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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어떻게 증후를 발명했는가 [맑스]

by Casey,Riley 2023.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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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증후

제1장. 맑스는 어떻게 증후를 발명했는가?


맑스, 프로이트: 형태의 분석

라캉에 따르면 증후symptom의 개념을 발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칼 맑스였다. 라캉의 이러한 테제는 단지 한마디 재담이고 모호한 유비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그에 걸맞은 이론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가? 맑스가 프로이트적 영역에서도 작동하는 바로서의 증후 개념을 실제로 명확히 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조우의 인식론적 ‘가능성의 조건들’에 관한 칸트적 질문을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맑스가 상품 세계를 분석하면서 꿈이나 히스테리 현상 등에도 또한 적용되는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답은 맑스와 프로이트의 해석 절차 간에--보다 정확히, 그들의 상품과 꿈에 대한 분석 간에--근본적인 상동성이 있다는 것이다. 양자 모두에서 요점은 형태 배후에 감추어져 있다고 가정된 ‘내용’의 고유하게 물신적인 매혹을 피하는 것이다. 분석을 통해 베일이 벗겨져야 할 ‘비밀’은 형태(상품 형태, 꿈 형태)가 감추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정반대로 이 형태 자체의 ‘비밀’이다. 꿈 형태의 이론적 이해는 현시적 내용manifest content으로부터 그 ‘감추어진 핵심’인 잠재된 꿈-사고들latent dream-thoughts로 꿰뚫고 들어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에 있다: 왜 잠재된 꿈-사고들은 그러한 형태를 띠었는가, 왜 그것들은 꿈의 형태로 치환되었는가? 상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진짜 문제는 상품의 ‘감추어진 핵심’--생산에 소요된 노동량에 의한 상품 가치의 결정--으로 꿰뚫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왜 노동이 상품 가치의 형태를 띠었는가, 왜 그것이 자신의 사회적 성격을 단지 자신의 산물의 상품 형태 속에서만 긍정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꿈 해석에 겨누어진 ‘범성욕주의pansexualism’라는 유명한 비난은 이미 평범한 것이다. 정신분석에 대한 혹독한 비평가인 한스-위르겐 아이젠크Hans-Jurgen Eysenck는 이미 오래 전에 꿈에 대한 프로이트의 접근 속에서 중대한 역설을 목격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속에서 조음되는 욕망desire은--적어도 대개는--무의식적이며 동시에 성적인 본성의 것으로 가정되어지는데, 이는 꿈의 논리를 예시하기 위한 소개 사례로 그가 선택한 꿈인 저 유명한 이르마Irma의 주사 꿈을 비롯하여 그 스스로 분석한 대부분의 사례들에 모순된다. 이 꿈에서 조음된 잠재된 사고는,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그건 일련의 상황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야. . .’라는 유형의 논변에 의해 자기 환자였던 이르마에 대한 치료 실패의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프로이트의 시도이다. 하지만 그 꿈의 의미인 이 ‘욕망’은 성적인 성격의 것도 아니며(오히려 그것은 직업 윤리와 관계하고 있다) 또한 무의식적이지도 않다(이르마에 대한 치료의 실패는 밤낮으로 프로이트를 괴롭히고 있었다)(Eysenck, 1966).
이러한 종류의 비난은 근본적인 이론적 오류에 기반하고 있다. 즉, 꿈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무의식적 욕망을 ‘잠재된 사고’--즉, 꿈의 의미--와 동일시하는 오류. 하지만 프로이트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처럼, ‘잠재된 꿈-사고’에는 ‘무의식적인’ 어떠한 것도 없다. 이 사고는, 일상의 공통 언어가 갖는 통사론으로 조음될 수 있는 전적으로 ‘정상적인’ 사고이다. 위상학적으로 그것은 ‘의식/전의식’의 체계에 속한다. 주체는 대개 그것을 의식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과도하리 만치 그렇다. 그것은 주체를 언제나 괴롭힌다. . . . 어떤 조건들 하에서 이 사고는 의식 밖으로 강제로 밀쳐내어지며 무의식 속으로 끌려간다. 즉, ‘일차 과정’의 법칙들에 종속되며, ‘무의식의 언어’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잠재된 사고’와 이른바 꿈의 ‘현시적 내용’--꿈의 텍스트, 그 축어적 현상성에서의 꿈--간의 관계는 어떤 전적으로 ‘정상적’인 (전)의식적 사고와 그것을 꿈의 ‘조각맞추기rebus’로 번역한 것 간의 관계이다. 그리하여 꿈의 본질적 구성은 그것의 ‘잠재된 사고’가 아니라 그것에 꿈의 형태를 부여하는 이 작업(치환과 응축의 메커니즘들, 단어와 음절의 내용들의 형상화)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기본적인 오해가 놓여 있다. 우리가 ‘꿈의 비밀’을 현시적 텍스트에 의해 감추어진 잠재된 내용에서 구한다면 우리는 실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라곤 어떤 전적으로--비록 대개 불쾌한 것이기는 해도--‘정상적’인 사고인데, 그것의 성격은 대부분 성적이지 않으며, 또한 확실히 ‘무의식적’이지도 않다. 이 ‘정상적’이고 의식적/전의식적인 사고는 단지 의식이 보기에 ‘불유쾌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억압되어 무의식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그 자신과, 이미 억압되어 무의식 속에 위치하고 있는 또 다른 욕망, 즉 ‘잠재된 꿈-사고’와는 어떠한 관계도 없는 욕망 사이에 일종의 ‘단락’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고의 열’--정상적인, 따라서 공통의 일상 언어로(즉, ‘이차 과정’의 통사론으로) 조음될 수 있은 것--은, ‘유아기로부터 유래하며 억압된 상태에 있는 무의식적 소망이 그것 위로 전이된 것이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기술해 온 유형의 비정상적인 심리적 처리법에’--꿈-작업에, ‘일차적 과정’의 기제들에--‘종속되는 것일 뿐이다’(Freud, 1977, p. 757).
애초부터 구성적으로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프로이트의 원억압urverdrangung)--즉, 일상적 소통의 ‘정상적’ 언어 속에 어떠한 ‘기원’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정상적인 사고의 열’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무의식적/성적 욕구이다. 그것의 유일한 자리는 ‘일차적 과정’의 기제들 속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꿈의 해석을, 혹은 일반적으로는 증후들의 해석을, ‘잠재된 꿈-사고’를 간주체적 소통의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공통 언어로 재번역하는 것(하버마스의 공식)으로 환원해서는 안된다. 구조는 언제나 3중적이다. 언제나 세 개의 요소들이 작동한다: 현시적 꿈-텍스트, 잠재된 꿈-내용이나 사고, 그리고 꿈 속에서 조음되는 무의식적 욕망. 이 욕망은 스스로를 꿈에 부착시킨다. 그것은 잠재된 사고와 현시적 텍스트의 틈새에 끼어든다. 따라서 그것은 잠재된 사고에 비해 ‘더 감추어져 있으며 더 깊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연코 더 ‘표면에’ 있는 바, 전적으로 기표의 기제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잠재된 사고가 종속되어 있는 처리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의 유일한 자리는 ‘꿈’의 형태 속이다. 꿈의 진정한 주제(무의식적 욕망)는 그 자신을 꿈-작업 속에서, 그것의 ‘잠재된 내용’의 세공elaboration 속에서, 조음한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종종 있는 일인 바, 그가 (비록 ‘아주 놀라운 빈도’를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경험적 관찰이라고 정식화하는 것은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언명한다: ‘꿈의 형태 혹은 꿈이 꾸어지는 형태는 아주 놀라운 빈도로 그것의 숨겨진 주제를 재현하기 위해 사용된다’(Freud, 1977, p. 446). 그렇다면 이것은 꿈의 기본적인 역설이다: 무의식적 욕망이, 즉 그것의 가장 은밀한 핵심으로 가정되는 것이 스스로를 조음하는 것은 바로 꿈의 ‘핵심’, 꿈의 잠재된 사고를 은폐하는 작업을 통해서, 이 내용-핵심을 꿈-조각맞추기로 번역함으로써 위장하는 작업을 통해서다. 다시금 그 특유의 방식으로 프로이트는, 이 역설에 대해, 나중 판에 첨가된 각주에서 그 최종 정식화를 제공한다. 

한 때 나는 독자들로 하여금 꿈의 현시적 내용과 잠재된 꿈-사고의 구분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일이 극히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기억 속에 간직되어온 형태의 어떤 해석되지 않은 꿈에 기반하여 논변들과 반대들이 되풀이해서 제기되곤 했으며 그것을 해석해야 할 필요성은 무시되곤 했다. 하지만 분석가들이 적어도 현시적 꿈을 그것의 해석에 의해 밝혀진 의미로 대체하는 것에 묵종하게 된 지금, 그들 다수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완고하게 고집하는 또 다른 혼동 속에 빠지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그들은 꿈의 본질을 꿈의 잠재된 내용에서 발견하려고 하며, 그렇게 하는 동안 잠재된 꿈-사고와 꿈-작업의 구분을 간과한다.

기본적으로 꿈은, 수면 상태의 조건들에 의해 가능해지는, 사고의 특수한 형태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그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꿈-작업이며 오로지 꿈-작업만이 꿈꾸기의 본질--그것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다. (Freud, 1977, p. 650)

프로이트는 여기서 두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 첫째로 우리는 꿈이 한낱 단순하고 무의미한 혼동에 불과하다는, 꿈은 생리학적 과정들에 의해 야기되며 그러한 것으로서 의미작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무질서에 불과하다는 외양을 깨뜨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해석학적 접근을 향한 결정적 일보를 성취해야 하며 꿈을 유의미한 현상으로서, 해석적 절차에 의해 발견되어야 하는 억압된 메시지를 전송하는 어떤 것으로서 생각해야 한다.

