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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마키아벨리의 평전 01

by Casey,Riley 2023.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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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평전 
로베르토 리돌피 


    제7판 서문
  지금까지 되풀이해서 말해 온 것처럼, 나는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이 베어든 나의 책을 사랑한다.  또한 판이 거듭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 많은 독자들 역시 이 책을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일곱 번째의 이탈리아 판을 준비해 달라는 출판사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나는 이 책을 가능한 한 더 낫게 만들고 싶었지만 두 가지 자애가 있었다.  하나는, 약 50페이지의 범위 내에서 내용을 증보, 수정, 개작해 달라는 출판사측의 요구이었고,  두 번째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나의 시력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이었다.  하여튼 나는 이러한 상황하래서 최선을 다했으므로 독자들은 이 책 또한 변함없이 사랑해 주리라 믿는다.
  1978년 7월 7일 라 바론타에서 
  로베르토 라돌피
  좀 우울한 이야기를 덧붙여야겠다.  나는 오래 전 고문서보관서에서 문서를 다루기 시작하여,   이후 문헌학자로서 그리고 그 뒤에는 역사가로서 이러한 작업을 계속해 왔다.  처음에는 무엇보다 새로운 문서들을 발굴해서 재 간행하는  일이 나에게는 기쁨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점점 그 문서들에 담긴 의미를 꺼내는 데 더 힘을 쏟게 되었고,  결국에는 더 많은 더 나은 결과를 위하여 이 일에 전력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요즘은 문서를 한 줄씩 얽어나가노라면 때때로 줄과 줄 사이가 흐릿해 보일 정도로 눈이 침침해졌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연구를 그만 둘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초판서문
  성경에는 인간이 흙으로 빚어졌다고 씌어 있다.  진실로 모은 인간은 스스로가 태어났고  또 오랜 세월에 걸쳐 조상의 유해가 흩어져 있는 자신의 땅의 산물이다.  우리 피렌체인들은 단단하면서도 결이 고운 이회토로 만들어져 침식되기는 쉬우나 빚기는 힘든 존재와 같다.  무릇 사람이란 같은 땅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태어났을 때 서로를 이해하기가 더 쉬운 법이므로,  나는 감히 피렌체인의 정수라 할 만한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관한 이 책을 쓰고자 마음먹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언젠가부터 이러한 생각을 품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내가 아직 젊었을 시절, 데 상티스가 위대한 서기장에 대해 경탄할 만한 글을 쓰면서도 정작 그를 어쩐지 좋지 않은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을 본 이후일 것이다.  데 상티스는 마키아벨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와 흡사하다.  쾌락을 즐기는 성격에다 사교 모임에서든 난봉꾼들과는 가리지 않고 잘 어울리는 묘한데가 있었다) 그에 대한 오랜 연구와 깊은 애정, 그리고 친구 조반니 파피니의 불같은 성화로 결국 이 책은 빛을 보게 되었다.
  마키아벨리에 관한 또 하나의 책이라니! 그러나 나는  여기서 흔히 하듯이 비르투, 포르투나 개념에 관해서 혹은 (영혼보다 더) 사랑하는 조국에 대하여 모호한 말들을 늘어놓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피렌체 서기장에 대한 글들이 그렇게 넘쳐흐르는 속에서도 정작 그의 전기, 진정학도 단순히 전기 그 자체인 저술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빌라리와 톰마시니의 기념비적이고 기본적인 책들이 있지만, 그것을 전기라 말하기는 힘들다.  그 속에서 전기적인 부분은 과도한 분량의 해석적, 비판적, 역사적 내용에 파묻혀 사라져버린다.  그리하여, 독자는  그의 생애에 대한 사실들을 연속해서 파악할 수가 없으며(그 책들을 끝까지 잃어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그것을 신속히 찾아보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  빌라리는 무려 300페이지를 지나서야 마키아벨리에 관해 약간 언급하기 시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방대한 세 권짜리 저술의 여기저기에는 많지 않은 정기적 단편들이 엄청난 자료의 소용돌이 속에서 떠다니고 있다.  심지에는 새로운 전기적 냉용이 100페이지를 넘어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더욱이, 지나치게 빽빽한 내용을 담은 이 두 연구서는 단지 그 순서와 비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사료의 해석에 있어서도 종종 좀더 개선될 여지가 있으며, 특히 콤마시니의 책이 그렇다.  다른 조그만 전기들은 독창적인 연구 내용을 거의 담고 있지 않다.
  새로이 발견된 약간의 문서들을 통하여 그리고 기존의 것을 좀더 낫게 활용함으로써, 이 책에서는 마키아벨리가(가)에 대한 몇몇 사실을 수정할 수 있었다.  또 그의 저술 연대도 여기저기서 약간씩 바꾸었다.  학자들이 엄숙히 되풀이해 온 잘못들을 고쳤고 나아가서 몇 개의 중요한 사항들을 제시하였다.  바람을 쏘이고 먼지를 털어서 되살릴 만한 것은 되살렸다.  나에게는 이러하게 청소하고 복구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이로써 새로운 사실들을 얻게 되었다.  내가 앞서 말한 모호한 논의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 만사가 그렇듯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계속 바뀌는 극히 다양한 해석들을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나 스스로가 오랫동안 읽고 싶었던 책, 즉 마키아벨리의 생애에 대한 평이하고도 인간적인 서술로서 그 자신의 행동과 말을 통해 그를 그리고자 한 그러한 책을 쓰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책이 역사학적 엄격성을 지키느라 시적 호흡을 외면한 일면이 있다고 할 때, 한 시인(마키아벨리가 시인이라고 하는 것을 그 스스로가 약간의 시를 썼기 때문만도 아니요, 또한 사람들이 증오하는 그러한 유의 정치를 설파했기 때문은 더욱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시인이었다)에 대한 이야기로는 너무 빈약하지 않은가라는 우려의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1953년 12월 3일 라 바론타에서
  로베르토 리돌피
    제 3 판 서문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은 15년 전이었다.  그리고 불과 몇 달뒤에 재판이 나왔다.  그래서 초판이 인쇄중일 때 출간된 관련 연구들의 경우는 그것을 참고하거나 명기할 틈이 없었다.  뒤이어 나온 이 책의 번역본들 가운데, 옥스퍼드 대학의 세실 그레이슨이 힘들여 내놓은 번역본(런던, 루트리지 앤 케건 폴 출판사, 1963년)만이 내용을 충분히 증보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번역과 간행 사이에 긴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그만큼 책의 빛이 바랠 수 수밖에 없었다.  이 훌류안 영역본도 물론 이탈리아 재판보다는 나았지만 이미 나이르 먹고 태어난 셈이 되었다.  이 영역본은 미국에서도 재간되었는데(시카고 대학 출판부, 1963. 그러나 실제로는 1965년에 간행됨), 실제 간행까지의 시차를 이용하여 적어도 인쇄상의 조그만 오류들이라도 어는 정도 교정할 여지가 있었지만 틈을 내지 못했다.  끄틍로 에스파냐어 번역본(멕시코, 레나시미엔토 출판사, 1961)은 마키아벨리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등장 인물들의 도판이 매우 풍부하게 들어 있다는 장점 외에는 이탈리아 판들과 비교될 만한 점이 없다.
 앞서 말한대로, 이 책은 이탈리아 안팎에서 큰 환영을 받아왔다.  이렇게 독자들이 호의를 보인 이유는(군주론 헌사나 만드라골라의 확고한 연대 비정(비정) 같은) (학문적 신발견)이나 인간 마키아벨리에 대한 새로운 주장에 잇는 것이 아니라, 초판 서문에서도 말했듯이 평이한 구성으로 (나 스스로가 오랫동안 읽고 싶었던 그러한 '전기'를 썼다)는 데 있다고 믿는다.  즉 독자들은 바로 나와 똑같은 것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새로운 판을 내면서, 나는 본문의 내용 자체에는 별로 손대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나나 다른 사람들이 이럭저럭 찾아낸 약간의 새로운 사실들을 덧붙이거나 잘못된 것을 바꾸었을 따름이다.  반면 독자들 중에는 이 전기가 (학문과 예술의 조화라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까지 보려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행문은 많이 고쳤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수정하는 부담에서는 벗어나는 대신, 최근 15년 동안 나온 방대한 마키아벨리 관련 문헌들을 담기 위해 주의 내용을 상당히 확대하였다.  그래서 이 판본에서의 주의 분량은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나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순수한 전기로서 의도된 것이 때문에, 내용상의 인용은 되도록  전기적 사실이나 연대 비정, 작품의 구성 또는 마키아벨리의 저술 목록에 관계된 것으로 한정해야 마땅하다고 생각되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마 혹시 내가 종종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너무 언짢게 여기지는 말 것을 학자들이나 또는 이 책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이 점에 관해서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다.
  주가 늘어남으로써 생긴 이점도 있었다.  즉 주를 전기적 서술과는 무관한 두 개의 작은 장(장)과 함께 제2부로 몰아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는 제1부의 본문을 읽어나가는 동안 제2부를 수시로 참조함으로써 마치 본문 아래의 각주를 보는 것처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란 학술적 저작에서는 언제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학술적 저작만은 아닌 이 책의 경우 그 동안 편집상의 이유로 그것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못했다.  나의 뜻으로 그리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똑같은 얼굴이기는 하지만 마치 오랜 지병으로부터 회복된 사람의 경우처럼 약간 살도 더 붙고 더 젊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내가 무엇을 더 해야 좋을까? 나는 많은 글을 써왔으나 이 책이야말로 (전방(전방),  Laparte davanti)(발레키 출판사)과 함께 내가 가장 아끼는 두 권의 저술 중 하나이다.  독자가 나에게 해주기를 바랐던 일을 내가 그들에게 해준다는 것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1969년 부활절
  라 바론타에서
      제 5 판 서문
  초판 나온 지 18년이 지난 이제 제5판을 내기에 이르렀다.  더 중요한 사실은 4년이 채 되지 않은 기간동안 세 개의 판이 나왔다는 점이다.  이는 요즘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과는 정반대로 시간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호의가 식지 않고 오히려 더 뜨거워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징조로 생각된다.
  나는 언제나 새판을 준비할 때마다 그것을 좀더 새롭고 산뜻하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이 판은 앞선 어는 판보다도 더 많이 개정되었다.  다른 판본들과는 달리, 여기서는 전기에 관한 내용 자체가 여러 곳에서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이는 소데리니에게 보낸 (기리비치)로부터 매우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나는 이미 크게 소급되어 왔던  이 글의 저술 연대를 무려 6년 이상이나 더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종래까지 1512년 겨울에서 1513년 사이로 비정되어 오던 저술 연대가 1506년 9울로 소급된 사실을 말함.  이에 대해서는 9장의 관련 내용을 참조할 것 - 옮긴이).  이 외에 도 (가리비치)의 경우만큼은 아니지만, 마키아벨리의 생애와 정치사상사에 대한 서술을 바꾸어놓은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군대의 재편에 관한 부분이나 이탈리아 동맹군 진영에서 귀차르디니와 함께 했던 마키아벨리의 생애 마지막 날들에 대한 부분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 번 판에서의 가장 크고도 가치 있는 수정은 역시 누구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책의 내용이 증면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 눈이 더욱 침침해진 나에게 (사실 날이 갈수로 시력이 떨어짐을 느낀다) 이는 사실 힘겨운 작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필요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사실들을 찾아내고 분석하려는 노력에 부응하는 일일 뿐 아니라, 마키아벨리의 이해에 필요하기는 하지만 글의 흐름을 지루하게 할까봐 본문에는 넣기 힘든 새롭고도 일차적인 점들을 덧붙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는 최근 한 세기 동안 흘러 넘칠 지경으로까지 늘어나 마키아벨리 관련 연구라는 강의 흐름이 너무 급박하게 흐르거나, 때로는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지 않도록 밑바닥을 넓게 파주는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19778년 
  로베르토 리돌피
  제4판의 경우, 앞의 판본이 이미 절판되었다는 이유로 책을 급히 찍어내느라 인쇄소에서 저자나 출판사의 수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채 책의 1권과 2권의 많은 부분을 조판에 넘겨버렸다.  그러다 보니 인쇄상의 좋지 않은 오류들이 그대로 남게 되었다.  출판사와 저자는 이에 대해 독자들의 용서를 구한다. 
  
     제1장 초년기의 교육과 경험
  아르노 강이 사보나롤라의 몸을 불태운 화형의 찌꺼기를 여전히 실어 보내고 있을 때, 피렌체 공화국에서는 그 수도사의 체포 직후 시작된 하나의 혁명이 조용히 마감되고 있었다.  읍도파(읍도파, I Piagnoni :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피렌체에서 사보나롤라파를 반대파가 깔보는 투로 부르던 말 - 옯긴이) 관리들은 모두 관직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는 반대파 사람들로 채워졌다.  처음에는 10인 위원회 I Dieci, 8인감찰위원회 gli Otto di Guardia,  정무위원회i Collegi della Signoria등이 폐지되었고, 점차 하위 관직까지 사보라롤라에 반대하거나 혹은 그를 공격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와는 무관한 사람들에게로 넘어갔다.  당시 그에게 더 노골적으로 반대했던 사람일수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기국에서 해임된 읍도파들 중에서 (피렌체 시(시) 찬가 De illust ratione urbis Florentiae)라는 시를 썼던 휴머니스트 우골리노 베리노 외에, 제2서기국의 서기장이었던 알레싼드로 부라치(혹은 브라체시)가 들어 있었다.  브라치는 때때로 격노파(격노파, kli Arrabbiati: 성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사보나롤라의 개혁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가리킴 - 옮긴이) 성향의 정무위원회와 읍도판 지지의 10인위원회 사이에 끼어 일을 어렵사리 처리해 나깆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사보나롤라에 대한 교황의 분노를 달래보려고 끝까지 노심초사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브르키엘로 풍의 풍자 시인이자 유려한 라틴 시인이었던2) 그의 후임으로 80인회 il Consiglio degli Ottanta는 무명의 청년인 니콜로 디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를 임명하였다. 
  비록 마키아벨리 가(가)가 도시의 유력 가문은 아니었다 해도, 그 기원조차 불분명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발 디 페사에서 도시로 이주해 왔으며, 몬테스페르톨리의 옛 군주들과 혈연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들은 곧 좋은 시민이 되었다.  빌라니 연대기에는 마키아벨리가가 1260년의 대패배 이후 피렌체서 쫓겨났다가 뒤에 (전면 복귀한)교황파의 주요 가문으로서, 바르바도리 가, 카니자니 가, 소데리니 가와 함께 을트라느노 구(구)의 (이름 있는 시민 집안)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도시의 많은 관직을 역임했는데, 그 중에서 21명의 곤팔로니에레 gonfaloniere(르네상스기 피렌체의 최고 행정 수반인 정무위원회 의장을 가리키던 관직명.  베네치아의 도제Doge에 해당된다.  중세 이탈리아 도식국가에는 민병대를 보유할 수 있는 행정구역 gonfalone들이 있었는데, 곤팔로니에레란 중앙 정부에 대해 그러한 구역을 책임지는 관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원래의 말뜻 그대로 보자면, 군기(군기, gonfalone)를 든 기수라는 의미이다.  이를 정무위원장이나 정무총감 혹은 행정장관 등으로 옮기는 것은 마치 왕과 같이 더 높은 직위 아래에 있는 하위직인 듯한 인상을 주므로  적적치 않다고 생각된다.  비이탈리아권의 학자들 역시 대개 원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 옮긴이)와 54명의 정무위원  periore(조합의 요직이나 정무위원회의 위원을 가리키는 말. 원래는 교회의 주요한 직책들{나라와 시기에 따라 다양함}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옮긴이)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도시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일한 사람은 지롤라모라는 인물로, 그는 과두 정부에 공공연이 반대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추방되었다가 결국은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3)
  마키아벨리 가가 (부유 시민 poploani grasssi)으로서 품위 있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상업보다는 발 디 페사에 소유한 토지 덕분이었다.  당시 다른 가계들에 비해 사정이 좋지 않았던 곳은 베르나르도 디 니폴로 디 부오닌세냐 집안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형편이 빈한한 것을 들어 그가 아마도 사생아 가계 출신이 아닌가 의심했으며, 나로서는 믿기 힘들지만, 이것이 빌미가 되어 뒤에 그가 사생아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토토 마키아벨리의 유산을 상속받아 형편이 약간 나아지기는 했지만 이러한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열심히 일하고 극히 절약하지 않으면 가계를 유지하기가 매우 힘든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법학 박사였던 그는 마르카에서 회계사 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5)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피렌체에서 그는 법률가로서 일한 적이 거의 없었고 간혹 그런 기회가 있었다해도 보수는 극히 적었다.  대신 그는 사려 깊고 엄격하게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재산을 관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최근까지도 아려져 있진 않았던 베르나르도의 (비망록 Libro di Ricordi)이라는 귀중한 자료가 발굴됨으로써, 우리는 그가 비록 본성보다는 궁핍 때문이겠지만 약간 인색한 편이며, 주의 깊은 성격에다 다소 괴팍한 데가 있으나 그렇다고 저급하지는 않은 인물이었음을 알게되었다.  그는 돈 문제에 신경을 쓰면서도 공부가 주는 위안도 아는 사람이었다.  베르나르도는 결코 사치할 만한 여유를 갖고 있지 못했으며 안락은커녕 최소한의 생활도 유지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때로는 책 살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야말로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결점이자 동시에 유일한 열정이었다.  그는 언제나 아직 철하지 않은 책을 사서 스스로 제본하는 애정을 보였으며, 때로는 채식(채식)을 가하기도 하였다.  만일 책을 사지 못하면 즉시 그것을 빌려 보았으며, 법률서뿐 아니라 인문학에 관한 책들도 읽었다.  피렌체에 인쇄술이 소개된 것은 그가 비망록을 쓰기 시작한 지 불과 사 년전의 일이었으나, 인쇄본을 멀리한 당시의 부유한 애서가들과는 달리 그는 탐욕스럽다고 하 만큼 그 이점을 이용하였다.  그는 초기의 피펜체 인쇄업자들 중 하나인 니콜로 델라 마냐로부터 인쇄 예정인 리비우스의 책 한 부를 받아 그 속에 나오는 지명을 색인하는 일을 맡았다.  12첩의 종이를 쓰면서 무려 아홉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애쓴 대가로 드디어 그는 자신이 열망하던 책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 베르나르도에게서 1469년 5월 3일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태어났다.  위로는 이미 프리마베라와 마르게리타라는 우아한 이름을 가진 누나가 둘 있었으며, 남동생을 재산을 남겨준 아저씨의 이름을 따서 토토라고 불리웠다.  어머니는 바르톨로메야 데 넬리오, 그 집안의 한 가문록 작가는 그녀가 몇 편의 종교시를 썼다고 말한 바 있으나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모계 유전에 관한 현대의 유전학 이론들에 비추어볼 때, 니콜로의 일생을 불태웠던 시적 재능이 어디에서 연유했는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유전적이든 본받아서든 간에 공부에 대한 애정을 물려받았다.  아버지 베르나르도의 기록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유년기 공부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1476년 5월 6일 니콜로는 마테오라는 선생으로부터 라틴어 공부의 첫걸음에 해당하는 (도나텔로 Donatello)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 일곱 살이었는데, 이 나이는 당시의 교육적 통례에 합치되는 것이었다.  다음 해에 들어 그는 산 베네데토 교회의 바티스타 다 포피를 새로운 문법 선생으로 맞게 되었다.  (소년은 많은 노력을 했고, 또 그것을 참을성 있게 견뎌냈다......,) 지루하게 마련인 유년기의 공부 짬짬이, 그는 아마도 아버지의 초라한 시골집이 있던 산탄드레아의 숲이나 혹은 외가의 시골집을 둘러싼 무젤로의 몬테부이아노 성벽 폐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뛰어다녔을 것이다.  1480년에 그는 산수도 함께 배우기 시작하였다. 베르나르도는 한 해 전에 그의 친척 두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피렌체인들을 희생시킨 전염병에 걸려 몸져 누웠으나 기적적으로 회복 된 후 빈약한 수입과 함께 식구가 줄어들었음을 신고하면서 아이들에 대해 (니콜로는 11살, 토토는 5살로 둘 다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다음해에 두 아니가 파올로 다 론칠리오네라는 선생에게 공부를 배우고 있음을 보게 된다.  토토가 (도나텔로)를 붙잡고 씨름하는 동안, (니콜로는 어느 정도 라틴어를 하게 되었다).  즉 로마의 말로 이미 짤막한 글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가 결혼할 무렵에야 겨우 라틴어를 배웠다는 조비오의 악의적인 말이 거짓임을 말해 준다.(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그의 말에 현혹되고 있다.!)
  반면 니콜로는 그리스어를 배운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아마 초보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결코 그를 학자로 만들 생각이 없었으며 니콜로 자신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생각이 어떻든 간에 그러기에는 아마 돈이 모자랐을 것이다.  그가 읽었던 것들은 분명히 그 시대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럴 듯한 구절들을 외우면서 숙독했을 그런 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성년이 되어 말했던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가 마치 위대한 소명처럼 바로 이러한 유년시절에 시작되었을 것임을 상상하고 또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읽게 되는 역사가인 유스티누스 Marcus Junianus Justinus17)(기원전 3세기경에 살았던 로마 역사기. 필리푸스 시대의 역사 Historiarum Philippicarum)를 썼는데, 이는 기원전 1세기경 폼페이우스 트로구스기 쓴 같은 제목의 책을 요약한 것임 - 옮긴이)는 그의 아버지의 서가에 없었지만 사려 깊은 베르나르도는 재빨리 그것을 빌려서 니콜로가 12살이 되어 이미 (라틴어를 하고 있을) 무렵에야 되돌려주었다.  반면 그는 비온도의 (로마제국사Deche)(폴라비오 비온도 {1392-1463}의 역사서 Historiaurm ab inclinatione Romanourm decades(1437-1442)는 그 제목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바와는 달리, 고대 로마제국사가 아니라, 5세기경의 서로마제국의 쇠망에서부터 바로 자신의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의 행적을 중심으로 다룬, 현재의 관점으로는 최초의 유럽 중세사이다.  서양에서는 이 책명을 줄여서 흔히 Decades(=Deche)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 역사서가 10권씩으로 묶여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옮긴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더욱이 리비우스의 저술들도 소장하고 있었다.  베르나르도는 아마도 어렵게 색인 작업을 한 대가로 얻었음직한 그 저술들을 1486년에 제본한 것 같다.  당시 17세였던 니콜로는 그 귀중한 책을 찾으러 제본업자에게 갔으며, 아버지가 시골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제본비 조로 (붉은 포도주 세병과 식초 한 병)을 주었다.  아버지의 이와 같은 기록들을 읽노라면, 니콜로가 언젠가 이야기했던, (나는 빈한하게 태어나서, 즐거움보다는 궁핍을 먼저 알게 되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마키아벨리가 고전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고 중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당시 피렌체의 가장 명망 있는 휴머니스트들의 학식과 비교한 것으로, 최근의 연구는 그 의미에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는 라틴 자가들 중 오직 역사가들에게만 관심을 가졌을 뿐) 이라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번역된 희극 작품들을 베끼거나 모방했을 뿐 아니라 그 유명도와 인기에 연연함이 없이 시들을 읽었다.  그는 단테에 매혹되어 라틴 시인들 중에서도 가장 단테적이라고 일컬어져 왔던 루크레티우슬 옮기어 베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각별히 즐거운 일이다. 그는 필사본 혹은 활자본 상태의 라틴어 번역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크세노폰, 헤로디아노스, 투키디데스, 폴리비오스를 일고 인용하였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열의를 가지고 진지하게 마키아벨리의 교양과 고전적 바탕이라는 문제에 관해 다룬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명시적으로 기록하고 있거나 암묵적으로 인용했거나 또는 적어도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는 작가들의 일람표 하나라도, 고전 고대에 대한 그의 인식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져 온 지식의 범위를 크게 넓혀줄 것이다.  단정하기는 힘들겠지만, 그가 분명히 연구하거나 읽은 저술가들을 전체적으로 파악한다면 우리가 마찬가지로 불분명하게 알고 잇는 여러 사실들이 다른 각도에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마키아벨리의 인생을 중반에 이르기까지 살찌웠던(고대사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였음이 틀림없다.  그 이후의 생애는 보다 더 (현대사에 대한 오랜 경험) 속에서 보내게 되며, 우리는 다음의 장들을 통하여 이러한 편력을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먼저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바로 그 시기에 스스로 목격했던 사건들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뒤에 말했듯이, 인생 초년에 보고 들었던 것들이 (젋은 마음에(......) 어쩔 수 없이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바, 이는 (모든 인생행로에서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것이었다. 그가 인간 행위에 대해 내세운 보편 진리들은 다름 아닌 스스로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씌어졌을 법하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마키아벨리의 시대는 그 스스로 보는 바에 의해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던 기억 덕분으로, 피렌체의 옛 생활 방식을 여전히 접할 수 있던 바로 그러한 시기였다.  소길드 세력의 약호로 1382년에 성립되어 1387년 개혁되고 1393년에는 마소 델리 알비치에 의해 조직이 개선, 강화된 유력 시민 정부 il governo di Ottimati는 공화국에 유례 없는 행복과 위대함을 가져다주었다.  비록 단테가 카차귀다 시대의 코무네(코무네0 정부를 그린 것만큼은 절제 있고 품격이 높지는 못하지만, 메디치 가의 집권으로 부패가 만연하기 전, 니콜로 다 우차노와 마소 델리 알비치 시대의 피렌체는 여전히 도덕이 살아 있던 도시였다.  부가 넘치고 상업이 활발하며 세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영민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찼던 당시의 건축물들은 최상의 모습을 뽐냈다.  뒤에 사보나롤라가 경멸 조로 말했듯이, 비록 종교적 성소롤 지어졌던 건물이 사실은 각 가문의 무기고로 이용되기는 했지만, 코지모 데 메디치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이 도시의 기질을 안다.  우리는 50년도 못 가 쓰러지겠지만 이 건물들은 여전히 건재할 것이다.) 이러한 절제된 화려함을 예술적 품위와 문학적 우아함으로 세련미를 더했다.  공적 의례는 장엄성을 과시한 반면, 사적 생활은 이탈리아 어느 곳보다도 높은 수준의 문화와 예법을 보여주고 있었다.
  통치력은 훌륭한 법률보다는 지도의 덕성에서 나왔다.  비록 정치 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직에 선임되었고 그 중 소수는 직접 정치를 담당하게 되었지만, 설사 불의와 권력 남용의 경우가 있었다 해도 그것조차 정의의 외양을 가지고 적절한 정도를 넘지 않도록 배려되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침해받고 있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정치적 인물을 훈련시키는 이러한 어려운 과정은 관직에 들어가기 전, 이미 도시의 명망 잇는 사람들의 상점이나 사무실에서 이 평민적 도시에 어울리는 소박한 방식으로 행하여졌다.  그들의 명망은 재산보다는 분별력에 연유한 것으로, 그들은 결코 최고위의 관직에서 중대한 국가사를 맡은 뒤에도 자신들의 사무실과 상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이렇게 단순 소박하다는 면에서 그들은 훌륭한 전기 작가인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가 비교한 바 있는 (그러한 고대 로마인들과) 매우 닮아 있었다.  사실 우아함을 갖춘 로마적 자유가 있다고 찬양해 마지않았던 당시 한 시임의 말과 같이 15세기 피렌체에서 마키아벨리 역시 종종 그랬던 것처럼 인물과 사건들을 로마의 경우와 비교하고자 하는 유혹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정당화 될 수 있었을 듯하다.
  이들 피렌체의 유력 시민들은 경쟁적인 베네치아 공화국의 귀족들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다.  글은 평민 귀족으로서, 분명코 인민 주권의 형식을 초대한 존중하려던 사람들이었다.  인민들은 그들을 (동등자 중 일인자)와 같은 존재로 간주하면서 그들의 통치 아래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들은 지도자들의 지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시장이나 상점 혹은 선술집에 앉아 정무궁Palazzo에서 진행되는 극히 세련되고 섬세한 정치 게임을 받아들였다.  우리 시대의 입헌 군주와 같이, 인민들은 다만 명목상의 주권에 만족하면서 정치를 소수의 지도자들에게 맡게 놓았던 것이다.
  메디치 가 역시 그들이 지배한 처음 50년간은 이러한 게임의 힘든 규칙을 지켰고, 그것을 잘 준수할수록 더 나은 통치를 해나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앞서의 과두정권 아래서 향유되었던 풍습과 삶과 만족감이 코지모든 피에로든 또는 로렌초든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일인 통치 아래서도 얼마간 지속되었다.  합법적이지는 않았지만 사실성의 군주였던 그들은 끊임없이 신변을 경계하면서도 무력으로 통치하기보다는 결코 신민이 아닌 동등 시민들의 동의에 의거하여 다스렸던 것이다.  이러한 평민 군주들은 스스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미묘한 방식으로 그들이 선호하는 인물을 장관 지게 앉히고 통혼과 관직 분배로 부와 호의에 균형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질시와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며, 거의 모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배려였을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나 째는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죽은 바로 그 해였다.  코지모의 뒤를 이어 피렌체의 시민 군주가 된 피에로는 그 자리를 다시 아들인 로렌초와 주리아노엑 물려주었다.  마키아벨리는 볼테라의 발란(1472)에서 야기된 무자비한 복수와 신의의 파기를 알기에는 당시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1478년 파치 가 사건이 발생했을 때쯤에는 이미 라틴 자가들을 읽고 있었다.  그때 그는 도시의 명망가라는 인물들이 자신들의 질시와 원한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은폐하고, 최악의 교황이었던 시스토 4세의 묵인 아래 그의 조카들이 허망한 탐욕으로 음모를 꾀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음모자들 중에는 피사 대주교와 교황의 혈족인 젊은 추기경 리아리오도 들어 있었다.  음모를 실행하기 위해 택한 시간과 장소는 성체 봉현 미사가 있던 성당이었다.  줄리아노는 사해되었으나 로펜초는 죽음을 면하였다.  대주교와 많은 공범자들은 그들이 헛되이 차지하려 했던 정무궁 창 밖으로 목이 매달렸으며, 길거리에서 군중들에 의해 찢긴 그들의 시체는 여러 날 동안 참혹스러운 광경을 연출하였다.
  교황은 줄리아노의 죽음에 대해 어색한 위로의 말을 전한 뒤,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는 교수형에 처해진 대주교보다는 자신의 혈족으로 당시 억류 중이던 추기경에 각별한 관심을 표하였다.  추기경은 결국 풀려났으나, 뒤에 마키아벨리가 말했듯이 (교황은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고 자신과 {나폴리}왕의 모든 세력을 규합하여 피렌체를 공격)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사실에 의거하여 마키아벨리주의적 교의를 이끌어내었던 것이다. 26) 교황은 세속적인 무기를 쓰기 전에, 먼저 정신적 무기로 로렌초와 장관들을 파문에 처함과 아울러 도시 전체를 금력으로 묶어버렸다.  니콜로의 말처럼, 이러한 조치는 피렌체 시민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무기는 이미 그것의 옹용과 사용자의 악명으로 무뎌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정신적 공격이 피렌체인들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해도, 군대의 공격으로 그들은 지쳤고 마침내는 포초 임페리알레에서의 패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는 용병대의 전례 없는 비겁성에서 기인했는데, 이는 시민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었고 특히 니콜로에게는 대단히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피렌체사 Istorie fiorentine)에서 이에 관해 언급하기 오래 전, 이미 마음속에 그 일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아니 메디치 가는 로렌초의 대담한 결정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남자답게 이 전쟁의 책임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나폴리 왕의 손에 맡김으로써 결국 명예를 손상치 않고 평화를 얻어내었다.  물론 이에 대해 교황은 즉시 반대하였으나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피렌체에서 로렌초의 명성을 최고조에 달했다. (니콜로가 어른이 되어 썼듯이)(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릇 어떤 일에 대한 평가는 원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그 결과에 달려 있는 법인 것이다.
  그 뒤에 발생한 사건들은 로렌초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는 이미 정치적 지략을 발휘하여 이탈리아에서의 세력 균형을 시도하고 있었다.  당시의 어떤 전쟁에서도 피렌체 공화국의 영토는 침범받지 않았다.  단지 평화라는 한마디를 하고 숨을 거둔 시스토 4세의 주음과 함께 막을 내린 롬바르디아 전쟁이나, 피렌체가 새로운 교황 인노첸초 8세에 대항하여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와 동맹한 제후들의 전쟁(1486)에서도 피렌체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제 17살이 된 니콜로는 후자의 전쟁을 통해 용병의 경악스러운 행태에 대한 관찰의 새로운 자료를 모을 기회를 얻었으며, 왕의 행동으로부터 (현명한) 군주라면 (신민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잔혹하다는 악명도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지 또는 한번 한 약속을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어떻게 파기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신의 파기의 기술을 그에게 더 장 보여 준 인물은 인노첸초의 뒤를 이은 새 교황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2 princip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알레싼드로 6세는 남을 속이는 일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언제나 속일 사람들을 찾아내었다.  그보다 더 효과적으로 어떤 것을 설득하고 또 굳게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만은 항상 성공하였다.)  그는 이와 유사한 책략을 이탈리아의 여러 궁정에서의 일상사와, 인근 로마냐에서 빈번했던 가족 학살(1488)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피렌체의 자유는 장갑(장갑)으로 은폐된 로렌초의 철권 아래서 소리 없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1470년 1471년 사이, 1480년 1490년에 각각 10년 간격으로 행해진 개혁으로 정보 요직은 점점 더 로렌초의 측근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이로써 그의 권력은 더욱 확고해졌다.  자유의 쇠퇴와 함께, 앞서 말한 바 있던 도시의 옛 생활 방식도 사라져갔으며, 이제는 다만 적어도 그 마지막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한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시대의 변화와 다른 궁정들의 영향 아래 운명적으로 유입된 부패는 정치에서 시작하여 종국에는 풍숩마저 물들였으나, 로렌초는 이를 오히려 통치상의 일환으로 이용하였다.  미키아벨리의 세대가 파행적 사회상을 민감하게 느끼게 된 것도 정확히 바로 이 시기였다.  뒤에 피렌체인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그 같은  부패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그는 당시의 부패상을 더욱 직설적이고 신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잇다. (다름 사람들을 더욱 교묘하게 파멸시킬수록 더 지혜롭고 존경받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 역시 이러한 배경으로부터 이론과 실제의 양면에서 어떤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당시는 사치와 오락, 호색과 남색(남색)(이른바(피렌체의 악습)이라 불리던 것)이 만연하고 그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사라져가던 때였다.  언제나 그러하듯이(그리고 마키아벨리도 언급하고 잇는 바와 같이), 도덕의 이완은 종교의 쇠퇴를 가져오게 마련이었다.  세속적 악습은 사제와 수도사들의 부패에 일부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그들이 빚어낸 결과적 현상이었다.  가장 극단적인 예는 안레싼드로 6세가 교황에 즉위한 이후 로마에서 나타났다.  세간의 이러한 악습과 로렌초의 부패한 통치에 반기를 들고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질타의 목소리를 드높인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 위대한 수도사는 1482년부터 1487년 사이 피렌체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별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1490년 중반에 돌아온 그는 이민 끊임없는 설교와 명상과 기도로 강해져 있었으며 충고와 계시를 통해 스스로의 소명을 확신하고 있었다.  복귀 후 자신이 행산 새로운 설교 방식이 호응을 얻은 데 고무된 그는, 악습과 그것으로 악명 놓은 이물들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로렌초는 협박과 회유로 그를 침묵시켜 보려고 했으나, 그는 로렌초의 최근 개혁을 격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결국, 로렌초가 1492년에 죽고 이어 1494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입으로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의 정권이 정복되자, 사보나롤라는 투쟁의 승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예언자이자 성인의 삶을 사는 임룰로 존경하게 되었으며, 프랑스 약탕과 내란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고 새로운 평시민 정부 governo popolare(여기서 (평시민 popole)이라 함은, 귀족적 신분인 상층의 부유 시민 popolani grassi 및 유력 시민 ottimati, gran야, maggiori과 하층인 소시민popolo minuto사이에 위치하는 계층으로, 그 구성 요소는 시간과 장소에 딸라 다양하게 변하지만 주로 조합의 마스터나 중간 이상의 상인들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때에 따라 사회 계층을 평시민과 소시민의 둘로 나누기도 하는데, 이 경우 평시민에는 상층의 시민 계층까지 포함된다.  이들은 시민 계급 박R의 대중들 moltitudine과는 rqnsaudgl 구별된다.  시민들로 이루어진 대평의회 Consiglio maggiore의 구성원 수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귀족 공화정과 평시민 공화정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이 책 곳곳에서 나오는 (평시민 정부)란 곧 후자의 경우이다 - 옮긴이)를 통해 자유를 고무하고 촉진시민 데 대해 감사하였다.  
  당시 25세였던 마키아벨리는 이 새로운 정부가 정확히 평시민적이라는 점에서는 만족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의지에서 온 수도사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국가를 종교,  즉 신에 봉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그의 생각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마키아벨리는 적어도 자신의 저술들 속에서 종교를 국가, 즉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그가 읍도파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고 오히려 그 반대파인 격노파의 일원일 것이라고 생각함직 하지만, 이 파의 열성적 인물들 명단에는 결코 마키아벨리의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  더욱이 그는 교회의 부패와 로마의 악덕 성직자들 그리고 사악한 사제들에 대항한 사보나롤라의 정치적 업적을 필연코 높이 평가했을 것이며, 설사 그가 자신과 피렌체인들의 기질에 따라 한때 그 몰락한 영웅을 조롱했다고 해도, 좀더 깊고 진지한 생각을 가진 뒤부터는 사보나롤라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에 관해 확실한 날짜가 기입된 최초의 글이자 그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문서들 중 하나로, 리차르도 베키에게 1498년 3월 9일자로 보낸 편지가 있다.  이 속에서 당시 교황의 (분노에 굴복한) 사보나롤라가 주교좌 대성당의 연단에서 물러나 산 마르코 성당에서 행한 두 편의 설교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는 그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속한 교단의 교회에서 한 첫 설교 두 편이었다.  이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이제 교황의 정신적 무기와 가톨릭 연명의 세속적 압박과 함께, 피렌체인의 상인적 교활성과 쉽사리 과거를 망각하는 불안정한 기질 때문에 무너져가고 있었다.  사보나롤라의 선의와 그로 하여금 설교케 하고 종국에는 화형주에 조용히 몸을 맡기게 했던 고결한 이상을 생각할 때, 이 위대한 수도사를 (시류에 영합하고 그럴 듯하게 거짓말을 둘러댔던) 사기꾼이라고 혹평하였던 마키아벨리의 편지는 아마도 오늘날 별로 읽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쯤은 익살로 씌어졌던, 친국에게 보낸 이 편지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는 다만 자신과 친구들 간의 재미를 위하여 피렌체인 특유의 독설적 기질을 선보이고 있었을 뿐이다.  더욱이 당시 그는 29세, 한창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좋아하고 사보나롤라가 금지시켰다. 화려하고 쾌락적인 생활을 즐기고자 하는 나이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젊은이에게 교황에 대하여 요구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사실 로드리고 보르자는 그로부터 두 달이 채 되지 않아서 피렌체인들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한때는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다른 무기 없이 오직 설교만으로 로마와 이탈리아의 수복을 꿈꾸었던 인물로 화형주로 보냈던 것이다.  이 화형주는 마키아벨리가 사인(사인)에서 공인(공인)으로 생활을 바꾸기 전에 사림들 사이에서 배운 마지막 교훈이었다.
  지금까지 마키아벨리 시대의 사악한 교훈들을 짤막하게 간추려보았다.  비록 자신의 저술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그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었다면, 그것은 아마 사람들과 세상사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도덕적 판단에 얽매이지 않은 채 논리적 엄격성을 유지하면서 결론을 끌어내는 남다른 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관찰과 논증으로부터 도출해 낸 대체로 과학적인 고찰들이 반드시 그 자신의 감정과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이론 속에서는 거의 언제나 이성적인 것이 감정을 압도하였으나, 행동에 있어서도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둘은 항상 결합되어 그것들로 충만된 마음속에서 새로운 갈등을 야기하게 될 것이었다.
  사실 피렌체인은 성격상 괴팍한 측면들을 많이 지니고 있었는데, 단테는 이 중 하나를 가리켜 (괴짜bizzarro)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는 곧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수사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피렌체인의 이러한 기질을, 변덕스러우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한결같고 가혹한 듯하면서도 때로는 감미로운 가운데 그것을 발샟메하고 또 성숙시킨 그곳의 토양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피렌체의 땅은 추위와 더위에 의해, 아니 그보다는 인간의 노동을 통하여 길들여져야 하는 단단한 돌덩이들로 되어 있어서 열성적이고도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피렌체인의 기질은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속으로는 가혹하고 심술궂은 데가 있다.  이는 아마도 도시민의 세련성 아래 가혹함의 불꽃이 번쩍이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신랄한 풍자와 그 유명한 조소적 태도는 반드시 유쾌함과 선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약간 경박함마저 풍기는 이들의 쾌활성을 입증하고 상징하는 말로, 흔히 로렌초 데 메디치의 (바코와 아리안아의 개선 Trionfo 야 baccoe 야 arianna)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후렴구를 싫증날 만큼 되풀이 인용하고 있지만, 정작 이렇듯 유쾌한 삶의 외양 밑에 똑같은 정도로 우울하고 씁쓸한 내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젊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이 아무리 덧없다 해도
  하고 싶은 대로 즐기라.
  내일이면 아무것도 확실치 않으리니.
  피렌체인의 기질을 잘 이해하려면 결코 다음의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여기서 가장 육욕적인 사육제 노래가 동일한 음조와 운율을 가지고 다만 가사만 바뀐 채, 다른 어떤 경우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헌신적으로 만들어진 성가로서 불렸던 것이다.  따라서, 마키아벨리 또한 그 같은 종류의 노래들이나 (만드라골라) 같은 희곡과 함께 (참회 권유 Esortazione alla penitenza)처럼 경건한 내용의 글을 썼다고 해서, 하등 놀랄 일도 장난으로 돌려버릴 일도 아니다.  이 도시에서는 풀치의 가장 피렌체적인 서사시 (모르간테 Morgante)에서도 나타나는바와 같이 불경함과 경건함이 끊임없이 뒤섞이고 있었다.  또한 사보나롤라의 놀라운 개혁과 함께 로렌초의 이교적 시대나 그의 화형 이후 한 행정관이 (신을 찬미하라.  이제 우리는 다시 쾌락을 즐길 수 있으리니)라고 천명했던 바의 격노파와 동무파i Compagnacci(피렌체의 반사보나롤라 졍파를 일컬음 - 옮긴이)의 비행들이 번갈아서 일어났던 것이다.
  피렌체의 정치 생활 역시 치열하고 변화 무쌍한 대립상에 의해 지배되는 그 같은 성향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모든 구가들 중에서 최악의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고 법률보다는 정치 지도자들이 오히려 나았던 이 도시에서 16세기의 위대한 정치 저술가 세 명(마키아벨리, 귀차르디니, 도나토 잔노티를 일컬음 - 옮긴이)(그 중 마키아벨리가 으뜸이지만)이 모두 나왔다는 것은 얼핏 이상스러운 우연인 듯도 하겠지만 사실 논리적으로는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원래 옛 자치 도시의 자유로부터 기원하였으나 단지 의심이 많고 시기심이 강하며 조급하고 변덕스러운 일상적 기질에 의존함으로써 이후 괴상한 모습으로 바뀌고 변화해 온 결함투성이의 정치 체제 이면에는, 극히 어려운 상황 아래서 남을 통치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통치하는 법을 익히도록 해준 정치적 교훈의 유익한 경험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위정자는 악법으로 인해 장애를 받았으며, 관리는 법률만큼이나 자주 바뀌었고, 외교 사절은 모호하고도 제한된 권한 외에는 아무런 권위도 부여받지 못하였다.  심지어 (참주 I tiranni)조차도, 앞서 살필 바와 같이, 도시의 기질에 맞추어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구정을 유지하고 매일매일 그것을 확인하며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간계로써 통치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피렌체의 한 유서 깊은 가문에서 표방했던 (살피고 준비하라,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신조는 파에솔레와 아느로 강 사이에서 생겨난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15세기 피렌체의 국정술(국정술) 학파에도 놀랄 만큼 꼭 맞는 말이었다.  니콜로 마카아벨리가 자라난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 학파에서였다.
  이 정을 끝내면서 나는 30대의 문턱에 들어선 마키아벨리의 초상을 간략히 그려보려고 한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형상화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던 바로 그 모습만큼이나 이해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한 뛰어난 인물을 과연 자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우려가 앞선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무려 450년간이나 이해해 보려고 애써왔으나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는 종종 냉소주의 때문에 비난받아 왔으나, 이는 실상(스스로의 논리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의 신념)에 다름 아니었다.  만일 누군가가 이 위대한 이상주의자의 냉횩한 현실주의와 이 낙관주의자의 비관주의를 염두에 두고 그를 이원론적 입장에서 분석한다고 해도 하등 놀랄 일이 못 된다.  그는 (반인 반수의 존재)인 켄타우로스의 모습으로 간주되는 그 자신의 정치와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먼저 지노 카포니가 그에 대해 쓴 그을 인용하면서 시작해 보자.  그의 말은 진실이므로 풀어쓸 수도 있겠지만, 글의 묘미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하여 그대로 옮겨보겠다.  (그의 지성은 우아하고 풍요로웠으며 품행은 거침이 없었다.  이해력은 놀랄 만큼 뛰어났으나 반드시 세상사가 그의 생각과 일치하지는 않았다. (...) 그는 정치를 아탈리아가 느끼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높았고 이상은 원대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힘은 헛되이 소진되고 위대성은 부패하여 수단의 부재와 전망 속에서 마치 패배 후 진흙탕에 처박힌 로마군의 독수리 깃발처럼 다만 엎드려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오히려 종교를 고귀한 것으로서 존중하였으며 이탈리아적인 것으로서 그것을 사랑하였다.  그는 종교를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든 잘못된 정치 제도에 분노하였으며, 그리하여 그것을 조소하고 공격하였고 악덕으로 규정하여 자신의 마음에서 축출해 버렸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이와 같았고 또한 이탈리아 역시 그러하였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그와 같았으나 아탈리아 전체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실상 다른 어느 곳보다 피렌체의 표현이자 상징이었다. 즉 그는 미덕과 악덕의 측면들이 불가피하게 더 부각되어 보이는 그러한 확대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특기할 만한 악습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무론 여자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을 결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데, 그는 이를 통해 과도한 활력과 애정을 분출하고자 하였다.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남에게는 매우 관대했고 자녀들에게는 자애로웠으며 무엇보다 정직했고 조국과 자유를 사랑하였다.  그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누구보다도 더 저열한 인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 스스로가 위대함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이 다 숨기려 하는 것을 결코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좋은 점은 감추고 덜 좋은 점은 내보이는 편이었다. 사실 그는 스스로가 실제보다 더 낮아 보였으며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동류의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고 많은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만일 사람들이 선하기만 하다면 자신의 몇몇 사악한 권고들이 (더 이상 소용없게 될 것) 임을 씁쓸한 어조로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저열함을 속속들이 맛보고 언제나 선인이 악인에게 굴복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이를 자신의 재능으로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법칙으로 재구성해 내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를 악인의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그는 차라리 선인 쪽에 끼일 인물이었다.
