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슬픈 꿈 - 구준회
이날의 새벽은 잠 어지러운 꿈 길
먼 옛길을 허허로이 거닐다
어느 한옥 장지문 너머 옛 여인의
사연 모를 흐느낌에서 막차처럼 돌아와
붉게 시작된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무슨 일로 그리 슬피 울며 내 꿈길 찾았나
미로로만 흐르던 끈끈한 기억의 잔영
아프게 흔들리다 홀로 깬 창가에서
눈 시리게 멀어 간 여인의 기억이 손길에 잡혀
한 모금 슬픔 팍팍한 목젖에 걸린다
꽃잎 같던 내 처음 사람
한 인생에 확실한 아픔의 깃폭을 세워 둔 그 사람으로
아직도 이 지상은 재울 길 없기로
어떤 아픔도 알려지지 않고
꿈길 밖에 길 모르는 이 세상
그냥 살다 죽어 가나니
내 아직 이 지상 남아
죄 되어 꺼져 가야만 하는 끝없는 정의 복사
어둠 덜 갠 여명의 깊이로
억만 톤의 먹지가 새벽 물가에 풀린다..
봄 산에 오르는 두 가지 이유 - 임현담
봄 산에 앉으니 햇살 한 번 와장창하다. 어느새 세상 만물은 이렇게 찬란하게 변했는지 눈부시기 그지없다.
곰곰이 돌아보면 산 아래에서 일상은 무미건조였고, 매일 매일의 풍경은 시멘트와 도로에 포장되어 있으니, 사시사철 변치 않는 삭막함이 아니던가.
햇살 아래 이런 산 풍광들과는 비교조차 필요치 않다.
장승같은 검푸르릇한 바위, 군자풍의 소나무 군락, 너럭바위들의 집합, 연녹색이 감돌기 시작하는 골짜기, 겨울바람을 털어 내고 다시 원기를 찾기 시작하는 억새풀, 바람에 흔들리는 관목 숲 그리고 그 사이로 끊어졌다 다시 이어 오르는 오솔길.
가슴이 뭉클하다.
봄바람에 이마를 닦으며 한 주일 동안 내가 걸었던 길을 되돌아본다.
아파트에서 나와 포장된 길을 따라 걸었고, 버스 안에서 여러 걸음 걸었고, 계단을 내려가 터널 속을 걷다가 지하철 안에서 앉고 내리기 위해 조금 걸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스팔트 위를 지나 육교를 건너 시멘트로 만들어진 건물로 들어왔다.
길이라고 불리기 싫은 길들을 일상에서 걸었던 셈이니, 오늘 올라온 산길과는 천지 차이.
그러나 어린 시절 오가던 길은 얼마나 환상적이었나. 늘어진 풀섭 사이로 여치가 울고, 개구리가 튀어나와 반대쪽으로 건너갔다. 나비와 잠자리가 서로 앞서듯 가로지르고 흙 내음 그득한 미풍이 뺨을 쓰다듬고 지나가지 않았던가. 마을 입구의 의원 집에서는 늘 유성기 소리가 흘러나왔으니, 가던 길을 멈추고 귀를 쫑긋거리며 줄을 타고 올라가는 나팔꽃을 유성기 스피커처럼 바라보았다.
가끔 마음 고운 할머니가 불러 '아가야 덥지?' 수박을 나누어주시고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가 부채를 휘적이며 지나가시던 흙 길.
많은 자연의 존재들은 변화라는 이름으로 소멸되었으니 이제 일상에서 그런 길은 모두 잃고 땅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그러니 길을 가도 길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 걸었던 길들은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저장되어 있으나, 도시에서의 그제의 길, 어제의 길, 오늘의 길 그리고 내일의 길은 아무런 의미 없는 동작의 일부로 기억에 남겨지지 않는다.
내가 살던 곳도 삼각대를 든 측량사들이 나타나더니 모두들 짐을 사들고 뿔뿔이 헤어지고 이어 불도저들이 밀고 지나갔다. 결국 이제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차들로 가득 매워진 도로가 되었다.
문명의 발전이라는 경탄과 칭송 뒤에 서서 잃어버린 과거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변화들은 평야, 구릉을 지나 결국 백두대간까지 곳곳에 신음소리 요란하다.
사라져 버린, 여치, 메뚜기, 나비, 잠자리, 개구리, 오솔길, 야생화, 작은 숲, 새, 매, 독수리, 나지막한 구릉 그리고 푸른 하늘.
내 아이들은 훗날 산에서나마 길다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도로에서 컨츄리 클럽을 지나 리조트와 콘도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까. 그리고 자연을 만끽했다고 만족하지는 않을까.
산을 오르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이렇게 잃어버린 길을 찾기 위함이다. 도시에서 고향은 물론 길을 잃은 소시민이 의미 있는 기억의 길을 찾기 위한 걸음걸음이다. 산은 아직 건재한 곳이 많으니 우리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남아 있는 것을 지켜야한다.
힘들게 올라와서일까. 얼굴은 물론 목까지 빨갛게 달구어진 봄날 같은 20대 여자가 옆에 앉는다. 그러더니 시선을 멀리 던지며 한 마디 한다.
"와, 좋다"
그래, 정말 눈에 닿는 모든 곳이 '와, 좋은' 봄날이다. 여자는 물통을 꺼내 한두 번 흔들더니 맛있게 마신다. 어느새 세상은 이렇게 눈부시게 변했을까.
여자는 말을 잇는다.
"죽인다, 죽여--."
고등학교 2학년 국어시간. H 선생님은 '안녕하세요' 인사를 받자마자 칠판에 두 글씨를 쓰셨다.
관조였다.
단어의 뜻을 아는 사람 손을 들라 했으나 모두들 벙어리 흉내였다. 선생님은 고등학생이 이 단어의 심오한 의미를 완벽하게 알기는 어렵다며, 관조의 깊고 넓은 뜻을 오랫동안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는 남보다 뛰어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무기라며 이 단어를 잊지 말고 살기를 당부하셨다. 모르기는 해도 많은 친구들은 노트나 책 구석에 이 단어를 적어 놓았으리라.
세상의 존재들은 하나의 커다란 법칙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통일장이라 표현되는 그 힘 안에서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각자의 존재를 유지한다. 사실 우주를 끌어가는 통일장을 발견한 것도 관찰과 조망의 결과였다.
동물-곤충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한 파블로를 위시해서, 파스퇴르, 고흐, 멘델, 다윈, 아인슈타인, 호킹을 포함한 수많은 석학들은 관조를 통해 세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생존의 법칙과 우주에 편재한 과학의 질서를 읽어냈다. 또한 성인으로 불려지는 동서양의 스승들은 자연과 인간에게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조망으로 종교의 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소시민은 아무런 관찰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더불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나를 포함한 그들은 이미 관조를 통해 밝혀낸 것들을 교육받고 따르면서 살아간다. 교과서를 가득 채우는 수학, 물리, 생물, 윤리, 지리, 천문학 등등은 관조를 통한 발견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말해도 무리가 아니다. 심사숙고로 오랫동안 관찰하고,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법칙을 찾아내고, 수학적 방정식을 도출해낸 사실들을, 우리는 배우고 시험을 치른 후 생업에 적용한다.
양자이론에서 가장 매혹적인 핵심은 '관찰이 그 대상의 실재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최근에는 더욱 발전해서 '관찰하는 정도가 많으면 많을수록 전자가 더 많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마이크로 세계와 마크로 세계-즉 미시와 거시의 세계가 둘이 아님이 밝혀진 지금, 이 놀라운 사실은 이미 불가와 힌두교에서 중생을 위해 이야기되어 왔으니, 우리는 자연의 관찰자이자 동시에 자연의 일부임을 말해왔다.
자연은 물론 우주를 관찰하면 할수록 대상은 빠르게 변화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관조는 계속 이어져 누군가 새로운 법칙을 발견한다.
또한 양자이론은 수행으로 인간 내부를 스스로 관찰하면 할수록-위빠사나-내부의 에너지는 변화가 일어나 소위 말하는 사리舍利가 만들어지는 과학적 근거까지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산을 바라보면 산의 변화는 더욱 극적으로 일어나니,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자연파괴를 막고 산은 더욱 아름답게 변할 수 있음을 말한다.
오늘의 산은 얼마 전보다 연녹색으로 물들고 잎새들은 넓어졌으며, 가슴을 파고드는 찬 기운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나의 관조 수준은 이렇듯 피상적으로 평범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아무리 범인이라 해도 봄 산에 오르면 얼마 전보다 확연하게 변화한 것을 관조한다-안다.
여름에 피는 꽃들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봄에 피는 꽃들의 이름,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등등 몇 가지를 쉽게 나열 할 수 있음은 지나간 겨울에 비해 변화무쌍한 봄(계절)-봄(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봄은 누구나 쉽게 관찰자로 만든다.
사실 관조의 깊은 의미를 아는 이들은 수행자다. 깊은 산 속의 눈푸른 납자(선승)들은 오늘도 자신의 내부를 조망하고 우주를 관찰하여, 온갖 것들에서 진리의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봄 산에 엄청난 변화는 평범한 사람들조차 관조자로 만들어 자연에서 8만4천가지 법문을 듣게 만드니 수행자에 근접시켜 준다.
이것이 봄 산을 오르는 또 다른 이유다. 봄 산에 오르는 것은 단순한 등정이 아닌 변화를 관(바라보다)하는 산 가람에 드는 수행이다.
산은 이밖에 많은 것을 주지 않는가. 투기꾼과 개발에 의해 땅은 있되 흙은 없는 저잣거리 세상에서 땅과 흙이 모두 있는 수목의 넓은 가슴으로 끌어 안아준다. 또 변화해 가는 자신의 몸을 보여주며 우리네 인생이란 세월 따라 계절 따라 자연의 호흡처럼 그렇게 변해 간다는 간단한 명제에 도달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니 가르침 그득한 봄 산에 안 오를 재간이 있는가.
생명을 만드는 햇살이 참으로 원초적이다. 도시의 혼탁을 털어 낸 자리에 푸른 솔바람을 채워주고 나 역시 산 그림자의 일부가 되어 이렇게 앉아 있다. 이런 산을 바라보면 산에서 사는 스님네가 부럽다.
보이지 않을 듯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북쪽으로 이어진다. 다시 한줄기 바람이 불자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또다시 이야기한다. 얼굴은 아직 볼연지를 찍은 듯 붉다.
"야, 정말 좋다."
그래, 정말 좋은 시간이다. 가슴이 또다시 뭉클하다. 저 아래 세상까지 이렇게 좋으면 얼마나 기쁠까.
성적 인간 - 오오에 겐사부로
1
칠흙의 어둠 속을 상아빛의 커다란 쟈가 한 대가 곶 모소리의 맨 끝에까지 질주해 온다. 쟈가는 밤바다를 향해 오른 쪽으로 폭포수처럼 갑자기 급경사를 이루며 깎아지른 가닥길로 들어선, 곶 남쪽에 겨드랑 밑처럼 숨겨져 있는 미미나시 만으로 향하였다. 쟈가는 아리프렉스 16밀리를 싣고 있다. 차도 촬영기도, 누구나가 J라고 부르고 있는 스물 아홉 살 먹은 청년의 것이다. J, 그의 아내, 쟈가를 운전하고 있는 J의 누이동생, 중년사내인 싱어, 이렇게 일곱 명이 쟈가를 타고, J의 별장으로 가는 길이다. J의 아내가 제작하고 있는 단편영화의 몇 가지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
재즈 싱어 아가씨는 완전히 알몸뚱이로 발가벗고 있다. 그녀는 취해서 노래를 하고 있다. 모두가 그녀의 노래를 주의 깊게 듣고 있지 않고 있어, 자기는 이 쟈가 속의 누구에게서나 경멸 당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며 언젠가 꽤나 호평을 받은 일이 있었던 노골적인 얘기를 다시 한번 꺼내보려고 한다. 도오꼬로부터 네 시간, 차로 오고 있는 동안, 운전하고 있는 J의 누이동생을 제외하곤 전원이 시종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 열여덟 살 먹은 가수가, 맨 먼저 이 한 패거리의 취객 전렬로부터 혼자서만 유독 앞으로 내빼기 시작한 거였다. 그것은 언제나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자제심이 부족했다.
"내가 정치가들 모임에 일하러 갔을 때였어. 내가 쓰는 대기실 속엔 화장도 안 한 열여섯 살 먹은 애가, 탁구공과 파아란 비닐옷을 무릎에 놓고 앉아 있는 거였어. 그래서 우린 금방 친해진 거지. 제 차례가 되는데도 그 아이는 화장을 않더군. 그냥 발가벗을 뿐이야. 그리고, 그 파아란 비닐 슬리핑 백 같은 옷에 머리로부터 기어들어가서는, 나더러 등의 아랫부분에만 붙어 있는 쟈크를 밀어 올리게 했어. 그러고 보니까 그 파아란 옷은 개구리 의상이야. 몸뚱이째 몽땅 들어가서는, 가랑이만이 생선 주둥이 마냥 뽕 뚫려 있어. 정치가들은 그 여자아이의 성기인 파아란 개구리를 보는 셈이지. 근데 말이지, 탁구공을 그 몸뚱이 속에 넣고 있어서, 그게 춤을 출 때마다 구굴, 구굴, 개구리처럼 울고 있는 거야!"
나머지 여섯이 우울한 목소리로 시큰둥하게 웃었다. 만일 여기서 웃지 않으면, 가수가 또 울면서 한 바탕 지랄을 벌이는 걸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웃자, 신이 난 가수는 "그 아이의 개구리 춤 기술이라는 게, 보통을 훨씬 넘어. 정말 기막힌 기술이야"하곤 자랑스럽게 한 번 둘러보며, 한껏 서스펜스를 내려고 하였다.
"파티에 나온 정치가들은, 기술을 본 게 아니야. 열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가 어느 만큼 심장에 철판을 깔았는지, 그걸 본 거지" 하고, 운전하고 있는 누이동생 곁에 아내와 나란히 앉아 있던 J가 말했다. "어떤 종류의 외설스런 쇼라도, 그 점은 변함이 없어. 기술을 보이고, 그 대신에 창피한 자기 육체는 투명하게 한다는. 그렇게는 되지가 않지. 관객이 보고 싶은 건, 창피를 모르는 육체 그 자체, 창피 그 자체니까!"
열여덟 살 먹은 재즈 싱어는 실망하고 속이 상해서 쿨쩍거리기 시작했다. J와 그 가수가 성관계를 맺고 있다는 건 J의 아내를 포함해서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점점 더 열여덟 살 먹은 계집아이는 울적한 듯이 발가벗은 어깨를 떨기까지 하면서 울었다. 만일 그게 차 속이 아니라면, 그녀는 칼이거나 깨어진 병을 갖고, 공포에 들린 고양이처럼 지랄을 했을 것이다.
"왜 또 그러는 거야. 그렇잖아도 어둠 속에 길까지 배배 꼬여 있는데 조금 조용히 해줄 수 없겠어? 움막에 닿기도 전에 죽고 싶어? 당신들 영화를 완성시키지도 못하고" 하고, 운전을 하면서 누이동생은 그녀를 나무랐다. 그녀는 자기 오빠가, 기묘하게 심리관계가 얽힌 짖궂은 장난을 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던 거였다.
그리하여 J의 누이동생과 우는 계집아이 이외에는 모두가 약간씩 싱얼싱얼 웃으며 입을 다물고, 술을 마시면서, 차의 엔진소리와 자기 내부의 소리만을 들었다. 왜 그렇게 웃고 있는지는 누구 하나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입을 다물 때는, 여유라도 있는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쟈가는 언덕을 내려가서, 포구 오른 쪽 날개로 들어가, 다시 왼쪽 날개를 향해 미미나시 마을의 좁은 돌길을 천천히 갔다.
"창을 닫아주지 않겠어? 썩은 생선과 그 그물 냄새가 싫어. 모두 아무렇지도 않나봐?" 하고 J의 누이동생이 말했다.
나머지 사람 가운데 누군가 두 사람이 창을 닫았다.
"이렇게 조심조심 달려도, 내일 아침에 보면 몇 군데 긁힌 곳이 나올 거야." 하고 J의 누이동생은, 오빠를 보고 한숨쉬듯이 말했다.
돌이 깔린 길을 달리는 차는,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좁은 수로를 이따금씩 건넜다. 길은 포구 바로 안쪽에 넉넉하게 구부리며 싸안은 마을의 양 가생이를 잇고 있다. 길 양쪽의 집들은, 죽은 코끼리 행렬과도 같다. 짙은 회색으로 그 자체의 내부를 향해 완전히 닫혀진 듯한 인상의 가옥군. 불빛은 수로 저편의 바다쪽으로부터 아스라하게 이르러 오고 있다. 정박하고 있는 고깃배의 표시 불빛이다. 가옥군은 어둠 속에 있었다.
쟈가는 얌전한 바다소리보다도 더 은밀한 소리를 내며 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현듯, 돌층계 앞쪽의 사람들 한 떼거리를 헤드라이트가 잡았다. 운전하고 있는 아가씨가 브레이크를 밟는다. 시트에서 술병이 굴러떨어지며 소리를 낸다. 열여덟 살 먹은 가수는 울다가 말고 욕지거리를 하려고 들다가, 끝내는 입을 다문다. 쟈가 속의 모든 사람이 호기심에 끌려 헤드라이트에 내비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돌연, 강한 빛 속에서 소경이 된 들쥐들처럼 우물거리고 있는 서른 명 가량의 어민들, 주로 여자들이다. 몇 명의 노인들과 아이들이 그 속에 섞여 있다. 여자들은 모두가 아이누 인처럼 짙고 어두운 색깔의 두꺼운 무명옷을 입고 있고, 누구나가 비슷한 나이로 중년처럼 보인다. 앙양되고 짜증스럽고 속이 상한 중년 여인의 집단. 라이트는 사람의 얼굴을 보기 흉하게, 동물적으로, 왜소하게 보이게 한다. 사람들은 돌 깔린 길을 가득히 메운 채 한 집앞에 웅성거리고 있다. 지금은 그 누구나의 얼굴이 쟈가 쪽을 돌아보고 있는데 바로 조금 전까지는 그 눈들이 바로 그 집을 보고 있었다는 게 확실히 느껴진다.
"게이꼬를 숨겨. 좌석 앞에 엎드리게 해서 윗도리를 머리로부터 덮어씌워!" 하고 J의 누이동생이 말했다.
사와 게이꼬라는 게 재즈 싱어의 이름이다. 게이꼬는 얌전하게 시키는 대로 따랐다. 앞 시트 등에다 옆구리와 허리를 찰싹 붙인 채 무릎을 꿇은 그 벌거벗은 작은 몸뚱이가 윗도리나 스커트 따위로 덮여진다.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 넘어지지 않도록, 뒷좌석의 나머지 세 사람이 그 무릎으로 사와 게이꼬를 떠받들고 있다. 쟈가는 엉금엉금 사람들 쪽으로 기어간다. J의 누이동생이 겁먹은 소리이긴 할망정, 그러나 단호하게 오빠를 제지하며, "안 돼요. 그런 짓 하면, 차를 뒤집어 엎고 태워버려. 저이들은, 지금 자진해서 비키려고 들잖아!" 하고 말했다.
쟈가가 접근해 가자, 실제로 사람들은 조용히 순조롭게 돌이 깔린 길의 양쪽 집들 처마 밑으로 피하였다. 그때 그들은 이미, 차와 그 속에 있는 일곱 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호기심도 품고 있지 않은 듯 하였다. 차라리 전혀 무관심하게 조차 보였다. 차 속의 사람들도 그대로 따르려고 하였지만, 웅숭그린 채 엎드려 있는 아가씨는 떨고 있었다. 차가 사람들 틈을 뚫고 지나갈 때 비로소, 모두가 눈길을 모으고 있는, 바닷가에 자리해 있는 그 집만이, 열려 있는 2층 창문 저편으로 불이 켜져 있고, 그것이 자갈길이나 사람들 얼굴을 부옇게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걸 알았다.
그곳을 빠져나와 쟈가는 속도를 냈다. 처음에는 모두가 가슴이 답답한 듯이 말이 없었다. 그들은 공갈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때는 노상, 침묵이나 긴장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하게 마련인 중년사내 카메라맨이 호걸풍으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단 웃게 되면, 그는 그런 웃음밖에는 웃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쪽에서 자극하지만 않으면, 아무런 짓도 하지 않는 원주민 부락을 통과하는 탐험대 같구먼 그래? 나는 보르네오로 교육영화를 찍으러 갔을 때가 생각났어! 그리고 서부극도 생각이 났고."
사와 게이꼬는 발가벗은 몸뚱이를 일으켜, 카메라맨의 살찐 짧은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리곤 약간 취기가 깨어난 가라앉은 목소리로, "저이들, 인디언이야?" 라는 둥, 철부지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저이들은 이 마을 주민이야. 사내들은 고기잡이 나갔으니까, 필경 이 마을에 남아있는 전원이 저기에 모여있던 게 아닐까? 나는 이 포구 사람들 여럿의 머리를 찰흙으로 만들었거든" 하고 J의 누이동생이 말했다. 그녀는 스물일곱 살로 조각가이며, 지난 초여름에 파리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J부부가 만드는 영화의 미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차를 세우고, 내일 먹을 생선을 미리 부탁해 두는 걸 그랬지?"하고 J가 말했다.
"당신은 이 포구마을 일을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 우리들이 피난해 와있을 때 당신은 집안에서 노상 그림만 그리고 있어서, 이 포구까지 내려오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거든. 어부 애들을 두려워했지."
쟈가는 자갈이 깔린 길을 마을 가생이까지 와서, 낮은 방파제 저편으로 담즙처럼 거무칙칙하게 그늘진 바다 쪽을 내려다보면서 우회하였다. 쟈가는 다시금 언덕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관목가지가 폭력에 의해 어거지로 비틀어진 팔처럼 괴로운 형태로, 쟈가의 프런트글라스를 향해 내뻗쳐 있다. 그것들한테 두드려 맞아 쟈가는 소리를 지르고 차안의 일곱 명은 일순, 소나기 속에 갇힌 듯한 기분이 되었다.
"어부 아이는 두렵지가 않았어. 단지 우리 가족이, 산 위에 얼마만한 땅과 작은 움막 하나를 갖고 있을 뿐이어서 포구사람들에게 꺼려지는 게 싫어서, 내려가지 않았을 뿐이지. 너보다도 내 쪽이 되레 둔감하지가 않았었어" 하고 J가 말했다.
"흥분해서 깜짝 놀라 격분하고 있는 얼굴이었지. 예를 들어서, 성교하고 있는 현장을 타인에게 들킨 듯한!"하고 사와 게이꼬가 말했다.
그리하여 운전하고 있는 아가씨 이외의 여섯 명은 웃었다.
"게이꼬 같으면, 성교하고 있는 현장을 다른 사람에게 들켜도 태연하겠지? 허지만 게이꼬 관찰력은 때때로 정확해"하고 카메라맨이 말했다.
"저이들은 간통하고 있는 여자를 욕 보이려고 저러고 있었어"하고 J의 누이동생이, 제 오빠에게만 속삭이듯이 나지막하게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이 피난해 와 있을 때도, 이런 일이 있었어요. 아까 그 집에 간통한 여자가 숨어 있는 거야. 그 집 출입구는 판자로 완전히 막혀 있을 걸. 오늘밤은 사람들에게 가려서 보이지가 않았지만 말이지."
"한밤중에 모여들어서 어쩌려는 거야? 욕보인다고 하지만, 그게?"
"그저 가만히 집 앞에 서 있을 뿐이야, 온 동네의 계집들과 노인과 아이가! 거기다가 사내들이 있으면, 사내들까지! 그걸로 충분히 욕보이는 거 아니겠어? 가슴이 답답해져, 상상만해도."
"그렇구먼. 나도 가슴이 답답해지는군. 아아, 싫어, 간통쯤으로!"하고 뒷좌석의 스무 살짜리 배우가 말했다.
"꼬마도, 매일 밤, 자기 아파트 앞에 온 도오꼬사람들이 몰려온다면 가슴이 답답해지긴 하겠지"하고 카메라맨이 말했다.
"정말로, 꼬마에게는 백 명쯤 되는 남편이 간통당하고 있으니까 말이지"하고 발가벗은 재즈 싱어가 배우를 연하 취급하면서 말했다.
쟈가는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올라가, 포구를 감싸고 있는 마을이 문득 바로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고대로 나와 있었다.
"잠깐 차를 세워.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던 집 2층 창에 불이 켜져 있었지. 뭐가 보이지 않나?"하고 카메라맨이 말했다.
일곱 사람은 쟈가 밖으로 나갔다. 사와 게이꼬는 시트에 깔아두었던 모포를 멕시코의 판쵸처럼 어깨에다 둘러쓰고 있었다. 카메라맨이 촬영용 렌즈를 금방 끼워 넣어 망원경을 만들었다. 그는 교육영화나 선전용 필름을 만드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데, 위인이 거칠고 품위라곤 없어, 동료들과 협조가 잘 안 되는, 기업 안의 아웃사이더이다. 회사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출세하긴 글렀다고 알자, 그는 수염을 기르고 회색 신사복 대신에 구질구질한 스웨터 나부랭이를 입고, 유행이 지난 차를 타곤, 자잘한 발명같은 것에나 열중하였다. 예를 들어, 망원경 렌즈를 끼는 일 같은 거. 또한 그는 젊은 친구들이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걸 알면, 가족이건 회사 일이건 나 몰라라 하고, 거기에만 열정을 쏟으며, 이 애매한 일에다 온 정성을 다 바쳤다. 그는 대단한 욕구불만이 있는 마흔 살 사내였다. 예리한 재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실로 착한 사람이고, 술꾼이었지만 나태하지는 않았다. 회사 일에 이제 와서는 이미 흥미를 잃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게으름을 피지는 않았다. 내일도 새벽녘 한 시간 촬영이 끝나면, 그는 혼자서만 차를 운전하고 도오꼬의 회사로 출근을 해야 했다.
망원경 조정이 끝나자 일곱 사람은 교대 교대로 바로 눈 아래 마을의 단지 불빛 하나만 내비치고 있는 창을 다시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여자가 엎드려 바쁜 듯이 팔을 움직이는 건 보이는데, 그 여자가 무얼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곱 사람은 꽤나 오랫동안을 내려다보았다. 여자 몸뚱이의 운동은 여전하다. 일곱 사람이 있는 위치에서는 여자의 등과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만이 보이고, 팔 동작은 불확실하다. 어깨의 격렬한 상하 운동만은 꽤나 인상적이었지만, 그들은 참으로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곤 모두가 차라리 저들의 채워지지 않은 호기심에 지쳐버렸다.
"이젠 차로 돌아가지, 춥구먼"하고 사와 게이꼬가 기회를 잡아 말했다. 이 열여덟 살의 색정광 아가씨에게는 이런 종류의 재치가 있다. 그것은 우둔해 빠진 갑충의 촉각만이 지닌 예민함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는 그 여자가 운동하는 의미를 알아내기를 단념한 채, 쟈가로 돌아왔다. J와 그 아내와 누이동생 셋이 앞좌석에 카메라맨, 재즈 싱어, 배우, 거기에다 줄곧 말없이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젊은 시인이 뒷좌석에 앉자 쟈가는 발차를 했다.
줄곧 말없이 있는 젊은 시인은 스물다섯 살로 시집 하나를 겨우 막 자비 출판하였다. 그는 J부부의 친구라는 거여서, 이 영화에 대해 코멘트를 다는 일을 떠맡은 것이다. 그는 J의 젊은 아내와 대학의 동급생이었다. 그리고 대학의 마지막 학년 때는 꽤나 가깝게 지냈다. 같이 잔 일도 있다. 그것도 한 번뿐만 아니고, 그 무렵의 J의 아내는 가난하면서도 의기양양한 암사자와도 같은 아가씨로, 영화감독이 되고싶어 했다. 이 영화에 미쳐 있는 동급생과 그는 졸업과 동시에 헤어졌는데, 일 년 가량 지나서 그한테 아가씨로부터 결혼식 초대장이 날아왔다. 동급생의 남편 J는, 철강회사 사장 아들로, 그들 두 사람보다 네 살이 많았다. J는, 예술적인 패트런 취미에서 아리프렉스 16밀리 촬영기를 입수했고, 예술가 누이동생을 갖고, 바퀴살이 달린 하얀 타이어의 상아빛 쟈가를 갖고,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별장을 갖고, 세계일주의 팬어메리컨 티켓까지 갖고 있었다. 그는 아내가 영화 하나를 만들 자금까지도 아버지 호주머니에서 뜯어내왔다. 동급생은 J에게 흠뻑 빠져있고, 또한 영화 만들 계획에 반은 미쳐 있었다. 젊은 시인은 친구에게 부탁해서 그녀의 남편인 J에게서 비용을 빌어 시집을 출판하고 그 대신에 영화에 대한 코멘트를 쓰기로 떠맡았다. 그는 새 부부가 사는 가정의 친구라는 셈이었는데 J에 대해서는 오로지 확실하게, 소원해지는 감각을 극복할 수가 없는 거였다. 그는 그전에 같이 잔 일이 있는 동급생의 남편에 대해서 질투를 느끼고 있었는가? 동급생은 그녀 남편이 화려한 아파트에서 젊은 배우와 가수들을 모아들여서 벌인 파티에 그를 초대하였다. 그것이 그녀만의 듯이었는지, J도 그것을 바라고 있었는지, 그 점을 그로서는 알 수가 없어 일말을 불안을 남기고 있었다.
"응, 저걸 어떻게 생각해?"하고 J가 젊은 시인과 매한가지로, 줄곧 입을 다물고 있는 자기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마침 병째로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참이었다.
"쌀을 찧고 있었어요"하고 아내는 별로 생각도 않고 말했다.
그렇다, 저 간통을 하고 나서 몰릴 대로 내몰린 여자는 쌀을 찧으면서 참아내고,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고 모두가 느낀다. 그리하여 일곱 사람은 모두가, 위협을 받으면서 쌀을 찧고 있는 여자와, 그 집 앞에 서성이면서 떠날 줄 모르는 화가 나있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생각해 보며,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당신은 꽤나 추위를 타는군. 당신이 고래잡이 배를 타고 남극까지 사진 찍으러 갔다는 게, 정말인지 모르겠군. 용케도 동사를 하지 않고 돌아왔네."
"정말이야. 허지만 추위 타는 것과 동사하고는 관계가 없어, 게이꼬. 너도 추위를 안 탄다고 과신하고 늘 발가벗고 있어봐. 춥다고 느끼기 전에 얼어죽어버려. 하긴 남극에서는 너무 자주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나는 그야말로 수선장이 비슷했지만 말이지."
J의 누이동생과 아내가 부엌 쪽에서 갖고 나온 자잘하게 토막낸 장작과 신문지를 난로에 쑤셔넣고 불을 붙이려고 들자, 카메라맨은 금방 그 일을 떠맡았다.
"나는 불을 붙이는 기술도 지니고 있거든. 성냥 없이 불을 붙일 수도 있어"하고 꽤나 허황하게 들리는 자랑까지 해가면서.
나머지 사람들이(나태한 J 이외에는) 난로 둘레에다 의자라는 의자를 몽땅 옮겨다가 둥글게 늘어놓았다. 그러는 김에 소파나 테이블도 난로와는 반대쪽 구석에 밀어붙였다. 춤추고 싶을 때를 미리 대비해서 또한 특별한 벽쪽으로 향하게 한 소파에서는 잠을 잘 수도 있을 것이다. 친구들로부터 귀찮지 않게.
기와 냄새가 큰 방을 메웠다. 불 곁에서 몸뚱이를 일으킨 중년인 카메라맨의 볼은, 이미 포도빛은 아니었다. 주독 낀 낯색으로 돌아와 있다. 그는 연기로 하여, 볼과 입술 주변에 한방울씩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불이 제대로 당겨주어 만족하고 있었다.
"봐요, 미쯔꼬 씨, 지옥으로의 도입부분 커트, 이 난로에다 왕창 불을 붙여서 찍자구"하고 카메라맨은 J의 아내에게 말했다.
"좋군요. 불빛만 천연색의 음화지를 만들어 합성할 수 있다면 졸을 텐데. 로제 봐딤의 흡혈귀 영화처럼. 그것은 피였지만"하고 미쯔꼬는 각자의 손에 글라스 하나씩을 건네어 주고, 거기다가 진이든가 위스키든가를 일일이 불어가며 따라주면서 열심히 대답했다.
"내가 그 시스템, 생각해볼게. 가만 나에겐 진을 주세요"하고 카메라맨은 자기 애인에게와도 같은 정겨운 목소리로 J의 아내에게 말했다. 목소리까지 약간 낮추어서.
영화 테마는 '지옥'이다. J와 미쯔꼬로부터, 지옥을 테마로 한 단편영화를 만들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젊은 시인은 이질감을 느꼈다. 그가 미쯔꼬 결혼식에서 받은 인상은 지옥과는 도무지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결혼 뒤에도 쟈가나 아리플렉스라고 하는 이 세상의 천국 꽃을 얻은 미쯔꼬는 행복해 보였고, 그 남편도, 행복한 아내를 얻어, 더더욱 행복해 보였기 때문에, 어째서 J부부가 그토록 지옥에 매달려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이미 소녀취미를 낼 만한 나이도 아니었겠고. 결국, 이 영화의 코멘트를 쓰고 나서도, 시인에게는 어째서, 이 영화에 지옥이 필요한 것인지 이해할 수는 없을 거라는 예감이 미리부터 있었다. 그러나, 카메라맨이 난로불의 필름 위에서의 효과를 재보고 위해 큰 방 불을 껐을 때 일순, 시인은 그 작은 불 속에 그 자신의 개인적인 지옥의 울림을 들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긴 했었다.
J의 누이동생인 스물일곱 살의 조각가는, 모두 둘러앉은 의자들 뒤쪽에 웅숭그리고 앉아, 낡아보이는 전축 조작을 하였다. 난로 속에 타는 불빛만이 어른거리는 방안이어서, 그곳은 마치 어두운 골짜기와도 같았다. 잠시 후 갑자기, 긴장되고 불안하고 게다가 감미로운 바하의 B장조의 파르티타가 울리기 시작했다. 꽤나 낮고도 약하여 여린 소리로, 디누 리파티의 마지막 콘서트라고 하는 한 장의 레코드다. 그들은 그들의 지옥이라는 영화음악에다 이 피아노 독주의 레코드를 쓰게 될 것이다. 리파티는 이 녹음 연주회에 거의 최악의 건강상태로 나갔다. 그리하여 끝내 이것이 마지막 연주회가 되었다. 그는 두 달 뒤, 베토벤의 F단조 4중주곡을 들으면서 죽어갔다.
"난로 위의 그림은, 미쯔꼬에게 보여준 그림과 비슷하군요"하고 젊은 배우가 말했다. 그는 일곱 사람 가운데 음악에 대해서는 가장 둔감하다. 그밖에 여섯 사람도 리파티에 송두리째 의식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화가예요, 벨기에 태생의."
"그럼, 내가, 이렇게, 가슴만, 리본 비슷한 윗도리로 감추고, 알몸뚱이로 걸어오는 셈이군"하고 사와 게이꼬가 말했다.
"그렇지요. 이 정원에, 로마 풍의 발가벗은 석상이 두 개 있어요. 그 사이를 게이꼬가 걸어와 봤으면 해요. 꼬마는 앞쪽에 발가벗고 저편을 향해 서 있는 거야. 전체를 포커스로 찍는 거니까. 물론 꼬마도 제대로 서 있어줘야 해."
"내 털은 이렇게 볼품이라곤 없는데"하고 솔직하게 열여덟 살의 재즈 싱어가 말했다.
그림은 쉬르 리얼리스트인 델보의 복제이다. 네모난 모를 잘라낸 형상의 영원히 조용한 풍경 속을 아름다운 음모의 망연하고도 전아한 아가씨들의 나체가 게이꼬를 부끄럽게 하고 있는 이유는, 다른 여섯 사람에게도 그대로 느껴지고 있다. 그림 속의 그녀들의 음모는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밤색으로서 청동색으로 그늘져 있었다. 일곱 사람은(이번에는 J의 누이동생까지 포함해서) 쟈가 속에서 취했던 광경을 새삼 떠올렸다. 저녁부터 깊은 밤에 이르는 자동차 여행의 감각이 아직 허리에서부터 발에 남아 있어 그것이 취기를 가속화했다. 열여덟 살의 재즈 싱어는, 금방 난로의 열기를 더워하며 옷을 벗어버린다. 공단 옷감의 짙은 와인컬러 옷은 그녀의 발치에서 죽은 닭과도 같다. 그녀는 금새 아랫도리까지 벗어버릴 것이다. 열여덟 살 아가씨가 하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그녀를 인간답게 하고 있는 개인적 성격은 노출증이다. 누구도 사와 게이꼬가 나르시시스트(자기 도취형 인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그녀의 육체는 빈약하고 아직 덜 자랐다. 어째서 그녀가 노출증이 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젊은 시인은, 언젠가 J가, 발가벗은 너는 옷을 입은 너보다 좋다라는 식의 말을 하지나 않았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다. 모두가 말없이 난로 위의 그림만 쳐다보는 데에, 그녀는 짜증이 나서 만일 필요하다면 새앙쥐같은 가발을 아랫배에다 묶을 텐데,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더더욱 나머지 여섯 사람에게서 무시당한 기분이 되어 독한 진을 물처럼 퍼마시기 시작했다.
"이 계절에는 햇님이 어느 근처에서 솟는가 몰라, J"하고 카메라맨이 말했다.
"글세, 어떨까." J는 아무 것도 모른다.
"아무튼 바다에서 오르겠지, 그러니까 왼 쪽에 햇볕을 받으면서 걸어오는 거야. 그림자를 엇비슷이 오른 쪽 뒤로 길게 끌면서. 꼬마의 머리와 어깨와 옆구리에 햇살이 비쳐서, 옆 얼굴은 꽤나 검게 보이지. 카메라는 꼬마의 1미터 뒤에 놓이게 되거든."
"그렇게 된다면"하고 카메라맨이 미쯔꼬에게 말했다. "아침에 아직 해가 이 위치보다 낮은 곳에 있는 느낌일 때 찍고 싶으니까 여섯 시에는 대강 일을 끝내고 싶군."
"게이꼬, 또 웃는다든지 하지 말아줘, 맨발이 못 견디게 가렵더라도 포커 페이스로 있어줬으면 좋겠어. 가장 중요한 장면이니까!"
열여덟 살의 재즈 싱어는 대답하려 들지 않았다. 엎드려 아랫도리를 잡는다. 그리고는 진과 레몬과 설탕 컵을 다람쥐가 호두를 잡듯이 꽉 두 손바닥으로 받들어 잡고, 의자에 무릎을 세워 고쳐 앉는다. 이젠 그녀에게 정상적인 말을 걸어본들 소용이 없다는 걸 모두가 깨달았다. 그녀 의자는 맨 오른 쪽 J가 앉은 의자의 안 쪽이다. 매한가지로 취기와 졸음 때문에 애매한 대답 밖에 하지 않는 J와 그녀는, 일곱 사람 가운데서 외떨어졌다. 나머지 다섯 사람이 미쯔꼬를 중심으로 영화에 관해 계속 떠들고 있는 동안에, 사와 게이꼬의 발가벗은 몸뚱이는 차츰 J쪽을 향해 오른 쪽으로 비틀리며 기울어져 간다. 결국, 그 벌거숭이의 여윈 등과 엉덩이를 장벽으로 해서 그녀는 자기와 J를 친구들의 단란한 분위기에서 잘라내버린다. 그 두 개의 의자만이, 다른 다섯 개의 의자보다 얼마간 떨어져 있는 것은,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른다. J와 재즈 싱어가 거기 앉는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각들 사이를 벌거숭이 아가씨가 걸어오는 장면이, 지옥 소의 풍경이라는 게 되는 건가?"하고 젊은 시인이 미쯔꼬에게 물었다. 그로서는 코멘트를 쓸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면 지옥으로 떨어지기 직전?"
"지옥 속의 커트예요. 그야 말할 것도 없이 그 이외의 광경은 없으니까! 벌써 몇 번이나 얘기하지 않았어?"
"조각들 사이를 벌거숭이 아가씨가 아름다운 털을 햇볕 속에서 드러내고 시원시원하게 걸어온다는 건, 지옥의 풍경은 아닌데."
"당신은, 단지 욕구불만이야."
젊은 시인은 원망스러운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 돈 많은 부부의 머리 속 지옥같은 건 어찌됐든 상관없다 라고 그는 혼자 생각하면서 자신을 달랬다.
난로 속의 장작이 눈에 뜨이게 적어졌다. 카메라맨이 술 컵을 든 채, 잔뜩 엎드려 난로 속에 부지깽이를 찔러넣고 휘저었으나 효과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방안은 화끈화끈 더웠으나, 모두가 난로 속의 타오르는 불꽃을 이를테면 기분적으로 필요로 했다.
"미쯔꼬 씨, 이제 장작은 없는가?"하고 카메라맨이, 난로 불기운과 답답한 자세 때문에 핏발이 선 눈으로 적동처럼 보기 흉한 낯색의 크고 둥근 얼굴을 잔뜩 젖히고 물었다.
"있어요. 바로 바깥에 쌓여 있을 건데. 만일 포구 마을 사람들에게 도둑만 맞지 않았으면, 있어요."
"그 도둑 맞는다는 건 미쯔꼬 씨의 강박관념이라고! 요전번에 화집이 없어졌을 때도 내가 훔친 게 틀림없다고 했는데 그것도 강박관념에서 미쯔꼬 씨는 그랬었거든."하고 젊은 배우가 말했다.
"그렇진 않아. 꼬마가, 우리 집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훔쳐내서 팔아버리고 있는 건 J도 알고 있어. 단지, 꼬마에게 도벽이 있더라도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우리는 꼬마를 집에 들여놓고 있지 않아? 만일 우리 집에서 훔치지 않으면, 꼬마는 용돈을 어디서 구하지?"
젊은 배우는 격분해서 온통 얼굴을 복숭아 빛으로 물들이고 눈물이 그득해지며 입술을 떨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가장 특유한 연기여서, 다른 누구도 새삼스럽게 마음이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뭐야! 골 아파. 정말 미쯔꼬 씨는 무슨 말이든, 말이면 다하는 줄 알아?"하고 배우는 울먹거리는 소리로 중얼거리곤 갑자기 일어서서 전축있는 데로 갔다.
리파티의 레코드는 이미 끝나 있었는데도, 모두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다. 픽업이 무의미한 숨찬 소리를 내는 걸 바람소리 같은 것으로 들으면서. 배우는 자켓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다른 레코드를 걸었다. 그것은 딕실랜드였다.
"춤 춰, 미쯔꼬 씨!"하고 애걸하듯이 젊은 배우는 말했다. 이런 식의 미련 많은 불안정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소년인 것이다.
"싫어, 꼬마!"하고 미쯔꼬는 사납게 말했다. 그래서 J의 누이동생인 조각가가 보다못해 일어서서 다가갔다.
젊은 배우와 조각가는 찰스턴의 스타일로 춤추기 시작했다. 스무 살 치고는 너무 어려 보이는 배우 얼굴은 금방 행복으로 빛난다. 그의 볼에 남아 있는 눈물자국을 스물일곱 살 먹은 아가씨가 춤을 추면서 손바닥으로 훔쳐준다. 배우는 그 팔을 잡아, 자기 목을 휘감게 하곤 아가씨를 바싹 끌어안아 버린다. 그로부터는 다른 스타일의 춤이었다.
"춤, 그만 추고, 장작을 가져오는 게 어때?"하고 미쯔꼬가 말한다.
"싫어, 미쯔꼬 씨"하고 배우는 미워죽겠다는 듯이 대답하여 두팔 속의 아가씨를 웃긴다.
"내가 가져올게. 부엌에서 바깥은 열쇠 없이도 나갈 수 있나?"하고 젊은 시인이 말했다.
"열쇠는 열쇠구멍에 박혀 있을 거야"
젊은 시인은, J와 재즈 싱어가 서로 어깨를 붙인 채 죽은 듯이 꼼짝 않고 있는 곁을 지나서, 춤추고 있는 젊은 배우와 아가씨 주위를 빙그르르 한바퀴 돌아, 취해서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난로 불이 불안정한 그림자를 만들어, 그의 평형에 대한 감각을 더욱 혼란시킨다. 자기자신의 흔들거리는 그림자를 밟으며 여전히 비틀거리면서 그는 걸어간다. 벽을 향해 있는 소파 곁에서 그는, 필경은 여기 누구와 누군가가 성교를 할 것이다. 이놈들 파티라는 건 노상 그런 거니까, 하고 일순 생각한다. 그리곤 소파가 닿아져 있는 벽의 바다 쪽 구석 도어를 바깥쪽으로 밀어 열고 나갔다. 이곳은 그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던 현관 입구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층층다리도, 변소 붙은 욕실에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도어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 그는 부엌 도어 곁의 스위치를 눌러, 도어를 열었다.
여름 한밤 중 차갑고도 거칠은 감촉의, 그러면서도 달콤한 공기가 단번에 그를 둘러쌌다. 부엌으로부터 정원으로 나가는 도어가 열려 있고, 한밤중의 바람에 약간 흔들이고 있다. 그는 그때 아무 것도 의심하진 않았다. 수도 구멍에서 조금씩 나오고 있는 물을 충분히 마시고, 그리곤 맨발 채로 정원의 잔디를 향해 발을 뻗는다.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 있어서 지면의 진짜 높이를 눈어림으로 재기는 어렵다. 젊은 시인은 일순 깊은 공포의 울부짖음 소리를 내면서 앞으로 엎어지듯 넘어졌다. 그는 바다를 향해 깎아지른 낭떠러지 기억을 문득 떠올리면서 울부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안전하게 무성한 잔디 속에 두 볼을 파묻고, 볼이고 목이고, 이슬 젖은 잔디에서 헤엄이라도 한바탕 치고난 뒤처럼 흠뻑 적셔가지곤, 빙긋이 웃고 - 난 꽤나 취해 있다 - 하고 생각하며 그대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 다음, 그는 천천히 무릎을 짚고 일어나자 오줌을 누고, 한 아름 가득히 장작을 안고 큰 방으로 돌아갔다.
젊은 배우와 아가씨는 배를 맞비비며 끌어안고, 키스를 하면서 춤추고 있었다. 레코드는 다시 찰과음밖에 내지 않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걸 별로 개의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J와 벌거숭이 아가씨는, 뒤쪽에서 보는 한에서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 그대로다. 카메라맨과 미쯔꼬는 난로 앞에 무릎을 대고 마주 앉아서 콘티를 검토하고 있었다. 젊은 시인은 그들 곁에다가 장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카메라맨이 새로 불을 일으키고 있는 동안에, 그는 미쯔꼬로부터 새 술잔을 받으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당신, 볼이 긁히지 않았어? 피가 맺혀 있는 걸"하고 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미쯔꼬가 말했다.
"응응, 넘어져서 말이지. 허지만 어떻게 해서 긁혔을까?"
"가엾게도! 기억도 나지 않아?"
"부엌의 도어가 밖으로 열려 있었어."
"그럴 리가 없는데"하고 미쯔꼬가 말했다. 그리고 꽤나 길어 보이는 목을 뻗쳐, 그의 볼에 내돋은 피를 더운 혓바닥으로 핥아 버린다. 그는 술냄새와 혐오감과 돌발적인 욕망을 느꼈다. J쪽을 살펴보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는 것은, 그 욕망 탓이다. 그는 낭패해 하고 있었다.
재즈 싱어는 젊은 시인에게 벌거숭이 등을 돌려, 머리와 어깨를 J에게 송두리째 내맡기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 손을 J의 엉덩이 밑에, 왼 손은 J의 넓적다리가 시작되는 부분에 놓여져 있다. 왼 손의 손가락 끝은 J의 바지를 불룩 솟아오르게 하고 있는 딱딱해진 성기 위에 뻗쳐, 그대로 가만히 있다. J는 반은 자고 반은 미소하고 있다. 확실히 둘만의 상관 관계 뿐인 외딴 방에 갇혀져 있었다. 그러자 문득 벌거숭이 아가씨의 성기 냄새가 난로 속에서 막 불이 당겨지고 있는 새 장작 냄새 속에 돋아 오른다. 젊은 시인은, J의 아내가 그 눈치를 채지 않기를, 이를테면 공황에 맞닥뜨리기라도 한 듯이 격렬하고도 수선스럽게 바라고, 재즈 싱어인 열여덟 살 아가씨의 둔감을 노엽게 느꼈다. 당연히 그는 또한 J를 증오하고 있었다.
"이 젖은 장작을 모두 불 주위에 놓고 말리지. 자, 도와줘"하고 카메라맨이 말했다. 그리하여 미쯔꼬와 젊은 시인도 고양이처럼 마루에 무릎을 대고 앉아 도와주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벌거숭이 아가씨와 J가 팔짱을 낀 채 일어서서 그대로 큰 방을 천천히 가로질러 2층으로 올라갔다. 젊은 시인은 J의 아내 얼굴을 보는 걸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단지 젊은 시인만이 여기에 익숙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하긴 카메라맨도 결코 거기에 익숙해져 있는 건 아닐 터이다. 그는 새로운 놀이를 제안했다.
"참, 미쯔꼬 씨, 저 테이프를 들어보지 않을래? 게이꼬가 있으면 화를 내서 말이지. 지금 딱 됐지?"
"좋아요. 허지만 게이꼬는 영화 효과음으로 저걸 쓰는 걸 싫어하지는 않아요"하고 취해서, 눈이 충혈되고, 볼을 불룩하게 한 미쯔꼬가 지나칠 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카메라맨이 쟈가로부터 가져온 포터블 녹음기와 테이프를 조작했다. 그는 어떤 경우이거나 자기의 엔지니어로서의 기능을 과장해서 행동한다. 그런 식으로, 그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바람직한 존재로서의 자기자신을 확인하곤 하는 것이었다. 난로 속의 새 장작이 피어나는 불꽃 속에서 테이프가 조용히 돌아간다. 처음 한동안은 어떤 소리도 재생되지 않는다. 젊은 배우와 아가씨는 아랫배를 찰싹 붙이고, 끌어안은 채, 어느덧 키스도 그만두고, 각자가 열심히 테이프를 쳐다보았다. 테이프가 소리를 내지 않는 동안, 스물일곱 살인 여류 조각가의 거친 숨소리만이 방안에 기포처럼 연신 솟아오르고 있다. 2층에서, 무겁고도 부드러운 것이 약간 이동하는 소리가 났다. 그 다음, 소리는 애매해져 버렸다.
문득, 젊은 아가씨 목소리가 보들레르의 번역된 시를 낭독하기 시작한다. '여행에의 유혹' 약간 소리의 질이 달라져 있지만, 그것이 사와 게이꼬의 목소리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노래할 때의 목소리보다 말할 때의 목소리에 가깝고, 더구나 흥분해 떠들 경우의 열여덟 살 아가씨 목소리에 가깝다. 단조로운 낭독이 발음 연습 때처럼 되풀이된다. 똑같은 시의 되풀이되는 낭독, 그것이 십분간 쯤 이어진다.
언제나 낭독되는 내용은 똑같은 시의 똑같은 번역인데, 차츰 아가씨 목소리의 저 속 깊이 스며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취해있는가? 하고 젊은 시인은 담백하게 의심한다. 아무튼 재즈 싱어 아가씨는 거의 항상 취해 있는 상태이니까. 그러다가 문득 시인은, 낭독자가 성적으로 흥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다. 열을 띠고, 메마르고, 여리게 떠는 듯하고, 옥타브가 높아지며, 가늘고 차츰 불안정하게 속도를 더해가는 목소리. 이따금씩 어색하게 멎어 있기도 하고, 아가씨는 열심히 참아내며 낭독을 계속하려고 한다. 그녀는 내부로부터의 저항과 싸우면서 소리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다. 화를 내면서 거역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일순 그것은 감동적이다. 그리고 의미없는 소리가, 시낭독 속에 섞여들기 시작한다. 노래하면서 달리고 있는 장거리 주자의 소리. 그녀는 헐떡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전히 감당해 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아, 아아, 하고 목소리는 테이프에서 흘러나온다. 아아, 아아, 저기에는, 그저 질서와 아름다움과 사치, 고요함과 쾌락 이외에는 무엇 한가지도 없다. 아아, 아아! 쾌락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아아! 아아! 아무 것도 없다. 아아!
그것은 홍수에 견디며 물 속에 잠겨 들면서도 강하게 휘어져서 떨고 있는 보잘것없는 나무와도 같은 감각이다. 목소리는 전혀 절망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그리고 돌연, 급류 속에 나무는 삼켜져, 그 자체가 홍수같은 힘의 동기로 변한다. 아아. 아아! 하고 녹초가 된 아가씨는 울부짖고 문득 흐느껴 운다. 아아, 질서와 아름다움과, 아아! 그것은 참으로 집요한 최후의 안간힘이다. 젊은 시인은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런데 목소리는 거칠게 폭발적으로 높아진다. 아아, 아아. 오오! J! 아아, J, J!
젊은 시인은 충격을 받고 미쯔꼬를 보았다. 테이프는 푸석푸석 소리를 내면서 혼자서 돌고 있다. 미쯔꼬가 웅숭그리고 정지 버튼을 누른다. 모든 소리가 애매한 침묵 속에 파묻혔다. 이젠 2층도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그 다음 스무 살 먹은 배우가 키들키들 웃기 시작했다.
"테이프 조연자는 J가 아니고 나야!"하고 킬킬 웃는 소리 사이사이로 배우는 말했다.
"그래요. 물론!"하고 얼굴을 쳐든 미쯔꼬가, 그녀를 보고 있는 동급생을 향해 대답하듯이 말했다.
"J가 아니야, 나야!"하고 의기양양해서 여전히 배우는 끌어안은 채인 조각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만히 자극을 주었었거든!"
"이 악한, 이 악당!"하고 얼굴이 온통 시뻘개지며 입술을 커다랗게 벌리고 웃으면서 스물일곱 살의 아가씨는 말하고 있었다. 빨간 목안이 보인다.
"이 마지막 3분 가량을 영화의 타이틀 백으로 쓰고 싶어"하고 미쯔꼬가 말했다.
"응응"하고 젊은 시인은 묘하게 맥이 빠진 기분으로 말하자, 의자의 꼿꼿한 등받이에다 등을 대고 눈을 감았다.
"저 포구로 내려가는 긴 언덕에서 말이지"하고 미쯔꼬가 카메라맨과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와 카메라맨에게 있어, 이미 그 테이프는 그다지 자극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둘은 녹음하는 자리에 입회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쪽, 이쪽?"
"이쪽 편, 그 언덕에서 J가 어릴 때, 개를 데리고 있던 노인이 트럭에 배가 깔려서 죽는 걸 보았다는군. 그런데 그 몸에서 흐르는 피를 개가 미친 듯이 좋아서 마시더라는 거야."
"미친 듯이 슬퍼서?"하고 카메라맨이 중년 사내다운 분별을 차려서 물었다.
"미친 듯이 좋아서."
"어떤 갠데?"
"도벨만 새끼."
"으응, 으응."
"난 그게 아이 적의 J의 공상에 지나지 않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해. 체코 동화에 역시 개가 피를 핥는 얘기가 있으니까, 그걸 J가 읽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어떤 건데?"
"예수님이 죽었을 때 개가 그 피를 빨아서, 그래서 개도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얘기."
"개도 천국으로 가지 못하게 됐다?"하고 카메라맨이 물었다.
"개도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럼, 이 영화에는 쓸 수가 없구먼."
"그런 거지"하고 미쯔꼬가 말했다.
"배 고프지 않아? 갖고온 닭을 먹자구. 그러구 난 조금 자겠어."
J의 아내는 아리프렉스 16밀리와 같이 쌓아둔 짐 보따리 속에서 베이크드 치킨의 기름종이 꾸러미와 소스 병을 꺼내왔다. 소스는 J의 누이동생이 레몬과 마늘로 그날 오후 내내 걸려 만든 거였다.
"꼬마도, 닭 먹을래?"
"으응, 먹고 말고"하고 저편 벽 쪽 소파에서 젊은 배우 목소리가 되받았다.
"나도 먹겠어"하고 J의 누이동생도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당돌하게도 비명과도 같은 웃음소리가 터져오른다.
"나도 먹겠어"하고 젊은 시인도 눈을 뜨고 난로의 거의 스러져가는 불빛을 눈부셔 하면서 말했다. 결국 아래 층 누구나가 배고파 있는 것이었다.
난로 앞에 다섯 사람이 모여 통닭을 먹기 시작했을 때, 소파 위에서 하던 얘기는 꼬마나 J의 누이동생까지 포함해서 다른 누구나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고집스럽게 의심을 하고 있었다.
"열아홉 살의 성불능 같은 건 없어."
"그게 있다니까. 진짜로 있었는 걸. 내 영국인 친구가 그랬었으니까"하고 J의 누이동생은 또 목안을 보이면서 웃고 있었다. 그것은 빨갛게 무서운 어두움이다.
"그건 성도착?"
"아니."
"그럼, 그 여자가 꽤나 지독했군. 동정이 가는데."
"그 여자라는 게 나야"하고 조각가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꼬마, 아직 발기한 채 그대로 있는 거 아냐? 그 여자와 같이 있어 가지고."
모두가 젊은 배우를 보고 웃었다. 그는 늘 그런 식으로 가학적인 귀염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 자신부터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내 프랑스인 여자친구 하나가 상담에 응해줬어. 그래서 셋이서 얘길 나누었지. 그 프랑스인 여자친구는, 내 애인의 성기까지 살펴봐 주었다니까. 젊은 시절의 루이 16세 같지나 않는가 의심해서 말이지!"
"거짓말! 루이 16세라든지 하는 그런 소리 말아. 나는 역사에 약하니까!"
"그래도 이상 없음이었거든. 그러자 내 여자친구가 이렇게 말했어. 내 애인의 성불능은 그 영국 청년만의 책임이 아니다. 결국 그것은, 두 사람간의 성교는, 서로를 흥분시키는 범위에 한해서다, 하는 수학적인 사실에 관계된다. 세 사람 이상의 성교라는 건 훨씬 더 흥분되지가 않을까? 이렇게 말했어."
모두가 웃었다. 그리고 J의 누이동생이 최초로 웃음을 그치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 프랑스인 여자친구도 침대에 들어와서 셋이 같이 잤는데, 역시 열아홉 살이야, 거뜬히 제대로 되질 않았겠어. 축하, 축하!"
"허지만 당신은 즐겁지가 않았지?"
"왜?"하고 스물일곱 살의 조각가는 극히 냉냉하게 경멸하듯이 말하곤, 젊은 배우를 침묵시켰다.
그때 재즈 싱어가 큰 방으로 돌아왔다. 사와 게이꼬는 가슴으로부터 아랫배에 걸쳐 여름 모포를 휘감고 있었다. 홀랑 벗었을 때의 그녀보다도 모포를 휘감고 있는 그녀 쪽이 사람들 눈을 외면시켰다. 그건 과연 노골적으로 J와 게이꼬 사이에서 그때까지 행해졌던 일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그런 심리작용에는 상관 않고.
"너무 하는군. 저들만, 닭 먹고!"하고 불만인 듯이 말했다.
"아직 얼마든지 있어"하고 미쯔꼬가 말했다.
"J가 당신이 와주었으면 해."
"왜?"하고 태연하게 미쯔꼬는 말했다.
"누군가가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대, 2층에서는! J도 나도 그런 느낌이 들던 걸. 더구나 난 작은 두 개의 눈이 도어 쪽에 보였어. 그래서 J는 안 돼, 아무리 애써도 안 되던데."
"나도 작은 두 개의 눈이 부엌 쪽으로 가는 도어 그늘에서, 우릴 보고 있는 걸 보았어! 그렇지 조금 아까 그렇게 말했지?"하고 젊은 배우가 울부짖었다.
"거짓말, 나는 안 보았어"하고 J의 누이동생은 또 빨간 목안을 가득 열어 보이면서 웃었다.
"나도 아까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게이꼬가 테이프를 듣고 있을 때"하고 카메라맨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젊은 시인도 역시 그의 등뒤로부터 엿보고 있는 눈을 줄곧 의식해온 듯한 느낌이 비로소 들었다. 그리고 그는 장작을 가지러 갔을 때 부엌 도어가 바깥쪽으로 열려 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그때는 아직, 그 일에 관해 깊이 의심해 본다든가 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도, 지금 그의 의식 속에서는 2층에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 J가 꽤나 위협적으로 비대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결국 인간이 누구에겐가 보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언제라도 그 인간을 보고 있는 망령을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의 의식이라는 건 그런 식으로 되어있는 게 아냐? 그건 말하자면 신의 눈이라든지, 악귀의 눈이라든지 그런 거야. 나는 히스테리를 일으키면 칠흑 어둠 속에서도, 그런 종류의 눈을 봐"하고 여류 조각가가 말했다.
"나까지 히스테리?"하고 중년사내 카메라맨이 말했다.
"내가 소르본느에서 철학강의를 받을 때--."
"이제 됐어, 그만해 둬, 철학얘기는!"하고 젊은 배우가 말했다. 그리고 그 느닷없는 난폭한 어투에도, 조각가가 반발을 않고 있어, 나머지 사람들은 조금 아까 소파 위에서 J의 누이동생과 배우 사이에 벌어졌던 애무의 성질에 관해서 막연히 알 수 있었다.
"그럼, 난 닭이나 먹겠어. 히스테리의 눈에 관해서는 잠시 잊고"하고 재즈 싱어가 말하며 큰 닭다리 하나를 들어 뜯어먹기 시작했다. 벌거숭이 가슴에 마늘 소스가 튕겨서 얼룩졌다.
"응, J에게로 가줘, 나하고는 아무리 애써도 안 돼. 난 지쳤어"하고 커다란 닭살을 하얀 이로 문 채 재즈 싱어는 재촉을 했다.
미쯔꼬는 애매하게 끄덕이곤 아무 맥락도 없는 가엾게 여기는 듯한 젖은 고양이와도 같은 눈으로, 젊은 시인을 보았다. 젊은 시인도 그 눈을 쳐다보았다. 취기로 해서 덥고 둔하고 완만한 그의 내부에 하나의 핵, 거기에만 명확하게 욕망이 번쩍이고 있는 열정의 핵이 뭉뚱그려졌다. 만일 미쯔꼬가 J에게로 가지 않는다면, 나는 미쯔꼬를 꾀어서 어딘가로 숨어야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미쯔꼬가 J에게로 올라가지 않기를, 하고 그는 열망했다. 하지만 어디에 숨는다는 말인가? 이 네 사람의 주정뱅이들이 문득 모두 잠이나 들어버렸으면 좋겠는데--.
그때 2층에서 J의 큰 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짜증나고 절박한 듯한 목소리가 되풀이 미쯔꼬를 부르고 있었다. 젊은 배우는 과장 섞어 풀석 웃어버린다. 미쯔꼬가 천천히 일어난다. 젊은 시인에게 눈길을 꼬나박은 채 그래서 그도 일어서서 미쯔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큰 방을 가로질러 같이 걸어 같다. 뒤로 도어를 닫고, 부엌과 욕실과 층층다리 틈에 나 있는 좁은 장소에서 일순 두 사람의 옛날 동급생은 서로 끌어안았다. 그의 손바닥은 J 아내의 스커트 밑, 작은 벌거숭이 맨살에 바쳐졌다. 그의 손가락이 젖어있는 뜨거운 눈에 닿는다. J 아내는 바지 위로 그의 화가 나서 요동치는 새를 꽉 잡았다.
"어디가 숨자, 어디가 숨어"하고 젊은 시인은 욕망에 겨워 속삭였다.
"어디로?"하고 똑같이 욕망에 사로잡혀서 쉰 목소리가 대답했다. "어디에 숨지?"
젊은 시인은 쫓기는 기분으로 이리저리 생각해 봤다. 하지만 어디에 숨을 데가 있다는 말인가? 2층에서는 J가 조바심이 나서 기다리고 있고, 부엌에는 목이 탄 누군가가 교대 교대로 들며 나며 물을 마시러 올 것이고 욕실에는 십 분마다 누군가가 오줌을 누러 온다는 식이다--.
"쟈가 속은?"하고 돌연 생각이 나서 희망에 찬 예감에 사로잡힌 젊은 시인이 말했다. "쟈가 속에 숨자."
"쟈가 열쇠는 J 누이동생이 갖고 있어"하고 미쯔꼬가 대번에 그 희망의 싹을 문질러버렸다.
"이 산장에서 밖으로 내빼자. 널 J에게서 구출해 줄게. 나가자!"
"우린 단지 취해 있어요. 사랑으로가 아니라 욕망으로, 어딘가에 숨어버리려 하고 있는 거예요"하고 미쯔꼬가 말했다. 그리고 그의 성기를 잡고있던 미쯔꼬의 손바닥은 바지 허벅지 쪽으로 벌렁 누워버렸다
J가 2층에서 다시 부르고 있었다. 미쯔꼬는, 젊은 시인의 팔에서 몸을 비비적거리며 빠져나와 층층다리를 달려 올라간다. 그 파르스름한 추한 옆얼굴을 보내고 나서 그는 자기의 말이 미쯔꼬를 겁먹게 한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자신도 겁먹었다. 영화를 만든다는 희망을 잃어버린 미쯔꼬와의 괴로운 내일의 생활이라는 이미지가 그를 겁먹게 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은 단지 취해 있는 거다. 사랑으로가 아니라 욕망에서, 어딘가 숨어버리려고 했던 거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욕실 도어를 열고 비틀거리면서 들어갔다. 발을 벌리고 방뇨하면서 문득 머리를 숙이자 그때까지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굴러 떨어져 부풀어 커진 성기를 적셨다. 그는 그것을 우스꽝스럽게 여기며 비죽이 웃었다. 그리고 그는 미쯔꼬와는 전혀 관계없는 고독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는 취기에서 오는 극도의 무감각 밑자락에 오르가즘에의 약간의 가능성을 더듬듯이 구하며 집요하게 용두질을 했다. 드디어 피와도 같은 정액이 눈물과 오줌의 맥주 비슷한 거품 속에 녹은 눈덩이처럼 떨어진다. 그는 쾌락도 없이 신음했다. 그는 이미 미쯔꼬에 대해서보다도, J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J에게 우정을 느꼈다. 그가 미쯔꼬 속에 환기시킨 욕망을 J가 잿물로 환원시켜 버릴 테지. 그는 J 누이동생 회상 속의 3자 성교의 이미지에다가 막연히 J, 미쯔꼬, 그리고 자기자신을 연결시켜 그 공상을 꽤나 조화있게 만족스럽게 느꼈다. 그는 비로소 J의 영역에어 자기자신을 마음 편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재즈 싱어나 젊은 배우처럼 강대한 J에게 굴복한 것을 느꼈는데 굴욕감은 지니지 않았다. 그는 급하게 시들기 시작하는 성기를 바지 속에다 집어넣고,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채 그대로 옆 욕조에 걸터앉아 가만히 있었다. 참을 수 없도록 졸음이 왔다. 그는 물이 들어 있지 않은 욕조에 벌렁 누워버렸다. 그렇게 잠들기 시작했는데, 그 일순 앞서 자기를 관속의 행복한 시체라고 느끼며, 이 걸 시로 쓰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욕조 밑바닥의 자기를, 이제 열려진 도어 저편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듯이 생각되는 맑은 두 개의 눈에 관해서도 거기에 써넣자고 생각했다. 그리곤 젊은 시인은 잠들어버렸다--.
미쯔꼬는 어두움 속에서, J가 겨우 사정에의 언덕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하는 걸 느끼고 J의 항문을 애무하며 그리고 사내아이처럼 강한 신음소리를 내서 J를 격려했다. 물 속에 잠겨들어 발랑 위를 쳐다보고 햇볕에 빛나는 수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릴적 골짜기 웅덩이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맑디맑은 냉정한 기분으로 털끝만큼의 쾌락도 없이. J가 약간 부끄러운 듯한 소리를 내며 경련한다. 미쯔꼬는 J의 몸뚱이가 대뜸 후줄근하게 땀 투성이가 되며 무게가 더해오는 걸, 간호부처럼 냉정하게 참아냈다. 게이꼬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건 J의 사정시간이 긴 것으로서도 확실했다. 게다가 미쯔꼬는, J가 게이꼬와의 성교를 특별히 즐기고 있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 J는 또 그녀 자신과의 성교에도 하나의 가짜 열중밖에는 나타내지 않는다. 그 사정에 관해서도 미쯔꼬는 느끼고 있었다. 그건 반대로 미쯔꼬 자신이 J와 성교하는 동안 항상 가짜 흥분을 연기해 가고 있는 걸 정당화시키는 듯이 생각되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J가 집요하게 게이꼬와 미쯔꼬에 대해 성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속에 숨어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미쯔꼬는 드물게 더러는 그 점에 관해 생각해 보려고 한 일도 있지만 결코 문제의 속 깊이까지 내려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막연한 공포의 해답을 예감하면서 스스로 물러설 뿐이다. 그녀는 J가 여자를 요구하는 태도 속에 본질적으로 거짓이 있지 않은가 하고 느끼고 있었다. J는 조용히 미쯔꼬 곁에 무너지듯, 그 어둠 속에 미쯔꼬와 마찬가지로 천장을 향해 발랑 누웠다. J와 미쯔꼬는 어둠 속에서 벌거숭이 채로 나란히 누워, 서로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둘이 다 어둠 속에 두 눈을 뜨고 있었다. 땀이 몸뚱이를 차갑게 하기 시작하자 둘의 벌거벗은 맨발이 협력해서, 모포를 당겨 올려 각각의 몸뚱이를 덮었다. 그사이도 둘은 말이 없었다. 아래층에서 게이꼬, 배우, 그리고 J 누이동생의 떠들썩하게 웃는 소리가 울려온다. 카메라맨과 젊은 시인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너는 가짜 오르가즘이 아니고 진짜 오르가즘에 이르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니?"하고 J가 문득 물었다.
"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내 진짜 오르가즘은 영화예요"하고 미쯔꼬는 말했다. 그건 이미 백 번째라고도 느껴지는 부부간의 대화다.
"허지만, 오늘밤 넌, 처음에는 진짜 오르가즘을 향해 나가고 있었어."
"거짓말이에요. 있을 수 없어요!"하고 놀라며 거의 공포에 휘감겨서 미쯔꼬는 강하게 부정했다. 그녀는 불감증을 자유로운 존재의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 믿고 있었다.
"허지만, 넌 흥분하고 있었어."
"거짓말, 있을 수 없어요!"
"그럼 좋아, 난 자겠어"하고 J는 말했다. 그리곤 말이 없었다.
미쯔꼬는 불안해지고 있었다. 맞다. 확실히 J 말대로 나는 흥분해 있었다. 하고 미쯔꼬는 생각했다. 성교섭을 가진 일이 있는 옛날 동급생 시인이 도어 밖에서 미쯔꼬를 끌어안았을 때, 돌연 미쯔꼬는 오르가즘에의 궤도를 타고 있는 새로운 자기를 발견한 것이었다. J가 미쯔꼬를 끌어안을 때 아무리 교묘하게 미쯔꼬 쪽에서 J를 유혹해도 J의 손가락이 저 시인의 일순간의 손가락 움직임을 모방할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의 손가락이 극히 일순간의 주저도 없이 단번에 그녀 성기에 닿았을 때, 미쯔꼬가 막연히 느낀 것은 이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짜로 여자를 바라는 타입의 인간 동작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J와는 반대다. 그때 미쯔꼬는 자기가 영화제작을 포기하고, 그전 애인인 젊은 시인과 같이 산장 밖 어둠 속으로 달아날 것처럼 느껴져서 깊은 두려움 속에 빠졌었다. 그리하여 미쯔꼬는 자기 내부의 오르가즘에 이르는 멸망의 길을 거부하고 그리고 젊은 시인을 거부, 그녀의 오로지 하나 뿐인 정렬인 영화 쪽으로 돌아오려고 했다. 그리하여 파르스름하게 떨면서 층층다리를 돌라갔던 거였다. 재즈 싱어의 몸뚱이 냄새가 스며있는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따뜻한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편과 성교를 시작했을 때, 그녀는 저 일순의 동요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미쯔꼬에게 있어 J는 이상적인 남편이다. 영화를 만들기 위한 온갖 것을 주고 게다가 그녀가 항상 자기자신의 내부에 머물러 있는 걸 양해해 준다. 그녀는 참으로 해방된 여성 예술가가 되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로 하여금 여성적인 것 안에 속박시키려고 드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의 견고한 내부를 불안하고 질척거리는 죽 같은 것으로 바꿔 버릴 위험이 있는 모든 유혹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성으로서의 오르가즘은 그녀의 영화작가로서의 반여성적인 기본권을 붕괴시킬 것이다. 미쯔꼬는 그런 함정에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또한 여성적인 질투의 독으로부터도 자유로와 지려고 애써, 나름대로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젊은 시인의 일순간의 애무로 이 지경으로 자기가 동요되고 있다면, 대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좋을까? 미쯔꼬는 금방 옆에서 잠들어버린 남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온 몸을 긴장시켜서 약간 흐느껴 울었다. J는 성교를 하면서 몇 번이나 머리를 비틀며 어디선가로부터 두 개의 눈이 보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천만에 아무도 보고 있진 않아요, J, 기분 좋지요, 빨리 안심하고 마음 푹 놓고, 아무도 보고 있진 않으니까요 하고 J를 달래었다. 하지만, 나도 누군가가 우리들 일을 보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바보 여자들처럼, 암캐도 느끼는 오르가즘을 느끼고, 전위영화를 만든다고 하는 굉장한 일에 쏟는 정열을 더러운 성본능에 치환시키는, 나의 패배하는 순간을 엿보려고 든, 악령의 눈일 것인가? 흐느껴 울면서 미쯔꼬는 잠들었다--.
J는 해방되었다. 아내가 흐느껴 우는 동안, J는 곰을 만난 나그네 마냥 두려움과 책략에서, 죽은 시늉을 내며 벌거벗은 채 발랑 누워, 겨우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아가미 호흡으로 바꾸고 싶다고 바라면서. 2년 전 J는 어릴 때부터 친구인 카메라맨에게 그 교육영화 제작소에서 임시로 일하고 있는 영화감독 지망인 젊은 아가씨를 소개받았던 거였다. 진 팬티를 입고, 기름때 투성이 머리카락을 당겨 고무줄로 묶고, 열광적인 눈을 지닌 초라한 젊은이 같은 아가씨로, 방금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아가씨는 성적으로 꽤나 자유분방하면서도 정작 불감증이어서, 성교를 그다지 중요시하지는 않고, 오로지 영화제작에만 온 정열을 쏟고 있었다. 1년이 지나, J와 아가씨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J의 원대하고도 뿌리 깊은 음습한 계획이 시작되었다. J는 자기를 핵으로 한 자기류의 작은 성의 세계를 만들고 싶다고 바라고 있었다. J는 스캔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가족이 속해있는 사회의 피와도 같은 것이다. 거기다가 또 J는, 지나칠 정도로 용감한 누이동생과는 반대로 실로 민감하게 공포에 반응하는 겁 많은 토끼간을 지니고 있었다. 전처가 죽은 이후, 그는 현실세계에 대해 무엇 한가지 작용을 해낼 수 없는 사내가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는 자기류의 작은 성의 세계를 만들어내자는 것에만은, 굴이 바위에 악착스럽게 들러붙듯이 끝내 고집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한 평생의 오로지 하나 뿐인 의미에로의 통로라고 느끼면서.
J는 결혼 후 1년도 채 안 되는 동안에 이미 미쯔꼬에게 그 자신이 흔히 있는 정상적인 성교섭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인간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쯔꼬는 그의 레몬 윗부분처럼 뾰족한 항문과 그의 오르가즘과의 관련을 느껴, 그 부분에 대한 애무에 버릇 들여져 있었다. 미쯔꼬는 또, J가 그들 부부의 서의 세계에 재즈 싱어 아가씨를 끌어들인 일에 대해서도 납득을 했다. 그것이 그 들의 또 한가지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교중인 J에게 결락의 감각이 있다는 것을 미쯔꼬는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꽤나 곤란한 일이 될 것이다.
조만간에 나의 성의 세계는 완전히 채워질까 하고 막연한 불안과 불가능이라는 감각의 안개에 휘감겨서 J는 생각했다. 그는 수 없는 밤을 이 피로감에 지친 숨막히는 안개 속에 젖어서, 잠들어 암흑으로 들어서기 직전의 몇 분 동안을 지내곤 했었다. 그것은 그의 성의 그 곤란한 세계가 완결될 때까지 개운하게 갠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안개일 것이다. 젊은 배우를, 그와 아내의 성의 세계에다 재즈 싱어 대신에 끌어들이는 일이, 그 마지막 한 발작이었다. 그의 아내가 열여덟 살 아가씨의 참가에 대해 특별히 충격 없이 승인한 것처럼, 저 스무 살의 청년이 그들 침대 속으로 들어온 일에도 아내가 충격을 받지 않는다는 일이 과연 있을 수 있는 걸까? J는 아내가 차츰차츰 호모 섹슈얼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도록 이끌어왔다. 아내는 이미 남색가를 파티에 불러도 특별히 이상스런 반응을 보이는 일도 없다. 허지만 제 남편이 또 다른 한 사내와 성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침대 속에서, 자기도 또 같은 성관계에 들어선다는 것은, 그것은 극히 길고 깊은 파열구로 점프해 들어가는 것임에 틀림없다. 아는 아내에게, 그녀 자신의 불감증으로부터 벗어나오기 위해서는, 이 커다란 점프를 행하는 길 밖에는 없다, 라고 하는 환영을 끝내 심어 줄 수가 있는 것일까? 하고 J는 생각했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먼 날까지, 아내가 어떤 손쉬운 오르가즘과도 상관없이, 영화에만 오로지 정열을 쏟아주기만 한다면, 희망은 J에게 남아있는 셈이다. 아내는 괴로운 듯이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J는 전처가 자살해 버린 그 어느 겨울의 꼭두새벽 일을 떠올렸다. 그때 J는 아내와 한 침대에 자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아내의 잠든 숨소리가 이상한 걸 느꼈다. J의 아내는, 남편이 사촌 누이동생의 교사인 외국인과 호모 섹슈얼의 관계를 계속해 가고 있다는 걸 어느새 알고 있었던 것이다. J는 그 겨울 꼭두새벽의 침대 속에서의 깊은 공포감으로부터 완전히 헤어나올 수 있는 날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두 번째 아내가, 그의 작은 성의 세계를 승인할 때 비로소, 그는 죽어버린 전처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젠 무언가로 갚을 길이 없는 이상, 그는 역으로 자기자신 속의 죄의 감각을 정통적인 자기 주장의 감각으로 전화시켜서, 자기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 길밖에 없었으니까.
J는 도깨비처럼 시커먼 마음으로 잠들어갔다. 콜타르와도 같은 암흑의 잠 속으로, 물론 그는 자신이 쫓기고 내몰린 끝에 바른 자세를 취한 범죄자와 다르지 않다는 걸 모르지는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잠든 꼴은 웅덩이 속에 그는 조금 아까 본 듯이 느낀, 그를 고발하는 두 개의 눈이 번쩍임을 다시 보아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부터 위협을 받으며 불안한 잠을 잤다.
큰 방에서는 카메라맨이 난로 앞에서 잠들어 있었다. 깨어나 모두와 섞여있는 때에 비해, 그는 지금 훨씬 늙어 있고 불쾌하게 고립돼 있는 인상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 모두를 거부하고 자고 있었다. 그는 회사 속에서만 비협조적인 고독한 인간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 끝내는 협조적으로 사는 순간은 없을 것이다. 거기 가만히 잠들어 있는 짐승처럼 자기 폐쇄적인 마흔 살 사내를 보고 있노라면, 어째서 그가 이곳에 젊은 사내들, 젊은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여서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카메라 맨 곁에서 역시 맨 마루 바닥에 그냥 앉아 벌거숭이 무릎을 두 팔로 끌어안은 열여덟 살의 재즈 싱어는 진 토닉의 마지 막 한 방울을 마저 마시려고 들었다. J와의 만족스럽지 못한 성교가 그녀의 몸뚱이 속에 굳은 저항체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그것은 불유쾌하다. 그녀는 그것을 녹여내서 배설해 버리고 싶다. 그래서 강한 알콜 음료를 줄곧 마시고 있을 터이다. 이미 너무 과하게 마시고 있다. 취기와 졸음이 열여덟 살 아가씨의 작은 머리속에 새빨갛고도 우스꽝스러운 소용돌이 무늬의 성운을 빙글빙글 돌게 하였다. 그녀 손바닥에서 컵이 모래처럼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녀는 일부러 선하품하듯 하며 일어서려고 하였다. 좀처럼 일어설 수가 없다. 그녀는 자기 발에 대해 분격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비치적거리면서, 여전히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외국인과 나와 어느 쪽이 좋았어?"하고 벽 쪽 소파에서는 졸음이 오면서도 기분 좋고 달콤한 꼬마의 목소리가 낮게 집요하게 되풀이되고 있었다. "응, 외국인과 나와 어느 쪽이 좋았어?"
"외국에선 말이지, 임신하면 어쩔까 하고 그게 죽는 것만큼이나 무서웠을 뿐이야. 나는 아직 애송이였고"하고 역시 졸음에 겨운 조각가 목소리가 받았다.
"응, 외국인과 나와 어느 쪽이 좋았어?"하고 스무 살의 배우는 노래라도 하듯이 같은 소리만 되풀이했다.
재즈 싱어는 천천히 도어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소파 곁을 지나칠 때 이미 소파 위의 두 사람은 잠들어버렸다. 그녀는 도어를 열고 도어를 닫았다. 그리고 겨우겨우 욕실 도어와 부엌 도어를 판별하며, 욕실 쪽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흑인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벌의 윙윙거리는 날개 소리 같은 것으로 밖에 자기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변기에 걸터앉아, 재즈 싱어는 반은 자면서 시원치 않게 오줌을 눈다. 몸뚱이 주위에 오줌과 알콜 냄새가 더운 샤워의 김처럼 피어올랐다.
그때 새 그림자가 흘낏 스치듯이 일순 무언가 조그마한 운동체가 재즈 싱어의 감은 눈동자 저편을 어둡게 하였다. 열여덟 살 의 아가씨는 아직 오줌을 누면서 방긋이 눈을 뜬다. 바로 앞에 그 자그마한 존재는 매달린 듯이 정지해서, 번쩍이는 두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아 당신이었군! 그 눈은! 하고 그녀는 목소리를 내지도 않고 목 속으로 울부짖는다. 눈은 대번에 자기 자신의 배후로 민첩하게 날아갔다. 재즈 싱어는 너무너무 취해 있었고 새끼원숭이와도 같고 자그마한 신과도 같았다. 결국 아가씨는 오줌을 마저 누고, 변기에서 천천히 일어설 때까지는, 그 침입자의 일은 깡그리 잊어먹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큰 방의 정원을 향한 유리문은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다. 난로 불은 완전히 꺼져 있다. 이젠 누구 하나 깨어있는 사람은 없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포구 안 마을의 몇 마리 닭소리를 날려올리고 있다. 잠든 자들이 잠든 채로 새벽녘의 추위에 몸을 들썩인다--.
오전 네 시, 카메라맨이 층층다리 밑 어둠 속에 박쥐처럼 벽에 들러붙은 채 잠들어 있는 열 살 가량의 어린 침입자를 보았다. 그는 발소리를 죽여 욕실로 들어가 여자처럼 꿇어앉아 소리를 내지 않도록 오줌을 누고는 되돌아와서 그 아이를 잡았다. 아이는 눈을 뜨자 단번에 죽을 둥 살 둥 저항하기 시작했다. 카메라맨은 당황하여 큰 소리를 질러 동료들을 깨웠다. 우선 욕조 속에서 자고 있던 젊은 시인, 소파에 겹쳐져서 자고 있던 스물일곱 살의 여류작가와 젊은 배우, 그리고 재즈 싱어가 쭝얼거리면서도 아무튼 호기심에서라도 일어나 나왔다. 잠시 후, J와 그 아내도 층층다리를 내려와서 잡힌 아이를 둘러쌌다. 카메라맨이 아이의 두 팔을 잡고, 그 카메라맨을 물어뜯으려고 하는 아이의 머리를, 젊은 배우가 두 손으로 누르고, 둘 다 잡힌 아이에게 연신 발길질을 당하면서 겨우겨우 아이를 큰 방으로 잡아들였다. 나머지 다른 사람도 그걸 에워싸듯이 흥분해서 이동을 했다. 조그마한 악귀와도 같은 아이다. 젊은 시인이 엎드려 굽혀 그 아이의 발을 눌렀는데 금방 무릎에 얼굴을 차여서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악센 사내에 잡혔으면서도, 아이는 완강하게 말이라곤 없이 뱀장어처럼 요동질을 했다. 배우는 손가락을 깨물려서 울분과 아픔이 뒤섞인 울부짖는 소리를 냈다. 카메라맨의 볼에서도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는 화가 나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공포에 질려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케냐의 동물영화에서 본 야생의 작은 동물을 포획하는 정경 같기도 했다. 그대로 버둥질치게 하면 이 작은 동물은 심장발작을 일으켜 뻗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일곱 사람의 참을 수 없게 화난 기분이 차츰 고조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를 잡아서 어쩌자는 것인가? 그러자 문득 그 작은 몸뚱아리 속에서 강철로 된 용수철이 튕겨져 꺾이듯이 부자연스럽게 아이는 모든 저항을 그쳤다. 그리고 아이는 증오의 독으로 엉겨있는 기묘한 소리로, "난 봤어"하고 울부짖었다. 가무잡잡한 작은 얼굴을 눈물로 흠뻑 적시며 뱀처럼 굳고 예리한 혀를 연신 입천장에다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일곱의 포획자들은 멍해져 버렸다. 다음 순간, 아이는 지난 밤, 재즈 싱어가 본 원숭이인지 조그마한 신인지 알 수 없던 그 민첩한 운동체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는 세 사람의 팔을 일거에 뿌리치고 여자들을 자빠뜨리며 뚫고 나가자, 닫힌 채로 있는 널 따란 유리문을 향해 돌진해 갔다. 세계의 끝장이 온 듯한 소리가 큰 방을 메웠다. 일곱 사람은 하나같이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들은 부서진 유리문 저 편을, 아직도 어두운 정원의 소용돌이치는 깊은 안개 속을 울부짖으면서 (아마도 맨발을 예리한 유리조각을 잔뜩 밟으며 이슬에 젖은 잔디를 피로 물들이면서) 달려가고 있는 아이의 참으로 자그마한 검정빛 등을 본 것이었다. 금방 날이 샐 즈음이어서, 그 짧은 동안에도 안개는 계속 물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일곱 사람은 고기를 놓친 뒤 파문이 잦아드는 해면을 보듯이 안개로 소용돌이치는 뜨락을 흥분해서 원망하듯이 쳐다보며 가만히 있었다. 부서진 유리문의 커다란 구멍으로부터 안개방울을 품은 새벽의 공기가 일제히 불어 들어와 큰 방에다가 거센 대류를 빚어냈다. 누구나가 머리는 덥고 아랫도리는 추워졌다. 실내 공기에는 짠 내음이 차츰 명확해졌다. 일곱 사람 누구나가, 소년이 도망해나간 순간 그대로의 자세로 머리만을 새벽녘 가까운 정원으로 비틀어 꼬곤, 의연하게 안개 바다 속으로 사라져간 그 잔상을 쫓고 있었다. 그들의 운동을 기록해 온 필름이 거기에서 갑자기 정지하여, 수은등은 한 장의 스틸을 공허하게 연방 번쩍거리게 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재즈싱어 혼자서만, 스틸로부터 빠져나와서, 바쁘게 방안으로 달려갔다. 방안은 다시 밤 속으로 가라앉고, 이제 누구나가 서로의 얼굴을 미라의 검은 얼굴인 듯이 보고 있을 뿐이다. 부서진 것도 그렇지 않는 것도 유리문은 단번에 허여스름한 빛을 더하여, 안개 속 뜨락으로부터, 방안의 밤을 격리시키기 위해 벽처럼 거기에 존재하는 인상으로 변했다. 재즈 싱어 이외에는 모두가, 방이 너무나도 어두워서, 그녀가 다시 불을 켜려니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미 동이 터온 것이려니 하고 믿었을 테지. 그러나 스위치 바로 위의 벽에 머리를 박은 재즈 싱어는 꼼짝 않고 있다.
"야, 불을 켜라. 뭐 하고 있어?"하고 J가 너무 불쾌하여 겁먹은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모두 J가 그렇게도 큰 소리를 지른 걸 처음 듣는다고 생각했을 지경이었다.
"싫어, 싫어, 그냥 어둡게 해두지 않으면!"하고 열여덟 살 아가씨는 거세게 말했다. 그리고 저 쪽을 향한 채 어깨를 떨면서 흐느껴 울고, 히스테리 증상으로 언덕을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찌해 볼 수 없도록 튕기면서, 아아, 아아! 하고 아가씨는 몸을 뒤틀면서 울었다. 아아. 아아! 살해당한다. 포구 사람들에게 살해당한다. 저 아이의 말을 듣고 온 패거리들에게 살해당한다! 고작 간통 정도였을 뿐인 사람을 그 지경으로 해대던 사람들에게--.
나머지 여섯은 히스테리로부터 멀리 자신들을 감당해 내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 심야의 돌 깔린 길을 하나 가득히 메우고 침묵의 위협을 하고 있던 어민들의 무거운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와 지기는 이미 불가능하였다--.
"쟈가로 달아나요. 응 쟈가를 타고 달아나자구요! 저놈들이 오기 전에, 응!"하고 재즈 싱어는 울었다.
"안돼. 만일 네 말대로, 저놈들이 우리들 일에 화를 내서 무슨 짓을 하려고 든다면, 이미 포구 쪽 길에 모조리 나와서 우리 퇴로를 막을 거야!"하고 J가 거부하였다.
"그럼 어떻게, 그럼 어쩌지?"하고 히스테리 아가씨는 흐느껴 울었다.
"우선 불을 켜는 거야. 그리고 천천히 조반 걱정이라도 하자"하고 J는 말했다. 그 다음, 그는 재즈 싱어에게로 걸어가서, 왼손으로 스위치를 누르면서 오른손을 아가씨 목덜미에 대자, 아가씨는 혐오감에 떨며 울부짖음과 함께 그 손을 뿌리치며 도로 엎디고 말았다. 살갗이 벗겨져 버리지나 않았을까 걱정될 만큼 벽에다 강하게 이마를 찧은 채--.
불빛 속에서 재즈 싱어를 제외한 여섯 사람은 평안하지 못한 쑥스러운 기분으로 서로의 얼굴로부터 눈길을 돌리고 웅성거리며, 자기가 앉아 있는 의자라든가, 자기가 기대고 싶은 벽같은 걸 더듬어 찾았다. 젊은 시인은 입술로부터 턱에 걸쳐 코피로 심하게 얼룩져 있었고, 배우는 물려서 피멍이 든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있었다. 카메라맨도 또한 손바닥으로 볼에 붙은 피를 비벼 대며 웅얼거렸다. 피를 흘리고 있는 세 사람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화장이 지워진 채인 여자들 얼굴은 환한 빛 속에서 혐오감 없이는 쳐다볼 얼굴이 아니었다. 그리고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수면과 작취미성으로, 녹초가 되어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더욱 더 가속적으로 모두가 불쾌하고 불안해졌다.
"어째서 그 아이를 그런 식으로 취급을 했을까. 만년필이든 뭐든 줘서 행복한 기분으로 평화적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는가?"하고 원망스러운 듯이 J가 카메라맨에게 말했다.
"정신이 들었을 땐 벌써 그놈은 내 팔 속에서 발광하고 있었어"하고 카메라맨은 변명을 했다. 그리고 주저를 섞어 덧붙였다. "게다가, 저놈은, 난 봤어 하더구먼. 그런 식으로 될 수밖엔 없었던 거 아냐?"
이때까지의 침묵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더욱 함정에 찬 기분 나쁜 침묵이 다시 비행기 그림자처럼 그들 머리 위를 뒤덮었다. 그렇다 그놈은 모든 걸보고 있었어, 하고 누구나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들 일곱 사람 그룹 속에서, 누구 하나도 서로 다른 사람을 마주보고 않고 있었다. 차라리 자기자신조차 보지 않았음을 모두 비로소 깨달았다.
J의 누이동생은 소년이 물 속으로 다이빙하듯이 부순 유리문 곁에 서서 약간의 피가 거기 떨어져 있는 걸보고 있었다. 핏자국은 발코니에서 잔디가 시작되는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적지 않은 피가 여름 잔디의 무성한 풀을 얼룩지게 하여, 그야말로 무의미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 자그마한 아이의 몸뚱이에 낭비해도 좋은 피가 얼마 가량이나 있다는 것일까?
J의 누이동생은 돌아서서 J를 지그시 보았다. 그리고는 J가 얼굴을 들고 당혹한 미소를 띠우려고 하는데 대해 선고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만일 저 아이가 절벽에서 몸을 날려 죽게라도 된다면, 당신은 두 사람 째 아무 죄도 없는 순진한 인간을 죽이는 거예요, J"
"어째서 누이는 그런 소릴 하지?"하고 미쯔꼬가 말했다. 일순 도망한 아이 일은 잊어먹을 만큼 동요되고 가엾은 목소리였다.
"왜냐하면, 또 한 사람을, 이미 J가 아무 죄도 없는 순진한 인간을 자살시켰기 때문이야."
"전처 말이에요? 그이는 노이로제로 자살하지 않았나요? 그게 J 책임?"하고 미쯔꼬는 J를 향해 말했다.
"내 책임이야"하고 J는 말했다. 그리고 누구나가 침묵했다. 재즈 싱어는 혼자 저 쪽으로 그냥 엎딘 채 여전히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것은 교실에서 항상 고립되어 있는 지능지수가 낮은 학생과도 같다. 그 간절하고도 보기 흉한 흐느껴 우는소리가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고 화나게 했다.
"왜"하고 미쯔꼬가 말했다.
"어쩐지 복잡한 얘기야."
"그 사람 자신의 탓으로?"하고 미쯔꼬가 말했다. 극히 약간이나마 희망의 조짐이 번득거리는 걸 보며.
"아니, 그것뿐은 아니야."
미쯔꼬의 절망은 회복되고,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그녀는, 어떤 식으로, 하고 거듭 남편에게 물었다.
"넌 내 전처가 자살한 걸 알면서 나하고 결혼했지? 너와는 관계가 없어"하고 J는 아내와 매한가지로 깊은 절망에 빠지면서 에고이스틱한 껍질 속으로 급하게 들어가려고 했다.
"관계있어요. 당신이 다시 똑같은 짓을 되풀이하려고 드니까"하고 J의 누이동생이 단호하게 말했다. "당장 지금, 저 아이가 절벽에서 상처투성이 주머니처럼 되어서 바다에 떨어지고 있다면 벌써 당신은 똑같은 짓을 되풀이했어."
"나뿐이야? 그 아이가 본 것은, 내가 더러운 성교를 해치우는 것뿐인가? 너도 충분히 그 아이에게 보여지지 않았을까? 나와 마찬가지 정도로 더러운 너희들의 성교를?"
"뻔뻔하기가!"하고 스물일곱 살인 조각가 아가씨는 떨고 있는 딱딱한 새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게다가 꽤나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충혈이 되어서 눈꼽이 낀 금방 무너져 내릴 듯한 눈에 눈물이 가득 채워졌다. 그녀는 오빠를 노려본 채, 소리 없이 울었다.
"당신은 무얼 했어? 어떻게 해서 당신 전처를 자살시켰지?"하고 어깨를 떨면서 여전히 오열에 잠겨 있는 시누이를 무시한 채 미쯔꼬는 남편에게 따지고 들었다.
"때가 되면 얘기할게."
"지금 듣고 싶어요"하고 미쯔꼬는 말했다.
"들어서는 어쩔래? 결국 그게 너한테 어떻게 관계되는 거야? 너는 단지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나하고 결혼한 것이 아니었나? 너는 지금 너의 우스꽝스러운 지옥 이미지의 전위영화를 만들고 있어, 그 이외에, 무얼 나에게 바랄 것이 있나?"하고 J는 항변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그다지 설득적이지 못했다. 차라리 J자신이 자기 목소리에 혐오를 느낄 정도였다.
"J, 속이고 드는 건 안 좋아"하고 그때, 문득 창백한 낯빛의 중년 사내 카메라맨이 개입해 들어와, J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J와 카메라맨과는 이미 십 년 가까운 동안의 친구였는데, 그 긴 기간동안, 항상 J는 카메라맨에게 군림하고 있었다. 카메라맨이 J에게 거역을 한 일 같은 건 한번도 없다. J는 그 카메라맨에게 지금 새삼스럽게 타인 그 자체를 발견하고, 꽤나 위협을 받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난 오로지--."하고 J는 얼굴을 보기 딱할 정도로 붉히면서 타협점을 모색하려고 하였다. 카메라맨에게 십년 동안 가신의 위치를 새삼 확인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제 J는 에고이스틱한, 기가 약한 아이처럼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J의 그전 아주머니가 자살한 것은 J가 결혼 뒤에도, 추한 외국인 남색가 하고, 대낮부터 침대에 들어가곤 해서였다. J는 그 진짜로 순진한 아주머니에게 그걸 고백하지도 않았으면서, 보여지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어. J, 자네는, 결혼 한 첫날부터, 그 아주머니가 자살하길 바라고 있었어. 자네는 아주머니가 수면제를 백 알이나 먹은 것을 미리 알았으면서도 잠든 시늉을 하며 아주머니가 죽어가는 걸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어. J, 언제까지 말 않고 속이려는가?"
J가 의자에서 튕겨 일어나듯이 서서 카메라맨 쪽으로 다가갔다. J가 카메라맨의 볼을 후려치는 걸, 카메라맨은 더욱 더 파래지면서, 입술에서 피를 흘리면서 말없이 무저항으로 견디고 있었다. 그는 지금 극도로 지쳐 있는 중년 사내이다. 고통의 소리조차 낼 수 없다. J는 결국 의무처럼 계속 후려치는 것이었다.
"J를 말려, 어서 J를 말려, J가 때려죽이겠어"하고 자기가 매를 맞는 듯한 노여움과 고통에 휘말려들며, 비명처럼 날카롭게 미쯔꼬가 소리를 질렀다.
젊은 시인이 일어나서 J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J의 주먹을 쥔 오른팔과 왼쪽 어깨가, 시인의 손에 닿자 대번에 힘을 잃고 갓난아기의 그것처럼 말랑말랑해졌다. 젊은 시인은 J가 넘어지는가 하고 일순 의심했다. 허나 J는 넘어지지 않았다. 거친 숨을 쉬고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가만히 무저항으로 젊은 시인에게 잡힌 채로 있다. 그리곤, 자기가 녹초가 되어서 뻗기라도 할 듯 이 음울한 소리로, "놓아줘, 이젠 되겠지"하고 뒤쪽 시인에게 말했다.
시인이 J의 몸뚱이에 걸쳤던 팔을 덜렁 내리자, J는 시인에게서 얼굴을 돌린 채 자기 의자로 돌아갔다. 젊은 시인은 미쯔꼬 의자에 수호자처럼 선 채, J를 노려보고 있었다. J는 두 손바닥에다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었다. 그도 또 오열을 터뜨리기 시작하는가 하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는 굴복한 채로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일순, 열을 띠어 붉은 원숭이와도 같은 얼굴을 쳐들자 젊은 시인을 노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네가 미쯔꼬와 잤었다는 걸 알고 있고, 지금도 이따금씩 자네가 내 아내에게 욕망을 느끼고 있는 걸 알고 있어. 자네는 그런 일 모두를, 자네의 그 양순해 뵈는 침묵과 미소로 덮어 싸고, 나한테 와있는 거니까, 어쩌면 자네에겐, 나를 규탄하는 심문관 비슷한 눈길을 하고는 있더라도, 내심으로 걸리는 구석은 있지 않을까?"
가슴이 막힐 듯한 거센 증오에 찬 침묵이 J, 미쯔꼬, 여류조각가, 젊은 시인, 카메라맨 작자를 짐승우리처럼 감쌌다. 그들은 꼼짝달싹도 않고 노여움과 불신과, 우정의 상실감의 먹물에다 몸뚱이 안 쪽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지난 밤 그들을 긴밀하게 이어주고 있었던 가공의 우정이라는 코일조각을 허망하게도 두 손바닥에다 올려놓고, 그 조각 자체도 단번에 서리처럼 녹아 스러지지 않을까 하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는 보잘 것 없고, 외톨이고 버림받은 듯이 느끼고 있었다. 재즈싱어의 훌쩍이는 소리는 그들 모두의 증오로 상처 입은 목안에서 나는 소리인 듯이 생각되었다.
오직 혼자만이 히스테리로부터도 증오의 사슬로부터도 자유로운, 스무 살 먹은 배우도 또한, 하나의 이상을 자기 내부 속에 발견하고 있었다. 그는 상상력이 부족하고 판단력이 약하고 둔감한 억센 사나이의 아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가 느끼고 있는 육체적인 불편함, 불쾌감의 저 안쪽에, 무언가 깊이 그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숨어있는 걸 예감하지 않고서는 못 배겼다. 그래서 그는 골이 아프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기괴한 것의 싹을 극히 하찮은 구체적인 대상으로 바꾸어놓고, 그것을 극복하고 싶다. 그는 침착하게 있지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살폈다. 그리곤 문득 하나의 착상을 얻었다. 그는 당돌하게도 이런 말로 침묵을 휘저었다.
"아아, 나는 샤워를 하고 싶어. 목욕탕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싶다니까. 난 기분이 나빠. 난 여자하고 그짓 한 다음 날 아침엔 늘 목욕탕으로 들어가서 샤워를 하는데 말이지! 자기의 정액이나 여자의 바르토린 선의 똥같은 게, 내 페니스를 풀칠한 것 같아서 말이지. 아아, 난 기분이 나빠!"
젊은 배우를 포함해서 여기 사람 누구나가 프로판 가스가 많이 있지 않고선 욕실도 사용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자신의 피부가 더럽혀져 있다는 불쾌한 가려움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증오감의 사슬이 육체적인 자기 혐오로 물들여져서 이중으로 되었다. 배우는 어릿광대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응, 나는 기분 나빠. 몸뚱이째로 냄새가 나! 혼자서 페니스와 바기나를 갖고 있어. 게다가 두 가지다 굉장히 냄새나는 놈을 갖고 있는 기분이야!"
물론 나머지 여섯은 웃지 않았다. 젊은 배우는 점점 더 불쾌하고 구슬픈 기분이 되었다. 칭얼거리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기분. 그래서 그는 일부러 의자를 넘어뜨릴 만큼 거칠게 얼어나자, 유리문을 향해 걸어갔다. 부서진 유리문 조각을 밟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극히 양식화된 고전극의 도둑이나 밀통자와도 같은 발걸음으로. 그리고 돌연 그는, 비연극적인 목소리로 돌아가 울부짖었다. 어린 겁쟁이 아이와도 같은 목소리로, "야! 저놈들이 왔어, 보라구!"
모두가 유리문 저편의 밝아오는 정원을 돌아보았다. 완전히 안개는 개어 오르고, 아름다운 여름의 새벽녘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잔디 언덕이 모조리 유리문 박을 메우고 있었다. 바다도 안 보인다. 수목도 안 보인다. 손질이 조잡한, 그러나 꽤나 짙게 자라 있는 잔디밭 곳곳에 잔디보다도 강인한 들풀이, 잔디의 초록보다도 더 짙은 초록빛의 키 높은 덩어리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두 개의 조상. 앞의 것은, 아폴론이다. 손목이 없는 왼팔을 왼 쪽 앞으로 내뻗치고, 단정한 청년의 머리도 그쪽 방향을 쳐다보고 있다. 부드럽게 발굽을 쳐든 왼 쪽 다리의 이완된 근육 덩어리는, 아침 이슬에 젖어 햇볕의 직사광선이 채 이르기 전의 새벽녘 평온하고도 조용한 빛 속에, 무겁디 무겁게 살짝 살짝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리고 포도잎과 두 개의 넓적다리 안 쪽 접점만이 검정색 짙은 조각은 제우스에 틀림없다. 수염과 같은 양식의 머리카락으로 에워싸여진 노인의 얼굴에, 눈은 공허한 두 개의 퀭하게 뚫린 구멍으로 열려 있다. 그것은 새벽녘의 미광에 미치지 않는 것 없이 드러내어진 초록빛 정원 속에 남은, 밤의 약간의 찌꺼기이다.
큰 방의 안 쪽 의자에 앉고 혹은 그 주위에 둘러서서 기다리고 있던 자들의 눈에 어민들은 불시에 두 개의 조각 사이로 나타났다. 그것을 본 누구나가 부르르 떨었다. 그 작은 떼거리는, 지난밤에 미미나시 만의 마을, 돌 깔린 좁은 길을 점거했던 사람들이었다. 중년 여인네들, 노인들, 아이들, 그들 얼굴은 새벽빛 속에서, 헤드라이트 빛에 떠오른 때보다도, 더 넓적하게, 더 동물 적으로, 그리고 또 점점 작게 움츠러드는 듯이 보였다. 그들은 돌 깔린 길에서 불면의 밤을 지낸 것일까? 저 남 모르게 고독한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있던 간통한 여자를 위협하고 욕되게 하던 침묵의 집회는 새벽녘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일까? 고기잡이 나간 자를 빼고는 나머지 모든 어민이, 밤새 분격해서 길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면, 미미나시 만의 마을은 증오를 위해서는 모든 일상 생활이 붕괴하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무서운 사람들의 마을인가? 방안의 일곱 사람은 공통된 두려움의 연줄로 다시 이어졌다. 지난밤까지 애매한 친화력으로 하여 그들을 하나의 떠들썩한 파티에 대해 연대 책임을 취하게 했듯이, 지금은 새로이 시작되는 공포와 폭력의 파티에로 협동시키고 있었다. 침묵한 채로 마흔 명 가량의 어민들은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은 발코니 앞에까지 왔다. 방안의 일곱 사람은 모두가, 떼거리 앞쪽에 풍성한 머리카락과 가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인디언 비슷한 중년의 여자와, 두 볼이 피로 더럽혀져 있는 소년이 밀려오듯이 다가오는 걸 보았다. 모두가 막바지에 이른 기분이었다. 방안을 들여다보고 멈춰선 어민들이, 지난 밤, 저 볼품 사납게 압박 받던 여자 집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가혹한 눈길을 하고 있고, 똑같은 잔인한 정념을 그 밑바닥에 숨기고 있는 것은 이미 확실하다. 스무 살의 배우도 기가 죽어, 동료들 의자 사이로 후퇴하였다. 바깥의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난입해서 마음껏 폭력을 휘두를 것인가? 그전엔 방안의 위협받는 일곱 사람은 할 일 없이, 그저 대기하고, 깊은 잔디에 복사뼈를 묻고 장딴지까지 이슬에 적신 미미나시 만 사람들은 당장 습격해 들어오려고 태세를 정비하였다--.
그때, J의 누이동생이 의자에서 일어나 나갔다. 유리조각을 실내화로 지근지근 밟으면서, 부서진 유리문의 위험한 구멍 속을 조심스럽게 뚫고, 혼자서만 발코니로 나가서 용감하게도 사람들과 맞섰다. 방안에서 보고 있는 여섯 사람 눈에, 미미나시 만 사람들이 참으로 깊이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그 아이가 절벽에서 떨어져서 죽지나 않는가 하고 걱정하고 있었어요. 밤새 여기에 숨어 있다가는, 유리문을 부수고 도망쳐 버려서 말이죠. 많이 다치지는 않은 것 같군요?"하고 J의 누이동생은 뻔뻔할 정도로 오만하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필사의 각오로 반격에 나선 것이다. 그녀의 정치적인 함정은 사람들을 휘어잡을까? 그 권모술수에 미미나시 만의 어민들은 벌써 거짓냄새를 맡고 그 거짓의 작은 구멍을 실마리로 잡아 J의 누이동생을 단번에 붕괴시켜버릴까? 배후의 여섯 사람은 격렬하고도 불안한 의혹에 휘감겼다.
침묵, 승부가 갈리는 미묘하게 절박한 감각. 저 소년은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J의 누이동생의 그 기만을 뭉개버리지나 않을까? 일순, J의 누이동생은 승리를 했다. 인디언처럼 생긴 그 중년 여인은 그 키다리의 두터운 허리 왼쪽 곁에 바싹 웅크리고 있는 소년의 머리를 꽉 왼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리곤 오른손을 크게 휘둘러 갈겼다. 철썩 하고 예리한 소리가 울렸다. 발코니 위의 아가씨도 방안의 여섯 사람도 모두가 욕지기의 떨림에 휘감겨 들었다. 소년은 잔디 속에 엎어지듯 넘어졌다. 그 엉덩이를 아낙의 완강한 발이 걷어찼다. 소년은 잔디 위를 짐승새끼처럼 벌벌 기어서 도망치려고 서둘러 일어서자 울부짖으면서 뛰어갔다. "난 보았어! 난 봤어!"하고 눈물에 잠긴 억울한 울부짖음 소리를 질러대면서.
"저 바보새끼가 도깨비를 보았다고 해서, 도깨비가 사람 죽이는 걸 보았다고 해서는! 저 바보 거짓말쟁이 새끼 꼴을 못 봐!"하고 아낙은 매우 부끄러워하는, 비열하고도 자잘한 웃음을 볼에 띤 채 말했다. 아낙 주위의 모든 얼굴이 이완되고, 선량한 듯 무의미한 비개성적인 것으로 변했다. 모두가 애매한 수치심의 포로가 되어서 곤혹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우리같은 건 괜찮아요. 옛날처럼 생선을 가져다 줄래요? 영화를 찍으러 왔어요. 일곱이나 되니까, 꽤나 많이 필요한데, 좋겠오?"
"영화를!"라고 하는 소리를 저마다 한마디씩 하여, 술렁거렸다. 미미나시 만 사람들은 이젠 완전히 J의 누이동생이 부리는 권모술수 영향 밑에 있었다.
"어젯밤도 그랬고, 오늘 아침에도 이렇게 빨리 무엇 때문에 나다니고 있지요? 축제날도 아니겠고!"하고 그녀는 힐난하듯이 추궁을 하였다. 그녀는 이제자신이 만만해서 기승한 듯이도 보였다.
아낙들, 노인들이 변명을 했다. 지금 미미나시 만 마을로부터 고기잡이 나간 배들은 하나같이 안 잡혀서 괴로워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이 포구에서 흉어의 씨앗이 됨직한 악령의 적발과 그 추방에 나서고 있다는 거였다. 저 간통한 여자도 자기 죄를 몽땅 털어놓고 모든 사람 앞에서 용서를 구할 때까지는 계속 감시를 당할 것이다. 저 여자가 굴복했을 때 악령 하나는 추방되는 것이다. 이밖에도 아직 가지가지 악령이 적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미미나시 만 사람들이 말없이 다시 한 떼거리가 되어 조각 사이를 빠져 내려가자, J의 누이동생은 발코니로부터 유리가 깨어 진 구멍을 조심스럽게 거쳐 다시 방안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정원을 조심스럽게 거쳐 다시 방안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정원을 등져서 새까맣고 그 솜털이 남아 있는 윤곽만이 초록빛으로 번쩍였다. 어민들에 대한 꽤나 당당하고 위압적이었던 그녀는, 방안으로 돌아오자 늙은 여자처럼 불안정하고 지치고 우울한 듯 차라리 멍해져 있었다. 그녀는 여섯 사람을 향해 목 쉰 소리로, "나는 잠시 자겠어, 이제 나에게 다급한 용무는 없겠지?"하고 자조적으로, 또한 대어들 듯이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그대로 의자 곁을 빠져 큰 방으로 가로질러서 도어를 열고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J가 자던 방과는 다른 방의 문 열리는 소리가 이층으로부터 들려왔다. 모두 말없이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J의 누이동생이 문을 닫고 필경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눕는 묵직한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이층으로부터는 이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카메라를 조립해야지. 이제 촬영준비를 하지 않으면 해가 올라와 버려"하고 카메라맨이 역시 퉁명스럽게, 그러나 꽤나 확실하게 조금 전의 얘기로 서로 파괴됐던 것을 만회하고 싶은 듯이 말했다. 그리고 혼자 일어서자, 아리프렉스 케이스 곁에 웅크리고 작업을 시작했다. 말없이, 여전히 화나 있는 듯이 거칠게, 그러면서도 어딘가 유유자적하게.
그래도 카메라맨의 그 제안이 언제나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구제한 것이다. 미쯔꼬는 히스테리 발작의 여운 속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는 창백한 재즈 싱어를 달래어, 일에 끼어들게끔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시인은 조각의 사진효과를 높이기 위해 양동이에 물을 떠다가 잔디밭을 걸어가서, 아폴론 상의 살갗을 씻었다. 항상 나태하여 육체노동을 수반한 일에는 결코 끼어들지 않는 J가, 그 날은 제우스의 조각을 씻었다. 젊은 배우는 수선스럽게 훌렁훌렁 윗도리를 벗고 상반신만 벌거숭이가 되자, 두들겨 맞은 소년이 넘어졌던 근처에 구부리고, 잔디에 피가 붙어있는지 어떤지를 살폈다. 이미 한여름에 알맞게 직절한 기온의 상승이 시작되어 있었고, 뜨락은 춥지가 않았다. 잠시 후 미쯔꼬에게 설득 당한 재즈 싱어가 완전히 벌거벗고 잔디로 내려가, 조각을 향해 비칠거리며 가까이 다가간다. 열여덟 살 아가씨의 얼룩진 작고 어린 얼굴은 검푸르게 꽤나 추했는데, 그 날씬한 벌거숭이 몸뚱이 자체는 제법 색정적이고 은밀하였다. 그것은 쉬르 리얼리스트의 나부 이미지를 필름 속에 충분히 환기시킬 것이다. 카메라맨이 촬영기를 조정하고 있는 곁에서 역시 창백하게 못생긴 미쯔꼬가 콘티를 쳐다보고 있었다. 훨씬 아래쪽 바다 는 이미 햇살에 타서 반사의 빛을 내고 있었다. 뜨락은 완전히 번쩍이는 여름 아침 한가운데에 자리해 있었다.
"어, 이것 봐. 그 아이의 부러진 이가 여기 덜어져 있군. 이것봐!"하고 젊은 배우가 낭낭하게 부르짖었다. 그는 오른손에 작은 물건 하나를 들고 있고, 햇살 속에 벌거숭이 상체를 장미빛으로 빛내면서 미소하고 있었다. "그놈은 꽤나 아팠겠군! 볼의 아픔이, 그놈 마음의 아픔을 저리 비키라고 하겠어!"
J도, 그 아내도, 재즈 싱어도, 카메라맨도, 젊은 시인도, 문득 움직임을 잃었다. 그들은 가만히 비난의 눈길을 젊은 배우에 게 돌렸다.
"응? 그놈은 도깨비 본 걸 잊어버렸다니까, 이렇게 피를 흘려서 아픈 상처를 참는 동안에, 그렇지?"하고 젊은 배우는 소리 질렀다.
모두가 말없이, 어이없이 멈춰 서 있었다. 젊은 배우는 짜증스럽게 계속 소리지르고 있었다.
"응? 모두 어떻게 된 거야? 미라가 된 사람처럼! 어떻게 된 거야? 시간이 멎어버린 듯이!"
누구 하나 대답하지 않았다. 의연하게, 멈춰 선 채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돌연, 젊은 배우는 오른손에 그 아이의 이를 움켜잡은 채, 피로 얼룩진 잔디 위에 두 무릎을 대며 엎드려서 몸을 뒤틀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아, 하고 흐느껴 울면서 스무 살 먹은 배우는 중얼거렸다. "아아, 난 싫어, 이런 곳에서, 이런 알몸으로, 이런 일이나 하고 있는 게, 난 조금도 즐겁지가 않아! 아아, 난 싫어, 진짜로 나다운 즐거운 일이 틀림없이 있을 텐데. 아아, 그건 다른 젊은 놈이 하고 있어--."
2
국회의사당 앞 역을, 지하철의 혼잡한 차량이 발차한 후 1분이 지났을 때였다. J와 노인이 동시에 열여덟 살 쯤 된 소년에게 눈길이 멎었다. 그것은 장식 단추나 꼬리 버클이 너저분하게 붙어 있는, 흔히 젊은이들이 입는 영국제 트렌치 코트 차림의 덩치 큰 소년이었다. 트렌치 코트의 깃 틈으로 들여다보이는 목과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밀집된 사람 몸뚱이로 빽빽한 속을 크게 한 발짝 내딛으며 가는 소년의 한쪽 발이 보였다. 그것은 사슴가죽 부츠를 신은 발로서, 일순 장딴지와 무릎이 그대로 드러나보였다. 소년은 야윈 듯한 느낌이었지만, 턱으로부터 머리에 걸친 포동포동한 살집으로 미루어, 70킬로는 실히 넘을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트렌치 코트와 부츠 외에는 전혀 알몸이어서 야윈 듯이 보이는 것이다.
지하철 전차는 겨울 새벽의 늦게 나온 신문배달부처럼 좌우로 떨면서 급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소년은 생선 알과도 같은 땀방울을 이마에 가득 매달고 또 한발 앞으로 나갔다. 소년의 몸뚱이는, 지금 한 아가씨의 등과 엉덩이에 찰싹 들어 붙어 있다. 도깨비처럼 이마에 혹살 하나가 있고 거만하게 코를 위로 쳐들고 있는 작달막한 아가씨의 등뒤에서. 아마도 무쇠와도 같은 자제심을 발휘해서일 것이다. 소년은 조용히 소리도 없이 한숨을 내쉬고, 그의 주위에 대해 경계의 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시궁창의 쥐를 쫓을 수도 없는 병에 걸린 개와도 같은 눈이다. 약간 교활한 듯한 생기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완전히 열에 들떠있다. 소년의 잔뜩 벌려질 대로 벌려져서 무언가 색다른 냄새를 맡아내려고 하는 콧방울은, 영낙없는 몽고인 계의 생김새다. 그를 포함해서 모든 승객들 머리의 약 5미터 가량 위에는 초겨울의 황량한 저녁 녘 대도회지의 풍경이 퍼져 있고, 거기에는 1천만의 사람이 생활하고 있는데, 누구 하나 이 고독한 소년이 벌이는 작업에 협력자는 없다 라는 것을, 소년은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덩치 큰 그 소년은 땀에 후줄근히 젖은 채, 마음 놓고, 이 세계 전체를 오만하게도 자기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바로 그 순간, 죽을 둥 살 둥 흥분하였다. 트렌치 코트의 비밀 포키트의 한 조그마한 창문으로, 딱딱한 무기 하나를 내밀고, 그걸 아가씨의 오린지 색 코트의 엉덩이 부분에다 사랑스러운 듯 울적한 듯, 열심히 비벼대기 시작했다. 성자와도 같은 위생무해의 미소를, 쾌감으로 말려 올라가는 입술을 중심으로 차츰 온 얼굴에 띠어가면서--.
J와 그의 친구인 몸집 큰 노인이 어깨를 붙인 채 그 정경을 보고 있었다. 둘 다, 긴장을 도저히 견뎌내지 못하고 눈을 감고 싶을 정도이다. 특히 노인은 심장발작이 두려웠을 것이다. 전차가 역으로 들어가 정차하고, 사람들을 토해내고, 새로운 사람을 안으로 빨아들이고, 다시 발차했다. 소년이 이미 사라져 있길 바라면서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그 쪽을 쳐다보고, 아까보다는 약 간 승객이 빠져나간 인간의 정글 속에, 그 소년이 아직 활동 중인 것을 발견했다. 더구나 지금 소년에게는, 죽음처럼 피할 수 없는 오르가즘이 엄습해 오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J 일행 두 사람뿐만 아니라 전차 속의 모든 타인들의 수 없는 눈이, 모조리 맹렬한 기세로 열려져서, 소년에게 주목할 듯 하였다. 소년은 타인들의 눈의 홍수 속에서 오르가즘에 이르렀다. 그때, 소년을 지켜보고 있던 청년과 노인 곁에서, 굳센 중년 사내 하나가 뛰쳐나와서 소년의 트렌치 코트 깃을 휘어잡았다. 단번에 트렌치 코트가 훌렁 벗겨지지나 않는가 싶어, 청년과 노인은 침을 삼키면서 더운 숨을 내뿜었다.
