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리뷰,

방정환 [한국위인전집]

by Casey,Riley 2023. 4. 27.
반응형

 방정환.

 

  제목 : 방정환(1899-1931)
  아동문학가로서 호가  소파 였다. 서울 야주개에서 큰 도매상 집손자로 태어나 모자람없이 살다
가 할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보성 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미동 보통학
교를 졸업했다. 선린 상업 학교에 입학했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그만두고 돈벌이를 해야만 했다.
1917년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하였으며 그 해  청년 구락부 를 조직하여 청년 운동에 뛰어들
었다. 1919년 3 . 1 운동이 일어나 독립 선언문을 나누어 주다가 일본 경찰에 붙들려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1920년 일본도요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 예술과 아동 심리학을 공부하였
다. 1921년 도코에서  천도교 소년회 를 조직하여 소년 운동을 펼쳐 나갔으며 이 때부터 눈을 감
을 때까지 어린이들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1923년 어린이들만을 위한 잡지  어린이 를
창간했으며 색동회 동지들과 함께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1957년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소파상
이 제정되었다.


  1. 야주개 마을 장돌이

  야주개는 서울에서도 대궐과 가까운 마을로 상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았다.
  넓은 길 양쪽으로는 큰 가게들이 즐비하여 제법 북적거리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 장돌이라는 아이가 있다. 다섯 살된, 살이 통통하고 살결이 뽀얀 사내아이로 걸음이
아주 날쌔다.
   방씨네 가게 라 불리는, 마을에서 제일 큰 가게가 장돌이네 가게이다. 이 가게에서는 쌀과 건어
물을 도매한다.
  많은 상품을 사서 쌓아두고 대궐에 납품을 하거나 소매상에서 파는 것이다.
  가게 주인은 장돌이네 할아버지 힌룡이었다. 아버지 방경수는 수레에다 말을 메워서 몰고, 마포
나루와 강진 나루를 드나들었다.
  할아버지 방한룡은 참 알뜰한 상인이었다. 아끼고 부지런했으므로 차츰 돈을 모으게 되었다. 가
게 뒷집도 사들여 담을 터서 한 집으로 만들었다.
  집 안이 넓어졌다. 그렇게 넓은 집 안에는 쌀섬과 건어물이 그득 쌓여 있었다.
  이러한 집안에서 태어난 장돌이는, 우리 나라의 어린이 애호 운동과 아동 문학의 선구자 역할
을 하였던 소파 방정환의 어릴 때 이름이다.
  방정환은 철이 들어 학교에 다닐 때까지 장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방정환이 태아난 것은 1899년(광무 3년) 11월 9일이었다.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금줄을 매고 난 다음, 할아버지 방한룡은 생각하였다.
   맏손자에다 맏아들이니까  장돌 이라 하자. 오래 장수하라는 뜻도 된다.
  이렇게 하여 아기 이름을 장돌이로 정했다. 장돌이의  돌 은 돌처럼 야물고 건강하게 자라라는
뜻에서 남자 아이들 이름에 많이 쓰이곤 했다.
  장돌이는 온 집안 사람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났다.
  아침이면 증조모가 얼레빗으로 장돌이의 머리를 빗어 준다. 그리고 댕기를 드려 잘 땋아 주면
서  장돌아, 집 앞에서 놀 때는 조심해야 된다.  하고 타일러 준다. 집 앞에는 수레가 있고, 등에
짐을 실은 말도 자주 오가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한다. 버릇 나쁜 말은 꼬마들이 밀면 뒷발길질
을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장돌이가 말 발길에 채여 집안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그 뒤부터 장돌이가 대문 밖을 나설 때는 늘 말에서 멀리 떨어진 데 가서 놀라는 당부를 해 두
는 것이다.
  장돌이는 남의 가게에 가서 과자나 사탕을 마구 집어 먹었다. 그래도 가게 사람들은 아무 소리
도 하지 않았다.
  며칠동안 장돌이가 와서 사탕을 집어가면 그것을 적어가지고 방씨가게로 간다.
   어르신, 장돌이가 사탕을 먹고 갔습니다.
   어 그거 잘 했군. 앞으로라도 장돌이가 무엇을 달라하거든 준 다음에 잘 적어 두게. 그리고 나
한테 와서 얘기하면 되네.  하고 돈을 선뜻 내어 준다. 이리하여 골목의 가게 여기저기에는 장돌
이의 외상이 깔려 있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그것을 모두 갚아 주고 장돌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집 안에서는 두 살 위인 누나가 늘 놀이 동무가 돼 주었다. 장돌이는 누나와 같이 쌓아 놓은
쌀섬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막내삼촌이 어울릴 때도 있었다. 집안이 넓어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달릴 수도 있었다.

  같이 놀던 막내삼촌이 심술을 부려 누나나 장돌이를 때리기도 했다. 이 때 삼촌은 할아버지께
단단히 혼이난다. 그럴 때는 마음 속이 매우 고소했다.


  2. 까까머리 유치반생

  장돌이는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께 천자문을 배웠다.
  책을 펴 놓고 기다란 막대로 글자를 눌러짚으며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하고
크게 소리내어 읽었다.
  사랑방에 손님이 들었을 때는 더 큰 소리로 읽었다. 그러면 손님이   어 잘 읽는다. 어, 잘읽
어. 하면서 다섯 푼짜리 동전을 던져 준다. 장돌이는 동전을 거두어 쥐고는  고맙습니다.  한 뒤
계속 천자문을 읽었다.
  두 살 위인 삼촌은 서당에 다녔다. 제법 어려운 글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삼촌은 서당을 그만두고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탁지부 대신 이용익이 세운 보
성 학교였다.
  아침이면 까만 두루마기에 까만 대님을 맨 삼촌이 책보를 끼고 학교로 나선다. 참 멋있어 보였
다.
  장돌이도 학교에 가고 싶어졌다.
   나도 삼촌 따라 갈래.  하고 나섰다. 그러자 할머니와 증조모가 붙잡고 말린다.
   너도 삼촌 나이 되면 보내 준다. 아직 너 같은 아이는 어려서 안돼.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대문 뒤에 숨어 잇던 장돌이는 살짝 삼촌 뒤를 따라 나섰다. 학교는 멀
지 않았다. 야주개에서 산모퉁이를 끼고 돌면, 새문안  거지바위 언덕에 우물이 있다. 그 우물 뒤
에 큰 대문이 달린 기와집이 있었는데, 그것이 사립 보성 소학교였다.
  갓을 쓴 사람, 초립을 쓴 사람, 머리 땋은 총각들이 몇백 명인지도 모르게 들어가고 있었다. 넓
은 마당이 가득할 만큼 많은 학생이였다. 당시의 학교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어린이들 사이에
섞여서 공부하였다.
   땡 땡 땡 땡…….
  종 소리가 나자 그 많았던 학생둘이  와! 하고 소리지르며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장돌이 혼자
만 동그마니 운동장에 남게 되었다.
   무엇을 하고 있나?
  장돌이는 슬금슬금 다가가서 교실 창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학생들이 한 책상에 두 사람씩 앉아 있었다.
  두루마기에 갓을 쓴 선생님은 긴 담뱃대로 칠판을 땅땅 두드리며 학생들을 꾸짖었다.
   그것도 몰라, 그것도 몰라!
  맨 앞줄에 삼촌이 보인다. 삼촌도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다시 다른 교실로 가 보았다. 여기에도 학생들이 가득 앉아 있다.
  쉬는 시간 종이 났다. 학교에 교무실이 없었으므로 선생님은 학생들을 내보낸 뒤 흑판 밑에 누
워서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창 너머로 들여다보는 꼬마를 보고,
   이노옴!
  하고 눈을 흘겨 본다. 장돌이는 깜짝 놀라 운동장으로 뛰어 나왔다.
  점심때가 되자 별안간 학교가 떠들석했다. 학생들이 운동장에 나와서 줄을 섰다. 선생님들도 두
루마기에 묻은 분필가루를 털고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서 학생들 앞에 섰다.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오신다는 것이었다. 곧 인력거가 도착하면서 위엄이 당당한 교장 선생님
이  내렸다.
  교장 선생님은 한 10분쯤 학생들에게 훈화를 한다.
  그러더니  제군들에게 선물을 주겠다. 열심히 공부하여 대한 제국의 기둥이 되도록…….  하고
큰 갱지 두 장과 연필 한 자루씩을 전교생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의 학교는 수업료를 받지 않았으며, 먹, 붓, 벼루, 종이, 연필 등을 모두 학교에서 대 주었
다.
  학생들 공부가 다시 시작되었다. 교장 선생님을 공부하는 광경을 살피면서 교실들을 이 방 저
방 돌아보았다. 그리고 운동장에 쭈그리고 앉아 놀고 있는 장돌이를 보더니,
   웬 아이냐?  하고 물었다. 꼬마는,
   장돌이에요. 야주개에 살아요.  하고 대답하였다.
   허, 그놈 똑똑하다. 여기는 어째서 왔느냐?
   삼촌 따라 왔어요.
   몇 살이냐?
   일곱 살이에요. 학교 다니고 싶어요.
   그래 학교 다녀야지. 학교에 다니려면 머리를 깎아야 한다.
  교장 선생님은 장돌이의 댕기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머리를 깎아야 공부가 되나요?
   그럼, 그럼. 나처럼 머리를 깎아야 한다.
  교장 선생님은 자기 모자를 벗어 보이며 말했다.
  장돌이는 교장 선생님 말씀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안 된다고 하거나, 싫다고 하면 학교에 못
오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장돌이를 번쩍 안아 인력거에 태운 후 무릎에 앉혔다. 얼마쯤 가던 인력거는 거
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새문안 마을 어느 큰 기와집 앞에 가서 섰다.
  식혜 한 그릇을 내어 와서 장돌이에게 주더니 하인을 불러,  이 아이의 머리를 깎아 주어라.
하고 말했다.
  하인이 가위와 이발기를 가지고 나왔다. 댕기 달린 머리를 가위로 싹뚝 자르더니 이발기로 머
리를 박박 깎고 솔로 머리를 쓸어낸다.
  아주 시원했다. 그런데 댕기가 달린 머리꽁지를 어쩔까 하였다. 할아버지가 야단치시지나 않을
까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나오더니,
   이놈은 아주 잘생겼으니 대장 모자를 씌워 주어야 한다.  하고 빛깔 고운 모자를 씌워 주었다.
그리고 조그만 단장을 주면서,
   대장이니까 단장을 짚어야 해. 이걸 짚고 내일부터 학교에 오너라.  하고 등을 두드려 준다.
  장돌이는 색동 모자를 쓰고, 단장을 짚고, 잘린 댕기머리를 팟단처럼 들고는 점잖은 교장 선생
님 흉내를 내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아니 아니? 쟤가?
  잘린 댕기머리를 들고 들어오는 장돌이를 보고 증조모가 기절을 할 듯이 놀랐다.
  다음으로 할머니가 나와서 소리쳤다. 그리고 어머니가 오셔서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글쎄 어떤 몹쓸 사람이 아이의 머리를 이꼴로 만들어 놓았단 말이냐?
할머니도 울음을 터뜨렸다.
  당시 우리 나라 사람은  몸에 있는 머리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이것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다.  라는 유교의 말씀을 깊이 믿고 잇었다. 그래서 머리를 자르는 일을 죽는
것 못지 않게 싫어하였던 것이다.
   머리를 깎고 왔어? 이놈 너 오늘 어디 갔었더냐?
  장돌이를 감싸기만 하던 할아버지도 이번만은 매를 들었다. 장돌이는 겁이 나서 쩔쩔매었다. 그
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삼촌이 하던 대로 종아리를 걷고 할아버지 목침 위에 올라갔다.
  몹시 확가 난 할아버지는 정말 손자의 종아리에 매를 대었다. 그래도 장돌이는 학교만은 가고
싶었다.
  이튿날이었다. 장돌이는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보내 주시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도 숨어 있다가 삼촌 뒤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교장 선생님은 대장 모자 쓰고 단장을 짚고 오라 하였지만 그렇게 하고는 학교에 갈 수가 없었
다.
  아침을 먹고 대문 뒤에 숨어 있던 장돌이는 삼촌 뒤를 따라 나섰다.
  300명 전교생 중에서 머리 깎은 아이는 장돌이뿐이었다.
  이 날부터 장돌이는 방정환으로 불리었다.
  까까머리 방정환은 유치반 학생이 되었다. 전교에서 나이가 제일 적은 학생이었다.
  선생님은 방정환을 맨 앞자리에 앉혔다. 아이들은 천자문을 배우고 있었다.
   어, 천자문? 이건 우리 할아버지한테서 모두 배워 버렸는데?  그래도 그 말을 할 수는 없었으
므로 그냥 앉아 있었다.
  갓 쓰고 담뱃대를 든 선생님이 출석을 불렀다.
   방정환!
   네!
  방정환은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이 방정환은 귀엽고 어리기 때문에 앞자리에 앉혔다. 머리를 잘 깎았어. 너희들도 방정환처럼
머리를 깎도록 하여라.
  선생님이 방정환을 앞에다 세워 놓고 꼬마들에게 인사를 하도록 시켰다. 방정환은 꾸벅 절을
했다.
  그런데 배우는 것이 너무 쉬워서 재미가 적었다. 학교라고 하지만 배우는 것은 글방과 다르지
않았다.
  아침에 공부가 시작되면 먼저 어제 배운 것을 외어야 한다. 나이 어린 학생들은 잘 외었지만
정작 상투 달린 학생들이 멍청했다. 선생님이 이 어른 학생에게 야단을 친다.
   이놈아. 어린애도 다 외는데 아들딸 낳고 아비 노릇하는 놈이 그것도 못 외어?
  선생님은 나이 많은 아버지 학생을 불러내어, 책상 위에 엎드리게 한다. 그리고 바지를 끄른 다
음 버드나무매로 볼기를 치는 것이다.
  선생님이 볼기를 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나이 어린 학생을 불러내기도 하였다. 상급반에서는
하급반 꼬마를 불러다가 볼기를 때리게 하여 창피를 주었다.
  방정환도 몇 번 상급반에 불려 가서 나이 많은 학생들 볼기를 때렸다. 선생님의 강요에 못 이
겨 한 일이었다.











