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눈 벌 레
제23장
눈 벌 레
눈벌레가 날아다닐 무렵이 되었다. 게이조가 하코다테에서 돌아온 지도 5일이 지났다.
북해도는 눈이 내리기 전이 되면 으레 젖빛의 작은 날개 달린 벌레가 날아다닌다. 그것들은
날아다닌다기보다는 오히려 떠돌아다니는 것 같은 운치가 있어서 사람들은 추위를 맞이하기
전의 긴장감이 잠시 잊혀지는 것 같은 부드러운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게이조는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약간의 따뜻함조차도 없어진 늦가을의 석양 속을, 고개를
숙인 채로 걷고 있었다.
아침 식탁에서 도루가 한 말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오늘 아침 도루는,
“아버지, 병원에 무라이라는 선생님이 계시죠? 상당히 핸섬하던데요.”
라고 말했다.
태풍이 불던 날 밤, 방송에서 게이조의 조난을 듣고 사무장과 무라이가 재빨리 달려왔던 것
을 게이조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좀처럼 병원에 가지 않는 도루가 무라이의 이름
을 알고 있어도 의심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영화배우가 되는 편이 좋았을 것 같구나.”
게이조는 상냥하게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그러자 도루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아, 그래. 엄마, 그 선생님 말이야, 태풍이 불던 날에 무엇인가 의논할 일이 있다고 엄마하
고 약속해 놓고 오지 않았던 선생님…….”
순간 말문이 막혀 버린 나쓰에를 보고 게이조는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 나쓰에는 또 무라이하고 만날 약속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나쓰에가 돌연 여행을 취소했던 이유가 무라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니, 게이조는 싫어도 인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이조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오늘 아침의 그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눈벌레가 착 하고 달라붙듯이 게이조의 코트로 날아들었다. 얇고 연한 날개가 너무 투명해
서 코트의 갈색이 훤히 비쳤다. 게이조는 눈벌레를 살짝 집었다. 그러자 눈벌레는 맥없이 그
냥 죽어 버렸다. 그것은 마치 한 송이의 눈이 손가락에 닿아서 녹아 버리는 것같이 덧없는
것이었다.
‘행복이나 평화도 이 눈벌레와 같은 것이구나.’
게이조는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숙한 사실인가를 지난번의 해난사고로 절실하게 깨닫
고 있었다.
게이조는 자신이 그 참혹한 희생 위에 살아있다는 사실을 평생 잊지 않고 정말로 진지하게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으로 아사히카와에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참혹했던 체험은 게이조 한 사람만의 체험이었다.나쓰에도 도루도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저 광란의 파도 속을 빠져나와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학교 1학년생과 같은 순진하고 진지함으로 살아가려고 했던 게이조의 생각은, 다시 오물
투성이의 손에 의해 원래의 생활로 되돌려져 버린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게이조가 아무리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하려 해도, 나쓰에가 게이조를 배반하려는 것같이 생각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삶밖에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게이조는 문득 지난 봄에 죽은 마에가와 다다시를 생각했다.
“수술받은 밤에는 망망한 하늘과 땅 사이에 떠도는 나의 실존을 생각한다!”
폐결핵으로 늑골 절제를 했을 때 마에가와 다다시가 한 말이었다.
마에가와 다다시는 게이조의 3년 후배였다. 그는 게이조와 같은 테니스 클럽에 다니는 머리
가 좋은 의학도였다. 그가 이런 말을 했을 때의 고독을 지금 게이조는 절실히 헤아릴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 어둠의 파도 사이를 떴다 가라앉았다 하고 있었을 때의 게이조의 심정과
비슷했다.
‘이 고독을 통해서 그는 죽고, 그리고 나는 살았다. 사는 것은 그 커다란 파도와 싸우는 것
과 어쩌면 그렇게도 같을까?’
게이조는 밝고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고 그렇게 원했는데도, 그 큰 파도는 또 다시 게이조에
게 엄습해 왔다.
‘나쓰에, 제발 부탁이니 조용히 살게 해줘!’
게이조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게이조는 언제까지나 눈벌레가 떠도는 거리를 걷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느덧 게이조는 부귀당 서점 앞에 와 있었다. 저녁 무렵의 서점은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
로 혼잡했다. 토요일인 탓인지도 몰랐다.
사람을 헤치고 서점의 안쪽까지 들어가는 것이 귀찮아서 게이조는 눈앞에 있는 책꽂이를 쳐
다보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성서로’라는 광고지가 있었다. 그 아래 검은 표지에 금박으로 쓰여진
성경이라는 글자가 놀라울 만큼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아직 10월 중순인데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이조는 성서 한 권을 집어 보았다. 두텁고 묵직한 성서를 보며 게이조는 문득 학생시절을
떠올렸다. 영어를 공부할 목적으로 선교사에게 다니고 있는 동안에 성경을 읽고, 교회에도
출입했던 때가 있었다. 별다른 고민도 문제거리도 없었기 때문에 그때 들었던 설교는 그다
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렇지만 신의 존재나 영원에 관해서 교회의 청년들과 토론했던
기억은 생생했다.
졸업 후에는 성서가 책꽂이의 어디에 꽂혀 있는가도 모를 정도로 읽는 날이 없어졌다. 지금
다시 성서를 손에 드니 그때 성서를 읽었던 시절이 무척이나 그리워졌다.
‘허, 구어체 번역인가?’
게이조는 여기저기를 골라서 읽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라고 기억하고 있었
던 《마태복음》의 성구가,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로
번역되어 있는 것도 희한하고, 어딘가 유머러스하기조차 했다. 여기저기 골라서 읽고 있는
동안에, 게이조의 시선은 마태복음 제1장에 쏠리기 시작했다. 한 번 읽고 게이조는 숨을 죽
였다. 게이조는 그 부분을 다시 읽었다. 처녀인 마리아가 임신을 한 이야기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는 이러했다. …… 어머니인 마리아는 요셉하고 약혼 만한 상태
였는데, 결혼도 하기 전에 성령으로 인해서 임신이 되었다. 남편인 요셉은 정직한 사람으로,
그녀의 일이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싫어해서 남몰래 파혼하려고 결심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다빗의 아들 요셉아, 걱정하지 말아라. 마리아를 너의 처로 맞이하는 것이 좋다. 마리아의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는 성령에 의한 것이다. 마리아는 남자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 이름을
예수라고 불러라. 그는 자기의 백성을 죄에서 구하는 사람이 될 터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기 위함이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 하느님의 사자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처로 맞이하였다.
게이조에게 있어서 이 만큼 중요한 말은 성서의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학생시절의 게이조가 이 부분을 읽었을 때의 문제는 ‘처녀 혼자서 임신이 가능한가?’라는
의학적, 과학적 의문이었다.
정자도 없이 난자가 분열한다는 것이 인간의 경우에 가능한 것인가를 두고 많은 토론을 했
다. 그때 게이조는 난자를 바늘로 수만 번 건드려 처녀의 임신 가능성을 증명하려고 하는
학자의 이야기에 흥미가 있었다.
“성령에 의한 처녀의 임신이라고 맨 처음부터 쓰여져 있는 것으로는, 성서도 의심스럽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처녀의 임신이 거짓말이라면, 일부러 이러한 의심받을 일을 제1장부터 썼을 리는 없다. 그
러니 이것은 여하튼 사실이다. 더욱이 2천 년 동안, 지워지지도 수정되지도 않고 지금까지
내려왔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증거이다. 기적은 있을 수 있다. 과학으로써 증명할 수 없는 것
을 기적이라고 한다. 우리들 과학하는 사람의 대상은 불가사의이지 기적은 아니다.”
라고 토론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여하튼, 그 무렵의 게이조에게 있어서 처녀의 임신 같은
것은 아무래도 매우 어리석게 생각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이야기는 게이
조의 가슴을 때렸다. 나쓰에의 배신으로 괴로워했던 게이조에게 있어서 읽고 그냥 지나쳐
버릴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인 약혼자의 임신이 남의 눈에 띌 정도가 되었다. 그것을 알았을 때 요
셉의 번뇌가 어떠했겠는가를 게이조는 충분히 헤아릴 수가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파혼할까도 생각했다.’고 하는 짤막한 한 귀절에, 그의 모든 고민이 담겨
져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꿈에 나타났던 천사가 그의 임신은 신의 뜻에 의해서였다고 알려 주었던 것이다. 파
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요셉이 천사가 명한 대로 마리아를 처로 맞이했다고 하는, 그 한
가지 일에 게이조는 진한 감동을 받았다.
게이조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2천 년 동안, 세계의 몇 십억의 그리스도 신자가 있었을 터이
지만, 마리아의 처녀 잉태를 요셉처럼 믿기 어려운 입장에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고 게이조
는 생각했다. 가장 믿기 어려운 입장이었지만, 천사의 말에 순순히 따랐던 요셉에게 게이조
는 경탄했다.
요셉이 신을 믿고 마리아를 믿는 것처럼 게이조도 나쓰에의 인격을 믿고 싶었다.
게이조는 가끔 그의 몸에 부딪치면서 왔다갔다 하는 손님들 속에서 성서를 손에 든 채로 쏟
아지는 눈물을 참기가 어려웠다.
나쓰에의 목덜미에 남아 있던 보라색의 키스마크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게이조의 눈에
선명히 떠올랐다. 요셉이 마리아의 처녀 임신을 믿었던 것도, 마리아의 평소 인품을 요셉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마리아는 흔히 볼 수 있는, 청순하고 정직할 정도의 여성은 아니었다. 그녀의 인품은 참으
로 숭고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게이조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쓰에와 무라이가 어느 정도까지의 깊은 관계에 있었는지는 게이조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게이조에게는 나쓰에가 무라이에게 끌렸다고 하는 그 사실이 견딜 수가 없었
다.
‘그렇게도 가고 싶어했던 여행을 그만 두면서까지 나쓰에는 무라이를 만나고 싶었던 것일
까? 무라이가 나쓰에에게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한 도루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
라도 여하튼 두 사람이 만날 약속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게이조는 현대어로 번역된 성서를 한 권 사서 밖으로 나왔다.
‘요셉이 마리아를 믿는 만큼 굳은 신뢰로 맺어진 인간관계가 과연 있을까?’
게이조는 쓸쓸했다. 거친 파도 속에서 그처럼 괴로움을 당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는데도,
결국은 시시한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쓸쓸했다.
‘이러한 생각만 하다가 어리석게 일생을 마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대로 바다에서
죽는 편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자기의 구명구를 위경련을 일으킨 여자에게 주었던 선교사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선교사에게 차라리 이 생명을 주었어야 했다.’
게이조는 그렇게 생각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밖은 어두워졌다. 추위가 발 밑에서부터 조용하게 휘감겨 오는 것 같았다.
집 앞까지 거의 다 왔을 때 보니 대문 등 아래에 요코가 서 있었다. 요코는 게이조를 보자
곧 달려왔다.
“이제 돌아오세요? 토요일인데도 많이 늦으셨네요. 걱정했어요.”
요코는 그렇게 말하고 게이조의 손에 매달렸다.
“그래.”
많이 걸어 다녀서 게이조는 피곤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요코의 손을 뿌리
치듯이 했다. 그런데 무심코 뿌리쳤던 손이 요코의 뺨을 때렸다. 요코가 놀라서 게이조를 쳐
다보았다.
“아, 미안. 아팠지? 아빠가 피곤해서…….”
자기의 귀가를 걱정하고 추운 대문 밖에서 기다렸던 요코의 볼을 실수라고는 하지만 때리고
말았다. 그의 머리는 견딜 수 없는 생각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돌아다녔던 것이 피곤해서인지, 다음날이 일요일이어서인지 정오쯤까지 게이조는 잠을 자
버렸다.
오후가 되어서 나쓰에는 게이조의 병문안을 왔던 사람들에게 답례를 하기 위해서 시립도서
관에 가는 도루와 함께 차를 탔다.
쓰기코가 부엌에서 월동할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게이조는 책을 읽는 것도 귀찮았다. 할일
없이 김치 담그는 것을 보기도 하고, 집 앞에 나와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숲 쪽에서 요코를 선두로 여자아이들 4~5명이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게이조가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수줍어 하다가 줄넘기의 끈이 발에 얽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던 요코를 게
이조가 떠받쳤다. 요코는 놀아서 빨개진 볼을 게이조에게 돌렸다.
“위험해.”
요코는 꾸벅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아빠도 한 번 해 볼까?”
“어머, 아빠도 뛸 거예요?”
요코가 기쁜 듯 줄넘기의 끈을 게이조의 손에 넘겨 주었다. 다른 아이들도 신기한 듯이 게
이조의 주위를 둘러쌌다. 게이조는 기모노를 입고 게다를 신은 채로 줄넘기 줄을 뱅글뱅글
돌렸지만 끈이 조금 짧았다.
“유감스럽게도 줄이 짧군.”
게이조가 그렇게 말하고서 줄넘기 줄을 요코에게 다시 넘겨 주자, 요코는 시시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빠, 이제 놀아 주지 않을 거예요?”
어린 아이들은 다시 숲쪽으로 달려갔다.
게이조는 어젯밤, 실수로 요코의 볼을 때렸던 보상을 한 것 같은 다정한 기분이 되어 있었
다.
“요코, 아빠하고 놀까?”
요코의 얼굴이 반짝 빛났다.
“정말이에요? 무엇을 하고 놀지요?”
요코가 묻자 게이조는 말문이 막혔다.
게이조는 어린 아이하고 놀아 본 경험이 없었다.
“밖은 추워. 어쨌든 집으로 들어가자.”
게이조는 요코의 손을 잡았다. 요코는 기쁜 듯이 껑충껑충 한 발로 뛰면서 대문 안으로 들
어갔다.
‘요코하고라면, 마음가짐 여하에 따라 더 즐겁게 지낼 수도 있을 거야.’
요코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게이조 역시 기뻤다. 어제 요코의 볼을 때린 대가로 더욱더
기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 게이조는 요코가 누구의 아이인가를 잊고 있었다.
“종이접기를 해 볼까?”
게이조가 말하자 요코는 복도를 달려서 곧바로 큰 종이 상자를 갖고 왔다.
“아빠, 무엇을 접을까요?”
“요코는 무엇을 접을 수 있지?”
“학, 사람, 배…….”
“많이 접을 줄 아는구나. 종이배는 어떻게 접더라?”
밝은 햇살이 비치는 창밖으로 새 몇 마리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
‘사랑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나도 요코를 사랑할 수 있어.’
게이조는 자신이 대견스럽게 생각되었다. 요코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재치있게 색종이를 접
고 있었다.
색종이의 귀퉁이와 귀퉁이를 겹쳐서 접을 때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접는 것을 보고
게이조는 놀랐다.
완성되자 요코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빠, 이 배의 끝을 잡고 계세요. 그리고 나서 눈을 감아요.”
‘요코가 이렇게 귀여운 아이였던가?’
게이조는 새삼스러운 듯이 요코의 웃는 얼굴을 싫증나지 않는 듯 뚫어지게 보았다.
“어서 눈을 감아요.”
요코가 우스운 듯이 웃었다. 요코의 웃는 얼굴은 너무 밝아서 머리카락까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요코?”
“왜요?”
“아빠가 안아 줄까?”
2학년이 되기까지 요코는 게이조에게 안겼던 적이 없었다. 요코는 기쁨과 부끄러움으로 두
볼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순순히 게이조의 무릎에 안겼다.
“요코는 상당히 무겁구나.”
의외로 살집이 좋은 요코를 무릎에 안으면서, 게이조는 한 번도 요코를 안아 주지 않은 자
신의 냉정함을 반성했다.
“저는 벌써 2학년인걸요.”
“너의 반에서 큰 편이지?”
“네, 두 번째로 커요.”
“그래? 대단하구나.”
게이조는 환자의 몸을 만지듯이 점잖게 요코의 양 어깨에 손을 댔다. 요코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고 얌전하게 있었다. 다음으로 게이조는 가볍게 양 팔에 손을 댔다. 팔도 생각했던
것보다 토실토실했다. 저쪽을 향해서 안겨 있는 요코의 등에 볼을 비비듯이 하면서 다리에
손을 댔다. 매끈매끈하고 둥근 무릎이 귀여웠다.
“짧은 양말을 신었어요.”
“왜 긴 양말을 신지 않았니? 이렇게 무릎을 내놓고 다니면 춥지 않니?”
“아뇨, 오늘은 따뜻한걸요.”
게이조는 비단과 같은 감촉이 느껴지는 무릎 주위를 만지고 있었다. 만지면서 어린 여자아
이가 치한에게 습격당한 이야기를 상기하고 있었다.
어린 계집아이에게 어른이 된 남자가 무엇이 재미있어서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인가, 하고
게이조는 자신의 소년시절의 잘못을 잊고 조소해 왔던 터였다.
그러나 지금, 요코를 무릎 위에 안으면서 게이조는 그 치한의 어린 여자아이에 대한 심리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성숙한 여성하고 있을 때와는 달랐다. 더 은밀하고 요염
한 기분이었다. 어른이 된 여성이라면 성에 대한 지식도 감정도 풍부해서, 반드시 뭔가의 반
응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어린 여자아이는 그러한 지식도 감각도 없었다. 어린 여자아이를
안은 것은 밀실에서의 자위행위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여자아이는 순진하게 안겨 있을 뿐이고, 어떠한 유혹도 하고 있지 않는데도, 성숙한 여성의
유혹과는 다른 야릇한 매혹이 있었다.
게이조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놀라서 요코를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무겁구나, 요코.”
요코는 고개를 조금 움츠리듯이 하고 웃었다.
‘만약에 이 작은 입술을 탐내서 마구 키스를 하더라도, 요코는 그 행위를 아빠의 사랑이라
고 받아들일 뿐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그와 같은 상상을 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요코가 내 친자식이라면 결코 이러한 상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이조는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자신의 추함에 치가 떨렸다.
‘나도 요코를 사랑할 수가 있다.’
라고 자부했던 아까의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짓은 사랑이 아니야. 결국 나는 이렇게 감각적으로 사람을 귀여워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요코가 그러한 게이조의 생각을 알 리가 없었다. 안긴 것이 기뻐서 열심히 종이학을 접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게이조는 아무 생각 없이 종이접기를 하고 있는 요코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귀여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좋아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이번에는 무엇을 접을까요?”
“…….”
“응, 아빠?”
“응?”
게이조는 요코를 보았다.
“무엇을 접지요?”
“응, 종이 비행기가 좋겠구나.”
“비행기?”
게이조는 소년시절에 광고지로 비행기를 접고 놀았다. 그것이 저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문득 배에서 만났던 선교사가 생각났다.
‘그거다! 자신의 생명을 상대에게 주는 것이다.’
게이조는 무심코 무릎을 쳤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 오랫동안 요코를 무릎 위에 안는 일마저도 할 수 없었다. 그
리고 겨우 안아 올렸다고 생각했는데 다만 감각적으로 되어 버릴 뿐이었다. 그러한 나는 저
선교사의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것은 왜 인가, 하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나는, 너의 적을 사랑하라고 한 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만으로
는 안된다. 그 선교사는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단순히 말만이 아닌 더욱 생명
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게이조는 그것을 알고 싶었다.
“아빠, 자, 비행기.”
요코가 다 접은 비행기를 게이조에게 날렸다. 비행기는 뚜렷하게 활 모양을 그리면서 게이
조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때,
“어머, 살아있었네.”
다카키가 미닫이를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 오게.”
게이조는 약간 얼굴을 붉혔다.
“자네는 운이 좋은 놈이군. 아니면 도가 통한 놈이던가. 그다지 나쁜 놈은 아니었으니까.”
다카키는 게이조의 무릎에 닿을 정도로 바싹 붙어 앉아서 꼼짝도 않고 게이조의 얼굴을 들
여다보았다. 게이조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다행이야. 어떻든 살아야 해. 사람은 죽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요코?”
다카키는 그렇게 말하고 옆에 앉은 요코를 가볍게 안아서 자기의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아빠가 살아 있어서 좋지?”
“네, 좋아요.”
“만약에 아빠가 죽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울었을 거예요.”
“울어? 어느 정도 울지?”
“몰라요, 엄마는 기절했었어요.”
“기절했다구?”
“병원의 선생님들이 주사를 놓았어요. 오빠도 울었어요. 아버지가 죽었다고 해서…….”
“저런, 큰일이 났었구나. 요코도 울었니? 엉엉, 하고 말이야.”
“요코는 울지 않았어요.”
“어째서? 슬프지 않아서?”
“오빠는 아빠가 죽었다고 했지만, 요코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요. 틀림없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요.”
게이조는 다카키가 요코를 안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아까 자신의 추한 생각을 부끄럽게 여겼
다. 요코를 부르는 친구들의 소리가 숲 쪽에서 들려왔다.
“지금 갈게. 기다리고 있어.”
요코는 맑고 큰 목소리로 대답하고, 종이 상자를 안고 나갔다.
“…….”
“…….”
다카키와 게이조는 꼼짝도 않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없었다.
“큰일날 뻔했구나.”
“그래.”
“생각하기도 싫겠군.”
“그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묻게 되겠지? 나는 그렇게는 묻지 않겠어. 어
차피 세상 사람들은 흥미만으로 묻는 거니까.”
“반드시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
“뭐, 목숨을 걸고 고통당한 일을 인정사정없이 묻는 것이 세상 사람들인걸.”
“…….”
“그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살려는 건 쓸데없는 짓이야.”
“…….”
“어차피 인간이란 몇 번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다지 자신이 영
리하다고만 생각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그냥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거야.”
게이조는 자신의 바보스러움이 엿보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다카키의 말에 뭔가
할말이 있는 것을 게이조는 느꼈다.
“아, 잠시 후에 무라이가 올 거야.”
“무라이가? 무슨 용무로?”
“아니, 별다른 용무는 없어.”
2, 3일 전부터 게이조는 병원에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라이하고는 몇 번인가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쓰에 씨는?”
쓰기코가 양주를 갖다 놓고 나가자 다카키가 물었다.
“답례하러 돌아다녀.”
“답례하러? 무슨 답례?”
“이번 일로 해서 위문해준 사람들에게 말이야.”
“뭐야? 그야말로 곤욕을 당했는데, 이번 일로 답례 인사를 다닌다구?”
다카키는 새하얀 이를 내보이고서 웃었다. 숲쪽에서 요코의 웃음소리가 한층 더 맑게 울려
퍼졌다.
“기운이 좋은 아이지?”
“아아, 요코 말인가?”
게이조는 귀를 기울이듯이 하고,
“아무튼 나무랄 데가 없는 아이야.”
하고 다카키를 보았다.
“그것 참 다행이군.”
“…….”
게이조는 물끄러미 다카키의 얼굴을 보았다.
“왜 그래?”
“요코는…… 정말로 범인의 아이인가?”
게이조는 다카키에게 확인하듯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까부터 그것을 묻고 싶었
던 것이다.
“약속을 잊었구나?”
다카키도 응수하듯이 게이조를 보았다. 허를 찔린 것 같은 낭패한 기색은 없었다.
“아니야, 약속은 기억하고 있어. 그러나…….”
“자네 부부의 아이야. 범인의 아이라니?”
다카키는 그렇게 말하고 넥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했다.
“요코는 머리가 좋아서 학교의 성적도 2등 이하로 내려가 본 적이 없어.”
“그래?”
“정말 맑고, 더구나 상냥한 아이지.”
“그래서?”
“게다가 얼굴도 예뻐. 살인범에게서 어떻게 저런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뭐야? 시시하구나. 자네의 말대로라면 살인자의 아이는 모두 머리가 나쁘고 얼굴도 천하
게 보인다든지, 성격이 삐뚤어진다든지 해야 하는 건가?”
“아니, 그렇지는 않지만 사이시라는 놈은 막일을 하고 있었고…….”
“쓰지구치, 자네의 회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술을 마시면서 불평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
는 유아원의 아이를 보러 오는 놈들에게 언제나 화가 치밀어 올라. 그 사람들은 뭔가 한 단
계 낮은 것이라도 보는 것 같은 눈초리로 어린아이들을 봐. 가령, 부모가 낙지이건 오징어이
건 우리들의 아이하고 얼마만큼 다르다는 건가? 요코가 의사의 자식이라면 할말은 없는데,
노동자의 아이라는 게 이상하다는 건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다카키가 매섭게 게이조를 쏘아보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게이조는 다카키의 말에 부끄러워졌다.
“나는 말이야, 쓰지구치. 언제나 유아원의 아이를 보며 나와 이 아이들이 도대체 어디가 다
른가, 하고 생각한다네. 보러오는 사람들이 뭔가 한 단계 위의 인간인 것 같은 표정으로 보
고갈 때마다 그렇게 생각한다네.”
“…….”
“자네 가문이 아무리 유서가 깊다고 해도 첩이 있었다든지, 전투할 때마다 사람을 죽인 적
은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런 일이 한 번도 없는 가문은 아마도 없을걸.”
“하긴, 그렇구먼. 그러나 그것은 범죄인과는 달라.”
“그럴까? 나도 수십 명이나 수백 명의 갓난아이를 죽여왔어. 도망치지도, 숨을 수도 없는
태아를 말이야. 그만큼 죽였으면 그 죽은 아이들이 둔갑해서 나올 것 같지만, 다행히도 둔갑
해 나오지 않아. 법률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니까. 경찰에게도 붙잡히지 않아.”
다카키는 자조했다.
“그것은 범죄가 아닌걸.”
“자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먼. 법률에 저촉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단 말인
가? 전쟁중에 이러한 일을 했다면 모두가 감옥행이었을 텐데…… 의사도 말이야. 그 시대라
면 나는 전과 몇 백 범은 될 거야.”
“…….”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나도 이러한 일은 그만두어야 하네. 하지만 그만두지도 않고 여전
히 그짓을 계속하면서 유아원의 아이를 귀여워하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있는 째째한 놈이
지.”
게이조는 다카키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네. 후쿠자와 유키치는 역시 훌륭한 인물이
야.”
“후쿠자와 유키치도 애인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는가?”
“모르겠는데…….”
“아사히카와에 그의 애인의 아들이랑 손자가 살고 있어.”
“허, 정말인가?”
“아, 정말이고말고. 아들이라고 하지만 벌써 70세야. 훌륭한 사람이지. 손자도 게이오 대학
을 나왔고, 인품도 훌륭한 사람이야.”
“그건 처음 듣는 소리인데……”
“여하튼, 그의 애인은 후쿠자와의 먼 인척이야. 후쿠자와가 청혼했지만 신분이 틀리다고 해
서 부모에게 거절을 당했다고 하네.”
“그러니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겠지.”
“아니, 후쿠자와의 사상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말을 사람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어. 그 애인의 손자는 오랫동안 내가 알고 지낸 사람이었는데, 후쿠자와 집안이
라고 한 번도 말했던 적이 없어.”
“어째서?”
“겸손해서야. 후쿠자와가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내세우고 싶지 않았겠지. 당신의 할머
니가 후쿠자와의 애인이었는가 하고 물었더니, 어디서 들었냐며 놀라더군. 그런데 무라이 군
은 조금 늦는 것 같군.”
게이조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무라이가 찾아왔다.
“사모님이 돌아올 때까지 천천히 술이나 마시고 있지. 쓰지구치, 그래도 괜찮은가?”
“상관없어.”
게이조는 무라이를 보기만 해도 언짢았다.
“병원에는 벌써 나가고 있다고?”
다카키는 쓰기코가 가지고 온 치즈를 세 조각 정도 한꺼번에 먹어치웠다.
“병원에 나가는 편이 편하네.”
“분에 넘치는 소리를 하는군. 예쁜 사모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도 좋을 것 같은데.”
무라이는 멍하니 술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왜 그래, 무라이?”
“왜라니요?”
“기운이 없어 보여.”
“그렇습니까?”
무라이는 히죽 웃었다.
“그런데 자네, 결혼할 생각은 없나?
“결혼이요?”
“몸에 무리가 될까?”
다카키는 게이조에게 묻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일도 손에 잡히고 했으니, 이제 슬슬 결혼해도 좋지 않겠나?”
게이조는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자못 무라이의 결혼을 바라는 태도를 취한 것을 후회했다.
“결혼 같은 거…….”
그렇게 말하고서 무라이는 다시 히죽 웃었다.
“능글맞게 웃는군. 결혼같은 거, 어차피 해보았댔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회하지. 그러나
그렇다고 결혼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네. 인간은 어차피 무엇을 해도
늘 후회하기도 하고 푸념을 하기도 하는걸.”
다카키의 말에 무라이는 또 히죽 웃었다.
“다카키 씨, 원장님과 같은 나이시지요?”
“응, 그래.”
“저보다 먼저 결혼하셔야지요?”
“아아, 그런가?”
다카키는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세상 사람들의 생각대로라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 그렇지만 무라이, 내가 혼자 있는 것
과 자네가 혼자 있는 것 중 어느 쪽이 눈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나?”
게이조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무라이는,
“남의 흉은 보지 말아 주세요. 왠지 내가 나쁜 짓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보이는 것이 아니고 나쁜 짓을 하고 있잖나? 틀림없이.”
“이거, 곤란한데요.”
“뭐, 어떻든 말이야, 나는 혼자 있어도 세상의 처녀들은 관심도 없어. 그러나 자네가 혼자
있으면, 세상 여자들이 떠들썩하지 않은가? 그렇지 쓰지구치?”
게이조는 마지 못해 웃고 나서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나쓰에에게 뭔가 의논할 일이 있었다고 하던데…… 결혼에 관한 일이었나?”
무라이는 조금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뭐, 별로 의논이랄 것도…….”
하고 말 끝을 흐렸다.
“병원에 누군가 마음에 둔 사람은 없는가?”
다카키는 빨개진 얼굴을 큰 손으로 문질렀다.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한 것은 다카키가 술에
취한 표시였다.
“유감이지만 없습니다.”
“쓰지구치의 병원 간호사들은 비교적 괜찮지 않나?”
“글쎄요. 뭐, 그렇지만도 않아요. 그렇죠, 원장님?”
그렇게 말한 무라이에게,
“사무원 중에는 누구 없는가?”
하고 이상하게 거침없이 게이조가 말했다.
“없어요.”
무라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마쓰사키 유카코는 비교적 마음이 맞지 않나?”
게이조는 심술궂게 말을 몰아갔다.
“마쓰사키 유카코? 그 사람은 원장님 이외에는 이 세상에 어떤 남자도 좋아하지 않는 여자
예요.”
무라이는 태연하게 양주를 컵에 따랐다.
“아니, 쓰지꾸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가? 다시 봐야겠어.”
다카키는 게이조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천만에 말씀!”
게이조는 손을 내저었다.
“당황해 하는 걸 보니 이상하군. 그렇지, 무라이?”
“마쓰사키라는 사람은 원장님밖에 몰라요.”
무라이는 히죽 웃었다.
“자네는 엉큼한 놈이야. 점잖은 얼굴을 하고 나에게는 한 마디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어.”
다카키는 게이조의 컵에 양주를 부었다. 게이조는 무라이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만약 마쓰사키가 그렇다면, 어떻게 무라이는 마쓰사키 유카코의 기분을 알고 있는가?’
“하지만,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게. 나쓰에 씨가 울테니까.”
다카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획 하고 무라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라이, 어쨌든 자네는 결혼해야 하네.”
“…….”
“자네 어머니가 꼭 부탁하셨어. 빨리 장가를 들도록 해달라고 말이야. 나쁘게 생각하진 말
게.”
“다카키 씨가 하라면 하겠습니다.”
“허, 정말인가?”
다카키는 싱글벙글했다. 그러면서 위쪽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사진을 꺼냈다.
“어때, 이 아가씨는?”
게이조는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꼼짝도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 같은 건 볼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여자는 50보 100보이니까요. 다카키 씨가 좋다면
무조건 하겠습니다.”
무라이는 손가락으로 양주잔을 빙빙 돌렸다.
“듣기 싫은 말을 하는 놈이구먼. 맞선 정도는 보아야 하지 않는가?”
“맞선 같은 건 귀찮아서 싫어요.”
무라이는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럼 바로 교제를 시작한다는 말인가?”
“어차피 결혼한다면, 싫어도 매일 교제하게 되지요. 결혼하기 전에는 얼굴을 안 보았으면
해요.”
“그럼 뭐야, 사진도 보지 않겠다, 본인도 보지 않는다, 결혼식 때 처음으로 얼굴을 본단 말
인가?”
다카키는 기가 막혀서 무라이를 보았다. 게이조는 속으로 놀랐다.
“다카키 씨가 좋다고 생각해서 권해 준다면, 전 그것으로 좋아요.”
“그러나 사진 정도 본다고 해서 벌이 내리는 것도 아닐텐데…….”
“사진 같은 거 보았댔자 여자의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또 만나 보아도 알 수 없거든요.
3개월이나 반 년 정도 사귀어도 서로 속일 수 있으니까 말이에요. 서로 좋은 점만 보이려고
할테니까요.”
“그러니까 사귀지 않겠다는 건가?”
“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결혼관이에요. 결혼해 보지 않으면 몰라요. 아니, 결혼해서 몇
십 년 지나도 몰라요. 사람이란 그런 데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때, 쓰지구치, 무라이의 논법이?”
다카키가 힘에 겨운 듯이 게이조를 보았다. 게이조는 뜻밖에 무라이의 깊은 상처를 건드린
느낌이 들었다.
‘무라이는 언제, 어디에서 이러한 깊은 상처를 입었을까?’
“다카키 씨는 총각이니까 알지 못해요. 그러나 원장님, 결혼이란 건 어쩌면 도박 같은 거
아니예요? 잘 되든가, 아니면 잘못되든가, 어느 한쪽이니까 말이에요.”
“그럴까?”
게이조는 대답하기 어려웠다.
“열렬한 연애를 한다거나, 마음을 잘 아는 어릴 적 소꿉친구하고 결혼을 했다 해서 다 잘
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어떤 결혼을 하든 성공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의 확률은 50%
밖에 안돼요.”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엉뚱한 생각을 하는 놈이구먼.”
다카키는 머리를 북북 긁었다.
“짝수냐, 홀수냐 둘 중 하나예요. 결혼이라는 도박을 하는 이상, 나는 얼굴도 연령도 이름
도 부모도 성질도 그밖의 일체 아무 것도 모르고 깨끗하게 승부를 걸고 싶어요.”
“마작만 하더니, 결국 자네는 노름꾼이 된 건가?”
“그럼요, 노름꾼이고 말고요. 내기할 마음이라도 생기지 않으면, 결혼할 기분이 들지 않거
든요.”
술에 취해서 창백해진 무라이의 얼굴을 보면서 게이조는 무라이에 대해서 처음으로 따뜻한
감정이 어렴풋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면 여자 편에서 승낙하지 않을걸세.”
게이조의 어조는 온화했다.
“자네는 무엇보다 사람을 바보처럼 여기는 어처구니 없는 놈이니 자네의 중매 같은 건 그
만 두겠어.”
다카키가 화난 것처럼 말했을 때, 나쓰에가 방으로 들어왔다. 손님이 다카키뿐일 것이라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다카키 씨가 와 계십니다.”
쓰기코는 무라이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쓰기코는 다카키의 이름에 무라이도 포함되어 있
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나쓰에는 방에 들어서자 마자 뜻밖에 무라이의 모습을 보고 당
황해서 목덜미까지 빨개졌다. 게이조와 다카키의 눈이 각각 날카롭게 빛났다.
“이렇게 오셨는데 집을 비워서 죄송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자 나쓰에의 마음은 약간 안정되었다.
“나쓰에 씨, 무라이가 결혼하기로 결정했어요.”
다카키는 나쓰에를 응시하듯이 하면서 말했다. 게이조는 또 다카키의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전에 다카키는,
“나는 중매 같은 거 이제 그만 두겠어.”
하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어머, 경사스러운 일이군요.”
나쓰에는 잠깐 놀랐지만 얼굴색은 변하지 않았다. 태풍이 불던 밤, 게이조가 죽었다고 생각
하고 실신한 그녀였다. 그 이후 마귀가 떨어진 것처럼 무라이를 생각하는 일은 없어졌다. 지
금 무라이의 모습을 보고 볼을 붉혔던 것은 단순한 놀라움일 뿐이었다. 혹은 전혀 단순하다
고는 말할 수 없어도, 연정이 있어서 그런 것과는 달랐다. 나쓰에의 감정은 어린아이 같은
데가 있었다. 지금의 나쓰에에게는 무엇보다도 게이조가 소중했다. 게이조의 죽음을 생각하
기만 해도 나쓰에는 겁이 났다. 그리고 무라이가 결혼한댔자 나쓰에의 생활이 위협받을 일
은 없었다. 요코를 기르게 했던 게이조가 밉기는 했지만,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경사스러운 일이군요.”
라는 나쓰에의 말을, 세 사람은 각각 다르게 받아들였다.
게이조는,
‘거짓말 마라!’
하고 생각했다.
다카키는 다카키 나름대로,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다니, 무슨 말
이냐? 지금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지 않은가. 그것은 단순한 부끄러움이었던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무라이는 나쓰에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꼈다.
‘이것은 저 사람의 본심이다.’
“다카키 씨가 권해서 말이에요.”
무라이는 태연하게 말했다. 나쓰에의 태도는 지로루 다방에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차갑지는 않았지만 거리가 있었다.
“어머, 어떤 분이에요?”
나쓰에는 다카키에게 미소짓고 머리를 돌렸다.
“이 사람이에요.”
다카키는 무라이를 힐끗 보고 나쓰에 앞에 사진을 놓았다.
“예쁜 분이군! 그렇지요, 여보?”
나쓰에는 게이조에게 말했다.
“아냐, 나는 아직 보지 않았어.”
게이조는 무라이도 보지 않은 사진을 보는 것을 주저했다. 그리고 나쓰에의 태도에 불안감
을 느꼈다.
‘나쓰에, 너무 시치미 떼지 마라.’
…
제24장 행 방
제24장
행 방
사고가 일어난 지도 벌써 8개월이 지났다.
다카키 씨의 중매라면 결혼하겠다고 했던 무라이는 6월에 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다. 나쓰
에는 그 이후로 무라이와 만나지 않았다. 루리코의 죽음도, 게이조의 조난도, 나쓰에가 무라
이를 가까이 했을 때 일어났다고 하는 그 우연의 일치가 나쓰에를 공포에 떨게 했다. 나쓰
에는 자기 자신을 책망하기보다는, ‘무라이에게 접근하면 재난이 덮친다.’는 미신 같은 두
려움을 가졌다. 나쓰에다운 유치한 발상이었다.
무라이의 결혼이 결정되었다고 들었을 때, 나쓰에는 쓸쓸하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액땜을
한 것 같은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이 들었다.
조난 이후 게이조 자신도 나쓰에도 무사하다고 하는 것에 한층 더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나
서로간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요코에 관한 일이었다. 무사한 날이 계속되
면 될수록 게이조는 불안에 시달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나쓰에가 요코의 출생을 알았다면 그 평화도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게이조는 나쓰에가 일 년도 전에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쓰에 또한 요코에 대해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미워서 견딜 수 없는 때도 있었고, 불
쌍한 운명의 아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잊고 귀엽다고 생각하는 날도
있었다.
요코를 기르게 한 게이조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쓰에는 조난 사고 이후로 조금 마
음이 변했다. 용서는 할 수 없지만 비난하는 것은 줄어 들었다. 게이조의 조난이 나쓰에를
진정시킨 것이다. 쓰지구치 가정은 현재로서는 평온했다. 도루는 중학교 2년, 요코는 소학교
3학년이 되었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 같군.”
도루와 요코는 잠자리에 들고, 게이조와 나쓰에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도루가
사달라고 졸라서, 4월에 샀던 텔레비전이었다.
“가무이 호수에 꽃 구경하러 갈까요?”
나쓰에가 텔레비전을 끄며 말했다.
“하지만 무라이의 결혼 문제도 있고…… 주례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은데…….”
“…….”
나쓰에가 뭔가를 생각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다카키는 무라이의 주례를 게이조에게 부탁했었다.
“자네가 소개했으니까, 자네가 주례를 서는 것이 좋지 않겠나?”
게이조가 말하자,
“나는 총각이잖아.”
하면서 다카키는 안된다고 놀라서 크게 손을 내저었다. 다카키의 당황한 모습이 희한해서
게이조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총각이라면 누군가하고 짝을 지으면 좋지. 다쓰코 씨는 어떤가?”
“다쓰코 씨는 좋은 여자지만, 아무래도 좀 곤란해. 그 사람은 남의 마음의 밑바닥까지 내다
보는 것 같은 데가 있으니까 말이야.”
“자네도 무서워하는 여자가 있었나?”
게이조는 놀랐다.
“있고 말고. 나쓰에 씨를 잠깐 빌려 준다면 생각을 바꿀 수도 있지. 모르는 사람들은 상당
히 어울리는 부부라고 말할 테니까.”
하고 다카키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내가, 신랑은 훌륭한 의사이고, 품행도 단정하고, 신부는 재원이고, 어쩌고……, 내가 그렇
게 말하면, 자못 거짓말로 들리겠지만, 쓰지구치 같은 놈이 말하면 아주 정말로 곧이 들을
거야.”
다카키는 그렇게 말을 하고 억지로 주례를 강요했던 것이다.
“거절하는 편이 좋았을텐데요.”
나쓰에는 주례를 강요했던 다카키가 못마땅했다. 시치미를 떼고 요코를 자신에게 기르게 했
던 장본인이 다카키라고도 생각되어서, 나쓰에는 이전처럼 다카키에 대해 허심탄회할 수가
없었다. 주례를 강요한 다카키의 마음 밑바닥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쓰에 씨, 무라이를 체념하게 할 사람은 당신뿐이오.’
다카키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쓰에는 무라이에게 마음이 끌리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반드시 무라이가 아
니면 안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다른 남자였다 해도 그랬을는지도 몰랐다.
집안일만하고 밖에 잘 나가지 않는 나쓰에에게 남편 이외의 남자를 대하는 것이 어쩌면 신
기할 정도로 자극적이었을는지도 몰랐다. 만일, 다카키가 그 상황에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
다면 다카키라도 좋다고 했을는지도 모른다. 게이조와의 생활이 약간은 권태로웠다고는 해
도, 다른 남자의 품으로 달려들 정도로 나쓰에는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사소한 자신의
몸짓이나 거동에 남자가 정열을 표시하는 것이 재미있어서였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잖소. 나는 무라이가 다니는 병원의 원장이기도 하니 주례를 거
절할 수도 없었소.”
게이조는 기분이 침울한 것 같은 나쓰에의 모습에 난처해 하며 말했다. 나쓰에는 무라이하
고 나란히 서 있는 신부를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얌전하게 서 있는 자신의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틀림없이 내가 신부보다 더 아름다울 거야.’
“그렇다면 당신이 하셔야죠.”
나쓰에는 금세 밝은 얼굴이 되어 게이조를 봤다. 게이조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게이조가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쓰지구치 선생님이세요?”
“그렇습니다.”
여자의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저 마쓰사키 유카코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아니, 자네가 웬일이야?”
게이조는 무심코 나쓰에를 뒤돌아 보았다. 나쓰에는 앉은 채로 게이조를 쳐다보았다.
“…….”
“웬일이지? 이봐, 마쓰사키?”
“…… 네. 사실은 사모님께서 전화를 받으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기운이 하나도 없는 그녀의 말투가 이상하게 게이조의 가슴에 사무쳤다.
“내가 전화를 받아서 언짢은가?”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기뻐요. 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왜 그래, 마쓰사키?”
게이조는 다시 나쓰에를 뒤돌아보았다.
“아니요, 저…….”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갑자기 쾌활한 어조로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용서하세요, 원장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를 드려서…… 저는 오늘밤 내기를 했어
요.”
“내기?”
“저 말이에요, 실은 사무장님이 결혼을 권유하시기에…….”
“그런데?”
“사무장님께서 제가 조금 이상하다고 말했어요. 더이상 원장실 앞을 어슬렁거리지 말라고
하시면서 빨리 결혼해 버리라고요…….”
