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미시정치학에서 저항과 적대의 문제
--계급투쟁의 생체정치학을 위하여
1.전복적 사유의 전복?
푸코는, 다른 대부분의 경우에 그랬듯이, 한국에도 역시 ‘감금의 사상가‘로 왔다. 혹은 광기와 광인에 대한 낭만적 옹호자로, 그리하여 이성과 이성주의에 반대하는 ’반합리주의자‘로 왔다. 그러나 푸코에게 중요했던 것은 차라리 감금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동하는 근대적 권력이 바로 감옥에서 집약된 권력의 다이어그램과 동일하다는 것이었고, 그런만큼 감옥에 대한 그의 연구는, 이런 표현을 써도 좋다면, 비-감옥으로서 근대 사회에 대한 연구였던 셈이다.G. Deleuze, Foucault, Minuit, 1986, 권영숙/조형근 역, ?들뢰즈의 푸코?, 새길, 1995, 75쪽. 이후 인용문은 번역문을 그대로 따르지 않으며, 인용주는 처음 나올 때만 모두 명기하고, 그 위로는 책이름만으로(번역서의 경우는 번역된 책이름으로) 표시하겠다.
또한 ?광기의 역사?나 ?말과 사물? 등에서 푸코가 그려냈던 역사를 단순히 이성에 반하는 광기나 비이성을 단순히 이성에 대비하여 복권시키려는 것으로 보는 것만큼 성의없고 상투적인 이해는 없을 것이다. ?광기의 역사?를 통해 근대적 이성의 타자의 역사를 다루는 한편, ?말과 사물?을 통해 그 동일자의 역사를 그려내려 한 것이라는 그의 언급을M.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 Gallimard, 1966, 이광래 역, ?말과 사물?, 민음사, 1986, 22쪽
믿어도 좋다면, 소박하게 말해서 푸코는 근대적 이성의 경계를 그리려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 문화의 가장 깊은 심층을 드러내려는” 이 시도들을 통해 그는 “우리의 고요하고 부동적인 대지에 균열과 불안정과 틈새를 회복시키려고 한다.”같은 책, 22쪽
다시 말해 그는 현존하는 이성의 경계를 드러냄으로써 그 “외부를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로써 확고하고 불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그 경계를 가변화시키려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사유방식과 새로운 사고의 요소를 향해 이성을 ’개방’하려는 시도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를 행하는 그의 문제설정은 지극히 근본적이고 비판적이다. 고고학이라고 부르는 그의 연구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된 지식이나 사고방식을 역사적으로 형성된 지층으로 간주하며, 그 지층 안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할하고 특정한 언표를 배제하는 메카니즘을 드러낸다. 니체 식으로 말한다면 지식의 내부에 있는 권력의지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혹은 계보학이라고 부르는 그의 연구는 담론적인 것 뿐만 아니라 비담론적인 것을 포함하는 복합체--이를 그는 ‘배치’(dispositif)라고이 dispositif는 disposer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배열하다’, ‘배치하다’, ‘...을 하도록 준비시키다’ 등의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으며, 법률적으로는 ‘판결문’을, 군사적으로는 ‘부서’나 ‘배치’를, 기계에서는 ‘장치’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판결문처럼 그 대상에게 명령하고 조치하는 ‘담론적인 것’과 기계적인 내지 제도적인 장치처럼 ‘비담론적인 것’, ‘기계적인 것’을 동시에 포괄하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기계적인 것의 의미가 강한 ‘장치’라는 번역어(이규현 역, ?성의 역사? 1권)는 일면적이며, appareil (d'Etat)의 번역어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당하지 않다. 더우기 푸코는 자신의 권력 개념을 국가적인 권력 개념과 이론적으로, 방법론적으로 대비하고 있기에 이 양자는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차라리 ‘배치’라는 말이 더 적합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담론이나 제도, 건축적 형태, 결정, 법, 행정적 조치, 과학적 언표 등등의 요소들이 일정한 ‘계열을 이루며 배열되고 결합된 것’이란 의미에서, 그리고 그것이 ‘장치’처럼 기계적인(machinique) 요소를 포함하는 상대적으로 고정화된 것이란 점에서 그렇다. 이는 푸코 자신이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의 이질적인 복합체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한 점에 비추어볼 때 유효하다(미시정치학의 대상에 관한 소절에서 다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한편 들뢰즈/가타리가 사용한 agencement은 영토성과 관련된 지리적 구성요소가 강조되는데 비해, 푸코의 dispositif는 다양한 요소들이 고유한 방식으로 ‘계열화’되는 것이 강조되지만, 그 내용은 매우 유사하다(들뢰즈/가타리는 푸코에 대해서도 agencement로 이해한다). ‘배치’라는 번역어는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인 agencement의 번역어인 ‘배치’와 구별하되지 않는다는 난점이 있지만, 거의 비슷한 개념이란 점에서, 배치로 번역한다. 단 구별이 필요한 경우에는 원문을 병기하겠다.
부르는데--를, 그 발생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기원’을 드러내고 그 기원의 가치를 의문에 부치는 니체적인 방법으로써,푸코는 이를 ‘기원’을 찾고 기원으로 돌아가려는 방법과 구별하면서, 기원이란 말을 차라리 발생과 혈통이란 말로 대체한다. 즉 그가 보기에, “문제는 사건뜰을 구별하고 그 사건들이 속해있는 그물망을 식별하여 사건이 상호 간에 맞물려 서로서로를 낳게하는 계보를 재구성하는 것이다...[이럼으로써] 거기서 재발견되는 것은 사물들의 상이한 질서다.”(M. Foucault, "Nietzsche, genealogie, histoire", ?니체, 계보학, 역사?, 이광래, ?미셸 푸코?, 민음사, 333쪽) 계보학은 이러한 문제화방식을 통해 “이전에는 부동이라고 간주되었던 바를 혼동시키며, 동질적이라고 상상되었던 것의 이질성을 보여주며, 통일된 사고였던 것을 조각낸다.”(같은 책, 338쪽)
감옥이나 성적 배치를 통해 작용하는 권력관계를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고고학이나 계보학이 갖는 ‘전복적 사유’ 내지 근본적 비판으로서 성격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푸코가 계보학적 연구로 방향을 돌리면서 ‘고고학’에 대해 일정한 거리감을 갖게 되었던 시기에 그는 고고학이란 말을 ‘전복적 원리를 작동시키는 비판적 집합’이라고 부른다.(Foucault, L'Ordre du discours, Gallimard, 1971, 이정우 역, ?담론의 질서?, 새길, 1993, 46쪽)
그가 ‘전복’(renverssement)이란 원리를 자신의 연구를 위한 방법상의 요구 가운데 가장 앞서 제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같은 책, 41쪽
그런데 분석의 대상이나 방법, 심지어 그 문체에 이르기까지 일관되었던 이 전복적 사유는 그의 말년에 이르러 거대한 전환점을 통과한다. ?성의 역사? 1권 이후 7년만에 출간된 그 2, 3권은 고대 이래의 윤리적 실천의 양상을 분석대상으로 할 뿐 아니라, 자유로운 윤리적 실천이라는 일종의 ‘대안‘을 포함하는 것이었다.M. Foucault, L'Usage des plaisirs, Gallimard, 1984, 문경자, 신은경 역, ?성의 역사? 2권, 나남, 1990, ?서문?; "A propos de la genealogie de l'ethique", H. Dreyfus and P. Rabinow, Michel Foucault: Un parcours philosophique, Gallimard, 1984, , ?윤리학의 계보학에 대하여?, 서우석 역,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 나남, 1989 참조.
이는 서구 근대의 사유 내지 근대 사회의 전복을 꿈꾸던, 그의 거의 평생에 걸친 비판적 작업에 비추어 본다면 지극히 전면적이고 놀라운 변환이다. 전복적 사유의 전복. 이러한 전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드러난 사실이 보여주듯이 비판적 문제설정의 포기일까? 그렇다면 그 포기의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전환이 불편한 긴장을 포기하고 안이한 대체물로 옮겨가는 손쉬운 ‘전향’이 아니라, 그 진지함을 지속하면서 그 긴장과 위기 속에서 야기된 전환인 한, 그 전환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이유’라는 말보다는 오히려 ‘동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데, 우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푸코가 추구했던 전복적 사유의 개념적 곤란을, 그의 미시정치학적 전략을 궁지로 몰아간 아포리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라건대 그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선을 추가하는데 성공할 수 있다면, 그 아포리아는 푸코의 이전 작업--대부분의 작업인데--을 우리 나름대로 영유할 수 있게 해줄 소급적 작용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근대 비판의 문제설정
푸코를 ‘감금’의 사상가 내지 낭만적 반합리주의자로 간주하는 것만큼이나 일반적인 것은 ‘권력’의 사상가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푸코의 전 저작을 권력이론에 맞추어 재생산해낸다. 그러나 지난 20년 간의 자기 연구의 대상이 권력이 아니라 ‘주체’였다는 말년의 발언은 이러한 통념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우선 지난 20년 동안의 내 작업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말하고 싶다. 그것은 권력 현상의 분석도, 그러한 분석의 기초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우리 문화에서 인간이 [주체로] 되는 주체화(subjectivation)의 상이한 방식들의 역사를 생산하려고 했다...따라서 내 연구의 일반적 주제를 이루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주체다.”Foucault, "Deux essais sir le sujet et le pouvoir", Dreyfus/Rabinow, Michel Foucault: Un parcours philosophique, Gallimard, 1984, ?주체와 권력?,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 297쪽
물론 푸코 자신 역시 자기의 작업이 “권력 문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권력을 연결짓는 통념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한 이 발언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장 일반적인 통념이 될 정도로 유명한 푸코의 권력이론과 그것을 부인(!)하는 푸코의 발언 간의 대비와 간극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는 단지 푸코의 입장변경을 의미하는 것만도, 혹은 ‘주체화 방식’에 대한 연구로 요약되는 말년의 입장에 과거의 자기 연구를 싸안으려는 시도만도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권력의 계보학이나, 그 이전의 ‘담론의 고고학’, 나아가 윤리적 실천에 대한 연구가 공통으로 전제하고 있는 문제설정에 대한 언급이다. 이는 ‘권력‘을 비롯한 그의 모든 개념들이 작동하는 이론적 공간을 분명히 하는 것이며, 그 개념들의 위상학적 위치를 정의해주는 것이기에 중요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근대 비판의 문제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표상과 인식을 인간을 통해 파악하며, 지식 역시 그러한 인간이 획득하고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사고방식, 권력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의 특정 집단)이 획득하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근대적인 철학이나 정치학의 영역을 통해 공통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것을 요약하면 인간이라는 주체가 표상이든 지식이든 권력이든 소유할 수있고 그것을 이용하고 행사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이는 주체를 당연시된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주체철학‘이고, 인간을 그 모든 현상과 경험의 중심점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인간학‘이다.
반면 그의 연구는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당연시된 이 출발점과 중심점을--후설 식으로 말하자면--괄호치는 것이다. 그리고 차라리 그러한 당연시와 중심화가 어떻게 하여 나타났는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컨대 ?말과 사물?은 노동, 생명, 언어라는 유한성을, 동시에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객체성을 통해 근대적 에피스테메를 특정화하는 한편, 그러한 특징을 집약하고 있는 존재로서 인간이 어떻게 근대적 에피스테메의 중심에 서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칸트에게서 분명하게 보이듯이, 인간은 유한한 경험의 한가운데 서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초험적 조건을 보유함에 따라 스스로 자신의 유한성의 토대가 된다. 경험적-선험적 이중체로서 인간. 그리고 사유가 인간이란 이중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것은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 사이의 공간에서 다시 한번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이다. ‘독단적인 잠’이 아니라 ‘인간학적 잠’에.”?말과 사물?, 390쪽
근대적 사유의 저 인간학적 잠을 깨우려는 이런 시도를 그는 칸트의 전례에 따라 ‘비판’으로 이해하는 한, 그가 겨냥하고 있는 지점은 분명한 셈이다.
이제 그는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주체와 객체의 이중체로서 인간에서 벗어나 거꾸로 “인간을 주체화하는 상이한 방식들”에 주목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선 그는 특정한 담론 안에서 주체의 자리가 정의되는 방식을, 그리고 그 담론이 개인들로 하여금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정의해주는 방식을 분석하며, 그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하게 제약하는 규칙을 분석한다. 나아가 그는 특정한 형태로 사람들을 길들이고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끔 만드는 권력의 행사방식을 분석하며, 그 결과 개개인의 사람들이 어떻게 ‘주체’로 만들어지는지를 연구한다.
결국 푸코가 생각하는 ‘주체’라는 주제는, 개개인으로 하여금 특정한 질서의 틀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강제하고 길들이는 조건을 통해 그들을 특정한 형태의 ‘주체’로 변형시키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 조건으로서 ‘인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오히려 인식에 선행하는, 표상할 수 있는 것과 표상할 수 없는 것을 분할하고 재단하는 방식’이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분석되던 시기가 있었던 셈이고, 그와 달리 규율이나 감시, 특정한 구조의 감옥처럼, 담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조건들을 통해 개인에게 작용하는 권력이 중심적으로 분석되던 시기가 있었던 셈이다.
이는 ‘주체철학’의 문제설정을 크게 두가지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전복하려는 것이다. 첫째, 인식하고 사고하는 것은 주체가 하는 것이라는 근대적 명제를 전복한다. 반대로 개인들이 ‘주체’로서 사고하는 것은, 인식이나 사고가 그 위에서 행해지는 바의 조건들--이를 ‘담론’이라 부르든, ‘에피스테메’ 혹은 ‘지식’이라 부르든--속에서며, 지식이나 담론이 개인들을 특정하게 사고하고 판단하는 ‘주체’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주체가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주체로 하여금 (특정한 형태로) 사고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주체와 지식의 관계는 뒤바뀐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이것이 담론이론의 문제설정을 가능하게 한 것이며, 동시에 그 결과기도 하다.