  3. 옛날의 학교 생활

  양력 정월 초순이었다.
  학교에 갔더니 이종호 교주에게 세배를 간다며 운동장에 집합을 시켰다. 육영 사업가 이종호
교주는 보성 학교의 설립자 이용익 대감의 손자였다.
   구령에 맞추어 잘 걷도록 해라. 앞으로 갓!
  선생님의 구령에 맞추어 출발을 하였다. 300명 학생중에 4분의 3은 갓 쓴 어른들이고 4분의 1
은 머리를 땋은 총각들이었다.
   하낫 둘. 하낫 둘…….  발을 맞추어 길을 걸었다. 큰 구경거리라며 길가에 사람들이 늘어서 있
었다. 학생들은 우쭐거리며 걸었다.
   세배를 드리면 교주님이 과자나 한 봉지씩 주시겠지?
   그럼, 그럼.
  꼬마들이 큰 기대에 차서 말을 주고받았다.
  교주님 댁은, 새문안을 지나 육조 거리에서 가까운 마을에 있었다.
  좁은 골목을 들어서자 총을 든 병정들이 교주님 댁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교주님 댁에 들어서니 보성 전문 학교 학생들까지 와서 있었다. 전문 학교 학생들도 모두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갖추어 입고 있었다.  사립 보성 전문 학교  라는 글자를 한문으로 써서 갓 앞쪽
테에다 붙인 상투쟁이들이었다.
  교주님이 대청에 나온 듯했다.
   교주님께 새해 새배를 올립니다. 경례!
  키 작은 꼬마들에게는 교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구령에 따라 꾸벅 절을 하였다. 교주님의
새해 인사말은 길었다.
   어서 과자나 한 봉지 주셨으면…….  하고 방정환 또래의 꼬마들은 침을 삼키고 있었다.
  뒤편에서 삐걱,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리고 있었다. 여러 사람의  하인이 짐을 지고 대문으로
들어왔다. 지게 위에 놓인 짐에는 휜 보자기가 씌워 있었다.
   옳다, 저것이 과자인가 보다.
   과자를 주면 나는 먹지 않고 집에 가지고 갈 거야.
  꼬마들은 교주님 말씀은 들을 생각도 않고 작은 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과자는 나오지 않고 병정들이 대문을 걸어 잠그고 가위를 가지고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전문 학
생들부터 차례로 상투를 자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이구, 왜 이러십니까?
   상투를 자르지 않고는 이 대문을 못 나가요.
   아니 아니, 아이고 아이고!
  싹뚝, 상투를 자른 뒤에 검은 모자를 하나씩을 씌어서 대문 밖으로 내보내 준다. 아까 과자인
줄 알았던 그 짐은 모자였던 것이다.
  상투쟁이 학생들은 달아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였다. 그러나 벌써 계획적으로 한 일이
므로 달아날 구멍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대문 안팎이 곡성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방정환 또래의 꼬마들도 무슨 영문인 줄 모르면서 덩달아 울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뒤미처 소식을 들은 학부형들이 달려오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통곡을 했다.
   남의 아들을 왜 이 꼴로 만든단 말이오. 차라리 나를 죽여 주시오. 내 목을 잘라 줘요.
  나중에는 학부형들로 골목이 가득 찼다. 정말 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소학교 상투쟁이 학생들도
머리를 모두 깎이었다. 마지막으로 댕기를 달고 다니는 꼬마둥이 학생까지 모두 머리 꼬리를 잘
렸다. 방정환과 친했던 김효남이도 이 날 머리 꼬리가 잘렸다. 수난을 당하지 않는 학생은 까까머
리 방정환뿐이었다.
  이렇게 하여 보성 전문 학교 학생 전원과 보성 소학교 300명 학생 전원이 단발을 마쳤다.
  상투쟁이가 없어진 학교는 이튿날부터 분위기가 달라졋다. 전교생은 모두, 깎은 머리에 까만 교
모를 쓰고 학교에 나와서 공부하게 되었다.
  한결 단정하고 보기에도 좋았다.
  집안 어른들은 이제 방정환의 학교길을 막지 않게 되었다. 방정환은 김중환 교장 선생님으로부
터 얻은 색동모자를 쓰고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색동 모자에 어울리게 겉옷으로 빨간 두루마기를 입었다. 김효남과는 제일 친한 단짝이었다. 키
도 같고 나이도 같았다.
  선생님은
   이놈들이 쌍둥이 같다.  하고 같은 자리에 앉혀 주었다. 공부를 가르치다가도 선생님은,
   귀여운 놈들이야.  하고 두 꼬마둥이의 뺨을 살짝 만져 보곤 하였다.
  방정환은 유치반을 마치고 초등과 1년이 되었다.
  오래된 기와집을 사서 개조한 다음 학교 살림을 차린 보성 소학교에는 아직까지 교무실과 교장
실이 없었다.
  학교 일을 보는 심부름꾼도 한 사람 없었다.
  시간이 되었을 무렵, 선생님 중 한분이 조끼 주머니에서 회중 시계를 꺼내보고 마치는 종과 시
작 종을 치는 것이다.
  쉴 만한 곳이 없는 선생님들은 칠판 밑 교단에 앉아 쉬다가 두루마기를 벗어 베개 삼아 베고
누워 낮잠을 잘 때도 있었다.
  이웃반 선생님들끼리 모여긴 담뱃대로 담배를 나누어 피우며 교육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
였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 앞서서 상투를 자르기는 하였지만 맨 머리에 탕건과 갓을 받쳐 쓴 채 학
교에 나왔다.
  교장실이 없는 교장 김중환 선생은 일 주일에 한두 번정도 나와서 학교를 둘러보고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받지않고 학용품까지 주어가며 공부를 시켰으므로 재산가가 아니면 학교 경영을 할 수
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 날, 전교생은 교장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고 말았다. 책상에 먹물을 엎지른 학
생이 많았던 것이다.
  종이와 학용품을 하인에게 들려 가지고 학교에 온 교장 선생님이 교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습자 시간에 어느 학생이 장난을 하다가 벼루를 엎어버렸는데 공교롭게 선생님 눈에 띄고 말았
다.
   붓글씨를 쓰면서 장난을 하다니.
  교장 선생님은 담임 선생에게 그 학생의 종아리를 때리도록 일렀다. 그리고 나서 교장 선생님
은 직접 교실에 들어와서 책상 위를 살폈다. 오늘 들킨 아이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학생들 책상
에는 먹물 자국이 있었다.
   이놈들, 자기 책상 하나 간수하지 못하다니. 책상은 살림하는 여자가 세간 아끼듯 해야 하는
거다!
  교장 선생님은 몹시 화를 냈다.
  페인트가 없던 때여서 책상 바닥이 하얀 나무로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의 날마다 붓글씨 공
부를 했으므로 책상은 먹물투성이었다. 교실 바닥에도 먹물 자국이 많았다.
  당장 깨끗이 닦아 놓도록 하시오!
  교장 선생님이 야단치자 선생님들은 얼른 대답했다.
   네 네, 잘 닦아 놓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내 눈 앞에서 닦도록 하시오!
  교장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300명 전교생의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전교생은 책상을 맞들고, 동네 우물터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마침 가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옷을 버릴까 해서 학생들은 나가기를 머뭇거렸다.
   무슨 동작이 이러나? 전쟁에 나간 병사가 비가 온다고 해서 전쟁을 안 해?
  학생들은 위통을 벗고 책상을 들었다. 우물가에 가서 젖은 새끼에다 모래를 묻혀 책상을 문질
러 먹물을 벗겨내었다.
  우물가에는 위통을 벗은 학생들로 그득하였는데, 참 보기 흉한 모습들이었다. 그 위로는 가을
비가 내리고 있어 몹시 추웠다.
  방정환은 이날 효남이와 같이 책상 먹물을 벗기느라 혼이 났다.





























  4. 눈물의 콩나물죽

  방정환의 할아버지 방한룡은 신용 있는 상인이었으므로 세찬계 도가(도매상)를 겸하고 있었다.
  어느 집이나 설빔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제수가 필요하다. 그래서 야주개와 새문안 일대의 상
인들은 세찬계를 조직해 놓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협동조합과같은 것이다. 처음 세찬계는, 계원들이 설에 쓰일 반찬인 세찬을 공
동으로 구입하여 나누는 데서 출발하였다. 설을 쇠기 위해서는 조기나 북어, 미역, 찹쌀 등이 필
요한데, 이것을 직접 산지에 가서 사들여 싼 값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리하여 계원들이 이득을 보
는 것이다. 야주개와 새문안에는 여러모임의 세찬계가 있었다.
  이들 여러 계의 모임 일을 모두 맡아서 대행하는 집이 세찬계의 도가였다. 방정환의 할아버지
방한룡은 현재의 협동조합장 일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하여 세찬을 싸게 사들이기 위해 모인 세찬계였지만 이것이 차츰 발전하여 김장철의 배
추를 공동구입하게 되었다. 초가을에는 메주콩을 싼값으로 사들여서 나누기도 하였다.
  계 도가의 주인 방한룡은 새문안 뒤 언덕에 큰 창고를 끼고 있는 도가집을 마련하였다.
  도가집 뒤에는 삼국지의 영웅 관운장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음력 정월 보름이면 방한룡이 전
체 상인을 대표하여 이 사당에 제사를 올린다. 상인의 집단 마을인 야주개와 새문안이 재수 대통
해서 장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 비는 제사였다.
  마을 사람들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을 상업의 신이라 믿고 있었다.
  할아버지 방한룡이 이처럼 상업을 크게 벌여놓고 있었으므로 누구나 그를 신용하게 되었고, 그
의 이름을 대기만 하면 어려운 일도 쉬 이루어지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로 집안이 기울어지게 되리라고 누가 알았으랴.
  어느날, 빚쟁이들이 여럿 방정환의 집에 들이닥쳤다.
   이거 망했구나!
  할아버지 방한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 동생이며 방정환의 종조부 되는 방인룡이 할아
버지의 이름을 대고 엄청난 빚을 내어 쓴 다음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방정환이 작은할아버지라 부르던 방인룡은 훤칠한 키에 모습이 멀쑥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말
솜씨까지 좋아서 한량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단단한 성격이 아니어서 형인 방한룡의 속을
썩여 온 터였다.
  제물포에서 장사를 하던 그는 일확천금을 하겠다며 미두에 손을 대었다. 미두란 현물 없이 미
곡을 거래하는 투기 행위였다. 미곡의 시세에 따라 돈을 댄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는데, 한꺼번
에 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 살림을 망칠 수도 있었다.
  방한룡은 그 기미를 알고 동생 인룡을 타일러왔다.
   아서라. 미두로는 돈을 모아도 오래 가지 못한다. 고생해서 번 돈이라야 제 것이 되는 거야.
미두로 돈을 벌어 봤자 네 돈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룡은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돈을 크게 벌어서 떵떵거리고 살아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제 미두에는 도가 텄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벌써 벌어 놓은 것만 해도 몇 사람 재산은 됩니다.
라고 큰 소리를 쳤다.
  미두에서 돈을 벌었다면서 큰집에 선물을 사 오기도 하고 방정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우리 장손이 잘 크는 걸 보면 우리 집안에 왕기가 텄다. 하고 1전짜리 동전을 던져 주기도 하
였다.
  그러던 방인룡이 미두로 집을 날리게 되자, 이 사실을 형에게 숨기고 빚을 내어다가 다시 투기
를 시작했다.
  세찬계의 계꾼들 집에 다니며 방한룡의 이름을 앞세우고 돈을 꾼 것이다.
   아니, 우리 형님 한룡 씨를 보더라도 이 조그만 돈쯤 못갚겠습니까? 변리를 후하게 줄테니 염
려말고 빌려 주세요.
  그러던 방정환의 종조부 방인룡은 계속 미두에서 손해만 보게 되었고, 빚은 이자에 다시 이자
가 늘어, 갚을 수 없을 만치 큰 돈이 되고 말았다.
  인룡이 빚에 졸리다가 숨어 버리자, 빚쟁이들은 형인 방한룡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어른신네 동생이 어르신을 앞세우고 빚을 내어 갔습니다.
   그래? 내 아우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천하에 고약한 것!
   우리는 어찌합니까? 갚아 주셔야지요.
   그래 그래, 갚겠네. 내 동생이 진 빚이니 내가 갚아야지. 하고 동생의 빚을 떠맡았다.
  빚을 갚기 위해서는 집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집을 팔아도 그 많은 빚을 다 갚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집안에 있는 가재 도구까지 죄다 빚쟁이에게 넘기고, 말과 수레도 모두 빚쟁이 손에 넘
겨 주었다.
  온 식구가 종조부를 원망하며 한숨을 쉬었다.
  식구 하나라도 덜어야겠다며 방한룡은 서둘러 딸을 여의었다. 방정환에게는 맏고모였다. 그래도
열두 식구라는 대가족이었다.
  번쩍거리던 세간까지 모조리 잃어버린 방정환의 식구는 이부자리와 부엌살림 몇 가지만을 든
채 쫒겨났다.
  식구들이 거처를 정한곳은 사직동 뒤, 도정궁 아래의 조그만 초가집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살아 이런 꼴을 보는고?
  방정환의 증조모 최씨가 목을 놓아 울었다.
  열두 살 난 막내삼촌이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인 가게의 점원으로 취직을 하였다. 월급은 없이
밥만 먹여 준다는 조건이었다.
  아버지 방경수도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며칠만에 조선 인쇄 주식회사의 활자공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얼마 뒤에는 아버지의 소개로 방정환의 삼촌인 방희영이 같은 회사에 다니게 되었
다. 한 달도 못 가서 콩나물 죽을 끓이게 되었다. 방정환에게는 학교가 배나 멀어져 힘이 들엇다.
사직동에서 전에 살던 야주개를 돌아 보성 소학교에 가야 한다. 그러자면 옛날에 살던 집 앞을
지나게 된다. 가게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저기가 내가 공부하던 방이다. 여기가 할아버지 거처 하시던 방…….
   누가 살고 있을까?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방정환은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긴 담뱃대를 든 노인이 나오면서
   웬 놈이 남의 집을 들여다보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방정환은 찔끔하고 달아나 버렸다.
  방정환의 가족이 살 때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집 안이 컴컴하기
만 하고, 가게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노인으로부터 혼쭐 난 뒤 방정환은, 살던 집 앞을 지나기가 싫었다. 그래서 집을 비켜서 돌아다
녔다.