“…….”
게이조는 유카코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사무장님이 너무 심하게 말했기 때문에 차라리 사무장님 말씀대로 결혼해 버릴까,
하고 갈피를 못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밤 원장 선생님 댁에 전화를 걸어서 만일 사모
님이 받으시면 결혼하고, 원장님께서 전화를 받으시면 일생 동안 혼자서 지내려고 그렇게
내기를 걸었어요…….”
“그러면 내가 전화를 받지 말걸 그랬군.”
게이조는 유카코가 술을 마셨다고 생각했다. 무라이의 결혼식이 가까워지는 것이 언뜻 머릿
속에 떠올랐다.
“아니요, 기뻐요. 원장님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유카코의 사력을 다 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뜨겁게 울려 퍼졌다.
“나를?”
게이조는 나쓰에를 뒤돌아보았다. 민감하게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것같이 나쓰에의 시선이
예리하게 게이조에게 쏠려 있었다. 게이조는 당황했다.
“네, 원장님만 생각하면서 평생을 혼자서 지내도 좋다고 하느님이 허락해 준 것 같은 느낌
이 들어서 정말 기뻐요.”
“바보 같은…….”
“바보라 해도 상관없어요.”
“자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어요. 제 소원입니다. 원장님의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싶
어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게이조는 자기도 모르게 수화기를 놓아 버렸다.
“무슨 일이에요? 어디에서 걸려온 전화예요?”
나쓰에가 게이조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병원 사무원이 한 전화야.”
게이조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더이상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남자예요?”
“여자인데, 마쓰사키 유카코라는 사무원이야.”
27, 8세라고는 하지만, 처녀로서는 너무 대담한 그 말이 게이조는 불쾌했다. 나쓰에는 무엇
인가 말하고 싶은 듯했으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게이조도 지금의 전화 내용을 그대로 나
쓰에에게 전해 봤댔자 나쓰에의 오해를 살 뿐이라고 느꼈다.
잠자리에 들고 나서도 게이조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이조는 평상시에도 걸려온 전
화를 자기가 먼저 끊는 편은 아니었다. 위아래를 막론하고 상대방이 수화기를 놓는 것을 확
인하고 나서 수화기를 놓았다. 오늘처럼 통화하는 도중에 거칠게 수화기를 놓았던 적은 없
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게이조는 유카코의 전화가 마음에 걸렸다. 이상하기보다는 진지한
전화였던 것 같았다.
“원장님의 아이를 낳고 싶어요.”
라고 했던 말도 의외로 경박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어떤 절박한 심정에서 한 말이었을지
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당장 대답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늦은 밤에 묘한 전화를 걸어온 유카코에게 게이조는 화가 나기도 하고, 가련한 기분이 들기
도 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무라이와 유카코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퍼뜩 깨달았다.
‘무라이의 결혼에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닐까?’
무라이의 결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무라이의 결혼 상대자는 다카키가 알고 지내는 사람의 여동생인 사키코라는 여자였다. 다카
키가,
“내 먼 친척 중에 바보같은 놈이 있어. 36살이나 되었는데, 이름도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여자에게 장가를 가겠다는 거야. 이런 여자는 어떠하냐고 모처럼 중매할 사람이 선 볼 사진
을 가지고 가도 거들떠도 안봐. 굳이 보지 않아도 내가 좋다는 여자라면 장가를 들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놈에게 시집오겠다는 바보 같은 여자가 어디 있겠나? 하고 사키코 씨
에게 이렇게 말하니까, 사키코는 내가 그 바보 같은 여자가 될까, 라고 말을 꺼내지 뭔가.
세상이란 이런 거야. 나는 당황해서 그만두는 편이 좋겠다고 했네. 게다가 그 녀석은 폐결핵
이었다고 말했는데도 사키코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네. 세상에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아가씨
도 있더라구. 이것도 인연이라고 하는 것인가?”
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한 무라이 부부의 희망이 없는 결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 유카코의 전화가 게이조에게는 무라이의 결혼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라이의 결혼식이 10일 후로 다가와 있었다. 결혼 축하 선물을 가지고 나쓰에는 무라이의
집을 방문했다. 무라이의 집은 병원 뒤에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 찾아가겠다고 미리 알렸기
때문에 무라이는 집에 있었다.
요즘에는 흔하지 않은 격자 미닫이를 열고 기모노를 입은 모습으로 무라이가 나왔다.
“어서 오세요.”
무라이는 마루에 우뚝 선 채로 나쓰에를 내려다보았다. 신장 위에 보랏빛의 라일락이 가득
꽂혀 있었다.
“예쁘군요.”
나쓰에는 미소를 지으면서 라일락을 바라보았다.
“들어오시지 않겠습니까?”
무라이는 뒷걸음질치듯이 하면서 오른쪽 미닫이 문을 열었다. 다다미 여섯 장 크기의 전통
일본식 방이었다. 그 방에도 라일락이 꽃꽂이 되어 있었다.
‘누가 꽃꽂이를 했을까?’
약혼자인 사키코가 삿포로에서 놀러 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무척 깨끗하군요.”
하고 나쓰에는 말했다.
“옆집 마쓰다 선생님과 함께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집안일을 시키고 있어요.”
“어머, 그것 잘되었군요. 식사 준비도 해주세요?”
“아침, 점심, 저녁 세끼 다 병원에서 먹습니다.”
무라이는 왠지 얼굴색이 안좋았다.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나쓰에는 보자기에서 염색된 끈이 달린 종이 봉투를 꺼내서 객실의 책상 위에 놓았다.
“여러 가지로 애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라이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할 수 없이 머리를 숙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건강은 어떻습니까?”
“너무 건강해서 걱정이지요.”
무라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결혼을 코앞에 둔 사람 같지 않았다. 라일락이 아름답게 꽂혀
져 있다고는 해도, 묘하게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분위기였다. 도코노마에는 족자도 걸려 있지
않았다. 방의 벽이나 기둥에도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무라이는 나쓰에를 보지도 않았
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기로 했어요?”
“네?”
무라이는 얼굴을 들었다. 지금까지 무라이는 나쓰에에 대하여 이처럼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
던 적이 없었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세요?”
“아아, 여행 같은 거 피곤하기만 하니까요 그만두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뭐, 삿포로에 양쪽
집이 다 있으니 집에 가서 잠깐 얼굴만 내밀까 해요.”
생기가 없는 말투였다. 무라이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음산해 보일 정도의 어두
운 눈이었다. 나쓰에는 결혼을 축하하러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매일 게이조의 방으로 신문을 가져 오는 유카코가 그날 밤 전화한 이후로는 보이지 않았다.
“원장님의 아이를 낳고 싶어요.”
라고 한 전화가 마음에 걸려서 게이조는 유카코하고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게이조는 좀처럼 사무실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사무장이 일하고 있는 방에 원장인 자기가
얼굴을 내미는 것은 삼가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용무가 있을 때는 원내
전화로도 충분했다. 용무가 있는 사람은 원장실을 방문했다. 그러나 오늘 오랫만에 사무실을
들여다볼 마음이 된 것은 요즘 유카코를 복도에서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
이었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으니까, 지난번 밤 늦게 한 전화도 있어서 걱정이 되었다.
점심 후에 잠깐 쉬는 시간이었다. 유카코도 사무장도 사무실에는 없었다. 게이조는 묶어 놓
은 신문을 책상 위에 놓고 뭔가를 조사하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의 형태
가 ‘ㄱ’자로 되어 있어서, 손님이 오면 사용하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신문을 놓아둔 곳
은 유카코를 비롯한 직원들의 좌석에서는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게이조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쓰사키는요?”
무라이의 목소리였다. 게이조가 있는 곳에서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유카코의 옆자리에서 일하는 여자 사무원의 목소리였다.
“안나온지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군.”
“혹시 몸살이 난 것은 아닐까요?”
“결근계는 냈던가요?”
“내지 않았습니다. 하숙집 아주머니로부터 결근한다는 전화만 있었습니다.”
“그래?”
무라이가 나가는 기척이 났다.
“무라이 선생하고 유카코 씨 하고는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요? 유카코가 출근하지 않는 일
로 계속해서 3일 동안이나 사무실에 찾아오니 말이야. 좋은 사이여서 그러나?”
게이조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또 한 사람의 사무원이 말했다.
“모르겠어.”
“정말 이상해. 가끔 복도에서 둘이 뭔가 속닥이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
“무라이 선생의 결혼식이 가까워지니까 유카코 씨가 안나오는 것 아냐?”
“…….”
유카코 옆자리의 사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카코 씨는 왠지 묘한 기분이 들어. 원장님에 관한 일도 저렇게…….”
“그런 말씀 마세요. 유카코가 누구를 좋아했든 상관 없잖아요.”
누군가 쏘아 붙이는 듯한 어조였다.
“하지만 말이야…….”
“그만 두세요. 유카코가 있는 곳에서 말한다면 몰라도 뒤에서 수군대는 것은 나빠요.”
게이조는 손님용 출입문으로 살짝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유카코가 감기에 걸려서 쉬고 있
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무라이의 결혼식도 지나갔다. 아카시아의 달콤한 향기가 바람에 날려서 원장실로 들어왔다.
‘드디어 무라이도 결혼했군.’
사키코라는 처녀는 의외로 지적이고, 시원한 눈동자를 가진 여성이었다. 게이조는 무라이가
선택했다고 해도 그 정도의 여성을 만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했
다.
‘신부에게 잘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게이조는 그렇게 생각하며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무라이가 결혼했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돼. 신혼 초에는 당분간 얌전할지도 모르
지만, 생각해 보면 나쓰에로부터 깨끗이 떨어져 나갔다고는 볼 수 없잖아?’
무라이는 결혼에 대한 아무런 결의도 보이고 있지 않았다. 결혼 피로연 때 무라이는 축사를
받으면서도 흰 카네이션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손장난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례를 맡은 게이조는 무라이의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뭔가 못 견뎌 하는 무라이의 마음
을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큰 일 났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사무장이 원장실로 급히 들어왔다.
“무슨 일이오?”
게이조는 사무장에게 의자를 권했다.
“사실은 마쓰사키에 관한 일입니다만…….”
게이조는 가슴이 덜컥했다.
“요즘 계속 출근을 하지 않아 어제 집에 가 보았습니다.”
“그래, 아파서 누워 있던가요?”
“아니요, 아팠다면 다행이게요. 하숙집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병원에서 전화가 오면 몸이
아프다고 말해 주라고 하고 여행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여행을요?”
“그렇습니다. 한 달 정도 본토에 가 있을 예정이니 병원의 누군가가 찾아오면 적당히 말해
주라고, 이렇게 말하고 나갔다고 하던데요.”
“그럼 그동안에 돌아오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노파심에 걱정이 되어서 방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
“무슨 일이냐고 하숙집 아주머니가 걱정을 하기에 결근계라도 혹시 써 놓았을까 해서 찾아
보겠다며 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래서?”
“처녀 혼자 사는 방에 들어가는 것이 꺼림직했지만…… 방에는 작은 화장대를 얹어 놓은
조그마한 책상이 하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경대 서랍을 열었
더니 거기에도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씻은 듯이 깨끗했습니다.”
“그리고…….”
“책상 서랍도 텅 비어 있었습니다. 놀랐어요. 벽장을 열어 보았습니다. 벽장은 한 칸 정도
크기의 벽장이었습니다. 벽장의 상단에는 침구가 단정히 개어져 있고 하단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옷가지는 두 개의 버들가지 고리짝에 들어있을 뿐이었고 조그마한 농 하
나도 없었습니다. 좀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편지나 메모 같은 것도 없었습니까?”
“실은요, 나도 그것이 걱정 되어 찾아 보았는데, 퇴직원도, 써놓고 간 편지도 없었어요.”
“그렇다면 한 달 동안의 여행이 끝나면 돌아오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단지 그 방이 너무 깨끗한 것이 맘에 걸려요.”
사무장은 물끄러미 게이조를 보았다. 뭔가를 탐색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원장님.”
“뭡니까?”
“마쓰사키는 정말로 돌아올까요?”
“왜 내게 그런 걸 묻지요? 돌아오겠지요.”
게이조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사무장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원장님은 그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무장은 호주머니에서 꺼낸 화장지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물었다.
“뭔가…… 잘 알 수 없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잘 모르십니까?”
“어떤 처녀입니까?”
게이조가 반문했다.
“나쁜 아이는 아니예요. 내가 아들이 있다면 며느리를 삼고 싶을 정도로 상냥한 처녀예
요.”
“그래요?”
“부모를 빨리 잃은 탓인지는 몰라도 묘하게 사람을 잘 따르는 데가 있어요. 오빠하고 둘이
생활을 하다가, 그 오빠도 결혼하고 이제는 혼자서 생활하기 때문에 매우 외로운 처지에 놓
여 있었어요.”
게이조는 사무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카코의 전화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누구에게나 자기의 몸을 비벼대는 습관이 있어요.”
“그래, 그래. 나도 그 점은 느끼고 있었어요.”
“여하튼 빨리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안되겠습니다.”
사무장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병원을 나오자 게이조는 오랫만에 바로 가까이의 이시가리 강 제방에 섰다. 저녁놀이 비치
는 이시가리 강은 무척 아름다웠다. 푸른색의 활 모양을 그린 아사히 다리 저쪽의 산맥이
연한 보랏빛의 선을 또렷이 보여주고 있었다. 재방 아래의 공원에는 벌써 가로등이 켜져 있
었다. 연못에 떠 있는 많은 보트를 바라보면서 게이조는 문득 유카코가 가련하게 생각되었
다.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에 그녀는 무엇에 상처를 입고 여행을 떠난 것일까?’
하고 게이조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손님이 오셨어요.”
요코가 부엌으로 나와 나쓰에를 불렀다.
“누구냐?”
나쓰에는 저녁 설거지를 막 끝낸 참이었다.
“무라이 선생이에요.”
요코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어요.”
하고 입을 삐쭉해 보였다.
“무라이 선생이라구?”
나쓰에는 잠시 옷깃을 여미고서 현관으로 나갔다. 무라이가 문에 기대듯이 하고 서 있었다.
“어머, 잘 오셨습니다.”
신부인 사키코하고 인사하러 오고 나서, 아직 10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무라이는 아직도 문에 기대 선 채로 있었다.
“어서 올라오세요.”
“술이 좀 취했습니다. 괜찮습니까, 사모님?”
그는 나쓰에 씨라 말하지 않았다. 어두운 목소리였다.
“어, 어서 올라오세요.”
무라이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요코, 아버지를 오시라고 해.”
나쓰에는 그렇게 말하고 응접실 문을 열었다. 무라이는 지금까지 한 번도 취하여 찾아 온
적은 없었다. 이렇게 술이 취해서 뭣 때문에 방문했는지, 나쓰에는 어쩐지 기분이 조금 나빴
다. 무라이의 눈은 핏발이 서 있고 흐려 있었다. 흔들흔들 비틀거리면서 무라이는 구두를 벗
었다.
‘사키코 씨하고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을까?’
나쓰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의자를 권했다.
“야아, 어서 오세요.”
무늬가 많은 명주옷을 입은 게이조가 들어왔다.
“원장님!”
무라이는 고함치듯이 한 마디 그렇게 말하고, 게이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쓰에가 차를
준비하기 위하여 방을 나가려고 했을 때,
“사모님도 여기에 계셔 주세요.”
하고 소리치듯이 말했다.
“무슨 일이오? 상당히 취해 있는 것 같군.”
게이조가 말하자,
“취하지 않았어요. 취하지는…….”
무라이는 그렇게 말하고 이마에 늘어진 머리를 난폭하게 쓸어 넘겼다. 게이조는 일찍이 이
렇게까지 취한 무라이를 본 적이 없었다. 무라이는 비교적 술버릇이 좋은 편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게이조와 나쓰에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취하지는 않았어요, 취하지는…….”
무라이는 다시 그렇게 말하고 테이블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가 부딪히지 않았나 할 정도로
급히 엎드렸다. 게이조도 나쓰에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채로 무라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무라이가 저렇게 거칠어졌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갑자기 무라이가 얼굴을 들었다.
“원장님!”
“…….”
“원장님!”
무라이는 절규하듯이 거듭 게이조를 불렀다. 무라이는 노려보듯이 게이조를 주시하고, 또 계
속해서 나쓰에를 천천히 보고 있었다. 나쓰에는 왠지 자기와 관계가 있는 말을 꺼낼 것 같
은 느낌이 들어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사모님, 앉아 있어 주세요.”
“물을 가져 오겠어요.”
나쓰에는 상냥하게 말했다.
“아아, 미안해요.”
무라이는 의외로 조용하게 말했다. 나쓰에는 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무라이는 머리를 조금
숙이고서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목에 있는 성대 뼈가 크게 움직였다.
“술은 없습니까?”
무라이는 나쓰에를 쳐다보았다. 나쓰에는 곤혹스러운 듯이 게이조를 보았다.
“공교롭게도 나는 별로 술을 마시지 않아서 사다 놓은 것이 없는데…….”
하고 게이조가 말하자,
“그렇습니다. 원장님은 술도 잘 마시지 않고, 다른 여자와 가까이 지내시지도 않으시죠, 훌
륭한 사람이죠. 흥, 성인인가?”
하고 무라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게이조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담뱃불을 재떨이에 강하게 부
벼 껐다.
“엄마.”
하고 요코가 문을 열었다.
“아이고, 예쁜 따님이시군요. 이리 좀 와 보렴.”
무라이가 손짓으로 요코를 불렀다.
“선생님, 술 드셨어요?”
요코가 옆으로 와서 무라이에게 말했다.
“그래, 마셨어.”
“선생님, 술이 싫으시죠?”
“싫어하지 않으니까 마시지.”
“그런데 기쁜 것 같지 않아요.”
무라이는 요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도, 엄마도 닮아 있지 않아.”
무라이가 말했다.
“요코, 무슨 용무가 있니?”
나쓰에가 책망하는 어조로 요코에게 말했다.
“아,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하러 왔어요.”
요코는 그렇게 말하고 무라이의 발 밑에 떨어져 있는 흰 손수건을 주워 무라이에게 그것을
건네주고는 생긋 웃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요코가 나가자, 무라이는 기세가 꺾이는 것같이 침묵해 버렸다. 게이조도 나쓰에도 무슨 말
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숲쪽에서 날카로운 새 울음 소리가 들렸다.
“이거 미안해서…….”
무라이가 어물거렸다.
“사키코 씨가 기다리겠어요.”
나쓰에의 말에 무라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장님! 마쓰사키가 죽었어요”
“뭐요?”
무라이는 눈을 감은 채로 되풀이했다.
“마쓰사키가 죽었어요.”
“마쓰사키가 죽었다니, 정말입니까?”
게이조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나쓰에가 의아한 듯이 게이조와 무라이를 번갈아 보
았다.
“죽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무라이는 고개를 숙였다.
“어디에서, 언제 죽었습니까?”
“언제인가는 알지 못합니다. 유서도 없었으니까 말이에요.”
“누구한테서 들었어요?”
게이조는 조금 침착을 되찾았다.
“아무한테도 듣지 않았어요.”
“뭐야, 장난하나?”
게이조는 겨우 안심했다.
“장난이 아니예요. 죽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무라이는 끈질기게 말했다.
“뭔가 죽어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게이조는 무라이를 상대하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되어졌다.
“사모님.”
무라이는 게이조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나쓰에를 불렀다.
“왜 그러세요?”
“마쓰사키 유카코라는 사람, 병원의 사무원이지요. 유카코는 원장님을 사랑하고 있었는
데…….”
“네?”
나쓰에는 게이조를 보았다.
“쓰지구치를 말이에요?”
나쓰에는 미소지었다.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군.”
게이조는 상대하지 않았다. 아무리 취해 있다고 해도, 무라이가 무엇 때문에 그런 시시한 말
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장님, 말도 안된다구요? 그렇게 생각하면 마쓰사키가 너무 가엾어요. 오늘은 무엇이든지
분명히 해야겠어요. 사모님, 사모님도 유카코를 가엽다고 생각해 줄 의무가 있어요.”
“무라이 선생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알게 해 드리지요. 잘 들으세요.”
무라이는 윗옷을 벗어 의자등에 걸쳤다.
“무라이 군, 오늘은 이만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 이야기는 내일 병원에서 듣기
로 하고…….”
게이조는 불쾌했다.
“아니, 원장님,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야기를 할 작정으로 왔어요.”
“…….”
“유카코를 위해서 들어 주세요”
“그러나…… 죽었다는 것은 거짓말이지?”
“아니, 죽었을 거예요. 그 아가씨의 성격으로 보아 죽은 게 틀림없어요. 유카코는 바보 같
은 아가씨예요.”
무라이는 눈을 치뜨면서 게이조를 봤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가 생각했더니 순식간에
눈물이 솟아 나왔다. 울지 않으려고 무라이는 뜰 수 있을 만큼 눈을 크게 떴다. 무라이는 소
매로 눈물을 닦았다.
“유카코라는 사람은 묘한 여자이지요. 내가 도야에 가기 전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의 집을
찾아와서 병원장님의 부인을 좋아하십니까, 하고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나쓰에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게이조는 표정이 굳었다. 무라이는 계속해서 말했
다.
“나는…… 좋아해요. 내가 누구를 좋아하건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마쓰사키
는, 좋아하는 것은 상관없다. 상관은 없지만, 겉으로 표현하는 짓은 그만 두라고 말했어요.”
게이조는 조금 초조해졌다.
“표현하지 말라고 할 권리가 당신에게 있는가 하고 마쓰사키에게 말하자 그녀는 있다고 말
했습니다. 실은 원장 선생님을 좋아한다면서, 그러므로 그녀는 원장 선생님이 불행하게 되는
일은 저지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어요. 정색을 하고 말이에요.”
나쓰에는 게이조를 보았다.
“자네, 그렇게…… 나는 마쓰사키 유카코의 그러한 마음을 모르고 있었네.”
게이조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오늘은 아무 말 말고 들어 주세요. 마쓰사키의 말로는 처음에 근무하던 날 사무장을 따라
서 원장실에 인사하러 갔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유카코가 자기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
다고 말했더니, 원장님께서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생이 많았겠군이라며 가엾다고
말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급료를 3할 올려 주도록 사무장에게 말했다고 해요. 사무장이 다
른 직원들과의 균형 문제도 있고 어쩌고 하며 싫은 내색을 하자 한쪽 부모나 양친이 있으
면, 적어도 사는 곳은 걱정이 없다. 이 사람은 사는 곳부터 먹는 것까지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거 수당인가 뭔가의 명목으로 급료를 올려 주라고 원장 선생님이 말씀해 주었다고
하던데요.”
무라이는 그렇게 말하고, 게이조의 반응을 보듯이 얼굴을 봤다. 그 말을 들어보니,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지만 게이조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8∼9년 전의 일이었다.
“오빠와 단둘이서 친척도 없이 사할린에서 피난온 그 아이에게는 몹시 고마웠던 것 같아
요. 그 사실을 나에게 이야기할 때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원장님처럼 온화하고 훌륭
한 사람은 없다고, 처음부터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유카코는 여자인 자신도 좋아하는
척 한 번 하지 않고, 참고 있는데 제가 원장 선생님의 부인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니까, 좋
아한다는 것은 도리가 없다지만 원장 선생님을 위해서 냉정하게 행동해 달라고 나에게 말했
던 것입니다. 내가 도야에 가기 반 년 정도 전이었습니다.”
무라이의 얼굴이 술이 깨서 그런지 창백해졌다.
“그날 밤, 나도 약간 정신이 나간 것 같았습니다. 나는 마쓰사키가 원장님을 사랑하고 있다
고 기가 죽지도 않고 말하는 것을 보고 묘하게 얄미운 것 같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것 같기
도 한 기분이 들었어요.”
무라이는 크게 한숨을 쉬고 말을 계속했다. 게이조 부부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 그러면 마쓰사키는 원장님하고 잘해 보아라. 나는 사모님하고 사이좋게 지내야겠다
고 말해 주었어요. 뭔가 그녀를 구박하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마쓰사키는 화를 내고, 절대
로 그러한 일은 할 수 없다. 원장님은 사모님을 사랑하고 있다. 만약 원장님을 불행하게 한
다면 생명을 걸고라도 저지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생명을 걸고 사모님을 좋아하
겠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원장님, 화내지 마세요. 나는 얼마만큼 원장님을 미워했는지 모릅
니다. 원장님이 죽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는지 모릅니다. 됐다! 원장님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찰나 잠이 깨어서, 몇 번이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게이조는 저도 모르게 나쓰에를 보았다. 나쓰에는 눈을 내리깔고 상기한 얼굴로 앉아 있었
다. 게이조는 나쓰에의 눈빛을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젊었습니다. 사모님을 얻기 위해서라면, 원장님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유카코에게 당신이 아무리 원장님의 행복을 위해서 목숨을 건
다고 해도 안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마쓰사키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일어섰습
니다. 그때 그녀는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습니다. 말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만…… 나
도 그때는 젊었을 때라 그 눈을 보자, 유카코를 정복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버렸습니
다. 그래서 이제는 사모님의 뒤만을 쫓아다니지 않는다고 저도 모르게 말해 버렸습니다. 유
카코는 믿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당신이 원장님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면, 당신의 몸을 나에게 달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남자라는 것
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여자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마쓰사키
유카코가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손을 잡고 원장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목숨
도 필요없다고 했던 것은 말뿐이 아닌가 하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나쁜놈이에요, 저는. 그것
이 유카코의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이후 언제라도 내가 자유롭게 상대할 수 있
었으니까요.”
게이조는 결국은 마쓰사키 유카코도 무라이를 사랑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유카코가 단
순히 게이조를 위해서 무라이의 뜻대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꾸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
러나 유카코가 말한 것은 아니고 무라이가 말한 것이기 때문에 진실로도 생각되었다. 나쓰
에는 조금 전과는 달리 돌변한 몹시 차가운 눈초리로 무라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게이조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마쓰사키는 너무나도 나를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원장님에 대해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동경과 사랑을 갖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내가 도야에서 돌아
온 것을 알고 너무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어지간히도 병원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했습니다
만, 원장님의 얼굴을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어서, 그만 두는 일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도야에서 돌아와서 나는 마쓰사키를 상당히 쫓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녀도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쉽게 잡히지 않았어요. 나의 결혼 이야기를 듣
자 그녀는 기뻐했어요. 축하 선물을 가지고 왔더군요. 이 결혼을 가장 기뻐하고 있는 것이
그녀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라일락을 꽃꽂이해 주었습니다. 그래, 그래. 사모님께서 축하 선
물을 가지고 왔던 바로 그날입니다. 원장님의 아이를 갖는 것, 원장님의 아이를 낳는 것이
자기의 소원이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원장님을 맞대면하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면서 전화
를 걸었습니다. 그랬는데 원장님은 바보 같은 말 하지 마라,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
그녀는 얼마나 모멸을 당했는지 죽어 버리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라일락을 꽃꽂이했어요.
나는 그러한 이야기를 한 유카코에게 점차로 마음이 끌려서, 다시 실수를 범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나쓰에는 축하 선물을 가지고 갔던 날, 그 이상하게 피곤해 보이고 어두운 표정의 무라이의
얼굴이 생각났다. 나쓰에는 더 이상 무라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 모습이 유카코
라는 여자를 범한 다음 순간의 얼굴이었던 것인가 하고 생각하자, 말할 수 없이 무라이가
싫었다.
게이조는 유카코의 전화를 회상하고 있었다.
“마쓰사키 유카코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이전의 익숙해진 두 사람의 관계가 있으니까
별 어려움 없이 관계를 맺을 수 있었어요. 유카코는 이제 원장님도 볼 수 없다고 말하고 돌
아갔습니다. 다음 날 병원에 나가서 책상 속을 깨끗이 치웠던 것이지요. 그것을 마지막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무라이는 말이 끝나자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쓰사키 유카코하고 결혼했으면 좋았을텐데…….”
게이조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원장님!”
무라이는 게이조를 노려보았다.
“원장님은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실은 저도 한 번은
결혼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쌀쌀맞게 싫다고 했어요. 원장님은 유카코가 결심하고 전화
를 걸었는데도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죽었습니다. 원장님처럼 목석
같은 남자는 남자가 아니예요. 그녀의 기분이 어떠했는지를 정말 알지 못하셨습니까? 나도
가해자이지만, 원장님은 더 심한 가해자입니다. 아니, 내가 더 나쁠까요? 여하튼 유카코는
이제 돌아오지 않아요. 그녀는 죽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바보 같은 여자예요.”
무라이는 일어서서 휘청거리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나를 싫어했던 여자는 유카코뿐이었어요.”
제25장 겨 울 날
제25장
겨 울 날
나쓰에는 요코가 전보다도 더 싫어졌다.
“요코.”
하고 매일 아침 요코의 친구들이 요코를 부르는 것도 싫었다.
“요코는?”
하고 도루는 밖에서 돌아오자 마자 맨 먼저 그렇게 물었다.
그러한 일이 나쓰에를 속태우게 했다.
요코는 꾸지람 들을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꾸짖을 일이 없다는 것이 나쓰에에게는 더 화
가 났다.
이러한 요코에 대한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나쓰에는 알 수가 없었다.
취한 무라이의 그날 밤의 고백이 나쓰에를 우울하게 했다. 무라이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을
터였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를 희롱하는 남자여서는 안되었다. 자기만을 사랑
해야 했다.
무라이의 고백은 나쓰에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러한 무라이에 대한 미움이나
분노가, 어느 사이엔가 형태가 변해서 요코에게 향하고 있었던 것을 나쓰에 자신은 알아차
리지 못했다.
나쓰에의 요코에 대한 차가움은 게이조도 느낄 수 있었다. 점차 게이조는 요코에게 줄 초콜
릿이나 책을 사가지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한 것이 또 나쓰에의 감정을 자극했다.
‘좋다. 요코를 결코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두지 않을 거야.’
‘요코가 누구의 아이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
까?’
마쓰사키 유카코에 관한 일도 전혀 게이조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게이조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전화를 건 이상 전혀 아무런 교섭도 없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
었다.
나쓰에는 피임 수술 때문에 이미 아이를 낳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더욱 유카
코의 그 말이 언제까지나 마음에 걸리고, 그것이 상처가 되어 점차 곪아 갔다.
결국 무라이의 고백에 나쓰에는 이중 삼중으로 상처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게이조는 어느 사이엔가 유카코에 관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병원 현관에 들어오면 어느새 창너머로 사무실 안을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매일 아침, ‘혹시나’하는 희망을 잃게 되었다. 유카코의 책상에는 이미 다른 여사
무원이 앉아 있었다.
유카코가 없어지고 나서 반 년이 지났어도 게이조는 허무한 기대를 걸고 사무실 안을 바라
보는 것이었다.
유카코가 느닷없이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쓰에와 밤에 사랑을 할 때도 무라이에게 능욕을 당하고 있는 유카코의 모습이 게이조의
눈에 떠오를 때도 있었다.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유카코가 게이조의 가슴에 살아 온 것 같았다.
드디어 유카코의 행방을 모르는 채로 해가 저물고 요코와 도루의 3학기가 시작되었다.
“어머니, 급식비 주세요.”
요코는 오늘 아침, 벌써 세 번째의 재촉을 했다.
“급식비? 조금 기다려라.”
그때마다 나쓰에는 알았다는 듯이 대답을 하고 바쁜 듯이 부엌으로 나갔다.
요코는 그린색의 오버 위에 검은 가방을 메고 벽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쓰에는 또다시 부엌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요코는 다시 시계를 쳐다 보았다. 벌써 시간이 빠듯했다.
“엄마, 학교에 늦겠어요.”
“그래, 빨리 가거라.”
“급식비는요?”
“어머, 그렇구나. 오늘은 조금 바쁘구나. 내일 가지고 가거라.”
나쓰에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요코는 아무 말 없이 집을 나왔다. 요코는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훌쩍거리기는 싫었다.
언젠가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땀과 눈물은 남을 위해서 흘리는 것이에요.”
라고 했던 말이 요코는 좋았다. 어쩐지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울고 싶어지면 요코
는 허둥대며 이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생긋하고 웃어 보았다. 웃는 얼굴이 되면 마음이 조
금 안정되어서 기분이 나아졌다.
‘ 참 이상해.’
하고 요코는 생각했다.
지금도 요코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울고 싶어졌다.
‘요까짓것!’
하고 요코는 생각했다.
요코도 4월에는 4학년이 된다.
나쓰에의 냉정함이 매일 여러 가지 형태로 몸에 스며들었다.
‘어머니는 어디가 아픈 걸까?’
요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 치더라도 왜 급식비를 주지 않는 것일까?’
요코는 알 수가 없었다. 나쓰에는 도루에게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
“도루, 오늘은 학급비를 갖고 가는 날이야. 잊지 말아라.”
그러나 요코에게 2~3일을 재촉해도 돈을 주지 않았다.
‘내일도 틀림없이 주지 않을 거야. 좀 기다리고 있거라, 라고 말할 거야.’
그날, 학교가 끝나자 요코는 다쓰코의 집을 향해서 걷고 있었다.
버스 탈 돈이 없어서 걷기로 했다.
지금까지 요코는 시내까지 걸어서 간 적은 없었다.
다쓰코의 집까지는 4Km 정도 되었다. 다리 위까지 걸어갔더니 사무라이가 사는 동네가 아
래로 보이고, 눈이 쌓여서 난간이 낮게 보였다.
일학년 짜리로 보이는 남자 아이 4~5명이 큰 고드름을 가지고 칼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옆
에서 오버도 입지 않은 다섯 살 정도의 여자 아이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고드름이 부딪
쳐서 휘날렸다. 얼음조각이 여자아이의 볼에 맞아 볼이 새빨개진 여자아이는 아프지도 않은
지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요코는 난간에 기대어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아무도 놀아 주지 않아도 웃고 있는 여자
아이가 좋아졌다.
요코는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선생님이 어느 때보다도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언제나 돈을 잊고 오는군. 숙제는 잊지 않는데 왜 돈은 잊고 오는 거니?”
“어머니는 재촉해도 주지 않아요.”
요코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요코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 말 않고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꾸지람을 들으면서 다쓰코의
집으로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다. 학교에서 다쓰코의 집까지는 거리가 멀었다. 말이 끄는 썰매가 지나갔던 눈
길이 햇빛에 반들반들 빛났다.
걸어도 걸어도 다쓰코의 집은 멀었다. 걷는 동안에 땀이 났다. 버스 정류장에 있는 옥색의
벤치가 눈에 파묻혀 벤치의 등받이가 겨우 보일 정도였다
버스가 몇 대나 요코를 지나쳐 갔다. 눈을 치운 다쓰코의 집 앞에 왔을 때, 요코는 겨우 안
심했다.
현관에는 털이 달린 붉은 방한 짚신이랑 어린아이의 장화가 정돈되어 있었다.
요코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연습장에는 가지 않고 거실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여느 때와는
달리 아무도 와 있지 않았다.
요코는 갑자기 배고픔을 느꼈다.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급식이 없었다.
요코는 오버를 벗고 스토브 옆에 누웠다. 피곤한 요코는 어느 사이엔가 잠이 들었다.
사람들이 웃는 소리에 잠을 깨자 다쓰코가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거실에는
대 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다쓰코는 요코를 응시한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요코는 다쓰코의 시선에 수줍어했다.
“야, 일어났구나.”
고등학교 국어 선생인 이치가와가 말을 걸었다. 다쓰코는,
“잘 잤니?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으니까 더 자도 돼.”
하며 웃었다.
“일어나겠어요.”
요코는 다쓰코의 웃는 얼굴을 보자 기뻤다.
“아직 점심 안 먹었지?”
다쓰코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3시가 다 되었다. 다쓰코는 준비해 놓았던 밥상을 요코의 앞에
놓았다.
요코가 좋아하는 콩자반이랑 달걀 프라이, 연어조림 등이 놓여 있었다.
다쓰코는 요코의 기쁜 듯한 얼굴을 보고 싱긋 웃어 주었다.
“미군이 점령 중에는 전차에까지 점령국 일본이라고 써 있었대. 알고 있었나?”
갑자기 큰소리로 말한 사람은 아사히카와에서 이름이 조금 알려져 있는 가수 이자와였다.
“뭐야, 점령국 일본?”
“일본이여, 너는 나에게 체포된 사람이야, 라는 말이야.”
“흥, 점령되었다는 것인가?”
“점령을 당한 식민지 일본을 말하는 거야.”
가수의 영탄적인 말투는 모든 사람의 웃음을 자아냈다.
“웃는 놈이 누구냐?”
“하지만 아무리 몰락하였다고 해도 지금은 일본이 독립국이잖아.”
시인 아라이가 장기를 두고 있다가 얼굴을 들었다.
“그렇지만 아라이 씨, 어쨌든 속국이 아니오?”
가수가 말했다.
“그래, 원숭이 재주부리는 것과 같은 거지. 끈을 획 하고 잡아당기면 주인 어깨에 올라타고
어디라도 끌려가 버리니까.”
웬일인지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코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요코, 아저씨들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니?”
이치가와가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알 수 있을 것 같애요.”
“허, 잘은 모르지만 알 수가 있다니…… 저 말은 다른 나라에 의지해서 외국이 하라는 대
로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야. 사람도 마찬가지란다. 너무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야.”
“다쓰코 씨 집의 밥을 너무 축내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
모두가 웃었다. 언제나 다쓰코의 집에서 먹고 있는 패거리였다.
“다쓰코 씨는 다른 나라 사람이고, 우리들은 일본 사람이라는 말인가? 이건 이야기가 좀
다른데?”
다쓰코는 생긋생긋 웃으면서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요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말이야, 부자라도 대학에 갈 돈은 자기가 번다고
해.”
“영국에서도 그렇대요. 대학교를 가든 장가를 가든 부모에게 의지해서 살아갈려는 사람은
일본 사람들뿐이야.”
그때 요코가 물었다.
“미국의 소학생도 돈을 벌어요?”
“소학생은 부모가 돈을 내는 것이 당연하지. 의무교육이니까.”
이자와가 대답했다.
“하지만 부모가 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요?”
“부모가 낼 수 없을 때는 나라에서 비용을 대준단다. 부모가 돈을 낼 수 있는데도 내지 않
으면 벌금을 내야겠지.”
“하지만 소학교 학생인데도 돈을 벌러 다니는 아이가 있어요. 우유배달이나 신문배달을 하
면서…….”
다쓰코는 요코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듣고서 말했다.
“요코, 식사했으면 돌아가거라.”
“…….”
요코는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듯이 다쓰코를 보았다.
“아줌마가 바래다 줄까?”
다쓰코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다쓰코가 이름붙인 ‘거실의 패거리’의 화제는 그럭저럭 문학 쪽으로 옮겨간 것 같았다.
이자와가 ‘클로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 혼자 가겠어요.”
요코도 가만히 말했다.
“버스 요금은 있니?”
“없어요.”
“그럼 올 때는 어떻게 왔지?”
“걸어서 왔어요.”
“걸어서?”
다쓰코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커졌다.
“뭐야?”
다쓰코 옆에 있던 국어선생이 다쓰코의 소리에 놀라서 물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다쓰코는 벌떡 일어서서 거실을 나왔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서 자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요코도 따라서 들어갔다.
“저는 혼자서 돌아갈 수 있어요.”
요코의 말에 다쓰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옷장 서랍에서 검은 바탕에 흰 줄무늬의 하오리를 꺼냈다.
“저, 아줌마, 얼마만큼 일하면 3백 80엔을 받을 수 있어요?”
다쓰코는 하오리를 입다 멈추었다.
“왜 아줌마한테 달라는 말을 하지 않니?”
“하지만 아줌마는 남인걸요.”
왜 나쓰에에게 돈을 받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다쓰코는 물을 수 없었다. 차비가 없어서 걸어
온 요코에게 사정이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요코는 나쓰에에 관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안주니까 아줌마가 주세요.”
하고 아이답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요코를 보며 다쓰코는 화가 나면서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궁리했다.
“그럼 말이야, 연습장을 혼자서 청소해다오.”
“그럼 3백 80엔을 주실 거예요?”
요코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쓰코는 요코의 청소하는 모습을, 양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로 꼼짝도 않고 주시하고 있
었다.
연습장은 다다미 20장 크기의 방과 12장 정도의 무대로 되어 있었다. 20장 크기의 다다미방
을 요코는 정성들여 쓸었다.
빗자루질하는 것은 3살 때부터 익힌 요코였지만, 빗자루질하는 방법이 여간 정성스럽지 않
았다. 빗자루의 끝을 치켜 올리지 않고 누르듯이 쓸고 있었다.
빗자루질이 끝나자 무대에 마른 걸레질을 했다.
요코는 구석 쪽에서부터 꽉꽉 힘을 다하여 닦기 시작했다.
마루에 무릎을 대지 않고 닦는 그 모습에는, 데리고 있는 제자들보다 더한 무엇인가가 있었
다.
몇 번인가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무대를 닦는 자세를, 다쓰코는 제자의 춤추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엄숙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요코는 다쓰코의 눈을 의식하지 않
고 있었다. 지금은 다만 마루를 닦는 것이 즐거울 뿐이었다. 잘 닦여진 판자가 미끈미끈해져
서 기분이 좋았다.
그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다쓰코는 감동을 받았다.
‘앞으로 이놈은 큰 일을 해낼 수 있을 거야.’
청소가 끝나자 요코는 다섯 장의 걸레를 세 번이나 빨았다.
쓰레받기도 깨끗이 씻고, 비도 비눗물로 씻어 물기를 없앴다.
“요코는 언제나 빗자루를 씻니?”
속으로 경탄하면서 다쓰코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었다.
“언제나는 아니지만 더러워지면 빨아요.”
다쓰코는 5백 엔이 아니라 천 엔이라도 주고 싶을 정도로 요코의 일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
었다.
그러나 꼭 3백 80엔만 주었다.
“집에 돌아가면 어두워지니까 데려다 줄게.”
시계는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게다 밑에서 눈밟는 소리가 녹말을 밟는 것같이 났다. 지독히 추운 날씨라는
표시였다.
다쓰코는 검은 방한 코트의 어깨를 움츠리듯이 하고 쓰지구치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 고마워. 바래다 주기까지 하고.”
나쓰에는 앞치마를 입은 채로 마중을 나왔다.
“오늘밤은 얼음이 얼 것 같군 눈밟는 소리가 뽀드득 하고 나는 걸 보면.”
“언제나 폐를 끼쳐서 미안해.”
나쓰에는 거실로 들어가자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요코가 쾌활하게 인사하는 것을 다쓰코는 힐끗 보고 웃었다.
“요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른 데 들러서는 안돼.”
나쓰에의 말은 상냥했다.
“네.”
요코는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요코가 뭣 때문에 우리집에 왔다고 생각해?”
나쓰에는 다쓰코의 옆모습을 살짝 바라보면서 물었다.
“글쎄, 모르겠는걸.”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요코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어. 3백 80엔이 필요하다고.”
“그래?”
나쓰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주인어른과 도루는 어디에 있어?”
“2층에 있어. 도루는 내년에 고등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에 바빠.”
나쓰에는,
“고등학교를 가고 싶다는 사람은 전부 다닐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좋을 텐데.”
하고 화제를 딴 데로 돌려 버렸다.
“3백 80엔 정도, 주면 되지 않아?”
다쓰코는 본화제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어머, 주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는데.”
확실히 나쓰에는 주지 않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좀, 기다려라’던가, ‘오늘은 바쁘니
까’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나쓰에다운 발뺌이었다.
“여하튼 나쓰에, 그 아이는 3백 80엔어치의 일을 하러 집에 왔던 거야. 괜히 쓸데없는 걱정
을 아이에게 시키지마.”
나쓰에는 부엌으로 들어가서 오븐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바빠. 아침에는 더욱 바빠. 그래서 그만 잊어버린 거야. 하지만 다쓰코한테 돈을
얻으러 가다니……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엄마가 나빠. 그렇게 착한 자식에게 그런 고생을 시키다니. 나쓰에는 옛날부터 인색한 데
가 있기는 했지만,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군.”
