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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먼 길을 움직인다 [맹문재]

by Casey,Riley 2023.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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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길을 움직인다
맹문재


    제1부 집게의 다문 입

    힘
  힘있는 자들이 이 계절을 화려하게 사는 동안
  힘없는 자들은 모든 계절의 추억을 안고 죽은 듯이 살아간다

    면도
  푸른 하늘 보기 위해
  한 이틀이나 사흘마다 하는
  수염 깎기

  -오빠, 엄마가 요즘 너무 지쳤어. 돈 얘기를 할 수 없어. 보충수업비 좀 보내줘.
  막내동생의 편지를 보고
  -난, 친구 이상으로는 너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
  떠난 내 첫사랑을 보고
  -죽은 사람만 그저 불쌍하게 된 거야.
  보상비가 현실 대상이 된 한 동료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행복을 망각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막힌 진리를 보고

  보고, 보고, 보고, 자란 나의 수염들
  오늘 아침 조심스레 자르면서도
  어느 하나 자랑스럽게 고르지 못했다
  거울 속에서
  다시 거울을 보려는
  나의 수염 깎기여

    수평선
  수평선은 바르다
  곧은 자세이다
  곧은 자세로 힘을 내고 있다
  옳은 힘을 내고 있다

  걸러낼 것은 걸러내고
  지울 것은 지우고
  밀어낼 것은 밀어내고 있다

  곧은 자세만이 소리를 낸다
  온몸으로 외쳐 적을 내몬다

  곧은 자세만이 포용한다
  큰 가슴으로 적을 안는다

  수평선은 바르다
  곧은 자세이다
  곧은 소리를 하고 있다

    발을 자꾸 움직인다
  X선 촬영 대기 의자에 않아
  나의 발을 내려다본다
  정사각형 타일 안에 초라하게 갇힌
  버스 노선을 익히고 전화번호를 외우며
  제철소의 공단 거리를 내달리던 발
  결국 움츠려든 채
  팔에 꽂힌 링거액처럼 눈물 방울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아직은 살아야 해, 한쪽 발을 들고 천천히
  옆으로 옮긴다
  여전히 에워싸는 높은 담벼락
  발을 자꾸 움직인다
  나를 가두는 이력서의 장벽을 넘어뜨리기 위해
  양 발 모두를 흔든다
  
    집게의 다문 입
  가시는 겁을 주어 자신을 지키지만
  집게는 오히려 적을 안는다
  가시는 공포의 침을 무기로 가졌지만
  집게는 둔한 몸뿐이다
  무기를 가진 가시는 여유가 있어
  고민도 긴장도 없이 살아간다
  한순간만 소홀해도 무너지는 운명을
  집게는 그러나 깨닫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잃었을 때
  찬밥도 못 얻는 신세를 두려워하는
  집게의 저 움츠린 자세
  가시를 안을 날이 그래도 차 있는
  그 다문 입

    어깨의 힘
  어깨는 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어깨에 힘이 없군, 하면
  풀이 죽거나 자신이 없는 상태를 일컫고
  어깨에 힘 들어갔군, 하면
  거만하거나 오만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어깨의 힘은 어깨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팔다리의 보조와 허리 받침과
  호흡 조절이 필요하고 또
  올바른 시선과 적당한 보폭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그러나
  이 사실을 잊고 있다
  하루 종일 벽돌을 지고 각목을 메고
  연탄을 배달하고 대합실을 청소하는 이들은
  몸으로 익혀 아는 수가 많지만
  대학 문을 나오고 시대를 고민한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잊고 있는 것이다
  신문이나 유인물을 읽는 동안에도
  한잔하면서 또는
  유행가를 부르고 토큰을 사는 동안에도 명심해야 할
  진정한 어깨의 힘

    정전
  그는 갑자기 온다
  살맛 안 나는 노총각이 사랑을 나누는 동안
  아무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연다
  그는 당당하다
  아무리 미끄러운 계단이라도
  식칼이 도마에 겁나게 박혀 있는 정육점이라도
  주춤거리지 않고 들이닥친다
  그는 자유롭다
  음식이 당기는 때나
  추운 계절이나
  소매가 헐은 옷을 걸치고도 눈치보지 않는다
  그의 눈은 크다
  비밀장부가 놓인 은행 구석이나
  생선 내장이 썩어가는 시장 골목이나
  숨가쁘게 돌아가는 노름판 돈까지 볼 수 있는
  새카만 눈을 가졌다
  그는 회초리를 들고 오기도 한다
  그의 앞에서는 배웠다는 사람도 온순해야 하고
  힘쓰는 이도 겸손해야 하고
  돈맛을 아는 이도 입을 열지 못한다
  그는 화가 나면 하루 종일 머무르기도 한다

    마중을 간다
  눈 위의 우아한 달빛 밟으며
  전철역으로 간다
  아내가 야근을 하고 돌아오는 시간이다
  집에는 협심증에 걸린 아버지가
  진찰을 받기 위해 시골서 올라와 계신다
  청량리역에 내려 전철을 타러 오다가
  그만 아버지가 넘어졌다고 집에 들어서며
  어머니는 알리셨다 넘어져도 사람이 하도 많아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고 덧붙이셨다
  예전 같으면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버럭 성을 내셨을 아버지, 그저 웃으셨다
  
  눈 위의 달빛을 당당하게 또는
  딴전을 피우는 여유로 밟은 기억이
  내게는 없다 지게를 지거나 쟁기질하거나
  장보러 가는 아버지의 구부린
  그 모습이었다
  시력이 나쁜 아내 역시 우리 집 유전처럼
  달빛을 엉금엉금 긴다
  나는 약속을 했지만 아직
  아내의 움츠림을 못 풀어주고 있다
  한때 팔힘을 자신했고
  열정을 자부했고 머리도 믿었는데... 그저
  눈 위의 달빛을 겁내며
  지켜야 할 그 우선의 약속으로
  마중을 간다