  5. 사직동 가난뱅이

  집안에는 다시 고난이 겹쳤다. 아버지와 삼촌이 인쇄소에서 받아오는 월급이 너무 적었던 것이
다. 아침부터 죽을 끓였으므로 학교에는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갈 수 없게 되었다.
  방정환은 도시락을 싸 내라고 어머니를 졸랐다.
   없는 걸 어떻게 싸 내란 말이냐, 이놈아!
  어머니는 몽당 빗자루를 들고 방정환의 궁둥이를 두어 차례 때렸다. 증조모가 말리면서 말했다.
   세상에, 저것을 배곯릴 줄 누가 알았겠느냐.
  방정환은 사립문 밖으로 쫒겨나가면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머니 손씨는 마루 끝에 서서 울고
있었고 증조모는 사립문에서 그대로 한숨을 쉬고 있었다. 어머니와 증조모가 가여워 보였다.
   그까짓 것 배고픈 것쯤 참아야지.
  그는 도시락도 못 가지고 학교에 가면서,
   오늘도 점심 시간에는 변소 뒤에 숨어 있다가 점심 다 먹고 아이들이 나오거든 같이 놀아야
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야주개에서 가까운 마을에 대고모가 살았다. 어느 날 대고모가 증조모 문안도 드릴 겸 친정에
와서는 한바탕 동생인 인룡을 나무라며 한탄을 했다.
   글쎄 조선 망치고 대국 망친다더니 큰집까지 쪽박을 차게 했군, 글쎄.
  그러더니 방정환이 도시락을 싸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우리 장손이 밥을 굶어서야 되겠니. 학교 가는 길에 빈 그릇을 갖고 오너라. 내가 밥을 담아주
마. 하면서 안쓰러워했다.
  이제 도시락을 날마다 갖고 다니게 되나 보다 하고 방정환은 망태에 뚜껑 덮인 빈 주발을 넣어
가지고 대고모댁으로 갔다. 그때는 아직 도시락그릇이 보급되지 않은때여서 학생들은 집에서 사
용하는 밥그릇인 주발에 점심을 싸 가지고 다녔다.
  대고모는 남편이 없는사이에는 도시락 주발에 밥은 담아 주었다. 그러나 남편이 집에 있을때는
곤란했다. 그러잖아도 처가가 망했다는 말을 듣고 재산이 처가 쪽으로 빠져나가지나 않나 하고
지켜보는 터였다.
 이런 날은 또 점심을 굶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도시락 주발을 열어보고,
   밥그릇이 말짱한 걸 보니 오늘은 할머니 집에서 점심을 주지 못했구나…….
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방정환에게 지긋지긋하게 싫은 일이 또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쌀을 꾸러 가는 일이었다.
  학교에 갈 때 어머니는 쌀 자루를 착착 접어서 정환에게 준다.
   공부 다하고 이모 집에 들러 오너라. 이모한테 쌀 두되만 꾸어 달라고 해라, 그믐께 보내 준다
고 하고.  방정환은 뿌리쳤다.
   싫다니까요, 굶으면 굶었지.
   다음에 너는 커서 이런 꼴 당하지 않는 사람이 돼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싫은 입도 떼어 봐야
한다.  어머니 눈에 또 눈물이 괴었다. 할 수 없이 쌀자루를 들고 대문을 나섰다.
   어떻게 또 쌀자루를 이모 앞에 내미나.
  학교에 가서도 종일 걱정이 되었다. 변소 뒤에 숨어 점심 시간을 보내는 이런 날은 머리가 휑
했다. 쌀 꾸러갈 일을 생각하면 하학 시간이 될까 봐 겁이 났다.
  학교 파하는 종이 울리고 이모 집을 향해 걸어가자면 또 걱정이 된다.
   들어가서 무어라고 말할까? 꾸어 줄 쌀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도로 나오나.
  이모 집에 닿았다. 들어갈까 말까 하는데, 집 안에서 이모부가 나왔다.
   장돌이냐?  이모부는 방정환의 어렸을 때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네.
  방정환은 머뭇머뭇 대답을 했다.
   이제 학교 갔다 오느냐? 어서 들어가서 놀다 가거라. 왜 그러고 있니?
  방정환의 입에서는 차마 쌀을 꾸러 왔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녜요. 저 저……. 얼른 가야 해요. 집에 일찍 오라고 그러셨어요.
  그는 꾸벅 절을 하고 나와 버렸다. 어쩌면 이모부가 쌀 꾸러 온 걸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골목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두부 장수, 새우젓 장수들이 외치며 지나가고, 집집에서는 저녁 연
기가 오르고 있었다.
  집에 이르렀다. 빈 바가지를 들고 어머니가 마루 끝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얘야, 왜 쌀을 안 갖고 오니?
  어머니는 빈손으로 오는 방정환을 보고 묻는다.
   이모집에도 쌀이 없다고 그래요.
  방정환은 그만 거짓말을 하고 말앗다. 그리고 밖으로 뛰어나와 전봇대를 잡고 울었다.
  사직동 오두막집에는 우물이 없었다. 우물은 사직 뒷 담 밑에 있었는데 집에서 두어 마장은 되
는 곳이었다.
  열 살의 방정환이 사촌 동생 경환이와 물을 길어 날라야 했다. 경환이는 여덟 살이었다. 석유
초롱으로 된 물동이에 끈을 매고 긴 막대기를 꿰었다.
  물 한 동이를 채워 어깨에 걸치고 경환이가 앞을 선다. 비틀거리며 오르막을 오르면 방정환이
뒤따라 메고 간다. 사촌 동생이 무척 힘들어 보였다.
   자, 여기서 좀 쉬자.
  오르막을 다 오른 다음,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막대기끝을 어깨에 멘다.
   자 이제 세 번째다. 이제 세 번만 더 길으면 끝나는 거야.
  세숫물을 합쳐서 하루에 여섯 동이의 식수가 필요했다. 그것을 두 꼬마가 먼 우물에서 길어 와
야 하는 것이다.
  정환이, 경환이는 학교에 갔다오면 먼저 물 긷는 일부터 마쳐 놓고 숙제도 하고 놀기도 하였다.
  이런 물긷기도 여름에는 별로 힘든 것이 아니지만, 추운 겨울이 오면 물이 달렸으므로 물동이
를 늘어놓고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우물가는 꽁꽁 얼어붙어서 미끄러웠다. 추위가 심했다. 바람까지 불어 주먹을 꼭 쥐고 동동 발
을 굴렀다.
  방정환은 집이 가난했으나 귀염성 있게 자랐다.
   귀골 태가 나는 아이다. 라고 방정환을 보고 사람들은 말을 하곤 하였다.
  그 중에서도 장씨 성을 가진 화가 한 사람이 몹시 방정환을 탐내었다.
  방정환을 불러다가 좋은 음식을 주기도 하고, 재미있는 장난감이나 그림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나도 얘처럼 귀여운 아들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던 화가는 방정환을 양자로 들여왔으면 하고 이웃 사람을 통해서 청을 하였다.
  방정환의 아버지는 이것을 거절하였다.
   집안이 내리막을 만나 이 지경이지만 자식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고 하시오.
  아버지 방경수는 전갈하는 사람에게 따끔한 이야기를 한 다음, 아들에게 화가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화가가 방정환에게 쏟는 사랑은 지극하였다.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방정환이 친척집에 가서 아쉰소리를 하고 쌀을 꾸어가지고 오는 길이
었다. 길가에서 화가 장선생을 만났다.
   정환이구나.
  화가가 방정환을 덥석 안았다.
   아버지가 너를 양자로 주지 않겠다 하셨다. 그래도 정환이는 귀여운 아이야. 우리 집에 갈까?
  외국 유학을 마친 화가는 다시 유럽을 다녀온 모양이었다. 몇가지 선물을 내 놓았다.
   그리고 이걸 정환이 주려고 사왔지!
  화가 장 선생이 내 놓은 것은 환등기였다. 이건 굉장한 선물이었다.
  장 선생은 환등기에 슬라이드를 넣어서 비춰 가며 설명을 한다.
   자, 활동 사진 같지? 이건 불란서라는 나라다. 파리라는 도시지. 이건 런던…….
   자, 여기 슬라이드가 있으니 갖고 가서 비춰 보도록해라.
   정말 저를 주시는 거예요. 장 선생님?
   그럼, 정환이 주려고 사왔다니까!
  방정환은 뛸 듯이 기뻐하였다.
   야, 이것으로 활동사진 놀이를 하면 되겠구나.
  값진 장난감이 생긴 방정환은 제법 영화사 사장 흉내를 내며 뽐내었다. 영화 놀이를 하고 싶었
지만 사직동의 집은 너무 좁았다.
  그는 서대문 고모네 가게에 가서 마을의 꼬마들을 모아들였다. 당시는 영화를 활동 사진이라
하였는데 소리가 함께 나오지 않는 무성 영화였다.
  활동 사진을 상영하는 데는 대사를 죄다 외어가지고 화면에 맞게 얘기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사람을 변사라고 하였다.
  변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해 가면서 대사를 외어댄다. 그것은 아주 멋진
일이었다.
  아이들을 모아들인 방정환은 환등기를 틀어 놓고 변사 노릇을 해 나갔다.
   여기는 영국이에요. 영국의 서울은 런던이고요. 시내의 복판으로 템스강이 흐르지요…….
  마을의 꼬마들은 방정환이 벌인 활동 사진 놀이를 흥미있게 구경하였다. 방정환의 인기는 대단
했다.
  방정환은 이 환등기를 통해, 영화와 연극에 대한 취미를 길러 갔다. 그러나 활동 사진 놀이를
하다가 고모집의 장독을 깨고부터는 서대문 쪽에 환등기를 갖고 가지 못했다.
   우리 대한으로 하여금 소년의 나라로 하라. 그리하려면 이를 감당하도록 교도하여라!
  1908년, 육당 최남선이  소년 이란 잡지를 통해 내세운 표어였다. 청소년을 잘 길러 나라의 일꾼
으로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자주 강연회가 열렸고 그 때마다 강사들은 탁자를 두드리며 나라를 일깨우자고 소리쳤다.
  방정환도 무엇인가 나라를 위해 일해야겟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끼리 토론을 벌이자.
  그는  입지 라는 말을 생각하였다. 소년들끼리 이런 이름을 가진 모임을 가졌으면 하였다.
   소년 입지회
  그는 간판을 썼다. 대한문 맞은편에 최순복이라는 동무가 있었다. 집이 넓직하였다.
   순복이네 집으로 모이자.
  몇 사람의 소학생이 모였다.
   나라와 우리의 장래를 생각하며 토론을 하자.
  열 살에서 열네 살까지의 코흘리개들이 토론을 벌였다. 회장은 열 살의 방정환이었다.
  그는 가끔 환등기를 가지고 와서 변사 노릇도 해 가면서 제법 세상을 두루 아는 듯이 설명을
해 나갔다.
  이리하여 입지회는 제법 알찬 모임이 되어 갔다.
  한 사람씩 나가서 자기의 주장을 하였다.
  석유 궤짝에 먹물을 칠해서 만든 칠판을 걸어 놓고 문제를 써 가면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
였다.
  그러다가 그만 순복이네가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제 간판을 걸 곳이 없게 되었으나 실망하지 않았다.
  간판과 칠판을 둘러멘 소년들을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가 아무 집이나 빈 사랑방이 보이면 찾
아들어가서 토론회를 벌이곤 하였다.
  이리하여 방정환이 회장이 이끄는 소년 입지회는 상당기간 계속되었고, 회장 노릇을 한 방정환
은 남을 이끄는 힘을 기르게 되었다.



































  6. 겨레  사랑에 눈뜰 무렵

  방경수와 방희영 형제는 조선 인쇄 주식회사의 활자공으로 다니면서 도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되
었다. 천도교의 청암 권병덕 도사였다.
  청암 권 도사는 동학 농민 운동 때 직접 수만 명의 동학군을 지휘하기도 하였던 동학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습과 언동이 도인다웠다. 인쇄소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여 따랐다. 동학 농민 운
동이 어째서 일어나게 되었으며 동학의 가르침은 어떤 내용이며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를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제1대 교주 최제우, 2대 교주 최시형이 순교한 이야기를 할 때는 듣는 사람들이 엄숙해졌다.
  현재의 교주는 의암 손병희 선생인데 우리 나라의 모든 종교 단체 중에서 가장 활발한 포교 활
동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친일을 반대해고, 개화를 앞장 서서 실천했다. 나라의 인재를 기르기 위해 종단의 돈으로 일본
에 유학을 보내고, 전국에서 손꼽히는 인쇄소인 보성사를 차렸다. 그리고 보성 전문 학교(고려 대
학의 전신)와 동덕 여학교를 인수하여 경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건축이 들어설 것입니다. 경운동에 천도교 중앙 교당을 짓고 있습니다.
  그는 교리책을 나누어 주면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권 도사에게 감동하여 천도교 교도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방경수와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가 되었다. 천도교 교인이 된 방경수는 집에다 청수를 모시고 염주를 굴리며 주문을 외
었다. 새벽이면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그 뒤부터 방경수는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졌다. 집안을 망친 숙부를 원망하지 않게 되
었다. 가난에 쪼들려도 화내지 않게 되었다. 조모님, 부모님을 공경하고 식구들에게도 따뜻하고
부드럽게 대했다.
   얘야 그게 무슨 도인지 네가 아주 달라졌구나. 나도 그 주문 좀 외어 보자.
  방정환의 할머니 김씨가 먼저 청수를 모시고 기도하는 교인이 되었다. 이어서 온 집안이 천도
교 교인으로 개종을 했다. 방정환의 집은 그 때까지 유교를 따르는 집안이었던 것이다.
  천도교에서는 적은 양이었지만 성미를 거두었다. 한끼에 한 사람의 교도가 한숟가락의 쌀을 교
회에 바치는 것이 천도교인의 의무다. 이것이 성미법이었다.
  천도교는 성미법을 잘 활용하여 당시에 가장 넉넉한 재정을 가진 종교 단체가 되어 가고 있었
다.
  권병덕 도사가 몇 번 방정환의 집을 찾았다. 방정환을 본 도사는 방경수에게 말을 했다.
   동생은 아들을 잘 두었네. 곧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겠군. 아들이 아주 귀골이야.
  그리고 방정환의 머릴르 쓰다듬으며 이모 저모 살피고 귀를 만져 보기도 하였다. 방정환의 모
습이 도사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 동안 고생만 해 오던 방정환의 증조모가 세상을 떠났다. 이 때 방정환은 할아버지가 우시는
걸 처음 보았다.
  방정환의 아버지 방경수는 사직동에서도 살 수 없게 되었다. 열 한 식구가 된 가족은 서대문으
로 셋방을 얻어 이사를 갔다.
  방정환은 보성 소학교를 그만두고 집안 일을 거들며 2년을 쉬다가 사직동에서 가까운 매동 보
통 학교에 입학 하였다. 그러다가 서대문의 미동 보통 학교에 재입학하여 그 학교를 졸업한 것이
열다섯 살 때였다. 담임 선생님이 상급 학교로 진학하도록 권했다.
   우리 집은 대대로 상업에 종사해 왔다. 상업 학교에가서 가업을 잇도록 하여라.
  할아버지의 말씀이었다. 방정환은 상업에도 별로 취미가 없었다. 글을 쓰거나 연설을 하거나,
연극을 하는 일이 좋았다. 활동 사진 변사라면 더욱 좋았다. 그러나 가업을 이으라는 할아버지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선린 상업 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숫자를 다루는 것이 상업 학교의 공부이다. 졸업만 하면 은행이나 금융 조합, 행정 기관 등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방정환은 숫자를 다루는 데에는 성격이 맞지 않았다. 주산이나 부기 공부는 제쳐두고
책을 먼저 읽었다.
  육당 최남선이 발행하는  소년 .  붉은 저고리  .  샛별  .  아이들 보이  등 어린이 잡지가 재미있
어서 이를 즐겨 읽었다.
  육당이 발행하는 교양 잡지  청춘 에 글을 써서 보낸 다음 발표되기를 기다리곤 하였다.
   글 쓰는 것이 재미 있다. 이 길로 나가자.
  글쓰기와 독서에 취미를 얻은 방정환은 학교를 그만두기로 하였다.
  담임 선생님과 집안 사람들이 말렸지만 그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학교를 나온 방정환은 직장을 구했다. 총독부의 토지 조사국에서 임시 직원은 여럿 채용한다고
하였다.
   총독부? 그런 데라도 뛰어들어가 보자. 왜놈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봐
야지!
  방정환은 상업 학교 2년 중퇴한 이력서를 토지 조사국에 보냈다.
  우리 나라를 빼앗은 일본은 먼저 토지를 조사하여 지적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지세를 정확하
게 알아서 침략 정책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세금을 매기고 거둬들이는 데 자료로 삼기 위한 것이
기도 하였다.
  이 엄청난 작업에 1만 명의 임시 직원이 필요했다.
  토지 조사국 사무소가 육조 거리(현재의 세종로)에 있었다. 장소가 모자라서 정동에도 나뉘어
있었다.
  측량 기사 밑에는 수치를 정리하고 지적도를 베껴내는 사람이 필요했다. 방정환은 글씨 쓰는
일을 지망했다.
  사무실에 앉아 자료를 베끼고 정리하는 일을 주로 하였지만 측량 기사를 따라 현장에 나갈 때
도 있었다.
   우리는 무엇을 했던고? 왜 일찍이 우리 손으로 우리의 토지를 조사하지 못했을까? 이런 일을
왜놈들이 와서 하게 하다니.
  방정환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여 나라에 바쳤다가 감옥에서 죽었다는 김정호를 생각하였다. 가
슴 아픈 일이었다.
  첫 월급 5원을 타서 4원을 어머니께 드렸다. 나머지 돈으로는 책을 샀다.
  토지 조사국에서 가까운 곳에 봉놋방이 있었다.  토지 조사를 하는 노무자들을 무료로 합숙시
키는 곳이었다.
  방정환은 가까이에 집을 두고도 봉놋방에서 생활을 하였다. 밤이면 팔도에서 모인 노무자들이
옳게 눕거나 거꾸로 누워서 잡담을 했다. 사투리가 시끄러웠다.
  그래도 전깃불이 밝아서 좋았다. 방정환은 밤이 늦도록 책을 읽었다.
  봉놋방 가까이에는 주막이 많이 있었다. 밥을 사 먹을 수 있었고, 술도 팔았다.
  이렇게 며칠 생활하는 사이에 방정환은 깡마른 젊은이 한 사람을 사귀었다.
   유광렬이라 합니다. 고양군이 고향이지요.
   나는 방정환입니다. 상업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었지요. 세상 물정을 좀 안뒤에 글을 쓰든지
사회 운동을 하고 싶어서요.
  열 다섯 살이 되면 어른 노릇을 하던 때라 청년들의 대화는 점잖고 엄숙하였다.
   나는 서울에 고학을 하려고 왔지요. 상급 학교에 진학하는게 꿈이에요.
  이렇게 시작한 두 사람의 대화는 나라 걱정으로 발전하였다. 나이로는 유광렬이 한 살 위여서
열여덟 살이었다. 그러나 세상 일에 대해서는 방정환이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몇 달 후, 고학을 하겠다던 유광렬은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다. 고양군 중면에서 면서기를 하면
서 독학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두 사람은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방정환은 혼자서 책을 읽을 때도 있었지만 봉놋방의 노동자들과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 때
방정환의 이야기는 논리가 정연했으므로 모두들,  많이 아는 젊은이야! 하고 감탄을 하기도 하였
다.

