  카포니는 마키아벨리가 종교를 애호하였으며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글 거의 어디에서나 비록 냉소적이기는 하지만 예민하고도 열정적인 시인의 정신을 엿볼 수가 있는데, 무릇 시가 있는 곳에 진정코 사악한 것은 없는 법인 것이다.  그러나 선은 사라져가고 악인 만연함을 보면서 그의 정신은 반란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렇게 쓰디쓴 격언들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거나 또는 쓴웃음을 통하여 그것을 표출하였다.  그는 스스로의 웃음 뒤에 숨어 있었다.  그는 선하고 고귀한 것을 따르고 믿는 자신의 감정을 비웃었다.  또한 좀더 일찍 그렇게 하지 못한 자산을 조소하였다. 
  그의 성격이 보여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다음의 8행시에 그려진 작화상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씌어진 시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의 심정을 느낄 수가 있다.
  나는 바라네.  하지만 바람은 나를 더욱 괴롭게만 하네.
  나는 우네.  하지만 울어도 가슴은 그저 쓸쓸하기만 하네.
  나는 웃네.  하지만 웃어도 마음은 허망하기만 하네.
  나는 태우네.  하지만 불꽃은 밖으로 피어나지가 않네.
  나는 내가 보고 내가 느끼는 것들이 두렵기만 하네.
  모든 것들이 나에게 새로운 고통을 주네.
  그래도 바라면서, 나는 울고 웃고 태우며,
  또 내가 듣고 보는 것들을 두려워하네.
  휴머니즘의 아들이지만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방탕한 자식 같은 존재였던 그는, 자신의 학문에서보다 더욱 정신면에서 휴머니스트들과 다른 점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음악을 무척 좋아하여 (류트)를 배우고 (책)을 읽으며 교양을 쌓았다.  반면 당시 놀라울 만큼 발전되었던 시작예술에 대한 언급은 그의 글을 통해 단 한번 나타날 뿐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이다.  (이 지방(......) 앞서 발한 바처럼 한때 사멸했던 시와 그림과 조작들을 되살려내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그야말로 다름 아닌 고전 고대의 용맹성과 질서가 되살아나기를 바랐던 인물이 아니던가?
  그는 균형이 잘 잡히고 중키의 호리호리한 풍모에 당차고 대담하든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머리카락은 검었고 안색은 희었지만 약간 창백하였다.  머리는 동그랗고 작았으며 이마가 높은 편이었다.  그의 두 눈은 빛났으며 굳게 다문 얇은 입술에는 언제나 약간 조소 어린 웃음이 머금어져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를 그린 몇 종류의 훌륭한 초상화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마키아벨리가 한창이었던 시절에 만났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만이 그 희미하면서도 뜻 모를 미소의 의미를 충실히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제 2 장 서기장 마키아벨리
  1998년 5월 28일, 80인회는 까다로운 심사 절차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게 젊은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제2서기장으로 선출하였다.  사보나롤라가 처형된 지 겨우 닷새 뒤의 일이었다.  전기 작가들은 지금까지 마키아벨리에게 이러한 길을 열어준 것이 바로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의 몰락이었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식으로 그는 당시의 경험으로부터 하나하나 교훈을 얻어가고 있었다.  사실 이미 그 해 2월부터 서기국의 한 하위 관직을 얻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든 그는 사보나몰라와 그를 따르던 읍도파의 몰라긍로 갑자기 더 좋은 기회를 맞게 되었다.  읍도파들 가운데는 다름아닌 제2서기장 알레싼드로 부라치가 들어 있었으며, 아울러 그의 자리를 놓고 니콜로와 경쟁했을 만한 몇몇 인물들로 끼어 있었던 서이다.
  니콜로의 임명 건이 6월 15일 80인회의 심의를 통과하고 법에 따라 대평의회 Consiglio Maggiore(베네치아의 경우를 본따 14새게말에 도입된 일종의 민회.  그 규모가 최대일 때는 구성원의 수가 약 3,000명에까지 이르렀다 - 옮긴이)의 최종 결정에 부쳤을 때, 그의 경쟁자로 나선 사람들이 공립대학 pubblico studio(스투디오란 르레상스기의 대학을 일컫는 말 - 옯긴이)의 수사학 교수였던 프란체스코 가티와 공증인 안드레아 디 로몰로, 그리고 순교자에 대한 재판 과정을 조작함으로써 악명을 얻었던 바로 그 프란체스코 디 세르 바로네였다는 사실은 결코 의미 없는 일이라고 흘려보낼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재능이 뛰어나지는 않아도 서기적에 오래 종사한 두 인물과 불량배로 악명 높지만 그 무혈 혁명에서 공을 세원 한 인물을 제치고, 비록 재능은 뛰어나지만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고 경험도 일천한 젊은이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는 6월 19일 제2서기국의 장으로 선임되었다.
  그곳은 물론 권위나 위엄에서 공화국의 제1서기장과 비교될 수 없었지만 중요한 자리였다.  이 두 관직에 대해 잘 아리지 못하고 혼동하는 경우도 있었고, 둘을 동등한 위치에 놓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이제 더 연륜이 많고 그 일에 더 능숙한 사람들이 젊은 새 서기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때까지 도시 내에서 명성은커녕 연대기에서든 공사(공사)의 문서에서든 그에 대한 언급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던 마키아벨리는 29세의 나이에 마치 신화의 주인공처럼 성숙한 용사의 모습으로 사람들 깊숙한 곳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서기국의 관직들은 설사 그것이 보좌직이라 해도 박사나 공증인이나 어느 정도의 명성을 가진 문필가로 채워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관례는 시민 모두로 선출자 자격을 확대한 1498년 2월 13일의 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선임자나 동료들, 또는 후임자나 부하들을 막론하고 누구나 그러한 자격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문학사에서 기억되거나 적어도 다른 학자의 글 속에 언급될 만한 글들을 남겼다.  반면에 그는 공문서상의 명치에서 (메쎄레 messere)난 (세레 sere)라는 칭호가 붙지 않는 사실에서 보듯이 박사도, 공증인도 아니었다.  또한 산물이든 시든 간에 그의 생에 전반기에 씌어졌다고 확신할 만한 작품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이 주요 저술은 물론이고 약간이라도 주목할 만한 소품들조차도 모두가 명백하게 생애의 후반기, 아니 후반기의 또 후반부인 서기장 재직 이후에 씌어진 것이다.  얼마 되지 않는 사육제 시편들 약간과 연애시 몇 편의 제작 연대를 그의 젊은 시절로 비정해 볼 수도 있으나, 이는 단지 그러한 추측을 반증하지 못해서일 뿐이지 결코 더 강력한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가족과 친족이라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확실히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 우리는 그가 쓴 1497년 12월 2일자 편지를 들 수 있다.  그 내용은 전 (마키아벨리 가) 전체를 대신하여 부유한 파냐 교구 교회의 소유권을 요구하는 파치 가의 주장을 일축하고 그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음을 페루자의 추기경 조반니 로페즈에게 탄원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쓴 것으로서 날짜가 명기된 최초의 글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 가가 아직은 젊은 나이의 니콜로에게 이러한 일을 시킨 것은 사실 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당시 아버지인 베르나르도가 가장으로서 여전히 생존해 있었을 뿐 아니라 법학 박사에다 결코 문재(문재)가 없었던 것도 아니가 때문이다.  어쨌든 이 편지가 그의 재능을 내보이고 있으며 법률가 풍의 장중함 아래 장래 대작가로서의 간결하고 단호한 문체의 일단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역시 이 문제에 관해 추기경에게 서간을 보낸 정무위원회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이 편지의 결과 마키아벨리 가가 교회의 소유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니콜라가 마키아벨리 가라는 자신의 문중 안에서 문재를 인정받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시민들 누구에게가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지금 우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문필가들 중 제일 말석을 차지했던 인물들까지도 그 이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그의 이름은 들어 있지 않을 분 아니라 당시의 나이까지 그가 쓴 글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그가 문필가고 활동한 적이 없다는 거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  그의 생애 전반기에 대한 이러한 모호함은 후반기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어느 정도 해명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는 말보다는 일을 더 사랑했으며, 문필보다는 삶을 더 좋아하였다.  그는 생각이 메마른 자신의 동시대인들이나 동료들 대부분과는 달리 결코 문필가는 아니었다.  그가 저작 활동은 시작한 것은 스스로의 (오랜 경험)이 이미 자신의 젊은 시절을 살찌운 바로 그 (끊임없는 독서)를 기름지게 만들고 비교의 재료를 제공하고 난 이후였다.  사실 그 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리라.  왜냐하면 경험이 결여된 도서란 무익할 뿐이었을 것이며, 거꾸로 그러한 독서가 없었다면 그것을 통해 본 일들을 경험 속에서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사 이러한 사실이 그의 문을 열고 가려진 젊은 시절의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줌으로써 성숙한 시절의 저작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열쇠가 된다 하더라도, 그의 서기장 선출을 둘러싼 작은 비밀을 해명하는 데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일 지난 세기의 몇몇 학자들이 한 말대로 그가 1494년이나 1495년 이후 보좌직 또는 그 보다 하위 직급으로 서기국에서 근무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점이 명료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그 같은 주장을 한 누구도 이를 입증하려 하지 않거나 혹은 많은 오류에 빠짐으로써, 그러한 주장에 담겨 있을지도 모를 일말의 신빙성조차도 빼앗아가 버렸다.  엉뚱한 문서를 바탕으로 피렌체 서기국에  대한 그러한 주장을 지지하려 했던 한 역사가는 진실로 (어이없는 웃음과 측은함의 대상이 될 법한) 실수를 범한 셈이었다.
  그러므로 니콜로의 선출을 둘러싼 비밀을 밝혀줄 수도 있는 견습시절에 대한 희망 섞인 추측은 더욱 신빙성 있는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제쳐놓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그것은 마키아벨리 스스로가 (국정술의 연구에) 전념했던 날들을 세고 있는 한 유명한 편지의 냉용과도 모순된다.  왜냐하면 그가 센 햇수 속에는 분명히 서기직으로 보냈던 날들 모두가 포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피렌체 서기국을 연구한 앞의 역사가는 니콜로의 선임이 1498년 4월 30일에 있었던 한 결의 사항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가설을 내놓고 있다.  이 결의에 따르면, 사절을 타국에 파견할 때면 젊은이들이 국정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청년 하나를 대동케 하였다.  하지만 (연대기 작가 파렌티에 의하면)(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희망으로 부풀게 했던) 이러한 특별 조치가 우리의 문제와 어떤 관련을 맺었을 가능성은 없다. 다만 마키아벨리가 그러한 조치 이전에라도, 그를 이어 뒤에 서기장이 된 도나토 잔노티(23장을 보면 1527년 6월초 메디치 가를 축출한 공화 정부가 마키아벨리가 봉직했던 서기장 자리에 프란체스코 타루지를 임명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는 얼핏 역시 1527년 잔노티가 마키아벨리를 이어 서기장직에 올랐다는 이 장에서의 언급과 상충되는 듯이 보일 수도 있다.  이에 관하 s사실을 정확히 말하자면, 타루지는 1527년 6월 10일 경 10인위원회 서기장직에 임명되었고, 잔노티는 같은 해 9월 23일 타루지의 후임으로 이 직에 선임되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죽은 지 약 석 달 후의 일이었다 - 옮긴이)가 그랬듯이 어던 사절들을 따라 외국에 나갔다 왔을 개연성이 없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가설도 버리고 나면 이제 아주 그럴 듯한 추정 한 가지가 남는다.  즉 그의 재능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그의 당시 조건에 비하면 그래도 높은 이 관직이 그에게 돌아간 데는, 누군가 명망 잇는 시민 또는 서기국과 관련이 있으면서 동시에 정무위원회에 힘을 가진 인물의 영향력이 작용했으리라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마르첼로 비르질리오 아드리아니라는 이름을 마음에 떠올리게 된다.  그는 마키아벨리가 제2서기장에 오른 해와 같은 1498년 2월 13일 스칼라의 후임으로 공화국의 제1서기장, 즉 제1서기국의 장으로 취임한 인물로 조비오가 마키아벨리의 선생이었다고 말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우연의 일치일까?)
  조비오가 진실을 쓰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일부러 진실이 아닌 것을 더 자주 쓰려고 했으며, 마키아벨리 역시 그의 악의와 중상의 피해를 입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는 이 사실의 단편은 비록 정확성은 부족하겠지만 완전히 엉터리는 아님이 분명하다.  조비오는 적어도 그가 쓴 (우리 시대의 역사 Historiae sui temporis)로 인해 많은 피렌체인들과 사이가 벌어지기전까지는  피렌체 및 그 시민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위의 사실을 성급하게 폐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마키아벨리의 주요 전기 작가들도 그가 제멋대로 지어낸 세부 사실들은 제외하고라도 마키아벨리가 마르첼로 비르질리오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는 점만은 진정하고 있다.  무론 여기에는 마키아벨리가 그에게서 라틴어를 배웠으리라는 추측은 당연히 배제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은 부친인 베르나르도의 (비망록)에 의해 부정되기 전에 이미 몇 가지 이유에서 잘못되고 자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전기 작가들은 마라첼로 비르질리오와 마키아벨리 사이가 어떤 식으로든 선생과 자제의 관계는 될 수 없었을 것이라든가, 또는 학식에서 차이가 지는 친구간에 배움을 나누는 통상적인 관계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단호하게 아드리아니가 마키아벨리의 선생이었다고 확언하기는 않겠다.  하지만 그들이 나이라는 잘못된 근거를 내세워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려고 했다는 점만은 밝히고 싶다.  그들의 주장인즉, 마키아벨리는 아드리아니보다 불과 5살 아래였기 때문에 (하지만 사실은 9살 연하였다) 제자가 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누구라도 이러한 주장이 우스꽝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아드리아니는 피렌체 공립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9살이나 어린 마키아벨리가(5살 아래라도 마찬가지지만) 왜 그의 강의를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드리아니가 마키아벨리를 천거했다는 것은 단지 조비오의 글에 근거한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는 어쨌든 합리적인 데가 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지금까지 찾고 있었던 그의 서기장 선출을 해명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사실상 성채 안의 성주와도 같은 존재였던 아드리아니야말로 그의 학생이라고 생각되던 사람을 그 성채로 들어오게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또한 그 누구도 정무위원회에 사람을 천거하는 데 있어 그보다 큰 권위를 지닌 인물은 없었으며, 정무위원회라고 해서 그의 보좌역이자 가장 가까운 협력자를 뽑는 일에 굳이 이래라 저래라 반대 의사를 표명할 리는 없었다.  일단 그가 정무위원회를 설득하기만 하면, 그것의 권위를 빌려 (복잡한 후보 지명과 심사)에도 불구하고 80인회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사람을 뽑는 것이 별로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며, 더욱이 대평의회에서는 더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특히 그곳에서의 마지막 심사에서 마키아벨리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가티였고 체코네가 그 뒤를 잇고 있었는데, 이 중 가티는 메디치파 열성분자가 아닌가 의심받고 있었으며 체코네는 야비하게 그를 이용했던 사람들조차도 경멸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드리아니와 마키아벨리가 조비오의 말처럼 사제지간이 아니라 단지 친구 사이였을 뿐이라고 해도, 그가 마키아벨리의 선임에 찬성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정무위원회에서 함께 일하던 시절, 두 사람 사이가 정말로 친구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찾기 힘들다.  심지어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제2서기장의 장남이 제1서기장을 대부로 맞게 되었을 때, 아드리아니가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편지에도 둘이 가깝거나 친밀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같은 부서의 동료들이 쓴 편지들 속에서는 그러한 느낌이 흘러넘치고 있는데 말이다.  사실 한쪽은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쪽은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엄숙하고 오만하기까지 한 아드리아니로서는 길들여지지 않고 쾌활한 성격의 젊은 동료에게 편안함을 느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궁정식의 장중한 품위를 유지하려는 아드리아니와는 달리 꾸밈없이 글쓰고 꾸밈없이 살아가고자 했던(매우 활기찬 성격의 소유자였던)것이다.
  운이 따라서건 재능 덕분이건, 아니면 둘 다가 작용했건 간에, 어쨌든 마키아벨리가 서기장이 되었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서기장이란 직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보는 일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피렌체 공화국에는 제1서기장과 제2서기장이 있었는데, 비록 전자의 권위 또는 적어도 그의 영향력이 후자를 덮고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가가가 제1서기국과 제2서기국을 책임지고 있었다.  원래 제1서기국은 대외 관계와 외교서신을, 제2서기국은 국내 관계와 전쟁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각의 역할이 바뀌고 중첩되었다.  10인위원회가 기능하는 동안은 일의 일부가 그곳 서기국으로 이관되었는데, 제2서기국은 결국 10인위원회와 합쳐지거나 일의 구분이 없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10인위원회와 합쳐지거나 일의 구분이 없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10인위원회 역시 정무위원회가 제1서기국을 통해 그렇게 한 것처럼 외국에 파견된 사절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다시 관청들간의 일이 얼마나 뒤섞여 있는 상태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정무위원회가 시작한 외교 서신을 10인위원회가 이어받아 답하고 있는 경우까지도 보인다(두 관청의 서기장들은 각각 대외. 대내 관계 서신을 구분하는 비망록과 자료철을 가지고 있었다.)  두 기관 사이의 차이란 단지 각각이 실제로 맡은 일과 그것을 기록한 장부상의 차이였을 뿐이었기 때문에, 정무위원회와 10인 위원회는 사실상 종종 같은 기능을 가졌던 셈이다.
  이 두 기관 사이에서 두 서기국은 내정, 외교, 전쟁 등 모든 일에 관여했으며, 더욱이 공화국 고위 장관들이 짧은 임기로 계속 교체되었기 때문에 일이 어떻게 풀려나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은 그들뿐이었다.  서기국은 여러 번에 걸쳐 개편되었는데, 당시 가장 최근의 개편은 서기장 바르톨로메오 스칼라가 사망한 직후인 1498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따른 주요 관직의 선임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제1서기국의 경우, 330피오니노 봉인금화를 연봉으로 받는 제1서기장에는 마르첼로 비르질리오 아드리아니, 80피오리노 연봉의 서기보에는 안토니오 델라 발레가 임명되었다.  제2서기국에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서기국 장의 임무를 동시에 관장하는 (정무위원회 서기장 il segretario della Signoria)으로서 연봉은 역시 봉인금활로 192피오리노였는데, 이는 대금화(대금화)로 따져서 128피오리노를 약간 상회하는 가치가 있었다.(피오리노 화폐는 원래 중세초에 은화로 제작되었으나, 1252년 금화 fiorino d'oro로 주조되었다.  이 금화의 앞면에는 피렌체의 수호 성인인 세례 요한상이, 뒷면에는 도시의 문장인 백합이 새겨져 있었다.  largo(=fiorino d'oro in oro)이며, 다른 하나가 역시 본문 중에 언급되고 있는 봉인금화 fiorino di suggello(=소금화 fiorino piccolo)이다.  대금화란 말은 금화 둘레가 커져서 무게도 늘어났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고, 봉인금화란 말은 그것의 무게를 달고 질을 검사한 후 지갑이나 상자에다 넣어 봉인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이 당시의 화폐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R. Ridolfi, Opuscoli, p. 169 ; N. Machiavelli, Machiavelli and His Friends : Their Personal Correspondence, tr. & ed. by James B. Atkinson and David Sices (DeBalb., 1996), p. 440, n. 2 ; L. Martines, The social World of the Florentine Humanists 1390 - 1460 (Princeton, 1963, p. 128,m n. 154 ; E. R. Chamberlin, the world of the Italian Renaissance (London, 1982), Appendix I - 옮긴이).  그리고 서기보는 아코스티노 베스푸치와 안드레아 디 로몰로로서 가각 봉인금화 96 피오리노아 60피오리노의 연봉을 받았다.  이들은 비아조 부오나코르시를 비롯한 또 다른 서기보들과 함께 때로는 10인위원회 서기장을 보좌하곤 하였다.  이 10인위원회 서기국은 얼마 후인 7월 14일의 결의에 따라 마키아벨리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무나 봉급 또는 부하 직원의 면면에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는 다만 명목상 자신이 섬겨야 할 상급자를 10명 더 가지게 되었을 따름이다.
  마키아벨리가 맡게 된 직책의 성격에 관해 당시의 전기 작가들이나 문필가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인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직책 자체가 무어라 규정하기 어렵고 논란이 많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마키아벨리의 시대에조차도 일의 내용이 분명하지 않았을뿐더러 그것도 필요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직책을 공화국의 제1서기장 직과 혼동하여 그를 살루타니, 브루니, 포초, 스칼라 등의 인물들과 같은 등급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잘못을 고친다면서 거꾸로 마키아벨리에게 부연된 직책의 중요성과 권위를 깡그리 무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2서기국의 (책임자는 니콜라우스 마클라벨류스)라는 기록이 1500년의 서기국 공식 명부에 버젓이 올라 있으며, 1502년의 명부에는 좀더 명시적으로 그를 가리켜 직접 (제2서기장)이라 부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는 법적인 측면을 넘어 실제적 측면에서 제2서기국의 장이었다.)고 말한 일급의 한 문학사가 비판하면서, 그가 (계속해서) 서기장 직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했던 앞서의 피렌체 서기국 연구가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어떤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평판이야말로 거의 직관적으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수많은 학자들의 어리석은 주장들을 교정케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피렌체의 서기장 Segretario fiorentino)이란 호칭은 그가 쓴 서명들 중 하나를 글자 그대로 옮긴 것으로, 역사적으로도 정확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오랫동안 바로 이러한 이름으로 불리고 인용되었으며, 마키아벨리라는 그 위대한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을 때에도 이러한 호칭 아래 그의 저작들이 출판되었다.  살루타티도 브루니도, 비록 그들이 최고의 명성을 지닌 서기장으로서 살아 생전에는 이탈리아의 도시와 궁정으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처럼 별칭으로 불리는 영예를 누리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영예는 지금 우리가 서기국의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음을 알게 된 바로 그 인물, 젊고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도 않으며 자신감과 재능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 인물에게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동시와 이탈리아에 대해 (나 여기에 있노라!)라는 그 유명한 말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제3장 첫 번째의 사절 임무들
  마키아벨리가 서기장 직에 취임한 당시, 피렌체인들의 주요 관심사는 피사의 탈환 문제였다.  서기국을 거쳐 나가는 대내외의 모든 일들 중 이 전쟁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피사의 반란은 샤를 8세의 간여와 동의 아래 이루어졌으므로, 피렌체인들은 무엇보다 그것을 상실케 한 원인이었던 왕으로부터 그 도시를 돌려받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뒤, 속았다가 것을 깨닫고 거꾸로 기회를 엿보다가 배반하는 긴 시간을 보낸 후, 결국 그들은 군사력으로 그것을 다시 빼앗고자 하였다.  만일 피렌체가 과중할 정도였던 대외적 욕심을 버리고 프랑스와의 끈끈한 밀착 관계를 포기함으로써 당시 샤를 8세에 대항하여 뭉쳐있던 이탈리아 국가들의 적의를 사지 않도록 했더라면, 피렌체의  피사 탈환은 쉽사리 이루어졌을 것이다.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는 오랜 전통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었으며 또 사보나롤라도 설교에서 그것을 옹호했기 때문에, 피렌체의 입장은 확고하였다.  특히 사보나롤라의 친프랑스적 설교는 이탈리아 동대의 깃발 아래 교속(교속)의 양군대를  동원하고 있던 교황을 격분케 하였다.  결국 로마 교황청이 피사 탈환을 양해하는 대가로 프랑스와 거리를 둘 것과 사보나롤라의 목숨을 요구함으로써, 피렌체 정부와 교황청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대결의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러한 대결 국면은 사보나롤라의 죽음으로 종결되었는데, 나는 여기서 당시 피렌체와 이탈리아 주요국들이 어쩐 관계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정책은 어떠 했는지를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샤를 8세는 사보나롤라의 체포 하루 전에 죽었지만, 이로써 이탈리아의 평화와 운명에 대한 프랑스 군의 위협이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새로이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는 전임자와 같이 두 시칠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는 말한 나위도 없고 할머니로부터의 계스권을 주장하며 스스로를 밀라노 공이라고까지 칭함으로써(루이 12세의 조부인 루이 드 발로아는 1389년 밀라노의 잔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첫 부인에게서 낳은 딸 발렌티나와 혼인하였다.  뒤에 1441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잔갈레아초의 손녀 비앙카 마리아와 결혼한 것을 기화로 밀라노를 장악하자, 루이는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하였다. - 옮긴이)  자신의 심중을 일찌감치 드러낸 바 있었다.  따라서 알프스 이남의 보든 나라들은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심정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반 샤를 ehdauod은 이미 해체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국가들은 이 후계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숙고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여러 나라가 프랑스에 사절을 파견하였고, 피렌체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히지만 피렌체의 경우, 비록 새정부가 사보나롤라 정부의 극단적인 친프랑스 정책을 멀리하고 알프스 이북의 공허한 약속보다는 좀더 가까이서 믿을 만한 우방을 찾는 쪼긍로 방향을 잡고는 있어ㅗT지만, 프랑스 탐새게는 가장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의 목숨을 담보로 한 승부에서 승리했고 그래서 더 이상 공의회도 샤를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교황은 이제 이탈리아에서 가문의 영예를 키우는 쪽으로 자신의 생각을 돌리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루이 12세의 호의와 도움이 필요했다.  그가 현재의 결혼생활을 청신하고 자신에게 형수 뻘 되는 죽은 샤를의 미망인과 혼인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교황은(정신적 호의를 베풂으로써 그 대가로 세속적 권력을 얻으려는) 의도 아래 이 쉽지 않은 두 사안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이제 그는 피렌체인들에게 노골적으로 우호감을 by시하기에 이르렀으며, 나아가 피렌체의 피사 탈환에 찬성할 뿐 아니라 베네치아의 동의를 얻도록 도와줄 용의까지도 있음을 피력하였다.  당시 베네치아는 흑안공(흑안공, II Moro : 스포츠차의 안색이 검다는 데서 유래한 별칭, 혹은 그의 미들 네임이 (Mauro)라는 데서 연유한다는 설도 있다. 부르크하르트가 일찍이 (완벽한 참주)라고 불렸던 인물 - 옮긴이) 로도비코 스포프차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렌체의 피사 탈환을 반대하고 있었다.
  자신의 인접 국가인 베네치아 공화국을 의심과 질시의 눈으로 보고있던 흑안공은 피사 문제에 대한 베네치아 공화국을 의심과 질시의 눈으로 보고 있던 흑안공 피사 문제에 대한 베네치아의 간섭이 차후 더 큰 주장으로 가는 빌미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정책의 방향을 바꾸어 피렌체인들의 뜻에 찬성할 뿐 아니라 그 일이 성사되도록 도와주려고 작정하였다.  이는 특히 사보나롤라와 그 파당이 제거된 후, 정권이 좀더 믿을 만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데도 그 이유의 일단이 있었다.  물론 피렌체 공화국이 그에 대한 프랑스 왕의 적개심을 완화시켜 주거나 또는 왕과 베네치아의 세력에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희망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피렌체의 피사 탈환을 베네치아가 완강하게 반대했다는 사실은 이미 말한 대로이므로, 이제는 이탈리아의 다른 국가들이 피렌체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부연하는 것만이 남은 듯하다.  제노바와 시에나 같은 인접 공화국들은 피렌체와 오랜 적대 관계에 있었다.  부근의 루카 역시, 흑안공의 개입으로 겉으로 중립을 지키고는 있었지만, 이웃의 적대국이었다.  로마냐 지방의 경우, 볼로냐의 참주 벤티블리오와 이몰라 및 포를리의 여 참주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피렌체에 우호적이었다.  반면 라엔차는 베네치아 편에 서있었다.
  다른 요인들이 끼어들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들이 피사 주변에서 진행되던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이 전쟁은 서기국에 자리를 잡은 마키아벨리의 일상적 관심사였으므로, 우리는 이에 관해 상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피렌체인들은 그 해 5월 산 레골로에서 작은 패배를 맛본 이후, 즉시 유명한 용병 대장이었던 파올로 비텔리를 군 사령관으로 부름과 동시에 로도비코 스포르창게데도 구원을 요청하였다.  스포르차는 중원군과 돈과 언약으로 공개적인 지지 의사를 표명하였고, 교황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는 다만 약속에 그치고 말았다.
  1498년 6월 1일 엄숙히 지휘봉을 잡은 새로운 지휘관은 곧 활기차게 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때까지 피사가 굳게 지켜왔던 부티, 비코피사노, 리브라파타를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협상을 통해 차지하였다.  베네치아는 직접 원군을 보내거나 또는 견제 공격으로 피사를 도우려 했지만, 가르파냐나로 진군하려던 시도가 좌절되고 로마냐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Tdmu 시에나와 페루자를 통해 군대를 보내려는 계획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자 베네치아는 파엔차를 경유하여 카젠티노에서 전투를 벌여 드디어 10월께는 비삐에나와 몇 개의 성채를 손에 넣었다.  이는 피렌체로서는 영토의 심장부를 위협받는 결과였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피사로부터 비텔리가 소환되었다.  베네치아인들은 물론이고 망명 상태에서 그들과 함께 있었던 피에로와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는 그 해 겨울이 우울하고 쓸쓸한 시기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강력한 적군과 대치하고 있었을뿐 아니라 동시에 그보다 더 강하고 적대적인 날씨라는 자연 현상에 대처해야만 하는 가혹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영토 획득을 열망한 피렌체인들 만큼의 강력한 동기를 갖지 못한 베네치아인들은  먼 곳에서의 전쟁에서 힘을 소모한 데 지친 나머지, 결국 페라라 공이 마련한 타협안에 동의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피렌체는 피사에 대해 단지 제한된 지배권밖에 누리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사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베네치아는 그들대로 이를 치욕으로 생각하였다.  이 중재안은 또 피렌체가 베네치아에 상당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정해 놓았는데, 후자로서는 이 액수가 불명예의 대가로는 충분치 못한 것이었던 반면, 전자로서는 배상금 지급이 옳지도 않을뿐더러 참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흑안공에 대항하여 프랑스 왕과 연합 관계에 있던 산 마르코 공화국(베네치아를 일컬음 - 옮긴이)이 그들에게 좀더 직접적이고 이익이 되는 일에 관심을 쏟게 되면서, 비록 조약 자체는 거부했지만 공교롭게도 조약에서 약정된 시간에 맞추어 자국군을 철수시켜 버렸다.  이로써 피렌체는 이제 모든 세력에게서 버림받은 상태였던 피사에 자신의 모든 전투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비망록 속의 마키아벨리 자필 편지나, 또는 보좌직에게 구술시키든지 그들에게 직접 쓰도록 한, 제2서기국과 10인위원회의 문서보관소를 가득 채우고 잇는 편지들을 통해 이 전쟁의 추이를 따라가는 일은 쉽지만, 동일한 비망록과 문서철 속에서 서기장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알기란 매우 어렵다.  설사 편지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매일 매일의 편지들만을 검토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더욱이, 장관들의 이름으로 씌어졌던 이러한 편지들에서 과연 얼마만큼이 그의 것인지를 알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암도 때로는 편지의 형식에만 간여했을 것이지만, 또 때로는 그 내용에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서기국을 둘러싼 비밀의 벽을 뚫고 마키아벨리의 재능이 한껏 빛을 발하는 경우는 특정한 군사. 정치 문제에 관해 장관에게 사실을 알거나 혹은 자문에 응하기 위해 쓴 보고서에서이다.  한 예로서 (피사 전쟁 논고 Discorso della guerra di Pisa)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피렌체가 베네치아로부터 스스로의 옆구리를 노리던 칼을 빼앗은 뒤 새로운 다짐으로 피사 탈환의 시도를 재개한 때인 바로 이 당시, 더 정확히 말하면 1499년 5월에 씌어진 것이었다.  명석학도 치밀하며 힘찬 느낌을 주는 이 글은, 현존하는 것으로는 마키아벨리 최초의 정치 저술로서 이미 사자의 발톱 같은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장군들과 그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데서 나타나는 명쾌성, 날카로운 판단력, 다부진 문체의 이 저술을 읽노라면, 정무위원회가 왜 날이 갈수록 그 서기장을 신임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서기장들은 이와는 다른 방식의 일까지도 하곤 했다.  때때로 그들에게는 위임업무나 나아가서는 사절의 임무까지도 부여되었는데, 이는 경비 절감이나 일의 성격상, 또는 어떤 긴급한 이유 때문에 정식으로 대사를 보내기가 마땅치 않을 때 그러하였다.  이때 서기장에게 붙은 호칭은 공식 대사를 뜻하는 암바쉬아토레 ambasiciatore나 오라토레oratore가 아니라 그냥 대리인의 의미를 지닌 만다타리오 mandatario였다.  그들의 임무는 평화 조약이나 동맹 관계에 관해 협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관측하고 보고하거나, 중성이 덜하면서도 긴급을 요하는 일을 처리하거나, 절차에 따라 선출될 대사에 앞선 예비 작업을 하는 것또는 이 대사들을 수행하고 보좌하며 조연하는 동시에 그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이런 종류로 처음 맡은 임무는 당시까지도 끝없이 계속되고 있던 피사 전재에 관련된 긋오 그 기간이 얼마 소요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피옴비노의 참주이자 피렌체의 용병 대장들 중 하나였던 야코포 다피아노에게로 보내졌는데, 당시 그는 급료 인상과 지휘권 확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 자신이 문서 속에서 밝힌 유명한 판단에 따르자면, (말을 잘하지만 결단력이 없으며 행동은 더 형편없는) 이 소참두와 그사이에 일었던 일의 결과는 우리에게 알려져 잇는 그대로다.  그는 첫 번째 요구에 대해서는 종전의 액수로 유지하도록 하고 두 번째 요구에 대해서는 그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언질을 줌으로써 사태를 해결하였던 것이다.
  7월 12일, 그는 좀더 중요한 두 번째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이 역시 피사 전쟁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가 만난 인물은 이몰라와 포를리의 백작이자 흑안공의 서출 질녀인 카테리나 스포르차였는데, 임무는 전년도의 15,000피오리노의 급료를 받고 피렌체를 위해 싸웠던 그녀의 막내아들 오타비아노 리아리오와의 용병 계약 건이었다.  작년 말, 그는 선택 사항이었던 다음 해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었다.  그러나, 백작은 그녀의 아저씨는 물론 자신의 머리 위로까지 몰려드는 구름떼를 보면서도 짐짓 속을 숨긴 채, 그 계약 건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문의하였다.  피렌체는 어머니를 자기 편으로 삼기 위해 그 아들을 한 해 더 고용하려고 했지만, 급료로는 10,000피오리노만을 계상하고 있었다.  피렌체가 마키아벨리를 보내 협상코자 한 것은, 유는한 지휘관을 갖춘 500면의 정예 보병대를 확보하고, 가능하다면 피사 전쟁에 쓰일 포탄을 구입하는 일이었다.  히지만 피렌체인드로서는 무엇보다도 인접 지역에 위치하여 그들 나라를 방어하거나 또는 거꾸로 그들을 공격하는 요새로 이용될 수 도 있는 백작광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13일 피레체를 떠난 마키아벨리는 카스트로카로에서 멈추어, 그곳의 군수품 사정과 초병 활동에 관해 정무위원회에 보고하기 시작하였다.  15일 포를리에 도착한 그는 백작을 알현하였다.  아직은 무명인 이 위대한 정치가 앞에 로마냐의 작고 소란스런 국가를 통치하면서 달련된, 아름다운 몸과 드높은 기상으로 유명한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성벽 위에서는 어떤 남성보다도 더 식씩하고 침실에서는 또 어떤 여자보다도 더 뜨거웠던 그녀는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첫 남편인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잃고도, 당당하게 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와 아이들을 위하여 나라를 지켜냈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 남편 역시 살해되자, 그녀는 다시 한번 가차없이 복수하였다.  36세의 나이로 재차 미망인 된 그녀는 조반니 데 메디치를 세 번째 남편으로 맞았는데, 그와의 사이에,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고 스포르차 가계의 호전적 기질과 더불어 어머니의 거침없이 사나운 성격을 이어받은 아들 하나를 두었다.(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 - 옮긴이).  지금은 옆방에서 그리 중요치 않은 협상을 진행중인 그 피렌체의 서기장은 앞으로 언젠가 이 젊은이에게 이탈리아의 마지막 희망을 실은 깃발을 치켜들도록 요청하게 될 것이었다.
  우리의 서기장이 이 여장부 앞에 나아갔을 때, 조언이 목적인지 아니면 감독이나 지시가 목적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자신의 거대한 친척이 보낸 사절과 함께 있었다.  그녀의 친척인 밀라나 공은 다시 교황의 버림을 받은 데다, 최근 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진 못하던 피렌치인들과도 사실상 멀어진 상태에서 알프스 산맥으로부터 프랑스군이 눈사태처럼 밀려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병사와 그 외 전쟁 물자 조달이 화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에 대한 협상에서 마키아벨리의 강력한 경쟁 상대인 셈이었다.  마키아벨리가 백작에게 자신의 이두를 얘기하자, (피렌체인들은 언제나 말을 그럴 듯하게 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행하는 데에는 시원치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는데, 이러한 반응은 당시의 피렌체인들이 흔히 접하던 것이었다.  그는 또한 그녀가 밀라노로부터 더 좋은 조건을 제시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자산의 제의에 대한 답을 곧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바로 그 다음 며칠 동안 몇 가지 대답을 받았으므로 앞의 약속 자체는 잘 지켜진 셈이었지만, 그 대답들이라는 것이 각각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던 데 대해서는 (일이란 더 많이 논의될수록 더 잘 알게 되는 법) 이라는 말로 정당화하였다.
  마키아벨리는 백작이 (잰 체하고 )있다고 피렌체에 전갈을 보냈다.  그녀의 옆에는 언제나 밀라노의 사절이 지키고 있었으며, 군인들은 계속해서 밀라노로 떠났다.  탄약도 여분이 없다는 말이 전해졌다.  이런 상황 아래 시국에서는 아드리아니가 전투 인력의 수급을 재촉하고 있었다.  서기보인 보오나코르시는 (계약서를 그 귀부인의 코앞에 들이밀어라)라고 말했다.  그러니 물러설 수밖에! 마키아벨리에게는 마치 악마가 살아 있는 여자의 모습으로 자신 앞에 서 잇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마침내 12,000피오리노의 급료를 주기로 하고 합의문에 막 서명하려는 찰나, 그녀는 피렌체가 자국 방어를 서면으로 약속해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를 내놓았다.  하지만 피렌체로서는 원래 그것을 다만 말로써 약속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변덕에 접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노한 감정을 더 이상 (말과 제스처로만) 나타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일을 끝맺지 않은 상태로 둔 채 즉시 피렌체로 떠나버렸다.
  피렌체에서는 그와 그의 편지에 매우 만족해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마키아벨리가 보낸 편지들로부터 내가 보기에 핵심적 사항이라 생각되는 사실들을 추론해 낸 것이리라.  만일 백작이 사태를 관망하고자 하는 입장이라면, 이는 피렌체인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일이될것인데, 왜냐하면 그 귀부인의 호의와 군대를 얻으려는 다툼에서 시간과 프랑스 왕이야말로 그들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키아벨리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정작 그는 그녀의 아저씨인 밀라노 공이 베네치안 군과 이제 움직이기 시작한 프랑스의 막강한 군대 상이게 일단 갇히게 되면 그녀도 더 이상 (잰 체하지)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비록 그 잘난 여인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 아래로는 야릇한 미소가 결코 그의 입가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8월 1일 피렌체로 돌아온 마키아벨리는 평상시와 같이 다시 서기국 업무에 매달렸다.  부오나코르시가 포를리에서 그에게 보낸 편지들을 믿는다면, 서기국에서는 그의 공백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피사 근교에서의 전투가 다시 가열됨에 따라 업무량도 폭주하고 잇는 상태였다.  마키아벨리가 돌아오던 바로 그날 피사 바로 아래의 진을 치고 있던 피렌체 군은 8월 6일 대포로 성벽을 40브라차(토스카나의 면적 단위로 1braccia는 약 0.3364 제곱 미터 - 옮긴이) 가량 부수었고, 10일에는 로카 디스탐파체 요새를 빼앗았다.  이곳을 빼앗김으로서 도시를 피렌체군에 열어줄 지경에 이르자, 모두가 도망할 궁리를 할 정도로 겁에 질린 피사인들은 항복 조건을 협상하기 위한 대표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적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몰랐던 비텔리는 아직 전투를 시작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승리가 눈앞에 다가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바로 그 시점에 군대를 퇴각시켜 버렸다.  그날과 다음날이 지나갈 때까지도 공격의 징조가 보이지 않자 피사인들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물론 성벽 사이의 부서진 틈으로 비텔리가 잃어버린 기회를 다시 되찾을 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하지만 공격을 재촉하는 정무위원회의 편지(이 중에는(엣소르타토리아 풀케리아 exhortatoria pulcherrima) 가장 아름다운 격문이라는 뜻 - 옮긴이)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이는 제2서기국 문서 속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비록 마키아벨리의 자필은 아니지만 그가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에도 불구하고, 비텔리는 사태를 좀더 지켜보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말라리아로 병력이 크게 손실을 입자, 9월 14일 포위망을 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피렌체에서는 이에 대해 큰 불만을 표시하였다.  한동안 도시는 전쟁 비용 때문에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난 5월이래, 1499년 후반기 동안 봉직할 10인위원회의 새로운 위원들이 선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위원회가 도저히 수행 불가능한 전쟁에 공금을 낭비했다는 오명 때문이었다.  결국 정무위원회가 공석중인 위원회의 역할을 떠맡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마카아벨리의 일이 바뀌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10인위원회의 위원들이 임명되지는 않았지만 위원회 자체는 존재하고 있었고, 또 그 서기국은 오히려 더 바빠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실제에 있어 10인위원회의 서기국은 제2서기국과 거의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참을성 잇게 기다리는 파울로 비텔리의 시중한 성격은 조바심을 자 치는 피렌체인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과거의 비난은 그렇다 치더라도, 스탐파체 사건 이후로는 설사 남을 덜 의심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를 그토록 유명한 용병 대장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허 능력 없고 비겁하다고 욕했을 법하다.  더욱이 이곳은 피렌체가 이니던가.  급기야 사람들은 그의 배반을 입에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앞서의 촉구성 편지에 뒤이어 또다시 비난조의 편지들이 비텔리에게 전달되었는데, 이 역시 마키아벨리에 의해 구술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역정과 불신이 극에 달해, 이에 놀란 비텔 리가 피사를 재차 공략하겠다고 나섰을 때에도 냉담한 반응밖에 얻지 못할 정도였다.  한편, 조바키노 과스코니를 수반으로 새롭게 바뀐 정무위원회는 무언가 일이 진행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토록 녹초가 딘 시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지휘관이 이끄는 전쟁을 계속하기 위한 비용을 더 부담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들 중도에 해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일들이 정무위원회에서 극비로 처리되기는 했지만, 이에 대한 그의 편지들을 통해 우리의 서기장이 계속해서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물론우리는 당시 정무위원들(원문에서는 (Signori)라는 용어를 상용하고 있으나 이는 (priori)와 동일한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 옮긴이) 중 하나가 그의 혈족으로서 알레싼드로의 아들인 또하나의 니콜로 마키아벨리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올로 비텔리를 벌하기 위해 취해진 마키아벨리주의적 방법이 우리의 마키아벨리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경솔하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쨌든 카쉬나로 소환된 비텔리는 관리들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그의 동생 비텔로초는 용케 빠져나갔지만 결국은 뒤에 더 전문적인 추적자에 의해 똑같은 운명을 맞게 되었다.  파올로는 피렌체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그가 정말 결백해서인지 아니면 용감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고 버티다가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렇듯 정의를 내세워 무자비함에 대해 d\그것은 명백한 불의에 불과하다고 말할 사람도 잇겠지만, 어쨌거나 피렌체인들은 그러한 조치에 크게 만족하였다.  곤팔로니에레와 그 휘하의 관리들은 큰 칭송을 들었다.  그토록 세련되고 예의에 밝은 이 사람들의 정신 깊숙한 곳에서 잔혹한 어떤 기원(앞서 말한 바처럼)이 한 줄기 섬광처럼 솟아올랐던 것이다.  이 평시민 공화국은 그야말로 기꺼이,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한 whdawkda군을 시범적으로 처단할 만큼 본보기를 중요시하였다.  귀족 공화국이었던 베네치아가 카르마뇰라에게 가한 조치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이와 같은 일의 진행 방식이 일종의 예술 작품과 같은 것이었고, 당시의 표현을 따르자면 한 국가의 (명성을 드높이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 마키아벨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건 간에, 비텔리 건을 가혹하다고 비난한 한 루카 서기장의 편지를 가로채 보고는, 스스로를 공화국 (대변인)으로 간주하는 서기장의 전통에 따라 그것에 격렬히 반발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피렌체인들은, 비록 사람과 상황은 다를지라도, 사보나롤라의 경우에서 보는 것 같은 사악한 조치들을 가차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들이 파올로 비텔리의 목을 도끼로 자른 행위는 반드시 정의를 세우려는 것보다는 당시 도시를 옭아매고 잇던 매듭을 잘라버리려고 한 데에 그 본위가 있었다.  일단 그러한 조치가 취해지자, 전쟁과 관련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군은 이미 이탈리아로 들어와 거침없이 진군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도비코 스포르차는 빨리 몸을 피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런 방어책도 생각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롬바르디아의 큰 도시들도 차례차례 침입자의 손으로 떨어져갔다.  그리하여 흑안공은 결국 5년 전의 자산의 손으로 프랑스 군을 이탈리아에 불러들임으로써 스스로 자초했던 눈사태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흑안공이 도주한 지 20일이 채 되지 않아 밀라노와 공국 전체가 프랑스 왕의 손에 들어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흑안공과 왕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피렌체는 급히 환영을 표하였고 비록 시기를 놓쳐 조건이 더 나빠지긴 했지만 승리한 쪽과 동맹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이것이 뜻하는 바는 왕의 군대를 빌려 피사를 재탈환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지친 상태였던 피렌체인들은 이로써 다시 거액의 돈을 지출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자비로 피사를 공략하려 하는 피렌체인들을 돕기 전에, 카테리나 스포르차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추기경이었다가 뒤에 발랑타노아의 전사이자 공작이 된 체사레 보르자를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다.  이는 교황이 왕의 이혼을 특별히 허락해 준 데 대한 보상이었다.  발렌티노(우리는 앞으로 보르자를 이렇게 부르기로 하겠다)는 교회의 군세에다 프랑스 군 원병을 보태고, 여기다가 왕의 이름과 깃발까지 빌린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쉽사리 이몰라와 프를리를 차례로 손에 넣었다.  비록 백작의 용기가 (여자의 가슴처럼 조바심치던 많은 수비군들 틈에서 남성적 기백으로 뭉쳐져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를 자신들의 보호아래 두고 있던 피렌체인들로서는 이는 결코 적지 않은 굴욕이엇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처럼 위험천만한 세력을 이웃에 두게 되었다는 불안감이었다.
