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어느쪽 아내인가가 불평을 했다. "일의 어느
부분이 그렇게 재미있나요?"
"하나 잊고 있었습니다." 밴 에이벌리가 서둘러
말했다. "당신이 가 있는 사이에 우리 동료 하나에게
르윈터의 서류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우리 쪽에서도
좀 조사를 해보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서류를 가져간 사실을 다이아몬드가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는 어쩌면 소련 쪽에다 배경조사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모든 정부기관에
긴급조회를 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해리, 알려
주는 게 좋겠습니까?"
듀크스는 한동안 생각해 보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우리를 나무랄 기회를 다이아몬드에게 주는 건
싫어 -- 당분간 모르는 척하면서 어떻게 되어가는지
두고 보기로 하세!"
제 11 장
[극 비]
포괄적 성격분석 327호
대상 : A J 르윈터
총괄 : 로버트 빌링스
고문 :
첨부자료 : 8월 19일 실시된 면담 내용
[극 비]
A 보드킨 부원과 탄도탄 노즈 콘 연구개발과장
사이먼 캐스트너 박사와의 면담 내용 요약. 8월 19일.
피면담자는 MIT에서 르윈터의 상사.
[캐스트너] 르윈터 일로 왔겠군요.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소, 그렇죠? 그런 줄 알았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었지. 르윈터가
나타나지도 않고, 편지나 전보, 그밖에 단 한마디도
연락이 없는 거요. 망명을 했소?
[보드킨] 나는 그쪽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캐스트너 박사님. 당신과 마찬가지로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캐스트너] 그래요, 물론 알고 있소. 이런 일에
대해서는 입이 아주 무거운 사람들이지. 좋소, 뭘
물어보고 싶소 ?
[보드킨] 제일 먼저 그가 당신 밑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우수한 연구원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캐스트너] 자세하게, 아니면 일반적인 이야기로?
구체적인 이야기가 되면 상당히 전문적인 것이
되는데.
[보드킨] 일반적인 이야기라도 좋습니다.
[캐스트너]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분이로구먼.
일반적 설명을 하자면 상당히 어렵다오. 여하튼 좋소.
르윈터는 -- 과거형으로 이야기해야 하나, 아니면
현재형으로 해야 하나?-- 요업학의 전문가로, 당연히
아주 우수한 사람이었소. 첫째,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서 일하게 되지도 않았지. 그의 전문분야는
탄도탄의 세라믹제 노즈 콘이며, 그 연구에는
요업학의 지식이 필요하오. 그는 전파를 반사하지
않고 오히려 흡수하는 세라믹 재료 개발반의
일원이었소. 우리는 전자투과성이 있는 물질을 찾고
있소. 말할 것도 없겠지만, 다른 나라보다 먼저 그런
물질을 개발하는 나라는 아주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지요. 다시 말하자면 그런 노즈 콘은 레이더에
탐지당하지 않는다는 게요. 레이더의 펄스가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오. 비전문가식으로 말하자면 레이더
스크린에 반사파가 나타나지 않는단 말이오. 소련이
그 노즈 콘을 탐지해서 추적할 수가 없게 되면 격추가
불가능해지는 거지요.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겠소 ?
[보드킨]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발견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
[캐스트너] 그랬으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전자를 투과하는 노즈 콘은 그 완성을 열망하고 있을
따름이오. 지금까지는 가장 유망하게 생각되던 물질도
대기권 재돌입 때의 고열에서 도저히 견뎌내지
못했소. 우리는 처음 시작할 때의 예산 -- 약 1,700만
달러 -- 을 거의 다 썼는데도, 성과라고 한다면 적이
보낸 콘의 도플러 효과를 7퍼센트쯤 틀어지게 할 수
있는 물질을 개발해 낸 정도인데, 그런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소. 도플러 효과는 상대 쪽이 미사일이 가고
있는 방향을 빨리 확인하는 데 이용할 정도이지, 그
효과에 거의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오.
[보드킨] 그렇다면 르윈터는 그의 전문분야에서
상대 쪽에게 이익을 줄 만한 비밀정보는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거로군요.
[캐스트너] 마침내 핵심을 건드리는군. 그렇소.
우리가 시도해 보고서 쓸모없다고 단정해 버린 수식
이외에는 르윈터가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
[보드킨]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연구분야를 좁히는데 보탬이
된다는 뜻으로라도요 ?
[캐스트너] 이론상으로는 당신 말이 맞소.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들의 연구방식에 잘못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 가령 아직 하지 않았다면 --
그들은 우리가 해온 것과 같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지요. 그러니까, 보드킨 씨, 가령 르윈터와
맞먹는 소련의 연구원이 내게로 오고 싶어 해도, 나는
말씀은 고맙지만 그럴 것까지는 없다고 말해 주겠소.
[보드킨] 르윈터가 담당하고 있었던 분야는 그
투과성을 가진 노즈 콘의 개발밖에는 없었습니까 ?
[캐스트너] 내게서는 그랬소. 4~5개월 전에
천체물리학에 관한 3개월 코스를 수료한 직후에 그가
일련의 MIRV 탄도를 생각해 낸 적이 있었소. 가짜
탄두가 진짜 탄도를, 그리고 진짜가 가짜 탄도로
날아가는 거지. 나는 그것을 탄도과(彈道課) 쪽으로
넘겨버렸소.
[보드킨] 그의 그 계획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
[캐스트너] 폐기해 버렸소. 너무 풋내기 같다는
것이었소. 완전히 초보자 같은 생각이었던 거요.
[보드킨] 그밖에는요? 그밖에는 그가 연구하고
있는 것은 없었습니까 ?
[캐스트너] 하하, 그 쓰레기에 관한 장난뿐이오.
당신들도 그것은 알고 있겠지 ?
[보드킨] 고형폐기물 처리계획을 말씀하십니까 ?
[캐스트너] 그렇소. 순수한 과외활동이지. 그리고
비기밀사항이고.
[보드킨] 그의 기밀정보취급자격은 어떻습니까?
그는 자기의 전문분야 이외의 일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까 ?
[캐스트너] 기밀에 관한 일이라면, 보드킨 씨,
내가 있는 이곳은 완전한 기밀실이나 다름없소. 그가
자기 자신의 연구실 이외의 자료, 정보를 본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해요. 게다가 아까도 말했지만, 그의
연구실의 연구성과는 지금으로서는 완전히 제로요.
[보드킨] 가령 그가 극비자료를 보았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럴 기회를 잡았을까요 ?
[캐스트너] 방금도 말했듯이 불가능하오.
[보드킨] 하지만 만일 가능하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요 ?
[캐스트너] 글쎄, 가정을 해본다면, 지하
금고실의 자료보관소에 가서 열람허가를
신청해야겠지. 어떤 특정한 서류철을 빌리자면
책임자의 서명이 들어 있는 '열람자격증명서'를
가지고 가야만 되오.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제7분류자료, 즉 세라믹 노즈 콘 자료의
열람자격뿐이었소.
[보드킨] 가령, 그가 기밀자료를 보관소에서
빌리는 데 성공했을 경우, 그 다음에 할 일은? 사진을
찍거나 복사를 할 수는 없습니까 ?
[캐스트너] 그것 또한 절대로 불가능하지요.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는 완벽한 기밀실과 같은
상태요. 그는 보관소에서 빌린 서류철을 가지고
열람실에 가야만 하고, 거기에는 열람실 경비원이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소. 그가 무엇이든 보고 베끼면
그 사실이 일지에 기입되어 경비과에 보고되고,
경비과에서는 왜 그가 보고 베껴쓰게 되었는지 내게
물어보도록 되어 있소.
[보드킨] 알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직접
자료보관소와 열람실 상황을 보고 와도 되겠습니까 ?
[캐스트너] 괜찮소, 보드킨 씨. 하지만 공연한
시간낭비에 불과할 게요. 여기는 기밀실과 똑같이
운영되고 있소. 게다가 일을 끝까지 따져봐야
르윈터가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그 스스로
고안해 낸, 초보자다운 탄도와 공상 같은 폐기물
처리계획밖에 없었소. 그것만으로 국경을 넘는
수단으로 삼기에는 아무래도 모자라요, 그렇잖소 ?
A 보드킨 부원과, MIT 탄도탄 연구개발과
자료보관소 사서인 P J 노블과의 면담 내용 요약. 8월
19일. 피면담자는 르윈터와 아무 관계 없음.
[보드킨] 이거야 원, 나는 당신이 자료보관소
사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노블] 하지만 사실인걸요. 그 사고 후에
사서보조에서 사서로 승진했지만 --
[보드킨] 그 사고라니 ?
[노블] 여기 있었던 매무스베리 씨 말입니다.
그는 극심한 근시였습니다. 인생의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걸까요? 그와 나는 휴가에 대해서
의논했었지요. 매무스베리 씨는 불쌍하게도
홀아비라서 그 독신자들만으로 떠나는 유람항해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카리브 해로 말입니다. 그런데
나와 헤어져서 10분도 채 못 되어 트럭에 치여 죽고
말았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정말 10분도 못 되어서.
[보드킨] 그것이 언제였소 ?
[노블] 그래요, 오늘이 19일이지요? 19, 18, 17,
16, 15, 14, 13, 12, 11, 10, 9, 8, 7, 6.
6일이었습니다. 내일이면 꼭 2주일이 됩니다.
[보드킨] 그렇다면 당신이 사서가 된 것도
2주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로군요 ?
[노블] 정식으로는 자료보관소 사서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 14년 간 사서보조로
일해 왔으므로 일에 관해서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신출내기는 아니지요.
[보드킨] 그런데, 노블 씨, 여기 연구원 중에서
르윈터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소? 머리글자가 A J
인데."
[노블] 안됐습니다만, 2주 전까지는 연구원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동안 일해
온 사서보조라는 직책은 시종 보관실 안에서만 일을
하는 것이어서, 두뇌명석한 양반들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 2주일 동안
여기를 다녀간 연구원 중에서 르윈터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군요.
[보드킨] 그럼, 다른 각도에서 물어보기로
합시다. 당신의 전임자인 매무스베리 씨는 신중한
사람이었소 ?
[노블] '미스터 세심'이라고 불러도 좋을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 점에는 정말 존경해
왔습니다. 정말 사서의 본보기 같은
사람이었으니까요, 보드킨 씨. 그의 묘비명에
어울리는 호칭이지요. '여기 사서 중의 사서 영원히
잠들다.'
[보드킨] 사서 중의 사서.
[노블] 틀림없습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뒤로
오랜 세월 동안, 그는 꼭 한 번밖에 실수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주 굉장히 엄밀한 정확성이
필요한 일을 하면서 14년 간에 지극히 사소한 잘못을
한 번밖에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본 적 있습니까,
보드킨 씨 ?
[보드킨] 아니, 못 보았소. 정말 대단한
기록이군요. 그런데 그 실수라는 게 어떤
것이었습니까 ?
[노블] 아, 그것 말씀이군요. 결국 우리는 모두
별수없이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케 하는
사소한 실수였습니다. 한두 달 전에 연구원 하나가
탄도의 수식을 잔뜩 쓴 종이를 가지고 내려와서는,
비교해 보고 싶은 점이 있다고 하며 탄도의 서류철을
대출해 갔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수식을 쓴 종이를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매무스베리 씨는 절대로
서류철을 대출해 주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그만 깜빡했던 거죠.
내가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가 쓴 수식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 실수라는 것도 불과 몇 분 간의 잠깐 사이였지요.
[보드킨] 몇 분 간이라고요 ?
[노블] 그렇습니다. 채 몇 분도 안되어서
매무스베리 씨는 그 연구원에게는 그 서류철의
열람자격이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 사람은
열람실에 갔어도 그 서류철을 펴볼 시간조차 없었을
겁니다. 그 두꺼운 낯짝에 기가 막힐 정도지요.
제7분류의 자료열람자격밖에 없는 사람이 여기에 와서
탄도관계의 자료를 요구하다니 !
[보드킨] 정말 낯짝 두꺼운 짓이군. 그래서
매무스베리 씨는 그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소 ?
[노블] 물론 그는 일지에 써넣었지요. 그런
점에서는 아주 까다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읽을 틈도 없이 서류철을 도로 빼앗아
왔으니까 정식 징계수속까지는 밟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하, 제법 괜찮은 표현이지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정식 징계수속이라는 것
말입니다.
[보드킨] 그래요, 아주 멋진 표현이군요, 노블
씨.
A 보드킨 부원과 보스턴 시 경찰의 매튼 프랭크
경감과의 전화대화 내용 요약. 8월 19일. 피면담자는
르윈터와 아무 관계 없음.
[프랭크] 매무스베리, 아서, 머리글자 R, 백인
남성, 62세, 키 171cm, 체중 70kg, 눈은 갈색, 머리는
백발, 이거요 ?
[보드킨] 그렇습니다, 경감님.
[프랭크] 알았소. 분명히 뺑소니차 사고였소.
[보드킨] 범인은 잡았습니까 ?
[프랭크] 아니, 잡지 못했소. 나는 이 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어요. 묘한 사건이라서 말이오. 피해자는
색깔이 선명한 노란 페인트로 양쪽에 회사명이 써
있는 소형 밴 트럭에 깔렸지요. 대여섯 명의 통행인이
그 회사명을 기억했습니다. 회사명이 너무도 분명하게
눈에 띄었기 때문에 아무도 번호를 보려고 하지 않은
거지요. 페어팍스 유업(乳業). 그렇게 쓰여
있었다더군요. 페어팍스 유업이라고.
[보드킨] 그 사건이 어디가 묘하다는 겁니까 ?
[프랭크] 페어팍스 유업이라는 회사는 없단
말이오. 보스턴에도, 매사추세츠 주에도. 그리고
우리가 조사해 본 바로는 동해안 어디에도 없었소.
A 보드킨 부원과 열람실 경비원 루이스
멘덜리니와의 면담 내용 요약. 8월 19일. 피면담자는
여러 번 열람실에서 르윈터를 감시했음.
[보드킨] 언제 은퇴했습니까 ?
[멘덜리니] 1년 전 9월이오. 30년 간의 경찰관
생활을 했소. 지금 같은 장발족, 성도착증 환자,
마약상습자가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은퇴했어도
억울하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근무기간을 꽉
채워서 일했으니까.
[보드킨] 지금은 옛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겠군요?
[멘덜리니] 하루 해가 긴 건 분명해요. 그러나
적어도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신사지요. 그야
지루해서 견딜 수 없을 때도 있기야 하지. 그러나
연금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기에는 좋은 직장이지요.
내가 말하는 뜻을 이해하리라고 생각하는데 ?
[보드킨] 나도 언젠가는 같은 처지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곳 일의 순서를 간단히 설명해 주지
않겠습니까 ?
[멘덜리니] 좋소, 간단해요. 누군가가 보관실에서
자료를 빌리면 이 열람실에 오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소. 채크 -- 저 입구에 있는 경비원 말이오 -- 가
그 사람의 배지와 신분증명 카드와 서류철의 표제를
조사해서 여기에 있는 이 인터컴으로 내게
알려주지요. 나는 그가 말하는 대로 이 일지에
기입해요. 여기 써 있는 것처럼 들어온 시간과 나간
시간을 다 기입하는 거요. 그리고 나는 여기에 그냥
앉아서, 이 창을 통해 그들이 하는 일을 감시하는
겁니다. 이것은 저쪽에서 보면 거울로 되어 있소.
흔히 말하는 일방통행의 투시거울이라는 거요. 전에는
보통 창이 달려 있었는데, 모두들 신경질적인
인텔리라서 다른 사람의 감시를 받게 되면 안정이
안된다고 해서 투시거울로 바꾼 거라오. 웃기는 것은
모두들 여기 감시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점이지
-- 오랫동안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는 들어와서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드는 경우도 있어요 -- 그러나
들어와서는 먼저 각자 여러 가지 행동들을 하지요.
[보드킨] 예를 들어 어떤 행동을 ?
[멘덜리니] 콧구멍을 후비기도 하고, 엉덩이를
긁기도 하고. 저러다가는 누군가가 마스터베이션을
시작하는 건 아닐까 여겨질 정도라니까. 그러면 나는
일지를 쓰지요. 몇 시 몇 분, 입실, 사정(射精), 몇
시 몇 분, 퇴실. 허허 !
[보드킨] 그런데 르윈터라는 사람을 기억합니까?
39세, 중키, 머리칼이 엉성하고 배가 나오기 시작한
사람인데.
[멘덜리니]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 않소. 이름을 외우는 것이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일지에 써 있을 거요. 르윈터라고
했소 ?
[보드킨] 머리글자 A J. 대문자 L에 소문자 W로,
르윈터.
[멘덜리니] 나는 이런 식으로 알파벳순으로
찾아보기 쉽게 견출지를 붙여놓았소. 이름 옆에 그
사람에 관한 일지의 페이지가 기록되어 있소. 이
방법은 내가 고안한 거지.
[보드킨] 그가 마지막으로 왔을 때의 기록을
보여주지 않겠습니까 ?
[멘덜리니] 마지막 왔을 때 말이오? 곧 알 수
있지. 245쪽이군. 이것이 44, 이것이 45. 음, 이거요.
르윈터. 15시 35분에
'실전탄두탄도(實戰彈頭彈道)'라는 서류철을 가지고
왔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드킨] '통'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
[멘덜리니] 나만이 아는 '통독(通讀)'의
약칭이지. 즉, 한번 죽 훑어보았다는 의미이고,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 '숙'이오. '숙독(熟讀)'의
약자지. 내용에 몰두해 있었다는 의미요. 여기에
이렇게 쓰여 있군. '15시 42분에 매무스베리가
열람실에 들어와서 서류철을 덮치듯이 빼앗아 갔음.'
[보드킨] 뭐라고요? 매무스베리가 열람실에
들어와서 서류철을 덮치듯이 빼앗아 갔다고요?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
[멘덜리니] 허, 농담하시오? 매무스베리는 툭하면
뛰어들어와서는 서류철을 빼앗아가기 일쑤였는데.
굉장한 근시였거든. 그의 얼굴 앞에서 PTA 카드만
슬쩍 보여줘도 원폭 제조법에 관한 서류철을 빌릴
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으니까. 물론
내게는 관계 없는 일이지만. 여기서 감시하는 것이 내
일이니까 말이오. 하지만 비밀자료의
보관방법으로서는 꽤 허술한 방법이지, 그렇게 생각지
않소 ?
[보드킨]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제 12 장
리오 다이아몬드는 특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 기관차가 옆 선로에서 화차와
연결되듯이, 중단되었던 옛날의 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버릇에 의해서 무슨 일을 하는
습관이나, 자기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 자기의
지각력(知覺力)을 감싸고 있는 당의(糖衣)와도 같은
무관심, 게다가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찰칵찰칵 시간을 세고 있으며, 가끔 어깨넘어로
뒤돌아볼 때마다 인생의 중간점에서는 옛날 측선을
찾아내기도 이미 늦어버렸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그
시계, 그런 것들을 떨쳐버리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인 듯한 생각이 들었다.
포괄적 성격분석이 시작되기 이틀 전에 그와
세알라가 뉴욕행 비행기를 탔을 때에는 그 시계는
움직이지도 않았었다. 썰렁한 워싱턴의 땅거미 속에서
선회하는 비행기에서 멀어져 가는 시가지를 보고
있으려니까, 중단되어 있는 이 상태에서 그냥 있는
일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더없이 이치에 맞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억압된 소수 그룹의 일원으로 있는 기분은
-- " 세알라가 말했었다. 금연 표시가 꺼졌다.
자질구레한 온갖 것이 가득 들어 있는 카키색 낚시용
가방을 휘저어서 세알라가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래, 당신은 억압당한 어느 소수 그룹의
일원이었나?" 놀리는 듯한 어조로 다이아몬드가
물었다.
"그야 왼손잡이 소수 그룹이죠." 세알라가 말했다.
"당신네 쪽 보안부 사람들이 내가 왼손잡이라는 것은
보고서에 쓰지 않았나 보죠, 안 그래요? 세계에서
가장 차별적인 취급을 당하고 있는 그룹이 우리들
왼손잡이에요. 모든 것이 오른손잡이들을 위해서
만들어져 있어요 -- 기타, 깡통따개, 자동차의 기어
시프트, 라이플의 볼트, 카메라, 그 모두가. 우리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예요, 리오. 왼손으로 한
서약은 지킬 필요가 없는 서약이라는 것을 아나요?
프랑스 인이 저 사람은 고시(왼손잡이)야, 하고
말하면 손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이탈리아
인이 어떤 사람에게 만치노(왼쪽)라고 했다면
거짓말쟁이다, 사기꾼이다 라는 것이 되지요. 러시아
인들조차도 우리들을 차별하고 있어요 -- 그들이
뭔가를 '나 레보'로 한다는 것은 몰래 한다는
뜻이에요."
싸움에 이겨서 자랑스러운 듯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마치 누에고치처럼 두 사람을 감쌌고, 다이아몬드는
선택된 유일한 사람이라는 흐뭇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통로 저쪽 자리에서 계산서를 쓰고 있던 중년의
기술직 인물이 자기는 들어갈 수 없는 그 고치의
존재에 생각이 미친 듯, 부러운 듯이 옆눈으로 두
사람을 흘끗 쳐다보았다.
뉴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알라는 이스트
사이드의 어떤 아파트를 마음대로 쓰기로 되어 있었다
-- 에게 해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는 모델인
친구에게서 열쇠를 받아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그래서 그녀와 다이아몬드는 둘만의 세계를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애인관계로 들어간 뒤에 비로소 두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원했다. 그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어둠속에서 길러지고 있었던 식물이 햇빛
속으로 나간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러한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 다이아몬드와 세알라의 마음의 결속은
더욱 깊어졌다. 그 접착제 역할을 한 것은 두 사람 대
세상이라는 엷은 근거의 엘리트 의식이었다.
"그녀의 수다 들어보셨어요?" 미국의 기성복 쇼의
모델로서 소련으로 가게 되어 있는, 세알라도 포함된
그룹을 위한 보도관계자 초대 파티가 수행 사진사의
스튜디오에서 열렸는데, 그 파티 뒤에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자기 잡지사에서는 절대적인 독재자예요.
'섬세한 진주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과연 있을까?'
라는 메모를 직원들에게 돌려놓고는 '절대로 없어!'
라는 메모를 뒤따라 보낸다고요. 뭐든지 그런
식이에요 -- 질문을 해놓고는 마지막에 가서 자기가
대답하는 거예요." 그리고 세알라가 그 여자의 어조로
아주 멋지게 흉내냈다. "'당신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요? 너무너무 무서워요, 그렇잖아?
내가 말하는 것은 나이를 먹는다는 그 사실이에요.
너무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불가항력적이니까,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불가항력적이니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을 타이르고는
마음을 가라앉혀요. 당신은 당신의 독자적인
인생철학을 가지고 있나요? 이것이 내 철학이에요.
불가항력적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피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리고 또다시 리오는 자기가
세알라의 웃음의 고치 속에 느
긋하게 앉아 있음을 느꼈다.
"그 러시아 이야기 -- "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꼭
가야만 되는 거야?" 물론 그 여행에 대한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어찌된 셈인지 지금에 와서 비로소
세알라가 일주일 동안 없어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파티가 끝난
다음이었다. 세알라와 다이아몬드는 붐비고 시끄러운
이스트 사이드의 조그만 술집 겸 레스토랑에서 존과
조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클루즈만 부부와 조그만
테이블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술집 주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뚱뚱한 여자로서, 객석이 가득차 더
들어갈 자리가 없게 되면 출입구 앞에 버티고 서서
마치 문처럼 꽉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술에 취한
호모가 청하지도 않은 사람의 테이블에 끼어들었다가
상대방 남자의 남자친구에게 입구 쪽으로 쫓겨나고
있었다. 클루즈만 부부 -- 아내는 패션 에디터이며,
남편은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였다 -- 도
스튜디오에서 열린 파티의 초대손님으로 왔다가
지루함을 달래려고 파티의 결점을 찾아내어
깎아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 이야기는 그야말로
뒤죽박죽에다가, 둘 다 상대방 이야기에 관계없이
제멋대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상대방이 끼어들려는
것을 남자가 소리를 높여서 억누르려고 하고, 여자는
말의 간격을 좁혀서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보통은
숨을 돌리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사이를 두는
것이 자연스러운 때에도 숨 한 번 안 쉬고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
람은 순찰중인 경관 같은 눈으로 끊임없이 레스토랑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저 중국인 같은 여덟팔자 수염을 기른
사람 말이야. 잘못 보았을 리가 없어." 존 클루즈만이
말했다. "애머건세트에서 만났어. 릴의 가축
우리에서, 기억나지?......"
"......당신이 말하는 릴의 가축 우리라는
것은......"
존이 한껏 소리를 높여 조안이 끼어드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더러운 가축
우리야......"
"......틀렸어요......모양이 바뀌어......"
"......어쨌든......그런 소릴 하는 게
아니야......저 팔자 수염이 아직 브래지어도 안한
어느 철부지 여자애에게 자기는 피츠제럴드의 충고를
따르고 있는 거라고 말했었어. F 스코트야. 다 쓴
다음에는 목이 달아날 것을 각오하고 소설을 쓰는
거라나 봐......"
"그 여자애라는 것이 비어트리스
조이너예요......그녀의 레이아웃은 최고로......"
"......그래서 나는 단편의 줄거리가......"
"......당신, 그녀의 전남편과 만났어요......"
존이 더욱 옥타브를 올려서 계속 떠들어댔다.
"사형수 독방에서 책을 쓰고 있는 사람에 관한 거야.
다시 말하자면......"
"노 브라가 어떻다는 거예요......바디
스타킹......"
"......그 사람이 다 쓸 때까지 사형집행을
연기하기로 주지사가 인정한 거라고......알겠어?
그러니까 그 녀석은 다 쓴 날 목이 달아날 각오로
쓰는 거야! 그러니까 언제까지고 끝이 안 나는 거지."
존 클루즈만이 자기가 한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자, 그
틈을 노려 아내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당신네 남자들은 다 마찬가지군요.
단추구멍이나 겨드랑이 틈새로 들여다볼 수 있을 때는
그쪽에 정신이 팔려서 그 여자 자체를 보지 못해요.
바디 스타킹이라는 것은 정말 위대한
별명이에요......" 쉬지 않고 밀어붙이는 바람에,
남편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허공에 떠 있는 대화를 습기처럼 벽이 빨아들이고
있는 그 고치 안에서 다이아몬드가 질문을
되풀이했다. "아까 그 러시아 이야기, 기어이 가야만
하나?"
세알라의 손가락 끝이 그의 손바닥에 가만히 올려져
있었다. 그 조심스러운 접촉이 양극 사이를 달리는
전류 같은 격렬한 애정을 불러일으켰다. "당신이 가지
말라고 하면, 리오, 나는 안 가겠어요."
"안 갔으면 좋겠어."
"그럼, 안 가겠어요."
다이아몬드가 그날 밤 침대에서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정말 괜찮은 거야?"
"뭐가 정말 괜찮은 거예요, 리오?"
"러시아에 가는 거 말이야." 그가 말했다. "그
여행을 그만두어도 정말 당신은 괜찮은 거야?"
먼저와 마찬가지로 그가 가기를 원치 않는다면 안
가겠다고 그녀가 말했다.
숨이 막혀 버릴 듯이 깊고 강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조심스럽게 표현되는 애정이 지금은
두 사람 사이에 생겨 있었다. 그것은 동물원에서
자기는 동물원이 끔찍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그녀가
몸을 기대왔을 때, 그가 팔에서 느낀 그녀의 젖가슴의
압력에도 나타나 있었고, 대화가 어쩌다 끊기면 이미
말의 표현력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어렴풋이 얼굴에
떠오르는 조용한 미소가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천천히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서도 다이아몬드는
이미 알고 있는 그녀 인생의 중요한 사건을 연결짓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점점 알아갈 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그녀는 여배우가 되고 싶어서 케이프 코트에서
벌어지는 하계자주공연(夏季自主公演)에 참가하여
숨막힐 듯한 더위 속에서 두 달이나 보낸 적도
있었다. "여배우로서 내 경력 중 최고는 -- " 그녀가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티 앤드 심파시'의 주인공을
맡았을 때였어요."
다이아몬드가 미끼에 덤벼들었다. "주인공이라면
대단한데."
세알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낚시를 걸었다. "나는 차
끓이는 역을 했어요 -- 단원 중에서는 주전자에서
물이 끓기 시작하는 소리를 휘파람으로 흉내낼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매일 밤 무대
옆에 서 있다가 신호가 오면 차가 끓는 역할을 연출한
거예요." 낮은 소리에서부터 점차 높은 소리로
휘파람을 불더니, 허파가 텅 비어버리고 눈알이
튀어나올 때까지 계속 불어댔다. 그리고는 터져버릴
듯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침대 위에
쓰러졌다. 후에 다이아몬드는 그때 눈물 흘리던 일을
생각해 내고는, 그것이 지난날 괴로움으로 가득찬
시간에 대한 추억 같은 눈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어떤 때는 세알라가 미디 블라우스에 검푸른
주름 스커트 차림으로 기숙학교에 보내져서, 틈만
나면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편지를
아버지에게 썼을 때의 이야기도 하곤 했다. 8개월
뒤에 겨우 아버지가 꺾이고 말았다 -- 그러나 그
사이에 오래 된 녹처럼 이제껏 몸에 배어버린
쓸쓸함은 아무래도 씻어낼 수 없는 향기처럼 아직도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기숙학교에서는 뭘 했는데?" 다이아몬드가 물었다.
"쓸쓸함을 호소하는 기나긴 편지를 쓰지 않을
때에는 여드름투성이의 처녀들이 하나 가득히 모여
있는 방, 침대 위에 앉아서 섹스와 여드름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여자들이 섹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어떤
것들이 화제가 되나?"
"여러 가지 기회, 그러니까 온갖 것에 대해서죠 --
처녀성, 입으로 하는 섹스, 정액에는 칼로리가 얼마나
있는가, 삽입을 할 때에는 자기가 유도해 넣어야
하느냐, 아니면 상대가 넣도록 맡겨두느냐 하는 것들.
자기가 유도해 넣어야 하느냐 마느냐가 특히 논란이
많았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어떤 것이었나?"
세알라가 미소지으며, "아직도 모르세요?" 하고
되물었다.
점점 애정이 깊어지고 상대방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어감에 따라서 다이아몬드는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세알라를 보게 되었다. 그가 어린애 같은
천진함이라고 생각해온 것이 --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순진을 가장한 그 자신의 1차원적인
허구와 동일시되었지만 -- 실은 애띤 천진함이 아니고
강한 의지에 의해 이를 악문 솔직함이었다. 자기
마음이 끌리게 된 것이 그 점이었다고 이제야
다이아몬드는 겨우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 다시
말하자면 새로운 경험을 잃어버리게 될까 봐 두려워서
자기를 지키는 일을 거부하는 태도인 것이다. "나는
벽을 허물어 버리지 않고 사람들 마음에 접해 본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어." 부드러운 기분에 젖어
있던 어떤 때에 그가 말했다. 두 사람은 동물원에서
아파트로 돌아가는 도중에 60블록을 동쪽으로 향하고,
지하철 공사의 먼지와 잡동사니 더미, 무뚝뚝하게
벽에 기대어서서 지나가는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작업원들이 줄지어 있는 곳 옆을 지나갔다. 사람들의
무리가 세알라와 다이아몬드의 주위를 지나가기도
하고, 교통신호나 기분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소용돌이치기도 했다. "마치......"
"마치 뭐예요?" 세알라가 재촉했다.
"마치 벽을 상대로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왔으며,
피가 통하는 인간을 만난 것은 당신이 처음인 듯한
느낌이야."
아파트에 도착하기 직전에 다이아몬드가 다시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아내와 사랑을 교환할
때마다." -- 아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 얼굴이
찌푸러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 "그녀에게서
은혜를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 당신의 경우엔
당신 스스로가 자신을 즐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
세알라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말했다. "그것을 캐고 들어가면, 나는 내 생각밖에는
하지 않는 여자라는 것이군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전혀 달라.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고 자기 일로 머릿속이 가득차 있어. 그러나
당신은 경험에 대해서 탐욕스러워." 사이를 두었다가
다이아몬드가 덧붙였다. "가끔 나는 당신에게 있어서
단지 한갓 경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어." 그는 그렇지 않다, 그런 것보다는 훨씬
뜻깊은 존재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그 말과, 그 말 속에 숨겨진 욕구를 흡수해 버린
채 말이 없었다.
세알라에게는 다른 일면이 있었는데, 다이아몬드가
근무처에서 전화를 걸어 포괄분석의 면담기록
제2회분이 방금 도착했기에 아파트에 돌아가기 전에
대강 훑어보아 두고 싶다고 했을 때 그녀의 그 새로운
면을 알았다.
"나는 어쩌라고요, 리오?-- 난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어요." 그 어조는 어둡거나 과장시킨 느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원한다는 것을 넘어 애원에
가까웠다.
"지금 읽어 두고 싶어." 이미 첫번째 페이지를
읽으면서 다이아몬드가 급하게 말했다. "뒤로 미루어
일거리를 쌓아두고 싶지 않아서 그래."
"미안해요, 리오." 설명 같은 것은 빼버린
사과였다. "내가 한 말은 잊어버려요." 그녀는 갑자기
전화를 끊어버렸다.
"대체 왜 그래?" 아파트에 돌아가서 다이아몬드가
물었다.
"난 가끔 그렇게 되는걸요." 그녀가 말했다.
이번에도 사과는 빼버린 설명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보이는 거예요 -- 하늘, 길거리, 장래,
과거, 현재, 나의 인생, 당신과 나, 그 모든 것들이.
한동안 나 자신을 받쳐줄 수 있는 것이 필요했어요 --
당신의 모습이. 하지만 이미 지나갔어요.
잊어버려요."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세알라의 마음속에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어떤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는 것을 알았다 -- 자포자기에 가까운
절망의 소리가. 돈키호테가 자기 안에 있는 풍차를
향해 창을 겨눈 것과 같이 그녀는 대단히 설득력이
있는 절망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다. 그녀의 거의
비정상에 가까운 솔직함이 실은 무관심에 대한 마지막
방어선이라는 것을 다이아몬드는 겨우 깨달았다.
무관심은 자포자기의 선봉인 것이다. 그녀의 잡다한
수집품 -- 그녀가 말하는 갖가지 부리 -- 조차도 그
싸움에 한몫 끼어 그녀가 거기서 출격할 수가 있고,
또 전세가 불리해지면 도망쳐 올 수도 있는, 오래
살아서 정이 든 근거지를 만들어 두고 있었다.
다이아몬드는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냉혹한 눈으로
자신을 볼 수가 있는데, 마침 그런 마음이 되어 있는
어떤 때에 자기가 애인은 아니고, 그녀가 배를 매어둔
한갓 말뚝에 불과한 듯이 생각되었다 -- 하루, 혹은
일주일, 아니면 한 달 동안, 마침내 절망에 완전히
저버려서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여행길을 다시 나서게
되기까지 잠시 머물러 있는 곳에 불과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 그 일 사과하겠어요, 리오." -- 이번에는
완전한 사과였다 -- "그렇게 전화를 마구
끊어버려서." 갑자기 세알라의 기분이 변했다.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두 팔을 벌린 채 -- 블루
진을 입고, 허리부터 위는 알몸이었다 -- 요염하게
미소지었다. "화난 것은 아니죠, 그렇죠?"
"화 안 났어." 그는 그녀의 기분에 맞추어 말했다.
"또 밖으로 식사하러 나가고 싶어요?"
"아니, 당신이 가고 싶지 않다면."
"난 가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말했다. "냉장고에
달걀이 몇 개 들어 있어요 -- 저녁으로 오믈렛은
어때요?"
"오믈렛이면 됐어 -- 전쟁중에 프랑스에서는 흔히
핀제르브를 먹었지. 플라스카시에라는 곳의
교외농장이었어. 닭이 많아서 달걀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식료품이 없으면 오믈렛을 해먹었지."