-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의미작용의 이러한 핵심에서, 꿈의 ‘숨겨진 의미’에서--즉, 꿈의 형태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내용에서--마력을 제거해야 하며, 이 형태 자체에, ‘잠재된 꿈 사고들’이 복종되는 꿈-작업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핵심은, 맑스가 ‘상품 형태의 비밀’을 분석할 때도 똑같은 두 단계로 된 설명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첫째로 우리는 상품 가치가 순전히 운에--예컨대 수요와 공급의 우연한 상호작용--맡겨지는 외양을 깨뜨려야 한다. 우리는 상품 형태 배후의 숨겨진 ‘의미’를, 이 형태에 의해 ‘표현되는’ 의미를 생각하는 결정적 일보를 성취해야 한다. 우리는 상품 가치의 ‘비밀’을 꿰뚫어야 한다. 

따라서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 크기의 결정은 상품의 상대적 가치의 외관적 변동들의 배후에 숨겨진 하나의 비밀이다. 이 비밀의 발견은, 생산물의 가치 크기가 마치 순전히 우연적으로 결정되는 듯한 외양을 제거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결코 그 결정이 일어나는 양태를 바꾸지 않는다. (Marx, 1974, p. 80)

- 하지만 맑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어떤 ‘아직은yet’이 있다. 즉, 비밀의 가면 벗기기는 충분하지 않다. 고전적인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은 이미 상품 형태의 ‘비밀’을 발견했다. 그것의 한계는 상품 형태 뒤에 감추어진 비밀의 이러한 매혹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그것의 관심이 부의 참된 원천으로서의 노동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전 정치경제학은 상품 형태 뒤에 감추어진 내용에만 관심이 있는데,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진정한 비밀을, 형태 뒤의 비밀이 아닌 이 형태 자체의 비밀을 설명할 수 없다. ‘가치 크기의 비밀’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고전 정치 경제학에 있어서 상품은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사물로 남아 있다--이는 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꿈은, 그것의 숨겨진 의미, 그것의 잠재된 사고를 설명한 뒤에라도,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남아 있다; 아직 설명되지 않은 것은 단순히 그것의 형태이며, 숨겨진 의미가 그러한 형태 속에서 스스로를 가장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다른 중대한 일보를 성취해야 하며, 상품 형태 그 자체의 발생을 분석해야 한다. 형태를 본질로, 숨겨진 핵심으로 환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감추어진 내용이 그러한 형태를 취하게 되는--‘꿈-작업’과 상동적인--과정을 검토해야 한다. 그 이유인 즉, 맑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노동 생산물이 상품의 형태를 취하자마자, 그것의 불가사의한 성격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분명, 이 형태 자체로부터다’(Marx, 1974, p. 76). 고전적 정치경제학이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은 형태의 발생을 향한 바로 이러한 일보이며, 이것이 그것의 결정적 약점이다.

정치경제학은, 아무리 불완전하게라도, 가치와 가치의 크기를 참으로 분석해 냈으며 이 형태들 속에 감추어진 내용을 드러냈다. 하지만 정치경제학은 왜 이 내용이 그 특수한 형태를 취했는가를, 다시 말해서, 왜 노동이 가치에서 표현되며 왜 노동의 지속시간에 의한 노동의 측정이 생산물의 가치 크기에서 표현되는가라는 질문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Sohn-Rethel, 1978, p. 31)


=============================== 02
제2장 맑스의 철학 혁명에서 맑스주의 철학으로


1.근대철학의 문제설정

데카르트는 ‘나’를, ‘주체’를 신으로부터 떼어냄으로써 철학적 근대를 열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적어도 철학적으로는,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만이 확실하고 자명한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이로써 ‘나’는 사고하는 주체로서 정립되고, 이것이 ‘나’란 존재의 근거가 되었다. 이처럼 사고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이제는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었다. 다시 말해 주체는 근대 철학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었고, 철학의 존재론적 지반이었던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 철학을 흔히 ‘주체철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주체를 신으로부터 독립시키자마자 불가피하게도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이처럼 독립한 주체가 신의 계시없이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진리를 인식할 능력도 없으면서, 쉽게 진리를 주던 신에게서 벗어난다는 것은 너무도 위험스런 일이었다. 따라서 근대적 주체의 독립을 정당화하려면 진리에 이를 수 있음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보여주어야 했다. 따라서 근대철학에서 진리는 철학이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이었고, 인식론은 철학의 중심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여기서 데카르트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은 갈릴레이 등에 의해 이루어진 과학의 혁혁한 진전이었다. 즉 과학의 발전을 통해 주체는 대상적 진리에 이를 수 있으리란 것이란 확신이 대두하게 된다. 따라서 오직 과학적인 지식, 참된 지식만이 지식으로서 가치를 획득할 수 있었으며, 어떠한 지식도 자신이 과학적임을 입증할 수 있을 때에만 존재할 권리를 얻을 수 있었다. 철학자들은 이후 이런 과학의 기초를 확고히 해주는 것이 바로 자기들의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들은 ‘신학의 시녀’ 대신 ‘과학의 시녀’를 자청한다. 근대적 인식론을 지배한 이러한 확신을 우리는 ‘과학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한편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 역시 새로운 준거를 갖게 된다. 진리가 인식의 목적이 되며 동시에 실천의 기준이 된다. 이성이 지시하는 바에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인 육체와 욕망은 당연히 통제되고 억제되어야 했다. 또한 참된 지식이 있음에도 이를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대중들은 깨이지 못한 자, 몽매한 자로 간주되었으며, 의당 깨인 자에 의해 계몽되어 빛이 있는 곳으로 인도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역사적 명칭으로서 ‘계몽주의’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해도, 근본적으로 계몽주의와 동일한 대립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학적 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요약하면, 중세의 ‘창조론’ 대신에 존재론이 주체철학이란 형태로 나타났으며, ‘계시론’ 대신에 인식론이 ‘과학주의’란 형태로 나타났다. 신의 계명과 성직자의 가르침 대신에 윤리학이 ‘계몽주의’란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주체를 출발점으로, 진리를 목표점으로 하는 문제설정의 출현으로 야기된 것인데, 이를 ‘주체와 진리의 문제설정’이라고 부르자. 이것이 근대철학의 지반을 이루는 것이었다.자세한 내용은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새길, 1994 참조.

그런데 이러한 문제설정은 곧바로 난감한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주체란 범주는 그 인식과 활동의 대상을 동시에 전제한다. 주체란 범주를 애초부터 독립시킨다는 것은 그것의 활동성과 주동성을 독립시키는 것이기에, 당연히 자연이나 대상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주체는 대상과 분리되고, 대상은 자연히 정적인 것, 피동적인 것이 된다. 이를 들뢰즈는 데카르트의 ‘반자연주의’라고 하며,G. Deleuze, Spinoza et la probleme de l'expression, 工藤喜作 외 역, ?スピノザと表現の問題?, 法政大出版部, 1991, 233쪽.
 이것이 ‘기술주의’로 이어지는 측면은 후기의 하이데거나M. Heidegger, Die Technik und die Kehre, ?기술과 전향?, 서광사, 1993; 박찬국, ?현대 기술 문명의 본질과 위기에 관한 하이데거의 사상?,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 ?시대와 철학?, 11호, 1995년 가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가들에 의해 누차 지적되어왔다.
그런데 근본적인 난점은 이처럼 주체와 대상, 주체와 객체를 나누었을 때, 주체(의 인식)이 있는 그대로의 대상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하고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고의 주체가 인식하고 있는 것은 자기 눈에 비친 것 뿐인데, 이것이 실제 대상과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제 3자가 개입해야 하는데, 이 제3자 역시 신적인 능력을 갖지 못하는 한 확실한 증명을 보장해줄 수 없다. 이를 우리는 근대철학의 근본적인 딜레마라고 정의했다. 이후 근대철학은 바로 이 문제를 중심으로 공전했다. 근대철학의 흐름이 보여주는 다양성은 바로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맑스의 철학적 혁명

(1)근대 철학의 전복

맑스가 근대철학의 정점이자 그 사유의 집약인 헤겔을 넘어서는 것은 근대철학 자체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던 것 같다. 그것은 근대적인 헤겔비판으로서 포이에르바하를 동시에 넘어서야 했다. 이는 주체와 진리의 문제설정을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을 통해 해체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맑스는 ‘실천’을 철학적 개념으로 정립함으로써 근대철학의 기본 범주에 대한 4중의 해체를 수행한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제일 앞머리에서 지금까지의 유물론이 근대적인 문제설정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포이에르바하를 포함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의 주요 결함은 대상, 현실, 감각을 다만 객체 또는 지각의 형식으로만 파악”하고 있었다고 비판한다.K. Marx, “Thesen uber Feuerbach,”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1990, 185쪽. 이하에서 나오는 모든 인용문은 국역본에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즉 대상?현실을 (정적인) 객체로, 감각을 단지 (수동적인) 지각으로만 파악했다는 것이다. 또 ?테제? 5에서는 포이에르바하가 말하는 감성적 지각이 ‘실천적인 행위’임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요컨대 맑스는 지금 대상(현실)을 ‘실천’으로 파악해야 하며, 지각(감성) 역시 ‘실천’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적인 주체와 대상 개념에 대한 맑스의 근본적 비판을 볼 수 있다.
나아가 ?테제? 2에서 그는 “사유가 대상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라고 말한다. 나아가 “환경의 변화와 인간 행위 변화의 일치는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다”(?테제? 3)고 말한다(강조는 모두 맑스의 것이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진리와 윤리(가치)의 영역 역시 실천의 개념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요컨대 ‘실천’이란 개념은 그 비판과 새로운 사고를 위한 가장 근본적인 개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실천이란 개념에 근거하여 맑스는 예전의 주체, 대상, 진리, 윤리개념을 새로운 것으로 전환시킨다.