"저 놈은, 과했어요"하고 청년은, 노인의 식물과도 같은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지금 저 소년의 허리 속에서는 쾌감의 물웅덩이가 치욕감과 공포의 잉크로 탁해지기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절망이 오르가즘의 마지막 하나의 맥동과 더불어 저놈으로 하여금 아스라하게 신음을 토하게 할 것이며, 몸을 떨게 할 것이라고, 심장을 이상 항진시킨 고동에 밟히며, 두 사람은 구슬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절대감각이 저놈의 젊디 젊은 내장 전체를 새끼줄처럼 꼬이게 할 것이다. 저놈은 트렌치 코트를 벗기우고 알몸뚱이로 작은 주름이 잡힌 눈과, 축 늘어진 페니스로부터 끈끈이 방울을 떨구며, 용두질한 침팬지와도 같은 꼬락서니로 경찰에 끌려가는 자신을 예감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허벅지에는 이미 굳어 있는 눈물과도 같은 색깔의 정액 젤리를 묻혀가지고, 수 없는 적의를 지닌 눈앞에서.
"저, 모험가를 구해 주지 않으렵니까?"하고 노인은 받았다. 그리고 둘은 트렌치 코트 소년을 잡고 있는 사내 쪽으로 나란히 다가갔다. 흥분으로 창백해지면서 차라리 자기 자신이 구조 당하는 입장이기라도 한 듯이 느끼면서.
"우리가 경찰에 넘기지요. 참말로 이런 치한이 있겠나"하고 노인이 소년을 잡고 격앙되어서 딱딱해 지려는 볼에다가, 힘든 노력 끝에 겨우 약간의 미소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매와 같이 수지빛을 띠고 날카롭게 빛나는 눈에는 가장 느슨한 표정을 띠우려고 하고, 그리고 그 굴강한 소방단원과도 같은 중년 사내에 비하더라도 당당하게 떨어지지 않은 몸집으로, 부드럽게 그러나 완강하게 위압을 주면서. J는 항상 이 노인의 육체적인 위엄에 매혹되곤 했다. 그리고 이 노인이 30대 무렵에 지니고 있었을 것인 근육다발에 대해서는 막연한 질투를 느끼는 것이다. 이 늙은 들소의 내부에, 불안한 불만족의 가시가 가득 돋아나서, 항상 물이끼의 촉수처럼 떨고 있는 것을, J 이외에 누가 꿰뚫어 볼 수가 있었을까?
"이런 치한은 두들겨 패어줘도 괜찮아요.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에게, 저런 짓을 하다니 원!"하고 중년사내는 이젠 분격을 지나치게 연기해내기까지 하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노인이 일순, 거센 고독한 노여움에 사로잡혀서, 눈 가장자리의 수 없는 고엽색 주름에 덮인 피부를 붉게 물들였다. 그러나 중년 사내는, 그 자신의 치한에 대한 분격에 노인이 동조해서 화를 낸 것으로 오해하고, 착한 사람처럼 끄덕이는 것이었다. J는, 노여움으로 붉어지는 노인의 얼굴이, 고든 진의 레테르에 취한 승냥이 비슷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J가 노인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발견하고 있는 유사점이었다.
"아무튼 우리가 경찰에 넘기지요. 당신의 명함 한 장을 주시면 진짜로 이놈을 잡은 것이 당신이라는 걸 서장님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하고 J는 노인이 중년 사내를 매도하기 시작하기 전에 재빨리 끼어들었다.
"유쾌하군요. 정의파 동료를 만날 수 있어서. 내가 시간이 있으면 같이 경찰로 갈 것인데, 이 치한 놈같으니라구!"하고 중년 사내는 속주머니 지갑에서 주둥이가 부러진 낡은 명함 한 장을 빼내어 그걸 J에게 건네었다.
노인과 J는 양쪽에서 트렌치 코트 소년의 몸뚱이를 붙잡았다. 그들의 옆구리와 허리에 잡힌 소년의 몸뚱이가 떨고 있는 게 전해져 왔다. 울지마, 바보 같은 비명이나 애원하는 소릴 내지 마, 하고 J는 말없이 수그린 채 계속 떨고 있는 소년에게 저 목안에서만 울리는 은밀한 소리로 속삭이려고 들었다. 중년 사내는 오린지 색 코트의 엉덩이에 얼굴을 내어, 쿨적이면서 울고 있는 그 아가씨를 위로하려 들었다. 그는 쥐색 손수건으로 정액을 깨끗이 훔쳐주려다가 다시 한번 아가씨에게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다 . 주위에 모여 있던 승객들은 기분이 좋아 흥분해서들 웃고 있었다. 이마에 도깨비와도 같은 혹살을 지닌 그 아가씨는 새파랗게 질려 금방이라도 싯누런 위액을 토해낼 것 같았다. 상처가 있고 추하게 생긴 아가씨의 인상만이 J로 하여금, 그 원인을 만든 치한 소년에 대해 약간의 혐오를 느끼게 하였다. 하필이면 이렇게도 역겹고도 못생긴, 게다가 겁까지 많은 아가씨에게 어째서 페니스를 비벼댔다는 말인가, 하고 J는 불만스럽게 여긴 것이다.
"아가씨, 이런 일로는 임신되지 않아. 그러구 당신은 처녀를 잃지도 않았어. 순결하다구!"하고 더욱 더 신이 난 중년 사내는 아가씨에게 소근거려서, 주위 승객들을 다시 한번 웃겼다. 그때서야 노인도 J도 그 사내가 술냄새를 풍기고 있는 걸 눈치챘다.
다음 역에서 노인과 J는 소년의 두 팔을 옆으로 잡은 채 플랫폼에 내렸다. 도어가 닫쳤을 때, 중년사내는 싯누런 옥수수 알과도 같은 이빨을 원숭이처럼 드러내며 웃고 손을 흔들었다. J는 사내로부터 받은 명함을 찢어서 버리고 사내를 향해 제법 진지하게 엿 먹어라는 식을 해보였다. 중년 사내가 어떤 반응을 하건 관심도 없이 J와 노인은 소년의 팔을 잡은 채(이젠 나이가 각각 다른 유쾌한 3인조이기라도 한 듯이) 플랫폼 층층다리를 향해 걸어가면서 소년에게 각각 이런 주의를 주었다.
"네가 하는 짓은 너무너무 엉망진창이야. 그래 가지곤 안 잡히는 게 이상하지. 왜 좀 더 조심성 있게 못 하나?"
"더 좀 승객이 많은 때를 잡아서 해야지. 그런 모험을 할 셈이면, 만원 전차 속이어야 한다구."
그리고 노인과 J는 동시에 소년의 팔을 놓아,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소년을 풀어주었다. 그들은 소년을 구해 내는데 성공한 셈이다. 소년은 자유로워졌음에도, 여전히 두 사람으로부터 속박을 받고 있다는 듯이 두세 발짝 같은 자세로 앞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서서 돌아다보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노인과 J를 쳐다보았다. 그의 콧방울은 이제 부풀어 있지가 않았고 눈도 앓은 개 같진 않았다. 오르가즘 뒤의 선량한 육체적 진정이 소년의 큼지막한 얼굴에 이를테면 천사같은 인상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수난 뒤의 빈사상태에 있는 순교자와도 같았고, 고난 뒤의 성자와도 같았다.
"당신들은 나를?"하고 쨍한 목소리로 소년은 물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내빼려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의아해 있었다.
"우린 너를 경찰에 넘기려던 게 아니야. 그건 괜한 농담일 뿐이었어"하고 J가 말하기 거북한 듯이 입 속으로 웅얼거리면서 말했다. 소년이 너무나도 진지하여 구해 낸 쪽은 스스로를 약간 부끄럽게 조차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난 오늘 잡혀서 혼나게 되는 걸 미리 고려에 놓고 있었단 말요. 나는 결심하고 이 짓이 갈 수 있는 한계점까지 나갔었어"하고 소년은 대어들 듯이 말했다.
J와 노인은 서로 멍하게 마주보았다. 그리고 J는 노인이 겨우 미소하는 걸보고 자기도 씁쓰레하게 웃었다. 약한 곳에 정확한 한방을 먹고 깜짝 놀라서 비로소 상대방의 펀치력을 평가하고 있는 관대한 복서의 미소를. 그리하여 J와 노인은 새로운 호기심에 자극되어서 소년을 더욱 주의 깊게 보았다. 소년은 짜증이 나고 분하고 그리고 또한 슬퍼보였다. 그를 양순한 성자와도 같이 보이게 했던 조금 전의 오르가즘 직후의 고요한 인상은 당장에 벗겨져 버리고 그 대신 극히 예리한 불만의 그림자가 짙게 떠올라 있었다.
"난 이 코트와 부츠 이외엔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는데, 이 차림으로 거리에 나올 결심을 하기까지, 난 꽤나 번민했어. 그리고 누구나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 쾌감의 마지막 건널목을 훌쩍 뛰어 넘는다는 건, 사실은 시속 80킬로로 내달리고 있는 오토바이 위에서, 눈을 감고 손을 놓는 모험만큼이나 두려웠던 거야. 그 결사대원과도 같이 진지한 나를 당신들은 한낮 게임 도구로 취급하나?"
그리고 소년은 충혈된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갑자기 J를 향해 후려치려고 들었다. J는 대학의 여름방학 때 연습했던 권투 기술을 써서 거칠고도 가혹하게 소년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년은 아파서 신음하며 두 팔을 덜렁 내려뜨리고, 찔끔 눈물을 흘렸다.
"뭣하면, 너를 철도 공안관이나 경찰에 잡아 넘기겠어"하고 J는 숨이 차서 붉게 물들여져 있는 손목을 비비면서 소년을 노려보고 위협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하고 소년은 눈물이 가득한 눈에 일순 다시 공포의 기색을 드러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J는 소년이 수면제를 마시고 잠들기 직전의 흥분과 심리적 불균형 상태에 있는 듯한 것을 느꼈다. 그것은 어쩌면 J가 모르는 그 어떤 특별한 마약에 의한 흥분이었는지도 모르는데, J는 몇 년 전 자기가 그 중독증상을 좀처럼 극복할 수 없었던 독일제 수면제의 가공할 정도로 매혹적인 하얀 정제를 떠올렸다. J는 단지 공허하게 앙양되고 그리하여 문득 공포에 찬 무의식의 밑바닥으로 떨어져 갔다--.
J는 회고적인 기분이 되어서, 소년이 그에게 갑자기 달려든 일로 상했던 감정으로부터 헤어나왔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경찰에 자진해서 가기 전에, 우리들 단골 술집에 가지 않겠어? 우네비 조오의 호텔 바야."
"당신들이 남색가가 아니면 가겠어. 아무튼 난 남색가를 위한 지겨운 닭은 아니니까"하고 소년은 조소적으로 말했다.
J는 대답하질 않았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동성의 애인과 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젊은 사내의 나체나 남근 감촉에의 갈망이 이따금씩 그를 혼란시키는 일은 있었다. 나는 이제 결코 저런 종류의 자극적인 성관계를 갖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고 그는 이를테면 자기 징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하긴 J는 남색가적 본질이란 게 태어날 때부터 한 인간에게 내재적으로 존재해서 그 인간으로 하여금 평생동안 남색가로 결정지어놓는다,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형은 아니었다.
"우린 남색가가 아니야. 그리고 우릴 보고 당신 당신하고 부르지 말아!"하고 노인이 말했다.
노인과 J와 소년은 겨울 저녁 녘의 거리로 나섰다. 약간의 눈이 간헐적인 바람을 타고 집요하게 되풀이되어 내리고 있었다. 소년은 몸을 떨면서 몇 번이나 우스꽝스러운 딸꾹질을 했다. 노인과 J는 우선 소년을 양품점으로 데리고 들어가 바지 하나를 사주고, 소년에게 그걸 변소에 가서 입고 나오도록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너무나 추워서 입술을 오디처럼 검푸르게 부풀리고 있던 소년은 택시에 타자 금방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J는 소년이 역시 수면제에 취해 있었다는 걸 알았다. 택시가 눈내리는 저녁 때의 위험한 길을 무네비 조오로 향해 질주해 가는 동안 소년은 그냥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작게 하 품을 하면서 뭐라뭐라 잠꼬대를 했다. J는 그 말의 뜻을 알 수 없었지만, 드디어 노인은 그것을 알아냈다.
"이 아이는, 꿈속에서 그 무슨 괴물과 만나고 있는가봐. 무섭다고 무섭다고 그러는구먼"하고 노인은 말했다.
"트렌치 코트와 부츠만 신은 알몸뚱이 맨 몸으로 지하철에 타는 건 두려운 체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꿈속의 괴물은 어쩜 치한이 된 자기자신이겠죠. 그런 나이이기도 하고"
"그런 나이라니?"
"네, 자기 자신 속에서 괴물이 생겨나는 듯이 느끼는 공포의 감각 말입니다. 열여덟 살에서 스물 한두 살까지는."
"자네 나이와 이 소년 나이에 나는 그다지 깊은 골짜기가 파여져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나는 예순 살이어서--."하고 노인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일단 입을 다물자 노인에겐 어찌해 볼 수 없이 견고하고 폐쇄된 인상이 머리로부터 몸뚱이 전체에 완전히 뒤집어쓴 갑옷처럼 나타나는 것이었다. 게다가 노인은 이따금씩 얘기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노화해서 쑥돌같은 이빨이기는 할망정 일단 그것으로 악물어버린 말의 맹수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노인은 입술을 꽉 물고, 매와 같은 눈을 자기 몸 둘레로 돌리면서 침묵하는 것이었다. 이런 노인을 볼 때마다 J는 노인이 어떤 경력을 거쳐온 인간인가 하는 걸 가지가지로 공상했다. J와 노인과는 '포도 위의 친구'였다. J는 노인에 관해 그 과거도 현재의 사회적 위치도 무엇 한가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반사회적 접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J편에서도 자기가 어떤 인간이냐 하는 걸 노인에게 말한 일이 없었다. 하긴 J는 자기자신을 향해서도 현재의 자기가 어떤 인간이냐 하는 걸 얘기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J는 노인이 어느 나라엔가 외교관으로 나갔던 일이 있고, 또한 정치가로서 일한 일도 있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노인이 J와 이따금씩 외무성이나 국회의사당 곁에서 약속해서 만났는데, 그런 때 노인은 관리들이나 의원들에게 번번이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금방 기골 있는 대화를 나눈 듯한 모습으로 나오는 등등, 대강 그런 사정에서의 짐작이었다. 요즘도 여전히 정치에 관계하고 있는 듯한 치기같은 건 이제 노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지만, 그날도 국회 의사당 앞 지하철 승강구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J를 보자, 노인은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해방감을 온 얼굴에 띠면서 J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J는 마치 못생긴 노파에게 인사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예순 살이어서--, 하고 노인이 막 입을 올렸던 말의 후반을 J는 생각했다. 그것은 필경 노인과 죽음과 상관된 말일 것이다. 노인은 암이라든지, 심근경색이라든지 생생하고도 주체적으로 그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죽음의 공포에 대해 이따금씩 J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예순 살이어서, 죽음이라는 괴물이 자기 속에서 급속하게 생겨나는 공포의 감각을 맛보고 있어, 하고 노인은 말할 작정이었을까? J는 노인이 당장 심장의 동맥경화를 앓고 있고 또 수술을 한들 이미 소용없는 암을 제 몸뚱아리 어디엔가 마치 귀한 포도주를 술 곳간에 저장해 두듯이 간직하고 있는 듯 하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노인이 직접 말은 않았지만--.
"이 소년은 진짜로 치한일까요? 치한일 수밖에 없는 인간일까요?"하고 J는 웃으면서 노인에게 말했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게다가 오늘 이 소년이 하는 짓은 매우 독특했어. 치한에 대한 씨름 비평가같은 말을 한다면, 실로 독특한 방법이었어."
"네, 확실히 독특했어요. 자기자신의 퇴로를 끊으면서 공격하고 있는 듯한, 위험한 자살 지향성이 있는, 지나치게 용맹한 병사 비슷한 구석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이런 애숭이로서, 아마 열여덟 살일 겁니다. 자신이 치한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 소년은 연인도 가질 수 없고 수음으로도 만족하거나, 단지 돈이 없어서 창부를 살 수도 없는 욕구불만 자일까요?"
"아니, 더 의식적인 치한일 걸"하고 노인은 주의 깊게 소년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J는 그와 마찬가지로 노인도, 이 소년에게 차츰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때까지 J는 노상 노인의 구체적인 인간혐오가 격렬한 데에 충격을 받아 왔었다. J는 노인이, 이렇듯 낯도 코도 모르는 생판 타인에게 관대한 것을 노인과 '포도 위의 친구'가 된 후로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J는 자기가 이 소년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노인이 말한대로 오늘 이 소년의 치한으로서의 행동법이 실로 독특했던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이 소년은 고독하고 공포감으로 차 있고 비장한 치한이었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이 소년이 항의하면서 한 말은, 결코 아무렇게나 한 말은 아니었던 것 같아. 아무튼 재미난 소년이야"하고 노인이 말했다.
무네비 조오의 호텔 현관 양쪽에는 더럽혀진 눈이 흙덩어리처럼 높이 쌓여져 있었다. 노인과 J가 소년을 흔들어 깨우자, 소년은 더러운 눈더미를 보고 추워서 부들부들 떨며, 눈 가장자리에서 눈물이 눈곱처럼 붙어 있었다.
"걷겠니?"하고 J가 물었다.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하고 미간을 찡그리며 J를 돌아보면서 소년은 핀잔주듯이 말했다.
그들 셋을 보고 호텔의 현관 도어를 연 제복의 보이는 짙은 초록색 윗도리에도, 금실로 꼰 테두리 장식에도, 엷은 하늘색 바지에도 알맞지 않은 어색하게 큰 오버슈즈를 추 마냥 질질 끌고 있었다. 눈이 그를 기죽게 한 것일까. 세 사람은 몸을 떨면서 1층 프런트의 바까지 곧장 걸어갔다. 거기에는 난방이 있어서 모두 마음을 놓았다. 노인과 J는 자연스레 소년을 감시하듯이 소년이 앉은 의자를 향해 부채꼴로 두 의자를 나란히 놓고 앉았다. 소년은 반발하듯이, "난 졸리니까 위스키를 마시겠어"하고 오버슈즈를 신은 채 있는 보이에게 맨 먼저 주문을 했다. J도 노인도 소년을 따랐다. 그들은 우선 말없이 한 잔씩 마셨다. 소년은 대번에 생기를 되찾는 듯 하였다. 세 사람은 다시 한 잔씩 위스키를 주문했다. 수고를 덜려고 보이는 위스키 병을 테이블까지 곧장 날라왔다.
"나한테 무얼 듣고 싶어? 아니면 나더러 잘못했다고 빌라는 거야?"하고 소년은 여전히 대들 듯이 말했다. "나한테 무슨 나쁜 짓을 하려는 거야?"
"물론, 너는 그렇게 젊은데, 어째서 치한이냐고 묻고 싶은 거야. 여자아이의 엉덩이가 어느 정도나 딱딱한지 알고 싶었나? 그렇다면 너 자신의 엉덩이를 만져보면 좋았을 텐데"하고 J는 소년의 도발에 대해 되받았다.
"한 판 할래?"하고 소년은 코브라를 본 망구스마냥 전신을 격분으로 물결치게 하면서 거친 소리로 말했다.
"화내지마. 우린 네가 어째서 치한이 됐는지, 치한인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던 거야. 너처럼 젊은 치한은 이때까지 본 일이 없었어"하고 J는 말했다.
"나는 시인이야"하고 소년은 으쓱하며 말했다.
"시인?"
"오래 걸려서 하나의 굉장한 시를 쓰려 하고 있어. 그건 '엄숙한 줄타기'라는 시야"하고 소년은 열정을 넣어 말했다. "그건 치한을 주제로 한 폭풍우와도 같은 시야. 그리고 이를테면 그 시와 치한인 나 자신과는, 닭과 계란의 관계야. 난 더 어릴 때부터 치한이어서, 그 치한의 시를 쓰고 싶다고 바라게 되었고, 그 시를 더욱 근사하게 하기 위해, 나는 가장 용감하고 절망적인 치한이 되어주려고 하고 있어."
J는 그가 알고 있는 또 한 사람의 젊은 시인을 생각해냈다. 그 젊은 시인은 그의 후처의 옛 애인이었다. 아내가 첫 단편영화를 만들고 있는 동안, 시인은 항상 그의 아파트나 별장, 또는 그의 쟈가 속에서, 타버리지 않은 욕망의 안개 속에 가라앉아 있는 원망에 찬 눈으로, J와 그 아내를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끝내, 젊은 시인은 J의 아내와 다시는 성관계를 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저 굶주린 고양이와도 같은 눈을 지닌 무저항주의자는, 문득 J 주위에서 모습을 감추었는데,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는지? 지금도 여전히 나약하고 폐쇄적인 시를 써서, J의 아내에 대한 욕구불만이라는 암을 무너뜨리듯이 해소하려 하고 있는 걸까? 아무튼, 그보다도 이 소년에게 시인으로서 더욱 풍부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라고 J는 생각했다. 적어도, 저 양순하고 가엾어 뵈는 젊은 시인에 비해 이 소년에게는 인간적으로 격렬한 인상이 있다. 알몸뚱이고, 단지 트렌치 코트와 부츠만 걸친 채, 지하철의 타인들 한가운데서 사정을 하는 사내니까!
"어떤 시야? 이제 몇 행 정도는 썼을 것 아닌가"하고 노인도 호기심이 생긴 듯이 열심히 묻고 있었다.
"몇 행 정도는 썼느냐 라고, 시는 그런 식으로 써지는 게 아냐. 적어도 내 시는 말이지. 필경, 난 어느 날, 그 시를 쓸 준비가 이제 됐다고 본능으로 느끼는 거지. 그리고 1초에 한 단어의 비율로, 꽤나 긴 시간, 쓰고 또 쓰고, 그렇게 완성될 거야"하고 소년은 거만하게 말했다.
"허지만, 노트같은 건 있을 테지? 기억 속의 노트라도?"하고 J는 말했다.
"으응, 그건 있어. 그걸 만들기 위해서 난 꽤나 괴로운 일을 참아왔으니까. 결국 난 체험적으로 시를 쓰고 싶어."
그리고 더욱 더 취한 듯이 끊임없이 웅변이라도 하듯이 소년은 그 시의 구상이라는 것을 떠들어댔다. 치한들, 이 도오꼬에 수 만 명을 헤아리면서, 극히 고독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가난하고 공허하고도 위험스러운 열정에 찬 일상생활의 투우사, 엄숙하기 짝이 없는 줄타기를--.
그들은 구슬플 정도의 엄숙한 얼굴로 절실하고도 우스꽝스럽게 지위나 명예나 때로는 생명까지도 노골적인 위험 속에 드러낸 채 그야말로 적수공권으로 극히 작고도 하찮은 쾌락을 위해 활동을 한다. 애초에 현대는, 모험가들에게 있어 은총받은 시대는 아닐 것이다. 우주 로케트에 탄 이후, 미터를 모두 자기류로 움직여버린다고 하는 끔찍스러운 용기를 지닌 사내 이외에는. 인간들은 2천년 내내 걸려서 오로지 힘을 합쳐 이 세계를 몽땅 고무로 한겹싸는 육아실로 맹수의 정글로 바꿀 수가 있다. 기도의 의식 마냥, 예를 들어 어린 계집아이의 허벅지에 손가락을 1초 가량 대어본다는 한 동작만으로도 그는 그때까지의 생애에 이룬 모든 것을 위험 속에 드러내는 것이다.
치한들은, 발견되고 처벌되는 걸 꽤나 두려워하곤 있지만 동시에 그 위험의 감각 없이는, 그의 쾌락은 엷어지고 애매해지고 쇠약하고,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금기가 줄타기 임자로 하여금 그 모험의 쾌락을 보장한다. 그리고 치한들이 안전하게 그의 시도가 이뤄지면 그 순간 안전한 종말이, 서스펜스 속의 전체 과정의 혁명적인 의미를 간단히 날려버리고 만다. 결국, 아무런 위험도 없었기 때문에, 이때까지 자기 쾌락의 숨은 동기였던 위험의 감각은 가짜에 지나지 않았으며, 즉 방금 맛본 쾌락 그 자체가 가짜 쾌락이었다고 치한들은 느낀다. 그리하여, 다시 그는 이 불모의 줄타기를 시작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조만간 그들이 잡히고 그의 생애가 위기에 떨어지고 그때까지의 가짜 시도가 몽땅 진실된 쾌락의 과실로 익기까지--.
치한들은, 대개가 말없이 행동하고 있다. 그들은 떠들면 그들의 행동이나 요설이나가 우스꽝스럽게 겉돌 뿐이다. 치한들은 서커스의 줄타기와 매한가지로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일단 잡혀서 타인들의 적의의 눈에 의해 치한으로서의 인식표가 주어지고, 치한의 본질이 확정되면 치한들 속에는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자기 신전을 하기 시작하는 자가 있다. 전후 일본의 가장 거세던 정치적 동요가 있던 때에, 국회를 에워싼 10만 명의 데모 군중 속에서 한 치한이 잡혔다. 그가 경관에게 고백한 말, "지금 10만 명의 노한 정치적 인간이,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고 포기하고 있는 10만 명분의 성적 흥분이, 그들 속의 하찮은 아가씨 엉덩이를 노리고 있는 나 혼자만의 특권적인 손가락에 집중해 오는 것 같아서, 내 손가락은 굉장한 지복의 열로 타올랐습니다. 더구나 무장한 제 4 기동대의 방대한 경찰들 앞에서 그 짓을 해냈으니까!"그들은 매일 매일이 엄숙한 줄타기이다--.
"괜찮아, 너는 그 시를 써야 해. 만일 출판비용이 필요하다면 내가 내줄께"하고 노인이 말했다. 그것은 J가 하려던 말이기도 했다. 자기가 쓰려고 하는 폭풍우와도 같은 시를 위해 트렌치 코트를 알몸뚱이에 걸치고, 이 겨울 저녁 녘에 지하철에 올라타서 저 모험을 해낸 소년, 게다가 적지 않게 번민한 뒤에 죽음을 걸 듯이 못생긴 아가씨의 털외투 엉덩이를 더럽히며 사정한 소년, 그건 역시 독특한 소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허지만 아직까지는, 내 머리 속에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시는 조금도 격해지지가 않아서 말이지"하고 소년은 언짢은 듯이 말했다. "너무 관찰적이야."
"관찰적이어서 나쁠 건 없잖아?"하고 J가 말했다.
"관찰적이기만 해서는, 시는 폭풍우처럼 거세지지는 않아"하고 소년은 제법 시에 들어서는 베테랑이기라도 한 듯이 깊이 생각하면서 말했다.
"그럼 넌 오늘, 자기의 시 세계에 꽤 깊이 들어가 있었나?"하고 J가 말했다. "적어도 제 3자적 관찰을 넘어서 있었으니까."
"안돼. 구조되어서 말야! 그래서 내 공포심도 영웅적인 용기도, 모두 가짜가 되어버렸어. 왜냐하면 난, 당신들이라고 하는 구명 보트의 출현을 근거도 없이 예상했던 것 같군. 오늘은"하고 소년은 말했다.
"우리가 나타난 걸 보고나서, 너는 자기가 그걸 예상하고 있었던 듯한 기분이 난 것이야. 저 공덕심이라는 도깨비에 잡혔을 때, 너는 당장이라도 심장이 뭉개질 것 같은 모습이었어"하고 J는 반은 조롱하듯이 위로해 주었다.
"아니, 지금 와선 그렇지도 않아. 나 자신이 구조되고 나서 그렇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있으니까 이젠 글렀어"하고 소년은 꽤나 지친 듯이 슬프게 중얼거렸다. 지금, 그의 어린 얼굴은 힘없이 암울하였다.
J와 노인은 할 말을 잃고 소년을 안스럽게 지켜볼 뿐이었다. 이 소년을, 치한이라고 하는 빠져나갈 구멍이라곤 없는 곳으로부터,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소년은 치한을 둘러싸고 세찬 시를 쓰려고 열망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J 와 노인은 이 소년을, 저 징그럽던 뚱뚱보 도덕가의 팔과 공명심의 속박 속에 그냥 처박아 두어야 했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소년은 지금쯤 어느 경찰서 유치장에서 추위와 치욕감에 떨면서 '엄숙한 줄타기'에 관한 그 자신감이 찰 만큼 세찬 시를 일거에 써내고 있지나 않을까, 1초 동안에 한 단어의 속도로 끝없이 긴 동안을--.
"너는 내일이라도 또 저 자살행위와도 같은, 달아날 구멍이라곤 없는 모험을 계속할 셈이야? 이젠 우리와 같은 구조자가 안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고?"하고 J는 말했다.
"내일? 도저히 안돼. 지금 난 지쳐 있고 또 다음 모험을 결심하기까지는 꽤나 긴 시간 번민할 걸로 생각해. 아아, 나는 자살할 셈이었는데, 강 밑바닥에서 끌어올려져서 겨우 숨을 드내쉬는 멍청이같은 기분이야. 구조자는, 그 멍청이가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맛본 가지가지 쓰디쓴 시련은 생각해 주지도 않으니까, 미소하면서 유쾌한 듯이 구조해 줄뿐이니까. 그렇군, 이 세상의 지옥의 불덩이 속으로 되돌려 놓았으니 말야. 휴머니즘이라는 부지깽이로--."
"하지만 넌 어째서 체포당할 것을 그렇게도 고집을 하지? 체포당하는 것의 의미를 너무 중요시하고 있는 건 아냐? 네가 무사히 달아나더라도 그건 결코 치한으로서 행동한 네 모험의 의미를 손상 당하는 건 아니지 않아?"하고 노인이 말했다.
"치한에도 결국 여러 가지 형이 있겠지요. 나는 시인이니까. 치한들의 샘플상자에서 가장 위험한 형의 치한 행동법을 채용했어"하고 소년은 노인을 여유있게 얼버무리면서 말했다.
노인과 J는 한 대 맞은 듯이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확실히 가장 위험한 긴장을 안고 폭발에 이르려고 하는 불행한 열정가와도 같았다. 그것은 매력적이었다. 소년은 유아기를 빠져나온 뒤, 오랜 추한 나이를 막 빠져나온 듯도 보였다. 그는 더욱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보다도 소년의 가증스러운 오만함에 그 나이 특유의 번쩍임이 있어 그것이 J와 노인을 사로잡았다.
"네가 그 도덕가에게 습격 당했을 때, 나는 네가 심장발작이라도 일으켜서 즉사하지 않도록 캄플주사를 놓아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가장 위험한 방법을 택해서 치한이 된 용사치고는 너무 너무 겁먹고 있지 않았어?"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J는 소년에게 말했다.
"진짜로 내가 그렇게나 겁먹고 있던가? 그렇다면 난 조금씩 진짜 치한에 가까와져가고 있어. 내 머리가 짜내서 구석구석 설계한 대로의 의식적인 치한이 아니라, 내 머리를 넘어서 실재하는 타자적인 치한으로. 내 속의 뜻하지 않은 타인으로서의 치한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 셈이지"하고 소년은 말했다. 그는 J의 조롱을 개의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요설에만 정열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J는 이런 종류의 나르시시스트가 좋았다. 따라서 J는 미소를 잃는 일없이 이를테면 호의적인 조롱을 계속할 수가 있는 셈이다.
"자기 속의 타인이 되고 싶다, 라는 욕구는 나도 너만한 나이 때는 얼마든지 갖고 있었어. 그건 단순히 말하면 어른이 되고 싶다는 어린애다운 열망이야"하고 J는 소년을 마치 아이 취급하듯이 말했다. "발돋움하려다가 넘어질 것 같은 아이를 본 어른이 손을 뻗쳐서 받쳐주고 싶듯이, 우리도 너를 구조해 주고 싶었어. 이 어른만의 세상에서, 아무리 자기 머리 속의 치한에 가까워지려고 한들, 너는 그때마다 주위 어른들에게 구조되어서,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거야. 너는 시지프스 주니어의 치한이야. 가엾게도!"
"그런지도 모르겠어.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다음 기회까지 절대로 최소 불가능한, 어른들이 구조하려고 해도 손을 쓸 수 없는, 치명적인 치한행위의 나다운 패턴을 발명하지 않으면 안되겠어. 세상 어른들이 나의 전도를 막아주기는커녕, 모두가 합쳐서 나를 물구나무 세워서 짓밟는 것 같아"하고 소년은 그 졸리운 듯한 어린 눈을 다시 어둡고 참담한 피로감으로 푸르스름하게 물들이면서 애처롭게 말했다. 폭풍우와도 같은 세찬 시를 써낼 인간이라기보다는 시험에 실패하고 암담해져 있는 열등생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J는 소년을 지나치게 조롱한 것을 뉘우쳤다. J가 자신을 부끄럽게 느끼면서 노인을 보자, 노인도 또한 도무지 쑥스러운 듯한 모습으로 지긋이 그를 쳐다보았다. J는 노인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으려니 하였다. 자기들은 이 소년의 솔직하기 짝이 없는 자기표백에 비해 너무나도 자기 방위적이어서 역겹지 않은가? 환자를 앞에 둔 두 사람의 정신분석 의사처럼 자기들만을 지키고 있지 않는가? 그리하여 J는 노인에게 끄덕이면서 이런 식으로 제안했다. "자, 이 소년에게 우리 일을 털어놓아버리는 게 어떨까요?"
"우리들은, 안전을 존중하는 쪽의 샘플을 선택한 치한이다. 하지만 물론, 치한인 것이 완전히 안전하다는 건 아니지만, 둘이서 공동방위하고 있어서 말이지"하고 노인이 말했다.
"뭐야. 이 술집이 치한 클럽이야?"하고 소년은 지나치게 재미난다는 듯이 울부짖었다. "당신들이 나를 구조하고, 집요하게 나에게 흥미를 지닌 이유를 이제 알겠군. 하지만 어째서, 당신들은 외톨박이 치한인 대신에 치한 클럽같은 걸 만들었지?"
"그건 치한이야말로 그들의 클럽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야. 만일 그것을 클럽이라고 부른다면"하고 노인이 말했다. "호모 섹슈얼의 패거리를 보라구. 그들은 특이한 새로운 흑인처럼 지금 집단을 만들고 저항하고 있어. 어쩌면 21세기에는 저들 종족의 나라를 만들어 독립하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라. 적어도 그들을 위한 의원 몇 명쯤은 각각의 나라에서 뽑아낼는지도 모르지. 나같이 조만간 죽을 사람은 짐작밖에 할 수가 없지만, 너는 반드시 21세기까지 살게 될 것이니까, 네 눈으로 그걸 보게 돼. 그야말로 타자적인 존재로서. 그들 의원은 우수하고 강력할 것이 틀림없어. 헌데, 치한은 호모 섹슈얼이 범죄로 되지 않는 날은 그다지 멀지 않지만, 치한은 범죄자임을 면하게 되는 때를 언제 언제까지 그냥 맞아들이지는 않아. 너처럼 체포당하고 벌받는 일 그 자체를, 치한으로서의 근본조건으로 삼고있는 형조차 있으니까! 하지만 치한들도 얼마간의 자위수단은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들은, 둘이서 상호 부조하는 작은 기관을 만든 셈이지. 그리고 오늘 너를 구한 것처럼 서로서로 궁지로부터 구출돼 왔어."
이번에는 소년이 J와 노인을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그는 깊이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는 이때까지의 그의 언동에 전혀 없던 일종의 경의(상대방 존재에 어떤 독자성을 인정하는 태도)를 표정으로 드러내면 이렇게 물었다.
"이 치한 클럽의 회원은 꽤 불어났나요?"
"아니, 현재도 우리 둘뿐인데, 그래도 외톨박이 치한밖에 활동하고 있지 않는 현재에는 하나의 발명이고 장족의 진보야. 당장에 나도 이 청년도, 체포당하는 일만은 피해 올 수 있었거든"하고 노인은 살짝 웃으면서 받았다. "어때, 너도 가입하지 않겠어?"
"난 구조 받는 건 싫어. 하지만 당신들 둘에 대한 구조 전문계로서 가입하겠어. 아직, 지금 당장은 나의 다음 행동계획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심심하기도 하니까. 게다가 나는, 자신보다 다른 치한이 하는 짓도 보아두고 싶고 말야. 내 강렬한 시의 히어로는 물론 나같은 형의 위험한 치한이지만, 더 좀 안전하고 흔해빠진 치한들을 보조역으로 등장시키는 것도 시의 구조를 복잡하게 해서 효과적일 것이니까!"
"그럼 거리에 나오면 이 술집에 들러달라구. 그리고 우리들과 만나서 같이 지하철이든지 전차든지 버스를 타자구. 물론 너는 그 새로운 자기 파괴계획을 개발할 때까지는 우리를 구조하는 역할만을 줄곧 맡아내는 셈일 테지만 말이지. 그건 결국 네 희망일 테니까"하고 J가 말했다.
"으응, 내 희망이야"하고 소년은 즐거운 듯이 말했다. 이미 그의 눈은 검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지는 않았다. 차라리 싱싱한 호기심으로 타오를 지경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위스키 잔을 테이블에다 도로 놓자, 소파에 깊숙이 몸뚱이를 파묻고는 조심성이라곤 없이 하품을 하고 주먹으로 눈을 문지르며 부신 듯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난 안심이 돼 졸리는군. 진짜 졸려. 난 당신들을 남색가로 의심하고 잠들지 않으리라고 했었는데, 당신들이 치한 동지로서 나한테 관심을 보였으니, 당신들 둘은 어떤 계기로 치한 클럽을 만들게 되었지? 아니면, 혹시, 당신들은 부자는 아니야? 설마 부자는 아니겠지?"
"으응. 부자도 아니고 형제도 아니야"하고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처음에 어느 편이 어느 편에게 치한으로서의 자기 소개를 하고, 그러구 치한 클럽을 만들자고 꾀었을까? 그러자고 들기까진, 꽤나 용기가 필요했을 것인데"하고 민감하게 짐작을 하면서 소년은 말했다. 그는 이젠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깝게 J와 노인에게 심리적으로 다가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듯 무방비 상태로 호기심을 드러내는 소년에겐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유치한 인상이 있었다.
"그야, 용기가 필요했지. 치한이라는 것은 호모 섹슈얼 패거리처럼 냄새로 맡아지는 특징 같은 건 갖고 있질 않거든. 그야 우리들이 만난 건, 오늘 너와 만났듯이, 우연히 행운이 작용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서로 말을 걸지도 못 했을 것이야!"노인은 J를 쳐다보면서 미소하며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J는 치한이 될 것을 정했던 것이었다. 그때 그는 극히 성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를테면 반성적인 자기징계 욕구에 휘감겨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J는 거센 갈망과도 같은, 성적인 흥분 조짐에도 휘말려들어 있었다. 하지만 J는 그 최초의 회심에 있어, 치한으로서의 그 자신 안에 성의 쌍두 괴물을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불면의 밤을 지샌 뒤의 어느 초겨울 오전 아홉 시경 침대 속에서, 나는 치한이 되자, 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침실에서 아내가 작업을 하고 있는 큰 방으로 나가, 새 영화의 콘티를 카메라맨 상대로 검토하고 있는 아내를 향해, 쟈가를 마음대로 써도 좋다, 난 전차를 타고 외출할 테니까, 하고 말했다. 어디로 가지요? 하고 아내와 카메라맨이 물었다. J는 단지 전차에 타기만 하 면 된다, 라고 말했다. 그렇게 돼서 J의 매일 매일 거리를 돌아다니는 습관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아파트를 출발하였다. 그리고 밤늦게 그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내는 대개 작업장 소파에서 모포를 가슴까지 덮고 피로에 지쳐 잠들어 있곤 했다. J와 아내가 거의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며칠을 그냥 지내는 일도 있게 되었다.
지금 아내와 중년 사내인 카메라맨은 완전히 새로운 계획에 열중해 있었다. 아내의 첫 영화는 완성하긴 하였지만, 제작에 관여한 자들만이 몇 번의 시사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어떤 영화회사에 2백만 엔에 팔려 그대로 소각 당했다. 처음 아내는 이 제안에 거세게 저항을 했지만 끝내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엔 풍경과 수목밖에 등장하지 않는 영화를 찍으려고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2백만 엔을 기금으로 해서, 천연색으로. 어쩌다가 그런 결과가 됐느냐 하면, 모두가 꼬마로 불렀던 그 스무살 먹은 배우 때문이었다. 그가 모든 혼란과 불운의 원인이었다. 첫 영화의 촬영이 끝나고 오랫동안에 걸쳐 참을성 있게 그 긴 편집을 아내가 하고 있는 사이에, 젊은 배우는 텔레비젼 연속 드라마에 출연해서 돌연 요란스러운 스타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그가 한 영화회사에 픽업되어 첫 번째 주연 영화를 찍기로 정해졌을 무렵에, J의 아내는 그 첫 단편영화의 편집이 막 끝나 있었던 것이다. 젊은 배우는 자기가 완전히 발가벗은 알몸뚱이로, 지옥의 일상생활을 지내고 있는 영화가 공개되는 경우에 일어날 스캔들을 두려워 시작했다. 그 두려움은 프로듀서에게 토로되고, 영화회사 수뇌부까지 알게 되었다. 이로부터 곤란한 실랑이가 벌어져 결국은 J의 아내가 굴복했다. J는 스타가 되고 난 후의 젊은 배우를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딱 한번 보았는데, 그 모습은 저 불안정하고 예민하고 성적으로 자유로왔던 스무 살의 부초와도 같은 청년이 아니라, 든든하게 안정되고 둔중할 뿐 아니라, 시민 도덕 속의 가장 왜소하게 한정된 성밖에는 믿지 않고 있는 순응주의자라는 인상이었다. J는, 자기가 그 인간과 같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자기가 지니고 있었을 것인 정열은 다시 되돌이키기도 불가능한 듯이 느껴졌다. J는 파리로 돌아간 여류조각가 누이동생에게 긴 편지로 이 한 사람의 스타가 탄생된 사연을 써보냈다. 그것은 우스꽝스럽고도 유쾌한 편지가 되어서 파리의 누이동생을 충분히 기쁘게 해주었던 것 같았다. 젊은 배우의 주연 영화는 호평을 받았는데, 카메라맨은 J의 아내의 단편영화와 비교해 보면, 꼬마의 아름다움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우리 쪽이 좋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젊은 배우는 이제 J의 아파트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노출광인 재즈 싱어도 또한 J의 아파트로부터 멀어져 갔다. 단지 그녀는 순응주의자로 탈바꿈한 것은 아니고 더욱 더 반역적인 인간이 되어서 제멋대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어느 콜걸 조직과의 관계가 스캔들 기사로 폭로되어서 나이트 클럽에서의 가수 일을 집어치웠다. 그리하여 그녀는 동남아로부터 정치교섭을 위해서 온 여행자들과 같이 국내를 돌기도 하고, 미국인 바이어와 함께 호텔에 체재하는 새로운 생활로 들어섰다. J는 요즘도 이따금씩 이 고급창부가 된 재즈 싱어로부터 전화연락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재즈 싱어가 J의 아파트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새 영화에 여자배우는 필요가 없었고, 이젠 그 어떤 파티도 J의 아파트에서 열리는 일은 없었으니까.
J가 매일매일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동안, J의 아파트에 틀어박혀서 외롭고도 울적하게 새 영화의 콘티를 만들고 있는 것은 J의 아내와 중년 카메라맨 두 사람뿐이었다. J조차, 이젠 이 두 사람이 일하는 큰 방으로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결국 미미나시 만을 바라보는 산장에서 있었던 그날 아침을 마지막으로, J의 기분 좋고 쾌락적인 살롱은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그이래, 도리어 결속이 굳어진 J의 아내와 카메라맨보다도 여느 사람들이 외톨박이로 고독해져버리고, 각자가 독자적인 행동법을 골라서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J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의 아내와 오랜 친구인 카메라맨 2인조도 어슷비슷하게 꽤나 고독하고 폐쇄적인 인상이었다. 둘은 지나칠 정도로 열중해서 새로운 영화계획을 세우면서, 정작 그 일을 특별히 즐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J는 거의 항상 아파트에서 나와,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기 때문에, 아내와 카메라맨 두 사람일을 관찰하는 시간도 더러, 우연히, 이따금씩 부딪치는데 불과했지만. J의 쟈가는 아내와 카메라맨을 위해 차고에 처박혀져 있었는데 영화는 아직 야외 로케이션 단계에 이르지 않고 있어, 쟈가는 운행되는 일이 그다지 없었다. 그 상아빛 몸체는 먼지에 싸여서 윤기를 잃고 있었다.
어째서 스스로 치한이기를 선택했는가? 라는 점에 관해서는 J는 특별히 집중시켜서 생각한 일은 없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 구석에 항상 아직 자기는 진정한 치한은 아니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자기는 폭력적인 타인의 팔에 꼼짝 못하게 잡혀서 수 없는 치욕을 받을 때에, 자기가 결정적으로 그걸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괴로운 예감을 품고 있는 탓이기도 했다. 다만, 이따금씩, 그 자신, 저 속에서의 자기가 치한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섬광이, 의식의 표면에 번쩍이면서 떠오르는 순간은 있었다. 돌연한 집행유예 정지처럼.
그날 저녁 녘에, J는 중앙선의 쾌속 전차에 타고 있었다. 그의 바로 앞에는 그와 동년배의 아가씨 하나가, 그와는 직각으로 그리고 그의 가슴, 배, 넓적다리의 모서리에 그 몸뚱이를 찰싹 붙이고 서 있었다. J는 아가씨를 애무하고 있었다. 오른 손은 아가씨의 엉덩이 틈 움푹 패인 곳에서 그 속을 향해, 왼손은 아가씨의 봉긋한 하복부로부터 패인 웅덩이를 향해서. 그리고 J의 쓸데없이 발기한 남근은 여자의 넓적다리 바깥쪽에 닿아 있었다. J와 아가씨의 키는 거의 비슷했다. J가 내쉬는 숨은 장미빛으로 상기되어 있는 아가씨 귓바퀴의 솜털을 살랑거리게 했다. 처음 한동안, J는 두려움에 떨고 숨결도 거칠었다. 아가씨는 울부짖지나 않을까? 그 자유로운 두 개의 팔로 J의 팔을 잡고 주위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하지나 않을까? 가장 격렬한 두려움에 휘말려 있을 때 J의 성기는 가장 딱딱해져서 아가씨 넓적다리를 향해 꽉 짓눌려져 있었다. J는 아가씨의 일정한 옆 얼굴을 바로 코앞에 보면서 깊은 공포 속에서 헤맨다. 주름은 없지만 짧은 이마, 짧게 위를 향해 솟아 있는 콧날, 코피 빛 솜털이 난 피부 밑의 두툼한 입술, 분명한 턱, 게다가 색소가 너무 짙은 탓으로 전체적으로 검게 흐려 보이는 훌륭한 눈, 그건 거의 깜박거리는 일이 없다. J는 깔깔한 털 스커트 너머로 계속 애무하면서, 문득 까물어칠 것 같다. 만일 지금 아가씨가 혐오라든가 공포의 울부짖음 소리를 지른다면 자기는 오르가즘에 이를 것이라고 느낀다. 그는 두려움처럼 혹은 열망처럼, 그 공상을 고집한다. 그러나 아가씨는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입술을 굳게 다물어진 채 있다. 그리고 무대의 막이 내리듯이 눈꺼풀이 꽉 닫쳐진다. 그 순간, J의 두 손은 엉덩이와 넓적다리의 거부로부터 자유로와진다. 부드러워진 엉덩이 틈을 더듬어 오른손은 그 속에 닫는다. 넓혀진 넓적다리 사이를 왼손은 정확하게 웅덩이에 가 닿는다.
그리고 J는 공포감에서 헤어난다. 동시에 그 자신의 욕망도 없어진다. 이미 그의 성기는 시들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그는 지금 의무감, 혹은 호기심에만 이끌려서 집요한 애무를 계속해 갈 뿐이다. 그때 J는 아아 언제나와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게 용인되고, 이 상태를 넘어선 하나의 핵심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라는 걸 차가와 오는 머리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그가 치한이 될 것을 결심한 날로부터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같은 양식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잠시 후 J는 자기의 두 개의 손가락에 그 낯도 코도 모르는 타인의 고독한 오르가즘을 느꼈다.
그 직후였다. 전차는 요란한 소리와 더불어 신쥬꾸 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J는 굳게 닫혀진 아가씨의 눈꺼풀 틈에서 비어져나 온 번쩍거리는 눈물방울이 울컥울컥 솟아나와서 볼을 타고 흐르는 걸 보았다. 입술은 시어빠진 매실을 씹고난 뒤처럼 생채기와도 같은 깊은 주름을 가득 지은 채 잔뜩 당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때 전차 도어가 열리고 J는 당장에 인파에 떠밀려 아가씨에게서 떨어져 플랫폼에 내려서 버리고 말았다. 전차가 떠난 후 J는 플랫폼에 선 채, 그 아가씨는 한 순간이나마 자기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곤 자기를 꽤나 고독하게 느끼면서 눈물을 머금었다. J는 그의 전처가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던 날 밤의 압도적으로 몰려오던 고독과 공포를 되씹은 것이었다. 그와 아내는 볼을 맞대고 잠자고 있었는데, 아내는 수면제로 비롯된 깊은 잠에서 디릉디릉 코를 골면서도 그 닫힌 눈으로는 눈물을 연방 쏟고 있던 것이었다. 그 눈물이 J를 깨워놓은 것이었다. 우스운 애기지만 J는, 만일 자기가 다시 그 아가씨를 만나게 되면 애원을 해서라도 결혼을 해서 같이 살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로부터 몇 주일 동안에 걸쳐 같은 저녁시간이면 도오꼬 역에 가 있곤 했다. 그러나 그는 아가씨 용모에 대해서는 이미 명료한 기억을 잃고 있었다. 단지, 눈물의 형태와 색과 번쩍임과 그 운동에 대해서만은 꽤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아가씨와의 단 한 번뿐인 해후는 치한으로서 J의 가장 행복한 추억이었다. 어둡고 불행한 추억거리는 셀 수도 없다. 그가 치한이 되기로 결의한 첫 무렵엔 매일 매일을 전차 속에서, 버스 속에서, 백화점 엘리베이터 속에서 그는 오직 열망에 불타서 파랗게 질리며 땀을 흘렸고, 온몸을 딱딱하게 하고 서있었을 뿐이었다. 아침 일찍 아파트를 나서서 밤늦게까지 이리저리 돌아가는 네덜란드 사람처럼 도오꼬 안을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다만 한 순간이나마, 타인의 육체를 향해 자기 손바닥을 내밀 수가 없는 나날이 몇 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었다. 치한으로서의 그는, 실로 가지가지 복병을, 금기를, 외부사회로부터의 적의에 찬 제지신호를 발견했다. 태어나서 그때까지 J는 외부세계가 그렇게도 시끄럽게 자기 주장적으로 그를 향해 다가오는 인상을 받은 일이 없었다. J는 반사회적인 행동가로서의 치한이 된 날에, 사회의 존재에 대해서 가장 민감해진 셈이다. 이 시기에, 포도 위의 J를 본 사람들은 J에 대해서 비할 수도 없이 견고한 도덕가라고 믿었을 게 틀림없다. 치한에의 회심을 막 행했을 뿐인 괴로운 도제 수업기간의 J를--.
J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귀신 쫓는 부적'은, 예를 들어 전차의 천장으로부터 드리워져 있는 가운데의 광고도 그 하나였다. 그 광고 한 장에 8천만 명을 위한 백과사전을 애용하는 8천만명의 타인들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는 고독한 무장의 기분이 들면서 부르르 떤다. 그때 한꺼번에 흔들리고 있는 전차의 밀크 색 손잡이는, 모두가 J의 목을 비틀어 죄기 위한 처형기구 처럼 느껴진다. J는 땀을 흘리며 눈을 힘주어 감는다.
이러한 암흑주간이 지나가고, J가 치한으로서 자유롭게 거동할 수 있게 된 뒤에도, J는 결코 항상 행복했던 건 아니었다. 낯도 코도 모르는 타인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 타인들 속의 생판 모르는 한 사람의 성기에 가만히 닿고, 그리고 다시 타인들 틈으로부터 안전하게 탈출해서 혼자가 된다. 그러한 이상적인 형의 치한행위가 행해지고 완성되는 것은 불가능하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J는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숲 속에 들어선 사냥꾼이 한 마리 사슴을 넘어뜨리곤, 그 죽은 짐승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금욕적이며 남성적인 기분을 맛보면서 지쳐 돌아오는 광경을 꿈꾸고 있었다. 만원 전차의 타인들 숲에서 싸우고, 거기서 퇴각하는 자기에게 J는 그 사냥꾼의 기분밖에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거의 늘, 어쩔 수 없는 혐오감에 겨워, 끝없이 갈 데까지 가든가 하는 것이었다--.
어느 저녁 녘, J는 시부야발 대형 버스의 가운데쯤에 서있었다. 오른 손은 가죽 손잡이를, 왼 손은 한 덩치 큰 여자의 스타킹과 코르셋 사이의 맨살 피부에다 손등 쪽으로 찰싹 붙인 채 그의 눈 10센티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여자의 우람한 머리의 풍요하고도 무거워 보이는 머리카락을 보고 그 냄새를 맡으면서, 목안을 긴장과 흥분으로 파삭파삭해질 정도로 건조시킨 채. 여자의 말려 올라간 두꺼운 울 옷감 스커트를 덮어 감추기 위해, 말 탄 사람처럼 양 무릎을 앞으로 잔뜩 내밀고 서 있는 J에게 있어서, 그 왼손을 여자의 맨살 넓적다리에 붙이는 일이란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었다. 조마조마한 고통으로 왼편 어깨로부터 손가락 끝까지 시들어버리는 느낌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J는 그대로 가만히 참았다. 그러자 문득, 여자가 약간 앞쪽으로 허리를 낮추었고 J의 불안정한 왼손에 무게를 더했다. J는 몸의 균형을 잃고 그 이마를 여자의 어깨에다 얹었다. 그리고 J가 몸을 바로 세웠을 때 J의 왼손은 이미 여자의 두툼한 손바닥 속에 꽉 잡혀져 있었던 것이었다. J는 망연자실해서 공포감의 홍수 속을 빙글빙글 돌면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다음 정거장에 버스가 섰을 때 J는 창백해져 땀방울을 온 몸에 흘리면서 여자 손에 여전히 이끌려서 사람틈을 빠져 버스를 내렸다. J는 그때 자기의 공포와 절망감으로 뒤섞여 있는 마음 저 밑바닥에 하나의 예정조화 냄새를 맡았던 것 같았다. 그때 비로소 그는 치한으로서 자기 쾌락에의 열망 뒷 쪽에 자기 징계의 욕구도 부수되어 있는 걸 실감한 셈이다. 달아나려고 하기 전에, J는 모친의 보호를 받고 있는 어린아기처럼 그 여자를 따라서 걸어갔다. 어딘가 가장 조롱이 심하고 가혹한 경찰로, 그러나 여자가 J를 끌고 간 곳은 경찰은 아니었다. 그것도 벽도 천장도 마루도 온통 방음장치의 두꺼운 종이로 몇 겹이나 둘러쳐진 싸구려 호텔의 한 방이었다. 그리하여 J는 되도록 빨리 성적 천민과도 같은 고역스런 봉사를 마치려고 애썼는데, 아무리 애쓴들 불능이었다. 여자는 벌 새끼마냥 싯누런 지방질에 한 겹 덧쌓인 벌거숭이를 더러운 형광등 불 밑에 가로 눕히고 괴로운 듯이 눈을 감고는 도무지 한마디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J는 여자 곁에 벌거숭이 알몸으로 무릎을 꿇고 맥없이 넘어져서 절망하였다. 방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건 여자와 J의 벌거벗은 냄새뿐인 듯이 느껴졌다. 드디어 J도 눈을 감고, 그대로 가만히 오그라들어서, 그 지옥의 백년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저항 없이 기다렸다. 여자도 또한 급속하게 부패하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언제까지나 꼼짝 않고 있어, 죽은 시늉을 내는 여우같았다.
붐비는 속에서의 극히 한 순간, 그 아랫도리 너머로 성기에 닿는 일에 자기 존재의 모든 것을 걸 정도로 앙양되면서도, 정작 그 성기의 소유자와 서로 발가숭이로 몸뚱이째 들이대자, 자기의 성적 열정 전체가 그 여자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걸 J는 이와같은 쓰디쓴 체험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는 항상 욕구불만이었는데, 이미 몇 개월 동안이나 아내와도 성교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곤 극히 작은 성적 접촉의 기회만을 꽤나 탐욕스럽게 구하면서 J는 매일처럼 아침부터 밤늦을 때까지 대도회지의 타인들이 붐비는 속으로 들어가고 방황을 계속했다. 그 노인과 만나게 되기까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일찍이 체험한 일이라곤 없을 정도의 깊이까지 철저히 고독하게. 만일 이 노인과 만나지 못했다면, J는 이미 폭발적으로 위험한 치한으로 행동해서 체포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J는 노인과 자기와의 사이의 상호부조 관계의 사상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J는 야마데 선을 타고 도오꼬를 한바퀴 돌려고 하고 있었다. 겨울의 엷은 햇살이 비치는 아침 끝머리에 J가 탄 칸 의 좌석은 거의 승객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아직 서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맨 바닥은 흑회색 쥐 등줄기와도 같이 말라서, 약간의 흙먼지를 햇볕 속에 그냥 저냥 뿜어 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치고, 그러나 지나치게 피로해 있다든지 하는지 않은 채, 주위에 다 눈을 굴리며 앉아 있다. 치한에게는 마의 시간이다.
하지만 전차가 우에노 역의 플랫폼에 들어서자 사정이 달라졌다. 필경 교사 인솔하에 박물관의 미라나 승문식 토기 쯤 견학하러 오는 길일 것이다. 신명이 나있는 여고생들 스무 명 가량의 떼거리가 J의 차칸으로 올라탄 것이다. J는 즉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붐비는 아가씨들 틈으로 끼어들어가, 치한으로서 가장 적당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그러기보다도 먼저, 덩치 큰 노인 하나가 실로 민첩하게 아무런 시늉도 없이 그 좌석에서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J는 그 어떤 예감에서 가슴을 울렁이며 방관자 편으로 돌았다. 노인은 보기에도 굴강하게 생기고 큰 몸집이었다. 여자 고교생의 던적스러운 머리가 떼거리져 있는 속에 노인의 호화스러운 낙타 외투에 감긴 넓은 어깨와 두툼한 가슴이 솟아 있었다. 노인은 굵은 목에 하얀 명주 목도리를 감고 머리에는 소프트를 깊이 쓰고 있었다. 얼굴 피부가 고엽색의 주름에 온통 덮여져 있는 것과, 맹수와도 같은 너무너무 날카로운 눈을 제외하면, 노인은 강장제 광고에 골프채를 잡고 등장하는 이상적인 노인상 그것이었다. 그것은 그냥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자기의 노년에 환상을 품게 해주는 것 같다. 여자 고교생들은 몇몇 비어 있는 좌석을 보면서도 가서 앉으려고 않고, 사자에게 습격당한 얼룩말이나 잔뜩 겁먹은 병아리들처럼 한 군데 서로 붙어서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전차의 굉음을 넘어서 차량 속을 채우고 있다.
노인의 머리와 상체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미동도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노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졸음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그만 거기에 굴복해 버리는 유아처럼 천천히 눈을 감는 것이었다. J는 노인의 감겨진 눈꺼풀 주변의 주름이 접힌 피부가 차츰 복숭아 빛으로 물들어오는 걸 보았다. 그러자 문득 J는 그 여자 고교생들이 일제히 입을 다문 것을 눈치챘다. 이젠 전차 달리는 굉음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 고교생들은 모두가 겁먹은 추한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다. 공포의, 추위로 얼어 있는 아직 채 발육이 안 된 거칠은 얼굴의 소녀들. 그래도 눈을 감은 노인만은 황홀하게 행복한 듯이 눈 가장자리를 복숭아 빛으로 물들인 채 서있을 뿐이다. J는 자기 일처럼 공포에 휘감겼다. 이제 1분만 지나면 소녀들은 울면서 고함을 지르기 시작하고, 노인은 치한으로 잡힐 것이다.
전차는 닛보리역의 플랫폼을 따라 정거하고, 막 문이 열리고 있었다. J는 와락 달려나가, 여자고교생들을 헤치고 노인 앞으로 나가자, 그 낙타 외투를 입은 팔을 잡고 힘껏 플랫폼에 끌어내렸다. 그들이 전차를 내리자 금방 등뒤에서 문이 닫혔다. J는 돌아보고, 유리 너머로 그와 노인을 노려보고 있는 여자고교생들을 쳐다보았다. 필경 노인은, 저 소녀의 가슴에 손바닥을 댄다든가 하는 짓으로 고독한 성적 앙양에다 몸을 내맡기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너무 조심성이 없어서"하고 J는 노인 가슴에서 자기 팔을 풀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약간 낭패하고 자기혐오까지 느끼면서 변명을 했다.
"고맙소, 만일 구조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어디까지든지 갔을 것이오"하고 노인은 극히 솔직하게 고마워했다.
이리하여 J와 노인은 '포도 위의 친구'가 되고, 같이 무네비 조오의 술집으로 가서 한잔 마신 것이었다.
J와 노인에게 소년까지 끼어들어서, 무네비 조오의 술집에서 만나, 거리의 붐빔 속으로 나서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소년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채 진학도 취직도 않고, 오직 한가지, 치한에 관해 폭풍우와도 같은 시를 쓰기만 열망하고 있었다. J도 노인도, 소년으로부터 그 이상 자세한 신상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들 세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거의 매일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때로는 한밤중까지, 셋이 가지런히 지하철을 타고 전차 속을 배회하고, 버스에 흔들리며 신바시, 시부야 사이를 몇 번이나 왕복하면서 친목을 도모한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가장 충실한 '포도 위의 친구들'이었다. 소년은 그 영국제 트렌치 코트를 비롯해서 (하긴 한 겨울에는 그것들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신사복도, 셔츠도, 넥타이도, 신도, 최고품을 걸치고 있어서, 그 나이치고는 너무 사치해 보일 지경이었지만, 정작 포켓 속에는 동전 몇 푼밖에 없는 날이 많았다. 노인과 J는 이따금씩 소년의 트렌치 코트 포켓에다 몇 푼의 돈을 디밀어 넣어주곤 했다. 소년은 그 점에 있어서는 전혀 자유로와서, 구애받는 일이 없이 그날 중으로 그 돈을 모두 내던져서 보기에도 호화로운 장식 투성이의 스키용 가죽장갑을 산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만일 그걸 낀 채로 여자 엉덩이에 닿았다면 여자는 소년에게 장난질을 당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소형 탱크에 엉덩이를 깔렸다고 오해했을는지도 모르는, 그 정도로 비실용적인 장식 과다의 손장갑이었다.
J와 노인과 소년이 붐빔 속으로 나간다고 하지만, 소년이 끼어 들고 부터는 치한으로 행동하는 것은 거의 노인뿐이고, J와 소년은 그 보안계 일만 맡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소년이 처음부터, 그 일만 떠맡겠다는 뜻을 명확히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J도 어쩌다가 소년 쪽으로 서버린 탓이었다. J의 변화에 대해 노인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종전과 마찬가지로 베테랑 치한으로만 행동을 계속했다. 그 열중도는 광적이라고 할 정도여서, J는 물론이려니와 소년도 이 늙은 괴물 치한에게는 한 몫 단단히 놓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의 활동을 차량의 여느 구석에서 지켜보면서, J와 소년은 이따금씩 치한의 의미를 둘러싸고 토론을 하곤 했다. 소년은, 치한을 노래하는 폭풍우와도 같은 시만을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얘기가 치한에 관한 것이면, 언제 어느 장소에서든지 열심히 떠들어댔다. 그리고 결국 소년은, 위험에 대해 미리 예방조치를 취하고 있는 치한을, 원칙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노인에 대해 차츰 외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은 하면서도 소년도 또한 광적인 구석이 있는 인간이었다. 그는 안전한 치한에도 또 한 매력이 있다 라는 식으로는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의 폭풍우와도 같은 시의 히어로인 가장 위험한 치한 이미지가 혼탁되는 걸 그는 늘 거부해온 셈이다.
"넌들, 전혀 위험이 없는 장소에서 위험이 없는 치한 행위를 한다 치더라도 그게 자신을 흥분시키리라고는 믿지 않겠지? 이 치한끼리의 상호 돕는 일도 안전율이 백 퍼센트는 아니니까 거기서 약간이나마 흥분될 수가 있는 게 아닐까? 우리들이 무네비 조오에서처럼 만나서 얘기하던 밤에, 저 노인도 그렇게 말했지. 완전하게 안전한 것은 아니라고. 치한은 맹수 사냥하는 사냥꾼과 마찬가지야, 사자도 코뿔소도 전혀 얌전해져서 목이나 그르렁거리면서 모여 앉아 있는 대초원 같은 데서는 대개의 사냥꾼은 지루해서 노이로제가 될 거야!"라는 식의 말을 소년은 했다.
그리고 J는 소년과의 토론에 흥미를 잃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J 자신, 자기가 치한이 되기로 정한 선택의 의미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응, 안전한 치한이라는 건 곤란하지 않는가?"하고 소년은 되풀이 말했다.
"곤란하지, 그건 그래. 허지만 언젠가 잡혀서 결정적으로 욕을 당하고, 최대의 위험을 맛보게 되는 것이 치한으로서의 숙명 비슷한 것이라면, 특별히 그걸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그건 죽음에 대해서도 매한가지야, 조만간 죽을 것이니까 특별히 서둘 것 은 없겠지."
"아냐, 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틀렸다고 생각해. 죽음이 삶의 의미를 입증한 유일한 것이라면, 난 되도록 빨리 죽고 싶어. 체포당하는 위험이 치한의 내부를 결정하는 요소의 하나라면, 역시 그 요소를 제외한 치한은 진짜배기 결정하는 요소의 하나라면, 역시 그 요소를 제외한 치한은 진짜배기 치한은 아니야. 가짜 치한이야. 그런 치한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야, 금방 지루해서 지쳐버릴 걸. 내 시의 영웅적인 치한은 그런 좀생이 녀석은 아니야! 단지 나로서 아직 알 수 없는 것은, 저 노인이 우리들 보호를 받으면서도, 전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고독하고 진짜 위험 속에 내팽개쳐진 적나라한 치한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점이야!"하고 소년은 말했다. 만원 버스 속에서 눈을 감고 눈꺼풀을 복숭아 빛으로 물들인 채 그 자신의 세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노인을 바라보면서.
그리하여 J는 소년에게 노인의 그 굴강한 몸뚱이 속에 이미 암이 터잡고 있는 모양이라는 것, 또한 심장 증상에도 깊은 불안을 지니고 있는 듯 하다는 그의 추측을 털어놓았다. 그리하여 소년은 노인에 대해서 더욱 헌신적으로 애쓰게 되었다. 소년은 그 폭풍우와도 같은 시의 보조역으로서, 빈사 상태의 치한을 등장시킬 셈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소년은, 실로 이따금씩 그의 다음 번, 결정적인 치한행위 계획의 시안을 J에게 털어놓곤 하여, J를 공갈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성범죄라고 불리워질 계획이어서, 만일 일단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한가지를 소년이 실행했다고 한다면, 그땐 확실히 J와 노인으로서는 소년을 살려내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치한의 행동범위를 넘어서서 성적인 흉악 범죄라는 영역에 이르러 있는 계획인 것이었다.
"안 돼, 너는 너 자신을 위해서도 그런 짓을 해선 안 돼. 만일 그런 짓을 하게 되면, 너는 폭풍우와도 같은 시를 쓰기 전에, 이 사회로부터 말살당할 것이야. 어째서 그렇게 해서까지 너는 그런 격한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
"아니, 생각해 보니까, 시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내가 진짜로 필요할는지도 몰라"하고 신비롭게 윤색을 하면서 소년은 말했다.
하긴 J는 소년의 몽상을 특별히 믿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J는 차츰 소년에 대해서 깊은 우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몽상으로라도 소년을 해방시켜주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J의 무의식과 비추어본다면 다음과 같은 형의 심리작용이 있는지도 모른다. J는 자기 자신, 위험한 가시가 돋아 있는 성게같은 치한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고, 그걸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소년의 위험한 가시를 제거해 줌으로써 차라리 자기 방어를 하려는 것이다.
어느 날, 무네비 조오의 호텔 바에서 J와 노인 두 사람만 있던 심야에 J는 그 점에 관해 노인에게 의견을 구하면서 말했다.
"저 소년을, 내가 그전부터 잘 알고 있는 반 창녀같은 아가씨에게 데려가 보려고 생각하는데요. 어쩌면, 치한을 영웅화하려는 시로부터, 육체적인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로 저 소년의 시적 관심이 옮기게 되면, 그런 편이 저 소년을 위해서는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그렇게 해봐줘, 꼭. 치한이 되자고만 한다면, 예순 살이 되더라도 충분히 늦는다는 일 없이 전신할 수도 있는 거니까"하고 노인은 약간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하여 J는 재즈 싱어가 있는 곳에 전화를 걸어, 소년을 그곳으로 데리고 갔던 것이었다. 재즈 싱어는 신바시의 호텔 안에 줄곧 묵고 있었다. J는 재즈 싱어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그리고 소년에겐, 극히 정상적인 성관계를 한 번 쯤은 시도해 볼만한 것이 라고 설득했다. 소년은 애매하게 웃으면서 J의 주장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J에게, 어쩐지 불안하니까 호텔 바에서 기다려주지 않겠느냐고 부탁했다. 소년의 말은, 경솔한 재즈 싱어로 하여금 자기만족에 겨웁도록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바에서 기다리고 있던 J에게 전화를 걸어, 거의 고함 지르듯이 울면서, 이 괴물을 어서 데리고 가달라고 울부짖은 것은 재즈 싱어 쪽이고 이때 J는 한잔의 베르노 술을 막 마신 참이었다. J가 재즈 싱어 방으로 올라가자, 소년은 벌써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매고,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느슨하게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재즈 싱어는 욕실에서 정신이 갑자기 돌기라도 한 듯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샤워를 하고 있었다. J가 욕실로 머리를 디밀고, 소년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자, J쪽을 돌아본 재즈 싱어는 샤워 물이 차가운 탓도 있었겠지만, 완전히 창백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젠 J하고도 절교라고 소리를 질렀다. J는 다시 도어를 닫으면서 욕조 곁의 타일 바닥에 피가 몇 방울 떨어져 있는 걸 보았다. 소년은 이렇다 저렇다 도무지 말이라곤 없었고, J도 묻지 않았다. 소년은 그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을 저지른 것 같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J도 노인도, 소년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시도하는 일은 극력 피했다. 그리하여 다시 J와 소년과 노인의 '포도 위의 친구들'로서의 거리 배회 습관이 평탄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소년은 역시 J와 노인 곁에 오래 머물러 있으려고 찾아온 새로운 정주자는 못되었다. 그는 그저, 두 번째 결정적인 치한행위로 향해 나서기까지, J와 노인의 비호 하에 자 기자신의 처형을 연기한 데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체재의 여행자였던 것이다.
겨울은 벌써 끝나가고 있었다. 심야에 천둥이 하늘을 달리고 간헐적으로 비가 내리고, 아침 일찍부터 햇살은 고양이 배처럼 따뜻하게 열을 띠었다. J의 아내는 중년사내인 카메라맨과 야외 로케이션의 일정표를 만들어서 작업장 벽에다 붙였다. 그녀는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새 영화의 필름을 촬영하게 될 것이다. 어느 날 아침, J는 노인과 약속장소에서 만나 둘이 무네비 조오의 술집으로 갔다. 그 며칠동안, 소년은 그들 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소년은 우울증에 걸려 있는 듯 하였다. 지금 와선 J도 노인도 소년이 나타나지 않으면, 붐비는 인파 속으로 들어갈 때에도 갈망이 식어오는 걸 느꼈다. 그리하여 그날 아침 무네비 조오의 호텔 술집에서 오랜만에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을 때는, J도 노인도 뜨거운 미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J는 그때 막연하나마, 아직 J와 노인의 2인조였던 무렵 J가 나타나는 걸 보면 노인의 얼굴이 반가움으로 추하게 보일 만큼 빛나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의 J처럼 소년은, J와 노인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있기라도 한 듯이, 참으로 노골적으로 불쾌해 하는 낯 색이었다. 그의 의자 앞의 낮은 탁자에는 수면제 병과 위스키 큰 병이 놓여져 있었다. J와 노인은 소년의 눈치를 보면서도, 그쪽으로 비난섞어 일별하였다. 그러나 결국 J도 노인도 소년이 아침부터 독한 술과 수면제를 먹는데 대해서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소년을 향해 앉아 말없이 각각 나름대로 편안해 지려고 의자 속에서 쉼 없이 몸을 움직거리면서 연방 미소하고 있었다.
"난 이미 두 번째 준비기간을 끝냈어. 난 할 작정이야"하고 소년이 말했다.
노인과 J는 소년을 보고, 즉시 미소하고 있던 볼과 입술을 딱딱하게 굳혔다. 소년은 수면제와 위스키로 머리 속이 뜨거워져 오는 모양이었다. 소년은 노인과 J가 처음 그를 만났던 그날 밤처럼 홀랑 발가벗은 몸뚱이에 부츠를 신고 트렌치 코트만을 입었던 그 몹시 절망적인 모험가다운 모습을 알알이 되생각나게 하는 날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은 충혈이 되어서 부풀어올라 있는 것 같고, 얼굴 피부는 귀밑까지 완전히 파랗게 보일 정도로 엉망이다. 게다가 목소리는 신경질적으로 떨고 있어서, 화가 나서 못 견디는 아이와도 같은 목소리다.
"하지만 넌 오늘 신사복도 입고 있고 바지도 입고 있지 않나? 이제부터 화장실에라도 들어가서 트렌치 코트와 부츠뿐인 경장 차림으로 변하나?"하고 노인이 마치 불안을 얼버무리자는 듯이 약간 쑥스러워하면서 조롱섞인 어투로 소년에게 말했다.
"아니, 난 그전과 같은 짓은 안 해. 당신들에게 방해 당했을 때도 그렇게 말했잖아"하고 소년은 말했다. J는 소년이 구조되었다고 하지 않고 방해 당했다고 한 데에, 자기자신이 소년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우정의 얼마 정도가 짓밟힌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네가 나한테 말했듯이, 전차 속에서의 강간이라든지, 지하철 속에서의 늙은 여자 찔러 죽이기라든지, 그런 잔혹한, 꿈과도 같은 이야기를 진짜로 실현시켜 보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잖아?"하고 J는 애써 냉냉하게 말했다.
"난 이젠 내 계획을 그 누구에게도 안 털어놓아. 털어놓은 순간에, 신기루처럼 내 프로그램을 사라져버리니까 말야. 아무튼, 이젠 나를 이대로 내버려두지 않겠어? 나는 단지 치한 클럽의 구조 전문계에 속해서 당신들 일에 참가한다는 약속이었지? 이제부터는 아무쪼록 나를 내버려둬!"하고 소년은 말했다.
"그럼, 넌 어째서, 우리들에게, 지금 네가 준비기간을 끝내고 두 번째의 큰 모험을 할 작정이라든 등, 일부러 지껄였지? 우리들에게 알리지 않고, 어느 먼 곳에서 혼자 외톨박이로 그걸 결행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난 단지 작별을 고하려고 왔어. 어쨌거나 친구였으니까"하고 소년은, J와 노인을 동요시킬 정도로 노골적으로 솔직하게 우정을 드러내면서 말했다. 그리고 금방 눈물이 어리고 충혈되어 부신 듯한 눈으로 두 사람을 보자, 난폭한 아이처럼 거칠게 일어섰다. "날 방해하지 마. 난 정말 죽는 일만큼이나 괴로워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겨우 이번 일을 결행하기로 결심했으니까. 난 진짜로 희생을 치르려고 결심했으니까. 이젠 방해하지 마. 난 당신들과 같은 안전위주의, 장난 반으로 하는 치한에겐 사실 참을 수 가 없어. 만일 당신들이 나를 방해할 생각이면, 난 당신들이야말로 치한이라고 밀고를 할테야!"
그리고 소년은 거의 달리듯이 호텔 현관을 빠져나갔다. 노인과 J는 술값을 치르고 뒤를 쫓았다. 이젠 눈이라곤 흔적조차 없는 메마른 포도로 금방 앞으로 넘어지듯이 큰 발걸음으로 부리부리하게 화가 난 것처럼 걸어가는 소년을, J와 노인은 숨을 헐떡이면서 쫓아갔다. 소년은 국전의 무네비 조오 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문득 교활하게도 머리를 돌려, J와 노인을 보자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몸짓을 해보이며 그들을 노려 본 채 그냥 멈춰섰다. J와 노인은 망설이면서도 그 소년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당신들은 왜 나를 쫓아오고 있지?"하고 소년은 소리를 질렀다. 그의 심리의 균형은, 수면제와 위스키의 공격을 받아서 파탄되어 있었다. 육체적으로도 소년은 이미 정상은 아니었다. 소년의 덩치 큰 상체는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지다가는, 갑자기 꼿꼿한 자세로 되돌아가고, 다시 옆으로 기울어지곤 했다.
"넌 머리가 돌아 있어. 돌아가서 자라. 우리가 택시를 태워줄 테니까."
"당신들은 왜 쫓아오느냔 말야? 어째서 남의 일에 간섭을 하느냔 말야? 지금 난 천금같은 때란 말이다!"하고 소년은 위협하듯이 팔을 내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곳은 번화한 상점가였다. 대뜸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좋아, 우린 너한테 간섭하지 않을게. 하지만 우리들이 너의 그 모험을 방관하는 것만은, 너도 말리지 않겠지? 우리는 네가 위험형의 치한이 되는 현장을 보고 싶단 말야. 왜냐하면, 네가 모험을 결행한 뒤에, 너한테 단연 폭풍우와도 같은 시를 쓸 자유가 있게 될 것으로는 생각되지가 않아서야. 자아, 마음대로, 자기하고 싶은 짓을 하라구. 우리는 이제 절대로 구조도 방해도 않을 테니까. 네가 지금 공포를 느끼고 있다면, 그건 진짜배기 공포일 거다"하고 J는 차츰 짜증이 나서 끝내는 증오를 섞어 말했다.
소년은 극히 일순, 깜짝 놀라듯이 담백한 표정으로 돌아가, J를 보았다. 그러나 금방 돌아서자,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젠 돌아보는 법도 없이 J와 노인을 완전히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자기자신 속에만 열중했다. J와 노인은 30미터 가량 떨어져서, 서로 침묵한 채, 소년을 미행했다.
소년은 무네비 조오 역 안으로 들어갔다. J와 노인은 소년이 개찰구를 지나쳐 간 다음에 차표 파는 곳까지 가서, 약간 뜸을 들여 표를 샀다. 그리하여 그들이 개찰구를 통화했을 때는, 소년은 이미 행동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간다 방면과 이께부꾸로 방면의 두 개 플랫품이 부채꼴로 갈려지는 그 두 층층다리 틈의 매점 곁에 소년은 서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한 어린 계집아이의 손을 잡고 있고, 그의 왼손은 전지로 움직이는 새빨간 원숭이 장난감을 그 어린 계집아이 눈앞에 흔들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소년은 얼마간 앞으로 숙여서 그 어린 계집아이에게 말을 걸고, 끝내는 그 원숭이 장난감을 주고 둘이 나란히 간다 방면으로 가는 플랫폼 층층다리를 오르고 있었다. 마치 오누이와도 같이. 그야말로 그 은밀한 친밀도의 인상으로 보아서는 그들을 지켜보는 타인들 누구에게서나 저도 모를 미소를 띠우게 하면서. J와 노인만이 달랐다. 그들은 소년이 그 어린 계집아이를 유괴할 작정인 듯 한 것을 눈앞에 보면서도, 그 사실을 믿는다는데 들어서는 공포를 느끼며, 멍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소년들이 층층다리를 다 올라가 보이지 않게 됐을 때, 매점 속 화장실 도어를 밀고 젊은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낮게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 다음, 공포에 휘감긴 듯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께부꾸로 방면으로 가는 플랫폼 층층다리를 몇 번이나 넘어질 듯 하면서, 그러나 재빨리 올라갔다. 노인과 J는 동시에 한발짝 앞으로 나가, 여자를 불러 세우고, 그쪽과는 반대되는 층층다리를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귀띔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둘 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내뻗쳤던 손을 그냥 드리우며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소년이 하던 말의 마법에라도 걸려들어 있었던 것일까?
잠시 뒤, 머리 위로부터 여자의 항의하는 듯한 비명이 소리개와도 같이 급강하해 왔다. J는 노인을 돌아볼 틈도 없이, 소년과 어린 계집아이가 사라져간 층층다리를 몇 단씩 건너뛰면서 올라갔다. 그리고 J는 그 애처롭고도 비장한 광경을 본 것이다. 플랫폼을 따라, 온 천지가 떠나가듯이 야마데 선 전차가 막 들어서려 하고 있다. 반대 편 플랫폼에는 젊은 여자가 팔을 내뻗쳐 당장이라도 선로를 향해 곤두박질치려 하고 있다. 빨간 원숭이를 잡은 어린 계집아이는 양쪽 선로 틈의 무쇠빛 자갈 웅덩이 속에 넘어져서 바들작거리고 있다. 그리고 소년은 전차가 달려오고 있는 선로에 두 무릎을 짚고 넘어진 말처럼 상체만이 하늘을 우러르며 금방이라도 울부짖을 것 같다. 어린 계집아이를 안전한 웅덩이 속으로 던진 뒤, 비어있는 두 팔은 가슴 근처에다 굽힌 채 눈을 감기 직전에 J는, 전차의 머리 부분이 소년의 피로 일순 진홍색으로 물드는 것을 기괴한 환영처럼 보았다. J는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렸다.
한 시간 후, J와 노인은 무네비 조오의 호텔 바 소파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서. 서로가 상대방 손바닥에 놓인 술잔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는 걸 보면서 가만히 있었다. J는 어린 계집아이를 가슴에 껴안은 젊은 어머니가 오열에 잠긴 채 주위를 에워 싼 군중에게 거듭거듭 뇌이고 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이는 하느님입니다. 내 아이가 나를 보고 플랫폼에서 선로로 뛰쳐나왔을 때, 이젠 누구 눈에나, 내 아이는 죽어버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저도 그랬지요! 그걸 하느님인 저이가 구해준 겁니다. 그러구 가엾게도, 아아."
"그 소년은 역시 치한으로 밖에 살길이라곤 없는 인간이었어.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약간은 참혹한 평안이 들어앉는구먼" 하고, 노인이 말했다. "그리고 치한은, 저 소년처럼 죽음을 걸고서라도 치한일 수밖에 없는 위험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우리들처럼 안전을 염두에 둔 치한 클럽은 엷게 탄 독을 마시는 기관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네, 나는 그 소년으로부터 몇 번이나 그런 식으로 핀잔을 들었지요"하고 J는 말했다.
"역시 우리에겐 거짓이 있었어. 결국 우리는, 저 소년처럼 위험한 치한이 되느냐, 치한이기를 그만 두느냐, 그 어느 한 쪽밖에는 길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하고 노인은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난 이제 이 술집엔 오지 않겠고, 당신을 만나는 일도 없을 겁니다"하고 J는 깊이 슬퍼하면서 말했다.
"넌 치한이기를 그만 두겠지. 그러구 난 더 위험한 치한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지하철 사람들 틈에서 체포되어서 심근경색증을 일으켜 죽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확실한 예감이 들어."
J는 일어섰다. 노인은 소파에 걸터앉은 채 J를 올려다보고, 머리를 저었다. 노인은 노여움이 북받치거나 성적으로 앙양된다든 지 할 때 노상 그러듯이 고든 진의 상표에 붙은 취한 늑대처럼 눈 가장자리를 붉히고 가엾은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눈에는 하얀 눈물안개가 걸려 있고. 그건 J가 본 가장 평화스러운 노인의 눈이었다. J도 다시 눈물을 글썽이고, 노인과 마찬가지로 약간 웃으면서 머리를 저으며 말없이 술집을 빠져나가 호텔 현관으로 나섰다. 그는 등뒤에서 노인이 그를 지쳐보고 있는 동안에 빈혈로 쓰러지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호텔 보이가 불러준 택시 속에서 J는 절망하면서 흐느껴 울었다. J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좋은 두 사람의 친구를 막 잃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주일 동안, J는 아파트에만 틀어박혀서 살았다. 그렇게 지나는 동안 그는, 아내에게 있어 J가 전혀 외출을 안 하게 된 것이 부담스럽고 고통인 듯하다는 점을 느끼게 되었다. 이 점은 아내뿐만 아니라, 작업장으로 영화제작 준비 때문에 노상 다니고 있는 카메라맨 역시 J의 존재에 대해 나타내는 비슷한 반응이라는 걸 그는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J는 매일 매일, 그 소년과 노인에 관해서만 노상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깊이, 아내와 카메라맨의 반응의 의미를 추적해 본다는 일은 없었다. 그는 이제 유아처럼 둔감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는 어느 날 늦은 아침에 J의 침실로 들어온 카메라맨이 J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을 때도, 아직 J는 그것이 영화제작비나 쟈가의 사용권과 관계된 것이겠거니 하고 예측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카메라맨은 그게 아니고, 자기가 J의 아내와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 그 결과로 J의 아내는 임신하고 있다는 것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J는 고래 대가리처럼 커다랗게 둥그스름하고 가무잡잡한 얼굴에 우스꽝스러운 수염을 세운 채, 핏발선 눈을 뒤룩거리며 그를 쳐다보고 있는 중년사내를 잠시 의아한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특별히 가혹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감정은 일어나지는 않는 걸 꽤나 당연한 듯이 느끼었다. 대체 어찌 되었다는 것일까, 이 열정적인 아웃사이더, 정밀 기구편애가인 중년 사내와 영화제작밖에는 흥미를 지니지 않는, 야위어빠지고 사내아이 같은 육체를 지닌 아내와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대체 어떻게 된 심판인가, 하고 J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더더구나 저 반여성적인 허리를 지닌 아내가, 임신할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니. 아내는 출산을 하다가 죽게 되지나 않을까.
"J, 자네가 충격을 받고 있는 건 알겠어. 자네는, 가장 오랜 친구에게 배반을 당했으니까. 그렇지 J"하고 카메라맨은 J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가장 오랜 친구? 하고 J는 깜짝 놀라며 반발했다. 지금 그에게 있어 친구라는 말이 제대로 환기시키는 실체는, 죽은 소년과, 지금도 여전히 붐빔 속을 고독한 치한으로서 방황하고 있을 터인 노인뿐인 듯이 생각되었다.
"그래서, 언제부터?" J는 얼빠진 듯이 이렇게 반문하며 스스로도 자기 말이 무의미한 데에 얼굴을 붉혔다. 언제부터 자기가 배반당했는지 그런 걸 확인해서는 대체 어쩌자는 건가? 허지만 카메라맨은 곧이 곧대로, "자네가 집을 비워놓기 시작하면서부터였어, J"하고 받았다.
"낮에 임신시켰나?" J는 약간 조롱하듯이 말했다.
카메라맨은, 일순 커다랗게 둥그런 가무잡잡한 얼굴을 온통 구리빛으로 붉히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J, 자네는 성도착이야, 미쯔꼬 씨에게 듣자하니, 자네는 자기 아내를 성적으로도 남색상대 소년의 대행처럼 취급하는 게 확실해. 확실히 말하거니와, 성도착인 사내가 아내를 지니고 있을 때는, 다른 사내가 그 아내와 육체관계를 가져야 할 것이야. 그건 다른 사내의 의무야."
J는 카메라맨과 아내가 자기의 성적인 버릇에 대해 이러고 저러고 지껄이고 있는 광경을 떠올리며 비로소 격렬한 노여움에 사로잡혔다. 카메라맨도 J가 두드려 패는 것을 무방비상태로 참기로 작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J는 결국 카메라맨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J는, 미미나시 만을 내려다보는 산장에서 카메라맨을 때린 이래, 마음 한 구석에 꺼림칙하게 남아 있었던 자기 혐오의 육종하나가 스르르 해소되는 걸 느낀 것이었다.
"그래 어쩔 작정이야?"하고 J는 그전부터 익숙해온 카메라맨의 그 핏발선, 안정감이라곤 없는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야말로 어버이처럼 물었다.
"미쯔꼬 씨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겠어. 만일 J가 이혼을 승낙해 준다면!"하고 카메라맨은 흥분하면서 말했다.
"자네 마누라나 애들은 어떻게 되고?"
"결국 생활비는 보태주어야겠지. 하긴 가능하다면, 아이는 떠맡고 싶지만."
"이제부터가 큰일이군"하고 J는 말했다.
"그럼, 야단이야. 영화도 완성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고"하고 카메라맨은 말했다. 그러나 그의 중년 사내같은 둔하고 교정 적인 표정은, 차츰 자랑스러운 자신으로 하여, 안쪽으로부터 빛나오는 듯 하였다. 이 부계사회의 족장과도 비슷한 무지막지한 중년 사내 때문에, 이제부터 대체 얼마만한 인간이 이 현실사회의 갖은 쓰라림을 맛보아야 하는 것일까, 하고 J는 동정과 연민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되도록 빨리 이혼수속을 취하지"하고 J는 말했다. "그래 미쯔꼬를 데려갈 장소는 이미 정해져 있나?"
"아니, 아직은."
"그럼, 내 편에서 잠시 아버지 댁에라도 가 있지"하고 J는 말했다.
"그래서 영화 얘기인데--."
"아리프렉스 16밀리는 너희들에게 증정하겠어. 그리고, 그전 영화를 판 돈을 미쯔꼬가 자기 명의로 예금을 하고 있으니까 말야. 우리 아버지가 투자한 몫 같은 건 이제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어."
"J, 고마워"하고 감동하면서 불현듯 여자처럼 나긋나긋해 지면서, 온몸의 긴장을 풀고 텁석부리 카메라맨은 말했다. 그리고 목 안으로 아이처럼 흐느껴우는 소리를 내면서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J는 침대에 벌렁 누워서 잠시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작업장에서 아내와 카메라맨이 소근거리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그러자 J는 옷과 간단한 소지품만을 트렁크에 넣어 아내와는 맞대면을 않고, 부엌 층층다리로 해서 차고로 내려가자 몇 개월만에 쟈가에 올라탔다. 그 길로, 그는 마루노우찌 철강회사 본사 빌딩으로 사장인 부친을 찾아갔다. J는 아버지에게 이혼한 경위를 포함해서 그날부터 아버지 집에 머물러야 할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했다. 아버지는 시종 부드러운 미소를 띠운 채 J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J에게 너는 이제 몇 살이냐고 물었다. 서른 살입니다, 라고 J는 대답했다. 서른 살이라고 하는 말소리가 그 자신의 귀에도 일종의 특수한 반향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J는 까닭도 없이 언짢은 느낌이 들었다. 서른 살? 이젠 어린 나이는 아니다.
"넌 전처가 자살하고 나서, 이를테면 은자처럼 도피생활을 해왔는데, 이번 두 번째 처가 간통을 해서 너를 버린 이상 이제 반반이 아니냐? 어때 이제 너도 서른 살이면, 평범한 생활로 돌아올 좋은 기회가 아니겠니? 우리 회사에서 이번에 혁명적인 아말감 공장을 짓는데, 그 준비 때문에 나는 조만간 미국 제휴회사로 시찰을 갈 예정이다. 내 비소로 미국에 가보지 않겠니, 그러구, 이 새 아말감 공장에서 한번 주요한 자리를 맡아볼 생각이 없니? 이제 너에게 그 아말감만으로 지어진 40층 짜리 빌딩의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마. 그건 진짜 사람을 흥분시킨다. 제법 물건이라니까. 너는 필경, 내 제안을 받아들이고 새 생활로 들어서고 싶어질 거다!"
J는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컬러 슬라이드를 보면서, 아버지 제안에 대해 생각했다. 오랜 친구들과 아내가 그로부터 떠나고 새 친구 하나는 사고로 죽고, 또 한사람이 동경의 1천만 군중 속으로 사라져간 이상, J는 이제 완전히 외톨박이였다. 그건 확실히 그전 같은 순응주의자로서의 현실생활로 되돌아갈 기회가 아닐까? J는 물론 전처의 자살에 대한 그의 책임과 죄의 감각을 후처의 강간으로 상쇄하려고 든다는 것이 설령 기분으로라도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자기기만을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순응주의자로서의 현실생활을 복귀하기 위한 첫 걸음이 되지 않을까?
J는 자기가 이제부터 수 없는 자기 기만을 거듭한 끝에 지금 자기 곁에서 불만스러운 짐승처럼 씩씩거리며 카메라 슬라이드를 지켜보고 있는 늙은 괴물과 흡사하게 닮은 노인이 되는 것이다, 하는 걸 예감했다. 그것은 체념의 감정 같기도 하고, 오랜 표류 끝에 구조받은 자의 감각 같기도 하였다. 비록 적의 배에 의한 구조이기는 할망정.
결국 J는 아버지에게 굴복했고 그 제안을 승낙했다. 출발은 3주일 뒤였다. 그의 일상생활은 돌연 풀 가동을 시작한 것이다. J는 사장실로 나와서 긴 복도를 걸어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 동안 줄곧 J는, 40년 뒤의 자기 이미지로서, 방금 헤어지고 나온 아버지의 풍모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의 아버지나 40년 뒤의 자기나 암에 걸리고 심근경색증의 위협에 당하더라도, 전혀 태연하게 순응주의자인 저 늙은 괴물의 포커 페이스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곤 없을 것이다. 자아, 자기기만의 순응주의자로서의 새 생활이 막 시작된 참이다. J는 다망하고 유능한 샐러리맨처럼 절도있게 어깨를 흔들며 걸어가 빌딩 자동 도어를 빠져나가자, 지하철 승강구 곁에 주차시켜둔 쟈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득 J는, 금방 실신할 정도로 극도로 흥분하여 쟈가를 그냥 지나쳐서, 지하철 층층다리를 마구 건너뛰듯이 달려 내려갔다.
J는 지하철의 혼잡한 차량 속으로 올라타자, 사람들이 밀고 밀리는 몸뚱이 틈을 아무런 주저도 없이 헤치고 나가 약속이라도 해두었던 듯이 한 아가씨 뒤에 닿아,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젠 이미 전차의 굉음도 사람들의 술렁거림도, 그의 귀속에서 왕왕 울리고 있는 더운 피의 소리에 빨려들어 있었다. 그는 눈을 힘주어 감고, 장끼처럼 살이 통통 져서 꽤나 저항감이 있는 아가씨 엉덩이 틈의 귀엽고도 따뜻한 웅덩이에다 맨 성기를 되풀이 비벼댔다. 대번에 그는 더 이상 후퇴가 불능한 첫걸음을 내딛으려고 하는 자신을 느꼈다.
새 생활, 자기 기만이 없는 새 생활, 그는 시뻘겋게 타오르는 머리 속으로 잘게 신음소리를 토하며 그대로 오르가즘에 이르렀다. 외부의 모든 술렁거림이 다시 의식되었다. 그의 정액은 이제 지울 수 없이 확실하게 아가씨 외투를 얼룩지게 하고 하나의 증거로서 실재하고 있었다.
순간, 1천만명의 타인들이 J를 적의의 눈길로 노려보며, J! 하고 울부짖는 듯 하였다. 지복감과 바로 이웃해 있던 공포감의 물결이 한없이 팽창해서 J를 휩싸버렸다. 몇 사람의 팔이 J를 꽉 잡고 있었다. J는 너무 너무 공포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이 눈물은 자살한 전처가 그날 밤 내내 흘렸던 눈물을 보상하는 눈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 천상병
멀잖아 북악에서 바람이 불고
눈을 날리며, 겨울이 온다.
그날, 눈 오는 날에
하얗게 덮인 서울의 거리를
나는 봄이 그리워서 걸어가고 있다.
아무것도 없어도
나에게는 언제나
이러한 '다음'이 있었다.
이 새벽, 이 '다음'
이 절대한 불가항력을
나는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윽고, 내일
나의 느린 걸음은
불보다도 더 뜨거운 것으로 변하여
나의 희망은
노도보다도, 바다의 전부보다도
더 무거운 무게를 이 세계에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음'은
눈 오는 날의 서울 거리는
나의 세계의 바다로 가는 길이다.
윌리엄 윌슨 - 포우
무엇이라 말할까? 그 두려운 망령, 내 앞을 가로막는 양심에 대해서? - 챔벌린의 '화로니이다'
우선 나를 윌리엄 윌슨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 새하얀 페이지를 나의 본명으로 더럽힐 것까지도 없지 않나, 내 이름은 이미 우리 일족의 경멸과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분노의 바람이 지구의 끝까지 전례 없는 오명을 불어 전해 주지 않았던가. 오오, 만인에게 버림받은 추방자 중의 추방자여! 대지마저도 너에게는 얼굴을 돌리고, 그 꽃들과 빛나는 대망과 영예는 모조리 너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변하고 말았다. 두껍고도 몽롱한 끝없는 구름이 너의 희망과 천국 사이에 드리워지고 있지 않는가.
나는 여기에서,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최근 몇 해 동안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행과 용서될 수 없는 죄과를 다 기술할 생각은 없다. 갑작스레 타락의 도를 깊이 했던 시기여서 우선 그 발단만을 밝혀 두는 데 그치기로 한다. 타락이란 서서히 그렇게 되는 것이 통례인데, 나의 경우는 말하자면 눈 깜박할 사이에 미덕이라는 외투가 통째로 벗겨져 버린 것이다. 사소한 악덕으로부터 한꺼번에 거인의 걸음걸이로 엘라 가발루스의 흉악의 경지로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대체 어떤 우연이, 어떤 사건이, 이 사악한 사태를 초래했던 것인지 잠시 나의 말을 들어주기 바란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나의 아픔 위에도 죽음의 전조의 그림자가 평온을 가져온다. 어두컴컴한 골짜기를 헤매면서 난들 동료들의 공감을-하마터면 연민이라고 말할 뻔했다-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어느 정도는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의 노예였었다는 것을 믿어주기를 바라게도 된다.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사정 속에서, 말하자면 과오 투성이의 벌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 생애 속에서 숙명이라는 조그만 오아시스를 발견해주기를 바란다. 설령 사람들이 여태까지 나만큼 악으로의 유혹을 당했다 하더라도 이다지도 시련 받고 이다지도 타락한 인간은 일찍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아니, 알아주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이다지도 고생을 맛본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 아닌가. 나는 꿈속에서 살아온 것이 아닐까. 이 지상의 일체의 환상 속에서도 그 공포와 신비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는 환영의 희생으로서 죽어 가는 것이 내가 아니겠는가.
대체로 나의 혈통은 공상과 흥분하기 쉬운 기질이었고 나 자신 아주 어렸을 때부터의 조상 전래의 특징을 듬뿍 받은 증거를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성장함에 따라서 이 점은 현저하게 더해져서 여러 가지 이유로 친구들에게 심한 불안을 초래하였고 나 자신에게도 피해를 입혔다. 제멋대로하게 되고 걷잡을 수 없이 변덕을 부리고 참을 수 없는 격정의 포로가 되었다. 나의 양친도 나와 비슷한 체질적인 약점에 사로잡혀서 의지가 약하여 나의 간악한 경향을 억제할 힘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효과가 없는 잘못된 양친의 노력이 완전히 실패해서 내 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이래서 나의 발언은 집안의 법률과 같이 되어버렸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직 엄격한 감독 하에 있을 나이부터 이미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명의는 어떻든 간에 사실상 완전히 자기 행동의 주인이 되었다.
학교 생활의 가장 오래 된 기억은 영국의 안개에 덮인 시골의 엘리자베드 조 풍의 산만한 건물과, '거대하고, 울퉁불퉁한 나무들로 꽉 차고, 어느 건물이나 구식이었던 고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실 이 낡은 동네는 꿈결과 같이 마음 편한 곳이었다. 지금까지도 그곳을 생각하노라면 울창한 가로수 길의 상쾌한 냉기를 몸소 느끼고, 무수한 덤불들의 향기를 맡고, 교회의 낮고 공허한 종소리에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느끼고, 마음의 설레임을 새롭게 느낀다. 격자 무늬의 고딕풍 첨탑이 적막한 어스름 빛 속에 잠기어 있는 가운데 한 시간마다 음울한 교회의 종소리가 그 고요함을 깨고 낮게 울려퍼지곤 했다.
그 학교 관계의 조그만 추억을 되새겨 보는 것처럼 지금의 나에게는 강렬한 쾌감을 주는 것은 없다. 비참한 처지에 빠져 있는 지금-아아, 너무나도 처참한 고생이다-이것저것 사소한 추억에 빠져서 약간의 위안이나마 구하려 하는 것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이들 아주 사소한, 그 자체로서는 우습게까지 보이는 세부가, 내 마음에는 어느 우연적인 무거운 의미를 띠게 된다. 즉 후년에 나의 생애를 모조리 어둡게 한 운명의 최초의 막연한 경고를 눈치챈 장소와 시기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학교의 건물은 낡고 불규칙했다. 구내는 넓고, 높고 단단한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곳이 바로 우리의 생활 구역이었다. 이 벽의 바깥 경치를 볼 수 있는 것은 일 주일에 세 번뿐, 매주 토요일의 오후, 두 사람의 조교를 따라 가까운 들판을 한 덩어리가 되어서 잠깐 산책하고 돌아다니는 것과, 일요일 시내에 있는 교회의 아침저녁 예배에 줄을 지어서 왕복하는 것뿐이었다. 우리 학교의 교장이 이 교회의 목사를 겸하고 있었다. 무겁고 느린 보조로써 교단에 올라가는 이 목사의 모습을 저 멀리 이층의 좌석에서 얼마나 놀랍고 곤혹스럽게 지켜보았던가! 이 성직자는, 매우 온화한 풍모에 번들거리는 성의를 휘날리면서 정성스레 분칠을 한 아주 엄숙하고 큰 가발을 쓴 이 사람은, 바로 어제까지 무뚝뚝한 표정으로 담배 냄새가 밴 양복을 입고, 회초리를 들고 존엄한 배움터의 규칙을 집행하던 그 사람이란 말인가. 그 얼마나 거대한 모순이며 풀기 어려운 기괴사란 말인가!
묵직한 벽의 한 구석에는 역시 묵직한 문이 있었다. 쇠못이 잔뜩 박혀 있는 위쪽엔 톱날 같은 철책마저 달려 있었다. 그 얼마나 위압을 주는 문인가. 먼저 말한 주 3회의 출입 이외에는 닫혀서 열리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 거대한 돌쩌귀가 삐걱거릴 적마다 우리들은 그 속에서 가지가지의 신비를 알아내고 소리를 죽여서 속삭이고 또한 엄숙한 사색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널찍한 구내에도 불규칙한 꼴로 여기저기 움푹 들어간 공지가 있었다. 그 가운데 커다란 공지의 서너 개가 운동장이었다. 평평하고 가는 자갈이 깔려 있었다.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지만, 나무나 벤치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건물의 뒤에는 있었지만, 정면에는 조그만 화단이 있어 접골목이나 다른 관목이 심어져 있었고, 이 성스러운 지역을 통행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어서 처음 입학하거나 마지막 졸업 때, 또는 크리스마스나 여름방학 때, 양친이나 친지가 마중 나와 주었을 때, 들뜬 마음으로 집에 돌아갈 때 같은 경우에 한해 있었다.
그러나 그 아주 낡아빠진 학교의 건물이야말로 나에게는 틀림없이 매혹의 궁전이었다. 그 복잡한 복도, 이해하기 어려운 소구역이 매우 많았다. 1층에 있는 건지 2층에 있는 건지 그것마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방에서 방을 옮길 때마다 반드시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서너 단의 계단이 있었다. 게다가 곁에 붙은 작은 방이 수없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있어서 어쩌다가 쳇바퀴 돌 듯 뱅뱅 도는 수가 있어 이 건물 전체를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해도 그것은 겨우 무한에 관해서 생각할 때와 같이 관념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 학교에서 보낸 5년 동안 나와 20명 정도의 친구들에게 할당된 작은 침실이 대체 구내의 어느 부분에 있는 것인지 끝내 똑똑히 알아내지 못했다.
교실은 건물 안에서 가장 큰 방-당시의 나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큰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었다. 굉장히 가늘며 길고 음침하며 낮은 방으로 창은 뾰족한 고딕 풍이고 천장은 참나무 판자였다. 그 복잡하고 무시무시한 한쪽 구석이 8피트나 10피트쯤으로 칸이 막혀져서 이것이 우리들의 교장인 프란즈비이 선생님의 '성역'이 되는 집무실이었다. 탄탄한 문이 달린 견고한 방으로서 '주인'의 부재중에 이 문을 열기라도 하면 생도들은 한 사람 남김없이 '영겁의 업고' 속에서 벌받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다른 구석에도 같은 칸막이 둘이 있었는데, 위엄에 있어서 교장 방보다는 떨어진다 하더라도 역시 외경의 대상이었다. 그 하나는 '고전' 담당 조교의 교단, 또 하나는 '영어와 수학' 조교의 것이었다. 이 교실에는 무수한 벤치와 책상이 그야말로 무한의 불규칙성을 띤 채 종횡으로 교차해서 놓여져 있었다. 검게 그을린 고물 책상에는 읽고 남은 헌 책들이 함부로 놓여져 있고, 그 위에는 머릿글자나 서명이나 그로테스크한 모양이나 기타 여러 가지 칼자국이 새겨져 있어, 원형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교실의 안쪽에는 물을 담는 통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거대한 기둥시계가 있었다.
이 고풍스러운 학원의 견고한 벽 속에서 나는 15세부터 5년 동안을 지냈는데 심심하거나 혐오 속에서 지냈다고 보는 건 부당하다. 소년시절의 저절로 넘치는 뇌수는 다채로운 외부적인 사건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견 우울하게 보이는 학교생활의 단순함도 내적인 흥분에 차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졸업 후의 호화로운 생활에서, 또는 성인 후의 범죄에서 얻은 그 어떤 자극보다 나은 것이었다. 내 최초의 마음의 발달은 정상적인 것을 벗어난, 퍽 과격한 것이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린 시절의 사건이 성인이 된 후에까지 명확하게 기억되고 있는 경우란 매우 드문 일이다. 일체가 모두 회색의 그림자, 엷고 희미한 기억, 경미한 쾌락과 변화무쌍한 고통과의 일정치 않은 혼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나는 어른 같은 정력으로, 카릍타고의 메달 표면 같이 분명하고 깊은 선으로, 지금도 기억 속에 조각되어 있는 가지가지의 추억들을 느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사실에 관해서는, 세상에서 말하는 사실에 관해서는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아침의 기상, 밤의 취침 명령, 복습, 암송, 정기적인 휴일과 산책, 운동장에서의 싸움, 유희, 그리고 음모-이러한 사소한 일들이 지금은 잃어버린 마음의 마술에 의해서 갖가지 감각의 홍수, 풍부한 사건의 산더미, 다채로운 정서, 너무나 격렬한 흥분 속으로 젊은 나를 끌어넣었었다. "오오, 즐거웠던 날들이여!"
사실, 격하기 쉽고 건방진 성격으로 일해서 나는 머지 않아 학우들 사이에서 한층 주목을 끌게 되었고, 어느새 동년배의 친구들에게 지배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예외는 친척이 아닌데도 나와 성과 이름의 똑같은 생도였다. 하기는 그다지 이상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나의 성은 흔히 있는 것이어서, 처음엔 귀족의 후예였지만 지금은 세월이 흘러서 일반 대중들이 많이 쓰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 소설에서 윌리엄 윌슨이라고 쓰게 되었지만, 이 익명도 본명과 그다지 틀린 셈은 아니다. 그런데 학교시절의 소위 '친구'들 가운데서 교실의 수업이건 운동장에서의 스포츠나 싸움 할 것 없이 감히 나에게 대항하고 나의 의견을 묵살하고, 나의 의지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단 한 사람, 이 동성동명의 사나이뿐이었다. 나의 독단적인 전제에 대해서 감히 대항하고 나선 것은 그뿐이었다. 대체 이 세상에 절대, 무한정의 전제주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강력한 소년 지도자가 기력이 약한 동료에 대해서 행하는 전제주의뿐일 것이다.
윌슨의 이러한 반항이 나에게는 심한 곤혹의 원인이 되었다. 그 이유는 표면적인 장소에서는, 그 또는 그의 주장 따위는 전혀 안중에 없다는 태도를 취해 왔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있는 그에 대한 공포를 지울 수가 없었고, 아주 유유하게 대등한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보아 실은 그가 나보다 더 강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로 말하면 실제로 상대방에게 위압당하지 않는 것만 해도 대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보다 우월하다, 아니 대등하다는 정도까지 실제로 눈치채고 있는 사람은 나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친구들은 실로 불가해한 맹목적인 태도이며, 그런 사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조차도 생각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실제로 그의 대립과 저항, 특히 나의 목적에 대한 완고하고도 무례한 간섭은 겉으로는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 마음속의 것이었다. 얼핏보아서는 이 사나이는 나와 맞서겠다는 야심도,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열정적인 에너지도 없어 보였다. 나와 맞서 보겠다는 동기라 할 만한 것은 고작해야 나에게 일부러 거역해서 놀라게 하거나 창피를 주어 보겠다는 변덕스런 욕망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나로서 본다면 경탄하고 굴욕적이고 분개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게 하는 일이 가끔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무례함과 모욕과 또한 반항 가운데는 무어라 할까 참으로 야릇한, 그리고 참으로 불쾌한 어떤 종류의 건방진 점이 섞여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상한 태도는 나의 상수에 서서 보호자연하게 보이려는 극도의 자존심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윌슨의 이러한 태도에다가 이름까지 같고, 같은 날에 입학했다는 우연까지 겹쳐서 상급생들 사이에서는 우리들 둘이 형제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상급생이라는 것은 대체로 하급생들의 문제 같은 것에는 까다롭게 개입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런데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아니 빠뜨렸는지도 모르지만, 윌슨과 우리 일가 사이에는 아무런 적의도 인연도 없었다. 그러나 만약 우리들이 형제라고 친다면 쌍둥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그것은 이 학교를 나와서 우연히 안 일이지만 윌슨은 1813년 1월 19일 생으로서 이것은 나의 생년월일과 일치되는 것이어서 상당한 우연의 일치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기묘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윌슨과의 대립이 견딜 수 없는 반항의식에 의해서 끊임없이 불안에 빠져들어 가면서도 나로서는 진심으로 상대를 미워할 마음은 나지 않았다. 사실 거의 매일같이 싸웠는데, 사람들 앞에서는 승리의 영광을 나에게 양보하면서도 월슨은 실은 이긴 것은 자기라고, 나로 하여금 느끼게 하곤 하였다. 게다가 나의 자존심과 그의 진정한 침착성 덕분에 둘은 언제나 말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지속시켜 왔을 뿐 아니라 우리의 기질 가운데는 서로 통하는 점도 많이 있어서, 이러한 대립상태만 없었으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상 그에 대한 나의 참다운 기분을 뚜렷하게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증오라고는 단정할 수 없는 초조한 반감이나 어느 정도의 경의, 또는 존경, 그리고 다분한 공포, 게다가 불안한 호기심이 듬뿍 섞여 있었다. 특히 모랄리스트 제위에게 덧붙여 두고 싶은 것은 윌슨과 나와는 아무래도 헤어질 수 없는 한패였던 것이다.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것은 확실히 변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태였고, 그에게 대한 나의 공격도 (은근하거나 노골적이었으며 빈번하였다) 진지하고 단호한 적의에 의한 것보다도 결국은 모두가 야유나 장난(못된 짓과 같은 형태로 고통을 주기는 하지만)으로 변하곤 하였다. 하기는 이러한 나의 노력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고, 기지를 다해서 꾸며 놓은 계획마저도 불발로 그치는 일이 많았다. 그 이유는 나의 상대방은 거만하지 않고 조용하고 엄격함이 몸에 배어서 좀처럼 약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 않았으며, 자기가 말하는 신랄한 농담은 매우 재미있어 하면서도 남의 조소 같은 것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기는 나로서도 한 가지만은 상대의 약점을 알고 있기는 했다. 그것은 아마도 선천적인 병에서 오는 체질적인 약점으로 그 당시의 나처럼 절박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 한 어떤 상대라도 눈감아 줄 만한 것이었다. 윌슨에게는 인후부 기관에 결함이 있어서 어떠한 경우에도 아주 낮은, 속삭이듯 하는 소리로밖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결함을 나는 될 수 있는 한 이용하였다.
이에 대한 윌슨의 보복은 다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 장난이 한 가지 있었다. 아주 사소한 장난으로서 대체 그가 어떻게 이런 일이 나를 괴롭힐 수 있는지를 알았는가는 매우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여하간에 그걸 알고부터는 되풀이해서 그 장난을 계속했다. 나는 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성을 좋아하지 안았다. 그리고 야비하지는 않지만, 흔해빠진 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듣기만 해도 혐오가 끓어올랐다. 내가 이 학교에 도착하던 날, 제 2의 윌리엄 윌슨도 도착하였는데, 나는 동성명을 가진 그가 미웠다. 왜냐하면 나 아닌 다른 사람도 그 성명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평상시 공부를 할 때에도 그와 내가 혼동되었기 때문에 나는 한층 더 그가 미웠고 그 이름이 싫어졌다.
이렇게 해서 생긴 초조감은 둘 사이의 정신적인, 또한 육체적인 유사점을 제시하는 사태가 벌어질 적마다 더해졌다. 그때까지 나는 둘이 같은 나이라는 것을 몰랐지만, 같은 키와 모습에서 용모에 이르기까지 기묘하게 닮았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리고 둘이 형제간이라고 상급생들 사이에서 퍼진 소문도 나를 화나게 하는 근원이 하나였다. 요컨대 우리들 사이의 정신적인, 육체적인, 또는 우연한 유사점을 들을 때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적은 없었다(무척 조심을 해서 이러한 불안을 감추려고 애를 썼지만).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유사가 (형제라는 소문, 그리고 윌슨 자신은 별도로 한다면) 급우들의 소문거리가 된다거나 혹은 주의의 대상이 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윌슨 자신이 이 유사의 모든 측면을 나 못지 않게 확실히 보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유사가 나에게 있어서 온갖 고민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오직 그의 놀라운 통찰력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그가 내 흉내를 낼 수 있었던 단서는 주로 말과 행동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잘 해냈다. 나의 복장을 흉내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걸음걸이에서 모습까지도 무난하게 흉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목소리까지도 자기의 선천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흉내내었다. 물론 고성은 무리였지만 그래도 목소리의 억양은 똑같았다. 예의 특이한 속삭임으로서 내 목소리를 고스란히 흉내내었다.
이 절묘한 묘사(이것은 단순한 흉내라고는 부를 수가 없다)가 얼마나 나를 괴롭혔는지는 지금 억지로 말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 있어서 단 한 가지 다행한 일은 이 흉내를 눈치채고 있는 것은 나 하나뿐이라는, 그래서 윌슨의 득의만면한 기묘한 심정에 대답하는 웃음만을 지우면 된다는 그런 사실이었다. 의도했던 대로 효과를 거둔 것을 확인하고는 그는 나에게 준 고통에 대해서 만족감을 느낄 뿐이지. 이런 기지가 성공한 데 대한 주위의 갈채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는 듯하였다. 대체 무슨 까닭으로 주위의 급우들이 그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그의 수완을 인정하여 그의 조롱에 관여하지 않았던가 하는 의문은 몇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불안한 나날 속에서 아무리 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하기는 그것은 그의 흉내가 점차로 천천히 이루어져가고 있었던 탓도 있고, 또한 윌슨의 교묘한 흉내내기 기술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묘사 따위에는 전혀 주의하지 않고, 다만 나 한 사람의 생각과 고민을 야기시키기 위하여 그의 독창적인 전 정력을 기울였다.
이미 몇 번이나 말한 바 있지만, 윌슨이 보호자연하는 태도를 보이고 자주 나의 의사를 일부러 간섭하려고 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간섭은 충고하는 것 같은 형태를 취하는 수가 많고 그것도 정면으로서가 아니라 옆으로 빗대서 하는 그런 수법이었다. 이것에 대한 나의 반발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해만 갔다. 그러나 지금, 오랜 후에 생각하니 그의 암시가 미숙한 나이의 무경험으로 인한 어리석은 잘못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충분히 인정해야겠다. 그의 일반적 재능이나 속세적 지식은 어쨌든지 간에, 도덕적 관념만은 적어도 나 자신보다는 훨씬 예민하였다. 그 의미심장한 속삭임 소리도 당시의 나는 진심으로 미워했고 또한 경멸하고 있었지만, 거기에 내포되어 있던 충고를 때로는 받아들였더라면 지금의 나는 보다 행복하고 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의 주제넘은 꼴에 싫증이 더 쌓일 뿐이고, 상대방의 건방진 수작에 날이 갈수록 맞대놓고 화를 폭발시키곤 하였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급우로서 대했던 처음 1, 2년 동안은 나의 감정은 우정으로 익어갈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날이 지남에 따라서 예의 간섭적인 태도만은 틀림없이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나의 기분은 거꾸로 거의 같은 비율로 단호한 증오의 기색을 더해 갔다. 그러던 중 윌슨도 이것을 눈치챘는지 그후로는 나를 피하거나 아니면 피하는 척했다.
나의 기억이 틀림없다면, 분명히 그 당시 나는 그와 심한 언쟁을 했는데 여느 때와는 달리 그도 흥분해서 자신을 망각했던지 전에 없이 내놓고 지껄이며 행동하였다. 그때의 그의 어조나 태도나 그 모습에는 이상하게도 무언가 나의 어렸을 때의 막연한 추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 있었다. 기억 그것 자체도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시기의, 거칠고 혼돈된 채 엉켜 있는 추억을 문득 불러일으키는 것 같은 것을 인식하고, 아니 그런 기분이 들어서, 처음에는 깜짝 놀랐으나 차차 깊은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이때 나를 사로잡았던 감정을 설명한다면 먼 옛날, 무한히 오래 된 과거의 언젠가에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나이와 친구였다는 기억이 있다는 그런 기분이 늘어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착각은 얼핏 떠올랐다가는 이내 사라져 버렸는데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 윌슨과 마지막 회화를 나누던 날을 똑똑하게 해두기 위해서이다.
크고 낡은 학교건물은 무수한 작은 방들과 함께 서로 왕래할 수 있는 6, 7개의 큰 방이 있었는데, 이 대부분은 생도들의 침실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독특한 설계의 건물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말하자면 구석방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재에 밝은 브란즈비이 선생은 이런 장소마저 침실로 만들었다. 그것은 좁은 창같이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한 사람이 들어갈 만큼은 되었다. 이런 작은 방 중엔 윌슨의 방도 있었다.
이제 5학년도 다 지나갈 무렵, 어느 날 밤, 그리고 금방 언급했던 윌슨과의 싸움 직후의 일이었는데, 모두가 깊이 잠들어 버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일어나 램프를 들고 서로 얽힌 좁은 복도를 지나서 윌슨의 방 쪽으로 갔다. 훨씬 먼저부터 계획해 왔었지만 악의에 찬 장난이 여태까지는 언제나 실패로 끝났었다. 이번에야말로 이것을 실행에 옮겨서, 내가 지니고 있는 악의의 정도를 알려주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목적하는 작은 방에 도착하자 램프를 덮어서 밖에다 두고 소리도 없이 스며들어갔다. 한 걸음 발을 들여놓고는 귀를 기울이어 상대의 평온한 숨결을 살핀 후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되돌아와 램프를 들고 다시 침대 쪽으로 가까이 갔다. 둘레엔 온통 커튼이 둘러쳐져 있었다. 계획대로 살며시 커튼을 벌리자 밝은 빛살이 잠자고 있는 상대의 모습을 뚜렷하게 비쳐냈다. 그러자 나는 시선을 그의 얼굴에 멈추고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기절할 것만 같은 얼음같이 찬 어떤 것이 내 몸을 휩쓸었다. 숨이 가빠지고 무릎이 떨리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견디기 힘든 공포가 나의 마음을 꽉 붙잡고 말았다. 나는 헐떡이면서 램프를 좀더 얼굴 가까이 들이댔다. 대체 이것이 저 윌슨의 얼굴이란 말인가. 틀림없이 그렇다. 그런데도 학질의 발작과 같이 전신의 떨림이 멈추지 않고,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도대체 이 얼굴의 어디에 나를 괴롭히는 것이 숨겨져 있단 말인가?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에 나의 머리는 걷잡을 수 없는 생각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다르다, 절대로 다르다. 그런데 깨어서 활동하고 있을 때의 그와는 이름도 같고, 생김새나 몸매도 같고, 입학한 날짜까지 같단 말인가! 그리고 나의 걸음걸이, 목소리, 버릇에서부터 모습에 이르기까지도 의미 없이 집요하게 흉내를 계속해 왔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그 빈정대며 흉내를 거듭한 결과가 이렇게까지, 현재로 눈앞에 있는 이 얼굴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망연해진 나는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면서, 램프를 끄고 소리도 없이 방에서 나와 곧장 이 낡은 교사의 복도를 뛰쳐나와 두 번 다시 되돌아가지 않았다.
