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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마키아벨리의 평전 02

by Casey,Riley 2023.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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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장 (비탄에 잠긴 마키아벨리)
  서기장이 글 속에서 관직을 잃은 슬픔에 관해 언급한 곳은 몇 안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그만큼 쓰디쓴 맛을 느끼게 한다.  아마 가장 마음에 여운을 남기는 경우는 그가 면직 이후의 시기를 표시하기 위해 적어놓은 간결한 문체의 (모든 것을 잃은 뒤 post res perditas) (이 어구는 1512년 메디치 가의 복귀로 마키아벨 리가 공직에서 해임되어 어쩔 수 없이 시골에 은거하게 된 일련의 사건을 가리킨다.  그는 이 말을 자신의 (피렌체 곤사조직론 Discorso dell'ordinare lo stato di Firenze alle armi) (1506)의 개인 소장 사본에다 써놓았다.  또한 그의 글 (민병대 옹호론 La cagione dell'ordinanza, dove la si truove, ...  Post Res Perditas) (1512)에서도 같은 글귀가 보인다-옮긴이)라는 구절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몰락과 불행을 조국인 자유 공화국의 몰락과 불행에 거의 등치시키고 있다.  그가 그토록 충직하게 열과 성을 다하여 국가에 봉사한 대가치고 타격은 너무 컸고 사정은 너무 불공평하였다.  그처럼 항상 바삐 돌아다니기만 하던 사람에게 해임 직후의 빈둥거리는 나날들이란 장래에 대한 염려 때문에라도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정무궁 집무실에서 온종일을 보내던 그가 집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다보니, 자신이 다욱 작고 옹색하게 느껴졌으리라.  바깥이라고 나가보았자, 비열한 인간들과 안면을 바꾼 사람들로 인해 마음만 더 무거워질 뿐이었다.  한 대는 공화국의 서기장에게 친밀하게 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외면하거나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단지 그의 불행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그는 이제 겨우 내리막길의 초입에 들어섰을 뿐이었다.  관직을 배앗은 것은 그것만으로 볼대는 다만 새 정부가 자신들에게 좀더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사람들을 원한다는 뜻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서기국을 통치에 이용한다는 것은 메디치 가의 오랜 방식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해임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비난이었고 처벌이었으며 복수였던 것이다.  이는 오래지 않아 명백히 드러난다.  11월 10일, 정무위원회는 그에게 일 년 간 피렌체 영토를 벗어나지 말것과 1,000피오리노 금화를 보석금 조로 납부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큰 액수의 돈은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친구 세 사람이 대납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마키아베리의 심장을 또 하난의 비수로 찌르는 격이었다.
  그에게 이어서 일어난 일은 비유하자면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사건이었다고 할까.  11월 17일(앞 뒤 시간 간격이 짧은 것 자체가 일을 더 잔인하게 만들었다), 정무위원회는 그가 14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일했던 정무궁에 12개월 간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곧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를 그곳에 데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면서 말이다! 당시 그는 민병대에 봉급을 주기 위해 큰 액수의 돈을 만졌기 때문에 회계 관계를 설명코자 정무궁을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출입이 금지된 문턱을 넘게 해주십사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한때 자신의 서기보였지만 이제는 마치 이단 신문관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돈 계산을 한다는 것이 시인의 마음을 지닌 그로서는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자리에 메디치 가의 옛 서기장이자 지금은 그들을 위해 정무위원회를 염탐하고 있는 니콜로 미켈로치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의 의심에 찬 얼굴과 피하는 듯한 목소리를 대하는 것도 모두가 고통스러웠다.  이러한 일들을 12월 10일까지 계속되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아르노 강 너머의 초라한 집에 웅크리고 있는 니콜로와 그의 가족들에게는 더없이 슬픈 날이었다.
  그의 식탁 위에는 산탄드레아의 맛있는 시골 빵과 가능성 없는 희망이라는 버터가 놓여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메디치파와 유력 시민들의 원한을 가라앉힐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을 법하다.  그의 식탁에 오른 것은 소데리니를 쫓아내되 자신은 폭군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보냈던 메디치 추기경을 향한 그 불 같은 교황의 분노와, 또다시 피렌체 정부를 바꿔놓겠다는 그의 엄포와, 신정부에 대한 의심으로 분통을 터뜨리던 일부 시민들의 불만이라는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특별히 마키아벨리를 살찌울 만한 것은 없었다.
  정권에 불만을 가진 인물들 중에는 아고스티노 카포니와 피에트로 파올로 보스콜리가 있었다.  둘 중 하나가 18명 내지 20명의 명단이 올라 있는 문서 하나를 잃어버렸고, 8인감찰위원회가 이를 입수하게 되었다.  명단에 나온 사람들을 모두 의심스럽게 본 그들은 더 조사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즉시 체포된 카포니와 보스콜리의 입에서 그들이 추기경을, 또는 딴 사람에 의하면 줄리아노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자백이 흘러나왔다.  이는 당시로서는 흔하게 보던, 칼보다는 펜을 가지고 하는 평범한 모의 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이 경우, 모의자들은 고전에서 그러한 영감을 얻긴 했지만 그 생각 자체가 매우 솔직담백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 해를 끼칠 만한 성질의 것은 못 되었다.  점잖고 학식있는 인물로서 사보나롤라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피에트로파올로의 마음속에서는 브루투스와 그리스도가 갈등하고 있었다.  모의자들은 이 명단에다 자신들이 아는 친구나 또는 반메디치적이라 알려진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하지만 이들 중 그들이 만난 사람은 니콜로 발로리와 조반니 폴키뿐이었는데, 둘은 그들을 차갑게 대했다.  그러므로 이 모의는 그럴 듯한 기반도 없고 실제 진행되지도 못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8인감찰위원회는 주저 없이 명단에 적힌 사람 모두를 체포하였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7번재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경찰이 그를 붙잡으로 갔지만, 그는 집에 없었다.  아직도 그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정무궁 내의 친구 누군가가 미리 알려준 덕분에 스스로 몸을 숨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딴 곳에 가 있었을 것이라는 편이 더 그럴 듯하다.  체포에 실패하자, 그들은 (메쎄르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의 아들 니콜로가 어디 있는지 알거나 그를 숨겨주고 있는 사람, 혹은 누가 그를 숨겨주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반란죄로 몰려 자신의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으려면 한 시간 안에 그를 고발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는 즉시 출두하였고, 그 자리에서 투옥되어 다른 혐의자들과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 보스콜리와 약간 아는 사이이며 발로리 및 폴키와 친구라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지 못했다.  혹여 있다면, 그들이 최근 몇 달 사이 그에게 가한 위해를 두고 그가 메디치 가를 조롱 조로 입에 담은 적이 있다는 것 정도엿다.  하지만 그가 하지도 않은 그 일조차도, 체포되어 고문 끝에 나온 다른 사람들의 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따.  푸네 fune(밧줄로 죄인의 손을 뒤로 묶어 매달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는 형벌-옮긴이)는 네 번이면 보통 심신이 기를 잃기에 충분한 횟수였다.  이것으로 모자랄 대는, 사지를 부러뜨리고 살을 찢는 고문이 되다른다.  니콜로는 6번 매달렸다.  그는 이를 (스스로도 대견해할 만한) 기백과 강인함으로 이겨내었다. 
  피렌체의 서기장은 감옥에 갇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면서, 비로소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부지불식간에 이 어두운 구멍 속에 빠져버린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자신이 처한 위치를 인식하려고 애썼다.  팔다리가 고문으로 찢겨진 데다 수갑과 족쇄로 꼼짝달싹 못하게 되어 있는 자신의 처지를 보며 그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들 찼고, 이는 다시 육체적 고통을 가중시켯다.  그는 자신과 가족의 장래를 염려했다.  그는 스스로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있었으며, 그처럼 자신에게 가당찮은 불운에 의해 굴욕을 겪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했다.  그로서는 사태가 나쁘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예견할 수 없었다.  그는 새 정부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국정을 다스리는 데 매우 엄격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고문을 꿋꿋하게 잘 이겨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을 엉뚱하게 걸고 넘어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동생인 토토가 사건 즉시 로마에다 전령을 보내 (정부의 인색함 때문에 그가 사절 시절 도무지 누리지 못했던 사치) 교황청에 대사로 가 있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사건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도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베토리가 (자신만을 아는) 사람이고, 설사 도와줄 마음이 별로 있다고 해도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2월 23일 동틀 무렵, 그는 장송곡 소리에 잠을 깼다.  카포니와 보스콜 리가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다.  서기장의 신앙심은 별로 두터운 편이 못 되었다.  혹시 쓸데없는 경거망동으로 자신을 파멸시켜 버린 그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동정심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별안간,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쳤다.  지금까지 그는 사람들이 줄리아노의 인간성, 점잖음, 관대함을 한껏 칭찬하는 소리를 들어왔다.  그는 재능 있는 사람들, 그리고 시인들과 벗하는 대단히 품위 있는 사람이며, 뮤즈의 신들과도 친분이 있다고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편지를 한번 써보기로 작정했다.  그는 이에 대한 허락을 받고는 필요한 물건들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성격상 소네트를 쓰는 사람이지 비탄 조의 탄원서를 쓸만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웃음으로 지키고, 숨을 때도 언제나 웃음 뒤에 숨은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사지의 고통과 죽음의 면전에서도 그는 자신의 그 유명한 조소를 되찾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썼다.
  저는, 줄리아노 님이여, 양다리엔 족쇄를 하고
  어깻죽지엔 여섯 번을 궁중에 매달린 상처가 있습니다.
  다른 불행은 아예 말씀 올리지 않겠습니다.
  시인이란 으레 이런 식으로 대접받으니까요.
  부서진 벽에서는 이가 득실댑니다.
  하도 크고 살져서 흡사 나방 같지요.
  그런 고약한 냄새는 아직까지 없었을 겁니다.  롱세스발리에스에서도
  혹은 사르데냐의 수풀 속에서도.
  저의 이 멋진 방에서만큼은 말입니다.
  땅에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를 하며,
  제우스와 몬지벨로(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옮긴이)가 내려치듯이.
  수형자 하나가 사슬을 차면, 다른 하나는 사슬을 풀고,
  열쇠와 자물통을 시끄럽게 찌그럭대면서.
  그리고 공중에 높이 매달린 또 누군가의 비명소리!
  저를 제일 슬프게 하는 건 말이죠.
  잠이 들어 새벽이 어슴푸레 다가올 때,
  들리기 시작하는 이런 소리.  (너를 위해 기도하노라.)
  원컨데 제발 그런 목소리를 듣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자비를 저에게 베푸시어.
  그리고, 대인이시여,
  이제는 그만 이 끔찍한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한 수의 시는 다른 시를 부르는 법.  그는 소네트 하나를 더 지어 앞의 것과 함께 보냈다.  혹은 며칠 뒤에 보낸 것 같기도 한다.  여기서 그는 마치 뮤즈가 감옥으로 자신을 찾아와 그렇게 신세 한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그가 이름을 대자, 뮤즈는 그를 꾸짖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콜로나니!  당신은 다초야.
  다리며 발꿈치며 모두 꼼짝달싹 못하고
  광인처럼 사슬로 채워져 있는 걸 보니.
  안드레아 다치(위의 시에 나오는 다초가 지칭하는 실제 인물-옮긴이)는 제1서기장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의 학생으로, 당시 정체가 심한 편이던 피렌체 문필계란 바다에서 어떻게든 떠 있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이 농담은 재치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재기가 넘치는 줄리아노에게 틀림없이 즐거움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3월 7일 재판이 끝났다.  발로리와 폴키는 2년 간 볼테라의 지하 감옥에 갇히는 벌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단기간의 추방이나 벌과금의 형을 받았다.  니콜로는 다시 숨쉴 수가 있었다.  그는 자유를 되사기 위한 돈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풀려난 것이 오직 소네트 덕분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사실 그는 뒤에 가서 자신의 방면이 줄리아노와 파올로 베토리 덕이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었다.  줄리아노에게 소네트와 그의 시인됨을 잘 말해 주어 그로 하여금 더 심한 벌을 받지 않도록 해준 사람이 바로 파울로였을 것이다.
  한편, 2월 21일 줄리오 2세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카포니와 보스콜리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인 22일에 메디치 추기경은 로마를 향해 떠났다.  3월 6일 교황 선출 회의에 들어갔던 그는 11월 레오네 10세라는 이름의 교황이 되어 나왔다.  그 소식은 정말 놀랍게도 바로 그날 안으로 피렌체에 전해졌고, 이제 모든 사람들이 메디치파로 변했다.  그들은 각각 동료 시민으로서 씀씀이가 후한 교황으로부터 공사 양면으로 기대할 만한 명예와 이익을 떠올리고 있었다.  피렌체는 광란의 상태에 빠졌다.  광장에서, 거리에서, 가가호호 문 앞에서, 닷새 동안 쉬지 않고 축제의 화톳불이 타올랐으며, 태울 만한 땔나무나 나뭇단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마루판이나 지붕의 나무 판자, 나무 통, 목가구까지 태웠다.  흡사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 것 같았다.  때는 사순절(참회의 상징으로 머리에 재를 뿌리는 성회례를 시작으로 부활절 전야에 이르는 40일 간을 말함.  황야의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는 뜻에서 단식과 참회를 함-옮긴이) 기간이었으나, 사람들은 마치 사육제라도 되는 양 가장행렬용 마차들을 만들어 매일 저녁 메디치 가 건물 앞에서 그것을 하나하나 불태웠다.  평화의 여신을 모신 마지막 남은 마차 한 대는 새 교황 아래서는 전쟁이 끝난다는 뜻에서 불태우지 않았다.  감옥 문이 열렸고, 모의죄로 형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벌과 금과 잔여 형기 모두가 면제되어 방면되었다.  곧이어, 소데리니까지도 사면되었다.
  그래서 (이 도시 전체가 환희의 도가니에 빠진 가운데), 마키아벨리는 그 악취 나는 감옥에서 풀려나 이미 봄의 향내가 풍기는 피렌체의 감미로운 미풍을 맛볼 수가 있었다.  그는 마치 오랜 중병에서 회복되어 다시 생명을 얻은 기분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도망쳐 나오 삶에 대한 새로운 욕구를 느낀 것이다.  2일 간을 차꼬에 묶여 있던 후에 다시 맛보는 자유란 더 기쁜 것이었다.  심연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어가다가 그 충격에서 겨우 벗어난 그는 이제 그 비탈을 다시 기어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 (메디치 군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여들여 그들에게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의심을 총애로 바꾸어놓아야만 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기 작가들과 문학사가들의 견해화는 반대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축복받은 영혼들에 대한 찬양 Canto degli Spiriti beati)의 저술 시기를 바로 이 당시로 비정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앞서 언급했던 평화 여신의 개선을 노래학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시를 쓰려고 했더는 것은 하등 놀랄 일이 못 된다.  투옥중에도 풍자 조의 시구들을 읊었던 그가 아니던가.  그것은 사육제의 노래라는 이름을 붙임직한 것들 중에서 사육제적 분위기와는 가장 거리가 먼 작품이며, 사실 종교적인 냄새까지 풍긴다.  여기서 그는 전임 교황의 통치기 동안 그리스도교 신앙을 피로 물들였던 긴 전쟁을 한탄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과오를 범한 사람들에게 보여주라
  우리 주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롭게 삶으로써.
  그는 또한 신의 증오와 분노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주께서 당신의 왕국을 보시니
  점점 사그라드는구나.  당신의 양떼까지도.
  새 목자가 잘 인도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를 (새 목자)로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다른 수단도 강구하고자 했다.  그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쓴 3월 13일자 편지에서, 베토리가 (하지도 않았던) 일을 들먹이며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한 다음, 교황의 시종이 되고 싶어하는 동생 토토를 추천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가능하다면 나를 교황 성하의 기억 속에 넣어두어 당신께서든 당신의 가족들이든 나를 쓰고자 생각하도록 해주게나.  그리 된다면 나는 기필코 자네에게 명예가 되고 나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네.)  그러나 베토리는 자신이 마키아벨리의 일을 추기경에게 말씀 올리기 위해 교황 선출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중 피사 원병에 참가하게 되는 바람에, 막상 그가 풀려나왔을 때는 알지 못했다고 변명하면서, (이전에 닥쳤던 다른 불운들도 참아내었던 것처럼, 이번의 박해도 오히려 기쁜 마음르로 털어내버리라)고 위로하고 (언제나 낙담만 있는 것은 아닐 거라)며 희망을 가지라는 듣기 좋은 말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단지 말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따뜻함에 마키아벨리는 기운을 차렸고 다시 희망을 되살리게 되었다.  그는 3월 18일 친구에게 답장을 쓰는데, 여기서 그의 마음과 그의 펜은 최근 자신을 덮쳤던 사건들로 되돌아간다.  (운명에 감연히 맞서는 일에 대해서라면, 난 나 자신의 불운으로부터 자네가 무언가 즐거움을 얻길 바라겠네.  나는 그러한 불운을 꽤 잘 이겨냈기 때문에, 나 스스로에 대해 기쁘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놈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일세.  그리고 만약 새로운 주인께서 내가 여기 이대로 있지 않도록 해주신다면, 나는 분부를 기꺼이 받들어 당신께 기쁜을 주는 방향으로 노력할 수 있다고 확신하네.  만약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난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만 하겠지.  원래가 빈한하게 태어나서 즐거움보다는 궁핍을 먼저 알게 되었던 나니가 말일세.)  이러한 말을 여기에 옮기는 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를 대하는 독자들 역시 바로 이 말 때문에 그를 반드시 더 좋아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렇듯 보편적인 기쁨을 느긋하게 맛보면서, 꿈꾸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생의 나머지를 즐기겠다)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삶에 대한 그의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 그를 더 좋아하게 될 것이다.
  이 꿈 저 꿈 속에서 대사 친구가 교황에게서 얻어다줄 도움을 기다리는 한편, 그는 자신이 직접 줄리아노에게 스스로를 알리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산탄드레아에서 잡은(사냥 시즌의 마지막 무렵에!) 개똥지빠귀를 새로 지은 소네트 한 수와 함께 그에게 보낸 것도 아마 바로 이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통상적인 경우와는 달리, 선물 때문에 소네트를 지은 것이 아니라 소네트 때문에 선물을 한 것이었다.
  줄리아노 님, 여기 몇 마리 개똥지바귀를 보냅니다.
  이 선물이 귀하고 좋아서가 아니라
  가엾은 마키아벨리를 잠시라도
  대인께 생각나도록 하기 위해.
  그는 계속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이 이 새들을 보내는 것은, 만일 그의 주변에 남을 (깨물고) 중상모략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깨물게) 하여 더 이상 남을 (깨물지) 못하다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새들이 보잘것없는 크기라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저 역시 보잘것없지요.  그들도 알다시피.
  하지만 저를 멋있게 한 입 가득 베어먹었죠.
  줄리아노가 그에게 호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맙다는 말이나마 전해주었는지 어떤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호의의 샘, 아니 아리오스토의 풍자에 나오는 호의의 우물은 로마에 있었으나, 그곳에는 아이의 대부에다가, 스스로 친구라고 말하고 그러한 샘을 두드릴 만한 최상의 위치에 있던 한 인물, 프란체스코 베토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엾은 마키아벨리)에게 돌아갈 물은 없었던 것이다.  피렌체인 교황의 귀를 열게 하고 그의 호의를 받아내는 데 피렌체인들의 대사 이상 더 적당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베토리는 3월 30일자 답장에서, 자신은 별로 교황의 총애를 받고 있지 못하며, 단지 명목적이고도 의례적인 일에 불과한 토토에 대한 부탁조차도 확답하기 힘든 지경이라고 썼다.  물론 그가 실제로 마키아벨리를 위하여 이러저러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도저히 친구에게는 그대로 전하기 힘든 대답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성품으로 볼 때, 교황의 나쁜 성질을 보았거나 그러리라고 짐작하면서 아예 그토록 골치 아픈 일에는 뛰어들려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편지는 그렇지 않아도 의기소침한 니콜로를 더욱 절망의 늪으로 빠뜨리고, 마지막 남은 한 줄기 희망마저도 빼앗아가 버렸다.  그는 베토리에 대한 답장에서, 그가 전해 준 쓰디쓴 소식에서 느껴지는 대로 무언가 경계하고 무언가 속 시원히 털어놓지 않는 답답함이 그를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괴롭고 당황스럽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나 토토의 교황 시종 건에 대해서도 더 이상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그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하고 있지 않네.  그리고 만약 토토가 시종 명단에 오를 수 없다면, 되는 대로 그냥 놔두게나.)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분명히 말하건대, 내가 부탁한 이 모든 일 때문에 자네가 조금이라도 불편해하지 말기 바라네.  만약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자네에게 화내는 일은 없을 것이네.)  물론 그는 그만한 일로 화낼 사람은 아니었다!  이 편지를 베토리의 답장과 비교해 볼 때, 마키아벨리의 사람됨이 그보다 얼마나 더 크게 보이는가!
  그러나, 비록 그가 그토록 희망에 부풀어 시작한 친구와의 서신 교환에서 아무런 실질적 이익도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와 더불어 세상사를 논하는 재미였다.  하지만 이 재미도 스스로가 기대했던 것과는 항상 반대로 움직이는 듯한 사건들 때문에 점점 시들해져 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지금가지 자네의 머리를 망상으로 가득 채우는 일만 한 셈일세.  어쩔 수 없었던 것이, 나의 운명은 비단이나 양모 짜는 기술에 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고 잇속을 남기거나 밑지는 일에도 문외한이니, 정치에 대해서밖에 더 얘기할 수 있었겠나.  아예 입을 닫고 있든가 이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든가를 내 자신부터 결정해야겠네.)  그는 편지 말미에다 다음과 같이 씁쓸한 서명을 남겼다.  (전 서기장 니콜로 마키아벨리.)
  그가 베토리에게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면, 피렌체식의 걸쭉한 농담이나 서로 아는 친구들에 대한 재미있는 주변사를 전하곤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이 농담 조의 말 중간에 페트라르카의 시구를 불쑥 들이밀고 있다.
  때로 내가 웃고 노래한다 해도
  그건 단지 이렇게 하는 것이
  내 괴로운 눈물을 감출 수 있기 때문이지.
  이렇게 그의 웃는 얼굴 뒤에는 슬프고 불행한 얼굴이 숨어 있다.  그를 시들하게 만드는 것은 어떠한 노고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에게 주어진 무위도식적 삶이었다.  그의 정신은 훼속되고, 궁핍은 먹여 살려야 할 입들이 기다리는 그의 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으며, 형편이 좋았던 때에 토토와의 거래를 위해서 별 무리 없이 빌렸던 빚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처디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처럼 자신이 품은 단 하나의 희망으로 옮아간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내가 만일 피렌체 영토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교황이 잘 있는지 어떤지를 물어볼 수 있을 텐데.)  한때 마키아벨리를 후원하고 칭찬해 주었던 소데리니 추기경도 로마에서 호의를 보여준 바 있었다.  지금은 (교황과 매우 껄끄러운 처지가 되어 있긴)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교황 레오네에게 추천해 주십사고 추기경에게 글을 써야 하는지, 혹은 베토리가 말로 전하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안하는 편이 좋을지를 물었다.  베토리는 아무것도 안하는 쪽이 낫다고 조언하면서, 추기경의 호의는 행동이 귀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말 뿐이었고, 설사 그가 추천해 준다 해도 그것은 공연히 소데리니 가와 서기장 사이의 옛 관계를 되새기게 해서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현명한 조언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더 이상 자신을 가두어놓을 수 없었다.  그는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4월 16일, 그는 친구에게 줄리아노가 로마로 가고 있음을 알리면서 다시금 자신의 존재를 생각게 한다.  (물론 자네는 그로 하여금 나에게 호의를 가지도록 할 만한 길을 알고 있겠지. (...)  확신컨데, 나의 경우를 솜씨 있게만 다루어준다면 내가 어떤 일에서든 쓰임새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걸세.  피렌체가 아니라도 좋네.  아니 의심을 덜 받는 로마나 교황청에서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  일단 교황 성하가 나를 써주기만 한다면 내가 왜 나 자신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이익이 되도록 처신하지 못하겠나.  내 이 글을 쓰고 있네만, 그렇다고 내가 꼭 이러한 것들을 열렬히 바라서는 아니네.  또 자네가 나로 인해 어떤 손해나 괴로움을 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네.  하지만 이런 내 기분은 헤아려주었으면 고맙겠네.)
  그러나 베토리는 이렇게 집요한 마키아베리의 요청에 당황했고, 답장에서 이야기 주제를 얼른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가엾은 친구의 마음을 푸는 길은 정치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길뿐이었다.  편지는 골치 아픈 문제는 제껴두고 온통 정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그것에 빠져 들어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궁핍을 잊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국의 군주들은 여전히 심하게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베토리 역시 그 결과의 에측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터라, 마키아벨리를 부추겨서 그의 날카로운 판단을 듣고 싶어하였다.
  (에스파냐 황)의 행동을 둘러싼 많은 추측들이 있었다.  프랑스 왕은 알프스 너머에서 영국 군과 에스파냐 군에 패하여 이탈리아 내에 겨우 소수의 성만을 남기고 축출된 데다 황제와 스위스와 베네치아를 여전히 적으로 돌리고 있던 중에, 그와 에스파냐 왕 사이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줄리오가 크게 분노함으로써 그는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사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거의 믿지 못할 대 사건이었다.  이는 프랑스로 하여금 알프스 이쪽을 칠 수 있도록 손을 풀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직후, 베네치아와 프랑스 간에도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로써 프랑스는 이탈리아로 진입하여 밀라노 공국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한 셈이었다.  당시 밀라노는 명목상 마씨밀리아노 스포르차의 이름을 내건 교황 연합군의 지배 아래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스위스가 주인이었다.
  베토리는 여우 같은 에스파냐 왕이 아무런 이유 없이 협정에 서명했을 리는 없기 때문에, 그 속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커다란 음모가 숨어 있으며 따라서 이 협정은 가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평상시보다 두 시간이나 더 침대에) 머물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도 여전히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자, 결국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눠본 어떤 사람보다도 나은) 자신의 친구에게 의견을 물어보기로 작정하였다.  마키아벨리에게 그와 같은 것을 묻는다는 것은 곧 그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러한 재능을 인정해준다 함은 곧 그에게 새 생명을 주는 일에 진배없었다.  그가 자신을 되살려놓을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당시 그는, 정무궁의 계단을 오르락거리며 그 귀찮고 쓸데없는 장부 계산 일에 시달린 이후, 로마에서의 희망조차도 친구가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가슴이 스렸던 데다 도시에서의 생게 비용도 대기 힘들고 매일같이 빈둥거리는 것도 싫어서, 산탄드레아에 있는 자신의 허름한 시골집으로 물러나 있던 참이었다.  그는 이제 정치에 관해서는 생각도 얘기도 하지 않으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뱃사람의 맹세에 불과하였고, 대사 친구의 편지를 받자 그는 한순간에 옛날의 그로 다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이렇게 실토하였다.  (내가 그것을 읽고 또 읽는 동안, 나는 지금의 불행한 처지를 깡그리 잊은 채, 내가 노고를 마다 않고 헛되이 쫓아다녔던 옛날의 사건들 속으로 되돌아간 듯했다네.)
  마키아벨리는 4월 29일자로 보낸 답장에서 매우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에스파냐 왕이 휴전 협정을 체결해 준 이유와 그로부터 초래될 결과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이는 역시 날카로운 베토리의 예상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매우 흥미 있게 읽었으나, 그의 생각은 재기가 넘치는 만큼 현실적이지는 않다고 판단한 것 같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말은 많은 사라들에게 그렇게 비쳤고 또 종종 실제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석 달 뒤, 프랑스 왕이 다시 한번 이탈리아로 침입해 들어와서는 또다시 밀라노 공국을 힘들이지 않고 빼앗았다가 어이없이 내주는 일을 반복하자, 베토리는 마키아벨리의 편지를 꺼내어 재차 읽어보고는 칭찬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예언자는 (시골집으로 물러나 사람의 얼굴을 멀리한 채), 외부로부터의 소식과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절연당한 어둠 속에서도 군주 제후들의 생각과 장래의 행동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제14장 산탄드레아의 (여가)-리비우스 논고와 군주론
  페르쿠시나 지방의 산탄드레아는 dpt 로마의 우편도로 부근에 자리잡은 조그만 마을로, 피렌체에서는 7밀리오, 산 카쉬아노에서는 2밀리오 떨어져 있다.  작은 교구 성당, 여인숙으로 사용되는 집 한 채, 이와 담을 같이 하고 있으면서 속칭 영주관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오막살이에 가까운 건물, 뒤쪽으로는 옹기종기 농가들이 박혀 있고 길 건너 편으로는 기름 짜는 곳, 빵 굽는 곳, 빵 굽는 곳, 농번기에 쓰는 움막, 외양간 등으로 쓰이는 집들을 거느린 군데군데 허물어진 성벽과 망류들, 농장 일꾼들이 기거하는 오두막집 등이 흩어져 있다.  이 집들, 이 농가들, 그리고 (보르고) 또는 (스트라다)로 불리는 이 농장과 (포초)라 불리는 또 다른 농장, 몬테풀리아노와 폰탈레의 땅들, 이러한 것들이 이제는 시골집에 살며 농장 관리인을 겸한 피렌체 서기장의 작은 왕국인 셈이었다.  영주관은 그 옆의 여인숙을 본따 (알베르가초 Albergaccio)(초라한 여인숙이라는 뜻-옮긴이)라 불렸는데, 이 말은 그 두 건물의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산 카쉬아노로 이어지는 길의 오른편에도 소유지가 있지만, 그 크기는 보잘 것 없었다.  그 소유의 땅과 포도밭, 올리브 과수원, 숲 등 모든 것이 자그마한 마을로부터 그레베란 이름의 개천에 이르는 남쪽 사면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이 모든 광격이 여름에는 물이 말라 하얀 자갈을 해골처럼 드러내는 계곡 낮은 곳에서 바라다보였다.
  (모든 것을 잃은 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제 더 이상 정치에 대해 생각하거나 논하지 않기로 작정하고서) 그곳에 은거하였다.  여기는 그 어두침침한 감옥 생활 이후 자신이 택한 푸른 숲과 햇빛이 있는 유폐의 장소인 셈이다.  그곳은 그가 어린 시절 뛰놀던 땅일 뿐 아나라 조상들에게도 친숙했던 땅이다.  하지만 처음에 그는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이 어쩐지 즐겁지 않고 오히려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곳은 인생의 황혼기쯤이면 활동에서 은퇴하여 마지막 여가의 나날들을 조용히 즐기기에는 적당한 장소로 보였다.  물론 활력이 최고조에 달한 인생의 절정기엔 어울리지 않겠지만 말이다.  시골의 단순소박한 생활이 그에게는 자신의 재능의 방향과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무릇 사람들이 위대함네 하고 내세우는 생각들이 자연의 눈으로는 얼마나 하찮고 덧없는 것인지를 정작 그들 자신은 알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시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 토스카나의 시골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소박한 듯하면서도 잡다하고 부드러운 듯하다가도 거친 것이 웃음과 울음을 왔다갔다하는 그의 종잡을 수 없는 기질과 꼭 닮지 않았는가!  그와 같이 오랜 부재 뒤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그곳의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도 몰랐던 자기 자신의 한 부분을 되찾게 된다.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것은 단지 해와 바람과 석양과 여명만이 아니다.  가장 소박한 것들, 개천에 깔린 단순한 고동이며 꽃 향기며 들풀 냄새며 새의 지저귐 소리.  바로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무뎌지고 비틀린 우리의 감각을 되살려주는 것이다.  흙을 밟고 만지고 들풀과 나무 뿌리 냄새를 맡음으로써 사람들은 안테오스(Anteo, Anteos, Ant(a)eus 등으로도 표기됨.  그는 포세이돈과 대지의 어머니 사이에서 난 거인으로, 리비아의 왕.  레슬링의 명수였으나 헤라클레스와 싸워 죽임을 당함.  여기서는 그가 대지에 접함으로써 힘을 얻은 사실을 비유한 것-옮긴이)의 신화를 되살려내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것들과 함께 있었다.  그토록 많은 고통과 근심을 겪은 뒤, 그는 이제 그처럼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 자신의 불행은 이제 독침을 거두고 오히려 행동의 활력소로 변했다.  계속 되는 그의 내키지 않는 여가가 그렇게 바뀌었듯이 겨울 동안의 오랜 휴식 끝에 기지개를 켜는 주변의 나무며 들풀들처럼, 이전에는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것들로 가득 찬 그의 마음도 싹을 틔워 나갔다.  베토리의 편지들 역시 그의 생각을 정치로 돌려놓는 첫 번째 자극이 되었다.  휴전 협정에 관한 4월 29일의 유명한 편지로 인해 침묵하겠다는 그의 결심은 흘러가 버리고, 그리하여 5월 모두와 6월 일부 동안의 시간 간격 뒤에 그들은 다시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7월 12일, 대사 친구는 주제의 성격 자체는 여전히 늘 보던 것이지만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난 자네와 함께 이 세계를 뜯어고치고 싶네.  전부가 안 된다면 일부라도 말일세.  물론 이는 머릿속으로 하기도 힘든 일이라, 설사 그것이 실현된다고 해도 나는 믿지 못할걸세.)  서두를 이렇게 뗀 그는 열강드리 처한 상황과 그들의 의도에 관해 얘기한 뒤에, 전 서기장에게 (펜으로 평화를 만들어내 보라)고 권유하면서 글을 끝맺었다.  이렇게 해서 두 친구는 7월과 8월 내내 서로 편지를 교환하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머릿속에서 평화 조약 안을 구상하였다.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이러했다.  마음이 선해서가 아니라 의심이나 어떤 술책의 일환이겠지만 어쨌든 계속 중립을 지키고 있는 교황이 프랑스 왕과 연합하고 대신 왕은 밀라노 공국을 반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생각을 가진 베토리는 8월 20일자 편지에서, 먼저 세상 소식으로 이 추방객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 뒤, 마키아베리와는 반대의 입장에서 자신의 평화 안을 뒷받침하는 논증을 펼쳐나갔다.  니콜로는 다시 8월 26일자 편지에서 마치 친구를 놀리는 듯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편지를 보고 처음에 그는 논증이 질서가 있고 복잡다단한 데 놀랐으나, 다시금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신이 여우로 본 것을 그는 사자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깜짝 놀라죽을 뻔했고, 그 다음에는 걸음을 멈추고는 덤불 뒤에서 그를 지켜보다가, 결국 말을 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곧 (프랑스 왕을 바보로 여기고 반면 영국 왕은 대단한 인물쯤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범한 그를 책망하는 셈이었다.  또다시 마키아벨리의 판단은 옳았다.  물론 그는 나라가 자신의 군대를 가져야만 강해질 수 있다는 지론으로 주제를 벗어나기도 하고,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공화국에 대해 말했던 것들은 무시하기도 함으로써, 베토리가 투르크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스위스에 대한 환상 속에 바지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였다.
  여우의 우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또는 응담 거리가 없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군주 제후들이 백성들의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간의 그 쓸데없는 경쟁을 계속함으로써 연일 새로운 생각 거리를 만들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토리는 이 편지에 답하지 않은 채 몇 달 간이나 소식을 뚝 끊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그를 자극하거나 도발하려는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편지를 쓰지 않았다.  이제 그는 자신의 여가와 생각을 다른 일에다 쏟아붓고 있었다.  그는 결국 자신만의 길, (지금까지 아무도 밟지 않을 길)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지체없이 그쪽으로 나아갔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아마 발렌티노 진영에 사절로 가 있던 당시쯤부터, 짧지만 가끔 생기는 (일 사이사이의 짬 otia inter nogotia)(otium=ozio(짬, 여가, 나태, 무위도식)와 nogotium=negozio(일, 바쁜 행동)는 서로 대립 개념으로, 르네상스 정치철학에서는 각각 명상적, 관조적 생활 vita contemplativa과 활동적, 행동적 생활 vita activa로 대변되는 두 개의 대립적 세계관을 뜻하기도 한다-옮긴이)을 이용하여 인간 행위에 대한 자신의 잊지 못할 경험들을 기술하고 그것을 고대인의 경우와 비교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천재성은 때로는 경험을 통해 또 때로는 직관을 통해, 스스로를 과거사에 깃들인 (역사의 풍미)를 음미하고 그로부터 신과학의 일반적 원리와 규칙들을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로 만들어갔다.  그의 주장이 기반하는 제일 원리는 인간 본성이란 그 속에 담긴 욕망과 악덕, 약점이나 미덕과 함께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과거의 모든 혁신자들이 주장한 것들이 거의 그랬듯이 수정되어야 할 여지가 있는 이론이라는 점은 인정되지만, 그 자체로서 어떤 진실의 일면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류를 범한 바로 그 부분조차도 진실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제일 명제가 그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은, 그가 과거사를 재독 삼독하면서 이러한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를 자신의 (오랜 경험)과 비교하여 (역사의 풍미)를 발견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대한 주석 작업에도 힘입은 바 있었다.  이 주석들은 원래 인쇄업자인 니콜로 델라 마냐가 마키아벨리의 아버지 메쎄르 베르나르도에게 주었던 리비우스의 같은 책, 어린 니콜로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일찍부터 보아왔던 바로 그 책의 넓은 여백에 씌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불운에 처한 그는 (시골집으로 물러나 사람의 얼굴을 멀리한 채), 나태와 불행과 필요성의 느낌이 뒤섞인 속에서 그 책을 다시금 뒤적거리게 되었을 것이고, 앞서 써놓은 위에다가 이제는 갖가지 생각으로 가득 찬 자신의 심중을 덧붙여 나갔으리라.  그리하여 그는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10권에 대한 주석의 형식을 빌려 공화국에 대한 노고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비록 첫 발상부터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초지일관 주석의 형태를 유지하였지만 말이다.
  이 저술은 여러 해에 걸쳐 띄엄띄엄 진행되어 나갔지만 결코 포기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여가 초기에 느낀 집필 충동 속에서 이미 그 일부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가 발간자의 열성으로 글에 매진하는 모습을 본다.  고대나 현대의 역사적 사실이 스스로 제시했던 이론, 그러리라 예건했던 진실을 확증하는 새로운 보기가 되었을 때, 저술에 대한 그의 열기와 희열은 더욱 커졌으리라.  그는 자신이 착수한 작업의 위대함과 새로움을 깨닫고 무한한 흥분을 느꼈다.  그리고 (미지의 바다와 땅을 탐색하는) 사람에게 으레 닥치는 위험을 스스로 예견한 그의 마음은 거의 두려움 같은 것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이론들과 사상적 논리성으로 엮여 있는 이 책의 저술에 몰입해 있는 동안, 자신이 접하고 있었던 역시 마찬가지로 모호한 재료로부터 다른 또 하나의 저작이 싹을 틔우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물병처럼 매우 구체적이고도 짜임새 있는 모양에다, 칼처럼 직설적이고도 날카롭다.  그의 마음은 자신의 시대와 나라와 혈통과 신분 때문에 언제나 평시민 국가에 쏠리고 있었고, 이러한 경향은 로마 세게에서도 그가 애호하는 유일한 존재인 로마 공화정의 행적을 좇아 오래도록 키워온 것이었다.  그러나 앞을 내다보는 그의 지성은 이탈리아가 자신의 이러한 마음과는 달리 군주국의 시대로 옮아가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가 군주국에 대해 논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던 셈이다.  바로 그 당시, 그가 리비우스에 대한 (논고)의 집필에서, 자신의 눈을 고대 로마로부터 당대의 이탈리아 도시들로 돌려 (부패한 민족은 설사 자유를 얻는다 해도 그것을 보존하기란 극히 어렵다)라고 말한 장에 다다랐을 무렵, 그는 (그 사지가 모두 부패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무력이나 군대롸 같은 비상 수단에 호소하고, 나아가서 스스로를 군주국으로 변신케 하는 일)이었다.  오직 어떤 (신국주)만이 그 썩은 사지를 되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필시 그러한 군주에게서만이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구원자)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10년 전, 발렌티노는 운세와 한 교황의 도움으로 그 일에 거의 성공할 뻔하였다.  보르자 가가 사라진 후, 줄리오 2세는 교회가 이탈리아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지금 교회는 교회의 힘에다가 피렌체국의 힘까지 더한 한 피렌체인의 손에 놓이게 되었다.  그에게는 아직 젊은 나이지만 권력을 쥐고 싶어하는 남동생과 조카가 있으며, 그 자신 역시 (하늘과 운세의 비호)를 비할 바 없이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산탄드레아의 은둔객은 마음속으로 공화국에 관한 앞의 책을 일단 제쳐두고 (군주국에 관한) 책, 즉 (군주론)을 쓸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오직 하나, 비르투만을 제외하고는 (신군주)로서 기대되는 다른 모든 조건들을 다 같춘 것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바치려고 작정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의 책에서 세습 군주국에 대해서는 휙 지나쳐 버리고 비르투에 의해 얻은 군주국의 경우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좋은 운세 덕분으로 얻은 군주국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발렌티노의 경우에서 또다시 되풀이된 사실이었다.  이탈리아의 운명은 그때마다 이들의 어깨에 달려 있었을 법하며 마키아벨리 자신의 운명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다.  이탈리아! 당시로서 그것은 단지 시인에게만 바쳐진 이름이었다.  이를 하나의 정치적 개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인이면서 동시에 정치가인 한 인물이 필요하였다.
  마키아벨리가 줄리아노 앞에 펼쳐 보이려 하는 군주의 전범은, 그가 (역사의 풍미)를 맛보고 있다고 볼 때, (칭송될 만하다고 누구나가 생각하는) 신적, 인간적 교의들을 같춘 인물이 아니라 시대 상황에 따라 바람직한 결과를 이룩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이 구원자를 어떤 구원의 난제로 이끌어, 사악함과 싸우고 사악한 자들과 겨루며 찬탈자를 다시 찬탈하는 과업에 착수하였다.  장군은 단지 군사적 측면에서만, 과학자는 단지 과학적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이론이 전개되어 나가는 데 이절적인 도덕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를 인도하는 것은 오직 강철 같은 놀리뿐이었다.  그가 국가의 승리에 대해 고찰할 때, 그에게 문제되는 것은 오직 국가뿐이며, 종교조차도 국가에 의해 조직되고 또 그 아래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의 과제가 사보나롤라의 경우처럼 사람들의 복음속에 신앙의 승리를 심는 것이라면, 똑같이 냉혹한 논리가 그를 와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이었다.  전쟁이 꼭 필요하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이며, 어떤 군주가 자신의 잔혹함으로 백성들에게 닥칠 더 큰 잔혹함을 막을 수 있다면, 그의 행위는 자비로운 것이다.  무릇 행위란 그 성격이 어떠하든간에 신성한 결과로 이끌어진다면 신성한 법이다.  그 유명한 마지막 권고가 마키아벨리의 책을 불경하고도 잔혹한 교의들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처럼, 결과는 그것을 있게 한 행위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탈리아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온 구원자와 이제 막 만나게 된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됩니다.  이들 외적의 침입으로 고통받던 모든 지방 사람들이 어떤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맞을지, 또 얼마나 복수심에 목말라하면서 굳건한 믿음과 경건함과 눈물로써 그를 대할지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어떤 문이 그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그를 경재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질시의 감정이 그를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탈리아인이라면 그를 경모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야만족의 지배가 방방곡곡에 뿌려대는 그 고약한 냄새란! 그러므로, 부디 대인의 고명한 가문이 정당한 일을 한다는 기백과 희망을 가지고 이 과업을 압장서 맡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대인의 깃발 아래 이 나라가 고격함을 되찾고, 대인의 영도 아래 일찍이 페트라르카가 읊조린 다음과 같은 희망이 실현되도록 이끌어주옵소서.
  광포함에 맞선 덕성이
  이제 무기를 잡으매, 싸움은 곧 끝나리니.
  옛날의 용맹함이
  이탈리아 사람들의 가슴속에 아직 살아 있으므로.
  꿈의 피륙 위에 다시 짜인 마키아벨리의 새로운 정치 교의들은 이렇게 마지막의 감정적인 호소 속에서 시의 세계로 들어온다.  몽테스키외는 마키아벨 리가 발렌티노라는 우상에 홀딱 빠져 있었다고 말했지만(법의 정신 29권 19장-옮긴이), 사실 (군주론)에서나 그 이전부터나 그가 빠져 있었던 것은 발렌티노가 아니라 자신의 (신군주) 개념이었다.  그가 메디치 가와 보르자 가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이탈리아의 구원이라는 자신의 원대한 꿈을 가로막지는 못했으리라.  물론 그도 인간이기에 스스로도 구원받기를 바랐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꿈속에서 그의 저작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완결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마키아벨 리가 등불 아래서 자신이 간직해 온 에 생각들과 이제 새로이 가지게 된 교의들의 아직은 형제 없는 덩어리로부터 끌을 힘차게 움직여 (군주론)에 담긴 개념들을 조각해 냈던 저녁의 나날들이 있었다.  아마 불운의 깊은 나락에 바진 어느 누구도 그 저녁의 마키아벨리만큼 행복감에 젖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일에 푹 빠져 다른 아무것도 생각지 않았다.  그가 피렌체로 나갈 때는 무슨 보릴이 있거나 책을 구하려는 경우뿐이었다.  베토리에게는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11월 23일,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편지를 보내옴으로써 둘 사이에 다시 편지를 오가게 한 것은 그의 친구 쪽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주저들 모두가 사람들의 악의와 냉담함과 이기심 덕분이라는 것은 그의 운명이었다.  메디치 가는 그를 관직에서 내쫓고 감금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무관심과 궁핍 속에 내팽개쳤으나, 그는 (군주론), 리비우스 논고), 그리고 그 밖에 영원히 기억될 다른 많은 글들이 나온 것은 바로 이 메디치 가 때문이었다.  (흔히 말하듯이) (단테가 망명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면 (신곡)은 있을 수 없었을 것처럼, 마키아벨리도 역시 정치로부터 추방되지 않았다면... (그의 저작들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베토리의 덕도 많이 본 셈이었다.  그는 자신이라면 분명히 줄 수 있었을 법한 도움을 주지 않음으로써,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불행 속에서도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였고, 더욱이 그에게 그렇게 할 일없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로 하여금 답장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조소와 탄식 사이에 놓인 최고의 명품들이었다.  그러나 베토리는 무엇보다도 앞서 이미 언급된 자신의 11월 23일자 편지를 통해,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이탈리아 문학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편지를 쓸 기회를 주었고, 나아가서는 그 내용의 윤곽까지도 제시해주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 대사 친구는 언제나처럼 나태하고 할 일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로마 생활이 편안하기는 하지만 아무 쓸모도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마키아벨리는 이에 답한 12월 10일자 편지에서 이번에는 스스로의 생활 모습을 적고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자신이 직접 덫을 놓아 개똥지빠귀를 잡았다.  해돋기 전에 일어나 올가미를 만든 다음, 등에다 한 무더기의 새장들을 걸치고는 마치 (암피트리온의 책을 가지고 항구에서 돌아오는 제타) (이 비유는 15, 6세기에 유행했던 8행시 형식의 노벨라 (제타와 비리아 Gete e Birria)에서 따온 듯하다.  이 이야기는 플라우투스의 (암피트루오 Amphitruo)에 근거하고 있는데, 여기서 암피트리온 Amphitryon은 그의 하인인 제타에게 책을 지워 보내면서 아내인 알쿠메나 Alcumena에게 자신이 곧 돌아간다는 소식을 알리도록 했다.  하지만 몰래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려는 주피터의 계획은 알지 못한채였다.  플라우투스의 작품에 나오는 하인의 이름은 소시아이지만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테렌티우스의 작품 (포르미오 Phormio)에서는 제타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마키아벨 리가 자신을 제타에 비유한 데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볼 것. John M. Najemy, "Machiavelli and Geta:Men of Letters" in Machiavelli and the Discourse of Literature, eds. Albert Ascoli & Victoria Kahn (Ithaca:Cornell Univ. Pr., 1993); Najemy, Between Friends: Discourses of Power and Desire in the Machiavelli-Vettori Letters of 1513-1515 (Princeton: Princeton Univ. Pr., 1993), pp. 221-230-옮긴이)처럼 떠나곤 했던 것이다.  11월은 내내 그렇게 흘러갔다(원문에 대한 나의 새로운 해석에 따르면 이렇게 생각된ㄷ).  하지만 개똥지빠귀의 이동이 끝나자 유감스럽게도 (좀 궂고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소일 거리였던 이 일마저도 함께 끝나고 말았다.  그 뒤의 생활은 이 위대한 작가 그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말로는 내가 도저히 그릴 수 없는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는 아침에 해가 뜨자마자 일어나 요즘 베어내고 있는 내 소유의 숲으로 가네.  그곳에서 두어 시간 머물면서 전날은 얼마나 일을 했는지도 살펴보고 벌목꾼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네.  그 축들이란 자기들끼리든 주변 사람들고든 언제나 무슨 말썽 거리라도 만들어내는 사람들 아닌가.  숲을 나와서는 약수터에 들었다가 내가 새를 잡는 것으로 가지.  나는 책을 한 권씩 끼고 다니는데, 단테나 페트라르카, 아니면 그보다는 조금 아래의 시인들일세.  왜 티불루스나 오비디우스 등속과 같은 사람들 있잖은가.  난 그들의 감미로운 정념과 그들의 사랑을 읽고 느끼지.  그리고 나의 정념과 사랑도 되새겨보지.  한동안은 이러한 달콤한 상념들 속에 잠긴다네.  그 다음엔 길로 나와 술집에 들르지.  그곳에서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말을 나누면서, 그쪽 소식을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온갖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의 잡다한 풍취와 다양한 생각들을 접하게 된다네.  그러다보면 식사할 시간이 오고, 나는 가족들과 함께 이 초라한 시골집과 보잘것없는 땅뙈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배를 채운다네.  식사를 한 뒤엔 다시 그 술집으로 가지.  그곳엔 나를 반길 사람들이 있지.  보통은 푸줏간집 한 사람, 방앗간집 한 사람, 그리고 가마 rnq는 일을 하는 사람 둘이 바로 그들이라네.  나는 이들과 아무렇게나 어울려 딱딱 소리를 내며 카드놀이를 하지.  이 와중에 수없이 오가는 말다툼과 욕석들.  그분인가.  돈 한 푼을 두고 종종 드잡이 판을 벌이는 바람에 그 고함소리가 멀리 산 카쉬아노에서도 들릴 정도라네.  이 기생충 같은 인간들 틈에 끼어 나는 곰팡내 나는 머리를 씻고 내가 처한 이 불운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려 하지.  운명의 여신은 나를 이처럼 짓밟고 있지만, 그래도 그녀 스스로는 이를 부끄러워하리라 생각하는 것으로 자위하면서 말일세.