①실천으로서의 대상?현실
포이에르바하는 대상(=현실)을 객체로만 볼 뿐 ‘활동적인 생활과정’으로서, 그에 기초한 ‘현실의 활동하는 인간’으로서 보지 못한다. 따라서 “그를 둘러싼 세계 영원한 옛날부터 직접 주어진, 항상 동일한 사물이 아니라 산업과 사회 상태의 산물이라는 것을, 더욱이 그 사물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의미에서, 즉 전 세대의 어깨 위에 서서 자신들의 산업과 교류를 계속 완성시켜 나가고 변화된 욕구들에 따라 자신들의 사회적 조직을 변용시켰던 그러한 세대들의 계열 전체의 활동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는 것을 포이에르바하는 알지 못하고 있다.”K. Marx, Die deutsche Ideologie, ?독일 이데올로기?,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 1권, 205쪽.

실천으로서 대상을 파악한다 함은 현실적 실천과정의 산물로서 대상 세계를 파악함을 뜻한다. 실천을 통해 어떤 ‘대상’과 실천하는 자는 일정한 연관을 형성하며, 관련된 ‘대상’들 역시 실천을 둘러싸고 특정한 양상으로 연관된다. 이러한 연관의 양상을 ‘계열’(serie)이라는 개념으로 표시하자.계열 및 계열화의 개념, 그것을 통해 의미를 정의하는 방식은 들뢰즈(G. Deleuze)에 의해 고유하게 발전되었다(G.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이에 대해서는 이진경, ?들뢰즈: ‘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서울사회과학연구소 편,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푸른숲, 1997 참조.

예를 들어 구 ‘중앙청’은 하나의 동일한 건물이 식민지 총독부 내지 정부의 청사가 되기도 하고, 박물관이 되기도 하는 경우를 보여준다. 이는 직접적으로 그 건물을 사용하는 실천의 양상에 의해, 다달리 말해 그 용법의 변화에 따라 다른 의미, 다른 기능을 갖는 건물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호텔로 사용되는 중세의 성이나 대저택이 있다면 이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는 단지 사용하는 자, 사용하는 목적의 변화만은 아니다. 그것은 연관된 대상들의 상이한 계열을 형성한다. ‘총독부 청사’로서 중앙청은 관리들의 사무실, 드나드는 사람들의 고유한 계열을 형성하며, 그 건물이 박물관으로 바뀌려면 사물실이 아니라 전시시설을 갖춘 전시실과 계열화되어야 하고, 드나드는 사람들도 전혀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성이 호텔로 사용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모든 건물이 모든 용도에 사용될 수 없는 한계가 정해진다. 즉 건물 자체에 내장된 계열화의 한계가 그 건물의 이용의 한계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성이나 ‘중앙청’을 체육관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어떤 대상의 의미는 관련된 항들의 특정한 계열 안에서, 그러한 계열화를 통해서 정의된다고 할 수 있다.나아가 맑스는 철학자들이 대상으로 삼는 ‘인간’이란 근대철학자들의 생각처럼 어떤 타고난 성질이나 범주들로 이루어진 실체가 아니라, 이런 물질적 생산과정에서 생산수단 및 비생산자, 다른 생산자 등과 계열화되는 양상에 따라 상이하게 정의되는 존재며, 따라서 역사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대상임을 주장하고 있다.


②실천으로서의 지각?감각
맑스의 견해를 근대철학의 개념을 빌어 표현하면, 인식주체의 지각?감각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수동적으로 모사하는 게 아니라맑스가 여기서 제시하는 견해는 경험주의나 실증주의에 대한 현대적 비판들을 이미 선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상의 맥락에서 경험주의자들 역시 포이에르바하처럼 추상적이라고 비판한다. 즉 그들에게 현실이나 역사는 단순히 죽어있는 사실들의 집합인 것이다.(?독일 이데올로기?, 202-203쪽)
하지만 맑스주의 유물론을 실증주의로 전락시키는 견해들은 얼마나 완강한 것인지!
 실천적 활동 속에서 선택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즉 근대철학이 확실한 지반으로 간주하던 인식주체의 감성이나 지각이 실천적 맥락의 ‘효과’ 속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는 포이에르바하의 오류는 “감성적 세계를 그의 ‘눈’으로, 즉 철학자의 색안경을 통해서 고찰했다”는 것이라고 한다.K. Marx, ?독일 이데올로기?, 205쪽.
 여기서 맑스는 철학자의 감성은 철학자가 행하는 실천 속에서 형성된 철학자의 색안경에 불과함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자명하고 확실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주체란 없으며, 오직 실천적 활동 속에서 지각하고 사고하며 판단하는 주체만이 있을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의 실천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물질적 생활과정 속에서 주체의 지각과 사고 등이 만들어진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를 마찬가지로 계열의 개념을 통해 다시 말하면, 지각이란 실천적 맥락 속에서 관련된 항들을 계열화하는 작용이고, 계열화의 양상은 바로 그 실천적 맥락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빵을 들고 달리는 소녀는, 날카롭게 생긴 부자집 마나님의 눈에는 도둑질로의 계열화되지만, 찰리의 눈에는 배고픔으로의 계열화된다. 물론 여기서 찰리의 계열화 방식은 일상적인 것은 아니며, 반대로 부자집 마나님의 계열화 방식은 ‘양식’(bon sens)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 양식은 다양한 계열화의 선을 지배적인 가치에 따라 하나의 방향--좋은 방향(bon sens)--으로 일방화하고 고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혹은 ‘참된’ 의미는 아니며, 그에 반하는 찰리의 계열화 방식이 주관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유사하게 데 시카의 영화 <자전거 도둑>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안토니오의 눈에 비친 자전거는 그것을 팔아 얻을 수 있는 어떤 화폐보다는 실업/취업의 경계선으로 계열화된다. 반대로 주인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은 양식에 따라 그를 도둑으로 간주하고 붙잡지만, 그와 아들이 자전거에 계열화되면서 도둑맞을 뻔한 주인 스스로가 상이한 의미/방향을 이해하고 놓아 준다. 다시 말해 그는 안토니오가 처한 상황--실천적 맥락--을 포착하면서 양식에 반하는 지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인식이나 의식 역시 마찬가지로 이러한 실천적 맥락을 통해서, 혹은 실천과 결부된 계열화를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로써 근대적 주체?대상의 개념은 ‘존재론’ 상에서나 ‘인식론’ 상에서나 근본적으로 해체되고 ‘주체’란 단어는 개념적 변용을 겪게 된다. 더불어 ‘인간’에 대한 개념 자체도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전혀 새로운 정의를 얻게 된다.

③실천의 문제로서 ‘진리’의 문제
맑스는 어떤 지식이 ‘진리’인가 아닌가(대상과 일치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이론적으로는 결코 증명될 수 없는 문제임을 잘 알고 있다. “실천에서 유리된 사유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적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인 문제다”?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2. ?맑스 엥겔스 저작 선집?, 185쪽. 강조는 맑스의 것이다! 여기서 맑스는 이 문제를 왜 굳이 스콜라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강조까지 했을까? 스콜라 철학의 슬로건인 “믿기 위해 이해하라”와, 이런 목적을 위해 철학에게 신학을 정당화하는 ‘시녀’의 자리를 할당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여기서 그는 실천과 분리된 상태에서 행해지는 진리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시녀적인 기능을 할 뿐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그것은 스콜라 철학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정당화주의‘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 철학의 딜레마를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는 게 아닐까?
동시에 그는 ‘자기 사유의 진리성’의 개념을 전환시킨다. 즉 그것은 대상과 일치하는 지식(대상적 진리성)이 아니라 “그 현실성, 힘, 차안성을 실천 속에서 증명하는” 문제다. 근대철학의 이상이던 ‘영원한 진리’는 애시당초 빗나간 목표였다는 선언인 셈이다.
실천을 통해 포착되는 진리의 개념은 단지 실증적 검증가능성를, 실용적 가치의 절대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대상과 지각이 실천적 맥락 속에서, 그에 고유한 계열화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명제와 결부된 것이다. 즉 어떤 항이 참인가 아닌가는 그와 결부된 다른 항들의 계열 속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계열이 실천적 맥락에 따라 구성되는 것인만큼, 그것은 그 항이 포함된 계열 전체의 “현실성, 힘, 차안성을 실천 속에서” 반복적으로 증명하는 문제다. 다시 말해 그 계열의 반복적인 진리효과를 통해서 그 계열이나 그 계열의 항들의 진리성에 대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리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이 다시 쓸 수 있지 않을까?: 진리란 실천적 맥락에 따라 구성되는 어떤 특정한 계열 안에서, 반복적 진리효과에 의해 타당성을 획득하는 지식이다. 혹은 반복적 진리효과를 갖는 어떤 계열 S가 정의될 수 있을 때, S를 구성하는데 필수적인 명제는 계열 S 안에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치료를 통해 한의학적 지식의 계열이 진리효과를 갖는 것으로 인정될 때, 기(氣)에 관한 개념이나 경혈에 관한 이론은, 그것이 한의학적 지식의 계열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진리로서 인정된다는 것이다. 잉여가치처럼 직접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개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계급적 적대와 계급투쟁, 혹은 이윤과 이자 등의 개념이 반복적인 진리효과를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이러한 개념의 구성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잉여가치 개념은 그 계열 안에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철학의 목표와 기능 자체가 변화한다. 근대철학과 달리 ‘영원한 진리’는 더 이상 철학의 목표에서 사라지고 실천적 맥락실천적 맥락이란 말을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진리 개념(비판)과 언어게임 개념을 통해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진리란 특정한 언어게임 내부에서 진리효과에 의해 정당화되는 지식이다. 이에 대해서는 ?철학과 굴뚝청소부?, 232쪽 이하 참조
 속에서만 ‘진리’는 존재한다. 또한 철학의 기능은 예전처럼 진리에 도달할 가능성을 입증하거나 어떤 지식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정당화주의’에서 벗어나, 올바른 것을 찾아내려는 실천으로, “인간적 실천과 이 실천의 이해 속에서 그 합리적 해결을 얻는”(?테제? 8) 활동으로 된다.