  프랑스의 욕심은 피렌체인들에게 잠시 숨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왕은 폐위된 흑안공이 공화국에 빌려준 돈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정무위원회는 마키아벨리를 밀라노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월 27일자 편지들을 통해 이미 그가 도착하리라는 사실이 트리불치오의 총독과, 막강한 루앙 추기경의 비서인 뤼숑 주교에서 전달되었으며, 2월 5일에는 사절의 신임장이 작성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날 흑안공의 동생인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이 밀라노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했으며 더욱이 흑안공 자신이 스위스와 독일의 정병을 이끌고 그곳으로 오는 도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죠T다.  그러자 피렌체는 마키아벨리의 출발을 취소하고 사태의 추이를 좀더 지켜보기로 하였다.
  흑안공은 놀라운 속도로 자신이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았지만 왕이 되돌아오고 스위스 용병들이 배신하는 통에 빼앗았던 것을 더 빨리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스스로의 자유까지도 상실하고 말았다.  (이탈리아 전체를 통틀어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 인물의 생각과 야망이 이제 좁은 감옥의 틀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던 거이다.)  이로써 피렌체인드의 피사 공략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은 이제 모두 사라진 셈이었다.  그란 동시에 피렌체는 프랑스인들이 원하는 조건과 돈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때는 용명을 날린 적도 있지만 지금은 다만 악명만을 가진 스위스 군대, 즉 왕의 가스코뉴 보병이 6월 초하루 보몽의 지휘 아래 피아첸차를 떠나 피렌체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먼저 피렌체 공화국의 부담 아래 볼로냐의 참주를 한번 쥐어짜 보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마키아벨리는 벤티볼리오(볼로냐의 참주 - 옮긴이)의 적벽 성채를 조롱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군대를 이끌고 지나는 길에,
  보몽은 벽돌을 몇 개씩이나 빼버렸네.
  그 동안 피렌체는 피사 공략에 소요될 비용을 마련하고 있었다.  돈은 기대했던 것보다 잘 걷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롬바르디아 지방 전체를 단 며칠만에 쉽사리 장악했던, 그토록 두려움의 대명사였던 군대가 그 동안의 저항으로 지칠 대로 지친 도시의 성벽 앞에 나타나는 것만으로 싸움은 끝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6월 10일, 피렌체는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루니자나까지 들어온 보몽에게 두 명의 전권 대사를 보냈다.  그들은 푸카 델리 알비치와 조밤바티스타 리돌피였는데, 특히 후자는 당시 공화국에서 최고위직에 잇던 사려 깊은 인물로 여론과는 달리 피사 공략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그들을 보좌하였는데, 그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하루는 전장에서 공사가 10인위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다가,  다른 날은 사무실에서 거꾸로 10인위원회가 대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6월 22일 피렌체에서 편지를 구술하고 있었으나, 24일에는 (그 무시무시한 프랑스 군영에서) 알비치의 서명이 달린 편지를 직접 쓰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군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존재라는 사실이 곧 드러났는데,그것은 그들의 적이었던 피사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고용한 피렌체에 대해 그러하였다.
  흑안공이 최근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스위스 용병이 오히려 그들을 고용한 쪽에 칼을 들이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병사들은 훈련되지 않고 광폭한 데다 장군이란 자는 능력과 권위가 모자라는 상황이었다.  여기에다 군인들이 양식을 낭비하거나 숨기는 등의 탐욕과 악의를 자행함으로써 식량이 부족해지자, 곧 난동 사건들이 거의 매일같이 발생하였다.  이런 일이 빈번해지자, 원래 아픈 상태에다, 보몽에게도 스스로 말했듯이 몸과 마음이 다 괴로워진 리돌피는 그만 피렌체로 돌아와버리고 말았다.  그는 이러한 사태가 곧 그들이 프랑스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자신의 말이 얼마나 옳은 것이었던가를 입증한다고 주장하였다.  군영에 홀로 남은 알비치와 마키아벨리는 난동을 부리는 병사들을 제어하려고 노력하였다.
  프랑스 군이 이렇듯 시간과 돈을 낭비하면서 느긋하게 전투 준비랍시고 하고 있을 때, 피사의 사절이 군영에 도착하여 도시를 피린체에 넘겨주는 것을 연기하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프랑스 군이 가까이 오고 있을 때 이미 이와 유사한 제의가 있긴 하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피사인들이 유예 기간으로 넉 달을 요구했던 반면, 이제 군대가 성벽 바로 밑에까지 이르자 그 기간이 단 한 달로 줄어들었다.  보몽은 이러한 조건부 항복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마키아벨리의 의견과는 달리 피렌체측 사절이 결렬한 어조로 이에 단호히 반대했기 때문에, 그들은 6월 30일 성벽을 포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졌으나 전황은 바뀐 것 없이 그대로였는데, 왜냐하면 이 (무시무시한) 군대는 결코 자신들이 식량 보급대를 공격할 때와 같은 기백으로 성 안을 향해 진격할 용기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닌 무적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섰다.
  진실은 알려졌네.
  어찌하면 프랑스인들도 패배할 수 있는가가.
  성벽 아래에서의 이러한 한심한 행동 이후에도 병사들의 불손함은 꺽이기는커녕 오히려 켜져 갔으며, 따라서 난동 사태는 나날이 더 악화되어 갔다.  결국 가스코뉴 보병들이 먼저 엉뚱하게 급료가 적다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고, 이어 7월 9일 일단의 스위스 병사들이 전체의 묵인 하에 반란을 일으켜 피렌체 사작을 감금해 벼렸다.  마키아벨리는 그 지옥 같은 난동 속에서도 굽힘없이 그와 함께  있으려 했으나, 알비치는 (피렌체로 돌아가 이 일을 알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곧 이를 짤막하지만 격동적인 어조의 편지에 담았다.  몇 시간 후 사절은 스스로 1,300두카토를 몸값으로 지불하고 풀려났다.  그러나 이 난폭한 행위를 끝으로 수위스 병사들은 떠나가 버렸고, 이로 인해 그토록 손쉽고도 빨리 해렬되리라 생각했던 일이 졸지에 왕에게는 불명에를, 피렌체인들에게는 손해와 조롱 거리를 남기고 끝나 버렸다.  군대가 철수하는 데서 새로이 힘을 얻은 피사인들이 점점 저항에 성공하기 시작하자, 피렌체로서는 프랑스에 사절을 파견하여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동시에 불평을 토로하고 이 사태를 어떻게 손볼 수 있을지를 알아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게 되었다.  이 임무를 맡기기 위해 그들은 알비치에 이어 피사 공략전에 파견되었던 프란체스코 델라 카사와 함께, 이 일의 진행 과장을 가장 소상히 아는 인물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선임하였다.
    제4장 첫 프랑스 사절 시기  
  니콜로가 피사에서의 위험한 임무를 위해 출발하던 5월 10일 바로 그날에, 그는 아버지를 잃엇다.  어머니는 4년 전인 1496년 10월 11이레 세상을 떠났다.  누나들은 이미 결혼을 해서 프란체스코 베르나치와 베르나르도 미네르베티라는 남편을 맞았다.  그래서 이제 남은 사람은 단지 남동생인 토토뿐이었는데, 그는 사제의 길을 택하였거나 혹은 그러려고 하고 있었다.  분명히 니콜로는 아버지를 잃은 누구나가 그러한 것보다 그의 공백을 더욱 뚜렷이 느꼈을 것이며, 일생 중 그대로 고통이 덜한 때를 생각하며 달래게 마련인 충격의 흔적은 더 무겁게 그의 말음을 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메쎄르 베르나르도와 니콜로는 서로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사이가 좋았다.  둘은 익살맞고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거의 형제 사이와 같이 가까웠으며, 서로간에 말이나 글로, 또는 산문이나 시로 농담 섞인 대화를 주고받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니콜로는 아버지가 운명한 후 그가 썼던 사물(사물)과 일찍이 자신의 어린마음을 담아두었던 손때 묻은 책들을 정리하다가, 이런저런 것들 사이에서 자신이 아버지에게 써 보낸 소네트 한편을 발견하였다.  이 시는 그가 시골의 아버지에게서 살찐 거위 한 마리를 받았을 때 썼던 것이었다.  메쎄르 베르나르도는 아들이 시내에서 바쁜 나머지 말리비틀어 진 육포와 건과로, 혹은 (빵과 나이프)만으로 식사를 대충 때우고 있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그들은 한 달 도 더 넘게
  호두와 무화과와 콩과 육포를 먹고 살았네.
  그건 결코 농담이 아니었네
  오랬동안 그곳에 그렇게 머문다는 것이.
  마치 피레솔레의 황소가 굶주린 채로
  제 콧등을 핥으며 아르노 강을 내려다보듯이,
  야채 가게 여주인의 달걀과
  푸줏간의 양고기, 쇠고기를 쳐다보고난 있었지.
  (...)
  그러다 마침내,
  나의 아버지 베르나르도가 사 보내셨지
  오리와 거위를. 당신께서는 잡숫지 않으시고.
  이젠 고인이 된 베르나르도여! 그의 위대한 니콜로는 그가 운명한 후에도 여전히 애정 어린 친근함으로 또 다른 농담을 던질지니.  1504년경이었던가.  산타 크레체의 한 수도사가 와서는 그에게 말하기를, 마키아벨리 가의 묘역에 불법적으로 다른 사람이 묘를 썼으니 빨리 그것을 옮기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니콜로는 (그 수도사의 장광설에 대해 ) 이렇게 답하였다.  (뭐 그대로 두시구려. 제 부친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이셨으니, 동무가 많을수록 더 좋아하실 테니까요.) 그러한 농담 속에서 우리는 불경함을 느끼기보다는 다른 준은 이들을 향한 동정심을 본다.  그것은 불손함도 무관심도 아니다.  그것은 몇 년후, 일찍이 아버지가 교회에 기증하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던 것을 이행했을 때 보여준, 그의 위대함에 걸맞는 커다란 관용의 마음이며 후하고 너그러운 품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니콜로는 바삐 돌아가는 공무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고 그에 대한 기억을 더듬을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는 사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얼마 되지 않은 유산이지만 그것을 동생인 토토와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의논할 틈도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베르나르도가 운명한 당시는 서기국이 피사 원정을 준비하느라 허둥대고 있을 때였으며, 얼마 후 그도 사절과 함께 전장으로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 임무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즉시 다음 임지로 가야만 했는데, 이번 목적지는 프랑스였다.
  마키아벨리에게 이는 첫 해의 임무이자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든 경력상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가 피사 원정에서 진짜로 얻은 것은(그 일에 쏟은 노고와 그 과정에서 겪은 위엄에 대한 보답으로) 받은 6피오리노 금화가 아니라, 바로 이 여행 그 자체였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가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이 아니라 실제로 토스카나 밖에 나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제 그는 가방 속에,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I Commentari)를 놓고 외국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이 호기심 많은 관찰자에게 외국 사람들이란 마치 막 첫장을 펼친 책처럼 아직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그야말로 미지의 대상이었다.  자시의 고향 피렌체는 마키차벨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고 알프스 이북의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은 것을 가르쳐주었음에 틀림없지만, 아직까지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야만인이라 부르는 바로 그 민족들이 이제는 거꾸로 피렌체와 이탈리아에, 그리고 특히 마키아벨리라는 천재 정치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차례였다.  그들은 강력한 통일성에서 나왔다.  그들은 복종의 관습에 잘 적응되어 있었고 자국군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주의 이름 아래 뭉쳐 있었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을 지배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피렌체 공화국은 이미 프랑스 대사로 프란체스코 괄테로티와 로렌초 렌치를 파견해 놓고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카사와 마키아벨리가 도착한 후에도 그곳에 남아 있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의 지위는 특별 사절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두사람이 만다타리오로 지칭되고는 있었지만( 이 책 54쪽의 사절 명치 참조 - 옮긴이), 이번의 파견은 7월 18일자 결의 사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델라 카사와 마키아벨리는 지위와 권위의 측면에서 서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물론 전자가 나이나 신분 면에서 위인 데다가 공문서에서 먼저 거명되었고 사절 신임장의 말미에 먼저 서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점들이 그들 사이의 우열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신임장의 내용도 모두 마키아벨 리가 쓴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기 작가나 문학사가들은 둘의 봉급이 다르다는 사실에 오도되어 이러한 점을 잘 알지 목하고 있었다.  카사의 경우 매일 8리라(즉 당시의 가치로 따져서 1과 3분의 1 피오리노 금화)와 일당을 받은 반면 마키아벨리는 4리라를 받앗다.  빌라리는 후자가 (더 하급직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가 봉급을 반밖에 못 받은 것인가? 사실은 이러하다.  델라 카사는 국가로부터 이것 외에 다른 어떤 급료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사절 선임 과정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공화국이 그가 받기로 되어 있던 특별 수당에서 서기국의 관습에 따라 (그의 정상 급여)를 감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보면, 그가 가외의 급료를 더 받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정무위원회 판단으로는, 그들 자신의 변명과 불만이 남들의 불만과 비난보다 먼저 왕국에 전달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그래서 대사들에게 훈련을 전하기에 앞서 이러한 점을 빨리 주지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그들이 받은 지시는 이랬다.  (힘이 닿는 한말에서 내리지 말고 가능한 빨리 가라.) 이에 따라 그들은 7워 18일에 목적지로 출발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여행 속도는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볼로냐에서 멈추었는데, 이는 정무위원회의 명령으로 벤티볼리오와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파르마에서 피아첸차로 가는 동안, 그들은 피사의 진지에서 이탈한 천여 명의 스위스 병사들을 목격하였다.  그들에 대한 앞서의 경험도 잇고 해서, 부득이하게 그들을 피해 우회로를 택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러한 상황은 마키아벨리의 여정을 지연시키기보다는 더 재촉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는 모르지만 (혼란과 사고) 때문에 두 사절은 도중에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다.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일에 대한 열의로 충만되어) 그들이 리용에 도착한 때는 7월 26일었다.  앞서부터 그곳에 상주해 있었던 두 명의 대사 중에 괄테로티는 이미 이탈리아로 떠난 상태였고 렌치는 왕국의 분위기와 임무 수행의 방법에 대한 특별 정보를 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극소에 남아 있었다.  원래 그에게는 사절들을 왕에 알현케 해줄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왕은 마키아벨리 일행이 도착하기전에 이미 리용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에, 렌치는 귀국길로부터 더 멀어지는 여행에는 더 이상 같이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래서 사실 그는, (스스로 피렌체에 보고했듯이 이제 (어떤 큰 일도 다룰 수 있는 ) 사람들이 도착했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그 직후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동안 신임 사저들의 열의는 리용에서 사그라들고 있었다.  원래 아무것도 없이 역마로 달려왔기 때문에, 말이며 하인이며 옷가지들을 그속에서 조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공화국은 사절들에게 그리 넉넉한 대우를 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 일행은 떠나기 전에 선금으로 각자 80피오리노씩 지급받았으나, 한 주 만에 각자가 쓴 돈이 벌써 30피오리노에 달했다.  이는 무려 22일분의 급료와 맞먹는 금액이었다! 그리하여 리용에서 머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졍부로부터 받은 현금은 모두 바닥이 났으며, 그들이 개인적으로 가져온 돈까지도 상당액을 써버린 상태였다.  아니, 그들은 결코 프랑스 땅에서 여유로울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7월 30일, 결국 그들은 스스로 왕의 일행을 찾아나섰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타고 왔던 말은 그에 지불된 돈만큼의 힘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왕은 당시 시골에 만연하고 있던 역병을 피해서 요리조리 신속하게 길을 우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월 5일, 그들은 생피에르 르 쿠티에에 가 가 있었으며, 따라서 네베에 머물고 있던 왕을 거의 따라잡을 뻔하였다.  그들은 그 조그만 마을에서 정무위원회에 보내는 각자의 편지를 썼다.  마키아벨리는 이 편지 속에서 (슬쩍) 자신의 개인적 요구 사항을 담은 편지를 끼워넣었다.  그 내용은 그나 동료나 둘 다 쓰는 돈이 다를 바 없으니 자신의 급료를 동료와 똑같이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어조는 자못 대담하다.(만일 제가 요구하는 금액이 너무 많은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저 역시 프란체스코만큼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는 뜻이든지, 아니면 다달이 저에게 지급되는 20두카토가 쓸데없는 것이든지 둘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혹시라도 뒤의 경우가 맞다면, 원컨대 저를 소환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날, 사절들은 (모든 불편과 감염의 두려움도 뒤로 한 채) 드디어 네베에서 왕의 일행과 만났다.  그들은 도착 즉시 루앙을 접견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 말을 빌린다면, 우리가 이후로 전능의 조르주 당브와즈이며 루앙의 추기경이라 부를 인물이었다.  추기경과, 그를 통해 그 직후 만난 왕과의 첫 대면은 솔직하고 유쾌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왕이든 장관이든 어느 구구도 피사 공략에서 나타난 무질서한 상황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임무의 핵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프랑스인들에게는 단지 수치일 분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인 즉, 피렌체인들에게는 일단의 책임이 있으며 자신들 역시 그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이미 과거사이므로 지금부터는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면서 왕의 명예를 되찾고 공화국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애써야 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를 프랑스어와 궁정 라틴어를 섞어가면서 말했지만, 그것을 보통의 피렌체 말로 옮기면 결국 왕 군대의 유지비용을 여전히 피렌체가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절의 고민은 그들의 용건이 끝난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즉 그들이 온 것은 단지 피사 건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하고 상대방에게 잘못을 전가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들은 공화국이 전쟁을 계속할 돈도 그와 같은 군대를 가지고 전쟁을 수행할 의사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 스스로가 피사 공략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중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왕과 그를 둘러싼 장관들은 즉각 이러한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반란과 도주의 오명을 얻은 스위스 군에 대한 급료는 여전히 피렌체인들의 몫이기 때문에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이처럼 뼈있는 말들이 오가자, 이야기는 처음과는 달리 냉랭한 분위기에서 끝나고 말았다.
  피렌체 사절들을 물러가게 하면서, 왕은 앞으로 3일쯤 뒤에 몽타르지에 머물 테니 그곳으로 좀더 나은 제안을 들고 오기 바란다고 말했는데, 사실 그들은 8월 10일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곧 여전히 앞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루앙과 언쟁을 벌였다.  그들간의 대화는 거의 언제나 귀머거리들이 논쟁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는데, 각각의 상대방의 의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싫증날 정도로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크게 세 가지 점에서 피렌체인들을 비난하였다.  첫째, 마키아벨리가 빈정대는 어투로 말했듯이, 왕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피렌체인의 돈으로 피사 전투를 계속하려 하지 않는 것.  둘째, 스위스 군이 피사 공략에서 이탈한 후 그들의 급료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것.  셋째, 스위스 군 사건 이후 왕의 다른 군대가 피렌체의 영토내로 들어가는 것을 거절한 것.  마키아벨리는 정무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정무위원님들께서는 결코 훌륭한 편지나 달변의 연설들이 유용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도시가 프랑스 왕가에 보여온 신뢰감이나, 전왕의 시대에 했던 일들, 우리가 그 동안 쓴 돈, 그 동안 겪었던 위험, 얼마나 자주 헛되이 돈을 썼는지, 최근의 사건들과 우리의 힘이 커짐으로써 왕의 권력은 이탈리아 내에서 오히려 안전하게 확보되리라는 것, 다른 이탈리아 국가들은 믿기 힘들다는 것들을 아무리 얘기하려 해봐야 모든 것이 헛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문제들을 매우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그곳 상황에 어두운 사람들이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과 현재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져 있으며 오직 군세를 갖추거나 돈을 줄 것 같은 자들만을 높이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미 지쳐서 합리적인 선 이상을 넘지 않으려는 공화국이란 모루와, 그러한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챙길 뿐인 왕이란 망치 사이(모루 incudine와 망치 martello의 비유는 진퇴양난을 뜻하는 이탈리아식 표현임 - 옮긴이)에서, 그리고 급하게 대답을 요구하는 왕궁과 대답을 거의 내놓으려 하지 않는 정무위원회 사이에서, 아무런 권한도 없이 다니지 불충분하고 보상도 없는 위임적 위치에 서 있던 두 사절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지옥과 같이 느껴졌으며 결국은 사태가 조국의 파멸로 끝날 것 같은 기분에 젖어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 인들의 요구를 무언가 받아줄 만한 아무런 권한도 지니지 못한 우리의 계급과 위신으로 침몰 직전의 상황을 다시 되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에) 신임 전권 대사를 보내는 거시 필요하며, 덧붙여(새로운 제안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그것도 소용이 없으리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헛일이었다.  사절들의 불안감은 필요시 특별 전령도 보낼 수 없을 정도로 궁한 당시의 처지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결국 다시 재촉한 끝에 급료를 올려 받게 되었다.  이는 동생인 토토의 노력과 곤팔로니에레의 호의 덕분이었다.  이 소식을 먼저 전해 준 것은 바로 토토였다.  이 결과 겉으로 보아 마키아벨리의 수당은 동료와 같아졌지만, 그가 정상적으로 받는 봉급까지 계산에 넣을 때 사실상 그는 훨씬 더 많은 수입을 가지게 된 셈이었다.  그는 또 그 같은 대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미 얘기된 바이지만, 사절의 협상 과장에 대한 명문의 편지들도 모두 바로 그의 자필로 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인정받고 있는 것은 필체보다는 문체 쪽이다.  피렌체에서 그 편지들은 큰 찬사를 받았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찬사는 어느 날 그러한 찬사를 전해 들은 진실된 성품의 부오나코르시가 그 편지들이 얼마나 쉽고도 명쾌하게 씌어졌는가를 이야기함으로써 더욱 증폭되었다.  이와 같은 수입의 증대와 피렌체인들의 찬사 덕분에 그는 프랑스에서 겪고 잇던 고통을 일부나마 덜게 되었다.  그에게는 친구들, 특히 그 중에서도 절친한 부오나코르시의 편지가 역시 큰 위안이 되었는데, 그는 니콜로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 서기국의 용병들 중에서도) ((용병 glistradiotti)이란 원래 16세기 당시 베네치아가 고용한 마케도니아 혹은 슬라브 용병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아마도 서기국 관리끼리 스스로를 지칭하는 일종의 속어인 것으로 생각된다 - 옮긴이) 그 이상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한껏 우쭐해 있었다.  물론 니콜로는 다른 (용병들)의 추신이 달린 다정하고 유쾌한 편지들도 받았는데, 모두가 그가 없는 사무국은 분위기가 영 재미없고 쓸쓸하다며 그쪽이라도 (제발 빌어먹길) 바란다는 (문장 속에 (제발 빌어먹길 mille cancheri)이란 표현 역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고 허물없는 사이에 주고받는 반어적 의미의 속어로 생각된다 - 옮긴이) 애정어린 내용이었다.
  그 동안 왕은 몽타르지에서 멜뤼으로 옮겨갔으며, 피렌체 사절들도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장소만 바뀌었을 뿐, 그들이 처한 상황은 이전 그대로였다.  그들은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시임 대사가 그러한 대답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약속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피렌체에서 그러한 임무를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프랑스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맨 먼저 프란체스코 페피가 대사로 선출되었으나 가려 하지 않았다.  그 뒤를 이어 루카 델리 알비치가 다시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 또한 피렌체 사절들이 그의 임명 소식을 왕국에 알린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자신이 갈 수 없는 사유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가 사적으로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스스로 내세운 이유는 몸이 불편하고 경비도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베르나르도 루첼라이와 조반니 리돌피가 뽑혔지만, 그들 역시 알비치처럼 그것을 거절하였다.
  이렇게 되자 마키아벨리 일행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말았다.  9월 3일쯤에는 급보를 전하기 위한 돈조차도 수중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왕의 잭 없이 즉시 그곳을 떠나 작정하고 있었다.  당연히 프랑스인들의 분노와 위협은 점점 더 커져갔다.  루앙은 심각한 경고를 보냈고, 이는 왕과 피렌체 간의 사이가 완전히 파국 상태를 맞는다는 뜻으로 보였다.  마키아벨리는 (고토록 많은 비용과 그토록 깊은 염원을 갖고 추구해 왔던 양국간의 우호관계가 이런 식으로 와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편지에 써 보냈다.  피렌체로부터의 대답은 여전히 열을 달라는데 겨우 하나만 주거나 아니면 아예 이도 저도 없는 정도에 불과한 형편이었다.  9월 20일 자의 한 편지에서, 정무위원회는 대사로 보낼 사람도 찾을 수 없고 (그러한 임무를 수행케 할 만한 히도 없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시민들의 생각을 왕의 요구에 따르도록 돌려놓을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왕이 만족할 정도의 돈도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피렌체 사정은(재정 결핍)을 이유로 사절들이 그토록 애타게 요쳥해 왔던 작은 액수의 돈조차도 주지 못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피렌체 공화국은 그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 부딪히자, 프란체스코 델라 카사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고는 심신을 편히하기 위해 파리로 가버렸다.  반면 마키아벨리는 여전히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왕을 쫓아 블로아로 갔다.  혼자 남은 그는 두 사람 몫의 열성을 가지고 루앙과 왕을 타협의 장으로 끌어내려고 이리저러 애써보았지만, 협상 거리도 없이 똑같은 이야기만 되풀이되는 우스꽝스러운 결과만이 나타날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무언가 쓸모 있는 일을 하려고 왕궁의 분위기를 그려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그의 장기인 날카롭고 단호한 판단력이 잘 드러난다.  며칠 전의 편지에서 그는, 왕이 나폴리 원정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행시키는 이유로(특히 그가 피사의 예를 통해 최근에 보았듯이, 힘이 필요한 곳에서는 분필과 명성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나폴리의 서기장이 여기에 와서 합의를 끌어내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일단 무언가를 약속하고 주려는 경우에만 귀를 기울이는 족이긴 하지만 그의 말이 곧 받아들여지리라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새로운 생가가 거리를 찾았는데, 그것은 발렌티노가 교황의 이름과 돈을 빌려 또 다른 원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혹자는 이것이 콜론나 가를, 또 혹자는 파엔차, 리미니, 페자로를 비롯한 로마냐 지방의 참주들을 겨냥한 것이라고도 하였다.  혹은 불로냐를 치려는 의도인지도 몰랐다.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교황이 모든 일을 용인한 이유는 발렌티노가 승리하는 것을 정말 원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야욕이 비록 무절제하긴 하지만 사람들이 그에 대해 공공연히 저항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르자 가의 야욕이 겨냥한 것은 로마냐였음이 곧 밝혀졌지만, 그들이 과연 그것에 만족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명확하지 않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즉시 피렌체인들의 의심을 샀다.  그러다가 이 교황의 아들이 메디치 가와 음모를 꾸미는 듯한 기미를 보이는 데다가 그가 피에로를 권좌에 복귀시키겠다고 드러내놓고 거들먹거리자, 피렌체인들의 의심은 급기야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사태는 말하자면 공화국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프랑스와의 친선이 바야흐로 노골적인 적대 관계로 바뀌려는 바로 그 시점에 태풍을 알리는 먹구름이 공화국의 경계로 몰려들고 있는 형국인 셈이었다.  10월 11일에도 마키아벨리는 어쩔 도리없이 대사가 스위스 용병의 봉급 문제에 대한 답변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똑같은 이야기를 여전히 반복할 수밖에 없었고, 루앙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당신이 말하는 게 그거지.  사실이야.  히지만 우리는 그 대사라는 친구가 오기 전에 다 죽고 말거네.  그러나 그 전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죽는 꼴을 보게 될걸세.)  피렌체인들을 불장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르자가 즉각 손을 든 리미니와 페자로를 수중에 넣는 동안, 두려움으로 인해 갑자기 제정신을 되찾게 된 피렌체인들은 곧 대사와 돈을 조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왕의 일행을 쫒아 낭트로가 있던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신임 대사 피에르프란체스코 토싱기가 만족스런 답변을 가지고 10월 16일 이쪽을 떠났음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답변은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1월 4일 왕으로 하여금 발렌티노가 피렌체인들에게 피해를 입힐 짓을 추호도 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는 점을 그에게 알리라는 내용의 편지를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에게 보내도록 할 정도는 되었다.  바로 이날 보르자의 야심에 대한 이러한 토론중에 나온 것이 추기경에 대한 그의 유명한 응답이었다.  그 내용인즉, 루앙이 이탈리아인들은 도대체 전쟁이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말하자, 마키아벨리는 즉시 프랑스인들은 정치 lo stato가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반박하면서 그것을 안다면 교회가 어떻게 그토록 큰 힘을 가지도록 방치했겠느냐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렌체의 서기장은 이 전능의 대신관 맞설 만한 대담성과 기민성만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동시에 자신이 보낸 거의 모든 편지 속에서,  현상태의 피렌체를 보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왕의 힘 앞에서는 과거의 분노와 이유와 권리들을 모두 잊어버리는 쪽이 현명할 것이라고 조언하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일만 두카토는 바로 내고 나머지는 분할하는 방법으로 스위스 용병에 대한 말썽 많은 급료를 지불하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왕은 돈이 늦어지는 것을 흔쾌해하지 않았지만, 분할금은 그들이 크게 부담되지 않는 액수로 쪼개졌고,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왕궁에서 좀더 나은 시간을 보내 수가 있었다.
 그는 또한 이제 곧 고향 땅과 친구들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아마 이제는 애정이 식은 집보다는 일더미가 쌓여 있지만 그래도 좋은 친구들로 가득 차 서기국으로 되돌아갈 욕심이 더 컸을 것이다.  그가 프랑스에 오래 머무는 동안, 누이 역시 세상을 떠났다.  프란체스코 베르나치와 결혼했던  바로 그 누이였다.  일찍이 아버지의 죽음에도 공무에 바쁜 나머지 미처 슬픔을 나눌 틈도 없었던 그에게 이렇듯 다시금 슬픔이 닥치자, 그는 스스로가 (뒤죽박죽 혼란상태에 빠져 있다)고 썼던 주변 정리를 위해 이제 돌아가게 해다라고 정부에 허락을 구했다.
  하지만 이 외에도 그의 귀향을 부추긴 다른 일이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친구인 비아조로부터 (그의 편지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로 추정된다), 그리고 다음에는 자신의 다른 서기보 아고스티노 베스푸치로부터 (이는 확실한 사실이다.) (어려운 말로 된) (원문의 (in grammatica)란 라틴어를 우회적으로 지칭하는 표현 - 옮긴이) 익살스런 장문의 편지를 받았는데, 이에 따르면 그의 복귀가 계속 늦어진다면 서기국 관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그의 삶이며 영혼을 다 바쳤던 제2서기국에 있어, 그는 바로 그것의 영혼이자 삶 그 자체였다.  그의 서기보들에게서 온 편지들, 그리고 베스푸치에게서 온 최근의 이 편지로 미루어볼 때, 그동안 그들은 서기장의 부재를 실감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기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던 그의 재치있고 유쾌한 말을 잃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왕은 낭트에서 투르로 옮겨갔고 마키아벨리 역시 그 뒤를 따랐는데, 그때가 11월 21일이었다.  거기서 그는 공화국을 위해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성하(성하)의 신성함에 어울리는)교황에 음모에 관한 자신의 마지막 경고와 조언을 담은 편지를 썼다.  여기서 그는 늘 되풀이하던 대로, 그들 스스로는 부정한 맘모나 신의 친구amicox de mammona iniquitatis(맘모나 신의 악덕한 부를 상징하므로, 이 어구의 의미는 재물을 주고받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편을 만든다는 것 - 옮긴이가 되어야 하며, 그 길만이 프랑스 궁정에 친구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임 대사가 느긋하게 부임해 오고 잇는 동안, 마키아벨리는 크리스마스 무렵에 도착한 것이 틀림없는 12월 12일자 편지를 통해 마침내 그토록 기다리던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당일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귀향길에 올랐지만, 오는 데 한달 반이나 걸린 토싱기보다는 훨씬 더 빠른 발걸음이엇다.  그는 1501년 1얼 14일 피렌체에 도착하였다.  그는 6개월 동안이나 외국에 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프랑스 땅에 머물고도 그는 안장 주머니를 채울만한 것은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었다.  아마 리용이나 파리의 인쇄소에서 나온 책 한 권도 들고 오지 않았으리라.  15세기를 마감하는 그 해의 한 이탈리아 휴머니스트에게 당시의 프랑스 문학이란 아직 별것이 아니었으며, 비용의 발라드조차도 지금의 우리가 느끼는 것만큼 그의 마음을 끌지는 못했다.  모르긴 해도 마키아벨리는 프랑스어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 정도를 가지게 된 것을 확실하겠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음미하지는 못했을 거이다.  왜냐하면, 사실 그가 왕궁에서 들은 것은 우리가 앞서 본 바대로(예컨데 주 29의 본문에 있는 루앙의 말은 원문에는 라틴d어로 적혀있다. - 옮긴이) 세련되지 못한 라틴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처럼 호기심 많고 영민한 사람이 서로 의사소통도 없이 6개월을 한 나라에서 보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언제k 그랬듯이 그곳의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려 묻고 말하는데 열심이었을 것이다.  무론 당시 프랑스 평민들이 학식있고 명민한 피렌체인들과는 비교되기는 힘들겠지만.  어쨌든 사절 임무에 관한 통신문들중, 궁정에서 일어난 토의 과정을 기술할 때 그는 보라는 듯이 약간의 프랑스어를 쓰거나 또는 말을 프랑스어식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그래도 한 언어를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 문인에게는 별 소용이 없겠지만(사실 그는 문인은 아니었다), 정치 관측자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도움이 될 수 있었을 법하다.  이는 좌우간 그의 정신을 고양시켰을 뿐 아니라, 종이에 쓰기보다는 마음속에 담아온 관찰 의 보따리에다가 이번 여행이 덧붙여준 또 하나의 유용한 지식이었다.  (프랑스 견문 Ritratti delle cose di  Francia)이나, 또는 (갈리아 관측기 Denatrua Gallorum)(지나치게 경직된 독일 학계는 이 글의 저술연대를 이 시기로 잘못 비정해 왔다) 처럼 간단한 메모 형식의 글조차도, 바로 이러한 첫 프랑스 사절의 경험 속에서 아직 모양이 다 갖추어 지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자양분을 얻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의 열매는 결코 금방 익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열매라기보다는 차라리 씨앗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다른 유사한 경험들과 어우러져 어느 날 마키아벨리의 정신과 사상 속에서 싹이 트게 될 것이었다.


==================================== 02
    제5장 속국의 반란과 발렌티노의 행적
  피사는 요새라는 무력을 통해 막고 피스토이아는 파양으 이용해서 지킨다는 거이 피렌체의 오랜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피사를 지킬 만한 히도 없고 피스코이아를 붙잡고 잇을 만큼 파당도 튼튼지 않은 상태로 보였다.  마키아벨리가 프랑스에 사절로 강 있었던 1500년 8월, 피렌체 정부가 약하고 분열된 모습을 보이자 도시를 가르고 있던 파당간의 묵은 원한이 때를 맞추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무리를 들고 일어난 법치파 i Cancellieri는 방화와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며 만복콕파(만복파,i Panciatici)를 내몰았다.  ((법치파)란 평시민 정부를 지향하는 반메디치파이다.  (cancelliere)란 법정의 수호자라는 뜻의 라틴어 (cancellarius)에서 유래하였다.  반면 (만복파)란 말은 배가 부르다는 뜻의 (Panciata)에서 나왔으며 유복한 친메데치파를 기리킨다 - 옮긴이).  콘타도 condado(도시의 통제권 아래에 놓인 주변 농촌 지역을 가리킨다 - 옮긴이) 역시 같은 처지로, (외부의 원조를 받고 싸우는 정규전과 거의 흡사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국경 바깥에서 탐욕스러운 보르자가 이를 갈고 있는 상황에서, 그 같은 무질서는 공화국에 불명예일 뿐만 아니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당시 도시는 이미 내부적으로 전쟁에 지친 데다 불신이 만연하고 재정까지 고갈되어, 사람들의 마음은 갈가리 찢긴 상태였다.  이는 곧 피스토이아인들의 마음까지도 분열시켰고, 그 영햐은 다시 피렌체인들에게로 되돌아왔다.  만목파가 메디치 가의 주총자엿던 반면 법친파ㅡ 평시민 정부를 지지했던 것과 같이, 피렌체의 명망 있는 시민들도 공공연하게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기울거나 어는 한편을 지지하였다.  또 피렌체 땅 바깥에서도 볼로냐의 참주인 조반니 벤티볼리오는 법치파 쪽인 반면, 체사레 보르자 휘하에서 종군하던 비텔리 가와 오르시니 가는 만복파의 편을 들고 있었다.
  병이란 원래 미리 막아야 하는 것이지만, 병이 낫을 때라도 곧 잡지 못하면 치료가 힘들어지는 법이다.  피스토이아는 물론이고 특히 그 주변 평야의 구릉지대는 공화국의 손에서 거의 벗어나 버렸다.  반란군 무리가 콘타도를 휩쓸었다.  이들 중 한떼는 카르미냐노에까지 진출해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전권 대리인)으로서 사태를 파악하고 어떤 조치가 필요하니즐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고 그곳에 파련되었다.  그때가 2월 초이틀로 프랑스에서 돌아온 지 겨우 2주만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 말을 타고 가는 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임지에 머문 시간 역시 그보다 더 소요되지는 않앗따.
  피스토이아 사태는 4월에 들어 피렌체가 그소을 다시 통제할 수 있을 만한 군대를 사절고 함께 보냄으로써 일단 진정 기미를 보엿따.  바로 이때 보낸 사절들 중에는 우리 서기장의 사촌인 니콜로 디 알레싼드로도  들어 있었다.  그는 우리의 서기장과 같은 이름을 가졌으나,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니콜로 마키아벨리나는 위대한 이름으로 부르려 하지 않았다.  하여간 사절들이 이러한 상처를 돌보고 있는 동안, 공화국은 훨씬 더 큰 위험 앞에서 고통받게 되었다.
  봄이 되자, 발렌티노는 다시 파엔차를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그곳 시민들은 작년 겨울 추운 날씨의 도움을 받으면서 격렬히 저항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날씨가 좋아진 데가 그렇게 강력한 침략군을 맞아 도시를 방어할 세력이라고는 오직 시민들뿐이었기 때문에 화펴을 맺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 승리 후 아버지로부터 로마냐공이라는 칭호를 하자받은 발렌티노는 이제 볼로냐를 빼앗을 수 있으리라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기수를 그곳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는 피렌체인들에게 피옴비노 공략을 위한 길을 열라고 요구햐면서,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국경을 넘어 들어왔다.  그는 아펜니노 산맥을 sjad가는 길이 막혀 있을 때에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일단 그것을 넘어서자 곧 거칠고 무례하게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원하는 바는 더도 덜도 아니고 피렌체가 자신과 동맹을 맺어야만 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군사 행동을 위해 거금의 돈을 지불해야 하며 정권을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물에게 넘겨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는 이러한 요구에 힘을 실어주기 위하여 군대를 성벽 거의 바로 아래의 캄피에 까지 진군시켰다.  피에로 데 메디치는 볼로냐 국경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비텔로초와 오르시니 가 사람들은 발렌티노와 함께 있었다.  그는 마키아벨 리가 피스토이아에 가 잇는 사절들에게 정부를 대표하여 쓴 편지에서 말했듯이, (하늘과 운명의 도움 아래) 군세를 몰아 무섭게 다가오고 있었다. 
  적은 성문 밑에만 잇는 거이 아니라 성문 안에도 있었다.  도시 내에는 메디치 가의 추종자들과 불만을 가진 유력시민들이 있었고, 이러한 분열로 말미암아 무력해진 피렌체 정부는 동맹을 받아들이고 돈을 지불한다는, 그래도 치욕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협정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피렌체인들은 문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쯤 왕으로부터 피렌체인들을 다치게 하지 말라는 새로운 명령이 내려왔기 때무이다.  결국 보르자는 한 푼의 돈도 거두지 못한 채 5월 176일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는 기수를 돌려 가는 길마다 닥치는 대로 약탈과 폭력과 파괴를 자행하면서 피옴비노롤 진군하였다.
  발랜티노의 침입으로 피스토이아 사태가 이전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피렌체는 다시 것을 통제하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7월 23이 마키아벨 리가 재차 그곳으로 파견되었으나, 그의 체류 기간은 2, 3일을 너지 않았다.  이보다 조금 앞서 그는 카쉬나에 가 있었다.  또 얼마 후인 8워 18일에는 시에나로 보내졌는데, 그 임무에 대해서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발렌티노의 행로와 관계 있다는 점 외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0월 들어 만복파의  복귀와 함께 불행했던 도시가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을 무렵, 다시 피스토이아로 돌아왔다.  이처럼 그는 이러한 국외 임무와 서기국의 평상 업무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일했다.
  이 당시 마키아벨리의 일이란 이런 것이었다.  우리가 그 내용을 아는 것은 이뿐이지만, 이것이 그의 일의 전부는 아닐엇을거이다.  아직 이야기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운명한 이후 그의 인생 행로느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프랑스에서 이제는 텅 빈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아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페이지에 나타나는 시기에도 토토가 여전히 그와 함께 살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려져 있진 않다.  그러나 만일 그랬다면, 당시 스스로와 동생의 처지를 생각하는 니콜로의 심정은 언젠가 자신의 가장 잘 알려진 희극 작품 속에서 그렇게 쓴 것처럼, (그들은 집에 여자가 없어 짐승처럼 살고 있다네)라고 한말과 흡사했으리라.  그래서 그는 뤼지 코르시니의 딸 마리에타와 혼인하였다.  처가 쪽의 지참금과 가문됨은 그리 많지 않은 재산이나 평시민의 신분과도 그저 어울릴 만한 정도였다.  이 혼인은 앞서 이미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501년 8월에 막 이루어질 단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그 뒤의 문제에서야 비로소 이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혼인이 전기 작가나 그가 쓰는 전기의 주인공 양자 모두에게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사건은 되지 않았다.  물론 니콜로는 장차 자식에게 친근한 아버지이자 양처 마리에타에게도 분명히 조용한 가운데 애정을 키워 나간 남편이 되겠지만, 그라ㄹ는 인물은 결코 아내에게 지나치게 매달리는 그런 성향이 아니었을뿐더러, 설사 그가 그렇게 하려고 했어도 바쁜 일 때문에 그럴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 무렵, 체사레 보르자는 피옴비노를 공격하고 있었고, 프랑스인들은 나폴리 왕국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점령하였다.  그들은 처음 이를 에스파냐와 나누기로 약속했지만, 그것은 거짓이었으므로, 차후 이탈리아를 두고두고 전쟁과 불행에 휩싸이게 할 사악한 씨앗이 뿌려진셈이었다.  1501년 9월 3일 피옴비노가 보르자의 군대에 넘어감에 따라, 피렌체인들은 점점 더 그의 군대와 그의 탐욕사이에서 오갈 데 없는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보르자의 아버지인 교황이 그들의 도시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기미가 농후해지자, 그들의 의심도 더욱 커져갔다.  이미 8월 25일 이후, 이 일 때문에 당시 사절로 로마에 가 있던 베스푸치는 교황청의 방종한 분위기를 질타하는 내용을 담아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사신(사신)에서, 보르자가 카메리노와 우르비노를 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귀띔하였는데, 이허한 전투들이 어디서 끝날지는 도무지 예측 불능이었다.  이러한 사태에 진면한 피렌체는1502년 4월 16일 프랑스 왕과 새 동매을 맺게 되었다.  조건은 예상보다 좋은 편이었는데, 왜냐하면 와동 이제는 피렌체가 당시 이탈리아로 진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신성로마 황제 막시밀리안편에 서서 그를 공격하지나 않을까 염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의 조약에 기운을 얻은 피렌체인들은 피사 부근을 초토화 시키기로 작정하고 그곳에 포병 부대를 보내려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이 새로운 정복 구상을 포기하고 지금까지 죽 그랫듯이 기존의 것을 지키기 위하여 또다시 애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이유는 56월 4일 밤 아레초가 비텔로초 비텔리와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5월초부터 발텐티노 군과 함계 발디키아나외 국경 부근에 가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반란이 일어나자 많지는 않지만 자기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즉시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피렌체 정부는 뒤늦게 피사 부근에 있던 군대를 불러들었다.  이 때문에 피사는 다시 한숨 돌리 수 있게 되었고, 아레초 역시 연일 보르자의 군세가 증대됨으로써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어졌다.  게다가 피에로 데 메디치는 이미 도시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피렌체 공화국이 와해 직전까지 몰리게 된 것은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공격보다는 내부의 허약성과 평시민 정부의 의심과 무능, 그리고 유력 시민들의 두려움과 불만 때문이었다.  발디키아나의 기름진 땅들이 공격을 기다릴 새도 없이 하나둘 차례로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몬테 아 산 사비노, 코르토나 시, 카스틸리오네, 앙기아리, 보르고산 세폴크로 등도 마찬가지로 적의 표병대가 시야에 나타나기도 전에 버림받고 말았다.  모든 영토가 찢겨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란두치는 특유의 대중적인 문체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하여 피렌체인드은 비유하자면 흡사 자신드의 창자까지도 모두 내어주고 잇Sms 양상이었다.  부근의 모든 사람들이 피렌체인들을 비웃었다.)