  저녁이 오면 난 집으로 돌아와 서재로 들어가네.  문 앞에서 온통 흙먼지로 뒤덮인 일상의 옷을 벗고 왕궁과 궁중의 의상으로 갈아입지.  우아하게 성장을 하고는 날 따뜻이 반겨주는 고대인의 옛 궁전으로 들어가, 나를 이 세상에 나오게 ks 이유이자 오직 나만을 위해 차려진 음식을 맛보면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던가를 물어본다네.  물론 그들도 친절히 답해 주지.  이 네 시간 동안만은 나에게 아무런 고민도 없다네.  모든 근심 건정을 잊어버린다는 말일세.  쪼들리는 생활도 나아가 주금까지도 나를 두렵게 하지는 못하네.  나 자신이 온통 그 시간 속에 빠져 들어가는 셈이지.  하지만 단테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어떤 것을 듣고 이해하더라도 기억 속에 넣ㅇ놓지 않으면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말일세.  그래서 나는 그들과의 이야기에서 배운 바를 일일이 써놓았다가 그것으로 (군주국에 대하여 de Principatibus)란 조그만 책자를 쓰게 되었다네...
  그의 성격이 꼭 그렇듯이, 행복과 불행, 꿈과 현실, 저열함과 위대함 등이 뒤섞인 속에서 (리비우스 논고)와 (군주론)이 태어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같은 1513년 12월 10일자 편지에서 만족감과 애정과 기대가 묻어나는 말로 친구에게 (군주론)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이 책의 내용을 늘리고 가다듬는 중이긴 하지만, 필리포 카사베키아에게 그것을 읽어봐 달라고 부탁했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그가 책을 늘리고 가다듬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책의 판본이 두 개 일것이라고 믿는 일단의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 내용을 완전히 바꾸어놓지는 않았다.  그는 또 그 책을 줄리아노에게 헌정했으면 하는데, 과연 그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저하고 있다는 말도 하고 있다.  헌정하지 않는 쪽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유로는 (줄리아노가 아예 읽어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문제가 있었고, 헌정하고자 하는 것은 (빈궁함으로 인해 받게 될 경멸)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신만의 절박한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메디치 군주들이 나를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네. 설사 돌 나르는 일부터 시킨다고 해도 상관없네.  어쨌든 내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다름아닌 내 탓이기 때문일세.  그들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내가 국정술 연구에 바친 지난 15년을 결코 잠과 놀이만으로 헛되이 보내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노고를 길잡이 삼아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의 봉사를 받는 데야 그 누군들 기쁘지 않겠는가.  그들이 나의 진실됨을 의심할 필요는 없네.  나는 지금까지 줄곧 진실된 길을 걸어왔고, 그것을 이제 와서 새삼 깨뜨릴 생각은 없네.  나처럼 43년 간이나 진실되고 바른 삶을 살아온 사람은 결코 그 본성을 바꿀 수가 없는 법이지.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이 바로 내가 진실되고 바르다는 증거가 아니고 뭔가.
  베토리는 이 멋진 편지에 대해 처음에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다시 그 일을 되새기게 하는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대답을 받기 위해 친구인 도나토의 야심찬 계획(돈을 써서 하층 계급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계획을 말함  본서 15장의 관련 부분을 볼 것-옮긴이)을 도와달라고 그에게 부탁하는 내용에다 슬적 얹어서 보낸 것이었다.  베토리는 이에 대해 12월 24일자로 답장을 보냈는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신변잡담만 잔뜩 늘어놓았다.  물론 우리의 가엾은 서기장은 이를 분명히 유쾌하게 보았으리라.  그가 처한 가난으로 이름이 땅에 떨어질 처지에 놓인 때라 그 재미는 덜했겠지만 말이다.  그가 가장 마음을 쓰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 대사 친구는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데 익숙해 있는) (리돌피의 책에는 이 구절이 (sendo a secco a faccende e a guadagnare)로 되어 있으나, 이는 (sendo asueto afaccende e a guadagnare)의 잘못으로 보인다.  베토리가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1513년 12월 24일자 편지의 원문을 볼 것.  Machiavelli, Tutte le opere, a cura 야 M. Martelli ( Firenze: Sansoni, 1971), Lettera 218, p. 1163b; Machiavelli, Lettere, a cura 야 F. Gaeta (Torino: UTET, 1984), Lettera 226, p. 434-옮긴이) 마키아벨리로서는 아직 막연한 상태에 있는 줄리오 데 메디치의 프랑스 사행 계획이 구체화된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로마에서 그가 할 만한 일이 없다는 말만 남겼을 뿐이었다.  줄리오는 노 줄리아노의 사생아로서, 최근 교황에 의해 추기경 직에 오른 바 있었다(줄리아노는 피에로의 아들이자 대 로렌초의 도생이다.  그를 노 줄리아노로 부르는 것은 대 로렌초의 셋째아들 역시 줄리아노이기 때문이다.  줄리오를 추기경으로 임명한 교황은 다름아닌 그의 조카 레오 10새 (대 로렌초의 둘째아들 조반니)였고, 그 또한 1523년에 교황 클레멘테 7세가 된다-옮긴이).  프랑스에서 옛 서기장은 그 나라와 말에 대한 지식 덕분에 쓰임새가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군주론)에 관해서는 단지 다음과 같이 차가운 말 한마디뿐이었다.  (자네가 그 책을 나에게 보내게 될 때, 그것을 헌정하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를 말해 주겠네.)
  그래도 마키아벨리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책을 가다듬는 일을 계속하였으나, 그의 고상한 관념들은 여전히 극히 대중적인 표현 속에 갇혀 있었다.  그는 치구들과의 서신 교환을 끊지 않았고, 심드렁한 편지들에는 역시 심드렁하게 답하였다.  베토리는 손님으로 초대받은 카사베키아와 브란카치가 그에게 집을 손질해서 좀 더 점잖은 분위기로 바꾸어보라고 훈계한다며 농담 섞인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그러면 그들에게 사순재식의 소반을 대접해서 잃어버린 사육제를 아쉽게 만들라고(예수가 광야에서 단식 수행한 것을 기려 부활제를 앞두고 6주 동안 술과 육식을 금하는 계율이 사순재인데, 그것이 끝날 때쯤인 사순절 직전 사흘 동안 벌이는 환락의 축제가 곧 사육제이다.  여기서는 손님들이 괜한 점잔을 빼면 아예 소식을 내놓아 그들을 골려주라는 뜻-옮긴이) 일러주었다.  베토리는 이러한 조언이 정말 참신하다고 즉각 반기면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매사에 대한 판단력만큼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처럼 작은 일에도 끼어들기를 마디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큰 포부를 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을 멋있게 필사하기 시작했고 작업이 끝나는 대로 그 중 몇 장을 서둘러 베토리에게로 보냈다.  하지만 베토리는 답장에서 늘 하던 대로의 신변잡사와 이런저런 애정 행각들만 잔뜩 늘어놓고는, 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짤막한 말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자네 책의 몇 개 장들을 보았네.  나에게는 비할 바 없이 마음에 드는구먼.  그러나 최종적인 평은 나머지를 다 볼 때까지 접어두고 싶네.)  이 침착하고 조심성 많은 대사에게는 자신이 (비할 바 없이)라고 평한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말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아직도 저술을 향한 열정에 휩싸여 있었을 마키아벨리에게는 이러한 평이 우유부단하고 차가운 것으로 느껴졌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었기에 베토리의 태도를 그리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때쯤 그는 가족과 함께 거처를 시내로 옮겼는데, 이렇게 한 데는 남은 겨울의 나날들을 좀더 편하게 보내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겠고, 더불어 자신의 책을 출판해 줄 친구들을 찾아 베토리에게 기대기보다는 좀더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 보겠다는 마음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빈 손에다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시골에 틀어박힌 지 8달 만에 가슴에 가득 희망을 품고 다시 돌아왔다.  그가 알베르가초의 서재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다름아닌 (군주론)과 (리비우스 논고)의 일부를 담은 어떤 너트 같은 것이었겠지만, 그것은 아직 사람들의 악의와 냉담함을 맛보지는 못한 상태에 있었다.
  
    제15장 사랑과 고통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피렌체는 이미 옛날의 그곳이 아니었고, 도시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시골에서 빈둥거리기보다 더 나은 바도 없어 보였다.  물론 그는 괘활한 성격에다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산탄드레아의 술집 주인이나 푸주한, 그리고 가마 굽는 친구들보다야 더 세련된 얼굴들을 보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생활이 분명 싫지는 않았으리라.  피렌체인 특유의 재치와 독설과 예민성이 난무하는 주점에서 그는 언제나 최고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그런 유의 사람이었고, 이 역시 자신의 재능을 때로는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잡기도 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아무 하는 일 없이 이러한 종류의 놀음만으로 지내는 것은 결코 성에 차지 않았다.  저녁이 오면, 그는 쓰잘데없는 말의 유희가 남긴 덧없는 수확물만을 가슴에 안은 채, 그 불멸의 목소리들과 함께 했던 알베르가초의 고독보다 더 큰 오로움을 느끼는 자신을 새삼 되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언제나 미소년의 뒤를 쫓아 다니는 도나토 델 코르노의 상점과, 경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품위 있는) 여인은 아닌 궁인 cortigiana(15세기말 이후 이탈리아에서 고급 창녀를 완곡하게 지칭한 말. 저금의 창녀는 이들과 구별하여 (meretrice) 혹은 (puttane)라고 불렀다.  이들 (궁인)의 미가 뛰어나고 따라서 그들과 교제하는 데 큰 돈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아한 예법과 높은 학식으로도 유명하였다.  역사적으로 비교하자면, 고전기 아테네나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에서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중후반, 각별히 시와 서간문을 통해 르네상스 문학에 기여한 궁인으로는 로마의 툴리아 다라고나와 베네치아의 베로니카 프랑코 등이 있다-옮긴이) 리차의 저택을 자주 드나들었다.  지혜롭다는 명성 덕분에, 그는 어떻게 해서든 하층 시민의 신분을 벗어나 보려는 그 상인의 난롯가를 차지하고 게다가 아름다운 부인으로부터 몇 번의 키스까지도 (몰래) 훔쳐낼 수 있었다.  그는 심사숙고한 자신의 생각으로 이러한 화롯가 자리와 키스에 보답하였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게 나타나자(정치에서처럼 인생에서도!), 한쪽은 그를 가리켜 상점 진드기, 다른 족은 집 진드기라 불렀다.  오, 가엾은 마키아벨리여!
  이 시기의 경우 역시, 베토리와 주고받은 편지들은 다른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전기를 쓰는 데 중요할 뿐 아니라, 그의 삶 자체에서도 진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오랜 친구들 가운데 베토리는 새 정권에서 받아들여진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고, 더욱이 2년동안이나 로마 대사로 봉직해 오고 있었다.  마키아벨 리가 바라는 호의와 일자리를 줄 만한 곳은 바로 로마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베토리의 편지가 언제나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11월 23일, 베토리는 로마에서의 남은 날들을 함께 보내자며 그를 자기 집에 초대하였다.  하지만 그는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와 웃고 농담하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약속해 주지 않았다.  편안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던 그는 전혀 대사같이 살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 사람들을 별로 만나지 않았는데, 이는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탓도 있지만, 당시 유럽의 모든 곳에서 그곳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의 물결 속에서도 마키아벨리만한 인물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는 그가 한 말이다).  그처럼 차갑고 비위 맞추기가 어려운 인물의 입에서 나온 칭찬치고는 듣기가 쉽지 않은 말인 셈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그의 초대에 감사하면서도 이에 응하는 데 주저하였다.  그것은 소데리니 가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그들 가문과 맺어온 관계로 볼 때, 자신이 로마에 가면서 그들에게 들르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행동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는 집으로 되돌아오는 즉시 바르젤로 Bargello (원래 이탈리아 도시 공화국에서 경찰서장 격에 해당하는 외국인 관리를 가리켰던 말로, 특히 피렌체에서는 그의 주거지로 쓰였다가 그 뒤에는 감옥으로 전용되었고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있는 건물을 일컫는다.  여기서는 감옥이라는 뜻-옮긴이)로 끌려가지나 않을까 우려하였다.  그는 베토리가 재차 걱정 말라고 말했지만 결국 가지 않았다.  그에게 약속된 풍족한 생활에 귀가 솔깃하기도 했겠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손에 (군주론)을 들고 가서 그것을 진상하고 싶어했다.  그는 유명한 12월 10일자 편지에서 말한 바처럼, (메디치 군주들)의 부름을 받고 시골에서 올라와 (이제 나 여기 있노라!)하고 외쳐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베토리의 편지는 매번 그에게 실망만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그는 단지 가벼운 신변잡사나 호색적인 애정 행각, 도는 (카사)와 브란카치처럼 자신을 힐난하는 사람들의 저급함 등의 이야기만을 주절대고 있었다.  마키아벨 리가 그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준 것은, 물론 그 자신이 이러한 이야기들을 결코 싫어하지는 않았기 대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와 연락을 게속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낮에 똑똑했던 사람이 밤이 왔다고 바보가 되지는 않는 다는 것을 친구에게 되새겨주었고, 사랑을 아무런 제약과 구속 없이 받아들이라고 권했으며, 피렌체 주점에서 들은 이런저런 농담들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마키아벨 리가 베토리에게 보낸 1514년 2월 25일자 편지에는 피렌체에서 사육제를 즐기던 중 그렇고 그런 브란카치가 역시 그렇고 그런 카사베키아에게 저열한 속임수로 장난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그 내용이 매우 외설적이긴 하지만 너무나 눈앞에서 보는 듯이 생생해서, 조금만 손질하면 우리 문학 최고의 단편 설화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농담 조의 이야기에서 정치 문제로 화제를 바꾸었다.  (어언 천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그에게는 그런 느낌이었으리라), 그는 오랜 관심사로 돌아와, 언제나 (그리스도교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주범)인 에스파냐 왕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편지 말미를, 수입은 90피오리노뿐인데 세금으로 나가는 것은 40피오리노나 되는 자신의 처지를 전하며, 대부청 gle Ufficiali 야 Monte에다 대출 천거를 좀 해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으로 끝맺었다.  베토리 역시 이러한 변덕에 자신의 변덕으로 응대하였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친구를 천거하되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묘한 방법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대부청에다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마키아벨리는 (가난하지만 좋은 사람입니다.  물론 달리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는 사실입니다.  제가 보증하지요...  그는 지금 수입에 비해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돈은 없고 아니들만 오글오글합니다.
  베토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란 인물은 일이 편지 한 통쯤으로 해결될 만한 정도일 때는 다정다감하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좋은 친구로 보이지만, 일이 중차대해서 귀에 좀 거슬리거나 흐름을 역류하거나 모든 호의를 앗긴 사람을 위해 자신에 대한 조그만한 호의라도 잃을 위험이 있을 때엔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그에게는 마키아벨리를 인정하고 그를 좋아할 정도의 머리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코 자신의 불편과 노고를 무릅쓰고 그를 도와주려는 그런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군주론)의 남은 부분을 받아 읽고 난 뒤에도 별 노력 없이 한두 번 알아보기는 했을지 모르지만, 이후 친구에게 책에 대해서나 로마로 오는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한마디 말도 비치지 않았고, 마키아벨리 역시 책 문제가 아니고는 로마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변함없이 편지를 웃고 즐기는 이야기로 채웠고, 답장 또한 그와 같은 내용인 것을 좋아하였다.  결국 둘 중 더 초조한 족이었던 니콜로가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답이 왔고, 비록 그러리라고 짐작은 한 바 있었지만, 그것을 보자 마키아벨리는 마치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처음 그는 격한 감정에 답장조차 할 마음이 없었다.  비록 그가 편지를 쓰긴 했으나 시골에 있다보니 편지 부치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변명 조의 말을 뒤에 했지만 말이다.  당시 그는 솔가하여 다시 시골로 내려가 있는 상태였다.  6월 10일, 그는 매우 비장한 어조로 평소와는 달리 짤막한 답장을 보냈다.
  그래서 난 이 버러지 같은 인생들과 함께 여기 머물게 되었네.  어쨌든 이곳엔 내가 무얼 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도, 내가 어떻게든 소용에 닿을거라고 믿는 사람도 없으니 말일세.  하지만 이 생활도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아.  무엇보다 빈둥거리는 나날 속에서 내 자신이 녹슬어 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네.  만일 신이 도움을 베풀어주지 않는다면, 집을 떠나 고관 댁의 가정교사나 비서직이라도 알아보는 것 외에 무슨 별 뾰족한 수가 있겠나.  아니면 어느 한적한 곳으로 가서 아이들에게 책읽기라도 가르쳐야겠지.  여기 가족들에게는 마치 내가 죽은 듯이 하고 말이야.  사실 그들은 나 없이 더 잘 살아갈걸세.  돈만 축내고 살지만 그렇다고 안쓰고 살 도리도 없으니, 이야말로 짐이 아니고 뭐겠나.  내가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은 자네를 불편하고 난처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단지 내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다시는 이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않으려 함일세.  그 일은 서로에게 부담만 주는 것 같으니 말일세.
  이후 서신 교환은 뜸해졌다.  베토리는 이러한 절규에 대해서 한 달하고도 반이 지날 때까지도 답하지 않았다.  이 동안 그는 친구가 (엄청나게 가슴 아파하는) 것ㅇ을 지켜보면서도 있을 법한 위로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7월 27일 편지를 보내왔으나, 그 내용은 온통 돈으로 신분을 사려는 장사꾼 도나토 델 코르노의 일에 대한 것뿐이었다.  마키아벨리의 드높은 꿈과 그가 의연함 속에서도 내비쳤던 생계 문제에 대해서는 그저 몇 마디 던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움의 손길은 왔다.  설사 그것이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크게 달랐을 뿐 아니라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곳에서 온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쿠피드의 화살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키아벨 리가 베토리에게 보낸 8월 3일자 편지는 사실 베토리의 7월 27일자 편지에 대한 답장이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더 이상 도나토의 일도 자신의 불행한 처지도 입에 담고 있지 않다.  그가 지금 빠져 있는 사랑이 가져다주는 행복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리차와의 육체 관계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니콜로가 스스로의 열정을 모두 쏟아부은 그러한 일이었다.  이는 감히 말하건대 그가 (군주론)을 쓰기 직전에 가졌던 거의 그런 정도의 열정이었다.
  시골에서 나는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났다네.  그런데 그녀는 그 천성이나 됨됨이가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섬세하고 너무나 고귀해서 어떤 찬사와 사랑도 그녀에겐 그저 모자랄 분이라네...  내 나이 이제 거의 오십을 바라보네만, 뭐랄까 이글거리는 태양에도 끄덕없고 험한 길에도 지침이 없으며 밤의 어둠에도 놀라지 않는다고나 할까.  만사가 편안하게 느껴진다네.  난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기지.  때로는 나의 감정과는 다르고 심지어 반대되는 경우까지도 말이야.  내가 지금 커다란 고통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속에서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네.  그건 바로 그녀의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용모 때문이기도 하고, 나의 고통을 모두 잊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  세상의 어떤 것을 준다 해도 난 여기서 벗어나지 않겠네.  그래서 위대하고도 중차대한 문제 같은 것은 생각지 않기로 했네.  이제 더 이상 옛 역사를 읽는 것도 우리 시대의 사건들을 숙고하는 것도 즐겁지가 않다네.  이 모든 것이 감미로운 생각들로 바뀌어버린걸세...
  마키아벨리를 이처럼 행복하게 만든 당사자는 시골의 이웃 여인이었다(니콜로 타파니의 여동생.  당시 그녀는 조반니라는 남자와 정혼하고 반지와 지참금까지 주고받은 사이였으나, 그가 별 이유 없이 로마로 가버리는 바람에 과부 아닌 과부 신세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서는 마키아벨 리가 베토리에게 보낸 1514년 12월 4일자 편지와 본문 257-258쪽을 참고할 것-옮긴이).  그러나 이글거리는 땡볕 아래서나 밤의 어둠 속에서도 그녀와 동행하여 험한 길을 마다 않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결코 아니었다.  친구들이라면 그의 연애에 대한 충동과 그에 쏟는 열정이 어떤 것인지를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토록 힘들고 쓰라렸던 나날 뒤에 온 이러한 연애의 감정은 만년의 그를 사로잡았다.  궁중의 법복이여, 안녕! 알베르가초의 서재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대화를 나누던 고명한 이들의 그림자여, 안녕! 45세의 나이에 이르른 마키아벨리는 이제 더 이상 정치에 대해서도 (역사의 풍미)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다.  다만 사랑의 시를 쓸 뿐이었다.  (동안의 궁수여, 넌 수없이 쏴댔지...)
  이러한 것 모두가 단지 허울분인 통상의 문학적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는 만사에 언제나 문학적 기교를 싫어했으며, 더욱이 사랑에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으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실 우리는 이 시기에 그가 어떤 주요한 저술을 하고 있었다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는 이 편지의 진실성을 일부 확증해 준다.  물론 그것은 그의 성격으로 보아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리비우스 논고)를 채워놓은 자료들 중에서 시일이 확실한 것 어느 것도 이시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군주론) 역시 그가 다시 손대지 않았다는 사실이 입증된 바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랑 사건이 그에게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었으며, 적어도 해가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덕분에 그 절망의 나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비록 새 걱정이 생긴 셈이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가장 잔인했던 고통을 잊어버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릇 격력한 사랑은 언제나 사람의 정신을 풍부하게 하는 법이다.  흔히 그렇듯이, 마키아벨리의 사랑 역시 곧 일에 대한 자극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이 때가 오면 힘을 발휘하리라는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다.  마치 홍수가 휩쓸고 간 들판에 기름진 흙이 쌓이듯이 말이다.
  이 시기 동안에도 베토리와는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다.  이는 단지 우리가 당시 오고간 편지들의 흔적을 잃어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서기장이 시골집에서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그러한 사랑의 정열로 녹이고 있었던 12월 어느 날, 대사 친구로부터 온 한통의 편지는 그의 마음속에서 꺼져 가던 정치에 대한 불시를 되살려놓았다.  그는 앞서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하면서, 정치란 그에게 (고통 외엔 아무것도 주지 않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그것에 관해 논하지 않으리라고 언약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조차 그러한 언약을 쉽사리 깨뜨려버렸다.  그가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친구는 어떤 문제를 던지고는, 분명히 말하되 바로 교황이 그 답을 읽을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가 일을 그만든 지 이태가 지났지만 그렇다고 그 기술까지 잊어먹을 사람은 아니라는 점 정도는 내가 잘 아네.)
  문제란 이런 것이었다.  즉 교황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교회의 교속 양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고, 프랑스 왕은 왕대로 베네치아와 한편에 서서 황제와 에스파냐 왕과 스위스에 대항하여 밀라노를 다시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때, 교황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프랑스나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는다면, 또는 그냥 중립을 지킨다면, 교황에게 돌아올 이점과 위험은 어떤 것일까?  이 내기의 판돈은 베토리가 흘렸듯이 교황의 호의가 될 수도 있었다.  사실 다시 몸을 일으켜보겠다는 기대가 사랑에 대한 욕망으로 모두 사라져버렸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위의 교황 문제를 제기한 베토리의 편지와 서로 엇갈려 보내졌던, 니콜로 타파니란 사람의 일을 부탁하는 라틴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묵은 근심 거리에 대해 다시 얘기를 꺼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서는 좋은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그는 12월 10일자 편지에서 평소의 지론과 성향에 따라 장문의 답장을 썼다.  그는 일단 중립안을 선택에서 배제한 뒤, 프랑스와의 동맹을 교황에게 권하였다.  왜냐하면, 프랑스 쪽이 이길 가능성이 더 높을 뿐 아니라, 프랑스 왕이 승리하는 것이 적이 승리하는 것보다 (그 파장은 덜해서 좀 더 견딜 만한 데) 반해, 설사 패배하더라도 그 후유증이 그리 크지 않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조언이 올바른 것이렀다는 사실은 뒤에 밝혀지게 된다.
  이 편지를 보내고 난 뒤, 마키아벨리의 기다림은 다시 시작되었고 아울러 베토리와의 서신 교환도 곧 재개되었다.  이틀 사이에 두 통의 편지가 산탄드레아에서 로마 족으로 보내졌다.  타파니에 대한 아니 남편에 의해 버림받고는 혼인 문제를 이렇든 저렇든 해결하고 싶어하는 타파니의 여동생에 대한 부탁의 말을 담은 앞서의 편지는 제외하고도 말이다.  그녀 외에 누가 우리들의 서기장이 사랑한 연인이 될 수 있겠는가? (여기 시골에서 그들만큼 나를 살갑게 대해 주는 사람은 없다네)라는 말은 물론 타파니 일가를 부탁하면서 쓴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부로 전체를 나타내는 일종의 제유법인 셈이다.  마키아벨리는 각졀히 그 가족 중 한 사람을 달콤하게 생각했던 것이리라.  내가 앞서 이틀 만에 보내졌다고 말한 두 통의 편지 중에서 한 통은 스타킹 한 켤레를 만드는 데 쓸 정도의 푸른색 털실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눈치 빠를 친구는 그것이 누구에게 소용되는지를 묻고 싶지 않아고 썼다.  그것을 짐작하기란 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베토리의 12월 15일자 편지는 마키아벨리에게서 꺼져 가던 희망의 불꽃을 다시 소생시켰다.  왜냐하면, 베토리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답을 읽고 그것에 동조하면서,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프랑스 사절 건을 그에게 지시한 사람이 다름아닌 무소불위의 권력자 메디치 추기경이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거리낌없이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장의 기다림과 조바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12월 20일,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중립을 지키는 문제와 전쟁에서 승리하는 쪽에 대한 교황의 우려에 대해 무언가 좀더 부언하고 싶다는 핑계 아래, 자신이 보낸 장문의 10일자 편지를 보총하는 역시 짧지 않은 편지를 다시 보냈다.  같은 날, 그는 베토리의 15일자 편지에 답하는 또 다른 편지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피렌체에 관한 일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고) 메디치 가에 봉사하고 싶다는 자신의 심정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내비치고 있다.  베토리는 이처럼 재촉을 받자, 결국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장을 보내왔다.  즉 마키아벨리가 보낸 두 통의 편지 모두를 교황과 메디치 추기경과 비삐에나(메디치 가의 문인 베르나르도 도비치의 별칭이다.  그는 조반니가 교황이 되는 데 큰 역할의 한 덕분으로 추기경 직을 얻었다-옮긴이)가 보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글의 명석함에 놀라면서 그 판단이 옳다고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토리는 곳. (자신은 친구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외엔 아무런 말도 끌어내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결국 이 말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대신 이 초라한 서기장의 마음을 그의 여인을 위한 푸른색 털실로 달래려 하였다.  적어도 이같이 조그만 부탁의 경우에는 그는 (백년동안이나) (베토리는 그렇게 썼다)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다면서 말이다.  나로서는 이 보잘것없는 물건이 그에게 새로이 가해진 타격을 얼마나 완화시켜 줄 수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키아벨리는 지금까지 이런 일에 마음을 다잡아왔기 때문에, 곧 새로운 희망을 가슴 가득히 채울 수 있었다.
  파올로 베토리는 당시 로마에 있었고, 대사인 그의 형과 함께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난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의논하곤 했다.  그는 12월말 피펜체로 돌아와 마키아벨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형에 비해 덜 신중하고 덜 이기적이면서도 더욱 온화한 성품을 가졌던 그는 짧은 시간 안에 훨씬 더 나은 성과를 얻어냈다.  당시 (메디치 군주들)은 자유 공화국 시절에 만들어졌다가 그들이 자유를 땅에 묻을 대 성급히 없애버렸던 민병대 조직을 다시 살려내기로 뜻을 모은 상태였다.  하지만 나사로의 경우처럼 큰 소리로 불러내지 않는 다음에야 민병대의 부활이 쉽지 않을 것이었다(나사로 Lazzaro는 성격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오빠이다.  병으로 죽은 뒤, 예수가 큰소리로 부르자 부활하여 걸어나왔다는 이야기를 비유한 것.  요한복음 11장 43-44절 참조-옮긴이).  그들이 이 분제에 대해 마키아벨리의 의견을 물어왔다.  여기에 다름아닌 파울로 베토리가 힘을 썼으리라고 믿지 않을 이유는 없다.  교황의 함대 제독은 어차피 같은 주친을 모시는 터라 피렌체의 입에 개입하게 마련이었고, 해군에 대해 발언권을 가지는 것은 물론 육군에 대해서도 간여할 권한이 있었다(파올로 베토리는 1513년 교황 함대의 제독으로 임명되었다.-옮긴이).  그리하여, 우리는 그가 마키아벨리를 바로 자신의 함대에 태워 리보르노까지 보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민병대에 관한 문제들을 마키아벨리와 상의했음은 물론이다.  그 조직을 만들고 움직였던 전임 서기장보다 그 일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관연 누구였겠는가?
  우리는 당시 마키아벨리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는 민병대 건에 관해 구두로 자문에 응한 후, 그것을 원래의 편제대로 다시 조직하는 문제를 최초로 논한 (민병대론 Ghiribizzi d'ordinanza)을 썼다. 해체된 지도 몇 년이 지난 민병대 문제에 그의 조언이 얼마만큼 소용에 닿았는지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그것이 정작 그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는 점뿐이다. 그것은 금방 사그라드는 또 한번의 짚불 같은 것이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쯤으로 물러설 파올로 베토리가 아니었다. 당시 교황 레오네가 가문의 일원들이 지닌 야심을 채워주기 위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다기다변한 계획들 중에서도, 그때까지 대체로 그리 되리라고 보였던 것은 줄리아노가 파르마, 피아첸차, 모데나, 레초의 군주가 되는 길이었다. 줄리아노의 신임과 애정이 깊었던 파올로는 이 새로운 국가에서 틀림없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호의를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던 마키아벨리 역시 나름대로의 몫을 얻게 될 것이었다.
  1515년 정월 그믐 그가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는 우리에게 마치 볏을 세운 수탉처럼 꼿꼿하게 되살아난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연인을 위해 쓴 시들을 보내고, 사랑과 눈물과 웃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사이의 편지들을 누가 보게 된다면, 내 소중한 친구여, 그것들간의 차이를 누가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히 크게 놀랄 것이네. 왜냐하면, 우리는 때로 중차대한 문제들만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고상하고 위대한 어떤 것을 담고 있지 못하면 결코 우리의 머리에 넣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이다가도, 장을 넘기면 어떻게 같은 사람이 그토록 경박하고 불안정하고 음탕하며, 그토록 덧없는 일에 빠져들 수 있는지 궁금해할 지경이기 때문일세. 이러한 행동거지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칭찬 받을 일로 보이네. 우리의 모습이 변화무쌍한 자연을 닮았기 때문이지. 자연을 닮고자 하는 사람을 옥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우리가 이렇듯 들쭉날쭉한 내용의 편지들을 주고받아 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 편지에서도 다음 장을 넘겨보면 알게 되겠지만 난 초지일관하겠네. 몸이나 잘 추스르게나.
  그러면서 그는 다음 장에서 새로운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파올로의 입을 빌려 줄리아노에게 올리는 조언을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일은 이제 해결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일에서조차 제안은 피렌체가 결정은 로마가 하는 상황에서, 이 일의 내용이 알려지자 죠황 비서인 피에로 아르딩겔리는 줄리아노에게 이렇게 썼다.  (메디치 추기경께서는 어제 저에게 대인께서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휘하에 두시었는지 어떤지를 제가 아느냐고 은밀히 물어오셨습니다.  저는 그에 대해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믿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답하자, 추기경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 역시 그러리라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피렌체에서 그런 말이 들려오니, 그것이 그에게나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이는 파올로 베토리의 짓임이 분명하다. ...  나 대신 그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니콜로와는 일체 관계하지 말라고 충과더라는 말을 전하라.)  만약 그의 말이 이 분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꾸밈없이 표현되지 않았더라면, 미움의 감정이 그토록 깊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으리라!
  아마 미콜로는 파올로라는 은밀한 통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이러한 공식적 반대에 대해 알지 못했던 듯하다.  만약 알았다면 그는 극도의 경악과 절망감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물론 오래지 않아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차리게 되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 시기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모른다.  이와 같은 정보의 부족은 단지 사고로 문서들이 유실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구든 모든 도움이 끊기다시피 한 상태에서 저 멀리 시골집에 틀어박혀 자기 자신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두지 않으면 안되었던 때, 그래서 잊으려 애쓰고 또 잊어버린 그런 때에 관해 말문을 닫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의 결핍은 오히려 마키아벨리에게서 바로 이 시기야말로 인생 역정의 최저점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우리에게는 그가 투르크에서 장사를 하는 생질 조반니 베르나치(조반니는 니콜로의 큰누나인 프리마베라의 아들임.  1500년 젊은 나이에 누나가 죽자, 외숙부인 니콜로는 생질인 조반니를 돌본 것으로 생각됨-옮긴이)에게 보낸 편지 몇 통이 남아 있다.  내용이 단순소박하고 주로 가내의 일을 담은 이 편지들의 일부는 마키아벨리의 인물 됨됨이라는 더 중요한 문제를 다루느라 미처 돌아볼 틈이 없었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 무시해 왔던 점들은 이 책의 주를 통해 간단히 밝혀놓는 것으로 충분할 듯싶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갑작스레 이 편지들이 귀중한 것은 다른 사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울러 가엾은 서기장이 불행에 쫓기면서 더욱더 가족적 유대감에서 도피처를 찾으려는 듯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베토리처럼 신분과 운세에서는 위에 있지만 재능에서는 동류라고 그가 스스로 믿는 인물 앞에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상투적인 가면, 즉 조롱하는가 하면 곧 거만해지고 이어 냉소적이 되었다가 때로는 궁중의 법복으로 몸을 감싸는 그러한 가면 뒤로 숨어버리곤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생질과 함께라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불행을 숨기지 않고 아무런 부끄럼 없이 모두 드러내 보였다.  그는 1515년 8월 18일, 생질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좀더 일찍 소식 전하지 않았다고 나나 다른 사람들을 고깝게 생각지는 말기 바란다.  그건 단지 시간이란 놈 때문이니까.  세월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 자신조차도 잊어먹게 만드는구나.)  그로부터 몇 달 뒤인 11월 19일, 그는 다시 이렇게 썼다.  (운명은 나에게 가족과 친구외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구나.)
  그가 이러한 말들을 쓰고 있을 무렵, 피렌체는 교황 맞을 채비로 온통 시끌벅적한 상태였다.  최근에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이 이탈리아의 상황을 또 한번 뒤집어놓았다.  마키아벨 리가 그 귀중한 조언을 로마로 보낸 지 얼마 후, 루이 왕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젊고 호전적인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밀라노를 되찾아 프랑스의 명예를 회복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으나, 레오네의 우유부단함은 오히려 도를 더해 갔다.  이미 처음부터 마키아벨 리가 날카롭게 예측한 것처럼, 교황은 (눈앞의 이익이나 두려움, 또는 그 둘 모두 때문에) 그의 위대한 동향인이 자신 앞에다 펼쳐놓은 간단한 선택을 마다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중립을 지킨다는 생각은 밀쳐둔 채, 에스파냐 왕과의 동맹을 갱신함으로써 나쁜 쪽을 택하고 말았다.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로 들어와 마리냐노에서 스위스 군을 격파하자, 교황은 그제서야 자신이 지는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조카인 로렌초 데 메디치와 피렌체 대사인 프란체스코 베토리의 보좌를 받은 교황이 이중 정책 덕분으로 교황 군이 직접 그 전투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승리를 목격한 레오네는 비록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마키아벨리의 조언을 따랐더라면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지켰을 수도 있었음을 틀립었지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승리자를 맞아들이기 위해 피렌체를 빠져나가 볼로냐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피렌체의 국정은 로렌초 데 메디치의 손에 있었다.  줄리아노(교황 레오네의 동생으로, 로렌초는 그의 조카임-옮긴이)는 그보다 나이도 더 많고 혈연적으로도 교황과 더 가까운 사이였지만 야심이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피렌체의 국정을 다루는 솜씨가 떨어지는데다 병약해서 (그는 결국 이 때문에 8개월 후인 1516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로렌초는 1515년 5월 스스로 피렌체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첫 작전에서 피옴비노를 장악하는 데 실패하자 이제는 시에나와 루카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레오네는 그로 하여금 우르비노를 공략하게 하여, 1516년 6월, 불과 며칠 만에 그곳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10월 8일, 로렌초는 교황의 서임에 의해 우리비노 공으로 책봉되었다.  이 젊은 군주에 대해서는 이미 그의 (술수가 발렌티노에 거의 버금간다)고 말들을 많이 해왔지만, 이 승리의 열기 속에서 말은 더욱 무성하게 되었다.
  그러므노, 2년 전 로렌초의 훌륭한 초상을 그려내었던 마키아벨 리가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 줄리아노보다는 바로 그에게서 갑작스레 자신의 신군주상을 찾았다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과거 우르비노에서 침탈적인 보르자의 족적을 따라다닌 바 있었다.  이제 그는 더 많은 정복의 관경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새로운 환상들을 그에게 쏟아붓고, 그 훌륭한 헌사와 함께 (군주론)을 그에게 바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헌사에서, 자신에게 응당 주어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평소의 당당한 태도로 스스로의 재능에 하당한 자리를 재차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대인께서 앉아계신 높은 자리에서 가끔이나마 이렇듯 낮은 곳으로 눈길을 돌려보신다면, 제가 거대하고도 끊임없는 운명의 심술 아래서 얼마나 부당하게 쓰라림을 당하고 있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 당시 프란체스코 베토리는 죽 로렌초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보좌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친구에 가까운 정도였다.  설사 그가 (친구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그처럼 매일같이 만나고 친분을 쌓는 사람에게 책 한 권 헌정하는 일쯤 돕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책을 바치기는 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줄곧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마키아벨리의 불행한 처지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책을 바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깊은 절망에 빠지든가, 아니면 헌정은 했지만 그것에 대한 반응이 앞의 경우에 못지않는 실망감을 불러일으키거나 둘 중 하나였으리라,  만일 그 자신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믿을 수 있다면, 그가 로렌초에게 책을 헌정하던 바로 그때, (동시에 누군가가 사냥개 한 쌍을 바쳤는데, 로렌초는 마키아벨리보다 개를 바치는 사람에게 더 고맙다는 얼굴로 더 친절히 대했고, 이에 분개한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원하는 대로 될지어다.)  (군주론)을 로렌초에게 헌정한 때는 1515년 9월보다 이르지 않고, 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1516년 9월보다 늦지도 않다.  이 두 시기 사이인 2월 15일, 그는 생질은 베르나치에게 이렇게 썼다.  (난 이제 나 자신에게나 가족이나 친구에게나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구나.  나의 쓰라린 운명이 그렇게 정해 버린 때문이지.  나는 나와 가족 모두의 건강 말고는 쓸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구나.  아니 그것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편이 더 낫겠다.  나는 행운이 나를 찾아줄 때를 기다리고 있다.  오지 않는다면 참을 수밖에.)  같은 해인 1516년 10월, 그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파올로 베토리가 맡긴 보잘것없는 일을 수락하고 갤리선 전함편으로 리보르노에 갔다.  그는 10일에 도착하여 15일까지도 여전히 그곳에 머물렀다.  우리는 그 뒤로부터 다시 베르나치에게 다음의 편지를 쓴 1517년 6월 8일까지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가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불운으로 인해 이처럼 시골에 박혀 있다보니, 어떤 때엔 한달 내내 과연 나란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잊고 살게 되는구나.)
  
    제16장 (무료함) 속의 글쓰기 - 당나귀, 만드라골라, 벨파고르
  정치에서 물러나 지난 몇 년 동안의 고통과 최근 몇 달 간의 각성을 경험하고, 교황의 원한과 우르비노 공의 어리석은 무관심으로 인생 행로에 거의 결정적인 낙인이 찍히자, 마키아벨리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심기를 다독거리고 스스로의 재능을 분출해 내고자 하였다.  그의 글들과 마찬가지로 무료한 삶 역시, 반드시 그가 처한 역경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그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의 내밀한 불안감이 그의 한숨만큼이나 그가 짓는 냉소를 통해 측정될 수 있음을 이미 터득한 바 있다.  그는 이제 갑자기 그 냉소와 한숨으로 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글은 다름아닌 (당나귀 L'Asino) 이다.  이 작품이 보통 (황금 당나귀)로 불리는 것은 뒤에 변조된 것으로 옳지 않다.  테르차 미라 terza rima (11음절구 3행 시절-옮긴이)의 형식으로 씌어진 이 단시는 단테 풍을 따르되 그것에 풍자적인 향취를 더한 것이다.  이 작품은 여태까지 커다란 오해 속에 다만 무시되어 온 측면이 있지만, 사실은 그런 상태로 방치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짐승으로 변장하여 진짜 짐승 같은 사람들을 깨문다는 작자의 생각은 기발하다.  이 위대한 산문 작가의 시들이 중중 그러하듯이, 이 시의 많은 부분이 산문 조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떤 구절들은 매우 훌륭하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내용의 자전적 성격으로, 이는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측면이다.  이 단시는 그 때문에 작자가 명예로워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작자 덕분으로 작품이 명예를 얻는 그러한 것이다.
  그의 독설적인 어조는 첫 행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도움을 바라기 위해 페보  Fobo/Phoebus(아폴론을 말함.  마키아벨리는 바로 앞에서 자신의 시를 빛내기 위해 그의 활과 화살통과 하프를 내리도록 빌지는 않겠다고 읊는다-옮긴이)를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분명히 밝힌다.
  그런 호의가 부탁한다고 얻어지지는 않기 때문이지.
  이제는 안 돼.  그리고 난 잘 알고 있네.
  당나귀 툴툴거리는 소리에 하프는 필요치 않다는 것을.
  그는 곧 자신이 (군주론을 통해 얻으려 했던 것처럼!) 그런 (대가와 보상과 또는 공적)을 찾지 않을 것이며, 설사 (공공연한 것이든 은밀한 것이든 어떤 중상모략으로 인해) (군주론 때문에 일어났던 것처럼!) 그가 상처를 받더라도 개의치 않겠다고 천명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물리든 맞든 난 개의치 않네.
  언제나 그런걸.  난 그걸 닮았다네.
  내가 노래하는 그 녀석(당나귀)의 모습을.
  그는 마치 당나귀처럼 물리고 채이는 것에 별반 마음 쓰지 않을 것이다.  과거 남을 그와 같이 대했던 그는 많은 날들을 (매우 조용히, 그리고 친절하고 참을서 있게) 지내왔다.  오랫동안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세상 여기저기를 주유했던 그는 이제 입장을 바꾸어 자신의 행동이 평가받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당나귀야, 그토록 많은 계단들을
  우리들의 이 세상에서, 오르락내리락 했었지
  이 모든 인생사를 살피기 위해.
  (...)
  하늘이라도 너의 울음소리를 막을 수는 없을거야.
  유감스럽게도 첫 장에서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시는 변신을 앞둔 최적의 시점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니콜로는 자신의 쓰라린 운명을 다시 한탄한다.
  옛 사람이든 지금 사람이든
  (...) 아직 그 누구도 맛보지 못했으리.
  더 깊은 배반감을, 더 큰 고통을.
  아울러 그는 (리비우스 논고)의 한 장에서처럼 국가와 그것의 쇠퇴를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필치로 그려낸다.  하지만 우아하고 힘찬 맛은 떨어진다.
  단테를 모방한 시에 당연히 베아트리체가 빠질 수는 없는 법이다.  설사 그 베아트리체가 힘이 약하고 고귀함이 덜한 짐승들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야생 동물들의 보호자일 뿐이며, 자신의 시인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덜 정숙한 그런 베아트리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가 그녀를 통해 당시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의 모습을 그리려 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녀야말로 어두운 불운의 골짜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그를 받아들여 위로하고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주지 않았던가.  물론 그가 짧은 시간만이라도 스스로를 위하여 당나귀로 변신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지만.  이 연애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우선 그것이 얼마나 계속 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사건이 그가 작가로서 새로운 힘을 얻는 데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녀에게 그만한 영향력이 있었다면, 그녀는 분명코 한번 정도는 그를 변신케 했으리라.
  마키아벨리는 무미건조하고 활기 없는 장을 몇 개 쓴 뒤에 (당나귀)를 중도에서 끝내 버렸다.  아마도 당시 그는 시가 자신을 정치로부터 물러서게 만든 그런 잔인함을 이겨내도록 해주고 어떤 내밀한 기쁨으로 그를 위로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 역시 그랬듯이 시작의 시작을 즐겼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마무리를 위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그 생각들을 좋아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이야기했고, 그 일부는 아마 친구들에게 일게 했던 듯싶다.
  이 시기의 친구 관계나 독서 경향 역시 좀더 문학 쪽으로 기울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1517년 12월 17일, 로마에 있던 시인 뤼지 알라만니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여기서 또다시 도나토 델 코르노의 그 이를 부탁하고 있는데, 델 코르노는 아직도 신사들 사이에 앉아보는 희망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을 뿐 아니라 1512년에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빌려준 돈 500피오리노도 되돌려받지 못한 처지였다.  그런데 그는 이 일에 관해 얘기하다가 갑자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 Orlande Furioso)를 읽어보았네.  시의 짜임새가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하고 저알 찬탄을 금할 수 없는 곳도 많이 있더군.  그런데 만일 그가 그곳에 자네와 함께 있거든 내 이야기를 하고 이 말을 전해 주게나.  오직 한 가지, 내가 애석해하는 일은 그가 그토록 많은 시인들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정작 나만은 쏙 빼놓았다는 것이며, 나의 시 (당나귀)에서라면 그가 (광란의 오를란도)에서 나를 대접한 그런 방식으로 그를 대접하지는 않으리라는 것 말일세.)
  이처럼 서로간에 엄청난 차이를 가진 두 시를 한데 모아보노라면 얼굴 가득히 퍼져나가는 미소를 어찌할 수 없다.  아리오스토가 그토록 많은 그렇고 그런 시인들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쏙 빼놓았다는 서기장의 유감 어린 말은 생각보다는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한 기품 있는 비평가는 이에 대해 마키아벨 리가 스스로 지닌 능력과 스스로 그러리라 생각한 능력을 혼동하고 있다고 퉁명스럽게 말한 바 있다.  나는 그보다는 차라리 그가 스스로 마음으로 느꼈고 (군주론)의 산문 속에서 쏟아냈던 시적 감흥을 자신이 운문 형식으로 표현했던 실제의 다소 저급한 시와 혼동했다고 말하겠다.  마키아벨리의 것으로서 아리오스토가 알고 있었을 법한 시라고 해봐야 첫 (십년기) 정도였을 것이고, 혹시 필사본 상태로 회람되고 있었던 (당나귀)의 몇 장쯤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문학적인 마키아벨리.  더욱이 학구적인 모습의 마키아벨리.  이는 사실 (당나귀)에서 노래한 경우와 비교할 때 훨씬 더 놀라운 변신이 아닌가! (물론 이러한 비교로 문학자들을 폄하하려는 뜻은 조금도 없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는 루첼라이 원 Orti Oricellarei에서 열린 학인들의 노임에 단골 손님으로서 드나들고 있었다.  이 모임에 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어떻게 해서 하나의 학당으로, 더욱이 플라톤 학당의 연장이라고까지 이야기될 수 있는지 그 정당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당시 모임의 주최자인 코지모 루첼라이는 몸이 불편한 상태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앎에 대한 그의 호기심을 키워놓았다.  그래서 피렌체의 영민한 청년들이 그의 야외 침상 주위로 모여들었고, 이 덕분에 문인, 군인, 법조인 등 다방면의 재능 있는 사람들이 피렌체에 들러가게 되었다.  이 모임에 가장 열성적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뤼지 알라만니, 두 명의 흐란체스코 다 디아체토, 디아체티노, 야코포 나르디, 필리포 데 네를리, 바티스타 델라 팔라, 안톤프란체스코 델리 알비치 등이 있었다.  그리고 자노비 부온델몬티도 언제나 그곳에 있었는데, 피렌체의 서기장은 교황 줄리오 2세의 재워 초기 로마 교황청에서뿐 아니라 바로 그의 집에서 아리오스토와 만나 면식을 텄음에 틀림없다.  둘 사이에 이미 친분이 있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마키아벨 리가 알라만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같은 편지에서 그 단골 손님들이 루첼라이의 정원에서 그랬듯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다.  당시는 커다란 나무들이 이루는 시원한 그늘 밑에 기분 좋게 앉아 있을 그런 게절은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모임의 주도권은 로마의 알라만니와 네를리에게로 넘어가 있었으므로, 마키아벨리는 그들이 뒤에 남겨놓고 간 (가엾고 불행하고 추위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생각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즉 (살아 있는 흉내라도 내기 위해서) 자노비 부온델몬티, 바티스타 델라 팔라, 그리고 그는 수시로 만나서 그들이 게획중이던 플랑드르로의 여행에 대해 의논하곤 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길을 가고 있다고 꿈꿀 정도로 이 여행 계획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정작 실제의 여행에서 느낄 즐거움을 벌써 반은 소진해 버린 상태였다.  그들은 또 여행중에 베네치아로 가서 사육제를 보는 (짤막한 일정)도 잡아 놓았다.  하지만 길을 떠난 뒤 친구들을 모으기 위해 일단 로마에 (들를) 것인지, 또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뒤 합류하여 (곧장 떠날) 것인지는 아직 미정이었다.