  7. 해월 신사의 가르침

  방정환은 독서를 통해 많은 학식을 얻었다.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한편, 아버지가 입교를
하여 온 집안이 믿게 된 천도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천도교 교당으로 권병덕 도사를 찾아가 만나기도 하였다. 그 때 마침, 의암 손병희 교주의 셋째
딸 용화가 결혼할 때가 되었으므로 장래성이 있는 젊은이를 찾고 있었다.
  손병희는 우선 가까운 도인들과 의논을 하였다. 첫째, 천도교 교인의 자녀여야 할 것과 둘째로
는,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집안이나 재산 정도는 보지 않겠다는 것이
다.
  권병덕은 언뜻 의동생 방경수의 아들 정환이 생각났다.
   있지요, 우리 교인 중에서 아주 좋은 젊은이가 있습니다. 내가 늘 귀골로 생겼다고 말해 온 총
각 말이에요. 지금 열여덟 살입니다.
   그래요? 그럼 그 총각을 좀 보도록 합시다.
  이렇게 하여 방정환은 교주 앞에 가서 선을 보이게 되었다.
  인사를 올리자 교주는   모든 것은 청암으로부터 잘 들었네. 나를 똑바로 보게.  하고 말했다.
  방정환이 고개를 들어 교주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약간 이쪽으로…….
  앞모습을 본 교주가 총각의 옆모습을 보려는 것이었다.
   되었네. 나가도 좋네.
  방정환이 나가고 난 다음, 곧 청암 권병덕이 들어왔다.
   선생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눈이 좋군. 그런데 너무 야위었소.
   그건 못 먹어서 그렇습니다. 이제 겨우 취직을 하였다지만 아직도 넉넉히 밥을 먹는 형편이
못 됩니다.
   알겠소. 며칠 두고 생각해 봅시다.
  이런 집안의 큰 일을 교주 혼자서는 결정할 수가 없었다. 우선 가족의 의견을 물어 보기로 하
였다. 다음으로 교단의 가까운 사람들과도 의논을 하였다.
  마침내 마음을 결정한 교주는 청암을 불렀다.
   그 댁으로 결정을 하였소. 곧 양쪽 집안이 만나서 약혼을 하고 혼례 준비를 했으면 하는데, 뜻
을 전해 주시오.
  의암은 가족들과 충분한 의논을 하였으며, 셋째 딸 용화에게도 의견을 물은 다음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교주 손병희는 딸만 다섯을 두고 있었다. 맏딸이 관화, 둘째가 광화였는데 각각 이씨와 정씨댁
에 출가하여 잘 지내고 있었다.
  모든 일을 새상의 순리에 맡기고 있는 의암은, 아들을 두지 못한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슬하에 아들이 없어 아쉬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젊은 교도들이 친자식처럼 교주의
가정을 돌보아 주었다. 교주의 집을 자기 가정 이상으로 걱정하는 도인들도 있었다. 그래도 아들
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됐다.
   셋째 사위는 아들 노릇을 겸할 사람으로 구하자. 내 일을 잘 거들 수 있도록 내 손으로 키워
야지.
  이런 뜻은 권병덕에게도 충분히 전달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방정환이 교주 손병희의 셋째 사위로 결정이 된 것이다.
  손병희 교주와 인쇄 공장의 직공 방경수가 사돈을 맺게 되자, 장안이 떠들썩하였다.
   의암이 인쇄소 직공의 아들을 사위로 맞아들였다지 뭔가?
   천도교 정신이 바로 그것이라네. 지위나 권세는 제쳐놓고 사람만 본 것이겠지. 의암 교주가 아
니면 하지 못할 일일세.
  아는 사람들은 의암의 처사를 크게 칭찬하였다.
  조선 500년 동안 사람들의 생활 양식은 유교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유교의 가르침은 도덕적으로 훌륭하였으나 조선 시대의 사회제도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었다.
이를 바로잡고자 평등 사상을 내세운 것이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 이었다.
  동학을 처음 일으킨 최제우는 1842년(순조 24) 경상도 경주의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60년(철종 11)에 만고에 빛날 큰 진리를 깨닫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동학이었다. 동
학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가르쳤다. 사람은 모두 하늘같이 귀한 존재이므로 차별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도를 깨친 최제우는  이 좋은 진리를 내 가정에서부터 펴야 한다. 고 생각하여 먼저 부인을 가
르쳐 교인이 되게 하였다.
  다음에는 자녀들에게 가르침을 폈다.
  집에는 두 사람의 여자 종이 있었다. 당시에는 양반과 평민 등으로 나뉘는 계급 사회였는데, 노
예는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급이어서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다.
  최제우는 먼저 사람이 평등하다는 진리를 실천해 보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 부리
고 있던 여자 노예 중 한 사람을 며느리로 삼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의 노예를 수양딸로 삼
아 교단을 찾아오는 교도들의 시중을 들도록 하였다.
  동학은 지금까지 조선 시대의 관습, 제도 등을 단번에 깨뜨리는 새로운 사상을 주장하였던 것
이다. 이러한 수운 대신사의 사상은 2대 교주인 최시형과 3대 교주인 손병희를 거치면서 더욱 발
전하여 어린이 애호 사상과 독립 운동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방정환은 몇 차례 교주를 만났다.
   자네의 포부를 한번 들어 보고 싶네. 상업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었다니 별다른 계획이라도 있
었던 것인가? 그 학교를 나오면 당장 취직이 될 텐데 말일세.
  교주가 조용히 물었다.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방정환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상업 학교를 졸업하면 은행이나 실업계에 취직이 될 것입니다.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는 대중을 위해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글이나 말을 통해서 나라에
봉사하고 싶은 것입니다.
  교주는 방정환의 또렷한 말에 감동을받았다.
   그거 좋은 생각일세. 가령 어떤일을 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게. 내가 후원자가
될 수 있지 않겠나.
   저는 해월 신사의 가르침에 대하여 깊이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 그 생각한 바는 무엇인고?
   사람이 곧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모두 하늘이라면 어
찌 힘있는 자가 약한 자를 윽박지르며,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억누르겠습니까? 천도를 모르고
날뛰는 무리를 이 땅에서 몰아내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옳거니! 그래, 그 무리들을 몰아 낼 방법이 있는가?
   있습니다. 이것도 해월 신사의 가름침에서 생각을 얻은 것입니다.  경솔히 아이를 때리지 말라.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하늘을 때리는 것이니라. 한울님이 싫어 하시고 기분을 상하게 한다.  는
그 말씀입니다.
 이쯤 말을 했을 때 교주는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일을 하겠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아니라  어린이 라 부르고 싶습니다. 어린이들을 잘 길러서 나라를
도로 찾자는 것이지요.
  교주는 감동을 하는 듯했다.
   자네의 뜻이 바로 한울님의 뜻일세. 옳고 바른 일이야. 그러나 우선 뜻을 세우고 그 목표를 향
해 공부를 하게.
  방정환은 교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교주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약혼식이 있은 다음 곧 혼인 날짜를 정했다. 좋은 날, 궂은 날을 특별히 따지지 않고 모든 일을
순리에 쫓는 교주는 자기의 생일에 예식을 올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사돈인 방경수에게 물어왔
다.
   교주님의 생신날보다 더 좋은 날이 있겠습니까? 하고 방경수는 동의 하였다. 이리하여 1917년
4월 8일, 의암의 쉰일곱살 생일연을 겸해 셋째 딸의 결혼식을 갖기로 하였다.






























  8. 어머니의 별세

  교주의 셋째 딸 용화와 결혼한 후 열아홉 살의 방정환은, 가회동 70번지 교주의 집에서 기거하
면서 포부를 다지게 되었다. 장인인 의암이 방정환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하였다.
   방서방은 굶주리던 사람이오. 무엇이나 좀 낫게 먹이도록 하시오.
  의암이 부인 곽씨에게 자주 하는 말이었다. 곽씨는 사위를 위하여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음식 덕택이었는지 방정환의 얼굴이 차츰 화색을 띠게 되었다.
  의암은 사위뿐만 아니라 사돈 집안을 도화야겠다고 생각했다.
  방정환의 아버지 방경수가 서대문에 작으나마 자기 집을 갖게 된 것이 이 때였다. 교주가 개인
돈을 들여 가난한 사돈에게 집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방정환은 남의 집 셋방살이로 고생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난 증조모 최씨를 생각하였다.
   지금까지만 살아 계셨더라도 고생이 한결 덜하실 텐데…….
  게다가 어머니 손씨도 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찌든 가난을 오래 견디면서 시부모에 시조
모까지 모시고 살아오던 손씨가 몸져 누워서 혼수 상태에 이른 것이었다.
   며느리나 보고 죽어야 할 텐데, 이런 가난뱅이 집에 누가 딸을 주겠니?
  손씨는 오랜 병에 시달리며 자주 이런 말을 했었다. 며느리만이라도 보고 난 뒤 눈을 감으면
소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일이 뜻밖에도 교주가 아들을 사위로 삼겠다 하니, 천도교인으로서는 그보다 큰 은혜가
없었다. 더구나 사돈이 가난하다는 말을 들은 교주가 집까지 한 칸 마련해 주겠다 한다니 그 위
에 더 감사할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교주 쪽에서 혼인을 서두른 것도 다행이었다.
   다시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하고 아들의 손을 잡고 눈물 흘리던 손씨의 입장을 봐서
라도 혼인을 서두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동안 교주가 마련해 준 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집은 생겼지만 아들의 결혼식이 있던 날 손씨는 누워서 앓고 있었다.
  며느리를 데려오던 날, 방종환의 집에서도 조촐하게 잔치를 차렸다. 어려서 같이 자라던 고모네
와, 신세졌던 대고모와 이모도 모여와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장돌이가 글세, 그런 좋은
집에 장가를 들다니.  하고 축하를 하면서도 손씨의 병을 걱정하였다.
  며느리에게 큰 절을 받을 때, 손씨는 겨우 일어나 앉아 떨리는 손으로 며느리의 손을 잡았다.
  그러던 손씨가 며느리를 본 지 한 달이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째, 그렁게도 복이 적을까? 쯧쯧.   이웃 사람들이 손씨를 가엾게 여겼다.
  저승길에 며느리를 앞세운 할머니 김씨가 목을 놓아 울었다. 며느리 대신 자기를 죽게 해 달라
고 한울님께 빌어왔던 김씨였다.
  방정환은 어머니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울고 또 울었다. 참으로 복이 없는 손씨였다.
  손씨의 장례를 치른 뒤 고양군 숭인면에서 오씨 성의 부인을 계모로 맞아 들였다. 방정환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였다.
  이후 집안 살림은 오씨가 맡게 되었고 방정환 내외는 가회동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방정환은 우선 전문 학교를 가려고 했는데 학력이 모자랐다.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 전문
학교 학생이 되려면 입학 자격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상업 학교 2년 중퇴라는 학력이 문제였다.
  그러나 방정환은 얼마 동안의 노력으로 전문학교 입학 자격을 얻게 되었다.
  9. 반일 단체  청년 구락부

  방정환의 결혼은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결혼 후 방정환은 유광렬을 만났다. 유광렬은 고양군 중면의 면서기 노릇을 해도 일본의 하인
노릇하기는 마찬가지라며 한탄을 하였다.
   무슨 좋은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조선 청년을 단결시킬 일 같은 것 말이세.
  명석하고 활동적인 방정환이 계획을 내놓았다.
   청년 단체를 하나 조직하는 것이 좋겠네. 저 일본놈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지 않나?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지.
  방정환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혀진 계획안 하나를 내놓았다. 혼자서 오래 전부터 머리를 짜
서 생각했던 것 같았다.
   청년의 힘을 한데 묶는 거지.  청년 구락부 라 이름을 지어 두는 것이 좋겠네. 너무 민족의식을
내세우면 안 되니까. 물론 비밀 단체로 해야 하네.
   찬성이야. 우리는 앞서서 일만 하는 거야. 회장이니 부회장이니 하는 감투는 다른 분들에게 돌
려 주고.
   그렇다면 회장에 누가 좋을까?
  이렇게 하여 방정환, 유광렬 두 사람에 의해 청년 구락부의 틀이 짜여졌다. 회장으로 이복원을
내세우기로 하고 집으로 그를 찾아갔다.
  이복원은 학부대신이었던 이용직의 친척 조카뻘 되는 사람으로 피끓는 청년이었다. 이용직은
한일 합병 조약서에 끝까지 도장을 찍지 않고 버티던 인물이었는데 그 뒤, 3.1 운동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받았던 작위를 빼앗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복원은 늘 집안 아저씨인 이용직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했다.
   도장을 안 찍으려고 버틴 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그 자리에서 칵 자결을 해 버리지 않고.
  이용직 대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가 내뱉는 소리였다.
  이복원은 청년 구락부의 취지에 대찬성이었다.
   우선 청년의 친목회 비슷하게 해서 조직을 해 두는 겁니다. 그러다가 때를 봐서…….
  때를 본다는 말에는 뜻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회장만은 맡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 모두 같은 또래지만 그래도 나이가 몇 살 위인 아 형이 회장을 맡으셔야지요.
  이렇게 여러 사람이 권하여 이복원이 회장이 되었다.
  배일 사상이 강하고 통솔력도 있는 이복원은 회장으로 적격자였던 것이다.
  부회장은 청주에서 올라온 이중각이 맡았다. 이들은 나라 일이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각오
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믿었던 그대로 그 뒤, 이들은 독립 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복원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그 뒤를 이어서 이중각도 종로서에 잡혀 경찰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고 나온 후 앓다
가 죽었던 것이다.
  회장 이복원과 부회장 이중각은 청년 구락부의 일을 열심히 해 나갔다. 방정환과 유광렬이 앞
장을 서서 뛰었다. 얼마 되지 않아 100명의 청년이 모였다.
  그 동안 몇 차례의 모임을 거쳐 청년의 교양을 주제로 한 토론회와 강연회를 가졌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마음놓고 집회를 가질 수 없는 것이 당시의 형편이었다. 일제는 세 사람
이상이 모일때는 집회신고를 하도록 법으로 정해 놓고 그 집회의 성격이 친일 행위가 아닐때는
허가를 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100명의 회원이 모인다면 아무래도 일본 경찰의 눈에 띄고 말거요. 특히 청년들이 모인다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텐데.
  회장 이복원이, 회원 전원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물었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밤 줍기 대회를 하는 거죠. 각자 도시락을 싸 가지고 모이는 겁니다.
소풍도 되고 친목을 도모할 수 있을 겁니다. 일본 사람들 보기에도 조직적인 모임으로는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거 좋군.
  방정환이 생각해 낸 밤줍기는 고양군 구파발로 결정 되었다. 이리하여 1917년 가을에 청년 구
락부의 제1회 밤줍기 대회 겸 단합 대회가 구파발에서 마련되었다.
  단합 대회는 성공이었다.
   이제 우리는 좀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복원 회장이 아주 좋아했다.
   기관지를 내 보도록 합시다. 내가 맡지요.
  방정환이 기관지를 내겠다면서 나섰다.
   좋아요. 방정환 씨가 맡아서 잘 해 보시오.
  인쇄는 등사판 프린트로 하기로 했다.
  창간사도 쓰고 회장의 글도 실었다.
  등사판 회보는 곧 활자판으로 바뀌었다.
  새 출발을 다지기 위해 당시 문필과 연설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민족 지도자 만해 한용운 스님
의 글을 받아 책의 첫머리에 싣기로 하였다.
  이복원 회장과 이중각, 방정환, 유광렬 등은 한용운을 찾아갔다. 그는 계동 선학원에 거처하면
서 불교 잡지를 낼 계획을 세우느라 바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참 좋은 일을 하는군, 반갑소.
  한용운은 젊은이들의 부탁을 받고 글을 써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한용운은 방정환이 의암의 사위인 것을 알고 아주 반가워하였다.
  방정환의 포부는 컸다.
   이것도 해 보고 싶고, 저것도 해 보고 싶다.
  그 중에서 연극은 문학 예술 중에서도 가장 흥미가 있는 부문이었다.
  어렸을 때 방정환을 귀여워해 주던 장 선생으로부터 얻은 환등기를 놓고 활동 사진 놀이를 할
때부터 연극 영화 등에 취미를 가졌다.
  그 중에서도 멋진 목소리로 변사를 해 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었다.
   극본을 한 편 써야지.  하고 생각했다. 같은 값이면 일본의 침략을 내세우고 겨레를 각성하게
하는 내용으로 했으면 하였다.
  방정환은 글을 써서  청춘 지에 발표한 일이 있고, 그 뒤에도 몇 편의 글을 썼지만 아직은 주장
을 내세운 글이 었을 뿐이었다. 극본을 창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극본이 완성되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가난한 농부가 있었다. 그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돈을 꾸었으나 갚지 못한다. 그 뒤에
아내는 병이 들었다.
  병든 아내를 위해 농부가 약을 구하러 간 사이였다.
  일본인 고리대금업자가 와서 돈을 내놓으라며 욕지거리로 협박을 하였다. 아내가 사죄를 한다.
그러나 일본인 고리대금업자는 부엌에 들어가서 솥을 떼어 가지고 가 버린다.
  뒤미처 농부가 돌아온다. 남편은 발을 구른다. 그러면서 아내를 위로한다.