"전쟁중의 당신 모습은 아무리 해도 상상할 수가
없어요." 세알라가 말하고, 미소짓고, 그에게
입맞추고는 저녁 준비를 하러 갔다. 저녁을 마친 뒤에
어째서 오믈렛에 케첩 같은 것을 쳐서 먹을 마음이
생기느냐고 그녀가 물었다. "맛을 망쳐 버리는데."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야." 다이아몬드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프랑스에서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달걀을 보는 것조차도 싫어졌거든."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았어요?"
"말했었지. 달걀을 자주 먹었다고."
"하지만 싫어한다고는 말하지 안았잖아요."
"설마 그렇게 둔하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다음에 세알라는
다이아몬드가 강 하류인 맨해튼 끄트머리 쪽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태양이 월
가(街)의 고층건물 너머로 가라앉기 시작했고, 섬과
브루클린을 잇는 다리의 윤곽이 뚜렷이 떠올라 이스트
강이 수은등과 그림자의 레이스 모양으로 바뀌어
있었다.
"맞춰 볼까요?" 세알라가 말하고서, 그가 망설이고
있는데 그녀가 덧붙였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르윈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 기억하고
있겠지? 그 러시아로 망명한 사람 말이야."
"CCP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나요?"
"CPP야 -- 포괄적 성격분석. 불행하게도 내가
예상한 쪽으로 가고 있어."
"극비정보를 가져갔다는 말이로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물론 사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서 이 나라가 시작된 이후로는 가장
중대한 망명사건이 될지도 몰라." 다시 이야기를
계속해서 자기의 생각을 입증할 수 있을 것 같은
사실들을 골라냈다. "르윈터는 그 자신의 연구분야에
관해서는 중요한 정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다른 분야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자료를 잠깐
본 적이 있어."
"하지만, 리오, 잠깐 본 것만으로 그것이 도움이
되겠어요? 사본을 만들든지, 사진을 찍든지, 완전히
외워버리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세알라가 아마추어의 처지에서 마치
보통 사람이 어릿광대에게 재료를 제공하듯, 프로인
다이아몬드에게 계속 질문을 해댔다.
"상식적으로는 그 말이 옳아 -- 설령 보았다고 해도
그것을 가져갈 방법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런데 우리의 친구 르윈터는 초인적인 기억력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는 것이 판명된 거야."
다이아몬드는 그가 쪽지에 적어 보냈다는 시에 대한
것, 비상한 기억력을 일단 잃었다가도 나중에 가서
그것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 전문가의 견해
등을 그녀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까, 그는
슬쩍 한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일을 끝낼 수가 있는
거야. 모든 수식을 완전히 암기해 버릴 수가 있는
것이 분명해."
"그것만이 아니겠죠, 리오? 다른 것이 더 없다면
당신은 그렇게까지 확실한 단정은 하지 않을 거예요."
다이아몬드는 그림자가 수면의 반짝임을 차츰
지워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어 -- 많은 단편들이 어떤 형태와
너무도 딱 들어맞기 때문에, 그 이외의 다른 형태로
맞추어보기가 아주 어려워. 첫째로, 르윈터가 망명한
직후에 어떤 인물이 그의 아파트에 가서 그의
개인적인 서류를 몽땅 가져갔어. 이쪽의 어느 기관
사람인가 해서 조사해 보았으나 아니었어. 이렇게
되면 그건 저쪽 사람이라는 얘기가 되는 거야.
녀석들은 자기네 품속으로 뛰어든 인간이 어떤
사람인가를 조사하는 데 꽤 극단적인 방법도
불사했다는 것이 확실해 -- 즉,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라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거지. 다음으로는 매무스베리라는 사서에 관한 게
있어. 망명 사흘 뒤에 -- 그 무렵이면 예비적인
정보청취가 이미 끝났을 거야 -- 르윈터에게
극비서류철을 대출해 준 사서가 페어팍스 유업의
트럭에 치여 죽었단 말이야."
"우연의 일치에 불과해요." 자신없는 어조로
세알라가 말했다.
"경찰이 조사를 했는데 -- 동해안에는 페어팍스
유업이라는 회사가 없다는 거야."
"하지만 왜 그 사서를 죽여야만 했나요?"
"최고기밀정보를 르윈터가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 버리기 위해서지.
그에게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으면, 우리 쪽에서는 그의 망명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거든 -- 그러니까 그가 훔쳐낸 수식을 바꾸지 않게
돼."
"당신은 그들이 정말로 그 사서를 죽였다고
생각해요?" 세알라가 겁먹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아주 무서운 일처럼 생각되었다.
"내가 하는 일에서는, 세알라, 우연의 일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야."
"르윈터에 관한 것은 어쩔 셈이에요?"
다이아몬드가 웃었지만, 그 웃음은 쓰디쓴 맛을 꽤
분명히 풍기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가장 많아. 꼭 내가 담당해야만 할 확실한 이유가
나타나지 않는 한 정보부에서 취급하게 되겠지."
"당신은 자신이 직접 하고 싶지요, 그렇죠?"
"그래, 내 손으로 해내고 싶어 -- 이런 일은 굉장히
의욕을 느끼게 하거든. 말하자면 승부 같은 것이지.
내가 직접 어떤 수를 생각해 내지. 그리고는 상대가
이쪽 말의 움직임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리고 이쪽에서 상대의
다음 수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상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아내려 하고. 그러면 이쪽은
다시 새로운 수를 생각하게 되지. 일종의 체스 같은
거야, 세알라. 지극히 분명하고 합리적인 말의
움직임이 있으며, 때로는 그런 식으로 말을 쓸 때도
있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몇 백 번 중에서 한 번밖에
떠오르지 않는 멋진 새로운 수를, 번뜩이는 영감 같은
것을 늘 찾는 거야. 언젠가 세르뉴 사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기억나지?-- 그 작전이 바로 그랬었어 --
성공의 가능성을 감춘 멋진 수였어......성공했을지도
몰라......" 다이아몬드의 생각이 원통한 추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이윽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을
계속했다. "당신, 체스할 줄 아나?" 그녀가 '노'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체스를 할 줄 아는 여자는 본
적이 없지. 그건 남자들의 게임이야 -- 사실 체스라는
것은 무서운 승부야. 잔인할 만큼 무섭고 교활함을
필요로 하지. 싸움과 침략, 기량과 용기가 합쳐진
게임이야. 믿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살아 있는
인간을 사용해서 체스를 하는 꿈을 흔히 꾸어. 그
판에서 밀려난 인간은 살해되지......"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세알라가 낮은 목소리로
가로막았다. "정말로 해낼 수 있나요?"
"확신이 있어. 희생시키는 일도 할 수 있어 -- 어떤
위치를 차지하거나 우위에 서기 위해서 사람을 하나
배반할 수도 있어. 나에게 그런 정도의 용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세알라가 그 말을 되십고 있는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사건을 당신이
맡게 되면 르윈터를 어쩔 셈이에요? 나라면 어떻게
할는지 알지만."
인간을 쓰는 체스에 정신이 팔려 있던 다이아몬드는
어렴풋이 흥미를 느꼈을 뿐이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지?"
"간단해요. 그가 훔쳐간 수식을 바꿔버리는 거예요.
새로운 수식을 쓰겠어요. 그렇게 되면 그가
상대방에게 준 정보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지요."
"돈이 너무 많이 들어 -- 600~700억 달러나 들지.
다른 수를 생각해야만 해."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일종의 게임이 되어,
세알라는 아마추어로서 명예를 끝까지 지킬
생각이었다. "좋아요. 같은 정보이긴 하나 내용이
다른 것을 가진 두 번째 망명자를 보내어 러시아
인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어떤
점이 나쁜가요?"
"시간이 너무 걸려. 망명자로 보이게 해서 잠입시킬
사람을 만들어내자면 몇 년이라는 세월이 걸려.
게다가 그 사람이 단 한 번이라도 실수를 했다간 --
예를 들어 출신 고등학교의 이름을 틀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 첫번째 망명자가 아주 귀중한 정보를 가진
중요인물이라는 것을 상대에게 확신시키는 결과가
되지. 그러나 아직 실망하기에는 너무 일러. 큐피
인형을 상품으로 받을 작정을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거야. 당신이 이겼을 때에 있을 대서특필을
상상해 보는 거야 -- 미인 모델, MIRV를 구출."
"MIRV가 뭐예요?"
"혼자서 한번 생각해 봐."
"그 MIRV라는 것이 그가 훔쳐간 정보와 관계가
있겠죠, 그렇죠? 그럼, 좋아요, 이건 어때요?"
세알라가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고 복잡한 암산이라도
하듯이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정말 자신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아주 초보적인 방법이에요. 목적은
르윈터에게 의혹을 갖게 해서 상대방이 그를 믿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요, 상대방이 그가 하는
말을 믿지 않는 한 설령 그가 상대방의 수중에 있다고
해도 이쪽은 아무 걱정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가
진짜 망명자인 것처럼 러시아 측을 믿게 하려고
당신이 애쓰고 있다고 상대측이 느끼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를 진짜라고 믿게 하려고 당신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연히 상대방은 그를
가짜라고 단정할 거예요. 그 방법은 어디에 약점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녀는 어떤 허점을 지적당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그 생각을 다시 한 번 말해 주지 않겠어?"
그녀가 다시 되풀이한 다음에, "그렇게 하면 어떤
점이 문제가 되나요?" 하고 마무리지었다.
다이아몬드는 아직도 강 쪽을 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물이 새까만 액체로 바뀌어 있었다. "당장
무슨 문제점이 있는 것 같지는 않군. 한동안 생각할
시간을 줘."
다음날은 둘이 뉴욕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이므로,
하루를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 여느 때보다 일찍
침대로 들어갔다. 세알라가 잠든 뒤에도 오랫동안
다이아몬드는 눈을 크게 뜨고서 머릿속의 어둠을
노려본 채 누워 있었다. 새벽 2시에 부엌에 가서
커피를 끓였지만, 한동안 마시는 것도 잊고 있었다.
생각이 났을 때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5시
54분이 되어 창틀 위쪽에서 차츰 회색빛이 퍼지고
있을 때에 세알라를 흔들어 깨웠다.
"왜 그래요?" 졸린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다이아몬드는 무슨 비밀스러운 농담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이 미소를 머금고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때, 체스를 배우지 않겠어?" 그가 말했다.
제3부 중반전
제 13 장
오후는 비가 계속 내려서 눈물 모양의 빗방울이
실에 꿰인 듯이 끊임없이 떨어져 나뭇잎을 때리고,
색이 변해 버린 구리로 된 홈통에 모여서는 소리를
내며 땅 위로 떨어졌다. 포고딘과 르윈터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지고 비는 그쳐
있었지만, 포장이 끊긴 막다른 골목부터 별장까지의
약 100미터는 온통 진흙 바다였다.
"판자를 깔 생각인데, 어찌된 셈인지 생각과 행동
사이에 있는 틈이 아무리 시간이 가도 좁혀지지
않는군." 두 사람을 맞아들이면서 자이체프가 웃으며
말했다.
"이 세상에 흔히 있는 부도덕이야......용서해
주겠네." 포고딘이 위엄있는 어조로 말하고는, 엄지
손톱으로 자이체프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여하튼 잘 오셨습니다, 포고딘 교황님."
자이체프가 큰소리로 말하고는 애정이 깃든 행동으로
포고딘의 어깨를 안았다. "가르쳐 주게, '환영'은
영어로 뭐라고 하나?" 포고딘이 가르쳐 주자
자이체프가 새삼스러운 태도로 르윈터 쪽을 향해 손을
내밀면서, "웰컴." 하고 말했다. 자이체프의 입에서
고약한 알코올 냄새가 났으므로 르윈터는 순간
멈칫했다. 자이체프가 다시 포고딘 쪽을 보았다.
"자네와 함께 온 사람은 영양과다의 요정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그 성격의
나약함에는 눈을 감고, 일단 환영한다고 말해 주게 --
내 오두막으로, 러시아로, 에트세트라, 에트세트라."
안으로 들어가니 별장은 젖은 나무, 젖은 양털,
그리고 발에서 나는 고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자이체프의 손님들이 말릴 생각으로 벗어놓은 구두가
입구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방 자체는 18세기
러시아의 장원 영주의 저택처럼 안쪽의 길이가 폭의
배 쯤은 되어 보였다. 조각으로 장식한 쇠살문은
눅눅한 밤공기를 향해 열려 있다. 자이체프는 이
별장을 여름 동안밖에 쓰지 않으므로, 창문에는
유리가 끼워져 있지 않았다. 따뜻한 계절이 끝나면
그는 중앙난방이 되어 있는, 지내기 좋은 모스크바의
자기 아파트에서 벗어나는 일이 결코 없었다.
방 저쪽 끝에는 아직 젖어 있는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창을 거쳐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너무도
가늘어 빛으로 된 실처럼 보이는 거미줄이 두 장의
잎을 이어놓고 있었다. 8월에 하나의 지붕 밑에 모일
수 있는 러시아 지식계급의 견본 같은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열 명 남짓,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벽에
기댄 사람도 있었다. 글렌피디치 스카치나 레미
마르탱 코냑, 혹은 마개가 없어서 일단 열면 다
마셔버려야 하는 폴란드산 워커의 빈 병이며, 반쯤은
빈 병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담배꽁초와 담뱃재,
담뱃재에 구른 듯한 사과 속, 체리씨 등이 접시에서
넘쳐나와 있다. 조그맣게 문을 해달아서 술병을
넣어두는 찬장으로 개조된 옛날 난로 옆에서 무척이나
아름답고 아주 취해 버린 발레리나가 마룻바닥 위에
퍼질러 앉아 마음놓고 울고 있었다. 누군가가
달래려고 하니까 점점 더 심하게 운다. 그녀가
훌쩍이면서 띄엄띄엄 하는 설명에 의하면, 그녀가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지 못하는 단 한 가지 원인은
역시 댄서인 그녀의 남편이 호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발레계에서는 호모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모양이다.
"소개하겠소!" 모두의 주의를 끌도록 나이프로 워커
병을 두드리며 자이체프가 소리쳤다. 그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고, 눈 가장자리가 붉게 짓물러 술과
더운 기운으로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 다시
말하자면 최고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통역을 해주게, 예브게니." 그가 포고딘에게
말했다. "사람의 이름은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자네의 미국인은 기억할 수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내가 붙이는 주석은 신중하게 번역을 해주게. 여느
때처럼 아주 귀중한 평가니까." 또다시 자이체프의
독백을 듣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맥빠진 이야기
소리들이 조용해졌다-- 파티가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저 울음소리는 발렌티나 벨레지코바요." 마룻바닥
위의 발레리나를 가리키며 자이체프가 말하기
시작했다. "울지 않을 때에는 오디트 같은 얼굴, 오딜
같은 마음을 가졌지." 모두들 웃었고, 당사자인
발레리나조차도 울음 섞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청중들의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이쪽은 알렉산드르 티모센코요. 평범한 번역인,
무기력한 편집자, '노비 밀'의 편집위원 중에서
꺼져가는 자유의 빛, 작가동맹에서 가장 늦게 쏘는
명수지." 실제로는 티모센코는 전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리베랄 파의 작가중 한 사람이며, 자이체프가
굉장히 존경하고 있는 인물이다. "알렉스, 이 사람은
예브게니 미하일로 비치 포고딘, 양면성(兩面性)
지식인, 양면성 인본주의자(人本主義者), 양면성
공산주의자, 양면성 관료일세. 표면적으로는 완전한
공산주의자지. 한 껍질 벗기면 거기에는 레닌도
마르크스도 아니고 탈라스 브리바야. 그런 점에서
그는 러시아와 공통점이 많아. 양면가치의
병존(竝存)은 우리의 마음을 아는 열쇠인 거야,
알렉스. 영국의 작가 토머스 칼라일은 그 점을
파악했어, 그렇지? 그가 창조한 인물, 디오게네스
토이펠스드렉의 사상이 그거야 -- '신의 아들'을
뜻하는 디오게네스, '악마의 똥'을 의미하는
토이펠스드렉. 양면가치 병존의 전형이야. 그런데
레닌 도서관에서 칼라일의 번역서를 대출받는 데
문화성의 허가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나?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그는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진정 이해하고 있었지. 그 이야기는 이제 끝. 자,
알렉스, 우리의 어머니인 러시아에 입국하기 위해서
대단히 노력한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 미국의 망명자 르윈터를 소개하겠네."
자이체프는 '망명자'라는 말을 마치 무슨
직업이라도 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르윈터의 어깨
뒤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포고딘은 그 독백을
부분적으로 통역했을 뿐이었다 -- 사람들의 웃음을 알
수는 있었지만, 모욕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완전한 대머리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티모센코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과 악수를 했다.
선생이 출석을 부르듯이 자이체프는 손님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해 나갔다. 그 안에 솔로몬 카가노비치가
있었다. 유명한 유태인 작가로서, 시베리아의
유형지에서 14년을 보낸 뒤에, 지금은 모스크바의
중심적인 패션 스튜디오인 돔 모델리에서 잡일을
맡아보고 있다. 낮에 그 카가노비치가 이 별장에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을 넘치게 해버리는 바람에
자이체프가 그를 '배관공의 두목'이라고 소개해서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 그것이 아직 펴내지 못한 채
그냥 있는 스탈린에 관한 카가노비치의 유명한 저서
제목이었다. 세르게이 예브드모트는 동요
작곡가이지만, 한편으로는 앵글러 극에 쓰이는
외설스러운 노래를 계속해서 작곡하고 있다.
자이체프는 그를 '러시아 최고의 화장실
낙서꾼'이라고 소개했다. 자이체프의 전처는 금니가
유난히 눈에 띄면서도 낡아빠진 듯한 느낌을 주는,
가엾을 정도로 가슴이 납작한 여자이며, 별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저널리스트인 지금의 남편인
부브노프와 함께 와 있었다. 소개를 할 때에
자이체프가 고의적으로 그의 이름을 잘못 말했지만,
부브노프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어서 자이체프의 잘못을 바로 잡아 줄
여유조차 없었다. 다음으로 소개된 사람은 그의 현재
애인이며, 그가 남모르게 '암소'라고 부르고 있는
여자였다. "이쪽이 -- " 그녀의 오른쪽 젖가슴을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자이체프가 말했다. "재채기를
아리아로 바꾼 고초열의 여왕. 나의 카트리나일세."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가 재채기를 해서
자이체프가 말했다. "이거 멋지군, 황송합니다."
무화과 가지가 들어와 있는 창 옆 한구석에 근처
마을에서 온 단단해 보이는 체격에 말이 없는 목공
슈리아프니코프가 완전히 취해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낙서 전문가인 예브도키모프가 커피 하우스에서
만나서, 자기가 얼마나 계급의식이 없는가를 과시하기
위해 데리고 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이체프가
지적했듯이 그가 얼마나 계급을 의식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했다. 그 목수 옆에 마흔이 채
안된 무서운 얼굴을 한 생화학자, 안드레이
안트노프-오브센코가 앉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1936년의 숙청으로 스탈린에게 처형당하기 전까지는
장래가 촉망되던 육군 장교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무슨 일에 대해서건 단 한 번도 항의를 해본 적이
없는 안트노프-오브센코는 아주 최근에 사람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무궤도한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특별히 설립된 정신병원에서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A 아크셀로드라는, 체제에
비판적인 시인의 재심을 정부에 요구하는 성명서에
서명했다. 때마침 그날 아침, 안트노프-오브센코는
그의 이름이 특별히 눈에 잘 뜨이는 그 성명서가 뉴욕
타임스 신문에 실렸다는 것을 알았다. "이 안드레이는
풋내기 아이스
스케이터라오." 자이체프가 소개했다. 힘없는
웃음을 띤 안트노프-오브센코가 새로 온 손님에게
손을 흔들었다. "보다시피 -- " 자이체프가 덧붙였다.
"그는 아주 얇은 얼음 위를 달리고 있지요."
"신의 은총이 없었더라면 자네도 거기에 갔을
거야." 방 구석에서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모두가 웃었다.
"그것은 무슨 뜻이오?" 포고딘이 통역을 하자,
르윈터가 물어보았다.
"나도 모르겠소."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포고딘이 말했다.
방안에는 그 밖에도 네다섯 명의 손님이 더 있었다.
볼리쇼이의 음악가 두 사람, 아무도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는 남자 하나 -- 자이체프가 그를 '알려지지
않은 손님'이라고 소개했다 -- 그리고 또
크레스테인스키라는 성을 갖고 있긴 하나, 방에
들어왔을 때에 그의 퍼스트 네임을 아무도 -- 적어도
주인이 -- 기억하지 못한 하급 외교관이 있었다.
카이로 근무를 마치고 막 돌아온 크레스테인스키가
깡통에 든 대마초를 가져왔으며, 손님 중 몇몇은 저녁
먹기 전에 시험해 보고 있었다. 그 녀석들도 한 대,
두 대 피우더니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를 내고는 다시
알코올 성분이 강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의 자이체프 -- " '암소'가 콧소리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음악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점호가 끝나면
다른 레코드를 틀어요."
"이 미국인에게 어울리는 것을 한 장 틀기로 하지."
자이체프가 말했다. 그는 신중한 솜씨로 다이아몬드
바늘을 레코드 위에 올려놓았다. "그를 쉬게 하기
위해서라고 전해 주게, 예브게니. 무엇보다 기분이
소중한 것이니까. 이 레코드는 일종의 클래식
판이라는 거야."
자이체프가 틀어놓은 레코드는 '신스 오브
오미션'이라는 미국의 그룹이 부른 8개월 전의 히트곡
록 음악이었다. 그 곡은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되었다.
재에서 재로, 그렇다.
똥에서 똥으로
모두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까, 놀랐지.
마법의 거울을 보듯이
온 방안의 자이체프의 손님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가사에 황홀한 듯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르윈터는
처음 듣는 노래이며, 그 자신도 그 가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알고 있는 척하는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파티가 일종의 플라토 상태에 와 있었다 -- 어떤
계기로 아주 진지하거나 혹은 아주 유쾌한 분위기,
아니면 그 양쪽으로 변해 가는 상태에 있었다.
'암소'가 음악에 마음을 빼앗긴 채, 발 옆의 커다란
핸드백에 손을 집어넣어서 최근에 파리에서 돌아온
친구에게서 엄청난 값으로 사들인 프랑스의 새로운
항생물질 스프레이를 꺼냈다. 캡슐을 플라스틱
분무기에 끼우더니 그 전체를 입안에 밀어넣고 레버를
밀면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살충제 같은 냄새가
풍기는 안개 같은 것이 목구멍 안에 닿은 다음 차츰
코로 올라가서 막힌 코를 뚫었다. 카트리나는 종이
냅킨으로 한쪽씩 코를 풀었다. "기분이 아주
시원해졌어요." 그녀가 말했다. "프랑스 약은 정말 잘
들어요."
"지금 여러분이 본 것이 카트리나의 도락일세."
자이체프가 설명했다. "사람은 그림이나 우표, 금,
또는 애인을 수집하지만, 우리 고초열 히포콘데리
양은 약을 모으는 것이 취미지. 그것도 어떤 약이나
다 모으는 것이 아니고 서유럽의 약으로 한정되어
있어. 2층에 있는 장 속을 보여주고 싶군 -- 마치
약국처럼 미국의 알약, 영국의 연고, 프랑스의
스프레이로 가득차 있어."
"내가 가장 아끼는 보물은 서독의 피임 필과
스위스의 변비약이에요 -- 초콜릿 맛이 정말
굉장해요." 카트리나가 끼어들었다.
열심히 르윈터에게 통역을 하던 포고딘은 이
미국인이 가져온 고초열 알약이 생각났다.
"어리석은 자이체프여." '노비 밀'의 편집자
디모센코가 말했다. "자네는 약을 수집하는 일 자체를
반대하는 건가? 그 어조로 판단하건대 특칭(特稱)에서
전칭(全稱)으로 역비약(逆飛躍)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군."
"어떤 논리적 비약이라도 자네를 버려두고 가버릴
수는 없을 것 같구먼, 알렉스." 자이체프가 그
프랑스제 스프레이를 카트리나의 손에서 빼앗아
쥐고는 판토마임으로 목에서 코, 귀, 마지막으로
엉덩이에 분무하는 흉내를 냈다. 모두들 배를 잡고
한바탕 웃었다.
"당신 친구는 -- " 르윈터가 포고딘에게 속삭였다.
"굉장한 익살꾼이로군요."
"나는 어떤 종류의 수집에도 반대야." 장광설을
시작하려는 어조로 자이체프가 말했다. "수집은
공산주의라고 불리고 있는 혼합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리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이지."
모두들 입을 열어 자이체프를 부추겼다. "좀더
정확히, 자이체프." 유태인 작가 카가노비치가
말했다.
"자네 말이 옳아, 좀더 정확해야만 돼. 좋아,
논리를 분명히 밝히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수집한다는 것은 도착적 물질주의이며, 모든 것이
풍부한 이 나라에 있어서 그 어느 날엔가 무엇인가가
부족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되는 거지." 자이체프는 야유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모두들 이해하고 있었지만,
카트리나만은 예외였다.
"하지만 나의 자이체프." 그녀가 마치 노래하는
듯한 어조로 말을 가로막았다. "사실 부족해요.
당신이 마지막으로 100와트짜리 전구를 구해 온 것이
언제지요?"
"농민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알고 있소?"
카가노비치가 물었다. "부족은 모두 농민들 사이에
배분되어 있어요."
"그 말이 맞아요." 카트리나가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맞장구를 쳤다. "게다가 예쁜 것이나 예술품을 모으고
있는 사람은 어때요? 그것과 언젠가는 쓰지 않으면
안될 약을 모으는 것과는 그 뜻이 전혀 다르잖아요."
"이봐, 설령 예술품이 되었건, 겨드랑이 냄새를
없애주는 스프레이가 되었건 모두가 퇴장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어." 자이체프가 대답했다.
"아름다운 물건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날에
대비해서 아름다운 것을 사모아 두는 것과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 퇴장은 어디까지나 퇴장이며,
반사회적, 반사회주의적 행위인 거야. 요는 그렇다는
거야."
"그렇다면, 자이체프, 가령 자네가 자네의 표현을
빌려서 퇴장한다고 하면 무엇을 모으겠나?" 낡은 소파
가장자리에 등을 굽히고 앉아서 벌어진 두 무릎
사이에 손을 마주잡고 있는 티모센코가 물었다.
자이체프는 손가락 끝으로 콧날을 누르면서 1분쯤
생각하고 있었다. 무화과의 두 개의 잎을 잇고 있는
섬세한 실이 눈에 들어왔다. "거미줄이야." 그가
말했다. "거미가 이 세상에서 소멸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거미줄을 모으는 거라네."
"하지만 어째서 거미줄을?" 포고딘이 물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친구여, 거미줄은 압력,
장력(張力)이 완벽하게 계산되어 있어. 그리고
디자인은 어디까지나 실용적이야. 자재는 아주 싸고,
언제든지 구할 수가 있지. 게다가 지금 모스크바에서
계속 세우고 있는 스탈린 이후의 근대적 추악의
극치인 건물들과는 반대로, 아무리 바라보아도
실증나지 않아. 크츠조프스키 대로에 세워진 새로운
오피스 빌딩 군(郡) 이야기를 들었나? '코소몰
프라우다'에 나와 있더군. 녀석들은 창이 열리지 않는
건물을 짓고 나서야 설치해 놓은 냉방장치가 너무
작다는 것을 알았어. 야금 전문가 한 팀이 6월에
들어갔지. 그 전문가들이 몇 주일이나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걸 보고 관료는 그들이 열심히 연구를 해
나가고 있는 줄로만 알고는 전원에게 보너스까지
주었네. 그런데 7월이 되자 작업원들은 보너스만 주면
제일인 줄 아느냐며 출근을 거부하여, 결국 연구소는
고리키 거리의 낡아빠진 건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지-- 창문에 경첩이 달려 있을 정도의 구식
건물로."
파티의 분위기가 활기를 잃기 시작하면 자이체프가
반드시 보여주는 화려한 연기였다. 그 농담 중 몇
가지는 앞으로 몇 주일 동안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다.
청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귀를 기울였으며, 가끔
간단한 질문을 해서 그를 부추기기만 하면 되었다.
전부터 해오던 일종의 실내놀이였다.
"자네 친구는 이야기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나,
예브게니?" 자이체프가 물었다. "어쨌거나 우리의
파티에 호감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다른 손님들도 그 말장난을 눈치채고 있었다.
포고딘으로부터 단편적인 통역만 듣고 있던
르윈터가 포고딘에게 뭐라고 소곤거렸다. "이 사람이
-- " 포고딘이 모두에게 통역했다. "카트리나는 코가
아니고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구먼. 약을 모으지 않고 못 배기는 점은
정신분석 전문의에게 진찰을 받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자이체프에게 장단을 맞추기에는 안성맞춤의
말이었다.
자이체프가 무대에 선 배우 같은 몸짓을 해가며
큰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 " 두 팔을
들어올려 항복하는 몸짓을 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신에게 감사하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정신의학자라는 미친 하이에나들이
우리 나라의 도처에서 개업하게 되는 놀라운 사태가
발생했을 게 틀림없어. 나는 두 손을 들어
사양하겠네. 동과 서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소,
르윈터 씨. 당신들 나라에서는 임금님은 자본주의가
아니고 정신의학인 거요. 한편, 우리는 정신의학이
성직에서 쫓겨난 시골 목사 같은 처지에 있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고. 당신들이 감기에 걸리는 것은
자기의 직업이나 아내나 인생이 싫지 않기 때문이오.
우리가 감기에 걸리는 것은 병균 때문이며, 실은 아주
단순한 문제지. 당신들의 세계에서는 정신의학자가
걱정, 불안, 우울, 지루함, 사랑, 미움 등과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감정의 움직임이 의학적 치료를
필요로 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소. 여기서는
단지 술을 한잔하는 것만으로 일이 끝나지. 그 점은
크게 감사해야만 해요. 굳이 말하자면 정신의학자의
근본적인 결점은, 정상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단정하고 덤비는 점이지."
"하지만, 그건 그렇잖아요, 나의 자이체프?
정상이라는 것은 좋은 거예요, 그렇죠?"
"정상적이란 것은 말이야, 나의 사랑하는
카트리나." 자이체프가 짐짓 의젓한 어조로 말했다.
"창조력을 압살(壓殺)시키는 거야. 체스의 명수 중에
정상적인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나? 새 경제계획을
채용한 공장 중에는 공장장을 고르는 데 서쪽과 같은
방법을 쓰고 있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 다시 말하자면 심리 테스트를 하고 있는 거야.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 우수한 공장장이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도 모르면서, 우수한 공장장이 될 수 있는
인재인가 아닌가를 테스트 한다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거잖아!"
만취한 목수 슈리아브니코프는 그 대화의 대부분은
듣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심리 테스트'라는 말을
듣고서 사고(思考)가 자극을 받았는지, 방 한쪽
구석에서 큰소리로 자기 생각을 말했다. "우리 쪽에서
미친 사람으로 낙인찍힌 대다수는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소. 고마운 일이지." 그는 호응을 구하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는 인간들 중에 미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해." 티모센코가
차디찬 어조로 말했다.
"아크셀로드처럼." 그 말 잘했다는 듯이
안트노프-오브센코가 끼어들었다.
"자네는 어리석어." 안트노프-오브센코를
노려보면서 자이체프가 소리쳤다. "큰 바보야.
아크셀로드는 죽었어. 그것도 이미 몇 달 전에
말이야."
방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아크셀로드가 죽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그런 일을 남들보다 빨리 알 수 있는
처지에 있는 티모센코뿐이었다.
"지금 저 양반이 뭐라고 했소?" 르윈터가
포고딘에게 물었다.
"공통의 어떤 친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소."
포고딘이 얼버무렸다.
"그가 죽은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안트노프-오브센코가
물었다.
티모센코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것은 다른 시간에 다른 곳에서 해야 할 이야기야.
부탁이니, 그 이야기는 그만해 두게."
자이체프가 자기의 술잔에 다시 버본을 따랐다.
그리고는 단숨에 마셔버렸다. "다른 시간에 다른
곳에서." 그가 되풀이했다. "책 제목이 될 만한
말이로군."
"묘하군." 르윈터가 포고딘에게 말했다.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는데 분위기가 바뀐 것을 느낄 수
있으니."
그러나 자이체프는 다른 화제를 꺼내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모두들 알고 있나?" 그가 말했다. "페르시아 왕
자크시즈가 근시안이었다는 것 말이야. 그래서 그는
살라미스 만을 굽어보는 언덕 위에 앉아서 50척의
그리스 함대가 500척의 페르시아 함대를 쳐부수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작전을 바꾸지 않았던 거야. 눈이
잘 안 보였기 때문이지."
"부하 장수들은 그에게 전황을 알리지 않았었나
보지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손님이 물었다.
"자크시즈에게는 위대한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다른 병이 있었어." 자이체프가 말했다.
"자기 주변의 인간들을 믿지 않았던 거야."
"큰 인물 중에는 몸에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포고딘이 말했다. "흥미 있는 연구과제가 될
수 있을 거야."
"브레즈네프는 치질이 있다더군." 자이체프가
말했다. 그의 전처와 '암소'가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왜 웃는 거야, 카트리나? 치질약도
가지고 있나?"
"솔직히 말해서 가지고 있어요." 그녀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이탈리아제의 좌약을."
"큰 인물이라고 하면, 자이체프, 위대한 작가 중
대부분이 고양이를 귀여워했다는 것을 알고 있나?"
낙서 전문가인 예브도키모프가 말했다. "우리 나라의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푸슈킨 -- 명단을 읽자면 한이
없지. 자네도 모스크바에서 한 마리 기르고 있지,
그렇지?"
"기르고 있어. 골고리의 <죽은 영혼> 중에 나오는
나쁜 놈의 이름을 따서 치치코프라고 부르고 있네.
주인의 재산을 축내며 은혜를 모르는 행동을 하는
농노(農奴)들의 영혼을 사모은 사나이지.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특별한 종류의 인간이야. 개나
고양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그 사람에 관해 여러
가지를 알 수가 있지. 나폴레옹과 무솔리니는
고양이를 아주 싫어했어. 히틀러는 개를 좋아했고.
독일인에게서 볼 수 있는 권력주의자나 사디스트,
마조히스트나 호모는 개를 사랑하지. 섹시하고
자립심이 강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은 고양이를
사랑해."
"쿠빌라이 칸, 줄리어스 시저, 그리고 사자의
마음을 가진 왕 리처드 1세를 잊지 말게 -- 그들은
개를 좋아했다네." 포고딘이 말했다. "그들에게도
공통점이 있어."
"예브게니는 정말로 역사를 잘 아는군요." '암소'가
말했다.
"그런 족보란 말이야." 자이체프가 말했다. 그는
갑자기 아주 피로하고, 지루하고, 잔인한 기분이 되어
-- 가시를 품은 어조가 되었다. "그는 러시아사(史)
7권을 편찬하고 니콜라이 1세의 억지 변호를 한,
미하일 페트로비치 포고딘의 손자의 손자란 말이야."
포고딘은 너무 놀라서 입이 딱 벌리고 말았다. 함께
대학을 다닐 때부터 자이체프를 알고 있었지만, 자기
족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만일 미하일 페트로비치가 변명을 일삼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라면 나는 반대하겠어." 포고딘이
말했다.
"반대하는 것은 좋아. 몇 번이라도. 니콜라이는
폭군이었으며, 그의 변호를 시도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치치코프에 못지않은 사기꾼이야. 설령 자네의
고조부라고 할지라도 말일세. 즉위한 첫날부터 그는
12월당원들을 탄압했어. 그 뒤 그는 황제의 자리에
있는 동안에 소수민족을 박해하고, 자기를 비판하는
자유주의자를 억압하고, 비밀경찰조직을 확대해
나갔지. 니콜라이는 러시아라는 통치체제에 붙어
있었던 가족주의적인 곰팡이야."