  아마도 이는 단지 그냥 계획에 불과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실현된 것도 있었다.  니콜로는 몇몇 피렌체 대상인의 의뢰로 사순절 기간 동안 제노바에 다녀왔던 것이다.  그의 소임은 투자처의 파산에 대비하여 최대한 손실을 줄이는 일이었다.  1518년 3월 3일 그는 출발 직전에 있었고, 26일에는 그를 보낸 사람들에게 제노바에서 편지를 썼다.  4월 8일, 그들은 그에게 이 지겨운 일의 처리 방법을 자세히 일러 보냈고, 14일에는 그에게 다시 편지를 써서 협상에 진전이 없으면 돌아오라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0일까지도 여전히 피렌체에서 그에게 부치는 편지가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의 전임 서기장이 다시 길을 나서게 된 것은 단지 멏 푼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몸을 움직여 스스로 (살아 있는 흉내라도 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피렌체 공화국이나 그 외의 다른 공화국들, 혹은 제후들의 사절 직은 아니지만 이러저러한 상인들의 대리인 역할도 마다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지금 그가 이야기할 것은 온통 줄 돈과 받을 돈, 그리고 염료와 옷감에 대한 것뿐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가 메디치의 군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점점 더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로렌초의 애정과 호의를 기대하기는 틀린 상태였다.  베토리는 프랑스에 가 있었고, 이후 로렌초와 함께 귀국할 예정으로 있었다.  로렌초가 단순한 시민의 모습을 벗어던진 것처럼, 그 역시 더욱 궁정의 조신처럼 변해서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최근의 상처를 여전히 아파하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인다.  군주들이 자신을 알아주고 호의를 베풀 것이라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 그는 루첼라이, 부온델몬티, 로렌초 스트로치 등 사사로운 위치에 있는 인물들의 평가와 관대함에 몸을 기대었다.  우리로서는 그러한 관대함이란 게 어떤 것이었는지를 모르며, 추측이란 것도 무언가 실마리가 없을 때는 별 소용이 없는 법이다.  단지 마키아벨리 자신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고, 원회에 단골로 오는 한 사람에 의하면 그가 (약간의 수입)을 얻었다는 점이 알려져 있는 정도이다.  짐작건대, 그가 지고 있던 자그마한 액수의 빚을 탕감해 주었거나, 또는 문학에 대한 스트로치의 욕심이나 다른 사람들의 장사 잇속에 어떤 도움을 준 데 대한 보답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은 이러한 도움과 함께 그를 친절하고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으며 그의 재능을 알아주었는데, 그에게는 사실 이러한 것들이 돈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었으리라.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자신을 (따뜻이 감싸주고 친절로써 도와주는) 훌륭한 친구들 사이에서 마침내 그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그의 모든 저술들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들을 찾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보여준 이러한 호의가 그를 기쁘게 했다면, 루첼라이 원회에서의 격조 높은 이야기들은 그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자극하였다.  그는 당시 이미 그곳에서 커다란 호응 속에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10권에 대한 논고)를 읽고 있었을 가능성이 짙다.  이 저술은 깊은 뿌리를 가지고 움츠려 있다가 산탄드레아 시절 초기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후 그가 이 책에 손을 댄 것은 아마 사랑의 격정이 식고 난 후인 1515년 전반기쯤이거나, 더 확실하게는 1516년이었고, 1517년에도 재차 그 작업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옛 저술로 되돌아갔다는 것이 곧 문학에서 정치로 복귀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 공화주의적 담론들은 그것이 메디치 군주들의 전성기에 문인 모임에서 읽혀졌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정치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인 냄새를 풍긴다는 해석이 좀 더 그럴싸하게 들린다.  당시는 아직 정치가 이론을 벗어나 논의되던 때가 아니었고, 레오네 시대의 그곳 단골들은 지금까지의 어떤 잘못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메디치파였다.  오히려 마키아벨리야말로 그들 중에서 메디치 가와 가장 거리가 먼 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시원한 그늘 아래서 그 똑똑한 청년들에게 (리비우스 논고)를 읽어주었다.  그들은 자신의 저술을 적어도 (사냥개)보다는 더 중히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었다(로렌초가 (군주론)을 헌정하는 마키아벨리보다 사냥개를 바친 사람에게 더 친절히 대했다는 일화를 뱃댄 말.  이 책 15장 265쪽을 볼 것-옮긴이). 그들 중 하나였던 필리포 테네를 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이들의 요청으로 이 때 읽은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이를 자신에게 가장 잘 대해 준 코지모 루첼라이와 자노비 부온델몬티에게 헌정하였다.  책머리의 헌정사는 아마 이 당시 그의 심정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일 것인데,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어떤 전기 작가도 그것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헌정사의 의도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의 재능을 업신 여기고 (군주론)마저도 무시해 버린 사람들에 대한 분노의 질책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저자가 자신의 이 새로운 책을 군주가 아니라 (수많은 미덕으로 그보다 훨씬 더 나은) 사사로운 위치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지위와 명예와 부를 내릴 수도 있었을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사람에게, 국가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통치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바치고 싶다고 언명하는 대목의 행각에서 다름아닌 로렌초의 이름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헌정사를 읽노라면, 책보다 (사냥)개를 더 반겼다는 일화가 더욱 그럴 듯하게 보인다.
  만일 그의 대작들이 빛나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 시기는 이른바 (모든 것을 잃은 뒤) 마키아벨리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때가 되었을 것이다.  전지 작가와 문학사가들이 지금까지 생각지 못한 새로운 점들을 감안해 볼 때, 나는 처음엔 (메쎄르 니차 Messer Nicia) 또는 (칼리마코와 루크레치아의 희극 Commedia di Callimace e di Lucrezia)으로 불리다가 뒤에 가서는 (만드라골라)로 더 잘 알려진 희극 작품의 저술 시기가 1518년 사육제 기간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이는 문서보관소의 관련 문서들만큼이나 쓸모 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문서 자료의 부족을 한탄하는 전기 작가들에게도 위안을 줄 만한 사료이다.
  이 희극 작품의 우아한 프롤로그 속에는 (리비우스 논고)의 헌정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쓰라린 심정이 담겨 있다.
  설사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너무 가벼운 내용이라
  자신은 현명하고도 무게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말이죠.
  하지만 너그러이 생각해 주세요.
  이 헛된 생각을요.
  다만 그의 쓸쓸한 마음을 달래려는 것뿐
  다른 어떤 곳에서도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요.
  나에겐 모든 것이 막혀 있죠.
  다른 것으로 능력을 보여줄 길이.
  흘린 땀에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 채.
  그는 이보다 조금 앞선 (당나귀)에서,
  땀 흘린 아무런 대가도 없이
라고 읇은 바 있는데, 이제 여기서 다시금 (또 다른 목소리와 또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위로받지 못하는 슬픔의 감정으로 되돌아간다. (당나귀)에서 그는 사람을 물어뜯는 옛 기술로 되돌아가리라고 위협한바 있는데, 이제 (만드라골라)에서도 역시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는 군주들, 그리고 지위와 고귀한 신분과 부에서 자신의 위에 있는 사람들 면전에다 경멸투로 자존의 말들을 던진다.
  만일 누군가가 험담을 퍼부으며
  그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그에게 겁을 주거나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나는 경고하리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리라.
  그 또한 욕설을 퍼부을 줄 알며
  이것이 그의 첫번째 기술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세상 어디서든
  우리말이 들리는 곳이라면
  그는 아무에게도 굽히지 않으리
  비록 겉으로는 아래에 있어도
  자신보다 더 좋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우리에게 이 작품이 걸작이리라는 확신을 느끼게 하는 이 프롤로그는 그의 전기적 측면, 즉 자전적 측면을 보여주는 주요한 사료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실 마키아벨리는 그의 희극 작품들 어디서나 나타나서, 나라와 신앙의 결점과 달리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불행을 웃어넘기고 있다. 한 위대한 근대 시인의 산문 속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그러한 웃음의 힘은 무시무시할 정도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마키아벨 리가 가장 애호하는 무기인 것이다. 이미(당나귀)에서 그랬듯이, 그는 자신의 방어를 위하여, 눈물의 부끄러움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하여 웃음을 사용한다.
  하지만 남자에게 눈물이란 언제나 보기 흉한 법이므로,
  운명과 마주할 때면
  눈물 없는 얼굴로 다가설지니.
  감히 말하건대, 마키아벨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오랫동안 겪어 왔고 또한 (군주론)에 대한 잔혹할 정도의 실망감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고통과 Tm라림도 (만드라골라)에서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스며 나오는 냉소 없이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가 홀로 되씹었던 짤막한 시구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웃네. 하지만 웃어도 마음은 허망하기만 하네.
  나는 태우네. 하지만 불꽃은 밖으로 피어나지가 않네.
  이 놀라운 희극 작품에서 명확지는 않지만 어떤 도덕적, 사회적 목적을 찾아내려 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것이 그냥 웃음을 주는 외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 당신이 웃지 않는다면
  약속하지요. 당신 술값은 내가 내기로.
  나는 마키아벨 리가 이 작품을 쓰면서 어릿광대극이나 풍자극을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우는 그러한 억누를 수 없는 시심에 따랐으리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굳이 어떤 목적을 찾는다고 할 때, 이처럼 사람을 생각도록 하는 작품이 단지 웃음을 주기 위해서 씌워졌을 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작품에서 풍겨오는 시적이고 인간적인 감흥만큼이나 그것이 유발하는 생각들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리비우스논고)의 저자보다는 (군주론)의 저자를 더 쉽게 만날 수 있다.  물론 어떤 면에서 냉소적 주장과 (건달 같은 얼굴)을 한 티모테오 신부를 (리비우스 논고) 1권 12장(신앙심을 유지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로마가톨릭 교회가 신앙심의 유지에 실패함으로써 이탈리아가 어떻게 쇠퇴해 왔던가에 대하여)에서 이론화된 개념들의 예술적 재현이라고 볼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작품에서는 희미하기는 하지만 어떤 비극의 냄세가 난다.  이 피렌체인의 몇몇 편지들이 그렇고 또 그이 일상생활이 그렇듯이, 그것은 미소 혹은 조소가 쫓아와 한숨을 흩날려버릴 때까지 희극적 광대극의 유쾌한 웃음을 바짝 얼어붙게 만드는 것이다.  바보스런 니차의 입을 빌린 재치 있는 기지도 보이고, (이곳에서 우리같이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개도 짖지 않는다)는 말처럼 거의 자전적 성격의 대사들도 있다.  전기 작가라면 이처럼 희미해져 버린 자신의 경계를 감히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한 것처럼, 마키아벨리는 (만드라골라)에다 스스로의 모습을 너무나 짙게 채색해 놓았기 때문에, 바로 앞의 대사에서 보듯이 그러한 모습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을 때조차도 그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나로서는 그가 이 작품을 쓸 당시 느꼈던 희열, 그가 이 작품을 언제나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꼽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그의 희열이 글의 전편에서 발산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상은 하지 않겠다.  그러한 감정은 (군주론) 속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것으로, 걸작품의 창조와 함께 하는 즐거움인 것이다.  이로써 모든 것이 설명된다.  고전적 전법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형식상의 새로움, 등장 인물들의 현대성과 인간미, 그들 중에서도 특히 플라우투스 Titus Maccius Plautus(대략 기원전 254년에서 184년에 걸쳐 살았던 로마의 희극 시인.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 음모를 꾸미는 자이다-옮긴이)에게서 봄직한 식객 역할의 리구리오(그는 시장에서 만난 한 평범한 피렌체 사람을 꼭 닮았다).  이 새로운 요소들 모두가 그처럼 앞의 시대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인물에게서 나왔다.  이 모든 연결고리를 깨뜨리고 이 작품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천재성과 결합된 시 바로 그것이었다.
  (만드라골라)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루첼라이 원회에서 먼저 읽혀졌을 법하다.  사람들은 아마 로렌초가 프랑스인 신부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1518년 9월 7일) 열렸던 대규모 축하연 기간중에 공연이 있었으리라 믿고 싶어할 것이다.  혹은 그 혼약을 기리는 축제 기간이 더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물론 그 당시 작품이 이미 완성되었고 아울러 배우들도 자신의 역할을 숙지한 상태였다는 가정 하에서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만일 이러한 조건이 성립만 한다면, 마키아벨리가 메디치 가에 대해 품었던 불신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추측은 매우 그럴 듯하게 돌 것이다.  한편, 1519년의 사육제 기간 동안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피렌체에서 열린 축제는 거의 없었다.  로렌초가 중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5월 4일, 그는 결국 27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의 행동거지는 시민들 사이에 반감을 불러왔고, 그 역시 자신의 방식대로 다스릴 수 없었던 도시를 싫어하였다.  말년에 들어 그가 신임한 인물은 필리포 스트로치아 프란체스코 베토리뿐이었지만, 그들은 이러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를 위해 아무런 힘도 되어주지 않았다.  로렌초는 소인베들을 가까이했고, 수다쟁이에다 대식가 였다.  그래서 (교황은 그가 잘 먹고 잘 떠들 수 있도록 매년 200스쿠도의 연금을 내렸다).  하지만 교황이든 그 조카든 정작 먹고 떠드는 것 외에 다른 것도 잘할 줄 알았던 마키아벨리에게 내려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 모두가 로렌초의 이러한 죽음에 실망했다 하더라도, 메쎄르 니콜로만은 슬퍼하지 않았을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같은 해에 있었던 또 한 사람, 즉 코지모 루첼라이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후로도 원회가 계속되기는 했다.  그가 정원을 삼촌들인 팔라와 조반니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팔라는 그야말로 이름뿐인 문인이었으나 조반니는 진짜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원회에 대해서나 니콜로에 대해서나 커다란 손실이었다.  원회로서는 그것을 이끌어오던 정신을 상실한 셈이고, 니콜로로서는 격려와 찬사 이상을 주던(물론 이러한 것이 그가 가장 바라던 도움이었다) 너그러운 후원자를 잃은 셈이었다.
  마키아벨리의 문학 작품들 중, 저작 시기의 이유 때문에 여기서 이미 언급했던 것들 외에,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있고 그 저술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그래도 대략 이 시기로 비정되는 다른 작품들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장시(세레나타 Serenata)처럼, 일찍이 포스콜로가 전편을 외우고 있다고 자랑한 바 있고 시간적으로도 연애 사건 당시에 씌어진 것이라 여기서 빠질 이유가 없는, 드문드문 나타나는 그의 시구들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우리 말 논고 Dialogo intorno alla nostra lingua)와, 원래는 (파볼라 Favola) 또는 (아내를 차지한 악마 Il demonio che presenogle)였다가 지금은 (벨파고르 이야기 Novella di Belfagor)로 불리는 설화적 작품들이다.(노벨라 novella)란 현대 이전의 설화체 문학이나 현대의 소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테면 보카치오, 뤼지 피란델로의 작품연대가 불분명하고, 특히 (우리 말 논고)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지만, 마키아벨리의 전기에서 이러한 작품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엇기 때문이다.
  (우리 말 논고)가 과연 마키아베리의 저술인가에 대해 지금의 비평가들과 문학사가들은 그렇다는 데 합의를 보고 있지만, 사실 뚜렷한 증거는 없는 상태이다.  그의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문체는 제쳐두고라도, 당시 그처럼 낡은 논쟁에 대해 그토록 새로운 점들을 이야기할 만한 사람은 그 외엔 생각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한 도시에 새로운 교설이나 새로운 기술이 들어올 때면 언제나) 어떤 말이든 신어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 같은 것이 그 좋은 보기이다.  (무릇 언어란 어느 한 나라의 것이라고 얘기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나라들에서 가져온 어휘들을 스스로의 용법 속에서 변용할 뿐만 아니라, 차용된 어휘들로 인해 원래의 나랏말이 바뀌기보다는 오히려 그 빌려온 어휘들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마키아벨리이다.
  그리하여 그는 언어에 대해 글을 쓴 다른 저술가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독창성과 날카로움을 가지고, 특히 (속어 웅변론 De vulgari eloquentia)의 재발견 이후 당시 크게 유행했던 논제,즉 (고전 로마의 ) 언어와 피렌체의 언어에 관한 문제를 자세히 고찰하고 있다.  그는 단테 같은 인물과의 논쟁도 불사하고 있으며, 논쟁 당사자이자 동시에 판관이라는 유리한 위치를 십분 활용하여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두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논쟁중에 던진 (비난은 그 결말과 무관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단테에 대하여 비난조의 말들을 던졌다고 해서 그것이 이 책을 피렌체 서기장의 저술이 아닌 것으로  볼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단테야말로 마키아벨리가 산탄드레아의 숲에서 몸에 지니고 다녔던 책들을 쓴 당사자였고, 그가 (십년기)와 (당나귀)에서 그의 글을 모방하였으며, 자신의 사적인 편지들 속에서 종종 기억을 통해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더 자주 인용하곤 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서도 그러하다는 말이다.
  (멜파고르 이야기)는 마키아벨리 자신이 지어내어 저녁 식사 자리나 술자리에서 재미있게 들려주었던 많은 이야기들 중 유일하게 글로 옮겨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몇몇 편지들과 함께 마치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이 문학 장르에서 그가 과연 어느 정도로까지 뛰어날 수 있었던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만일 (만드라골라)가 한 비평가에게 한 편의 극화된 설화같이 보였다면, 다른 비평가에게 (벨파고르 이야기)는 시나리오 줄거리를 따온 것처럼 비쳤다.  아마 둘 다 옳은 말일 것이다.  이 문제는 여기에서 지면만 허용된다면 더 논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지적해야겠다.  그것은 최상급의 이탈리아 작가들 중에서도 하나 이상의 문학 장르에서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는 사실이다.  마키아벨리야말로 그의 천재성이 발휘된 거의 모든 곳에서 최상의 위치에 섰거나 후세에 깊으 s족적을 남겼던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와 역사 저술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설화 문학에서는 단 한 작품만을 남겼을 뿐이지만 그 수준 역시 탁월하였다.
  그는 희곡에서도 역시 한 작품만을 썼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자발적인 영감 덕택이지, 친구들의 권유에 못 이겨서도 또는 어떤 행사를 기념할 목적에서 상투적인 라틴적 전범에 의거하여 제작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영감은 그로 하여금 이탈리아 희곡 전체를 통틀어 최상급의 희극 작품을 생산해 내게 하였다.  이에 비하면 아리오스토조차도 평범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것은 당시까지 근대의 어떤 작가가 쓴 작품보다 뛰어나며, 아마 시대를 뛰어넘어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다.
  

============================= 05
    제17장 (카스트루초 전)과 (전술론).  보잘것없는 돈에도 불구하고 역사 쓰기를 택하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죽음은 그의 아버지인 피에로가 죽었을 때와 꼭 마찬가지로, 피렌체에서 메디치 정권의 입장을 오히려 호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르시니 가와의 새로운 혈연 관계, 새로운 혈연 관계, 새로운 공작령의 획득, 프랑스 앙가와의 새 결속 관계, 어머니로부터 받은 나쁜 영향, 조신들의 잘못된 조언.  이 모든 것이 위대했던 대 로렌초의 적출로서는 마지막이었던 인물에게서 피렌체적 (문화 civilta)(이말은 넓게는 문명, 문화, 좁게느 푸뮈, 세련미 등을 가리키며, 르네상스 이탈리아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핵심어이다.  마키아벨 리가 군주론 26장에서 알프스 이북의 사람들을 야만적 barbaro이라 불렀을 때, 그가 그 반대 개념으로서 염두에 두고 있었더 srjt도 바로 이 말이다.  이는 주로 도시적 성격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가장 가까운 말은 도시적 세련성을 가리키는 urbanita가 elf 것이고, 그 반대 개념어느 stlrhf 농촌의 촌스러움을 지칭하는 barbarie 일 것이다-옮긴이)를 빼앗아가 버렸다. 사실 이는 피렌체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그들은 때로 자유는 기꺼이 포기하기도 했으나 이 문화만은 결코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다.  로렌초는 말년에 마치 군주처럼 소수의 근신들에 둘러싸여 지냈으며, 스스로도 무소불위의 군주인양 생각했다.  그래서 대 로렌초의 뒤를 이은 진정한 계승자로, 로렌초의 행동을 내심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교황 레오네 외에는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교황 레오네 10세는 대로렌초(149-1492)의 차남이며, 여기서의 로렌초는 교황의 형인 피에로의 외아들이자 레오네의 조카이다-옮긴이).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야코포 살비아티와 란프레디니 등과 같이 한때는 메디치파이자 동시에 공화국에 충실했던 시민들에게 그가 얼마나 무례하게 대했는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숙부인 줄리오 추기경조차도 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로렌초느 금방 땅에 묻히지 않았다.  그 전에 추기경이 피렌체로 급히 와서 도시를 손아귀에 틀어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곧바로 시정을 장악하였다.  그는 적어도 고위관리들의 복종을 받아낼 만큼은 다시 권력을 확보하였다.  그는 좀더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하는 체는 하였다.  그는 행동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도록 노력했고, 남의 말을 끈기있게 들엊는 모습도 보였다.  관직은 그것을 찾는 사람들의 집요한 공세가 아니라 그 사람의 공적에 따라 나눠주었다.  그는 공금을 자신의 개인 재산만큼이나 잘 관리했기 때문에, 언제나 이 as제에 민감한 피렌체인들은 이에 깊이 감사하였다.  비록 그의 개인적 이재방식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지만 말이다.  교황 레오네와는 달리 그는 잡담이나 도박, 또는 익살 같은 것을 싫어하였다. (근느 사람들의 품성을 관찰하는데 남다른 호기심을 보였기 때문에, (...) 한가할 때면 어떤 직업을 가졌든 그 방면에 학식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였다.)
  이처럼 피렌체 국정의 상황이 바뀐 데다 이런 유의 인물이 교황을 대신하여 시정을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마키아벨리와 같은 인재가 머리가 텅 빈 로렌초 시대에서처럼 마냥 잊혀지고 내팽개쳐진 상태로 남아 있지는 않을 터였다.  앞서 이미 말했듯이, 레오네가 서기장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소데리니와 가깝다거나 자유 공호국에 봉직했다는 점 이상으로, 그가 로마나 프랑스의 궁정에서 자신이나 동생인 줄리아노와 맞닥끄렸을 때, 물론공직자롯의 책무에서 그랬던 것이지만, 그들에게 보인 냉랭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생아인 줄리오는 메디치 가라는 나무에 푸릇푸릇한 새순이 가득했을 동안에는 뒷전의 그늘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경우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로마 시절 마키아벨리에 대해 그가 보인 태도는 사실 레오네의 노한 기분을 대신 표출한 것이었다.  줄리아노가 그를 임용하려는 데 대해 레오네가 반대한 일은 앞에서 살핀 대로이다(이 책 15장 261쪽을 볼 것-옮긴이).  하지만 줄리오가 피렌체의 국정을 책임지게 되자, 적어도 사소한 사안에 관해서는 자신의 생각대로 해도 괜찮을 만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키아벨리가 줄리오를 만난 것은 1520년 3월 10일께인데, 이는 베토리보다는 더 친절했던 로렌초스트로치를 비롯한 원회의 여러 친구들이 주선해 준 덕분이었다.  줄리오는 그를 친절히 맞아주었다.  필로포 스트로치는 이 모임에 대해 듣고는 자신의 형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형이 마키아벨리르 메디치 가에 소개해 주었다니 매우 기쁘군요.  그가 만약 주인의 신임만 얻을 수 있다면 그의 출세는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겠지요.)
  마키아벨리의 재능에 관해서는 조금이라도 머리가 있다면 그 누구도 입댈 사람이 없었지만, 스트로치의 이 말은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은, 물론 진중함이 부족하고 의견을 냄에 있어 다소 허풍을 떠는 면이 있으며 시를 폄하하는 등 스스로의 이름을 깍아내리는 어떤 성품에도 이유가 일부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배자의 미움을 샀다는 데에 기인하고 있었다.  이제 마침내 얼음은 깨어졌고, 그들은 아마도 그가 할 만한 무언가를 주게 될 것이었다.  우리는 그와 추기경 사이에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 모른다.  그러나 약간 뒤에 기록된 문서와 사태 발전의 추이를 통해 판단할 때, 짐작건대 추기경은 그에게 (일터에서 여전히 두들겨 만들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 또 자신이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관하여 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날로 구체적 방법까지 거론되어, 서기장이 첫 (십년기) 이래 역사 서술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는 오래된 이야기로 옮아간 듯하다.
  그러나, 마키아벨 리가 당시 쓰고 있었던 저작은 7권으로 구성된 (전술론 Arte della Guerra) (전술론이란 제목이 뜻하는 바는 물론 전술, 전략이라는 현대적 용어의 협소한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군사론 전체를 포괄한다.  우너래 마키아벨 리가 붙였던 (De re militari)란 이름도 바로 이러하였다.  그래서 이 원래의 제목을 살리 수도 있겠지만, 이 저작이 저자의 승인 아래 그 생전에 간행된 것이라는 사실 이 저작은 마키아벨리의 주요 작품들 중 그가 살아 있을 때 출간(1521)된 유일한 것이다-옮긴이) 이었다.  이는 로렌초 스트로치가 최근 자신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하는 뜻에서 그에게 헌정된 것으로, 속어로 된 책에다 라틴어 제목을 붙이느 swj자의 습관ㅇ 따라 애초에는 (군사론 De re militari)으로 명명되었다.  그에게 군사학이란 단지 정치학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시민 생활에서 군사적 측면을 떼어낸 것이야말로 이탈리아 병의 시작이었다는 점을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저작은 (군주론) 및 (리비우스 논고)와 필연적으로 보완 관계에 있으며, 그 사상과 정서에서 놀랄 만큼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1516년 파브리치오 콜론나의 원회에서 이루어진 가상적인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콜론나와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뤼지 알라만니, 자노비 부온델몬티, 바티스타 ef라 팔라, 그리고 누구보다도 코지모 루첼라이 등의 인물들이다.  특히 코지모의 경우에 대해서는 깊은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저자의 애석함이 곳곳에서 잘 표출되어 있다.
  여기서 가장 부각되어야 할 점을 든다면, 그것은 마키아벨 리가 (전술론)에서도 역시 고전 작가들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와 현대의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오랜 경험)을 결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피사 전쟁기 동안, 그리고 발렌티노와 줄리오 2세와 프랑스와 스위스와 독일에 사절로 나가 있는 동안, 언제나 자신을 이끌었던 군사 문제를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그것에 쏟아부었다.  그의 관찰은 민병대 제도의 도입에 도움을 주었고, 이는 다시 군사 문제에 대한 그의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  이 문필가는 군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기예를 가르치려 들면서도 감히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놓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던 군주들도 적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자만 속에서 행동으로만 나타내 보이려고 했던 역할을 말로 한다고 해서 잘못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란 인물은 어떤 생각을 하건 간에 항상 놀랄 만큼의 참신성과 예견력을 보여주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도 사람인 이상 편견이나 정념으로 인해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말이다.  고대로부터 비친 빛줄기가 때로는 그를 밝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눈을 부시게 만들어서, 그로 하여금 장차 무기의 발전 양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 될지를 미처 내다보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었다.  이 책이 씌어지던 당시 그는 그러한 무기의 효과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것을 목격할 만한 경우라고는 그때로서는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마리냐도 전투 정도를 들 수 있겠는데, 그는 이에 대해 상세한 보고서를 접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군사학의 불변적 측면에 관한 한, (당시로서도 놀라운 저술이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까지나 그러할) 정도로 계속 변함없는 인정을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근대적 전술의 기초를 다진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그는 정치학의 기초를 놓았던 때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감연한 지성으로써 그 일을 헤쳐나갔다)는 빌라리의 정평 있는 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귀기울일 만하다.  더웅ㄱ이 앞서 말한 대로, 그는 직관력을 발휘하여 이 책에서 전쟁과 정치 사이에 존재하는 강한 결속 관계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군사론을 다룬 이 책에서 (리비우스 논고) 및 (군주론)과, 그리고 지난날 자신의 경험과도 가장 긴밀히 연관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전기 작가로 하여금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깊은 열정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국가란 반드시 스스로의 군대로 무장해야만 하며, 병사들은 폭력과 약탈과 기만을 일삼는 용병이 아니라 결코 상스럽지 않고 (신을 두려워 할 줄 알며) 조국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 않는 훌륭한 시민이어야 한다는 그의 기본 개념들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저자가 파브리치오 콜론나의 입을 빌러(실제의 그는 아마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 피렌체 민병대를, 바로 그들만의 민병대를 칭송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는 (그 결과가 언제나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현인들이 항상 반대했다)는 비판에 대해서, (문제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곱색보라)고 응답한다.  이 문구는 1권 거의 첫머리에 나오는데, 책의 말미에서도 말이 거의 바뀜이 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끝부분은 (군주론)의 마지막 장과 비교해서도 그 열정과 설득력이 결코 뒤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노 콜론나는 이야기를 듣는 젊은이들에게 이탈리아인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는 고대의 용맹심을 되살려내라고 외친다.  (시와 그림과 조각에서 목격했듯이, 이 땅이야말로 죽은 것을 부활시키기 위해 탄생한 곳이 아니던가?)
  마키아벨리가 이 저작을 다듬어가고 있을 때, 새로운 메디치 가의 호의 덕분으로 그의 미래도 밝아오고 있었다.  4월 26일 친구이자 원회에서 가까운 사이였던 바티스타 델라 팔라가 로마에서 좋은 소식을 한 보따리 보내왔다.  그는 오랫동안 메딫 가에 봉사해 온 이력에다 굉장히 값나가는 흑담비 모피를 선물한 덕분으로 교황궁과 매우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지적인 모임을 좋아하는 교황에게 자신들의 원회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들 모두가 마키아벨리의 재능을 높이 사고 있다는 말을 전한 적이 있었다.  또 그는 (만드라골라)에 관해서도 후한 평을 했는데, 이는 당시 이미 교황청에서 상연될 예정으로 있었다.  레오네란 인물은 (군주론)보다는 봄 질척거리는 희극 같은 것에 더 쉽사리 넘어가는 그런 유의 사람이었다.  그는 아마도 농담은 즐기고 쓴 말은 뱉어가며 연극을 보았으리라.  그 교활한 조신은 먼저 교황의 기분을 맞춘 다음, (저술이나 또는 다른 일에 대한 보수)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자신의 후의를 표시한다는 말을 그로 하여금 메디치 추기경에 서 전하도록 해주십사고 청하였다.  이 편지가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좋은 소식은 이것으로다가 아니었다.  마키아벨리는 언젠가 비삐에나 추기경의 칼란드로에게 메쎄르 니차의 찬사를 전한 적이 있었는데(칼란드로와 니차는 각각 비삐에나의 희극 (라 칼란드리아 La Calandria)와 마키아벨리의 (만드라골라)의 주요 등장 인물. 결국 마키아벨리가  비빠에나의 작품에 대해 후한 평을 보냈다는 뜻.  두 사람의 작품은 플라우투스나 테렌티우스 같은 고전 작가를 모방한 르네상스기의 이른바 (commedia eurdita)에 속하는 대표적인 보기이다-옮긴이), 이제 그에 대한 (정중한 답례)를 받게 되었다.  더불어 살비아티 추기경도 호의의 말을 전해 왔다.  그리고 RMx으로, 그럴싸한 말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나토 델 코르노는 그토록 애를 먹이던 500두카토를 되돌려받게 되었고, 그 일부는 돈을 떼이지 않도록 애써준 친구에게로 갈것이었다.
  물론, 글 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저술에 대한 보수)를 받아 그 덕분으로 조용히 공부에 파묻히든지 아니면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것을 바라마지 않겠지만, 피렌체의 서기장이 그보다 더 바랐던 것은 오히려 자신이 한때 봉직했던 자리와 그 때문에 겪었던 온갖 수고로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메디치가로서는 저술을 맡기는 쪽이 관직 임명의 문제를 비켜가느 swhg은 구실이 되었으리라.  바티스타 델라 팔라의 편지에 암시적으로 나타나는 언급으로 미루어보아, 앞서 얘기했듯이 이미 추기경과의 첫 만남에서 마키아벨리에게 저술을 맡기는 방법이 제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그 전에 (그늘 친구들) (원회 단골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을 빌리자면)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당분간 그 가엾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했다.   그 성격상 토마토 익는 가을이나 되어서야 나올 보수를 기다리면서, 그는 미켈레 귀니지의 대파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루카로 가서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이 사건에서 피렌체 상인들이 여럿 관련되어 큰 손해를 입었는데, 그 중에는 교황의 혈족인 살비아티도 끼어 있었다.  그는 이 채권자들을 대변하여 상거래로 인한 부채가 노름빚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파산의 규모 등 관련 사항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제노바에서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마키아벨리에게 법률가나 회계사의 역할을 맡겼던 것이다.
  그는 7월 9일 길을 떠났다.  당시 그는 사인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채권의 규모와 그 채권자들의 면면이 공화국이라 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정도였기 때문에, 추기경 스스로가 그 파견 문제를 결정한 뒤, 루카의 정무위원회에 직접 추천서를 써서 그 위상을 높여주려 할 정도였다.  7일, 정무위원회는 이 편지를 미리 보냈다.  서기장이 이 문제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루카와 관련하여 새로운 문제가 불거졌다.  첫째는 조페소 문제였고, 두 번째는 그곳에 피신하고 있으면서 말썽을 일으키던 피사 대학 학생들 문제였다.  이 사소하고도 귀찮은 문제들에 대한 계획과 편지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우리에게는 추기경이 학생 문제로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편지가 한 통 남아 있는데, 그 표현은 친절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의례적인 것으로 보인다.  피렌체의 정무위원회가 루카의 정무위원회 앞으로 쓴 편지도 한 통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우리 시민과 상인들은(...) 두 달 전 니콜로 마키아벨리라는 사람을 그곳으로 보낸 바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첫머리에 실려 있다.  정무위원호는 그가 공직에 있었을 당시 같았으면 (고귀하고 지체 높은 nobile e spettabile)이란 말로 지칭될 서기장이었다는 사실을 유념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이제 단지 산타 지타의 정무관들과 파산한 상인의 처리 문제를 협의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품상 RmsrlfhTJ 모든 일에 잘 적응하여, 어디에서건 자신의 재능에 값하는 일을 찾아낼 사람이었다.  정치 이론가이자 관찰자 외엔 다른 사람일 수 없었던 그의 품성이, 루카 공화국에 머물면서 그곳 정부를 연구하고 그에 관한 보고서를 쓰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었고, 그는 그 일을 해냈다.  하지만 밀고 당기는 중에 몇 달이 흘러갔고, 그는 그 일을 해냈다.  하지만 밀고 당기는 중에 몇 달이 흘러갔고, 그는 루카에서의 긴 시간적 여유 속에서 또한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 전)을 쓰기에 이르렀다.  이 작품은 그것을 역사서로 생각하고자 한 후세의 현학자들간에는 하나의 커다란 스캔들이 되었다.  그들은 차라리 정치 저술이거나 나아가 문학 작품으로 보아야 할 그 책에서 역사적 오류 또는 오히려 허구라고 불러야 좋을 사실들을 지적해 내기에 바빴던 것이다!  결국에는 그 작품의 본질을 인식해 냈던 명민한 현대의 비평가들조차도 그것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이제는 마키아벨 리가 피렌체 공화국의 역사가 후보에 오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힘차고도 아름다운 산문은 그의 후원자들에 대해서는 견본인 셈이고 스스로에 대해서는 역사 서술의 문체를 시험하는 것이었으리라. 이는 결코 단순한 추측이 아니며 문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친구들에게 그것을 (역사서의 모험)으로 생각하며 보냈고, 친구들 역시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였다.  시험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견본은 나름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그는 니콜로 테그리미의 (카스트루치 안텔미넬리 전 Castruccii Antelminelli vita)을 15세기 판 혹은 필사본으로 읽으면서, 이로부터 (이 이야기 저 이야기 colloqui) (당시 루카에서의 (colloqui)란 말은 피렌체에서는 (pratiche)에 해당된다)를 골라내고는 그것에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 Diodorus Siculus(기원전 60년경에 활동하다가 30년에 죽은 그리스 역사가.  신화 시대로부터 키케로 시대까지의 40권짜리 지중해 세계의 역사를 씀.  비판적 면모는 보이지 않으나, 그가 사용한 사료들은 귀중한 가치가 있음-옮긴이)와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Diogenes Laertius(기원후 3세기초에 살았던 그리스 문필가.  철학자들의 사상을 학파에 의거하여 쓴(철학자들의 생애 Vitae Philosopforum)가 있음.  뚜렷한 역사관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며, 주로 철학자들의 일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쉽게 풀어쓴 대중적 저술이 특징임-옮긴이)를 전범으로 하여 고전 고대의 풍미를 가하였다.  일은 이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고전적 특에 갇혀서 자신이 애호하는 정치, 군사 개념들을 사용하여 다시 한번 이상적인 군주상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그는 마키아벨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치와 시를 역사에 부가하므로써 이 소품은 더 큰 (역사 Istorie)를 위한 (조그만 모형)이 될 것이었다.
  (카스트루초 전)은 8월이 가기 전에 완성되었다.  29일, 그는 자신이 책을 헌정한 자노비 부온델몬티와 뤼지 알라만니에게 그 작품을 보냈다.  자노비는 9월 6일자 답장에다 그 책에 대한 자신과 다른 (그늘 친구들)의 평을 담아 보냈다.  그를 비롯하여 뤼지, 디아체티노, 귀데티, 안톤프란체스코 델리 알비치 등이 다함께 그 책을 읽고 검토한 결과, 그것이 (훌륭히 잘씌워진 글)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들은 다만 약간의 사소한 부분들을 지적하면서 (그냥 두어도 나쁘지 않겠지만 조금 손보면 더 나아질 여지가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말미의 경구들이 그 보기인데, 그것은 수가 너무 많은 듯이 보이기 때문에 efms 책에서 따온 것들의(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부는 차라리 빼버려도 좋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야기는 주로 언어와 문체에 관한 세부적인 문제들에 집중되었다.  야코포 나르디,바티스타 델라 팔라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 역시 이 책을 읽고는 모두가 좋아하며 칭찬의 말을 해주었다.
  자노비가 같은 편지에서 그렇게 불렀듯이, 마키아벨리가 이 (역사서의 모형)으로 호평을 받자,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제는 그가 견본적인 습작에서 진짜 역사서로 옮아갈 때가 되었다는 의견이 늘어났다.  자노비의 말이다.  (우리 모두는 자네가 하루바삐 이 역사서를 쓰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고 믿네.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자네가 그렇게 햊었으면 하네.) 따라서 근 마키아벨리에게 빨리 돌아오도록 재촉하였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그들은 그가 보고 싶었고, 게다가 특히 그에게 (자네도 알 만한 우리의 계획을) 말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계획이라는 게 바로 피렌체사의 서술을 그에게 맡기는 일이었으리라.  
  추기경의 마음이 이미 우호적ㅇ로 돌아선 데다가 그 주변 사람들 모두가 애써준 덕분으로, 일은 이제 거의 다 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마키아벨리는 이 같은 호의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9월 8일에서 10일 사이 어느 때쯤에 피렌체로 돌아왔다.  루카에서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방향은 좋은 결과를 얻는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 곧 피렌체 대학이 자신을 고용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그 대학의 장은 다름아닌 메디치 추기경 자신이었고 실무 쪽은 마키아벨리의 처남인 프란체스코 델 네로가 맡고 있었다.  세세한 계약 조건은 아직 미정이었으므로, 이 미래의 역사가는 델 네로에게 손수 이렇게 써주었다.
  계약 조건은 다음과 같다.  그는 연봉 얼마얼마를 지급받는 조건으로 얼마 얼마의 햇수 동안 고용된다.  그의 의무는 피렌체 국과 그 도시에 의해 행해진 일들의 연대기 또는 것이다.  그 시기는 그가 가장 알맞다고 생각하는 때로 하고, 사용 언어도 라틴어로 할 것인지 토스카나어로 할 것인지 그에게 맡긴다.
  그러나 대학 당국의 11월 8일자 결정에 따른 실제의 계약 내용은 이와 달랐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1월 1일을 시작으로 향후 2년 간 대학에 고용되었다.  그 첫해의 계약은 확정된 상태였지만 두번째 해의 경우에는 재계약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들은 (피렌체의 연대기나 역사, 또는 그 외 다른 일 중에서)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택할 수 있도록 했으며, 그 보수는 스투디오화 fiorini di studio(대학 당국이 지급하는 피오리노 금화-옮긴이)로 100피오리노였다.  이 화폐는 (촉진이 불가능한) 재래식 피오리노화로, 당시 통용되던 피오리노 봉인금화처럼 평가 절하된 화폐 종류였다.  따라서 고용에 대한 보수는 사실상 57피오리노 정도에 불과했는데, 이는 그가 정무위원회 서기장으로서 한창 명성을 날릴 때쯤에 받던 액수의 반을 약간 넘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 소용 닿는 데가 있었다.  그는 마침내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일에는 명예가 따라오고 있었다.  과거에 피렌체 공화국의 역사가를 역임한 면면들 속에는 레오나르도 아레티노(레오나르도 브루니를 말함.  그가 아레초 출신인 데서 나온 이름-옮긴이), 포초, 스칼라가 들어 있었는데, 이 모두가 위대한 인물들로 정무위원회의 제1서기장을 지낸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가 서기장직으로 거의 돌아간 듯한, 혹은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낸 듯한 기분이었다.  마침내 한 가닥 서광이 비쳤고, 그것을 통해 무언가가 눈앞에 나타났다.  추기경이 몸소 그 일을 맡겼다는 사실이 희망을 더 밝게 해주는 듯이 보였다.  추기경은 그를 고용하자, (그 외 다른 일)도 맡길 수 있다는 계약 조건에 따라 교황에게 보일 글 하나를 주문했는데, 이것이 바로 (로렌초 사후의 피렌체 국정에 대한 논고 Discorso delle cose fiorentine dopo la morte di Lorenzo) (이하 (피렌체 논고)로 줄여 씀)이다.  당시 교황은 적법한 후계자 없이 자신과 추기경이라는 두 명의 성직자 손에 놓여 있던 피렌체의 국정을 안정시키는 방책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황 레오네가 추기경의 입과 베토리의 글을 통해 그의 자문을 구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마키아벨리에게 결코 좋은 것이 될 수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공화국의 봉급을 받는 입장에서 자신에 대한 요청에 직접 응대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요청이란 게 스스로도 그토록 다시 쓰고 싶어했던 피렌체 국정에 관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피렌체가 문제였기 때문에, 그는 (피렌체 논고)에서 교황에게 그럴 듯한 말보다는 자신의 나라에 유익한 이야기를 하려 하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그의 견해는 당시의 여론과는 너무 차이가 있었다.  그의 얘기는, 예컨대 종신 또는 장기간의 임기를 보장받을 필요가 있는 곤팔로니에레를 제외하고는 옛부터 내려오던 통치 방식을 모두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장된 태도로 말미암아 그의 제안은 아주 나쁜 정도는 아닐지라도 어쩐지 현실성이 없고 좋지 않은 것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 (피렌체 논고)에는 보기에 따라 좋은 듯도 하고 나쁜 듯도 한 내용도 끼어 있었는데, 그것은 교황과 추기경이 목숨을 다한 뒤에는 피렌체를 다시 자유롭게 해달라는 말이었다.  이는 사실 넓은 견지에서 나온 조언으로, 레오네에게는 그리 기분 나쁜 말도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의 가문 안에서 적법한 계승자를 찾을 수 없는 마당에 그로서는 한번 관대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반면 교황의 인척과 그의 충실한 추종자들에게는 이러한 조언이 매우 듣기 싫은 것이었으리라.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들의 명예와 이익이 깡그리 훼손될 것이고, 나아가 평시민의 정권의 복수에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음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한 학식 있는 문학사가는, 그같이 고귀한 생각을 접할 때 (우리는 (군주론)의 저자를 새삼 우러러보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대신 이렇게 말하겠다.  그러한 생각은 그의 드높은 이상을 일관되게 말해 줄 따름이라고.  우리는 (군주론)에 담긴 고결한 생각들뿐만 아니라 그 시적 장중함을 (피렌체 논고) 마무리 부분의 다음과 같은 말 속에서 다시 음미하게 된다.
  믿건대,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는 그의 조국이 자연스럽게 내려주는 것이며,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이자 동시에 신까지도 기쁘게 하는 일은 자신의 조국을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나아가 공화국과 왕국을 법과 제도로써 혁신하는 사람만큼 그 행동에서 더 칭송받을 만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이야말로 거의 신성을 지녔던 인물들 다음으로 찬사를 받아야 마땅한 이들입니다. (...)  그러므로 하늘은 그 누구에게도 이들보다 더 나은 재능을 내리지 않았고, 더 영광된 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신이 성하의 가문과 성하께 내리신 그 넘치는 행운들 중에서도, 바로 이것이야말로 성하의 고명을 스스로 영원케 하고 성하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누려온 영광까지도 뛰어넘게 만들 힘과 기회를 부여하는 최고의 행운인 것입니다...
  (피렌체 논고)는 로마로 보내졌으나, 당시 추기경은 그곳에 없었다.  그는 1520년인 그 해 11월 6일 피렌체를 떠난 상태였다.  반면 이탈리아 문제에 대한 레오네의 모호한 게획은 점점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의 죽음으로 공백 상태에 있었던 제국이 결국 에스파냐의 칼에게로 넘어갔고, 이는 여태까지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 사이 마키아벨리의 명성은 이 (피렌체 논고)보다는 최근의 다른 저술들과 장차 나올 역사서 덕분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출세를 보장받은 사람)으로 비쳤다.  또 다른 미래의 역사가이자 그의 친구인 필리포 데 네를리는 평소의 시금털털한 농담 없이 그에게서는 보기 드문 진지함을 가지고 자신이 (카스트루초 전)과 (전술론)을 애타게 고대하고 있다는 편지를 11월 17일자로 로마에서 써 보냈다.  (전술론)은 메디치 추기경도 기다리는 바였고, 그래서 네를리는 그에게 그것을 주기로 약속했던 자노비 부온델몬티의 말만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그가 책을 보내지 않는다면 난 전하께 꼼짝없이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네.  그러니 제발 자네 둘 사이에 끼어 나 죽는 꼴 보지 않도록 해주게나.)
  마치 이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는 듯이 마키아벨리에 대한 재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루크레치아 살비아티는 궁정 내의 문인들 중 하나로부터 (알렉산드로 대왕 전) 한 부를 증정 받았는데, 네를 리가 그녀에게 읽어준 바 있던 퀸투스 루푸스의 같은 인물에 대한 전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이를 마키아벨리에게 맡겨 새로 고쳐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이 묘하게 꼬인 것이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네를리의 공모에 가담하지 않았고, 비난은 그 혼자 뒤집어 썼다.  15일에는 콘테시나 리돌피가, 19일에는 마딸레나 치보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제 마돈나 루크레치아만이 교황의 여동생들 중 유일한 혈육으로 남게 되었다(레오네 10세의 아버지인 대 로렌초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는데, 이중 첫째딸 루크레치아 메디치는 야코포 살비아티와 결혼했고, 콘테시나 메디치는 피에로 리돌피와, 마딸레나 메디치는 프란체스케토 치보와 결혼했다.  치보는 교황 인노첸초 8세의 사생아였다-옮긴이).  레오네가 교황위에 올랐을 때만 해도 그토록 환희와 드높은 희망이 넘치던 그 가문이 불과 4년만에 혈족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황폐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마키아벨리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조그만 행운에 만족하면서, 장차의 더 나은 삶에 희망을 걸었다.  생질은 베르나치에게 보낸 편지의 분위기도 마침내 환하게 바뀌었다.  피에로 소데리니가 그에게 보낸 1521년 4월 13일자 편지가 그가 새로이 되찾은 마음의 평화를 흔들어놓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전에 소대리니는 그에게 아드리아해 연안의 소국 라구사 공화국의 서기장 자리를 제의했던 적이 있었고 그는 이를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제의를 해왔다.  전임 곤팔로니에레는 당시 서기장을 물색하고 있던 프로스페로 콜론나에게 피렌체 공화국의 전임 서기장을 천거한 것이다.  로마의 대귀족이자 용병 대장이었던 그는 (전술론)에서 자신의 사촌 파브리치오의 명예를 드높인 저자의 명성에 이끌려 그 제의를 매우 환영하면서 그 일의 성사 여부를 소데리니에게 일임하였다.  그에 대한 보수는 금화 200두카토에다 비용을 따로 얹어주는 것으로, 실로 대단한 액수였다.  피에로 소데리니는 귀띔하기를, 만일 조건이 마음에 들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즉시 말에 올라 피렌체에서 그가 길을 떠났다는 것을 알기 전에 곧바로 콜론나에게로 가라고 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이 제의가 (그곳에 남아 보잘 것 없는 돈으로 역사책을 쓰고 있느니보다 휠씬 낫다)고 하면서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귄유하였다.
  금화 200두카토에다 비용은 따로라니!  공화국의 제1서기장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의 봉급도 그만큼은 되지 못했다.  마키아벨 리가 역사를 쓰는 대가로 받는 액수도 겨우 그 사분의 일이나 오분의 일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러한 제의를 한순간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을 수락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명예로운 공직을 버리고 외국 군주의 궁정에서 봉직함을 뜻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로서는 궁정의 조신으로 5피오리노를 받는 쪽보다는 피렌체에서 자유를 누리며 단 1피오리노를 받는 쪽이 나았을 법하다.  그가 콜론나에게로 간다면, 이는 곧 대학 당국이나 원회 친구들과의 약속을 깨뜨리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친구들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고, 조국 피렌체는 물론 스스로와 애증을 함께 해온 알베르가초에 안녕을 고하는 것이며, 마침내 그가 (출세가도)로 접어들 무렵, 그리고 계약상의 (그외 다른 일)이라는 문구가 말해 주는 바처럼 공화국으로부터 무언가 일 부스러기를 (아마도 사절의 직이리라!) 맡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이제 막 가지려는 참에, 그 (메디치 군주들)과 간계를 끊어버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콜론나의 제의는 정말 탐나는 것이었지만, 마키아벨리는 단 한시도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제18장 (나막신 공화국) 사절 시기
  1521년 5월의 어느 날, 마키아벨리는 아펜니노 산맥의 정상을 뒤로한 채 볼로냐 쪽으로 말을 몰아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안장 주머니속에는 공화국 시절의 10인위원회를 대체한 8인집행위원회 gli Otto di Pratica의 명령서가 들어 있었다.  그 문서는 그가 오랫동안 근무하던 바로 그 부서에서 씌어졌고, 그것에 서명한 사람 역시 그를 대신하여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니콜로 미켈로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시 한번 정부 신임장을 들고 공화국의 경계 너머 토스카나를 벗어나 사절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의 조국이 그 날카로운 관찰자이자 예견력 있는 정치가인 그를 다시 기억해 냈단 말인가?  그리하여 그는 지금 또 다시 프랑스 왕과 황제에게로 가고 있는 것인가?
  오 가엾은 마키아벨리여!  그는 단지 카르피에서 열리고 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총회 모임 참석차 가고 있었을 뿐이었따.  그는 그곳에서 정무위원회 및 피렌체의 실질적인 군주인 메디치 추기경의 이름으로, 피렌체 영내의 프란체스코 수도원들은 여타 토스카나 지방의 수도원과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전할 것이었다(피렌체 내의 프란체스코 수도원들을 좀더 쉽게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정책이었음-옮긴이).  간단히 말해서, 추기경은 전용 교서로 자신의 뒤를 밀어주는 교황의 승인 아래, 일찍이 사보나롤라가 도미니쿠스 교단의 대역을 함으로써 안렉산드로 6세로 하여금 그를 파멸시킬 핑계를 주었던 그러한 일을 피렌체 영내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을 대신하여 해줄 심산이었다.  이러한 임무는 정치가에게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고, 더욱이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의 위대함과 천재성과 품성들, 그리고 (만드라골라)의 작자로서의 평판을 감안할 때, 그가 이러한 임무를 맡았다는 것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결코 그것을 거절할 리 없었다.  그는 바로 그 메디치 군주들에게 (하찮은 일)이라도 좋으니 제발 자신을 써주십사고 간청했던 바 있었고, 그래서 이제 그들은 그에게 하찮은 일 하나를 내려준 셈이었다.  다시 한번 그는 운명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짓밟아 스스로를 부끄렇게 만들어보려는 심술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 길은 그를 어느 순간에 프란체스코 수도외의 총회장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 일은 그에게보다는 그것을 그에게 맡긴 사람들에게 더 부끄러움을 안겨줄 만한 그런 것이었다.  그는 세상의 부조리에 억눌렸던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는 더 나아지겠지 기대하면서 자신의 쓰라린 고통을 우스갯소리와 웃음 속에 감추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마키아벨리는 이 감미로운 계절에 아펜니노 산맥의 마지막 구릉지 사이를 막 감아돌아 내려가는 길이었고, 그의 발 밑에는 풍요로운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이 길을 잘 알았다.  그것은 이전에 다른 기대 속에서 수없이 오고 갔던 길이었다.  그는 이러저러한 곳을 알아보았고, 더 자신만만했던 당시의 여행들 도중에 자신이 했던 생각들을 되새겨 보았다.  여기는 그가 황제를 배알하려고 독일로 가는 길에 잠깐 묵었던 농가 오두막이었지.  그리고 또 여기는 1510년 무더웠던 여름날 그가 프랑스 궁정으로 가는 세 번째 사행길에 산등성이로부터 이리저리 급하게 말을 내리몰아 찾아왔던 그 시원한 냇물이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그는 탁발승들과의 협상을 위해 카르피로 가는 길이었고, 주머니 속에는 (나막신 공화국 la repubblica degli Zoccoli)(탁발승들이 신는 (나막신 zoccolo)에다 비유한 말.  여기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가르킴-옮긴이)에 관계된 훈령과 신임장이 들어 있었다.  