 발렌티노는 프랑스 왕의 분노가 점점 더 커가는 데에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엇따.  그는 분명히 아레초의 반란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사라인) 베텔로초가 그곳에 간 것은 단지 사적복수를 위해서임을 맹세한 바 있었다(그러나 베텔로초는 아레초 체류 동안 편지에다(교황 군영으로부터)라고 명기하였다).  그가 반란 사건에 관련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피렌체와 전쟁중이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해동 하나한가 거미줄처럼 엉킨 간계의 연속이었다.  아레초 공략에 투입된 군대른 외맨상 카메리노 공략을 위해 규합한 군세의 일부였다.  (그의 사람)이 실질적으로 아레초를 치는 동안, 그는 카메리노를 공격하였다.  그런 후 , 발렌티노는 그쪽 일에 전념하고 있다는 모두가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믿기 어려울 정도의 기동력으로 (먹고 마시지도 않은 채) 우르비노 쪽으로 움직여서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그 소국을 빼앗아버렸다.  그는 이에 앞서 미리 우르비노에 카메리노 공략을 위한 원조를 요청하여 그곳의 포병대와 병상들을 이동하도록 만드는 계략을 썼다.  그는 똑같은 행운으로 카메니노 역시 곧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직전에 앞서, 그리고 프랑스 왕의 명령이 다시 한번 그의 계획을 망쳐놓게 되긴 전에, 그는 자신의 그 같은 모든 성공과 피렌체의 그 같은 불운이 과연 더 큰 도박으로 이어질지 어떨지를 시험해 보고 싶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우르비노를 공략하기 위해 떠나는 바로 그때에 맞추어 피렌체에도 매우 중요한 문제를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다.
  피렌체인들은 그들의 영토 안에서 그러한 분란을 일으킨 인물, 그리고 그것을 단 한번에 잠재우거나 또는 거꾸로 더 확대 시킬수도 있는인물이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려고 매우 고심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스 원군이 도착할 대까지 그를 지켜보며 그의 행동을 지연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서기로서보다는 분별있는 조언자로서 마키아벨리를 딸려 보냈다.  그들은 6월22일 서둘러서 길을 떠났고, 최대로 말을 달려 같은 날 폰티첼리에 도착하여 정무위원회에 편지를 올렸다.  이 편지는 통상 그렇듯이 마키아벨 리가 쓰고 소데리니 단독으로 서명한 것이었다.  그들이 전광석화 같은 우르비노 점령과 그 작전에 이용된 계략에 관해 들은 것은 그곳으로 가는 길인 폰타씨에베에서였다.  편지는 마티아벨리다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끝나고 있다.  (여기 정무위원님들께서는 이러한 계략과 기민성이 최고의 호기와 맞아떨어진 상황을 눈여겨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논쟁과 숙고만을 거듭할 뿐, 정작 결단에서는 미적거리기 일쑤인 피렌체 정부에 대해 던지는 하나의 교훈이었다.
  그들은 24일 저녁 우르비노에 도착하여 두 번째 밤을 맞았다.  보르자가 바로 앞서 승리에 대한 사절들의 축하와 약간은 빈정대는 듯한 보르자의 답례가 오고간 뒤, 서로를 비난하고 그에 변명하는 설전이 시작되었다.  비난전의 내용은 발렌티노가 피렌체 성벽 아래까지 왔던 때로 돌아가, 그가 강요해 놓고는 다시 스스로 지키지 않은 협정들과 당시 그에게 보냈던 사절 및 편지들이 언급되었다.  이 자리에 마키아벨리가 같이 있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모든 일들을 자신이 직접 처리했거나, 혹은 처리 과정을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편지를 쓴 것도 내내 자신으로서 사실상 모든 일의 실마리를 한 손에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렌티노의 결론은 위협적이었다.  (나는 당신들의 현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신뢰할 수 있다.  당신들은 이 정부를 교체해야 되며, 지금까지 나에게 약속한 것은 모두 지키겠다고 맹세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런 식으로 그냥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당신들이 나를 우방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적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에 대해 피렌체 현정부를 최상으로 여기고 있으며 또 그에 만족하고 있으므로, 다른 우방들도 역시 그러하다고 응답하였다.  두 시간에 걸친 논쟁 끝에 양쪽은 서로 좀더 전향적인 입장에서 다음날 다시 논의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두 사적이 매우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데, 이들에게는 발렌티노의 일 처리방식이 마치 (병을 앓는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전에 부음이 전해졌던) 우르비노 공의 경우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집에 버티고 않아 잇는 형상)이라고 생각되었다.
  다음날, 그들은 오르시나 가의 방문과 환대를 받았다.  이들은 사절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득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즉 프랑스 왕은 사실 보르자가 피렌체인들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락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는데, 만일 일을 빨리 처리하지 않고 고의로 지연시킬 때는 피렌체에 원군을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절들은 이러한 일이 발렌티노의 간계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차렸으나,  그래도 일이 어떻게 될지 걱정스러운 마음 떨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삼경쯤에 그들은 다시 발렌티노를 접견했으나, 그는 전날 밤과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4일 안에 대답을 달라고 못받았다.  이렇게 되자 그들의 걱정은 한층 더 커졌다.  그들이 함께 피렌체로 돌아 갈것이라는 작정을 한 적도 없었지만, 형편상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일단 말을 더 잘 타는 니콜로 혼자 피렌체로 달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발렌티노가 준 시간을 하루는 더 아낄 수 있을 것이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담고 특별 전령 편으로 즉시 우송되었던 바로 그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는 보르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잇다.  (이 군주의 용병술은 매우 놀랍고 위엄이 있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매우 용맹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이 오히려 사소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그는 영광과 권력을 얻기 위해 피로도 위험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가 머물던 곳을 떠났다는 마을 듣기 전에 이미 다른 곳에 가 있곤 합니다.  그는 병사들의 마음을 얻고 있으며, 그래서 그의 병사들을 이탈리아에서도 최정예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들 덕분에 그는 상승의 위업을 이루고 있으며, 변함없는 행운도 손에 쥘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묘사의 글 아래 소데리니 주교의 서명이 적힌 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무언가 위조나 실수의 결과라고 생각될 것이다.
  일은 편지에 쓴 대로 진행되었다.  마키아벨리는 밤새워 보르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일에 대해 오랜 시간 소데리니와 논의하고는 날이 낡기 전에 긴 편지를 쓴 뒤, 말에 올라 최대한 빠른 속력으로 피렌체를 향해 달렸다.  주교는 곤경을 헤쳐나가기 위해 우르비노에 남았다.  하지만 떠난 사람이나 남은 사람이나 발렌티노의 무시무시한 태도에 심적으로 시달리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하루하루 날은 흘러갔는데, 이 마지가 며칠은 교황의 아들에게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왕의 전령이 전하는 명령이나 그 유명한 프랑스 군이 피렌체를 돕기 위해 아느로 계곡으로 전군해 오고 있는 데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는 척 했으나.  사실은 자신의 요구를 좀더 온건하고 적절한 수준으로 양보하여 옛 협정을 지키라고 촉구하는 정도에서 만족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렇게 되자 피렌체인들은 최대한 왕에 대한 그들의 채권은 늘리고 적에 대해서는 줄이려는 욕심으로 조건을 흥정하였다.  결국, 소데리니는 협상을 중단하고 돌아오라는 훈령을 받았고 보르자는 아무것도 얻은게 없는 (불안한 상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피렌체는 프랑스 왕을 이용하여 그 위험스러운 적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왕은 지금까지 교황인 아버지나 그 아들 모두가 질색이었고, 그래서 결국 마키아벨리가 일찍이 낭트에서 왕의 재상에게 요청했던 것이 실현됨 셈이었다.  왕은 친히 보르자를 벌하기 위해 진군해 오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이는 투르크 토벌만큼이나 경건하고 성스러운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쳔명하였엿다.) 왕의 군대와 왕의 분노를 목격한 발렌티노는 어쩔 수 없이 비텔로초에게 퇴각을 명하였다.  당시 앙보 휘하의 프랑스 군은 아래초로 진격하고 아스티로부터 내려온 다른 군세른 파르마에서 트스카나 쪽으르 방향을 막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라초만은 여전히 이전 상태로 있었는데, 그 이유는 협상을 통해 비텔로초로부터 그곳을 탈환한 앙보가 주둔중이었기 때문이다.  아레초는 랑그르의 군주가 그곳을 돌려주라는 왕의 급로를 가지고 왔을 때에야 비로소 되돌려받을 수 있었다.  태풍은 지나갔고, 공화국으로서는 유능한 정부가 키를 잡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정무위원회의 명복상 수반은 보잘것없은 인물이었으나, 사실상의 지도자는 알라만노 살비아티였다.  피렌체의 이 일이 좋은 결과로 매듭지어진 데에는 그와 함께 기백 있는 사절 안토니오 자코니미의 힘이 컸다.
  이 모든 사건들의 와중에서 아무리 편지 써 보내는 일로 바쁜 때라 해도, 마키아벨 리가 서기국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서기보인 베스푸치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말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은가)라고 말했을 것인가.  그는 아레초에 세차례 갔다.  첫 방문은 대략 8월 15일에서 19일 사이였는데, 랑그르를 맞아 그를 접대하고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다음 두 번은 역시 랑그르에 대한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9월 11일과 17일의 방문이었다.  우리는 9월 13일에도 그가 그곳에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가 다음날 떠났다는 아무런 언질이 없는 점으로 보아 두 번째와 세 번째 방문 사이에도 그는 거의 피렌테에 머물 틈이 없었음을 알 수가 있다.
  피렌체 영토 내의 다른 임무들이 거의 그렇듯이, 이러한 임무들이 그어게 어던 중요한 계기로서 작용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최근의 이러한 공화국 내부 사건들, 즉 피스토이아의 파당 사건과 아레초 반란 사건들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도 서기국의 이름 나지 않는 일을 통해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잠시 있다 가는 정무위원들과는 달리 그는 그들을 보좌하여 죽 계속해서 같을 일을 했기 때문에, 때로는 신중하게 사건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역할로, 때로는 편지 작성의 역할을 함으로써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전기 작가나 그의 책에 대한 주석가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바로는, 그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피스토이아와 아레초와 같은 종속 도시들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정무위원들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처럼 엄한 조치를 선호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비론 입중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조치를 조언한 인물이 바로 그일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마 설사 그가 그런 조언을 했다손 치더라도, 일의 진행 과정은 그것이 그렇게 전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마키아벨리의 경험들이 피렌체의 정치에 미친 영향보다는 스스로의 지성의 성숙에 미친 영향에 더 관심을 기울여왔다.  물론 내가 프랑스에서의 임무에 관해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관심사는 아직 그가 딴 열매보다는 그가 뿌린 씨앗에 잇다. 이 씨앗들은 후일 그가 무력함과 비탄에 빠지게 되엇을 때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이다. 그가 매일매일 생각했던 피렌체 정부의 구조적 취약성은,특히 그것의 원인과 결과를 그가 감탄해 마지 않은 발렌티노가 가진 힘의 원인 및 결과와 비교할 때, 그에게는 이미 끊엄없는 교훈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
  종속국들의 반란은 그에게 결코 적지 않은 관찰과 연구의 재료가 되었다.  그의 (피스토이아 반란 보고서 De rebus pistoriensibus)는 단지 새로 취임한 정무위원이나 대사에게 정보 차원에서 쓴 많은 공식 보고서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 그 중에서도 가장 단조롭고 재미없는 글에 속한다.  하지만 미완성으로 추정되는 (발디키아나 반란민의 처리 방식에 대한 논고 Del modo di trattare I popoli della Valdichiana ribellati)는 또 다른 경우이다.  그 도시를 탈환한 지 한 해 후에 씌어진 이 글은 일반적으로 마키아벨리의 정치저작들 가운데 회고적 성격을 지닌 최초의 경우로 간주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지난 시기의 처벌 과정에 관한 글이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회고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렌티노라는 외적 위협이 계속되는 한 아레초를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점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이 당장 서기국이 필요로 하는 문제 때문에 씌어진 것은 아닌 최초의 경우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것은 앞서의 공식 보고서들과는 달리 거의 문학적 풍미를 느끼게까지 해준다는 점에서 처음이며, 피렌체의 서기장이 (과거사에 대한 끊임없는 공부)를 당 시대에 적용한 예로서도 처음이었다.  이러한 적용의 밑바닥에 깔린 명제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에나 지금이나 항상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으로서, 이는 그의 신 과학의 근본 원리들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짤막한 글을 마키아벨리 저술의 많은 부분을 핵심적으로 예고.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에 담긴 정치적 내용을 넘어 어떤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 핵심이란 우리가 마키아벨리로부터 개대할 수 잇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즉  반란을 일으킨 나라들은 확실히 감싸주든지 아니면 아예 절멸시켜 버려야 하며, 어정쩡하게 중간적 입장에 취했다가는 큰 재난을 입을 것이라는 점이다.  고대의 현인이 말한 중용적 덕성도 적어도 정치에 있어서는 그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제 6장 발렌티노에 대한 사절 시기
  피렌체는 언제나 법률상의 결점을 시민들의 능력으로 보완해 왔으나, 이 즈음에 들어 상층 시민 cittadini migliori일수록 공직에서 더 소외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평시민들의 시기로 인해 마음이 이반되고 불만과 경계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재력을 국가를 위해 쓰려들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이익 관계와 세력간의 각축속에서 구습들이야말로 공화국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었다. 극히 짧은 임기의 정무위원을 추첨으로 선출하는 이상한 방식 때문에, 종종 아무런 능력도 경험도 없는 인물들이 권좌에 앉게 될 뿐 아니라 그들 역시 공직에 대한 경험을 쌓기도 전에 그 직에서 물러아야만 했다.  이러저러한 난맥상이 초래한 결과는 당시 공화국이 겪은 재난들 속에서 잘 나타나 있었다.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에서 결국 모두들 정부를 개혁하고자는 데는 동의했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국정의 기초이자 상징인 대평의회를 폐지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심 그것을 무척 바라는 사라들 조차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평시민 정부의 틀을 유지하되 베네치아의 소평의회 I Pregiti(원로원적 성격을 띤 베네치아의 통치기구. 베네치아에서는 pregado라고 함 - 옮긴이)와같이 거의 유력 시민 회의 il consiglio di ottimati에 해당하는 소수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직제을 도입하여 공화국의 중대 현안을 다루자는 안도 나왔다.  하지만 이는 평시민들이 받아들일 리 없었으므로, 결국은 당분간 종신제 곤팔로니에레를 임명하여 시기를 봐가면 좀 덤 충분한 고려 아래 개혁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하나의 절충안에 불과하였다.  최초의 (종신 곤팔로니에레)를 선택하는 일은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력 시민과 평시민의 요구 사이에 끼인 상태였으므로, 결국 평범한 인물이 권좌에 오르는 것이 낙착되었다.  선출은 대평의회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가장 똑똑한 인물보다는 평시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 뽑힐 가능성이 많았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 여러 계층이 두루 받아들일만한 성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피에로 소데니가 바로 그 같은 인물이었다.  명문가 출신의 상층 시민이었던 그는 평화기였다면 자신의 소임을 재무 잘 해나갈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관직에서나 사절에서나 소임을 매우 잘 해나갈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관직에서나 사절에서나 자기 차례를 거부한 적이 없었으므로 평시민 정부의 강력하나 지지자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공직에 기용되고, 또 그것이 다른 인물들의 공직 기피 때문임을 알지 못한)평시민들은 결코 유력 시민들이 만족스러워 할 만한 선택은 아니었으나, 모든 점을 감안할 때 공화국으로서는 괜찮은 결과였다.
  이는 마키아벨리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성실하고 헌신적이 자세로 국정에 임했던 마키아벨리는 곧 그와 비슷한 성향인 소데리니의 눈에 띄었다.  이와 더불어 그는 마키아벨리의 날카로움, 기민함, 단호함을 마음에 들어 했는데, 이 모든 품성은 관대하기만 해서는 안되는 곤팔로니에게에게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나쁜 점은 나타내고 좋은 점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약간 건방진 듯하면서 장난기 어린 태도에다, 처음 만남 평범한 사람들과는 잘 부딪혀서 그들에게 자신을 오만하거나 혹은 묘한 인물로 보이게 하는 그런 성품 때문에, 우리의 니콜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 반면, 그를 오랫동안 잘 알고 그의 예의바름과 재능을 이해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뛰어난 인물로 비쳤다.  우리는 훗날 그가 소데리니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들과의 친분을 맺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과거에 소데리나가 여기저기 많은 공적을 옮겨 다니는 동안, 서기국 일으 통해 그와 지속적으로 접촉한 바 있었다.  또한 바로 전에 있었던 우르비노 사절단에서 그의 동생인 주교와 동행했을때에도 마키아벨리는 곧 주교의 마음을 얻었었는데, 이 역시 신임 곤팔로니에레의 마음을 열게 해준 열쇠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마키아벨리는 그의 취임 즉시 10인위원회 명의의 공한과 함께 사적인 축하의 편지를 쓴 것으로 보이나.  그가 소데리니의 동생인 주교에게 라틴어로 편지를 쓴 것으로 보인다. 그가 소데리니의 동생인 주교에게 라틴어로 격식을 갖추어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리고 주교는 곧 답장을 보내어, 그의 (품위 있는)편지에 감사하면서 자신의 가문과 국가를 위해 애써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때쯤 발렌티노는 왕에게 자신의 변호하기 위해 급히 가서는 프랑스식의 무책임한 사면뿐 아니라, 이제는 희생양이 되어버린 비텔로초로부터 치타 디 카스텔로를 돌려받고, 나아가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으로 왕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벤티볼리오로부터 볼로냐를 차지해도 좋다는 백지 위임장을 들고는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보르자의 이러한 복귀는 피렌체인들에게 다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정작 이를 더 두려워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의 성공 도구였던 소군주들, 즉 비텔리를 비롯하여 오르시니 가, 빌리오니 가,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 판돌표 페트루치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보르자가 자신들의 무덤을 파는 데 오히려 일조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어떻게 하면 이를 미연에 방지 할 수 있는지 숙고하기 시작하였다.
  보르자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은 피렌체 공화국에게나 어제의 적들에게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그들은 판돌포 페트루치를 통해 접근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파랑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피렌체는 이러한 기미가 분명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종립을 지키면서 발렌티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발렌티노가 피렌체와의 동맹을 모색하기 위해 사절을 이몰라로 보내 주기를 청했을 때에도, 그들은 자산들이 알레싼드로 6세의 환속과 건달 아들을 싫어하는 이상으로 그와의 동맹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그와 계속 접촉하면서 가까이서 그들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보르자에 휘말리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파악해 낼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마키아벨리를 그에게로 보냈다.
  그는 최대한 속력으로 말을 달리라는 훈령을 받고 1502년 10월 6일 길을 떠났다.  그는 이 훈령을 곧이곧대로 따랐는데, 이는 그의 일행이 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자 스카르페리아에서 짐과 하인들을 뒤에 남겨둔 빌린 말을 타고 이몰라까지 단신으로 달려간 데서 잘 나타난다.  다음날 도착 즉시 그는 (승마복 차림 그대로)발렌티노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몇 마디 서로 반가운 듯이 인사를 나눈 뒤, 자신의 임무를 설명하였다.  말의 요점인즉, 피렌체인들은 오르시니 가와 빌리오니 가, 빌텔리,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 마조네에서 소집된 구수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프랑스 왕 및 wqkffpsxlsh와의 친선을 확고히 지키기 위해 그것을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발렌티노는 이러한 배려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는 한때 자신과 같은 편이었다가 이제는 적이 되어버린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자신과 공화국 모두에게 손해를 입히고 약탈을 자행하고 배신을 일삼았다고 온갖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그 (패잔병 집단)을 애써 경멸하면서, 그들이 부추겼던 우르비노 공국의 반란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설사 그것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을 다시 되찾는 방법까지 잊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왕이 이탈리아에 있고 교황이 여전히 살아 잇는 한, 이 둘이 (환히 밝혀주는 불을 끌 만큼 물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다면 결코 자신을 쉽사리 없애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과 공화국 사이를이간질하는 오르시니 가와 비텔리를 제거한 뒤, 서롤 힘을 합치자고 제의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 리가 (그러한 동맹의 세부 사항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끝내 함구하였다.)
  다음날, 발렌티노는 마키아벨리를 불러 왕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내용의 프랑스 발 편지를 몇 통 보여주면서 그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발렌티노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아는 마키아벨리는 편지의 서명을 이전에 프랑스로부터 받은 편지들의 경우와 비교 확인해 보라고 10인 위원회에 요청하는 시중함을 보였다.  또한 그는 발렌티노의 새로운 동맹 제안을 전했으며, 아울러 용병 대장들의 변절 이후 얼 마 안 남은 군대의 세부사항을 보명, 기병, 포병, 현재 소집중인 새로운 군대, 그리고 다른국가와의 관계, 자신의 신민들과의 관계별로 조목조목 전달하였따.
  벌써 이 첫 번째의 편지에서부터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사람들의 찬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니콜로 발로리가 이에 앞장섰다.  마키아벨리는 이미 피스토이아에 사절로 가 잇는 동안 일을 잘 처리해 그의 신임을 얻은 바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정무위원의 위치에 올라 젊은 서기장을 치하하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시하였다.  그는 거듭거듭 마키아벨리의 편지쓰기와 판단력을 칭찬해 마지 않앗다.  그는 편지에서 (모두가 당신만큼만 한다면 실수는 일어나지 않을 텐데!)라고 썼다.  또 그는 11월 1일 공직에 취임할 예정인 새 곤팔로니에레에게 얘기하여 마키아벨리에겍 30두카토의 격려금을 보내도록 하엿다.  그 직후 쓴 편지에서 그는 돈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마키아벨 리가 발렌티노를 다루는 방법이나 출중한 판단력에다 힘이 넘치는 편지 내용에 대한 자신의 공적. 사적 찬사로써 모자라는 액수를 메우게 해달라고 말하였다.
  비아조 부오나코르시 역시 그를 찬양하였는데, 언제나 니콜로의 예찬자였던 그는 때로는 연인의 질투심이 묻어나는 듯한 편지를 쓰기까지 할 정도였다.  한번은 그조차도 감연히 마키아벨리를 비판하고 나선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편지를 씀에 있어서 자신의 그 간명하고 명쾌한 판단은 좀 유보해 두고 단지 사실들을 전달하는데 거쳤어야 했다는 내용이었다.  비아조가 지적한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당시 발로리가 칭찬해 마지 않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사람 좋은 비아조가 그를 비판한 것은 그가 마키아벨리를 경외했기 때문이고 그러한 경외심은 또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러한 애정은 이성적 판단보다 더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이는 다음의 솔직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부디 신의 가호로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를.)
  적어도 후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니콜로는 그 건달 같은 군주의 모든 행적을 자신의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되씹어봄으로써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뤼지 델라 스투파가 자신이 사절로 가 있던 플랑스로부터 니콜로에게 쓴 편지 속에서 (기류의 변화와 함계 이러한 품성을 지닌 다양한 인물들을 보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예리하게 만든다) 고 말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군주를 좋아하엿따.  그의 이름은 체사레엿고 그의 일생은 그 이름에 값하는 것이었다.  그의 군기에는 (체사레냐 무(무) 냐)라는 명문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탈리아어 (체사레 Cesare)란 라틴어 (카이사르 Caesar), 즉 황제란 뜻임 - 옮긴이). 그는 정복과 계략을 거듭하면서 (하늘과 행운의 도움으로) 피렌체 성문 앞에 모습을 나타냈던 그때 이후 줄곧 마키아벨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그가 마키아벨래의 호감을 얻게 된 것은 여전히 승리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던 몬테펠트로의 웅장한 성채에서 그를 접견했을 때였다.  용병 대장들과 휘하 소국들과 그리고 운명까지 그에게 반기를 들었을 당시에조차도 그를 좋아하는 마키아벨리의 마음은 변치 않았다.  10월 17일 적들은 그나마 그의 수중에 남아 있던 소수의 군세마저 궤멸시켜 버렷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빼앗았던 모든 것을 잃은 채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처지가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참고 숨기고 가다리면서, 또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신민을 다독거리고 요새를 강화하면서,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체사레는 그 사이사이에 이미 평화를 위태롭게 할 조짐을 보이고 잇던 반군 수장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속삭임으로써 (그, 일부를 이탈케) 하력고 시도하였다.  그는 많은 비용을 감수하면서, 프랑스, 로마, 밀라노, 레라라 등지에 끊임없이 전령을 보내 협상을 하거나 무기와 친선과 군대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 사용한 수단과 그 결과를 만사에서 절약을 지향하는 피렌체 공화국의 경우와 비교하고 있다.  그는 이몰라체류 2주쯤 되는 어느 날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제가 여기 온 이후, 그는 우리 정부가 두 해 동안에도 다 쓰지 못할 정도의 큰 금액을 전령과 사절의 비용으로 다 써버렸습니다.) 그가 생각지 못한 것이 있다면, 자신의 동료 시민들이 스스로의 지지갑에서 돈을 지불해야 한는 반면, 체사레의 돈은 교황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며, 교황은 추기경들을 마치 닭장 속의 닭처럼( 이 비유는 베체치아 대사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좋은 값에 만들어서는 잔치에 쓸 요량으로 살찌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마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발렌티노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보다 악한 정도에서 열 배는 아래인 어떤 피렌체인은 단지 그가 교수대에 서는 것을 보고 싶어했겠지만 말이다.  카미아벨리가 발렌티노를 좋아한 것은 그가 강력한 국가를 이룩한 상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발렌티노 공이 외교와 전쟁에서 보여준 불국의 끈기, 그 저동성과 분별력, 숨김과 가장의 능력 그 능숙한 정책과 기민한 실천력에 찬사를 보냇다.  그의 인생 행로는 마키아벨리를 현혹시켰고, 특히 그가 그 과정에서 보여준 신념은 더욱 그러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그를 요모조모 뜯어가며 연구하엿고, 그가 자신의 마음에 새겨준 모든 말드과 사실들을 남김없이 피렌체에 알렸다.  한번은 그가 친구 비아조에게 프르타프코스의 (영웅전 Vite)을 보내달라고 청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 그가 이미 마음속으로 현재의 경험과 과거의 사실들을 서로 새롭게 비교하려 했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으리라.
  발렌티노 역시 그의 드높은 위신과 에스파냐, 로마적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이보잘 것없는 지위의 서기장을 결코 불쾌하게 생각지 않았다.  흑자가 그렇게 믿고 또 쓰고 있는 바와 같이 마키아벨리가 사절로 가 있는 동안 발렌티노의 마키아벨리즘을 흡수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어리석은 생각이 되겠지만, 그가 마키아벨리에게 이례적일 만큼 접견을 쉽사리 그것도 장시간 허용했던 사실이나 양자간 대화의 성격 등으로 미루어볼 때, 이 사심 없는 피렌체 사람의 재능과 격식 없고 날카로운 판단력이 발렌티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명확해 보인다.
  어쨌든 당분간 보르자는 계속해서 피렌체와의 협정을 고집하였다.  히지만 피렌체는 통상 그렇듯이 말로는 좋은 듯이 하면서도 그것을 행동을 옮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의 변명이란 이 일을 왕에게 알리고 그의 동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히지만 한 주일 한 주일 시간은 흘러가도 답은 오지 않았다.  발렌티노는 비록 여전히 우호적이긴 했지만 그 특유의 놀랍고도 초연한 태도로 자신의 새로운 방식에 따를 것을 재차 촉구하였다.  그에게 정말로 중요했던 것은 이미 물의를 빚어왔던 자신의 용병료, 즉 세례 요한의 상이 새겨진 양질의 피오리노 금화였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에게는 자신의 나라 피렌체를 위해 이 펜싱 선수와 겨루어야 하는 임무가 맡겨졌으며,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그리고 피렌체 정부가 그에게 준 무디고 녹쓴 무기를 가지고 이 일을 해냈다.  어느 날 둘은 피렌체 공화국이 새로이 고용한 만토바 후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발렌티노가 물었다. (그래, 당시네 정부가 나에게 맡긴 일은 뭐요?) 마키아벨리는 이에 대해 전하는 일을 맡기보다는 일을 끌어가실 분이라고 농담 조로 응답하였다.
  왕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변명이 더 이상 먹혀들어가지 않자, 피렌체인들은 이제 교황과 의논하고 싶다고 말을 바꾸었고, 이어서 다시 소데리니 주교를 프랑스로 보냈으니 모든 결정은 그 결과에 달렸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발렌티노는 압력을 넣을 요량으로,  그가 오르시니 가 및 비텔로초와 거의 조약을 체결하기 지적이며, 그렇게 되면 피렌체인들은 매우 난처한 지경에 처할 것이라고 들러대었다.  마키아벨리로서는 만약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다면 돈으로 발렌티노와의 친선을 사는 데에 기꺼이 일만 두카토 정도는 걸 마음이 있었으나 정무위원회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그는 결국 어느 날 피렌체가 그에게 무언가 괜찮은 일감을 주기는 힘든 처지에 있으며, 그렇다고 사소한 일을 맡기 수도 없지 않느냐고 말할 도리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발렌티노의 한 관리가 용병료라는 말이 적절치 않다면 수고비로 명복을 바꿀 수도 있다고 제의하자, 마키아벨리는 이름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피렌체가 발랜티노와의 친선에 단돌 한 두카토도 내지 않으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관측했듯이 그들간의 친선 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쓸모없는 것으로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피렌체 정무위원회는 그 즈음 마키아벨리와 발렌티노 사이의 모든 협상과 논의를 중단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한 상태였다.  그래서 친구 비아조는 피렌체 발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르 다음과 같이 놀려대었다.  (이보게 니콜로, 자넨 허탕을 쳤어,  아마 자네는 발렌티노의 마음에 들 만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네만.)  이 일로 인해 그는 앞서 어떤 때보다도 더 본국으로의 귀환을 정부에 요청하게 되었다.  그가 귀환하고 싶어하는 데는 자신이 10인위원회에 보낸 편지에 적힌 것 말고도 상당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  그에게는 가사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었고, 게다가 당시 집 사정도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외국 출장중에 자신과 공화국의 품위를 위해 버는 액수보다 돈을 더 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그는 편지에서 아마 인색한 정무위원회로서는 그리 달갑게 들리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저는 제 몫으로 돈을 쓸 수 도 있었고 또 지금은 그러한 돈을 공작으로부터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돈은 바라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그럴 만한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일은 우리 정부에게나 제 자신에게나 결코 명예롭지 못한 것이라 생각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도 제가 한푼 두 푼 비용을 구걸하다시피 하면서도 정말 기꺼운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생각해 주실 줄 믿습니다.)
  편지에는 쓰지 않았지만, 마키아벨리가 돌아오려는 또 다른 이유들 중 하나는 가엾은 아내 마리에타의 불평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의 불평을 막기 위해서 이번 출장이 8일 정도면 끝날 것이라고 말해 놓았으나, 이제 벌써 8주가 지나고 보니 그녀의 심정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혼자 지내기가 싫었던 그녀는 생질인 피에로 델 네로의 집으로 가버렸다.  그곳에서 남편도 돈도 없는 자시의 처지를 되돌아보게 된 (그녀는 스스로의 인생도 재산도 모두 내동대이쳐 버렸다는 자괴감에서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잘아려 있지 않지만 그를 매우 근심케 한 듯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가 관직을 재임용받을 시한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당사자가 본국에 없다는 사실이 언제나 불리하게 작용함을 알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는 출장중에 자신의 관직을 잃게 될까 우려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친구들은 곤판로니에레가 그를 특히 좋아하고 또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거듭 이야기했으며, 곤팔로니에레가 그에게 보낸 편지도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재임용 문제에 대해 알라만노 살비아티는 다음과 같이 썼다.  ( 그 동안 공적으로 보아 재임용에 관해 부탁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정부 쪽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특히 피렌체인들의 마음 씀씀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스스로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보오나코르시에게서 온 소식 역시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로는 새 정부가 먼저 서기들의 봉급을 깎고 나서, 이어 그들 자체를 줄이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관계하는 두 서기국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가 없는 동안, 제2서기국은 제1서기장인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의 관장 아래 있었으나, 서기보들의 말로는 별로 한 일이 없었다.  그는 또 대학 쪽에도 일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이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지금 난 내 일과 당신 일에다 강의까지 겹쳐서 죽을 지경이네.)  그를 대신해서 10인위원회 일을 하고 있었던 그의 친구 비아조는 편지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자네가 맡던 일을 보고 있는데, 그럭저럭 잘 해나가고 있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일에 대해 또는 동료들에 대해 새로운 소식들을 전해 주곤 했는데, 그들은 언제나 서로 다투거나 운수 사나운 일을 당하곤 했다.  예컨데 안드레아 디 로몰로가 주사위 노름에 푹 빠져 있다는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안토니오 델라 발레와 안드레아가 노름 때문에 사무실에서 다투다가 안드레아가 안토니오를 발로 차 그의 등허리를 다치게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곤 했던 것이다.  물론 사무실에서의 이러한 장난들이 음담패설로 윤색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보다 좀더 그럴 듯하고 기발한 이야기를 그에게 전해 준 사람은 다른 서기보인 아고스티노 베스푸치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스스로가 겪은 재수 없는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루는 어수룩한 정무위원 한 사람이 갑자기 방에 들어와서는 (어이, 어이, 이것 좀 받아써보게) 하고 소리쳤는데, 다른 동료들은 모두 슬금슬금 도망쳐 버리고 자기만 잡혀서 그 지겨운 글을 받아써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편지들은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우울한 보르자의 궁에서 빠져나와  잠시나마 톡톡 튀는 피렌체의 분위기를 느끼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그 역시(모두들 포복절도하게 만든) 자신의 이야기로 답을 대신하였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남아 잇지 않다.  그가 친구들에게 쓴 다른 편지들로 미루어볼 때,  이는 이탈리아 문학에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가 귀환을 원했던 모든 이유들에 앞서 무엇보다 결정적인 사실은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로서는 그가 그렇게 탄원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자신의 귀환 문제를 좀더 부각시키기 위해서 실제보다 더 아픈 척했는지 어떤지는 자세히 알 지 못한다.  하지만 11월 22일자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틀 전 열이 심했으며, 지금도 틍증은 여전합니다.)  12월 6일에는 또 이렇게 썼다.  (열이틀째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들것에 실려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피렌체 정부는 그를 귀환시키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들것에 실려서라도 발렌티노의 뒤를 쫓아다녀야 할 형편이었다.  발렌티노 공작은 전군을 휘몰아 이곳저곳 집적거릴 것이었고, 이 와중에서 누군가가 분명히 손해를 입게 되겠지만 불똥이 어디로 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피렌체인들은 공작의 이러한 움직임과 가능하다면 그의 속마음까지도 가까이서 지켜볼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그 일을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정부의 무리한 요구에 참다 못한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다.  (정무위원회에는 죄송한 말이지만, 명심해야 할 점은 누구도 그러한 일들을 알아맞추기란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이곳의 군주는 만사를 그 자신이 혼자 결정하나는 것입니다.  공상이나 꿈같은 일은 쓰려고 하지 않는 다음에야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관련 사람들을 모아야만 하고 여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저는 지금 최선을 다해 시간을 쪼개어 낭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피렌체에서는 마키아벨리가 보낸 편지들을 읽고 상황을 분석했지만, 발렌티노의 첫 일격이 어디에 떨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떤 판단을 내리지 목하고 있었다.  단지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가 사태를 관망하면서 군세를 모으고 있으며, 그리하여 적이 그를 치기 전에 그가 적을 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점은 이미 보르가 패배하여 군세를 상실했던 그 당시부터 내내 마카아벨리가 의심 많은 정무위원회에 보고해 온 사실이었다.  11월 19일, 여느 때처럼 발렌티노와 사담을 나누게 된 그는, 자신이 항상 그가 승리하리라는 것을 예측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사절로 온 첫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겨놓았더라면 (발렌티노에게는 그것이 마치 예언처럼 보였으리라는 것)을 아첨이 아니라 차라리 어떤 자신감 속에서 감히 이야기하였다.  그는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말했으나, 대체로 (발렌티노는 혼자이고 적은 다수이므로 그러한 추론의 연결고리는 쉽사리 끊어질 수도 있음)을 주지시켰다.
  사실 평화는 바야프로 가까이 와 있었다.  발렌티노느 마음이 바뀐 프랑스 왕이 다시 휘하에 받아들인 벤티볼리오뿐만 아니라 그가 주도면밀한 계산 아래 (반군 무리에서 꾀어낸) 그 진중치 못한 오르시니 가의 인물들과도 화평을 맺었으며, 이에 다른 반군 우두머리들도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조네에서 공모자들을 묶어놓았던 결속의 끝이 끊어지게 된 데는 왕과 교황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발렌티노의 끈질긴 위장도 한몫을 하였다.  그에게는 어제의 적들과 그럴 듯하게 쌓아놓은 유대를 파기해 버리는 것 역시 쉬운 일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세상사가 흘러가는 방식이라는 점은 마키아벨리가 (특히 오늘날 신의라는 것이 얼마나 유명무실한가를 생각하게 하면서) (이처럼 평화가 도래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전쟁을 분비하는 발렌티노의 태도에 대해) 10인위원회에 써보낸 편지에 예견되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비텔로초가 발렌티노에게 (복종과 감사의 정이 넘치는 )편지를 보냈음을 10인위원회에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발렌티노는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읽거나 알아채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가 무슨일을 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문제에 관해 무언가 견해를 말하라면... 그것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예언은 곧 맞아떨어지게 된다.
  12월 9일 발렌티노는 군대를 체세나로 이동시켰고, 마키아벨리는 이틀 뒤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는데, 그것은 몸도 돈도 좋은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10인위원회에다 자신이 설사(상황이 돌아가는 대로 따른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위협조의 편지까지 쓴 바 있었다.  이에 대해 소데리니는 (지금 무엇보다 긴급한 일은 당신의 경비를 조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답장과 함께 그에게 25두카토의 돈을 보내왔다.  이렇게 마키아벨리의 어려운 형편을 크게 도닥거려주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당신은 그곳에서 무슨일이 진행되는 지를 계속 주시하면서 수시로 상황을 보고해 주기 바라오.  그리고 그쪽 형편이 불리는 대로 당신의 복귀를 주선할 것이며, 그때까지도 발렌티노공과 계속 접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우리는 당신의 후임자를 임명할 것이오 그러니까 당신도 당분간은 지금까지 해온 대로 일을 충실히 봐지기 바라오)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해나갔음은 물론이다.  곤팔로니에레의 처방이 그에게 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체세나에서의 상황 판단은 이몰라에서보다 결코 더 쉬워 보이지 않았다.  누구는 발렌티노가 나폴리 왕국으로 진격해 들어갈 것이라고도 하고,  또 누구는 베네치아에 대적하기 위해 라벤나와 체르비아로 갈 것이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가 먼저(자신을 모욕되게 했고 나라까지도 거의 잃게 하기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 위인들을 확실히 처리하려)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단지 방관자에 불과하지 또는 그이 행동을 부추기는 배후의 힘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교황은 로마에서 사태가 이렇게 지연된 데 대해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로는 그가 큰 소리로 (이 창녀의 자식 같은 놈, 이 사생아 같은 놈!) 하면서 그를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포도주 맛을 속이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이란 화를 내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속의 진실을 드러내 보이는 법인 것이다.
  12월 26일, 발렌티노는 4일 전 갑자기 그곳을 떠난 프랑스 창기병을 제외한 모든 군세를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의 행동을 미리 짐작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구구한 억측과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는 떠나면서, 한때 로마냐 사람들을 다스리는 데에 자신의 충실한 도구였던 그 권세 있고 잔혹했던 라미로 로르콰의 둘로 절단된 시체를 시 광장에 두고 갔다.((군주론) 7장에 나오는 동일 인물 라미오 데 오르코의 예를 참조할 것 - 옮긴이).  이 피비린내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는 자신의 부하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를 털어내고, 스스로가 (부하의 자리를 그 공과에 따라 좌지우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의로운 군주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숨기려 하였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유명한 사건 역시 그로부터 어떤 교훈과 행위 규범을 끌어낼 수 있을 만한 것으로 주목하였다.
  바로 그 12월 26일, 그리고 그 해의 남은 마지막 5일 동안, 사태는 마치 체스판에서처럼 연이어 숨가쁘게 돌아갔다.  오르시니 가와 비텔리는 발렌티노의 이름 아래 그 명령을 받들어 세니갈리아르 점령하였다.  그는 그의 군세를 숨기기 위해서 병사들을 소규모 분대로 편성하여 파노로 이동시켰는데, 정작 그 자신은 그곳에서 매우 신속하게 세니갈리아로 달려갔다.  도중에 비텔로초, 파올로 오르시니, 그라비나 공작 등과 우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만난 그는, 그들과 화기애애하게 담소하면서 자신이 군대 일부를 거느리고 그 동시에 입성하엿따.  도착 후, 그는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도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자신이 신호를 보내면 즉시 장군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뒤, 보르자니 가와 비텔리의 군대를 무장해제시켜 버렸다.
  이미 파노에서 발렌티노로부터 이 일에 대해 슬쩍 암시를 받앗던 마키아벨리는 그의 뒤를 따라가 이 혼란의 장면을 목격하였다.  사태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그는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10인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약탈이 진행중이고, 지금 시각은 23시입니다.  저는 매우 걱정이 됩니다.  이 편지를 전해 줄 사람을 찾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올리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들이 내일까지 살아 있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실 비텔로초와 올리베로토에겍 그 해의 말일은 곧 자신들의 생에서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다.  다른 둘의 처형은 교황이 오르시니 추기경과 그 가문의 나머지 인물들을 잡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연기되었다.  그의 행위는 물론 죄악이었지만, 그것은 완벽한 일격이었다.  피렌체의 서기장에게는 발렌티노라는 인물이 커다란 모습으로 다가왔다.
  새벽 2시경, 보르자는 그를 불러 (더없이 환한 얼굴로) 자신의 성공을 자축하였다.  그리고는 피렌체인들로서는 (매우 똑똑하고 솔깃하게 들리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인즉, 피렌체인들은 자신들의 가장 큰 적이었던 그들을 없앨 수 있다면 아마 2O만 두카토라도 쉽게내놓았을 것이고, 또 (설사 그랬다 해도) 결코로 자신이 한 것만큼(그렇게 깨끗이 그들을 제거할 수는 없었을)바로 그 시점에 그들을 없애준데 대해 감사해야 하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치타 디 카스텔로와 페루자 공략에 일조할 군대를 보내줄 것을 피렌체에 요구하였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에 편지를 썼다.  그러나 발렌티노의 움직임은 이 편지들을 가재고 간 전령들보다 더 빨랐다.  1503년 1월 1일, 그는 이미 전군을 몰아 코리날도에 가 있었으며, 3일에는 사쏘페라토에, 그리고 5일에는 괄도에까지 진격하였다.  그는 그날 그곳에 잠시 머물면서 치타 디 카스텔로의 사절들로부터 항복의 뜻을 전해 받았고, 이튿날에는 페루자의 사절들이 역시 같은 의사를 표명해 왔다.  그들의 말로는 도시민들이 (두카 두카) (두카란 공작이라는 뜻 - 옮긴이)하고 발렌티노의 이름을 외치면서 일어났으며, 잠파올로 발리오니는 오르시니 가와 비텔리의 얼마 남지 않은 잔당을 이끌고 황급히 시에나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에나 판돌포 페트루치 역시 발렌티노의 발톱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보다 더 안심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판돌포는 1487년 36세의 나이로 시에나의 정권을 장악한 뒤, 자신의 장인을 암살하고 마조네 가를 부추겨 보르자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미도록 만든 인물임 - 옮긴이)
  페루자도 시에나도 들었네
  히드라의 숨소리를.
  두 참주는 도망쳤네
  그의 분노를 피해.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오랜 후 마키아벨리는 그렇게 썼다.  당시 이히드라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진격을 계속해 나갔다.  8일 그는 아씨시에 있었고, 10일에는 토르차노로 진출하였다.  그곳에서 발렌티노는 마키아벨리를 불러 시에나 사건에 관해 장황하게 얘기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 도시에 아무런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페트루치를 내쫓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피렌체가 이 일을 도와줄 수 있으리라는 의중을 내보였다.  그의 군대는 이제 시에나의 속령인 큐시를 향하고 있었다.  발렌티노와 또 한번 긴 말의 공방전을 나눈 치타 델라피에베에서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 속에는 자신이 되풀이해서 올렸던 진언을 받아들여 그들이 마침내 발렌티노에 보내는 대사로 명망 인사인 야코포 살비아티를 임명했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20일, 판돌포 역시 히드라로부터 도망치고 잇을 때, 마키아벨리는 보르자 진영을 떠나 피렌체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는 23일 집으로 돌아왔다.
  마키아벨리으 사절 임무는 보르자의 그 은밀한 심중에서 복수의 계획이 처음 싹 튼 때에 시작하여 1502년말 피로 물든 복수극이 일어나던 그 비극적인 날 밤에 끝난 셈이었다.  그가 이러한 사적의 기간을 통해 얻은 유일한 결실이 유명한 (발렌티노가 비텔로초 비텔리 등을 죽이는데 사용한 방법에 관한 묘사 Descrizione del modo tenuto dal Duca Valentino nell'sammazzare Vitellozzo Vitelli ecc)인데, 이는 복수극의 전말을 보고서 형식이 아닌 순수한 문학 작품의 형식으로 짤막하게 묘사해 놓은 것이다.  그르나 이 작품을 그 사건에 관한 공식 서한들과 비교해 본 학자들에 따르면,  실제와는 다르게 묘사하거나 또는 사시을 과장하면서 서건의 과정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마키아벨 리가 발렌티로르 이상화라려 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는 다만 그 군주가 지닌 어떤 품성과 조건들을 각별히 칭송했을 뿐이며, 그리하여 마치 화가가 자신의 이상저인 그림을 위해 삶으로부터 어떤 측면들을 취하는 것과 같이, 그도 이러한 품성과 조건들을 어떤 추상적인 군주상에 대입시켜 당시의 다른 군주들 속에서 그러한 요소들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었다.  비록 그런 인물을 찾지는 못했지만,
  피렌체의 서기장이 이 사절 임무중 보르자란 선생이 가르치는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해 왔고, 우리 역시 그것을 이 자에서 지적한 바 잇다.  이 말의 뜻은, 무언가 분명히 위대하고 기억될 만한 행적, 무언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러한 행적 앞에서, 그는 그로부터 과학적 이론들을 끌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흔히 생각하듯이 마키아벨리가 바로 오직 그때 그곳에서 마키아벨리즘을 배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제7장 첫 로마 사절 시기
  마키아벨리가 내내 로마냐 사절의 임무에 매달리다가 돌아온 이후에도, 발렌티노와의 협상은 여전히 서기장으로서 그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발렌티노의 협상은 여전히 서기장으로서 그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 역시 그가 실패한 지점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협상이 순조로울 수 없었던 데에는, 피렌체인의 차가운 기질뿐 아니라 교황과 프랑스 왕 사이의 복잡다단한 정치 게임과 나폴리 왕국 내에서 에스퍄냐의 프랑스 간에 벌어지고 있던 전쟁의 불확실한 행로 등의 이유가 있었다.  교황은 왕과의 동맹으로 별 이익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야망이 와에 의해 여러번 좌절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참에 프랑스 군의 위세가 하락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자, 바로 지금이 자신의 군세와 계획을 에스파냐 쪽으로 몰아줄 때라고 판단하였다.  또 왕은 왕대로 이러저러한 점들을 예상하면서 벤티볼리오와 피렌체 공화국, 루카와 시에나를 움직여 교황과 그의 똑똑한 아들의 힘을 견제할 새로운 동맹을 내심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보르자 가의 분노와 치욕감은 아랑곳없이 시에나에다 앞서 축출되었던 페티루치 가를 북귀시켰다.