둘째, 권력은 누군가, 즉 어떤 ‘주체’가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이라는 명제를 전복한다. 반대로 개인들이 특정한 형태의 ‘주체’로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거꾸로 그들을 특정한 형태로 행동하도록 길들이고 강제하는 권력--그것을 ‘규율권력’이라 부르든, ‘생체권력’이라 부르든--에 의한 것이란 것이다. 즉 권력이 개개인을 특정한 형태의 주체로 만들어낸다그가 무엇보다도 우선 권력을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는 이론 전체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권력을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재산(propriete)으로 보는 입장이, 권력현상 전체를 국가적 권력으로 환원하는, 자유주의와 맑스주의에 공통된 관점에 전제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로써 푸코와 맑스주의자들 간에 ‘유명한’ 논점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푸코 자신이 구별하지 못하고 뒤섞은 것이 있다. 그것은 ‘주체와 권력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정의되는 것을 ‘계급과 권력’, 계급투쟁이라는 차원에서 정의되는 것과 뒤섞어버린다는 점이다. 이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권력이 작동하는 계치와 교차하는 상이한 차원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 집단 간의 다양한 적대가 형성되는 차원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상이한 차원에서 정의되는 두 가지 권력 개념이 동일한 선상에서 대립되고, 서로 대체적인 관계에 있는 것처럼 된다.
풀란차스가 서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는 푸코의 권력이론에 대해, 그것이 계급투쟁과 국가적 권력을 무시하며(N. Poulantzas, L'Etat, Le pouvoir, le socialisme, PUF, 1978, 박병영 역, ?국가, 권력, 사회주의?, 백의, 1993, 57쪽), 결국은 파슨즈나 말리노프스키로 대표되는 기능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57, 87쪽). 다른 한편 그는 푸코 이론의 관계적 권력 개념을 긍정하며(186쪽), 일정한 유보 하에서 그의 분석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87-88쪽). 그러나 그는 푸코의 권력 개념이 정의되는 지반을, 그리고 두 가지 권력 개념이 작동하는 상이한 차원을 그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 여기서도 권력과 주체의 관계는 뒤바뀐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떤 물질성의 기반 위에서 주체가 형성되는지를 찾”는M. Foucault,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and Other Writings, 1972-1977, ed. by C. Gordon, Pantheon, 1980, 홍성민 역, ?권력, 왕의 머리베기와 훈육?, ?권력과 지식?, 나남, 1991, 129쪽.
것이다. 푸코는 그것을 권력이 어떻게 행사됨으로써 근대적 주체를 형성해내는가라는 문제로 제기한다. 돌아가 말하자면, 인간 개개인을 특정한 형태의 (사회-역사적으로 정의되는) 주체로 만들어내는 양식이란 차원에서 푸코의 권력개념은 작동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가 분석하려 한 대상은 바로 ‘주체’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윤리학적 문제설정 역시 근대 비판이라는 이러한 전반적 문제설정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그것은 (근대적인) 권력 자체의 전복을 포기한 전제 위에서, 근대적인 권력관계와 권력기술에서 개개인이 벗어나 새로운 양식의 주체를 스스로 구성해내는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그가 도덕 자체에서 가치, 규칙, 금기들의 체계로서 ‘행동 규약의 측면’과 도덕마다 상이한 자기 실천 방식으로서 ‘주체화 형태의 측면’을 구분하면서,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양자 사이에 최대한의 거리를 만들어내려고 시도할 때, 그리고 ‘규약 지향성 도덕‘에 대비해 ’윤리 지향성 도덕‘의 중요성을 역설할 때,?성의 역사?, 2권, 42-44쪽
나아가 근대의 극히 규약지향적인 도덕과 상이한 도덕이 이전에 실존했음을 그리스의 예를 통해 보여줄 때, 우리는 그 노력의 진지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욕망이라는 ’윤리적 실체‘를 법이라는 ’예속의 양식‘을 통해 규범화하는 근대의 도덕, 근대적 윤리학에 대한 계보학적 비판이다.?윤리학의 계보학에 대하여?, 334-341쪽 참조. 한편 푸코가 법이라는 예속화양식에서 벗어나려는 반면, 하버마스(J. Habermas)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대립과 그에 따른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법’이라는 매개영역을 통해 넘어서려고 한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Faktisitat und Geltung).
그런데 푸코가 새로이 주목하는 ‘주체화 양식‘이 어떤 시원적인 범주로서 주체를, 다시 말해 주체철학적 범주로서 주체를 다시 도입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권력에 의해 정의되는 바 주체로부터 이탈하려는, 이전같으면 ’저항‘이라고 표현했을 힘을 통해 ’자기에 대한 실천‘을 설명한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는 “주체란 없다. 다만 주체성의 생산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G. Deleuze, Pourparler; 1972-1990, 김종호 역, ?대담: 1972-1990?, 솔, 1993, 115쪽) 푸코의 ’주체화‘를 지식과 권력을 넘어서 스스로를 산출하는 것, 권력의 선을 접는 ’주름‘으로 파악한다. “[푸코의] 주체화 과정은 ’사생활‘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개체 혹은 공동체들이 기존의 지식과 권력의 테두리 밖에서 주체로서 성립되어 새로운 지식과 권력을 형성할 수 있게까지 되는 작용을 지칭합니다...따라서 푸코가 주체로 회귀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같은 책, 166쪽)
이상이 푸코 자신이 언급한 세번의 ’방향전환’이다.?성의 역사? 2, 20쪽; ?주체와 권력?, 297-298쪽
결국 그는 담론, 권력, 윤리를 주체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대한 연구라는 ‘일반적 주제’ 아래서 연구했던 것이며, 그 전체가 개인들을 근대적 주체로 생산해내는 방식에이처럼 ‘개인들을 특정한 역사적 형태의 주체로 생산해내는 방식’을 ‘주체생산양식’이라는 개념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체의) 생산’이라는 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대중은 어떤 주어진 질서나 대상에 스스로 동일시함으로써 ‘주체화‘된다기보다는 차라리 푸코가 잘 보여주듯이 특정한 권력의 계치 안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신체에 새겨지는 권력의 효과를 통해 ’주체로 생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감시와 처벌, 반복적 시행을 통한 훈육, 이를 통한 유용한 능력의 생산,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통해 형성되는 이른바 ’습속의 도덕‘, 그것은 대중을 특정한 역사적 형태의 주체로 만드는 ’공장‘이다.
우리가 ’표상체계 패러다임‘을, 그것이 “기호의 물질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우리는 ’주체화‘를, 그것이 타자 내지 큰주체가 정의하는 바에 대한 ’동일시‘를 전제하는 한 받아들이지 않는다.(이에 대해서는 이진경, ?쟈크 라캉: 무의식의 이중구조와 주체화?; ?미셸 푸코와 담론이론?, 이진경/신현준 외, ?철학의 탈주?, 새길, 1995 참조.) 덧붙이자면, 그 경우 ’저항‘은 기껏해야 ’반동일시‘나 ’비동일시‘라는 식으로, 즉 동일시의 일종(!)으로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M. Pecheux, Langage, semantique et ideologie). 혹은 공존하는--공존의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다른 (저항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동일시로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동일시하는 이데올로기/큰주체를 변경하는 이유는 역시 아무도 모른다. ’문화접변‘ 비슷한 ’이데올로기 접변‘을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다르게 정의함으로써 대체 무엇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일까? 예컨대 그것을 ’피지배자들의 가상의 특수한 보편화‘라고 한다면, 그러한 보편화는 어떻게 수행되는 것이며, 그것이 (개인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집합적인 표상체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즉 다른 피지배자들에게 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모방충동‘과 미시적 전염? 아니면 또 다시 동일시?(전자는 지라르R. Girard에 의거해 아글리에타M. Aglietta가 화폐를 설명하는데 이미 사용한 바 있다. M. Aglietta/A. Orlean, La violence de la monaie, PUF, 1982)
‘주체생산’과 ‘주체화’에 관한 것으로 다시 돌아 오자. 우리는 차라리 들뢰즈/가타리나 말년의 푸코처럼, 권력에 저항하여, 기존 권력의 테두리 밖에서 스스로를 주체로 형성하는 것은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주체화’라고 정의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주체화 양식’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는 권력이 정의하거나 타자/큰주체가 정의하는 복종적 위치에 대해 거리를 두고 탈주하려는 힘에 강조점이 가 있기에 그렇다는 것을 재차 분명히 해두자.
대한 비판이었다고 할 것이다.
3.권력의 미시정치학
(1)담론에서 권력으로
알다시피 푸코의 고고학은 담론적 형성체를, 그 안에서 작동하는 담론 형성 규칙을, 그리고 그 효과를, 한마디로 말해 ‘담론의 질서’를 연구한다. 그런데 담론의 질서에 대한 연구의 정점에서 푸코는 담론의 경계를 넘어서며, 비담론적인 것 혹은 권력에 대한 연구로 이동한다. 이는 고고학에서 계보학으로 방법론적인 이동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이를 ‘담론에서 권력으로’라는 말로 잠정적으로 요약하자.
푸코가 말하는 담론 내지 담론적 형성체는 무엇보다 우선 언표들의 집합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언표행위나, 그 언표행위에 연관된 다른 행위와 같은 담론적 실천의 집합이기도 하다. 담론이나 지식은 ‘말이 되는 말’, 언표를 제한하며, 그에 따라 어떤 담론, 예를 들면 정신병리학이란 담론적 형성체에는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언표가 있는가하면 결코 언표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어떠한 언표나 언표행위도 그것을 통제하는 형성규칙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병에 대한 생각이나 정신병자들의 행동을 통제한다. 이런 점에서 담론은 특정한 언표집합이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못하는, 열려있으나 제한된 공간인 동시에 담론적인 실천이 진행되는 장이다.M. Foucault, L'archeologie du savoir, Gallimard, 1969, 이정우 역,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1992, 56쪽, 60쪽.
이런 이유로 인해 언어가 허용하는 무수한 문장들이 모두 언표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매우 적은 언표만이 출현할 수 있다. 이를 푸코는 ‘언표의 희박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같은 책, 171-175쪽
이는 담론적 실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신병리학에서 언표행위의 주체는 의사나 그에 연관된 위치로 제한된다. 따라서 어떤 언표행위의 주체나 대상, 그리고 그들 간의 관계를 정의해주는 개념이나 전략은 특정한 담론 형성체 안에서 정의되며, 반대로 그것들을 통해 담론 형성체는 작동한다. 여기서 푸코는 언표할 수 있는 것과 언표할 수 없는 것을 가르고, 언표의 출현을 통제하는 제한된 공간으로서 담론을 연구한다. 특정한 담론 형성체를 구성하고 제한하는 것은 담론의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지만 결코 담론의 내부는 아니다. 그것은 언표들을 담론적 공간 안에 분배할 뿐 아니라, 어떤 언표가 다른 언표와 상이한 가치와 효과를 갖도록 정의해주며, 그것을 통해 어떤 담론을 다른 담론과 구별해준다. 푸코는 이를 ‘외부’(dehor)라는 말로 개념화한다. 담론의 바깥이라기보다는 담론에 내재하는 외부. 그것은 바로 언표가능한 것의 경계요, 언표들을 이미 조건짓는 ‘역사적 선험성’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언표적 사건들이 그 상대적인 희박성 속에서, 그들의 성긴 이웃관계 속에서, 그들의 펼쳐진 공간 속에서 배분되는 이 외부(dehor)를 되찾는 것”이다.같은 책, 177쪽.
이러한 ‘외부’의 사유는 ?말과 사물?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되는 것이다. 표상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러나 결코 표상되지 않는 외부, 혹은 사유를 제한하며 그 안에서 사유가 전개되도록 하는, 사유 속의 비사유, 바로 이것이 그 책에서 푸코가 찾아내려 했던 것이다. 이를 그는 ‘에피스테메’라고 지칭한 바 있다.
이제 담론의 분석이 해석학과 갈라지는 지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해석학은 어떤 공통의 (생활)세계, 특정한 말이나 글들이 펼쳐지고 해석되는 의미의 지평을 찾으며, 그 안에서 중층화된 의미의 다가성을 찾으려 한다. 이는 그 안에 포섭되는 한에서만 유의미하게 발화될 수 있는 언표나 언표행위, 혹은 실천의 공통 지반--해석학에서 말하는 ‘지평’--을 찾으려한다는 점에서 푸코의 담론 개념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에피스테메나 담론 형성체를 찾으려는 푸코에게는, 공통의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공통의 ‘경험 공간’도,R. Koselleck, Vergangene Zukunft: Zur Semantik geschichtlicher Zeiten, Suhrkamp, 1979, tr. by K. Tribe, Futures Past: On the Semantics of Historical Time, MIT Press, 1985, 267쪽 이하 참조
공통의 의미를 형성함으로써 서로에게 이해가능성의 기초를 제공하는 ‘의미 지평’도,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의미의 가능성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Dreyfus/Rabinow,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 96-98쪽; 이정우, ?담론의 공간: 주체철학에서 담론학으로?, 민음사, 1994, 196-199쪽
왜냐하면 그로서는 차라리 언표의 출현조건을 제한함으로써 ‘공통의 지반’이라는 형태로 동일자를 구성하는 이 ‘외부’가 문제기 때문이다.
대비해 말하자면, 말해진 것 속에서/뒤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을 찾아내려는 점에서 양자는 유사하지만, 해석학은 그것을 의미를 가능케하는 공통분모를 추구하거나, 그것을 통해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려 하는 반면, 푸코의 고고학은 특정한 언표 및 언표행위만을 가능하게 하는 제한과 규칙을 찾아내려 한다. 전자에게 중요한 것은 공통분모로서 의미의 지반이지만, 후자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문장을 유의미/무의미하게 만드는 제한과 규칙이다.여기서 ‘말해지지 않은 것’에 대한 가치평가가 정반대로 될 수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전통’은 공통의 의미지평을 이룬다는 점에서 해석학에게는 ‘소중한 것’이지만(H-G, Gadamer), 푸코가 보기에 그것은 특정한 언표나 언표행위만을 가능하게 하고 다른 것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제한과 규칙의 통칭일 뿐이다.