  일본인의 수탈 때문에 이 나라 농민은 농토를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호소하는 내
용이었다.
  제목을    령  이라 하였다. 두 개 동그라미로 뜻을 감추어 두고 생각하게 한 것이다. 그것은
동원령이라는 뜻이었다. 일본인을 이땅에서 내쫓는 데 이 민족이 총동원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
었다.
  연출은 극본을 쓴 방정환이 맡았다. 배역을 정해 연습을 시켰다. 여자 회원이 없었으므로 여자
역에 알맞은 남자 회원을 한 사람 뽑아서 여자의 치마 저고리를 입혔다.
  1918년이 저물어가는 때였다. 혜화동 소의 보통 학교의 강당을 빌려 송년회 겸 연극 발표 잔치
를 차렸다. 소의 보통 학교는 현재 동성 고등 학교의 전신이다.
  200명으로 늘어난 회원 중에서 대다수 회원이 모여 방정환 극본, 방정환 연출의    령 을 관
람하였다.
































  10. 등사판 독립 신문

  어느 날 신문을 펴든 의암이,
   독립을 외치고 나설 좋은 기회가 왔구나.
하고 혼자말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들은 방정환이 물었다.
   선생님 좋은 소식이 있습니까?
  방정환은 장인이며 교주되는 의암을 선생님이라 불러 왔다.
   좋은 소식이고말고.
  의암은 방정환에게 신문의 제목을 보여 준다. 오사카의 아사히 신문이었다.
   아니?
  신문은, 미국 대통령 윌슨의 사진과 함께 그가 내놓은 세계 평화를 위한 14개 항목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민족 자결주의도 들어 있었다.
  5년이나 끌던 세계 대전은 1918년에 막을 내렸다.
  연합군이 전쟁에서 이기자 이들 나라의 대표들이 파리에 모여 전쟁의 뒤처리를 위한 강화 회의
를 하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이 강화 회의에서 내놓을 세계 평화를 위한 14개 항목을 신문에 발표한 것
이다.
  14개 항목 속에 포함되어 있는 민족 자결주의는  모든 민족이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민족의
일을 스스로 결정해야 된다.  는 주장이었다. 일본의 손아귀에 나라를 잃은 한민족에게는 더할 수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세계의 신문들이 이 놀라운 뉴스를 다투어 보도하고 있었다. 일본이 한국인의 눈과 귀를 막고
있었지만 이런 국제 소식까지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어로 된 신문으로는 매일 신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 신보
는 보도가 바르지 못하므로 의암은 일본에서 발행하는 아사히 신문과 마이니치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문을 읽던 의암은 일어서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고 있었
다. 무슨 결심을 다지는 것 같기도 하였다.
  방정환이 이튿날 보성 전문 학교에 나가 보니 이 놀라운 국제 뉴스를 알고 있는 학생이 여럿이
었다. 몇 사람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방정환은 조용한 말로 물었다.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들고 일어나야 하네.
  성급하고 혈기 있는 몇 학생은 주먹을 쥐어 보이기도 했다.
  청년 구락부 모임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 특히 회장 이복원과 부회장 이중각은 의분에
차 있었다. 방정환도 그러했다.
   그런데 의암 선생께서 무슨뜻이 계시는 듯하니 얼마 동안만 두고 봅시다.
  방정환의 말이었다.
   의암이 나서신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지. 우리는 그쪽에 따르기만 하면 될테니…….
  회장 이복원의 말이었다.
  방정환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의암은 은밀히 무슨 계획을 하고 있었다. 먼저 천도교의 중진
인 오세창과 권동진을 자택에 불러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이 두 사람과 의암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부터 큰 일, 작은 일을 같이
의논해 온 사이였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얻으려면 온 계레의 이름으로 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무력으
로 일어서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많은 피를 흘려야 한다.
  국민 대회를 열고 결의문을 만들어서 일본 정부와 파리의 강화 회의에 보내는 방법이 있다. 그
러나 총독부에서 국민 대회를 허가해 줄 리 없었다.
  독립 청원서를 총독부와 일본 정부, 파리의 강화 회의에 보내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
본으로 하여금 한민족을 더 억누르는 구실을 주게 될 것 같았다.
  세 사람은 여러 가지 방법을 연구한 끝에 독립 선언서를 전국에 펴고 대중 시위를 벌이기로 하
였다.
  무엇보다 독립을 요구하는 이가, 개인이 아닌 한민족 전체라는 것을 내세워야 한다. 그러기 위
해서는 민족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을 해야하고, 하나의 조직 밑에서 독립 운동이 이루어져야 한
다. 또한 폭력을 쓰지 않는 시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합의는 1918년 12월28일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보성 고등학교 교장 최린에게 부탁하여 이 독립운동에 적극 협조할 인물들을 만나 보도
록 하였다.
  이런 내용을 알고 방정환은 청년 구락부 간부들과 의논하였다.
   선생님께서 계획하고 계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청년 구락부 회원은 따로 행동하지 말고 여기
에 따르기로 합시다.
   그게 좋겠어요. 방정환 씨가 자주 연락을 해야 됩니다.
  이복원 회장의 말이었다.
  의암 손병희는 우선 박영효, 한규설, 윤치호 등 대한제국 시대에 높은 관리를 지낸 사람들에게
독립 운동에 협조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손병희의 뜻에 응해 주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이 종교인 중심으로 운동을 일으
키기로 하였다.
  정주 장로 교회 장로로 있는 이승훈의 협조를 얻게 되었다. 한용운 등 불교계 인사들과도 접촉
이 되었다.
  그러던 중, 그 해 1월 21일 오후 1시 45분에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대한 제국의 황제 고종은 나라를 잃은 뒤, 여러 가지로 수모를 당하고 잇었다. 그러다가 비운의
황제 고종은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웬일인가?
  백성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임금이 돌아가시면 온 백성이 상주 노릇하는 유교 예법에 따라
백성들은 흰 갓과 흰 옷 차림을 하고 덕수궁의 정문인 대화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고종이 덕수궁
에서 거처하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모여든 군중이 모두 목을 놓고 울자, 궁궐이 떠나갈 듯하였다.
   태황제 폐하. 이 백성은 어쩌면 좋습니까?
  나라의 운명을 하소연하면서도 우는 백성도 있었다.
  고종 황제의 장례일은 3월3일로 결정되었다. 나라일을 걱정하는 시골 선비들까지 서울로 몰려
들고 있었다. 시위에는 좋은 기회였다.
  민족 대표 33인이 결정되었고, 만세 시위는 3월 고종 황제 장례일을 이틀 앞당긴 3월 1일로 정
해졌다. 2월 15일에는 독립 선언서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문장가로 알려진 최남선이 쓴 것이었다.
  여기에 한용운이 공약 3장을 곁들여서 썼다.
  27일부터,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 인쇄소에서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기 시작하였다. 비밀이
새지 않게 하기 위해 사장 이종일이 직접 인쇄 기계를 돌렸는데, 밤 시간을 이용하여 1만 2천 장
의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새벽 5시 반.
  여느 때처럼 교주의 가족이 한 자리에 모였다. 청수를 올리고 기도하는 시간이다.
  교주는, 민족의 큰 일이 일본 경찰의 눈에 들키지 않고 순조롭게 이루어졌음을 한울님 앞에 감
사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교주 의암으로 봐서는 집에서 올리는 마지막 기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방정환이 교주
가족의 한 사람으로 이 엄숙한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날 낮 12시.
  방정환은 파고다 공원에 모인 학생들과 같이 있었다.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만세 부를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인쇄된 독립 선언서를 나누어 들고 한용운의 선창으로 만세를 불렀다. 3.1 운동의 불이
당겨진 것 이었다.
   대한 독립 만세!
  태화관 민족 대표 쪽에서 만세 소리가 나자 이를 신호로 파고다 공원 안에 모인 학생들이 일제
히 만세를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
  학생 대표 한 사람이 독립 선언서를 소리 높이 낭독하였다.
  이어서 시위의 봇물이 터졌다.
  이 시위 군중 속에서 독립 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같이 만세를 부르는 젊은이가 있었다. 방정환
이었다.
  달려나온 일본 경찰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인파였다. 장안 사람들이 모두 나와 만세를 부르는 듯
했다.
  일본경찰이 시위대를 가로막고 총과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독립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 쓰
러졌다. 쓰러지면서도 만세를 불렀다.
  이 날 의암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 대표들은 모두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갔다. 그러나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곳곳에서 일본 경찰과 시위 군중이 충돌하였다.
  전국적으로 약 200만 명이 이 시위에 가담하였고, 7509명이 일본 경찰과 헌병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다친 사람은 1만 6000명이었으며, 4만 6948명이 감옥에 갇혔다.
  시위가 멎자  일제 검거령  이 내려졌다. 독립 운동에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였으
므로 경찰서 유치장과 형무소 감방이 넘치게 되었다.
  구속된 민족 대표들은 그날 밤부터 취조를 받았다. 3월 5일에는 서대문 형무소로 옮겨져 감방
에 갇히게 되었다.
  독립 운동의 본거지인 가회동 170번지 손병희의 저택에 일본 경찰들이 들이 닥쳤다. 집 안의
곳간까지 죄 뒤져서 취조에 자료가 될 만한 것을 거두어 갔다.
  또 언제 일본 경찰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이런 공포 속에서도 방정환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그
것은  독립 신문 을 계속 발간하는 일이었다.  독립 신문 은 1896년, 독립 협회에서 펴내었던 신문
과 같은 제호의 신문으로, 3.1 운동을 계기로 보성 전문 학교에서 윤익선 교장 이름으로 발행되었
던 신문이었다. 보성 전문 학교에 서는 이 신문을 보성 인쇄소에서 찍어, 독립 선언서에 곁들여서
배부를 했다.
  그러나 독립 선언서를 인쇄했던 보성 인쇄소가 일본 경찰에 의해 접수되고, 윤익선 교장이 잡
혀서 감옥에 들어가자 신문은 계속 나올 수 없었다.
  발행인이 그대로 있고 인쇄 기계를 돌릴 수 있다 하더라도 시위가 일어난 이 마당에 일본 경찰
이 신문을 내게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독립 신문은 속간되어야 한다.
  그는 몹시 초조하고 바빴다. 사식을 넣는 등 천도교에서 하는 일도 거들어야 한다. 서대문 형무
소로 장인인 교주의 면회도 가야 한다. 청년 구락부 사람들과도 연락을 해야 하였다. 청년 구락부
사람들도 나서서 만세를 불럿지만 다행히 잡혀 들어간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
  그 바쁜 중에서도 가장 서둘어야 할 일은 독립 신문을 내는 일이었다.
   독립 신문을 인쇄하여 내기는 어렵다. 등사판으로 찍어서 지하 신문으로 내는 수밖에 없다.
  방정환은 집이 가까운 청년 구락부의 몇몇 친구들과 같이 보성 전문 학교 서무 주임 오일철을
찾아갔다. 오일철은 민족 대표 오세창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이번 만세 운동이 통쾌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잡혀들어간 그의 아버지 걱정을 하고 있었
다.
   천도교 중진이 모두 감옥에 가셨으니 걱정이오. 노인들이어서…….
   걱정이긴 하지만 이미 목숨을 내놓은 분들 아닙니까. 우리도 민족 대표로 감옥에 가신 분들의
일을 이어갑시다. 우선 독립 신문을 속간해야겠는데, 등사판으로 찍는 수밖에 없겠어요.
   그렇게 하시오.
  오일철은 방정환의 열의에 감동을 하는 듯했다.
   학교 등사판을 좀 주시오, 숨어서 일을 해야 하니까.
  방정환은 친구들과 같이 등사판을 싸서 들었다. 줄판과 원지, 인쇄 잉크를 가지고 가회동 170번
지로 갔다. 뒷방에 신문 편집실을 차렸다.
  방정환은 먼저 동지들에게 지시를 했다.
   언제 일본 경찰이 닥칠지 모르네. 달아날 준비는 항상 하고 있어야 해. 증거물이 될 만한 것은
남겨 놓지 말도록 하고.
  등사판 신문에 무슨 기사를 실을까도 의논을 하였다.
   그야 이번 만세 운동을 자세히 다루어야지. 평화적인 시위에 일본 경찰이 총칼을 들었어. 수많
은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하지 않았나.
   물론이지. 만세 운동이 정당함을 논설로도 써야지.
  해외의 뉴스는 무전기를 가진 선교사들을 통해 취재해서 싣도록 하였다. 해외에서 펼치고 있는
독립 운동의 경과도 기사로 다루었다.
  이 날 밤 지하 신문이 나왔다. 방정환과 몇 사람의 친구들 손으로 만든 이 신문은 논리가 정연
하였다. 글자모양이 못나고 인쇄가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지하 신문으로서는 가치가 있었다.
   드디어 나왔다! 다음은 배달이다.
  네 사람은 지하 신문을 들고 새벽길에 나섰다. 일본 경찰의 눈을 조심해 가며 담 너머 집 안으
로 신문을 던져 넣었다.
  지하 신문은 날마다 발행이 되었다. 이런 일은 3주간이나 계속되었다.
  일본 경찰은 이번 만세 운동에 대한 세계의 여론을 날마다 새롭게 알려 주는 지하 신문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모양은 볼품없지만 상당한 조직을 가지고 펴내는 신문 같은데?
   글쎄 말이야. 국제 뉴스를 어떻게 알아낼까?
  당시 하나뿐인 한글 신문인 매일 신보는 총독부의 기관지여서 다른 보도를 해 주지 않았다. 그
러므로 만세 운동 후의 국제 소식을 알기에는 힘이 들었다.
   손 교주의 집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거야. 방정환이라는 사위가 교주의 집을 지키고 있거든.
   그렇지만 교주의 집은 샅샅이 뒤졌는걸.
   그래도 다시 조사할 필요가 있어.
  어느 날 밤에 느닷없이 일본 경찰관 다섯 사람이 들이닥쳐 손전등을 들이대고 집 안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내일 신문을 만들려고 네 사람의 편집인이 등사기구를 만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어느 시간에나 흔적을 없앨 준비는 되어 있었다.
  세 사람의 친구를 달아나게 한 다음 방정환은 등사기구를 한 묶음으로 싸서 우물에 집어넣어
버렸다. 방안에는 종이 한 장, 잉크 한 방울이 없었다. 방정환은 이불을 덮고 천연스럽게 코를 골
고 있었다.
  교주의 집은 넓었다. 문간에서부터 편집실이 있는 구석방까지 뒤지는 데는 꽤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구석방까지 온 일본 경찰관은 코로 킁킁 냄새를 맡았다. 잉크 냄새가 난다는 눈치였다.
   여기서 등사판 신문을 내지?
  경찰관이 다그쳤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지금 자고 있던 중이오. 뭐 조사할 게 있거든 차근차근 조사해 보시
오.
  방정환은 일부러 하품을 했다.
   네가 아니면 누구겠어.
  일본 경찰은 방정환을 방에서 끌어내었다. 그리고 경찰서로 가자고 했다. 증거는 없지만 수상하
니 수사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경찰서에 끌려간 방정환은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모르는 일이오! 하고 부인만 했다.
   모르다니 맛을 봐야 알겠나?
  무서운 고문이 시작되었다. 손발을 묶어 놓고 코로 물을 넣었다. 손가락을 불로 지지기도 하였
다. 그러나 방정환은 이를 악물었다.
   너 혼자서 지하 신문을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와 같이 일했느냐?
  며칠을 두고 고문을 당했으나 방정환은 동지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지독한 놈이로군.
  일본 경찰은 방정환을 놓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증거 없이 감옥에 넣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일 주일 만에 풀려났다. 상처투성이가 된 그는 비틀거리며 가회동에 닿았다.
   아니, 방 서방이 이 꼴이 되다니.
  장모 곽씨가 달려 나오며 놀랐다. 손용화 부인도 뛰어나왔다.
  친정 아버지에 이어서 남편까지 일본 경찰에 끌려간 뒤, 부인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것
이다.
   이 상처가 뭔가. 얼마나 고문을 했으면…….
  곽씨가 상처를 만지며 안쓰러워했다.
  그러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그는 곧 서대문으로 달려갔다. 교주의 일이 걱정이 되었던 것이
다.
  형무소 앞, 천도교에서 마련한 방에서는 사식을 넣어주기 위한 천도교인들이 늘 대기하고 있었
다.
   건강을 상하지나 않으셨는지?
  모두들 민족 대표로 감옥에 간 분들의 소식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특히 교주 의암은 지금 쉰아
홉 살로 당시로서는 노인이었다.
  방정환이 나타나자 모두들 반가워했다.
   놓여나셨군. 어떻게 됐소?
  그러다가 얼굴의 상처를 보고 그들도 놀랐다.
   당했군 그래. 자,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방정환이 고문을 당한 이야기를 하자 사람들은 치를 떨었다. 그러면서 감옥에 있는 노인들에게
도 그러한 고문이 가해지리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방정환은 교주의 가족과 천도교의 몇 사람과 함께 형무소의 면회실에서 교주를 뵈었다.
  이 해 6월 28일 밤 10시 반,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였던 보성 인쇄소에 불이 났다.
  총독부에서 몰래 불을 지른 것이다. 보성 인쇄소에서는 활자 하나도 꺼내지 못한 채 인쇄 시설
을 다 잃고 말았다. 천도교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장모인 곽씨 부인이 권했다.
   방 서방, 몸을 피해야겠네. 아주 멀리 떠나버리는게 좋겠어. 총독부 손이 닿지 않는 데로 말일
세.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본
에 가서 공부를 했으면 합니다.
   선생님도 그런 생각이셨네. 다만 조선에서 몇 해 더 공부한 다음 일본 유학을 보내시겠다는
것이었지. 어차피 그럴 바에는 이 기회에 일본으로 가게.
  방정환은 곽씨 부인의 말씀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11. 어린이 사랑을 가슴에 새기고