  피오 가의 고도인 카르피는 모데나로부터 12밀리오 떨어져 있는데, 마키아벨 리가 지나갈 예정이었던 그곳의 당시 총독은 또 다른 피렌체 사람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였다.  이 위대한 정치가 두 사람은 이미 서로간에 안면이 있었다.  1509년 니콜로는 뤼지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베로나 발 편지에서 그의 형 프란체스코에 대해 무언가 친구 사이의 일을 떠맡긴 적이 있었다.  니콜로가 정무궁에서 서기장으로 있고 프란쳇코가 에스파냐 주재 대사로 있을 당시, 둘 사이에 서로 교류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사실 프란체스코는 니콜로가 그에게 라벤나 전투를 (편향된 시각에서) 얘기했다고 불평한 적까지 있었다.  귀치르디니는 1513년말 자신의 임지에서 되돌아온 즉시 교회령 국가내의 명예와 부가 함께 보장되는 자리들에 임용되었던 반면, 마키아벨리는 촌구석에 갇혀서 그에게 그처럼 수많은 불행과 그토록 커다란 영광을 동시에 가져다줄 그 무료한 시간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이후 지금까지 그들은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도 서로 만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탈리아의 폭풍이 그들을 한 배에 태우기 전까지는 이 둘 사이에서 의기상통한 어떤 감정이나 진정한 우정이라는 것을 찾기란 힘든 일이었다는 점이다.  귀차르디니는 귀족적인데다가 차갑도록 이기적이고 진중하며 예의가 깍듯한 인물이었으나, 마키아벨리는 평민적이며 피가 뜨겁고 마음이 너그러운 편인 데다 좀 경박스러울 정도로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전자가 실제적이고 현실주의적인 데 반해, 후자는 이론적이고 이상주의적이었다.  둘은 모두 그들의 진정한 위대성을 내밀하게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귀차르디니가 격조 높은 품격이라는 암벽 속에 그것을 가두어놓고 있는 데 반해, 마키아벨리는 일상이라는 옷을 입고 건달 같은 행동을 하고 돌아 다니는 데 개의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일생이 귀차르디니가 풍족하게 누렸던 명성과 권위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해서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시인과 혁신가들에게 흔히 퍼부어지는 비난의 소리는 제쳐두고라도, 바로 이러한 점이 그와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 넘기 힘든 물줄기를 뚫어놓았던 것이다.  반면 귀차르디니는 자신의 그 차가운 위엄으로 몸을 감싼 채, 후대의 사람들까지도 포함한 모두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 사람의 행운과 다른 한 사람의 불운 간에는 너무 간격이 져서 생전의 그들 사이에 경쟁이라는 것은 아예 있을 수도 없었다.  경쟁 관계는 그들 사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우리가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시간쯤이면, 마키아벨리는 그 고통스러웠던 여가 속에서 인쇄본으로든 필사본으로든 간에 자신의 가장 유명한 저작들을 이미 쓰고 펴낸 상태였을 뿐 아니라, 지금은 (피렌체사)를 집필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부 일을 비롯한 다른 사무로 바빴던 귀차르디니는 별로 글을 쓰지 못했고 간행된 저작도 전혀 없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것에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재능에 마음이 이끌렸다.  그리하여 그와 편지를 주고받노라면 그의 뜨거운 열정이 자신에게로 옮아오는 덧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마키아벨리에게 쓴 편지들이 그의 서신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인간적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시인과 철학자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치를 하는 데는 그들이 오히려 위험스런 존재로 비쳤다.  카르피로 가는 이 사적 시기에 그가 친구에게 한 말을 들어보면, 마키아베리를 당시의 사람들과 갈라놓은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게 된다.  그는 마키아벨리를 가리켜 (언제나 도에 지나친 주장을 펴고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썼던 것이다.  물론 이 말 속에는 어떤 아이러니컬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표적이 된 사람의 명예에 누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마키아벨리는 귀차르디니를 정말 좋아했으며, 장차 어느 땐가의 편지에서 자신의 이러한 감정을 불쑥 토로하게 될 것이었다.  귀차르디니가 시인이자 혁신가적인 그의 (과장성)을 이해해 주지 않았을 때에도, 그는 슬펐지만 결코 그에 대해서 어떤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그의 성품이 그렇듯이, 그는 오히려 귀차르디니의 덕성을 칭찬하였고 더욱이 그의 행운을 찬탄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메디치 군주들)이 그렇게 큰 일들에 쓴 인물, 조국을 빛낸 피렌체인에게 존경의 염을 표하였다.  그는 자신과 동등한 입장에서 국가사를 논할 수 있었던 정치인,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만은 그의 단단하고 차가운 껍질을 깨고 나왔던 인물을 좋아하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틀림없이 카르피 가는 길에 모데나에 들렀고 돌아오는 길에도 다시 그곳으로 갔을 것이다.  둘은 함께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당면 문제들에 대해서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기이한 사행을 두고 질탕한 농담을 주고받았으리라.  이때가 그의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산 카쉬아노의 곰팡내 나는 생활을 떠나 그토록 먼 거리를 말 잔등에 얹혀왔던게 아니었는가 말이다.  이제 여독을 느낄 때도 되었을 것이다.  그는 5월 11일이나 12일에 피렌체를 떠나 모데나에서 하룻밤과 한나절이 채 못 되는 동안을 묵었다.  그는 탁발승들이 저녁 기도를 위한 종을 울리기 전에 도착했는데, 그것은 일라리오네라는 이름의 수도사가 그렇게 하도록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모두를 상전으로 모셔야 할 판이었다.  그는 그곳에 있으면서도 친구와 계속 대화하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에게는 이어서 더 기이한 임무가 맡겨졌는데, 이 덕분에 그들간에 나눌 이야기 거리도 더 많아진 셈이었다.  양모 조합의 조합장들이 그에게 쓴 5월 14일자 편지에는, 그곳 수도사들에게 잘 얘기해서 조반니 괄베르토 다 피렌체라는 저명한 수도사(별칭이 (북풍)일 정도였다)로 하여금 다가오는 사순절에 두오모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하게 해달라는 부탁의 말이 담겨 있었다.  이 전언은 마키아벨 리가 길을 떠난 때보다 이삼 일 뒤에야 부쳐졌으나, 우편이 더 빨라서 카르피에는 그와 거의 동시에 도착하였다.  아마 한 친구의 편지를 통해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것으로 생각되는 귀차르디니는 그럴 더 놀려먹을 기회를 갖게 된 셈이었다.  그는 17일자로 마키아벨리에게 편지를 써서, 피렌체의 유명한 대식가이자 동성연애자인 파키에로토로 하여금 (친구에게 아름답고도 우아한 아내를 찾아주도록 한 것)처럼, 그에게 설교자를 구하게 한 것은 정말 기막힌 생각이라고 농을 던졌다.  그리고는 이어서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자네가 그들이 기대하는 대로 자네의 명예를 지키면서 일을 하리라 믿네.  하지만 이 나이에 새삼 신심을 새롭게 해서 명예를 흐리게 하지는 말게나.  지금까지 언제나 그 반대로만 살아온 자네 처지에 신심을 돈독히 한다는 건 미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치함으로 치부될 테니 말일세.)  그는 끝으로 수도사들이 그를 위선자라고 비난하기 전에, 그리고 유구한 영향력을 가진 카르피의 분위기가 그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기 전에, 서둘러 일을 마치라고 조언하면서 글을 맺었다.  아니 한 가지 더.  얄궂은 운명의 장난에 의해 만일 그가 어떤 카르피 사람의 집에 묵게 된다면, 그의 병에는 약이 없을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시지스몬도 산티라는, 그 도시의 군주인 알베르토 피오의 서기장 집에 유숙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는 곧 집주인과 수도사들을 놀려먹을 생각으로 반짝거렸다.  즉 귀차르디니로 하여금 그에게 특별 전령을 자꾸 보내게 해서, 사람들이 그를 귀하신 분으로 보도록 만들어 더 존경도 받고 식사 대접도 나아지도록 하려는 게획을 세운 것이다.  (이 얘기를 들려주지 않을 수 없겠네.  그 궁수가 편지를 가지고 도착하여 땅에 코가 닿다록 절을 하면서 급한 일로 특별히 왔다고 말하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우왕좌왕하ㅇ며 존경스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네.  그 중 몇 사람이 나에게 새소식을 묻더군.  그래서 나는 내 위신을 높일 겸 이렇게 말해 줬지.  사람들은 황제를 트렌토에서 기다리고 있고 스위스는 새 의회를 소집했으며, 프랑스 왕은 가서 그 왕과 만나려 하지만 그의 자문관들은 그것에 반대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네.  그랬더니 사람들은 모두 입을 헤 벌린 채 모자를 벗어들고는 내가 편지를 쓰는 동안 내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지 뭔가.  내가 장문의 편지를 쓰는 양이 그들에겐 신기한지 마치 무엇에 홀린 듯이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다네.  나는 그들을 더 놀래줄 양으로 가끔 펜을 멈추고는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했지.  그랬더니 모두 침을 질질 흘리더군.  만약 그들이 내가 무엇을 쓰고 있었는지를 알았다면, 더 놀라 자빠졌을걸세.)
  그는 5월 17일자 같은 편지의 서두에서 설교자를 택하는 일에 대해 우스갯소리를 장화하게 늘어놓았다.  수도원들을 격리시키는 문제는 모든 것이 수도사들의 선거가 끝날 때를 기다려야만 했는데, 이 또한 그에게 새로운 농짓거리의 소재가 되었다.  (난 이곳에서 할 일없이 빈둥대고 있네.  수도회 총장과 감독관들이 선출될 때까지는 아무것도 일을 볼 수가 없는 형편이라네.  그래서 일을 한번 꾸며보기로 했지.  스캔들이 일어나도록 해서 그들이 나막신을 끌고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도록 말일세.  내가 잘만 한다면 성공하리라 믿네.  자네의 조언과 도움이 있다면 훨씬 낫겠지.)  카르피의 분위기가 영향을 미칠 거라는 귀차리디니의 농에 대해서 그는 뻔뻔스러운 어조로 지금까지 거짓말 박사로 지내온 마당에 자신이 배울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믿는 것을 말하지 않고, 내가 말하는 것을 믿지 않으며, 혹시라도 진실을 말할 때가 있다 해도 그것을 알지 못하도록 이러저러한 거짓말 속에 숨겨버리기 때문이네.)  또다시 그는 스스로가 가지고있지도 않은 악습들을 마치 가지고 있는 양 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귀차르디니는 친구의 장난에 같이 마음이 동해서 이 게임을 계속하기로 하고는, 마치 그가 중요하고도 극히 비밀을 요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것처럼 꾸며 시지스몬도를 놀려먹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일 하룻동안 두 통의 편지를 마키아벨리에게 보냈다.  (친애하는 마키아벨리 보게나.  난 자네에게 조언할 시간도 재간도 없을 뿐 아니라 보통은 아무 보수도 없이 그런 일을 하지도 않네만, 자네의 그 험난한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미력하나마 도움을 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네.  그래서 여기 궁수 하나를 전령으로 보내네.  그에게는 이 일이 매우 중요하므로 최대한 빨리 전하라는 지시를 미리 내려두었으니까, 아마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뛰어들어갈 테지.  그가 들어오는 양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주접거리는 모습을 보면, 모드들 자네가 귀하신 몸이며 자네의 일이 탁발승과의 일과는 다른 중요한 것이라고 믿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네.  그리고 우편물이 두꺼워야 주인이 믿을 것이므로, 내가 취리히로부터 받은 통신문들을 동봉할 테니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주든지 자네 손에 들고 있든지 알아서 편리할대로 사용하게나.)  마키아벨리는 이 편지를 받고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자신하건대,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고 말할 수 있네.  숨이 턱에까지 찬 전령의 모습과 두꺼운 편지 뭉치 사이에서 이 집과 이웃의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어버렸지 뭔가.  나는 메쎄르 시지스몬도를 특별히 생각해 주는 척하며 그에게 스위스와 왕 사이의 조약 내용을 언급한 부분을 보여주었다네.  그는 이를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네.  그래서 황제의 병환과 그가 프랑스로부터 사고 싶어하는 나라들에 대해 말해 줬지.  그랬더니 그도 놀라 침을 질질 흘리더군.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뭔가 미심쩍어하는 눈치일세.  왜 그 많은 편지들이 갑자기 탁발승만이 가득한 이 아라비아의 사막에 나타났는지 도대체 의심스럽고 이해할 수 없다는 거겠지.  그리고 나 역시 그에게는 자네가 편지에서 썼던 바와는 달리 그렇게 대단한 사람으로 비치는 것 같지는 않네.  노상 집안에 죽치고 있으면서,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아니면 그냥 찍 소리 않고 처박혀만 있으니 왜 안 그렇겠나.  그래서 자네가 나와 그를 두고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쩌나 싶네.  그가 뭔가 캐물어도 난 엉뚱한 쪽으로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다가올 홍수나 언젠가는 우리를 침공해 올 투르크에 대한 이야기, 또는 이 시대에 심자군을 일으키는 것이 합당한지 어쩐지 등등 술집에서 흔히 하는 잡담들을 늘어놓는다네.  그는 아마 자네를 대면해서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묻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걸세.  그도 그럴 것이 자네야 말로 그를 이 혼란에 빠뜨린 장본인이 아닌가 말이야.  나야 뭐 집에서 괜히 그를 바쁘게 만드는 성가신 존재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래도 그는 이 장난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 눈치네.  그래서 그런지 계속 환대하는 얼굴에다 식사도 연일 진수성찬이라 나도 얼싸 좋다 하고 먹어치우지.  그리고는 점심 때면 '야! 오늘 아침엔 2줄리오 giulio (교황 줄리오 2세가 처음 만든 은화-옮긴이) 벌었네,' 저녁 식사 때는 '오늘밤엔 4줄리오'하고 중얼거린다네.)  두 피렌체인은 이런 식으로 게속 농을 주고받았고, 마키아벨리는 이에 더해서 대접까지 잘 받고 있었다.
  장난기를 거두고 이야기를 먼저 진지하게 되돌린 쪽은 귀차르디니였다.  그는 1일자로 된 것들 중 두 번째 편지에서, 마키아벨리 정도의 인물이 설교자 구하는 일 때문에 탁발승들에게 사절로 보내졌다는 이 희극적 장면 속에 담긴 거의 비극적인 비애감을 표시하였다.  (나는 공화국 및 수도사 사절 이라는 자네의 직함을 보면서, 엣날 자네가 상대했던 그 많은 왕과 제후들을 생각했다네.  그리고는 리산드로스 Lysandros(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격파한 스파르타의 장군-옮긴이)를 기억해 냈지.  그토록 많은 승전과 전리품을 뒤로 하고 스스로 영예롭게 이끌었던 바로 그 병사들에게 급식하는 일을 맡게 되었던 그 인물 말일세.  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지.  바뀌느니 사람의 얼굴과 사물의 외양뿐이요, 사건은 언제나 되풀이될 뿐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 이미 일어나지 않았던 일은 결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건의 이름과 얼굴이 바뀜으로써 오직 현명한 자만이 그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법.  역사가 우리에게 좋고 유인한 것은, 우리에 앞서 존재하면서 우리가 결코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일들을 다시금 알고 보도록 해주기 때문이 아니겠나.  사제식 추론법에 따르자면, 이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이 나오지.  자네에게 역사를 쓰도록 배려한 사람들은 칭송받아야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자네는 자네에게 맡겨진 그 일을 지체 말고 부지런히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것일세.  이를 생각하면 지금의 이 사절 임무도 깡그리 쓸데없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네.  이 삼 일 간의 여가 동안 자네는 나막신 공화국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이 실례를 자네의 다른 에들과 비교 대조해 봄으로써 자네의 목적에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네.)  이러한 말 속에는 그가 마치 (리비우스 논고)나 (군주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대목들이 있다.
  그러나 그는 곳 평소의 쾌활함으로 돌아온다.  (난 자네가 시간을 죽이거나 운세가 좋을 때 그것을 잡지 못하는 것은 자네에게 유익함이 없는 것으로 보았네.  그래서 늘 하던 대로 다시 전령을 보냈다네.  그게 다른 일에는 별 소용이 닿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내일 아침 파이 하나는 더 얻게 해주지 않겠나.)  하지만 이제 농담 거리도 떨어졌고, 그가 맡은 일도 끝나 가고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19일자 편지에서 보듯이, 그는 자신의 총독 친구에게 주인집 사람의 의심스러운 눈치에 대해 말하면서 장난에 종지부를 찍었다.
  제기랄!  이 작자에게 신경 좀 써야겠네.  눈치 빠르기가 흡사 악마 삼만을 합친 것 같다니까.  내 생각으로는 그가 자네의 장난을 알아차린 듯하이.  왜냐하면 전령이 오자 그자 이렇게 말했거든.  (이것 봐.  틀립없이 뭔가 내막이 있어.  전령이 너무 잦거든.)  그리고는 자네의 편지를 읽고 나서 또 이렇게 말했다네.  (내 생각으로는 총독이 나와 당신을 놀리고 있는 것 같은데.) (...)  그래서 난 지금 변도 제대로 못 볼 지경이라네.  그가 빗자루를 들고는 나를 여인숙으로 쓸어내 버리면 어쩌나 하고 말일세.  그러니 내일 하루는 쉬어주게나.  이 장난이 지나쳐서 여태까지 좋았던 사정이 완전히 뒤집히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어쨌든 요 삼 일 동안은 좋은 음식에 편안한 잠자리에 여러 모로 참 잘 지냈다네.
  오늘 아침에 수도원 분리 문제에 착수했네.  이 때문에 아마 온종일 바쁠걸세.  내일이면 끈날 것 같네만. (...)
  역사와 나막신 공화국에 대해서라면, 내가 여기 와서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지는 않네.  왜냐하면, 난 여기서 나름의 장점을 지닌 수많은 규율과 제도적 장치들을 접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이를 유용하게 쓸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일세.
  탁발승들의 제도와 규율을 관찰한 것에 대한 이 마지막 구절은 그야말로 마키아벨리 그 자체, 즉 만사에 자신의 끝없는 호기심을 발휘하는 마키아벨리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점, 좋은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를 논외로 할 때, 그가 이 사절 시기 동안 얻은 것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설교자 문제에 관해서는 실제로 그는 비아냥거리는 어조이긴 하지만 dpt 역사 사실들을 방편으로 삼아 그 축복받은 북풍 신부의 고지식함은 완화하고 피렌체 사람들에게는 그 고귀한 성인의 설교를 통해 위안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려 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잠깐 동안이지만 무례한 농짓거리는 거둔 채 이렇게 썼다.  (보건대 신앙이라는 외투 속에 스스로를 감춘 악한들이 얼마나 신뢰를 받고 있는지, 가장이 아니라 진실로 프란체스코 성인이 걸었던 궂은 길을 따르는 선인들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난 쉽게 간파할 수 있다네.)  하지만 북풍 신부가 난색을 표했고,  이 기묘한 사절께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그의 말로는 자신이 더 이상 피렌체에서 합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세.  그리고 그가 이전에 그곳에서 설교할 당시, 창녀가 대중 앞에 나설 때엔 반드시 황색 베일을 써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누이가 보내온 편지로는 청녀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옷을 입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전보다 더 꼬리를 치고 다닌다며 이러한 점들을 매우 못마땅해했다네.  하지만 난 그를 달래려고 이렇게 말했네.  큰 도시에서는 어떤 일도 오래 지속됨이 없이 오늘 다르고 내링 다른 것이 보통이므로, 그 일에 너무 놀라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일세.  그리고는 로마와 아테네의 경우를 보라고 했더니, 그는 비로소 마음이 한층 가라앉아 나에게 거의 언질을 주었다네.)  그러나 다음날 그는 또다시 마음이 흔들렸고, 그의 상급자가 찾아와서는 그가 다른 곳에 가기로 정해졌다는 말을 전했다.  나로서는 이 일이 결국 어떻게 끝났는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 결과를 꼭 알아야 할 만큼 그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수도원 분리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미 얘기했듯이, 그 일은 19일날 시작되어 20일에 끝나 버릴 정도였다.  어쨌든 이 일에서도 마키아벨리 특유의 솜씨는 수도사들의 어지러운 강변들 속에서 어느틈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총회 평의원들을 한 사람씩 따로 만나서는, (그들 모두에게 말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하고 날카로운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전했다).  그는 이 일을 교황이 원한다는 정치적 무기를 내 보였고, 그런데도 이 사안이 수도회 200년 이래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반응이 나오자 마침내는 (인간의 지혜란 자신이 지킬 수도 그렇다고 누구에게 팔 수도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포기할 줄 아는데 있다)는 말까지 내뱉기에 이르렀다.
  (소인배들 같으니.)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하며 그 형편없는 탁발승들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추기경과 8인집행위원회로부터 오는 새로운 공한들이 그들의 숙고 과정에 보탬이 될 것이었으리라.  일라리오네 신부가 미키아벨리에게 빨리 말에 올라 피렌체로 가서 그 편지들을 받아로라고 권하자, 지금까지 카르피에 있을 만큼 있었던 그로서는 이것이 여기서 벗어나 그를 파견한 사람들을 놀려먹을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던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모데나에 도착하자 22일까지는 피렌체로 들어가라는 신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추기경에게 거침없는 논조로 장문의 보고서를 올렸다.  그는 거기에다가 자신은 (약간 몸이 불편한 관계로) 말을 빨리 달릴 수 없다는 말을 집어넣었다.  그리하여 그는 총독의 말 잘 타는 전령 하나를 대신 보내고는, 8인집행위원회와 추기경과 프란체스코 수도외의 조바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데나에 눌러앉아 귀차르디니를 벗삼아서 며칠을 즐기며 보낸 뒤, 여유작작하게 피렌체로 돌아왔다.
  바로 이러한 것이 카르피에서의 임무였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흡사 마키아벨리의 전 생애를 상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가 얻은 것은 단지 좋은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만은 아니었다.  그는 비록 자신에게 그 일을 맡긴 어리석은 사람들의 마음에 쏙 들게 하지는 못했지만, 언제나처럼 쾌활한 얼굴을 잃지 않음으로써 후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아울러 역경의 시기에도 그 유쾌한 편지들을 남김으로써 명예를 얻었던 것이다.
  
    제19장 역사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시골집에 틀어박혀 (피렌체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그 자신과 그가 갈망하던 생활 사이에 또다시 옛날의 그 숲과 올리브 동산과 사람들과의 절연이 들어서 있다.  날이 밝으면 이전에 베토리에게 적어 보낸 대로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런 생활이 시작된다.  끈끈이로 잡을 개똥지빠귀는 없지만, 그물로 잡을 만한 꾀꼬리는 있다.  또한 숲이 있고 술집이 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나른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자신이 모데나에서 귀차르디니와 나누었던 그 유쾌했던 이야기들과, 총독 친구의 그늘에서 며칠 간이나마 맛볼 수 있었던 공사의 기분 좋은 향내를 다시 기억해 낸다.  그러다가 저녁이 오면, 그의 고독은 다시 위대한 영혼들로 둘러싸이고, 그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는 사람들은 근대의 피렌체인들이며, 일찍이 그에게 위대했던 업적들을 일러주었고 또 그 자식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귀기울였던 고대의 로마인이 아니다.  이제 그는 메디치 추기경에 의해 공화국의 역사가로 명 받았기에, 더 이상 아무 거리낌 없이 스스로의 영감에 따르던 때만큼 자유로움을 느끼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는 원래 역사가이기보다는 정치 저술가이자 역사 철학자였기 때문에, 역사를 쓰는 것보다는 역사로부터 정치과학적 법칙을 추출해 내는 데 더 익숙하다.  비록 그가 역사를 쓴다 해도, 그에게 이는 다만 그것을 정치과학적 법칙으로 환원하는 과정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그 시작부터 모호함과 난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틴어로 쓸 것인지 아니면 이탈리아어로 할 것인지 언어를 택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게약시 그 문제에 관해서는 백지 상태로 모든 것을 일임해 달라고 말했을 때, 이미 답이 심중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쓰는 역사는 결코 낡은 옷으로 몸을 감싼 죽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며, 자신이 묘사하는 행동의 주체인 바로 그 사람들의 살아 있는 언어로 된 살아 있는 존재이어야만 했다.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도 문제였다.  그가 원래 생각했던 시점은 코지모의 복귀와 함께 메디치 가가 피렌체에서 세력을 잡게 된 1434년이었다.  일찍이 레오나르도 아레티노가 쓴 역사는 이 해보다 약간 앞서 끝을 맺었고, 포초의 역사 또한 그 해를 약간 넘긴 때까지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역사 서술의 시점을 이렇게 설정하는 것이 지금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무난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자신에게도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렇게 하는 편이 시간도 근접하고 자료 조사도 용이할 뿐 아니라, 행복했던 서기장 시절 이후 줄곧 계획해 온 이 일을 위해 그 동안 자신이 정리한 자료들을 이용하기에도 좋으며(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이 문제를 해명한 바 있다), 그의 전임자들이 이미 밟았던 길을 다시 가지 않으려는 자신이 생각에도 부합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아첨한다는 악평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와, 다른 역사가들이 지금까지 도시의 내부사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려 하지 않았던 관례, 그리고 새롭고 차별성을 가져야 할 자신의 저술이 전임자들의 역사를 계승치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기댐으로써 중요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는 결국 도시의 기원으로 돌아가서 그로부터 1434년까지의 내부적 사건들을 요약하고는, 이를 서론격인 1권에 담기로 작정하였다.  즉 로마 제국의 화해로부터 그가 원래 생각했던 시간까지를 거의 포괄하는 이탈리아 역사의 윤곽을 그리려는 것이었다.  이로써 그의 서술을 더 넓은 범위에다 더 충실한 내용을 가지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드디어 일에 착수한다.  우리는 서문의 첫머리에서 그가 (두명의 훌륭한 역사가) 레오나르도와 포초의 유명한 역사서들을 조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역사 쓰기에 새로운 서술 형식과 통일성과 가치를 부여한다.  그는 휴머니스트 학파의 전통과 양식, 자료의 집적에 불과한 연대기들, 그리고 대중 연대기를 뒤로 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섬으로써,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마련한다(마키아벨리가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리돌피의 견해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도 같다.  바로 아래에서 저자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는 사실의 검증을 더 중시하는 현대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역사를 관통하는 인간 행위의 규칙성을 찾아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역사학보다는 일종의 역사정치학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그 이전의 연대기적 역사 서술과 비교할 때, 그는 분명히 수사적이고 장식적이기보다는 더 실용적인 역사의 길로 가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옮긴이).  (리비우스 논고)에서 그랬듯이, 그는 지금까지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사가로서보다는 정치가로서, 정치학이라는 목적을 위해 역사를 쓴다.  그는 정반대의 측면에서 귀차르디니의 더 역사다운 역사를 유명하게 만든 성실하고도 세밀한 사실 추구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사실들로부터 교훈과 법칙과 이론을 추출해 내고 싶어하며, 때로는 사실을 이론에 맞추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래서 더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의 저술에서 여태까지와는 다른 점을 찾아야만 한다.  피렌체와 이탈리아에는 이미 부지런한 연대기 작가들이 다수 있었고, 나중에라도 칼 5세의 시게보다 훨씬 맞지 않는 사료와 문서 속에서 참을성 있게 진실을 캐내는 진정한 역사가들을 보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을 없었고, 또 그 후로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이 어딘지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바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그는 자신의 소략한 사료를 앞부분의 경우 비온도, 빌라니, 브루니와, 뒷부분에서는 포초, 마르키온네 디 야코포 스테파니, 또는 카발칸티와 대중없이 섞어놓은 채로 결코 그것을 면밀히 비교해 보려 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데.  그러소는 한번에 한 사람씩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는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되, 뒤죽박죽으로 샇여 있는 자료들을 끼워맞추고, 다양한 사건들간의 관계를 찾아내고, 갑작스런 예지력으로 길을 밝히고, 힘차고도 눈부신 문체 속에서 모든 사물을 되살려내면서, 그가 손대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역사 속의 사람들과 사건들이 한 인간이자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에게 무심하게 보일 때에는, 그의 이야기는 마치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는 식의 두서없는 모양새를 보일 뿐 아니라 문체까지도 그를 인도하는 사료의 수준으로 하락한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나 영웅이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그가 태오도릭 같은 인물의 모습 아래로 자신의 신국주상을 드리울 수 있을 때, 그의 문체와 사상은 작은 날갯짓에도 놀라울 만한 힘으로 솟아오르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역사 서술 방식을 취함으로써 굳이 새로운 사료를 힘들게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자료는 알베르가초의 서재안에 다 있었다.  우리는 이미 1485년네 비온도의 역사서가 마키아벨리의 집에 있었던 것을 안다.  브루니와 포초의 라틴어 사서들도 (아차이우올리와 야코포 브라촐리니의 이탈리아어 번역으로) 그 당시 인기리에 여러 판으로 간행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장서 속에 들어 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 속에 빌라니의 필사본이 빠져 있긴 했지만, 당시 피렌체에서라면 그 책 한 부 정도 사거나 빌리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테파니와 카발칸티의 필사본 경우에는 그 당시로도 구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리라.  물론 그가 이 외의 다른 사료들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전혀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피에로 미네르베티의 (피렌체 연대기) 필사본을 빌려다가 읽고는 책표지 안쪽의 여백 면에다가 자필로 주석까지 달아놓았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재치 있는 책주인이 이 여백 면에다 당시의 유행에 따르되 각각의 경우와 빌린 사람에 맞추어 3행 시절로 된 상용적인 주의문을 붙여놓았다는 점이다.
  오 마키아벨리여, 저와 더불어 즐기기되
  제발 등불은 가까이 대지 마시고
  곧 돌려주시며 아이들에게서도 멀리해 주시기를.
  그래서, 책을 구하기 위해, 아울러 여자도 보고 좀더 격조 있는 대화도 나누기 위해 그는 때대로 도시에 들르곤 했다.  그는 잠깐이었지만 자신의 (전술론)이 준티 출판사에서 간행되기 직전인 1521년 8월, 교정을 보기 위해 다녀가기도 하였다.  그는 정오표에서 보이듯이 아주 깔끔하게 교정을 보았던 것 같다.  만일 (만드라골라)의 경우를 일단 제외한다면, 이는 그의 주저들 중에서도 처음 빛을 보아 간행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금방 인쇄된 책 한 장 한 장을 애정 어린 손길과 눈빛으로 어루만지고, 원회의 친구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즐거움을 마다하지 않았으니라.
  비록 코지모 루첼라이는 죽었지만, 친구들은 흩어지지 않았고, 마키아벨리는 이들과의 격조 높은 만남 속에서 산 카쉬아노에서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모두 잊어버린 채 스스로 되살아나는 듯한 기분에 젖었다.  그곳에서 (피렌체사)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옛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평시민 가문 출신이지만 세련된 몸가짐과 총명한 머리를 가진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도나토 잔노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결코 그리 잘 알려져 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이러저러한 글들 가운데, 우르비노 공 로렡오 데 메디치를 가리는 (월계시집 Lauretum)안에 들어 있는 것으로 (신군주)에게 군사적 덕성을 갖출 것을 촉구하는 라틴어 2행 시적이 눈에 띌 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와 라틴 작가들 연구에 큰 힘을 쏟았고, 그리하여 이 방면에 상당한 명성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당시 피사 대학에서 그리스 어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겸손함과 아울러 반듯하면서도 사교적인 성품에 매료되어 그를 각별한 마음으로 대하였다.  마치 그 젊은이가 얼마 후 10인위원회 서기국의 옛 직책에 앉아 민병대에 대한 자신의 궁을 계승 발전시키리라는 것, 그리하여 결국은 당대의 정치 저술가들 가운데 자신과 귀차르디니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명예의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잔노티를 신뢰하고 있었다(물론 그만을 신뢰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는 (피렌체사)의 일부가 씌어지는 대로 그에게 읽혔을 정도로 그와는 허물없는 사이였다.  그리고 그들간의 대화는 언제나 역사가 그 일을 맡긴 메디치 가에 관련될 때 부딪히는 서술의 진실성이라는 고민으로 되돌아갔다.  마키아벨리의 요점은 이런 것이었다.  (도나토, 난 결코 코지모가 권력을 장악한 그때부터 로렌초 사후까지의 역사를 내가 모든 짐에서 벗어난 상태에서처럼 쓸 수는 없어.  물론 그들의 행위 자체는 무엇이든 배제하지 않고 그대로 쓸 것이네.  다만 사건의 전반적인 원인들을 논하지 않으려 할 뿐이야.  그래서 나는 코지모가 정권을 잡았을 때 일어난 일들을 기술하되, 그가 어떤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여 그 높은 곳에 다다르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으려네.  이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내가 그의 적을 통해 하는 말을 눈여겨 보아야만 할걸세.  난 내가 직접 말하기보다는 그의 적의 입을 빌려 말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지.)
  잔노티가 직접 마키아벨리로부터 여러 번 들었다는 이 말 또는 이와 비슷한 말들은 (피렌체사)의 서술이 아직 문제의 1434년에까지 도달하지 않은 때에 나왔음이 분명하다.  물론 저자가 시험적으로 미리 써보곤 했던 몇몇 단편적인 글들은 이미 그 시기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일단 제외한다면 그러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저작의 저술 단계를 시간적으로 비정하고자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뿐 아니라 그 결과도 시원치가 않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내 생각으로는 통상 후닥닥 초고를 쓴 다음 차후 그것을 꼼꼼히 되쓰곤 했던 마키아벨리이지만, 이 저작의 경우에는 다른 것에 비해 좀더 천천히 작업을 진행시켰을 것 같다.  그에게는 자료 조사의 문제가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미 앞서 언급했던 바이지만, 그래도 이 때문에 글 쓰는 것이 주춤거렸을 수도 있다.  또는 생각이 순조롭게 잘 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기하학적 삶에서 마지막 사사분기 전체를 차지한 (여가)의 시간을 온통 주요 저작들의 생산에 쏟아부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계속적인 독서) (전반기 29년)와 (오랜 경험) (삼사분기 14년 반)으로쿼 배운 모든 것을 토해 내었다.  그리고 그는 생의 마지막 8분의 1에 해당하는 7년을 거의 모두 (피렌체사)의 서술에 할애한 반면, 그 바로 앞서의 7년 동안에 (군주론), (만드라골라), (카스트루초 전), (리비우스 논고), (전술론)을 모두 써내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현시점에서 몇몇 문서를 통해 당시를 되돌아볼 때, 사람들에게는 마키아벨 리가 (피렌체사)를 쓰고 있던 시기, 특히 이 초기의 시간이 마치 그가 오직 이 일에만 진력한 듯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명상적이고 고립적인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시기는 그의 전기와 서신들에서 기묘한 공백기에 해당한다.  그것은 적어도 상징적 의미에서, 저작의 방대함과 집필의 어려움에 압도된 저자의 명상과 은둔의 모습을 보여주는 공백기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전기 작가라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에서 멋대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는 하다.  이러한 지식의 공백은 단순히 자료가 우연히 망실된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비록 시골의 고적함 속에서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통해 이탈리아 정치판의 뒤엉킨 실타래를 풀게 해줄 사건의 실마리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한때 정무궁에서 외교 서신들을 열람하곤 했던 그는 이제 시내로 갈 때면(그가 1521년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그곳에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술집이나 원회에 들러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시골에 있을 때면, 유럽의 다양한 면모들이 스쳐 지나가는 로마 행 가도 부근에 자리한 술집 밖에 앉아 새 소식을 나꿔챘다.  혹은 친구들로부터 세상 형편을 전해 듣기도 했는데, 변화의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서도 구경꾼이 아니라 행위자로 남게 된(운 좋게도 말이다) 귀차르디니도 그러한 친구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때쯤, 인생에서나 정치에서나 마찬가지로 큰 도박꾼이었던 교황 레오네는 또다시 대도박을 감행하고 있었다.  베토리가 편지에서 쓰고 있듯이, 운명이 그의 조카를 앗아감으로써(1519년에 죽은 우르비노 공 로렌초 데 메디치의 경우를 말함-옮긴이), 그가 가문의 영화를 추구할 명백한 동기는 사라진 셈이었다.  이 상태에서 그가 단지 교회에 대한 권력의 확대만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더 원대한 전국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명확지 않다.  조만간 추기경 직에서 물러나야 될 사촌 줄리오에게 한몫 떼어줄 심산이었다는 말도 있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그가 최근 몇 년 동안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와 에스파냐의 왕 칼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다가, 칼 몰래 프랑수아와 조약을 맺고는 제위 게승 문제를 둘러싼 분쟁에서 프랑수아 편을 들었으나, 결국 칼의 승리로 끝나자 갑자기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칼 쪽으로 선회했다는 사실이다.
  1521년 5월 8일 조약이 체격되고 29일 비준이 끝나자(당시 마키아벨리는 카르피에서 돌아와 있던 상태였다),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교황, 황제 동맹국 주재 사절은 메디치 추기경이, 총감독관은 귀차르디니가 맡았다.  운명은 다시 한번 레오네 편이었다.  프랑스군은 아다 강 유역 바우리에서 에스파냐 군에 일격을 당했고, 이 전투에서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막내아들 조반니 데 메디치는 명성을 얻었다.  프랑스는 이로 인해 밀라노마저도 곧 내주고 말았다.  레오네는 이 승리로 크게 기뻐하였으나 그것이 가져다줄 과실을 맛보지는 못했다.  12월 초하루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이는 늘 좋은 운세에 편승해 온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운명의 장난 같은 것이었다.
  교황의 죽음으로 동맹은 와해되었다.  전쟁은 그의 돈 아니 교회의 돈으로 지탱되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 군 역시 자연히 흩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교회가 빼앗은 파르마 시는 새로 힘을 얻은 프랑스 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귀차르디니의 지휘아래 잘 방비디고 있었다.  롬바르디아에 아무 할 일 없이 남겨져 있었던 메디치 추기경은 교황 선출 회의에 참석하려고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비록 자신이 교황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공공연히 그 자리를 노리던 소데리니 추기경을 저지함으로써, 이미 전임 교황의 처사에 분개하고 있었던 일단의 사람들에게 새로운지지 기반을 더해 준 셈이 되었다.  1522년 1월 9일, 아드리아노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플랑드르 출신에다 전임 교황이나 로마 교황청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매우 경건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이러한 결과에 대경실색한 사람들이 그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을 무렵, 메디치 추기경은 피렌체 공화국과 그곳의 대주교구를 장악하기 위해 돌아왔다.  
  마키아벨리는 틀림없이 레오네의 죽음으로 자신의 손실을 입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뒤에 베르니가 비삐에나 추기경에게 전한 다음과 같은 말을 정말로 그 스스로가 했을 수도 있었을 법하다.
  그는 결코 그에게 득도 해도 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득보다는 해가 많았든지.  그러나 그저 범상한 재능의 시인과 문인들에게도 그토록 많은 시혜를 베풀었던 교황 레오네는 자신도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피렌체의 위대한 서기장에게도 역시 두 가지 점에서 혜택을 주었던 것이 아닐까.  먼저 그 하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이리저리 바꿈으로써 그에게 환상과 동시에 고귀한 상상력을 촉발시킨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절망적으면서도 생산적인 여가의 상태로 방치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언제나 메디치 가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마키아벨리의 문학은 무엇보다도 그를 도운 적인 없는 레오네에게 더 크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 역시 다른 피렌체인들처럼 레오네의 죽음으로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것보다도 그는 언젠가는 로마로부터 좋은 소식이 오리라는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만약 소데리니가 교황 선출 회의에서 승리했다면 서기장의 미래는 확실히 보장되었을 것이다.  쫓겨난 전 곤팔로니에레는 마키아벨 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보인 당시의 싸늘한 태도보다는 옛날의 충성심을 더 쉽게 기억했을 것이므로.  피에로를 비롯한 이 소데리니 가 인물들은 이제 매디치의 권력에 노골적으로 대항하고 있었고, 이 와중에서 지금은 메디치 가의 후견 아래 있는 그들의 옛 부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야심으로 가득한 추기경은 프랑스 왕과 힘을 합쳐 렌초 다 체리의 지휘 아래 시에나 교회에서 군대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이 고려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면서도 더 신속하게 피렌체 정부를 교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당시에 줄리오는 도시의 유일한 실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구 읍도파와 자유의 애창자들을 적어도 곁으로는 감싸안으며 매우 부드럽게 도시를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다시 한 번 국정 개혁에 대한 의견들을 청취하고자 하였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떠보고 피렌체의 어떤 사람들 머릿속에 무슨 야심들이 들어 있는지를 알압기에 매우 알맞은 방법이었다.  자기 쪽 직계의 적손은 이미 끊어져 버린 상태였으므로, 그의 원래의 의도는 진실된 것이었을 법하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때문이었는지 또는 추종자들의 야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적새심에 의한 분노 때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는 메디치 가의 사생아 두 명을 키우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어버렸는데, 이폴리토와 알레싼드로가 바로 그들이었다.  아폴리토는 줄리아노의 아들이었고, 알레싼드로는 당시 우르비노공 로렌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은 줄리오 추기경 자신의 소생이라 추정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추기경은 그러한 감언이설로 인해 이제는 다시 주워 담기는 쉽지 않을 정도로 욕망과 환상에 사로잡히기에 이르렀다.  이미 다수의 정부 개혁안이 제출되었으나, 그는 내친 김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의견을묻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도 의견을 물었고, 그는 이에 대해 앞서 레오네 10세에게 제시한 개혁안을 약간 수정하여 그대로 올렸다.  다만 이제는 그 일이 곧 결과를 볼 것 같았기 때문에, 그는 안의 형식을 직접적인 포고나 성명의 모양으로 바꾸었다.  알레싼드로 데 파치 역시 의견을 내놓았는데,  여기서 그는 마키아벨리의 안을 가리켜 (이상스럽고도 엉뚱한) 데가 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 리가 지금까지 이러한 유의 평가에 익숙해 있었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사실 그의 안은 세부적이 SAUS에서 다소 인위적인 데다 실제적이지 못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요약하자면 평시민 정부로 돌아가되, 추기경이 살아 있는 동안에느 SAPELCL 가에 따르고 그 뒤로는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또한 추기경이 5월 초하루 축제일에 반포하려고 작성해 놓은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포고의 기초를 이루는 내용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일이 그 정도로까지 갔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11일, 알렌싼드로 데 차치는 적당한 라틴어 연설을 tj서, 자유를 되찾게 한 추기경을 칭송하였다.  작자가 이 글을 그에게 바치려 하자, 추기경은 심복인 숌버그를 통해 이렇게 대답하였다. (자네의 연설문은 정말 반갑네만, 그 내용은 아니라네.)  개혁에 대한 생각들을 희석시키려는 변명이랄까 의도랄까가 처음으로 나타나 것은 렌초 다 체리의 원정에서 였다. 하지만 그것이 피렌체 정부의 준비 상태나 그 일을 계획한 사람의 짧은 생각 때문에 무산되자, 이어서 그것에 연루된 음무계힉이 불거져 나왔다.  그것은 그리스도 성체절(6월 19일)에 메디치 추기경을 암살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는 또한 국정 개혁을 앞당기는 길이기도 했다.
  이 음모의 주모자는 마키아벨리와 가장 가까운 두 친구 자노비 부온델몬티와 시인 뤼지 알라만니였다.  그리고 그 외의 가담자로는 또 다른 뤼지 알라만니를 비롯하여 디아체티노와 브루촐 리가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원회에 드나든 문인들이었다.  이는 가엾은 마키아벨리로서는 조금도 달가울 게 없는 사건이었다.  그야말로 이들의 친구 중 하나이자 앞서의 반메디치 음모 사건에 연루된 인물로 지목되었던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더 나쁜 것은, 부온델몬티가 공모자 한 사람에게 그를 이 계획에 동조할 만한 시민들 중 하나로 거명한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이 계획에 정말 연루되었는지, 그리고 이 사실이 공모자에 대한 신문중에 나온 것인지 어떤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 공모자란 인물이 자노비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마키아벨리는 처지가 힘든 데다 친메디치파로 알려져 있지도 않기 때문에, 의심을 사지 않고 필요한 일을 해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첫 재판에서 이에 대한 부온델몬티의 심중이 어떠했는지 아무것도 진술된 사실이 없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는 시인 뤼지 알라만노아 함께 앞질러 귀띔을 받고는 미리 몸을 피했기 때문이다.  붙잡힌 사람은 다른 뤼지 알라만니와 디아체티노뿐이었는데, 그들은 신문 끝에 일을 자백하고는, 6월 6일 효수형에 처해졌다.  내가 앞서 언급한 니콜로 마르텔리(서간집 Lettere의 저자와는 다른 사람이다.)라는 이름의 그 공모자는 브루촐리처럼, 그리고 바티스타 델라팔라를 비롯한 다른 공모자들처럼 용케 도망을 갔다.  그러다가 1524년 메디치 정부의 손에 잡혔고, 결국에는 부온델몬티의 그 숨겨진 심중을 밝히게에 이르렀지만, 때는 이미 1526년으로 아르노 강의 다리 밑으로 거친 강물이 넘쳐 흐르고 있는 상태였다.
  강물은 테베레 강의 다리 밑으로도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소데리니 추기경은 처음엔 메디치 추기경을 싫어했던 교홍 아드리아노의 편애를 듬뿍 받았으나, 메디치 가쪽에서 그이 음모에 대한 불리한 정보를 부지런히 일러바침으로써 결국에는 카스텔 산탄젤로에 갇히는 신세가 디고 말았다.  그의 형 피에로는 그 음모가 발각된 지 며칠 뒤인 1522년 6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이제 이 헌신적인 시민에 대한 기억도 메디치 정부의 판결에 의해 공개적으로 훼손되어 버렸다.  베네데토 다로베차노가 그를 위해 카르미네 성당에다 만들어 놓은 무덤은 텅 빈채 남아 있었고, 후세를 위한 그의 진짜 묘비명은 마키아벨리가 쓴 그것이었다.
  피에로 소데리니가 세상을 떠난 그날 밤
  그의ㅡ 영혼은 지옥의 목구멍까지 내려갔지.
  그러자 플루토가 소리쳤네. (이 어리석은 영혼아, 지옥엔 왜 왔느냐? 림보로 가서 어린애들하고나 지낼 것이지.)
  이 넉줄밖에 되지 않는 시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너무 많은 말들이 있었다.  다른 어리석은 영혼들은 tepfl니에 대한 동지애적 입장에서 이에 분개하였다.  심지어는 마카아벨리를 비난에서 구하려는 목적으로 그가 이 작품을 썼다는 증거들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기에 옛 서기장이 자신에게 항상 친절과 호의를 보여주었던 곤팔로니에레를 조롱하는 듯한 모습은 마땅찮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진실과 마키아벨리의 진정한 성격을 왜곡하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라는 사람이야말로 농담을 좋아하는 데다가, 몰락한 영웅들, 특히 발렌티노처럼 사악한 인물이나 소데리니 같이 유약한 인물에는 더 정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지 않는가 말이다.  결국 이 유명한 묘비명은 피렌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어떤 상황에서라도 내뱉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신랄한 농담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무릇 농담이라면 날카로워야지 결코 애처롭거나 너그러워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인, 완전히 말로 하는 농담일 뿐이며, 마키아벨리 자신이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거 뭐, 별로 얼얼하지도 않구먼)이라고 말했던 그런 유의 농담인 것이다.  농담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현대인들보다, 자신의 위대한 숙부는 (시인의 입장에서) 그냥 재미로 농담삼아 이 묘비명을 썼을 뿐이라고 한 줄리아노 데 리치의 16세기 주석이 사실 더 진실에 가깝다.
  그 음모 계획에 뒤이은 재판 과정과 판결 이후에 마키아벨리의 기분이 어떠했는지는 어떤 문서도 우리에게 말해 주는 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문서가 가르쳐줄 수는 있는것보다 더 쉽사리 그의 기분을 상상할 수가 있다.  바로 그 당시, 그는 또한 선량하고 경건한 사제로서 모두가 좋아하던 동생 토토를 잃는 슬픔까지 겪었던 것이다.  니콜로는 그의 옆에있어주려고 피렌체로 돌아왔다.  당시 그 자신은 사절로 나갈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피렌체로 와보았자 그는 다만 사절로 예정된 사람들에게 도움말을 주는 데 만족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한때는 그렇게 좋았던 이도시로의 여행도 이제는 왠지 가슴 아프고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그의 인생에서 남아 있었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의 하나인 원회 출입도 끝이 났다.  죽거나 도망간 친구들에 대한 슬픔에다 그 스스로도 어찌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봉착한 그는 한때 귀양지 같은 곳이었다가 지금은 도피처가 된 자신의 시골집에 그 어느 때보다도 깊숙이 몸을 숨겼다.  이는 또한 바로 그 무렵 피렌체에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돌림병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길이기도 했다.  1522년 11월 27일, 그는 자신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그 무렵, 부온델몬티와 알라만니가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다시 들어오려다가 붙잡혔다는 소식이 피렌체에 알려졌다.  두 명의 망명객은 결국 풀려날 것이므로 이 사건이 그들에게는 별반 위험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회에서의 추억을 일깨우는 모든 것이 그로 하여금 두려움과 참담함을 새삼 느끼게 만들었다.  자신이 또 다른 메디치 추기경(조반니 데 메디치를 말함. 1513년에 레오네 10세가 됨-옮긴이)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감수해야만 했던 고문과 투옥으로 인한 고통이 마음과 육신 양쪽으로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는 자신이 인생사에서 (두 음모 계획 사이에서 끼어 있던) 마지막 세월들을 낙담 속에서 쓸쓸히 되돌아보았다.  그것은 마치 그 해말이나 1523년초쯤에 그 가까이 가고 있었음이 확실한 (피렌체사) 제 8권 서두와 흡사했다.  그의 쓴 술잔을 가득 채우느라고, 아고스티노 니포의 유명하고도 악명 높은 표절이 간행된 것도 바로 이때다.  그 볼썽 사나운 (군주론)의 모조품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내가 발견한 베토리의 한 편지에서 그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걱정을 안겨다주는 아들 로도비코에 대한 새로운 근심으로 심란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는 결국 8월초까지 갈 돌림병이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던 때였다.  시민들은 피렌체를 떠나 시골로 흩어졌다.  그러나 역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다.  롬바르디아에서는 에스파냐와 프랑스 간의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프랑스 군은 밀라노를 잃은 후, 본니베 장군의 지휘 아래 새롭게 정신을 다진 군대로 되돌아왔다.  이에 맞선 것은 칼 5세 휘하의 샤를이란 이름을 가진 두 인물, 즉 나폴리 총독인 란노아와 프랑스 왕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킨 부르봉이었다.  바로 이대(1523년 9월 14일) 교황 아드리아노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오히려 그의 주치의에게 도시를 구한 은인이라며 화관과 치하의 글을 바치면서 기뻐하였다.  교황 선출 회의는 길어졌고, 줄리오 데 메디치가 이끄는 노장파와 폼페오 콜론나를 앞세운 소장파가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문인들에게는 이 상황이 마치 옛날 또 다른 줄리오와 또 다른 폼페오 간에 있었던 대립의 재판으로 보였다(이탈리아어 이름인 줄리오와 폼페오를 라틴어식으로 바꾸면 율리우스(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된다-옮긴이).  이 투쟁은 마침내 줄리오의 승리로 끝났고, 그는 클레멘테 7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11월 18일).  메디치 추기경들은 오히려 음모 사건들의 덕을 본 셈이었다.