다쓰코는 나쓰에를 심술궂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 인색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쓰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쓰에는 결혼 전, 사람들로 부터 선물을 받거나, 얻어 먹어도
좀처럼 갚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교수의 집에 태어나서 아랫사람이나 학생들로부터 무엇을
받는 것에만 익숙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심술궂어서 그런가?”
“너무 심해, 다쓰코.”
하고 살며시 받아넘긴 나쓰에는,
“나, 그렇게 심술쟁이가 아니야.”
하고 상냥하게 웃음지어 보였다. 확실히 그 웃는 얼굴에서 심술궂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
다.
요코가 방으로 들어왔다.
“요코, 왜 돈을 다 쓰고 아줌마에게 달라고 갔었니? 엄마에게 달라고 하면 줄텐데.”
요코는 획 하고 나쓰에를 쳐다보았다.
다쓰코의 면전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나쓰에의 심정을 요코는 알 수 있었다.
“저는 청소를 하고 돈을 받았어요. 지금부터는 뭔가를 해서 돈을 벌고 싶어요.”
“돈을 벌다니?”
나쓰에는 곤혹스러워서 도움을 요청하듯이 다쓰코를 보았다. 다쓰코는 모르는 척하고 앉아
있었다.
“그래요, 우유배달이나 신문배달을 할 거예요. 껌을 파는 것도 좋아요.”
요코는 눈을 반짝거리며 즐거운 놀이의 이야기라도 하는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요코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며칠이나 나쓰에를 재촉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그만 두거라. 요코, 그러다가 아버지와 엄마가 비웃음을 산단다. 넌 병원집의 아이니까 말
이야.”
나쓰에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이거, 오랫만이군요.”
게이조와 도루가 서재에서 내려왔다.
“주인어르신도 시험공부를 해요?”
다쓰코가 가볍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야,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오신지도 몰랐습니다.”
게이조는 어색한 듯이 목덜미를 문질렀다. 나쓰에는 식사준비를 위해서 일어섰다.
“도루, 많이 컸구나? 이제 아버지보다 더 큰 것 같구나.”
“몸뚱이만 커졌어요! 그리고 아직 속알머리는 없는 걸요.”
라고 하는데 도루는 변성기가 되어 있었다.
“금년 봄에 연습 때문에 수고가 많겠군요. 다쓰코 씨.”
게이조는 다쓰코를 대하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연습도 큰일이지만 자질구레한 일이 더 많아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언제나 거실에서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바쁠 때는 잘 도와주거든요. 연습장이며, 프로그램
이랑 입장권의 인쇄부터 포스터까지, 어느 사이엔가 역할을 나누워 결정해 버리지요. 덕택으
로 도움도 많이 되고요.”
“그게 다 다쓰코 씨의 인덕 때문이지요.”
식사가 시작되자 요코가 말했다.
“오빠, 나 돈 벌고 싶어.”
“요코, 그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해라.”
나쓰에의 목소리가 엄했다.
전에 없이 말투가 날카로운 나쓰에를 게이조도 도루도 놀라서 쳐다보고 있었다.
“요코, 무슨 말이야? 뭣 때문에 꾸지람을 들었지?”
도루가 요코를 감싸듯이 말했다.
“아니, 꾸짖는 것이 아니라 요코가 자꾸 우유배달이나 껌 파는 것을 하겠다고 하잖아.”
나쓰에는 3백 80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쓰코는 그렇게 말하는 나쓰에의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괜찮겠죠. 돈벌이를 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죠. 우리 선생님도, 돈을 번다는 것은 주위
사람이 편안해지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지만 요코, 우유배달은 매일하기 때문에 아
주 힘들어.”
도루는 무슨 생각을 하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오빠의 말대로 힘든 일이지. 일한다는 것은 노는 것과는 전혀 다르단다. 비오는 날
도, 눈오는 날도 해야 하니까 말이야.”
게이조의 상냥한 말투가 나쓰에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게이조는 요즘 요코에 대해서 언제
나 위로하는 것 같은 다정한 말투를 했다.
“하지만 저는 일하고 싶은걸요. 저희 반의 요시다라는 아이도 신문배달을 하고 있어요. 저
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평소의 요코답지 않게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도루는 나쓰에의 얼굴을 보았다.
“요코, 너는 쓰지구치 병원의 딸이야. 병원집 딸이 신문배달이나 우유배달 같은 걸 할 수
있니?”
“왜 못해요?”
도루가 포크로 찔렀던 고기를 접시에 도로 내려놓고 씁쓸한 얼굴을 했다.
“왜라니?”
나쓰에는 구원을 요청하듯이 다쓰코를 보았다.
도루가 계속해서 말했다.
“돈을 번다는 것이 나쁜 일이야?”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번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야.”
게이조가 나쓰에에게 도움을 보낸 셈이었다.
“그래, 쓰지구치 병원의 딸이 신문배달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법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도루의 말이 나쓰에에게는 반항적인 여운을 남겼다. 분명히 도루는 요코 편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요코가 그런 일을 해보아라. 세상 사람들에게 아버지와 엄마가 비웃음을 산단다.”
나쓰에는 온유하게 말했다.
“웃음거리가 돼요? 왜 그렇죠?”
요코의 말투는 솔직했다. 모르니까 묻고 있다는 말투였다.
“어릴 적부터 일하는 사람은 가난한 집의 아이들뿐이야.”
나쓰에는 요코에게까지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서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돈을 번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잖아요.”
도루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도루의 어이없어 하는 말투가 나쓰에를 자극했다. 도루에게 멸시당한 것 같아서 괴로웠다.
“가난하다고 해서 남을 그렇게 멸시해도 되나요?”
도루는 거침없이 말했다.
“지금 한 말은 네 엄마의 실언이었다.”
제일 먼저 식사를 끝낸 게이조가 재떨이를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나쓰에는 게이조와 도루가 함께 자기를 책망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럼 당신은 요코가 우유배달을 하거나, 껌을 팔거나 해도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세요?”
“별로 크게 나쁜 일은 아니지 않소. 하고 싶으면 해도 되겠지.”
“아이, 창피해.”
나쓰에는 무심코 소리를 질렀다.
“뭐가 창피하단 말이에요? 모르겠어요.”
도루가 말꼬리를 잡았다.
“하지만 껌을 팔다니 말도 안돼.”
“그것 봐요. 그런 말투가 싫어요. 껌을 파는 것이 왜 나쁘죠? 의사는 좋은 직업이고, 껌을
파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가요? 정말 우리 어머니의 생각은 너무 구시대적이에요.”
도루의 말에 나쓰에는 자기도 모르게 다쓰코의 얼굴을 보았다. 다쓰코 앞에서 창피를 당하
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아까부터 다쓰코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나쓰에로서는
화가 치밀었다. 무슨 말인가 해서 도와 주었으면 하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이집 식구들은 좀더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다쓰코는 아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아무 말 하지 않고서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
이다.
“그런데 요코는 왜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수습하려는 듯이 게이조가 말했다.
“그냥……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거짓말! 요코는 돈이 필요했었겠지?”
도루는 요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돈이 필요하면 어머니에게 달라고 하면 되잖아.”
게이조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쓰에는 지금이라도 다쓰코가 무엇이든지 모두 말해 버리는 것이 아니가 하고, 조마조마했
다. 게이조는 물론, 도루에게도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은 ‘3백80엔’사건이었다.
나쓰에는 지금까지 도루 모르게 요코에게 냉담했다. 그러나 도루는 요코의 일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엄마가 돈을 주지 않았구나.’
“어떻게 하지, 다쓰코?”
나쓰에가 물었다.
“돈을 벌고 싶어하면 일을 시키면 되잖아.”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세상 사람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 우유배달이라도 시작한다면, 나는 칭찬해 주겠어.
설마 쓰지구치 병원을 아이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있다고는 아무도 생
각하지 않겠지.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은 있어도, 헐뜯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런데 요코,
어머니가 좋다고 하면 우유배달이든 뭐든 해 보렴. 하루나 이틀로 싫어지면 매일 일하고 있
는 아이들이 정말로 훌륭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공부가 되거든.”
제26장 뒷 모 습
제26장
뒷 모 습
기어이 요코는 5월 달부터 우유배달을 하기로 되었다. 4월 동안은 눈이 완전히 녹지 않았기
때문에 길 사정이 나빴다. 그래서 5월부터 하기로 한 것이었다.
게이조는 요코가 순진할 뿐만이 아니라, 자립심이 강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생각할 것도 없이 일하고 싶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게이조도 나쓰에도,
또 도루도 어릴 때부터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다. 역시 서로 피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이시는 16살 때 노동판에 팔렸다고 했었는데…….’
그러한 일을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병원 정문을 들어섰다. 아직 나무의 싹이 돋아나지 않은
4월 초의 정원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앞을 보니 10m 정도 앞에 무라이가 걸어갔다. 장신의 키를 약간 구부리듯이 하고 무라이는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게이조와 마찬가지로 무라이도 아직 오버를 무겁게 걸치고 있었다.
병원 안에서 달려나온 환자의 간병인 같은 여자가 무라이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무
라이는 답례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느릿느릿 걸어갈 뿐이었다.
스치듯이 지나갔던 여자는 의아한 듯이 무라이를 뒤돌아보았다.
‘유카코에 관한 일로 아직까지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는 걸까?’
게이조는 무라이에게 우정 비슷한 그 무엇인가를 느꼈다. 게이조 자신도 그 이후 계속해서
유카코에 관한 일이 마음에 걸려 있었다. 유카코에 관한 일을 걱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라
이는 누구보다도 게이조와 가까운 존재였다.
‘무라이도, 그렇게 나쁜놈은 아니었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볼 때, 게이조 자신도 남의 부인이었다면 나쓰에에게 마음이 끌렸을
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고 무라이를 동정할수록 무라이의 뒷모습은 더 처량해 보였다.
그날 오후에 게이조는 수술실에서 무라이와 우연히 마주쳤다. 수술복 아래로 털이 많은 정
강이가 보였다.
“적출 수술을 했나 보군.”
게이조의 물음에 무라이는 미소를 띠었다. 수술로 인한 긴장 탓인지 혈색이 발그레하고 눈
이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아침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던 무라이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수고했어요.”
게이조의 위로에 무라이는 멈춰 서서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곧 게이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아무 말 없이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방으로 찾아가도 괜찮겠습니까?”
무라이가 멈추어 섰다. 욕실 앞이었다. 수술 후에 목욕을 하는 것은 관례였다.
“그럼요, 목욕을 끝내고 오세요. 마쓰사키에 관한 일입니까?”
게이조가 말했다. 무라이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니, 그 아가씨는 죽었어요.”
“그러나 죽을 작정이었다면 유서 정도는 써 놓았을 것 같은데요.”
“원한이 깊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무라이는 욕실의 문은 열고 들어갔다. 순간 몽롱하게 따뜻한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무라이의 말 한마디가 게이조의 가슴을 찔렀다.
‘그런가? 유서도 남기지 않은 것은 원한이 깊다는 증거인가? 자기 생각의 전부를 말로 해
서 남기기에는 너무나 정이 깊었다고 하는 말인가?’
목욕을 끝낸 무라이가 원장실로 들어왔다. 양복 위에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피곤하지요?”
게이조는 위로하고 양주병을 꺼냈다.
“아니, 지금은 마시기 싫어요.”
무라이는 사양했다. 창이 수증기로 젖어 있었다.
‘원한이 깊은 증거다!’
아까 무라이의 말이 생각났다.
“무슨 용무가 있습니까?”
멍하니 있던 무라이에게 게이조가 말했다.
“원한이 깊은 것은 유카코뿐만이 아닌 것 같아서요.”
“뭐라고요?”
“원장님은 다카키 씨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떻게라니? 상당히 좋은 사람이지.”
“그것뿐입니까?”
“그것뿐이라니?”
“그럼, 다카키 씨는 원장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라이의 질문이 게이조가 듣기에는 너무 당돌하게 들렸다.
“어떻게라니? 우리는 학생시절부터 친구예요. 별로 어떻게 생각되어지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다카키와 무라이는 먼 친척간으로 혈연관계가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용모나 성격 어디에도
공통점이 없었다.
“그럼 다카키 씨는 원장님의 부인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고 봅니까?”
게이조는 무라이가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겠지요.”
‘다카키는 너와는 달라.’
게이조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습니까?”
무라이는 문득 입가에 냉소를 띄었다.
게이조는 아무 말 않고 있었다.
“원장님은 의외로 무사태평하시군요.”
“……?”
게이조는 어이가 없어서 상대를 하지 않았다.
“원장님, 나는 아마 사모님에 관한 일을 잊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카키 씨도 그럴까
요?”
‘쓸데 없는 말 하지 말아라.’
게이조는 어두워진 창에 비쳐 있는 무라이를 보았다.
“다카키 씨는 평생 사모님에 대해서…….”
“그만 둡시다.”
게이조는 애써 온유하게 말했다.
“다카키와 나는 친구예요.”
“우정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무라이는 기가 죽지 않고 계속 말했다.
“유카코에 관한 일이 있었으니까 말하겠어요. 원한이 깊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니까요. 다카
키 씨가 왜 아직 독신으로 살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다카키라는 사람을 몰라도 유분수지, 게이조는 무라이의 시선을 되받아쳤다. 다카키가 왜 독
신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해서 게이조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카키가 혼자서 살아
가는 것을 탄식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자랑한 적도 없이 담담하게 지내고 있기 때문
인지도 몰랐다.
주위 사람에게 다카키는 자신의 독신을 걱정시키게 하는 짓 따위는 하고 있지 않았다. 언제
나 태평스럽고 명랑했다.
‘생각해 보면 다카키도 40살이 지났다.’
게이조는 지금까지 다카키에게 결혼을 권했던 적이 없었다. 그것을 깨닫자 게이조는 자신이
너무나 친구로서 인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독신으로 끝까지 살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가는 편이 마음 편할는지도 모르
잖아.’
무라이는 잠자코 있는 게이조를 꼼짝도 않고 보고 있었다.
“원장님, 다카키 씨에게는 혼담이 무척이나 많이 들어와요.”
의사라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많은 여성이 사귀고 싶어하는 것을 게이조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렇겠지요.”
“그러나 다카키 씨는 그런 여성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나쓰에가 원인이라고 무라이는 말하고 싶었다.
다카키가 학생시절에 나쓰에에게 프로포즈를 했던 일은 게이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도 나쓰에를 잊기 어려워서 독신으로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카키 씨가…….”
무라이가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을 때 노크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뜻밖에 다쓰코가 들어
왔다.
게이조는 놀라서 물었다.
“아니, 병원에를 다 오시고, 보기 드문 일이군요. 어쩐 일입니까, 오늘은?”
다쓰코는 하늘색의 방한 오버를 벗었다. 수수한 연지색의 기모노가 다쓰코에게 잘 어울렸다.
무라이를 다소 처리 곤란해 하고 있던 게이조는 잘 되었다 싶어서 다쓰코를 반갑게 맞이했
다.
다쓰코는 무라이를 알아보고,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쌀쌀맞게 말하며 머리를 숙였다.
무라이는 처음 대면하는 사람에게 지금처럼 쌀쌀맞게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반드시 무라이를 본 순간 바짝 긴장을 하듯이 응시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쓰코에게는 없었다. 다쓰코의 큰 눈은, 무라이보다도 방 안을 둘러보고 있
었다.
“아니? 다쓰코 씨는 무라이 군과는 처음이십니까?”
“그렇지요, 아마?”
게이조는 당황해서 두 사람을 소개했다.
“아니요, 나는 언젠가 뵌 적이 있어요.”
무라이는 드물게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어머, 그래요?”
어디에서라고 다쓰코는 말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게이조가 물었다.
“루리코가 죽었을 때…….”
루리코의 장례식을 거들고 있던 다쓰코를 무라이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방이군요? 저 그림은 아사쿠라 씨의 설경이군요. 이것은 누구의 그
림이지요?”
다쓰코는 벽에 걸려 있는 작은 풍경화를 쳐다보았다. 다쓰코는 완전히 무라이를 무시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게이조의 얼굴이 빨개졌다.
“허…… 당신이 그린 그림이에요? 놀랍군요. 위트릴로의 그림이라고 생각했는데.”
학생시절에 그렸던 삿포로의 거리였다. 게이조 자신도 왠지 좋아서, 며칠 전 벽에 걸었던 그
림이었다. 무라이는 처음으로 여성으로부터 무시당했을 터인데도, 안하무인격인 다쓰코에게
반감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 다쓰코 씨, 무라이 군은 다카키의 먼 친척이에요.”
게이조는 무라이가 왠지 딱해 보여서 한 마디 했다.
“그래요?”
다쓰코는 무라이를 힐끗 한 번 바라볼 뿐이었다.
“왜 다카키가 지금까지 독신인가를 무라이 선생이 추리하고 있는 중이었소.”
게이조의 말에 다쓰코는 히죽히죽 웃었다.
“결론이 어떻게 되었어요?”
무라이는 차마 다쓰코 앞에서,
“다카키는 나쓰에를 잊지 못하고 독신으로 평생을 지낸다.”
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다카키 씨는 잊을 수 없는 여자가 있다든가 뭐라든가 말하고 있지요? ”
하고 다쓰코가 말하자 무라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별로 신경쓸 것 없어요. 다카키 씨는 집을 짓는 방법을 잊어버린 새와 같은 걸요. 우산
을 가지고 다닐 때마다 잊고 다니는 다카키 씨가 평생 잊지 못하는 여자가 있을 리 없잖아
요.”
“다쓰코 씨에게 결혼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어요.”
게이조가 말했다.
“정식으로 신청했던 것은 아니고 다 귀찮으니까 다쓰코 양과 결혼할까, 하고 말했던 거예
요.”
다쓰코는 우스운 듯이 말했다.
무라이는 왠지 다쓰코에게 기가 죽어서 방을 나갔다.
무라이가 방을 나가자 다쓰코가 말했다.
“무라이 선생이란 분이 저 사람이에요? 도대체 저 사람의 어디가 좋아서 모두 난리법석이
지요?”
‘나쓰에와 무라이의 관계를 다쓰코가 알고 있는 것일까?’
게이조는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무라이 군에 관한 일을 알고 있습니까?”
“이름은 알고 있어요. 집에 무용을 배우러 다니는 아이가 안과에 입원하고 있지요. 오늘 문
병하러 갔더니 6명의 환자가 무라이 선생님, 무라이 선생님하고 떠들고 있었어요. 집단 사랑
이라고 하는 것인가요? 어이가 없었어요. 어떻게 생긴 남자인가 하고 생각했더니 여기서 만
났군요. 내 취향은 아니예요. 저런 타입은…….”
게이조는 겨우 안심했다.
나쓰에와 무라이에 관한 일을 다쓰코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떤 타입이 다쓰코 씨의 마음에 드십니까?”
게이조는 마음이 누그러져서 다쓰코에게 물었다.
다쓰코의 눈이 번쩍 빛났다.
“좋아하는 타입?”
다쓰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게이조 씨 같은 타입도 아니예요. 안심하세요. 그렇다고 해서 다카키 씨와 같은 타입도 아
니예요. 어떤 타입이라고 해야 할까요? 곤란한데요.”
“남자 같은 거 안중에도 없습니까? 아까 다카키는 집을 짓는 일을 잊어버린 새와 같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런데 다쓰코 씨는 어떻습니까?”
“나도 다카키 씨와 똑같은 생각인걸요.”
“설마? 당신은 아직 젊어요. 이제 슬슬 결혼하시는 게 어때요?”
“감사해요. 아직까지도 나를 여자 취급해 주시니…….”
“다쓰코 씨 같은 분이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억울해요. 다쓰코 씨 같은 분이 어째
서 혼자 살아가십니까? 재산과 무용이 있기 때문인가요?”
다쓰코는 대답하지 않고 꼼짝 않고 게이조의 얼굴을 봤다. 저도 모르게 게이조는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그것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다쓰코의 긴장한 아름다운 표정 때문이었다.
겨울 햇살에 빛나는 나무에 붙은 얼음과도 같이 아름다운 표정이었다.
“재산하고 무용과 정사(情事)할 생각은 없어요. 누구든지 많건 적건 비밀을 가지고 있지요.
그렇지 않아요?”
게이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코가 회상되었다.
나쓰에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더구나 요코를 맡은 이유는 다카키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쓰코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쓰코 씨에게 비밀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있어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아니지만, 그냥 말하지 않아요.”
다쓰코는 상냥하게 웃었다.
“허, 알고 싶습니다. 어떤 비밀인가요?”
“알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렇게 말하면 곤란합니다만…….”
“저는 아이를 낳은 적이 있어요.”
다쓰코는 게이조의 얼굴을 꼼짝도 않고 주시한 채로 말했다.
“네?”
게이조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여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동경에서 머물고 있을 때, 전쟁중의 일이
었어요. 아이는 낳자 바로 죽었어요. 남자아이였는데.”
“…….”
“상대는 마르크스주의자였어요. 그는 절개를 굽히지 않고 옥사했어요. 그는 좮만요슈좯를
애독했어요. 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사람이었죠. 그러한 남자는 이제 좀처럼 만날 수 없겠
지요.”
게이조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 정도의 비밀을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밝게 살아
온 다쓰코에게 게이조는 경탄했다.
다쓰코를 지탱하고 있는 그 남자와의 추억에 게이조는 머리를 숙였다. 자기의 비밀과는 전
혀 달랐다. 다쓰코의 자랑스러운 비밀에 게이조는 자기를 부끄럽게 여겼다.
“누가 물어도 대답하기에 곤란한 일은 아니예요. 그러므로 누구에게 말해도 좋아요. 하지만
지금까지는 너무나 소중해서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제 조금 어른이 된 것인가요? 결국
말하고 말았으니까요…….”
제27장 폭 설
제27장
폭 설
요코가 우유배달을 한다고 해도 한 달 정도 하고 나면 지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
나 비오는 날이 몇 날 계속 되어도, 요코는 그만둔다고 말하지 않았다
라일락꽃이 아름다운 6월도 지나고, 흰 감자꽃이 피는 한여름을 맞이해도, 요코는 도무지 그
만둘 낌새가 없었다.
요코는 아침 5시가 되면 언제나 눈을 번쩍 떴다.
재빠르게 몸단장을 하고서 발소리를 죽여 살짝 뒷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헛간
에서 자전거를 꺼내서 경쾌하게 뛰어 탔다.
우유 보급소에서 40개들이 우유 상자를 자전거 짐받이에 싣는 것이 요코에게는 가장 어려웠
다.
뒷쪽이 무거워진 자전거를 요코가 누르고, 보급소의 주인이 우유상자를 짐받이에 동여매 주
었다.
익숙지 않은 동안에는 비틀비틀했지만, 3개월 정도 지난 지금에 와서는 상당히 익숙해졌다.
아직 인적이 드문 거리를 딸가닥딸가닥 병소리를 내면서 요코는 페달을 밟았다.
요코가 우유배달을 하고 있다는 소문은 어느 사이엔가 학교에도 퍼졌다.
“요코, 왜 우유배달을 하지?”
짝꿍인 게이코가 물었다.
“내 공책이랑 연필을 내가 번 돈으로 사고 싶어.”
“어머나, 나는 내 용돈으로 충분히 살 수 있어.”
부모님이 철공소를 하는 집의 딸인 게이코가 말했다.
“하지만 게이코, 나는 용돈보다 내 스스로 번 돈을 가지고 사는 게 좋아.”
“요코는 이상해. 쓰지구치 병원은 부자잖아. 그런데도 요코가 우유배달을 하고 있는 것은
남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라고 우리 어머니가 말했어.”
게이코는 마음씨가 좋은 아이였다. 심술궂은 기분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야, 남에게 칭찬받고 싶기 때문은 아니야.”
“하지만 우리 어머니께서 곧 신문에 이 사실이 나올 거라고 했어. 신문에서 칭찬받을 거라
고 말씀하셨어.”
게이코는 요코를 칭찬한 셈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요코는 좀 쓸쓸했다.
자신의 기분을 남이 몰라주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태
어나서 처음으로 요코는 오해라는 것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매일 아침, 인적이 드문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의 즐거움, 한 병 한 병 우유를 배달하
고 빈 병만으로 짐이 가벼워졌을 때의 만족감은 요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
었다.
2학기가 시작되자, 갑자기 아침 바람이 차가워졌다.
어느 사이엔가 키가 커진 옥수수가 바람에 휘날리어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냈다. 그리고 진
눈깨비 섞인 비가 내릴 무렵에는 몸 속까지 차가워지기도 했다.
눈이 거의 녹을 때까지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서 자전거를 탈 수 없는 겨울이 왔다. 요코
의 일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겨울이었다.
자전거를 탈 수 없는 겨울은 마포자루에 우유를 넣어서 배달했다. 20병씩 넣은 자루를 양
손에 들면 손이 아팠다. 그러나 익숙해지자 힘이 길러져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겨울에는 6시에 일어났다. 너무 아침 일찍 우유를 배달하면 우유가 얼어서 병이 깨지기 때
문에 사람이 일어나서 문을 열 무렵에 배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한 사정도 요코는
알았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요코는 우선 창 너머로 숲을 바라보았다. 나뭇가지가 서리를
내뿜듯이 모두 얼어 있는 아침은 밖에 나가는 찰나에 눈썹이 얼어 달라붙었다. 숨을 쉬면
콧속이 뻣뻣해졌다. 이러한 날은 귀마개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지 않으면 동상에 걸리
기 때문이었다.
곧 그만 둘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게이조와 나쓰에도 정월이 되자 한편으로는 놀라기도 하
고, 어느 한편으로는 어이 없기도 했다.
나쓰에는,
‘역시 출생이 다르군. 노동판에만 다녔던 피가 흐르고 있는 거야.’
하고, 배달을 마친 요코가 맛있는 듯이 아침식사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게이조가,
“요코는 매우 장래성이 있는 아이야. 끈기가 있어. 전혀 그만둘 기색이 없잖아.”
하고 말했을 때,
“도대체 어떻게 생긴 부모일까요? 다카키 씨에게 자세하게 물어 보고 싶어요.”
하면서 게이조의 아픈 곳을 건드리면서 시치미떼는 얼굴을 했다.
이웃 사람들에게 요코가 칭찬받으면 나쓰에는,
‘요코는 왜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지, 무용을 배우고 싶다고 하지 않는지 몰라.
열 살이나 열한 살 정도에 돈을 탐내서 일을 하다니, 정말로 그 아이의 태생은 속일 수 없
나봐.’
하고 속으로 악담을 하곤 했다.
“저, 요코, 이제 5학년이 되었어. 그러니 우유배달을 그만해다오.”
하고 말했지만 요코는 싱긋 웃기만 하고, 그만 둔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나쓰에는 그러한 요코가 고집이 세게 생각되어서 화가 났다. 아이들이 밖에서 돈을 번다는
것이, 나쓰에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쓰에는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요코는 나쓰에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우유배달을 그만 둘 마음은 되지 않았다. 그때쯤 그러
한 요코가 그만 두려고 결심하지 않으면 안될 사건이 일어났다.
아직 겨울방학 때의 일이었다.
그날 아침엔 눈보라가 더욱더 거칠어져 있었다.
창문의 유리가 바람에 울리고, 창은 눈보라가 달라붙어 새 하얗게 되어 있었다.
나쓰에는 바람 소리에 잠을 깼다. 참다 못해 단호하게 요코에게 오늘은 쉬도록 말할까도 생
각했다. 그러나 요코는 쉬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나쓰에는 무슨 말을 할 생각
도 없어져서 요코가 눈보라 속으로 나가는 낌새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요코는 오버의 깃을 세우고, 그 위에 털로 짠 목도리를 칭칭 감았다. 그리고 모자를 쓰고 밖
으로 나갔다. 하지만 갑자기 세차게 내려치듯이 심한 눈보라에 숨이 막혔다.
온 힘을 다하여 걷기 시작했는데, 정면으로 불어 닥치는 바람에 얼굴도 들 수 없었다.
길도 보이지 않았다. 요코는 한 발 한 발 눈 속을 헤치며 걸어갔다. 전깃줄이 바람에 웅웅
소리를 냈다. 무엇이든지 밀어 넘어뜨릴 것 같은 바람에 저도 모르게 등을 돌리고 바람을
피하고는 다시 몸을 구부리고 걷기 시작했다.
상당히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숲속에서 바람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장화 안에 눈이 들어가
녹았다.
조금 가자 눈더미가 있었다. 요코의 가슴 높이 만큼의 깊이였다.
한 발 한 발 눈의 깊이를 확인하면서 요코는 앞으로 나갔다. 땀이 촉촉이 이마를 적셨다. 요
코는 헐떡거리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강을 건너는 것보다는 피곤하지 않아. 물이 흐르지 않으니까.’
요코는 그렇게 생각하고 힘을 냈다. 눈더미를 겨우 빠져 나오자, 바람으로 인해서 눈이 쓸린
길이 나왔다. 그러나 그 길은 3미터 정도밖에 계속되지 않았다.
우유 보급소까지는 여름이라면 5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걸어도 걸어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돌아가 버릴까?’
요코는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요코는 길 옆의 높게 쌓여진 눈에 기대어 몸을 쉬었다.
바람은 때마침 눈보라를 날리면서 불고 지나갔다.
‘갓난 아이들이 우유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요코는 다시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걷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호흡을 조절하고서 바람을 피
하고, 필사적으로 눈 속을 걸었다. 또 다시 눈더미가 나타났다.
눈더미를 몇 발짝 걷지 않았는데 다시 온몸에 땀이 났다.
‘갈 수 있을까? 가 보자!’
어른이라도 심한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앞으로 2~3미터만 가면 자기의 집이라는 곳에서 쓰
러지는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요코는 그 눈보라의 무서움을 알지 못했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가면서 요코는 차츰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즐
거움이었다. 눈보라가 세차게 치고 지나갈 때마다, 주위는 눈보라의 흰 막으로 덮였다. 눈보
라가 멈추기를 기다려서 또 걸었다. 잘못하면 방향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드문드문 집
이 서 있었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고 걸을 수가 있었다.
간신히 우유보급소 앞에까지 도착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요코는 녹초가 되어 잘 열리지 않는 문을 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때, 보급소 주인이 안에
서 문을 열어 주었다.
“이거 요코 아니냐. 이런 눈보라 속에 용케도 걸어올 수 있었구나.”
주인은 어이가 없어서 요코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딱 벌린 입에서 충치가 하나 들여다
보였다.
“정말로 어이가 없군. 이런 날에 밖으로 자식을 내보내는 부모도 있구나.”
남자처럼 두터운 눈썹을 한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주인에게 눈짓했다.
요코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오늘은 쉬라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말씀하지 않았느냐?”
주인은 토방의 난롯불을 굵은 불쑤시개로 2, 3번 쿡쿡 찔렀다. 쿵 하고 소리를 내고 순식간
에 연돌까지 빨갛게 되었다.
“저는 말을 안들어요.”
아빠와 엄마에 관한 일을 나쁘게 말하는 것은 싫었다.
“허어, 항상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도 말을 듣지 않는구나. 넌 오빠하고는 다른
것 같구나.”
요코의 장화에 묻은 눈을 털어 주면서, 아주머니는 다시 주인에게 눈짓을 했다. 굵은 눈썹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요코는 아주머니의 이러한 눈짓이 마음에 걸렸다.
주인은 아주머니를 쏘아보듯이 하면서, 다시 난롯불을 쿡쿡 찔렀다.
아주머니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눈이 많이 쌓여 있지?”
하고 요코에게 물었다.
“굉장해요. 배 있는 데까지 눈이 찰 만큼 높이 쌓여 있어요.”
“어머, 배 있는 데까지? 혼났겠구나. 그런데 어째서 네 아버지, 어머니는 네게 우유배달을
시키는 거지?”
아주머니는 화가 난 듯이 말했다.
“아이를 교육시키기 위해서야. 쓸데없는 말 하지마.”
“교육 때문이라면 일부러 요코 혼자에게만 우유배달을 시킬 리가 없잖아요. 오빠에게도 시
켜야죠. 여하튼 지독한 부모예요.”
아주머니는 뜨거운 우유를 큰 찻잔에 부어서 요코에게 권했다.
눈에 젖은 장화에서도, 요코의 바지에서도 김이 나고 있었다.
“저, 아주머니, 엄마께서는 우유배달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다고 졸랐어요.”
요코는 주인 아줌마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나쁘다고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흥, 뭣 때문에 요코는 우유배달을 하고 싶었지?”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코는 뜨거운 우유를 입으로 불면서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아침 배달은 쉬거라. 바람이 자고 나면 아저씨가 천천히 배달을 할 테니까 말이야.”
주인도 우유를 마시면서 말했다.
“어머, 갓난 아이에게 먹일 젖이 없으면 어떡해요?”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말이야, 이러한 날에 배달을 하게 한다면, 배달하는 사람이 질려 버
릴 거야.”
“하지만 저는 배달하겠어요.”
“농담하지 마라.”
하면서 주인이 큰소리로 가로막았다.
쌓인 눈을 감아 올리듯이 하고 부는 바람은 전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걸어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지금부터는 이러한 엉뚱한 짓은 하지 말거라.
이런 날은 어른들도 길가에 쓰러져서 죽을 수가 있어. 이렇게 심한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말이야.”
하고 말하는 주인 다음으로 계속해서 아주머니도 말을 덧붙였다.
“정말이야. 그래도 이 부근은 집이 몇 채라도 있으니까 다행이지만 더 시골이라면 오늘 같
은 날은 얼어죽기 딱 알맞아. 여하튼 바람이 잠잠해질 때까지 천천히 쉬었다 가거라. 어차피
방학이니까 말이야.”
그러나 요코는 우유배달을 하려고 왔기 때문에 난롯불을 쪼이고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한 번도 쉰 적이 없는 우유배달을 쉰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뜨거운 우유와 난롯불 덕택으로 몸이 완전히 따뜻해졌다. 요코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피곤해서 옆 벤치에 누웠다. 눕자마자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문득 눈을 떠 보았더니 어느 사이엔가 요코는 깨끗한 객실에 누워 있었다. 요코는 놀랐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으나, 우유 보급소의 객실에 있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20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요코가 이불에서 일어나려고 했을 때, 옆방에서 소근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야.”
억누르는 듯한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말이에요…….”
아주머니가 뭔가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유배달을 하고 싶다고 했던 것은 요코야. 특히…….”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요코는 나갈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날에 자기 자식이라면 어떻게 밖으로 내
보낼 수 있겠어요?”
“……요코도 알고 있을까? 자기가 얻어온 아이라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그러는데요, 우선 얼굴이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요.”
미닫이 문 한 장만을 사이에 둔 옆방의 목소리는, 소근거리는 소리라도 잘 들렸다.
“그러나 닮지 않은 부모 자식도 있어. 당신도 도키코하고 조금도 닮지 않았잖아.”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그 아이는 내가 낳았어요.”
아주머니의 낮게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여하튼 요코는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 아무 말 말아.”
“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머지 않아서 알려질 이야기예요. 누구라도 요코를 얻어온 아이라
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쉿, 큰소리를 내지 마.”
요코는 깜짝 놀랐다.
‘얻어온 아이? 내가 얻어온 아이라니…….’
그러나 이상하게도 요코는 그렇게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벌써부터 나쓰에가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생각을 요코는 하고 있었다. 자기도 왠지 얻어온 아이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확실히 그와 같은 일을 알고 나서는 쓸쓸했다.
‘오빠도 진짜 오빠가 아니란 말인가!’
요코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땀과 눈물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흘리세요.’라는 말을
생각했지만, 그래도 눈물이 나왔다.
‘얻어온 아이가 아닐 거야.’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해 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게이조도, 나쓰에도, 도루도 갑자기 아주 먼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요코는 외톨이가 된 것 같은 슬픔에 입술을 깨물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았다. 보급소 아주
머니와 아저씨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얻어온 아이라도 좋아. 괜찮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래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요코는 결심하고 일어나서 눈물을 닦고 토방으로 나갔다.
“일어났니?”
하고 아주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네.”
요코는 고개를 숙이고 장화를 신고 있었다.
“아직 9시야. 푹 자도 돼.”
아주머니가 그렇게 말했지만, 요코는 밖으로 나갔다.
바람은 거짓말처럼 뚝 그치고, 파란 하늘이 드러나 보였다. 요코는 어쩐지 자신이 다른 사람
이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이 좁게 나 있었다.
‘어디에서 얻어온 것일까?’
요코는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얻어온 아이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급식비를 주지 않으셨을까?’
학예회 때 옷을 만들어 주지 않았던 일이 회상되었다. 뒤쪽에서 큰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
았더니, 큰길에 노란색의 제설차가 눈보라를 휘날리며 눈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요코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무엇이 원인이 되었든 간에 쓸쓸함이 느껴졌다.
‘내일부터 우유배달을 그만두자.’
요코는 자신이 일하는 것 때문에 우유 보급소 아주머니가 아빠와 엄마를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상기되었다.
자신이 일하는 것이 싫다고 했던 어머니의 기분을 비로소 요코는 알았다.
집 옆에까지 왔을 때, 요코는 문득 나쓰에의 무서운 얼굴이 떠올랐다. 나쓰에가 몸으로 누르
듯이 하고 요코의 목을 졸랐을 때의 얼굴이었다.
‘어째서 얻어온 아이라 하더라도 귀여워해 주지 않을까?’
책에서 읽었던 백설공주가 생각났다.
언젠가 자기도 백설공주처럼 집을 나가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요코는 기운없이 부엌문
을 열었다.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이 안에서 나쓰에가 뛰어 나왔다.
“어머, 이런 눈보라에 가엾게도…….”
그렇게 말하고 나쓰에는 요코를 꽉 껴안았다.
나쓰에는 7시경에 일어나서, 너무 지독한 눈보라에 놀랐다.
이런 날에 요코를 내보냈다고 생각하니 요코가 불쌍해서 돌아올 때까지 안절부절 못하고 기
다리고 있었다. 요코는 나쓰에의 품에 꼭 껴안겨서, 기쁜지 슬픈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억누르지 못하고, ‘와’하고 큰소리로 울면서 나쓰에에게 꼭 달라붙었다.
제28장 연 못
제28장
연 못
요코는 우유배달을 그만 두었다.
“과연 요코도 눈보라는 무서웠던 모양이군.”
게이조는 그렇게 말했다. 나쓰에도 도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래 계속할 리가 없잖아요. 아직 어린아이인걸요.”
요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우유보급소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들었던 ‘얻어온 아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
다.
눈보라가 치던 날, 나쓰에가 걱정되어 허둥지둥하면서 요코를 껴안아 주었던 것이 기뻤다.
‘좋은 어머니야.’
그 일을 회상하면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착한 아이가 될 거야. 언젠가 친어머니를 만나면 좋은 아이로구나,
하고 칭찬받을 수 있도록 아주 착한 아이가 될 거야.’
요코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요사이 한 가지 걱정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도루
가 뚜렷한 이유도 없이 과묵해진 것이었다.
요코가 학교 이야기를 하면 나쓰에나 게이조보다도 열심히 들어주었던 도루가 요사이는
‘응’이라든가 ‘그래’라고 말할 뿐이었다.
‘오빠는 고등학교 입학시험 때문에 바쁘겠지.’
요코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저녁식사 때 도루가 침묵하고 있으면 쓸쓸했다. 그러한 도루의
변화를 나쓰에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도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꼭,
“엄마, 요코는 어디 있어?”
하고 물었다. 그러나 요즘의 도루는 요코에 관한 일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날
밤, 게이조도 요코에 대한 도루의 태도가 변한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목욕을 한 요코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들어왔다. 게이조도, 나쓰에
도, 도루도 모두 거실에 있었다.
요코가 무엇인가 말을 걸려고 하다가,
“저, 오빠!”
하고, 도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도루는 마치 전류가 통하는 것처럼 꿈틀하고 몸을 떨더니 휙 하니 몸을 돌려 버렸
다. 그 때문에 하마터면 요코가 넘어질 뻔했었다. 도루 자신도 놀랐는지 얼굴을 붉히고 재빨
리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어머, 요코, 괜찮니?”
나쓰에의 다정한 말을 듣고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요코는 울고 싶을 정도로 슬펐다.
“어처구니가 없군.”
“틀림없이 긴장해서 그럴 거야. 시험 공부로 피곤해 있잖아.”
게이조는 속으로 동요가 일어나는 것을 숨기고 온유하게 말했다.
게이조는 도루가 요코의 출생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도루는 시립도서관으로 나가고, 요코도 강 건너 이노자와 스키장으로 나갔다. 날씨 좋은 일
요일 오후를 게이조는 객실에서 파이프 청소를 하고 있었다. 햇빛이 가득 들어오고 있는데
도 게이조의 마음은 무거웠다. 게이조는 지난 밤의 도루를 생각하고 있었다. 요코가 도루의
어깨에 손을 얹었던 순간, 몸을 돌려서 피했던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게이조는 자
신이 요코를 이 집에 떠맡은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몹시 불안하게 생각되었다. 그때,
나쓰에가 방으로 들어왔다.
“어머, 여기에 계시는군요. 2층에 계신다고 생각했는데요.”
곰가죽 위에 앉아서 파이프를 닦고 있는 게이조를 보고, 나쓰에가 놀라서 말했다.
“응.”
“볕이 들어와서 따뜻하군요.”
“그래.”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있는 게이조를 보고 나쓰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을 생각하고 계셨어요?”
나쓰에는 게이조의 옆에 앉았다.
곰털이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아니야, 별로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아.”
게이조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도루도 이제 다루기가 힘들군요”
게이조의 마음을 꿰뚫어보듯이 나쓰에가 말했다.
“왜 그러지?”
게이조의 말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라니요? 지난 밤, 도루의 행동을 보셨잖아요.”
“아, 그 일 때문인가?”
“그 일이라니요?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갑자기 어깨에 손을 얹어서 놀랐을 뿐이었어.”
“아니요, 도루는 요즘 좀처럼 요코하고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학교에서 돌아와 요코가 없
으면, 반드시 요코는? 하고 말했는데, 요사이는 묻지 않게 되었고요.”
“시험이 가까워져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겠지.”
“그럴까요? 나하고도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말을 하지 않아도 때때로 꼼짝도 않고
요코를 주시하기도 하고, 왠지 걱정이 되어요.”
“도루도 이제 사춘기야. 사춘기에는 여러 가지로 변하잖아. 그 나이가 되면 사람을 피하고
싶기도 하고, 부모의 말도 듣지 않는 법이야. 혼자 있고 싶은 게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도, 인간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소? 당신도 너무 신경질적으로 대하지 말아요.”
게이조는 드물게 말을 많이 했다. 불안이 게이조를 말이 많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특히 요코를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춘기이기 때문일까요? 요코도
이제 5학년이 되었어요. 몸이 슬슬 어른이 될 나이예요.”
“……?”
“도루가 요코에게 이성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돼요.”
이러한 나쓰에의 걱정은 게이조에게는 상상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이조는 도루가 요코의 출생을 알고, 요코를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불안했던 것이
다. 하지만 나쓰에는 도루가 요코를 이성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근심하고 있었
다.
“설마, 그럴 리야 있겠어?”
“아니예요. 도루는 이제 몸도 완전히 어른이 되었어요.”
나쓰에는 문득 볼을 붉혔다.
“하지만 요코는 도루의 여동생이잖아. 설마 당신이 걱정하는 것 같은 일은 아니겠지.”
도루는 사이시의 딸과 절대로 맺어질 수 없었다. 게이조는 자기 자신의 불안을 부정하듯이
강하게 말했다. 그러나 말을 듣고 보니까, 지난 밤 도루의 태도가 요코를 여동생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단면적으로 알려주는 것 같았다.
“여보, 그 아이는 벌써 훨씬 이전부터 요코가 누이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물론 게이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이조는 파이프를 무릎 위에서 가지고 놀면서 숲을
보았다. 때때로 소리도 없이 나뭇가지에서 눈이 떨어졌다. 게이조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해
야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요코를 누구에게 주어야 할까? 도루에게 요코의 출생을 알려야 할까?’
