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은 자신의 삶(life)을 표현하는 바대로 존재한다--맑스
‘리얼리즘의 재구성’ 강의안
<1주> 맑스?엥겔스의 문학이론
O. 맑스주의라는 것
이 양반들은 모두가 맑스주의를 허울좋게 내세우지만, 그건 당신이 프랑스에서 10년전에 알고 있었던 식의 맑스주의이고 또 그런 맑스주의에 대하여 맑스는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내가 맑스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라고 말했더 적이 있다네. 게다가 맑스라면 어쩌면 이 신사양반들에 대하여, 하이네가 자신을 모방하는 자들에 대해 “나는 용의 씨를 뿌려서 벼룩을 거둬들였다”고 했던 말을 할지도 모르겠군. (1880년 8월 27일 엥겔스가 뽈 라파르그에게 보내는 편지.) 조만영?정재경 역 ?맑스?엥겔스 문학예술론 1?(돌베개, 1990) 149면. 맑스와 엥겔스 인용은 따로 언급되지 않는 한 이 번역본의 것임. 따라서 앞으로는 이 경우에 본문에 면수만 표기하기로 함. 다만 간혹 본강사가 번역에 손질을 가했음.
현재 우리에게 결핍된 것은 분명 맑스주의의 비판이 아니라, 맑스의 이론을 이어받을, 그에 못지않은 현대적 화폐 이론입니다. (들뢰즈) 질 들뢰즈, ?대담 1972~1990?, 김종호 역(솔, 1993), 167면.
I. 일반적 개요
1. 공문구화된 ‘유물론’
일반적으로 독일에서 ‘유물론적’이라는 단어는 수많은 젊은 문필가에게는 아무런 깊은 연구도 없이 모든 것에 레테르를 붙이는 단순한 공문구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레테르를 붙이면 일은 다 끝났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관이란 헤겔주의식의 구성도구가 아니라 연구를 위한 지침입니다. 전역사가 새로이 연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이한 여러 구성체들에 상응하는 정치적, 사법적, 미학적, 철학적, 종교적 견해 양상들을 그 사회구성체로부터 도출하고자 하기 이전에 먼저 그 사회구성체의 현존 조건이 낱낱이 탐구되어야만 합니다....탐구되어야 할 영역은 무한합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작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많은 것을 이루어 낼 수가 있으며, 탁월한 성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은 채 많은 수의 독일 젊은이들은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공문구만을 (모든 것은 공문구로 될 수가 있다.) 바로 자신의 빈약한 역사적 지식---경제사는 이제사 겨우 태동기에 들어서 있을 뿐이다--을 재빨리 체계적으로 가다듬고 자신이 매우 강하다는 듯이 내세우는 데에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현학을 즐기는 학도가 되어 물론 단순한 공문구로 되어 버린 문제들에 공격적으로 대들게 됩니다. (1890년 8월 5일 엥겔스가 베를린의 콘라트 쉬미트에게, 70-71면.)
2. 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 맑스주의와 속류 맑스주의
젊은 사람들이 흔히 경제적인 측면에 그것이 차지하는 것 이상으로 비중을 부여하는 데에는 부분적으로 맑스와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적대자들에 대항해서 그들이 부인하는 주요 원칙을 강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는 상호작용에 관련되는 제 계기를 온전히 제시하는 것이 항상 목표로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장소도 아니었으며, 그러한 기회도 아니었지요. 그러나 한 역사적 단면을 서술하는 데에 이르면, 즉 실제적인 적용에 이르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떤 오류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주요 명제들을 전유하는 순간, 자기가 어떤 새로운 이론을 완전히 이해했고 그래서 이제 곧바로 잘 다룰 수 있거나 한 것처럼 믿어버리는 일이 너무나 빈번히 일어나곤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항상 옳은 일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런 비난을 최근의 수많은 ‘맑스주의자들’에게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럴 때마다 또 놀랄만한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1890년 9월 21-22일 엥겔스가 쾨니스베르크의 요젭 블로흐에게, 71면))
이와 연관되는 것 또한 이데올로그들의 다음과 같은 우둔한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상이한 여러 이데올로기 영역들의 독자적인 역사적 발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또한 그러한 영역들의 역사적인 작용력 전체까지도 부인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원인과 결과를 경직되게 상호대립하는 극단으로서 간주하는 통상의 비변증법적인 사고방식, 즉 상호작용의 절대적인 무시가 근저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의 역사적 계기는, 그것이 일단 다른 원인 즉 결국은 경제적인 원인에 의해서 성립되자마자 곧 자기의 환경과 심지어는 자기자신의 원인에 대하여 반작용을 할 수 있다는 사실들을 이 양반들은 거의 의도적으로 망각하곤 합니다. (1893년 엥겔스가 베를린의 프란쯔 메링에게, 92-93면)
3. 실천하는 능동적 활동성의 철학<--->객체주의(objectivism)
지금까지 모든 유물론--포이어바하의 유물론을 포함하여--의 주요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을 다만 객체 또는 직관의 형태로만 파악할 뿐, 감성적인 인간활동으로 서, 실천으로서, 즉 주체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적 측면은 유물론에 대립해서 관념론에 의하여--물론 이 관념론은, 현실적인, 감성적인 활동 그 자체를 알지 못하지만--추상적으로만 발전하였다. 포이어바하는 사유대상과는 진정으로 구별되는 감성적 대상을 의욕하였으나, 인간의 활동성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본질?에서 그는 이론적 태도만을 참으로 인간적인 태도로 보고 있으며, 반면 실천은 그 더러운 유태인적 현상형태로서만 파악되며, 그렇게 고착화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혁명적인’, ‘실천적-비판적인’ 활동성의 의미를 개념파악하지 못한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1번)
4. 경제적 관계의 중요성<--->주체주의(subjectivism) 혹은 주의주의(voluntarism)
따라서 사람들이 흔히 여기저기에서 그러려니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경제적 상황의 자동적인 결과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인간들을 제약하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주어지는 사실적인 관계들에 기초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주어진 관계들 중에서 경제적 관계들이, 비록 여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심급에서는 결정적인 것이고, 유일하게 이성적인 이해로 이끌어주면서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엥겔스가 브레슬라우의 보르기우스에게, 90면)
5. 긍정(affirmation)과 다양성(multiplicity)의 철학
어떻게 대상이 인간에게 자신의 것이 되느냐는 대상의 본성과 그 본성에 상응하는 본질력의 본성에 달려 있다. 왜냐 하면 이러한 관계의 특정성이 [현실세계] 긍정의 특수하고도 현실적인 방식을 이루기 때문이다. 한 대상은 눈에 비춰질 때와 귀에 들릴 때가 다르며, 눈의 대상은 귀의 대상과 다르다. 모든 본질력 각각의 특유성은 바로 그것의 특유한 [본질적] 존재(Wesen)이며 따라서 그것의 특유한 대상화 방식, 그 대상적-현실적인 생동하는 존재의 특유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유 속에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온갖 감각들에 있어서 인간은 대상적 세계내에서 긍정된다. (?경제철학수고?, 114-5면)
6. 인간(주체)과 자연--생태학적 문제의식의 단초
자연은 인간의 비유기적인 몸이다. 말하자면 자연 그 자체가 인간의 실체는 아니라는 한에서 자연은 자연이다. 인간이 자연에 의거해 살아간다는 말은 자연이 그의 몸이며 또 인간은 죽지 않기 위하여 이 몸과 함께하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존속해가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의 육체적인 생활과 정신적인 생활이 자연과 연관을 맺고 있다는 의미 이외의 다른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경제철학수고?, 111면)
그러나 인간의 자연정복에 지나치게 자만하지는 말자. 그러한 정복은 각각 우리에게 복수를 하기 때문이다. 실상 그들 각각은 처음에는 우리가 믿었던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처음의 결과를 너무도 자주 무효로 돌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아주 다른 결과를 낳는다.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소아시아 등지에서 경작할 땅을 얻기 위하여 숲을 태웠던 사람들은 숲을 태우는 과정에서 습기를 모으고 보존하는 중심을 함께 태우게 됨으로써 이 나라들이 현재 처한 황폐한 상태의 토대를 마련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알프스 산맥의 이태리인들이 산의 북쪽 사면에는 그렇게 애지중지 보존되고 있는 소나무 숲을 남쪽 사면에서는 다 잘라서 써버렸을 때 그들은 그럼으로써 그들 지역의 낙농업의 뿌리를 자르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또한 그들은 그럼으로써 일년 중 상당한 기간을 산의 샘이 마르게 하여 결과적으로 우기에 급류가 평원위에 쏟아부어지게 하리라고는 더욱더 생각하지 못하였다. 유럽에 감자를 퍼뜨린 사람들은 동시에 연주창을 퍼뜨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매번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민족을 지배하는 정복자처럼 자연의 밖에 서있는 어떤 존재로서 자연을 지배하지는 결코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며, 피와 살과 뇌를 지닌 우리는 자연에 속하며 자연 가운데 존재함을 상기하게 되고,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배란 다른 존재에 비해서 자연의 법칙을 알고 적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음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자연의 법칙을 더욱 많이 아는 일]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인간은 자연과의 통일성을 더욱더 느낄 뿐만 아니라 인식하게도 되며, 그리하여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 영혼과 육체의 모순이라는 엉터리없는 반자연적인 생각--이러한 생각은 고대의 몰락 이후에 유럽에서 발생하였으며 기독교에서 완성된 형태에 달하였다--은 더욱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자연 변증법? 중 ?원숭이에서 인간으로?에서) Friedrich Engels, Dialectics of Nature, Trans. and Ed. Clemens Dutt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0), 291-3면.
II. 문학예술론 개요
1. 사회?경제적 발전과 예술발전의 불균등성
2. 자본주의의 소외된 삶과 창조적 삶
이렇듯, 아무리 협소한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규정 속에서일지라도 인간이 항상 생산의 목적으로 나타나는 옛 견해는, 생산을 인간의 목적으로 삼고 부를 생산의 목적으로 삼는 현대 세계와 비교할 때 매우 고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 협소한 부르주아적 껍데기를 벗겨내고 보면 부란 개인의 욕구, 능력, 향유, 생산력 등의 보편성 즉 보편적 교환 속에서 창출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며, 인간 자신의 본성이 가진 힘들 뿐만 아니라 자연력들 즉 이른바 자연이라고 부른ㄴ 것이 갖는 힘들에 대한 통제가 한껏 발전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부란 이전으 역사적 발전이라는 것말고는 선결조건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의 창조력이 절대적으로 펼쳐진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이 발전의 총체--즉 이미 주어진 잣대로 재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진 힘들의 발전 그 자체--를 자기목적으로 만들며 이를 통하여 인간은 어떤 특정의 성격으로 자신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총체를 생산하며 그가 이미 도달한 그 무엇에 머물려 하지 않고 절대적 생성의 움직임 속에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 경제에서는---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시기에서는--인간의 내적 잠재력의 이러한 완전한 펼쳐짐이 그의 총체적 공동화(空洞化)로 바뀐다. 그의 보편적 대상화는 그의 총체적 소외로 되며 모든 규정된 일면적 목표들의 파괴는 [인간적] 자기목적을 전적으로 외적인 목적을 위해 희생시킨다. 이것이 한편으로 고대의 어린애같은 세계가 우월한 어떤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그룬트릿세?에서) Karl Marx & Friedrich Engels, Collected Works vol. 28, Trans. Ernest Wangermann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6), 411-2면.
3. 반영의 문제와 언어관
‘정신은 처음부터 물질이라는 “짐을 지는” 저주를 받고 있다. 여기서 물질은 공기와 소리의 흥분된 층이라는 형태, 즉 언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언어는 의식만큼 오래 되었다. 언어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존재하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의식이다. 그리고 오직 이로 인하여 나에 대해서도 존재한다. 의식처럼 언어도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의 욕구, 교류의 필요로부터만 생긴다. 어떤 관계가 존재할 때 그 관계는 나에 대해서 존재한다. 동물은 자신을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지우지” 않는다. 동물은 아예 “관계”란 것을 지울 줄을 모른다. 동물들에게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란 관계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식은 처음부터 사회적이며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회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Karl Marx & Frederick Engels, German Ideology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6), 49-50면.
철학자들이 맞닥뜨리는 가장 어려운 과제들 중의 하나는 사유의 세계로부터 실제 세계로 내려오는 일이다. 언어는 사유의 직접적 현실성이다. 철학자들이 사유에 독립적 현실을 부여해 온 만큼 그들은 언어에 독립적 영역을 부여하게 마련이었다. 이것이 철학적 언어의 비밀인데, 여기서는 사유가 자신의 내용을 단어의 형태로 갖고 있다. 사유의 세계로부터 실질적 세계로 내려오는 문제는 언어로부터 실제 삶으로 내려오는 문제로 바뀐다.
우리는 개인적 상황들이나 개인들의 관계들이 자립적 실존을 얻는 결과로 사유와 관념들이 자립적 실존을 얻음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분업의 결과임을...보여 주었다. 철학자들은 철학언어가 실제 세계의 왜곡된 언어라는 점을 인식하고 사유와 언어가 그 자체로 자립적인 영역을 형성하지 않으며 단지 실제 삶의 발현이라는 점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 철학언어를 일상적인 언어(이로부터 추상된 것이 철학언어다)로 분해해보기만 하면 된다. 같은 책, 472-3면.
4. 인간해방의 필수적 계기로서의 감각의 해방
사적 소유는 우리를 너무 우둔하고 일면적으로 만들어서 어떤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할 때에만--그것이 우리에 대하여 자본으로서 존재하거나 아니면 직접적으로 소유되고 먹혀지고 마셔지고 입혀지고 거주될 때 등등에만 즉 우리에 의해서 사용될 때에만 우리의 것이 된다. (...)
따라서 모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감각들 대신에 이 모든 감각들의 순전한 소외인 소유감각이 들어섰다. 인간은 자신의 내적 부를 외부 세계에 산출하기 위해서 이러한 절대적 빈곤의 상태로 전락하여야 했던 것이다. (?경제철학수고?, 113면)
사적 소유의 지양이란 따라서 모든 인간적 감각과 속성들의 완전한 해방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은 바로 다음을 통해서 즉 이 감각들과 속성들이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 인간적으로 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눈은 그 대상이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대상, 인간을 위하여 인간으로부터 생기는 대상이 됨에 따라 인간적인 눈이 된다. 따라서 감각은 그 실천에서 직접적으로 이론가가 된다. 감각은 사물 자체를 위해서 사물과 관계맺지만, 사물이란 것 자체가 바로 스스로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맺는 객관적인 인간적 관계이며 또한 그 역이다. (저자주: 사물이 인간과 인간적으로 관계맺을 때에만 나는 실천적으로 사물과 인간적으로 관계맺을 수 있다.) 유용함이 인간적인 유용함으로 되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욕구나 향유는 그 이기적인 성격을 잃고 자연은 단순한 유용성을 잃는다. (?경제철학수고?, 114면)
III. 리얼리즘의 문제
1. 전형성과 리얼리즘의 승리
1-1. 엥겔스가 하크니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해당 소설의 몇 가지 측면에 대한 칭찬--비판 받아야 할 점--상황에 있어서의 전형성의 결여--스스로를 돕지 못하는 수동적인 민중이 적절하던 시기는 지났다--이러한 지적이 경향소설을 쓰라는 말은 아님을 역설--저자의 견해와 리얼리즘 간의 괴리 그리고 후자의 승리를 예로 듦--다시 비판을 완화하는 말로 편지를 맺음
1-2. 전형성 일반
‘저의 의견으로는 전형성이란 세부의 진실함 이외에도 전형적 상황에서의 전형적 인물들을 진실하게 재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아마도 전형성에 관한 엥겔스의 두 번째 발언이다. 최초라고 생각되는 것은 바로 엥겔스 자신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성격들은 모두가 하나의 전형이라는 점, 그러나 동시에 특정의 한 개별인간, 노(老) 헤겔의 표현처럼 한 사람의 ‘이 사람’(ein Dieser)이기도 하며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1885년, 민나 카우쯔끼에게 보내는 편지, 161면)
1-3. 전형적 상황
하크니스의 소설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의 골자는 그녀의 소설에는 전형적 상황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엥겔스가 ‘전형적 상황의 결여’라는 어구로 뜻하는 바는 이제는 역사적으로 과거가 되어 버린 노동자계급의 모습(“스스로 도울 능력도 없고 또 심지어는 스스로 도우려는 노력조차 보여주지 않는 수동적인 대중”)을 그리는 데 머물러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노동자계급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1) 능동성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며 2) 스스로를 돕는 노동자계급을 그리는 것이 리얼리즘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
주위의 억압적 환경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항거,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으려는 그들의 때로는 발작적이고 때로는 반의식적이며 때로는 의식적인 시도들은 엄연한 역사의 일부이며, 따라서 리얼리즘의 영역에서도 자기 자리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64면)
1-4. 리얼리즘의 승리
엥겔스는 자기 계급의 해방을 위한 싸움에 나선 노동자 그리고 역사의 엄연한 일부인 그들의 그러한 시도들을 그려달라는 요청이 작가의 정치적 입장을 직접적으로 밝히라는 요청으로 오인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자신이 경향소설을 요청하는 것은 아님을 밝히고 또한 ‘저자의 견해가 숨겨져 있을수록 예술작품을 위해서는 더 낫다’는 견해를 밝히며 작가의 정치적 입장이 직접적으로 노출된 부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른 부분이 탁월한 리얼리즘적 업적을 남길 수 있는 예로서 발자끄의 소설을 든다.
따라서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명제의 언급은 엥겔스가 하크니스에게 아쉬웠던 것으로 지적했던 측면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예컨대 하크니스는 발자끄에게 있는 어떤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다시 말하자면 엥겔스가 하크니스에게서 아쉬워한 것은 1888년 당대에서 보았을 때 역사의 아주 중요한 현재에 속하는 것에 대한 인식과 소설화이며(이런 의미에서 내용의 측면에 속한다), 발자끄를 통하여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역사의 특정 단계와 관계 없이 리얼리즘 전반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이런 의미에서 형식의 측면이다). (* 부록 참조)
2. 지킹엔 논쟁과 셰익스피어화
2-1. 라쌀레의 주장
(자신의 희곡인 ?지킹엔?에서) 그 비극의 원천은 영원한 사상 갈등 즉 혁명 이념의 순수성이라 할 것과 그것을 실현하는 데 동원되게 되는 현실적 술수 사이의 갈등에 있다. 지킹엔의 오류는 ‘모든 전환기에 영원하게 반복되는 사상 갈등이라는 데에 근거하고 있고 , 단편적이고 우연적인 성격의 죄과라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필연적이고 영원한 입장으로 화’하는 것이다.
2-2. 맑스의 비판
따라서 당신이 갈등을 ?괴쯔 폰 베어리힝엔?에서 펼쳐지는 것과 같은 갈등으로 단순히 환원시키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당신의 계획은 아니겠지요), 지킹엔과 후텐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 혁명가였기 때문에 (베어리힝엔에 대해서는 결코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1830년의 폴란드의 교육받은 귀족들이 한편으론 자신들을 현대적 이념의 대표로 설정하면서도 사실상으론 반동적인 계급이해를 대표했던 것과 같은 식입니다. 그렇다면 혁명의 귀족적 대표자들이--통일과 자유라는 구호 뒤에는 항상 엣 황권과 ‘주먹의 정의’에 대한 꿈이 도사리고 있거니와--당신의 작품에서처럼 모든 이해들을 흡수해서는 안되며, 농민의 대변자들(특히 이들)과 도시내의 혁명적 요소들의 대변자들이 전적으로 의미있는 적극적인 배경을 이루었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당신은--지금도 종교의 자유 이외에 부르조아적 통일이 여전히 주요 이념인 마당에--가장 현대적인 이념들을 가장 소박한 형태로나마 아주 높은 수준에서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 더 셰익스피어화했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쉴러화한 것, 즉 개인들을 시대정신의 단순한 전달도구로 전락시킨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오류라고 여깁니다. 당신 자신이 어쩌면 마치 당신의 주인공 프란쯔 폰 지킹엔처럼 루터적.기사적 저항을 서민적.뮌쩌적 저항보다 우위에 놓는 외교론적 오류에 빠졌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맑스가 라쌀레에게 보낸 편지, 1859년 4월 19일, 191면)
3. 문학과 현실변혁
3-1. 문학활동의 의미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결코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 자체가 목적이며 작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한 수단이 아니어서 필요한 경우에는 작가가 글쓰기의 실존을 위해 자신의 실존을 희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
생업이 되지 않는 것, 이것이 출판의 첫 번째 자유이다. 출판을 물질적 수단으로 깎아내리는 작가는 이 내적 부자유의 형벌로서 검열이라는 외적 부자유에 처해져 마땅하며, 아니면 오히려 그의 실존이 이미 그의 형벌인 것이다. (?출판의 자유와 신분제의회 의사록의 간행에 관한 논쟁?, 140면)
3-2. 문학과 현실적 문제의 해결.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경향성이란 명시적으로 제시됨이 없이 상황과 사건진행 자체로부터 분출되어야 하는 것이며, 또 시인은 자신이 묘사하는 사회적 갈등들을 풀어갈 장차의 역사적인 해결책을 독자의 손에 쥐어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 그 경우에도 역시 사회주의적 경향소설이 자신의 직분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은, 제 견해에 따르자면 그것 자체가 직접 어떤 해결책을 제공해주지 않고도, 실로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가 노골적으로 당파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그 소설이 현실적인 제반 관계를 충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이 관계들 위에 군림하는 인습적 환상들을 타파하고 부르조아 세계의 낙관론을 뒤흔들어놓아서 현존하는 것의 영원한 타당성에 대한 회의가 불가피하도록 만들 때이지요. (엥겔스가 비인의 민나 카우쯔끼에게, 161-2면)
<부록>
졸고, ?새로운 문학을 위하여?(?작가? 2000년 봄)에서 발췌
지금까지는 문학작품을 외부와의 관계에서 하나의 혈처럼 말하였지만, 실상 하나의 작품을 여러 개의 혈들이 다양하고도 복잡한 경락(經絡)으로 이어진 기운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추어 ‘전형성’의 문제를 새로이 조명해 볼 수 있다. ‘전형성’이란 사회현실에서 폭넓게 작용하는 힘(들)이 어떤 개별자를 통해 집중적이고도 농축된 형태로 제시되는 것을 말한다. 전형적 인물을 좁혀서 말한다면 어떤 사회계층을 대표하는 인물에 해당한다. 논의 편의상, 이른바 ‘리얼리즘’ 소설들에도 이에 해당하지 않으면서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들이 있다는 점만 밝히고, 좁은 의미의 전형성은 여기서 논외로 할 것이다.