"자네는 장점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나?" 포고딘이
물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려고 했다. 자이체프가
심심풀이로 자기를 깎아내리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꼭 하나 있지 -- 그는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
출현의 배경을 제공했어. 니콜라이의 러시아에서
푸슈킨, 렐몬토프와 골고리가 나타났어."
"어머, 나의 자이체프, 당신은 무엇에서든지 장점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군요." '암소'가 말했다.
"그렇지 -- 당신에게서조차 찾아내니까."
사람들이 당황하여 방안이 조용해졌다. 카트리나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자이체프의 농담이 도를
넘어버렸다. '노비 밀'의 편집자인 티모센코가 구조에
나섰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자이체프? 키릴
문자는 러시아에게 도움이 되었는가, 아니면 해가
되었는가?"
"정치적으로 말인가, 아니면 문학적 의미로
말인가?"
"문학적으로."
"그야 물론 러시아를 해롭게 했지. 러시아와 서방측
철로 궤도의 폭이 다른 것이 우리에게 불리함을
가져온 것과 마찬가지로. 그로 말미암아 국경을
넘어서 들어오는 지적(知的) 화물의 움직임이
둔해졌어 -- 그만큼 우리는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지."
"동감이야." 티모센코가 말했다. "하지만 러시아
이상으로 서유럽 제국도 손해를 보았다고 나는
생각해. 푸슈킨이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골고리의 진수를 흡수하지 못한 문학의 존재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생각만 해도 어처구니가 없어."
"잠깐 테스트를 해보기로 하지."
카가노비치가 르윈터 쪽을 보았다. "당신은 러시아
문호의 작품을 읽어본 적 있소?" 포고딘이 통역했다.
"대학시절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을 읽은
정도요." 르윈터가 대답했다. 그들이 보다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하지 말기를 바랐다. 그 책을 읽은 것은
기억하고 있지만, 제목 이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이체프, 미국에 관해서 좀더 구체적인 질문을
해봐요." '암소'가 말했다. 그녀는 여느 때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으며, 한 손에는 마시던 술잔, 다른
손에는 담배를 쥐고 있었다.
"그렇군, 르윈터 씨, 미국인이 흑인을 증오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이오?" 낙서 전문가인
예브도키모프가 물었다.
"어째서 그들은 3,00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기아상태로 그냥 방치해 둘 수가 있는 거지?"
저널리스트인 부브노프가 물었다.
"어째서 케네디가, 두 사람이나 되는 케네디가
살해당하는 그런 실수를 했나요?" 담배를 들이대면서
'암소'가 말했다. "나는 그걸 꼭 알고 싶어요.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죠?"
"나의 아름답고 단순소박한 카트리나, 그것이 이
르윈터의 개인적인 책임은 아니지, 그렇지?"
자이체프가 말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도 물어볼 수
있어 -- 어째서 암살자가 레닌의 머리에 흉탄을 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느냐고. 자, 좀더 이치에 맞는
질문을 한 번에 하나씩 해주지."
티모센코가 르윈터에게 질문을 했다. "미국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 줄 수 없겠소?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에 살고 있으므로 나는 그
실태를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가 없단 말이오."
포고딘의 통역을 거쳐서 르윈터는 미국에서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적절한
말을 찾는 듯이 띄엄띄엄 느릿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질문을 예측하고 있었으므로,
대답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라의 폭이
5,000km에 이르고, 2억의 인구가 살고 있는 나라를
간단히 설명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소. 그
사회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나는 '비인간성'이라고 대답하겠소."
그 말을 포고딘이 통역을 하자, 순간 의견이
분분했다. 자이체프는 르윈터가 말하는 것은, 자료나
그 밖에 일체 이름이 지워진 '앤퍼슨'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본래부터 그가 소련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생각해 온
일이다. 그러나 그 오해는 곧 풀어졌다.
르윈터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몇 년 전에 뉴욕의 어느 곳에서 여자 하나가
괴한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었소. 그 끔찍한 행동은
밤늦게 어느 거리에서 일어났지요. 나중에 신문이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30명 내지 4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려달라는 그녀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고
했으며, 침실의 창문으로 그 끔찍한 행동을 직접
목격한 것이 판명되었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구하러 가거나, 창문을 열고 구조를 요청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경찰에 전화를 건 사람조차 없었소.
나는 이것이 미국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해요. 2억 개의
공포와 불신의 도랑을 자기 주변에 두른 2억 개의
고립된 세계. 단적으로 말하자면 철저한 고독상태인
거요."
그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대답이었다. 흥미 있다는
것은, 그 방에 있는 러시아 인들에게 늘 러시아의
신문을 통해 읽혀지고 있는 일이며, 자기네의
신문이기 때문에 의심하고 있었던 일을 그 대답이
뒤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럼, 당신이 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이
나라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오?"
티모센코가 물었다. 그 질문을 포고딘이 통역하고
있는 사이에 사람들은 흥미 있는 대답을 기대하고
저마다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리요." 르윈터가 대답했다. 그리고 가벼운
어조로 다시 덧붙였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거미줄 하나둘 정도."
르윈터는 자기가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주었다고 느꼈다.
"우리 미국 친구여, 미리 실망에 대비해야 하오."
자이체프가 말했다. "사람이란 각각 고립된 섬이라고
말한 것은 당신들 앵클로 색슨 민족의 어떤 시인이오.
그런데 다른 어느 나라도 다 그렇듯이 그 말은 이
나라에서도 진실이라오." 자이체프가 귀를
만지작거리며 한동안 생각한 끝에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덧붙였다. "게다가 이곳 거미줄은 공포의
거미줄인 경우가 많다오."
"그는 자네에게서 들은 인간과는 전혀 달라."
자이체프가 말했다. "자네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그는 어딘지 모르게 얼빠진 느낌을 주었는데.
마지막에 가서 나는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네."
마지막 손님이 돌아갔다. 그 발레리나는 슬리퍼 한
짝을 찾지 못해서, 겨우 찾아놓은 한 짝도
집어던지고서 맨발로 발끝으로 걸어서 진흙 속을
걸어갔다. 지금 자이체프는 긴의자에 벌렁 누워서
젖은 접시행주로 두 눈을 덮고 있었다. 포고딘은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리고서 테이블 옆에
앉아 말라빠진 검은 빵과 산양 젖 치즈를 먹고
있었다. 르윈터와 '암소'는 2층에 있는 방에서 잠이
들었다. 르윈터는 버드나무 가지를 엮어서 만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잠이 깨면 의자의 무늬가 몸에
자국을 남길 것이다. 카트리나는 언제나 자이체프와
함께 자는 한쪽 구석의 커다란 매트리스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지금은 사후검토의 시간이었다.
"정말이지 자네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네."
자이체프가 말했다. 옆에 있는 접시에 행주를
담갔다가 물기를 좀 짜내고서 차곡차곡 접어서 다시
눈 위에 올려놓았다. "자네가 전화를 걸어서 그를
데리고 함께 오겠다고 했을 때는 정말 놀랐어. 어째서
그들이 허락한 건가? 이것이 정보를 캐내는 새로운
방식인가?"
포고딘이 불가리아산 백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오랫동안 너무 갇혀 있었어......신경이
곤두섰어......성미도 급해지기 시작했고......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어." 포고딘은 입안에 든 것을
십으면서 이야기했다. "좋은 요법이야. 실은 내가
생각해 낸 거지. 녀석들을 설득하는 데 애먹었지만,
파티를 여는 사람이 자네라고 했더니......"
"나라고 했더니 뭐라던가?" 자이체프가 재촉했다.
"절대로 안된다고 하더군." 두 사람은 함께
소리내어 웃었다 -- 그 웃음이 두 사람의 유대를 더욱
돈독히 했다.
"자네는 오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어, 그렇지?"
"자네 초청을 거부할 수는 절대로 없지." 포고딘이
말했다. "자네는 일종의 화학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거든......그런데, 호기심이 좀 생기는데,
내가 그를 뭐라고 묘사했었나?"
"누구를?"
"우리의 A J 르윈터 말일세."
"아, 르윈터? 자네는 그가 함부로 슬로건이나
외치며 지식의 표면이나 만지작거리는, 깊이가 없는
호모 사피엔스의 본보기라는 듯한 인상을 내게
주었어. 하지만 나는 그의 말 속에 진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네. 물론 러시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고 오해가 있다는 점은 용서해 주어야겠지. 그
역시 그 나름대로 선전의 영향을 받았을 테니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이체프는
사람들을 대접하는 번거로움에서 해방되어, 느긋한
기분이 되어 눈의 피로를 푸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포고딘은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앉아 온몸의 피로를
즐기고 있었다. 밖에서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무화과 잎을 때리고 있었다.
자이체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망명이라는
것을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어. 그 기반이 되는
소외감은 물론 이해할 수 있지. 일생 동안 소외감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인간이란 있을 리 없거든.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들을 포기해 버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을 텐데. 모스크바에 전화번호부 같은 것도
없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자이체프, 그 걸레를 얼굴에 덮은 채 잠들어
버리기 전에 아크셀로드가 누군지, 아니 누구였는지
말해야 될지 모르지만, 가르쳐 주지 않겠나?"
자이체프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만일 내가 그 일에 관해서는 되도록이면
이야기하고싶지 않다고 한다면, 예브게니, 자네는
믿을 수 있겠나?" 갑자기 자이체프가 벌떡 일어나서
행주로 얼굴을 닦았다. "그런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자네 마음도 편하고, 그것이 다행일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지. 뭐라 말할 수 없군." 포고딘은
마음이 흔들렸다. 알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
그러나 동시에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가 그 이야기를 더 이상 할 틈을 주지 않고
자이체프가 화재를 바꾸었다. "파티는 재미있었나?
티모센코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가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랐어. 자네들 둘이 친구
사이라고는 몰랐거든. 그가 말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2년 전 휴가로 일본에 왔을 때 만난 적이
있었어. 대사가 그를 위해서 칵테일 파티를 열었거든.
그는 진정한 동조자는 아니지?"
"그가 솔제니친을 찾아냈을 때의 이야기를 들었나?"
자이체프가 물었다. "어느 날 밤 아파트에서 그가
'노비 밀'에 실을 원고를 보다가 마침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원고를 보게 되었어. 이것은
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야. 그는 10페이지쯤
읽다가는 일어나서 턱시도로 갈아입었지. 그리고는
촛불에 불을 켜고 샴페인을 한 병 따가지고는,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새벽까지 계속
읽었다는 걸세. 자기가 러시아 천재작가의 작품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거야 -- 러시아의
르네상스를 자기가 목격하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그가 말하더군. 그는 위험한 줄 알면서도 그
책을 출판했어. 대단히 용기 있는 사람이야."
"그 사람과는 언제부터 알게 되었나?"
"정말로 친한 사이가 된 것은 겨우 몇 달 안돼.
우린......여하튼 머지않아 모두 이야기하겠네.
오늘밤은 이미 너무 늦었어. 그런데, 오브닌스크 쪽의
동정은 어떤가? 꼭 듣고 싶어."
"언제고 그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지. 호기심을
가지고 있구먼, 안 그래? 흥정을 하세. 자네가
아크셀로드 이야기를 해준다면 내가 르윈터와
오브닌스크 이야기를 하겠네."
"이 무슨 일인가, 러시아로 돌아와서 아직 3주일도
안되었는데 벌써 자네는 사물의 핵심에 관심이 끌리고
있어." 자이체프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고뇌가 깃들어 있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가 아주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크셀로드. 그래, 아크셀로드. 정말 알고 싶은가?
하나도 복잡할 것 없어. 작년 이맘때쯤 아크셀로드가
당 대회에서 연설을 했다네. 그는 검열자가 자기의
최신 저서의 출판을 거부했다, 삭제를 요구했다고
했어 -- 무지한 시골 녀석들이 이 말을 써서는 안돼,
저 말을 써도 돼, 하면서 아크셀로드에게 지시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게나. 자기에게는 경찰이
귀찮게 따라다니고 있다고 그가 말했어. 진행중인
원고를 압수당한 채 도로 찾지 못하고 있다는 거야.
외국여행용 여권 교부도 거부당했다고도 했어. 그리고
검열제도를, 검열을 허용하고 있는 정부를, 공산당의
무식한 하급당원이 이 나라의 대작가 작품에 손대는
것을 인정하는 제도를 공공연히 비난한 거야. 그런데
여러 가지 의미로 검열을 달게 받는 녀석들이며,
검열에 걸리지 않도록 스스로 원고에 손질을 하는
녀석들이 하나같이 그의 말에 찬성하고 지지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던
거야. 물론 아크셀로드는 자기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될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지. 녀석들은 그를
레닌그라드 교외에 있는 정신병원에 가두어버렸어 --
레닌그라드의 작가와 시인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는
시설이야. 3개월쯤 전에 나는 지하정보망을 통해서
아크셀로드가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을 알았지. 그는
화장실 청소를 담당했을 때 자루걸레를 풀어서 끈을
만들어 샤워의 커튼 레일에 걸어 목을 맸다는 거야.
그의 <일보후퇴>라는 소설을 읽어본 적 있나? 아니,
읽었을 리가 없지. 출판되지 않았으니까. 그 작품의
등장인물 중에서 분명히 드미트리라는 이름이었다고
생각되는데, 그 정신박약자가 똑같은 방법으로
자살했다네."
이야기 사이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뿐이었다. "당국에서는 그가 암 같은 것으로
죽었다고 공표할 생각인 모양이야 -- 골치아픈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번 작가동맹대회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는 거지. 하긴 소요가 일어날 리도 없지만
말이야."
빗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자이체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는 아마 미쳐 있었을
거야."
자이체프가 다시 버본을 따르면서 술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자, 이번에는 자네 차례야 -- 오브닌스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게."
"이것은 술자리에서 화제가 될 만한 것은 아닐세,
자이체프, 그 점은 이해해 줘야겠어. 자네에게
이야기를 하다니 나도 꽤나 어리석은."
"내가 국가의 비밀을 공표라도 할 줄 아나,
예브게니? 나는 그런 바보는 아닐세. 자, 말하게!"
"어쨌든 정보청취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네. 우리의
친구 르윈터는 모든 점에서 합격했네. 그는 온갖
각도에서 몇 번씩이나 심문을 받았지. 나는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었어."
"그래서 녀석들은 그의 이야기를 믿었나?"
"그래 믿었다고 해도 좋아. 다만 문제는 이번 사건
전체가 구름을 잡는 듯한 일이라는 점인 거야. 그는
등사실에서 탄도의 수식이 적혀 있는 초안지를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등사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던 것을 주웠다는 거야. 그래서 그 수식을 암기해
두고서 자료실에 가서 그 수식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가를 확인하기 위해 원본 서류철을
대출했다는 거야. 그는 자기가 암기한 것이 MIRV의
탄도수식이라는 것을 확인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시간
동안 그 서류철을 볼 수가 있었어. 사서가 그에게
열람자격이 없는 것을 나중에 깨닫고 서류철을
빼앗아버렸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미국측은 그가 서류철 원본을 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거로군?"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어. 르윈터는 사서가 그
일을 완전히 덮어버렸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어. 극비서류를 열람자격도 없는 인물에게 대출한
사실이 드러나면 그는 해고될 것이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그의 이야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은
하나도 없는 거로군?"
"꼭 한 가지가 있어 --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지 우리는 망설이고 있다네. 그가
우리에게 말해 준 16개의 수식 중 하나는 궤도가 되지
않는단 말일세 -- 다시 말하자면 탄도의 수식이
아니라는 뜻이야. 르윈터가 잘못 기억한
것인지......"
"하지만 그는 원본과 대조했다면서?"
"아니, 그는 원본 서류철을 몇 분 동안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전부를 대조할 수는 없었던 걸세."
"그렇겠군."
"그러니까 흔히 있는 착오, 즉 처음부터 잘못
기억을 했거나, 아니면 옳게 외우기는 했는데 그
일부를 잊어버렸거나 둘 중 하나야. 어쩌면 거짓말을
하고 있든지. 그것도 아니면 미국의 MIRV 중에는
똑바로 상승한 채 내려오지 않는 핵탄두가 포함되어
있거나......그럴 가능성은 우선 없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리 세계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란 말일세."
"내 생각으로는 -- " 자이체프가 말했다. "수식 중
하나가 궤도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 그가 말한 것의
진실성을 입증하고 있어. 사실 옳은 수식을 15개,
궤도가 되지 않는 수식을 하나 기억시킨 가짜를
우리에게 보내는 바보짓을 할 리가 없잖아."
"자네가 좀더 잔꾀에 밝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포고딘이 웃었다. 첩보활동이 그의
가장 자신 있는 게임이고, 그 분야에서 그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상대방에게 가짜를 믿게
하는 데에는 정보 중에서 하나쯤 잘못된 정보를
섞어두는 것이 가장 좋은 수법인 거야. 어쨌든 16개의
수식 중에서 하나가 궤도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가 없다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인가?" 자이체프가
물었다. "게임은 점점 더 재미있게 되어가겠군."
"그것을 나도 전혀 알 수가 없단 말일세." 갑자기
포고딘의 자신에 넘치는 의기양양함이 허물어졌다.
그는 무화과 가지가 들어와 있는 창 쪽으로 달려가서
거칠게가지를 밖으로 밀어냈다. 그 바람에 거미줄을
망가뜨려 버렸다. "처음 왔을 때부터 이것이 마음에
걸려서 견딜 수가 없었어."
말투와 말하는 속도가 갑자기 바뀌었기 때문에
자이체프는 얼른 방향을 바꾸어 친구를 보았다. 그는
포고딘이 우리 속의 사자처럼 방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꼭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이 생각났다. 그것은
포고딘의 처가 아기를 낳다가 죽은 날 밤이었다.
사태를 스스로가 다스릴 수도 없고, 그 결과를 좌우할
힘도 없고, 사태의 경위를 충분히 이해할 수조차
없어서 포고딘이 자제력을 거의 잃게까지 되었었다.
지금 그는 그때와 비슷한 상태에 빠져 있는 듯했다.
"왜 그러나,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자이체프가
물었다. 그 어조에는 놀리거나 비꼬거나 술기운 같은
것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단순명쾌한 기본적인 사실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나로선 전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이런 일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는 자네도 잘 알 거야, 자이체프. 단
하나의 과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거야. 단 하나의
과오로 오랜 세월에 걸친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려.
만일 이번 이 사건으로 과오를 범하게 되면......나는
정말로 떨린다네. 나는 나 자신의 야심이 무섭네.
그러나 그 야심이 달성 안될 가능성이 더 무서워.
나는 지금까지 항상 자신감에 차 있었어......그러나
지금은 이 꼴이야. 이 생각이 옳다고 단언할 자신이
없는 거야. 그 르윈터라는 인물은 대체 누구인가? 내
말은 그의 거짓없는 정체가 무엇이냐는 뜻이야.
때로는 그 사람과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적도 있어. 나는 지금까지 정략에
휘말려본 적이 없어......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러다 보면 만사가 잘 끝을 맺게 될지도 몰라."
자이체프로서는 그 이상 할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어느 틈엔지 사라져 버리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어. 지금 격렬한 싸움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어. 모스크바의 모든 관료들이 이번 이 사건에
관해서 여기저기서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 육군,
해군, 미사일 담당자, 신경제계획 관계자, 경우에
따라서는 자네가 말한 야금전문가들도. 가령 우리가
르윈터의 정보를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고서 대응책을
강구한다고 하면, 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새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돼. 그렇게 되면 여러 계획이
크게 영향을 받게 되지. 그러나 우리가 미국의
다탄두각개목표재돌입 미사일에 관한 비밀을 쥐고
있다고 하면, 그 정보를 이용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인 거야."
"그런가? 나는 단지 한 아마추어에 불과하지만,
자네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같이 여겨진다네. 그들은 입수한
비밀정보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믿고
있어.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애써 손에 넣겠는가
하고 반문하지. 그러나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 정보를 입수하라,
그리고 그 정보를 잊어버려라 -- 이것이 최선의
방책일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브크센티에프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아브크센티에프가 개입해 있다니 정말 놀라겠군."
"사실이라네. 아브크센티에프 장관 동지는 스스로
자랑하는 경제개혁이 그러잖아도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는데, 여기서 긴급군사계획이 시작되면 그의
경제개혁은 완전히 밀려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중앙위원회 정치국 안에서 르윈터 공격의
선봉을 맡고 있는 것이 아브크센티에프이지. 실은
나는 내일 아침 그와 만나기로 되어 있네." 포고딘이
순간 망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아무래도 나는 나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깊은 곳에까지 끼어들게
된 것 같아."
"그런 것까지 일일이 생각할 필요는
없네."자이체프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자네가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상태에 놓여 있다네."
제 14 장
4차선 고속도로는 소련에서는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다. 더구나 대개의 경우에는 근대적인 시설로
되어 있다 -- 그 하나는 도로표지판이다. 모든 요철,
커브, 교차점에서 1km 전에 표지판이 되어 있으며,
전방에 무엇이 있는가를 경고해 준다. 그 지점에
다다르면 바로 여기라는 듯이 X표 비슷한 두 번째의
표지판이 서 있다. 그러나 그 포장이 완비된 2차선
도로가 모스크바-스몰렌스크 고속도로와 교차되는
곳에는 표지판이 하나도 없었다 -- 다시 말하자면 그
옆길로 차를 타고 들어가는 사람은 행선지를 충분히
알고 있어야만 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오전 10시 조금 전에 펜더가 휘어지고 크롬에 녹이
슨 검은 질(1967년에 제작된 소련의 최고급차)이
고속도로에서 그 옆길로 들어갔다. "조금 더 가면
신분증명서를 조사할 겁니다, 동지." 운전사가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포고딘은
지갑에서 신분증 카드를 꺼내어 거기 붙어 있는
사진을 보았다. KGB의 중령 차림을 한 그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는 사진 속 인물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그 사진을 찍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를 알아내 보려고 했지만, 공식적인 사진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표정한 눈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포고딘은 카드를 무심히 만지작거리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와서는 자이체프의 별장에서
하룻밤 보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 파티나,
파티가 끝난 뒤의 대화가 아브크센티에프와의 면담을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충분히 잠을 자두는
편이 차라리 옳았다. 게다가 포고딘은 지쳐 있었다.
그 점은 의문의 여지도 없었다. 그가 대단한
전리품이라고 생각한 인물과 함께 소련에 돌아온 이후
19일 동안은 정신적으로 대단한 피로와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에 어떤 시점에서 포고딘의
장래와 르윈터의 운명이 이제는 어쩔 수도 없는
상태로 얽히고 만 것이다. 포고딘이 르윈터를
발견하여(단지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문제가
아니다) 소련에 데리고 왔다 -- 그러니까 모든 것은
그의 책임인 것이다.
그 책임이 오브닌스크에서 정보청취 기간 중
포고딘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있었다. 그는 매일밤
열리는 평가회의에서 전문가들이 르윈터의 정보를
세밀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을 온 신경을 집중시켜
들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나,
그것도 모스크바로부터 계속된 문의가 날아오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어느 날 갑자기 르윈터는
첩보관계자가 뻐기며 내보일 전리품이 아닌 것으로
되어버렸다-- 그는 정치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단계에서 비로소 아브크센티에프가 개입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 아브크센티에프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포고딘은 아브크센티에프를 알고 있었다. 적어도
전에는 알고 있었다. 몇 년 전에 프라하에서 근무하던
무렵, 아브크센티에프는 그의 과장이었다. 그 뒤로
사람들이 예상했던 대로 그는 출세했고 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브크센티에프는 프라하 시절과는 얼마나
많이 달라져 있을까 하고 포고딘은 생각해 보았다. 그
무렵 그는 대단히 세심한 계획입안자였으며, 충분한
사전 조사를 한 다음에 다리를 건너듯이, 즉 하나씩
하나씩 문제에 대처했다. 특히 기밀을 요하는 일을
취급하는 데에는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말 속에는
부드러운 표현을 많이 써서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대개의
경우에는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그 부드러운
말에 조심을 해야겠다고 포고딘은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옆길로 들어가서 첫번째 커브를 돌았다.
고속도로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곳으로서, 차는
차단기 앞에서 멈췄다. 조그만 오두막 앞 의자에 늙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입구 위에 레닌의 사진이 든
액자가 걸려 있었다. 여자는 잘못하여, 또는 호기심에
끌려서 이 옆길로 들어온 사람들을 쫓아버리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온 사람은
없었다. 한 번도.
두 개 있는 군대의 검문소 중 하나가 그곳에서 500m
앞에 있었다. 길을 6km쯤 가니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땅 가장자리에 아브크센티에프의 저택이 있었다.
안채는 연극계의 후원자를 자처하던 러시아의 백작이
17세기에 세운 회색의 네모난, 장식이라곤 없는 석조
저택이다. 한가운데에 있는 홀은 실제로는 백작의
농노들이 연극을 하던 소형 무대였다-- 그 희곡 중 몇
개인가는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던 백작이 직접 쓴
것이었다. 조그만 언덕 뒤에 있어서 사람들 눈에 잘
뜨이지 않게 길게 지어놓은 마구간은 언제나 이
저택에 배속되어 있는 육군의 조그만 부대 막사로
개조되어 있었다. 안채 바로 뒤에는 조그만 예배당의
허물어진 잔해가 남아 있으며, 벽 일부에는 아직도
프레스코 벽화(갓 바른 회벽에 그린 수채화)의 단편이
남아 있다. 예배당은 볼셰비키 혁명에 이은
반종교적인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지방의 농민들이
폭파해 버린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마침 베르사유 궁전의 그림을 본
백작의 자손이 저택 안에 정원을 만들었다. 그 정원의
중앙에 있는 두께 1m의 지붕을 얹은 강철과
콘크리트의 방공호는 러시아 인이 말하는 이른바
대조국전쟁(大祖國戰爭)의 추억 같은 것이다. 그
방공호에는 사연이 있다. 1941년에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던 독일군이 이 저택에 사단 사령부를
설치했다.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때에 독일군
참모부가 히틀러가 전선시찰을 나섰을 경우에
대비해서 거대한 방공호를 만들라고 각 사단장에게
명령했다. 그의 시찰은 실현되지는 않았다. 뒤에 가서
냉전이 한창일 무렵, 스탈린이 이 저택을 방문하게 될
경우를 생각해서 현대적인 환기장치와 통신시설이
방공호 안에 설치되었다. 그 스탈린의 방문도
실현되지 않았다. 아브크센티에프는 마침내 최근에
와서 그 방공호를 포도주와 감자의 저장고로
개조했다.
포고딘의 차가 그 방공호 옆을 지나서 자갈을
깔아놓은 차도로 진입하여 정면 현관 앞에서
멈춰섰다. 하인일 거라고 포고딘이 생각한 아주
나이든 사람이 돌층계 위쪽에 서 있었다. 그는 키가
180cm 이상이나 되고 황새처럼 여윈 모습이었다.
헐렁하고 낡은 바지를 입고, 투박한 천으로 만들어진
깃 없는 농부용 셔츠의 단추를 턱 밑까지 단정히
잠그고 있었다. 안경알은 확대경처럼 두꺼웠다. 등을
활처럼 구부리고 약간 다리를 끌면서 그 노인이
집안으로 안내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타일 위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처럼 -- 포고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 바닥을 보면서 걸어갔다.
그들은 황금색 액자의 유화와 대리석 조각으로
둘러싸인 무대 겸용의 홀을 지나갔다. 그 방에는 언뜻
보기에 적갈색 무늬가 들어 있는 듯한 굵은 돌기둥이
여섯 개가 있었는데, 실제로는 극이 바뀜에 따라 쉽게
옮겨놓을 수 있도록 발사 재(材)로 만든 기둥이었다.
방구석, 백작이 연극을 위해서 바람이나 벼락치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나무로 된 커다란 장치 옆에서 두
소녀가 바닥에 앉아 집짓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둘은
포고딘을 올려다보고서 웃고는 다시 놀이를 계속했다.
노인이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가라고 포고딘에게
몸짓으로 전했다. 구부리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조그만 문이었다. 뒤에서 문이 닫히고 포고딘은
자기의 발 밑에서 쇠로 만들어진 나선계단이 어둠을
향해 밑으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어렴풋이 유황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포고딘은
영화관에 들어온 사람처럼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어둠에 눈이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벽 위쪽의
좁다란 창에서 약간의 빛이 새어드는 것 말고는
빛이라고는 없었다. 차츰 검정과 회색의 구별이 되기
시작하고, 포고딘은 주변의 상황을 알 수가 있었다.
방은 무대 겸용의 홀 바로 밑에 있었으며, 넓이도
거의 같았다. 한쪽 구석의 커튼 밑에서 다른 방의
전기조명 빛이 노란색 구슬이 이어진 것처럼
새어나오고 있었다. 여러 가지 연극에 쓰이는 도구 --
만들어진 나무, 말안장을 던져둔 조각배, 갑옷을 쑤셔
박아놓은 짚으로 만든 커다란 바구니, 겉모양만
만들어놓은 우물 등 -- 이 마주 보이는 벽의 창 밑에
여기저기 놓여져 있었다. 종이, 볏짚, 물감을 들인
양털로 만들어진, 오려내게 되어 있는 그림을 길고
짧은 갖가지 길이의 실로 천장에 매달아 놓았다.
날아가는 새처럼 보이는 것, 집이나 성 같은 모양을
한 것, 꽃모양으로 생긴 것, 개중에는 포고딘이
지금까지 본 적조차 없는 것도 있었다.
"그것은 파야키라고 하는 것이야 -- 폴란드의
농민이 집안을 장식하는 데 쓰는 거라네. 바닥을
보았나?" 굉장히 딱딱하고, 전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러시아 어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커튼
저쪽에서 들려왔다. 틀림없는 아브크센티에프의
목소리였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습니다, 장관님."
"아, 그랬군. 구두로 바닥을 문질러 보게."
포고딘이 구두를 앞뒤로 움직여 바닥을 문지르자
모래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얼굴이 닿을 정도로
엎드려서 자세히 보았다. 바닥이 모래 그림에 덮여서
동그라미, 네모꼴, 세모꼴이 뒤섞인 정밀한 기하학적
무늬가 방 중앙에서 파문처럼 퍼져나가 있었다.
다시 아브크센티에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진귀한 것일세. 아직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열 명도 안되겠지. 자, 이리로 오게,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포고딘이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자 아브크센티에프가
다시 재촉했다. "바닥의 무늬가 흩어지는 것에는
신경쓸 것 없네. 오게나. 첫발만 내딛으면 그 뒤는
간단해." 손님을 반드시 그 자리에 못박아 버리는
심리를 재미있어하며 아브크센티에프가 유쾌하게
웃었다.
"대화가의 그림 위를 걷는 듯한 기분입니다,
장관님." 포고딘이 말하고 발뒤꿈치를 들고 구두 끝이
무늬를 밟지 않도록 잔뜩 애써 가며 커튼 쪽으로 방을
가로질러갔다.
커튼을 좌우로 젖힌 순간 갓을 씌우지 않은 전구의
강한 불빛 때문에 포고딘은 한동안 앞이 안 보였다.
유황 냄새가 심하게 코를 찔렀다. 그는 시력의 회복을
기다리며 눈을 껌벅이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방 입구에
서 있었다.
"자네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 예브게니."
아브크센티에프가 말했다. "너무도 미국인 같아서
말을 걸기가 불안해질 정도야. 마지막으로 만난
곳이......어디였었나?"
"체코슬로바키아입니다."
"그래, 그랬었지. 체코슬로바키아였어."
겨우 아브크센티에프의 모습이 보이게 되었다. 그는
완전히 발가벗고 나무 벤치에 앉아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마른 진흙의 엷은 막에 감싸여 있었다.
"자네도 해보지 않겠나, 예브게니? 특별히 흑해에서
비행기로 보내오고 있다네. 그곳 진흙에는 유황
성분이 아주 많아. 관절염에 상당히 효과가 있지.
하긴 자네는 아직 관절염 같은 병은 없겠지만. 여하튼
해보게나. 자네에게 이로운 성분이 섞여 있을 게
틀림없을 걸세."
"감사합니다, 장관님. 하지만 제게는 진흙이란
바르는 것이 아니고 닦아내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자네는 여전히 정설적(正說的)인 사고방식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이로군. 여하튼,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몇 년 만에 만나게 되어 아주 반갑네.
건강해 뵈는군. 다소 지친 듯하지만, 좌우간 건강해
보여. 자리에 앉아서 적당한 걸 마시게나. 진흙을
씻어내고 나서 이야기로 들어가세." 아브크센티에프가
타일을 붙여놓은 한쪽 구석으로 가서 샤워를 한껏
틀었다. 진흙의 막이 녹아서 배수구로 흘러들어갔다.
보리스 아브크센티에프는 소련 공산당의 유망한
젊은 간부 중 한 사람이다. 51세에 이미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의 후보로 지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개혁 부(副) 종합책임자이며, 게다가 국가의 대외
보안관계의 여러 기관을 감독하는 초비밀위원회
서기를 맡고 있다. 전연방 레닌 공산주의 청년동맹원
시절에는 레슬링 챔피언이었다. 한때 그를 올림픽에
파견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가 보안관계 일에
대한 흥미를 표명했기 때문에 중지하게 되었다 --
사실 그 뒤 그는 한동안 보안관계의 일을 했다.
중단이 된 것은 그 방면의 간부가 너무 일찍 그를
여러 사람들 눈에 뜨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흙이 점점 씻겨짐에 따라서 과거의
레슬러를 연상케 하는 몸이 그 모습을 나타냈다.
건장한 어깨에서부터 가늘게 조여진 허리, 다시
근육이 발달한 허벅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브크센티에프의 체격에 다소라도 결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리가 허리의 길이에 비해 유난히
짧은 점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아브크센티에프와
만난 사람은 누구나 실제보다는 훨씬 키가 크다는
인상을 받고 돌아간다.
아브크센티에프가 흰 타월 천으로 된 화장복으로
몸을 감싸고 그 위를 가볍게 두드려서 몸을 말리면서
포고딘의 맞은편 의자에 가서 앉았다. "이 집을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은 아주 진기한 집이라네. 내
말은 저 무대를 말하는 걸세. 위에 있는 저 목조의
기묘한 장치를 보았나? 크랭크를 돌리면 폭풍의
음향효과를 낼 수 있다네."
"그게 뭔가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포고딘이
말했다. 그는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무던한
이야기부터 시작될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지하실에 소도구를 넣어두는 방이 있어. 옛날에
쓰이던 배경의 일부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지. 자네가
지나온 그 방의 가장 안쪽에 무대로 통하는,
뛰어올라가게 설계된 문이 있어. 아주 흥미 있는
장치야 -- 귀중한 역사적 유물이지."
"모스크바에 살고 계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 차가
교외로 방향을 틀 때에는 깜짝 놀랐습니다." 포고딘은
의자를 약간 틀어서 아브크센티에프와 마주앉았다.
의자의 다리가 바닥에 끌리면서 귀따가운 소리를 내자
그는 등골이 오싹했다.
"모스크바에 아파트가 있긴 하지만 시내에서 떠날
수 있을 때에는 언제나 이리로 온다네. 나는 친숙하게
어울리고 싶은데 누구와, 또는 무엇과 어울릴지는 나
스스로도 분명히 모르고 있단 말이야." 포고딘이
상대방의 기분에 맞추느라 얌전히 웃었다.
"저 모래 그림은 누가 그리는 겁니까? 정말
멋지더군요."
"그건 이야기가 길어. 하지만 자네에게는 이야기해
주겠네. 자네를 현관에서 맞아준 그 노인을 자세히
보았나? 그가 그리는 거라네. 그 오려내는 그림도
그의 솜씨지. 그 기술은 폴란드에서 익힌 거야. 그의
어머니가 폴란드의 농사꾼이었는데, 1907년 집안이
몽땅 오데사로 옮겨갈 때까지 그는 폴란드에서
살았었어. 이주할 당시 그는 16살이었지."