  일단 두려움이 가시자, 언제나 쉽사리 달아오르는 마키아벨리의 가슴은 다시 희망으로 불타기 시작하였다.  그에게 먼저 떠오른 생각은 새 교황이 추기경이었을 때 자신에게 쓰라고 맡긴 작품을 바치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질질 끈다 싶을 정도로 느릿느릿 작업해 오고 있던 그 책이 이제 갑자기 보물 단지처럼 여겨졌다.  내가 알기로 당시 작업의 진도는 바야흐로 8권에 이르러 이야기는 교황의 숙부이자 메디치 군주국의 진정한 창시자인 로렌초의 행적을 다루어야 할 시점에 와 있었다.  이 사건들은 시간적으로도 당시에 가깝고 그 사안도 중요했기 때문에, 그로서는 조심해서 다룰 필요가 있었다.
  1524년 8월 30일, 마키아벨리는 재산 문제로 포피아노에서 어떤 일을 해달라고 부탁한 귀차르디니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는 먼저 그 해엔 꾀꼬리마저 잡을 수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뒤(이탈리아에서는 꾀꼬리의 일종인(beccafico)를 식용으로 하고 있다-옮긴이) (또 하릴없이 한 해가 지나가는데 식탁엔 맛있는 음식조차 놓을 수 없구나!), 늘 그렇듯이 어조를 싹 바꾸고는 이렇게 썼다. (난 지금까지 시골에서 피렌체사의 저술에 전념해 오고 있었다네.  거두절미하고, 자네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부분을 내 편에서 한번 봐준다면 자네에게 10솔도를 줄 용의가 있네.  난지금 어떤 대목을 세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그게 사실을 과장하거나 폄하하지는 않았는지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단 말일세.  물론 결과는 내 스스로 판단해서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한 아무에게도 불편을 주지 않도록 처리할걸세.)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죽음은 그에게 이 8번째 권을 종결하는 동시에, 당시 그가 교황에게 바치려고 작정한 작품 전체를 끝맺는 데에는 최상의 시점으로 보였다.  그는 책을 서둘러 마무리하고는 이어 전체적으로 글을 다듬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손질을 거침으로써, 그의 글은 쓸데없는 장식을 덧붙이던 당시 문인들의 유행과는 달리 오히려 더욱 명료하고 꾸밈없는 문체를 가지게 될 것이었다.  그는 글을 장식하기보다는 글에 힘을 실어주려 하였다.  그는 일종의 환영 비슷한 기대감 속에서 자신의 위대한 시간들을 작업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러다가 쓰던 글에서 고개를 들고는, 친구들이 전해 오거나 술집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롬바르디아의 평원과 프로방스의 따뜻한 날씨 속에서 경쟁 관계에 놓인 두 강대국이 시시각각 펼치는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는 숨을 멈추고 교황 클레멘테의 아슬아슬한 게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레오네 10세만큼의 역량도 운세도 갖지 못했으면서도 게임을 계속하려는 듯이, 이제는 황제를 떠나 프랑스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느라 마키아벨리는 수시로 펜을 멈추었다.  그리고, 꾀꼬리를 잡지 못한 그를 위로나 하려는 듯, 쌀쌀한 가을의 새벽빛 속에 그가 놓은 가시나무 덫 사이로 첫 개똥지빠귀들이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제20장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이제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에게 다시 힘을 주는 무언가가 그이 상상력과 지성을 자극하면서, 그를 축 늘어진 시골의 분위기 속에서 끌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개똥지빠귀와는 사뭇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는 마치 고목에 다시 싹이 돋은 듯한 기분에서 시내 출입이 더 잦아지고 그곳에 더 기분 좋게 머물렀다.  루첼라이 원은 영원히 문을 닫아버렸지만, 이제 또 다른 정원이 그에게 열려 있었다.  산 프레디아노 성문 밖의 야코포 르노차이오 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곳은 문인도 펄학자도 자주 들리는 곳이 아니며, 학식 있는 쟁론이 들려오는 곳도 아니었다.  대신에 그곳에서는 향연이 열리며, 음식도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였다.  포르나차이오는 하층 시민plebeo 출신의 부자였지만, 귀족들이라고 해서 그의 집을 멸시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특히 피렌체에서라면 편견까지도 맛있는 음식과 함께 삼켜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맛있는 음식은 카르피에서의 농담들에도 불구하고 미식가인 마키아벨리에게는 그 자체가 큰 매력이었으리라.  그리고 또한 바르베라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녀는 매력 만점의 젊은 가인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그녀와 벗하고 싶어했으며, 친구들도 한동안 그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이에 대한 첫 언급은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신임 교황에게 하례를 드리러 갔던 베토리가 프란체스코 델 네로에게 쓴 1524년 2월 5일자 편지에 나타난다.  (니롤로 마키아벨리에게 안부 부탁하네.  그리고 그에게 전해 주게나.  저녁 시간에 오랫동안 기다려도 종내 열리지 않는 여기 이 문옆에 서 있는 것보다는 때때로 포르나차이오가 내는 저녁 식사를 바르베라와 함께 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말일세. )
  사실 마키아벨리는 친구나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그녀에게 끌려들고 있었다.  바르베라는 가까이하기 어려울 만큼의 큰 매력을 지닌 그런 여자는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가난한 처지의 몰락한 (신군주) 같은 그에게는 그것이 다만 한동안이나마 자신이 무엇을 정복하며 지배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을 법하다.  그는 그러한 환상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아는 시인이었고, 게다가 불우한 시절을 보내면서 그러한 생각을 연장하며 그것으로 살아가는 기술을 터득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것은 56세의 남자가 겪을 수 있는 , 때로는 활기차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작은 연애 사건이었다.  혹은 스스로의 기분과 여인의 기질에 따라 환히 타오르는 듯하다가도 금방 사그라드는 조그만 모닥불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그녀는 중년의 연인인 그가 비록 재능 외엔 가진 것이 없어도 다정하게 굴었다.  물론 가끔은 애정 어린말로 그를 놀려대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의 재치를 좋아했고, 그의 재능에 이끌렸다.  위대함이란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소원하게도 하지만, 또 때로는 사소한 일에서조차도 빛을 발하면서 사람들을 끌어당기기도 하는 법이다.  이들 둘 사이에는 보통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키아벨리가 죽은 지 17년이나 된 1544년에 와서 어떻게 바르베라가 (니콜로 마키아벨리와의 좋은 추억 속에 담긴 애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녀의 소송 사건을 도와달라고 로렌초 리돌피에게 청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복잡한 것이긴 해도,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니콜로는 자신의 양처 마리에타를 사랑했다.  그녀는 다정한 아내이자 부지런한 주부였으며 동시에 사랑하는 아이들의 엄마였던 것이다.  하지만 칼리말라의 옷감 장수에게도 언제나 충분한 것은 아니었던 이러한 역할들만으로 마키아벨리라는 사람을 만족시키기는 힘들었다.  시골집이며 숲이며 새 잡는 여흥이며 모두가 그에게 즐거움을 주었지만, 그것도 그에게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아꼈지만 마음이 넓을 수는 없었던 마리에타 역시도 바로 그런 집이며 숲이며 새 잡기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자주 포르나차이오의 만찬 모임에 나갔다.  그리고 바르베라도 그곳에 있었다.  (클리치아 Clizia)가 탄생한 곳도 바로 이러한 만찬과 모임에서 였다.  그 얼마 전, 카추올라 극단이 몬텔로로에 있는 베르나르디노 디 조르다노의 저택에서 (만드라골라)를 상연한 적이 있었다.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바스티아노 다산 갈로가 배경을 그린 무대였다.  포르나차이오는 자신의 연금 상태가 풀린 것을 축하할 목적으로 1525년 1월 13일에 열기로 한 잔치 마당에서 이 장관을 재연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만드라골라)를 무대에 올리는 데 대한 얘기가 오가고 있을 때, 마키아벨리는 인심이 후한 주인에 보답하려고 했건 또는 바르베라를 즐겁게 해주려고 했건 간에,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새로운 희극 작품을 선보이는 쪽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곧 작품을 쓰기 시작했으나, 잔칫날은 멀지 않았고 시간은 빠듯했다.  불쑥 제의를 하긴 했으나 써놓은 것이라곤 아직 한 자도 없는 데다 무엇을 쓸 것인지도 정하지 않은 상태인지라, 이번 같은 경우라면 고전 시대의 희극을 토대로 각색하는 도리밖엔 딴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플라우투스의 (카시나 Casina)를 모형으로 삼게 되었는데, 나에게는 이것이 그냥 우연한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포함해서 모든 것 모든 사람을 놀려대곤 했는데, 이 새로운 희극에서는 바로 자신의 애정 행각들을 재미의 도마위에 올렸다.  비록 그가 자신에 의해 피렌체인 니코마코(이름의 아이러니라니! 그 첫 음절들은 바로 자신으 것과 같지 않은가)로 둔갑한 스탈리노네 만큼 나이가 들지는 않았지만, 그가 바르베라에게 보낸 몇몇 편지와 시구들 속에는 약간 우울한 어조로 자신의 뒤늦은 연애 사건을 희롱하고자 하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못마땅한 건
  당신이 아니야 차라리 나 자신이지.
  내가 알고 실토하건대
  그 같은 아름다움이라면
  더 싱싱한 젊음을 사랑해야 해.
  이 시구들은 운율은 다르지만 거의 같은 표현을 빌려 희극의 칸초네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래, 이사랑에 빠진 늙은이야
  그 일은 불타는 젊은이에게 맡겨두는 쪽이 더 나았을 텐데.
  전기 작가든 문학사가든 여태까지 고려에 넣지 않았던 작품의 이러한 기원은 지금까지도 해명되지 않고 있던 (만드라골라)와 (클리치아)간의 예술적 가치의 큰 차이를 쉽게 설명해 준다.  앞의 경우는 솟구치는 감흥으로부터 분출되어 나온 것이었고, 뒤의 경우는 포르나차이오가 열고 싶어하는 잔치에 시간을 대어야 하는 상황에서 비교적 냉정한 마음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작품의 도덕적 목적성을 상정하여 고안되었던 둘로 접은 글판의 가설은 완전히 무너져버린다.
  (클리치아)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그는 플라우투스를 그대로 옮기기도 하고, 당시의 풍취에 따라 자유롭게 그것을 따오기도 하며, 때로는 내용을 지어내고 새로이 바꾸기도 하면서, 짧은 시간 안에 급히 작품을 써내려갔다(그의 이러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작품속에서 진정 새롭고도 신선한 것은 그 문체이며 피렌체인 특유의 재치이다.  그것은 비록 (만드라골라)의 기지와는 비할 수 없다 해도, 원본의 고전극보다는 종종 더 나은 데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야말로 그 작품이 영감의 세례를 별로 받지 않고 급히 씌워졌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마키아벨리는 몇 주 동안 (피렌체사)를 한쪽으로 제쳐놓았을 것이다.  아니면 둘을 동시에 쓰고 있었을 수도 있다.  역사를 쓰다가 싫증이 나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을 때 희극으로 가는 식으로 말이다.
  공연의 밤이 왔다.  포르나차이오는 호화찬란한 연회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여기에는 물론 몇 달 전 교황이 공화국의 수반으로 내정하여 보낸 어린 이폴리토 데 메디치를 필두로, (도시의 저명 인사들과 당시 권력층에 있던 고위 공직자들이 모두 초청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 주요 인사들에 뒤이어 중간층 시민들 cittadini mezzani과 그보다 하층 시민들도 함께 초대되었다. (이미 퍼진 명성으로 인해 모두가 보고 싶어했던 )그 연극이 드디어 막을 올렸다.  무대 배경과 무대 면은 바스티아노 다 산 갈로, 일명 아리스토텔레라 불린 바로 그 사람이 맡았고, 바바리에 따르면 이는 (모두에게 만족스러웠다).
  연회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 화려함 덕분으로 연극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 소문은 피렌체 밖으로까지 퍼져나갔다.  물론 곧이곧대로 모두 믿을 바는 못 디지만, 당시 모데나의 총독으로 있던 필리포데 네를리는 마키아벨리에게 부친 1525년 2월 22일자 편지에서 농담조의 과장을 섞어 이렇게 쓰고 있다.  (자네의 희극 작품은 어디에서나 이름을 날리고 있네.  내가 이러한 소문을 친구의 편지에서 전해 들었다고는 생각지 말게나.  난 그것을 여행객들로부터 들었다네.  그들은 길을 가며 산 프레디아노 성문에서의 그 화려했던 장관과 그 멋있었던 광경들을 외치고 다닐 정도라네.  그러한 장관을 어찌 토스카나 안에서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겠나.  여기에서도, 그리고 나아가 알프스너머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그런데 자신이 도덕적으로 뭔가 낫다는, 위선이랄까 혹은 질시랄까에서 (클리치아)와 그 저자를 구설수에 올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네를리 자신이 바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농담 섞인 축하의 말을 바로 며칠 후, 프란체스코 델 네로에게 바르베라의 (꽁무니를 쫓아 다니면서) (그게 무슨 잘난 일이라고 그 이야기를 희극으로) 썼느냐고 비난하며 (마키아)의 행동을 심하게 나무랐다.  그는 독설을 끝내면서, 델 네로에게 (자신의 이름은 말하지 말고) 무언가 좀 조치를 취해 보라고 촉구하였다.  델 네로는 니콜로의 처남이었으므로, 이는 가계내에서 그를 귀찮게 만들려는 위선적 간계였던 셈이다.
  그 무렵 이미 수정 작업이 끝난 (피렌체사)를 직접 헌정하려는 생각에서, 마키아벨리는 (클리치아)의 상연 얼마 후 로마로 돌아가는 친구 베토리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당시 dEjs 다른 생각들을 심중에 품고 있었음이 분명한 교황은 베토리를 보자마자 즉시 마키아벨리의 근황과 함께 책이 끝났는지의 여부를 물어왔다.  베토리는 로렌초의 죽음까지 작업이 완료되었으며, 자신이 그 일부를 읽어보았는데, 좋은 것 같더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혼란스러운 정황이 아니었다면 벌써 직접 그것을 헌정하러 왔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교황은 일단 겉으로는 (아무렴, 와야지! 어째 그 책은 반갑고 기쁘게 읽힐 것 같구먼)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베토리는 질시 때문인지 차가운 성격 탓인지는 모르지만, 교황 레오네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마키아벨리의 희망을 서둘러 미리 막아버리려고 하였다.  교황의 말을 전한 3월 8일자 편지에서, 그는 (시기가 책을 읽고 바치기에는 좋지 않기 때문에) 과연 직접 책을 들고 와야 하는지 어떤지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하며 억지로 김을 빼놓았다.  그리고는 이어 이렇게 덧붙였다. (최근 교황의 기분으로 보아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 뻔한 일에 자네를 굳이 오라고 하고 싶지가 않다네.) 그는 프란체스코 델 네로에게도 똑같은 내용을 써보냈다.
  책을 읽고 그것을 바치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 얼마 전인 2월 24일, 제국 군은 파비아에서 프랑스 군을 무찔렀고, 그로 인해 결국 교황은 황제의 입장에서 볼 때 프랑스와 연합을 뜻한다고 보이는 몇몇 조약들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왕자신은 포로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막강한 힘을 가진 에스파냐의 위협아래 놓이게 되었다.  클레멘테는 돈도 군대도 잃은 채, 정복자의 뜻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처지에 놓였다.  교황은 레오네에게는 영민함이었지만 자신에게는 다만 소심함과 우유부단함을 의미할 뿐인 갈팡질팡 정책을 밀고 나가, 서둘러 4월 초하루에 황제와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 덕분으로, 교황과 황제는 당시 (카이사르의 그늘 아래) 프렌체스코 스포르차(로도비코 스포르차의 아버지인 프란체스코(1401-66)가 아니라, 로도비코의 둘째아들인 프렌체스 마리아를 가리킨다.  그는 1521-1524년, 1529-1535년 동안에 밀라노 공이었다-옮긴이)가 소유하고 있던 밀라노 공국을 함께 지키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황제는 교회령 국가들 (그가 페라라 공으로부터 빼앗아 주겠다고 약속한 레초를 포함해서)과 피렌체 국 그리고 그곳에서 메디치 가의 세력을 지켜주겠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같은 조약에 따르면, 교회령 국가를 지켜주고 메디치 가의 지배를 인정해 주는 대가로 피렌체인들은 관례가 그렇듯이 황제에게 십만 두카토를 지불해야만 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피렌체에서 교황, 황제 동맹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된 축제가 아무런 흥을 내지 못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평화를 희생해서 교황의 안전을 보증받았던 조약도 그 안도감이 오래가지 않았다.  항제는 총독을 통해 자신 명의로 된 조약을 비준하였으나, 헤초 문제를 비롯한 부속 조항들에 대해서는 비준이 연기되었다.  황제의 좋지 않은 성품을 알리는 징후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 가운데에서 교황은 당시 이미 유럽 정치의 중심 축이 되어 있던 마드리드궁에 조카인 살비아티 추기경을 사절로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여기에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동행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과거에 추기경에 대한 충성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사실 그는 (전술론)이 인쇄되었을 때, 로마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그것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그이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그것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추기경 역시 당시 어떤 사람보다도 그의 재능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추기경의 궁에서 일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은 그의 부친인 야코포였다.  그는 기품 있는 노인이자 훌륭한 시민이었다.  추기경의 자줏빛 옷조차도 언제나 아버지의 꾸지람을 면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5월 3일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마키아벨리를 거명한 사람도 바로 야코포였다.  그리고 13일에 그는 이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었다.  (네가 더불어 자문을 구할 만한 서기관으로 내가 보기엔 니콜로 마키아벨 리가 제일 적임자인 듯하구나.  내가 이에 대해 성하께 말씀올렸으나 아직 결정을 내리시지 않고 계신다.  어떻게 하실지 두고 보자꾸나.)
  그 기품 있는 노인은 바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품행과 풍속에서 매우 엄격한 사람이어서, 아들의 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무뚝뚝하게 꾸짖곤 하였다.  이로 보아, 이러한 측면에서 니콜로에게 붙어다니던 악평은 사람들이 주장하던 바와는 달리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면 야코포가 떠도는 얘기들보다는 사실적 측면을 더 중시했든지.  하지만 교황의 망설임은 결국 그 제의를 거절하는 쪽으로 가고 말았다.  그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정치적인 혹은 도덕적인 생각에서 였는지 아니면 그를 다른 데 쓰기 위함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야코포가 아들에게 보낸 5월 17일자 편지에서 (교황께서 꺼려하니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만 접어야 되겠다)고 한 말이나, 24일자 편지에서 (그래서 이젠 더 이상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말기로 하자)고 한 말뿐이다.  애석할지니!  그가 서기관으로 동행했더라면, 그 사행은 새로운 의미를 가졌을 텐데.  새로운 경험을 한 마키아벨리의 머리에서 또 무엇이 나왔을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처럼 이베리아 행이 좌절되고, 아마 모든 일이 이미 끝난 뒤 이를 알게 되었을 법한 마키아벨리는 결국 로마로 가서 (피렌체사)를 교황에게 바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5월의 마지막 며칠 간을 이용하여 길을 떠났다.  교황이 그를 맞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친절하고 다정한 것이었으리라는 점은 6월 9일 클레멘테가 자신의 사금고에서 그에게 120두카토 금화를 답례로 주도록 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사실 그는 로마에 올 때 책 하나만 들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그 특유의 열정으로 피력하여 교황의 냉정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를 단시간 내에 돌려놓는 데 성공햇던 것이다.  교황은 당시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자신의 정책 어디가 나쁜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스스로 우유부단했던 관계로, 언제나 결단력 있는 정복자의 희생물이었던 것이 지금까지 그의 타성적 행로였다.  인색한 성품 때문에 병사라고 제대로 있을 리 없었고, 레오네가 했던 것과는 달리 관직가 성직록 판매도 주저하니 수중에 돈도 있을리 없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나쁜 교황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훌륭한 세속 군주가 되기를 망설이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미 해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병대 제도였다.  이야말로 그의 위대한 생각이자 오래전부터 내건 깃발이 아니었던가!  교황과 자문관들, 살비아티, 사돌레토, 심지어는 목석 같은 숌버그조차도 설복되어 그의 말에 넘어가버렸다.  로마냐 사람들을 무장시켜라!  그리하여 마키아벨리는 사돌레토가 쓴 교황의 급전을 가지고 당시 파엔차에 머물고 있었던 로마냐 총독, 즉 친구인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에게로 보내졌다.  비상한 질병에는 비상한 치유책이 요구된다는 것이  그 급보의 요지였다.  따라서 총독은 니콜로 마키아벨 리가 말하는 바를 주의 깊게 듣고 즉시 그에 대한 의견을 적어 보내야만 했다.  그것은 중대한 일이었다.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사안은 매우 중대하며, 바로 여기에 교회령 국가뿐 아니라 전 이탈리아, 나아가서는 거의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의 안위가 달려 있노라.)  이제 남은 일은 이러한 열정과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열정이 과연 총독의 냉담함을 녹일 것이지 아니면 도리어 얼어붙게 할 것인지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온다는 것, 그리고 그가 오는 이유에 대해서, 귀차르디니는 이미 로마의 교황궁에 심어둔 자신의 측근 체사체 콜롬보를 통해 듣고 있었다.  그는 6월 18일 자로 쓴 그에 대한 답장에서, 즉시 그의 영민하고도 실제적인 마음에 맨 처음 떠오른 의문을 써 보냈다.  (나를 대신하여 교황이 어떤 목적으로 이를 계획했는지를 물어보라.  만약 그것이 당면한 위험을 면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 조치는 도저히 제때 시행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멀리 보고 있었고 귀차르디니는 가까운 것을 보고 있었다.  교황은 항상 그랬듯이 목표를 단기적인 데 둘 것인지 장기적인 데 둘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사전 귀뜀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엔차에 도착하였다.  그는 새로운 열정으로 충만된 책 6월 10일이나 11일에 로마를 떠났던 것 같다. (피렌체사)에 대한 보수를 좀더 올려 받으려는 자신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기다려보지도 않은 상태에서였다.  21일 귀차르디니는 그의 측근에게 교황의 사절이 왔으며 그의 임무를 들었다고 썼다.  이 첫 편지에서 그는 적어도 그러한 계획에 담긴 위대하고도 고귀한 정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고 말한다.  (만일 그것이 원하던 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성하께서 할 수 있는 일 중에서도 가장 쓸모 있고 칭송할 만한 업적이 될 것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실제적인 효과를 논하는 데 이르자, 그는 자신의 용의주도하고 냉혹한 실제론에 입각하여 친구의 고결한 이상론을 서둘러 격하시켰다.  그는 그 조치가 성공할 경우 뒤따를 이익은 (그것이 명약관화하다는 이유로) 뒤로 제쳐두고, 또 비록 이 사람들의 품성이 자기들과는 다르다 해도, 자신에게는 (사람들을 무장시키는 것이 별로 어렵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같은 것도 없음)을 미리 전제한 뒤, 그는 이 조치가 합당치 않은 이유를 하나하나 열거하였다.  그 지방을 분열시키는 뿌리깊은 사적, 정치적 반목, 사람들의 애국심을 전제하고 있는 마키아벨리의 안과는 달리 교회를 달가워하지 않는 그곳 사람들의 성향, 교황의 복안과는 달리 빈한한 마을들에서 끌어모으기가 쉽지 않을 관련 비용 등등.  그는 이러한 난점들을 제시하는 것은 반드시 교황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만일 이 같은 것이 충분히 감안된 다음이라면, 그것을 무시하든 또는 그에 대처하든 간에 (성하께서 한때 당신의 영광과 위해함을 드높이리라 생각하셨던 그 계획에 합당하도록 모든 성심 성의를 아끼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교황에게 보일 목적으로 귀차르디니가 그의 측근에게 쓴 6월 23일자 편지에도 같은 이유들이 그리 다르지 않은 말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따로 보낸 훈령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최대한 면밀하게 교황의 언행을 관찰하여 나에게 그 모든 것을 알려주기 바라네.)  그는 물론 숌버그와 살비아티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원했을 것이다.  다음날, 마키아벨리는 사돌레토에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새로운 편지 한 통을 써 보냈고(지금은 유실되고 없다), 이 역시 교황에게 전해졌다.  그의 편지는 문제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베르니의 유명한 소네트에서 희화화된 바 있는 클레멘테 특유의 우유부단함과 망설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파엔차에서는 귀차르디니아 마키아벨리가 서로 상반되는 이유로 고민하며 교황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어느 정도까지 이 친구의 실제적인 논변에 설복당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이 사안은 물론 다른 모든 문제에서도 그 소심한 교황을 자신의 반대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미 불운과 오해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총독 친구와의 토론과 함께, 그가 제공하는 좋은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에서 위안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가운데서도 멀리 두고 온 가족을 잊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은행에 예금하라고 얼마간의 돈을 보내려 했던 것이다.  이 돈은 그 당시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받았던 것 중 상당 부분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즉 바로 (피렌체사)의 저술에서 장차 딸 바치나의 결혼 지참금으로 쓰일 돈이 나왔던 것이다.  아니 언젠가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7월 8일, 교황은 여전히 숙고의 결과를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귀차르디니는 측근으로하여금 그에게 자신들이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아무런 하명도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므로, 부디 사돌레토에게 빨리 명을 전하도록 재촉해 주십사)고 (마키아벨리의 안에 대한 결정)을 재차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사돌레토는 이미 6일자로 마키아벨리에게 그와 귀차르디니의 편지를 교황에게 전했다는 소식을 알려온 바 있다.  이쨌든 교황의 답은 (좀더 생각해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날을 잡아 다시금 문의하였으나, 답은 여전히 더 생각해야겠으니 마키아벨리는 당분간 파엔차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 그 달 26일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으나, 기다릴 만큼은 기다렸다는 생각이 든 데다가 (자신의 일도 보아야 했으므로)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래서 귀차르디니는 콜롬보에게 편지를 보내, 이 사실을 교황에게 알리고, 덧붙여서 (성하의 명이 있을 시엔 언제라도 그곳으로 달려갈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점을 주지케 하라고 지시하였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이미 교황 자신보다 앞서 그의 결정, 아니 그의 끝없는 망설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전기 작가라면 누구나 그가 새로운 실망감으로 크게 가슴 아파했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마음속으로 아픔을 느꼈을 법하지마나 그러한 심정을 전하는 말은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있다.  게다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그가 실제적 성향의 귀차르디니에 의해 제기된 구체적 반론들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는지도 알지 못한다.  귀차르디니는 그러한 계획이 훌륭한 것이라는 점은 부인치 않았으나, 다만 그것이 바로 그 시점에 교회령 국가의 사람들, 특히 그 지방의 경우에 적용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하는 데서는 반대의 뜻을 나타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아마도 이 점에서 다소나마 위안을 얻었으리라.
  비록 실망하기는 했어도, 그는 이러한 감정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귀차르디니가 그에게 베풀어준 친절과 환대가 아니다.  그는 전지 작가들의 말과는 달리 마키아벨리를 결코 차갑게 대하지 않았다.  사실, 총독 관저의 한 지붕 아래 같이 머물렀을 파엔차에서의 이렇게 오랜 체류 기간 동안, 두 사람은 더욱 다정하고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그리하여 총독은 자신의 거만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한 편지에서 친구가 그를 (고명한)이라는 경칭을 붙여 부른 데 대해 그만두지 않으면 자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겠다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한 (품위있는 궁인)이 그에게 보여준 다른 종류의 환대인 것이다.  7월 2일, 귀차르디니는 마키아벨리에게 쓴 편지에서 익살 조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네가 떠난 후, 마리스코타가 자네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면서 자네의 예법과 언변을 격찬했지 뭔가.  나 역시 자네에게 항상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터라 듣기가 좋았다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독같은 어조로 8월 3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내가 마리스코타로부터 얼마나 찬사를 받았는지를 전해 준 자네의 편지를 받고 보니,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내가 받아왔던 어떤 칭찬보다도 더 기쁘다네.)
  이제 이 두 명의 위대한 정치가는 서로 더 자주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파엔차 체류 동안 친구에게 약속하기를, 그가 직접 둘러보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대리인의 자격으로 사놓았던 부동산 한 건과 앞으로 살까 계획하고 있는 다른 한 건을 둘러보고 그 결과를 알려주기로 한 바 있었다.  그는 8월 3일자로 현지를 찾아본 소감을 적어보냈는데, 여기에는 그가 산 카쉬아노의 시골에서 생활한 덕을 보았다는 것이 잘 드러나 있다.  (피노키에토로 시작해서 모든 것을 얘기하겠네(여기서 'Finocchieto'란 회향풀이나 그 열매를 뜻하는 'fnocchio'에다 축소형 어미를 단 것으로, '피노키에토로 시작한다'는 말은 당시 식사 끝에 관습적으로 붙이는 어구였다.  또한 피노키오란 말에는 남색가라는 속어적 듯도 들어 있으므로,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뉘앙스들을 버무려 귀차르디니에게 농담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옮긴이).  무엇보다 먼저 얘기하고 싶은 점은 부근 3밀리오 안에는 무언가 괜찮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일세.  한마디로 흡사 바위투성이의 아라비아 Arabia Petreia(요즘으로 보면 아카바 북쪽, 요르단 남서부의 험준한 지역.  그 중심지가 페트라 Petra이기 때문에 'Petreia'란 형용사형이 스이고 있다-옮긴이)와 같다고나 할까.  집은 나쁘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생활에 불편하게 보여서 결코 좋다고도 하기 힘드네.  방이 비좁은 데다 창문은 너무 높다랗게 붙어 있어서, 마치 지하 감옥 같은 느낌이네.  앞쪽에는 풀밭이랄까 하는 것이 약간 있더군.  나가는 길은 모두가 가파른데, 단지 한군대만이 100브라초('braccio'란 토스카나 지방에서 쓰던 넓이의 단위로, 1브라초는 약 0.3364평방미터이다-옮긴이) 가량 평지를 이루고 있을 뿐이라네.  게다가 언덕배기 아래에 묻혀 있어서 기것해야 시야가 반 밀리오나 된까...) 그는 귀차르디니에게 이 당을 파는 편이 낫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팔든 그대로 가지고 있든 당분간은 이것저것 주변 시설들을 정비해 두는 편이 좋겠다고 조언하였다.  (이렇게 주변 시설을 정비해 두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경우 중 어느쪽으로든 유익할 듯 싶네.  첫째, 만일 자네가 그것을 판다고 했을 때, 그곳을 둘러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 흥정을 붙일 수 있을 것일세.  지금 상태로는... 자네처럼 물건을 보지 않았던 사람 같으면 모를까 누구도 그것을 사려고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네.  설사 자네가 그것을 그냥 가지고 있겠다고 해도, 그렇게 정비를 해둠으로써 이곳의 질 좋은 포도주를 더 많이 수확할 수 있을 것이고, 자네가 언젠가 이곳에 오더라도 실망해서 죽지는 않을 것 아닌가...)
  이러한 이야기 속에는 귀차르디니의 무뚝뚝한 마음을 자극하고 질러대는 익살 기가 다분히 묻어 있다.  이에 대해 귀차르디니 역시 피노키에토의 집 스스로가 일인칭으로 말하도록 하는 익살 조의 훈계담으로 답하였다.  그 집 아니 그곳 시골의 요정은 마키아벨리의 심술에 찬 평가를 평소 누구에게나 잘 보이려 하는 쉬운 여자와 어울리곤 하는 그의 습관 탓으로 돌렸다.  오직 자신의 주인만을 섬기고자 하는 정숙한 여인의 무덤덤함을 그는 높이 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사물의 외양에 머물지 말고 그 본질을 찾았어야만 했다.  귀차르디니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자네의 바르바라가 자네에게 깨닫게 해 주었어야 하는 것이네.  왜냐하면 비록 그 이름은 잔혹함과 무자비함을 뜻하지만(이탈리아어로 '바르바라 barbara'란 야만적이라는 뜻.  여기서 그녀의 이름을 본래의 바르베라가 아닌 바르바라로 바꾸어 부른 것도 이런 의도에서이다-옮긴이), 자네의 말대로라면 그녀의 안에는 온 도시를 감싸안을 만한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있기 때문이라네.)
  바르베라.  바로 여기에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망각과 교황의 미적거림과 계속해서 마키아벨리의 인생사를 넘보는 희생과 치욕을 잊어버리는 길이 있었다.  바르베라와 그 사이의 쓴 사랑 이야기는 마키아벨리가 보낸 도시에서의 단순한 심심풀이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친구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한 이야기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를테면 바로 같은 달 8월에 배당관 accopiatore(르네상스가 피렌체의 관직 선출 과정에서 관직 보유의 자격자들을 각 관직으로 배당하여 정부를 구성하는 책임을 맡은 관리-옮긴이)들이 마침내 그의 피선거권을 되살려주었을 때(그렇다고 그가 더 이상 서기관 직에 머물지 않고 정무관이나 곤팔로니에레라도 되어서 정무궁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필리포 데 네를리는 그 특유의 심술 섞인 어조로 그같이 좋은 일은 다름아닌 (바르베리아 Barberia(아프리카 북부 해안 지대를 가리키는 옛 이름.  역시 앞의 '바르바라' 경우처럼, 마키아벨리의 애인 이름을 슬쩍 바꾸어 그를 놀리기 위해 쓴 말-옮긴이)로부터) 온 호의의 결과라고 편지에서 그를 놀릴 정도였다.
  어쨌든 이제 운명은 그에게 호의적인 듯이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피렌체사)에 대한 보수를 올리기 위해 감행했던 짧은 로마 여행 동안 뿌려놓았던 씨앗은 싹이 터서 곧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었다.  지난 7월말, 프란체스코 델 네로는 그에게 필리포 스트로치가 교황에게서 좋은 시식을 전해 들었다고 편지로 알려왔다.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학 당국자는 교황에게서 (마키아벨리에게 스투디오화로 100피오리노가 아니라 금화로 100두카토를 지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학교 금화가 아닌 진짜 금화로 100피오리노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원래보다 곱절의 돈이었다.
  뒤이어 8월 19일, 레반테 감독위원회는 한 베네치아인이 일단의 피렌체 상인들에게 가한 투르크식 덮어씌우기(원래 투르크인들이 오리엔트 지방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한 데서 나온 말-옮긴이) 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를 베네치아로 파견하였다.  이는 별 것 아닌 임무였으나, 그로서는 머리에서 곰팡내를 걷어내고 아울러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을) 보고 들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는 또한 가는 길에 총독 친구에게 들러 그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보고(그가 귀차르디니에게 편지에서 썼던 것처럼), 더불어 당시 날로 절박해지고 있던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한편 마키아벨리는 소화를 돕고 변을 잘 통하게 해준다는 유명한 환약의 처방전을 그에게 써 보냈는데, 이는 평소에 그로 하여금 (원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혹은 그토록 잦았던 일신상의 쓰라린 일들을 삭이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이렇게 해서 그는 베네치아로 갔고 일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베네치아 주재 교황 사절이나, 친구인 베토리가 만나보라고 한 루도비코카노사 주교 등과 함께 정치에 관해 얘기를 나우었다.  나는 그가 이외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가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말이 있긴 했지만, 설사 그랬다 해도 필리포 데 네를 리가 평소의 냉소적인 어투로 편지에서 섰듯이 이삼천 두카토씩이나 따지는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9월 16일, 그는 되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났다.  오는 길에 그가 총독 친구와 같이 보낸 날은 불과 며칠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피렌체에 도착한 것은 그 달 말이었다.  돌아온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귀차르디니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편지들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만드라골라)이다.  지금은 유실되었지만 8월 12일자 편지에서 귀차르디니는 이 작품을 크게 칭찬하면서 그곳 파엔차에서 무대에 올리는 것이 어떠냐는 제의를 했다.  앞서 마키아벨리는 그 희극의 대본 한 부를 그에게 증정했던(직접 혹은 우편으로) 것이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자네가 메쎄르 니차를 좋아한다니 기쁘구먼.  만약 이번 사육제 때에 그것을 상연하고 싶다면, 우리가 가서 도와줌세)라고 답하였다.  그 뒤 10월 13일, 귀차르디니는 재차 편지를 보내, 스스로 피렌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에게 작품 속의 몇몇 피렌체식 농담과 속담류의 뜻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새로 편지를 써서 이에 답하였는데, 이야말로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재치가 넘친다.  (사실 난 이 써레 작업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마치 티모테오 신부처럼 수많은 책들을 훑어 보았다네.  결국 부르키엘로의 작품들 속에서 나에게 딱 어울리는 것을 찾아냈지.  그의 소네트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네.
  황제가 쳐들어올까 두려워
  실패 냄비를 사절로 보냈지...
  하지만 피에솔레의 써레도 뒤따라갔다네...
  이 소네트는 나에게는 매우 불가사의하게 보이는데, 잘 살펴보면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를 풍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실패 냄비를 보냈지만 지금은 실패가 마카로니로 바뀌었다는 것뿐이지.  나에게는 이 점이야말로 시간은 돌고 돌아도 사람은 언제나 같은 존재임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이네. (...)   부르키엘로가 피에솔레의 써레를 들고 나온 것은 그것이 토스카나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네.  티투스 리비우스의 두 번째 십년기에서 보듯이, 이 농기구를 처음으로 고안해 낸 게 바로 피에솔레 사람들 아닌가 말이야.  어느 날 한 농부가 써레로 땅을 고르고 있었는데, 전에는 한 번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던 두꺼비 한 마리가 깜짝 놀라서 저게 뭔가 하고 지켜보고 있었지.  그렇데, 아 그 써레란 놈이 다가오더니 발톱으로 등을 두 번도 더 할퀴어대는 것 아니겠나.  써레가 지나간 후, 등을 심하게 긁힌 것을 안 두꺼비는 이렇게 외쳤다지.  '다시는 돌아오지 마!' 이 외침 소리는 세월 따라 속담이 되어, 사람들은 누구인가를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때면 '두꺼비가 써레에게 말하듯이'라고 한다네.)
  우리는 여기서 익살 조의 박식(리비우스의 두 번째 십년기까지도!)과 학자연하는 희극적 색조와 교화의 대 황제 정책을 향한 풍자가 두드러짐을 본다.  마카로니란 사행 길에 이 훌륭한 서기장을 대동하지 못했던 살비아티 추기경을 뜻한다(마카로니(이탈리아어로는 마케로니 maccheroni)에는 바보, 멍청이란 뜻도 숨어 있다-옮긴이).  그는 이 사행에서 귀차르디니가 (이탈리아사)에서 말했듯이 (그는 자신의 주인보다 더 정력적이지도 확고하지도 못했다).  그의 주인이란 물론 교황 클레멘테였다.  마키아벨리의 편지들이 모두가 걸작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이 마지막 편지들은 메쎄르 니차의 말을 빌리자면 갈수록 빛이 난다.  그는 10월 20일 직후에 슨 편지에서, 교황으로부터 귀차르디니의 딸들에게 줄 지참금을 더 많이 받아내는 방법에 관해 장황하게 얘기하다가, 불쑥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모로네(밀라노 공의 비서 지롤라모 모로네.  21장 첫부분 참조-옮긴이)는 포로로 잡혔고, 밀라노 공국은 빼앗기고 말았지.  그리고 그가 무력해졌으니 다른 무든 군주들도 그럴 것이고, 달리 무슨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라네.  '그저 하늘의 뜻일 뿐.'
  알라냐에서 돌아오는 백합을 보네.
  그리고 당신의 대리인 안에서, 등등...
  (이 시구가 비유하고 있는 것은 미남왕 필립(1268-1314)과 교황들 간에 일어났던 분쟁이다.  알라냐란 프랑스 사제들에 대한 왕권의 확대를 추구한 필립 왕과 불화를 빚었던 교황 보니파초 8세의 궁전이 있었던 로마 동남쪽의 아냐니를, 그리고 백합이란 프랑스를 말하며, 알라냐에서 돌아오는 백합(프랑스 왕가의 문장)이란 필립 왕의 사절이었던 길로메 드 노가레가 교황을 모욕하고 돌아온 사건을 비유하고 있다.  두 번재 줄의 구절을 완성하면, '당신의 대리인 안에서 그리스도는 포로가 되었네! (본문의 바로 다음을 볼 것)인데, 이는 단테의 (신곡) (연옥편), XX, vv. 86-87에 나오는 구절을 약간 변형시킨 것으로, 여기서 그는 위그 카페의 입을 빌려 자신의 후손들을 꾸짖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지적 맥락을 감안할 때, 결국 마키아벨리는 이 시를 통해, 이탈리아가 설사 프랑스의 편에 선다고 해도 스스로를 위협하는 신성로마 황제 칼 5세의 세력을 제어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옮긴이)
  '이 시구는 자네도 알겠지.  나머지는 혼자 스스로 읽어보게나.'  우리 한번 즐거운 사육제를 보내자구.  바르베라에게는 방 하나를 주어 탁발승들과 지내도록 하겠네.  만약 그들이 그녀에게 빠지지 않는다면 돈을 받지 않겠어.  마리스코타에게 날 천거해서 연극이 어디서 상연될 것인지 알게 해주게나.  자네에게 좋은 때가 언제쯤인지도.  (피렌체사)에 대한 보수를 100두카토까지 올려 받았다네.  이제 다시 글쓰기가 시작되었고, 난 우리를 이 자리로 오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 군주들에게 비난을 퍼붓는 중이라네.)
  (그저 하늘의 뜻일 뿐.)  이제 비극은 5막에 이르렀고, 그 주제는 이탈리아였다.  그 비극적 힘은 모두 그의 이 짤막한 글 속에 들어 있다.  (신변잡기)로부터 파멸적인 정책에 대한 묵시론적인 보편 판단으로, 그리고 단테가 놀라운 예견력으로,
  당신의 대리인 안에서 그리스도는 포로가 되었네
  라고 읊은 시구 속의 한 줄기 섬광 같은 예언으로부터 만사 태평의 사육제적 즐거움 속으로 갑작스레 옮겨가는 그 구절들 속에 말이다.  바로 여기에 마키아벨리의 모든 것이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어느 때보다도 더 그의 시대와 이탈리아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는 그같은 말을 한 뒤, 편지의 말미에다 농 반 진 반으로 이렇게 서명하였다.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이며 비극 작가인 니콜로 마키아벨리.)  그야말로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 아니겠는가.

============================== 06
    제21장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이며 비극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그가 역사 집필로 다시 돌아갈 당시 입에 올린 것 외에는 비극 작품을 쓴 적도 없고 또 그렇게 하려고 작정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속은 자신이 (군주론) 마지막 장에서 기원한 일에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군주들을 마치 극 속에서처럼 준엄하게 꾸짖기에 모자람이 없을 만큼 비극적 생각들로 가득하였다.  그는 이미, 대 로렌초의 죽음에 뒤따른 (외세의 침략)에서 출발하여 미켈란젤로식의 단축법으로 묘사된 기만과 오류의 미로를 거쳐, 앞에서 말한 최근의 편지에서 스스로 예언한 그 치명적인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힘찬 필치로 그려내고 있었다.
  (모로네는 포로로 잡혔고, 밀라노 공국은 빼앗기고 말았지.)  그에게는 자신이 그리고 있던 비극 작품의 마지막 막 마지막 장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사실 파비아 전투 이후 이탈리아의 지배자들이 재개했던 그 비열한 정치 게임을 종격함과 동시에 그 성격을 요약하는 것이었다.  교황 클레멘테는 그 스스로 황제의 수중에 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도, 또다시 에스파냐를 이탈리아에서, 특히 밀라노 국에서 축출하기 위한 동맹(1526년의 코냑 동맹-옮긴이)을 결성하고자 작정하였다.  밀라노에서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유명한 용병 대장이었다가 1450년에 밀라노 공이 된 프란체스코가 아니라, 그의 손자이자 흑안공 로도비코의 아들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즉 프란체스코 2세를 가리킨다-옮긴이)가 조약의 결과에 따라 (황제의 그늘 아래) 사실상 허수아비로 전락해 있었다.  일을 좀더 쉽게 진행시키기 위하여, 교황은 당시의 정치 관습에 따라 가장 비틸리고도 어려운 길을 택하였다.  즉 징병은 자기 편에서 한 뒤 통합군에 대한 지휘권은 페스카라 후작에게 맡긴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출생이기는 했지만 출신 가문상으로 에스파냐계에다 이탈리아적 대의에 반하는 인물로, 더욱이 당시 교황이 싸우고자 하는 바로 그 에스파냐 군의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음모를 생각해 낸 자는 밀라노 공의 비서로 바람의 방향을 기막히게 알아냈던 지롤라모 모로네였다.
  페스카라는 이러한 제의를 별다른 항변 없이 그냥 듣기만 하다가, 즉시 황제에게 알였다.  이는 필요시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배반할 여지를 두면서도 현재의 위치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능란한 방책이었다.  물론 그가 이 경우만 그리고 그만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모로네와 황제 사이에서도 그런 방법을 썼던 적이 있었다.  스포르차는 황제와 프랑스 왕 사이에서 그렇게 행동했고, 교황 역시 이쪽저쪽 자신의 강적들 틈바구니에서 그렇게 했다.  클레멘테는 한편으로 황제의 장국을 꼬드기면서 동시에 황제에게는 장국을 조심하라는 편지를 썼다.  그들 모두가 이중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페스카라와 모로네가 변절자라는 말이 나돌았던 적도 있지만(즉 모로네는 친구들을, 페스카라는 적에 대한 서약을 배반했다는 것), 결국 모로네는 옥에 갇히고 공국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에스파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탈리아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당시 클레멘테는 더울 취약해진 위치에다 황제의 의혹은 날로 커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와 힘을 합쳤으면 하고 생각했지만, 왕이 풀려나기 전에는 그쪽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왕이 풀려나는 문제 또한 칼의 요구가 너무 지나쳐서 큰 난관에 봉착해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거의 절망에 빠져 있다가, 페스카라 후작이 죽었다는 소식에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적군의 주요 지휘관이 죽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이점으로 느껴졌다.  그는 이처럼 쓸데없는 희망 속에서 세월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그란 사람은 베르니처럼,
  당신은 할 수 있느뇨, 파파 키멘티여,
  그렇게 무기력하고 그렇게 우둔한데도,
  하늘로 하여금 스스로를 눈멀게 귀멀게 하고
  더불어 모든 감각까지도 다 빼앗아가 버리도록?
  이라고 적나라하게 모욕하는 것에보다는 비극시에 더 잘 어울리는, 영원한 불확실성을 지닌 극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교황의 그러한 무기력증을 비꼰 마키아벨리의 말도 없지는 않다.  (그는 시간이 있다 싶으면, 그것을 적에게 넘겨준다.)  어쨌든 당시와 같이 급박한 시점에 같은 피렌체인들의 정신과 태도를 숙고하기에 이른 그는, 자기 편이든 혹은 이탈리아의 다른 나라든 간에 (죽든 살든 무언가 대의로 삼을 만큼 명예롭고 용감한 일)이라고는 해온 적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는 이를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1525년 12월 19일자 편지에다 썼다.  이 내용을 제외하면 이 편지는 자신이 파엔차 체류 이후에 이미 말했던 것처럼, 교황에게 그의 세 딸을 위해 후한 지참금을 마련해 주십사 청할 것을 다시금 권하는 등, (신변잡기)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다시 단테에 의지하여 친구에게 로메오의 전례를 인용한다.
  그에게는 딸이 넷 있었고,  그 각각이 모두 여왕이었지...
  하지만 귀차르디니는 마키아벨리와는 달리 시인도, 시를 즐겨 읽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이 19일자 편지에대한 26일자의 답장에서, (로메오의 동화인지 설화인지 그 이야기를 찾아보려고 로마냐에 있는 단테의 책들을 모조리 훑었고) 결국에는 주석 없이 본문만 있는 것만을 겨우 입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속직히 고백하였다.  그리고는 이 제기발랄한 친구에 대해 반은 칭찬으로, 반은 미덥지 못하다는 투로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평소 자네가 가지고 있던 그 끝없는 저장고 속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어.)  로메오, 그는 누구였단 말인가?  (여기서 로메오란 바르셀로나 백이자 프로방스 후작이었던 레이몽 베랑귀에 4세(1131-1162)의 프로방스 궁 집사였던 로미외 드 빌레뇌브를 가리킨다.  마키아벨 리가 그를 언급하고 있는 1525년 12월 19일자 편지에 의하면, 로메오는 딸이 넷이었던 프로방스 공에게 첫딸이 출가를 잘 해야 나머지도 혼인이 순조로울 것이라 조언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첫딸에게 후한 지참금을 주어 프랑스 왕(성왕 루이 9세)에게 시집보냈으며, 이어 나머지 딸들도 모두 유럽 왕가들에서 왕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키아벨 리가 로메오의 일화를 인용한 것은 귀차르디니 역시 교황에게 청을 넣어 딸에게 후한 지참금을 내리도록 해서 좋은 혼사를 마련하라는 뜻에서이다-옮긴이) 총독은 심지어 공적인 일에서조차 방향을 잃고,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 그 대담한 선택에 자신은 싫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인 양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만을 남길 뿐이었다.  (나는 태풍이 불어오는데도 몸을 피할 생각도 않고, 우리처럼 길 가운데에서 아무런 방비도 없이 서 있는 사람은 들은 적이 없네.  그러므로, (...) 우리는 스스로 나라를 빼앗겼다고 하기보다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손에서 내팽개쳐버렸다'고 말할 수 있겠지.)