그런데 전형들이 작품에서 서로 모이고 연결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작품을 ‘흐름’으로 보는 시각과 ‘구조’로 보는 시각이 대조될 수 있다. 전형성론의 씨앗을 심었다고도 할 수 있는 엥겔스가 지킹엔의 극을 비판적으로 평하면서 셰익스피어에서 보는 바와 같은 “행위의 활력과 충만”을 강조하고 여기에 독일 극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했을 때 그는 작품을 활력과 행위의 ‘흐름’으로 만들도록 권유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엥겔스가 발자끄의 문학적 성취로서 거론한 ‘리얼리즘의 승리’도 이런 방향의 권유를 함축하는 것으로 볼 수있다. 루카치는 ‘리얼리즘의 승리’를 집요할 만큼 '관점'과 연관시킨다. 비록 '사회주의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해당되는 삶의 부분--소재--을 충실하게 그리는 데 방해가 되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배제할 만큼의 ‘관점’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따리의 해석은 이와 다르다. 물론 이들도 발자끄에게 존재하는 장애물--“카톨릭적?전제적 기의(記意)”--을 지적하는 것은 루카치가 현실의 객관적 반영에 방해가 되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지적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러한 장애물을 극복한 원인이나 결과를 루카치가 ‘객관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들뢰즈와 가따리는 ‘흐름’의 관점에서 본다. 이들이 말하는 ‘흐름’은 예의 장애물들을 쪼개고 혁명적 시야를 양성하는 움직임인데, 발자끄가 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이 ‘흐름’을 추적하고 ‘흐름’이 순환되도록 했는지를 엥겔스가 입증했다는 것이다.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132-3면 참조.
이에 비해서 루카치가 말하는 ‘전형들의 위계구조’는 작품을 ‘구조’로 보는 데 가깝다. 작품을 ‘구조’로 본다는 것은 작품의 특정 부분이 전체를 대표(표상)하는 것으로 보거나 마치 국가가 한 민족 혹은 국민의 일부이면서도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족은 국가에 의하여 ‘재영토화’되면 하나의 구조가 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민족은 집단적 삶의 흐름이 된다.
, 좀더 세련된 형태의 경우에는 직접적으로는 부재하는 어떤 것이 전체를 대표(표상)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요컨대 작품에 어떤 완결된 통일성 혹은 총체성이 부과되는 것이다. 알뛰세의 ‘구조적 총체성’(structural totality)이 이를 나타내는 대표적 개념이다.
‘전형들의 위계구조’에서 각 전형들은 작품의 ‘총체’ 속에서 부여받은 크고 작은 중요성을 가지고 ‘비례관계’의 형태로 배열된다. ‘비례관계’는 완결된 총체를 전제한다. 그렇지 않다면 ‘비례관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로렌스의 “온전한 자아”나 카프카의 ‘미시적 욕망’은 이 ‘비례관계’로 포착되지 않기에 루카치의 시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카치의 ‘전형들의 위계구조’가 가진 미덕을 보는 데 인색하지는 말아야겠다. 문학(비평)의 시장에는 별의별 희한한 종류의 ‘구조’들이 다 나와있기 때문이다.
<2주>: 레닌의 똘스또이론
?러시아혁명의 거울로서의 똘스또이론?(1908년)
?L. N. 똘스또이?(1910년 10월 16일)
?L. N. 똘스또이와 현대 노동운동?(1910년 10월 28일)
?똘스또이와 노동자의 투쟁?(1910년 12월 18일)
?레오 똘스또이와 그의 시대?(1911년 1월 22일)
I ‘똘스또이주의’와 그 모순, 예술가로서의 레오와 사상가로서의 레오
-- 여기서 레닌이 다루는 대상은 작품에 구현된 바의 똘스또이(및 그의 견해, 사상 등)뿐만이 아니다. 레닌은 똘스또이의 견해의 총체를 다루고 있으며 그 총체의 내적 모순이 (농민적 부르주아 혁명인) 러시아의 혁명(1905년)의 특성을 표현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
똘스또이는 러시아에 부르주아 혁명이 다가오고 있을 시점에서 수백만의 러시아 농민들 사이에서 생겨난 사상들과 감정들의 대변자로서 위대하다. 그는 그의 견해들의 총체가 그 전체로 보았을 때에 농민적 부르주아 혁명인 우리의 혁명의 특수한 측면들을 표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32면)
예술가 똘스또이의 작품들에 그리고 사상가 똘스또이의 견해들에 반영된 것은 옛 러시아를 떠받쳤던 모든 낡은 “기둥들”이 이렇게 급속하고, 고통스럽고, 철저하게 파괴되는 과정이었다.(59면)
참고: ‘농민적 부르주아 혁명’에 대한 레닌의 설명
그것은 그 직접적 목적이 짜르의 독재정치, 짜르의 군주정치를 전복하고 지주제도를 폐지하는 것이지,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전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부르주아 혁명이다. (53면)
-- 자유주의자들은 ‘똘스또이주의’를 구성하는 것 중에서 정치를 거부하고 도덕을 설파하는 부분만을 앞에 내세운다.
◆
이는[자유주의자들이 똘스또이가 “위대한 양심”임을 앞에 내세우는 것] 그의 예지가 아니라 그의 편견을 표현하는 측면 즉, 그에게 있어서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속하는 부분을, 모든 계급지배에 대한 그의 항거가 아니라 정치의 거부와 도덕적 자기완성의 설교라는 측면을 앞에 내세우는 것이 아닌가? (56면)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은 레오 똘스또이의 문학작품들을 연구함으로써 적들을 더 잘 아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전(全)민중은 그의 교리를 검토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약점들 즉 해방의 대의를 끝까지 밀고 가게 허용하지를 않았던 약점들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63면)
똘스또이주의의 진정한 역사적 내용은 동양적 질서, 아시아적 질서의 이데올로기이다. (66면)
II. 똘스또이와 사회주의, 과거와 현재
-- 레닌은 똘스또이의 내적 모순을 이론에 있어서 우위에 있는 현재의 입장에서 그 결함을 지적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는 똘스또이가 당대에 최고로 나아갔던 측면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
그리고 똘스또이의 견해의 모순은 오늘날의 노동운동과 오늘날의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평가되어서는 안되며 (물론 이러한 평가가 필요하긴 하지만 충분하진 않다) 진전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항거, 토지를 박탈당한 대중들의 몰락에 대한 항거--가부장적인 러시아의 농촌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러한 항거의 입장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32면)
똘스또이가 제기하였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문제들..(.56면)
이것이 [똘스또이의 모순이 농노해방 이후, 혁명 이전의 시기의 반영이라는 것] 똘스또이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의 관점에서만 가능한 이유이다. (55면)
그러나 그가 남긴 유산 ① 국가, 교회, 사유재산에 대한 비판 ② 자본주의 비판
은 과거의 것이 되지 않고 미래의 것이 된 것을 포함한다. 이 유산은 러시아의 노동자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져서 새로이 가공될 것이다.(56면)
똘스또이의 교리는 분명 유토피아적이며 그 내용은 말의 가장 엄밀하고도 깊은 의미에 있어서 반동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교리가 사회주의적이 아니라거나 진전한 계급을 계몽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 비판적 요소들을 담지 않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러가지의 사회주의가 있다. [부르주아지를 대체할 계급의 사회주의와 부르주아지에 의해 대체되는 계급의 사회주의] 봉건적 사회주의는 후자의 유형의 사회주의다. 67면)
III. 똘스또이의 예술성, 독창성 등
-- 레닌은 똘스또이 문학의 높은 예술성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추호의 의심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똘스또이의 문제를 그 예술성의 문제라든지 하는 식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예술성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 예술성의 본질이 어느 측면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가 단순한 문학평론가로서 똘스또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한 이는 당연하다 할 것인데, 레닌이 마치 소설가로서의 똘스또이를 문제삼은 것처럼 잘못 이해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
러시아의 삶을 견줄 바 없이 훌륭하게 그려냈을 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에 일급의 기여를 한 천재이며 위대한 예술가...(31면)
똘스또이는...그의 작품들이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것에 속할 정도의 예술적 높이에 오르는 데에 성공했다. (52면)
예술가 똘스또이는 러시아에조차도 극히 소수에게만 알려져 있다. 그의 위대한 작품들이 진정으로 모두의 소유물이 되려면, 수백만 대중을 무지와 몽매함과 천한 일과 가난에 빠지게 하는 사회체제에 항거하는 투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사회주의혁명이 성취되어야 한다. (52면)
똘스또이는 대중들이 항상 감상하고 읽을 예술작품들을 생산하였을 뿐만 아니라...당대의 체제에 의하여 억압당하는 다수 대중의 분위기를 대단히 힘있게 전달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들의 처지를 묘사하고 항거와 분노라는 그들의 자발적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53면)
똘스또이의 비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는 유럽이나 러시아의 문학에서 인민의 벗들이 오래 전에 말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비판의 독특함과 그 역사적 의의는, 그것이 이 시기의 러시아 즉 농업적, 농민적 러시아의 방대한 인민대중의 견해들에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를 천재적 예술가만이 가진 힘으로 표출하였다는 점에 있다....그의 견해는 가부장적이고 순진한 농민의 견해이다....(60면)
-- 마지막 글에서 똘스또이의 작중인물에 대한 유일한 논의가 나온다. 이 작중인물은 러시아의 역사적 전환기(1861-1905)의 성격을 아주 생생하게 표현한 것으로 거론된다.
<모더니즘의 한 유파인 미래주의에 대한 레닌의 견해>
1. 루나찰스키에게 보낸 편지
마야꼬프스키의 ?1억5천만?을 5천부나 출판하는 데 찬성한 것이 부끄럽지도 않소?
쓰레기, 우둔함, 이중으로 물든 우둔함 및 허식.
내 견해로는 그러한 것은 도서관과 기타 사람들 용으로 10개 중 하나만 출판해야 할 것이요, 최대 1천5백부까지만 출판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루나찰스키를 미래주의를 찬성한 죄로 매질을 해야 할 것이요.
레닌
2. 포크로프스키에게 보낸 편지
포크로프스키 동지! 나는 미래주의와의 싸움 등에서 동지가 도와주기를 되풀이해서 간청하는 바이요.
(1) 루나찰스키는 협의회에서 (슬프다!) 마야코프스키의 ?1억5천만?의 출판을 통과시켰오.
이것을 멈출 수는 없겠오. 멈춰져야만 하오. 이 미래주의자들은 세 번 이상은 출판되어서는 안되고, 최대 1천5백부까지만 출판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합시다.
(2) 정보를 들어보니 루나찰스키는 미래주의자를 직접?간접적으로 돕기 위해서 “리얼리스트”라고 알려진 키셀리스를 다시 한번 쥐어짜낸 모양이오.
믿을만한 반(反)미래주의자를 발견할 수는 없소?
레닌
<레닌이 보는 프롤레타리아 문화>
--루나찰스키가 자신과 합의한 바와 정반대되는 내용의 연설을 한 데 대하여 레닌은 Proletcult의 결의안을 작성하여 중앙위원회에서 통과시킬 것을 요구한다. 결의안의 핵심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쏘비에트 공화국의 모든 교육--정치적 교육 일반과 예술 교육--은 프롤레타리아가 벌이는 계급투쟁의 정신으로 고취되어 있어야 한다.
2)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그 전위인 공산당 및 많은 조직들을 통하여 공공교육에서 선봉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3) 근대사의 경험과 ?공산주의 선언? 이후의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맑스주의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이해, 관점, 문화의 유일하게 진실한 표현임을 입증하였다.
4) 맑스주의가 역사적 의의를 얻은 것은 부르주아 시대의 가장 귀중한 성과들을 거부하지 않고, 2000년 이상의 인간 사유와 문화의 발전에 들어있는 가치있는 모든 것을 소화하여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천적 경험으로 고취된, 이러한 토대에서 이러한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작업만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문화의 발전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5)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서 All Russian Proletcult Congress는 남다르게 특별한 종류의 문화를 창안하고 자족적인 조직 속에 고립된 채 남아있으며, Proletcult와 인민교육위원회의 활동분야를 구분하려하거나 인민교육위원회 하에 수립된 단체들에 Proletkult의 ‘자율성’을 세우려 하는 모든 시도를 이론적으로 불건전하고 실천적으로 해로운 것으로서 단호히 거부한다.
<백낙청 선생의 똘스또이론>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 벽사 고희논문집 )
◆
?전쟁과 평화?나 ?안나 까레니나?의 문학적 위대성을 전제한 논의임은 물론인데, 그렇다고는 해도 후기의 사상에 치중한 발언은 똘스또이 문학 본연의 모습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 실제로 레닌의 똘스또이론이 그대로 적중하는 소설은 ?부활?이며 ?안나 까레니나?는 좀 다른 차원이 아닐지, 이 점 또한 작품을 놓고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다. (325면)
더욱 중요한 점은, 맑스주의 역사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라는 일대 창안을 해낸 레닌조차도 정작 집권한 후에는 사회주의를 러시아 농촌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전시 공산주의’와 ‘신경제정책’ 등의 다양한 실험을 해보는 데서 그쳤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레빈 자신이나 가령 사회혁명당이 사회주의자들보다 더 나은 해결책을 가졌다는 주장이 아닌 한--물론 ?안나 까레니나?는 그런 주장과 무관하다 --이 대목의 문제제기 역시 아무도 ‘농민적 한계’라는 말로 청산할 수 없을 것이다. (329면)
<들뢰즈?가따리의 레닌론--?천 개의 고원? 중에서>
--‘어용론(pragmatics)은 언어의 정치학’이다라는 주제로 레닌의 중요성을 다룬다.
우리는 다른 조건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예[언어적 언표를 통하여 현실을 바꾸는 예--정리자]로서, 레닌의 “슬로건에 관하여”(1917)라는 텍스트에 기반을 하여 쏘비에트 러시아에서의 레닌적 유형의 언표의 형성을 들어 볼 수 있다. 이 텍스트는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집단(현실적 몸체)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 생기기 이전에 대중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언표의 아쌍블라주로서 도출해낸 비물질적 변형을 구성한다. 이는 새로운 유형의 계급을 “창안해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제1 인터내셔널로부터 나온 천재적인 솜씨였다.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결별을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하면서 레닌은 또 하나의 비물질적 변형을 창안 혹은 포고하였는데,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부터 전위를 언표의 아쌍블라주로서 도출하였으며, 관료체제로 전락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당”에 귀속되는 것이었다. 이는 일종의 내기요 대담한 행위인가? 레닌은 “모든 권력을 쏘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혁명이 평화롭게 진행되는 기간인 2월 27일에서 7월 4일까지만 유효하고 전쟁시에는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하였다. 평화에서 전쟁으로의 이행은 대중으로부터 지도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로의 전환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로부터 지도적 전위로의 전환을 함축하였다. 7월 4일에 정확히 쏘비에트 권력은 종료되었다. 모든 외적 상황들이 원인으로 제시될 수 있다. 레닌으로 하여금 핀랜드로 도망가게 한 봉기뿐만 아니라 전쟁 등의. 그러나 비물질적 변형이, 그것이 해당되는 조직 즉 <당> 자체의 성립 이전인 7월 4일에 언표되었다는 사실은 남아있다. “모든 개별 슬로건은 확연한 정치적 상황의 특수한 측면들의 총체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만일 이 특수한 측면들이 정치에 속한 것이지 언어학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반대가 나온다면, 정치가 얼마나 철저하게 언어를 안으로부터 작동하는지, 그리하여 어휘뿐만 아니라 구조 및 모든 어구요소들로 하여금 명령어가 변함에 따라 변하게 만드는지를 말해야 할 것이다. 일정 유형의 언표는 그 화용론적 함축의 기능으로서만, 바꾸어 말하면 함축적 전제들, 내재적 행동들 혹은--언표에 의하여 표현되고, 몸들(bodies, [단자들, 개별자들-정리자])의 새로운 배열을 도입하는-- 비물질적 변형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평가될 수 있다. 진정한 직관은 문법성의 판단이 아니라 표현의 내적 변수들을 상황들의 집합과의 관계 속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83)
<3주> 루카치의 미학이론
1. 일반적 개관
루카치는 그 이전의 진보적 문학론들의 성과를 집약하여 리얼리즘론을 최초로 체계화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대표적이다. 초기의 몇몇 저작을 제외하면 그의 문학영역에서의 저작은 리얼리즘에 대한 논의가 그 핵심을 이룬다. 후기에 전체 예술을 포괄하는 미학의 저술로 관심을 넓히기는 하지만 그 핵심은 리얼리즘론에서부터 그대로 연장된다.
루카치가 가진 대표성은 다른 맥락에서도 찾을 수 있다. 데리다, 푸코, 들뢰즈?가따리 등에 의한 새로운 사고의 모색은 각각 독특하면서도 반(反)헤겔주의라는 면에서 공통성을 띤다. 헤겔주의는 나라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맑스와 엥겔스의 시대부터 20세기 전·중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진보적 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철학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사고방식이 헤겔식 사고방식과의 단절을 의도한 것은 철학적 맥락에서는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루카치는 문학론 바깥에서도 헤겔주의자로 분류되지만, 그의 문학론의 핵심범주인 전형성이 결국 특수성이라는 헤겔의 범주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시기를 대표하는 문학이론가이기도 하다. (후자의 대표성을 놓고 볼 때 그의 문학론의 극복은 이 특수성 범주의 극복--성과를 보존한 형태의 극복--을 거치기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이 헤겔과의 연관만을 갖지는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은 문학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견해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중간에 레닌의 똘스또이론이 있다. 이들의 견해에는 나중에 루카치에게서 체계화되는 핵심적 요소들이 단초적인 형태로 담겨있다. 단순화의 위험은 있지만, 이 세 사람의 통찰을 헤겔의 범주에 기반하여 체계화한 것이 바로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이라고 할 수 있다.
2. 특수성/전형성
루카치는 현실을 구성하는 세 범주인 보편성(Allgemeinheit), 특수성(Besonderheit), 개별성(Einzelheit) 중에서 과학이 보편성을 중심으로 하는 반면에 문학(예술)은 특수성을 그 특유의 범주로 삼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방대한 후기 저작인 ?미의 고유성?(Die Eigenart des Asthetischen)은 다름 아닌 예술의 고유성을 밝히는 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실상 루카치가 특수성을 예술의 중심 범주로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작품이 그 부분들 각각의 개별성 그리고 그 부분들이 이루는 전체의 고유성 혹은 일회성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일반적인 진실을 제시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예술을 과학(혹은 철학)과는 전혀 다른 아주 특수한 종류의 일반화 형식이라고 한다.
예술의 중심범주인 ‘특수성의 구체적 예술적 체현’이 바로 전형성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전형성은 사회현실에서 폭넓게 작용하는 힘(들)이 어떤 개별자를 통해 집중적이고도 농축된 형태로 제시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개별적 인물이나 현상, 사건들과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단순히 개별성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보존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선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루카치는 보편성과 개별성이라는 양극단을 매개하는 범주인 특수성을 전형성의 철학적 토대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전형성 범주는 작품분석의 도구로서보다는 분석의 결과로서 리얼리즘 문학을 변별해내는 기준으로 기능하는 측면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즉 한편으로는 개별성에만 집착하여 개별적인 사실들의 나열에 몰두하는 문학(자연주의)과 구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성에만 집착하여 개별자들의 등장보다는 추상적인 사상의 전달에만 치우친 문학과 구별되는 것이 바로 리얼리즘 문학인 것이다.
루카치는 전형성의 토대인 특수성을 보편성과 개별성 사이의 어떤 고정된 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펼쳐진 어떤 활동공간이나 장(場)으로 본다.
양극단(보편성과 개별성)은 그 사이가 더 멀어질도록 움직일 수는 있지만 특정의 순간에는 점(点)임에는 변함이 없다. 반면에 중심을 이루는 특수자는 점과 점 사이에 펼쳐져 있는 것으로서 활동공간이며 장(場)이다. (?미적인 것의 범주인 특수성에 대하여?에서)
예술작품에서는 전체 작품을 조직하는 중심점으로서 이 활동공간 내에서 어떤 지점을 선택해야 하는데, 이 중심점에 대해서는 미리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어떤 경우에는 보편성에 더 가깝게 정해질 수도 있고(사회풍자적 희화형의 경우), 또 어떤 경우에는 개별성에 더 가깝게 정해질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미리 정해진 것이 없다는 측면이 바로 예술의 다양성을 근거짓는다고 한다.
루카치는 어떤 시대, 어떤 계급의 전형적 속성을 단 하나의 전형으로 수렴하는 것은 예술적 반영의 속성에 반대된다고 말한다. 그 속성은 여러 전형들의 집합(전형군)을 통하여 표현된다. 루카치가 말하는 전형군은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유사하거나 혹은 절대적이거나 상대적으로 반대되는 젼형들이 함께 모여 ‘전형들의 위계구조’를 이루며, 이들의 역동적인 상호관계가 작품창작의 토대를 이룬다고 한다. 그리고 이 역동적 위계구조는 현실반영의 측면에서는 인류의 특정 발전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3. 총체성
일반적인 철학 범주로서의 총체성은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와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범주들 중의 하나이다. 특히 탈구조주의적 사고가 유행적으로 확대됨과 함께 총체성은 형이상학적 사고의 대표적 범주로서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알뛰세같은 이는 총체성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하나만 남기고 다른 것은 떨구어냄으로써 그 범주가 가진 합리적 핵심을 살리고자 하였다. 알뛰세는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도 떨구어낼 것들 중의 하나인 헤겔의 ‘표현적 총체성’(expressive totality)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다른 한편 제임슨은 알뛰세의 총체성 개념의 기본 취지를 받아들이면서도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이 표현적 총체성의 한계에 갇히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문학작품에 적용되는 총체성 개념은 일반적 철학 범주로서의 총체성 개념과 반드시 같지는 않다. 루카치가 문학작품에 적용하는 총체성 개념은 어찌보면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일단 양적인 거대함을 말하는 외연적 총체성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그것이 재현하는 삶의 영역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모든 중요한 요인들을 정확하고도 적절한 비례에 따라 반영해야 한다. 예술작품은 이러한 삶의 영역이 안으로부터도 밖으로부터도 이해가능하고 추체험가능하도록 반영해야 하며, 그 영역이 삶의 총체로 나타나도록 반영해야 한다. 이는 모든 예술작품이 삶의 객체적이고도 외연적인 총체를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현실의 외연적 총체란 가능한 그 어떤 예술적 창조의 범위도 뛰어 넘게 마련이다. 현실의 [외연적] 총체는 과학의 무한한 과정을 통한 점진적인 접근을 통해서만 지적으로 모사될 수 있다. 예술작품의 총체성은 오히려 내포적이다. 즉 그려지는 삶의 부분에 객관적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며 그 현존과 움직임을 규정하고 그 특수한 지속성과 총 삶의 과정 속에서의 위치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자기충족적이고 자립적으로 정렬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장 짧은 노래도 가장 거대한 서사시만큼이나 내포적 총체성에 해당한다. (예술과 객관적 진리?에서)
이러한 총체성이란 결국은 전형성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앞에서 언급된 ‘전형들의 위계구조’에 대한 논의를 루카치는 이렇게 일단락짓는다.