몇 달 동안 하는 일없이 집에서 지낸 뒤에, 나는 이이튼의 학생이 되었다. 이 얼마 안되는 동안에 브란즈비이 학원에서의 기억은 엷어져 갔다. 최소한 기억에 따라 다니는 기분만이 아주 변하고 말았다. 지금엔 과거의 나의 오감의 정확성을 의심할 여지까지 생겨서 그 사건을 생각할 적마다 인간의 감각의 허술함에 놀라고, 나의 타고난 공상력의 너무나 생생함에 고소를 금치 못할 정도였다. 또한 이이튼의 학교생활도 이러한 나의 회의심을 감소시켜 주지는 못했다. 부질없는 우행의 소용돌이 속으로 즉각적이고 맹목적으로 뛰어들어가는 생활 속에서 지나간 날의 추억은 거의 거품 이외에는 깨끗이 씻겨 내려가고, 묵직하고 진지한 인상은 하나도 남김없이 삼켜져 버려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이전의 하찮은 떠들고 놀던 기억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나의 어이없는 방탕생활의 행적을, 규칙을 정면으로 거역하면서도 그나마 감독의 눈을 교묘하게 피할 수 있었던 갖가지 우행을 말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이 어리석은 3년 동안은 전혀 무익한 나날로서, 그 동안에 얻은 것이라고는 지울 수 없이 배어버린 악덕의 습관과, 얼마간 이상하리 만큼 자란 키뿐이었는데, 일주일간의 사려 없는 유흥 끝에 학우들 중의 출중한 녀석들을 내 방으로 초대해서 비밀연회를 연 적이 있었다. 모인 시각이 이미 심야였는데, 그것은 분명히 마시면서 밤을 새울 작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술은 마음껏 교환되었고, 훨씬 위험한 다른 유혹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기에 회색의 여명이 허옇게 새 갈 무렵에도 이 광란의 주연은 아직 한창이었다. 트럼프와 술에 미칠 듯이 취한 내가 다시 격렬한 모독의 말씨를 토하면서 건배를 부르짖고 있었을 때, 별안간 방문이 조금이지만 격하게 열리더니 밖에서 하인의 열띤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군가가 급히 나를 만나려고 하는 사람이 문간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술기가 돈 나는 이 불의의 침입에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반가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곧 현관으로 나갔다. 그 곳은 작은 방으로 램프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때 빛이라고는 반원형의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밝아오기 시작하는 새벽녘의 아주 희미한 빛뿐이었다. 입구 쪽으로 걸어나가자 눈에 띄는 것은, 나와 같은 정도의 키로서 그때 내가 입고 있었던 것과 같이 최신 유행의 흰 캐시미어의 모닝 프록 차림의 청년이었다. 어렴풋한 빛으로 겨우 옷차림만은 알아보았지만 얼굴은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내가 나가자 저쪽에서 부리나케 다가오더니, 무척 지루하게 기다렸노라 하는 듯이 나의 팔을 잡고서는 귀밑에다가 "윌리엄 윌슨!" 하고 속삭였다.
단번에 취기가 사라졌다.
이 처음 보는 상대의 태도, 창가의 광선을 가로막듯이 나의 눈앞에 밀어낸 손가락의 미묘한 경련에는 정말로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있었다. 하나, 이다지도 격렬하게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것은 실은 이것이 아니었다. 괴상하게 낮고 쉰 목소리 속에 숨어 있는 묵직한 경고의 암시였고, 특히 그 간단하고 익숙한 이름을 속삭인 목소리의 성질과 억양이었다. 그것과 함께 지나간 날의 갖가지 추억들이 몰려들어서 나의 마음을 전격과도 같이 일순간에 때려뉘었다. 겨우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상대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 사건은 혼란했던 나의 상상력에 선명한 영향을 끼치기는 하였지만, 선명함과 동시에 거의 순간적이기도 하였다. 나는 수주일 동안이나 열심히 탐구에 골몰했고, 막막하고 병적인 사색 속에 빠져 들어갔다. 이 괴상한 인물, 집요하게 나를 간섭하고, 무언가 충고 비슷한 말을 함으로써 나를 괴롭히는 사나이의 정체를 모른 체하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이 윌슨이라는 것은 대체 누구이고 또 어떤 자일까. 어디서 왔으며 그러면 이 윌슨이라는 것은 대체 누구이고 또 어떤 자일까. 어디서 왔으며 그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러한 점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고, 다만 브란즈비이의 학원에서 내가 자취를 감췄던 날 오후에 윌슨도 역시 가족의 불의의 사고로 인해 자퇴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머지 않아 옥스퍼드 행이 가까워져 있었고 이것만으로도 머리가 가득 차서, 그 문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부터 부친은 무분별한 허영심에서 두둑한 연금과 학비를 대주었는데, 그 액수야말로 이미 익숙해진 사치스런 생활을 마음껏 즐기고 나아가서는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의 지체 높은 자제들과 낭비 솜씨를 겨룰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이런 악습에 젖어 있었으므로 타고 난 기질이 더욱 자극되어서 나는 점점 더 나빠졌고, 미친 듯한 유락으로 모든 절제의 속박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한 난행을 하나하나 들어서 말해 보아도 무의미할 것이다. 다만 이것만은 말해 두고 싶다. 낭비에 있어서는 어떠한 낭비보다도 심했으며, 신기한 난행의 고안에 있어서는 유럽의 가장 발랄한 대학에서 행해졌던 수많은 악덕에다가 다시 한술 더 뜬것이었었다고.
하지만, 내가 신사로서의 체면을 지키지 않았을 뿐더러, 직업적인 도박사의 치사한 협잡질을 알게 되고 이 천한 기술에 숙달해져서 장차는 이것의 상습자가 되어 어리석은 학우들을 속여 이미 팽대한 나의 수입을 더욱 증대시키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사실이었다. 일체의 명예, 또는 인간적인 감정을 짓밟는 이 방법의 너무나도 엉뚱함이야말로 내가 거리낌없이 이 악습에 젖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이유의 하나임엔 틀림없었다. 아무리 방종한 내 노름 친구들이라 할지라도, 쾌활하며 솔직하고 돈 잘 쓰는 윌리엄 윌슨, 옥스퍼드의 자비생들 중에서 가장 기품있고 돈에 담백한 이 내가 그런 협잡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한테 아첨하는 이들은 나의 난행을 젊고 분방한 청춘의 잘못으로 돌렸고, 내 과오를 흉내낼 수 없는 돌발적 사고라고 하였으며, 가장 나쁜 나의 죄악을 단지 무모하고 조심성 없는 장난이라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이 년쯤 지냈을 무렵 글렌디닝이라는 젊은 부자 귀족이 새로이 입학해 왔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해로데스 아티쿠스 못잖은 부자이며 별로 힘들이지 않고 축재하였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머리가 그다지 신통치 못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 기술의 좋은 시험상대로 눈독을 들였다. 한동안은 게임에 끌어들여서 도박사들의 상투수법으로 상대에게 상당히 따게 해주었는데, 그것은 한층 더 효과적으로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나의 계획이 열매를 맺어 프레스튼이라는 둘의 공통된 친구이던 자비생의 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다(이 회견에서 단번에 마지막 결판을 내버리고 말 작정이었다). 프레스튼에 관해서 한 마디 말해 두자면 그는 나의 계획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는 바가 없었다. 그리고 자리를 어울리게 하기 위해서 그밖에 8, 9명의 친구들도 모이게 해서, 트럼프를 시작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고 그것도 노리고 있는 상대 쪽에서 먼저 하자고 해서 시작된 것처럼 보이도록 꾀를 썼다. 저주스런 이야기이기 때문에 간단히 하겠는데, 이런 때에 필요로 하는 자질구레한 수작은 유감없이 이용하였다. 도대체 이러한 낡은 협잡수단에 아직도 걸리는 인간이 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게임은 길어져서 심야에 이르고 끝내는 글렌디닝 하나만을 승부의 상대로 끌어넣는 데 성공했다. 이때의 게임도 나의 특기인 에카르테였었다. 좌중의 다른 친구들은 이 승부의 귀추에 마음이 쏠려서 자기네들의 게임도 집어치우고 둘의 둘레를 에워싸고 구경하고 있었다. 글렌디닝은 나의 꾐으로 초저녁부터 술에 취해버려서 카드를 치거나 나누거나 승부를 가릴 때에도 일종의 거친 흥분을 보이고 있었다. 생각건대 얼마간은 취기의 탓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으리라. 순식간에 그는 나에게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되었고 라임을 한 잔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 때마침 내가 냉정하게 기다리고 있던 것, 말하자면 이미 막대한 액수로 불어나 있던 내기 돈을 배로 끌어올리자고 말을 꺼낸 것이다. 이쪽은 곤란한 척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는 상대방에 끌려들어가서 거친 말을 내뱉고 이쪽도 분개하면서 억지로 동의하는 것 같은 그런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는 물론 상대방이 통째로 나의 함정에 걸려들어 반 시간도 못되어 그의 부채는 4배가 되어 버렸다. 술 탓으로 붉어져 있었던 거의 얼굴에서 핏기가 없어진 것은 조금 전부터였는데 이제 보니까 거의 무서우리만큼 창백해져 있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깜짝 놀랐다고 감히 말한 것은, 글렌디닝은 내가 면밀하게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단히 큰 부자로 알려져 있었다. 이때 그가 진 금액도 큰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다지 큰 부담이 될 만한 액수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하물며 상대가 충격을 받을 만한 것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술 탓이겠지 하는 생각이 이내 떠올랐는데 나로서도 친구들에게 평판을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심사로(그 이상의 고결한 동기는 없었다.) 게임은 이제 그만두겠노라고 단호히 말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때, 나의 바로 옆에 있던 친구들의 표정에서, 그리고 글렌디닝이 무의식중에 내뱉은 절망의 외침 속에서, 그가 완전히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진 한낱 불쌍한 존재가 되자, 친구들은 그를 악마의 손아귀에서일지라도 구출해 내려 하는, 그런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는지 곤란하였다. 그의 가련한 모습으로 인해서 좌중의 모두에게 서먹서먹하고 음침한 분위기가 퍼져서 한동안 조용해진 가운데, 그 중에서도 점잖은 축에 속하는 친구들이 나에게 던진 경멸이나 비난의 눈초리로 인하여 볼이 뜨거워지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참에 놀라운 불의의 습격에 의해서 이러한 사태가 중단되고, 그 순간만이라도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 같은 일이 생겼다. 이 아파트의 널찍하고 큰, 양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는 문이 힘차게 열리더니, 그 맹렬한 기운 때문에 마치 마술에 걸린 것처럼 방안의 촛불들이 모조리 꺼져 버렸다. 그 꺼지는 순간의 흐릿한 빗속에서 겨우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침입해 온 낯선 사나이, 나와 똑같은 키에, 외투로 몸을 감싼 사나이의 모습이었다. 촛불은 꺼졌어도 아주 캄캄한 것은 아니어서 우리들의 한가운데에 버티고서 있는 이 사나이의 존재를 느낄 수가 있었다. 이 횡포한 침입에 좌중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동안에 이 사나이 쪽에서 먼저 지껄이기 시작했다.
"여러분." 하고 말을 꺼낸 그의 낮고 명료하고 잊을 수 없는 속삭임소리에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여러분, 한 마디의 인사도 없이 뛰어들어왔습니다만, 그것은 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전혀 모르고 있군요, 오늘밤 에카르테에서 글렌디닝 경에게서 거액의 돈을 빼어간 사나이의 정체를,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이 필요 불가결한 사실을 알 수 있는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이 사나이의 왼쪽 소매의 커프스의 안쪽에 꿰매서 붙인 일상복의 큰 포킷 안에 들어 있는 몇 개의 작은 꾸러미를 천천히 조사해 보도록 하십시오."
그러는 동안은 바닥에 떨어지는 핀 한 개의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다. 말을 마치자 사나이는 이내 나가버렸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이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때의 나를, 아니 나의 상태를 어떻게 형언하면 좋을 것인가?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모든 공포를 일순간에 맛보았다고나 할까. 그것보다도 이것저것 생각해 볼 만한 여유도 없었다. 즉각 여러 사람의 손이 거칠게 나를 움켜잡았고 촛불도 곧 켜졌다. 즉시 신체검사가 시작되었다. 나의 소매 속에선 에카르테에 필요한 모든 그림 카아드와 평상복의 포킷에서는 이 판에서 쓰인 것과 똑같은 카드가 몇 벌 나왔다. 이것을 잘 쓰기만 하면 여느 순박한 상대방쯤은 언제나 이길 수 있는 도구들이었다.
협잡이 탄로났을 때 차라리 분노를 한꺼번에 터뜨려 주었으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나에게 나타낸 것은 묵묵한 모멸과 차가운 무시뿐이었다.
"윌슨 군." 하고 방주인은 몸을 굽혀 발아래 떨어진 극상품의 모피로 된 사치스런 외투를 주워 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건 자네 것이지.(추운 계절이라서 내가 방을 나올 때 평상복에 위에 걸치고 온 외투를 여기 와서 벗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이상 자네 기술의 증거를 (외투의 깃 근처를 신랄한 눈초리로 흘겨보면서) 들추어 낼 필요도 없겠지. 정말이지 질려버리고 말았네. 두 말할 것도 없지만 옥스퍼드를 자퇴하게-아니, 여하간에 내 방에서 즉각 나가주게."
그처럼 멸시받고 전신이 진흙투성이가 된 나지만, 이 강렬한 한 마디에는 당장 폭력으로라도 보복을 할 만도 했는데, 그 순간의 나는 놀라운 사실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내가 입고 있던 외투는 최고의 모피제품이었는데 얼마나 고급이고 비싼 값이었는지는 감히 말하지 않겠다. 그 스타일 또는 특이하고 색달랐다. 이런 쓸데없는 일에도 우스우리만큼 까다로운 멋을 부렸었다. 그런데 프레스튼 군이 바닥에서 주워서 나에게 건네주려고한 그 외투를 보았을 때 나는 공포에 가까운 경악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미 내 것은 팔에 안고 있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안고 있었다.) 지금 나에게 내밀어진 것은 모든 것이 한 치도 틀리지 않는 똑같은 외투였다. 나의 비밀을 폭로시키고 지독한 꼴을 당하게 한 그 기묘한 사나이도 외투를 입고 있었으나 그외에는 좌중에서 외투를 입고 있었던 것은 나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튼 어느 정도 침착을 되찾고서는 프레스튼이 내민 외투를 받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게 내 것 위에 겹쳐 입고는 반항적인 찌푸린 얼굴을 지으면서 방을 나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아직 날이 새기도 전에 옥스퍼드를 떠나 공포와 굴욕에 젖은 몸을 대륙으로 옮겼다.
도망쳐도 소용없었다. 사악한 운명은 승리를 뽐내듯이 내 뒤를 쫓아오고, 그 신비로운 지배력의 행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이 보여졌다. 파리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나의 생활에 대해서 행사하는 그 윌슨의 저주스런 방해의 새로운 증거에 부딪쳤다. 세월은 흘러갔지만 나에겐 마음이 안정될 겨를이 없었다. 그 얼마나 지독한 녀석이랴! 로마에서는 느닷없이 기분 나쁜 간섭을 해서 나의 야심을 방해했다. 그리고 또 비인에서, 베를린에서, 또한 모스크바에서! 녀석을 저주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곳이 대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 알 수 없는 압제의 손에서 나는 페스트라도 피하듯이 들뜬 걸음걸이로 오로지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그러나 지구의 끝까지 도망쳐 보아도 결국 헛일이었다.
되풀이하고 되풀이하면서 내면의 마음과의 은밀한 대화 속에서 이렇게 물어본다. "녀석은 누구인가, 어디서 온 것인가, 녀석의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하고. 그러나 답은 언제나 얻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주제넘은 간섭의 방법과 형식과 특징을 아주 세밀하게 조사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논거를 끄집어낼 만한 근거마저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기는 그가 내 앞에 나타났었던 수많은 경우를 생각해 볼 때, 우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두가 나의 행동이나 나의 계획을 꺾고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때의 나의 행동이나 계획이라는 것은 만약에 충분히 실행이 되었다면 모진 피해가 생기는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 전제적인 횡포의 뒷받침으로서 너무 미흡하지 않은가. 자율적인 행동이라는 천생의 권리를 이다지도 집요하고 모욕적으로 부인당한 댓가로서는 너무도 빈약하지 않는가.
또한 내가 눈치챈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나를 괴롭혔던 상대가(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복장을 해 보이겠다는 변덕을 아주 세심하고 불가사의 한 솜씨로서 이행해 나가는 한편) 수단과 방법을 바꿔 가면서 내가 하려는 것을 방해할 때 아직 한 번도 그의 얼굴만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윌슨이 어떤 자이건 간에 어쨌든 그런다고 하여 설마 내가 그의 정체를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그것은 지나친 과장이며 우행이리라. 이이튼에서의 설교역이며, 옥스퍼드에서의 내 명예의 파괴자이고, 로마에서는 야심을, 파리에서는 복수를, 나폴리에서는 열정적인 연애를, 그리고 이집트에서는 탐욕을 꺾고 방해했던 나의 불구대천의 적이며 악령과도 같은 사나이가 생도시절의 그 윌리엄 윌슨, 동성 동명의 급우, 그리고 라이벌, 브란즈비이 학원에서의 그 밉살스럽고 지긋지긋한 라이벌에 틀림없다는 것을 설마 내가 모르리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자, 그러면 끝으로 최후의 극적인 사건으로 이야기를 몰고 가기로 하자.
이제까지만 해도 나는 그의 전제적인 지배에 기력없이 굴복해 왔다. 윌슨의 괴상한 성격, 장중한 예지, 도처에 출몰해서 일체를 꿰뚫는 것 같은 그의 능력에 내가 언제나 느꼈던 깊은 외경의 염에 더해서, 그의 본성, 사상태도에 있어서의 다른 특징이 나에게 느끼게 하는 공포감이 곁들어서 나로 하여금 오로지 자신의 연약함과 믿음직하지 못한 점을 의식케 하고, 종래는 그의 압제적인 의지에 강하게 반발을 하면서도 은연중에 복종하는 기분이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결국 나는 아주 술에 젖어버려서 나의 유전적인 소질에 미칠 듯한 영향을 미쳐서 거의 자제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버렸다. 우물우물 말을 더듬거리기도 하고 의심하거나 머뭇거리기도 하고 반항도 하였다. 그리고 장차, 이쪽이 의지를 굳세게 갖기만 하면, 나를 괴롭히는 상대의 의지력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고 공상하였다. 아무튼 이제야 나는 희망의 영감을 느끼게 되었고, 마음속 깊이 이 이상의 예속은 당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게 된 것이다.
장소는 로마, 카니발 기간에 나는 디블로리오 공작 저택의 가장 무도회에 참석했다. 여느 때보다 술을 더 마셨기 때문에 혼잡한 방안의 숨막히는 분위기가 견딜 수 없었다. 방안에 넘치는 인파 사이를 겨우 밀치면서 나가려니 나의 초조한 기분은 더할 뿐이었다. 왜냐 하면 나는 열심히 (어떤 야비한 동기에서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늙은 디블로리오 노인의 젊고 쾌활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대담하게도 그녀는 이날 밤의 비밀스런 분장을 미리 나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모습을 알아차린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 곁으로 다가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때 마침, 가볍게 나의 어깨에 손이 닿더니 그 잊을 수 없고 저주스러운 낮은 속삭임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참을 수 없는 분노의 발작이 일어, 나는 갑자기 이 방해자 쪽으로 돌아서서 거칠게 상대의 컬러를 움켜잡았다. 예기했던 대로 그는 다시금 나와 똑같은 차림새로서 파란 빌로오도의 스페인 풍의 외투를 걸치고 허리에 진홍의 벨트를 매고 검을 차고 있었다. 검은 명주 가면으로 얼굴을 푹 싸고 있었다.
"악당 같으니!"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나는 외쳤다. 그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분노에 더욱 불을 지른 것같이 되었다.
"악당! 사기꾼! 개새끼! 이젠 너 같은 녀석은--, 너 같은 녀석에게 쫓겨다니지는 않는단 말이야. 뒤쫓아오기만 해 봐라. 당장 그 자리에서 찔러 죽여 버릴 테다!" 나는 무도장에서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 대기실 쪽으로, 저항도 하지 않는 상대를 끌다시피 하면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방안에 들어가자마자 호되게 밀쳐 버렸다. 그러자 그는 흐느적거리면서 넘어지려고 했다. 나는 "개새끼!" 하고 외치면서 문을 닫고, 검을 빼라고 말했다. 그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짧은 한숨을 쉬면서 말없이 검을 빼들고 방어태세를 취했다.
승부는 어이없이 끝났다. 나는 심한 흥분으로 미친 듯이 날뛰었고 나의 한 팔에는 몇 사람 몫의 기력이 넘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상대를 벽에다 밀어붙이고, 말하자면 궁지에 몰아넣고 나는 맹렬한 기세로 상대의 가슴패기를 겨눠 몇 번이나 검을 찔러댔다.
그 순간에 누군가가 문의 고리를 잡아 흔들었다. 나는 급히 침입자를 막아놓고 나서는 빈사의 상대 쪽으로 곧 되돌아왔다. 그때 나의 눈에 비친 광경에 대한 경악과 공포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는지. 내가 잠깐 눈을 돌렸던 그 사이에 방의 안쪽 모습에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 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곳에 커다란 거울이 서 있었다 - 혼란했던 나의 눈에는 처음에 그렇게 보였다. 극도의 공포에 이끌려서 그쪽으로 걸어가자, 내 자신의 모습이, 온통 피투성이의 창백한 나의 모습이 힘없이 비틀거리면서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보였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의 상대, 그 윌슨이 단말마의 고통을 보이면서 내 앞에 서 있었다. 가면과 외투를 내던져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의 몸에 걸친 의복의 실 한 오라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뛰어난 얼굴 모습의 가는 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 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 없었다.
틀림없는 윌슨. 그러나 이제는 속삭이는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음의 그의 말은, 실은 나 자신이 지껄이고 있다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이긴 것은 자넬세. 나는 졌네. 그러나 이제부터는 자네 또한 죽은 사람일세. 세계에서, 그리고 천국과 희망으로부터 버림받은 죽은 사람이란 말일세. 나의 속에서 자네는 살고 있었네. 나를 죽게 함으로 해서-그렇지, 자네의 것인 이 닮은 모습에 대해서 보는 것이 좋을 걸세-자네 자신을 그야말로 완전히 죽여 버리고 만 것일세."
소크라테스의 변명 - 플라톤
소크라테스 (기원전 469년에서 기원전 399년까지) :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테네 출생.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는 석조가였다고는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술에 능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린 시절부터 '다이몬의 소리'를 듣고, 자주 깊은 몰아상태를 경험하는 신들린 사람이었다고 한다. 만년에는 후대에 악처로 유명했던 크산티페와 결혼하였다. 펠로폰네소스전쟁 때에 중장보병으로 북그리스로 2회, 보이오티아로 1회 종군했으며, 이때 훌륭한 인내심과 침착한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종군 때 이외에는 아테네를 떠난 적이 없었는데 젊은 시절에는 자연에 대한 연구도 하였으나 그 뒤에는 인간문제에 관해서만 관심을 기울여, 아테네의 거리와 시장, 체육관 등에서 대화와 문답을 하면서 지냈다. 그의 인격과 유머가 있는 날카로운 논법에 공감하는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동아리'를 형성하였고, 플라톤도 그 모임에 들어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펠레폰네소스전쟁 종결 5년 뒤인 기원전 399년 신에 대한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고발을 당해 재판에서 사형을 받아 일생을 마쳤다. 그는 저서를 남기지 않아 플라톤의 대화편(주로 초기)과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관계 저서를 통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이 주장하는 '덕'과 세상의 이른바 지자라는 사람들의 '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묻거나 밝혀내려 했다. 덕은 지와 도일시되며 혼의 비합리적인 부분 및 감정 등을 배제한 지의 추구만이 참으로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원래 결코 실수하는 일이 없는 절대 확실한 것이라면 참된 지자는 신뿐이며, 우리 인간은 선미의 사항을 어느 한 가지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존재라고 하였다. 이런 자각을 하게 된 것은 '소크라테스 이상의 지자는 없다'고 한 델포이의 신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 뜻을 해명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지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음미하며 편력한 결과, 그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데도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신만은 무지를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신탁의 참뜻은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빌려 모든 인간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덕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항을 음미, 논박하며 무지를 깨닫게 하는 활동을 '신명'으로 알고 그 스스로에게 부과한 것이었다. 이 문답의 과정에서 제시된 지의 기준의 엄격성, 논리와 방법에 대한 명확한 의식, '무엇인가'라고 하는 물음에 담겨진 본질에 대한 지향 등은 그의 생사에 대한 본연의 자세와 함께 철학에 커다란 전환과 비약을 가져다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 플라톤
소크라테스(기원전469년에서 기원전399년) :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테네 출생.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는 석조가였다고는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술에 능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린 시절부터 '다이몬의 소리'를 듣고, 자주 깊은 몰아상태를 경험하는 신들린 사람이었다고 한다. 만년에는 후대에 악처로 유명했던 크산티페와 결혼하였다. 펠로폰네소스전쟁 때에 중장보병으로 북그리스로 2회, 보이오티아로 1회 종군했으며, 이때 훌륭한 인내심과 침착한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종군 때 이외에는 아테네를 떠난 적이 없었는데 젊은 시절에는 자연에 대한 연구도 하였으나 그 뒤에는 인간문제에 관해서만 관심을 기울여, 아테네의 거리와 시장, 체육관 등에서 대화와 문답을 하면서 지냈다. 그의 인격과 유머가 있는 날카로운 논법에 공감하는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동아리'를 형성하였고, 플라톤도 그 모임에 들어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전쟁 종결 5년 뒤인 기원전 399년 신에 대한 불경죄라는 죄목으로 고발을 당해 재판에서 사형을 받아 일생을 마쳤다. 그는 저서를 남기지 않아 플라톤의 대화편(주로 초기)와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관계 저서를 통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이 주장하는 '덕'과 세상의 이른바 지자라는 사람들의 '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묻거나 밝혀내려 했다. 덕은 지와 도일시되며 혼의 비합리적인 부분 및 감정 등을 배제한 지의 추구만이 참으로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원래 결코 실수하는 일이 없는 절대 확실한 것이라면 참된 지자는 신뿐이며, 우리 인간은 선과 미의 사항을 어느 한 가지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존재라고 하였다. 이런 자각을 하게 된 것은 '소크라테스 이상의 지자는 없다'고 한 델포이의 신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 뜻을 해명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지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음미하며 편력한 결과,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데도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신만은 무지를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신탁의 참뜻은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빌려 모든 인간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덕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항을 음미, 논박하며 무지를 깨닫게 하는 활동을 '신명'으로 알고 그 스스로에게 부과한 것이었다. 이 문답의 과정에서 제시된 지의 기준의 엄격성, 논리와 방법에 대한 명확한 의식, '무엇인가'라고 하는 물음에 담겨진 본질에 대한 지향 등은 그의 생사에 대한 본연의 자세와 함께 철학에 커다란 전환과 비약을 가져다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1. 아테네인 여러분, 여러분이 나의 고발자의 변론으로 과연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그것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아무튼 나로 하여금 나 자신마저 잊게 했을 정도였다.
그럴 정도의 설득력으로 그들은 말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 한 마디의 진실조차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토해낸 숱한 허언 가운데에서도 특히 나를 놀라게 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즉 그들이 나를 웅변가로 만들어 버리고는 그런 나한테 속는 일이 없도록 여러분은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럴 것이 내가 입을 열어, 조금이라도 웅변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기만 하면 그들의 그 허언은 이내 그 실증에 의해 대번에 뒤집혀 버릴 터인데도 여전히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지를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가장 뻔뻔스러운 점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기는 그들이 진실을 말하는 자를 웅변가라고 부르는 것이라면 다르거니와, 만일 그들의 뜻하는 바가 여기에 있는 것이라면, 나는 스스로-본시 그들과는 다른 뜻에 있어-일종의 웅변가임을 인정해도 좋다.
방금 말한 대로 그들은 거의 한 마디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거니와, 이에 비해 여러분은 나의 입을 통하여 모든 진상을 분명하게, 그리고 상세히 듣게 될 것이다.
아테네인 여러분, 물론 여러분이 나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는 말들은 제우스 신에게 걸어, 그들의 말과 같은 철두철미 여구와 미사로 장식된 교묘한 연설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기교 같은 것은 없이, 그저 생각나는대로 나오는 진정어린 말이다. 단 나는 내가 말하는 바의 올바름을 굳게 믿고 있다.
따라서 여러분 가운데의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이외의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 여러분 앞에 나타나, 청년처럼 기교를 부린 변설을 농하는 따위는 나의 나이로 보아서도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아테네인 여러분, 여러분에게 꼭 부탁해두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소이다-이 변명을 하게 됨에 있어 내가 평생 시장 바닥에서(그곳에서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들은 들었을 것이다),또는 다른 장소에서 사용한 것과 똑같은 말을 쓰는 것을 듣게 되더라도 여러분은 그 때문에 의심하거나 왁자지껄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기 바란다.
그것은 즉 이런 까닭이다. 나는 이미 70세 이상이 되지만, 이런 재판정에 나온 것은 무릇 이번이 난생 처음이다. 따라서 나는 이곳에서 쓰는 말에는 전혀 통하고 있지를 않다.
가령 내가 실제로 타관 사람이었다면, 설령 내가 나의 고장에서 배운 사투리나 화법을 사용하더라도 여러 분은 아마 나를 나무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 여러분을 향해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것은 적어도 나로서는 정당한 것으로 생각된다-그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쁘건, 또는 뛰어나 있건 간에 아무튼 나의 말투를 너그럽게 보아주시기 바란다.
내가 말하는 것이 정도에 맞는지, 안 맞는지, 다만 그것만을 고려에 넣어, 다만 그것에만 주의를 돌려주기 바란다.
그럴 것이 재판관의 덕의는 바로 이곳에 있고, 이에 대해 변명하는 자의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2. 아테네인 여러분, 그리하여 나는 첫째로 나에 대해 옛부터 제기되고 있는 허위의 탄핵과 해묵은 탄핵자에 대해서 변명하고, 그런 다음에 새로운 탄핵과 탄핵자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믿는다.
실상 옛부터 다년간에 걸쳐 나에 대해서 전혀 사실이 아닌 허위를 퍼뜨리고 다니는 숱한 탄핵자가 여러분 앞에 나타난 바 있었다.
내가 그들을 두려워함은 아뉴토스와 그의 도당 이상이다-물론 후자도 또한 분명히 두려워할만은 하거니와, 전자가 더한층 두려운 것은 그들이 여러분들 가운데의 많은 사람들이 아직 소년이었던 무렵부터 농락하여 그들을 설득시켜, 나에게 전혀 사실이 아닌 허구의 죄를 뒤집어씌우고자 도모하여, 여기 소크라테스라는 현자가 있는데, 뜻을 천체의 현상에 숨기고, 지하의 모든 사상을 탐구하여 나쁜 일을 선한 일이라 속여왔다고 충동질한 데에 있다.
아테네인 여러분, 이런 터무니없는 풍설을 퍼뜨린 사람들이야말로 실로 내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탄핵자이다.
그것은 이 말을 듣는 자가 이런 종류의 일을 탐구하는 자는 보나마나 신들마저도 믿을 리가 없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수는 많으며, 그들의 나의 대한 탄핵의 목소리는 매우 오래되었고, 게다가 그들이 여러분에게 말함은 여러분의 어떤 사람은 아직 소년이고,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은 아직 청년으로서, 다른 사람의 말을 가장 믿기 쉬운 나이인 데다가 그들은 나를 변호해 줄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결석재판으로 나를 탄핵한 것이다. 특히 나를 가장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다만 그 가운데에 한 희극작가(아리스토파네스)가 있다는 사실을 빼놓으면 그들의 이름조차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직 시기와 비방 때문에 여러분을 설득하려고 뜻한 사람들-그밖에도 또한 처음으로 스스로 다른 자를 설득하게 되었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이제와서 어찌 해 볼 방도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에서 단 한 사람도 이곳으로 소환해서 이를 반박할 수가 없고, 변명에 즈음해서도 영락없이 그림자와 싸우는 것 같고, 그 누구도 응답하는 자 없이 반박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만큼 여러분 또한 내가 이미 말한 것처럼 내게 대해 나타난 탄핵자에는 두 종류가 있어, 하나는 나를 고발시키는 자이고, 또 다른 것은 이미 말한 바대로 옛날부터의 인간임을 인정받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먼저 후자에 대해 변명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나의 의견에 동의해 주기를 바라고 싶다.
그럴 것이 여러분 또한 후자의 탄핵을 전자의 그것보다도 훨씬 전에, 또한 훨씬 많이 듣게 될 터인즉.
좋소, 아테네인 여러분, 그러면 이제부터 변명을 행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옛부터 내게 품고 있는 의혹을 여러분에게서 제거하도록 시도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아주 짧은 시간 안으로! 물론 나는 그것이 여러분과 나를 위하는 길이라면, 그것이 성공되기를-그리하여 나의 변명으로 어떤 상당한 효과를 거두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결코 이 사건의 성질을 그릇 예측하고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사건으로 하여금 신의 뜻대로 되도록 할 수 있게 하라. 나는 국법에 따라야 하며, 그리고 변명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우리는 먼저 마땅히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그리하여 나에 대한 악평을 환기시키는 죄상-크레토스 또한 이것을 틀림없이 믿고 나에 대한 소송을 폐기하게 된 바의 것-은 무엇인가를 묻기로 하자.
그러면 나의 비방자들이 비방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먼저 그들을 보통의 고발자로 간주하고 그들의 소장을 읽어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소크라테스는 부정을 행하고, 또한 무익한 일에 종사한다. 그는 지상 및 천상의 사상을 탐구하고, 나쁜 것을 선한 것으로 호도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이 말하는 바는 대략 이런 내용이다. 실상 그것은 여러분들 자신도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구름이라는 제목의 극)에서 아마 보고 들으셨을 것이 분명하다.
그곳에서는 소크라테스라는 사나이가 무대를 돌아다니면서 공중을 비행할 수 있다고 스스로 말하고, 또는 많다고도 않고, 적다고도 않고는 철두철미하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물에 대해서 그밖에도 숱한 망언을 쏟아놓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가령 이런 종류의 사상에 정통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지식을 경멸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나는 다만 메레토스로부터 이렇듯 무거운 죄상에 붙여진 사실을 너무나 뜻밖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테네인 여러분, 이런 종류의 죄상은 나로서는 전혀 관련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증인으로서 나는 여러분 자신 가운데의 대다수를 든다.
그리고 전에 나의 대화를 방청한 일이 없는 여러분은-그런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에 많이 있을 것이다-서로 말을 나누고 서로 알리기를 바란다.
즉 여러분 가운데의 단 한 사람이라도 그것이 간단하건, 자세하건 내가 이런 종류의 사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는지 어떤지, 잠시 서로 말을 나누어 보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뭇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말하는 또 다른 숱한 소문도 또한 같은 종류의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4. 분명히 이것은 사실무근이다. 또한 여러분이 누군가의 입으로 내가 스스로 숨어서 사람들을 교육한다고 말하고, 게다가 이것에 대해 사례를 요구한다는 말을 듣게 되더라도 역시 이것은 진실은 아니다.
하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교육하는 능력을 가지고있다면, 사례를 받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되거니와, 가령 레온티노인 고르기아스나 케오스인 프로디코스나 에리스인 힛피어스(3명의 유명한 소피스트)가 그러하다.
여러분, 이들은 모두가 각지-좋아하는 도시로 가서 그곳 청년을 사로잡아, 본시 그 똑같은 시민의 누구하고도 바라는 바대로 무보수로 사귈 수 있는 그들을 설득하여 그 같은 시민과의 교제를 버리고, 보수를 치루어 자기에게로 오게 하고, 게다가 이것을 감사하게 만들 수 있을 만한 기량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한 현인이, 한 사람의 바로스인이 당시에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이곳에 체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까닭인즉 이러하다-나는 우연히 다른 모든 사람이 치룬 총액보다도 훨씬 많은 보수를 소피스트들에게 지불했다는 한 사나이를 만났다. 그것은 힛포니코스의 아들 카리야스이다. 그는-두 아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그리하여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카리야스 군, 자네의 두 아들이 만일 당나귀나 송아지였다면, 그들에게 어울리는 덕을 훌륭하게 가르칠 수가 있는 감독자를 골라 그를 고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당 조마사라든가 농업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네의 아들은 인간이야. 자네는 그들을 위해서 어떤 감독자를 선택할 셈인가? 이런 종류의 덕을-인간으로서, 또한 시민으로서의 덕을-알고 있는 자가 누구일까? 자네는 두 아들의 아버지니까 아마 이 일을 생각한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그래 마땅한 적임자가 있었나? 암, 있었고말구.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누구이며, 어디서 온 사람이지 ? 그리고 그 사람의 수업료는 얼마인가? 나는 이렇게 그에게 물었다.
소크라테스군, 에우에노스라는 바로스인으로, 수업료는 오 무나일세.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이 에우에노스라는 사나이를 행복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그가 실제로 이런 방법을 이해하고 있고, 그렇듯 교묘한 교수를 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만일 내가 그런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나 자신 그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5. 여기서 여러분 가운데에서는 아마 이렇게 힐문할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 군, 자네는 대체 무엇을 직업으로 삼고 있나? 자네에 대한 이 나쁜 소문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지? 자네는 보나마나 무언가 세상 일반과는 다른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 자네가 세상 여러 사람들과 하나도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자네에 대해 이런 명성과 평판이 떠돌게 될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그러니 일의 자초지종을 상세히 얘기해 보라. 우리는 자네에 대해 우리 자신의 억측에 빠져있고 싶지는 않으니까.' 생각컨대 이렇게 말하는 자는 정당하다. 그런 만큼 나는 그 무엇이 이런 명성과 악평을 내게 가져왔는지, 그것에 대해 여러분에게 상세히 설명해 보고자 한다.
부디 잘 들어주시기 바란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에는 내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더러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꼭 믿어 주시기 바란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제부터 완전한 진실을 말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아테네인 여러분, 내가 이런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오직 내게 일종의 지혜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어떤 지혜였는가? 생각컨대 그것은 일종의 인간적 지혜일 것이다. 그런 지혜라면 나도 실제로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있으니까.
이에 비해서 앞서 말한 사람들은 필경 초인간적 지혜를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그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보나마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나를 비방하기 위해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아테네인 여러분, 내가 무언가 큰 소리를 토해낸다고 여겨지는 일이 있더라도 부디 방해를 하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말은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충분히 누구나가 믿을 수 있는 한 증인의 말을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나의 지혜에 관한-만일 그것이 실제로 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또한 그 성질에 관한 증인으로서 나는 델포이의 신을 세운다.
생각컨대 여러분은 카이레폰(소크라테스의 가장 충실한 제가)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나의 벗인 동시에 또한 민당 여러분의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그리하여 한 때 민당과 함께 망명을 같이 했고, 또한 여러분들과 같이 돌아온 바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카이레폰이 어떤 사나이었는지, 또한 그는 무엇을 하는 경우 그 얼마나 격정적이였는지, 그것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터이다.
그는 일찍이 델포이로 나아가 다음 같은 물음에 대해 신탁을 구하는 대담한 짓을 감행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여러분, 부디 정숙하게 진실을 들어주시기 바란다.
즉 그는 나 이상의 현자가 있느냐고 신에게 물은 것이다. 그런데 그곳 무녀는 소크라테스 이상의 현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대답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곳에 있는 그의 동생(카이레크라테스를 말함)이 보증해 줄 것이다. 카이레폰 자신은 이미 사망한 바있으니까.
6. 그것은 어떻든 생각해 주시기 바란다. 내가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것을.
그것은 이런 터무니없는 비방이 어디에서 어떻게 나에 대해 일어났는지를 여러분에게 설명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어떻든 간에 이 신탁을 들었을 때 나는 스스로 이렇게 물었었다.
신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며, 또한 그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라고, 내가 큰 일에 있어서나 작은 일에 있어서나 현명하지가 못하다는 것은 흔히 자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대체 어떤 뜻일까? 신이 나를 가리켜 지극히 현명하다고 한 것은.
하지만 신이 물론 헛된 말을 할 리가 없다. 그것은 신의 본질에 위배되는 까닭이다.
이리하여 나는 오랫동안 신이 뜻하는 바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고심한 나머지 가까스로 다음 같은 신탁탐구법에 상도했던 것이다.
나는 현자라는 소문이 나 있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찾아다녔다. 그곳에 있어서야말로-만일 어딘가에서 가능한 것이라면-신탁에 대한 반증을 들어 그리하여 이것을 향해 '보라, 이 사람이야말로 나보다도 현명하다. 그런데 그대는 나를 가장 현명한 인간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주장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하여 그 사람을 충분히 연구했을 때-그 이름을 댈 필요는 없거니와-아테네인 여러분, 내가 음미하고 있었을 때 다음 같은 경험을 한 것은 정치가인 한 사람이었다-그와 대담 중에 나는 과연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현자로 보이고, 더욱이 그 자신은 그렇게 믿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는 스스로 현자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그에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나는 그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증오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곳을 떠나면서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내 쪽이 그 사나이보다는 현명하다. 그럴 것이 우리는 두 사람 모두 선에 대해서도, 미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하다고 여겨지지만,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도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나는 적어도 스스로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고 있는 한에 있어 그 사나이보다도 지혜상으로는 약간 뛰어나 있는 것 같이 생각된다.
그리고 나는 전자 이상으로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있는 또 한 사람을 찾아가 보았으나, 역시 똑같은 결론을 얻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사람들에게서도 증오를 받게 된 것이다.
7. 그 후 나는 차례로 온갖 사람들을 방문했다. 그리고는 나는 증오를 스스로 불러들인 사실을 인정하고 또한 슬퍼하며 우려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나는 신탁의 뜻을 분명히 하고자 스스로 식자라는 소문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보아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맹세코 말하지만-여러분에게는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나는 실제로 대략 다음 같은 것을 경험했던 것이다.
즉 신의 뜻에 따라 탐구한 결과, 나는 가장 이름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지견이 부족하고, 이에 비해 존경되는 일이 적은 다른 사람들이 오히려 지견에 있어 우수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 만큼 나는 나의 표장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참으로 쓰라림의 연속이라고도 할 그런 것이었지만, 결국 다만 신탁을 뒤집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밝힌 것에 지나지 않았다.
즉 나는 정치가 다음으로 시인을, 비극 시인이나 주신을 칭송하는 시인이나 그 밖의 시인을 방문했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그들보다도 우매하다는 증거를 현장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작품 중에서 가장 고심했다고 여겨지는 것을 들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느냐고 물었다. 동시에 그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진실을 고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거의 모두가 그 작품에 대해서 작자 그 사람 이상의 설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이렇게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라 생각한다.
이렇게 되어 이곳에서 역시 나는 시인이 시작을 하는 것은 지혜에 의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예언자나 신무처럼 일종의 자연적 소질과 신래에 의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물론 이들 또한 숱한 아름다운 것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스스로 말하는 바의 진의에 대해서는 하등 이해가 없는 것이다.
시인 역시 거의 똑같은 상태에 있다고 여겨졌다. 동시에 나는 그들이 그 시재 탓으로 다른 일에 대해서도-사실은 그렇지가 않은데도 불구하고-세계 최대의 지자임을 다만 스스로 자칭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리하여 나는 내가 정치가들보다도 뛰어나 있다는 같은 점에서 이들보다 뛰어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 곁을 떠났던 것이다.
8. 마지막으로 나는 수공자를 찾아갔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이를테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에 비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 나는 잘못이 없었다. 그들은 실상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테네인 여러분, 나로서는 이들 수공자 또한 시인과 마찬가지의 과오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모두 그 직업인 기예에 숙련되어 있다는 것으로 다른 가장 중대한 일에 관해서도 최저의 식자라 믿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이 그릇된 생각이 그들이 갖추고 있던 지혜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신탁의 이름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들 같은 지혜마저도, 그들 같은 우매함마저도 갖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있는 것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나는 어느 것을 선택하려 하느냐? 하고.
그리고 나는 나 자신과 신탁에 대해 스스로 있는 그대로 있는 편이 나를 위해서 좋은 것이다,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9. 아테네인 여러분, 이 탐구의 결과 내게는 많은 적이 생겼다. 게다가 그것은 가장 악랄하고 가장 위험한 종류의 것이다. 즉 그 결과 그들에게서 숱한 비방이 일어나고, 또한 내가 현자라는 소문도 퍼지게 된 것이다.
그럴 것이 방청자는 언제나 내가 어떤 것에 대해 타인에게 그의 무지를 논증할 때 그 일에 있어 나 자신은 현자라고 믿는 까닭에.
그러나 여러분, 진정 현명한 것은 오직 신뿐이며, 또한 그가 이 신탁에서 말하는 바는 사람의 지혜의 가치는 지극히 적거나 공무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신은 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말하고, 또한 나의 이름을 쓰고는 있지만, 그것은 나를 다만 하나의 예로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그것은 마치 '인간들이여, 그대들 가운데에서 가장 현명한 자는 소크라테스처럼 자기의 지혜는 실상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임을 깨달은 자이다' 이렇게 말하고있는 것만 같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나는 여전히 신의 뜻대로 돌아다니면서 같은 시민이건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건, 적어도 현자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찾아내면, 이 일을 탐구하고, 또한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상 이것에 반대되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는 신의 조력자가 되어 그가 현자가 아님을 지적한다. 또한 이 일이 있는 까닭에 나는 공사에 있어서나 사사에 있어서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는 일도 없이 신에 대한 봉사사업으로 가난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10. 게다가 또한 이런 일도 있다. 지극히 부유한 시민의 아들로서 가장 많은 여가를 가지고 있는 청년들은 스스로 나의 뒤를 따라, 내가 사람들을 심문할 때 재미있어 하면서 이를 방청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따금 나를 모방하여 다른 사람들을 심문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컨대 그 결과 그들은 스스로는 과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자만하고 있지만, 사실은 거의, 또는 전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기막히게 많음을 발견한다.
이리하여 그들의 심문을 당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꾸짖는 대신에 나에 대해 노여움을 품고는 '소크라테스라는 괘씸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청년을 부패시키는 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그들에게 어떤 행위와 어떤 교설에 의해 심문을 당했는가? 이렇게 물을 때 그들은 아무 것도 아는 바 없어 답변에 궁해져, 그 당혹을 감추느라 모든 철학자에게 돌려지는 진부한 비난을 끌어내는 것이다.
즉 그는 천상 및 지하의 현상에 대해서 가르치며, 또한 신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또한 나쁜 일을 좋은 일이라 가르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일의 진상을, 즉 스스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무엇을 알고 있는 체 한 사실이 폭로됨을 바라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바야흐로 이 무리들은 온갖 설득력 있는 언사로 나를 비방하게 되었고, 이에 격려되어 메레토스(시인), 아뉴토스(공인의 대표자) 및 류콘(연설가)의 세 사람이 고발자가 되어 나를 공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메레토스는 시인을 위해서, 아뉴토스는 수공자와 정치가를 위해서, 그리고 류콘은 또한 연설가를 위해서 일어선 것이다.
따라서 맨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이렇듯 늘어난 비방을 내가 이렇게 짧은 한정된 시간 사이에 여러분에게서 제거할 수가 있다면, 오히려 나 자신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다.
아테네인 여러분, 이것은 진실이다. 나는 일의 큰 점도, 작은 점도 이를 숨기거나 덮어 버리는 일 없이 여러분에게 알린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 일로 인해 증오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바가 진실이며 또한 나에 대한 비방과 그 이유가 이렇다는 증좌인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오늘날. 또는 장래에 있어 이일을 구명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그 까닭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1. 최초의 고발자의 비난에 대해서 내가 여러분들 앞에서 해야 할 변명은 이제 말한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제 나는 이것보다 스스로 유덕한 인사이고 또한 애국자라 자칭하는 메레토스와 다음으로는 그 뒤의 고발자에 대해 변명을 시도해 보고자 생각한다.
우선 우리는 그들을 다른 고발자로 간주하여 그들의 소장을 보기로 한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대략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는 죄를 범하는 자이다. 그는 청년을 부패시키고, 또한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령을 믿는 까닭에' 라고. 이것이 그 소장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 내용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십시다.
그는 말한다. 나는 청년을 부패시키는 까닭에 죄를 범하는 자이다 라고. 이에 비해 나는 주장한다. 아테네인 여러분, 메레토스야말로 바로 죄를 범하는 자이다. 그럴 것이 그는 엄숙한 일을 농담거리로 만드는 자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경솔하게 상관조차 없는 것을 소송사건에 집어넣고, 또한 일찍이 손톱만큼도 관심을 느끼지 않았던 일에 대해 열심과 관심을 지니고 있는 것 같이 치장하고 있다고, 사실 그대로임을 나는 여러분들에게 증명해 보이고싶다.
12. 이리 오게나, 메레토스 군, 그리고 말하게. 자네가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청년이 가능한 한 선량해지는 것이지? 그럴 테지? '그렇소이다.' 그렇다면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말하게나. 청년을 선도하는 것은 누구인가를. 자네는 아마 그것을 알고 있을 거야. 그것이 자네에게 있어 중요한 일이니까.
실상 자네는 그들을 부패시키는 나라는 인간을 발견했다면서 나를 이렇게 이곳으로 끌어내어 나를 고발할 정도이니까.
자아, 말하게나. 선도자의 이름은 누구인가를. 그리고 그것을 재판관 여러분에게 알리게.
메레토스 군, 자네 한 마디도 못하고 숫제 입을 다물고 있지않나?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또한 이 문제가 적어도 자네의 관심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는 나의 주장의 충분한 증거라고는 생각지 않는가? 친구여, 자아, 말하게나, 그들을 선도하는 자는 누구인가를.
'국법, 나라의 법일세.' 천만에, 나는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닐세. 훌륭한 벗이여, 무엇보다도 먼저 자네가 말하는 국법을 알고 있는 인간이 누구인가? '소크라테스 군, 거기 있는 재판관 여러분들이지.' 메레토스 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이 사람들에게 청년을 교육하거나 선도할 힘이 있단 말인가? '물론, 있고말구.' 모두란 말인가? 아니면 어떤 자는 선도가 가능하고 어떤 자는 가능하지가 않다는 것인가? '모두가 그렇다네.' 헤라의 신에 걸어, 이거 이상한 말도 다 있군. 그렇다면 선도자는 굉장히 많이 있는 셈이구먼. 그렇다면 다시 묻고 싶네. 이곳 청중들도 역시 그들을 선도하는가, 아니면 안 하는가? '그들 역시 마찬가지라네.' 그렇다면 참정관은? '참정관 역시 마찬가지지.' 메레토스 군, 그렇지만 국민의회 의원들은 청년을 부패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그들도 모두 청년을 선도하고 있는가? '그들 역시 마찬가지일세.' 그러면 나를 빼놓은 아테네 인은 모두 그들을 선량하고 유덕하게 만들고 있는데, 유독 나만이 그들을 부패시키고 있단 말이군? 자네의 설은 그것인가? '옳거니. 나의 설은 바로 그대로일세.' 자네가 인정하는 대로라면, 나는 매우 비참한 인간이군. 하지만 한 가지 답변해 줘야겠네. 자네는 말의 경우에도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나? 모든 인간이 그들을 잘 길들이고, 나만 한 사람만이 그들을 그르치게 하는가?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을 잘 길들일 수 있는 것은 단 한 사람이거나, 또는 아주 적은 수의 사람, 즉 조마사뿐이고, 대다수의 사람이 그들을 다루거나 사용하거나 하면, 오히려 그것을 나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나, 메레토스 군? 말이나 그 밖의 모든 동물의 경우에는 자네나 아뉴토스 군이 반대를 하건, 찬성을 하건 그것은 뻔하지.
만일 청년을 부패시키는 자가 다만 한 사람이고 나머지는 모두 그들을 선도하는 자였다면, 그들은 아마 행복했을 터인데.
좋아, 메레토스 군, 이제 충분히 드러나 버렸네. 자네가 결코 청년들에 대해 염려하고 있지를 않았다는 것은. 또한 자네가 그 때문에 나를 고발한 일에 대해 아무런 근심도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도 스스로 분명히 폭로해 버렸어.
13. 아무튼 메레토스 군, 제우스의 신에 걸어 또 한가지 말해 줘야겠네. 함께 살아가는 데는 선량한 시민과 사악한 자와 어느 쪽이 좋을까? 벗이여, 대답해 주게나. 별로 힘든 물음도 아니니까.
악인은 늘 그 이웃사람에게 나쁜 일을, 선인은 이에 비해 좋은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닐는지? '물론. 분명히 그렇지.' 그렇다면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익보다도 오히려 해를 받기를 바라는 자가 세상에 있을까? 벗이여, 대답해 보게나. 법률이 자네에게 답변할 것을 명하고 있어. 이 세상에 그 누가 해를 받기를 바라겠는가?
'물론 그런 자는 없지.' 그래? 그렇다면 자네가 나를 이곳으로 끌어낸 것은 청년을 부패시키거나 나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을 내가 고의로 그러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럴 작정 없이 하기 때문인가?
'고의로, 나는 감히 이렇게 주장하오.' 놀랐구먼, 메레토스 군. 자네는 그렇게 젊은데도 이런 늙은 나보다 훨씬 현명하고 악인은 언제나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나쁜 일을 행하고, 선인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나는 나와 교제가 있는 누군가를 악으로 인도하면, 나 자신도 그에게 해를 입을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뿐더러, 자네의 주장에 의하면, 내가 고의로 이런 해를 자초할 만큼 어리석다는 것인데, 그런 것은 나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 메레토스 군.
또한 생각컨대 다른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걸세. 나는 오히려 무릇 청년을 부패시키는 자가 아닌가? 또한 부패시킨다고 한다면, 고의 없이 하는 자이거나 어느 한쪽일 것이다. 따라서 자네는 양자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되네.
그런데 만일 내가 고의에서가 아니고 부패시키고 있는 것이라면, 그런 뜻하지 않은 잘못 때문에 나를 이곳으로 끌어내는 것은 단단히 잘못된 일이지.
오히려 자네는 나를 넌지시 불러 내게 교시와 훈화를 주어야 했다. 만일 내가 납득할 수 있다면, 그 짓을 그만 둘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지.
그런데도 자네는 내게 다가오는 것도, 나를 훈화하는 것도 거부하고 대신 처벌을 받도록 하고자 나를 이 자리로 끌어낸 것이다.
14. 어쨌거나 아테네인 여러분, 내가 앞에서도 말한 것처림 많건 적건 메레토스가 이런 일들에 대해 하나도 염려를 안 했던 것만은 명백하다.
하지만 메레토스 군, 자네는 내가 어떻게 청년을 부패시킨다고 주장하는가? 그것을 들려주게나.
자네의 소장에 따르자면, 그것은 분명히 내가 그들에게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치 않고, 그 대신 다른 새 신령을 믿도록 가르치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그들을 부패시키는 것은 결국 이런 가르침에 의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소, 나는 단호히 그렇게 주장하네.
그렇다면 메래토스 군, 지금 논제에 올라 있는 신들에 걸어, 좀더 뚜렷하게 나와 이곳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게. 나로서는 자네가 말하는 것이 잘 이해되지를 않으니까.
자네의 주장은 이러한가? 나는 어떤 신들의 존재에 대한 신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나 스스로 신들의 존재를 믿고 있는 셈이며, 전혀 무신론자가 아니니까 이 점에서 죄는 없지만, 다만 나의 신들은 국가가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이라고 주장하는가? 그리고 이것이 다른 신들을 믿는다는 자네의 힐책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인가? 아니면 또한 내가 통틀어 신들을 믿지 않고 있으며 그것을 타인에게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인가? '나는 후자를 주장한다. 당신은 통틀어 신을 믿지 않고 있소.' 자네 정말 놀라운 사람이군, 메레토스 군. 어쩔 셈으로 그런 주장을 하지? 그렇다면 자네는 내가 일륜도, 월륜도 신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처럼은 믿지 않는다는 말인가? '제우스에 걸어 그렇소. 법관 여러분, 그는 일륜을 돌로, 월륜을 흙으로 주장하고 있소이다.' 친애하는 메레토스 군, 자네는 아나키사골라(자연철학자)를 제소할 셈인가? 자네는 이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여, 그들은 크라조메노스인 아나키사골라스의 저작이 이런 종류의 설로 채워져 있는 것을 모를 만큼 무식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러면 또한 청년들이 내게서 배운다는 지식이라는 것은 오르케스트라(그리스의 극장)에 가서 고작 일드라크메만 차놓으면 살 수 있는 것으로서,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그것은 내 것이라는 투의 얼굴을 한다면-하물며 그것은 매우 해괴한 설인 만큼-그를 비웃는 건덕지로 삼을 수 있는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제우스에 걸어, 자네는 정말로 내가 그렇듯 신들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분명히 제우스에 걸어, 당신은 그것을 전혀 믿고 있지 않소이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구먼, 자네는. 하기는 자네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럴테지. 아테네인 여러분, 이 사람은 지극히 교만하고 방자한 사람 같소.
그리고 그가 이 소장을 기초한 것도 다만 이 교만과 방자 및 청년 같은 생각 탓이라 여겨지오. 그럴 것이 그는 하나의 수수께끼를 걸어 사람을 시험해보려는 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현인 소크라테스는 내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과 내가 자가당착을 말하고 있는 것을 꿰뚫을까? 아니면 나는 그와 다른 청중들을 속여낼 수 있을까?' 라고.
왜냐하면 그의 소장 가운데에는 자가당착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소크라테스는 죄 있는 자이다 그는 신들을 믿지 않는 까닭에, 게다가 신들을 믿는 까닭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이것은 다만 농담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15. 여러분, 내가 어떤 이유로 그의 말을 이렇게 이해하는가를 나와 함께 고찰해 주기 바라오.
그러나 메레토스 군, 자네는 대답하게. 메레토스 군, 무릇 인간에 관한 것의 존재는 믿지만, 인간의 존재는 믿지 않는다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가? 여러분, 그는 대답해야 한다. 그는 거듭 떠들어댈 것은 없는 것이다. 세상에 말의 존재를 믿지 않고, 말에 관한 것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있는가? 또한 피리부는 자의 존재를 믿지 않고 피리부는 기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천만에, 한 사람도 없소이다. 뛰어난 자여, 자네가 대답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내가 대신 자네와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하리.
그러나 적어도 다음 물음에는 대답하라. 세상에 신령의 작용은 믿지만, 신령은 믿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한 사람도 없소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재판관 여러분을 의식하여 자네가 마침내 대답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어쨌거나 자네의 주장에 따르자면, 그것이 새것이건 해묵은 것이건, 나는 어쨌든 신령의 작용을 믿고, 또한 가르치는 자이다. 어쨌든 내가 신령의 작용을 믿는 것은 자네가 소장에서도 맹세하고 있듯이 자네가 언명한 대로이다.
그런데 만일 내가 신령의 작용을 믿는다면, 나는 또한 지극히 필연적으로 신령마저도 믿는 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나는 이렇게 추정한다. 자네가 대답하지 않으니까 찬성으로 간주하고. 그런데 신령마저도 우리는 신들, 또는 신의 아들로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찬반을 분명히 하게나.
'그렇소이다.' 그러면 만일 내가 자네도 허락하듯 신령을 인정하고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신령이 신들의 일종이라면 자네의 주장은 앞서도 말했듯이 수수께끼이고 농담이라고 해야 하리라.
나는 신들을 인정치 않는 자이고, 게다가 신령을 인정하는 만큼, 또한 신들을 인정하는 자이기도 하다는 것이 되니까.
만일 또한 신령이란 사람들이 말하고 있듯이 여정이나 그 밖의 여성을 어머니로 하는 신들와 서자라면, 그 누가 감히 신들의 아들은 존재하지만 신들은 존재치 않는다고 믿는가? 그것이 배리임은 마치 말과 당나귀와의 잡종인 노새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말과 당나귀와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천만에, 메레토스 군, 자네가 이런 소장을 기초한 것은 우리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이거나 또는 무엇을 진정한 죄과로 삼아 나를 모함할 것인가에 당혹한 결과로 밖에 생각되지를 않는다.
자네가 다소라도 분별이 있는 사람을 향해서 한편으로는 신령의 일과 신들의 일을 믿는 것은 같은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거나. 한편으로는 또한 (양자를 믿는) 그 똑같은 사람이 신령마저도, 신들마저도, 반신마저도 믿지 않는 수가 있을 수 있다면서 설득하려 해도 그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16. 그렇기는 하지만 아테네인 여러분, 내게 메레토스의 소장이 말하고 있는 그런 죄과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굳이 변명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상 말한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맨 처음 말한 것처럼 나에 대한 숱한 적의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음이 진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멸망당한다고 한다면, 나를 멸망시키는 것은 이것이다. 그것은 메레토스도 아니고, 아뉴토스도 아니고, 오히려 군중의 비방과 시기이다.
그것은 이미 숱한 선인을 멸망시켜왔다. 생각컨대 또다시 멸망시켜갈 것이다. 내가 그 최후가 되리라는 근심은 절대로 필요치 않다.
하기는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는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여, 그대는 지금 그것 때문에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그런 직업을 직업으로 삼고 있음을 치욕으로 느끼고 있지는 않는가?' 라고.
그러나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정당한 이유로써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벗이여, 자네의 말은 바르지가 않네. 자네가 만일 조금이라도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생명의 위험이야말로 고려에 넣어야 하며, 무엇을 함에 있어서도 그 행위가 과연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 또한 선인의 행위인가, 악인의 행위인가만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럴 것이 자네의 설에 따르면, 트로이 성 밖에 쓰러진 모든 반신들은, 특히 티티스(아킬레스를 말함)조차도 모두 비천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여신인 그 어머니가 헤크토르를 죽이려고 열중한 그에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치욕을 받는 것보다는 신변에 미치는 위험 따위는 모조리 이를 경멸했다
그녀의 말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아들아, 네가 살해된 친구 파트로크로스의 원수를 갚고자 헤크토르를 죽인다면, 너 자신도 죽게 된단다. 헤크토르에 이어 곧 죽는다는 것이 네가 가지고 태어난 운명 이니까.
그러나 그는 이 말을 듣고도 여전히 죽음과 위험을 개의치 않고, 오히려 겁장이로 살아남아 친구의 복수마저 못하는 것을 더한층 두려워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고약한 놈에게 분풀이만 할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죽어 버리고 싶다. 그 배 위에 살아남아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고, 대지의 짐이 안되도록' 라고.
자네는 설마 그 때 그가 죽음이나 위험에 신경을 썼다고는 생각지 않을 테지? 아테네인 여러분, 진실을 말하면 이런 것이다. 사람은 그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그것이 스스로 최량이라고 믿은 것이건, 또는 그것이 지휘자에 의해서 지정된 것이건 간에 그곳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고수해야 하는 것이며, 치욕에 비하면, 죽음이나 그 밖의 것은 추호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17. 아테네인 여러분, 여러분이 나의 지휘자로 선임한 상관이 내게 지정한 자리에는 포티다이아라도, 안피폴리스라도, 또한 데리온이라도 다른 그 누구에 못지않게 이것을 고수하여 죽음의 위험에 직면했던 나인데, 지금 만일 신에게서 받았다-고 스스로 믿고 또한 생각하고 있는-자리를, 바꾸어 말해서 애지자로서 살고 자기 및 타인을 음미하는 것을 죽음이나 그 밖의 위험의 공포 때문에 포기했다고 한다면, 나의 행동은 보나마나 기괴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괴이한 일이고, 실상 그때야말로 사람은 정당한 이유로 나를 법정에 끌어낼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신탁에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따라서 또한 현명하지도 못하면서 현인인체 하는 까닭에 신을 믿지 않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럴 것이 죽음을 두려워함은 스스로 현명치 않은데도 현인인 체 하는 것 밖에 되지를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스스로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믿는 것인 것이다.
생각컨대 죽음이란 인간에게 있어 복의 최상의 것이 아닌지 어떤지를 그 누구도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이 악의 최대의 것임을 확지하고 있는 듯이 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야말로 그 악평 높은 무지, 즉 스스로 모르는 것을 안다고 믿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여러분, 나는 필경 이 점에 있어 스스로 타인보다도 현명하다는 사실이 허용된다면, 그것은 바로 다음 같은 점, 즉 나는 명부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제대로 모르는 대신에 또한 알고 있다고 망신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을 행하는 것과 그것이 신이건 사람이건 무릇 뛰어난 자에게 따르지 않는 것이 악이며 치욕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이 악임을 알고 있는 악 대신에 그것이 혹시 복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거나 피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설령 여러분이 이번에는 나를 방면하여 '여러분은 처음부터 소크라테스를 법정으로 끌어내지를 말았든지, 또는 일단 끌어낸 이상은 그를 사형에 처하든지,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이제 방면된다면, 여러분들의 자제들은 이내 그의 가르침을 실행하여 모조리 철두철미 부패하게 될 터이니까' 이렇게 말한 아뉴토스의 의견에 따르기를 거부한다고 하더라도-만일 여러분이 이 말에 대해서 '소크라테스여, 우리는 이번에는 아뉴토스의 말을 듣지 않고 너를 방면하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너는 앞으로 그런 인간음미에 종사하지 말고 지혜의 애구에 노력해야 한다. 만일 이에 반해 네가 앞으로 그것을 하고 있는 현장에서 잡히면, 그때 너는 살해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내게 선고한다면-만일 여러분이 지금 말한 그런 조건하에 나를 방면하려고 한다면. 나는 여러분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존중하고 또한 사랑하는 인간이지만, 그러나 여러분을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신을 따를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숨과 힘이 이어지는 한, 지혜를 애구하거나, 여러분에게 충고하거나, 여러분 중의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다음 같이 지적하면서 그 나의 투로 말할 것이다.
시민 여러분, 아테네인이면서 가장 위대하고 또한 그 지혜와 뛰어난 힘 까닭에 그 이름이 가장 높은 시민이면서도 가능한 한, 다량의 축재나 또한 소문이나 영예만을 생각하고, 오히려 지견이나 진리나 또한 자기의 영혼을 되도록 선하게 하는 일 따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그대는 치욕이라고는 생각지 않는가? 라고.
그리고 만일 그 때 여러분 중의 누군가가 이에 항의하여 나는 그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여전히 당장에는 그를 놓지 않고, 또한 나 역시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에게 질문하고 그를 정사하고 또한 엄하게 심문하여 그래도 만일 그가 덕을 지니지 못하고 지닌다고 주장한다고 내가 인정한다면, 나는 그는 가장 귀한 것을 가장 가치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오히려 가치가 적은 것 쪽을 높이 평가한다면서 그를 비난할 것이다.
나는 적어도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노인에게도 청년에게도, 이방인에게도 같은 시민에게도 그런 태도를 취할 것이다. 게다가 그 중에서도 시민 여러분에게 대해서는 그러할 것이다.
여러분은 혈통상 나와 보다 가까운 자이기에. 왜냐하면-이것을 나는 단언한다-그것은 신이 명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나는 믿고 있다. 신에 대한 나의 이 봉사에 웃돌 만한 행복이 이 나라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내가 걸어다니면서 파악하는 것은 젊은이도, 노인도 여러분 모두를 향해 몸과 재산에 대한 고려를 영혼의 최고 가능의 완성에 대한 그것보다도 앞세우고 또한 더한층 열심히 찾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권하는 것, 또한 덕이 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 및 인간에게 있어 다른 모든 선한 것이란 사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공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덕에서 생기는 것임을 부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이런 말로 청년을 부패시키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위험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것과 다른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사실무근이다.
그렇다면 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다만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여러분은 아뉴토스의 말에 따라도 좋고, 따르지 않아도 좋으며, 또한 나를 방면해도, 방면을 안 해도 좋다고, 어쨌거나 나는 절대로 나의 행동을 바꾸지는 않으리니, 설령 거듭 죽음의 운명에 위협 당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18. 아테네인 여러분, 떠들지 말아 주시오, 내가 말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고 경청하도록 부탁한 사실을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생각컨대 그것을 경청하는 것은 여러분의 이익이 될 터이니까.
사실 나는 또다시 몇 가지 말을 하려고 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아마 여러분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짓은 절대로 그만 두어 두었으면 싶다
부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러분이 만일 내가 이곳에서 스스로 설명하는 것 같은 인간인 나를 사형에 처한다면, 여러분은 나보다도 오히려 여러분 자신을 해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럴 것이 메레토스도, 아뉴토스도 결코 나를 해칠 수는 없을 터인즉. 또한 실제로 그들에게 그것이 가능한 것도 아닌 것이다. 나는 악인이 선인을 해친다는 것이 신적인 세계질서와 양립한다고는 절대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필경 나를 사형에, 또는 추방에, 또는 공민권박탈에 처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그나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아마 큰 화라고 생각될는지 몰라도 나로서는 절대로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그보다 훨씬 더 큰 화는 지금 그가 하고있는 것, 즉 정의에 반하여 한 인간을 사형에 처하려고 꾀하고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여기서 나 자신을 위해 -세상사람들이 혹시 상상하듯-변명 하려고는 생각조차 않는다. 오히려 나의 변명은 다만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분이 나를 처형하는 결과, 신으로부터 여러분에게 주어진 선물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인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나를 사형에 처한다면, 달리 또다시 나 같은 인간을 찾아내기란 수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인간이라는 것은 약간 익살스럽게 들릴지는 몰라도 바로 신에게서 시에 결박지어진 자이다.
그리고 그 시는 가령 거대하고도 기품 있는 군마이며, 게다가 거대한 까닭에 약간 운동에 둔하고, 이것을 각성하려면, 무언가 찌르는 자가 필요한 그런 것인 것이다.
생각컨대 신이 나를 이 시에 잡아맨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나는 종일 온갖 곳에서 여러분을 따라다니며, 여러분을 자성시키고 설득하고 또한 비난하는 짓을 결코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아마도 이런 인간은 좀체로 또다시 여러분 앞에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즉 여러분 중에 만일 나의 말에 따를 생각이 드는 자가 있다면, 나를 사랑하고 아끼라.
여러분은 필경 잠을 깨게 된 가수자처럼 마구 화를 내어 내게로 덤벼들어 아뉴토스의 설에 따라 경솔하게 나를 사형에 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그 뒤의 일생을 통해서 계속 잠을 자게 되어 버릴 것이다 신이 여러분을 우려하여 제2의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그런데 내가 신에 의해 이 고장으로 보내어진 자라는 것은 여러분도 다음 같은 사실로 꿰뚫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나는 나 자신에 관한 것은 일체 이를 돌아보지 않으며, 다년간 가사의 황폐를 태연히 방관하여 시종 여러분을 위해 힘을 다해 왔고, 부친이나 형처럼 누구에게나 개인적으로 접근하여 덕을 추구하도록 설득해온 자이거니와, 이는 결코 인간의 짓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하기는 내가 그것으로 어떤 이득을 얻고, 또한 이 가르침에 대해 보수라도 받고 있는 것이라면, 내가 하고있는 것이 이해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 이렇게 보시다시피 다른 모든 점으로는 그렇듯 뻔뻔스럽게 나를 고발한 나의 고발자들도 내가 누구에게 보수를 받았거나 또는 청구했다고 주장하고 그 증인을 데려올 정도로 낯이 두꺼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럴 것이 나는 나의 주장의 진실에 대해서 빈틈없이 뒷받침해 줄 증인을 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다름 아닌 나의 가난이다.
19. 내가 다만 돌아다니면서 개인적으로 이런 충고를 주는 것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 굳이 공적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국가 헌책 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여러분이 이미 몇 번이나 온갖 곳에서 나의 입으로 들은 바이다. 그것은 즉 내게는 일종의 신적이며 초자연적인 징후(목소리)가 나타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실로 메레토스도 그 소장 가운데에 비웃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나의 유년시절에 시작된 것으로, 안에서 일종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들릴 때에는 그것은 언제나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을 간하는데, 절대로 재촉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정치에 종사하는 것에 항의하는 것인 것이다.
게다가 이 항의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것이 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에게 단언한다. 내가 젊어서 정치에 종사하고 있었다면, 나는 벌써 생명을 잃어버려, 여러분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아무런 이득을 볼 수 없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진실을 말하더라도 화내지 말아 주기 바란다. 여러분에 대해서, 또는 다른 민중에 대해서 감연히 맞서 싸워 국가에서 행해지는 숱한 부정과 불법을 저지하려고 뜻하는 자는 그 누구일지라도 그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진정 정의를 위해서 싸우려고 바라는 자는 만일 그가 설령 잠시 동안이라도 살아 있으려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사인으로 생활해야지 공인으로 활동할 것은 아닌 것이다.
20. 이 일에 관해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유력한 증거를 제출하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이 아니고, 여러분이 존중하는 것. 즉, 사실인 것이다.
그러면 내가 당한 이야기를 들어주기 바란다. 그것은 내가 그 누구에 대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정의에 반하여 양보를 하는 인간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과 게다가 양보를 하지 않으면 보나마나 몸을 망칠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이해받기 위해서인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려는 것은 법정에 있어서는 보기 드물게 거침이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진실인 것이다.
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아직 한 번도 국가의 공직에 몸을 담은 일이 없다. 다만 참정원 의원이 된 일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쩌다가 내가 속하고 있는 안티오키스 족이 당번이었을 때 여러분은 해전 뒤에 시체를 거두지 않았던 18명의 장군에 대해 일률적으로 유죄선고를 내리기로 정했었다. 그것이 위법행위였음은 여러분도 뒤에 가서는 모두 승인한 대로이다.
당시에 있어서는 당번의원 가운데에서 다만 나 한사람이 여러분에게 반대하여 위법행위를 저지르지 말라고 고한 바 있었다.
그리고는 나는 이것에 반대하는 투표를 했던 것이다.
그러자 연설자들은 나를 고발하여 구속하려고 했고, 여러분은 또한 그들을 충동질하여 노여움을 터뜨렸지만, 나는 투옥과 사형을 두려워하여 위법결의를 한 여러분과 행동을 같이 하기보다는 오히려 국법과 정의의 편이 되어 온갖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직 국가에 민주정치가 행해지고 있는 무렵에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과두정치의 세상이 되었을 때 30명은 다시금 나를 다른 4명과 함께 소환하여 사라미스인 레온을 사라미스에서 데려와 사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그들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자기들과 같은 죄에 끌어들이고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일을 명한 것이다.
그 때에도 나는 역시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험에 의해-만일 이런 표현이 과히 거칠지가 않다면-스스로 죽음은 추호도 염려치 않지만, 이것과 반대로 부정과 독신의 행위를 피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자임을 중시했다.
그렇듯 강대한 권력을 지니고 있던 정부도 나를 위협하여 단 한 가지 부정도 행하게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곳에서 나왔고, 다른 4명은 그 길로 사라미스로 가서 레온을 데리고 왔지만, 나는 혼자 집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만일 그 정부가 그 뒤 이내 붕괴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그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 일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증언해 줄 것이다.
21. 그것은 어떻든, 여러분에게 묻겠는데, 내가 정치에 종사하여, 게다가 유덕한 사람에게 맞도록 행동하며 정의에 따라 이것을-당연한 일이거니와-그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다고 하더라도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 믿을 수 있겠는가? 불가능할 것이 뻔하다.
아테네인 여러분, 아마 그것은 다른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보시다시피 나의 일생을 통해 공인으로서도(적어도 공적으로 활동했을 때에는), 사인으로서도 이 태도를 바꾸지않는 한 사나이이다.
나는 아직 한 번도 그 누구에 대해서나 다른 시민뿐만 아니라 나의 비방자가 나의 제자라고 부르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정의에 반하여 추호도 양보한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 누구의 스승도 되지는 않았었다. 다만 나는 내가 자기의 사명을 이루려고 말할 때 누군가 그것을 듣기를 바라는 자가 있으면, 청년이건 노인이건 이를 거부하는 짓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나는 보수를 얻을 때에는 말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말하지 않는 그린 일은 없었으며, 오히려 빈부의 차별 없이 그 누구의 질문에도 응했을 뿐만 아니라, 바라는 자에게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내가 말하는 바를 듣는 것마저도 허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사람들 중의 어떤 자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건 말건 공정하게 말하면 내가 책임을 질 까닭은 없는 것이다. 그럴 것이 나는 그 누구에게도 수업을 약속한 일도, 준 일도 없으니까.
또한 만일 누군가가 달리 들은 일이 없는 것 같은 것을 일찍이 내게서 개인적으로 배웠다거나 들었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결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 주시기 바란다.
22. 그렇다면 오랫동안 나의 동료가 되어 사는 것이 어떤 사람들을 기쁘게 만드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아테네인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들으셨다. 나는 여러분을 향해 모든 진실을 알렸다. 즉 현명하다고 자만하면서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이 방청하는 것을 그들은 재미있어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불유쾌한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내게 있어서는 내가 주장하듯이 이 사명은 신탁이나 몽상이나 그 밖의 무릇 신의 뜻이 인간에게 무엇을 명하는 온갖 방법에 의해 신에게서 내게 주어진 것이다.
아테네인 여러분, 이것은 진실이고, 또한 손쉽게 증명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럴 것이 내가 만일 어떤 청년을 부패시키는 자, 또는 부패시킨 자라고 한다면, 그들 중 이미 장년에 이르러, 그 청년시절에 내게서 나온 조언을 받은 것을 깨달은 자는 이제 이곳으로 와서 나를 고발하고 내게 복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여러분 안 그렇소? 또한 만일 그들 자신은 그렇게 하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그 가족의 어떤 자, 즉 부모나 형이나 다른 친척들은 그들의 일족이 과연 내게 화를 입고 있는 것이라면, 이제 그것을 상기하여 보나마나 복수를 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실상 보기에 이곳에는 그런 사람이 제법 많이 있다.
우선 첫째로는 크리톤-나와 같은 나이 또래이며 같은 고향의 친구로서 그곳에 있는 크리트브로스의 아버지.
다음으로는 스훼토스인 류사니어스-저기 있는 아이스키네스의 아버지. 그리고 저곳에 있는 케휘샤인 안티폰-에피게네스의 아버지.
그리고 이곳에는 나와 사귀고 있던 사람들의 형제들도 보인다. 니코스토라토스-데오조티데스의 아들로서 데오도토스의 형, 그리고 저기 있는 파라로스, 데모도코스의 아들이며 데아게스의 형제. 이쪽에 있는 아디만토스-아리스톤의 아들이며 이곳에 있는 플라톤의 형.
그리고 아이언트도로스-이곳에 있는 아포로도로스의 형. 이밖에도 나는 여러분에게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들을 수가 있다.
메레토스는 따라서 적어도 누군가 그 중 한사람을 증인으로 삼아, 자기의 연설 중에 특히 그 이름을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만일 그 때 그것을 잊은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좋으니 그것을 들도록 하라-나는 그것을 용인한다-그리고 말하는 것이다. 그에게 무언가 그런 종류의 것이 있다면,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은 아마 이것과 정반대의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오히려 나를 원조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메레토스나 아뉴토스의 주장에 따르건대, 그들을 부패시키고, 그들 일족에게 화를 준 것은 나인데도.
딴은 부패 당한 자 자신은 혹시 나를 원조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패 당하지 않았던, 이미 나이가 많은 그들의 친족은 진실하고도 공정한 이유, 즉 메레토스는 거짓말을, 그리고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말고는 나를 원조할 만한 그 어떤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
23. 여러분, 아마 이것으로 족하리라. 내가 변명으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략 이 정도이다. 또한 달리 더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것일 것이다.
하기는 여러분 가운데에는 자기는 이보다 훨씬 가벼운 소송사건에 있어서도 연거푸 눈물을 흘리면서 법관에게 탄원 애구하고, 또한 가능한 한의 동정을 끌고자 아이들이나 친족이나 친구들을 많이 법정으로 끌어냈는데도 나는 이에 비해 현재 최대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짓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내게 대해 불쾌감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부의 사람은 필경 이런 일을 염두에 두는 결과 자존심을 상했다고 느끼고, 이것 때문에 분노 가운데에 투표를 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에 그런 심정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하기는 나는 그렇게 전제하는 자는 아니지만-가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나는 정당한 이유로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선한 벗이여, 내게도 몇 명의 가족은 있다. 그럴 것이 호메로스의 말에도 있듯이 나는 매듭에 의해서도 풀리지 않고, 바위에 의해서도 끊어지지 않으며, 사람에게서 태어난 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게도 가족도 있을 뿐더러 아들도 있다. 아테네인 여러분, 아들은 셋이며 (장남은 람프로클레스, 나머지는 메네쿠세노스, 소프로너스코스), 하나는 이미 청년이 되어 있고, 다른 둘은 아직 어린아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죄방면의 투표를 여러분에게 애원하고자 그들 중 그 누구도 이곳으로 데려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그런 짓을 하지 않는가? 아테네인 여러분, 그것은 거만해서도 아니요, 여러분을 멸시해서도 아니다.
내가 태연히 죽음을 대할 것인지, 대하지 못할 것인지, 그것은 별문제이거니와, 아무튼 나는 내게 있어서도, 여러분에게 있어서도, 또한 국가 전체에 있어서도 내가 그런 짓을 함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물며 나는 이렇게 나이를 먹고 있으며. 그것이 당연한 것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아무튼 이런 명성을 얻고 있다. 즉 소크라테스가 어떤 점에서 뭇사람에게 뛰어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이미 정평이 되어 버리고 있으니까.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에서 지혜나 용기가, 또는 그 밖의 어떤 덕에 있어 탁월하다는 세평이 있는 사람이 만일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치욕이라고 할 것이다.
실상 나는 제법 명성이 있는 사람이 법정에 서게 되면, 괴이한 짓을 하는 것을 수차 보아왔다-죽게 되면 무서운 고뇌를 만난다고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에 의해 사형에 처해지지 않으면 마치 불사이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컨대 이들 무리는 국가에 불명예를 가져오는 자이다. 물론 일부의 외래자 또한 아테네인 가운데에서 그 덕이 빼어나, 시민이 선임하여 관직이나 그 밖의 명예를 준 자도 부녀자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믿게 될 염려가 있는 것이다.
그런즉 아테네인 여러분, 우리는 적어도 다소 세상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간인 이상,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여러분도 우리가 만일 그런 짓을 한다면, 이를 용서할 바가 못될 것이다.
오히려 여러분은 그런 딱한 연극을 연출하여 국가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자를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자보다 훨씬 엄하게 처벌하도록 해야 마땅할 것이다.
24. 여러분, 그러나 명예에 대해서는 잠시 놓아두더라도 교시와 설득에 의하지 않고 재판관에게 애원하고, 그 애원으로 사죄를 얻는 일 따위는 내게는 바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물론 재판관이 그 자리에 있음은 정실에 의해 공정을 일종의 은혜로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건을 심리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또한 그는 마음에 드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없이, 국법에 따라 재판할 것을 굳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그 선언을 깨는 것 같은 습관을 들일 방도도 없으며, 여러분 또한 스스로 그런 습관을 들일 필요도 없다. 그것은 우리들 쌍방에게 있어 경건한 행위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까닭에 아테네인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스스로 명예라고도, 바르다고도, 경건하다고도 생각지 않는 그런 태도를 취하기를 기대하지 마시라. 더욱이 지금은 제우스에 걸어, 이곳에 있는 메레토스에게서 신을 없다고 한 까닭에 고발되어 있는 것인즉.
물론 내가 만일 여러분을 설득하여 선언한 여러분을 애원으로 강제했다고 한다면, 나는 분명히 이것으로 여러분에게 신들의 존재를 믿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 되어, 따라서 스스로 변명하려다가 오히려 신들을 믿지 않는 혐의로 실은 나 자신을 고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나를 고발한 그들보다도 더 굳게 신을 믿고 있는 인간이며, 또한 내게도, 여러분에게도 가장 좋은 방법으로 나를 재판하기를 여러분과 신들에게 맡기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25. 아테네인 여러분, 지금 나타난 결과에 대해서, 즉 여러분이 내게 유죄를 선고한 것에 대해서 내가 노여움을 느끼지 않는 것에는 달리 숱한 이유가 있지만, 그러나 그 주된 것은 이 결과가 나의 짐작에 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나는 두 종류의 표수의 비례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차가 이렇듯 근소한 것이 아니고, 훨씬 많아지리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 다만 30표만 달랐어도 나는 무죄방면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메레토스에 대해서는 나는 지금도 무죄방면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무죄방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일 아뉴토스와 류콘이 나의 고발자로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에게나 명백하듯 그는 5분의 1의 표를 얻지 못한 탓으로 1천 드라크메의 벌금을 물어야 했을 것이다.
26. 이 사람은 나를 사형에 처할 것을 제의한다. 좋다. 그렇다면 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이것에 대해서 무엇을 제의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분명히 내가 의당 받아야 할 것은 아닌가?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평생 다만 안온하게 살려고는 생각한 일도 없고, 또한 축재나 가사나, 군대의 지휘나 공적인 연설이나, 그 밖의 공직이나 국내에 존재하는 도당이나 당파나, 이들 대다수의 사람들이 염두에 두는 모든 것에 무관심했던 까닭에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그 어떤 체형 또는 벌금형이 있는가? 나는 그곳에 몸을 던져 몸을 보전하기에는 실상 너무나 지나치게 바르다고 믿은 까닭에 그곳에서는 내가 여러분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하등 복리를 가져올 것 같지도 않은 곳에 몸을 던지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오히려 나의 이른바 최대의 선행을 누구에게나 친히 개인적으로 행할 수 있는 방면으로 나아갔다.
결국 나는 스스로 가능한 한, 선량하고 현명해지도록 먼저 나 자신을 고려하기 전에 자신에게 속하는 일을 고려하지 않도록, 그 밖의 모든 경우에도 이 순서에 따라 매사를 고려하도록 여러분 가운데의 몇 사람이라도 설득하도록 노력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인 까닭에 내가 당연히 받아야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언가 좋은 것이다.
아테네인 여러분, 적어도 상벌이 진정 당연한 평정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내게 어울리는 좋은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충고를 주기 위해 한가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한 가난한 공로자에게 어울리는 것이란 대체 무엇인가? 아테네인 여러분, 이런 인물에게는 푸류타네이온(참정관들이 집무하는 관청)에서 식사를 시키는 것 이상으로 어울리는 것은 달리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여러분의 한 사람이 또는 승마에 의해서, 또는 두 마리, 아니면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의해 올림피아경기에서 승리를 올린 경우보다도 훨씬 어울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여러분을 행복하다고 보이게 할뿐이지만, 나는 그렇게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그에게는 급양의 필요가 없지만, 내게는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내가 만일 올바름에 따라 의당 받아야 할 것을 제의해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것을 제의한다.
즉 푸류타네이온에서의 식사를.
27. 이런 표현을 하면, 여러분은 아마 전에 내가 연민과 애원에 대해서 말했을 때처럼 그것은 오만에서 오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아테네인 여러분, 그것은 그렇지가 않고 오히려 이런 까닭이다.
나는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결코 고의로 부정을 행한 일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그것을 믿게 하기란 지난하다. 그것은 우리가 말을 나누는 시간이 너무나도 짧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믿는 바로는 만일 타국 사람에게 있어서처럼 여러분 사이에 있어서도 사활에 관계되는 재판은 단 하루만에 결정해야 할 것이 아니라, 많은 날짜가 걸려야 한다는 규율이 있었더라면, 여러분에게도 아마 믿게 할 수가 있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짧은 시간 동안에 나에 대한 이렇듯 중대한 비방을 제거하기란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결코 그 누구에게도 부정을 행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는 까닭에, 또한 자기 자신에게 부정을 행하여 자기는 무언가 나쁜 보복을 의당 받아야하는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 죄를 선고하고, 그리고 나에 대해 그에 합당한 벌을 제의하는 것 따위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도대체 나는 무엇이 두려워 그런 짓을 하랴? 아니면 메레토스가 내게 부과하려고 제의하는 것에-나 자신은 그것이 과연 복인지 화인지 모른다고 자백하고 있는 것에-봉착하는 것이 두렵기라도 하다는 것인가?
그 대신에 나는 그것이 화임을 잘 알고 있는 벌을 스스로 택해 그것을 내게 부과하도록 제의해야 하는가? 가령 투옥은 어떨까? 그러나 감옥에서 그 때 그 때의 관리, 즉 11명의 옥리의 노예가 되어 생활을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아니면 벌금형을? 그리고 그것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있는가? 그러나 그 역시 결국 내게는 전에 말한 것과 같은 일이다 내게는 그것을 치를 만한 돈이 없으니까.
아니면 나는 추방의 형벌을 제의해야 하는가? 생각컨대 여러분이 내게 내리려 하고 있는 판결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시민인 여러분조차 나의 행동과 담론에 견디지 못해, 이제는 그것을 제거하려고 하게 되었을 정도로 번잡스러운 것을 타국인같으면, 오히려 손쉽게 그것에 견딜 수 있으리라 기대할 정도로 내가 이성을 잃고 있다고 한다면, 나의 삶에 대한 집착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아테네인 여러분, 그런 것은 생각조차 미치지 않는다. 내가 이 나이가 되어 추방당하는 신세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떠돌아다니면서 온갖 곳에서 내쫓김을 당하면서 일생을 보낸다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훌륭한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어디를 가건 마치 이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청년들이 나의 연설을 경청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그들을 멀리 하면, 그들은 그 장로를 움직여 나를 추방할 것이다. 만일 또한 내가 그들을 멀리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부모나 일족은 그들을 위해 역시 똑같은 짓을 할 것이다.
28. 아마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여, 자네는 이곳을 물러나 침묵을 지키며 조용한 생활을 보낼 수 없나? 라고.
이것이야말로 여러분 가운데의 어떤 사람을 납득시키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곤란한 점이다. 즉 만일 내가 그것을 신명에 위배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그런 까닭에 가만히 있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나를 진지하지 않다고 치고,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내가 만일 인간의 최대 행복은 나날이 덕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자타를 음미할 때 그것에 닿는 것을 여러분이 들은 것 같은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서, 넋의 탐구 없는 생활은 인간에게 있어 사는 보람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나의 말은 여러분에게 더한층 받아들여지기 힘들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여러분,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가 말하는 대로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여러분에게 믿게 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스스로 어떤 벌에 해당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일에는 익숙해져 있지 않다. 하기는 만일 내게 돈이 있다면, 나는 내가 지불할 수 있는 벌금을 제의할 것이다. 그것은 내게 아무런 해도 미치지 않을테니까.
그런데 나는 빈털털이이다. 만일 여러분이 내가 지불할 수 있는 그런 액수로 정해 준다면 별문제이거니와. 아마 나도 은 2무나 정도라면 지불할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 만한 과금을 제의한다.
그런데 아테네인 여러분, 이곳에 있는 플라톤이나 크리톤이나, 크리토프로스나 아포로도로스는 벌금 30무나를 제의하라고 내게 권고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보증인이 되겠다고 한다.
그런 만큼 나는 그 액수를 제의한다. 게다가 이 금액에 대해서는 이들은 여러분에게 있어 그 만한 돈에 대한 신용할 수 있는 보증인일 것이다.
29. 아테네인 여러분, 여러분은 아마 길지도 않은 세월 동안의 인내가 부족한 탓으로 애꿎은 현인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했다는 오명과 죄과를 짊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을 비의하려고 바라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현인이라고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분이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렸다면, 그것은 저절로 여러분의 희망대로 되었을 터인데.
실상 나의 나이는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이미 고령에 이르고 있어, 죽을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하기는 나는 이 말을 여러분들 모두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내게 사형을 선고한 사람들에게만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아가서 이들에게 또한 다음 같은 말도 덧붙여두고 싶다.
여러분, 여러분은 아마 이렇게 생각될 것이다. 내가 유죄가 된 것은 말의 부족에 의한 것이라고. 바꾸어 말하자면, 만일 내가 유죄선고를 면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하거나 말하거나 해도 상관없다고 믿고 있기만 했었다면, 말에 따라서는 여러분을 얼마든지 설득할 수 있었을 터인데 라고.
그러나 그런 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다. 물론 어떤 부족 때문에 나는 유죄가 된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말의 부족이 아니라, 후안무치와 여러분이 가장 기뻐할 말로 여러분을 움직이려는 의도의 부족이다.
결국 내가 울거나 떠들거나, 그밖에 내가 나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게다가 여러분이 타인들에게 많이 들은 바 있는 것을 하거나 말하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변명 때에도 몸에 다가오는 위험 때문에 천민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고, 지금도 그런 변명을 한 사실을 조금도 뉘우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나는 이런 변명 뒤에 죽는 것을, 그렇게까지 해서 사는 것보다는 훨씬 뛰어난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법정에서도 싸움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무슨 짓을 해서라도 죽음을 벗어나려고 뜻함은 나도, 또한 다른 사람도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전쟁터에서 있어서조차 무기를 집어던지고 추격자에게 애원하며 매달리면, 죽음을 벗어나는 것쯤은 손쉽게 가능한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그 어떤 위험에 즈음해서도 만일 무슨 짓이라도 하려고 들거나 말하려들 작정만 하고 있다면, 죽음을 피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천만에, 여러분, 죽음을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악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더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죽음보다도 속히 달리는 까닭에.
이리하여 완만하고 나이먹은 나도 지금 비교적 완만한 자에게, 강하고 신속한 나의 고발자들은 비교적 신속한 자에게, 사악에 추격 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여러분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그들은 진리로부터 천하고 열악함과 부정과의 죄를 선고받고 이곳을 퇴장한다.
나는 이 판정에 쾌히 따르리라. 하지만 그들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아마도 그것은 이렇게 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으리. 그리고 나는 이것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30. 나를 유죄로 단정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향해서 이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 예언해두고 싶다. 왜냐하면 나의 죽음의 때는 다가오고 있지만, 그 죽음의 때라는 것은 사람이 가장 많이 예언력을 발휘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내게 죽음을 부과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감히 말한다.
나의 사후 즉시 여러분이 내게 부과한 사형보다도 제우스에 걸어, 더한층 무거운 벌이 여러분 위에 오리라.
지금 여러분이 이런 행동으로 나온 것은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의 생활에 대해서 변명을 할 필요가 없게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주장한다. 여러분에게는 전혀 반대의 결과가 생겨날 것이다 라고. 이제보다도 더 많은 문책자가 여러분 앞에 나타나리라. 여러분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테지만, 이제까지는 내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젊은 만큼 더한층 가혹할 터이고, 여러분은 더욱 깊이 이것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만약에 사람들을 죽이는 것으로 여러분의 바르지 못한 생활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비의를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단단히 잘못되어 있다.
생각컨대 이 도피방법은 성공도 힘들거니와, 또한 훌륭하지도 못하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손쉬운 것은 남을 압복하는 것이 아니고, 가능한 한 선해지도록 스스로 마음쓰는 일이다. 이 정도만을 나를 유죄로 단정한 여러분에게 예언하고 이제 그만 여러분에게 작별을 고하고자 한다.
31. 그러나 무죄투표를 해준 여러분과는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고 싶다. 담당법관에게 아직 용무가 있고, 그리고 내가 아직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지 않아도 될 동안만이라도.
그러면 여러분, 그 동안만 나하고 함께 있어 주기 바란다. 허용된 시간 동안 잡담을 하는 것은 조금도 지장이 없을 터이니까.
실상 나는 나의 친구인 여러분에게 지금 나의 몸에 내린 사건의 진정한 의의를 천명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함은 재판관 여러분-물론 여러분을 재판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나의 신상에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즉 나의 귀에 익은(신령의 목소리의) 예언적 경고는 나의 생애를 통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늘 거듭 들려와, 특히 내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지극히 자질구레한 일이라도 늘 나를 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이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사람이 최대의 화라고 생각할 것 같은 일이고, 또한 실제로 그렇게 간주되고 있는 일이 나의 몸에 내려왔다.
그런데도 내가 오늘 아침 집에서 나올 때에도, 이 법정으로 오는 도중에도, 또한 변론에 즈음하여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신으로부터의 경고의 징후을 접한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다른 경우에는 그것은 거듭 말하고 있는 도중에 나를 저지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이 사건에 있어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한 번도 나를 저지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그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을 여러분에게 말하겠소.
지금 나의 몸에 내려진 일은 필시 좋은 일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들 가운데에서 죽음을 화라고 믿는 자는 모두들 틀림없이 잘못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는 유력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내가 이제 만나려 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 경고의 징후가 나를 간하지 않을 까닭이 결코 없는 것이다.
32. 또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아도 죽음은 일종의 행복이라는 희망에는 유력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으리라. 단 죽음은 다음 두 가지 중의 어느 한쪽이 아니면 안 된다.
즉 죽음이란 완전한 허무로 돌아감을 뜻하며, 또한 죽은 자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하등 감각을 지니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말하듯 그것은 일종의 갱생이고,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영혼의 이전인가 ?
또한 만일 그것이 모든 감각의 소실이고, 꿈 하나 꾸지 않는 잠 같은 것이라면, 죽음은 참으로 놀라울 만한 이득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럴 것이, 생각컨대 만일 사람이 꿈 하나 꾸지 않을 정도의 숙면의 한 밤을 골라내어 이것을 그 생애 중의 다른 숱한 밤이나 낮과 비교해 보고 그런 심사숙고 뒤 그 생애의 몇 날 몇 밤을 이 하룻밤보다도 더 좋게, 더 상쾌하게 지냈음을 자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면-비단 보통사람 뿐만 아니라, 페르샤 대왕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른 낮과 밤에 비해 손쉽게 헤아릴 수 있을 정도 밖에 없음을 발견할 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과연 이런 것 같은 것이라면, 나는 이것을 하나의 이득이라고 말하리라. 그 때 영원은 단 하룻밤보다도 길게는 보이지 않을 터인즉.
이에 비해 죽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편력의 일종이고, 또한 사람들이 말하듯 실상 모든 죽은 자가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이라면, 재판관 여러분이여,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실상 이 세상에서 재판관이라 자칭하는 사람들에게서 피해 명부로 가서 그곳에서 재판에 종사하고있다는 말을 듣고 있는 진정한 재판관을, 미노스나 라다만튀우스나, 아이어코스나 트리프토레모스나 그밖에 일생을 바르게 보낸 반신들을 찾아냈다고 한다면, 이 편력은 과연 그래도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는 오르페우스나 무사이오스나, 헤시오도스나 호메로스 등과 그곳에서 사귀기 위해서라면 여러분의 대다수는 제아무리 비싼 대가라도 기꺼이 치를 것이다.
적어도 나는 몇 번 죽어도 상관없소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저 세상에 있어서의 생활은 내게는 특히 경탄할 만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럴 것이 그곳에서 바라메데스(아르고스의 용사)나 테라몬의 아들 아이어스나 그 밖의 부정한 재판으로 살해된 옛사람과 만날 수가 있다면, 나의 운명을 그들의 운명과 비교해 보는 것은 나로서는 대단히 유쾌한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저 세상에서도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시문하거나 음미하거나 해서 그 중의 누가 현자인가, 또한 누가 현자인 체 하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확인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으며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재판관 여러분, 사람은 그 때문이라면 그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를 것이다. 트로이 공격의 대군을 인솔한 사람이라든가, 오뒤세우스라든가 시시포스라든가, 또는 우리가 그 이름을 들을 수 있는 한의 다른 숱한 남녀를 시문할 수가 있는 것이라면.
그곳에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사귀거나, 그들을 시문하거나 하는 것은 무어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행복일 것이다.
아마 그곳에서는 그 누구도 그 때문에 사형에 처해지는 일은 없으리라. 그럴 것이 저 세상 사람들은 다른 점에 있어서도 이 세상 사람들보다는 행복할 뿐만아니라, 또한 만일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영원히 불사일 것인즉.
33. 그러나 재판관 여러분, 여러분 또한 즐거운 희망으로 죽음에 임하고, 그리고 이 한 가지 사실이야말로 진리라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선인에 대해서는 생전에도, 또한 죽은 뒤에도 그 어떤 화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 또한 신들도 결코 그를 잊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내게 닥쳐온 것들도 결코 우연의 일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지금 죽어 인생의 괴로움을 피하는 쪽이 분명히 나를 위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그 징후가 그 어디에서도 내게 경고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만큼 나로서는 내게 유죄를 선고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또한 나의 고발자에 대해서도 조금도 노여움을 품고는 있지 않다.
하기는 그들이 내게 유죄를 선고하거나, 고발하거나한 것은 그럴 셈이 아니고, 오히려 내게 해를 가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비난받아 마땅한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그들에게 부탁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여러분, 훗날 나의 아들들이 성인이 된 무렵에는 그들을 질책하여 내가 여러분을 괴롭힌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괴롭혀 주기 바란다. 적어도 그들이 덕보다도 축재나 그 밖의 것을 염두에 두는 것 같이 보인다면.
또한 그들이 만일 그렇지도 않으면서 한 사람 몫의 인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 그 때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비난하여 그들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을 추구하지 않으며, 아무런 가치도 없으면서 무언가 위대한 인간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말해 주기 바란다.
여러분들이 만일 그 일을 해준다면, 그때 나 자신도, 나의 아들들도 여러분으로부터 정당한 취급을 받았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제 사라질 때가 왔다.-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아남기 위해서.
하기는 우리들 양자 가운데의 어느 쪽이 더 한층 좋은 운명을 만날 것인지, 그것은 신 말고는 아무도 아는 자가 없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에
내가 미리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온다
기다려 본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와 있는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있다.
마리 로제 사건의 수수께끼 (부제 :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 속편) - 포우
세상에는 실제의 사건과 병행해서 존재하는 일련의 관념적인 사건이라는 것이 있다. 양자는 좀처럼 일치하지는 않는다. 대개 인간과 실제의 상황은 관념상의 사건을 변질시켜, 그것은 불완전한 양상을 나타내고, 또한 그 결과도 불완전한 것이 된다. 종교개혁의 경우가 바로 이것에 해당하는 것으로, 프로테스탄티즘 대신에 루터러니즘이 나온 것이다. - 노발리스의 '도덕론'에서
지력을 가지고는 단순한 일치라고 이해할 수 없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우연의 일치에 놀란 결과, 오싹 소름이 끼쳐 초자연적인 어떤 것에 대하여 막연하게나마 반신반의하는, 그런 경험을 이따금 갖지 않은 사람이란 냉정한 사상가들 중에서도 보기 드물 것이다. 이러한 감정-왜냐하면 내가 말하는 반신반의라는 것은 완전한 사고라고 할 수 없으므로-은 우연성의 원리, 보다 더 전문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확률론에 따르지 않고는 좀처럼 설명될 수가 없다. 바로 이 확률론은 요컨대 순전히 수학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림자처럼 공허한 걷잡을 수 없는 영성을 가장 정확한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엉뚱한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내가 지금 여기서 공개하려고 하는 이상한 사건은, 시간의 순서로 따져서 일련의 이해하기 힘드는 우연의 일치에 대한 첫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그 결말이 되는 제 2의 부분은 최근 뉴우요오크에서 일어난 '메리 세실리아 로저스 살인 사건'과 일치한다는 것을 여러 독자들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약 1 년 전에 '모르그 가의 살인'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야기에서 내 친구인 C. 오귀스트 뒤팡 준남작의 놀라운 지성의 특징을 설명하려 했을 때는, 막상 이 화제를 다시 되풀이하리라고는 예상하지도 않았다. 내 의도는 그의 특징을 설명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의도는 뒤팡의 특징을 예증하기 위하여 엮었던 그 기묘한 일련의 사건에서 완전히 달성된 것이다. 다른 실례를 들 수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그 이상 더 증명되지도 않으리라. 그러나 최근에 일어난 사건은 참으로 놀라운 진전을 보였기 때문에 나는 경탄한 나머지, 굳이 고백을 하자면 다시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최근에 그러한 사건을 들은 이상은 그전에 내가 보고 듣고 한 것에 대하여 잠자코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노릇일 것이다.
레스파네 부인과 그 딸의 죽음에 얽힌 비극의 해결을 보게 되자, 뒤팡은 그 사건을 곧 잊어버리고 또 다시 전과 같은 침울한 몽상에 빠져 버렸다. 언제나 방심했던 나도 곧 뒤팡의 기분을 동조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생 제르맹 교외의 집안에 틀어박힌 채, 내일은 걱정도 하지 않고 오늘을 태평스럽게 지내면서 주위의 보잘것없는 세계를 환각 속에서 스쳐 보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몽상 속에서도 때로는 방해가 없지 않았다.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 때 이 친구가 보여 준 솜씨는 파리의 경시청 당국에 큰 감명을 주었다는 것은 누구라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경관들 사이에서는 뒤팡의 이름이 항상 입에 오르내렸다. 그 수수께끼를 풀어 낸 그의 귀납적인 추리방법은 경시총감에게나 또는 나 이외의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그 사건은 무언가 기적처럼 보이고, 준남작의 분석력이 탁월한 직감이라고 칭송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솔직성을 보여 주었더라면 모든 질문자를 그러한 편견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귀찮다는 생각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흥미가 사라진 문제를 새삼스럽게 떠들어대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인해 경찰 전체의 주목거리가 되었고 경시청으로부터 그의 협조를 요청한 사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마리 로제라고 하는 젊은 아가씨의 살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모르그 가의 참극이 있은 지 약 2년 뒤에 일어났다. 마리는 에테르 로제라는 미망인의 외동딸이었다. 아버지는 이 아가씨가 아직 어렸을 때 죽었고, 그때부터 이 이야기의 골자가 되는 살인 사건이 빚어지기 18개월 전까지 모녀는 빠베 생 앙드레 가에 살았고, 딸의 시중으로 어머니는 하숙을 쳤다. 그런 상태로 세월이 흘러가서 딸은 스물 두 살이 되었는데 그 당시 그녀의 미모는 빨레 로이얄 아래층에 가게를 차린 향료상의 눈길을 끌었다. 이 사람이 고객으로 상대하는 자들은 주로 이웃에 얼씬거리는 건달패들이었다. 그래서 르 블랑 씨는 자기 향료 가게에다 예쁜 마리를 채용하면 이득이 상당하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보수는 톡톡히 주겠다고 청하자 어머니는 어쩐지 꺼려했으나 아가씨는 선뜻 받아들였다.
가게 주인의 예측은 그대로 적중하여 싹싹한 아가씨의 매력 때문에 가게는 대번에 유명해졌다. 그런데 그녀가 가게에서 일한 지 1년쯤 됐을 무렵 갑자기 종적을 감추자 그녀를 따르는 자들은 아우성이었다. 르 블랑 씨는 어찌하여 아가씨가 사라졌는지 이유를 몰랐고, 로제 부인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신문은 당장 이 사건을 크게 다루었고 경찰에서는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려 했다. 사건 발생 일 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마리는 좀 수척하긴 했으나 향료상의 자기 카운터에 보통 때처럼 무사한 모습을 다시 나타냈다. 친숙한 사람들에 대한 조사 외에 일체의 조사는 곧 중지되었다. 르 블랑 씨는 전처럼 아무 것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마리와 어머니는 물론 질문에 한결같이 지난 1주일 동안 계속 시골 친척집에서 지냈다고 했다. 이렇듯이 이 사건은 일단락을 지었고 세상에서도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귀찮게 파고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얼마 안 있어 그녀는 향료 가게를 그만두고 빠베 생 앙드레 가의 어머니 집에서 조용하게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살게 된 지 3년 가량 되었을 무렵에 아가씨는 다시 갑자기 자취를 감춤으로써 그녀를 아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흘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흘째 되던 날, 그녀의 시체가 센 강의 생 앙드레 구역 맞은편 기슭 근처에 떠오른 것이 발견되었다. 그곳은 한적한 룰르 관문에서 그다지 말지 않은 장소였다.
이 살해의 잔인성(피살당한 것이 일목 요연했다)과 피하자가 젊고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 더욱이 소문이 자자하던 여자였다는 것, 이러한 일이 겹쳐져서 이 사건은 감정이 예민한 파리 시민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이토록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이제까지 그 예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 사건 때문에 몇 주일 동안이나 논의가 들끓었고 그 당시의 중요한 정치 문제마저 도외시할 형편이었다. 경시총감은 전력을 기울였다. 물론 파리 경찰은 이 사건에 총력을 집중시켰다.
처음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즉시 수사가 착수되었으므로 범인이 쉽게 도망치지 못하리라고 추측되었다. 현상금을 걸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 것은 1주일이나 지나서였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현상금은 고작 천 프랑을 넘지 못했다. 그 동안 반드시 현명한 방법은 못 되었으나 수사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취조를 받았으나 얻은 것은 별로 없었다. 한편 사건의 수수께끼에 대한 아무런 뚜렷한 실마리도 잡지 못하자 사람들의 흥분은 점점 고조되었다. 열흘째가 되자 처음 내건 현상금을 배로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게끔 되었다. 그리고 끝내 아무런 실마리도 잡히지 않은 채 2주일이 경과했고, 파리 시민들의 경찰에 대한 평소에 쌓였던 반감이 폭발하여 몇 건의 만만치 않은 소동이 빚어졌기 때문에, 경시총감은 '살인범을 고발'하거나 또는 두 사람 이상의 연루자가 사건에 개입했을 경우 '살인범 중에서 누구든지 고발하는 경우' 2만 프랑의 현상금을 준다고 발표했다. 이 현상금을 내건 포고에는, 공모자로서 공범을 고발할 경우에 그 공범자는 무죄 석방해 줄 것을 약속했다. 또한 그밖에도 이 포고가 나붙은 장소 곳곳마다 경시청이 제공하는 현상금 이외에 시민 위원회가 제공하는 1만 프랑의 현상금이 추가된다는 민간 측의 게시가 덧붙여져 있었다. 이렇게 하여 현상금 총액은 3만 프랑이나 되었는데, 그녀가 가난한 집 딸이라는 것과, 큰 도시에서는 이런 종류의 흉악 범죄는 흔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그 현상금은 어마어마한 금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살인 사건의 수수께끼가 쉽게 해결될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어느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한두 차례 용의자가 체포되고 당장 실마리가 풀릴 것 같기도 했으나 유죄라고 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어 그들은 곧 석방되었다. 이상스럽게 여길는지 모르지만, 시체가 발견된 지 3주일이 경과하기까지 그토록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의 소문조차 뒤팡과 나는 듣지 못했다. 우리는 온 정신을 쏟아야만 할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으므로 한 달쯤 전부터 둘 다 외출한 일이 없었고, 손님을 맞지도 않았으며, 고독하고 있었던 한 일간지도 중요한 정치 기사만을 훑어볼 정도였던 것이다. 이 살인 사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경시총감 G씨가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이다. 18????년 7월 13일 이른 오후, 그는 우리를 찾아와 밤늦도록 앉아 있었다. 그는 범인을 찾아내겠다는 자신의 노력이 모조리 실패로 돌아간 것을 매우 안타까와했다. 그의 명예에도 관계되는 일이다, 세상의 눈이 그에게 쏠려 있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불사하겠다고 말하고, 마지막으로 그는 우스갯소리로 뒤팡의 뛰어난 솜씨를 추켜 올리면서 우스꽝스런 이야기를 끝마쳤다. 그러고는 뒤팡에게 많은 보수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 제의의 정확한 내용에 대해서는 내가 그것을 얘기할 근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의 핵심과도 상관이 없는 일일 것이다.
뒤팡은 칭찬은 굳이 물리치고 제의만은 쾌히 받아들였는데, 그 이득이라는 것은 가약속에 불과했다. 이 점이 결정되자 총감은 즉석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그의 견해를 설명하게 되었다. 이따금 증거에 관한 것을 말하게 되면 주석을 붙였는데, 증거에 관한 것은 아직 우리가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총감은 떠버리면서 혼자만 아는 채 했다. 그러나 점점 밤이 깊어지자 졸음이 와서 나는 밤이 깊었다고 이따금 알려주었다. 뒤팡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안락의자에 앉아서 매우 끈덕지게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그는 회견하는 동안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초록빛 안경 속으로 이따금 눈을 흘끔거리는 것으로 미루어서 내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경시총감이 떠날 때까지 지리하기 짝이 없는 7, 8시간을 계속 그는 조용히 푹 잔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 나는 경시청으로 가서 지금까지 늘어놓은 일체의 증거와 완전한 보고서를 받았고, 또한 각 신문사를 찾아가서 이 슬픈 사건에 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결정적인 정보가 실린 모든 신문을 한 부씩 얻었다. 확실히 반증이 된 것을 뽑아 본 정보를 한데 뭉치면 다음과 같다.
마리 로제는 18????년 6월 22일 일요일 아침 아홉 시경에 빠베 생 앙드레 가의 어머니 집에서 나갔다. 나갈 때에 그녀는 자끄 생 에스따슈라는 사람에게만 드롬므 가에 살고 있는 숙모의 집에 가서 놀다 오겠다고 말했다. 드롬므 가는 얼마 멀지 않았고, 로제 부인의 하숙에서 질러가면 2마일쯤 되는 거리였다. 생 에스따슈는 마리의 약혼자로서 이 하숙집에서 숙식했다. 그는 저녁때 마중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비가 몹시 퍼부었다. 그래서 마리는 숙모 집에서 자고 올 것이라고 여기고(전에도 그런 경우 자고 왔으므로) 약속한 대로 마중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밤이 되자 로제 부인(이미 나이 70살의 몸이 약한 노파였다.)이, "인제 딸애를 두 번 다시 못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근심스럽게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그 말을 그때는 그저 무심히 들었다.
월요일이 되자 마리가 드롬므 가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리의 소식은 전혀 알 수 없는 채 하루가 지나서야 뒤늦게 시내와 교외의 몇 군데에서 수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실종된 뒤 나흘째가 되도록 그녀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정보는 아무 것도 입수하지 못했다. 그날(즉 6월 25일 수요일), 빠베 생 앙드레 가 맞은편 센 강기슭의 룰르 관문 근처에서 보베라는 사나이가 친구와 함께 마리의 행방을 알아보고 있던 중 어부들이 방금 물에 떠오른 시체를 기슭에 끌어올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시체를 본 보베는 잠시 망설이다가 향료 가게의 아가씨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그의 친구는 그보다 먼저 그 아가씨라고 하였다. 얼굴은 검붉은 피로 뒤덮였는데 거기에는 입에서 나온 피도 엉겨 있었다. 보통 물에 빠진 익사자의 경우와는 달리 입에서 거품을 뿜지는 않았다. 세포 조직도 변색되지 않았다. 목 언저리에는 상처와 손톱자국이 있었다. 두 팔은 가슴 쪽으로 구부린 채 굳어 있었다. 오른손은 꽉 쥐었으나 왼손은 약간 펴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는 두 바퀴나 죄어진 상처 자국이 있었다. 밧줄자국이 분명했는데 두 가닥의 밧줄 아니면 한 가닥의 밧줄을 두 번 감은 자국인지도 모른다. 오른쪽 손목의 일부와 등 가득히 심하게 스친 상처가 나 있는데, 특히 심한 곳은 어깨뼈 둘레였다. 시체가 강기슭으로 끌어낼 때 밧줄을 걸긴 했었으나 쓸린 상처는 어느 것이나 그때 생긴 것이 아니었다. 목의 살은 잔뜩 부어 있었다. 칼에 찔린 상처라든가 심하게 얻어맞은 타박상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레이스 헝겊 조각이 가려져서 보이지는 않으나 무섭게 부어오른 채 목이 졸려 있었다. 그 끈은 완전히 살 속에 파묻혀 바로 왼쪽 귀밑에서 매듭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숨이 끊어질 수 있을 정도였다. 죽은 사람의 정조에 관해서 내려진 의학상의 증언에 의하면, 그 여자는 야만적인 폭력을 받았다고 한다. 시체가 발견되었을 당시에는 곧 누구라는 것을 가려낼 만한 상태였다.
옷은 심하게 찢긴 나머지 엉망진창이었다. 겉옷은 아랫도리 쪽에서 허리께까지 1피트 정도의 너비로 찢겼으나,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다. 그것으로 허리를 세 번이나 감아 등판에서 일종의 코를 만들어 고리짓듯이 묶었다. 겉옷 바로 안에 입은 드레스는 엷은 옷감이었는데 그것은 너비 18인치쯤이 잘려나갔다-아주 고르게 조심스럽게 잘려져 있었다. 그 자른 것으로 목을 졸라매어 매듭지은 것이었다. 이 모슬린 조각과 레이스 조각 뒤에는 모자끈이 묶여서, 거기에 모자가 매달려 있었다. 이 모자끈의 매듭은 여자 솜씨가 아니고, 고리를 지은 매듭, 즉 선원들이 매는 식의 매듭이었다.
시체의 신원이 확인된 다음 관례대로 시체 보관소로 운반하지 않고(그런 수속은 필요하지 않아서)끌어올린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재빨리 묻어 버렸다. 보베의 노력으로 사건은 될 수 있는 한 비밀리에 얼버무렸으나, 며칠 지나자 드디어 세상이 떠들기 시작했다. 어떤 주간지가 마침내 이 사건을 들추어냈기 때문이다. 시체는 발굴되었고 재검사를 했으나 이미 알려진 것 이상 새로운 사실은 없었다. 다만 피살자의 어머니라든가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옷가지들이 분명히 처녀가 집에서 나갈 때 입고 나간 것이라는 증언을 받았다.
그 동안에 소동은 점점 커졌다. 몇 사람인가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다. 생 에스따슈는 특별한 혐의를 받았다. 처음에 그는 마리가 가출한 월요일에 자기가 어디 있었다는 소재를 똑똑히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후 그는 G씨에게 진술서를 제출하여 사건 발생일의 경위를 하나하나 만족할 수 있도록 설명했다. 이렇듯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무 것도 발견되는 것이 없게 되자 터무니없는 낭설이 수없이 떠돌았고 신문 기자들은 억측을 자아내고만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마리 로제는 아직 살아있다. 센 강에서 발견된 시체는 누군가 딴 불행한 여자라고 하는 의견이었다. 이런 의견을 밝힌 신문 기사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해 두기로 한다. 다음에 열거하는 것은 권위가 있는 신문 '래 뜨왈르'의 기사를 그대로 고스란히 번역한 것이다.
"마리 로제 양은, 18????년 6월 22일 일요일 아침, 표면으로는 드롬므 가에서는 숙모, 또는 누군가 딴 친척을 찾아간다고 하면서 집을 나갔다. 그 이후로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의 흔적과 소식은 일체 모른다. 지금까지의 경우 그녀가 어머니 집에서 나와 그날 자취를 감춘 후로 목격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6월 22일 일요일 아홉 시 이후 그녀가 이 세상에 살아 있었다는 확증은 없으나, 그 시각까지는 그녀가 살아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수요일 낮 열두 시에 룰르 관문의 기슭 근처에서 여자의 시체가 뜬 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가령 마리 로제가 어머니 집을 나와 세 시간 이내에 강에 내던져진 것이라고 해도 집을 나간지 사흘-만 사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령 그녀가 살해당했다고 할 경우 범인이 한밤중 이전에 시체를 강에다 내던질 수 있을 정도로 빨리 살해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리라. 이러한 흉악 범죄를 행하는 자는 낮보다는 밤 어둠을 택하기 마련이다-이런 까닭으로 강에서 발견된 시체가 틀림없이 마리 로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틀 반 아니면 넉넉히 잡아 사흘밖에 물 속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경험에 비추어 익사체나 살해 직후 물 속에 내던져진 시체는 완전히 부패해서 물위에 떠오르게 되기까지는 엿새에서 열흘 정도의 날짜가 필요하다. 시체 위에다 대포를 쏘더라도 적어도 물 속에 잠긴 지 대엿새가 됐어야 물위에 떠오르는데, 만약 그냥 놓아둔다면 시체는 다시 가라앉고 만다. 그렇다고 하면 어째서 보통 경우와 다른 일이 생겨났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묻고 싶다. 만일 화요일 밤까지 살해된 시체를 방치해 두었다고 한다면 무엇인가 범인의 흔적이 강기슭에서 발견되었을 것이다. 또한 가령 살해된 지 이틀 후에 물 속에 내던져졌더라도 그렇게 빨리 시체가 떠오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의심스럽다. 게다가 또한 지금 상상하는 것과 같은 살인을 저지른 악한이라면 무거운 추를 달았을 법도 한데 그 정도의 배려도 없이 쉽사리 시체를 그냥 내던졌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여기서 기자는 더 나아가, '시체는 불과 사흘이 아닌 적어도 사흘의 다섯 갑절'을 물 속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보베가 당장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체가 부패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점은 이미 충분히 반증되었다. 번역을 다시 계속하자면--.