  그 시간, 피렌체는 발렌티노로부터 여전히 위협을 느낀 데다 피사전쟁을 재개할 욕심을 군대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먼저 돈 문제를 고려치 않을 수 없었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 해도, 바로 그 세금을 낼 사람들이 투표할 대평의회에서 그렇게 하기란언제나 곤란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곤랄로니에레가 내홍는 법단들은 많았지난, 이에 대한 분만의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하자 모두 부결되고 말앗다.  결국 통과된 것이라고는, 만일 교황이 허락한다면 성직자들에게도 데치마 decima(10분의 1세 - 옮긴이)를 부과한다는 안뿐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재정 조달을 위한 연설 Parole sopua la provvissione del denaio)을 쓴 (말하지 않고 (글 제목 제목 속의 (parole)는 글이 아니라 말을 뜻하기 때문에 이를 장난조로 슬쩍 건드린 것 - 옮긴이)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 글의 목적은 법안에 유리한 쪽으로 말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그것은 피렌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자유를 방어어하고 스스로의 군대로 무장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짤막하면서도 힘 있는 문체로 씌어진 연설이었다.  (항상 다름 사람의 칼에 의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적이 침입해 올 때 언제나 허리에 찰 수 잇도록 칼은 몸 가까이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초기 작품들로부터 그의 날갯짓이 더욱 힘차게 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4월 중순, 교회 재산에 부과하는 데치마 문제도 그렇고 다른 문제도 잇어서 교황과의 협약 건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즈음 복권된 판돌포 페트루치에게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 1503년 4얼 25일 마키아벨리는 협약 체결을 둘러싼 상황을 그에게 설명해 준다는 목적을 가지고 시에나로 파견되었다.  이는 매우 짧고도 간단한 임무였다.  하지만 그 협약은 지켜지지도 않았을 분 아니라 피렌체가 그것을 완전히 파기해 버렸기 때문에, 그의 임무는 사실 아무 소용도 없었던 셈이다.  피렌체가 얻은 것이라고는 소데리니 주교의 추기경 모자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주어진 이유도, 그의 형인 곤팔로니에레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는지, 주교가 대사로 가 잇던 프랑스에서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 또는 각각 1다카토 금화의 가치 정도는 나가는 수많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 알쏭달쏭한 상황이었다.
  피렌체와 교황간의 협상이 깨어진 주요한 이유는 교황이 협약 문구에서 프랑스 왕에 유리한 듯한 부분을 빼자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군이 나폴리 왕국에서 패배와 퇴각을 거듭할수록, 노회한 교황은 승승장구하는 에스파냐에 더욱 가까이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단지 그의 교활한 머리 때문이었는데, 그는 좀더 확실한 결과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평화 협상은 처음에 두 왕들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콘살보 Consalvo(Gonzalo Fernandez de cordoba를 가리킴.  이탈리아 전쟁 당시 에스파냐의 장군. (대장군 el Gran Capitan)이란 별명으로 불렸음 - 옮긴이)가 평화냐 아니냐를 택일하라며 프아스 군을 풀리아와 칼라브리아에서 다시 무찌르자, 교황은 그들을 구하러ㅡ올 프랑스 원군의 존재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프랑스와, 그리고 발렌티노는 에스파냐와 협사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둘 중 아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결코 입에 담는 법이 없고, 아버지는 자신이 말한 바를 그대로 행한 적이 없었다는 속담 비슷한 말이 한창 떠돌고 있을 정도였다.  그들의 야망은 이 원대하고도 은밀한 게획에서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1503년 8월 18일, 삼일열을 3일간 앓고 난 뒤, 교황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더불어 건강 면에서 교황과 비슷한 상태였던 발렌티노 역시 같은 날 같은 병으로 자리에 눕는 처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보르자 가계의 별은 그 무덥던 로마의 저녁에 갑자기 스러져가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발렌티노는 그가 후에 마키아벨리에게 말했듯이, 오랫동안 아버지 사후를 준비하고 있엇다.  그는 모든 것을 생각하고, 모든 경우를 예상하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같은 순간에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있게 될 줄을 알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그의 국가들은 마치 종이 성처럼 갑작스럽게 무너져내렸고, 페루자, 치타 디 카스텔로, 우르비노, 카메리노, 시네갈리에서는 옛 통치자들이 속속 복권된 반면, 자신의 군세는 본인 주변의 군대로 축소되엇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콜론나 가와 화해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에 반대하는 오르시니 가와 연합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에게로 향한 증오와 재난과 불운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하였다.  줄어든 입지에도 불구하고 교황 선출회의 때문에 프랑스와 에스파냐 모두로부터 꼬드김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멀리 떨어진 에스파냐보다는 또다시 프랑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 군은 그 당시 교황 선출에 압력을 행사할 요량으로 나폴리 왕국으로 진군하는 기에 로마 성벽 부군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그 위압적인 군세로 훨씬 더 쉽게 그를 방어해 줄 수도 있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루앙 추기경과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다시 한번 왕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루앙은 이 협약을 맺으면서 이제 발렌티노 휘하의 추기경들이 가진 표를 모으면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무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인물을 교황으로 앉히려는 애초의 희망이 무산되자,  발렌티노는 투표를 통한 방법 역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파와 에스파냐파의 두 적대적인 무리로 나뉘어 서로를 제압하려고 필사적이었던 추기경들은 결국 피콜로미니를 선출하는 것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는 그의 노령과 유약함을 감안할 때, 양파간의 휴전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피오 3세는 겨우 26일 후 운명하였다.  상황은 다시 한번 원점으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그 소식이 피렌체에 전해진 것은 10월 20일이엇다.  그리고21일, (새 교환이 선출될 때까지) 마치마벨래를 로마에 파견해 두기로 결정되었다.  사실 8월 28일 안레싼드로 6세가 죽었를 때 이미 같은 결정이 내려진 바 잇었다.  그때는 니콜로가 대규모의 프랑스 군을 거느리고 피비차노로부터 시에나 쪽으로 오고 있던 상드리쿠르를 접견한 다음, 뒤이어 교황 선출 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볼테라로부터 로마로 향하던 소데리니 추기경을 만나 꽤 오래 동행하면서 한여름 태양의 이글걸리는 열리 속으로 허덕허덕 막 돌아왔을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서기장의 출발이 연기되다가 결국 취소되어 버렸지난, 이 새 교황까지도 운명한 이번에는 진짜였다.  그는 10월 24일 아침 길을 떠났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에 우호적인 유력 추기경들에게 줄 신임장을 가지고 갔다.  그는 그들에게 새 교황은 그리스도교권과 이탈리아 모두의 요구에[ 부합되는 인물잉어야 한다는 말을 전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지시외에도 그는 공화국의 이름을 빌려 프랑스 왕이 내린 잠파올로 발리오니의 용병 계약 건을 지정된 조건으로 체결하는 특수한 임무도 하달받고 있었다.  이 건은 비롯한 다른 모든 문제에서 사절은 누구보다도 먼저 소데리니 추기경과 의논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로마에는 또 하나의 피렌체인 추기경 조반니 데 메디치가 와 있었으나, 마키아벨리는 그를 만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도록 암묵적으로 양해되어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27일 로마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이 인물과 그 유서 깊은 도시의 유적들이 조우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다.  그의 글 숙에는 이에 대해 슬쩍 언급하거나 생각 해 본 듯한 날조차도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리비우스의 책을 뒤지고 다녔던 것과는 달리(마키아벨리가 (리비우스 논고)를 쓴 사실을 비유한 말 - 옮긴이), 로마의 유적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정도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설사 그가 그렇게 했다 해도, 그것이 적어도 사절로 막 왔을 무렵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한듯하다.  무장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잇던 당시의 로마를 어슬렁거리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도 안전한 행동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곳은 병사보다는 시골 농부들과 좀도둑들, 그리고 새로 힘을 얻은 로마 소제후들의 졸개들로 들끓고 있었다.  프라티 가문과 보르기 가문은 발렌티노의 사람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소요와 의심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이러한 것이 마키아벨리가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본 광경이었으며, 또 첫 사절 보고서에서 정무위원회에 알린 모습이었다.  그는 소데니리 추기경과 읜논 한 후, 잠파올로 발리오니와의 계약 건에 대해 편지를 올렸으며, 아울러 교황 선출 회의의 추이를 예상하는 편지도 썼다.  우리는 여기서 발렌티노의 그림자가 여전히 그에게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발렌티노는 성 안아 앉아 그 어느때보다 더 위대한 일을 이루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그는 곧 발렌티노의 희망이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달려 잇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타인에게는 해를 입히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해준 적이 없었던 그가 말이다.(발렌티노 공이 교황이 되고자하는 사람들로부터 큰 환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가장 선호하는 에스파냐의 추기경들은 물론이고, 그 외의 많은 추기경들이 매일 성으로 몰려와서 그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잇는 상황입니다.  그리하여 생각건대, 누가 교황이 되든지 그에게 빚을 지는 셈이어서, 그는 새 교황이 자신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새로운 교황으로 산 피에트로 인 빈쿨라, 즉 추기경 줄리아노 델라로베레가 유력하다는 소문이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그에 대한 이러한 선호도는 누가 교황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마키아벨리가 두 번째 보고서를 올렸던 10월 28이, 은행들은 줄리아노가 교황이 되는 데에 32퍼센트의 배당금을 걸었으며, 30일에는 그 비율이 60퍼센트로 올랐다.  추기경들이 교황 선출 회의에 들어가기 직전인 31일, 그의 뒤에는 발렌티노뿐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교황 선출이 무산된 루앙이 잇다는 소문이 돌자, 그의 주가는 즉시 90퍼센트까지 치솟았다.  발렌티노 같은 인물이 단지 약속만을 믿고서, 10년동안 보르자의 이름을 증오하며 망명 생활을 해온 사람에게 자신의 표를 몰아주려고 했다면, 그의 머리는 병마와 불운으로 인해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하다.  하기야 사태가 궁해지면 어떠한 쪽으로 흐를지 모르는 것이 인간사인 법이니, 우리의 사절께서 썼듯이 추기경들은 더 부자가 되고 싶었고 발렌티노는 회생을 원하는 바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하여, 시스토 4세의 그 성마른 조카는 이미 교황이 다 된 채 교황 선출 회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바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당시 떠돌던 소문 덕분에, 마키아벨리는 그날 밤 피렌체로 보낸 편지에서 교황 선출의 결과가 공표되기도 전에 새 교황의 이름뿐 아니라 줄리오 2세라는 교황명까지도 거명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그가 그러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못할 만큼 매우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이제는 확실해진 이 엄숙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오는 아침 산 피에트로 인 빈쿨라 추기경이 새로운 교황위에 오르게 되었음을 감히 신의 이름으로 위원님들게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부디 신께서 그를 그리스도교권 전체에 유익한 목자로 만드시기를.) 그뿐이었다.
  하지만 피렌체의 서기장은 자신의 편지에 날개를 달아야 할 중요한 시점 시점에서 그다지 운이 좋지 않았다.  돈에 인색한 공화국은 그가 특별 전령을 보낼 수 잇도록 해주지 않음으로써 그의 날개를 잘라버린 셈이었다.  세니갈리아 사건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새 교황의  출건 역시 사절이 보낸 편지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이미 다른 경로들을 통해 피렌체에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마키아벨리가 그 소식을 제일 먼저 안 사람들 중 하니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스도의 대리자 앞에서 잠시 사라졌던 마키아벨리의 야심에 찬 미소는 같은 날인 11월 초하루, 그가 10인위원회에 보낸 네 통의 편지 중 마지막 편지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는 여기서 교황 선출의 신성함보다는 인간적이고도 극히 세속적인 세세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와 약속을 한 사람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에, 과연 그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교황이므로, 그가 누구와 진실된 약속을 했는지는 곧 밝혀질 것입니다.)  3일 후, 마키아벨리는 줄리오2세가 (놀랍도록 많은 지지)를 받았던 이유를 자세히 서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가 이러한 지지를 받은 이유는 자신이 요청받은 사항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데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약속들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알려지기로 그가 발렌티노에게 한 약속 중에는 로마냐 전체를 그에게 되돌려주겠다는 말도 들어 있었다.  당시 그곳은 옛 통치자들과 베네치아의 야욕 사이에서  분열된 상태에 놓여 있었으나, 그래도 한때는 다른 누구보다도 그에게 충성했던 지역이었다.  이와 더불어 교황은 발렌티노에게 그의 개인적 안전을 위하여 오스티아 같은 조그만 선심과 함께 교회의 곤팔로니에레 직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교황이 자신의 묵은 원한과 쓰라린 망명 시절을 잊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간파한 이 피렌체인은 조소 띤 어조로 다음과 같이 결론 지었다.  (발렌티노 공은 스스로의 기백 있는 자신감 때문에 오히려 제 무덤을 파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자신의 말보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더 신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새로운 교황은 즉위가 공표된 직후, 우리의 사절은 이번 선출이 피렌체에는 매우 잘된 것이라는 점을 10인위원회에 서둘러 주지시켰다.  그 이유는 당시 피렌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로마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발렌티노의 몰락 이후 오히려 더 달갑지 않고 더 위험스러운 세력들과 이웃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작의 힘에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자 로마냐는 분열되어 한쪽은 교회에 충성하는 편으로 복귀하고 다른 쪽은 이전의 통치자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상태가 되었다.   예컨데, 오르델라피 가는 피렌체의 도움으로 포를리에 다시 입성하였다.  파엔차 역시 피렌체인들과의 묵계 아래 결국 만프레디 가의 한 사생아를 청해 왔는데, 이곳은 원래 다른 어떤 도시들보다도 더 오래 발렌티노에 복속되어 있었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미 리미니를 점령했고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힘을 앞세워 협상으로 수많은 성을 빼앗았던 베네치아는 마침내 파엔차마저도 공격 끝에 함락시켜 버렸다.  발렌티노는 한 단명한 교황의 그늘에서 마치 독 버섯처럼 돋아나온 한 명의 신군주에 지나지 않았앗지만, 베네치아는 그곳의 석호만큼이나 유서 깊은 강력하고도 부유한 공화국으로서, 피렌체와 능히 맞설 만한 적국이었다.  이 두 도시국가 간의 관계는 항상 질시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야말로 서로가 화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10인위원회는 줄리오 2세의 등극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교황에게 베네치아의 이러한 침탈 행위를 항의토록 하라는 편지를 홍수처럼 내려보냈다.
  11월 5일, 마키아벨리는 관례적인 예를 치르기 위해 새로운 신임장을 가지고 교황의 발치에 섰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다시 교황을 찾아 그들의 항의 사항을 고하였다.  그는 유력 추기경들에겍도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기억하셔야 할 것은 이 무제가 토스카나의 자유가 아니라 바로 교회의 자유에 관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만일 베네치아인들의 세력이 더 커진다면 교황은 한 낱 그들의 예배당 신부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권리가 존중되는 것만큼 그들의 이러한 행위에 대한 제재도 당연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또 발렌티노의 마음을 들쑤셔놓으려 했으나, 발렌티노는 피렌체인들이 언제나 자신의 적이었다고 말하면서 심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확실히 그것은 사실이었다.  발렌티노는 스스로 베네치아와 손을 잡음으로써 이에 복수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그리고는 악의와 격분에 찬 말을 하며 계속 이 문제에 관하여 길게 붙잡고 늘어졌다.  우리의 사절은 똑같은 어조로 그의 말을 뒤받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스스로를 자제하면서 그의 기분을 누그러뜨릴 몇 마디 말을 한 뒤, 정말 일각이 여삼추 같았던 그와의 이야기를 서둘러 끝내 버렸다.  로마냐 사절의 시간은 이렇게 지나갔고, 더불어 마키아벨리와 발렌티노 사이의 마키아벨리주의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근사했던 대화들도 함께 흘러갔다.
  그러나 5일 뒤, 발렌티노는 사람을 보내 마키아벨리를 불렀는데, 이번에는 훨씬 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정화하게 늘어놓으면서, 교황이 그들 돕고 있으며 피렌체도 마찬가지로 이에 동참하여 공동의 적인 베네치아에 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이제 다른 방도가 없는 그로서는 말로써나마 초지일관 스스로의 뜻을 옹호하고 있는 셈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가 발렌티노 자신의 입으로 우리가 앞서 말한 바 있던 그의 몰각에 대한 연유를 들게 된 것도 아마 바로 그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마법의 힘은 사라진 다음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그를 이제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마치 주검을 관찰하는 해부학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제 주구도 그를 되살려낼 수는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교황이 발렌티노와의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고 있으며 또 그러한 심중을 너무 일찍 그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사태를 관망중임을 간파하고는, 발렌티노의 많은 헛된 희망을 내심 조소하였다.  공작은 여전히 교회의 곤팔로니에레가 될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왕을 믿었고, 그를 주변에서 쫓아버리기 위해 그에게 로마냐로 가라고 닦달하는 교황을 믿었다.  하지만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한 약속을 저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물론 이점에서는 누구도 그보다 더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딛고 있는 발 밑의 땅이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망연자실했으나 어떻게 해야 하지를 모르고 있었다
  발렌티노는 피렌체인들이 자신에 대한 안전 통행권을 보장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들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들이 지금 베네치아로부터 받는 위협보다는 그에 대한오 랜 원한의 감전이 더 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악명 높은 부하 돈 미켈레에게 군대를 주어 토스카나로 보낸 뒤, 스스로는 배를 타기 위해 오스티아로 갔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마키아벨리를 불러 피렌체가 안전 통행의 보장을 거절한 데 대해 격렬히 비난하면서, 자신이 피사 및 베네치아와 연합하여 피렌체를 공격하겠다고 협박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레에게 그의 위협은 그저 공허하게만 느껴졌으므로 별로 동요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단 한번도 자신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던 그가 지금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하겠다고 말하고 잇는 것이 아닌가  피렌체의 서기장은 사태를 능란한 솜씨로 처리하였고,  약간의 고무적인 말도 해주었다.  어차피 그와 그의 군대의 운명은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뒤 그는 10인위원회에 편지를 써서, 군대가 토스카나 쪽으로 가고 있으며, 그들을 저지하든 통과시키든 그것은 그들의 권한 안에 있음을 설명하였다.  얼마 후 그는 (돈 미켈레와 그의 군대가 그곳을 향하고 잇긴 하지만, 일이 잘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는 적중하였다.
  하지만 마티아벨리와 공작 간의 이러한 토론과 함께, 그가 편지에서 이를 중시 한데 대해 피렌체에 있는 누군가가 못마땅하게 생각한 듯이 보인다.  저어도 소심한 보오나코르시가 편지로 전한 바에 의하면 그러하다.  이는 사실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피렌체가 발렌티노를 싫어한다고 할 때, 그를 지켜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더없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있다면, 사절로서는 그가 나눈 대화들을 얘기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더욱이 그가 이러한 일에 관하여 (신바람나게) 썼다는 것은 사실이 아 다.  왜냐하면 바로 그 문제의 편지들엑서 마키아벨리는 공작의 행로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만 그의 운명이 (계속해서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다)고 말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사실 바로 그 순간 이후, 발렌티노는 급전직하의 상태에 있었다.  오스티아에서 그는 교황이 보낸 두 사람의 추기경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발렌티노에게 충성하는 로마냐의 성채들을 교황에게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베네치아의 위협에서 안전하게 되면 되돌려준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를 거절하자, 교황은 그를 체포하여 로마의 감옥에다 가두어버렸다.  이와 거의 같은 시간, 아무런 안전 보장책도 없이 토스카나에 들어갔던 그의 군대 역시 피렌체령에 이르러 습격을 받고는 가진 것을 약탈당했다.  보르자 휘하의 장군이자 그의 교살로 악명 높은 돈 미켈레 또한 피렌체인들의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앞서 피렌체가 보르자의 안전 통행을 거부했다는 소식에 만족감을 표시했던 교황은 이제 그의 마지막 남은 군세가 분쇄된 데 대해 마키아벨리의 면전에서 매우 흡족해하면서, 그 악한 돈 미켈레를 자신에게 넘기라는 교서를 피렌체에 보냈다. (그가 체포된 이때야 말로 지난 11년 동안 로마에서 자행된 온갖 불경하고도 반인륜적인 행위들, 즉 강도, 살인, 신성모모독, 그리고 여타 끝없는 범죄들을 들추어 밝히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보르자는 이런 식으로 매일 매일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가고 있엇다.  일찍이 그의 배반으로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우르비노 공 (보르자는 1502년 - 1503년 우르비노를 침탈했는데, 이때의 군주는 귀도발도였으며, 보르자의 죽음 1년후인 1503년 교황 줄리오 2세의 아들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가 그를 이어 우루니노 공이 되었다. - 옮긴이)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비참하게도 스스로를 변명하며 부친이 영혼을 저주하는 바로 그날, 그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는 셈이 될 것 이었다.  아마 자신의 아들이 내뱉는 이 저주야말로 알레싼드로 6세의 영혼을 향한 유일무이한 기원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를 위해 기도한 사람은 없었다. 혹시 있다면, 바로 그 자신에 의해 화형주에 달린 한 도미니쿠스 수도사(1498년 알레싼드로 6세의 명으로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질로라모 사보나롤로를 일컬음 - 옮긴이)정도 일까.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영웅이 파멸해 가는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우리는 이 교황이 자신의 빚을 정말 멋있게 같아나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는 잉크병을 솜으로 닦아내고 있지만, 정작 그의 손은 모두로부터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가.) 이틀 후 그는 다시 발렌티노를 가리켜 (우리는 그의 죄악이 조금씩 조금씩 그를 참회의 순간으로 데려가고 있음을 본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해서 공작은 점점 더 무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고 썼다.  아멘.
  피렌체의 서기장이 몰락하는 영웅을 이렇듯 냉혹한 어조로 그리고 있는 데 대해 분노하면서 그를 비난한 사람들이 있다.  하잔 그들은 그를 오해하고 있었다.  그는 발렌티노의 항해가 수조로울 때, 군주로서의 그의 어떤 측면들을 찬양했을 뿐이었다.  그와 같은 악한은 이단 파멸하게 되면 누구의 동정도 얻지 못하는 법이다.  더욱이 그처럼 마지막 순간에 일말의 영민함도 꿋꿋함도 보이지 못하는 경우에는 더 말해 무엇하랴.  마키아벨리는 뒤에 자신의 (리비우스 논고 Discorsi)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떠한 행위에서건 영광의 획득은 가능하다.  보통의 경우, 그것은 승리를 통해 얻어지지만, 패배했을 때라 할지라도(...) 그것을 덮을 만한 용기 있는 행동을 즉각 취한다면 영광은 획득 될 수 잇는 것이다.) 하지만 발렌티노는 로마에서의 그 마지막 나날 동안 우유부단하고도 비참한 행동거지 외에 아무런 용기도 보여주지 목하고 다만, 
  남들에게서만 찾으려고 했었지
  자신도 생전 몰랐던 동정심을.
  이러한 말들은 마키아벨리의 첫 (십년기(십년기, Decennale)를 비롯한 다른 유사한 시구들에 나타나는 것으로, 그가 비록 정치학의 저술가로서는 보르자의 그 비열한 도덕적 품성들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그러한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잇다.  사실 그는 정치학 저술가로서 이 비참한 인물의 슬픈 최후로부터 무언가를 배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것은 자신이 배반하고 해를 입힌 사람들은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에게 발렌티노의 그 같은 모습은 틀림없이 그가 저지른 다른 모든 범죄만큼이나 용서 받을 수 없는 잘못으로 보였을 것이다.
  로마냐 공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던 그 즈음에도, 그곳에서 일어나는 당시의 사건들은 여전히 마카아벨리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었다.  그는 냉담한 교황의 마음의 베네치아에 대한 공격의 열기로 바꾸어 놓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말로는 호의를 보이면서도 행동에서는 더디고 마치 북풍처럼 오싹한 그를 보면서, 이러한 태도가 원래의 성품 때문은 아닌 듯하다고 느낀 마키아벨리는 혹시 그가 자신의 교황 선출에 도움이 된다면 누구에게나 무언가를 약속했던 그 당시, 베네치아 쪽에서도 무슨 약조를 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만일 그 같은 경우라면, 그가 베네치아에도 앞서 발렌티노에게 했던 대로만 해주기를 바랄 도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황의 말과 행동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그가 비교적 솔직한 인물임을 안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즉 그가 온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자신이 새 교황으로서 아직 군대로 재정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가 (확고한 권력을 얻을 )때까지 사태를 관망하면서 행동거지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에서 확실한 것은 딱 한가지가 있습니다.  이는 명에를 추구하면서도 성마른 그의 성격입니다.)  그리고 4일 후, 그는 베네치아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상하였다.  (교황의 성격은 그들에게 전 이탈리아를 내어주는 문이 되든가, 아니면 거꾸로 그들을 몰락의 길로 인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중 두 번째 예상은 진짜 예언자로 만들어버렸다.
  11월도 다 지나가 버렸다.  마키아벨리가 로마에 체류한 지도 벌써 한달이 넘었다.  이번의 경우, 언제나 쉴 틈이 없는 그에게 이례적인 일은 그가 휴가를 청하는 말도 불평의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직 딱 한번, 비용이 많이 들어 돈이 더 필요하니 봉급을 올려달라는 편지를 정부에다 보냈을 뿐이다.  만일 봉급 인상이 불가능하다면, 전령에 드는 비용이라도 대신 지급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이처럼 힘든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항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끝 맺었다.  (제가 어떻게 해보겠지만, 요즘 사람이란 게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일하지 뒤로 물러나려고 일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서기장이라고 험한 말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번은 비교적 낮은 신분 출신의 한 정무위원이 교황의 로마냐 정책에 대해 자신에게 개인적을 좀 알려달라고 요구하고는 소식을 빨리 전해 주지 않느냐고 안달을 하자,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되받아쳤다.  (제가 그랬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만약 알아먹기 어려운 말로 보고서를 썼다면 이제부터는 쉽게 쓰도록 하지요.)  그는 또 언젠가 보고에 태만하다는 지적을 받자, 역시 강경하게 응답하였다.  위원님들이 주는 봉급이나 제가 지닌 수단으로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는 비용을 감수하면서, 큰 불편과 위험을 무릅쓰고 열심히 일한 대가가 태만하다는 비난이라니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짜증스런 이러한 일들을 제쳐놓는다면, 당시 유행하던 역병에도 불구하고 미키아벨리에게는 로마에서의 생활이 괜찮은 것이었음을 확실하다.  상상은 좋지만 톰마시니가 이 시기 그의 로마 체류를 (아무 재미도 없었을) 뿐더러 (유쾌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말한 데는 찬성하기 어렵다.  거꾸로 그는 그곳에서 매우 만족스럽게 지냈다.  그래서 12월 중순 10인위원회가 이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그는 못 들은 척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다른 때에는 빨리 돌아가게 해다라고 요청할 때난 써먹던 몸이 불편하든 변명을 이 당시엔 귀국을 늦추려고 이용하고 있었다.  즉 그는 이미 한 차례 병으로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전달에 겪었다는 기분 나쁜 병상의 불안간에 대해서 별다른 기억을 남기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귀국을 원할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로마에서는 역별이 돌고 있었고, 피렌체에는 장녀를 본 이후 두 번째 아기를 막 낳기 직전에 떠나온 젊은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좀 방탕한 편이었던 그가 아내든 역별이든 그리 개의치 않았을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이 제 막 태어난 두 번째 아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것도 아들임에랴!  아이는 11월 9일 세례를 받고 할아버지 이름을 따서 베르나르도로 부르게 되었다.  아이의 대부들 중에는 공화국 제1서기장인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와  마키아벨리의 친구 보오나코르시가 들어 있었다.  부오나코르시는 편지 속에서, 정무위원 한 사람이 변덕스럽다는 두, 왜 그렇게 친구에게 냉담하냐 둥 하면서, 마르첼로가 (바삐 뛰어다니고 있는) 서기국의 자질구레한 소식들을 전한 후 마키아벨리의 아기 이야기도 빼먹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 아기가 잘 컸다는 칭찬을 듣도록 힘을 쏟고 있네.  그건 열며 말게,  그런데 이해는 마치 까마귀 새끼 같아. 너무 새까맣거든.)  그의 아내 역시 몸을 추스르자마자 애정 어린 편지 속에서 이 남자아이 이야기를 써 보냈다.  (얘는 당신을 닮았나봐요.  피부는 눈처럼 흰데 머리는 검정 벨벳 같아요.  당신처럼 몸에 털이 많고요 그리고 당신을 닮아 그런지 내게는 아주 미남으로 보여요(...)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고는 온 집이 떠나가라고 울어댔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과 10인위원회의 명령까지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마키아벨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종종 소데리니 추기경의 집으로 가서 그와의 오랜 친분 관계를 다지곤 했으며, 자기 나라에 유리한 큰 계획을 그에게 들려주면서 자신의 존재를 기억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당시, 그는 10인위원회에다 추기경의 칭찬을 하기 바빴고, 추기경은 또 그대로 피렌체에다 마키아벨리의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좀 심해서 정무궁 내에서는 두 사람간의 이러한 친분 관계를 좋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이에 대해 가장 못마땅해하는 쪽은 아마도 곤팔로니에레의 정적들일 것인데, 그들의 수와 세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추기경 역시 마키아벨리의 아들에게 기꺼이 대부가 되어주었으며, 10인위원회의 첫 소환명령을 따르지 말도록 부추긴 것도 바로 그였다.  결국 마키아벨리가 소환에 따르기로 작정하자, 추기경은 10인위원회에다 그를 빼앗아가는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면서, 그는 매우 총명하고 성실한 인물이니 잘 봐주라고 부탁하는 편지까지 써주었다.
  12월 18일, 우리의 사절은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체류를 끝내고 추기경의 편지를 마실 물 삼아 길을 떠났다.  그의 전기 작가 한 사람은 로마에서의 이 체류 시기가 마키아벨리에게는 (아무 재미도 없었던) 것처럼 생각했지만, 차라리 좀더 상상력을 발휘하여 마키아벨리가 유적들이나 대사들로 붐비는 교황청 접견실, 맛있는 음식을 내놓는 식당들, 그리고 로마의 멋진 여성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제8장 두 번째 프랑스 사절 시기.  첫 (십년기 ) 민병대
  전쟁은 멀리 나폴리 왕국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프랑스와 행로를 같이하고 잇던 피렌체인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에 사자로 가 있는 동안 계속해서 전쟁 소식을 전해 달라는 닦달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그 당시에는 전투가 없다가 그가 떠난 직후인 12월 28일, 프랑스 군은 가릴리라노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에스파냐 균의 잘 닦인 군기와 보병대의 용맹성, 그리고 운과 재주를 겸비한 지휘관 콘살보 덕분이었다.  패전군은  설상가상으로 겨울의 매서운 날씨와 싸워야만 했다.  피에로 데 메디치 역시 바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싸우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물이 불어난 강을 건너다 익사했는데, 이는 시종 멍청하고도 불행한 삶을 살았던 그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프랑스 군의 궤멸로 인한 실망과 불안이 더 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피렌체의 평시민 정부는 피에로의 이 같은 죽음에 축하라도 보내야 할 판이었다.  나폴리 왕국 내의 기반을 모두 잃어버리고 에스파냐 군에 대패한 데다가, 스위스 막시밀리안의 의중은 오리무중인 상태에서, 루이 왕은 장차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지 에도 너무 바빠 동맹국을 돌본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우려되는 바는 콘살보가 프랑스를 롬바르디아에서도 축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그 첫 타격이 토스ㅌ카나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이미 피사에다 지지 기반을 만들어놓았으며, 시에나 루카에서도 여러 계획들을 진행시키는 등 그곳에서 일을 꾸미고 있었다.  로마냐 문제까지 끼어 있는 상황에서, 피렌체인들로서는 마치 대장군(콘살보의 별명 - 옮긴이)의 망치와 베네치아의 모루 사이에 놓여 있는 심정이었다.
  따라서, 피렌체인들이 사태가 얻허게 돌아가는지, 왕의 준비 태세와 의중이 어떠한지를 즉즉시 파악하고자 햇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하여 1504년초, 그들은 당시 피렌추올라에 가 잇떤 니콜로 발로리르 사절로 보냈다.  그는 이미지로 따나기에 앞서, 그에게 도움이 될 만환 일을 일러주기 위해 급히 그곳으로 파견되었던 마키아벨리로보터 지시 사항을 들었다.  하지만 서기장에게는 또 다른 긴여행이 기다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발로리가 아직 궁정에 도달하기도 전데, 콘살보의 의중에 대해서는 새 정보를 알아냈지만 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공화국은 애가 타사 다시금 마키아벨리를 급히 그에게 보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단히 긴급을 요하는) 자신의 임무를 두고 6일안에 도착해 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사실 그렇게 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키아벨리를 파견한 일은 좀 이사하게 보일 수도 잇다.  왜냐하면, 피렌체는 이미 왕의 궁정에 새로운 훈령을 주어 신임 대사를 보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게 편지로 지시만 내리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 굳이 마키아벨리를 보내게 된 것은 s서신 우송이 미답지가 못하다는 이유 말고도, 그가 이 모든 협상의 추이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잇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사람들, 특히 곤팔로니에레가 그의 판단력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는 1504년 1월 19일자로 그에게 내려진 훈령 속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당신의 이번 여행은 현재 진행중인 준비 상황을 관찰하고, 그것데 대한 당신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첨부하여 우리에게 '즉시' 알려주는 것이다.) 그들은 그곳 주재 대사의 판단을 믿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월 20일 길을 떠난 마키아벨리는 22일 밀라노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지시받은 대로 그곳의 프랑스 사령관인 샤를 당브와즈를 만나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즉 프랑스의 도움이 없다면, 피렌체로서는 그냥 앉아서 점령당하든가 아니면 점령하려는 자들과 협정을 맺을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앙브와즈는 이에 대해,  자신은 콘살보가 침입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설사 그런 일이 있다 해도 왕이 우방을 결코 못 본 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무제를 궁정에 상세히 보고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러한 조치는 사절로서 바라던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와 헤어지며, 그는 큰소리로 (아무 걱정 말라)고 소리쳤다.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에 보내는 편지에다 자신의 프랑스어 실력을 슬쩍 뽐내면서, 이 말을 전하고 있다.
  그는 다음날 밀라노를 떠나, 27일 왕이 잇는 리용에 도착하였다.  밀라노에서 뺏겼던 시간을 뺀다면, 그는 6일만에 오겠다던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대사부터 만나러 갔다. 이 두 니콜로는 서로 오랜 친구 사이였고, 우리가 앞서 말했듯이 (99쪽을 보라 - 옮긴이), 발로리는 마키아벨리에게 정감 어린 편지들을 보내곤 했던 인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는 한 통의 편지에서 더욱 정겨운 마음이 느껴진다.  (나는 형제가 없기 때문에, 당신을 나의 형제처럼 생각하고 싶소.  당신도 그렇게 대해 주었으면 하오.  이는 우리끼리의 약속이오) 따라서 둘의 사이는 틀림없이 좋았을 것이므로, 발로리가 10인위원회의 명으로 그에게 온 마키아벨리와 같이 분별 있는 사람을 괜히 의심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문필가로 약간을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대사는 스스로 보고서를 쓴 뒤 혼자 서명하였다.  다른 임무에다 그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로서는 독자적인 보고서를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지에서의 시간을 통틀어서 그가 쓴 편지는 두 통뿐이었다.  그 중 중요한 내용을 담은 첫 번째 편지의 경우, 그는 단지 발로리가 쓴 것을 확인하고 추인 했을 뿐이었다. 다만 그가 곤팔로니에레와 내밀한 편지를 주고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당시 왕은 그간의 실패로 심신이 피로한 상태라 접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니콜로는 다음날 루앙을 만났다.  앞서는 두 명의 사절 중 하위 직급이었던 마키아벨리는 이제 상위 직급의 위치에서 그에게 신임장을 수여하고 자신이 온 이유를 밝혔다. 그는 루앙에게 콘살보와 베네치아에 관해서, 그리고 주변의 적대적인 공화국들과 피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의 말인즉 일러하였다.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은 왕이 무엇을 도와 줄 수 있는지, 또 피렌체가 과연 그것에 의지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는 만약 우방이 도와주지 못한다면 적과 악수하는 수 밖에 또다른 도리가 있겠느냐고 덧붙였다.  추기경은 (불쾌하다는 듯이 화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불평 조로, 피렌체인들은 프랑스가 이렇게 어려운 때에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느냐고 되받았다.  다음은 발로리의 전언이다. (그러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매우 능숙한 솜씨로 프랑스가 토스카나를 구하려 한다면 우선 어떻게 성벽을 지킬 것이가를 숙고해야 한다는 점과 교황과 시에나와 페루자가 콘살보에 대한 방여벽ㅇ 역할을 할 서이라는 점을 주지시켰습니다.) 추기경은 교황와 시에나는 믿을 수 있을까? 페루자는 교황의 것인가? 라는 말을 되묻듯이 되풀이하고는 이야기를 중단시켜 버렸다.
  다음날, 추기경은 발로리와 마키아베리에게 좀더 누그러진 태도로 대하였다.  그는 현재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두 왕들 간에 휴전 협상이 진행중임을 전했다.  그는  전쟁이냐 평화냐의 여부가 다음주쯤이면 결정 나겠지만, 어는 경우든 피렌체는 안전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상황이 휴전으로 갈지 또는 프랑스의 강력한 도움으 받는 것이 될지, 어느 족이든 확실한 사실을 피렌체에 보고할 수 있을 때까지는 떠나는 일을 연기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30일, 그들은 왕을 접견하여, 앞서 루앙에게 한 이야기를 그에게 다시 되풀이했고  역시 똑같은 대답을 받았다.  피렌체의 두 사절과 프랑스 궁정의 다른 두 인물 간에도 똑같은 내용의 설전이 오갔다.  그 중 하나는 로베르테였고, 다른 하나는 투키디데스를 번역한 클로도 드 세이쎌이었는데, 발로리는 그들을 향해 (재빨리 일급의 서기관들을 파련한) 피렌체의 기민성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일급의 서기관들)을 파견한 것도 결과적으로 별 소용이 없었다.  11일 휴전 협정이 맺어졌기 때문이다.  그 기간은 3년이었고 양측은 각각의 동맹국들을 거명할 수 있었다.  기대했던 대로 프랑스는 피렌체를 지명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물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출발을 연기하다가, 3월초가 되어서야 서두르지 않고 느긋한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길을 떠났다.
  우리는 그가 언제 피렌체에 도착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4월 2일 피옴비노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임무는 당시 시에나의 영토 안에서 전쟁 준비로 의심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잇는 데 대해 그 곳 지방 연주와 의견을 나누면서, 피렌체는 그의 영지가 보존되기를 원하므로 서로의 공동 이익을 위해 그를 도울 의사가 있음을 알린 뒤, 그로 하여금 피렌체와의 옛 우호 관계를 재개하도록 권유하는 것이었다.  공화국으로서는 다른 나라가 자신의 소극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실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예비 임무들을 진지하게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파견된 주요한 목적은 훈령 끝머리에 나타나 잇는 대로, 그쪽 지역에서는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어가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영주의 모든 품성들, 사람들의 성향, 시에나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또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등을 면밀히 관찰하기 바라오.)
  파쎄리니의 허풍과는 달리, 이번 임무의 중요성을 그곳 영주와 그가 다스리는 영지의 가치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서기장은 며칠안에 일을 끝내고는 서기국의 편지 쓰는 일로 돌아왔다.  이탈리아에서 사로 싸우던 두 나라 왕이 휴전 협정을 체결하자, 그곳은 갑작스런 고요함에 빠져들었다.  로마냐 쪽의 베네치아인들은 이제 그들이 획득했던 영토로 만족하고 있었다.  호전적이었던 교황의 역시 호전적인 조카인 줄리오 2세는 여전히 (확고한 권력을 얻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이제는 긴 공성전이 되어버린 지루한 피사 전쟁만 없었더라면, 당시는 아마 옥타비아누스의 평화 시대를 다시 구시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이 시기에 우리의 관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공한들보다는 그가 오랫동안 머릿속에만 담아오다가 당시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 군사에 대한 몇몇 생각들이다.  청년기 이후, 전쟁은 그에게 용병대의 저열함과 모반의 경향 그리고 배신 행위들과 함께, 피렌체와 이탈리아가 그들로 인해 파괴되는 모습을 숱하게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시기국에서 궁정에서, 전장의 소요 속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왔던 그에게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고, 이후 그는 그러한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그 고대의 용맹성이여
  이탈리아인의 가슴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고 있구나
  라고 읊은 페트라프카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서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는 로마냐에 사절로 가 있는 동안, (한 집당 한 명씩 정발된) 그곳의 농민들이 돈 미켈레의 고된 훈련 끝에 어엿한 병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mfl고 피사인들이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용병대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스스로를 방어하는 모습도 목격하였다.
  물론 영예로운 코무네의 민병대((milizie) 혹은 (la Ordinanza). 이를 민병대로 옮긴 것은 당시의 용병대에 반하는 개념에서이며, 현재와 같이 졍규군이 아닌 사병(사병)이란 뜻에서가 아니다.  물론 시민군 miliaia cittadina 또는 자국군 armi proprie 등의 옮긴말도 가능하며, 이 역시 마키아벨리나 리돌피가 실제로 쓰고 있는 말들이다.  앞의 경우는 중세 봉건 영주에 대항한다는 의미가 강하지만, 실제로 모병 대상자는 대개 콘타도의 농민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좀 도시 반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한 역어라고 생각된다.  뒤의 경우는 조금 거리가 있는 말이다. - 옮긴이)에 대한 기억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로부터 거의 이백년이 지난 당시의 상황에서 시민과 농민을 모병한다는 생각은 피렌체인들에게는 아무래도 무모하고 허황되게 보일 만큼 낯선 것이었다.  읍도파 문인 도메니코 체키가 (피렌체를 지키기 위한 성스럽고 고귀한 개혁 방안 Riforma santa e preziosa)에서 주워섬기고 있는 그렇게 많은 기발한 방법들 중에서도 체격이 좋은 시민들을 군으로 훈련시킨다는 괴상한 생각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 당시 피사 전쟁과 그 외의 이러저러한 용도로 콘타도 지역에서 징집된 (코만다티 comandati)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공병대로 보는 것이 나으며, 단지 어떤 특수한 경우에만 활용되었다.  피렌체의 서기장은 국민병에 대한 정치 이론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이론을 실제에 적용하여 정규적인 소집과 확고한 법령에 의하여 정부 관리의 통제 하에서 운용되는 민병대를 창설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그처럼 기상천외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굳은 신념에다가 곤팔로니에레와  그의 동생인 추기경이 그에게 보여준 큰 호의 덕분에 그는 용기를 얻었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그가 추기경에게 이 계획에  관해 처음으로 이야기 한 것은 로마에 사절로 가 있을 때인 듯하다.  분명한 것은, 당시 그들 사이에 이 문제에 관한 의견 교환이 있었고, 추기경이 아주 즉각적이고도 열성적으로, 그리고 아주 강력하게 그 계획을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피렌체로 돌아와 곤팔로니에레를 비롯하 몇몇 유력 시민들과 그 문제를 의논한 결과 그는 조심성 많은 피렌체인들의 회의적인  분위기를  극복하기란 아무래도 매우 힘들겠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7년 전 정무위원회가 무장 호위대를 갖추게 하자는 말이 나왔을 때 기를 쓰고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이 그렇지 않아도 종신 임기인 지금의 곤팔로니에레를 아예 종신제 참조로 만들려는 음모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케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같이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마키아벨리는 반 쯤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1504년 5월 24일 추기경에게 편지를 썼고 5일 뒤 다음과 같은 답장을 받았다.  (민병대에 대한 반대는 그 방안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건전한 것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네.  그리고 그것은 사적인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적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그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될 것이네.  거기서 주저앉지 말기 바라네.  언젠가는 그 일을 자랑스러워 할 때가 올 테니까.  다른 보답은 없더라도 말이네.) 사실 그는 다른 어떤 보답도 받지 못했지만, 그 때문에 훗날 영예는 얻게 되었다.  그의 앞길을 예언하는 듯한 이러한 격려가 피렌체 서기장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추기경의 애정 어린 배려는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그는 같은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를 가리켜 (가장 친애하는 동료)라고 불렸으며, 대부가 되어 준 것 외에도 그에 대한 자신의 우정을 또 다른 방식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사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마침 군사 문제를 주 업무로 하던 서기국 일과 병행해 나갔다.  그때 피렌체는 피사를 둘러싸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들은 작전은 상례대로 주변 농작물을 갈아엎고, 리르바파타를 재탈환하고, 도시를 먹여살리는 외부의 도움을 차단하는 조치들을 취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피사에 대한 원조는 오직 아르노 강 위쪽의 바다로부터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머저 강 어귀에다 좁다란 랠리선을 가진 일단의 수비대를 배치한 뒤, 강의 물줄기를 돌려 피사인들을 말려버릴 계획을 추진하였다.  곤팔로니에fp는 물을 잘 아는 피렌체와 외국 전문가들을 부추김으로 이 계획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공화국 돈 7,000두카토를 웅덩이 속에 밀어넣고,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우리 서기장의 펜만 수없이 닳아없어지게 하는 데서 그치고 말았다.  마키아벨 리가 이 안을 지지했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톰마시니는 아니라고 말한다.  무릇 위대한 인물이라면 실수가 있을 리 없고 특히 그의 전기 작가를 위해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증거를 더 확인하지 않고도 이에 대해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는데 개의치 않겠다.  우리는 서기장과 그 계획의 주도자인 곤팔로니에레간의 관계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으며, 실제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주 기발하고 대담했던 그 계획의 성격 자체가 나에게는 바로 마키아벨리적인 천재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듯이 보인다. 