이 자립적이고 잘 정렬된 총체로부터 작품 속에 구체적 특수성의 형상이 생겨난다. 바로 특정의 발전 단계에 대한 예술적으로 일반화된 모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특수성?에서)
여기서 제임슨의 견해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는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을--일반적 철학 범주로서의 것이든 문학비평에 적용되는 것이든--아주 현대적으로 해석한다. 즉 이데올로기적 ‘봉쇄전략들’(strategies of containment)을 벗겨내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면, 비평에서 루카치가 사용하는 “총체성” 개념은 서술분석의 도구로 즉시 변형되어 재현대상들에게 형식적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서술틀들 혹은 봉쇄전략들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으로 사용될 수 있다. 실로 루카치가 중기에 낸 리얼리즘에 관한 너무나도 낯익은 글들은--종종 단순히 “반영이론”의 구사로만 읽혀지는데--이런 식으로 다시 읽힐 때, 즉 나중의 모더니즘이 가진 정교한 틀들과 봉쇄전략들이 무슨 이유로든 아직 필요하지 않았던 특권적인 내러티브 사례들(소위 “위대한 리얼리스트들”)에 대한 연구로서 읽힐 때 그 흥미를 되찾게 된다. (?정치적 무의식?에서)
이런 의미에서 제임슨은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을 알뛰세의 ‘부재하는 원인’으로서의 역사 혹은 현실이라는 생각에 합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4. 당파성
루카치가 당파성이라는 말로 뜻하는 것은 비교적 단순하다. 일반적 의미의 당파성이란 예술가가 작품에 형상화된 현실에 대하여 불가피하게 취하게 되는 태도를 말한다. 그는 이 당파성 범주와 관련된 편견들로서 모든 진정한 예술은 무당파적이라는 견해와 당파성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유물이라는 견해를 든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의식적 당파성은 일반적 의미의 당파성의 한 형태라고 한다. 더 나아가 그는 당파성이란 ‘삶의 구체적 문제와 경향에 대한 가능한 한 최고로 구체적인 입장취함’이라 한다. 희극적이냐 비극적이냐, 독자를 고양시키느냐 기죽게 하느냐 등도 입장취함의 양태들이며, 작품의 분위기도 이 입장취함을 표현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당파성이란 작품의 모든 부분에 배어있는 것으로서, 작가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입장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루카치가 엥겔스를 따라서 발자끄의 작품에서 ‘리얼리즘의 승리’를 보았을 때, 진정한 예술적 당파성이란 그 승리한 부분에 담긴 입장을 말하지 발자끄 개인의 정치적 입장을 말하지 않는다.
당파성은 곧 ‘관점’(perspective)의 문제이다. ‘관점’은 객관적으로는 주어진 역사적 과정에서의 주된 움직임을 가리킨다. 주관적으로는 이 움직임의 존재와 작용방식의 파악능력을 나타낸다. 삶에서는 ‘어디로’가 ‘어디서부터’의 결과인 반면에 문학에서는 ‘어디로’가 내용, 선별, 여러 요소의 비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에서 각 요소의 의의를 결정하는 것은 관점(목적지)이라고 한다.
사회주의적 관점 혹은 사회주의적 당파성은 현실의 객관적 반영을 보장하는 것이기에 가장 우수하다는 것이 루카치의 견해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당파성(의 우열)은 결국 다른 범주들--반영의 객관성, 충실성, 전형성--로 설명된다. 그는 미적 반영에 있어서의 당파성의 고유성을 파악하려 할 때 주목해야 할 점으로, 한편으로는 가능한 한 충실한 현실모사를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성과 개별성을 유기적으로 포함하는 특수한 것의 감성적 형상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드는 것이다.
5. 묘사와 서술
루카치의 글 ?서술이냐 묘사냐?("Narrate or Describe?")는 그의 다른 대부분의 글들과 달리 언어사용의 문제와 연관이 있는 통찰들을 담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졸라의 소설들과 같은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적 현실제시 방법인 ‘묘사’(description)가 소설의 주된 방법으로 쓰일 경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리얼리스트들이 사용하는 ‘서술’(narration)이라는 방법의 예술성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묘사’라는 말이 반드시 이렇게 Zola적 의미로 쓰이란 법은 없다. 그래서 본논문에서는 이런 의미로 쓰일 때는 작은 따옴표를 붙여 쓰기로 하고, 평범한 의미로 쓰일 때는 따옴표 없이 쓰기로 한다.
루카치가 지적하는 ‘묘사’의 심각한 문제점은 사물들이나 사실들이 인간의 운명과의 연관이 없이 그 자체로 제시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말경주 장면이 졸라의 ?나나?에서는 관찰자의 관점에서 묘사되고, 톨스토이에서는 참가자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톨스토이는 경마라는 어떤 사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변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경주 자체는 외적인 사건인 동시에 내면의 드라마로 된다.
묘사는 모든 현상과 사태의 의미와 가치를 평준화하며, 심지어는 의미가 역전된 질서가 나오기도 하는 위험을 내포한다고 한다. 루카치가 지적하는 것은 결국 주체와 그 외부 현실이 단절되는 현상이다. 그리하여 ‘묘사’가 나타내는 사이비 객관성(순차적으로 배열되는 사물화된 객체들)에는 사이비 주관성(순차적으로 배열되는 주관적 인상들)이 상응한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묘사’ 방법은 현실에 대하여 관찰자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보며, 이러한 관찰자적인 태도는 또한 유럽의 자본주의가 안정화되는 1848년 이후의 단계에 상응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6. 루카치의 언어관
언어라는 것을 이러한 특수한 관점에서 상세히 분석할 때 아마도 일상적 사고의 특성은 가장 입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언어는 우리가 이미 강조했던 특성, 즉 그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주체가 직접적으로 관계맺고 있는 복잡한 매개체계라는 특성을 보여준다. 일체의 문장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낱말까지도 그런 의미에서 직접성을 넘어선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명백한 사실이다. 도끼라든가 돌과 같은 가장 일상적인 낱말조차도 직접적으로는 서로 다른 현상들의 복잡한 종합이요 여러 현상들에 대한 추상적 종합인 것이다. 여기서 직접성과 감각적 지각에 대해 거리를 취하는 매개와 일반화의 오랜 과정이 어떻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가를 언어의 역사는 보여준다. 어떤 미개종족의 언어를 관찰해보면 그들의 언어구조가 우리의 언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직접적인 지각에 가깝고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찌기 헤르더(Herder)는 낱말 속에 대상의 특정한 속성이 정착되어 그것이 “다름 아닌 대상 자체를 구성한다”17)는 사실을 통찰하였다. 구체적 감각성을 띠고 직접 주어진 어떤 특징을 찾아내어 어떤 대상이나 복잡한 관계나 행위 따위의 -- 흔히 상당한 매개를 거친 -- 개념이 한 낱말 속에 정착되기까지는 실로 장구한 세월이 소요된다. 이를테면 비스마르크 군도(가젤 반도)의 원주민들은 ‘검다’라는 낱말도 개념도 알지 못한다. “‘검다’는 말은 이 색깔을 내는 여러가지 대상들의 이름으로 지칭되거나 혹은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비교하여 그것을 검다고 지칭한다.”18) 가령 까마귀, 불타서 숯이 된 개암나무 열매, 늪지대의 검은 찰흙, 불에 그을린 송진, 불에 탄 나뭇잎이나 빈랑나무의 열매 따위가 그러한 비교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검다’는 간단한 낱말보다 직접적인 지각에 훨씬 더 가깝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표현들이 이미 개별적인 지각의 차이를 추상적으로 넘어서서 유추적으로, 즉 직접적인 지각에 대해 거리를 두는 종합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 없다.
말하자면 일상생활의 언어는, 그 언어가 없는 상태에서 표상할 수 있는 것보다 비할 바 없이 더 크고 풍부한 외부세계 및 내면세계를 인간에게 열어준다는 변증법적 모순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언어는 인간 고유의 주변세계와 내면세계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언어는 인간이 내면세계와 외부세계를 편견 없이 수용하는 것을 종종 불가능하게 하거나 적어도 방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증법은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언어의 경직화와 불확실성과 혼란이 동시적으로 진행됨으로 인해 더욱 복잡해진다. 과학적 술어는 언어의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것을 우선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이와 함께 언어의 경직화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과학적 술어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일면적이고 그릇된 판단일 것이다.
그리고 비록 아직 여기서는 미적 반영과 그 표현형식의 특성을 집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문학적 언어가 -- 과학적 언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고유한 방식으로 -- 일상언어의 양극단을 이루는 애매성과 경직성을 극복하려는 경향을 지닌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중적 의미에서의 극복은 과학에서나 문학에서나 강조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미학에서는 ‘능력’이라는 것을 따로 떼어내어 아주 쉽사리 그릇된 ‘분업’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빗나갈 수 있어서, 엄밀성은 과학이 해야 할 몫으로 치부하고 경직성의 지양은 문학이 맡아야 할 소임으로 돌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과학이라는 것은 실재에 호소하여 경직성을 해소시키지 않고서는 일상적 사고 및 언어의 애매성을 결코 극복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문학 역시 언어의 모호한 불명료성을 -- 마찬가지로 현실에 복귀함으로써 -- (문학적인 의미에서) 정확하고 분명하게 형식화하지 않는다면 결코 언어의 경직된 고착성을 유연하게 하는 데 성공할 수 없다. (이상 ?미의 고유성?에서)
7. 논평 (졸고 ?새로운 문학을 위하여?, ?내일을 여는 작가? 200년 봄호 )
루카치가 말하는 리얼리즘문학의 총체성은 이른바 ‘내포적 총체성’(intensive totality)이며 여기에 핵심적인 것은 그려지는 삶의 부분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객관적 규정들의 ‘비례적 연관’이다. 문제는 이 ‘비례’란 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관계의 성립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봉건 사회에서는 모든 개인적인 것은 그 자체로 사회적이었으며, 인간이 봉건국가의 실질적 원리였다. 물론 봉건 사회의 개인은 특수한 봉건적 관계에 묶인 혹은 빈틈없이 밀착된 개인이었기에, 이러한 봉건 사회의 특성을 맑스는 ‘부자유의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어쨌든 이 ‘부자유의 민주주의’에서는 ‘비례’라는 양적 관계는 적용되기 힘들다. 모든 관계가 양적 관계로 환원된 자본주의에서 총체로서의 자본의 몸체가 설정되면 그 경계 내에서의 관계는 저절로 양적 비례 관계의 형태를 띤다. 경제의 영역에서는 양적 비례에 의한 교환이, 그리고 정치의 영역에서는 모든 개인을 그 수적 측면으로 환원하여--1인 1표--일정한 수 이상의 지지의 획득이 ‘합리적’ 권력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우세를 점함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자본주의적 전제, 자본주의적 공리와의 싸움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은 ‘비례’관계와는 다른 차원의 관계에 대한 추구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활동은 인체의 혈(穴)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서로 연결되어 기운(에너지)의 흐름을 형성하는 혈들은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 단순히 부분은 아니지만 비례적 관계로 파악되지 아니하며, 오직 수평적 연결만 존재하지 수직적 위계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혈은 기운이 집중되는 곳이기도 하지만 또한 몸체의 외부로 열려진 곳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와는 다른 것을 추구하는 문학에서도 중요한 것은 자본의 외부로의 열림과 그 열림을 뒷받침하는 기운의 집중이다. 다만 자본의 외부로의 열림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리 주어진 지식도 당연히 없고 미리 주어진 기준도 없다. 그것은 과학적 지식이나 이른바 ‘정보’와는 달리 열림 그대로 독자대중에게 흘러가서 만남의 공간으로 작용할 것이며, 뒤에 비로소 그 산물로 과학적 지식이나 정보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문학작품을 외부와의 관계에서 하나의 혈처럼 말하였지만, 실상 하나의 작품을 여러 개의 혈들이 다양하고도 복잡한 경락(經絡)으로 이어진 기운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추어 ‘전형성’의 문제를 새로이 조명해 볼 수 있다. ‘전형성’이란 사회현실에서 폭넓게 작용하는 힘(들)이 어떤 개별자를 통해 집중적이고도 농축된 형태로 제시되는 것을 말한다. 전형적 인물을 좁혀서 말한다면 어떤 사회계층을 대표하는 인물에 해당한다. 논의 편의상, 이른바 ‘리얼리즘’ 소설들에도 이에 해당하지 않으면서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들이 있다는 점만 밝히고, 좁은 의미의 전형성은 여기서 논외로 할 것이다.
그런데 전형들이 작품에서 서로 모이고 연결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작품을 ‘흐름’으로 보는 시각과 ‘구조’로 보는 시각이 대조될 수 있다. 전형성론의 씨앗을 심었다고도 할 수 있는 엥겔스가 지킹엔의 극을 비판적으로 평하면서 셰익스피어에서 보는 바와 같은 “행위의 활력과 충만”을 강조하고 여기에 독일 극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했을 때 그는 작품을 활력과 행위의 ‘흐름’으로 만들도록 권유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엥겔스가 발자끄의 문학적 성취로서 거론한 ‘리얼리즘의 승리’도 이런 방향의 권유를 함축하는 것으로 볼 수있다. 루카치는 ‘리얼리즘의 승리’를 집요할 만큼 '관점'과 연관시킨다. 비록 '사회주의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해당되는 삶의 부분--소재--을 충실하게 그리는 데 방해가 되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배제할 만큼의 ‘관점’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따리의 해석은 이와 다르다. 물론 이들도 발자끄에게 존재하는 장애물--“카톨릭적?전제적 기의(記意)”--을 지적하는 것은 루카치가 현실의 객관적 반영에 방해가 되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지적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러한 장애물을 극복한 원인이나 결과를 루카치가 ‘객관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들뢰즈와 가따리는 ‘흐름’의 관점에서 본다. 이들이 말하는 ‘흐름’은 예의 장애물들을 쪼개고 혁명적 시야를 양성하는 움직임인데, 발자끄가 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이 ‘흐름’을 추적하고 ‘흐름’이 순환되도록 했는지를 엥겔스가 입증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루카치가 말하는 ‘전형들의 위계구조’는 작품을 ‘구조’로 보는 데 가깝다. 작품을 ‘구조’로 본다는 것은 작품의 특정 부분이 전체를 대표(표상)하는 것으로 보거나, 좀더 세련된 형태의 경우에는 직접적으로는 부재하는 어떤 것이 전체를 대표(표상)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요컨대 작품에 어떤 완결된 통일성 혹은 총체성이 부과되는 것이다. ‘전형들의 위계구조’에서 각 전형들은 작품의 ‘총체’ 속에서 부여받은 크고 작은 중요성을 가지고 ‘비례관계’의 형태로 배열된다. ‘비례관계’는 완결된 총체를 전제한다. 그렇지 않다면 ‘비례관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로렌스의 “온전한 자아”나 카프카의 ‘미시적 욕망’은 이 ‘비례관계’로 포착되지 않기에 루카치의 시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조화’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총체성’ 혹은 ‘통일성’에 대한 거부가 ‘흐름’이 되지 못하고 아무 의미없는 혼란이 되는 경우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모더니즘’으로 분류되었던 작품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으로서, 리얼리즘 옹호자들에 의해서는 ‘파편화’(fragmentation)라는 말로 지칭되었던 현상이다. ‘파편화’를 위한 ‘파편화’보다 더 상투화된 매너리즘이 있는가?. 이보다 더 맹목적인 폭력이 있는가? 물론 실제 작품을 놓고 그것이 ‘흐름’인지 ’파편화‘인지를 가리는 작업이 가장 필수적이고 또 어렵다. ’흐름‘은 늘 유동하는 것이어서 미리 주어진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리 주어진 기준이 없기에, 기성의 기준들에 해박한 ’전위‘나 전문가의 지배에서 벗어난 수평적이며 협동적인 만남이 가능한 것이다.
<4주> 백낙청의 리얼리즘론
1. 초기의 이해
참다운 리얼리즘의 경우 현실에 대한 세밀한 조사는 비유컨대 역사의 싸움에 임한 동지와 동지 사이에 수행되는 일종의 전황점검과 같은 성격을 띤다. 그것은 만인의 동포적 결합을 앞당기는 데 필요불가결한 작업일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동지와 동지간의 사랑을 전달하고 굳히는 기능을 갖는다.” (「文學的인 것과 人間的인 것?, 1973)
2. 민중문학/민족문학론과의 결합 및 심화과정
여기서 [60년대말. 70년대초의 문학논의 과정에서 외국문학에 대하여] 이룩된 진전의 골자는 무엇보다도 19세기 서구의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생겨났고 동시에 실존주의를 포함한 20세기 서양의 넓은 의미로 모더니즘이라 부름직한 흐름들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제삼세계와 민중문학?, 1979)
70년대 중엽이후로 민족 문학론이 점차 여러 논의들의 구심점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에 맞먹는 진보가 외국 문학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이룩되었다...
첫째, 민족문학론이 본격화되기 이전의 리얼리즘은 아직도 서구추종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남아 있었다... 동시에, 구체적인 외국문학 수용의 방법론에서도 민족문학론은 훨씬 큰 신축성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리얼리즘이 끝내 주류를 이루기는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를 포함한 대다수 민족문학론자들의 주장인데...” (「제삼세계와 민중문학?, 1979)
제3세계 문학에서 리얼리즘의 문제는 곧 근대화의 문제와도 직결되며 궁극적으로는 과학과 기술의 의미를 새로이 묻고 그것을 인간의 삶에 뿌리박도록 하는 전인류적인 과제의 일부가 된다.(「제삼세계와 민중문학?, 1979)
서구 리얼리즘문학이 그대로 제3세계 민족문학의 표본이 될 수는 없다.
단순한 기법상의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는 제3세계의 개별적인 문학 및 작가에 의해 얼마든지 신축성있게 취사선택 될 수 있는 것이며, 해당 민족과 민중의 구체적인 상황에 맞는 현실인식과 현실극복의 노력을 작가가 충실히 해내느냐 못해내느냐 만이 성패의 결정적인 척도가 됨을 말해준다. (「제삼세계와 민중문학?, 1979)
오늘의 현실을 각성된 노동자의 눈으로 보는 참다운 민중?민족문학의 작품들이 얼마나 나오느냐가 우리 문학이 새 단계로 비약하느냐 마느냐를 가름하는 열쇠라고 믿기 때문이다. (?민중?민족문학의 새 단계?, 1985)
3.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1990)
◆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의 대량 유입이라는 극심한 도전....그런데 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에 대한 도전이자 리얼리즘론 전체에 대한 도전이요 민족문학론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 민족문학, 리얼리즘, 탈근대
우리의 민족문학론은 당면한 민족적 현실에 대한 ‘정당한 인식과 정당한 실천적 관심’이라는 자신의 ‘리얼리즘적’ 속성을 고수하면서, ‘탈근대’ 또는 ‘탈현대’라 일컬어지는 이 시대의 새로움에 부응하는 또 한번의 이론적 약진을 이룩해야 할 처지이다.
본고의 주제와 직결시켜 말한다면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범람기에 휩쓸리기를 거부하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의 논리에도 비판적으로 대응하는 민족문학론 나름의 리얼리즘을 키워나가겠다는 것이다.
이 싸움의 끝에 다가올, 지혜가 한층 보편화된 세상의 예술은 아마도 ‘리얼리즘’이라는 거추장스럽고 말썽많은 낱말을 더 이상 부릴 이유가 없게 되기 쉽다. 하지만 그러한 해방조차도 리얼리즘운동의 성취를 딛고서나 가능할 것이다.
◆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구별
중요란 문제제기를 담았으면서도 오히려 진지한 모색을 가로막는 효과가 두드러진 개념의 좋은 예가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구별이 아닌가 한다. 이 개념에는 ‘당파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더불어 리얼리즘 예술의 당파적 내용과 그 성취방법 등 그 누구도 회피해서는 안 될 문제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로는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을 회피 또는 제한하는 데 곧잘 이용된 것이 예의 양분법이기도 하다.
◆ 고리끼의 ?어머니?에 대한 턱없는 과대평가
오늘도 국내외의 여러 논자들이 마치 입을 맞춘 듯이 그 작품의 예술적 탁월성을 예찬하는 현상 앞에서는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예컨대 ?안나 까레니나? 같은 리얼리즘 문학의 어김없는 대작보다 바로 리얼리즘으로서 더 높은 차원에 다다랐다는 듯이 말하는 것은 비평안목의 심각한 왜곡과 리얼리즘론 자체의 천박화를 가져올 위험이 크다.
◆ 엥겔스의 리얼리즘론에 대하여
엥겔스는 ‘사실주의 일반’도 아니려니와 당시 졸라 등이 대표한 바 유행사조로서의 사실주의(내지 자연주의)와도 구별되는 리얼리즘(내지 현실주의)을 말했던 것이다. 그 구별의 요체가 바로 ‘세부의 진실성’ 외에도 인물 및 환경의 ‘전형성’이 필요하다는 점이며, 언제나 부분적인 사실일 수밖에 없는 사실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전체를 대표하는 전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졸라에게 없고 발자끄에게는 있는 변증법적 사유가 전제되는 것이다.
실제로 엥겔스의 발자끄론이야말로 일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이 아닌가. 편지를 쓰는 사람도 사회주의자요 받는 사람도 사회주의자며, ?도시의 처녀?는 노동소설이다. 발신인[엥겔스를 말함--강사]은 이 노동소설의 사실성을 높이 사주면서도 다름아닌 노동계급적 당파성의 부족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러한 당파성의 부족이 곧 진정한 리얼리즘의 부족임을 설파하는 것이다.
◆ 당파성
다만 문학에서의 당파성이 무엇보다도 작품의 당파성이라는 사실만은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자들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은, 그러한 당파성을 확보하는 데 맑스?레닌주의적 사상과 실천이 필수조건이자 (일부 논자들의 표현대로) 거의 충분조건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강조가 19세기 위대한 리얼리스트들의 민중성(내지 민중연대성)과 20세기 사회주의 작가들의 좀더 의식적인 당파성의 구별을 흐리는 태도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 양자의 구별을 보되 작품에 구현된 민중성?당파성을 보자는 것이요, 그랬을 때 ‘비판적 리얼리즘/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양분법이 얼마만큼의 실질적 설명력을 가지며 어느정도의 비중이 주어져야 할 개념인가를 묻는 것이지, 의식적인 당파성의 문제나 1917년의 세계사적 의의에 눈감으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루카치에 대한 입장
루카치 미학의 정태적?인식론주의적 편향 (→?작품?실천?진리?)
루카치가 30년대 스딸린 치하의 모스끄바에서부터 소련의 헝가리침공 시절 이후까지 ‘자연주의 비판’ 및 ‘리얼리즘의 승리’론의 형식으로 일관되게 수행해온 관변문학과 교조주의에 대한 투쟁....더구나 작가 개인의 당파성 내지 당성보다 작품의 당파성을 중시하는 ‘리얼리즘의 승리’론의 기본입장은 아직도 거듭 강조할 필요성이 충분하며, 사실 ‘객관성의 당파성’이라는 개념도 그것을 편향되게 해석하여 객관주의?인식주의로 흐를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 ‘과학적 세계관’과 일치하는 당파성임을 자부하는 한 포기할 수 없는 핵심적 개념인 것이다.
[발자끄를 놓고] 다시 말해 발자끄는 기왕의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에서 설정한 ‘비판적 리얼리스트’의 모습과는 현격한 차이가 나지만, 19세기의 진정으로 위대한 리얼리스트들 중에서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개념에 가장 근접하는 일면을 지닌 작가이기도 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냉엄성의 다른 일면이라 할 ‘순진성’의 결여는 곧 민중과 역사에 대한 믿음의 결핍이며, 이에 따르는 미래에 대한 전망의 결여는 그의 리얼리즘 자체를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카치가--또는 다른 누구라도--발자끄를 최고의 리얼리스트이자 위대한 리얼리즘의 전범 그 자체로 설정하는 한, ‘비판적 리얼리즘’을 규범화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과소평가한다는 공격을 면할 길이 없으며, 양자의 무리한 분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가 힘들게 마련이다.