  사정이 이러하므로, 다른 것보다 (만드라골라)의 상연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보는 편이 더 나았다.  사실 귀차르디니는 편지에서, (적어도 이 일만큼은 우리 권한 안에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이렇게 뒤숭숭한 때일수록 오락은 더 요긴한 법)이라며 만사 제쳐두고 이 분제부터 챙겼다.  배우들은 모두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정작 (아르구멘토 argumento), 즉 그예리하면서도 통렬한 색조의 아름다운 프롤로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식으로 고쳐 썼으면 하였다.  그러나 귀차르디니는 자신의 친구에게 부탁하여 청중들의 수즌에 맞추어 다른 대사를 쓰도록 하는 게 어떠냐고 제의하였다.  어차피 연극은 저자 자신이 아니라 청중들의 자화상이 될 터였다.  그는 그 해의 경우 2월 13일에 끝나는 사육제 마지막 날들 중 어느 하루를 잡아 무대를 꾸미고 싶어했고, 작가는 어떻게든 그곳에 참석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래서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정월 그믐께쯤 와서 사순절까지 머물다 가라고 권유하였다.  그때쯤이면 (귀인을 모실 방들)도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바르베라를 염두에 둔 마로, 그녀는 연극의 서두에 노래하게 되어 있었다.  귀차르디니는 (이 문제가 그냥 무시하고 넘겨버릴 일이 아니라면서) 그가 어떻게 하기로 작정했는지를 (심각한 어조로) 묻고는 편지를 끝맺었다.  그 자신이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모든 점에서 볼 때 스스로가 사용하려고 단골 인쇄업자 지롤라모 손치노에게 부탁하여 만든 것으로 보이는 작지만 훌륭한 연극 대본에서 잘 나타난다.  평소 그는 총독이 오락과는 거리가 먼 포고문 등속의 무거운 글들을 인쇄하기 위해 이용하곤 했던 사람인데, 이번에야말로 그도 맡은 일에 틀림없이 신나했을 것이다.
  이 편지에는 희극과 비극이 시종일관 묘하게 뒤섞여 사람을 그는 특이한 매력이 있는데, 마키아벨리의 1월 3일자 담장 역시 그러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희극 문제에서 그는 과연 바르베라가 올 수 있을 것인지 확답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만한 애인들이 있기 때문이네.  하지만 어떻게든 일이 되도록 할 수 있을걸세.) 오, 가엾은 니콜로여! 하지만 그나 그의 연인이나 모두가 오고 싶어했고, 바로 이때를 위하여 막간곡으로 새로이 곡을 붙인 5곡의 노래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노랫말은 그의 편지 속에 적혀 있다.  비극의 측면을 보자.  만약 황제가 권력의 우위에 서고자 한다면 결코 왕을 풀어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붙잡혀 있을 동안이라야 황제는 프랑스와든 교황과든 조약을 완전히 깨뜨리거나 혹은 거꾸로 체결해 버리지 않고 다만 조약의 가능성만을 남겨놓은 채, 그들을 가지고 놀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이 프랑스와 연합하려는 낌새가 보일 때면, 그는 또다시 프랑스와 협상에 나서 이탈리아와의 조약을 불발로 끝나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승리하게 되는 것이네.)
  며칠 전, 교황, 베네치아, 프랑스가 한편에 선 이탈리아 동맹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듣기로, 상황은 매우 괜찮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왕과 황제가 드디어 협상을 끝냈는데, 그 내용은 왕이 자신을 풀어주는 대가로 부르고뉴를 양도하고,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며, 이탈리아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의 황제권을 인정하고, 게다가 두 아들을 인질로 준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대가로 프랑스 왕이 받는 것은, 그것을 대가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승리자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는다는 것뿐이었다.  마키아벨리의 판단으로는, 칼이 그렇게 협상을 끝냈다면 그 이면으로 프랑스가 교황과의 동맹을 파기했을 것이 틀림없고, 사태가 이렇다면 그가 프랑스와 했던 약속 역시 파기될 것이었다.
  교황과의 동맹이나 황제와의 협상에 관한 이처럼 삐걱거리는 소문들은 몇 주 후 약간 다른 점은 있었지만 거의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동맹에 대한 정보를 더 직접적으로 접하고 있던 귀차르디니는 친구가 선술집 잡담식으로 그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읽고는 틀림없이 웃었을 것이다.  그가 심중에 감춘 큰 비밀을 생각할 때, 그의 미소는 자신이 종종 마키아벨리의 입가에 번지는 것을 불안스레 바라보던 그의 조소와 그리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 비밀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1월 중순경, 교황은 어떤 중요한 일로 그를 로마에 불러들였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슬쩍 전해 왔다.  프란체스코는 이리저리 숙고를 거둡하고 일에 대한 보수와 같은 (세부 조건)에서도 적지 않게 밀고 당기고 한 끝에 결국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12월 4일까지도 그는 과연 교황이 자신에게 무슨 일을 맡기려 하는지 듣지 못한 상태에 있었고, 그 이후로도 여전히 추축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클레멘테가 프랑스와 연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에게 맡기려는 임무가 바로 먼저 그 문제를 담판짓고 이어서 전쟁을 치르게 하려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자, 그는 평소에는 차가운 자신의 성품에도 불구하고 즉시 몸 전체가 확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듣기로, 이제 문제의 핵심을 충분히 이해하게 된 그는 (세부 조건)을 두고 그토록 밀고 당긴 자신의 태도를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이 임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대의 만족은 성하께서 가만히 앉아 굴종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를 비밀로 하였다.  하지만 그가 사육제 동안의 연극 상연 건으로 마키아벨리에게 편지를 하고 그와 바르베라를 초청한 것이 자신의 심중을 감추자고 한 행동만은 아니었다.  홰냐하면, 그는 자신이 언제 일을 맡게 될는지도 잘 몰랐고, 더욱이 황제의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데다 교황 역시 우유부단해서 과연 그 계획이 실행될 것인지조차도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다음 해인 1526년 1월 3일가지도 모든 것이 답보 상태였으므로, 귀차르디니는 계획이 거의 무산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6일, 움직이라는 지시를 받은 그는 20일 피렌체를 향해 길을 떠났고, 그곳에 도착하여 나흘을 머물렀다.  그는 자신이 온 이유를 비밀로 해야만 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곳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비밀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즉 (만드라골라)의 파엔차 공연은 실행되지 못했으리라는 것, 설사 이루어졌다 해도 그 자리에 귀차르디니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마키아벨리도 참석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에게는 위안 거리가 있었다.  바로 그 사육제 기간 동안 베네치아에서 자신의 작품이 전례없는 호평 속에 상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곳 피렌체 사회의 요청으로 무대에 올려진 것인데, 같은 날 저녁 일단의 베네치아 신사들은 이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플라우투스의 (메니이크미 Menaecmi)를 번역하여 상연하였다.  이 연극은 최고의 배우들을 기용하고 무대와 의상에도 막대한 액수의 돈을 쏟아부었지만, 피렌체 희극과 비교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무대였다는 평을 받았다).  이렇게 (만드라골라)가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소문을 들은 바로 그 베네치아 신사들과 배우들은 자신들의 연극을 상연했던 바로 그 저택에서 다시 한번 그 작품으로 무대를 꾸며 줄 것을 피렌체 사람들에게 간절히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이 공연을 본 관객들은 커다란 만족감을 표시했고 작가와 배우에게 열렬한 찬사의 말을 보냈다.  (만드라골라)가 베네치아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사누도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1522년 사육제에 그것에 상연되었을 때, 엄청난 수의 관객이 쇄도하는 바람에 공연을 끝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고대인이라면 자동적으로 훌륭하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던 시대에 고대 작가와 겨류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희극에 대한 마키아베리의 예술적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라 하겠다.
  하지만 희극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비극 작가인 그가 당시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은 희극 작품이 아니라 역사였다.  귀차르디니와 나눈 편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결코 비극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고 때로는 (그 일에 깊이 빠져 있기도) 했으나, 어쨌든 다시 역사 쓰기를 시작하였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이 끝나기 전 ante res perditas) (앞서 나왔던 (post res perditas)를 저자가 바꾸어 표현한 것-옮긴이) 피렌체 서기장들의 역사 찬술 전통을 이어받겠다는 작정으로 집무중에 수집, 발췌해 왔던 편지들을 간추리고 요약하는 작업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벌서 20년이나 묵어버린 이 서류들 속에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이미 역사 드라마의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몇몇 인물들의 모습도 경쾌하게 스케치되고 있다.  알레싼드로 6세의 경우는 이렇다.  (사악한 교황.  머리에는 밀라노와 피렌체를 협잡하려는 간계가 가득하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다.)  흑안공에 대한 묘사는 또 이러하다.  (로도비코 스포르차.  가벼운 성격.  이것저것 수시로 바라고 두려워하고 집착하는 인물.)
  마키아벨리가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이탈리아가 겪고 있던 모든 우환들은, 바로 이처럼 지나치게 간교하고 예민한 데 집착하다 오히려 빈약하고 우둔해져 버리는 인물들의 정책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든 또는 그같이 오랜 기원의 실마리들을 다시 묶든 간에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황제와 왕 사이의 협저에 체결된 것은 바로 그때쯤이었다.  2월 20일, 그 소식이 이탈리아에 알려지자마자, 사람들은 과연 황제가 약속대로 왕을 풀어줄 것인지 또는 만일 왕이 풀려난다면 그는 또 약속을 지킬 것인지를 두고 입씨름을 시작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이 문제에 대해 (오만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한채) 친구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에게는 그토록 신뢰성 없는 협상 조건들을 따로 살피지 않고도, (왕이 똑똑하게 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황제는 멍청이가 될 수밖에 없음)을 입증하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유명한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왕이 협정을 준수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아들들이 인질로 잡힌 데다가 그처럼 힘든 시간을 보낸 뒤라 조용히 지내고 싶은 생각도 있을 테고, 여기에 교황과 베네치아인들의 믿음 없는 정책으로 이탈리아인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증오심이 솟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렇게 불확실한 정국의 와중에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였다.  사태가 어떻게 되더라도, 전쟁은 즉각적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고 이탈리아는 피로 뒤덮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이탈리아인들에게 남겨진 일이라고는 좋은 군대와 용기 있는 마음으로 무장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자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말을 하나 하겠네.  아마 자네는 이 제안을 경속하고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은 무언가 대담하고도 통상적이 아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그러한 결정을 요구하고 있다네.  (...)  며칠 전 피렌체에선 조반니 데 메디치 대인께서 어디든 유리한 쪽에서 싸우고자 과감히 깃발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네.  이 소문을 듣고 나는 정작 일반 사람들은 과연 그가 지금 해야 하는 행동에 관해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따져보게 되었다네.  물론 누구나가 믿고 있는 바이지만, 이탈리아인 가운데서 그 분만큼 병사들이 기꺼이 그 뒤를 따르려 하고 그 분보다 더 에스파냐 군이 두려워하거나 경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은 사실일세.  그리고 모두가 조반니 님이 용기 있고 과감한 성격에다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결단을 내릴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도 알고 있네.  그러므로 우리는 비밀리에 그 분을 도와 그 휘하에 최대한의 기병과 보병을 결집시켜서 그 분으로 하여금 이 깃발을 휘날릴 수 있도록 할 수 있다고 보네.)  사람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어떤 목적이 있음을 에스파냐인들이 안다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들은 그것이 교황이나 왕의 계획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들과의 약속을 파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좋고 나쁘고를 떠난 마키아벨리 그대로의 솔직한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큰 생각을 하다가도 다음과 같은 마음르로 후닥닥 넘어가는 것 역시 그보다 덜하지 않은 그의 특징이기도 하다.  (바르베라가 그곳에 있네.  만일 자네가 그녀를 어떻게든 보살펴줄 수가 있거든, 그녀더러 자네에게 가라고 하겠네.  나에게는 황제보다도 그녀가 훨씬 소중하기 때문이네.)
  마키아벨리의 이 편지들이 로마로 보내지자, 그것을 받은 사람이 귀차르디니건 필리포 스트로치건 혹은 다른 누구건 간에 모두가 즉시 그것을 친구들에게 회람시키고 교황에게도 보였다.  이를테면 스트로치에게 보낸 3월 10일자 편지가 한 예인데, 여기에서 그는 여전히 황제와 와 사이의 협상 문제를 얘기하면서 그것이 과연 지켜질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교황은 (이를 매우 주의 깊게 듣고는 요소요소 칭찬의 말을 하면서, 세부 사항에 관한 정보 없이도 그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다했다고 크게 흡족해)하였다.  그러나 귀차르디니가 그로부터 받은 3월 15일자 편지를 보였을 때, 교황은 그 내용, 즉 자신이 돈을 대고 조반니에게는 지휘권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깃발을 올리게 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별로 탐탁해하지 않았다.  에스파냐인들이 그 깃발 뒤에 누가 있는가를 쉽게 알아차릴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던 점이었지만.  그러나 클레멘테가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은 것은 조반니에 대한 질시의 감정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단지 그 계획의 대담성이 그의 그릇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드디어 왕이 풀려났다는 소식이 전해짐으로써, 그 동안의 온갖 추측은 사라지고 만사가 분명해졌다.  그리고 곧 그가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라는 것도 확실해 보였다.  그러자 황제로서 (멍청이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책이, 자신이 3월 15일자 편지에서 썼듯이, (황제는 어떤 나쁜 결정을 내려도 스스로 해를 입지 않는 반면 왕은 아무리 좋은 판단을 내려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마키아벨리는 한 풍자시를 통해 당시의 기분을 토로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아르고의 한 인물을 빌려 자신이 지닌 눈은 모두가 그리스도교국의 제후들로부터 빼앗아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이유라네.  그 바보 같은
  로마인들이 왕 칼과 그의 총독들이
  어찌될 줄도 모르고 왕을 풀어준 것 말이야
  따라서 전쟁은 어쩔 수 없었고,  그것을 바라보며 조소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방어하고 공격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였다.  방어의 측면에서 피렌체인 교황과 피렌체의 그 조신들은 무엇보다 피렌체를 최우선으로 todr가하였다.  그곳은 알프스 이북으로부터의 공격에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군사 기술자인 피에트로 나바라 백작이 그에 대비하기 위해 그곳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변절한 에스파냐인이었던 그의 옆에 전술의 이론가이자 피렌체인인 마키아벨리를 두기로 결정되었다.  그는 언제나 움질일 채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귀차르디니가 4월 4일자로 교황의 명령을 그에게 전하자, 그는 코르토나의 추기경과 상의한 뒤, 다음날 이미 성벽에 올라 나바라와 대담한 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마키아벨리가 쓴 보고서와 함께 로마로 보내졌는데, 이는 현대의 군사 사학자들에 의해서도 칭송될 정도이다.
  하지만 그 입안자가 즉시 로마로 불려간 것을 보면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칭찬한 사람은 클레멘테 7세와 그 조신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곳에서 그는 교황과 심지어는 귀차르디니까지도 자신의 계획에 찬동케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4월 26일이나 27일 이행해야 할 지시 사항을 들고 머릿속에는 (성벽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채) 다시 길을 떠났다.  그 사이에 피렌체에서는 로마에서의 논의 과정에서 마키아벨리 자신이 발의한 (5인성벽관리위원회 I Cinque Procuratori delle mura)라는 새로운 직제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는 그 감독관이자 서기장으로 임명되었고 아들인 베르나르도를 조수로 쓰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는 다시 한번 정무궁에 근무하게 되었고 또다시 서기장이 되어 (공식 직함으로) 편지를 쓰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가 이 일로 얼마를 받았는지 혹은 (피렌체사) 에 대한 보수로 그냥 때웠는지 어떤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그 위치를 불문하고 공화국에서 관직 얻기를 고대해 와TEk.  설사 그 직이 별반 중요하지 못한 것이었다 해도, 그는 스스로의 행동과 글과 그리고 필요하다면 상상력을 동원해서라도 그 자리를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놓았을 것이다.  그가 맡은 새로운 직은 사실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그가 하는 일은 매우 중차대한 것이었다.  바로 조국이 방어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그가 해야 할 새로운 임무였고, 그는 즉시 적을 막는 보루를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는 시작부터 산 미니아토의 언덕들을 피렌체의 성벽 안에 두고 싶어하는 교황 클레멘테의 마음을 돌리고자 많은 것을 하고 많은 편지들을 써야만 했다.  그리고 이 문제 때문에 하루는 귀차르디니에게 세 통의 편지를 써야만 했던 때도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하지만 이렇게 머릿속이 성벽 문제로 꽉 찬 상태에서도, 마치 공상하듯이 그의 생각과 펜은 이탈리아 사태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당시 국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던 귀차르디니에게 편지를 슨 것도 바로 이때쯤이었다.  (나에게는 왕에 의해 버림을 받은 황제가 교황에게 중요한 제의를 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네.  하지만 성하께서는 그것에 귀를 기울이려 하시지 않을걸세. (...)  자네도 알다시피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회를 잃어버렸나.  또다시 이번 기회를 놓치거나 사태를 방관하고 있어서는 안 되네.) (군주론)의 마지막 장을 썼던 바로 그 마음으로 그는 같은 편지에서 그 운명적인 기원의 언사를 큰 목소리로 외친다.  (그 오랜 근심 거리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키라!)
  그가 이러한 선동이 말을 쓰고 있던 바로 그날인 5월 17일, 코냑에서 프랑스 왕, 교황, 피렌체, 베네치아 간의 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리고는 에스파냐 군이 눈치채지 못한 상태에서 왕이 제공하기로 했던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전쟁을 선포하였다.  사실 그의 원군이라고 해봐야 시기상으로나 규모상으로나 기대할 바가 못 되었다.  베네치아는 우르비노 공의 지휘 하에 자국군을 보냈고, 교황군은 귀도 랑고니와 조반니 데 메디치가 이끌고 있었다.  비텔로 비텔리는 피렌체 군을 맡았고, (거의 절대적인 전권을 부여받은0 총감독관 격의 자리에는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가 있었다.  6월말, 이 대군세는 로디에 나타났고 그곳은 곧 점령되었다.  그리고는 밀라노 아래에다 진을 쳤다.  그들은 당시 그곳의 형편이 좋지 않았으므로 비교적 쉽사리 공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하루 낮 하룻밤을 머문 뒤, 우리비노 공은 총감독관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자신의 군대를 빼내 가버리는 치욕적인 행동을 하였고, 이 때문에 그와 총감독관 사이에는 심한 말들이 오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우리비노 공의 행동과 그로 인한 언쟁은 장차 닥쳐올 비극적 사건들의 전조가 될 것이었다.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때를 이런 식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동안,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에서 보루를 설계하고 직무에 관한 편지를 쓰는 데 몰두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사실 전기 작가들은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난국에 처했을 때 항상 그랬듯이 그는 첫 군사 이동 속에서 (행운의 동맹군(그렇게 부르도록 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불운의 동맹군) 진영에 와 있었던 것이다.  8인집행위원회가 그 앞으로 발급한 신임장이나 허가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코르토나의 추기경에 의해 보내진 것인지 혹은 그의 총감독관 친구가 그를 휘하에 두고자 한 것인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사실 귀차르디니는 수시로 그를 불러 전쟁에 관련된 자신의 지시 사항들을 이곳저곳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귀차르디니의 편지 한 통을 통해 그가 무슨 일로 그곳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 마키아벨 리가 와 있네.  원래 그는 민병대를 재조직하려고 왔지만, 사람들의 피폐해진 상황을 보고는 엄두가 나지 않는가보네.  달리 어떻게 할 방도가 없으니, 다만 인간의 힘 없음을 웃어넘길 수밖에.)  내가 다른 곳에서 말한 바대로, 이는 마치 한 폭의 초상화를 보는 듯한 일필휘지의 묘사이다.  그가 언제 롬마르디아에 도착했는지 우리는 정확히 모른다.  그가 가지고 있던 성벽관리위원회 기록부는 6월 8일에서 끊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한 편지 단편에 의하면, 7월 13일에 자신이 (전장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전후 사정으로 보아 그는 이미 앞서 꽤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장은 마리냐노에 있었고, 며칠 뒤인 7월 22일에는 밀라노 근처 바디아 아 카사레토로 옮아갔다.  하지만 대군은 아무 하는 일 없이 그저 롬바르디아의 수도격인 그곳의 멋있는 첨탑들을 바라만 보면서 오랫동안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 동안 마키아벨리는 군영을 배회하면서 그곳의 일들을 보고 들으며 군사 문제에 관한 자신의 단상들을 메모하거나, 혹은 (힘과 용맹에서 이 군영의 누구도 당할 자 없어 모두가 두려워하는) 조반니 데 미디치와 귀차르디니 사이에서 이리저리 시간을 쪼개어 그들과 만나고 있었다.  조반니는 거친 성격이었으나, 예컨대 아레티노와 같이 영민하고 재치 있는 사람들과 얘기하기를 즐겼다.  마키아벨리 역시 그에 못지않게 당돌하고 재치가 넘치는 데다가 조반니에게는 스스로가 지닌 유일한 기술인 전쟁술에 관한 유명한 책까지 슨 인물이었으므로, 그가 그를 좋아하지 않았을리 만무하였다.  그들간의 대화가 그저 담소 정도였다면, 그 마상 시합을 이끈 쪽은 분명히 마키아벨리였다.  화제가 군사 문제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조반니와 당당히 겨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어느 날 이 위대한 장군은 마키아벨리에게 그가 (전술론)에서 훌륭히 기술해 놓은 방식으로 삼천 명의 병사들을 한번 직접 지휘해 보라며 도발적으로 나왔다.  무릇 남을 속이려다가 자기가 속는 법.  마키아벨리는 두 시간 동안이나 몸이 달아서 이리저리 고함을 쳐댔으나, 도무지 제대로 대오를 갖추게 할 수가 없었다.  가엾은 병사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렸다.  마키아벨리도 땀은 났으나 긴장하여 오히려 오한이 들 지경이었다.  조반니가 마침내 싱긋이 웃으며 말하였다.  (자 이제 골치 아픈 일은 그만두고 식사나 하러 갑시다.)   그는 그리고는 드럼 소리에 맞추어 순식간에 군대를 여러 거지 진행으로 만들어 보였다.  그것은 이론가에 대한 실천가의 빛나고도 잔인한 복수인 셈이었다.  하지만 식사를 하면서 니콜로는 니콜로대로 익살맞고 질척거리는 이야기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의 앙갚음을 하였다.  그곳에서 마테오 반델로라는 조반니의 손님이 또 한 사람 있었는데, 그도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미식가일 뿐 아니라 음담패설을 즐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느 유명한 도메니코 수도회 총장의 조카이면서 그 자신이 그 수도사이기도 한 그는 우리에게 그 음담을 전해 주었다.  비록 이야기한 사람의 재치와 스타일까지 전해 주지 못한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당분간 전투는 롬바르디아 평원의 땡볕 아래서 멈추어 서 있는 상태였다.  마키아벨리는 그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틀림없이 피렌체의 부드러운 언득과 유괘한 친구패들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는 또한 바르베라 생각도 하고 있었고, 그녀의 편지가 끊기자 상심하여 포르나차이오에게 편지로 그녀의 안부를 물엇다.  그러자 고맙게도 포르나차이오는 바르베라에게 달려가 (욕을 한 무더기) 퍼부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그녀로부터 자신이 피렌체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답을 못했다는 사과와 함께, 멀리 있는 특별한 친구에 대한 사랑의 서약과, 매주 편지하겠다는 약속과, 그가 하루바삐 피렌체로 돌아왔으면 하는 소망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그가 그곳에 있을 때면 (그녀는 마치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잠드는 것 같은 기분)이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그를 바쁘게 만들고 그를 마음르로나마 피렌체로 돌아오도록 한 친구들과의 편지 교환이 있었다.  베토리는 그가 남긴 장문의 편지들 중 일부를 그에게 보냈는데, 자신의 (이탈리아사 대요 Sommario della storia d'Italia)에서처럼 사건들을 힘찬 필치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그는 최근 들어 황제의 운세가 지나칠 정도로 좋았다는 것, 이탈리아와 교황의 행로는 이와 반대로 불운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교황은 최근에 시에나 정권을 무력으로 바꾸어놓으려 하다가, 보병 오천과 기병 수백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군대가 불과 사백 명에 지나지 않는 시에나 군에 의해 패퇴하는 꼴을 보기까지 하였다.  재치있는 생각들로 가득 찬 이러한 편지들을 읽고는 똑같이 재치 있는 답장을 쓰는 것이야말로 그토록 오랫동안 전장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마키아벨리로서는 가장 즐거운 일들 중 하나였다.  그의 답장은 군대와 장군들의 상황에 관해 많은 것을 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군대와 정치상의 사건들에 대한 날카로운 판단을 재기발랄한 문체로 써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피렌체의 친구들은 목을 빼고 편지를 기다렸다.  예컨데 베토리는 답장을 받자마자(그는 7월 31일자로 편지 한 통을 받았으며, 그러보터 8월 24일 사이에 적어도 세 통 이상의 편지를 받았으나 지금은 모두 유실되고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을 이폴리토 데 메디치에게 보내 읽도록 하거나, (그것이 전쟁에 무언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는) 로마의 필리포 스트로치에게 보내 교황이 보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편지들을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칭찬하였다.  오직 한 가지, 나폴리 왕국을 전쟁에 끌어들이자는 제안만이 소심한 클레멘테에게는 못마땅했을 뿐이었다.  니콜로는 결코 이 오랜 지기들과의 편지에 열중하느라 자신의 더 젊은 친구들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 우리는 바르톨로메오 카발칸티를 보게 된다.  그는 이제 곧 자신이 봉직할 두 공화국에서 드높은 명예를 얻게 될 것이었고, 그것은 다름아닌 피렌체 공화국과 문필 공화국이었다.
  바로 그때쯤, 동맹군의 일단은 크레모나를 죄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성을 공격하는 기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9월 10일 귀차르디니는 (대단히 유능한 사람)인 마키아벨리에게 신임장과 훈령을 주어 그곳으로 보냈다.  그가 할 일은 그곳 상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과연 무슨 희망이라도 보이는지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보기에 신속한 승리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면, 베네치아 군 지휘관인 페사로를 설득하여 포위를 풀고 제노바를 공략하도록 해야 할 것이었다.  그는 갔고 보았다.  페사로는 물론 우르비노 공과도 일을 논의했는데, 그라는 작자는 적 앞에서 소심하고 굼뜬 것만큼이나 이야기를 나눔에서는 생기 있고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마키아벨리는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총감독관 앞으로 수많은 편지를 썼다.  간단히 말해서, 늘 그렇듯이 그는 힘 닿는 대로 일을 해나갔다.  9월 14일 저녁, 그는 밀라노 성벽 아래의 아군 진영으로 돌아왔고, 장군들뿐 아니라 그 자신까지도 신속한 승리를 얻을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전할 수 있었다.
  사실 실제적인 접수는 그달 말로 늦추어지기는 했지만, 그 도시가 함락된 때는 23일이었다.  그러나 동맹군 진영에서 이 희소식을 자축하고 있을 무렵, 로마에서 다른 최악의 소식이 전해졌고 이는 환호를 일시에 쓰라림과 비탄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어리석은 교황 클레멘테는 제국의 장군이자 대리인으로서 자칭 발렌티노의 사도인 돈 우고 다몬카다와 말을 맞춘 콜론나파에 속아서, 그가 제의한 기만적인 휴전 협정을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이다.  꼬임에 빠진 교황은 자신이 주변을 지키던 소수의 경비병들마저 해산시켰다.  9월 19일 밤, 그는 콜론나파의 군대에 의해 공격을 당했다.  그는 미처 몸을 숨길 시간도 없이 붙잡혀 가스텔 산탄젤로에 갖혀버렸고, 보르고 Borghi(단수는 Borgo. 도시 성벽 밖의 전원 지역 혹은 이전에 성벽 밖에 있었던 거리를 말함-옮긴이)와 교황궁과 심지어는 산 피에트로 교회까지도 처참하게 약탈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신의 대리인 안에서 그리스도는 포로가 되었네)라고 읊은 마키아벨리의 예언은 놀라울 정도로 적중한 셈이다.  하지만 극적인 이 모든 사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는 단지 비극 마지막 장면의 예고편에 불과하였다.
  
    제22장 (육십 평생에)
  (기도하라, 유대의 왕이여! 그대에게 사면을 내리노라.)  그 사악한 돈 우고와 에스파냐의 장군들이 공손하지만 완강하게 그 div에서 무릎을 꿇고는 자신들이 저지른 신성 모독적인 무도 행위를 사면해 달라고 요구하자, 클레멘테 7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피렌체식 조소 외엔 메디치 교황이 그 정복자들에게 달리 되갚아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다라서 그는 넉 달 간의 휴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동안 롬바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콜론나파를 사면하고 협정을 준수한다는 표시로 필리포 스트로치를 인질로 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트로치는 교황의 인척일 뿐 아니라 몸값이 무려 백만 두카토를 넘는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조약은 체격되었고, 이제 그가 이를 지키려고 하는 한, 그의 편에서 보자면 전쟁은 사실상 끝난 셈이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마키아벨리의 군 병영 생활도 끝났다.
  그토록 어리석은 행동이 가져온 그 엄청난 재앙에 귀차르디니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는 교섭이 아니라 강요에 의한 조약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항의도 하고, 이러저러한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끌어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군대를 피아첸치로 철수시키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고, 10월 9일에는 그 자신도 그곳으로 뒤따라갔다.  연하의 친구인 바르톨로메오 카발칸티에게 장문의 편지 한 통을 썼는데, 여기에는 그 스스로 사태의 요점을 간추려두자는 의미도 일부 담겨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일찍이 빌라리가 공식 보고서라고 오인하였던 바로 그 편지였다.  여기서 그는 전쟁 과정에서 장군들이나 교황에 의해 저질러진 실수들에서부터 (그렇게 로마에 머물다 마치 어린애처럼 잡혀버린) 마지막 실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놀라울 정도로 명료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교황 클레멘테는 (어린애들의 림보에) 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전부터 정말 진심으로 그를 그곳에 보내고 싶어했음에 틀림없다.
  휴전중인 상태에서 피아첸차에는 마키아벨 리가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동안 비텔 리가 이끄는 피렌체 군은 로마로 향했다.  늦었지만 우선은 교황의 신변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교황이 그와 맺은 협정을 무시하기로 작정하는 대로, 그 신성 모두의 무례함을 안겨준 장본인인 폼페오 콜론나를 추기경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후, 그 가문의 영지를 칼과 불로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피렌체로 돌아갈 시점에 마키아벨리는 야코포 살비아티에게 자신은 군대와 동행했으면 한다는 편지를 썼다.  그것은 분명히 교황 사절의 자격으로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군대가 밀라노 인근에 주둔하고 있을 당시 이미 그의 위치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강한 추측을 낳게 한다.  어쨌든 친구를 추천하는 귀차르디니의 편지를 받은 체사레 콜롬보가 이 문제를 교황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그에게 오라고 편지하라.  나도 그편이 좋아)라고 답하였고, 살비아티에게도 역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교황의 윤허가 기다리고 있는 피렌체로 곧장 가지 않았다.  그는 교황의 일로 여기저기를 (둘러오라는) 귀차르디니의 부탁을 받고 있었으므로, 먼저 보르고 아 산 돈니노에 들러서 아마도 당시 휴전으로 크레모나를 떠나고 있던 에스파냐 군과 접촉하고는 이어서 모데나로 향한 듯하다.  그는 그곳에서 이틀 동안 머물려, 분노로 가득한 총감독관과 이를 감지하고는 심란해 있던 다른 두 사람의 마음을 친구의 입장에서 위로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 하나는 그 자신 역시 전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귀도 랑고니 백작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심한 질책을 받았던 필리포 데 네를리 총독이었다.  네를 리가 불쑥 (도대체 내가 잘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라고 말을 꺼내자, 니콜로는 익살과 미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재빨리 이렇게 말을 받았다.  (총독 각하, 그렇게 놀라지 마십시오.  그건 각하의 잘못이 아니라 잘한 일을 한 사람도 잘된 일도 하나 없었던 올해의 잘못이니까요.  황제를 보십시오.  그는 금년 내내 자신의 편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쉽사리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최악의 행동이죠.  에스파냐 군도 우리를 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고, 우리 역시 이길 수 있었음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지요.  교황은 교황대로 천 명의 군사보다 펜 한번 휘두르는 것이 자신을 더 잘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제대로 행동한 것은 오직 시에나 사람들뿐인데, 미쳐서 돌아가는 시대에는 정작 미친 자들이 낫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요.  그리고, 총독 각하, 실수하는 것보다 무언가 괜찮은 일을 하는 쪽이 오히려 더 불길한 징조일 수도 있답니다.)  이처럼 비극이 희극으로 바뀌는 데야 네를리도 웃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 랑고니가 끼어들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총감독관께서는 여전히 화가 나 있으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니콜로의 재바른 대답.  (아닐 겁니다.  이젠 더 이상 옆에 화나게 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결국 모든 분노의 감정은 한바탕 웃음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러한 웃음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을 법하다.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피렌체에 도착했으나, 교황이 자신에게 새 임무를 맡기도록 했다는 살비아티의 때 지난 편지를 보고 기뻐한 것도 잠시, 그가 막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출행을 취소하는 또 다른 편지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비텔리는 길을 재촉한 반면, 그는 여정을 너무 지체했기 때문에, 그의 자리는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오직 귀차르디니의 즉석 위로밖에는 없었지만, 그로서는 잃은 것이 그리 많이는 않았다.  왜냐하면 (콜론나가의 초막에) 머문다고 무슨 괜찮은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은 풀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교황을 위시하여 피렌체를 통치하는 사람들이 눈에도 어느 정도 들게 되었기 때문에, 비록 돈과 명예에서 얻는 것에 비해 수고는 많겠지만 소소한 일거리들은 마키아벨리에게 끊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둘 모두를 필요로 했지만, 당분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만으로 만족하고자 하였다.  이제 막 그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던 (피렌체사)의 비극을 다시는 스스로 겪지 않을 것이었다.  이러한 속에서 그는 자질구레한 임무들을 맡고 있었고, 11월 30일에는 8인집행위원회의 명령으로 당시 모데나에 있었던 귀차르디니에게로 보내졌다.
  한편, 당시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던 프룬치베르크 휘하의 독일 (란치 군 Lanzi) (Lanzichenecco(=Landsknecht)의 준말로, 16, 7세기 독일 황제력 Land 출신 용병을 일컫는다.  Georg von Frundsberg가 그 지휘관이었다-옮긴이)은 베네치아 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알프스 고갯길을 지나 포 강의 도하 지점에 이르렀고, 우르비노 공이 그곳에서 어떻게든 그들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기 어려운 형평이었다.  결국 모든 희망은 조반니 데 메디치가 이끄는 소수의 군대와 그의 용감무쌍한 기개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11월 25일, 그는 평소 하던 대로 장군으로서보다는 병사의 한 사람으로서 싸우던 도중, 포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다리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귀차르디니는 곧 이것이 단지 조반니 개인에 대해서뿐 아니라 전황 전체에 치명적 타격이 되리라는 점을 간파하였다.  이처럼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그 용감한 전사가 상처의 고통과 그것을 치료할 의사만으로 싸우고 있는 동안, 란치 군은 이탈리아의 심장을 향해 창 끝을 겨누면서 포 강을 건넜다.  그때가 11월 28일이었고, 30일에는 조반니데 메디치가 죽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같은 날 훈령을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 내용은 별 것 없었고, 단지 (그러한 위치의) 사절에게 (형식적으로) 주어지는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행간을 잘 읽어보면 피렌체 정부는 당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니콜로의 임무는 총감독관에게로 가서 도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 점에서는 이미 귀차르디니가 그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 피렌체 시민들이 많은 돈을 주겟다는 제의보다는 조약의 체결 쪽으로 기울고 있지만, (협상 내용과 시기는 각하의 생각에 일임하겠다)는 말을 전할 예정이었다.  사절 임무치고는 참 희한한 것이 아닌가!
  서둘러 말을 달리는 것이 이제는 괴로울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해로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펜니노 산맥의 세찬 겨울 바람을 헤치고 밤낮으로 말을 몰아 12월 2일 아침 일직 모데나에 도착하였다.  그는 즉시 총감독관을 만나 현안들을 상의한 뒤에, 8인집행위원회 앞으로 보낸 당일자 편지에서 그 내용과 의견들을 수합하여 보고하였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은 한 점도 더하지 않고, 오직 귀차르디니의 말만을 의도적으로 옮겨 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일은 그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특이한 경우이다.  간단히 말해서 결론은 이러하였다.  즉 적군의 공격이 임박한 상황에서 피렌체인들에게 희망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육칠천 명 정도의 교회 군 보병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설사 조약을 맺는다 해도, 그것은 전장에서가 아니라 로마나 피렌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엇다.  이 지루한 편지의 말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이 덧붙여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위원님들께서는 조반니 님의 죽음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 소식은 이미 늦은 것이었지만, 무릇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을 그냥 눌러놓고 있기란 어려운 법인 것이다.
  그는 다음날 8인집행위원회에다 새로운 사실을 약간 더한 다른 편지 한 통을 써 보냈다.  페라라 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자신이 황제 편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란치 군은 피아첸차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 총감독관은 전쟁의 방향이 그쪽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파르마로 갔다는 것, 그래서 그 자신 역시 내일 귀향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그가 이 편지를 쓴 때는 3일이었지만, (쓸데없이 힘을 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5일까지 기다렸다가 그날 느긋하게 말에 올랐다.  그는 더 이상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1527년 2월 3일, 유난히도 눈비가 잦던 그 해 겨울도 한창일 무렵, 8인집행위원회의 지시로 그는 다시 한번 말을 타고 귀차르디니에게 갔다.  밀라노에서 나온 에스파냐 군은 이미 트레비아 강 쪽으로 넘어간 독일의 란치 군을 따라 포 강을 건넜다.  제국 군의 목표가 피렌체를 약탈하고, 로마마저도 약탈과 복수의 제물로 삼겠다는 것임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이제 피렌체인들은 얼마 안 되는 교황의 보병 부대와 그의 피렌체인 총감독관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므로, 마키아벨리는 도시 사람들의 생각과 소망을 총감독관에게 생생히 설명해 주어야만 했다.  이제 몸도 늙고 지친 상태였고 마음 역시 그러하였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는 갔다.  밀라노 부근의 진지에 도착할 무렵, 그는 당시 자신이 몇 통의 공한을 긁적이며 작업하고 있던 공책을 이번으로 영원히 덮어버렸다.  이후 그는 (피렌체사)를 다시는 펴보지 않았다.
  이번에 그는 좀더 천천히 길을 갔고, 위원회 쪽에는 (적군으로 인한 장애물들) 때문에 늦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는 7일에야 파르마에 닿았는데, 그곳에서는 8인집행위원회가 그의 파견을 결정하기 며칠 전 이미 코르토나 추기경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있었던 귀차르디니가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전령을 보내 빨리 오라고 재촉하기까지 하였다.  총감독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도시의 소망들을 그로부터 듣자는 것도, 또는 동맹으로부터 얻을 만한 어떤 원조의 가능성을 그에게 알리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원했던 바는 공화국 사절의 힘을 빌려 ((우르비노) 공작과 (살루초) 후작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를 설득함으로써) 그들로부터 더 많은 원조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바로 그날로 마키아벨리를 공작에게 데리고 갔고, 그는 최선을 다해 (강력하고도 신속한 도움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어떤 결정을 내림에 있어 사태를 관망하는 성품인 공작은, 살루초로 하여금 전위 부대를 거느리고 토스카나로 들어가게 하고 반면 자신은 주력을 유지하며 적의 배후에 남겠다고 우겼다.  하지만 그들은 다음날 다시 만나 (모든 것을 문서로 작성하는 데) 합의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사항을 같은 날 8인집행위원회에 알렸다.  문서로 작성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즉 만일 적군이 폰티레몰리를 경유하여 토스카나 쪽으로 온다면, 프랑스 군, 베네치아 군, 교황 군 전체가 적을 앞지를 것이지만, 만일 그들이 볼로냐로 향한다면, 토스카나에는 살루초 후작만 입성하고 공작은 뒤처지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으며, 뒤에는 후미에 붙어서 역시 전혀 움직이려 들지를 않았다.  2월 11일, 마키아벨리는 8인집행위원회에다 새로이 편지를 써서 적군의 동향이 오리무중임을 전한 후 이렇게 말을 맺었다.  (저는 아직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길이 어느 쪽을 향하는가를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정부의 예상대로 방향을 잡는다면, 저는 그에 대한 처방의 종류와 방법을 알려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삼사 일 더 머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거의 석 달을 지체하였다.  이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 물길이 에밀리아의 평원 지대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14일자로 8인집행위원회에다가 편지를 썼던 파르마에서부터 적군과 대치하면서 교황 군을 따라오다가, 스칸이아노와 사수올로를 거쳐 볼로냐에 도착하였다.  그때가 27일이었는데, 그는 그로부터 한 달 이상을 그곳에 머물렀다.  한편, 란치 군과 에스파냐 군은 처음에는 식량과 돈이 떨어져서, 뒤에는 나쁜 날씨 때문에 지체되어 지금은 온통 물과 눈으로 질퍽거리는 대평원에서 꼼짝않고 있었다.  우르비노 공은 그처럼 곤경에 빠져 있는 적군을 쉽사리 제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싸우려들지 않았으므로, 마키아벨리나 귀차르디니나 편지에서 보고할 거리라고는 적군이 기아와 악천후로 곤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볼로냐에서는 눈이 (도시 어디에서나 키 높이만큼이나 많이) 쌓였음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곳의 교황 사절은 교황의 사촌인 인노첸초 치보 추기경이었는데, 그는 매우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문인들과도 활발히 교유하는 편이었다.  이것을 보면, 그에게는 리구리아 사교 쪽보다는 대 로렌초의 피가 더 많이 흐르고 있었던 것 같다.  추기경은 곧 마키아벨리에게 마음이 끌렸고, 그란 인물은 자신에게 닥쳤던 그 유명한 곤경들보다 이같이 따뜻한 호의에 훨씬 더 힘을 얻는 성품이었다.  오 가엾은 마키아벨리여!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그 스스로를 알지만, 자신이 오랫동안 사람과 운명에 의해 망각되어 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짓밟히고 잊혀져 오는 가운데, 그는 자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평범성을 잣대로 스스로의 비범성을 재곤 했다.  그는 스스로가 더 위대한 일에 소용이 닿은다고 느꼈지만, 동시에 영원히 하찮은 일에만 갇혀 있는 자신이 모습을 보았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보여준 자신의 저작들조차도 그로 하여금 인간에 대해 당연히 가져야 할 존경심을 빼앗아가 버린 잔인함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그는 한때 인간에 대한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 남은 것은 절망뿐이었다.  이렇게 내내 그 자신을 갉아먹는 그러한 고질병을 앓고 있던 차에, 추기경이 보여준 각별한 마음 씀씀이는 마치 환자가 물불 가리지 않고 손에 넣으려 하는 특효약과 같은 것이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풍성한 볼로냐에서 이 치료약과 추기경의 아낀 없는 성찬 덕분에 그의 기력은 되살아나고 있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그가 볼로냐에서 쓴 편지들에는 이처럼 짧지만 그래도 좋았던 시절의 냄새가 묻어나고 있다.  우선 그것에는 생기가 넘쳐나고 있으며, 이전의 날카로운 판단력과 번뜩이는 문체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과 하늘의 도움에 기대고자 하는 바람도 더 크다.  (만일 페라라 공이 머릿속에 약간의 생각이라도 가지고 있고 게다가 이 같은 날씨가 이틀만 더 지속되어 준다면, 그는 앉아 잠깐 눈을 붙이는 사이에 이 전쟁을 끝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날씨는 여전했으나, 그 자신 이탈리아 사람임에도 언제나 황제편에 붙어 이탈리아를 제물로 삼았던 공작의 머릿속에는 아직 아무 생각도 없었다.  더 나쁜 것은 교황조차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아니 오히려 바로 그 시간에 그는 평소의 바보 같은 짓을 또다시 저지르기까지 하였다.  그는 적과 새 협정을 맺음으로써 여러 가지로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고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반면 혼란에 빠져 있었던 제국 군은 프룬츠베르크가 죽은 후 부르봉의 지휘 아래 다시금 움직임을 재개하고 있었다.
  3월 그믐날, 교회 군이 볼로냐를 나와 적군의 앞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사이, 마키아벨리는 미리 숙영지를 마련해 놓으려고 이몰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8인집행위원회 앞으로 슨 편지에서, 정부는 군대를 멈추는 대가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요구하는 부르봉의 협박에 켤코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당신들과 그들 사이에 여전히 알프스가 가로지르고 있고 당신들의 군대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데도 삼 일 내에 십만 피오리노를 내놓고 이어 열흘 안에 십오만 피오리노를 더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그런 유의 적과 무슨 희망으로 협상을 논한다는 것입니까?  알프스에서 내려오게 되면, 그들을 첫 번째로 당신들의 재산 모두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단지 당신들을 약탈하고자 하는 일념뿐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물론 그렇지 않으면 좋으련만!)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악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다만 그것을 풀어버리는 것 외엔 아무런 치유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만 한다면, 그들이 당신들의 성벽 아래에까지 왔을 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알프스에서 행동에 옮기는 편이 더 낫습니다.)
  그것은 이미 이탈리아를 구원한다든지, 혹은 어떤 망상적인 정치적 계획을 꾸미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야흐로 잔혹한 에스파냐 군과 야만적인 란치 군의 위협에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는 자신의 조국 피렌체를 위해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치솟아 올라오는 더욱 살가운 애정이었다.  저 산들 너머엔 보호해야 할 성벽들이 있고, 그 성벽 안에는 자신의 가족과 아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곳에는 장남인 베르나르도가 있었고, 아직은 어려서 그를 실망시키지 않고 여전히 어떤 환상을 품게 만드는 더 어리고 귀여운 이이들이 있었다.  귀도, 피에로, 바치나, 그리고 아직 갓난아기인 토토.
  니콜로는 베르나르도를 성벽관리위원회에서 일하게 했지만, 그가 자신의 족적을 뒤쫓아오리라는 지대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재능도 공부도 일천한 데다 공부에 대한 열의도 없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도는 이제 나이가 찼기 때문에, 적어도 시골집 정도는 돌보면서 아버지가 멀리 출타중이거나 장작 패는 일 아닌 다른 문제를 생각해야 될 때면 그 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해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최근 아들에게 두 번 편지를 보냈으나 전혀 답이 없었다.  그는 또 차남인 로도비코의 거친 성격 때문에 그와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다.  로도비코의 이러한 성격은 심지어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나고 있으며, 일찍이 8인감찰위원회의 눈에까지 띄었을 정도였다.  지금 그는 두 번째로 레반테 지방으로 가 장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직은 소년 티를 못 벗은 귀도와 피에로는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가 제일 좋아한 아이는 귀도였을 텐데, 그는 조용하고 학구적인 성품이었지만 몸이 허약한 편이었다.  여러 자식들 가운데서도 오직 그만이 언젠가는 아버지가 어던 사람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그런 아이였던 듯하다.  그래서 아버지의 늙고 쓸쓸한 가슴도 그 생각 덕분에 한층 따뜻해졌으리라.
  알프스와 성벽에 관한 편지를 정무궁에 보낸 후인 4월 초이튿날, 그가 애정 어린 편지 한 통을 쓴 것도 다름아닌 어린 귀도에게였다.  (신께서 너와 나에게 긴 목숨을 허용하신다면, 네가 스스로의 몫을 할 준비가 되었을 때 난 너를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을.)  그 어른 어린이는 아들에게 새로 사귄 치보 추기경과의 친분이 (너무 두터워 내 자신도 놀랄 지경)리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추기경이 최근 그에게 베풀어준 명예를 덕분에, 그는 자신이 총애하는 아들에게 진지하고도 애정 어린 충고를 해줄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다.  (네가 더 이상 몸 아픈 탓을 안해도 된다면, 문학과 음악을 배우는 수고를 아끼지 말거라.  나의 이 보잘것없는 능력으로도 이렇게 맣은 명예를 누리는 모습을 너는 보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내 아들아, 네가 날 기쁘게 하고 너 자신도 이득과 명예를 누릴 양이면, 부디 잘 처신하고 열심히 배우거라.  우선 네가 네 스스로를 도와야 남도 너를 돕는 법이란다.)
  그러나 진지한 훈계 뒤에 공상 같은 이야기가 따르는 것도 역시 이 귀여운 아들과 함께 할 때이다.  그 내용은 어린 아들이 제일 좋아하던 작은 노새의 괴상한 행동에 관한 것이다.  (작은 노새 이 녀석은 미친 놈처럼 보이지만 다른 광인들과는 달리 다루어야만 된단다.  왜냐하면 다른 광인들은 묶여 있지만, 난 네가 그 녀석을 풀어주었으면 하기 때문이야.  노새를 반젤로에게 데리고 가.  그리고 그 녀석을 몬테풀리아노로 끌고 가서 마구며 재갈이며 다 풀어버리고 어디든지 그 녀석이 먹을 것을 얻고 그 미친 짓에서 벗어날 만한 곳으로 가도록 놔두라고 그에게 말하렴.  시골은 널따랗고, 이 짐승은 조그마니까 말이야...)  여기서 이 자상한 아버지는 몬테풀리아노의 널따란 숲속을 힝힝대며 이리저리 돌아 다니는 이 조그만 노새를 그려 보임으로서, 어린 아들로 하여금 공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또한 독자들은 니콜로가 어린 아들에게도 역시 다른 사람들이 흉내내지 못할 만큼의 이야기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갑자기 그의 생각은 다시금 현재의 위험에 미치고, 불현 듯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치솟아오른다.  (마리에타 부인께 안부 전해 주렴.  그리고 내가 그 동안 내내,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이곳을 떠나고 싶어한다고 말해 다오.  내가 이때처럼 피렌체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는 말도 함께.  하지만 당분간은 여기 머물러 있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구나.  이곳에 어떤 위험이 닥치기 전에 돌아갈 것이라는 식으로 무엇이든 네 엄마가 듣고 기운이 날 만한 말만 하거라.  바치나, 피에로, 그리고 걔가 그곳에 있다면 토토에게도 뽀뽀해 주어라.  토토의 눈은 좀 괜찮아졌는지 어쩐지를 들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즐겁게 지내되 시간은 최대한 아끼거라...  모두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사악함으로 악명 높고 냉소적이며 신을 부정하는 자로 알려진 그 사람은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어떤 위험)이 닥치기 전에 집에 돌아가 있겠다는 그의 약속은 빈말이 아니었다.  또 한 명의 위대한 피렌체인인 총감독관은 이미 오래 전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그와 상의하였고 또 그렇게 하기로 최근의 경계 근무중에 결정한 바 있었다.  즉 (작은 돈을 들이고 방어할 수 있을 때) 로마냐 지역을 방어하고, 그 이후로는 (최대한으로 이탈리아 군과 돈을 모아서 (...) 어떻게든 피렌체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토리에게 보낸 4월 5일자 편지에서 마키아벨리가 썼듯이, 이를 위해서는 적군보다 먼저 트스카나로 진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반면 그 느려빠진 공작은 자신의 바람대로 후미에 처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교황의 우유부단함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이는 적군의 결단력이나 베네치아의 보잘것없고 의심스러운 기백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이었다.  클레멘테는 전쟁을 계속할 돈도 없이, 그리고 마법사 시몬의 처방전은 훨씬 뒤에 아무런 이득도 없이 다만 비난만 받게 될 운명을 위해 간직한 채 여전히 쓰지 않으려 하면서(여기서 마법사 시몬이란 성경의 (Simon Magus)를 말한다.  그는 기원후 1세기경에 살았던 사마리아 출신 마법사로, 돈으로 성령을 주는 힘을 사려고 한 일로 비난받았던 인물이다.  성직 매매(죄)를 뜻하는 (시모니 simony)라는 용어가 나온 것도 바로 이러한 일화에서이다(사도행전 8장 9-20절).  따라서 본문 중의 (마법사 시몬의 처방전)을 쓴다는 말은 곧 뇌물을 써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려 한다는 의미가 된다-옮긴이), 매일같이 휴전에 대한 유치한 희망만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가 최근에 겪었던 일들도 그에게는 전혀 교훈을 주지 못했다.  황제의 이름을 들먹이며 휴전을 주선해 왔던 에스파냐인 부왕은 황제군의 지휘관인 부르봉에게 진군을 멈추라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교황은 그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부르봉은 마치 아무것도 들은 바 없는 것처럼 진군을 게속했다.  부왕은 그에게 사절을 보냈고, 이어 그 스스로가 그를 만나 길을 멈추게 하려고 했다.  클레멘테는 기대감 속에서 안도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부르봉은 여전히 다가왔고, 교황이 그들을 패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음을 안 동맹국들은 더욱더 그로부터 멀어져 갔다.