  이 수공 작전에 건 마지막 희망도 가을에 닥친 첫 홍수 속에 떠내려가 버렸다.  바로 같은 때, 마치 강물처럼 마키아벨리의 시심이 가느다랗게 분출되었다.  10월도 마지막으로 치닫던 그때, 그는 샤를 8세의 침입으로 서두를 잡아 ( 10년 동안 이탈리아가 기울인 노력과 2주동안 '자신이' 기울인 노력)을 보여주는 550행짜리 시 한수를 완성했던 것이다. (첫 (십년기 Decenale) 를 가리킨다. 이 작품은 시의 형식을 빌려 1494 -1504년의 10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피렌체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위의 (2주동안)이라는 표현은 이 시가 14-5일 만에 씌어 졌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나온 날이다.  미완성으로 남은 두 번째 (십년기)가 있으면, 이는 1504-1509년의 일을 다루고 있다 - 옮긴이).  이 시에서 모든 일의 출발점인 서두의 경우, 우연은 별다르게 기능하지 않지만, 끝맺음 부분에 가서 발렌티노(연전히 그의 운명적이 군주인)의 마지막 행적을 다룰 때에는 상당한 작용을 하고 있다.  줄리오 2세의 마지막 발톱을 피해 가까스로 몸을 피한 그는 처음으로 콘살보의 환대를 받으나 뒤에 그로부터 배신당한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읊고 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네
  그리스도에 거역했던 자가 받을 만한 만큼.
  산문에서든 시에서든, 살아서든, 죽어서든, 이후 (바쁜) 마키아벨리는 더 이상 자신의 영웅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발렌티노는 에스파냐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전투중에 그곳에서 죽었다.  한때 이탈리아의 역사 무대 위에 발을 내디뎠던 그는 이제 마키아벨리에게는 정말 (무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십년의 이야기는 한 악한의 쓸쓸한 최후로 마감됨으로써 민요 풍의 노래 un cattare di dandamento popolaresco((십년기)를 (민요풍)이란 부른데 대한 디오니소티의 반론과 리돌피의 재반론에 관해서는  이장의 주 33을 볼 것 - 옮긴이)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끝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전기 작가로서는 할 수 없는 간략하게 다룰 도리밖에 없지만, 이 첫 (십년기)는 많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잇다.  첫째 (신곡)에 대한 그의 오랜 연구와 강한 애정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데, 그것은 단순히 테르차 리마 Terza Rima(11음절구 3행 시절 - 옮긴이)를 취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단테로부터 여러 가지 표현법이나, 형식, 반구(반구)들을 빌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마키아벨리는 시를 쓸 때보다 산문을 쓸 때가 더 시인처럼 보인다는 것, 그리고 시라는 것 자체가 이 경우과 같이 역사와 정치를 논할 때는 적절치 못한 형식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마키아벨리의 신랄하고도 현실주의적인 문체가 시의 운율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시행들이 없지 않고, 당시 인기가 높아서 아예 속담처럼 사용되기에 이른 날카로운 격언 조의 말들도 다수 보인다.  바로 이러한 격언들, 다부진 생각들, 그리고 나라에 대한 애정과 같은 것 때문에, 이 조그만 시 작품은 마키아벨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여기서 내면의 불꽃과 영원한 냉소를 지닌 생생한 자화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십년기)에서 정치는 시라는 베일에 감싸여 있지만, 알라만노 살비아티에 대한 그 작품의 헌정사 역시 정치적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살비아티는 아레초 반란의 시기 공화국을 구했던 인물이다.  사실 원대한 군사적 개혁을 꿈꾸고 계획하던 마키아벨리로서는, 조밤바티스타 리돌피를 비롯한 여러 유력 시민들과 함께 반소데리니파의 수장격이었던 그를 고려에 넣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계획에는 너무 많은 난관이 따랐기 때문에 10월 말경에는 곤팔로니에레 자신도 가을 바람만큼이나 열성이 식어버렸다.  심지어는 마키아벨리가 로마에서 돌아온지 정확히 아홉 달 만에 태어난 새 아들에게 또다시 대부가 되어준 추기경조차도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자신이 개입된 데 대해 형에게 사과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피렌체의 서기장은 용기를 잃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냉담함을 스스로의 열정으로 메우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기운은 물방울이 떨어지듯 조금씩 빠져나갔네.
  그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피렌체인들과, 특히 반대자인 살비아티에게 자신의 군사 계획을 지지해 주도록 애타게 호소하였다.
  하지만 길은 쉽고 가까울 수도 있으리니
  만일 당신이 마르스의 신전을 다시 열기만 한다면.
  이 두 시행은 거의 민간의 별점처럼 그 정치적 예언을 끝내는 (십년기)의 마지막에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은 마키아베리가 한것이므로, 그로 하여금 그 감미롭던 이탈리아 땅이 조만간 전쟁의 풍파에 휩싸이리라고 예언케 했던 이유들을 하나한 뒤따라가보는 수고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교황이 바라는 바,
  상처받은 교회를 되살려놓는 것.
  자식 하나를 가진 황제는
  자신이 베드로의 후계자로 보이고 싶어하네.
  갈리아는 고통으로 가득한데.
  피렌체와 베네치아 또한 각자의 몫을 주장하였다.
  두려워하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마르코여,
  전쟁이냐 평화냐 망설이고 있구나.
  그리고 (피렌체여) 피사를 향한 당신의 탐욕 또한 너무 크나니
  (상처 받는 교회를 살리려는) 교황의 압박아래 (전쟁이냐 평화냐)의 기로에 선 산 마르코 San Marco(성 마가는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 - 옮긴이)는 그와 잠깐 동안 우호 조약을 맺었다.  화친과 전생 사이에서 베네치아는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에게 뒷돈을 대어주었는데, 그는 자신의 나라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사실은 피렌체를 공격할 목적으로 콘살보의 깃발을 떠나 페트루치, 비텔리 가 미치 잠파올로 발리오니와 동맹한 인물이었다.  피렌체인들은 결국 피사를 향한 바로 그 (너무 큰 탐욕을 )을 앞세우다가, 1505년 3월 27일 폰테 아 카펠레세 근처에서 피사에 대패까지는 아니지만 힘빠지는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그 당시 마키아벨리는 서기국이 늘 그렇듯이 연일 편지쓰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많은 양의 이러한 공신 서한들이 아니라 이 시기에 쓴 극소수의 사신(사신)들이다.  그중에는 여전히 교회 성직록을 얻고자 애쓰고 있던 동생 토토의 편지 한 통이 끼어 있다.  또한 니콜로 발로리가 보낸 매우 정감 어린 편지도 남아있다.  그는 마키아벨리와 주고받은 편지들에게서 언제나 그랬듯이 편지를 보내도 도대체 답이 없다고 불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불평은 좀 지나친 면이 있어서, 마키아벨리의 막내아들에게 대부가 되어주었던 것이 그에게는 우정을 돈독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섭섭한 감정을 가지도록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프랑스 사절의 일에 싫증이 난 발로리는 피에로 소데리니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귀국을 주선할 말한 사람에게 기대였다.  그는  프랑스 궁정에서는 (머리가 총명하면서도 과묵한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는, 친구인 마키아벨리를 바로 자신의 후임자로 삼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프랑스로 가지 않았다.  그는 페루자의 군주 잠파올로 발리오니가 있는 카스틸리오네 델 라고로 파견되었다.  발리오니는 피렌체와 용병 계약을 체결해 놓고도 뒤늦게 자국을 넘어서서 다른 나라의 방어까지 고려할 여력이 없다는 변명과 함께 그것을 포기해 버렸다.  공화국의 입장에서 그와의 용병 계약을 대단히 중요한 일인 데다가 이미 카펠레세의 패배로 힘이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갑작스런 변절로 난관에 처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일이 적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면 더욱 위험한 상황이었다.  어떤 난관에 봉착하여 무언가 확실한 사정을 알고 싶을 때면 늘상 그래왔듯이, 피렌체인들은 마키아벨리로 보냈다.  그가 맡은 임무는 어뗳게든 잠파올로를 구슬러서 계약을 되살리지는 못하더라도 그가 마음을 바꾼 것이 좀더 좋은 조건을 얻어내려는 욕심 때문인지 아니면 더 은밀한 이유가 있는 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길을 떠난 마키아벨리느 4월 11일 카스틸리오네 델 라고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만찬을 전후하여 세 시간 이상 발리오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흡사 고양이를 만남 쥐 같았다.) 마키아벨리가 이 긴 논쟁에서 하도 (그를 이지저리 몰아세우는) 바람에, (그의 안색이 여러 번 바뀔) 정도였다.  한 대목에서 그가 많은 페루자의 법률가들과 의논했다고 말하자, 마키아벨리는 (이 문제는 법률가들이 아니라 군주가 결정할 일이며, 갑옷을 입고 명예를 얻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면 신의를 잃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이 없을 분 아니라, 그가 볼 때 지금 발리오니가 도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대답하였다.  모두가 그를 (비틀거리는 망아지)정도로 보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에게는 말을 바꿀 힘이 없다는 힘이 없다는 듯이 결심에 변함이 없었지만, 마키아벨리는 그를 넘겨짚기도 하고 찔러보기도 하면서 두 번이나 그의 내심이 드러나는 말들을 하도록 유도했다.  마키아벨리와 10인위원회는 이를 그곳에서 알아낸 정보들과 맞추어본 끝에 발리오니, 오르시니 가, 판돌포, 루카인 들 사이에 모종의 비밀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잠파올로는 상황이 어떤지를 감지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이미 (두달 동안 노심초사하면서 한번도 스스로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정보원들이 그에게 한 이야기였다.  그는 아마도 마키아벨리로부터 (어느쪽으로 택할 것인지를 잘 생각해야만 하며, 그 결과 페루자 전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경고를 들은 이후 더 웃음을 잃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제 피렌체는 군사력의 부족에다 누가 적인지를 소상히 인지한 때문에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더욱 고심하게 되었다.  이것이 다 말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닌 니콜로 덕분이었다.  피렌체인들은 알비아노를 고용한다는 계획을 포기하였다.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인물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지킨다는 계획은 매우 교활하긴 하지만 그만큼 매우 잘못된 것이었다.  대신 그들은 만토바 후작에게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그와의 협상이 난항에 부딪혔으므로, 5워 4일자 훈령에 의해 마키아벨리가 만코바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든 누구든 그 협상을 성공시킬 가능성은 없었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곤팔로니에레는 그를 나폴리로 보내 콘살보와 협상케 하는 일을 거론하였다.  그른 해로를 통해 피사로 보병을 실어 나르고 있었으므로 이를 적절히 활용하면 알비아노를 저지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 다른 인물이 그를 대신해서 파견되었다.  마키아벨리가 시에나로 가는 것까지 반대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여정은 400밀리오((miglio)란 영어의 마일과 같다.  그러나 그 길이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난다.  보기를 들자면, 고대 로마에서는 약 1,480m였으나, 그뒤로 로마에서는 1,460m, 피에몬테에서는 2,466m 등으로 바뀌었다.  현재 영미 1마일은 1,069m 정도이다 - 옮긴이)가 아니라 40밀리오였고, 그가 이러한 맞바꿈을 흔쾌하게 생각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태는 이러했다.  판돌포 프트루치로부터 알미아노가 피렡체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경고의 말이 전해졌다.  폭풍우가 그쪽에서, 그것도 곧 닫치리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정작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음모들을 처음부터 꾸미고 또 그 속에 가담한 당사자인 판돌포가 왜 갑자기 피렌체의 안위에 그토록 신경을 곤두세우는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절의 임무는 그의 전갈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는 명목에도 불고하고 이 놀라운 회심의 이유를 캐는 데 그 본위가 있었다.
  7월 17일 성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시에나에 도착한 마키아벨리는 (이제 막 잠에서 깬) 판돌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잠파올로 발리오니보다는 더 똑똑한 적수였다. 그의 목적이 당시 위험에 처한 피렌체가 몬테풀차노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데 있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원조의 약속과 조언들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지금 협상하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그에게 주시시키려고 애쎴다.  그는 10인 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자연스럽게든 우연히든 이 계획을 알아차리고 있음은, 제 생각으로는 이 협상이 매우 혼란스러워서 제가 앞으로 가야할지 뒤로 물러서야 할지도 모를 지경임을 그에게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대는 대로 그에게 부딪혀 갔다.  그는 8 동안 이 문제에 관해 무려 7통의 편지를 서기국에 보냈다.  마침내 7월 24일, 인내심도 돈도 한계에 다다른 그는 귀국 허가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이미 그의 친구 보오나코르시는 곤팔로니에레로부터 귀국과 돈을 모두 허락받아 놓고 있었다.
  사실 지난 몇 달 동안 알비아노와의 협상과 함께 그에 뒤이은 알비아노의 움직임 때문에 서기국은 끊임없는 일거리와 이야기 거리로 바쁘게 돌아갔다.  비는 왔지만 천둥까지 치지는 않았다.  8워 17일 산 빈첸조 부근에 이른 알비아노는 에르콜레 벤티볼리오가 이끄는 피렌체군을 만났고, 긴 각축전 끝에 패하고 말았다.  그의 군대가 거의 모두 포로로 잡히거나 무기를 빼앗겼고, 수송기구와 군기들을 잃었다.  피렌체인들은 이 승리로 자못 의기양양해졌다.  이로 인해 곤판로니에레는 대담해졌고 벤티볼리오와 계약 중재자인 자코미니는 사기가 올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피사 공략이 결정되었다.  콘살보의 원병과 우기에 대비하기 위하여 작전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전장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 작전의 행로는 그들이 품었던 희망과는 같지 않았다.  9월 6일 성벽 밑에 진용을 갖춘 군대는 다음날 대포로 성벽에다 큰 구멍을 둘씩이나 뜷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보병들은 돌격을 감행할 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피렌체에 아무런 성과도 안지 못하고 그곳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남긴 것이라고는 이탈리아 군대의 치욕스런 무능의 오명밖에 없었다.
  용병대의 이러한 무능함은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용기와 새로운 주장을 펼칠 수 있게 해주었다.  곤팔로니에레와 그의 친구들은 그의 말에 솔깃하였다.  그들이 의심을 버리고 그 실행 방법을 논하게 되자.  (그와 같은 이일 이름값을 하면서 지속되려면)이 문제가 대평의회에서 다루어져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특히 소데리니는 쵠그느이 반대와 의혹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데다 몇 몇 유력 시민드이 과연 찬성해 주겠느냐는 의심이 겹쳐, 관례대로 평시민들의 동의를 받아내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일이리 새롭고도 이례적인 것이라, 평시민들에게 먼저 시범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것에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는 다른 상의 없이 오직 정무위원회의 권한만으로 무젤로와 카센티노같이 그래도 제일 군대 기질이 두드러진 지역에서 사람들을 징집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는데, 이제 그 일을 총괄하게 된 마키아벨리는 이에 적당한 인물을찾아내었다.  그는 바로 발렌티노의 악명 놓은 부하였던 돈 미켈레였다.  그는 피렌체인들에게 사로잡혀 교황에게 넘겨졌으나 그에게 고분고분하게 군 덕분에 결국 방면된 전력으 가지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이 (잔인하고도 무시무시하며 공포를 주는 인물) 아래에서 로마냐의 농민들이 군인을 변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무젤로와 카센티노의 농민들을 병사로 키우는데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인물있다.
  수단보다는 목적에 더 관심이 있는 곤팔로니에레를 설득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자의 악명과 발랜티노에 대한 증오심을 간직하고 있는 시민들을 납득시키는 일이었다.  더욱이 선량한 소데리니에게 보르자의 악행을 답습할 인물이라는 의혹이 일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현실이 아닌가! 마키아벨 리가 조밤바티스타 리돌피, 피에로 귀차르디니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의향을 슬쩍 떠보았지만 모두가 반대쪽이었으므로, 곤팦ㅍ로니에레는 더 이상의 조언이 없이 그 안건을 80인회의 표결에 부쳐 통과시켰다.  반대자들으 분개했지만 결과를 기다리른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구성된 민병대가 관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으 것인가는 여전히 두고 봐야 될 사항이었지만, 마키아벨 리가 자신의 대전투에서 이미 승리했다는 점은 혹실했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방핼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모병을 위해 무젤로로 갔다. 1506년 새해 초하루, 그는 이 새로운 제도를 빨리 실행에 옮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는 혹독한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1월 2일 그는 10인위원회에다  자신이 전날 뽑은 사람들에 대해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익살스러운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저를 이리저리 걸어 돌아다니게 만드는 걸 보니 제가 위원님들과 이 삭풍에게 잘 보였나봅니다.)
  10인위원회는 찬사와 격려의 편지로 이에 답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따로 격려가 필요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농민들의 저항을 잘 무마해서 기꺼이 무기를 들게 만들었음을 본다.  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 아래에는 과세와 관련된 어떤 계산된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마을과 마을, 파벌과 파벌 간의 적대심을 잘 다스리고 있음도 본다.  며칠 만에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곧 병사들을 모집하기 위해 다시 물젤로로 간다.  1월 27일이 되면 그는 폰타씨에베에서 그곳 사람들의 모병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디코마노와 산 고덴초로 갔다가, 새로이 구성된 보병대를 시찰하기 위해 다시 폰타씨에베로 되돌아온다.
  이 병사들은 (흰 방한 조끼에다 흰색과 붉은색이 섞인 바지를 입고, 흰 군모를 쓰고 군화를 신고 쇠로 만든 가슴가리개르 착용한 채, 일부는 창을 들고, 일부는 총을 가지고)있었다.  마키아벨리는 그들을 (스위스식으로 훈련받도록)하였다.  즉 독일식이라 뜻이다.  피렌체에서 의 첫 사열식는 1506년 2월 15일 사육제에 맞추어 정무궁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이른바 현인으로 불리는 유력 시민들은 기분이 상한 나머지 (이 행사를 크게 비난하였다).  하지만 평시민들은 환호하였다.  훌륭한 시민이었던 란두치가 그 광경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일기 Diario)에다 써놓은 다음과 같은 말은 그가 이른바 현인들보다 더 현명하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피렌체 시에서 열렸던 어떤 행사보다 더 장관이었다.)


================================ 03
    제9장 마키아벨리와 피렌체사.  줄리오 2세에 대한 두 번째 사절 시기
  문필가에서 갑자기 군사를 다루는 위치에 서게 된 마키아벨리를 두고, 역사가든 전기 작다든 모두가 한 목소리로 그의 애국심을 노래하고 있다.  나라고 남보다 앞서 그의 이러한 덕성을 부정하는 인물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당대인들조차도 인정했던 대로, 자신의 조그만 도시국가와 자신의 자유를 향한 애정은 말할 것도 없이, 그때로서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았던 더 넓고 큰 조국 (이탈리아를 말함 - 옮긴이)에 대한 애국심을  당시의 다른 이탈리아인 누구보다도 더 확실히 보여준 인물로서 그를 지목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좀더 공평하게 평가하자면, 피렌체의 서기장이 민병대에 기울인 열성과 관심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재능을 믿고, 더불어 반대자들에 의해 그토록 심하게 공격당한 계획을 성사시키기코자 한 한 인간으로서의 열성과 관심이었다고 보는 쪽이 더 나을 거이다.  우선 스스로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손상될 순간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운명과 한 배에 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는 그의 성격에서 나타나는 불꽃 같은 열정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 어떤 이론, 어떤 생각은 곧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말을 타고 그토록 열성적으로 여기저기 돌아 다니는) 모습에서 알수 있듯이, 새로운 것을 향한 쉴 줄 모르는 욕망은 그로 하여금 서기국에 앉아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보다 군인을 모병하는 일이 더 즐겁다고 느끼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만사에서 승리감을 만끽하고 있었던 당시,  그에게 조그만 행복감을 가져다준 것은 (십년기)의 출간이었다.  그가 무젤로에서의 모병을 끝내고 만 카센티노로 가고 있을 때였다.  그 작품은 서기보인 아고스티노 베스푸치가 자신으 돈으로 출판한 것인데, 그는 여기에다가 지금까지도 훨씬 더 비중 있게 대우 받을 만한 몇몇 피렌체인들에 바치는 헌사를 붙여놓았다.  여기서 그는 그 작품을 칭찬한 뒤에, 그것이 피렌체인들에 대해 저자가 지고 있는 빚을 이제 갚기 시작하는 데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즉 (그는 빚을 다 갚기 위해 지금 일터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더 큰 놈을 두들겨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문맥으로 보아, 그는 여기서 마키아벨리가 지금 좀더 큰 규모의 역사 저술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그냥 막연하고 가정적이 아니라 생생하고 실제적인 어투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의 일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작업은 지금까지 피렌체 서기장들이 써왔던 전통적인 연대기를 계속 이어나간다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 작품은 원사료 수집과 함께 벌써 착착 진행중인 상태에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왜 그렇게 많은 공문서 필사본과 발췌본들이 굳이 바로 그 (십년기)의 시기에 맞추어 나타났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자료들 중에는 마키아벨리의 자필도 있고 그의 서기보들이 쓴 것도 있다.  이러한 필사본과 발췌본들은 분명히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지, 그가 메디치 추기경의 의뢰오 자신의 피렌체사를 쓰게 될 (오랜 시간 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십년기)가 당대인들에게 바쳐진 것이라면 장래의 피렌체사는 후대인들에게 바쳐질 운명이라고 친구인 아고스티노가 말했을 때, 그는 예언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후대들은 이 (십년기)에 대해서도 감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마키아벨 리가 스스로 그 작품 속에 남겨놓은 것 때문에, 그가 쏟았던 애정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첫 출판물이 그에게 가져다준 조그마한 행복감 때문에 그러하다.  그는 책이 나오자 곧 친구들과, 자신이 공무로 만나는 높은 신분의 인물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그들로부터 인사 치레가 아닌 진짜 찬사의 말을 들었다.  그 작품의 우아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를 누구보다도 칭찬한 사람은 피렌체군의 지휘관이었던 데르콜레 벤티보리오였다.  그는 1506년 2월 25일 찬사의 말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마키아벨리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 소책자가 큰 인기 속에 널리 퍼져나간 것은 어떤 찬사보다도 해적판 덕분이었다.  그것은 첫 판이 간행 된지 대략 20일도 채 되지 않아 시중에 유포되었던 것이다.
  마키아베리가 이 해적판의 간행 소식을 들은 것은 카센티노에서의 모병 작업중 2워 28일 포피에 도착해서였다.  그는 즉시 자신의 서기보와 편집자인 베스푸치에게 연락을 취했다.  베스푸치는 전략을 기울인 끝에 경우 안드레아 기를란디 피스토이아란 출판업자르 찾아낼수 있었다.  그는 세르 안토니오 투비니의 동업자였다.  이 두 사람은 베스푸치에게보다는 근 현대의 서지학자들에게 더 친숙한 이름이다.  베스푸치는 이들이 찍은 책 한 부를 확보하고는 마키아벨리에게 (인쇄가 형편없다)고 편지를 썼다.  (이건 완전히 사기야, 행간도 없고 종이크기도 너무 작은 데다, 책 앞뒤에 여백 페이지도 없어 활자는 또 어떻고, 온통 잘못투성이네.)
  베스푸치는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고 친구의 명예를 손상시킨 데 대해 분노와 열성이 뒤섞인 상태에서 그 (형편없이 인쇄된 책자)를 흔들어대며, 8인감찰위원회로 달려가 기르란디에 대하여 항의했을 뿐 아니라, 이어서 대주교 대리에게 투비니 사제의 일을 고하였다.  양쪽 다에서 그가 이겼다.  문체의 판본은 원래 판매가 금지되었다.  대주교 교리는 투비니르 심하게 질책하면서, (이 사제에게 벌을 내리고) 그가 행한 (여타의 사행(사행)까지도 후회하도록)만들겠다고 말하였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이러저러한 사실들을 베스푸치의 유쾌한 편지에서 읽는 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또한 서지학자들은 이 편지로부터 몇 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잘 알려진 바가 없는 이 두 개의 (십년기) 판본에 관해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두 명의 출판업자에 대한 약간의 정보도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안토니오 투비니 사제가 범한 (여타의 사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은 여전히 가라않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복수를 한 마키아벨리는 눈으로 뒤덮인 산중의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포피에다 본부를 차려놓은 뒤 카센티노에서 모병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는 신병에게 지급할 무기가 늦어 도착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무기와 갑옷을 만든는 피렌체의 대장장이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할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3월 5일 그는 10인위원회에 다 (만약 무기가 제때 오지 않는다면, 여기서 아물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함므로) 빨리 서둘러달라느 편지를 보냈다.  하여튼 이러한 상황이 곤혹스러웠던 그는 큐시 지역에서의 모병 작업을 당분간 포기하였다.  그곳은 넓은 구역이라 (눈이 어지간히 오고 난 후에 가는 것으로 남겨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눈밭을 뒤고 하고 돌아와 다시 서기국 일에 매달렸다.  이제 3월도 끝나가고 있었고, 지난 10월 에스파냐와 프랑스 간의 화약으로 더 굳건해진 니탈리아의 평화는 그렇게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펠리페 대공(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1506년 카스티야의 왕이 된 미남왕 펠리페 1세를 가리킨다.  신성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이자 페르난도 2세의 사위 - 옮긴이)은 카스티야를 통치하고 페르난도 다라곤과 왕국을 분담하기 위해 에스파냐로 가버렸다.  페르난도 다라곤(가톨릭 와 페르난도 2세를 가리킨다.  그는  1504년 16년에 페르난도 3세로서 나폴리를 통치했다. - 옮긴이)은 나중에 이탈리아로 와서 나폴리 왕국을 다스리게 되는 인물이다.  이러한 사태 변화에 대한 논의와 염려가 있었다.  그러나 더 당면한 전쟁의 위험은 마키아벨리가 (십년기)에서 예견했듯이, 그 경박하고도 변덕스러운 막시밀리안의 존재와,
  상처받은 교회를 되살려놓기를
  원하는 줄리오 2세의 계획에 있었다.  그는 교황이 도기 전까지는 (언제나 원모(원모)로 가득 차 있었던) 인물이었으나, 즉위 후에는 그 꿈이 다소 사그라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바뀌지 않았다.  단지 힘을 비축하고 자금을 모으면서 (권력을 다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1506년 봄, 서기국에서 작성된 공한들이 주로 다루고 있던 문제는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얼마나 예리하게 이 문제들을 논하고 있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는 6월 중순 당시 피사 공략을 전담하고 있던 조반니 리돌피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속에서 이를 피력하고 있다.  항상 그렇듯이, 군대로써 펜을 움직이게 하지는 못하는 법이며, 또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렇게 될 때까지는 펜이 군대를 움직이게 만드는 법이다.  모두의 기대대로 먼저 군대를 움직인 쪽은 교황이었고,  마키아벨리는 이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기 위해 그곳으로 보내졌다.
  줄리오 2세는 피렌체인들에게 자신의 목적이 (폭군의 제거)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용병 대장인 마르칸토니오 콜론나의 부대를 벤티볼리오를 치기 위한 그의 작전에 참여시키라고 요구하였다.  공화국으로서는 이 요구가 별로 마땅치 않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당장 피사로부터 전력을 빼와야 한다는 것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곤팔로니에레는 교황으 거스르지는 말되 초대한 시간을 끌어보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는 조밤바티스타 리돌피의 지지를 받아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이 임무는 마키아벨리에게 맡겨졌다.  그는 이제 이러한 임시변통성 임무에 익숙해 있었다.  그락 줄리오 2세에게 그 대가로 준 것은 (그의 선하고도 경건한 의도를 칭찬하는) 듣기 좋은 말 한 보따리였다.
  마키아벨리는 8월 25일과 26일 사이의 밤에 출발하여, 27일 테리에서 교황 일행과 만났다.  그는 전날 대규모의 추기경, 조신, 병사들을 이끌고 로마에서 그곳으로 오던 길이었따.  마키아벨리는 치비타 z,스텔라나에서 그를 접견하여 멋진 논변을 보여주었다.  그는 우선 찬사와 감축의 말으 놀어놓은 뒤 콜론나의 참전이 어려운 이유를 그 어느때보다도 힘 있게 설명하였다.  그의 열성은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교황은 그의 말을 (주의깊게 그러면서도 유쾌한 기분으로)들었다.  그리고는 대답하였다. 자신이 듣기로 피렌체인들은 세 가지 점을 걱정하는 듯이 보이는데, 그것은 첫째 프랑스가 이 작전에 동참하고 있지 않으며, 둘째, 그 스스로가 이 일에 열성을 보이고 있지 않으며, 셋째, 결국은 벤티볼리오를 쫓아내지 않고 그와 협정을 맺든지 혹 쫓아낸다 해도 그를 다사 복귀시키리라는 것이었다.
  피렌치인들이 이 세가지 점을 우려하고 있으며, 군대의 손실보다는 그것을 참전의 더 큰 걸림돌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선 첫째번의 경우, 그들로서는 벤티볼리오를 자신의 후견 하에 둔 프랑스 왕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나머지 두 가지 점에 있어서도, 그들은 지금까지 우호 관계로 잘 지내오던 이웃에게 칼을 들이댄다는 사실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을뿐더러, 만일 교황의 무관심이나 관용으로 인하여 벤티볼리오가 뒤에라도 자신의 영토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면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사절에게 이 일에 찬성하고 도와주겠다는 프랑스 왕의 편지를 보여주며, 첫 번째 문제를 안심시켰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그 스스로가 앞장서서 이 일을 진행시키고 있는 상태가 아니냐면서 그의 열성을 의심치 말라고 하였다.  또 세 번째 문제의 경우에도, 벤티보리오는 일개 (사인)으로서 볼로냐에 머물도록 할 것이며, 다른 조치는 생각지 않고 있다면서 염려를 불식시키려 하였다.
  저녁 무렵, 마키아벨리가 (이 요새를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교황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을 때, 교황은 그를 불러 아침에 했던 자신의 말을 되풀이하였다.  마키아벨리가 이에 대해 공화국의 원군이 조만간 올 것이라고 안심시키자, 그는 자신이 지금 가진 군대와 앞으로 더 늘어날 군대의 규모를 설명한 뒤, (자신의 주머니에는 병사들이 가득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는 또, 베네치아가 좋은 조건으로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들이 자신과 피렌체에 손실을 입히고 이미 교회로부터 빼앗아간 영토를 양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교황의 말은 프랑스 원병이 오기 전에 콜론나를 소환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게 만들었고, 이는 피렌체에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일은 조용히 지나갔고, 마키아벨리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교황궁을 따라 아주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교황은 비테르보, 오르비에토, 카스텔 델라 피에베, 카스틸리오네 델 라고를 거쳐 편안한 발걸음으로 페루자를 닿았고, 그곳에서 잠파올로 발리오니로부터 첫 번째 셈을 청산받았다.  사실 이 셈은 이미 끝난 것과 마친가지였는데, 그 이유는  잠파올로가 오르비에토에서 그의 빚쟁이를 만나, 그에게 무릎을 꿇고는 요새와 인질을 비롯한 다른 모든 것들을 그가 원하는 대로 양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9월 13일 막상 페루자에 입성하자, 마키아벨리는 잠파올로와 같은 악한의 손아귀에 잡힌 쪽은 오히려 교황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이 일로 그는 10인위원회에 거의 매일같이 편지를 오렸는데, 그 중에서 발리오니가 교황과 추기경단을 자신의 수중에 넣고 잇다는 관측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자신의 나라를 빼앗으러 온 사람에게 맛서 해 되는 아무런 행동도 않는다면, 그는 분명 훌륭한 인품과 인간성을 갖춘 인물일 터이겠습니다만, 이 일이 결국 어떻게 맺어질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습니다.)
  끝은 좋앗다.  사람들은 마키아벨리의 이 유명한 말에 놀랐겠지만, 그의 판단이 빗나간 것은 쉽게 말해서 그가 이 사태를 두 군주 간의 정치적 관계에 대해 냉정하게 따져보는 정치가의 입장에서 보았다는 데 연유한다.  두 군주간이라 한 것은,  교황이 교황이 아니라 햔 명의 군주로서, 그것도 다른 군주의 권력을 빼앗기 위해 온 군대의 선두에서 잇는 군주로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귀차르디니 역시, 훨씬 더 깊은 숙고 끝에 쓴 저술에서, 당시 (그보다 더 사소한 일에서도 배신의 악명을 휘날렸던) 잠파올로가 (어떻게 그처럼 큰 사건 속에서 세상을 다시 떠들썩하게 만들지) 못했는지 놀라워하였다.  배신은 떡 먹듯 하는 그와 같은 인물이 그처럼 행동한 것은 자신의 비겁함 때문이지, 결코 양심에 찔려서 또는 존경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존경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마키아벨리와 귀차르디니의 말은 이 축소판 발렌티노가 그 호전적인 교황을 감금하리라는 뜻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할 만한 힘이 그의 수중에 있었으며, 교황은 분별없이 그를 믿고 있었다는 뜻이었을 뿐이다.  당시 잠파오로가 줄리오에게 감히 하지 못했던 행동을, 사정은 좀 다르지만 뒤에 콜론나 가가 클레멘테 7세에게 하게 될 것이었고, 그때도 마키아벨리는 교황이 (천명의 병사보다 펜에 묻은 잉크 한 방울을 더 믿는다)고 비난하면서 그를 조롱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당분간 교황의 승리는 거의 마키아벨리의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합리성에 대한 불합리성의 승리였을 뿐 아니라, (비르투 virtu) (비르투란 덕성을 뜻하는 현대 영어의 (Virtue)에 대응되는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말이다.  하지만, 현대어 용법과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이 말을 윤리적 의미에서보다는 용기, 과감성, 결단력 등 남성적 (활력)을 뜩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비르투와 포르투나(운명)의 대결은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이 그 기초로 삼고 있는 세계관이다 - 옮김이)에 대한 운명 fortuna의 승리이기도 하였다.  어떤 점에서는 여전히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그가 소데리니에게 보낸 그 유명한 글 (기리비치 Ghiribizzi)는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1506년 9월 13일에서 21일 사이 가벼운 집답 조로 페루장게서 써 보낸 것으로 생각되는 초고 형태의 편지를 가리킨다.  이를 각별히 (리리비치)라고 부르는 것은 이 편지의 서두에 적힌 (Ghiribizi scripti in Perugia al Soderino)란 말 때문이다.  교황의 페루자 무혈 입성을 지켜보며 인간과 운명의 관계를 숙고하게 된 마키아벨리는 이미 여기서 나중에 (군주론)25장에서 피력할 유명한 체세론의 핵심을 이야기하고 잇다 - 옮긴이). 지금까지 이 소데리니는 당연히 곤팔로니에레인 피에로 소데리니하고 생각되어 왔고 또 그렇게 생각할 수 박R에 없었으나, 사실을 조반 바티스타 소데리니(그는 패에로의 조카이자 마키아벨리으 친구이다-옮긴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비록 답장을 썼지만 내심으로는 숙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젊은 소데리니가 마키아벨리에게 가벼운 잡담 조의 편지 한 통을 쓰자 (1506년 9월 12일자 편지, 이장 주 19를 볼 것 - 옮긴이), 마키아벨리 역시 농담으로 가득 찬 글로 이에 답했던 것이다.
  이 (기리비치)는 (리비우스 논고)나 (군주론)을 예켠케 하는 주제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미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어떻게 발전되어나갔는가를 연구 하는데 매우 기초적이고도 중요한 자료로 간주되고 잇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주제들은 그의 이러한 대작들이 개념화되고 저술되기 직전에야 발상 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이러한 발상의 시점을 무려 6년이나 앞당길 수 있게 되는 것으로 보이니 솔직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앞서의 잘못된 판단(줄리오 2세와 잠파올로 발리오니에 대한 자신의 빗나간 평가를 가리킴 - 옮긴이)에 충격과 당혹감을 느낀 마키아벨리는 이 글을 통해 이간의 행동을 선도하고 역사의 형성에 작용하는 힘을 이론적이고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자 하고 있다.  세상사란 것이 (수단보다는 결과에 의해 판단되는 )경향이 있다고 할 때, (왜 그렇게 다양한 체세 방식들이 때로는 똑같이 성공하고 때로는 똑같이 실패하게 되는지)를 숙고한 끝에 그는 (비르투)와 (포르투나), 즉 운명 사이의 본질적인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성격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성격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포르투나는 인간을 지배하여 스스로의 멍에 아래 가두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생각들은 그 힘과 표현에서 거의 다를 바 없는 정도로 수 년 후 마키아벨리의 주장들 속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한 곳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포르투나와 한번 부딪혀보라.  그녀는 젊은이를 좋아한다) (교황은 늙었지만, 젊은이들 못지않게 일에 급하고 대담했다.) 다른 곳에서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칼 쓰는 법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앞 뒤 가리지 않는 행동에 오히펴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일을 신중히 계산한 끝에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 교황은 상황의 경중을 재어볼 생각도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군세도 갖추지 않은 채, 적절한 준비과정과 충분한 군사력으로도 해내기l 어려운 일을 절묘한 기회 포착을 통해 성취하였던 것이다.) 그만! 아직은 그가 이러한 일을 딱히 성취한 것은 아니니까.
  교황은 자신이 처음으로 거둔 승리를 즐기면서 9월 22일까지 페루자에 머물렀다.  그로부터 거의 한달이 지났으나 일은 별 진척이 없었다.  그는 망설이며 프랑스의 원병을 기다렸다.  그들은 피렌체 원병까지도 끌어 올 것이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이 이탈리아로 다시 들어오려고 준비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왕은 병사를 보내는 대신 조언이랍시고 몇 마디 말만 전해 왔을 뿐이었고,  이는 일에 대한 열성으로 몸이 달아 있었던 교황으로서는 매우 불쾌한 것이엇다.  평소 마키아벨리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교황은 이미 9월 12일, 만일 프랑스가 자신을 응호하고 더불어 황제의 진군이 사실이 아니든가 또는 금방 실현될 것이라면, (그는 교회든 다른 누구든 어떤 손실과 위험에 처하 든간에, 그 자신의 수치만은 결코 참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줄리오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궁정과 군대를 이끌고 구삐오와 우르비노르 거쳐 체세나로 이동하였다.  마키아벨리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마침내 프랑스 왕이 군대를 보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이에 힘을 얻은 교황은 이미 자시니 볼로냐를 얻은 양 생각하고는 다른 큰 일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10월 3일, 그는 벤티볼리오의 사절단에 d\대해 매우 의기양양한 어조로 이제 자신은 (보로냐 따위가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를 떨게 만들 수 있는 군세를  가지고 있다고 떠벌렸다.
  프랑스 군이 오고 있는 사이, 10월 5일 그는 체세나에서 자신이 보유한 군대의 사열을 실시하였다.  군사 문제에 깊이 몰입해 있던 마키아벨리가 그 행사에 빠질 수가 있겠는가! 그는 전문가의 눈으로 그것을 지켜본 뒤 10인 위원회에 올린 보고서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다.  (만일 위원님들께서 우르비노 공과 난니의 이 병사들을 본다면, 결코 위원님들의 민병대를 부끄러워하거나 그것이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친구인 보아나코 시는 바로 그 당시 보낸 편지에서, (당신들의 위하여)라는 식의 어조로 씌어진 이 말들을 장난스럽게 빗대어 (민병대 문제에 관해 이 제 배에다 동물 기름을 슬쩍 한 겹 바른 격이로군 그래)라고 썼다.
  하지만 민병대 호의 항해는 키잡이가 이처럼 오래 빠져 있는 동안에도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친구인 비아조는 수시로 그에게 향해 일지의 주요 사항들을 적어 보내주었다.  더욱이 그가 종종 공식 전달 사항들과 함께 넣어 보내는 사신(사신)들 속에는 온갖 종류의 정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카스티야의 왕이 왕국의 쓴맛 단맛 채 보기도 전에 세상을 뜬 이야기라든지, 매일 같이 이럴까 저럴까 하며 주사위만 굴리고 잇는 막시밀리안의 그 영원한 방황 같은 정치 소식도 있었고, 교황의 궁정에서 (일에 눌려 줄을 지경에 있을) 마키아벨리를 이제 소환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를 있은 후, 벌써 사무실 부하 직원들은 일이 줄어들 것이라는 희망에 (구석에 처박혀 꿈을 꾸고) 있다는 등, 시(시)와 서기국에 대한 소식들도 있었다.  그는 또 알라만노 살비아티가 몇몇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마키아벨리를 건달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그와 곤팔로니에레가 이제 서로를 미워하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 주었다.  이것이 (십년기)의 헌정에 대한 그의 보답이었던 셈이다.
  (배에 바른 동물 기름)에 대한 편지는 10월 11일자로 되어 있고 윗 머리의 착신지도 (포를리 또는 악당이 있는 곳)이라고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10월 9일 이후 포를리에 있었다.  여기서 교황은 이미 7일 체세느에서 선포한 금령에 덧붙여 벤티볼리오를 겨냥한 초강경 교서를 발효하였다.  이 교서만으로는 볼로냐를 공략하기가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차에 프랑스 군이 지척에 접근하자, 교황은 마키아벨리를 불러 지금이야말로 마르칸토니오 콜론나의 군대가 필요한 대임을 알렸다.  그의 말인즉, 피렌체인들은 자신들의 원병이 마지막 줄에 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었고,  이제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에다 이 사실을 알이기 위해 즉시 전령을 보냈다.  그는 필요한 시일을 꼽아보았다.  그것은 급한 성격의 교황에게는 (너무 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0월 16일 마키아벨리는 클론나가 이미 군령(군령)을 받았을 뿐 아니라, 참전시 필요한 비용까지도 수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황을 알현하였다.  줄리오의 입이 찢어졌다.  그는 주위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아 10인위원회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주었다.  그리고는 그가 베네치아의 영토를 피해서 피렌체 영토를 경유한다고 결정을 내리자, 마키아벨리는 그에게 요청하여 자신이 한 걸음 앞서 가 이 볼품없는 나라를 지나는 교황 및 그의 궁정과 병사들을 위해 준비해놓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하였다.  이 지칠 줄 모르는 서기장은 스스로 병참 장교가 되어, 카스트로카로, 모딜리아나, 마라디, 팔라추올로 등지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교황을 보위하였다.  그가10인위원회에 보낸 몇 통 안 되는 편지들은 그 길이도 짧은 뿐 아니라 내용도 정치보다는 시락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팔라추오롤에서 그는 다시 줄리오 2세의 행적을 분석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만일 볼로냐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더 큰 일을 모색함에 있어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판단컨대, 지금이 아니면 이탈리아가 스스로를 삼키려 해왔던 자들을 응징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20일 이몰라에 도착한 볼로냐의 사절들은 교황과의 면담을 기다리던 중에, 피렌체가 그들의 군주와 싸울 군대를 보낸 데 대해 마키아벨리에게 (정중히)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피렌체인들에게 (시류에 따라 움직이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다름아닌 볼로냐의 군주였으므로, 그가 못마땅하게 생각해야 할 대상은 피렌체인들의 정책이 아니라 피렌체가 스스로의 희생을 감하며 그로부터 배웠던 바로 그 행동 방식이라고 말하였다.  벤티볼리오가 발렌티노의 시대에 했던 일을 빗댄 이러한 응답은 정말 일품이었다.  바로 폐부를 찌르는 그의 농담 방식은 과연 마키아벨리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파르티아의 화살인 셈이었다.(마지막으로 남긴 독설이라는 뜻으로, 마키아벨 리가 사절을 그만두고 곧 돌아가게 된 것을 가리킴 - 옮긴이).  며칠 전 교황청 사절로 선임된 프란체스코 페피가 10월 26일 이몰라에 부임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 벤티보리오가 떠난 도시가 함락되고 11월 11일 교황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그곳에 입성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대가 도착한 후에도 이틀 더 이몰라에 머물러 있다가 만성절(만성절, Ognissanti : 11월 1일을 말한 - 옮긴이)에 맞추어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는 이제 연례 행사가 된 새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애정 어린 민병대 일에 전념하였다.  보오나코르시의 비유를 계속 빌리자면 민병대 호(호)는 이제 암초 지대를 벗어나 돛을 한껏 펼치고 갑자기 대해로 나선 형국이었다.  12둴 6일에는 9인 피렌체군령 및 민병대 관제위원회 Nove ufficiali dell'lrdinanza e miliaia fiorentina가 창설되었는데, 당시 이는 국가의 업무를 안정적으로 관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직제였다.  크든 작든 이 모든 것이 마키아벨리에 의해 구상되고 추진되었다.  위의 9인관제위원회에 대한 법령 역시 그가 초안한 것이었다.  그의 명석학도 훌륭한 저술 (피렌체 군사조직론 Discorso dell]ordinare lo stato di Firenze alle armi)은 이 법령이 막 통과되던 무렵에 씌어졌다.  그는 글의 서두를 다음과 같이 일반적인 것에서 시작한 뒤, 이에 신제도의 세부 사항들을 논의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잇다.  (지휘관이라 함은, (...) 사법적 권위를 가지고 군대를 통할하는 사람을 뜻한다.  피렌체에 사법적 권위를 가진 사람은 소수이며, 군대는 전무하다.)
  9인관제위원회라는 새로운 직제에는 서기관이 한사람 필요했고 이를 맡을 인물을 마키아벨리 외에는 없었다.  물론 제2서기장직과 10인위원회 서기관직은 그대로 겸임한 상태였다.  하지만 겸직에도 불구하고 봉급은 관직 하나에 대해서만 지급되었는데, 이는 지금과 비교하면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당시로서는 아직 다른 방도가 모색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피렌체의 서기장은 봉급을 많이 받는 쪽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물론 받는 만큼 쓰기 위해서이긴 하지만,(그에 못지않게 명성과 찬사 역시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또 바로 이러한 자신의 업적 때문에 관직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누구보다 더 열성인 사람은 소데리니 추기경이었다.  새로운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이 도시가 이처럼 가치 있고 짜임새 있는 일을 한 적은 우리가 알기로도 꽤 오랫동안 없었던 듯하네.(...) 이른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신의 선물일세.)
  최근 불로냐로 파견된 아고스티노 베스푸치도 그곳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축하의 말을 하고 나서, 이미 10인위원외에서 그렇게 하고 잇듯이 자신을 9인관제위원회의 서기보로 써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또한 페피가 소환 요청을 올렸고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다시 교황청 사절로 복귀하리라는 소문을 전해 주었다.  나는 이 소문이 실제 소문 이상으로 진행되었는지 어떤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 마키아벨리는 아직 초창기 상태였던 새로운 제도를 확고히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으므로, 자신을 이제 막 시작된 그 일로부터 떼어내려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는 특유한 열성으로 1507년 3월 14일부터 4월 17일까지 34일 동안 피에베 산토 스테타로, 앙기아리, 발 디 키아날, 키안티, 포치본시, 콜레, 산 지미냐노, 포마란체 등지를 돌면서 병사들을 모았다.  5월이 되자, 그는 군대 사열을 위해 사나 지미냐노로 돌아왔으며, 아마 방금 말한 다른 지역에서도 사열이 있었을 것이다.