◆ 레닌의 똘스또이론에 대하여
어쨌든 레닌은 똘스또이 문학의 위대성과 한계를 똘스또이의 개인적 재능이나 사상 또는 귀족지주적 신분과의 관련에서 보는 대신 그가 알게모르게 대변한 1861~1905년 기간 러시아 농민계급의 저항과의 관련에서 파악하는 독창적인 똘스또이론을 전개함으로써, 그 스스로 강조하는 당파적 관점이 실제 문학비평에서 생산적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엥겔스의 발자끄론과의 차이]
똘스또이는 발자끄와 같은 의미의 반동적 정견을 가진 것은 아니고 스스로 ‘민중연대’의 원칙을 표방했던 것이며, 다만 그 주된 연대대상이 당대 최고의 세계관을 구현할 수 없는 계급이었기에 똘스또이의 민중성에 이런저런 모순과 한계가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 레닌의 인식이다. 따라서 작품에 의한 작가 개인의 ‘패배’는 발자끄의 경우만큼 현저하지 않은 셈이다.
발자끄론과의 또다른 차이는 엥겔스의 편지가 작품 위주의 논의였던 데 비해 레닌의 똘스또이론은 집필 당시의 좀더 긴박한 문제, 즉 만년의 똘스또이 사상과 그 영향에 대응하는 문제에 치중한 정론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전쟁과 평화?(1865-69)나 ?안나 까레니나?(1875-77)의 문학적 위대성을 전제한 논의임은 물론인데, 그렇다고는 해도 후기의 사상에 치중한 발언은 똘스또이 문학 본연의 모습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 실제로 레닌의 똘스또이론이 그대로 적중하는 소설은 ?부활?(1899)이며 ?안나 까레니나?는 좀 다른 차원이 아닐지, 이 점 또한 작품을 놓고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다.
더욱 중요한 점은, 맑스주의 역사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라는 일대 창안을 해낸 레닌조차도 정작 집권한 후에는 사회주의를 러시아 농촌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전시 공산주의’와 ‘신경제정책’ 등의 다양한 실험을 해보는 데서 그쳤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레빈 자신이나 가령 사회혁명당이 사회주의자들보다 더 나은 해결책을 가졌다는 주장이 아닌 한--물론 ?안나 까레니나?는 그런 주장과 무관하다 --이 대목의 문제제기 역시 아무도 ‘농민적 한계’라는 말로 청산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예술적으로 어떤 결함이 있든 이들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소속되므로 ?안나 까레니나?보다 리얼리즘으로서 한 등급 높다고 말하는 것은 리얼리즘 개념의 부실화이자 똘스또이의 현재성에 대한 배반이며, 이때에 발자끄와 똘스또이를 ‘비판적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동일시하는 것 역시--발자끄의 현재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위해서도--하등 도움이 안되는 일이다. 그리고 발자끄와 똘스또이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은, 후자가 결행한 “자기 계급과의 단절”이 리얼리즘의 좀더 온전한 승리를 위해 갖는 중요성을 상기함과 동시에, 발자끄가 그려낸 프랑스의 고전적 자본주의 사회보다도...똘스또이가 처했던 혁명전 러시아의 여러모로 ‘제3세계적인’ 상황이 오늘의 제3세계에는 물론이요 전지구적 현실에도 더 적실한 바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 ‘세계관’과 ‘방법’에 관하여
이러한 통찰은 우리가 방법에 관한 끊임없는 성찰을 생략할 수 없지만 우리의 목표는 방법을 넘어선 지혜라는 필자의 입장에 부합된달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제까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은 온갖 번쇄한 식별을 통하여 방법이 아닌 그것을 ‘방법’으로 정립하려 할지언정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방법으로 규정했던 그 출발점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짐작컨대 ‘지혜’라는 낱말을 접했더라도 그 ‘비과학성’이 끝내 못미더워서 ‘방법’을 버리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방법개념에 대한 집착은 이른바 과학적 세계관을 보유한 당이 어떻게 해서든 예술의 창작과정과 수용을 지도해야겠다는 집념의 표현에 다름 아닌 듯하다. 미리 주어질 수 없는 막연한 ‘방향방법’이라도 어쨌든 ‘방법’으로 규정되어야만 조직에 의한 ‘과학적’인 지도가 가능해진다. 필자는 바람직한 조직의 바람직한 지도나 과학성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가 모두 지혜의 일부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방법’에 대한 지혜롭지 못한 집착이 있는 곳에서는, 구체적인 방법을 소홀히하고 ‘세계관’을 과대평가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특정 방법을 규범화하는 기왕의 편향들이 거듭거듭 되살아날 위험이 남지 않을까 한다.
세계관이라는 것도 지혜를 위한 방편이지 그 자체가 진리를 담보하지 않는다. 본래 ‘세계관’(Weltanschauung)이라는 낱말이 갖는 잇점은 우리가 ‘세계’의 어느 일부가 아니라 그 전부--다시 말해 우주만물과 생사 유무 일체--를 총체적으로 볼 필요성을 환기해주는 데 있다. 그런데 그럴 필요성을 진지하게 숙고하는 사람은 동시에 그 불가능성을 실감하게 마련이다. 문자 그대로 세계를 본다는 것은 인간 능력 밖이고, 다만 각자 처한 위치에서 눈에 보이는 부분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전체에 대한 최대한의 인식으로 끌어올리는 변증법적 전환이 가능하다면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세계관’의 ‘觀’자 자체가--비록 독일어의 Anschauung이 ‘직관’의 뜻을 갖는다 해도--‘보는’ 기능에 어떤 특권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적절한 것도 아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작품으로 구현된 세계관 이외에 세계관이 달리 없다는 예술에서의 원칙은 실제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사색하며 실천하는 인간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세계관이며, ‘과학적 세계관’으로 정리되어 있는 이념적 내용은--그것이 진정 과학적인 한에서--그러한 세계관 정립의 가장 유리한 길잡이요 동무가 될 뿐이다. ‘과학적 세계관’이 그 이상의 것을 자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의 고전적 정의에 그대로 들어맞는 꼴이다. 실제로 예술론에서 ‘방법’이라는 개념을 고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맑스가 별로 안쓰던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애호하는 데에는, 자신의 입장에만은 ‘이데올로기’라는 표현을 적용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큰 몫을 차지한다고 본다.
<참고>
“모든 방법은 그때그때의 대상을 향하는 이론적?실천적 활동을 위한 일처리규칙들(Verfahrensregeln)의 총체이다.”(?엠엘주의 철학?)
4. 루카치의 미학에 관해서
미리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현실 내지 실체가 작품이라는 별개의 실체 내지 현실 속에 담긴다는 반영론의 기본 전제 (?모더니즘 논의에 덧붙여?)
즉 루카치는 예술과 과학이 그 방법에 있어 대조적이나 크게 보아 동일한 목표를 지녔다고 보며, 예술의 진리는 과학의 진리와 그 구체화 방식이 다르고 부르조아 과학 혹은 철학의 평면적 ‘진리’와는 더구나 판이하지만, 과학에서의 정확성(Richtigkeit, correctness, 바로맞음)과 애당초 차원을 달리하는 개념은 아닌 것이다. ‘현실의 올바른 반영’이라는 표현이 루카치 저서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과학과 예술의 목표를 루카치가 똑같이 ‘정확한’--내지 ‘올바른’(correct)--현실반영에 두기 때문에, 논의를 좀더 진전시킬 경우 오히려 예술의 진리성을 부인하는 데로 기울게 된다. (?작품?실천?진리?)
[로렌스와 루카치를 비교하며]
이것이 결국 루카치가 말하는 예술작품의 ‘특수성’을 저해하는 잘못된 극단주의로 흐르지 않으려면--그리하여 극단적인 주관주의와 인간 자체가 아예 빠져버린 잘못된 객관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되지 않으려면--그 추구하는 바 ‘다른 어떤 율동적 형식’이 루카치적 ‘특수성’은 그것대로 구현하면서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에서 미처 탈피 안된 낡은 인간관?세계관의 일대 전환을 성취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다른 어떤 율동적 형식’과 리얼리즘?)
그러나 루카치의 어법을 빌어 부연한다면, 루카치의 주장대로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결합해서 ‘특수한 것’을 이룬다기보다, 생명이라는 것은 항상 개별적이고 창조적인, 그런 의미에서 루카치적 ‘특수성’을 지닌 개체로서만 존재하며, 예술작품의 ‘특수성’은 이러한 삶의 창조성이 구현되는 하나의 방식이요,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은 모두가 그보다 본원적인 ‘특수한 것’--로렌스의 표현으로는 individual한 것--으로부터 추상된 관념으로나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물론 추상된 관념들 가운데도 그것이 어떻게 추상되었느냐에 따라 한갓 망상에 가까운 것과 보다 과학적인 개념간의 차이가 생긴다.) (?‘다른 어떤 율동적 형식’과 리얼리즘?)
<5주> 리비스(F. R. Leavis)의 문학관
1. 루카치와 리비스
<* 강사 정남영의 박사학위 논문 ?디킨즈의 ?리틀 도리트?와 새로운 리얼리즘론의 가능성?에서 인용문의 영어원문만 제하고 그대로 발췌하였음.>
Lukacs의 Dickens 비평과 견줄 만한 것은 F. R. Leavis의 비평이다. Leavis가 영미 비평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다. Leavis는 아마도 Lukacs를 몰랐던 것 같다. 그러나 전세계의 급진적 성향의 문학이론가들이 Lukacs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면 영미권에서는 싫든 좋든 Leavis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의 큰 특징은 다른 철학적?문학이론적 담론을 작품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Dickens를 비롯하여 그가 영문학의 가장 주된 계열로 보는 문학에서 자신의 고유한 문학론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Shakespeare에서 Blake와 Dickens를 거쳐서 Lawrence로 이어지는 계열을 영문학의 주된 맥으로 본다. Leavis의 문학론에 대한 국내의 연구로는 김영희, ?비평의 객관성과 실천적 지평?(서울: 창작과비평사, 1993), 2장, 3장 참조.
Leavis는 자신의 문학론을 리얼리즘론이라는 이름으로 칭한 적은 없으나 Lukacs의 리얼리즘론의 상당한 부분이 그의 문학론과 겹친다. 양자는 일단 작품을 당대의 역사적 현실과 강하게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Lukacs에게 예컨대 Dickens의 소설은 영국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기의 현실의 반영이며, Leavis에게 Little Dorrit같은 소설은 빅토리아조의 문명에 대한 탐구이다. 다음과 같은 Leavis의 발언의 내용은 Lukacs의 견해와 다를 바 없다.
디킨즈는 위대한 소설가였으며, 소설가이기에 비견할 바 없는 사회사가였다. 우리에게 사회의 역사를 제시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위대한 소설가들이다. 바로 이들의 작품--창조적 작품--속에서 이루어진 것에 비하면 전문적 사회사가들이 서술한 역사들은 공허하며 우리에게 알려 주는 바가 별로 없는 듯하다. Leavis, Nor Shall My Sword (London: Chatto & Windus, 1972), p. 81.
Lukacs의 고유상표처럼 되어 있는 전형성이나 총체성에 대한 인식도--비록 다른 용어로 표현되지만--Leavis에게 아주 중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불필요한 군더더기 세부들에 대한 Leavis의 비판적 태도는 Lukacs의 전형화가 포함하는 순전한 개별성의 지양이라는 측면과 통하면서 동시에 총체성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Leavis가 ‘탈개성화’(impersonalization)이라고 부르는 것도 경험이 제공하는 자료가 갖는 사적(私的) 개별성을 지양한다는 점에서 Lukacs의 전형화와 통한다. 전형성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Dickens의 소설들을 사소설(私小說)의 차원에서 읽는 태도--즉 소설내의 인물, 사건, 사물 등을 실제 현실에서 나타난 것들과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태도--를 원천적으로 배제한다.
작품의 유기적 총체성에 대한 인식을 양자가 공유하고 있음은 더욱 확연하다. 이 점에서 양자는 작품의 유기성보다도 탈유기성을 강조하는 최근의 탈구조주의적·해체론적 문학이론가들과 똑같이 대조된다고 하겠다.
또한 두 비평가는 모두 다른 정신활동의 영역(특히 과학과 철학)에 비하여 문학(예술)이 갖는 고유성을 강조한다. Lukacs는 현실을 구성하는 세 범주인 보편성(Allgemeinheit), 특수성(Besonderheit), 개별성(Einzelheit) 중에서 과학이 보편성을 중심으로 하는 반면에 문학(예술)은 특수성을 그 특유의 범주로 삼는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Lukacs, "Uber die Besonderheit als Kategorie der Asthetik", Georg Lukacs Werke Band 10 (Neuwied und Berlin: Luchterhand, 1969) 참조. 이하 이 글 제목은 "Besonderheit"로 줄임.
그리고 그의 방대한 후기 저작인 Die Eigenart des Asthetischen(?미의 고유성?)은 다름 아닌 예술의 고유성을 밝히는 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두 비평가 모두 어떤 형이상학적이고 자의적인 것을 예술의 고유한 본질로 설정하는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 Lukacs가 예술을 반영형식들 중의 하나로 보는 데는 예술을 자의적 주관성이 아니라 객관성에 입각시키겠다는 뜻이 들어있으며, Leavis 역시 예술을 객관적 현실과 동떨어진 초월적 영역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Leavis는 진정한 문학작품에 발휘되고 있는 사유는 수학적이거나 논리적인 사유로 환원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Leavis, Thought, Words and Creativity (Chatto & Windus: London, 1976) I장의 논의 참조.
그런데 이 유사성들은 곧 차이점들과 잇닿아있다. Leavis는 문학논의에서 어떤 다른 기존의 철학 체계에 의존하는 경우가 없으며 오히려 모든 참된 문학비평가는 곧 반(反)철학자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Lukacs는 친(親)철학주의자로서 앞에서처럼 예술의 고유성을 설명하는 자리에서조차 기본적으로 철학의 범주들에 의존한다. 몇몇 주요한 소설가에 대한 견해에서도 양자는 차이가 난다. Leavis의 Balzac 평가는 Lukacs의 높은 평가와는 달리 매우 인색하며 Lawrence에 대한 평가에 오면 양자의 견해 차이는 확 두드러진다. 앞의 인용문에 바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Leavis는 Dickens와 Lawrence의 친화성을 중요한 것으로 언급한다.
사실 나는 그의 소설들을 읽어오면서 그의 천재성은 로렌스의 천재성과 어떤 본질적인 면에서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다양하게 상호작용하는 삶의 흐름들이 힘차게 흘러가서 어떤 데서는 기운이 강했다가, 다른 데서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무언가 억압적으로 침체된 것이 되기도 하며, 또 다른 곳에서 강력한 새로운 약속으로서 스스로를 재천명하는 모습을 보았다. Leavis, Nor Shall My Sword, pp. 81-2.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Lukacs는 Lawrence를 리얼리즘적 성취와는 대립되는 모더니즘적 환원--삶의 성(性)으로의 환원--의 한 경우로 든다. Lukacs, Realism in Our Time (New York: Harper Torchbooks, 1971), p.74 참조.
Lukacs의 이 판단은 사실적으로도 틀렸지만 Lawrence는 인간에게 가장 우선적인 것은 성적 동기가 아니라 세계를 건설하는 창조적인 동기라고 한다. D. H. Lawrence, Fantasia of the Unconscious and Psychoanalysis and the Unconscious (Penguin Books: Harmondsworth, 1977), pp. 18-9 참조.
이러한 사실판단의 오류가 그의 문학론의 어떤 특성에 뿌리박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의 문학론과 Leavis의 문학론과의 차이는 사소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문학의 고유성의 내용에서도 양자는 차이가 난다. 실상 Lukacs가 특수성을 예술의 중심 범주로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작품이 그 부분들 각각의 개별성 그리고 그 부분들이 이루는 전체의 고유성 혹은 일회성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일반적인 진실을 제시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예술을 과학(혹은 철학)과는 전혀 다른 아주 특수한 종류의 일반화(Verallgemeine- rung) 형식이라고 한다. Leavis도 문학작품이 개별성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는 견해를 공유한다. 그는 예컨대 Dickens의 Little Dorrit같은 작품에서 작가는 ‘삶에 대한 인식과 판단의 어떤 보편타당성들’(certain general validities of perception and judgement about life)에 도달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Leavis, "Dickens and Blake: Little Dorrit", in F. R. and Q. D. Leavis, Dickens: The Novelist. (London: Chatto & Windus, 1970), p. 219.
그러나 Leavis는 Lukacs처럼 과학과 문학(예술)의 차이가 반영형식의 차이라는데 강조를 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다르다. 물론 Hegel로부터 온 범주들을 사용하느냐 아니냐가 양자의 차이에 어떤 간접적이면서도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어의 경우처럼 범주도 그것을 통해 전달되는 내용과 떼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Hegel적 사유방식의 한계를 밝히는 아주 거대한 작업과 연관되어 있는 까닭에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선다.
Leavis 역시 앞에서 언급한 대로 반영의 측면을 무시하지 않으며 또한 주지하다시피 예술이 추상적 보편성보다도 구체성을 구현하고 있음을 말하지만, 아무래도 반영의 측면보다는 창조의 측면이 그가 강조하는 핵심을 이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상 모든 창조적인 작가의 작품은 새로운 길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it may be said that every genuine creative writer's work is the discovery of a new way)는 그의 말은 이를 요약적으로 표현한다. Leavis, Thought, Words and Creativity, p. 45.
양자의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언어의 문제에서라고 할 수 있다. Leavis에게 언어문제는 문학작품을 읽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언어의 ‘산문적 사용’과 ‘시적 사용’을 나누어 후자를 참된 문학에 맞는 언어사용방식으로 본다. 실상 양자의 견해를 언어관이라는 일반화된 형태로 추상화시켜 보면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Lukacs의 미학이론에서도 문학언어의 고유성에 대한 지적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Die Eigenart des Asthetischen에서 그는 과학언어와도 구별되고 일상언어와도 구별되는 고유한 문학언어에 대하여 언급한다. 문학언어는 일상언어에서 발전되었으면서도 소위 질적 비약에 의해서 전혀 다른 종류의 것으로 발전한 것이며, 이와 비슷한 경로로 자라나온 과학언어와는 대조되는 성격을 갖는다고 한다. 과학언어가 일상언어의 개별성을 일반성 쪽으로 ‘지양’한 것이라면 문학언어는 일상언어를 특수성 쪽으로 지양한 것에 해당한다.
양자의 언어관은 구조주의적 혹은 탈구조주의적 관점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Saussure의 통찰을 구조주의자들이 이어받은 이후로 언어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퍼진 것은 넓은 의미의 기호론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기호 자체에 대한 연구를 뜻하는 좁은 의미의 기호론과 구분하기 위하여 ‘넓은 의미의 기호론적 태도’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언어 혹은 기호체계를 사고의 모델로 사용하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현실 속에서 담론 혹은 기호체계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않으려는 태도로 나아간다. 반영론을 그 인식론적 토대로 하는 Lukacs에게서 이러한 태도가 보일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Pavlov의 조건반사론에 기반하여 언어를 신호의 신호로 규정한다. 1차적 신호가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언어는 외부현실로부터 한 마디 떨어져 있을지언정 그 관계는 여전히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Lukacs, Die Eigenart des Asthetischen 1.Halbband, Georg Lukacs Werke Band 12 (Neuwied am Rhein: Luchterhand, 1963), 11장 참조. 이하 이 책의 제목은 Eigenart 1 (혹은 Eigenart 2)로 줄임,
Leavis 역시 위의 기호론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한편으로 그는 ‘문학비평가가 관계하는 판단들은 삶에 대한 판단들’이라는 Arnold적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고 있으며 Leavis, Nor Shall My Sword, p. 97. 이는 당연히 Lukacs의 태도와 통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관심을 갖는 언어란 기호론적 언어관의 중심대상인 ‘랑그’(langue)와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랑그’는 명백하게 언어학자들의 분석대상이 되는 공적인 기호들의 체계인 반면에 Leavis에게 언어란 단순히 기호가 아니라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은 ‘제3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는--언어를 나타내는 관습적인 기호나 상징과는 별도로--개별적 사용자들에게서만 현실적으로, 그 충만한 실질성을 띠고 현존한다. 언어는 관용구들, 어구들, 단어들 등이 그들의 생명력의 터전인 의미, 의도, 힘과 함께 (예컨대) 나에 의하여 발화되거나 의미되고 당신에 의하여 받아들여질 때에만 현존한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공적 세계에 속하는가(하지만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가 없다) 아니면 단지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경쾌한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여기에 맞지 않음을 알고 있다. Leavis, English Literature in Our Time and the Universit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p. 49.
그러나 차이는 실제 작품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데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Lukacs는 비록 문학언어의 고유성을 설명하는 좋은 예로서 Shakespeare를 자주 인용하지만 그의 논의는--그의 저작의 목적상--어디까지나 문학언어 일반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 맞추어져 있다.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비평에서 그는 작품을 구성하는 언어의 구체적 존재에 대해서는 대체로 특별한 관심을 쏟지 않는다. 이에 반해서 Leavis에게서는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비평에 있어서 언어가 주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실상 그가 말하는 ‘시적 언어사용’은 넓게 보면 문학언어 일반의 성격을 말한 것에 해당하며 그런 점에서는 Lukacs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가 예컨대 Shakespeare에 비견할만큼 탁월한 수준으로 ‘시적 언어사용’을 구사한다고 보는 작가는 많지가 않다. 그는 Lukacs적 의미에서는 충분히 리얼리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Fielding이나 George Eliot 같은 작가에 대해서는 Dickens에게 대해서와 같은 정도로 ‘언어의 시적 사용’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시적 언어사용’은 Lukacs의 ‘고유한 문학언어’와 일면 상통하면서도 동일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그것에 의해 모두 설명되지도 않는다.
언어에 대한 Leavis의 관심은 단순한 문학적 관심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의 언어관은 자본주의 영국에서 일어난 어떤 현상에 대한 판단과 맞물려있다. 그가 본 영국의 근·현대사는 그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유기적 문화가 쇠퇴하는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문화가 자기의 당대--20세기 후반부--에는 소멸된 것으로 본다.
우리는 이런 유기적인 종류의 노동과 삶의 관계를 어떤 향수어린 마음에서, 무언가 복고되어야 할 것으로서 혹은 탄식하는 가운데 우울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상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것이 속했던 유기적인 공동체와 함께 사라졌으며 예상가능한 미래에서는 복고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상기한 것이다. Leavis, Nor Shall My Sword, p. 85.
그런데 그의 견해에서 창조적으로 살아있는 언어는 이러한 문화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온전한 의미의 언어는 문화에 대한 아날로그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언어는 문화의 ‘본질적 생명력’(essential life)이라는 것이다. Leavis, English Literature in Our Time and the University, p. 49 참조.