    웃으라구?
  좀 웃어요, 웃어보세요, 웃으라니까요. 오늘도
  언론 속의 시민들은 내게 웃으라고 한다.
  웃으라구?
  그들은 노동자인 나보다 고상해서
  하루의 주식 시세와 외국 여행의 경험 그리고
  레크리에이션과 피서의 유용성을 가르치며
  웃으라고 한다. 웃지 않으면
  소외자이고 중산층이 못 되고 심지어
  한 많은 사람이라고 비꼬며 종용한다.
  그들의 요구를 받을 때마다 겁이 나지만 솔직히
  억울함을 숨길 수 없다.
  나는 시민이기에 앞서 내 어머니의 아들이고
  내 친구의 친구이자 내 작업장의 동료여서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억울함에 책임져야 할 자도
  나인 것이다. 내게 위로와
  충고를 해주려는 언론 속의 시민들이여
  진정 책임질 수 있는가? 아주 합리적으로
  그대들의 손해는 보지 않으며
  어떻게 해주겠는가?
  갤럽 조사의 예상대로 춘천 지구의 보궐선거에서
  여당의 후보가 당선된 오늘
  나는 그들이 착각하도록 동감의 미소를 보인다.
  그는 언론 속의 시민후보였을 뿐
  그런데? 담뱃불을 붙이며
  다시 생각한다. 나 보고 웃으라구?

    무심한 일간지
  저녁 노을 아래에서
  개구리가 살해되었다
  
  죽은 개구리를
  재미있게 내려보는 아이들

  밉지 않던 놀이친구를 죽이느라
  작은 손마다 비린내가 뱄다
  
  봄바람이 논둑을 넘어가고
  보름달이 뜬다

    개미 같은
  가락시장의 저녁 바람은 심하다
  어물 궤짝이 자리 잡지 못한 난전에는
  화덕을 피우는 아낙들로 붐빈다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정지한 지 오래
  차나 사람이나 제각기 알아서 지나가야 한다
  회사원들은 꺼진 신호등 아래에서 퇴근을 기다리고
  학생들은 주머니 속 토큰을 쩔렁거리며
  발을 구른다
  버스는 여전히 오지 않고
  달리는 차들에 횡단보도가 점점 까맣게 지워진다
  그때 한 할머니
  잘록한 허리에 리어카를 매달고
  차 사이를 빠져나간다 위험한 허리에는
  라면 박스를 비롯한 고물들이
  잔뜩 실려 있다
  언제 밟힐지도 모르면서
  저보다 몇 배나 큰 식량을 옮기는 아, 개미 같은

    반성
  전태일(노동자, 1970년 11월 13일, 열악한 노동현실 고발하며 분신)
  김진수(노동자, 1971년 5월 16일,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구사대에 의해 사망)
  김경숙(노동자, 1979년 8월 11일, 신민당사 농성 강제 해산 도중 사망)
  박영지(노동자, 1986년 3월 17일, "근로기준법 및 노동3권 보장하라"고 외치며 분신)
  정낙현(노동자, 1988년 노동운동중 목매 자살)
  문송면(노동자, 1988년 7월 2일, 산업재해-수은중독-로 사망)
  성완희(노동자, 1988년 7월 9일, 동료의 복직투쟁 중 회사측의 탄압에 맞서 분신)
  송철순(노동자, 1988년 7월 15일, 노조사무장으로 파업 도중 현수막을 걸다가 추락 사망)
  김종수(노동자, 1989년 5월 4일, 파업중 "무노동 무임금 철폐" 외치며 분신)
  조정식(노동자, 1989년 5월 24일, 노동운동가로 산업 재해로 사망)
  최종길(교수, 1973년,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사)
  박종철(학생,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사,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됨)
  박래전(학생, 1988년 6월 6일, "광주학살 원흉 처단 군사파쇼 타도" 외치며 분신)
  마석 모란공원의 안내판에 나를 비춘다
  너도 저럴 수 있느냐?

    당기시오, 그 걸
  산타페, 흑석동 골목에 있는
  그곳에 가면
  그곳에서
  커피를 좀 마시다가
  카운터 앞을 지나 한쪽으로 돌아서면
  "당기시오"
  그 손짓이 있다
  예쁜 손가락의 아가씨가 썼을 것 같은
  베이지색 바탕에
  보라색 글씨

  손짓 따라 당기고 안으로 들어가
  오줌 한줄기 깔기며
  당겨야 하나?
  말아야 되나?
  
  "당기시오"
  그 손짓 따라
  나는 한 여인을 떠나보냈고
  이사를 결정했고 전기밥통을 샀고
  동료의 부음을 슬퍼했고 또
  노조 얘기를 했고...
  
  스물아홉 이 구름 낀 저녁
  그 걸
  당겨야 하나? 마나?

    바퀴
  바퀴는 정직하다
  어느 바퀴살 하나 꾀부리지 않고
  있는 힘 다해 제 길을 간다
  진창이 있어도
  목 노리는 칼날이 있어도
  두려워 않고 간다
  
  굴러가는 바퀴를 보고 있으면
  주춤거린 나의 세월도
  용서된다
  바퀴처럼 향할 용기가 아직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제2부 무직을 반성한다

    적
  목수의 적은 바로 못이다
  밥을 주는 손이지만 일단 변하면
  인정사정도 없이 살을 뚫는다
  의리 있는 목수들은 그러나
  피 흘리도록 찔리지 않고
  잘 사귀어 오히려 동지가 된다
  찔릴지라도 욕하거나 돌아서지 않고
  자신을 탓하며 믿음을 지킨다
  한순간 한순간을 몰두하며
  망치질하는 공사판의 목수들을
  누가 못의 적이라 하겠는가

    사십구일재
  산마루의 억새들도
  절을 한다
  
  언 살 터지게 살던
  제철소의 용접공

  떠날 때 못다 한 땜질
  마저 하러 오는가
  
  안전모 쓴 얼굴로 이 빗속을
  불똥처럼 날아와 박히는

  사람아
  *포항제철 1열연공장에 근무하던 강정민 형께 드림.
  