"그렇다면 보베 씨가 시체를 틀림없이 마리 로제라고 생각한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옷소매를 찢고 나서 틀림없이 그 사람이라고 확신할 특징을 발견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특징이 어떤 상처 같은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런데 그는 팔을 문질러 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것은 어딘지 납득이 가지 않는 말로서 마치 소매 속에는 팔이 있더라는 식의 막연한 소리이다. 보베 씨는 그날 밤 돌아가지 않고, 수요일 밤 일곱 시경에 로제 부인에게 처녀의 시체에 대한 조사가 아직 계속되고 있다고 사람을 시켜 전갈한 바 있다. 로제 부인은 늙은 데다가 슬픔에 빠져 자신이 가 볼 수 없었다는 가정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상당히 양보한 견해지만), 만일 시체가 마리의 것이라고 생각했더라면 누군가 한 사람쯤은 가서 조사에 입회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가지 않았다. 빠베 생 앙드레 가에서는 이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도 않았거니와 듣지도 못했다. 어머니의 집 하숙인이며, 마리의 애인인 동시에 약혼자인 생 에스따슈 씨는 이튿날 아침 보베 씨가 그의 방에 찾아와 이야기해 줄 때까지 약혼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러한 성질의 통보로 본다면, 그것이 매우 냉담하게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하는 인상을 짙게 해준다."
이러한 경우 신문의 입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마리와 친지들이 그 시체가 정말 마리였다고 하면 어떻게 그렇게 사리에 맞지 않게 냉담할 수 있었겠느냐고 하는 인상을 던져 주려고 했다. 신문이 의도하는 것은 결국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마리는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묵인 아래, 자신의 정조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거리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마리를 닮은 시체가 센 강에서 발견되었으므로, 그녀의 친지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처녀가 죽은 것이라고 세상에 알리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래 뜨왈르' 지는 결론이 지나쳤다. 상상한 것과 같은 냉담한 점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 분명히 증명되기 때문이다. 노파는 몹시 몸이 약했고,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했다.
또한 생 에스따슈 씨는 통보를 냉담하게 들었다기보다는 너무도 비탄에 빠져서 미칠 지경이었으므로 보베가 그의 친구와 친지들에게 잘 보살피도록 부탁을 하고 발굴된 시체의 조사에 입회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래 뜨왈르' 지에 의하면 시체는 관비로 다시 매장되었고, 개인 묘지에 매장해 주겠다는 호의적인 제안이 가족에 의하여 거절되었으며, 또한 가족은 아무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 두지만, '래 뜨왈르' 지는 자기네가 의도하는 인상을 한층 더 강하게 느끼게 하려고 그와 같은 주장을 했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반증이 있었다. 그 신문은 그 다음 호에서 당치도 않게 보베에게 혐의를 걸려 하고 있다. 편집자의 주장은 이렇다.
"자아, 이제 사태는 뒤바뀐다. 수소문한 바에 의하면 한번은 B부인이 로제 부인 집에 있을 때, 방금 외출하려던 보베 씨가 헌병이 여기 올지 모른다, 당신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헌병에게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내게 맡겨야 된다, 이렇게 B부인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양상으로 미루어 보아 보베 씨는 사건 일체를 자기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베 씨를 빼놓고는 한 발짝도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디 가든지 그 사람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는 자기 이외에는 누구도 이 사건에 일체 간섭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심하고, 친척 남자들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멀리했다. 보베 씨는 친척들에게 시체를 보이는 것조차 무척 꺼려하는 것 같았다."
이렇듯 보베에게 건 혐의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하여 더욱더 명백해졌다. 처녀가 실종되기 며칠 전 그가 외출중인 사무실을 찾아갔던 방문객은, 문 열쇠구멍에 장미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고, 손잡이 근처에 매달린 석판에 '마리'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각 신문에서 얻은 일반적인 인상은, 마리가 한 무리의 깡패들에 의하여 희생당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깡패들이 그녀를 강 건너로 데리고 가서 폭행을 가하여 죽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범위한 독자를 가지고 있는 '르 꼬메르시엘' 지는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에 대하여 반대했다. 그 신문 기사를 한두 대목 소개해 보자.
"수사가 룰르 관문에만 쏠리고 있는 한, 이제까지의 수사는 잘못되어 있다고 본다. 이 아가씨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여자가 거리의 세 구역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지나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눈에 띄기만 했다면 누구라도 기억했을 것이다. 이 아가씨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가씨가 외출한 시간은 거리에 사람이 붐비는 시간이다--. 그녀가 룰르 관문이나 드롬므 가에 도착하기까지 10여 명 이상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어머니의 집밖에서 목격한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외출한다고 그녀 자신이 말했다고 한 증언 외에 그 여자가 실제로 외출했는지 여부의 증거는 전혀 없다. 그녀의 옷은 찢겨져 몸뚱이가 묶였다. 시체는 짐짝처럼 운반되었다. 룰르 관문에서 피살되었다고 하면 그런 처치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시체가 관문 근처로 표류하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그곳에서 물 속에 던져졌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불행한 아가씨의 속치마는 길이 2피트, 너비 1피트가 찢겨져 머리 뒤쪽으로 돌려져 턱 아래에서 묶였는데 이것은 아마 비명을 못 지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이런 짓은 손수건을 갖지 않은 자의 소행이다."
그렇지만 경시총감이 우리를 찾아오기 하룬가 이틀 전에 중요한 정보가 경찰에 날아들어와, '르 꼬메르시엘' 지의 주장 중에서 적어도 중요한 대목을 뒤집고 만 모양이다. 들뤼크 부인의 두 어린 아들이 룰르 관문 근처의 수풀 속을 돌아다니다가 깊숙한 데까지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큼직한 서너 개의 돌이 발판과 등판을 이루는 의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위쪽의 돌에는 하얀 속치마가 걸려 있었고 다음 번 돌에는 비단 스카프가 얹혀 있었다. 근처의 가시덤불에서는 옷가지의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땅바닥은 발자국들로 짓밟혀 있었고, 관목들이 부러져 있어 격투가 벌어졌음이 분명했다. 수풀과 강 사이에 있던 울타리가 부서지고 땅바닥에는 무슨 무거운 것을 끌고 간 흔적이 눈길을 끌고 있었다.
주간지인 '르 솔레이유' 지는 이 발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으나, 이것은 거의 모든 신문 논조를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물건들은 모두 다 최소한 서너 주일 동안 분명히 이 장소에 있었음이 틀림없다. 비에 젖어서 잔뜩 곰팡이가 피었고, 곰팡이 때문에 달라붙기도 했다. 둘레에는 풀이 솟아나기도 하고 그 중에는 풀에 덮인 것도 있었다. 양산의 비단 천은 질긴 것이지만 안쪽의 실들은 삭아 있었다. 천이 두 겹인 양산의 윗 부분은 잔뜩 곰팡이가 피어 썩어 있었고, 펴자마자 양산은 부서지고 말았다--. 관목에 걸려 찢긴 윗도리의 헝겊 조각은 너비 3인치, 길이 6인치 정도였다. 하나는 웃옷의 가장자리로 기워져 있었으며, 또 하나는 치마의 한 조각이었으나 가장자리는 아니었다. 어느 것이나 찢기어 잘린 것 같았고, 땅 위에서 1피트 정도의 가시덤불 위에 걸려 있었다--. 따라서 그 끔찍한 범행 현장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이 발견에 의하여 새로운 증거가 다시 나타났다. 들뤼크 부인은 룰르 관문 건너편의 강둑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선술집을 경영하는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 근처는 후미진 곳이기 때문에 일요일이면 거리의 깡패들이 보트를 타고 건너와 노는 곳이다. 그런데 문제의 일요일 오후 세 시경에, 거무튀튀한 청년을 따라서 한 젊은 아가씨가 이 선술집을 찾아 왔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잠깐 휴식했다. 그러고는 근처의 우거진 수풀 쪽으로 걸어갔다. 들뤼크 부인은 아가씨가 입고 있던 옷에 눈길이 쏠렸는데, 그것은 죽은 친척이 입고 있던 옷과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스카프가 특히 눈을 끌었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곧 한 패거리의 건달들이 찾아와서 법석을 떨며 먹고 마시고 하더니 돈도 안 내고 먼저 청년과 아가씨가 간 곳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는데, 저녁때 다시 선술집으로 돌아와서 매우 서두르며 강을 건너갔다.
그날 밤, 날이 어두워지자마자 들뤼크 부인과 그녀의 큰아들은 선술집 근처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 비명은 요란했으나 곧 그쳤다. 들뤼크 부인은 수풀에서 발견된 스카프만이 아니라 피살자가 입고 있던 옷가지도 기억한다고 했다. 게다가 합승 마차의 마부인 발랑스라는 사내가 문제의 일요일에 마리 로제가 거무튀튀한 청년과 같이 센 강을 건너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이 발랑스는 마리를 잘 아는 사람인데 사람을 잘못 볼 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수풀 속에서 발견된 물건은 마리의 친척들에 의하여 틀림없이 그녀의 것이라고 확인되었다.
뒤팡의 제안에 따라 내가 각 신문에서 이렇게 모은 증거와 정보 중에는 이 이외에도 또 한 가지 점이-그것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게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피해자의 옷가지들이 발견된 직후에 마리의 약혼자인 생 에스따슈의 시체, 아니 시체라기보다 거의 다 죽게 된 모습이 지금은 누구나 범행 현장이라고 생각하는 장소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로당움'이라는 딱지가 붙은 빈 유리병이 그 옆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숨결로 보아 독약을 먹은 것이 증명되었다. 그는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죽었다. 몸에는 유서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간단하게 마리에 대한 애정과 자살 계획을 쓴 것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만."하고 뒤팡은 내가 기록한 것을 다 읽고 나더니 입을 열었다. "이것은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보다 훨씬 복잡한 사건이야. 그것과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이 틀린다네. 이것은 흉악하긴 하지만 흔히 있는 범죄야. 더군다나 기괴한 점이라곤 하나도 없어.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의 수수께끼는 쉽게 풀릴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러나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해결이 상당히 어렵다고 마땅히 생각해야만 하네. 그것을 자네도 알고 있겠지. 따라서 처음에는 현상금 따위를 내걸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G의 부하 경관들도 이런 흉악 범죄가 어떻게 왜 일어났느냐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 방법-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과 동기-그것도 많이 있지만-를 이번 경우에는 그들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리고 이 많은 방법과 동기 중에 어느 것이든지 실제로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 중의 어느 것인가 하나는 틀림없이 사실일 거라고 그들은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 것이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상상이 쉽사리 이루어져, 그 어느 것이나 모두 그럴듯하게 보이는 점이, 수수께끼를 쉽사리 푼다기보다는 도리어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당연히 생각지 않으면 안 되지. 그래서 전에도 내가 말했지만 이성이 진실을 찾으려고 더듬어 나가는 경우에는 보통 흔히 있을 수 있는 수준을 초월한 사실에 눈을 돌려야만 하는 것이지. 그리고 이번과 같은 경우, 당연히 가져야 할 의문은 '무엇이 일어났느냐?'하는 것이라네. 레스파네 부인 집의 수사에 있어서, 그 '비정상'이라는 것 때문에 경시총감의 부하들은 실망하고 당황했지만, 만약 그들의 지혜가 적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면 그 점에 있어 성공할 것은 의심할 바 없다고 생각하네. 한편 이 향료 가게 아가씨의 사건에 있어서는 눈에 띄는 것이 모두 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보여지네. 이번에도 그 점에 있어 역시 그 지력 때문에 오히려 실망을 느꼈는지도 모르지만, 경시청의 관리들은 단지 쉽게 성공할 수 있다는 인상을 풍기고 말았단 말이야.
레스파네 부인과 그 딸의 경우, 우리가 조사를 시작했을 때 살인이 자행되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어. 자살이라는 생각은 당장 사라졌지. 이번 경우에도 또한 처음부터 자살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할 수가 없지. 룰르 관문에서 발견된 시체는 그 발견된 상황으로 보아, 그 중요한 점에 있어서 우리를 혼동시킬 여지가 전혀 없지. 그러나 발견된 시체가 마리 로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나타나 있군. 현상금은 그녀의 살해범 또는 공범들에게 걸려 있으며, 우리가 경시총감과 맺은 계약도 이 아가씨만을 조건으로 삼고 있네. 우리는 총감이 어떤 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나. 이 사람을 너무 과신하면 안 될 거야. 그러니 발견된 시체로부터 수사를 시작해서 범인을 확실히 알아냈을 때 이 시체가 마리가 아닌 딴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또는 마리가 아직 살아 있다고 가정하여 출발한 다음 아가씨를 찾아내고 그녀가 살해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다면-이 둘 중의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헛수고를 하게 되는 거지. 왜냐하면 우리들의 상대는 그 G씨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사회 정의 때문이라는 것보다는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도 먼저 시체가 행방 불명된 마리 로제의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지어야만 한다는 것이네.
'래 뜨왈르' 지의 논조는 세상 사람들에게 주효했어. 또한 이 신문 자체가 자기들의 기사에 큰 자신을 갖는 것은, 이 사건에 관한 기사 서두의 문귀에도 나타나 있군. 오늘 조간의 여러 신문들이 월요일자 '래 뜨왈르' 지의 결정적인 기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고 말이야. 그러나 내가 보기로는 이 기사는 필자의 과열 이외에는 거의 아무 것도 결정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네. 잊어서 안 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네 신문들이 목적하고 있는 것은 진실을 추구한다기보다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일, 즉 독특한 주장을 한다는 것이네. 전자의 목적은 후자의 목적과 일치할 때에만 비로소 추구되는 것이지. 평범한 견해(이것이 상당히 근거가 있는 견해일지라도)에 찬성하는 신문은 대중의 호평을 받지 못하지. 대체로 세상 사람들은 일반적인 의견이라고 해도 신랄하게 공격할 때만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지. 추리의 경우도 문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장 빨리, 가장 널리 이해되는 것은 경구지.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가장 값어치가 없는 것이야.
내가 말하려는 것은, 마리 로제가 아직 살아 있다고 하는 견해를 '래 뜨왈르' 지가 밝혔고, 그것이 사람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는 것은 정말 그것이 진실처럼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얄팍한 경구와 연극의 범벅이라는 것이네. 이 신문이 논하고 있는 문제점을 차례로 검토하기로 하세. 신문이 논의하고 있는 모순은 빼고 말이야.
이 집필자의 첫 번째 목적은 마리의 실종으로부터 표류 시체의 발견까지의 시간이 너무 짧았다는 것으로부터 이 시체는 도저히 마리의 시체가 아니라는 것을 내세우려고 하고 있네. 그렇게 하자면 가능한 한 그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이 추리가의 목표가 되지. 그 목표를 추리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집필자는 처음부터 단순한 가정에 부딪치고 마는군. 그래서 '가령 그녀가 살해당했다고 할 경우 범인이 한밤중 이전에 시체를 강에다 내던질 수 있을 정도로 빨리 살해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하는 따위군. 왜 그러냐? 하고 우리는 당장 반문해야 되겠지.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야. 아가씨가 어머니의 집을 나간 지 5분 이내에 살해되었다고 상상하는 것이 어째서 어리석은 짓이란 말인가? 그날, 어느 시간이라도 좋아, 어떤 일정한 시간에 살해가 빚어졌다고 상상해서, 그게 어째서 어리석은 일인가. 살인은 어느 시간이든 빚어져 왔으니까. 그러나 일요일 오전 9시부터 밤 12시 15분전까지의 사이에 살해당했다고 하더라도, 한밤중 이전에 시체를 강에 내던질 시간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이 가정은 정확하게 말해서 이렇게 된다네. 즉, 살인은 일요일에 빚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가정이지. 그러나 만약 '래 뜨왈르' 지에 이러한 가정을 허용한다면, 우리는 그 신문이 무엇이든지 멋대로 보도하게 할 수도 있지. 가령 조금 전에 본 '래 뜨왈르' 지에 인쇄된 기사만 보더라도, 집필자의 실제 생각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거네. '가령 그녀가 살해되었다 치고 한밤중 이전에 시체를 강에 던질 만큼 빨리 살인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자정이 지날 때까지 시체가 강물 속에 던져지지 않았으리라고 상상하는 것 역시 바보짓이 아닌가.'-이러한 문장 자체가 벌써 불합리한 것이지만 차라리 인쇄되어 나온 기사보다는 덜 불합리할 걸세."
"'래 뜨왈르' 지의 그런 논조를 공박하자는 것이 나의 목적이라고 한다면"하고 뒤팡은 계속 말했다. "그것을 그냥 내버려두고 말 것일세. 그렇지만 우리가 캐내야 할 것은 '래 뜨왈르' 지가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일세. 문제의 기사는 그것만으로는 한 가지 의미밖에 없지. 그러나 단순한 말의 이면을 캐서, 분명히 밝히고 싶었지만 못 밝힌 본뜻을 알아낸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네. 신문 기자가 말하려고 한 것은, 일요일의 낮이나 밤 어느 시간이든 이 살인이 저질러졌다고 하고, 범인이 한밤중 이전에 시체를 강에 운반하는 식의 위험을 저지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지. 그리고 이 점에 관해서 실제로 내게 불만을 자아내는 가정이 있다네. 강으로 시체를 운반해야 할 필요가 있는 그러한 장소, 그러한 상황에서 살인이 빚어졌다고 하는 가정일세. 그러나 살인은 강가에서 진행되었는지도 모르고 강 위에서였는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한다면 물 속에다 시체를 던지는 것은, 주야를 가릴 것 없이 어떤 시간에라도 가장 정확하고, 가장 신속한 뒷처리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야. 어쨌든 나는 내가 여기서 무엇이 확실하다든가 이것이 나의 의견과 일치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두길 바라네. 지금까지 말하고자 한 것은 사실 그 사건과는 일체 상관이 없는 것이야. 다만 '래 뜨왈르' 지의 논조에 대하여 처음부터 그것이 편견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자네한테 지적하여 충분히 경계해 달라는 것뿐이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선입관에 적당한 한계를 만들어 놓고는, 곧 만약 이것이 마리의 시체라고 한다면 물 속에 잠겼던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라고 가정해 놓고, 다시 신문은 앞으로 나가면서 이렇게 내세우고 있네.
'여러 가지 경험에 비추어 보아, 익사체나 살해 직후 물 속에 내던진 시체가 충분히 부패한 뒤 물위에 떠오르기까지는 엿새 내지 열흘 정도의 날짜가 필요하다. 가령 시체 위에다 대포를 쏘더라도 최소한 물 속에 잠긴 지 대엿새가 되었어야 시체가 떠오르는데, 그냥 내버려둔다면 다시 시체는 가라앉고 만다.'
이 주장은 '르 모니뙤르'를 제외한 파리의 모든 신문이 묵인하고 있지. '르 모니뙤르' 지는, 익사했다고 인정되는 사람의 시체가 '래 뜨왈르' 지가 주장하는 것보다 더욱 짧은 시간에 떠오른 실례를 대여섯 개 들추면서 그 기사의 익사체에 관한 부분에 대하여 반대를 하고 있네. 그러나 상대방의 주장에 상반되는 특수한 실례를 몇 개 들어서 '래 뜨왈르' 지의 주장을 모두 공박하려고 하는 '르 모니뙤르' 지의 그 하는 방식이 매우 이치에 맞지 않네. 이를테면 2, 3일 걸려 물위에 떠오른 시체의 예를 다섯 개가 아닌 50개를 들 수 있다고 해도, '래 뜨왈르' 지의 원칙 그 자체가 파괴되기 전까지는 그 50개의 실례는 역시 원칙의 예외로서 볼 수밖에 없지 않겠나. 원칙을 인정하는 이상은 ('르 모니뙤르' 지도 그것을 부정하고 있지 않고 단지 예외를 크게 강조하고 있을 뿐이니까) '래 뜨왈르' 지의 주장은 여전히 충분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사흘 안에 시체가 물위에 떠오르는 확률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우는 것이 없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 확률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 '르 모니뙤르' 지가 유치하게 내건 실례가 반대의 원칙을 이룩할 정도로 충분한 수에 달하기 전까지는 역시 '래 뜨왈르'지의 입장이 유리하다고 하겠네.
자네도 쉽사리 알 수 있겠지만, 이 점에 대해서 논의하자면 그것은 법칙 그 자체를 반박하는 것이 된다네. 그래서 그 목적 때문에 법칙의 논리적 근거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 그런데 인간의 육체라는 것은 대개 센 강의 물보다 크게 가볍지도 않거니와 무겁지도 않지. 곧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어서의 인체의 부중은 인체의 부피가 밀어내는 같은 부피의 맑은 물의 비중과 거의 같지. 비록 뚱뚱하고 살이 찐 사람이라도 일반적으로 뼈대가 가는 여자의 몸은 여위었다고는 해도 뼈대가 굵은 남자의 몸보다는 가벼운 법이야. 또한 강물의 비중은 바다에서 조수가 밀려오면 어느 정도 영향을 받게 되지. 그러나 이 조수에 대한 것은 문제삼지 않더라도, 담수 속에서라도 사람의 몸은 거의 저 혼자서는 가라앉지를 않네. 사람이 강물에 빠졌을 경우, 물의 부중과 자기 자신의 비중을 요령있게 균형 잡히게 한다면-곧, 가능한 한 조그만 부분만을 나기고, 몸 전체를 물 속에 잠기도록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떠오를 수가 있지. 헤엄치지 못하는 사람도 땅 위에서 걸어갈 때처럼 곧바로 선 자세를 잡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물 속에 잠기면 되는 것이지. 그때 입과 코만을 물위에 내놓는 거야. 이런 상태로 한다면 별로 힘들이지 않고 물위에 떠 있을 수 있다네. 그러나 사람의 몸과 사람의 몸만큼 밀려난 물의 부피, 그 양자의 비중은 아주 미묘한 균형을 갖고 있지만, 아주 조금일지라도 어느 쪽이든 한쪽이 무거워진다는 것은 분명하지. 예컨대 한 팔을 수면에서 든다면 그만큼 물이 버텨 주는 것이 없어져서 나머지 무게가 가중되어 머리 전체가 물 속에 들어가 버리지. 한편 아주 자그마한 나무토막을 잡는다면 둘레를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머리를 쳐들 수가 있다네. 그런데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 속에서 버둥거릴 때는 으레 두 팔을 뻗치고 머리는 곧바르게 쳐들려고 애를 쓰지. 그 때문에 입과 콧구멍으로 물이 들어가고, 수면 속에 가라앉으면서 숨을 쉬려 하니까 폐 속으로 물을 들이마시고 마는 거야. 그리하여 뱃속에도 물이 많이 들어가게 되고, 처음에 폐나 위 속에 쌓였던 공기 대신에 물이 들어간 만큼 차이가 나서 온몸이 더욱 무거워지게 되고 만다네. 이런 무게의 차이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몸을 물 속에 가라앉히는 데 충분하지만, 뼈대가 가늘고, 그 대신 비계가 많은 뚱뚱한 체질인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지도 않지. 그런 사람은 익사하더라도 물에 뜨게 마련이지. 시체가 강바닥에 있다고 치면, 그 비중이 무슨 이유에선지 그것이 배수되는 물의 부피의 비중보다 작아질 때까지 가라앉은 채로 있다네. 비중이 작아지는 것은 부패라든가 그 밖의 원인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부패하게 되면 가스가 발생해서 세포 조직이라든가 털구멍을 부풀게 하여 흉한 형상이 되는 것일세. 이런 팽창이 계속되어 시체의 부피가 크게 늘어나고 질량, 즉 무게 쪽이 그것만큼 늘어나지 않을 때 그 비중은 배수되는 물의 부피의 비중보다 작아져서 시체는 곧장 물위로 떠오르는 것일세. 그러나 부패는 여러 가지 형편에 의하여 가감이 되지. 여러 가지 원인에 따라서 빨라지기도 하고 늦어지기도 하는 거야. 이를테면 기후가 춥거나 덥거나, 물의 광물질 함량의 다소, 물이 깊이 흐르고 있느냐 괴어 있느냐, 그리고 체질, 죽기 전의 병의 유무 등이 있지. 이런 이유로 해서 부패되어 시체가 떠오르는 시기를 정확하게 결정하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네. 어떤 조건 밑에서는 한 시간 만에 떠오를지도 모르지. 또 다른 조건에서는 전혀 떠오르지 않을지도 몰라. 동물의 육체를 영구히 썩지 못하게 하는 화학적 주입제가 있는데 수은의 이염화물이 그 한 가지지. 그러나 부패 작용 이외에도 식물성 물질의 산패 발효에 따라 위 속에(또는 다른 원인으로 몸의 공동 속에)가스가 발생하여 시체를 물위에 뜨게 하는 데 충분히 팽창이 일어날 경우도 있지. 대포를 쏘아서 시체가 떠오르게 하는 데 충분한 팽창이 일어날 경우도 있지. 대포를 쏘아서 시체가 떠오르게 하는 것은 처박혔던 시체가 진동 때문에 흔들려서, 그렇지 않아도 다른 원인 때문에 떠오르기 직전까지 왔을 때 시체가 물위에 떠오르게 되는 것일세. 그리고 또한 진동 때문에 세포 조직의 썩은 부분이 접착력을 잃고 가스의 작용으로 몸 속의 공동이 팽창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이런 식으로 이 문제에 관하여 이론을 모두 정연하게 하면 '래 뜨왈르' 지가 내세운 주장은 간단히 검토할 수 있다네. 이 신문은 여러 가지 경험에 비추어 익사체나 살해 직후 물 속에 던져진 시체가 완전히 부패해서 물위에 떠오르기까지는 엿새 내지 열흘이 소요된다고 했군. '시체 위에다 대포를 발사하더라도 최소한 물 속에 잠긴 지 대엿새가 되었어야 물위에 떠오르는데, 그냥 내버려두면 시체는 다시 가라앉고 만다'고 하고 있군.
이쯤되면 이 1절은 모두 모순 덩어리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지. 여러 가지 경험에 비추어 익사체가 완전히 썩어서 물위에 떠오르자면 엿새 내지 열흘이 소용된다고 하는 따위는 증명될 수 없네. 시체가 떠오르는 시기는 일정하지 않고, 또 필연적으로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 과학적임과 동시에 경험에 따라 증명되고 있으니 말이네. 더욱이 대포를 쏘아서 시체가 물위에 떠올랐을 경우, 완전히 부패되어 몸 속에 생긴 가스를 방출하지 않는 이상은 '그대로 놓아두면 시체는 다시 가라앉는다'고 한 것 같은 일은 없겠지. 그러나 나는 '익사체'와 '살해 직후 물 속에 내던져진 시체'가 구별돼있다는 것에 자네가 주의를 기울이기 바라네. 집필자는 이 구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을 합하여 같은 범주에 넣고 있군. 익사체가 같은 부피의 물보다 어째서 비중이 무거워지는가, 물위에 두 손을 내밀고 버둥거린다든가, 물 속에 가라앉으면서 무리하게 숨을 쉬려 한다든가(그런 일을 하면 폐 속에 원래 들어 있는 공기를 몰아내고 물을 들이마시게 되는 것이네).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물에 빠진 사람은 가라앉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은 왜 그런가-이런 점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을 했군. 그렇지만 '살해 직후 물 속에 던져진 시체'의 경우 버둥거린다든지 억지로 숨쉴 이유는 없지. 그러므로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보아서 전혀 가라앉지 않는 법이지. '래 뜨왈르' 지는 분명히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거야. 부패작용이 크게 진행되어서, 살이 많이 떨어져 나가게 되면, 그때야말로 비로소 시체는 가라앉고 말겠지만, 그때까지만은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이야.
자아, 그러면 이번엔 발견된 시체가 마리 로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겨우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 시체는 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나. 익사했다면 마리는 여자니까 가라앉지 않았을지도 몰라. 혹은 가라앉았더라도 24시간 이내에 떠올랐을는지 모르지. 그러나 이 아가씨가 익사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군. 왜냐하면 강에 던져지기 전에 죽었으므로 그 뒤로는 아무 때라도 물에 뜰 수가 있는 것이겠지.
'래 뜨왈르' 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군. '만약 시체가 화요일 밤까지 살해된 채 강기슭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하면 범인의 흔적이 무엇이든 간에 발견되었을 것이다'라고 말이야. 이렇게 되면 집필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것을 썼는지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지. 이건 자기 주장의 반대론을 예상해서 선수를 친 것일세. 즉, 시체는 빠르게, 물 속에 잠긴 경우보다도 더 빠르게 부패하면서 이틀 동안 강가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도 있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시체가 어쩌면 수요일에 물위에 떠오를 수도 있으리라 상상하고, 또한 그러한 경우에만 시체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야. 따라서 시체는 강기슭에 놓여 있지는 않았었다는 것을 내세우려 한 것이지. 곧, 만약 놓여 있다고 한다면 '범인의 흔적이 무엇이고 간에 기슭에서 발견된다'고 하는 거야. 이런 주장에는 아마 자네도 웃을 걸세. 시체를 단지 오랫동안 강기슭에 놓아둔다고 하여 어째서 범인의 흔적이 늘어나게 되는가. 아무래도 자네는 모르겠지. 나조차 모르니 말이야.
게다가 이 신문은 또 이렇게 쓰고 있다네. '그리고 나아가서 지금 추측하는 것 같은 살인을 자행한 악당이라면 그 정도는 쉽게 마음을 썼을 법한데 무거운 추를 달지도 않고 시체를 강에다 내던진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고 말이야. 이 우스꽝스러운 생각의 혼란을 살펴보란 말이야. 누구 하나-'래 뜨왈르' 지조차도-발견된 시체가 살해된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 폭력을 휘둘렀다는 흔적은 너무도 확실했고, 이 집필자의 목적은 단지 이 시체가 마리 것이 아니라는 것만을 제시하고 싶었어. 즉 마리가 살해된 것이 아니다, 하고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지. 이 시체가 살해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 그러나 그의 설명은 단지 후자의 입장만을 증명하고 있다네. 여기에 추를 달지 않은 시체가 있다, 범인은 시체를 물 속에 던질 때 추를 달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러니까 이 시체는 범인이 던진 것이 아니다, 증명된 것은 이 정도밖엔 아무 것도 없다네. 이 시체가 누구의 것이냐? 하는 문제에는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고, '래 뜨왈르' 지는 지금까지 스스로 인정했던 것을 이번에는 어떻게든지 부정하려고, 그 때문에 고심하고 있는 걸세. '발견된 시체는 여자의 타살체임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고 하고 있으니까 말야.
더욱이 집필자가 자기 모순을 빠진 것은 문제의 이 부분에서도 그 점만은 아니야. 집필자가 의도한 것은 내가 아까 말했지만 마리의 실종으로부터 시체의 발견까지의 시간을 가능한 축소시키려고 했던 것일세. 그런데 아가씨가 어머니의 집을 나간 뒤로부터 아무도 그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고 분명히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6월 22일 일요일 아침 9시 이후로 그녀가 이 세상에 있었다고 하는 확신은 일체 없다'고 썼네그려. 그의 주장 그자체가 확실히 일방적인 것이었으니까. 적어도 이런 문제는 오히려 끄집어내지 않은 것만도 못하네. 예를 들어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누가 마리의 모습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문제의 시간은 크게 단축되어, 그의 추측에 따르자면 시체가 여점원의 것이라는 확률은 다분히 적어지기 때문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의 논조를 강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래 뜨왈르' 지는 이 점을 강조하고 있으니 정말로 우스운 노릇이군.
그럼 보베에 의한 시체의 신원 확인에 대하여 말한 부분을 한번 검토해 보세. 팔의 털에 대해서는 '래 뜨왈르' 지는 분명히 불공평하게 쓰고 있군. 보베가 바보가 아닌 이상 시체 확인에 있어서 단지 팔에 털이 나 있다고 말할 턱은 없지. 털이 없는 팔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래 뜨왈르' 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반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증인이 말한 것을 곡해한 것에 지나지 않아. 증인은 그 털에 관하여, 무언가 특징에 대해서 말한 것이 확실해. 털의 빛깔, 성질, 길이, 그리고 위치 같은 것의 특징에 대해서 말이야.
그리고 또 이 신문은 이렇게 쓰고 있네. '그녀의 발은 작았다고 한다. 그러나 작은 발이란 얼마든지 있다. 그녀의 양말 대님은 증거가 될 수 없다. 구두 역시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구두거나 양말 대님은 똑같은 것이 많이 팔리기 때문이다. 모자에 달린 꽃장식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보베 씨가 열을 내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발견된 양말 대님의 쇠장식이 대님을 줄이기 위하여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여자가 거의 다 그렇거니와, 산 가게에서 양말 대님을 매 보지 않고 그냥 집에 가져와서 자기 다리에 맞추기 때문이다.' 이쯤 되고 보면, 이 집필자는 제 정신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 보베 씨가 마리의 시체를 수색하고 있을 때, 몸집이나 용모가 거의 행방불명된 아가씨와 닮은 시체를 발견했다면(옷차림 따위는 문제시하지 않고) 용하게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겠지. 만약 몸매라든가 얼굴 생김새 전체뿐만 아니라, 그 팔에서 생전의 마리에게서 보았던 눈에 익은 많은 털을 발견했다고 하면, 그가 드디어 그 확신을 굳힌다는 게 당연한 노릇이 아니겠나. 그 확실성은 털이 많다는 특성 또는 그 이상한 점에 비례하여 증가한 것이 확실하지. 만약 마리의 발이 작고 시체의 발도 작았다고 한다면, 그 시체가 마리라는 확률은 단지 산술적이 아니고 매우 기하학적인, 즉 누적적 비율을 가지고 커지게 마련일세. 이런 데다 덧붙여서 구두까지도 실종한 날 신었던 것으로 아는 구두와 똑같은 것으로 친다면, 설사 그 구두와 똑같은 것이 많이 팔렸다고 하더라도 확률은 바로 확실성에까지 이끌어 올릴 거야. 그것만으로는 신원 확인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조금만 더 증거를 보충한다면, 그것은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네. 또한 이번에는 행방불명된 아가씨가 쓰고 있던 똑같은 모자의 꽃장식만으로도 충분한데 게다가 두 개 세 개, 아니 그 이상 있다면 어떻게 된다고 보겠나. 한 개가 추가되는 데 따라서 그것은 곱절이 된 증거일세. 한 가지 증거에 다시 한 가지의 증거가 덧붙여진 것이 아니고, 수백 배 수천 배로도 배가된 증거가 되는 것이지. 그럼 그 다음으로는, 즉은 사람이 생전에 쓰던 것과 같은 양말 대님까지 발견되었다고 하면 그 이상 더 캔다는 것은 어리석은 노릇이야. 그런데 그 양말 대님은 집을 나가기 바로 직전 마리가 맸던 것과 똑같이 쇠장식이 죄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던 거야. 그러므로 아직도 의심한다는 것은 돌았거나 거짓말쟁이일 걸세. 양말 대님을 이런 식으로 좁혀 매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래 뜨왈르' 지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단지 어디까지나 억지를 부리려는 신문의 태도를 보여 줄 뿐이네. 원래 양말 대님이라는 것은 신축성이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죄이지를 않지. 저절로 조정되게 만든 물건은 외부에서 조정되는 일이 매우 드물다는 거야. 아까 말한 대로 마리의 양말 대님이 한층 죄어맬 필요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녀의 신원이 밝혀진 것이지. 그러나 문제는 시체가 행방불명된 아가씨의 양말 대님을 매고 있다든가, 그 구두를 신고 있다든가, 그 모자, 또는 모자의 꽃장식이 발견됐다든가, 팔에 남다른 특징이 있다든가, 몸매나 용모 전체가 닮았다든가 하는 그런 것이 아니지. 시체가 그러한 조건 하나 하나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고 하는 점일세. 이러한 형편에 놓였는데도 '래 뜨왈르' 지의 기자가 의심을 품고 있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이 사람의 경우, 굳이 정신 감정을 받을 필요조차 없겠지. 이 사람은 법정의 네모난 영장을 그대로 되풀이하기를 능사로 여기는 법률가들의 부질없는 말을 흉내내는 것을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지.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법정에서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배척당한 것 중의 많은 것이 오히려 현명한 사람에겐 가장 큰 증거가 된다고 하는 것일세. 왜 그러냐 하면 법정은 그 자체가 증거에 대한 일반 원칙-공인된 서류로써 기록된 원칙에만 따르고 있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에도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꺼린다는 말이야. 게다가 또 이런 식으로 끝까지 원칙만을 고집하여 그것과 모순되는 예외에 대하여 거리낌없이 무시한다는 것은 긴 안목으로 보면 진실을 최대한으로 잡는 확실한 방법이지. 그러니까 이러한 방식은 전체적으로는 이론적이라고 보네, 개개의 입장에서 볼 때 수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 역시 틀림없는 노릇이라네.
자네도 그 보베에 대한 혐의 따위는 당장에 일축해 버리겠지. 이 선량한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는 자네도 이미 잘 알고 있겠지. 즉 로맨틱한 곳이 많이 있기는 하나 조금은 재치가 모자라는 사람일세. 이런 성질을 가진 사람은 흥분하게 되면, 지나치게 예민하다든가 혹은 악의를 가진 사람이라는 혐의를 받기 쉬운 행동을 하게 되어 있네. 보베 씨는(자네가 기록한 것으로 보자면) '래 뜨왈르' 지의 기자와 몇 차례인가 직접 회견을 갖고 기자의 의견은 아랑곳없이 그 시체가 정말로 마리의 것이라고 주장하여 상대방의 성미를 돋우고 말았지. 신문에는 이렇게 썼더군. '보베 씨는 시체가 마리의 시체라고 끝내 주장하지만, 우리가 이미 설명한 것처럼 제삼자를 납득시킬 만한 사실은 하나도 내세우지 못했다.' '제삼자를 납득시킬 만한' 유력한 증거를 들지 못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들 수 있는 능력은 없다고 해도 당사자 자신이 믿고 있는 것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네. 사람의 개성에 있어서 그 인상만큼 막연한 것은 없지. 누구라도 이웃 사람을 보면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어떻게 알았느냐고 한다면 곧 이유를 대기가 쉽지 않지. '래 뜨왈르' 지의 기자는 보베의 논리적인 아닌 확신에 화를 낼 권리는 없는 거야.
보베를 둘러싼 수상한 일은 그에게 죄가 있다고 하는 기자의 암시보다 오히려 그 사람은 로맨틱한 참견꾼이라는 내 억측이 오히려 잘 들어맞겠지. 좀더 동정적인 풀이를 한다면 열쇠 구멍에 꽂혀 있었던 장미꽃, 석판에 '마리'라고 써 있었던 점, '친척 남자들을 멀리했다'는 점, '그들에게 시체를 보이기를 꺼려했다'는 점, '자기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헌병과 아무 얘기도 해서는 안 된다'고 부인에게 주의를 준 점, 또한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일체 관계시키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는' 듯한 점-이런 모든 것을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 있지. 보베가 마리에게 구혼을 했다는 것, 그 아가씨가 그에게 호의를 가졌다는 것, 또한 그가 마리에게 가장 친숙해져서 신임을 받고 싶은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이러한 것은 모두 내게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말하지 않겠네. 어머니라든가 그 외의 친척들이 냉담했다는 점-그들은 시체가 향료 가게 여점원의 시체라고 말하면서도 그것하고는 사리가 안 맞는 냉담함을 보였다는 점, 이런 점에 관한 '래 뜨왈르' 지의 주장은 증거가 충분히 그것을 제거시켰으니까 신원 감정의 문제는 완전히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해결이 됐다고 치고, 이야기를 앞으로 전개하세나."
"그렇다면 '르 꼬메르시엘' 지의 의견에 대해서는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하고 나는 여기서 질문을 했다.
"그 신문의 주장은, 이 문제에 관해 발표를 한 그 어떤 의견보다 분명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지. 그 전제로부터 끄집어내는 추리는 이론적이고도 매우 예리하네. 그러나 그 전제가 적어도 두 가지 견지에서 불완전한 관찰에 입각하여 있네. '르 꼬메리시엘' 지는, 마리가 어머니의 집을 나가자 멀지 않은 곳에서 악당들한테 붙잡혔다고 말하고 있군. '이 아가씨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고 세 구역이나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고, 이 신문은 주장했어. 이것은 파리에서 오래도록 산 사람-그 중에서도 관공리로서-시내를 걸어다니더라도 관청이나 회사 근처밖에 돌아다니지 않는 사람이 생각할 만한 일이지. 그런 사람은 자기 사무실에서 길을 열 발짝만 걸어가는 동안에도 꼭 누구와 마주쳐 말을 건네게 된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지.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지 그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윽고 향료 가게 여점원의 유명 정도에다가 비교하여, 거기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곧, 그녀가 거리를 걷고 있었다면 자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고 간주한 것이야. 그러나, 그것은 아가씨가 거리를 걷는 것이 자기와 같이 언제나 변함없이 일정한 방침에 따라서 똑같이 한정된 구역 안을 걷고 있다고 하는 경우에만 들어맞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은 일정한 시간에 비슷한 직업 관계의 일로 해서 저절로 자기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그러한 제한된 범위를 왕래하는 것이지. 그렇지만 마리는 대체로 발가는 대로 걸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게다가 이번 경우에는, 언제나 다니던 길 말고 좀 다른 길을 걸어갔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 '르 꼬메르시엘' 지의 기자가 생각하고 있었다고 상상되는 비교는, 모든 시내를 걸어다니는 두 사람의 경우만 생각할 수 있겠군. 이 경우, 아는 사람의 수가 같다고 한다면 아는 사람을 만나는 회수도 같을 수 있는 가능성이 반반일 것이기 때문이지. 나로 말하자면 마리가 언제, 어떤 시간이라도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자기 집에서부터 숙모의 집까지 가는 많은 길 중에서 그 어느 길인가를 골라 갔다고 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거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네. 우리가 이 문제를 충분히, 정당하게 판단하려고 하면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알고 있는 사람의 수효와 파리의 총인구수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할거야.
그런데, '르 꼬메르시엘' 지의 주장에는 아직 얼마쯤 신빙성이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아가씨가 외출한 시간을 생각해 보면 그 신빙성이라는 것은 상당히 줄어들게 되어 있어. '그녀가 외출했을 때, 거리에는 사람이 붐빌 때였다'고 '르 꼬메르시엘' 지는 내세웠지. 그러나 그렇지 않았네. 시간은 아침 9시 였네. 1주일 동안 일요일을 빼고는 매일 아침 9시경에는 사람이 거리에 잔득 붐비지. 그러나 일요일의 9시경만은 모두들 집안에서 교회에 나갈 준비를 하게 되어 있어. 안식일 아침에는 언제나 8시부터 10시경까지 시내에서 그 무렵만은 특히 인적이 드물다는 것을 주의 깊게 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거야. 10시부터 11시까지는 거리가 사람으로 붐비지만 방금 말한 그런 시간에는 그렇지 않다네.
'르 꼬메르시엘' 지가 또 한 가지 잘못 생각한 것이 있네. 불행한 아가씨의 치마 한 부분이 길이 2피트, 너비 1피트쯤 찢겨져 나갔고, 그것으로 머리 뒤쪽에서 휘감아 턱 아래에서 묶었는데, 오로지 그것은 비명을 못 지르게 하려고 한 것이야. 그런 소행은 '손수건을 갖지 않은 자의 짓이다'라고 지적했더군. 이런 판단이 충분한 근거가 있는지 어떤지는 나중에 검토하고 싶은데 말야, '손수건을 갖지 않은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 기자의 속셈이 보잘 것 없는 건달패를 지적하는 것이지. 그렇지만 그러한 패거리라고 하더라도 셔츠는 입지 않아도 손수건은 꼭 갖고 다닌다네. 요즈음 볼 것 같으면 정말 악당들에게 손수건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자네도 틀림없이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르 솔레이유' 지의 기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하고 나는 물었다.
"그 기자가 앵무새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야. 매우 훌륭한 앵무새가 됐을 텐데 말야. 그 기자는 칭찬할 만큼 부지런을 떨어서 여기저기 신문에서 자료를 긁어모아서는 이미 발표된 의견을 한 가지 한 가지씩 재기록하고 있으니까. '이 물건들은 모두다 최소한 서너 주일동안 분명히 이 장소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그 끔찍한 범행 현장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고 그 기자는 쓰고 있군. 여기서 '르 솔레이유' 지가 되풀이하고 있는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한 나 스스로의 의문을 다소나마 풀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에 대해서 나중에 딴 문제와 관련하여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세.
지금 우리로서는 다른 조사에 힘을 쏟지 않으면 안 된다네. 자네는 시체에 대한 조사를 매우 게을리했다는 것을 알 만하겠지. 물론 신원은 곧 밝혀졌고 또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 그런데 그 외에도 또 확인되어야 할 것이 많이 있었네. 시체에서 무언가 탈취된 것이 없었는지, 피살자가 집을 나올 때 보석 같은 것을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는지, 만일 지니고 있었을 경우, 시체가 발견될 당시에도 무언가 보석 같은 것을 몸에 지니고 있었는지, 이러한 점이 증언에서는 전혀 다뤄지지 않은 중요한 문제야. 이 이외에도 이와 같이 중요한 문제가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단 말일세. 우리는 스스로 조사해서 납득이 가도록 해야만 하네. 생 에스따슈에 관한 것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지. 나는 이 사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네. 그러나 어쨌든간에 우리는 순서대로 일을 진행시켜야 하겠지. 이 사람이 일요일에 어디에 있었는지 그 점에 대해서 그의 진술서를 정확하게 살펴야 되겠네. 그런 진술서가 흔히 일을 헛갈리게 만들기 쉬우니까. 그렇지만 그 점에 있어서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생 에스따슈의 조사를 그치도록 하세. 진술서에 거짓이 있다고 하면 그의 자살은 혐의가 짙은 것이겠지만, 그런 거짓이 없다고 한다면 자살은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일도 아니고, 굳이 그것 때문에 일반적 해석 밖으로 이끌 필요조차 없다네.
내가 지금부터 제의하고 싶은 것은 이 사건의 내부적인 문제들을 제쳐놓고, 그 주변에다 주의를 집중시키자는 것이야. 이번과 같은 조사에서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은 직접적인 사건 수사에 치우친 나머지 방계적인 또는 부수적인 사건을 완전히 무시하고 마는 일이지. 증언과 변론을 관련이 있는 듯한 일의 범위 안으로 제한하는 것이 법정의 악습일세. 더군다나 경험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또는 참다운 이론이 항상 보여 주는 것처럼 대부분의 진리라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관계가 없는 듯한 것에서 나타난다네. 근대 과학이 예기치 않은 곳에 의존하려고 하는 것은 이 원리의 정의 그대로가 아니더라도 그 취지에 입각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자네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모를지도 모르겠네. 인간의 지식의 역사가 끊임없이 보여준 것에 따르자면, 대부분의 매우 중요한 발견은 방계적, 우발적인 사건에 힘을 입었지. 긴 안목으로 진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연히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한 방면에서 생기는 발견을 최대한으로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거야. 이제까지 있어왔던 것에 입각하여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것은 더 이상 이론적이라 말할 수가 없지. 우연이라는 것이 기초 이론의 한 부분을 이룬다고 인정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우연을 절대적인 예측의 문제로 보는 거야. 보통 수학 공식으로는 예측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생각해 보자고 하는 거야.
되풀이 말하자면 모든 진실의 대부분이 방계적인 사실에서 밝혀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네. 그리고 그러한 사실에 포함된 원리의 정신에 따라서 이번 사건에서 충분히 조사되고도 아직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사건 그 자체에 한정된 조사 방법을 변경시켜, 사건을 둘러싼 그 당시의 상황에 수사를 기울이자는 것일세. 자네가 그 진술서가 정확한지 어떤지 확인하는 동안에 나는 각 신문들을 여태까지 자네가 한 것보다 더 광범위하게 전체적으로 조사하겠네. 지금까지 보기로는 우리는 이미 조사된 부분만을 살핀 데 불과하지. 그러나 각 신문들을 내가 말한 것처럼 광범위하게 조사한다면 수사의 방향을 분명히 잡을 수 있는 어떤 세밀한 점이 나타날지도 모르지. 아니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노릇이야."
뒤팡의 지휘에 의하여 나는 진술서를 면밀히 조사했다. 그 결과 진술서는 정확했고, 따라서 생 에스타슈는 무죄라는 것을 확신했다. 한편 뒤팡은 내가 보기에는 전혀 까닭을 모를 정도로 면밀하게 각 신문의 기사들을 조사했다. 그러고는 1주일 뒤에 다음과 같은 신문 발췌를 내놓았다.
"약 3년 반 전, 이 마리 로제는 빨레 로이얄의 르 블랑 씨의 향료 가게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이번과 거의 비슷한 정도의 소동을 빚어냈다. 그러나 그 1주일 뒤에 그녀는 평소보다 얼마간 안색이 창백했으나 보통 때와 같이 다시 가게에 나타났다. 르 블랑 씨나 어머니의 이야기로는 그녀가 시골 친척집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런 후 이 사건은 곧 식어지고 말았다. 예측컨대 이번에 자취를 감춘 것도 역시 대수롭지 않은 일이며 1주일 혹은 한 달 뒤에는 돌아올 것이다. - 석간 신문, 6월 23일 월요일."
"어제의 어떤 석간 신문은 전에도 로제 양에게 알 수 없는 실종 사건이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르 블랑 씨의 향료 가게에서 자취를 감췄던 1주일 동안, 그녀가 방탕자로 소문난 젊은 해군 사관과 같이 지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때는 둘이 다투었기 때문에 다행히 집에 돌아왔다고 본다. 지금 파리에 머물고 있는 이 난봉꾼의 이름은 알고 있으나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한 이유 때문에 그것을 발표하는 것을 보류한다. - '르 메르퀴르' 6월 24일 화요일 아침."
"악하기 짝이 없는 흉행이 엊그제 파리 근교에서 발생했다. 아내와 딸을 동반한 신사가 해질 무렵, 센 강 둑 근처에서 보트를 저으며 놀고 있던 여섯 명의 젊은이들에게 부탁하여 강을 건너갔다. 맞은편 강기슭에 닿자 세 사람의 승격은 내려서 보트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걸어갔다. 그때, 딸이 보트에다가 양산을 놓고 온 것을 알았다. 그 아가씨는 그것을 찾으려고 다시 갔다가 그 건달패 놈들에게 붙잡혀서 강속으로 끌려들어갔고, 입을 틀어막힌 채 폭행을 당했으며, 양친과 함께 보트를 탔던 곳에서 멀지 않은 강가에 내려졌다. 그때 악한들은 도망쳤으나 경찰이 추적 중이므로 그중 몇 명은 곧 체포될 것이다. - 조간 신문, 6월 25일."
"본사에서는 이번 흉악 범죄가 므네(처음에 혐의를 받아 체포된 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아무런 증거가 없어 석방된 적이 있다)의 소행이라는 한두 통의 투서를 받았다. 그러나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이 인물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고, 투서자들의 내용은 근거가 없이 다만 열성에 불과하므로 공표할 가치가 없다고 본다. - 조간 신문, 6월 28일."
"본사에서는 각각 출처가 다르게 여겨지는 몇 통의 격렬한 투서를 접수했는데, 그것에 따르면 불행한 마리 로제는 일요일, 파리 근교를 설치고 다니는 수많은 깡패 패거리들 중의 누군가에게 희생된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우리의 견해도 이 추측에 단연 찬성하고 있다. 금후 이것에 대한 기사들을 몇 건 지면에 다루겠다. - 석간 신문, 6월 31일 화요일."
"월요일, 세관에 소속된 나룻배의 한 선원이 센 강 아래로 떠내려오는 빈 보트를 발견했다. 돛은 보트 밑바닥에 놓여 있었다. 선원은 그 보트를 선박 관리소에 끌고 갔다. 이튿날 아침 보트는 관리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없어졌다. 키만은 관리소에 보관 중이다. - '라 딜리장스' 6월 26일 목요일."
이런 여러가지 발췌 기사를 읽었으나 그것들이 다 내게는 상관없이 보였을 뿐, 그 중 어떤 것도 현재의 사건에 관련시킬 만한 것이 못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뒤팡이 무언가 설명해 주길 기다렸다.
"나는 이 발췌 기사의 첫 째 것과 둘 째 것에 대해선 지금 자세히 논할 생각이 없다네. 내가 이 기사를 베껴 낸 것은 무엇보다도 경찰의 엄청난 태만을 자네가 알아 달라는 뜻이지. 여하간 내가 경시총감한테 들은 바로는 여기서 지적된 해군 사관에 대하여서는 경찰에서는 전혀 수사에 손을 미치지도 않았다네. 그런데 마리의 첫 번째 실종과 두 번째 실종과의 사이에 아무런 추측할 만한 연관성이 없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노릇이지. 첫 번째의 도망질은 결국 연인과의 싸움 때문에, 배반당한 쪽이 집에 돌아왔다는 점으로 일단락을 짓겠지. 그렇다면 두 번째의 도망질(다시 도망질을 쳤다고 가정하고 하는 말이지만)은 다른 남자가 새로 유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먼젓번 남자가 다시 또 유인을 한 것으로 보고 싶다는 말이야. 새로운 연애가 시작됐다기보다는 오히려 옛사랑을 다시 돌이키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가. 먼젓번에 마리와 도망질을 한 사내가 다시금 유혹하는 것과 이번에 다시 다른 사내한테서 마리가 같은 유혹을 받는 것은 비교조차 안 될 만큼 큰 차이가 있지 않겠나. 여기서 자네가 알아두어야 할 일은, 첫 번째의 확실한 도망질과 그리고 두 번째의 추측되는 도망질 사이에는 그 경과한 날짜가 보통 우리 나라 해군이 순양 항해하는 기간보다 몇 달 길었다고 하는 사실이야. 마리의 애인이 항해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첫 번째의 못된 짓은 중도에 그치고 말았으나 귀국하자마자 당장, 그가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미처 실행할 수 없었던 추잡한 짓을 다시 또 한 것은 아닐까. 이런 모든 것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지.
그러나 자네는 두 번째 경우에 생각했던 도망질은 실행되지 않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네. 확실히 실행되지는 않았어. 그렇다고 하여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 생 에시따슈하고 모름지기 보베를 빼놓고는, 공공연히 알려진, 수치스럽지 않은 마리의 구혼자가 보이지 않는군, 딴사람들에 대해선 일체 아무 소문도 없지. 그렇다면 그 사나이에 대하여 친척들-최소한 그들 대부분-은 아무 것도 모르나, 마리 자신이 일요일 아침에 나가서 룰르 관문 근처의 한적한 숲 속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함께 있기를 싫어하지 않을 정도로, 그토록 깊은 관계의 비밀의 연인은 누구냐, 하는 일이야. 마리가 집을 나간 아침, 어머니인 로제 부인이 말한 이상스러운 예언-'이제 두 번 다시 그 애의 얼굴을 보지 못할지도 몰라'라고 한 말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거지?
그러나 설사 어머니가 마리의 도망질에 대한 계획을 모조리 다 알리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딸 자신이 그런 계획을 품고 있는 것을 추측하고 있었다고 상상할 수는 없겠나. 딸은 집에서 나갈 때 드롬므 가에 사는 숙모에게 간다고 말했었지. 그리고 생 에스따슈에게는 저녁때 마중을 나와 달라고 부탁했군. 그런데 좀 생각해 보면 이 사실은 내가 암시한 것을 강력하게 반증한다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세. 아가씨는 틀림없이 누구인가를 만나서 함께 강을 건넜고, 오후 세 시라는 늦은 시간에 룰르 관문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지. 그러나(어떤 목적에서인지, 어머니가 알고 있었는지, 몰랐는지 그것은 차치하고) 그런 식으로 이 사내와 동행하는 것을 동의했을 때, 마리가 집을 나서며 행선지를 알려 둔 것이라든지, 약혼자인 생 에스따슈가 일러준 시간에 드롬므 가에 찾아가서 그녀가 그곳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더구나 이 놀랄 만한 사실을 알고 하숙집으로 돌아와 보니까 이번에는 또 그녀가 계속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약혼자가 어떤 놀라움과 어떤 의심을 갖겠는가 하는 것들을 그때 마리는 이미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을 거야. 아니, 확실히 지금 말한 것 같은 것을 생각한 게 틀림없네. 생 에스따슈가 분하게 여기고 모두들 의아해 할 것을 미리 생각한 것이 확실해. 그녀가 돌아올 생각이었다면 이러한 의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는 없지. 그러나 그녀가 만약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면 그런 의혹 정도는 그녀에게는 대수로울 게 하나도 없었을 테지.
아가씨는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상상해도 되겠지. '나는 도망칠 목적(그것도 어느 누구도 모르는 어떤 목적) 때문에 어떤 사람과 만나게 돼 있다. 방해가 되지 않게 해야지. 추격하는 사람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넉넉히 가져야지. 그러니까 드롬므 가의 숙모한테 가서 하루를 보내는 것으로 알고 있도록 해주어야지. 생 에스따슈에게 어둡기 전에는 마중하러 오지 못하게 일러주어야지. 이렇게 한다면 가능한 한 오래도록 집을 나가 있어도 별달리 의심받거나 걱정을 끼치지 않고, 변명할 수 있고, 어떤 딴 방법보다 충분한 시간을 얻을 수 있겠지. 생 에스따슈한테 해질 때에 나를 마중 와 달라고 하면 그 전에는 찾아오지 않겠지. 그러나 마중 오라고 전혀 일러두지 않는다면 내가 도망칠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겠지. 그것은 내가 좀 더 일찍 돌아오리라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나간 것이 그만큼 빨리 걱정을 끼치게 될 것이니까. 그런데 만일 내가 돌아올 생각이라면-내가 그 사람과 다만 산책만 할 생각이라면-생 에스따슈에게 마중 와 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왜냐하면 마중 와서는 내가 자기를 속였다는 것을 빤히 알게 될 것이니까. 그 사람한테는 내가 가는 곳을 알리지 않고 집에서 나갔다가 해지기 전까지 돌아와서 드롬므 가의 숙모한테 다녀왔다고 말한다면 그에게 언제까지나 들키지 않고 배길 수 있으니까. 그러나 내 계획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지. 적어도 몇 주일 동안, 아니 들키지 않을 때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나로서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자네가 기록한 것으로도 알고 있겠지만, 이 슬픈 사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생각은 처음부터 아가씨가 깡패들에게 희생당했다는 것이군. 세상의 여론은 어떤 조건 아래서는 무시할 수가 없는 노릇이지. 여론이 저절로 생겼을 때-엄밀하게 보아서 자발적으로 생겼을 때-에는 그것을 천재의 특징이기도 한 직감으로 우리는 볼 수가 있네. 나는 그 여론의 의견을 백 중 99까지는 받아들이지. 하지만 그것에는 암시의 흔적이 전혀 없어야 한다네. 그 의견은 엄밀히 대중 자신의 것이 아니면 안 되네. 그런데 이 구별을 인식하여 단언하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점이 많네. 이번 경우, 깡패의 패거리라고 하는 '대중의 의견'은 세 번째의 발췌 기사에서 말한 것처럼 방계적인 사건에 의하여 추가된 것으로 보여지네. 젊고 아름답고 그리고 잘 알려진 마리의 시체가 발견되자 파리는 온통 발칵 뒤집혔네. 그 시체는 폭행을 당하고 강에 떠 있는 것이 발견되었지. 그렇지만 그 처녀가 살해당한 것으로 믿어지는 것과 거의 같은 시간에, 이 피해자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거의 비슷한 폭행을 젊은 깡패들이 딴 젊은 여자에게 가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군. 이미 판명된 한 가지의 폭행이, 지금 다른 분명치 않은 폭행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면 과연 그것이 놀라운 일이겠는가? 이 사건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망설이는 동안에 이미 알려진 폭행이 매우 편리하게 그 판단을 주는 것처럼 생각된 것이지. 마리도 강속에서 발견되었군. 그리고 그 똑같은 강에서 이미 판명된 이 폭행이 빚어진 거야. 이 두 가지 사건의 연결이 너무나 비슷하여서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 그러나 실은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 알려진 폭행은 거의 때를 같이해서 행해진 다른 폭행이 이렇게 범행되지 않았다고 하는 증거일세. 어떤 장소에서 악당 한 패가 전대 미문의 못된 짓을 하고 있는 동안에 같은 도시, 같은 지역, 같은 상황 밑에서, 같은 방법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다른 패거리의 악당들이 아주 똑같은 성질의 못된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우연의 암시에서 생긴 이 세상의 견해에 따르자면, 방금 말한 것과 같은 놀랄 만한 우연의 연속적인 일치를 믿으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엔 없지 않겠나.
얘기를 진행시키기 전에, 룰르 관문의 수풀 속의 살인 현장으로 추측되고 있는 장소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겠나. 이 수풀은 울창하긴 해도 공로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 수풀 속에 커다란 돌이 서너 개나 뒹굴고 있는데 그게 발판과 등판이 되는 의자처럼 되어 있더군. 위쪽 돌에서는 하얀 속치마가 발견되었고 다른 돌에서는 비단 스카프가 눈에 띄었지. 양산과 손수건도 역시 이곳에서 발견되었군. 손수건에는 '마리 로제'라는 이름이 씌어 있었네. 옷가지의 잘린 조각이 주변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네. 땅바닥은 마구 짓밟혔고, 관목의 가지는 부러졌고, 맹렬한 격투가 벌어졌었다는 증거가 뚜렷했군.
이 수풀이 발견되자 신문은 대서 특필했고, 이것이야말로 흉행의 현장이라고 모두 생각했지만, 의심이 갈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네. 이것이 현장이라고 내가 믿건 않건간에-어쨌든 의혹을 살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었지. 만일 정말 현장이 '르 꼬메르시엘' 가 언급하는 빠베 생 앙드레 가 근처였다고 한다면, 가령 범인들이 아직 파리에 있다고 쳐서,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이렇듯 곧바르게 쏠리고 있다는 것에 당연히 놀랐을 것이지. 그리하여 얼마만큼 머리가 도는 녀석이라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딴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고 당장 느꼈겠지. 그렇게 되면 룰르 관문의 수풀은 짙은 의혹에 휩싸인 곳이니까 예의 물건들을 그 장소에 옮겨 놓을 생각이 당연히 들었겠지. '르 솔레이유' 지의 추측에도 불구하고 발견된 물건들이 2, 3일 이상 그 수풀 속에 있었다는 증거 따위는 없군. 한편 그 숙명적인 일요일로부터 아이들이 물건을 발견한 저녁때에 이르기까지인 20일 동안 이런 물건들이 사람 눈에 띄지 않고 그곳에 놓여 있을 리는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한 증거는 충분히 있어. 각 신문의 의견을 채택하면서 '르 솔레이유' 지는, '이러한 물건들은 비에 젖어서 잔뜩 곰팡이가 피었고, 곰팡이 때문에 달라붙기도 했다. 둘레에는 풀이 솟아나기도 하고 그 중에는 풀에 덮인 것도 있었다. 양산의 비단 천은 질긴 것이지만 안쪽의 실들은 삭아 있었다. 천이 두 겹인 양산의 윗부분은 잔뜩 곰팡이가 피어 썩어 있었고, 펴자마자 양산은 부서지고 말았다'고 했네. '둘레에는 풀이 솟아나기도 하고, 그 중에는 풀에 덮인 것도 있었다'고 했네. '둘레에는 풀이 솟아나기도 하고, 그 중에는 풀에 덮인 것도 있었다'고 하는 것은 단지 두 사내아이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으로서, 곧 그들의 기억에 따라서 확인된 것이 분명하다네. 그 이유는 아이들이 제삼자가 보기 전에 집으로 그것들을 가지고 갔기 때문이지. 그런데 풀은 단 하루 동안에도 2, 3인치가 자라나는데, 더구나 비가 많고 따스한 계절(이 살인이 빚어진 때가 바로 그런 계절이지만)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잔디를 새로 깐 지면에다 양산을 놓아두어도 1주일이 지나면 솟아나는 풀 때문에 전혀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네. 그리고 '르 솔레이유' 지의 기자가 지금 말한 것처럼 짧은 문장 속에서도 세 번이나 반복할 만큼 강조하고 있는 것은 곰팡이인데, 이 기자는 곰팡이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군. 이 곰팡이는, 균들 중에 많이 있는 종류의 하나로서, 24시간 동안에 생겨났다 말라죽고 만다는 특징은 상식인데, 그런 것까지 이 기자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필요가 있겠나?
이런 이유로 하여, '최소한 3, 4주일 동안' 수풀 속에 있었다고 하는 의견을 주장하기 위하여 장황하게 인용한 것이 모두 사실의 증거로서는 극히 불합리하고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곧 알 수 있지. 그와 반대로 이 물건들이 1주일 이상 오랜 기간-일요일에서 다음 일요일보다 긴 기간을 문제의 수풀 속에 있었다고 하는 것도 결코 믿을 수 없는 일이군. 파리 근교를 어느 정도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교외에서 아주 멀리 가지 않는 한, 인적이 끊긴 곳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노릇이지. 근교의 나무숲이라든가 작은 숲 속에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장소라든가 사람이 찾아가지 않은 곳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가 없지. 자연을 아끼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대도시의 먼지와 티끌 속에 휩싸여 있어야만 한다. 만약 그러한 사람 중에 누군가가 이를테면 평일에도 도시 근처의 아름다운 경치에 젖어, 아늑함 속에 마음을 풀어 보려 했다고 치세. 한두 발짝 옮길 때마다, 어디선가 무뢰한이나, 깡패 패거리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그 모습들이 나타나서 모처럼의 깊은 정취가 당장 깨져버리게 되고 말지. 아무리 깊은 나무 숲 속에 혼자만 있고 싶어도 결국 소용이 없지. 이런 깊은 숲 속일수록 거기에는 가장 더러운 파리로, 설사 그곳이 똑같이 더러운 곳이라고 하더라도, 눈에 걸리는 것이 적기 때문에 도망치듯 돌아오게 마련이지. 그러나 파리 근교가 평일에도 이렇듯 소란스럽다면, 안식일에는 얼마나 더 소란스럽겠나. 그날이야말로 근로의 의무에서 해방되고, 또 죄악을 범할 기회를 잃은 도시의 무뢰한들은 전원을 아낀다는 것은 경멸하지만, 사회의 인습과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도시의 변두리로 모여들게 마련이지. 무뢰한들은 신선한 공기나 푸른 나무들을 찾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원의 제한 없는 공간 속에서 방종하기 위해서지. 길가의 선술집이라든가 숲 속의 녹음에서 자기들 패거리들만이 거리낌없이 미친 듯 설치는 쾌락-방종과 럼 주로 미쳐 날뛰는 것이지. 파리 근교의 어떤 수풀 속에서도 일주일 이상이나 되는 오랜 기간 동안 예의 물건들이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겠네. 내가 거듭 말하고 싶은 것이 그것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냉정한 관찰자라면 잘 알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네. 그리고 예의 물건들이 흉행의 실제의 현장에서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하여 그 수풀 속에 던져진 것이 아니냐고 하는 이유는 그 외에도 또 있다네. 그러면 우선, 그 물건들이 발견된 날짜를 보게나. 이 날짜와 신문에서 내가 발췌한 다섯 번째 기사의 날짜를 대조해 보게. 그러면 석간 신문에다 절박하게 투서들을 보낸 바로 직후에 그 물건들이 발견된 것을 자네도 알 수 있겠지. 이 투서 내용도 여러 가지로서 여러 사람이 보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느 것을 보더라도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군-즉, 흉행의 범인은 무뢰한의 한 패로서, 그 현장은 룰르 관문 근처라는 것에 이목을 끌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일세.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여, 물론, 이것 덕택에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그리 쏠려서 남자애들이 유품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그 이전에 수풀 속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것은, 그러한 물건들이 투서한 날짜와 같은 때에, 아니면 그보다 바로 직전에 투서의 주인공인 범인들의 손에 의하여 그곳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그곳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겠지.
이 수풀은 이상한, 유달리 이상한 수풀이었어. 이상야릇할 정도로 우거진 곳이었지. 자연스럽게 벽으로 둘러싸인 숲 속에는, '발판과 등판이 될 수 있는 의자를 형성하고 있는' 세 개의 괴상한 돌이 있었지. 그런 데다 자연미의 극치를 이룬 이 수풀은 들뤼크 부인의 집에서 불과 몇 로드(1로드는 5야드 반)안에 있으므로, 부인의 아들들은 녹나무 껍질을 찾으려고 버릇처럼 주변의 관목림을 뒤지고 다녔었지. 그 사내아이들 중의 누구 하나라도 이 나무 그늘의 넓은 터전에 자리잡고 있는 자연의 옥좌에 앉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겠지. 이런 추측에 내기를 걸었다면 그것은 무모한 내기야. 이런 내기조차 주저하는 이가 있다면 소년시절이 없었거나 소년의 기분을 잃어버리고 만 사람일 테지. 다시 말하지만-하루나 이틀보다 오래도록 이 수풀 속에 그 물건들이 눈에 띄지 않은 채 있었다고 한다는 것은 전혀 이해가 안 가는 노릇일세. 비록 '르 솔레이유' 지가 독단적인 무지를 저지르고 있지만, 내가 이제까지 말한 그런 까닭으로 해서 물건들은 비교적 나중에서야 발견 장소에 놓여진 것이 아니냐고 의심할 이유는 충분히 있다는 거야.
그런데, 그 유품들이 이런 식으로 그곳에 놓여진 것으로 믿고 싶은 이유는 지금가지 내가 주장한 것 이외에도 또 매우 유력한 이유가 있다네. 그럼 이번에는 이 물건들이 아주 교묘하게 배치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하기 바라네. 위쪽의 돌 뒤에는 하얀 속치마를 걸쳤지. 그 다음 돌에는 비단 스카프가 얹혔고. 주위에는 양산, 장갑, 그리고 '마리 로제'라는 이름이 씌어진 손수건이 흩어져 있었군. 이것이야말로 머리가 그다지 예민하지 못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물건을 늘어놓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하기 쉬운 배치라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정말 자연스러운 배치는 아니야. 나라면 어느 것이나 땅바닥에 놓고 발로 짓밟힌 것처럼 보이게 했을 거야. 그 좁은 나무 그늘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의 격투가 벌어져 이리 저리로 휩쓸리면서도 속치마라든가 스카프가 돌 위에 그런 식으로 놓여져 있다니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겠네 그려. '격투가 벌어졌다는 것은 증거가 뚜렷했다. 땅바닥은 짓밟혔고 나뭇가지는 부러져 있었다'고 씌어 있군 그래-그런데 속치마나 스카프는 마치 선반 위에 얹힌 것처럼 놓여 있었지. '관목에 걸려 찢긴 웃옷의 헝겊 조각은 너비 3인치 길이 6인치 정도였다. 하나는 웃옷의 가장자리이며 기워져 있었고, 또 하나는 치마의 한 조각이었으나 가장자리는 아니었다. 어느 것이나 찢겨져 잘린 것 같았다'고 했군. 여기서 '르 솔레이유' 지는 경솔하게도 의심스러운 말을 하고 말았군 그래. 윗도리의 헝겊 조각은 과연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걸려 찢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러 사람 손으로 그렇게 한 것 같았어. 여기서 화제가 되고 있는 것처럼 웃옷의 헝겊 조각이 가시덤불 때문에 걸려 찢긴다는 일은 전혀 있을 수 없는 노릇이야. 이 옷감의 성질상, 가시덤불이나 못에 걸려 찢길 경우, 직각으로 찢어지게 마련이야-가시가 걸린 부분이 정점이 되어서 서로가 직각을 이루는 두 개의 사선으로 찢기게 마련이야-그런데, 찢긴 모양이 걸려 찢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이야. 그런 것을 나는 본 일도 없거니와 자네 역시 그렇겠지. 조각을 찢어내려면 대부분의 경우, 두 개의 다른 힘이 서로 틀리는 방향으로 작용할 필요가 있겠지. 옷감의 양쪽에 끝이 있는 경우, 이를테면 손수건 같은 것인데, 이 경우에 한해서는 가느다란 천 조각을 뜯어내려면 오직 한 쪽의 힘만으로도 족하지. 그러나 이번 경우, 한 쪽밖에는 끝이 없는 옷이로군. 전혀 가장자리가 아닌 옷감의 한복판에서 가시로 조각을 당겨 뜯어낸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면 될 수가 없고 또 가시 한 개만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야. 만약 그것이 옷의 가장자리라 할지라도 두 개의 가시가 필요하고, 한 쪽의 가시는 두 개의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고 또 다른 쪽 가시는 한 개의 다른 방향으로 작용해야만 된다네. 그러나 이건 단을 집어넣지 않은 경우라네. 단을 집어넣었다면 전혀 불가능하지. 그렇기 때문에 덤불의 가시만으로 조각이 걸려 찢긴다는 것은 여러 가지 큰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더군다나 우리는 한 군데만이 아니고 많은 조각이 이런 식으로 걸려 찢어졌다고 믿어야 한다니 말일세. 또한 '한 개의 잘린 조각은 치마의 한 부분으로 가장자리는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즉 옷의 단조차 없는 복판에서 완전히 찢겨나간 것들이야. 그러나 시체를 운반해 갈 것을 생각할 만큼 주의 깊은 범인들이 수풀 속에 이런 유품들을 두고 갔다니 그것은 더더욱 의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나. 그렇지만 만일 내가 이 수풀이 범행 현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네의 잘못이네. 이곳에서 못된 짓이 빚어졌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들뤼크 부인의 집에서 사건이 발생했는지도 모른다네. 그러나 사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 우리는 범행 현장을 발견하자는 것이 아니고 살인범을 찾아내자는 것이니까. 여러 가지 자세한 것을 말했지만, 내가 그런 것을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네. 하나는 '르 솔레이유' 지가 적극적이고도 조급하게 내린 단정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것인가를 말하고 싶었고, 또 하나는 이 살인이 끝내 무뢰한의 한 패거리가 한 소행이냐 하는 것에 대하여, 가장 자연스런 방법으로, 자네가 생각해 보도록 하려고 했기 때문이야.
이 문제로 이야기를 되돌리는 데 있어서, 검시를 맡았던 외과 의사의 그 언짢은 보고를 잠깐 살펴보세. 악한의 수효에 대하여 그가 발표한 억측은 파리의 저명한 해부학자들 모두에게 부당하고 전혀 근거가 없는 노릇이라고 당연한 비웃음을 샀다는 사실을 말해 둘 필요가 있네. 사건이 억측된 것과 같지 않았는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억측 그 자체에 어떠한 근거도 없었다는 것이지-다른 추측을 내릴 만한 근거도 충분치 않았을까?
그러면 이번에는 여러 가지 격투의 흔적에 대하여 생각해 보세. 이 흔적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상상되나? 한 패거리의 무뢰한들일까? 혹시 무뢰한의 무리가 없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어떤 격투가 벌어졌다는 걸까-여기저기에 흔적들을 남길 정도로 오랫동안 맹렬한 격투가 벌어졌다니, 약하고 저항할 건더기도 없는 아가씨와, 상상되는 것과 같은 무뢰한의 패거리와의 사이에 말일세, 두어 명의 억센 팔로 꽉 죄면 그것으로 만사는 끝나 버리고 말지. 희생자는 그들 마음대로 조용해졌겠지. 그 수풀이 범행 현장이 아니라는 주장은 무엇보다도 두 사람 이상에 의하여 행해진 흉행의 현장이 아니라는 의견일 때만 말할 수 있다네. 범인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상상하는 경우 분명한 흔적을 남길 정도로 맹렬한 격투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네. 그 경우에만 한하여 생각되는 것이야.
그리고 다시 말하면 내가 이미 말한 것처럼 예의 물건들이 발견된 그 수풀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 매우 이상스럽지. 이러한 범죄의 증거가 그 발견 장소에 우연히 남아 있었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네. 범인은 시체를 운반할 만한 침착성(추측컨대)이 있었어. 그런데 시체 그 자체(이것은 부패 때문에 특징이 빨리 사라져 버릴지 모르나)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흉행 현장에 여봐란 듯이 그대로 남아 있군-내가 말하는 것은 피해자의 이름이 씌어진 손수건이라네. 만일 그것이 실수였다고 하면 그것은 무뢰한 패거리들의 실수가 아니지. 누군가 한 사람의 실수라고 밖엔 생각되지 않아. 자네 알겠나? 한 사람이 살인을 했다고 하세. 범인은 자기 혼자 죽은 사람의 유령을 마주하고 있네. 목전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된 시체에게 위협을 받는다, 난폭한 감정은 가라앉고, 그 다음으로 자신이 범한 행위에 대한 자연적인 공포심의 틈이 크게 벌어지네. 동료가 있었다면 필연적으로 생길지 모를 그런 자신만만한 기분에는 미치지 못하지. 다만 혼자서 죽은 자와 마주하고 있는 거야. 몸이 덜덜 떨리고 허둥거리게 되지. 그러나 시체는 처치해야 한다. 그래서 시체만을 강까지 운반해 가서, 범죄의 딴 증거는 뒤에 남겨 둔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단번에 갖고 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나 곤란할 것이고, 남겨 놓은 것을 가지러 되돌아온다는 것은 간단하기 때문이지. 그렇지만 강까지 가는 도중에 마음속의 공포가 더욱 커지지. 길가의 여기저기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누군지 이쪽을 향한 사람의 발소리가 몇 번이고 들린다. 아니, 그런 생각이 든다. 거리 쪽에서 보이는 등불조차도 공포를 안겨준다. 공포 때문에 몇 번이고 다시 멈춰서곤 하면서 이윽고 물가에 도착하여 무서운 짐을 처치한다. 어쩌면 보트를 이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이 외톨이 살인자가 그 힘드는 길을 되돌아서서 피도 얼어붙을 것 같은 기억뿐인 수풀 속으로 다시 갈 수 있겠나? 그런 힘을 가진 작자가 이 세상에 있겠나? 아무리 값나가는 보물로 유혹한다 하여도, 어떤 보복의 협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이 가능할까? 결과야 어찌 되든 범인은 되돌아가지 않네. 되돌아가려고 생각했더라도 못하지. 다만 재빨리 도망칠 것밖엔 생각지 않네. 두렵기만 한 관목의 수풀에는 영원히 등을 돌려대고 마치 닥쳐올 천벌을 면할 수 있는 것처럼 그냥 도망쳐 버리는 거야.
그러나 무뢰한들의 패거리의 경우라면 어떻겠나? 그들의 수효가 배짱을 내밀게 하겠지. 설사 속으로는 자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더욱이 상상되는 무리들은 잔악한 자들 뿐이야. 말하자면 그들의 수효가 한 사람을 마비시킬 것이라고 내가 상상했던 것 같은 그 이유 없는 압도적인 공포심을 막아 줄 거야. 한 사람,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실수를 네 번째 녀석이 척 보기 좋게 처리해 줄 테지. 그래서 뒤에는 무엇 하나 남기지 않았을 거야. 또 수효가 갖춰져 있으니, 단번에 무엇이든간에 운반할 수 있고 되돌아올 필요조차 없었을 거야.
자아, 그러면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입고 있던 겉옷은, '아랫도리 쪽에서 허리께까지 1피트 정도의 너비로 찢겼으나, 아주 떨어져 나가진 않았다. 그것으로 허리를 세 번 감아서 등판에서 일종의 코를 지어 고리짓듯이 묶었다'고 하는 형편을 생각해 보게나. 이것은 분명 시체를 나르는 데 손잡이로 쓰려는 목적이었네. 그러나 사람이 여럿 있었다면 설마 이러한 방법을 생각해 냈겠나. 서너 사람이 있었다면 시체의 수족을 잡으면 충분할 것이고 또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그러니까 이런 계획은 한 사람의 경우이지.
그러면 이제 그 '수풀과 강 사이에 있던 나무 울타리들이 부서졌고 땅바닥에는 무엇인가 무거운 것을 끌고 간 흔적이 눈에 띄었다'고 씌어져 있는 것을 돌이켜 보세. 사람이 여럿이라면 어떤 울타리라도 쉽사리 넘길 수 있을 것인데, 일부러 울타리를 부수고 끌고 갈 정도로 부질없는 수고를 하였겠느냐는 거야. 도대체 사람의 여럿인데 끌고 간 흔적이 확실히 남을 정도로 끌고 갔겠느냔 말일세.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그 '르 꼬메르시엘' 지의 기사를 살필 필요가 있네. 내가 이미 어느 정도 캐보았던 그 의견 말이야. 그 신문이 언급하기로는, '불행한 아가씨의 속치마는 찢겨져 머리 뒤쪽에서 돌려 턱 아래에서 묶였는데, 이는 아마도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런 짓은 손수건을 갖지 않은 자의 소행이다'라고 했군.
진짜 악당들은 결코 손수건을 안 가지고 다니는 일이 없다고 내가 이미 말했지. 그런데 지금 내가 특히 말하고 싶은 건 그것이 아니야. 이렇게 턱에 헝겊 조각을 둘러 감은 것은 '르 꼬메르시엘'지가 상상한 것 같은 목적에 쓰기 위한 손수건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 아니야. 수풀에는 손수건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으로도 그것은 확실해. 또한 그런 목적에 더욱 적당한 것을 사용하지 않고 굳이 이 헝겊 조각을 돌로 감았다는 것 자체가, 그 목적이 '비명을 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 그런데 증언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이 헝겊 조각은 '목둘레를 느슨하게 감았고, 꼭 매듭이 져있었다'고 했지. 그 말은 퍽 막연하기는 하지만, '르 꼬메르시엘'지의 주장과는 큰 차이가 있군. 헝겊 조각은 너비 18인치로 모슬린 옷감인데 서로 잡는다든가 꼬든가 하면 질긴 끈이 될 수 있다네. 또한 발견됐을 때는 그런 식으로 꼬여 있었지. 내 추측은 이렇다네. 오직 한 사람의 범인이 시체의 몸 둘레에다 헝겊 끈을 감아서(수풀에서인지, 어딘지 다른 곳으로부터) 어느 지점까지 운반한 다음, 이런 식으로는 너무 무거워서 제 스스로는 감당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야. 그리하여 이번에는 시체를 끌고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지-사실 시체가 끌렸다는 것은 증언 그대로야.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무언가 밧줄 같은 것을 시체의 어느 한 끝에 감지 않으면 안되지. 그러니 목둘레에다 감는 것이 제일 좋았지, 머리가 걸려서 끈이 빠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범인이 당장 생각한 것이 두말할 것도 없이 허리 둘레에 감았던 띠였지. 그것은 시체를 동여맨 데다가 풀기 어렵게 코를 져 매듭지었기 때문에 옷에서 찢어낼 수가 없었으므로 그만두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그 띠를 반드시 사용했을 거야. 그러나 그것을 찢어내어 목에다 꼭 감아서 시체를 강까지 끌고 간 것이야. 여하튼 만들기가 힘드는 데다가 시간이 걸리고 또한 별로 쓸모조차 없는 이 띠가 사용됐다는 것은, 손수건이 수중에 없을 때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네-곧 우리가 상상했던 것처럼 수풀 속에서 나와(그 현장이 수풀이었다고 하고) 수풀과 강 사이의 길에서 그런 일이 생겼던 것이야.
그러나 자네는 말하겠지! 그 들뤼크 부인의 증언으로는 살인이 생겼을 무렵에 수풀 근처에는 무뢰한의 패거리가 있었다고 지적하지 않았느냐고 말이야. 하기야 나도 그것을 인정하지. 그렇지만 들뤼크 부인이 지적한 것 같은 무뢰한의 패거리들이라면, 비극이 감행된 시간이나 아니면 거의 그 무렵에 룰르 관문 근처에는 10여 명의 무뢰한들이 있지 않았었나. 그러나 어느 정도 때가 늦고 게다가 의심스러운 게 들뤼크 부인의 증언 역시 의심스럽지. 이 부인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무뢰한 패거리들은 이 정직하고도 조심스런 늙은 부인의 말을 빌자면 자기 가게의 음식이랑 술을 막 먹어치우고서도 돈을 치르지 않은 작자들이지. 그 때문에 '이 녀석들 맛 좀 봐라' 하고 벼른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들뤼크 부인의 정확한 증언이란 무엇이겠나? '한 패거리의 무뢰한들이 찾아와서, 소란을 피우면서 마시고 먹고 하다가는 돈도 치르지 않고, 먼젓번의 젊은이와 아가씨가 간 곳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는데, 해질 무렵에 다시 선술집에 돌아와서는 몹시 서두르는 모습으로 다시 강을 건너갔다'고 말했군 그래.
그런데 '몹시 서둘렀다'고 하는 것은, 들뤼크 부인의 눈에 비치기를 매우 서두르는 것으로 보였을 걸세. 왜냐하면 들뤼크 부인의 처지로는, 어수선하게 먹고 마시고 한 음식이며 술에 대하여 원망스럽게 여기면서-아직도 초조하게 값을 받아내야 되겠다는 가냘픈 기대를 갖고 있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해질 무렵이었다고 말한 이상, 굳이 서두르는 모습이었다고 강조할 필요가 어디 있겠나. 더구나 큰 강을 작은 배로 건너야 하는데 폭풍우가 올 것 같고 밤은 밀려오는 때였으니, 아무리 무뢰한이라고 해도 귀가를 서두른다는 것이 무언가 이상스럽다고 하지 않겠나.
밤이 밀려오게 되었다고 내가 말한 것은 아직 왔다는 것이 아니야. 들뤼크 부인의 소박한 눈에 비친 이 악당들이 꼴사납게 서두른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네. 그러나 들뤼크 부인의 큰아들이 '선술집 근처에서 여자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고 한 것은 그날 밤이었다고 알려지고 있네. 그런데 비명이 들린 밤의 그 시간을, 들뤼크 부인은 어떻게 말했던가? '아주 깜깜해지자마자 곧'이라고 말했군 그래. 그런데 '아주 깜깜해지자마자 곧'이라는 말은 적어도 깜깜해진 것을 가리키지. 그러나 '해질 무렵'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아직 밝다는 것이야. 그러니까 들뤼크 부인이 비명을 들었을 때보다 앞서 무뢰한들은 룰르 관문을 떠나 버렸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지. 그리고 이 증언을 알린 모든 기록에서 이런 상대적인 말이 지금 내가 말한 것 같이 늘 분명히 사용됐지만 여태까지 신문들도 경찰관들도 이 커다란 차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군.
무뢰한들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주장에다 내가 한 가지 더 말해 두겠네. 그런데 이 한 가지라는 것은 적어도 내 생각에는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것이야. 막대한 현상금이 걸려 있는가 하면, 공범을 고발하는 자에게는 무죄 석방을 시켜 준다고 했으니, 비겁한 악한의 패거리 중에서나 아니면 또 다른 패거리들 중에서 누구든지간에 그 공범자를 밀고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지. 이런 경우에 패거리의 한 놈 한 놈이 저마다 현상금을 탐내거나 도망칠 생각에 빠진다기보다는 오히려 제 패거리들에게 배신당할 것을 두려워하게 되지. 저 자신의 배신당하기 전에 먼저 딴 녀석을 배신해 버리는 것이야. 비밀이 아직 누설되지 않았다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비밀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증거야. 이 흉악 범죄의 놀라운 내용은 오직 한 사람, 아니면 두 놈의 살아 있는 인간과 하느님만이 알고 있을 뿐이야.
자아, 그러면 지금까지의 불충분하지만 우리의 오랜 분석에 대한 몇 가지 성과를 간추려 보세나. 우리는 들뤼크 부인의 집에선가 아니면 룰르 관문의 수풀 속에서, 피해자의 애인이든지 또는 아무도 모를 친한 사람에 의하여 살인이 빚어졌다는 판단에 이르렀네. 이 친한 사람이란 얼굴이 거무튀튀한 사나이라네. 그 안색, 띠로 코를 지어 매듭진 점, 거기다 모자의 끈이 선원의 매듭짓는 솜씨였다는 점에서 선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쾌활하긴 했으나 천박하지 않은 아가씨였던 피해자와 그가 사귈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사나이가 선원보다는 신분이 높은 존재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네. 그 점이란, 신문사에 그가 지급으로 보낸 투서가 명문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단단히 뒷받침해 주고 있네. 그리고 '르 메르퀴르' 지에 실린 첫 번째의 도망질 사건에서 불행한 아가씨를 죄 속에 빠뜨린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그 '해군 사관'이, 이 선원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한다네.
그런데 여기서, 이 안색이 거무튀튀한 사나이가 그 다음 계속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장 적절하지. 이 사람이 안색이 거무튀튀하다는 것을 특히 지적하고 싶네. 보통 정도로 거무튀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마부인 발랑스나 들뤼크 부인이 기억하는 것이 바로 그 한가지 점이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자취를 감추었을까? 악한들에게 살해되었나? 그렇다면 어째서 피살된 아가씨의 흔적만이 남았지? 두 가지의 흉행 현장은 당연히 동일한 곳으로 생각되네. 그렇다면 남자의 시체는 어디로 갔나? 가해자는 틀림없이 어느 시체이건 똑같은 방법으로 처치했을 텐데. 그렇지만 이 녀석은 살아 있어. 살인죄를 뒤집어 쓸 것이 두려워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런 걱정이 지금에 와서-사건 발생 후 한참 뒤인 지금에서야 생길 수도 있지. 자기가 마리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이 나타났으니까. 그러나 사건이 보도된 초반기에는 그런 걱정도 없었겠지. 결백한 인간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사건을 알리고, 악당을 찾아내는 데 협력하는 일이라네. 이러한 방법을 모를 리는 없겠지. 그 녀석은 아가씨와 함께 있던 것을 들켰지. 지붕 없는 나룻배로 아가씨와 함께 강을 건너간 거야. 범인을 찾아내는 것이 자기가 혐의를 벗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 정도는 아무리 바보라도 알 수 있는 노릇이었을 테지. 그 숙명적인 일요일 밤, 이 작자가 결백하고 동시에 범죄가 저질러진 것을 몰랐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네. 그러나 그런 사정이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이 작자가 살아 있으면서 범인을 찾아내려 하지 않았다고 상상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
이쯤 되면 우리가 진상을 파악할 방법은 무엇이겠나? 얘기를 진행하는 동안에 그 방법이 쉽게 나타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일세. 그렇다면 우리는 첫 번째 도망질에 대하여 철저하게 파헤쳐 보세. 그 '해군 사관'의 자세한 경력과 현재의 경우와, 그리고 살인이 발생했을 때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내 보세. 악당 패거리들에겐 대신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석간 신문에다 보낸 여러 가지 투서를 비교하여 알아보지 않겠나. 그것을 끝내면, 이 투서와 그 이전에 조간 신문에 보낸, 므네가 유죄라고 끈덕지게 주장하는 투서와 문체, 그리고 필적을 비교해 보세. 그리고 들뤼크 부인과 부인의 자식들, 또 합승 마차의 마부인 발라스한테 거듭 물어 보고, '거무튀튀한 안색의 사나이'의 모습이나 태도에 대하여도 무엇인가 좀 알아내도록 노력해 보세. 재주껏 물어 본다면 그들에게서 특수한 점(혹은 그 이외의 것)에 대한 정보-이 사람들이 알 만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정보-를 반드시 캐낼 수 있을 것이야. 그러고 나서 시체가 발견되기 얼마 전인 6월 23일 월요일 아침, 나룻배 선원이 발견한 그 보트의 행방을 찾아 나서기로 하세. 시체가 발견되기 직전에 키도 없이, 관리인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선박 관리소에서 없어져 버린 그 보트 말이야. 되도록 조심조심 끈기 있게 한다면 반드시 이 보트의 행방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보트라면 그것을 발견한 나룻배 선원이 가려낼 수 있을뿐더러, 더구나 키를 수중에 보관하고 있으니 말일세. 보트의 키를 내버려 둔 것이 수상할 뿐만 아니라 또한 침착한 사람의 소행이 아니기 때문일세. 그런데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을 갖고 싶네. 이 보트를 습득했다고 하는 광고가 나와 있지를 않잖아. 그러니까 소리도 없이 선박 관리소에 끌러갔고 다시 소리도 없이 없어져 버리고 만 것이야. 그러나 보트의 임자나 아니면 고용인이-그 사람은 월요일에 그 보트가 있었던 장소를, 광고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화요일 아침에 알 수 있었을까. 그 사람은 해군과 어떤 관계가-해군하고 사소한 일, 매우 세부적인 소식까지도 알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상상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나는 한 사람의 범인이 시체를 강가에까지 끌고 가는 일을 말했을 때, 어쩌면 보트를 이용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마리 로제의 시체는 사실 보트 위에서 내던진 것이라고 말해도 좋겠지. 응당 그랬을 것일세. 시체를 강기슭에 가까운 얕은 곳에다가 처넣을 까닭은 없으니까. 피해자의 어깨와 등에 독특한 상처가 있었던 것은, 보트 바닥의 목재에 긁혔다는 것을 말해 준다네. 시체에 추를 달지 않은 것도 그런 생각을 한층 더 짙게 해주는군. 기슭에서 내던졌다면 반드시 추를 달았겠지. 추를 달지 않은 것은 보트를 띄우기 전에 범인이 추를 준비하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겠지. 시체를 물 속에 내던지려고 했을 때, 물론 범인은 스스로가 경솔한 것을 깨달았을 거야. 그러나 그때는 당장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지. 저 저주스러운 기슭으로 다시 돌아가기보다는 어떤 위험도 달게 받겠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소름 끼치는 짐을 내동댕이치고는 범인은 거리 쪽으로 허겁지겁 저었을 거야. 그러고는 아무데든 사람 눈에 띄지 않는 나루터에서 뭍으로 올라섰겠지. 그러나 보트로 치면-그걸 매두었겠나? 너무나 허둥거리는 바람에 보트를 매둔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 할 노릇이지. 더욱이 나루터에다 보트를 매두는 것을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그곳에 남기는 것처럼 생각했을 거야. 범인이 응당 생각한 것은 범죄와 관련이 있는 것을 깡그리 자기한테서 멀리 떼어놓으려 한 것이지. 자기가 나루터에서 도망을 쳤을 뿐 아니라 보트를 그곳에 그대로 놓아두지도 않았을 거야. 어김없이 보트가 떠내려가는 대로 내버려둔 것일 거야. 상상를 더 계속 하세나. 이튿날 아침 이 녀석은 자기가 매일처럼 나가는 곳, 직무상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서 그 보트가 매여 있는 것을 발견하자 더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힌 거야. 그날 밤으로 키가 달려 있는지 없는지 분간할 여유도 없이 그 녀석은 보트를 옮겨버린 거야. 그렇다면 지금 그 보트는 어디 있겠나.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을 먼저 찾아내기로 하세. 일단 그 보트를 우리가 발견한다면 그와 동시에 성공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이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이 보트는 우리의 앞장을 서서, 그 비극의 안식일 한밤중에 보트를 부렸던 작자를 들춰내 줄 것이 틀림없지. 그리하여 확증과 확증이 겹치고 겹쳐 살인자는 마침내 덜미를 잡히게 될 것이야."
"자세히 말하지 않더라도 독자 여러분이 이미 잘 알 것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갖고 있는 원고 중에서 뒤팡이 입수한 자세한 단서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을 엮은 부분을 생략했다. 단, 기대했던 결과는 실현됐고 경시총감은 뒤팡과의 계약 조항을 본의는 아니었으나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간단하게나마 전해 두는 바이다. 포오 씨의 소설은 다음과 같은 그로 끝을 맺는다 - 편집주(이 소설을 최초로 발표한 지의 편집주)"
나는 우연의 일치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지 그 이상의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독자는 양해해 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한 것으로 충분하다. 내 마음에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신앙이 없다. 자연과 그의 신은 엄청나게 다르리라는 것은 사색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정하지 않으리라. 자연을 창조한 신은, 뜻대로 자연을 지배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뜻대로'라고 한 것은, 왜냐하면 의지의 문제이며, 광적인 논리로 생각하는 것 같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 스스로의 법칙을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고,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신에 대한 모독이다. 신의 법칙은 그것이 만들어진 때부터 미래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우연을 포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신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현재'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지금까지의 일은 모두 우연의 일치로서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우리가 알고 있는 한 불행한 메리 세실리아로 저스(이 소설의 배경이 된 실제 살인 사건-뉴우요오크에서 일어났으며 사건의 전모가 마리 로제 건과 흡사하나, 이 소설이 발표된 1824년 11월 당시엔 해결되지 못했음-의 주인공)의 운명과 마리 로제 같은 아가씨의 그 경력의 어떤 시기까지의 운명과는 일종의 평행을 보여 주고 있고, 그 이상할 정도로 정확한 평행선은 이성으로도 분간키 힘든 노릇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납득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억측을 해서는 안 된다. 즉 마리의 불행한 얘기를 지금 말하는 시기로부터 다시 거슬러 올라가, 그녀에 얽힌 수수께끼를 결말짓기 위하여 내가 평행선을 한층 더 연장하는 것을 몰래 의도하고 있다고 여겨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 여점원의 살해자를 발견하기 위하여 파리에서 채택된 방법이거나 아니면 똑같은 추리 방법에 입각하여 모름지기 똑같은 결과가 생긴다고 말하려 하고 있다고 여겨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후자의 가정에 대하여 생각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두 가지 사건의 사실에는 아주 보잘것없는 차이가 있으나 그것이 양자의 방향을 철저하게 바꾸게 되고, 끝내는 아주 중대한 오산을 저지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치 산술에 있어서 그것 그 자체는 보잘 것 없는 오산이지만, 계산의 전과정에서 몇 번이고 거듭 반복하여 마지막에는 사실과 엄청나게 틀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똑같은 노릇이다. 그리고 또한 전자의 가정에 있어서는 이미 내가 말한 확률론 그 자체가 평행선을 연장한다고 말한 사실을 상기해서도 안 된다. - 평행선이 아주 길게, 정확하게 뻗쳐 있는 것만큼 비례하는 그런 단호한 절대성을 가지고 그것을 금하는 바이다.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수학적이라고 할 수 없는 사고력에 호소하는 듯하나, 그러나 수학자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력에 호소하는 듯하나, 그러나 수학자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변칙적 명제의 하나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주사위 놀이에서 6이 두 번 연거푸 나왔을 경우, 세 번째는 그렇게 나오지 않을 거라고 내기를 걸어도 염려가 없을 정도로 충분한 이유가 되겠으나, 그것만큼 일반 독자에게 납득시키기 어려운 일은 없다. 이러한 암시는 흔히 이지에 의하여 당장 배척되어 버린다. 처음에 주사위를 두 번 던진 것은 이미 끝난 일이고 지금으로서는 전혀 과거의 일이나, 미래에 속하는 다음번 주사위가 나올 것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지는 못한다. 6이 나온다는 확률은 여느 때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곧 다른 여러 가지 경우도 주사위를 던졌을 때와 똑같은 힘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것을 반박하려고 한다면 고분고분 수긍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웃음을 사기가 쉽다. 여기에 내포된 오류-해를 끼치기 쉬운 커다란 오류-를, 지금과 같이 한정된 지면에서는 지적할 수가 없다. 또 현명한 사람들에겐 굳이 지적할 필요조차 없다. 여기서는 이 오류가, 사소한 하나 하나로부터 진리를 찾고자 하는 경향 때문에 이성의 진로 위에서 생기는 숱한 오류 중의 하나라고 말하면 족할는지 모르겠다.
풀 사이드 - 무라카미 하루키
35세가 되던 봄, 그는 자신이 이미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버린 것을 확인했다. 아니,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35세의 봄을 계기로 그는 인생의 반환점을 돌기로 결심했다고 하는 것이 적합하리라.
물론 자신의 인생이 몇 년간이나 계속 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만약 78세까지 산다고 한다면 그의 인생의 반환점은 39세가 되는 셈이고 39세가 되려면 아직 4년의 여유가 있다. 게다가 일본 남성의 평균 수명과 그 자신의 건강 상태를 함께 생각한다면 78년의 수명은 그다지 낙천적인 가설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35세의 생일을 자기 인생의 반환점으로 정하는 것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도 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면 죽음을 조금씩 멀리 물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계속하다 보면 나는 아마 명확한 인생의 반환점을 놓쳐 버릴 것임에 틀림없다.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수명이 78에서 80으로 되고, 80에서 82로 되고, 82에서 84로 된다. 그런 식으로 인생은 조금씩 조금씩 연기되어 간다. 그리고 어느 날 사람은 자신이 벌써 50세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50이라는 나이는 반환점으로는 너무 늦다. 100세까지 산 인간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된단 말인가?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의 반환점을 잃어가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스무살을 넘었을 때부터, 그는 계속 그 '반환'이라는 사고 방식이 자신의 인생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인 것처럼 느껴왔다.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서 있는 장소의 위치를 우선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사고 방식의 기본이었다.
혹은 그런 사고 방식에는 그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십 년 가까이를 톱 클래스의 수영 선수로서 보냈다는 사실도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수영이라는 스포츠에는 확실히 단락이 필요했다. 손가락이 풀의 벽에 닿는다. 그것과 동시에 그는 돌고래같이 수중에서 몸을 놀려 순간적으로 몸의 방향을 바꾸고 발바닥으로 힘껏 벽을 친다. 그리고 후반 200미터로 돌입한다. 그것이 턴이다.
만약 수영 경기에 턴이 없고 거리 표시도 없다면, 400미터를 끝까지 전력으로 헤엄치는 작업은 어떻게 할 길이 없는 암흑의 지옥임에 틀림없다. 턴이 있어야만 그는 400미터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적어도 반이 끝났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또 반--이라는 식으로 긴 거리는 점점 세분화되어 간다. 거리의 세분화에 맞추어 의지도 또 세분화된다. 즉 '아무튼 이 다음 5미터를 헤엄쳐 버리자'라는 식이다. 5미터를 헤엄치면 400미터의 거리는 80분의 1이 줄어드는 셈이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그는 물 속에서 때로는 구토하고 살을 경련시키면서도 마지막 50미터를 전력으로 헤엄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선수들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품고 풀을 왕복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그 분할 방식이 가장 성미에 맞았고, 또 가장 진지한 사고 방식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사물이 아무리 거대하게 보이고 그것에 마주서는 자신의 의지가 아무리 미소하게 보여도, 그것을 '5미터만큼'씩 정리해 나가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는 50미터 풀 속에서 배웠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형식을 가진 인식이다.
그래서 35회째의 생일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그는 그것을 자신의 인생의 반환점으로 삼는 것에 전혀 망설임을 느끼지 않았다. 겁낼 것은 무엇 하나 없다. 70년의 반인 35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만약에 70년을 넘게 살 수 있다면 그건 그대로 고맙게 살면 된다. 그러나 공식으로는 그의 인생은 70년인 것이다. 70년을 풀 스피드로 헤엄친다-그렇게 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나는 인생을 그럭저럭 잘 헤쳐 나갈 수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것으로 반이 끝난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한다.
1983년 3월 26일은 그의 35번째 생일이었다. 아내는 그에게 초록색 캐시미어 스웨터를 선물했다. 날이 저물자 두 사람은 아오야마에 있는 자주 가는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을 따고 생선 요리를 먹었다. 그리고 그 후 조용한 바에서 진토닉을 세 잔인가 네 잔씩 마셨다. 그는 '반환점'의 결심에 대해 아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한 종류의 사고 방식은 타인의 눈에는 종종 바보처럼 비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섹스를 했다. 그가 샤워를 끝내고 부엌으로 가서 캔맥주를 갖고 침실로 돌아오자 아내는 벌써 잠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넥타이와 양복을 옷장에 걸고 아내의 실크 원피스는 살짝 접어서 책상 위에 놓았다. 셔츠와 스타킹은 둥글게 말아서 욕실의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혼자 맥주를 마시고 한동안 아내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1월에 갓 서른이 되었다. 그녀는 아직 분수령의 저쪽 편에 있다. 그는 이미 분수령의 이쪽 편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나머지 맥주를 다 마신 후, 머리 뒤로 팔짱을 끼고 소리내지 않고 웃었다.
물론 정정은 가능했다. 인생은 80년이라고 새삼스레 결정해 버리면 된다. 그렇게 하면 터닝 포인트는 40세가 되고 나머지 5년 간 그는 저쪽 편에 머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답은 노였다. 그는 35세를 계기로 이미 터닝 포인트를 돌아 버린 것이다. 그것으로 됐잖은가? 그는 부엌에 가서 맥주를 또 한 병을 마셨다. 그리고 거실의 스테레오 장치 앞에 엎드려 헤드폰을 끼고 심야 2시까지 브루크너의 심포니를 들었다. 밤중에 혼자서 브루크너의 장대한 심포니를 들을 때마다 그는 언제나 어떤 종류의 얄궂은 기쁨을 느꼈다. 그것은 음악 속에서밖에 느낄 수 없는 기묘한 기쁨이었다. 시간과 에너지와 재능의 장대한 소모--.
미리 말해 두고 싶은 건데,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나에게 이야기한 대로 여기에 적고 있다. 물론 어떤 종류의 문장적 각색은 있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독단적으로 생략했다. 내 쪽에서 질문을 해서 자세한 부분을 보충한 곳도 있다. 아주 조금이지만 내 상상력을 구사한 곳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 문장은 그가 이야기한 대로라고 생각해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야기 태도는 정확하고 요령이 있었고, 그렇게 해야 할 부분에서는 상황을 극명하게 묘사할 줄도 알았다. 그는 그런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는 어느 회원제 스포츠 클럽의 풀 사이드에 있는 카페 테라스에서 나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생일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는 7시에 깨어나서는 물을 끓이고 뜨거운 커피를 타고 서양 상추와 오이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드물게도 아내는 아직 푹 자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음악을 들으며 수영부 시절에 단련된 꽤 힘든 체조를 15분 동안 열심히 했다.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수염을 깎는다. 그리고 긴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이를 닦는다. 치약은 조금 짜서 이빨 하나 하나의 앞과 뒤에 천천히 칫솔질을 한다. 이빨 사이의 더러운 것은 덴탈 플러스를 사용한다. 세면장에는 그의 것만 세 종류의 칫솔이 놓여 있다. 특정한 자국이 안 생기도록 로테이션을 하면서 한 번씩 나누어 쓰는 것이다.
그런 아침 의식을 대강 마치고 나서 그는 언제나처럼 근처에 산책은 가지 않고 탈의실 벽에 붙은 키만한 거울 앞에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서 자신의 몸을 가만히 점검해 보았다. 어쨌든 그것은 후반의 인생에 있어 첫 번째 아침인 것이다. 그는 마치 의사가 신생아의 몸을 조사하듯 이상한 감동을 가지고 자신의 몸 구석구석까지 바라보았다.
우선 머리카락 그리고 얼굴 피부, 이빨, 턱, 손, 배, 옆구리, 페니스, 고환, 허벅지, 발. 그는 긴 시간을 들여 그 하나 하나를 체크하고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머리 속 리스트에 메모했다. 머리카락은 이십대에 비해서 어느 정도 엷어졌지만 아직 특별히 신경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50까지는 아마 이대로 계속되겠지. 그 뒤는 그 후에 다시 생각하면 된다. 가발도 좋은 것이 많이 있고, 나 같은 경우는 머리 형태가 나쁘지 않으니까 벗겨진다 해도 그 정도로 보기 싫은 모습은 안 될 것이다. 이빨은 젊었을 때부터의 숙명적인 충치 때문에 상당수의 의치가 들어 있다. 그러나 3년 전부터 정성스레 칫솔질을 계속하고 있는 덕택으로 진행은 딱 멈추었다. "20년 전부터 이렇게 했으면 충치 따위는 하나도 없는 건데 말입니다"라고 치과 의사는 말한다. 과연 옳은 말이지만, 끝난 일은 한탄해 봐도 소용없다. 현상을 유지하는 것,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전부다. 그는 치과 의사에게 도대체 몇 살까지 이빨로 음식을 씹을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60까지는 괜찮겠죠"라고 의사는 말했다. "이렇듯 제대로 손질을 하신다면야." 그것으로 충분하다.
얼굴 피부의 거친 상태는 역시 나이에 걸맞는 것이다. 혈색은 좋아서 언뜻 보기에는 젊게 보이지만 거울에 가만히 다가가 보면 피부에는 미세하게 오돌오돌한 것이 나 있었다. 매년 여름이 되면 꽤 무리하게 살을 태웠고 담배도 오랫동안 너무 많이 피워 왔다. 앞으로는 질 좋은 로션이나 스킨이 필요했다. 턱살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붙어 있었다. 이것은 유전적인 것이다. 아무리 운동을 해서 턱살을 깎아도 얇게 눈이 쌓인 것처럼 보이는 이 연한 살 껍질만은 절대로 떼어낼 수가 없다. 나이가 듦에 따라 이것은 결정적이 된다. 그리고 나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이중턱이 되겠지.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배에 대해서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6대 4 정도였다. 운동과 계획적인 식사 덕택에 3년 전에 비해 배는 유난히 단단히 죄어져 있었다. 35세치고는 상당한 것이다. 그러나 옆구리에서 등에 걸친 군살은 어중간한 운동으로는 떼어 낼 수 없다. 옆을 보면 학생 시절 마치 칼로 깎은 듯한 허리 뒤의 날카로운 선은 사라져 있었다. 성기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다. 옛날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생생함이 약간 감소한 것 같지만, 그것도 그렇게 생각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섹스 횟수는 물론 옛날만큼 많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임포텐츠의 경험은 없다. 아내와의 사이에서도 성적인 불만은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신장 173센티미터, 체중 64킬로의 그의 몸은 주위에 있는 같은 나이 또래의 남자들의 몸과 비교해 보면,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28세라고 해도 충분히 믿을 정도이다. 육체적인 순발력은 쇠퇴하긴 했지만, 지구력에 한해서 말하면, 그의 육체는 훈련 덕택에 20대 당시보다 진보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의 주의 깊은 눈은 자신의 몸을 천천히 감싸 가는 숙명적인 늙음의 그림자를 놓치지는 않았다. 머리 속의 체크리스트에 확실히 새겨진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밸런스 시트가 무엇보다도 그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아무리 타인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나는 늙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노력해 봤자. 사람은 늙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충치와 마찬가지이다. 노력을 하면 그 진행을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아무리 진행을 늦추어 봤자 늙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들만큼은 들어간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쓰여진 노력의 양에 비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의 양은 적어지고 그리고 이윽고 제로가 된다.
그는 욕실을 나와서 타월로 몸을 닦고 소파에 누워서 오랫동안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방에서는 아내가 다림질을 하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빌리 조엘의 노래에 맞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폐쇄된 철공소에 대한 노래다. 전형적인 일요일 아침이었다. 다리미 냄새와 빌리 조엘과 아침 샤워.
"나이가 드는 것 자체는,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는 그다지 공포라고 할 것도 아니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말이오. 그에 맞서기 어려운 것에 대해서 계속 맞선다고 하는 것은 내 성질에 맞소. 따라서 그런 것은 괴롭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소"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나에게 가장 큰 문제는 더 막연한 거요.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제대로 직면해서 싸울 수 없는 것, 그런 것 말이오."
"왠지 그런 것을 느낀다는 건가요?"라고 나는 물어 보았다.
그는 끄덕였다. "아마 그런 거라고 생각하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테이블 위에서 거북한 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물론 나도 35살이나 된 남자가 다른 사람 앞에서 새삼스레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어리석다는 정도는 알고 있소. 그런 종류의 파악 불능한 요소는 누구의 인생에나 있소. 그렇지 않소?"
"그렇겠죠"라고 나는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말이오, 솔직히 말해, 실제로 이런 식으로 확실히 느낀 건 나로서는 태어나서 처음이오. 즉 자기 자신 속에 이름을 밝히기 어려운 파악 불능의 뭔가가 잠재하고 있다는 걸 느낀 건 말이오. 그래서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무지 모르겠소."
할 말이 없어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는 확실히 혼란에 빠진 듯이 보였지만 그래도 그 혼란된 모습은 혼란된 나름대로 시원스레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듣기로 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도쿄 교외였다. 쇼와 23년 봄, 아직 종전 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형이 한 명에다, 나중에 5살 아래 여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원래 중견 클래스의 부동산업자였지만 후에 중앙선연선을 중심으로 한 빌딩 임대업에 진출해서 60년대의 고도 성장기에 꽤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14살 때 양친이 이혼했는데 복잡한 사정이 있어 아이들은 세 명 다 아버지 집에 머물렀다.
그는 일류 사립 중학교에서 같은 계열의 고등학교에 그리고 대학에 에스컬레이터 식으로 올라갔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자 그는 미타에 있는 부친의 맨션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일주일에 5일은 수영장에서 헤엄치고 나머지 2일을 여자와 데이트하는 걸로 삼았다. 그다지 화려하게 놀아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노는 상대에게 얽매이지도 않았다. 결혼 약속을 당하게 될 정도로 한 여자와 깊이 사귀는 일도 없었다. 대마초도 피웠고 친구가 권해서 데모에 참가한 적도 있었다. 공부라고 할 만한 공부를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강의에만은 출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 정도의 성적을 거둘 수는 있었다. 노트 필기할 시간이 있으면, 그만큼 수업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면 되는 것이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그의 성격을 잘 파악할 수 없었다. 그의 가족도 그의 친구들도 사귀던 여자들도 그랬다. 그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무도 잘 알 수 없었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다지 머리가 좋아 보이지도 않는데, 항상 톱 클래스에 가까운 성적을 받고 있는 것도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그렇게 파악할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천성적인 순수한 친절함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극히 자연스럽게 그의 주위로 끌어들였고, 그 결과로서 그 자신도 실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연장자에게도 잘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대학을 나오자 그는 주위 사람들이 예상하고 있던 일류 기업에는 들어가지 않고 아무도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작은 교재 판매 회사를 취직처로 골랐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 일로 놀랐지만, 그에게는 물론 그 나름대로의 심산이 있었다. 그는 3년 동안 세일즈맨으로서 일본 전체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현장의 교사나 학생들이 하드, 소프트 양면에서 어떤 교재를 구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관찰했다. 각 학교가 얼마만큼의 예산을 교재에 맞추고 있는지도 조사했다. 리베이트(수수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잚은 교사들과 술을 마시며 불평도 들었다. 수업도 열심히 관찰했다. 그 동안 영업 성적도 물론 톱을 지켰다.
입사한 지 3년째의 가을, 그는 새로운 교재에 대해 두꺼운 기획서를 써서 사장실에 제출했다. 비디오 테이프와 컴퓨터를 직결하고 교사와 학생이 공동으로 소프트 제작에 참가하고 하는 획기적인 방식의 교육 시스템이었다. 기술적인 몇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원리적으로 가능할 터였다.
사장이 독단적으로 승낙을 해서 그가 중심이 된 프로젝트팀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그 3년 뒤에 그는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가 만들어 낸 교재 시스템은 값이 비싸기는 했지만 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한번 팔아 버리면 소프트웨어 관련의 애프터캐어로 내버려두어도 그의 회사가 혜택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은 그의 계산대로였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이상적인 규모의 회사였던 것이다. 새로운 시도가 하찮은 관료적인 회의의 연속에서 짓뭉개져 버릴 만큼 큰 회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자본에 얽매일 정도로 작은 회사도 아니었다. 경영진도 젊고 충분히 의욕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실질적으로 중역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연 수입은 같은 나이 또래의 누구보다도 많았다.
스물 아홉의 가을에 그는 2년 전부터 사귀어 온 다섯살 아래의 여성과 결혼했다. 그녀는 깜짝 놀랄 정도의 미인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눈을 끌 정도로는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집안 환경도 좋고 성실하고 무뚝뚝한 데가 없었다. 성격은 솔직하고 매우 근사한 치아를 가지고 있었다. 첫 인상보다도 횟수를 거듭해서 만날 때마다 느낌이 좋아지는 그런 타입의 여성이었다. 그는 결혼을 계기로 아버지 회사에서 요노키자카에 있는 맨션을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샀다.
결혼 생활에도 무엇 하나 문제는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공동 생활은 극히 부드럽게 흘러갔다. 그는 일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녀는 가사를 돌보는 것을 좋아했고, 둘 다 노는 것은 더 좋아했다. 몇 쌍의 친구 부부를 골라 함께 테니스를 치기도 하고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런 친구 부부가 손떼고 싶어하던 중고 MG를 아주 싼 가격으로 손에 넣기도 했다. 신형의 일본차에 비해 차를 검사할 때마다 쓸데없는 돈은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역시 싸게 산 것이었다. 친구 부부 쪽은 아이가 태어나서 두 사람 좌석밖에 없는 MG가 필요 없게 된 것이지만, 그들 두 사람 쪽은 당분간 아이는 낳지 않기로 정하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있어 인생은 이제 막 시작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제 그다지 젊지는 않다, 라고 그가 처음으로 인식한 것은 결혼하고 두 번째 봄이었다. 그는 역시 알몸으로 욕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몸의 선이 옛날과는 아주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모습이었다. 요컨대, 22세까지 수영으로 단련시킨 육체의 유산을 그는 10년 동안에 전부 갉아먹은 것이다. 술, 미식, 도회 생활, 스포츠카, 평온한 섹스, 그리고 운동 부족이 군살이라는 추악한 형태로 그의 육체에 달라붙어 있었다. 앞으로 3년만 있으면, 나는 분명히 추한 중년 남자가 되어 버릴 것이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우선 치과 의사에게 가서 철저한 이빨 치료를 받았고, 그리고 나서 다이어트 컨설턴트와 계약해서 종합적인 다이어트 메뉴를 작성했다. 우선 당분이 삭감되고 백미가 제한되고 지방이 선별되었다. 술은 지나치게만 마시지 않으면 제한은 없었지만, 담배는 열 개비까지로 제한되었다. 육식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고 정해졌다. 원래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광신적이 될 필요는 없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식사할 때는 좋아하는 것을 조금 양에 덜 차게 먹기로 했다. 운동에 관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될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살을 빼기 위해서라면 테니스라든가 골프라든가 볼품 있는 스포츠카는 무의미했다. 하루 20분에서 30분 제대로 된 체조, 그리고 적당한 런닝과 수영, 그것으로 충분했다.
70킬로였던 그의 체중은 8개월 후에는 64킬로까지 줄었다. 듬뿍 쳐져 있던 뱃살이 빠져서 배꼽 모양이 뚜렷이 보이게 되었다. 볼이 홀쭉해지고 어깨 폭이 넓어지고 고환의 위치가 이전보다 조금 낮아졌다. 다리가 굵어지고 입 냄새가 줄었다.
그리고 그는 애인을 만들었다.
상대는 어느 클래식 콘서트에서 옆 좌석에 앉아 알게 된 9살 연하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점이 있었다. 두 사람은 콘서트 후에 술을 마시고 그리고 잤다. 그녀는 독신으로 여행 대리점에 근무하고 있고 그 외에도 남자 친구가 몇 명 있었다. 그 쪽도 그녀 쪽도 서로 이 이상 깊게 사귈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은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콘서트에서 만났고, 그리고 잤다. 아내 쪽은 클래식 음악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온화한 바람피우기는 발각되지 않고 2년 간 계속되었다.
그는 그 정사를 통해 어떤 한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이미 성적으로 무르익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35살치고는 24살의 여자가 원하고 있는 것을 전혀 부족하지 않게 제대로 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는 그것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군살을 빼더라도, 그는 두 번 다시 젊어질 수는 없다.