그가 특별하게 ‘시적 언어사용’과 연관시키는 Shakespeare나 Dickens 등의 작품들은 이러한 온전한 의미의 언어의 최고도의 발현에 해당하며, 따라서 단순한 감상대상을 넘어서 이러한 소멸된 문화를 회복하는 실천적 과제와의 연관하에서 의미심장한 가치를 갖는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역사를 이렇게 후퇴한 것으로 보는 관점은 산업의 증진자들에게서도 보기 어렵고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서도 보기 어렵다. Lukacs가 만일 이러한 견해를 접했다면 틀림없이 이를 과거지향적 낭만주의의 한 형태라고 비판하였을 것이다. 그에게서 역사는 아무리 지그재그 형태의 것으로 파악될지라도 기본적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Leavis의 이러한 견해가 결코 외로운 것만은 아님은 바로 Walter Benjamin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 내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는 기술발전이라는 대세를 타고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만큼 독일 노동자 계급을 타락시킨 것은 없다고 지적하며, 자연정복에 있어서의 진보란 곧 자연에 대한 착취임을 지적한다. Walter Benjamin, “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Illuminations, (New York: Schocken Books, 1968) pp. 258-259 참조.
역사철학에 관한 그의 테제들 중 아홉번째 테제는 그 유명한 ‘역사의 천사’라는 비유로써 이러한 반(反)진보주의를 나타내고 있다.
‘안겔루스 노부스’라는 이름이 달린 클레의 그림은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무언가로부터 막 물러나려는 참인 것처럼 보이는 천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눈은 응시하고 있고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그의 날개는 펼쳐져 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는 역사의 천사의 모습이다. 그의 얼굴은 과거를 향해 있다. 우리가 일련의 사건들을 인식하는 곳에서 그는 재난에 재난을 덧쌓아서 그의 발 앞에 던지는 단 하나의 파국을 본다. 천사는 머물러서 죽은 자를 일깨우고 부서진 것들을 다시 합하여 온전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낙원으로부터 폭풍이 불어오고 있다. 폭풍이 너무나도 격렬하게 그의 날개에 불어쳐서 천사는 더이상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폭풍은 불가항력적으로 천사를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로 몰고 간다. 한편 그의 앞에는 파편더미가 높이 쌓여만 간다. 이 폭풍이 바로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같은 글, p. 257.
자본주의 사회에 대하여 더 비판적이면 비판적이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Lukacs가 역사를 후퇴한 것으로 보는 이러한 시각을 거의 보여주지 않음은 일단 그의 활동무대가 자본주의보다 발전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회주의권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겠다. 그러나 사회주의권이 Leavis가 말하는 창조적 상호협동성에 기반한 살아있는 문화가 존재하는 곳이라고 하기에는 그것을 입증할 문학적 성과가 너무나도 미흡하기 때문에 양자의 견해의 차이를 활동무대의 차이만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분명한 것은 Lukacs가 특별한 의심을 보인 적이 없었던 ‘발전된 사회주의’론이 함축하는 진보주의의 문제점이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의하여 현실로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2. 리비스의 언어관
<* 강사 정남영의 ?살아있는 언어, 살아있는 삶?(?창작과비평? 99년 겨울)에서 그대로 발췌하였음>
여기서 언어의 창조성에 대한 탐구를 자신의 작업의 주요한 부분으로 삼은 영국의 비평가 리비스(F. R. Leavis)의 견해를 경청해 보기로 한다. 리비스는 ‘시적 언어사용’과 ‘산문적 언어사용’ 두 가지를 대조시킨다. (이는 들뢰즈와 가따리의 ‘소수 언어’와 ‘다수 언어’의 대조와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이것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장르구분과 관계가 없다. 시가 ‘산문적 언어사용’을 중심으로 할 수도 있고(예컨대 영국 18세기 오거스탄 시대의 시들), 반대로 소설이 탁월한 ‘시적 언어사용’을 구현할 수도 있다(19세기의 주요한 영국소설들). 예의 구분은 또한 어휘상의 차이와도 관계가 없다. 시에 맞는 어휘가 따로 있고 산문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말하는 ‘산문적 언어사용’이란 ‘이미 확연히 규정된’(previously definite) 생각을 정확하게 진술하는 것을 말한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하나의 기호가 어떤 지시대상을, 혹은 하나의 기표(記標, signifier)가 어떤 기의(記意, signified)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지칭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산문적 언어사용’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도구로 보는 언어사용이며, 사유와 언어를 본래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보는 언어사용이다.
‘시적 언어사용’이란 장르를 막론하고 좋은 문학작품들에서 구현되는 것으로서, 새로운 사유와 인식의 생성을 낳는 언어사용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적으로 사용된 언어는 정보전달도구가 아니며, 주관적 감정 혹은 견해를 표현하는 수단도 아니다. ‘시적 언어사용’에서는 하나의 글 혹은 작품이 곧 그 자체로 하나의 사유활동이 되며 그 결과로 새로운 인식과 사유가 생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시적 언어사용’이란 언어가 ‘사유의 터전’이 되는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리비스는 언어의 이러한 사용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말하는 바 이상을 행한다”(does more than it says, ?살아있는 원리?, 104) 이 글에 인용된 리비스의 책은 The Living Principle: 'English' as a Discipline of Thought (London: Chatto & Windus, 1977)와 The Common Pursuit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63)이다. 지금부터 전자는 ?살아있는 원리?로 후자는 ?공동작업?으로 칭하고 그 뒤에 면수를 표시하기로 한다.
고 말하기도 하고 “말하는 문제가 아니라 존재하고 구현하는 문제”라고 설명하기도 하며(?공동작업?, 130), “경험의 몸체가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도록 제시된다”고 말하기도 한다(?공동작업?, 110).
더 나아가 ‘시적 언어사용’이 갖는 창조성은 까마득한 인류의 여명기와 심지어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가게도 하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아직 구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예감을 인간에게 형성시키는 일”도 한다(?살아있는 원리?, 44). 이렇게 “전례 없는 일들을 하며 알려진 것의 경계를 확대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살아있는 원리?, 100) ‘시적 언어사용’은 “단어들을 넘어선 내용을 담는 언어”를 구현하는 종류의 것이다.
언어가 시적으로 사용된 경우 그것은 이미 존재를 완료한 것을 재현 혹은 지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산문적 언어사용의 경우처럼 지시대상이나 아니면 이른바 기의에서 찾을 수가 없다.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 되며, 바꾸어 말하면 살아있는 것이 된다. 살아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움직이며 변화한다는 것이다. 리비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의 핵심으로 삼는 ‘이미지’(형상)보다도 시 전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movement)을 더 포괄적이고 우선적인 원리로 본다. 실상 은유적 이미지나 시각적 효과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시도 있으므로 이미지를 시의 핵심으로 보는 것은 맹점이 있다.
시가 가진 활력에 대한 이해에 접근하는 데 가장 중심적인 것이 ‘움직임’의 분석이며, 이미지는 이 ‘움직임’을 구성하는 일부로서만 힘을 갖는다. 이 ‘움직임’에 대해서는 다소 상세한 설명을 필요로 할 것 같다.
1) ‘움직임’은 시의 구성요소들 전체--단어의 사전적 의미, 발음, 이미지, 행 나누기, 단어와 이미지의 배열 등등--가 구성하는 복합적인 것인 동시에 시마다 다른 일회적이고도 고유한 것이다. 따라서 ‘움직임’의 수는 시의 수만큼 많다. (독자가 해석하는 수만큼 많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2) ‘움직임’의 면에서 활력이 있는 시와 그렇지 않는 밋밋한 시를 상대적으로 나눌 수 있고 이것이 시를 평가하는 기준의 주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그러나 이 활력은 결코 양적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평가된다. 밋밋한 시는 시의 구성요소들이 동질화되어서 변화를 보이지 않는 시이다. 활력있는 ‘움직임’은 한편으로는 이질적인 요소들, 심지어는 서로 어긋나고 갈등하고 대조되는 요소들의 복합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갈등, 긴장, 정지 등의 변화--“논리를 초월하며 예상을 깨는 운동이요 변화”(?살아있는 원리?, 105)--의 복합이다.
3) 이러한 ‘움직임’은 시에서 살아있는 힘의 장(場)을 구성하는데, 이 장은 “총체로서의 발화에 의하여 창조”되는 ‘의미’에 복무하고 또 ‘의미’를 완결한다. ‘의미’의 유동성은 바로 이러한 살아있는 힘의 장에서 온다.
‘의미’의 유동성이 갖는 불확정성은--과학주의자들이 문학에 대하여 말할 때 들먹이는--개인의 주관적 자의성에 오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어떤 생명체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사물이 처음 생성되는 단계에서 갖는 종류의 창조적 불확정성이며 이는 막 태어난 갓난아이를 어떤 확정적인 틀로 포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 다른 한편으로 ‘의미’의 사회적 속성에서 오는 것이다. 리비스는 이 사회적 속성을 ‘만남의 장소’라는 말로 설명한다. ‘의미한다’에는 ‘의도한다’는 측면이 필연적으로 포함되는데 의미를 의도하는 개인과 그에 응하는 개인이 만나는 장소가 바로 언어 혹은 하나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개별적 존재들이 의미 속에서 만나지 않는 한 의미는 없다.”(?살아있는 원리?, 58)
이렇듯 리비스가 말하는 ‘의미’란 인간의 창조적 개입을 배제한 ‘기표-기의-지시대상’이라는 도식에서와는 달리 인간의 ‘만남’이라는 사회적 사건에 의하여 생성되며 그렇게 만나는 개인들의 차이가 낳는 유동성만큼 유동적이다. ‘산문적 언어사용’이 갖는 사회적 기능이 확연하게 고정된 생각이나 재현물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일방적 흐름에 복무하는 데 있음을 생각하면 두 언어사용이 동반하는 사회성의 차이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다. 80년대 전위주의적 정파의 문제점 중 하나는 그 언어생활이 위에서 아래로의 전달(지도)과 아래에서 위로의 전달(보고)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데 있었다. 위와 아래가 언어로 서로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식이 생성되는 것은 시야에 없었다.
이러한 ‘만남’의 장소는 분명 물리적인 공간은 아니다.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기에 시청 건물처럼 공적(公的)이지도 않고, 개인의 침실처럼 사적(私的)이지도 않다. 그러나 이 장소는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리비스는 이를 ‘제3의 영역’이라고 부른다. 실상 리비스는 인간 세계 자체가 ‘제3의 영역’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성격을 지닌 활동, 즉 언어에서 두드러지게 구현되는 종류의 상호협동적 창조성을 구현하는 활동에 의하여 창출되고 유지되었다고 한다. 의미의 유동성은 위험을 내포한다. 이 위험은 예컨대 사이비 난해시나 그에 준하는 소설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작품들은 유동성이 과학에서처럼 분명하고도 확연하게 입증되지 않음을 파고들어서 내용의 부실을 가짜 유동성으로 위장한다. 이러한 사이비와 진짜의 구분에서 핵심적인 것은 과학적 증명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해석이 건강하게 교류되는 ‘제3의 영역’(에서 만날 줄 아는 사람들)의 존재여부이다.
<6주+1/2> 하이데거의 예술관
--?예술작품의 본원?(The Origin of the Work of Art)에 대한 지극히 소략한 해설
◆ 사물의 사물적 속성
하이데거는 사물의 사물적 속성(thingly character of the thing, Dingheit des Dinges)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작품의 작품적 속성(workly character of the work, Werkhafte des Werkes)을 찾는 데로 나아가는 방식을 실험적으로 택하여 본다. 그리고 사물의 사물적 속성을 찾는 데는 기존의 견해 3개--1)문장의 구조를 사물의 구조에 투사한 것 즉 사물은 실체subjectum+속성accidens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 2)사물을 주관적 감각의 집합으로 보는 것, 3)사물을 형태지워진 물질formed matter 즉 내용과 형식의 결합으로 보는 것--의 도움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 셋 중 어느 것도 사물의 사물적 속성을 밝히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논증한다. 특히 세번째 것은 도구의 도구적 성격을 밝히는 데 적중하는 것이지 사물의 사물적 속성을 밝히는 데 적중하는 것은 아니며 작품의 작품적 속성을 밝히는 데는 더욱 적중하지 못하는 것임을 말한다. 따라서 사물(하이데거에서 이는 단순한 사물 즉 아주 좁은 의미의 사물을 말함)을 도구 마이너스 알파로 보고 작품을 도구 플러스 알파(미적 가치)로 보는 사고--이 사고는 기존의 미학의 이데올로기이다--는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의 실험은 잘못된 길이었다.
하이데거는 도구가 무엇인지를 작품이 말해주는 것--고호의 신발 그림을 예로 들었음--에서 찾아 본다. 그리고 여기서 하이데거는 작품이 사물과 도구의 존재(Sein, Being)를 드러내 줌을, 즉 존재자들의 존재(Being of the beings)를 드러내줌을 본다. 이러한 드러냄이 일어나는 것을 그는 진리의 발생이라고 한다. (그의 반미학주의에도 주목할 것.)
예술작품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자들의 존재를 열어 보여준다. 이러한 열어 보여줌, 이러한 드러냄, 즉 존재자들의 진리가 작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예술작품에서는 존재하는 것의 진리가 작품으로 서게 된다(...set itself to work). 진리란 무엇이길래 때때로 예술로서 일어나는 것인가? 이러한 ‘작품으로 섬’이란 무엇인가? (39면) 인용된 면수는 Poetry, Language, Thought, trans. Albert Hofstadter (New York: Harper & Row 1971)의 것임.
◆ 작품의 첫 번째 속성: '세계'
‘세계’란 1) 오감에 의하여 지각 가능한 대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2) 단순히 상상된 틀로서 1)의 대상에 부가되는 것도 아니다. 객체적이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종속되어 있는 어떤 것이다. 우리의 존재와 관련된 역사의 결정들이 이루어지고 취해지고 포기되는 곳 어디에서나 세계는 세계한다(there the world worlds) *여기서 하이데거는 ‘세계’라는 명사를 그냥 동사로 사용하였음. (pp.44-45)
◆ 작품의 두 번째 본질적 측면: '대지'
--"생겨나는 사물들 속에 대지는 보호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In the things that arise, earth is present as the sheltering agent.)(42면)
--“대지 위에 그리고 대지 속에 역사적 인간은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거처를 근거짓는다. 작품은 세계를 세우는 가운데 대지를 개진한다. 여기서 개진은 엄밀한 의미에서 숙고되어야 한다. 작품은 대지 자체를 세계의 <열려진 공간>으로 움직여서 거기서 보존한다. 작품은 대지로 하여금 대지가 되도록 한다.”(46면)
-- 대지는 파고듦(penetration)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지는 계산에 의하여 접근하는 것을 모두 파괴로 바꾸어 버린다. 이 파괴는 정복의 모습으로, 자연의 기술적.과학적 객관화의 형태를 띤 진보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알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복은 줄곧 의지의 무력함으로 남아있다. 대지는 본성상 드러낼 수 없는 것으로, 모든 드러냄으로부터 움츠러들고 항상 스스로를 닫아 놓고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또 보존될 때에만 자기 자신으로서 밝게 열어진 상태로 나타난다....대지는 본질적으로 스스로를 숨기는 것이다. 대지를 내어 세운다는 것(setting forth of the earth)은 대지를 열려진 곳 속으로 스스로를 숨기는 것으로서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47면)
◆ 세계와 대지의 대립
“세계와 대지의 대립은 투쟁(striving)이다....이 투쟁에서 대립자들은 서로를 자기의 위로 끌어올린다....작품이란 이러한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작품의 작품적 속성은 세계와 대지간의 싸움에 있다. 이 싸움에서 작품의 통일성이 생기는 것은 이 투쟁이 친밀함의 단순성에서 그 최고의 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49면) 즉 양자는 상호 투쟁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본성이 확증되고 또 서로 속하게 된다.
◆ 예술작품과 진리1
예술작품에서는 진리가 작품으로 선다(...is a truth set to work). 하이데거의 예술론에서는 그리고 나아가 그의 사상체계 전체에서는 그의 진리관이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는 ‘진술적 진리’(propositional truth)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몇 세기 동안 우리에게 친숙해 온 진리의 본성에 만족하지 말아야 하는가? 진리는 지식과 사실과의 일치 혹은 상응을 오늘날 의미하고 또 오랫동안 의미해 왔다. 그러나 지식과 그 지식을 구성하고 표현하는 진술이 사실과 상응할 수 있으려면 그 사실이 사실임이 보여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실은 진술을 구속하는 것이 될 수 없다. 만일 사실이 은폐(concealedness)로부터 나와 서지 않는다면, 만일 사실이 ‘드러남’(the unconcealed) 속에 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자신을 보일 수 있겠는가? 하나의 진술은 드러난 것 즉 진실인 것(what is true)에 상응함으로써 진실한 것이 된다. 진술적 진리는 항상, 그리고 항상 전적으로 이러한 정확성을 말한다. 데까르뜨 이래로 확실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중요한 진리개념들은 진리를 정확성이라고 정의하는 것의 여러 형태들일 뿐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진리의 본성--즉 재현의 정확성--은 존재자들의 ‘드러남’으로서의 진리와 운명을 같이한다.(51-52면)
진리라는 말의 의미를 확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일단 유보하고 그의 취지를 따라가자면 우선 그가 진술 자체보다는 그 진술이 상응하고자 하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음에서 알 수 있듯이 진술 자체도 바로 이 현실의 산물임을, 이 현실에 부속됨을 지적한다.
그러나 존재자들의 ‘드러남’을 전제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오히려 존재자들의 ‘드러남’(존재)이, 어떤 것을 재현함에 있어서 우리가 항상 그러한 ‘드러남’ 속에 있고 또 그 ‘드러남’의 시중을 들고 있는 존재상태로 우리를 밀어 넣는 것이다. 하나의 인식이 그에 맞추어 정렬을 하는 바의 것뿐만이 이미 어떤 식으로 드러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어떤 것에 상응함”이 진행되는 전체 영역이 이미 ‘드러남’ 속에서 생겨야 한다. 이는 진술과 사실의 상응이 분명하게 드러남을 보는 주체[인간]에게도 해당된다. 존재자들의 ‘드러남’이 이미 우리를 그 밝아진 영역(that lighted realm)--모든 존재자가 그 안에서 우리의 앞에 섰다가는 물러가는 영역--에 노출시키고 그 영역 안에 놓지를 않는다면, 우리가 사실을 정확하게 재현한 것들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어떤 것이 이미 나타나 있는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52면)
◆ 드러남과 은폐
이어서 하이데거는 이 ‘드러남’이 과연 무엇인지를 논구한다. 이는 곧 존재(Being)에 대한 논구이다. 그는 모든 존재자들의 중심이면서도 또한 그것들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으로 어떤 열려진 공간(an open space) 혹은 밝게 비추어진 공간(a clearing, a lighting. Lichtung)을 말한다. “존재자들이 서 있는 밝게 열려진 공간은 동시에 은폐이다.” 이 은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거부로서의 은폐--즉 존재자들이 우리에게 밝혀지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假裝)으로서의 은폐이다.
하나의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 앞에 자신을 놓는다. 하나는 다른 것을 숨기는 것을 도우며 다른 것을 흐린다. 소수가 다수의 앞을 막고 하나가 모든 것을 부인한다. 여기서 은폐는 단순한 거부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존재자가 나타나기는 하는데 다만 자신과는 다른 것으로 자신을 제시하는 것이다. (54면)
“...밝게 열려진 공간은 오직 이 이중의 은폐로서만 일어난다.”(54면)
◆ 예술작품과 진리2
반 고호의 그림에서는 진리가 발생한다. 이는 어떤 현존하는 것이 정확하게 그려졌다는 말이 아니라 신발의 도구적 성격이 드러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 전체(that which is as a whole)가, 상호작용하는 세계와 대지가 드러남(Unconcealedness)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이렇듯 작품에서는 진실한 어떤 것(something true) 뿐만이 아니라 바로 진리가 작동한다. 농부의 신발을 보여주는 그림이나 로마의 분수에 대하여 읊은 시는--만일 그것들이 무언가를 알려준다면--이러한 개별화된 존재자들이 그 자체로 무엇인지를 알려줄 뿐만이 아니라 드러남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 전체에 관하여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신발들이 단순하고도 본질적으로, 그리고 그 분수가 질박하고도 순수하게 자신들의 본질에 몰두하면 할수록 그것들과 함께 모든 존재자들이 더 직접적이고도 포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자신을 은폐하는 존재는 이런 식으로 비춤을 받는다. 그러한 빛은 자신의 빛남을 작품 속으로 엮어 넣는다. 작품 속으로 엮어 넣어진 빛남이 바로 아름다운 것(미)이다. 미는 드러남으로서의 진리가 일어나는 하나의 방식이다. (56면)
◆ ‘창작되어져 있음’과 진리
하이데거는 ‘창작’의 측면, ‘만들어졌음’의 측면--사실상 너무나 명백하여 이제야 언급한 것이 이상할 정도인 측면--에서 작품을 고찰하기로 한다. 그는 그리스에서는 작품의 생산이나 도구의 생산이 모두 테크네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음을 상기시킨다.
테크네라는 단어는 오히려 앎의 한 방식을 가리킨다. 앎이란 ‘본다’의 넓은 의미에 있어서 ‘보았음’을 뜻하는데 본다는 것은 앞에 현존하는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임을 뜻한다. 그리스의 사유에 있어서 앎의 본질은 알레테이아 즉 존재자들의 드러남에 놓여 있다. 이것이 존재자들에 대한 모든 태도를 이끌고 방향짓는다. 그리스적으로 경험된 앎으로서의 테크네는, 현존하는 것을 그 자체로 은폐된 상태로부터 끌어내어 바로 우리 앞에 드러난 상태로 가져오는 한에서 존재자들의 불러일으킴(a bringing forth of beings)이다. 테크네는 무엇을 만드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59면)
시간의 순서만을 고려한다면 창작이 작품의 작품적 존재를 규정할 것 같으나 하이데거는 이와는 반대로 말한다.
비록 작품은 창작이 완료되어서야 현실화되므로 그 현실성은 창작에 좌우되긴 하지만 창작의 본질은 작품의 본질에 의해 규정된다. 작품이 누군가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측면이 창작과 하나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창작된 측면이나 창작이나 작품의 작품적 존재로부터 규정된다. (60면)
그러면 진리란 무엇이길래 작품 등의 속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이 열린 공간(the Open) 속의 열려있음(openness) 즉 진리는 그 자체가 이 열린 공간 속에서 자리를 잡을 때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진정한 자기자신 즉 이 열려있음(this openness)이 된다. 따라서 이 열려있음이 그 안에 자리잡고 지속할 어떤 존재자가 이 열린 공간 속에 언제나 존재해야 한다. 열려있음은 이 열린 공간을 차지함으로써 이 공간을 열려 있는 상태로 유지한다. (61면)
◆ ‘창작되어져 있음’, 비일상성, 보존
모든 사물에 있어서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일상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작품에 있어서는 그것이 작품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비일상적인 것이다. “작품이 자신을 더 본질적으로 열면 열수록,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존재한다는 사실의 특유성이 보다 빛을 발한다.”(영 65-66면)
...작품 자체가 존재자의--작품 자체에 의하여 열린--열려있음으로 순수하게 들어서면 설수록 작품은 그만큼 단순하게 우리를 이 열려있음으로 집어넣으며 동시에 우리를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끄집어낸다. 이러한 전위(轉位)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세계와 대지에 대한 습관적인 관련을 바꾸고 따라서 모든 일상적인 행위와 평가와 앎과 봄을 억제하고 작품에서 발생하는 진리 속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머무는 것을 지속하는 것이 비로소 창작된 것을 작품이 되게 한다. 작품을 작품이 되게 하는 것--이것을 우리는 작품의 보존(preserving, Bewahrung, ‘진실되게 함’이라고도 읽힘)이라고 부른다. 보존되는 경우에만 창작된 작품은 현실적인 것으로서 즉 이제 작품으로서 현존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66면)
◆ 예술작품과 앎
작품의 보존이란 작품에서 발생하는 존재자들의 열려있음 속에 서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 ‘보존하며 안에 서있음’이란 하나의 앎이다. 그러나 앎이란 어떤 것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나 표상에 있지 않다. 진실로 존재자를 아는 사람은 존재자의 가운데서 자신이 하려고 의지하는 바를 아는 사람이다. (67면)
앎으로서의 작품의 보존이란 작품에서 발생하는 진리의 비일상성 속에 각성된 상태로 서 있는 것을 말한다. (67면)
◆ 경험환원론에 대한 비판과 심미주의 비판
하이데거는 작품을 단순히 경험의 촉발자로 보지 않는다. (작품을 경험으로 환원하는 것은 아주 낯익은 비평 방법이다.) 아울러 심미적 대상으로도 보지 않는다.