  귀차르디니는 만약 제국 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모든 것이 공포로 변할 분이라며 그러한 조약 뒤에 숨어 있는 위험드레 대해 로마로 피렌체로 편지를 써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같은 내용을 8인집행위원회는 물론, 피렌체 정부 내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던 베토리에게 써 보냈지만 허사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바로 앞서 몇 마디 인용했던 4월 5일자 편지는 포를리에서 씌어진 것인데, 그는 귀차르디니 및 그들의통제 아래 남은 소수의 교황 군과 함께 그곳에 가 있었다.  그들은 뒤에 남겨놓고 온 도시들을 수비하기 위해 행군 도중 여기저기에 일단의 군병을 배치해 두었다.  그는 8인집행위원회 앞으로 가는 4월 11일자 편지에서 (우리는 (...) 파르마에서부터 군사들을 떼어내기 시작하여, 여기 포를리에 오는 동안 조금씩조금씩 인원을 줄여나갔습니다)라고 썼고,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상황은 전쟁을 재개하든지 아니면 평화 조약을 맺든지 양단간에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와 있습니다.)
  평화.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이번처럼 로마에서 체결하고 롬바르디아에서는 지키지 않는 그런 의심스럽고 기만적인) 조약이 아니라 확고한 평화였다(이틀 뒤, 그는 또 하나의 말벗인 베토리와의 대화중에 그렇게 말했다), 피렌체에서는 조약이 이제 거의 성사되었다는 편지들을 게속 보내왔다.  왜냐하면, 만일 어차피 전쟁이 있어야 한다면, 부르봉에게 조약의 대가로서 내주어야 할 첫 분할금 육만 두카토를 병사들의 급료로 쓰는 편이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만약 계략에 빠져 조약을 맺음으로써, 그 대가로나 전쟁을 위해서나 양자 모두에 돈이 들어가게 되어 그 어느 쪽에도 돈을 쓰지 못하는 지경이 된다면, 이는 결국 우리만 손해를 보고 적은 이롭게 하는 결과에 이를 것이네.  적군은 오직 전쟁만을 생각하며 그쪽으로 진군하고 있을 뿐이고, 우리를 전쟁과 조약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들의 속셈이라네.)
  바로 그 무렵,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는 같은 내용을, 때로는 거의 같은 말을 하면서 로마와 피렌체에 편지를 써 보내고 있었다.  수 개월에 걸쳐 함께 한 야영 생활과 그로부터 만들어진 공통된 생각들이 위대한 이 두 명의 정치가들 사이의 간격을 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귀족과 평시민, 실천가와 이론가, 산문과 시 사이의 모든 차이점이 사라져버렸다.  귀차르디니는 마키아벨리를 더 높이 보게 되었고, 마키아벨리는 귀차르디니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16일, 협상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에스파냐의 부왕은 부르봉의 군대를 정지시키고 조약을 준수하게 만들고자 피렌체로 왔다.  그러나 부르봉은 이에 개의치 않고 갈레아타 로를 따라 행군을 계속하였다.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는 8인집행위원회에다 이렇게 썼다.  (결코 이보다 더 혼란스럽고 위험한 사태는 이제까지 없었습니다. (...)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저에게 가장 위험천마한 점으로 보이는 것은 토스카나에 적은 있을 망정 정작 군대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쪽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오지 않는 상황에서, 저는 제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제 휘하의 군대 모두를 피렌체 족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엿습니다...)
  그것은 마키아벨 리가 원하던 결정이었고, 그렇게 하는 데는 아마도 그의 조언이 작용했을 것이다.  같은 날 귀차르디니와 같은 어조로 베토리에게 쓴 편지에서, 감정이 북받친 그 위대한 인물을 갑자기 이렇게 말문을 터뜨린다.  (나는 메쎄르 프라네스코 귀차르디니를 사랑하네.  그리고 나의 조국을 내 영혼보다도 더 사랑하네.  내 육십 평생의 경험을 두고 자네에게 감히 말하네만,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은 일찍이 없었다네.  평화는 필요하지만 전쟁을 그만둘 수는 없고, 게다가 우리의 군주는 평화나 전쟁 어느 쪽을 위해서든 필요한 일을 하기가 힘든 분이 아닌가.)  그 군주란 물론 가엾은 클레멘테였다.  그는 평소의 우유부단함 속에서 스스로 군주가 될 것인지 교황이 될 것인지를 아직 결정치 못하고 있었다.
  (육십 평생)이라니!  그는 아직 그만큼 나이를 먹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나이를 더한 것은 단지 자신의 말에 귄위를 세우기 위해서, 또는 그냥 별 뜻 없이 숫자를 부풀리려는 데 그 이유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짊어져 온 수많은 세월과, 자신이 감내해온 모든 노고와, 자신이 겪어온 모든 좌절감과 그리고 위대한 인물이며 위대한 시인들을 말없는 가운데 좌절케 하는 모든 사소한 불행들까지, 문든 그 모든 것의 무게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리라.
  
    제23장 결말
  육십 세 가량의 나이에, 머리는 기울어졌고 얼굴은 심적, 정신적 고뇌로 찌들린, 지치고 불행해 보이는 한 가엾은 남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라고 알려져 있는 피렌체 소재 채색 테라코타 흉상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니다.  지치고 고뇌에 찬 얼굴 아래로 예리하면서도 재기 어린 조소를 날리는 그 애수에 찬 표정은 바로 그의 특징 그대로이다.  만약 이 초상이 그의 것이라면, 어떠한 작가의 글도 마키아벨리의 비극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설사 그의 모습이 아니라 해도, 그것은 그의 생애와 나의 책이 이르른 바로 이 시점에서 내가 상상한 그의 이미지 그대로이다.
  그의 서간집을 읽을 때, 특히 그가 마지막 순간에 쓴 편지들을 읽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마음속으로 이 고통스런 모습을, 삶의 활력과 드넓은 포부로 가득한 그를 보여주는 다른 모습과 함께 떠올리게 된다.  감옥에 갇혀서 팔다리는 고문으로 뒤틀린 채 그래도 농담과 웃음을 잃지 않았던 인물.  바로 그러한 미소로 생애 내내 자신을 모른체한 군주들의 부당한 행동과 동료들의 무관시을 감내했던 인물.  그가 같자기 웃을을 잃고 스스로를 내팽겨쳤다.  심지어는 바르베라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  그의 (참회 권유)는 밀라노의 군 막사에서 돌아온 뒤인 바로 이 시기쯤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여하튼 그의 편지에서나 얼굴에서나 마찬가지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그 글 말미의 다음과 같은 페트라르카 풍 시구에 담긴 고원한 깨달음이 아닐지.
  이제 분명히 알겠네.
  세상을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이 한바탕 잛은 꿈일 뿐이라는 것을.
  한편, 당시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그 끔찍한 전쟁이었다.  적군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고, 동맹군 역시 그러하였다.  총가독관에 의해 등을 떠밀린 그들은 이미 피렌체의 방어를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먼저 귀도 랑고니 백작의 군대가 왔고, 그 뒤를 이어 조반니 데 메디치 휘하에 있었던 보병들과 카이아초 백작의 보병 및 기병대가 차례로 도착하였다.  마지막으로 그 느려빠진 우르비노 공조차도 피렌체인들이 산 레오를 탈환한 데 자극받아 행국 속도를 높여 이동을 개시하였다.  18일 마키아벨리는 귀차르디니와 살루초 후작의 프랑스 군을 따라 브리시겔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베토리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의 어린 귀도가 17일에 포를리에서 보낸 짤막한 편지를 받았던 것도 바로 그곳에서였음이 틀림없다.  여기서 귀도는 아버지가 돌아올 때면 오비디우스의 (변신 Metamorphoseos) 첫 권을 암송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약속하면서, 공부에 진전이 있음을 자랑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편지들만으로도 (그중 많은 수가 kan런 흔적도 없이 유실되어 버린 상태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니콜로가 그 불안의 와중에 가족에게 이례적일 만큼 자주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귀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르나르도 앞으로 된 두 통의 편지를 언급하고 있는 외에도, 귀도의 17일자 편지 속에는 그가 마리에타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 대한 언급과 함께, 그것에 대한 답의 일부가 들어 있다.  군대가 가까이 다가오면 올수록, 커다란 시련의 시간도 가까워졌다. 애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가족과 재산과 수확물들을 보호할 수 있을까에 대한 오만 가지 생각들이 교차하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골 농장들과 무방비 상태의 마을들은 언제나 군대의 첫 번째 희생물이었고, 더군다나 알베르가초는 큰길 가에 있었다.  따라서 수확물을 일부라도 도시 안으로 옮겨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혹시 도시가 포위되더라도 그것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정무위원회에서 무슨 포고령이라도 내리게 되면 그것을 세금 조로 낼 수 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가재도구도 좋은 것들은 도시 안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근처의 성벽 도시 산 카쉬아노에 갖다놓아야만 했다.
  니콜로는 마치 자상한 가장처럼 편지를 통해 때로는 부탁하고 때로는 지시하기도 하면서, 시시콜콜 이러저러한 주의를 주었다.  가족들의 이수선하던 마음도 이제는 안정되었고, 그리하여 어린 귀도는 (우린 더 이상 란치 군에 대해 생각 않기로 했어요.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여기 게시기로 약속하셨으니까요)라고 썼다.  사실 그는 22일, 귀차르디니보다 하루 먼저 피렌체에 가 있었다.
  그가 보기에, 도시의 분위기는 매우 뒤숭숭했고 폭동의 기미까지 보일 정도였다.  메디치 가에 대한 반감이 전반적으로 커져 가고 있었고, 친정부파들조차 불만을 표시하는 상태였다.  벼릴 없이 평온한 시기에도 정국을 겨우 지탱해 나갈 정도로 무능한 데다 운조차 나쁜 코르토나 추기경의 정부가, 전쟁 비용으로 멀쩡하게 눈 뜨고 껍질가지 벗겨질 판에 사람들로부터 용인될 턱이 없었다.  귀차르디니는 곧 이렇게 예측하였다.  (설사 도시가 지켜진다 해도, 정부는 스스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 이렇게 덧붙였다.  (이 자만심에 들뜬 코르토나는, (...)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하려들면서도 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입니다.)  최근 클레멘테는 그를 보좌케 하려고 피렌체 대주교인 리돌피 추기경을 보낸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친분상으로나 인척 관계로나 현정부에 적대적인 유력 시민들과 연관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옴으로서 그 결과는 교황의 의도와는 오히려 상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치보 추기경까지 파견되어 왔지만, 그는 원래 외국인이라 아무런 권위도 시민들과의 교감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메디치 가로서는 상황이 더 악화된 셈이었다.  불길한 조짐이 처음으로 감지된 때는 마키아벨리가 돌아오고 4일 후였다.  도시 근교에 병사들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아군이었지만, 적군보다 더 고약한 것이, 절도와 방화와 부녀자 강간을 일삼고 있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러한 수비군을 도시 안으로 들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기백 있는 청년들은 군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코르토나는 그들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대면 어쩌나 두려워서 주저했지만, 리돌피와 다른 유력 시민들이 주장에 따라 마침내 4월 26일 군대의 시내 배치를 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정무궁 광장에는 성급한 청년들로 득시글거렸고, 일부 병사들의 고압적인 자세 때문에 약간의 소요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코르토나, 리돌피, 치보 추기경들과 아직은 어린 이폴리토가 우르비노 공을 맞기 위해 말을 타고 나오자, 당장 메디치 가 사람들이 도망치고 있다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즉각적으로 사방에서 청년들이 몰려들었고, 일순간 정무궁은 그들로 꽉 메워졌다.  원로 명사들과 메디치파 사람들까지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현정부이지 평시민들의 정부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곤팔로니에레로서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의 형인 뤼지까지도 문 앞으로 나와 일부 유력 인사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안으로 들임으로써, 자신이 그들이 편이며 평시민들이 원하는 바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안에서는 이제 통제 불능 상태가 된 청년들이 정무위원들에게 위협과 구타를 가하며 메디치 가를 반역자로 선포하여 추방하고 소데리니 시대와 같이 평시민 정부로 복귀할 것과,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대종을 울릴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무궁에서 이러한 일들로 격론을 벌이고 있는 사이, 그 소식을 들은 추기경들은 황급히 피렌체로 방향을 돌려 관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동맹국 소속 장군들과 많은 수의 병사들도 함께 들어왔다.  궁 안의 사람들은 돌로 자신들을 지키려 하고 있었고, 궁 밖의 사람들은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만일 정무궁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한다면, 상당수의 피렌체 시민들이 살해당할 것이고, 나아가 도시가지도 약탈될 가능성이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나라의 안위를 염려한 리돌피 추기경과 메쎄르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는 페데리고 다 보촐로로 하여금 정무궁으로 들어가 협상해 보라고 간청하였다.  첫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총감독관과 함께 다시 들어가 관련자 전원의 사면을 약속하고 협상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추기경들과 우르비노 공이 서명하였다.
  피렌체의 역사가들이 (금요일의 봉기 il tumulto del venerdi라고 부르는 이 잛은 혁명기 동안 마키아벨 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이 마지막 시기에 총감독관 및 교황 군 진영에서 수행했던 역할과 친분이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귀차르디니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은 알려져 있다.  귀차르디니는 추기경들에 앞서 그 날 아침 일찍 우리비노 공을 맞으러 갔었고, 마키아벨리 역시 같이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럴 경우, 귀차르디니와 함께 피렌체로 되돌아왔을 그는 공격하는 쪽에 끼어 광장에 있었겠지만, 정작 마음은 정무궁 안의 방어하는 쪽에 가 있었을 법하다.  그 안에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와 바르톨로메오 카발칸티를 비롯한 모든 친구들이 있었고, 또한 자유 피렌체 공화국이 있었다.
  한편, 부르봉은 아르노 계곡을 내려와 도시 가까이로 들어왔다.  하지만 피렌체가 성벽과 군대의 측면에서 아주 잘 방비된 상태여서, 과일의 핵처럼 깨뜨리기가 힘든 곳임을 알아차린 그는, 더 신속한 행군을 위해 경포병대까지도 뒤에 암겨놓고는, 몬테바르키에서 갑자기 로마 쪽 길로 방향을 꺾었다.
  느림보 우리비노 공은 약간 뒤처져 그를 쫒아 나섰고, 교황 군은 그보다 하루 앞서 있었다.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는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5월 2일 피렌체를 떠났고, 마키아벨리는 그들을 위한 숙영지를 준비하기 위해 이미 길을 떠난 상태였다.  사실 그는 4월 27일 혹은 28일 필리네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2,3일 간격으로 동맹군을 앞서가고 있던 교황 군을 바짝 붙어 따라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누군가 기다릴 만한 사람을 구하러 가는 중인 병사들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질서와 속도를 유지하면서) 행군해 나갔다.  당시 부르봉의 군대는 훌륭한 장군도 규율도 없는 데다 포병까지도 뒤에 남겨놓은 오합지졸들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겨우 2,3일의 시간 동안 로마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오직 랑고니 백작만이 (오천의 보병과 일천의 경기병을 이끌고 급히 로마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부르봉은 필사적으로 말을 달려 5월 4일 저녁 그보다 먼저 로마에 닿았다.  그는 도시가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날 군대를 규합한 그는 6일 아침 보르고와 산토 스피리토의 성문들 사이를 공격하였다.  부르봉은 그 첫 공격에서 벤베누토 첼리니가 자신이 쏘았다고 주장하는 화승총 한 발을 맞고 죽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막 승리하려는 순간 스스로의 배반에 대한 대가를 치른 셈이 되었다.  이후 그 광란의 무리는 오직 강탈과 강간의 탐욕에 사로잡혀 두 시간동안 매우 거칠게 싸웠다.  그들은 공성용 포대도 없이 거의 맨손으로 취약한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결국엔 그곳에 모여 있던 소수의 수비군들을 제압하였다.  교황은 황급히 카스텔로 안으로 피신하였고, 그 사이 더 이상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카톨릭교도인 에스파냐 군과 루터파인 란치 군은 서로 앞을 다투어 그 도시를 짓밟아버렸다.  과거 황제들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지금은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그곳을 말이다.  당시 행해졌던 인명 살상과 성물 파괴, 잔인함과 모욕과 강탈과 강간 행위들을 여기서 새삼 되새기는 것은 오직 마키아벨리가 일찍이 예언했던바, 그 묵시록적 종말을 미완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일 분이다.  몇 달 사이에 두 번째로 (당신의 대리인 안에서 그리스도는 포로가 되었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불경함이 더욱 길고 더욱 잔인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었다.
  로마와 메디치 교황의 파멸이 피렌체에서 메디치 정권의 와해로 이어진 것은 필연이었다.  모든 그리스도교도와 모든 이탈리아인들의 마음에 공포를 안겨다준 이 소식은 느지막이 11일이 되어서야 전해졌다.  그리고 피렌체인들은 이러한 공포 속에서도 곧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인지를 생각하였다.  16일 정무궁에 모인 8인집행위원회는 사보나롤라 체제하에 있었던 대평의회를 부활시키고, 아울러 두 명의 메디치 가 젊은이는 사적인 시민의 위치로 남게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사태는 결말이 지어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피렌체 사람들은 매를 둥지에 가둬두는 것으로 안전함을 느기지 못했다.  곧 질시와 의혹, 수군거림과 소문들이 난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자신들이 안전과 도시의 평화를 위하여 메디치 가가 떠나주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결국 17일, 그들은 경의도 적의도 보이지 않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 망명길에 오름으로써 스스로가 민중의 뜻을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교황은 자신이 그 같은 곤경에 빠져들었음을 이후에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또한 마치 그것에 스스로 동의한 양 행동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이를 두고, 교황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무슨 선심이라도 쓴 양했다며 그를 조롱하게 될 것이다.  소데리니에 비해 마키아벨리에게 더 이익을 준 바도 없었고 더욱이 그 스스로 훨씬 더 바보짓만 골라서 했던 클레멘테 7세가 마키아벨리로부터 좋은 말을 듣기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동안 마키아벨리는 교황의 일을 돕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귀차르디니와 함께 브라차노까지 갔는데, 그것은 역시 사절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5월 19일, 총감독관 친구는 브라차노에서 정권이 바뀐 소식을 들었다.  곧 이어서 오르비에토 입성을 앞두고 (로마에 대한 그 무시무시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은 하나의 지진이 훑고 간 후 다시금 들이닥친 또 하나의 여진인 셈이었는데, 두 사람은 비록 한 배에 타고 있기는 했지만 그 소식을 듣고는 서로 전혀 다른 마음과 생각에 잠겼다.  마키아벨리는 즉시 친구에게 피렌체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친구는 그것을 허락하였다.  아니 더 나아가 그는 마키아벨리를 돕고자 자신이 8인집행위원회 앞으로 보낸 21일자 편지의 부본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 편지의 내용인즉, 그는 교황의 통치로부터 해방된 공화국 시민들을 방해할 생각이 없으나, 스스로는 (그는 이렇게 썼다) (제 군주의 사람으로서 그냥 이 군대와 함께 여기 있겠으니) 이를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마키아벨리 역시 똑같은 이유로 교황의 사람들을 방해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동일한 임무를 띠고 교황 군 진영에 와 있었던 프란체스코 반디니와 함께 안드레아 도리아의 함대가 있는 치비타베키아로 갔다.  그곳에서 다음날인 5월 22일, 그는 제독과 상의를 끝낸 후, 자신에게 이에 대한 임무를 주었던 총감독관 앞으로 상의 결과를 보고하는 편지를 썼다.  그의 (사절 생활) 중에 마지막으로 쓴 이 편지에서 그의 서명은 (딱 한번!) 프란체스코 반디니의 이름 위에 씌어져 있다.  이어서 그는 배에 올라 리보르노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피사 전쟁기 동안 청명한 날씨 속에서 수없이 지나쳤던 그 가로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그는 마음으로는 공화주의자였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교황과 메디치 정부를 위해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조국이 자유 공화국으로 바뀐 지금, 그는 또다시 패자의 편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주위에 거느린 사람도 별로 없이 깊은 상념에 잠긴 채, 한때 즐거웠던 시골 들녘과 마을들을 지나 순리와 자유로 되돌아간 피렌체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그는 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유를 너무나도 사랑하였다.)  무엇보다 그에게 후회스러운 일은, 나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이 조금도 애정을 준 적이 없는 교황과 그 (메디치 군주들)과 일함으로서 스스로의 앞날을 막는 바람에, 이제 행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진심을 다하여 자신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 정부 아래서 국가에 봉사하는 길마저 빼앗겨버린 점이었다.
  그는 또한 그 스스로와 가족에 대한 생각들로 괴로워했으며, 그 중 오해 마지않던 무료함과 (가난으로 인한 멸시)를 되새기며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아마도 그는 언젠가 메쎄르 니차의 입을 빌려 내뱉었던 그 말들을 혼자 되풀이해서 중얼거렸으리라.  (이곳에서 우리같이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개도 짖지 않는다.)  1512년에 정권이 바뀔 때만 해도 그는 아직 젊은 나이여서 한창 힘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이제 1527년의 정권 교체에서는 그는 늙고 지치고 좌절한 상태였다.  옛날 그때는 써주기만 한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만큼) 기백으로 충만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마 더 이상은 알베르가초에서 위인들의 혼령과 더불어 공부하던 그 기억에 끌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능력 한도내에서 가능한 모든 불멸의 저작들을 깡그리 토해 냈다는 느낌을 받앗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가 (나 여기 있노라!) 라고 말을 걸 만한 사람도 없었다.  이탈리아가 파멸되는 상황에서도 이제 더 이상 불러낼만한 구원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그에게, 메디치 가가 제거된 지금, 한 대 그들이 그로부터 빼앗아갓던 것, 서기국의 그 애정 어린 자리로 복귀하리라는 희망은 전혀 없었다.  그는 도시 돌아가는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고, 읍도파 일색인 새 정부가 마키아벨리란 인물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이 경우 의심받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당시의 한 피렌체 사람의 말을 따르자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별히 자노비 부온델몬티와 뤼지 알라만니를 비롯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금 그 자리에 복귀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이 늙은 시인에게 한 가지만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여전히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는 사이, 그 역시 인간이었으므로, 6월 10일 그의 자리에 지금은 폐지된 8인집행위원회의 제1서기장으로 2년 간 봉직했던 프란체스코 타루지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또 한번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과거 메디치 정부는 공화 정부가 그에게 부여한 자리에 그를 그냥 두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공화 정부는 그의 옛 서기장을 다시 불러들이지 않고 오히려 메디치 정부가 선임했던 한 서기장을 그 자리에 재임명하엿다.  앞의 메디치 정부는 마키아벨리보다 니콜로 미켈로치라는 인물을, 뒤의 공화 정부는 프란체스코 타루지라는 인물을 더 선호했던 것이다.
  한편, 다시 찾은 자유에 대한 환호성 속에, 길거리에서 서로 포옹하는 시민들도 눈에 띌 만큼 도시는 기쁨으로 가득 차 (거의 새 생명을 얻은 것처럼 (...)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위대한 시민, 미켈란젤로와 함께 단테 이후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던 그는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멸시당했다.  그가 메디치 가로부터 몇몇 보잘것없는 직위를 받았다는 사실 정도는 쉽사리 용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여느 사람들과 다르게 만든 그 행동 방식과 그 신랄한 말투와 그 거리낌없이 내보이는 결점으로 인해 용서받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그의 (군주론) 때문에 그를 비워하였다.  부자에게는 (군주론)이 공작으로 하여금 그들이 재산을 모두 가로채려는, 빈자에게는 그들의 자유를 빼앗는 법을 가르치는 문서로 보였고, 읍도파에게 그는 이단으로 비쳤으며, 선인에게는 사악한 인물로, 악당에게는 자신들보다 더 악당이거나 더 능력 있는 인물로 생각되었으므로, 모두가 그를 미워하였다.)  부시니는 그렇게 썼다.  그는 심술궂고 악의로 가득찬 작가였으나, 적어도 이 말 속에는 그의 동향인에 대한 악의와 증오심이 일면이 충실히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한숨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가 기억을 더듬었고, 한숨 사이로 간간히 교황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조롱의 말들을 힘없이 내뱉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가 이미 늙고 인생이 별 기대를 가지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래도 자신과 이탈리아에 대한 최후의 희망으로 뙤약볕과 눈비를 마다 않고 말을 달렸던 마지막 시간들로 인한 혹사 때문에, 그는 이제 그만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최근의 그 쓰라린 고통을 겪은 후, 흔히 그러하듯이 마음의 병은 곧 육신의 병으로 이어졌다.  그의 비웃는 듯한 조소와 거만하게 보이는 외양 아래 깊숙이 자리한 그 열정적인 성격도 그의 상태를 호전시키지는 못하였다.
  타루지의 임명 직후 병석에 누운 그는, 20일 자신이 평상시에 들던 약을 먹었다.  그가 어떤 병이든 걸렸다 하면 먹곤 하던 바로 그 유명한 환약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엾은 위인 니콜로에게는 자신이 그 시대의 군주와 장군들에게 내렸던 처방만큼이나 약효가 없었다.  사실 그 약들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곧 격심한 복통이 닥쳐왔고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어,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까지 생각될 정도였다.  주위에 그때까지 남아있던 몇 안되는 좋은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프란체스코 델 네로, 친절한 자노비 부온델몬티, 시인 뤼지 알라만니, 재능 있는 문인이자 훌륭한 시민이기까지 한 야코포 나르디, 또한 최근 조국의 해방에서 담당한 역할과 더불어, 이미 유서 깊은 가문과 부 덕분으로 자신에게 쏠리고 있던 선망과 질시를 한층 더 배가시킨 필리포 스트로치 등이 그들이었다.
  병자는 마음의 고통과 창자를 뜯는 듯한 아픔을 겪으면서도, 때로는 이상한 쾌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는 아이들과 자신이 나라와, 그리고 국정의 상태가 최악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논하는 행복함을 맛보게 될 메쎄르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를 생각했다.  그는 또 알베르가초의 서재와 정무궁이 사무실을 생각했다.  그곳에서는 이제 다른 사람들이 그의 것에 비하면 다만 무미건조할 뿐인 공한들을 쓰고 있을 터였다.  산 카쉬아노의 숲과 새잡이 그물도 생각났다.  그곳에서는 가을의 감미로운 안개 사이로 개똥지빠귀들이 다시 날아올 것이었다.  그에게는 아마 크고 작은 이 모든 것이 생각났을 것이며, 이제는 자신을 거부하고 있는 여인들과 생명에도 생각이 미쳤을 것이다.  주금을 생각하명, 때로는 견딜 수 없다가도 또 때로는 그거시 피난처이자 휴식처인 듯도 하였다.  그러나 그 같은 병약함과 불행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마키아 Machia) 였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친구들과 더불어 자신의 불행을 웃어넘겼고, 스스로의 고통과 나아가 자신의 감정 자체에 반항하려 했을 것이다.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누르면서, 웃고 농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대담하게도 감히 죽음에 맞섬으로써 마치 자신의 마지막 영웅 조반니 데 메디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는 형편이 좋았던 옛날이나 별 다름 없이, 편안하게 자신이 꾼 어떤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그의 상상에서 나온 것일 뿐이었다.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비쩍 말라 병약해 보이는 빈자의 무리들을 드문드문 보았다고 얘기하였다.  그가 그들에게 누구냐고 묻자, 자신들은 천국의 축복받은 사람들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들에 대해서는 성경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가난한 자는 축복받을지니 천국이 너희 것이라.) (마태복음 5장 3절-옮긴이) 그들이 사라지자, 왕이나 궁정의 예복을 입은 고상한 입성의 사람들 한떼가 나타났다.  그들은 진중히 국가사를 논의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플라톤, 플루타르코스, 타키투스를 비롯한 고대의 유명한 인물들이 눈에 띄었다.  그가 새로이 나타난 이 사람들에게 누구냐고 묻자, 자신들은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인데 그 이유는 (이러한 종류의 지식이 신의 뜻에 어긋나기) (이 말의 정확한 전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로마서 곳곳에 나오는 오만함에 대한 바울의 경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로마서 11장 20절, 12장 3절, 12장 16절 등을 볼 것-옮긴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 역시 사라지자, 그에게는 누구와 함께 있고 싶으냐는 질문이 던져졌다.  그는 대답하기를, 자신은 처음의 누더기를 걸친 무리들과 천국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고귀한 영혼들과 국가사를 논하며 지옥에 있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는 그 존재가 거의 공개된 적이 없는 한 위대한 이야기꾼의 마지막 이야기였다.  하지만 마키아벨 리가 (이 유명한 꿈)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채 조소하며 숨을 거두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친구들이 떠나고 가족들만이 남자 홀로 생각에 잠겼으며, 조용히 스스로 임종에 대비하면서 (마테오 신부를 불러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고), 그리하여 신부는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6얼 21일 세상을 떠났고, 그 유해는 22일 산타 크로체에 묻혔다.
  그러므로 그는 살아 생전에나 죽는 그 순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키아)가 곧 마키아벨리였고, 가면인 듯 보인 것이 곧 진면목이었다.  죽음 직전의 그 담대한 태도에서, 그리고 돌연히 스스로의ㅡ 평상심으로 되돌아가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바로 다음의 시를 썼던 바로 그 사람임을 본다.
  나는 웃네.  하지만 웃어도 마음은 허망하기만 하네.
  나는 태우네.  하지만 불꽃은 밖으로 피어나지가 않네.
  그는 저녁이 오면 흙먼지로 뒤덮인 일상의 옷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훌륭한 옷으로 갈아입었던 바로 그런 사람이기에, 죽음에 임해서도 다시금 궁정의 의상을 차려입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시시껄렁한 농담 조의 말로 일관하다가 어느새 진지한 태도로 되돌아오던 것처럼, 그리고 (군주론) 말미에서 그랬던 것처럼, 틀림없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결국 (자신의 구원자)를 희구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제24장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
  죽음이란 결국은 사람들 각자에게 합당한 이름과 안식을 선사하는 법이지만, 그것이 마키아벨리에게 처음으로 가져다준 것은 무자비한 공격과 오명 분이었다.  불운은 그의 생애를 통해 그렇게도 그를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마치 화형주처럼 그 피곤한 영혼의 유해를 활활 태우고 있었다.  시대의 배경은 바르게 바뀌었고, 반면 인간의 본성은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렌체의 서기장은 (비록 위대했지만 동시에 불운했기 때문에 죄악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한 교황의 은총과 특권으로 인쇄되었던 그 불멸의 저작들은 이제 다른 교황에 의해 탄핵을 받고 금서화되었다.
  반마키아벨리즘의 아버지이자 자식인 그 악명 높은 (마키아벨리즘)은 프랑스 땅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는 언젠가 프랑스인은 정치가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말했던 그 사람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때 어떤 찬사도 충분치 않다고까지 얘기되었던 그 이름이 이제 와서는 모욕과 경멸이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명사, 형용사, 동사, 부사들이 만들어졌다.  나아가 그 이름을 둘러싸고 악마 연회의 분위기를 풍기는 하나의 전설이 형성되었다.
  한 사람이 어떤 과학적 발견을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스스로의 야심을 채우는 데 이용하거나 또는 그것을 빙자하여 전혀 칭송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발견자에게 모든 짐을 지우는 것이 마치 정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 사악한 과학의 법칙들을 탐색하고 그것을 만천하에 알린 책임은 마키아벨리에게로 쏠렸다.  또 그의 저작들을 공부하고 그것을 칭송한 사람들의 행동까지도 모두가 그의 탓으로 돌려졌는데, (가장 최근의 폭정들을 제외하고라도) 나폴레옹 1세가 그 한 보기이다.  그 역시 (한 명의 신군주)였던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한 부당한 오명이 그토록 오래 지속되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이었다.  마키아벨 리가 마침내 자신의 시대를 맞아, 이전에는 위대하지만 차갑고 비인간적인 저술가로 취급당했던 바로 그곳에서, 민족의 부흥과 함께 열정적이며 고결한 인물로서 되살아난 그때에조차도, 그 동안의 편견들은 단지 진정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통치자의 폭정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편견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파스콸레 빌라리처럼 훌륭한 제일급의 전기 작가가지도 그 오랜 죄악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언제나 그에게서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피스텔 리가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그는 (비록 자신의 주인공을 칭송하고 있으며 또한 언제나 최선을 다해 그를 변호하려 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그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것이다.  반면에 나는 그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그를 변호하기보다는 이해하고, 한 인간으로서 그가 겪은 역경들 속에서 그에게 가가이 다가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오늘날에는, 그를 가리켜 (사악한 천성)을 가졌다고 한 카포니의 말을 감히 되풀이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분명코 그 (절망적인 경구들의 잔인함)은 틀림없이 산 세바스티아노 가의 대저택에서는 너무나 시큼한 맛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나 역시 그곳에서 초년을 보냈고 같은 공기를 호흡하였다.  부디 솔직 담백한 지노 아저씨께서 이 어긋나는 조카의 말들을 용서하시기를!  그 시대에 또 그런 집에 살면서 달리 생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조차도 철학자들은 마키아벨리의 철학에 관해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 좀더 잘 알고 있다.  즉 일부 철학자들이 마침내 인정했듯이, 그란 인물은 분명히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시종일관 정치가이자 예술가였고 아울러 시인이었다.  그는 과학적 판단력과 함께, 예술가와 시인의 즉각적이고도 다기다양한 충동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어느 때부턴가 마키아벨리의 수수께끼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던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사상이 지닌 근본적 논리와 일관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충동적 열정과 함께 모순되면서 복잡다단한 그의 기질 또한 반드시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미 이 책 앞부분에서 그의 성격을 나 자신이 말로써 묘사해 보려고 했던 바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바로 서기장 자신이 또 하나의 위대한 피렌체인에 대해 섰던 그 말을 빌려 그의 성격을 표현해 보는 쪽이 더 낫겠다.  (그의 내부에는 두 개의 다른 인격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절망적인 경구들)에 대해, 우리는 지금까지 그것에서 모든 외적 맥락들을 애써 잘라낸 채, 단지 순순하고 견고한 과학적 명제로 생각하도록 배워왔다.  그것은 국가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부과된, 도저히 물리칠 수가 없는 어떤 가혹한 필요성의 표현인 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키아벨 리가 종종 (stato)란 말을 (patria)의 뜻으로 쓰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stato)란 국가, 정권, (patria)란 조국, 교향이라는 뜻-옮긴이).  더욱이 (리비우스 논고)와 (군주론)에는 (조국이야말로 마키아벨리적 도덕성의 한계이자 기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다수 있을 것같이 보이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도덕성에 대한 관념을 지니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하며, 그의 저작들 속에서 (엄격함과 함께 고통스런 도덕적 양심의 명확한 징후들)을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의 윤리학을 가리켜 (높고 원대하다 d'alta montagno)라고 규정한 경우가 있었다.  이 말에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미적인 종류가 아니라 어떤 의미 표출적인 종류일 것인데, 우리는 이를 그의 종교에 적용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가 국가에 관한 이론화 과정에서 종교를 거의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까지 만들면서 그것을 국가에 적응케 하려 했다는 생각이 논리적으로 보인다.  다음과 같은 말처럼 말이다.  (모든 형태의 인간 활동은 그것이 행해지는 과정에서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강화할 힘을 얻는 법이다.)  하지만, 그 엄격하면서도 격노의 화염에 휩싸이기 쉬운 반종교개혁의 시대에, 마키아벨리의 사상이라는 전체 구조물로부터 어떤 문구들을 따로 떼어내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런저런 예배의 방식들에 대한 피렌체 서기장의 냉담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기 자신까지도 스스로 비방하는) 인물에 의해 과장적으로 표출된 수많은 조롱 조의 농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로마 교회의 부패 때문에 신앙심과 이탈리아가 파멸에 이르렀으며 (하늘이 무장해제당했다)고 비난한 그의 유명한 조소 띤 구절들을 그러한 경구들과 연관시키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산더미 같은 편견들은 이 모든 것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적 윤리의 대담성에 의해 야기된, 그렇지 않아도 이미 커다란 오해와 스캔들의 더미를 더 키워놓았다.  이렇게 해서 몇백 년의 세월이 흘러가자, 편견의 더미들은 층층이 싸이고 다져져서 피렌체 서기장의 종교적, 그리스도교적 양심은 그 밑에서 형체도 없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편견은 그 무게와 힘이 대단한 데다 더욱이 시간이 흐름 속에서 굳어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는 그 저자의 그리스도교 사상이 절정에 이른 것이라 보고 나의 경우는 인간적으로 고통당한 한 인생의 봉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참회 권유)이 그 경건하고도 서글픈 내용에 대해서조차, 평소에는  그의 도덕성과 신앙심을 옹호해 마지않던 가장 명석한 현대의 학자들까지도 그것을 번잡스런 농담 조의 이야기 정도로 치부해 오지 않았던가!
  마키아벨 리가 만년에 이르러 (그 위대한 인물)에 대해 썼던 존숭의 말들도, 그의 사신과 시구들에 담긴 불경함과 경멸조의 반사제주의적 태도를 잊게 만드는 데는 결코 충분치 못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신앙 원래의 순수성을 보존해 온 민족들에 대한 그의 특별한 애정도, (그리스도의 삶을 귀감으로) 그 뒤를 따른 사람들과 (성프란체스코의 발자취를 좇았던) 사제들과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찬) 병사들에 대한 그의 칭송도, 그 굳어진 편견들을 제거하는 데는 오랫동안 충분치 못했다.  어느 것도 충분한 것이 없었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주목한 극히 미묘한 측면들 역시 편견을 바로잡기에는 아마도 충분치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란 미묘한 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보다 가면을 보여 그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그들은 결코 그 밑에 있는 진면목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것으로도 충분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그리스도교적 본질)과, 그의 저작 어디에나 스며들어 있는, 내적 종교성에 기반한 양심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 다음과 같은 말들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신앙심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종류의 선을 기대할 수 있는 반면, 그것이 없는 곳에서는 그 반대의 모습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와 비슷한 경구들은 그의 글 속에서 많이 보이는데, 실제로 지난 세기에 신자들ㅢ 교화를 목적으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작에서 충실히 추출한 종교적 경구 선집 Massime religiose estratte frdelmente dalle opere di Niccolo Machiavelli)이란 책을 편찬한 사람이 있었다.  이 괴상한 선집은 현대의 몇몇 변명론자들의 글들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너무나 기세 좋게 안장 위로 뛰어오르다가 오히려 말 저편으로 나가덜어져 버리는 기수를 연상케 한다.  변명론자들이란 가장 무자비하게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 못지 않게 해로운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이 (아직까지 누구도 지나가지 않았던) 길을 택함으로써 방향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마키아벨리의 예언과 선량한 필리포 다 카사베키아가 (유대인들 또는 다른 민족의 후예들에게서나 봄직한 가장 위대한 예언자의 모습)을 서기장에게서 발견했노라며 농 반 진 반으로 썼던 말들을 되새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는 예언자였으나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였고, 자기 스스로가 한때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며 밀어넣었던 그 운명의 구렁텅이에 그 또한 빠져들었다.  물론 화형주에 매달린 것은 그의 초상과 책들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 화형주로부터 (사후에) 다시 솟아나,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를 무장시켜 그를 무적의 존재로 만들 그러한 무기를 손에 쥐고는 복수를 위해 되돌아올 운명이었던 것이다.
  
    제25장 (신이 내린 글)
  마키아벨리의 생애를 얘기해 나가면서 정작 그의 정치사상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기회가 없었다.  바꾸어 말해서, 이 책에서는 단지 그 수목에서 어떤 과일이 어떤 식으로 열렸는지를 보여주는 데 그쳤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정치사상적 변천은 좋든 싫든 많은 부분 바로 이러한 품성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었다.
  이는 이미 나에 앞서 다른 이들이 지적했던 점이었다.  사실 그의 글에 대해 피렌체의 대 산문 작가인 지노 카포니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진중한 듯하다가도 경멸 조로 돌아섬으로써 당시 칭송과 인기를 함께 누렸던 그의 문체, 그것이 지닌 비할 데 없는 대담성과 힘.(...)나의 생각으로는, 그의 교의가 드물지 않게 지고의 권위를 부여받는 것도 작가로부터 풍겨져 오는 바로 그러한 인상 덕분인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만일 그가 바로 그 교의들, 그리고 새로우면서도 예리하며 힘차면서도 매서운, 바로 그 놀라운 생각들을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궁정 라틴어로 호화롭게 치장하든가 혹은 질리도록 장황하지만 한 속어문 속에 용해시켜 버렸다면, 지금 그는 단지 몇몇 문학사 저작에서만 언급될 뿐인 그런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상상해 보라. (군주론)이 빈약한 필사본 전통만을 뒤로 남긴 채, 인쇄되기도 전에 유실되어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에라도 그렇게 되었다면, 아고스티노 니포의 그 악명높은 표절서 (통치술 De regnandi peritia)은 그 저자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이점속에서 어떤 부침을 겪게 되었을지 알 수 가 없다.  단지 사실만이, 혹은 적어도 사실이 문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떠들어대는 작금의 그 어리석은 비평가들은 이로부터 무언가라도 배워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레오파르디는 자신의 (수상록 Zibaldone)에서 문체란 설사 사실로부터 분리된다 해도 어떤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우리를 따끔하게 꾸짖지 않았던가 말이다.  다만 사실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면서, 마키아벨리의 문체가 귀감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산문을 같은 곳, 같은 시대, 같은 장르에 속하는 다른 어떤 작가들의 글과 비교해 보아도, 그것은 전혀 다른 소리가 난다.  훈련을 거의 받지 않은 귀에도 마키아벨리의 한 문장, 한 구절은 다른 수많은 작가들의 경우와 쉽사리 구별된다.  우리에게는 몇몇 학자들이 필체를 근거로 그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자필 문서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들로부터 나오는 소리는 무디어서 내가 말한 그 독특한 음색은 잘 식별되지가 않는다.  만일 그가 그 문서들을 단지 베꼈을 뿐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면, 이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병 관찰기 Descrizione della peste) (이 글의 저자는 로렌초 스트로치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 16장 주 15를 볼 것 - 옮긴이) 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래서 데 상티스는 (기교적이고 보카치오적인) 마키아벨리의 존재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거꾸로, (우리말 논고)처럼 그 자필 원고는 유실되고 아둔한 학자들은 저자의 신빙성을 의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서기장의 작품이 분명한 크고 작은 원고들도 있다. 나는 이러한 점을 이 책 다른 곳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즉 마키아벨리를 알아보는 데는 필적보다는 문체가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오직 아둔한 학자들만이 어떤 말, 어떤 구절이 그 위대한 작가의 것인지 혹은 그의 글을 베낀 뻔뻔스럽거나 멍청한 사람의 것인지를 구별치 못하는 법이다(그래서 결국(만드라골라)의 진본 원고를 찾아낸 것도 사실 다름 아닌 나였다).
  이후 (오직) 그만의 것인 그 언어와 그 문체에 대한 해부 작업이 뒤따른다. 접미사의 사용, 풍부한 액식 어법, (한 개의 형용사 또는 동사로 다른 두 개의 명사를 억지로 수식 또는 비배시키는 수사법을 말함.  이를테면 (흐느끼는 눈망울과 두근거리는 가슴)이라고 해야 될 것을 (흐느끼는 눈망울과 가슴)이라고 하는 것-옮긴이), 간결한 문장, 낱말 특히 동사의 배치 등을 통해 글의 속도가 빠른 이유가 탐색되어야 하고, 비문체와 양도 논법, 극히 자연스러운 어투, 대립적인 어휘 또는 대립적인 개념 간의 빈번한 대비, 자신의 (비극적) 본성에 잘 호응하는 용어와 문체상의 어떤 극적 박력성을 통해 그의 글이 지닌 힘의 비밀이 주의 깊게 관찰되어야만 한다.  또한 궁정식과 평시민식을 섞어놓고, 고상한 속어와 피렌체 관용 어법을 라틴식 어휘나 혹은 직접적으로 라틴어와 혼합해 놓은 그 혼용의 방식이 연구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하면 때로는 (일상의 옷)을 입었다가 또 때로는 궁중복으로 갈아입던 이 산 카쉬아노의 인물에 매우 쉽사리 접근할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설사 이러한 점들을 제대로 맞추어 인식하고 정리했다고 해도, 이 놀라운 말의 혼합물 속에는 여전히 우리를 비켜가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비교할 수도 흉내낼 수도 없지만 이 글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풍미랄까, 더 적절한 표현을 찾자면 어떤 시 정신 같은 것이다.
  한 근대 이탈리아 문학사가는 그를 시인이라 부르면서도, 시심이 과정되고 허풍스럽게 느껴진다는 이유로 그의 시를 혹평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를 평가하는 데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요소이다.  바로 그와 같이 정치가이자 역사가이며 동시에 정치, 역사 철학자인 인물의 저작 속에서, 특히 개인적인 편지들 속에서, 각별히 단테를 비롯하여 평소 암송하고 했던 라틴아와 속어 시인들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여기저기 인용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런 면에서는 정치가와 역사가만이 아닌 문인까지 통틀어 당시이 대작가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따르지 못한다.
  그에게 글쓰기의 스승이 되었던 사람은 누구보다도 단연 단테였고, 타키투스도 그러하였다.  아마 루크레티우스도 이에 일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비교적 최근에야 마키아벨 리가 그의 작품을 필사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그를 정신적으로 이끌어가는 어떤 위대한 품성이다.  그가 귀감으로 삼은 것들, 그의 글쓰기 실제에 담긴 비밀들을 다름아닌 그 자신 속에서, 평시민적 휴머니스트이자 산문 작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이었던 그의 정말 특이한 품성 속에서 찾아져야만 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지노 카포니의 말(앞서 인용했던 다른 말들에다 이를 다시 덧붙인다고 해서 전혀 부끄러울 일이 없다. 나는 이 말을 접하기 전에 이미 수없이 그와 똑같은 심정을 느꼈기 때문이다)에 뜻을 같이할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절묘한 행문을 보노라면, 아마도 다른 작가들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질시를 느낄 것이다.)  그처럼 평온하고 온건한, 이른바 (솔직담백한 지노)의 문체에 조금이라도 친숙한 사람들에게라면, 니콜로가 구사하는 어떤 동사, 어떤 부사가 적어도 뭔가 상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처럼 범상치 않은 글에서 마찬가지로 범상치 않은 표현이 어울리는 법이다.  
  프렌체스코 데 상티스 역시 니콜로의 글 속에서 (근대 산문의 예감) (이보다는 (반드시 근대적임이 틀림없는 그러한 산문에 대한 예감)이라고 말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같은 것을 보고 느꼈으며, 그리하여 한번은 그것을 가리켜 (신이 내린 글 divina prosa) 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까지 사람들은 오직 (신이 내린 시 divina poesia)에 대해서만, 그것도 최고의 시인들에 한해서만 말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마키아벨리 문서에 대한 간략한 논평
  나는 극히 최근에 다른 경로로 얻은 몇 명 미편집 문서들 외에, 마키아벨리 문서철의 잔존 문서들을 조사하였다('Le carte del Machiavelli," La Bibliofilia LXXI (1969)).  이 잔존 문서들은 오랫동안 리치 가문에 보존되어 왔는데, 이는 니콜로의 막내딸인 바르톨로메아(별칭 바치나)가 그 가문의 조반니란 사람과 혼인한 이후의 일이었다.  이 결혼으로 줄리아노가 태어났는데, 그는 자신의 위대한 외조부에 관련된 문서들을 모으고 정리하고 베끼는 데 전생애를 바쳤다.  그는 16세기 말에 니콜로의 친손들로부터 문서철에 남아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입수하였다.  추측건데, 유감스럽게도 마키아벨리의 작품 원고들은 이미 이때에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줄리아노 리치에 대해서는 다음이 참조된다.  G. Sapori, "Giuliano de' Ricci, ecc.," in Stu야 in onore di Armando Sapori, Milano, Istituto Editoriale Cisalpino, 1957, vol. 2, p. 1063 sgg.).
  문서철이 줄리아노에게로 넘어갔다고 추정하는 것은 결코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사실, 니콜로의 증손녀이자 그의 마지막 혈손인 이폴리타가 리치 가문의 또 다른 인물 피에르프란체스코와 혼인한 뒤 1613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의 외동달은 피렌체 서기장의 소유물이었던 물건들 모두를 세리스토리(혼인이 이루어졌던 곳)에다 옮겨놓았는데, 그 속에는 문서라고는 한 장도 들어 있지 않았다.  또한 줄리아노의 자필 노트에도 이 난파된 고문서호의 잔존물들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1820년대에 들어, 리치 가문의 마지막 유족들이(최근에 자손이 끊기고 말았다) 당시 여전히 토스카나 대공의 개인 도서관이었던 비블리오테카 팔라티나에다 자신들의 고문서철 일부를 팔았다.  이렇게 문서철이 분할된 이후, 그 나머지 전부를 누가 입수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1832년 비블리오테카 팔라티나가 분할된 나머지 모두를 중간 구매자 혹은 그러한 사람들 중 한 명으로부터 총액 순금화 100제키노에 샀다는 사실이다.  당시 이 구매를 제안한 사람은 빈틈이 없는 데다 운도 좋았던 서적상이자 도서관장이었던 주제페 몰리니였다.  그가 원래의 문서철을 훼손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어쨌든 이렇게 두 번에 걸친 구입으로 얻은 모든 자료들은 이후 그의 주관 아래 정리되고 분류되었다.  현재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마키아벨리 문서 Carte del Machiavelli)란 바로 이 자료들을 피렌체 고문서관에서 나온 다른 자료들과 합친 것이다.