  곤팔로니에레는 그 어느 때보다 마키아벨리에게 믿음을 보여주었고, 이 덕분에 서기장은 이 일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언이든 그를 설득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j.  하지만 일안 더 쉽게 해나가도록 하는데는 그의 동생인 소데리니 추기경의 도움이 컸다.  그는 언제나 이런식으로 자신의 (우정) 보여주는 데 인색함이 없었으며, 나아가 1506년 3월 4일자 편지에서 마키아벨리에게 더 큰 일을 약속하고 있다.
  이 편지에서 추기경은 슬쩍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국의 안녕과 위엄을 위하여 (자신의 손으로 그처럼 가치 있는 일을 성사시켰으니, 자네의 기쁨이 결코 적지 않으리라 믿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군사조직론)을 보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자네가 쓴 이 작품은 분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볼 만한 것이네.  그리고 자네의 말이나 우리의 믿음이나 모두 그러하듯이, 이번 일 때문에 자네의 힘이 깡그리 소진된 것이 아니라면 자네의 지력을 모두 쏟을 만큼 가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나)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이 있겠는가?

    제10장 독일 사절의 시기.  피사 전쟁과 탈환
  소데리니 곤팔로니에레의 통치 아래에서, 그리고 좀더 나아진 경기 덕분으로, 피렌체는 다시 번영하였으며, 지도자가 훌륭하고 현명하며 정치를 잘 해나갈 때 그 나라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행복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는 도시가 파탄 지경에 놓여 있음을 인식하고는, 자신의 사적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사에서도 극도의 절검 정책을 실시하는 등, 무엇보다도 재정을 일으켜 세우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유능한 행정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4년 뒤, 재정 상태가 개선되면서 국가의 신용은 되살아났고 세금은 경감되었다.  그는 시민을 신뢰하였고 시민들 역시 그를 믿었다.  반면에 그에 대한 일부 유력 시민들의 의심과 증오는 더욱 켜졌다.  알라만노 살비아티와 조잡바티스타 리돌피 등을 앞장세우고 있던 이 소수의 유력자들에 대해 그는 그리 적절하게 대처하기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랬다.  곤팔로니에레는 소위원회들에서 그들의 분별력과 명성이 자신을 앞서는 것을 보고는, 정무위원회나 80인회를 통해 국정을 처리해 나가는 쪽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곳은 좀더 낮은 계층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의 관직이 주는 권위와 공무상의 경험이 훨씬 더 쉽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결국 유력 시민들의 의심과 원한은 더욱 증폭되어 이제는 그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사사건건 반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 소데리니는 자신의 계획이 그들의 반대에 부딪힐 때면, 거의 언제나 더 쉽게 찬성을 얻을 수 있는 쪽에 기대어 고집스러울 정도로 그것을 참아내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곤 하였다.
  이미 얘기했듯이, 곤팔로니에레를 향한 이러한 증오는 동시에 마키아벨리에게도 쏠리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곤팔로니에레의 도구이자 거간꾼이라는 의미에서 만네리노 mannerino(아참꾼, 정탐꾼 등의 뜻을 가짐 - 옮긴이)라고 불렸다.  조금 앞서 알라만노 살비아티가 그를 (건달)이라고 우아하게 부른 것도 이 근사한 별명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 마상 시합에서 주인뿐 아니라 종자 역시 어느 정도 타격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앞의 여기저기에서 그것을 목격한 바 있으나, 또 다른 타격이 곧 뗠어질 것이었다.  
  줄리오 2세는 잠시 조용한 상태였으나 이탈리아의 평화는 1507년초 제노바의 반란으로 깨어져 버렸다.  물론 반란을 프랑스 왕이 개입하여 신속히 진압되었다.  하지만 뒤이어 있은 프랑스 왕과 개입하여 신속히 진압되었다.  하지만 뒤이어 있은 프랑스 왕과 아라곤 왕 간의 회담은 아무런 결실을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마침내 두 왕이 이탈리아를 떠나자, 막시밀리안의 침입에 대한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그는 콘스탄츠 제국 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의 망령과 독일의 명에를 부추김으로써,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프랑스 왕을 롬바르디아에서 쫓아내고 로마에서 황제의 보관을 수여 받는 데 충분할 정도의 군대와 돈을 약속받고 있었다.
  피렌체인들에게 막시밀리안의 명성이란 거의 비웃음 거리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땅에 떨어져있었다.  그는 선군이자 용맹스럽고 당당한 군주로서의 품성을 과시하기엔 영토상의 거리에서나 기세에서나 피렌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들이 본 것이라고는 단지 황제가 원대환 계획과 그에 따라주지 않는 수단 사이에서 헛되이 방황하는 좋지 못한 모습뿐이었다.  그러나 의회는 최근 그에게 했다는 약속의 소식이 들려오자, 지금까지 분열되어 있던 세력들이 독일의 자존심이라는 이름 아래 갑자기 결집될지도 모르며, 그러한 세력을 손에 넣은 막시밀리안이 더욱 대담하고 결단력 잇게 나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사 피렌체인들은 그의 준비 상황과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그가 이탈리아로 들어오려 할 대 그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면 과연 돈이 얼마나 들 것인지를 파악할 만한 사람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는 프랑스와의 선린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자신이 믿을 수 잇는 사람을 원했던 곤팔로니에레는 이 일에 마키아벨리를 선임하였다.  하지만(그가 떠날 차비를 하고 있을 때) 늘 있던 반대파로부터 (피렌체에는 그 일을 할 만한 능력 있는 청년들이 많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결국 매번 언제나 그들과 싸울 수만은 없었던 소데리니는 양보 할 수밖에 없었다.  임명 내용이 변경되었고, 6월 27일 프란체스코 베토리는 (협상을 하거나 어떤 결정을 하지 말고, 단지 지켜보고 보고하라는 ) 일반적인 임무를 가지고 황제에게 파견되었다.
  이 일로 인한 굴욕감이 서기장보다는 곤팔로니에레에게 더 컸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건 직후, 당시 사절로 나가 있던 필리포 다카사베키아와 알레싼드로 나시는 마키아벨리에게 이 일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그를 위로한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피비차노에 나가 있었던 필리포는(독일의 승리(마키아벨리의 virus에 반대한 알라만노의 이름 뜻이 원래 독일 혹은 독일인 alamanno=alemanno임을 빗댄 말 - 옮긴이)에 대해 참을성 있게) 대처하면서 그를 저지했다고 뽐내는 사람들에게 너무 괘념치 마라고 말했다.  카쉬나에 있었던 알레싼드로는 (친애하는, 그리고 결코 불행하지 않은 마키아벨리)가 (제국 사절이라는 것을 배설함)으로써 무언가 알 수 없는 병으로부터 회복한 것을 축하하며, 자신을 마키아벨리가 독일로 가지 않고 피렌체에 머무르는 쪽이 그들 위해서나 도시를 위해서난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8월 9일 마키아벨리가 다시 길을 떠나게 된 것은 역시 독일건 때문이었다.  교황은 카르바할 추기경을 막시밀리안에게 사절로 보냈는데, 그가 가는 길에 피렌체를 거쳐 가야 했으므로 10인위원회는 서기장을 보내 그의 수행원은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시에나는 그를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먼저 시에나로 갔다가가,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그 다음에는 산 킈리코 드르차로 갔다.  그는 10인위원회에 세 통의 편지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그들이 거느린 마소와 사람 수를 알린 뒤, 세련된 피렌체인의 입장에서 (그들 대부분이 마치 감방에서 막 나온 듯이 궁상스런 모습)이라며 교황청 조신들의 저질스러움을 거듭 입에 올렸다.  더불어 자신이 입수한 정보도 첨부하였다.  즉 교황 사절단은막시밀리안에게게 만일 비무장 상태가 아니라면 이탈리아로 들어오지 말라고 전하라는 훈령을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머리가 빠른 판돌포는 그가 오리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서기장은 (가장 가까운 길을 따라 천천히)집으로 되돌아왔다.
  황제의 남하 소식이 더욱 잦아짐에 따라, 시민들의 정신 상태와 의견 다툼도 가열되어 갔다.  피렌체의 오랜 전통에 따라 친프랑스적 경향이 강한 곤팔로니에레는 상례적인 반대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중에서도 알라만노는 그 이름값을 하고 있었다.(독일인 alamammo이 독일 Alemagn을 지지한다는 뜻 - 옮긴이)) 결코 독일에 정식 사절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그리고 점점 더 사태의 촉박함을 알리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의 편지들이 전해져 오는 가운데, 결국 공물조로 막시밀리안에게 보낼 돈에 대한 새로운 훈령을 내리기로 결정되었다.  황제는 원래 오십만 두카토를 원했으나 지금은 그 액수가 많이 내려가 있었다.
  하지만 베토리를 그다지 믿지 않았던 곤팔로니에레는, 이 일은 매우 중요한 데다 혹시 편지가 잘못되더라도 말로 그 내용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를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당시 그 악명 높은 돈 미켈레의 후임으로 민병대 지휘관을 맞을 인물을 물색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일찍이 발로리를 보강하기 위해 그를 프랑스로 보냈을 때 내세웠던 것과 똑같은 핑계가 소데리니로 하여금 정적들에게 이 조그만 앙갚음을 하도록 해주었던 셈이다.  마키아벨리의 임무는 간단히 말해 다음과 같았다.  즉 일정한 지급 조건 아래 최고 오만 두카토까지 지급 가능하지만, 우선은 삼만 두카토로 협상을 시작하며, 그 대라고 피렌체의 주권으 제한하는 일체의 유보 조건 없이 모든 영토를 복구하여 보전케 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좋지 않은 시기의 좋지 않은 여행이었다.  12워 17일 길을 떠난 그가 열악한 도로 사정에도 불구하고 초대의 속도로 롬바르디아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이미 전쟁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프랑스 군은 경계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은 사절을 (세밀하게 조사하고는) 더 자세히 조사하는 것이 겁났던지 그가 지닌 훈령과 편지를 빼앗아 찢어버렸다.  크리스마스 동안 제네바에 머물고 있었던 그는 그곳에서 10인위원회로 가는 간단한 편지를 썼다.  그리고는 황제의 궁정과 베토리가 있는 볼차노롤 방향을 잡은 끝에 1508년 1월 11일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처럼 시간이 많이 걸린 데 대해, 여행 거리가 길었고 날씨와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데[다가, 말은 지쳤고 돈도 충분치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변명하였다.  사실 그는 떠날 때 받았던 110두카토를 가는 중에 남김없이 써버린 상태였다.  그는 크게 우회할 수밖에 없었던 기 여정 속에서도 3일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며칠도 그냥 허비한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위스 땅에서 네 번의 밤을 보내는 동안, 각별히 군사적 관점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며 또 어뗜 유의 사람들인가)를 관찰하여, 볼차노에게 10인위원회에 보낸 첫 편지에서 그것을 극히 통찰력 있는 필치로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오는 도중에 만난 모든 사람들과 쉼없이 자신의 끝없는 탐구심을 시험한 결과 얻어낸, 황제의 계획에 대한 정보들도 알려주었다.  콘스탄츠에서 그는 (두오모(이탈리아에서'Duomo'란 주교좌가 있거나 또는 가장 주요한 위치에 잇는 성당을 가리킴 - 옮긴이)의 두 밀라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피렌체에 아내를 둔 유명한 음악가 아자하를 찾아본 다음, 사보야 공의 대사 한 명과 저녁을 하며 담소하였는데,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당신은 내가 몇 달 걸려서도 알아내지 못한 일을 단 두 시간안에 알고 싶어하는군요)라고 말하였다.
  그는 볼차노에 도착하여 압수됭 찢겨버린 서류의 내용을 베토리에게 말로 전한 뒤, 곧 황제를 알현하고자 나섰다.  이탈리아인들은 언제나 칭호에 관대한 편이기 때문에 얼마 전부터 그를 로마인들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는 황제를 만나 삼만 두카토를 세 번에 나누어 지불하겠다고 제의하였다.  이 제의가 말도 안 된다고 즉석에서 거부당하자, 그는 돈을 사만으로 올렸다.  그제서야 막시릴리안은 만족의 빛을 보이며 다음날 대답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측근을 한쪽으로 불러, (방금 왔던 그 서기장이 누구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이 오고, 또 10일이 더 지나가도 왕은 답을 주지 않았다  마친내 1월 24일 베토리를 부른 막시밀리안은 제의된 돈이 너무 적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조공 액수는 자신이 포 강변에 도착했을 때 피렌체 사절들과 논의하기로 하고, 지금 즉시 25,000두카토를 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이는 돈은 확실히 나가지만 언제 돌려받을지는 확실치 않은 제의였다.  베토리는 이를 거절하고 피렌체에 새로운 훈령을 청했다.  피렌체 정부와 돈 문제로 합의를 보기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고, 더욱이 이번처럼 먼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절들로서는 더 힘든 문제였다.  물론 그러한 사정이 10인위원회로서는 종종 사태를 관망하여 궁지를 벗어나는 기회로 활용되기는 했지만, 하여튼 이번 경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귀머거리끼리의 대화나 다름없어 보였다.
  이 사절 임무에 관한 편지들은 거의 다 마키아벨리가 직접 자필로 작성한 것이었다.  베토리는 단지 서명만 했을 분이며, 기껏 해보았자 자필로 몇 줄 덧붙인 데 지나지 않았다.  그 자신 문필가로서의 자질이 결코 떨어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므로, 그을 동료에게 맡긴 것이 그냥 스스로의 게으름 때문인지, 또는 서기의 봉사를 받는 것이 좋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키아벨리가 자신보다는 그 일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두 피렌체인이 스스로가 취할 태도와 보고 내용에 관해 서로 의논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보고서 속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한 대목에서 베토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니콜로와 저는 이러저러한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다른 한 대목에 가서는, 자신의 동료 없이는 (어떤 동료인데!)(일을 잘 알지 못했으리라)는 점을 실토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추정해 보건대, 일의 처리 과정에서 더 비중이 컸던 인물은 직위는 낮지만 눈의 예리함과 연륜에서 앞선 쪽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다른 경우에 니콜로는 비록 대사 직함은 가지지 못했지만 적어도 역할만은 그러하였던 적이 종종 있었으나, 이번 경우에는 그러한 역할조차도 부여받지 못한 처지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앞장서 남을 이끄는 성품을 타고 났고, 이 편지들에서 베토리 필적이지만  사실은 그가 쓴 것으로 보이는 구절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그의 역할을 단지 글을 받아쓰는 것 이상이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협력 관계에서 둘 중 누구의 몫이 얼마만큼인가를 판별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이 사절 임무 그 자체는 마키아벨리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그리  큰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이 일은 다니지 그가 독일 세계와 접촉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뿐이다.  비록 그러한 접촉의 시간이 매우 짧았던 에다, 관습과 사고 방식이 크게 달랐을 뿐 아니라 말까지도 다른데서 오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것이 그의 마음을 열어주는 또 하나의 창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그가 카이사르의 안내로 프랑스에 갔다면 독일여행에서 그를 안내해 준 인물은 타키투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그와 같은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이라면 아마 누구라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5세기에 태어난 한 피렌체인에게는 그 광대한 영토까지도 틀림없이 매우 야만적으로 보였을 한 나라 중에서도, 그가 본 것은 타키투스의 기술에 따르자면 알프스의 험지에서 가장 인접한 스위스와 티롤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북쪽의 대도시들이 누리고 있던 부와 문화에 대해 알지 못했는데, 항상 일을 정치와 군사의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그로서는 그러한 지식이 별 쓰임새도 없긴 하였다.  하지만 피렌체로 돌아온 뒤 하루만에 쓴 그의 (독일 보고서 Rapporto delle cose dell'Alemagna)는 글이 착상된 환경으로 미루어 오히려 자연스러운 오류와 생략과 편견들이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직관력을 발하고 있다.  우리가 마키아벨리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은 어떤 특정 사실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번뜩임인 것이다.  이 (독일 보고서)는 뒤에 (독일 관찰기 Ritratto delle cose della Manam)로 발전하는데, 그는 여기서 문체와 체제만을 개선했을 뿐 그 이사상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가 떠난 이후에도 독일 서적상들이 무언가를 문의한 사실로 보아 그가 독일에 관한 어떤 자료들을 찾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보통은 베네치아의 보고서가 이 피렌체인의 것보다 낫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베네치아 사절들은 사건의 외양을 세밀히 기술하는데 힘쓰는 반면, 마키아벨리는 일의 핵심을 직관적으로 포착한다고 말하는 쪽이 더 사실에 가깝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티롤에 마련한 자신의 조그만 관측소에서 탐색하고 숙고하면서, 사보야 공의 대사가 두 달이 결려서도 알아내지 못한 내용을 정말로 단 이틀만에 파악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독일 민족의 힘과 그 정치적 취약성 사이에 놓인 영원한 간격을 꿰뚫어봄으로써 이 두 요소가 균형을 잡고 길을 찾아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는 비극적 현실을 거의 예감하기까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좋지 않은 정치 환경 아래서 막시밀리안은 불행히도 당분간은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회가 약속했던 돈과 군대의 일부조차도 모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두 피렌체인들 역시 자국의 인색함과 (비스킷도 제대로 없이 갤리선을 탄) 황제 사이에, 그리고 10인위원회의 불분명한 훈령과 그보다 더 불확실한 황제의 태도 사이에 끼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피렌체에서는 만약 막시밀리안이 정말 침입을 결행하리라고 판단된다면 액수를 오만이나 육만까지 올릴 수도 있다는 훈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가 이럴지 저릴지는 베토리도 마키아벨리도 모르는 일이었고, 어욱이 막시밀리안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새로운 군대의 도착으로 그의 계획이 힘을 얻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미 그를 떠나가는 다른 군대로 인해 분위기는 냉각되고 있었다.  그의 각료 한 사람이 황제를 한 번은 속일 수 있어도 두 번은 속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 마키아벨리는 이에 빈정거리는 어저로 되받기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일을 통해 매번 알면서도 속는 수가 허다한데, 궁정의 기류가 수시로 바뀌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탈리아 원정을 향한 바람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프랑스 사람들의 수다에 익숙해 잇던 피렌체인으로서 더 어리둥절한 것은 아주 사소한 일에조차 쉬쉬 하며 감추는 이곳의 거의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비밀스런 분위기였다.
  공대한 크기의 영토와 원거리로 인한 자국과의 통신상의 난점에다 이러한 비밀주의까지 겹치자, 마키아벨리와 베토리는 (마치 자신들이 무슨 잃어버린 고도(고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두 피렌체인은 다른 사람들과 함계 황제를 따라 모든 사절들이 모여있던 트렌토에서 볼차노와 메라노로 차례차례 옮겨갔는데, 알려지기로는 군대의 이동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황제의 첫 움직임은(왕의 군대라기보다는 차라리 소제후의 군대)에 더 가까울 정도였다.  특히 베네치아가 카도레에서 그의 수염을 멋있게 뽑아버린 이후로는 더욱 그렇게 보였다.
  그러자 막시밀리안은 도움을 청하려고 울름에서 의회를 소집했는데, 당시 베토리가 병중에 있였기 때문에 마키아벨리 혼자 그곳에 보내기로 결정이 났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가지 않았다.  그는 볼차노에서 궁정이 있던 트렌토까지의 짧은 여행을 빼고는 죽 베토리 옆에 남아 있었다.  이는 우리 후세인들에게는 손실이겠지만, 둘 사이로 보아서는 좋은 일이었다.  바로 이 사절 시기를 시작으로 피렌체 서기장의 삶이 끝날 때까지 이어질 우정이 싹튼 것이다.  그가 비록 이러한 관계로부터 자신에게 이익이 될 만한 어떤 것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둘 사이의 우정은 그에게 자신의 훌륭한 편지글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억될 만한  것을 쓸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베토리에게는 바로 그 당시의 마키아벨리라는 존재가 너무 소중한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도착 당일 바로 10인위원회에다 동료를 데리고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베토리는 자필로 오히려 반대의 뜻을 전하였다.  (원컨데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우리를 머물게 해주십시오.  그는 여기에 있어야만 합니다.) 이윽고 3월 13일 그들 둘은 함께 인스브루크로 이동했다가, 볼차노를 거쳐 트렌토로 되돌아왔고, 바로 그곳에서 황제의 최종 대답을 들었다.  그의 요구는 육만 두카토를 세 번으로 분할해서 지불하되, 각각의 시간 간격은 짧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0인위원회로부터 특히 돈 문제를 포함하여 확고하고도 분명한 훈령을 받아내기 위해, 마키아벨리는 다시 편지 쓰는 작업에 노력을 쏟아부었다.  5월 30일자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경애하는 여러 정무위원님들게 말씀 올립니다.  정부가 자아놓은 실이 이처럼 너무 가늘어 정작 베를 짤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 (저는 이미 아무도 그의 침입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점을 써 올린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은 그럴 수 잇고 또 의지에 따라서는 그러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누구도 그가 침입하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은 한번도 그런 결정을 내린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도 그러리라는 징후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결론은 이러하였다. (필요한 것은 두 길 중 하나를 택하되, (...) 어느 쪽이 덜 위험한가를 살피고, 일단 그 길에 들어서면 신의 이름으로 마음을 단단하게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릇 이처럼 큰 일을 콤파스로 어설프게 재려고 덤비다가는 단지 실소만 범하게 될 뿐인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은 다시 한번 이른바 (사간의 이점)을 택한 피렌체 사람들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황제는 또다시 베네치아 군에 패배햐였고, 수중에 고리치아, 트리에스테, 프리울리 전 지역과 끝으로 피우메만이 남았을 때, 베네치아와 휴전 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말해서 쌍방은 빼앗은 만큼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모든 영토는 베네치아에 돌아갔고, 그가 얻은 것이라고는 손실과 치욕뿐이었다.  이탈리아 원정도 로마에서의 대관식도, 프랑스에 대한 응징도 제국 권위의 회복도, 모두가 허망한 꿈으로 남게 되었다.  피렌체인들은 결코 허깨비를 현실로 잘못판단하지 않았고, 그래서 주어야 마땅한 액수 이상의 돈을 주는 일도 없게 된 셈이었다.
  6월 10일, 베토리가 궁정에 다시 합류할 채비를 하고 있는 동안, 마키아벨리는 이제 독일 문제에는 식상한 데다 결석(결석)까지 있어서 치료차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하고는 트렌토를 떠났다.  그는 귀향길을 재촉한 끝에, 14일에는 이미 볼로냐에 도착하였고 16일에는 피렌체에 닿을 수 있었다.
  그가 그처럼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데는 결석증 말고도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작용했을 것임이 틀림없을 테지만, 그는 귀향 직후 또다시 전장의 고달픔을 참아야만 하였다.  공화국은 피사 문제를 이번에는 확실히 끝낸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팔망미인인 서기장은 먼저 산 미니아토와 페쉬아로 가서 민병대를 모집하고는 그들을 대동하고 폰테데라에서 다시 모병한 뒤, 그곳으로부터 피사로 갔으며, 8월 21일에는 포위 상태에 있는 도시 주변을 초토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처음에는 프랑스 왕아. 그리고 이어서 아라곤의 왕이 불쌍한 피사인들을 어여삐 여겨 이리저리해서 결국 150,000두카토를 받고 그들의 손을 들어준 후에, 피렌체는 피사 공략에 훨씬 더 열성을 보이게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그들의 새로운 민병대를 시험하여 소득을 올릴 기회였다.  마키아벨리에게는 희열의 순간임과 동시에 우려의 순간이기도 했다! 10월에 시작하여 11월과 12월에 연이어, 그는 모병과 사열을 위해 산 미니아토와 발디니에볼레, 키안티 교구와 발디체치나 등지를 돌아다녔다.
  1509년 1월말, 이미 그는 민병대와 함께 물리나 디 쿠오사에서 경계 근무에 들어가 있었다.  2월 중순에는 포위된 도시에 대한 외부 원조를 끊기 위해서 피우메모르토 강 하구에 배치된 천 명의 민병대를 이끌고 있었다.  아르노 강과 모든 운하는 다리와 말뚝과 성채로 차단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군대의 훈련과 경계 근무와 노역과 그 외 모든 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이 편지들이 80인회에서 읽혀지자, 부오나코프시는 그에게 평상시에 쓰던 그런 편지를 보내다라고 부탁했으나 소용 없었다.  10인위원회는 (군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다니던) 서기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당신의 어깨 위에 이 모든 일을 맡겼다)고 썼다.
  그러나, (준둔지에서 정부를 대표하는 인물은 오직 니콜로 마키아벨리 외에는 없을 정도로), 그가 어깨에 진 짐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알라만노 살비아티와 안토니오 다 필리카이아가 감독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인 3월 4일, 마키아벨리는 포위된 도시를 돕지 않는다는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자청하여 루카 공화국으로 갔다.  감독관들이 도착하자, 10인위원회는 그를 피옴비노의 군주에게로 보냈다.  소문에 의하면 피사인들이 그에게 피렌체와의 협상을 중재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임무는 그 소문이 과연 사실인지, 아니면 (시간을 벌기)위한 술책인지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대 전쟁의 조짐이 일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서는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무언가 실낱같은 것이라도 기대할 여지가 있었다.  반면 피렌체인들로서는 이미 밥을 한 술 뜬 상태에서 지금은 결코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갔다.  그리고 3월 14일 야코ㄹ포 다피아노(피옴비노의 군주 - 옮긴이)와 피사의 사절단을 만났다.  사절은 일반적인 말로 말머리를 뗐으나, 자신들의 정무위원이 동석하지 않는 한 어떤 결론적이 말도 할 수 없다고 나오자 논쟁은 격화되었다.  이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들어 보자. (저는 앞부분의 말에 대해서는 제 생각에 따라 대답했습니다.  뒷부분에 대해서는, 그들이 사실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셈이기 때문에 저 역시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으며, 저의 대답이 듣고 싶다면 그들부터 무언가 알맹이 있는 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생명과 명예와 재산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었고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대답을 원한다면 먼저 어떤 정도의 보장을 바라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고, 만약 그 요청이 합리적이고 존중해 줄 만하다면, 우리 정부는 단지 복종을 바라는 것뿐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과 재산과 명예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협상은 깨어졌으나, 마키아벨리는 피사의 사절들간에 의견 차이가 나도록 유도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이 과정을 피옴비노에서 10인위원회에 편지로 보고했으며, 그 뒤 피렌체에 돌아와서 직접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전장의 생활을 병사들과 나누기 위해 되돌아왔다.
  4월 16일 그는 니콜로 카포니가 감독관으로 전군을 위한 후방 업무와 보급을 관장하고 있던 카쉬나로 자신을 보내려는 것이 10인위원회의 뜻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곳에 있는 것이 덜 위험하고 힘도 덜 든다는 사실을 저도 압니다.  하지만 애초에 제가 위험이나 힘든 일을 마다했다면, 피렌체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정무위원님들게 바라건데, 저로 하여금 이 주둔지에 남아 감독관들과 함께 관련 문제들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여기서는 제가 무언가 소용에 닿지만, 그곳에 가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좌절감으로 죽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사실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애국심을 볼 수도 잇을 것이다.  하지만 신랄하고 조소적인 그의 또 다른 면모 아래에서 불쑥 솟아나곤 하는 그 열정적인 성격은 또 얼마나 우리를 매혹하게 하는가!
  그래서 그는 민병대를 나누어 배치해 놓은 세 군데의 주둔지를 여기저기 돌아보면서, (군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다녔다.) 병사들은 총감독관보다 그의 권위를 더 인정하였으며, 이에 화가 난 살비아티가 어느 날 한 지휘관에게 평상시와는 다른 과격한 언사를 쓰는 일까지 벌어졌다.  마키아벨리가 편지로 이에 항의하자, 그 역시 편지로 답하여, 자신은 그 지휘관을 모욕하고자 한 것이 아니며, 자신이 화를 낸 것은 그가 감독관의 권위에 적절한 존경심을 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들이 자네의 권위를 인정하고 싶어한다해도, 자네가 언제 어디서나 그들을 통솔 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그들이 항상 자신들과 매일같이 생활하는 자제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복종심을 더 키워야 하고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더 잘 알아야 할 것이네.)
  5월 중순께, 마키아벨리는 보급선을 더 효율적으로 짜기 위해 이삼일 간 주둔지를 떠나 피스토이아로 갔다.  하지만 전쟁은 그쯤에서 끝나 있었다.  5월 20일, 그는 감독관들과 함께 피사 사절들을 만나 항복의 첫 단계에 관해 협상을 벌였다.  그가 자필로 10인위원회에 쓴 몇 통의 편지가 남아 있어서 당시의 진행 과정을 말해 주고 있다.)  피사의 항복 사절이 피렌체로 갔고, 어디에나 모습을 빼놓지 않는 그도 행동을 같이하였다.  하지만, 막상 합의에 도달해서 조약이 체결되고 항복 조인식을 하는 자리에 이르자, 그의 이름은 제1서기장 마르첼로 비르질리오 아래에 씌어 있었다.  15년의 긴 전쟁 끝에, 드디어 8일 피렌체 감독관들은 피사에 입성했으며 마키아벨리와 그의 민병대 역시 그들과 동행하였다.
  나는 당시 피렌체인들이 승리의 희열을 만끽하면서도 과연 얼마나 이 범상한 지위의 서기장에게 그러한 승리의 몫을 인정해 주고 그에게 마땅히 돌아갈 만큼의 찬사를 해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해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고스티노 베스푸치는 바로 당일 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이처럼 영광된 장소에 당신이 함께 했음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결코 적지 않은 역할을 한 데 대해서도 치하드립니다.) 글은 계속된다.  (감히 말하건데, 당신이 민병대와 같은 훌륭한 조직을 만들어내었기에 그처럼 늦지 않고 신속하게 피렌체의 영토가 회복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얼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신께 맹세컨데, 너무 기뻐서 우리는 당신에게 키케로식 연설이라도 바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필리포 다카사베키아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 고귀한 도시를 정복한 위업을 천번 만번 축하하네..  사실 이 일은 실질적으로 자네 작품이고, 어쨌든 자네의 기여가 컸던 것 아닌가.) 이어 글의 어조는 더 강해진다.  (자네의 철학이 우둔한 사람들에게까지 이해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법이지.  내 말을 이해하리라 믿네. (...) 날이 더할수록 나는 자제야말로 유대인이나 다른 민족들이 가졌던 대예언자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네.  오, 니콜로여,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가 없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라네)
  마키아벨리는  그 승리를 입성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한 대리석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결코 볼 수 없었다.  살비아티(그는 입성 직후 말라리아로 피사에서 사망하였다), 피리카이아, 카포니의 이름만이 그곳에 박혀 있었다.  그는 단지 종이에 쓰인 이러한 찬사에 만족했을 따름이다.  언제나 결과를 바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시로는 혹시라도 과장과아첨이었을지도 모를 이러한 찬사는 이제 단순명료한 진실로 바뀌어지기에 이르렀다.

    제11장 만토바, 베로나 사절시기.  세 번째 프랑스 사절 시기
  피사 전쟁의 불꽃이 조용히 사그라들고 있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다른 더 큰 화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캉브레에서 프랑스 왕과 막시밀리안 사이에 반베네치아 동맹이 맺어졌고, 여기에 주리오 2세와 아라곤 왕이 마지못해 가세하였다.  그리하여 바로 이해 1509년 봄이 되면서 레오네 디 산 마르코(마르코 성인의 사자, 즉 베네치아를 가리킴 - 옮긴이)가 이들 모두의 공격의 받는 상태가 되었다.  롬바르디아 지역의 경우, 베네치아 5월 14일 아다의 자갈밭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곧 베르가모와 브레쉬아르 잃었다.  로마냐에서는 24일 파엔차가 함락되고 연이어 라벤나도 넘어갔으며, 교황의 2개국 연합군에 밀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리미니와 체르비아를 포기해 버렸다.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듭하는 프랑스 군의 기세에 암도되어 베로나, 비첸차, 파도바까지도 적의수중에 떨어졌으며, 황제는 캉브레 조약 덕분에 스스로의 힘과는 관계 없이 그 지역들을 차지할 수가 있었다. 
  일이 이쯤 진척되자, 황제는 프랑스 왕과 교황의 부담으로 결집된 대 군세를 거느리고 산맥을 넘어 내려왔다.  하지만 그의 진군은, 느려터지고 우왕자왕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그 모습도 모습이지만, 다른 군대가 빼앗아놓는 족족 잃기만 하는 것엔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했다.  왜냐하면, 파도바는 곧 베네치아로 넘어갔으며, 막시밀리안이 대군세에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포대로 그곳을 포위했지만, 으레 그렇듯이 치욕만 안고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베로나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프랑스 원군을 허망하게 기다리다가, 마치 패자가 승자를 인정하지 않는 격인 휴전을 베네치아에 제의하고는 더 안전한 것으로 물러서 버렸다.
  그러나, 그는 베로나를 떠나기에 앞서 피렌체와 그 유명한 조공 액수에 합의했는데, 40,000두카토를 네 번에 갈라서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이 정도는 전 같으면 베토리에게서 얻어낼 수도 있었던 금액보다 적은 돈이었으나, 당시의 상황에서는 프랑스의 전례가 없었더라면 아무도 그에게 이만한 액수를 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튼 이거라도 그가 이탈리아로 와서 얻어낸 몇 안되는 것들 중 하나였음에랴!  첫 회 할부금이 10월에 즉시 전해지자, 그는 (이 세상에서 돈 없이 살수 있는 사람은 없지)라는 말로 사절들을 환영하였다고 한다.  11월 중순  만토바에서 전달키로 약속된 두 번째 할부금을 처리하기 위해 그들은 마키아벨리를 파견하였다.
  11월 10일, 그는 두 명의 마부와 함께 10,000피오니노 금화를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가 15일 만토바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같은 시각에 비첸차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의 수비대를 축출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에게는 금화라는 짐 외에도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살피는 책무가 떨어졌다.  그리하여 그는 돈 문제를 해결한 뒤, 21일에 베로나로 향했는데, 그곳의 공기 속에는 이미 폭풍의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만일 그가 하루만 더 지체했더라면 길이 끊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그곳이 전쟁이 진행되는 길목이라 짐작하고, 거기서 황제를 기다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첫 번째 편지에서, 귀족들과는 달리 평시민들은 모두가 산 마르코 공화국 편인 도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베로나 사람들은 비첸차인들을 닮고 싶어하지만, 가까이 있는 성채들과 프랑스 군의 존재가 그들의 욕구를 저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듯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때때로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들의 생각대로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또 5밀리오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제국 군과 베네치아 군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그 도시의 위치와 성벽에 관해서도 기술하였다.
  그는 앞서 보오나코르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지금 자신이 뛰어들고 있는 함정에 대해 다소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긴 했으나, 그래도 곧 다가올 충돌의 위험 속에서 비교적 여유 있는 모습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데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베네치아 군을 베로나를 떠났고, 황제는 궁지에 몰려 하릴없이 프랑스 왕의 도움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왕은 그에게 해줄 만큼 해주었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말이다.  산 마르코의 사자는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다시 힘을 얻은 셈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일 이 왕들이 서로를 경계하면서 짧지만 격렬한 이 전쟁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지금까지 빼앗은 영토를 더 빠른 속도로 다시 되돌려주어야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12월 1일자 편지에서는 또 이렇게 썼다. (이 두왕들 중에서, 하나는 싸울 능력은 있지만 싸우고 싶어하지 않고, 다른 하나는 싸우고는 싶지만 능력이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후자는 물론 막시밀리안이었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가 베로나에서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 일을 한다는 것으 보여주기 위하여) 그는 (10인위원회에도 설교 조의 말들을 써갈겨) 보냈다.  그는 또 (칸타파볼라 cantafavola) (시 형식을 빌린 이야기를 가리킴 - 옮기이)라 부를 만한 작품을 써서 뤼지 귀차르디니에게 보냈는데, 당시 만토바에 있었던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글을 한번 써보라고 재촉한 바 있었다.  이 작품이 바로 두 번째 (십년기)란 설이 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십년기)의내용 역시 묘하게도 1509년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럴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는 쪽은 종료 시점이 일치하는 사실 외에도 두 번째 (십년기)의 몇몇 구절이 이 시기에 씌어진 편지 속의 표현들과 비슷한 데가 있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찮다.  예컨데, 그는 칭송받던 시민이었던 자코미니에게 바친 송덕문에서 그를 가리켜 (시력으 앗긴 노인)이라는 말을 썼는데, 1509년 당시 자코미니의 나이는 경우 53세였을 뿐 아니라 아직 눈이 먼 것도 아니었다. 또 다른 증거들은 놔두더라도,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두 번째 (십년기)가 1514년 이후에 씌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가 1505-1514년 사이 십 년의 역사를 쓰겠다고 작정한 때가 바로 이 해이거나 그 다음 해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마키아벨리가 송덕문에서 자코미니를 노인아라 부르면서, 자신이 (모든 것을 잃은 뒤) 그의 죽음으로 (어찌할 바 모를 깊은 슬픔에 잠겼다.)고 한 말을 정상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그가 당혹해했건 슬픔에 잠겼던 간에 그는 여가를 얻었고, 이는 다시 그에게 글쓸 마음을 불어넣어주었다.  그의 글 중에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뤼지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제기발랄한 편지 한 통이 있다.  뤼지는 언제나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넘치는 사람으로, 마키아벨리에게 자신의 즐거운 경험을 이야기하거나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편지를 써보내곤 하였다.  마키아벨리 역시 이에 응답할 마음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뒤에 또 하나의 별난 피렌체인이 벰보의 유명한 소네트를 패러디한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그래서 그는 친구에게 자신이 (부부 생활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한 포주 할머니와 어둠에 속은 사건이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여기서 세세히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단지 어떻게 (그녀로부터 도망쳤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순식간에 그 절절하던 욕구를 채운 뒤, 그는 불빛으로 자신의 욕구를 채워준 여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 이런 일이라니!  글쎄 그 여자라는 게 추악한 모습의 늙어빠진 할망구였던 것이다.  이런 유의 묘사에서는 이전의 그 어떤 문인도 마키아벨리를 당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 소름끼치는 모습을 그리면서도(...입은 로렌초 데 메디치같이 생겼는데, 한쪽으로 비뚤어진 그 입에서는 허연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지 뭔가...) 하는 식으로 특유의 재치를 발휘하고 있다.  그러한 괴물을 보고 속이 뒤집히기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도 마찬가지일 정도이다.  이 이야기의 골격 자체는 아마도 진짜였을 법하다.  하지만 이야기가 모두가 진짜라기엔 그 세부 묘사가 너무 아귀가 딱딱 맞고 너무 리얼하다(나에게는 단순한 농담 이상으로 보일 만큼).
  그러나, 피렌체의 서기장은 3주 동안 장난기 어린 글들을 끄적이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실컷 즐긴 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12월 1일 그는 10인위원회에다 (만약 황제가 트렌토에 머물게 되면, 저도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라고 썼다.  그 후, 황제가 인스브루크로 갔으며, 제국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에서 다시 아우크스브루크로 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그는 11일 만토바로 되돌아와서 이제 귀향하게 해달라는 편지를 썼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의회의 진행 상황을 보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로 간다는 것이 별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게다가 그곳의 다른 군주들이 외국의 사절들과 접촉하는 것을 황제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17일에 귀국 명령이 떨어졌고, 이 소식은 21일이나 22일이 되어서야 그에게 전해졌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크리스마스가 지나서야 길을 떠났고, 피렌체에 도착한 대가 1월 2일이었던 사실로 보아 여행은 급할 것이 없었던 듯하다.
  그가 이렇게 늦었던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혹시 베르나에서 미처 채우지 못한 욕구를 만토바나 볼로냐에서 벌충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향에서느 유감스럽게도 예기치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는 도중에 부오나코르시로부터 그가 어디에 있든 간에 그에게 전하라는 12월 28일자 편지 한 통을 받았다.(원문에는 27일로 되어 있으나, 이는 28일을 잘못 쓴 것이다 - 옮긴이).  그는 매우 흥분하고 성난 어조로 전하기를, (투라토 un turato), 즉 얼굴을 가린 작자 하나가 증인이랍시고 다른 두 녀석을 대동하고 와서는, 법령 등기소의 공증인에게 마키아벨리란 사람은(어쩌고저쩌고 한 위인을 애비로 두었기 때문에) 지금의 직분을 도저히 수행할 수 없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접수시켰다는 것이다.  보오나코르시는 계속해서, 비록 법률상으로는 친구가 유리하기는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입방아를 찧고 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리고 있으며, 심지어는 만일 무슨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두고 보자는 식으로 위협까지 하고 있는 터라, 일이 좋지 않은 상황에 있으므로 무언가 강력한 도움을 받아서 일을 조심스럽게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편지는 시종일관 이런 식으로 사태는 위험하게 되어가고 적대적인 사람의 숫자 및 정도는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는 점을 한껏 부풀려 전하고 있다.
  아버지와 관련하여 그 무엇이 니콜로로 하여금 이처럼 관직츨 수행 할 수 없다는 말까지 듣게 했는지 우리는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톰마시니는 (어쩌고저쩌고)란 말에 자극을 받아 아버지 베르나르도가 틀림없이 사생아였을 것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톰마시니에게는 부오나코르시의 표현이 (분별 있게 제대로 한) 것으로 보였을지 모른지만, 원래 그 친구의 편지라는 것이 분별 있게 제대로 된 것과는 거리가 먼 (어쩌고저쩌고)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하지만 베르나르도가 (엔체 채무자 명부(중세와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코무네에서 상환 불능 연제 채무자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명부.  스페키오specchio'로 불림-옮긴이)에 등재되어) 있었다는 것, 즉 코무네의 상환 불능 연체 채무자였다는 것은 확실하며, 이 사실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된다.  아들까지 관직에서 밀려나게 말든 뻔했던 것은 아버지가 사생아른 엉뚱한 사실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경제적 상황이었다.  톰마시는 다른 동료들 몇몇도 마키아벨리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말이 같은 편지에 나온다는 점을 감안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시 연체 채무자 명부에 이름이 등재된 시민드은 수천 명에 달했던 반면, 서기국이 온통 사생아 아버지를 가진 자식들로 가득 차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다는 점도 당연히 생각했어야만 했다.
  부오나코르시는 대책이 강구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으나, 그래도 도착을 며칠 늦추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간곡히 얘기하였다.  볼로냐의 이쪽 어딘가에서 그 편지가 마키아벨리에게 전해진 때는 틀림없이 12월 28일 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의 간청에 따라 발걸음을 늦추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하루 이틀 이상은 아니었다.  단지 더 새로운 소식이 없을까 기다렸을 만한 시간 정도였다.  그 서기본의 우려는 조금 지나쳤던 것으로 부인다.  그는 원래 소심한 데다 흥분을 잘하며, 평소 그런 유의 이야기로 마키아벨리를 성가시게 하곤 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적도 많지만 동시에 곤팔로니에레처럼 힘 있는 친구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사 적이라 해서 곤팔로니에레가 자신의 (심복)이 잘못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리라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그리 높은 직급에 있지도 않은 서기장을 겨냥했다기보다는 단지 곤팔로니에레를 괴롭히려는 계획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마키아벨리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 또 하나 있었는데, 자신에게는 이쪽이 더 심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의 사적인 편지를 통해 당시 로마에서 그와 관련된 한 거의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단지 추측만 한다는 것은 불확실하고 소용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이 어떤 식으로 그와 동생 토토 간의 계약 관계와 관련된 교회 성직록 문제에 일어난 재판이 아닐까 추측해서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설사 이 추측이 잘못되었다 해도 그리 큰문제는 아니다).  토토는 바로 그때인 1510년 1월 5일 수련의 과정을 벗어나 사제에 서품된 상태였다.  프란체스코 넬리와 피에로 델 네로의 중재로 마련된 이 계약에 의해, 토토는 형인 니콜로에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몫을 양도 한 바 있었다.  그 주요 내역은 피렌체의 집과 페르쿠씨나의 산탄드레아에 있던 땅 약간이었다.
  로마에서의 소송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피렌체에서의 투서 사건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후 그에게 일어난 일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와 9인관제위원회 서기장에다가 정무위원회 서기장까지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10인 위원회의 명으로 3월 12일에서 23일 사이 몬테 산 사비노로 가서 피렌체령 가르곤차의 주민들과 시에나령 아르마이올로 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5월25일에서 6월 3일 사이에는 9인관제위원회의 일로 산 미니아토와 발디니에볼레의관구들에 파견되어 모병 작업을 돌보았다.  그리고는 피렌체로 돌아와 며칠 쉰 뒤, 세 번째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
  줄리오 2세는 이제 누구와도 부딪힐 일이 없었다.  베네치아와는 묵은 것이든 새것이든 모든 문제를 청산한 상태였고, 따라서 더 이상이 영광스런 공화국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처리해야할 문제는 많은데 해결은 난망인 막시밀리안에게 이러한 상황은 썩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프랑스 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교황이 베네치아를 보존하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그 나라를 쳐야 하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의 위치를 확고히하기 위해서 산 마르코의 사자를 길들이 필요가 있었고, 반면 교황은 프랑스인들을 내쪼츠는 데에 베네치아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줄리오 2세는 프랑스에 대항하여 다른 세력들을 끌어모으는 한편, 페라라가 프랑스 보호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여 그 도시를 공격할 채비르 갖추었다.  서로 경멸하고 불신하는 가운데 교황의 증오와 왕의 분노는 나날이 커져 갔으며, 이제 최악의 상황만이 남지 않았는가 생각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교속의 두 군주 사이에서 언제나 조정 역할을 담당했던 루앙 추기경이 지난 5월 세상을 뜸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피렌첸는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줄리오를 적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데리니의 말처럼, (교황은 우방으론 시원찮지만 적으로 돌아서면 골치 아픈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프랑스 궁정에 상주할 대사를 파견하면서 자신들이 그 불 같은 교황과의 협상을 최대한 신중하게 처리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마키아벨리를 동행시켰다.  그는 공적인 임무 외에 곤팔로니에레가 사적으로 부탁한 일까지 맡고 있었다.  곤판로니에레는 10인위원회의 훈령이라는 천 위에 자신의 이름 첫 그르자를 아로새기는 것(공문서에 자신이 서명한 것을 비유한 말 - 옮긴이)말고도, 그러한 중대 국면속에서도 자신과 그의 동생인 추기경은 개인적으로 여전히 프랑스 왕에게 충성하고 있음을 확신시키고 싶어하였던 것이다.  추기경은 마키아벨리의 출발 소식을 듣자, 곤팔로니에레가 그랬던 것처럼 곧 로마로부터 교황과 왕이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편지를 뒤딸려 보냈다.