“해석한다는 것은 언표의 결핍에 대응하는 방식이며, 그 결핍을 의미의 복수화를 통해서 보상하고자 하는 것이다...그러나 담론적 형성체를 분석한다는 것은 [반대로] 이 결핍을 야기하는 법칙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지식의 고고학?, 175쪽
여기서 권력의 문제로 나아가는 하나의 통로가 열린다. 다시 말해 담론적 형성체는 “담론은...존재하자마자 단지 실천적 적용에 국한되지 않고서 권력의 물음을 제기하는 속성(propriete), 자연히 정치적 비정치적 투쟁의 대상이 되는 속성/재산인 것이다.”같은 책, 175쪽
다른 한편, 그 이전 저작에 비해 ?지식의 고고학?에 두드러진 것으로서, 담론 형성체를 비담론적인 관계들의 장 속에, 다시 말해 ‘외재성(exteriorite)의 장’ 속에 위치지운다는 것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진경, ?미셸 푸코와 담론 이론: 표상으로부터의 탈주?, 이진경/신현준 외, ?철학의 탈주: 근대의 경계를 넘어서?, 새길, 1995 참조. 이 논문에서 나는 외재성의 문제, 즉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의 연관을 ‘사건’이란 개념에 연관짓고, ‘외부의 문제’, 즉 담론의 형성규칙에 따른 담론의 효과를 ‘실증성’이란 개념으로 요약했는데, 후자는 요약한 개념이 그다지 적절치 않았고 전자는 좀 거칠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실증성은 담론적 형성체의 효과만이 아니라 그것의 외재성이란 측면을 포괄하는 것이란 점에서, ‘사건(적 계열)화’가 담론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란 점에서, 푸코가 ‘담론의 사건성을 복구’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담론적인 것에 대한 비담론적인 것의 효과라고만 하기에는 다소 도식화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중 특히 ‘사건’의 개념은 푸코나 들뢰즈의 사상이 갖는 유물론적 중심점을 이루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정리할 것이다.
예컨대 정신병리학은 그 자체만으로는 정신병자 내지 광인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그들의 실천에 담론적인 일관성을 부여하기 힘들다. 그것은 최소한 수용소 내지 정신병원이라는 제도적 조건, 혹은 그들을 다루는 기술이라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나아가 정신병리학이라는 담론 자체도 근대 초의 ‘거대한 감금’이라는 사건없이는 성립될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담론적 관계들은, 모든 담론이나 담론의 대상과 독립하여 제도, 기술, 사회구성체 등의 사이에서 그려질 수 있는 ‘일차적인 관계’과 구별되며, 그러한 관계들 사이에서 성립된다.?지식의 고고학?, 77쪽
그리고 “언표들이 그에 필연적으로 복종하는 바 물질성의 규제는...[이러한] 제도의 질서에 속한다.”같은 책, 151쪽
따라서 그가 보기에 담론적인 것은 비담론적인 것과 다양한 이질적 복합체를 이룬다. 다시 말해 담론은 담론만으로 작동하고 존립하는 완결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담론은 ‘담론적 사건’의 집합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하며,?담론의 질서?, 45쪽
담론의 사건성을 복구하는 것이 계보학적 전환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 가운데 하나가 된다.같은 책, 41쪽
들뢰즈는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의 복합체를 통해 담론적 실천을 형성해내는 지점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언표를 둘러싸고 있는 ‘보족적 공간’이라고 하며, 푸코의 담론 개념에 고유한 특징으로 본다.?들뢰즈의 푸코?, 30-31쪽. 이를 그는 확장된 ‘화용론’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이에 관해서는 Deleuze/G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109-116쪽 참조. Deleuze/Gattari는 이 책에서 이전에 ?안티-오이디푸스?(L'anti-OEdipe, Minuit, 1972)에서 자신들이 제안한 분열분석(schzo-analyse)과 미시정치학을,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으로 구성되는 지층에 대한 역사적 연구로서 지층분석학(strato-analyse) 내지 확장된 의미의 화용론(pragmatique)과 등치한다.(Mille Plateaux, 33쪽).
기표의 물질성 내지 상징적인 것의 자율성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푸코는 구조주의와 다른 갈래점을 이룬다. 여기서 이후 감옥과 같은 비담론적인 제도나 조건을 통해서 특정한 실천의 집합을 반복적으로 생산해내는 ‘형성규칙’을 포착하게 된다는 점에서, 담론에서 권력으로 이르는 또 하나의 통로가 열린 셈이다.
(2)미시정치학의 대상
담론에서 권력으로 나아가는 길은 이중의 변환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첫째로, 연구 대상이 담론적 공간 안에서 언표들의 위상학적 관계에서 권력관계로 변환된다. 이는 비담론적인 것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그 안에서 작동하는 핵심적인 권력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계보학적 분석의 중심 과제가 된다. 둘째로, 직접적인 분석의 영역이 담론 형성체를 이루는 언표집합에서 비담론적인 제도나 관계 속에서 사용되는 권력기술로 변환된다. 예컨대 감옥이나 가족 등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되는 다양한 권력기술들이 분석된다.앞서 비담론적인 것을 통해 열린 통로가 후자로 연결된다면, 담론에 ‘내재하는 외부’를 통해 열린 통로는 전자로 연결되며, 이 통로는 또한 권력의 개념이 다시 담론이나 지식에 관한 이전의 분석으로 되돌아가는 통로기도 하다. 권력의 사상가로 되는 통로.
권력기술은 경험적인 차원이며, 그 차원에서 사용되는 ‘권력’이란 용어는 경험적 개념이다. 반면 권력관계는 경험적인 차원을 넘어서 일반화된 차원으로,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의 관계, 그 속에서 특정한 실천을 반복해서 생산하는 양상을 분석하기 위한 방법론적 개념이고, 따라서 그 차원에서 사용되는 ‘권력’이란 용어는 분석의 대상들을 특정화하기 위한 포괄적이고 초험적인 개념이다. 이는 마치 맑스의 생산양식이란 개념이 한편으로는 경험적인 개념인 동시에(예컨대 ‘협업’처럼 특정한 공장에서 생산방식의 변화를 분석할 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규정으로서 초험적인 개념(예컨대 기계 사용의 효과를 특정화하기 위한 개념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도입될 때)인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푸코는 ‘권력’이란 개념이 갖는 이러한 차이를 명시하지 않기 때문에, 권력이란 개념이 모든 곳을 손쉽게 뒤덮는듯이 보인다. 실제로 그의 권력 범주는 경험적-실증적 차원과 비판적-메타이론적 차원을 넘나들며 체계적으로 이중의 의미에서 사용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J. Habermas, Die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 Suhrkamp, 1985, 이진우 역,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문예출판사, 1994, 321-322쪽
경험적 역할과 선험적 역할을 동시에 떠맡는 권력 개념의 이 ‘체계적인’ 모호성으로 인해, 그것은 구조로서 기능하는 동시에 조절과 통제의 심급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같은 책, 325-326쪽
이는 현재주의, 상대주의와 (근거없는) 규범주의가 뒤섞인 불가능한 객관주의를 이룬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같은 책, 327쪽 이하. 그러나 쟈니코(D. Janicaud)는 이러한 비판이 철학적 과정과 과학적 과정을 혼동한데서 기인한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초험적 범주로서 권력은 철학적 방법론적 입장의 문제와 연관된 것이라면 경험적 범주로서 권력은 과학적 실증적 분석의 대상이라는 것이다.(D. Janicaud, "Rationality, Force and power: Foucault and Habermsa's Criticisms", Michel Foucault Philosopher, 291쪽 이하) 이는 어쩌면 가치선택의 당파성과, 연구 상의 가치중립성이라는 베버식 대답처럼 보인다.
하지만 좀더 나아가 권력기술에 대한 경험적-‘실증적‘ 연구를 통해 드러나는 일반적인 관계 범주로서 권력을, 즉 권력관계를 추출하는 것이 원리상 불가능한 게 아니라면, 초험적 범주로서 권력관계를 단지 ’철학적 과정‘으로 떼내지 않아도 좋을 것같다. 즉 ’초험적인 것’으로서 지식 내지 담론을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듯이(’역사적 선험성’), 초험적인 것으로서 권력을 겨냥하고(철학적 방법론적 선택?) 권력기술과 권력의 계치를 ‘실증적으로’ 연구하여 일반적 권력관계를 도출하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푸코가 나중에 권력관계와 권력기술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은 앞서와 같은 비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예컨대 ?주체와 권력?). 나아가 그는 전략이란 말의 의미를 세가지로 구분하면서, 권력이란 개념을 ①선택된 수단의 집합, ②그 수단들에 의해 야기되는 지배적 효과, ③권력의 전략과 저항 전략 간의 관계로 구분하고 있다.?주체와 권력?, 317-318쪽
여기서 ①을 권력기술이라고 한다면, ②와 ③은 일반화된 권력개념의 두 층으로, 권력관계 안에서 겨냥된 효과(흔히 전략이라고 한다)와, 그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권력(-저항) 관계라고 하겠다.
여기서 개념의 겹침이 나타나는듯이 보이는 것은, 권력관계는 권력기술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권력기술은 권력관계를 생산하는 한에서만 작동한다는 사정 때문이다. 이로 인해 권력기술을 통해 작동하며, 그 효과를 통해 권력관계를 형성하는 ‘(권력)전략’이란 개념이 외연을 달리하며 반복해서 사용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권력관계와 권력기술은, 전략적 효과의 장을 형성하는 권력행사 방식을 통해서 포착되고 기술될 수 있다. 권력행사를 푸코는 “가능한 행위들의 장을 구조화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한다.?주체와 권력?, 315쪽
부언하자면 권력관계는 권력행사를 통해 구조화되는 관계며, 권력기술은 권력 행사의 기술이다. 따라서 푸코의 연구는 특정한 제도적-담론적 형성체에서 권력행사의 장으로 옮겨간다.
여기서 우리는 권력행사의 장(전략적 효과를 구조화하는 장)으로서 ‘배치’라는 개념을 만나게 된다. 이 배치라는 개념을 통해 푸코는 “첫째, 담론이나 제도, 건축의 형태, 규칙적인 결정들, 법칙, 행정적인 조치, 과학적인 언표, 철학적이고 도덕적이며 박애주의적인 명제라는, 전혀 이질적인 것들로 구성된 복합체의 구조를 밝혀보려 했다”고 한다. 이는 “말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말해지지 않는 것”,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의 이질적인 복합체인데, “바로 이것이 성적 배치를” 그리고 사법적인 배치나 의학적인 배치를 구성하는 요인이라고 한다.M. Foucault, ?육체의 고백?, ?권력과 지식?, 236-237쪽
둘째로 배치는 이러한 요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기도 한데, 이런 점에서 푸코는 배치라는 개념을 통해 “이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고리들의 성격”을 밝혀보려고 했다고 한다. “셋째로, 역사적으로 주어진 일정한 시점에 사회적으로 하나의 구조가 형성되며, 이것이 그 시대에 필요한 요구에 부응하게 된다는 의미로 배치라는 용어를 썼다”고 말한다. 이전 점에서 배치는 “전략적인 기능자로 존재“한다.같은 책, 236쪽
따라서 ?지식의 고고학?에서 말했듯이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이 공존한다고 할 때, 이 양자를 포괄하며 또한 이 양자가 서로 관련되는 방식으로서 ‘배치’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가능한 행위들을 구조화하는 방식 혹은 전략을 추적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배치는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제도 등을 통해 반복적인 실천의 양상을 생산하는 장인 것이고, 이런 점에서 가능한 실천의 구조화된 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배치’라는 개념을 통해 구조화되는 행위들의 관계, 배치를 통해 작동하는 효과와 저항의 뵥합체를 그는 권력(관계)로 정의하는 셈이며, 그러한 관계, 그러한 효과의 통일성을 생산하는 다양한 요소와 기술을 권력기술로서 파악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성의 역사? 1권은 ‘성의 과학’이란 제목으로 성에 관한 담론과 그 급격한 증가, 거기서 고백의 절차에 대해 말하며(물론 그는 교회에서 만들어낸 ‘고백의 배치’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는데), 그 위에서 ‘성적 배치’를 분석하는 중심적인 장으로 나아간다. 혼인 배치와 성적 배치의 교차점으로서 가족이란 제도, 그 가족 안에서 성적 활동의 통제를 위한 전략(여성 육체의 히스테리화, 어린이 성에 대한 교육화, 생식행동의 사회적 관리, 도덕적 쾌락의 정신의학으로의 편입)을 분석하면서, 성(sexualite)이란 “역사적 배치에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라고 말한다.?성의 역사? 1, 119쪽
푸코는 근대의 성적 배치에 대한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신체에 작용함으로써 생(vie)을 통제하려는 권력--권력의 전략 내지 권력관계--을 추출해낸다. 생체권력(bio-pouvoir). 그것은 두 개의 극을 갖는 권력기술로 구체화되었는데, 하나의 극은 “신체의 조련, 신체적 저성의 최대한 활용, 체력의 착취, 신체의 유용성과 순응성의 병행 증대,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통제체제로의 신체의 통합, 이 모든 것이 ‘규율’을 특징짓는 권력의 절차, [한 마디로] 신체의 해부-정치학(anatomo-politique)”이었고, 다른 하나의 극은 “증식, 출생율과 사망률, 건강의 수준, 수명, 장수, 그리고 이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문제로 하는 일련의 개입 및 ‘조절적 통제’ 전제, [한 마디로] 인구의 생체-정치학(bio-politique)”이 그것이었다. 즉 신체의 훈육과 인구의 조절이 생체권력(bio-pouvoir)이라고 요약되는 근대적 권력(관계)를 실행하는 권력기술의 두 축이었다는 것이다. (근대적) 주체란 이러한 배치를 통해 작용하는 권력관계의 효과로서 생산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단순히 권력관계의 효과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데, 이는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으며,” 그만큼 저항은 권력에 내재적이기 때문이며, “권력관계는 다양한 저항점들과의 관련 아래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성의 역사? 1, 109쪽
결국 배치라는 개념에서 권력의 미시정치학을 구성하는 기본 개념들의 위상학적 종합을 볼 수 있다. 배치는 담론적인 형성체와 비담론적인 제도 내지 권력기술의 이질적인 복합체로서, 그 안에서 사람들의 실천을 특정한, 반복적인 형태로 생산해내는 전략적 효과를 통해 권력관계를 작동시키며, 그것으로써 그들을 특정한 형태의 주체로 생산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권력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저항을 내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들뢰즈는 푸코의 배치라는 개념이 네가지 선(線)을 구성요소로 갖는다고 말한다. ①빛을 구조화하는 ‘가시성의 선’(가령 팬옵티콘으로서 감옥), ②말할 수 있는 것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언표행위의 선’(가령 형법이나 행형법), ③이전의 굽어진 곡선을 교정하는 ‘힘 내지 권력의 선’(가령 보이지 않으며 모든 것을 보는 다이어그램), ④그리고 권력의 선에 갇히지 않기 위한 것으로 ‘주체화의 선’이 그것이다. 마지막의 주체화의 선은 말년의 푸코가 사용한 방식으로, ‘주체화’라는 말을 외적인 금지와 규칙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에 대해 거리를 만드는 것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그것은 들뢰즈 식의 개념으로 말하면 일종의 탈주선인 셈이다.Deleuze, "What is a dispositif?", Michel Foucault Philosopher, 159-161쪽. 들뢰즈/가타리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배치(agencement)이란 개념이 푸코의 계치(dispositif)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앞서 언급했듯이 계치가 고유한 역사적 요소의 계열로 이루어지는 반면, 배치는 영토성과 연관해 지리적 요소가 강조된다는 것이다(?철학에 관하여?, ?대담?, 164쪽). 다른 한편 배치는 권력의 배치기 이전에 욕망의 배치며, 권력은 배치의 지층화된 차원이고, 다이어그램이나 추상기계는 일차적인 것으로 탈주선을 가지며, 이는 배치 안에서는 저항이나 반발이 아니라 창조의 첨단 내지 탈영토화의 첨단이라고 한다.(Mille Plateaux, 175-176쪽) 한편 이런 내용을 푸코의 개념과 대비시켜 좀더 분명히 하고 있는 것으로, "Desir et plaisir," Magazine litteraire, N°.325, 1994년 10월을 참조).