그는 소파 위에 엎드린 채 그날의 첫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전반의 인생, 즉 35년 분의 저쪽 인생이었다. 그는 원하고 원했던 것의 많은 부분을 손에 넣었다. 노력도 했지만 운도 좋았다. 그는 보람있는 일과 높은 연수입과 행복한 가정과 젊은 연인과 건장한 몸과 초록색 MG와 클래식 레코드의 컬렉션을 가지고 있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대로 소파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생각을 잘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빌리 조엘은 이번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 아내는 아직 다림질을 계속하고 있다. 무엇 하나 모자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양쪽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차례차례 흘러내렸다. 눈물은 그의 볼을 타고 밑으로 떨어져서 소파의 쿠션에 얼룩을 만들었다. 어째서 자신이 울고 있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울 이유 따위는 하나도 없을 터였다. 혹은 그것은 빌리 조엘의 노래 때문인지도 몰랐고, 다리미 냄새 때문일지도 몰랐다.
10분 후 아내가 다림질을 끝내고 그의 옆에 다가왔을 때, 그는 울음을 그치고 있었다. 그리고 쿠션은 뒤로 돌려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옆에 앉아서 손님용 이불을 새로 사고 싶은데, 라고 말했다. 그로서는 손님용 이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기 때문에 당신 좋을 대로하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런 뒤에 두 사람은 긴자로 나가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새 영화를 보았다. 두 사람은 결혼 전에 "야성의 소년"을 같이 본 적이 있었다. 신작은 "야성의 소년"만큼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영화관을 나온 두 사람은 찻집에 들어가 그는 맥주를 마시고 그녀는 멜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레코드 점에 가서 빌리 조엘의 LP를 샀다. 폐쇄된 철공소와 베트남의 노래가 들어 있는 LP이다. 그다지 감탄할 정도의 음악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한 번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지 그는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째서 빌리 조엘의 LP를 살 기분이 되었어요?" 라고 아내가 놀라서 물었다.
그는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카페 테라스의 한쪽 벽은 유리로 되어 있고, 눈 아래로는 풀의 전경이 내려다 보였다. 풀 천장에는 가늘고 긴 천창이 붙어 있고 그곳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수면에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빛들 중 어떤 것은 수저까지 닿고, 어떤 것은 반사해서 무지적인 흰색 벽에 의미 없는 기묘한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자니, 나에게는 그 풀이 조금씩 풀로서의 현실감을 잃어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풀의 물이 너무 맑은 탓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풀의 물이 필요 이상으로 맑은 탓에, 수면과 수정 사이에 공백 부분이 생긴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풀에서는 두 명의 젊은 여자와 한 명의 중년 남자가 헤엄치고 있었는데, 그들은 헤엄을 치고 있다기보다는 마치 그 공백 위를 조용히 미끄러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풀 사이드에는 하얗게 칠해진 감시대가 있고, 체격 좋은 젊은 감시원이 심심한 듯 풀의 수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대강 아야기를 끝내고 손을 들어 웨이트리스를 불러서 맥주를 더 주문했다. 나도 내 몫을 주문했다. 그런 뒤에 맥주가 올 때까지 둘이서 다시 하릴없이 풀의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저에는 코스 로프와 헤엄치는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그와 나는 만난 지 2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이 스포츠 클럽 회원으로 말하자면, 수영 동지인 셈이다. 내가 크롤할 때의 오른팔 움직임을 교정해 준 것도 그였다. 우리는 수영 후, 역시 이 카페 테라스에서 차가운 맥주를 마시면서 몇 번인가 세상사를 이야기했다. 어느 땐가 서로의 직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어, 내가 소설가라고 말하자 그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잠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 자신의 이야기요"라고 그는 말했다. "어느 쪽인가 하면, 평범한 이야기라고 생각되고, 당신은 재미없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야겠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소. 나 혼자 품고 있자니, 언제까지나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오." 상관없다고, 나는 말했다. 그는 재미없는 이야기를 지루하게 해서 상대에게 폐를 끼치는 타입의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일부러 나에게 뭔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 이야기를 했다.
"이봐요, 당신은 소설가로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오? 재미있다고 생각하오? 아니면 지루하다고 생각하오? 솔직하게 말해 주시오."
"재미있는 요소를 포함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라고 나는 주의 깊고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는 미소를 짓고 머리를 몇 번인가 가로저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나로서는 도대체 이 이야기의 어디가 재미있는지 전혀 모르겠소. 나는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어떤 종류의 우스꽝스러움이라고 할 만한 것을 파악할 수가 없소. 그리고 그것이 만약 잘 파악된다면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보다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당신의 말대로겠죠, 아마도." 라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이 이야기의 우스꽝스러움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소?" 라고 그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난 당신 이야기에는 매우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가의 눈을 통해서라고 말해도 좋다면 말이죠. 하지만 도대체 이 이야기의 어디가 재미있느냐 하는 것은 실제로 손을 움직여 원고지에 써 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죠. 내 경우는 문장으로 보지 않으면 여러 가지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거죠."
"당신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알겠소." 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그리고 나서 한동안 잠자코 각자의 맥주를 마셨다. 그는 베이지색의 버튼 다운 셔츠 위에 엷은 초록색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었다. 길쭉하게 잘 빠진 약지에는 은색의 결혼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손가락이 매력적인 아내와 젊은 연인을 애무하고 있는 모습을 잠깐 상상해 보았다.
"그 아야기를 써 봐도 좋을 것 같군요." 라고 나는 말했다. "어쩌면 어딘가에 그것을 발표해 버릴지도 모르겠어요."
"상관없소, 그래도."라고 그는 말했다. "게다가 발표해 주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여자 일이 들켜 버리는데도 말입니까? 그래도 괜찮겠어요?" 라고 나는 말했다. 내 경험에서 말하자면 실재의 인물을 모델로 한 문장은 우선 100퍼센트의 확률로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마련이다.
"괜찮소.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소." 라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들켜도 괜찮다구요?" 라고 나는 다짐하듯 말했다.
그는 끄덕였다.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말이지 좋아하지 않소."라고 그는 헤어질 때 말했다. "그 거짓말이 가령 누구 한 사람 상처 입히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더라도,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소.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속이거나, 이용하거나 하면서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고 싶지는 않소."
나는 거기에 대해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게 옳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풀에서 그와 얼굴을 마주한다. 이제 복잡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풀 사이드에서 날짜 이야기를 하거나 최근의 콘서트 이야기를 하거나 할 뿐이다. 그가 나의 이 문장을 읽고 어떤 식으로 느낄지, 나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다.
개미 귀신 - 이외수
파리의 양쪽 날개를 떼어 내고 텅 빈 운동장 복판에다 놓아 둘 것. 저물녘 기어다닌다는 외로움.
날개를 준비함. 장소는 꽃밭. 시간은 역시 저물녘. 황혈염에 탄산칼륨을 가하여 가열한 다음 얻어 낸 백색의 고체, 청산가리. 그리고 승홍도 약간. 주사기를 사용함. 외로움을 느끼지 말 것. 기타.
삼촌은 단 한 번의 연애에는 비록 실패했었지만, 단 한 번의 자살에서 결국 성공한 사람이었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아마 삼촌만큼 신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도 이 세상에는 드물 것이며, 삼촌만큼 신을 증오해 본 사람도 이 세상에는 드물 것이다.
삼촌은 말더듬이었다.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을 약 십 초 정도 목구멍에다 잔뜩 눌러 놓았다가 갑자기 퇴퇴퇴 뱉아 내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일단 뱉아 낸 뒤에도 순조롭게 말을 진행해 나가는 법이 없었다. 수시로 더듬거리곤 했다. 때문에 삼촌이 아무리 심각한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심각하게 들리지 않았고, 아무리 슬픈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슬프게 들리지가 않았다. 마치 구충제 먹은 뒤의 민촌충처럼 토막이 나서 떠듬떠듬 삼촌의 입 밖으로 뱉아지는 삼촌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그 진실의 반 이상이 이미 목구멍 속에서 삭감되어져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언젠가 삼촌의 아버지로부터 몽둥이로 심하게 매질을 당한 뒤로 생겨난 버릇이라는 거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비극적이 것은 삼촌이 다리를 전다는 사실이었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았던 모양이었다.
목발을 짚고 다닐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눈에 띄게는 절름거리는 편이었다.
게다가 성장 과정도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삼촌의 어머니는 삼촌이 어렸을 때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어디론가 도망쳐 버린 모양이었고, 삼촌은 줄곧 주정뱅이이자 폭군이었던 삼촌의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모양이었다. 삼촌의 얼굴이 유난히 못생기고 키가 유난히 작았던 이유는 혹시 삼촌이 술과 몽둥이에 오래 찌들고 주눅들어 왔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삼촌의 아버지는 삼촌이 말을 더듬기 시작하면서부터 삼 년 뒤엔가에야 완전히 술잔과 몽둥이를 팽개쳤다. 개과천선을 한 것이 아니라 간경화증으로 죽어버린 것이다.
그 동안 여러 가지로 삼촌네를 도와주었던 친척들은 한편으로는 잘 죽었지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언제나 친척들이 자랑삼아 전통으로 간직해 왔던, 동기간으로서의 남다른 협동심을 끝까지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친척들은 다시 얼마간의 돈을 모아서 사석동 변두리에다 조그만 개인 화실 하나를 삼촌에게 꾸며 주었다.
삼촌의 소질을 살려주자는 마음에서였다.
사실 삼촌은 그림에만은 남다른 재질을 갖추고 있던 사람이었다. 혼자 공부해서 관전에도 몇 번 입상을 했던 적마저 있었다. 삼촌은 남들이 신에게서 찾으려 들었던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그림에서 찾아보려고 발버둥쳤던 사람이었다.
삼촌은 친척들이 사석동 변두리에다 꾸며 준 개인 화실에서 두문불출 그림에만 몰두해 있었다. 날마다 영혼의 즙을 짜내어 캔버스 속에다 적시면서 삼촌의 내부에 무겁게 누적되어 있던 어둠을 걷어 내려고 노력했었다.
그렇다. 신이 삼촌에게 내려 준 혜택은 단지 그림에 대한 재질과 정열 그것뿐이었다. 그외의 모든 것은 가혹한 형벌과 쓰라림뿐이었다. 아니다. 신은 또 하나의 혜택을 삼촌에게 내려 준 적이 있기는 있었다. 한 여자로 하여금 삼촌의 그림에 도취케 만들고, 삼촌으로 하여금 그 여자의 모든 것에 도취케 만들어, 마침내는 그 여자가 삼촌의 애를 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일--.
그러나 삼촌이 차라리 한 마리 날개 없는 파리로 태어나게 만들지 않고 다리를 저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만든 것이 신의 첫 번 째 실수였다면, 그 여자로 하여금 삼촌의 그림에 도취케 만들고, 삼촌으로 하여금 그 여자의 모든 것에 도취케 만들어 마침내는 그 여자가 삼촌의 애를 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일은 신의 두 번 째 실수였음에 틀림없다.
그 여자가 삼촌의 화실을 방문한 것은 어느 여름 장마비가 개고 난 뒤의 해질녘이었다. T셔츠에 청바지 차림. 한 쪽 손에는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나른하고 염세적으로 생긴 여자였다.
그 여자의 나른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옳을까. 보는 사람의 세포까지 환각제가 스며든 듯 나른해져서, 차츰 그 여자를 한 번만 가만히 안아 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그 여자의 이상한 분위기를 어떻게 표현해야 옳을까.
"그림-- 좀 구경해도 되나요?"
그 여자는 그렇게 말해 놓고 나서도 잠시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목소리까지 나른한 여자였다. 기우는 서녘 햇빛이 창문으로 비쳐들어 그 여자의 한 쪽 어깨를 치자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비가 갠 뒤였으므로 그 햇빛은 맑고 깨끗해 보였으며, 그 여자는 그 햇빛 속에 금방 나른하게 녹아 없어져 버릴 것 같았다.
"구-- 구경하십시오."
한참만에야 삼촌이 대답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더욱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게 삼촌이었다.
그 여자는 삼촌의 허락이 떨어지자 조그만 이를 드러내고 역시 나른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벽에 걸린 그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삼촌은 주로 폐인 같은 모습을 가진 사람들을 즐겨 그려 왔었다. 이를테면 행려병자, 아편장이, 알콜 중독자, 미치광이 같은 사람들이 작품의 주된 소재였다. 완성된 삼촌의 그런 작품들은 한결같이 만지면 화면 전체에서 썩은 곰팡이가 손가락 끝에 묻어 나거나, 간혹 그 폐인 같은 모습을 가진 사람들의 늑골 사이로 어떤 고통의 신음소리 같은 것이 새어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또 가끔 삼촌은 곤충들의 애벌레를 즐겨 작품소재로 삼아 보기도 했었다. 삼촌은 어둡고 습기 찬 바탕색 위에다 아주 꼼꼼한 필치로 그 곤충들의 애벌레를 한 마리 한 마리씩 그려 넣곤 했었는데, 완성된 후에 보면, 그 곤충들의 애벌레는 마치 부패한 동물들의 시체 속에 득시글거리는 구더기들처럼 화면 속에 가득 들어 차 스물스물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삼촌은 참혹한 자기 자신을 캠버스에다 옮겨 놓고 싶어했었던 것이다.
삼촌은 이제 그 여자가 그림 앞으로 옮겨 다닐 때마다 마치 실기 대회에 나온 중학생이 심사 광경을 엿보고 있을 때처럼 몹시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삼촌이 여자에게 자기 그림을 공개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림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한 번도 삼촌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그냥 오래도록 주의 깊게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어느 그림 앞에선가 현기증을 느낀 듯 이마를 짚으며 비로소 낮게 한 번 비명을 질렀다.
아! 그 그림은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한 폐인의 시체를 그린 것이었다. 어두운 바다 밑, 한 사내가 모래 위에 누워 있었다. 늑골 속이 휑하니 비어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휑하니 비어 있는 늑골 속에 녹슨 칼 한 자루만 놓여 있었다. 머리말에는 시집이 한 권, 빈 술병도 몇 개 쓰러져 있었다. 사내의 야윈 팔이며 다리에는 바다풀이 감겨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바다 밑 저 끝으로도 노을이 감빛 음악처럼 번져서 사내의 영혼을 헐어 주고 있었다.
그 여자는 실내를 한바퀴 다 돌고 나서도 다시 그 그림 앞에서 넋을 잃고 서 있다가, 천천히 삼촌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아직도 어떤 환상에서 미처 깨어나지 못한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기 저 그림 보러 가끔 여기 와도 괜찮겠어요?"
삼촌이 쾌히, 그러나 심하게 말을 더듬으면서 그렇게 해도 좋다고 허락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 후부터 정말로 가끔, 그 여자는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폐인을 보러 삼촌의 화실을 방문하곤 했었다. 차츰 삼촌은 그림보다 그 여자를 기다리는 데 더 많이 신경을 쓰게 되었고, 그 여자가 오지 않는 날은 아무 일도 못한 채 하루에도 몇 번씩 밖을 내다보거나 하루에도 몇 번씩 화실 안을 서성거리게 되었다.
가을이었다. 삼촌은 차츰 밤을 세우는 일이 많아져 갔다. 삼촌은 엉뚱하게도 그 여자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에 몰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삼촌의 그 여자에 대한 사랑이 과연 진실이라면 어떻게 삼촌이 그 진실을 편지 속에 충분히 표현해 넣을 수 있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 여자에게 전달해 줄 수가 있었을 것인가. 본디 진실이란 가슴 안에만 존재하지 가슴 밖으로 나와 버리면 그 본질이 달라져 버리는 법이다. 그리고 그 가슴 안에 있던 진실의 빛깔이 짙으면 짙을수록 그것을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운 법이다. 당연히 아침이 되면 삼촌이 밤을 세워 써 놓았던 그 진실의 껍질들은 잘게 찢겨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그 여자는 대게 사흘에 한 번 정도의 간격으로 삼촌의 화실을 방문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물어도 그 여자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는 절대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
"시시하잖아요. 그런 거 묻지 마세요." 라는 대답으로 곧잘 상대편의 입을 막았다. 삼촌이 알고 있는 그 여자의 신상에 대한 것을 단지 그 여자가 최근 몹시 삼촌의 속을 태우는 존재로 변해 버렸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삼촌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접근하기가 어려운 여자는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여자는 삼촌 앞에 불쑥 끄집어 낸 말 한마디만으로도 대번에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었다.
"삼촌. 내 몸을 가지고 싶으세요?"
그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 말은 하지만 삼촌의 입장으로서는 생애 최초이자 최고의 충격이었고 현기증 나는 말이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삼촌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전신이 마비되어 버린 듯한 표정으로 뻣뻣이 굳어 있다가, 한참만에야 울상을 지으며 겨우, 화이트를 한 통 사야 할 텐데 하고 엉뚱한 소리로 얼버무려 버렸다.
하지만 그날 그 여자가 돌아가고 나서부터는 줄곧 이틀 동안 삼촌은 한잠도 못 잤다. 도대체 그런 말을 서슴치 않고 끄집어낸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여자는 난해하다. 그 어떤 현대 시인의 난해시보다도 난해하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볼 필요는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 여자는 다시 삼촌의 화실에 나타나 주었고, 그날 밤 그 여자는 정말로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남자들은 나를 보면 첫 눈에 내 몸부터 가지고 싶어하죠. 하지만 난 내 몸 따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요. 누구든 가지면 되는 거죠. 그뿐이예요."
삼촌과 그 여자의 사이는 이제 급격히 가까와져 있었다.
삼촌은 오직 그 여자를 기다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같았다. 하루만 못 보아도 안절 부절 못했다. 그 여자가 오지 않는 날, 삼촌이 해 낼 수 있는 일이란 역시 그 창문을 내다보는 일과 화실 안을 서성거리는 일뿐이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 주어야만 비로소 삼촌은 붓을 잡을 수가 있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화실 벽에는 하나 둘 그 여자의 나른하고 염세적인 모습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옷을 입은 모습도 있고, 옷을 벗은 모습도 있었다.
"나도 옛날에는 그림을 무척 열심히 그렸었죠. 그런데 이젠 잘 안 되네요. 누군가가 죽고 나서부터예요. 그 사람 미치광이였어요. 자살 예찬론자."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옛날이라는 것에 대해 이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눈치였다. 그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다가도 문득 입을 다물어 버리고 간단히 마무리를 지어 버리곤 했다.
"앞으로 삼촌을 좋아하려고 노력해 볼께요."
그 여자는 극히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면 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삼촌에게 완전히 맡겨 버리려고 애를 썼다. 삼촌이 원하는 대로 삼촌과 함께 화실에서 자고 가 주곤 했다.
"승홍이라는 게 있어요. 염화제이수은이죠. 조금만 혈관 속에 주사해 넣어도 죽을 수가 있어요."
어느 날 그 여자는 삼촌과 마주 앉아 이렇게 말했다.
"삼촌도 한 번 자살해 보시지 않겠어요?"
그리고 정말 핸드백 속에서 약병 하나와 주사기를 꺼내 보였다.
"저기 책상 위에다 놓아 둘 테니까 필요할 땐 언제든지 사용하세요."
그러나, 삼촌은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삼촌이 지금까지 경영해 온 그 많은 어둠의 시간들, 억울한 형벌들, 그것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겨우 자살이나 해 버리기에는 삼촌이 가진 한이 너무 많았다. 삼촌은 살아간다는 사실에 대해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 놓은 사람이었다.
"나, 나도 언젠가는 나, 날개를 가지게 된다--."
삼촌은 수시로 그렇게 중얼거려 왔었다. 그리고 캔버스 앞에 앉기만 하면 마치 치열한 전투에 임하듯 안간힘을 다했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거였다. 삼촌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곁에 없으면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거였다. 삼촌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 여자를 끝까지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쯤은 삼촌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겠지만, 삼촌은 그 여자를 단념하기엔 너무 장래가 참담한 모양이었다. 삼촌은 한시라도 그 여자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그 여자와 함께 있는 시간을 연장하려고 노력했다.
"그림을 그리세요."
그 여자는 그러한 삼촌이 답답해 못 견디겠다는 듯 자주 그렇게 충언했었다. 어느새 밖에는 겨울이 당도해 있었다.
"좋아요. 최소한 일주일 동안만은 동거 생활을 해 드리죠. 그 이상은 안 되요. 난 알고보면 대단히 복잡한 여자예요."
어느 날 그 여자는 삼촌에게 말했다. 며칠동안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 있었으며, 아직 한번도 눈은 내리지 않았고, 화실은 몹시 썰렁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삼촌은 그 여자가 허락한 일주일 동안 단 한 점의 작품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다만 삼촌은 그 여자의 몸을 자기 몸의 일부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그 자기 몸의 일부 속에다 자기 영혼까지를 불어넣어 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림을 그리세요. 삼촌이 그림을 그리지 않는 한 절대로 나는 삼촌을 좋아할 수가 없어요. 삼촌은 충분히 나를 미치게 만들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어요. 자, 그림을 그리시라니까요."
그 여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자기가 이 화실을 자주 찾아오는 이유는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삼촌이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노라고.
그래도 삼촌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왜 빈 스케치북이라도 들고 다녀야 하는지, 지금 내 심정이 어떠한지, 삼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요."
마침내 그 여자는 맥빠진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 여자가 약속한 일주일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을 때, 삼촌은 그 여자에게 함께 죽어 버리자고 간신히 말을 꺼내 보았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반대였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린 하지도 말아요. 자살이 뭐 그런 시시한 감상이나 사치에 의해서 감행되어지는 건 줄 아세요. 초연한 상태로 죽을 수 있어야 해요."
그건 삼촌도 마찬가지 생각일 거였다. 사실 삼촌은 자살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언제나 혐오하고 비웃어 왔으니까, 비겁한 놈들이라고 죽을 힘이 있으면 살 힘도 있는 법이라고.
"나, 나도 언젠가는 나, 날개를 가지게 된다--."
그 날개의 상징적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삼촌은 가끔 야외로 곤충 채집을 나가는 버릇이 있었다. 포충망, 충관, 애벌레관, 삼각통, 핀셋, 수충망 따위의 채집 용구들을 꾸려 가지고 강이며 들이며 산 속을 절름절름 헤매면서 곤충이나 곤충의 알, 애벌레, 번데기들을 산채로 채집해 와서는 표본 할 것은 표본을 하고 기를 것은 길러서 우화시키는 버릇이 있었다. 우화란 번데기가 날개 있는 벌레로 변하는 것을 말함이었다.
삼촌의 화실 한 쪽에는 여러 개의 곤충 사육상자들이 형형색색으로 쌓여져 있었고, 그 속에는 바구미, 물땡땡이, 노린재, 장구애비, 사마귀, 게아재비, 박각지, 물장군, 방게, 소금쟁이, 풍뎅이, 송장메뚜기, 개미귀신-- 따위들의 알이나 애벌레, 또는 번데기나 우화된 어른벌레들이 살고 있었다. 밤이 깊어서 고요해지면 그것들이 마치 모래알 사각거리는 소리처럼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으며, 그것들은 항시 무슨 일들엔가 열중해서, 그것들 대로 어떤 작고 새로운 세계로의 길을 틔우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졌었다.
삼촌의 말을 빌면, 곤충은 북극이나 남극 같은 한대 지방에서부터 열대의 정글이나 사막에 이르기까지, 하늘 위에도 땅 속에도 물밑에도 꿀벌들의 겨드랑이나 사람들의 사타구니나, 심지어는 다른 동물들의 썩은 시체에서부터 냄새나는 똥 속에 이르까지, 닥치는 대로 생활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환경 적응의 가장 뛰어난 성공자들인 모양이었다. 그 종류만도 약 백만 종, 지구상에 있는 전동물의 약 사분의 삼이 곤충이라는 거였다. 과연 삼촌의 말대로 곤충은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삼촌은 곤충이라고 해서 무조건 존경해 주지는 않았다. 삼촌은 그 어떤 환경에 살든 그리고 그 어떤 모양을 가졌든 날개가 없는 곤충은 절대로 존경해 주지 않았다. 존경은 커녕 보는 대로 그 자리에서 잡아죽이곤 했다. 이를테면 좀 무리, 톡토기 무리, 쇠귀뚜라미의 암컷이나 이, 벼룩 등의 무리들은 삼촌을 또 하나의 천적으로 삼고 있는 셈이었다. 반면에 삼촌은 유지매미 따위들을 항상 존경해 마지않았었다. 유지매미는 굼벵이로 애벌레 생활을 하면서, 무려 칠 년 동안이나 기나긴 세월을 어둡고 습기찬 땅 속에서 고통스럽게 방황한 다음에라야만, 비로소 은혜의 날개를 얻어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다는 거였다.
말하자면 삼촌은 곤충에게서 삶의 한 방법적 교훈을 얻어 낸 셈이며, 날개가 있는 모든 곤충들의 생활이 날개를 가지게 되기 전에는 삼촌 자신과 아주 흡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어느 날 삼촌의 화실에 취미삼아 그림을 좀 배워 볼 수 없겠느냐고 한 남자가 찾아 왔었다. 그러나 삼촌은 그 남자의 '취미삼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 보이지 않고, 엉뚱하게도 곤충 사육 상자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그 남자를 데리고 가서는 모래가 담긴 상자 하나를 가리키며 이렇게 물어 보았었다.
"이 모, 모래상자 속에 무, 무엇이 사, 살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 모래 상자에 담긴 모래는 결이 곱고 깨끗해 보였으며, 그 결이 곱고 깨끗해 보이는 모래의 표면에는 마치 밑구멍이 없는 원뿔 모양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조그만 분화구들이 빠끔빠끔 파여져 있었다.
"개미귀신이 살고 있군요."
그 남자는 자신 있게 대답했었다.
"그, 그럼 개, 개미귀신이 무, 무얼 먹고 사는지 아시겠습니까?"
다시 삼촌이 그 남자에게 물어 보았었다.
"개미를 먹고 살지 않습니까?"
"마, 맞습니다."
삼촌은 다시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더니 다시 그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었다.
"그, 그럼 개미귀신이 크크, 커서는 무엇이 되는지 아십니까?"
그러자 그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었다. 삼촌은 그 다음부터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고, 그 남자가 개미귀신이 커서는 무엇이 되느냐고 물어 보아도 그냥 묵묵히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약간 무안한 표정으로 삼촌의 그림에다 잠시 한눈을 팔다가, 원 별자식 다 보겠네 하는 표정으로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삼촌은 입을 열었다.
"그, 그림은 취 취미삼아 그리는 게 아니야--."
하지만 개미귀신이 왜 거기에 끼어 들었던 것일까. 그리고 개미귀신이 크면 또 무엇이 된다는 것일까.
삼촌은 개미귀신이 모든 곤충들 중에서 가장 자기와 닮아 있다고 말했었다. 개미귀신의 다리는 다른 곤충들의 애벌레와는 달라 뒤로 아래로 향해서밖에는 움직일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거였다.
또 크면 날개를 가진다고도 했다.
삼촌은 그러나 더 이상은 말해 주지 않았었다. 그 곤충의 이름이 무엇인지 날개는 어떤 빛깔을 가지고 있으며, 생태는 어떠한지 전혀 말해 주지 않았었다. 개미귀신이 커서 날개를 가진 곤충으로 우화한다니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개미귀신이 커서 하늘을 날아다니게 된다구. 웃기는 소리 하지마라. 개미귀신이 무슨 피터팬이냐 하늘을 날아다니게. 개미귀신은 평생 개미귀신일 뿐이야. 다 커서 뭐가 돼냐구?"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삼촌은 개미귀신이 크면 틀림없이 날개를 가진 곤충이 된다고 우겼다. 그리고 날마다 개미지옥에다 개미를 잡아넣어 주곤 했었다. 그러나 개미지옥에서는 개미귀신이 개미를 잡아먹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삼촌은 그 이유가 햇빛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음인지, 모래 상자를 창틀 위에다 올려놓고는 틈나는 대로 그것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삼촌은 하루 빨리 거기서 무슨 변화가 일어나 주기만을 간절히 빌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여름이었다.
역시 모래 상자 속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채 며칠동안 장마비만 계속되고 있었다. 창틀에 놓여 있던 그 모래 상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래도 삼촌은 그림을 그리다 말고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자주 모래 상자를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삼촌이 모래 상자 앞에서 어떤 비명 같은 탄성을 발했다.
"나, 나, 나--."
삼촌은 너무 감격한 나머지 큰소리로 '나, 나, 나--.' 만 되풀이하면서 한참 동안 제대로 말을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나, 나, 날개다!"
삼촌이 겨우 그렇게 부르짖었을 때야 비로소 어떤 심상치 않은 일에 대한 궁금증이 그 형태를 확실하게 드러내 주었다.
모래 상자 속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곤충 한 마리가 지금 막 새로운 탄생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던 것이다.
그 곤충의 날개는 아주 얇고 연약해 보였으며, 별로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생명체로서의 신비로움은 충분히 간직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한참 동안 모래 위에 앉아 있다가 조금씩 몸을 움직여 보더니 그 얇고 연약해 보이는 날개를 몇 번 파르르 떨어 보였다.
"이, 이게 바로 명주잠자리다. 개미귀신의 어른벌레지."
삼촌은 너무 감동해서 콧날이 다 시큰해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 나도 어, 언젠가는 날개를 가진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삼촌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취미삼아가 아니라 바로 날개를 가지는 작업이며, 그 날개를 가질 수 있을 때까지 삼촌은 마치 유시형 곤충들의 애벌레처럼, 이를테면 명주잠자리의 애벌레인 개미귀신처럼 현재의 이 불행들을 감수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세요. 끝이 보일 때까지 그리세요. 삼촌은 나를 미치게 만들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니까요. 이게 뭐예요. 겨우 구스타프 클림트 흉내나 내고 있잖아요. 나를 그리지 말고 삼촌을 그리세요. 아참, 답답도 해라."
가끔 삼촌을 찾아서 녹음기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그 여자는 삼촌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려고 노력했다. 캔버스도 새로 사 주고 물감도 새로 사 주었다.
"날개를 가지는 작업을 하세요. 끝이 보이면 저기 저 주사기와 승홍을 사용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기꺼이 붓을 잡고 그림에 몰두했을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삼촌은 달랐다. 삼촌은 키도 작고 못생기고 말더듬이에다 절름발이 게다가 친척들에게 얹혀 그나마 화실이라도 가지고 있는 가난뱅이 처지였다.
항시 열등의식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안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 여자가 자기 곁을 떠나 버리리라는 불안, 그것 때문에 삼촌은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여자가 삼촌의 호적 속에 그 여자의 이름을 올리게 된다 해도, 그 불안은 가셔지지 않을 것이다. 그 여자가 이 세상에 살아 있고 그 여자를 삼촌이 사랑하는 한, 삼촌은 결코 아무 일도 못할 것이다.
"이젠 못 오게 될지도 몰라요. 난 알고 보면 복잡한 여자라니까요."
어느 날 그 여자는 마침내 진지한 표정으로 삼촌에게 말했다. 삼촌은 다만 고개를 깊이 떨군 채 캔버스 앞에 앉아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젠 정말로 다시 못 오게 될는지도 몰라요."
그 여자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했던 그림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서는 오래도록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 그림 볼수록 눈물나요."
이윽고 여자는 돌아섰다. 문득 그 여자가 영원히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화실 가득 설레고 있었다. 그 때였다. 출입문 쪽으로 가고 있던 그 여자가 갑자기 입을 가린 채 급격히 허리를 숙이더니 무엇인가를 토하듯 윽 하고 어깨를 솟구쳐 올렸다. 그러나 잠시 뿐 그 여자는 자세를 가다듬고 도망치듯 화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흘이 지나도 그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삼촌은 안절부절 못 한 채 불안과 초조의 기다림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때로는 하루 종일 이 도시 곳곳을 헤매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는 태평양에 떨어진 빗방울 한 개 찾아내기였다. 그 여자가 원채 자기 신상에 대한 것들을 신경써서 숨겨 왔으므로 도무지 그 여자를 찾아낼 만한 꼬투리가 생겨 주지 않았다. 겨우 다방을 전전긍긍해 보거나 남의 화실마다 찾아다니면서 이러이러한 여자가 혹시 왔다 가지 않았느냐고, 심하게 자존심까지 상해 가면서 묻고 돌아다녀 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던 중 그 여자로부터 편지 한 장이 날아왔다. 삼촌은 흥분 때문에 손까지 부들부들 떨어내면서 그 편지의 겉봉을 찢었다.
형편없이 초라해져 있습니다. 삼촌의 화실에 들렀을 때 보았던 그 그림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거기서 나는 다시 살아나고 싶습니다. 옛날에 한 남자를 사랑했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던 남자였습니다. 치열했고, 삼촌같이 불행에 찌들려 있었고, 그림의 끝을 보고야 자살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누구든 사랑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여잡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삼촌의 화실을 찾아갔을 때 나는 약혼 중에 있었습니다. 돈밖에 모르고, 자랑하기 좋아하고, 예술 따윈 시간 낭비로 아는 어느 건설 회사의 젊은 돼지하굽니다. 다음 달에 결혼합니다. 지금은 홀로 여행 중, 어제 삼촌의 아기를 병원에서 지워 버렸습니다. 이젠 더 이상 붙잡아 볼 게 없습니다. 텅 비어 있습니다. 그 동안 삼촌에게 잘해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삼촌을 좋아해 보려고 노력해 보기도 했었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삼촌이 옛날에 자살하면서 내 뇌까지 몽땅 뽑아 가버린 그 미친 사람보다 더 자신의 삶-그림 말입니다-에 미칠 수만 있었다면, 삼촌은 반드시 그 사람보다 더 나를 미치게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자신있게 나의 약혼자를 버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형편없이 초라해져 있다 하더라도, 아직 나는 자살할 수가 없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림을 그리시기를 빕니다. 끝이 보일 때까지 우리는 서로 이제 서로를 잊기로 합니다. 안녕을.
삼촌은 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막막한 절망감에 빠진 얼굴로 멍하니 창 밖만 내다보았다.
다음 날 삼촌은 친척들에게서 얼마간 돈을 얻어 그 여자를 찾아 나섰다. 가까스로 그 여자를 찾을 만한 건덕지가 털끝만큼 생겨난 것이다. 우체국 소인, 그 여자가 보낸 편지의 겉봉에는 동해안에 있는 어느 소읍의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여행중이라는데 아직도 거기 머물러 있을까?"
"그, 그래도."
삼촌은 단지 '그래도'만 가지고 동해안으로 떠났다. 그리고 열흘만에 거지꼴이 되어 돌아왔다. 종적이 묘연하더라는 거였다.
삼촌은 이제 날마다 먹지도 못하고 잠들지도 못한 채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입술이 허옇게 부르트고 눈이 십 리나 움푹 들어가 있었다. 참혹해 보였다. 그러다 미쳐버리는게 아닐까 염려될 정도였다.
"그, 그래도 하, 한번은 와주겠지."
그래도 삼촌은 한 가닥 미련만은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 잠을 좀 자고 싶다. 오, 오 분만이라도 벌써 여, 열흘째 한잠도 못 잤다. 미치겠어--."
"수면제라도--."
"소, 소용없다. 버 벌써 먹어봤어. 하, 한꺼번에 스무 개나 머, 먹어봤는데도 자, 잠은 안 오더라--."
정말로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라는 거였다. 벽도 방바닥도 천정도 하얗게 타고 있다는 거였다.
"보이는 건 모, 모두 다 하얗다. 먼 산도 가까운 거리도 책상도, 잉크 병도, 모 모두 다 하얗다. 무, 무서워."
삼촌은 가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보기도 했다. 안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만약 사람들의 신체에 잠샘이라고 하는 기관이 있어 그것을 이식 수술할 수만 있다면 삼촌에게 몇 개 더 이식해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또 만약 누군가 자기의 충치앓이와 삼촌의 불면증을 맞바꾸자고 싶다고 제의해 오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당장 무르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맞바꾸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해요?"
"있다."
"어떻게 증명해요?"
"그, 그럼 누가 나를 절름발이로 태어나게 했냐?"
하늘은 카랑카랑했다. 별들이 양철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몹시 추웠다.
"봄이 오려나부지--."
"봄이 온들 뭘 하냐."
"내복을 갈아입죠."
"바, 바람도 원--."
싸르락싸르락 언 땅에 모래알 쓸려 다니는 소리, 어느 집 장독대에선가 양은 세숫대야 굴러 떨어지는 소리, 삼촌은 절름절름 다리를 절며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삼촌은 펄럭거리고 있었다. 외로운 사랑도 펄럭거리고 외로운 절망도 펄럭거리고--.
펄럭거리다가 외등 밑에 이르러 잠시 펄럭거림을 멈추었다. 삼촌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몰라보게 야위어 버린 그리고 탈진해 버린 삼촌의 얼굴은 무기수의 그것처럼 막막해 보였다.
맞은 편 담벼락에서 삼촌의 그림자가 배멀미를 하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에 전등갓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삼촌은 다시 절름거리며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평소 그토록 증오하던 하나님을 찾아서 절름거리며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골목 안의 모든 집들은 거의 불들이 꺼져 있었고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한데 바람 소리만 가슴을 자꾸 후벼 놓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서야 이윽고 교회를 만났다. 교회는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러나 그 건물은 어둠 속에서도 엄숙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서 완전히 삼촌을 압도하고 있었다.
삼촌은 교회를 오르는 가파르고 긴 계단 밑에서 철탑 위의 십자가를 한참동안 쳐다보고 있었는데, 삼촌의 모습은 실지보다 반 정도나 축소되어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피, 피뢰침을 서, 설치했을까?"
한참동안 십자가를 쳐다보고 있던 삼촌이 뚱단지 같은 소리로 말했다.
"했겠지요."
아무리 교회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 교회에 떨어지는 벼락을 대신해서 맞아줄 만큼 높은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교회에도 피, 피뢰침을 하냐?"
"하겠죠."
"왜?"
"벼락에 맞지 않으려고."
"아, 아니다. 교, 교회는 피뢰침을 하지 않는다."
금시 초문인 얘기였다.
"하, 하나님은 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삼촌은 전도사 풍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원수를 사, 사랑하라고 하신 하, 하나님이 자, 자기를 믿기 위해 지어 놓은 교회에다 벼, 벼락을 때릴 까닭이 없다."
삼촌은 이제 완전히 하나님께 매달려 보기로 작정해 버린 것 같았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거머잡듯이. 삼촌은 절름절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은 몹시 가파르고 긴 편이었다. 이 교회를 나오는 신도들은 이 계단을 다 올라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른 교회를 다니는 신도들보다 생명수를 한 컵 정도는 더 얻어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여자를 어, 어떻게 했으면 조, 좋겠지."
"나도 모르겠여요."
"조, 좋은 여자 같지 않든?"
"모르겠어요."
"나, 나를 좋아하고 있으면서 괘, 괜히 그렇게 튕기는지도 모르지."
"--."
"그런 거 같지 않든?"
"모르겠어요."
"다시 만나면 아무도 어 없는 산 속에 가서 다, 단 둘이 살자고 말해 볼까. 아, 아무래도 남의 눈이 무, 무섭거든. 도대체 앞으로 어 어떻게 하면 좋겠니."
"하나님한테 물어 보세요. 이제 다 올라왔으니까."
그러나 그 가파르고 긴 계단을 다 올라갔을 때, 삼촌은 뜻하지 않은 장애물과 맞부딪혔다. 높은 담벼락과 철대문이 삼촌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담벼락은 도저히 기어오를 엄두도 못 낼만큼 높았으며, 철대문은 감옥의 그거처럼 굵고 곧은 쇠막대로 튼튼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손을 넣고 더듬어 보니 빗장에는 커다란 자물쇠까지 매달려 있었다.
삼촌은 두 손으로 쇠막대를 잡고 힘껏 뒤흔들어 보았다. 마치 교회가 그 여자를 빼앗아다 감금해 놓기라도 했다는 듯이. 몸부림치며 몇 번이고 힘껏 뒤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삼촌은 그만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오래도록 웅크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그만 내려가요."
그러나 삼촌은 마침내 울고 있었다.
이윽고 삼촌은 구체적으로 그 여자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봄이 되어 있었다. 날씨는 연일 화창하고 꽃들은 눈부셨지만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운 것도 그 여자가 곁에 없는 지금의 삼촌에게는 더욱 증오만 끓어오르게 만드는 요소들일 뿐이었다. 그 아편같은 시간들, 그 몸부림의 결말. 삼촌은 화실 서쪽 벽에다 동자의 얼굴 하나를 그려 놓았다. 이상하게 생긴, 머리카락도 없고 눈동자도 없는, 어딘지 모르게 주술적인 분위기를 가진 동자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 밑에는 한문으로 무슨 주문 같은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동자의 한 쪽 눈에는 바늘 한 개가 깊이 꽃혀 있었다.
삼촌은 하루 종일 탈진한 모습으로 벽을 마주하고 앉아서 그 동자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쪽 창에 호박꽃 같은 노을이 퍼져 들기만 하면 마치 최면술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슬그머니 일어나서 그 동자 앞으로 천천히 빨려들어 갔다. 그리고 무슨 주문인가를 중얼중얼 되풀이했다. 그럴 때의 삼촌은 무슨 주술사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대단히 기분 나쁜 분위기였다. 마치 악령이라도 부르고 있는 것 같은 삼촌의 얼굴, 그러나 삼촌은 그 의식 하나 때문에 아직도 살아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단 하루도 그 의식을 거르는 날이 없었다.
바늘이 꽃혀 있는 것은 비단 동자의 한 쪽 눈만이 아니었다. 실내에 있는 모든 인물화들이 한 쪽 눈에는 어김없이 바늘들이 꽃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바늘들이 차츰 녹슬어 가면서 그 인물들도 차츰 어떤 귀기가 서려 가는 것 같았다. 빠레트에는 먼지가 허옇게 앉아 있었고, 붓은 모두 바싹 말라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화실 구석마다 삼촌이 기르던 벌레들이 사육 상자의 보호망을 뜯고 나와 탈출을 끊임없이 시도하다 죽어버린 듯, 날개가 떨어져 나가 있거나 다리가 부러진 채 널려 있었다. 그 벌레들은 겨울에도 살아갈 수 잇는 능력을 가진 벌레들이었다. 그러나 만지면 바스러질 정도로 그것들은 말라 죽어 있었다. 삼촌이 전혀 관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곤충 사육 상자 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를 뒤집고 죽어 있거나 다리를 오그린 채 죽어 있는 곤충들이 허다했다. 어항 속의 수서건충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면에 떠서 허옇게 곰팡이 같은 걸 뒤집어 쓴 채 죽어 있었다.
"그, 그냥 내, 내버려 둬라. 그래도 어, 어디선가, 고, 곤충들의 애벌레가 나타나게 되어있다. 하, 하다 못해 파, 파리의 애벌레라도 나타난다--. 곤충들은 안 죽어. 개미귀신은-- 개, 개미를 먹고 커, 커서는 명주잠자리가 된다--. 그러나 주, 죽으면 그 시체를 다, 다시 개미에게 주지--."
삼촌은 응얼응얼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삼촌의 말은 사실이었다. 봄이 다 지나 갈 무렵부터 또 어디선가 이름을 알 수 없는 벌레들이 더러 화실 구석에 나타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삼촌은 점점 더 헤어날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표정이 백치 같아져 있었으며 가끔 이상한 소리들을 일삼곤 했다.
"어, 어젯밤에 아, 아버지의 유령이 다녀갔다. 나, 나보고 미안하다는 거였어. 둘이 끌어안고 우, 울었다--."
처음엔 꿈 얘기이겠거니 했었다. 그러나 꿈 얘기하냐고 물으면 화를 내면서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아닌게 아니라 화실 분위기는 유령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유령 따윈 없는 게 분명하다. 대개 '납량 특별 보너스 북' 어쩌구 해 가면서, 무슨 주간지나 학생 잡지 따위에 게제되는 미스테리물 속의 귀신이나 유령이나 또는 사차원적 인물들은 그 면을 담당한 편집자를 그 아버지로 삼고 있다는 설이 있다. 이를테면, 이것은 일본 혼고우구에 있는 하다 씨의 저택에서 아주 최근에 실지로 일어난 일이다로 시작해서 밖에는 비가 내리고 시계가 열 두 점을 친 다음 나타나는 십 년 전 교통사고로 죽은 하다 씨의 외동딸 따위들은 그 편집자가 수음조차도 하지 않고 만들어낸 상상의 동정녀라는 얘기일 것이다.
"아, 아버지의 유, 유령이 말하더군. 바, 반드시 그 여자의 눈이 멀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라는 식의 삼촌 얘기는 그러니까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삼촌의 화실에 들어서기만 하면 느껴지는 음산함. 눈에는 바늘을 한 개씩 찔리운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그 인물화들의 귀기. 그런 것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눈에까지 바늘이 박혀 거치적거리는 것 같았고 곧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조차 느껴지곤 했었다.
"아버지가 처녀 유령을 데 데리고 왔었지, 이, 이쁘더라. 나, 나하고 같이 자고 새, 새벽에 돌아갔다."
고대 설화집에나 나올 법한 얘기를 삼촌은 태연히 늘어놓기도 했다. 이제 삼촌의 외로움과 절망감은 극에 달해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바늘들은 완전히 새빨갛게 녹이 슬어 있었다.
"어디든 떠 떠나야겠다. 화, 화실을 맡아서 그, 그림을 그리고 있거라. 아, 아무도 저 바늘들을 빼, 빼게 해서는 안 된다."
가을이 되어서야 삼촌은 어느 정도 정신을 되차린 것 같았다. 언제 돌아올 지 모른다며 삼촌은 유리 표박의 정처 없는 길을 떠났다.
짐승도 죽을 때는 고향 쪽에다 머리를 두고 죽는다. 수구초심이라고 했던가. 삼촌이 다리를 절며 절며 떠돌아 다니다가 다시 완벽한 걸인의 모습으로 되돌아 온 것은 그로부터 삼 년이 조금 못 되어서였다.
비록 차림새는 그렇다 하더라도 어딘지 모르게 삼촌은 많이 좋아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선 건강해 보였으며 옛날 여자 따윈 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태도였다. 그림들이 인물 한 쪽 눈마다 박혀 있는 녹슨 바늘들을 자기 손으로 직접 뽑아 내면서 삼촌은 말했다.
"부, 부질 없다."
삼촌은 다시 화실을 자기 분위기에 맞게 정리하고 도구들을 장만한 다음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더러는 야외로 나가 곤충들을 채집해 왔고, 옛날처럼 표본도 하고 우화도 시켰다. 그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면 그저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데서나 더 불행해져 보려고 노, 노력했지. 부, 불행한거나 해, 행복한거나 그게 그거야."
삼촌은 이제 묵묵히 캔버스 앞에 앉아 낮이나 밤이나 물감을 자기 영혼 속에 녹여 부으며 마치 어떤 종교인이 죄를 사하듯 절실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그림에 몰두했다.
삼촌이 주로 그리는 것은 그 소재가 옛날과 마찬가지로 폐인이나 곤충의 애벌레들이었지만 그 방법만은 좀 달라져 있었다.
옛날에는 폐인은 폐인대로 벌레는 벌레대로 각각 다른 화면에다 그려 넣었었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같은 화면에다 처리해 보려고 노력했다.
"대작을 하나 만든다--."
삼촌은 수시로 호언장담하곤 했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만은 잘 되어 주지 않는 모양으로, 같은 구상을 몇 번이나 다시 지우고 다시 그리고 다시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다. 더러는 술에 곤죽이 되어 화실 바닥에 나뒹굴어 있기도 했고, 또 더러는 옛날 그림을 싸구려로 마구 팔아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거지꼴이 되어 되돌아오기도 했다.
"내 맘에 드는 그, 그림을 평생에 단 하, 한 점으로 족하다--."
무엇을 바쳐서라도 그 한 점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친척 한 사람이 삼촌을 찾아 왔다. 마땅한 자리가 하나 있으니 장가를 가보지 않겠냐는 거였다.
"어, 어떤 여잔데요."
"곱상하게 생긴 여자다."
친척은 우선 시각적인 측면에서부터 그 여자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곱상하게 새, 생긴 여자가 왜 나, 나한테 시집을 오나요."
"팔자가 세다."
약혼을 세 번 했는데 세 번 다 남자가 약혼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그 여자는 자기가 남자 셋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어느 날 용하다는 점장이에게 물어보니, 불구자한테 시집을 가면 그 남자들의 영혼을 달랠 수 있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신랑감을 물색 중이라는 거였다. 삼촌이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 셈이었다.
"중학교밖엔 안 나왔지만 얼굴은 곱상하다."
친척은 '얼굴은 곱상'에 대해 특히 매력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삼촌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무조건 싫다는 거였다.
"그래도 네 생각을 해서 여기까지 찾아 왔는데,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라."
친척은 몹시 실망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화실을 나갔다. 나가고 나자 삼촌이 거절한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그 여자의 단점을 혼자 중얼거렸다.
"주, 중학교밖에 아, 안 나온 여자가 내 평생 단 한 점의 자, 작품을 아껴 줄 수 있을까."
삼촌은 지금까지 줄곧 그 평생의 단 한 점이 될 작품 그것과 대치되어 전에 없이 치열한 전투를 벌여 오고 있었다. 자주 굶고 자주 밤을 새웠다. 자신의 건강 따윈 일체 돌보지 않고 있었다. 그 대신 그림과 곤충에 대한 정성만은 그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다.
"되, 될 것 같은데 자, 잘 안 되는구나."
"구상을 한 번 바꿔 보시지 그래요."
"더 이상 조, 좋은 구상은 없다."
삼촌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보겠다는 듯 캔버스 하나를 왕창 때려 부셔 버렸다. 그리고 스케치북에다 폐인들이며 곤충들의 애벌레를 정밀하게 연필로 묘사해 보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미친 듯이 삼촌은 그 짓만 했다. 그 다음 작은 캔버스에다 그것들을 일일이 옮겨 보기 시작했다. 이른바 철저한 습작 과정을 거쳐 보겠다는 속셈 같았다.
"사, 사람과 버, 벌레 사이를 연결시켜 놓기가 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가끔 삼촌은 붓을 쉬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리고 또 가끔 곤충 사육 상자 앞으로 걸어가서 마치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자기가 앞으로 그리고자 하는 그림에 대해 아주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삼촌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 큰소리로 이렇게 소리질렀다.
"아, 바로 그거였다!"
삼촌은 다시 백 호 짜리 캔버스 하나를 새로 준비하고, 그날로 그 캔버스 앞에 주저앉아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서서히 영혼을 헐어내기 시작했다.
삼촌이 그림을 그릴 때의 화실 분위기는 한마디로 정지 상태 그것이었다. 삼촌은 마치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완전히 침묵 속에 들어앉아 있었다. 무엇이든 삼촌의 붓 끝에 닿기만 하면 소리 없이 녹아서 기체로 화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삼촌은 확고부동한 무엇인가를 잡아 놓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무엇을 바꾸거나 지워버리지 않을 것 같았다.
벌써 몇 달간의 시간이 무더기로 나가고 있었다. 삼촌은 아침마다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될 모양이다."
삼촌은 코피를 흘릴 때마다 오히려 행복한 표정이었다.
나는 삼촌이 본격적으로 작품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전혀 붓을 잡지 못하고 있다. 삼촌만큼 진지해질 수가 없다. 오늘부터 삼촌은 완성될 때까지 단식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창자가 비어 있으면 의식이 맑아진다는 것은 정말일까. 밖에는 장마비가 내리고 있다. 새벽 세 시다. 삼촌의 뒷모습이 보인다. 아직도 손이 움직이고 있다. 저러다 쓰러지고 말 것이다. 빗소리가 그쳐 있다. 눈을 감고 누워 있으면 삼촌의 붓이 캔버스에서 움직이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이따금 붓을 빠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도 삼촌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삼촌의 뒷모습이 보인다. 아직도 손이 움직이고 있다. 저러다 쓰러지고 말 것이다.
좀처럼 감기가 낫지 않는다. 관절이 녹아들고 있다. 목구멍이 아프고 코가 막혀 숨을 쉬기가 곤란하다. 삼촌과 함께 굶어 보려 했지만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휘청거리며 밖으로 나가 갈비탕을 한 그릇 사 먹었다. 새벽에 깨어보니 삼촌의 뒷모습이 보인다. 코피를 닦고 있었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닷새 째다. 아직도 삼촌은 물밖엔 먹지 않았다. 저러다 언젠가는 쓰러지고 말 것이다.
입안에서 고구마 찌는 냄새가 난다. 열이 심하다. 몇 번의 혼수 상태, 감기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삼촌의 뒷모습.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
집에 가서 앓고 싶다. 오늘이 며칠인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모르겠다. 삼촌의 뒷모습. 움직이고 있다. 다시 혼수 상태--.
무엇인가 어수선하게 움직이고 있다. 잠결이다. 눈을 뜰 수가 없다. 다시 혼수 상태--.
늦잠에서 깨었다. 조금은 몸이 가벼워진 것 같다. 현기증, 고요하다. 삼촌의 뒷모습. 없다!
어떻게 된 것일까. 화실은 텅 비어 있었다. 벽에 있던 그것들도 곤충 사육 상자들도 그리고 물감, 붓, 빠레트, 기름통, 기타 잡다하던 정물들도 간 곳이 없었다.
화실은 거짓말같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나는 마치 다른 곳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곳은 아니었다. 실내 한복판에 놓여 있는 이젤과 그 이젤에 놓여 있는 삼촌의 그림 한 폭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끝냈구나! 나는 홀린 듯이 캔버스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그 옛날 어느 여자가 삼촌의 그림 하나를 보고 그러했듯이 현기증으로 앞이마를 짚으며 짧게 탄성을 발했다.
아! 그 탄성 이상으로 그 그림을 표현하기란 불가능했다. 그것은 도저히 사람의 손으로 그려놓은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물보다 더 사실적이었으며 현실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그 어떤 충격적인 인간의 종말도 그 그림의 감동을 따라 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고뇌와 비원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한 사내가 죽어있었다. 하늘을 향해 허옇게 눈을 뜬 채로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채 죽어 있었다. 그 모습은 생생했다. 미간의 주름살, 옷소매의 실밥, 무엇이든지 실물보다 더 생생했다. 어떻게 처리했는가 만져서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시체는 썩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썩어가는 시체 위에 수없이 많은 벌레들이 달라붙어 살점들을 여기저기 헐어 놓고 있었다. 가슴이 헐리고 장단지가 헐리고 한 쪽 볼이 헐리고 헐린 살점 속을 파고들어 굼실굼실 움직이고 있는 벌레들-- 긁어 내면 한 무더기씩 화실 바닥에 떨어져서 굼실굼실 기어다닐 것 같았다.
시체 위에는 하늘. 화창한 햇빛을 받고 눈부신 구름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은 시체와 대조적인, 그러면서도 시체를 더욱 시체답게 만들어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문득 구름 속으로 명주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가 숨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환시였다.
삼촌의 시체가 발견되어진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고, 생각보다 평온하고 깨끗한 얼굴이었으며, 삼촌의 시체 옆에는 주사기 한 대와 약 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염화제이수은이었다. 장소는 꽃밭, 마타리꽃 멧미나리 키 자라 퍼져 있는 산비탈. 나비들도 몇 마리 날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태운 듯 잿더미도 한 무더기 보였다.
삼촌의 유서대로 나는 그 여자의 집을 찾았다.
화실을 나가 몇 년 방황하면서 삼촌은 기어코 그 여자의 거처를 알아내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이 좁은 대한민국 안에서 굳이 찾으려고 들자면 못 찾을 것도 없을 것이다. 그 복잡한 서울 명동에서도 똑같은 사람을 각기 다른 장소에서 하루에 다섯 번씩이나 우연히 만났었다는 사람도 있고, 아침에 동경 어느 음식점에서 보았던 사람을 저녁 때 무교동 어느 낙지집에서 만났었다는 사람도 있다니까.
그러나 이제 와서 삼촌은 또 그 여자에게 무슨 용무가 더 남아 있다는 것일까. 그냥 찾아가 보면 된다니 도무지 짐작조차 안 되는 일이었다.
유서에 적힌 대로 그 여자의 집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집은 예상보다 그리 크지는 않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의외로 그 여자가 직접 나와 주었다. 첫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옛날에 그 나른하고 염세적인 모습은 간 곳이 없었고, 다만 얼굴 윤곽만 그대로였다. 좀 뚱뚱하고 천박해진 모습이었다. 임신을 했는지 아랫배가 불룩 솟아나 있었다.
"삼촌이 죽었군요."
나를 보자 그 여자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미리 어떤 얘기가 있었던 것일까.
"알았어요. 약속대로 그림을 보러 가죠. 그 화실에 있겠죠. 굉장한 그림이겠군요. 언젠가 만났을 때 벌써 삼촌은 끝을 보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나는 잠시 망연해 그대로 서 있었다.
"알았어요. 가세요."
그 여자는 돌아서려 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엄마."
세 살쯤이나 되었을까. 그 여자의 딸인 듯 싶은 계집아이 하나가 팔짝팔짝 대문 밖으로 뛰어 나와 그 여자의 손목에 매달렸다. 그리고 나는 그 계집아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만 둔기로 심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아연해지고 말았다.
눈.
그 계집아이의 한 쪽 눈이 약간 찌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하얗게 백태까지 끼어 있었다.
"사, 삼촌도 옐 본 적이 이, 있습니까?"
"아뇨, 그런데 언제부터 말을 더듬으세요. 전엔 안 더듬으신 것 같은데."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혼란해진 상태로 서 있는 내게 그 여자가 다시 말했다.
"이제 가세요. 그만--."
아름다운 얼굴 - 송기원
좀 엉뚱하지만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누군가는 이 서두만을 대하고도, 원 나이가 얼만데 아직까지 아름다움 운운 한담하고 얼핏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지만, 나 자신으로서는 그런 오해를 무릅쓸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문학을 삼의 어떠한 가치보다 우위에 놓고 그것에 끌려 다니던 문학 청년 시절의 탐미주의부터 비롯하여, 머지않아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러서도 아직껏 아름다움 따위를 찾는다면, 남들에게 철이 없거나 얼마쯤 덜떨어지게 보리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줍잖게 고백하건대, 십 년 가까이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한 채 거의 절 필 상태에서 지내다가 가까스로 다시 시작할 작정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아름다움 때문이다.
모르기는 해도 쉰 가까운 나이에 아름다움 운운하는 삶이란 결코 평탄하지 않을 터이다. 그렇다. 나에게 있어서 자신의 삶이란 평탄하기는커녕 고작해야 자기혐오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 도 나는 마치 욕지기처럼 치밀어 오르는 어떤 혐오감 없이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지 못했다. 내가 처음으로 아름다움에 눈 뜬 것이 언제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짐작하건대, 그 시기는 내가 처음으로 자기 혐오에 빠졌던 무렵과 겹쳐 있다는 정도이다. 어떻게 보 면, 나에게 아름다움이나 자기혐오란 결국 같은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내 낡은 사진첩에는 태어나서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의 사 진이라고는 거의 없다. 고작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국민학교와 중학교 의 졸업 기념 사진뿐인데, 거기에서도 내 얼굴은 찾아 낼 수가 없다. '6 학년 2반 졸업 기념'이라는 글이 들어 있는 국민학교 졸업 사진에는, 시골 학교답게 낮은 지붕의 교사와 드높은 하늘을 배경으로 예순 명 남짓 한 아이들이 저마다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들뜬 표정들 가운데 단 한 군데만이 날카로운 면도날 자국을 남긴 채 지워져 있다. 면도날 자국이 바로 내 얼굴인 셈이다. 중학교의 졸업 사진에도 내 얼굴은 면도날 자국으로 남아 있다. 삼십 년이 훨씬 지나 버린 지금까지도 예의 사진을 대하면 나는 얼핏 자신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면도날을 느낀다. 그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흐린 삼십 촉 짜리 전등 아래서 자신의 얼굴이 들어 있는 모든 사진을 찢고 있는 사춘기 무렵의 소년을 떠올린다. 그 소년의 떨리는 손이 마침내 '6학년 2반 졸업 기념'을 집어 올리고, 차마 해맑게 웃는 동무들의 모습은 찢을 수가 없어서 자신의 얼굴만 지운 채 남겨 두는 여린 마음까지 되살아 오면, 나는 이번에는 얼굴이 아니라 바로 가슴살을 가르며 지나가는 면도날을 느낀다.
이제 막 풋물이 오르는 사춘기의 소년에게 자신의 얼굴에 면도날까지 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은 아니었을 까.
"얘, 아가, 이리 온."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아이를 불렀다. 기생집인 춘향관 대문 옆 모퉁이였다 이제 막 장터의 빈 가게들을 휩쓸며 '도둑놈 순사'를 끝낸 뒤라 아이의 목구멍에서는 아직도 가쁜 숨과 함께 단내가 풍겨 나는 참이었다.
"왜, 왜 그란디요?" 아이는 다가서는 대신에 한 걸음 물러서며 재빨리 누군가의 행색을 살폈다. 어둠에 익숙해 있던 아이의 눈은 일별에 사내의 신분을 알아내었다. 적어도 촌놈은 아니다. 영화에 나오는 왜놈순사처럼 도리우찌 모자에다 당꼬바지를 입은 것으로 보아 건달패거나 노름꾼, 어쩌면 쓰리꾼 오야 봉인지도 몰랐다. 아이는 여차하면 달아날 작정으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내가 아이를 좇아 한 걸음 앞으로 나섰고, 비로소 사내의 얼굴이 춘향관 대문의 전깃불에 드러났다. 사내가 쓰리꾼 오야봉처럼 험상궂은 얼굴이 아니어서 아이는 얼마쯤 안심했다.
"니가 대운이냐?" 사내가 뜻밖에 아이의 이름을 대었고, "그란디요?" 아이는 놀라며 반문했다. 사내는 그런 아이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바지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었다.
"아나, 이거."
"그것이 뭔디요?" 아이가 되바라지게 물었고, "어른이 받어라면 공손하게 받어야제." 사내가 아이를 나무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아이는 쉽게 사내에게 말려들지 않았다. "피이, 누가 모를 줄 알고--. 그거 주고 딴 심바람시킬라고 그라제라?"
"허어, 고놈 참. 심바람 안 시킬텡께 받어." 아이가 어렵사리 의심을 푼 다음에 손을 내밀었고, 사내가 쥐어 주듯이 아이의 손에 무엇인가를 건넸다. 바삭거리는 셀로판지 속에 든 그 "오메, 이건 내 껀디--." 아이가 어쩔 수 없이 입을 함박꽃처럼 벌렸고, 사내 또한 그런 아이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표정이었다.
"좋냐?"
"야우, 그랑께. 이 양말 참말로 나 준 거지라우?" 아이는 빨갛고, 노랗고, 파란 갖가지 색깔이 층층이 겹친 색동양말을 보며 다시 확인을 했다.
"그렇당께. 공부 잘 허라고 주는 거이다 잉?"
"피이, 나는 아직 핵교 안 댕긴디." 아이가 반박을 했고, 사내는 일순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헛웃음 소리를 내었다.
"허헛--. 담에 핵교 가먼 말여."
"낼 설쇠먼 봄에 핵교 가는디." 아이가 사내의 말에 토를 달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좀더 대담한 눈길로 사내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왜놈순사 같은 차림새도 그렇지만 도리우찌 모자의 그늘에 숨겨져 있는 작고 날카로운 눈매가 아이에게는 우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아이는 사내 몰래 꼴깍, 침을 삼켰다.
"근디, 아자씨는 누구다요?" 아이의 질문이 의외였던지 사내는 얼핏 당황하는 눈치더니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인자 그만 집에 가 봐라. 니 앰씨가 지달릴텡께."
"오메, 아자씨가 우찌께 울 엄니를 아요?" 아이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채 물었고, "이 장바닥에서 니 앰씨 몰르는 사람 있는 중 아냐?" 사내가 잔뜩 비앙대는 투로 받았다. 그러고는 아이가 미처 다른 것을 물어 볼 틈도 주지 않고, "그럼 가 보랑께." 아이에게 손을 내젓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춘향관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내에 대한 궁금증이 아직도 입안에 침처럼 고여 있었지만 아이는 쉽게 춘향관에서 물러섰다. 까짓거, 누구면 대수냐. 춘향관을 드나드는 어른 치고 좋은 사람은 없을 터이었다. 아이는 무엇보다도 사내에 대해서 더 이상 궁금해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바로 오늘밤만 지나면 내일은 설날인 것이다. 떡이나 과일 같은 먹을 것이며 세뱃돈도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벌써부터 다른 아이들에게 몇 번씩이나 자랑한 설빔이었다. 그것은 누나의 뉴똥치마처럼 새까만 세일러 학생복이었는데, 내년 봄 학교에 들어가면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단 채 입고 다닐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어머니의 치맛귀를 붙들고 조른 끝에 설날 딱 하루만 입어보기로 승낙을 받아 놓은 참이었다.
아이는 춘향관에서 물러나자 이내 다급한 마음이 되어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발소를 지나고, 청요릿집을 지나고, 국밥집, 목공소, 고깃간을 지나면서 아이는 얼핏 사내의 작고 날카로운 눈매를 떠올렸다. 그러자 아이에게는 이상하게도 사내의 눈매며 입언저리가 어디서 많이 본 듯 친숙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빔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아이에게 그러한 느낌은 지나치는 청요릿집이나 고깃간의 풍경처럼 가볍게 사라져 버렸다.
아이가 숨이 턱에까지 차 오른 채 집에 다다라 가겟문을 밀치자 부엌에서 뽀얀 김과 함께 시루떡 냄새가 풍겨 왔다. 아이가 그 시루떡 냄새를 향해 손에 쥔 양말을 흔들며 외쳤다. "엄니, 엄니이, 요것 잠 봐?" 그러자 어머니보다 먼저 누나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머언디 그르케 호들갑이다냐?" 뽀얀 김 속에서 아이의 말을 받았다. "양말이여, 양마알." "양마알?" 이번에는 목소리와 함께 누나의 얼굴이 얼른 김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이는 그런 누나가 어쩐지 얄미워서, "누가 누님보고 그랬간디?" 한마디 퉁을 주었다. 누나는 아이의 퉁에는 아랑곳없이 손에 들고 있는 양말을 확인하고는 갑자기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너 또 어서 돌른 건 아니제?"
"아녀, 아녀." 누나의 물음에 아이가 기겁을 하여 두 손을 내저었다. 아이는 언제인가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장사꾼의 눈을 피해 잡화점에서 머리핀이며 손수건 따위를 훔쳐 자랑삼아 누나에게 주었다가 어머니에게 몹시 혼난 적이 있었다.
"그라먼 어서 났냐?"
"우떤 아자씨가 줬어."
"아자씨?" 누나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물었고, 아이는 불현듯 입안이 타는 느낌이었다.
"참말 이랑께. 쩌그 춘앵간 앞에서 몰르는 아자씨가 줬어. 멋이냐, 핵교 가면 공부 잘허라고 함서."
그러자 뜻박에도 부엌에 있던 어머니가, "시방 멋이라고 그랬냐?" 불을 지피던 부지깽이를 든 채 황급히 가게로 나왔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시퍼런 표정이었다. 아이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진 것을 직감했다. "참말이어라우. 그랑께, 도리우찌 쓰고 당꼬바지 입은 아자씬디, 엄니를 안다고 함서 줬단 말이요. 엄니, 절대로 안 훔쳤어라우." 아이는 온몸을 긴장시키며 자신을 변명했다. 그러던 아이는 어느 순간 어머니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는 것을 훔쳐보았다. 그런 어머니의 입술 사이로 탄식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깅가밍가 했드만--. 급살맞을 인사--." 아이에게 매가 쏟아진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넋이 나간 듯 허공을 쳐다보던 시선이 아이에게 내려오기가 무섭게, "이 동냥치 새끼야, 나가 니한테 믹일 걸 안 믹엥냐, 입힐 걸 안 입 헹냐, 머이 부족해서 동냥질이냐?" 어머니는 욕설과 함께 부지깽이를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까짓 양말로 인해 매질을 당하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상상하지 못했던 아이로서는, 처음에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오메, 엄니. 동냥질한 것이 아녀라우. 그 아자씨가 맬갑시 줬단 말이 요."
"몰르는 사람이 주는 것을 기냥 받어 오면 그것이 동냥치제, 동냥치가 따로 있다냐?"
"아, 안 받을랑께, 어른이 주먼 공손허게 받어란디요?"
"아나, 나껏도 받어라, 아나, 아나." 어머니의 매질은, 아이의 몸뚱이에 부지깽이가 떨어질 때마다 숨이 헉헉 막힐 만큼 거센 것이었다. 아이는 이제 필사적인 마음이 되어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이리저리 매를 피했다. 그때 누나가 어머니를 말리고 나섰다. "오메, 엄니. 어째 이라요? 이러다 대운이 죽이겄소." 어머니로부터 매를 빼앗으려 들던 누나는 한순간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자빠져 버렸다. "니년은 가만 있어. 오늘 나가 이 놈을 쥑이고 나도 죽어뿔 거잉께." 어머니의 말보다도, 치맛자락에 매달려 얼핏 얼굴을 욜려다본 순간, 아이는 어쩌면 어머니가 정말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저기 굵은 힘줄들이 기어다니고 두 눈이 퍼렇게 번들거리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아이는 분명한 살기를 느꼈던 것이다. 아이는 지금껏 어머니뿐만 아니라 누구에게서도 그렇듯 무서운 얼굴은 보지 못했다.
불현듯 어떤 절망감이 아이의 눈 속으로 마치 캄캄한 어둠처럼 몰려오는 것이었다. 아이는 더 이상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지 못하고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그렇게 무너져 내리면서 아이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맞을 매가 아니다. 그리고 아이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작고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아이를 내려다보며 비웃는 듯 혹은 딱해 하는 듯 얄궂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처음으로 빠지는 자기혐오란 어쩌면 훗날 화려하게 피어날 아름다움이라는 꽃의 싹눈은 아닐까.
그리하여 그 싹눈에서 대지를 향해 뻗어 가는 첫 뿌리는 아닐까.
이윽고 대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다음, 이번에는 푸른 하늘을 향해 키를 누여가는 줄기는 아닐까.
그리고 그 줄기에서 가지로 퍼져나와 온몸 가득히 문을 열어 탄소동화작용을 하고 있는 이파리는 아닐까.
그렇듯 오랜 낮과 밤을 보낸 끝에 이슬이 많이 내린 어느 날 아침 봉긋이 맺어 보는 꽃봉오리는 아닐까.
훗날 그것이 악이나 독의 꽃이 될지 아직은 아무 것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사춘기란 이른 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봄에 대한 예감은 사방에 가득한데 정작 확인하려 들면 어느 하나 확실하게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대신에 아직은 매서운 바람과 칼날 같은 추위가 여린 살을 찢는다. 그렇듯이 무언가 이제 막 시작되려 하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예감은 사방에 가득한데, 어느 하나 인생의 실체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예감은 견딜 수 없는 갈증으로 변하고, 이제 막 시작되려는 자신의 인생 대신에 지금껏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조건만이 매서운 바람과 칼날 같은 추위가 되어 여린 살을 찢는다. 아아, 사춘기의 어린 나이에 돌아다보는 자신의 삶이란 정작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내가 자신의 사진들을 없애고, 국민학교와 중학교의 졸업 사진에 면도날을 대던 무렵이 바로 사춘기의 초입일 터이다. 헤아려 보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여 재수를 하던 때이다. 어린 재수생으로서는 사방의 모든 것들이 다만 춥고 암담하였을 것이다. 심한 자기혐오에 빠진 것도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해도 사진들을 없애고 급기야 자신의 얼굴에 면도날까지 대는 행위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어린 재수생의 자기혐오라고 해도 무언가 정도를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럴지도 모른다. 문제는 바로 사춘기의 어린 나이에 벌써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아 버린 데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는 소년의 눈에 맨 처음 비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엉뚱하게도 소년은 자신의 얼굴보다는 타인의 얼굴을 먼저 돌아다보아 버린 것은 아닐까. 언제인가 어떤 절망감이 캄캄한 어둠처럼 어린아이의 두 눈에 몰려올 때, 바로 그 어둠 속에 떠오르던 작고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 더 이상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아이를 향해 비웃는 듯 혹은 딱해 하는 듯 얄궂게 웃던 사내. 그랬을 것이다. 소년도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사내는 소년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서, 소년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조건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삼십 촉 짜리 흐린 전등 아래서 손을 떨며 소년이 면도날로 지운 것은 어쩌면 얼굴은 영원히 사내의 얼굴에 가려지고 말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소년은 마치 자신의 인생의 어떤 예감에 대한 갈증처럼 사내의 얼굴 때문에 보지 못하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년은 면도날로 자신의 얼굴을 지우는 식의 자기혐오 이외에는 사내의 얼굴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사방의 모든 것이 춥고 암담한 사춘기의 소년에게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터이다.
내가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고, 그리하여 거기에서 정작 자신의 얼굴보다는 작고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를 먼저 보았을 때, 사내는 당연하게 나의 인생에 하나의 조건이 되어 개입하였다.
'사생아.' 어린 시절 어둠 속에서 단 한 번 보았던 사내가 나의 생부라는 것을, 그리고 그 무렵 생부는 오랜 감옥살이 끝에 갓 출감하였다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듯 나는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는 사생아거나 장돌뱅이 출신인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다. 오히려 장돌뱅이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며 잡초처럼 자라던 시절의 기억 속에는, 한줄기 구김살도 없이, 장터의 밑바닥 사람들만이 갖는 특유의 자유 분방함과 낙천적인 분위기만이 가득 차 있다. 모름지기 사춘기 소년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예감하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전까지는 나는 그런 대로 행복한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장돌뱅이에게 있어서, 닷새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장날이란, 어른 아이 막론하고 축제일 수밖에 없었다. 장날이 돌아오는 나흘 내내 기껏해야 휴지 나부랭이나 회오리바람에 날리곤 하던 쓸쓸한 빈터와 기둥만 앙상하던 빈 가게들이, 장날이 되면 하루아침에 갑자기 사람들이 들끓는 싸전이며 어물전, 포목전, 유기전, 옹기전, 잡화전 등으로 변하고, 노점 음식점들마다 돼지 머리와 순대가 산더미처럼 쌓이거나 가마솥이 넘치도록 팥죽이 끓어 대는 요술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축제 분위기 속에서 장터의 사람들은,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목이 시도록 시골 사람들을 불러 하루 벌어 닷새를 먹고 살 돈을 마련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장터의 이곳 저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물건을 훔치거나 아니면 혹시 길에 떨어진 동전 한 닢이라도 줍기 위해 해종일 악머구리 끓듯 해댔다. 시골 사람들은 그런 장터 사람들을 비하하여 어른이나 아이들 할 것 없이 한데 싸잡아 장돌뱅이라고 불렀고, 장터 사람들은 장터 사람들대로 시골 사람들을 얕보아 촌놈들이라고 불렀다.
우리 식구는 모두 장돌뱅이였던 셈이다. 어머니는 어물전의 한 귀퉁이에서 길바닥에 거적대기를 깔고 그 위에 역시 거적대기만한 차일을 친 채, 김이며 미역, 멸치, 마른 새우등의 해산물을 팔았다. 내가 갓난아이였을 때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해종일 어머니와 함께 장날을 보냈지만, 조금 커서 너댓 살이 되었을 때만 해도 이미 어머니의 등을 벗어나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장돌뱅이가 되어 장터를 헤집고 다녔다.
어린 장돌뱅이의 벌이는 그다지 신통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싸전 근방을 기웃거리며 기회를 엿보다가 어른들의 다리 틈으로 쌀을 한 주먹씩 훔쳐내어 주머니를 가득 채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되밀이꾼에게 들켜서 되밀이로 얻어맞거나, "아 문댕이 새끼, 손모가지를 콱 짤라 불기 전에 쌀 못 놔?"
"아이고, 저건 어떤 장똘뱅이년 구녕에서 나온 새끼여?" 하는 시골 아낙네들의 막된 욕지거리야 다반사였고, 조금도 개의할 바가 아니었다. 어린 장돌뱅이들은 저만큼 도망치면서 "히힛, 니에 미 씹이다아"하고 대거리를 해대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렇게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쌀을 훔친 다음이면, 이번에는 약장수가 굿을 벌이고 있는 곳으로 가서 맨 앞줄에 않아 입술이 허옇도록 야금야금 고소한 쌀 맛을 즐기면서 약장수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간혹 길에서 큰돈이라도 줍는 날이면 어린 장돌뱅이들에게는 바로 그 날이 명절이었다. 오다 마나 구루메루 같은 주전부리는 물론 잘하면 팥죽이나 순대, 돼지머리도 실컷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렇듯 큰돈을 주우면 대개는 낌새를 알아챈 열 서너 살쯤의 좀더 큰 장돌뱅이들에게 빼앗기게 마련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시의 시골 장터는 너나없이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밑바닥 사람들이 몰려든 곳이었다. 서른에서 마흔을 전후한 나이의 장터 아낙네들은 흔히 남편이 없거나, 남편이 있더라도 전혀 생활에 무능력한 병자이기가 십상이었다. 그런 장터 아낙네들은 바로 자신의 몸뚱이와 손님을 소리쳐 부르는 입만이 전 재산이었고, 그 전재산에 병든 남편과 어린 자식들의 목숨이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번번이 장터로 흘러 들어와 장돌뱅이가 되는 아낙네들은 대개가 사연이 비슷하였다. 한 아낙네가 전쟁에 남편을 잃었으면, 다른 아낙네는 멀쩡한 농사꾼이던 남편이 갑자기 폐병이 들어 병수발에 가산을 탕진해 버렸다는 식이었다. 아낙네들은 장터로 흘러들기가 무섭게 바로 고리장수의 체곗돈을 빚내어 가까운 항구에서 갈치며 고등어 따위 생선을 떼다가 장바닥에 좌판을 벌였다. 그렇게 장돌뱅이가 된 아낙네들은, 반년이나 일 년 쯤 버티다가 끝내 병든 남편이 죽으면 어쩔 수 없이 어린 자식들이 올망졸망 딸린 과부가 되고, 과부가 된 얼마 후에는 쉽게 개가해 갔다.
장돌뱅이 같은 밑바닥의 사람들은 굶주림에 대해서 거의 동물적인 공포를 갖기 마련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생존이란 바로 굶주림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에 다름 아니었지만 때로는 그러한 생존마저도 지켜 내지 못하곤 했다. 어쩌다 장마가 계속되거나 극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아 예 장이 서지 않는 시절에는 더 이상 장터에서도 견뎌 내지 못한 채 대처로 떠나거나 거렁뱅이로 나서는 집이 나왔다. 그런 장돌뱅이들에게는 인근 농촌의 엄격한 도덕이나 관습은 자신의 생존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로 여겨졌을지도 몰랐다. 비록 선망의 대상은 될지언정 지금 당장 굶주리고 있는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한, 어떠한 도덕이나 관습도 자신의 삶을 속박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대부분의 장돌뱅이 아낙네들과 대저 큰 차이는 없었다.
어린 시절에 나는 내 의부를 일컬어 전혀 스스럼없이 '사촌 아부지'라고 부르고는 했다. 의부가 생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대신에 어린 내가 궁리해 낸 일종의 타협안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의부는 비록 쓴웃음을 지을망정 별로 탓하지는 않았다.
내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어쩌다 자신의 의부에게 매라도 맞으면 길길이 날뛰며 "지에미 씹할 놈이 진짜 아부지도 아님서 왜 때려?"하고 고래고래 욕질을 해대는 풍경은 흔히 볼 수 있었다. 나라도 의부에게 매를 맞았다면 틀림없이 다른 아이들처럼 길길이 날뛰며 욕질을 해댔을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의부에게 욕질을 해댄 기억은 없다. 아마도 의부가 나를 때린 일이 없어서였었을 것이다. 나와는 열 한 살 차이가 나는 누이를 낳은 첫 결혼에 실패한 후, 어머니가 누이를 데리고 장터로 흘러온 것은 해방 무렵이었다. 손재주가 있어 일찍이 재봉 기술을 익힌 어머니는 어렵사리 재봉틀을 마련하여 장터에다가 조그맣게 양복점을 차린 것이었다. 물론 양복점이라지만 번듯한 새 옷 을 만드는 것보다는 수선이나 짜집기 따위가 전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를 인근에서 호가 난 노름꾼이자 건달패인 나의 생부가 무심하게보아 널길 리가 없었다.
내가 태어난 고장은 일제시대에 이미 간척 사업이 벌어져 드넓은 간척지를 끼고 있어서 타고장보다는 비교적 물산이 풍부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노리고 꾀어 드는 패들이 만만치 않아 일찍부터 노름이 성행하고 작부를 둔 술집들이 흥청하였다. 생부는 그렇게 꾀어 든 패들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훗날 내가 생부와 맺어지게 된 것을 궁금해하자, '나가 머에 눈이 씌었든 갑서야, 글 않고서야 어찌께 그런 인사를 만났겄냐. 아매도 니가 생길라고 그랬든 모냥이여' 환갑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붉히면서 변명하듯 대답했다. 그러나 장터란 곳이 원래부터 젊은 여자가 혼자 살아 내기에는 힘든 곳이 아니었으랴. 더군다나 노리는 상대가 그런 일에 호가 난 건달패였음에랴.
어머니와 맺어지자 생부는 당연하게 기둥서방 노릇을 하였다. 거기다가 생부는 그 무렵 아편에도 손을 대어, 어머니에게서 노름 밑천과 아편 밑돈을 함께 강탈하였다. 하루하루 벌어서 끼니 때우기도 어려운 시절에 생부에게 노름 밑천과 아편 밑돈을 대는 일은 아무리 억척같은 어머니로서도 무리였을 것이다. 급기야 생부가 어머니의 유일한 생계 수단인 재봉틀마저 훔쳐다가 아편으로 없애 버리자 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생부에게서 등을 돌렸다. 때마침 생부가 아편 밀매와 마약 중독으로 감옥에 가자 어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의부를 택했다. 하루아침에 생계 수단을 잃어버린 어머니로서는 무엇보다도 어린 두 자식의 굶주림을 보아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의부는 인근의 중상으로 주로 서울이나 강원도 등지의 웃녘 장사를 하는 해산물 도매업자였다. 의부와 함께 산후로 우리 식두들의 굶주림에 대한 공포감은 어느 정도 사라졌지만, 대신에 어린 나이로는 차마 견뎌 내기 힘든 외로움이 누나와 나를 울리곤 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이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어머니가 한번 의부의 장사길에 따라나서면 한두 달은 예사이고, 심지어는 서너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의부의 웃녘 장사는 전라도에서 쌀이나 보리 따위 곡식을 사 가지고 배를 이용하여 속초나 묵호 등지의 강원도로 가서 오징어나 명태 등을 되사 오는 일종의 물물교환이었는데, 주로 겨울 동안에 행보가 이루어져서, 누나와 나는 겨울 내내 휑뎅그레 큰집을 지키곤 하였다. 어쩌다 가 돌아온다는 기약의 날이 지나도록 어머니와 의부가 돌아오지 않거나 혹은 바람이라도 거세게 부는 날이면 누나는 아예 목을 놓아 울었고, 누나 옆에서 나 또한 낑낑대며 따라 울기 마련이었다. 의부와 함께 살게 된 후로 어머니가 집에 있는 기간은 고작해야 일년에 너댓 달 정도였다. 어머니는 웃녘 장사를 떠나지 않을 때는 고작해야 오일장을 돌며 해산물을 팔았는데, 나는 그런 어머니를 따라다니려고 막무가내 때를 쓰곤 했다.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식구의 의부와의 새로운 생활은 예전보다 결코 행복한 편은 못 되었다. 어쩌다 장사에 손해를 보거나 셈이 틀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으레 어머니와 의부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곤 했는데, 두 사람의 싸움이라는 것이 부부 사이에 설마 그럴 수 있으랴 싶게 아예 사생결단이었다. 아무리 장터 같은 밑바닥 사람들의 감정이 거칠다고는 해도 이 부부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둘의 싸움은 치열하다 못해 결국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되어 벌렁 나자빠져야 끝이 났는데, 누구도 감히 이 싸움을 말리지 못했다. 어머니와 의부가 그토록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데는 정작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몰랐다. 의부는 본처에게서 자식을 생산하지 못했는데 어머니와의 사이에서도 전혀 자식이 생산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의부로서는 누나와 내가 어쩔 수 없이 눈엣가시처럼 아픈 존재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 도 누나보다는 사내아이인 내가 매번 싸움의 원인이 되는 것이 분명했는데, 의부에게서 그런 낌새가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어머니는 싸움에서 터럭만큼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싸움은 다짜고짜 의부가 한 손으로 어머니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한 손으로 어머니를 후려패는 것이 순서인데, 그러면 매번 어머니보다 누나가 먼저 눈을 뒤집은 채 속절없이 나자빠지곤 했다. "오메, 누가 울 엄니 잠 살레주시요, 울 엄니가 죽소오." 누나가 그럴수록 의부의 손속은 더욱 사나워지곤 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나는 한 번도 어머니와 의부의 싸움에 끼여든 기억이 없다. 누나와는 달리 나는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되어 싸움이 끝날 때까지 방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굳게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지켜보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것은 어린 내가 어떻게 해서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이, 더구나 의부를 향해 욕질 한 마디 뱉는 일없이 잠자코 싸움을 지켜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희미하게나마 가슴 밑바닥에는 굶주림에 대한 동물적인 공포감으로부터 우리 식구를 구해 준 의부에 대한 고마움이 숨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혹은 어머니와 의부 사이에 항상 자신이 싸움의 원인이 되는 불편한 위치라는 자각을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중에 지니고 있었는지도,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싸움이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 애매하지만, 의부와의 싸움에서 어머니가 꼭 한 번 이긴 적이 있었다. 의부는 곧잘 집에서 독작을 하곤 했는데, 해산물 도매업자답게 안주가 고급이었다. 주로 대구 어란이나 북어 찜 혹은 어포 따위 해물이었는데, 나로서는 맛보기 힘든 것들이어서 의부가 술을 마시는 날이면 어머니의 잔소리나 누나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나는 으레껏 술상 머리를 떠나지 못했다. 의부는 그런 나에게 이따금 안주를 건네주었던 것이다. 그날도 나는 의부의 술상 머리에 붙어 앉아 안주를 얻어먹고 있었는데.
"옜다, 니도 한잔 해뿌러라." 의부가 나에게 불쑥 술잔을 내밀었다. 무료했던 것일까. 차츰 취하기 시작한 의부의 눈매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나는 엉겁결에 의부에게서 술잔을 받았다. 그렇게 한두 잔 받아 마시던 나는 어느 순간에 뒷마당의 장독대며 장독대 옆에 붉게 핀 맨드라미가 빙글빙글 도는 것을 보았다. "허허, 이놈 봐라, 인자 본께 니가 술이 올른 모양이제? 우짜냐? 니도 쬐깜 술맛을 알겄냐?"
"히히, 장독대가 돌아라우, 맨드래미도 돌고라우. 오메, 사춘아부지도 돈디요." 나는 아마 술상 머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자 빙글거리던 장독대며 맨드라미가 한쪽으로 기우뚱 쏠렸고, 그 순간 나는 마루에서 뒷마당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오메, 대운아. 왜 그라냐?" 나는 금방 숨이 넘어갈 듯 다급한 누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까무룩히 정신을 잃어 갔다. 다시 먼 곳에서처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놈의 인사가 대운이를 쥑이네에." 내가 정신을 잃은 것과 어머니와 누나가 함께 의부에게 달려든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술 취한 기분 속에서도 두 여자의 달려드는 기세가 여느 때 같지 않은 것을 깨달은 의부는 평소의 의부답지 않게 쉽사리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이년들아, 애먼 소리 말어. 설마 허니 나가 갸를 쥑일라고 했겄냐? 넙죽넙죽 잘 받아묵길래 자꼬 주다본께 그런 거제. 이년들이 생사람을 잡어도 유분수제--." 그 후로 의부는 다시는 나에게 술은 물론 안주마저도 일체 건네주지 않았다. 물론 나 또한 어머니의 매가 무서워 더 이상 의부의 술상 머리에 얼씬거리지 못했다. 인생에 대한 조건을, 면도날로 얼굴을 지우는 식으로 확인한 사춘기의 소년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좀더 파괴적인 자기 혐오에 빠져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진행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자신의 출신 성분을 증오하다 못해 무슨 치부처럼 여겼을 터였다. 그랬다. 나는 한 순간도 자신의 치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다가 길거리에서 여학생과 얼핏 눈이라도 마주치면 나는 뜨거운 불에라도 덴 듯 화들짝 놀라곤 했다. 나는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붉게 물들었을 것이었다.
'지금 나는 저 여학생한테 내 치부를 들키고 말았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도청 소재지에 있었는데, 시골 장터의 장돌뱅이 입장에서는 일테면 유학을 온 셈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새 교복을 입은 것만으로도 나는 다른 장돌뱅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기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장돌뱅이들로서는 자식을 고등학교까지 진학시킨 것은 어머니가 처음이었다. 내 또래의 다른 장돌뱅이들은 대부분이 국민학교를 졸업하기가 무섭게 서울 등의 도회지로 나가서 상점의 점원이나 중국 집의 배달원 혹은 넝마주이가 되거나 일찍부터 부랑아로 빠졌고, 어렵사리 중학교라도 마친 또래들은 한두 명에 불과했다. "인자 두고봐라, 나가 배가 부서져서 가루가 되야도 니를 기연시 대핵까장 높은 공부럴 시키고 말텡께. 니는 암시랑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먼 된다 잉? 오메, 내 보물 단지 새끼이." 장터의 누구도 어머니를 탓하려 들지 않았다. 다른 아낙네들은 오히려 한술 더 떠, "인자 대운이 엄니는 고상 다 했소. 고등과를 댕기는 아들이 있는디 머이 꺽정이오. 고상 끝에 낙이 온다등마는, 좋겄능거. 참말로 부럽소." 부추겼고 어머니는 더욱 기고만장하여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문이라우, 하문이라우. 인자 나 못 배운 포한은 반절쯤 풀렛소." 다만 한 사람 의부만이 그런 어머니를 여간만 눈시려워하지 않았다. 의부는 어머니를 향해 드러내 놓고 쯧, 혀를 차 댔다. "보자 보자 헝께, 이 여편네가 해도 너무 허네 그랴. 지발 속 잠 채레, 이 여편네야. 나가 끝까장 참겐을 안 할 라고 그랬는디, 머여? 대핵을 보내? 잉, 그래, 고등과는 그렇다 치고, 니가 먼 수로 대핵을 보내? 아, 천하에 부자들도 자석 하나 대핵 보내면 패가망신 허는 판인디 어쩌고 저쩨? 빕새가 황새럴 따라가먼 가랭이부텀 몬자 찢어져!"
"오메, 이 냥반 말하는 뽄세 잠 보소. 인자 봉께 식구가 아니고 웬수 였구만. 아, 몰르는 남들도 다덜 잘 되얏다고 말 한마디라도 보태 주는 디, 멋이라우, 가랭이가 찢어져라우? 그거이 여태까장 한솥밥 묵은 사람이 헐 소린게라우? 의붓자석도 자석인디, 그르케 자석 잘되는 꼴이 배가 아프요?"
어머니는 아예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아니 이년이 애먼 소리 허는 것 잠 보소. 머여? 나가 시방 배가 아퍼서 그런다고? 허어, 이년이 살인도 내것네."
"왜, 나 말이 틀렛소? 사람이 심보를 바르게 써야제. 심보가 삐틀리먼 되는 일이 없는 법인께." 어머니는 기어코 의부의 아픈 곳을 찔렀다. 벌써 오래 전부터 어머니와 의부는 장사에 있어서는 서로 갈라서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 저학년 무렵까지 비교적 순탄하던 어머니와 의부의 웃녘 장사는, 어느 해 겨울 오징어와 명태를 가득 싣고 묵호 항을 출발한 배가 풍랑으로 좌초된 후부터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겨울철의 배편이라는 것이 늘 위험하기 마련이어서 걸핏하면 침몰되거나 전복되는 사고가 뒤따랐고, 그 와중에서 두 사람은 자칫 목숨마저 잃을 뻔한 적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후로 어머니는 아예 인근 오일장이나 맴도는 해산물 소매업으로 주저앉았고, 의부는 의부대로 이것저것 다른 사업에 손을 대었다. 돌이켜 보면 의부는 그때부터 줄곧 불운이 떠나지 않았던 셈이다. 급기야 의부는 밀수에도 손을 대었는데, 누군가의 밀고로 배가 닿는 바닷가에서 현장을 급습 당하여 고스란히 밀수품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밀수 사건으로 의부는 재산의 대부분을 거덜냈을 뿐더러 나중에 벌금을 내기 위해서는 그 동안 어머니가 힘들게 마련한 우리 집까지 팔아 넘겨야 했다. 그 후로 의부는 이따금 어머니에게서 사업 자금마저 빌려 가는 눈치였고, 빌린 돈을 갚지 않아 이번에는 그것이 또 둘 사이에 싸움의 원인이 되곤 했다. 어머니가 다시 집을 마련하는 데는 뜻밖에 오랜 세월이 걸렸다.
어머니나 다른 장돌뱅이 아낙네들에게 그렇듯 선망의 대상이 된 내가 정작 그들을 자신의 치부로 여긴 일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무슨 원죄 의식처럼 가슴 밑바닥에 남아 있다. 어쩌면 그 무렵에 나는 사생아라는 조건보다는 오히려 장돌뱅이라는 출신 성분에 대해서 더욱 괴로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 당시의 나에게, 자신이 태어나서 자라 온 장터와 거기에 얽힌 기억들은, 나로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일종의 늪처럼 여겨졌다. 굶주림에 대한 동물적인 공포감,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끝나는 사생결단의 부부 싸움, 개똥처럼 버려진 채 아무렇게나 자라는 아이들,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이 장 저 장을 돌아다니는 장돌뱅이 아낙네들과 거기에 빌붙어 기둥서방 노릇을 하는 건달패들, 술집 작부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와 술취한 사내들의 고성 방가, 노름꾼, 소매치기--.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늪이 되어, 내가 거기에서 빠져나가려고 허우적이면 허우적일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게 하는 것이었다. 도청 소재지의 번화가를 걷다 보면 나는 더욱 더 뚜렷하게 자신이 빠져 있는 늪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대하는 갖가지 풍물들, 거의 눈이 부셔 바라볼 수조차 없게 만들어 버리는 문화라는 이름의 행사들, '피아노 독주회' '기념 전시회' '무용 발표회' '초청 공연'--, 그것들은 낱낱이 하나의 거울이 되어 남달리 예민한 감수성의 사춘기 소년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고,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저 어둡고 끈적이는 늪에 빠져 헐떡이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했다. 요컨대 나는 처음으로 장돌뱅이 이외의 사회에 눈뜨고, 처음으로 장돌뱅이 이외의 문화를 만나고, 그리하여 장돌뱅이가 사회에서 얼마나 비천한 위치에 있는가를 깨달은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무엇보다도 어머니를 위시한 장돌뱅이 아낙네들의 나에 대한 기대를 견딜 수가 없었다. 막연하지만 나는 그들의 기대나 선망이 바로 나로 하여금 그들에게서 등을 돌려 그들을 짓밟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 버린 것이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는 자신의 출신 성분이나 어머니를 위시한 장돌뱅이들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거나 무슨 치부로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밑바닥 사람들만이 지닌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낙천적인 분위기만이 먼저 떠오를 뿐이다. 모름지기 그들과 나는 알몸이었으며, 그들이 즐거울 때면 나도 즐거웠고, 그들이 슬플 때면 나도 슬펐다.
내가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언제였을까. 어쩌면 그들이 선망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이미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것 이 아니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들이 선망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상 나는 이제 그들과 한 몸일 수 없으며, 그들의 즐거움이나 슬픔도 오로지 그들만의 것일 뿐 내 것일 수는 없었다. 그들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낙천적인 분위기마저도 나에게는 단 한 가지의 의미밖에는 되지 않았다.
'치부' 그렇다. 자식에 대하여 그토록 기고만장하여 자만심을 감추지 못하던 어머니마저도 어느 순간 나에게 치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어머니에 대한 죄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고백하거니와 어머니를 치부로 여기면 여길수록 나의 죄의식은 더욱 깊어 갔다. 어린 내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본 것도 그 무렵일 것이었다. 그리고 약간 엉뚱한 장면에서 의부의 충고를 이해한 것도. '빕새가 활새럴 다러가먼 가랭이부텀 몬자 찢어져!' 나는 자신이 장돌뱅이 계층과 또 다른 계층 사이에 두 발이 묶인 채 능지를 당하여 가랑이가 찢어지는 장면을 상상했을 터였다. 물론 내가 당시에 계층이니 하는 어려운 말을 알았을 리 없지만. 만일 내가 좀더 일찍이 사회적 부조리나 계급적 모순에 눈떠, 그것들에게 자신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떼어 넘기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훗날 나는 그토록 깊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토록 자신을 허우적이게 하는 저 늪이며 눈부신 거울, 심지어는 어머니를 위시한 장돌뱅이들에 대한 죄의식-그 어느 하나에서도 헤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아니, 방법을 아예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만 한 가지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누구보다도 익숙해져 있었다. '자기혐오.' 면도날로 자기 얼굴을 지우는 식이라면 나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나는 결국 그 방법을 택했다. 나는 새 교복을 입은 지 채 일 년을 채우지 못한 11월 무렵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밤늦은 시각에 막차에서 내려 또다시 장돌뱅이로 돌아갔다. 이제 막 밤안개가 플랫폼이며 역사며 역사 너머 장터를 에워싸고 있었다. 안개는 넓은 간척지 너머 길게 누워 있는 바다에서 시작하여 늦가을의 싸늘한 수분을 품고서 슬금슬금 몰려와 장터를 휘감아도는 중일 것이었다. 나는 잠시 플랫폼의 가등마다 무슨 밤의 꽃처럼 겹겹이 피어나고 있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치 꿈꾸는 듯 몽롱한 눈으로 안개꽃을 바라보았을 터였다. 그러자 예의 안개꽃들은 내가 장터를 떠난 이후 받아야 했던 모든 상처들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렇게 안개꽃들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젖은 공기 속에서 어렴풋이 소금기가 묻어 있는 바닷내음이 풍겨왔다. 나는 몇 번이고 거듭 심호흡을 했다. 나는 다만 그렇게 심호흡을 하며 바닷내음을 맡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불현듯 두 눈에서 왈칵 눈물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손등으로 두 눈을 문지르며 나는 무엇보다도 바로 그 눈물이 분한 듯한 느낌이었다. 플랫폼의 가등에 불이 꺼지고, 이어 출찰구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이윽고 콧잔등까지 눌러썼던 모자를 벗어, 거기에서 모표를 떼어 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교복에 붙은 명찰과 학년 배지 따위를 마저 떼어 냈다. "잘 가라." 나는 그것들을 안개 속으로 힘껏 던졌다. 그런 나에게는 더 이상 졸업 사진 속의 자신의 얼굴에 면도날을 대던 순간의 손 떨림 따위는 없었다. 나는 다만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무엇인가를 향해 이를 악물었을 뿐이었다. 어머니의 표현에 따르자면 '반거치기'가 된 나는 자연스럽게 장돌뱅이 속에 끼여들었다. 그리고 건달패들의 똘마니가 되어 어린 깡패 노릇을 하였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왜 나는 분한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 아직 스스로 깨닫지 못하지만, 어쩌면 그 순간 자신의 얼굴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흔히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혐오를 견뎌 내지 못하고 끝 모를 나락으로 자신을 던져 버릴 때, 그렇듯 자신을 온전히 포기해 버릴 때, 거기에서 발견하는 것은 짓뭉개진 자신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자기애이기 십상이다. 가등마다 겹겹이 피어 나는 안개꽃을 꿈결처럼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던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바로 아름다움이 된 것일까.
건달패들의 똘마니 노릇을 하던 내가 거기에서도 밀려나 다시 복학을 한 것을 꼬박 한 해가 지난 다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저 늪이나 거울, 혹은 죄의식 따위에 시달리지 않았다. 똘마니로서의 한 해는 나를 나이 이상의 어른으로 만들어 주었고, 무엇보다도 내게 세상을 속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또한 플랫폼에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배웠던 자기애는 뜻밖에도 나에게 세상에 대한 무기가 되어 주었다. 세상에 대한 무기로서 나는, 그 무렵 알기 시작한 문학을 빼놓을 수가 없다. 똘마니 시절, 나 같은 얼치기는 흔히 사건을 처리하기보다는 사건을 키우기 마련이어서, 어느 날 건달패를 따라 노름빚을 받으러 갔다가 싸움이 벌어졌는데 자칫 겁을 준다는 것이 그만 상대방의 머리통을 깨버렸고, 나는 결국 사건이 무마될 때까지 장터를 떠나야 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다시 도청 소재지로 갔고, 거기에 있는 친척집에서 몇 달을 숨어 지냈다. 바로 거기서 나는 문학을 만난 것이었다. 친척집의 서가에는 세계 문학 전집을 위시하여 한국 문학 전집 따위가 장식용 비슷하게 꽂혀 있었는데, 지방관청의 주사 급이던 친척은 술이라도 얼큰한 날이면 나를 붙들고 서가를 자랑하며 자신의 문학 취미에 대해서 가로세로 떠들곤 하였다. 나로서는 문학이 처음이었다. 문학마저도 장돌뱅이 부류는 낄 수 없는 보다 정신적이고 고귀한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던 나는 한두 권 소설을 읽어 나가는 동안에 벼락이라도 맞듯 충격을 받았다. '이건 바로 내 이야기 아닌가!' 어떤 소설은 나보다도 형편없는 개차반 인생이 바로 그 개차반 인생을 그것도 무슨 자랑이라고 중언부언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바로 그 개차반 인생이 그런 이야기로 작가가 되고, 그리하여 당당하게 세상에 끼여들었다는 점이었다. 문학이 그런 식이 라면 나도 얼마든지 자신이 있었다. 당시 내가 이해한 문학은 내가 세상에 끼여들 수 있는 일종의 문 같은 것이었다. 친척의 서가에서 앤솔러지를 발견하고, 그리하여 차츰 시를 알기 시작했을 때, 나는 소설보다는 시를 쓰기로 작정을 하였다. 아무리 영악한 채 하지만 역시 어렸던 나로서는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세상에 까 보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치부는 전혀 건드리지 않으면서 무엇인가 있는 듯 없는 듯 잘도 꼬리를 감추는 시 쪽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내가 똘마니 시절에 배운 세상을 속이는 방법과 시가 지닌 상징이나 은유 따위의 애매 모호한 기교는 신기하게도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다시 복학을 하자 나는 자신의 기대 이상으로 문학을 잘하였다. 시 쪽을 택한 나의 궁리도 잘 맞아떨어져서 나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놓지 않고서도 거뜬히 세상에 끼여들 수 있었다. 몇 군데인가 백일장을 휩쓸자 당연히 내 이름은 도청 소재지의 남녀 고등학교 문예반에 알려졌고, 모르는 여학생들로부터 심심하지 않게 편지도 받았다. 아아, 처음으로 여학생의 편지를 받았을 때의 감격이라니! 나에 대한 동경으로 거의 글씨마저 떨리는 듯한 그 편지는, 처음에 나에게 일종의 면죄부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랬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심지어 감추어진 치부까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듯이 착각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감격의 순간이 지나자 나는 곧이어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했다. 착각하지 마라. 너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상은 그렇듯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고작 철없는 여학생 한 명이 너에게 속아넘어간 것뿐 아닌가. 그것도 정작 네가 아닌 너의 문학에.
편지가 아니라 실제로 여학생을 대하고 그리하여 나에 대한 호감을 확인했을 때도 나는 마찬가지였다. 도청 소재지에는 남녀 고등학교 문예반에서 한두 명씩 뽑혀 나와 만들어진 문학동인회가 있었고, 마침내 나도 거기에 가입하게 되었다. 일 주일에 한 번 만나서 서로 작품을 돌려읽고 평 을 하는 식의 모임이었는데, 신입 회원으로 첫 인사를 하던 때의 기억을 나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아무리 무기를 지니고 단단히 무장을 했다고 해도 역시 어린 나이였다. 나에 대한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들을 대하는 순간 나는 또다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저 아이들은 혹시 내 치부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온몸이 후둘 후둘 떨려 왔고, 그것을 숨기기 위하여 나는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당시의 나에게, 적어도 그들만큼은 세상을 속이는 나와는 달리 올바르게 문학을 하는 셈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으로 자란 아이들이었다. 바로 그들에게 내 치부를 들킨 것이었다. 그런 나를 누군가가 구해 주었다.
"댁의 명성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만 목에 힘 빼세요." 얼굴이 달걀처럼 갸름한 여학생이었다. 여학생의 말에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입을 벌려 웃었다. 그 순간 나는 정말로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어떤 허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 올라왔다. 엉뚱하게도, 나는 세상을 속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고 마치 그들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여전히 웃고 있는 그들을 보며 나는 이런 식일 바에는 차라리 자신의 치부를 들키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한바탕의 웃음과 함께 인사가 끝났을 때, 얼굴이 갸름한 여학생이 다시 나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색을 좋아하세요?" 여학생의 질문이 나에게는 왜 그렇듯 잔인하게 들렸던 것일까. 나는 마치 여학생을 짓뭉개는 기분으로 대답했다. "빨간 색이오." 얼마 후 그 여학생에게서 편지를 받았을 때 나는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변소에 버렸다.
여학생의 편지를 변소에 버린 행위는, 단순하고 유치한 심리와는 달리, 나의 일생을 통해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다. 물론 당시의 나로서는 까마득히 몰랐지만 그것이 일테면 나의 위악의 시초였던 셈이다. 훗날 대학 시절을 거치면서 이 위악이야말로 나에게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어 있었다.
돌이켜보면, 대학 시절, 세상에 대한 나의 무기는 바로 위악이었을 터이다. 사회과학 식으로 말한다면 위악이 나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이 위악은 자연스럽게 죽음이라거나 탐미주의 혹은 허무주의 등과 뒤섞여 세상에 대하여 깊게 병든 한 청년의 문학이 되어 갔다. 얼마 전 인사동의 술집에서 나는 우연히 한 후배를 만났다. 후배는 후배대로 일행이 있었고, 나는 나대로 일행이 있었는데, 서로의 술자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를 불렀다. "너한테 고백할 게 있는데--. 어때? 둘이서 한잔 더 하지 않으련?" 내가 일부러 정색을 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또 밤새우게요?" 슬쩍 한 발을 빼는 시늉을 하였다. 기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와 어울린 술자리는 매번 밤을 세웠다. 그러나 조금만 헤아려 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차츰 기분 좋게 마시는 술자리가 드물어지고, 그러다 보니 어쩌다 즐거운 술자리가 되면 여간 만 해서는 쉽게 헤어질 수가 없게 된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에게는 그와의 술자리가 매번 즐거웠던 셈이다
"아니, 오늘은 정말로 너한테 고백할 것이 있어서 그래." 내가 또다시 정색을 하였고, "어쩐지 겁나는데요?" 그는 여전히 빙글거렸다. 서로의 술자리가 차츰 어수선해질 무렵 그와 나는 살그머니 술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추운 밤거리에서 그의 팔짱을 끼고, 열두 시 넘어서도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술집을 찾아 헤매는 동안, 나는 그를 새삼스럽게 쳐다보곤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이었다. '나는 왜 이 친구를 좋아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런 질문 자체가 황당한 것일지도 몰랐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자체까지도 의심을 품어야 하는 식이라면 그것은 상식이 아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스스로에 대한 의아심이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몇 해 동안이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문단 주변의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지내 온 셈이었다. 그런 태도는 사람들뿐만이 아니고 무슨 행사나 모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거기에는 아예 등을 돌린 상태였을 터이었다. 그런 나의 기피증은 어쩌다 문학 운동을 하는 후배들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숫제 싸늘한 시선이 되곤 했다. 그러면 무심코 나를 향해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오던 후배들은 나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그런 태도가 된 것은 물론 자신에게 원인이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런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반동의 기간인가?' 자문한 적이 있다. 그럴지도 몰랐다. 예를 들면 아무리 먹고 싶었던 음식이지만 그 음식 한 가지만을 줄곧 먹다 보니 이번에는 코끝에 냄새만 맡아도 거부감이 오는 그런 식인지도 몰랐다. 몇 해 전, 십 년 가까이 관여하던 출판사를 그만두던 무렵이 나에게는 그와 비슷했을 것이다. 아니, 그때 나는 어떤 거부감을 지나쳐서 차라리 끔찍하게 여겼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출판사와 관계되는 모든 것들을 그렇듯 철저하게 외면하게 된 것인지도. 내가 관여했던 출판사는 여느 출판사와는 달리 문학운동적인 성격이 강했다. 우선 출판사의 출발부터 뚜렷한 사주가 없는 일종의 공동체적인 구조에다가 수익금은 모두 문학 운동이나 혹은 소위 민중운동권을 돕는 데 사용할 목적이었다. 문단의 선배들에게서 그 출판사에 관여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을 때,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직장다운 직장 생활을 해보지 못한 터수임에도 불구하고 거절하지 못했다. 그 무렵이 내가 소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하다 풀려나온 직후였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머니의 일이며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속수무책으로 버려 둔 처자식을 거두어 준 문단의 선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빚을 갚는 일이 나에게는 바로 출판사에 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자, 문단의 선후배들에게 빚을 갚는다는 마음보다는, 자본의 속성에 따라 이윤을 좇는 데 급급하는 출판 경영인의 마음뿐이었다. 거기다가 어쩌다 좋은 작품을 만나면 나는 감동하기에 앞서 상품성부터 먼저 헤아리게끔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자신의 그런 변모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다 출판사가 소위 베스트셀러를 내자, 돈걱정에서도 해방된 나는 밤마다 술집을 헤매거나 황폐한 연애에 빠져들었다. 내가 또다시 새삼스럽게 저 사춘기 무렵의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결국 나로서는 출판사를 그만두는 것 이외에는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 없었을 터이었다. 한편 출판사의 성격 자체도 어느 면에서는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필요 따위를 지나쳐서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출판사의 성장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있었다. 출판사는 처음부터 당연하게 80년대 정권에 대하여 반체제적 문학 운동으로 나아갔고, 80년대 중반 이후 민중시를 비롯하여 노동 문학이 형성될 때는 그 터전이 되기도 하였는데, 그 무렵 모든 동권을 몰아쳤던 노선 투쟁이 급기야 문단에도 몰려와 무슨 엔엘이니 피다니 하는 어려운 싸움에 말려들었다. 나로서는 이쪽 말을 들으면 이쪽이 맞는 것 같고 저쪽 말을 들으면 저쪽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쉽사리 편을 들 수가 없었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서로의 인간관계가 무너질 정도로 사생결단도 예사였다. 너무 깊이 숲에 들면 그 숲에 가려 막상 산은 보지 못한다고 한다. 비유하자면 나는 너무 깊이 숲에 든 나머지 민중운동이라는 큰산은 보지 못 한 채, 무슨 당위성이나 분파주의 혹은 교조주의나 조직 논리에 따른 비인간화 따위 악목들만 본 셈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운동이란 그 길이 잘 가는 것이건 못 가는 것이건 어쨌든 앞을 향해 나가고 있는 이들의 몫이고, 그것이 바로 진보 아니랴. 십 년 가까운 출판사 생활에 나는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거의 모든 사고가 보수화 되어 있었다. 나는 운동의 조직 논리에서 왜 조직의 보전을 위해서는 정기적인 숙청이 필요한가를 이해했다. 그리고 나는 출판사라는 조직에서 스스로를 숙청하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니?" 맞춤한 술집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내가 먼저 후배에게 운을 떼었다. 그는 여전히 빙글거리는 웃음 속에 한 가닥 경계의 빛을 감추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부끄럽게."
"그게 부끄러워할 일인가?"
"그럼 자랑할 일인 가요?"
"나라면 자랑하지."
"에이, 선배님도 참. 그러지 말고 술이나 드세요" 그가 술잔을 들어 나의 입막음을 하였고, 나는 그의 잔을 부딪쳤다. 그러면서도 나는 머리 속에 그와 처음 만나던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런 술자리 처음이오?"
"예."
그는 아주 쉽게 대답하였다. 맙소사, 이건 점입가경이로군. 나는 그가 쉽게 대답한 그만큼 나 또한 쉽게 그에 대해서 잊어버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한참 동안은 정말 그에 대해 잊어버렸다.
술자리는 어느덧 노래가 시작되어 어떤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고, 이윽고 내 차례가 되자 나 또한 어떤 절정에 올라 '울고 싶은 인생선', '울며 헤어진 부산항', '망향의 노래' 따위 주로 청승맞은 노래를 계속 불러 댔다. 그 무렵 나는 출판사를 그만둘 작정인데다가 무언가 자신의 인생은 실패하고 말았다는 식의 자기혐오에 빠져 있을 때여서 노래도 다분히 감상적이고 청승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어떤 심상치 않은 느낌에 그를 돌아보자, 그는 눈물이 가득히 고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처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던 내가 "왜, 노래가 너무 퇴폐적이오?" 농반진반으로 묻자, "아닙니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왜, 하고 내가 눈으로 묻자, 그는 여전히 눈물을 글썽거린 채 입을 열었다. "제 아버님 생각이 나서 그럽니다."
"아버님이라고?" 일행 중의 누가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고, "예." 그가 대답했다. 어느덧 술자리도 슬슬 끝나는 것을 느끼며 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주시했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얼핏 눈살을 찌푸리더니 입을 얼었다. "제 아버님이 부르시던 노래였거든요. 한 해 농사를 죄다 소작료로 갖다 바치고 온 날이면 아버님은 노래를 부르셨어요. 평소에는 술을 안 하시는 분인데 그런 날은 술이 취해 우시면서 노래를 부르시는 거예요. 그렇게 마음을 달래신 거지요. 우리 땅이라곤 한 뼘도 없었거든요. 노래 가사나 분위기가 그때 듣던 것하고 똑같다 보니--." 어눌한 말투와는 달리, 한번 말문이 트이자, 그의 입에서는 쉽게 그의 가족사가 풀려 나왔다. 방안의 사람들은 그리하여 한 사람의 공부를 위하여 고향을 떠난 일가족이 누구는 공사판의 막노동으로, 누구는 행상으로, 또 누구는 공장의 여공으로 나선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비로소 그가 왜 대학의 강사직을 그만두고 노동운동에 나서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뭘 그렇게 골몰히 생각하세요? 술 드시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가 나를 상념에서 깨워 주었다. 나는 일순 당황하기도 하여, "응, 갑자기 네가 부러운 생각이 들어서." 그로서는 엉뚱한 말을 했다. "또 나를 놀리려구요?" 그는 가볍게 경계하는 표정을 만들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가 부러웠다. 내가 아직도 위악을 세상에 대한 무기로 삼아 자신은 물론 남마저 피투성이로 만든 나이에, 그는 이미 노동운동을 무기로 삼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싸움에 몸을 던졌던 셈이다. "아니, 나는 정말로 네가 부러운걸. 그깐 이유는 따지지 말고, 자. 술이나 비우자." 그와 나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내가 말을 이었다. "자신을 괴롭힌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지?"
"그렇겠지요."
"자신을 괴롭히다보면 무엇보다도 그만큼 남을 괴롭히니까." 탁자 너머로 건너다보았더니 그는 무언가 애매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표정에 쐐기를 박았다. "흐응, 너도 남을 많이 괴롭힌 모양이구나." 그의 애매하던 표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힘들 때가-- 많았어요."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와 나는 다시 한번 단숨에 술잔을 비워 냈다. 내가 말머리를 돌렸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나의 말에, 그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지금 너 있는 곳 말야. 네가 가끔씩 위태해 보였거든. 저러다 무너지는 건 아닌가 하고." 그는 아직도 나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한 듯 의아한 시선이었고, "좋은 뜻도 지나치면 위선이-- 아닐까?"
나는 마지막 말까지 했다. 지난 여름에 나는 우연히 그가 일하고 있는 곳에 들른 적이 있었다. 아마 여름 들어 가장 무덥지 않나 싶은 날이었는데, 서너 평 되는 공간에 책상 세 개와 손님용 의자 몇 개와 함께 그가 끼여 있었다. 낡은 건물의 사층인가 오층인가 되는 층수였으므로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 가쁜 숨을 쉬는 나에게 그가 부채를 내밀었다. "아니, 이놈의 사무실에는 그 흔한 선풍기 하나 없단 말이냐?"
"미안해요." 그러고 보니 허우적거리며 계단을 올라온 나뿐이 아닌 그도 역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한 면만이 밖에 면한 채 창이 나 있고 나머지 세 면은 낡은 베니어판으로 막아 다른 사무실 구별해 놓은 곳에 바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에라, 이 징헌 놈아." 나는 부채를 들어 그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런 나에게 불쑥 한 가지 의문이 솟아 왔다. '이 친구는 지금 무엇을 견뎌 내는 것일까?' 그가 일하는 사무실은 재야권의 문화 운동 단체로, 그는 거기에서 대중 교육의 실무를 맡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월급 따위는 있을 리가 없을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관여하던 노동운동 조직이 반국가 단채로 몰려 와해되는 과정에서, 조직원의 누군가는 잡혀가고 누군가는 기약 없는 도피 생활로 접어들면서, 너나없이 어려운 좌절의 시기가 닥쳐왔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 그는 도피 생활을 끝내고 세상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무엇인가를 시작했다. 나는 그가 새롭게 시작한 것이 무엇인지는 구태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다.
"선배님은 제가하는 일이-- 위선으로 보입니까?" 그가 얼마쯤 심각한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향해 비스듬히 웃어 보였다. "왜, 찔리는 데라도 있니?"
"그런 점도 없지 않지요."
"이 바보야, 내 얘긴 말야, 너 스스로를 아낄 줄도 알란 얘기였어." 그와 나는 또다시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그가 울고 있는 것을 알았다. 전혀 우는 기척도 없이 얼굴에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그런 얼굴로 그가 말했다. "아버님이 불쌍했어요. 차라리 미워하고 싶어도 도무지 미워할 수조차 없을 만큼요. 자신을 아끼고 말고 할 여유조차 나에겐 없어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빠른 속도로 뇌리에 살아오는 한 사내의 얼굴을 발견했다. 가늘고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 그런 눈매로 아이를 내려다보며 비웃는 듯 혹은 딱해 하는 듯 얄궂게 웃고 있는 사내. 그렇듯 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조바심으로 목이 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는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조차 없어서 괴로워할 때 또 누군가는 한 얼굴을 지우기 위하여 자신의 얼굴에 면도날까지 댔다.
"옛날 얘기 하나 할까?"
"예."
"옛날에 한 바람둥이가 있었지. 그런데 이 바람둥이는 연애를 할 때마다 우선 상대가 된 여자에게 치욕적인 상처를 주는 거야. 그래서 여자가 피투성이가 되면 그때야 비로소 이 바람둥이는 여자를 사랑하는 거지. 왜 그랬을까?"
"글쎄요."
"이 바람둥이는 여자보다는 바로 자신이 만든 상처를 사랑했던 것이지. 그런데 이 바람둥이가 아직 어려서 여자를 몰랐을 무렵에는 어떤 식이였을까?"
"--."
"사진에 있는 자신의 얼굴에 면도날로 상처를 입히는 식이었어."
"어렸을 때 무슨 정신적인 상처를 입었던 모양이군요?"
"아니, 흔한 사생아였을 뿐이야." 아마 그와, 나는 둘 다 취한 표정이 아니었을 터였다. "이 바람둥이의 요즈음 희망이 뭔지 아니?"
"그러구도 아직 희망이 남았어요?"
"그럼 남구말구. 뭐냐면 말이야, 글쎄. 뻔뻔하게도 또다시 연애를 하는 것이래지 뭐녀? 뭐, 인제야말로 연애가 뭔지 알겠다나 어쨌다나 하면서."
"그만하면 존경할 만하군요."
"존경은 필요없구, 냅둬라. 그 길로 가다가 뒈져 버리게." 나의 말에 잠시 아연한 표정을 짓던 그가 배시시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저도 옛날 얘기 하나 할까요?"
"너도?"
"예."
"해 봐."
"옛날에 사회주의자가 한 명 있었는데요."
"그래서?"
"아직도 사회주의를 안 버렸대요." 그는 이제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웃고 있지 않은 얼굴을 향해 말했다. "당연하지. 그 캄캄한 나이에 그거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아남겠니?" 그와 나 둘이만 남아, 하품을 참지 못하는 술집 주인이 기어코 사정을 할 무렵에야 둘은 술집을 나왔다. 열두 시가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기이하게도 밖으로 나오자 비로소 술이 취하는 느낌이었다. 그와 나는 텅 빈 거리에서 어깨동무를 했다. 포장마차의 불빛이 꿈결에서처럼 아득하게 다가 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나는 좀더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참, 내가 너한테 고백할 게 있었지?"