  가는 길에 귀환중인 대사 (그는 절친한 관계였던 알레싼드로 나시였다)를 만났던 마키아벨리는 7월7일 리룡에 도착했고, 이틀 뒤에 다시 길을 떠나 17일 궁정이 있던 블로아에 닿았다.  로베르테는 그렇지 않아도 피렌체에 전령을 보낼까 하고 생각중이었는데, 마침 때 맞춰 잘 왔다고 일러주었다.  왕은 자신이 로마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와중에 대사까지 소환된 데다, 공화국이 교황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휘하를 떠나 교황의 명으로 제노바를 급습하려는 마르칸토니오 콜론나에게 길을 열어주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피렌체의 의도로 의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피렌체로서도 이 일들에 관해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왕은 도착 직후 그를 접견한 자리에서 거두절미하고 대뜸 앞의 사실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만일 교황이 자신을 괴롭힌다면 공화국이 (지체없이)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밝히라고 요구하였다.  사절은 이에 피렌체인들과 왕 사이에는 우호 조약이 맺어져 있으며, 이를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였으나, 이 정도로는 왕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왕이 대답하기를, 물론 자신은 이를 확신하고 있으나, 그 이상의 보장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정부에다 이 문제에 관해 즉시 편지를 쓰라고 명하였다.  이를 로베르테에게 주어서 왕의 전령 편으로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시키는 대로하였다.  그는 피렌체인들이 어떤 답을 줄 것인지를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회답을 기다리며 궁내의 귀족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어보았다.  모두가 교황에 대한 비난 일색이었다.  (복종의 관계를 거두어들이고 즉시 공의회를 개최하라.  그리고 그로부터 교속 양권을 빼앗아버려라.  그래도 이 정도면 후하게 대접하는 셈이다.) 그러나 궁내에는 교황 사절 역시 주재하고 있었는데, (그는 매우 분별이 있고 정치에도 정통한, 정말로 괜찮은 인물이었다.)  그는 마키아벨리와 만난 자리에서 (어떻게 사태가 갑자기 이토록 험하게 돌아가게 되었는지 경악하면서) 침울해하였다.  궁에는 또 조반니 지롤라미라는 소데리니 추기경의 첩자도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매일같이 자기 상전의 말을 전해 주었다.  마키아벨리는 곧 그와 힘을 합쳐 협상에 착수하였다.  이탈리아와 피렌체는 물론이고 추기경 자신의 사익에도 하등 좋은 징조가 못되는 이 일련 움직임에 피렌체가 조정자이자 중재자로서 개입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8월 8일, 왕이 사냥을 나간 곳 가까이까지 말을 타고 나간 피렌체의 서기장과 로베르테는 약 3레가(1lega는 약 3migli에 해당함-옮긴이)의 거리를 가는 동안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모든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에다 그 내용의 핵심을 추려 보고하였다. (당신네 정부는 만일 교황과 왕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양단간에 한쪽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 것이오.) 이는 물론 위험이 뒤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무언가 보상이 없다면 그러한 위험에 뛰어들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하면서, 로베르테는 우르비노 공국 정도라면 피렌체인들이 좋아하겠느냐고 물었다.  마키아벨리는 슬쩍 답을 피했으나, 정무위원회에다는 이제 루카에 관해 한번 생각해 볼 시점이 아니냐고 제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내 교황과의 전쟁에 (내재된 모든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프랑스에 초래할 위험들을 주시시키려고 애썼다.  (만약 혼자서 전쟁을 치른다면, 그것이 쉽게 끝나지 않고 질질 끌 것이라는 점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와 힘을 합친다면, 이탈리아의 일부는 그 동맹국에 떼 주어야 할 것이고, 결국은 그 나라와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될 터인데, 이는 교황과의 싸움보다 훨씬 위험할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로베르테를 설득하였고, 이 때문에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줄 만 알았던 프랑스인들의 마음도 바꿀 수가 있구나 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을 뻔하였다.  (지체 있는 이탈리아 사람 몇 명만이라도 여기서 프랑스인들의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들을 심어주고자 노력한다면 그들을 설득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이탈리아인은 프랑스에 없었고, 이탈리아에서도 아마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동안 사태는 나름의 필연적인 행로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왕은 자신에 대한 지지를 명확히 밝히라고 압박을 가했지만, 피렌체인들은 조약의 명문 규정은 언제나 지키겠지만 그를 돕겠다는 어떤 명확한 언질도 줄 수 없다고 버티었다.  마키아벨리가 이 대답을 왕에게 전하자, (그는 매우 만족스러워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마키아벨리를 국무회의의 장소로 부르더니, 만일 교황이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악령의 사주를 받아) 제노바에 어떤 식으로든 해를 가한다면 피렌체 공화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쇼몽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그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피렌체는 곧 줄리오의 분노를 사 그의 군대를 바로 끌어들이는 상황에 처하고 말 것이라고 대답하자, 국무회의의 제후들은 (거의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치기를, 왕이 이탈리아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해 준비중이므로 그것은 단지 며칠 정도만 공격을 막아내는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역시 마키아벨리는 정부가 무슨 대답을 내놓을 것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왕의 요구를 10인위원회에 알리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했고, 다시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이들이 어떻게든 우리를 이 전쟁에 끌어들이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숙고할 점은(...) 질 것 같은 속에서 어떻게 승리를 이끌어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며칠이 지나가고 사절의 부지런한 보고는 계속되었지만, 사태는 변하지 않았다.  왕은 교황과의 전쟁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쪽으로 갔다.  그의 말이다. (당신은 짐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짐은 교황에 피배하고 싶지 않다.) 그는 다가오는 겨울 내내 사태를 관망하면서, 그 동안 줄리오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공의회를 소집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반면 교황은 군대를 끌어모으면서, 페라라를 공격하고 조약을 통해 모데나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교황이 고용한 스위스 용병대는 롬바르디아로 가는 길목마다에서 저지당해  패주하게 되고, 프랑스 궁정에서는 춘계 대공세를 두고 (사실 그건 아예 전쟁이 아니라 로마로 소풍 나가는 격이 될 것)이라며 유쾌해했다.  마키아벨리에 의하면, (이 사제들은 이 세상에서 쓴맛을 좀 봐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 발전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사제들의 희망은 저 세상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 즈음 프랑스에서는 사람들이 (코클리쉬 Coquluche)(백일해의 일종-옮긴이)라고 부르던 유행성 독감이 온통 유행가고 있었고, 마키아벨리도 이로 인해 괴로움을 겪었다.  24일, 그는 변명 조로 다음과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기침 때문에 5일 동안 아무하고도 만나지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기침이 멈추고 난 뒤에도 (그놈이 제 뱃속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는 처집니다.) 더욱이 그는 언제나처럼 돈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불만스러워하였다.  그는(제가 말을 팔아버리고 걸어서 집에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이라고 썼던 며칠 전의 펼지를 상기시키며, 10인위원회에 재차 송금을 요청하였다.
  몸이 아프자 그는 귀국하여 아내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에 젖어들었다.  지금은 잔느라는 여인이 빈 곳을 어느 정도 메워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도 얼마 후에는 심드렁하게 대하게 될 터였다.  그가 귀국할 날은 그리 멀리 않은 듯했고, 로베르토 아차이우올 리가 신임 대사로 선임되어 발걸음은 느리지만 이미 이쪽으로 길을 잡은 상태였다.  파란체스코 베토리는 그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로베르토에게 자네를 곧 돌려보내라고 부탁했네, 그래야 그는 떠나더라도 대신 자세를 보게 될 테니까 말일세(...) 필리포(카사베키아)와 나는 매일같이 자네를 학수고대하고 있네) 프란체스코는 독일 사절 이후 마키아벨리에게 보내는 편지에 세레명만으로 서명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기꺼이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가 어는 아이의 대부였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아마 1510년초에 태여났다가 1511년 2월에 죽었던 아이였던 것 같다.  마키아벨리의 아이들이 누구누구인지, 그들의 대부는 또 누구인지를 어떻게 일일이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동안 아이들과 아내는 비교적 잘 지내고 있었던 편이었다.  그가 서기국에다가 왜 가족의 근황을 그렇게 전해주지 않느냐고 불평 조로 말하자, 아드리아니가 나서서 짤막하면서도 익살맞게 말을 받았다.  (자네 아내는 여기서 살고 있고, 아이들은 제 발로 서 있으며, 집에 연기가 나는 일도 없지만, 페르쿠씨노의 포도 작황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 정무위원회에다 10인위원회와 9인관제위원회의 서기장이자 가장 가톨릭에 충실한 왕에게 파견된 사절이었던 그이지만, 이제는 정치.군사 문제에 대한 생각 외에 산탄드레아의 얼마된지 않는 농토까지도 신경을 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니!  수확과 나쁜 날씨와 자신 소유 농토 내의 농부들이나 나무꾼들이 겪는 끝날 줄 모르는 불운들이 때로는 그를 성가시게 만들었고, 때로는 기쁘게도 했으며, 또 때로는 사무실 동료들에 대한 그의 불평 속에서 은연중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나무꾼과 농부들이라니! 지금 그는 프랑스 궁정에 있으며, 마치 커다란 청동제 화병 두 개 사이게 끼인 도자기 병 같은 형국에 있던 자신의 공화국을 어려움에서 건져내야 하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 사절 임무를 토해서였다.  왕과 같이 백일해에 걸려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로베르테를 방문한 그는 분별과 논지를 갖춘 말로 그와 아야기를 나누었다.  마키아벨리의 말인즉, 만일 전쟁이 계속 제 가리 길로 간다면, 왕은 피렌체를 (크게 존중해 주어야(하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커다란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렌체에다 떠맡기는 요구들과 계획들을 충분히 숙고하고 논의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주장에 공감하는 듯했으며, 그래서 그들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문제는 쇼몽이었다.  그에게는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이 곁에 없었던 데다가 이탈리아 전쟁의 짐을 온통 혼자서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반드시 원군이 있어야만 한다고 고집하였다.  그러자 마키아벨리는 다시 국무회의로 돌아와 그 (제안들)을 장시간 논하였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앗다.  피렌체인들은 조약을 지킬 태세가 되어 있다.  하지만 군대를 보내라고 요구함으로써 주위의 적에 스스로를 무방비 상태로 내맡기도록 만드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교황을 막는데는 피렌체가 군대를 도시 내에 유지하고 있는 편이 (다른 곳으로 내보내는 편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다.  국무회의는 서기장의 말을 신중히 경청한 뒤, 그의 논지가 옳다고 찬사를 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는 결국 그들 모두를 설복시킨 것이다.
  마키아벨리도 프랑스인들을 설복시키는 데에는 줄리오의 호언장담도 한몫을 하였다.  당시 그는 지나치게 친프랑스적인 피렌체 정부를 무너뜨려 버리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성미 고약한 교황은, 볼로냐로 가는 길에 몬테피아스코네에서 그를 만나 공화국이 교회와 왕 사이의 협상을 중재할 의사가 있음을 알리고 전쟁으로 기우는 쪽에 평화를 권고하려던 피렌체의 사절들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파문에 처하겠다고 위협했으며, 피렌체 영토를 유린하고 나아가 더 이상의 일도 불사하겠다고 으르렁거렸다.  운수 사납게도 교화의 눈밖에 난 사절들은 도매금으로 넘겨졌다.  피렌체와 똑같은 이유로 파견되었던 사보야 공국의 사절 하나나 투옥과 고문의 괴로움을 겪었다.  이보다 조금 앞서 오스티아에서는 페라라의 사절이 바다에 던져버리겠다는 위협을 받았는데, 그는 다름이 아니라 신이 내린 오를란도 시인(아리오스토를 말함 - 옮긴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성미 괄괄한 교황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가운데, (이탈리아를 프랑스인들의 굴레로부터, 그들의 손아귀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언명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이 말을 아무런 비평없이 기록하였다. 사실 그는 뒤에 (야만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유명한 글을 쓰게 될 것이었다.((군주론) 26장 참조 - 옮긴이). 빌라리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일찍이 발렌티노는 그렇게 칭찬했으면서도 왜 위엄 있는 줄리오에게는 끌리지 않았는지 궁금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황은 피렌체의 자유를 파괴했을 뿐 아니라 마키아벨리에게 오래도록 불행을 겪게 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앞서 말한 촉구의 글을 포함하여 자신의 가장 빛나는 저술들을 쓴 것도 바로 그러한 불행의 시기 동안이었다.  그 이전에도 마키아벨리는 줄리오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많다.  첫째, 분노와 충동이 자신의 군주상에 적합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물론, 자신이 믿는 또 하나의 신앙인 국가마저도 타락시켜 온 사제들의 지배를 못마땅했기 때문이며, 끝으로 그는 한 사람의 피렌체인이자 이탈리아인로서 교회의 세속 권력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야만족을 쫓아내려는 그 유명한 함성도 줄리오의 입을 거치면 무언가 이상하게 들릴 법했다.  사실 그 스스로가 이탈리아에 그들이 얼마나 많이 불러들였던가,  마키아벨리에게 그는 정말 (이탈리아의 우환을 매개하는 숙명적 존재) 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가 쇼몽에게로 간 왕의 편지에 그 자신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제시했던 (제안들)과 부합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을 알고 로베르테에게 (사태를 더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적극적 행동으로 교황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촉구한 것은, 결코 스스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프랑스인들 좋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뒤에 10인위원회에다 이렇게 썼다. (그는 자신들도 교황에게 한번 호된 맛을 보여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웃음과 함께 이 말을 하면서 제 어깨를 두드렸는데, 마치 곧 그렇게 할 거라는 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임무는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신임대사에게 보내는 본국의 편지가 9월초 궁정과 옮겨간 투르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10인위원회는 평소 서기장이 보여준 민첩성과 열성에 물들어서 신임대사 역시 그곳에 도착했거나 곧 도착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8월 31일이 되어서도 여전히 리용에서 어기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사절은 하는 수 없이 계속 그 앞으로 오는 편지들을 개봉하여 회답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9월 중순에야 겨우 그곳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에게 일을 인계하기 위해 며칠 더 지체하였다.  우리는 그가 정확히 언제 투르를 떠났는지, 또 이탈리아로 오는길에 언제 리용을 떠났는지 잘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가 피렌체에  닿은 것이 10월 19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임무야말로 단순히 끝없는 마상 여행 정도가 아니라 마키아벨리 자신이 무언가 자신있게 말할 거리가 잇는 그러한 성격의 일이었다.  마치 아리오스토가 당시 스스로 겪은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던 것처럼
  그리고는 그것을 나를 시인 마부로 만들어버렸다네.

    제12장 12시 정오
  마키아벨리가 프랑스로부터 보고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점이었다.  즉 교황과 왕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있으리라는 것과 피렌체는 어쩔 수 없이 그 전쟁에 휘말리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가 먼저 군사적 측면을 고려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못 된다.  그의 기본 신념을 결국 보병이 전투를 마무리 짓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기병과 맞싸울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반면 자신이 만든 민병대에는 기병이 없었기 때문에, 곤팔로니에레와 10인위원회를 설득하여 민병대 편제 안에 새 기병이 아니라 석궁과 총을 휴대한 경기병으로 토스카나의 농촌 사람들로 채워질 수 있었다.
  그들을 설득하는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510년 11월 7일 10인위원회는 서기장에게 (경기병 분견대를 만드는) 임무를 맡겼다  분명히 이는 법으로 그 제도를 확정하기 전에 저번 보병의 경우처럼 일단 시험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발디키아나에서 첫 모병이 있었고 마키아벨리는 이를 위해 11월 13일에서 29일 사이, 12월 3일에서 19일 사이에 두 번에 걸쳐 그곳에 갔다.  두 번째 방문 초입에 그는 시에나로 가서 얼마 전 시효가 끝난 시에나 공화국과 피렌체간의 휴전 협정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화성궁의 영향 아래(화성은 그리스 신화에서 군신(군신) 마르스의 별을 가리킴 - 옮긴이) 한 해를 마감한 마키아벨리는 1511년 새해를 들어 군사에 관한 일에 더욱 많이 관여하게 되었다.  1월 5일, 그는 줄리아노 다 산 갈로와 함께 피사의 성채를 둘러보고 그 상태를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곳으로 가서 6일 간 머물렀다.  14일에는 같은 이로 아레초로 갔으며, 2월 15일에는 시에나의 공격을 막은 피렌체의 요충지인 포초 임페리알레로 향했다.  이제 그는 서기장에서 공화국의 군사 전문가로 바뀌어 있었다! 3월 14일 그는 경기병 100명을 모집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발디키아나로 가서 그 달 내내 그곳에 머물렀다.  모병된 사람들에게는 (4월 한달 동안 기병으로 복무하는 대가로 일인당 10인두카의 금화가 지급되었다. )21일에는 그곳으로 되돌아와 100명의 졍기병을 피렌체로 인솔해 왔으며, 그 첫 사열식으 백야의 주일 la dominica in Alvis(부활철 이후 첫 일요이를 일컬음 - 옮긴이)에 실시 되었다.  민병대는 이런 식으로 점점 발전되어 나갔다.  그것은 훌륭하고 좋은 제도였으나 너무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뿌리룰 내리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평화가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유 피렌체 공화국의 시간은12시 정오를 향하고 있었다.  그 동안 소데리니 정부라는 솜씨 있는 키잡이 밑에서 평온한 바다 위를 순항해 왔으나, 교황 줄리오 2세의 격한 성품으로 인해 파도가 거칠게 일어나면서 항해는 어려워졌다.  외부로부터 오는 이 같은 압력은 곤팔로니에레의 적과 메디치 간의 지지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더해 주었다.  그들은  근 들어 수적으로나 자신감으로 부쩍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피에로가 죽은 후 메디치 가는 그 생전의 통치 방식과 귀양으로 잃었던 만큼의 지지자들을 다시 규합할 수 있었다.  조반니 추기경과 점잖은 줄리아노처럼 잔존한 동생들이 보여준 인간다움과 관대함도 지지자를 늘리는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  특히 추기경은 로마에 사럭나 그곳에 들르는 피렌체 사람들엑 호의와 친절을 베풀고 무엇이든 아낌없이 도와주었는데, 그이 이러한 모습은 (지독히 인색하고 오직 자신만 아는) 소데리니 추기경과 큰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피렌체에선 그와 그의 가문은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곤팔로니에레는 이런 일들로 마음이 크게 상했으나, 달리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다만, 조반니 추기경이 자신의 우호적인 이미지를 드높일 생각에서 거액의 지참금을 미끼로 피에로의 딸 클라리체와 명망 있던 청년 필리포 스트로치를 피렌체 시내에서 결혼시키려고 하자, 곤팔로니에레가 크게 화를 니며 필리포를 어떻게든 벌주려고 애쓴 일 정도가 있었을 뿐이었다.  사실 그의 분노는 극도로 치달아, 마키아벨리에게 법에 따라 8인감찰위원회에 비밀리에 제출될 고소장을 (솜씨와 논리를 초대로 발휘하여) 작성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스트로치 가의 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벌은 미미한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다.
  양가문 사이의 이러한 경쟁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이미 1508년초였다.  그러다가 1510년말, 필리포가 자신의 열성과 술책에 제 스스로 말려드는 바람에 곤팔로니에레를 살해하려 한 음모가 발각되었다.  그 주모자인 프린치발레 델라 스투파는 자신이 메디치 추기경으로부터 그 임무를 부여받았으며, 뒤에는 아마 교황이 있을 것이라고 뽐내듯이 말을 뱉어내었다.  이를 통해 소데리니는 어떤 조치를 취할 기회를 잡았다.  1511년 1월 3일, 8인감찰위윈회는 누구든지 메디치 추기경 또는 그의 동생 집에 머루거나, 혹은 그들과 어떤 거래를 하는 것만으로도 반역자로 간주 될 것이라고 포고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로마냐에서는 프랑스 군이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1511년초 줄리오 2세는 미란돌라를 빼앗는 놀랄 만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이 일이 놀랍다는 것은 그곳의 위치가 전략상 중요해서라기보다는 나이든 교황이 전쟁터에서 보여준 개인적 용기 때문이었으므로, 이로 인한 영예는 교황청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직후 그는 페라라에서 패배했으며, 급기야는 5월 21일 에 가서는 로마 다음으로 교회의 주도(주도)인 볼로냐까지 잃고 말았다.  게다가 교황 자신이 당연히 의지해 왔고 또 불패로 생각해 왔던 교권이라는 무기조차 오히려 그에게 창 끝을 들이대고 있었다.  교회령 국가내의 도시들에는 9월1일 피사에서 공의회가 소집되니 교황은 그곳에 직접 출두하라는 내용의 파발이 돌았던 것이다.  그는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채, 라벤나로, 이어서 리미니로 물러 났으며, 난생 처음으로 그 불굴의 정신이 평화에 대한 마음으로 꺽이는 듯이 보였다.
  만일 왕이 승기의 이점을 잘 살리기만 했어도 전쟁은 교황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존중의 뜻에서건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건 군대를 뒤로 물려버렸다.  그로서는 스스로가 공격받은 쪽이 아니라 마치 공격한 쪽인 양, 승리자가 아니라 마치 패배자인 양, 교황 앞에서 겸손함을 보여주려 한 셈이었다.  하지만 왕의 바로 이러한 유약성이 교황의 마음을 다잡게 만들었다.  더욱이 그는 프랑스의 승리를 질시한 아라곤 왕이 슬쩍 그를 자극하여 희망의 여지를 불어넣자, 곧 이전의 호전성을 되찾았다.  그가 취한 첫 조치는 자신의 군대가 패배한 이후에도 여전히 스스로의 수중에 남아 있던 교권의 무기를 쓰는 것이었다.  그는 이로써 앞서 적이 열겠다던 공의뢰를 무산시키고, 적어도 이 측면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되자 분리파 추기경들의 대리인이 자신들의 공의회에 관한 문서들을 피사에서 간행하였다.  교황은 이에 격노하여 피렌체 상인들을 벌주고 도시를 금령에 처하겠다고 위협하였다(당시 피사는 피렌체령이었음-옮긴이).  피렌체인들에게는 첫 번째 위협이 더 무서운 것이었다.  그들이 피사에서 공의회를 열어야 한다는 왕의 압력을 받아들인 것은 줄리오가 나락에 떨어져 있있던 반면  황제는 피사 공의회 개최에 열성적이었던 시점이었고, 프랑스와 독일의 사제들이 그 곳에서 대규모로 만나리라 예상되던 때였기 때문이었다.  귿들도 보고 있듯이, 이제 줄리오는 그토록 맘ㅎ은 패배를 겪고 병이 들어 죽는다고까지 소문이 났으면서도 몸과 마음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반면 황제는 으레 그렇듯이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머뭇거리고 있었고, 공의회는 겨우 세 사람이라는 소수의 대리인들에 의해 아무런 위용도 갖추지 못한 채 열릴 예정으로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피렌체인들은 자신들이 커다란 위험에 노출되어 었으며 교황의 분노에 손쉬운 목표물이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리인들에게 추기경들이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공의회를 진행시키지 말라고 명한 뒤, 사람을 보내 추기경들을 오지 못하게 하고 프랑스 궁정에는 제발 이 문제의 공의회를 자신들의 영토 바깥 멀리로 내보내 주도록 간청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마키아벨리가 선임되었는데, 이번 일에는 솜씨 있고 믿을 만한 데다 무엇보다도 기민하고 민첩한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이미 앞서의 내용으로 독자들은 눈치 챘을지 모르지만, 서기장이라고 그때까지 마냥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5월 5일에는 그는 모나코의 군주인 루차노 그리말디를 만났다.  그의 행위를 응징하고 다시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마키아벨 리가 그곳으로 가는 중에 받았던 조약에 관한 훈령 때문에, 그 임무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공화국은 해적 행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조약 상대국의 일연의 행동들에 대해 도저히 점잖게 묵과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화국으로서 모나코에서 서명된 문서가 거의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었고, 마키아벨리의 경력에서 볼때는 (자신이 (대사)라고 불리는 것을 듣는 작은 만족감을 제외하고!), 그것에 쏟은 적지않은 시간과 고생스러웠던 여정의 기억만이 남았을 따름이었다.  6월 5일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곧 시에나와의 새 조약 체결에 뛰어들었다.  이 거래는 페트루치가 자신의 이익을 노리고 교황을 사이에 넣어 진행시킨 것인데, 시에나로서는 조약의 대가로 몬테풀차노를 반환해야 했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셈이었다.  이 후 그는 8월 24일부터 9월 7일까지 새 민병대에 배치할 백 명의 기병을 더 뽑기 위해 발다르노 위쪽 지역과 발디키아나, 카센티노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는 이 일에서 돌아오자마자 곧 프랑스로 가는 네 번째 사절 임무를 준비하였다.
  그는 9월 10일 길을 떠나 12일에는 파르마와 피아첸차 사이에 위치한 보르고 산 돈니노에 도착했다.  카르바할, 산 말로, 코센차, 산세 베리노 등 교황에 대항한 6명의 추기경들 중 4명이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먼저 가장 중요한 인물인 카르바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서 코센차와 산세베리노가 합류하였고, 결국에는 그들 모두가 산말로를 만나러 갔다.  서기장은 이 세 번의 회합에서 시종일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되풀이하였다.  즉 교황이 화를 내는 바람에 피렌체인들은 곤경에 처해 있으니 피렌체 가까이로 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아직 공의회에 필요한 준비들이 갖추어지지 않았을뿐더러 교속 양쪽으로 힘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 있으므로, 공의회를 동요시키지 않도록 행동해 달라)는 요청도 있엇다.  추기경들은 마키아벨리를 문 밖에 세워놓고 두 번에 걸쳐 장시간 토론한 끝에, 그들이 피렌체로 가지는 않겠지만 대신 열흘에서 열이틀 안에 폴트레몰리를 경유하여 피사로 갈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서기장은 그들의 말에서 이미 공의회에 대한 열기가 많이 사그라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밀나로까지 가서 그곳 프랑스 총독에게 자신의 임무를 설명하였는데, 공의회에 대해 자신이 왕에게 말할 내용을 빼고 단 지 피렌체인들에게 닥친 위험에 관해서만 언급하였다.  그리고 난 뒤, 15일 느지막한 시간에 다시 프랑스를 향애 길을 떠났다.  그는 말을 재촉해서 22일 왕이 머물고 있는 블로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작년 마키아벨리와 교체해서 부임해 왔던 로베프토 아차이우올리가 여전히 대사로서 피렌체를 대표하고 있었다  서기장은 다음날 그와 함께 왕을 알현하였다.  그날은 교황이 피렌체에 금령을 선포한 날이기도 했다. (마키아벨리의 정중한 인사가 있은 후), 두 피렌체인은 내용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왕을 설득할 수 있을 만한 모든 논점들을 압축한) 문서를 왕 앞에서 낭독하였다.
  그는 먼저 공의회 시도를 끝내고 합리적인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피하라고 권유하면서, 피렌체가 중재 역할을 맡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왕은 평화에 애착을 보이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께 바라건대, 당신들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공의회가 교황을 조약에 끌어들이려는 의도로 계획된 것이라는 반론을 폈다.  따라서 그것을 지금에 와서 취소한다면 그에게 물린 재갈을 도로 풀어주슨 셈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제기한 두 번째 논점은 공의회를 피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열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왕은 즉시 그리고 단호하게 대답하기를, 공의회를 그곳에서 연다고 이미 선포한 상황에서 장소를 옮긴다면 명분에 손상이 갈것이므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앞의 두 논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작성된 마지막 세 번째 논점은, 공의회 개최를 두세 달 연기하여 공화국이 스스로를 강화할 시간적 여유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한 그렇게 했으나, 이는 사실 (시간을 벌겠다)는 피렌체의 통상적인 정책의 일환이었다.  혹시 교황이 죽는다든가 또는 다른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그들이 처한 위험이 해소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왕은 이 마지막 논점은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왕의 명으로 공의회를 만성절까지 연기하라는 편지가 추기경들에게 보내졌다.
  그러므로 피렌체인들이 얻은 유일한 이점은 시간인 셈이었다.  그것은 대단한 것은 못 됐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피렌체인들은 그 힘든 여정을 무릅쓴 그들의 서기장에게 고마움을 표했어야 했다.  그는 더 이상 처리할 일이 남아 있진 않았지만, 되돌아가는 어려움을 겪기 전에 여독을 풀기 위하여 궁에서 약 3주를 더 머룰렀다.  이동안 그는 1-인위원회에다 직접 간략한 내용의 편지 한 통을 썼다.  우리에게는 왕과의 토론 내용을 길게 설명한 원본 편지 두통이 남아있은데, 둘 다 서명은 아차이우올리가 했지만, 한 통은 마키아벨 리가 쓴 것이고 또 한 통은 다른 한 서기가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설사 우리가 그 중 한 통만 가지고 있다 해도, 문체로 보아 누가 쓴 것인지를 쉽게 알 수가 있다.  10월 중순경, 그는 10인위원회로부터 귀환 허락을 받고, 다시 길을 되짚어와 11월 2일 피렌체에 닿았다.  그는 이번에도 미처 말에세 내릴 틈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도착하는 바론 그날 새로운 임무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이미 피사로 말을 몰고 있었다.
  그곳에는 11월 5일 시작되는 공의회 첫 회기에 참석하기 위해 분리파 추기경들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교황에 의해 추기경의 직위를 몰수당하고, 사람들로부터는 미움을 받는 데다, 사제들의 복종도 얻어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신명은 적고 위험은 큰 처지에 놓여있었다.  왜냐하면, 로트넥의 군주와 50명의 프랑스 궁사들로 이루어진 호위대가 고작일 뿐, 더 이상의 호위가 갑작스럽게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의 피렌체인들은 그 소수의 인원조차 싫어했으며, 호위받는 사람들 못지않게 호위대에도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그리하여 피렌체 정부는 급히 마키아벨리르 파견하여, 자신의 민병대로부터 뽑아온 삼백 명의 병사로 50명의 프랑스 군을 다시 에워싸고는 추기경들을 설득하여 그들 자신과 그들의 논쟁과 그들의 야심을 모두 함께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는 임무르 맡겼던 것이다.
  가가 떠나고 몇 시간후, 10인 위원회는 피사 감독관 로쏘 라돌피와 안토니오 포르티나리로부터 모든 것이 평온하다는 보고를 받고는 가능한 한 군대를 개입시키지 말고 일을 처리하라는 편지를 뒤따라 보냈다.  그래서 그는 곧장 피사로 가서 공의회의 첫 회기에 참석한 다음, 카르바할 추기경을 만났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마치 정부를 대표하는 사라므로서 죄송하다는 식의 어조로 피사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렵다는 말을 꺼냈다.  추기경은 이에 대해, 물론 그곳이 풍족하지도 안락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들은 불평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장소를 옮기는 것이 피렌체인들의 원하는 바라면 서로 의논해 보자고 말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그가 자신의 말뜻을 알아챘음을 느끼고, 그들이 (토스카나에서보다 훨씬 더 복종적인 사람들이 있는) 프랑스나 독일로 옮ㄱ니는 편이 그들에게도 백번 낫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해나갔다.  추기경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겠으며 프랑스 왕과 독일의 황제에게 편지를 써야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마키아벨리는 한술 더 떠 앞서 산 논니노에서 추기경과 동료들이 두세 회기 후에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다고 한 말을 다시 상기시켰다.  카르바할은 지겹다는 듯이 그것도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하였다.  서기장은 그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행여나 피렌체 정부로부터 어떤 도움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말 것이며, 복종하려 들지 않는 피사의 사제들에게 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도(그들 자신이 이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할 것임)을 주지시켰다.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말에다 사제들의 적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동요로 마음이 움직인 추기경들은 7일의 두 번째 회기를 끝으로 공의회란 유령을 밀라노로 옮겨가기로 작정하였다.  마키아벨리는 11일 피렌체오 돌아왔고, 추기경은 일행은 12일에 떠났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그 도시에 대한 교황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는 피렌체가 소데리니 정부 아래에 있는 한 결코 조용하게 놔두지 않으리라 결심한 터였다.  그는 12월 1일에 금령을 일시 철회했다가 15일에는 그것을 원상복구시켰다.  물론 사람들은 그 소식을 무관심하게 받아들였다.  이는 아무 효용성도 없는 무기였으나, 그는 그 동안 다른 무기를 준비해 오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편에서는 회심의 일착이었지만, 장차로는 확전으로의 길을 열어놓고 스스로를 다시 한번 (이탈리아의 우환을 매개하는 숙명적 존재)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금령보다 더 효과적일 분 아니라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대해 그랬던 것만큼이나 프랑스에 대해서 재앙과 같은 존재인 에스파냐의 그 무시무시한 보병을 등에 업고, 그는 앞으로 볼로냐를 탈환하게 될 것이었다.  이어서 피렌체를 굴복시킨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알고 있었으나, 모두가 고통 속에 있었떤 것은 아니었고ㅓ, 더군다나 도시를 적극적으로 방어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곤팔로니에레의 정적이었던 유력 시민들은 비록 그들 모두가 메디치 가의 추종자들의 예외 없이 곤팔로니에레의 적이었으므로 물론 확호작약하였다.  심지어는 메디치 가의 친구도 곤팔로니에레의 정적도 아닌 사람들까지도 재정을 축내는 것을 극히 못마땅해했고, 귀차르디니의 관측과 같이 중립은 오직 강한 자를 위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중립으로 남고 싶어했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에 사절로 가 있는 동안 이러한 사태와 이러한 분위기가 점점 더 무르익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그 병이 어떤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는 피사에서 돌아와, 자신이 출발한 후 이틀째 밤에 정무궁 첨탑에 떨어진 벼락이 서기국 사무실을 통과하여 문 위에 새겨진 세 송이의 황금 백합을 찢어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곧장 프랑스 왕과 피렌체 정부 양쪽 모두에게 불길한 징조로 해석되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당시의 여느 위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전조를 믿었으며 그리하여 예감 같은 것을 느꼈다.  11월 22일, 그는 서기국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첫 번째 유언을 남겼다.  얼마 후 곤팔로니에레도 그 뒤를 따랐다.
  피렌체인들은 내분과 탐욕과 시간 벌기의 정책에 막혀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1512년초 아라곤의 왕에게 도시의 비범한 청년 한 명을 보냈다.  그의 이름은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였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 스스로를 살리는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이 피렌체인들은 (그에게 동맹국들의 불쾌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만한 훈령을 내리지 않았다.) 훈령을 써서 그에게 넘겨준 인물은 바로 서기장이었고, 따라서 이 위대한 정치가 두 사라믐은 당시 서로 대면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냉요을 구술한 것은 소데리니와 그의 정파였다.  그로 인해, 이 임무는 (프랑스 왕을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을) 뿐, 동맹국을 달래는 데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피렌체는 점점 더 신에게서나 적에게서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을 위해서난 그 자신의 재능에 비추어서나 그에게 주어진 권한은 너무나 미미했다.  피사에서 돌아온 뒤인 1511년 12월 2일, 그는 모병을 위한 피렌체령 로마냐로 떠났다.  이듬해 2월 19일, 그는 정무궁 광장에서 300명의 기별대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3월 30일, 그동안 애쓴 결과로 드디어 그가 계획해 온 기병 민병대 안이 통과되었다.  5월말경엔 그는 내성의 수배대를 다시 짜기 위해 피사로 떠났다.  하지만 시에나로 가 판돌포 페트루치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당시까지도, 그는 여전히 하류 족 발다르노에서 모병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시에나를 거쳐 6월 6일 피사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기병대 일을 보며 이럭저럭 보내다가 같은 달 15일 이후에야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 사이 사태는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공화국이 전쟁을 아직 먼 후의 일로 보고  그에 맞추어 대비 태세를 해나가고 있는 동안, 줄리오 2세는 그들의 코앞에서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용맹무쌍한 전사였던 가스통 드 푸와를 저 세사으로 떠나보낸 라벤나 대전투의 다음날, 프랑스는 전날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황제 군으로부터 이탈한 스위스 군대의 압박에 밀려 삽시간에 전쟁에서 패배하고 롬바르디아마저 잃고 말았다.  이러허게 전세가 역전된 가운데, 피아렌차, 파르마, 로마냐의 모든 지역, 그리고 볼로냐까지 교회의 손에 넘어갔다.  줄리오 2세는 승리했고, 피렌체는 그 무시무시한 노인 앞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교황은 로렌초 푸치를 보내 피렌체가 반프랑스 동맹에 들 것과 전쟁 비용을 부담할 것을 요구해 왔다.  피렌체인들은 얼마간 돈을 내겠지만 동맹에 합류하는 것은 좀더 두고 보자고 응답하였다.  이는 어떤 제의를 거절하는 상투적인 방식이었다.  그 직후, 만토바에서 희동한 교황 동맹은 피렌체를 공격하여 정부를 교체해 버리기로 생각을 모았다.  그리하여 나폴리 총독인 라이몬드 다 카르도나가 지휘하는 에스파냐 군의 토스카나로 집입해 들어왔다.  메디치 추기경이 교황 사절로서 그들과 동행하였다.  그는 최근까지 프랑스에 의해 라벤나에 투옥되어 있다가 풀려났는데, 지금은 교황의 총신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운세도 그의 쪽으로 풀려나가고 있었다.
  피렌체인들은 겨우 정신을 차렸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나라 구석 구석에서 병사들을 급조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  아직 미비한 민병대를 보강하기 위해서였다.  피렌체는 군대라곤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고 능력 있는 장군도 없었다.  적에 대처하기 위해 마키아벨 리가 파견되었다.  그는 이미 6월 내내 교황군의 동향을 살피느라 바빳다.  그들내에 반정부 세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정부는 통로를 열어달라는 교황을 요구를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7월이 되자 그는 이미 전쟁의 냄새과 풍기는 무젤로에서 병사들을 모집하였다.  그는 보병 천 명을 모아 피렌추올라에서 적군과 맞 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을 때, 급히 돌아오라는 내용으로 10인위원회가 8월 24일에 보낸 편지 한 통이 도착하였다.  로 스탈레를 경유하여 진군하고 있던 에스파냐 군이 지금 바르베르노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피렌체 군 지휘곤들은 군대의 주력을 도시 성벽 가까이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12시 정오에 다다른 지금, 마키아벨 리가 있어야 할 장소는 바로 그곳이 아니겠는가!
  그곳에서 그는 보오나코르시의 편지를 받았다.  여기서 그는 에스파냐 군이 캄피에까지 들어왔음을 전하면서, 곤팔로니에레를 위해 (뭔가 좀 조치를 취해 보라고) 얘기하였다.  그는 적이 그렇게 코앞에까지 다가온 데 대해 (놀라서 마음이 영 편치 않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도대체 그들이 연습 삼아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왔다고 생각했던가? 이 가엾은 위인은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단지 그의 서기장이 그 다재다능함으로 무슨 기적이라도 일으켜주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총독이 그가 관직에서 물러날 것과 메디치 가 사람들이 사인(사인)으로서 피렌체로 되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자, 그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자신에게 맡긴 시민들뿐이라고 용기 있게 응대하였다.  또한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의 용기로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총독은 프라토로 진군해 들어왔다.  그곳에서 3,000명의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첫 공격이 격퇴되고 적이 보급 부족과 허기에 시달리게 되었을 때, 곤팔로니에레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천 소마(1soma는 70-71kg임 - 옮긴이) 정도의 빵으로 좀도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할 여지가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말로는, (현자들 i Savi) (평소 그의 문투로 보건데 바로 자기 자신)이 이러한 방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곤팔로니에레는 소십한 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갑자기 지나치게 대담해져서 이를 묵살해 버렸다.  두 번째 공격 앞에는 프라토의 성벽도 민병대의 기세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이전에 한번도 적군이라는 존재와 대면한 적이 없는데다가, 그 적이란 것이 라벤나에서의 패배 이후 거의 승승장구해 오다시피한 공포의 에스파냐 군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결국 프라토는 무자비하게 약탈당했다.  바로 교황 사절이 보는 앞에서 살인과 성물 파괴와 강간이 수도 없이 자행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피렌체인들은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곤팔로니에레와 같이 있었던 마키아벨리의 말에 따르면 그는 여전히 (스스로의 허망한 판단에) 집착하고 있었다.  31일, 네명의 귀족 청년이 그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왔다.  그 중에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의 동생인 파올로도 끼어있었다.  그는 마키아벨리를 보내 프란체스코를 데레오게 했다고 말했다.  이제 (홀로 두려움에 떨게 된) 곤팔로니에레는 만일 안전을 약속해 준다면 즉시 정무궁을 떠나리라 작정하였다.  프란체스코는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레갔고, 밤을 도와 시에나로 향하는 그와 동행하였다.  이는 실각이라기보다는 도망에 가까웠다.  도시와 곤팔로니에레의 운명이 아직 완전히 희망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바로 이때 이미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냉소적 행로에 첫발을 내디디고 있었던 것이다.
  소데리니의 실각으로 협상을 쉽게 마무리되었다.  메디치 가는 사인(사인)으로서 피렌체로 돌아왔고 정부가 개편되었다.  새 곤팔로니에레는 종신제에서 14개월의 임기제로 바뀌고 대평의회에서 선출하게 되었다.  이에 조밤바티스타 리돌피가 뽑혔는데, 그에게는 (유력 시민들의 수장이자,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고귀한 태생에다 위엄 있는 풍모를 갖추었으며, 그 격랑 속의 바다에서 기우뚱거리는 배를 바로 이끌어줄 훌륭한 키잡이)라는 수사가 뒤따랐다.
  그러나, 바다가 거칠건 배가 기우뚱거리건, 또는 알려진 대로 메디치 간와의 친족 관계가 그를 현혹시키고 부패하게 만들었건 간에, 리돌피는 자신의 통치 초기에 보여준 단호함과 엄격함을 지속하지 못했다.  메디치 가의 문 안에서는 추기경에 의한 모의가 계획되고 있었다.  9월 16일 줄리아노를 비롯한 음모 가담자들은 무기를 숨기고 정무궁 안으로 들어갔고, 신호에 따라 광장이 병사와 사람들로 가득 차자 그들은 곧 정무궁을 장악하였다.  팔레 palle! 팔레(단수형 (palla)는 공 모양의 메디치 가 문장(문장)을 가리킴.  즉 메디치 가를 지지한다는 뜻 - 옮긴이) 간단히 말해서, 폭력과 공포 속에서 전체시민회의 parlamento((arengo)라고도 불리며, 사제를 제외한 성년 남성 시민으로 구성되는 전체 회의를 가리킴-옮긴이)를 세우는 상투적인 방시긍로 자유는 끝장나고 말았던 것이다.  일찍이 한 사제(사보나롤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됨-옮긴이)가 피렌체 사람들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경고는 대평의회장의 대리석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단지 모래 위에 씌어졌을 뿐이었던가?
  난 아네.  전체시민회의를 열자는 것은
  정권을 빼앗아가겠다는 말이란 것을
  월권적이긴 하지만 예부터 내려오던 관습에 따라 광장의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메디치 가를 지지하는 폭도들에 의해 선출된 비상개혁위원회는 행정 조직과 시민의 자유를 야금야금 먹어들어갔다.  9월 18일, 우선 민병대를 총괄하던 9인관제위원회가 해산되었고, 마키아벨리가 만든 민병대 조식이 와해되었다.  소데리니는 추방되고 대평의회는 폐지되었다.  곤팔로니에레로 뽑힌 리돌피는 그 자리를 (두 달이 못 가 그만두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임은 사실상 등을 떠밀리다시피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도시는 로펜초와 피에로의 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았고, 모든 일이 메디치 추기경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이 같은 소란 속에서도 마키아벨리에게 관심을 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의 글에서조차 그는 잊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는 그가 리돌피 정권 아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공사를 막론하고 어떤 기록들에서도 이 문제는 다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전기 작가들도 기록상의 공백을 메꿀 만한 어떤 그럴 듯한 추정을 해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옛 읍도파의 일원이자 소데리니의 첨예한 경쟁자이며 유력 시민 계급의 수장으로서 비중 있는 위치에 있던 인물이 평시민 출신에다가 실각한 곤팔로니에레의 행신 나쁜 (아첨꾼)정도롤 생각했든 그를 결코 좋게 볼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당시 서기장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을 알고, 어디 서기국 한 구석에서 의기소침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는 그곳에서 (끝없이 따라오는 스스로의 불운)을 곱씹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일거리를 후딱후딱 해치우고 있었을 법하다.  그들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고, 그가 보는 얼굴들도 함께 바뀌었다.  한때 그는 정무궁에서 자신의 직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의 그는 단지 미관말직에 있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꿈을 좋아하는 시인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고, 때로는 스스로의 삶 그자체이자 소명이기도 했던 그 관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까지도 품고 있었을 것 같다.  비록 정권은 바뀌었으나, 그는 자신의 펜과 자신의 재능으로 권력에 봉사하는 문필가인 것이다.  이는 예술가, 군인, 시인과 같은 경우였다.  그는 파당이 아니라  국가의 충복이었다.  그는 평시민 정부 아래서 공화국에 충실히 봉사해 왔으며, 이는 메디치 정부 아래서라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새로운 권력에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려는 사람들 속에도 끼지 않고 얼마 후 자신의 글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스스로를 사람들과 메디치 가에 팔아넘기는)그런 유에도 속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지배자를 단지 경멸의 눈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친 메디치적이라는 것만 확인되는 한 이름 모를 (귀부인)에게 당시의 사건드을 설명하는 글에서 그들에게 복종의 염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느느 자신이 (메디치 가에 올리는 글 Ricordo ai palleschi)에서, 권력작에게 알랑거리기 우햬 미주알고주알 소데리니의 잘못을 파헤쳐 비난하려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짓이라고 솔직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9월 29일, 1494년 메디치 가가 쫓겨날 때 몰수된 재산을 점검하여 되돌려 주기 위해 5명의 관리가 선임되었을 때, 그는 좀더 솔직하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추기경에게 현명하고도 관대한 정치력을 발휘해 주십사 진언하였다.  아마 대(대) 로렌초 정도의 인물이었다면 러한 진언에 대해 적어도 말로나마 고마움을 표했을 법하다.
  그러나 추기경은 말로든 행동으로든 아무런 고마움도 표시하지 않았다.  서기장이 아직도 환상에 빠져 재치와 우아함이 넘치는 자신의 글재주로 찬사와 호의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머지않아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었다.  메디치 가는 중립노선을 취했던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에게 제1서기장을 직을 그대로 수행하도록 했지만, 소데리니의 (아첨꾼)으로 행동에서나 글에서나 그토록 반 메디치적이었던 인물을 용서할 리가 없었다.  또한 물론 마키아벨리로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로마나 프랑스 궁정에서 메디치 망명객들에게 그가 보인 쌀쌀맞은 태도도 그냥 잊혀질 리 만무하였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뭔가 상을 주어야할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11월 7일, 정무위원회의 결저응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제2서기국의 서기장 직과 10인 위원회의 서기장 직에서 (해임되어 그 일에서 완전히 격리되었다).  그의 친구이자 서기보였던 비아조 부오나코르시도 같은 운명이었다.  서기장 한 사람이 물러나는 정도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적지 않았던 연대기 작가나 일기 작가들 중 어느누구도 이 일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마키아벨리의 불행이 자유 피렌체의 몰락보다도 더 중요한 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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