(3)권력에 관한 몇 가지 새로운 명제
권력행사가 이루어지는 배치를 통해서, 그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기술과 그것을 통해 생산되는 권력(관계)의 양상을 연구하면서 푸코는 이전과는 매우 다른 권력 개념을 제시하게 된다. 근대적인, 다시 말해 누군가에 의해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을 그런 어떤 주체로 만들어내는 것이 권력이라면, 그것은 권력에 관한 이전의 명제를 뒤집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음은 당연하다. 들뢰즈는 이러한 새로운 권력 개념이 좌파의 전통적 주장과 관련해 폐기하려는 바를 다음의 여섯 가지로 요약한다.
①소유의 공준: 권력은 획득되고 소유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은 소유물이 아니라 전략이다. ②국지화의 공준: 권력은 국가장치 한가운데 소재하고 있다;그러나 권력은, 비록 전반적(global)이진 않기에 국지적(local)이지만, 어떤 특권적인 장소로 국지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분산적이다. ③종속의 공준: 권력은 상부구조로서 특정한 생산양식에 종속된다; 그러나 권력은 상부구조가 아니라 생산의 역할을 직접 담당하는 곳에 있으며, 생산양식과 무관하진 않다해도 그리 환원되진 않는다. ④본질 또는 속성의 공준: 권력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별해주는 어떤 본질과 속성을 가진다; 그러나 권력은 본질을 갖지 않으며 조작적이고, 속성이 아니라 관계다. ⑤양상에 대한 공준: 권력은 억압과 이데올로기라는 두 양상에 의해 작동한다; 그러나 억압이나 이데올로기는 어떤 배치 내지 배치를 상정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⑥합법성의 공준: 전쟁의 정지로서 법/합법성과 그것의 부정으로서 비합법성이 대립한다; 그러나 법은 다양한 불법행위에 의해 구성되며, 따라서 법 자체가 진행중은 전쟁이요 그 전쟁의 전략이다.?들뢰즈의 푸코?, 51-60쪽
이는 유용한 요약이지만, 우리가 검토하려는 문제와는 다른 절단면을 이루는 것이기에, 푸코의 주장을 나름대로 선별된 다음 몇 가지 명제를 통해 다시 살펴보자. 이는 나중에 검토할 푸코의 권력 개념에 가장 중심적인 것이지만, 그런만큼 그의 난점과 긴밀히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①“권력은 소유되기보다는 행사되는 것이다.”M,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Gallimard, 1975,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 1994, 56쪽
이는 앞서 보았듯이, 권력을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는 입장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푸코는 명시적으로 유명론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은 제도도 아니고, 구조도 아니며, 일부 사람들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간주되는 특정한 권세도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한 사회에서 복잡한 전략적 상황에 부여되는 이름이다.“?성의 역사 1?, 107쪽
권력이란 특정한 전략적 효과를 통해 (소급하여) 정의되는 어떤 관계로서, 그러한 효과를 야기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관계에 부여된 이름이다. 그것은 효과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효과와 독립해서도 존재하지 않는 관계다. 권력이란 관계의 특정성과 무관한 불변적 실체가 아니며, 여러 관계들을 포괄하는 유기적 실체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어떤 사람은 감시하고 강제하는 역할을 하게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규칙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사회적 관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이 행사되는 양상과 메카니즘의 고유함을 보는 것이고, 그 관계 속에서 개인들의 실천이 어떻게 조직되는지를 보는 것이 문제다.
②“권력은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 효과다.”?감시와 처벌?, 56쪽
권력은 단순히 지배계급의 특정한 집단에 의해 행사되는 권한이나 특권, 강제나 금지 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매우 불균등한 형태로 행사되는 지배의 효과를 지시한다. 즉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배치와 메카니즘을 통해 행사되며, 그로써 지배가 지속될 수 있는 조건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양한 방법과 전술을 통해서 어쨌든 지배를 지속해야 한다는 목표--그 목표에 전체가 합의한 적이 없이--을 관철시키는, 그리고 어떤 영역에서는 종종 실패하기도 하는 전략의 효과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그 효과의 지배적임을 확보하지 못하고는 지배가 지속될 수 없는, 지배의 조건이기도 하다.
가령 자유로운 개인, 혹은 ‘인간’이란 개념에 기초하고 있는 근대 사회에서는 외적인 강제와 폭력, 종속을 통해서 지배를 지속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개개인의 자유의지를 ‘원칙에 따라’ 인정해주자마자 그렇다면 “사회(적 질서)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홉즈적 질문이 제기된다. 이것을 우리는 근대 사회의 이율배반이라고 요약한 바 있다. 이러한 이율배반을 해소하기 위한 묘책은 ‘외부적 강제없는 지배’, ‘강제적 통제없는 통제’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개인들로 하여금 질서를 스스로 지켜나가도록 해야 한다. 감금을 통해서든, 훈육과 강제를 통해서든, 아니면 규범화 내지 내면화를 통해서든. 또 감금과 훈육, 강제나 내면화 등을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여하튼 이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질서를 지키도록 길들여지고, 그것이 또한 내가 선택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근대적 인간이, 근대적 주체가 만들어진다.이에 대해서는 박태호, ?근대적 주체와 합리성:베버에서 푸코로??, ?경제와 사회?, 1994년 겨울호를 참조
그것이 어느 누가 한 사람이나 집단에 의해 고안된 것이 아니었으며, 또 어느 하나의 중앙에 의해 단일하게 통제되며 실시된 것이 결코 아니며, 그 성과는 영역과 관계에 의해 매우 다른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일관되게 계획된 것이라기 보다는 ‘총체적인 전략적 효과’로서만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을 이러한 주체로 생산하는 것이 부르주아지의 계획과 통제 하에 수행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부르주아지라는 지배계급의 계획과 통제, 방법 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된 “사람의 축적이 자본의 축적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감시와 처벌?, 321쪽
특정한 형태로 사람을 만들어내는 권력이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란 말은 바로 이런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권력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투쟁이나 갈등, 전쟁이라는 개념을 동원해야 한다”고 보며, “정치는 전쟁에서 비롯되는 세력관계의 불균형을 인정하는 메카니즘”으로 파악하자고 한다.?권력, 왕의 머리베기와 훈육?, 122-3쪽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뒤집어서 만든 “정치는 전쟁의 연속”이란 명제는, 이처럼 적대 속에서 권력관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가정을 포함하고 있다.이는 그 뒤에 ‘적대의 가정’을 포기하면서 소실되는데, 나중에 푸코의 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다시 언급할 것이다.
③권력은 금지나 부정보다는 차라리 긍정적인 형태로 행사된다. 즉 “권력은 그것을 갖지못한 자들에게 단지 일종의 의무 내지 금지로서 강제되는 것은 아니다.”?감시와 처벌?, 56쪽
“권력의 경제를 지배해왔던 ‘강탈-폭력’이라는 낡은 원칙에 대신하여, 규율(권력)은 ‘부드러움-생산-이익’의 원칙을 채택한다.”같은 책, 319-320쪽
예를 들면, 학교에서 교육과정을 통해 학생들을 길들이는 권력은 학생들로부터 무언가를 강탈하는 방식으로 교육하지 않는다. 학생들의 훈육을 위해 여러 가지 규칙과 강제가 반복적으로 동원되지만, 푸코가 보기에 그것은 그들의 신체 위에 지식과 능력을 새기는 것이다. 병원에서의 규율 역시 건강의 생산과 관련되며, 심지어 군대의 경우에도 파괴력의 생산과 관련된다.같은 책, 320쪽. 그런데 여기에는 두가지 상이한 것이 뒤섞일 위험이 있다. 하나는 권력의 행사방식 내지 권력기술의 측면으로, 예를 들어 학교나 공장에서 행해지는 시간적˙공간적 규율이나, 정해진 동작의 반복, 혹은 규범으로 내면화된 예절 등은 분명 자의적인 의지를 규제하고 통제한다는 점에서 아무리 부드러운 경우에도 부정적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학습능력 내지 지적 능력, 노동능력, 혹은 절제능력의 생산이란 점에서 그 대상에게 유익하고 생산적이다. 아마도 후자의 측면에서 푸코는 권력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행사된다고 한 것같다. 그러나 이것이 훈육적 권력을, 니체적인 용어로 말해 ‘긍정적(인 권력의지)’라고 간주하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양자를 뒤섞은 댓가인 셈이다. 왜냐하면 이는 저항과 권력의 가치평가--니체적인 의미에서--가 반전될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푸코 이론의 난점을 검토하면서 다시 다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규율을 통해 파악되는 권력은 단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개개인을 특정한 능력과 특성, 지식을 가진 ‘주체’로 생산한다.
푸코는 감옥에서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을 이런 문제와 관련지운다. 즉 격리를 통해 감옥은 “범죄자를 ‘체념적이고 유익한 활동’에 맞도록 훈련시키고 그에게 ‘사교성의 습관‘을 회복시켜 준다.”같은 책, 343쪽
또 “감옥에서의 노동이 경제적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산업사회의 일반적 기준에 따라 기능화된 개인을 생산함으로써다...’노동은 감옥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사회-기계(une societe-machine)는 전적으로 기계적인 교정 수단이어야 한다.‘(Faucher) 이는 개인-기계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제조기도 하다.”같은 책, 349쪽
더불어 감옥은 치료와 규범화를 통해 범죄자를 ’교정‘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자유의 박탈을 넘어선다.”같은 책, 351쪽
그런데 이 새로운 권력 개념은 그것이 새롭고 파격적인만큼 모호하고 이질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지속적으로 개념적인 변위가 발생하는 동력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질성은 무엇보다 계보학적 권력 개념을 발전시킨 두 권의 저작--흔히 동일한 개념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사이에서 나타나는 개념적 변위를 통해 확인된다.
?감시와 처벌? 이후에 행해진 강연(1976년)에서 푸코는 자신의 권력 개념에 전제되어 있는 두 가지 가정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푸코 말을 빌면 ‘라이히적인 가정’과 ‘니체적인 가정’이다. 푸코는 권력관계를 투쟁과 갈등, 전쟁을 통해 파악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갖고 있었으며, 이런 맥락에서 그는 “정치란 전쟁의 계속”이라고 보았다. 또한 이런 점에서 그는 권력관계의 기저가 지배와 피지배,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적대적 세력관계라고 보았는데, 니체에서 연유하는 이러한 입장을 그는 ‘적대의 가정’이라고 부른다. 한편 권력의 작동방식은 ‘억압’이라고 보는 또 하나의 가정으로, 라이히(W. Reich)적인 의미에서 ‘억압의 가정’이라고 한다. 이 억압은 앞서 말한 적대, ‘전쟁’의 정치적 결과라고 한다.?권력, 왕의 머리베기와 훈육?, 122-124쪽. 그는 여기서 억압의 가정에는 약간 유보를 달고 있으며, 강조점은 니체적인 적대와 투쟁의 가정에 두어져 있다.
예컨대 “권력은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 효과”라는 명제는 ‘적대의 가정’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성의 역사? 1권은 바로 이 두가지 가정을 명시적으로 폐기할 뿐만 아니라, 억압의 가정은 ‘억압가설’이란 이름으로 직접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성의 역사? 1, 제2장. 여기서 푸코가 억압가설을 비판할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라이히와 마르쿠제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선 적대의 가정을 폐기함으로써 “권력은 지배계급의 전략적 효과의 총체“라고 하는 명제는 “권력이란 한 사회의 복잡한 전략적 상황에 부여하는 이름”이라는 정의로 치환된다.?성의 역사? 1, 107쪽
다시 말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이항대립은 없다...그보다는 차라리 생산기구, 가족, 국한된 집단, 제도들 안에서 형성되고 작용하는 다양한 세력관계가 전사회체를 관통하는 폭넓은 분리효과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고 상정해야 한다. 지배란 단지 이러한 대립의 강도에서 나오는 헤게모니의 결과다.”같은 책, 108쪽
이러한 새로운 관점은 또 다른 새로운 명제로 진전된다: “권력은 아래로부터 나온다.”같은 책, 108쪽
다시 말해 권력은 지배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지배당하는 사람 자신들에 의해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권력은 행사되는 것이고, 그 결과 형성되는 사람들 간의 관계라는 앞서의 명제와 연관된 것이다. 예를 들면 팬옵티콘의 감시장치에 수감자를 배치하는 경우를 상정해본다면, 그 경우에도 팬옵티콘은, 다시 말해 보이지 않으면서 보는 권력의 도식은 그대로 유효하게 작동한다. 즉 푸코가 보기에 감옥에서 행사되는 권력은 감시자가 수감자에 대해 행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공간적인 배치 내지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 자체의 효과인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위계적 관계에서 상부에 있는 자에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하부의 직접적인 관리자에 의해 실행된다. 예컨대 감옥에서 그러한 효과의 수행은 교도소장이나 간부보다는 차라리 직접적인 감시자에 의해 이루어지며, 때로는 수감자 자신들에 의해서 좀더 치밀하고 빈틈없이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경우 간부들은 특정한 수감자들을 포섭하여 그들을 통해 좀더 효율적인 관리와 통제를 수행한다. 이는 학교에서도, 공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지배받는 자에 의해 실행되는 권력, 혹은 권력자없이 실행되는 권력.