④혁명적(전복적) 실천과 계몽주의 비판
맑스에게서 모든 비판적 활동, 모든 철학적 활동의 기초는 혁명적 실천이다. 이것이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왔을 뿐인 기존 철학과 맑스의 철학이 갈라서는 분기점이다. 이것은 대상이나 지각을 실천으로서 파악하게 하고, 진리를 ‘현실성, 힘, 차안성’으로 파악하게 했던 지반이었다. 그런데 이 지반 위에서 맑스는 근대적 윤리학으로서 계몽주의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라는 교의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게 되며, 그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된다”(?테제? 3) 교육하는 사람과 교육받아야 할 사람, 선진적인 사람들과 후진적인 사람들, 지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과 무식하고 몽매한 사람들 등등의 이분법. 그러나 그것은 “환경이 바로 사람(대중!--인용자)에 의해 변화된다는 것과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아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맑스는 “환경의 변화와 인간 행위 변화의 일치는 혁명적(umwalzende, 전복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적 윤리학의 전제인 이성적인 사람들과 몽매한 대중의 이분법, 교육자와 교육받아야 할 자의 이분법 자체를 비판하는 획기적 관점을 주목해야 한다. 윤리학적 계몽주의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이러한 혁명의 철학을 ‘탈근대적 윤리학’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이제 맑스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세계 안에서 수렴되는 이런저런 가능한 새로운 계열들을 제안하고 새로운 해석을 산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계열화를 특정한 한계 안에 제한하는 조건--세계--자체를 변혁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계몽주의란 앞서간 사람들이 밟은 경로를 뒤처진 사람들로 하여금 반복하여 답습하게 하는 것이고, 이성이란 이름의 주어진 질서 안에 대중의 능력(puissance)이 갖는 다양한 방향과 잠재성을 제한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질서로서 주어진 어떤 계열화 방식을 반복하여 재생산할 뿐이다. 이 점에서 그는 차라리 혁명적 실천을 통해 드러나는 대중의 자발적인 능력과 창조적 생산성을 믿는다. 즉 교육자, 앞선 자, 이성적 질서 자신이 그러한 창조적 생산을 통해 변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철학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진리를 찾아내거나 과학이 찾아낸 진리를 엄밀하게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에 따라 이성적 삶의 계몽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혁명적 실천을 주목하여 기존의 배치를 가로지르는 전혀 다른 계열화의 선을 찾아냄으로써 세계를 변혁해야 하는 것이다.

(2)맑스적 개념의 한계

요약하자면 맑스에게서 대상은 무엇보다도 우선 ‘인간의 활동적 생활과정’, 사회적 관계다. 또한 주체는 물질적 생활과정 속의 인간,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된 인간이다. 그리고 그 주체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철학에서와는 달리 주체는 더 이상 출발점이나 아니라 오히려 관계 속에서 구성된 결과물이다. 따라서 그것은 중심으로서 위치를 상실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의 철학적 위치나 기능은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버렸다. 진리의 개념 역시 철학의 목표가 아니라 실천적인 올바름을 파악하는 문제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 그 위치나 기능이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버렸다.
결국 맑스는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서 근대철학의 출발점과 목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중요한 사고방식 자체를 넘어선다. 그의 출발점은 주체가 아니라 ‘실천’이다. 혁명적 실천의 지반 위에서 그는 ‘주체’/‘진리’라는 개념 짝이 형성하는 근대적 문제설정을 해체한다. 이런 의미에서 맑스에서 ‘실천’ 개념은 근대적 문제설정을 벗어나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체는 단지 부정적인 힘으로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이전에 그것은 긍정적인 창조요 생성이었다. 새로운 대상으로서 물질적 생산방식, 그리고 그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를 파악하는 이론적 영역이?독일 이데올로기?의 표현을 빌면, ‘생활양식’(Lebensweise)이란 개념이 이론적으로 구성될 공간이 여기에 마련된 셈이다. 우리는 이를 생산양식 개념으로 환원시키기보다는 그 공간의 의미 자체를 새로이 탐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주체생산방식’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4장에서 다시 상세히 다룰 것이다.
 형성된 것이다. 이 새로운 이론적 지대를 흔히 역사유물론이라고 부른다.
반면 맑스의 개념이 갖는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첫째, 주체는 ‘의식적 주체’ 개념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한에서 맑스의 주체 개념이 근대적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아 인간의 본질을  관념/정신에서 도출하는 관념론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주체 개념을 사회적 관계로 환원했다. 이럼으로써 주체의 복합성을 사고할 요소를 제공하긴 했으나 주체와 사회관계(계급관계) 간의 불일치나 대립, 나아가 주체 자체의 불통일성과 분열을 사고할 공간을 제공하진 못했다. 다만 노동자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의식’과 계급적 관계를 반영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 간의 차이는 즉자적 계급(자기를 아직 의식하지 못한 계급)과 대자적 계급(자기를 의식한 계급)이라는 헤겔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게 되고, 그 차이의 해소는 자칫 (자기)의식화의 문제로 될 위험을 갖게 된다. 물론 혁명적 실천이란 요소가 병존하지만.이와 관련해 혁명적 실천(혹은 계급투쟁)이 개개인에게 미치는 효과에 대한 개념적 진전이 있어야만, 그와 병존하는 ‘의식화’ 모델을 제압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맑스주의적 저작에서 중요하게 나타나지만 직관적인데 머물러 있어서 개념적 진전은 보이지 않는다. 한편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문제에 관한 한 탁월한 예외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제7장을 참조.

둘째, 실천이란 개념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 예컨대 주체를 구성하는데서 실천 개념이 하는 역할에 대한 개념적 진전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실천의 개념을 실증주의적 ‘검증’ 개념으로 되돌리려는 경향은 이후 끈질기게 잔존하고 있다.


3. 맑스주의 철학과 근대성

(1)맑스주의와 철학: 근대로의 회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맑스의 사상은 이후 하나의 체계를 이룩하게 된다. 이는 거대한 사상이 거쳐가는 필연적인 경로다. 더구나 자신의 사상을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실천 속에서 정립하려 했던 것이기에, 그래서 물질적 힘으로의 전환을 지향하는 것이기에 체계화는 일부러라도 진행되게 마련이다. 엥겔스와 카우츠키, 플레하노프 등 초기의 중요한 맑스주의자들의 노력은 이처럼 맑스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대중화하는데 촛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런 노력과 함께 맑스의 사상은 ‘맑스주의’로 발전하게 된다.처음에 ‘맑스주의(자)’란 말은 맑스의 지지자들을 비난하기 위해 무정부주의자들이 사용하던 말이었다. 이후 이 말은 맑스의 지지자들이 자신을 지칭하기 위해 긍정적으로 사용하며, 여기서 카우츠키의 노력이 두드러진다. 이에 관해서는 G. Haupt, ?맑스와 맑스주의?, 서관모 편, ?역사적 맑스주의?, 새길, 1993 참조.
 나아가 러시아 혁명 이후 맑스주의는 몇 권의 ‘교과서’로 요약되는 대중적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코민테른을 통해 전세계 사회주의자나 진보적 인사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금 우리가 맑스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대개 이것을 지칭한다. 이러한 맑스주의의 ‘발전’ 속에서 맑스의 철학적 혁명은 지속되지 못했다. 그것은 오히려 근대적 형태로의 맑스주의의 변환에 의해 주도된 과정이었다.예외가 없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그 예외는 ‘발전과정’에서 소수자였을 뿐이라는 점에서 ‘주도’라고 썼다. 다수적 맑스주의, 그것은 지배적 형태의 맑스주의와 정확하게 외연을 같이 한다. 여기서 다수는 숫자의 많음이 아니라, 항상적이고 안정적인 것을 지향하기에, 언제나 권력과 결부되는 그런 것이며, 반대로 소수란 숫자의 적음이 아니라, 그러한 다수성와 항상성, 안정성에서 이탈하며, 그것의 변이선을 만들어내는 것을 뜻한다. 다수적 맑스주의는 이런 소수적 맑스주의를 배제하고 억압하거나 현재적 형태로 변용시켜 포섭하는 방식으로 그것에 반작용한다. 이러한 다수와 소수 개념에 대해서는 G. Deleuze/ F. 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133-134쪽; 이 책의 6장을 참조.
 이제 우리는 근대적 형태로의 맑스주의의 변환이 수반해야 했던 중요한 특징들을, 근대적 문제설정과 관계해서 검토해 보겠다.맑스주의에서 근대적 사고가 지배적인 것으로 된 것을 오직 맑스의 철학 자체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나 또한 그것을 오직 이후 맑스주의자들만의 탓으로 돌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부당하다. 중요한 것은 맑스 자신의 한계와, 그것들이 이후 어떻게 변환되는가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와 연관해 가장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것은 ‘과학주의’다. 알다시피 맑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오직 참된 지식만이 정당화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더우기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고, 그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는 참된 지식이란 형태로 정당화되어야 했다. 이 점에 관한 한 맑스의 사상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생산양식을 대상으로 하는 이론은 과학으로서 정립되어야 했다. 또한 과학임을 주장하는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 역시 과학/비과학의 기준으로 행해졌다.
사실 그것 이외의 다른 기준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투쟁하고 비판하는 것이 그 시대에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런 점에서 ‘과학주의’는 맑스가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지반이었는 지도 모른다. 더구나 대중적인 동의를 구하고 대중적인 이해를 통해서 스스로 물질적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상이라면. 그래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시리즈를 1권으로 포기하고, 좀더 대중적인 문체로 ?자본론?을 쓰려고 했던 맑스라면. 그리하여 ?자본론?에 대한 최대의 보상을 유럽 노동자들이 그것을 읽어준다는 것에서 찾았던 이 위대한 혁명가라면.?자본?의 ?서문?들을 참조. D. Groh는 독일 노동운동이 맑스와 엥겔스의 개념과 이론들을 채택한 것은 선별적 과정을 통해서 였다고, 즉 다른 것들과의 비교 속에서 선택된 것이었다고 말한다. 요컨대 맑스주의는 ‘선별’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된 것이었다고 한다.(D. Groh, "Le movement ouvrier 'marxiste' allemande: un malentendu histirique?," 서관모 편, 앞의 책, 312쪽)