    문씨의 조퇴
  염병할 노인네, 하필 왜 이때 죽는디...
  공사판 사무실서 전화를 받고 온 문씨
  못주머니를 내던진다.
  잠시 일손을 놓고 모여 우리는
  떠다 놓은 물을 한 대접씩 마신다.
  물통에 담긴 하늘로
  퍼져 나가는 담배 연기.
  
  글씨, 이 바쁜디...
  언제 나가능가?
  3일장잉께 모레가 되겄지.
  부조 얘기도 공가 사항도 다시 침묵이고
  담배 연기만 햇살 속으로 타들어간다.
  
  그럼, 수고들 하더라고. 잉?
  그려, 잘 다녀오이라.
  담뱃불을 비벼 끄고 일어난 문씨
  시멘트 포대만하게 멀어져간다.
  허든 일 마저 허구 저녁에 의논하제?
  야, 그리야제.
  조장 양씨를 따라 나도 못주머니를 찬다.
  염병할...

    그는 날개를 그들에게 줬다
  강원도 홍천부터 경기도 용인까지
  네 명의 자식과 아내를 데리고 목장에서 공사판까지
  안해본 일이 없는 그였다 살아오는 동안
  그는 날개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몸 아낄 필요도
  겁낼 필요도 없었고 전세가 아닌 월세를
  고집할 수 있었다 집주인이 입을 팔아도 이집 저집을
  수월하게 날아다니면 되었던 것이다 그가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으로 날아온 지 3년째
  마을이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는 일이
  일어났다 날개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어두운 얼굴로
  하나 둘 떠나가야 했지만 그는
  큰딸의 고등학교 졸업이 얼마 안 남았고
  해온 일자리가 아쉬워 몇 계절 더
  눌러 있기로 했다 그가 잔류를 결정하자
  떠나지 못한 이웃들은 좋아했지만
  한때 그를 존경했던 동사무소와 기관들은 등을 돌렸다
  각종 세금과 전기세 하다못해 텔레비전 수신료까지 꾸며서
  촉박하게 통보했고 어느 저녁부터는
  전기와 수도와 전화선까지 일방적으로 끊었다
  그는 단박에 동사무소를 찾아가려고 했지만
  맡은 일이 너무 밀려 다 끝낼 때까지 미루기로 하고
  대신 철탑을 쌓고 날아올라가 당분간
  달빛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가 이웃까지 데리고
  철탑 위로 올라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날개를 가지지 못한 경찰과 백골단과 철거깡패들이
  잔뜩 시기하고 모여들어
  욕을 하고 돌팔매질을 해댔다 그러나 그들은
  날개가 없었기 때문에 소용없었다 그러자
  야밤을 틈타 철탑 아래에 불을 놓았고
  사람들의 눈 의식해 불을 끄는 척하면서
  오히려 그에게 물을 쏘아댔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자던 그는
  철탑 아래의 소란이 궁금해 위층으로 올라가
  살피고자 했다 그런데
  잠이 덜 깨 날개의 무게를 깜박 잊은 데다가
  소방 호스에서 튄 물이 계단을 미끄럽게 할 줄 미처 몰라
  그만 추락하고 말았다 18m의 높이였다 그는
  
  땅에 떨어지자 마자 날개를 펴려고 했지만
  불행하게도 날개는 금이 가 있었다
  수리에는 바늘과 실이 우선 필요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불을 놓았던 떼거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짓밟아대는 바람에 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라도 날아오를까 생각했지만
  쉰 살이 되도록 실컷 날았다고 여겨 미련을 버리고
  애원하는 그들에게 흔쾌히
  날개를 떼어주었다
  겨울밤도 군화발도 조용해졌다
  날개가 없어도 편안함을 느낀 그는 한잠 더 자기로 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
  개 패듯하는 바람에 
  온몸이 뒤틀리고
  등뼈까지 바숴지며
  하수구로 처박히네
  야적장에서도
  공사판에서도
  소리 한번 못 지르고
  죽어가네
  죽어가면서 억울하여
  하얗게 달라붙네

    무직을 반성한다
  식구들 모두 일터로 나가 텅 빈집
  아침 한 그룻 대충 먹는다
  현관에는 신문이 쌓여 있다
  신문을 탓하기에는 너무 지쳐
  절대로 시간을 내서 보지 않는다
  귀를 닫을수록 마음 편안하다고
  억지로 길러온 지 오래
  
  그런데 부엌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
  다시 수저를 든다
  또 들린다
  소리 나는 쪽으로 일어서는 순간
  입고 있는 청바지의 부스럭거리는 소리, 의자
  끌리는 소리, 고개 돌리는 소리...

  화장실에서, 창가의 장기판에서, 돼지
  저금통에서, 텔레비전에서, 벽에 걸린 달력에서,
  내 유년에 찾던 쌀밥에서...
  