어쨌든 호적에 남매로 되어 있는 이상 도루와 요코의 결혼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게이조는 계속해서 무릎 위에서 파이프를 세우기도 하고, 넘어뜨리기도 하고 있었다. 그러한
단순한 동작 때문에 나쓰에는 점차로 초조해졌다. 게이조가 곤혹스러워하는 원인을 나쓰에
는 알고 있었다.
‘요코가 사이시의 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요. 당신은 루리코를 살해한 사나이의 피
가 게이조의 가문에 합쳐질까봐 두려운 거죠?’
“여보.”
게이조는 나쓰에가 부르는 소리에 놀란 듯이 움찔하더니 손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
다.
“뭐야?”
“우리, 차라리 도루하고 요코를 결혼시킬 작정으로 기른다면 좋았을 뻔했어요.”
“당신, 미쳤어?”
게이조의 격한 말투에 나쓰에는 일부러 다정하게 말했다.
“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도루는 어차피 여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요코는 정말로 좋은
아이예요. 머리도 천성도 얼굴도 나무랄 데가 없어요.”
게이조는 협박당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쓰에의 다정한 목소리가 한층 게이조를 위협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정말로 당신은 요코를 그렇게 좋은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그렇게 말하고 나서, 게이조는 당황해서 덧붙여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귀여워해 주지 그랬소?”
무심코 했던 그 말이 나쓰에에게 무엇을 야기시킬 것인가를 게이조가 알아차릴 리 없었다.
나쓰에의 얼굴색이 변했다.
“더 귀여워해 주었다면 좋았을 거라구요?”
게이조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냉담했다는 것에 나쓰에의 기분이 상한 것인가, 하고 게이조
는 생각했다.
“그래, 도루의 색시로 삼고 싶을 정도의 아이라면 더 귀여워했어야 해.”
나쓰에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보라색 바탕에 화살무늬가 그려진 기모노에 황색의 큰 띠를 두르
고 있었으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학생이었어. 나는 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
을까, 하고 놀랐어. 당신은 너무 아름다웠고, 얌전했었소. 당신은 지금도 아름다워. 요코에게
상냥한 편이 당신에게는 더 어울려.”
나쓰에는 나직이 웃었다. 게이조는 나쓰에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
쓰에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나로서는 도루하고 요코를 어디까지나 남매로 기르고 싶어. 한지붕 아래서 남매로
자란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야. 근친상간의 느낌이 든단 말이야. 당신도
두 사람을 결혼시키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으면 해.”
나쓰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왜 그래, 나쓰에?”
나쓰에의 침묵에 게이조는 점점 의심을 가졌다. 나쓰에는 반듯하게 얼굴을 쳐들고 정면으로
게이조를 주시했다. 입술이 어렴풋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실 말씀은 그것뿐이십니까?”
“왜 그래? 너무 판에 박힌 듯한 말투가 아닌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도루와 요코는 오
빠와 여동생 사이라는 것뿐이야.”
“어머나, 아직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요. 다만 그것뿐이에요.”
평상시의 나쓰에와는 달랐다.
“당신, 뭣 때문에 요코를 맡았어요?”
“무엇 때문이냐고? 당신이 루리코의 49제도 끝나지 않았을 때 여자아이가 갖고 싶다고, 루
리코라고 생각하고 기를 테니까, 꼭 다카키에게 부탁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어? 그 일을 잊
었소?”
게이조는 나쓰에의 모습에 의구심이 생겼다.
“잊지 않았어요. 나는 분명하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루리코라고 생각하고 기르고 싶다고.”
나쓰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니까 별 도리 없이 요코를 데려 왔던 거야. 그때 나는 분명 반대했을 터인데? 하지만
당신은 죽은 루리코에 관한 일 같은 거 잊은 듯이 요코, 요코하면서 열중해서 귀여워하고
있었어.”
나쓰에는 꼼짝도 않고 게이조를 응시했다. 게이조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등골이 오
싹했다.
“말씀하신 대로예요. 설마, 루리코가 요코의 아버지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을, 꿈에도……꿈
에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게이조는 뜻밖의 막대기에 발목이 걸린 것같이 망연했다. 게이조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말이 되지 않았다.
‘나쓰에가 요코의 출생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팍에 비수가 꽂혔다고 생각했다.
“대답이 없으시군요.”
나쓰에는 울먹이는 목소리가 되었다.
“여보, 당신이란 분은 내가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요코를…… 요코를 위해
추운 밤에 몇 번이고 일어나서 우유를 만들기도 하고, 기저귀를 갈아 주기도 하는 것을, 용
케도…… 용케도 태연하게 보고만 계셨어요.”
나쓰에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정면에서 게이조를 딱 응시하는 나쓰에의 볼이 경련을 일으
켰다.
“당신!……그렇게, 그렇게.”
눈물 때문에 말이 막혔다. 나쓰에는 소리를 죽이고 울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내가 미웠어요?”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엎드려 울었다. 요코의 출생을 알고 난 이후부터 4년간,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나쓰에를 덮쳤다. 게이조는 멍하니 쓰러져 우는 나쓰에를 바
라보고 있었다.
‘다카키와 자기만의 비밀을 어떻게 해서, 언제 나쓰에가 알았을까?’
그것이 불가사의했다.
“그렇게 내가 미웠어요?”
그렇게 말한 나쓰에의 말에 게이조는 어리둥절했다. 요코를 맡아서 10여 년이 지난 지금, 게
이조의 나쓰에에 대한 미움은 수그러들었다. 게이조는 아무 말 않고 나쓰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쓰에는 뿌리치듯이 뒤로 물러나면서 외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지금, 다카키에게 보낼 게이조의 편지를 읽었던 4년 전의 증오와 슬픔이 역력히 나쓰에의
가슴에 되살아났다. 그때의 편지 내용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요코를 사랑하기 때문에 맡은 것은 아니다. 사이시의 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아이를 기르는 나쓰에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사이시의 아이라는 것을 알고 발을 동
동 구르는 나쓰에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이시의 딸 때문에 일생을 헛되게 보냈다고 분하
게 여기는 나쓰에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쓰에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글귀였다.
게이조는 자기의 손을 더러워진 물건처럼 뿌리쳤던 나쓰에의 격한 증오에 접하자, 반사적으
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쓰에의 흰 목덜미에 뚜렷이 남았던 보랏빛 키스마크였다. 그것이 얼마만큼 게이조
를 오랫동안 괴롭혀 왔던가. 보랏빛 키스마크는, 나쓰에와 무라이의 포옹의 모습을 가지각색
으로 상상시켰다. 상상 속에서 그려 보는 아내의 모습은 게이조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새로운 분노가 게이조의 전신을 엄습했다. 분노를 누르고 게이조는 애써 조용히 말했다.
“손대지 말아 달라고 더러운 것처럼 나를 뿌리쳤지만, 나는 너처럼 더럽지는 않다고 생각
해.”
“뭐라고요? 내가 더럽다구요?”
나쓰에는 어깨를 떨었다.
“나쓰에, 진정하고 옛날 일은 생각해 봐. 그래, 당신이 말한 것처럼 요코는 확실히 사이시
의 딸이야. 당신이 그 사실을 어디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사실이야. 나도
루리코의 아버지야. 루리코가 피살된 슬픔이 당신보다 깊었으면 깊었지 얕지는 않았어.”
울어서 눈이 부어 있던 나쓰에의 눈에, 순식간에 새로운 눈물이 솟아 올랐다.
“루리코의 아버지인 내가 왜 사이시의 딸을 길렀는지 알겠어? 루리코가 살해되었을 때, 나
에게는 미운 놈이 세 놈 있었어. 그 중 한 놈은 역시 사이시야. 루리코를 죽인 놈이지. 다음
두 사람은 나쓰에와 무라이야.”
나쓰에는 새파래졌다. 새파랗게 된 얼굴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나에게 말하라고 하면, 루리코를 죽인 것은 이 세 사람이야.”
게이조는 지금이야 말로 확실히 이 사실을 나쓰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아니, 내가 죽였다니요? 그런 지독한…….”
“지독하다니? 그러면 묻겠는데, 루리코가 피살되었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지?”
“…….”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대답할 수 있어? 그날의 일을,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그 무렵에는 쓰기코도 있었어. 내가 출장중에 쓰기코와 도루는
영화를 보러 보내고, 어린 루리코까지 밖으로 내보내고, 당신은 무슨 짓을 하고 있었어? 지
금 여기에서 확실하게 말해봐!”
게이조는 자신이 점차로 난폭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심호흡을 하여 숨을
조절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쓰에를 쏘아보고 있었다.
“대답할 수 없는가?”
대답도 하지 않으며, 사과도 하지 않는 나쓰에에게 게이조는 분노가 치밀었다.
“대답할 수 없겠지. 나의 출장중에 무라이를 끌어들여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어. 알겠어?
네가 나를 한창 배반하고 있을 때, 루리코가 살해되었던 것야. 루리코가 겨우 3살 때의 일이
야. 그 무더운 여름날의 대낮에 밖에 나가 있으면 집안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어머니의 도
리야. 하지만 너는 무라이하고 둘이서만 있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게을리했어. 루리코
에게 말해 보라고 하면 살해된 것은 엄마 탓이라고 할 거야.”
나쓰에는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그날, 루리코가 응접실에 들어왔다. 그것을 밖에서 놀고 있으라고 나는 말했다.’
나쓰에의 얼굴은 한층 더 창백해졌다.
“나에게 말하라면, 범인도 무라이도 너도 같은 죄야. 하지만 당신은 아무래도 루리코에게
미안해 하는 것 같지가 않아. 너는 그 사건 뒤에도 무라이하고……무라이하고…….”
게이조의 목소리가 한층 커지더니 중단되었다. 복도에서 희미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두 사
람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쓰에의 입이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이든지 용서하리라 마음먹고 있었어.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귀여운 여자아이를 얻
어다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은 무라이를 좋아하게 되었지. 당신의 목덜미에서
키스마크를 내가 보아 버렸던 거야.”
나쓰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마디의 변명도 사죄도 하지 않았다.
게이조는 흥분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나쓰에의 양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다.
“너는 나를 몇 번이나 배반했어. 어린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을 다행으로 여기고서 몇 번
이고 무라이와…….”
게이조는 나쓰에의 침묵에 불안해졌다.
‘그런가? 역시 대답할 수 없는 건가?’
나쓰에는 흔들리는 채로 있었다. 가면처럼 움지이지 않는 얼굴에는 이미 눈물도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다오.’
게이조는 재차 나쓰에의 어깨를 흔들었다.
“사이시의 아이를 기르게 되어서, 당신에게 불평할 자격이 있나? 사이시하고 당신은 죄가
같아. 당신도 한패야. 한패의 딸을 기르게 한 것에 무슨 불평이 있을 수 있어?”
게이조는 차차 우울해졌다. 아까부터 했던 말이 그대로 가득히 가슴에 찬 것 같은 무거운
기분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말을 할 만큼 해도 가슴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이만큼 말해도 나쓰에는 무엇이라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 나쓰에는 무라이하고…….’
11년 전 생각을 모두 다 말한 다음에는, 다만 고독만이 남아 있었다.
게이조는 잠자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뻣뻣하게 앉아 있는 나쓰에를 보았다. 16년 동안이
나 부부로 같이 살아온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만큼 말했는데도 서로 통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게이조는 팔짱을 끼고 숲을 보았다. 겨울햇살이 밝게 숲을
비추고 있었다. 밝은 햇살 아래에 추하게 다투는 쓸쓸함을 게이조는 느꼈다.
‘16년의 결혼생활에 도대체 우리 부부는 무엇을 쌓아 올렸던 것인가?’ 도루라는 아들 놈
이 있기는 하지만 조금 찌르면 와르르 소리를 내고 허물어질 것 같은 약한 가정밖에 쌓고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행복한 부부로 보이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여하튼 마
음 밑바닥을 숨김없이 털어 놓은 지금, 얻은 것이라고는 남보다 먼 두 사람이었다는 감정뿐
이다.’
게이조는 서재로 갈려고 일어섰다. 그때, 나쓰에가 휙 하고 게이조를 쳐다 보았다. 두 사람
의 시선이 딱 하고 소리를 낼 것같이 부딪쳤다. 게이조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 순
간, 나쓰에가 손을 짚었다.
“용서해 주세요!”
게이조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나쓰에를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하지만…… 무라이하고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 같은 그러한 일은 한 번도…….”
나쓰에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게이조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
“믿을 수 없어.”
게이조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하지만 나, 정말로 아무것도…….”
나쓰에의 표정은 필사적이었다.
‘그렇다면 그 키스마크는 어떻게 된거야? 유카코를 범한 무라이가 키스만 하고 얌전하게
돌아갈 리가 없어.’
하지만 나쓰에의 필사적인 눈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까,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생각
되어졌다.
“그렇다면 당신의 목덜미에 나타난 키스마크는 어떻게 해서 생긴 거지?”
나쓰에는 약간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채로 우물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어쨌다는 거야?”
“그것뿐이었어요.”
“그것뿐이라니?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게이조는 날카롭게 반문했다.
“키스만 했어요. 무라이가 도야의 요양소에 가기 때문에 인사하러 와서…… 그리고 느닷없
이 목덜미에……. 나는 깜짝 놀라서…… 하지만 무라이 씨는 곧 돌아갔어요.”
나쓰에의 눈빛에서 거짓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랫동안 게이조를 괴롭혔던
의혹이 간단하게 없어질 리도 없었다.
“그게 정말이야?”
게이조는 다짐하듯이 말했다.
“정말이에요.”
‘나쓰에의 말이 정말이라면 나는 무엇 때문에 오랫동안 괴로워했단 말인가? 뭣 때문에 요
코를 기르게 했단 말인가?’
게이조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지는 것을 보자 나쓰에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범인의 아이를 맡아 기르게 할 정도로 나쁜 짓을 하지 않았어요.”
게이조는 잠시 침묵을 하고 있다가 말했다.
“하지만 나쓰에, 당신이 무라이하고 단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루리코가 살해되
었어. 게다가 당신은 육체적인 관계만 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
는데 말이야, 다른 남자와 마음이 통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관계보다 더한 배반이라는 것을
몰랐었나? ”
그때 갑자기 드르륵 하고 미닫이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뒤돌아보니까 도루가 문턱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금 돌아왔니, 도루?”
도루는 아무 말 없이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게이조와 나쓰에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무슨 일이냐, 도루?”
나쓰에의 말에 도루는 미움에 가득찬 시선을 두 사람에게 보냈다. 입술이 실룩실룩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들어와 앉거라.”
도루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지저분한 사람이었는가를 여태껏 알지 못했어요.”
도루는 그렇게 말하고서 나쓰에를 매섭게 노려 보았다. 나쓰에보다도 게이조의 얼굴색이 변
했다.
“지저분하다니? 어머니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냐?”
게이조는 큰소리쳤다.
“지저분하니까 지저분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나의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키스 같은 걸 주
고받다니, 그렇게 지저분한…….”
“그만 두거라!”
게이조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듣고 있었구나.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은 좋지 않은 짓이야, 도루.”
게이조는 애써 별 문제 없는 것처럼 가장했다.
“듣고 있었어요. 그렇게 큰소리라면 밖에까지도 다 들려요. 집에 들어왔더니 아버지가 큰소
리로 어머니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어요.”
도루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나쓰에에게 말했다.
“엄마는 불결해요! 무라이 같은 사람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해도 나는 싫어요! 불
결해요!”
“도루야, 어머니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냐? 말을 삼가하거라.”
게이조는 무섭게 말했다.
“이렇게 지저분한 사람은 나의 어머니가 아니야!”
“잠자코 있어!”
“언론은 자유예요.”
게이조는 일어나서 갑자기 도루의 뺨을 때렸다.
도루는 비틀거리면서,
“맞아 죽어도 말할 거예요!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사람이었기를
바랐어요. 아니, 훌륭하지는 않아도 좋아요. 깨끗한 사람이기를 바랐어요. 아버지는 지독한
사람이에요.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으면 헤어지면 되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는 비겁하게 아무
말 없이 요코를 맡아서…… 남자답지 않아요. 그렇게 큰소리로 고함을 치고 있었으면서 지
금 벌써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어요. ……그렇게 순식간에 좋게 될 사이라면, 어째
서…… 어째서 요코를 떠맡았어요?”
맞아 죽어도 좋다고 하던 도루의 기백에 게이조도 나쓰에도 아무 말 않고 있었다.
“도루야, 너는 깊은 사정을 모른다. 방 밖에서 듣고 있어서 잘못 들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여하튼 좀 앉거라. 앉아서 차분히 들어 보아라. 아버지도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오해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어머니는 불결하지 않아. 아무런 일도 없었다. 잘못 생각해서는
안된다.”
게이조는 겸손한 태도로 어떻게든 이 사태를 모면하려 애썼다. 나쓰에는 얼굴을 들 수가 없
었다.
“그런 말을 나는 믿지 않습니다. 여하튼 요코가 범인의 아이라는 것은, 절대로 잘못 들은
것이 아니예요. 그렇지요, 아버지?”
도루는 서 있는 채로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게이조는 나쓰에의 옆에 말없이 앉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요코에 관한 일은, 절대로 내가 잘못 듣지 않았어요.”
하고 도루가 다시 말했다.
“요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이제 잠자코 있거라. 요코가 들으면 큰일일테니까.”
“아버지, 들어서 큰일 날 일을 왜 하셨어요? 이 집에서 자라서 크게 된 요코가, 만일 이 사
실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요? 요코는 이 집에 있을 수 없어요. 죽을지도 몰라요”
도루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모두 함께 귀여워해 주어야 하지 않겠니? 자, 이제부터는 아무 말 말고 있거
라.”
“아버지는 제멋대로예요…… 어른들은 모두 제멋대로예요. 아버지, 아무리 귀여움을 받아도
어느 집에서 자란 것보다 이 집에서 자란 것이 요코에게는 가장 불행한 것이에요. 무슨 권
리가 있어서 요코를 불행하게 하는 거예요? 나도 이러한 불행의 종자가 뿌려져 있는 집이
싫어요.”
“알았다. 아버지가 나빴다.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아버지가 요코를 귀여워하며 길러 주겠어요?”
“그러마.”
“어머니는요?”
나쓰에는 소매자락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대학을 나오면 요코하고 결혼하겠어요.”
“바보 같은 놈!”
게이조는 당황했다.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일이었다.
“바보라도 좋아요. 요코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괴로운 집에 왔어요. 요코가 불쌍해요.
어머니도 외간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역시 어머니는 나빠요.”
도루는 나쓰에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알았다.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엄한 게이조의 어조에 도루는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도루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버지는 모르고 있어요. 아버지도 나빠요. 어머니에게 복수하고 싶으면 해도 좋아요. 하
지만 그것 때문에 한 인간의 운명을 불행하게 하다니, 그렇게 인간을 소중히 하지 않는 사
고방식에 나는 화가 나요.”
“알았다. 아버지가 나빴다.”
“아니 몰라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좋아진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니예요. 아버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예요. 요코는 어떻게 되겠어요? 이 집에서 자라지 않으면 안되었
던 요코는…….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나는 요코하고 결혼할 거예요. 아버지, 방금 요코를
귀여워해 준다고 하셨는데, 바로 반대했어요. 그런 게 아버지가 귀여워해 준다는 것인가
요?”
도루는 흥분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무단입실 금지.’
도루의 방문에 이런 쪽지가 붙어 있었다. 게이조와 나쓰에를 몹시 책망했던 다음날부터였다.
도루는 정말로 어느 누구하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점점 말수가 적어져 가는 도
루였다. 거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도루는 어쩐지 요코를 보는 것이 낯간지럽게 생각
되었다. 어째서 그런지 도루 자신도 몰랐다. 여하튼 지금까지 요코가 친 누이동생은 아니라
고 알고 있었지만 여동생처럼 귀여워 했었다. 그것이 갑자기 여동생과 같은 귀여움은 아니
고 더 비밀스러운 귀여움으로 된 것이었다.
목욕을 끝내고 나오는 요코가 도루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돌려
피했던 것도 도루 자신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불안정의 상태로 있었을 때,
도루가 비밀을 알아 버렸던 것이다. 그때까지 도루에게 있어서 자신의 가정은 자랑스러웠다.
병원장이신 온유하신 아버지, 아름답고 상냥한 어머니, 밝고 영리한 여동생, 그리고 생도 회
장인 도루 자신, 더 말할 나위없는 가정이었다. 그러나 한 껍질만 벗기면 비열하고 질투심이
깊은 아버지이고, 부정한 어머니이고, 살인범의 딸인 여동생이었다는 사실에 도루는 깊은 상
처를 받았다.
도루는 사람이 변한 것처럼 음침해졌다. 게이조도 나쓰에도 그러한 도루를 조마조마해 하면
서 지켜볼 뿐이고, 특히 나쓰에는 도루가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
“도루, 밥 먹어라”
하고, 두려워하면서 말을 걸어도 도루는 매서운 시선으로 한 번 슬쩍 볼 뿐이었다. 게이조가
서로 잘 이야기 해보려고 해도, 도루는 공부한다는 구실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의 도루를 서투르게 질책해서 집이라도 나가 버리면 큰일이기 때문에 게이조는
강한 태도로 나올 수도 없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도루에 관한 일로 의논을 하고 싶다는 편지가 왔다. 그날 밤 게이조는 자
기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후회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사이시의 아이를 나쓰에에게 기르게 하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그때 나는
나쓰에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용서를 안한 탓으로 누구나가 다 불행하게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복수하려고 하여 가장 복수당한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렇다. 요코를
사랑할 수 없는 괴로움, 그 비밀을 아내에게 숨기고 있는 괴로움, 다만 괴로움뿐이었다. 그
것뿐만이 아니다. 도루에게도 모든 것이 알려져 버린 것이다. 더욱이 도루는 요코하고 결혼
을 하겠다고 한다.’
게이조는 무서워져서 성서의 한 구절을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게이조는 도루가 도대체 어떠한 일을 했던 것인가 하고, 학교에서 온 편지를 생각하
면서 그날 밤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정말 곤란한 일이 생겨서요.”
나쓰에가 도루의 학교에 가니까 선생님은 사정을 설명했다.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1~2등을
다투었던 도루가, 3학기 때는 어느 과목도 시험을 백지로 제출했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도루를 불러와서,
“어쩌된 일이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고 물었더니,
“시험 답안지를 쓰지 않아도 나의 실력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하고, 무슨 사정이 있느냐고 물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바보 같은 생각 말고 추가 시험을 치거라. 금년 졸업생 총대표는 쓰지구치로 결정되어 있
기 때문이야.”
그러자 도루는,
“시시하게 총대표라니……. ”
하며 내뱉듯이 말하고,
“우리집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우등생이었다고 하던데요.”
하며 냉소했다고 했다.
“뭐, 대충 이러한 일인데요. 무언가 짐작이 가는 일이라도 없습니까?”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저희들에게는 별로 이렇다고 짐작이 갈 만한 이유가 없어요.”
나쓰에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겠지요. 댁과 같은 가정에 무슨 사정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요.”
중년의 선생님은 나쓰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쓰에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게이조는 도루에게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지 더욱더 자신이
없어졌다. 도루가 갖고 있는 마음의 상처의 깊이를 알고 있는 지금은 책망할 수도, 사죄할
수도 없었다. 점차 집안은 침울해져 갔다. 그 가운데 요코만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코
도 게이조와 나쓰에가 친부모가 아니고, 도루가 친오빠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요코 나름대
로 상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요코는 때때로,
‘나의 친아버지랑, 친어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나를 길러준 아버지, 어머니를 소중히 여기자. 남의 자식인 나에게 밥을 먹여 주고, 옷을
입혀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고, 솔직하게 감사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의붓자식에 대한 학대 이야기를 읽으면,
나쓰에와는 전혀 다른 무서운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때마다 요코는 나쓰에를 상냥하다고 생
각했다. 요코는 도루가 아무리 불쾌하게 해도 조마조마해 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도루가
들어도 듣지 않아도 식사 때에는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나, 읽었던 책에 관해서 이야기했
다.
“응,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하고, 거리낌이 없이 말을 거는 요코에게 도루는 상냥한 표정으로 한두 마디씩 대답을 했다.
그러나 나쓰에와 게이조에게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연히 게이조도 나쓰에도 요코를 통해서 도루하고 이야기하는 일이 많아지고, 요코의 존재
만이 쓰지구치집의 등불이 되어 갔다.
드디어 도루는 고등학교 입시에도 백지를 제출하고, 게이조와 나쓰에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
해 버렸다.
제29장 답 사
제29장
답 사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나서부터 도루는 차차 명랑해졌다.
도루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요코에게 마음속으로 은근히 사과하고 싶었던 것
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과거를 이러한 형태로라도 요코에게 사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
었던 것이다.
게이조와 나쓰에의 낙담을 보고 도루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것으로 일
단 벌을 받은 것으로 되었다고 도루는 생각했다. 이러한 일을 요코가 안다면 틀림없이 용서
해 줄 것이라고 도루는 생각했다.
‘무단 입실 금지’라는 종이 쪽지도 떼어 버렸다. 도루는 요코를 데리고 아무 데고 곧잘
다니게 되었다. 이전에는 별로 다니지 않았던 다쓰코의 집에도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 도루
의 눈이 무서웠기 때문에 나쓰에는 요코에게 상냥하게 대해 주었다. 하지만 요코를 마음속
으로 사랑하는 것은 역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요코가 루리코를 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
나 요코의 아버지가 루리코를 살해했다고 하는 그 사실로 해서 나쓰에의 본능적인 모성애가
요코를 미워하게 했다. 특히, 도루가 요코를 귀여워하고 있는 것도, ‘나는 요코하고 결혼하
겠다.’고 했던 도루의 말이 생각나서 나쓰에는 겁이 났다.
‘언젠가 반드시 요코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쓰에는 마음속 깊이 그렇게 결심했다.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든 요코와 도루가 결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나쓰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원수의 피를 쓰지구치 가
문에 전하게 할 수는 없었다. 사이시의 손자가 자기들의 손자로 되는 현실은 있어서는 안되
었다.
다음해, 도루는 별로 수험공부도 하지 않고 도립 아사히카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나쓰에에
게도 점차 상냥해졌고 어머니날에는 브로치를 선물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권유하기도 했다.
“어머니하고 함께 가면 용돈이 남게 되니까요.”
도루는 그렇게 말하고, 나쓰에에게 가자고 졸랐다. 자기보다도 키가 큰 도루와 어깨를 나란
히 하고 밖에서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나쓰에는 즐거웠다.
“아버지, 저 역시 의사가 될까봐요.”
화학을 하겠다고 했던 도루가 그렇게 변하여 홋카이도 대학에 입학한 지 1년이 지났다. 요
코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3월의 일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요코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나쓰에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키가 큰 요코는, 숱이 많은 머리카
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영화에서 본 클레오파트라처럼 앞머리를 잘라, 그 검은 머리가
요코의 얼굴을 흰꽃과 같이 깨끗하게 보이게 했다.
“어머니, 졸업식은 20일로 결정되었어요.”
“어머, 그래?”
“그런데, 금년 답사는 여자가 한대요. 제가 그 역할을 맡도록 부탁받았어요.”
“그래, 잘됐구나.”
나쓰에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요코의 세일러복의 모습이 복도로
사라지자 나쓰에는 입술을 깨물었다.
‘요코가 답사를 하다니…….’
나쓰에는 도루의 중학교 졸업 때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루도 졸업생의 대표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루는 학년 말 시험에 백지를 제출해서, 대표는커녕 고등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유는 요코가 루리코를 살해한 범인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던 충
격 때문이었다.
도루가 받았던 충격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신뢰가 빗나간 쪽에 더 큰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나쓰에는 제멋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적당히 잊고 있었다. 나쓰에에게 말하라고 하면
요코 때문에 도루가 졸업생 대표의 영광을 잃어 버렸다고 말할 것이다. 당사자인 요코가 답
사를 한다는 그 화려한 일은 분수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나쓰에는 자기들이 사이시
의 딸에게 패배한 것 같아서 분했다.
“여보, 요코가 졸업식에서 답사를 한다고 해요.”
저녁식사 때 나쓰에는 기쁜 듯이 게이조에게 알렸다.
“허! 그것 참 잘됐군. 더구나 요코라면 당연하잖아.”
게이조는 싱글벙글했다.
“어머니, 와주시는 거죠?”
“당연하지 않니? 요코의 장한 모습을 보지 않고서 뭘하겠어? 몇 일이더라, 졸업식이?”
“20일이에요.”
요코가 기쁜 듯이 말했다.
“가야가사키에 있는 도루에게도 알려야겠군.”
대학생활 1년을 끝마친 도루는 지금 가야가사키의 외할아버지 집에 놀러가 있었다.
“도루도 정말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쓰에는 게이조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 화가 치밀었
다. 도루가 졸업 시험에 백지를 제출했던 중학교 졸업식 때의 일을 남편은 잊고 있는 것일
까, 하고 나쓰에는 게이조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도 와 주시는 거죠?”
하는 요코의 말에,
“20일이지? 꼭 가고 싶다만 그날은 회의가 있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구나.”
하며 달력을 쳐다보는 게이조의 시선이 흰 스웨터를 입은 요코의 풍만한 가슴쪽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나쓰에는 보았다.
한순간이라고는 하지만 게이조의 눈 속에는 나쓰에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이 한층 요코를 용서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답사를 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했다고 해도 누가 나를 책망할
수 있겠는가? 자기의 귀여운 아이를 죽인 원수의 딸을 아무도 기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요
코를 기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요즈음은 답사 때 어떤 말을 하니?”
게이조는 식사를 끝내고, 요코에게 물었다.
“글쎄요, 그다지 마음에 남는 것은 없어요.”
“요코는 무엇을 말할 작정이니?”
게이조는 요코에게 상냥했다. 4년 전 도루에게,
“이 세상에 우리집처럼 요코에게 있어서 있기 어려운 집은 없다.”
라고 책망당했을 때, 게이조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너의 원수을 사랑해라.’라는 말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은 머리에서만 알고 있을 뿐이고, 어떻게든 행동으로는 옮겨지지 않
았다.
한때 게이조는 배에서 만났던 선교사를 그리워한 적이 있었다. 하다못해 교회에 가서 설교
를 들어볼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 하고 좀처럼 젊은 시절처럼 다른 세
계에 뛰어드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다만 혼자서 서재에 틀어박혀 성서를 펴는 일이 많아
졌다. 하지만 요코에게 상냥해진 것은 다만 성서를 읽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서를 읽는
것만으로는 게이조의 마음속에 아직 신앙의 성과는 없었다. 루리코가 살해되고 16년이라는
긴 세월이 요코에 대한 감정에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
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알려지고 싶지 않은 일이었는데, 미워하기에는 요
코가 너무나 아름답게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잠깐 위를 보고 웃을 때의 희고 매끈매끈한 목을 보기만 해도 게이조는 은근히 평온함을 잃
는 일조차 있었다. 한칸 반 정도의 좁은 세면장에서,
“어머, 아빠, 흰머리가 있어요.”
라고 말하며 흰머리를 뽑아줄 때 요코의 풍만한 가슴이 게이조에게 살짝 닿으면, 껴안고 싶
어지는 유혹을 견디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연히 게이조는 요코에게 상냥하게 되었지만, 자기 자신의 상냥함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게이조는 때때로,
‘나라는 놈은 어떠한 인간일까? 사이시의 딸에게 나는 무슨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인가? 잠
시라도 나는 요코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단 말인가? 나는 결국 요코를 진실로 깨끗하게 사랑
할 수 없는 인간이란 말인가?’
하고, 절망적으로 되는 수도 있었다.
“글쎄요, 답사를 하라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중학교 때는 시험공부만 하다 시시하고 보잘
것없이 보냈다고요.”
요코는 게이조에게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나쓰에도 웃었다. 웃으면서 나쓰에는 어떻게 하면
요코에게 답사를 하지 못하게 할까를 생각했다.
‘그렇다.’
나쓰에는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도루가 없는 것이 나쓰에를 대담하게 했다. 도루가 있었다면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하기
어려운 일을 나쓰에는 할 작정이었다.
‘만일 내가 한 일을 요코가 알아서 요코에게 책망당한다면, 나는 말할 것이다. 요코가 누구
의 딸인가를…….’
“요코, 졸업식에는 세일러복을 입고 가거라.”
나쓰에는 기분좋은 목소리로 요코에게 말했다.
드디어 요코의 졸업식 날 아침이 되었다. 요코는 지난 밤 잘 써 놓아둔 졸업식 답사지를 보
랏빛 보자기에 싸서 가지고 나갔다.
“뒤따라갈 테니까 잘해라.”
나쓰에는 문밖에까지 나와서 전송을 했다. 커다란 함박눈이 너풀너풀 내려 오는 하늘 아래
요코는 뒤돌아 보면서 손을 높이 들었다. 검은 오버가 조금 짧게 보였다. 나쓰에도 손을 흔
들었다. 누가 보아도 온화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오늘은 용감한 요코도 울음을 터트릴 것이다.’
나쓰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파란 무늬에 엷은 크림색의 큼직한 그림무늬가 있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쓰에는 화장대
앞에 섰다.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하자 눈언저리에도, 입주위에도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지
만 작은 주름이 있었다. 어느모로 보아도 32~3세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치사도 들었으나, 40을 넘은 나쓰에에게는 흐뭇하게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젊어 보인다고 해도, 이제 20대로 잘못 보일 수는 없다.’
요즘 나쓰에는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요코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의식하게 되었다. 15세의
요코에게 42세의 자신을 비교하는 우스꽝스러움을 나쓰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하고 종종 거울에게 물으면,
“그것은 당신입니다.”
라는 대답에 만족하고 있던 백설공주의 계모가 이윽고는,
“그것은 당신이 아니고 백설공주예요.”
라고 하는 거울의 소리를 들어야 했던 분함을 나쓰에는 마음속 깊이 사무쳐서 잘 알 수 있
었다.
요코를 데리고 길을 걸으면, 2~3년 전까지는 나쓰에에게 쏠렸던 시선이, 지금에 와서는 거의
요코에게 쏠리게 되었다. 생생하고 표정이 풍부한, 타는 듯한 요코의 눈은 한눈에 사람을 끌
어 당겼다. 그러나 오늘은 그 도도한 나쓰에도 자신의 얼굴 모양과 몸매보다도 이제부터 일
어날 사건의 그 결과가 기대되어서 거울 앞을 매우 빨리 떠났다.
나쓰에가 학교에 도착하자 졸업식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내빈의 축사가 차례차례로 계속
되어도 나쓰에는 건성으로 들었다. 조금 마음이 안정되자, 나쓰에는 요코를 찾아서 식장 안
을 둘러 보았다. 내빈석과 학부형석이 양측에 있고, 학생들은 보다 높은 곳에 앉아 있었다.
요코는 앞에서부터 둘째 줄의 중앙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요코의 모습을 보자 나
쓰에의 심장은 더 뛰기 시작했다.
‘요코가 나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릴까?’
정신이 들자 이미 축사가 끝날 무렵이었다.
“답사, 제13회 졸업생 대표 쓰지구치 요코.”
깡마른 체구의 교감이 호명했다.
“네.”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요코가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시작되었군.’
격렬한 심장의 고동에 나쓰에는 조금 숨이 가팠다.
요코가 내빈석에 인사를 하고 선생님이 계신 곳에도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서 요코
는 천천히 답사 종이를 폈다. 아름다운 요코를 향해 내빈석은 조용하게 웅성거리기 시작했
다. 그러나 곧 다시 장내는 잠잠해졌다. 누군가의 작은 헛기침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요
코는 편 답사지를 든 채로 왠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요코를 바라보고 있는 나쓰에는 현
기증이 날 것 같았다. 식장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요코가 천천히 답사지를 원래대로
접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어떻게 된거야?”
나쓰에의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났다. 교감선생님이 당황해서 일어서려는 모습이 보였다.
나쓰에도 일어설 뻔했다. 장내는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답사는 졸업식의 꽃이었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답사지를 접는다는 것은 큰 일이었다. 요코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너무 긴장한 것 아냐?”
“아니,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는 것 같아. 누군가에게 몰래 바꿔치기 당한 게 아닐까?”
인사를 한 요코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힐끗 보고, 침착한 발걸음으로 단상에 올라갔다. 물
론 정해진 행동은 아니었다. 당황해서 달려 들려고 한 교감선생님은, 옆자리 선생님에게 제
지당하여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단상에 오른 요코를 보고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장내는
조용하고 요코에게 호기심어린 시선이 쏠려 있었다. 요코는 거기에서 또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여러분, 단상에 올라 말씀드리는 것이 대단히 실례인 줄 알지만 졸업생 일동을 대표해서
답사를 하겠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나쓰에는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 작정인가?’
“실은 방금 답사를 읽으려고 생각했더니, 그것은 백지였습니다.”
요코는 답사지를 높이 쳐들었다.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렸다.
“어디에서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떻든 저의 부주의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내빈 여러분, 선생님, 재학생 여러분 그리고 오늘 경사스러운 출발을 하
시는 졸업생 여러분, 나의 부주의를 아무쪼록 용서하여 주십시오.”
요코는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여러분, 저의 부주의를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로서도 며칠이 걸려서 써 놓았던 답사
가, 설마 백지로 되어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방금 조금 놀랐던 것
입니다.”
장내는 아주 조용하고 긴장된 분위기로 꽉 차 있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인생에는 몇 번이고 있다는 것을 배운 것 같
은 느낌이 듭니다.”
요코의 말에 나쓰에는 입술을 깨물었다. 요코는 말을 계속했다.
“자신의 예정대로 되지 않는 경우에는, 예정했던 일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저는
지금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멋대로입니다만, 방금 예정 외의 행동을 취했습니다. 선
생님께서는 구름 위에는 언제나 태양이 빛나고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조금 곤란
한 일을 당하면, 곧 허둥지둥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고, 울상을 짓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구름이 끼어 있을 뿐인 것으로, 그 구름이 걷히면 태양은 다시 빛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우리들은 얼마나 침착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오늘 저는 그것을 배울 수가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중학을 졸업하면 진학을 하는 사람, 취직하는
사람의 구별이야 있겠지만, 한 발 어른의 세계에 다가가는 일은 모두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
다. 어른들 앞에서 실례인 줄 압니다만, 어른들 중에는 심술궂은 사람도 있지 않을까, 생각
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심술쟁이에게 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심술궂은 일
을 당해도 괴로워하지 않는 패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울리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
서 운다면 지는 것입니다. 그때야 말로 싱긋 웃고 살아갈 만큼의 힘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
다. 이러한 일 하나만이라도 우리들 졸업생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면, 오늘 축사
를 해주신 분들, 선생님들, 또 사이좋게 지냈던 여러분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 아
닐까, 생각합니다. 횡성수설로서 쓸데없는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으로서 제13회 졸업생 일
동을 대표해서 답사를 가름하겠습니다.”
요코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났다. 나쓰에는 현기증을 느꼈다. 박
수 세례를 받는 요코가 미웠다. 사람들은 요코가 누군가로부터 악질적인 장난을 당한 것을
동정했다. 침착하게, 맑은 목소리로 답사를 한 요코를 몹시 기특하게 보는 것 같았다.
답사에 대하여 박수를 치치 않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였다. 그러나 지금은 교사도 학부형
도 학생들도 요코에 대하여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장내에는 넘치는 하나의 감동이 물결치고 있었다. 졸업식이 갖는 감상 탓도 있었겠지만, 어
떻든 누군가의 악질적인 농간에도 굴하지 않았던 요코를 사람들은 칭찬하고 싶어 했다. 그
러나 박수를 받으면서 단을 내려오는 요코의 마음은 복잡했다. 직감적으로 요코는 나쓰에의
소행이라고 느꼈다. 급우들이 몰래 바꿔치기할 리는 없었다. 요코는 학교에 와서 한 번도 손
에서 답사지를 싼 봉투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러러 보면 소중한 우리 스승의 은혜.”
여학생들 중에는 소리를 내서 우는 학생도 있었고 킥킥 웃고 있는 남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요코는 노래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다만 슬프다는 감정만이 아닌, 복잡한 심정이었다.
‘친어머니라면 이러한 일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깊고 잔잔한 외로움이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요코는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서 재학생의 박수를 받으면서 급우들과 함께
퇴장하는 참이었다.
나쓰에는 요코의 고개 숙인 모습을 주시하면서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
요코가 세면장에 있는 동안에 살짝 답사 봉투를 바꿔치기 해 놓았었다. 나쓰에는 사이시의
딸에게 도루가 패배하는 것을 승복할 수 없었다.
‘절대로 답사를 읽게 해서는 안된다.’
라고 하는, 뭔가에 홀린 것 같은 생각을 나쓰에는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요코는 모든 사람 앞에서 백지를 펴겠지. 읽어야 할 글자는 한 자도 없을 것이다. 요코는
확실히 창백하게 되어 울게 되겠지. 경사스러운 장소에서 수치를 당한 요코는, 아주 풀이 죽
어 버려서 고교 입시에도 실패할지 모른다. 백지로 바꿔치기한 것을 급우의 질투 때문이라
고 생각하겠지. 마음에 상처를 입은 요코는 당분간 우울해 하다가 끝까지 고민하게 될 거
야.’
나쓰에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요코는 조금도 곤란한 기색없이 사람들의 동정표를 얻
었다.
나쓰에의 좌석 뒤에서도,
“침착하고 훌륭한 아가씨야.”
“심술궂은 짓을 한 사람이 누군지 참으로 얄밉군.”
“우리들은 조금도 흉내를 낼 수 없을 거야.”
라는 등 속삭이는 소리가 났다.
나쓰에는 사은회에 나갈 예정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은회에서 사람들로부터 요코
가 찬사를 듣는 것은 당연했다. 집에 돌아오는 도중에도 나쓰에는 비참했다. 요코에게 우롱
당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난처해서 울 거라고 생각했던 요코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기에게 할당된 역할을 충분히 연습한 배우와 같이 참으로 훌륭하고 침착하게 임무를 완수
했던 것이다.
‘요코는 나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나쓰에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요코가 돌아오면 너무 훌륭했다고 칭찬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만해도 나쓰에는 비참했다. 집에 돌아오니 한꺼번에 피곤이 몰려
와 나쓰에는 화장대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리 심술궂은 일을 당해도 어려워하지 않겠다는 것은 나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닌
가?’
나쓰에는 화가 난 기분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했다. 피곤한 얼굴이 갑자기 몹시 늙어
보였다. 나쓰에는 한층 불쾌해졌다.
나쓰에는 자기가 한 일에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오히려 살해된 루리코의 복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들었던 것이다. 나쓰에는 자기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에 공연히 화가
났다.
‘좋다. 정말로 그 아이가 평생 괴로운 얼굴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가 어떤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괴로움을 당하게 해보이겠다.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다. 그 아이의 출생을 알
고 있는 한…….’
하지만 나쓰에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요코가 어디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를.
요코는 집 앞까지 왔지만 집에 들어갈 기분이 아니었다. 졸업 증서도 통지표도 나쓰에에게
보여줄 기분이 나지 않았다. 요코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봄볕에 부드러워진 눈에 발이 파 묻
혔다. 요코는 그루터기 위에 앉았다.
‘어머니는 왜 나에게 그런 짓을 했을까? 아무리 얻어온 아이라 하더라도, 답사를 읽으면
듣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않는가?’
요코는 나쓰에의 기분을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한 일이 아닐 수도 있잖아. 그 장면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나쓰에 외에는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았기 때문
에 바꿔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기뻐하는 것일까? 이 정도로 지독한 일을 하실
어머니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문득 요코는 소학교 일학년 때 나쓰에에게 목을 졸리었던 일을 생각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의 자식일까? 어쩌면 어머니가 미워하는 사람의 아이일는지도 몰라.’