이는 단지 대중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중운동의 지도자들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선 과학주의적 태도가 더욱 광범했다. 예컨대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중요한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과학주의’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과학의 가장 중요한 모델로 간주되었던 것은 다윈의 생물학, 즉 진화론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맑스와 다윈의 비교는 끊임없이 행해졌으며, 심지어 다윈적인, 진화론적인 방식으로 맑스주의를 해석하는 태도들이 지배적이었다.이러한 태도에 의해 맑스의 사상은 그 당시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노동운동에서 진화론적으로 해석되고 그런 방식으로 수용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1880년대에 카우츠키가 당대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윈의 열렬한 찬양자였음을 상기해야만 한다...다윈주의가 자연과학과 동의어였다면 맑스주의는 사회과학과 동의어였다. 카우츠키가 이점에선 전혀 예외가 아니었음에 주목하자. 다윈과 맑스의 비교는 세기말 사회주의적 담론 속에서 끊임없이 행해졌다. 그것은 과학주의에 젖어있었으며, 자연과학에서 유래한 진보 및 진화의 사상과 일원론적 유물론에 지배되던 당시의 감성과 짐단심리를 반영했다.”G. Haupt, 앞의 책, 271-272쪽


그런데 ‘과학주의’가 단지 자신의 지식을 정당화하고 대중운동의 지도자들이나 대중들에 의해 수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야기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맑스와 엥겔스 자신조차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의 한계’였던 것 같다. 이런 태도는 특히 엥겔스에게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는 사유와 그 법칙에 대한 학문인 논리학과 변증법만이 철학의 영역에 남을 것이며, 다른 모든 것은 자연과 역사에 관한 실증과학으로 귀착되리라고 본다.F. Engels, Anti-Duhring, 김민석 역, ?반듀링론?, 새길, 1987, 33쪽.
 나아가 개념이 현실적인 사물의 모사요 반영인 한 “변증법은[논리학도 마찬가지겠지만] 외부세계와 인간 사유 두 영역의 일반적 운동법칙에 관한 과학으로 환원되었다”고 한다.F. Engels, Ludwig Feuerbach und die Ausgang der deutschen klassischen Philosopie, 양재혁 역, ?루트비히 포이어바하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돌베개, 1987, 64쪽.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자연변증법’을 자연의 운동법칙에 대한 과학으로서 체계화하려고 한다.F. Engels, Dialektik der Natur, 황태호 역, ?자연의 변증법?, 전진.

또한 ‘실천’을 통해 이론적 이해의 정확함을 확인하고, 철학적 망상에 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실천의 개념에 해당되는 것으로 실험과 산업을 들고 있다. 이로써 칸트적인 물 자체는 인식된 사물로, ‘우리에 대한 사물’로 전환된다고 한다.F. Engels,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34쪽.
 결국 실천은 ‘검증’ 개념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된다.
이런 점에서 ‘과학주의’는 맑스의 새로운 철학적 혁명을 포위하고 있던 이중의 벽이었던 셈이다. 근대적 문제설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이루는 이 벽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근대적 문제설정 너머에서 출발한 새로운 문제설정은 불가피하게 근대화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 마치 예전에 유명론이 로크에 의해 근대화되었듯이, 혹은 스피노자가 셸링이나 헤겔에 의해 근대화되었듯이.이에 대해서는 ?철학과 굴뚝청소부? 90-101쪽, 144-160쪽을 참조.

그 대표적인 징후는 물질과 의식이란 범주가 철학 전체를 좌우하는 중심적 위치를 회복하게 되고, 그 양자의 관계나 일치가능성이란 문제가 철학의 근본문제나 철학사의 중심축에 들어서게 되는 결과로 나타난다. 물론 이는 엥겔스의 최후의 입장(1888)이며, 맑스의 저작에선 전혀 없진 않다해도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과학주의’의 벽 안에서 엥겔스가 제시한 이 정식화는 이후 맑스주의를 철학적으로 체계화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맑스주의 철학에서 물질과 의식, 존재와 사유, 대상과 주체 범주가 복권되는 것은 바로 이 정식화를 통해서다. 그에 따라 그것이 자리잡고 있던 근대적 문제설정이란 지반 자체가 맑스주의를 포위한다. 결국 맑스주의 전체가 근대적 한계 안으로 회귀할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요약하면,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의 탈근대적 개념과 문제설정에도 불구하고 과학주의라는 이중의 벽에 갇혀 있었고, 그 안에서 사고하고 활동해야 했다. 따라서 그들의 이론은 탈근대적 개념에 기초해서 새로운 출발이 가능했던 것이었으나, 과학주의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해야 했으며, 결국은 과학주의의 벽을 끝내 돌파하지 못한다. 그리고 엥겔스는 그 벽 안에서 철학적 사고의 근본개념을 존재/사유, 물질/의식로 전환시킴으로써 근대적 설정 속으로 되돌아간다. 이처럼 ‘근대로의 회귀’의 기초가 과학주의를 통해 만들어진 셈이다.

(2)맑스주의 철학의 근대적 형태

엥겔스 이후 맑스주의의 철학적 근대화는 급속히 진행된다. 그 결과 맑스주의 내부에 두가지 철학적 흐름이 만들어진다. 하나는 ‘과학주의’의 직접적 효과 속에 있는 것이다. 이는 모든 지식이 실증과학으로 전화되리라는 엥겔스 명제의 직접적 연장선 상에 있는 것으로, ‘실증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흔히 ‘실천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실증주의에 대한 반대입장에 서 있다. 대개 과학주의 자체에 대해서도 반대하는데, 근대적인 ‘주체철학’의 일종이다. 이 양자는 각각 근대적인 과학주의와 근대적인 주체개념의 잔재에 기초한, 맑스주의 철학의 근대적 분할형태인 셈이다.

①실증주의
이는 근대적 맑스주의 철학의 지배적인 형태다. 그것은 엥겔스 이래 맑스주의 철학에서 대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전반적으로 실증과학에 대한 근대적 신뢰에 의해 추동되었다. 물질/의식, 존재/사유 간 관계와 더불어 모든 철학의 중심문제로 파악된 양자의 일치가능성(진리) 문제가 여기서 하나의 중심적인 회전축을 제공한다. 과학을 지향하며, 과학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지향 속에서, 맑스가 제시했던 새로운 실천 개념은 실험과 산업에 의해 대표되는 진리의 검증장치로 전화되었다. 그 도움을 받아 유물론은 반영론으로, 즉 사유가 존재를, 의식이 물질을 모사한다는 ‘근대적’ 인식론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엥겔스의 테제는 이후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소련 철학 전반에 주춧돌이 된다. 예컨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레닌은 엥겔스가 ?포이에르바하?에서 제시한 철학의 근본문제를 자신의 인식론적 작업의 근본적인 구획선으로 삼고 있다.V. Lenin, Materialism and the Empiro-criticism, 정광희 역,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아침, 1988, 102-103쪽.
 레닌에게서 반영론의 근대적 형태는 더욱 강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레닌은 인식론으로 파악된 유물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대상, 사물, 물체가 우리의 외부에, 그리고 우리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며, 우리의 감각은 외적 세계의 모사라는 점이다.”같은 책, 107쪽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자연을 반영하는 의식과 의식에 반영되는 자연의 조응이다.”같은 책, 143쪽.

따라서 그의 진리 개념이 이러한 출발점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에 따르면, “대상적 진리란 사유에 의해 참되게 반영된 대상(물자체)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같은 책, 108쪽.
 “우리의 감각을 외적 세계의 모사로서 간주하는 것, 객관적 진리를 승인하는 것, 유물론적 인식론의 입장에 서는 것--이것은 모두 동일한 것이다.”같은 책, 136쪽.
 “객관적 진리를 승인하는 것, 즉 인간 또는 인류에 의존하지 않는 진리를 승인하는 것는 어떻든 간에 절대적 진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같은 책, 138쪽.
 “인간의 사유는 본질적으로 상대적 진리의 총합인 절대적 진리를 우리에게 줄 수 있고 또 주는 것이다. 과학도 그 발전단계마다 절대적 진리의 총합에 진리의 새로운 사소한 진리를 첨가한다. 그러나 각 과학적 명제의 진리성의 한계는 상대적이다. 즉 인식의 성장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같은 책, 140-141쪽.