아브크센티에프가 무심한 얼굴로 자기의 잔에
광천수를 따랐다. "새벽에, 아무도 일어나기 훨씬
전에 그 노인은 바닥의 모래를 쓸어모아 양동이에
담지. 신문지를 깔때기 모양으로 말아서 끝을 손으로
막고 그 속에 모래를 집어넣는 거야. 그리고는
쭈그리고 앉아서 새로운 무늬를 그리기 시작하지.
언제나 방의 중앙에서 시작하여 차츰 둘레를 넓혀서
저 나선형 층계 밑에서 끝나지. 매일 1년 365일. 다른
무늬가 바닥을 덮고 있어. 같은 무늬는 절대로 그리지
않는다네. 점점 눈이 멀어가고 있는데도 절대로
그만두려고 하질 않아."
"아마 젊었을 때를 생각하는 모양이지요." 포고딘이
자기가 상상한 것을 말했다.
그러나 아브크센티에프는 그 말을 듣지 못한 듯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 노인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알면 자네는 놀랄지도 모르겠군. 역시 놀란 모양이군.
내 아버지의 생애는 아주 흥미 있는 것이라네. 그분은
오데사에서 어른이 되었다네. 그분의 소년 시절의
친구 중에 요시프 비살리오노비치 쥬가슈빌리라는
신학생이 있었어. 물론 우리는 스탈린이라고 부르는
인물을 말하는 걸세. 스탈린이 공산당에 입당했을 때
우리 아버지도 그를 따라서 입당했어. 혁명 전의
당활동 초기 무렵에 두 사람은 오데사에서 몇 번인가
은행강도를 했지. 내전 중에 스탈린은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아무도 맡을 사람이 없는
일을 담당했어 -- 도망자의 사형집행이었지. 아버지는
전선에서 전선으로 돌아다니면서 공포에 떠는 인간의
머리에 권총을 갖다대고 방아쇠를 당겼어. 그분은
사형을 선고받은 인간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어딘가에서 읽었던 모양인지, 언제나 나선
무늬가 없는 대형 회전총과 소구경의 권총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형수에게 선택하도록 했어. 1920년대가
끝나갈 무렵, 실권을 장악한 스탈린은 오래 된
동지들에게 보답하기로 했어. 어느 화창한 날, 그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저택을 주었다네.
30년대에 스탈린은 지난 날의 친구, 은행강도 시절의
동료, 오데사 시절의 동지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숙청했지만, 아버지만은 예외였어. 아버지는 언제나
저 무대 가장자리에 앉아 다리를 흔들면서 숙청의
손이 자기에게 다가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네. 매일
밤 아버지는 나를 안고 '잘 자거라'가 아니고 '잘
있거라'라고 하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
그러다가 아버지는 젊었을 때의 일, 언제나 죽음의
공포에 들볶일 필요가 없었던 폴란드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는 일에 집착하기 시작했어. 그 오려내는 그림의
장식물이나 모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어. 그분은 요즘 와서는 거의 말을 않네.
그렇다고 본 정신이 아니란 말이 아닐세 -- 다른,
보다 소박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네."
포고딘은 당혹감과 호기심 사이에 끼어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호기심이 이겼다.
"그러면 아버님께서는 어째서 숙청당하지 않았는지
아셨습니까?"
"아니, 모르겠어. 몇 년 전에 나는 넌지시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
단지 그분의 이름을 깜빡 빠뜨린 거겠지. 아니면
스탈린이 지난 날 아버지에게서 받은 은공을 잊을 수
없어 목숨을 구해 주었을지도 모르고. 아버지를
체포하러 왔으나 길을 잘 몰라서 그냥 돌아갔을지도
모르지.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걸세."
포고딘은 스탈린의 공포정치시대의 이야기를 여러
가지 들었었다 -- 그 중에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있다. 해외근무에서 소환된 아버지는
투옥이나 처형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본국에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승진을 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크센티에프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에는
특별히 가슴을 치는 것이 있었다. "모래로 예술작품을
창조한다는 것은 굉장히 슬픈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참으로 덧없는 느낌이
듭니다.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그 전통을
이어갈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어버리겠습니다."
"아니, 있다네." 아브크센티에프가 말했다. "실은
내가 그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네. 모래 그림을
그리는 그 자체는 별로 어렵지가 않아. 케이크에
크림으로 무늬를 넣는 것과 다를 바 없거든. 어려운
것은 자신의 독자적인 무늬를 생각해 내는 것과,
동심원적(同心丹的)인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라네.
나는 단순한 연쇄무늬 같은 것은 그런대로 잘하는
편이며, 지금은 좀더 복잡한 무늬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네."
"그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포고딘이 말했다.
"전통을 지키려는 각하가 정말로 부럽습니다."
"내가 유지하려는 것은,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현상(現狀)인 거야. 그 현상이 어떤 것이 되었든."
마침내 정리 단계에 이른 교사같이, 아브크센티에프가
냉철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포고딘은 모래 그림
이야기가 단지 그저 하는 잡담이 아니고, 간접적인
표현으로 그 특징을 설명하고 있음을 알았다.
"죄송합니다, 장관님." 포고딘이 말했다. "중대한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는데,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난 날의 명석한 두뇌를 유지하고 있다면,
예브게니, 이야기의 핵심을 알아차렸을 줄 아네."
"장관님의 대답은 '노'라는 거로군요?"
"그렇다네. 표면상의 가치로 판단한다면 우리가 그
미국인 망명자의 정보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누구나가 생각할 것이 틀림없어. 그러나
나와 내 동료는 현상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어야겠네 -- 우리들이
본능적으로, 습관적으로, 성향적(性向的)으로
현상유지를 지향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말이야. 그
현상이 실제로 어떤 것인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닐세.
우리 나라는 혼란과 공포를 수십 년이나 경험해 왔어.
이제 겨우 평화와 안정과 통합의 시대를 맞았네.
우리는 산업 분야의 일부에 있어서의 경제개혁처럼
조화를 깨뜨리는 일을 할 경우에는 천천히, 신중하게,
망설이며 움직인다네 -- 그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자세히 검토한 다음에. 우리가 그 망명자의 정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을 경우, 급속히 종래의
방침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되네. 그 결과 자금,
우선순위, 당사자의 체면, 정부 각 부처간의 세력,
나아가 당 내부에 있어서의 세력분야를 포함해서
굉장한 혼란을 야기시키게 되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자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걸세."
이제 비로소 포고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아브크센티에프와의 은밀한 대화에 불려온 이유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손을 떼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최고간부들 중에 아브크센티에프와 그가 대변(代辯)을
하고 있는 무리들은, 이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예브게니, 자네는 지금까지 대단히 유능하고
지혜가 풍부한 정보관이라는 것을 실증해 왔어. 그런
자네가 지금은 자기의 불편부당성(不偏不當性)을 위험
속에 내던지고 있는 듯이 보이네. 자네는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어 -- 그 결과, 자신을 위험한 처지에 두고
있는 걸세. 자네는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일세.
이번에는 무조건 우리들의 생각에 따라주기를 바라네.
우리들 중에는 이해를 떠나서 그 미국인 망명자를
철저하게 불신하는 사람이 몇 명 있다네. 현상유지를
버리는 것에 대한 우리의 불안이,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길을 지나다가 느닷없이 들어와서는 미국
최고의 비밀을 우리에게 전해 주려는 인간에 대한
본능적인 불신감에 의해서 더욱 고조되어 있어.
현재로서 우리는 그를 의심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네.
말하자면 울타리에 올라타서 형세를 지켜보는 상태지.
조만간 미국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생각이 어느쪽으로든 결정될 것은 분명해. 저쪽에서
이번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누군지 알고 있나?"
"이번 사건에서는 저쪽 일에 대해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옛날 친구이며, 자네와 내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있을 때 세르뉴 작전을 담당했던
사나이 -- 리오 다이아몬드라네."
"그래서 르윈터를 상대방 작전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런 점도 있어. 다이아몬드는 작전을 좋아하는
친구야. 이번 일은 참으로 그가 생각해 내기 쉬운
일이지."
"그렇다면 르윈터는 무시한다는 것이군요? 그것이
장관님의 결론이군요?"
"그렇지는 않네, 틀렸어. 우리는 그를 선전에
이용하는 거야. 미국 생활에서 견딜 수 없게 된
망명자가 찾아온 거야. 이 상황에서 우리로서는
적어도 그 점에 관해서는 그의 의견을 표명케 할 수
있어. 그리고 더 앞일은 기다리면서 움직임을
지켜보는 거야."
제 15 장
"물론 너무 번거로워진다면 별문제이지만......"
르윈터가 끝까지 말을 하지 않고 중도에서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감쌌다. 당장에라도 벌레에게 덤벼들려는 새와 같은
자세로 르윈터 옆에 붙어 있는 중년의 웨이트리스는
누군가가 지시를 내려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회견의 진행을 맡기 위해 불려온 선전부 과장인
보리스 미류틴은 250-의 비프스테이크 위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허공에 멈춘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군." 포고딘이 통역해
주자 아브크센티에프가 말했다. "무엇이 너무
번거로워진다는 건가?"
"고기입니다, 장관님." 포고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는 좀 덜 익었다고 생각되는
모양입니다. 다시 더 구워주었으면 싶은가 봅니다."
아브크센티에프가 손가락으로 딱 하는 소리를
내고서 르윈터의 접시를 가리키며 러시아 어로 두세
마디 했다. 웨이트리스가 르윈터의 어깨넘어로 몸을
굽혀 재빨리 그의 접시를 들어냈다. 바짝 마른 몸에
새의 부리 같은 코의 중간쯤에 안경을 걸치고 있는
의젓한 태도의 관리 미류틴이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
옆에 내려놓고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불끝을 위쪽을
향하고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으므로
담배를 피울 때는 손목을 반회전해야만 되었다.
"당신은 모스크바에 관한 인상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지?" 아브크센티에프가 말했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상 아브크센티에프, 포고딘, 미류틴 세
사람은 눈앞에 놓인 요리를 무시하고 있었다.
르윈터는 식사를 계속하라고 세 사람에게 권하는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아브크센티에프 씨, 누구의 발등도
밟게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감히 말씀을 드린다면,
모스크바의 첫인상은 무엇보다 음침한 거리라는
것입니다."
"'발등을 밟는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포고딘이
그대로 통역을 하자 아브크센티에프가 물었다.
소련에서 한 발자국도 외국으로 나가본 적은 없지만
교과서식 영어를 하는 미류틴이 설명했다. "그것은
초조하게 한다는 표현입니다, 장관님. 자기가 다른
사람의 발등을 밟으면 그 사람을 초조하게 만든다는
그런 발상에 의한 것입니다."
카키색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겨 있던
포고딘이 고수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었다. "그는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한
겁니다. '초조하게 한다'는 것도 맞지만,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쪽이 훨씬 정확합니다."
"번역이라는 것은 전부터 내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일이란 말이야." 르윈터가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당신들은 의논을 하는군. 하지만 지금
이 말은 통역하지 마시오. 나는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단지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오."
"뭐라고 하는 건가?" 아브크센티에프가 물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우리들이 의논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러시아 어를 배우면 되지." 언짢은
어조로 아브크센티에프가 말했다. 그는 배가
고팠으며, 눈앞의 요리가 식어가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했소?" 르윈터가 물었다.
"아브크센티에프 장관님은 러시아 어를 조금이라도
알아듣게 되었느냐고 묻고 계시오." 포고딘이 말했다.
"되도록 빨리 당신에게 가정교사를 붙여주어야겠소."
"그래요, 꼭 부탁합니다. 러시아 어 공부를 해보고
싶소. 여기서 영주하려면 배우지 않으면 안되겠지.
로마에 있을 때에는......"
"그렇군, 그는 모스크바를 로마에 비기고 있는
모양이군." 그 한마디를 설듣고서 아브크센티에프가
말했다. "그에게 말해 주게. 나도 로마에는, 그래, 두
번 가본 적이 있는데, 나도 그 도시가 마음에
든다고."
포고딘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대화로 적당히
짜맞추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려고 했을 때 웨이트리스가 르윈터의 접시를 들고
되돌아왔다. 르윈터는 시험삼아 고기의 한가운데쯤을
잘라보고 꼭 알맞다고 말했다. 그때 갑자기 다른 세
사람이 자기 때문에 식사를 하다 말고 기다리고 있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는 얼굴을 붉히고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예브게니, 내 걱정은 할 것
없으니 식사를 하시오."
한동안 네 사람은 말없이 먹기만 했다. 르윈터는
입으로 가져갈 때마다 꼼꼼하게 같은 분량의 고기와
콩과 튀긴 감자를 포크 위에 올려놓았다. 나머지 세
사람은 식어빠지고 불어터진 음식에 입맛을 잃고
이리저리 뒤적이거나 불가리아산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에게 물어봐 주게, 예브게니. 어디서 살고
싶은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생각해 보았느냐고."
"그 이야기를 물어주어서 고맙소." 르윈터가
말했다. 그는 언제쯤에나 누가 그 이야기를 꺼내줄
것인가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있는 레닌
언덕의 그 집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소. 물론
단독주택 한 채를 몽땅 쓸 필요는 없소 -- 방이 네댓
개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일에 대해서는 될 수만
있으면 환경오염 분야의 일,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형폐기물처리에 관한 일을 하고 싶소. 그 분야라면
상당히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소."
아브크센티에프가 통역된 내용을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렇다면, 예브게니, 누구의 집을 그에게
주기로 할까? 포드고르니의 집인가, 아니면
코스이긴의 집이 좋겠나? 레닌의 언덕이란 말이지!
나도 거기에서 살고 싶어. 자네의 이 미국인은 아직
여러 가지 일들을 익힐 필요가 있군. 그에게 설명해
주게. 그 언덕은 정부 수뇌나 중요한 방문객, 즉 그와
같은 인물들을 위해서 마련되어 있는 것이라고. 어디
시내 안의 훌륭한 아파트와 차 한 대, 그리고 거기에
걸맞는 연금을 제공한다고 전해 주게. 대개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다고. 일에 관해서는 우리 사회주의의
발전에 그가 좀더 공헌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본
다음에 결정할 문제야. 그렇게 하면 어떻겠나?"
웨이트리스가 커스타드와 커피를 가져오는 바람에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 고초열 알약에 관한 것을 물어봐 주겠소,
예브게니?"
"이번에는 뭔가?"
"장관님, 르윈터는 고초열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미제 알약을 가져왔습니다만, 성분을
분석하기 위해서 당연히 우리가 압수했습니다. 그런데
그 알약이 없어져 버린 모양입니다."
"그것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군. 그런데 여기 있는
미류틴이 우리 미국인 친구에게 기자회견을 설명해
주는 게 좋겠네. 지금으로선 기자회견을 성공시키는
것이 중요하니까."
"알약에 관해 뭐라고 하고 있소?" 르윈터가 물었다.
"그를 번거롭게 하기는 싫지만......"
"르윈터 씨!" 미류틴이 영어로 말했다. "잠깐 내게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꽁초가 된 담배로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테이블 위에다 수첩을
펼쳤다. "당신은 이 크레믈린 안에 있는 거울의
방에서 서방측 기자도 섞인 기자회견을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걸어서 얼마 안됩니다. 내가 당신
옆에 있으면서 당신을 돕기도 하고, 안내하기도 하고,
오해를 해소시키기도 합니다."
"미리 말해 두지만 -- " 르윈터가 말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 나가면 아주 신경이 예민해지는데."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르윈터 씨.
질문의 대부분은 호의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사실
어떤 질문이 나올 것인지 나로서는 꽤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 그러니까, 그런 질문에 대해서 당신이
어떻게 대답하면 좋은지 지금 대강 줄거리를 가르쳐
드렸으면 합니다만."
그래서 그들은 기자회견의 리허설을 시작했다.
"첫번째 질문은 미합중국의 현재상황에 관한
일반적인 질문이 될 것입니다. 즉, 당신이 우리
쪽으로 망명할 마음이 들게 한 상태에 관해서입니다.
그런 경우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생각입니까, 르윈터
씨?"
르윈터는 기자들이 자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광경이 머리에 떠오르자 불안해졌다. "그래, 아마,
처음에는 -- " 잔기침을 하면서 미류틴이 물어보고
싶어할 것으로 생각되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가 목전에 다가와
있음이 분명해요.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생활이나
사회를 밑바닥에서부터 파괴해 가면서 그냥
계속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지요. 나는 억압,
비판자의 강제수용소나 경제적 문화적 혼란상태에
관해서 이야기하겠소. 미국의 중산계급의 부리깊은
불만이나, 월부로 차나 TV, 세탁기를 사는 것이
유토피아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겠소. 현재 미국에서 싹트고 있는
혁명운동의 기반은 중산계급이라고 할 생각이오."
르윈터는 아주 멋지게 대답했다고 믿고 있었다.
미류틴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차디찬 얼굴로
상대방을 보았다. 그는 그 분야에는 도통한
사람이었다. 한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르윈터 씨, 지금 당신이 한
답변에 대해서 세 가지 비판을 하겠습니다 -- 그리
중요하지 않은 점 두 가지와 중요한 점 한 가지에
관해서. 우선 그리 중요하지 않은 점 두 가지에
관해서 -- 당신은 미국의 인종적 편견과 젊은 세대의
도덕심의 타락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비치지
않았습니다. 우리 러시아 인은 그런 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만일 당신이 그런
문제를 무시해 버린다면 대단히 기이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당신은 중산계급에서 혁명을
일으킨다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로서는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사실입니다. 레닌의 가르침에서는
중산계급은 자본주의의 붕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아니 그보다는 중산계급이 프롤레타리아와 착취자로
나뉘어 싸우고, 그 결과 자본주의가 멸망하는 겁니다.
당신의 답변에는 그것을 고려에 넣어야만 합니다 --
물론 지금과 같은 표현이 아니고 말입니다."
"자네는 대단히 카톨릭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군."
포고딘이 말했다. 그는 데미타스 스푼으로 접시에
흘린 커피를 휘저었다.
"자네가 어떤 뜻으로 그 '카톨릭적'이라는 말을
썼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군." 미류틴이 반발을
했다. 얼굴을 아래로 하고서 안경너머로 포고딘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50년 전에 쓰여진 도그마를 지금까지도
믿고 있다는 점에서 카톨릭적이라고 한 것이라네.
미국에는 거대한 중산계급이 있어서, 르윈터 씨가
지적했듯이 그 나라의 불만의 대부분이 거기에서
발생하고 있다네. 레닌은, 그 점은 마르크스도
마찬가지지만, 진보한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중산계급의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어. 그
존재를 무시해 버린다고 해서 중산계급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세, 그렇지 않나? 좀더 성실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네."
"포고딘 동지, 나는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서의
중산계급의 역할을 논하는 것으로 지금의 한정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
논의가 영어로 진행되었으므로 아브크센티에프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지 탁구시합을 구경이라도
하듯이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엔 좀더 중요한 일이 문제가
되어 있다네, 미류틴 동지."
"더 중요한 일이라고?" 미류틴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네. 훨씬 중요한 문제가 있지. 내
생각으로는 르윈터 씨가 자신의 신빙성을 확립하는
일이 지금으로서는 무엇보다 중요해. 그러자면 그는
선전부의 원고를 그대로 읽듯 할 것이 아니라 좀더
숨김없고 솔직한 답변을 해야만 하네. 나는 그가
미국을 칭찬하는 것이 옳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네 --
적어도 자유를 사랑하는 위대한 프롤레타리아인 미국
국민과 지배계급을 명확히 구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미류틴이 덤벼들 듯한 자세로 똑바로 안경을 통해서
포고딘을 보았다. 그는 극심한 근시여서, 눈이 조그만
티벳처럼 보인다. 이번에는 미류틴이 러시아 어로
말했다."자네는 맡은 직무의 영역을 이탈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데, 자신을 위험한 처지로 몰아가고 있다네,
포고딘 동지."
다른 사람이 그런 표현을 입에 담는 것은 오늘
그것이 두번째였다.
아브크센티에프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자네들 둘
사이에 무슨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군."
낮은 목소리로 재빨리 포고딘이 사정을 설명했다.
한동안 무시되어 버린 상태가 된 르윈터는 의자에
기대어 지루해 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뒤로
줄곧 그는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이 밀려난 존재이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겨우 들기 시작했다.
아브크센티에프는 포고딘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으나, 다 듣고 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판정을 내렸다. "중산계급에 대해서는 물론 자네
말이 옳아. 다른 경우였다면 미류틴 동지도 틀림없이
제일 먼저 동의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네.
그러나 이 문제는 그의 생각대로 하도록 해주어야만
하네, 알겠나? 자네는 이번의 의견발표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점에서 생각을 잘못하고 있어. 우리는
자본주의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야. 그들은 필연적으로 르윈터를 미치광이로
취급하기도 하고, 조만간 미국측이 신문지상에
대대적으로 발표하는 지어낸 이야기 -- 르윈터는
빚으로 말미암아 사면초가였다든가,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든가, 아니면 호모였다든가 -- 를 믿게 될
거야. 그것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 나라 국민을
향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네. 그것이 자기의
직무이기 때문에 미류틴 동지는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걸세. 우리는 자본주의를
개종(改宗)시키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항상
국민에게 말하고 있는 점, 다시 말하자면 서구보다는
이쪽이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르윈터에게 기자회견을 시키는 것이다. 오늘 아침
둘이서 이야기한 그 사고방식대로 말하자면, 지금의
경우는 솔직한 의견표명이 현상유지의 기반을
흔들어놓을 수도 있어. 어쨌든 르윈터는 그 방면의
전문가 손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아."
미류틴이 집게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올리고는
르윈터 쪽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르윈터 씨, 내가
상상하건대, 두 번째 질문은......"
"자, 다음 질문자는?" 미류틴이 테이블 너머로 뼈만
앙상한 긴 손가락을 내밀어 두 번째 줄의 한 남자를
가리켰다. "'루데 플라보'의 블라세크 씨,
말씀하시죠."
다리를 꼬고 앉아 연필로 수첩을 가볍게 두드리며
체코의 '루데 플라보' 신문의 기자가 질문을 했다.
"르윈터 씨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미국의 대학교수
중 태반이 체제측에 동원되어 대학 안팎에서 군사,
첩보, 그 밖의 온갖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가요?"
"그렇소, 사실이오." 하고 르윈터가 말했다. 자기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교직의무가 있는 대학원생이
되기 위해서, 말하자면 억지로 군대의 연구에
협력하도록 강요당했다. 물론 그 방법은 음흉하고
교묘하다. 아무도 입으로 무슨무슨 계획에 협력하라,
그렇잖으면 직책을 맡을 수 없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교직을 얻는 일, 장래의 승진승급은
정부의 연구계획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서 정해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또 정부는 대학에 대해서
거액을 보조해 주고 있다. 그전에는 '연구 발표,
그렇잖으면 실직'이 미국 대학의 규칙이었지만,
지금은 '성과를 올릴 것, 그렇잖으면 실직'인 것이다.
이것으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었습니까? 하고
르윈터가 물었다.
지금은 답변을 더듬거리지 않고 잘 진행되고 있었다
-- 미류틴조차도 긴장을 거의 풀고 있었다. 르윈터가
회의실 입구에 서고, 클리그등(燈 : 조명용의 강력한
아크 등)이 줄지어 있으며, 30~40명의 기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릴 듯한 순간이 있었다. 그는 회의실에
들어가서 기자회견에 응할 수 없는 구실을 필사적으로
생각해 가며 현실 앞에서 뒷걸음질쳤었다. 그러나
이미 되돌릴 수는 없었다. 도쿄의 소련 대사관에 한
발자국 들여놓은 그 순간부터 뒷걸음질의 가능성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어깨에 닿아
있는 미류틴의 손바닥 촉감에 힘입어 문턱을 넘어서
책상의 한쪽 자리에 앉아 미류틴이 자신을 전세계에
소개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억압에서
도망쳐 소련 사회주의공화국연방으로의 망명이 인정된
인물을 소개하겠다고 미류틴이 말했다.
이어 첫번째 질문 -- 미국생활의 현상에 관한 질문
-- 을 받고 르윈터는 기자단과 마주앉았다. 이야기
도중에 숨이 막히는 것을 기침으로 숨기면서 그는
자본주의의 붕괴가 눈앞에 다가와 있다느니, 억압과
강제수용소, 미국에 있어서의 경제적 문화적
혼미상태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인종차별과 젊은
세대의 도덕적 타락을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시 미국의 중산계급이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이 엄연히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차츰 자신감이 더해 갔다.
미류틴의 손가락이 허공을 떠돌다가 불가리아의
일간지 '나로도나 무라데그'의 여기자를 가리켰다.
"사회주의 국가의 생활에 대한 르윈터 씨의 인상을
말해 주십시오."
"물론 나는 이리로 와서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르윈터로서는 과거에는 그런 경험을 한 적도 없지만,
참으로 귀중한 말이라도 되는 듯이 기자들이 자기의
답변을 적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까 차츰 기분이
유쾌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인상을
말씀드리지요. 먼저 첫째로 사람들 사이의 일상적인
접촉이 미국만큼 복잡하지 않고 보다 솔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두들 노력하지 않고
뭔가를 얻을 기회를 노리고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겁니다......" 르윈터가 간접으로 들은
관찰결과를 거침없이 말했다.
미류틴이 눈을 가늘게 뜨고 조명의 불빛 속을
둘러보면서 다음 질문자로 공산계 영자신문과 뉴스
서비스사(社)를 경영하고 있는 프랑스 인을 골랐다.
"지금까지의 대우는 어땠습니까?" 그 사람이 물었다.
"혹시 불만스러운 점은 없습니까?"
"나는 대단히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르윈터가 말했다. "단 한 가지 불편한 점은 미국에서
가져온 고초열에 쓰는 알약을 어딘가에 두고서
잊어버린 것입니다만, 이쪽에도 고초열에 대한 훌륭한
약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 대답에
기자들이 모두 웃었다.
소련 기자가 르윈터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현상에
불만을 품고 도망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주 많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르윈터가
말했다. "이미 대량이주(大量移住)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미류틴이 이미 20년 가까이 모스크바에 주재하고
있는 뚱뚱한 동독 기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질문을 미처 하기도 전에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로이터 통신의 건방진 젊은
기자가 선뜻 일어섰다. 반체제작가와 접촉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미 당국으로부터 요주의인물 취급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미류틴은 당대회에서 있었던
아크셀로드의 체제비판연설 내용을 몰래 국외로
내보낸 것은 그 영국인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르윈터 씨, 짜여진 줄거리에 따른 대사가 아니고
좀더 핵심을 건드리는 문제로 화제를 옮겨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영국인이 말했다. "거기 계시는
미류틴 동지는 당신을 과학자로 소개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과학자입니까? 어떤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까?"
방안이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 소련이나
동유럽 기자들조차 르윈터의 대답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미류틴은 엷은 웃음을 지으며 영국인 쪽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어떤 과학자였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요, 우수한
과학자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기본적으로는 요업전문가로서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접시 만드는 방법의
전문가지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나는
산군복합체(産軍複合體)에 발탁되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탄도 미사일의 노즈 콘 연구를 시켰습니다.
극비연구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 분야의
연구과정에서 나는 군부가 거대산업(巨大産業)의
협력을 받아 소련에 대한 선제공격에 쓸 수 있는 --
또한, 내 생각으로도 완성된 뒤에는 사용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 미사일
군비를 갖추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런 계획에 나 자신이 가담한다는 것이
혐오스러웠기에 이리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나는 탄도 미사일의 노즈 콘에 관한 나의 다소간의
지식을 소련 동료와 나누어 갖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금도 말씀드렸듯이 나의
연구내용은 중대한 기밀이라고까지 할 정도의 것은
아닙니다. 지식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선의의 의사표시라고 해야겠지요."
방에 있던 몇몇 소련 기자가 르윈터의 양심적인
사고방식에 박수를 쳤다. 미류틴이 집게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올렸다.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와
오랫동안 사귀어 오고 그를 잘 알고 있는 기자들은
아주 만족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질문을 하시지요."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미류틴이 말했다.
[모스크바발 8월 22일 로이터] 소련은 미국의
탄도 미사일 전문가에게 망명을 허락하겠다는 뜻을
오늘 발표했다. (모스크바 표준시 19시 45분)
[모스크바발 8월 22일 로이터] 소련 정부는 오늘,
핵 미사일의 노즈 콘 연구에 종사해 온 미국인
과학자의 망명을 허가했다. 크레믈린 궁에서 열린
이례적인 기자회견에서 소련측은 망명자 A J
르윈터(39세) 씨를 소련과 서방측 기자에게 소개했다.
"미국 군부는 대(對)소련 선제공격용 미사일 장비를
갖추고 있다." 라고 르윈터가 공언했다. "나는 그런
계획에 협력하는 것이 혐오스러웠기에 이리로 왔다.
그러므로 당연히 탄도 미사일의 노즈 콘에 관한 나의
다소의 지식을, 나를 받아준 쪽과 나누어 가질
생각이다." (모스크바 표준시 19시 49분)
제4부 공격준비
제 16 장
첩보관계 문제에 관한 한 실질적으로는 여기가 모든
일의 종점이었다 -- 화이트 하우스의 눈과 코앞인
이크젝티브 오피스 빌딩의 3층에 있는, 눈에 잘 띄지
않아서 오히려 이목을 끄는 회의실. 문에 표시되어
있는 것은 방 번호뿐이며, 그밖에 인덱스 카드에
고르지 않은 활자로 타이프친 주의서가 붙어 있지만,
긴 세월로 스카치 테이프가 바싹 말라 버려서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 카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
허락없이 입실 절대금지
방 번호를 그대로 이름으로 한 303위원회가 열리지
않을 때에는 문에 이중으로 자물쇠가 채워지고,
부근을 하루 두 번 보안기술자가 도청장치의 유무를
조사하고 다닌다. 위원회가 열릴 때는, 대개는 목요일
밤이 되는데, 문 옆에 무장한 경비병이 지키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리로
온 사람들을 쫓아보내기 위해서 그때 그때 틈이 나는
사람을 위원회가 빌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 방문자는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303위원회가 르윈터 망명사건을 취급한 그
목요일에는 야근 타이피스트 그룹에서 아가씨 하나가
증발되었다. 가져온 책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녀는
버즈 마틴이 방에서 고개만 내밀었을 때 얼굴도 들지
않았다. "방해를 해서 정말 미안하오." 약간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로 그가 말했다.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소 -- 큰키에 마흔 전후,
다이아몬드라는 사람인데 -- 이리로 올라오라고 전해
주지 않겠소?"
"알겠습니다." 그녀가 로비로 내려갔다.
303위원회는 본래 미국의 첩보관계의 여러 기관이
정보교환을 하는 자리였다. 1961년에 쿠바 진격의
실패에 격분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첩보활동의
고삐를 잡을 방법을 찾아서 설치한 것이다. 그 뒤
첩보관계 -- 특히 CIA -- 의 비밀작전은 모두
303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만 하게 되었다.
그렇게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어쩌면 바로 아마 그것 때문에 -- 303위원회는 비밀의
베일에 싸여 있다. 워싱턴에서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의 수도 겨우 수백 명 정도에 불과하다. 버즈
마틴의 처는 그런 사람 중의 하나는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사생활에서는 완고할 정도로
예절을 중시 여기고, 직무에서는 기밀유지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몇 년 전에 국가보안사항 담당의
특별보좌관을 물색중이던 대통령 눈에 뜨인 것은 입이
무거운 그의 성품 때문이었다. 이제 버즈 마틴은
303위원회에 있어서 대통령의 대리자,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을 갖춘 중년 남자로서, 잠자는
시간 말고는 거의 전부를 방침선택에 쓰고 있으며, 그
인생에 있어 유일하고도 최고의 목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 대통령의 권한, 품위, 신변을 수호하는
데 있는 듯이 보인다. 버즈라는 별명은 젊고 신분이
낮았을 무렵, 뒤얽힌 어려운 문제를 '버즈
소'(소형이며 둥근 전동 톱)로 자르듯이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나서 붙여진 것이다.
회의 첫머리에, CIA를 대표하는 상임위원이지만
투표권이 없는 해리 듀크스가 방콕에서 있었던
'사소한 착오'에 관해서 보고했을 때, 마틴은 대통령
수호자로서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돈을 좀 부려서
수습해 놓았습니다." 간단히 모면할 생각으로
듀크스가 설명했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돼." 살이 통통한 볼에 손을
대고 마틴이 말했다. 그는 대통령을 곤란하게 할
가능성에 대해서 정부관계자 전원을 채점하고 있었다
-- CIA 관계자는 그의 요주의인물 명단 중에서도 아주
위쪽에 놓여 있다. "자네들은 누구보다도 게임과
실패에 시간을 보내고 있군......"
"그것은 공정하지 못합니다." 듀크스가 항의했다.
"만일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실
생각이라면......"
그러나 손을 가볍게 내저으며 가로막았다.
"이러다가는 자네들은 U_2 사건 같은 큰 추태를
보이게 될 것이 틀림없어. 방콕의 한 가지 일로 인해
이쪽에서 당혹스러운 사태가 생겼을 경우,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대통령의 처지야. 바꾸어
말하자면 자네 쪽 사람을 한둘 이리에게 던져주어야만
할지도 모른다는 뜻일세."
"누군가를 이리에게 던져주는 것은, 그 던져지는
것이 자기가 아닌 한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있어."
그 역시 303위원회의 상임위원인 노스 캐롤라이나 주
선출 선임 상원의원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털미지는 손잡이에 자개 세공을
장식한 권총 같은 사람으로, 기분이 좋을 때는 풍채가
수려하고 정중한 인물이지만, 한번 화를 냈다 하면
폭발해 버린다. 72세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화를
잘내며, 특히 CIA 일이라면 금방 화를 낸다.
"기막힌 이야기야. 내 소위원회는 녀석들이 얼마나
돈을 쓰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긴 마찬가지야." 그가 흔히 말하는
불평이다. "이젠 누군가가 녀석들의 콧대를
꺾어놓아도 좋을 때가 되었어."
털미지는 그럴 마음만 먹으면 자기 자신이 직접 할
것 같은 인상마저 준다. 워싱턴에서는 그와 견줄
상대가 없는 권력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시체가
묻혀 있는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
하긴 그 자신은 '어렴풋한 정도 이상은 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의 권력의 기반은 자기와
밀접한 사이인 군부이다. 충분하다는 것과,
수량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그는 주장하며 모든 종류, 규모,
형태의 군사시설의 설치를 추진한다. 그 중 상당한
부분이 그의 주에 설치되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그가 더 이상 시설을 늘린다면 -- "
털미지의 정적 중 한 사람인 공화당 의원이 은근히
불만을 터뜨렸다. "이 주는 침몰해 버릴 거야."
이치상으로는 303위원회의 위원은 모두 대등한
처지에 있지만, 대통령의 대리인인 버즈 마틴과
독자적인 권력을 가진 털미지 상원의원이(일반적인
표현에 따르자면) 가장 대등하다. 그것은 다른
위원들과 그들이 대표하고 있는 정부기관이 설령
불만스러울지라도 깨끗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두 사람에게 맞설 만한 잠재적 가능성을
가진 유일한 인물은 통합참모본부를 대표하는 풀튜닉
중령이지만, 그는 2세적인 의욕과 3세적인 인내심을
겸비하고 있어 이론을 제기할 필요가 없는 한 흐름에
그저 따라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 밖의 위원
-- 국무차관보인 케네스 포스, 공화당
하원의원인하워드 스넬, 국방차관 리처드 큐넨 -- 은
거물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는 것을 기다렸다가
따른다.