요코는 자신의 친부모에 관한 일을 상상해 보았다. 어떤 사람이 나쓰에에게 미움을 산 사람
인가, 하고 요코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의 친어머니는 지금 어머니하고 라이벌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나를 낳은 어머니
에게 애인을 빼앗긴 것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어떻게 해서 그 라이벌의 아이가 쓰지구치집에 데려와질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
면, 그 상상은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아아, 어쩌면 나는 아버지 애인의 아이일는지도 모른다. 아, 싫어. 남의 부인을 괴롭히는
엄마가 나의 친엄마라는 것이 싫어.’
요코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엄마가 싫어하는 사람의 딸일 거야. 무슨 사정으로 어머니가 나를 길
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오늘과 같은 일을 하시다니……. 그렇다면 나는 모
르는 일이라도 어머니에게는 상당히 미안한 일이군. 어머니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
었겠지. 뭔가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원망해서는 안돼.’
남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요코의 타고난 성품이었다.
‘게다가 나를 낳아 준 어머니가 그런 좋지 않은 일을 했을 리는 없다. 나를 낳아 준 어머
니가 만약 이러한 일을 한다면 슬픈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은걸 뭐.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
도 비뚤어지지 않는다. 이런 일 정도로 사람을 원망하고, 나의 마음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
다.’
요코는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개운해졌다.
제30장 지시마낙엽송
제30장
지시마낙엽송
요코는 고등학교 1학년, 도루는 북해도 대학 2학년이 되었다. 도루가 삿포로에 간 이후로 집
안은 묘하게 음산했다.
나쓰에는 언제나 집안을 말끔히 정돈하고, 복도도 미끄러져 넘어질 정도로 정성을 다하여
닦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사는 기분이 나지 않았다.
특히 게이조의 귀가가 늦어질 때, 나쓰에와 요코 두 사람만이 식사를 하게 되면 나쓰에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탁은 매일 풀이 빳빳한 상보가 갈아 씌워져 있고, 식탁 위에는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따
뜻하게 데워진 접시에 두터운 스테이크가 놓여 있고, 그 옆에 마요네즈를 얹은 아스파라거
스가 곁들여져 있었다.
수프 접시에는 스튜가 김을 무럭무럭 내고 있고, 식사 후에 먹을 사과가 모양 좋게 깎여 접
시에 올려져 있었다. 더할 나위 없는 식탁이었다.
그럼에도 요코는 묘하게 으스스한 것을 느꼈다. 전혀 말이 없는 나쓰에와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하면서 요코는 애써 화제를 찾아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나쓰에는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머니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내가 싫은 것일까?’
대담한 요코도 나쓰에와 단둘이 식사할 때는 할 말을 잊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밝게 살고 싶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법인데, 어머니때문에 어둡게
살아갈 필요는 없어.’
요즘 요코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다쓰코의 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다쓰코의 집은 어릴 때
보았을 때와 조금도 변함없이 정다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다쓰코는 별로 다정하게 대하는
것도 없었다. 집에 들어가면 그저 따뜻한 눈짓으로 맞이할 뿐이었다.
“어서 오너라.”
라는 말조차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다쓰코 아주머니는 무용으로 단련되었기 때문에, 몸 전체로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을 거야.
입으로 전하는 것보다 몸 전체로 감정을 전한다는 것이 더욱 아름다운 일인지도 몰라.’
요코는 미묘하게 변하는 다쓰코의 얼굴을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춤추고 있는 동안은 말을 걸 수도 가깝게 대할 수도 없는 엄숙함이 있어서 다쓰코의 몸 주
위에는 차갑다고 해야 좋을 정도의 분위기가 감도는 적도 있었다. 그날도 요코는 학교에서
돌아와서 다쓰코의 집에 들렀다.
요 몇 년 동안 단골손님이었던 구로에는 요코의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었다.
소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선생님으로 요코의 눈에는 상당히 나이들어 보였지만 구로에
는 아직 서른 살 전의 독신이었다.
구로에는,
“나는 다쓰코 씨보다 좋은 여성이 나타나면 결혼하겠어요.”
라고 항상 말했다.
다쓰코는 싫은 얼굴도 기쁜 얼굴도 하지 않고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다쓰코 씨하고 결혼하면 되잖아.”
하고 누군가가 말하면,
“아니, 다쓰코 씨보다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야 결혼하겠어.”
라고 구로에는 그렇게 큰소리쳤다. 그러한 구로에가 요코에게 말했다.
“가을 전람회에 요코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어때, 모델이 되어 주겠니?”
요코는 모델이 되는 것보다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편이 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로에는 모델이 되어 달라고 졸랐다. 그러한 사실을 나쓰에는 다쓰코의 전화로 알
았다. 밤에 나쓰에는 게이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구로에 선생은 아직 독신이지요? 여자아이 혼자 보낼 수는 없어요.”
하고 반대했는데,
“물론이야. 요코에게 모델 같은 것을 절대로 시키지 않겠어.”
하고 게이조가 강경히 말하는 것을 듣자,
“하지만 구로에 선생은 좋은 분이에요. 요코의 고등학교 선생님이기도 해서 딱 잘라서 거
절할 수도 없어요.”
하고 갑자기 나쓰에는 요코가 모델이 되는 것에 찬성했다.
“아니, 안돼. 요코는 아직 학생이니까. 요전에도 고등학교 선생이 제자에게 아이를 낳게 하
는 사건이 있었잖아.”
게이조는 불쾌한 듯 말했다.
“하지만 구로에 선생님의 댁에는 양친도 함께 기거하시고, 아틀리에도 거실 바로 옆에 있
다고 해요. 게다가 옷을 벗어야 할 리는 물론 없을 테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다쓰코가
말했어요.”
“그러나 일부러 그 선생을 위해서 우리 요코가 모델이 될 필요는 없잖아.”
게이조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문득 나쓰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어머, 당신 질투하고 계세요?”
하고 냉소했다.
“어째서? 내가 질투할 이유라도 있어?”
게이조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나쓰에의 예민한 눈치에 움찔했다.
작년 여름의 일이었다. 토요일 오후, 여느 때보다도 빨리 돌아와 보니 집안이 조용했다. 세
탁기 돌아가는 소리만이 웅웅거리며 나고 있었다. 거실로 들어가려고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게이조는 갑자기 멈춰섰다. 속옷 하나만을 걸친 모습으로 요코가 긴 의자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세탁기의 회전음 때문에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짧은 슈미즈만을 입은 채로 다리를 꼬고 있었기 때문에 드러난 넓적다리가 게이조의 눈에
띄었다. 발목이 가늘고 날씬하게 뻗은 다리가, 넓적다리 부근에서는 둥글고 희게 살이 쪄 있
었다. 게이조는 그 넓적다리로부터 시선을 돌리려 해도, 돌릴 수가 없었다. 그 피부에 직접
닿은 것 같은 전율이 온몸에 퍼져서 게이조는 그대로 서재로 올라가 버렸던 것이다.
그후 그때의 요코의 모습이 생각나서 게이조는 마음에 가책을 받았다. 그러나 남 모르게 즐
겁기도 했다. 언젠가 꿈속에서 안고 있던 나쓰에가 점점 가늘어져 갔다. 놀라서,
“나쓰에, 나쓰에.”
하고 외치자 다시 원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얼굴을 들여다보니까, 그것은 나쓰에가 아니고 요코였다.
“당신, 질투하고 계세요?”
하고, 방금 나쓰에에게서 비웃음을 당하자, 긴의자에서 속옷만 걸치고 있는 모습으로 발을
꼬고 있던 요코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게이조는 깨달았다.
확실히 게이조는 구로에라는 교사를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델 이야기는 원래 요코 자신도 내키지 않았고, 게이조가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그만
두었다.
나쓰에는 요코가 모델이 되기를 부탁받았던 일도, 요코의 아름다움이 다쓰코의 거실에서 종
종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요코가 다쓰코의 집에 가는 일조차도 불
쾌했다.
어느 날 저녁 식사가 끝나자,
“요코, 다쓰코 씨의 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니?”
나쓰에는 정색한 어조가 되었다.
“좋아요.”
요코는 의아한 듯이 나쓰에를 보았다.
“좋아? 단정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니?”
“아니요, 조금도.”
“어머, 요코는 조금도 지저분한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구나. 응접실에 지저분하게 사람들
이 모여 있는 것에도 지저분한 느낌이 들지 않니?”
“아니요, 예의바른 사람들은 아니지만 지저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만약 우리 집에 저렇게 항상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뒹굴기도 하고, 잠을
자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
나쓰에는 얼굴을 찡그렸다. 요코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쓰지구치 집 거실에 그 사람들이 모여 모두 얌전하고 예의바르게 앉아 있는 것을 상상하니
생각만해도 우스웠다.
나쓰에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성미가 아니었다. 다쓰코는 사람을 충분히 편안하게 해주
면서 자신의 마음 속에까지는 발을 딛지 못하게 하는 절도가 있었다.
결코 나쓰에가 말하는 단정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다쓰코 씨의 집에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지? 요코도 이제 슬슬 남자들의 눈에 띌 나이가 된
데다가, 어머니의 친구들 중에는 그 나이 정도에 시집간 사람들도 있는걸. 이제 너는 어린
아이가 아니야.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는 것을 삼가하거라.”
요코는 나쓰에의 말에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좋은 분들이세요.”
“나는 싫어. 남의 집인지, 자기 집인지도 구별 못하는 예의를 가진 사람들이지 않니? 구로
에 선생도 그래. 언제나 짝도 맞지 않는 게다를 신고, 스웨터 차림이지? 남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의 모습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요코는 그러한 구로에가 더 좋았다.
“게다가 식사 때도 개의치 않고 남아 있지? 다쓰코가 손님들의 응석을 받아 주니까 그런
거야.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언제나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하게 하는 것은 말도 안돼.”
여하튼 요코가 다쓰코의 집에 가는 것이 나쓰에는 싫었다.
그 이후 요코는 다쓰코의 집에 가는 횟수를 줄였다. 다쓰코를 만나지 않을 때면 요코는 때
때로 자신의 친부모에 관한 일을 상상하게 되었다.
다쓰코의 옆에 있으면 요코의 가슴속에 가득 차 있던 서글픈 감정이 차츰 사라진다는 것을
나쓰에는 미처 알아 차리지 못했다.
요코는 때때로 슬퍼졌다.
‘무슨 사정으로 나의 부모는 남의 손에 나를 넘겨 주었을까? 나는 부모에게 있어서조차 소
중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아무리 열심히 살아 보아도,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이 없는 것같이 생각되
었다. 아직 어린 요코에게는 자기의 부모가 죽었다는 상상은 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품안에서 떠났다
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존재가 축복받고 있는 것같이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나를 둘도 없는 사람으로 사랑해 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쓰에에게는 물론 사랑받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게이조는 상냥했다. 하지만 요코에
게 적극적으로 아버지다운 애정을 보인 일은 없었다. 요코와 단둘이만 되면 뭔가 답답하고
어색해 하는 것이 게이조에게도 있었다.
삿포로에 간 도루는 일요일마다 돌아왔다. 그러나 단둘이 있으면, 게이조보다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때때로 도루의 뜨거운 시선과 마주칠 때면, 요코는 희미한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요코가 도루에게 바라고 있는 것은 오빠로서의 애정이었다. 그런데 도루는 요코가 거침없이
응석부릴 수 있는 오빠다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빠에게 있어서 나는 둘도 없는 존재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코는 그것이 기쁘지 않았다. 도루의 눈에 연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날이, 자신
이 이 집을 나가는 날처럼 요코는 생각되었다.
여름방학이 가까워졌다.
도루로부터 나쓰에에게 엽서가 왔다.
며칠만 있으면 돌아가겠습니다. 기숙사에서 같은 방에 있는 기다하라라는 친구와 일 주일
정도 집에 머무를 계획입니다. 그는 화학을 전공하는 학생이고, 나보다는 한 학년 위입니다.
늘 신세를 많이지고 있으니까, 가면 환영해 주십시오.
나쓰에는 그 엽서를 요코에게 보여주고,
“도루란 놈은 이쪽의 형편을 물어 보지도 않고, 답답한 소리만 하는구나.”
하고, 난처한 듯이 말했다.
나쓰에는 사람들과 사귀고 지내는 것을 싫어하는 성미여서,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기다하라라는 학생에 관해서 때때로 도루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요코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검도가 3단이라고 했다. 어딘가에서 피난온 사람으로 어머님이 계시지 않
는다는 것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왜 도루가 기다하라를 집에 데리고 오는가를 요코도 알
수가 없었다.
도루가 그 일에 관해서 얼마만큼 생각하고 괴로워했는가를 물론 요코가 알 리 없었다. 난처
해 하는 것 같은 나쓰에의 태도로 보아 기다하라라는 학생이 그다지 있기에 편한 집은 아닐
것이다, 라고 요코는 생각했다.
그날은 무더운 일요일 오후였다.
요코는 숲속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좮폭풍의 언덕좯을 읽고 있었다. 숲속은 시원했다.
소설 속의 주인공 히드클리프가 버려진 아이였다는 것이 요코의 감정을 자극했다. 히드클리
프의 어두운 정열이 요코에게 옮겨 붙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요코는 숨을 죽이고 읽어 갔다.
버려진 아이였던 주인공이 남매처럼 자란 캐서린을 사랑하고, 캐서린이 남의 아내가 되었는
데도 못잊고 마침내는 죽어 버린 캐서린의 무덤을 파헤쳐, 캐서린의 환영을 안으면서 죽어
가는 과격함이, 친부모를 알지 못하는 요코에게는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히드클리프처럼 양 손을 내뻗고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단 한 사람, 둘도 없는 사람이라고 추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야.
자신이 부모에게조차 둘도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절망이, 이렇게 격렬하게 사랑하는 사람
에게 집착하게 만드는 것인가?’
읽으면서 요코는 자신도 정열적으로 남을 사랑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받
고 싶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때때로 낚싯대를 어깨에 멘 아이들이 작은 물통을 들고 숲속의 제방을 지나갔다. 하지만 요
코는 소설에 열중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더구나 요코의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은 옆 얼굴
을 꼼짝 않고 바라보고 있는 청년이, 나무가 우거진 샛길에 서 있는 것을 알아 차릴 리 만
무했다.
‘굉장하군. 히드클리프는 마루를 봐도, 길가에 깔린 돌멩이를 봐도, 어떤 구름도, 어떤 나무
를 봐도, 캐서린의 얼굴로 보이는구나.’
요코는 히드클리프가 부러웠다. 죽은 애인의 묘를 파헤치고, 그 후에도 여전히 애인의 모습
을 그리워하는 히드클리프야 말로 둘도 없는 존재를 가진 인간이라고 생각되어 그가 부러웠
다.
‘하지만 그는 캐서린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존재가 아니었어.’
요코는 책에서 얼굴을 든 채로 계속해서 생각했다.
‘연애를 한다면, 나도 이렇게 뜨겁고 진지한 연애를 하고 싶어.’
그때 다람쥐가 요코의 발 밑을 지나갔다.
놀라서 일어섰을 때,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청년이 요코를 물끄러미 주시하고 있
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코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자기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훤히 내보인 듯한 느낌이었다. 청년은 수줍은 듯 미소지었
다.
적당한 키에 균형잡힌 몸매, 까무잡잡한 피부에 짙은 눈썹이 시원한 느낌이 들게 하는 청년
이었다.
“안녕하세요?”
청년은 요코를 어디의 누구라고 알고 있는 것 같은 친밀감을 다해서 인사했다. 야무지고 힘
찬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요코도 쾌활하게 인사를 했다. 소설을 읽고 있던 흥분이 요코의 눈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있었다.
“나는 기다하라라고 합니다.”
청년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파고드는 듯한 친밀감이 있었다.
“아아, 오빠의 친구시군요?”
요코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
“나는 여동생 요코예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쓰지구치가 항상 자랑하는 여동생이니까요. 쓰지구치는 요코는 말이
야, 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날이 없었어요.”
기다하라는 밝게 웃었다. 요코는 나쓰에가 어떤 모습으로 그 학생을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
하자 조금은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이러한 숲이 옆에 있다는 것을 쓰지구치는 한 번도 말했던 적이 없어요. 싱거운 친구로구
먼.”
기다하라는 싱긋 웃고,
“나는 숲이 좋아요. 이렇게 소나무만 있는 숲은 드물어요. 지금에야 이 팻말을 보고 나무들
의 이름을 알았어요. 전나무, 스트로부스소나무, 캐나다가문비, 독일가문비 …… 그리고 무슨
소나무더라?”
기다하라와 요코는 숲을 나와서 제방 위로 올라갔다. 제방 위에는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쪼
이고 있었다.
“무라야나소나무.”
“무라야마소나무?”
“아니요, 무라야나소나무, 몬타나소나무.”
“여러 가지가 있군요. 이 연약하고 영양실조에 걸린 것 같은 소나무는 뭐예요?”
“아, 이 나긋나긋하고 유연한 느낌의 소나무 말이에요? 그 나무는 지시마낙엽송이에요.”
“지시마낙엽송?”
기다하라의 얼굴이 빛났다.
“그렇습니까? 이것이 지시마낙엽송…….”
말하자마자 기다하라는 제방을 뛰어 내려가서 지시마낙엽송의 줄기에 손을 댔다.
요코는 놀라서 제방 위에서 기다하라를 보았다.
빛나고 있던 기다하라의 얼굴이 차차 어두워져 가는 것을 요코는 봤다.
요코는 제방을 내려와서 기다하라의 옆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저는 지시마에서 태어나서 네 살 때 피난을 나왔어요. 어머니는 지시마에 고이 잠들어 있
어요. 그래서 나는 매년 샤리다케에 올라가서 지시마를 보곤 하죠. 하지만 구름이 끼면 지시
마는 보이지 않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던가 10일 동안 매일 샤리다케에 올라간 적도 있었
어요”
요코는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은 이미 찾아갈 수가 없는 고향인 지시마를 매년 산에 올라가
바라보는 기다하라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거기에는 어머님이 묻혀 계시기 때문이야.’
생모를 알지 못하는 요코는 어머니가 없는 기다하라가 갑자기 가까운 존재로 생각되었다.
기다하라의 시선이 요코가 가지고 있는 책에 멈추었다.
“아아, 좮폭풍우의 언덕좯이군요. 나도 두 번이나 읽었지.”
두 사람은 숲속의 샛길로 들어갔다. 축축해서 걷기에 부드러운 길이었다.
나무 아래의 잡초가 키가 크게 자라서인지 숲속은 어두웠다.
“어두컴컴하군요. 이렇게 나무가 많은 곳에 살고 있어서 행복하겠군요?”
“행복하다고요?”
요코는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이조와 나쓰에가 친부모가 아
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졸업식에서 답사 종이가 백지로 바뀌어 있을 때도 슬프기는 했지
만 불행하다고 한탄했던 기억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행복하겠군요.’라는 말을 들으면서
상당히 거리가 있는 말처럼 생각되었다.
“쓰지구치는 당신 자랑을 많이 했어요. 길을 걸으면서도 슬쩍 스치는 여자를 뒤돌아 보며
‘저 정도는 요코의 발 밑에도 못 미친다.’고 하니까요. 기숙사의 동료들이 누군가가 방문
해서 직접 요코를 만나보고 오너라, 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어머, 오빠도…….”
요코는 웃었다.
“저에게도 여동생이 한 사람 있어요. 쓰지구치가 아무리 자랑해도 그렇게 부럽다고는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만…….”
기다하라는 이렇게 말하다 말고 약간 수줍은 듯한 얼굴을 했다.
팔장을 낀 기다하라의 팔이 늠름하게 햇빛에 그을려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걸었
다.
“어머님이 상당히 미인이시더군요.”
기다하라가 느닷없이 말했다.
“네, 그렇죠?”
요코도 나쓰에를 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칭찬을 받으면 역시 기뻤다.
“쓰지구치도 당신도 행복하겠어요. 그런 좋은 어머니가 계시다니…… 부럽군요.”
요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기다하라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나쓰에를 ‘좋은 어머니’라고 하는
말에는 저항을 느꼈다.
“이제 돌아갈까요?”
요코가 말했다.
“그러지요. 쓰지구치가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숲이 너무 좋아서 잠깐 산보나 할까,
하고 나왔을 뿐인데, 한 시간이나 지났군요.”
제방으로 나갔더니 도루의 목소리가 났다.
“기다하라 씨.”
도루가 마중 나온 것 같았다.
“야호!”
하고 기다하라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대답하자, 도루가 달려왔다.
“아, 요코하고 함께 있었구나.”
도루가 미소지었다.
“소개받지 않아도 한눈에 요코 씨라는 것을 알았어.”
기다하라의 말에 도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역겨운 표정이 도루의 얼굴에 떠올랐지만
기다하라와 요코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숲은 어땠어요?”
나쓰에는 기다하라를 보자마자 애정 깊은 미소를 띠었다.
“여러 종류의 소나무가 있어서 참으로 진기하다고 생각했어요.”
기다하라가 약간 응석부리는 어조로 말하는 것을 요코는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마음에 드신다면 호두나무 숲이랑 늪의 습지도 안내해 드리지요.”
나쓰에의 표정은 밝았다.
“아아, 어머니가 안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도루가 말하자,
“어머니께서?…… 그러면 제가 너무 죄송해서요.”
하고 기다하라는 언제나 짓는 수줍은 표정을 하고 나쓰에를 보았다.
기다하라의 수줍은 표정은 소년 같은 천진난만함과 청년다운 응석부림이 있었다.
“아니에요, 조금도 죄송할 것 없어요. 여기에 있는 동안이라도 친어머니라고 생각하고 편하
게 대하세요.”
나쓰에는 상냥하게 말하고 부엌에서 차가운 우유를 가지고 왔다.
‘오빠에게서 엽서가 왔을 때는 이쪽의 사정도 물어보지 않는다고 침울해 하시더니, 어쩌면
오늘은 기분좋게 들떠 있을까?’
요코는 기다하라를 상냥하게 대접하고 있는 나쓰에를 고맙게 생각해야 좋을 터인데도 왠지
고마워할 수가 없었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도루가 말했다.
“시내로 나가 볼까? 여하튼 기다하라는 아사히카와가 처음이니까.”
“그럼 안내해 주게. 요코 씨도 함께 가지 않을래요?”
“물론이야. 요코는 자네 안내를 맡은 사람이니까.”
도루가 말하자 나쓰에는,
“요코, 미안하지만 집을 좀 보아라. 잠깐 시장보러 갔다 올테니까. 괜찮겠지?”
하고 도루와 요코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아버지가 곧 돌아오실 텐데요”
도루는 불쾌한 듯이 말했다.
“아버지는 오늘밤 9시경에 돌아오신다고 했어.”
나쓰에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기다하라 일행의 차를 전송하면서 요코는 나쓰에의 태도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불쾌하다기보다는 좀 더 깊숙이 마음에 휘감기는 착잡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소녀 특유의
예민한 감정인지도 몰랐다. 요코는 대문에 기대어 땅거미가 지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까마귀가 숲에서 시끄럽게 울고 있었고, 멀리 서쪽 하늘은 황색의 구름이 띠처럼 가늘게 떠
있었다. 요코는 잠시 기요히메의 허리띠라고 불리우는 그 황색의 띠구름을 바라보고 있다가,
집으로 들어가 목욕물을 데웠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불이 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쓸쓸하고 적막했다.
기다하라를 위해서 흰 무늬가 있는 옷감을 사온 나쓰에는 하루가 걸려서 옷을 만들었다.
도루가 아직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는 유가타가 있는데도, 일부러 사온 것이 요코는 의아하
게 생각되었다.
기다하라가 온지 2~3일이 지난 오후에, 요코는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기다하라가 나쓰에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도루는 옆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기다하라
는 요코를 보자 수줍은 듯이 웃으면서 어깨를 계속해서 주무르고 있었다.
나쓰에는 요코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기다하라에게,
“정말 시원하게 안마 잘 받았구나.”
하고 겸연쩍은 듯이 웃었다.
기다하라는 진지한 얼굴로,
“조금 더 주무르겠어요.”
하고 계속 주무르자,
“정말 고마워.”
하면서 나쓰에는 어깨에 올려진 기다하라의 손에 자기의 손을 얹었다. 잠시 후,
“제대로 주무르지 못해 죄송합니다.”
기다하라는 그렇게 말하고 재빨리 도루의 옆으로 가서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요코 씨, 늦었군요.”
기다하라가 요코에게 말을 걸었다. 요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쓰에가 기다하라의 손
에 자신의 손을 얹어놓은 것이 요코는 마음에 걸렸다.
“저는 이제까지 한 번도 어머니의 어깨를 주무른 경험이 없어요. 제가 어릴 적에 어머니께
서 돌아가셨으니까요. 그래서 어머니의 어깨를 주무릅시다, 라는 노래를 들으면 어릴 때 생
각이 나서 언제나 울곤 했지요. 오늘은 덕택으로 효도의 흉내를 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기다하라는 정말로 기쁜 것 같았다.
나쓰에와 요코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낮잠을 자고 있던 도루가,
“거 참 잘됐군.”
하면서 돌아 누웠다.
문득 기다하라와 요코의 시선이 마주쳤다. 무심코 두 사람은 미소지었다.
그 광경을 도루는 아무 말 없이 보고 있었다.
“이제 잠이 깼나?”
기다하라가 말하자 도루가 일어났다.
“기다하라 씨, 숲속으로 놀러갈까? 어깨를 주물러 준 답례로 숲속을 안내해 줄게.”
나쓰에가 말했다.
요코는 나쓰에의 입술이 평상시보다 붉은 것을 알아차렸다.
흰 무늬가 있는 옷을 입은 기다하라와 곤색 옷을 입은 나쓰에가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도
루와 요코는 아무 말 없이 보고 있었다.
“요코.”
“왜, 오빠?”
도루는 아무 말 않고 있었다.
“왜 그래, 오빠?”
“내일, 기다하라하고 세 사람이서 소운쿄에라도 갈까?”
“그래, 하지만 어머니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계시잖아.”
도루는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안 갈 거야.”
요코가 도루를 보며 말했다.
“가지 않겠다니, 왜 그래?”
도루는 요코를 보았다.
“싫어.”
“싫어? 무엇이?”
“뭐라니……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아.”
“기다하라가 싫은 거야, 요코?”
도루는 요코가 싫다고 말했으면 했다.
도루는 요코의 출생을 알고 난 이후, 요코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요즘은 생각이 변했다.
‘요코는 쓰치구치가에서 살기가 괴롭다. 나하고 결혼하고 만일 출생을 알게 된다면, 요코는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불쌍하게 여겨서라고 오해 할거야. 자기의 아버지가 루리코를 살
해했다는 것을 알면 결혼 생활이 계속 될 수 없겠지.’
도루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도루는 진실로 요코를 사랑하고 있었다. 호적에 관
한 일은 가정 재판소에 의논해서 정정하면 된다고 도루는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해 왔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요코의 입장을 알게 되었다.
‘요코는 나하고만은 결혼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그 일을 도루는 자신에게 억지로 납득시켰다. 기다하라와 한방에서 살아서 도루는 그의 속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머리도 좋고 성격도 밝고 깔끔했다. 그리고 동정심도 있고 용
기도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요코하고 결혼할 수 없다면 기다하라에게 맡기자.’
청년다운 성급한 마음에 도루는 기다하라를 아사히카와로 초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다하라와 요코가 친하게 되는 것을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반대를 원하고도 있
었다.
조금이라도 기다하라와 요코가 친한 것 같은 기색을 보이면, 괴로워서 신음하고 싶어졌다.
‘요코만 행복하게 된다면 나는 평생 결혼 같은 거 하지 않을 거야. 요코의 행복만을 바라
고 살아갈 거야.’
괴로워지면 도루는 그런 자신의 결심을 스스로에게 타이르곤 했다.
“기다하라가 싫은 거니?”
요코에게 그렇게 물으면서 도루는 마음이 산만해졌다.
“싫지 않아. 또 싫어지게 될 정도로 친해지지도 않았는걸.”
“그럼, 함께 가도 되잖아?”
“하지만 기다하라 씨와 교제를 해야 할 이유도 없잖아. 오빠.”
도루는 기뻐서 큰소리로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루는 아무 말 없이 요코를 주시했다.
“기다하라는 좋은 사람이야.”
‘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난 싫어.’
요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요코는 슬퍼서 울 것 같은 자신을 느꼈다.
숲쪽에서 기다하라와 나쓰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심을 끝내고 요코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요코는 설거지를 하면서도 기다하라
가 어느 방에 있는지 이상하게도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기다하라 씨는 내일 돌아간다.’
요코는 다 씻은 그릇을 바구니에 넣고 수돗물로 헹구고 있었다.
“미안합니다만, 물 한 컵 주세요.”
기다하라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네, 여기 있습니다.”
요코는 물이 든 컵을 내밀었다.
물컵을 받으려고 한 기다하라의 손이 요코의 손가락에 닿았다. 요코는 움찔했다.
이상한 감각이 온몸에 짜릿하게 퍼졌다. 기다하라는 컵을 든 채로 아무 말 하지 않고 요코
를 주시했다. 요코는 획 하고 등을 돌려서 다시 그릇을 씻었다. 그리고 마른 행주로 꽉꽉 힘
을 주어서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코의 모든 신경은 기다하라에게 쏠려 있었다.
드디어 설거지가 끝났다. 기다하라는 그때까지도 요코의 뒤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요코는
용기를 내어 뒤돌아보았다. 기다하라는 아직까지도 물이 든 컵을 들고 있는 채로 서 있었다.
“왜 물을 드시지 않으세요?”
요코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다하라에 대해서만은 평상시의 요코처럼 되지 않았
다.
요코는 다시 획 하고 등을 돌려서 지금 썼던 행주를 소독용 냄비에 넣고 가스불을 켰다.
“요코 씨.”
기다하라가 불렀다.
요코는 대답하지 않고 가스의 파란 불꽃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기다하라 씨?”
요코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드디어 내일이면 이별이군요.”
그렇게 마음 가볍게 말하고 싶었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이상하게 변해 버렸을까?’
요코는 불꽃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요코 씨, 강쪽으로 산책갈래요?”
기다하라는 그때야 비로소 물을 다 마셨다.
그때 나쓰에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기다하라 씨, 산보하러 가지 않겠어요?”
나쓰에가 말을 걸었다. 기다하라는 요코를 보았다. 기다하라가 놓아둔 컵을 씻고 있던 요코
는 두 사람의 옆을 살짝 빠져 나와서 재빨리 자기 방으로 가 버렸다.
‘싫다. 나는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인간이 된 것인가? 더 쾌활하고 더 솔직해야 할 터인
데…….’
요코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곧 후회했다.
‘바보 같은 요코, 생각대로 행동해야지.’
요코가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기다하라도 나쓰에도 없었다.
행주를 삶는 물이 끊고 있었다. 요코는 기다하라가 마셨던 컵으로 물을 마셨다.
도루와 요코는, 기다하라와의 마지막 저녁식사를 다카스나다이에서 먹을 예정이었다.
세 사람이 나가려고 하자 나쓰에도 함께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곧 돌아 오실 거예요.”
도루가 말했다.
“아버지는 오늘 밤도 어차피 9시가 지나서 돌아오실 거야. 오늘밤은 모두가 기다하라 씨의
송별회를 하자꾸나.”
나쓰에는 기다하라에 관한 일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혹시 빨리 돌아 오신다면 곤란하잖아요? 전화라도 해 놓으시지요.”
“괜찮아. 요즘은 매일 늦으시니까.”
나쓰에의 이런 말에 요코는 게이조가 가엾게 생각되었다.
“쓰지구치의 어머니께서 이렇게 잘 해주시니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요.”
“그러니까 여름내내 머무르라고 얘기했잖아요.”
아들 또래의 청년을 대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도루는 그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어머니인 나쓰에가 자기와 같은 또래의 기다하라에게 마음이 끌렸다고 도루는 상상할 수 없
었다.
도루 자신이 이성을 느끼는 대상은 나이가 더 어려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도루는 도루 나름대로 기다하라를 후하게 대접하는 나쓰에의 기분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요코에게 마음이 끌려 있는 것을 알고 어머니는 결혼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하
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기다하라에게 환심을 사서 요코를 기다하라에게 억지로 맡기려는
지도 모른다.’
그 일은 도루에게 있어서 바람직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다.
‘어쩌면 요코는 기다하라와 맺어질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요코를 위해서만은 아니고, 쓰지
구치 집안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기다하라에게 환심을 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쓰에의 기다하라에 대한 태도가 때로 화가 나기도 했다.
다카스나다이는 쓰지구치 집 강 건너편 산악지대에 있었고, 그곳에는 레스트 하우스와 타워
가 있었다. 레스트 하우스의 앞에서 차를 내리자,
“멋있는 풍경이다.”
라며 기다하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거기에서는 아사히카와의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멀리 저녁 햇빛을 받은 다이세쓰 산 봉우리들이 아름다운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그 오른쪽
에 도카치 산의 봉우리들이 병풍을 세운 것처럼 이어져 있었다.
“좋은 곳이죠?”
나쓰에는 기다하라에게 다가갔다.
“아사히카와는 굉장히 크군요.”
“가미가와 분지가 큰 거예요. 주위가 온통 산이잖아요. 그래서 그 산 아래까지 모두 아사히
카와처럼 보여서 그래요. 차를 타고 가면 계속해서 밭이 이어져서, 꽤 넓은 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나라에서 운영하는 펄프공장의 흰 연기가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저 숲이 쓰지구치 집 옆의 시범림이군요?”
기다하라가 가리키자 나쓰에는 살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트 하우스에 들어가 징기즈칸 요리를 먹을 무렵쯤 아사히카와 거리에 등불이 깜박거리
기 시작했다.
나쓰에도 오늘밤은 맥주를 마셨다.
“징기즈칸이 맛있군요.”
가다하라가 요코를 보고 말했다. 요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웃었다.
나쓰에는 기다하라를 위해서 부지런히 고기를 굽기도 하고, 맥주를 따라 주기도 했다.
“어머니, 저도 아들이에요. 기다하라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것 같아서 질투가 나는데요”
도루는 조금 취해 있었다. 그런 도루도 아까부터 요코에게 주스를 따라주기도 하고, 고기를
구워서 주기도 했다.
“저는 쓰지구치처럼 여동생을 생각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저도 여동생에게는 꽤 상
냥하게 잘해 주지만, 쓰지구치는 못따라 가요. 남매라기보다 마치 연인 사이 같아요.”
기다하라는 마지막 말을 나쓰에에게 했다.
나쓰에는 잠깐 표정이 굳어졌지만 곧바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어릴 적부터 사이좋게 지냈어요.”
하고 말했다.
요코는 꼼짝도 않고 고기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을 바라보고 있다. 기름이 방울져 떨어져서
때때로 불이 작게 올라왔다. 기름이 타는 바람에 연기가 길게 방안에 떠돌고 있었다.
“요코는 참으로 좋은 여동생이야.”
도루는 취하자 명랑해졌다.
“자, 기다하라 씨, 다 구워졌어요.”
나쓰에가 기다하라의 접시에 고기를 올려 놓고 계속해서 피망이랑 양파도 접시에 놔 주었
다.
요코는 나쓰에가 기다하라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을 묵묵히 보고만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네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도루는 차를 부르기 위해서 전화를 걸러가고, 나쓰
에도 화장실에 갔다.
요코는 밤하늘을 올려 보았다. 별이 하늘 가득 빛나고 있었다.
요코는 이렇게 많은 별들이 있었던가, 하고 놀랐다. 언제나 숲 옆에서 별을 보았기 때문이었
다.
요코는 그것을 깨닫자 어쩐지 쓸쓸해졌다.
‘하늘을 반밖에 못 보았다…….’
확실히 자신은 어떤 일도 아직 반밖에 보고 있지 않았다.
‘아냐, 반도 못 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야.’
요코는 생각했다.
“요코 씨.”
돌연 절박한 것 같은 기다하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요코는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나…….”
말이 막혀 우물거렸던 기다하라의 눈이 똑바로 요코를 주시하고 말했다.
“편지를 해도 되겠습니까?”
요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다하라는 수줍은 듯이 웃는 얼굴이 되었다.
“편지를 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했던 말이 요코의 가슴속에 되풀이해서 울려퍼졌다.
게이조는 1주일 동안 줄곧 늦게까지 일을 했기 때문에 조금 피곤했다.
중환자가 있으면 게이조는 걱정이 되어 당직의사에게 맡기고 돌아올 수가 없었다. 다른 의
사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하면 다른 의사들이 거북해 한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
다. 그것을 알면서도 게이조는 집으로 늦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게이조도 그런 자신이 싫었다.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과는 다른 소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정을 하고 오늘은 정각 5시에 병원을 나왔다. 정각에 나오지 않으면, 또 늦게 된다고 게이
조는 생각했다.
오랫만에 밝은 시내를 게이조는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었다.
“병원장이란 사람이 버스를 타지는 않겠지.”
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들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게이조는 병원의 차는 왕진할 때와 병원일로 나갈 때 이외에는 타지 않았다.
게이조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는 운전사에게 미안해서였다. 사실 타기 쉬
운 곳에서 타는 버스나 택시 쪽이 더 마음이 편했다. 그러다 마음이 내키면 걷기도 했다.
도루가 운전 면허를 따고 차를 사고 싶어했지만, 게이조는 사지 않았다. 게이조는 차를 운전
하는 것이 싫었고, 대학생인 도루가 차를 사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이조는 기다하라에 관한 일을 생각하면서 걷고 있었다. 기다하라가 오고 나서 집안은 활
기가 넘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기다하라가 올 무렵부터 게이조는 바빴다. 그래서 오늘은 차분히 저녁식사나
함께 하면서 서로 이야기나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도중에 게이조는 요코를 위해서 초콜릿을 사려고 생각했다.
상점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게이조는 작고 별로 사람이 많지 않은 상점으로 들어갔다. 그
작은 상점은 포장지도 나쁘고, 싸는 방법도 서툴렀다.
그러나 백 엔짜리 초콜릿을 다섯 개 정도 사니까, 그 상점의 여자 주인이 가련할 정도로 기
쁜 얼굴을 했다.
게이조에게 있어서는 사소한 물건이 이 상점의 생활에 큰 보탬이 되는 것을 알고 마음이 무
겁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좋은 일을 한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상점을 나오자 게이조는 너무나 피곤해서 택시를 탔다.
현관의 문을 열려고 하자 문이 잠겨져 있다.
헛간에 있는 여벌의 열쇠로 뒷문을 열고 들어가자, 테이블 위에 종이 쪽지가 있었다.
‘기다하라의 송별회를 다카스나다이의 레스트 하우스에서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와 주세
요.’
읽고 나서 게이조는 화가 치밀었다.
‘전화로 연락했어야 하지 않는가! 1주일 내내 늦는 날이 계속되었다고 해도 오늘도 반드시
늦는다고는 할 수 없잖아!’
라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기다하라의 송별회는 도루하고 요코에게 맡겨 놓으면 좋지 않은가? 일부러 나쓰에까지 집
을 비워두고 갈 필요는 없잖아.’
나쓰에의 감정의 변화를 게이조는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기다하라에게 유가타를 만들어 주었다고 들었을 때는 별로 개의치 않았던 일이 갑자기 마음
이 상했다.
‘여름내내 있을 손님도 아니고 일부러 유가타를 만들어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게이조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병 꺼냈다. 안주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별도리 없이 사온 초콜릿을 안주해서 마시기 시작했다.
‘나쓰에가 40살이 지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누가 보아도 서른 살 안팎으로밖에 보
이지 않는다. 스물두서너 살된 학생들이라면 별로 큰 나이 차이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40을 넘고 나서 나쓰에는 성격이 조금 변한 것같이 생각되었다. 성격이 변했다기보다는 밤
의 부부생활이 적극적으로 되었다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게이조는 왠지 불안해졌다.
‘무라이와 그런 일도 있고…….’
게이조는 순식간에 맥주 한 병을 다 마셨다.
두 병째를 냉장고에서 꺼낼 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다쓰코였다.
“문 좀 열어 주세요.”
아직도 밖은 훤했다.
게이조가 당황해서 현관문을 열자,
“뭐예요, 주인양반. 지금 창에서 들여다본 얼굴은 부인에게 버림받아서 자포자기한 것 같은
얼굴이었어요.”
다쓰코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게이조는 목을 만졌다.
“요코 없어요?”
“모두 도루의 친구 송별회에 갔어요.”
다쓰코는 게이조를 보고서 히죽히죽 웃으면서,
“역시, 그래서 토라져 있었군요? 이 다쓰코가 함께 맥주를 마셔 줄테니까, 이제 울지 말아
요.”
다쓰코는 재빨리 부엌으로 가서 맥주와 컵, 치즈, 버터 피너츠 등을 함께 가지고 왔다.
“버터 피너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게이조가 놀라자,
“댁의 사모님은 결혼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같은 깡통을 같은 장소에 놓아두지요.
나는 이 집의 현금이 있는 곳도, 저금통장이 있는 곳도 알고 있어요.”
다쓰코는 쾌활하게 말하고,
“아, 그래. 지금 4가의 평화로에서 내 차 앞을 무라이가 지나갔어요.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
고 말이에요.”
하고 한 마디 덧붙였다.
무라이는 설 이후 쓰지구치의 집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아내인 사키코하고 어떻게든 잘 살
아가는 것 같았다.
“무라이 씨는 요즘 다카키를 만나지 않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개업한 이후 거의 아사히카와에 오지 않는군요?”
“병원이 잘 되고 있는지도 몰라요.”
“작년에 세금을 250만 엔을 냈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다카키는 장사속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아야겠군요.”
게이조는 이제야 맥주가 맛있었다.
오늘밤 다쓰코는 나쓰에보다 더 싱싱하고 젊다고 생각했다.
“건강 우량아가 요즘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아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다쓰코가 말했다.
“건강 우량아? 아아, 요코 말입니까? 정말 그 아이는 튼튼해서 발육이 좋아. 잘 있어요.”
요사이 요코는 또 조금 키가 자란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게이조가 말했다.
“잘 있다니 다행이지만, 6월 경부터 왠지 집에 오지 않아서요.”
다쓰코는 게이조의 컵에 맥주를 따랐다.
“웬일로 그 동안 가지 않았을까요?”
게이조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요코는 다쓰코의 집에 일 주일에 한 번은 갔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갑자기 어른이 되었는지도 몰라요.”
“정말이군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당신 집에는 많은 남자들이 드나드니까요.”
나쓰에가 요코를 발걸음도 못하게 하는 것을 게이조는 몰랐다.
요코가 다쓰코의 집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은 결혼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다쓰코는 드물게 입을 다물고 혼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다쓰코는 창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다쓰코는 정면에서 보는 것보다 옆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다쓰코 씨도 아이를 낳은 적이 있었지.’
그렇게 생각하자 다쓰코가 묘하게 아름답게 생각되어졌다.
문득 다쓰코가 게이조를 보았다. 게이조는 잠시 당황해서 눈을 내리떴다.
“요코는 대학에 보내지 않을 건가요?”
다쓰코가 말했다.
“대학에?”
게이조는 요코의 진학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마치면 곧바로 결혼을 시키겠다고 생각했다. 게이조에게 있어서도 역시 두려운
것은 도루가 요코를 아내로 삼는 것이었다.
“그래요. 성적이 좋다고 하지 않아요? 집에 잘 오는 누마다 씨라는 사회과 선생님이 계세
요. 요코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시지요. 2학기부터 진학반과 취직반으로 나누기 위해서 희망
코스를 조사했더니 요코는 취직반에 들어 있다고 해요.”
“취직반에요?”
게이조는 취직시키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누마다 선생님께서 애석한 듯이 말했어요. 사회 시간에도 요코는 아주 예리한 질문을 한
다고 해요. 누마다 선생님은 꼭 대학에 보내고 싶다고 말했어요.”
게이조는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결혼시켜서 이 집에서 내보내 버리고 싶다
고는 말할 수 없었다.
“화내지 말아요. 나도 요코를 대학에 보내고 싶어요. 하지만 그 애도 어차피 언젠가는 결혼
시켜야 할테니까 마음을 넓게 갖고 지금부터라도 나에게 맡겨 주세요. 지금까지 키워서 남
에게 넘겨주는 것은 애석하겠지만 말이에요.”