  서른을 넘기는 아침 
  무직을 반성한다

    칼질
  탁 탁 탁
  내 게으른 발바닥은 오늘 새벽에도
  매를 맞고 있다
  자식의 새벽 출근을 위해
  도마 위에서 떨고 있을 어머니의 시린 손
  뜨뜻한 국을 끓이시겠지
  배곯지 마라
  안전사고 당하지 마라
  빌고 계시겠지
  
  이불 속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작업복 명찰을 읽는다
  저 칼질 속에서 자라온
  내 이름 석 자여
  
  봉창으로 들어오는 바람도 춥지 않다
  정말 춥지 않아요
  탁 탁 탁
  어머니의 시퍼런 칼질에
  겨울 바람은 잘리고 있다

    버들 아래를 지나며
  거꾸로 사는 의미를 알았는가
  이 공단길을 걸어가서 부러지고 째지고 심지어는
  영원히 못 돌아온 작업복 명찰들
  나는 세월이란 망각에 젖어
  미루나무 잎이나 슬쩍 흔드는 여린 바람이었다
  제철소의 확실한 증명 이곳에서
  절여진 그들의 꿈 함께 펴주지 못하고
  소주병 뚜껑이나 익숙하게 따며
  해진 목장갑처럼 끼워져 왔을 뿐이다
  보도 블록 사이로 꽂히는 햇살이
  조각난 간밤의 꿈을 다시 꿰매느라
  번뜩이는 손놀림을 한다
  반역할 수 없는 목을 내밀고
  황사바람 속에서도 철조망 담장을 넘는
  아침 햇살의 저 눈빛들
  나의 힘줄은 반란처럼 뛴다
  언뜻언뜻 떠오르는 작업복 명찰들
  거꾸로 서서 새봄을 맞는 이 공단길 버들처럼
  나는 확인하며 출근을 한다
  
    개새끼
  개새끼라 자꾸 하지 말어유
  지들도 고향 가문 사랑받는 자식이여유
  누가 뭐라캤나, 엉?
  다 느들 잘되라는 소리 아니가, 이 개새끼덜아...
  조장 전씨는
  술기운을 못 이기고 옆으로 쓰러진다
  대꾸를 하던 영팔이도 말이 없고
  극성스런 모기만큼이나
  텔레비전의 여자만 지껄여댄다
  이 드러븐 시상...돈 벌어야 혀...나맨치 장가도 못 가지 마꼬
  이...개새끼덜아...
  전씨가 잠꼬대처럼 다시 지껄인다
  개구리 울음이 막사로 들어와
  전등을 핼쑥하게 켜는 밤
  모두들 말없이 담배만 빤다
  텔레비전의 사장집 딸이
  큰소리를 지르며 삼각관계를 열내고
  모기들이 점점 뜯으려 드는
  공친 날 이 여름 밤, 캄캄한 침묵
  
    천 원에 대한 명상
  떨어질 듯 떨어질 듯하면서도
  용케 날아오르는 저 날개짓
  
  닷새 동안의 비로 공쳐
  식당집 눈치를 보며 외상 밥을 먹고 있는
  작업 대기자의 희망
  
  저것들이 천 원짜리 지폐라도 된다면...
  
  나뭇잎들이 야윈 등을 연신 내보이는 오후
  비가 올 것만 같은 공사판 하늘에서
  
  잠자리 군단은 아찔하다
  
    쇠독
  공사판에서 몇 차례 밟은 뒤
  깨달은 일이지
  못에 찔린 발이 아프다고 누우면
  사흘이고 열흘이고 좋다는 것을
  찔린 즉시 피를 배고 자꾸 내딛어야
  쇠독이 빠져 하루라도 당겨 낫는다는 것을
  세상살이에서 어쩌다 찔려
  쓰라리고 아프다고 누우면 결국
  자신만 초라하지 않는가
  당찬 걸음이 되기 위해
  한 번쯤 밟을 필요는 있지만
  밟았을 땐 오기를 가져야 하지
  다시는 안 찔리겠다고
  어서 걸어야 한다고
  
    병아리 고르기
  가격표를 단 병아리들이 이 봄날
  시장바닥에서 바둥대고 있다
  어느 놈을 집어야
  토실하게 자랄까? 저놈은
  좋은 씨로 보이지만 너무 비싸
  요놈도 그렇고
  이놈은 값이 맞는데
  괜찮을까?
  이쪽 놈은 할머니께 필요할 텐데
  어머니께는 저쪽 놈이 맞을 것 같고
  그 옆의 목장갑도 통조림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느 놈을 집어야 정말
  좋은 알 낳을까?
  
  창사 기념으로 나온 물품교환권을 들고
  나는 낡은 잠바처럼 흔들리고 있다

    반성
  힘들었던 하루를 알리는 저녁
  어질러진 식기들
  파리 한 마리 그 옆에
  달라붙어 있다
  
  반란으로 뱉어야 할 나의 말도
  저렇게
  
    권리
  직행버스로 한 시간 정도의 출퇴근길
  오늘은 훨씬 지났는데
  절반도 못 가고 있다
  눈은 자꾸 내리는데
  앉아서 졸던 사람들은 눈을 뜨고 하품을 하며
  제기랄, 아직도 여기야
  빌려 준 돈을 떼인 것처럼 투덜댄다
  사람들이 짜증을 내는 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다
  텔레비전 저녁 뉴스를 놓쳐서도
  중요한 약속을 어겨서도
  아니다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권리로 못 챙기고 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누구는 죽고
  그의 가족은 울다가 까무러쳐 있을
  이 겨울날 저녁
  눈은 여전하다 사람들의 권리처럼
  
    손목시계
  지도 한 장 들고 떠났지요
  산 넘고 물살 센 개울을 건너
  가고 또 가서 터를 잡았지요
  등 휘도록 지게를 지고
  땅을 일구고 집을 짓고
  우리들의 세상 만들었지요

  우리들의 가슴속에는 이제
  그 옛날이 가득 차 있답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일들이
  알알이 보석으로 채워져 있답니다
  
  당신은 우리들의 소중한 보물을
  쉽게 차고 다니지요
  팔아 치우거나 저당 잡힐 수 있고
  잃어버릴지도 모르죠
  빼앗길 수도 물론 있구요
  우리들의 뿌리
  꼭 간직해주세요, 네?