  방정환이 훌쩍 서울을 떠나 도쿄로 온 것은 3.1 운동이 일어난지 1년이 되는 1920년의 3월이었
다.
  도요 대학 철학과에 학적을 두고 아동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하였다. 무엇보다 같은 대학 음악과
에 천도교인 정순철이 같이 공부하게 되어서 반가웠다.
  방정환이 아동학을 전공하기로 마음 먹게 된 것은 첫째, 해월 신사가 말씀한 아동 애호 정신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는 방정환 스스로의 자각에서 어린이 운동을 펼쳐야 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이 나라를 도로 찾기란 어려운 형편이었다. 3.1 운동으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감옥에 갇히었지만 나라를 찾게 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이를 잘 기르면 그 힘이 뭉쳐서 나라를 찾게 되리라.
  그는 먼 장래를 보는 입장에서 어린이 운동을 펴고자 하였다.
  방정환은 이때부터 스스로 아호를  소파  라 하였는데  잔물결  이라는 뜻이었다.
  어린이라는 잔물결이 자라서 장차 큰 물결이 되고 큰 물결이 모여 조국 독립을 가져오게 되리
라는 소망을 지닌 이름이었다.
  그러나 도쿄에서의 1년 동안은 어린이 운동을 펼치지 못한채 지냈다.
  그는 도쿄라는 적국에서 고국과 교주를 걱정하며 지내야 하였기 때문이었다. 집안 걱정이 또한
컸다.
  일본에 오고 이듬해에 할머니 김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는 어머니를 잃은 데에 못지 않은 슬픔
이었다.
  방정환보다 두 살이 많은 누님 은희는 열다섯 살에 결혼을 했는데 가난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
었다.
   식구 하나를 줄여야 해. 하면서 아버지가 강제로 결혼을 시킨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가난뱅이끼리 짝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누님의 오막살이는 동대문 밖 안암동의 채석장에 있었다.
  또한 두 여동생이 계모 슬하에서 살고 있다. 옥희는 열네 살, 춘희는 열한 살이었다. 달이 비칠
때마다 고국 생각이 난다.
  소파 방정환은  개벽  지에  달밤에 고국을 그리워하며 라는 글을 발표했다.

  어린 누이는 집에서 울고 출가한 누님은 가난과 설움에서 울고, 이몸은 남의 땅……들판에서
  운다. 아, 우리 남매는 어느 별이 점지를 해서 이러느냐…….

  일제는 붙잡아들인 민족 대표와 만세 시위를 모의한 지사들을 합친 48인에 대하여 1년 6개월이
지난 후에 판결을 내렸는데, 손병희 등 여덟 명에게는 최공형인 3년 징역을, 네 명에게는 2년 6개
월, 열아홉명 에게는 2년 징역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손병희 교주는 판결이 있기 전인 1919년 11월부터 중풍을 일으켜 감방에서 신음하게 되
었다.
  이듬해인 10월에는 병이 더욱 심해져,  간사하고 악독한 총독부도 손병희를 병보석으로 내보내
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보석으로 풀려나 가정에서 치료를 받게 된 의암은 사위인 방정환을 자주 찾았다.
  방정환은 장인이며 교주인 의암의 병문안을 위해서도 방학 때마다 고국에 와야 했다.
  방정환이 나타나면 교주는 기쁜 표정이 뚜렸했다. 아들이 없는 의암에 있어서 방정환은 아들과
같았던 것이다.
  방정환은 몸져 누운 교주의 시중을 들면서 자기의 포부를 이야기하곤 하였다. 중풍으로 말하기
가 불편했던 교주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암의 병세는 차츰 나빠지기 시작했다. 합병증으로 더욱 고생을 하던 교주는 1922년 5
월 19일에 예순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의 큰별이 떨어진 것이다.
  방정환은 의지할 곳을 잃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힘을 잃고 헤매어서는 안된다.
  가끔 교주의 말씀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방 서방은 마음에 정해 둔 그 길을 가는 것이 가장 큰 애국이야.
  그 때마다 방정환은 마음 속으로 다짐을 하였다.
   선생님, 선생님께 약속 드린 바로 지키겠습니다.
  그의 눈앞에는 가난에 찌들고 학대받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3.1 독립 운동 이후 일제는 한국 사람들에게 신문이나 잡지를 허가해 주도록 정책을 바꾸었다.
이른바 겉으로만 문화 정치를 내세워 우리 민족을 다스리겠다는 것이었다. 천도교에서는 감옥에
들어갔다가 풀려나온 사람들과 남아 있던 간부들이 모여, 앞으로 민족 운동을 어떻게 펼쳐 갈까
에 대해 의논을 하였다.
  여러 의견 중에 민족 독립 운동 방법의 하나로 청년 운동과 농민 운동을 펴도록 결정하고, 민
족을 바르게 이끌기 위한 잡지로서  개벽  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방정환은 민족 운동으로 어린이를 바르게 기르는 운동을 같이 펴 갈 것을 강력하게 주
장하였다.
  그 결과, 방정환은 상당수의 천도교 간부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전체 천도교 간부들을 설득하지 못한 것은 천도교 내부에서조차 아직까지
는 어린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때문이었다.
  방정환은 바쁘게 현해탄을 넘나들었다. 대학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머물러야 했고 어린
이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어린이 운동을 벌이기에 앞서 먼저 어린이
라는 말이 널리 쓰이도록 하여야 했다. 당시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아이  ,  애놈  등으로만 불렀
다. 간혹 글 속에서 어린이라는 말이 쓰이기는 하였으나 일반 사람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어린이 라는 말을 처음 책 속에 넣은 사람은 최남선이었다. 그는  소년  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처음 내면서 이 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1908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어린이라는 말을 널리 펴지는 못하였고 그 말을 최남선 스스로가 즐겨 쓰지도 않았다.
  방정환은 1920년 개벽 제3호에  어린이 노래 라는 번역시를 발표하면서  어린이  라는 말을 펴기
시작하였다.
  어린이 노래 -잔  물-

  (불켜는 이)
  아, 나는 이담에 크게 자라서
  이몸이 무엇을 해야 좋을지
  나 홀로 선택할 수 있게 되거든

  그렇다. 이 몸은 저이와 같이
  거리에서 거리로 돌아니며
  집집의 장명등에 불을 켜리라.
  그리고 아무리 구차한 집도
  밝도록 훤하게 불켜 주리라.
  그리하면 거리가 더 밝아져서
  모두가 다같이 행복되리라.

  거리에서 거리로 꽃을 이어서
  점점점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적막한 빈촌에도 불켜 주리라
  그리하면 세상이 더욱 밝겠지…….

  방정환이 어린이에게 주는 번역시로  불켜는 이 를 고른 것은 이 시 속의 어린이가, 그가 그리
는 이상적인 어린이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방정환이 기르고자 하는 어린이는 집집마다 밝음을 주는 어린이였다. 독립을 찾고, 세상을 평화
롭게 해 줄 어린이였다. 이들에게 그처럼 많고 큰 것을 바라자면 이들을 잘 길러야 하며, 그들에
게 꿈을 일깨워야 한다. 어린이들의 꿈을 일깨우는 데는 동화가 가장 적당했다.
  그는 세계 명작을 읽고 연구하였다. 가장 감동적인 세계 명작 10편을 골라 그것을 짤막하게 줄
였다. 이것을 한권의 책으로 엮어   사랑의 선물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림 동화의   잠자는 공주  와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왕자와 제비  등 10편의 번역 동화를 한
권의 책으로 엮으면서 방정환은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자라나는 불쌍한 어린 영들을 위하여, 그윽이 동정하
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엮었습니다.  라는 머리말을 곁들였다.
  번역은 1921년 연말에 일본 도쿄에서 하였고 이듬해 개벽사에서 발행이 되었다.
  방정환은 이어서 아동 잡지를  개벽 의 자매지로 개벽사에서 발행하도록 계획을 세워, 천도교
중진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도쿄의 하숙방에서, 창간될 아동 잡지의 원고를 썼다. 이것을 서울로 보내어 개벽사에서
내도록 하였다. 잡지 이름은  어린이  라 하였다.
  이리하여 1923년 3월 20일에  어린이  지가 처음 나왔다.  어린이  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 내게
된 본격 아동 잡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일제의 탄압이 따랐다. 3월 1일에 발행을 하기로 광고까지 냈는데 총독부에서
원고 검열을 제때에 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19일이나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기사에서 한국 어린이에게 유익할 만한 내용은 모두 삭제를 당헸다. 그래서 창간호를 내놓고
보니 꼬리빠진 족제비 격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타블로이드 12페이지밖에 되지 않던 이 잡지에 발행인 방정환은 어린이 사랑을 호소 하
는 발간사를 썼다.
   ……죄 없고 허물 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한울 나라. 그것은 우리의 어린이 나라입니다. 우리
는 어느 때까지든지 이 한울 나라를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뜨거운 정성을 모
아서 내는 이  어린이  지가 여러분의 따뜻한 품에 안길 때 거기에 깨끗한 영의 싹이 새로 돋을
것으로 우리는 믿습니다.
  총독부의 탄압에 이어 또 한가지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아직 일반 사람들에게 아동 잡지가 잘 이해되어 있지 않을 때여서 팔리는 양이 적은 것
이었다.
   어린이 를 읽으세요. 편집부로 주소만 가르쳐 주시면 거저 보내 드리겠습니다. 하고 광고를 내
었으나 주소를 알려 주는 독자가 겨우 열 여덟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처럼 수난을 겪던  어린이  지는 8호부터 사륙판으로 크기가 바뀌어 잡지의 체재를 갖추게 되
었다. 지면도 차츰 늘어서 74페이지의 잡지로 발전하였고 한 떄는 3만부나 팔려 나가게 되었다.
  소파 방정환은 잡지를 내는 그 빠쁜 가운데서도 어린이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가 조직을 통해 어린이 운동을 시작한 것은  어린이 지를 내기 이전인 1921년의 일이었다.
  이 해 5월 1일에 천도교 소년회를 처음 조직한 방정환은 같은 개벽사의 직원인 김기전, 이정호
등과 함께 그 지도 위원이 되었다.
   어린이 여러분!
  방정환이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높임말을 썼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어린이라는 말도 처음
듣지만 높임말은 더 어색했다.
  노예 계급 사람이 상전의 아이에게나 높임말을 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어린이 여러분. 씩씩하고 참된 어린이가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갑시다.
  방정환의 말은 언제나 정다웠다.
  이 해 6월에는 천도교 소년회 어린이들 30명을 이끌고 창경궁에 소풍을 갔다.
  이듬해인 1922년에 방정환은 특별히 5월 1일을 어린이 애호 사상을 드높이는 날로 정했다. 이
것이 어린이날의 뿌리가 되어 준 것이다.
   10년 뒤의 조선을 생각하라! 하는 큼직한 플래카드가 가두행진의 앞을 섰다. 그 뒤를 천도교 소
년회 30명이 노래를 부르며 따르고, 자동차가  전단 을 뿌리며 그 뒤를 따랐다.
  이 행사는 그 이듬해에 와서 더욱 크게 이루어졌는데 일본 도쿄에서 조직된 색동회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12. 색동회와 어린이날