상상 외의 다쓰코의 말에 게이조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게이조가 아무 말 않고 있는 것을 보고 다쓰코는,
“역시 무리한 주문이었나요? 저런 좋은 아이를 갖고 싶다는 것이 무리일는지도 모르지요.
큰 재산은 아니지만 이 아이에게라면 전부 주어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좋아
하는 공부를 하고 싶은 만큼 시켜서 그 아이를 발전시켜 주고 싶어요.”
‘다쓰코에게 요코를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구나.’
게이조는 묘하게 마음이 동했다.
이대로 집에 놓아 두는 것보다 다쓰코에게 맡기는 편이 요코에게 있어서도 행복하다고 게이
조는 생각했다.
“물론 쓰지구치 집은 대단히 돈이 많기 때문에 대학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영국에라도 유
학을 시킬 수 있겠지요?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닌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 아이가 진학하지
않는다고 들어서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보았어요.”
“아니, 오히려 내가 너무 무심해서 그 아이가 대학에 간다든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
았어요.”
“요코가 대학에 가고 싶어 하지 않던가요?”
“나쓰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역시 언짢은 이야기를 끄집어냈군요. 하지만 그 아이를 나에게 맡긴다면 나는 언제라도
기꺼이 맞이하겠어요.”
다쓰코는 그렇게 말하고 택시를 불러서 돌아갔다.
게이조는 왠지 오늘밤은 나쓰에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싫어서 빨리 침실로 들어갔다.
잠자리에 들고나서 생각을 해 보니 요코를 다쓰코에게 맡기고 될 수 있는 한 도루로부터 멀
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쓰코의 집이라면 요코도 갈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기회를 보아서 나쓰에와 의논해 보려
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매일 피곤했던 탓인지 게이조는 어느 사이엔가 잠에 푹 빠져 버렸
다.
도루와 기다하라의 웃음소리에 잠이 깨어서 시계를 보니 아직 9시가 못 되어 있었다.
살짝 미닫이 문이 열렸다. 나쓰에였다.
게이조는 눈을 감은 채로 있었다. 그러자 나쓰에는 잠깐 방을 들여다보기만 하고 곧바로 또
거실로 들어가 버렸다.
때때로 나쓰에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게이조는 화가 치밀었다. 기다하라의 수줍은 듯한 웃는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왠지 나쓰에가 기다하라의 옆에 딱 달라 붙어 앉아서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다하라의 체온이 나쓰에에게 전해져서, 때때로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이조는 완전히 잠이 깨어 버렸다. 이윽고 복도에서 조용한 발소리가 났다. 이어서 힘이 센
남자의 발소리가 났다. 게이조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편지를 보내겠어요. 주무세요. 요코 씨.”
기다하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나쓰에는 아니다!’
게이조는 어둠 속에서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아까의 질투심이 스스로도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었다.
‘기다하라와 요코라…….’
게이조는 도루의 얼굴을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기다하라가 돌아간 지 3일이 지났다.
아침식사 후 도루는 방으로 올라가서 한스 카로사의 좮아름다운 유혹의 시절좯을 번역하고
있었다. 도루는 중학교 때부터 게이조의 도움을 받아 독일어를 공부해 왔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와서 2년째라고는 해도 도루의 독일어 실력은 꽤 진전되어 있었다.
번역을 하다 지친 도루는 창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에 집들이 꽤 많이 들어섰구나.’
도루가 어릴 적에는 주위에 아직 감자밭뿐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시범림의 옆까지 빨갛고
파랗고 녹색의 지붕인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래도 아직 옥수수밭이랑 감자밭이 보이는 것이 기뻤다. 문득 창 아래를 보았더니 뜻밖에
도 요코가 정원에서 풀뽑기를 하고 있었다.
흰 보자기로 머리를 싸고, 더운 햇살 아래 요코는 열심히 풀뽑기를 하고 있었다. 누가 보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요코의 모습을 보고 도루는 미소지었다.
요코는 흰 블라우스에 검은 쇼트 팬츠를 입었다. 요코는 쇼트 팬츠를 싫어했지만, 일을 할
때는 입었다.
도루는 요코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몇 년 후에 자신의 아내로 지금처럼 풀뽑기를 하고 있는
요코를 상상했다.
의사가 된 자신이 일요일의 한때를 이렇게 아내인 요코의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단념하지 않으면 안된다.’
요코를 아내로 만들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남인 것을 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 때문에
요코가 누구의 딸인가를 알아 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역시 두 사람은 친오누이로 평생을 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도루는 요코가 이미 자기가 얻어온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요코의 태도에는 아무런 거북함이 보이지 않았다.
‘기다하라에게도 요코의 출생을 알려서는 안된다.’
기다하라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요코에 관한 일을 부탁하려고 생각했던 도루였다. 그러나 이
내 자기의 어리석은 생각을 깨닫고 몸을 떨었다.
‘알고 있는 것은 부모와 자신, 그리고 삿포로의 다카키 아저씨뿐이다. 비밀은 절대 새지 않
을 것이다. 하지만 자칫하면 어머니로부터 샐 수도 있다.’
도루는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잡초를 뽑고 있는 요코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막 요코를 부르려고 했을 때 우편 배달부 아저씨의 붉은 색 자전거가 멈춰 섰다. 손에 묻은
흙을 털고서 요코가 우편물을 받아 들었다. 우편 배달부가 사라지자 요코는 그 중의 한 통
을 보고서 급히 뜯어 보았다. 봉투를 뜯고 나서 무엇을 생각했는지, 짧은 바지 호주머니에
편지를 집어 넣고서 요코는 숲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숲속에서 차분히 읽을 작정인 것 같았다.
‘기다하라로부터 온 편지구나.’
갑자기 도루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요코.”
도루는 저도 모르게 창에서 몸을 앞으로 쑥 내밀고 외쳤다.
“왜 그래, 오빠?”
하고 요코가 뒤돌아보았다.
“편지가 왔니?”
“응, 오빠에게도 왔어.”
요코는 그렇게 말하고 이층으로 뛰어올라왔다.
봉투를 뜯지 않았던 편지는 나쓰에와 도루 앞으로 온 기다하라의 편지였다.
“요코에게도 기다하라에게서 편지가 왔어?”
요코가 볼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자,
‘요코는 벌써 기다하라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도루는 쓸쓸했다.
‘좋아, 그것으로 충분해. 요코는 진짜 나의 여동생이다!’
도루는 기다하라의 편지를 책상 위에 놓은 채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번역 노트를 폈다.
요코는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내려와서 세면장에서 손을 씻었다. 손을 씻은 김에 얼굴도 씻
었다. 그리고 짧은 바지를 회색의 폭 넓은 치마로 갈아 입었다.
“요코에게도 기다하라로부터 편지가 왔어?”
하고 도루가 묻는 찰나, 갑자기 기다하라의 편지가 소중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더러워진 손으로 무심코 기다하라의 편지를 읽으려고 했던 것이 스스로도 이상했다.
요코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평상시처럼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았다가 다시 책상 앞의 흰
레이스로 짠 커버를 씌운 방석에 정좌하고 기다하라의 편지를 꺼냈다.
아까 손가락으로 봉투를 뜯었던 것을 가위로 다시 잘랐다. 약간 오른쪽으로 올려쓴 듯한 글
씨였다.
쓰지구치 요코 씨!
멀리 지도코 반도가 희미하게 보이는 샤리의 해안에 왔습니다.
경석이 여기저기 많이 있습니다. 해마다 오는 곳이긴 하지만, 경석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알
게 된 것은 올해가 처음입니다.
오늘 아침, 이 해안에 젊은 여자가 파도에 밀려 올라와 쓰러져 있었습니다.
죽으려고 바다에 들어 갔는데, 파도가 그 여자를 물가로 떠밀어 버렸던 것입니다.
바닷가에 기절해 있던 그 여자는 구조되었습니다.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뜻깊은 것으로 생각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필사적인 몸부림을 한 인간의 의지도, 무엇인가 위대한 자의 의지에 의해서 저지
당해 버렸다는 이 사실에, 나는 엄숙함을 느꼈습니다. 다만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위대한
자의 의지를 말입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그것은 한 사람이 죽음에 당면했을 때보다도 엄숙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
지 않겠습니까?
오랫동안 요코 씨의 집에 머무른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1962년 7월 기다하라 구니오
편지는 그것으로 끝나 있었다.
한 줄 정도, 종이가 찢어질 정도로 글씨를 지웠던 곳이 있었다. 요코는 그 지워진 글자 위를
손가락으로 몇 번이고 어루만지고 있었다.
요코에의 감정이 하나도 내재되어 있지 않은 이 편지에, 요코는 왠지 강한 매력을 느꼈다.
기다하라의 시원시원하지만 약간은 달콤한 인상과 이 편지로부터 받은 인상이 꽤 달라 있는
것에 마음이 끌렸는지도 몰랐다.
요코는 기다하라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위대한 자의 의지라는 것이 무슨 말일까? 신을 말하는 것일까?’
아직 요코에게는 신이라는 말이 막연했다. 신에 대하여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신을 믿지 않
으면 안된다고 할 정도로 자신이 약하지는 않다고, 요코는 생각했다. 그러나 기다하라의 편
지를 읽으며, ‘위대한 사람의 의지’라는 말에 공감했다.
다른 사람이 썼던 말이라면, 그냥 슬쩍 읽고 지나갔을는지도 모르는 말이었다.
‘내가 이 집에서 길러진 것도 위대한 자의 의지 때문이었을까?’
요코는 누가 자기를 이 집에 데려 왔는지를 알고 싶었다.
‘태어난 지도 얼마 안되는 나를 누가 이 집으로 보냈을까? 아버지, 어머니, 어느 쪽일까?’
하고 요코는 생각했다. 그리고 갓난아이인 자기를 이 집에 데려 왔던 것이 게이조인지 나쓰
에인지를 알고 싶었다.
‘기다하라 씨의 사고 방식에 의하면, 내가 이 집에 데려와 진 것은 친어머니와 친아버지의
의지가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의지 또한 아닌 아마 그것을 초월한 어
떤 사람인가의 의지라는 말이 되는지도 몰라.’
요코는 운명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하지만 기다하라가 말한 ‘위대한 자의 의지’와 ‘운
명’은 조금 다른 것처럼 생각되었다.
‘다른 것일까? 기다하라 씨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 편지 속에 여인은 죽고 싶었음에도 살아
났다. 정말로 이 세상에는 인간의 의지를 초월한 더 커다란 의지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
다. 하지만 그것은 운명이라는 것과는 다른 것 같다. 잘은 모르겠지만…….’
요코는 더 깊이 파고들고 싶었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나고 나쓰에가 얼굴을 나타냈다.
“요코, 기다하라 씨로부터 편지가 왔다지?”
“네.”
“어디에서?”
나쓰에는 요코의 옆에 앉았다.
“샤리에서 왔어요.”
“어머, 나에게는 기타미에서 보냈더구나. 고세이 화원은 꽃이 필 철이 조금 지났다고 써 있
었어.”
나쓰에는 요코의 무릎 위에 있는 기다하라의 편지를 바라보았다.
“기타미는 좋은 곳인가요?”
요코는 편지를 봉투에 넣으면서 말했다.
“그거, 기다하라 씨의 편지냐?”
“네, 그래요.”
“뭐라고 써 있었어?”
“샤리의 해변에 여자가 파도에 떠밀려 왔다고요.”
“자살인가 보구나?”
“네, 하지만 살아났대요.”
“어머, 그래? 좀 읽어 보아도 되느냐?”
요코는 아무말 없이 기다하라의 편지를 나쓰에에게 건네 주었다. 나쓰에는 편지를 받아쥐고
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 편지는 끝내 요코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제31장 강
제31장
강
8월 말, 도루가 친구의 자동차를 빌려타고 왔다.
소운쿄에서 아이누족의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고 나쓰에와 요코에게 졸랐다.
“소운쿄까지 차로 갈거니?”
나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나쓰에는 도루가 학교로 돌아갈 때, 함께 삿포로로
나갈 속셈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기다하라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주 집을
비울 수 없다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둘이서 다녀 오너라. 어차피 그날 갔다 그날 올테니까.”
“소운쿄까지 간다면, 온천에 들어가 하룻밤 자고 와야지. 그렇지, 요코?”
“요코와 둘이서 말이야?”
나쓰에는 불안한 듯이 말했다.
“그래요. 요코와 둘이서.”
도루는 나쓰에의 불안해 하는 얼굴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하지만 도루의 표
정은 그 이상 나쓰에가 아무 말도 못하게 하는 엄한 데가 있었다.
“오빠, 운전 잘 할 수 있어? 유서를 써 놓지 않아도 될까?”
요코는 자동차를 타고 나서 도루에게 농담을 했다.
“글쎄, 모르겠는걸. 기다하라에게 유언이라도 써 놓는 편이 좋을거야.”
도루는 쾌활하게 말했다.
‘나는 요코의 친오빠다. 한방에서 몇 날 밤을 같이 지내도 나는 친오빠다.’
나쓰에의 불안한 듯한 시선에 도루는 화를 내고 있었다.
아사히카와를 나와서 국경지방의 병사들이 개척했다고 하는 나가야마 마을로 들어서자, 푸
른 논이 아름답게 보였다. 도루는 신중하게 운전했다.
“오빠, 운전 잘 하네.”
요코는 초콜릿을 쪼개서 그 한 조각을 도루의 입에 넣어 주었다.
“삿포로에서는 언제나 친구의 차를 운전하고 다녔는걸.”
도루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요코는 요즘 침울하지 않은 도루가 오빠다워서 좋았다.
“어머, 정말 아름다운 강이야. 이것이 진짜 이시카리 강의 모습이야.”
여름의 햇빛을 반사하면서 흐르는 물은 맑아서 밑바닥까지 훤히 들여다 보였다.
“그래, 우리는 공장 폐수의 시큼한 냄새가 나는 저 새까만 강이 이시카리 강이라고 생각하
고 자랐지? 옛날에는 저 이시카리 강에 연어가 굉장히 많았대.”
“강이란 모든 사람의 것이야. 한 회사 때문에, 고기도 사람들도 헤엄칠 수 없다면 그건 강
이 아니야. 하류의 어부들의 생활을 침해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요코는 화가 치미는 듯이 말했다.
“응, 그런데 말이야, 저 정도 상태라도 상당히 좋아졌다고 할 수 있지. 회사도 꽤 노력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
다이세쓰의 계속된 봉우리가 뚜렷하게 크게 다가왔다. 차는 가미가와 거리를 지나서 점차로
산골짜기 속으로 들어갔다. 거인이 커다란 끌로 깎은 것 같은 암벽이 계속되었다. 차는 드디
어 소운쿄에 다다랐다.
저녁식사를 마치자, 도루와 요코는 불꽃놀이를 구경하려고 여관을 나왔다. 이미 해는 저물고
길은 어두웠다. 여관에서 조금 떨어진 버스 터미널에 있는 무대에는 재단이 만들어져 있고,
주위에는 수천 명의 관광객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제단에는 연어, 무, 오이, 가지를 비롯해서
많은 공양물이 차려져 있고, 그 옆에 있는 3미터 정도의 성화대에서 때마침 불꽃을 터트리
고 있었다.
요코는 도루의 유가타 소매를 붙잡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속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성화
가까이에 다가갔다. 불의 열기가 강해서 사람들은 그 가까이에는 없었다.
제단 앞 무대에는 아름다운 수가 놓여진 옷을 입은 아이누의 여자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면
서 손뼉을 쳐서 장단을 맞추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단조로운 가락으로 외치는 소리는 아마도 소박한 아이누의 노래 같았다. 외마디 소리뿐인
그 소박한 노래가 차츰 열기를 띠어갔다. 삥 둘러서서 춤을 추는 아이누 여자들의 길고 검
은 속눈썹이 아름다웠다.
“오빠.”
요코는 살짝 도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왜?”
“이제 그만 돌아가.”
“왜 그래? 기분이 나쁘니?”
도루는 놀라서 요코의 얼굴을 봤다. 그때 춤이 끝나고 사람들이 와 하고 냇가쪽으로 몰려
들었다.
“기분은 나쁘지 않지만…….”
그때 세 사람의 아이누 여자가 성화로부터 옮겨온 불화살을 활에 메겼다. 활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불덩어리가 되었다.
와, 하고 환성이 올랐다. 다음 순간 한복판에 뱀처럼 불화살이 날고 강 건너편으로도 불화살
이 수없이 날아갔다. ‘협곡의 불꽃놀이’라는 글자가 모양대로 타올랐다. 다시 환성이 올랐
다.
“요코, 돌아갈까?”
도루가 물었다.
“아냐, 이젠 괜찮아. 아름다운 불꽃이야.”
요코는 밝게 대답했다. 요코는 아이누족을 구경거리로 삼는 일에 강한 저항을 느꼈던 것이
다.
계속해서 큰 불꽃이 타올랐다. 강물에 불꽃이 비쳐 아름다웠다. 불꽃이 크게 밤하늘로 퍼져
나가자, 어둠속으로 떠밀리듯 우뚝 솟은 암벽이 쑥 하고 모습을 나타냈다. 불꽃이 사라지자
바위도 모습을 감추었다.
요코는 불꽃에 바위가 솟아오를 적마다 험준한 암벽이 드러나는 쪽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어둠속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험상궂은 바위는, 불꽃과는 대조적인 아름다움을 보였다. 어
둠 속에서 나타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바위는, 지구가 크게 헐떡이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다가오는 아름다움이기도 했다.
요코는 어느 사이엔가 도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바위가 살아 있는 것같이 보여.”
“바위가?”
도루는 양 팔을 가슴에 낀 채로 요코를 봤다. 불꽃에 비치는 요코의 얼굴이 아름다웠다.
불꽃이 올라올 때마다 휭 하고 금속성의 소리가 났다.
“마치 소이탄이 터지는 소리 같아. 전쟁이 생각나는걸.”
옆에 있던 50세 정도의 남자가 내뱉듯이 말하고 자리를 떴다. 도루와 요코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니까, 그 남자는 목발을 짚고 있었다.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요코는 그때 생전 처음
으로 전쟁의 말할 수 없는 무서움을 피부로 느낀 것 같았다.
여관에 돌아와 보니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산골짜기의 불꽃이 굉장히 박력있는 것 같아.”
“그래, 소리가 메아리치니까.”
도루는 요코와 한방에서 자는 것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요코, 목욕해야지?”
“응, 오빠가 먼저 할래?”
“두 번씩이나 하지 않아도 돼.”
요코가 목욕하러 가자, 도루는 이부자리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요코가 돌아오기 전에 잠을 자 버리고 싶었다.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도루는 그런 자
신에게 화가 났다.
나쓰에의 불안한 것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이 바보같은 놈! 요코는 내 여동생이야!’
도루는 나쓰에에게 반발하듯 마음속으로 외쳤다. 이렇게 마음이 쉽게 흔들려서는 요코의 행
복을 바라면서 일생을 좋은 오빠로 지낼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해졌다.
‘요코는 기다하라의 여자다.’
도루는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장래, 요코와 기다하라 구니오가 맺어질까 어떨까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든 요코를 다
른 남자하고 결혼할 여자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미닫이 문이 열리고 요코가 들어왔다.
“물이 참 좋아.”
요코는 자기의 이부자리 위에 앉아서 도루를 보았다.
“그래?”
가래가 목에 달라붙은 것 같아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요코는 주전자에서 물을 컵에 따라서 마시려고 하다가, 도루에게 말했다.
“오빠, 물 먹고 싶어?”
“응.”
도루는 손을 내밀었다. 차가운 물을 마시자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요코는 태어났을 때부터 컸는데, 지금도 꽤 크군.”
도루는 그렇게 말하고서 안심했다.
요코가 태어났을 때를 알고 있는 것같이 도루는 행동하고 싶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자기
와 요코가 피가 이어져 있는 남매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자신에게 일깨워 주고 싶었다.
요코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이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요코는 역시 엄마를 많이 닮았어, 외할머니를 빼다박았어.”
도루는 젊어서 죽어 버린 나쓰에의 어머니를 알지 못했다. 퇴색해 버린 사진을 보았을 뿐이
었다.
“그래?”
요코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요코의 머리맡에 앉아서 언제까지나 요코를 들여다보곤 했었어. 머리를 쓰다듬으려
고 했더니, 막 태어난 갓난아이의 머리는 부드럽기 때문에 손 대지 말라고 꾸지람을 들었
어.”
요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이지…….”
“오빠,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요코는 이불 위에 일어나 앉았다.
“알고 있어. 내가 얻어온 아이라는 것을.”
요코의 말에 도루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요코는 어른스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도루
를 보았다.
‘알고 있었는가?’
“언제부터?”
도루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소학교 4학년 때의 겨울이었어. 지독하게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이었지.”
“그렇게 일찍부터 말이야?”
도루는 다시 깜짝 놀랐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친남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어떻
게 순진하고 밝게 살아올 수가 있었던 것인가, 하고 생각하자, 요코가 돌연 전혀 미지의 여
성인 것처럼 수수께끼에 쌓여 있는 것같이 보였다.
‘어찌하여 요코의 표정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었을까?’
자신보다도 요코 쪽이 밝다는 것이 도루가 생각하기에는 불가사의했다.
“누구에게서 들었어?”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어.”
요코는 보급소 부부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누구에게 그 말을 했어?”
“말하지 않았어.”
소학교 때부터 요코는 그 비밀을 혼자서 가슴속에 깊이 간직해 온 것인가 생각하니, 도루는
요코가 가련하다기보다 무섭기조차 했다.
“그 말을 듣고 요코는 정말이라고 생각했었니? 많이 놀랐지?”
“응, 하지만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어. 왠지 어린 마음에도 느낌이 있었어. 더 어리든지 더
컸더라면 느낌이 달랐을는지도 모르지만…… 조금 쓸쓸한 느낌이었어. 하지만 그다지 심한
쇼크는 받지 않았어.”
“그래? 그런데도 요코는 비뚤어지지도 않고 잘자랐구나.”
도루는 요코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나의 비뚤어진 곳인지도 몰라. 친어머니를 만나서 칭찬받는 좋은 아이
가 되려고 처음에는 최선을 다했어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신문에서 비행소년에 대한 기
사를 자주 보았어. 양친이 없다든가 편모라든가 계모라고 해서 비뚤어진 사람이 흔히 있었
지. 하지만 나는 그러한 흔히 있는 인간의 한 패거리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어. 자신이 나
빴던 것을 남의 탓으로 하는 것이 싫었던 거지. 자신이 나쁜 것은 자기의 탓이야. 환경이라
는 것도 확실히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말하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나는 어떠
한 역경이 다가와도 살아갈 수 있는 아이야. 소운쿄에 올 때 이시가리 강의 상류는 깨끗했
어. 하류는 공장의 폐수로 검게 더러워져 있지만. 그것을 보고 생각했어. 나는 강이 아니고
인간이다. 설사 폐수와 같은 더러운 것이 흘러들어도 나는 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
아야지. 그렇게 생각했어. 이런 거 역시 내가 순진하지 않다는 얘기야. 그렇지, 오빠?”
요코의 목소리는 명랑했다.
제32장 빨간 꽃
제32장
빨간 꽃
대학으로 돌아가는 도루와 함께 나쓰에도 삿포로로 출발했다.
결혼할 때까지 삿포로에서 자란 나쓰에가 오랫만에 삿포로에 나가보고 싶다는 것은 자연스
러운 일이었다.
다카키도 개업한 이후,
“출산이라는 것은 어째서 이렇게 의사가 쉬고 싶을 때를 노리는 것인지 모르겠어.”
하고 탄식할 정도로 일요일도 없는 분주함 때문에 아사히카와를 방문하는 일이 전혀 없었
다.
그러니까 나쓰에가 다카키를 방문한다는 것도 충분히 삿포로로 나가는 구실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인 즉 나쓰에는 기다하라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기다하라가 나쓰에에게 보였
던 다정함 때문에, 나쓰에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젊음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했다.
지금 나쓰에는 재차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엄마가 계시지 않으니까 기다하라가 너무 가엾어요.”
나쓰에는 그렇게 말하고 기다하라의 잠옷과 양말을 사서 삿포로로 출발했던 것이다. 당일치
기라고 말하고 출발했던 나쓰에는 8시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요즘 들어 빨리 귀가하는 게이조도 웬일인지 아직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18헥타르 이상이나 되는 숲의 고요함이 숲 옆의 집 안에까지도 가득차 너무나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자, 자신의 존재조차 어쩐지 기분 나쁘게 생각되었다. 씩씩한 요코마저
도 게이조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켜는 것도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텔레비전 속의 인물이 화면으로부터
쑥 빠져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똑똑한 것 같아도 요코는 고등학교 1학년짜리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읽기 시작했던 카뮈의
좮페스트좯에 겨우 흥미를 붙였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요코?”
나쓰에의 목소리였다.
“집 보느라고 수고가 많다. 아버지는 오셨니?”
들뜬 목소리였다.
“아, 엄마. 아빠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어머, 그래?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내일 밤에 돌아가겠다고 전해줘. 지금 다카키 씨의 집에
있단다.”
“여보세요, 요코?”
문득 도루의 목소리가 났다.
전화에서 들으니까 게이조의 목소리와 꼭 닮았다.
“오빠도 엄마하고 함께 있어?”
“응 …….”
도루는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목소리로,
“……잘있어.”
하고 말했다. 이어서 다카키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요코, 많이 컸지? 아주 매력있는 여성이 되어야지. 오랫동안 만나지 않으니까 네가 아직도
소학생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다음에는 요코도 삿포로에 오너라. 아저씨는 매일 갓난아이를
이 세상에 맞이하느라 바빠서 말이야. 뭐가 갖고 싶니? 아저씨는 돈이 많거든. 아빠는 아직
도 돌아오지 않았니?”
하고 싶은 말을 하고는 갑자기 다카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귀신 나오겠다!”
“싫어요, 아저씨.”
요코의 말에 다카키의 크게 웃는 소리가 났다.
다카키의 떠들썩한 전화가 끝나자, 집안이 한층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
게이조는 10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요코 혼자 있었니? 쓸쓸했겠구나.”
게이조는 유카타로 갈아 입으면서 말했다.
“혹시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빨리 오려고 했는데, 미안하구
나…….”
게이조는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식사하셨어요?”
“별로 생각이 었구나. 우유가 있으면 비스킷이라도 먹을까?”
“비스킷이요?”
“응, 그래.”
게이조는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싫은 말이야, 환자가 자살을 했어. 그래서 집에 전화할 겨를이 없어서…….”
“어머, 자살? 병이 심했던가 보죠?”
“아니, 그 사람은 내일 퇴원할 예정의 환자였다. 의사가 되어서 20년이나 되었지만, 퇴원을
앞두고 자살하는 경우는 처음이야.”
게이조는 비스킷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어머, 병이 나았는데 왜 자살을 해요?”
과연 그랬다.
환자는 28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가벼운 폐결핵으로 공동도 없었다. 은행원으로 복직도 결정
되어 있었다. 양친 부모도 다 계시고 삼형제 중 둘째로 아버지는 소학교의 교장이었다. 아무
런 문제도 없는 환경이었다. 그는 약간 야위기는 했지만 허약하지는 않았다. 요양 태도도 착
실해서 병세가 가벼운 환자들에게서 보기 쉬운 무단외박이나 음주도 없었다.
게이조는 나쓰에가 돌아올지 어떨지 모르기 때문에, 요코 혼자서 집을 보게 하는 것이 가엾
어서 빨리 퇴근하려고 생각했다. 막 가운을 벗으려던 참에 원내 전화가 매우 요란스럽게 울
렸다. 또 응급환자인가, 혹은 왕진인가를 생각하면서 수화기를 들자, 결핵병동의 간호부장인
고시지 가즈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원장 선생님, 2호실의 마사키 씨가…… 지금 옥상에서 뛰어내려서…….”
“뭐, 마사키가? 마사키가 말인가?”
“네, 마사키 지로 씨입니다.”
“내일 퇴원하기로 한 마사키가 틀림없나?”
“틀림없습니다.”
게이조는 막 벗으려던 가운을 다시 입으면서 원장실을 뛰어나갔다.
그는 즉사했다.
게이조는 마사키의 죽음에 짐작이 가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마사키는 병세에 차도가 있음
에 따라서 과묵해져갔다. 복직이 결정되어도 퇴원 날이 결정되어도 왠지 우울한 얼굴로 멍
하니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마음에 드는 간호사라도 생겨서 퇴원하는 것이 싫은 것일까, 생각하고 게이조는 마사
키를 원장실로 불렀다.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만일 마사키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 일
년 후에는 결혼해도 좋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원장실에 들어온 마사키는 활기가 없었다.
“왠지 기운이 없는 것 같군. 어디가 아픈가?”
“아무 데도 아프지 않아요.”
“마음이 울적해 보이는데?”
“재미가 없습니다. 뭐든지.”
“왜 그래? 실연이라도 했단 말인가?”
게이조의 말에 마사키는 히죽 웃었다. 게이조는 섬뜩했다. 너무 차가운 웃음이었다.
“실연이라면 차라리 좋겠어요. 나는 내가 뭣 때문에 살아 가는지알 수가 없어졌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병은 완전히 치유되고,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부터 시작이지 않은가?”
“아니에요. 선생님, 아픈 동안은 치료한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치료가 되었다면
이제부터 도대체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마사키는 절망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엇을 하다니! 일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일이라니요? 선생님,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6년 동안이나 주판을 놓기도 하고 돈을 셈하
기도 하면서 일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기계도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나는
요사이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2년 동안이나 쉬었는데 은행은 조금도 곤란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쉬고 있는 동안에 시내에만도 지점이 두 곳이나 늘어나
서 번창하고 있으니까요. 내가 쉬든지 쉬지 않든지 꼭 같습니다. 결국 나의 존재 가치는 없
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가 직장에 돌아가서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게이조는 그때 분에 넘치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웃으면서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런 마사
키가 오늘 자살을 했던 것이다.
수신인이 없는 유서에는,
“결국 인간은 죽는다. 마사키 지로를 꼭 필요로 하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는데 어정어정 살
아가는 것은 치욕이다.”
라고 쓰여져 있었다.
게이조의 말을 요코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었다.
‘결국 그 사람도 둘도 없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을 누군가가 진지하
게 사랑해 주었더라면, 그 사람은 과연 죽었을까?’
요코는 그 사람의 죽음이 남의 일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이 일로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단다.”
게이조는 소파에 누우면서 말했다.
“나는 마사키 군의 병은 치료할 수 있었지만 살아가는 힘을 주지는 못했어. 마사키 군의
영혼은 병들어 있었어. 하지만 나는 육체의 병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면서, 마음의 병
에는 무관심했던 것이란다.”
게이조는 쓸쓸한 표정으로 요코를 봤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마사키 군의 마음의 병을 아빠가 알았다고 해도 기침에는 기침약,
결핵에는 마이신과 같은 딱 들어맞는 처방은 마음의 병에는 없다고 생각한단다.”
게이조는 요코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는 모습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요코에게 신경을 쓰기에는 게이조 자신이 마사키의 죽음에 의해서 받은 충격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게이조는 지금, 자신이 도대체 뭣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의사를 평생의 직업으로 가진 것에 대하여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자랑스럽기조차
했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자신이 의사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꼭 어
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지금 갑작스럽게 죽는다고 해도, 또 병원이 문을 닫는다고 해도 환자들은 다른 병원
으로 가면 된다.’
병을 치료하는 일에 게이조는 큰 기쁨과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게이조가 아니면 치
료가 되지 않는 병은 없을 터였다.
어느 사이엔가 게이조도 허무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완전히 치료된 마사키에게 삶
의 힘을 부여할 수 없었던 절망감이기도 했다.
자신의 생각 속에 젖어 있었던 게이조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요코의 빛나는 눈이 게
이조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 나도 마사키 씨의 기분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허, 알 수 있을 것 같애?”
“그래요. 나도 자신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어요. 사실은 어떠
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둘도 없는 존재일 터인데도, 자신은
그것을 느끼지 못해요. 누군가가 진심으로 나를 둘도 없는 존재라고 말해 준다면 알 수 있
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에요. 마사키 씨 같은 분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요코는 자기의 말에 그만 얼굴을 붉혔다. 사랑이라는 말은 낯 간지러운 말이었다. 요코는 태
어나서 처음으로 남 앞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게이조는 요코의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누군가가 마음속으로, 요코를 둘도 없는 존재라고 말해 준다면… ….”
이라는 말에, 게이조는 사랑에 굶주려 있는 요코의 고독을 느꼈다.
‘나도 나쓰에도 요코가 고등학교를 나와서 하루라도 빨리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면 하고 바
라고 있다. 빨리 이 집을 떠나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게이조는 정말로 요코가 불쌍했다.
“벌써 11시다. 자거라”
게이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렇게 말하면서, 내일은 요코를 데리고 어딘가에 드라이브
라도 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정원에서는 벌레의 울음소리가 나고 있었다.
“여기가 아이누의 묘지란다. 아사히카와에 살고 있는 이상, 요코에게도 한 번은 보여주고
싶었다.”
언덕 위에 차를 멈추고 내린 곳은 보통의 소나무숲과 같았다. 화산재로 깔려 있는 길 때문
에 게이조와 요코의 구두가 곧 더러워졌다.
“어머!”
묘지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았던 요코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묘지라고는 해도 일본 사람들의 그것과 같이 ‘누구의 집안’이라고 경계를 치지 않고, 나
무로 만든 묘표가 얌전하게 정렬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죽은 자가 잠들고 있는 고요한 느낌이었다. 죽어서까지 빈부의 차가 분명
한 일본 사람의 묘지만이 같은 오만한 묘는 없었다.
“어머, 참 좋은 묘지예요.”
요코는 게이조를 쳐다보았다.
“요즘에는 여기에도 돌묘가 들어와 있는데 말이야. 좋지? 이 세상의 부나 지위 같은 것에
도 모든 연을 끊어 버린 숙연함이 있어 좋지?”
“정말 그래요. 아버지, 이 절구공이 형태와 뾰쪽한 종이칼과 같은 형은 서로 어떻게 달라
요?”
요코는 조그마한 절구공이형 묘표 앞에 섰다.
데키시란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여자 묘고, 뾰쪽한 것이 남자 묘란다. 이 나무는 백 년은 썩지 않는 것이라고 하더
구나.”
온통 클로버로 뒤덮여 있고, 한 되짜리 병이 하나 데구르르 묘표 앞에 나뒹굴고 있었다.
찢어진 신문지 위에 썩은 사과 하나, 그 옆에 좁쌀이나 피로 만든 밥이 차려져 있었다.
“본래의 아이누족들은 한 번 죽은 사람을 매장하면 그 묘에는 가까이 가지 않아. 본토 사
람의 음력 백중 때의 성묘하는 풍습이 아이누족 사람들에게도 들어간 것이겠지.”
게이조는 다정하게 요코를 뒤돌아 보았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오너라. 여기는 토장으로, 그다지 깊게 파지 않은 것 같구나. 게다가
학생들이 부장품인 장식용 칼이나 구슬을 고고학 참고로 삼으려고 파헤쳐 갔다고 하니까 말
이야.”
“어머, 그건 너무하군요.”
요코가 슬픈 듯이 외쳤다.
“저는요, 아버지. 지금 죽은 아이누족의 일생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모두 다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틀림없이 아이누족인 것만으로 일본 사람들에게 어릴
때부터 못당할 일을 많이 당해서 슬펐겠죠? 그럼에도 죽어서까지 묘를 파헤쳐지다니…… 너
무 불쌍해요.”
요코의 말에 게이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1896년생’이라고 쓰여진 묘표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도 고통을 당해서 죽은 것은 아닐까?’
하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지금 여기에 잠들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1906년에는 1만 평이었던 아이누의 묘지가 지금은 950평으로 줄었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누
족들이 불쌍하다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어제 이맘 때 마사키는 아직 살아 있었다.’
게이조는 문득 마사키의 죽은 얼굴을 연상했다. 마사키는 얼굴 전체가 비뚤어져 금방이라도
신음이 새어나올 것 같은 괴로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겁의 괴로움이 계속될 것 같
은 표정이었다.
9월의 태양 아래 아사히카와의 거리가 연한 초록으로 흐려 보였다.
게이조와 요코는 나란히 아무 말 없이 언덕 아래의 시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까?’
마사키의 자살은 그가 말한 대로 개인의 존재가치는 이 세상에서 없다고 하는 생각에 대한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사회가 복잡하게 되면 될수록 개인의 인격도 가치도 무시되는 것이
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안되는 분야는 계속해서 폭이 좁아질 뿐이다.
‘죽음은 해결이 아니고 문제 제기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자살은 더 그렇다.’
게이조는 묘표에 앉아 있는 빨간 고추잠자리를 바라보았다. 햇빛에 빛나는 잠자리의 얇은
날개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문제를 제기해 보았자 주위 사람들도, 사회도 그에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
다.’
게이조는 인간이라는 것이 지독하게 차갑고 그리고 바보스럽게 생각되었다.
“요코.”
요코는 꼼짝도 않고 아사히카와 시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저 거리의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부여되는 것이 하나 있단다. 뭐라고 생각하니?”
“태양의 빛?”
“태양이 비추지 않는 곳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럼 하루의 길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는 24시간이잖아요.”
“그렇기도 하구나.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건강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죽는 것만
은 틀림없이 공평하게 부여되어 있다고 생각한단다.”
“정말 그렇군요. 나도 언젠가 죽겠지요. 하지만 나는 지금 시내를 바라보고 있고, 저 많은
지붕 아래에 살고 있는 사람은 뭔가 일을 하고 있어요. 정말 늠름하다고 생각해요.”
요코가 죽음보다도 일하면서 살아가는 것에 마음이 끌리는 나이라는 것을 알고 게이조는 고
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태양 아래 아사히카와 거리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낄 나이인 요코가 일하는 에
너지에 보다 마음이 끌려 있는 것이 게이조를 불안하게 했다.
게이조는 요코가 취직반에 들었다고 했던 다쓰코의 말이 생각났다.
‘요코는 자기의 출생을 알고 있는 것일까?’
수백 미터 앞에 일본인의 묘소가 희게 빛나 보였다.
‘여하튼 사람은 모두 죽는다.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게이조는 자신이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고 몹시 허무했다. 무엇을 목표로 해서 살아왔던 것
인가 알 수 없었다.
‘인간은 무엇을 목표로 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에게는 사회적인 지위도, 얼마만큼의
재산도, 아름다운 아내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꼭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니었
다.’
게이조는 발 밑에 피어있는 작은 빨간 꽃을 꼼짝도 않고 보고 있었다.
게이조는 요코를 맡고 싶다고 했던 다쓰코의 말을 나쓰에에게 해야 할지 생각하다가 지쳐
있었다. 그 말을 다쓰코가 나쓰에에게 직접 하지 않은 것은, 게이조의 판단에 따라 나쓰에에
게 말하라는 조치라고 생각되었다.
“다쓰코가 요코를 데려가고 싶다고 했소.”
하고 가볍게 말을 끄집어 내야겠다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하지만 나쓰에는 나쓰에대로 그것
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어머나, 다쓰코가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우리 두 사람이 있는 데서 하지 않고 당신 혼자
있는 데서 했다니, 정말 너무하군요. 그렇지 않아요?”
하고 몹시 분개할지도 몰랐다.
“이상하군요. 왜 그러한 말을 꺼냈을까요? 당신이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요? 내가 그 아이
를 기르는 방법이 당신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이렇게 말을 할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은 요코를 그렇게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그렇게 그 아이가 귀여워요?”
하고, 시비를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게이조가 그 말을 꺼낼 수 없는 것은 사실대로 말하면 다른 이유에서였다. 나쓰에가
다쓰코의 말에 응해서 요코를 주어 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 집에서 요코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는 생각만 해도, 게이조는 쓸쓸했다.
서재의 펜 접시는 연필이 언제나 깨끗이 깎여 있다. 요코가 한 일이었다. 그것 하나만을 보
아도 게이조는 딸의 다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
2, 3년 전부터 매일 아침 세면장으로 가면, 곧바로 요코가 따라와서 치솔에 치약을 묻혀 주
었다. 그것은 처인 나쓰에에게서도 받은 적이 없는 따뜻한 마음의 배려였다.
게이조는 때때로 요코의 남편이 되는 남자는 매일 아침 이렇게 따뜻한 사랑을 받겠다고 상
상한 적이 있었다.
병원에서 피곤에 젖어 돌아와도, 요코의 밝은 웃는 얼굴을 보면 위안이 되었다.
도루만 평생 요코를 여동생으로 생각해 준다면 요코를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게이조는 문득 너의 적을 사랑해라.’고 하는 말을 생각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말이었
다.
‘이 말을 나의 평생 과제로 삼겠다는 다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그 말
조차 잊어 버리고, 지금의 나에게는 요코가 사이시의 아이라는 생각조차 희미해졌다. 도루에
관한 일이 없었다면 완전히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게이조는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말을 자주 생각했다.
‘지금의 요코에 대한 이 애정은 시간이 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나의 인격과
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주어진 것인가?’
게이조는 시간이 해결하는 것은 정말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하튼 게이조는 요코를 떼놓고 싶지 않았다. 다쓰코의 말을 나쓰에에게 전하려고 생각하면
서도, 꾸물대다가 그 해도 어느새 다 지나갔다.
제33장 눈의 향기
제33장
눈의 향기
새해가 되었다.
오후가 되어서 쓰지구치 집에 연하장 뭉치가 배달되었다.
“편지요!”
라는 소리에 요코는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요코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이야 말로
기다하라 구니오의 연하장이 올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다하라는 언젠가,
“편지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라고 요코에게 말했었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한 번 편지가 왔는데, 기다하라의 편지는 나쓰
에의 손에 건너간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어쩐지 요코는 답장을 쓸 기회를 놓쳐
버렸다. 삿포로에 돌아가서 기다하라가 다시 편지를 보낼 거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끝내 편지는 오지 않았다.
요코는 자신이 답장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편지가 오지 않는 것인가 생각하면서도, 기다하
라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편지가 오지 않은 채로 새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하장 정도는 보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요코도 연말에 기
다하라 앞으로 연하장을 썼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지난해는 소식을 주셨는데도, 답장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 편지
의 지워져 있던 부분에는 무엇이 쓰여져 있었어요?
너무나 평범한 문맥이었지만, 그런한 편이 좋은 것처럼 생각되어서, 요코는 눈 속의 큰길에
있는 우체통까지 연하장을 부치러 갔다.
지금쯤 기다하라가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요코는 급하게
연하장 다발을 풀었다.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도루가,
“어디, 나에게도 두세 장은 와 있겠지?”
하고 엽서 뭉치의 반을 받아들고 가려내 주었다. 대부분이 환자가 보낸 게이조의 연하장이
었다.
나쓰에와 게이조는 오전부터 객실에서 세배 손님을 대접하고 있었다.
요코 앞으로 온 연하장도 많았다. 그 중에는 요코가 잘 모르는 상급생으로부터 온 엽서도
있었다.
“허, 요코도 명사급이군. 상당히 많구나.”
남학생으로부터 온 연하장이 있는 것을 보고 도루가 놀렸다.
요코는 남자들의 글씨가 보일 때마다 몇 번이고 기다하라 구니오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하
고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기다하라의 엽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기다하라 씨는 이제 나에 관한 일를 잊었는지도 몰라.’
요코는 얼마 남지 않은 엽서를 한 장 한 장 정성껏 가려냈다.
‘오늘 연하장이 오지 않으면, 인연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기를 건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뭐야, 그 녀석, 규슈에 가 있었던가?”
“응, 이것은 좋은 판화다. 그렇지 요코?”
하는 등 한 장씩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도루가 요코보다 연하장 가려내는 것이
늦었다.
기다하라의 연하장은 이제 없다고 생각했던 그때, 기다하라 구니오라는 이름이 요코의 눈에
들어왔다.