작품을 보존한다는 것은 인간을 그 경험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발생하는 진리에 속하는 상태로 집어넣는 것이며....더욱이 보존이라는 의미에서의 앎이란 작품의 형식적 측면들, 그 여러 자질들과 매력들을 심미적으로 감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보았음’으로서의 앎이란 결단하고 있음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사용한 개념임.
을 뜻하며 작품이 균열(rift) 속으로 집어넣은 갈등(conflict) 속에 서있음을 뜻한다. (68면)
작품의 올바른 보존방식은 전적으로 그리고 오직 작품 자체에 의해서만 같이 창조되고(co-created) 규정된다. 보존은 서로 다른 범위와 지속성과 밝기를 가지고 여러 다양한 수준의 앎으로 발생한다. 작품이 단순한 예술적 향유를 위해서 제공되는 경우에는 그것이 작품으로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 아직 입증된 것이 아니다.(68면)
◆ 작품과 시대
저 비일상적인 것으로의 밀려듬(Stoß)이 일상성과 감식에 사로잡히자마자 작품산업이 시작된다. 작품을 애써서 물려주는 것이나 학문적인 작품복구 노력은 작품 본연의 존재에 도달하지 못하며 단지 그에 대한 회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 회상도 작품에게 역사를 같이 창조할 수 있는 위치를 부여해줄 수 있다. 반면에 작품의 가장 고유한 현실은 작품이 자기 자신을 통해 발생한 진리 속에 보존되는 경우에 작용한다. (56면)
<1/2+8주> 고양된 힘의 표현으로서의 예술: 니체의 예술론
(Will to Power중 IV “The Will to Power as Art”에서)
◆ 허무주의의 극복
이 책의 제목은 대안운동(countermovement) 즉 원리에서나 과제에서나 언젠가 이 완전한 허무주의를 대신할 운동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허무주의를 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전제하기에 그 이후에만 오는 운동이다. 허무주의의 출현이 필연적이 된 까닭: 지금까지 우리가 지녀온 가치들의 최종적 귀결이기에, 우리의 위대한 가치들과 이상들의 궁극적 논리적 결론이기에, 이 가치들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허무주의를 경험해야 하기에.
(→ 니체에게서 암시를 얻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허무주의의 문화적 완결형태로 볼 수도 있는 가능성?)
◆ 대안운동으로서의 예술
근대의 종교, 도덕, 철학은 데카당스(창조적 힘, 기운의 쇠퇴)의 형태들이며 이에 대한 대안운동으로서 예술이 상정될 수 있다. <참고: 니체의 ‘힘’에 관한 들뢰즈의 설명, Nietszche and Philosophy>
(...) 지금까지 우리는 마치 서로 다른 힘들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inert) 사물들을 소유하기 위하여 싸우는 것처럼 말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사물(대상) 자체가 힘이며 힘의 표현이다. 그렇기에 사물과 힘 사이에 친화성의 정도가 다른 것이다. 이미 잡히지 않은 힘(현상)이란 없다. 그 자체가 가상이 아니라 힘의 드러남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힘은 본질적으로 다른 힘과 관계를 맺고 있다. 모든 힘은 다원적이다. 힘을 단수로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지배하는 힘과 지배를 받는 힘. 다양한 힘들이 일정하게 떨어져서 작용을 가하고 받으며, 여기서 각 힘에 포함되어 있으며 각 힘을 서로 관계짓는 차별적 요소는 거리(distance)이다. 이것이 니체의 자연철학의 원리이다. 원자주의의 비판은 이 원리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원자주의는 힘에만 속하는 본질적 다양성과 거리를 물질에 부여한다는 것이 원자주의 비판의 요체이다. (6)
(...) 니체가 말하는 힘은 따라서 다른 힘과 관계를 맺고 있는 힘이다. 이러한 형태의 힘은 의지라고 불린다. 의지(힘에의 의지)는 힘의 차별적 요소이다. 의지의 철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이로부터 나온다. 의지는 근육이나 신경에 신비스럽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물질 일반”에 작용하는 것은 더욱 아니며, 반드시 다른 의지에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제는 의지와 자동적인 것의 관계가 아니라 명령하는 의지와 복종하는 의지의 관계이다. (복종의 정도를 포함하여.) (7)
(원용자의 강조)
더 고도의 예술개념을 함축하는 것으로서 예술가-철학자(artist-philosopher)가 설정된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을 형성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리(차이)를 두느냐 아니냐가 관건이다. 그 예비단계는 1) 자기를 형성하는 사람인 은자(隱者) 2) 지금까지의 예술가 즉 재료를 가공하는 작은 규모의 완성자이다.
◆ 예술의 기초적 본능
효용이 없는 유희(play)이다. 이는 힘으로 가득찬 자의 이상이며, ‘어린아이다움’이다.
◆ 예술의 두 가지 상태
예술이 인간에게서 자연력처럼 나타나는 두 가지 상태는 아폴로적인 것(비전)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주연, orgy)이다. 양자는 일상생활에서도, 즉 꿈과 도취상태에서 시연되지만 약하다. 꿈은 비전, 연상, 시에 해당하고, 도취는 제스처, 열정, 노래, 춤에 해당한다. (420)
◆ 도취
도취라 불리는 즐거움의 상태는 바로 고양된 힘의 느낌(an exalted feeling of power)이다. 이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은 시공간에 대한 감각의 변화; 엄청난 거리의 개관과 최초의 이해; 비전의 확대; 극히 조그맣고 금세 사라지는 것들을 이해하는 기관의 세련화; 도움이 거의 없고 암시되는 것이 극히 미미해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지적’ 관능성’; 근육을 통제한다는 느낌으로서의 힘, 움직임의 유연함과 즐거움으로서의 힘, 춤으로서의 힘, 경쾌함으로서의 힘, 빠르기로서의 힘; 힘을 입증하는 데서 느끼는 즐거움으로서의 힘, 과시, 모험, 겁없음, 생사에 대한 무관심으로서의 힘이다. 삶의 정점을 이루는 이러한 순간들을 서로 자극한다. 이중 어느 하나에 대한 이미지와 관념의 세계는 다른 것들을 불러일으킬 암시로서 충분하다. 이러한 식으로 상태들은 충분히 떨어질 이유가 있으면서도 서로 합친다. 예: 종교적 도취의 느낌과 성적 흥분.
◆ 주는(흘러 넘치는 힘을 표현하는) 존재로서의 예술가
제대로 된 예술가란 잉여 에너지로 가득찬 강한 존재다. 성적 씨스템의 과열없이는 라파엘로는 불가능하다. 예술가들에게 잠재력이 멈추면 생산성도 멈춘다.
예술가들은 그 무엇도 있는 그대로 보아서는 안되고 더 충만하게, 더 단순하게 “도취한 상태에서의 지극한 차분함(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느낌의 느려짐)은 영혼의 조용한 제스처와 비전 속에 반영되기를 좋아한다. 고전적 스타일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차분함, 단순함, 축약, 집중을 대표한다. 힘(기운)의 최고의 느낌(the highest feeling of power)은 고전적 유형에 집중되어 있다. 천천히 반응하는 것. 거대한 의식. 몸부림의 느낌이 없는 것.” (§799에서)
, 더 강하게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예술가의 삶은 일종의 젊음과 봄을, 일종의 습관적 도취를 담고 있어야 한다.
예술가는 사물에 변화와 충만함을 주입하고 시로 읊어서 마침내 사물들이 우리의 삶에서의 충만함과 기쁨을 반영하도록 한다.
◆ 예술가와 동물되기
우리가 이러한 변화와 충만함을 보이는 사물들을 만난다면 동물적인 것이 모든 즐거운 상태들이 위치해있는 영역들의 흥분으로 반응한다. 동물적인 것의 복지(well-being)와 욕망의 섬세한 뉘앙스들의 혼합이 미적 상태를 구성한다. 미적 상태는 육체적 힘의 흘러 넘치는 충만함이 가능한 것들에게서만 나타난다. 도취를 모르는 자, 지친 자, 탕진한 자, 말라버린 자(예를 들면 학자들)는 예술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일차적인 예술적 힘, 풍요로움의 압박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줄 수 없는 자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한다
완성이란 힘의 느낌의 비범한 확대이며 풍요로움이고, 모든 한계(경계)를 흘러넘치는 것이다.
◆ 예술을 위한 예술비판
만일 우리가 소리와 단어의 서정성으로부터 이 내적 열기의 모든 흔적들을 뺀다면 서정시와 음악에서 남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예술을 위한 예술> 즉 습지에서 절망으로 몸을 떨어대는 개구리의 숙련된 개굴개굴 소리일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사랑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 예술, 몸, 의사소통
모든 예술은 근육과 감각에 암시를 주는 힘을 행사한다. 미적 상태는 풍요로운 전달수단을 소유하며 자극과 기호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극히 뛰어나다. 미적 상태는 살아있는 존재들간의 소통과 전달의 정점을 이룬다. 이는 언어의 원천이다. 여기서 언어가 기원한다. 어조의 언어와 제스처 및 시선의 언어. 우리의 능력은 더 완전한 능력으로부터 섬세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도 우리는 여전히 근육으로 들으며 심지어는 근육으로 읽는다.
모든 삶의 활력의 제고는 인간의 이해능력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 능력을 제고한다. 다른 사람의 영혼에 이입해 들어가는 것은 원래 전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암시를 느끼는 생리적 감수성이다. 우리는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움직임, 모방기호들을 전달하는데 이것을 우리는 다시 생각으로 소급시킨다.
◆ 예술가와 보통 사람, 그리고 미학
예술가와 보통 사람의 차이. 후자는 받아들일 때 감수성의 정점에 달하는 반면 전자는 줄 때 그렇다. 이 두 능력 사이의 대립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바람직하다. 예술가에게 여성이 되도록, 받아들이도록 요구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의 미학은 예술수용자들이 ‘무엇이 아름다운가?’에 대한 경험을 정식화했다는 점에서 여성의 미학이었다. 이는 필연적인 오류인데, 막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한 예술가는 자신을 잘못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뒤돌아보아서는 안된다. 아니 보는 것 자체가 금지다. 오직 주어야 한다.
비평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예술가의 명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반반의 얼치기다. 즉 ‘근대적’이다.’
◆ 철학과 예술, 정신과 감각
대체적으로 말해서 나는 지금까지 그 어떤 철학자보다도 예술가들에 동의하였다. 예술가들은 삶의 냄새를 잃지 않았고 ‘이 세상’의 사물들을 사랑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감각을 사랑하였다. 내가 보기에 탈감각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위선이나 사기가 아닌 경우라면 오해거나 병이거나 치료책이다. 나는 나 자신과 삶을 살아가는, 살아가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감각의 점증하는 정신화(spiritualization)와 증대가 있기를 바란다. 실로 우리는 감각의 섬세함과 충만함과 힘에 감사하여 정신의 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을 감각에 돌려주어야 한다. (..) 이런 식으로 우리는 위대한 인간관 즉 인간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법을 배울 때 실존의 변화자가 된다는 생각을 굳게 고수하는 것이다.
◆ 긍정으로서의 예술
예술작품의 효과는 예술을 창조하는 상태를 촉발시키는 것이다. 허무주의적 예술이란 없다. 예술은 긍정한다. 그러나 졸라나 공꾸르 형제가 보여주는 사물들은 추하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추함에서 느끼는 즐거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 거짓 ‘심화’(intensification)
1) 낭만주의의 espressivo는 힘의 표시가 아니라 결핍의 느낌이다.
2) 풍경화적 음악(이른바 극적 음악). (자연주의 소설의 장황한 사실 및 특징 묘사.)
3) 신경과 피곤해진 영혼과 관련된 것으로서의 ‘열정’.
4) 자극적인 것에 대한 선호.
◆ 존재에 대한 부정과 긍정
예술은 현실에 대한 불만의 결과인가, 아니면 향유된 행복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인가? 전자는 낭만주의이고, 후자는 후광(aureole)과 디오니소스찬가 즉 신성화의 예술이다. 라파엘로 또한 후자에 속한다. 단지 그는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을 거부하는 외양을 지녔을 뿐이다. 실존이 기독교적이 아닌 곳에서는 그는 그 실존에 대하여 감사하였다.
도덕적 해석은 세계를 참을 수 없게 만든다. 기독교는 세계를 도덕적 해석으로써 극복하려는 즉 부정하려는 시도였다. 실제로 그러한 살인적인 미친 시도--세계의 위로 인간을 끌어올리는 미친 짓--는 인간을 우울하고 소인적이고 빈곤하게 만들었다.
◆ 두 가지 유형의 예술
낭만주의란 무엇인가? -- 모든 미적인 가치들에 관하여 나는 이제 근본적인 구분을 채택한다. 나는 각각의 개별적인 경우에 “여기서 창조적으로 된 것은 배고픔인가 아니면 과잉인가?”라고 묻는다. 처음 보기에는 다른 구분--훨씬 더 명백한 구분이다--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즉 경직성, 영원, “존재”가 창조의 원인이 되었는가, 아니면 파괴에 대한 욕구, 변화에 대한 욕구, 생성에 대한 욕구가 창조의 원인이 되었는가의 구분. 그러나 양 욕구는 더 자세히 검토해보면 애매하며 위에서 말한 구도에 따라서 해석할 수 있음이 판명된다. 이에 나는 위의 구분을 더 선호할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파괴, 변화, 생성에 대한 욕구는 미래를 잉태하고 있는 흘러 넘치는 힘의 표현(이를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부른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건강하지 못하고 상속권을 박탈당하였으며 특권을 잃은 자들의 증오가 파괴하는 주체, 파괴를 해야만 하는 주체가 될 수도 있다. 실존하는 것, 실로 실존 그 자체, 모든 존재 그 자체가 그 증오를 촉발하고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영원하게 만들기” → 영원한 회귀
는 감사와 사랑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이러한 기원을 갖는 예술은 신성화의 예술이 될 것이다. 루벤스에게서는 아마도 디오니소스찬가적이고, 하피즈에게서는 축복으로 가득 차 있으며, 괴테에게서는 밝고 자비로우며, 모든 사물에 호머적 후광을 던진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큰 고통을 겪는 자, 자신의 고통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며 협소한 것--가장 기이한 것--을 구속력있는 법칙과 강요로 만들려 하며, 말하자면 자신의 이미지, 고통받는 자신의 이미지를 사물들 속에 각인하고 강요하고 새겨넣음으로써 모든 사물들에 복수를 하려는 자의 포악한 의지일 수도 있다. 후자가 가장 전형적인 형태의 낭만적 허무주의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이든, 바그너의 음악이든.
<참고: The Eternal Recurrence에 관하여>
◆ 들뢰즈의 설명(?니체와 철학?에서)
--능동적으로 되기(a becoming-active)는 선택의 산물로서만 사유가능하다. 이 선택은 힘의 능동성에 의한 선택인 동시에 의지의 긍정에 의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이중적인 선택이다. 이 선택을 수행하는 것, 이 선택의 원리로서 복무하는 것이 바로 영원한 회귀이다.
두 가지 형태의 선택이 있다.
1) 윤리적 사유로서의 영원한 회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을 그 영원한 회귀를 의지하는 식으로 의지하라.’ 이는 의지를 온전하게 만듦으로써 의지하기를 창조하기로 만든다.
2) 다른 두 번째 의미의 선택이 있다. 이는 니체의 철학에서 가장 모호한 부분이다. 여기서는 주제만 요약해 본다.
ㄱ) 영원한 회귀만이 허무주의를 온전하게 만든다.
ㄴ) 허무주의는 반작용적인 삶(반작용적이 된 힘)의 보존원리이다.
ㄷ) 영원한 회귀는 부정을 반작용적 힘 자체의 부정으로 만들기 때문에 허무주의를 완성할 수 있다.
ㄹ) 능동적 부정 혹은 능동적 파괴는 자기자신에게 있는 반작용적인 것을 파괴하는, 반작용적인 것을 즉 자기자신을 몰락을 각오하고 영원한 회귀의 시험에 맡기는 강한 정신의 상태이다.
ㅁ) 영원한 회귀는 ‘능동적으로 되기’를 산출한다. 영원한 회귀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의지의 속성으로서의 부정은 긍정으로 변이하며, 부정 자체의 긍정이 되고, 긍정하는 힘이 된다. 이제 문제는 선택하는 사유가 아니라 선택하는 존재이다. 영원한 회귀란 존재이며, 존재는 선택이기에.
action ---------------> reaction -----------------> action
↑전도 ↑전도의 전도
<?힘에의 의지?에서>
◆
모든 것은 생성하고 영원히 회귀한다. 피할 수 없다. 우리가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무슨 결론이 나오는가? 힘에 봉사하는(그리고 야만!!!에 봉사하는) 선택적 원리로서의 회귀라는 생각.
이러한 생각을 하기에 인간이 충분히 성숙해짐. (?힘에의 의지?)
◆
더 이상 확실성으로부터의 즐거움이 아니라 불확실성으로부터의 즐거움.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창조적인 것. 더 이상 보존에의 의지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 더 이상 ’모든 것은 단지 주관적이다‘라는 겸손한 표현이 아니라 ’그것은 또한 우리의 작업이다!--자랑스러워하자!‘라는 표현. (?힘에의 의지?)
◆
어떤 황제는 사물들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사물들 사이에서 평온하게 살기 위하여 항상 사물들의 덧없음을 명심한다. 나에게는 반대로 모든 것은 너무나도 귀중하여서 그렇게 덧없을 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모든 것의 영원함을 구한다. 가장 소중한 치료약과 포도주를 바다에 부어야만 하는가? 존재했던 모든 것은 영원하다는 것이 나의 위안이다. 바다가 그것을 다시 던져 올리리라. (?힘에의 의지?)
◆
새로운 세계 개념--세계는 존재한다. 그것은 생성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아니면 오히려, 세계는 생성하고 사라지지만 생성하기를 시작해 본 적이 없고 사라지는 것을 그쳐본 적이 없다고 할까. 세계는 양자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한다. 세계를 스스로를 먹고 산다. 그 오물이 그 음식이다.
◆
내게 ‘세계’가 어떤 것이지 당신은 아는가? 당신에게 그것을 내 거울 속에서 보여줄까? 이 세계: 시작도 끝도 없는 괴물같은 에너지. 더 커지지도 더 작아지지도 않는, 스스로를 써버리지도 않고 단지 변화시키기만 하는 확고한 쇠같은 크기의 힘. 전체적으로 크기가 변동이 없으며, 지출도 없고 손실도 없는, 그러나 마찬가지로 증가도 없고 소득도 없는 가구(家口). 경계처럼 ‘무’에 의해 둘러싸인 것. 흐릿하고 낭비된 어떤 것도 아니고, 끝없이 확대된 어떤 것도 아니며, 확정적인 공간에 확정적인 힘으로서 놓여있는, 여기저기서 ‘비위질’ 수도 있는 공간이 아니고, 전체에 스며있는 힘으로서, 힘의 움직임이요 힘의 파동으로서, 하나이면서 다수(多數)이고, 여기서는 늘지만 저기서는 줄어드는 것. 함께 흐르고 몰려가며, 영원히 변하고 영원히 물러가며, 엄청난 시간 후에 회귀하고 그 나름의 썰물과 밀물을 가진 힘의 바다. 단순한 형태로부터 가장 복잡한 형태로 나아가며, 가장 고요하고 경직되고 차가운 형태에서부터 가장 뜨겁고 격동하고 자기모순적인 형태로 나아갔다가 이 풍요로움으로부터 다시 단순한 것으로 귀향하는, 모순들의 유희로부터 합치의 즐거움으로 되돌아오는, 그 과정과 그 세월의 이러한 획일성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하는, 영원히 회귀하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축복하는, 만족을 모르고 혐오를 모르고 싫증을 모르는 생성으로서 스스로를 축복하는. 이것, 영원히 자신을 창조하고 영원히 자신을 파괴하는 나의 디오니소스적 세계, 이 이중의 기분좋은 즐거움의 신비한 세계, 나의 ‘선악을 넘어서’, 목표가 없으며, 만일 있다면 순환의 즐거움 그 자체인. 의지가 없으며 만일 있다면 동그라미가 스스로에게 호의를 느끼는. 이러한 세계의 이름을 당신들은 원하는가?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을? 당신들에게 또한 빛을 원하는가, 그대 가장 잘 숨겨져 있고 가장 강하며 가장 대담하고 가장 자정과도 같은(most midnightly) 사람들아?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며, 그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대들 또한 이 힘에의 의지이며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9주> 들뢰즈와 가따리 I ---기본 개념들
◆ 코드: 반복되는 행동의 패턴을 말한다.
코드는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정의된다.(TP, 313)
코드의 변이가 있는 곳에서는 단순한 첨가가 아니라 잉여가치 같은 새로운 차원(평면)의 구성이 일어난다.(TP, 314)
◆ 환경
물질적 자연의 부분 중에서 코드화된 부분을 말한다. 그러나 절대적 반복, 즉 절대적 코드화는 없기 때문에 환경은 닫혀 있지 않고 열려있으며 변한다.
모든 환경은 진동한다. 구성요소의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구성되는 시공간의 블록인 것이다. 예컨대 살아있는 것은 물질(materials)로 구성된 외적 환경, 구성요소 및 구성물질로 이루어진 내적 환경, 막이나 경계로 이루어진 중간환경, 에너지원이나 행위-인식으로 이루어진 병합환경을 갖는다. 모든 환경은 코드화되어있는데 코드는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정의된다. 그러나 각 코드는 항상 코드변환(transcoding, transduction)의 상태에 있다.(TP, 313)
환경은 혼돈(chaos)에 열려있다.
환경은 혼돈에 열려있다. 혼돈은 소진과 침입의 위협을 가한다. 율동(리듬)은 혼돈에 대한 환경의 대답이다. 혼돈과 율동이 공유하는 것은 ‘사이’이다. 두 환경의 사이, 율동-혼돈 혹은, 캐오스모스이다. (TP, 313)
환경이란 다른 각도에서 보면 형태가 갖추어진 물질(formed substance)에 다름 아니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형식’(형태)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코드이다.