    제3부 그리움이 먼 길을 움직인다

    잔뜩 불이 있는 곳
  (  )개미도
  (  )거미도
  안 보이고
  (일과 의리 모두 아는) 벌들만
  한창 분주한

  저 복사꽃

    밖을 보는 법
  벽은 온통 못투성이
  다가가 볼수록 촘촘히 박혀 있었다
  이렇게 많은가? 언제 다 빼내어 나의 길을 내다보나?
  배운 공식과 단어들을 동원하고
  월급 액수와 큰손들의 성공담을 떠올리며
  빼내야 할 수를 헤아려보았다 하나 둘 셋 넷,
  그러나 어느 정도 가서는
  그 수를 잊어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럴수록 나는 오기를 부렸고
  마침내 병을 얻었다 오랜동안 입원을 해
  나를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문득
  벽 한 곳의 문을 보았다
  찾으려고 할수록 가려져 있었는데
  어느 것인지 어디쯤인지 안달하지 않으니
  오히려 보인 것이다
  몸이 아파 비로소 깨달은 밖을 보는 법
  아픈 때만큼 살기
  
    연둣빛 발걸음
  어머니가 사주신 양말 속으로
  발을 쑥 밀어넣는다
  양말 속의 발가락들이 서로 기대고 히히덕거리며
  야단들이다 목욕탕에서 물장난을 치는 아이들처럼
  서로의 별명을 부르며 좋아라 한다
  
  꼼지락거리는 발가락들을 다독거리며
  출근을 한다 발가락들이 기대하는 눈빛을 떠올리며
  결혼 기념 시계를 차고 출근복을 입고
  머리 빗고 구두를 신고
  집을 나가 언덕을 오른다

  전철역으로 가는 봄 언덕에서 바라보는
  앞산은 연둣빛이다
  산은 나무들로 이루어져
  양말 속의 발가락들처럼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숨바꼭질을 하고
  휘파람을 불며 새들을 꼬드기고
  햇살 틈에서 나붓거린다
  
  일터로 가는 나의 발걸음 또한 연둣빛이다
  
    미숫가루를 타며
  하루 세 끼의 밥과 연탄 두 장의 무게에
  서리 맞은 배춧잎처럼 움츠려지는 이 겨울날
  미숫가루를 탄다
  한 그릇의 물을 붓고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니
  스물아홉 열두 달의 나이테가 어지럽게 돌고
  이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서 오늘도 살아가야 하는구나
  아침밥 대신 미숫가루 한 그릇으로 새우잠의 허리를 펴고
  움츠린 발목 양지까지 헤쳐가야 하는구나
  큰오빠, 자취 생활에 몸 버리기 쉽지? 엄마가
  때 거르지 말고 이거라도 타 먹으래
  색깔 고운 2300원짜리 소포의 소인 찍힌 우표 너머
  콩깍지처럼 배틀어진 막내 동생의 연필 글씨
  벽에 걸린 달력의 색연필 표시
  할아버지 제삿날이 문득 문풍지를 울린다
  조기라도 한 마리 사기 위해 어머니는
  콩 말이나 이고 장에 가셨겠지
  도회로 나간 자식들 대신 삐걱거리는 지게 지키는
  작은할아버지 두 분만 허리 굽혀 오시겠지
  덩이가 다 풀려 젓기를 멈춘다
  언저리까지 풀려나오는 배추속대 같은 희망
  오늘은 편지를 쓰자
  이제 열흘만 지나면 정기적금을 탄다고
  어머니의 귀앓이도 동생들의 수업료도
  얽히고 설킨 우리 집의 농협빚도 장작 패듯 쪼개 내보자고
  겨울 바람의 날갯죽지를 확 확 잡아당기는 이 풀기
  스물아홉 열두 달 초이틀 아침 불 불 불붙어
  출근복을 입는다
  
    그리움이 먼 길을 움직인다
  먼 길에서 바라보는 산은 가파르지 않다
  미끄러운 비탈길 보이지 않고
  두릅나무 가시 겁나지 않고 독오른 살모사도
  무섭지 않다
  먼 길에서 바라보는 기차는 한산하다
  발 디딜 틈 없는 통로며
  선반에 올려진 짐꾸러미 보이지 않는다
  
  먼 길에서 바라보면
  다른 사람의 수술이 아프지 않다
  불합격이 아깝지 않고
  자살이 안타깝지 않다
  배고픔과 실연이 슬프지 않고
  아무리 글을 읽었어도 강의 깊이를 볼 수 없다
  
  그러나 길은 먼 데서 시작된다
  누구나 먼 길에서부터 바위를 굴릴 수 있고
  도랑물 소리 들을 수 있다
  장기적금 첫회분을 부을 수 있고
  못난 친구들과 잔 돌릴 수 있고 심지어
  노동시의 슬픔도 읽을 수 있다

  새벽에 나서는 설 귀향길
  그리움이 먼 길을 움직인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석날 고모님댁에 인사를 가는데
  버스정류장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호기심으로 다가가니
  개 한 마리 건물 구석에 놓여 있었다
  에구, 누구 집 개야, 안됐네
  한마디씩 남기고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
  마지막으로 내가 남았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가축 병원이 어디 있나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고
  주인이 나타나기를 한참 기다렸지만
  역시 헛일이었다 차에 치인 개는 피를 계속 흘리며
  그저 숨만 볼록볼록 쉬고 있었다
  나는 개를 살리고 싶었지만
  싣고 갈 차도 필요한 돈도
  할애할 시간도 없어
  끝내 개를 남겨놓고 돌아서고 말았다
  누가 개를 발견하여
  얼른 가축 병원으로 옮겨주었으면,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도망을 가고 있음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털, 그 부끄러움에 대한 기억
  첫눈 오는 저녁이다 방 안의 도배지를 온통 덧칠하는 그리움,
  아스라한 흙길, 할머니, 할머니의
  눈물, 야근, 안전사고, 환경검열
  대청소...너, 하고 불렀던 여인
  