요코의 얼굴이 빛났다. 왜 이렇게도 기쁜 것인지, 요코 자신도 이상했다. 부끄러울 정도로
기뻤다. 하지만 기쁜 것은 조금 빨랐다. 수신인은 나쓰에와 도루였다.
그러나 요코는 낙담하지 않았다. 도루 바로 옆에는 아직 30장 정도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나쓰에와 도루에게 연하장이 와 있는 이상 자신에게도 와 있을 거라고 요코는 생각했다. 그
러나 끝내 요코의 기대는 빗나가 버렸다. 요코는 단념하지 않고 다시 2백 매 정도의 연하장
을 전부 다시 조사했다. 역시 기다하라의 엽서는 한 장밖에 와 있지 않았다.
‘왜 내가 이렇게 기다하라 씨의 연하장을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 기다하라 씨는 겨우 1주
일 정도 머물렀던 오빠의 친구가 아닌가.’
하고 요코는 생각했다.
‘나는 기다하라 씨의 친구의 여동생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나의 친구는 아닌 것이다. 잊혀
져도 어쩔 도리가 없지 않는가…….’
그러나 요코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어디에 마음이 끌리는지 요코 자신도 잘 알 수가 없
었다.
요코는 나쓰에와 도루에게 보낸 기다하라의 연하장을 손에 들었다.
‘하정(賀正)’이라고 써 있는 옆에 ‘지난해에는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라고 쓰여져 있을
뿐이었다.
요코는 자기에게 온 50장 정도의 연하장을 팔에 안고 일어섰다.
“요코, 스키 타러 갈까?”
연하장을 보고 있던 도루가 얼굴을 들었다.
“글쎄…….”
요코는 기분이 침울한 듯이 대답했다.
도루는 누운 채로 회색바지에 핑크빛 스웨터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요코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힘이 없어 보이구나. 설날에 이노자와에서 스키를 타지 않으면, 어쩐지 설 기분
이 나지 않아.”
두 사람은 소학교 때부터 설날에는 강 건너 스키장에 갔던 것이다. 하지만 금년의 요코는
스키 타는 것에 어떤 흥미도 없어져 있었다.
“갈까?”
도루의 권유를 거절하는 것이 미안하여 요코는 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스키화를 신고 숲속
으로 들어갔다.
운동 신경은 요코가 더 뛰어났다. 그렇지만 도루도 스키는 잘 탔다. 두 사람은 교묘하게 숲
속을 빠져 나와서 제방을 따라 스키를 탔다.
가루눈이 조금씩 날리고 있었다. 강바람이 볼을 스쳐갔지만 스키를 타면 몸이 따뜻해졌다.
“겨울 강은 참 좋아.”
요코가 스틱을 눈 깊숙이 짚고서 멈추어 섰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강은 폭이 좁았다. 새
하얀 눈 속을 흐르는 겨울 강물은 검고 차분하게 주위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오빠.”
요코는 도루를 뒤돌아 보았다.
“왜 그래, 요코?”
도루는 요코의 얼굴이 지독하게 슬픈 것 같아서 놀랐다.
“눈은 정말 맑고 깨끗해. 그렇지, 오빠?”
“응.”
“하지만 향기가 없는걸.”
“이렇게 온 세상에 쌓여 있는 눈에 향기가 있다면 큰일이겠지, 요코.”
하고 도루가 웃었다. 요코도 따라서 웃었다.
사실 요코는 기다하라로부터 연하장이 오지 않은 것을 도루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
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은 다시 스키를 타기 시작했다.
설날의 스키장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평상시처럼 붉은색, 황색, 녹색의 꽃을 뿌려 놓은 것
같이 화려한 스키복으로 활기차 있는 산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산꼭대기까지 다다르자, 도루와 요코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역시 여기에 서지 않으면 설 기분이 나지 않지?”
“정말이야. 매년의 습관이란 무서운 거야. 떡국을 먹지 않으면 설 기분이 나지 않는 것과
똑 같아.”
주위는 조용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가루눈이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사히카와
의 거리도 내리는 눈 때문에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기다하라에게서 연하장이 왔니?”
도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었다. 요코는 시가지 쪽을 내려다 본 채로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왜 연하장도 보내지 않는지 몰라?’
요코는 힘껏 스틱를 짚고 도루의 옆을 떠났다. 도루는 요코의 교묘한 활강을 주시하면서,
‘그런가? 기다하라와 역시 편지 왕래도 하고 있지 않는가?’
하고, 약간 안심했다.
기다하라가 요코에 관한 일을 말한 적은 없었다. 요코로부터 편지가 있는 기색도 없었다. 처
음에는 기다하라를 요코에게 가깝게 하려고 안달했었던 도루였다. 그러나 소운쿄에 불꽃을
보러 갔던 밤, 도루는 요코가 자기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이후, 도루의 마음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미 도루가 친오빠가 아니라는 사실을 요
코가 알고 있다면, 도루가 요코와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도 부자연스럽지는 않을 것 같은 느
낌이었다.
요코의 출생의 비밀이 새어나갈 것 같지는 않았다. 만일 어쩌다가 요코가 그 일을 알아 버
렸다고 해도 아무런 증거도 없기 때문이었다.
“요코가 그 범인의 딸이라면, 어떻게 해서 내가 결혼할 수 있었겠어?”
하고, 말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도루는 역시 요코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 한 사람뿐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하라로부터 연하장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새삼스레 도루는 몸
속에 힘이 가득차 넘치는 것 같았다.
산 기슭에 조그맣게 보이는 요코를 목표로 해서, 도루는 힘차게 활강을 시작했다. 바람을 가
르고 산을 미끄러져 내려가자, 내리는 눈이 얼굴을 찌르는 것같이 아픈 것도 오히려 도루에
게는 기분이 좋았다.
내려오는 도루를 보고, 요코는 급히 왼쪽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기다하라에게서 연하장이 왔어?”
하고 도루가 물었을 때, 말할 수 없는 쓸쓸함에 사로잡혀서 요코는 산을 내려오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을 도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도루는 도망치는 요
코를 목표로 계속해서 미끄러져 왔다. 요코는 도망칠 장소를 잃어 버리고 눈 속에 누워서
얼굴을 파묻었다.
“왜 그래, 요코?”
검은 선글라스를 썼기 때문에 도루의 얼굴이 단단하게 보였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눈투성이가 된 얼굴로 요코는 도루를 바라보았다. 도루도 그 옆에 앉았다.
“이렇게 눈 속에 뒹군 채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지. 어릴 때 말이야.”
“그래.”
폭신폭신하게 쌓여 있는 눈에 몸을 파묻고 내리는 눈을 보는 것은 즐거웠다. 눈은 잿빛 하
늘에서 내려오는 것같이는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하늘에서 샘솟는 것처럼 보였다.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눈은 입 속으로 들어오지 않고, 곧바로 눈 앞에까
지 내려와서는 훌쩍 도망쳐 버리는 것 같았다.
“응, 어릴 때와 똑같아. 이렇게 반듯이 누워서 보고 있으면, 뭔가 하늘나라로 빨려들어 가
는 것 같아.”
“응.”
도루도 반듯이 누운 채로 요코와 나란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요코, 기억 나니? 2학년 때였던가, 눈이 왜 희냐고 물었던 것 말이야. 내가 만일에 신이라
면 일요일에 내리는 눈은 흰색, 월요일에는 노란색, 화요일에는 빨간색으로 정하고 싶다고
말했었지.”
“그런 말을 했던가?”
“그래. 그러고 나서 눈아가씨의 이야기를 했더니, 눈아가씨는 눈을 이불로 해서 잠을 자느
냐고 물었었어.”
“어릴 때는 눈아가씨 이야기가 정말로 무서웠어. 처마의 고드름이 달빛에 파랗게 비치니까
어쩐지 눈아가씨가 얼음 속에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소학교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도루도 요코도 즐거웠다.
남매로서 사이좋게 자란 두 사람에게는 공통된 추억이 몇 개인가 있었다.
‘이러한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것은 너무나 바람직한 일이야.’
그렇게 생각했을 때, 요코가 먼저 눈을 털며 말했다.
“자, 오늘은 어두워질 때까지 스키를 타자.”
“응, 그래”
도루도 일어나 눈을 털었다.
도루는 더 천천히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차가운 눈 위에서는 그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들여다 보였다. 도루는 스키화를 조이고서
요코의 앞에 서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월도 7일이나 지났다. 그 날은 공기마저도 얼어 버릴 것 같은 추운 날로 이중창으로 된
바깥창이 새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지난해 고장난 페치카 옆에 석탄 스토브가 타고 있었
다.
“겨울방학이라는 것은 역시 필요해. 이렇게 불을 쪼이고 있어도 등 쪽이 추우니까 말이
야.”
도루는 그렇게 말하면서 등을 스토브 있는 쪽으로 돌렸다.
“그래, 오늘 같은 날 소학생이 학교에 간다면 큰일날 거야. 아사히카와의 겨울방학은 25일
까지이지만, 2월 한 달 내내 춥잖아.”
나쓰에는 회색의 털실로 게이조의 양말을 뜨고 있었다. 게이조는 겨울철엔 나쓰에가 손으로
짠 양말 이외에는 신지 않았다.
“아버지가 소학교 때에는 영하 20도 정도가 되면 땅 하고 불꽃이 올라오고 10시에 학교가
시작된다고 했어. 지금은 6시 뉴스에서 알 수 있지만.”
요코는 책장 사이에 끼워둔 꽃을 액자에 넣었다. 여름 동안에 말려 두었던 꽃잎을 그림처럼
천이나 종이에 붙여 만드는 것이었다. 요코가 만들어 놓은 마른 꽃잎은 거의 색깔이 변하지
않고 선명했기 때문에, 액자 속에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싱싱하게 보였다.
추위가 혹독한 홋카이도에서는 꽃꽂이의 물도 얼 정도이기 때문에 요코가 만든 색이 선명한
말린 꽃잎은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저 잠깐 다쓰코 아주머니 집에 세배하러 다녀오겠어요.”
요코는 다 만든 액자를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서 말했다. 요코는 오랫동안 다쓰코의 집에
가지 않았다. 정초도 되고 해서 가보고 싶었다.
다쓰코의 집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나쓰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추운데?”
도루가 창 밖을 보며 말했다.
“이렇게 추운 날이라 아주머니의 집에도 손님이 없을 거야.”
요코는 조용한 다쓰코의 거실을 상상하자 까닭없이 가고 싶어졌다.
“아주머니의 집이라면 가도 괜찮지 않아요?”
도루는 아무 말 없이 뜨개질을 하고 있는 나쓰에를 보고,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자 금세 속눈썹이 달라붙고, 눈썹도 앞머리도 내뱉는 입김도 얼어붙어서 순식간
에 하얗게 되었다. 요코는 버스 정류장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워서 꼼짝 않고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가 가까이에서 울렸다. 요코는
아무 생각없이 버스가 오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
다시 클랙슨 소리가 났다. 무심코 뒤돌아 본 요코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자동차를 세우고, 요코를 보고 있는 것은 기다하라였다.
“어머, 기다하라 씨.”
가죽 점퍼를 입은 기다하라는 아무 말 없이 뒷문을 열었다.
요코는 이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저희 집에 오시는 참이었어요?”
요코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넘쳐 있었다. 기다하라는 조금 생각하는 듯이 하고 나서 고개
를 끄덕였다.
“어머, 우리집에 들르시지 않을래요?”
자동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요코가 물었다. 기다하라의 눈이 힐끗 백미러를 통해서 요코를
보고 있었다.
오랫만에 만난 기쁨으로 요코는 기다하라가 아직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
지 못했다.
“어디 가세요, 기다하라 씨?”
요코는 기다하라의 침묵을 겨우 알아 차렸다. 약간 불안해졌다.
“우리집에 가시지 않아요?”
“싫어요.”
그때서야 처음으로 기다하라가 말했다. 단호한 어조였다.
“……?”
백미러에 비치는 기다하라의 눈이 요코를 보고 있었다.
“나는 요코 씨만 만나러 왔습니다.”
성난 것 같은 말투였다. 요코는 자기도 모르게 멈칫했다.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기다하라는 4가 거리에 있는 호텔 앞에 차를 멈추었다. 지난 여름에 왔을 때 도루와 식사를
했던 곳이었다. 기다하라는 아사히카와에서는 여기밖에 아는 곳이 없었다.
요코는 시계를 봤다. 12시 조금 전이었다.
스팀이 들어와서 식당은 따뜻했다. 두 사람은 2층의 창가에 앉았다. 숙박객이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이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요코는 창에 기댔다.
“나는 요코 씨만을 만나러 왔어요.”
하고 말했던 기다하라의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길 모퉁이의 약국 앞에 세워져 있는 황색 깃발이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춥기 때문인지 사람의 왕래도 차의 왕래도 적고, 큰 개 한 마리가 느릿느릿 차도를 가로질
러서 가는 것이 보였다.
“요코 씨, 뭘 드시겠어요?”
기다하라가 물었다.
요코는 가슴이 꽉 차는 것 같아서 식욕이 없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요.”
요코는 의자에 앉았다.
“곧 12시예요.”
기다하라는 카레라이스를 두 그릇 주문했다. 그 모습이 소학교 남학생과 같은 모습이어서
요코는 픽 하고 웃었다.
“카레라이스가 이상합니까?”
기다하라는 잠시 수줍어하더니,
“나에게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거든요. 그래서 생일이나 제사 때도 아버지가 손수 만든 카
레라이스를 먹고 자랐어요.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서 카레라이스는 진수성찬이지요.”
하고 웃었다. 하지만 기다하라는 곧 표정을 바꾸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요코를 주시했다.
“요코 씨, 당신으로부터 연하장을 받고 나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알 수 없다니요? …… 뭐가 말이에요?”
“요코 씨라는 사람이 말이에요.”
“나를요? 왜 그랬을까요?”
“연하장을 보낼 정도라면 왜 샤리에서 보냈던 편지를 되돌려 보냈어요?”
“내가 당신의 편지를요?”
요코의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큰 눈을 한층 더 크게 뜨고 정말로 깜짝 놀랐다는
순진한 표정이었다.
‘그 편지는 어머니에게 빌려 주었다.’
순진한 놀라움의 표정이 그 생각에 이어 약간 흐려졌다.
“그럼 당신은 모르는 일입니까?”
요코의 놀라는 모습을 보고 기다하라가 말했다
“… ….”
‘내가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 어머니에 관한 일을 말하지 않으면 않된다.’
요코는 난처했다. 하지만 그때 기다하라가 말했다.
“어째서 당신의 어머니는 거짓말을 했을까요?”
기다하라는 지난해 여름방학 때의 마지막 날을 회상했다. 그날 일어났던 일을 기다하라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나쓰에가 삿포로에 왔다고 해서, 도루가 기숙사로 기다하라를 데리
러 왔다.
콕돌이라는 레스토랑에서 나쓰에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옷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흰 바탕에 엷은 녹색 무늬가 있는 기모노가 잘 어울려서,
나쓰에는 젊디젊고 요염하게 보였다.
커다란 선물 꾸러미를 건네받고 놀라고 있는 기다하라에게 나쓰에는 핸드백에서 흰 봉투를
꺼내어서 기다하라에게 주었다.
“이것은 요코가 당신에게 전해 주라고 한 편지예요.”
기다하라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서 편지를 건네 받았다. 나쓰에는 얌전히 웃으면서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 요코를 좋아해요?”
“네, 좋아합니다.”
그때 나쓰에는 드물게 높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정직하시군요.”
아마 그때 도루는 담배를 사려고 자리를 떴을 때였다. 도루가 있었다면 부끄러웠을 것이라
고 생각했던 일을 기다하라는 기억하고 있었다.
흰 봉투를 소중하게 포켓에 넣고 먹었던 그때의 비프 스테이크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
었다.
기다하라는 샤리에서 요코에게 보냈던 편지의 답장을 기다리다 지쳐 있었다. 그러므로 틀림
없이 그 답장의 편지일 거라고 생각하고 받았던 봉투 속에, 자기가 보냈던 편지를 발견했을
때 기다하라는 망연실색했다. 말할 수 없는 굴욕감에 잠시 동안은 도루의 얼굴을 보는 것조
차도 고통스러웠다.
그러면서도 기다하라는 숲속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요코의 모습을 생각하곤 했다.
그때 열심히 책을 탐독하고 있던 요코의 얼굴은 한눈에 기다하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요
코의 얼굴에는 힘이 넘쳐 있었다. 뭔가에 딱 직면해 있는 긴장된 것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
다. 연약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교태도 없었다. 생명 그 자체가 숨쉬고 있는 것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책에서 눈을 떼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
은 불타는 눈으로 무심코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의 눈초리를 기다하라는 결코 잊을 수가 없
었다.
“그렇습니까? 당신이 그 편지를 되돌려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아, 이제야 마음이 놓
이는군요. 나는 틀림없이 요코 씨가 편지를 되돌려보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다행이라고
생각하니 배가 아주 고파요.”
기다하라는 기분좋게 웃었다. 정신이 들자 카레라이스는 완전히 식어 있었다.
“나도 배가 많이 고파요.”
요코도 웃었다. 기다하라는 스푼으로 가득 카레라이스를 떠서 한입에 넣었는데, 잠시 무엇인
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요코 씨가 답장을 주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고민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용서하세요.”
“오늘 아침 연하장을 보고, 즉시 달려온 것입니다.”
“어머, 그렇게 늦게요?”
“우편 사정이 좋지 않으니까요. 좋아요. 이제부터는 주저하지 않고 마구 쓰겠소. 생각해 보
면 나도 나빴어요. 왜 편지를 돌려 보냈느냐고 한 마디 정도 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지
만 되돌려 보낸 쇼크로 그러한 용기가 생기지 않았어요.”
“이유야 어떻든 내가 나빴어요.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쓰지 않았는걸요. 하지만 왠지 쓸 수
없었어요.”
“별도리가 없지요. 이제 용서해 드리겠어요.”
기다하라는 밝게 웃었다.
순식간에 기다하라의 접시는 비워졌다.
“부족하세요? 제가 뭔가 대접해 드릴까요?”
“손아랫사람에게 대접을 받으면 기가 죽어요.”
“그 말씀은 상당히 훌륭한데요? 여자로부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고 웃었다.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해도 두 사람은 즐거웠다.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비프 스테이크?”
“비프 스테이크는 지긋지긋해요.”
기다하라는 나쓰에와 함께 맛있게 먹었던 비프 스테이크가 원망스러웠다.
“어머, 비프 스테이크가 싫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요코가 놀라서 물었다.
두 사람은 핫케이크를 시키고 나서 그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기다하라 씨?”
“왜요?”
“샤리에서의 그 편지에 관한 일을 묻고 싶어요. 편지가 찢어지도록 지웠던 곳이 있었지
요?”
요코는 물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말을 꺼냈다.
“아아, 그것 말이에요?”
기다하라가 수줍은 듯이 웃었다.
“뭐라고 쓰셨는지 알고 싶어요.”
“하지만 …… 요코 씨에게 꾸지람을 들을 것 같은데…….”
“어머, 내가 성질낼 말이에요? 어떤 말인지 듣고 싶어요.”
요코는 똑바로 기다하라를 쳐다보았다.
“난처한데…… 그 편지에 ‘위대한 자의 의지’라는 말을 썼지요? 기억하고 있습니까?”
“네, 잊지 않았어요.”
“그 말입니다. 나는 쓰지구치하고 기숙사의 한방에서 살았고, 그리고 당신과 알고 지낼 수
있지 않았어요? 그러한 일을 내 나름대로 생각해 봤던 것이에요. 그래서, ‘요코 씨를 만났
던 일을 신의 뜻이라고 느껴도 좋겠습니까?’하고 써 놓았던 것입니다.”
기다하라의 눈초리가 매서울 정도로 진지했다.
요코는 볼을 붉히면서도 기다하라의 시선을 응시했다.
“…… 하지만 왜 …… 지워 버렸어요?”
요코는 주저하지 않고 물었다.
“그러한 중요한 말을 서로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하는 것은 경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분명히 기다하라는 겨우 1주일 밖에 쓰지구치의 집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러나 1주일간 같
은 지붕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청년인 기다하라와 소녀인 요코에게 있어서 결코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 그 편지는 어떻게 되었어요? 갖고 계세요?”
“태워 버렸어요. 틀림없이 당신이 되돌려 보냈다고 생각해서…….”
“어머, 태워 버렸다니 아까워요.”
나쓰에가 왜 기다하라에게 편지를 되돌려 보냈을까를 생각하자, 요코는 나쓰에가 원망스러
워 견딜 수가 없었다.
기다하라 역시 나쓰에에 관한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비프 스테이크를 먹고 나서, 도루는 어딘가에 용무가 있다고 나가 버렸다. 그
래서 짐을 백화점의 보관소에 맡기고 기다하라와 나쓰에는 삿포로의 거리를 걸었다. 그때
오고가는 사람들이 나쓰에를 뒤돌아 보았다.
“우리들이 어떤 사이로 보일까요?”
나쓰에는 기다하라를 쳐다보면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주머니는 젊으시니까 모자간으로는 보이지 않을지도 몰라요.”
기다하라의 말에 나쓰에는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기다하라 씨, 아줌마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쓰지구치의 어머니라고 부를까요?”
“아이, 참.”
“그럼 사모님이라고 부를까요?”
“싫어요.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저 그냥 나쓰에라고 불러 주세요. 이름을 불러 주
시면 안되요?”
나쓰에는 분명하게 자신의 나이도 입장도 잊고 있었다. 나쓰에는 기다하라가 보낸 호의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미모가 아직은 충분히 20대 남자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다
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쓰에 씨라고 부르라구요?”
기다하라는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네, 나도 구니오 씨라고 부르겠어요.”
기다하라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기다하라는 나쓰에의 모습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보고 싶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기다하라에게 나쓰에가 말했다.
“구니오 씨는 내가 싫어요?”
“아니요.”
“좋아해요?”
나쓰에는 대담하게 말했다.
“좋아합니다만, 지금은 조금 싫어졌습니다.”
기다하라는 멈춰 서서 나쓰에를 내려다 보았다.
“어머, 왜 그러세요?”
나쓰에의 눈 속에 요염한 빛이 있었다. 그것은 결코 모성애의 빛이 아니었다.
기다하라는 문득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여기 들어가요.”
나쓰에가 먼저 다방으로 들어갔다. 약간 어두컴컴한 데서 보는 나쓰에의 얼굴은 한층 더 요
염하고 젊어 보였다.
나쓰에가 젊게 보이는 것은 기다하라에게는 무의미했다. 약간 어두운 다방 안에서 보는 나
쓰에에게는 어머니다운 데는 어디에도 없다고 기다하라는 생각했다. 나쓰에가 자기의 어머
니와 같은 정도의 나이였으면 했다.
하늘색 옷을 입은 웨이트리스가 물컵을 가지고 왔다. 웨이트리스는 노골적으로 호기심을 나
타내면서 기다하라와 나쓰에를 말똥말똥 보았다. 주문을 받고 뒤돌아 가면서도 탐색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가 어떤 사이로 보일까요?”
나쓰에가 말했다. 나쓰에의 말에 기다하라는 사나운 어조로 말했다.
“아주머니, 우리 두 사람 사이가 어떤 사이로 보이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기다하라의 이런 말투에 놀라서 나쓰에가 얼굴을 들었다.
“나는 모자 사이로 보이고 싶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머니입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어머님이 그리웠습니다.”
나쓰에는 고개를 숙인 채로 컵을 입에 갖다 댔다.
“우리들 사이가 무엇으로 보일까요?”
하고 두 번이나 되풀이 했던 나쓰에를 기다하라는 경멸한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연인으로 보인다고 하면 기뻐할 사람이다.’
확실히 나쓰에가 40세를 넘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30살 안팎으로 보
였다. 거꾸로 23살밖에 안된 기다하라는 27, 8세로 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연인
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다하라는 남편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끌린다는 말
은 비록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라도 싫었다. 그것은 기다하라 자신의 돌아가신 어머님의 신성
함이 침범당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 실례하겠습니다. 요코 씨에게 편지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하고 기다하라는 불쑥 일어섰다.
놀란 나쓰에의 얼굴이 무척 아름다웠다.
“급한 일이 생각나서 …….”
기다하라는 그렇게 말하고 나쓰에와 헤어졌던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요코가 말했다. 어느 사이엔가 핫케이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기다하라는 핫케이크 위에 버터를 바르면서 요코에게 미소지었다.
요코가 현관문을 열자 도루가 뛰어왔다.
“요코, 다쓰코 아주머니 댁에 간다고 해놓고선 가지 않았지?”
도루는 책망하는 투로 엄하게 말했다.
“어머, 어떻게 알았어?”
요코는 명랑하게 물었다.
“아까 다쓰코 아주머니 댁에 전화를 걸었어. 오늘은 추우니까 다쓰코 아주머니 댁에서 자
게 해달라고 그랬더니, 오지 않았다고 말했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요코답지 않아.”
“미안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야.”
요코는 명랑한 얼굴을 하고 거실로 들어갔다.
“다녀 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요코의 목소리에 나쓰에는 아무 말 않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굴도 들지 않았다.
요코는 그런 나쓰에를 보고 있었는데도 그 밝은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도루는 요코를 주
의깊게 지켜 보고 있었다. 다쓰코의 집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였던 것이 요코의 어디에도 보
이지 않았다.
기가 죽은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상시보다도 훨씬 명랑했다. 몸 속에 불이
켜진 것처럼 요코의 얼굴이 아름답게 빛났다.
“아버지는 아직 오시지 않았어?”
“의사회의 신년 모임이 있으시대.”
도루는 요코가 밖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알고 싶었다.
‘뭔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었다.
“요코, 어디 갔다 왔어?”
“알아맞혀 봐.”
“모르니까 묻는 게 아니겠어.”
“농협의 버스 정류장에서 친구를 만났어. 그래서 호텔에서 카레라이스를 먹었지.”
요코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웃었다.
“그리고 나서 거리를 빙빙 돌아다녔어.”
“이렇게 추운데?”
“하지만 차 안은 난방이 되었는걸.”
도루는 꼼짝도 않고 요코의 얼굴을 봤다. 만났던 친구라는 사람이 남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를 운전하는 남자 친구가 요코에게 있었단 말인가?’
문득 기다하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다하라의 아버지는 다키가와에서 비료 회사를 하고 있
어서, 차를 두 대 가지고 있었다.
‘설마 이 추운 날씨에 일부러 아사히카와까지 자동차로 올 리는 없다.’
요코는 기다하라하고 편지 왕래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요코가 옷을 갈아입으러 가자 나쓰에가 말했다.
“도루, 요코에 관해서 너무 신경쓰지 말아라.”
“왜요? 그럼 다녀왔습니다, 하고 말해도 대답하지 않는 어머니의 흉내를 내는 편이 더 좋
겠습니까?”
도루는 저도 모르게 심술궂은 어조로 말했다.
“어머, 상당히 기분이 나쁜가 보구나. 하지만 요코가 숨기고 있는 것을 꼬치꼬치 묻는 것보
다는 모른 척하는 얼굴을 하는 편이 훨씬 친절한 거야.”
나쓰에는 도루에게는 상냥했다.
도루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읽기 시작한 좮짜라투스트라좯의 책장을 훌훌 넘겼다.
“나는 요코가 누구를 만났는지 알아.”
도루는 못 들은 척했다.
“요코도 이제 곧 고교 2년생이 되잖아? 옛날 같으면 시집갈 나이야.”
나쓰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도루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쓰에의
마음속까지는 도루도 알 수 없었다. 나쓰에는 민감하게 기다하라와 요코에 관한 일을 간파
하고 있었다.
나쓰에는 삿포로에서 기다하라를 만났을 때, 기다하라의 가슴에 요코가 자리잡고 있는 것을
역력히 느꼈다.
“요코를 좋아하세요?”
하고 물었을 때,
“네, 좋아합니다.”
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던 기다하라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방에서 볼일이 생
각났다고 하고 도중에 자리를 떴던 기다하라의, 자신을 깔보는 것 같은 표정을 잊을 수 없
었다.
“우리 두 사람이 어떤 사이로 보일까요?”
하고 말했던 나쓰에에게,
“어떤 사이로 보이시면 만족하겠습니까?”
라고 말했던 기다하라의 엄한 말투를 잊을 수가 없었다.
나쓰에에게 있어서 기다하라는 도루의 친구가 아니고 이성이었다.
모든 남성들은 나쓰에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나쓰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쓰에는 기다하라로부터 받았던 굴욕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요코와 기다하라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나쓰에에게 있어서는 더 커다란 굴욕이었다.
“도루, 요코에 관한 일은 어머니가 주의를 시킬 거야. 부탁이니까, 아무 말 말고 있어 줘.”
“요코의 일에 대하여 참견 말라는 것입니까?”
도루는 문득 요코를 누구의 눈에도 띄게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요코가 오늘 만난 사
람을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은 오늘처럼 춥진 않을 것 같구나. 눈이 내리고 있어.”
기모노로 갈아 입은 요코가 방으로 들어왔다.
다쓰코의 집에 간다고 나가서 누군가하고 거리를 방황했던 요코가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표
정에 나쓰에는 화가 나 있었다.
“요코, 오늘 누구하고 함께 있었니?”
“엄마, 다자이 오사무의 좮사양(斜陽)좯을 읽어 보셨어요?”
“누구와 같이 지냈느냐고 묻지 않니?”
“좮사양좯에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른의 표시라고 쓰여 있어요. 요코도 이제 어른이
되었어요. 노코멘트예요, 어머니.”
도루는 요코의 말에 놀라서 요코를 한참 동안이나 쳐다봤다.
제34장 계 단
제34장
계 단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이 마치 유리 세공품으로 만든 발처럼 죽 늘어져서 반짝이고 있었다.
게이조는 일요일 오후, 거실에서 고드름을 바라보면서 요코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다.
요코가 감기에 걸려서 열이 났던 한밤중에 정원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툇마루의 장지문을
열어 보았다. 그랬더니 나쓰에가 눈 속에 깊숙이 발이 빠진 채로 열심히 고드름을 세수대야
에 따 넣고 있었다.
그 무렵의 게이조는 나쓰에를 깊이 원망하고 있었는데, 추위가 지독한 밤중에 요코를 위해
서 얼음을 따는 모습을 보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던 것이다.
“푸딩 드세요.”
나쓰에가 게이조 앞에 흰 푸딩을 갖다 놓았다.
“고마워.”
게이조는 다정하게 말했다. 옛날 일을 회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쓰에에게 몹시 미안한 생
각이 들었다.
나쓰에는 게이조의 다정함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쓰에는 지금 부엌에서 일을 하면서, 인형
축제일이 다가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쓰에가 결혼할 때 가지고 왔던 병아리 인형과 루리코의 첫돌에 샀던 병아리 인형이 있었
다. 그러나 요코의 출생을 알고 난 이후 나쓰에는 잊어버린 듯이 축제에 병아리 인형을 장
식하지 않게 되었다. 세심한 게이조도 그 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쓰에는 인형 축제 때마다 장식한 일이 없는 병아리 인형을 생각하고는 속으로 게이조와
요코를 미워하고 있었다.
루리코를 위해서 사 놓았던 인형을 요코를 위해서 장식한다는 것이 분했다. 매년 인형 축제
가 가까워질 무렵이 되면 나쓰에는 그 일을 상기했다.
올해는 특히 요코가 미웠다. 그 이유를 다른 사람이 물으면 대답할 수는 없었다.
정월 이후 때때로 요코에게 기다하라로부터 두툼한 편지가 왔다. 편지가 온다는 것만으로도
나쓰에는 자신이 무시되고 모욕당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삿포로의 다방에서 기
다하라가 돌연 자리를 떴던 일을 나쓰에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기다하라의 청년다운 시
원시원함에 끌려 있었던 나쓰에에게 그것은 커다란 모욕이었다.
더욱이 기다하라는 요코를 사랑하고 있는지 자주 편지가 왔다. 그것이 나쓰에를 자극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요코가 자신에게 절대 보이려고 하지 않는 것에도 나쓰에는 화가 났다.
“보여줄 수 없는 편지예요.”
요코는 그렇게 말하고 나쓰에가 읽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매년 반복되는 인형 축제 때
의 괴로운 추억이 금년에는 한층 더 강했다. 지금 게이조가 나쓰에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고
있는 것도 그녀는 자기 생각에 몰두해 있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보, 요코도 이제 골치깨나 썩일 나이가 되었어요.”
나쓰에는 푸딩를 한 입 스푼으로 떴다.
“무슨 일이 있었소?”
게이조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듯한 나쓰에를 보았다.
“남자아이와 편지 왕래를 하고 있어요.”
나쓰에는 예쁜 입안으로 푸딩을 살짝 넣었다.
“남자아이라면, 도루의 친구인 기다하라 군인가?”
“네.”
“기다하라 군이라면 나쁘지 않잖아.”
안심한 듯이 게이조가 말했다.
“하지만 기다하라 씨가 가엾어요.”
나쓰에는 게이조를 보았다. 게이조는 나쓰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를 알지 못하고 말했
다.
“가엾다니? 뭐가 말이야? 기다하라라면 상당히 좋은 청년이야.”
“…….”
“요코도 나쁜 아이는 아니야.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이야기를 매듭지어 두는 것이 좋지 않
을까?”
게이조는 도루가 요코와 결혼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기를 바랐다.
기다하라와 결혼하게만 된다면 자신이 요코를 맡았던 일도 해피엔딩으로 끝난다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당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진심이고 말고. 왜 그래?”
“당신은 모르는 척하고 요코를 기다하라 씨에게 떠맡기겠다는 거군요?”
나쓰에가 차갑게 말했다.
“아아,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것은 요코의 그 일인가?”
게이조는 요코가 시장으로 물건을 사러 나가고 집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요코가 누구의 아이인가를 말할 것 같으면, 역시 우리들의 아이야. 그 아이는 어머니의 태
내에서 10개월, 태어나서 1개월 정도 친부모와 있었을 뿐이니까 말이야. 그리고는 요코는 이
집에서 17년이나 살았잖소. 우리들의 아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소?”
“그럴까요?”
“비밀을 지켜 주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야.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를 기다하라 군에게 억지
로 떠맡긴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요코는 상당히 똑똑한 아이예요. 우리들의 아이라고
해도 이렇게 훌륭한 아이로 키우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게이조의 이런 말에 나쓰에는 신경질이 났다.
“나도 요코가 야무진 아이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어깨에 돌을 맞아도 울지 않았던 아
이였잖아요. 그리고…….”
중학교 졸업식 때의 답사에 관한 일을 생각하면서 나쓰에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아. 밝고 상냥한 아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너무 강한 것은 확실해요. 다쓰코도 남에게 허점을 잡히지 않는 아이라고 말했어
요.”
나쓰에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게이조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난로의 재를 불쑤시개로 쑤셨다.
이 이상 나쓰에에게 요코를 맡아 기르게 하는 것은 끔찍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다쓰코 씨 말이 갑자기 생각나는데, 어차피 요코도 2~3년 후면 집을 떠나게 되니까, 차라
리 다쓰코 씨에게 요코를 맡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던데…….”
게이조는 나쓰에를 자극하지 않도록 태연스럽게 말했다.
“다쓰코의 집에요?”
“그렇소.”
“그런 말, 다쓰코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요?”
나쓰에는 정색하는 표정을 보였다.
“다쓰코 씨가 먼저 말을 꺼냈소.”
“언제요?”
“언제였더라? 아아, 그래, 그래. 이봐, 기다하라가 우리집에 머물고 있을 때였어.”
“어머, 그때부터 반 년 이상 지났는걸요. 왜 곧바로 그런 말을 하시지 않으셨어요?”
나쓰에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 따질 만한 특별한 이유도 없잖소.”
“다쓰코도 지독한 사람이야. 나에게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나쓰에는 불쾌한 듯 입을 다물었다.
“다쓰코 씨는 요코가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대학에 보내지 않을 거냐고 물
었소.”
게이조는 나쓰에의 불쾌함을 무시하듯이 말했다. 말을 꺼냈던 것이 흐지부지되는 것이 싫었
다.
“다쓰코는 아무것도 몰라요. 요코는 진학하는 것보다도, 고등학교를 나오면 곧바로라도 결
혼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요코가 대학에 가다니!’
요사이는 여자 아이들도 대학에 가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쓰에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쓰에는 요코를 대학에 보내고 싶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요코의
의향을 물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쓰에 자신도 구제(舊制)의 여학교를 나왔을 뿐이었다. 요
코가 나쓰에 이상의 학력을 갖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요코를 다쓰코에게는 주지 않을 거야.’
나쓰에는 다쓰코의 재산을 생각했다. 물욕에 집착하지 않는 다쓰코는 요코에게 재산을 물려
줄 것임에 틀림없었다. 요코가 쓰지구치 집안의 딸로 호적에 올라 있는 이상, 쓰지구치 집안
의 재산도 요코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양가의 몫을 합한다면 요코는 나쓰에보
다도 많은 재산을 갖게 될 터였다.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이 사이시의 딸의 운명이라니…….’
살해된 루리코의 일을 생각하면, 나쓰에는 다쓰코의 그런 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어.”
“그럼,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경우에 따라서는 다쓰코 씨의 집에 맡겨도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편이 요코도 행복할 거라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어머, 지독한 양반. 그러면 내가 힘에 겨워 요코를 기를 수 없어 하고 있는 것 같잖아요.
나는 싫어요. 최선을 다해서 지금까지 길러 왔는걸요. 이집에서 결혼할 때까지 키우고 싶어
요.”
나쓰에의 말은 지당하게 들렸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소.”
게이조는 처마의 고드름을 보았다.
게이조는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았던 요코를 지금까지 길렀다는 것이 나쓰에에게 있어서 얼
마나 대단한 일이었던가를 생각했다.
자기가 낳은 아이조차도 한 사람의 어른으로 제구실을 할 수 있도록 길러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요코는 보통의 얻어온 아이와는 다르지 않은가.
나쓰에는 사이시의 아이라는 것을 알고도 어쩔 수 없이 요코를 기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
이다.
‘요코를 눈 앞에 보고 있는 한, 나쓰에의 마음은 명랑해질 수가 없었겠지. 그 출생의 비밀
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겠는가? 어쩌면 나는 이렇게도 끔
찍한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요코를 결혼할 때까지 이 집에서 키우고 싶다는 나쓰에의 말을 게이조는 액면 그대로 받아
들였다. 나쓰에를 당해내지 못한다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이윽고 게이조는 서재로 들어가, 무엇을 읽을까 하고 서가 앞에 섰다. 바로 눈앞에 아베 지
로의 좮산타로의 일기좯가 있었다. 대학 예과 때 읽고 그 이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책이
었다. 게이조는 책장을 넘겼다.
‘여기에 한 사람의 바보가 있다.’
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페이지에는,
‘너의 생활은 뭐라 해도, 아직 내용이 부족하다.’
라는 말도 눈에 띄었다.
책장을 앞으로 넘기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평범과 비범을 합하면 아무것도 없다.’
라고 쓰여져 있었다.
어느 것이나 눈에 들어오는 글자가 자신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책을 서가에 다시 꽂고 게이조는 책상 앞에 앉았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게이조는 입밖에 내서 그렇게 말해 보았다. 그리고 퇴원하기 전 날에 자살했던 마사키 지로
를 생각했다. 마사키 지로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지 못해서 자살했다.
게이조는 자신의 생활를 뒤돌아 보고, 이것이 바로 삶이라고 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도야마루 사건이 있은 지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있어서도 게이조는 피로하면 바다 속으
로 끌어당겨지는 것 같은 꿈을 꿀 때가 있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몇 번이고 그 바다의
꿈을 꾸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의 ‘진실하게 살아 보자.’라고 순진하게 결심했던 생각은, 두 번 다시 돌아오
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증오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노여워하기도 하는 것이 산다는 것
인가?’
게이조는 책상 위에 있는 성서를 손에 들었다.
‘이 책이 정말로 나에게 새로운 생활 방식을 가르쳐 줄 것인가?’
가르쳐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야마루 태풍 때, 자신의 구명구를 젊은 여성에게 건네주고 죽었던 선교사의 일을 게이조
는 생각했다.
‘나도 그 선교사처럼 살아가고 싶다.’
이 눈으로 확실하게 봤던 그 귀중한 생활 방법을 왜 자신은 흉내내려고도 구하려고도 하지
않고 10년 가까이나 질질 끌면서 살아온 것인가 생각하자 게이조는 그 시간이 후회스러웠
다. 자신이 나태하고 우매한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게이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성서를 폈
다.
게이조는 책장을 편 곳을 읽다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남편은 집에 없었다. 멀리 여행을 떠나기 위해 손에 보따리를 가지고 나갔다. 보름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고, 여자는 여러 가지 요염한 말로써 그를 유혹하고, 교묘한 화술로
써 꾀이니까, 젊은 사람은 곧바로 그 여자를 따랐다.’
구약성서 안에 있는 말이었다. 구약이면 적어도 몇 천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3천 년이나 4천 년 전에 이미 남편이 없는 동안에 다른 남자를 끌어들인
여자가 있었단 말인가? 간통이란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되풀이 되어 왔던
것인가?’
게이조는 놀랐다. 아니, 이후 수만 년 동안도 똑 같은 일이 반복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게
이조는 생각했다. 게이조는 자기와 똑같이 처를 미워하고 저주했을, 헤아릴 수 없는 뭇 남자
들을 생각했다.
‘아니 남편를 배반한 여자보다도 아내를 배반한 남자 쪽이 몇 십 배, 몇 백 배나 더 많을
것이다.’
게이조는 신문의 신상 상담란에 남편의 부정으로 고민하는 여성들의 편지를 흔히 볼 수 있
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렇다. 고민했던 것은 나 혼자만은 아닌 것이다. 수천 년, 아니 수만 년 전의 옛날부터
지금까지도, 그리고 어쩌면 인류가 이 세상에 있는 한 부정은 되풀이 되는 것이다.’
증오와 질투에 사로잡혀서 처를 살해한 기사를 바로 얼마 전 신문에서 보았다.
‘하지만 나처럼 마누라에의 증오 때문에 자신의 아이를 살해한 범인의 딸을 떠맡는 실없는
놈은 없었겠지.’
게이조는 지금에 와서 왜 요코를 떠맡았는지 자기 자신마저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너의 적을 사랑해라.’라는 말로 자기 자신과 다카키를 속이고, 나쓰에에게 범인의 아이를
기르게 했던 비열하고 냉혹한 인간이 자기라는 것을, 게이조는 싫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을 하면서 그래도 나는 아직 내심으로 나쓰에를 책
망하는 마음이 있다.’
이대로 뭔가의 병으로 죽어 버리면, 자신의 일생은 얼마나 모순투성이일까, 하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용기를 내어 교회에 나갈까? 교회에 가서 이렇게 어리석고 추한 사람도 아직 진실하게 살
아갈 수가 있는 것인가를 목사에게 물어 볼까?’
게이조는 성서를 덮었다.
‘여하튼 가 봐야겠다.’
지금까지 교회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게이조는 왠지 가지 못하고 있었
다. 게이조는 성서를 보자기에 쌌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까 4시가 지나고 있었다.
외출에서 돌아왔는지 요코의 목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저녁식사를 끝마치자 게이조가 말했다.
“요코, 차를 좀 불러 줄래?”
“네.”
요코가 바로 일어서서 전화기를 들었다.
나쓰에가 이상한 듯이 게이조를 보고 말했다.
“어머, 어디 가시게요?”
“응, 잠깐 다녀 올 데가 있어서…….”
게이조는 우물거렸다. 교회에 간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게이조는 볼일 없이는 저녁식사를 마
치고 나서 외출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나가는 일도 없었다. 나쓰
에는 의아스러운 듯이 게이조를 보다가 아무 말 없이 옷 갈아입는 것을 거들었다.
“몇 시쯤 집에 돌아오세요?”
“글쎄, 아마 9시까지는 돌아오겠지.”
차가 오자 게이조는 도망치듯이 집을 나왔다.