  1923년 3월 16일이었다. 도쿄의 중심에서 벗어난 센다가야 온덴 마을 101번지에 한국인 유학생
이 모였다. 방정환의 하숙집이었다.
  방정환, 강영호, 손진태, 고한승, 정순철, 조준기, 진장섭, 정병기 등 8명이었다.
  방정환의 연락으로 모였지만 대부분 서로 처음 만나는 사이였으므로 인사부터 나누었다.
  강영호는 경남 진주에서 온 소년 운동가였고, 손진태는 와세다 대학 역사과에 다니는 학생이었
다. 고한승은 니혼 대학 예술과에 다녔고, 조준기와 정순철은 도요 대학 음악과에 다니는 학생이
었다. 진장섭은 도쿄 고등 사범 학교 영문과에 다녔고, 정병기도 유학생이었다.
  방정환이 모임의 취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나라의 장래는 어린이들에게 달렸다는 것, 우리 나라
와 같은 형편에서는 어린이 운동이 더욱 절실하다는 것, 지식인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어린이 애
호 운동을 펼치는 일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힘주어 말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뒤이어 조재호,정인섭,윤극영 등이 회원으로 가입하여 회원은 더 늘어났다.
   회의 이름은 한국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옷빛깔을 따서  색동회 라 하면 어떨까요?
하고 두 번째 모임에서 윤극영이 의견을 내놓았다.
   그거 좋은 이름인데…….
  모두들 찬성하였으므로 모임의 명칭은 색동회로 결정되었다.
  태극기와 병아리 모양을 어우른 색동회 마크도 결정되었다.
  이어서 어린이 운동을 어떻게 펼쳐 갈까를 의논하였다.
  1923년 5월 1일, 색동회는 정식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 날 오후 4시, 회원들은 도쿄의 만세교
에 모여 창립 총회를 갖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색동회의 출발과 함께 제1회 어린이날을 선포하였다.
  한편 본국에서는 사전에 색동회 대표 방정환으로부터 전달받은 계획서대로 제1회 어린이날 행
사를 펼치고 있었다. 이 행사는  개벽 지의 주간 김기전이 중심이 되어 마련한 것이었다.
  어른과 어린이에게 부탁하는 글을 인쇄한 전단 12만장을 전국 각지에 나누어 뿌렸다.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
  1)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2) 어린이를 가까이하시어 자주 이야기 하여 주시오.
  3) 어린이에게 높임말을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
  4) 이발이나 목욕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5)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6) 산보와 소풍을 가끔까끔 시켜 주시오.
  7)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8)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 만한 놀이터와 기관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어린 동무들에게)
  1)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2) 어른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3) 뒷간이나 담벼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같은 것을 그리지 말기로 합시다.
  4) 꽃이나 풀을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5)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에게 자리를 사양하기로 합시다.

  색동회는 6월 9일, 정병기 회원의 하숙방에서 모임을 갖고 다음 행사의 계획을 세웠다.
  1)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고국에서 강습회를 갖는다.
  2) 강습회의 이름을   전 조선 소년 지도자 대회  라 한다.
  3) 색동회와 개벽사의  월간 어린이 부가 주최를 한다.
  4) 장소는 천도교 기념관으로 하고 기간은 7월 23일부터 1주일 동안으로 한다.
  5) 강습회의 내용은 아동 문제와 동요, 동화, 동극 등 아동 예술지도 방법을 중심으로 한다.
  이렇게 하여 이 소년 지도자 대회에는 서울을 비롯하여 진주, 통영, 당진, 대전, 파주, 철원, 배
천, 안주, 옹진, 마산, 평산 등지에서 16개 소년 단체 지도자들과 유지들이 참가하여 어린이 운동
의 방법을 의논하고 서로 배우게 되었다.
  방정환을 회장으로 한 이 모임에서 정병기, 전장섭, 윤극영, 정순철, 조준기, 고한승, 조재호 등
이 각기 강의와 지도할 내용을 나누어 맡았다.
  이 강습회로 전국의 소년 운동 지도자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고, 방정환은 그 대
표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24년의 제2회 어린이날 행사는 더욱 크게 열려, 전국 각지에 1만 장의 포스터를 붙
이고 134개 소년회가 동원되어 30만 장의 전단을 뿌렸다.
  이후 어린이날은 5월 첫 일요일로 바뀌었다가 5월 5일로 고정이 되었다. 1925년, 제3회 어린이
날부터는 방정환이 어린이날 노랫말로 지어 서양 노래  장엄하고 활발한 야구수들아 에 맞추어 부
르게 하였다.

  어린이날 노래
  1. 기쁘다 오늘날 5월 1일은
  우리들 어린이의 명절날일세.
  복된 목숨 길이 품고 뛰어노는 날.
  오늘이 어린이날.

  2. 기쁘다 오늘날 5월 1일은
  반도 정기 타고난 우리 어린이
  길이길이 뻗어날 새 목숨 품고
  즐겁게 뛰어노는 날

  (후렴)
  만세 만세를 같이 부르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기쁜 맘으로
  노래를 부르며 가세.








  13. 뒤따르는 일본 형사

  방정환은 몇 사람 몫의 일을 맡고 있었다.
  다달이  어린이 지 한 권을 내어야 했고, 글을 쓰고,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 주어야 했다. 지
방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하고, 전국 소년회의 일도 보아야 했다.
  몸이 매우 뚱뚱해졌으나 동작은 민첩하고 생각이 또한 빨랐다.
  그는 도쿄에 앉아서 서울 일을 보았는데, 맡겨진 일이 많았기 때문에 현해탄을 자주 건너다녔
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본 경찰에게 미행을 당하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방정환이 미행을 당하게 된 것은 3.1 운동 이후부터였다.
   저 젊은이를 감시하라. 언제 어디서 독립 운동을 일으킬지 모른다. 손병희의 사위란 말이야.
  이것이 일본 경찰 우두머리의 지시였다. 날마다 감시 당하는 것이 싫어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쿄에 처음 간 방정환은 천도교 청년회에서 마련한 집에서 지냈다. 그런데 매일 일본인 형사
가 다녀가는 것이었다.
   방 선생이 잘 계시나요? 오늘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집 주인에게 묻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인 척하고 방정환의 방안을 슬쩍 살피기도 했다.
   기분 나쁜데……. 여기서도 감시를 당하고 있어.
  방정환은 혹시나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 하고 센다가야 온덴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일본 형사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하루에 몇 번씩 찾아와서 방정환의 거동을 살피고
갔다.
  이럴 때면 주인집 아키코라는 아가씨가.
   방 선생님, 손님 오셨어오.
하고 위층의 방정환에게 소리친다.
   또 왔군. 어제 온 그 젊은 형사인가?
  방정환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았다. 오늘은 늙은 형사가 왔다. 늙은 형사는 나이답지 않게 미
안해 어쩔 바를 몰라하면서 서 있었다. 미안해할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감시를 할까?
   아주 친해 버리는 게 좋겟어.
  이렇게 생각한 방정환은 귀한 손님 대하듯이 일본인 형사를 맞이했다.
   이리 올라오세요.
  그리고 담배를 권하면서
   날씨가 좋군요. 조선 날씨는 일본보다 더 좋지요.
하고 넌지시 그의 마음 속을 떠보았다. 그도 양심이 있는 듯했다.
   무어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면 부탁하세요.
한다. 그렇다면 이 형사 녀석에게 필요한 일을 시키면 좋겠다.
   양말을 사야 하거든요. 나는 시장일을 잘 몰라서요.
  이쯤 입을 떼면 일본인 형사는  네 네.  하고 굽실거리면서 심부름을 해 준다.
  시장에 가서 서툰 일본말로 묻거나 하면 조선 사람이나 중국 사람으로 알려져 바가지를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인 형사를 시키면 값싼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그는 심부름을 아주 잘 했다.
  학교에 갈 때도 미행을 당하지만 돌아올 때도 수위실에서 기다리다가 방정환을 뒤따랐다.
  방정환이 하숙집에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미행자는 경찰서로 돌아가는 것이다.
  비가 잦은 나라여서 아침에는 맑았다가도 저녁에는 비가 내릴 때가 많았다.
   우산을 가져올걸. 하고 비를 맞으면서 교문을 나서면 그 늙은 형사가 하숙집에 가서 우산과 나
막신을 들고 마중 오는 때가 있었다.
   간사하고 불쌍한 것들.
  방정환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친절한 척하며 남을 꾀어서 자기 잇속을 차리는 것이 일본인이
었기 때문이다.
  방정환이 학교에 가지 않고 하숙집 2층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면 문밖에 서서 지키기도
했다.
  어느 때는 비를 맞으면서도 정처없이 걷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방정환은
   불쌍한 것 하나가 비를 맞으면서 내 뒤를 따라야 할 텐데. 하고 그만 집으로 오고 만다.
  찻길 옆으로 가다가 지나가는 전차에 뛰어오르면 뒤따르는 형사는 방정환을 놓치고 말 것이다.
   내가 이 집 앞문으로 들어가서 뒷문으로 빠져나가면 내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종일 앞문
만 지키고 있을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방정환은 한 번도 장난을 한 일 이 없었다.
   저들이 미울수록 나는 떳떳한 조선 사람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는 자기를 귀찮게 구는 이들 형사를 용서해 주자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급히 서울까지 갈 일이 생겼다. 서울까지 가려면 도쿄에서 시모노세키까지 가서
부산 가는 연락선을 타야한다.
  우선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차표가 필요했다.
   급히 차표가 필요한데…….
   네 네!
  일본인 형사가 굽신거리며 곧 도쿄 역으로 달려가서 차표를 구해왔다.
  서울을 향해 도쿄를 출발하면 벌써 일본 경찰끼리 연락이 되어 있었다.
   21일 9시 도쿄발 32호 열차에 주의 인물 방정환 탔음. 뚱뚱한 젊은이임. 넘겨 받을 준비 바람.
  일본 경찰들이 구역을 나누어 서로 연락을 하는 것이다.
  도쿄에서 형사가 뒤를 밟았다. 승객을 가장해서 같이 기차를 타는 것이다. 형사는 몰래 쫓아왔
지만 하도 여러번 겪는 일이어서 방정환은 다 알고 있었다. 도쿄에서 요코하마까지 가면 히로시
마 형사가 기다렸다가 서로 신호를 보낸다. 방정환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지만 벌써 그들의 모
습은 저만치 보인다. 그들은 단장 위에 모자를 벗어 얹거나 장갑을 걸치거나 한다. 그리고 열차
입구에 마주서서 멀리 방정환이 타고 있는 쪽을 가리키면서 수군거리는 것이다.
  방정환을 인계하는 형사는
   저기 저쪽 젊은이인데 시렁 위에 짐짝은 두 개요. 그럼 인계 마쳤으니 나는 돌아가겠소. 당신
은 저 시모노세키까지 가서 인계하는 거요. 하고는 기차에서 내려 가 버렸다.
  다시 몇 정거장을 가노라면 인계받은 형사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
   이 자로구나!
  이야기를 엿들으려 하는 모습에서 형사임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이 옆에 앉은 친구와 무슨 말을 주고받나? 조선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가?
세 사람이 동행이 된 듯한데. 하고 비밀을 탐지하느라 곁눈질을 흘끔한다. 무슨 책을 읽고 있는가
도 엿보는 것이다.
   이 자를 좀 놀라게 해야지. 하고 갖고 가던 맥주를 뚝 따서 따른다.
  그리고 느닷없이 그자에게 들이대며,  자 한잔 하시죠. 시모노세키까지 가시려면 시간이 지루할
텐데요. 하고 말을 건넨다.
   아니 아니 아닙니다. 저는 시모노세키까지 가지 않아요.
  형사는 허를 찔린 듯이 계면쩍어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뭐 그럴 것 있어요? 다 아는 일인데 뭐. 저기 시렁에 얹힌 것이 내 짐이오. 잘 보아 주시오.
  이처럼 터놓고 말해 버리자 일본인 형사는 더욱 굽실거린다.
   사실은 제가 시모노세키까지 선생님을 잘 모시라는 상부 지시를 받았습니다. 어려운 것이 있
으면 시키십시오.
   그렇게 할 터이니 이 술이나 드시오.
  이렇게 하여 자기를 미행하는 형사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오자면 심심하지는 않았다.
  이윽고 기차가 시모노세키 역에 닿았다. 여기에서 내려 항구에서 부산행 연락선을 타야 한다.
여관을 안내하는 빨간 모자의 심부름하는 아이들이 찻간으로 뛰어들어   여관에 가시지요. 하며
짐을 받아 안으려 한다.
   아니다. 우리는 부산 가는 사람들이야.
  방정환이 짐을 주지 않으려 했다.
   연락선 표는 벌써 다 팔렸어요. 도쿄 박람회 구경 때문에 승객이 많아서요.
   그래?
  그러나 안내원 아이 말만 믿고 여관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여관에서 하룻밤을 쉬려면 비싼
여관비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되건 안 되건 빨리 가 보기나 하자. 하고 방정환은 짐을 두손에 들고 연락선이 닿는 포구를 향
해 달린다.
  이 때 질겁을 하는 것은 일본인 형사다.
   서세요! 서세요!
  그는 방정환 일행을 뒤따라 달리면서 소리친다. 주의 인물이 그만 달아나 버린는 줄 알았던 것
이다.
   연락선 떠날 시간이 돼 가서 그래. 따라 오라고.
  방정환이 포구를 향해 계속 달렸다. 안내원 아이가 말 한 대로 배표는 없었다.
  이 때도 일본인 형사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 일행이 급한 일로 경성(서울)에 가야 하는데 배표가 다 팔렸소. 배표 석장만 구해 주시
오.
  미행을 하던 일본인 형사 덕분에 방정환 일행 세 사람은 배표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방정환은 다시 어느 형사에 인계되어 부산에 이르고 부산역에서 서울까지 또 경찰이 뒤
따랐다.
  참으로 귀찮은 일이었다.