둘째로, 억압의 가정. 물론 그는 이미 권력이 금지나 부정의 형태보다는 긍정적 형태로 행사된다는 명제를 제시한 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강제와 억압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따라서 이는 ‘강제권의 정치학’이란 방식으로 파악되었다. 그는 ‘억압의 가정’과 ‘긍정적 권력 개념’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성의 역사? 1권에서 권력은 명시적으로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즉 권력은 지식이나 경제적 능력, 성적 능력을 생산함으로써, 그러한 능력의 차이로 규정되는 관계 자체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지식의 유무나 경제적 능력의 유무 등과 같은 불평등의 결과만이 아니라 동시에 그러한 차이를 만들내고 불평등을 야기하는 내적 조건이다.
이를 좀더 포괄적인 차원으로 확장함으로써, 권력은 개개인에게 지식이나 활동능력, 성적 능력 등을 만들어줌으로써 그들 각각을 특정한 ‘주체’로 생산하는 것이 된다. 즉 규율권력, 혹은 지식-권력이라고 부르든, 생체권력이라고 부르든, 요체는 개인에게 특정한 형태의 실천을 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그를 ‘주체’로 생산하는 권력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권력의 형식은 즉각적인 일상생활에 적용되어...개인을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에 밀착시키고, 그가 인정해야 하고 타인들이 그에게서 인식해내야 하는 진리의 법칙을 그에게 부과한다. 개인을 주체로 만드는 것은 바로 권력의 형식인 것이다.”?주체와 권력?, 302쪽
요컨대 ‘권력은 개개인을 특정한 형태의 주체로 생산한다’는 명제가 억압의 가정을 포기함으로써 분명하게 된다. 억압하는 권력이 아니라 ‘생산하는 권력’.
4.권력과 국가
(1)통치의 문제설정
앞서 다룬 권력 개념은 개인들을 특정한 형태의 주체로 생산하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 “어떤 물질성의 기반 위에서 주체가 형성되는지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이런 한에서 이는 푸코 말대로 ‘권력의 미시물리학’(micro-physique) 내지 미시정치학(micro-politique)을 구성한다. 여기서 우리는 ‘미시적’이란 말에 대해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은 국가나 사회에 비해 개인이라는 ‘작은‘ 대상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대상영역의 규모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며,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중간적’ 영역을 상정해야 하는 것인지...
계급투쟁처럼 거창한 활동과 한없이 작은/작아지는 미세한 활동을 대비하는 것도 아니다. 들뢰즈 말대로 그것은 지식이나 제도처럼 지층화된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실천의 차원이며, 국지화되고 안정적인 지식 내지 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불안정하고 국지화되지 않는 미분적 관계를, 유동적인 실천의 가능한 한계를 구조화하는 기술의 분석을 통해 포착하려 한다.?들뢰즈의 푸코?, 116-117쪽
결국 미시물리학이란 (개인들을 짜넣는) 미분적인 관계들을 통해 (근대 사회라는) 거대한 집합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만큼 우리는 ’거시적‘ 차원을 정의할 수 있다. 그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관계를 고정하고 안정화시키는 통합(integration;적분)의 메카니즘 내지 특정한 방식으로 체제(regime)화된 제도적 요소들(예를 들면 국가적 통합), 혹은 그런 차원에서 통합된 거대 집단들 간의 관계(예를 들면 계급 간의 관계,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의 관계) 등. ?성의 역사? 1권 이후에 푸코가 국가와 ’통치‘(gouvernement)의 문제에 주목하는 것을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의 역사? 1권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체권력의 중요한 한 축인 인구통제의 생체정치학은 주로 국가적 권력의 직접적 행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사적인 활동을 국가라는 거시적 권력이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가를 다루어야 한다. 이 역시 개개인을 특정한 형태의 주체로 생산하는 효과를 갖는 것이긴 하지만, 단지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제를 내포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주체로 생산된 개개인들의 활동을, 극히 사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권력 아래 어떻게 포섭, 관리하고 통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러나 이는 이전에 파악된 권력의 행사방식을 국가적 수준에 확대적용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즉 신체를 해부하여 얻어낸 감시와 통제의 도식을 이 영역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는 ?감시와 처벌?에서 발전시킨 신체의 해부정치학과 다른 과제를 설정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대상의 분포가 달라지면 권력의 행사방식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 푸코는 ‘통치’ 내지 통치기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연구한다. 결국 통치의 문제설정은 국가권력이,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미시적인 권력의 작동을 어떻게 포섭하는지, 혹은 주체로서 생산된 개인들을 자기 안에 포섭하는 전략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라고 하겠다.이러한 질문은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푸코의 분석을 수용하여 미시적 수준의 권력개념을 받아들이려 하자마자 곧바로 우리에게도 제기될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즉 미시적 권력을 국가적 거시권력이 어떻게 체계 내로 포섭하고 통합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다시 말하면 계급적 지배권력이 미세한 권력의 그물망 속에서 생산되는 주체들을 어떻게 포섭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푸코가 보기에 “통치란 목적에 용이하게 이를 수 있도록 정리된, 사물들의 올바른 정렬이다.” 이러한 통치는 “그 자체의 확고한 대상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군주권과 명백히 구분될 수 있다.”M. Foucault, "Governmentality", The Foucault Effect: Studies in Governmentalit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93-94쪽
“가령 통치는 가능한 최대량의 부가 산출되도록 보장해야 하며, 사람들이 충분한 생계수단을 제공받도록, 또한 인구가 증가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등등. 특정한 최종 대상들의 모든 계열들 있으며, 이것이 통치 그 자체의 목표가 된다. 다양한 이들 최종 대상들을 획득하기 위하여 사물들이 배치(disposition)되어야 한다.”"Governmentality", 95쪽, 여기서 disposition은 영역된 말인데, 아마도 dispositif에 적절한 번역어가 없어서 선택한 말로 보인다(이는 1988년 1월에 개최된 푸코 콜로키움의 논문집 Michel Foucault Philosopher 영역자 T. Armstrong의 말이다(159쪽). 그는 원어병기를 하며 social apparatus로 번역하는데, 그보다는 차라리 disposition이 나아 보인다). 그러나 disposition은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사용했지만(Surveiller et punir, 31쪽), 이후 dispositif로 바꿨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통치성이란 미시적 대상을 국가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달리 말하면 국가적 권력이 개별화된 주체를, 그리고 그들을 생산하는 권력을 포섭하는 메카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푸코는 통치성과 관련해 세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그것은 매우 특정하면서 복합적인 형태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 과정, 분석과 반성, 계산과 전술들로 구성되는 전체라는 점이다. 이러한 권력의 표적은 인구며, 중요한 지식형태는 정치경제학이고 그 본질적인 기술적 수단은 안전장치들이다. 둘째, 통치라는 권력유형이 다른 모든 형태(군주권, 규율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세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통치적 권력은 중세적 국가가 15-6세기에 걸쳐 행정국가로 전환되고, 점차 통치화되는 과정의 결과 만들어진다는 것이다."Governmentality", 102-103쪽
실제로 그는 오랜 기간 서구를 통털어서 주권-규율-통치의 삼각관계에서 통치의 권력유형이 다른 모든 권력형태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경향을 지적한다. 따라서 “어떤 점에서 권력의 다른 모든 유형들은 국가에 의거하게 된다(se referent).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그 각각이 국가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권력관계 각각이 지속적으로 국가(관리)화(etatisation)되었기 때문이다. ‘통치’라는 말의 이 제한된 의미에 의거할 때, 우리는 권력관계가 점진적으로 통치화되었다고, 다시 말해 국가적 제도의 형식 내지 그 후원 아래 권력관계가 정교화되고 합리화되었으며 집중화되었다”고 한다.?주체와 권력?, 317쪽(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우리는 국가권력에 대한 푸코의 생각이 예전과 매우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이전에 그가 자신의 권력 개념을 국가적 권력 개념에 대립시키고, 거시적 차원에서 미시적 권력과 주체를 포섭하고 통합 통제하는 차원을 ‘의도적으로’(!) 무시했었음에 비교할 때 매우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통치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엇이 있다고 보며, 특히 “우리의 근대성에서, 다시 말해 우리의 현재에 정말 중요한 것은 아마도 사회의 국가화라기 보다는 차라리 국가의 통치화”라고 지적한다."Governmentality", 103쪽(강조는 인용자). 이 인용문에서 ‘국가의 통치화’에 대비해 말하는 ‘사회의 국가화’는 아마도 (시민)사회의 영역이 국가화되는 것을 뜻하는 듯하며, 이는 아마도 ‘시민사회론자’를 겨냥한 말같다. 한편 이를 바로 앞의 인용문에 나오는 ‘권력관계의 국가화’와 혼동하면 그의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당착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시민사회론자의 경우도 ‘사회’와 ‘국가’만큼 ‘사회’와 ‘권력’은 대립된다는 것은 다 아는 바다). 앞서의 인용문에서 분명히 했듯이 그는 ‘권력관계의 국가(관리)화’로 ‘국가의 통치화’를 파악한다.
(2)근대국가와 사목권력
위와 같은 관점에서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그가 ‘사목권력‘(pouvoir pastral)이라고 부른 근대 국가의 권력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17세기 이후 중요하게 부상하는 ‘치안’(police)이라는 배치다.
사목적 권력은 기독교의 사목(목자)이라는 메타포에서 끄집어낸 것이다. 기독교적 사목은 영토(토지)보다는 양떼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고, 흩어져있는 개인(양떼)를 모으고 인도하며 지도한다. 그는 자기 양떼의 구원을 보장하며, 이러한 권력의 행사 자체가 사목의 의무라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M. Foucault, “Politics and the Reason," Michel Foucault: Politics, Philosophy, Culture, ed. by L. Kritzman, Routledge, 1988, 62쪽
여기서 요체는 사목이란 양떼를 부단히 개별적으로, 그 전생애에 걸쳐서 양심에 대한 지식과 지도를 통해 돌보는 존재라는 점이다. 즉 사목 권력은 양떼 개별 구성원에게 기울이는 주의를 의미한다. 통치기술이란 차원에서 도식적으로 대비하자면, 국가가 중앙집권화하는 정치형태라면 사목권력은 개별화하는 권력이다.같은 책, 58-59쪽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 사목권력에 몇 가지 변화가 발견된다고 한다. 첫째, 사목권력의 목표가 현세에서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으로 바뀌는 바, 그 결과 구원이란 말은 건강과 복리, 안전과 재난에서의 보호 등을 의미하게 된다. 둘째로 사목권력의 관료들이 증가하며 국가기구라는 형식을 통해 권력으로 행사된다. 셋째로 인간에 대한 지식의 발전을 수반한다.?주체와 권력?, 95-96쪽
그 결과 사목권력의 유형은 사회체 전체로 확산되게 된다.
다음으로 푸코가 주목하는 ‘치안‘은 이러한 사목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근대국가가 마련한 배치다. 치안은 여타의 국가기구와 함께 국가를 이끄는 행정기구로서 등장했는데, 어떤 영토에서의 사람들의 공존상태, 재산에 대한 관계, 생산물, 시장에서의 일 등 살아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일과 그들의 질병 및 안전 등을 고려하여 활동한다.치안에 대한 이러한 방향의 관심은 이미 ?감시와 처벌?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이는 학위논문이었던 ?고전주의 시대 광기의 역사?에서와 상반되는 양상을 보인다. ?광기의 역사?에서는 치안을 ’거대한 감금‘과 연관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금, 17세기 유럽 전체에 걸쳐 그 징표를 볼 수 있는 이 대대적인 사태는 바로 ‘치안‘의 문제였다. 고전주의 시대에 사람들이 부여했던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치안은, 노동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노동을 가능하고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수단의 총체였다. 볼테르가 일찌기 정식화했고, 콜베르의 동시대인들이 이미 스스로 제기했던 질문이 있다. ’뭐요? 당신이 인민의 집단 속에 자리잡은 이래, 모든 부자들이 모든 빈민들로 하여금 노동하도록 강제한 비밀을 아직도 모른다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치안이라는 그 첫번째 요소를 모르고 있군요.’”(Foucault, Histoire de la folie a l'age classique, Gallimard, 1972, 75쪽)
보다시피 여기서 푸코는 감금, 그리고‘노동의 정언명령(imperatif)’과 치안을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가두고 통제하는 계치로서 치안/경찰이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감시와 처벌?에 이르면 이 문제를 다루는 시각이 매우 달라진다. “제도로서 치안이 확실히 국가장치의 형태로 조직되었다고 해도, 또 확실히 정치적 주권의 중심에 연결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행사하는 권력의 유형...은 특수한 것이었다...치안 권력은 ‘모든 것을’ 담당해야 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먼지같은 사건들, 작용들, 행동들, 의견들, 다시 말해 ‘발생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것은 이중의 입구를 가진 체계였다. 그것은 사법장치를 우회해 왕의 직접적 의지에 부합해야 했지만, 또한 하층의 청원에 응답할 수 있어야 했다.”(Surveiller et punir, 215, 216쪽). 하지만 여기서 푸코는 18세기의 치안장치(appareil policier)의 조직에서는 국가적 차원에까지 이른 훈육의 일반화가 허용되었다고 말하면서, 치안의 문제를 훈육의 문제에 연결하고 있다(같은 책, 217쪽).
요컨대 치안은 생활을 돌본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치안의 진정한 대상은 인간”이라고 간주된다."Politics and the Reason," 79-81쪽
이로써 국가적 권력은 개인들의 생활과 생존, 안전 등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인정받게 되고, 역으로 치안은 사람들의 삶에 중앙집권화된 정치 행정권력이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을 연다. 이러한 배치를 통해 국가는 개인의 삶과 생활에 대해 개별적으로 책임을 지며 돌보아야 하는 사목적 위치를 확보하게 되며, 그 댓가로 개인들의 삶을 국가적 권력 아래 포섭하고 관리하게 된다. 이제 국가가 개인의 생활에 개입하는 것은 사목적인 위치로 인해 당연한 것으로서 정당화되며(복지국가!), 반대로 국가적 권력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개인은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국가’를 개인들이 어떤지 무시하면서, 그리고 심지어 개인들의 존재 그 자체를 무시하면서 개인들을 초월하여 발전하는 실체로 간주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한가지 조건 아래서 개인들이 통합될 수 있는 매우 정교한 구조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즉 이 개별성에 새로운 형식이 부여될 것이며, 그것이 특수한 메카니즘의 총체에 복속되리라는 것이다.”?주체와 권력?, 305쪽
즉 국가를 개별화하는 권력의 근대적 모체로 보며, 사목권력의 새로운 형식으로 간주한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분석을 전제로 푸코는 서구의 근대국가에 대해 결론적인 테제를 제시한다. “국가권력은 개별화하는 동시에 전체화하는 권력의 형식이라는 사실--이것은 국가권력이 강력한 이유 중 하나인데--을 강조하고자 한다. 동일한 정치적 구조 내부에서 개별화하는 기술과 전체화하는 과정의 교묘한 결합은 인간 사회의 역사 어디에서도--심지어 고대의 중국 사회에서도--발견할 수 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기독교 제도들에서 발원한 오래된 권력 테크닉을 근대 서구국가가 새로운 정치형태 속으로 통합해 넣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같은 책, 304쪽. 강조는 인용자.