  옛날의 편지를 뒤진다
  너의 사랑으로부터, 변치 않는 우리를 위하여,
  대침질만큼이나 나의 가슴을 찔러대는 너의 끝인사
  우리들의 치정이었나
  문득 봉투 사이에 붙은 털 한 가닥 눈에 띄어
  나도 몰래 얼굴을 붉힌다
  누구나 털, 하고 부르기를 꺼리는 저 실체
  서른 살 나의 순정이 비친다
  
  첫눈 오던 그날
  너는 운명을 얘기하며 돌아섰지
  나의 교대근무와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는 작업환경과
  공돌이라는 불안한 간판과...
  
  공단 거리에 찍힌 너의 발자국마다
  눈물을 채우며 깨달은 것은
  가난이 죄라는 사실이었다
  사타구니의 털만큼이나 부끄럽던 가난, 이제
  
  오기를 부려
  털을 휴지통에 넣는다
  손끝까지 붉어지는 나의 순정이여
  그리움으로 확인하지 않고도 끝내 간직할
  그 부끄러움이여
  
    나를 움직이는 잔돈
  연립주택 4층을 잔돈들이 움직인다
  아침에 깨어나 보면 줄을 서서
  휴지통을 싱크대 옆으로 옮기고 식탁 위의 아기 우유병을
  끌고 있다 조간신문을 들고 작은방에 들어서면
  또 한 무리들이 간밤에 남겨둔 담뱃갑 근처에 몰려있고
  방바닥의 식빵 부스러기를 쓸어댄다
  그 동안 잔돈들은 우리 집 텔레비전을 배치했고
  책꽂이에 책을 꽂았고
  신발장을 정돈했고 공중전화에 필요한
  카드까지 마련해놓았다 창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눈이 어지러운 4층에서 왕국을 짓고 있는 잔돈들
  그들이 날라놓은 쌀로 아침을 짓는다
  아침밥은 나의 신발을 신을 것이고
  신발은 길을 따라갈 것이고
  길은 산을 세우고 산은 하늘을 믿고
  결국 나는 잔돈들을 따를 것이다 쌀을 안친 뒤
  화장실에 간다 변기에 앉아 낑낑대며
  출근 준비로 신문 사설을 비판하고
  죽은 친구들을 기억하고
  나의 부끄러운 일들을 떠올리는데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또 한 무리의 잔돈들

    돈거미를 죽이고 설쇠다
  설쇠러 고향 가 잠 안 오는 밤에 [문제는
  리얼리즘이다]를 읽는다 강요된 화해를 지나고 있는데
  거미 한 마리 빽빽한 활자들을 헤치고 나온다
  오랫동안 잊었던, 돈거미
  
  정확한 학명은 모르지만
  밑지는 사업에 몰두하는 당신 아들을 위해
  생전에 할머니가 붙인 이름이다
  
  집 안에 들어오면
  돈 물고 온다고 할머니 좋아하시어
  식구들 감히 못 잡던 거미
  아버지의 돈은 그러나
  온 천장을 덮은 거미줄에도
  끝내 걸리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책장을 툭 치자 거미는 놀라
  책 표지 뒤로 얼른 숨는다
  다시 보려고 따라 뒤집으니
  거미는 벌써 보이지 않는다
  이상히 여기고 앞 표지로 다시 넘기는데
  아뿔싸!
  거미는 책에 깔려 허연 물기를 내고
  발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는 것이다
  
  돈거미를 죽이고 설쇠는 밤
  잃어버린 돈 후회하지 않는다 눈뜨고 다시
  리얼리즘을 읽는다
  
    진달래꽃에 벌금 물다
  진달래꽃이 막 핀 봄날
  뒷산에 올라 꽃을 따먹던 어린 날 추억과
  붉은 넋으로 삼았던 노동자 시절이 뭉클해
  흥얼거렸네 약속한 커피숍으로 가는 길도 즐거워
  그냥 무단횡단.
  
  교통순경에 걸려
  파출소로 끌려가면서
  붉은 꽃, 붉은 넋, 생각하다 보니 화가 치밀어
  신분증을 보일 수 있소!
  벌금도 낼 수 있소!
  하지만 사람 많이 다니는 길목에 왜?
  횡단보도는 안 만들고 왜?
  건수 올리는 데만 이용하는 거요!
  그들 역시 합법성을 들고 나와
  나는 더욱 큰소리로
  내가 누군데?
  내가!
  
  그러나
  횡단보도의 필요성
  진정 고민했던가?
  
  벌금증서를 받아 봄볕을 걸으며
  안전사고로 분신자살로 죽은 동료들을 생각하며
  나의 억지 반성하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도
  그리움을 안겨주는 저 진달래꽃에
  벌금 무네.
  