"아니, 그러면 정말이었어요?" 그가 나에게 되물었고, "정말이잖구." 나는 멈추어섰다. 그리고 가로등의 불빛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그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도 가로등의 불빛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뭐냐면 말야, 네 얼굴이야말로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것!"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가 곧바로 뛰어와 나를 막아섰다.
"저도 선배님한테 고백할 게 있어요."
"뭔데?"
"아름다움이야 원래 선배님 전공이라는 것!" 그는 내 흉내를 내어 나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 낮은 목소리를 냈다.
"뭐야, 서로 덕담 주고받긴 줄 아냐?" 나는 벌컥 화를 내었다. 그러나 자신도 억제하지 못할 한 가닥 기쁜 마음이 벌써부터 가슴 언저리께를 간지럽히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끝내 엉뚱한 말을 하고 말았다. "만약에 나한테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게 있다면. 그건 내게 아니야. 그건 내가 상처 입힌 모든 이들 것이지." 거기에는 저 작고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도 포함될까. 하고 문득 나는 자문했다. 그리고 별로 오래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사내야말로 나에게 가장 크게 상처를 입었는지도 몰랐다.
가난한 사람들 - 도스토예프스키
4월 8일
더없이 소중한 나의 바르바라!
오늘 아침은 어쩌면 이렇게 멋있을까요? 창문을 열자 태양은 환히 빛나고, 새들은 지저귀고, 그야말로 모든 것이 싱싱하게 살아나고 있습니다. 저는 창 밖을 바라보며 당신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바르바라, 기억나나요? 내가 당신에게 키스하던 때가? 그 때의 감정이 되살아나 지금 나는 아주 행복하답니다.
바르바라, 나는 이 방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참, 당신은 이 집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군요? 우선 어두컴컴하고 불결한 긴 복도를 상상해 주십시오.
오른쪽은 창문 하나 없는 벽이고, 왼쪽에는 여관집처럼 셋방이 한 줄로 죽 늘어서 있답니다. 난 부엌 한쪽에 칸막이를 하여 살고 있습니다. 혹 당신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방은 꽤 안정적일 뿐만 아니라 아주 편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당신 방의 작은 창문과 마주 보고 있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나의 천사여, 거듭 말하지만 내가 이런 방에 들었다고 해서 이상한 추측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단지 편리하다는 점에 유혹되었을 뿐이니까요. 참, 바르바라, 당신을 위해 봉선화 화분 두 개를 사왔습니다. 이 편지와 함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안녕, 나의 천사여! 벌써 출근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귀여운 손등에 키스를 하며 이만 펜을 놓겠습니다.
4월 8일
친애하는 마카르!
당신에게 선물을 받는다는 건 정말로 괴롭습니다. 그러한 선물이 당신에게 있어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또 그 때문에 당신이 얼만큼 절약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마카르, 저를 속이려고 하셔도, 또 변명하려 하셔도 소용없어요.
당신이 그렇게 시끄럽고 지저분한 곳에 세들어 계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제발 저 때문에 쓸데없는 돈일랑 쓰지 마세요. 당신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당신이 그다지 부자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참, 오늘 하녀 표도라가 일거리를 가져왔어요. 그 때문에 저는 하루 종일 마음이 즐거웠답니다.
4월 8일
친애하는 바르바라!
바르바라, 당신은 늙은 나를 놀리고 있군요! 하긴 머리칼도 희끗한 늙은이가 사랑이니 뭐니 하고 주책없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바르바라, 당신은 나의 마음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 나는 단지 아버지 같은 정으로 당신을 보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나의 생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말아 주십시오. 또한 당신 집에 간다는 것도 함부로 할 일은 아니지요. 사람들이 보면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릴 것이 뻔하잖아요. 나의 천사여, 차라리 내일 밤 교회의 기도식에서나 만나도록 합시다. 바르바라, 이젠 잠자리에 들어야겠어요. 잘 자요.
4월 9일
경애하는 마카르!
당신은 화를 내고 계신가요?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해 드렸다고 생각하니 정말 슬퍼지는군요.
마카르, 제가 당신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아시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전 상관없어요.
참, 마카르, 오늘 안나 표도로브나가 저에 대해 수소문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녀는 언제까지고 저를 쫓아다닐 건가 봐요. 자기가 나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나요. 저와 어머니를 굶어 죽지 않게 보살펴 주었는데 은혜를 잊어버렸다느니 어쩌구 하면서요. 안나 표도로브나 얘기가 나왔으니, 당신에게 저의 지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유년 시절은 여기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시골에서 시작되었어요. 아버지는 T현에 있는 P공작의 광대한 소유지의 관리인이었는데, P공작이 돌아가신 뒤 해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의 괴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비우기가 일쑤였는데, 어쩌다 집에 있는 날은 안색이 무척 어두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유도 없이 화를 벌컥벌컥 내는 등 성격까지도 아주 나빠져 버렸습니다. 일이 뜻대로 안 되어 빚만 산더미같이 졌다나요. 결국 아버지는 날로 수척해져 가더니, 오래지 않아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빚쟁이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살림살이를 모조리 가져가 버렸어요.
그 때, 안나 표도로브나가 나타났습니다. 아버지의 아주 먼 친척이라고 하면서 우리와 사이 좋게 지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추운 겨울날, 그녀를 따라 바실리예프 섬으로 떠났답니다. 안나 표도로브나는 상당히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우리에게 꽤 친절히 대해 주었지요. 하지 만 우리가 빈털터리라는 걸 알게 되자, 본성을 드러내어 못살게 굴기 시작했어요. 할 수 없이 우리는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일거리를 받아 삯바느질을 했지요. 바느질에다 온 힘을 쏟아 붓던 어머니는 점차 몸이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 무렵 저는 남몰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집에 하숙을 하고 있는 포크롭스키라는 가난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어, 브이코프라는 지주의 손에서 자랐답니다. 브이코프 씨는 안나 표도로브나의 친구였으며, 또 포크롭스키의 어머니와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그 집도 브이코프 씨가 소개해 주었고요. 아무튼 저는 그에 대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순 없고 하여, 항상 그를 곯려 줄 궁리만 했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저를 말괄량이 취급했습니다.
그날도 그런 마음이었겠지요. 저는 포크롭스키가 외출한 사이에 그의 방으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그의 방은 그다지 깨끗하거나 정돈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다섯 개의 책꽂이에 책이 가득 꽂혀 있었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이렇게 학식이 높은 사람에게 저 따위는 아무런 관심거리도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불현듯이 그의 책들을 남김 없이 읽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답니다. 그래서 떨리는 마음으로 책 한 권을 뽑아 드는 찰나, 복도에서 인기척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기 위해 선반의 책들을 죽 밀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선반을 지탱하고 있던 녹슨 못이, 마치 이 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힘없이 부러져 버렸습니다.
그 다음엔 선반 한쪽이 털썩 하고 내려 앉으면서 책들이 방바닥에 와르르 쏟아졌지요. 바로 그 때, 문이 열리면서 포크롭스키가 들어왔습니다.
"도대체 언제쯤에나 철이 들 거야?" 하고 그는 저의 얼굴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당황하여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 방에서 뛰쳐나왔습니다. 그 후 전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어머니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었습니다. 저는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잔 채 어머니를 돌봐야 했지요.
어느 날 밤, 밀려드는 피로 때문에 깜빡 잠이 들었던 저는 무서운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지요. 그러자 포크롭스키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저는 그의 팔에 안겨 있었습니다. 저는 밤새 한 잠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설렘이 온 몸으로 번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 날 밤부터 우리 두 사람의 우정이 시작되었지요. 어머니가 편찮으신 동안, 우리 두 사람은 매일 밤 몇 시간씩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묘한 기분에 휩싸여 그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고 말았습니다. 그를 사랑하고 있으며, 늘 가까이에서 그를 위로해 주고 싶다고--. 그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저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없이 괴롭고 쓸쓸한 기분에 젖어들었습니다. 혹시 이 사람이 나를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전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의 두 손을 잡아 키스를 하더니, 자기 가슴에 가만히 갖다 대었습니다. 그는 감동하고 있었던 거예요. 저의 가슴은 아주 따뜻하게 밝아 오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집에 이사 온 후로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즐거웠던 나날은 너무나 짧고, 그것을 대신할 슬픔과 불행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길었습니다. 그가 갑자기 앓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가 앓고 있는 동안, 매일 그의 머리맡에 붙어 앉아 간호를 했습니다. 포크롭스키는 이따금 제 얼굴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대개는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가을이 깊어 가던 10월의 어느 날, 그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의 장례를 치른 뒤, 저는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마지막 남은 친구인 어머니를 힘주어 껴안았습니다. 어머니를 죽음의 신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온 몸을 떨며 흐느껴 울었지요. 그러나 죽음의 신은 이미 어머니의 곁에도 다가와 서 있었습니다.
마카르, 이런 걸 편지에 써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저의 이러한 심정을 이해해 주시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쓸쓸한 마음을--.
6월 12일
그리운 바르바라!
어제는 옆방에 사는 라타쟈예프와 함께 문학 모임에 나갔답니다. 문학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든든하게 하고, 또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지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르바라, 만일 이 세상에 '마카르 제부시킨 시집'이라는 책이 나온다면 어떨까요? 길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저기 작가이며 시인인 제부시킨 씨가 지나간다. 저기 봐, 바로 저 사람이야." 하고 소리를 치겠지요. 참, 바르바라, 당신을 위해 책을 한 권 사왔습니다. 그리고 사탕도 보내 드릴게요. 사탕을 먹을 때마다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6월 27일
마카르!
어느 분이 저의 딱한 처지를 동정해서 가정 교사 자리를 알선해 주겠다고 합니다. 당신 생각은 어떠세요?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이 두렵기는 하지만, 당신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카르, 당신은 왜 요즘 저를 만나러 오시지 않나요?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노라면 무척 쓸쓸해진답니다.
6월 28일
사랑하는 나의 바르바라!
제발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다른 지방으로 가겠다니? 난 단연코 반대입니다. 차라리 내가 헌 셔츠 하나를 걸친 채 거리를 떠돌아야 하는 한이 있다 해도 당신을 불편하게 하진 않겠습니다. 바르바라, 그건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당신이 떠난다면 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신에게 찾아가고 말고요. 곧 찾아가겠습니다. 바르바라, 부디 마음을 가라앉혀 주십시오.
7월 1일
사랑하는 마카르!
거듭 생각해 보았지만, 이렇게 좋은 자리를 거절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곳 생활이 괴롭고 쓰라릴 수도 있지만, 매일 매일의 빵만은 어김없이 얻어먹을 수 있으니까요. 언제까지나 당신의 도움을 받으며 산다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전 항상 몸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당신처럼 늘 일을 할 수도 없지요. 대체 어떻게 해야 조금이나마 당신에게 도움이 될까요? 전 정말 당신에게 필요한 여자일까요? 다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발 저를 붙잡지 말아 주십시오. 잘 생각해 보세요.
7월 1일
바르바라, 그건 정말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이 부족한 거죠? 당신은 사랑받고 있고, 또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바르바라, 당신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나는 때때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내 생각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또 당신의 답장을 받고--.
그런 일이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네바 강에 몸을 던져 죽을 지도 모릅니다.
당신 없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아아, 나의 귀여운 바르바라, 당신은 내가 영구차에 실려 볼코보의 묘지로 운반되길 바라는군요.
너무하십니다, 바르바라. 정말로 너무하십니다. 나를 떠나려 하다니요? 아아, 나의 소중한 사람이여, 제발 당신의 머릿속에서 그렇게 어리석고 무모한 생각은 깡그리 내쫓아 버리십시오. 바르바라, 반드시 마음을 돌려 이 늙은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십시오.
7월 6일
마카르!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좋은 일자리가 생겼을 땐 마땅히 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당신은 저 때문에 월급까지 가불하시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제가 병이 났을 땐 옷까지 파셨다는 것도 알고요. 그 때문에 저는 괴로움에 빠졌던 거예요. 아아, 마카르! 그 동안 당신이 베풀어주신 여러 가지 도움은 늘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당신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받아 오기만 것이 지금은 경솔한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당신이 사주신 모든 물건들이 이제는 전부 저를 슬프게 하는군요. 그리고 마카르, 왜 그렇게 분별없는 생활을 하시나요? 당신을 아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당신이 술에 취해 길가에 쓰러져 계신 걸 경관이 발견하고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면서요? 마카르, 제발 부탁이니 마음을 가라앉혀 주세요. 당신은 나 때문에 빚까지 져 집주인과도 안 좋은 일이 있다지요? 당신이 그런 사실을 모두 숨겨 왔기 때문에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 거예요.
7월 28일
더없이 소중한 나의 바르바라!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했지만, 그런 건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집주인 여자가 몇 차례 꽥꽥댄 일은 있지만, 당신이 보낸 10루블로 빚의 일부를 갚고부터는 별말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일시적인 혼란에 휩싸여 있긴 하지만,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여 성실하게 맡은 바 직무를 다하고 있고요.
그러니 당신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내가 괴로워하는 건 이 늙은이가 당신을 도와주기는 커녕 되레 신세를 지게 돼버렸다는 것입니다.
아아, 바르바라! 이번엔 당신이 죄를 저질렀습니다. 무례하게도 어떤 녀석이 당신에게 청혼을 했다면서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단숨에 집을 뛰쳐나가, 그 괘씸한 녀석을 찾아갔지요. 그리고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말을 지껄였는지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저 정신없이 떠들어 댄 것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입니다. 그러다 그 자리에서 쫓겨났지요. 그 순간 계단에서 미끄러진 거고요. 이게 전부입니다.
바르바라, 난 지금 당신과 말다툼할 용기도 없습니다. 당신은 마치 나에게 은혜를 보답할 기회가 주어졌다고 기뻐하는 것 같군요. 바르바라, 이제 빚 얘기는 그만하도록 합시다. 이 나이에 돈을 함부로 썼다고 비난을 듣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난 지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입니다. 요즘은 직장에 나가서도 얼굴이 확확 달아오릅니다. 문득문득 사람들이 당신과 나 사이를 눈치 챈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옆방에 사는 라타쟈예프가 다 지껄여 버린 모양입니다. 어제 당신 집으로 점심 먹으러 갔을 때, 주인 여자가 나를 가리키며, "저봐, 악마 같은 늙은이가 나이 어린 계집애하고 붙었구려." 하면서 당신에 대해서까지 함부로 지껄였습니다.
난 이제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낼 수가 없을 듯합니다. 나의 천사여, 이젠 숨겨 봐야 소용도 없지만, 아마도 우린 신의 노여움을 받은 모양입니다.
8월 2일
경애하는 마카르!
제발 아무 염려도 하지 말아 주세요. 모든 일이 잘 되도록 하느님이 지켜 주실 거예요. 저에게 있었던 유쾌하지 못한 일에는 아마 안나 표도로브나가 관계되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전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당신도 주인 여자가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마십시오.
8월 4일
친절하신 마카르!
얼마라도 좋으니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돈을 좀 구해 주세요. 당신의 입장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도움을 청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지만, 제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아시면--. 전 더 이상 이 집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요.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어제 아침, 지난번에 무례를 저지른 장교의 큰아버지라는 노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저를 붙잡고 어떻게 지내는지, 뭘하며 지내는지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 대답은 듣지도 않고, 조카는 아주 경망스런 놈이니 이제부터는 자기가 보호해 주겠다나요. 그러더니 제 볼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당신은 참 아름답군. 볼우물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어." 하고 중얼거리며 키스를 하려 들지 않겠어요? 그때 마침 표도라가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그 남자를 방에서 내쫓아 버렸답니다. 안나 표도로브나가 한 짓이 분명해요. 그러니 마카르,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나중에 다 갚을게요. 모른 척 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에게 이런 걱정을 끼쳐 드리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지만, 저로서는 당신밖에 달리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8월 4일
나의 귀여운 바르바라!
이 무슨 청천 벽력 같은 일입니까? 그런 무서운 소리를 듣고 나니, 온 몸이 다 떨립니다. 반드시 당신을 구해 내겠어요. 아아, 바르바라, 나의 귀여운 사람, 당신에게 바느질을 하게 하고, 돈 때문에 머리를 아프게 하고, 눈을 따갑게 하다니--. 난 정말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당신을 꼭 지키겠어요. 나의 천사,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8월 5일
누구보다도 친절한 마카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당신만이라도 절망하지 말아 주세요. 일이 잘되지 않는다 해도 하는 수 없잖아요. 마카르, 제 일로 너무 마음 졸이지 마세요. 그 때문에 당신 일은 모두 팽개쳐 버리셨죠? 오늘 퇴근길에 들러 주신 당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창백한 얼굴에 잔뜩 겁을 먹은 표정--. 아주 절망 적이었어요. 돈을 구하지 못하신 것 때문에 제가 슬퍼할까 봐 두려우셨던 거죠? 마카르, 제발 그렇게 슬퍼하지 말아 주세요. 모든 일이 잘될 거예요.
8월 5일
나의 사랑스런 바르바라!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내가 돈을 마련하지 못했는데도 당신은 불행해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나도 안심입니다. 당신이 이 늙은이를 버리지 않고 그 하숙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 아닙니까? 앞일을 미리 생각하여 쓸데없이 근심하는 게 좋지 않다는 것쯤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러한 걱정과 고생이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설사 추운 겨울날에 외투도 입지 않고 구두도 신지 않은 채 살아야 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이라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지껄이기 좋아하는 친구들이 뭐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그 사람들을 위해 외투를 입고 구두를 신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늘 아침엔 여느 때보다 일찍 거리로 나섰습니다. 출근하기 전에 돈을 좀 빌려 볼 생각이었죠.
비가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어서 거리는 온통 진창길이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길모퉁이에서 때와 기름에 절은 옷을 입은 노동자들의 무리와 마주쳤습니다. 그들은 내 몸을 툭툭 치며 지나가더군요. 그 바람에 나는 온통 진흙 투성이가 되어 버렸지요. 정말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 꼴로 돈을 빌리기는 다 틀렸으니까요. 그래서 돌아설까 하다가, 되든 안 되든 부딪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집 문을 열었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지저분하고 꼴사나운 개 한 마리가 뛰쳐나와 미친 듯이 짖어 대는 게 아닙니까? 나는 얼떨결에 그 집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오오, 그런데 현관으로 뛰어들다가 커다란 통에 우유를 따르고 있던 노파한테 걸려서 우유를 몽땅 엎질렀지 뭡니까? 노파는 욕을 마구 퍼붓더군요.
소동이 일어나자, 도둑놈 같은 눈초리를 한 사나이가 나타나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찾아온 용건을 간단히 말했지요.
"40루블 가량 빌려주실 수-."
"담보물은?"
나는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이미 일이 틀려 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담보물은 없지만 내 옆자리에 앉는 예멜리안 이바노비치의 소개니까--, 하고 사정을 설명했지요.
"나는 돈이 없습니다. 예멜리안 이바노비치가 뭐라고 했든 나는 돈 같은 것 갖고 있지 않아요. 자, 얼른 돌아가시오. 서 있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
순간 나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 나는 어떻게 그 집을 빠져 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몸이 얼어붙어서 덜덜 떨면서 가까스로 직장에 출근을 했습니다. 현관에서 옷에 튄 진흙을 옷솔로 털려고 했더니, 글쎄 옷솔이 상한다고 수위가 빼앗아 버리지 뭡니까?
바르바라,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퇴근을 하고 돌아왔더니, 라타쟈예프가 누군가의 편지를 소리 높여 읽고 있지 않겠어요? 그것은 바로 내가 당신에게 쓴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떨어뜨린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마구 떠들어대면서 뱃살을 움켜쥐고 웃어대더군요. 나는 라타쟈예프를 향해 "배신자"라고 소리 쳤습니다. 그러자 라타쟈예프는, "너야말로 여러 여자를 정복하였으니, 로벨라스(리처드슨의 소설 '클라리사 할로'에 나오는 주인공. 바람둥이의 대명사)로군!" 하며 대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나를 로벨라스라고 부릅니다. 하인놈들 까지 한패가 되어 나를 모욕한답니다. 팔리돈이란 하인에게 소시지 가게에 가서 소시지를 좀 사 오랬더니 말을 안 듣더군요. 그래서 그게 네 의무가 아니냐고 했더니, "천만에요! 난 우리 주인 아주머니한테만 의무가 있지 당신한테는 의무가 없습니다." 하고 대꾸를 하는 겁니다. 나는 하인놈에게 모욕을 받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서, "너 취한 게로구나. 이 못난 놈아!" 하고 나무랐습니다. 그랬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봐요, 당신이 언제 나한테 술값이라도 집어 준 적이 있던가요? 아마 자기가 먹을 술 한 잔 값도 없을걸. 나이 어린 계집애한테 20코페이카 짜리 돈푼이나 얻어 쓰는 주제에--." 하고 지껄이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바르바라, 어쩌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을까요? 살아가는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바르바라,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그건 돈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이러한 푸대접입니다. 그들의 냉랭한 표정과 비웃음, 쑥덕거럼, 그런 것들이지요. 아아, 나의 황금 시절은 다 가버렸습니다. 마음이 울적하군요.
8월 14일
마카르!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되신 거죠? 하느님까지 잊어버리셨나요? 마카르, 당신이 저를 이토록 비참하게 하실 줄은 몰랐어요. 이제 전 우리 집 층계도 오르내릴 수 없게 되었어요. 모두들 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니까요.
"저 계집애가 술주정뱅이한테 붙었다는구나. 어제도 그 하급 관리가 잔뜩 취해서 끌려왔다더군."
이런 말을 듣는 저의 심정이 어떻겠어요? 게다가 여주인은 당신을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지요? 당신은 현관에 쓰러져서 밤을 새우셨다지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제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아시나요? 제발 저를 생각해서라도 그런 행동 은 하지 말아 주세요. 왜냐하면 저는 당신 한 분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으며, 언제까지나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니까요. 자꾸만 불행해지지 말고 꿋꿋이 견뎌 주세요. '가난은 죄가 아니다.'라는 말을 명심하시고요. 그렇다고 부끄러워하시지는 마세요. 당신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고치신다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우리에게 연이은 불행이 덮쳐오기 때문에 이제 저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곤경에 처해 있는 당신을 어떻게든 도와 드리고 싶은 마음에 은화 30 코페이카를 보내 드립니다.
8월 19일
바르바라!
사랑하는 바르바라, 정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마음을 좀 풀어 보려고 그렇게 한 것이 그렇게 나쁜 짓입니까? 어쨌든 그렇게 좀 취해 있는 동안은 다 떨어진 구두창이나 낡아빠진 외투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우리 같은 사람은 마음대로 술도 마실 수가 없는 건가요? 다들 무엇 때문에 나를 욕보이고 경멸하는 거죠? 편지를 읽어보니 당신은 마음이 몹시 상했군요.
아니에요, 바르바라. 내가 나빴습니다.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탈선을 해버린 겁니다. 하지만 악의는 없었어요. 당신은 또 돈을 보냈더군요. 당신이 보내 온 돈을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합니다. 나는 정말 쓸모 없는 인간입니다. 구두창보다도 나을 게 없는 인간이죠. 사랑하는 바르바라,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난 외톨이였습니다. 당신이 나의 어두운 생활에 빛을 비추어 준겁니다. 이제 나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리라 했는데, 운명은 나를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군요.
바르바라, 오늘은 당신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고로호바야 거리에 갔었거든요.
호화롭기 짝이 없는 거리더군요. 그 곳엔 훌륭한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 사이를 눈부실 만큼 현란한 마차들이 신나게 내달았습니다. 그 속엔 귀부인들이 앉아 있었지요. 하나같이 화려하게 차려 입은 걸 보면 모두 공작의 딸이거나 백작의 부인이 틀림없겠지요.
나는 문득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아아, 귀여운 바르바라! 당신을 생각하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그토록 불행할까요? 당신은 다정하고 아름답고 학식도 있는데 어찌하여 그런 불행을 짊어져야 합니까? 도대체 저 사람들보다 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그런 마차를 타고 다닌다면 어떨 까요?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장군이나 귀족들이 당신의 상냥한 눈길을 붙잡으려고 야단들일 겁니다. 당신은 그 낡아빠진 무명 옷 대신 금실로 수놓은 비단 옷을 입겠지요. 나는 그런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아니 그림자만 보아도 행복해질 겁니다.
정말로 오늘은 나를 감싸고 있는 가난이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바르바라, 연기 자욱한 어느 길모퉁이에 개집이나 다름없는 방안에서 한 직공이 잠을 자다 깨어났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구두 꿈만 꾸었지요. 어제 잘못 재단한 구두 꿈을 말이에요. 그는 구두를 만드는 직공이거든요. 그래서 꿈도 그런 것밖에는 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구두 꿈은 다른 사람도 꿀 수 있습니다. 방안을 훌륭하게 치장한 큰 부자가 역시 전날 밤에 구두 꿈을 꿀 수도 있겠지요. 다음날에 있을 무도회에 신고 나갈 멋진 구두를 고르느라 고심하는 꿈을--.
바르바라,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직공이라는 겁니다. 바르바라, 건강하시오. 당신을 생각하면 이렇게 병든 마음도 신기한 약을 먹은 듯 금방 가벼워지니까요.
9월 9일
사랑하는 바르바라!
나는 정신없이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 사무실에서 굉장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기 때문에 지금 나는 매우 흥분해 있습니다.
어제 일부터 말해야겠군요. 내가 출근을 하자마자, 치모페이 이바노비치가 중요하고 급한 서류라면서 정서(글씨를 깨끗이 쓰는 일)를 부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요. 가슴속은 냉랭하고, 마음은 어둡고, 머릿속은 당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그렇다고 안 할 수가 있나요. 할 수 없이 한 줄 한 줄 써나갔죠. 그런데 어떤 악마가 나를 부추겼는지, 아니면 그렇게 될 운명이었는지, 아무튼 결재 내용 중에서 한 줄을 빼버린 채 다음 줄을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서류를 거기까지 만드는 데도 시간이 꽤 많이 걸렸기 때문에 다시 쓸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두었답니다.
그런데 오늘 막 출근을 했을 때였습니다. 치모페이 이바노비치가 나를 급히 부르지 않겠어요?
"이봐, 제부시킨! 얼른 각하께 가보게. 자네는 그 서류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단 말일세."
나는 죽은 사람처럼 핏기를 잃었습니다. 이윽고 멍한 표정으로 각하의 집무실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인사조차 잊어버렸죠. 너무나 겁을 먹고 있었거든요. 입술도 다리도 온통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습니다. 각하는 몹시 노한 어조로, "자네, 도대체 무슨 일을 이 따위로 하나? 이게 얼마나 중요한 서륜 줄 알아?" 나는 사과를 드리려고 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내 단추가, 그 괘씸한 놈의 단추가 별안간 실을 끊고 떨어지더니 툭 튀어서 각하의 발 밑으로 날아갔습니다. 내가 각하께 하려던 변명과 사과를 단추가 해 버렸던 겁니다. 아, 그 순간 차렷자세로 가만히 있었더라면 좋았을 걸, 나는 단추를 주우러 허겁지겁 달려갔습니다. 몸을 굽히고 단추를 잡으려고 하자, 그것은 요리 조리 굴러가면서 좀체 잡히지 않더군요. 각하는 나의 행동을 지켜보시더니, 치모페이 이바노비치를 향해, "어떻게 된 건가? 저 사람 왜 저래? 도대체 지금 뭘 하는 거야?"
"저, 각하, 하지만 여태까지 실수라곤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아주 모범적인 직원입니다."
"그럼 저런 궁색한 꼴은 하지 않게 해줘야 하잖겠나? 가불이라도 해주든가--."
"벌써 오래 전부터 가불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매우 곤란을 겪고 있는 모양입니다."
"좋아, 제부시킨, 이리 와 보게."
각하는 나를 불러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 지갑에서 1백 루블 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내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잘것없는 나의 손을 잡고 흔들며, "자, 이제 가봐도 좋네. 이번은 그냥 넘어갈 테니까 다시는 틀리지 않도록 하게."
바르바라, 그 순간 나는 결심했습니다. 나중에 나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나를 낳아준 아버지를 위해선 빌지 않더라도 각하를 위해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빌어 달라고 할 작정입니다. 각하는 그 악수로써 나의 영혼을 되살아나게 하고, 나의 생활을 즐거움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바르바라! 지금 내 마음은 굉장히 두근거립니다. 당신에게 45루블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20루블은 주인 여자에 게 주고, 35루블은 수중에 남겨 놓을 생각입니다. 지금 내 기분은 아주 평온합니다.
나중에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그럼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사랑, 안녕히--.
9월 23일
친애하는 마카르!
며칠 동안 편지를 한 장도 드리지 못했군요. 당신에게 주어진 행운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카르, 왜 이렇게 많은 돈을 보내셨어요? 조금씩이라도 저축을 하셔서 또다시 불행한 일을 만나지 않도록 하셔야죠.
마카르, 그 동안 저에게도 커다란 사건이 하나 일어났답니다. 사실은 그저께 브이코프 씨가 찾아왔어요.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렸죠. 안나 표도로브나의 친구라고--. 그 사람은 큰 소리로 웃으며 다짜고짜 방안으로 들어섰어요. 그리고 백지장같이 창백한 제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별안간 뭐라고 한 줄 아세요? 글쎄, 결혼을 신청한다는 겁니다.
"나는 당신에게 결혼을 신청합니다. 지금 불현듯 당신 명예를 회복해 드리는 것이 나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부자니까 당신을 내 영지가 있는 시골로 데려가서 토끼 사냥을 하며 즐겁게 살 수 있도록 하고 싶소. 당신은 정말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군요. 이대로 한 달만 더 내버려두면 당신은 죽어 버릴 겁니다."
저는 그 사람이 결혼해 달라고 하는 말에 너무 놀라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바보같이 왜 울어 버렸을까요? 그 사람은 제 눈물을 감사의 표시라 생각한다며, 당신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자기로서는 제가 당신에게 빚을 진 채로 있게 하고 싶지는 않다나요? 자기가 대신 5백 루블 정도 주면 넉넉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아무튼 자기의 청혼을 깊이깊이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인 뒤, 수틀 위에 5백 루블을 내려놓고 돌아갔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심했답니다. 마카르, 그 사람과 결혼하겠어요. 저의 이 치욕을 씻어 주고, 더럽혀진 명예를 회복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가난과 불행에서 저를 구해 줄 사람이 있다면--. 제가 장차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체질이 약해서 앞으로도 남들에게 폐만 끼칠 거 예요. 물론 제가 가려는 길이 천국일리 없다는 거 잘 알아요. 제가 행복해질지 어떨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일입니다. 다만 브이코프 씨는 친절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저를 아껴 주실 것이고, 또 저도 그 사람을 존경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9월 23일
사랑하는 바르바라!
물론 당신은 이제 행복해지겠지요. 아무런 불편도 없이 살아가겠지요. 사랑스런 나의 천사여,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그토록 서두르는 겁니까? 이제 편지는 어떻게 하죠? 나는 혼자 남아서 무얼 할 수 있을까요? 바르바라, 아니 아니, 안 됩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밖을 보세요. 비가 물통을 뒤집어엎은 것처럼 쏟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마음까지 얼어 버릴 겁니다. 바르바라, 어두워지면 당장 당신을 만나러 가겠어요. 기다려 주십시오.
9월 27일
친애하는 마카르!
저희는 닷새 후에 결혼식을 올리고, 그 다음날에는 이곳을 떠날 생각입니다. 준비할 것이 너무나 많아서 이젠 아주 지쳐 버렸습니다. 브이코프 씨 말로는 자기의 아내가 남의 집 하녀와 같은 옷차림으로 돌아다녀서는 곤란하다는 거예요.
마카르 알렉세예비치, 부탁드릴 게 있어요. 수고스러우시겠지만, 고로호바야 거리의 시폰 부인을 찾아가셔서 우선 저한테 바느질하는 여자 두서너 명을 보내 달라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어제 본 견본대로 비단 레이스의 모양을 꼭 바꿔 달라고 하시고, 또 다른 견본도 보내 달라고 전해 주세요. 마카르, 여러 가지로 귀찮은 심부름으로 수고를 끼쳐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화가 나신 건 아니시겠죠? 오늘 제 몸이 많이 불편하거든요.
9월 27일
바르바라!
당신이 부탁하신 일은 모두 그대로 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시내에 있는 상점이라는 상점은 모조리 돌아다녀도 좋습니다. 나의 천사여, 나는 오늘도 당신이 무척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집 앞에 두 번이나 갔었지요. 하지만 줄곧 브이코프 씨가 있어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9월 28일
마카르!
미안한 부탁을 또 드려야겠어요. 지금 곧 보석상에 좀 다녀오시겠어요? 진주와 에머랄드 귀걸이는 만들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브이코프 씨가 그건 너무 사치스럽다고 화를 내었어요. 이렇게 돈이 많이 들 줄 알았더라면 애당초 결혼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더군요. 식을 올리는 대로 곧 출발하자고 합니다. 손님도 부르지 않겠대요. 마카르, 이제 전 어찌 될까요?
9월 29일
나의 귀여운 바르바라!
나는 이제 병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바쁘고 중요한 때에 병이 들다니 참으로 원망스럽습니다. 이젠 편지를 쓰지 말아야겠어요. 당신의 마음을 어지럽히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바르바라, 알다시피 난 매우 우둔하고 단순한 사나이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생각나는 대로 써버리곤 하여, 나중에 당신이--. 아, 아닙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르바라, 행복하게 살아 주십시오. 당신만 행복해진다면 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누가 우리의 편지를 전해 주죠?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태산 같은데--.
내게 당신이 빌려 준 책이 한 권 남아 있습니다. 이 책만은 가져가지 말고 내게 주십시오. 사랑하는 바르바라, 그 책이 매우 읽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이제 겨울이군요. 밤이 길어지면 무척 쓸쓸해지겠죠. 그리고 난 하숙을 옮겼습니다. 전에 당신이 있었던 그 집으로요. 이젠 텅 비어버린 당신 방을 구석구석 살펴보곤 합니다. 그 방에는 당신의 손때 묻은 수틀과 그 위에 자수를 놓다만 천이 고스란히 놓여 있습니다. 당신은 내가 써 보낸 편지를 접어 실을 감았더군요.
귀여운 바르바라, 이젠 그만 써야겠어요. 안녕.
9월 30일
더없이 소중한 마카르!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 버렸어요.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는 하느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내일 저는 떠납니다. 제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친구요 은인인 마카르!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저를 잊지 마시고, 저 때문에 상심하지 마시고 부디 행복하게 지내 주세요. 하느님의 축복이 당신의 머리 위에 내리기를 빌겠어요. 저는 늘 당신을 생각할 겁니다. 지난 추억 속에 즐거웠던 기억 몇 가지를 새로운 생활로 가지고 갑니다. 그 중에서도 당신에 대한 추억은 더욱 소중하게 되살아나겠지요. 당신은 저의 유일한 친구였어요. 당신만이 저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저의 웃는 얼굴만 보고도, 저의 편지 한 줄로도 행복해 하셨지요.
이 세상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친구 마카르! 당신을 이토록 깊이 사랑했던 당신의 바르바라를 생각해 주세요. 당신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든 당신에게 다녀오려 했지만, 브이코프 씨가 틈을 주지 않는군요. 사랑하는 이여, 그리운 분이여, 아아,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에게로 달려가 당신의 가슴에 매달리고 싶습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저의 가슴은 지금 눈물로 가득차 있어 당장 터져 버릴 것만 같답니다.
9월 30일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여운 바르바라!
당신은 끝내 가버리고 마는군요. 아아, 당신을 빼앗길 바에는 차라리 내 심장을 빼어 던지는 게 좋겠습니다. 당신은 어쩌자고 울면서 떠나가나요? 편지지가 온통 눈물에 젖어 있더군요. 결국 당신은 가고 싶지 않은 거군요. 그곳에 가면 당신의 마음은 쓸쓸하고, 서글프고, 차디차게 얼어붙을 겁니다. 아아, 사랑하는 바르바라, 도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런 결심을 했습니까? 무덤 속으로 가는 거나 다름없어요. 나의 천사여,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죠? 말렸어야 하는 것을--.
아아, 바르바라, 마차 바퀴에 몸을 던져서라도 당신을 보내지 않겠습니다. 아니에요. 당신과 함께 가겠습니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쫓아가겠습니다. 바르바라, 그렇게도 지주의 부인이 되고 싶었습니까? 나는 앞으로 누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불러야 합니까? 나는 어디에 가서 당신을 찾아야 합니까? 바르바라, 난 이런 불행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죽어버리고 말 거예요. 아아, 그리운 바르바라, 난 당신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내가 직장에 나가 일을 하는 것도, 산책을 하는 것도, 원고 정서를 하는 것도 모두 당신이 내 곁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바르바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가다니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당신은 갈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몰인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이 도시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마차가 망가지고 말 겁니다. 바르바라, 말해 주십시오. 브이코프 씨와 함께 갈 수 없다고--.
여기에 남겠노라고 말해 주세요. 당신에게 그 사람은 뭐죠? 별안간 브이코프란 사나이가 그리운 존재로 변했단 말입니까? 당신에게 예쁜 장식이 달린 옷을 사주었기 때문인가요? 나도 월급을 타면 그까짓 것은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바르바라, 안 됩니다. 이것이 마지막 편지가 되어 버리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이 편지가 마지막이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내 문장도 틀이 잡혀가고 있지 않습니까? 아아, 아니에요. 문장 따위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단지 당신에게 몇 줄이라도 더 쓰고 싶은 것뿐입니다. 아아, 나의 귀여운 바르바라, 나의 그리운 바르바라, 나의 사랑하는 바르바라!
날개 - 이상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만을 영수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 끔 되고 그만둔 모양이오. 굿바이.
굿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놓을 것 같소. 위트와 파라독스와--.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작품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하고 고매하리다.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도스토예프스키 정신이란 자칫하면 낭비일 것 같소. 위고를 불란서의 빵 한 조각이라고는 누가 그랬는지 지언인 듯싶소. 그러나 인생 혹은 그 모형에 있어서 '디테일' 때문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소? 화를 보지 마오. 부디 그대께 고하는 것이니--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상채기도 머지 않아 완치될 줄 믿소. 굿바이." 감정은 어떤 '포우즈'. (그 '포우즈'의 원소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지 나도 모르겠소) 그 포우즈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할 때 감정은 딱 공급을 정지합네다.
나는 내 비범한 발육을 회고하여 세상을 보는 안목을 규정하였소.
여왕봉과 미망인-세상의 하고많은 여인이 본질적으로 이미 미망인이 아닌 이가 있으리까? 아니, 여인의 전부가 그 일상에 있어서 개개 '미망인'이라는 내 논리가 뜻밖에도 여성에 대한 모험이 되오? 굿바이.
그 33번지라는 것이 구조가 흡사 유곽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한 번지에 18가구가 죽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서 창호가 똑같고 아궁이 모양이 똑같다. 게다가 각 가구에 사는 사람들이 송이송이 꽃과 같이 젊다.
해가 들지 않는다. 해가 드는 것을 그들이 모른 체하는 까닭이다. 턱살밑에다 철줄을 매고 얼룩진 이부자리를 널어 말린다는 핑계로 미닫이에 해가 드는 것을 막아 버린다. 침침한 방안에서 낮잠들을 잔다. 그들은 밤에는 잠을 자지 않나? 알 수 없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잠만 자느라고 그런 것을 알 길이 없다. 33번지 18가구의 낮은 참 조용하다.
조용한 것은 낮뿐이다. 어둑어둑하면 그들은 이부자리를 걷어들인다. 전등불이 켜진 뒤의 18가구는 낮보다 훨씬 화려하다. 저물도록 미닫이 여닫는 소리가 잦다. 바빠진다. 여러가지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비웃 굽는 내, 뜨물내, 비눗내.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도 그들의 문패가 제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이다.
이 18가구를 대표하는 대문이라는 것이 일각이 져서 외따로 떨어지기는 했으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도 닫힌 일이 없는, 한길이나 마찬가지 대문인 것이다. 온갖 장사치들은 하루 가운데 어느 시간에라도 이 대문을 통하여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이네들은 문간에서 두부를 사는 것이 아니라, 미닫이를 열고 방에서 두부를 사는 것이다. 이렇게 생긴 33번지 대문에 그들 18가구의 문패를 몰아다 붙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들은 어느 사이엔가 각 미닫이 위 백인당이니 길상당이니 써붙인 한곁에다 문패를 붙이는 풍속을 가져 버렸다.
내 방 미닫이 위 한곁에 칼표 딱지를 넷에다 낸 것만한 내-아니! 내 아내의 명함이 붙어 있는 것도 이 풍속을 좇은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러나 그들의 아무와도 놀지 않는다. 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사도 않는다. 나는 내 아내와 인사하는 외에 누구와도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내 아내 외의 다른 사람과 인사를 하거나 놀거나 하는 것은 내 아내 낯을 보아 좋지 않은 일인 것만 같이 생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만큼 까지 내 아내를 소중히 생각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내 아내를 소중히 생각한 까닭은 이 33번지 18가구 속에서 내 아내가 내 아내의 명함처럼 제일 작고 제일 아름다운 것을 안 까닭이다. 18가구에 각기 빌어들은 송이송이 꽃들 가운데서도 내 아내가 특히 아름다운 한 떨기의 꽃으로 이 함석지붕 밑 볕 안드는 지역에서 어디까지든지 찬란하였다. 따라서 그런 한 떨기 꽃을 지키고-아니 그 꽃에 매어달려 사는 나라는 존재가 도무지 형언할 수 없는 거북살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나는 어디까지든지 내 방이-집이 아니다. 집은 없다-마음에 들었다. 방안의 기온은 내 체온을 위하여 쾌적하였고, 방안의 침침한 정도가 또한 내 안력을 위하여 쾌적하였다. 나는 내 방 이상의 서늘한 방도 또 따뜻한 방도 희망하지 않았다. 이 이상으로 밝거나 이 이상으로 아늑한 방은 원하지 않았다. 내 방은 나 하나를 위하여 요만한 정도를 꾸준히 지키는 것 같아 늘 내 방에 감사하였고, 나는 또 이런 방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아서 즐거웠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 하는 것을 계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행복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다고 불행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그날을 그저 까닭없이 펀둥펀둥 게으르고만 있으면 만사는 그만이었던 것이다.
내 몸과 마음에 옷처럼 잘 맞는 방 속에서 뒹굴면서, 축 쳐져 있는 것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그런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말하자면 절대적인 상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가 좋았다.
이 절대적인 내 방은 대문간에서 세어서 똑 일곱째 칸이다. 럭키 세븐의 뜻이 없지 않다. 나는 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훈장처럼 사랑하였다. 이런 이 방이 가운데 장지로 말미암아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그것이 내 운명의 상징이었던 것을 누가 알랴? 아랫방은 그래도 해가 든다. 아침결에 책보 만한 해가 들었다가 오후에 손수건만 해지면서 나가 버린다. 해가 영영 들지 않는 윗방이 즉 내 방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볕드는 방이 아내 방이요, 볕 안드는 방이 내 방이요 하고 아내와 나 둘 중에 누가 정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평이 없다.
아내가 외출만 하면 나는 얼른 아랫방으로 와서 그 동쪽으로 난 들창을 열어 놓고 열어놓으면 들이비치는 햇살이 아내의 화장대를 비쳐 가지각색 병들이 아롱이 지면서 찬란하게 빛나고, 이렇게 빛나는 것을 보는 것은 다시없는 내 오락이다. 나는 조그만 돋보기를 꺼내가지고 아내만이 사용하는 지리가미를 꺼내 가지고 그을려 가면서 불장난을 하고 논다. 평행광선을 굴절시켜서 한 촛점에 모아가지고 그 촛점이 따근따근 해지다가, 마지막에는 종이를 그을리기 시작하고, 가느다란 연기를 내면서 드디어 구멍을 뚫어 놓는 데까지 이르는, 고 얼마 안되는 동안의 초조한 맛이 죽고 싶을 만큼 내게는 재미있었다.
이 장난이 싫증이 나면 나는 또 아내의 손잡이 거울을 가지고 여러가지로 논다. 거울이란 제 얼굴을 비칠 때만 실용품이다. 그 외의 경우에는 도무지 장난감인 것이다. 이 장난도 곧 싫증이 난다.
나의 유희심은 육체적인 데서 정신적인 데로 비약한다. 나는 거울을 내던지고 아내의 화장대 앞으로 가까이 가서 나란히 늘어 놓인 그 가지각색의 화장품 병들을 들여다본다. 고것들은 세상의 무엇보다도 매력적이다. 나는 그중의 하나만을 골라서 가만히 마개를 빼고 병구멍을 내 코에 가져다 대고 숨 죽이듯이 가벼운 호흡을 하여 본다. 이국적인 센슈얼한 향기가 폐로 스며들면 나는 저절로 스르르 감기는 내 눈을 느낀다. 확실히 아내의 체취의 파편이다.
나는 도로 병마개를 막고 생각해 본다. 아내의 어느 부분에서 요 냄새가 났던가를--. 그러나 그것은 분명하지 않다. 왜? 아내의 체취는 여기 늘어섰는 가지각색 향기의 합계일 것이니까.
아내의 방은 늘 화려하였다. 내 방이 벽에 못 한 개 꽂히지 않은 소박한 것인 반대로, 아내 방에는 천장 밑으로 쫙 돌려 못이 박히고, 못마다 화려한 아내의 치마와 저고리가 걸렸다. 여러가지 무늬가 보기 좋다. 나는 그 여러 조각의 치마에서 늘 아내의 동체와, 그 동체가 될 수 있는 여러가지 포우즈를 연상하고 연상하면서 내 마음은 늘 점잖지 못하다.
그렇건만 나에게는 옷이 없었다. 아내는 내게 옷을 주지 않았다. 입고 있는 골덴 양복 한 벌이 내 자리옷이었고 통상복과 나들이옷을 겸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이넥의 스웨터가 한 조각 사철을 통한 내 내의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다 빛이 검다. 그것은 내 짐작 같아서는 즉 빨래를 될 수 있는 데까지 하지 않아도 보기 싫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허리와 두 가랑이 세 군데 다-고무밴드가 끼어 있는 부드러운 사루마다를 입고 그리고 아무 소리 없이 잘 놀았다.
어느덧 손수건만해졌던 볕이 나갔는데 아내는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요만한 일에도 좀 피 곤하였고 또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내 방으로 가 있어야 될 것을 생각하고 그만 내 방으로 건너간다. 내 방은 침침하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낮잠을 잔다. 한번도 걷은 일이 없는 내 이부자리는 내 몸뚱이의 일부분처럼 내게는 참 반갑다. 잠은 잘 오는 적도 있다. 그러나 또 전신이 까칫까칫하면서 영 잠이 오지 않는 적도 있다. 그런 때는 아무 제목으로나 제목을 하나 골라서 연구하였다. 나는 내 좀 축축한 이불 속에서 참 여러가지 발명도 하였고 논문도 많이 썼다. 시도 많이 지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가 잠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내 방에 담겨서 철철 넘치는 그 흐늑흐늑한 공기에 다 비누처럼 풀어져서 온데간데 없고, 한잠 자고 깨인 나는 속이 무명헝겊이나 메밀껍질로 띵띵찬 한 덩어리 베개와도 같은 한 벌 신경이었을 뿐이고 뿐이고 하였다.
그러기에 나는 빈대가 무엇보다도 싫었다. 그러나 내 방에서는 겨울에도 몇 마리의 빈대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내게 근심이 있었다면 오직 이 빈대를 미워하는 근심일 것이다. 나는 빈대에게 물려서 가려운 자리를 피가 나도록 긁었다. 쓰라리다. 그것은 그윽한 쾌감에 틀림없었다. 나는 혼곤히 잠이 든다.
나는 그러나 그런 이불 속의 사색 생활에서도 적극적인 것을 궁리하는 법이 없다. 내게는 그럴 필요가 대체 없었다. 만일 내가 그런 좀 적극적인 것을 궁리해내었을 경우에 나는 반드시 내 아내와 의논하여야 할 것이고, 그러면 반드시 나는 아내에게 꾸지람을 들을 것이고-나는 꾸지람이 무서웠다느니 보다는 성가셨다. 내가 제법 한 사람의 사회인의 자격으로 일을 해보는 것도 아내에게 사설 듣는 것도 나는 가장 게으른 동물처럼 게으른 것이 좋았다. 될 수만 있으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버리고도 싶었다. 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스스러웠다.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아내는 하루에 두 번 세수를 한다.
나는 하루 한 번도 세수를 하지 않는다.
나는 밤중 세 시나 네 시쯤 해서 변소에 갔다.
달이 밝은 밤에는 한참씩 마당에 우두커니 섰다가 들어오곤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 18가구의 아무와도 얼굴이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18가구의 젊은 여인네 얼굴들을 거반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내 아내만 못하였다.
열한 시쯤 해서 하는 아내의 첫번 세수는 좀 간단하다. 그러나 저녁 일곱 시쯤해서 하는 두 번 째 세수는 손이 많이 간다. 아내는 낮에 보다도 밤에 더 좋고 깨끗한 옷을 입는다. 그리고 낮에도 외출하고 밤에도 외출하였다.
아내에게 직업이 있었던가? 나는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만일 아내에게 직업이 없었다면 같이 직업이 없는 나처럼 외출할 필요가 생기지 않을 것인데-아내는 외출한다. 와출할 뿐만 아니라 내객이 많다. 아내에게 내객이 많은 날은 나는 온종일 내 방에서 이불을 쓰고 누워 있어야만 된다.
불장난도 못한다. 화장품 냄새도 못 맡는다. 그런 날은 나는 의식적으로 우울해 하였다. 그러면 아내는 나에게 돈을 준다. 오십전 짜리 은화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을 무엇에 써야 옳을지 몰라서 늘 머리맡에 던져두고 두고 한 것이 어느 결에 모여서 꽤 많아졌다. 어느 날 이것을 본 아내는 금고처럼 생긴 벙어리를 사다 준다.
나는 한푼씩 한푼씩 그 속에 넣고 열쇠는 아내가 가져갔다. 그후에도 나는 더러 은화를 그 벙어리에 넣은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게을렀다. 얼마 후 아내의 머리 쪽에 보지 못하던 누깔잠이 하나 여드름처럼 돋았던 것은 바로 그 금고형 벙어리의 무게가 가벼워졌다는 증거일까. 그러나 나는 드디어 머리맡에 놓았던 그 벙어리에 손을 대지 않고 말았다. 내 게으름은 그런 것에 내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싫었다.
아내에게 내객이 있는 날은 이불 속으로 암만 깊이 들어가도 비오는 날만큼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나는 그런 때 나에게 왜 늘 돈이 있나 왜 돈이 많은가를 연구했다. 내객들은 장지 저쪽에 내가 있는 것을 모르나보다. 내 아내와 나도 좀 하기 어려운 농을 아주 서슴지 않고 쉽게 해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내 아내를 찾은 서너 사람의 내객들은 늘 비교적 점잖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자정이 좀 지나면 으레 돌아들 갔다.
그들 가운데에는 퍽 교양이 얕은 자도 있는 듯싶었는데, 그런 자는 보통 음식을 사다 먹고 논다. 그래서 보충을 하고 대체로 무사하였다. 나는 우선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기에 착수하였으나 좁은 시야와 부족한 지식으로는 이것을 알아내기 힘이 든다. 나는 끝끝내 내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말려나보다.
아내는 늘 진솔 버선만 신었다. 아내는 밥도 지었다. 아내가 밥을 짓는 것을 나는 한번도 구경한 일은 없으나 언제든지 끼니때면 내 방으로 내 조석밥을 날라다 주는 것이다. 우리집에는 나와 내 아내 외의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밥은 분명 아내가 손수 지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내는 한 번도 나를 자기 방으로 부른 일은 없다. 나는 늘 웃방에서나 혼자서 밥을 먹고 잠을 잤다.
밥은 너무 맛이 없었다. 반찬이 너무 엉성하였다. 나는 닭이나 강아지처럼 말없이 주는 모이를 넓적넓적 받아먹기는 했으나 내심 야속하게 생각한 적도 더러 없지 않다.
나는 안색이 여지없이 창백해가면서 말라 들어갔다. 나날이 눈에 보이듯이 기운이 줄어들었다. 영양 부족으로 하여 몸뚱이 곳곳의 뼈가 불쑥불쑥 내어 밀었다. 하룻밤 사이에도 수십 차를 돌쳐 눕지 않고는 여기저기가 배겨서 나는 배겨낼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이불 속에서 아내가 늘 흔히 쓸 수 있는 저 돈의 출처를 탐색해내는 일변 장지 틈으로 새어나오는 아랫방의 음성은 무엇일까를 간단히 연구하였다.
나는 잠이 잘 안 왔다.
깨달았다. 아내가 쓰는 그 돈은 내게는 다만 실없는 사람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까닭 모를 내객들이 놓고 가는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왜 그들 내객은 돈을 놓고 가나? 왜 내 아내는 그 돈을 받아야 되나? 하는 예의 관념이 내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저 예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혹 무슨 댓가일까? 보수일까? 내 아내가 그들의 눈에는 동정을 받아야만 할 한 가엾은 인물로 보였던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노라면 으레 내 머리는 그냥 혼란하여 버리고 버리고 하였다. 잠들기 전에 획득했다는 결론이 오직 불쾌하다는 것뿐이었으면서도 나는 그런 것을 아내에게 물어 보거나 한 일이 참 한 번도 없다. 그것은 대체 귀찮기도 하려니와 한잠 자고 일어나는 나는 사뭇 딴 사람처럼 이것도 저것도 다 깨끗이 잊어버리고 그만 두는 까닭이다.
내객들이 돌아가고, 혹 외출에서 돌아오고 하면 아내는 간편한 것으로 옷을 바꾸어 입고 내 방으로 나를 찾아온다. 그리고 이불을 들치고 내 귀에는 영 생동생동한 몇 마디 말로 나를 위로하려든다. 나는 조소도 고소도 홍소도 아닌 웃음을 얼굴에 띠고 아내의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본다. 아내는 방그레 웃는다. 그러나 그 얼굴에 떠도는 일말의 애수를 나는 놓치지 않는다.
아내는 능히 내가 배고파하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그러나 아랫방에서 먹고 남은 음식을 나에게 주려 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든지 나를 존경하는 마음일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배가 고프면서도 적이 마음이 든든한 것을 좋아했다. 아내가 무엇이라고 지껄이고 갔는지 귀에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다만 내 머리맡에 아내가 놓고 간 은화가 전등불에 흐릿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고 금고형 벙어리 속에 은화가 얼마만큼이나 모였을까? 나는 그러나 그것을 쳐들어 보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의욕도 기원도 없이 그 단추구멍처럼 생긴 틈바구니로 은화를 떨어뜨려 둘 뿐이었다.
왜 아내의 내객들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나 하는 것이 풀 수 없는 의문인 것같이, 왜 아내는 나에게 돈을 놓고 가나 하는 것도 역시 나에게는 똑같이 풀 수 없는 의문이었다.
내 비록 아내가 내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 싫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고것이 내 손가락 닿는 순간에서부터 고 벙어리 주둥이에서 자취를 감추기까지의 하잘것 없는 짧은 촉각이 좋았달 뿐이지 그 이상 아무 기쁨도 없다.
어느 날 나는 고 벙어리를 변소에 갖다 넣어 버렸다. 그 때 벙어리 속에는 몇 푼이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고 은화들이 꽤 들어 있었다.
나는 내가 지구 위에 살며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지구가 질풍신뢰의 속력으로 광대무변의 공간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참 허망하였다. 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는 현기증도 날 것 같고 해서 한시바삐 내려 버리고 싶었다.
이불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난 뒤에는 나는 고 은화를 고 벙어리에 넣고 넣고 하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나는 아내가 손수 벙어리를 사용하였으면 하고 생각하였다.
벙어리도 돈도 사실은 아내에게만 필요한 것이지 내게는 애초부터 의미가 전연 없는 것이었으니까 될 수만 있으면 그 벙어리를 아내는 아내 방으로 가져갔으면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아내는 가져가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아내 방으로 가져다 둘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으나 그 즈음에는 아내의 내객이 워낙 많아서 내가 아내 방에 가 볼 기회가 도무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변소에 갖다 집어넣어 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서글픈 마음으로 아내의 꾸지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내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않았을 뿐 아니라 여전히 돈은 돈대로 머리맡에 놓고 가지 않나! 내 머리맡에는 어느덧 은화가 꽤 많이 모였다.
내객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나 아내가 내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나 일종의 쾌감-그 외의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을 나는 또 이불 속에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쾌감이라면 어떤 종류의 쾌감일까를 계속하여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불 속의 연구로는 알 길이 없었다. 쾌감, 쾌감, 하고 나는 뜻밖에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 흥미를 느꼈다. 아내는 물론 나를 늘 감금하여 두다시피 하여 왔다. 내게 불평이 있을 리 없다. 그런 중에도 나는 그 쾌감이라는 것의 유무를 체험하고 싶었다.
나는 아내의 밤 외출 틈을 타서 밖으로 나왔다. 나는 거리에서 잊어버리지 않고 가지고 나온 은화를 지폐로 바꾼다. 오 원이나 된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는 목적지를 잃어버리기 위하여 얼마든지 거리를 쏘다녔다. 오래간만에 보는 거리는 거의 경이에 가까울 만큼 내 신경을 흥분시키지 않고는 마지않았다. 나는 금시에 피곤하여 버렸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그리고 밤이 이슥하도록 까닭을 잃어버린 채 이 거리 저 거리로 지향없이 헤매었다. 돈은 물론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돈을 쓸 아무 엄두도 나서지 않았다. 나는 벌써 돈을 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
나는 과연 피로를 이 이상 견디기가 어려웠다. 나는 가까스로 내 집을 찾았다. 나는 내 방을 가려면 아내 방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아내에게 내객이 있나 없나를 걱정하면서 미닫이 앞에서 좀 거북살스럽게 기침을 한 번 했더니, 이것은 참 또 너무도 암상스럽게 미닫이가 열리면서 아내의 얼굴과 그 등 뒤에 낯설은 남자의 얼굴이 이쪽을 내다보는 것이다. 나는 별안간 내어 쏟아지는 불빛에 눈이 부셔서 좀 머뭇머뭇했다.
나는 아내의 눈초리를 못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른 체하는 수 밖에 없었다.
왜? 나는 어쨌든 아내의 방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안 되니까--.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무엇보다도 다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불 속에서는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암만해도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걸을 때는 몰랐더니 숨이 차다. 등에 식은땀이 쭉 내배인다. 나는 외출한 것을 후회하였다. 이런 피로를 잊고 어서 잠이 들었으면 좋았다. 한잠 잘 자고 싶었다.
얼마동안이나 비스듬히 엎드려 있었더니 차츰차츰 뚝딱 거리는 가슴 동계가 가라앉는다. 그만해도 우선 살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들쳐 반듯이 천장을 향하여 눕고 쭈욱 다리를 뻗었다.
그러나 나는 또 다시 가슴의 동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아랫방에서 아내와 그 남자의 내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는 기척이 장지 틈으로 전하여 왔던 것이다. 청각을 더 예민하게 하기 위하여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숨을 죽였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아내와 남자는 앉았던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고 일어서면서 옷과 모자 쓰는 기척이 나는 듯하더니 이어 미닫이가 열리고 구두 뒤축 소리가 나고 그리고 뜰에 내려서는 소리가 쿵 하고 나면서 뒤를 따르는 아내의 고무신 소리가 두어 발짝 찍찍나고 사뿐사뿐 나나 하는 사이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대문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아내의 이런 태도를 본 일이 없다. 아내는 어떤 사람과도 결코 소곤거리는 법이 없다. 나는 웃방에서 이불을 쓰고 누웠는 동안에도 혹 술이 취해서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 내객들의 담화는 더러 놓치는 수가 있어도 아내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말소리는 일찌기 한마디도 놓쳐 본 일이 없다.
더러 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있어도 나는 그것이 태연한 목소리로 내 귀에 들렸다는 이유로 충분히 안심이 되었다.
그렇던 아내의 이런 태도는 필시 그 속에 여간하지 않은 사정이 있는 듯 시피 생각이 되고 내 마음은 좀 서운했으나 그보다도 나는 좀 너무 피로해서 오늘만은 이불 속에서 아무 것도 연구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고 잠을 기다렸다. 낮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문간에 나간 아내도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흐지부지 나는 잠이 들어 버렸다. 꿈이 얼쑹덜쑹 종을 잡을 수 없는 거리의 풍경을 여전히 헤매었다.
나는 몹시 흔들렸다. 내객을 보내고 들어온 아내가 잠든 나를 잡아 흔드는 것이다.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내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다. 나는 좀 눈을 비비고 아내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노기가 눈초리에 떠서 얇은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좀처럼 이 노기가 풀리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벼락이 내리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쌔근 하는 숨소리가 나면서 부스스 아내의 치맛자락 소리가 나고 장지가 여닫히며 아내는 아내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몸을 돌쳐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개구리처럼 엎드리고 엎드려서 배가 고픈 가운데도 오늘 밤의 외출을 또 한 번 후회하였다.
나는 이불 속에서 아내에게 사죄하였다. 그것은 네 오해라고--. 나는 사실 밤이 퍽이나 이슥한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것이 네 말처럼 자정 전인지는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너무 피곤하였다. 오래간만에 나는 너무 많이 걸은 것이 잘못이다.
내 잘못이라면 잘못은 그것 밖에 없다. 외출은 왜 하였더냐고? 나는 그 머리맡에 저절로 모인 오 원 돈을 아무에게라도 좋으니 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내 잘못이라면 나는 그렇게 알겠다. 나는 후회하고 있지 않나? 내가 그 오 원 돈을 써 버릴 수가 있었던들 나는 자정 안에 집에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리는 너무 복잡하였고 사람은 너무도 들끓었다. 나는 어느 사람을 붙들고 그 오 원 돈을 내어 주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여지없이 피곤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좀 쉬고 싶었다. 눕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 짐작 같아서는 밤이 어지간히 늦은 줄만 알았는데, 그것이 불행히도 자정 전이었다는 것은 참 안된 일이다. 미안한 일이다. 나는 얼마든지 사죄하여도 좋다. 그러나 종시 아내의 오해를 풀지 못하였다 하면 내가 이렇게까지 사죄하는 보람은 그럼 어디 있나? 한심하였다. 한 시간 동안을 나는 이렇게 초조하게 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불을 홱 젖혀 버리고 일어나서 장지를 열고 아내 방으로 비칠비칠 달려갔던 것이다. 내게는 거의 의식이라는 것이 없었다.
나는 아내 이불 위에 엎드러지면서 바지 포켓 속에서 그 돈 오 원을 꺼내 아내 손에 쥐어 준 것을 간신히 기억할 뿐이다.
이튿날 잠이 깨었을 때 나는 내 아내 방 아내 이불 속에 있었다. 이것이 이 33번지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내가 아내 방에서 잔 맨 처음이었다. 해가 들창에 훨씬 높았는데 아내는 이미 외출하고 벌써 내 곁에 있지는 않다. 아니! 아내는 엊저녁 내가 의식을 잃은 동안에 외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조사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전신이 찌뿌드드한 것이 손가락 하나 꼼짝할 힘조차 없었다. 책보보다 좀 작은 면적의 볕이 눈이 부시다. 그 속에서 수없이 먼지가 흡사 미생물처럼 난무한다. 코가 콱 막히는 것 같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낮잠을 자기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코를 스치는 아내의 체취는 꽤 도발적이었다. 나는 몸을 여러번 여러번 비비꼬면서 아내의 화장대에 늘어선 고 가지각색 화장품 병들의 마개를 뽑았을 때 풍기는 냄새를 더듬느라고 좀처럼 잠은 들지 않는 것을 나는 어찌하는 수도 없었다.
견디다못하여 나는 그만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서 내 방으로 갔다. 내 방에는 다 식어빠진 내 끼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다. 아내는 내 모이를 여기다 두고 나간 것이다. 나는 우선 배가 고팠다. 한 숟갈을 입에 떠 넣었을 때 그 촉감은 참 너무도 냉회와 같이 써늘하였다. 나는 숟갈을 놓고 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하룻밤을 비었던 내 이부자리는 여전히 반갑게 나를 맞아 준다. 나는 내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번에는 참 늘어지게 한잠 잤다. 잘--. 내가 잠을 깬 것은 전등이 켜진 뒤다. 그러나 아내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나보다.
아니! 돌아왔다 또 나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것을 상고하여 무엇하나? 정신이 한결 난다. 나는 밤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 돈 오 원을 아내 손에 쥐어 주고 넘어졌을 때에 느낄 수 있었던 쾌감을 나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객들이 내 아내에게 돈 놓고 가는 심리며 내 아내가 내게 돈 놓고 가는 심리의 비밀을 나는 알아낸 것 같아서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니다.
나는 속으로 빙그레 웃어 보았다.
이런 것을 모르고 오늘까지 지내온 내 자신이 어떻게 우스꽝스럽게 보이는지 몰랐다.
따라서 나는 또 오늘밤에도 외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돈이 없다. 나는 또 엊저녁에 그 돈 오 원을 한꺼번에 아내에게 주어 버린 것을 후회하였다. 또 고 벙어리를 변소에 갖다 쳐넣어 버린 것도 후회하였다. 나는 실없이 실망하면서 습관처럼 그 돈 오 원이 들어 있던 내 바지 포켓에 손을 넣어 한번 휘둘러보았다. 뜻밖에도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있었다. 이 원 밖에 없다. 그러나 많아야 맛은 아니다. 얼마간이고 있으면 된다. 나는 그만한 것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기운을 얻었다. 나는 그 단벌 다 떨어진 골덴 양복을 걸치고 배고픈 것도 주제 사나운 것도 다 잊어버리고 활갯짓을 하면서 또 거리로 나섰다. 나서면서 나는 제발 시간이 화살 단듯해서 자정이 어서 홱 지나 버렸으면 하고 조바심을 태웠다. 아내에게 돈을 주고 아내 방에서 자 보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좋았지만 만일 잘못해서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갔다가 아내의 눈총을 맞는 것은 그것은 여간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저물도록 길가 시계를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고 하면서 또 지향없이 거리를 방황하였다. 그러나 이날은 좀처럼 피곤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간이 좀 너무 더디게 가는 것만 같아서 안타까웠다.
경성역 시계가 확실히 자정을 지난 것을 본 뒤에 나는 집을 향하였다. 그날은 그 일각대문에서 아내와 아내의 남자가 이야기하고 섰는 것을 만났다. 나는 모른 체하고 두 사람 곁을 지나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아내도 들어왔다. 와서는 이 밤중에 평생 안 하던 쓰레질을 하는 것이었다. 조금 있다가 아내가 눕는 기척을 엿보자마자 나는 또 장지를 열고 아내 방으로 가서 그 돈 이 원을 아내 손에 덥석 쥐어 주고 그리고-하여간 그 이 원을 오늘밤에도 쓰지 않고 도로 가져 온 것이 참 이상하다는 듯이 아내는 내 얼굴을 몇 번이고 엿보고-아내는 드디어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자기 방에 재워 주었다. 나는 이 기쁨을 세상의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편히 잘 잤다.
이튿날도 내가 잠이 깨었을 때는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또 내 방으로 가서 피곤한 몸이 낮잠을 잤다. 내가 아내에게 흔들려 깨었을 때는 역시 불이 들어온 뒤였다. 아내는 자기 방으로 나를 오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또 처음이다. 아내는 끊임없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 내 팔을 이끄는 것이다. 나는 이런 아내의 태도 이면에 엔간치 않은 음모가 숨어 있지나 않은가 하고 적이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내의 하자는 대로 아내의 방으로 끌려갔다. 아내 방에는 저녁 밥상이 조촐하게 차려져 있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면 나는 이틀을 굶었다. 나는 지금 배고픈 것까지도 긴가 민가 잊어버리고 어름어름하던 차다.
나는 생각하였다. 이 최후의 만찬을 먹고 나자마자 벼락이 내려도 나는 차라리 후회하지 않을 것을. 사실 나는 인간 세상이 너무나 심심해서 못 견디겠던 차다. 모든 것이 성가시고 귀찮았으나 그러나 불의의 재난이라는 것은 즐겁다.
나는 마음을 턱 놓고 조용히 아내와 마주이 해괴한 저녁밥을 먹었다.
우리 부부는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밥을 먹은 뒤에도 나는 말이 없이 부스스 일어나서 내 방으로 건너가 버렸다. 아내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나는 벽에 기대어 앉아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그리고 벼락이 떨어질 테거든 어서 떨어져라 하고 기다렸다.
오 분! 십 분! 그러나 벼락은 내리지 않았다. 긴장이 차츰 풀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어느덧 오늘밤에도 외출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돈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돈은 확실히 없다. 오늘은 외출하여도 나중에 올 무슨 기쁨이 있나? 내 앞이 그저 아뜩하였다. 나는 화가 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굴렀다. 금시 먹은 밥이 목으로 자꾸 치밀어 올라온다. 메스꺼웠다.
하늘에서 얼마라도 좋으니 왜 지폐가 소낙비처럼 퍼붓지 않나? 그것이 그저 한없이 야속하고 슬펐다.
나는 이렇게 밖에 돈을 구하는 아무런 방법도 알지는 못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좀 울었나 보다. 왜 없느냐면서--.
그랬더니 아내가 또 내 방에를 왔다. 나는 깜짝 놀라 아마 이제서야 벼락이 내리려나보다 하고 숨을 죽이고 두꺼비 모양으로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떨어진 입을 새어나오는 아내의 말소리는 참 부드러웠다. 정다웠다. 아내는 내가 왜 우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란다.
나는 실없이 깜짝 놀랐다. 어떻게 사람의 속을 환하게 들여다보는고 해서 나는 한편으로 슬그머니 겁도 안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마 내게 돈을 줄 생각이 있나보다, 만일 그렇다면 오죽이나 좋은 일일까. 나는 이불 속에 뚤뚤 말린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아내의 다음 거동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옜소'하고 내 머리맡에 내려뜨리는 것은 그 가뿐한 음향으로 보아 지폐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내 귀에다 대고 오늘을랑 어제보다도 늦게 돌아와도 좋다고 속삭이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우선 그 돈이 무엇보다도 고맙고 반가웠다.
어쨌든 나섰다. 나는 좀 야맹증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밝은 거리로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리고는 경성역 일 이등 대합실 한곁 티이루움에를 들렀다. 그것은 내게는 큰 발견이었다. 거기는 우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안 온다. 설사 왔다가도 곧 돌아가니까 좋다. 나는 날마다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내리라 속으로 생각하여 두었다. 제일 여기 시계가 어느 시계보다도 정확하리라는 것이 좋았다. 섣불리 서투른 시계를 보고 그것을 믿고 시간 전에 집에 돌아갔다가 큰 코를 다쳐서는 안된다.
나는 한 복스에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마주 앉아서 잘 끓은 커피를 마셨다. 총총한 가운데 여객들은 그래도 한 잔 커피가 즐거운가보다. 얼른얼른 마시고 무얼 좀 생각하는 것같이 담벼락도 좀 쳐다보고 하다가 곧 나가 버린다. 서글프다. 그러나 내게는 이 서글픈 분위기가 거리의 티이루움들의 그 거추장스러운 분위기보다는 절실하고 마음에 들었다. 이따금 들리는 날카로운 혹은 우렁찬 기적 소리가 모오짜르트보다도 더 가깝다.
나는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번 읽었다. 그 것들은 아물아물하는 것이 어딘가 내 어렸을 때 동무들 이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거기서 얼마나 내가 오래 앉았는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에 객이 슬며시 뜸해지면서 이 구석 저 구석 걷어치우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아마 닫는 시간이 된 모양이다. 열 한 시가 좀 지났구나, 여기도 결코 내 안주의 곳은 아니구나, 어디 가서 자정을 넘길까? 두루 걱정을 하면서 나는 밖으로 나섰다. 비가 온다.
빗발이 제법 굵은 것이 우비도 우산도 없는 나를 고생을 시킬 작정이다. 그렇다고 이런 괴이한 풍모를 차리고 이 홀에서 어물어물하는 수도 없고 에이 비를 맞으면 맞았지 하고 그냥 나서 버렸다.
대단히 선선해서 견딜 수가 없다. 골덴 옷이 젖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속속들이 스며들면서 추근거린다. 비를 맞아 가면서라도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거리를 돌아다녀서 시간을 보내려 하였으나, 인제는 선선해서 이 이상은 더 견딜 수가 없다. 오한이 자꾸 일어나면서 이가 딱딱 맞부딪는다. 나는 걸음을 늦추면서 생각하였다. 오늘 같은 궂은 날도 아내에게 내객이 있을라구?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집으로 가야겠다. 아내에게 불행히 내객이 있거든 내 사정을 하리라. 사정을 하면 이렇게 비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알아주겠지.
부리나케 와 보니까 그러나 아내에게는 내객이 있었다. 나는 너무 춥고 척척해서 얼떨김에 노크하는 것을 잊었다. 그래서 나는 보면 아내가 덜 좋아할 것을 그만 보았다.
나는 감발자국 같은 발자국을 내면서 덤벙덤벙 아내 방을 디디고 내 방으로 가서 쭉 빠진 옷을 활활 벗어버리고 이불을 뒤썼다. 덜덜덜덜 떨린다. 오한이 점점 더 심해 들어온다. 여전 땅이 꺼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만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내가 눈을 떴을 때 아내는 내 머리맡에 앉아서 제법 근심스러운 얼굴이다.
나는 감기가 들었다. 여전히 으스스 춥고 또 골치가 아프고 입에 군침이 도는 것이 씁쓸하면서 다리 팔이 척 늘어져서 노곤하다. 아내는 내 머리를 쓱 짚어 보더니 약을 먹어야지 한다. 아내 손이 이마에 선뜻한 것을 보면 신열이 어지간한 모양인데 약을 먹는다면 해열제를 먹어야지 하고 속생각을 하자니까 아내는 따뜻한 물에 하얀 정제약 네 개를 준다. 이것을 먹고 한잠 푹 자고 나면 괜찮다는 것이다. 나는 널름 받아먹었다. 쌉싸름한 것이 짐작 같아서는 아마 아스피린인가 싶다.
나는 다시 이불을 쓰고 단번에 그냥 죽은 것처럼 잠이 들어 버렸다.
나는 콧물을 훌쩍훌쩍 하면서 여러 날을 앓았다. 앓는 동안에 끊이지 않고 그 정제약을 먹었다. 그러는 동안에 감기도 나았다. 그러나 입맛은 여전히 소태처럼 썼다.
나는 차츰 또 외출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러나 아내는 나더러 외출하지 말라고 이르는 것이다. 이 약을 날마다 먹고 그리고 가만히 누워 있으라는 것이다. 공연히 외출을 하다가 이렇게 감기가 들어서 저를 고생시키는게 아니란다. 그도 그렇다. 그럼 외출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그 약을 연복하여 몸을 좀 보해 보리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나는 날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이나 낮이나 잤다. 유난스럽게 밤이나 낮이나 졸려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잠이 자꾸만 오는 것은 내가 몸이 훨씬 튼튼해진 증거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아마 한 달이나 이렇게 지냈나보다. 내 머리와 수염이 좀 너무 자라서 후틋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내 거울을 좀 보리라고 아내가 외출한 틈을 타서 나는 아내 방으로 가서 아내의 화장대 앞에 앉아 보았다. 상당하다. 수염과 머리가 참 상당하였다.
오늘은 이발을 좀 하리라고 생각하고 겸사겸사 고 화장품 병들 마개를 뽑고 이것저것 맡아보았다. 한동안 잊어버렸던 향기 가운데서는 몸이 배배 꼬일 것 같은 체취가 전해 나왔다. 나는 아내의 이름을 속으로만 한 번 불러 보았다. "연심이--." 하고--. 오래간만에 돋보기 장난도 하였다. 거울 장난도 하였다. 창에 든 볕이 여간 따뜻한 것이 아니었다. 생각하면 오월이 아니냐.
나는 커다랗게 기지개를 한 번 켜보고 아내 베개를 내려 베고 벌떡 자빠져서는 이렇게도 편안하고 즐거운 세월을 하느님께 흠씬 자랑하여 주고 싶었다. 나는 참 세상의 아무것과도 교섭을 가지지 않는다. 하느님도 아마 나를 칭찬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실로 세상에도 이상스러운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최면약 아달린갑이었다. 나는 그것을 아내의 화장대 밑에서 발견하고 그것이 흡사 아스피린처럼 생겼다고 느꼈다. 나는 그것을 열어 보았다. 꼭 네 개가 비었다. 나는 오늘 아침에 네 개의 아스피린을 먹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잤다.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나는 졸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감기가 다 나았는데도-- 아내는 내게 아스피린을 주었다. 내가 잠이 든 동안에 이웃에 불이 난 일이 있다. 그때에도 나는 자느라고 몰랐다. 이렇게 나는 잤다. 나는 아스피린으로 알고 그럼 한 달 동안을 두고 아달린을 먹어 온 것이다. 이것은 좀 너무 심하다. 별안간 아뜩하더니 하마터면 나는 까무러칠 뻔하였다. 나는 그 아달린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산을 찾아 올라갔다.
인간 세상의 아무 것도 보기가 싫었던 것이다. 걸으면서 나는 아무쪼록 아내에 관계되는 일은 일체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길에서 까무러치기 쉬우니까다. 나는 어디라도 양지가 바른 자리를 하나 골라 자리를 잡아 가지고 서서히 아내에 관하여서 연구할 작정이었다. 나는 길가의 돌장판, 구경도 못한 진개나리꽃, 종달새, 돌멩이도 새끼를 까는 이야기, 이런 것만 생각하였다. 다행히 길가에서 나는 졸도하지 않았다.
거기는 벤치가 있었다. 나는 거기 정좌하고 그리고 그 아스피린과 아달린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그러나 머리가 도무지 혼란하여 생각이 체계를 이루지 않는다. 단 오 분이 못가서 나는 그만 귀찮은 생각이 번쩍 들면서 심술이 났다. 나는 주머니에서 가지고 온 아달린을 꺼내 남은 여섯 개를 한꺼번에 질겅질겅 씹어먹어 버렸다. 맛이 익살맞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 벤치 위에 가로 기다랗게 누웠다. 무슨 생각으로 내가 그따위 짓을 했나, 알 수가 없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나는 게서 그냥 깊이 잠이 들었다. 잠결에도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졸졸 하고 언제까지나 귀에 어렴풋이 들려 왔다.
내가 잠을 깨었을 때는 날이 환히 밝은 뒤다. 나는 거기서 일주야를 잔 것이다. 풍경이 그냥 노오랗게 보인다. 그 속에서도 나는 번개처럼 아스피린과 아달린이 생각났다.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마르크, 말사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 아내는 한 달 동안 아달린을 아스피린이라고 속이고 내게 먹였다.
그것은 아내 방에서 이 아달린 갑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증거가 너무나 확실하다.
무슨 목적으로 아내는 나를 밤이나 낮이나 재웠어야 됐나? 나를 밤이나 낮이나 재워 놓고, 그리고 아내는 내가 자는 동안에 무슨 짓을 했나? 나를 조금씩 조금씩 죽이려던 것일까? 그러나 또 생각하여 보면 내가 한 달을 두고 먹어 온 것이 아스피린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무슨 근심되는 일이 있어서 밤이면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정작 아내가 아달린을 사용한 것이나 아닌지? 그렇다면 나는 참 미안하다.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큰 의혹을 가졌다는 것이 참 안됐다.
나는 그래서 부리나케 거기서 내려왔다. 아랫도리가 홰홰 내어 저이면서 어찔어찔한 것을 나는 겨우 집을 향하여 걸었다. 여덟 시 가까이였다.
나는 내 잘못된 생각을 죄다 일러바치고 아내에게 사죄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무 급해서 그만 또 말을 잊어버렸다. 그랬더니 이건 참 큰일났다. 나는 내 눈으로 절대로 보아서 안될 것을 그만 딱 보아 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얼떨결에 그만 냉큼 미닫이를 닫고 그리고 현기증이 나는 것을 진정시키느라고 잠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기둥을 짚고 섰자니까, 일 초 여유도 없이 홱 미닫이가 다시 열리더니 매무새를 풀어헤친 아내가 불쑥 내밀면서 내 멱살을 잡는 것이다. 나는 그만 어지러워서 게가 나둥그러졌다.
그랬더니 아내는 넘어진 내 위에 덮치면서 내 살을 함부로 물어뜯는 것이다. 아파 죽겠다. 나는 사실 반항할 의사도 힘도 없어서 그냥 넙적 엎드려 있으면서 어떻게 되나 보고 있자니까, 뒤이어 남자가 나오는 것 같더니 아내를 한아름에 덥석 안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다소곳이 그렇게 안겨 들어가는 것이 내 눈에 여간 미운 것이 아니다. 밉다.
아내는 너 밤새워 가면서 도둑질하러 다니느냐, 계집질하러 다니느냐고 발악이다. 이것은 참 너무 억울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너는 그야말로 나를 살해하려던 것이 아니냐고 소리를 한 번 꽥 질러 보고도 싶었으나, 그런 긴가민가한 소리를 섣불리 입밖에 내었다가는 무슨 화를 볼는지 알 수 없다. 차라리 억울하지만 잠자코 있는 것이 우선 상책인 듯시피 생각이 들길래, 나는 이것은 또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툭툭 떨고 일어나서 내 바지 포켓 속에 남은 돈 몇 원 몇 십 전을 가만히 꺼내서는 몰래 미닫이를 열고 살며시 문지방 밑에다 놓고 나서는, 나는 그냥 줄달음박질을 쳐서 나와 버렸다.
여러번 자동차에 치일 뻔하면서 나는 그래도 경성역으로 찾아갔다. 빈자리와 마주 앉아서 이 쓰디쓴 입맛을 거두기 위하여 무엇으로나 입가심을 하고 싶었다.
커피! 좋다. 그러나 경성역 홀에 한 걸음 들여놓았을 때 나는 내 주머니에는 돈이 한푼도 없는 것을 그것을 깜박 잊었던 것을 깨달았다. 또 아뜩하였다. 나는 어디선가 그저 맥없이 머뭇머뭇하면서 어쩔 줄을 모를 뿐이었다. 얼빠진 사람처럼 그저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면서--.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 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몽롱한 기억 속에서는 이렇다는 아무 제목도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 나는 또 내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그런 대답은 하기가 싫었다. 나는 거의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
허리를 굽혀서 나는 그저 금붕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붕어는 참 잘들도 생겼다. 작은놈은 작은놈대로 큰놈은 큰놈대로 다 싱싱하니 보기 좋았다. 내려 비치는 오월 햇살에 금붕어들은 그릇 바탕에 그림자를 내려뜨렸다. 지느러미는 하늘하늘 손수건을 흔드는 흉내를 낸다. 나는 이 지느러미 수효를 헤어 보기도 하면서 굽힌 허리를 좀처럼 펴지 않았다. 등이 따뜻하다.
나는 또 오탁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우적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들을 못한다. 나는 피로와 공복 때문에 무너져 들어가는 몸뚱이를 끌고 그 오탁의 거리 속으로 섞여 가지 않는 수도 없다 생각하였다.
나서서 나는 또 문득 생각하여 보았다. 이 발길이 지금 어디로 향하여 가는 것인가를--. 그때 내 눈앞에는 아내의 모가지가 벼락처럼 내려 떨어졌다. 아스피린과 아달린.
우리들은 서로 오해하고 있느니라. 설마 아내가 아스피린 대신에 아달린의 정량을 나에게 먹여 왔을까? 나는 그것을 믿을 수는 없다. 아내가 대체 그럴 까닭이 없을 것이니, 그러면 나는 날밤을 새면서 도둑질을 계집질을 하였나? 정말이지 아니다.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나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 발길이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옳은가 이것만은 분간하기가 좀 어려웠다. 가야하나? 그럼 어디로 가나?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타인의 방 - 최인호
그는 방금 거리에서 돌아왔다. 너무 피로해서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아파트 계단을 천천히 올라서 자기 방까지 왔다. 그는 운수 좋게도 방까지 오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었고 아파트 복도에도 사람은 없었다. 어디선가 시금치 끓이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을 더듬어 문 앞에 프레스라고 쓰인 신문 투입구 안쪽의 초인종을 가볍게 두어 번 눌렀다. 그리고 이미 갈라진 혓바닥에 아린 감각만을 주어 오던 담배꽁초를 잘 닦아 반들거리는 복도에 던져 버렸다. 그는 아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문을 열어 주기를. 문을 열고 다소 호들갑을 떨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기를 맞아주기를.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마지막 남은 담배에 불을 당기었는데도 방 안쪽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그는 다시 그 작은 철제 아가리 속에 손을 넣어 탄력감 있는 초인종을 신경질적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손끝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그는 또 기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초인종이 고장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러나 그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아득한 저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반영되어 오는 것을 꿈결처럼 듣고 있었기 때문에, 필시 그의 아내가 지금쯤 혼자서 술이나 먹고, 그리고는 발가벗은 채 곯아떨어졌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나는 잠이 들어 버리면 귀신이 잡아가도 몰라요.
아내는 그것이 자기의 장점인 것처럼 자랑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분노를 느끼며 숫제 오 분 동안이나 초인종에 손을 밀착시키고 방 저 편에서 둔하게 벨 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는 것을 초조하게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의 방 열쇠는 두 개로, 하나는 아내가 가지고 있고 또 하나는 그가 그의 열쇠 꾸러미 속에 포함시켜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열쇠로 방문을 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편이냐 하면 그런 면엔 엄격해서 소위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아내 된 도리이며, 적어도 아내가 문을 열어 준 후에 들어가는 것이 남편의 권리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엔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두드렸지만 나중에는 거의 부숴 버릴 듯이 문을 쾅쾅 두들겨대고 있었다. 온 낭하가 쩡쩡 울리고 어디선가 잠을 깬 듯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아파트 복도 저쪽 편의 문이 열리고, 파자마를 입은 사내가 이쪽을 기웃거리며 내다보았는데 그것은 그 사람 한 사람 뿐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방의 사람들도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사뭇 경계하는 듯한 숫돌 같은 얼굴을 하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보세요." 마침내 그를 유심히 보고 있던 여인이 나무라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 집에 무슨 볼일이 있으세요?"
"아닙니다" 그는 피로했으나 상냥하게 웃으면서 그러나 문을 두드리는 것을 계속 하면서 말을 했다.
"그 집엔 아무도 안 계신 모양인데 혹 무슨 수금 관계로 오셨나요?"
"아닙니다." 그는 그를 수금 사원으로 착각케 한 여행용 가방을 추켜들며 적당히 웃었다.
"그런 일로 온 게 아닙니다."
"여보시오." 이번엔 파자마를 입은 사내가 손 매듭을 꺾으면서 슬리퍼를 치륵치륵 끌며 다가왔다.
"벌써부터 두드린 모양인데 아무도 없는 것 같소. 그러니 그냥 가시오. 덕분에 우리 집 애가 깨었소."
"미안합니다" 그는 정중하게 사과를 하였다. 하지만 그는 더러워서 정말 더러워서, 침이라도 뱉을 심산이었다.
"사실은 말입니다" 그는 방귀를 뀌다 들킨 사람처럼 무안해 하면서 주머니를 뒤져 열쇠꾸러미를 꺼냈다. 그리고 그는 익숙하게 짤랑이는 대여섯 개의 열쇠 중에서 아파트 열쇠를 손의 감촉만으로 잡아들었다.
"전 이 집주인입니다."
"뭐라구요?" 여인이 의심스럽게 그를 노려보면서 높은 음을 발했다.
"당신이 이 집주인이라구요?"
"그런데요." 그는 대답하였다. 그러자 여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뭐 의심나는 것이라두 있습니까?"
"여보시오." 아무래도 사내가 확인을 해야 마음놓겠다는 듯 다가왔다. 사내는 키가 굉장히 큰 거인이었으므로 그는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이 아파트에 거의 삼 년 동안 살아왔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소?"
"아니 뭐라구요?" 그는 튀어 오를 듯한 분노 속에서 신음 소리를 발했다.
"당신이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래 이 집주인을 당신 스스로 도독놈이나 강도로 취급한다는 말입니까. 나두 이 방에서 삼 년을 살아왔소. 그런데두 당신 얼굴은 오늘 처음 보오. 그렇다면 당신도 마땅히 의심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겠소." 그는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쨌든" 사내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당신을 의심하는 것은 안됐지만 우리 입장도 생각해 주시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니깐." 그는 화가 나서 투덜거리면서 방문 열쇠 구멍에 열쇠를 들이밀었다. 방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정 못 믿겠으면 따라 들어오시오. 증거를 뵈 주겠소" 그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컴컴하였다.
"여보!" 그는 구두를 벗고, 스위치를 찾으려고 벽을 더듬거리면서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허지만 방안은 어두웠고 아무도 대답하질 않았다. 제길헐. 그는 너무 피로해서 퉁퉁 부은 다리를 질질 끌며 간신히 벽면의 스위치를 찾아내었고, 그것을 힘껏 올려붙였다. 접촉이 나쁜 형광등이 서너 번 채집병 속의 곤충처럼 껌벅거리다가는 켜졌다. 불은 너무 갑자기 들어온 기분이어서, 그는 잠시 동안 낯선 곳에 들어선 사람처럼 어리둥절하게 서 있었다. 그때 그는 아직도 문밖에서 사내가 의심스럽게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는 조금 어처구니없어서 방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때 그는 화장대 거울 아래 무슨 종이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래서 그는 힘들여 경대 앞까지 가서 그 종이를 주워 들었다.
여보, 오늘 아침 전보가 왔는데, 친정 아버님이 위독하시다는 거예요. 잠깐 다녀오겠어요. 당신은 피로하실 테니 제가 출장 가신 것을 잘 말씀드리겠어요. 편히 쉬세요. 밥상은 부엌에 차리 놨어요.
당신의 아내가
그는 울분에 차서 한숨을 쉬면서, 발소리를 쿵쿵 내면서, 한없이 잠겨 들어가는 피로를 느끼면서, 코우트를 벗고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어츠를 벗는 일관 작업을 매우 천천히 계속하였으며 그리고는 거의 경직이 되어 뻣뻣한 다리를, 접는 나이프처럼 굽혀 바지를 벗고 그것을 아주 화를 내면서 옷장 속에 걸었다. 그때 그는 거울 속에 주름살을 잔뜩 그린 늙수그레한 남자를 발견했고, 그는 공연히 거울 속의 자기를 향해 맹렬한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제길헐. 겨우 돌아왔어. 제길헐. 그런데두 아무도 없다니.
그는 심한 고독을 느꼈다. 그는 벌거벗은 채, 스팀 기운이 새어 나갈 틈이 없었으므로 후덥지근한 거실을, 잠시 철책에 갇힌 짐승처럼 신음을 해 가면서 거닐었다. 가구들은 며칠 전하고 같았으며 조금도 바뀌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트랜지스터는 끄지 않고 나간 탓으로 윙윙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껐다. 아내의 옷이 침실에 너저분하게 깔려 있었고, 구멍 난 스타킹이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다리 안쪽을 조이는 고무줄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루우즈 뚜껑이 열린 채 딩굴고 있었다.
그는 우선 배가 고팠으므로 부엌 쪽으로 갔는데, 상위에는 밥 대신 빵 몇 조각이 굳어서 종이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그는 무슨 고무 질을 씹는 기분으로 차고 축축한 음식물을 삼켰다.
이건 좀 너무한 편인 걸.
그는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그는 마땅히 더운 음식으로 대접을 받았어야 했다. 그뿐인가. 정리된 실내에서 파이프를 피워 물고, 음악을 들어야 했을 것이었다. 허지만 그는 운수 나쁘게도 오늘밤 혼자인 것이다.
그는 신문을 보려고 사방을 훑어보았지만 신문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문 볼 생각을 포기하였다. 그는 시계를 보았는데, 시계는 일주일 전의 날짜로 죽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아내가 사 온 시계인데 탁상시계 치곤 고급 시계이긴 하나 거추장스러운 날짜와 요일이 명시되어 있는 시계로 가끔 망령을 부려 터무니없이 빨리 가서 덜거덕하고 날짜를 알리는 숫자판이 지나가기도 하고 요일을 알리는 문자판이 하루씩 엇갈리기도 했는데, 더구나 시간이 서로 엇갈리면 뾰족한 수 없이 그저 몇천 번이라도 바늘을 돌려야만 겨우 교정되는 시계였으므로, 그는 화를 내면서 시계의 바늘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환장할 것은 손톱을 갓 깎은 후였으므로 그는 이빨 없는 사람이 잇몸으로만 호두 알을 깨려는 듯한 무력감을 손톱 끝에 날카롭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망할 놈의 시계를 숫제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나가면서 참으로 무의미한 시간의 회복을 반복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작업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더욱 지쳐 버렸다.
그는 천천히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욕실로 갔다. 욕실 안의 불을 켜자, 욕실은 아주 밝아서 마치 위생적인 정육점 같아 보였다. 욕조 안엔 아내가 목욕을 했는지 더러운 구정물이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아내의 머리칼이 욕조 가장자리에 붙어 있었고,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손을 뻗쳐 더러운 물 사이에 숨은 가재 등과 같은 고무 마개를 빼었다. 그러자 작은 욕조는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고, 매우 빠른 속도로 물이 빠져나가 좀 후에는 입맛 다시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더러운 때의 앙금을 군데군데 남기고는 비어 있었다.
그는 우선 세면대에 고무 마개를 틀어막은 후 더운물과 찬물을 동시에 틀었다. 더운물은 너무 찼다. 그는 얼굴에 잔뜩 비누 거품을 문질렀고, 그래서 그는 마치 분장한 도화역자의 얼치기 바보 같아 보였다. 그는 자동 면도기가 일주일 전 그가 출장 가기 전에 사용했던 것처럼 그대로 날을 세우고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면도기의 칼날 부분엔 아직도 비눗기가 남아 있었고 그 사이로 자른 수염의 잔해가 녹아 있었다. 그는 화를 내면서 아내의 게으름을 거리의 창녀에게보다도 더 심한 욕으로 힐책하면서 수염을 깎기 시작했다. 수염은 거세었고, 뿌리가 깊었으므로 이미 녹슬고 무디어진 칼날로 잘라내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얼굴 두어 군데를 베었고 그 중의 하나는 너무 크게 베어져 피가 배어 나왔으므로 얼핏 눈에 띄는 대로 휴지 조각을 상처에 밀착시켰다. 휴지는 침 바른 우표처럼 얼굴 위에 붙여졌다. 우표는 매끈거리는 녹말기로써 접착된다. 하지만 그의 얼굴 위에선 피로써 붙여졌다.
그는 화를 내었다. 그는 우울하게 서서 엄청난 무력감이 발끝에서부터 자기를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으며 욕실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우송되는 소포처럼 우표가 붙여진 채 부옇게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는 거울에 무엇인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손을 뻗쳐 그것이 무엇인가 확인을 했다.
그것은 껌이었다. 아내는 늘 껌을 씹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내의 버릇 중의 하나였다. 밥을 먹을 때나 목욕을 할 때면 밥상 위 혹은 거울 위에 껌을, 후에 송두리째 뜯어내려는 치밀한 계산 하에 진득한 타액으로 충분히 적신 후에 붙여 놓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낄낄거렸다. 그는 그 껌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껌은 응고하고 수축이 되어 마치 건포도알 같았다. 향기가 빠져 야릇하고 비릿한 느낌이 들었지만 좀 후엔 말랑말랑해졌다. 아내의 껌이 그를 유일하게 위안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한결 유쾌해졌고 때문에 노래를 부리기 시작했다.
나뭇잎에 놀던 새여. 왜 그런지 알 수 없네.
낸들 그대를 어찌 하리. 내가 싫으면 떠나가야지.
그의 목소리는 목욕탕 속에서 웅장하였다. 온 방안이 쩡쩡거리고, 소리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으므로 종소리처럼 욕실을 맴돌았다. 그는 휘파람도 후이후이 불기 시작했다.
역시 집이란 즐겁고 아늑한 곳이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무심코 중얼거렸지만 그는 순간 그 소리를 타인의 소리처럼 느꼈으며 그래서 놀란 나머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그러나 개의치 않기로 하였다.
그는 욕실 거울 앞에 확대경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그는 그것의 용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내가 겨드랑이의 털이나 코밑의 솜털을 제거할 때, 족집게와 더불어 사용하는 것으로 그는 그것을 쥐어들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뚜렷한 형상을 가지지 않은 사내가 이상하게 부풀어서 확대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움직여 욕실의 형광 불빛을 한곳으로 모으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햇빛 밑에서 확대경을 움직거리면 날개 잘린 곤충을 태워 버릴 수도 있다. 그는 끈끈하고 축축한 욕실에서 한기를 선뜻선뜻 느껴 가면서 형광 불빛을 한곳으로 모으려고, 빛을 모아 뜨거운 열기를 집중시키려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긴 지난 여름날의 하지를 느끼고 있었다.
지난 여름은 행복하였다.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입으로 중얼거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내었다.
그럼 행복했었지. 행복했었구말구.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소리에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좀 무안해졌고 부끄러워졌으므로 과장해서 웃어 제쳤다.
그는 키 큰 맨드라미처럼 우울하게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샤우어 쪽으로 다가갔다. 샤우어 쪽으로 갈 때마다 그는 키를 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샤우어의 모가지는 사형 당한 사형수의 목처럼 꺾이어져 매우 진지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샤우어의 줄기 양옆에 불쑥 튀어나온 더운물과 찬물을 공급하는 조종간을 잡았다. 그는 더운물 쪽을 조심스럽게 매우 조심스럽게 틀었다. 그러자 뜨거운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욕실바닥의 타일을 때리고 금시 수증기가 되어 올랐다. 그는 신기하다, 이것은 어제의 더운물이 아니다라고 그는 의식한다. 그는 갑자기 오랜 암흑 속에서 눈을 뜬 사내처럼 신기해한다. 그는 이번엔 찬물을 더운물만큼 튼다. 그 차가운 물은 이제 예사의 찬물이 아니라고 그는 의식한다. 물은 그의 손바닥 위에서 너무 뜨겁기도 했고 차갑기도 해서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윽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사나운 비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그는 더운물이 피로한 얼굴을 핥고 춤의 신발을 신어 버린 소녀처럼 매끈거리면서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촉을 즐기고 있다.
그는 비누를 풀어 온몸을 매만진다. 거품이 일어 온몸이 애완용 강아지의 흰털처럼 무장하였을 때, 그는 그의 성기가 막대기처럼 발기해서 힘차고 꼿꼿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욕망이 끓어오르고, 그는 뜨거운 물 속으로 다시 뛰어들면서, 신음을 발하면서, 세찬 물줄기가 가슴을, 성기를 아프도록 때리는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뜨거운 빗물은 싱싱한 정육 냄새 나는 발그스레 상기한 근육을 적신다. 이윽고 온몸에 비눗기가 다 빠져도 그는 한참이나 물 속에 자신을 맡긴 채, 껌을 씹으면서 함부로 몸을 굴리고 있었다. 피로가 어느 정도 풀리자 그는 물을 잠그고 몸을 정성 들여 닦는다. 그는 심한 갈증을 느낀다.
그는 욕실을 나와 한결 서늘한 거실 찬장 속에서 분말 쥬스와 설탕을 끄집어낸다. 그는 바닥에 가루를 흘리지 않으려고 조심을 하면서 쥬스를 거의 열 숟갈도 더 넣어 버린다. 그것에 그는 차가운 냉수를 섞는다. 그리고 손잡이가 긴 스푼으로 참을성 있게 젓는다. 그는 컵을 들고 한 손으로는 스푼을 저으면서 전축 쪽으로 간다. 그는 많은 전축판 속에서 아무 판이나 뽑아 든다. 그는 그 음악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전축에 전기를 접속시키자, 전축은 돌연히 윙 거리면서 내부의 불을 밝혀든다. 레코오드판 받침대가 원을 그리면서 돌기 시작한다. 그는 투원반을 가볍게 날리는 육상 선수처럼 얇은 레코오드를 그 받침대 위에 떠올린다. 바늘이 나쁜 전축은 쉭쉭 잡음을 내다가는 이윽고 노래를 토하기 시작한다. 그는 음악을 들으면서 소파에 길게 눕는다. 갓스탠드의 은밀한 불빛이 온 방안을 우울하게 충전시킨다. 그는 마치 천장 위에서 보면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부동의 자세로 누워 있다. 때문에 그는 가구 같은 정물로 보인다. 그러다가 그의 눈엔 화장대 위에 놓인 아내의 편지가 들어온다. 그러자 그는 아내의 메모 내용을 생각해 내고 쓰게 웃는다. 아내가 그에게 거짓말을 하였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는다. 그런데도 아내는 오늘 전보를 받았다고 잠시 다녀오겠노라고 장인이 위독해서 가보겠다고 쓰고 있다. 그는 웃는다. 아주 유쾌해지고 그는 근질근질한 염기를 느낀다. 나는 안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아내는 내가 출장 간 날 그날부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아내는 내일 저녁 내가 돌아올 것을 예측하고 잘해야 내일 모래 아침에 도착할 것이다. 다소 민망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아내는 내게 나지막하게 사과를 할 것이다.
나는 아내가 다른 여인과 다른 성기를 가진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성기엔 작구가 달려 있다. 견고하고 질이 좋은 작구이다. 아내는 내가 보는 데서 발가벗고 그 작구를 오르내리는 작업을 해 보이기 좋아한다. 아내의 하체에 작구가 달린 모습은 질 좋은 방한용 피륙을 느끼게 하고 굉장한 포옹력을 암시한다.
그는 웃으면서 스푼을 젓는다. 그때였다. 그는 무슨 소리를 들었다. 공기를 휘젓고 가볍게 이동하는 발자국 소리였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그는 욕실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난폭하게 일어나서 욕실 쪽으로 걸었다. 그는 분명히 잠근 샤우어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제길헐. 그는 투덜거리면서 물을 잠근다. 그리고 다시 소파로 되돌아온다. 그러자 이번엔 부엌 쪽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불평을 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부엌 쪽으로 간다. 부엌 석유곤로가 불붙고 있다. 그는 투덜거리면서 그것을 끈다. 그리고 천천히 소파 쪽으로 왔을 때, 그는 재떨이에 생담배가 불이 붙여진 채 타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는 엄청난 고독을 느낀다.
"누구요" 그는 조심스럽게 소리를 지른다. 그의 목소리는 진폭이 짧게 차단된다. 그는 갇혀 있음을 의식한다. 벽 사이의 눈을 의식한다. 그는 사납게 소파에 누워, 시선에 닿는 가구들을 노려보기 시작한다. 모든 가구들이 비온 후 한결 밝아 오는 나뭇잎처럼 밝은 색조를 띠고 빛나기 시작한다. 그는 스푼을 집요하게 젓는다. 설탕물은 이미 당분을 포함하고 뜨겁게 달아 있으나 설탕은 포화 상태를 넘어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그래도 그는 계속 스푼을 젓는다. 갑자기 그는 그의 손에 쥐여진 손잡이가 긴 스푼이 여느 스푼이 아님을 느낀다. 그러자 스푼이 그이 의식의 녹을 벗기고, 눈에 보이는 상태 밖에서 수면을 향해 비상하는, 비늘 번뜩이는 물고기처럼 튀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힘을 다해 스푼을 쥔다. 그러자 스푼은 산 생선을 만질 때 느껴지는 뿌듯한 생명감과 안간힘의 요동으로 충만 된다. 그리고 손아귀에 쥐여진 스푼은 손가락 사이를 민첩하게 빠져나간다. 그는 잠시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린 채 스푼이 허공을 날으면서 중력 없이 둥둥 떠서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온 방안의 물건을 자세히 보리라고 다짐하고는 눈을 부릅뜬다. 그러자 그의 의식이 닿는 물건들마다 일제히 흔들거리면서 흥을 돋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거실에 스위치를 넣으려고 걷는다. 그는 스위치를 넣는다. 형광등의 꼬마 전구가 번쩍 번쩍거리며 몇 번씩 빛을 반추한다. 그러다가 불쑥 방안이 밝아 온다.
그는 스푼이 담수어처럼 얌전하게 손아귀 속에 쥐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조심스럽게 온 방안의 물건들을, 조금 전까지 흔들리고 튀어 오르고 덜컹이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훑어보기 시작한다.
물건들은 놀라웁게도 뻔뻔스러운 낯짝으로 제자리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비애를 느낀다. 무사무사의 안이 속에서 그러나 비웃으며 물건들은 정좌해 있다. 그는 투덜거리면서 스위치를 내린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단 설탕물을 마시기 시작한다. 방안 어두운 구석구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둠과 어둠이 결탁하고 역적 모의를 논의한다. 친구여, 우리 같이 얘기합시다. 방 모퉁이 직각의 앵글 속에서 한 놈이 용감하게 말을 걸어온다. 벽면을 기는 다족류 벌레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옷장의 거울과 화장대의 거울이 투명한 교미를 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는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벽이 출렁거린다.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방 벽면 전기다리미 꽂는 소켓의 두 구멍 사이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친구여. 귀를 좀 대 봐요. 내 비밀을 들려줄께. 그는 그의 오른쪽 귀를 소켓에 밀착한다. 그의 귀가 전기 금속 부분품처럼 소켓의 좁은 구멍에 접촉된다. 그러자 그의 온몸이 고급 전기곤로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그의 몸에 스파아크가 일고, 그는 온몸에 충만한 빛을 느낀다.
잘 들어요. 소켓이 속삭인다. 마치 트랜지스터의 이어폰을 꽂은 목소리처럼 그의 목소리는 귓가에만 사근거린다. 오늘 밤 중대한 쿠데타가 있을 거예요. 겁나지 않으세요.
그는 소켓에서 귀를 뗀다. 그리고 맹렬한 기세로 다시 스위치에 불을 넣는다. 불이 들어오면 이 모든 술렁임이 도료처럼 벽면에 밀착하고 모든 것은 치사하게도 시치미를 떼고 있다. 그는 불을 켠 채 화장대로 다가간다. 그는 투덜거리면서 키가 크고 낮은 모든 화장품을 열어 감시한다. 그리고 찬장을 열어 그 안에 가지런히 빈 그릇들, 성냥통, 촛대, 옷장을 열어 말리우는 바다 생선처럼 걸린 옷들, 그리고 그들의 주머니도 검사한다. 옷들은 좀 괘씸했지만 얌전하게 주머니를 털어 보인다. 그는 하나하나 보리라고 다짐한다. 서랍을 뒤져 남은 물건도 조사한다. 그러다가 이미 건조하여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듯한 낙엽 몇 송이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에게 지난 가을을 생각키우게 했고 그는 잠시 우울해졌다. 그는 사진틀 속의 퇴색한 사진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책상에 꽂힌 뚜껑 씌운 책들도 관찰하였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석유곤로의 심지도 관찰하였다. 덮개가 있는 것은 그 내용물을 검사하였으며 침대도 들어서 털어도 보았다. 심지어 변기도 들여다보았고, 창 틈 사이도 들여다보았다. 물건들은 잘 참고 세금 잘 무는 국민처럼 얌전하게 그의 요구에 응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들여다보는 물건은 본래 예사의 물건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어제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는 한층 더 깊은 피로를 느끼면서 거실로 돌아와 술병의 술을 잔에 가득히 부어 단숨에 들이마셨다. 그러자 그는 아주 쓸쓸하고 허무맹랑한 고독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잔을 그득히 부어 연거푸 단숨에 들이마셨다. 술맛은 짜고 싱겁고, 달고도 썼다.
그는 어디쯤엔가 피다 남은 꽁초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랍을 뒤지다가 말라빠진 담배꽁초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에 불을 붙였다. 술기운이 그를 달아오르게 하고 그를 격려했기 대문에 그는 아동처럼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뭇잎에 놀던 새여. 왜 그런지 알 수 없네.
낸들 그대를 어찌 아리. 내가 싫으면 떠나가야지.
그는 벌거벗은 채 온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이 일상사인 것처럼 걷고, 그리고 뛰었다. 그는 부엌을 답사하였고 그럴 때엔 욕실 쪽이 의심스러웠다. 욕실 쪽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거실 쪽이 의심스러웠다. 그는 활차처럼 뛰고 또 뛰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아무런 낌새도 발견해 낼 수 없었다. 무생물에 놀란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자 그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거만스럽게 걸어가서 스위치를 내렸다. 그는 소파에 앉아 남은 설탕물을 찔금찔금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가 스위치를 내리자, 벽에 도료처럼 붙었던 어둠이 차곡차곡 잠겨서 덤벼들고 그들은 이윽고 조심스럽게 수군거리더니 마침내 배짱 좋게 깔깔거리고 있었다. 말리운 휴지 조각이 베포처럼 늘리워 허공을 난다. 닫힌 서랍 속에서 내의가 펄펄 뛰고 있다. 책상을 받친 네 개의 다리가 흔들거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래도 처음엔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허지만 그들의 대상이 무방비인 것을 알자, 일제히 한꺼번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날뛰기 시작했다. 크레용들이 허공을 난다. 옷장 속의 옷들이 펄럭이면서 춤을 춘다. 혁대가 물뱀처럼 꿈틀거린다. 용감한 녀석들은 감히 다가와 그의 얼굴을 슬쩍슬쩍 건드려 보기도 하였다. 조심해 조심해. 성냥곽 속에서 성냥개비가 중얼거린다. 꽃병에 꽂힌 마른 꽃송이가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면서 춤을 춘다. 내의가 들여다보인다. 벽이 서서히 다가와서 눈을 두어 번 꿈쩍거리다가는 천천히 물러서곤 하였다. 트랜지스터가 안테나를 세우고 도립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재떨이가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소켓 부분에선 노래가 흘러나온다. 낙수물이 신기해서 신을 받쳐들던 어릴 때의 기억처럼 그는 자그마한 우산을 펴고 화환처럼 황홀한 그의 우주 속으로 뛰어든 셈이었다. 그는 공범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때였다. 그는 서서히 다리 부분이 경직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우연히 느낀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이 방에서 도망가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소리를 내지 않고 살금살금 움직이리라고 마음먹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다리를 만져 보았는데 다리는 이미 굳어 석고처럼 딱딱하고 감촉이 없었으므로 별수 없이 손에 힘을 주어 기어서라도 스위치 있는 쪽으로 가리라고 결심했다. 그는 손을 뻗쳐 무거워진 다리, 그리고 더욱더 굳어져 오는 다리를 끌고 스위치 있는 곳까지 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는 채 못 미쳐 이미 온몸이 굳어 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숫제 체념해 버렸다.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조용히 다리를 모으고 직립 하였다. 그는 마치 부활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다음날 오후쯤 한 여인이 이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방안에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을 발견했다. 매우 놀라서 경찰을 부를까고도 생각했었지만, 놀란 가슴을 누르며 온 방안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는데 틀림없이 그녀가 없는 새에 누군가가 들어온 것은 사실이긴 했지만 자세히 구석구석 살펴본 후에 잊어버린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자 안심해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잊어버린 것이 없는 대신 새로운 물건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물건은 그녀가 매우 좋아했던 것이었으므로 며칠 동안은 먼지도 털고 좀 뭣하긴 하지만 키스도 하긴 했었다. 허지만 나중엔 별 소용이 닿지 않는 물건임을 알아차렸고 싫증이 났으므로 그 물건을 다락 잡동사니 속에 처넣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그 방을 떠나기로 작정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메모지를 찢어 달필로 다음과 같이 써서 화장대 위에 놓았다.
여보. 오늘 아침 전보가 왔는데 친정 아버님이 위독하다는 거예요. 잠깐 다녀오겠어요. 당신은 피로하실 테니 제가 출장 갔다고 할 테니까 오시지 않으셔두 돼요. 밥은 부엌에 차려 놨어요. - 당신의 아내가
숲 속의 죽음 - 셔우드 앤더슨
1
그 부인은 노파였는데, 내가 살던 읍에서 멀지 않은 한 농장에 살고 있었다.
시골에 사는 사람이나 작은 읍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부인들을 본 적은 있지만,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런 노파는 노쇠한 말에 마차를 끌리거나, 바구니를 들고서 걸어서 읍내에 들어온다. 그 부인은 집에서 닭을 몇 마리 쳐서 달걀을 파는지도 모른다. 바구니에 달걀을 넣어서 식료품상에 가지고 간다. 가게에서 물물교환으로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약간 사고, 완두콩을 약간 산다. 그리고 1, 2파운드의 설탕과 밀가루를 산다. 그러고 나서는 푸줏간에 가서 개에게 줄 고기를 좀 청한다. 10센트나 15센트를 쓰는 일이 있지만, 돈을 쓸 때엔 무엇인가를 산다. 이전에 푸줏간에서는 가져가고 싶은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간을 내 주었었다. 우리집에서는 늘 그것을 먹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 형제 중 한 사람이 읍내 전시장 터 근처의 도살장에서 소 한 마리의 간을 온통 얻어온 일이 있었다. 우리들은 그것을 실컷 먹었었다. 돈은 한푼도 쓰지 않았었다. 그후부터는 간에 대해서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
그 농장의 노파는 약간의 간과 수우프용 뼈를 하나 샀다. 그 노파는 누구와 얘기할 일도 없으므로 사고 싶은 것을 사고 나서는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늙은 몸에는 그것도 꽤 짐이 되었다. 사람들은 길을 곧장 갔기 때문에 그런 노파에게는 정신이 쏠리지 않았다.
내가 아직 어리고, 소위 염증성 관절염을 앓고 있던 해였다. 여름과 가을에 그런 노파가 하나 언제나 우리집 앞을 지나서 읍내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두서너 마리의 보기에 야윈 개들이 그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그 노파에게 뭐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별로 알지 못하는 이름 없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후 몇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노파에 대한 생각과 일어났던 일이 갑자기 회상된다. 그것은 하나의 얘기이다. 그 노파의 이름은 그라임즈이고, 그 부인은 읍내에서 4마일 떨어진 작은 개울 둑 위에 선 한 작은, 칠도 안한 집에 남편과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남편과 아들은 불량배였다. 아들은 겨우 스물 한 살 밖에 안되었지만, 벌써 한 번 징역살이를 하였었다. 남편은 말을 훔쳐서 다른 군으로 빼돌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가끔 말이 없어지면, 그 남자도 보이지 않았었다. 아무도 그를 잡지 못했었다. 한 번은 톰 화이트 헤드의 전세 마찻집에서 내가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그 사나이가 그것에 와서 앞에 있는 벤치에 앉는 것이었다. 다른 남자들도 두서너 명 거기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 사나이는 얼마동안 거기 앉아 있더니 일어나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가면서 고개를 돌려 그 사람들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아니, 나는 친해지려고 했는데, 당신들은 내게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구려. 이 읍내에선 내가 어딜 가나 그렇구려. 그러다가 언젠가 당신들의 그 좋은 말이 하나 없어졌을 때엔 어떻게 할라우?"
그는 사실상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었다.
"네놈들 중에서 어느 놈이고 그 턱주가리를 깨버릴까부다."하는 말이 그의 눈에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그 눈의 표현이 얼마나 나를 떨게 했던지 잊을 수가 없다.
그 노인은 원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제이크 그라임즈. 이제 모든 것이 뚜렷하게 생각난다. 그 아버지 존 그라임즈는 개척시대에 제재소를 가지고 돈을 벌었었다. 그러다가 술을 마시고, 계집을 쫓아다니고 해서, 죽었을 때엔 별로 남은 것이 없었다.
제이크가 그나마 남은 돈을 탕진해 버렸다. 벌채할 재목도 곧 없어지고, 땅도 거의 남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독일인 농장주인 집에서 아내를 얻어왔다. 6월 어느 날 그는 그 농장주인 집에 일하러 갔었다.
그 당시 여자는 아직 어렸었고, 굉장히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 처녀는 계약고용으로 일하는 몸이었는데, 물론 그 농장주인은 그 처녀에게 야심을 품고 있었을 것이고, 농장주인의 아내는 남편의 야심을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아내가 장보러 읍에 가게 되면, 농장주인이 그 처녀의 뒤를 쫓았었다. 처녀는 제이크에게 실상 별일이 없었다고는 말했지만, 그는 그 말을 믿어야 할 지 어떨지를 몰랐었다.
제이크로 말하면 그는 처음 그 처녀를 끌어냈을 때 손쉽게 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만일 그 독일인 농장주인이 그를 경치려고 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그 처녀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농장에서 타작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처녀와 마차로 드라이브하자는 약속을 해놓고, 다음 공일날 밤 그녀를 데리러 갔었다.
그녀는 주인에게 들키지 않고서 집을 빠져나왔으나, 마차에 타려고 할 때 주인이 나타났다. 거의 어두울 무렵인데, 주인이 말머리 쪽에서 갑자기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말고삐를 잡고, 제이크는 마차의 채찍을 꺼냈다.
두 사람은 끝장이 날 때까지 싸웠다. 그 독일인은 난폭한 녀석이었다. 그는 아마 자기 아내가 알건 말건 상관 안했을 것이다. 제이크는 채찍으로 그의 얼굴이며 어깨를 마구 후려갈겼으나, 말이 야단을 치는 바람에 마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했다. 처녀는 그것을 보지않았다.
말이 달리기 시작하여 도로를 1마일쯤 달리고 나서야 처녀는 말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길옆에 있는 나무에 간신히 말을 묶어 맸다. (나는 어떻게 해서 이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렸을 적에 들은 마을의 이야기가 마음에 새겨진 탓일 것이다.) 제이크는 독일인을 해치우고 나서, 처녀가 그곳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겁에 질려 울면서 마차 곁에 움츠리고 있었다.
그녀는 제이크에게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독일인이 자기를 차지하려고 애썼다는 이야기, 한 번은 헛간으로 자기를 쫓아들어왔었다는 이야기, 또 한 번은 우연히 집에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의 앞을 아래까지 찢었다는 이야기 등, 그때 만일 안주인이 마차를 타고 문에 들어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기를 마음대로 했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아내가 장보러 읍에 갔다오는 참이었으며, 아마 말을 헛간에 끌어들였을 것이다. 독일인은 아내의 눈에 띄지 않게 밭으로 살짝 빠져나가 버렸으며, 처녀에게 만일 입밖에 내면 죽여버린다고 일러 놓았었다. 별수 없이 그녀는 가축에게 먹이를 주다가 옷을 찢겼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그 처녀는 계약고용으로 와 있는 몸이었고, 양친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은 아실 것이다.
이런 계약으로 와 있는 아이들은, 지극히 혹독한 꼴을 당하는 일이 가끔 있다.
그들은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어서 사실상 노예와 다름없었다. 그 무렵에는 고아원이라고는 몇 개 없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어느 집엔가 계약고용으로 들어가 있었다. 어떤 결과가 되느냐 하는 것은 주인의 형편이나 자기의 운수 소관이었다.
2
그 처녀는 제이크와 결혼하여 일남 일녀를 두었는데, 딸애는 죽었다.
그러는 동안에 생활이 안정되어 가축을 기르게 되었다. 가축의 사육은 그녀의 일이었다.
독일인 집에 있을 때엔, 독일인과 그 부인의 식사를 그녀가 지었었다. 그 독일인 부인은 엉덩이가 큰, 강건한 여인이었고, 대부분 남편과 함께 밭에 나가서 일을 했었다. 이 처녀는 구인 부부를 위하여 식사를 지었고 헛간에 있는 소들에게 먹이를 주었고, 돼지, 말, 닭들에게도 먹이를 주는 일로 시종했었다.
그런데 이제 제이크 그라임즈와 결혼을 하니, 그에게 식사를 해주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녀는 조그만 체격이었는데, 결혼을 하고 3, 4년이 되어 두 아이를 낳고 나니, 그 날씬한 어깨가 앞으로 굽었다.