레닌의 실천개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우리의 실천이 증명하는 것만이 유일한, 궁극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인 것이다.같은 책, 149쪽
 실천은 “인식론에서의 실천이라는 기준”이란 제목 아래 이론의 객관적 진리성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상정되어 있다.
결국 레닌은 물질/의식 혹은 주체/객체의 동일성이란 문제가 야기하는 딜레마를 ‘무시’하고 있다. “현상과 물자체 사이에는 어떠한 원칙적 차이도 없고, 또 있을 수도 없다. 유일한 차이는 알려진 것과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 뿐이다.”같은 책, 106쪽.

다른 한편 스탈린 시대에 그 기초가 확고히 마련된, 그리고 그의 사후 최근까지도 지속된 철학교과서의 체계 역시 이와 동일선 상에 있다. 여기서는 두가지 문제를 세계의 본성/본질에 대한 문제와 세계의 인식가능성에 관한 문제라고 요약함으로써 그 특징을 분명히 정식화한다.F. Konstatinov (ed.), Fundamentals of Marxist-Leninist Philosophy, 편집부 역, ?철학의 기초 이론?, 두레, 1988, 16- 20쪽.
 또한 “진리와 허위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철학은 생각하기 어렵다. 인식론적 문제는 그 초점으로 진리에 수렴해간다...인식의 목적은 진리고,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맑스주의에서는) 누구나 승인하는 바”라고 한다.Kopnin, ?맑스주의 인식론?, 이성과 현실, 133-134쪽.

이러한 입장은 대상이나 주체를 실천으로 파악하던 맑스의 입론을 물질과 의식이란 근대적 범주로 되돌려놓는다. 그리고 현실성, 힘, 차안성으로서 파악되던 진리를 대상과 일치하는 지식이라는 전형적인 근대적 개념으로 회귀시킨다. 이때 감성적 활동은 단지 대상을 모사하고 검증하는 중립적 장치로 간주된다. 따라서 실천 개념은 대상, 현실, 감성과의 관련성을 상실한 채 실증주의적 개념으로 되돌아간다. 요컨대 반영론이라 불리는 인식론은 극히 근대적인 유물론의 다른 이름이다.
물론 이런 문제설정에서 대상과 인식이 일치하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런 점에서 근대적 딜레마까지 함께 싸안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을 딜레마로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치가능성은 실험과 과학이 보증해주리라는 결론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②실천 철학
이는 근대적인 맑스주의 철학에서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것인데, 실증주의에 대한 반대물이면서 동시에 전체적으로는 그 보충물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물질/의식이라는 실증주의적 짝보다는 실천적 주체와 그 대상이란 짝을 기초로 삼고 있다. 논자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개 실천을 주체로서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로 간주한다. 그리고 실천은 대개 목적의식적이고 의식적인 인간의 활동을 뜻한다.
이런 입장을 가장 명확하게 하는 것은 두브체크가 주도한 체코 자유화 운동의 철학자 코지크다. 그에 따르면

“유물론 철학에서 실천이라는 문제는...다음과 같은 철학적 물음에 대한 철학적 대답으로서 형성된다.--인간은 누구인가? 사회-인간적 현실은 무엇이며 이 현실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실천이라는 개념에서 사회-인간적 현실은 주어진 것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즉 인간 존재의 형성인 동시에 그 특수한 형태로서 나타난다. 실천은 인간 존재의 영역이다.”K. Kosik, Die Dialektik des Konkreten: eine Studie zur Problematik des Manschen und der Welt, 박정호 역, ?구체성의 변증법?, 거름, 1985, 183-184쪽.


따라서 실천은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는 어떤 것이고, 사회-인간적 현실을 형성하는 적극적 요인이며, 이로서 인간은 세계의 통일성을 생산해낸다. 이 속에서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구별이 일어난다.같은 책, 184-185쪽.
 “실천이란 인간을 대상화하고 자연을 지배함과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다”같은 책, 187쪽.

루카치 역시 ?역사와 계급의식?의 핵심개념을 ‘실천’이라고 말한다.G. Lukacs, Geschichte und Klassenbewußtsein, ?1967년 서문?, 박정호 역, ?역사와 계급의식?, 거름, 1986, 19쪽.
 이는 정관적인 부르주아적 사유를 극복하는 요인으로서 고려된 것이다. 그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대상과 주체 간의 근대적 분리가 야기하는 문제점이다. 그는 인식의 주체이자 객체인 계급을 통해, 그 계급의 실천을 통해 대상과 주체의 분리는 극복되며, 이로써 총체성의 이념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같은 책, 57쪽.
 이러한 위치를 갖는 유일한 게급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다.같은 책, 87쪽.
 물론 여기서 이 주체가 스스로를 인식하고 의식화되는 것(계급의식)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실증주의적 인식론에 대한 비판을 자연과학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즉 총체성을 갖지 못한채 단순히 나열된 사실들 역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며, 주체와 무관한 객관적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같은 책, 61쪽.
 그리고 엥겔스의 실증주의적 태도가 “역사과정에서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상호작용을 방법론적 고찰의 중심에 끌어넣기는 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그렇게 되면 ‘형이상학’과의 차이가 없어지게 된다. 즉 모든 ‘형이상학적’ 고찰에서는 고찰의 객체나 대상이 건드려지지 않고 변화되지 않은 채 있어야만 하고, 따라서 고찰 자체가 단순한 관조에 머무르며 실천적으로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같은 책, 58쪽.
 결국 이런 식으로는 칸트적 물 자체에 대해 종지부를 찍는게 불가능하다는 것(근대철학의 딜레마)을 루카치는 1967년의 자기비판적 ?서문?에서도 계속 언급하고 있다.같은 책, 21쪽.

요컨대 루카치로선 주/객의 통일과 총체성,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과정으로서 실천을 자기 사상의 중심에 두고 있으며, 이것이 실증주의적인 주/객 분리(정확하게는 물질/의식, 존재/의식의 이분법)가 야기하는 딜레마를 겨냥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코지크과 루카치의 적지 않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실천철학’이란 하나의 범주로 포괄할 수 있게해주는 요소인 셈이다.
이런 특징은 맑스주의를 ‘실천철학’이라고 명명하는 그람시에게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그는 실천철학을 철학과 정치, 사유와 행동의 동일성 또는 균형으로 파악한다. 즉 그것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관한 이해를 의미하며, 이런 점에서 철학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다.A. Gramsci, Prison Notebooks, 이상훈 역, ?옥중수고?, II, 거름, 1993, 196쪽.
 따라서 철학은 인간학과 동일시된다.같은 책, 201쪽.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과연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며 또 스스로를 만들 수 있으며, 나아가 자신의 삶을 창조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하나의 과정으로, 더 엄밀히 말해 스스로의 행위[실천]의 과정으로 보고자 한다...그 질문은 곧 인간의 의지와 구체적 활동이 스스로를 창조하고 또 인간이 살아갈 삶을 창조하는데서 어떤 중요성을 갖는가 하는 질문이 아닐까?”같은 책, 196-197쪽.


즉 인간이 자신의 삶과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과정으로서 실천이 그의 사고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시켜주는 특징이다.(이런 의미에서 그는 ‘유적 인간’이란 말을 쓴다.같은 책, 199쪽.
 결국 철학과 정치를 통일시키며 사유와 행동을 통일시키는 인간의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과정을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인간 자체를 특징짓는 존재론적 특징으로서 실천이 위치지워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람시 역시 자연과학을 모델로 하는 실증주의적 과학 개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같은 책, 308쪽.
 그는 부하린을 겨냥하여 비판하는데, 더불어 ‘외부 세계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실재는 오직 인간과 관련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생성이라고 본다.같은 책, 317쪽.
 즉 실증주의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그람시는 이어서 “실천철학에 대한 루카치 교수의 견해를 연구해아 한다”는 노트를 남겨두고 있다. 물론 그는 자연과 인간의 이원론에 대한 반대를 전제로 달고 있지만(같은 책, 319쪽).(그러나 루카치가 그런 이원론을 취한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것이라고 편집자는 주를 달아놓고 있다.)

요컨대 실천철학이라고 묶일 수 있는 철학적 흐름은 물질, 존재, 혹은 (정적인) 객체에서 출발하는 실증주의와 반대로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역할을 하는 주체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주체로서 인간이, 혹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갖는 존재론적 특징(본질적 특징)을 실천으로서 파악한다. 실천 개념을 통해 주체와 객체는 통일되고, 이로써 루카치가 명확히 지적하듯이 칸트적 물 자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형이상학적 유물론’(그람시)의 딜레마를 넘어서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설정 자체가 보여주듯이 대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대적 질문에서 이들 역시 출발하고 있으며, 주체는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으로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주체철학에 확고하게 서 있다.
이런 점에서 맑스주의의 상반되는 이 두 형태는 사실상 동일한 근대적 문제설정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실천’이라는 맑스의 탈근대적인 범주는 두 경우 모두 근대적 범주로 전환되어 버린다. 전자의 경우는 검증개념으로(실증주의), 후자의 경우는 주체의 존재론적 특징으로(주체의 형이상학). 결국 이 모두는 맑스주의가 근대적 문제설정 속으로 회귀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3)프롤테타리아트와 과학: 프롤레타리아적 진리를 향하여!