형태와 물질(substance), 코드들, 환경들은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TP, 502)
* 주의: matter 와 substance의 차이
둘 다 ‘물질’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에 번역으로는 잘 구분이 안된다. substance란 형태가 부여된 matter이다. “Substances are nothing other than formed matters."(TP, 41) 예를 들면, 잉크병에 들은 잉크는 아직 형태가 부여되지 않은 것이기에 (병의 형태는 별도이다) matter에 해당하지만 흰 종이 위에 일정한 형태로 배열되어 굳어진 잉크--문자--는 substance이다.
◆ 층(strata)
코드들(환경들)이 서로 접합(articulation)되어 층(strata)을 이룬다. 그런데 층을 구성하는 접합은 항상 이중접합(이중협격)이다. 접합되는 것은 내용과 표현이다. 형식과 물질은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반면에 내용과 표현은 실질적으로 구분된다. 내용의 접합과 표현의 접합에서 내용과 표현은 각각 고유한 형식과 물질을 갖는다. 내용과 표현 사이에는 상응관계도 없고 인과관계도 없으며 기표-기의 관계도 없다. 양자 사이에는 실질적 구분이 존재하고, 상호 전제가 존재하고, 동형성(isomorphy)만이 있을 뿐이다.
◆ 코드화(coding), 위로부터의 코드화(overcoding), 탈코드화(decoding)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코드화란 반복의 패턴을 부여하는 것을 말하며, 탈코드화란 그 패턴의 소멸을 뜻한다. 위로부터의 코드화란 접합된 여러 코드들을 하나의 통일성 속에 묶어 놓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권력이 개입된다. 국가의 성립은 이러한 위로부터의 코드화의 대표적 경우이다. 뒤에서 살펴볼 리조움(뿌리줄기)이나 다수성(multiplicity)은 위로부터의 코드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 영토, 영토화
환경구성요소들이 방향성(직선의 모양을 상상할 것--강사)을 잃고 차원성(평면의 모양을 상상할 것)을 띨 때, 기능적이기를 그치고 표현적이 될 때 바로 영토가 존재한다. 율동이 표현성을 가질 때 영토가 존재한다. 영토를 정의하는 것은 표현물들(matters of expression)(성질들)의 출현이다. 새나 물고기에 있어서 색의 예를 들어보자. 색은 내부의 호르몬 상태와 연관된 막 상태이다. 그러나 색은 일정한 유형의 행동(성적 흥분, 공격성, 도망)에 묶인 한에서는 기능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반면에 색은 영토적 혹은 더 정확하게는 영토화하는 표징--즉 서명signature--인 시간적 항상성과 공간적 넓이를 획득할 때 표현적이 된다. 문제는 색이 영토에서 예전의 기능을 다시 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느냐가 아니다. 후자는 분명하다. 그러나 기능의 이러한 재조직은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고 있는 요소가 표현적이 되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그 의미는 영토를 표시하는 것임을 함축한다.(TP, 315)
영토는 실상 환경과 율동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과 율동을 “영토화하는” 행동이다. 영토는 환경과 율동의 영토화의 산물이다.
◆ 아쌍블라주(assemblage)
<영토와 아쌍블라주>
아쌍블라주는 환경으로부터 영토를 추출해냄으로써 시작한다. 모든 아쌍블라주는 기본적으로 영토적이다. 영토가 아쌍블라주를 만든다. 아쌍블라주는 영토적인 한에서 여전히 층에 속한다. 즉 내용과 표현이 구분되는 면에서 층에 속한다.
<층을 넘어선 아쌍블라주--첫 번째 분할>
아쌍블라주가 층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표현이 기호체계, 즉 기호의 체제(a regime of signs)가 되고 내용이 실제 행위의 체제(pragmatic system), 즉 능동적 행동과 수동적 겪음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semiotic system / pragmatic system)이 모든 아쌍블라주의 첫 번째 분할이다. 그것은 기계적(machinic) 아쌍블라주(pragmata의 측면)인 동시에 불가분하게 언표(enunciation)의 아쌍블라주(semiotic system의 측면)이다. 각 경우마다 말해진 것과 행해진 것을 모두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층을 넘어선 아쌍블라주--‘비물질적 변환’>
진술 혹은 표현들(쉽게 말하자면 말해진 것--강사)이 몸들(물체들) 혹은 내용들(pragmata--강사)에 속성들로 “귀속되는”(attributed) 비물질적 변환(incorporeal transformation)은 층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비물질적 변환에 대해서는 나중에 들뢰즈?가따리의 언어이론에서 더 자세히 설명할 것임--강사). 층에서는 표현들이 기호들을 구성하지 않으며 내용들도 실제 행위(pragmata)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호들이 표현하고 실제의 일로 귀속되는 비물질적 변환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쌍블라주는 내용과 표현의 구분이 유효한 정도만큼 층에 속한다. 우리는 기호의 체제들과 실제 행위의 체제들을 그 나름의 층으로, 앞에서 언급한 광의의 의미의 층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과 표현의 구분이 새로운 모습을 띠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좁은 의미의 층과는 다른 것 속에 있는 것이다. (TP, 504)
<층을 넘어선 아쌍블라주--두 번째 분할>
영토성(내용과 표현 포함)의 측면과 함께 영토를 가로지르고 가만있게 하지 않는, 탈영토화의 선들에 의하여 구성된다. 이 선들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선들은 영토적 아쌍블라주를 다른 아쌍블라주로 열어 놓는다. 다른 선들은 아쌍블라주의 영토성에 직접 작용하여 그것을 태곳적부터 있었거나 장차 올 땅(land)으로 열어 놓는다(예를 들어, 독일 가곡에서 혹은 낭만주의 예술 일반에서 영토와 땅의 게임). 또 다른 선들은 아쌍블라주를 그것들이 발동시키는 추상적이고 우주적인 기계로 열어 놓는다. 아쌍블라주의 영토성은 환경의 일정한 탈코드화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탈영토화의 선들에 의해서 확대된다. 코드가 탈코드화로부터 분리 불가능하듯이 영토는 탈영토화로부터 분리 불가능하다.
<요약>
아쌍블라주는 4가(價)적이다. 1) 내용과 표현 2) 영토와 탈영토화.
◆ 탈영토화
탈영토화는 영토를 떠나는 운동이다. 그것은 탈주선(a line of flight)의 작동이다.
1) 탈영토화는 탈주선을 가로막는 보상적 재영토화에 의하여 덧씌워질 수 있다. 이럴 때 탈영토화는 부정적이라고 불린다. 모든 것이 재영토화로 쓰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잃어버린 영토를 “대표”(stand for)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존재, 어떤 대상, 어떤 책, 어떤 기구나 체제를 재영토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가기구는 영토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것은 실상 탈영토화를 수행하며, 다만 이는 즉시 재산, 노동, 화폐에의 재영토화에 의하여 덧씌워진다.
2) 탈영토화가 긍정적(적극적)이 될 경우. 바꾸어 말하면 탈영토화가 재영토화를 누르고 재영토화는 이차적 역할만 하는 경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긍정성은 상대적인 것으로 남는다. 그것이 그리는 탈주선은 구획되어 있고 연속적인 “절차들”로 나뉘며 블랙홀들로 가라앉고 심지어는 일반화된 블랙홀(큰 재난)로 끝나기 때문이다. 수동적 겪음(passion) 및 의식과 연관된 탈영토화가 일어나는 주체적 기호체제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 탈영토화는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긍정적이다.
3) 절대적 탈영토화
절대적 탈영토화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여기서 “절대적”이란 무슨 뜻인가? 우리는 먼저 탈영토화, 영토, 재영토화, 그리고 대지 사이의 관계들을 더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 영토 자체는 영토를 안에서부터 움직이는 탈영토화의 벡터들과 분리할 수 없다. (...) 영토적 아쌍블라주 자체가 다른 유형의 아쌍블라주들로 열려 있거나 그것에 의해 끌려가기 때문이다. 둘째, 탈영토화는 다시 상관되는 재영토화와 분리할 수 없다. 탈영토화는 단순하지 않으며 항상 다수적이고 복합적이다. 그것이 동시에 여러 개의 형태들에 참여하기 때문에만이 아니라 그것이 독특한 속도와 운동을 수렴시켜서 그것을 기반으로 일정한 순간에 “탈영토화된 요소”와 “탈영토화하는 요소”를 할당할 수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이제, 본원적 작용(original operation)으로서의 재영토화는 영토로의 회귀를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이 탈영토화 자체에 내재하는 이 차별적 관계들을, 탈주선에 내재하는 이 다수성을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땅은 탈영토화의 반대가 결코 아니다. 이는 “the natal"의 신비에서 이미 보여질 수 있는데, 여기서 열렬하고 탈중심적이며 강렬한 초점은 영토의 바깥에 있으며, 탈영토화의 운동에서만 존재한다. 대지, 빙하적인 것(the glacial)은 오히려 최고의 <탈영토화>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우주>에 속하며, 인간존재가 그것을 통해 우주의 힘을 따오는 물질로 스스로를 제시한다. 우리는 탈영토화된 것으로서 대지가 그 자체로 탈영토화의 엄밀한 상관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탈영토화가 대지의 창조자라고--단순한 재영토화가 아니라 새로운 땅과 우주의 창조자라고 불릴 수 있는 정도로.
이것이 “절대적인”의 의미다. 절대적인 것은 어떤 초월적인 것이나 무차별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주어진 (상대적인) 양들을 초과하는 양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아니다. 상대적인 운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유형의 운동을 표현할 뿐이다. 운동은 그 양과 속도가 어떻든 다수적인(multiple) 것으로 간주된 “하나의” 몸(body)을 그것이 소용돌이의 방식으로 차지하고 있는 매끄러운 공간과 연관시킬 때 절대적이다. 운동은 그 양과 속도가 어떻든 <일자>로 간주된 몸을 그 몸이 움직이는 결이 진 공간, 비록 가상적일지언정 직선들을 가지고 측정하는 결이 진 공간과 연관시킬 때 상대적이다. 탈영토화는 두 번째 경우에 상응하여 탈주선을 방해하는 일차적 재영토화를 통하여 작동하거나 탈주선들을 축소시키기 위하여 구획작업을 하는 이차적 재영토화를 통하여 작동할 때 부정적이거나 상대적이다(그러나 이미 효과적이다). 탈영토화는 첫 번째 경우에 상응하여 새로운 대지를 창조할 때 바꾸어 말하면 탈주선들을 연결시키고 추상적인 활력선(an abstract vital line)의 차원(power)으로 끌어올리거나 공존지속성의 평면(a plane of consistency)을 그릴 때 절대적이다.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절대적 탈영토화는 그것이 초월적이 아니라는 바로 그 이유로 반드시 상대적 탈영토화에 의해서 진행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상대적 혹은 부정적 탈영토화도 작동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포괄적인” 어떤 것으로, 대지를 위로부터 코드화하고 탈주선들을 (창조하기 위하여 결합시키는 대신에) 봉합하여 정지시키고 파괴하는 총체화하는 어떤 것으로 만든다. (...) 그리하여 본래적으로 부정적인 혹은 심지어는 상대적인 탈영토화에서도 한계적으로 절대적인 것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전환점에서 탈주선들은 방해받고 구획될 뿐만 아니라 파괴 혹은 죽음의 선들로 바뀐다. 여기에 걸린 것은 실로 절대적인 것 속의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다. 대지가 사방에서 에워싼 매장(埋葬) 및 자살 조직의 대상으로서 띠가 둘러지고 둘러싸이고 위로부터 코드화되고 봉합되느냐 아니면 대지가 공고화되고(consolidated) <우주>와 연결되며 생성들로서 그것을 가로지르는 창조의 선들을 따라서 우주 속으로 넣어지느냐이다(니체의 표현: 대지가 빛이 되어라...). (TP, 508-510)
◆ 리조움
층뿐만 아니라 아쌍블라주들도 선들의 복합이다. 선의 첫 번째 상태 혹은 첫째 종류의 선을 밝혀 보자면 이렇다. 선은 점에 종속된다. 사선은 수평선과 수직선에 종속된다. 선은 형상적이든 아니든 윤곽을 구성한다. 그것이 구성하는 공간은 결이 진 공간이다. 그것이 구성하는 셀 수 있는 다수성은 항상 우월하고 보충적인 차원에 존재하는 일자(一者)에 종속된다. 이러한 유형의 선들은 몰적이며 구획된, 원형의, 이원적, 수상(樹狀)의 체제를 구성한다.
두 번째 종류는 퍽 다른 분자적인 것으로서 “리조움” 유형의 선이다. 사선은 스스로를 해방시키며, 부수거나 뒤튼다. 사선은 이제 윤곽을 구성하지 않으며, 사물들 사이를, 지점들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그것은 매끄러운 공간에 속한다. 그것은 하나의 평면을 그려내는데, 이 평면은 그것을 가로지르는 차원들 말고는 다른 차원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구성하는 다수성은 일자에 종속되지 않으며, 자기 나름의 공존지속성(consistency)을 띤다. 이는 계급의 다수성들이 아니라 대중 혹은 무리의 다수성들이다. 규범적이고 법적인 다수성들이 아니라 변칙적이고 유목적인 다수성들이다. 생성의 다수성들이며, 변환의 다수성들이지, 셀 수 있는 원소들도 아니고 질서지워진 관계들도 아니다. 엄정 집합(exact aggregate)이 아니라 퍼지(fuzzy) 집합이다. (...)
그러나 일자와 다수적인 것(the multiple) 사이의 대립을 다수성들의 유형들간의 구분으로 대치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두 유형간의 구분은 하나가 다른 것에 내재하는 것을 미리 배제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가 다른 것으로부터 자기 나름으로 방식으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다수성들은 나무모양이고 다른 것들은 아니라는 식이라기보다는 다수성들의 수상화가 존재한다느 것이 초점이다. 이것이, 리조움을 따라 흩어져 있는 블랙홀들이 서로 공명하기 시작할 때나, 그 줄기들이 (특히 얼굴의 경우에 우리가 보았듯이) 공간을 모든 방향으로 결지어서 비교가능하고 분할가능하고 동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구획들을 형성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는 또한, “대중” 운동 혹은 분자적 흐름이 그것을 구획하고 정류(整流)하는 축적과 정지의 지점들에서 결합할 때 일어난다. 그러나 반대로 그리고 비대칭적으로 리조움의 줄기들은 항상 나무에 작별을 고하며 대중과 흐름은 나무에서 나무로 뛰고 나무를 뿌리뽑는 연관들을 창안하면서 항상 달아난다. 이것이 바로 공간을 매끄럽게 하기이며, 이는 다시 결이 진 공간에 재작용한다. 심지어는 그리고 특히 영토들이 이 심층적인 운동들에 의하여 동요한다. 언어도 그렇다. 언어의 나무들은 피는 눈과 리조움들에 의하여 뒤흔들린다. 그리하여 리조움의 선들은 그것을 구획하고 심지어는 결짓는 나무의 선들과 그것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 탈주 및 파열의 선들 사이에서 동요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 개의 선들로 구성되는데 각 선은 그 위험을 지닌다. 우리를 옥죄며 우리에게 동질적 공간의 결들을 부과하는 구획된 선들뿐만 아니라 이미 이 미시적 블랙홀들을 나르는 분자적 선들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항상 그 창조적 가능성을 버리고 죽음의 선으로 전환될 위험, 순전한 파괴의 선(파시즘)으로 전환될 위험을 감수하는 탈주의 선들도 그렇다. (TP, 505-506)
◆ 기계, 전쟁기계
들뢰즈와 가따리는 기계와 관련하여 두 가지 관점을 비판한다. 하나는 기계론자(mechanists)들의 견해로서 이들은 단순히 부분들의 조립으로 본다. 다른 하나는 활력론자들(vitalists)의 견해로서 이는 기계를 생물체에 동화시키거나, 생물체를 기계에 동화시킨다. 이 두 관점이 공히 가지고있는 문제점은 대상을 통일성(unity, 혹은 일자에 의한 위로부터의 코드화)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들뢰즈?가따리가 재구축한 기계 개념은 기술공학적 기계(,the technical machine, 상식적인 의미의 기계)를 넘어선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다수성의 관점에 바탕을 둔 것이며, 통일성이 구현하는 폐쇄성으로부터의 해방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가따리는 “영토적 아쌍블라주가 (자연적 조건에서든 인위적 조건에서든) 탈영토화의 운동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하나의 기계가 풀려나졌다고 말한다”(TP, 333)라고 한다.
다른 한편 그들의 기계 개념은 그 독특한 언표(enunciation)의 힘에 착목한 것이다. 언표란 예의 비물질적 변형을 일으키는 표현(말함인 동시에 행함인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앞의 내용--“그것은 기계적(machinic) 아쌍블라주(pragmata의 측면)인 동시에 불가분하게 언표(enunciation)의 아쌍블라주(semiotic system의 측면)이다”--참조.
전쟁기계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탈영토화의 양자의 발산이 목적인 기계를 말한다. 즉 변이와 생성이 목적인 기계이다. 전쟁은 변이가 아니라 변이의 실패이다. 전쟁기계가 변화시키는 힘을 잃었을 때 남는 유일한 목적이 전쟁이다. 이럴 때 국가에 의하여 전유되거나 그 자체를 국가기구로 구축한다. 파괴만을 하는 것으로
전쟁기계는 법과는 아주 다른 법(nomos)이다. 국가형태는 자기자신을 재생산하며, 자기자신에 동일하게 남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서 전쟁기계는 변형 속에서만 존재한다. 기술적 창안뿐만 아니라 산업혁신에서, 종교적 창조뿐만 아니라 상업적 유통에서, 이러한 흐름들과 조류들은 이차적으로만 국가에 의하여 전유되도록 허용한다. (TP, 360)
◆ 블랙홀
이는 탈영토화가 폐쇄되는 경우이다. 이는 때이르거나 극히 갑작스런 탈영토화의 조건에서, 경로들이 봉쇄될 때 일어난다. 이럴 때 기계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개별적인” 집단효과를 발한다. 들뢰즈?가따리는 혁신적 과정의 해방을 위해서는 우선 블랙홀로 떨어지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반면에 블랙홀들이 서로 공명하거나 금제(inhibition)들이 서로 봉합되어 반향하면 공존지속성으로 열려져 나가는 대신에 아쌍블라주의 폐쇄가 일어난다. 마치 진공 속에 탈영토화되는 것처럼. 들뢰즈?가따리는 기계란 항상 아쌍블라주를, 영토를 열고 닫는 독특한 열쇠라고 한다.
<10주> 들뢰즈와 가따리 II
1. ‘비물질적 변환’과 ‘소수 언어’** 이는 미발표 원고의 일부를 조금 수정한 것입니다.
가. ‘의미’의 의미
의미에 관한 들뢰즈의 견해는 리비스의 견해와 여러 모로 유사하다. 그는 언어이론가들이 흔히들 말하는 문장의 세 가지 차원 하나는 지칭(denotation) 혹은 지시(indication)로서 진술문장이 외부의 사태를 지칭하는 측면을 말한다. 둘째는 발현(manifestation)으로서 진술문장에서 드러나는 화자(말하는 개인)의 욕망이나 신념을 나타냄을 말한다. (이는 첫 번째 것에 부차적이다. 사물이 있어야 그에 대한 욕망이나 신념이 생기기 때문이다.) 셋째는 기호작용(signification)으로서 이는 단어(기표)를 보편적 혹은 일반적 개념(기의)과 관계짓는 문제이다.
에 ‘의미’의 차원을 덧붙인다. 여기서 ‘의미’는 “진술문장이 표현하는 바”(the expressed of the proposition)로서 문장과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그 안에 내재한다. 그러나 진술문장 그 자체는 아니고 그 진술문장이 지칭하는 사태도 아니다. 지시의 차원에서 진술문장은 고정된 것으로 포착된 사물들이나 사태를 지시하는 반면에, 의미의 차원은 이 사물들의 변화, 사태의 변화의 차원이다. 이것을 비교적 집약하여 표현한 대목을 보자.
[의미]는 바로 진술하는 문장과 사물의 경계이다. 그것은 존재 바깥의 어떤 것인 동시에 내재하는 것이다. 즉 내재에 걸맞는 최소존재이다. 그것이 “일어남”(event)인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다. 즉 일어남이 사태(a state of affairs) 안의 시공간적 실현과는 혼동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일어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지는 않을 것이다. 일어남이 의미 자체인 것이다. 일어남은 본질적으로 언어에 속한다. 그것은 언어와 본질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사물들에 대하여 말해지는 것이다.(?의미의 논리?The Logic of Sens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0, 22면) 들뢰즈의 언어관을 가장 집약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은 가따리와 공동저술한 Gilles Deleuze & Fe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 Brian Massumi (London: University of Minnessota Press, 1980)의 4장 "November 20, 1923--Postulates of Linguistics"이다. 이 외에 이 글에 인용된 다른 책은 들뢰즈 혼자 저술한 The Logic of Sense, tr. Mark Lester and Charles Stivale, ed. Constatin V. Bounda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0)이다. 지금부터 전자는 ?천 개의 고원?으로 후자는 ?의미의 논리?로 지칭하기로 한다.
독자들은 아마 다소 어지러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정신을 가다듬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추려 보자. 1) 의미는 기호도 아니고 사물도 아니다. 2) ‘의미’는 물리적 공간에 있지 않으나(“존재 바깥”) 현실적이다(“내재). 3) ‘의미’ 자체인 ”일어남“은 물리적 공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사태 안의 시공간적 실현“)과는 다르다. 4) ‘의미’(일어남)는 언어와 본질적 관계를 맺는다.
들뢰즈가 말하는 ”일어남“(event)이란 ‘순순한 생성’을 일컫는 다른 말이다. ‘생성’이란 말은 리비스의 ‘삶’(Life)처럼 들뢰즈와 가따리가 창조적 변화를 집약적으로 담아 표현하는 말이다. 양자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전자가 창조의 활력(에너지)의 측면을 주로 지칭한다면 후자는 그 과정을 주로 지칭하며, 그 힘을 표현하는 말로는 불어 pouvoir(권력)와 대립되는 puissance(잠재력)라는 말을 사용한다. 영어로는 양자가 동일하게 power로 번역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컨대 들뢰즈와 가따리가 “<권력>(Pouvoir) 및 <지배>와는 다른 영역에 속하는 생성의 힘(puissance)”(?천 개의 고원?, 106)이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삶은 성장이며 성장은 변화라는 진실”(?살아있는 원리?, 44)이라고 한 리비스와 비슷한 취지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들뢰즈와 가따리에게 있어서 <권력>을 행사하는 최고의 조직은 국가이다. 국가를 반(反)창조적인 조직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 들 세 명은 견해가 같다. 다만 리비스가 국가의 반창조성 자체를 깊이 파고 들어본 적이 없는 반면에, 들뢰즈와 가따리는 실상 ?천 개의 고원?에서 국가비판을 그 작업의 중요한 일부로 삼고 있다.
나. 언어가 행하는 일
리비스에게서 시적 언어사용은 진술이나 전달이 아니라 구현(enacting, 혹은 실행)의 언어였다면, 들뢰즈와 가따리에게는 모든 단어가 근본적으로 명령어(order-word)이다. 리비스가 모든 단어에 의미를 의도하는 사람과 그에 응하는 사람의 만남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고 보았듯이 들뢰즈는 모든 단어는 명하는 사람과 그에 응하는 사람의 만남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발화는 (자유)간접화법이다. 이미 누가 말한 것을 (인용표시 없이) 다시 말하는 것이다. 명령어라는 개념은 언어를 정보전달이나 의사소통의 관점보다도 그 수행성의 관점 즉 언어행위론의 관점에서 보게 해준다. 대부분의 현대 언어학에서는 이러한 수행성을 언어외적 요소로 본다.