    각형에 서는 일
  삼각형이나 사각형이나 각형에 서는 일은
  원형에서보다 어렵다
  위험하다
  시간이 더 걸린다
  원 안에 서면 균형인지 불균형인지 또는
  손익이 되는지 의심할 바 없지만
  각형 안에서는 어지럽다
  한 귀퉁이에 서면 중심이 안 잡혀
  나머지 각들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고
  어렵게 중간쯤 찾아서 서도
  불안하다
  중용인지 이중인지 눈치가 보인다
  양심으로 그러나 길을 가면
  각형은 닳아질 것이다
  
    제4부 또 한 식구를 위하여

    대싸리
  일 년 만에 들어서는 고향집 마당 가는
  온통 대싸리 숲이다
  아침 일찍 이러나 움직여야
  밥술이나 먹게 된다며 할머니는
  대싸리비를 내게 쥐켜주셨지
  눈이 쌓인 날 아침은
  마당으로 장독으로 길을 내느라고
  아주 내 몫이었지
  피곤하고 우울한 서울 생활에서
  때로는 늦잠을 자고 싶지만
  마당을 쓸던 기억이 발바닥을 꼬집는다
  초가집이며 대싸리 울타리가
  슬레이트 지붕으로 시멘트 담으로 바뀌어
  내 가난의 발자국이 지워져 버렸지만
  대싸리들은 여전히 그 옛날을 안고 있다

  내일 아침엔 마당을 쓸자
  십 년이 넘는 객지 생활에서 아직 내 집이 없는 가난을
  한 치 밀어보자
  밥술이라도 먹는다는 할머니의 말씀을
  희망으로 가져보자

    짚가리
  던지는 짚단을 받아 아버지는
  쌓는다
  지난 가을에는 
  아버지가 짚단을 던지고
  할아버지가 저렇게 쌓았다
  할아버지가 떠나신 올해
  내가 짚단을 던지고
  아버지가 받아 쌓는다
  허물어지지 않게
  어미 까치가 둥지를 짓듯
  이리저리 맞추고 밟는 아버지를 보며
  내 아들을 생각한다
  당신이 가시는 날엔 나도
  아들이 던지는 짚단을 저렇게
  쌓을 것이다

    주낙을 놓으며
  바위 틈새로 줄을 끼우며
  주낙을 놓고 있어 동석아
  도랑물 저 아래 에서 저녁 어둠이 
  걸어오는데 니도 오지 그러냐
  한낮에 흘린 땀 씻었으문
  담배나 한 대 빨고 돌아가지
  나이 서른이 되어서도 이 짓이냐구
  그래도 놓고 싶구나
  니를 내 색시처럼 기다리고 싶구나
  메기가 물리든 뱀장어가 물리든 또
  빈 낚시문 어떠냐
  니가 중국집 배달부로 자장면을 싣고 가다가
  덤프트럭에 깔려 죽었다는 얘기를
  일 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들었단다
  박박머리에 까만 고무신 신고
  주낙을 함께 놓던 우리들였잖냐
  초저녁 별들이 하나 둘씩 용소 속으로 박혀
  내 작업장의 용접불처럼 빛나는데
  우우 나도 타고 싶구나
  뱀장어가 걸릴까 메기가 걸릴까
  남아 있는 세월 동안 니 것까지
  기다리며 타마 동석아 불알 친구야
  
    이 빠진 식구들의 수저질
  처마 위로 날이 저물자
  봉당의 신발 속으로 싸락눈이 들이친다
  화로 옆, 오늘 저녁에도 할머니는 없다
  어머니의 밥그릇이 대신
  아버지의 밥상에 마주 놓였다
  
  할머니가 쇠죽을 끓여
  문풍지 바람이 밥상을 흔들어도
  뜨뜻한 방
  
  막내가 실수로 흘린 밥을 얼른 주워 먹고
  마굿간에서 어미 소가 울자
  아버지는 덕석을 수저에 얹는다
  
  이가 빠진 식구들의 수저질
  마구를 치고 김장을 담그고
  수업료를 내고
  서울 막내고모에게 고추를 보내고
  할머니의 제사도 차린다
  
    또 한 식구를 위하여
  쥐불 논 논둑을 지나 움츠리며 오는 저녁식구를 부르는 불이 우리 집에도 켜지네
  지붕 위 전선줄 윙윙 울리는데
  텔레비전을 반찬 삼아 밥상에 앉은 식구들
  아버지의 가래가 끓을 때마다 어머니는
  빈 쌀독만큼이나 날씨 걱정하시고
  까치집마냥 손자들에 둘러싸인 할머니는
  한술씩 조용조용 뜨시네
  찢긴 문풍지 새로 눈발이 치자
  숭늉 얼른 들고 마구로 나가시는 할아버지
  굽은 등 더 굽네 또 한 식구를 위하여

    할머니의 키질
  까불 때마다
  잘 여문 알들이 소복소복 키 안으로 모이고
  쭉정이며 티들은 떨려지네
  할머니의 저 키질처럼
  나도 알갱이만 가려내며 살아가고 있는가
  누군가의 키에 올려지는 날
  떨려지는 쭉정이가 되는 건 아닐까
  키질 끝난 팥을 자루에 담으며
  내 이름을 달아보네
  저녁 노을의 키질에 우뚝 남겨지는 앞산
  저 산 키질의 알갱이
  아, 할머니
  
    검불 불
  마을 전설을 타래로 감고 섰던
  당산 밤나무가 죽어 있었다 저녁노을이 산등성에 앉아
  고무줄놀이 하는 기집애들을 내려다보는 동안
  마구로 들어가며 낸 송아지 울음이
  봇도랑에 얹혀 흘러내려 갔다
  차 먼지를 켜로 쓴 신작로의 미루나무가
  소경처럼 서서 검버섯 핀 슬레이트 지붕을
  바라보았고 봉숭아 몽우리 같은 가슴으로
  몰래몰래 엿보던 그녀 집 봉당 아랜
  빈 개집이 졸았다
  담배 곳간 흙벽이 군데군데 아프게 헐어졌고
  