요약하자면, 통치의 문제설정을 통해 파악되는 근대국가는, 개개인을 거대 권력 아래 포섭하고 통제하려는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을 통해 좀더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몰(mole)적인’ 포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으며, 이를 치안이라는 배치를 통해 개별화하는 권력기술로서 사목권력을 통해 수행한다. 따라서 사목권력을 통해 대상들을 개별화하면 할수록 그것은 국가적 권력 아래 전체화되고 통합된다. 이런 점에서 근대 국가는 개별화하는 동시에 전체화하는 권력이다.그렇다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또한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주의, 특히나 근대를 특징지으며 전체주의적 악몽과 대비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개인주의란 사실 전체화하는 권력의 효과일 뿐이며, 그런 점에서 전체화하는 권력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그런 한에서 그것은 근대적 전체주의의 이면일 뿐이라는 것을. 따라서 개별화 내지 개인주의에서 출발함으로써 전체주의의 악몽을 피할 수 있으리란 것은 전체화하는 권력 안에서 꾸는 또 다른 꿈일 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개별화하는 동시에 전체화하는 권력을 가로지르는 것, 개별화와 전체화의 벡터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연대(alliance 혹은 association)를 창출하고 증식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대”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5.미시정치학의 아포리아
(1)권력의 궁지
적어도 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는 사상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푸코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서로에 대한 존경과 애정으로 가득한 그들의 극히 이례적인 인간적 우정과 “철학적 우정, 정치적 우정”에 대해서는 D. Eribon, Michel Foucault, Flammarion, 1989, 박정자 역, ?미셸 푸코?, 하권, 시각과 언어, 1995, 106-113쪽과, Deleuze, Lust und Begehren, Merve, 1996에 부친 F. Ewald의 서문 참조.
들뢰즈는 푸코가 죽은 직후 그의 초상화를 그려낸다.?들뢰즈의 푸코?. “지성과 애정이 섬세한 떨림을 보이는 감동적인 ”(Eribon, ?미셸 푸코? (하), 113쪽) 이 책은, 거기 서술되는 내용이 정말 푸코의 것인지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고, 오랫 동안 거부되었다고 한다(들뢰즈의 푸코!). 푸코 콜로키움에서 발표한 글(“What is a dispositif?“)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Pourparler(국역, ?대담?)에 실린 ?푸코의 초상화?이러한 평가를 돌려놓기에 충분했으며, Magagine litteraire의 푸코 특집호(1994. 10)에 실린 노트(”desir et plaisir“)는 이러한 전환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F. Gros, "Le Foucault de Deleuze: Une fiction metaphisique", Philosophie N°.47, Minuit, 1995, 10, 53쪽; 이 글은 ?성의 역사?1권이 나온 직후였던 1977년에 ?감시와 처벌?과 그 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푸코에게 전달하기 위해 에발트(F. Ewald)에게 주었던 애정어린 사신(私信)으로 두 사람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하지만 다른 맥락에서 들뢰즈의 ?푸코?를 이해하자면, 들뢰즈 말대로 그것은 ‘푸코의 초상화’다. 거기에 그려진 것은 푸코(“푸코의 이중체”)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들뢰즈가 자신의 눈과 자신의 필치로 그린 것임 또한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그 초상화는 정말 ‘들뢰즈의’ <푸코>인 셈이다. 하지만 벨라스케즈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와 베이컨의 <이노센트 10세>는 정말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그 초상화에 대해 대담하는 자리에서 푸코가 추구하던 미시물리학, 미시정치학의 위기에 대해 언급한다. “이러한[미시물리학적인] 경향은 ?지식의 의지?[?성의 역사? 1권]까지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 책 다음에 또 다른 새로운 위기가 닥칩니다. 좀더 내적이고, 아마도 좀더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은밀한 위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었습니다.”?푸코의 초상화?, ?대담?, 103쪽
그리고 들뢰즈 말대로 그는 이 위기를 통해서 또 다시 새로운 영역으로 진행되었고,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성의 역사를 계속해서 다루지만 사실상은 전면적인 이론적 전환의 문턱을 넘는 것이었다. 윤리학의 계보학 내지 윤리학의 문제설정이 그것인데, 그 고유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그의 생을 거의 일관해 온 전복적 사유의 전복이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위기는 어째서, 그리고 어디에서 야기된 것일까?
들뢰즈의 생각: “나는 그가 ‘권력 너머로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부딪쳤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궁지에 빠지듯 권력의 관계 속에 그는 갇혀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는 자신이 싫어했던 것 속에 흘리듯 내던져진 셈입니다.”같은 책, 109쪽
우리는 이러한 생각이 타당하다고 본다. 거의 전 생에 걸쳐 푸코는 저항과 전복을 꿈꾸었고, 또 실천하려 했으며, 저항의 문제로서 모든 것을 사유하려 했다. 따라서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일자의 지배를 뒤엎는 것이었고, 권력의 지배를 전복하는 것이었으며, 결국은 저항 가능성의 지점을 찾는 것이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라는 말은, 몇몇 비판가 말처럼 그의 권력 개념에서도 저항을 사고할 수 있다는 어설픈 변명이 아니라, 반대로 권력의 장을 연구함으로써 그가 찾으려는 것이 바로 저항 가능성의 지점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권력관계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주체란 권력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권력은 생산적이라는 명제를 제시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권력이 없다면 주체도 없다.” 즉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주체로 생산되고 살아가려면 권력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권력은 영원하다. 그렇다면 저항은 대체 무엇을 전복할 수 있는 것일까? 저항은 이제 불가능해지는 것일까? 또한 그가 분명히 하듯이 권력이 긍정적이라면, 저항은 차라리 그에 반하는 부정적인 어떤 것이 되는 건 아닐까?
결국 그는 저항의 가능성, 그 가능성의 지점을 찾기 위해 권력에 대한 미시물리학적 탐사로 나아갔지만, 그 연구의 결과는 권력은 불가피하며 권력의 외부는 없다는 결론이었다. 모든 것을 가두는 권력의 벽, 저항 자체를 곤란하게 만드는 권력의 궁지. 그런만큼 그것은 전복의 사상가에게 “내적이며 의기소침하게 하는 위기”를 야기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성의 역사? 연작 계획을 누차 수정하다가 결국 급전시켜 버린 것도Eribon, ?미셸 푸코? (하), 213-226쪽 참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윤리학적 문제설정으로의 전환은 이런 궁지와 위기에서 발생한다. 그는 이런 식으로 새로이 질문하는 것같다: 권력이 불가피하다면, 권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권력 (관계) 안에서 ‘저항’을 사고할 수는 없는 것일까? 훈육적인 권력이나 생체권력, 혹은 개별화시키는 사목적 권력에 대항하여 ‘저항’하는 것을 불가능한 것일까?
통치기술로서 사목권력에 대한 연구 위에서 그는 새로운 방식의 저항 가능성을 찾아낸 바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개별화를 통한 통치‘에 반대하는 것으로, 이미 주어진 개인적 지위를 의문시하는 투쟁이다. 개인들을 분리시키고, 다른 이들과의 연계를 깨뜨리며, 공동체생활을 분열시키고, 개인을 자신에게 고착시키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스스로의 정체성에 묶어두는 모든 것에 대한 공격. 투쟁의 목표는 권력효과 그 자체로서, 지식, 권한, 자격 등에 연결되어 있는 권력효과에 대한 반항이고, 지식의 특권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또한 그것은 특정한 경제적, 정치적 통치형태에 한정되지 않는 횡단적 투쟁이다. 그것은 주적을 찾지 않고, 눈앞의 직접적인 적을 보며, 해방, 혁명, 계급투쟁의 종식과 같은 미래의 해결책을 찾지 않는다.?주체와 권력?, 301-302쪽
저항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이후 일반화되어 ‘주체화’라는 개념으로, 즉 지식의 체계화된 규범이나 권력의 구속적 규범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신의 임의적인 규범을 통해 스스로를 주체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발전한다. 즉 권력이 불가피한 것이며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자신의 외부에서 주어지는 권력에 의해서가, 차라리 거기에 거리를 두면서 자기 스스로 부과하는 권력을 통해 스스로를 주체화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자신을 다스리는 자만이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는 그리스의 사례가,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돌보는”, 근대와는 다른 윤리학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떠오른다(하지만 그것은 ‘대안’도 ‘모델’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말년의 푸코가 제시한 윤리학적 문제설정은, 권력이 불가피한만큼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권력의 궁지에서 사유한 (근대) 권력에 대한 비판의 한 형식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전복적 사유와 강력한 비판적 문제화 방식은 분명히 소멸되거나 지극히 약화된다(알다시피 이는 문체(style)의 변화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저항과 연대를 통한 어떤 권력(관계)의 전복은 윤리적 실천의 전망에게 자리를 내준다. 이는 아직 전복적 사유의 지반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한, 인정할 수는 있어도 수용하기는 힘든 것이다. 우리가 그의 마지막 제안에 혁명적 주석을 달며 받아들이기 보다는, 차라리 그가 처했던 궁지로 다시 돌아가 권력과 저항에 대해 다시 근본적으로 사고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2)저항과 권력
권력의 연구를 통해 권력에 대한 저항 가능성의 지점을 찾으려했던 미시정치학은, 권력은 불가피하고 영원하며 권력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름으로써 그 내적인 난점을 드러냈다. 우리는 이 난점을 두 개의 주제와 연관해서 검토할 것이다. 그 하나는 권력과 저항의 관계고, 다른 하나는 권력과 적대의 관계인데, 후자는 앞서 푸코가 기각한 바 있는 ‘니체적 가정’(적대의 가정)과는 다른 문제다.
첫째, 저항과 권력. 이 문제는 앞서 권력개념을 다루면서 언급한 명제들, 즉 “권력은 아래로부터 나온다”, “권력은 긍정적이다” 내지 “권력은 생산적이다”는 명제에 의해 야기된다. 우선 권력이 아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대체 저항은 어떻게 가능한가? 또 권력자 없이 권력이 행사되며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대립을 제거한다면, 대체 누가 누구에 대해 저항하는 것인가?“권력에도 똑같이 저항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과 그것에 복종하는 자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보지 못한다.”(J. Baudrillard, Oublier Foucault, Galilee, 1977, 박봉희 역, ?푸코를 잊어버리기?, ?세계의 문학? 53호, 민음사, 1989년 가을, 390쪽.)
한편 보르리야르는 권력이 생산적이란 명제에서 역전이나 전복이 불가능한 권력 개념을 본다(389쪽). 이러한 권력 개념은 맑스나 들뢰즈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생산의 거울’에, 즉 모든 것을 ‘생산’의 개념을 통해 포착하는 ‘상상계’에 갇혀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대신 자신은 푸코의 ‘기능적 관점’ 대신에 유혹과 술책으로서, 역전가능한 교환으로서 권력을 정의하려 한다. 하지만 유혹이라는 기술 내지 술책을 권력의 정의 자체로 끌어들임으로써 확보되는 권력의 ‘역전가능성’은, 무한한 상호역전으로 나아감에 따라 만들어지는 허무주의의 유혹을 댓가로 지불해야 했다. 권력이란 어차피 유혹하는 것이고, 권력을 역전하려는 시도 역시 그 유혹의 놀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역전가능성으로 권력의 유혹을, 따라서 권력을 정의하려하자마자 그는 곧바로 권력의 점유자들을 전제하는 근대의 정치학적 전제를 다시 도입하게 된다는 점이다.
권력이 ‘아래’로부터 나온다고 할 때 ‘아래’는 피지배자 내지 피지배적 위치도, 아래에 있는 자도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행사되는 배치의 아래, 그리하여 권력의 신경이 작동하는 배치의 말단이며, 그 대상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부딛치는 하부다. 그것은 권력의 도식이 담론이나 제도를 통해 대상에 작용하는 지점이며, 권력이 ‘실행’된다고 할 때 실행이란 말이 직접적인 의미를 갖는 수준이다. 아이의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부모, 그들을 그렇게 관계짓는 교육적 관계에 의해 권력은 실행된다. 미시적인 동작 하나하나까지 규범화된 통제의 도식에 따라 움직이도록 강제되는 분업화된 노동자의 수족 사이에서, 그들의 맞물린 작업에 의해 권력은 실행된다. 나사를 늦게 돌리는 채플린은 바로 옆의 망치든 노동자가 닥달하는데 따라 좀더 빠르게 나사를 조여대야 한다. 행동 하나하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권력은 실행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푸코가 보기에 권력에 대한 저항은 권력이 행사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셈이다. 작업거부 혹은 태업, 혹은 출근거부나 취업거부. 담배피우는 아이, 몰래 자위하는 아이, 혹은 가출하는 아이 등등. 그것은 특정한 행동을 정의하고 강제하며 감시하는 권력의 도식에서 이탈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것은 지배자에 대해 저항한다기보다는 권력의 도식에 저항한다. 따라서 권력은 아래로부터 나온다는 명제가 저항의 가능성을 봉쇄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차라리 권력의 도식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의 관계가 집합적인(몰적인) 적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다음 절에서 이 문제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다음으로 권력은 생산적이라는 명제. 권력이 주체를 생산한다면 그 주체가 권력에 저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은 권력이 주체(의 복종)을 생산한다면, 주체가 바로 그 동일한 권력에 대해 저항할 이유는 무엇인가? 즉 동일한 권력이 복종과 저항을 동시에 생산한다고 해야 하는가?하버마스는 이 문제를 보는데도 지극히 일면적이다. 그는 오직 푸코가 자신의 계보학적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규범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로 권력이론의 아포리아를 다루고 있어서, 프레이저(N. Fraser)를 인용하면서 복종과 저항을 다루는 경우에조차도, 어째서 복종보다 저항이 바람직한가를 질문하고는, 여기에는 어떤 모종의 규범을 도입해야 함을 지적할 뿐이다(?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336쪽). 그러나 이는 가치(value)와 가치평가(evaluation)를 비판 철학의 중심에 끌어들이는(G.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UF, 1962, 신범순, 조영복 역, ?니체, 철학의 주사위?, 인간사랑, 1993, 21-22쪽 참조) 이 ‘니체주의자‘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니체처럼 계보학은 힘이라는 양과 의지라는 질에 대한 가치평가를 그 내재적 요소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주91>을 참조.