방콕의 그 사건에 대한 논의가 끝나자 듀크스는
다른 문제를 들고 나왔다. CIA가 지난 달 위원회에서
원칙적으로 승인을 얻은 85 브라보 작전의 실시허가를
요청했다. 85 브라보 작전이라는 것은 쿠바의
상공에서 사실은 없는 공작원에 대해서 무기, 탄약,
위조서류를 비행기에서 투하하는 작전이다. 그 목적은
쿠바측에 미국이 속임수로 공중투하보급을 하고 있는
것처럼 알게 함으로써, 과거 북베트남에 대해서
효과가 있었던 낡은 수법이지만, 미국이 진짜
첩보공작원을 보낼 때에는 쿠바가 경계를 소홀히 하여
진짜 보급이 훨씬 쉬워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이번엔 그 계획을 조금쯤 뒤로 미루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털미지
상원의원이 말하자 버즈 마틴이 동조했다. "그 일이
화이트 하우스와 관계되는 만큼, 그 비행기가
격추당할 가능성을 신중하게 고려해 보지 않으면
안돼. 격추된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듀크스가 말했다.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은 미국인이
아니고 쿠바의 망명자이며, 비행기는 미국 국외의
기지에서 발진합니다. 게다가 그 계약자는 격추되었을
경우에는 미국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걸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지금은 그것을 받아들이겠지." 마틴이
말했다. "그러나 일단 쿠바의 형무소로 끌려가면 모든
것을 자백해 버릴 게 틀림없어 -- 누구에게서 돈을
받았으며, 누구에게서 훈련을 받고,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를. 가까운 장래에 진짜를 보낼 계획은
없으니까 이 작전은 한동안 미루어두는 것이
어떻겠소?" 모두들 고개를 끄덕여 찬성의 의사를
표했다.
"그러면 그 문제는 일단 정리가 된 것으로 치고,
르윈터 사건으로 이야기를 옮겨가기로 하지." 털미지
상원의원이 말했다. "버즈, 문밖에 서 있을 그
다이아몬드라는 사람을 이리로 부르게 하는 것이
어떻겠나?"
"신사 여러분!"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온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얼른 위원들을 둘러보던 시선이
마치 빨려들 듯이 듀크스에게서 멈췄다. "자네가 이
사건 심의에 끼어 있을 줄은 몰랐네, 해리."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 증오하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한 눈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정보부의 대표야." 쌀쌀한 어조로 듀크스가
말했다.
"물론 그럴 테지." 다이아몬드가 대답했다. 서류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찰칵 소리를 내며
자물쇠를 열었다. "여러분, 어거스터스 제롬
르윈터입니다." 마치 당사자를 소개라도 하는 듯한
어조로 말하고는 두툼한 서류철을 꺼냈다.
"자네가 이 회의에까지 찾아오게 된 것으로
보아서는 우리가 약간은 궁지에 몰려 있다는
이야기인가?" 털미지가 눈이 부신 듯이 가늘게 뜨면서
테이블 너머로 다이아몬드를 보았다 -- 언제라도
덤벼들 수 있는 자세 같았다.
"그렇습니다." 다이아몬드가 대답하고서
303위원회에 A J 르윈터의 망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는 테이블 위에 서류철을 펼쳐놓긴
했지만, 그 내용을 보면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이상과 같습니다." 그가 마무리를 지었다. "소련측이
그를 공개된 자리에 내놓았습니다 -- 그 일은
여러분께서도 이미 아시고 계신 줄 압니다 -- 그리고
국내용 선전에도 최대한 이용했습니다."
"우리가 공표한 배경설명은 어땠나?--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이 믿어주던가?" 국방차관인 큐넨이
물었다. 전성기를 이미 넘긴 소심한 정치학자다.
"그쪽은 꽤 잘되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어떻게 될지 몰라서 보스턴 경찰에 연락하여
체포영장을 준비시켰습니다 -- 몇몇 십대 소녀에 대한
추행죄로. 증인도 세 사람 준비했습니다. 게다가
보스턴 재판소에서 이혼수당 지불 불이행으로 그를
소환해 놓았습니다 -- 이건 사실입니다. 체포영장이
소련의 기자회견보다 날짜가 앞섰으므로 기자들도 그
이야기를 곧이 듣고는 그대로 기사화했습니다."
"그럼, 고향친구들 사이에선 사과속인지 자두속인지
하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 되겠군?" 털미지가
물었다.
"르윈터가 무엇을 가지고 갔느냐는 뜻이군요?"
다이아몬드가 물었다.
"그렇다네. 그 르윈터라는 녀석이 좀더 푸른 들이
많은, 아니 좀더 붉은 목초지를 향해서 떠나기로 했을
때 가방에 무엇을 넣어 갔느냐는 거야." 털미지가
머리 뒤에서 두 손을 깍지끼고 그를 쳐다보았다.
"가방에 든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머리에 넣고 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점으로
미루어보건대......"
두 팔꿈치로 테이블을 짚고 비밀을 털어놓는 듯한
어조로 다이아몬드가 상상하고 있는 최악의 경우를
설명했다......르윈터가 어린 시절의 그 비상했던
기억력을 다시 회복한 것을 가리키는
사실......초극비인 MIRV 탄도 궤적의 서류철을 그
초능력적인 기억 속에 집어넣기에 충분한 시간, 그
서류를 가지고 있었던 사실.
"동기는 뭔가?" 마틴이 물었다. 그는 다이아몬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메모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에 휴지통 속에 그
메모는 집어던져 버리고, 대통령이 알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메모 없이 요점만 추려서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마틴은 '동기'라고 쓰고, 그
뒤에 콜론을 찍고서 다이아몬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러 가지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우리의 포괄적 성격분석에
가담하고 있는 정신의학자는 최종적으로 르윈터는
유명인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단정했습니다. 그
정신의학자 말에 의하면 망명자는, 특히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망명한 인물은 세상이 주목할 만한
대상이 되기 때문에, 르윈터는 그 주목할 만한 대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었다는 겁니다. 저 자신은
르윈터의 좌익적 -- 이라기보다는 과격한 -- 활동에서
그의 동기를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가
미국에 대해 깊은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어쨌든 보통 망명자 세 사람분 정도의
동기가 있습니다."
"OK. 그가 보았다고 자네가 말한 그 MIRV 관계의
극비서류철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지. 어떤 정보가
들어 있었나?" 마틴이 'MIRV'라고 쓰고 콜론을 찍고서
다이아몬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국은 현재 1,170기(基) 정도의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 그 대부분은 지상의 사일론에
들어 있는 미니트맨과 원자력 잠수함에 실려 있는
폴라리스 미사일입니다. 숫자에 대해서는
여러분들께서 더 잘 알고 계실 줄 압니다만, 제가
들은 바로는 지난달 말까지는 그 미사일들의 거의
모두가 MIRV화 됐다는 것입니다 -- 다탄두각개목표
재돌입 미사일입니다. 그런데, MIRV라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노즈 콘에 지금까지 하나 밖에 없었던
핵탄두가 세 개 들어 있는 미사일로서, 파괴력과 적의
대(對) 미사일 방어망을 뚫을 수 있는 확률이 몇 배나
많아진다는 겁니다. 목표에서 일정한 거리에 도달하면
노즈 콘이라고 하는 그 통이 열리면서 각 탄두가
예정된 목표를 향해서 날아갑니다.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MIRV의 탄두는 16종류가 있으며, 그 중에는 진짜
핵탄두 이외에 모습이나 움직임이 진짜와 똑같은 가짜
탄두와, 적의 대 미사일 방어용 레이더를 교란시키는
탄두가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그
16종류의 탄두에는 각각 독자적인 궤도가 있습니다 --
즉, 노즈 콘이 열리면 그 탄두의 종류에 따라서
정해진 궤도를 그리면서 날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면 그것을 컴퓨터에
프로그램하여 추적장치로부터 나오는 정보에 따라서
불과 몇 초 사이에 날라오는 탄두의 어느 것이
진짜이며 가짜인가, 또 교란용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으므로, 중도에
말을 끊고서 침이 괴도록 기다렸다.
"르윈터가 가져간 정보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이아몬드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혹은 적어도
그것이 르윈터가 가져간 정보라고 추정해야만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 " 날카로운 어조로 마틴이 말했다.
"그는 상대방에게 우리 쪽의 미사일 시스템의 열쇠를
주었다는 거군." 마틴의 예상을 훨씬 넘어 버린
심각한 사태였다. 그는 이미 그것이 대통령에게
미치게 될 영향을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다 -- 다시
취할 수 있는 조치의 선택 여지에 관해서.
"그는 우리에게서 무기를 빼앗아 가버려 현재
우리는 맨손이나 다를 것이 없군." 털미지 상원의원이
말했다. 웃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찌푸린 것도
아닌 수수께끼 같은 표정이 그 얼굴에 떠올랐다.
테이블 너머에서 국방차관 큐넨이 낮고 길게
휘파람소리를 냈다.
다만 한 사람, 처음부터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듀크스만이
다이아몬드의 설명을 냉철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어, 모두의 얼굴이 자기에게로 쏠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번에는 좀더 힘을 주어 말을 계속했다.
"나는 보안정책담당 부차관보 대행이." -- 듀크스는
조금은 우습게 들릴 정도로 다이아몬드의 직책명을
길게 늘어놓았다 -- "현재까지 판명된 사실을 필요
이상 비관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듀크스는 그때까지 이야기에 끼어드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 자기의 양쪽 옆에 앉아 있는
털미지와 버즈 마틴이 불신자를 둘이서 깔아뭉개려는
광신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설이면서도 다이아몬드의 얼굴을 흘끗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잉크 병에 들어 있는 잉크 같은 검은
액체를 연상시키는 냉철한 눈, 미소가 떠오르려는
듯이 끝이 조금 휘어진 거만한 입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과거의 여러 가지 일들이 머리에 떠오르자,
듀크스는 당면한 현실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과감히
입을 열었다.
"부차관보 대행은." -- 이번에는 대행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 "마치 최악의 사태인 것처럼
설명했습니다만, 그것은 주로 무슨 일이나 가장
비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그의 오랜 버릇 때문인
듯합니다." 듀크스가 방향을 바꾸어 다이아몬드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최악의 사태라는 자네 생각을
뒷받침할 만한 사실이 단 한 가지라도 있는가?"
다이아몬드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면서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사실을 정리했다. "자네는 확증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해리, 가령
재일(在日) 미대사관에 러시아 인 하나가 들어와서
망명허가를 요청했다면, 자네라면 어떻게 했겠나?
스베트라나 같은 거물이 아닌 한, 자네는 아주
신중하게 대처할 것이 틀림없어, 그렇겠지? 자네는
온갖 가능성을 고려해 보겠지 -- 위장망명, 이중
스파이, 혹은 자네 신용도의 실추를 노린 모략은
아닐까 하고. 정식으로 대응하기 전에 자네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받아들일 만한 인물인지를 상대방에게
입증시킬 거야. 입증이 되면 자네는 상대가 요구하는
망명을 허락하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그 시나리오를
그대로 뒤집는 거야 -- 러시아측에서는 사람을 딸려서
부랴부랴 르윈터를 모스크바로 보내기까지 두세
시간의 여유가 있었어. 소련은 그를 받아들였지.
그들이 적어도 그가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은 지극히 명백해."
다이아몬드는 변호사가 배심원 쪽으로 돌아보는
느낌으로 303위원회의 다른 위원들 쪽을 보았다.
"르윈터의 망명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모두 -- "
다이아몬드가 목소리를 낮추어 다시 한 번 모두라고
강조했다 -- "이 간단명료한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소련측이 그를 받아들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게다가 최악의 사태라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수수께끼 같은 사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소련측은 그들 자신의
손으로 배경조사를 하기 위해서 르윈터의 개인적인
서류를 훔쳐갔습니다 -- 그런 식의 조사는 대단히
중요한 망명자의 경우 이외에는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자기네의 발자취를 없얘기 위해서 그
사서를 살해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아브크센티에프가 직접 이 사건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중요한
점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아냈는가?" 도전하는 듯한 어조로
듀크스가 물었다.
"우리 쪽 모스크바 대사관 소속 무관이 그 사실을
보고해 왔네." 딕 큐넨이 말했다. "기자회견 전에
르윈터는 아브크센티에프와 점심을 함께 먹은
모양이야. 오늘 외교용 우편행낭이 도착했네 --
정보부로 돌아가면 자네에게도 그 사본이 가 있을
것일세."
듀크스가 다이아몬드의 무표정한 얼굴을 흘끗
보고는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이 문제는 또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가령 우리의 친구
다이아몬드가 말한 최악의 사태라는 견해가 맞는다고
가정합시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우리 쪽의
전문가는 200발의 핵폭탄이 목표에 도착하면 소련은
궤멸한다는 겁니다 -- 딱딱한 공식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인명 및 재산에 대해서 이성 있는 소련
지도자의 모두에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힌다는
거지요. 그 전문가는 또한 소련의 현재의 대 미사일
방어력을 가지고 날아오는 3,600개의 탄두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설령 안다고 해도 목표에
도달하는 탄두의 수를 800개 이하로 막아낸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사태를 최악이라고 보는 견해가 설령 옳다고
하더라도 전혀 무의미한 견해라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는 우리는 언제나 소련의 대 미사일
방어력을 훨씬 넘어선 수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으며, 적의 공격에 대한 반격력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르윈터가 상대방에게 정보를
제공하든 말든."
국방차관 큐넨이 의자를 뒤로 비스듬히 넘겨서 의자
뒷다리에 체중을 실었다. "그것은 현재의 기술 단계에
있어서의 이야기야." 그가 말했다. "가령 소련이 대
미사일 방어기술의 연구개발에 시간과 돈을
쏟아붓는다고 하면 미사일 저지능력이 향상될지도
몰라. 그 새 기술과 탄도궤적에 의해서 진짜 핵탄두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합친다고 하면 명중하는 수를
200개 이하로 막아낼 수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건가?"
"현재까지의 진행으로 보아 소련은 대 미사일
방어력의 향상에 전력을 기울일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듀크스가 반론을 제기했다.
"지금까지는 소련에서 탄도에 관한 수식을 손에
넣지 못했어." 큐넨이 반박했다.
"지금 손에 넣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거친 투로 듀크스가 말했다.
"여러분!" 버즈 마틴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큐넨이 의자를 너무 뒤로 젖혀 넘어갈 정도가
되었다. "나는 다이아몬드에게 질문하고 싶네." 그가
말했다."자네는 이번 사건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처지니까 르윈터의 망명 효과를 없애버릴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해." 큐넨은
다이아몬드가 이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각본이
짜여져 있었던 일은 추호도 내비치지 않고 조용하고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잠깐만." 다이아몬드의 대답을 막으며 듀크스가
말했다. "부차관보 대행은 그가 소속되어 있는
정보국의 책임인 망명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불려온 것입니다 -- 취해야 할 조치를 우리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털미지의 남부 사투리가 기름처럼 매끄럽게, 무거운
대화를 누그러뜨렸다. "다이아몬드같이 이번 사건에
직접 관계가 있는 인물로부터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참고상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 물론 그에게 생각이 있다면
말이지."
"실은 두세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그는 A J 르윈터의 망명을 쓸모없게 만드는
방법에 관해서 303위원회에 자기 생각을 말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방안은 물을 부린 듯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이야기의 진행이 너무 빠른 것같이
생각되는데." 듀크스가 말했다. "좀더 속도를
늦추어서 자네가 말하는 그 신호를 신중히 검토해야만
될 것 같네. 하 여튼 암살 이야기는 논외로 쳐야
하네. 그런 작전을 전개하자면 우리에게는 3개월 내지
6개월의 여유가 필요하고, 그때쯤이면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네."
"나는 10일이면 할 수 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단언했다.
"절대로 성공할 수 없어." 듀크스가 냉소했다.
"그 점이 내 계획의 가장 큰 이점이오."
다이아몬드가 대답했다. "나는 성공할 필요가
없습니다 -- 누구나가 믿을 만한 진짜처럼 보이는
암살미수면 되는 거죠."
큐넨이 다시 의자를 흔들었다. "우리 국방부에 관한
한 -- " 그가 말했다. "이 위원회의 찬성을 얻을 수만
있다면 국방부 정보국의 일원으로서 다이아몬드가
그런 작전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인정할 생각이오."
갑자기 듀크스는 처음부터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르윈터 암살계획을 어떻게 10일 이내에 실현할
생각인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듀크스가 말했다.
얄궂게도 다이아몬드는 지금이야말로 중대한 결심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지난 며칠 간을 세알라와 함께
지냄으로써 가슴속에서 점점 솟아올랐던 따뜻한
감정이 단숨에 몸 밖으로 빠져나가고, 체스를 하는
경우나 그 세르뉴 사건 때와 같은 특이한 정도의
냉혹성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지체없이
다이아몬드는 구체적인 방법을 듀크스에게 설명했다.
"대단히 교묘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털미지가 말했다.
"대통령께 의논해 보겠소." 버즈 마틴이 말했다.
"그 사이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모의실험
센터에서 실험을 시켜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는
것이 어떻겠소?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아직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회의실 밖에서 듀크스는 우연히 다이아몬드와
단둘이 되었다.
"이건 절대로 허락이 떨어지지 않을 거야." 적의에
찬 신음 같은 소리로 듀크스가 말했다. "내게
다소라도 발언권이 있는 한은."
"자네도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네." 관료들의
독특한, 잘 구슬러서 이해시키려는 어조를 흉내내어
다이아몬드가 조용조용히 말했다.
"만일 또다시 작전을 펼치게 된다면, 리오,
이번에는 서류에 의한 허가를 꼭 첨부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게나."
"서류 없이 일을 하는 바보 같은 짓은 절대로 하지
않겠네, 해리."
제 17 장
보리스 아브크센티에프라는 명패가 놓여 있는
남자가 먼저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솔직히 말해서 -- " 솔직함을 나타내려고 열심히
노력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눈 주위의 근육을
흠칫거렸다. "나는 이중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오." 그 영어에는 어렴풋이 외국 사투리가
느껴졌다 -- 아마 슬라브계의 사투리겠지만, 아무도
확실하게 식별할 수는 없었다.
"왜 이중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방안에
단 한 사람, 책상 위에 명패가 없는 남자가 물었다.
"글쎄, 나는 물론 야심가지 -- 게다가 어중간한
편의주의자이기도 하고."
"어중간하다는 것은 어떤 뜻이오?"
"즉, 설사 승진을 위해서라고 해도 내 뜻을
저버리고 연로한 폴란드 농부인 아버지를 죽이는 짓은
할 수가 없어요 -- 동시에 그를 돕는 일이 출세에
방해가 될 경우, 무리해서까지 그를 도울 마음도
없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웃었다.
"당신의 솔직성에 감사를 보내겠소." 모니터가
말했다. "계속하시오."
"어디까지 했었지?"
"자신의 이중성향을 설명하고 있었소."
"참, 그렇지, 이중성향이었지. 아는지 모르지만,
내가 경제개혁에 관계하게 된 것은 그 일이 당의
중추에 있어서 상당히 빨리 출세하는 데 도움이 되고,
더구나 별로 위험이 따르지 않는 일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오. 처음 얼마 동안은 나는 신중하게 한발 한발
내디뎠지만, 생산성이나 이익률이 향상되고 원자재
낭비율이 줄어들게 되는 등, 내 개혁계획이 성공한
사실이 분명해진 뒤에 내 이름이 공개적으로 개혁과
결부시켜서 들먹여지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소.
지금에 와서 나는 서방측의 소련 관찰자들 사이에서
신중하고 진보적인 실용주의자로 평가되고 있으며,
현재의 수상이 그 직책에서 싫증을 내게 될 경우에
후계자 후보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소 -- 현
수상이 그 직책에 싫증을 내게 될 경우는 도저히 있을
수 없지만 말이오." 다시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직 당신의 이중성향을 설명하지 않고 있는데."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지요." 이야기하는 남자가
다시 얼굴 근육을 흠칫거렸다. "나라의
대외보안관계의 여러 기관을 감독하는 정치국인
위원회의 서기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르윈터
사건의 소용돌이 속, 그것도 한가운데에 있소.
그런데, 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서 -- 음,
뭐라고 하면 좋을까 -- 카톨릭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 중 하나요. 나는 거짓 없이 역사의 진로는
예정되어 있다고 믿고 있소 -- 정립(定立)은
'정(正)', '반(反)', '합(合)', '정-반-합'으로
한없이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나는
모스크바의 당대학에서 공부할 때 헤겔의 변증법에
관한 전공논문을 썼는데, 그건 지금으로서는 관계없는
일이오.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와 레닌이 가르쳤듯이
개인은 역사의 진로를 바꿀 수는 없지만, 기회를
이용함으로써 그 진도를 앞당길 수가 있다는 점이오.
그런데 르윈터가 그 기회인 듯한 생각이 드는 게요 --
다시 없는 기회 같소. 요는 그렇다는 거지요 --
이것이 나의 이중성향의 골격이오. 즉, 나는
경제개혁과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인적 물적 자원과 예산을 미사일 방어망 쪽으로
돌려서 경제개혁에 지장을 주는 것은 아무래도
싫지만, 동시에 르윈터의 정보에 의해서 자본주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 우위에 설 수 있는 가능성에도
마음이 끌리거든."
"그렇군." 모니터가 말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시오?"
"나는 만일, 내가 추측하고 있듯이 군부가 미사일
방어망 설치의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고 하면,
자원이나 자금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에 찬성하게 되지
않을까 싶소. 나는 요즘 와서 군부의 동지들이 전보다
더 영향력이 강해진 것을 느끼고 있소. 르윈터가
제공한 정보의 이용을 지지한다는 것은 최종적으로는
군부가 마지못해 지지하고 있는 경제개혁보다 더욱
빨리, 더욱 확실하게 최고간부의 지위에 이르는 길을
제공해 줄지도 모르니까. 알겠소? 나는 두 손을 들어
열광적으로 지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성원해 준다면 제법 열광적인 지지자가 될
마음이 생길 테지."
"그렇군." 모니터가 말하고 점수 카드 같은 종이에
무엇인가를 써넣었다. 이번에는 알렉산드르 수하노프
장군이라는 명패를 앞에 놓고 있는 남자 쪽을 보았다.
"내 생각은 쉽게 추측할 수 있지." 장군이 말했다.
"나는 그런 정보를 입수했으면서도 그것을 군사적
이익에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범죄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소. 나는 미국이 자기네가
선제공격을 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제공격용
미사일 군사장비를 갖추어가고 있음을 확신을 가지고
강경하게 주장하오. 르윈터의 정보는 그런
선제공격에서 견뎌내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고 동료들을 설득할 작정이오."
"그 살아남는다는 말의 뜻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좋소. 살아남는다는 것은 도심부 목표에 명중하는
미국의 1메가톤 탄두의 수를 150개 이내로 막아낸다는
뜻이오. 최종적으로는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소련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고,
레닌에 의해서 우리 나라가 시작한 사회주의의 실험을
살리는 길이라고 강조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가령 우리 쪽 정치 지도자들이 조국의 국토,
그것의 안전보다 다른 주의나 주장을 우선시키는 일이
있다면 본인 또는 군부의 동지들은 그것을 반역과
다름없는 행위로 간주할 것이라고 완곡하게 경고할
것이 분명하오."
다음으로 니콜라이 힌츄크가 소련의 예산관계자의
처지에서 의견을 말했다.
"나는 일반적인 상황하에서라면 대 미사일 방어는
공격용 미사일 군사장비보다 훨씬 돈이 더 든다는
것을 주장하오. 왜냐하면, 날아오는 핵탄두를
저지시키는 데 90퍼센트의 확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의 탄투 한 개에 대해서 세 개의 비율로 대
미사일용 미사일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현재의 통설이 되어 있기 때문이오. 그러나
정보관계의 동지 여러분이 보는 르윈터에 대한 생각이
옳은 것이라면, 그 조건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되겠지요.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우리는 그 고유의
탄도궤적을 이용함으로써 날아오는 탄두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가려낼 수가 있고, 그 결과 대 미사일
방어용 예산을 3분의 1로 줄일 수가 있소. 표현을
바꾸면 대 미사일 방어망의 비용이 공격용 미사일
군사장비의 비용과 맞먹을 정도가 되며, 경제적으로
성립되는 선까지 축소가 가능하다는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르윈터의 정보를 기초로 해서
행동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로군?"
"경제적인 관점에선 물론 예스요."
"자네는 그렇게 본단 말이지." 다시 점수 카드에
뭔가를 써넣었다. "포고딘."
명패에 예브게니 포고딘이라고 쓰여 있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를 발견한 것은 납니다. 모스크바의
내 상사들은 주로 내 의견을 따라서 그를 본국으로
데려오기로 결정했소. 이제 나의 장래와 출세가 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분명해요.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나는 끝까지 그의 정보의 유익성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소."
모니터가 다시 아브크센티에프 쪽을 보았다.
"포고딘의 의견이 당신의 판단에 미치는 영향력의
정도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나는 생각해요. 나는 그가
자기의 장래가 르윈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소 -- 사실은 그렇지도
않은데 -- 그러니까 나는 그의 르윈터 지지를
할애해서 받아들이지요."
모니터가 미하일 로잰코의 의견을 요구했다.
"과학자의 처지에서 나는 문제가 경제관계자가
주장하듯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겠소. 문제는 단지 대 미사일 방어용 비용만이
아니오. 우리가 대 미사일 방어망을 설치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미국이 같은 조치를 강구하게 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소. 그렇게 되면, 우리는 미국의 대
미사일 방위조치에 합당한 공격용 미사일 군사장비의
확장과 아울러 비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지."
"르윈터가 제공한 정보에 대해서 당신은 어떤
입장에 서겠소?"
"기술적인 견지에서 대 미사일 방어가 비로소
현실적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요."
다시 점수 카드에 기입해 넣었다.
"남은 건 밀리안트비치, 당신과 의장뿐이오."
배치솔라프 밀리안트비치처럼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나는 과학 아카데미의 USA 연구소를
대표하는 사람이오 -- 다시 말하자면 미국 정부
연구의 전문가지. 이 토론에 있어서 주로 내가 공헌할
수 있는 것은 르윈터 사건이 장기적으로 외교정책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점이오. 나는 소련이 지금까지
언제나 힘을 배경으로 하는 처지에서 발언을 할 때에
비로소 외교적으로 가장 성공한 점을 강조하고 싶소.
대조국전쟁 뒤의 몇 년 간 서유럽을 석권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미국이 믿고 있었던 그 시기가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소. 따라서 나는 대 미사일
방어조직을 군사장비에 보태게 되면 자본주의 여러
나라에 대한 우리 쪽의 외교적 입장은 말할 수 없는
이익을 얻게 된다고 결론짓겠소."
"그럴 경우, 우리가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대
미사일 방어조직을 전개한 사실을 미국측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보시오?" 모티너가 물었다.
"전혀 없지. 그들은 우리가 국제적인 흥정의
자리에서 전보다 자신을 가지고 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뿐이오 -- 좀더 가벼운 걸음걸이라는
느낌으로 말이오."
"그럼, 당신은 르윈터가 제공한 정보를 활용하자는
쪽에 찬성이군?"
"자본주의 여러 나라와의 국제적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또한 그것이 미국에 끼칠 효과를
중시한다는 관점에서 예스요."
"이제 남은 건 의장, 모두 당신 생각 여하에 달려
있소."
명패에 '의장'이라고 써 있는 남자가 한동안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좀더 시간을 두고 결론을
내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잠시 뒤 그가
말했다. "우선 바람이 어느쪽으로 불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소. 만일, 과오를 범했을 경우, 되도록
많은 사람이 책임을 나누어지는 그런 상태가
바람직해. 나는 앞으로 한동안은 지극히 신중하게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아브크센티에프가 군부와 동조한다는 것이
확실해진다면, 나는 그와 같은 방향으로 나가기로
생각을 굳히겠지 -- 물론 그들보다 앞서서. 어쨌거나
나는 그들의 지도자이니까."
"로잰코의 신중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 점에 관해서는, 로잰코의 동생이 바로 얼마
전에 결혼생활 12년에 이르는 내 처제와
이혼한......" 의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과학자의 신중론에 의해 생각을 바꿀 가능성은 우선
없을 것으로 생각하오."
강당의 뒤쪽에서 얼마 안되는 방청객들 한 무리가
신중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브루킹
인스티튜트에 근무하고 있으면서 모의실험 센터를
학위논문의 테마로 하여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남자,
어떤 문제에 관한 외교방침을 '실험 게임'에 붙이기
위해서 와 있는 국무부의 젊은 러시아 전문가 두
사람, 티토(유고슬라비아의 전 대통령) 역을 맡기
위해서 실험 센터에 고용되어 있는 유고에서 온
망명자, 그리고 리오 다이아몬드도 끼어 있었다.
무미건조한 대화 사이에 가끔 주위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끼어들지 않고 있는 것은
다이아몬드뿐이었다. '배우'들은 한껏 즐기고 있었다
-- 그러나 그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즉석 대화처럼 들리는 의견에 너무도 많은 것이 걸려
있다.
실제로는 거기에서 주고받는 의견은 즉석에서
떠오른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의장' 배역을
맡고 있는 사람은 자기 배역의 대상인물의 생활을
12년 간이나 공사(公私)에 걸쳐서 자세히 연구해
왔다. 의장이 자기 처제가 이혼당한 것에 화내고
있다는 정보는 모스크바 주재의 서방측 첩보관계자가
칵테일 파티 등에서 주워들은 소문의 단편을 모아서
알게 된 것이다.
이 모의실험 센터라는 것은 카프카와 같은 기묘한
존재였다. 이 센터는 상근, 또는 비상근 직원으로
350명을 고용하고 있다. 이 센터의 이른바 '상근'
직원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지위가 높은, 또는
장래성이 있는(센터 내부의 독특한 표현에 의하면)
'말(馬)'을 가지고 있어야만 되고, 우수한 '말'을
가진 사람은 수입이 좋은 신분을 확보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자기 배역의 대상으로서 아브크센티에프를
골라잡은 사람은 현재 예상되고 있듯이 그의 '말'이
소련에 최고지도부의 요직으로 출세하는 경우에는
장래가 안정된 신분이 보장된다. 그러나 모두가 다
행운을 잡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젊은
행동심리학자는 어떤 다크 호스의 연구에 3년을
보냈는데, 그 '말'이 어쩌다가 타시켄트의
수도관리자의 직책으로 좌천되어 버렸다. (그
행동심리학자는 민간인 일자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또한, 운명의 손이 개입할 가능성도 언제나
따라다닌다 -- 중앙정치국원 중 누군가가 죽게 되면
'말'을, 다시 말하자면 직위를 잃은 연기자에게 꽃을
보내는 것이 어느새 모의실험 센터에서는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오늘 아침 연기자들은 모니터의 표현대로
지금까지는 '워밍 업' 정도의 의견의 개진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즉, 실제의 인물들이 르윈터를 진짜
망명자로 믿고, 그가 가져온 것으로 되어 있는 정보에
따라서 행동하느냐 마느냐는 점에 국한시켰을 뿐이다.
그 점에 관한 의견 개진이 끝나면 그들은 다음 문제로
옮겨간다. 흔히 두뇌유출이라고 불리는 학자들의 대량
출국 때에 워싱턴에 초청될 때까지 옥스퍼드 대학의
학감을 지냈던 모니터가 다음 문제를 말했다. "자,
여러분, 다음에는 이미 발신된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신호 문제를 거론해 보겠소 -- 그
체이핀이라는 사람에 대한 것, 보스턴에서 있었던
불상사, MIRV 회의,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 말이오.
문제를 따져보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소련측은 그런 신호를 받아들일까? 가령
받아들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누구라도
좋으니까 아무때나 발언해 주기를 바라겠소,
아브크센티에프."
다이아몬드는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그 문제는 내 생각에는 아주 간단한 일이 아닐까
싶소." 아브크센티에프의 역할을 하는 남자가
파이프에 담배를 마저 채웠다. "잠깐 실례." 파이프에
불을 붙여 서너 번 빨고는 얼굴을 들었다. "모니터,
당신은 신호에 관해서 질문했소. 우선 첫번째로 할 수
있는 말은 그런 신호가 발신이 되면 우리는 즉시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안다는 점이오. 우리는 당연히
취할 조치로서 체이핀이나 보스턴의 녀석들을
지켜보게 되겠지. 우리가 최초로 받는 신호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거요
-- 즉, 미국측이 진짜 망명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는
듯이 보여 르윈터가 진짜 망명자라고 보는 우리의
생각에 뒷받침이 되지. 그러나 제2, 제3의 신호를
받게 되면 -- 그 무렵에는 우리는 당연히 MIRV의
전문가가 워싱턴에 소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에 --
우리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고, 즉시 그 사건을
재검토하지요. 그리고 암살이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알
무렵에는 우리는 신호가 발신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지."
"그런데 당신은 그 신호들을 어떻게 해석하시오?"
"미국의 첩보관계 여러 기관은 진정한 망명에 대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소. 오히려
망명이 진짜라는 것을 우리에게 믿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우리는 결론지었으므로, 따라서 그것은
기만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럴듯하군." 모니터는 금방이라도 다른 질문을 할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수하노프
장군의 의견을 요청했다.
"나 자신과 군의 지도적 지위에 있는 동지 여러
사람들의 대부분은 -- " 장군이 말했다. "르윈터가
진짜 망명자라는 생각을 계속 버리지 않겠지만, 젊은
중견장교 중 일부는 아브크센티에프 장관의 생각이
옳다고 볼 거요. 그들은 미국측에서는 그가 진짜라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으니까 가짜가 틀림없다고 생각할
거요."
"중견장교들의 의심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은?"
"르윈터의 정보에 의해 조치를 강구하는 것을
끝까지 요구하려는 우리의 결의를 흔드는 것이 되지.
나는 내 생각을 계속 주장하겠지만, 그전만큼 강경한
주장은 하지 않아요 -- 그리고 겉으로 들어내지는
않겠지만, 다른 동료들의 생각이 옳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겠지."
"니콜라이 힌츄크." 모니터가 다음 사람을
재촉했다.
"일단 씨가 뿌려지면 -- "
"실례지만, 무슨 씨?"
"의혹의 씨요, 모니터. 르윈터의 진실성에 관한
의혹의 씨가 부려지면 나는 예산국을 대표해서 현재의
5개년 계획을 변경하는 것이 바보짓이라고
주장하겠소. 모든 것은 르윈터의 정보가 진짜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소. 그 점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의문이 존재한다면 나는 일을 신중하게 진행시킬 것을
요구하겠소.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비용이라는
점에서 공격용 미사일 군사장비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기 때문에, 대 미사일 방어조직을 구축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하오."
"다시 말하자면 당신의 본래의 신중론이 더욱더
강화된다는 거로군?"
"그렇소."
"그렇군." 모니터가 말했다.
다음에는 포고딘이 생각을 말했다.
"내 장래는 르윈터에게 달려 있소. 나는 상사에게
미국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말하겠소. 오히려 그 반대이며, 그 나라에 관한 내
지식에 의거하여 생각컨대, 그들은 단지 진짜 망명에
대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이오. 미국에는 그런 경우에 꼭 알맞은
속담이 있소 -- 말이 달아난 다음에 마구간 문을
잠근다는 거요."
모니터가 아브크센티에프를 보고 포고딘의 의견이
그의 판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물었다.
"지난번보다는 영향을 받지." 아브크센티에프가
말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사이를 두고 생각을
정리했다. "본래 포고딘은 제1급 정보부원이오.
걱정하고 있는 것이 자기 자신의 직무상의 처지나
장래의 출세만이라면 그는 형세가 불리하다 싶으면
즉각 르윈터에게서 미련없이 손을 뗄 거요. 그러니까
그런 그가 끝내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고 있는 점에
나는 강한 인상을 받게 되지 -- 특히 그가 미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았으므로, 그 나라에 대해서 이른바
전문가라는 우리 쪽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독특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마음에 걸리는 거요. 결국 나는
처음부터의 생각을 고집하게 되겠지만, 포고딘의
의견이 마음에 걸릴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그래요,
마음에 대단히 걸릴 것만은 틀림없소."
소련의 미국 전문가 바치슬라프 미리안트비치가
모니터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발언했다.