  문서들이 그렇게 훼손되고 흩어지기 전에 그 문고가 어떤 식으로 분류되어 있었는자, 그리고 (이 쪽이 더 중요한데) 그 내용상의 다른 중요한 점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 것은 내가 원래는 하나였던 두 개의 문서철을 접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을 때였다.  윤택했던 시절, 대공 가문에서 구매해 놓았던 것이 이제 흘러나오게 된 것이었다.  약 30년 전 이 문서철 중의 하나가 부침이 심한 골동품 시장의 파도 위로 다시 떠올랐을 때, 나는 숙부인 파에로 지노리콘티에게 그것을 구입하여 필사본 콜렉션에 넣도록 권유하였고, 이는 그 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나도 무언가 관련이 있었던 한 약속 덕분에 피렌체 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나는 또한 운 좋게도 당시 바르갈리 페트루치 백작 가의 도서관에 보관중이던 다른 문서철 역시 국립도서관으로 보낼 수가 있었다.  당시 파스콸레 빌라니는 그의 저작을 쓰는 데 이 문서들을 이용, 연구하는 편의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그 내용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자내지는 못하였다.
  이 두 개의 귀중한 고문서 유물 중에서 첫 번째 것, 즉 전 지노리 콘티 문고는 불행히도 잘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서 국립도서관에 오기 전에 훼손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그 중 50통의 편지가 세르조 베르텔리의 편집으로 간행되었음은 이미 dkb서 말한 대로이다.  반면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던(책이 제본된 형태가 줄리아노 데 리치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는 좀더 (신중히) 받아들여야 할 말이다) 두 번째 문고, 즉 전 바르갈리페트루치 문고는 새로운 곳에 보관된 1956년 이후,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나를 제외한 현대의 마키아벨리 연구자들에 의해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이 두 번째 문고는, 전 지노리 콘티 문서철처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력시 전 문서철이다), 그리고 아마도 몰리니에 의해 훼손된 그 문서철처럼, 가죽으로 보강된 양피지에 싸여 있었다.  책등에는 (Lettere/del/Machiavelli)라고 씌여 있었고, 고퐁의 글씨체로 31이라는 표시가 적혀 있었다.  현재는 피렘체 국립도서관에 (Nuovi acquisti, 1004)라는 서명으로 보관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문서철 속에는 다른 편지와 문서들, 그리고 첫 (십년기)의 모조폼에 적혀 있는 (미우 중대한 오류들)에 대한 주석 등을 제쳐놓고도, 피렌체 서기장의 편지 75통이 오롯이 들어 있다.  특히 여기에는 1506년 3월 14일에 아고스티노 베스푸치가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대단히 귀중한 편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앞서 언급한 나의 글 "La carte del Machiavelli"를 통해 간략한 문서 목록을 제사하고 그 내용에 대한 몇몇 연구 결과를 간행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이러한 문서 목록을 오랬동안 피렌체 국립도서관에서 같이 보존되어 온 리치 가의 다른 마키아벨리 문서 목록과 합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어쨌든 이로부터 어떤 문서학적 소결론을 끌어내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다음과 같은 것이 그 중 하나이다.  니콜로가 죽은 후, 그 상속자들인 베르나르도, 로도비코, 피에로, 귀도의 문서들은 문서철 속에 뒤섞여 있었다.  사실, 그 속에서 우리는 아들들이 니콜로에게 보낸 편지뿐만 아니라 그나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보낸 편지들도 끼어 있음을 본다.  이를테면, 훨씬 뒤에 루카르도의 교구 신부가 죽으면서 귀도에게 보낸 한 놀라운 편지가 그것인데, 여기서 그는 생전에 귀도의 좋은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했던 모든 희망들을 적어놓았다.
  어쨌거나, 그리고 혹시 다른 어떤 중요 사항들에 대해 알고 싶으면, 독자들은 앞서 말한 나의 글로 되돌아갈 수 있다.  지금의 이 짤막한 논평은 그 글을 간략히 요약한 것으로, 나의 의도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 글을 다시 돌아다보게 하는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흩어진 마키아벨리 문서에 원형이 통일성을 부여해서 우리를 인도해 줄 그 간략한 문서 목록에 유의해 주기 바란다.
  
============================== 07
    부록-마키아벨리의 (실패한 회심)을 다시 생각하며
  나로서는 한편으로 (무언가 석연치 않은 냄새를 풍기는)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고,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무언은 곧 동조라는 옛 속담이 생각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동조하는 것으로 보이도록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내 입장을 다시 밝힌다는 목적으로, 이 책 3판의 경우 23장을 마무리하는 긴 주(본 역서에서는 주 25-옮긴이)를 더 늘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4판에서 덧붙여놓았으나 이제는 낡은 것이 되어버린 주석에 그냥 만족할 수도 없는 데다가, 노래를 이렇게 마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썩 내키지는 않지만 여기 이 자리를 빌려 약간의 말을 보태고자 한다.
  나로서는, (마키아벨리의 '실패한 회심' La 'mancata conversione' del Machiavelli)이라는 제목의,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최근의 논문에서 내가 이 문제에 관해 쓴 내용을 일부는 풀어쓰고 일부는 그대로 옮기는 편이 수고와 성가심을 더는(유감스럽게도 독자에게는 성가시겠지만) 길이라 생각한다.  위의 제목에서 작은 따옴표 안에 있는 기괴한 표현은 마키아벨리 탄생 500주년의 분위기 속에서, 피에로 마키아벨 리가 외삼촌인 프란체스코 넬리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린 짤막한 편지가 사실은 위조된 것이라는 야단스러운 풍문에 마치 탐욕스런 콘도르처럼 달려들었던 신문쟁이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도는 그래도 낫다.  부수가 많은 일간 신문이나 잡지들의 경우 더한 일도 일어난다.  정작 문제는 그 경건한 편지에 대해 베르텔 리가 편집한 미키아벨리 저작집(Opp B.)같이 기념비적 면모를 가진 판본조차도 여전히 엉둥한 소리를 담고 있다는 데 있다.  베르켈리는 마키아벨리의 서건들을 수록하고 있는 귄의 텍스트 해설 부분에서, 거의 반이나 되는 지면을 이 편지의 진위성이라는, 전혀 그곳에서 다룰 필요가 없는 주제에 할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여전히 문제의 편지가 위조라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을 분 아니라, 경건한 주교좌 참사회원이며 학식 있고 고결한 성품의 학자이자 로렌초 도서관 관장인 안젤로 마리아 반디니에게도 이 문제와 관련하여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다.  나로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또 어디서부터, 즉 누구에 의해서 우리의 연구 상황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를 알 수가 없다.  성급함은 앞서고 근거는 미약한 이러한 주장의 경솔함이라니!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경솔함을 넘어서서 어리석기까지 한 것이다.  나는 관련 사항을 명확히하기 위해, 대작이긴 하지만 실수도 많은(cfr. M Martelli, "Memento ecc." cit.)  이 마키아벨리 서간집에 텍스트와 함께 수록해 놓은 베르텔리의 해설에 대하여 내가 앞서 언급한 논문에서 지적한 내용을 일부러 풀어쓰지 않고 원문 그대로 제시하고자 한다.
  앞서 (492쪽) 국립도서관 소장 문서의 하단에 적혀 있는 날짜 문제를 지적한 바 있던(왜 MDXXVII(1527년)이 아니고 MDXXXVII(1537년)으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것.  하지만 바라건대 문서가 설사 이론의 여지가 없는 원본이라 할지라도 날짜 기입에서 (X) (10)가 더 들어갔거나 덜 들어간 경우를 그 역시 무수히 볼 수 있었기를!)  베르텔리는, 편지를 처음으로 간행한 반디니가 위조자에 의해 범해진 (실수를 알차채고는) 날짜의 연도를 MDXXVII(1527년)으로 고쳐놓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곧 이어(494쪽)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므로 반디니 자신이야말로 그 위조의 장본인이가나, 혹은 적어도 그것을 부추긴 사람이라고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간단히 말해서, 반디니는 자료를 위조했거나 위조하게 만든 사람이며 날짜를 위조했거나 위조하게 만든 인물로서, 뒤에 그 스스로가 위조한 문서를 간행하면서 그것을 수정한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그래서 말인데, 반디니가 결백하다는 점을 밝히는 좋은 방법은 바로 베르텔리 자신이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일 듯하다...
  지금 막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피에로가 쓴 문제의 편지가 바로 혈족인 넬리의 문서고에서 나왔다는 것을 안다면, 모조본이라 주장되는 피렌체 국립도서관 소장본은 원본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리고 또한 반디니에게 정확한 내용이 담긴 사본을 전해 주고 싶었던 조반 바티스타 넬리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바로 여기에 모조본을 만드는 고전적인 동기가 있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이 위조본의 문제에 관해서라면 그냥 여기서 펜을 놓을 수도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베르텔 리가 보여준 익살에 대해서는 정말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유감스럽게도 긴 얘기가 되지 않을까 우려되지만.)  그는 학술 잡지 (정치사상2 pensiero politico)에 수록된 짤막한 글에서, 그의 방식에 따라 무언가 대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세상에 참!) 것에만 대답하면서도, 아는 체하는 어조로 모조본의 가설은(다음의 말을 한번 들어보시라!) 문제의 편지에 담긴 필체가(만약 그것이 진품이라면 아직 소년의 손으로 씌어졌을 것이다) 피에포의 자필(이미 어른이 된 후의)이기 때문에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도대체 모조본이라는 게 언제 있었단 말인가라고.
  그러나 보라!  나는 모조본 역시 완벽한 필체 위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굳이 따로 배우지 않고도 이런 유의 연구로 백발이 다 된 사람이다.  이 귀중한 사실을 더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옛 연애 사건들로 다시 돌아가거나 고문서학에 대한 새 논문을 쓸 용의까지도 있다.
  하지만 일단은 그러한 시도를 중지하고 마키아벨리의 (실패한 회심)으로 돌아가보자.  비록 내용에 인용부호까지는 달지 않았지만(그래도 나의 글이다) 앞서 인용한 그 논문의 관련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하자.  우선 이렇게 todr가해 보자.  피렌체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그토록 소동의 대상이 되었던 문서가 정말로 위조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 문서의 내용까지도 모두 가짜라고 말이다.  물론 나라고 해서 문서 그 자체이든 그 내용이든 무조건 절대적으로 믿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이러한 가정을 비록 인정하지는 못한다해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  그 편지가 완전히 위조품이라고?  좋다.  그래서?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임종시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일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줄리아노 데리치로부터 (그는 아내와 자녀들의 품에 안겨 침대에 누운 채 그리스도교인답게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다.  임종을 지켜보았던 자녀들 중에는 다름아닌 줄이아노 자신의 어머니도 끼어 있었다.  그것이 진짜든 가짜든 문제의 편지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나로서는 마키아벨리나 또는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좋으니 그가 경건하게 죽었다는 것을 확인해 줄 어떠한 문서나 증언도 전해지지 않는 이러한 경우, 과연 그 누가 이 사람이 경건하게 죽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추론해 낼 수가 있겠는지(너무나 이상한 (침묵의 논증)이 아닌가!)  바로 그것이 알고 싶다.  유감이지만 학문의 영역에서도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생겨난다.  특히 당파심이나 감정, 혹은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 욕심이 작용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아직은 나 자신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우리는 마키아벨리 문제로 인해 바로 그러한 지경에 이르렀다.  앞서의 간략히 논증된 놀라운 (발견)에 근거하여, 그의 (실패한 회심)이 주장되었다.  그래, 좋다.  나는 피렌체 서기장의 신앙심이란 문제를 그 명암과 함께 역시 최근에 긴 논문에서 다룬 바 있기도 하거니와, 단지 합리적 논증으로 비합리적 주장을 바로잡기를 원할 분인 여기서 이 문제를 다시 꺼내고 싶지도 않다.  나로서는 정치에 대한 논구로 유명한 한 인물을 그의 사람됨과 구별하고, 나아가서는 그 사람됨 속에서도 냉소적이며 뻔뻔스럽기까지 한 데가 있는, 그리하여 (심지어는 그 자신까지도 비방한) (마키아)를 선량하고 열정적이며 때로는 솔직하기까지 한 마키아벨리와 구별함으로써, 나에게는 이미 명확한 것처럼 보이는 사실을 재차 주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마키아벨리는 분명히 알데리시오식의 유들유들한 그리스도교인은 아니었다.  그는 말하자면 르네상스 시대의 한 그리스도교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아름다운 산 조반니의 샘에서뿐만 아니라 휴머니즘이라는 이교적 샘에서도 동시에 침례를 받았던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그 시대, 그의 나라, 그의 다른 친구들과 다르지 않은 그리스도교인이었다.  그는 그 자신만큼이나 신랄하고 담대하게 당시의 교회에 맞서 진실을 얘기하고자 했던 귀차르디니나 베토리 같은 인물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단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들에 비해 그가 더 대담하고 더 방종한 면이 있었으며 능력도 더 뛰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그의 정신에 내재된 더 우월한 종교성과 그의 열정적인 기질, 돌연히 모습을 드러내고 갑작스레 모습을 바꾸는 그러한 종교성과 기질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그러한 유의 그리스도교인이었을 뿐, 결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마무래해 보자.  나는 그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을 전적으로 부도덕하기 쉬운 정치라는 지식의 명인쯤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설사 마케아벨 리가 이 세상의 왕국에 대해 쓰지 않고 그것만이 그리스도의 왕국인 정신의 세계에 반하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손 치더라도, 이는 결코 놀라운 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실패한 회심)이라고?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회심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경건하면서도 서글픈 느낌을 주는 (참회 귄유)를 쓴 것으로부터?  지금까지 가장 큰 오해를 받아왔던 인물인 만큼, 이 글을 연구하지 않고 그것을 읽어보지도 않는다면 그럴수록 그를 이해하기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혹은 무신론으로부터 회심한다는 말인가?  한 편지에서 (이제 나에게는 신 외에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고 썼던 바로 그가 말인가?
  
    역자 해제-리돌피의 마키아벨리
  이 책의 자자 로베르토 리돌피 Roberto Ridolfi는 1899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마키아벨리와 동향인 셈이다.  리돌피 가문은 마키아벨리 시대에도 종종 정치 무대에 등장하는 피렌체의 유서 깊은 명문가이다.  15세기 후반 피렌체를 통치했던 대 로렌초가 그의 직계 선조이며, 이탈리아 통일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시대에 상원의원을 지내고 (피렌체 공화국의 역사 Storia della Repubblica di Firenze) (1875)를 쓴 지노 카포니 후작이 그의 아저씨가 된다.  사실 리돌피 자신도 후작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소년 시절 곤충학자가 되고 싶어했으나, 곧 생각을 바꾸어 고문서학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는 서지학, 문헌학, 그리고 역사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수많은 중요 문서들을 발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 업적을 내놓았다.  그 중에서도 각밸히 15-6세기 이탈리아 문학과 사상이 그의 전문 분야이다.  그는 마르조토 문예상(1954)을 필두로 이탈리아 각지에서 수많은 상을 받았고, 피사 대학(1960)과 옥스퍼스 대학(1961)에서 명예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는 한때 피렌체 대학에서 서지, 서적학을 가르쳤고(1952-57), 1957년에는 동 대학에 고인쇄술학 연구소를 설립하고 그 소장 직에 취임하였다.  그는 또 역사, 인문 분야 학술 잡지들의 공동 편집자로도 활약하였는데, 특히 1944년 이래 (애서: 책의 역사와 서지학에 관한 잡지 La Biblifilia: Rivista di Storia del Libro e di Bibliografia) 편집자를 역임하면서, 이를 통해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고, 잠시 (벨파고르 Belfagor)의 공동 편집자를 맡기도 하였다(1962-63).  아울러 그는 1960년대에서 1985년에 이르는 25년 간 저명 일간지 (일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문예란 고정 기고자였다.  리돌피는 특히 마키아벨리, 귀차르디니, 사보나롤라 등에 관한 탁월한 전기들을 간행함으로써, 르네상스기 전기 분야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1991년 12월 자신의 만년을 맡긴 은거지 라 바론타에서 세상을 떠났다.
  리돌피는 수많은 글과 저서들을 남겼는데, 이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15,6세기 피렌체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연구이다.  그는 사보나롤라가 임종시의 대 로렌초를 만난 사건을 다룬 논문(1928)을 시작으로 관련 문서들을 새로이 발굴하면서 사보나롤라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이는 결국 1952년의 (사보나롤라 평전)으로 마무리된다.  그는 이에 앞서 도나토 잔노티에 대한 작막한 전기(1942)도 썼다.  마키아벨리와 귀차르디니에 대한 역구 역시 거의 같은 시기에 진행되는데, 1931년에는 귀차르디니 가의 고문서에 대한 연구서를, 그리고 1936년에는 마키아벨 리가 피렌체사를 쓰는 대가로 메디치 가에게서 받은 보수가 얼마였는지를 다룬 논문으로 그 문을 연다.  그리고는 회심의 저작 (마키아벨리 평전)(1954)과 (뤼차르디니 평전)(1960)을 잇따라 내놓는다.  그 외에도 마키아벨리의 희극 (만드라골라)의 텍스트 진본과 귀차르디니가 지은 (피렌체사 Cose fiorentine)의 발견과 편집, 그리고 그 유명한 마키아벨리의 (기리비치) 연대 비정에 관한 연구 등, 두 사상가에 대한 해석을 바꿔놓은 탁월한 업적들이 있다.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글은 주로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는 회고적 성격의 것들이다.  그는 57세가 되던 해에 자신의 학문 역정을 되돌아 보는 책을 썼으며, 이후 1983년 마치 삶의 결말을 스스로 예감하는 듯한 제목의 (라 바론타여 안녕)으로 오랜 문필 생활을 실질적으로 끝맺었다.  이 이야기체의 회고담들은 리돌피 개인의 인생 역정을 여러 측면에서 증언해 줄 뿐 아니라, 그가 살았던 20세기 이탈리아의 지성사 자체를 조명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91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를 기리는 학술 회의들이 열렸다.  그가 40여 년간을 책임 편집자로 일했던 (애서) 잡지는 한 호를 할애하여 그를 기념하는 특집호로 꾸몄다.  그 결과물들로서, 알레싼드로 올스키, 뤼지 발사모, 에우제니오 가렝, 조반니 스파돌리니, 인드로몬타넬 리가 서지학, 역사학, 문체, 인물 등의 측면에서 생전의 리돌피를 그린 (로베르토 리돌피)와 프란체스코 아도르노, 비토레 브랑카, 젠나로 사쏘 등에 의한 역시 비슷한 성격의 (로베르토 리돌피를 위하여)가 1992년에 함께 간행되었다.  그리고 1996년 올스키 출판사 주최로 열린 리돌피 심포지엄의 결과로 이듬해 (로베르토 리돌피)라는 기념 연구서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크로체는 어느 글에서 그 누구도 이른바 (마키아벨리의 문제 questione del Machiavelli)를 풀기는 힘들 것이라는 비관 조의 예언을 하였다.  그리고 이미 이보다 앞서 영국의 문필가 머콜리는 (마키아벨리의 수수께끼 enigma of Machiavelli)라는 말로 그를 이해하려 할 때 부딪히는 난점을 표현한 바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역사적 이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 말에 대체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생전에 이미 공화주의자인지 아닌지, 반메디치파인지 아닌지에 대한 시비가 구구했을 뿐 아니라, 그가 죽은 이후 4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인물과 사상과 행적들에 대한 이러저러한 논쟁들이 결말지어지지 않은 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리돌피의 (마키아벨리 평전)은 전기라는 형식을 통하여 바로 이러한 (문제) 혹은 (수수께끼)에 답하고자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이외이다.  리돌피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정치가이자 예술가)이며 무엇보다도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가 정치가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겠지만, 예술가라니?  당시의 예술에 관한 얘기라고는 자신의 전 저작을 통틀어서도 거의 찾을 수 없는 그가?  그리고 시인이라니?  물론 그가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이러저러한 시를 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정도인가?  비록 마키아벨리 자신은 아리오스토가 시인을 얘기하면서 자신을 빠뜨렸다고 불평하고 있지만, 후세의 많은 학자들은 결코 그를 진정한 시인의 반열에 올리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돌피는 그를 시인이라 부른다.  리돌피에게 그가 시인인 진정한 이유는 그의 품성과 행적 속에서 냉소적이지만 동시에 예민하고 열정적인 (시인의 정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는 충동적 열정과 함께 모슨되면서도 복잡다단한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현실 정치라는 냉혹한 이익의 각축을 (과학적으로) 관찰하는 데 흥미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언제나 에술가와 시인으 즉흥성과 열정과 이상 속에 녹여내는 묘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리돌피는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성품이야말로 그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 요소라고 생각한다.  마키아벨리의 저작에서 우리는 인간과 세상사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도덕적 판단에 얽매이지 않은 채, 논리적 엄격성을 유지하면서 명쾌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남다른 능력을 본다.  동시에 우리는 그의 행동에서 겉으로는 변덕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한결같고, 심술궂고 가혹하며 신랄하고 냉소적이면서도 부드럽고 관대한 이중적 면모와, 미덕과 안덕의 측면들을 과장해 보이려는 (괴짜)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론적 측면에서는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우고 관찰과 논증을 중시하는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행동에서는 약간은 즉흥적이고 진중함이 부족한 피렌체 사람의 기질을 기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리돌피의 마키아베리는 그래서 (만드라골라 La Mandragola)를 썼으면서도 동시에 (참회 권유 Esortazione alla penitenza)를 쓴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리돌피는 마키아벨리의 생각에 영향을 준 요인으로서 이러한 피렌체의 기질 외에 당시의 시대 상황을 든다.  마키아벨리의 기질과 성품이 그가 태어난 곳으로부터 습득한 좀더 선천적인 요소라면, 그의 인생 편력에서 부딪혔던 다양한 사건들은 그에서 세상사의 (원리)를 하나하나 가르쳐준 후천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까.  리돌피는 유년기로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 (마키아벨리의 경험들이 (...)  스스로 지성의 성숙에 미친 영향)을 추적하며 글을 써나간다.  이를테면 1502년경 체사레 보르자의 책략을 지켜본 그는 이러한 편지를 올린다.  (여러 정무위원님께서는 이러한 계락과 기민성이 최고의 호기와 맞아떨어진 상황을 눈여겨 보셔야 할 것입니다.)  이는 언제나 논쟁과 숙고만 거듭하며 정작 결단은 미루기 일쑤인 피렌체 정부에 던지는 교훈이었다.  이 사건의 교훈은 결국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피렌체 정부의 구조적 취약성을 발렌티노의 힘의 근원에 비교하여 이론적으로 그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데까지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현대 정치학에서는 마키아벨리를 가리켜 세상사의 외양과 본질, 가장과 본심이라는 이중적 측면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그것이 정치의 본질 중 하나라는 점을 예리하게 파악한 인물로 평가한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리돌피의 묘사를 따라가노라면, 그의 이러한 감각이 피렌체적(나아가서는 이탈리아적) 기질 및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물론 단순한 기질론과 상황론만으로 그의 정치사사을 설명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어쨌든 리돌피의 말마따나 한 사람의 인간과 인물됨은 도외시한 채 단지 저작 속의 구절들만을 분석하고 개념화하는 것만으로는 그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단지 시대 상황의 (소산)이라고만 기게적으로 규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 사상이 살아 숨쉬고 있었던 실제적 맥락은 도외시한 채 텍스트 분석에만 매달리는 것도 역시 문제이다.  무릇 인물됨이 사상을 싸안는 법이며, 사상은 인물 속에 녹아 있는 법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리돌피가 전기를 써내려간 방식이었다.  마키아벨리에 관한 사실을 충분히 전하면서도(그리고 여전히 톰마시니를 답습하고 있는 수많은 오류들을 고쳐 나가면서) 그의 인간적 면모를 문학적으로, 나아가서는 시적으로 그려보는 것.  마키아벨리의 정치 관념들을 그의 기질과 함께 시대 속에서 성숙해 간 (인간)을 통해 보이고자 하는 것.  그리하여 저자는 그 스스로가 오랫동안 읽고 싶었던 책, 즉 (마키아벨리의 생애에 대한 평이하고도 인간적인 서술로서 그 자신의 행동과 말을 통해 그를 그리고자 한 그러한 책)을 쓰려고 한 것이다.
  리돌피의 이러한 마키아벨리 상이 독자에게는 일견 주관적 인상과 상상력의 소산인 듯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을 면밀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저자가 얼마나 실증적인 학자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는 한 사람의 인물과 행적을 밝히는 데에 문헌학적 사실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그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가 쓴 한 줄 한 줄의 묘사들은 종종 깊고도 넓은 서지학, 문헌학, 역사학이 지식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특히 본문에 대한 주석을 따라가 본 독자들은 이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최종판인 7판을 기준으로 보면, 본문이 약 400쪽인 데 비해 주가 무려 200쪽 가까이나 된다.  더욱이 주는 활자가 본문보다 훨씬 작으므로 실제 글자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전문적인 데 관심이 없는 독자들이라면 이 주를 굳이 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를 둘러산 세세한 문제들을 알고자 하는 독자들은 이 주를 길잡이로 삼아 단시간 내에 거의 모든 주요 논쟁에 입문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를 시인이라고 주장하는 책치고는 예기치 않은 일이 아닌가.  다소 현학적인 부분들이 없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미로같이 얽힌 다양한 논쟁의 실마리들을 따라가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마키아벨리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몇 가지 논쟁들을 리돌피의 주장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는 데 그치고자 한다.
  마키아벨리의 초년기를 얘기할 때, 맨 먼저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니콜로의 아버지 베르나르도의 출생에 관한 논쟁이다.  문제의 발단은 채레타니가 자신의 (비망록 Ricordi)에서 니콜로를 가리켜 (마키아벨리가의 한 사생아의 아들)이라고 적어놓은 데 있다.  19세기에 들어 이러한 주장을 증폴시킨 인물은 톰마시니였다.  서기보였던 부오나코르시가 1509년 12월 28일자로 마키아베리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가 (어쩌고 저쩌고 한 위인을 애비로 두었기 때문에) 서기장 직에 부적합하다는 진정서가 접수되었다는 전언이 나온다.  톰마시니는 이 (어쩌고저쩌고)란 말이 곧 베르나르도가 사생아였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틀 후세의 학자들이 이어받았다.  최근에 영어로 쓴 세바스티안 데 그라치아의 전기 (지옥의 마키아벨리)가 전거를 밝히지 않고 이 주장을 반복하고 있으며, 김영국의 (마키아벨리와 군주론) 역시 이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나온 대부분의 연구서들은 더 이상 이러한 주장을 명시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리돌피는 베르나르도의 사생아 설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이 말은 곤팔로니에레 소데리니의 (아첨꾼)(정적들은 마키아베리를 그렇게 불렀다)에 대한 미움에서 비롯된 악담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부오나코르시가 전한 (어쩌고저쩌고)란 말은 베르나르도가 사생아임을 뜻한 것이 아니라 그가 (연체 채무자 명부)에 올라 있었다는 의미일 뿐이라는 것이다.  당시 피렌체에는 국가에 진 빚을 갚지 못해 이 명부에 오른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고, 더욱이 부오나코르시의 편지에는 다른 동료 몇 사람도 마키아벨리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보다, 이 (어쩌고저쩌고)를 사생아 설로 해석한 톰마시니의 주장은 억측에 불과하다는 것이 리돌피의 입장이다.
  관련 사실들을 검토해 볼 때, 톰마시니의 근거는 희박해 보인다.  물론 체레타니의 말이 단지 악담에 불과하다는 리돌피의 주장 자체는 그냥 심증에 가깝다.  데 그라치아의 말처럼 니콜로의 할아버지가 독신이었으므로 베르나르도가 사생아일 수 밖에 없다는 주장 역시 근거를 대기가 힘든 얘기이다.  아마 피렌체에서 마키아벨리 가문이 비교적 괜찮은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도 가게가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던 사실로부터 이러한 추측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도 그러하듯이, 한 가문 안에서도 많은 소가계들이 빈한한 생활을 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베르나르도가 사생아였다는 주장은 이제 더 이상 지속되기가 어렵다.  사실 관계가 완전히 명증하지는 않지만, 특히 톰마시니의 근거가 무너진 이상, 체레타니의 말만으로 베르나르도를 사생아라 구ㅠ정하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  왜냐하면, 부시니나 조비오의 예에서 보듯이,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에서 정치 이념이나 친소 관계에 따라 사실에 반하는 말을 하는 것이 결코 드문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화국 봉직시 마키아벨리는 제2서기장 secondo cancelliere이라는 직책으로 업무를 관장하고 사행에 나갔는데, 그의 이러한 직책이 성격과 외교 사절로서의 위치 역시 오랫동안 논쟁 거리였다.  당시 피렌체에는 두 개의 서기국이 있었는데, 그 중 제1서기국의 장을 제1서기장, 제2서기국의 장을 제2서기장이라 불렀다.  이들은 모두 최고 행정 기구였던 정무위원회 Signoria를 보좌하여 국정에 필요한 문서를 고나장하는 기관들이었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 두 기관이 업무를 어떻게 분담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지 못했다.  리돌피에 따르면, 원래 제1서기국은 대회 관계와 외교 서신을, 제2서기국은 국내 관계와 전쟁에 관한 문서를 다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양 기관의 업무가 중첩되고 심지어는 뒤바뀌기까지도 하였다.  특히 10인위원회 Dieci의 사무는 종종 제2서긱구의 일과 합쳐졌으며, 정무위원회의 사무 역시 제1서기국이 함께 보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10인위원회와 정무위원회의 일도 중복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마키아벨리가 제2서기장이면서 동시에 10인위원회 서기장을 겸하고 때로는 정무위원회 서기장 직까지 겸임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통상 제1서기장이 제2서기장에 비해 훨씬 더 권위 있는 자리였지만,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예리한 관찰력과 판단력 덕분에 피렌체의 역사를 통틀어 오직 그만이 (피렌체의 서기장 Segretario fiorentino)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기장은 업무의 성격상, 그리고 경비 절감의 목적 때문에, 종종 외교 사절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경우, 정식 대사를 뜻하는 (ambasciatore) 혹은 (oratore)란 말 대신 그냥 대리인의 지위를 의미하는 (mandatario)란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종래 학자들은 마키아벨리를 대사로 오인하곤 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서기직이었으므로 처음부터 대사가 될 신분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사절로서의 마키아벨리의 위치에 관해 학자들간에 이견이 생겨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주제페 토파넹은 마키아벨 리가 대사가 아닌 보좌직이었다는 이유로 그의 일이 (극히 하찮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리돌피에 따르면, 이는 결코 정확한 말이 못 된다.  마키아벨 리가 맡은 직책은 대사의 직위에 비해 (하찮은 것)이었지 모르지만, 그가 실제로 수행한 일들을 그렇게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떨까?  마키아벨리는 비록 정식 대사는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대사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말이다.
  리돌피의 업적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기리비치 Ghiribizzi)의 새로운 연대 비정이다.  (기리비치)란 마키아벨리가 소데리니에게 가벼운 잡담 조로 써 보낸 초고 형식의 편지를 가리킨다.  리돌피가 이에 대한 새로운 연대 비정을 하기 전까지 모든 마키아벨리 학자들은 그 작성 시기를 1512년 겨울에서 1513년 사이, 특히 피에르 소데리니가 라구사에 망명해 있던 1513년 정월로 생각해 왔다.  이는 줄리아노 데 리치의 사본 속에 적힌 (Ghiribizzi scritti in Raugia al Soderini)라는 제목에 의거한 것이었다.  톰마시니가 별 근거도 없이 이 사본의 신빙성을 부인하기 전에는, 모든 마키아벨리 판본들이 바로 이 제목 아래 그것을 수록하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말 스위스의 마키아벨리 학자인 장-자크 마르샹이 카포니 필사본 속에서 그 자필 초고를 발견하여 리돌피에게 알려주었다.  리돌피는 필적학자 길리에리와 같이 새로운 판본으로 엮으려 하던 중,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길리에리의 감정으로는 그것이 1512-13년이 아니라 1505-6년 사이에 나타나던 필적이라는 것이다.  문헌학에서 거버-길리에리로 이어지는 필적 감정은 상당한 신뢰성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리돌피로서는 이러한 결과가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원점에서 다시 텍스트를 검토한 결과, 우르비노 공 귀도발도의 행적을 근거로 이 편지가 그가 죽은 1508년 이전에 씌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더욱이 이전까지 (라구사에서)라고 새겼던 (in Raugia)란 말이 사실은 (페루자에서)라고 새겨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 나타나는 마키아벨리의 당혹감과 비통한 분위기는 종래의 생각과는 달리 그가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즉 1512년)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1506년 9월 교황 줄리오 2세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간교한 폭군 잠파올로 발리오니가 통치하던 페루자로 진격하여 결국은 무혈 입성에 성공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은 당시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자신의 예측과는 달리, 세상사에서 비합리성이 합리성을 누르고 승리하는 모습에 분노가 마키아벨 리가 다양한 처세 방식의 성공과 실패를 비르투와 포르투나의 상호 관계를 통해 성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발견이 있은 지 몇 달 뒤, 마리오 마르텔리는 조반 바티스타 소데리니가 1506년 9월 12일자로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편지 한통을 새로이 찾아냈는데, 사실 (기리비치)는 바로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모든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기리비치)는 마키아벨 리가 피에로 소데리니가 아닌 그의 조카 조반 바티스타 소데리니에게 1506년 9월 13일에서 21일 사이에 쓴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되기에 이르렀다.
  (기리비치)의 작성 시기가 1512년 겨울-1513년에서 1506년 9월로 6년 이상 앞당겨짐으로써, 마키아벨리에 대한 전기의 내용은 물론, 그의 사상적 발전 과정에 대한 기존의 학설들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세상사에서 (왜 그렇게 다양한 처세 방식들이 때로는 똑같이 성공하고 때로는 똑같이 실패하게 되는지)를 숙고할 때, 비르투와 포르투나 사이의 균형을 깨뜨리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성격이라고 본 마키아벨리 정치사상의 핵심 개념이 (군주론) 훨씬 전에 이미 그 모습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리돌피는 이러한 일련의 발견과 해석을 가리켜 마키아벨리 연구사에서 (100여 년 만에 나온 대발견)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데서 가장 오랜, 그리고 최대의 논쟁 거리는 아마도 그가 공화주의자였는지 아닌지(혹은 군주론자였는지)의 문제가 될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친메디치파였는지 또는 그것을 가장한 반메디치파였는지와 함께, 그가 과연 기회주의자로 봐야 하는지의 문제까지도 부가된다.  사실 이는 마키아벨리의 (문제) 중 하나이다.  이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게 된 것은 우선 마키아벨리 자신의 행적에 모호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고백했듯이, (자유를 너무나도 사랑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유를 빼앗아간 메디치 가를 위해 봉직하였다.  그는 보온델몬티나 알라만니 같은 골수 공화주의자를 친구로 가지고 있었으나, 동시에 사보나롤라 지지의 읍도파를 비롯한 피렌체의 많은 시민들에 의해 메디치파 내지는 기회주의자로 간주되었다.
  리돌피는 마키아벨리가 마음으로는 분명 공화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그는 왜 마지막까지 메디치 정부를 위해 그토록 진력했던가?  리돌피의 대답은 이러하다.  즉 마키아벨리는 스스로를 펜과 재능으로 국가에 봉사하는 문관이자 파당에 관계 없는 국가의 충복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메디치 새정부에 아첨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메디치 가를 마냥 경멸의 눈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얼핏 그 자체가 모호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마키아벨리라는 한 인물을 놓고 볼 때는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정치 이념에 대한 내 견해를 좀더 명시적으로 밝히자면 이러하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를 사랑하는 것만큼 공화주의를 애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이념이 이탈리아 전체나 다른 유럽 국가들에까지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그는 한번도 어떤 정치 이념을 극단적으로 주장한 적이 없었다.  그는 어떤 정치적 모의에도 가담한 적이 없었을뿐더러, 오히려 자신을 그러한 모의에 연루시킨 (공화주의자들)을 비나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아마 그는 특정 정치 이념의 이론적 적용보다는 당시의 현실에서 공화정이 더 적절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법하다.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처신은 기회주의적인 것이었던가?  리돌피는 이를 단호히 부인한다.  만일 그가 정말로 기회주의자였다면, 후한 보수를 약속한 콜론나의 서기장 직을 마다하고 대가도 빈약한 (필렌체사 Istorie fiorentine)의 집필을 고집했겠는가?  리돌피는 이를 마키아벨리의 정치에 대한 열정과 조국 피렌체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는 시종일관 빈텔터리가 아니었던가?  그라고 물욕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는 돈보다는 명예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세상사를 극히 현실주의적인 눈으로 냉정히 관찰하면서도, 그리고 인간사를 조소하곤 하면서도, 정치를 논할 때면 언제나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이상주의와 즉흥적 열정을 억제하기 어려웠던 사람, 그리고 친구들과는 지극히 세속적인 농담과 쾌락을 즐겼던 사람.  하지만 정치 파당에는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싫어했던 사람(사실 그는(피렌체사)에서 파당의 존재야말로 피렌체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그러한 인물이 아니었겠는가?
  마키아벨리를 이런 식으로 본다면, (군주론 Il principe)과 (리비우스논고 Discorsi)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데올로기적 모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마키아벨리 연구사에 밝은 학자라면 분명히 이렇게 반문하리라.  학계에는 그 동안 두 저작이 군주제와 공화제라는 상이한 정치 이념을 표현하고 있다는 주장과 양자 사이에는 명백한 통일성이 존재한다는주장이 다기다양하게 갈래를 치면서 병존해 왔다.  이 역시 마키아벨리의 (문제) 중 하나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역사가 르노데는  두 저작이 어떤 경우에도 같은 정치 이념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고, 뒤에 한스 바론 역시 이러한 견해를 재차 표명하였으나, 공화주의를 표명하고 있다는 (리비우스 논고)에 조차도 (공화국이거나 군주국이거나를 막론하고)라는 구절이 종종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일단 마키아벨리의 주요 저작들이 모두 동일한 정치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마키아벨리는 과거사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와 현재의 세상사에 대한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 본성이란 그 속에 담긴 욕망과 악덕, 약점과 미덕과 함께 시간의 흐름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정치 원리)를 발견하였고, 이를 그의 모든 저작들에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503년에 쓴 (발디키아나 반란민의 처리 방법에 대한 논고 Del modo ditrattare ... Valdichiana ribellati)에서 이미 그 단초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비르투와 포르투나의 대결로 압축되는 그의 유명한 세계관 역시 1506년의 (기리비치)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핵심 관념들은 (군주론), (리비우스 논고), (전술론 Arte della guerra), (피렌체사) 등의 주요 저작들이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그 기초가 형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저작들은 이 같은 내적 통일성에도 불구하고 각각 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씌어진 것이었다.  (군주론)은 1512년 겨울이라는 시간적 상황에서 나왔다.  그것은 분명히 저자의 보편적 정치 원리에 바탕하면서도, 군주정, 그것도 포르투나에 힘입은 메디치 군주정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야만인들을 축출하라는 저 유명한 26장의 내용도 당시 메디치 가가 이탈리아 중북부에 걸쳐 대규모의 국가를 세우려 한다는 소문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 (리비우스 논고)는 훨씬 더 이론적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이 역시도 나름의 시간적, 동기적 맥락 속에 놓여져 있다.  리돌피의 해석을 받아들이자면, 이 저작의 헌정사는 오랫동안 마키아벨리의 재능을 업신여기고 (군주론)마저도 무시해 버린 사람들에 대한 분노의 질책이었다.  자신은 이 책을 군주가 아니라 사사로운 위치에 있지만 (수많은 미덕으로 그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들에게, 국가를 어떻게 다스려야 되는지도 모르면서 통치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가 아니라 그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다고 저자는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군주론)은 로렌초 데 메디치라는 군주에게 헌정되었고, (리비우스 논고)는 자노비 무온델몬티와 뤼지 알라만니 같은 공화주의자에게 바쳐졌다.  (군주론)은 저자 자신이 밝혔듯이 군주국에 대해 노하고 있으며, (리비우스 논고)는 군주국에 대한 언급이 없지 안흥ㅁ에도 불구하고 그 언술의 지향점은 공화국이다.  우리는 한 작가의 텍스트들을 논함에 있어 그것을 관통하는 통일성(그러한 것이 있다면)과 그것이 씌어진 실제적, 지적 맥락을 구분해야 하며, 텍스트에 표현된 작자의 의도와 동기를 구별해야만 한다.  마키아벨리적 (문제)의 불가해성은 바로 이러한 측면들이 뒤엉키고 혼동되면서 초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요약하자면, 마키아벨리는 심정적으로는 공화주의자였으나, 결코 극단적인 이데올로그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흔히 영미권의 마키아벨리 학자들에게서 보듯이, 그를 공화주의자로 쉽게 단순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군주론)과 (리비우스 논고)는 각각 군주국과 공화국에 대해 논하고 있으나, 양자를 관통하는 원리적 통일성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무신론자였는가?  이 역시 마키아벨리 사후 지금까지 근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의문 중 하나이다.  특히 통속적 차원에서 이는 마키아벨리즘이란 이름 아래 상당히 넓고 깊게 퍼져 있다.  마키아벨리가 무신론자(나아가서는 사탄의 후예)라는 비난은 (군주론)에 대한 예수회 신부들과 프랑스 반왕당파 위그노들에게서 주로 기인한 것이지만, 외삼촌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아들 피에로 마키아벨리의 1527년 6월 22일자 편지 내용과 , 마키아벨리가 임종 직전에 친구들에게 했다는 유명한 꿈 이야기, 그리고 1527년 봄쯤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글 (참회 권유) 등의 진위를 둘러싼 현대의 전기 작가와 역사가들의 상반된 입장들 역시 이러한 편견을 부추기고 증폭시킨 요인이 되었다.
  먼저 피에로의 편지 건을 살펴보자.  톰마시니는 이 편지가 가짜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임종을 지킨 신부에게 (죄를 고해했다는) 내용이 마키아벨리 평소의 성품으로 보아 믿을 수 없는 데다가, 편지의 필적도 피에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빌라리 또한 이러한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임종의 자리에서 마키아벨리가 죄를 고해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은 이미 재단된 편견에 바탕한 것일 뿐, 전혀 어떤 실증적 근거로 기능할 수는 없다.  필적 문제 역시, 톰마시니는 당시 13살 난 어린이의 필적을 그가 성년이 되었을 때의 필적을 기준으로 판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리돌피의 지적대로, 과연 그 어떤 아들이, 그것도 아직 어린이에 불과한 아이가 바로 당신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부음을 알리는 편지를 위조할 수 있단 말인가?
  유명한 꿈 이야기 역시 마키아벨리가 무신론자라는 편견의 근거가 되어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종에 가까워진 마키아벨리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그 속에서 누추한 입성에다 몸이 말라빠진 일단의 사람들을 보았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천국으로 가는 착한 영혼들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후, 이번에는 품위 있는 차림새에 위엄 있는 모습을 한 사람이 나타났다.  또다시 누구냐고 물으니, 신의 뜻에 반하는 지식을 추구하다가 지옥으로 떨어진 영혼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라자자, 이번에는 마키아벨리 자신은 어느 쪽으로 가고 싶으냐는 질문이 던져졌다.  이에 대해, 그는 차라리 고귀한 인물들과 국가사를 논하며 지옥에 있기를 바란다고 답변하였다는 것이 이 꿈 이야기의 전말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배후에 또다시 부시니가 있음을 본다.  그는 일찍이 마키아벨리가 모든 피렌체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있다는 악의적인 말을 한 바로 그 인물인데, 이 경우에도 그는 마키아벨리가 바로 이 꿈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채 조소하며 숨을 거두었음)을 전하고 있다.  빌라리는 오히려 마키아벨리를 옹호하려는 마음에서 이 이야기가 그냥 후대에 지어진 것일 뿐이라고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였다.  하지만 리돌피는 이 꿈의 내용이 사실은 그 전부터 마키아벨리가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변형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자신의 임종을 보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에게 애써 유쾌한 척하면서 해준 이야기라는 것이다.  최근 사쏘는 리돌피의 이러한 입장에 동조하면서, 다만 그 출처가 고전 고대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새로운 의견을 내놓고 있다.  마키아벨리에게 매번 악의적이었던 부시니의 말만으로 이 이야기가 그의 (무신론)을 입증한다는 발상은 역시 근거 없는 것으로 보인다.
  (참회 권유) 또한 학자들에게는 큰 고민 거리였다.  도대체 그토록 세속적인 쾌락을 즐기던 미키아벨리가 이렇듯 (도덕적)인 글을 쓸 수 있었단 말인가?  학자들은 대체로 이 글을 작자의 장난 정도로 돌리려하고 있다.  이를테면 빌라리는 이를 (아이러니)로 보고 있고, 크로체나 프레촐리니는 일종의 (농담)으로 간주하려 한다.  그러나 알데리시오는 이 글의 솔직성을 옹호하였고, 리돌피 역시 이에 따르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무신론자라는 주장들은 대개 어떤 실증적 근거를 가지고 있기보다는 이미 그러하다는 편견 위에서 나온 또 하나의 근거 없는 억측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마키아벨리의 믿음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리돌피는 이 문제에 관한 한 그가 당시의 전형적인 피렌체인들과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무신론자가 아니라 반사제주의자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베토리처럼 미사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는 여자와 쾌락에 몰입했으나, 친구인 델 코르노와 같은 남색가들보다는 오히려 그 정도가 덜한 편이었다.  그는 당시의 교회가 자행했던 부패와 부조리를 공격하였을 뿐, 가톡릭 교회와 교황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는 고전 고대의 종교가 가졌던 사회적 역할을 칭찬했으나, 그것이 곧 그리소도교의 종교적 진실성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마키아벨리는 괴짜로서의 피렌체적 (그리스도교인이었을 뿐, 결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던) 그런 인물이었다.  최근에 마키아벨리의 전기를 쓴 데 그라치아 역시 대체로 이러한 입장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키아벨리가 모럴리스트일 뿐 아니라 공익에 기여한 국가 지도자라면 그 사악함에 관계 없이 구원을 약속하는 정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주장이 어쩐지 다소 작위적인 것으로 들린다.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이 치밀하고 엄격하게 고증된 역사서일 뿐 아니라, 동시에 마키아벨리에 대한 저자의 사랑이 가득 담긴 문학서의 체취를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저자 리돌피는 스스로 초판 서문에서 마키아벨 리가 지녔던 시적 풍미를 제대로 옮기지 못했음을 자괴하고 있으나, 그의 전기 곳곳에는 단순히 (냉혹한 정치 이론가)로서가 아니라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또 시와 희곡을 썼던 문필가로서, 그리고 도덕과 정치 사이에서 고뇌하는 한 인간으로서, 마키아벨리의 면모가 그야말로 인간적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우리는 리돌피의 이 책을 통해 역사의 격류 속에서 고민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특별하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던 한 인물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책을 번역하고자 마음먹은 때는 1993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훨씬 오래전 이 책이 대우재단의 연구 번역 과제로 나왔으나, 오랫동안 채택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그 해 말에 다행히 나의 신청이 받아들여져 1994년부터 번역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이미 시작해 놓은 번역과 논문들이 있었던 데다, 대우 재단에서도 관례상 번역자에게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허용해 주곤 하였으므로, 번역 작업은 상대적으로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96년 저작권법의 개정으로 번역을 2년 안에 끝내야 한다는 통지가 갑자기 날라왔고, 나는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하였다.  하던 일을 마무리하면서 밀린 번역에 본격적으로 착수했지만, 예상했던 것 이상의 시간이 소모되었다.  나의 어학 실력 부족은 제쳐놓고라도, 총 679쪽의 분량에다 특히 조그만 활자로 무려 200쪽에 달하는 미주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원래의 약속 시한인 1998년말을 넘기고, 그 위에 다시 세 번의 새로운 약속을 한 다음, 작년 7월말에야 비로소 모든 작업을 완료할 수가 있었다.  메모리 양으로 총 1메가가 넘고, 200자 원고지로 환산하면 모두 3,300여 매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나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무엇보다 나 자신이 마키아벨리의 삶과 그에 대한 연구사에 대해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1983년 마키아벨리의 역사사상을 다룬 부끄러운 석사 논문을 쓴 이래, 마키아벨리와 마키아벨리의 삶과 사상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게기를 맞았던 셈이다.
  이 책은 원래 Vita di Niccolo Machiavelli라는 제목으로 1954년 3월에 초판(Roma, Angelo Belardetti Editore)이 나왔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 벌써 2판 인쇄에 들어갔다(하지만 이는 초판에다 몇 가지 사소한 수정만을 보탠 것일 뿐이었다).  그 뒤 이는 에스파냐어와 불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1963년 이 초판을 텍스트로 하되, 저자 자신의 수정을 가한 영역본(The Life of Niccolo Machiavelli, trans. by Cecil Grayson,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이 간행되었다.  이후 이탈리아판도 개정을 거듭해서 3판(1969), 5판(1972), 그리고 본 변역의 텍스트이자 저자 생전의 마지막 판인 7판(Firenze, Sansoni, 1978)이 간행되었다.
  번역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겠지만, 제일 큰 걱정은 역시 원문이 제대로 옮겨졌나 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어 문법에 관한 문제를 넘어서서, 마키아벨리의 삶에 대한 세세한 사항들, 그것에 대한 미세한 논쟁들, 수시로 나타나는 문학, 예술 이론들, 심지어는 등장 인물들 간의 촌수 관계에 이르기까지 우리말로 옮기는 데 요구되는 사항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미력하나마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이 책을 읽는 어는 분이든, 아무리 사소한 부분일지라도 미심쩍거나 틀린 사항을 지적해 준다면 정말 고맙겠다.  좀더 나은 역서가 될 수 있도록 앞으로 두고두고 고쳐나갈 것을 독자들에게 약속드린다.
  고르지 않은 원고를 읽고 유익한 조언을 해주신 익명의 심사자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시간의 지연에도 불구하고 그 사정을 이해해 준 대우재단의 너그러움에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오랜 번역 기간 동안 이에 대한 얘기를 들어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은 사학과와 인문학 담론 모임의 동료 교수들 역시 이 작업의 동반자였다.  원고의 정리와 교정은 김인선, 배혜정, 김정화, 이승희가 맡아 수고해 주었다.  부디 본 역서가 마키아벨리를 연구하거나 그를 알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진면목을 이해하도록 하는 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된다면 옮긴이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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