예컨대 학교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어떤 지식과 특정한 활동능력을 갖도록 작용할 때, 병원에서 규율이 건강을 생산할 때, 감옥에서 범죄자를 유익할 활동에 맞도록 훈육할 때, 바로 그 동일한 권력이 그에 반하는 저항을 야기한다는 것인가? 그 저항의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동일한 권력이 복종과 저항을 동시에 생산한다면, 그 권력 개념은 모든 것을 말하기에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푸코 권력 개념의 가장 근본적인 공백 중 하나를 발견한다.
이 문제를 좀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개개인을 주체로 생산하기 위해 권력이 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권력이 무언가를 길들인다면 길들일 이유는 무엇이며 길들일 대상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권력이 필요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 답은 분명하다. 길들이지 않으면, 권력을 통해 특정한 활동의 형식을 부과하지 않으면 안될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대로 둔다면 제멋대로 활동해서 어떤 정해진 질서를 깨뜨릴 것이 분명한 어떤 ‘위험스런’--혹은 ‘무질서한’--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 힘을 ?안티-오이디푸스?의 들뢰즈/가타리처럼 ‘욕망’이라고 부르든, 프로이트처럼 ‘거시기’라고 부르든, 아니면 프로이트-라이히처럼 ‘리비도’라고 부르든 간에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힘이 어떤 실체인가가 아니다. 그 힘의 본질이 무어라고 보는가와 무관하게, 어쨌든 권력이란 개념이 정의되려는 순간 이미 논리적으로 필요한 전제가 있다는 점이다. 길들여야 할 대상, 특정한 형식을 부과함으로써 유용하고 유익한 활동능력으로 생산해낼 대상이. 혹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생산될 어떤 활동능력의 질료가.이 힘을, 들뢰즈/가타리처럼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는 힘이요 어떤 행동을 만들어내려는 의지라는 점에서 ‘(생산하는)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수많은 비판가들의 우려와는 달리, 어떤 생물학적 힘에 어떤 근원적 지위를 부여하는 생물학주의도, 어떤 본질적 실체를 가정하는 실체론도 아니다. 왜냐하면 방금 보았듯이 그것은, 존재하는 어떤 질서나 권력을 말하려는 순간 이미 이미 전제할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에 붙이는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로 둔다면 어떠한 질서나 형식, 정해진 관계로부터 벗어날 것이란 점에서 ‘탈주적인 힘’이다.이는 들뢰즈/가타리 자신이 지적한대로 푸코와 그들 간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다.
권력이란 바로 이 힘에 대해 작용하는 것이고, 이 힘을 길들이고 포섭하려는 것이며, 그 힘에 어떤 형식을 부과함으로써 그것을 생산적인 어떤 능력으로 생산하는 것이다.따라서 권력 이전의 어떤 힘을 상정하는 것이, 혹은 그것을 ‘욕망’이란 이름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이른바 ‘억압가설’을 재도입하는 것은 결코 아니란 점을 확인해 두자. 더불어 푸코가 ‘억압가설’을 비판하는 이유에 대해 잠시 언급하자. 그가 비판하는 것은 예컨대 성이 억압되었다는 사실, 권력기술이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억압가설’을 비판하면서 중요하게 포착하려는 것은 권력이 단지 억압하는 방식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좀더 근본적으로는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아니든 간에, 권력이 어떤 긍정적인 활동능력을 생산한다는 것이었다(이와 관련해 우리는 <주52>에서 권력의 생산적 효과를 지적하는 것이 권력기술 내지 작동방식을 일면화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억압가설’을 명시하여 비판했던 것은 그것이 권력의 작동방식 뿐만 아니라 그 효과에 관해서도, 이러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양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를 둘러싼 논란과 오해는 사실상 매우 광범위했고, 이에 대해 그는 ?성의 역사? 독일어판(Suhrkamp, 1983)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성의 억압이 없었다고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권력, 지식, 성의 관계를 판독해내기 위해 책의 전체적인 분석을 억압의 개념 주변에 유기적으로 배치해야만 되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또 성의 금지, 방해, 거부, 은폐 등을, 단순히 억압만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 복합적이고 전면적인 전략에 삽입시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D. Eribon, ?미셸 푸코?, (하), 136-137쪽에서 재인용. 강조는 인용자.) 에리봉 말대로 정말 “푸코는 독자가 자신의 책을 잘못 읽고, 잘못 이해했다는 씁쓸한 감정”을 가질 만했다(같은 책, 137쪽).
그것은 ‘저항’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힘이다. 권력이 있는 곳에서 그것은 이제 ‘저항’으로 정의된다. 그것이 없다면, 길들여지지 않은 그 힘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길들이려는 권력은 대체 존재할 이유를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굳이 푸코의 용어를 그대로 쓰자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권력 이전에 이미 저항이 존재한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진경, ?글쓰기와 폭탄; <카프카>가 성으로 간 까닭은??,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관한 7편의 영화?, 새길, 1995, 177-182쪽 참조.
탈주적인 힘의 선차성.
결국 권력이란 탈주적인 힘의 능동적/작용적(active) 힘에 반하여 작용한다는 점에서 반동적/반작용적(reactive) 힘이며, 탈주적 힘의 규제와 통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긍정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경우에도, 또 생산적인 효과를 갖는 경우에도 근본적으로 부정적(negative) 의지다.니체에게서 권력의지는 힘들 간의 관계로 정의된다. 힘에는 능동적 힘과 반동적 힘이 있다. 무언가를 야기하고 자극하고 무언가를 생산하는 힘이 ‘능동적 힘’이라면, 야기되고 자극되고 유용한 효과를 생산하도록 유도된 힘이 ‘반동적 힘’이다. 후자는 능동적 힘에 대해 되작용하고 반작용하는 힘이지만, 그것 역시 ‘유용한 효과’를 생산하도록 행사되며, 단순히 수동적인 힘이나 반향적인 힘이 아니다. 한편 권력의지는 힘들 간 관계를 특정하게 차별화하는 미분적/변별적이고 발생적인 요소로서, 관계된 힘들 간의 질을 규정한다. 그 질 역시 상반되는 두가지로 나뉜다. 어떤 힘의 능동적 작용에 좋은 ‘가치를 부여’(evaluation)하고 무언가를 하도록 하는 ‘긍정적인’ 의지와, 그것을 나쁘게 평가(evaluation)하고--같은 말이지만, 반동적 힘에 가치를 부여하고--무언가를 하지 못하게 규제하는 ‘부정적인‘ 의지가 그것이다.(?니체, 철학의 주사위?, 인간사랑, 1993, 95-103쪽 등 참조)
반면 탈주적 힘의 선차성을 부정하고, 권력을 선차적인 것으로 개념화할 경우 그 상반되는 두 가지 힘의 가치는 반전된다. 다시 말해 저항을 권력을 통해서만 정의하고, 권력을 통해서 야기되는 것이라고 보는 순간, 그것은 긍정적인 힘에 대해 반동적인 힘의 가치를 갖게 된다. 그러한 권력-저항의 개념적 관계 위에서 “권력은 긍정적이다” 내지 “권력은 생산적이다”라는 명제가 제시될 때, 푸코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저항은 부정적이고 반동적인 힘으로서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이제 저항은 꿈꿀 이유마저(꿈꿀 가치마저!) 상실할 위험 앞에 선다. 푸코의 윤리학에서 저항이란 개념을 발견하기 힘들게 되는 것이, 차라리 금욕적 절제를 통해 ‘자아의 실천’(pratique de soi)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3)권력과 적대
둘째, 권력과 적대. 이 문제는 푸코가 언급한 것보다는 언급하지 않은데서, 개념화하는데서보다는 개념화하지 않는데서 나온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권력 이론에는 적대의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앞서 그의 권력 개념을 요약하면서, 한때 그가 갖고 있었으나 나중에 포기한 이른바 ‘적대의 가정’과는 다른 것이다.
푸코가 적대의 가정을 통해 지칭하려고 했던 것은, 지배/피지배 관계로서 권력관계의 대립, 혹은 지배계급의 전략과 피지배자 간의 대립이다. 그런데 그의 권력 개념이 미시적 차원에서 개별적인 대상에 대해 작용하는 한, 그 대립은 결코 집단 간의 적대(예를 들면 계급 간 적대처럼)가 아니라, 지배집단과 개인, 혹은 권력의 전략과 개인 간의 적대다. 감옥에서 적대는 훈육적인 권력의 전략 내지 권력을 행사하는 배치와 수감자 개개인 간의 관계를 지칭한다. 그는 궁극적인 적대자를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것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지만, 모든 것이 서로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은 프롤레타리아트고 다른 한편은 부르주아라는 식으로 투쟁의 형태를 나눌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만의 투쟁이 있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겠습니까?”?육체의 고백?, 252-3쪽
여기서 푸코는 이런 ‘적대’의 궁극적인 요소를 개인 내지 개인을 이루는 하위체계라고 말한다. 이로써 그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 간, 즉 집단 간의 관계로서 적대 개념을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적대란 사람들의 지속적이고 특정한 관계이기에, 모든 개별자 간의 대립, 혹은 그 이하 수준에서의 대립을 적대라고 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용어가 뜻하는 것은 권력이 아래로부터, 각인 간에 행사된다고 할 때, 그에 대한 각인의 ‘저항’이라는 것이다. 이는 성적 배치를 통해 생체권력을 분석할 때도, 치안 배치를 통해 사목적 권력을 분석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대립은 권력과 개인(혹은 그 이하) 내지 권력의 전략과 개인 간에 있으며, 그 이외의 어디서도 별도의 관계를 찾지 않는다. 결국 그가 말하는 적대 내지 대립이란 권력/저항의 대립이요 적대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개념으로 말하면 탈주적 힘과 권력의 대립과 동의어다.
여기서 권력과 저항을 둘러싼 또 다른 난점이 발견된다. 앞서 사목권력에 대한 논의에서 본 것처럼 푸코는 권력관계나 권력의 배치를 전복하려 하지 않으며, 다만 대상을 개별화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주어진 정체성에 묶는 권력에 대해, 그리고 그것에 의해 이미 주어진 개인적 지위에 대해 투쟁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그것은 권력관계나 그 배치를 그대로 둔 채 다만 권력의 효과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그가 권력과 저항을 개인과 권력, 개인과 권력의 전략, 혹은 개인과 권력배치의 양 극 안에서만 포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항이나 투쟁은 개인과 사목적 권력 간에, 개인과 통치 배치 간에, 개인과 국가 간에 설정된다. 이러한 저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가지 극을 갖는다. 하나는 국가적 통치권력의 효과에 대해 가능한 모든 지점에서 저항하는 ‘부정적인’ 무정부적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권력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개개인의 ‘긍정적인’ 윤리적 실천이다.
이러한 ‘난점’--이는 아직도 전복을 꿈꾸는 자들에게나 그런 것이지만--은 권력이 적대없이, 혹은 적대와 무관하게 정의된다는 점에 기인한다. 물론 여기서 적대는 집단 간의 적대, 몰적인 적대다. 다시 말해 푸코가 포착한 권력관계와는 다른 차원의 대립 내지 적대가 있으며, 권력관계가 그리로 환원되지는 않는다해도 그것과 무관하게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이는 ‘미시적 차원’과 ‘거시적 차원‘의 차이를, 그 이질성을 정의한다.
예컨대 이해관계의 대립을 통해 구성되는 계급 간의 적대 관계는, 권력이 행사되는 배치가 그리로 환원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후자와 무관하지 않다.
차라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는 바, 어떠한 배치는 다양한 방식으로 상이한 집단들을, 그리고 종종 집단들 간의 몰적인 적대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에서 생산의 배치는 한편으로는 자본가를 자본의 도식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본의 담지자(Trager)로 만들고, 노동자를 예컨대 테일러적 도식에 따라 행동하는 생산요소로 만든다는 점에서 권력의 배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본가와 노동자를 이윤 대 임금 간의, 노동을 시키는 자 대 노동하는 자 간의, 잉여노동시간 대 필요노동시간의 적대적 이해관계를 만들어낸다. 이 두 가지 차원의 긴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탈숙련화시키는 ‘실질적 포섭’의 권력기술이 이윤의 증대와 밀접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어떤 배치가 몰적 적대를 포함하는 한, 권력은 단일하지 않을 수 있으며 차라리 복수적일 수 있다. 예를 들면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계급적 신체를 구성하기 위해 성을 이용하는 권력기술이 노동자 가족에게는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았다는 푸코 자신의 언급이“계급의식의 가장 중요한 형태들 가운데 하나는 육체의 확립이라는 것을 필경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18세기 부르주아지의 경우에는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 당시 부르주아지는 귀족의 푸른 피를 튼튼한 신체와 건전한 성욕으로 전환시켰다...[반면] 특히 19세기 전반기에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과해진 생활조건을 고려하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육체와 성은 결코 배려의 대상이 아니었다.”(?성의 역사? 1권, 139쪽)
그럴 가능성을 시사한다. 공장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도식은 단적으로 말해 노동자에게는 ‘테일러적인 동작관리의 도식‘으로 부과될 테지만, 자본가에게는 베버 말대로라면 ‘금욕적 축적의 도식’으로베버는 청교도적 소명의식과 금욕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에 고유한 에토스를, 부르주아적 직업 에토스의 성립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이런 “종교적 금욕의 힘이 성실하고 양심적이고 대단한 노동능력을 가진 동시에 신이 원하는 삶의 목적으로서 노동에 매진하는 노동자들을 제공해 주었다”고 말한다(M. Weber, Die protestantisch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박성수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1988, 131쪽). 다시 말해 동일한 금욕주의의 에토스가 자본가에게는 축적으로 도식이, 노동자에게는 노동의 도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동일하게 적용될 수 없었다는 것은, ‘구빈법’(맑스)이나 ‘거대한 감금’(푸코)으로 대변되는 유혈낭자한 조치를 통해서만 노동의 습속을 창출할 수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베버 자신도 “‘민중은, 곧 노동자와 수공업자 대중은 오직 빈곤한 경우에만 신에게 복종한다”는 캘빈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같은 책, 132쪽). 그러나 그는 “구빈법의 입법에 적용된 것이 청교도의 가혹한 금욕주의”라고 하지만, 이 말은, 이익에 반하여 강제되는 노동의 습관을 통해 형성되는 ’금욕‘의 도식이, 이해에 부합해 축적으로 이어지는 금욕의 도식과 동일하리란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라면 틀린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박태호, ?근대적 주체와 합리성: 베버에서 푸코로??, ?경제와 사회?, 1994년 겨울호 참조.