"당신의 불안을 더욱 부채질할 자료를 제공하겠소,
아브크센티에프 동지. 미국측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당신의 의견에는 나도
동의해요 -- 그러나 그들이 노리는 것이 뭐요?
최종적으로는 그 모든 것이 미국은 우리에게 어떻게
생각하기를 바라고 있는가에 달려 있소. 그는
진짜라고 생각하게끔 우리에게 바라고 있다면 그는
가짜가 분명해요. 가짜라고 생각하기를 바란다면 그는
진짜고. 거기서 일이 복잡해지는 거지요. 내가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해 보겠소. 미국측은 그가 진짜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차리고서, 그가
가짜라고 우리가 단정할 것을 기대하고 르윈터가
진짜라는 신호를 우리에게 보내오고 있을 가능성이
있소. 그러므로 그들은 그가 가짜라고 우리가
생각하기를 원하고 있소. 그러므로 그는 진짜가
틀림없어요, 알겠소?"
"그럴듯한 생각이군. 이야기가 점점 복잡해지는데."
아브크센티에프가 말했다.
"그래서 그 점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모니터가 물었다.
"나는 아주 단순한 일에 불과한 것에서 심오한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이 우리 쪽의 전문적인 미국
연구자의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나 자신은 미국인은
그처럼 정밀하기 짝이 없는 교활성이 있다고 생각지
않소. 나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미국측은 진짜 망명에 대해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 포고딘의 사고방식이며, 또 하나는 그들은
신호라는 수단을 통해서 망명이 진짜라고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하고 있다는 거요. 따라서 가짜가
틀림없다는 것이 내 사고방식이오. 그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나는 역시 내 사고방식을 지지하겠소."
"당신은 아직 의견을 말하지 않았는데, 로잰코?"
"내 동료인 과학자들은 아브크센티에프 동지의
사고방식, 즉 미국은 망명이 진짜라고 우리가
생각하도록 애쓰고 있고, 따라서 가짜가 틀림없다는
견해를 강력히 지지할 거요. 우리는 새로운 군사장비
확장경쟁이 시작되는 것에는 반대하며, 그것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떠한 논리라도
지지하겠소."
"그렇군, 언제나 그랬지만 결국은 의장의 결단을
기다릴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거로군?"
"나는 대단히 불안해요." 의장이 말했다. "너무도
많은 상반된 의견이 분분하고 있소. 어느쪽을
돌아보아도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말했었잖아 하고
반박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거요."
"당신은 어느쪽으로 기울어 있는 거요?"
"나로서는 아브크센티에프와 첩보관계자의 생각에
동의하고 싶은 기분이오 -- 즉, 미국이 르윈터가
진짜라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소. 그러니까 그는
가짜가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싶소."
모니터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여러분은 다시
두세 가지 신호가 추가된다면 좀더 마음이
편해지겠소?"
"물론이오." 아브크센티에프가 말했다. "앞으로
두세 가지 징후적 사실이 추가된다면 미국이 르윈터가
진짜라는 신호를 우리에게 보내고 있는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해질 것이오. 그렇게 되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는 가짜라고 단정할 수가 있소."
"과학자는 -- " 로잰코가 옆에 서 있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장단이라도 맞추듯이 발언했다.
"예산관계자도 함께 그 견해를 지지할 거요."
"또다시 신호를 보내올 경우에는 나 역시 그 견해에
찬성할 것이 틀림없소."
"나라도 르윈터가 진짜 망명자일까 하고 의혹을
갖기 시작하겠네." 수하노프 장군이 인정했다.
"어쨌거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으니까."
"의견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은 나로서도
대단히 반가운 일이오." 의장이 말했다. "여러분의
결의가 내 생각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대단히 만족하고 있소. 그럼, 내가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겠소 -- 르윈터는 가짜이며, 가짜로서 취급을
받아야만 해."
"이런 결론이오, 여러분." 모니터가 말했다 --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험은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모니터가
메모를 간추리면서 말했다. "내 역할에서 벗어나는
것일지 모르지만, 이쯤에서 앞으로 두셋 추가될
신호에 관해서 생각해 보면 어떻겠소?"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든 좋은 생각이 있으면 듣고
싶은데?"
미국 연구자인 밀리안트비치가 손을 들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나와 내 동료들은 미국의
신문이나 잡지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소.
따라서 가령 예를 들면 '뉴스위크' 잡지의
'페리스코프(잠망경)' 난에 어떤 기사가 실렸다고
하면......"
제 18 장
45구경 권총의 묵직한 중량감을 다이아몬드는
손금의 생명 선 부근에서 힘껏 쥐었다. 금속의 축축한
감촉을 피부로 느끼며 그 중량감에 의한 자기 모습의
어색함을 의식하게 되자 그의 기억이 영국인
교관에게서 처음 그 권총 쏘는 법을 교육받던
영국에서의 어느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
녀석이 자네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네." 간호원이 의사에게 메스를 건네 주듯이 그
남자가 다이아몬드의 손바닥에 권총을 덜렁
올려놓았다. 다이아몬드는 높낮이도 없이 계속되던 그
교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크게 숨을 들이마셔. 그래, 이번에는 그 중 반을
내쉬고. 좋아.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쥔다. 잘했어. 활
모양을 그리듯이 가늠쇠를 표적 위까지 들어올리고
권총의 무게로 자연스럽게 내려. 그래. 가늠쇠가
표적과 겹치면 쏜다. 알겠나? 방아쇠는 한번 당긴
뒤에 다시 한 번 당긴다. 알겠나? 두 번이야. 프로는
항상 두 번 쏜다. 내 교육이 끝날 때쯤이면 프로는
항상 두 번 쏜다는 말이 커다란 글씨로 자네 가슴에
새겨질 거야."
갑자기 한 남자가 -- 어렴풋이 낯익은 누군가 -- 의
윤곽이 10 미터 전방, 약간 왼쪽으로 나 있는 창에
나타났다. 다이아몬드는 순간 한쪽 무릎을 꿇고
손잡이를 두 손으로 꼭 쥔 45구경을 팔을 힘껏 뻗어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반을
뱉어내고서 가늠쇠를 표적 위에까지 들어올렸다.
가늠쇠가 내려와서 표적과 겹친 순간에 한 발을
쏘았다 -- 그리고 가슴에 커다랗게 새겨진 글씨에
따라서 본능적으로 다시 한 발 쏘았다.
주위의 방음벽에 날카로움이 흡수되어 버린 건조한
폭발음이 실내사격장을 가득 메웠다.
"두 발 다 빗나감." 지겨운 듯 차디찬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직업적인 흥미가 어렴풋이
섞인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전쟁중에 사격을
배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다이아몬드 씨?"
다이아몬드가 유리로 둘러싸인 조그만 방 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에서였지요? 혹시 서섹스 군의 육군정보부
훈련소 아닙니까? 교관은 프리처드라는 사람?"
"그렇다네." 다이아몬드가 커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
"포도주의 맛을 보고 어느 밭의 포도인가를 아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나는 쏘는 방법을 보고
어디서 배웠는지 아는 거지요. 당신이 그 권총을 쥔
모양 말입니다 -- 두 손으로 손잡이를 쥐고 있어요 --
게다가 두 발 쏘고. 몇 년에 한 번쯤 옛날 사람이
와서는 한번에 두 발을 쏘아대지요. CIA의 듀크스 씨,
아십니까? 똑같습니다 -- 빵 빵. 그것이 그
프리처드라는 사람의 특징이거든요. 그에게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 발을 쏜답니다. 하하.
당신네들끼리 클럽 같은 거라도 만들어야겠군요."
스피커의 웃음소리와 함께 다이아몬드도 웃었지만,
그의 웃음소리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의 이름을
잊어버렸어." 상대방의 말에 이끌리듯 그가 말했다.
"그래, 맞았어 -- 프리처드였어. 아마추어는 한
발밖에 쏘지 않지만, 프로는 항상 두 발 쏜다고 늘
말했었지."
"어른과 아이의 차이라고나 해둘까요."
다이아몬드는 어른과 아이, 프로와 아마추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특별히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전쟁중 뮐즈에서 일어난 십대들의 사건이
떠올랐다. 독일군이 독립기념일 축하를 금지하자
젊은이들이 수천 마리나 되는 달팽이를 빨간색, 흰색,
파란색으로 칠해서 거리에 내보냈다. 대담한
의사표시였다! 독일군 지구사령관이 젊은이 셋을
처형했다 -- 그 중 둘은 달팽이 사건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아이들이었다. 아마추어는 자기가 한 일로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밀어넣는 녀석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다이아몬드는 생각했다.
"좀더 해보시겠습니까, 다이아몬드 씨?" 스피커의
말소리가 다시 차디찬 어조로 돌아갔다.
"물론 해야지."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이번에는 문이 홱 열리면서 기관총을 든 사나이 --
이 녀석도 어렴풋이 낯익은 얼굴이다!-- 의 검은
모습이 나타났다. 또다시 다이아몬드는 순간적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몇 년 전에 영국의 초원에서 배운
사격법을 되풀이했다 -- 허파 속의 공기를 반쯤
뱉어내고서 가늠쇠를 표적에 맞춰라, 맞든지 안
맞든지 교관에게 프로로 인정받기 위해서 두 발.
"두 발 모두 빗나감. 정정. 두 번째 총알이 어깨를
스쳤음."
소리는 여전히 무표정하고 차디찼으나,
다이아몬드는 이제까지는 없었던 어떤 느낌이 들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 그는 그런 것에 민감했다.
그 느낌이라는 것은 한 달에 한 번 찾아와서 구식
사격법, 둔한 반사신경으로 연습을 하지만, 커다란
벽에조차 맞추지 못하는 옛날 프로에 대한
모멸이었다. FBI의 거대한 건물 지하 2층에 있는 이
사격장에서 중요한 것은 직함이 아니고 솜씨다 --
사격솜씨가 좋은 사람이 잘난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다이아몬드는 사격 솜씨가 아주 형편없었다
-- 적어도 사격장에서 얼굴도 이름도 없는 인형을 쏠
때에는. 언제나 약실 안에서 화약이 폭발하고 총알이
나선 모양의 총신 안에서 전진을 시작할 바로 그
순간에 팔이 움찔 하고 굳어버린다. "방아쇠는 당기는
것이 아니야, 쥐어짜는 거야." 지난날 프리처드가 몇
번이나 한 말이었다. "그렇게 하면 언제 공이치기가
떨어지는지 모르니까 몸이 굳어지지 않는다네."
발사 순간에 몸이 굳어지는 것에 대해서
다이아몬드는 그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연습'에서의 사격 성적이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쩐 일인지 필요한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정식', 다시
말하자면 상대가 있을 때뿐이었다. 십대였던 시절에는
아주 우수한 농구선수로서 힘이 있고, 움직임이
빠르고, 거칠고, 득점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합 때뿐이었다. 연습 때에는 언제나 날카로운 면이
없었다 -- 자기보다 체격도 작고 움직임도 둔한
상대에게 가지고 있던 공을 빼앗기기도 하고, 슛을
브로크당하거나 해서 다리에 납이라도 붙어 있는 듯이
꼴사나운 경기를 하곤 했다.
사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 적어도 그 자신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겨냥하고
총을 쏘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럴 필요가
생기면 냉정, 신속, 정확히 쏠 수가 있다는 것에
절대로 자신이 있었다. 사람과 겨룬다는 자극이
있다면 자기가 우수한 사격수 -- 냉혹한 살인자 -- 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이아몬드는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전쟁중, 영국의 조종사 두 사람이 겁을 먹고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었던 그 피레네 산맥의 가축
우리에서 추적해 오는 개가 소변의 트릭에 속지
않기를 바라면서, 비시 정권의 국경경비 대원이 문을
열고서, 무릎을 꿇고 45구경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쥔
채 힘껏 팔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자기 앞에
나타나기를 마음속에서 바라고 있었던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들의 두려움으로 가득찬 시선이
자기에게 와서 박히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총알 -- 물론 한 사람에게 두 발씩 -- 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나이들의 몸이 총알의
힘에 의해 허공에 뜨고 뒤로 나뒨굴며 가죽과 뼈의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열려 있는 문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자기가 얼마나 원했었던가. 이야기의 그 부분은
아직 세알라에게도 들려주지 않았다는 것을
다이아몬드는 생각해 냈다.
"다이아몬드 씨, 다시 한 번." 스피커의 소리가
말했다.
이번에는 약간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살이
두툼한 얼굴이 궤짝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다이아몬드는 순간 그 얼굴이 누구인지 알았다. A J
르윈터를 빼닮았다. 다이아몬드는 순간 한쪽 무릎을
꿇고 두 팔을 앞으로 내밀어 목표인 눈 사이에 두
방을 쏘았다.
"그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약간 남부
사투리가 섞인 어조로 동료인 스티브 페리가 물었다.
"다른 신호는 일단 이치에 맞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암살까지는 좀......"
"우리가 그를 죽이려 하는 것처럼 보이게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결국은 그것이 목적일세."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어떤 방법으로?"
물론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303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르윈터 사건에 대한 설명을 미리
해두려고 큐넨 차관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
다이아몬드는 아직도 그 점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다. "르윈터의 암살을 제안하는 것은
좋아." 큐넨이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가는
테니스 코트에서 CIA측으로 공을 보내는 것이 될
뿐이야.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수단을 가진 것은
그들뿐이며, 녀석들이 하겠다고 달려들겠지 --
달리......" 펜타곤(국방부) 내의 세력다툼의
베테랑인 큐넨이 혼잣말처럼 여러 가지로 생각한 바를
얘기했다. 국방부 정보국이 담당할 수 있도록
암살계획을 생각해 내는 것이 문제다. 그 대답은
우연에 가까운 모습으로, 어떤 소련 정치국원의
건강진단 결과를 가져다 주기위해 뛰어들어온 큐넨의
부하인 젊은 수재가 제공해 주었다. 큐넨이 그
부하에게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자이체프를 이용하면 어떻겠습니까?" 마치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그 젊은이가 대수롭지 않게
제안했다.
"그 자이체프는 누군가?" 큐넨과 다이아몬드가 함께
물었다.
자이체프는 유명한 소련의 체스 그랜드 마스터인
스토얀 알렉산드르비치 자이체프를 말하는 것이라고
그 젊은 수재가 설명했다. 그 자이체프가 러시아 인이
말하는 출판용이 아니고 서랍용으로 놔둘 생각으로
수기를 썼다. 다만 그 수기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해빠진 지극히 평범하고 아무런 해가 없는 수기가
아니고, 오래 전에 자존심 같은 것은 몽땅 내던져
버린 한 남자의 노여움에 가득찬 웅변 같은 고뇌의
외침인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이체프의 수기는
소련의 작가 안드레이 아크셀로드에 관한 것인데 --
그가 당대회에서 대담하게도 검열과 네오스탈린주의를
비난한 것, 그가 레닌그라드 교외의 정신병원인
셀브스키 정신진료연구소로 끌려간 것, 또는 -- 이
부분은 서방측에 알려져 있지 않지만 -- 그가
화장실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한 것 등이 적혀 있다.
그러나 수기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크셀로드에
관한 것이 아니고 자이체프 자신에 관한 것이다 --
자이체프는 당대회에서 아크셀로드가 연설한 뒤에
그에게 퍼부어진 일반의 비난에 자신이 동조한 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격렬하게 책망하고 있다. "막상
시련의 때가 오니 나는 나 자신의 인간성보다는
아파트나 별장, 승용차, 외국여행 같은 것을 더
중요시했다." 마지막의 준엄한 전기분석의 부분에서
자이체프는 아크셀로드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그리고, 그런데도 여전히 자기는 너무
겁쟁이라서 아크셀로드와 가까운 집안끼리만 모인
장례식에도 참석할 용기조차 없었다고 써 있다는
이야기를 그 젊은이가 차관에게 설명했다.
그 장례가 끝나고 한참 지난 어느 날 자이체프는
'노비 밀'의 자유주의적인 편집자 티모센코에게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고는 두 사람은 의식을 잃을
때까지 술을 계속 마셔댔다. 날이 샐 무렵 자이체프는
냉수에 머리를 처박아 취기를 쫓고는 손으로 그
수기를 쓰고서 '양심선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티모센코가 잠에서 깨어나니 자이체프가 수기 위에
엎드려서 자고 있었기에 그는 그것을 집어들고
읽었다-- 그리고 자이체프가 그 원고를 동료들에게
돌려가며 보일 생각으로 쓴 것이라고 짐작하고서
자유주의적인 친구들에게 보이려고 가지고 돌아갔다.
대낮 가까이 되어 '암소'가 겨우 생각나서 자이체프를
깨웠더니 자이체프는 자기가 아주 위험한 짓을 저지른
것을 깨닫고는, 그 무렵 마치 시한폭탄이라도 되는
듯이 조심조심 돌려가며 보던 원고를 되찾아서
없애버리려고 눈을 뒤집고 모스크바의 거리를 찾아
헤맸다. 그는 그날 저녁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원고를
찾아내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모스크바의 머리가
잘 돌아가는 어느 자유주의의 시인이 원고를 사진으로
찍어놓은 뒤였다. 그리고 번거로운 지하경로를 거쳐서
상당한 액수의 돈과 맞바꾸어 그 필름이 미국방부
정보국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그것을 선전에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 20~30부 위조해서 이쪽의
비밀경로를 거쳐 소련으로 들여보낸 뒤에, 때를 보아
서방측 신문에 그 전문(全文)을 싣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젊은이가 설명했다. "자이체프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쓴 아크셀로드에 관한
진상(물론 아시고 계실 줄 압니다만, 소련측은 그가
암으로 죽은 것으로 해놓았습니다)이면 전세계에
대단한 충격을 줄 것입니다." 그런데 기록보관소의 한
직원이 그런 경우의 규정절차로서 자이체프의
신상기록 카드를 조사해 본 즉, 그가 지극히 우수하며
장래가 촉망되는 정보부원이며, 현재 재일(在日) 소련
대사관의 첩보책임자인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포고딘이라는 사람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그 발견에 의해서 새로운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포고딘!" 다이아몬드는 벌써 말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르윈터를 시중드는
역을 맡고 있는 인물이야."
"그렇습니다." 젊은이가 말했다.
"포고딘과 자이체프는 어느 정도로 친한 사이인가?
자이체프와 그의 수기에 대해 알게 된 경위에 대해서
다이아몬드의 이야기가 끝나자 스티브 페리가 물었다.
"대단히 -- 자이체프의 별장에서 있었던 파티에
포고딘이 르윈터를 데리고 갔을 정도야."
"그래서 자네는 그럴 마음만 있으면 자이체프가
다시 르윈터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군?"
다이아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의 간단한
부탁과 그의 '양심선언'을 맞바꾸자고 하는 거야."
"그는 응하지 않을 걸세 -- 그런 일로 살인을
범하지는 않을걸." 페리가 경고했다.
"그는 자신이 살인을 한다는 것을 모른다네."
"그렇다면 남은 건 자네가 '양심선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이체프에게 알리기만 하면 일은 다
되는 거라는 이야기로군." 페리가 말했다. "CIA의
손을 빌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나?"
"그래, 있을 걸세."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전화가 오랫동안 계속 울리고 있었다. 다이아몬드가
수화기를 놓아버리려는데 세알라가 나왔다.
"여기는 마담 데파르지."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지독한 사람이군요, 리오, 어디에 가 있었어요?"
"여기저기."
한동안 그 '여기저기'라는 말의 모호함에 대해서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우리들, 여러 가지
일들을 허공에 떠 있는 채 그대로 두고 있는 것 같고,
그 점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서로 할 이야기는 다 끝난 줄 알고 있었는데."
세알라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리오? 전에 당신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고, 나는 그런 당신이 좋았어요 -- 한 겹, 두
겹, 항상 새로운 당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당신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것 같아서
어쩐지 두려워요. 리오, 듣고 있어요?"
"듣고 있어. 당신은 공상이 지나쳐, 세알라. 모든
것이 지금까지와 같아. 우리들은 고원(高原)에 도착한
거야. 그것뿐이라고 -- 계속 걷기 전에 잠깐 멈춰서서
쉬고 있는 중이야."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 거예요?" 세알라가
물었지만 다이아몬드는 못 들은 척하고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러시아에서 돌아오면 서로 느긋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이야기하기로 하지, 괜찮겠지?"
"나는 내가 러시아 같은 곳에 가게 되어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래서 전화한 거야, 세알라.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다이아몬드는 너무 긴장되어
이마를 누가 조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러시아에서?"
"응. 위험은 전혀 없어. 절대로 없어. 보증하지.
모스크바에서 어떤 사람과 만나서 편지를 한 통
건네주면 돼, 그것뿐이야."
"어쩐지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은 역할이군요."
평소의 세알라의 말투로 바뀌어 있었다. 스파이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겨, 그 안에서 한몫 하게 되는
것에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내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아니면 당신이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렇게 흥분하지 마, 세알라 -- 당신은 있는
그대로 가는 거야. 그리고 어떤 남자와 2~3분
이야기를 하고, 편지 한 통과 고초열 알약을 조금
건네주는 것뿐이야. 그것뿐이라고. 자세한 것은
만나서 이야기하지. 게다가 다소 보수도 나와 --
3,000달러 쯤. 어때?"
"신나요." 그러나 세알라는 문득 생각이 났다.
"리오, 난 안돼요."
"안된다니, 무슨 뜻이야?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잖아?"
"재미있을 것 같지만......난 갈 수가 없어요.
패션하는 사람들에게 이번 여행은 갈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해 버렸고, 그들은 이미 대신 갈 모델과
계약까지 해버린걸요."
"그 일은 이미 해결했어." 다이아몬드는 별일
아니란 듯이 말했다. "그 아가씨에게 돈을 주고서
대신 다시 당신이 가기로 되어 있어."
"당신은 나에 대해서 상당히 자신이 있군요, 리오.
당신이 마음대로 정해 버린 것이 이것으로 두
번째예요."
"처음은 언제였지?"
"나하고 자기 전에 내 신상조사를 시켰을 때. 나를
침대로 끌어들일 자신이 있었던 거죠, 그렇죠, 리오?"
"세알라,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줄 알았는데. 나는
당신이, 뭐라고 할까, 내 일의 성질을 이해해 준
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잘 들어, 러시아에 가고
싶지 않으면 그렇다고 말해. 전부 취소할 테니까."
세알라는 다이아몬드의 계획을 모두 허사로
만들어버렸을 때의 만족감과, 러시아에 갔을 때의
즐거움이나 흥분을 비교하면서 한동안 망설였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좋아요, 리오, 가겠어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말해 봐요,
리오, 내가 안된다고 했다면 어떻게 할 셈이었죠?"
다이아몬드는 한 번 쓴 적이 있는 말로 그 자리의
어색함을 피하려고 했다. "내가 당신을 침대로
끌어들였지, 분명?"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러자고
말을 하지는 않았어."
이번에는 세알라가 웃지 않았다.
다음 전화는 훨씬 홀가분했다.
"당신은 나를 모릅니다." 다이아몬드가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내 이름은 카입니다. R가 둘입니다.
국방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터스에 관한 일인가요?" 모린 싱클레어가
물었다. 그 지친 듯 힘없는 말소리가 갖가지 고뇌를
겪었음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이번 일로 대단히 괴로움을 당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이아몬드가 위로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진심으로......"
"카 씨,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테니 분명하게
대답해 주세요 -- 어거스터스는 돌아올 수 있는
건가요?"
"돌아와요?" 순간 다이아몬드는 그녀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떤 뜻입니까, 돌아온다니?"
"돌아오는 것, 돌아오는 것." 되풀이하면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어조로 모린
싱클레어가 말했다.
갑자기 다이아몬드는 그 뜻을 알아차렸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에게 책망당하지 않고 돌아올 수
있느냐는 뜻입니까?"
"그래요, 바로 그 말이에요."
"우리의 견해로는, 싱클레어 양, 소련에서의 영주를
희망했을 뿐이지 르윈터 씨는 아무런 위법행위도 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바로는
그는 아직 미국의 시민권을 정식으로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그럴 생각만 있다면 언제라도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물론 직장을 잃을지도 모르고, 또다시
기밀정보 취급자격이 주어질지는 의문입니다만......"
"어쨌든 돌아올 수는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가 귀국하는 것을 두려워할 법적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고 봅니다."
그 말에 모린 싱클레어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 " 다이아몬드가 계속했다.
"우리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내가 한 말이 공식적으로
인용되면 곤란합니다만, 우리 나라의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인 훌륭한 시민이 철의 장막 너머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 외국에 대한 우리 나라의
이미지에 결코 플러스가 안됩니다. 내 말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그와 직접 대화만 할 수만 있다면......"
다이아몬드가 바라던 돌파구가 열렸다. "직접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싱클레어 양, 그에게
편지를 쓸 수는 있습니다."
"편지를? 편지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군요. 어디로
보내면 되나요?"
"실은 그 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적인 경로를 통해서 르윈터 씨에게 편지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즉, 저쪽 당국자 모르게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가 있나요?"
"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은 절대로
입밖에 내어선 안된다는 것은아시겠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카 씨.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겠어요. 맹세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다이아몬드는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어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당신의 필적으로 그에게
편지를 쓰는 겁니다. 일상적인 이야기처럼 쓰는
겁니다 --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날씨 이야기
등등을 말입니다. 쓰면서 우리가 아니고 당신이 쓴
편지가 틀림없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중간에
개인적인 일들을 적당히 섞어가며 써주십시오. 그리고
2페이지쯤에서부터 진지하게 써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쓰시라고는 나로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여하튼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즉 아실 줄 압니다만.
느낌에 따라서 쓰면 됩니다. 그가 없어서 아주
쓸쓸하다는 것, 무슨 이유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마음이 생겼는지, 충분히 알고는 있겠지만 처음
가보는 나라에서 하나부터 다시 해나간다는 것은 그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힘들지 모른다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 중간 적당한 부분에, 국방부에 문의해
보니 그가 생각을 바꾸어 귀국한다고 해도 제재를
받는 일은 전혀 없다는 보장을 받았다고 말해
주십시오. 대강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싱클레어
양?"
"예, 잘 알겠습니다. 물론 쓰겠습니다. 이 전화가
끝나는 대로 곧장 책상으로 가서 쓰겠어요."
"예, 고맙습니다. 당신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해가며
쓰신다면 그분도 제정신을 되찾고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저녁때 직원을 시켜서 편지를
가지러 보내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카 씨, 이 고마움을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같은 마음이니까요. 그리고 참, 싱클레어 양, 한
가지 더. 그 기자회견 내용을 읽어보셨나요 -- 르윈터
씨가 고초열에 쓰는 알약을 잃어버린 이야기를 한
기사를?"
"예, 읽었어요. 가엾게도, 그이에게 듣는 약은
그것뿐이었던 것 같은데요."
"당신이 알약을 보내주면 그는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할 겁니다. 우리 쪽에서 당신의 편지와 함께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처방을 모르는데요."
"이렇게 하시지요, 싱클레어 양. 알약에 관한 것은
내게 맡겨주십시오. 당신은 그가 가지고 간 알약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한 200알쯤 보낼
생각이라고 편지에 쓰기만 하시면 됩니다. 될 수
있다면 추신에." 격려하듯이 다이아몬드가 덧붙였다.
"가령 저쪽에서 영주하기로 했을 경우에도, 그렇게
자상하게 마음써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그가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워싱턴-뉴욕 간의 왕복 비행기편이 늦게야 있어서
다이아몬드는 라 가디아 공항에서 택시를 잡는데 애를
먹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데 미드타운 터널까지는
차가 별로 붐비지 않았지만, 거기서부터 브로드웨이
86번까지 가는 데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가 가까웠다.
다이아몬드는 어떤 약방 앞에서 한동안 버티고 서서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영상 너머로 보니 어떤 남자가 혼자 있을 뿐, 상점
안에 손님은 없었다. 재빠른 동작으로 문 -- 플라워
약방이라고 황금색 글씨로 써 있었다 -- 을 밀고
들어섬과 동시에 뒤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닫쳤음'이라는 글씨가 보이도록 문에 걸려 있는
표찰을 뒤집어 놓았다.
"강도질을 하러 왔다면 잘못 들어왔어. 나는 두
시간마다 현금을 은행에 넣거든. 여기는 거스름을
위한 잔돈밖에 없어. 와서 직접 보는 게 좋겠군.
거짓말이 아니야, 보라고." 셸던 플라워는 지난 10년
동안에 36번이나 강도가 들어왔는데, 그 기록을
정확히 하기 위해서 그때마다 청소용 빗자루에 금을
그어 표시를 해두었다. 그는 흑인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부근의 상점 주인이 흑인은 들어와서
돈이 없으면 화를 내면서 물건을 마구 부순다고
하기에 플라워는 흑인 강도용으로 10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카운터 밑에다 언제나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백인이나 푸에르토리코 인일 경우에는 단지
사실을 말할 뿐이었다 -- 그는 금전동록기의 현금이
일정액이 되기 전에 가까운 은행에 예금해 버린다.
대개의 강도는 금전등록기 안을 흘끗 보고는 말도
않고 뒷걸음치며 나가버린다. 개중에는 그의 말을
믿고서 금전등록기를 보지도 않고 나가버린 녀석도
한둘 있었다.
"강도가 아니오, 플라워 씨."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내 얼굴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플라워가 어슬렁어슬렁 카운터 뒤에서 나왔다.
근시인데 마침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으므로, 홰에
앉아 있는 독수리처럼 목을 내밀고 눈을 가늘게
뜨고서 상대방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느라 애쓰고
있었다.
"아는 얼굴인데." 이윽고 그가 말했다. "자네는 CIA
사람이지 -- 리온 던켄." 플라워의 머리 회전이 차츰
속도를 더해 갔다. "그래, 맞아. 리온 던켄, 나는
사람의 이름을 절대로 잊지 않거든."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가 바로잡았다. "리오
다이아몬드."
"물론 그렇지, 다이아몬드지. 당신은 전후에 곧
이리로 왔지, 그렇지? 그래, 점점 생각이 나는군. 그
무렵 당신은 젊지만 대단한 일꾼이었어, 굉장했지.
당신이 루마니아에서 큰일을 해치운 것을 기억하고
있어. 아니, 체코였었나? 어쨌든 정보국 안이 온통 그
이야기뿐이었으니까. 지금은 최고간부 중 한 사람이
되었겠지, 당신 같은 일꾼이라면."
"정보국을 그만둔 모양이군요."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50년대 초에 물러났어 -- 내 기능을 활용하는
일거리가 없어져 버렸으니까."
"꽤 근사한 상점이로군요." 선글라스, 칫솔,
괘종시계 같은 것이 가득 채워진 선반 쪽으로 손을
흔들면서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또다시 다이아몬드는
이마를 조이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약을 조제해
줄 수 없겠습니까, 플라워 씨?"
플라워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다이아몬드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상점을
발견하고 들어온 것이 아님을 알았다. "물론 조제는
할 수 있지 -- 수수료를 낸다면." 카운터 저쪽으로
돌아가면서 플라워가 말했다. "어떤 약인가?"
"고초열에 쓰는 크롤 트리메턴 정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플라워 씨?"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서두르던
다이아몬드는 터미널 입구에서 큰소리로 신문을 팔고
있는 대머리 남자 옆을 지나갔다. 얌전한
미치광이같이 혼자 중얼거리다가는, 자기의
터무니없는 말에 웃으면서 그 남자는 입구로 가는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섞여들어갔다.
"대통령이 사라져서 찾을 수가 없어." 접은 신문을
내밀면서 그가 말했다. "임금님의 부하가 햄프리
댐프티의 몸을 본래대로 해놓았어. 미군이 중국으로
침공했어. 베를린이 러시아 인의 손에 의해
함락되었어. 전부 이 시내판에 실려 있어. 지금 사고
신문값은 후불 -- 뉴스가 마음에 안 들면 신문값은
물러주겠어. 크레믈린이 호모와 레닌을 비난했어.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여성으로 변했어......"
자기만의 좁은 시야의 포로인 다이아몬드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마음쓰지 않고 갈 길을
서둘렀다.
제5부 종반전
제 19 장
파티는 전채(前菜) 요리로 시작되었다. 근처가 온통
접시로 가득찬 듯한 그 전채 요리의 내용은 여덟
종류의 캐비아, 겨자 소스를 바른 절인 청어,
호로데츠 젤리, 향신료를 많이 쓴 비토키라는 고기
완자, 청어, 찐 감자, 양파, 사과를 사워 크림에
넣어서 구워낸 요리 등이었다. 그런 요리를 프랑스
송로(松露(4~5월경 해변의 솔밭에 나는 버섯)), 레몬
껍질, 거기에 목초의 줄기로 각각 향기를 바른 세
가지를 포함한 15종류의 보드카를 마시면서, 말하자면
리드미컬하게 흘려넣었다. 캐비아를 입에 넣고
보드카를 한 모금, 청어로 보드카 한 모금,
훨슈마크를 입에 넣고 보드카 한 모금, 물론 그
사이에 건배가 차례차례 줄을 이었다.
"미국의 우리 친구들을 위해서 건배." 모스크바
패션 하우스의 전무이사가 소리쳤다. "우리 사회주의
국가에 관한 즐거운 추억을 안고 귀국하기를 바라며."
모두들 목을 뒤로 젖히고 보드카를 털어넣었다.
"러시아의 기성복 관계의 우리 동료를 위해서."
잔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리며 미국의 기성복
메이커가 소리쳤다. "자본주의에 대한 왕후와도 같은
대접에 감사하며." 또다시 파티장의 50여 명의 사람이
잔을 비웠다.
"큰일이에요." 세알라가 오른쪽 옆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모두들
죽어버리겠어요."
자이체프가 새빨간 눈으로 세알라를 보면서
싱글벙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영어를
못합니다." 하고 그는 러시아 어로 말했다.
"그럼, 프랑스 어, 이야기가 되겠어요?" 세알라가
물었다.
"할 수 있고말고요!" 왼쪽의 아주 예쁜 미국
아가씨와 공통의 언어가 있었다는 기쁨에 자이체프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나는 조금 전에 이렇게 나가다가는 모두
죽어버리겠다고 했어요." 세알라가 프랑스 어로
말했다.
자이체프가 빛이 변해 버린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가 대답했다.
세알라는 그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한 말은 모두들 너무 많이 먹어서
죽겠다는 뜻이에요." 긴 테이블에 빈틈없이 늘어놓은
접시를 가리키며 그녀가 설명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아가씨, 러시아에서는 옛날부터
써온 표현이 있소. '이 얼마나 멋지게 죽는
방법이냐.'" 자이체프가 팔꿈치로 세알라를 쿡쿡
찌르며 웃으라고 재촉했다. "아시오? 아가씨는 모두가
너무 먹어서 죽어버린다고 했소. 거기에 내가
대답했소. '이 얼마나 멋지게 죽는 방법이냐.'" 그가
또 웃었다.
"우리도 같은 말을 해요." 명랑한 어조로 세알라가
말했다. "틀림없이 세계 공통이겠죠." 그녀는 화제를
바꾸어보려고 했다. "당신은 누구세요?"
"아가씨가 그것을 물어본다는 것은 굉장한 우연의
일치요." 자이체프가 말했다. "나로 말하자면 성인이
된 뒤로 전 인생을 그 의문을 해명하는 데 써오고
있소. 음,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나는 남자이고,
러시아 인이고, 체스의 그랜드 마스터이고,
레닌주의자이고......"
"그건 공산주의자와는 다른 건가요?"
바야흐로 자이체프의 얼굴에 생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요, 완전히
다르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공산주의, 혹은 마르크스주의와
비교해서 레닌주의를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이야기의
결론이 어떻게 날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세알라는 대화를 즐기기 시작했다.
"아가씨, 마르크스주의는
변환주의(變換主義)랍니다. 모든 것 -- 전쟁, 사랑,
권력, 섹스 -- 을 유물론적 표현으로 변환하려고
해요. 공산주의는 작년의 댄스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물건이오 -- 그 핵심은 유럽 인이 몇 세기 동안이나
영혼의 각각 다른 방에 숨겨두었던 것을, 즉 종교와
영리심을 한데 합친 것에 불과해요. 그러나
레닌주의는 다르지요. 레닌주의는 이상주의에
부리내린 병이란 말이오."