제이크의 집은 개울가의, 지금은 쓰지 않는 제재소 가까이에 있었는데, 그 집에서는 언제나 큰 개를 여러 마리 먹이고 있었다. 그가 무엇인가 도둑질을 하지 않을 때엔, 항시 말 장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빈약한 말라빠진 말을 여러 마리 먹이고 있었다. 돼지도 서너너덧 마리 있었고, 소도 한 마리 있었다. 본래 그라임즈 집안의 땅이었던 몇 에이커의 남은 땅에서 그 가축들을 먹였고, 제이크는 거의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빚을 내어 탈곡기 한 대를 사서 수년간 써보았으나,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신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에게 밤에 곡식을 도둑맞지 않을 까 의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을 맡기 위하여 멀리까지 가야만 했고, 그렇게 하니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겨울이 되면 그는 사냥을 했고, 약간의 땔감을 베어서, 가까운 읍으로 팔러 나갔었다. 아들은 성장하자 아버지와 꼭 같아졌다. 부자가 함께 술에 취했다. 그들이 집에 돌아와서 집안에 먹을 것이 없으면, 영감은 마누라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러면 그녀는 집에서 키우는 몇 마리 닭 중에서 한 마리를 부랴부랴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다 잡아버리면 그녀가 읍에 갈 때 팔아야 할 달걀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녀는, 예를 들면, 살을 찌게 하여 가을에는 도살할 수 있도록 돼지를 먹이는 일과 마찬가지로, 한평생 집안 것들을 먹일 계획을 세워야만했다. 돼지를 잡으면 으레 남편은 대부분의 고기를 읍에 가지고 가서 팔아버리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꾸물대면, 아들이 그 일을 대신했다. 때로는 부자가 싸우기도 했고, 싸움이 시작되면 노파는 몸을 떨면서 비켜섰었다.
어떻게 돼서인지 그녀에게는 침묵의 버릇이 생겼고, 그것이 아주 굳어 버렸다.
그녀가 늙어 보이게 되었을 무렵-아직 나이 40도 안되었었지만-남편과 아들이 말장수를 하러 나간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사냥을 한다든가, 도둑질을 한다든가 해서 집을 비웠을 때엔, 집안이나 헛간 마당을 혼자서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어슬렁거리는 수가 가끔 있었다.
어떻게 모두를 먹여 살린단 말인가? 그것이 그녀의 문제였었다. 개들에게도 먹이를 주어야 했다. 헛간에는 말이나 소에게 줄 충분한 건초가 없었다. 닭에게 모이를 안 주면, 그것들이 어떻게 달걀을 낳겠는가? 팔 달걀이 없으면 이 농장의 생활을 지탱할 여러 가지 물건을 읍에서 어떻게 사올 수 있겠는가? 천만다행으로 남편은 먹일 필요가 없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생긴 후로는 얼마 안 있어 그럴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남편이 어디로 장사여행을 떠나는지 그녀는 알 길이 없었다. 때로는 몇 주일 동안 집을 비우는 일도 있었고, 아들이 크자 둘이 함께 나가버리곤 했었다.
그들은 집안 일을 몽땅 그녀가 처리하도록 맡기고 가지만, 그녀에겐 돈이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었다. 읍에 나가도 그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겨울이면 불 지칠 나뭇가지를 주워 모아야 했고, 아주 적은 양의 곡식으로 가축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헛간에 있는 가축들은 배가 고픈 듯이 그녀에게 소리지르고, 개들은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겨울에는 암탉들이 불과 몇 개의 알을 낳았을 뿐이다. 그것들이 헛간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으면 그녀는 언제까지나 그것들을 지켜보았었다. 겨울에는 암탉이 알을 낳을 때 아무도 돌보지 않으면 알이 얼어서 터져버린다.
어느 겨울날, 노파가 달걀 몇 개를 가지고 읍에 나가는데 개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럭저럭 거의 세시 가까이가 되고 눈이 몹시 내릴 때에야 집을 나섰다. 그녀는 한 4, 5일째 몸이 좋지 않았었다. 그래서 입은 것도 시원찮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중얼중얼하면서 집을 나섰다. 낡은 곡식 부대 밑바닥에 달걀을 감추듯이 넣어 가지고 갔다. 달걀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겨울에는 값이 비쌌다. 그 달걀과 교환하면 고기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조금씩과, 설탕 약간, 그리고 어쩌면 커피도 약간은 살수 있으리라. 푸줏간에서 간을 한 조각 줄지도 모른다.
그녀가 읍에 도착하여 달걀로 물건을 바꾸고 있을 때 개들은 밖에서 문 곁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흥정을 잘 해서, 필요한 물건을 예상외로 많이 손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 푸줏간에 가서 간을 조금 얻고, 개먹이 고기도 조금 얻었다.
그녀에게 누가 다정하게 말을 건네준 일은 정말 오랫동안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녀가 푸줏간에 들어갔을 때, 가게에는 주인 혼자 있었는데, 그는 병들어 보이는 노파가 이런 날씨에 외출한 것을 생각하고는 화를 냈었다.
몹시 추운 날이었고, 오후가 되자 멎었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주인은 그녀의 남편과 아들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고 욕을 해댔다. 노파는, 그가 지껄이고 있는 동안, 악간 놀란 기색을 띠며 그를 바라보았다. 푸줏간 주인은 자기가 그 곡식 부대에 넣어준 간이나 고기 부스러기가 붙은 커다란 뼈다귀를, 남편이건 자식이건 그 누가 먹으려고 든다면, 그런 인간은 그야말로 먼저 굶어 죽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굶어 죽는다고? 그러나 짐승들을 먹여야 하고, 남자들도 먹여야 한다. 아무 쓸모는 없어도 어쩌면 팔릴지도 모르는 말도, 석달 동안이나 젖 한 방울 내지 않는 빈약하고 야윈 저 암소들도 먹여야 하지. 말들, 소들, 돼지들, 개들, 사람들도.
3
노파는 될 수 있는 대로 어둡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 했다. 개들은 그녀가 등에 멘 무거운 곡식 부대의 냄새를 맡으며 뒤를 따랐다. 그녀는 읍내를 벗어나자 어느 담장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 부대를 한 가닥의 끈으로 등에 묶어 맸다. 그러기 위하여 끈을 호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렇게 하니, 짐 나르기가 훨씬 수월했다. 두 팔이 아팠다. 담장을 기어 넘는 데에 힘이 들었고, 한 번은 곤두박질쳐서 눈 속에 파묻혔었다. 개들은 까불면서 뛰어 돌아다녔다. 다시 한 번 일어서려고 애쓴 끝에 겨우 일어섰다. 담장을 기어 넘은 것은 언덕을 넘어 숲을 빠져서 가는 지름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를 따라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1마일 이상이나 멀어진다. 지체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고, 또 짐승들에게도 먹이를 주어야만 했다. 건초도 조금밖에 없고 옥수수도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어쩌면 남편과 아들이 돌아올 때에 무엇을 가지고 올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라임즈 집안에 단 한 대밖에 없는 마차, 그 덜커덕거리는 마차에 비틀비틀하는 말을 고삐로 끌고서 떠났던 것이다. 그 두 사람은 될 수 있으면 말을 팔아서 다소의 돈이라도 장만할 작정이었다. 돌아올 때엔 취해서 오겠지. 돌아왔을 때엔 집에 무엇이 좀 있는 것이 좋다.
아들은 15마일 떨어진 군청 소재지의 어떤 계집과 관계가 있었다. 그 여자는 난폭한 불량배였다.
여름에 아들은 계집을 집으로 데리고 온 일이 있었다. 둘이 다 술이 취해 있었다. 제이크 그라임즈는 집에 없었는데, 아들과 그 계집은 노파를 종처럼 부려먹었다. 노파는 별로 꺼리지 않았다. 시중드는 일이 노파에게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노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사는 방법이었다. 어려서 독일인 집에 있었을 때에도 그렇게 지내왔고, 제이크와 결혼한 후에도 그러했다. 아들이 계집을 데리고 와서 밤새 결혼한 사이처럼 함께 자며 묵어갔을 때에도 그러했다. 노파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젊었을 때 이미 놀라운 일은 다 치렀기 때문이다.
등에 짐을 지고 깊은 눈 속에 빠지며, 넓은 들판을 고생스럽게 건너서 숲 속에 들어섰다.
작은 길이 하나 있었으나, 내처 가기가 힘들었다. 바로 언덕 너머, 숲이 가장 깊은 곳에 펑퍼짐한 작은 공지가 있었다. 전에 누가 거기에 집을 세울 생각을 한 것일까? 그 공지는 읍내 건축대지 정도의 넓이였고 정원이 딸린 집 한 채가 들어설 만했다. 오솔길이 그 공지 옆으로 나있었으나, 노파는 거기에 다다르자 한 나무 밑에 걸터앉아서 쉬었다.
그런 짓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나무 줄기에 짐을 기대고 앉으니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다시 일어서자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노파는 그것을 잠시 염려하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마 잠깐동안 잤을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추우면 추위는 느끼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그날은 오후가 되자 조금 따스해졌지만 눈은 전보다 더 내렸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는 날이 개고 달까지 나왔다.
그라임즈 부인을 읍에까지 따라온 네 마리의 개는 모두 키가 크고 야윈 것들이었다. 제이크 그라임즈나 그 아들 같은 인간들은 정해놓고 바로 그런 개들을 키우기 마련이다. 그들은 발길로 차고 학대하지만, 개들은 집을 나가지 않는다. 그라임즈 집의 개들은 굶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먹이를 찾지 않으면 안됐다. 그래서 노파가 공지 옆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자고 있는 동안에도 먹이 찾기에 열심이었다. 개들은 숲이나 인접한 밭에서 토끼를 쫓고, 그러는 동안에 딴 농장의 개 세 마리와 한패가 되어버렸다.
잠시 후 개들은 모두 공지로 돌아왔다. 그것들은 무엇엔가 흥분하고 있었다. 날씨가 춥고, 개어서 달까지 있는 이러한 밤은 개에게 무슨 작용을 일으킨다. 그것은 개들이 늑대였을 때 겨울밤에 떼를 지어 숲을 헤매고 있었을 무렵의 그 옛날부터 내려오는 본성이 다시 되살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지의 노파 앞에 모인 개들은 토끼를 두서너 마리 잡아서 당장의 시장기는 면했었다. 그것들은 공지에서 원을 그리고 달리면서 희롱하고 있었다. 제각기 앞의 개의 꽁지에 코를 대고는 빙빙 돌았다. 이 공지의 눈이 쌓인 나무 그늘 밑에서 겨울 달빛을 받으며, 연한 눈을 밟고 원을 그려가며 이렇게 소리 없이 달리는 모양은 기이한 풍경이었다. 개들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것들은 원을 그리며 빙빙 돌뿐이었다.
노파는 죽기 전에 개들의 이런 꼴을 보았을 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한 두 번 깨어서 희미한 늙은 눈으로 그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별로 춥지가 않고 다만 졸릴 뿐이었다. 생명이 오랫동안 붙어 있을 뿐, 아마 이성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독일인 집에서 일하던 어린 시절, 그리고 그 이전, 어머니가 그녀를 버리고 달아났던 어린애 시절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파의 꿈은 그다지 유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쾌한 사건이라고는 별로 그녀에게 일어난 일이 없었으니까. 가끔 그라임즈 집의 개중에서 한 마리가, 달리고 있던 원에서 벗어나 그녀 앞에 와서 서는 것이었다. 그 개는 그녀의 얼굴에 바싹 상판때기를 들이댔다. 붉은 혀가 축 쳐져있었다.
개들이 달리는 것은 죽음의 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밤에, 그리고 질주함으로써 그들에게 소생한 늑대의 원시본능이 그들을 다소 불안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들은 늑대가 아니다. 우리들은 개다. 인간의 종이다. 인간이여, 살아 계시라. 인간이 죽으면, 우리들은 다시 늑대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개 중의 한 놈이, 노파가 나무에 등을 대고 있는 곳까지 와서 코를 노파의 얼굴에 까지 내밀고 나서는 만족스러운 듯이 다시 떼 속으로 달려서 돌아갔다.
그라임즈 집의 개들은 그날 밤 노파가 죽기 전에 모두 한 번씩은 이 짓을 했다.
그것을 안 것은 그후, 내가 어른이 되어서였다. 한 번은 일리노이 주 숲 속에서, 역시 겨울밤에, 한 떼의 개들이 꼭 그런 짓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개들은 내가 어렸던 그날 밤 노파가 죽기를 기다렸듯이, 내가 죽는 것을 기다렸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있었을 무렵의 나는 청년이었고, 죽음 같은 것은 전연 생각하지 않았다.
노파는 곱게 조용히 죽었다. 그녀가 살았을 적엔 그녀가 그라임즈 집의 개들을 먹여 살렸지만, 이젠 어떻게 될 것인가?
노파의 등에는 짐이 있었다. 그 곡식부대 속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푸줏간에서 얻은 간, 개 먹이 고기, 수우프용 뼈다귀 등이 들어 있었다. 읍내의 푸줏간 주인은 갑자기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그녀의 자루에 묵직하게 채워주었던 것이다. 노파에겐 큰 벌이었던 셈이다.
이제 그것이 개들에게 큰 벌이가 되었다.
4
그라임즈 집의 개 한 마리가 갑자기 무리에서 뛰어 나오더니, 노파의 등에 있는 짐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실지로 개들이 늑대였더라면, 그 개는 그 무리의 두목이었을 것이다. 그놈이 한 짓을 다른 개들도 모두 따라 했다.
개들은 모두, 노파가 끈으로 등에 묶어 맨 곡식 부대 속에 이빨을 박았다.
개들은 노파의 시체를 넓은 공지로 끌고 나왔다. 낡은 옷이 즉시 어깨에서 찢어져 나갔다. 하룬가 이틀 후 노파가 발견되었을 때, 옷이 허리까지 말끔히 찢어져 있었다. 그러나 개들은 노파의 시체엔 손대지 않았다. 곡식 부대에서 고기를 꺼낸 것뿐이었다. 시체가 발견됐을 때, 그 시체는 꽁꽁 얼어 있었고, 어깨가 아주 좁고, 몸이 아주 날씬하여, 죽은 모습이 어떤 아리따운 소녀의 몸 같았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중서부의 읍에서는, 읍에 가까운 농장에 이런 사건이 가끔 있었다. 토끼사냥 나갔던 사냥꾼이 그 노파의 시체를 발견하였지만, 그는 시체에는 손을 대지 않았었다. 눈에 덮인 작은 공지에 있는 밟힌 오솔길, 그곳의 정적, 개들이 곡식 부대를 잡아떼어 찢어버리려고 시체를 마구 짓밟은 그 장소-사냥꾼은 어쩐지 섬뜩해져서 그냥 읍내로 달려왔던 것이다.
나는 그때, 석간 신문을 여기저기 상점에 배달하고 있던 읍내 신문 배달원인 나의 형 한 분과 함께 중심가에 있었다. 때는 거의 밤이었다.
그 사냥꾼은 식료품점에 들어가서, 그 이야기를 했다. 그 다음은 철물점으로 가고, 다음은 드러그 스토어로 갔다. 사람들이 한길 가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숲 속의 그 장소를 향하여 모두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나의 형은 신문을 배달해야 했지만, 그만두었다. 모두가 숲으로 가고 있었다.
장의사도 따라가고, 경찰서장도 갔다. 몇 사람은 마차 한 대에 올라타고, 오솔길이 도로에서 갈라지는 곳까지 몰고 가서 숲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말들은 말굽쇠가 단단히 끼워져 있지 않아서 자주 미끄러졌다. 그들은 걸어서 간 우리들만큼이나 시간이 걸렸다.
경찰서장은 남북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부상당한, 몸집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무거운 지팡이를 들고, 분주히 다리를 부상당한, 몸집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무거운 지팡이를 들고, 분주히 다리를 절며 도로를 걸어갔다. 나는 형과 함께 바로 그 뒤를 쫓아갔고, 가는 도중에 다른 어른들과 아이들이 우리와 한패가 되었다.
노파가 도로에서 오솔길로 길을 바꾸었던 곳에 이르렀을 무렵에 날이 어두웠다. 그러나 달은 떠 있었다. 경찰서장은 살인사건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사냥꾼에게 계속 질문을 했다. 사냥꾼은 어깨에 총을 메고, 개가 뒤를 따랐었다. 토끼사냥꾼이 이렇게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끌 기회란 별로 많지 않다. 그는 이 기회를 최대로 이용하여, 경찰서장을 선두로 한 행렬을 인솔하고 있었다.
"난 아무런 상처도 못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처녀입니다. 얼굴을 눈 속에 파묻고요. 아니, 난 그 여자를 모릅니다."
사실인즉 사냥꾼은 그 시체를 자세히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겁을 집어먹었었다. 누가 살인을 했는지도 모른다. 나무 뒤에서 누가 뛰어나와 자기까지도 죽일지 노를 일이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땅은 하얀 눈으로 덮이고, 도처에 정적뿐인, 늦은 오후의 숲 속에선 무엇인가 섬뜩한 것이 심신에 스며드는 법이다.
수상하고 섬뜩한 일이 바로 옆에서 일어난다면 누구나 그저 딴 생각 없이 죽을 힘을 다하여 도망치려고 할 것이다.
어른들과 아이들의 무리는 노파가 밭을 횡단했던 곳에 이르자, 서장과 사냥꾼의 뒤를 따라서, 느린 경사를 올라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형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이 어깨에 멘 부대 속에는 신문뭉치가 들어 있었다. 그가 읍에 들어가면, 집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먼저 신문배달에 나서야 할 것이다. 내가 따라갈 줄로 그가 이미 생각하고 있듯이 내가 같이 따라간다면, 둘이 다 늦을 것이다. 어머니나 누나 중에서 누군가 우리 식사를 데워야 할 것이다.
하여튼 우리에겐 얘깃거리가 생길 것이다. 얘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자주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냥꾼이 들어왔을 때 우리가 마침 그 식료품점에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사냥꾼은 시골 사람이었으며, 우리 형제는 그를 전에 본 일이 없었다.
이제 어른들과 아이들은 공지에 도달했다. 이런 겨울밤에는 어둠이 빨리 내린다. 그러나 보름달이 떠 있어 모든 것이 뚜렷이 보였다. 형과 나는 노파가 죽은 나무 근처에 서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조용히 얼어붙은 채 누워 있는 노파의 모습은 늙게 보이지 않았다. 한 어른이 그 시체를 눈 속에서 젖혀놓는 바람에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다. 어떤 이상한 신비감이 들어 나는 몸이 떨렸고, 형도 그러했다. 춥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형제는 여자의 시체를 본 일이 없었다. 언 육체에 묻은 눈 때문에 대리석같이 그렇게 희고 아름답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읍에서 여자라고는 한 사람도 일행에 끼어 오지 않았지만, 남자 중에서 한 대장장이가 읍을 향해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말없이 뒤를 따랐다. 그때 그 노파가 누군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5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다. 개들이 뛰어다닌 자국이 마치 경마장의 작은 트랙과 같이 눈에 타원형을 그린 것을, 사람들이 신비감에 잠겨 있는 것을, 그리고 젊게 보이는 나체의 하얀 두 어깨를 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말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은 다만 신비감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시체를 장의사로 운반하여, 대장장이와 사냥꾼과 서장과 기타 몇 사람만이 안으로 들어가고서, 문을 닫아버렸다. 만일 아버지가 거기 있었더라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인데, 우리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형과 나머지 신문을 배달하러 갔다. 집에 돌아와서는 형이 그 얘기를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마 형의 그 얘기하는 태도에 불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후에 읍내에서 그 노파에 관한 그 밖의 여러 가지 얘기를 듣게 되었다. 다음날 노파의 신원이 확인되고 조사가 이루어졌다.
남편과 아들 있는 곳을 알게 되어 그들을 읍으로 데려왔다. 그들과 노파의 죽음과 어떤 관련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두 사람에게는 아주 충분한 알리바이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읍의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반감을 가졌다. 그래서 두 사람은 떠나야만 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다만 숲 속의 그 광경을 기억할 따름이다-둘러섰던 사람들, 얼굴을 눈에 파묻고 있던 소녀 같은 나체의 모습, 개들이 뛰어서 생긴 자국, 그리고 위로는 맑고 차던 겨울 하늘. 조각 구름이 하늘에 둥실둥실 떠가고 있었다. 수목 틈으로 구름은 앞을 다투어 흘러가고 있었다.
숲 속의 그 광경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 내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실화의 토대가 되었다. 물론 이야기의 세부는 훨씬 뒤에 서서히 주워 모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나는 청년시절에 독일인 농장에서 일을 했다. 그 농장에 고용된 소녀는 주인을 무서워했고, 주인 여자는 소녀를 미워했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일을 그 농장에서 보았다. 그 후의 일인데, 한 번은 청명한 달 밝은 밤에 일리노이주의 어떤 숲에서 개들과 신비스런 모험을 한 일이 있었다.
또 국민학교에 다니던 어느 여름, 동무 하나와 읍내에서 개울을 따라 수 마일을 걸어 그 노파가 살던 집에 갔었다. 그녀가 죽은 이래 그 집엔 아무도 사는 이가 없었다. 문이 경첩에서 떨어져나갔고, 창문은 다 깨어져 있었다. 그 동무와 내가 바깥 길에 서 있을 때에 틀림없이 떠돌이 들개 두 마리가 집 모퉁이를 돌아 이쪽으로 달려왔었다. 그 개들은 키가 크고 야윈 놈들이었는데, 담장으로 와서, 길에서 있는 우리들을 틈으로 노려보는 것이었다.
나는 나이가 듦에 따라, 노파의 죽음에 대한 얘기 그 전부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과 같이 생각되었다. 그 선율은 한 번에 하나씩 서서히 주워 모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인가 이해해야만 했었다.
그 죽은 여인은, 동물의 생명을 기르도록 운명지어져 있었다. 하여튼 그것이 그녀가 한 전부였다. 태어나기 이전에도, 아이 때에도, 독일인 농장에서 일하던 젊은 시절에도, 결혼 후에도, 늙어서도, 그리고 죽었을 때에도 그녀는 동물의 생명을 길렀었다. 그녀는 소의, 닭의, 돼지의, 말의, 개의, 인가의 동물적 생명을 먹여 살렸다.
그날 밤 우리가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와 누이가 듣는 자리에서, 형이 그 이야기를 할 때에, 그가 얘기의 요점을 파악하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형은 너무 어렸고, 나도 그러했다. 그렇게 완전한 일에는 그 자체에 아름다움이 들어 있는 법이다.
나는 그 점을 특히 강조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그때 왜 불만을 느꼈고, 그후에도 오늘날까지 불만을 느끼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뿐이다. 내가 왜 이 단순한 얘기를 다시 한 번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여러분이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얘기하는 것뿐이다.
영자의 전성시대 - 조선작
실로 우연한 기회에 나는 영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영자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내가 군대에서 돌아와 한 공동목욕탕에서 일자리를 구한 다음의 일이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나는 진짜로 고군분투했었다. 그러나 결국 낙착된 것은 목욕탕의 '때 미는 사람'이었다. 사실 내가 군대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사람을 죽이는 일밖에 없었다. 월남에서 실제로 나는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화염 방사기로 토굴 속에 숨어 있는 일곱 명의 베트콩을 불태워 죽이고 이름있는 무공훈장을 획득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훈장이 나에게 취직자리를 약속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훈장을 받고 의기양양해졌을 때는 군대에 말뚝을 콱 박아버릴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소시적부터 꿈을 그렇게 쉽사리는 버릴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어느 철공장에 빌붙어 견습 용접공으로 밥을 얻어 먹었지만, 내 꿈이란 무교동의 한 화려한 술집에서 보타이를 매고 일하는 것이라든지 명동의 한 소문난 양복점에서 재단사로 일해보는 것 따위의 그럴 듯한 것이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뒤 사실 나는 그런 곳에 일자리를 찾았었다. 그러나 웨이터 자리를 위해서는 내게 보증금이 없었고, 양복점의 '시다'로서는 나이가 너무 많이 먹어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을 불명예스럽게도 공동목욕탕의 때미는 녀석으로 낙착시키지 않을 수 없었는데, 따지고 본다면 실상 이 일자리는 실속은 있는 일이었다. 열심히만 뛴다면 까짓 시시하게 술집의 웨이터나 양복점의 재단사가 문제가 아니라 양복점의 사장도 될 수도 있는 판국이었다. 월남에서 용맹을 날리던 우리 중대장이, 아직도 불도저가 산을 깎아 내려 택지를 만들고 있는 이 신흥 주택가에 엉성한 목욕탕을 하나 차려놓고 치사스럽게도 돈을 긁어모으는 일에 설미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내가 거기서 손님들의 때를 밀고 있는 사실도 피장파장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우리 중대장이 차려놓은 목욕탕에 일자리를 구하고 나서 내게는 약간의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여유가 생기자 나는 내가 군대에 들어가기 전에 사귀었던 계집애, 창숙이년을 찾아나서게 되었는데 엉뚱하게도 영자를 만나 버렸던 것이다.
영자는, 내가 군대에 들어가기 전 청계천 2가에 있는 한 철공장에서 용접공으로 빌붙어 밥을 얻어먹고 있었을 때 그 주인집의 식모였다. 짐작하겠지만 그때 나는 영자를 좋아했었다. 영자를 한 번이라도 더 만나 보기 위해서, 나는 철공장에서 그 주인집까지 부지런히 심부름을 다녔었다. 심부름을 갈 때마다 대문을 열어준 것은 영자였는데, 그때마다 부린 영자의 심통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언젠가 한번 대문을 열어주는 영자의 그 큼직한 젖통을 슬쩍 건드렸던 것이 잘못이긴 하였지만 말이다. 영자는 나에게 마치 길들여지지 않는 독종 애완동물과 같았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가 그년을 올라타 깔아뭉개겠다는 생각을, 이를 갈아 마시며 다짐하고 있었다. 내가 또 심부름으로 주인집을 찾아가게 되는 그 어느 날, 영자가 혼자서 낮잠을 자고 있기만 한다면 나는 용코없이 그년을 올라타겠다. 애를 배게 된다면 저도 별수 없이 내 여편네가 되어 주겠지.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을 실현시키지도 못하고 시시껄렁하게 군대로 뛰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자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청량리 일각에 포진한, 세칭 오팔팔이라고 불리우는 사창굴에서였다.
창숙이년을 찾아 나섰다가 영자를 만나게 되었다고는 했지만, 사실 나는 그것이 오로지 창숙이년을 찾기 위해서 나선 것만이라고는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것은 욕망뿐이어서 걸핏하면 다리 사이에서 그놈이 천막을 치고 일어서는 바람에, 사실 나는 그놈을 적당히 달래주는 일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쁠 지경이었다. 그쯤되면 창숙이년이고 나발이고간에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허겁지겁 꺼야 했던 것이다. 더구나 서울 바닥에 어디 사창굴이 한두군덴가, 창숙이년이 어느 구석에 어떻게 처박혀 있을는지는 실로 묘연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마치 한강 백사장에 떨어진 바늘 하나 찾기나 진배없었다. 덕분에 나는 서울바닥의 요소요소에 진을 치고 있는 사창굴들을 모조리 순례했을 뿐이었다.
나는 창숙이년에게 수월찮은 빚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삼 년이나, 아니 벌써 오 년 전부터 차곡차곡 밀려온 외상값이었다. 나는 그 외상값을, 군대에 들어가 월남에나 가게 된다면 빠삭빠삭하는 달라로 갚아주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은 실로 허무맹랑한 계획이었다.
빠삭빠삭하는 달라는 고사하고 남의 나라 전쟁에 팔뚝이나 하나 안 바치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창숙이년을 찾으려 했던 것은 외상값을 갚아주려고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한때 나는 창숙이년과 살림을 차릴까도 생각했었는데 (둘이서 돈을 모아 사글세방이라도 한 칸 얻어 보려고 계획을 짜기도 했었다) 그만하면 내가 창숙이년을 찾으려고 했던 변명으로는 충분한 것이다. 창숙이년과 한 번 놀아본 일이 있는 손님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겠지만 창숙이년의 그 달콤했던 애교와 잠자리의 기교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월남에서는 나도 기분파적으로 국제창녀들과 놀아 본 경험이 있지만, 창숙이년의 그것과 비긴다면 비싸기만 했지 진짜 별볼일 없었던 것이다.
좀 치사스럽기는 하지만 목욕탕에 실속있는 일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약간은 여유가 생긴 나로서 창숙이년을 채겠다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도발적인 불빛이 질펀하게 깔리고 색정적인 화장을 한 계집들이 서성거리며 살을 부딪고 추파를 던져오는 골목길에 들어서면, 나는 우선 마른 입에 군침부터 청하기가 일쑤였다.
"야, 너 손창숙이라고 하는 계집애 어디 사는지 모르니?" 나에게 추파를 던지며 덤벼오는 계집을 보면 나는 이렇게 허두를 떼기는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이미 창숙이년이고 나발이고 간에 다 글러먹은 판국이어서, 나는 조급한 마음에 그만 말까지 더듬어 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야 너 소 손창숙이라고 하는 계 계집애 어디, 어디 사는지 모 모르니?" 나는 이렇게 마치 실성한 놈처럼 같은 질문만을 되풀이하며,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그 계집을 따라가기 마련이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영등포의 밤거리로부터 청량리 일각까지 더퉜다. 그리고 그 청량리 일각에 포진한 사창굴에서 뜻밖에도 영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영자는 물론 그 사창굴에서 개업을 하고 있는 창녀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날도 나는 밤늦게까지 목욕탕에서 격심한 노동을 하였다. 아마 일요일이었던 모양이어서 손님도 많았었고 수입도 평일의 갑절이 넘었다. 나는 매우 피곤하였지만 주머니가 두둑하였기 때문에 용기백배하여 목욕탕을 나섰다. 그날 밤 나는, 밤이 늦었기 때문에 과속으로 질주하는 좌석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청량리 쪽으로 진출했다.
셔터를 내린 백화점 앞에서 버스를 내린 나는 백화점을 끼고 돌아 사창굴의 입구를 향해서 전진했다. 그때 마침 백화점 칠 층에 있는 카바레에서 춤을 끝내고 쏟아져 나오는 번듯한 한 떼의 계집들과 마주쳤다. 나는 그것들을 거슬러 올라가며 심통스럽게 어깨를 부딪쳤는데, 나에게 어깨를 받힌 계집들은 가볍게 "어머." 하고 소리치며 종종걸음으로 달아났다. 씨발년들, 저들도 별수없이 앉아서 오줌이나 갈기는 주제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게 무어야 하고 생각하며 나는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갔다. 사실 나는 창녀가 아닌 번듯번듯한 계집들을 볼 때마다 괜스리 심통이 피어 올랐다.
그것은 내가 그것들과 놀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겠지만, 따지고 본다면 그것들이나 창녀들이나 다 오십 보 백 보가 아닌가. 요즈음 계집들 치고 두 명 이상의 사내들과 놀아나지 않는 계집이 과연 몇 명이나 남아 있겠느냐 말이다.
골목길로 들어선 나는 나에게 덤벼오는 계집들 중에서 인정이 깊어 보이는 계집 한 명을 골랐다. "야 너 소 손창숙이라고 하는 계집애 호 혹시 모르니?" 나는 역시 말을 더듬으면서 그 계집에게 먼저 이렇게 따리를 붙였다. 그러나 물론 그 계집도 창숙이년의 친구는 아니었다.
"시장한 판에 찬밥 더운밥 가리게 됐우. 오늘밤은 까짓거 나하고 놀읍시다." 계집은 이렇게 말하며 내 등을 떠밀었다. "그런 게 아 아니야. 나는 손창숙이를 차 찾으러 온 거야." 이렇게 겸양을 떨기는 했지만 나는 오토바이처럼 털털거리는 걸음으로 그 계집에게 떠밀려 들어갔다. 이때부터 나는 창숙이년을 찾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계집의 방에는 싸구려 화장품들의 향료 냄새가 터질 듯이 가득차 있었다. 하루 왼종일 물비린내와 소독약 하이크론 냄새에 찌들려 죽어 있던 나의 후각이 갑자기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월남에서는 나의 코가 화약냄새와 송장이 썩어가는 냄새에 시달렸었다. 그때도 그리워했던 것은 역시 계집의 방에서 흘러 넘치는 향수 냄새였던 것이다. 계집의 방에 들어서 그 향수 냄새를 맡으면 비로소 마비되었던 후각의 기능이 되살아나면서 무언가 착실하게 나를 안도케 해 주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싸구려 화장품들의 향수 냄새는 나의 하반신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나는 그 계집과 한바탕 유감없이 놀아났다. 마치 기갈이 들린 짐승처럼 성급했기 때문에 나는 계집의 사정 따위는 아랑곳할 여유가 없었다.
"아이 시시해."
계집은 나의 벌거벗은 등짝을 찰싹 갈기며 짐짓 이렇게 말했다. 욧자락에 엎어져서 내가 거친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가만있어 이거. 아직도 다섯 번은 더 아쌈하게 남아 있으니까."
"웃기시네, 누굴 죽일려구." 계집이 뾰루퉁해져서 말했다. 나는 낄낄거리고 웃으며 다시 말했다.
"죽이잖구. 월남에서는 일곱 명이나 죽인 것이 바로 나야."
"월남 여자들을?"
호들갑을 떨면서 계집이 물었다. 나는 점잖게 대답했다. "베트콩이었지만 말이야."
"월남 갔다 온 사람들은 모두 사람죽였다는 게 자랑이더라."
계집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 잠깐 나갔다 와도 되죠?"
계집은 벗어 팽개쳐 두었던 옷을 찾아 걸치기 시작했다.
"안 돼." 나는 계집의 바짓가랭이를 바꿔채며 단호하게 말했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영업중에 계집이 방을 비우는 일은 대체로 재미가 적었다. 다른 방에 또 하나의 손님을 받아놓고 딴 살림을 차리기가 보통이었다.
"안 돼 앉아." 나는 노기어린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그런 게 아니야요. 누굴 좀 만나고 오려고 그래요." 계집이 애원하는 투로 다시 말했다.
나는 툴툴거리며 배앝았다. "누구라니, 놈팽이겠지."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말씀이야. 이래봬도 하룻밤 지조는 지키는 여자라구요." 이번에는 계집이 화를 돋우어 말했다. 계집은 분하다는 몸짓으로 난폭하게 주저앉았다. 이런 경우, 나는 늘 그렇지만 남자가 좀 물렁해지는 수밖에 없다. 내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좋아."
"그만두겠어요." 계집은 화가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상체를 도리질하며 말했다. 나는 계집의 손을 잡아끌며 부드러운 음성을 가장해서 다시 말했다.
"누굴 만나려는 거야?"
"누구라면 아시겠어요?" 계집은 삐쭉이며 아직도 노엽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마치 무안당한 어린애처럼 할 말을 잊었다. 우리들은 잠시 침묵했다. 계집은 내게 팔목을 잡힌 채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계집의 그와 같은 태도에 조금 압도되는 느낌이 들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사창가다운 밖의 독특한 소요도 점차 잠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근처의 역 구내에서 들려오는 기관차들의 소리만이 마치 살아 있는 맹수들의 그것처럼 뚜렷했다.
잠시 후에 계집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투로 의기양양해져서 소리 높여 말했다.
"여자를 한 명 더 데려다 같이 놀지 않겠어요? 어때요, 근사하지요?"
나는 계집의 이 돌연한 제안에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한꺼번에 두 명의 계집을 데리고 노는 일을 나는 아직 들어 본 일도 상상해 본 일도 없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그러나 기쁨으로 가득찬 기묘한 음색으로 말했다.
"아니, 뭐 그런 게 다 있어."
"조금만 더 쓰신다면 둘이서 아주 근사하게 놀아드릴께요. 내 아주 친하고 친한 친구야요. 내가 아까 잠깐 만나겠다고 했던 애가 바로 그 애야요. 불쌍한 년, 오늘밤도 또 공 때렸을 것이 분명해"
계집은 가식만은 아닌, 가슴에 저며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괜스리 이죽거리고 싶어졌다. 내가 말했다.
"친구 되게 사랑하시는구먼."
"아이 시시해. 같지 않게 무슨 떫은 소리유. 좋으면 좋다고 말할 일이지, 뜨뜻미지근하게 뭐예요."
나를 이렇게 힐책하고 나서 계집은 밖을 향해서 제멋대로 소리치고 있었다.
"아줌마 아주움마, 나이롱네 집에 가서 영자 좀 데려다 줘요."
나는 사실 거절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주머니도 두둑하겠다. 한 번쯤 그런 희한한 행각을 저질러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나는 짐짓 볼이 부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 누가 데려오라고 했어, 이거. 김새게"
"싫지만도 않으면서 괜스리, 진짜 김빠리 팍 새게 자꾸 그러지 말아요. 근사하게 한 번 놀아드리면 되잖아요. 길가에 나앉은 거지에게도 적선을 한다는데 오입장이가 불쌍한 계집 하나 조금 도와줬대서 난리 쳐들어 온답디까?"
계집은 나를 덮어씌우듯 잰말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또 한번 이죽거리며 말했다.
"사지가 멀쩡해 가지고 왜 남의 적선을 받으려는 거야? 김새게--."
"참말 김새는 것 좋아하시네. 사지가 멀쩡하다면 왜 적선을 받겠우?"
나는 정신이 말짱하게 걷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성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담 뭐야, 벼 병신이란 말이야?"
"그래요. 그 앤 팔 한 쪽이 없는 애란 말이야요."
계집은 오금을 박듯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말 심장에 못이 박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온몸의 표피에는 일시에 소름이 돋아났다.
"아니, 뭐 뭐라구? 김새게."
나는 비명이나 지를 듯이 이렇게 소리쳤다.
"안돼, 그만두겠어. 당장 취소다."
팔 한 짝이 없는 창녀라니, 이건 정말 요절할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검객물 영화에는 외팔뚝이 검객이 등장하여 흥을 돋우곤 하지만 사창굴에 외팔뚝이가 등장하다니, 이게 무슨 천재지변이란 말인가. 나는 계집을 발길질로 밀어붙이며 서둘러서 말했다.
"야, 꿈자리 사나울라. 빨리 나가서 못 들어오게 하란 말이야."
"월남에서는 사람을 일곱 명이나 죽였다고 큰 소리 탕탕 치시던 양반이 그까짓 일에 뭐 그리도 기급이시우. 한 번 보기만이래두 해요. 얼마나 이쁘게 생긴 앤데."
그때 이미 방문 밖에서는 인기척이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쉰 듯한 목소리가, 알고 있는 사람의 그것처럼 친근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나야. 들어가도 좋아?"
"그래. 어서 들어와."
계집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가까운 발끝으로 미닫이 문짝을 조금 열어 주었다. 밖의 계집은 조금 열어진 문틈으로 다섯 손가락을 끼워 문틀을 잡고 살그머니 밀어 연 다음, 게처럼 발을 옆으로 움직여 들어왔다. 그리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실례합니다."
그것이 바로 저 철공장 주인집의 영자였던 것이다.
실로 이런 우연한 자리에서 영자를 다시 만나보게 되리라고는 꿈엔들 생각해 보았을까? 나는 기절해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비로소 나를 발견한 영자도 경악의 표정을 짓고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영자는 옛날보다는 대체로 야위어 있었다. 그 싱싱했던 피부의 탄력이나 풍만했던 가슴의 융기는 시들해졌고, 크고 뚜렷뚜렷한 얼굴의 윤곽만이 그린 듯이 변치않고 남아 있었다.
잠시 후에, 나는 말라서 뻣뻣해진 입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웬일이야?"
영자는 잊고 있었기 때문에 덜렁거리는 빈 소맷부리를 성한 팔로 움켜잡으며 쪼그리고 돌아앉아 갑작스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귀밑머리 몇 올이 홍조를 띤 뺨에 흘러내려 요기를 품어내고 있었다. 영자의 흐느낌은 정직하게도 내 심장을 자극했다. 나도 잔뜩 언짢은 표정이 되어 고개를 떨구었다.
무언가 눈치챈 것이 분명한 계집이 거북살스런 태도로 일어서면서, 그러나 실감은 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요령부득인데, 무슨 신파 이야기같구려. 두 사람 밀렸던 이야기들이나 나누시지."
그러나 영자도 갑작스럽게 따라 일어서면서 까닭없이 가시돋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나도 갈래."
"아니 얘봐. 옛날 애인을 만난 모양인데 왜 그렇게 시시껄렁하게 나오니?"
"애인은 무슨 애인이우, 진짜 시시껄렁하게." 영자가 톡 쏘아서 말했다.
"원한에 사무친 모양이구나. 뭘 하는 거야요. 얘를 좀 잡아요."
이렇게 말하고 계집은 밖으로 나갔다. 나는 영자를 잡아야 할까 놓아주어야 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역시 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켜 영자를 가로막았다. 내 몸은 부끄럽게도 알몸뚱이였다. 영자는 얼굴을 돌리며 비켜섰다.
"좀 앉아. 이야기 좀 하자."
나는 영자의 성한 팔목을 나꿔채서 끌어앉히며 말했다. "팔뚝은 어쩌다 그렇게 됐어."
"시시한 이야기는 집어쳐요. 놀고 싶으면 돈부터 내시던가."
영자는 아주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영자는 내 손아귀에 잡힌 팔목을 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는 더욱 힘주어 영자의 팔목을 비틀어 잡으며 성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너하고 놀겠어. 가지 말아."
"이것 놓아요. 아프단 말이야요. 한쪽뿐인 팔목이 그것마저도 부러지겠어요."
영자가 조금 느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영자의 팔목을 잡았던 손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그래. 그럼 달아나지 말아."
영자는 갑작스럽게 소리를 내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웃음을 그치고 딸꾹질까지 하면서 영자가 말했다.
"화대를 내겠다는 손님을 버려두고 도망치는 미친년도 있을까."
서슬에 놀라서 나는 입을 벌렸는데, 이제는 영자가 철공장 주인집의 식모였던 그 옛날의 영자가 아니로구나 하는 절실한 깨달음에 괜스리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꾸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말아."
영자는 또 한번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어딘지 생소한 구석이 있었다. 웃다가 영자는 빈 소맷부리를 잡아당겨 내 앞으로 내밀면서 흉칙스런 표정을 만들어 가지고 말했다.
"웃기지 말아요. 이것 안 보여?"
나는 새삼스럽게 흠칫 놀라서 한걸음 물러앉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랬어. 어쩌다가 팔뚝을 그랬느냔 말이야."
"시시한 이야기는 진짜로 집어치우라니까 그러네. 신경질나게."
영자가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전쟁판에까지 갔다 온 나도 이렇게 사지가 멀쩡한데 진짜 무슨 일이야?"
"씨발, 듣기 싫다는데 왜 자꾸 신경을 돋구실까. 놀 테면 빨리 한번 놀고, 그렇잖으면 나는 갈 테야."
"알았어."
나는 마치 몰이에 쫓기는 토끼처럼 다급한 마음으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려 있는 바지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냈다. 나는 괜스리 허둥대고 있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그것을 영자에게 심통스럽게 던져주었다. 종잇장들은 마치 가랑잎처럼 날렸다.
그런데 영자는 그것을, 굶주린 사람이 허둥지둥 밥술을 떠넣듯 그렇게 줍는 것이 아닌가. 비로소 나는 사람을 죽일 때와 마찬가지의 잔인스런 쾌감에 떠받치기 시작했다. 내가 난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너를 돈주고 샀어. 옷을 벗어. 사그리 벗어버리란 말야."
"좋았어, 진작에 그렇게 나올 일이시지."
영자는 내 심정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기를 돋우어 말했다. 그리고 나서 한 손만으로의 불편한 동작으로, 그러나 아주 익숙한 솜씨로 옷을 벗었다. 나는 마치 내가 죽인 시체를 내려다 볼 때처럼 복잡한 마음으로 영자의 알몸뚱이를 내려다보았다. 민둥하게 싹뚝 잘리워 나간 영자의 어깨를 보았을 때, 나는 까닭없이 호흡이 가파라지기 시작했다.
영자는 알몸을 미끄러지듯이 더러운 홑이불 속으로 감추며 일부러 꾸민 듯한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끄럽사와요, 자꾸 쳐다뵈지 마시와요."
철공장집의 식모로 있을 때 내가 영자를 올라타 버리지 못한 것은 대단한 잘못이었다.
철공장의 직공이었던 김씨는 말했었다. 생각이 있으면 자식아, 꿍꿍 앓지만 말고 먼저 깔아뭉개란 말이다. 물론 나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회를 잡았다손 치더라도 내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은 저으기 의심스럽다. 돈을 주고 사지도 않은 계집을 어떻게 공짜로 차지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창숙이년에게처럼 외상이라도 그었다면 혹시 모르지만. 열대식물로 뒤덮여 있는 늪 근처의 마을 하나를 기습한 일이 있었다. 우리들이 그 마을을 평정하였을 때 마을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계집들 뿐이었다. 하사가 내 귀를 끌어당겨서 속삭였다. "멋진 기회다." 마을의 계집들은 전우들의 요구에 헤프게도 벌려 주었다. 그때도 나는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못생긴 처녀 하나를 불필요하게 비상식량 한 상자를 주고 샀던 것이다.
소녀는 목이 가늘었다. 소녀는 풀대처럼 말라비틀어진 목을 도리질하며 저항했다. 소녀의 그 슬픈 저항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내가 무지막지 했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었을까. 그렇지, 나는 매우 괴롭게 소녀의 국부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무서운 통증을 제어했었다. 나는 나의 난폭하게 돌기한 부분을 소녀의 밖에서 해결했다.
나는 어리석게도 영자의 그곳을 향해 달려들 통증을 상상하며 영자를 깊숙이 점령했다. 그러나 영자의 그곳은 슬프게도 마치 헐거운 팔찌처럼 반들반들하게 길이 나 있었다.
일을 마치고 나서 영자는 장난끼만도 아닌 어조로 말했다. "자주 찾아 달라고도 못하겠네. 팔뚝이 한 짝 없어놔서는 이 장사도 해먹기 어렵더군요. 그래도 댁 같은 분이나 자주 찾아와 준다면 그럭저럭 견딜만 할 텐데 난 그저 빚투성이라구. 잘 좀 부탁해요. 그래도 이렇게 부탁드리는 도리밖에 별 수가 있겠어?"
영자의 말은 다분히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우연찮게 영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영자를 만난 뒤로 나는 창숙이년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까마득하게 잊어먹게 되었다. 대신 나는 영자를 자주 찾아갔다. 영자의 그 감동적인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영자를 찾아갔을 것만은 틀림없다. 나도 알고 있지만, 이런 것이 바로 나의 기특한 점인 것이다.
목욕탕의 경기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면서부터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나의 돈벌이도 기가 차게 시원찮아졌다. 나는 영자를 정당한 셈을 치르고 사기도 힘들 지경이 되었다. 영자는 그런 나에게 어느 날은 익살을 부리며 말했다.
"오늘은 내 때 좀 밀어 주셔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부엌 뒤의 후미진 곳 시멘트 바닥 위에서 나는 군소리 없이 영자의 묵은 때를 벗겨 주었다. 영자의 때를 벗겨 주면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었지만, 한짝 뿐인 팔만으로는 목욕을 하기도 여간 불편할 것이 아니었다. 나는 영자가 측은하게 생각되었고, 영자의 때를 밀어 주는 일이 즐겁기까지 했다. 내가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야, 이 때 좀 봐."
"허물이 벗겨지겠어, 아파요." 영자는 낄낄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이건 약과야." 내가 점잖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떤 목욕탕에서는 여자가 남자들의 때를 밀어 준다면서요?" 영자는 마치 신기한 이야깃거리라도 찾아냈다는 듯이 소리를 높여 말했다. "어떤 손님이 그러던데요. 그러면서 망할 새끼가 날더러 글쎄, 너는 팔이 한 짝 없어서 그 노릇도 해 먹기 틀렸구나, 그러잖겠어? 그건 돈벌이가 괜찮다면서요?"
"내가 알아?" 나는 괜스리 화를 돋우어 말했다. 영자는 내 마음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안타깝게 말했다. "진작에, 팔이 성했을 때 그 짓이라도 해서 한 밑천 잡았더라면--."
영자에게는 단골손님이라고는 없는 모양이었다. 어떤 시러배아들이 외팔뚝이 창녀를 단골로 찾아들겠는가. 영자를 아는 녀석들이라면 꿈에라도 뵐까 무서워 그 근처로는 발걸음도 얼씬 아니할 일이었다.
그 장사도 여름을 타기는 마찬가지여서 그 고장의 경기는 말씀이 아니었다. 온전한 몸뚱이를 가진 창녀들도 길가에 내놓은 평상에 모여들 앉아 나이롱뽕을 하거나 달려드는 모기떼를 쫓는 일이 고작이었다. 어쩌다가 그럴싸한 사내 하나가 두리번거리며 골목으로 들어오면 계집들은 화투짝을 내던지고 달려들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영자는 그 판에도 한몫 낄 수가 없었다. 소맷부리를 덜렁거리며 달려들어 보았댔자 일번으로 딱지를 맞을 건 뻔할 뻔자인 것이다.
언제나 그랬지만 영자는 컴컴한 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나이롱 아줌마가 물어다주는 사내를 기다릴 수밖에는 없었다. 나이롱 아줌마는 펨프 일까지 나선 영자네 집의 주인 아줌마였다. 곰보 나이롱처럼 얼굴이 얽고 성미가 사납고 억척스런 여편네여서 그 동네에서 억척 나이롱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파리를 날릴 지경인 한여름의 불경기에 처해서는 그 유명한 나이롱도 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거의 매일 밤 영자는 내 차지가 되었다. 낮에 목욕탕에서 이백 원을 벌면 이백 원을, 오백 원을 벌면 오백 원을 나는 영자에게 갖다 바쳤다. 내가 공때리게 되는 날은 영자도 공때렸다.
어쩌다가 사내 하나를 물어오게 되면 나이롱 여편네는 보통으로 기승이 아니다. 사내를 영자의 방안으로 밀어넣고는 방문 앞에서 어정거리며 안의 동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으례 그랬지만 영자가 외팔뚝이인 것을 발견하고 노한 사내와 영자가 티격태격 하는 소리가 새어나올 것을 대비해서였다. 그럴 때면 억척 나이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내를 험상궂은 억양으로 힐난했다.
"오입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팔뚝은 뭣에 쓰려구 찾노, 구멍만 뚫렸으면 됐지. 팔뚝이 있다면 뭐 잘라 족탕으로 해먹을 건가? 별 으바리 같은 소리 다 듣겠다."
그러면 트집을 잡던 사내도 기가 죽어 대개는 잠잠해지기 마련이었다.
내가 영자에게 의수를 하나 만들어 주겠다는 생각을 갑작스럽게 해 내게 된 것은 정말로 천우신조였다. 그것은 골목에 가득차, 마치 모든 것을 곪아 터지게 할 듯한 한 여름의 열기도 아침 저녁으로는 시들해지기 시작한 어느 날이었다. 그날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내가 갑작스럽게 그런 신통한 생각을 해내게 되었던지 지금 분별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내게도 그 천재적인 영감이라는 것이 전혀 없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소맷자락 속에 의수를 달고 어두운 골목길로 나아가 손님을 청한다면, 누구라 감히 그것을 눈치채겠는가. 손 부분에는 장갑을 끼우거나, 아니면 바지주머니 속에 슬쩍 찔러 넣는다. 팔굽이 마치 패션 모델처럼 처억 꺾어진다. 나는 이런 모습을 상상하며 눈물까지 찔끔거리고 웃었다. 나는 우선 목욕탕의 보일러실 창고에서 팔뚝만한 굵기의 부서진 의자 다리 한 개를 찾아냈다. 나는 그것을 영자의 성한 오른팔만한 길이로 잘랐고, 또 세 토막을 냈다. 손 부분은 작은 널빤지 조각을 따로 구해 정교하게 다듬었다. 팔굽의 이음매에는 한쪽으로만 굽힐 수 있도록 쇠고리를 붙였다. 팔목에는 양쪽으로 고리못을 박아 이어 앞뒤 좌우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팔뚝의 굵기에 알맞게 붕대를 감아 굵은 부분과 가는 부분을 조절했다. 내가 목욕탕에서 이런 물건을 만들고 있는 동안 청소원인 박군이나 보일러실의 천씨는 보통으로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천씨는 심지어 나에게 "미친 새끼." 라고 말하기조차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만든 물건을 나는 영자에게 가지고 갔다. 처음에는 영자도 어리둥절하여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벽에 걸린 영자의 원피스를 떼내려 그것을 소맷자락 속에 집어넣고 어깨 부분에서 끈으로 붙잡아매고 바늘로 꿰맬 즈음에는 영자도 허리가 부러져 나가도록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걸 달고라면 골목길에 나가 설 수가 있겠어. 누구라도 암, 어떤 싹수없는 자식도 꼼짝없이 속아넘어가고 말 거야." 영자는 의기양양해서 이렇게 말했다. 영자는 나무팔뚝이 든 소맷자락이 대롱거리는 원피스를 한 팔로 치켜들고 바라보며 또 한번 깔깔거리고 웃었다. 기뻐하는 영자의 모습을 보자 덩달아 나도 기뻤다. 나는 기쁨과 열적은 표정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머리는 써야 돼."
"어쩌면 이렇게 기발난 생각을 다 해 냈을까? 참말 난 돌대가리인 모양이야. 당장 골목길로 나가보겠어. 아마 틀림없이 걸려들 거야."
이렇게 말하며 영자는 대담한 동작으로 원피스를 걸쳤다. 나는 영자의 어깨로부터 흘러내려 대롱거리는 나무 팔을 잡아서, 팔굽 부분은 처억 굽히고 손을 허리께에 파여진 주머니 속에 찔러 넣어 주었다. 내가 말했다.
"그러나 무리하면 안 돼. 아직은 밝거든."
"그래. 어두워지면 한번 나가 볼 테야. 어때요 자 어때?"
영자는 제가 마치 진짜 패션모델이라도 된 것처럼 멋들어지게 포즈를 잡아 보이며 말했다.
"됐어, 좋아." 나도 사기 왕성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딘가 모르게 동작이 어색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긴 소맷부리만 덜렁거리던 때와는 어찌 견줄 수가 있었겠는가. 어리숙한 녀석이라면 진짜 눈 깜빡할 사이에 속아넘어가기 십상이었다.
비로소 나는 마음이 놓여 웃음이 터져나왔는데, 영자는 그런 나에게 엉겨 붙으며 또 한번 깔깔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방바닥에 나뒹굴어져서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어댔다. 그 통에 안방에서 화투를 치고 있던 나이롱 아줌마와 동네 여편네들이 우리들의 방을 기웃거리게 되었고, 우리 두 사람의 모양새를 발견하고는 아연실색들 했다. 나이롱 아줌마는 돌아서며 그 여편네의 말버릇대로 중얼거렸다. "미친 것들, 그게 뭐 그리 대단타고 그 지랄발광들이야."
그러나 영자의 그 독창적인 의수가 대단치 않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장 그날 밤부터 영자는 거침없이 골목길로 진출할 수 있었고, 그 희한한 나무팔뚝의 힘으로 눈먼 고기들을 낚아올리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목욕탕의 일도 잊어버린 채 골목길로 진출한 영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했는데, 영자의 활약은 실로 눈부신 바가 있었다. 외팔이만 아니었다면 창녀치고는 영자도 유혹당할 만큼은 잘 생긴 용모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엉큼한 생각을 가지고 이 골목길로 접어든 사내라면 아무리 아닌 체하려 해도 벌써 눈길부터가, 걸음새부터가 달랐다. 영자는 우선 그런 사내를 포착해서 달려든다.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으며 사내의 턱밑으로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놀다 가세요." 라고 말한다. 사내의 행색에 따라서는 "아주 멋있게 놀아드릴께요." 라든가 "싸게 해드릴께요." 라고 덧붙여서 더욱 효과를 높인다. 나는 곡예사의 줄타기를 구경하는 소년처럼 손에 땀을 쥐고 멀찍이 골목의 그늘에 숨어서 영자를 바라본다. 그러나 영자는 줄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사장되어 있던 비상한 재주가 영자의 전신에 흘러넘치고 있는 듯싶었다. 그날 밤도 세 번이나 손님을 갈아들이는 영자를 나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어찌된 셈인지 방에서도 한쪽 팔의 문제 때문에 시비하는 말도 별로 들려오지 않았다. 술에 취한 놈팽이나 얼간이는, 어떻게 스리슬쩍 몸뚱이로 돌려쳐 속아 넘겼을 테고, 좀 까다로운 녀석이었댔자 그 원피스에 쑤셔넣은 나무 팔뚝을 발견하고는 할 말을 잊었을 테지. 더욱 까다로움을 피는 사내녀석이 있어 "이런 내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라고 호소했다면, 길가에 나앉은 거지에게라도 적선한 셈쳤지 별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 상상하며 영자에게 갈채라도 보내고 싶었다.
그 뒤로 영자는 정말 악바리처럼 뛰었다. 그만한 정성이라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없었다.
"돈을 모아야지. 이젠 무조건 돈이나 모으는 거야." 영자는 이를 갈아마신듯 다부진 말투로 입버릇처럼 자주 이렇게 말했다. 농사집이래야 밭 두 뙈기 뿐이어서 굶기를 밥먹듯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로 식모살이 온 것은 오로지 배불리 먹어 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식모살이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부엌일이 어렵다는 뜻이 아니고 밤을 견디는 일이라고 풀이했다. "내가 철공장집에 있었을 때는 댁도 그러잖았어. 남의 가슴팍에 왜 손을 슬쩍 집어넣느냐 말이에요." 영자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이렇게 서두를 끄집어냈다. 사내들이란 어린애나 늙은이나 모두 주책이라고 말했다. "아, 식모살이라면 지긋지긋 했어. 식모를 뭐 제집 요강단지로 아는지, 이놈도 올라타고 저놈도 올라타고 글쎄 그러려들더라니까요. 하룻밤은 주인놈이 덤벼들며 다음날은 꼭지에 피도 안 마른 아들 녀석이 지랄발광이고 내 미쳐 죽지 미쳐 죽어."
식모살이를 네 군데나 옮겨 다니며 살았지만 모두가 그 모양이었노라고 말했다. 대학생들을 하숙치는 집에도 좀 살아봤는데, 배웠다는 사람들이 이건 뭐 더 악마구리떼 같았노라고 말했다. 그래서 식모살이를 그만둔 것이라고 말했다. 다 팔자소관이겠지만, 기왕 이렇게 알몸뚱이로 벌어먹어야 할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곧바로 이리로 찾아왔지 미쳤다고 여차장은 뛰어들었냐고 아주 탄식 어린 어조로 말했다. 여차장을 하다가 만원 버스에서 떨어져 마침 달려든 삼륜차 앞바퀴에 팔 한 짝을 바쳤노라고, 이제는 신경질도 안 부리고 줄줄 잘도 고백했다.
"곧바로 이 동네로 왔다면 성한 두 팔로 남들에게 지잖게 잘도 해먹을 수 있었잖겠어요?" 라고 영자는 다시 강조했다. 팔뚝만 성했더라면 정말 알몸뚱이의 처지로서는 그래도 떠억 벌어지게 차려 놓을 수 있는 장사가 바로 이것밖에 또 무엇이 있겠느냐고, 영자는 못을 박았다. 포주를 떼버리고 방을 한 칸 세를 내어 화장대랑 전축이랑 선풍기를 월부로 들여다가 오밀조밀하게 꾸며 놓고 그럴싸한 손님들을 한 오십 명쯤만 단골로 잡는다면 그에서 더 부러울 것이 없을 거라고, 영자는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춘자 언니처럼 댓바람에 이 길로 들어섰더라면 그만 못할 것이 무어야?" 영자는 까닭없이 화를 돋우어서 말했다. 춘자란 내가 영자를 처음 만나게 되었던 날, 만났던 계집이었다. 팔뚝을 한 짝 잃어버리고 영자는 하는 수 없이 춘자언니를 찾아왔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왕 이렇게 굴러 떨어졌을 바에는 애당초 상경길에서부터 춘자와 행동을 함께 하는 거였다고, 영자는 분통한 듯이 말했다. 춘자의 시골집 식구들은 춘자 덕분에 굶주림을 모르게 되었는데 우스운 것은 춘자가 타이피스트쯤으로 취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혹시 춘자네가 눈치채고 있다 한들 어쩔 것인가, 울며 겨자 먹기지. 영자는 이렇게 말하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부터야." 영자는 이를 갈며 대체로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늦게 내가 목욕탕의 일과를 끝마치고 영자를 찾아갔을 때, 영자는 둥그렇게 몰려선 구경꾼들 속에서 어떤 사내 하나와 실랑이질을 벌이고 있었다. 영자는 성한 팔로 사내의 멱살을 움켜잡고 있었다. 그러나 멱살을 잡았다기보다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표현이 옳겠다. 나는 어이가 없어 구경꾼들 틈에 섞여 한동안 구경을 했다. 헙수룩한 노동자 차림의 커다란 사내는 악바리처럼 붙들고 늘어지는 영자를 뿌리치려고 했다.
수치심과 낭패감으로 쩔쩔매고 있는 사내의 표정은 판자집들의 열어젖뜨린 문짝들 밖으로 터져나온 불빛에 아주 역력하게 보였다. 이 판에 어디선가 나타난 춘자가 끼어 들었다. 춘자는 내게 아주 당연한 목소리로 "아니, 뭘 구경만 하고 서 있는 거야요." 라고 힐책한 다음,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며 소리쳤다. "아니 왜 그러니, 영자야. 이 말뼉다귀 같은 새끼가 뭘 어떻게 했어?"
"처먹고는 그냥 달아나려잖아."
영자가 식식거리며 말했다. 춘자는 사내 앞으로 돌진하여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처먹고 그냥 달아나? 그러고도 뻔뻔스럽게 약한 여자를 쳤어. 여기가 어딘 줄이나 알아?"
"어디긴 어디야, 오팔팔이지." 구경꾼들 틈에서 어떤 되바라진 창녀의 목소리가 말했다.
"맞다 맞아. 창녀들의 창녀들에 의한 창녀들을 위한 오팔팔공화국 아니가."
경상도 계집애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야 팔팔이야, 꽉 물어버려라."
"그걸 그냥 둬 해. 가운데 그거라도 뽑아버려 해." 둘러서 있는 계집들이 마치 운동경기라도 응원하듯 제각기 한 마디씩 했다. 사내는 술에 취했는지 비척거리고 있었다. 춘자는 영자를 떼놓고 대신 사내의 앞자락을 움켜쥐며 말했다.
"너같은 새끼는 맛 좀 봐야 해. 파출소로 가자."
춘자는 사내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워낙 육중하게 생겨먹은 사내의 체중을 가냘픈 여자의 힘으로는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내는 비로소 낭패감에서 벗어나서 투덜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넌 뭐야. 넌 제 삼자야."
이렇게 말하며 사내는 사나운 몸짓으로 춘자를 뿌리쳤다. 춘자는 마치 벌레처럼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재수 옴붙었군." 사내는 발음이 새는 목소리로 말하며 발걸음을 떼놓기 시작했다.
이때 내가 왜 사내 앞으로 나갔던지 그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팔자에도 없는 빵깐 출입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한 팔로 사내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우며 말했다.
"이봐 형씨, 계집을 데리고 놀았으면 셈할 건 해야잖아?"
나의 위협적인 목소리에 사내는 흠칫하는 눈치였다. 사내가 겁먹은 음성으로 말했다.
"난 데리고 놀지를 않았단 말입니다. 어쩌다 걸린 것이 재수없게 외팔뚝이여서 그냥 나와 버렸어요."
구경꾼들이 모두 깔깔거리고 웃었다. 웃음 속에서 영자의 야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자식, 그만하면 직사하게 논 거지, 얼마나 치사스럽게 더듬고 지랄질을 쳤는데."
이번에는 사내가 내게 매달리며 통사정을 했다. "형님 이것 좀 보슈. 난 속았단 말입니다. 감쪽같이 속았어요. 나도 공사판 막벌이꾼인데, 며칠 먹지 않고 모았어요. 한 번 멋있게 놀아 보려고 밥먹을 거 라면으로 때우며 모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재수가 옴붙었지, 하필이면 외팔뚝이가 걸렸단 말씀입니다. 깨끗이 속았어요. 형님 좀 봐 주슈."
"시끄러."
나는 까닭없이 분노가 치밀어올라 녀석의 급소를 올려쳤다. 사내는 단박에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녀석에게 위협적으로 달려들며 말했다. "며칠 모았다는 거 다 내놔."
사내는 마치 날개가 떨어진 곤충처럼 길바닥을 벌벌벌벌 기면서 비명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 강 강도야. 사 사람 살려."
"이 새끼."
나는 녀석의 턱주가리를 뽄대있게 한 번 돌려찼다.
그때 야경원 두 명이 구경꾼들의 틈을 비집고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야경원들은 알 만한 얼굴들이었다. 넘어져 있던 사내가 야경원의 발목에 매달리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했다. "살려 줘요."
"당신 언젠가 일 저지를 사람인 줄 알고 있었어. 파출소까지 같이 갑시다."
야경원 중의 한 명이 내게 말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야경원의 뒤를 따랐다. 사내에게 발목을 잡혔던 야경원은 뒤에서 멀찍이 그 사내의 어깨를 부축해서 데려오고 있었다.
훨씬 불어난 더 많은 구경꾼들이 우루루 몰려 따라왔다. 어느새 춘자가 따라와서 나를 호송해 가고 있는 야경원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김씨, 잘 좀 봐 줘요. 잘못한 건 저 새끼라구요."
춘자와 야경원은 서로 알 만한 사이인가 보았다. 나는 비로소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춘자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관둬. 시끄러워."
내가 영자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석 달 뒤였다. 나의 그 뽄대있는 발길질에 그 불운한 사내녀석의 이빨이 다섯 대나 부러져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는 폭행범으로 검찰에까지 송치되었다. 그러나 검찰에서 나를 담당했던 그 젊은 검사는, 월남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돌아온 개선용사라는 점을 특별히 고려해서 기소유예 처분을 내려주었다. 내가 풀려나오게 되기까지는 목욕탕의 주인인 옛 중대장님의 노고가 대단히 컸다. 중대장님은 내가 월남에서 얼마나 모범적인 사병이었던가 하는 점을 그 젊은 검사에게 누누이 강조했다고 말했다.
구치소를 나와 나는 곧바로 영자를 찾아갔다. 내가 갇혀 있는 동안 영자는 몇 번인가 나를 찾아왔었다. 한 번은 춘자와 함께 면회를 온 일도 있었다. 나를 찾아와서 영자는, 자신의 영업이 그 나무팔 덕분에 얼마나 성업 중인가를 의기양양해서 설명했다. 그리고나서 "전세방 값만 모은다면 이젠 발씻고 살림을 차릴 테야." 하고 말을 맺었다. 그러나 나는 영자가 누구와 살림을 차리겠다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그 동안 서로 좋아지내게 된 놈팽이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의심을 품었다. 그래서 나는 볼이 부은 목소리로 "누구하고?" 라고 묻기도 했는데, 영자는 얌통머리 없이 뱅글뱅글 웃기만 했었다. 그럴 때면 나는 풀려 나가기만 한다면 영자의 꼬리를 밟아 요절을 내버리고 싶을이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찾아갔을 때 영자는 제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영자를 걷어차서 깨웠다. 영자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깨어나자 나는 댓바람에 영자의 따귀를 올려붙이고 말했다.
"어떤 놈팽이야, 살림을 차리겠다고 한 것이!"
번갯불이 번쩍 하도록 갑자기 따귀를 얻어맞은 영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포악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어떤 놈팽이야, 어디 말해 봐."
"왜 때리는 거야?"
비로소 잠결에서 깨어난 영자가 성깔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영자에게 다시 발길질을 하며 말했다.
"이 쌍년아, 네 죄는 네가 불었어. 어떤 새끼야 살림을 차리겠다고 한 것이!"
영자는 나의 무분별한 발길질을 고슴도치처럼 몸을 굽혀 피하면서 악을 썼다. "괜히 사람을 치고 야단이야. 그걸 자기가 알지 내가 알아? 자기가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어렵쇼." 나는 발길질을 멈추고 말했다. "내가 언제 너하고 살림을 차린댔어?"
"그것 봐. 비겁한 것은 바로 자기면서 괜스리 사람을 들볶아. 사람이 저러니까 경찰이 때갔지. 저런 사람을 왜 풀어 주었을까!" 영자는 악에 받힌 목소리로 그러나 어느 구석인가는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비로소 갇혀있었던 동안 가졌던, 영자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 그러나 나는 이죽거리며 다시 말했다.
"그래, 내 또 한번 들어가 주지. 영자 네가 살림살이를 차릴 놈팽이 하나 물을 때까지."
"왜 자꾸 삐딱하게만 그러실까." 영자는 한숨까지 내쉬며 노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빙그레 웃어 주었다. 그 틈바귀를 놓치지 않고 영자는 내가 헉 소리를 내도록 내 가슴팍을 향해서 몸뚱이를 날려왔다. 나는 영자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영자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어리광조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또 들어가지 마이. 자기가 거기 들어가 있는 동안 난 벼라별 생각을 다 했단 말야. 또 들어가지 마, 응?"
가을도 깊어지자 오팔팔 일대에서 나는 어느덧 영자의 서방으로 통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게 치명적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과히 듣기 좋은 호칭을 아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본다면 목욕탕에서 손님들 사타구니의 때나 밀어주며 세상을 빌붙어 사는 주제에, 창녀의 서방도 과분할밖에 없었다.
영자가 손님과 시비가 붙으면 그때마다 나는 그 사내를 교묘한 수단으로 구슬리고 위협해서 적당히 해결해 놓았다. 그러나 월남에서 돌아온 개선용사라는 점을 특별히 고려해서 과대한 처분을 내릴 만한 우직한 일을 나는 더는 저지르지 않았다. 그건 내가 미련한 녀석은 아니라는 단적인 증거였다. 영자는 부지런히 돈을 모았고, 모은 돈을 나이롱 아줌마에게 맡기고 있었다. 영자는 일금 이십만 원을 목표로 정해놓고 매일 그 달성 비율을 따지며 사기를 돋우었다. 그럭저럭 한여름과 가을을 우리들은 별일 없이 보냈다.
그런데 겨울에 들어서면서부터 갑자기 그 일대는 경찰의 철저한 단속을 받기 시작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당국의 방침이 이 일대의 사창굴을 완전히 소탕시킬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들 중대가 평정지역의 베트콩 잔비들을 깨끗이 소탕했듯이 소탕시킬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불도저 작전' 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경찰들의 단속이 전에 없이 지독해졌다. 이제까지도 몇 번인가 그와 비슷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이번만은 낌새가 전혀 달랐다. 골목으로 들어오는 입구의 이곳저곳에는 경고판이 세워졌다. 하얀 페인트를 칠한 넓다란 판자 위에는, 앞으로 이 일대에서는 유객행위나 매음행위를 일절 엄금한다는 내용의 삼엄한 경고문이 깨알같은 글자로 찍혀져 있었다. 골목의 입구마다 방망이로 무장을 한 순경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며칠 뒤에는 집집마다, 매음행위를 근절시키겠다는 당국의 처사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하는 전단이 날아들었다. 또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겠노라는 특별시장 명의의 계고장도 날아들었다. 창녀들은 좌충우돌 도망칠 구멍을 찾기에 얼들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골목의 입구는 경찰들의 방망이로 완전히 봉쇄되어 있어 진짜로 창녀들은 독 안에 든 쥐가 아닐 수 없었다. 이삼일 후에는 아니, 바로 오늘밤에라도 기백 명의 병력이 투입되어 창녀들을 완전히 소탕해 내리라는 뒤숭숭한 소문이 쫙 깔렸다.
나는 비록 창녀는 아니었지만 그 골목들의 입구를 출입하기가 여간 불편해진 것이 아니었다. 이미 나는 좋지 않은 인상으로 몇몇 경찰관들에게 얼굴이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며칠째 영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뒤숭숭한 날 밤도 내가 찾아갔을 때 영자는 어디론가 싸질러 나가버리고 없었다. 영자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자취는 역력했다. 영자의 방에는 벌써부터 꾸려둔 옷보따리 두 개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영자를 구해내기 위해서 현장을 돌아보며 세밀한 작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백화점 쪽의 블록으로 쳐두른 담을 뛰어넘어 행인들 틈에 섞이는 방법이었다. 그러자면 우선 그 블럭담 옆의 집들 지붕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 이 방법은 외팔뚝이인 영자로서는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한 또 하나의 방법은 그 골목길의 네 거리에 위치한 맨홀의 뚜껑을 쳐들고 하수도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오는 구멍을 알 수 없다는 큰 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자정이 가까와서야 영자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영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비상한 탈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영자는 사내처럼 머리를 짧게 깎았고, 어디서 구했는지 그래도 걸맞는 말쑥한 차림의 신사복을 입고 있었다.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처억 매고 있으니 기가찰 노릇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헤벌리고 쳐다보았다. 나를 발견하자 영자는 호들갑을 떨면서 서둘러 말했다.
"어디서 이제 와요. 자, 동무해 줘요, 도망치게. 통금 전까지는 빠져나가야 하니까."
영자는 성한 팔로 내 팔을 꿰면서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나는 영자에게 끌려갔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서 우리들은 영자와 한 집에서 살던 창녀 경상도를 만났다. 경상도가 말했다.
"니 영자 아니가. 어림도 없는 수작 말아라. 니같이 차리고 나간 아덜 지금 몽땅 붙잡혔데이."
"춘자 언니도?" 영자가 물었다.
"말이락 하나, 물론이제. 니는 그라도 날 만났으니 운이 좋다. 날 따라 온나, 좋은 수가 있데이. 아저씨는 퍼뜩 나가 백화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오."
"어떻게 할 생각인데?"
내가 성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경상도는 의기양양해서 설명했다.
"지붕을 타고 넘씸니더, 두고 보이소."
바로 그거였군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경상도는 어느새 영자를 끌고 달려가버렸다. 지붕을 타고 넘어온다면 그 지점은 아무래도 백화점 옆의 블록담 근처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순경들이 스물 네 시간 교대로 지키고 있는 골목의 입구를 빠져나와 경상도와 영자가 지붕을 타고 넘어올 지점을 지켰다. 그 블록담 근처에도 마치 동초처럼 왔다갔다하며 지키고 있는 순경 하나가 있었다. 이건 마치 전쟁이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잠시 후에 지붕 위에서 두 명의 그림자가 얼씬거리기 시작했다.
두 명은 불빛들로 밝혀진 하늘에 그림자를 뚜렷하게 투영하고서 점차 블록담 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나는 가슴을 조이며 두 명의 그림자를 주목했다. 그들은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지붕을 타고 넘었다. 한 집에서 다른 집의 지붕으로 넘어올 때마다 그림자들은 마치 파도 속에서 부침하는 작은 배처럼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집을 남겨두고 일은 삐딱하게 나가버렸던 것이다. 무언인가 지붕에서 밑으로 굴러떨어지면서 장독인지가 깨지는 소리가 우당탕하고 들려왔고, 동초를 서고 있던 순경이 지붕 위의 움직이는 물체를 발견해 버렸다. 순경은 동료 한 명을 청해 블록담을 타고 재빨리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붕 위에서 쫓고 쫓기는 촌극이 벌어졌다.
그런데 허술한 그 판자집들의 지붕은 그 육중한 체중의 순경들을 떠받치기에는 턱없이 허약했던 모양이었다. 그 소란 틈에 영자는 블록담을 뛰어넘어 도망쳤다. 나도 볼것없이 영자가 도망친 방향을 향해서 냅다 달렸다. 뒤에서 "저놈 잡아라." 하고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끝까지 따라오는 기색은 아니었다. 우리들은 어두컴컴한 백화점의 후면을 돌아 사람들로 들끓는 통금 직전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숨을 헐떡거리며 막 출발하려는 좌석버스를 잡아탔다. 우리들이 찾아갈 곳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었다. 결국 우리들은 별 수 없이 나의 직장인 공동 목욕탕으로 꼽살이를 낄 수밖에 없었다.
영자가 죽은 것은 그로부터 보름쯤 뒤였다. 영자는 그해 겨울 청량리 일각의 그 사창굴에서 일어난 원인 모를 화재 속에서 불에 타 죽었다. 영자가 공교롭게도 그날 밤 청량리에 갔던 것은 그 악질적인 나이롱 여편네에게 맡겨 두었던 돈을 찾기 위해서였다. 나는 영자를 내가 일하고 있는 목욕탕으로 데리고 와서, 목욕탕친구들의 얄궂은 눈길 속에서도 불구하고 잔심부름이나 시키며 밥을 얻어 먹이고 있었는데, 영자는 나도 모르게 살짝 빠져나가 그곳에 드나들고는 했던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그것 때문에 한두 차례 다투었는데, 그래도 영자는 막무가내였다. 영자는 어떻게든 그 돈을 찾아다가 따로 방을 얻어 살림을 차려야겠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다녀와서 영자는 그곳 형편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무 것도 없어. 마치 염병으로 죽어나간 집들 같더라니까. 나이롱 여편네도 때갔다는 거야. 그렇지만 거짓말일 거야. 아무래도 나를 따돌리려고 그러는 것 같아. 어디로들 다 갔을까?"
탈의실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던 천씨에게서 그곳에 불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날 밤 아홉 시경이었다. 나는 손님의 때를 밀다 말고 홀로 뛰쳐나와 영자부터 찾았다. 영자는 물론 없었다. 나는 허둥지둥 화재 현장으로 달려갔다. 판자집들에서 터져 나온 불길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나는 구경꾼들을 헤치며 불길 앞으로 달려갔다. 소방차들의 소화작업도 길 건너편의 건물들에게 불길이 번지는 일을 막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었다. 물줄기는 불길 쪽보다도 엉뚱하게 백화점이나 호텔의 벽을 후려때리며 식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화재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구경꾼들의 전렬에 나와서 화기에 얼굴을 익히며 구경이나 할밖에 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때도 나는 설마 영자가 저 불길 속에서 타 죽었으랴고 생각했었다.
날이 샐 무렵, 잿더미 속에서 길거리로 끌어내 놓은 세 구의 시체를 나는 보았다. 그 화재 속에서 타죽은 사람은 모두 네 명이라고 했다. 한 명은 구출하여 인근 병원가지 옮겼는데, 병원에서 숨졌노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것이 바로 나이롱 여편네였는데 바로 나이롱 여편네의 집에서 갑자기 솟아올랐다고 했다.
세 구의 시체들은 마치 화염방사기에 타죽은 베트콩의 그것들처럼 시꺼멓게 그을려 있었다. 물집이 터진 자리는 군데군데 시뻘겋게 익은 살덩이가 드러나 있었다. 그 세 명 속에서 영자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영자는 외팔뚝이었으니까. 불에 그을려 알아 볼 수 없게 되었어도 영자의 시체에는 역시 팔뚝 한 짝이 없었다. 나는 영자의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나는 이를 악물어 울음을 삼켰다. "이 바보야 누가 널 보고 이 불길 속으로 뛰어 들랬어. 누가." 그러나 영자는 마치 장난기까지 섞인 말투로 "불은 내가 질렀는걸요." 하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나라도 지금 심정같아서는 어디라도 한 군데 싹 쓸어 불질러 버리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목걸이 - 모파상
그 여자는 매우 아름답고 매력도 있었지만, 조물주의 잘못으로 가난한 하급 공무원의 집안에 태어났다. 자기 몫으로 모아둔 돈도 있을 리 없고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니 돈이 많거나 지체 높은 남자들에게 알려져 눈을 끌게 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사랑이나 청혼을 받을 길도 막히고 보니, 할 수 없이 문부성에 근무하는 하급 공무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화려하게 몸치장을 할 만한 여유도 없었으므로 소박한 차림을 했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 있는 여자들은 다 마찬가지지만, 결코 그런 환경에 만족을 느낄 수는 없었다. 여자란 신분이나 가문이 문제가 아니라, 우아하고 아름답고 매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훌륭한 혈통과 가문을 대신하게 마련이다. 바탕이 아름답고 천성이 우아하고 마음씨가 부드러우면, 그것으로 능히 특권계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평민의 딸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얼마든지 귀족의 딸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야말로 이 세상에서 온갖 쾌락과 사치를 즐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언제나 마음이 언짢았다. 집이 초라하고, 벽이 남루하며, 의자가 낡고, 가구가 때묻은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괴로왔다. 이러한 것은,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여자들 같으면 별로 의식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그녀만은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났다. 그리하여 식모 노릇을 하고 있는 부르따뉴 태생의 계집애를 보고만 있어도 서글픈 생각과 미칠 듯한 몽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동양식 장식이 걸리고, 높은 청동 촛대에 촛불이 휘황하며, 짧은 바지를 걸친 두 하인이 활활 타오르는 난로의 후끈한 열에 싸여 졸음이 와서 긴의자에 기대어 자고 있는, 비단으로 장식한 넓은 살롱을 상상해 보았다. 값지고 진귀한 보석들이 달려 있는 아름다운 가구하며, 뭇여성들의 선망을 받고 있는 사교계의 인기 있는 남성들과 친한 친구들이 모여 저녁 한때의 이야기를 즐기도록 마련된 향취 높고 아담한 방을 상상해 보는 것이었다.
저녁식사 때, 벌써 사흘째나 빨지 않은 테이블 보를 깔아 놓은 둥근 식탁에 앉자, 마주앉은 남편이 수우프 뚜껑을 열고 "아, 훌륭한 수우프로군. 나에겐 난생 처음인걸--." 하고 기뻐하는 소리를 듣자, 그녀는 다시금 호화로운 만찬의 관경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번쩍이는 은그릇들, 선경의 숲 속에 나오는 기이한 새들과 고대의 인물들을 그려 넣은 벽화, 눈부신 그릇에 담긴 산해진미, 불그레한 생선이나 들꿩의 고기를 뜯으면서, 스핑크스와 같은 미소를 띠고 정담을 나누는 남녀들의 모습이 그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에게는 이렇다할 옷도 보석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가장 사랑한 것은 옷과 보석이었다.
자기는 그런 것들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토록 그녀는 인생을 향락하고 싶었다. 모든 남성들의 인기를 차지하고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부유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수도원 학교 시절의 동창이었다. 그녀는 그 친구를 별로 찾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로서는 그 친구를 만나는 것이 몹시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그녀는 으레 며칠 동안 슬픔과 뉘우침과, 절망과 비관으로 종일 울곤 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남편이 사뭇 자랑스러운 얼굴로 손에 커다란 봉투를 한 장 들고 들어왔다.
"이거, 당신에게로 온 거야." 하고 남편은 말하였다.
그녀는 얼른 봉투를 뜯고, 그 속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문부성장관 조르쥬 랑뽀노 부처는 1월 18일 월요일 저녁에 장관 관저에서 야회를 개최하오니 르와젤 부처께서는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조금도 기뻐하지 않을뿐더러, 아내는 그 초청장을 심술궂게 테이블 위에 내던지며 중얼거렸다.
"이걸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아니 여보, 난 당신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리라고 생각하였는데,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은 별로 외출도 못하였으니 좋은 기회가 아니오. 이것을 얻느라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요? 직원들이 저마다 얻으려고 했지만 몇 장 차례가 오지도 않았소. 아무튼 그날 가면 정부의 고관들을 다 볼 수 있을 거요."
그녀는 성난 목소리로 남편을 노려보더니, 이윽고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대관절 무엇을 몸에 걸치고 가라는 거예요?"
남편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니, 거 극장에 갈 때 입던 옷 있지 않소? 내 눈에는 그 옷이 퍽 좋아 보이던데--."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아내가 울고 있었던 것이다. 두 방울의 커다란 눈물이 눈가에서 입끝으로 서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더듬더듬 말하였다.
"왜 그래? 글세, 왜 그러는 거야?"
그녀는 간신히 슬픔을 가라앉히고 나서, 젖은 두 볼을 닦으며 조용히 대답하였다.
"아녜요, 아무것도 아녜요. 단지 입고 갈 옷이 없어서 그래요. 난 야회에 안 갈 테에요. 그 초대장은 다른 친구에게 주어버리세요! 나보다 좋은 옷을 가진 아내가 있는 사람에게 말이에요."
남편은 실망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 봐 마띨드! 멋있는 옷 한 벌 맞추는 데 얼마나 해? 다른 나들이 때에도 입을 수 있고 그다지 비싸지 않은 옷 말이야."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얼마나 요구해야 그 검소한 공무원 생활을 하는 자기 남편이 단박에 기절해 버리지 않고, 놀라서 소리를 지르지도 않을까.' 하고 값을 따져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주저주저하면서 말하였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4백 프랑쯤 있으면 될 거예요."
남편은 얼굴빛이 약간 해쓱해졌다.
그는 꼭 그만한 돈을 예금해 두었지만, 그 돈으로 총을 사서 이번 여름에 낭떼에르 벌판으로 사냥을 가려던 참이었다. 일요일마다 그곳에 가서 종달새 사냥을 하는 몇몇 친구들과 어울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래, 내 4백 프랑을 줄 테니 좋은 옷을 맞추도록 해."
무도회의 날짜는 점점 다가왔다. 르와젤 부인은 근심과 슬픔에 싸여 있었다. 옷은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남편은 어느 날 저녁에 이렇게 물었다.
"왜 그래? 당신 요새 며칠 동안 아주 얼빠진 사람 같구려."
그녀는 대답하였다.
"나는 보석도 패물도 아무것도 몸에 붙인 것이 없으니, 이런 딱할 데가 어디 있어요. 내 모양이 얼마나 꼴불견이겠어요. 차라리 그 야회에는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남편은 말하였다.
"생화를 달고 가구려. 요즘은 그것이 아주 멋있어 보이더군. 10프랑만 주면 아름다운 장미꽃 두셋은 살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싫어요! 돈 많은 여자들 틈에 끼어서 가난하게 보이는 것처럼 창피한 일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남편은 큰소리로 말하였다.
"참 당신두 딱하구려! 아, 그 당신의 친구 포레스띠에 부인 있지 않소. 그 여자한테 찾아가서 보석을 좀 빌려 달라고 하구려. 그만한 것쯤 편리를 못 봐줄 사이가 아닐 테니까."
"참 그렇군요! 그 생각을 미처 못했군요."
이튿날 그녀는 친구의 집을 찾아가서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포레스띠에 부인은 거울이 달린 의자 앞에 가서 커다란 보석상자를 들고 와서 열어 보이며 르와젤 부인에게 말하였다.
"자, 골라봐."
그녀는 우선 몇 개의 팔찌를 골라 보았다. 다음에는 진주 목걸이를, 그 다음에는 베니스제의 십자가를 골랐다. 그 십자가는 금과 진주로 되어 있었는데 솜씨가 놀라왔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보석을 이것저것 몸에 걸어보면서 망설일 뿐 어떤 것을 놓고, 어떤 것을 빌어가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번번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또 뭐 없어?"
"왜 없어, 가서 골라봐. 어느 것이 네 마음에 들는지 나는 알 수 없으니까."
그러자, 까만 공단상자 속에 눈부신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그것이 어찌나 탐이 났던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것을 쳐들자, 이번에는 손이 떨려왔다. 그녀는 그 목걸이를 몽땅뜨(몸을 세워입는 옷) 위로 목에 걸고, 아름다운 자기 모습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입을 떼어 이렇게 말하였다.
"이걸 좀 빌려줘. 다른 건 필요 없어."
"이렇게 해."
그녀는 친구의 목을 얼싸안고 뜨거운 포옹을 하였다. 이어서 목걸이를 들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무도회 저녁이 돌아왔다. 르와젤 부인은 크게 인기를 끌었다. 그녀는 어느 여자보다도 아름답고 우아하고 맵시가 있었으며,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모든 남자들마다 그녀를 바라보고는 이름을 부르며 소개를 받으려고 하였다. 비서관들은 저마다 그녀와 춤을 추고 싶어하였다. 이윽고 장관도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도취된 기분으로 춤을 추었다. 자기의 미모가 가져온 승리와 성공을 이룩한 영광, 온갖 찬사와 감탄, 소생하는 정욕과, 여성들에게도 한없이 달콤하고 완전무결한 최고의 승리로 이루어진 행복의 구름 속에서 기쁨에 도취되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튿날 새벽 네 시쯤 되어서야 야회에서 나왔다. 남편은 자정 경부터 조그마한 응접실에서 세 사람의 친구들과 함께 졸고 있었다. 그 동안에 그들의 부인은 저마다 마음껏 쾌락에 도취되어 있었다.
남편은 돌아올 때를 생각하여 가져온 평시의 허름한 웃옷을 아내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 초라한 모습은 아무래도 야회복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도 그것을 느끼고, 값진 털옷으로 몸을 단장한 다른 여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피하였다.
르와젤은 아내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기다려, 이대로 밖으로 나가면 감기들 테니까. 내가 나가서 마차를 한 대 불러올게."
그러나 아내는 남편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날쌘 걸음으로 층계를 총총히 내려갔다. 두 사람은 낙심하여 달달 떨면서 세느 강 쪽으로 내려갔다. 그때 마침 강변에서 밤에나 나다니는 낡은 마차 한 대를 발견했다. 낮에는 빠리에서 차마 그 초라한 꼴을 보이기가 창피하다는 듯이 밤에만 벌이를 하는 그런 마차였다.
두 내외는 그 마차를 집어타고 마르띠르 거리에 있는 집 문 앞에 다다랐다. 그들은 쓸쓸한 마음으로 발을 옮겨 층계를 올라갔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남편은 아침 열 시까지는 문부성에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자기의 화려한 모습을 보기 위해 거울 앞에 가서 어깨 위에 걸친 웃옷을 벗었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목에 걸었던 목걸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옷을 벗고 있던 남편이 엉거주춤하며 물었다.
"왜 그래?"
그녀는 남편을 향해 얼빠진 듯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저-- 저-- 포레스띠에 부인의 목걸이가 없어졌어요."
남편은 실성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아니 뭐라고--. 그럴 리가 있나!"
그들은 옷 갈피와 외투 갈피, 그리고 호주머니 속 등을 온통 뒤져보았으나, 목걸이는 아무데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남편은 물었다.
"무도회에서 나올 때는 분명히 갖고 있었나?"
"그럼요. 장관댁 현관에서 만져보기까지 한걸요."
"그러나 만일 한길에서 떨어뜨렸다면 소리가 났을 텐데. 그러고 보니 마차 속에서 잃은 것이 분명하군."
"그런 것 같아요. 당신 그 마차 번호를 아세요?"
"몰라. 당신도 마차 번호를 잘 보아두지 않았지?"
그들은 낙심하여 서로 마주 쳐다볼 뿐이었다. 이윽고 르와젤은 옷을 다시 입기 시작하였다.
"혹시 찾을지 모르니 돌아온 길을 다시 가 봐야지."
그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야회복을 벗을 생각도 잠자리에 들 기력도 없었다. 그리하여 불도 피우지 않은 아무 생각도 없이 의자 위에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7시쯤 되어 남편이 돌아왔다.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경찰국과 신문사로 달려가 현상을 걸고 광고도 내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마차를 부리는 회사를 온통 찾아보고, 조금이라도 가망이 있어 보이는 곳은 모조리 찾아다녔다.
아내는 이 끔찍스러운 재난 앞에서 넋을 잃고 종일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르와젤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눈이 폭 꺼진 창백한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당신 친구에게 편지라도 써야 할까봐. 목걸이의 고리가 부서져서 수선을 하는 중이라고. 그렇게 하면 다시 사방으로 찾아다닐 시간 여유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아내는 남편이 부르는 대로 받아썼다.
한 주일이 지나자 그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이 며칠 동안에 5년이나 더 늙어 보이는 르와젤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보석을 돌려줘야지."
다음날 두 내외는 보석 목걸이가 들어 있던 빈 상자를 들고, 그 안에 적힌 상호의 보석상점을 찾아갔다. 상점 주인은 여러 권의 장부를 뒤적거리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부인, 그 목걸이는 저희 집에서 사간 것이 아니올시다. 저희는 다만 상자만 제공했나 봅니다."
두 사람은 잃은 것과 똑같은 보석을 구하기 위해, 그 기억을 더듬어가 면서 보석상마다 찾아다녔다. 두 내외는 비탄에 젖어 환자처럼 보였다.
이윽고 이 부부는 빨레 르와이얄의 어느 보석상에서 그들이 찾고 있던 것과 똑같아 보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찾아내었다. 값이 4만 프랑이었으나 3만 6천 프랑이면 팔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사흘 안으로 살터이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아 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그리고 만일 3월말까지 잃어버린 목걸이를 다시 찾으면, 상점에서 3만 4천 프랑으로 도로 사준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하였다.
르와젤에게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1만 8천 프랑의 재산이 있었다. 나머지 돈은 빚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사람에게서 천 프랑, 저 사람에게서 5백 프랑, 여기서 5루이, 저기서 3루이 하여 닥치는 대로 돈을 꾸었다. 차용증서를 쓰고, 재산을 몽땅 잡히고 고리대금은 물론, 모든 대금업자와 거래를 했다. 그는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전 생애를 담보하다시피 하였으며, 갚을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서약서에 마구 도장을 눌렀다. 그는 앞으로 닥칠 불행에 대한 걱정, 머지않아 찾아올 비참하기 짝이 없는 어두운 그림자, 앞으로 겪어야 할 모든 물질적인 궁핍과 정신적인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신을 떨며, 새 목걸이를 사기 위해 보석상에 가서 계산대 위에 3만 6천 프랑을 내놓았다.
르와젤 부인은 그 목걸이를 사 들고 곧 포레스띠에 부인을 찾아갔다. 부인은 좀 퉁명스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좀 일찍 갖다 줘야지. 내게도 쓸 일이 생길지 모르지 않아."
포레스띠에 부인은 상자를 열어보지는 않았다. 르와젤 부인은 친구가 그 상자를 열어볼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만일 친구가 물건이 바뀐 줄 알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무어라고 했을까? 자기를 도둑 년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르와젤 부인은 가난한 생활이 얼마나 괴로운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우선 저 끔찍한 빚부터 갚아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꼭 갚을 심산이었다. 식모를 내보냈다. 집도 바꾸어 지붕밑 다락방으로 세를 얻어들었다.
그녀는 집안 일이 얼마나 힘이 들고, 또 부엌 치다꺼리가 얼마나 귀찮은지 몸소 체험하여 잘 알게 되었다. 그녀는 기름기가 묻은 그릇과 냄비 속을 닦느라고 분홍빛 손톱이 다 닳았다. 더러운 옷이나 내복, 걸레 등속을 빨아서 줄에 널었다. 아침마다 쓰레기를 담아 들고 거리까지 나갔다.
층계참에서 숨을 돌리며 물을 길어 올렸다. 하류계급의 아낙네들과 다름없는 차림을 하고, 바구니를 팔에 끼고 야채 가게와 식료품 상점과 고깃간을 드나들며 값을 깎다가 욕을 먹기도 하면서, 돈 한푼을 아꼈다.
두 내외는 날마다 지불할 것은 또박또박 이행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차용증서를 고쳐 쓰고 연기하였다.
남편은 저녁마다 어느 상인의 장부를 정리하는 부업을 맡았다. 그리고 때로는 한 페이지에 5수우의 보수를 바도 사본을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생활이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10년이 지나서야 모든 빚을 정리할 수 있었다. 고리대금의 이자와 목은 이자의 이자까지 다 갚게 되었다. 르와젤 부인은 무척 늙어 보였다. 그녀는 억세고 완강하고 거칠고 가난한 살림꾼 아낙네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아 텁수록하고, 치마는 구겨지고, 빨개진 손으로 마룻바닥을 훔치고, 커다란 목소리로 떠들어대었다. 그러나 가끔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창가에 걸터앉아서, 지난날의 야회, 그토록 아름다워 총애를 받던 야회를 회상해 보았다.
그 목걸이만 잃어버리지 않았던들, 어떻게 되었을까? 누가 알 수 있으랴. 알 수 없지! 인생이란 무척 기이하고 허망한 거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 파멸을 가져오기도 하고 구원을 해주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녀는 한 주일 동안의 피로를 풀려고 샹젤리제 거리로 산책을 갔다가 우연히 어린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포레스띠에 부인을 만났다. 부인은 여전히 젊고 아름답고,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르와젤 부인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서 그 동안의 경위를 이야기할까? 그렇지! 이미 빚을 다 갚았겠다, 이야기 못할 게 뭐람?
그녀는 가까이 다가갔다.
"쟌느 아냐? 이게 얼마만이야!"
포레스띠에 부인이 그녀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런 비천한 여자가 자기를 그토록 정답게 부르는 것이 적이 놀라왔다.
"누구야?-- 나는 잘 모르겠는데--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어요?"
"어머! 나 마띨드 르와젤이야."
친구는 크게 외쳤다.
"뭐! 마띨드-- 아이 가엾어라! 그런데 왜 이렇게 변했어!"
"그 동안 고생 많이 했어. 우리가 마지막 헤어진 후로 고생살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그것도 다 너 때문이지 뭐야--."
"나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생각나지 않아? 저 문부성장관의 야회에 가려고 내가 빌어갔던 다이아몬드 목걸이 말이야."
"응, 그래서?"
"그걸 잃어버렸지 뭐야."
"뭐? 아니 내게 고스란히 돌려주지 않았어?"
"그렇지만 그건 품질은 같지만 다른 목걸이야. 그 목걸이 값을 갚느라고 10년이나 걸렸지 뭐야--. 인제 다 해결되었어. 얼마나 마음이 후련한지 몰라."
포레스띠에 부인은 발길을 멈추고 서 있었다.
"그래, 내 것 대신에 다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왔단 말이야!"
"그럼. 여태껏 그걸 몰랐구나. 하긴 똑같은 것이니까."
그녀는 약간 으스대는 듯한 순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포레스띠에 부인은 크게 감동되어 친구의 두 손을 꼭 쥐었다.
"아이 가엾어라, 마띨드! 내 것은 가짜였어. 기껏해야 5백 프랑밖에 되지 않는--."
헤어짐이 아름다울 때 - 용혜원 님
우리의
헤어짐이 아름다운 것은
다시 만날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이별이라면
눈물로 한없이 젖어버릴 텐데
웃으며 손을 흔들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대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다시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의 만남이 있을 때마다
서로를 위하여 축배를 듭시다
하늘의 별처럼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가 서로 만나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의 축복입니다
사랑, 우울한 병동 1 - 김이하
사랑의 설렘은 아직까지도 나를 잠재우지 않네
스무 살의 실족에 몸을 맡겨 버린
잔잔한 일상의 거품들은 사랑의 거푸집을 지었네
그러나 누가 알았겠나, 제 몸에 사랑을 부어 슬픔을 빚을 줄
사랑이 빠져나간 거푸집엔 낯선 풍경들과 우울한 노래
불구가 되어 버린 운명의 악기마저 그 어둠에 방치할 줄
조심성 없는 쥐의 발톱에 제멋대로 할퀸
불협화음의 밤이 가네, 그리고 낮 동안에 말라 버리는 눈물샘
그 눈물의 뿌리가 통째로 뽑혀 소금기로 드러나는
한낮 긴 실어의 귀에 바람이 서걱거리는
귀 울림이 세상을 헤매는, 너무 길었던 스무 살의 낮
낡은 거푸집의 식은땀이 마르고 그 안을 기웃거리던 바람
낮게 주문을 흘리고 천천히 스무 살의 두루말이를 접네
불임기의 끈적끈적한 이부 자락 속에서
실족의 악몽에 몸을 뒤집고 울어 버린 밤의 거품이
사랑의 거푸집을 떠나네, 그러나 사랑을 빚을 수는 없는
진딧물의 집 속에서 악몽을 벗으려 했네, 떠나네
낯선 길을 가면서 그 설렘의 스무 살을 꿈꾸었지만
가임기의 자궁이 세월을 키우는 동안 나의 성장은
행복했던, 슬픔까지도 행복해야만 하는 사랑의 거품 속에서
알몸으로 기어 나와야만 했던 스무 살의 꿈에서 멈추고
그대 오네, 솜털 보송보송한 꽃들에게로 쓰러진 날
입 속에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그대 스무 살의 나를 부르네
그러나 달려갈 수 없었네, 실족한 나의 사랑은
다운 증후군의 병세를 벗을 수 없었으므로
나의 걸음을 아직 한 걸음도 완성하지 못했으므로
그러나 사랑의 설렘은 아직도 나를 잠재우지 않네
희망가 - 김이하
여보, 죽은 자식 대신
새 자식을 내라고
저 야단이네, 글쎄
지 자식들은 유학이다 뭐다
미국놈 좆이나 빨러 내보내고
세상이 IMF라고 호들갑을 떠니까
그것도 일이라고 해처먹을 놈 없으니깐
우리 같은 쭈구렁탱이들헌테
구녕을 다시 파라고 하네
제 놈들이야
싱싱한 것들 구녕 앞에서
체면도 안 서는 짓을
하다가하다가 안 되니깐
해 본 가락으로 다시 한번
구녕들 쑤셔 보라 하것다
에라잇!
한밤중에 내다 버린 연탄재만은 못해도
새벽녘이면 새마을 운동 아니라
그 할애비라도
멀쩡하게 조져버릴 힘이야
아직도 남아 지랄하는 걸
그럼 못할 줄 알구?
산타모니카 - 구준회
20년 만에 만난 친구와
태평양 너머 고국을 바라보며
듣는 기막힌 사랑 이야기
모래에 꽂아지는 숱한 담배꽁초
대신 태운 가슴인양 묻고
태평양을 건너온 조선의 바다 안개
아득한 눈매의 친구 옆얼굴에
맺혀지는 파도 빛 향수
랍스터 굵은 허리를 분질러
캐찹처럼 선명한 그리움을 찍어
태평양 멀리 울컥 삼키는
하얀 살집의 담백한 우정.
망망대해처럼 살아온 세월 속에
파도처럼 씻겨간 조가비 같은 사람들
어쩌다 이렇게 살았는지 정말 몰라
구멍으로 뚫리는 가슴이 투명하다
우산 하나의 행복 - 구준회
우산하나 쓰고
우산 만큼의 행복을 품고
촉촉이 길을 걸어 재취업교육장에 간다
우산 하나의 공간
유일하게 몸을 감쌀
우산 하나의 삶으로
우산살만큼 야윈 뼈로
지금은 이 빗속을 지나가야 한다
그동안 허파에 든 바람의 색깔
우산 안에 피어나는 담배연기 만큼의
공간을 비집고 여기 아닌데로
올라보려는 연기의 촉수
연기만큼의 허무한 몸뻗침
빗방울 떨어져 동심원을 그리는 횡단보도
흰 사선 검은 보도블록 일어서
평탄하던 길이 언덕이 된다. 가파라진다.
허파가 빠져나간다. 씩씩 연기가 된다
우산하나 쓰고 연기가 간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번이나 세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없는 수많은 세월을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놓고 떠나라.
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사랑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 일 것이다
언젠가 그대가 한없는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데 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그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할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내게 강같은 평화 - 박세현
맛있게, 닭곰탕을 먹으며
신새벽 가로등에 달라붙는 습기를 본다.
고스톱으로 붉어진 눈을 비비며
닭갈비 하나를 씹는다.
몇몇의 젖은 여인들이
바닥뿐인 병원 광장을 가로지른다.
면목 없는 죽음은 영안실을 나와
곰곰히 자기를 보고 있는다.
가로수에는 철없는 연초록 잎이 돋고
새날에는 모두가 새것으로 보이건만
악착같이 닭곰탕 국물을
박박 긁어먹고 일어서면서
나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는다.
강풍에 대하여 - 벨로크
신의 뜻이 여러 사물의 근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이간의 옛날부터 내려오는, 아니 오히려 인류의 걸어온 길만큼이나 오래된 논쟁거리이다. 그리고 또 신의 뜻은 그러한 일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고 단언하는 근대인에게도 자기들의 확언이 새로운 것이라고 하는 무식한 신념 이외에는 아무런 신기한 것이 없는 것이다. 신의 뜻이 근원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며 또 그것만이 궁극적으로 정당한 근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의 이해력은 내가 강풍을 만나고 또 그것과 친숙해질 때마다 생기를 북돋게 되고 성찬식에서처럼 영혼의 힘을 얻게 된다. 이 생명력 넘치는 신의 창조물에 실제로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미신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그것은 물질적인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인격은 갖추고 있지 않지만, 그 변덕스러움으로 인해 어디까지나 자유 분방하게 보이는 점, 또 목적을 향해서 거침없이 매진하는 점을 보면 거기에는 굉장한 정신의 활동이 반영된 것처럼 여겨진다.
강풍이 펜즈 지방이나 링런드 지역 일대를 휩쓸면서 북해를 향해서 동해안의 저지대를 윙윙 불어 올 때면 그것은 이 섬나라 영국에 딸려 있는 어떤 것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서 바다와 맞붙어 싸워야 하거나 시합이나 전투로 한바탕 승부를 겨루려고 하는 존재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해안 쪽으로 구름이 수평선에 뭉게뭉게 떠오를 때면 그것은 또 질풍의 사자요 선구요 동료로서 육지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결심을 한 바다에 딸려 있는 어떤 존재와도 같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힘의 성쇠, 그 머뭇거림, 그 되살아난 폭력, 그 피로와 최후의 휴식-이것은 모두 정신적 상징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보다도 특히 그 어쩔 줄 모르는 환희의 모습이야말로 그러한 상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은 바람의 외침이나 그 환성인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은 친구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고 인간이란 것을 겪어서 알게 될수록 비록 우정에 의지해서 살아갈 망정 진정한 친구의 수효는 적어져만 가는 것이다. 그러나 강풍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의 친구요, 그것이 갖고 있는 힘은 친목의 힘이다. 그래서 그것을 적으로 삼고 싸운다는 일조차도 가치가 있고 잘 선택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다에는 잔인성이 있고 산에는 공포, 깊은 밤의 어둠 속에는 악의가 숨어 있다고 할 때 바람에는 이러한 성질이 하나도 없고 오직 힘만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잔인이라든가 악의라든가 또는 무슨 공포라든가 그러한 거부적인 것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을 만큼 힘이 충만해 있다. 그리고 그러한 힘은 엄숙한 방법으로 우리들 자신이 가진 혼의 건강 상태를 증명하고 또 시험도 해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포(내가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잊을 수 없는 고통이 가져오는 저 심연같이 깊은 까닭 모를 공포라든가 일반적으로 마음을 위로해 주고 힘을 북돋게 해줄 길이 끊어진다는 쓰라림)나 악의나 잔인성이나 또 사람을 매복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죄악에는 병적인 냄새가 어딘가 풍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정의나 올바른 생활에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크고 균형이 잡힌 세력들을 얻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힘을 돋구어 주고 위안을 줄 수 있는 다른 힘에 끌려가고 있다.
우리가 원기 왕성하고 세상의 기쁨에 넘쳐 있는 것은 우리에게 간직되어 있는 건강 때문이고, 그러한 건강을 가지고 있다는 좋은 증거는 실로 우리가 강풍을 즐긴다는 일이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산 위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바람을 향해서 말을 타고 나가거나 질풍을 뚫고 도보로 길을 헤치고 나간 사람 치고 누가 그날 하루를 대군에게 둘러싸여서 보낸 것이라고 느끼지 않을 사람이 있으랴. 그는 노련한 군대를 전쟁터에서 겪은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강풍이 부는 날은 수없이 많은 음향이 일어나는 날이다. 그것은 음조나 강도에 셀 수 없을 만큼 변화를 주고 인간에게 있는 무수한 힘을 늘려 주고 또 불러일으키고 한다. 그래서 강풍이 몰아치는 날은 우리의 육체가 휘말리고 짓눌리고 얻어맞고 하면서 그것에 저항하고 물리치고 하는 날이다. 그것은 정당하게 수행될 때에는 민족을 살아 나가게 하고, 참가한 사람들이 가장 고귀한 정신을 발휘하게 되는 저 전쟁의 모습을 가지고 우리의 활기를 돋아 주는 것이다. 옛적부터 영위해 온, 사람의 성미에 맞는 어떠한 종류의 일들은 차츰 새 시대의 필요에 밀려서 보이지 않게 되리라고 하는 소리가 (그래도 지금은 10년 전보다는 덜한 셈이지만) 그럴싸하게 퍼지고 있다.
이리하여 이제는 말을 타는 사람이 없어진다든가, 집은 건강에 좋은 벽돌이 아니고 금속으로 세워진다든가, 고기도 이제부터는 불에 그을리지 않고 굽게만 된다든가 그리고 위가 약해져서 술은 못 먹게 된다고 하는 어리석은 소리까지 지껄이는 패가 종종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나 그 밖의 많은 불쾌하고 경박한 일들을 떠벌여 대는 것이 지금의 유행이 되어 있다. 이러한 이야기 거리는(고마운 일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마지막에는 행복이라는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정신을 쏟는 것이고 그러한 목적에 도움이 될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또 생각해 낼 것이기 때문이다. 바람의 이용, 특히 돛을 가지고 바람을 이용하는 일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기 손으로 돛단배를 조종해서 키 손잡이에서 생명력을 느껴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해도 바람이란 것을 알 리가 없다. 바로 이러한 때라야 비로소 사람은 바람과 가장 관계를 많이 갖게 되고 바람과 장난을 치거나 구슬려서 달래거나 또는 물리쳐도 보거나 하면서 시종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굴복해야 할 때는 굴복하지만 바람을 거슬러서 그 폭력에 맞붙을 때도 있다. 또는 길들이기도 하고 부리기도 하며 맥없이 바람이 자면 불러들이고 너무 거세게 나오려고 하면 질책을 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이 훌륭한 놀이 친구를 다루는 것이다. 인간은 바다를 건너는 수단으로 범선을 이용했을 뿐이고 돛은 한낱 기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항해를 해보지 못했거나, 전연 항해에는 어울리지 않거나 어느 한편이다. 모든 시대의 가지각색의 범선이 그만큼이나 사람의 눈을 끌고 그렇게까지 화려하게 보였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온 심신을 바쳐서 범선의 창조에 착수했고 또 만들어진 배는 그러한 인간을 잘 표현해 주었던 것이다. 그 솜씨, 그 숙련, 그 모험정신을, 바람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생존해 오고부터 미지의 나라에 대한 탐구라든가 혹은 순례, 정복, 발견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자기확장이라는 여러 가지 양상으로 인간이 보람을 느끼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던 여행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숭고한 갈망을 도와주는 인간의 맹우가 되어 주기도 하였다. 바람이 우리의 그지없는 훌륭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이점 때문이다.
나는 북동풍이 저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서쪽 바다로 몰아 나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켜 주면서 거대한 신처럼 3월의 산을 불어 내려올 때, 용기 백배해서 출범을 서둘렀던 그들의 일을 생각해 보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표르드의 물가에 깔려 있는 조약돌을 으스러뜨리면서 길다란 배를 통나무에 올려놓고 밀어 나갔다. 그들은 잔잔한 해협을 내려가서 광활한 바다로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서 몇 날 며칠을 이 지배자이자 고귀한 친구인 바람에게 가는 길을 맡겼다. 그들은 바람을 선장으로 믿고 찾아낼 수 있는 것은 한껏 찾아보려고 멀리 수평선으로 시선을 던지는 것이다. 때는 봄철이었다. 사람은 육지에서보다 해상에서 더 많은 봄의 감촉을 느끼는 법이다. 그들은 물거품에 젖은 어슴푸레한 눈으로 새로운 육지 발견에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동경하고 찾아 헤매는 그 새로운 육지야말로 바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털끝만치도 틀림없는 좋은 광경이요, 우리의 되풀이되는 평범한 일상생활의 뒤에 찾아오는 환영과 같이, 기나긴 공허한 해상 생활의 뒤에 오는 움직이지 않는 구름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해서 발견된 새로운 육지가 아주 신기로웠다. 비록 세계가 진정으로 아주 젊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세계의 젊음을 가슴 아프게 여길 까닭은 없다. 우리들이 도회지에 살면서 바람이 이제는 위에서 말한 그러한 일로 우리의 마음을 끌지는 않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독서가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가 우리의 가슴속에 키워 주고 있는 저 포만의 세상 풍토는 전연 거짓이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누구나 배를 타고 나가서 풍랑이 높이 이는 해상에서 바람과 어울려서 즐길 수가 있다. 그도 지금 아니 천년 후에라도 육지를 발견하리라. 그런데 처음으로 보는 그 육지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는 법이다. 어릴 적부터 알고 있는 바다를 넘어서, 세밀하게 방향도 잘 알고 있고 이번이면 백 번째로 가게 된다고 하는 섬을 훨씬 멀리서 찾아보게 된다고 치더라도 충분히 충족되는 법이다.
철학자가 아닌 데 대해서 - 린드
"최근에 에픽테토스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지요?"
"아니요, 최근엔."
"그렇다면 읽어보세요. 토미는 처음으로 그의 글을 읽고 무척 흥분하고 있어요." 나는 호텔 휴게실의 이웃 테이블에서 이런 대화를 들었다. 나는 아직 에픽테토스의 글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끼고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서가에 꽂힌 그의 작품을 가끔 눈여겨봐 오긴 했지만-아마 인용도 했을 것이다-그리하여 나는, 학교 이래로 갈구해 온 지혜의 책이 마침 여기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혜가 어딘가 책에서 발견되리라는 젊은 날의 신념에는 아직 변함이 없었고-모래밭에서 조개껍질을 줍듯이 쉽게 주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왔다. 나는 솔로몬 못지 않게 열렬히 지혜를 갈망하고 있으나, 그것은 노력 없이 얻어져야 한다-마치 감염되다시피 몸에 붙일 수 있는 그런 지혜여야만 한다. 나는 힘든 철학을 연구할 만한 시간도 없고 정력도 없다. 철학자가 힘든 연구를 수행하고, 그러고 나서 그들의 노력의 과실을 나에게 먹여 주길 바란다. 마치 농부한테서 달걀을 구하고 과수원에서 사과를 구하고 약방에서 약을 구할 수 있듯이, 싼값으로 지혜를 구할 수 있도록 철학자가 마련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 한때 에머슨을 읽고 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읽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을 읽음으로써 나는 현명해지길 바랬다. 그런데 조금도 현명해지질 않았다.
그들의 글을 읽을 때는 그들과 생각을 같이 하나, 읽기를 그치면 전과 같은 상태로 되돌아 간다. 그래서 그들이 말한바 생각을 집중시키라는 것에 대해서 전념할 수 없었고, 그들이 무관심하라고 일러준 것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역시 책에 대한 신념은 잃지 않고, 안락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도 철학과 강한 성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쇄물이 어디엔가 존재할 것으로 믿어 왔다. 호텔 휴게실에서 대화를 듣고 나서 서가에서 에픽테토스의 책을 끄집어 낸 것은 이런 기분에서 그랬던 것이다.
고백하거니와, 나는 상당한 흥분상태로 그의 책을 읽었다. 에픽테토스는 인생을 다루는데 있어서 고작해야 어려운 어휘로 논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 그런 철학자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다른 일들과 곁들여서 의논하는, 나의 마음에 드는 철학자였다. 그리고 그가 한 말에 대해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동의한다. 고통과 죽음과 빈곤은, 안락의자에 앉아 철학서를 읽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에게 커다란 악이다. 내가 철학서를 읽고 있을 때 만약에 지진이 일어난다면, 나는 철학서를 잊어버리고 다만 지진과 그리고 흔들리는 벽과 굴뚝을 어떻게 피할까 하는 생각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소크라테스나 플리니우스 그리고 그 밖의 철학자를 누구 못지 않게 존경하고, 안락의자에 앉아 철학서를 읽을 때는 건장하지만, 일단 위급한 일을 당하면 나 자신의 마음도 몸도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상생활의 작은 일에 대해서도 나는 에픽테토스 학파의 철학자처럼 처신할 수가 없다. 가령, 어떻게 해야 "신의 뜻을 맞게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조언을 하고,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부당한 봉사에도 참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내 성질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정신적인 태도를 강요하는 것이다. "더운물을 청했을 때" 그는 말한다. "노예가 이를 들은 체하지 않는다든가, 들었다 해도 미지근한 물을 가져왔다든가, 아니면 숫제 눈에 띄지 않았을 때, 화를 내지 않고 분풀이를 한다면, 이 어찌 신의 뜻에 맞을 소냐? 당신이 거느리는 사람들도 친척이고 형제들이며 또한 제우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잊었던가?" 이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나도 또한, 웨이터가 주문한 것을 잘못 가져 왔다든가 아니면 가져오는 것조차 잊었을 때, 끈덕지게 철학적인 미소를 지으며 식당에 앉아 있을 수 있는 남자가 됐으면 한다.
그런데 실제로 시중드는 것이 형편없으면, 나는 짜증을 낸다. 주류 목록을 세 번씩이나 청구해야 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15분이나 지나고 나서야 셀러리가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불쾌하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에 다투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나에게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다. 이럴 경우에 상대방을 질책하지 않는 것은 철학자와 같지만, 속에서 이글거리는 짜증이 틀림없이 얼굴에는 나타날 것으로 생각한다. 확실히 이런 말을 하는 나 자신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이 웨이터는 나의 친척이요, 제우스의 후손이다"라고. 뿐만 아니라, 설사 그렇다 해도 제우스의 후손은 시중을 잘못 들어도 좋다는 건가? 에픽테토스는 식당에서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하나 그의 끈기는 그런 데서도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위에서 말한 그런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침착한 태도를 취할 수 없을 바에야, 폭군이나 지진을 대면했을 때 어찌 철학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에픽테토스가 물질의 소유에 대해 그의 견해를 피력하고 그것이 도난 당해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무관심하라고 일러줬을 때, 이론상으로는 동의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의 말에 복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행복의 기반을 물질에 두는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 현자는 궁핍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그러한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에픽테토스나 나나 같은 의견이다.
그러나 에픽테토스는 최소한 태연히 이상을 견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물질에 대해서 그것이 도난 당하건 안 당하건 간에 개의하지 않을 정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 이상을 성취할 수 있다고 다짐하고 있다. "옷 자랑을 하지 말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러면 그것을 훔쳐간 사람에게 대해서 화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도둑에 대해서도 설득하듯이 말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진선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좋은 옷을 갖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도 역시 그런 생각을 즐기고 있다. 그를 불러서 옷을 가져가게 할 생각은 없는지?" 확실히 그는 논리적으로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회에서 어떤 손님이 나의 새 모자를 가져가고 그 자리에 그의 헌 모자를 두고 간 것을 발견했을 때, 순간이나마 그렇게 느낄 수는 없다. "그는 인간의 진선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내 모자를 갖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고 혼자 말해 봤자 조금도 위안이 되질 않는다. 더구나 우리 집 연회에 참가했던 손님에게 그와 비슷한 사건이 생겼을 때, 그런 철학으로 손님을 위로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새로 산 모자를 잃는다는 것은 심히 짜증나는 일이다. 무엇이나 잃는다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다. 특히 그것이 의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될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상에 살았다면 나도 에픽테토스를 본받을 수 있었으리라고 느껴진다. 그러나 분실과 도난과 소매치기에 의해 물건이 없어지고, 많은 식탁에서는 버릇없는 웨이터에 의해 식사가 제공되고, 그밖에 수많은 불유쾌한 일이 생기는 세상에서는, 철학자의 생활을 본받으려고 하느니보다 차라리 운동화를 신고 히말라야 등반을 시도하는 편이 나으리라.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대개 철학자가 옳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그들의 여러 가지 특이한 것 중에서도,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걱정할 가치조차 없다고 언명한 점에 있어서, 그들의 주장은 옳다고 본다.
우리가 소크라테스보다 우매하다는 것은 쉽게 믿을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가 옳지 않다면 그는 지금껏 살아온 누구보다도 바보일 것이다.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나 에픽테토스 같은 사람들이 물질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점을 옳다고들 믿고 있다. 1년에 1만 파운드나 수입이 있고, 그러면서도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이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만약에 우리들의 가까운 친구가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문자 그대로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면, 우리들의 대부분은 깜짝 놀랄 것이다. 에픽테토스의 경우에는 지혜로 간주되는 것도, 친구의 경우에는 정신이상으로 보게 마련이다. 혹 친구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해도 적어도 가까운 친척의 경우에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만약에 내가 금전과 위안과 기타 모든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에픽테토스와 마찬가지로 무관심해지고 빈곤과 도둑에 대해서도 에픽테토스 식으로 행복한 웃음으로 대한다면, 나의 친척들은 내가 물질만능의 철학을 지니고 유능한 회사 발기인이 되었을 때보다 더욱 마음이 산란해질 것은 확실하다. 가령 철등을 훔친 도둑에 대한 에픽테토스의 이론을 생각해 보라. '그는 비싼 값을 지불하고 등을 샀던 것이다. 그는 등잔 하나 때문에 도둑이 되고, 등잔 하나 때문에 신의가 없어지고, 등잔 하나 때문에 금수가 된 것이다. 이것이 그의 눈에는 유리한 것처럼 보이다니!' 이론상으로는 지극히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물질을 도외시하고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살아 갈 수가 없다. 소수의 성도나 그렇게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들도 초기에는 친구들간에 커다란 걱정에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정상적으로 즐겁고 안온할 때 우리는 역설적인 신념을 고수한다. 즉 철학자는 현명하나 그들을 모방하는 자는 어리석다고. 철학자는 읽을 가치가 있는 반면 물질은 관심의 대상이 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가 지혜를 즐긴다는 것은 하나의 광경을 즐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이는 무대에 전개되는 즐거운 광경으로서 관객이 이에 참가한다면 어색하게 보여질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과 로마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우리와 달랐던 것일까? 소크라테스와 에픽테토스의 숭배자들이 실제로 자기들도 철학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일까? 그게 아니면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실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보다 현명한 자에 의해 조제된 마약에 의해 현명해질 것을 바랐던 것이 아닐까? 노력 없이 현명해진다는 것은-남의 말을 듣거나 책을 읽음으로써-극도로 흥분시키는 흐뭇한 꿈이다. 이런 꿈을 지닌 채나는 서가에서 에픽테토스의 책을 꺼냈다. 그런데 어쩌리, 한낱 꿈이었으니.