부과될 것이다. 이 양자를 어떻게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저항과 투쟁을 개념적으로 구분하여 새로이 정의할 수 있다. 푸코 말처럼 저항이, 권력과 그것이 겨냥한 대상 간에, 즉 권력과 탈주적 힘 사이에서 정의된다면, 투쟁은 다양한 몰적 적대에 의해, 그리고 나아가 적대하는 생체권력 사이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나아가 권력이 단수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이한, 때로는 적대적인 권력들로 존재한다면, 권력에 대한 저항 역시 이제는 이 권력들 간의 관계 속에서 동적으로 포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잉여가치를 위한 생산의 배치에서 작동하는 권력에 대해 노동자가 저항하는 방식(일례로 파업)은 자본가 자신이 저항하는 방식(일례로 낭비)과 다를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저항의 양상의 차이를 지워버린다면, 그것은 이미 개념으로서의 가치를 잃은 것이다.
투쟁과 결부될 때 저항은 적대적 관계를 전복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가능성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으며, 개인적 저항을 넘어서 특정한 역사적 형태의 권력의 배치 내지 권력기술의 전복을 꿈꿀 수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적대와는 다른 차원에서 작용하는 권력(들)/저항에 결부될 때 투쟁은 단지 적대적 이해관계를 전복하는 것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권력관계‘의 문제로까지 확장된다. 예컨대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변혁이 그 자체로 권력의 변환은 아니며, 피지배계급 자신이 지배적 권력에 포섭되어 있었던 한 차라리 동일한 권력행사를 반복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점, 따라서 권력에 대한 저항의 확장이, 그리하여 ’권력관계의 형태변환‘이푸코에게서 추론되는 ‘권력의 영원성’이 결코 권력의 전복을 꿈꾸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복은 권력(관계) 자체를 겨냥할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특정한 형태의 권력(관계)를 겨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맑스에게 생산이나 생산관계가 영원하지만, 혁명은 결코 생산(관계) 자체의 폐기를 목표하지 않으며, 특정한 생산관계의 변환을 목표하는 것처럼.
필요하게 된다는 사실은 지금이라면 그다지 납득하기 어려운 게 아니다.
좀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전복을 꿈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면, 적대적 이해관계를 낳는 생산의 배치의 전복과 더불어, 테일러주의적 권력기술을 통해 작동하는 부르주아적 생체권력을 대체하여 코뮨적 주체를 생산할 수 있는 또 다른 ‘권력기술’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6.계급투쟁과 생체정치
지금까지 푸코의 권력 개념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나름대로 두 개의 개념적 난점을 통해 그의 미시정치학이 갖는 아포리아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에 대해 우리는 ‘탈주적 힘의 선차성’과 ‘몰적 적대의 차원’을 추가함으로써 그의 미시정치학이 펼쳐지는 개념적 배치를 변경시킬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 셈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개념적 배치의 변이 가능성을 ‘계급투쟁’(이는 다양한 몰적 적대의 하나다. 하지만 극히 중요한 하나다)과 ‘생체정치’(이는 푸코가 해부정치(학)과 대비시켰던 용어와는 다르게 신제적 무의식 내지 생체권력을 축으로 벌어지는 저항과 투쟁의 양상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정의하자)의 문제를 통해 시험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를, 맑스를 통해 푸코를 영유하려는 시도라고 보아준다면 고마운 일이다.
우리는 계급투쟁을 몰적 적대로서 존재하는 계급과, 그 집단이 포함하고 있는 권력들(혹은 권력/능력)여기서 ‘권력’(pouvoir)이란 말은 지배적인 제도나 담론 등을 통해 이미 지배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는 권력(관계)를, 대개는 지배적 계급의 전략을 내포하는 권력관계를 지칭한다. 반대로 ‘능력’(puissance)이란 말은 네그리(A. Negri)의 말을 빌자면(Negri, L'Anomalie sauvage: Le concept du pouvoir et puissance chez Spinoza, PUF), 대중들이 갖고 있는, 아직 제도화되지 않아서 안정적이지도 확고하지도 않지만, 아마도 대항적인 담론들(예를 들면 맑스주의적 담론)이나 제도적인 요소들(예를 들면 당이나 노동조합)을 통해 잠재화된 현실적인 힘을 말한다, . 후자 역시 근대의 지배적 배치들을 따라 형성됨으로써 권력과 대칭적인 형태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물론이며, 이 경우 적대적인, 그러나 동형적인 권력 대 권력의 대립의 양상을 띤다.
간의 관계 속에서, 기존의 지배적 권력에 저항하는 ‘탈주적 힘‘을 장악하려는 권력들 간 투쟁의 문제로 다시 정립할 수 있다. 계급투쟁은 계급적 권력 내지 조직이라는 실재가 예를 들면 의회에서 거수로써 싸우거나, 거리에서 무기들고 펼치는 대리전이 아니다. 혹은 잉여가치를 두고 벌이는 이해관계의 게임만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계급적 권력이 개인을, 나아가 대중을 장악하려는 투쟁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계급투쟁에 대한 계보학적 정의?), 탈주적 힘의 결속을 통해 기존의 생체권력를 넘어서려는 시도, 그리하여 코뮨적인 새로운 생체권력을 작동시키려는 기도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탈주적 힘‘을 주어로 놓는다면, 그 힘이 지배적인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대항권력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와 연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때 ’대중과의 결합‘ 내지 ’대중의 장악‘은 선거에서 지지표를 모으는 ’정치‘가 아니려, 단지 의식화나 이데올로기적 장악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대중들의 생체권력을 만들어내는 기존의 지배적인 습속과 기술, 배치에 반하는 저항이요, 그것을 통해 대중들의 신체적 무의식을 ’장악‘하려는 투쟁이다. 생체정치와 계급투쟁.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계급투쟁의 때론 국지적이고 때론 전면적인 양상과 사건들이 미시적인 수준에서 개인들의 생체권력/신체적 무의식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서 다시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1987년의 전국적인 노동자투쟁은 그 자체로 경제적인 요구와 조합주의적인 내용을 갖고 있던 매우 ‘근대적인’ 투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대중들로 하여금 기존의 순응적이고 포기적인 삶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그리고 지배적 권력에 대해 저항할 필요성을, 그 거대한 억압과 지배의 벽의 틈새에서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노동자들 개개인의 사고는 물론 행동 자체에도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계기였던 것은 아닐까? 그런만큼 그것은 적대적 이해관계에서 야기된 계급투쟁이었지만, 동시에 대중들의 신체에 새겨진 습속의 권력, 생체권력에 저항할 계기를 대대적으로 마련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생체정치적’ 계기였던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전반기에, 혹은 한국이라면 이른바 ‘산업화’ 전반기에 ‘경제투쟁’이란 이름으로 불린 투쟁이나 그에 연관된 사건이 ‘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예를 들어 전태일의 죽음, 혹은 동일방직 여공들의 투쟁). 혹은 거대 공장의 파업에 대해 전쟁같은 물리적 공격이 행해지고, 그 여파를 축소하기 위해 ‘전사회적인’ 비난과 공세의 담론들이 동원되는 것은 잘 알다시피 그로 인해 내주어야 할 임금의 양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르주아지가, 그들이 실제로 내줄 임금이나 양보의 양보다 더 큰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노동자들이 투쟁에 의해 무언가를 획득하려는 것 자체를 막으려 할 때, 그것이 갖는 생체정치적 효과가 아니라면 대체 이 ‘비합리적 선택’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까? 그들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오직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로 환원하고, 노동자의 이기적 욕구에서 기인한 것으로 매도하는 것 역시, 예견되는 이 생체정치적 효과를 겨냥한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투쟁이 임금이나 이해의 문제로 ‘안정’된 경우, 파업은 제도화된 협상의 일부분이 되기 쉽상이다. 적어도 어떤 공장이나 회사의 ‘경제적인’ 파업에 국가가 그처럼 떠들썩하게 개입하진 않는다. 그 개입은 노동자에 대한 양보나 패배가 전체 대중들에게 미칠 (생체)정치적 파장이 문제일 때 발생한다. 억압된 사회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시도나 심지어 조그만 공장의 파업 하나가 종종 생각못한 만큼의 큰 파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생체정치적 효과를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계급투쟁의 생체정치적 효과. 이런 의미에서 계급투쟁은 생체정치다. 그것이 대중들 개개인의 신체에 새겨진 생체권력에 대해 일정한 정치적 효과를 행사한다는 점에서. 대대적인 방식으로 대중들을 생체권력에 대한 저항에 나서게 자극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라면 어떤 직접적 이익을 위해 제시하는 요구사항보다는 차라리 이러한 생체정치적 효과를 생산할 수 있는 투쟁의 배치와 전개가 더 중요해 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젠 거꾸로 생체정치를 계급투쟁의 차원에서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대중을 장악하여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주체로 생산하려는, 적대적인 계급 간의 투쟁이다. 가령 17세기 이래 유럽 전체에 걸쳐 나타나던 기계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란, 특히 ‘러다이트 운동’이란 이름으로 상징되는 자연발생적인 기계파괴운동은K. Marx, Das Kapital, Bd.I, 김수행 역, ?자본론?, 1권 (하), 543쪽 이하.
기계적 리듬을 노동자의 신체에 새기려는 ‘부르주아적‘ 생체권력에 대한 저항이었다.이 기계적인 생체권력의 계급적 성격은 맑스가 인용하는 유어의 말에 잘 나타난다. 그는 자동식 뮬 방적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노동계급 안에 질서를 회복할 사명을 지닌 것이었다...이 발명은 이미 우리가 전개한 학설, 즉 자본은 과학을 자기에게 봉사하게 함으로써 불온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기계물리학은 빈민들의 억압수단으로서 부유한 자본가들에게 봉사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A. Uhr, The Philosophy of Manufactures, ?자본론?, 1권 (하), 554쪽에서 재인용.) 하지만 “분업의 낡은 보루 뒤에서 자신을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하였던 불평분자들은 근대적 기계기술에 의하여 측면공격을 받아 그들의 방어물이 격멸되었음을 알았으며, 무조건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같은 책, 553쪽에서 재인용)
테일러가 이른바 ‘과학적 관리’를 노동과정에 도입하려고 했을 때, 노동자들이 응수했던 강력한 저항H. Braverman, Labour and Monopoly Capital: Degradation of Work in the Twenthieth Century, MRP, 1974, 이한주, 강남훈 역, ?노동과 독점자본?, 까치, 1987, 87쪽 이하 참조.
역시 대중의 미시적인 동작까지 장악하려는 ‘계급적’ 생체권력에 대한 저항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생체정치인만큼 계급투쟁이었다. 따라서 분명하게 말하건대, 생체정치는 계급투쟁이다. 생체정치없는 계급투쟁은, 아니 기존의 생체권력을 전복하지 못한 혁명은, 그것이 정치권력과 국가를 장악하는 경우에조차, 대중의 삶이라는 전장을 ‘장악’하지 못한 채 단지 중요한 고지만을 장악한 데 불과한 건 아닐까? 그 경우 새로운 계급 권력은 여전히 대중들을 장악하고 있는 낡은 생체권력의 지휘자없는 게릴라전(!)에 처음부터 시달릴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회주의의 붕괴는 어쩌면 이처럼 지휘자없는 게릴라전에 국가권력이 패배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는 권력과 개인, 권력과 주체라는 이항대립 속에서 질문하고 대답하는 푸코 식의 개념적 배치를 빗겨나, 차라리 맑스적인 방식으로 다시 문제를 정립해야 한다. 권력과 저항을 통해 적대와 투쟁을 사고하는 것, 적대와 투쟁 속에서 권력과 저항을 사고하는 것. 달리 말하자면 계급투쟁을 생체정치의 차원에서 사고하며 미시적인 수준에서 혁명의 문제를 다시 사고하는 것, 혹은 대중의 신체를 장악하고 그들을 포섭하려는 ‘생체정치’ 안에 새겨진 몰적 적대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현존하는 노동자 신체에 새겨진 무의식적 힘으로서 생체권력이 적대 속에서 작용하며 적대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계급적 관점에서 생체권력의 변환을 사고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감옥에서 응집된 훈육적 권력에 대한 이른바 ‘정치경제학’이 필요한 셈이다.이는 사실 푸코의 작업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감시와 처벌?에서 훈육적 권력을 통해 근대적 주체를 생산해내는 것이 부르주아지의 계획과 통제 하에 수행된 것은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생산된 “사람의 축적이 자본의 축적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321쪽) 그리하여 “근대 사회의 형벌제도를 신체에 관한 일종의 정치경제학 속에 다시 위치지워야 한다“고까지 말한다(같은 책, 54쪽). 이는 이 시기에 그가 아직 권력을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 효과라는 명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과 결부된 것이다. 이는 몰적 적대 속에서 생체정치의 문제를 사고하려 할 때, 그의 분석이 유효성을 가질 수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대중과 결합 내지 대중을 장악하는 문제를 생체정치의 문제로서 다시 정립하는 것, 또는 생체정치적 효과의 차원에서 계급투쟁을 포착하는 것 역시 가능하며 고유한 의미를 가진다. 계급투쟁의 ‘생체정치학’. 그렇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한 이 두 가지는 결코 두 개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적대와 권력, 저항과 투쟁이라는 두 벡터의 다양한 종합을 통해 배치의 역학(dynamique)을 사고하려는 단일한 기획의 대상일 뿐이다. 이런 기획을 “맑스와 푸코를 결합함으로써 상이한 대상을 뒤섞는 시도“라고 비난한다면, 우리는 다만 정치적 웃음으로 답할 수 있을 뿐이다.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문화경제론 03 (0) | 2023.04.28 |
|---|---|
|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개념과 연구방법 (0) | 2023.04.28 |
| 미학사에서의 문예사조 (0) | 2023.04.27 |
| 믿음의 객관성 (0) | 2023.04.27 |
| 바보와 천재 (0) | 2023.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