  썩은 지붕 타고 내리는 산그늘이
  물잡힌 논의 엉머구리 울음에 찢기고 있었다
  신문에서 듣지 못한 울음들이
  저녁 굶으며 자던 내 어릴 적 가난의 서러움처럼
  논둑 콩잎 아래에서 훌쩍였고 저녁 이내가
  그 울음을 안고 터벅터벅 마을을 휘돌아
  묵정밭으로 갔다 농약 치다 쓰러진
  순옥이 할배의 병원비 어림셈이
  텃밭의 고추모처럼 흔들렸고 먼 마을 아낙들이
  품팔이 가 인신매매 당했다는 소문이
  저녁 끝낸 툇마루에 내려 쌓였다
  
  할머니 제사에 들른 고향
  
  엉머구리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뒤안으로 드는 텔레비전 선전들을 밀어냈고
  짙게 깔리는 어둠에 젖어 사위어가던 검불이
  타닥타닥 타 들어가며 훠얼훨
  되살아나고 있었다

    달밤
  산모퉁이 돌아오는 차 불빛에
  앞산의 파수병 소쩍새가 숨을 죽인다
  이슬을 빨아먹던 풀섶의 벌레들은
  감전이 되었나 커겅컹 길가 집 개가 짖는다
  왠지 잠이 안 와
  골방을 나와 오줌을 깔기는 밤
  달은 밝아 새파랗게 질린 채
  벼 포기 뒤에 숨은 밤안개까지 비치고
  미처 숨지 못한 안개들이 내뛰느라
  온 들판이 요란하다

  차가 지나가자
  소쩍새도 벌레들도 안도의 숨을 쉰다
  한평생 지게를 지며 지켜온 아버지의 땅이 
  신문 광고에 번듯이 나는 관광지가 되어
  잠자리까지 어지러운 밤
  바지 단추를 채우며 바라보는 저쪽에서
  또 한 대의 차가 온다
  신작로의 밤안개가 치이고 쓰러지고 달아나고
  길가의 전봇대는 어이가 없어
  먼 대를 본다
  농약 마시고 올 봄에 죽은 상술이가
  저쪽 논둑에서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는데
  달이 밝은데
  
    아카시아꽃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들
  죽어가면서도 악착같이 길을 낸다
  그 길 끝으로 펼쳐진 하얀 아카시아 숲
  갑자기 흔들린다
  
  농협빚 그물을 찢기 위해
  농약을 마신 뒤 가슴을 쥐어뜯고
  피를 토하며 뒹구는 아카시아 숲 속
  
  작은아버지

  위안의 알약으로 아카시아꽃은
  하얗게 새하얗게
  올 봄에 또 피었구나
  
  울고 싶은 무심한 꽃아
  점점 달라붙는 빗방울들아

    무좀과 한잔
  10년쯤 쇠를 만들다가
  다른 길로 들어섰는데 그가 또 나타났다
  안전화 속에서 함께 지내던 그가
  이 서울까지 따라온 것이다
  
  발바닥에 땀이 차도록 뛰어다녀
  양말도 벗지 못하고 떨어져 자는 날이나
  헌 구두에 빗물 드는 날이면
  그는 여지없이 찾아와 나를 달랜다
  아무리 문을 닫아 걸고 피하려고 해도
  꾸벅꾸벅 졸며 피곤한 척해도
  심지어 그가 아주 싫어하는 독극물 얘기며
  살인사건을 꺼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지고 온 술을 따르며 안주 좀 내오라고
  오히려 한술 더 뜨고
  술주정에 시비까지다
  
  어서 가길 바라는 나의 눈치도 모르는 체
  그가 오늘 또 와 있다
  큰손녀의 백일을 차려주기 위해
  먼 시골서 올라오신 나의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넉살좋게 떠벌인다
  모처럼 만에 뵈는 어머니와의 조용한 시간도
  죄다 글러
  
  나는 기분이 언짢고 그와 마신 술이 올라
  화장실로 간다 오줌을 갈기며 문득
  어느 날 내가 덜컥 쓰러져 그의 들볶음을
  그의 속썩임을
  못 보게 된다면... 나는 얼른 오줌을 턴다

    제염소에서
  첫눈 내리고
  염전 두렁의 륜곽이 어슴푸레 보이는 저녁
  뒤쪽 저수지의 컴컴한 물결 위로는
  겨울 바람들 출렁출렁 몰려가겠지
  
  5구 6호의 이곳에서
  등탈 없는 자식 되리라 속대사를 해왔지만
  소득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깨달은 바는
  태질하듯 불어치는 어려움도
  호상의 인정 있으면 이겨낼 수 있다는 것
  
  염판을 한 바퀴 돌고 나오다 만난
  작업장의 동료들
  모처럼 만의 대근이 나를 부풀린다
  초저녁 별들이 오늘은
  이 염전 바닥에 반짝반짝 박힐 것도 같은데

    대동강물을 보내며
  한 토리 따스한 해살 무질되요
  한식 훨씬 지나 푸르싱싱한 저 대동강물
  답을 쓰며 바라보고 있소
  웃동 훨훨 벗고 헤염이라도 치고 싶은
  바로 저 강물이
  문배술 제조에 필요할 줄이야
  얼마나 놀랬는지 그러문서 기뻤는지
  호상의 뉴대 위하야 기꺼이 보내리요
  문배술은 남녘 화강암층 물보다는
  이곳 석회암층 대동강물로 빚어야
  제 맛을 낼 수 있다지요
  요번에 보내거든 심혈을 기울여
  우리의 민속주 되살린 기발 어디 한번 날려보오
  제시한 물값과 물량 모두 동감하니
  남포항 선적과 인천행 반입 날짜
  이 달의 끄트머리 정도로 정하자요
  상계처리 하자는 제의에도 같으니
  술 다되면 좀 넉넉히 보내주요
  아니, 손수 싣고 오시라요
  우리는 한 자손 또 딱친구
  한 많은 대동강도 푸르른 두만강도
  어깨동무하고 웨쳐보자기요
  기다리요, 꼭 오시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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