장례식 - 루카스
음산하고 습기 찬 오후에 서리에 자리잡은 어느 묘지에서 있었던 일이다-모두가 몹시 쓸쓸하고 조용했고 회장자는 몇 사람밖에 없었지만 죽은 사람과 생판 관련이 없는 구경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무척 친절하고 상냥한 친구가 이제 우리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는데도 외로움을 자아내는 상실의 느낌은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묘지에 인접해 있는 운동장에서는 왁자지껄하게 축구 시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덤 옆에 서 있을 때, 내가 교장이라면 시체가 매장되는 그 몇 분 동안이라도 시합을 중지시킬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삶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죽는 것'처럼 죽음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괴한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은 갈 데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매장하러 온 바로 그 당사자조차도 학생들이 경기를 계속해 주기를 누구보다도 바라고 있었을 것이리라.
그는 늙은-그렇다고 그다지 늙은 것도 아니지만-학자로서 나와 5년간이나 사귀어 왔고 여러 번 함께 먼길을 산책도 해본 일도 있었다. 키가 작고 튼튼해 보이는 아일랜드의 신사였고, 여러 가지의 얄궂은 지식과 최고의 문학으로 무장되어 있는 크고 다정스러운 백발의 머리에, 또 어린애 같은 마음씨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솔직한 성격을 가진 사나이를 이제까지 한번도 사귀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사람들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그의 두뇌는 거울 밑에 놓여진 벌집과 같아서 누구나 그 작업을 모두 지켜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벌꿀까지도! 1년의 어느 계절이건 그와 함께 산책이라고 하노라면, 그는 숲이나 생울타리, 목장 그리고 하늘의 모든 현상을 읊었던 가장 뛰어난 영국 시인들의 작품을 회상시켜 주었고 새롭게 일러주기도 하였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서도 서정적 요소가 풍부히 담긴 대목이 언제나 그의 입에서 튀어 나왔고, 워즈워드나 키츠는 모두 외우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러한 사람들이 그가 좋아하는 시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은 황홀한 시편을 하나하나 모두 그는 읽고 있었고 또 조금도 그 정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의 일생은 책과 친구와 긴 산책으로 보내어졌다. 고독한 인간으로서 그는 어느 때나 별다른 방식도 없이 공부를 해왔고 또 필경 이로 인해 죽을병도 얻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 자신의 저술로는 별반 내세울 만한 것이 없지만 무척 대범한 성격으로 해서 끊임없이 타인의 연구에는 조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의 학식의 열매는 널리 뿌려져서 비교적 생소한 수많은 사람들의 세평을 증가시켜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일생의 대작은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여러 해 동안을 그는 그 일에 골몰하고 있어서 종내에는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기까지도 하였다. 그렇지만 아직 형태를 이루고 있지는 않았을망정 그것은 정신의 큰 향연 같은 것이기 때문에 세상이 언젠가는 그것을 알아줄 날이 올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보물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작품의 가치가 부족한 탓이 아니고 원고의 글자를 판독할 만한 사람을 얻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우리의 이 늙은 친구는 런던에서도 첫째 가는 악필로 휘갈기기 때문에, 그에게서 받은 편지를 해독할 만한 실마리를 찾아서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쳐가면서 물어보고 다니는 것이 그의 편지 상대자들이 흔히 했었던 경험이었다. 그리고 어느 때에는 두 친구가 뜻밖에도 서로 만나서 동시에 제각기 주머니에서 그러한 편지를 꺼내어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도록 무슨 일을 해서든지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있었다.
그의 아일랜드 사람으로서의 기질로 인해 그가 일에 있어서 정연한 질서나 방법이 없고, 또 그저 되는대로 아무 거침없는 아량을 베풀어 줬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성미가 급하고 의협심이 있어서 그레이트 포틀랜드 스트리트의 어느 조그만 담배 가게에서 한번은 그 주인이 무례한 짓을-그 자신에게가 아니고 내게-했다고 생각하고 그를 호되게 때리려고 계산대를 뛰어넘으려 드는 것을 내가 가까스로 붙들고 말렸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가엾은 부인에게 예의에 어긋난 짓을 한 것으로만 지레 짐작했던 억센 돈키호테 식 승격의 용맹 무쌍한 행동에 혼쭐난 버스 차장이 런던에 한 두 명이 아니었다. 평상시에는 상냥하고 아량도 있었지만 부정, 불의의 일을 들었을 때의 그 치미는 분노는 불길처럼 맹렬하였다. 그는 비열한 행동에 관한 일은 듣기만 해도 불끈하였다. 그러한 이야기는 밤새껏 그를 괴롭히곤 했다. '그것이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하고 그는 묻고는 불길처럼 다시 타오르곤 했다.
그는 독서와 집필, 그리고 친구들이나 편지 상대자들의 일을 도와주거나 하는 것 이외에는 모든 일을 검소하게 처리해 나가고 있어서, 자기가 위스키 펀치라고 이름지은 것을 맛이 뛰어나게 손수 만들기도 하였다. 이 일에 대해서는 그는 문학상의 노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정성을 쏟았다. 그것은 그에게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거기에는 무엇 하나 서두른다거나 내갈겨 버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또 그 성과는 그러한 엄숙한 처리 방법을 충분히 엿보이게 할 만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제 그의 죽음으로 해서 그러한 유쾌한 연금술사의 수는 한 사람만으로 줄어 버린 셈이다. 바로 그 사나이는 저 먼 태즈매니아에 있는 것이니 내게 있어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그는 그의 독서가로서의 집념-자기의 연구 문제에 정통하려는 그 욕망-으로 해서 몇 가지 재미있는 기행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얼스 코트로와 애디슨 로의 두 지하철 종착역 사이를 날마다 오가고 있었을 때 '지하철 속에서 읽는다'고 하면서 손가방에 책을 가득 넣어 들고 다녔던 일이 바로 그것들 중의 하나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무슨 철도국에 대해서 풍자하려는 속셈이 아니었고 순수한 열의 때문이었다. 그의 성질에는 풍자적인 데는 조금도 없었다. 그는 마음속을 털어놓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이 늙고 상냥한 독신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지금 모여든 사람들은 괴상한 소수의 일행이었다. 두서넛의 친척과 여덟 명의 문학상의 친구들, 그들 대부분은 상당히 나이가 든 데다 대개가 지성인이었고, 하나 둘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평상시 몹시 익숙지 않은, 격식을 차린 검은 복장을 걸치고 있어서 조금 거북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몹시 엄숙하고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지만, 그것은 확실히 슬픈 장례식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더 오래 살 수 있었다 하더라도-그는 63세였다-분명히 몸에 병이 들어서 자기의 그 안절부절 못하는 활동적인 심신을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한스럽게 여겼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무척 행복한 생애를 보낸 후 처음으로 호된 병에 걸려서 죽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알고 있고 또 그가 독신자로서 거의 고독한 몸이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친척이 아닌 우리들 회장자는 간혹 장례식을 몹시 비극적으로 만드는 저 불시의 손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뼈저린 느낌 때문에 가슴이 메이고 맥이 빠지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죽음은 어떻게 찾아오든 신비스러운 일이고 그 앞에서 인간이 태연하게 슬픈 생각도 없이 서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거기 서 있으면서도, 그가 세상을 뜨기 전에 좀더 빈번히 매의 둥지 같은 높은 다락방으로 그를 찾아 올라가서, 그가 좋아하던 에핑같은 곳으로 꾀어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를 끌어내기라도 해서 식사를 하고 위스키 펀치라도 거리낌없이 함께 마실 수도 있었을 것을, 하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또 무척 감동적인 의식이 진행되어 나가고 있는 동안, 그 수천의 절묘한 시구와 셰익스피어에 대한 저 비교할 데 없는 언어학적 지식을 지닌 박식한 두뇌가 이 세상에서 이제는 사라졌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하는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하여간 이러한 삶의 정지는 영생에 대해서 사람이 무어라고 말하든, 사도 성 바울이 저 당당한 비꼼으로 부정을 한 죽음의 가시의 한 부분이요, 무덤의 승리의 한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묘지를 향해서 줄을 지어 나갔다. 교회는 낡았는데도 묘지는 새롭고 대단히 넓었다. 목사의 뒤를 따라서 달팽이 걸음처럼 느리게 우리들 몇 사람의 검은 일행은 싸늘하고 음산한 하늘 아래를 4분의 1마일쯤이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들 대부분은 늙었고 대개가 서재 속에만 들어 박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들 중에는 탈모한답시고 모자를 겨우 머리에서 뗄락말락하고 있는-경의의 표시로서 고작 보리 낱알이 들어갈 간격만큼만 남겨 놓고서-사람이 있어서 보기에도 우스웠다. 그런데 교회지기와 목사는 하느님이 무한한 자비로서 전연 못본 채 한다든가 또 본다 하더라도 그대로 미소짓고 넘겨버려 줄 저 검은 우단의 두건을 살짝 얹고 있었다.
이렇게 되어 우리의 늙은 친구는 축구선수들의 앞을 다투는 외침 속에서 땅 속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나서 우리들은 모두 단단히 모자를 쓰고(벌써부터 고인은 우리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리라) 동네로 다시 나와서 아주 오래된 여관에서 차를 마시고 죽은 이의 괴상하고 익살스럽고 그리고도 가슴 아프고 아름다운 추억담을 서로 나누었다.
꽃제례 - 이관용
여러 해 전 동해안 어느 어촌엘 간 적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시달려 정신이 피로해 훌쩍 도회를 떠났던 그 때의 이야기이다.
비린내가 풍기는 이 조그마한 어촌에는 여름 휴가의 계절이 지난 뒤라서 그처럼 붐비던 인파가 뚝 끊어져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10여 호가 바다를 향해 띠엄띠엄 떨어져 있는 이 한적한 어촌에, 내가 민박을 하고 있던 집은 저만치 뚝 떨어져 있는 초가였다.
가을도 제법 깊어가는 10월 중순이어서 바닷가를 찾는 사람도 없었고, 다만 허허로움과 저막만이 흐를 뿐, 도회와는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그 초가에는 할머니와 그의 아들, 지금 내가 말하려는 동섭이란 24세 되는 청년이 외로이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도회의 문명과 동떨어진 이 바닷가에서 바다와 하늘과 바다새 소리를 들으며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옛날 그녀의 조상들이 그렇게 운명에 순종했듯 아침 일찍 바닷가로 나가 미역, 해파리 같은 해산물을 따다 흰 모래벌 위에 말린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바닷가 윗쪽에 조그만 땅을 일구어서 채소를 가꾼다든지, 때로는 저 아득한 해변가에 서서 멍청히 동해의 푸른 수면에 넋을 잃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이 적막과 외로움이 어른거리는 어촌에서 나는 처음 너무나 갑갑하고 무료해서 해가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외아들인 동섭과 얘기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그는 이상하리만치 통 말이 없었다.
태양과 짠 바닷물, 그리고 해풍에 절은 그의 얼굴, 피부는 검게 그슬렀고 떡 벌어진 체구지만 검고 깊은 눈은 시골 청년답지 않는 면모를 갖고 있었다.
그는 어쩌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면 그냥 모르는 체 시선을 돌리기 일쑤였다.
어느 때는 행여나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어 할머니 방엘 들어가 보면 벌써 그는 집을 나간 뒤였다. 늘 그는 일찍 집을 떠나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집에 없었다.
나는 할머니와 그의 아들 동섭이와 한집에 살면서 때론 적막감에 무료했지만 그들에게선 조금도 짜증스러운 빛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 어느 날 밤, 그날 따라 밤 파도 소리가 유난히 귓전을 울려 밖에 나와 있었다. 문명과 단절된 이방지대에서 조금은 도회에서 절은 마음이 씻겨져 버린 듯해 마음의 뜰이 맑아진다는 생각을 해 보면서 해변을 향해 몇 걸음 옮겼을 때였다.
"바람이 몹시 찬데 감기드셔요."
등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저만치 동섭이가 혼자 서 있었다.
언제 돌아왔는지, 그리고 통 말이 없던 동섭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망설여져 그저 웃기만 했다. 내가 이곳에 온 지 10일만에 비로소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나는 묵묵히 그 곁으로 다가갔다. 동섭은 다가오는 나를 향해, "너무 한적하죠? 혹시 불편하신 것 없으세요?"
비로소 처음 인사를 나룰 때처럼 그는 차분한 음성으로 어른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으로 뒤덮힌 적막한 바다에 눈을 던지고 있었다.
"바다를 좋아하세요?"
"도시에서만 살아 왔기에 바다를 좋아하는 편이지요."
나의 말이 끝났는데 한잠 동안 잠자코 서 있던 동섭은, "전 바다를 싫어해요."
단호하게 말하는 그의 음성처럼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동섭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한참만에, "내가 좋아하던 여잘 삼켜 버렸어요."
그는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낸 후 저 적막한 속에서 마치 사랑하는 여인이 외쳐 부르기라도 하듯 바다 쪽에 던진 시선을 땔 줄을 몰랐다. 아마도 여인의 아름다운 환상이 망막 속에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그 후 여인을 삼켜 버린 바닷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섭이가 쓸쓸하게 보였고, 측은해 졌다. 어떻게 되어 바다가 여인을 삼켰는지, 또 과거를 묻어 버리고 새로운 애인을 찾아야 한다는 등 시시껍절한 이야기는 결코 꺼내지 않았다. 동섭의 영혼에 잠이 든 여인의 그 깊은 사랑이 그의 마음을 떠나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밤마다 아니 두 영혼은 이 해변에서 서로 만나 소리 없이 애틋한 애정을 교류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외롭고 적막한 어촌을 떠나기 이틀 전, 낮에 통 볼 수 없던 동섭을 본 것은 막 황혼이 바닷가를 붉게 피물들일 무렵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그의 가슴에는 진붉은 들국화가 한아름 안겨져 있었다. 그 붉은 들국화를 한아름 안고 바다를 향해 내려갈 때 그의 눈은 왈칵 눈물이 쏟아질듯 촉촉하게 물기가 젖어 있었다.
너무나 심각한 표정을 발견한 나는 무심결에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걸음을 뚝 멈췄다.
바다의 수면 위는 노을이 여러 색깔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그 수면 위로 동섭을 한아름 안고 있는 가을꽃 들국화 꽃송이를 던지고 있었다. 나는 꽃잎을 띄우는 그의 표정에서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엄숙하고도 신성함을 보았다.
물위에 떨어진 꽃잎과 꽃송이들을 밀려온 파도가 이내 삼켜 버려 저 멀리 흩어져 버렸다. 동섭은 그 수면 위에 무늬처럼 떠다니는 꽃잎들을 언제까지 지켜보듯 눈을 떼지 않고 서 있었다.
"오늘이 연순이가 죽은 날 이라우."
언제 왔는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먼데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착각할 정도로 동섭의 행동에 취해 버렸다.
차분하고 조용한 표정으로 파도가 꽃잎을 쓸어가면 자꾸만 자꾸만 꽃송이를 따 바다위로 띄우는 동섭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저 애는 그 애 죽은 날이 오면 언제나 저런다우. 연순이가 저 가을꽃을 좋아했다구 하면서--."
아들의 쓸쓸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는지 할머니는 앞치마로 코를 풀더니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꽃제례를 지내는 동섭의 순수함에 할 말을 잃었다. 영원으로 간 연인의 영혼을 위해 바다 위로 꽃잎을 띄우는 동섭의 외로워하는 모습은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았다. 점점 계산된 애정으로 살냄새 풍기는 도회의 젊은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가벼운가를 느꼈다.
제가 불로 다비해 드렸습니다 - 임현담
형제처럼 지내는 분의 부친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예기치 않은 갑작스런 죽음에 가족분들은 미쳐 준비하지 못한 황망감과 슬픔 속에 당혹해하는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예순일곱해의 지상에서의 소풍을 끝내신 분은 하얀 국화에 둘러 쌓이신 채 갓맑은 흑백사진을 남기고는 하늘로 혼자 끝걸음으로 되돌아가셨습니다.
여행을 떠나 여러 명이 한 방에 묵는 도미트리에 들어가면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유럽의 대부분 나라사람들은 물론, 갓털의 히피들과도 잠을 자보았으나 다양한 인종이나 서로간의 밤새우며 진지하게 나누었던 대화보다는 오고감의 시간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밤중에 기차를 타고 도착해서는 새벽에 다시 부시럭부시럭 짐을 꾸려 얼굴도 보여주지 않은 채 일찌감치 떠나고, 어떤 이는 저보다 먼저 도착하여 제가 떠나는 날까지 계속 질펀하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스웨덴 여자, 못생겼던 스위스 여자, 눈이 커다란 프랑스 남자, 미국인 히피 모두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숙소에 들어와 합류해서는 일찍 떠나거나 혹은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그것이 여행자의 법칙이었습니다. 일찍 도착한 사람이 일찍 떠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는 잠시 머무르고 누구는 오랫동안 머물 수 있다는 순서 없는 불규칙성이 여행자의 법칙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소풍이라 부르고 여행이라고 불리는 인생 역시 그렇게 예상과는 달리, 우리 의지와는 관계없이, 빠르고 혹은 늦게 머물면서 오고감이 진리입니다. 예순일곱의 동굴이나 한 살 짜리 동굴이나 어둠을 밝히는 것에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듯, 지상에서의 나이는 죽음이라는 횃불 앞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이 법칙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집트 룩소르의 텅빈 도미트리 방안에 혼자 앉아, 간밤에 함께 잠들었던 여섯 명 모두 사라져버린 풍경 속에서 배낭을 꾸리며 여행자의 법칙, 삶의 법칙을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흑백사진 옆에는 고인이 믿고 따르시던 종교를 대표하는 묵주가 놓여있었습니다. 저는 우선 고인의 종교대로 그 분의 신에게 영혼의 인도를 위해 인사드렸고, 제가 좋아하는 죽음의 애도 방법으로 만뜨라를 외웠습니다.
하리 옴, 하리 옴, 하리 옴.
그리고 마음에 불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오후 한 사람의 화장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얀 천을 씌운 시체가 나무장작 위에 얹혀졌고 곧이어 꽃숭어리되어 화르르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불이란 정말 이상해서 사람들은 불을 바라보면 깊은 침묵 속에 들어가며 영혼의 안식을 느껴 혼탁한 생각이나 욕심은 정화됩니다. 타닥타닥 장작소리만 들릴 뿐 사람들은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불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됩니다.
불꽃이 약간 사그러들자 시체를 뒤집었고 몇 개의 나무쩍지와 통나무를 던지자 불길은 다시 소리지르며 광휘롭게 미친듯이 살아났습니다. 화부는 일어나 끝이 뾰족한 장대로 날파람나게 정수리를 때렸습니다. 해골이 빠개져 골이 터져 나오며 수증기가 퍼지자 남아있는 사람들이 만뜨라를 외웠습니다.
하리 옴, 하리 옴, 하리 옴.
그것은 가슴에 있던 아트만이 화장으로 머리에 모이고, 골을 빠개줌으로써 몸을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간다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화부가 불 밖으로 길게 삐져 나온 다리를 다시 불 안으로 밀어넣고 조가비처럼 쪼그리고 앉을 무렵, 불길은 후룩히 줄어들고 사람들은 합장한 채 한 사람 두 사람씩 화장터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제법 흐른 후 불꽃이 사그라든 무렵에는 주변에 가족인듯한 대여섯 사람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미 장작은 무너져 내렸으나 아직 사라지지 않은 불꽃 속에 타다만 검은 시체가 나무토막처럼 남아있어 숯덩어리들과 섞여 있었고, 이제 그것이 식어버리는 아침이면 갠지스 강가에 아무렇게 텀벙 던져져 머나먼 뱅골만을 향해 물결따라 흘러갈 것입니다.
저는 2월 초에 바라나시에 혼자 도착했습니다. 하얀 도티를 입은 릭샤왈라는 강변 입구에 저를 내려놓았고 골목을 뒤져 무슬림이 운영하는 로지에서 며칠 묵을 방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제일 싼 3층 방을 잡고, 짐을 풀고는 길게 뻗은 갠지스 제방을 따라 하류 쪽으로 산책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힌두 순례객의 인파 속에서 무심히 앉아있다 걷다를 반복하며 히말라야에서 녹아내린 갠지스 물결을 바라보았습니다. 때로는 호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넣고 걷고 때로는 몇 루삐를 꺼내 거지에게 적선하며 아주 천천히 걸었습니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면 작은 물결이 강물 위를 흩고 지나가 반사되었던 풍경들이 금자락 은자락 흔들거렸습니다.
그리고는 로지로 돌아와 침대 위에 누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렸습니다. 시트는 걸레처럼 너덜거렸고 벼개는 습기차서 눅신하며 참기 어려운 인도적인 냄새를 풍겨, 가끔 일어나 심호흡하며 해창 덧창을 올리고 창 밖을 내다보아야 했습니다.
인도 각지에서 온 수많은 인파들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강으로 향하는 모습이 펼쳐졌습니다.
옆 침대에 누워있는 국적을 알 수 없는 헌옷때기 걸친 사람은 시차를 이기지 못하는 듯 미동조차 없이 죽음만큼 깊은 잠을 내내 자고 있었습니다.
바라나시에 온 용건은 시체를 태우는 일들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상야릇한 망설임 같은 것이 발목을 움켜잡아 다짜고짜 화장터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정오의 공기 속에 들어있는 어떤 나른함에 이어, 긴 기차여행으로 다가온 피곤함으로 깊은 낮잠을 자고 난 후, 최초의 망설임의 이유를 생각하며 오전에 걸었던 곳과 반대로 화장터있는 상류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습니다.
몬순이 지나간지 오래되고 건조해서 강 주변의 모래는 갯벌과 섞여 마치 늙은 짐승의 가죽처럼 주름잡혀 있었고 누군가가 강변에서 매우 천천히 규칙적인 리듬으로 둥둥둥 북을 쳤습니다. 무엇인가 잠재우는 듯한 마취적인 리듬 속에 심장 박동 역시 건기의 더운 바람 속에 동조하는 듯 매우 느리게 섞였습니다.
멀리서 시체를 태우는 불길이 보였고 보랏빛 연기가 미친년 산발처럼 하늘로 향해 회올리며 춤추었습니다.
다가서자 불은 뜨겁고 찬란하고 불꽃은 신성했습니다. 불에 의해 생기는 제 뒷그림자는 덧없는 허깨비에 불과했습니다. 불에 의해 육신이 타고 남으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 결국 육신은 시간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최초 인간들은 신과의 교분을 불로 생각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불은 하나이지만 나무가 타고, 집이 타고, 사람이 타고, 숲이 타는, 다시 말하면 수많은 형상으로 타오른다는 사실이 비범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꽃으로 지상의 존재는 사라져가며 그 기운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에너지의 역동적인 사유를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여 불을 피워 신과의 교감을 시작하는 종교적 제례는 구약을 포함하여 역사가 깊은 온갖 종교에 골고루 널리 퍼져있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것은 물론 죽어 불이 빠져나가 싸늘해진 육신에 불을 붙여 하늘의 신에게 올려보내는 행위는 아름다운 제의였습니다.
물끄러미 앉아 화장을 바라보는 저에게 참으로 이상야릇한 평화가 자리잡고 그들이 나즈막하게 외우는 '하리 옴'이라는 만뜨라는 오랫동안 저를 붙잡으며 더욱더 가라앉게 만들었습니다. '하리'를 말하는 동안은 바깥에, 그리고 '옴'을 말하는 동안은 커다란 종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몸이 웅웅 거리며 공명했습니다. 그것은 죽은 이의 죄를 사해주고, 죽은 이의 천도를 비는 힌두들의 만뜨라였습니다.
저는 해질물 그곳 불바람 속에서 홧홧거리는 얼굴을 쓰다듬으며 매장파에서 화장파로 돌아섰습니다. 죽음 후에 남은 육신의 흙과의 밀착보다는 하늘바람으로의 자유를 택했습니다.
화장터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삶을 마감하고 이제 고인이라 불리우게 된 분은, 가족들의 애도 속에 따뜻한 시선으로 사진 안에 천주교 식으로 계셨습니다.
저는 황막하고 불모로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믿지 않습니다. 그곳은 불길보다 강하고 불길만큼 따뜻한 찬란한 빛으로 이루어진 '사망의 눈부신 빛언덕' 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눈이 감기고 호흡이 끊어지면, 어떤 인연으로 지상에서 몸뚱아리로 뭉쳐졌던 원소들이 분리되어버려, 죽었다 깨어난 임사체험자들의 말처럼 강한 빛 속으로 방광되어 날아들어 감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티벳의 바르도 쉐돌의 '오, 기품있게 태어난 이여, 들으오. 지금 그대는 진실법계의 정수적 지혜로부터 방사되는 눈부신 빛을 경험하고 있소. 그것을 인식하오.'를 중얼거릴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마음속에서 그 분의 진대나무 시신을 남김없이 태워드렸습니다. 히말라야 전단향이 가득한 나무를 쌓아 탑을 만들고 그 위에 편안하게 눕혀드리고 톱밥을 가득 뿌렸습니다. 그리고 애지로 불 붙이자 육십칠년동안 이 땅에서 빌려와 만들었던 본디꼴 화학적 결합은 불망울 속에 끊어지고 물리적인 원소조차 떨어져 나갔으며 기마져 해체되었으니 소풍 끝난 뒤에 남긴 쓰레기 태우는 작업과 유사했습니다.
모여든 뱃속 가스로 몸의 가장 약한 부분인 배꼽이 터져나간 후, 제가 긴 막대로 까르마가 기록된 영혼의 상승을 위해 정수리를 열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남은 잿가루, 잿개비를 익은흙과 함께 갠지스 강물에 띄워 영혼은 하늘로, 육은 물흐름으로, 결합이 풀려 이승에서 해방을 맞아 드렸습니다.
하리 옴, 하리 옴, 하리 옴.
제가 그 분을 불로 태워 다비해드렸습니다.
상주의 눈물 맺힌 그렁그렁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제가 비교적 편안하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이나마 제 식으로 편안하게 보내드렸기 때문입니다. 해탈로 향하는 기나긴 영혼의 여행 중에서 잠시 이곳에 머무르신 그 분은 이제 영적진화를 위하여 이곳에서의 한바탕 모진 꿈을 마감하고 또 다른 여행지로 표표히 떠나셨음이 틀림없습니다.
먼 길 살펴가시고, 이곳은 잊으시며, 또다시 여행자 숙소에서 일가를 이루시며 여행하시다가 길 끝에서 깨달음의 나비빛으로 만나기를 마음속에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비나리했습니다.
우주의 좋은 도보여행자, 좋은 해탈방랑자가 되시기를--.
하리 옴, 하리 옴, 하리 옴.
마음의 카메라 - 파괴된 사나이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뭔가 일이 내 뜻대로 안 풀려 짜증이 나거나 우울해지려 할 때면 내가 억지로 부르기 시작하는 찬송가가 489장 이것이다. 도저히 노래가 나올 기분이 아닐 때에 그저 입으로라도 중얼거리기 시작하면 어느새 나는 "주의 크신 복을" 깨닫게 되어 마음에 평화를 찾게 된다.
나랑 비슷한 때에 예수님을 만난 내 친구 중에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받은 복 100개를 세는 애가 있다. 그 애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한 친구는 하루에 200개를 센다는데 자기는 도저히 200개까지는 채우기가 어렵고 100개만 채우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말이 100개이지 늘 변함없는 일상의 삶에서, 그렇게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100개는커녕 10개도 채우기 어려울 것이다.
아침잠 많은 그 친구는 아침에 힘겹게 일어나며 건강하게 일어날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 학교 가기 전에 밥 먹는 아들을 보며, 아들 주신 것 감사, 그 아들 건강한 것 감사, 학교 보낼 수 있는 여건 허락하신 것 감사--. 그렇게 받은 복을 세어 간단다.
왜 그 친구라고 짜증나는 일이 없겠나. 내가 알기만해도 답답한 일이 많거늘, 그렇게 복을 세다 보니 받은 복이 너무 많음을 깨닫게 되어, 남 보기에 화가 나는 일도 그저 담담한 마음으로 웃으면서 넘길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친구를 가진 것을 비롯하여 늘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감사하는 것은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주심이다. 글쎄 그것을 능력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의 생각으론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아니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진정 내가 감사하는 부분은 내가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을 주신 것이다.
왜 사람들은 글을 쓰지 않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글이란 것은 마음을 정리하여 주는 훌륭한 도구이다. 내가 화가 났을 적에 그 일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것이 그렇게까지 화날 일이 아니었음을 어느새 깨닫게 된다. 기도조차도 마음이 부산하여 안될 때에 글로 하나님께 고하면 얽혔던 실타래가 하나하나 풀림을 느낄 수 있다.
이 아침에도 글로 나의 생각을 정리하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좋은 하루를 시작하고자 한다.
높은 지위에 대하여 - 베이컨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삼중의 종이라고 할 수 있다. 군주나 국가의 종이며, 명성의 종이며 그리고 업무의 종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몸, 행동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간에도 자유가 없다. 권력을 추구하기 위하여 자유를 잃고, 또한 남에 대한 권력을 추구하면서 자신에 대한 권력을 잃는다니 참 이상한 욕망이기도 하다. 출세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비열함을 요구하며 사람들은 그런 비굴한 행동을 통하여 권좌에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자리는 위험스런 자리이고 후퇴는 몰락 아니면 적어도 빛을 잃게 되고 마니 그것은 우울한 일이다. '누구든지 지난날의 출세가 사라지는 날, 더 이상 살고자 할 까닭이 없다'. 아니, 사람은 물러나고 싶을 때는 물러날 수 없고 물러날 이유가 있을 때는 물러날 마음이 안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은퇴를 요하는 나이와 질병에도 불구하고 은퇴하기를 꺼려한다는 것은, 마치 도회의 늙은이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의 나이를 비웃는대도 거리로 난 문간에 언제까지나 앉아 있는 것과 비슷하다. 확실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빔으로써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만일 자기 자신의 느낌만으로 판단한다면 행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스스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처럼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면, 비록 속마음은 그 반대라 할지라도, 소문대로 자기도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결함을 아는 데는 가장 꼴찌이고, 자신의 슬픔을 알아내는 데는 첫째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렇게 커다란 행운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일에 얽매여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몸이나 마음의 건강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하지만 '남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잘 모르고 죽는 사람의 죽음은 비참하다'. 높은 지위에 있으면 좋든 나쁘든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 중에서도 후자는 저주스런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나쁜 일에 있어서 최선의 조건은 그러한 마음을 먹지 않는 일이며, 차선의 조건은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권력은 추구해야 할 참되고 올바른 목적이다. 왜냐하면 훌륭한 생각은(비록 하느님이 그것을 받아들일는지는 몰라도)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한, 좋은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월하고 유리한 위치로서의 권좌가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공적과 선행은 인간 활동의 목적이요, 이와 같은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마음의 안식을 성취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만일 인간이 하느님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며, 마찬가지로 그는 하느님의 안식에도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그대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가장 좋은 본보기를 그대 앞에 세워 두라. 왜냐하면 모방이야말로 엄청난 교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이어 그대 앞에 그대 자신의 본보기를 세워 두라. 그리고 그대가 애초부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는가 엄격히 자신을 음미해 보라. 그리고 그대와 대등한 자리의 다른 사람이 잘못 처신한 본보기도 등한히 하지 말라. 그들의 지난 잘못을 들춰내어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피해야 할 것인가를 그대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자만을 하거나 지난 시절과 인품의 잘못을 비난 말고 개혁을 하라. 좋은 선례를 따르듯, 마찬가지로 그것을 창조하도록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라. 사태를 최초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어디서 어떻게 하여 그것이 타락하였는가를 살펴보라. 그러나 과거와 현재에 가장 알맞는 일인가를 후손에게 물어보는 것도 잊지 말라. 그대의 진로를 규칙적으로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대의 일을 앞질러 알 수 있도록 노력하라. 그러나 지나치게 적극적이어서 자기 멋대로 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자신의 규정에서 이탈할 때는 그것을 잘 설명하도록 하라. 그대의 지위에 속하는 권한을 보존하되 일이 겹쳐 사법권의 문제가 야기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요구나 도전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의 권리를 묵묵히 '사실상의' 권리로서 주장하라. 마찬가지로 아랫사람의 권리도 똑같이 보존하라. 그리고 모든 일에 서둘러 간섭하느니보다는 중요한 일을 이끌어 주는 것을 한층 명예롭게 생각하라. 직무 수행에 관계되는 도움과 충고를 사심 없이 받아들이고,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을 참견하는 사람이라 내쫓지 말고 호의로써 받아들이도록 하라.
권위에 따르는 폐단은 주로 다음 네 가지가 있다. 즉 지연, 부패, 거친 태도 그리고 편파성이다. 지연에 대해서는, 접근을 용이하게 하고, 약속 시간을 지키고, 눈앞의 사무를 신속히 처리하고, 필요한 일 이외에 다른 일을 동시에 진행시켜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다. 부패에 대해서는, 자신의 손이나 하인의 손을 뇌물을 받지 못하도록 묶어 둘 뿐만 아니라, 뇌물을 제공할 수 없도록 청탁자의 손도 묶어 두는 일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정직을 실천하면 전자가 이루어지고, 정직을 토로하고 뇌물을 싫어한다는 것을 털어놓으면 후자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실은 물론 의혹도 피하라. 쉽사리 태도가 바뀔 수 있다든가, 확실한 이유도 없이 그 태도가 바뀌는 사람은 누구나 부패의 의혹을 산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견이나 진로를 바꿀 때는 그것을 분명히 밝히고, 또 그것을 밝힐 때에는, 그 바꾸게 된 까닭을 함께 듣도록 하고 그것을 감출 생각을 말아야 한다. 종 또는 총애 받는 신하가 각별히 인정을 받을 뚜렷한 별다른 이유도 없이 주인의 신임을 받는다면, 그것은 은밀한 부패의 샛길이라고 생각되기 마련이다. 거친 태도는 불필요한 불만을 사는 원인이 된다. 준엄은 두려움을 낳지만, 거친 태도는 증오를 낳는다. 웃어른의 꾸지람이라 할지라도 엄숙해야 하며 모욕적이어서는 안된다. 편파성은 뇌물보다 더 나쁘다. 왜냐하면 뇌물은 드문 일이지만 청탁이나 편파적 인정에 끌린다면 결코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말하는 바와 같이 "재판할 때 공정을 잃는 것을 옳지 않다. 밥 한 그릇 때문에 죄를 짓기도 한다".
옛말에 '지위는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라고 한 것은 틀림없이 맞는 얘기이다. 지위보다 나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위보다 못한 사람도 있다. '그가 통치하지 않았어도, 훌륭한 통치자로 모든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타키투스는 갈바에 관하여 말한 적이 있다. '모든 황제들 가운데서 베스파시아누스는 권력을 얻음으로써 보다 훌륭해진 유일한 인물'이라고 그는 베스파시아누스에 관하여 말했다. 하기야 전자는 통치 능력에 대해서 말한 것이고 후자는 품행과 성향에 대해서 한 말이다. 사람의 인품이 개선된다는 것은 고귀하고 관대한 정신의 확실한 증거이다. 명예라는 것은 덕성을 쌓는 일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자연계에서 사물이 제자리로 돌아갈 때는 격렬하지만, 일단 제자리에 당도하면 평온해진다. 마찬가지로 덕망이 있는 사람도 야심을 품을 때는 격렬하지만 일단 권좌에 오르면 평온해진다.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만일 당파가 있으면, 한창 출세길에 있는 사람은 어느 한편에 가담해야 하지만, 일단 자리에 오르면 중립을 취하는 것이 좋다. 자기 전임자의 유업에 대해서는 공평하고 정중하게 하라. 왜냐하면,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가 자리에서 물러날 때는 그 빚을 갚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동료가 있으면 그들을 존경하라. 그리고 그들이 부름을 기대하는 이유가 있을 때 그들을 제외하느니보다는 오히려 부름받기를 기대하지 않을 때 그들을 부르도록 하라. 청탁자와의 대화나 개인적인 응답에 있어서 지나치게 자신의 지위에 민감하거나 그것을 염두에 두지 말라. 그리고 오히려 '저 분은 일자리에 앉으면 딴 사람이 된다니까요'라는 말을 듣게 하라.
진리에 대하여 - 베이컨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빌라도는 익살맞게 묻고는, 그 대답을 기다리려 하지 않았다. 확실히 세상에는 지적인 변덕을 즐거움으로 삼고 어떤 신념에 집착하는 것을 하나의 속박으로 생각하며 행동이나 사고에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하려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유파의 철학자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인데도, 이와 같은 옛사람들이 보여 준 기질도 갖추지 않은 채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려는 경향을 지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거짓을 좋아하는 것이 진리를 발견해 내는데 드는 어려움이나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에 인간의 사고에 던지는 속박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거짓 그 자체에 대한 자연적이지만 그릇된 애착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 말기 학파의 한 철학자가 이 문제를 두고 검토하였듯이 시인들처럼 기쁨이 생기는 일도 아니고 또 상인들처럼 이익이 생기는 일도 아닌데, 사람들은 거짓을 위한 거짓을 사랑한다니 무슨 연유인지 나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어찌하여 적나라하고 대낮의 빛과도 꼭 같은 이 진리가, 세상이라는 무대 위의 가면극과 무언극 그리고 승리의 행진을 당당하고 우아하게 비춰주는 촛불의 절반만큼도 행세를 못하는지 그 이유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진리는 대낮에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진주처럼 그 값어치를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빛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다이아몬드나 루비의 값어치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거짓이 혼합되면 언제나 기쁨을 더해준다. 만일 인간의 마음속에서 헛된 의견이나, 마음을 들뜨게 하는 희망, 엉터리 가치 판단, 이른바 겉잡을 수 없는 망상 등을 제거한다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가난과 위축만이 남고 우울과 권태로 충만하여, 제 자신을 미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어느 신부 한 분이 시를 가리켜 '악마의 술'이라고 아주 신랄하게 비난했는데, 그 이유인즉 시는 상상력을 충족시켜 주지만 거기엔 허위의 그림자가 깃들어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짓 가운데서도 마음을 스쳐 지나가는 거짓이 아니라 마음속에 가라앉아 고정돼 버리는 거짓이 해가 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것들이 인간의 타락한 판단력이나 감정 속에 자리잡고 있다 하더라도, 참된 가치를 판단할 줄 아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진리란 그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에 애정을 품고 사랑하게끔 해주는 것이요, 진리를 인식함은 진리의 존재, 그의 믿음, 그의 향락이 인간성의 최고의 선이 됨을 배우는 일이다. 며칠을 두고 작업한 하느님의 작품들 가운데 최초로 창조된 것은 감각의 빛이었고, 최후의 것은 이성의 빛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언제나 하느님이 안식일에 하는 일은 그의 성령을 인간에게 비추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먼저 혼돈의 지표 위에 빛을 불어넣으시고 그 다음 인간의 얼굴에 빛을 불어 넣으셨다. 그리고 그는 그의 선민의 얼굴에 지금도 숨결을 불어넣으시고 빛을 내뿜고 계신다. 쾌락파를 꽃 피운 그 시인-그가 아니었던들 쾌락파는 다른 파에게 뒤지고 말았을 것이지만-은 다음과 같은 탁월한 말을 하고 있다. "바닷가에 서서 바다 위에 배들이 흔들거리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성곽의 창에 기대서서 전투가 벌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어떠한 즐거움도 진리라는 유리한 지위에서 내려다보는 것과는 비할 바가 못된다(그 언덕을 굽어볼 언덕은 없을 것이며, 거기에는 언제나 깨끗하고 맑은 공기가 있다). 어떻게 저 아래 골짜기에서 일어나는 오류와 방랑과 안개와 폭풍을 바라볼 때의 기쁨에 비하랴."
그러나 이러한 전망은 언제나 허세나 자존심이 아닌 연민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이 자비 속에서 움직이고 하늘의 섭리 속에 안주하며 진리의 양극 위에서 회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확실히 지상천국인 것이다. 신학적, 철학적 진리로부터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진리에로 생각을 바꿔 보건 데, 깨끗하고 원만한 행동은 명예로운 인간의 본바탕이요, 뒤섞인 허위의 행동은 금화와 은화 속에 나쁜 금속을 섞은 것과 같아서, 겉모양은 훨씬 나아 보이지만 질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그런 행동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이해가 가리라 믿는다. 이러한 꾸불꾸불하고 비뚤어진 길은 발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배로 비천하게 기어가는 뱀의 길이다. 거짓과 불성실만큼 인간을 치욕으로 뒤집어 씌우는 악은 없다.
그런고로 몽테뉴는, 거짓의 말이 왜 그토록 수치스럽고 혐오해야 할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며, 아주 적절한 말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잘 생각해 보건대, 인간이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것은 마치 그가 하느님께 용감하고 인간에게 비겁하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그가 하느님께 용감하게 대하면서 인간에게는 몸을 숨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허위와 배신의 사악함이 가장 적절하게 표현된 것은 인간의 여러 세대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부르는 최후의 나팔 소리일 것인즉,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라고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호박꽃 십자가 - 이관희
남자로 태어나 일생에 꼭 한번 흘릴 수 있는 깊은 가슴 속의 눈물. 그것은 보석이었다.
H목사님의 은퇴예배에 다녀온지 두 달이 지났는데도 나는 아직도 거기서 받은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곳에서 호박꽃 십자가를 보았던 것이다.
H목사님의 은퇴예배는 말이 은퇴예배였지 실은 은퇴가 아닌 승전축하 예배였고 동시에 새로운 복음전선으로의 출발을 축복하는 예배였다. 그래서 그런지 1백여 본교회 교인들은 물론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내객들 모두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도 목사님이 은퇴하신다고, 그래서 우리 곁을 떠나시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일부러 그렇게 화장을 한 것은 분명 아닌 것 같은데 작은 교회당 안을 여러 가지 준비하는 일로 바쁘게 왔다갔다하는 교인들의 얼굴에는 모두 불그스레한 기쁨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어라고 말만 한마디 붙여도 금방 활짝 웃으며 좋아 어쩔줄 몰라 할 것 같은 그런 표정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말이 은퇴예배니까 조금 섭섭해 하는 표정도 지어야돼 라고 스스로 일깨우는 듯 꼭 다물어 지지 않는 입술을 일부러 정신차리고 다물어 기쁨을 감추는 표정들이 역역하다. 무엇이 저리도 기쁜 것일까? 그 이유는 예배순서가 하나하나 진행되어 가는 동안에 차례로 밝혀져 나갔다.
설교 순서를 맡으신, H목사님의 평생 친구요 동역자라는 I목사님은 H목사님의 평생에 걸친 목회자로서의 특징을 '그는 무슨 일에도 앞에 나서서 자기를 내세우는 일을 극히 피해 온 목회자였다'는 말로 특징 지어 말씀 하셨다. 권면을 하고 축사를 하기 위해서 오신 여러 목사님들도 각기 그들이 겪어 아는 H목사님과 그의 사역에 대해 말씀 하셨는데 그 모든 내용은 한마디로 'H목사님은 예수님과 교인들 사이에서 팔 벌린 목회를 해오신 분이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내가 H목사님을 알게 된 것은 10년 전 신학생 시절의 일이었다. 목사님은 당시 막 교회를 개척하여 아직 만 1년도 안되었을 때였다. 교회당은 현재는 한국인 촌으로 붐비는 '가든 그로브' 시 인근의 어느 미국인 교회를 빌려쓰고 있었는데 본당 건물이 아니고 교회 주차장 한쪽 구석에 있던 창고 건물이었다.
내가 H목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의 인상은 후에 누구나 다 같은 의견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참 키가 크시구나 하는 것과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 없다고 하였는데 목사님은 성씨 마저 허씨 성을 쓰시니 참 속이 허 하시겠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후 지금까지 10년 동안을 교회에서는 목사님으로 신학으로는 은사님으로 그리고 우리 가정에서는 아버님 같으신 분으로 늘 가까이 모시며 살아오는 동안 목사님을 처음 뵙던 그때의 인상은 조금도 흩어지지 않고 살아있다. 나보고 은퇴예배 순서에 나와 목사님에 관한 말씀 한마디를 하라고 하였다면 나는 '목사님은 꼭 호박꽃 같으신 분이십니다' 라고 하였을 것이다.
호박꽃은 자신을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생전 자기 자랑이란 게 없다. 그러니 남을 제치고 앞에 나서려 하겠는가?
호박꽃은 담장 넘어 주인집의 화려한 꽃밭을 넘보지도 않는다. 행여 거기 화려한 꽃들 가운데 슬그머니 섞여 피어 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은 아예 없다. 주인이 정해서 심어 주는 곳이면 아무 곳이라도 군말 없이 심어져 잘도 자라고 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곳이 담장 밑이 되었든 밭두렁이 되었든 심지어는 똥밭이 되었더라도 주인이 심어 주는 대로 묵묵히 따를 뿐이다.
호박꽃은 또한 자기 모양을 뽐내기 위해서 꽃을 피우는 법이 없다. 순전히 탐스럽고 영양가 많은 호박열매를 맺기 위해서 꽃을 피울 뿐이다. 아무도 호박꽃을 꽃으로 반겨 주는 이 없고 찾는 이 없어 가끔씩 벌들이나 한번씩 둘러 갈 뿐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한국 농촌의 아침을 그 한 품안에 다 안고 피어나는 꽃. 아침 일찍 길을 나설 때면 언제나 제일 먼저 이슬방울로 얼굴을 정결하게 씻고 있다가 반겨주는 꽃. 고향을 떠났다 돌아 올 때면 제일 먼저 동구 밖까지 마중 나와 있다가 반겨주는 꽃. 호박꽃은 그렇게 늘 소리 없이 사람들을 향하여 가슴을 활짝 열고 피어 있다.
내가 신학 초년생으로 목사님이 개척하시는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안 되어 야외예배를 간 일이 있었다. 그때 교인들 틈에 아무렇게나 털부덩하고 잔디밭에 주저앉아 상추쌈을 한 주먹이나 되게 싸서 우적우적 잡수시던 목사님의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지만 앞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때도 순박하고 순수하기 비할 데 없는 호박꽃 한 송이를 보았었다.
H목사님에게는 생전 "체"라는 것이 없다. '체' 하는 것이 없으니 말할 것도 없이 '척'하는 일도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잘난 체란 아예 없었고 거룩한 체 같은 것은 더욱 있을 수 없었다. 목사라면 마치 필수조건이라도 된다는 듯 꾸며서라도 달고 다니는 그런 거룩한 체라는 것이 H목사님에게는 통하지 않는 얘기였다. 하긴 호박꽃이 무슨 잘난 체며 더구나 거룩한 체이겠는가? H목사님은 집에 심방을 오실 때도 교회 목사님이 아니라 꼭 아버지가 아이들 사는 집을 둘러보러 오신 것 같은 그런 편안한 몸가짐에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신학 초년생이었던 나는 목사님의 그런 너무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여간 의문스럽지가 않았다. 저렇게 교인들과 아무 구분 없이 아무데서나 털부덩 주저앉아 상추쌈을 한 주먹이나 되게 싸서 조금도 '거룩해 보이지 않게' 우적우적 잡수셔도 목회가 제대로 되는 것일까? 그런데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 그 생각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나는 비로소 왜 지금도 내 어린 시절 시골 고향집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노란 호박꽃이 한 아름이나 되게 머리 속에 떠오르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호박꽃은 한국 농촌의 어머니 같은 꽃이었기 때문이다. H목사님의 목회가 바로 그런 어머니 같이 언제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편안한 목회였던 것이다.
그런데 호박꽃은 결코 혼자서 피는 법이 없다. 호박꽃은 반드시 팔을 쫙 벌리고 손에 손을 잡고 줄기줄기 핀다. 호박꽃의 가장 큰 특징은 아마도 이것이 될 것이다.
그날 H목사님의 은퇴예배에 참석하여 같이 예배를 드리며 설교도 하고 축사와 권면의 말씀을 하신 모든 동료 목사님들의 한결 같은 고백은 바로 이점이었다. 목사님의 목회는 호박꽃처럼 팔을 벌리고 한쪽 손은 예수님의 손을 잡고 다른 한쪽 손은 교인들의 손을 잡은 채 평생 자기 자랑 하나 없이 호박꽃처럼 묵묵히 피어나 웃으며 모든 쓴것도 단것도 다 같이 포용하여 그것으로 오히려 달고 영양가 높은 열매를 맺어 오신 호박꽃 같은 목회였습니다 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한결 같은 고백이었던 것이다. 호박꽃 목회, 그것은 다름 아닌 팔을 벌린 십자가 목회였다.
그런데 그날 내가 정말로 크게 감동을 받은 일은 그 다음 순서에서 일어났다. 나는 호박꽃의 눈물을 보았던 것이다.
찬송 순서도 지나가고 긴 기도 순서도 지나가고 설교와 축사와 권면의 순서들도 길게 길게 다 지나간 후 이제는 원로 목사님이 되신 은퇴 목사님이 답사를 하시게 되었는데 아직도 키가 남보다 한 뼘은 더 크신 그대로, 그리고 여전히 호박꽃처럼 허해서 주기만 하고 다툴 줄 모르시는 그 모습 그대로 마지막 목회 고별의 인사를 하기 위해 단에 서신 목사님은 몇 마디 말씀을 하시다가 그만 갑자기 목이 메어 말씀을 더 잇지 못하셨다.
그 동안 이 힘든 목회 일을 함께 고생하며 오늘의 승리가 있게 해준 교인들에게 감사하고 또 아버지를 따라 같이 고난의 길에 동참하여 기꺼이 함께 고생해준 여섯자녀들(실제로는 일곱자녀 : 맏딸은 이북에 두고 오셨다고 한다)에게도 감사하고 그리고 나의 돕는 배필이 되어 눈보라 비바람을 함께 맞아 온 아내에게도 감사하다가 그만 거기서 말문이 막히시고 만 것이다. 그 대목은 말로서만은 다 표현 할 수가 없는 대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목사님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깊은 가슴속을 열어 보이시고 말았다. 그것은 눈물이었다. 남자로 태어나 일생에 꼭 한번 흘릴 수 있는 깊은 가슴속의 눈물. 그것은 보석이었다.
그런데 그 보석의 주인공은 누구였는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사모님이셨다. 나는 비로소 목사님의 팔 벌린 십자가 목회의 승리의 비결이 무엇이었는가를 두 눈으로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 모세가 '르비딤' 산 위에서 팔을 벌리고 있을 때 그의 팔이 올라가 있는 동안은 이스라엘이 전쟁에 계속 승리를 거두게 되고 그의 팔이 피곤하여 내려가면 이스라엘이 전쟁에 지게 되었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모세의 피곤한 팔을 옆에서 부축하여 내려가지 않게 해 준 돕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제사장 아론이었다.
팔을 든 자의 팔을 부축해 주기 위해서는 부축하는 사람도 팔을 들어야지만 된다. 그런데 팔을 든 자의 쳐지는 팔의 무게는 배나 더 무거운 무게로 부축해 주는 사람의 팔에 얹히기 마련인 것이다. 이 감당하기 힘든 무게를 온몸에 안고 일생 보이지 않는 인고의 땀과 눈물로 십자가를 함께 엮어 오신 분이 다른 분이 아닌 사모님이셨던 것이다.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를지도 모르지만 팔을 들고 있던 목사님만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으므로 그 앞에 눈물로서 밖에 그 사랑과 인내와 수고에 대한 감사를 다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벌린 팔을 버텨주고 있던 나무 십자가! 사모님은 바로 그 나무로 된 목회십자가였던 것이다. 그 나무로 된 십자가가 있었으므로 그 위에 목사님의 호박꽃 목회가 줄기줄기 피어나 탐스런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목사님은 하늘에 빛나는 별 같은 승리를 거두셨고 사모님은 한 아내가 일생을 온갖 수고와 인내와 사랑의 삶을 살아 낸 후에라야만 받을 수 있는 가장 귀한 보석을 받으셨던 것이다.
H목사님은 그 눈물 한 방울을 흘리기 위해 그 많은 세월 그 험한 고생의 떡과 수고의 물을 마셔 오셨고 사모님는 그 목사님의 뜨거운 눈물 한 방울 받아 갖기 위해서 그 오랜 세월 인고와 사랑으로 견디어 오신 것이었을까?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사람답게 살고싶다 - 이관희
미국에서는
달마저 낯이 설다. 달 뿐이랴.
미국은 꽃도 낯이 설다.
나는 때때로 내가 벌레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일하기 위해서 태어나 눈만 뜨면 죽어라고 일만 하는 벌레. 지난 20년간 나의 이민생활은 그렇게 바쁜 세월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지난 수년동안 나는 그야말로 눈코 뜰새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눈 뜨면 곧장 책상 앞으로 달려들어 글쓰고. 시간되면 일어나 나가서 먹고살기 위해 일 하다가 남들 다 깊은 잠에 떨어져 있는 꼭두새벽에 집에 돌아와 픽 쓰러져 잠시 잠들었다 일어나면 또다시 책상 앞으로 달려들어 책 만들고, 일 나가고--. 실로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다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싶다.
그런 바쁜 와중에도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 어떤 분명치 않은 아픔 같은 것을 마음속에 느껴오고 있다. 그 아픔은 처음에는 너무 작은 것이어서 거의 느낄 수조차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마치 청력 테스트 할 때 들을 수 있는 작고 날카로운 소리처럼 작지만 분명한 것이기도 하였다.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남칼리포니아의 긴 여름도 지나가고 미친 여자의 덥수룩한 머리 같은 인디언 서머도 한 바탕 극성을 떤 후 물러간 어느 날, 갑자기 달이 하얗게 식어 버린 것을 알 게 되었을 때 나는 문득 그 아픔을 느끼게 된다.
혹은 우기가 되어 자다가 후두둑 지붕 위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기적처럼 듣게 되었을 때, 혹은 쓰레기통 있는 데 까지 잠시 나갔다 오는 사이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게 밝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혹은 우연히 켠 텔레비전에 쌍둥이 자매가 나와 스피아민트 껌 광고를 하고 있는 신선한 모습의 사진을 보게 되었을 때, 혹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열어놓은 뒷문 밖으로 멀리 불타고 있는 석양의 붉은 노을 보게 되었을 때, 혹은 밤 비행기 한 대가 은은한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는 것을 우연히 올려다보게 되었을 때 --. 나는 다시 그 아픔을 느끼곤 한다.
그렇게 아픈 횟수가 거듭되고 차츰 그 아픔이 더 커져서 마침내 내가 그것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아보게 되었을 때 나는 깜짝 놀라 '그럴 리가 없어!' 하고 힘있게 도리질을 쳤었다. 마치 몹쓸 병이 든 것은 아닐까 하는 공연한 의심이라도 떨쳐 버리듯.
그러나 요사이에 와서 그것은 마침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입술을 들치고 소리가 되어 튀어나오는 중증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눈코 뜰새없이 또다시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난 어느 날 저녁, 우연히 이곳 남칼리포니아에도 전에 고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선득한 저녁바람이 옷소매를 들치며 불어올 때도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갑작스럽게 내 입술을 들치며 기침 튀어나오듯 한 그 아픈 신음소리! 그것은 놀랍게도 '사람답게 살고싶다!'는 것이었다.
사람답게 살고싶다. 이 말은 내가 그 동안 살면서 경험해온 바로는 어떤 운명적인 불행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어두운 생활을 해오던 사람들이나 견디다 못하여 토하게 되는 절망적인 소망의 한숨인 줄로 알고 있던 말이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도 아닌 지난 십 수년간 천국복음을 전한다고 해온 목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목사가 남에게 말 못할 무슨 부끄러운 병이라도 앓고 있듯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아픔을 오랫동안 앓아오고 있었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혹 남모르게 무슨 수상쩍은 생활이라도 해오고 있었던가?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더 이상 지난 수년동안 내 마음속에 자라온 이 분명한 아픔을 도리질 쳐버리거나 어떻게 달리 모르는 체 할 수도 없을 정도로 기침 튀어나오듯 하게끔 까지 되었을 때는 나는 이미 그것들의 정체도 분명하게 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어이없게도 '오늘쯤 친구놈들이 갑작스럽게 집에 좀 찾아와 주지나 않을까?' 하는 그런 지극히 작은 소망에 관한 아픔이었다. 혹은 전에 자주 그랬듯이 내편에서 어떤 친구놈의 집을 불쑥 찾아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어이없게도 외출하기 위해 문밖을 나서다가 문앞에서 마침 잘 아는 동네 아저씨를 만나게 되어 '안녕하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게 되는 그런 생활을 다시 한번 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아주 작은 소망에 관한 아픔이었다. 그것은 어이없게도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문득 낯선 길가 찻집에 둘러 차 한잔 마셔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런 작은 소망의 아픔이었다. 거기서 전화로 친구놈들을 불러내어 그 집을 새로운 단골집으로 삼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가슴속에 자라고 있는 이 '사람답게 살고싶다'는 아픔은 사람들이 어께를 툭툭 서로 부딪치며 지나가는 거리를 전에 자주 그랬듯이 다시 그렇게 좀 걸어다녀 보았으면 참말로 좋겠다는 그런 아주 작은 소망들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에 관한 아픔이었다. 시장에 들어가 사람들이 북적대는 길가에 쭈그러뜨리고 앉아서 순대 한 접시 다시 한번 사먹어 보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의 아픔.
가난한 동네에 들어서면 아이들이 우는 소리, 어느 집에선가 악악 소리를 질러대며 부부싸움 하는 소리, 대낮부터 전봇대에다 대고 오줌을 질질 흘리고 있는 술 취한 사내의 모습, 검정개 누렁개가 코를 땅에 박고 절래절래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모습. 그리고 냄새나는 동네 길가 시궁창의 모양까지. 이 모든 낯익고 친근한 보통 사람들이 소떼처럼 무리지어 풀을 뜯듯 사는 그 가운데서 나도 그 중에 하나로 섞여 그렇게 무리지어 풀을 뜯듯하며 살아보았으면--. 그것이 소떼가 아니라면 벌레라해도 좋고 혹은 물 속에 헤엄쳐 다니는 그놈이 그놈인 것 같은 물고기 중 한 마리라 해도 좋고 혹은 공중에 날아가는 수 많은 새들 중 한 마리라 해도 좋고, 무수히 떨어지는 가랑잎 가운데 하나라 해도 좋고--. 무엇이라해도 좋으니 나도 그냥 그렇게 보통 사람들 중 하나로 낯익은 사람들 가운데 섞여서 살면서 동네 길에서 잘 아는 아저씨를 만나게 되면 꾸벅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구멍가게에서는 눈깔사탕 한 알 사먹고, 점심에는 찬밥을 물에 말아 된장에 고추 찍어 먹고, 할 일 없이 거리를 걸어다니고, 비 맞고, 눈 맞고, 바람맞고, 달 쳐다보고, 그리고 늙어서 죽은 다음에는 천국에 가서도 또다시 그렇게 그냥 보통 사람으로 낯익은 사람들 가운데 섞여서 영원히 그렇게 무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섞여 살고 싶다는 소망.
그렇다. 나의 이 비밀한 아픔은 바로 이 작은 소망 하나를 지금 이 땅 위에서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아픔이었다. 지난 20년간 나는 그런 보통사람으로 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미국에 이민 온 후 갑자기 별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차라리 별난 사람이라도 되었더라면 그렇기나 해서 그랬다고 자위라도 하였을 텐데. 그러나 이민이라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런 것일 수밖에 없었다는 오직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그렇게 밖에 살 길이 없었다.
미국에서는 불쑥 친구가 친구네 집을 찾아가고 오는 법이 없고 동네 길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잘 아는 아저씨'를 만나볼 길이 없으며 남대문 시장도 동대문 시장도 없으므로 길가에 쭈그러뜨리고 앉아서 순대를 사먹을 수도 없다. 이민이란 그런 것이었다.
어디를 가나 낯 설기만한 땅. 미국에서는 달마저 낯이 설다. 달 뿐이랴. 미국은 꽃도 낯이 설다. 나는 어느 해 가을이던가, 일하던 공장 뒷문 밖에서 바람에 불려온 씨라도 떨어져 핀 듯한 코스모스를 발견하고 달려가 얼싸안듯 손을 댔다가 얼마나 실망하고 돌아섰는지 모른다. 미국 꽃은 꽃잎마저 치즈를 먹고 자랐는지 그렇게 두껍고 투박할 수가 없다. 한국의 가을 코스모스를 치마폭에 하늘하늘 몸매를 감춘 참 여인의 모습 같다고 한다면 미국의 코스모스는 수영팬티 밖으로 불거져 나온 여성 보디빌더의 두꺼운 근육질 같다고나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늘도 땅도 공기마저도 낯이 설기만한 이 땅에서 내가 도망쳐갈 수 있도록 허락된 유일한 피난처는 오직 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민자들은 공장에 일하러 가서도 한시도 빈둥거리면 돌아다닐 수가 없다. 이민자들은 마치 기계 앞에 말뚝이라도 박힌 듯 하루종일 붙박혀 서서 죽어라고 일만 해 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민자들이 부지런해서 그런가? 아니었다. 백인들처럼 빈둥거리고 돌아다니며 잡담을 나눌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말도 서툴고 감정도 안 통하고 미식축구도 모르고 야구도 모르며 거기다 텔레비전 프라임 타임에 틀어주는 개그맨들의 웃기는 소리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으므로 화제 거리가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밥에 도토리처럼 생긴 모양이 항상 눈밖에 드러나 있으니까!
천국이란 어떤 곳이냐? 천국이란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같이 낯익은 사람들만 모여서 사는 곳일 게다. 그리고 모두 다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다른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섞여서 같은 종류의 물고기들처럼, 새처럼, 벌레들처럼 아무 구별 없이 살게 되어있는 곳일 것이다.
그곳에서는 다시는 대통령도, 학교 선생도, 교통순경도, 목사도 없을 것이고 아, 아, 무엇보다도 이민자라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다시 단순해 질 것이다. 사람들의 감정은 봄비처럼 부드러워질 것이고 마음씨는 펑펑 쏟아지는 눈처럼 순백해질 것이며 서로 대하며 사는 예모는 물처럼 자연스러워 질 것이다. 사람들은 다시 동네 길에서 잘 아는 아저씨를 만나 꾸벅 절을 하게 될 것이고 처녀들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빨리 지나쳐 가게 될 것이며 소년들은 그 처녀들 앞을 지나쳐 갈 때면 넘치는 사랑의 감정 때문에 다리가 후둘후둘 떨리게 될 것이다.
천국이란 그렇게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낯익은 동네 아저씨들만 모여서 소가 풀을 뜯어먹고 살듯 그렇게 푸르게 푸르게만 사는 곳일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살고픈 소망만은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핵가족이 아닌 대가족의 삶을 살게 될 것이며 이혼이 아닌 결합의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경쟁이 아닌 조화, 사업의 성취가 아닌 사랑의 성취, 그리고 종교가 아닌 그냥 사는 것이 종교가 되는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민이 아닌 고향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영원토록!
가을 여자 - 임현담
내 친구가 많이 아프다. 올해를 넘길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다. 설혹 올해를 넘기더라도 다음해 여름을 맞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음파를 통해 질병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이미 간 우엽에 5센티 크기로 발전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어 컴퓨터단층촬영과 혈관조영술을 시행하고 간의 우엽을 잘라냈다.
병명은 간암.
수술 후 수술 부위에서 담즙이 새어나오고 복수가 차 오르는 악순환이 거듭되더니,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남아 있는 간에 현미경학적 전이가 있었던지 간암들이 이곳저곳에서 마구 자라나기 시작했다.
예과 일 학년 때 처음 만나 정을 차곡차곡 쌓여, 세월의 햇수를 헤아려 보면 정말 긴 시간.
이제 그는 저편 세계로 나는 이편 세계로 갈라져야하는 기로에 서 있다. 그가 가야할 그곳은 더 이상 대화를 함께 나누거나 오손도손 소주잔을 기울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삶과 죽음이란 그렇게 갈린다. 붓다가 이야기한 생로병사에서 삶을 유지하던 우리는 늙거나 병들어 죽는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우리네 인생살이인가 보다.
사실 수련의 생활 동안에는 환자 질병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내가 보는 것은 환자가 아니라 환자의 질병이었고, 질병이 만든 영상이었다.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 걸려 있는 필름 안에 빛의 투과 정도에 따라, 정상, 폐렴, 폐암 등을 진단 내리는 일이 수련이었다. 전문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을 뛰어넘어야 한다지만, 진단방사선과는 몇몇 시술을 제외하고는 환자를 직접 보지 못하고 이미지만으로 접해야하는 다소 건조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직접 환자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병들고 늙어 죽어가면서, 사진을 바라보는 시선은 보다 진지해졌다.
그 시작은 전공의 2년차 때였다.
그때 역시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문턱이었다. 넥타이로 목을 조르고 가운을 걸쳐 입었어도 그렇게 더위를 느끼지 않아도 좋은 계절이었다. 신경외과 환자의 조영제 주입을 위해 컴퓨터 단층촬영실을 가다가 계절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았다.
1층 복도 끝에 유리창을 통해 누군가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긴 머리가 어깨를 지나 조금 더 내려왔고 헐렁한 환자복을 입었으되 시선을 끄는 제법 큰 키의 여자. 내가 복도 끝 우측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파란 하늘이 내려앉은 여의도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신경외과에서 의뢰한 두부 단층촬영을 마치고 다음 환자로 기계 위에 누운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얼굴이 창백한 것에 반해 화장하지 않은 입술은 붉었고, 시원시원한 눈매와 곧은 코가 상당한 미인이었다.
"여자, 예쁘죠?"
환자를 눕히고 돌아온 기사가 동의를 구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조영제를 매달기 전에 병명은 이미 판가름 났다. 역시 간암. 23세에 맞이하기에는 너무 이른 질병이었다. 피지도 못한 꽃이 지고 마는가.
VIP이었는지 검사 중간에 내과 J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어떻게 됐어?"
몇 커트 뒷부분을 보시더니 탄식하셨다.
"아이쿠!"
J 교수님은 환자의 어머니가 B형 간염의 보균자인 사실과 더불어 그녀의 아이들이 모두 간암으로 사망한 가족력을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 남은 아이라고 덧붙이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셨다.
교과서에 나오는 전형적인 종괴가 주변 조직을 압박하고, 간 문맥에 혈전을 만들어 멀리 전이시킬 준비를 완료했거나 이미 시작한 상태였다.
잠시 후 교수님이 나가자 그녀의 엄마인 듯한 사람의 낮은 울음소리가 문틈으로 스며 들어왔다.
사실 그날이 죽어 있는 흑백의 이미지에서 살아 있는 환자의 모습을 처음으로 투영한 날이었다. 교과서, 교수님, 선배들은 사진의 암호를 해독하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 주셨으나, 뒷이야기를 읽는 법은 배워주지 않으셨다. 이렇게 이미지에서 심상을 읽을 수 있었음은, 우선 여자가 아름다웠기 때문이고, 사물이 삶을 마감하는 가을이 다가왔기 때문이고, 까르마 탓이었다. 그후 사진을 보면서 임상의 환자는 물론 차차 사진 안의 질병에 대한 고통도 읽혀졌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세 사람이 들어가서 칼국수를 시켰던 날, 공교롭게 아주머니는 주문을 잘못 알아들었다. 두 그릇을 내온 것이다. 한 그릇은 이미 다른 친구가 젓가락을 담그었고, 남은 한 그릇이 가운데 놓였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먼 훗날, 친구가 불쑥 간암으로 일찍 떠날 줄 알았다면 이런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친구 중에 진단방사선과를 공부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간암에 시달리는 그는 검사사진을 종종 보여 주었다. 곧 지상을 떠날 사람을 옆에 두고 시간마다 모습을 바꾸어 가는 종괴를 짚어가며 판독하는 기분은 그렇고 그랬다.
사진 안에서 그의 육신의 해체, 가족의 눈물 그리고 다가올 이곳에 남아 살아갈 사람들의 시련이 읽혀지는 것은 바로 그 가을의 여자 덕분이었다. 어떤 식으로 사진을 접해야 할지, 이미지를 이미지로 끝내지 않고 사진 안에 들어 있는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해준 사람은 그녀였고, 그녀를 만난 것은 전공의 시절의 행운이었다.
인과응보( 뿌린대로 거두리라) - 임현담
오십을 정확히 한 달 남겨둔 남자가 찾아와 흉부 사진을 찍었다. 아침에 한 사발 정도 객혈로 인해 창백해진 얼굴로 불안하게 앉아, 엑스레이 박스에 걸린 자신의 가슴 사진과 내 표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진에는 우측 폐 하부에 오렌지 크기의 둥그렇게 생긴 덩어리가 자리 잡았고 폐문부 주변 역시 심상치 않았다. 잘하면 1년 정도 살 수 있는 커다란 폐암이 있는데다가 불행히도 수술이 어렵게 폐문부까지 폐암의 전이가 동반되어 있지 않은가.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진땀 나는지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서늘하고 넓은 이마였다. 그러나 이제 얼마 후면 얼굴에 죽음의 색이 찾아올 것이고 이번 오십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생일이 되리라.
"담배를 많이 피우셨나요?"
"예."
"웬만하면 끊지 그러셨어요."
"몇 번 끊어봤는데, 죽어도 못 끊겠더군요."
'죽어도 끊지 못하겠다'는 말을 전에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기억을 더듬으며 대학병원으로 진찰을 의뢰하는 진료의뢰서를 작성해서, 얼굴만큼 하얀 봉투에 넣어 넘겨주었다.
결론을 말해야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환자분 폐에 덩어리가 있는데 악성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보다 자세한 것은 컴퓨터단층촬영을 하고, 조직검사로 확증해야 됩니다. 이제부터 힘든 일이 많이 생길 테니 마음을 굳게 잡수시고, 대학병원 가실 때는 보호자와 함께 가세요."
고개를 끄떡이는 그를 보내고 책상에서 일어서자, 그때서야 '죽어도 끊지 못하겠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인턴시절.
아침 회진이 끝나고 레지던트 선생님과 처방전을 옮겨 쓰는데 간호사가 달려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대체가 말로는 안 되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회진 전에 환자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들어갔더니 김씨가 창문 밖을 내다보며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여러 차례 전과가 있었는지 같이 따라온 병동 수간호사가 말을 덧붙였다. 여자치고는 다혈질인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얼굴부터 붉어졌다.
"그게 한두 번이면 말을 안해요.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어요. 워닝(경고)을 한 번 주세요."
그는 하루에 두 갑 내지 두 갑 반을 무려 30년 이상 피어온 사람이라고 했던가. 아침마다 가래가 그르렁거리고 급기야 가래 속에 피가 섞여 올라오니, 놀라 병원을 방문한 50대 환자였다.
같이 서있던 내과 주치의 선생님이 나를 바라보더니 안경 밑으로 눈을 끔뻑하며 말했다.
"임선생, 임선생이 가서 말해봐."
그때는 인턴이었고 모든 행동은 상급자 명령을 따라야 했으니, 열심히 받아쓰던 처방전을 한쪽에 몰아놓고 병실로 향했다. 그는 객담검사를 받고 나서 외래의 권유로 입원했고, 정확한 병명은 폐암.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몰려있는 팔인용 병실은 시장판. 환자 하나에 보호자가 하나, 둘, 붙어 있고 각기 집에서 가지고 온 옷가지, 담요 그리고 냄비 따위가 병실 이곳저곳 쌓여 있는 곳. 또 병문안 왔던 사람들이 가지고 온 오렌지 주스, 과일 등이 여기저기 놓여있으니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병실이라기보다는 시장이나 구호소 쪽에 가깝지 않은가. 가진 돈은 없고 병은 깊은 사람들.
문제의 김씨는 침대에 비스듬히 몸을 일으키고 앉아 돋보기를 걸친 채 독서 중이었다. 같은 나이 또래의 김씨 아내가 나를 먼저 발견했다. 그녀는 공손히 일어나더니, 여보, 여보, 여보, 남편을 몇 번 부르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가운의 앞단추를 풀어놓은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서 깡마르고 다소 연약해 보이는 김씨에게 고의적으로 인상쓰며 목청을 높여야 했다.
"혼자 쓰는 병실이 아닌데 그렇게 담배를 피시면 되겠어요?"
그는 이미 이런 상황이 올지 알았다는 듯이 안경 벗고 자세를 고쳐 잡더니 시선을 떨구었다.
"사실, 혼자 쓰는 병실이라도 그렇지, 피지 말라는 담배를 그렇게 피우시면 어떻해요!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잖아요!"
일은 너무 싱겁게 끝났다. 다시는 담배 피우지 않겠다는 대답을 순순히 받아내고 병실을 나왔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불렀다.
"선생님, 선생님."
하얀 고무신을 신은 김씨 아내. 가운 끝을 잡아 계단 쪽으로 끌고 가더니 가슴에 한 손을 대고 조용히 말했다.
"저희 집 바깥양반은 자기 병이 뭔지 몰라요. 우리는 폐에 피멍이 들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가끔 거기가 터져 피가 나온다구요."
조금 전 김씨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했을 때, 여자가 더 안절부절못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혹시 내 입에서 당신은 '폐암'인데 꼭 담배를 피워야겠냐는 말이 나올까 걱정한 것.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김씨 아내는 순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깥 어른, 뭐하시는 분이세요?"
"시인이세요."
그리고 보니 얼굴과 분위기가 그랬다.
계단 입구에서 김씨의 아내 이야기를 짧게 들었다. 집안을 팽개치고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몰려다닌 이야기, 고주망태 이야기, 여러가지 기행들.
참말로 글쟁이들이란(글쟁이를 몰랐던 옛날이나, 같이 어울리는 지금이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참 이상해요. 어차피 가실 양반이라면 하시고 싶은 거 다하게 해서 보내드리고 싶어요."
김씨 아내는 어차피 죽을 폐암이라면 좋아하는 담배를 말리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실은 맞기는 맞는 이야기다. 금연 운동을 통해 미리 예방을 해야겠지만 어차피 암이 깊을 대로 깊어 수명이 몇 달 남지 않은 상태라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닌가.
"혹시라도 암이라는 소리는 하지 말아주세요--."
신신당부를 받고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걸어 내려오면서 마지막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선생님,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결혼해서 이렇게 오래 함께 같이 있어보기에 처음이에요. 죽을병으로 입원해서야 같이 있으니--."
자리잡고 앉자 열심히 차트를 쓰던 레지던트 선생님이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이야기 잘했어?"
"예."
"뭐라고 했어?"
"죽고 싶으면 맘대로 피라고요. 필요하시다면 제가 담배를 박스 째로 사다 드린다고 했어요."
또 김씨가 시인이라는 이야기와 암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말아달라는 보호자 부탁을 전했다. 알고 있었다며 고개를 끄떡이는 레지던트 선생님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선생님,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면 담배를 좀 피우게 해주면 안되나요?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서부영화에서 친구가 죽을 때 담배를 입에 물려주잖아요."
하던 일을 멈추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만든 레지던트 선생님은 나를 천천히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당신이 의사야? 당신이 총잡이 쟝고야?"
한 주일 후에 같은 일이 생겼다. 야간 간호사가 담배 피우던 김씨와 또다시 다툰 모양이었다. 보호자도 한 통속으로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나를 쳐다보던 레지던트 선생님은 서부 사나이 쟝고를 이제는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손수 병실로 올라갔다.
내과 인턴을 마치고 몇 달 지난 후, 김씨와 김씨 아내를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만났다. 역시 먼저 알아본 김씨 아내가 인사했다. 휠체어에 앉은 시인 김씨 몰골은 말이 아니어서, 그사이 몰라보게 살이 빠져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두렁은 깊은 우물처럼 움푹 패어졌다. 환자복이 헐렁하여 바람이 쉽게 들락이는 것이 죽음이 목전에 다가와 휠체어를 함께 타고 때를 기다리는 듯.
김씨 아내는 예의 그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퇴원했다가 집에서 피멍이 터져 며칠 전에 다시 입원했다고 말했다.
"아직도 담배 피우세요?"
살이 빠져 주름진 얼굴이 만들어내는 미소가 기묘했다. 마치 산맥 같아 보이기도 하고 파도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의식적으로 미소가 만들어졌는데 힘이 없어 중간에 멈추어지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그가 말했다.
"죽어도 못 끊겠어요. 죽어두요--."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면 남편하고 싶은 대로 해주고 싶다던 김씨 아내가 동조한다는 듯이 고개를 조용히 끄떡였다.
죽어도 못 끊겠다는 담배. 죽어도 죽어도--.
가뭄 속에 서서 말라 비틀어져 가는 나무처럼 죽어가고 있는 김씨 입에서 흘러나오는 '죽어도 끊지 못하겠다는 말'이 철학적으로 들렸다.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사슬, 죽어도 태양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그 운명의 서글픈 굴레. 그는 담배에 파멸될 수 있지만 결코 패배 당할 수 없다는 기묘한 논리를 따르는 고집스러운 시인. 혹시 공초 선생을 따르던 수제자는 아니었는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김씨는 죽었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본관 건물을 들어서다가 상복 입은 김씨 아내와 가족들을 보게 되었다. 손님들에게 접대하려는지 커다란 양은 냄비 그릇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 다가서서 이렇게 묻고 싶었다. "혹시 바깥어른 임종하실 때, 담배를 입에 물려달라고 하시지 않던가요?"
사실 아직 레지던트 선생님이 '서부의 총잡이, 쟝고' 운운하며 야단치신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어차피 죽음이 코앞에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죽어도 못 끊는 사람이라면 담배 따위가 아무런 문제가 아니리라. 그런 상황이라면 기쁘게 해주어야 하니, 담배를 끊으라는 이야기는 말기 암환자에게 부적절하다.
오늘 오 십을 한 달 남겨둔 환자는 나가기 전에 이렇게 물었다. 유난히 진땀을 많이 흘렸다.
"담배를 끊어야 되겠죠?"
대답은 당연히 '환자 분 마음대로 하세요, 좋으실 대로요'였다. 이제는 담배가 짧아질 대로 짧아진 남은 수명을 더 이상 단축시키지는 않는다. 다시 생각하니 그때 시인의 일이 무의식 속에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담배와 몇십 년의 수명을 맞바꾼 오늘의 환자. 이미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는 절벽을 향해 내달리고 이제 몇 달 후면 곤두박질 친다.
임종을 맞이할 때 그렇게 사랑했던 담배를 증오하지 마시기를.
그것은 스스로 만든 일이지 담배가 만든 것은 아닐 테니까.
뿌린 대로 거두리라, 그리고 의사도 도와줄 수 없는 서글픈 인과응보.
십대의 풍경 - 임현담
직업상 흉부 X Ray 사진을 꽤나 많이 본다. 한 해에 몇 명 정도의 가슴 사진을 보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지금처럼 정기검진의 계절 동안은 엄청난 숫자의 가슴-흉부를 단기간에 들여다봐야 한다.
어제 저녁과 오늘 오전 사이에도 1천100명의 사진을 보았다. 부근의 고등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사진이었다. 사진은 이름이 써있거나 나이가 적혀져 있지 않아 소속 단체 이외에는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일을 시작한지 제법 되어 X-Ray 사진 한 장으로 나이를 대충 짐작하는 일이 가능하다. 이번처럼 집단검진인 경우에는 대부분이 십 대지만 일반 직장에서의 사진은 연령층이 각양각색이기에 나이를 짐작하는데 좋은 경험이 된다. 아무리 틀려도 한 5년 정도의 편차를 가지고 연령을 짐작이 가능하다. 짬밥 수 때문이라고나 할까.
십 대들의 흉부를 들여다보는 일은 매우 즐겁다. 10세 이하의 아이들은 성장기라 반쯤 끓는 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안정감이 없어 보이는 반면, 사춘기를 지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는 이 나이는, 5월 봄날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하여 10대의 사진은 내게는 차라리 한 폭의 풍경이다.
아직 혹사되지 않아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심장이랄지, 심장에서 뻗어 나가고 들어가는 깨끗한 폐혈관들은 인체에 대한 감동과 경외심까지 느끼게 만든다. 성인에게서 나타나는 오랜 흡연으로 인해 지저분하게 보이는 기관지나, 노화 현상을 거듭하는 흉추와 늑골과 쇄골 등등의 소견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으니, 때로는 사진 한 장이 청량감을 던져준다.
그러나 가끔 섞여 있는 선생님들의 사진은 그들이 살아온 연륜만큼, 그리고 그가 즐긴 기호식품이나 환경만큼 혼탁하다. 담배를 피워 기관지는 얼마나 상했는지, 혈압을 올리며 흥분한 탓에 심장은 또 얼마나 혹사되었는지, 분필가루, 공해에 얼마나 많이 노출되었는지, 한 장에 사진에 그간의 살림살이 정보가 축적되어 있다. 10대 아이들의 사진 사이에 가끔 섞여 있는 선생님의 사진을 구분해내는 일은 잘 자라는 화초 밭에서 잡초를 찾는 일만큼 쉽다.
집단검진에서 병이 제일 많은 단체는 아파트 관리인들이다. 분진이 많은 공장 근로자보다 심하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요란한 폐결핵의 흔적, 늑막염이 지나간 자리, 심장비대증, 폐문부 종대, 기관지염, 기관지확장증, 천식 등등.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살아왔던 과정이 평이하지 않음을 말한다. 공장, 공사장 그리고 지저분한 막장 인생을 지나 왔을까. 병이 걸리고 싶어 걸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얼마나 힘든 인생의 바닥과 질병 사이를 헤쳐 왔는지, 그들 사진에서는 삶의 역전 용사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오늘 고등학생 사진에서는 1천명 중 10여명에서 질병이 발견되었다. 0.1퍼센트 정도인 셈이다. 늑막염, 기관지염, 척추(흉추)측만증처럼 생명과는 무관한 질환이어서 다행이다. 10대는 아름답지만 부모의 경제적 도움 없이는 스스로 자라지 못한다. 그들의 암이나 종양 같은 심각한 질환은 가족 모두의 살림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니 정말 다행인 셈이다. 가끔 장년층에서 나타나는 폐의 커다란 덩어리에서는 죽음의 임박한 환자들과 그들 가족의 서글픔이 눈에 들어온다.
생로병사는 진시황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흑백의 음영으로 만들어진 사진을 들여다보면 생로병사의 참 많은 이야기가 도사리고 있다.
저수지의 지킴이들 -성석제
방학식을 하던 날, 저수지가 있는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따로 모여 선생님에게 훈시를 들어야 했다. "너희들 이번 방학에 못에 갔다가 걸리면 몽땅 퇴학이야. 선생님이 매일 올라가 볼 거니까 절대 못 가에 얼씬거리지도 마라."
우리는 초등학교에 퇴학 제도가 없다는 걸 입학 전부터 벌써 알고 있었다.
또 미안하게도 입학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게 있었는데 여름방학 동안 한 번도 선생님이 못에 올라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튿날부터 작당을 해서 들마루를 들고 개구리처럼 와글거리며 저수지로 향했다. 저수지에는 크나큰 물뱀으로 화신한 지킴이가 살고, 달밤이면 물귀신이 허연 머리를 풀고 '반딧불 좇아서 즐긴다'는 노래를 부르며, 전쟁 때 갖다 버린 포탄이 바닥에 득시글거린다고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우리 자신이 물귀신인 듯, 지킴이인 듯, 노련한 포탄인 양 들마루를 저수지에 띄워 놓고 여름방학 내내 거기서 살았다.
헤엄 못 치는 아이들은 들마루에 앉히고 헤엄치다 지치면 들마루에서 한잠 자고 물에 띄워 놓은 수박이며 참외를 건져 먹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흰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 것이다.
선생님을 보자마자 아이들은 놀란 개구리처럼 물 속으로 풍당퐁당 뛰어들었는데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나는 고스란히 노출될 위기에 처했다. 아이들은 물 속에서 고개만 내민 개구리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야, 이 놈들아. 내가 벌써 다 봤다. 당장 나오지 못해!" 선생님은 저수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쳤다.
개구리들은 들마루를 떠밀어 선생님 계신 반대쪽으로 몰아갔다.
"하하, 요놈들 봐라." 선생님은 거센 콧김을 몰아쉬며 자전거를 몰아 반대쪽에 이르러 간첩 생포를 눈앞에 둔 대대장처럼 의기양양하게 고함을 쳤다. "이리 와도 소용없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순순히 손들고 나와라."
가짜 개구리들은 들마루를 떠밀어 다시 반대쪽으로 갔다. 선생님은 번개처럼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수첩을 꺼내 이름을 적을 준비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반대쪽으로 들마루를 끌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다 하루 해가 저물고 새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됐다. 개구리들도 물 밖으로 나와 각자 팬티와 신발을 집어들고 집으로 도망쳤다.
이상한 건 그 때 들마루를 타고 놀았던 아이들 가운데 물귀신에 잡혀 먹힌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생각하면 아이들이 아이들의 구명조끼였고 튜브였고 구명선이며 지킴이였으니까. 그 선생님, 아직도 저수지에서 아이들을 호령하고 계실까.
불안 -도종환
칸나꽃 빛깔 같던 여름의 열정이 아직도 화단 구석엔 짙기만 한데 벌써 가을바람이 잎새들을 흔든다. 세월은 바람처럼 아무 것에도 막힘이 없이 흘러간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의 흐름이 이처럼 살갗에 와 닿을 때면 까닭 없이 미래에 대한 불안 같은 것이 솟곤 한다.
늙음과 병듬과 죽음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 것인가. 피어서 시들지 않는 꽃은 없고 지금 살아 있는 모습으로 영원히 죽지 않거나 변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스무 살 무렵에는 삼십 살이 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는데 어느새 사십대에 들어서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육십 살이 되어서 인생의 큰 고비를 넘는구나 생각하며 되돌아보는 나이 오십은 안타깝게 보낸 후회의 나날이었는데 젊어서 생각하는 나이 오십은 아득한 불안으로 바라보게 되는 나이이다. 그렇게 살아보지 않은 나이에 대한 두려움과 살아 본 나날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이어지는 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늙음과 죽음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공연한 불안감을 갖게 하는 것이 앞날에 대한 생각이다.
그럴 때면 오늘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라고 불경에서는 가르친다. 오늘의 나의 삶이 미래의 나의 삶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하루를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땀흘리며 살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아 오늘에 부끄러움이 없이 사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늘의 나가 곧 미래의 나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내가 어떤 벗과 함께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한다.
내 마음에 맞고 그도 나와 함께 떨어질 수 없는 벗의 모습은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의 반영이요 그를 보면 나의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삶이 의롭고 삿되지 않으며 자신감을 가질만 하면 나 또한 내 삶에 믿음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지금 그런 벗들과 함께 있다면 당신의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라고 불경에서는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께 굳건히 갈 수 있는 벗이 아니라면 이 가을 지금의 삶을 떠나 그런 진정한 벗을 찾아 나서야 한다. 내가 지금 어리석은 벗과 함께 가고 있다면 당신은 혼자서 가기를 선택하는 게 좋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숫타니파아타의 비유처럼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혼자 가야 한다. 그러면 내 외로움, 내 당당함에 맞는 새로운 벗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용기가 있다면 오늘 하루의 삶이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다가올 하루하루의 삶 역시 불안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무소유 - 법정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이름난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스레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있는 생물이라곤 나하고 그 애들 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슨가 하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이상으로 실내온도를 높이곤 했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 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개인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 물소리에 어울려 숲 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와 안타까와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착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의 유행기)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못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난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쳐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난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을 듯 홀가분한 해방감! 삼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 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기형도 시인의 편지글 모음
편지 1
천천히 걸었다. 서울대에서 신림동 사거리 늦가을의 벌판을 지나 어느 야트막한 축대와 이태리 풍의 가옥의 베란다에 놓인 맨드라미 화분과, 그리고 나는 더욱 천천히 걸어 왔다. 90분간의 긴 노정. 이곳은 신림사거리 커피숍 '럭스' 그리고 '예스터데이'. 나는 죽은 것처럼 조용히 걸었다. 내일이면 네가 상경하리라. 그리고 며칠 후 귀대하여 나의 이 파충류 껍질처럼 팟팟 부스러지는 나의 죽음을 알게되리라. 펄헵스 러브. 오, 늦가을의 가난. 무엇하나 할 수 없는 메마른 대기. 그렇다. 나는 죽어 있었다. 감상과 감성의 차이는 어디쯤일까. 무수히 젖어 있다. 내 생은 온통 압지처럼 어딘가 빨려 들어가는 것인가.
요즈음은 살아서 걸어다니는 뭇 인간들을 하나의 외경심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나의 눈의 고요한 침잠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혐오할 뿐이다. 나의 문학과 생활과 시간 속을 조용히 관통하는 기류. 계절은 우리에게 변화와 적응과 또한 그 환멸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환멸 또한 소중한 까닭은 우리의 부질없는 희망들 때문이다. 겨울은 올 것인가. 자네가 싫어하는 릴케 식 산문, 모든 세기말 데카당스의 미학적 예언자의 소비성 언어. 지극히 불건전한 릴케, 도스토예프스키를 다시 보고 있다. 그의 심리학과 리얼리즘은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언어 역시 건강하지 못하다. 믿음은 값진 것이다. 오 내 친구.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의 형이상학이나 관념들은 얼마나 사소한 고통이나 굶주림, 불만에서 출생하여 지극히 애매하고 신비한 언어로 치장되는 것이냐. 형이하학적 만족, 그것이 진정한 인간들의 구원이다. 예수가 죽은 까닭은 형이상학을 거부했던 예루살렘의 가난 때문이다. 무릇 형이상학이란 여유계층의 레저이거나 하학적으로 압제자인 사람들의 아편일 뿐이다. 이것은 삶과 문학과의 사이에도 엄연히 공존한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닌 나의 현실, 그렇다, 모든 욕망 때문이다. 나의 욕망은 너무도 화려하다. 거리는 향락과 더러운 슬픔 따위로 어지러워 있다. 우리가 그곳에 섞여 숨쉬며 믿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모든 형식의 압제에서 풀려날 것. 자네의 진정한 참회와 노력을 청구한다. 자신에게 솔직해질 것. 특히 집착하지 말 것. 초연의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스스로 건강해 질 것. 열심히 쓰라. 우리가 문학으로 패배한다면 우리를 치유하는 심리요법으로서의 구원은 문학뿐이다. 모든 통곡들이 거리에서 음산한 하늘로 인다.
1982년 10월 25일
추신 : 레오나르드 코헨을 들으면서.
편지 2
안녕. 방금 심각한 절망을 겪고난 후 필연적으로 파생하는 '잠' 속에 도피한 후 깨어났는데 웬일인지 오늘의 '잠'은 나에게 손톱만큼한 구원의 가능성조차 제공해 주지 않아 더욱 더 절망에 빠져 이번 절망의 심각성을 재고하다가 그 지겨운 집착에 다시 배가된 절망을-- 하다가 자네의 편지를 받았다. 네잎 클로바 고마웠다.
요즘엔 오전엔 대개 잠을 자고 오후엔 이빨 닦고 세수, 머리감고 옷 입고 대개 안양엘 가. 승현이가 휴가중이고 그가 날 사랑하는가 보아. 신춘용 소설 쓰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큰 힘이 되고 있어. 원고 교정이나 구성, 당위성의 헛점 등을 집어주고 있어. 오늘쯤 탈고를 끝냈겠지. 그리고 안양지하상가에서 88올림픽 사격장엘 가서 사격을 하곤 해. 카라멜 따먹기. 그리고 당구를 쳐. 음, 그리고 신축 이전한 '안양'다방이나 '샘'다방에 가서 빈털털이 될 때까지 차를 마시고 10시 30분쯤 103-1을 타고 집에 와. 비가 오는 날이 많았고 무력감을 느끼지도 못할만큼의 한심한 무력감. 집에 와서 혼자 저녁 차려먹고 독서를 해. 신문을 읽고 편지가 와 있으면 꼭 즉시 답장을 쓰고 새벽 2시쯤 잠을 자.
꿈도 요즘들어 부쩍 늘었어. 어떤 날은 하루 3번이나 가위 눌린 꿈도 꾸었어. 한 번인가 크게 비명을 지른 적도 있어. 나답지 않게. 예비군 훈련 끝내고 집에 와서 그날 부로 입술 양끝단이 크게 부르터 있다. 이제 얘기할께(물먹고 왔다). 신춘용 소설은 일 주일 전에 완전 포기했고 시는 오늘 잠정적 포기. 원고지에 옮겨보다가 서글픈 생각이 들어 왜 그런가 생각했더니 한마디로 의욕이 완전히 나가리되어 버렸어. 처참한 기분이다. 그만큼 내 욕망과 수준에 대해 자가당착에 빠져버린 꼴이지.
어쩌면 네가 지적한 나의 나르시시즘의 근거가 묘하게도 델리키트한 문학적 우월감에 근거를 두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큰 충격이다. 이번 여파는 심각할 것 같아. 욕망이 거세당한 인간의 필연적 도피가 매저키즘이라지만 나의 의존적 절대가 결코 외부에 존재하거나 설령 존재하더라도 나의 시야에 포착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생각이 마지막 오기처럼 잔존하므로 참혹한 아나키즘에 걷잡을 수 없이 말려들어. 자네의 소설 축하한다. 이제 내가 할 일을, 할 일은 없다. 신춘은 거의 유보. 안녕. 피노키오. 그럼 또.
1982년 11월 14일
추신 : 설전은 해보나마나야. 넌 날 만나면 거의 한마디도 할 수 없을 거야.
편지 3
우선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요즘은 병원엘 다니고 있다. 나의 건강은 심각한 사태로 악화되었다. 파스칼 자르뎅은 모든 사람은 슬픔 때문에 죽는다고 했지만 그 슬픔의 근원은 사실상 유물론적인 것에 기인한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네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소변 검사시에 다량의 백혈구(파괴된 것)가 검출되었다. MG주사를 맞고있다. 우선 춥다. 방안은 시베리아 벌판 같고 잠을 잘 때 나는 두꺼운 파카를 입고 잔다. 아침에 일어나면 몸 한 부근에 얼음을 박아놓은 듯하다. 또 오한과 복통. 놀라지 말라. 내 친구, 준. 너에게만은 사실적으로 얘기하는 게 좋겠지. 백혈병 초기증상.
내가 병원에 들어설 때 갑자기 환각적으로 한 사내가 떠올랐다. 내 소설의 주인공 승후와 중2때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죽음의 어두운 등을 보이고 사라진 급우 김재형. 이름까지도 생생히 기억하는 이 놀라운 예감 ! 이쯤되면 너도 우울하냐? 아직까지 내가 문장으로 너를 속일 수 있음을 기뻐한다. 안 속았다고? 약간은 놀랐겠지. 그리고 두근거렸지. 요즈음은 이러한 주술적 자살을 운운거리지 않고는 살수 없을 정도로 나는 염세주의의 '이즘' 자체까지도 염세하는 '그것'이 되어 있다. 주체의 완벽한 객관화. 하여간 이러한 장난들이 내 무료한-포도밭 묘지 같은-생을 긴장시켜 준다면 너는 기꺼이 나의 철학적 가사를 방조해도 좋으리라.
네 편지를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적으로 읽었다. 이건 정말 믿어도 된다. 단 눈물만 빼고. '형'의 이야기는 너무나 비과학적이어서, 너는 그 비합리성에 묘한 선험적의미로서 정당화시키겠지만 그것은 소극적 도피이다. 하기야 어떤 환상이든 주체의 주관적 역동인이 된다면야. 석제가 15일(내일)부터 휴가랜다. 내일 나는 처음 만나겠다고. 영광이 되길 바란다고. 전화하라고. 그와 나는 요즘 실존철학에 대해 얘기한 바, 그는 너무도 철학을 조발거려 조금 산만하다. 그리고 뻔한 게 크리스마스 함께 지내자 할텐데. 안양파(특히 윤승훈의 형도 독점)와도 잠정적 약속을 해놨으니 이를 어째? 네가 적당한 답을 해주길 바란다.
난 요즈음 조병준이 말은 아주 잘듣기로 했다. 기쁘자? 집안일이 아주 바빠. 돼지의 난산 등. 아 정말 완벽한 형이하학자란다. 안녕. 답장 빨리 써. 형도.
1982년 12월 15일
추신 : 너의 당선을 확신, 확언하며.
편지 4
준(처음이지, 아마 내가 자네의 이름을 첫머리에 쓴 것은). 내가 다소 격앙된 심정을 가지고 너에게 이 못난 엽서를 띄움을 용서해 주길 바란다. 자네는 물론 내가 논리주의자나 형식주의자 심지어 형이상학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난 주의자와는 너무도 관계가 멀어. 처음으로 밤눈 뿌린 소하리 신작로 길 위에 찍힌 발자욱이나 얼음이 풀리는 한강 기슭에 목이 꺾인 강아지풀을 성에 낀 창 밖으로 바라볼 때 그 눈물겨운 종이해라든가 아니면 속물 아니면 조금 지성인이라면 모두 싫증내는 멜라니 샤프카의 '더 새디스트 씽'을 들으며 하릴없는 슬픔에 젖는 깔대기 종이같이 허약한, 참으로 선천적으로 못난, 아니면 후천적으로 수동적으로 길들여진 유약한 사내쯤 된다는 것을 자네도 내 친구라면 알고 있겠지.
네게 엽서를 아침에 띄우고 그래도 남아있는 못다한 말들 때문에 삼단요처럼 자꾸만 접히는 눈꺼풀을 캐기면서 진정으로 서러운 느낌을 자네께 쓴다. 석재를 만났다. 봉희형도 만나 당구를 4시간 쳤다. 석재녀석이 자꾸 가라고 하는 걸 뿌리치고 독산동(그 살벌한 이름을) 버스 정류소에서 12시 02분에 택시를 타고 거금 천 원을 뿌리치고 집에 와서 홍당무 한 개를 씹으며 편질 쓴다.
나는 지금 슬픔에 잠겨있다. 그러나 슬픔이, 가난이 뭔지 모르는 사람도 있단다. 안다면 미학적이거나 냉정함을 가장한 그것! 네 말에 의하면 허영적 감성!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자꾸만 목이 조이는 것 같아. 목도리를 하고 가서 목도리 탓이라고 돌려 버렸지만 그러나 가난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래 가난이다. 오해치 말도록. 전번 신림동에서의 가난과는 다른. 가난에 대해선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오늘의 가난은 본질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어눌하고 비냄새 가득한 비닐 같은 추상적 가난의 공감대가 없다는 뜻이다. 너와 내가 같다면 우리는 가난을 호주머니 속에 접어두거나 장롱 밑에 쑤셔박지만 가끔 이삿짐을 꾸릴 때마다 딸려 나오는 낡은 사진 같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가난을 모르는 사람들은 가난을 만날 뿐이다. 그리고 기행할 뿐이다.
갑자기 자네(자네라고 부를 때마다 감정이 이성적으로 되어 참 편하다)가 보고 싶다. 자네가 뭔데? 아무 것도 아닌데. 아니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것인 데. 사실 건강이 좋질 않다. 날 만나면 좀 업어주렴. 책은 다 읽었니? 홍영철의 그것은 불가지론이다. 즉 훗서얼의 현상학, 그러나 본질을 알 수 없는 현상에 괄호를 묶어 본질은 다만 유보하는 것. 어제 엽서를 읽고 편지를 썼다면 또 한 통을 쓰렴.
난 네 편지 읽을 때가 제일 기쁘단다. 오늘은 종일 네게 아부만 하는구나. 백만원 타면 시집이나 몇 권 사 주렴. 형도.
1982년 12월 16일
추신 : 올라 올 때 내 엽서 시간별로 복사해 갖고 와 줘. 네 장씩 한 종이에. 읽고 싶다. 갑자기. 미안.
편지 5
안녕 준. 오랜만이군. 피아노 진도는 어떨런지. 전형적인 엽서, 서신으로 바야흐로 접어들은 기분일세. 먼저 상현 졸업식에 우종과 함께 갔었네만 그는 오지 않았네. 우종과 '캠퍼스' 에서 차 한잔하고 헤어졌네. 아주 추운 날이었지 아마. 우종은 두꺼운 러시안 외투를 입고 있었지만 그 역시 추운 표정이었다고 기억하네. 복학수속을 했네. 놀라지 말게. 등록금이 57만원일세. 횔더린의 히페리온을 읽고 있어.
나는 다시 출발할걸세. 나는 내 시의 주관을 어렴풋이 감지했네. 나는 그것을 감지함을 감동적인 떨림으로 간직함과 동시에 엄청난 비애를 느끼네. 2월 한 달은 주로 뒤늦은 사회학 공부를 통하여 문예사조를 재정리할 수 있었네. 문학사조는 크게 고전주의의 산문시대와 낭만주의의 운문정신의 변형이라고 생각되네.
정신과 물질, 유한과 무한, 이성과 감성의 복잡한 미궁에서 뿌려지는 빛의 명멸들. 지드의 '배덕자'와 로렌스를 다시 접하게 되었지. 지드는 주인공 미셀을 통하여 (히페리온과 그가 맥을 잇고 있음을 알고 놀랐네) '양피가죽 위에 쓰여진 인쇄를 벗겨내어 나타나는 무늬'를 발견하듯 자연에서 '생명'을 보게 되는 거지. 우리들의 감동이란 얼마나 주관적인 것일까. 문제는 베르그송 식의 '직관'적 마찰이라고 생각하지. 나는 문학을 계몽주의에 입각한 낭만주의라는 기묘한 두 개의 적성층위를 결합하여 부르기로 했네. 당분간은 변하지 않을 것 같군 그래. 하기야 어떠한 개념의 폭을 확대하다 보면 그것의 의미에 포함되지 않을 사상이 어디 있겠느냐. 따라서 언어 한 개와 온 우주는 대응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인식주관이 뒤틀어질 수 있다, 그것이 자연과 교감하는 혼일 임을 주장하여 노장을 강조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는 모든 언어의 폭을 제한하며 그것을 질서라고 부른다고 생각하네. 종진에게 '시도' 20집 받고 짤막한 촌평을 보냈네. 영웅 행자에게 편지 보냈는지. 도움은 스스로 찾아지니만큼 연락해 주게. 김종훈 병장님께 안부 전하고 자네와 마찬가지겠지만 '시간의 인위적 구분이 없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질문해 주게.
갑자기 봄이 서러워 짐은 왜일까. 미쳤네.
1983년 2월 27일
편지 6
안녕. 반갑다. 추운 날이었다. 내가 너무 일찍 요즈음을 봄이라고 단정지은 것이 잘못이었다. 예비군훈련 마치고 돌아와서 답장을 쓰고 있다. 복학을 드디어 했다. 월요일 부터 강의가 있다. 학교 다니기 싫어질 것 같다. 그냥 그 긴 현수막 등과 눈에서 살기가 도는 신입생들-자세히 보면 그 살기는 얼마나 경박한 것인지-과 재학생들. 문제는 나의 유리관 내지 가치관에 관한 규정-파생행위가 퍽 나를 괴롭히리라. 어차피 각오하고 과에 들어간 만큼. 스스로 쉽게 패를 써버린 만큼.
그간 영화 '안개마을'-익명의 섬-을 보았다. 각본 구조의 불가피한 취약성과 영상의 심리묘사의 한계성(결국 정윤희가 나레이터로 나오는데)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면 음악의 상징적 반복과(묘한 본능과 죽음의 율동을 느끼게 하는 목관악기) 정일성 촬영의 놀랄만한 기법('나자리노' '캣피플'의 환상적 터치 같은). 몇일 동안 학교에서 그냥 희희낙낙 떠들고 불쾌불쾌하다보니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그래서 외롭다. 너는 무슨 편지를 그렇게 했느냐. 무엇을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야. 따라서 어떠한 지식이나 논리, 체계, 사고분야 등의 인식대상으로서의 학문이 객관적 탈취가 그 목적이라면 그 인식의 해석으로 빚어지는 개인간의 편차, 따라서 상대주의적 만남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들의 개성과 다양한 이서, 감성의 혼입을 부여한다는 것이야. 말이 자꾸 겉도는데 그 이유는 너도 느끼겠지만 나의 부끄러움이나 너의 과감함을 정면으로 애기하기엔 그만큼 열린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뜻이겠지.
다른 얘기 '지금 없는, 남는 것'은 없어 있다면 그 노력은 개념의 확장 혹은 파생적 변형을 요구하는 것 밖에는 '찾아본다'라기 보다는 '선별하여' 분류 그 이후의 새로운 개념만의 부여일 것이야. 또 한가지 '시간개념의 인위적 구분이 없다면' 우선 논리적으로 자연적 구분만 존재하겠지. 그러나 자연적 구분(일출 등)의 세분화 조직화가 결여되어 있음으로 해서 그러한 자연적 시간은 공간화되는 즉 공간의 하층구조로 전락하겠지. 비가 오던 어떤 날의 해질 무렵 등등의 모든 기억은 비슷한 유형으로 몰려가고 모든 예감이나 확률성은 신비화되어 '갑자기'영감처럼 들이닥칠 것이며 '사랑'은 이미 그 부속성인 '축적'의 견고성을 잃게 되어 그것은 사랑의 가장 절대화된 동일화로 이름과 동시에 가장 위험한 허무로 빠져들 건가. 인위란 억압이며 문화이고 아, 기침, 감기, 욕망 그리고 허물어져.
1983년 3월 6일
편지 7
준아. 형광등 불빛을 받으며 엎드려 쓴다. 너에게. 건넌방에선 세든 30대 중년 아주머니와 아이들, 아이들 꾸중하는 소리. 멀리서 교회의 차임벨 소리, 끓어진다. 다시 들린다. 아무도 없는 빈집과 무서운 공포처럼 엄습해오는 적요. 부엌 쪽에서 쥐가 냄비를 챙기는 소리. 가증스럽게도 이럴 때 나는 신을 생각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 아버지 다 내려가시고 TV를 볼까하다가 그만 둔다. 어제부터 완벽한 혼자이다. 담배를 껐다. 자꾸만 어디선가 문이 닫히거나 혹은 열리는 소리가 깜짝깜짝 나의 의식을 세게 친다. 사람들. 복학수속이 완전히 끝났다. 수강신청 변경원까지 마쳤다.
오늘은 열쇠를 하나 샀다. 어쩌면 그렇게 신기하게 열리고 잠기는지. 내 의식과 무의식을 잠가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또다시 지겹게도 엘리어트를 읽는다. 복학생은 참 피곤하였다. 전공공부에 충실하기로 한다. 원서 읽기도 열심히 결심해본다. 그것이 쉽게 재학생으로 섞여버리는 유일한 방법일 거라고 판단하였다. 불안하다. 누구를 만나고 다방에 가서 율무차를 마시고 마지못해 흡연을 하고 술을 건네고 당구를 치든지 결국은 전자오락실이다. 버스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흔들린다. 걸어온다. 집, 빈 집, 혹은 어머니가 계신 집. 발을 닦기. 엄지 발가락부터 하나 하나. 기타를 잡고 튜닝을 한다. 불안하다. 기타를 놓는다. 나의 문학은 영원히 튜닝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이 청준의 조율사처럼, 너무나 멀다. 나는 가까이 있다. 남의 시들을 읽고 욕설을 한다. 승용차 한 대가 다가온다. 등뒤에서 나는 빛의 어망에 걸린다. 타협하자. 어려운 일.
1983년 3월 17일
편지 8
가스라이터 한 개를 주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갖고 있던 물건인듯.
옅은 코발트 빛이다.바슐라르가 그랬던가. 촛불은 '타는 물'이라고. 가스라이터는 타는 공기쯤 될까. 윤전기에서 손을 떼면 삽시간에 불은 없어진다.
우리들 사람들의 불이 점화하는 곳은 어디에 어느쯤 될 것인가. 시간과 상상쯤 될까.
승현이가 한번 문학실로 찾아왔었고 어제는 장장 네 시간쯤이나 페퍼포그와 유리의 파편, 호흡장애 등이 있었고 얼결에 본의 아니게 석제도 내 기억 속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태연히 문학의 밤 행사를 가졌고 조세희 선생과의 대화가 있었고 바오밥나무와 장미의 어린 싹이 우리의 귓가에 머물렀었네.
내 마음을 과연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너도 알겠지만 난 좀 괴팍한 형식주의자여서 어떤 사고의 틀이나 감상의 공간이 주어지기 위한 내 주위의 여건에 심각한 알레르기를 느낀다.
이제 장례란 말은 쓰지 말기로 하자.
그 말이 주는 효용이나 기능 혹은 부수적인 느낌 같은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
어떤 관념의 놀이나 쓸데없는 사유 그 자체 내에 고여있는 휴지 같은 느낌.
그리고 서울엔 비가 많이 왔다.
1983년 8월 27일
편지 9
비가 내리고 있는 대학 정문을 들어설 때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나올 뻔하였다. 베를렌느의 시중에서 '비올롱'이라는 악기가 문득 생각이 났고 뜨거운 햇빛이 비닐처럼 드리워진 긴 담을 기억해 냈다. 여기는 학생회관 옆 간이휴게실이다. 너도 기억하겠지. 대학도서관의 검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앉아 있는 탁자 오른 편에는 대학병원이 있다. 맑은 날이면 환자들이 파자마차림으로 나와서 배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간의 경험들과 감각들을 기억했다. 여학생 서넛이 마구 뛰어갔다. 시간은 오후 한 시. 문득 종교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인가 터득한다는 것이 편리한 일일까. 하지만 나는 나의 습관들을 무시하기로 하였다.
이상하지, 비가 오는 날씨에는 모든 사물들이 검게 보인다. 철저한 감각론자는 아니지만 인간의 내면을 언제나 새로운 느낌으로 채우는 외면적 실체는 존재할 것 같다. 얼마 전에는 길거리에 뛰어 노는 작고 귀여운 애들을 보고 갑자기 네 생각이 났었다. 너를 생각하면 항상 무슨 구름생각이 나. 가끔씩은 약간의 생각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옆 좌석에서는 두 명의 사내가 역사를 얘기하고 있다. 기다림이란 얼마나 파괴적일까. 몇 개의 구름들이 지상으로 내려오기 위하여 얼마나 작은 몸들로 찢기워져서 후드득 떨어지는지. 비가 개인 숲으로 올라가 보면 좋겠다. 사랑은 서로의 그림자를 나눠 갖는 것일까.
1984년 4월 17일
편지 10
이상해. 요즘은 매일 맥주를 마시고 있다. 어제는 국문과 마광수 교수와 '장미빛인생'인가 하는데서 마셨다. 근우형이 나에게 성격 파탄자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이들은 나에게 왜 머리를 잘랐냐고 했다. 제임스 띵인가 아니면 마이클 잭스니스트냐고 했다. 나는 너무 중요한 동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도 중요해서 곧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오늘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오는데 갑자기 살기를 느꼈다.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이다.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소리를 지를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워져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쉬지 않았다. 손을 들어 심장 가까이 댔다. 미약한 울림이 쓸쓸하게 내 감각을 위로했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얼굴 가득히 땀이 흘렀다. 심장마비란 이런 것일까. 나는 신도림에 내려 콘크리트의자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부끄럼을 잘 타는 편이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슴은 곧 터질 것같이 팽팽한 풍선처럼 흔들렸다. 내 의식의 등유가 미친 듯이 출렁거렸다. 나는 아득히 내가 아는 이들의 얼굴을 생각하고 천천히 허공을 향해 호명했다. 말을 나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나는 흔들리는 연기처럼 수직으로 일어섰다.
편지 잘 받았다. 이 곳은 대학도서관. 네 친구는 아무도 읽지 않는 얇은 책처럼 작은 방 안에 꽂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일 것이다. 나는 요즘 항상 그것만을 생각한다. 모든 것은 믿을 수 없다. 기억도 그렇다.
1984년 6월 2일
편지 11
몇 개의 비극들을 떠올리고 혼자 빙그레 웃어 보았다. 쓴다, 너에게. 방금 수강신청을 끝냈다. 학부생활의 마지막 의무들 혹은 향유할 수 있는 청춘의 이름들을 나는 신중하고 깨끗하게 적어 넣었다. 이상하지, 나는 언제나 마지막을 겨냥하고 무엇인가를 집어던지지만 그것은 언제나 출발에 불과했으니, 마지막이 없다면 출발 또한 무슨 소용일 것인가. 너의 편지를 읽고 아직도 나에게 감동이 남아있음을 신에게 감사했다. 너의 그 문장들. 일부러 딱딱하게 기어가는 갑충류와 같던 너의 글씨들. 애정을 담되 그것을 객관적이고 필연적으로 보이게 하려 했던 문장의 어미들.
도서관에 왔다. 노트를 읽고 있었다. 학생들이 모두 제각기의 일들에 열중하고 있다. 일렬로 길게 늘어선 형광등 불빛들. 아나키즘의 막스 스트리너를 읽다가 갑자기 4층 로비로 나갔다. 총애하는 후배 김군-최근 알게 되었다-도 참고열람실에서 자리를 뜨고 없었다. 아름다운 굶주림의 빔!
다음 학기의 과목은 네 개 뿐이라 얼마나 기쁜지 모를 것이다. '국제정치', '한국 정치사상', '문예사조', '근대철학' 각 한 과목씩 적어 넣었다. 참 이상하구나. 사실상 나는 도서관에서 종종 답신을 쓰는 편이지만--. 갑자기 말테가 생각이 나서 해본 소리였단다. 그래, 나는 꿈꾸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한 번도 열려본 적이 없는 도어의 손잡이 어디쯤에 붉게 녹슬어가고 있는 볼트의 그것처럼. 내가 요즘 사실들을 믿는 이유는, 내 세계관의 비극성을 의미하고 의지를 신봉하는 이유는 순발력의 공간, 곧 외계관에 힘겨운 노력의 표징일 것이다. 아듀, 가스등 희미한 겨울 거리의 추억이여.
1984년 6월 13일
편지 12
오른쪽 팔목을 수술했다. 작은 종양이었는데 그것을 떼어냈다. 벌써 일주일째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대학병원 밖을 나와 소아재활원과 루스채플을 거쳐 청송대나 우중의 노천극장을 지나기도 한다. 폭양 뒤에 마치 전쟁과 같은 빗속을 지나 맑게 개인 저녁하늘의 신선함, 혹은 무거운 청어의 은빛과 검정빛의 칼날 같은 비늘, 그것을 연상시키는 구름들과 그 구름 위에서 빛나는 일몰의 아름다움을 너는 본 적이 있는 지 모르겠다. 요즈음은 온통 불명확한 것 투성이다. 나의 생, 혹은 문학, 진로, 학업, 관계, 사랑, 미래, 시간, 공간--. 모두가 알 수 없는 실체들로서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그 불명확한 것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어떠한 극복들을 내가 마주서야 할 때 나는 비틀거리는 층계 어디쯤에서 불현듯 위기감을 느낀다. 어떤 확실한 것, 즉 사소한 '확실함'이 하나라도 나에게 다가온다면 나는 요즈음의 전 생애를 그것에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 때문에 우울해 하곤 하였다. 편지 잘 받았다.
요즘은 랭보평전을 읽고 있다. 모든 신비주의와 신을 생각한다. 그리고 랭보와 릴케, 구체적으로 '두이노의 비가'를 연상해 보고 그들을 연관시켜 본다.
위대한 정신들이란 순수한 관념과 인간의 내면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신성에 있을 것이다. 이번 여름은 가장 위험한 경험들로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것이 예감이므로 나는 조금 안심할 수 있고 멀리서 보고 차라리 '기다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산에는 아마 7월 20일경 갈 것 같다. 내려가면 연락하마. 아직도 나는 작은 충격들만으로 충분히 그 곳의 추억들을 호출할 수 있다.
1984년 2월 7일
편지 13
오, 놀라와라 그대. 장미에게 얼음을 넣어주다니.
누가 내 끓는 영혼에 얼음 몇 조각을 넣어 줄 수 있다면.
여기는 예의 그 학생회관 간이 휴게소-비닐로 된 둥근 방갈로-그곳에 앉아 있다. 학생회관 잔디 앞에서 얼마 전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한국 대학생들과의 인터뷰가 있었다. 매미가 울고 있다. 곧이어 얇고 투명한 날개 몇 잎이 그의 죽음과 지난 여름의 잔해를 보여줄 것이다.
부산. 성미와 진혜도 잘 있겠지. 글은 많이 썼는지. 이제 곧 개강이니까 또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하겠군. 경신의 상경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입술에 부딪치는 부드러운 입맞춤이 되어 서울의 깊고 어두운 세계를 차갑게 씻어줄 수 있다면. 너무도 더운 여름이었다. 이 더위와 함께 우리들의 기나긴 사투, 인내심의 기록들은 당분간 우리들의 감각의 사료에 깊은 고통 혹은 긍지로 남게 되겠지. 기회가 닿으면 꼭 '송정'에 갔다오기 바란다. 그리고 그 인상을 나에게 알려주렴. 가능하면 안개가 끼고 바람이 험하게 부는 날이면 좋겠다. 물고기의 뼈, 그물에 걸린 해초의 눈들.
경신이의 텅 빈 우체함을 위하여 엽서를 띄우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여름의 기온 탓이라 돌리려 한다. 요즈음 레온 유리스의 '트리트니'를 읽고 있다. 아일랜드의 정치적 독립을 둘러싼 이야기인데 요즈음 한국 작가들의 수식어로 점철된 신택스의 얄팍함은 질책 받아야 한다고 느낀다.
좋은 글 많이 쓰렴. 첫째는 감상에 빠지지 말 것. 그것이 '낭만'과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하는 것은 상경한 후 '장미빛 인생'카페에서 얘기하자. 어둡다. 너무 밝아 눈이 부시기 때문이다. 꿈이란 현실과 작자의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경우의 불가결한 몽상이다. 불꽃은 위로만 솟아오르며 물줄기는 아래로만 떨어진다.
1984년 8월 10일
편지 14
두 통의 편지. 하나는 어떤 결의가 담긴 내용이고 또 하나는 그 부친 것인지 아름답고 힘 센 시 한편-맞지?-그 두 통을 받았다. '불꽃놀이'라는 시는 어떻게 해서 쓴 것인지. 혹시 전날 부친 그 편지를 쓰고 나서 그대가 '스스로 선택한 절망 속에서 스스로의 내부의 방의 모든 불을 끄고 촛불을 찾은 다음 어둠 속에서 불을 켜려고 성냥을 긋는 순간 시의 착상이 부대꼈는지도 모를 것' 같다.
첫번 편지를 받고 나서 나는 꽤 당황했었다. 그대의 결의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내가 그대에게 어떤 위로나 충고도 줄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예측뿐이었다. 왜냐하면 너도 그런 것들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고 또 그렇게 어렴풋이 혹은 명백히 절망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면 출구 또한 그렇게 어렴풋이 혹은 명백히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나의 확신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대는 나의 이와 같이 흐릿한 확신의 불을 켜주었다. 바로 '불꽃놀이'라는 경신의 '불'이 그것이다. 이것 봐, 벌써 여름이 지나갔다.
어제는 부산에 거대한 폭풍이 있었다고 했다. 나는 상상 속에 거대한 태풍의 나무를 생각했다. 그 바람으로 만든 둥글고 강철같은 이파리, 구름 사이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너였다. 너는 어둡고 세찬 바람 속에서 작고 가느다란 양초를 들고 있었다. 분명히 불꽃은 심지에 타고 있는 데 너는 자꾸만 성냥을 그어대고 있었다. 이것 봐, 성냥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중얼거렸다. 너는 그것을 듣지 못했다. 송도(성미)는 피해 없었는지 염려된다. 꼭 안부 전해라. 송정은 갔었는지 송정의 안개와 그물은 보았는지 진혜는 안녕한가. 어둡다. 이봐, 힘을 아껴봐. 난 벌써 잉크가 떨어지고 있다.
1984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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