정보는 명령을 발하고 전달하고 준수하는 데 필요한 최소치일 뿐이다. 우리는 “불이야!”를 “풀어라!”와 혼동하지 않을 정도의, 아니면 루이스 캐롤이 묘사한 선생과 학생의 불행한 상황(계단의 맨 위에 있는 선생이 질문을 하면 그 질문은 하인에 의하여 아래로 전해지는데, 한 단씩 내려올 때마다 질문이 왜곡되며, 저 아래 마당에 있는 학생이 한 대답도 되돌아가면서 왜곡된다)을 피할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언어는 삶이 아니다. 언어는 삶에 명령을 내린다. 삶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듣고 기다린다. 모든 명령어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리는 것조차도 작은 사형선고를 포함한다. 카프카가 말한 바의 심판을. (?천 개의 고원?, 76면)
이 명령어라는 개념은 언어가 현실에 작용하는 독특한 방식을 설명한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판사의 선고를 예로 든다. 판사의 선고는 선고되는 즉시 현실에 어떤 변형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 변형은 선고당시에는 아직 물질 세계에 물질적으로 어떤 변화를 주지는 않는다. 이는 나중에 처형의 형태로 실현된다. 따라서 선고 당시, 즉 언표의 순간에 일어난 변환을 그는 ‘비물질적 변환’(noncorporeal transformation)이라고 부른다.
이 ‘비물질적 변환’이 함축하는 바는, 언어가 현실을 뒤따라가는 ‘거울’이 아니라 현실을 앞서가고 현실을 추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따리가 드는 예는 레닌의 “슬로건에 관하여”이다.
이 텍스트는,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집단으로 존재할 조건이 생기기 전에 대중으로부터 언표의 집합(assemblage)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도출해낸 비물질적 변환을 구성한다.(?천 개의 고원?, 83)
리비스가 말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아직 구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예감을 인간에게 형성시키는 일”(5주 강좌 참조)이 과연 이것과 얼마나 크게 다를까? 어쨌든 적어도 리비스나 들뢰즈와 가따리나 언어의 물리적이지 않은 어떤 본질이 재현, 정보전달, 의사소통의 차원을 넘어서 현실에 미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비물질적 변환’이 바로 언표(enunciation) 혹은 언표적 아쌍블라주가 표현하는 바이다.
다. ‘소수 언어’와 ‘다수 언어’
‘명령어’는 ‘만남’과는 달리 억압의 요소를 갖는다. 거기서 권력관계가 느껴지는 것이다. 실제로 들뢰즈와 가따리가 진정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명령어’를 ‘통과암호’(password)로 바꾸고, ‘명령어’에 담긴 죽음의 선고(억압)를 창조적 행동으로 바꾸는 것이다. 언어 자체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적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소수 언어’(minor language)와 ‘다수 언어’(major language)의 구분이다. 리비스의 ‘시적 언어사용’과 ‘산문적 언어사용’이 그랬듯이, ‘소수 언어’와 ‘다수 언어’도 실질적으로 구분되는 별개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고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을 지칭한다. ‘다수 언어’란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들에서 불변적?상수(常數)적 요소들을 추출하여 그것을 통해 언어를 동질화하고 표준화하는 언어사용을 말한다. 이에 반해서 ‘소수 언어’는 언어의 변수들을 계속적으로 변화하고 변동하게 하여 탈표준화하고 탈중심화하는 언어사용 방식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불변적 혹은 의무적 규칙을 갖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선택적 규칙을 갖는데, 이 규칙은 변주 자체와 함께 부단하게 변한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예컨대 사투리와 같은 별개의 ‘소수 언어’를 창출하는 것보다--이는 상대적 ‘다수 언어’를 만드는 꼴이 된다--표준화되고 동질화된 ‘다수 언어’를 소수적으로 사용하는 데, 즉 소수화(minorization)하는 데 더 의미를 둔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언어 영역에서의 창조성이다. 소수화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연속적인 변동의 상태에 놓기’이며, 그 결과물은 ‘변동의 연속체’이다. 연속적으로 변동시킨다는 것은 계속해서 새로운 어휘를 주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과정을 자기 나름의 ‘문체’를 갖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문체’로 어떤 고정된 것을 연상하면 잘못이다. 기존의 언어에서 불변적?상수적 요소로 되어있는 것을 변수로 만들고 그 변수들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체로 만드는 것이 바로 문체이기 때문이다.
소수적 언어사용은 “더 이상 선행하는 범주들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천 개의 고원?, 104면) 언어사용이기에,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예컨대 엉터리 난해시에서 보는 바와 같은 마구잡이 식의 탈표준화, 탈영토화를 창조적인 소수화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비평가인 리비스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리비스의 견해에 따르면 이 척도는 예의 ‘만남’의 장소인 의미 속에서 개인들이 서로 만나는 가운데 그 상호협동의 산물로 생겨난다. 쉽게 말하면 작품들을 놓고 서로 토론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것이다. 이 척도는 따라서 지극히 유동적일 수밖에 없으며, 늘 수정될 가능성에 열려 있다. 이러한 유동성을 포착하는 데 적합한 훈련과 기율을 쌓지 못한 사람이라면 일정한 고정된 척도를 자신의 재산으로 삼은 다음 그것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세련화하거나 아니면 더 고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을 것이다. 물론 유동적인 척도에 대한 감각이 늘 균형있게 열려있기는 힘든 일이지만, ‘다수 언어’가 대표하는 미리 정해진 척도를 경계하는 마음을 풀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따리가 ‘다수 언어’를 권력의 언어이자 지배의 언어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들에게 권력(pouvoir)과 생성의 힘(puissance)은 언어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의 다른 영역에서도 대립한다. 권력을 대표하는 조직은 국가이고, 생성의 힘을 대표하는 것은 소수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소수자화된다는 것은 하나의 권력에 다른 권력을 맞세우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작업이 된다. 권력에 권력을 맞세우는 기획은 다수 언어를 다수 언어로 맞세우는 기획과 상응한다.
앞에서 들뢰즈와 가따리가 레닌의 “슬로건에 관하여”를 언급한 취지를 다시 살펴보자. 그 취지는 “모든 개별 슬로건은 특정 정세의 특수한 측면들의 총체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라는 문장에 함축되어 있다. “특정 정세의 특수한 측면들의 총체”는 시시각각으로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모든 슬로건들은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상황에 밀착하여 임시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기존의 것에 구속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부단히 슬로건을 새롭게 작성하는 것--이것이 바로 레닌이 슬로건 작성에서 보여준 창조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와 가따리는 레닌의 정치적 텍스트를 언어의 특성을 설명하는 데, 더 나아가 “정치가 얼마나 철저하게 언어를 안으로부터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2. 재현과 표현 이 부분은 직접 인용이든 간접인용이든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음.
가. 차이와 동일성
현대 사상은 재현의 실패에서, 동일성의 상실에서, 동일한 것의 재현 아래 활동하는 모든 세력들의 발견으로부터 탄생하였다. 현대 세계는 씨뮬라크르의 세계이다. “씨뮬라크럼은 단순한 복사물이 아니라 원형을 전복함으로서 모든 복사물들을 전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사유는 공격이 된다.”
인간은 신보다 오래 살지 못했으며, 주체의 동일성은 실체의 동일성보다 오래 가지 못했다. 모든 동일성들은 더 심오한 차이와 반복의 게임에 의하여 씨뮬레이트될 뿐이며 시각적 ‘효과’로서 창출될 뿐이다. 우리는 차이 자체를 그것을 동일자(the Same)로 환원시키는 재현의 형식들과 무관하게 사유하고, 차이물과 차이물의 관계를 그 차이물들로 하여금 부정적인 것을 통과하게 만드는 형식들과 무관하게 사유하기를 제안한다. (XIX))
나. 동일성/ 재현 / 매개 /이성
동일성의 우위가 재현의 세계를 정의한다. 재현이란 차이를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한편으로 대상을 동일한 것으로 상정하고(A는 A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를 동일한 것으로 상정한다(<자아>=<자아>). 즉 재현은 동일성의 형식으로서의 개념의 형식이다.
재현은 모든 것, 모든 차이를 매개하여 동일성으로 환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물의 교류를 매개하여 질적인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화폐와 비교해 보라) 이 경우에 매개의 토대가 되는 것은 ‘충분한 이성’(sufficient reason)이라고 한다. 재현의 매개물인 한에서의 ‘이성’의 네 주요한 측면들은 ① 개념의 동일성 ② 판단에서의 유추 ③ 술어의 대립 ④ 인식에서의 유사성이다.
다. 반영
반영의 개념으로서의 차이는 재현의 모든 요구들에의 완전한 종속을 입증하며, 따라서 ‘유기적 재현’이 된다. 반영의 개념에서 매개하는 차이와 매개된 차이는 실상 개념의 동일성, 술어의 대립, 판단의 유추성, 인식의 유사성에 온전히 종속된다. 여기서 우리는 재현의 필연적으로 4원적 성격을 재발견한다. 문제는 차이가 이 모든 반영적 측면들 하에서 자신의 개념과 현실을 잃지는 않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실상 차이는 그것이 격변--유사성의 계열들 내에서의 연속성의 단절이나 유추적 구조들 내에 존재하는 건널 수 없는 틈들--을 지칭하는 정도로만 반영적이 되기를 멈추고 실질적으로 현실적인 개념을 회복한다. 차이는 격변이 되기 위해서만 반영이 되기를 멈춘다. 물론 반영이 없이는 격변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격변으로서의 차이는 유기적 재현의 겉보기만의 평형 아래서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환원불가능한 땅(근거, ground)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가? (34-5)
라. 재현의 두 종류: 유한한 재현과 무한한 재현
재현이 자체 내에서 무한을 발견할 때 그것은 유기적 재현이 아니라 주연적(orgiastic) 재현이 된다. 재현은 자체 내에서 조직된 것의 한계를 발견하며 평온함의 아래에서 격동과 잔인과 격정을 발견한다. 재현은 기괴함(monstrosity)을 재발견한다. 헤겔과 라이프니쯔의 경우가 이에 해당.
이제 한계의 의미 자체가 완전히 바뀐다. 더 이상 유한한 재현의 한계를 지칭하지 않으며, 유한한 규정이 주연적 재현 내에 감싸이고 배치되어서 끊임없이 생기고 없어지는 모태(자궁)를 지칭한다. 형식의 유한성이 아니라 하나의 근거로의 수렴을 지칭한다. 형식들의 구분이 아니라 근거짓는 것 과 근거지어지는 것의 상호관계를 지칭한다. 힘의 정지가 아니라 힘이 발휘되는 터전을 지칭한다. 만일 우리가 <작은 것>과 <큰 것>이라는 두 수학적 규정들을 유한한 재현의 한계들로 생각하였다면, (헤겔과) 라이프니쯔에게는 이것이 전적으로 무관한 문제이다. 무한을 건축구조학적 요소에 종속시킴으로써 작은 것과 큰 것의 문제와 무관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연적 재현이 차이를 짓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차이를 토대와 연관시키는 무한을 도입함으로써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좋은 것the Good>에 의하여 근거짓거나 고통과 노동으로 기능하는 부정성에 의하여 근거짓는다.) 요컨대 형식을 원리로 하고 유한한 것을 요소로 하는 유기적 재현(유한한 재현)과는 달리 주연적 재현(무한한 재현)은 근거(ground)를 원리로 하고 무한한 것을 요소로 한다.
마. 재현의 한계
재현은 차이가 긍정되는 세계를 포착하지 못한다. 재현은 하나의 중심만을, 하나의 퍼스펙티브만을 갖는다. 그 결과로 가짜 깊이를 갖는다. 재현은 모든 것을 매개하지만 아무 것도 동원하거나 움직이지 못한다. 운동이란 중심의 다수성, 관점들의 겹침, 여러 시각들의 얽힘, 재현을 본질적으로 뒤트는 계기들의 공존을 함축한다. 그림이나 조각은 이미 그러한 ‘뒤틂’이다.
사실 무한한 재현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법칙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 즉 한편으로는 표현된 것의 즉자성을 구성하고(A는 A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재현하는 주체의 대자성을 구성하는(<자아>=<자아>)는 동일성의 형식으로서의 개념의 형식이 그것이다. 재현에서 ‘재-’라는 말은 차이를 종속시키는 ‘동일한 것’의 개념적 형식을 뜻한다. 따라서 ‘전(前)재현적인 것’으로 정의된 직접적인 것은 재현과 관점들의 수를 늘림으로써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재현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중심으로부터 뒤틀어지고 다른 데로 돌려지고 떼어내어져야 한다. 모든 관점은 그 자체가 대상이 되어야 하거나 아니면 대상이 그 관점에 속해야 한다. 따라서 대상은 동일하지 않고 차이 속에서 갈라진다. 그리고 여기서 바라보는 주체의 시야에 있는 대상의 동일성은 사라진다. 차이가 터전이 되어야 하고 궁극적인 통일성이 되어야 한다.
바. 표현
‘표현’이라는 말로 우리는 항상 그랬듯이 표현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 사이의 비틀림 직선적인 재현적 상응관계가 아니기에 들뢰즈가 이러한 표현을 쓴 것으로 생각됨.
을 포함하되 표현되는 것이 표현하는 것과 (비록 완전히 다른 것인 양 관계하지만) 떨어져서 존재하지는 않는 그러한 관계를 포함한다. 따라서 ‘가능한’이란 말로 의미하는 것은 유사성이 아니라 감싸는 것과의 이질성 속에 감사이거나 함축되는 상태이다. 공포에 질린 얼굴은 공포에 질리게 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으며, 공포에 질리게 하는 세계의 상태를 감싼다. 모든 심리적 체계에는 현실 주위에 가능성들이 몰려든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능한 것들이란 항상 타자들(Others)이다. 타자는 그것을 구성하는 표현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몸을 대상으로 간주하고 그 귀와 눈을 해부학적 부분들로 간주할 때조차도 우리는 그것들이 표현하는 세계를 극도로 단순화할 수는 있어도 표현성을 몽땅 제거하지는 않는다. 눈은 함축된 빛이거나 가능한 빛의 표현이고 귀는 가능한 소리의 표현이다. (...) 이것이 타자를 그 자체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인위적이든 경험의 특별한 조건들--즉 표현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표현하는 것과 분리된 실존을 갖지 않는 순간--을 강조하는 것이 옳았던 이유이다. 가능한 세계의 표현으로서의 타자를.
<11주> 들뢰즈와 가따리 III** What is Philosophy?(1991)의 7장 “Percept, Affect, and Concept”의 내용을 주로 정리하였다.
◆ 자립적 지속과 보존--기념비
예술은 세계의 한 순간이 자립화되어 지속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보존되는 것이다. 예술은 이렇게 보존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보존한다. “이 세계에서 보존되는 유일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작품은 기념비이다. (163)
자립적 지속을 위해서는 첫째로 원형 혹은 재현대상(객체)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둘째로 주체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 퍼셉트, 어펙트
◆ 재료(물질)와 감각
보존되는 것은 감각(sensation)이다. 재료(material)--색, 음, 돌, 단어들--는 일정한 지점에서 감각으로 화한다. 우리는 어디부터가 감각이고 어디부터가 재료(물질)인지 알 수 없다. 양자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원리상으로 양자는 다르다. 보존되는 것은 감각이고 재료(물질)는 그 조건이다.
그러나 적어도 원리상으로는 감각은 재료와 같은 것이 아니다. 본래적으로 보존되는 것은 재료가 아니다. (재료는 사실에 따른 조건만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 조건이 충족되는 한 (즉 그 캔버스, 색, 혹은 돌이 부서져서 먼지가 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보존되는 것은 퍼쎕트이거나 어펙트이다. (166)
우리는 감각을 가지고 그리고, 조각하고, 작곡하며 쓴다. 우리는 감각을 그리고, 조각하고 작곡하며 쓴다. 퍼셉트percept로서 감각은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인식perception(지시작용)이 아니다. 만일 감각이 무언가를 닮았다면 그것은 그 감각 고유의 방법을 가지고 산출된 닮음이다. 그리고 캔버스 위의 미소는 색, 선, 색조, 명암만을 가지고 만들어진다. 만일 닮음이 예술작품에 귀신처럼 들러붙어있다면 그것은 감각이 그 재료만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재료 자체의 퍼쎕트이거나 어펙트affect이고, 유화물감의 미소이며, 불에 구운 진흙의 몸짓이고, 금속의 튀어나옴이며, 로마네스크 돌의 웅크림이고, 고딕 돌의 상승이다. 각 경우마다 재료는 아주 다양해서 (캔버스 지지대, 붓 혹은 그에 해당하는 것, 튜브 속의 물감) 실상 재료가 어디서 끝나고 감각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말하기 어렵다. (166)
재료가 감각으로 이렇게 연결될 때 혹은 재료가 감각으로 바뀔 때 재료가 표현적으로 되었다고 한다. 이럴 경우 감각이 지시하는 것은 오직 재료밖에는 없다. 감각이 만일 어떤 객체를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될 때 재현관계가 들어서게 된다.
◆ 감각의 구성
예술의 목적은 주관적 감정의 표현도 아니고 객관적 인식의 전달도 아니다. 감각의 블록을 자립화하여 지속시키는 것이다. 감각은 퍼쎕트와 어펙트로 구성된다. percept는 인식percption과 관계가 있지만 원리상으로 구분되는, 그리고 어펙트는 감정(정서, affection)과 관계가 있지만 원리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예술의 목적은 재료를 수단으로 하여 대상들에 대한 인식들로부터 그리고 인식하는 주체들의 상태로부터 퍼쎕트를 떼어오는 것이며,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변이를 뜻하는 감정에서 어펙트를 떼어오는 것이다. 즉 감각의 블록을, 순수한 감각의 존재를 추출하는 것이다. (167)
◆ 퍼쎕트
퍼쎕트는 인간 앞에 있지만 인간이 부재하는 풍경이다. (169)
자연의 비인간적 풍경(169)
세상을 가득 채우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며 우리로 하여금 생성되게 하는 인식불가능한 힘들을 인식가능하도록 하는 것--이것이바로 퍼쎕트의 정의 그 자체가 아닌가? (182)
◆ 어펙트 스피노자에게서 어펙트란 인간의 능동적 행동능력의 증감을 말한다. 능력이 증가할 때는 기쁨, 감소할 때는 슬픔이 그 어펙트이다.
...어펙트는 인간의 비인간적 생성이다. (...) 우리는 세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 생성된다. 우리는 세계를 응시(contemplate)함으로써 생성된다. 모든 것은 바라봄이며 생성이다. (169)
어펙트는 하나의 겪은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이 아니라 인간의 비인간적 생성이다. 에이허브는 모비 딕을 모방하지 않으며 펜티실리어는 행실이 나쁜 여자를 “연기”하지 않는다. 생성은 모방도 아니고 경험된 공감도 아니며 상상된 동일시조차도 아니다. 닮음이 존재하지만 생성이 닮음은 아니다. 닮음도 단지 산출된 닮음일 뿐이다. 오히려 생성은 두 감각들이 닮음이 없이 결합된 가운데 생기는 혹은 반대로 단일한 비춤 속에서 양자를 포착하는 빛의 거리에서 생기는 극단적인 접촉이다. ...그것은, 안드레 도텔이 말하기를, 하나가 다른 것으로 변환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 무언가는 오직 감각으로서만 구체화될 수 있다. 그것은 비결정의 지대이며, 식별불가능성의 지대로서, 마치 사물들, 짐승들, 인간들...이 그들의 자연적 분화에 바로 선행하는 지점에 끝없이 도달하는 듯한 것이다. 이것이 어펙트라고 불리는 것이다. <삶>만이 살아있는 것들이 소용돌이치는 그러한 지대를 창출할 수 있으며, 예술만이 그 공동창조(co-creation)의 기획 속에서 그러한 지대에 도달하고 그러한 지대를 꿰뚫을 수 있다. 이는 재료가 감각으로 바뀌는 순간 예술은 그 자체가 이러한 비결정의 지대에서 살기 때문이다. 이 지대들은 블록들이다. (173)
◆ 감각의 블록을 세우는 방식--작가의 경우
작가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어떤 통사구조를 만들어서 그 구조가 단어를 감각으로 변하게 하고 그 감각이 다시 표준 언어를 더듬거리고 떨고 소리치며 심지어는 노래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체이며 “어조”이고 감각의 언어이며 혹은 미래의 사람들을 부르는, 언어 속의 외국어이다. (176)
◆ 예술(감각)과 혁명
기념비는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을 기념하거나 찬양하지 않고, 현현(event)을 육화하는 지속적인 감각들을 미래의 귀에 대고 털어놓는다. 사람들의 항상 다시 시작되는 고통, 그들의 재창조되는 저항, 그들의 항상 재개되는 투쟁. 고통은 영원하고 혁명들은 그 승리를 지속하지 못하는 까닭에 이 모든 것이 헛될 것인가? 그러나 혁명의 승리란 혁명 자체에만 존재하는데, 혁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떨림과 껴안음과 열어줌 바로 그 속에 존재한다. 이것이 그 자체로 항상 생성의 과정에 있는 기념비를 구성한다. 마치 새 여행자가 올 때마다 돌 하나를 보태서 만드는 고분처럼. 혁명의 승리란 내재적인 것이며 혁명이 사람들 사이에 수립하는 새로운 유대에 놓여있다. 비록 이 유대가 혁명의 녹여진 재료보다 더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분열과 배반에 굴복하더라도 말이다. (176-7면)
◆ 기념비의 유형들, 혹은 감각의 복합체의 다양한 양상들 (168)
① 떨림(vibration): 이는 단순한 감각을 특징짓지만 이미 지속적이고 복합적이다.
② 껴안음(embrace or clinch): 두 감각이 서로 껴안음으로써 서로서로 공명한다.
③ 엶, 팽창(opening, distension): 두 감각이 서로 멀어지거나 풀려나는데, 그 가운데 빛, 공기, 진공이 틈입하는 방식으로 다시 합쳐진다.
◆ 예술에 대한 흔한 오해--3원적 대조
퍼쎕트 <------> 인식
어펙트 <------> 감정
감각 <------> 견해
◆
퍼쎕트와 어펙트로 이루어진 복합적 감각은 자연적· 역사적· 사회적 환경 내에서 주도적인 인식들과 감정들을 한데 모은 견해의 체계를 탈영토화한다. (197)
이는 다시 구성의 평면에 재영토화된다. 구성의 평면이란 앞에서 말한 퍼셉트와 어펙트로 구성된다. 동시에 구성의 평면은 감각을 다시 더 높은 탈영토화에 개입시킨다. 일종의 deframing을 거쳐서 이 평면을 열고 쪼개서 무한한 우주로 향하게 한다. “아마도 예술의 특수성은 무한한 것을 다시 찾고 회복하기 위하여 유한한 것을 거치는 것이리라.”(197)
◆ 철학, 과학, 예술
예술이 과학과 철학의 종합은 아니다. 세 길은 독특하며 각각 직접적이다. 철학은 개념(concept)을 통한 사유이고, 과학은 함수(function)를 통한 사유이며, 예술은 지금까지 설명된 감각을 통한 사유이다. 이 세 사유 중에 그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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