"아주 흥미 있는 정의로군요." 세알라가 말했다.
"나는 그 세 가지가 모두 권력의 추구라는 정의에 딱
들어맞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요."
"나의 친애하는 젊고 천진한 미국인이여." 파티장의
소음을 제압하는 듯한 큰소리로 자이체프가 말했다.
몇 사람이 얼굴을 이리로 돌려서 둘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본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당신네
자본주의 국가의 아이들은 '호모 폴리티쿠스'가
권력밖에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이익밖에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무지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이라는 것을
언제 가야 깨닫게 되겠소?"
"호모 폴리티쿠스? 호모 에코노미쿠스? 놀랍군요,
절충주의로군요." 그의 오만함과 지성이 융화와 그
차림새에 깊은 인상을 받고서 세알라가 말했다.
"당신은 누구세요?" 다시 물었다.
"내 이름은 스토얀 자이체프. 그저 얼굴이나 아는
사람은 나를 스토얀이라고 부르지만, 마음이 통하는
친구나 애인은 자이체프라고 부르지요. 아가씨는
자이체프라고 불러도 좋소. 절충주의인 점에 관해서는
당신네 쪽 스코트 피츠제럴드가 명문구를 토했지 --
다재다능한 인간은 모든 전문가 중에서 능력의 폭이
가장 좁은 인간이며, 특히나 그 능력의 폭이 좁은
것이 특징이야."
세알라가 방긋 웃었다. "자이체프." -- 상대를
라스트 네임으로 부르는 것에 그녀는 당혹감을 느꼈다
-- "당신에게서 능력의 한계를 찾아내는 일은 어려울
것이 분명해요."
"패션 분야에 있어서 소련과 미국의 협력에 건배."
테이블 저편 끝에서 만취한 러시아 관리가 소리쳤다.
"패션의 두 초강대국에 건배." 미국의 여성복
전문지의 기자가 소리쳤다. 그녀가 들어올린 술잔에서
백포도주가 쏟아졌다.
"먹어보시오." 자이체프가 말하고 두 번째 코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 오콜로슈카라는 차가운
수프로서, 오이, 야생조류의 고기와 향료식물을
쿠바스와 크림으로 쪄서 식히고 솥 모양을 한 얼음
위에 그릇이 올려져 있다.
세알라는 먹을 것을 뺀 모든 것에 대해서
다이아몬드에게서 설명을 들었다. "그를 못 알아보게
될 걱정은 절대로 없어." 그때 그가 말했다.
"바람둥이 영감이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야."
"그런 사람은 많아요." 세알라가 말했다.
다이아몬드가 격분했다. "그거 무슨 뜻이지?"
"재미있네요. 오늘은 유난히 민감하시군요."
세알라가 말했다.
"당신이 둔감한 탓일지도 몰라."
"그만해 둬요, 리오. 내가 바람둥이 영감이 많다고
말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들어맞는 표현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을 뿐이에요. 좀더 확실한
특징은 없나요? 내가 다른 바람둥이 영감에게 편지를
주어버리면 곤란하잖아요."
다이아몬드는 한동안 말없이 세알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취소할 수가 있어."
"알고 있어요." 상대방을 마주보면서 세알라가
말했다.
결국 시선을 돌린 것은 다이아몬드였다. "알겠어?
나는 당신이 해주겠다고 나선 것에 감사하고 있는
거야."
"당신이 감사해 주는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차디찬 어조로 세알라가 말했다. "그 자이체프라는
사람의 인상을 좀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없겠어요?"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그녀에 대한 자신감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전에 우리는 서로 충분히
이야기해 두는 게 좋았어. 당신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우리는 왜 사사건건 다투지 않으면 안되는
거지?"
세알라가 조금 태도를 누그려뜨렸다. "이번 러시아
일로 우리 둘 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모양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잽싼 설명이었다 -- 그러나 그 자리의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당신은 자이체프의 인상을 설명해 주는
중이었어요." 세알라가 재촉했다.
"눈이 조그맣고, 콧구멍이 크고, 이빨 색이 변해
있으며, 40대, 언동이 야한 편이야. 말할 때에 계속
두 팔을 치켜들지. 술은 많이 마시지만 좀처럼
흐트러지는 적은 없어. 그의 완전한 이름은 스토얀
알렉산드르비치 자이체프."
세알라가 그 이름을 되풀이했다.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는 송별회에
참석할 거야. 이쪽의 문화담당관이 그의 참석을
요청하도록 지시를 받았으나, 그것은 별로 문제가
없을 거야. 러시아측은 그를 문화적인 만능 내야수로
생각하고 있으며, 외국에서 손님이 올 경우에는
언제나 그를 내보내고 있어. 일이 제대로 되면 그는
당신의 오른쪽 옆자리에 앉게 될 거야. 참고로 알아둘
것은, 그는 프랑스 어를 할 줄 알아."
"어떻게 그런 자세한 것까지 알고 있나요?"
세알라가 물었다.
"나는 알고 있다고만 해두기로 하지, 괜찮지?"
"왜 그 문화담당관이 직접 자이체프에게 편지를
전해 주지 않나요?"
"문화담당관은 우리 쪽의 대사관 직원 모두와
마찬가지로 주야로 감시당하고 있어. 자이체프는
절대로 그의 옆에는 가지도 않을 것이며, 가령 옆에
갔다고 해도 편지를 받지 않을 거야. 또, 가령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주고받는 것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즉시 당국의 손에
넘겨줄 것이 분명해."
세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이체프라는
사람에게 뭐라고 하면 되나요?"
"처음부터 일을 서둘러서는 안돼." 다이아몬드가
주의를 주었다. "그는 당신에게 흥미를 갖게 될 거야.
당신은 미인이고, 그는 예쁜 아가씨에게는 언제나
흥미를 갖지. 그가 마음을 터놓도록 해야 돼.
모스크바에 관한 것, 문학, 뭐든지 좋으니까 화제가
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돼. 식사가 끝나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를 잡아야
해. 그리고 그의 차로 공항까지 바래다 주지
않겠느냐고 부탁하는 거야. 그는 모스크바에서 자가용
차를 가지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야. 버스는
모두들 너무 소란을 피워서 견딜 수 없다고 하면 돼.
그와 둘이 있게 되면 이렇게 말하는 거야......"
사람들은 이제 다음 코스를 먹기 시작했다 --
크레비아카라는 요리인데, 기름이 오른 연어를 파이
껍질 같은 것으로 싸서 사워 크림을 친 것이었다.
그리고 불가리아산 백포도주가 잔에 넘쳤다.
"모스크바의 인상은 어떻소?" 자이체프가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았다.
"나는 레닌그라드 쪽이 좋아요." 세알라가 말했다.
"우리는 여행을 시작할 때 거기에 이틀 있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도시라고 생각했어요. 네프스키 대로.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표트르 대제(大帝)의 묘.
에르미타지. 가르쳐 주세요, 자이체프. 왜 러시아의
박물관에서는 신발 위에 슬리퍼를 덧신으라고
하나요?"
"바닥을 보존하기 위해서겠지."
"안내원 한 사람이 우리에게 바닥을 반들거리게
닦게 하기 위해서라고 농담을 하더군요."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군." 유쾌한 듯이
자이체프가 인정했다. "늘 눌려지내는 어떤 장관이,
구경온 사람들이 우리의 홀을 돌아다닌다면 유익한
사회주의적 노동을 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어느 공장에서 슬리퍼 재고가 쌓여서
무슨 교환조건으로 박물관부에 갖다주었을지도
모르고. 뭐라고 단정할 순 없소." 자이체프가 또
포도주 잔을 비웠다. "당신네 미국인은 기묘한
인종이오. 그전에 어떤 미국인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거미줄을 찾고 있다고 하더군."
"거미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나도 모르겠소, 나도 말이오. 어쩌면 자기의
감수성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인상적으로
남기려 했는지도 모르지."
세알라는 자이체프가 아무리 술을 마셔도 겉으로는
취한 것 같지 않아서 감탄하고 있었다. "미국인은
감수성이 둔하기로 유명해요."
"그렇게 생각하오?"
"입증해 보겠어요. 당신이 모스크바의 인상을
물었는데, 나는 이야기를 다른 데로 돌렸지요.
사실은, 나는 이 도시가 아주 끔찍해요. 어쩐지
차갑고, 보기 싫고, 고집세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들어요. 글쎄, 뭐라고 하면 좋을까." -- 세알라가
적당한 말을 찾았다 -- "모스크바 생활의 획일성에
진저리가 나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들 어떤
기준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 더구나 그
기준이 단조롭고 어두워요. 상점이란 상점은 어딜
가나 모두 똑같은 것을 팔고 있어요.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고. 방은 모두 여기처럼
샹델리아가 있는 방조차도 들어가는 입구에는 똑같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스위치가 붙어 있어요. 정말
러시아에서는 플라스틱 스위치를 단 한 가지 종류밖에
만들지 않나요? 게다가 당신네들은 모두 하나같이
자기네 나라의 부족한 점을 철저하게 변명을
하더군요. 난 어젯밤 침대에 이가 기어다니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서 프런트 데스크에 전화를 걸어서
잔소리를 좀 했더니, 담당자라는 사람이 소련에는
이가 없다고 한마디 하고는 찰칵 전화를
끊어버리더군요."
자이체프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브라보, 마이 레이디." 세알라에게 건배하는
자세로 술잔을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누군가가 우리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사회구조에 결함을 찾아냈다고
들으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소. 우리 쪽 지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함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으니 말이오. 당신이 발견한 그
이에 대한 이야기 말이오, 과거 레닌이 이가
사회주의를 이기느냐 사회주의가 이를 정복하느냐, 둘
중 하나라고 외친 적이 있소. 그래서 우리는 이와의
싸움을 시작했지. 그저 조금 살아남은 놈은 우리는
무시해 버리고 문제로 삼지 않아요. 그래서 그
데스크의 사람이 소련에는 이가 없다고 했을 게
틀림없어요. 인종차별, 동성애, 실업, 범죄, 모두
마찬가지요 --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단 말이오."
"비슷한 점은 무엇이에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알라는 자이체프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외국에 관해서 무지한 우리의
친애하는 미국 아가씨여, 당신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소. 소련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 사흘 이내든지, 아니면 3년 이상 있었던
사람들뿐이라고 하고 있소. 당신 경우에는 애석하게도
그 중간에 해당되는군. 그러니까 당신은 일부의
인간들이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요세프
스탈린이 말한, 완전한 닮은꼴은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는 있을 수 없다고 한 말을 알 리가 없지. 그는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만 -- 전 러시아를 똑같은
색으로 만들기 위해서 많은 인간을 무덤으로
보냈으니까. 어쨌든 당신이 본 비슷한 점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거요. 개인의 뉘앙스의 차이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표면의 한꺼풀 밑을 보아야만
해요. 러시아에는 지금부터 내가 만드는 속담이 있소
-- 닮은꼴은 보는 사람의 눈에 존재한다. 일본인은
모두 똑같아 보인다, 그렇죠? 다만, 함께 자보기
전까지의 이야기요!"
이제는 요리가 메인 코스에 와 있었다 --
향료식물의 가지를 잘라서 그 속에 넣고 고치구이를
한 닭고기, 코카서스산(産) 잣으로 둘러싸인 어린
양의 등심, 통째로 로스트해서 옛날의 관습에 따라
입에 사과를 물려 접시 위에 올려서 내온 새끼돼지
요리.
"자이체프 씨, 당신이 보기에 당신네 나라에 비판할
점은 없나요?" 그녀는 새의 허벅지 살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는 세 종류의 요리를 잔뜩 자기의 접시에
담고 있었다.
"애석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할 시간이 없소.
그러나 여러 가지 결점을 내가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알아주었으면 좋겠소. 너무 많이 알아버려서 그
안에서 익사해 버릴 것만 같은 때가 있소. 그랜드
마스터라 할지라도 욕구불만을 느끼지 않고 이 나라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어째서 여기에 머물러 있나요?"
"왜냐하면 설령 여러 가지 결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러시아는 아름다운 나의 조국이기 때문이오. 여기는
독특한 분위기, 활기, 사는 기쁨이 있소." 자이체프가
두 팔을 치켜들었다. "내가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은 --
" 조용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그것이 어디든, 다른
나라에서 살 생각이 절대로 없기 때문이오. 결점에
관해서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속담이 있소 -- '집에
영향을 끼쳤으면 그 집에서 살아야만 한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먹고만 있었다. 이윽고
자이체프가 세알라에게 물었다. "나는 좀 이해가
안돼요, 당신이나 저 사람들이." -- 파티장의 손님 중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인들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 "모스크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우리는 문화교류계획의 일부예요. 1년 전에 당신들
쪽의 중심 패션 하우스인 톰 모델리가 미국에서
러시아의 의류전시회를 열었어요. 이번에는 그 답례로
우리들이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아메리칸
스타일의 의류전시회를 연 것이지요."
"굉장히 쓸모없는 이야기로군." 자이체프가 말하고
둘은 함께 소리내어 웃었다.
드디어 디저트가 나오자 미국인 몇몇은, 세알라도
포함해서 정말 지겨운 듯이 한숨을 쉬었다. 설탕에
절인 과일과 나무 열매를 캐러멜 조각으로 감싼
옥수수 가루 푸딩이었다. '그레프 캐셔'와 부순
나무열매와 벌꿀과 설탕으로 되어 있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조그만 케이크 '고지나크'가 곁들여 있었다.
그런 것을 적어도 러시아 인은 목이 타는 듯한
아르메니아산(産) 브랜디와 함께 목구멍으로
들이붓는다. 잔을 들어올릴 정도의 힘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거대한 황금색 사모바르(러시아의 차
끓이는 주전자)에서 홍차나 혹은 수입품 파이렉스
피처에서 블랙 커피를 따라주었다.
"당신네들의 방문일정 마지막 순간에 당신을 만난
것이 아무래도 애석하군." '그레프 캐셔'를 먹으면서
자이체프가 말했다. "모스크바의 매력의 일부를
당신에게 소개할 수 있었으면 대단히 즐거웠을 텐데
말이오. 모스크바 강의 만곡진 부분과 크레믈린의
벽이 내려다보이는 내 아파트에서 가끔 여는 파티에
와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즐거웠을까." 자이체프는
자신이 엘리트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나도 애석해요." 세알라가 말했다. "어쩌면......"
"어쩌면 뭐요?"
"아니에요.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자기가 선택한 표현의 아이러니를
문득 생각했다. 지금부터 그에게 대단한 폐를 끼치게
될 텐데.
"당신이 내게 폐를 끼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절대로
생각되지 않소." 자이체프는 그렇게 말해 놓고서
그녀에게 다음 말을 계속하도록 재촉했다.
"차를 가지고 계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실 나는 최신형 검은 모스크바의 자랑스러운
소유자요."
"왜 검정색을 고르셨어요?"
"내가 색깔을 선택한 것이 아니오. 소련에서는
파란색이나 빨간색, 오렌지색 등으로 색을 지정해서
차를 주문하지 않아요. 다만 차를 주문하는 거요.
그리고 대금 전액의 선불에 대한 우대조치로서 다행히
예약명단에 이름이 오르면 자기에게 배당된 차를
인수하는 거지. 내 순서가 왔을 때에는 공장이 검은
무드였던 모양이오. 왜 차에 관한 것을 물어보시오?"
"귀찮으시겠지만, 공항까지 바래다 주실 수는
없겠어요, 자이체프? 버스는 꽉 차는데, 서로 먼저
타려고 앞을 다투는 것이 싫어서요......"
"더 말할 것도 없소. 그런 사소한 일로 도움이
된다면 나로선 더 이상 기쁜 일이 없지요."
그렇게 많은 보드카, 포도주, 브랜디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이체프는 운전이 대단히 능숙했다.
자이체프는 술을 아주 많이 마셔도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한 다이아몬드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하고
세알라는 생각했다. 말라버린 빗물 자국이 남아 있는
차창을 통해서 모스크바의 거리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맥주의 매점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줄, 주차된 외제 차를 신기한 듯 둘러보는 젊은 두
사병, 어린 딸을 안고 도랑에 대고 오줌을 누이고
있는 남자, 바브슈카로 머리를 감싸고 건설현장
부근에서 배수로를 파고 있는 단단한 체격의 농사꾼
여자 두 사람. 말을 꺼내려다가 세알라는 너무 긴장한
탓인지 생각대로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스토얀 알렉산드르비치 자이체프예요?" 쉰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자이체프가 문득 몸을 세웠다. "어떻게 내 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있소?"
"난 고백해야 할 일이 있어요 -- 실은 파티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게 되기 전부터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었어요."
"그랬군. 그것으로 적어도 의문 가운데 하나는
풀렸군. 내가 어째서 패션 관계자의 파티에
초대되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었지. 미국인 중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특별히 희망했다고만
들었소. 희망한 것이 당신이었군, 그렇소?"
세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체스 팬이 분명하군. 프랑스 어로 번역된
나의 가장 최신 책을 보았소?" 자이체프가 물었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토마토를 산더미처럼
실은 대형 트럭의 뒤에 가서 멈췄다.
"분명히 당신이 쓴 어떤 저서를 보았어요."
세알라가 말했다. "하지만 프랑스 어는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수수께끼 같은 소리를 하는군 -- 당신은
러시아 어는 읽지 못하고, 내 저서는 영어로 번역된
것은 없소."
"아니, 된 것이 있어요, 자이체프."
"그것 고맙군. 곧 인세를 받아낼 방법을
생각해야겠는데. 그런데 당신이 영역된 것을 보았다는
내 책은 어느 것이었소?"
세알라는 몇 초 동안 두려움과 당황 속에 있었다.
지금이라도 모든 것에서 손을 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에게는 뭐라고 해야 하나?
자이체프와 둘이서만 만날 기회가 없었다, 아니 내가
알아들을 정도로 그는 프랑스 어를 할 줄 몰랐다,
또는......세알라는 '뭔지 모를' 수집품에 보태고
싶은 기묘한 상자에 끌려가듯이 자신이 차츰
협박이라는 미지의 경험에 끌려가고 있음을 느꼈다.
마침내 잘 들리지도 않는 조그만 목소리로 자기가
영역된 것을 읽었다는 자이체프의 저서 이름을 댔다.
"'양심선언'이라는 제목이었어요."
세알라는 자이체프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입 언저리에 조금 엄숙한 표정이 지나갔을
뿐, 놀라움이나 불안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의 그 '양심선언'을 어떻게 생각했소?
당신이 어디선가 영역된 것을 읽었다는 그 물건
말이오."
"워싱턴에서요."
"흠, 워싱턴에서. 어떻게 생각했소?"
"용기 있는 멋진 내용이라고 생각했어요.
출판된다면 전세계 사람들이 같은 인상을 받게 될
것이 틀림없어요."
"출판된다면." 자이체프가 무표정하게 반복했다.
"서방측에서 출판된다면 당신 처지가 곤란하게
되나요, 자이체프?"
자이체프는 설령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익살스러운 가면으로 숨기고 있었다. "내 처지가
곤란하게 된다고? 내가 술김에 해버린 농담이 출판이
되었을 때 그런 일에 관계하는 관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아무도 모르지. 솔직히 말해서
체제비판이라는 칠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었다면 내
명성이 싫어도 올라갈는지 몰라. 약삭빠르게 굴면
어디서 국제적인 상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군.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오, 그렇잖소?"
"자이체프, 당신의 '선언'은 아직 출판되지
않았어요." 이야기를 본래의 방향으로 되돌리려고
세알라가 말했다. "나는 마침 그것을 출판하려는
사람을 알고 있어요 -- 경우에 따라서는 중지시킬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이 하는 말은, 내가 무슨 일인가를 하면
중지시킬 수가 있다는 이야기요? 아니면, 당신이 무슨
일을 하면 그 사람이 중지한다는 거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인데 -- " 긴 터널을
빠져나온 뒤에 메아리가 따라오는 듯한 공허한
목소리였다.
자이체프는 교통이 혼잡한 교차로 바로 앞에서 차를
길가에 붙이고는 엔진을 껐다. 이제는 정말로 거래를
생각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당신의 그 친구가 내 '양심선언'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 나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소?"
세알라는 말없이 핸드백에 손을 넣어 그녀 자신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붙은 두꺼운 종이를 꺼냈다. 그
사진을 떼어내니 손으로 쓴 원고 중 한 페이지를 찍은
조그만 사진이 나타났다. 자이체프는 시선을 집중시켜
원고를 한두 줄 읽고는 사진을 세알라에게
돌려주었다. 그녀가 본래대로 자기의 사진을 그 위에
붙였다.
"그럼, 당신의 그 친구가 내게 요구하는 것이
뭐요?"
"자기가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그가 물으면 -- "
다이아몬드가 세알라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 부탁은
아주 단순하고 아무런 해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거야."
"아주 사소하고도 별것 아닌 일이에요, 자이체프."
세알라가 말했다. 그리고 워싱턴의 자기 친구가
부탁하려는 것은 단지 그 미국에서 망명한 르윈터의
여자친구의 편지를 그에게 전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설명했다. 르윈터에게 미국으로 돌아올 것을
권하고, 돌아와도 당국에서는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것을 그에게 전하는 편지다. 그리고 그 밖에
또 하나는 -- 하고 세알라가 말했다. 그
여자친구에게서, 르윈터가 늘 써오던 고초열에 쓰는
알약을 200~300정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 그는
이리로 올 때에 가지고 있던 알약을 잃어버린 것 같다
-- 여름이 되면 그 알레르기 증상이 심해진다.
자이체프는 표정 하나 변치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가령 내가 르윈터와 만날 기회가 없다고
한다면?"
"내 친구는 당신이 그와 만나려고만 하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당신 친구는 나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알고 있는
것 같군. 내가 편지와 알약을 르윈터에게 전해
주겠다고 해놓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더라도 확인해 볼
길이 없을 텐데?"
그러나 세알라에게는 그것에 대한 대답도 준비되어
있었다. "내 친구는 당신이 르윈터에게 전했는지
않았는지를 안다고 하더군요."
"그가 한 말은 그것뿐이오? 안다고만?"
"그래요. 그는 확신이 있는 것 같았어요. 안다고만
했을 뿐이에요."
"그렇다면 나로서는 그의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군. 그에게 확인할 방법이 없다면 이 이야기는
사리에 맞지 않으니까. 그런데 르윈터가 내 조국
러시아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 편지 -- 와 이 나를
당국에 넘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그것뿐이오?-- 없다고? 당신 친구는 그렇게밖에
말하지 않았소?"
세알라는 접은 신문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그런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가 말했어요. 당신이 잘만 하면 르윈터는
당신에게 피해가 갈까 봐 편지를 당국에 갖다바치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더군요."
"흠." 자이체프가 좌석의 등받이에 기댔다.
플라스틱으로 된 천장에 얼굴이 거의 닿을 듯했다.
한동안은 그대로 눈을 크게 뜬 채 한번도 깜박이지
않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몸을 일으켜
세알라 쪽을 보았다.
"물론 당신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충분히 알고
있을 테지. 당신은 프로요, 아니면 아마추어요?"
"나는." -- 세알라가 망설였다 -- "아마추어예요.
친구에게 부탁을 받았을 뿐이에요."
"그는 당신에게 강제로 시켰소?"
세알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아니에요."
"당신은 친구 하나를 위해서 대단히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 거요. 가령 내가 당신을
국민병(國民兵)에게 넘기면 당신은 어떻게 될 것
같소? 나를 미국의 첩보활동의 앞잡이로 만들려다가
붙들린 것이 되는 거요. 당신에게 이 일을 시킨 그
친구는 당신을 이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겠소? 그 사람이 진짜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허허, 참, 오늘 처음 당신 얼굴을 보았을 때
철부지라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는데, 지금은 분명히
알겠군."
"나는 약속을 받았어요......" 이제는 세알라도
겁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를 당국에 넘겨도 당신은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모든 것을 부정할 테니까."
"내 원고의 사진을 어떤 식으로 부정하겠다는
거요?"
"그 사진은 이미 없어요 -- 그 종이에서 내 사진을
떼어낸 5분 뒤에는 화면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도록
만들어져 있어요."
"그럼, 당신의 핸드백에 들어 있을 그 편지는?
알약은?"
"알약은 내 이름으로 처방된 고초열에 쓰는 알약에
불과해요. 그리고 편지는 다만 편지에 불과해요 --
편지를 보내는 것이 위법행위가 될 리는 없어요."
편지가 약간의 열만 받아도 타버리도록 과망간산칼륨
코팅이 되어 있는 것은 세알라가 설명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당신의 그 편지에 우표를 붙여서
우체통에 집어넣지 않소?" 이제는 자이체프도 화를
내고 있었다 -- 숨기고 있던 두려움이 노여움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자이체프 씨, 우리 서로 좀더 차분하게 의논하기로
해요. 가령 당신이 나를 당국에 넘겨줄 생각을 하고
있어도 소련 정부가 겨우 편지 한 통이라는 사소한
일로 문화교류계획이 헛일이 되어버리는 재판문제를
일으키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게다가 당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되지요. 내 친구가 당신의
'선언'을 공표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되나요?"
"그래." 자이체프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지만,
자기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들이 내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 편지를
르윈터에게 전해 주는 것뿐이란 말이지?"
"그것과 고초열용 알약을."
"그래, 알약을 잊으면 안되겠군."
자이체프가 엔진에 시동을 걸고서 차의 물결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어때요?" 세알라가 말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좀 생각해 보고." -- 세알라는 자기가 어떤
살인사건의 재판에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피고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대답을
하지." 자이체프는 팔을 들어 서독제 윗도리의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모스크바 국제공항의 전망 데크에서 미대사관의
문화담당관이 팬암 항공의 은빛 제트기가 굉음을
울리면서 활주로를 달려서 밤하늘로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공중전화 쪽으로
걸어가서 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매스턴이야 -- 통신부로 돌려주게. 여어, 진?
방문단은 무사히 떠났어. 저녁때까지 돌아갈께. 배가
고파."
그 '배가 고파'라는 말이 신호로서, 진 셸턴은 즉시
암호문을 만들어 워싱턴으로 긴급전문을 보냈다.
우체부가 무사히 예정대로 출발한 것을 펜타곤의
큐넨에게 전하라.
제 20 장
자이체프는 배짱을 부렸다. "나만큼 세상 경험을
쌓은 사람에게는 -- " 그는 농담을 했다. "파키리스
에스트 데스켄사스 아웨르니." 포고딘을 위해서 라틴
어를 러시아 어로 바꾸어 말했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야."
자이체프 서재의 페르시아 양탄자 위를 왔다갔다
하면서 포고딘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무시해 버리고
질문을 계속했다.
"그녀가 자기의 친구라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이 절대로 틀림없는 거지?"
"절대로."
"자네는 그 '양심선언'의 사본을 가지고 있는가?"
"옛날에 없애버렸어."
"원문은 어떻게 썼나?"
"어떻게 썼느냐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이체프는
창가의 벽에 기대서서 프랑스제 에어컨 너머로
크레믈린의 벽을 보고 있었다.
"타이프로 친 것이라면 -- " 포고딘이 책상 위
타이프라이터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 "그리고
서명이 되어 있지 않다면 설령 그들이 출판했다
하더라도 자네는 위조라고 일체를 부인할 수가 있어."
거실 쪽에서 '암소'의 음악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사랑스러운 자이체프, 대체 이걸 모스크바의
어디에서 찾아냈어요......"
그러나 자이체프는 커다란 소리로 고함쳐서 막았다.
"나중에, 나중에 말해." 그는 포고딘 쪽을 보았다.
"그 '선언'은 손으로 썼으며, 서명이 들어 있어. 이번
이 사건이 무사히 마무리지어진다면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서명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겠네."
"그저 생각이 났을 뿐이야." 포고딘이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알약은 어디에 있나?"
자이체프가 윗도리 호주머니를 두드리다가, "저쪽
방에 두고 온 모양이야." 하고 말했다.
"좋아, 그쪽 것은 나중에 생각하지." 포고딘이
말했다. "잘 듣게, 자이체프, 아주 간단명쾌하게
말해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예브게니, 이제 그만 우리
속의 사자처럼 돌아다니는 것을 멈추시지."
자이체프가 거친 어조로 말했다. "마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고 자네 같군 그래."
포고딘이 자이체프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타이프라이터의 키를 장난삼아 눌러보고 있었다.
"아주 간단명쾌하게 말해서, 이 사건에서 쉽게
빠져나갈 방법이 하나도 없어."
그러나 자이체프는 아직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 편지가 정말로 해될 것이 없다면 그에게 전해
준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포고딘이 편지를 허공에다 대고 흔들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네는 조금도 이해가 안되는
모양이군." 화가 난다는 듯이 그가 말했다.
괴로워하는 표정이 포고딘에게서도 자이체프에게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누군가가 르윈터에게
보낸 편지치고 해가 없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거야." 포고딘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번 일은
냉철하게 검토해야만 하네. 때에 따라서는
미국측에서는 편지가 르윈터의 손에 전해지는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편지가 그의 손에
들어가기를 바라지 않을 가능성마저 있다네. 그들은
그저 다만 자기들이 르윈터에게 편지를 보내려 하고
있다고, 우리에게 믿게끔 하기 위한 건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때까지 억지로 감추고 있던 두려움이 그제야
자이체프의 얼굴에 나타났다. "나는 체스엔 프로지만
그렇게 복잡한 수법은 이해할 수가 없다네."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양쪽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으며, 승리를 노리는
쌍방의 움직임에 당장에라도 끼어죽을 것 같다는
점뿐일세. 이런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할 수
없지만,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나는 정말로 겁나네
-- 이번 일로 당장에라도 쓰러져 버릴 정도로
두렵다네."
두 사람 다 그 공포심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자이체프가 위스키를 가득 따라서
단숨에 털어넣었다. "오랜 나의 친구 예브게니, 내가
자네와 의논한 것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르겠네. 그
동안의 친분으로 오늘 내가 여기에 온 것을 잊어주지
않겠나?"
"그럼, 자네는 어쩔 셈인가?"
"미국인이 바라는 일을 하겠네 -- 이 저주스러운
편지를 그에게 전해 주겠어."
"이 단순하고 소박하고 어리석은 자야, 자네 자신이
얼마나 고지식하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나? 이번
일을 끝으로 미국인이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이 편지를 그에게 전해 주면
그들에게 더욱더 강력한 협박수단을 쥐어주는 것에
불과하다네. 이 다음에는 그들은 '선언'과 르윈터에게
편지를 전해 준 사실을 구실로 자네를 위협할 걸세.
5만 달러 정도의 금액을 기재한 자네 명의의 스위스
은행 예금통장을 보여 주면서 당국에 신고하겠다고
위협하겠지. 자네는 낚시바늘에 걸린 고기와 같이
되어버리고 말 걸세. 미국의 모략활동의 앞잡이가
되어버리는 거네. 처음에는 간단한 일을 부탁하겠지
-- 말을 전한다든지, 얼핏보면 아무런 해가 없을 것
같은 정보를 입수케 한다든지, 누구와 누구가
밀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보고하는 그런 정도야.
그러다가는 좀더 복잡한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지 --
조직망을 만들라든가, 당간부를 협박하라든가. 이렇게
해서 끝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어. 자이체프, 나는 이
방면의 일은 잘 알고 있네 -- 이쪽도 저쪽에다 대고
같은 짓을 하고 있다네. 지난 몇 년 간 내가 뉴욕에서
뭘 했었다고 생각하나? '뉴욕 타임스'를 읽으면서
세월이나 보내고 있었는 줄 아나? 좀더 어른이
되게나, 자이체프."
"그 '선언'이 공표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지
자네도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자이체프가 말했다.
"내 경력에 종지부를 찍게 되네."
"미국측의 모략활동의 앞잡이가 되면 자네가 어떻게
될 것인지 나는 알고 있네. 믿어 주게, 자이체프,
나는 자네를 형제처럼 사랑하고 있어. 그러나
친형제에게도 같은 말을 할 것일세......"
마이크의 잡음처럼 낮은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와서 포고딘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 소리가
갑자기 공포에 가득찬 비명으로 변하더니 마침내
헐떡이는 듯한 소리로 바뀌었다.
"자이......자이......자이......"
포고딘과 자이체프가 옆방으로 뛰어들었다.
'암소'가 바닥에 쓰러져서 울며 헐떡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호흡을 멈추고 죽었다.
"파키리스 에스트 데스켄사스 아웨르니."
자이체프가 속삭였다 -- 그리고 힘없이 두 무릎을
꿇고서 공포에 넋을 잃은 표정으로 애인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서는 고양이 치치코프가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조그맣고 파란 알약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제6부 버리는 말
제 21 장
세알라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손가락으로 비틀다가는
다시 멈추곤 했다. "나는 이 침대용 의자에 누워
있어야만 하나요?" 상대방의 얼굴을 보지 않고
물었다.
"당신이 싫다면 눕지 않아도 돼요."
그러나 세알라는 일어나려고는 하지 않았다.
"화산재 속에서 목만 내놓고 묻혀 있었던 것이
기억나요. 표면이 화산재처럼 보였어요 -- 발이 곱고
희고 베이비 파우더 같았어요. 하지만 그 속은 오트밀
같은 느낌이었어요."
의사가 다리를 꼬고서 테이프레코더의 마이크를
조절했다. "그, 화산재에 묻혀 있었던 것은 당신을
지켜주기 위해서였나요, 아니면 겁을 주기
위해서였나요?"
"지켜 주는 쪽이라고 생각해요." 세알라가 눈 위에
덮인 몇 가닥의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그리고는 갑자기 어깨의 무거운 짐을 털어내려는 듯이
몸을 떨었다. "당신은 내게 무슨 짓을 했나요?" 울
것만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음 순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지켜주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처음에는
호흡하는 것이 다소 힘들었지만, 그건 내가 너무
흥분해 있는 탓이라고 생각했어요. 흥분했을 때는
호흡이 힘들어지거든요. 몇 사람인가가 내게
다가오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도 기억나요. 그
사람들이 발을 옮길 때마다 철벅하고 커다란 소리가
났어요."
"그들은 누구였소?"
"기억이 안 나요."
"당신에게 다가오려고 몸부림치며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씨를 부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 그냥 씨가
아니고 고초열에 쓰는 알약이었어요."
"고초열에 쓰는 알약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난 알고 있어요." 덤벼들 듯한 어조로 세알라가
말했다.
의사는 그 적의를 무시했다. "당신에게 다가오려고
몸부림치던 그 사람들에 대해서 당신은 어떤
느낌이었소?"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아무것도 느낄 리가
없잖겠어요? 다만 그저 내 쪽으로 다가오려고
애쓰고만 있었어요. 나는 아직도 다가오려고 하는지
가끔 흘끗 그쪽을 보았어요."
"그래, 다가오려고 하던가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들은
철벅하고 발을 빼내고는 다시 내려놓았고,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듯이 보였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봐야 가까이 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죠."
"어떻게?"
"뭐가 어떻게요?"
"아무리 그래 봐도 가까이 오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왜, 그들이 언제까지나 내 곁에는 올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신이 한 말이오." 의사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그들이 언제까지나 당신에게 가까이 올 수 없다고
당신이 말했소. 어떻게 그걸 알았느냐 이 말이오?"
세알라는 몇 초 동안 생각해 보았다. "그들의
모습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커지지 않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다시 말하자면 언제나 나와의 거리가
같았거든요."
세알라가 또다시 단추를 비틀자 이번에는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단추가 떨어져 나갔어요." 슬픈
목소리로 말하고 그녀는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눈물로 시야가 흐려지고, 이번에는 시야가 흐려진
것에 겁이 나서 계속 울었다.
"자신이 왜 울고 있는지 알고 있소?"