  14. 소파의 글솜씨

  방정환은 말과 글에 재주가 있었다. 스물네 살의 젊은 나이에 전국의 어린이 운동을 이끌어갈
정도로 지도력과 넉넉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의 말과 글은 어린이 사랑으로 이어
졌다.
  방정환은 열아홉 살 때  청춘 지에 글이 발표되자 퍽 마음이 설레었고, 더욱 글쓰는데 열중하였
다.
  이듬해인 스무 살 때에는 마해송, 유광렬, 이범일과 힘을 합쳐  녹성  이라는 영화 잡지를 엮었
다.
  1920년 천도교에서 종합잡지 개벽이 창간되자 창간호에서부터  유범 이라는소설을 실었고, 다시
 그 날 밤 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여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기도 하였다.
  방정환의 아동 문학은 1921년 도쿄에서 번역하여 이듬해에 책으로 낸 번역 동화집  사랑의 선
물 이 그 시작이었다.
  방정환은 아동 문학을 동화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동극은  어린이 지 창간호에 발표한  노래 주
머니 가 시작이다.
  방정환의 창작 동화나 소년 소설에는  만년 셔츠  같은 단편과  금시계 같은 중편이 있다.
  이밖에  동생을 찾으러 ,  칠칠단의 비밀  등 장편을 쓰기도 하였다. 작품 내용에서는 용감하고
슬기로운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갖은 모험 끝에 악당을 물리친다.
  방정환이 쓴 동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어린이  1929년 10월호에 발표한  늙은 잠자리
이다.

   늙은 잠자리

  수수나무 마나님
  좋은 마나님
  오늘 저녁 하루만
  재워 주세요.

  아니 아니 안 돼요.
  무서워서요.
  당신 눈이 무서워
  못 재웁니다.

  잠잘 곳이 없어서
  늙은 잠자리
  바지랑대 갈퀴에
  혼자 앉아서
  추운 바람 서러워
  한숨짓는데
  감나무 마른 잎이
  떨어집니다.

  방정환은 문학 작품외에 주장을 담은 글도 많이 발표하였다. 그의 주장은 논리가 바르고 감동
을 주었다. 어린이 사랑에 대한 글이 대부분이었지만 청년 학생에게 주는 글도 적지 않았다.
  세상을 빗대어 쓴 글도 있고, 과학 이야기, 놀이 이야기, 금붕어 기르기, 팽이 만들기, 곤충 채
집법 같은 학습 기사도 아기자기한 문장으로 정성을 다해서 썼다.
  방정환은 이런 글들을  어린이 지에는 물론,  녹성 ,  개벽 ,  신여성 ,  학생 ,  조선 농민 ,  별건곤 ,
 혜성  등 월간 잡지를 통해 발표하였다. 그의 문장은 힘이 있고 재미있는 것이어서 당대에 두드
러진 문장가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정성을 기울인 글은  어린이 지에 달마다 연재한  어린이 독본 이었다.
  어린이 독본은 어린이에게 가장 감동을 줄 만한 실화를 엮은 것이었는데 겨레 사랑, 독립 사상,
인류애, 생명 존중, 근면, 지혜 등을 주제로 하였다.
   이것만은 꼭 읽으시오.  하는 뜻으로 이  어린이 독본 만은 더 큰 활자로 인쇄하여 눈에 잘 띄
게 하였다.
  1927년 3월호의 어린이 독본에 실린  두 가지 마음성 을 살펴보자.

  기차 속에서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일본 사람이 귤을 먹다가 차 바닥에 떨어뜨려서 그냥 내버렸는데, 옆에 있던 조선 부인
이 허리를 꾸부리고 그것을 집어서 흙을 털어 자기도 한 쪽을 먹고 아기에게 두세 쪽을 주었습
니다.
  그것을 보고 일본 사람 내외는 얼굴을 찡그리다가 그냥 웃어 버렸습니다.
   조선 사람은 더럽고 불쌍하다. 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그 기차가 다음 정거장에서 쉬었을 때, 양복 입고 안경 쓴 점잖은 일인 신사가 올라 탔습니다.
그이는 나무갑에 든 점심밥을 사 가지고 서너 젓가락 먹었으나 밥이 식어서 차니까 먹을 수 없었
으므로 도로 덮었습니다.
  그러나 그 밥과 반찬을 그대로 버리기는 아깝던지 그 옆의 걸상에 앉은 갓 쓴 조선 사람에게
잠자코 내어 주었습니다.
  보아하니 시골 구석에서 조밥이나 보리밥만 먹는 것 같아 보였으므로 깨끗한 쌀밥과 좋은 반
찬을 주면 비록 식었더라도 달게 먹으리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갓 쓴 사람은 아무 말없이 받아 들더니, 반찬 그릇과 밥그릇을 한꺼번에 몹시 내어던져 신사
의 얼굴을 보기좋게 갈기었습니다.
   이놈아! 내가 갓을 쓰고 구식 사람일망정 너 같은 놈에게 업신여김을 받지는 않는다. 고 소리
질러 꾸짖었습니다.
  일인 신사는 자기가 잘못한 일이므로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에 묻은 밥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민족의 자존심을 가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주려서 죽을망정 다른 민족, 특히 일
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방정환은 항일 운동의 한 가지 방법으로  어린이 지를 경영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이 잡
지의 어느 대목에도 일본 사람을 칭찬한 곳이 없다는 것, 우리 나라의 위인 특히 이순신을 기회
있을 때마다 내세운 것 등으로도 알 수가 있다.





  15. 형사도 같이 울어

  방정환은 외국 동화를 우리 나라 어린이들에게 많이 소개하였다. 그것들을 살펴보면 그림 동화
의  백설공주 ,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 오스카와일드의  왕자와 제비 , 하우프트만의  한넬레의
승천 ,  아라비안 나이트  등 세계 명작이었다. 일본 동화는 한 편도 소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우리 나라의 전래 동화를 고쳐 쓰는데에 더 많은 힘을 기울였다. 방정환의 손으
로 고쳐 쓴 우리 나라 전래 동화들은 흥미진진하게 어린이들에게 잘 읽히었다.
  그의 동화는 창작한 것이거나 개작한 것이거나 우리의 민족 정신과 깊이 있는 가르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한국 민족의 희망을 암시해 놓은 것이었다.
  그는 글을 쓰는 재주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 주는 솜씨가 또한 놀라웠다. 청중인 어린이나
어른들을 금방 웃겼다가 울리고 만다. 방정환은 이런 말 솜씨를 가지고 스무세 살인 1921년부터
동화 구연을 겸한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다.
  처음에는  어린이 지의 깔깔 소학교 난에 쓰던 웃기는 이야기 두어 가지를 한다. 이런 이야기는
짤막하지만 뚱뚱한 방정환의 이야기 솜씨가 곁들여지면 배꼽을 잡지 않고는 듣지 못한다.
   내 얼굴 보고 웃으면 안 돼요. 그런데 나는 깔깔 학교 교장 깔깔 박사예요…….
  이쯤만 이야기를 시작해도 벌써 웃음이 터진다.
  그 다음으로 슬픈 이야기다.  콩쥐 팥쥐  같은 우리 나라 이야기도 많이 하였지만 외국 이야기
로는  한넬레의 승천 ,  백설 공주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
  주인공이 고난을 당하는 대목에 와서는 듣는 어린이나 어머니들이 같이 울면서 수난당하는 우
리 겨레를 생각했다. 구연하는 방정환도 같이 울고 있었다.
  오줌이 마려운 어린이들은 고무신을 벗어 오줌을 누면 서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천도교의 장로 이돈화도 같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운일이 있었다. 동화 구연 대회가 다 끝난 다
음 이돈화는   자네의 이야기는 마술과 같아. 방정환은 마술사야. 하면서 눈물을 닦았다.
  기사를 잘못 썼다는 이유로 방정환은 자주 유치장에 갇히곤 하였다. 이 때마다 방정환은 같이
있는 감방의 죄수들에게 동화를 들려 주어 감동을 시키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밤차로 대구에 내려가서 다음날 강연과 동화를 들려 주게 되었다.
  역 앞에는 멀리 지방에서 온 교사도 마중나와 있었다. 모두들 어린이 운동에 관심이 있는 분이
며 소년회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날 방정환의 동화 구연 대회는 만경관이라는 극장에서 열렸다. 넓은 극장에 어린이들과, 어
머니와, 교육자, 어린이 지도자들로 가득 찼다.
  여기서도 방정환은 대구 사람을 웃기고 울렸다.
  행사가 끝나자 지방의 어린이 지도자들이 그의 주위로 우우 몰려들었다.
   방 선생님이 이야기 잘 하신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그처럼 심금을 울리는 줄은 몰랐습니다.
다음에는 저희 지방으로 와 주십시오.
   아니 여기서는 저희 지방이 더 가깝습니다. 저희에게 먼저 와 주십시오.
  모두들 방정환을 잡아끌자 그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번 출장은 계획된 일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가서  어린이 지 원고도 마감해야 합니다.
그 곳에 또 다른 계획이 있습니다. 다음 기회로 미룹시다.
  붙잡는 곳을 놓고 방정환은 마산으로 향했다. 마산에서도 유지들이 환영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
었다.
  다시 그 이튿날은 부산으로……. 이렇게 하여 방정환은 강연과 동화 구연을 위해 전국을 누볐
다.
  그는 전국 지도를 붙여 놓고 강연을 다녀온 곳마다 표를 해 갔다. 강연을 다녀 온 곳이 여든네
곳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와 달라고 부탁해 온 곳은 그  다섯 배가 넘었다.
  논산에 가서 강연을 하였는데 이 날은 어린이 사랑과 함께 생활 계몽에 대한 주제였다.
   아직도 상투를 갖고 있는 분은 안 됩니다. 흰 옷은 경제적이 아니어서요, 검은 물을 들여서 입
읍시다. 두루마기 고름이 길어서는 못 씁니다. 두루마기에 단추를 답시다……. 하고 방정환이 열
변을 토했다.
  이튿날 아침 떠날 때에 지방 유지들이 많이 나와서 방정환의 연설을 칭찬하면 작별을 아쉬워했
다.
  그런데 한 시골 노인이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가다가 저쪽에서 돌아와 다시 모자
를 벗어 보이는 것이었다.
  네댓 번 모자를 벗고 같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긴 방정환은 그 노인을 잘 아는
이 곳 사람에게 물었다.
   저 어른이 내 앞에 와서 여러 차례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시는데요.
  그러자 고장 사람이 대답하였다.
   완고하기로 이름난 분이시지요. 그런데 어제 방 선생 강연을 듣고 깨달으신 겁니다. 당장 상투
를 자르셨어요. 상투 자르고 머리 깎은 것을 방 선생님께 보이기 위해 그러시는 겁니다.
  방정환은 자기의 연설이 이처럼 효과를 본 것에 아주 만족했다.
  그런데 어디서나 방정환의 뒤에는 일본 경찰관이 따라다녔다. 강연이나 동화를 할 때는 한쪽
편 임관석에 꼭 일본 경찰이 앉아 있는 것이다.
  총독부나 일본 사람을 공격하는 말을 하기만 하면 단 뒤에서 당장 끌어내리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정환의 동화를 듣는 일본 경찰은 그만 같이 울고 만다.




















  16. 선구자 방정환

  세상은 방정환을 민족 운동가로 손꼽게 되었다.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로 장래에 큰 일을 하게
되리라고 기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이 방정환에게는 짐이 되었다. 첫째로 3.1 운동에서 민족 대표 33인의 첫머
리에 놓인 손병희의 사위라는 것이 큰 짐이었다.
  손병희가 지난날 천도교의 3대 교주였으므로 방정환도 종단의 일을 같이 걱정해야 했다.
   개벽 지는 민족 종합지로 창간이 되었으나 갖은 탄압을 받았다. 34회나 발매 금지를 당해 이미
찍어 놓은 잡지를 빼앗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1926년 8월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을 당하고 말았다.
  개벽에 이어서  별건곤 을 발행하였으나 이 역시 일제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별건곤에 이어  혜
성 을 창간한 것이 1931년이었다. 이 밖에도 개벽사에서는  어린이 ,  신여성 ,  학생 ,  조선 농민 ,
 신인간  등의 월간지를 내어 우리나라 신문화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 모두가 하나같이 일제의 탄압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잡지 경영이 어려워지게
되고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제일 많이 팔린다는  어린이 지도 돈이 남는 잡지는 아니
었다.
  이 모두가 방정환에게는 정신적인 고통이 되었다. 그 밖에도 방정환에게 맡겨진 일이 많았다.
그러나 방정환은   젊은 나이인데 이것 쯤이야. 하고 참아 나갔다.
  그는 땀을 흘렸다. 남달리 땀을 많이 흘리는 편이기도 하였다. 동화 구연을 마치고 나면 연거푸
얼음물 세 사발을 마시는 때가 있었다. 그러면서 밤을 새우며 글을 쓰고 동화 구연을 하러 전국
을 누볐다.
  그러던 하루는 견딜 수 없이 아파서 제국 대학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1931년 7월 16일이
었다.
   안 되겠어요. 입원하세요.
  의사는 병세가 위중하다고 알렸다.
  젊은 나이라 별일 없으리라 믿고 과로한 탓에 신장이 약해지게 되었고, 신장염에서 고혈압 증
세까지 온 것이다.
  방정환은 입원실에서 신음 소리를 내며 앓았다. 이튿날 17일에는 정신이 몽롱해졌다. 방정환은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안 되겠어. 여보! 살아나지 못할 것 같소.
  방정환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부인을 불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부인 손용화는 울먹이었다. 옆에는 열세 살의 맏아들 운용이가 손을 잡고 있었다. 맏딸 영화는
열한 살, 둘째 아들 하용은 여덟 살, 둘째 딸 영숙이는 세 살이었다.
  소파 방정환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달려온 것은 색동회 친구들이었다.
   과로한 탓이었어요, 소파. 이제 낫거든 건강도 좀 살펴가면서 일하셔야 해요.
  색동회 친구들은 위로하느라 곧 나을 거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누구의 눈으로 봐도 가망이 없
는 상태였다.
  일본 도쿄에서 의형제처럼 맺어진 색동회 친구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의논도 하고 부탁
도 하였었다.
   어린이 지는 그들의 도움으로 경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린이 운동이 걱정이었다.
  7월 23일 오후, 색동회의 식구 조재호가 손을 잡자,
   우리 어린이들을 어떻게 하지……? 하고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말을 끝으로 방정환은 눈을 감았다.
  오후 6시 54분.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 소파 방정환이 서른두 해를 살고 간 것이다.
   아까운 사람…….
   나이가 너무 젊구나.
   참으로 많은 일을 할 사람이었는데…….
하고 온 나라 사람이 슬퍼하였다.
  방정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가  어린이 에 연재하던 모험 소설  소년 사천왕 이 중단이 된
채 유고로 남게 되었다. 이 역시 슬픈 일이었다.
  소파의 사랑을 받아오던 윤석중은 이 날의 슬픔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젖없이 자라는 저흴 버리고
  어떻게 가십니까, 네? 선생님
  옷자락에 매달린 저흴 떼치고
  어디로 가십니까, 네? 선생님
  선생님이 가시다니 방 선생님이
  안 돼요. 못 가세요. 어딜 가세요?
  천년을 사신대도 안 놓을 것을
  40도 채 못 넘겨 가시다니.
  웃으며 가신대도 서러울 것을
  말없이 괴로웁게 가시다니요.
  선생님이 가시다니 방 선생님이
  안 돼요, 못 가세요. 어딜 가세요?

  한국 아동 문학사에는 방정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고 있다.
  방정환(1899-1931) : 호는 소파. 서울 야주개 출생.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 아동 문학의 선구자, 동요, 동화, 동극 작가, 번역가, 잡지 편집인, 동화
구연가, 독립 유공자,  몽견초 ,  북극성  등 여러 가지 작품이 있음.
  한 세상 서른두 해 동안 많고 많은 일을 한 분. 어린이들을 위해서만 사신 분.

반응형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지의 제왕, J. R. R. Tolkien The Lord Of The Rings  (0) 2023.04.27
발터 벤야민  (0) 2023.04.27
백범일지 [김구]  (0) 2023.04.27
빙점 [미우라 아야코] 01  (0) 2023.04.27
빙점 [미우라 아야코]  (0) 2023.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