이 두가지 형태의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고를 근대적 문제설정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고유한 자신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는 자본주의적 계급관계 내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리잡고 있는 위치를 확인하는 문제기도 했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서 실증주의와 실천철학이라는 상반되는 두 입장은 동일한 지점으로 수렴되는 결과를 보여준다. 그것은 ‘계급적 진리’, ‘계급적 과학’, 혹은 ‘프롤레타리아적 진리’란 관념이다. 이는 두 입장이 사실은 상호 대칭적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각각이 이 지점에 이르는 길은 상이하다. 즉 ‘계급적 진리’에 이르는 ‘두가지 길’을 이들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①실증주의에서 계급적 진리로
우선 실증주의적 입장은 엥겔스와 레닌에 의해 복원된 ‘진리’란 개념에서 출발한다. 거기서 가장 근본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존재/의식, 혹은 물질/의식 개념과, 대상 자체와 일치하는 지식으로서 진리다. 따라서 맑스주의에서 지식은 당연히 ‘대상에 일치하는 지식’으로서, 진리로서 추구되어야 한다. 따라서 진리/허위의 대립이 지식을 다루는데 가장 근본적인 축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지식의 문제를 과학/이데올로기로서 다룬다. 그리고 이 개념의 짝은 진리/허위라는 개념의 짝과 대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진리는 계급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옳은 지식을 뜻한다. 반면 이데올로기는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라 구성되는데, 이로 인해 대상 자체를 올바로 반영하는게 아니라 왜곡하고 거짓되게 반영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으로 간주된다. 특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다. 즉 과학=진리, 이데올로기=허위다.
이제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테제는 “의식은 의식된 존재에 다름아니다”는 테제의 도식화된 해석을 통해, 의식이나 지식을 사회적 존재, 즉 계급관계에 환원하여 파악하는 환원론적 테제로 변환된다. 그 결과 모든 의식이나 관념은 계급적인 것으로 되고, 계급의식의 일부로서 간주된다. 그리고 이 계급의식은 한 사회에서의 계급관계, 나아가 계급적 이해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모든 관념이나 지식은 이데올로기며, 모든 이데올로기는 계급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모두 계급적 이해관게에 의해 왜곡된 ‘허위’에 불과하다.
여기서 이중의, 그러나 사실은 단일한 딜레마가 나타난다. a)과학 역시 하나의 지식이라면, 따라서 하나의 ‘상부구조’에 불과하다면, 진리를 의미하는 과학은 이제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혹은 이런 난감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계급적 관계의 효과에서 면제받은 진리의 영역을 예외로서 설정해주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과학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지식은 계급관게의 효과에서 자유로운가? 그것은 지식을 계급관계로 소급해서 파악하는 ‘유물론적’ 관점 자체의 (부분적) 무효화를 뜻하는 건 아닌가?
b)반면 과학이 진리여야 한다면, 따라서 계급적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되어선 안된다면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되는가? 이 역시 계급적 이해관계를 반영한다면, 진리라고 간주하기 힘든 것 아닌가? 그렇다면 스스로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맑스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허위)에 불과한 것인가?  그것은 과학으로서, 진리로서 연구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스스로의 지향에 비추어 정당화될 수 없는 게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만은 허위가 아니라는 예외조항을 둘 것인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진리(≠이데올로기)’, ‘과학=계급적 지식(=이데올로기)’이란 테제에 이어 세번째 차원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과학적 지식에 대한 계급투쟁의 효과’에 대한 맑스의 견해다.
맑스는 ?자본론? 1권 2판 후기에서, 계급투쟁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더욱 공개적이고 위협적인 형태를 취함에 따라 부르주아 경제학은 조종을 울리게 된다고 한다. 즉 “어떤 이론이 참인가 아닌가(ob dies oder jenes Theorem wahr sei)가 아니라 그것이 자본에 유익한가 유해한가, 편리한가 불편한가, 정치적으로 위험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가 문제로 되었다”는 것이다.K. Marx, Das Kapital, Bd. 1, 김영민 역, ?자본?, I-1, 이론과 실천, 12쪽.

이는 과학으로 성립한 지식이 계급투쟁의 효과 속에서 어떻게 변환되는지를 분석함으로써, ‘과학’이란 지식조차 상황이나 거기서의 기능, 효과와 관련됨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당한 테제는 진보적 계급과 반동적 계급의 대비 속에서 반동적 계급은 일관되게 진리를 추구할 수 없으며, 일관되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진보적 계급이라고 하는 테제로 변환된다. 즉 진보적 계급의 이데올로기=진리, 반동적 계급의 이데올로기=허위라는 테제가 성립된다.
물론 일관되게 진보적일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유일하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계급이다. 그렇다면 이중의 딜레마는 일시에 해결된다. 과학을 과학이 못되게 하고 어떤 지식을 진리가 못되게 하는 원천은 반동적인 계급의 이해관계기에, 일관되게 진보적인 계급이 있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게 자기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그런 계급이 있다면 과학은 가능하다. 이제 그것은 그 진보적인 계급이 자기 입장을 충실히 발전시킴으로써 충분히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가 과학과 동일한 ‘참된 의식’이다.
따라서 이율배반들이 해소된다! 과학은 계급적 이해관계와 무관한 객관적 진리지만, 이는 계급적 이해관계가 그것을 추구하는데 어떤 장애도 만들지 않는 일관된 진보적 계급에 의해서만 연구될 수 있다. 그런 유일한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는 과학, 진리를 자기의 계급적 이해 속에 포함하고 있기에,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과학으로서 추구되며, 따라서 더이상 허위의식이 아니라 참된 의식이요 진리다. “맑스주의는 전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기 때문에.”(레닌, ?맑스주의의 세 가지 구성 요소와 원천?)
이제 과학은 계급적인 것(상부구조)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것(계급적이지만은 않은 것)이란 ‘변증법적’ 위치를 얻게 된다. 진리 역시 그렇다. 그것은 대상 자체와 일치하는 지식인 한 객관적이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계급 외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진리추구를 계급적 이해관계로 하는 특수한 어떤 계급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내적인 것이며 주체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계급적 진리’라는, ‘프롤레타리아적 진리’라는 역설적 개념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과학=진리=계급적 지식’이란 역설적 테제의 의미인 셈이다.
결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서만 보편적 진리는 가능하며, 이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보편적 진리를 가능케 하는 보편적 계급이다. 이는 실천철학에서, 특히 루카치에 의해 제출된 보편적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 개념과 일치한다. 즉 실증주의는 근대적 진리 개념에서 출발하여, 환원론적인 역사유물론과 진보적 계급/반동적 계급의 진리이론을 통해 실천철학에서 가정하고 있는 보편주체라는 존재론적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에 도달한 것이다.

②실천철학에서 계급적 진리로
대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존재론을 구성하는 방향을 취하는 대부분의 실천철학은 인간이란 범주 속으로 모든 것을 몰아넣는다. 그런데 실천철학의 대표적인 입론을 제시하면서도 인간론보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논리를 명학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루카치의 저작이다. 즉 그에게서 실천철학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존재론’이다.
앞서 본 것처럼 그는 주체없는 지식, 주체없는 진리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헤겔적인 입장에서, 자연과학을 모델로 하는, 주체가 배제된 순수히 ‘객관적인’ 지식이란 불가능하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추구하는 실증주의적 입장을 물상화된 자본주의의 소산으로 간주한다.
그가 보기에 진리란 주체로부터 독립된 어떤 지식이 아니라, 반대로 주체와 객체의 통일성을 확보할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데 그것은 스스로가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인 특수한 존재가 나타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일이다. 즉 주관주의적 환상과 실증주의적 ‘사실’을 동시에 넘어서 진리로 승화되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주체와 객체가 통일된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해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과학에서) 진리를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계급이며, 진리의 존재론적 전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객체인 계급의 자기의식이 바로 진리다. 즉 진리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의식을 현실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당이라고 루카치는 본다. ‘계급적 진리’, ‘계급적 과학’이란 역설적 개념이 여기서는 오히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존재론적 개념을 통해서 출현한다. 이로써 실증주의와 실천철학의 대칭성이 드러난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몇가지 결과를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프롤레타리아트는 진리의 존재론적인 전제다. 그것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기에, 진리 혹은 과학을 위해선 프롤레타리아트 입장에 확고히 기초해야만 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적 인식을 통해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특수한 계급, 보편계급이다. 이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데카르트적 주체를 대신해 인식의 새로운 출발점으로서 정립된다. 즉 근대적 주체를 대신하는 인식의 출발점이 맑스주의적 개념을 통해 복원된 셈이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인식과 사고의 근저에 자리잡은 시원적 범주가 된다.
둘째, 진리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통해 가능한 계급적 진리며,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진리야말로 과학을 지향하는 모든 인식이 목표로 삼아야 할 지점이다. 이로써 근대적인 인식론의 목표지점이었던 ‘진리’ 역시 맑스주의적 변형을 거쳐서 새로이 복원된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대상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으나(목표에 도달하려면 참된 출발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다른 계급은 그러지 못한다.
셋째, 실증주의에게나 실천철학에게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진리를 담지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담지체가 바로 당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이해를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담보하고 있으며, 프롤레타이라트의 일관된 실천적 진보성과 이론적 관심을 대변한다. 따라서 당이 바로 계급적 진리에 이르는 길을 매개한다. 따라서 진리를 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보는, 그것을 앞서 사고할 수 있으며, 이론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실천적으로 확고하게 집행할 수 있는 당의 지도를 통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당이 참된 인식의 진정한 주체가 된다.
넷째, 그렇지만 근대철학자들을 고민하고 동요하게 했던 근대적 딜레마는 여기선 이미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한편에선 유물론은 인식이란 대상의 반영이라고 보는 테제로써 조직되며, 여기서 인식이 목표인 대상적 진리에 도달하는 데는 어떤 본질적 장애도 없다고 ‘가정된다’. 따라서 진리는 단번에 획득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지라도 언젠가는 도달가능한 것이며, 실천을 통해 검증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진리란 이런 뜻에서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의 통일로 간주된다. 다른 한편에선 계급적 진리란 주체이자 객체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의식이란 테제를 통해 해소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론적 본질이기에 오직 장애물에 의해서만 도달을 방해받는 ‘자명한 도달점’이다.
두 경우 공히 대상과 인식의 일치를 확인하는 문제는 애시당초 문제되지 않는다. 즉 일치는 이미 가능한 것으로 가정되고 전제된다. 이럼으로써 딜레마 자체는 거의 주목되지 않으며, 무시되고 지나쳐진다.
이럼으로써 a)계급의식이 진리인지 여부는 다만 가정되는데 머물고, 현재 ‘계급의식’이라고 간주되는 어떤 이론이나 관념이 정말 계급의식인지, 다른 의식과는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 것인지는 사실 알 수 없고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근거를 확보하지 못한 채 참됨이 가정된다.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보편계급적 출발점이 진리의 ‘보증자’로서 기능하는 듯이 보인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섬으로써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를 이미 확보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진리를 확보할 수 있는 안전하고 손쉬운 지반이 된다. 안이함과 자만, 그리고 독단과 교조의 시대가 이와 무관한 것일까?
b)한편 이미 확보된 지반으로 인해 몇가지 이론적 환원이 나타난다. 첫째, 모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으로, 프롤레타리아적 지식으로 환원된다. 둘째,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 지식은 모두 그 안전지대인 ‘맑스(레닌)주의’로, 즉 이미 진리로 간주되고 있는 기존의 지배적 형태의 맑스주의로 환원된다. 셋째, 그리고 이 계급의식이 바로 당에 의해 담지되는 것이라면, 맑스주의에 대한 해석을 비롯한 모든 문제가, 이미 진리로 간주되는 ‘당의 결정’으로 환원된다. 여기서 중앙위원회로, 또 거기서 지도자(수령)으로 나아가는데는 어떤 본질적 장애도 없는 것 같다.
인식되거나 말거나, 인정되거나 말거나 복원된 근대적 문제설정과 그 딜레마는 이처럼 자기 나름대로 작동한다. 이는 근대적 형태로 회귀한 맑스주의를 통해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철학적-정치적 효과를 미치게 된다.