"이 단추가 떨어져서 울고 있는 거예요." 세알라가
말했다. 이윽고 울음을 그치고 물었다. "난 이 침대용
의자에 누워 있어야만 되나요?"
"당신이 싫으면 일어나도 좋아요."
이번에도 세알라는 일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는 이쯤 해둡시다." 의사가 말했다.
"11시에 면회하러 오기로 되어 있소, 알고 있소?"
세알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만나보겠소?" 그의 장사 밑천인, 격려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의사가 물었다.
세알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만나겠어요." 날씨나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말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다이아몬드는 창가의 딱딱한 의자에, 세알라는 병원
특유의 네모반듯한 침대에 앉아서 오랫동안 서로
말없이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화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다이아몬드가 가능한 한 자연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대우가 나쁘진 않나?"
그러나 세알라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멍청하고
공허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그렇군. 아파트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져다 준
모양이군."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긴장된 쉰 목소리가 그의 감정이 흔들리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가엾은 리오 -- 당신에게는 절대로 마음 편한 일이
아니죠, 그렇죠?" 세알라가 다리를 끌어다 붙이고
벽에 기댔다. "내가 하는 말은 시체와 대면하는 것을
뜻하는 거예요." 머리칼을 거머쥐고 눈 근처에서
옆으로 잡아당겼다. "세르뉴 사건 이후에는 이런
생각을 안해도 됐지요, 그렇잖아요? 가엾은 리오."
미소지으며 동요의 후렴처럼 노래하듯 계속해서,
"가엾은 리오." 를 되풀이했다.
다이아몬드는 손등으로 입을 훔쳤다. 힘없이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고 있어서 늙고 살이 찐 듯한 인상을
주었다. "믿어줘, 세알라......" 중도에서 말을
멈추고 혀끝으로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신성한 모든 것에 대해서 맹세하겠어......"
"그게 뭔데요?"
"뭐가?"
"당신에게 신성한 것이?"
다이아몬드는 의표를 찔렸다. 그녀가 화내고 있는
것인지, 비꼬고 있는 것인지, 농담인지, 미쳤는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 대답이 궁했다.
"나는 결말이 이렇게 될 줄은 미처 몰랐어, 세알라,
믿어주겠어?"
그러나 세알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젯밤에 꿈을
꾸었어요." 대답 대신에 그녀가 말했다. "화산재 속에
목만 내놓고 묻혀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몇
사람인가가 내게 다가오려고 애를 쓰더군요. 그들이
발을 들어올릴 때마다 철벅하고 커다란 소리가
들렸어요." 세알라가 뭔가를 생각해 냈다. "당신도
있었어요, 리오. 내게 다가오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 속에 당신도 있었어요."
"나는......"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당신 모습이 커지지
않았어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왜 자이체프의 '선언'을 공표했나요?"
"내가 결정한 일이 아니야, 세알라.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관계하고 있으며, 러시아측은 자이체프를
세상에서 매장해 버리기 위해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했다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기 위해서 그
'선언'을 공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세알라가 윗몸을 앞으로 숙이니 머리칼이 늘어져서
커튼처럼 얼굴을 덮었다. 그녀가 그 커튼의
한가운데를 벌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표면은
화산재같이 발이 고운 가루로 보였지만, 그 속은
오트밀같이 망울망울하고 꺼끌꺼끌했어요."
두 개의 사운드 트랙을 이어놓은 것 같은 말투에
대처할 방법이 없어서 다이아몬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세알라, 제발 세알라."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가
흉내내어, "세알라, 제발 세알라, 세알라, 제발
세알라, 제발 세알라." 하고 가냘픈 목소리로
노래했다.
갑자기 노래를 멈추고 머리칼을 양쪽 귀 뒤로
걷어올리고는 얼굴 전체를 내보였다. 빛을 띤 푸른
눈이 완전히 정상으로 보였다. "자이체프는 어떻게
되었나요, 리오?" 날카로운 어조로 그녀가 물었다.
"그도 살해당했나요?"
"자이체프는 잘 있어, 세알라. 하나님에게 맹세해,
그는 건강해. 녀석들은 그를 레닌그라드 교외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보냈을 뿐이야. 그것뿐이야. 거짓말이
아니야. 그것이 체제를 비판하는 인텔리에 대한
그들의 상투수단이야. 체제에서 발을 빼는 사람은
모두 정신병원에 보내는 거야."
"자이체프와 세알라." 상냥한 목소리로 세알라가
말했다."자이체프는 정신병원에, 세알라는 일반병원에
정착해서 긴 동면을 맞게 되는군요."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세알라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독살한 아가씨. 그들은 사실을 말한 거죠, 그렇죠,
리오? 내가 그 아가씨를 독살한 거죠, 그렇죠?"
"당신이 독살한 게 아니야, 세알라. 그건 사고였던
거야. 피할 수 없는 불행한 사고였어."
"하지만 누군가가 그 알약을 먹었을 게 확실해요 --
그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르윈터라도."
"우리는 소련의 대적(對敵) 정보부 녀석들이 그
알약 속에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을 틀림없이 발견할
것이라고만 계산했던 거야. 우리는 그들이 발견하기를
바랐어. 이쪽에서 르윈터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고
그들이 생각하도록 하고 싶었어. 그건 우리가 보내는
신호 중 하나였던 거야."
"리오, 대체 어디에서 그런 계획을 생각해 냈나요?"
세알라가 물었다. 그 착상의 근거를 자기가
제공했다는 것을 그녀는 잊고 있었다. "자이체프와
세알라. 세알라와 자이체프." 노래하듯이 그녀가
말했다. 그러다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기
사람들이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고 있나요?"
다이아몬드가 고개를 흔들면서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래, 세알라."
"여기에 왔을 때에는 건강했다고요. 그들이 나를
병들게 했어요. 그들이 내게 병을 주었어요, 그들이
나를......"
다이아몬드는 자기와 세알라가 탄 비행기가 뉴욕을
향해 가고 있는 동안에 303위원회에서 긴급히 개최된
회의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 아가씨 말이야 --
" 털미지 상원의원이 말했다. "우리의 공표내용을
그녀가 망쳐 버리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손을 써야만
해."
CIA를 대표해서 참석했던 듀크스가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우리 쪽에서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래? 시끄러운 일을 일으키면 안되네." 털미지가
경고했다.
"앞으로도 시끄러워질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듀크스가 말했다.
"......병들게 했어. 그들이 나를 병들게 했어."
지금은 세알라가 소리를 내어가며 울고 있었다. "팔을
내놔 -- 자주 당했어 -- 나는 리오를 기다리고
기다렸어 --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했어 -- 기를
쓰고 잠에서 깨어나면 그들이 또 주사를 놓았어."
세알라는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울음을
참았다. 눈과 볼은 부어 있었다. "겨우 그들이 잠을
깨도록 해주었을 때 나는 부탁했어 -- 애원했어 --
아무것도 알려주지 말라고.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다고 했어 -- 나는 듣지 않으려고 했어 --
내가 그 아가씨를 죽였다고 그가 말했어 -- 신문에 난
자이체프의 '선언'을 내게 보여 주었어 -- 내가
자이체프도 죽였다고 했어 -- 자, 팔을 내놔 -- 리오,
어디 있어요? 당신은 죽을 힘을 다해 나를 구하려고
싸우지도 않았어요 -- 그렇죠, 리오?-- 당신은 내가
더 고통스러워하도록 거들었어요."
예상 외로 깊은 우물에 조그만 돌 하나를
떨어뜨리고는, 오랫동안 떨어진 물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다이아몬드는 해야 할
이야기를 이것저것 생각했지만, 하나같이 어색한
이야기가 될 것만 같았다. 가령, '당신이 여기서
나가게 되면 우리 둘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라고 말해도 세알라는 노래라도 부르듯이 엉뚱한
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무섭도록 파리해진 세알라의 얼굴에 미소 같은
표정이 떠올랐지만, 거기에는 행복 같은 것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생각대로 정식으로
책임자 직책을 맡게 되었나요, 리오?"
"사실은 -- "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그 일로
인해서 국방부 정보국으로 이동되었어."
"자, 사양할 것 없어요." 세알라가 말했다. "르윈터
계획의 공적이 인정되어 영전했다 -- 그런 셈이지요,
아닌가요?"
"지금은 작전부장이야." 다이아몬드가 인정했다.
"어떤 거예요, 그 작전부장이라는 것은?"
"즉, 총괄하는 거지......"
세알라가 그를 대신해서 마무리지었다. "말을
일부러 버리는 술책을."
활짝 열려 있는 문에서 리졸(소독약의 일종)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여기는 별로 기분이 좋은 곳이
아니군."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불쾌해요." 세알라가 말했다. "보세요, 나의 '뭔지
모를' 것을 몇 개 가져다 주었어요."
다이아몬드는 놋쇠 공 여섯 개와 강철로 만든
온도계가 붙어 있는 마호가니 재(材)의 조그만 상자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저건
수집품에서 빼낸 건가, 세알라?"
"그래요." 내키지 않는 말투로 대답했다. "여기
있는 의사 하나가 알고 있더군요. 포도주의 알코올
도수를 재어보는 시크로노미터라고 하기에 버렸어요."
"시크로노미터라서 버렸다고?"
"그것이 뭔지 알았으니까 버린 거예요."
이윽고 다이아몬드가 몸을 바로하고 고쳐앉았다.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어디라도 좋으니 어디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돌아가는 거예요, 리오?"
"워싱턴으로 돌아가야만 해......"
세알라가 침대가에까지 앉은뱅이 걸음으로 나왔다.
"내 일은 걱정 말아요, 리오. 운이 없었던 거예요.
계획이 생각대로 안되었을 뿐이에요......"
그러나 다이아몬드가 그녀의 말을 바로잡았다.
"잘된 거야, 세알라. 제발 이해해 줘 -- 생각대로
잘된 거란 말이야."
세알라가 미소지었다 -- 이번에는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 그리고 되풀이해서 노래했다.
"잘되었다, 잘 되었다, 잘되었다."
제 22 장
사팔뜨기 남자 간호원이 차와 잼이 들어 있는
조그만 깡통을 가져오더니 입구 옆에 자리를 정하고,
성한 눈으로는 긴 나무 테이블 저쪽 끝에 마주보고
앉아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고, 또 한쪽 눈으로는
네모난 플라스틱 통 안에 들어 있는 천장의 네온 등을
보고 있었다. 그 통 바닥은 나방의 시체로 덮여
있었다. 플라스틱에 비친 죽은 나방의 그림자가
실물보다 확대되어 보인다. 가끔 몇 마린가의 날개가
상자 안에서 소리도 없이 늘어붙어 버리는 것이
독방의 벽을 두드리는 죄수를 흉내내는 섬뜩한
판토마임 같았다.
"저 사람의 머릿속을 상상해 봐." 간호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자이체프가 말했다. "한쪽 눈에는
우리의 영상이 찍혀 있고, 다른 한쪽 눈에는 천장의
나방이 비치고 있어. 그 두 영상이 한데 엉켜서 -- "
자이체프는 잠깐 생각했다 -- "두통을 일으키고 있는
거야."
포고딘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잼을 한 술 떠서
차에 넣고는 멍청히 휘젓고 있었다. 그는 벌써 몇
년째 망가진 채로 그냥 있는 선풍기 바로 밑에 앉아
있었다. 긴 테이블이 열 개 남짓, 지평선에 뻗어 있는
밀밭이 보이는 창이 벽에 그려져 있는 것 말고는 방은
텅 비어 있어서 연극의 세트 같았다 --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려퍼지고, 기둥으로 받쳐진 벽 뒤에서
배우들이 긴장해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무대를 생각나게 했다.
포고딘은 찾아올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가 굉장히
믿고 있는 본능이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기묘하게도 그 생각을 바꾸도록 그를 부추긴 것은
아브크센티에프였다. 식을 마친 직후에
아브크센티에프가 포고딘을 옆으로 불렀다. "자네는
자이체프에 대한 우정을 버리지 못하고 꼬리처럼 끌고
다녀." 그가 말했다. "나 자신도 같은 경우를
겪어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어. 한 번 더 그를
만나서 자신을 해방시킬 필요가 있어."
"우선은 최고의 정신병원이라고 할 수 있지."
자이체프가 말했다. "과거 제정시대에 케렌스키와
같은 차를 타고 동궁(冬宮)에서 달아난 호모 장관의
별장이었다는 거야. 저걸 보게 -- 자이체프가 천장의
회반죽이 떨어져 버린 방의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
"전체가 낡을 대로 낡았어. 창의 쇠창살마저
삭아버렸어. 밀면 손이 밖으로 빠져나갈 정도지만,
아무도 상관치 않아. 문에 걸려 있는 간판을
보았겠지?-- 셀브스키 정신진단연구소. 내가 이곳
책임자였다면 단테의 지옥 입구에 걸려 있는 문구와
바꾸어 달겠어 -- '그대들 여기 들어오는 자들이여,
일체의 희망을 버리라.' 그러는 편이 훨씬 적절한
문구인데 말이야. 이곳 녀석들은 생각이 저속해."
포고딘은 몇 번이나 질문을 하려다 만 것을 결국
입밖에 내고 말았다. "자네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겠지?"
"불길한 생각을 하면서 걱정할 필요는 없네,
예브게니. 아크셀로드 사건 이후로 녀석들은
자루걸레를 스폰지로 바꾸어 버렸다네. 어쨌든 나는
82살 때의 톨스토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뭐라고
표현했더라, 그래, 죽을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어. 그리고 천성적인 겁쟁이인 덕분에
성공하고 있지. 내가 자포자기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면, 그것은 절대로 자네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야."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그렇다니까. 자네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야.
나의 친애하는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자네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와서 가령 내가 싱글벙글하고 있다면
자네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네. 설령
이런 환경 속에 있기는 해도 나는 미치광이는
아니야."
"만일 자네가 미치광이라면 적어도 자네에게 합당한
곳에 와 있는 셈이지." 포고딘이 농담을 했다. 그래서
서로 기분이 풀려서 둘은 오랜만에 함께 소리내어
웃었다.
포고딘이 입구 옆 간호원 쪽을 흘끗 보니까 아직도
움직이고 있는 나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나, 자이체프?" 그가
물었다.
"그 점에 대해서 여기는 별로 귀찮게 하지는
않는다네. 매일 아침 나는 우선 내가 있는 층의
화장실을 청소하지 -- 수입해 온 영국제 소변기가 둘,
이탈리아제 좌변기가 하나, 러시아제 샤워실 하나,
거기에 커튼이 걸려 있지는 않네. 나는 그 커튼
레일이 번쩍번쩍해질 때까지 닦는 거야."
"아니, 무엇하러?"
"그 레일에다 아크셀로드가 목을 맸거든 -- 아주
진귀한 기념비야. 그렇게 생각지 않나? 번쩍거리는
커튼 레일."
"더없이 진귀하군 -- 자네가 아니고는 미처 생각해
내지 못했을 걸세. 그리고 하루의 나머지는 어떻게
보내나?"
"그리고는 지루해서 도망칠 곳을 찾지."
포고딘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런 우거지상을 하나, 예브게니? 우리들
시대에서는 아주 흔한 도피수단이지. 미국의 작가
버스가 멋진 말로 표현했어 -- '현상이 절망적이라고
해서 더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어때!" 자이체프가
팡파르를 부는 흉내를 냈다. "우리 시대의 핵심을
포착한 문장이야 -- 인간의 정신이 어디까지
위축됐는가를 지극히 솔직하고 냉혹하게 요약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지 않나?"
"경솔한 문구군." 포고딘이 말했다. "게다가 나는
자네가 하는 말을 믿지 않네. 당연히 책은 읽을 수
있을 것이며......"
"나는 억제에서 완전히 해방된 문장이 나타나지
않는 한 한 절, 한 구, 한마디라도 읽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네."
"그래, 그런 문장이 나타나는 것은 언제인가?"
"브레히트가 말했어. '민스크는 세계에서 가장
지루한 도시 중 하나다.' 라는말로 시작되는 소설이
나타나면 소련은 표현의 자유를 회복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
"꽤 멋진 말이로군 -- 그런 말로 시작되는 책을
자네가 쓰면 어떻겠나?"
자이체프가 소리를 죽여 속삭이는 흉내를 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네. 나는 민스크의 체스
토너먼트 시합에 몇 번인가 참석했었는데, 거기에
통통하고 귀여운 계집애가 하나 있단 말이야......"
이미 두 사람의 우정이 한데 어울어져 함께
소리내어 웃었다.
"즉, 위대한 브레히트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란 말일세." 포고딘이 말했다.
"우리 둘도 마찬가지야." 자이체프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두 사람이 모두 어두운 기분이 되었다.
포고딘이 차를 마셨다. 자이체프는 깡통에서 잼을
한 술 떠서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어때, 자이체프, 여기에 진짜 환자가 있기는
하나?"
"몇 명은 있어." 손가락으로 머리를 만지며
자이체프가 말했다. 자이체프의 손이 어렴풋이 떨리고
있는 것을 포고딘은 비로소 깨달았다. "나와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 리트아니아 인이 있어. 그
사람은 매일 아침 자기가 꾼 꿈을 써두었다가 점심을
먹은 직후에 의사에게 제출하는 거야. 어제 점심 먹을
때 그 리트아니아 인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서
고함을 치기 시작했어. '조심해, 이 바보야. 내 꿈
위에 샐러드 드레싱을 흘렸잖아.'" 우울한 얼굴로
손을 흔들면서 자이체프가 되풀이했다. "꿈 위에
샐러드 드레싱이라고!"
자이체프는 그 사람의 흉내를 내며 펄펄 뛰다가
풀석하고 주저앉자 체중으로 침대가 삐걱거렸다.
"미친 놈이 몇인가 있어. 자기가 마레카모비츠라고
우기고 있는 유태인도 있어. 이디시 어로 '죽음의
천사'를 그렇게 부르는 거야. 그 밖에 매일 아름다운
말을 모으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 그것을 알파벳
순으로 긴 리스트를 만드는 거야. 새로운 말을 발견할
때마다 그 긴 리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쓰지.
나는 '만(만)'과 '아지랭이'와 '정서'를 가르쳐
주었어. '이슬'도 말해 주었는데, 그것은 이미
리스트에 올라가 있더군. 그 두세 사람을 빼고는 이곳
주민의 대부분은 제정신이지. 내 별장에서 만났던
사람, '뉴욕 타임스'에 실린 아크셀로드에 관한
탄원서에 서명한 그 사람을 기억하나?"
"안트노프 -- 오브센코."
"그래, 그 친구도 여기 있어." 자이체프가 같은
정신병원에 들어 있는 해양생물학자, 천체물리학자,
시인 세 사람과 발레단의 단장 등 유명인의 이름을
꼽았다. "그 천체물리학자는 나보다 뒤에 들어왔다네.
당국에서는 누군가를 시켜서 체포하는 그런 정도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았어. 전화를 걸어서 갈아입을
속옷을 가지고 루비양카 형무소로 출두하라고 명령을
내린 거야. 녀석들의 절대적인 자신감이,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모욕인 거야. 이미 과거의 좋은 시절처럼
깊은 밤에 문을 노크하는 그런 짓은 안해. 더구나
말이야, 그는 시키는 대로 한 거야!"
"그것은 불공평한 견해야, 자이체프. 그렇게 말고는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나?"
"도망쳤어야 했어. 남부에는 5천 루블이면 터키로
도망치게 해주는 녀석들이 있다는데 말이야."
"그렇게 용기가 있다면, 자네는 왜 해보지 않았나?"
"내게는 오랫동안 걸을 수 있는 스태미나가 없어."
자이체프가 말했다. "게다가 그 이야기는 여기서 만난
사람에게서 처음 들었거든."
전보다 살아남은 수가 적어진 나방이 다시 날개를
퍼덕이며 한 마리도 남김없이 움직이지 않게 될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느닷없이 포고딘이 스푼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왜 그녀에 대한 것을 당국에 알리지 않았나?"
"글쎄......" 자이체프가 말을 꺼내려다가 한동안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마추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 의미를 알겠나? 그래, 모르는
것 같군." 자이체프가 포고딘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여하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그것보다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미국인들은 르윈터를 죽임으로써 어떤
일을 끝내려고 했었나?"
포고딘이 입구에 서 있는 간호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이야기가 저 사람에게 들리나?"
"걱정 안해도 돼." 자이체프가 말했다. "특별히
머리가 둔해. 단어를 3천 개도 모를 걸세."
"좋아." 포고딘의 상체가 다가왔다. 어깨가 엷어서
고양이 등처럼 굽어 있었다. "미국측이 진짜 망명에
대해서 손을 썼을 가능성이 있어 -- 즉, 르윈터가
이미 우리에게 제공한 정보를 더욱 정밀하게 하는
것을 막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거야. 또한, 앞으로
망명을 기도하는 녀석들에 대한 본보기로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미국측은 르윈터가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케 하도록 진짜 망명에
대한 조치를 강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 했을
가능성도 있어. 그렇다면 그는 가짜지. 아니면,
미국인들은 르윈터가 진짜라고 우리에게 믿게 하려는
걸 우리가 알아차리고서 거꾸로, 그러니까 그가
가짜라고 판단할 것을 계산에 넣고서, 그를 진짜로
보이게끔 한 것인지도 모르지. 다시 말하자면
우리에게 그는 가짜라고 단정시키고 싶어한다는 거야.
그럴 경우에 그는 진짜지."
"그 사건은 아직도 복잡한 채로 남아 있는
모양이군." 자이체프가 차디찬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어떤 견해가 유력한가?"
"아브크센티에프는 미국측이 진짜 망명에 대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어."
"그 암살 미수사건 때문에 말인가?"
"그것과 그 밖의 신호를 근거로 해서."
"그렇다면 르윈터의 정보는 진짜가 되는 거로군?"
"그래, 진짜가 되는 거야."
자이체프가 잼을 다시 한 술 입에다 떠넣었다.
"그러나 자네는 그 견해에는 반대겠지?"
"맞아. 내 견해는 반대야."
"왜?"
"왜냐하면......다이아몬드라는 인물이 관계하고
있으며, 그 다이아몬드라는 인물은 모략작전을
좋아하니까. 그는 우리에게 가짜 정보를 진짜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아주 사소한 점에
이르기까지 몇 년이나 걸려서 이런 작전을 계획할
수가 있는 인물이란 말일세. 게다가, 그 암살사건도
있고......"
"그래, 암살 기도가 있었지."
지금의 포고딘은 자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말하고 있었다. "도무지 무의미한 일이었어......"
"무의미했어." 자이체프가 동의했다.
"......그들은 우리가 이미 르윈터에게서 정보를
캐낸 것을 알고 있었을 거야. 그 암살은 망명에 대한
조치가 아니고 신호였던 거야. 그들이 망명에 대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기를 바랐던
거야. 미국측은 르윈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고 있어."
"그렇다면, 그는 가짜군."
"맞아. 르윈터는 십중팔구 가짜일 거야."
"그 사실을 아브크센티에프에게 이야기 했나?--
르윈터가 가짜라고 자네가 확신하고 있는 것을?"
포고딘이 대답을 망설였다. "아니."
"왜 말하지 않았나?"
"첫째, 나 자신이 내 생각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야......"
"어떻게 된 건가,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과거의
솔직함은 어디로 가버렸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주 곤란한 처지에 있다네."
변명 같은 어조로 포고딘이 말했다. "처음부터 그가
진짜라고 주장한 것은 바로 나란 말일세. 그러니
승진하고 나서는 갑자기 주장을 바꿀 수가
없어서......"
"승진? 내가 축하해야 할 일인가, 예브게니?"
"나는 웨스트워크의 부부장으로 승진했다네. 지금은
아브크센티에프의 직속 스태프에 끼어 있어."
"그 웨스트워크라는 것은 대체 뭘 말하나?"
"서방측에 대한 첩보활동의 호칭일세."
"그렇다면 자네는 이젠 거물이로군? 그러니까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니까, 그렇다고 해서......" 포고딘은
취해야 할 길을 결정하려고 계속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과감하게 의견을
말하지 않으면 우리 나라는 가공의 탄도에 대처하기
위해서 대(對) 미사일 조직을 근본적으로 다시 고치게
될지도 모른단 말일세."
"어떻게 생각하나, 따지고 보면 상대적으로
제정신인 세계의 샘에 살고 있는 인간의 충고를 듣고
싶지 않은가? 싫어도 말해 주어야겠네." 자이체프가
포고딘 쪽으로 다가갔다. "자네는 목숨을 건 승부를
시작해야 하네. 불행하게도 외부의 미치광이들
사회에서 살고 있는 자네들에게 있어서 목숨을 건
승부란 건 사람을 젖혀놓고 출세하는 일이야."
포고딘이 의자 위에서 죽 허리를 폈다. "자네는
내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것을 잊고 있는 모양이군,
자이체프. 마르크스주의자인 바에야 자기 나라 국민에
대해서 책임을 다할 의무가 있는 걸세."
"자네는 4분의 1만 마르크스주의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비꼴 필요는 없네." 포고딘이 말했다.
"잘 들어보게, 포고딘 동지 -- 공산주의자라는 것은
본래는 사회 순위라고 할까 계급조직을 없애는 것이
목적이었던 거야. 그러나 그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어. 우리는 서열이 제일인 나라에 살고 있어.
더구나, 그 서열이라는 것은 줄을 선 차례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그러니까 기왕 서열을
차지할 바에야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는 것이
똑똑하다는 이야기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두 마리의 나방이 다시
날개로 플라스틱 상자의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동료의 시체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갔다.
"실은 그것이 내 아버지의 인생철학이었다네."
자이체프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 아버지는
관절도 손가락도 다 부어오른 나무꾼이었어. 그리고
어머니는 볼셰비키 정신이 풍부해서 우리 집
근처에서는 제일 먼저 입당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네.
어머니가 당에 입당한 것은, 당시 당에서 1년에 한
번씩 피크닉을 개최했는데 어머니는 피크닉을 아주
좋아했기 때문이야, 알겠나? 예브게니, 우리는 인생의
기본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네. 어머니는 우유를 한
모금만 마셔보고도 많은 산양 중에서 어느 것의
우유인지 알아맞출 수가 있었어. 우리는 벽 바깥쪽에
창문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목조 건물에서 살았었네.
하하! 나는 완전히 한 바퀴 돌아서 출발점으로 돌아온
거야. 어릴 때에는 창문 그림이 바깥쪽에 그려져
있었지. 지금은 안쪽에 그려져 있지만." 자이체프가
벽에 있는 빛바랜 수확 풍경의 그림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자네에게 묻고 싶어. 어느쪽 집이
세상에서 진정 도망치는 장소를 제공해 주고 있는
건가?"
그러나 포고딘은 그 씁쓰레한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자이체프가 화제를 바꿨다. "자네는
알았었나?......" 흥분한 어조로 말을 하려다가 다음
순간 그 이야기를 꺼낼 마음이 사라져 버린 듯했다.
"뭘 말인가, 스토얀 알렉산드르비치?" 포고딘이
퍼스트 네임과 아버지 이름으로 자이체프를 부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자이체프는 처음의 기세가 차츰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자네는 단순한 서술(敍述)이 독자적인
의미를 갖게 되고, 그런 것들이 인간의 파괴력을
나타내는 완곡한 어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
본 적이 있는가? 예를 들면 독일인의 '수용소'라는
말의 사용법이야. 또는 미국인이 말하는 '휴전구역
(free fire zom).' 또는 우리 나라의 '정신병원.'" 그
'정신병원'이라는 말에서 자이체프의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나는 지금까지 평생 동안 이것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네." 어렴풋이 떨리는
손으로 주위를 가리켰다. "그러나 여기에 들어온
지금은 사실은 한시름 놓은 기분이야. '네가 모든
것을 빼앗은 인간은 이미 네 마음대로는 안돼.'
솔제니친의 글일세. 여하튼 그대로야. 여기는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만큼 무서운 곳이 아니야." 짧은
한 순간 과거의 자이체프를 생각나게 하는 불꽃을
눈속에 이글거리면서 그가 말했다. "그것은 물론 나에
대해서 다소라도 말로써 나타내고 있는 것이 되지,
그렇잖은가?"
자이체프가 남은 잼을 다 먹어치우고는, 조금 남아
있던 차로 스푼을 헹구어 바지에 문질러 닦고서
윗도리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머리 위에서 나방이
힘없이 파닥거리다가 죽었다.
자이체프와 포고딘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할
이야기를 다해 버린 듯한 얼굴로 마주보고 있었다.
열차의 승객이 후회를 가슴에 숨기고 조용히 목적지에
닿은 느낌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자이체프, 사람이 죽었으니 이미
내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네." 눈물 같은 땀방울
하나가 포고딘의 벗겨진 이마에서 반짝하고 빛났다.
"물론 나로서는 이런 결과가 되어버려서 분하기 짝이
없어." 다음 순간 그는 복받쳐 오르는 격정으로 목이
메었다. "아, 자이체프, 만일 그때 자네가......"
자이체프는 그런 경우의 가능성의 무게에 치여
찌부러진 듯했다.
"만일 -- " 그가 포고딘에게 말했다. "많은 '만일'
더 많은 '만일', '만일'의 장사진이 끝없이 뻗어나가
-- 러시아를 지나 중앙 아시아를 넘어 시베리아를
지나 블라디보스톡에 이르고 있어."
자이체프는 사열을 하는 단상에 서 있으면서 한없는
사람들의 행렬을 향해 손짓이라도 하듯이 손바닥을
한들한들 흔들었다.
"차렷,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부동자세로 내
인생에 대해 '만일'에 경례를 하는 거야."
제 23 장
사빈코프는 몸의 일부가 마비된 탓에, 포고딘
쪽으로 방향을 돌렸을 때 온몸이 깁스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가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금테 안경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은빛의 공허한 구멍처럼 보인다. '슐레터,
자기분리기(磁氣分離器), 원심분리기, 1일 처리량
12억 파운드의 고형폐기물은 한 사람이 1년 간에
1톤의 쓰레기를 버리는 계산이 됩니다. 나는 -- "
사빈코프는 쟁반을 들어올리듯이 서류철에서 두
손으로 종이 한 장을 들어올렸다 -- "나는 국가의
안전보장에 관한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포고딘은 사빈코프가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단지 그의 취미에 불과한 거야.
우리의 당면문제는 8페이지에 나와 있어."
"그렇군요." 사빈코프가 말하고서 그와 두벤코,
이즈볼스키가 8페이지를 내놓고 읽기 시작했다.
포고딘은 불안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최근에는 완전히 러시아 인으로 보이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칼라의 끝을 보턴으로
고정시키는 셔츠가 폴란드제 새하얀 셔츠로 바뀌었다.
해리스 트위드 윗도리와 세팔레이트 바지 대신에
소련제의 검은 비즈니스 양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짧게 깎았다. 가령 포고딘의 4분의 1이 본래의
인본주의자로 남아 있다고 해도 관료 특유의 태도나
외모 -- 무표정한 얼굴, 얼핏 보면 신경이 둔한 듯한
느낌, 끊임없이 연필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의
움직임 등 -- 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사빈코프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얼굴을 들었다.
"이렇게 되면 물론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건 굉장한 하사품인걸." 두벤코가 얼굴을 들고는
말했다. 그는 중년에다 장신의 그루지아 인으로서, 몇
가닥 안 남은 머리칼이 벗어진 대머리에 달라붙어
있으며, 금속 같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다.
37세로서 그 자리에서는 가장 젊은 이즈볼스키가
휘파람소리를 냈다. "믿기지 않는 굉장한
정보인데요."
포고딘이 녹색 수첩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 처음
르윈터를 대면했을 때의 내용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자네들에게는 그 서류철에 없는 배경설명이
필요하겠지." 그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일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었어."
자신은 그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어조로 말했다. "우리 손 안에 굴러들어온
것이 사실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러나 마침내
미국측이 우리의 수중에 있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진짜 망명자라는 것을 한 점의
의문도 없을 정도까지 분명하게 알려주었다네. 그
첫번째 단서는 도쿄에서 르윈터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던 체이핀이라는 친구를 그들이 저승으로
보내버린 거야. 이어서 그들은 도쿄 컨트롤과
보스턴을 포함한 뉴 잉글랜드 지역의 공안지국
녀석들을 바꿔 버렸어. 또한, 많은 MIRV 전문가들이
암암리에 워싱턴으로 소집되었지 -- 그 목적에
관해서는 자네들 상상에 맡기겠네. 또 같은 주(週)
안에 미국 국무성 고위층에 믿을 수 있는 소식통을
가지고 있는 주간지 '뉴스위크'의 '페리스코프'난에
조그만 기사가 실렸어. 단지 르윈터의 망명은 당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이상으로 중대한 사건이라고
쓴 간단한 기사였어. 그 뒤 MIRV를 장비하기로 되어
있던 아이다호 주의 미사일 기지가 구형의 탄두를
그대로 단 미사일로 작전임무를 계속 수행하기로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어. 그 무렵 자네들도
알다시피 303위원회의 일원인 털미지 상원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소위원회가 망명에 관한 조사를
비밀리에 하기 시작했어. 그런 일들과 아울러
르윈터의 암살기도가 있었고."
포고딘이 얼굴을 들었다. 몇 초 동안 방안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4층 밑의 제르진스키 거리에서
나는 차소리 -- 그리고 포고딘이 연필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뿐이었다.
포고딘에게 있어서 그것은 여러 가지 일이 갑자기
밝혀진 것이 아니라, 꽤 오래 전부터 밝혀져 있었던
것이 문득 떠오른 특별한 몇 초 동안이었다. 그것은
새벽에 서광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으면서, 자신이
이미 아까부터 여러 가지 사물을 식별하고 있었던
것을 갑자기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리를
지나는 차들의 소음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사이에
포고딘은 자신이 스스로 손발을 묶고 있다는 의심은
그냥 둔 채 야심에 가득차 있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을 때의 그의 어조는
갑자기 솟아오르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바로 이 순간까지 -- " 포고딘이 말했다. "소련은
대 미사일 조직의 개발에 시간, 노동력, 자금, 자원을
별로 쓰지 않고 지내왔어. 우리의 과학자들이 너무
어렵다고 단정했고, 또 우리는 그 말에 따랐지.
그렇다고 해서 날아오는 탄두를 격추시킬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은 아니야. 문제는 날아오는
탄두가 지나치게 많아서 그 모든 것을 격추시킬 수가
없다는 점에 있었던 것이지. 그러나 이제는 사태가
변했어. 우리는 상대방 탄도의 궤적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고, 그에 따라서 날아오는 탄두 중 어느 것이
핵탄두인가를 식별할 수가 있게 되었어. 그것만 알면
적의 탄두를 저지하는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가 있지. 사실 우리의 당과 군의 수뇌부는 그
문제의 해결에 착수해야 한다는 점에 대강 의견이
일치되어 있어."
여기서 다시 포고딘은 사이를 두었다. 자기의
가슴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는 자이체프의 '만일'의
행렬의 발자국 소리를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들리지 않았으므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이 특별작업반이 설치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겠네. 그 탄도 궤적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르윈터의 정보를 믿고 있지 않다고 미국측이
생각하도록 해야만 돼."
"그들이 다른 탄도를 채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당연한 것처럼 사빈코프가 말했다. 그는
그런 모략엔 베테랑이었다.
"그렇다네." 포고딘이 인정했다. "그들은 우리가
탄도 궤적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고 확신하면 당연히
그 궤적을 변경하겠지. 그래서 우리는 이쪽에서는
르윈터를 믿지 않고 있다. 가짜로 의심하고 있다고
워싱턴 녀석들이 생각할 만한 일련의 신호를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또다시 방안이 조용해졌다. 이즈볼스키는 엄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말을 꺼내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안돼, 간단히
알아차리게 될 거야."
사빈코프와 두벤코는 벌써 오로지 그 방안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렇지." 연필 끝으로 종이를 두드리면서 거기에
나타나는 점무늬를 지켜보며 포고딘이 말했다.
"어쨌거나 르윈터를 미국으로 되돌려보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네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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