(4)프롤레타리아적 주체‘형성’의 문제: 전위와 대중의 변증법

맑스주의 역사유물론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적 성격을 드러내고 그것을 상대화시켰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넘어서 새로운 사회를 창출하는 문제를 사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는 일차적으로 생산수단 소유관계의 변혁을 통해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을 통해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창출하는 문제였다.
다른 한편 이러한 변혁을 위해서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formation)되어야 했다. 이는 자본주의적 관계 속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염된’ 대중을 그 이데올로기로부터 끄집어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교육하고 의식화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당에 의해 지도되는 다양한 조직들로 ‘조직화’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요컨대 개개의 대중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으로 의식화하고, 이를 통해 그들을 전체 계급을 구성하는 통일적 조직으로 묶어세움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주체’는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 계급의식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대중들의 자생적 활동으로부터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 외부에서, 이론으로서, 과학으로서 추구되어야 하며, 목적의식적 실천을 통해 대중들 속으로 ‘도입’(좀더 강한 단어를 쓰면 ‘주입’)되어야 했다.
‘계급의식의 담지체’로서,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어세우는 통일적 조직으로서 당의 기능과 활동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정의되었다. 당이 이런 기능을 위해 대중들을 의식화시키고 조직하며 지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전위요, 선진적인 부분이다. 물론 전위로서의 당은 대중 속에서의 활동을 통해 대중들의 이해를 ‘좀더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으며, 대중적 실천을 통해 그 올바름을 검증하고 확인할 수 있다. 상호전제하며, 상호규정하는 이 대립적 부분들 간 관계가 ‘전위와 대중의 변증법’이다.
당은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반영하고 대변하는 조직이고, 이러한 계급적 이해를 대중에게 일깨우며(의식화), 이들을 하나로 묶어 통일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신경망이다. 즉 당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주체의 의식이요 머리다. 반면 대중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몸체며, 머리가 작동할 수 있는 전제고, 머리가 해야할 일을 규정하는 기초다.
그런데 이 모델 자체는 의식적 주체라는 근대적 개념의 확장을 통해 성립된 것이다. 즉 당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주체의 (자기)의식이며,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이해를 투명하고 통일적으로 반영한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계급적 진리를 투명하게 체현하고 있으며,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중심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매인 대중들, 자신의 이해조차 인식할 수 없는 대중들은 과학적인 이 계급의식, 이 계급적 이성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입론은 그 자체만으론 “사회를 선진적 부분과 후진적 부분으로 분할하는” 근대적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즉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 깨인 부분과 깨이지 못한 부분이란 계몽주의적 이분법. 그리고 여기서 이성적인 부분, 깨인 부분, 선진적인 부분의 중심성은 이미 처음부터 이분법 자체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위적 부분의 판단과 대중들의 판단이 서로 빗나갈 때 전자가 후자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아무 근거없는 부당한 것만은 아닌 셈이다. 이런 일들은 프랑스와 독일, 러시아의 혁명과정에서 무수히 나타났으며, 그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대개 정치적 직관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의 신뢰를 저버린’ 인민에 대해 비난을 퍼부은 동독공산당1953년 6월 17일 동베를린 노동자 봉기를 진압한 동독공산당은, 당과 정부를 실망시킨 인민을 비난하면서 이제 다시 당의 신뢰를 획득할 것을 촉구하는 전단을 뿌렸다. 이를 두고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풍자한다. “[그 전단에는]...인민들이 어리석게도/ 정부의 신뢰를 잃어버렸으니/ 그것은 오직 2배의 노동을 통해서만/ 되찾을 수 있다고 씌여져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하여 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해결방법>,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마당) 
 역시 전위로서의 이러한 자임에 근거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입론의 문제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더욱 체계화된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대중조직들은 당이란 전위의 판단과 실천을 대중들에게 전달해주는 ‘전도벨트’(스탈린)로 정의되고, 대중운동 자체는 전위적 결정의 올바름을 확인하고 지지하기 위한 시위로 전환된다. 교육하는 자와 교육받는 자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혁명적 실천’은 교육하는 자를 지지하는 동원운동으로 대체된 셈이다. 이 역시 근대적 맑스주의의 철학적-정치적 효과가 아닐까?


4.맑스의 철학적 공간

모든 이론에는 고유한 역사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그 이론이 아무리 일반적이고 초역사적인 형태로 정식화되었든 간에.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제시되는 철학적 사고조차 자신을 둘러싼 고유한 역사의 산물이다. 맑스주의 역시 그렇다. 아니, 스스로 역사적 개입을 지향하며, 거기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자 하는 것이 맑스주의 이론이기에 맑스주의는 더욱더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역사의 흔적으로서 이론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것이 갖는 일반성을 무화함을 의미하는 것은 또한 아니다. 즉 이론이란 시절이 달라지면 강물에 흘러가듯 무효화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론이 역사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역사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노력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은 언제나 일반적 형태로 제시되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이 양자 간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역사와 현실의 변화를 들어 이론 전체를 던져버리는 것에도, 반대로 이론의 일반성을 들어 변화와 무관하게 그것을 고집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변화된 역사를 통해서 기존 이론의 한계를 사고하고 새로운 사고의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사고의 요소를 통해서 이론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배적인 형태의 맑스주의에서 당연시되었던 것들, 따라서 우리 역시 당연시했던 것들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의문에 부치려고 했다. 그것은 당연시된 것들의 ‘근대성’을 통해서, 즉 맑스주의를 지배하고 있는 근대적 사고의 흔적들을 통해서 맑스주의의 한계를 사고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근대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맑스의 노력을 주목하려고 했다.
그러나 맑스가 만들어낸 탈근대적 사고의 이 공간은 곧바로 맑스의 시대를 지배한 역사 속에서, 특히 과학주의라는 이중의 장벽에 갇혀 축소되고 무화되었다. 역사는 이처럼 강력하게 새로운 사고와 이론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는 것이다! 근대적인 형태를 취해야만 했던 탈근대적 사고의 딜레마. 바로 이것이 맑스의 새로운 철학이 다시금 근대로 회귀토록 한 셈이다. 이것은 역사에 개입하려는 사상의 불가피한 선택이다.
근대의 장벽을 깨야하는 시기에, 적어도 그것을 깰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시기에 근대성에 안주함으로써 비극의 본 막(幕)은 시작된다. 근대적 형태의 맑스주의는 고착화되고 체계화되어 ‘정통’이란 공식성을 갖고 확산되었다. 맑스주의가 역사의 흔적을 지워버림으로써 역사에 개입하려 하는 순간, 그것은 새로운 차원의 혁명적 사고조차 역사적 흔적에 의해 지워버릴 수 있었던 용기있는 사상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맑스의 철학적 혁명이 창출한 탈근대적 사고의 공간에 들어가 공간 자체를 확장하고 그 속에서 맑스주의 자체와 역사까지도 다시 사고할 수 있는 이론적 요소를 찾아내는 작업은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맑스의 정신에 따라 근대적 한계를 넘어서 맑스주의를 밀고 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는 맑스의 철학적 혁명을 통해 마련된 지반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어쩌면 ‘다시 맑스로’ 회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맑스가 제시한 어떤 ‘과학적’ 명제들의 집합이 아니라, 다만 그가 마련한 ‘공간’일 뿐이란 점에서 단순한 회귀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근대 너머를 사고할 수 있는 그 공간만으로 근대성의 경계를 넘어서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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