‘전혀 나쁜 곳에 가는 것도 아닌데…….’
차 안에서 게이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교회에 간다고 나쓰에에게 말하면, 나쓰에가
뭐라고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쩐지 냉소당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달빛을 받아 눈이 파랗게 보였다. 처마의 고드름이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큰길로 나오자 운전사가 물었다. 게이조는 당황했다. 교회가 있는 곳을 알고 있지 않았다.
문득 게이조는 다쓰코의 집에서 보았던 교회를 생각했다. 몇 년 전 일요일 아침, 나쓰에와
요코 세 사람이서 다쓰코에게 피크닉을 가자고 권유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가까이서 종소
리가 울리고 있었는데, 무슨 종소리냐고 물었더니 교회의 종소리라고 다쓰코가 가르쳐 주었
다.
교회의 십자가가 다쓰코의 집에서 보면 비스듬히 뒤쪽으로 보였던 것을 게이조는 기억하고
있었다.
“6조 10가의 예수 교회로 가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게이조는 겨우 안심했다. 차가 교회 가까이 다가가자, 마음이 점차 무
거워졌다. 게이조는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싫어했다. 하물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교회를
간다는 것은 더욱 그랬다.
차가 미도리바시 거리를 달려 시청의 모퉁이를 돌았다. 시청 옆의 벌거벗은 큰 포플러가 밤
하늘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아름답게 보였다.
차가 멈추었다. 교회 앞이었다. 차비를 내고 차 밖으로 나와서, 게이조는 교회를 쳐다보았다.
십자가 아래에 밝게 켜져 있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장식창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
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글씨가 굵직하게 쓰여져 있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게이조의 옆을 지나서 교회의 계단을 올라갔다. 예배당은 2층에
있었는데, 계단은 밖에서 곧바로 오르도록 되어 있었다.
게이조는 왠지 발길이 내키지 않아 인근의 주유소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추위가 혹독했
지만 게이조는 개의치 않았다. 다시 교회 쪽으로 가려고 했을 때, 중년의 부부처럼 보이는
남녀 한 쌍이 게이조를 앞질러갔다.
“당신, 춥지 않아?”
“괜찮아요.”
두 사람이 교회의 계단을 서로 의지하듯이 이야기하면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아
주 한순간이었지만, 게이조 부부에게는 없는 따뜻한 분위기였다.
게이조가 교회의 문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문득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뒤돌아보았더니 다쓰코가 싱글벙글 웃으며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교회를 다가고.”
“아니, 그냥 와 봤어요.”
게이조는 얼굴이 붉어졌다.
“설교의 제목은 ‘없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쓰여져 있더군요. 들어 가실려면 빨리 들어
가세요.”
다쓰코는 그렇게 말하고서 게이조를 보았다. 게이조는 들어갈 기분이 없어졌다.
“다쓰코 씨는 교회 가까이에 살면서 여기에 와 본 적은 없습니까?”
게이조는 다시 주유소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되돌렸다.
“있어요.”
“그래요?”
“감탄할 것 없어요. 매년 5월 달에 바자회가 있는데, 그때 생선초밥이랑 단팥죽을 먹으러
왔을 뿐이에요.”
다쓰코가 웃었다.
게이조는 교회라는 곳은 집 가까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다니는 곳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
을 새삼스러운 듯이 생각했다.
“집에 들렀다 가세요. 모처럼 여기까지 오셨으니까요.”
다쓰코의 말에 잠시 마음이 움직였지만, 게이조는 거절했다.
“게이조 씨, 당신에게는 역시 교회가 어울려요. 다녀 오세요.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집에
들러요.”
다쓰코는 게이조의 기분을 살피듯이 그렇게 말하고 재빠르게 걸어 갔다.
게이조는 설교의 제목 ‘없어서는 안될 것’에 마음이 끌렸다.
교회 앞에 다다르자 안에서 찬송가가 들려왔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찬송가를 듣자 게이조
는 역시 들어가기 어려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게이조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한심했다.
‘용기를 내서 들어가면 되는데.’
그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그러나 게이조는 돌아갈 수도 없었다. 추위가 온몸에 스며 들었다. 게이조는 오버의 깃를 세
웠다.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란 무엇일까?’
게이조는 십자가를 쳐다보았다.
학생 시절에 영어를 배우러 선교사의 집에 다녔을 때는 교회가 이렇게 들어가기 어렵지 않
았다고 생각하다가, 그만 교회 안으로 들어갈 기회를 놓쳐 버렸다.
미도리바시 쪽으로 와서 차를 잡자, 게이조는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철저히 증오하고 싶었
다.
‘이래서는 또 당분간 교회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게이조는 자기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리고 자신은 구도의 엄한 생활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
각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해 주셨다고 써 있었지만, 정말로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
고 계시는 것일까?’
게이조는 자기 자신이 하느님에게 사랑받기에 너무나 추하다고 생각되었다.
제35장 사 진
제35장
사 진
요코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체격이 좋았기 때문에 기모노를 입으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처녀처럼 보였다.
요코가 학교에서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나쓰에가 기분이 좋은지 요코의 방으로
들어왔다.
“도루가 사진을 보내 왔더구나.”
“어머, 무슨 사진이에요?”
“잠깐 기다려라. 오늘은 6월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덥구나.”
나쓰에는 요코가 옷 갈아입는 것을 기다렸다가 흰 봉투에서 사진을 끄집어 냈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사진을 손에 들었다. 아주 사이좋은 모녀 같았다.
첫 번째 사진은 도루와 기다하라가 팔씨름을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도루도 기다하라도 입을 옆으로 일그러뜨리고 상대의 팔을 밀어 넘어뜨리려고 하고 있었다.
팔이 가는 도루 쪽이 조금 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 오빠가 질 것 같아요.”
나쓰에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다음의 한 장을 손에 들었다.
기다하라와 도루가 기숙사에서 책상을 나란히 하고 책을 읽고 있었다. 도루의 책상 위는 잘
정돈되어 있는데, 도루보다도 더 큰 기다하라의 책상 위는 어수선하게 책이 쌓여 있고, 책상
아래도 옆에도 책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요코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기다하라의 청결한 인상은 변하지 않았다.
“기다하라 씨는 의외로 깔끔하지 못하구나.”
나쓰에가 말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여요.’
요코는 아무 말 않고 있었다.
다음은 도루가 말을 타려는 사진이었다. 허리를 내밀고 있어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두 사
람은 웃었다.
“오빠가 승마를 시작했다고 말했었어요.”
다음은 말 위에 있는 도루의 모습이었다.
평상시의 신경질적인 얼굴이 아니었다.
“남자답고 씩씩해요. 오빠 같지 않아요.”
요코의 말에 나쓰에가 얼굴을 들었다.
입술 언저리에 차가운 미소를 보이고, 나쓰에는 다음의 한 장을 요코 앞에 놓았다.
요코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기다하라와 여학생이 온실 벤치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이 여자, 상당히 예쁘지?”
나쓰에가 말했다. 인상이 좋은 여학생이었다. 기다하라를 보고 있는 조금 옆으로 향한 얼굴
이었다. 요코는 그 얼굴을 정면으로 돌리고 싶은 질투를 느꼈다.
다음은 그 여학생이 기다하라의 팔에 가볍게 손을 얹고, 포플러 가로수 길을 걷고 있는 사
진이었다. 비틀어 돌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얼굴이 주문대로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느
슨하게 물결치듯이 짧은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고, 웃는 입가의 덧니가 귀여웠다.
“이 사람이 기다하라 씨의 연인인지도 몰라.”
나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이전부터 이 여성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요코는 결정타를 먹은 것 같은 생
각이 들었다. 그 다음의 몇 장인가의 사진은 요코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학교 때부터 남녀 공학을 다닌 요코는, 남녀가 조금 어깨를 두드리거나 얼굴을 마주하고
같은 책이나 뭔가를 들여다본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왔었다. 그러나 기다하라와 알
지 못하는 여학생과의 사진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그 사진이 뇌리에 확실히 새겨져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아직까지도
두 사람이 온실의 벤치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나 두 사람이 팔짱을 낀
채로 포플러 가로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두 사람이 이윽고 벤치를 떠나고, 끼고 있었던 팔을 뗐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
니었다. 그러나 뇌리에 새겨졌던 영상은 온실의 벤치에서 정답게 서로 이야기하고, 포플러
가로수 길을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었다.
‘기다하라의 연인’이라고 했던 나쓰에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게 남아 있었다.
요코는 자신과 기다하라를 단순한 친구 사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정월의 그 추운 날에 만난 이후, 기다하라와 요코는 계속 편지 왕래를 하고 있었다.
요코는 남 모르게 숨어서 하는 음침한 교제는 싫었다. 두 사람의 편지 내용은 교실에서 서
로 이야기하는 것같이 확 트인 느낌의 편지였다. 서로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말을 요코는 필
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 요코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한 기다하라에게 애인이 있다고 생각하자 요코는 슬프다기보다는 쓸쓸했다.
무엇이라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상대에게 자기가 모르는 소중한 일이
있었던 것이 쓸쓸했다.
요코는 마침 쓰기 시작했던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버려 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받았던
7통의 편지를 다시 읽지도 않고 버렸다.
요코의 마음 밑바닥에 숨어 있던 심한 노여움이 한 번에 폭발한 것 같았다.
“서로가 둘도 없는 존재로 있고 싶었어.”
라고 소망했던 요코였다.
자기가 외곬이듯이 기다하라도 외곬이기를 바랐다.
기다하라로부터 다시 편지가 왔다. 요코는 한순간에 마음이 흔들렸다. 가위를 손에 들고 봉
투를 자르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사진을 본 이후로는 기다하라의 어떠한 편지도 읽고
싶지 않았다.
요코는 좮폭풍의 언덕좯 같은 열정적인 사랑을 원했다. 요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을 용
서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이성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된 소녀의 결백이었다. 사랑의 테크닉도 필요없는, 몸으
로 부딪혀 가고 싶은, 격렬하고 고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순수한 열정이었다. 요코는 작
은 성냥갑과 편지를 가지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강가에 나가서 요코는 기다하라의 편지에 불을 붙였다. 6월의 밝은 태양 아래 보이는 불꽃
은 투명했다. 기다하라의 편지는 태양의 불꽃처럼 투명한 불꽃이 되어서 타올랐다.
요코는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린 기다하라의 편지를 꼼짝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두견새가
울면서 강 위를 낮게 날아갔다. 강 건너로 날아간 두견새의 목소리가 점차로 멀어지고 있었
다.
제36장 제 방
제36장
제 방
그 후 기다하라로부터 두 번 정도 편지가 더 왔는데, 그때마다 요코는 봉투를 열어 보지도
않고 태워 버렸다. 여하한 변명도 요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둘도 없는 존재이고 싶었어.’
라고 너무나 소망했던 요코에게 있어서 기다하라와 다른 여자와의 정다운 듯한 모습의 사진
은 요코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
7월이 되자, 도루가 여름 방학이 되어 돌아왔다.
“기다하라는 요코가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어. 그 녀석은 맹장염이 악화되
어 계속 입원중이야.”
‘입원?’
요코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상태가 그렇게 나빴었어?”
“지금은 위기를 벗어 났다고 하지만, 한때는 혈압도 내려가서 위험했어.”
“그렇게 안좋았어요?”
요코는 만약 기다하라가 죽는다고 생각만 하여도 몸이 떨려 왔다.
“기다하라는 인기가 좋아서 언제 병원에 가도 여학생들이 문병와 있었어.”
달려서 문병하러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요코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말이었
다.
“그런데 오빠, 승마는 능숙해졌어?”
요코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다하라에게서 상처받은 자신을 요코는 자기 혼자 몰래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었다.
도루가 돌아오자 집안이 밝아졌다. 그러나 요코의 마음은 쓸쓸했다.
병원에 있는 기다하라에 관한 일이 끊임없이 마음에 걸렸다. 걸핏하면 만나보고 싶다는 생
각에 시달렸다.
지난해 이맘 때쯤, 그 숲속에서 처음으로 기다하라를 만났었다고 생각하자, 요코는 숲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도 요코는 기다하라와 처음으로 만났던 스트로부스소나무 숲속의 그루터기에 앉아 있었
다.
요사이 기다하라를 만나고 싶어지면 꼭 이 나무 그루터기에 요코는 앉았다. 여기에 있으면
기다하라가 그때 그 길에서 다시 나타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만나고 싶은데도,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도 문병 편지 한 장 보내지 않는 자신에게 요코는 놀라고 있었다.
‘사랑이란 미움일까?’
요코는 자신의 알 수 없는 마음의 동요에 불안했다. 일찍이 요코는 이렇게 남을 향해서 화
내고 미워하고 그리고 망설이고 그리워함의 격렬함을 가졌던 적이 없었다.
요코는 그루터기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 보았다.
스트로부스소나무의 부드럽고 파란 나뭇가지 끝이 햇빛에 빛나서 흰 구름 속을 흘러 가는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소리가 났다. 한순간, 요코는 숨을 죽였다.
‘기다하라 씨가 올 리가 없다.’
요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요코, 왜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니?”
요코가 뒤돌아 보니 도루가 흰 바탕에 잔 무늬가 있는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요코는 쾌활하게 말하며 일어서서 소매 없는 옷을 입은 팔을 가볍게 팔짱 끼었다.
‘만일 여기에 진짜로 기다하라 씨가 나타났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가슴에 매달려서 울
어 버렸을지도 몰라. 그렇지 않으면 확 도망쳤을지도 몰라. 오빠이기 때문에 그 어느 쪽도
할 수 없어.’
“요즘 어쩐지 힘이 없어 보이는구나.”
도루는, 기다하라와 요코가 정월 이래 다시 편지 왕래를 시작하고 나서 요코를 독점하고 싶
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 여기에 새하얀 팔을 가볍게 끼고 서 있는 요코를 보자, 도루는 새삼스럽게 요코가 아
름답다고 생각되었다.
“아냐, 나는 건강해. 우리 술래잡기하자. 도망갈 테니 오빠가 잡아 봐.”
요코는 재빨리 도루의 옆을 빠져 나가서 단숨에 제방을 향해 달려갔다.
제방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래에서 보니 제방 위의 요코는 푸른 하늘 속
을 날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 도루도,
“좋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뒤를 쫓았다.
도루가 제방으로 뛰어올라 가자, 요코는 벌써 제방을 내려와서 독일가문비의 어두운 숲속으
로 흰 스커트를 나부끼며 들어가는 참이었다. 어두컴컴한 숲속에 들어가자, 도루는 소나무
뿌리에 발이 걸려서 넘어질 뻔했다.
게다를 신고서 달리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도루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숲속의 작은 대나무숲이나 움푹 패인 땅을 보자, 어릴 때 생각이 나서 도루는 그리운 듯이
멈추어 섰다. 등산 모자를 쓰고 줄자를 든 청년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그 사람은 이 시범림을 관할하고 있는 아사히카와 영림국 직원
이었다. 어릴 적에도 이러한 영림국 사람의 모습을 이 숲에서 종종 본 적이 있다고 도루는
생각했다. 숲속만은 옛날과 변함이 없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 무렵은 요코가 진짜 여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했을 때 요코의 목소리가 났다.
“오빠, 빨리와!”
숲 밖에서 나는 소리였다. 숲을 빠져 나가자 요코가 강가의 백양나무를 등지고 서 있었다.
“요즘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달렸던 적이 없었어. 그래도 재미있었어.”
“그거 잘됐구나. 나는 게다를 신어서 넘어질 뻔했어.”
도루는 웃으면서 풀 위에 앉았다. 요코도 나란히 앉았다. 하늘이 맑아서 도가치의 연봉이 파
랗고 뚜렷하게 보였다.
“요코.”
“응?”
“말 잇기 놀이할까?”
“좋아.”
요코가 웃었다.
“하지만 연상놀이가 더 재미있어.”
“그래, 즉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지는 거야. 좋아? 자, 그럼 숲!”
“폭풍의 언덕.”
요코는 하마터면 기다하라의 이름을 말할 뻔했다.
연상놀이를 하고 노는 것에 싫증이 나자 도루와 요코는 아무 말 없이 냇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도루는 부드러운 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하나를 냇물에 떨어뜨렸다. 풀
은 획 하고 한 번 돌더니 그대로 흘러갔다.
“요코.”
“응?”
“어디로 진학할지 결정했어?”
요코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빨리 결정해서 수험 방침을 세우는 것이 좋아.”
“나, 대학에 가지 않을 거야.”
“가지 않아? 왜?”
도루는 놀라서 요코를 보았다.
“공부하고 싶지 않아.”
“거짓말하면 안돼. 요코는 수학을 하고 싶다고 했잖아?”
요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학반을 택하지 않았니?”
“오빠, 나는 비뚤어졌는지도 몰라. 고등학교를 졸업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과분하다고 생각
하고 있어.”
“바보 같은 요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야단치지 마.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대학에 보내달라고 말할 수 없어. 대학에 가는
것보다 내 일을 하고 싶어. 나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비뚤어져 있
는 것인지도 몰라.”
요코는 쓸쓸한 것 같았다.
“요코는 조금도 비뚤어지지 않았어. 하지만 좀 걱정이 돼.”
“뭐가?”
“요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취직할 작정이지?”
“그래.”
“무엇이 되고 싶니?”
“국가공무원 자격을 따서 영림국에 근무하고 싶어.”
“하지만 집에서는 요코가 일한다고 해서 고마워하지도 않고, 대학에 간다고 해도 재산에
그렇게 커다란 영향을 받지 않아.”
“그것은 알고 있어.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는 걸. 나의 자립심을 존중하고 싶어. 어른이라
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자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도루는 불안한 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요코를 주시하고 있다가,
“요코, 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집을 나갈 작정이니?”
하고 말했다.
“왜? 취직한다는 것뿐이야. 집을 나가지는 않아. 그런 짓을 한다면 지금까지 길러 주셨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나쁜 짓을 하는 거야.”
“그래?”
도루는 안심했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내가 이 집을 나가는 것은 죽었을 때뿐이야.”
요코의 말에 도루는 가슴이 뜨끔했다. 요코는 결혼을 할 때 이 집을 나가야 했다.
‘어쩌면 요코는 결혼하지 않으려는지도 몰라. 그렇지 않으면…….’
도루는 청년다운 자긍심을 갖고 요코를 쳐다봤다.
“요코가 이 집을 나갈 때는 결혼할 때잖아?”
도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강물이 햇볕에 빛나서 눈부셨다.
“싫어. 나는 결혼 같은 것은 하지 않을래.”
“어째서?”
“이유야 어떻든간에.”
“그럼 평생 동안 혼자 지낼 작정이야?”
“그러면 안돼?”
“요코의 나이 때는 누구나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기 때문이야. ”
도루는 요코가 기다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정말로 언제까지고 집에 있고 싶어.”
요코는 기다하라의 사진을 회상하고 있었다. 쓸쓸했다. 숲속에서 산비둘기의 우는 소리가 나
직이 들렸다.
“요코.”
“응?”
“요코가 정말로 언제까지나 집에 있어 준다면…….”
도루는 말을 우물거렸다. 요코가 집에 있고 싶다는 것이 혹시 자신과 함께 있고 싶다는 것
은 아닌가, 하고 도루는 생각했다
“아, 오빠가 결혼하게 되면 곤란하겠는걸. 언제까지나 시누이인 내가 집에 있으면.”
요코는 익살스럽게 고개를 움츠리고 웃었다. 도루는 웃지 않았다. 요코가 도루와의 결혼을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인지, 전혀 그런 생각이 없어서 하는 말인지 도루는 알 수 없었다.
“나 말이야…….”
‘요코와 결혼하고 싶어’
오빠와 누이동생으로서 자랐다는 것이 도루를 망설이게 했다. 좀 더 거리를 두고 생활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요코, 다쓰코 아줌마 이야기 들었니?”
도루는 나쓰에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다쓰코 아줌마가 무슨 말을 했는데?”
“요코를 데려가고 싶다고 말했대.”
“어머, 왜?”
“아줌마는 아이가 없잖아. 어차피 요코도 결혼하면 쓰지구치 집을 나가야 하니까 미루지
말고 지금 주지 않겠냐는 거야.”
도루도 자세한 말은 듣지 못했다. 나쓰에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을 뿐이었다.
‘태어나서 곧바로 입양되어서, 지금 또 다른 곳으로 가야 하다니……. ’
거기가 비록 아주 좋아하는 다쓰코의 집이라 해도 요코는 견디기 어렵게 쓸쓸했다. 자기가
모르는 곳에서 ‘받는다든가 또는 준다’든가 하여지고 있는 자신이 정말로 가엾게 생각되
었다.
“어머니는 뭐라고 말씀하셨어?”
“어머니는 애써 지금까지 길렀는데, 이 집에서 결혼할 때 내보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
요코의 얼굴이 반짝 빛났다. 다쓰코에게 줌으로써 요코가 대학에 가든지, 혹은 많은 재산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나쓰에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도루도 요
코도 알지 못했다.
요코는 나쓰에의 말이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기뻐, 오빠.”
요코는 그렇게 말하고, 도루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요코에게는 차가운 나쓰에였지만, 자기
를 남에게 넘겨 주려고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그것만으로도 요코는 솔직히 기뻤다.
그런 요코의 기쁨을 도루는 알지 못했다. 쓰지구치의 집에 있는 것이 기쁜 것은 자기와 함
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도루는 제멋대로 생각했다.
두 사람은 다시 여름풀이 무성하게 자란 어두컴컴한 독일가문비의 숲속으로 되돌아갔다.
숲속에는 햇빛이 저녁 안개처럼 자욱이 끼여 있었다. 인상파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아름다
움이었다.
“이 숲은 어둡지만 가장 좋아하는 곳이야.”
“그래?”
도루는 요코에게 하고 싶은 말이 가슴에 맺혀 있었다.
“오빠.”
요코가 멈추어 섰다.
산비둘기가 또 나직이 울었다.
“왜?”
“저, 저 말이야, 오빠는 나의 진짜 아버지랑 어머니를 알고 있어?”
뜻밖의 말에 도루는 말문이 막혔다. 나무뿌리에 걸려서 넘어질 뻔했던 도루는,
“아이 아파, 발을 다쳤어.”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괜찮아, 오빠?”
“괜찮아. 하지만 좀 아파. 저, 요코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어? 왜 묻니?
내가 어릴 때의 일이라서 나는 아무것도 몰라. 아버지도 아마 모르실 거야.”
도루는 알고 있으면서도 절대로 모른다고 필사적으로 말했다.
“몰라? 오빠, 나는 나를 낳아 준 부모와 어머니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요코는 중학교 졸업식 때 답사에 관한 일을 생각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하지 않아.”
‘어머니는 나를 다쓰코 아줌마의 집에 보내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래, 그러한 일을 생각해 봤댔자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야.”
도루는 겨우 안심했다. 도루는 요코가 자기를 낳아준 부모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정말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요코가 너무 가여웠다.
“요코, 만일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말해다오.”
“고마워, 오빠.”
요코는 도루의 말이 기뻤다.
“요코가 누구와 결혼해도, 또 혼자 살아간다고 해도 나는 독신으로 지낼려고 해.”
“어머, 왜?”
요코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도루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잠자코 있는 도루를 요코는 멈춰 서서 바라보았다. 도루는 휙 하고 뒤돌아보더니 성
큼성큼 다가왔다.
“요코, 나는 요코와는 남매로 자라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기다하라가
부러워.”
도루의 말에 요코는 어안이 벙벙했다.
“안돼, 오빠. 그렇게 말하면…….”
요코는 독일가문비의 나무 줄기에 손을 댔다. 몸이 흔들리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도루의 눈
매가 매서워서 요코는 불안했다.
“요코는 내가 싫으니?”
“좋아해. 너무 좋아해.”
요코는 문득 고독감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 결국 요코는 오빠로서의 나를 좋아하는 것이겠지?”
“그래, 당연한 것 아니야? 나의 오빠인걸.”
요코의 말에 도루는 겁을 내지 않았다.
“요코, 나는 훨씬 전부터 요코를 여동생으로서가 아니고 혈통이 이어지지 않은 남으로, 여
성으로 생각해 왔어.”
“…….”
“그러나 요코가 나를 오빠로밖에 생각해 주지 않았지.”
바람이 조용하게 숲속을 지나갔다. 요코는 도루의 말이 쓸쓸하게 들렸다.
“오빠, 오빠는 요코가 어릴 때부터 쭉 나의 오빠야. 언제까지나 오빠로 있었으면 해.”
요코는 애원하듯이 도루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요코에게 결혼을 신청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소원이야. 지금부터 나를 오
빠라고 생각하지 않아 주었으면 해.”
도루의 이마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오빠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야? 나는 이제 누구를 의
지하고 살아가지? 남매로 자랐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야. 피가 이어져 있고 아니고를 떠나서
남매로 있는 게 더 좋아. 나는 언제까지나 쓰지구치의 집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오빠에
게 그런 말을 들으면 있고 싶어도 있을 수 없잖아.”
요코는 도루 앞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도루와 결혼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도루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자기의 마음을 도루가 몰라 주는 것이 요코는 가슴 아팠다.
“요코, 역시 기다하라가 좋으냐?”
‘그러한 것과는 달라. 기다하라가 좋건 싫건, 오빠와 결혼할 마음은 생기지 않아.’
요코는 아무 말 않고 옆에 있는 뽕나무 잎을 한 잎 땄다. 아무 말 않고 있을 도리밖에 없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코, 요코는 기다하라와 결혼할 수 없어.”
요코는, ‘왜?’라고도 묻지 않았다. 그때 사진에서 보았던 기다하라와 여자의 얼굴이 떠올
랐기 때문이었다.
‘요코, 네가 누구의 아이인지 알고 있니?’
도루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곧 그런 자기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요코의 쓸쓸한
것 같은 얼굴이 눈 앞에 떠올랐다.
‘이 얼마나 비열한 짓인가? 요코를 얻고 싶다는 생각으로 나는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이 비밀만은 입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저쪽에서 아장아장 걸어오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여자아이는 빨간옷을 입고 있었다.
루리코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여자아이가 있는쪽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다.
‘루리코일 리가 없다. 루리코는 죽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작은 여자아이는 갑자기 쏜살같이 게이조를 목표로 하고 달려왔다.
강아지가 달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위험해, 그렇게 달리면 넘어지잖아!”
하고 게이조가 아이를 꼭 껴안으니까, 그 여자아이는 요코였다.
어린 요코를 껴안자 부풀어 오른 가슴이 게이조의 가슴을 꽉 눌렀다. 이상하게 생각해서 요
코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니까 풍만한 둥근 젖가슴이 손가락에 닿았다.
게이조는 무심코, 그 가슴에 입술을 갖다 댔다. 갑자기 휙 하고 검은 막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서 게이조는 놀라 눈을 떴다.
‘꿈이구나!’
지금 꿈속에서 만졌던 풍만한 젖가슴의 촉감이 아직 생생히 손가락 끝에 남아 있었다. 꿈이
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만졌던 젖가슴이 요코의 젖가슴이었다는 데 게이조는 깊은 죄의식
을 느꼈다.
요코가 중학생일 때 속치마 한 장만 입고 안락의자에 자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요코의 노출된 넓적다리를 게이조는 이따금 생각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
는, 그러나 은근한 즐거움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꾼 꿈에는 깊은 죄의 냄새가 났다.
‘불륜’이라는 말을 게이조는 중얼거려 봤다. 3시나 되었을까, 짧은 여름밤은 이미 동이 트
기 시작했다.
방안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쓰에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청결하고 건강하게 생각되었다. 마누라에게도 말할 수 없는 꿈
을 꾸고, 남들이 아직 잠자고 있는 시간에 잠이 깨어 있는 자신이 게이조는 부끄러웠다.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자기 딸의 가슴을 만지는 꿈을 꿀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야비한 짓은 누구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게이조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게이조는 잠
을 설쳐 버렸다.
요즘 게이조는 잠이 깨면 잠자리 속에 느긋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살짝 잠자리를 빠져 나
오자, 나쓰에가 자다가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얼굴이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게이조
는 문득 나쓰에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사랑스럽다기보다 가엾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나쓰에가 가여운 것인가, 부부라는 관계가 가여운 것인가, 게이조도 알 수가 없었다.
한방에서, 이렇게 한 사람의 남자와 한 사람의 여자가 잠자고 있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다.
한방에서 잔다는 것은 마음을 허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부부이기는 해도 마
음속에 뭔가를 숨기고 살아가고 있는지는 서로가 알 수 없었다. 혹 다만 미움만 갖지 않고
살아가는 부부도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한방에서 잠자고 있다는 이러한 평범한 사실이 게이조의 마음에 깊이 사무쳤다. 요코의 꿈
을 꾼 때문인지도 몰랐다.
게이조는 살짝 침실을 나와서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의 커튼을 열자, 이미 밖은 완전히 날이 밝아 있었다. 문득 하늘로부터 작은 돌멩이가
하나 떨어져 왔다.
놀라서 창을 보았더니 참새였다. 참새는 아찔할 정도로 민첩하게 먹이를 찾아서 날아올랐다.
다음에 또 획 하니 두 마리의 참새가 정원으로 내려왔다. 활기에 넘친 참새의 움직임을 보
고 있자니 게이조는 확실히 자신이 방종하게 생각되었다.
‘이렇게 온 생명을 다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게이조는 다시 꿈을 생각했다.
그때 뜻밖에 숲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요코였다. 게이조는 연속으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하고 의심했다. 요코는 게이조가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숲 입구에서 멈춰섰다.
요코는 옥색 브라우스에 곤색 체크치마를 입고 있었다. 예쁘게 생긴 다리였다. 요코는 허리
를 구부리고 뭔가를 주웠다. 낙엽이라도 주운 것 같은 그 몸짓은 소녀다움이 넘쳐 있었다.
다시 일어서자, 요코는 숲속을 따라서 나 있는 샛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숲속에는 몇 개인가
의 오솔길이 있고, 지금 요코가 걸어간 오솔길은 무라야나소나무 숲에 연결되는 길이었다.
‘아직 4시도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요코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요코가 다시 멈추어 서는 것이 보였다. 하반신은 풀에 덮여서 게이조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요코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것일까?’
게이조는 방금 꾼 요코의 꿈을 생각했다.
자신이 이불 속에서 요코의 꿈을 꾸고 있을 무렵에 요코는 벌써 숲속을 걷고 있었던가, 하
고 생각하자 게이조는 자기의 꿈이 못견디게 한심스럽게 생각되었다.
‘요코는 이렇게 일찍부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게이조는 가슴이 섬뜩했다.
‘설마, 요코가 자신의 부모의 일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10년 전, 멍청하게도 게이조는 자신의 편지 때문에 나쓰에에게 비밀이 알려져 버렸다. 그리
고 도루에게도 몇 년 전에 요코의 출생이 알려져 버렸다.
지금 또 요코가 그것을 알아 버린 것은 아닌가 불안해졌다. 이윽고 요코의 모습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게이조는 발돋움하고 숲쪽을 뚫어지게 봤다.
‘요코의 나이 또래에는 자도자도 잠이 올 때이다.’
밤에 잠을 자지 않을 정도의 고민이 무엇일까 생각하니 게이조는 불안해졌다.
‘설마 나쓰에나 도루가 요코에게 비밀을 털어 놓지는 않았겠지?’
이 집에서 요코를 결혼시켜서 내보내고 싶다고 했던 나쓰에를 게이조는 믿고 싶었다. 그러
나 마음 한 구석에, 나쓰에가 일단 외곬로 생각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하는 불신의
생각이 희미하게 났다. 나쓰에라면 그 비밀을 절대로 지켜 준다고 단언할 자신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도루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게이조는 마음이 가라앉
지 않았다. 요코는 좀처럼 숲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요코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게이조의
불안은 더욱 더 커져갔다.
‘좋아, 데리러 가 보자.’
의자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무라야나소나무 숲 쪽에서 요코의 모습이 나타났다. 게이조는 안
심했다.
요코는 고개를 숙인 채로 집 쪽으로 걸어왔다. 요코는 그때까지도 게이조가 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사립문을 열고 요코는 자신의 방 출입구를 살짝 열고 있었다. 요코의 방은
정원을 향해서 입구가 있었다.
‘어쩌면 잠이 오지 않아서일는지도 모르겠군.’
게이조는 안심하고 의자에 앉았다.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해두자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게이조는 그렇게 생각했다.
요코를 다카키에게서 소개받고 난 이후, 언제나 마음속에 응어리 같은 것이 있었다. 나쓰에
에게 숨기고 있을 때의 꺼림직함과 언제 진실이 폭로될까 하는 두려움이 그것이었다. 그런
데 나쓰에에게 알려지고, 도루에게도 알려져 버렸다.
도루는 그 일 때문에 고등학교 입시를 거부했지만, 지나고 보니 걱정할 정도의 비극은 일어
나지 않았다. 나쓰에도 이 집을 나간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게이조는 새삼스러운 듯이 안
심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원만한 가정이라고 생각되면서 생활해 왔다는 것이 생각해 보
면 불가사의했다.
‘의외로 어느 집이나 남편의 부정, 아내의 바람기, 고부간의 갈등, 아이의 비행 등 남에게
는 말할 수도 없는 부끄러운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일단
체면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그 숨겨진 드라마가 어떤 동기로 해서 자살·가출·살인·이혼이
라고 하는 형태로 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비로소 그 일에 대하여 알아차리는 것이 아닌
가, 하고 생각하니 게이조는 요코를 맡았던 자신이 무서운 인간이라고 생각되었다.
‘더욱이 아침에 꾼 꿈은 어떤가?’
게이조는 자신의 손가락을 봤다.
‘꿈속의 나도 나다. 꿈속의 생각이나 행동도 모두가 나 자신으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게이조는 정말로 자기를 죄가 많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누구보다도
역시 자신이 사랑스러운 것이 불가사의했다.
‘만일 다른 사람이 나처럼 마누라의 부정이 미워서 요코를 처에게 기르게 했다는 말을 들
으면, 나는 그 남자를 매도하겠지. 제일 먼저 나 자신이 만약 하룻밤의 바람을 피웠다고 해
도, 나는 결코 자신에게 화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누라의 바람은 절대로 용서되지 않
는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남이 해서 나쁜 것은 자신이 해도 나쁜 것이다. 남의 일이라면 좋
지 않게 대답을 해도, 인사를 나쁘게 하는 것에도 화가 나는데 왜 자신의 일이라면 용서할
수 있는 것일까?’
게이조는 인간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기 중심적인 것에 신물이 났다.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이 죄의 근본은 아닐까?’
게이조는 요코의 방 커튼이 조금 흔들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제37장 길 모퉁이
제37장
길 모퉁이
여름방학 동안 도루는 두 번 다시 자기의 기분을 요코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코는
쓰지구치 집에 있는 것이 몹시 괴로웠다. 요코는 도루와 단둘이 되는 것을 피했다.
기다하라와도 소원해지고, 도루에게도 마음을 열 수가 없어졌던 요코는 고독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도루가 삿포로로 돌아갔다. 요코도 2학기가 시작되자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사이좋은 몇 명의 친구들은 진학반이어서, 복도를 걸을 때도 단어카드를 보며 다닐
정도로 바빠 차분히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요코, 기다하라 씨로부터 편지가 오지 않는구나. 혹시 싸웠니?”
나쓰에는 요코에게 그러한 말을 하게 되었다. 요코는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요코는 기
다하라로부터 온 몇 통인가의 편지를 뜯지도 않고 태워 버렸지만 편지가 오지 않게 되자 안
절부절 못할 정도로 불안했다. 일요일 같은 때 우편물이 배달될 시간이 되면 꼼짝도 않고
집에 있는 것이 고통이기조차 했다. 고통이기는 했지만 귀를 기울이고,
“우편이요!”
하고 외치는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은, 그래도 외로움을 잊을 수가 있었다.
‘이번에, 편지가 오면 절대로 태우지 않을 거야!’
기다리고 있는 동안은 어슴푸레하게 달콤한 기대를 했다. 그러한 요코의 기분을 꿰뚫어 보
듯이 나쓰에는,
“기다하라 씨로부터 편지가 오지 않는구나. 네가 먼저 편지를 보내면 되잖아.”
하고 말했다.
그러나 기다하라가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 상처를 받았던 요코는, 스스로 먼저 편지를
보낼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진심으로 ‘둘도 없는 존재’로 있고 싶다고 원했던 자신
을 배신해 버린 기다하라를 요코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나쓰에는 기다하라와 요코가 편지 왕래를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자기가 모르는 곳
에서 두 사람이 편지 왕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요코의 친구 집에라도 기다하라의 편지가 와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쓰에는 자신이 기
다하라의 편지를 요코에게 말하지 않고 돌려보낸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래서 두 사
람이 나쓰에를 따돌리고 편지 왕래를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는 기다하라 씨라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너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다른 아
가씨하고 사이좋게 사진을 찍기도 하니 말이야……. 기다하라 씨는 여자친구가 많은가
봐!”
나쓰에는 그런 말도 했다.
요코는 나쓰에가 기다하라에게 친절하게 했던 것을 잊고 있지 않았다. 기다하라와 매일처럼
숲속으로 산보하러 갔던 나쓰에를 요코는 알고 있었다. 기다하라가 싫다고 하는 나쓰에의
말을 요코는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나쓰에는 기다하라가 삿포로의 다방에서
자신을 내동댕이치듯이 버려두고 나가 버렸던 일을 원한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원한이
기다하라하고 편지 왕래를 하고 있는 요코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기다하라의 편지가 오지 않은 채로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는데도
도루는 돌아오지 않았다.
올 겨울방학은 돌아가지 않겠어요. 삿포로에 있는 요양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섯달 그
믐날부터 7일 정도는 집에 가서 쉴 수 있을는지 모르겠어요. 기대하지는 마세요
도루가 보낸 간단한 우편엽서를 나쓰에는 서운하게 여겼다.
“이상하군요. 어째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일까요? 용돈은 부족하지 않을텐데. 일하고 싶다
면 우리 병원에서 일을 거들면 좋잖아요.”
게이조는 도루의 아르바이트에 대해서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게이조에게도 똑같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뭐, 상관 없잖아? 아버지의 병원에서 일할 마음이 나지 않아서겠지. 더욱이 도루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고작해야 객담검사라든가, 적혈구나 백혈구를 셀 수 있는 정도겠지만.”
요코 역시 도루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자기와의 일 때문에 도루가 겨울방학인데도 집에 올
수 없는 것은 아닌가해서 걱정이 되었다.
도루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있었다. 그 이유인즉 요코가 자신과 남으로 되기 위해서는 조
금이라도 떨어져 있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해서였다. 기다하라가 병에 걸려 있을 때도 문병
하러 가지 않고 편지 왕래도 하지 않는 것 같은 요코의 기색에 도루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안심하고 있었다. 맨 처음에는 기다하라에게 요코를 맡기려고 했던 도루였다.
그러나 요코가 소학교 4학년 때부터 자신이 양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요코에 대한 연정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기다하라가 요코를 너무 사랑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자 도루의 요코에 대한 연정이 더 강해졌다.
요코의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기다하라와 결혼하는 편이 요코가 더 행복할 수 있다고 생
각하면서도, 오랫동안 사랑해온 요코를 체념할 수가 없었다.
도루가 돌아오지 않은 채로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졌다. 정원 마가목의 새빨간 열매에 흰 눈
이 쌓이자 교회의 종처럼 모양이 되는 것이 보기 좋았다. 요코는 쓸쓸함에 익숙해져서 점차
로 혼자 있는 것의 즐거움을 알았다. 요코는 혼자서 희랍어 공부를 하기도 하고, 원래 좋아
했던 수학에 몰두하고자 유크리트의 기하학을 게이조의 서가에서 찾아내어 읽기도 했다. 그
러나 마가목의 붉은 열매가 눈을 덮어 쓴 모습을 쳐다보면서 요코는 어느 사이엔가,
‘기다하라 씨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고 요코는 자기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기다하라로부터
편지가 오지 않게 되어도, 요코의 쓸쓸함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기다하라 씨는 나를 배반했지만, 나는 그 사람을 배반하지 않았다.’
라는 것이었다. 기다하라의 일로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은 없었다.
나쓰에로부터 쇼핑을 부탁받은 요코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시내로 나갔다. 커다란 함박눈이
너풀너풀 내리고 있어서, 따뜻한 밤이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 가는 거리에는 징글벨 노
래가 떠들썩하게 흘러 나왔다. 상점마다 크리스마스 세일이라고 쓰여진 간판을 내걸고, 쇼윈
도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되어 빨강, 파랑의 작은 전구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쇼핑을 마친 요코가 양품점을 나올 때였다. 2~3미터 저쪽에 사람들로 붐비는 속을 걸어오고
있는 기다하라가 보였다. 요코는 깜짝 놀라서 움츠린 듯이 서 있었는데, 기다하라는 검은 목
도리를 감은 여성과 이야기를 하면서, 요코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요코는 눈 깜짝 할
사이에 가게 앞의 큰 크리스마스 트리 뒤에 몸을 숨겼다. 사진에서 본 여자의 웃는 얼굴과
흰 덧니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요코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가지 너머로 지나가는 기다하라를
꼼짝도 않고 주시했다. 기다하라는 조금 여윈 것 같아서 약간은 나이들어 보였다. 두 사람은
요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상점 앞을 지나갔다. 그리웠다.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기
다하라가 왜 이렇게 그리운 것인가, 요코는 알 수가 없었다.
요코는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쫓아서 어떻게 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함박눈이 내리는
가운데서도 기다하라와 여학생의 모습만은 요코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 여학생은 때때로
기다하라를 쳐다보며 말을 하고 있었다. 4가 평화로의 신호 있는 곳에서 두 사람은 멈추어
섰다.
기다하라만이 사거리를 건너고, 같이 가던 여학생은 우측으로 돌았다. 두 사람 다 서로 뒤돌
아보지도 않고 손도 흔들지 않았다. 깨끗한 이별이었다.
요코는 빨간불로 변한 신호 저쪽으로 건너간 기다하라의 모습을 놓쳤다. 쫓아가 봤댔자 말
을 걸 수도 없을 터였다. 바로 옆 모퉁이 약국에 공중전화가 있었다. 그 전화의 다이얼을 돌
리고 있는 사람은 지금 기다하라와 헤어진 그 여학생이었다. 요코는 자기도 모르게 그 여자
의 뒤에 멈추어 섰다. 상대가 통화중인지 그 여학생은 재차 다이알을 돌렸다. 수화기를 꼼짝
도 않고 귀에 댄 채로 그 사람은 무심코 요코를 보았다.
“미안해요. 통화중이에요. 먼저 하세요.”
사랑스러운 덧니를 보이면서 그 여학생은 요코에게 전화를 양보하려 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요코는 미소지었다.
‘이 사람은 나를 모르는 걸.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인상이 좋은 사람이
야.’
여학생은 요코의 말에 순진하게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요코는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아, 저예요. 모르겠어요? 저, 미치코. 기다하라 미치코예요.”
‘기다하라 미치코?’
요코는 그 여자를 꼼짝도 않고 주시했다.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오빠하고 둘이 와 있어요.”
그 여학생은 공중전화에 바싹 붙어서서 말하고 있었다.
‘오빠하고 둘이서?’
요코는 이 뜻밖의 상황에 망연실색했다.
‘어쩌면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기다하라의 여동생은 조금도 기다하라를 닮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진을 보았을 때, 어머니는 이 사람이 기다하라 씨의 연인이라고 말씀하셨
어.’
기다하라의 여동생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로 연달아서 웃고 있었다.
‘오빠도 기다하라 씨와는 결혼할 수 없다고 말했어. 어째서 그런 말을 했을까?’
요코는 도루가 말했던 ‘기다하라와는 결혼할 수 없다.’고 했던 말을 ‘기다하라는 사랑하
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같이 알아 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틀림없이 사진 속의 사람
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 여자가 여동생이라면, 다른 연인이 있는지도 몰라.’
요코는 도루가 설마,
‘너는 살인범의 딸이니까 태생을 알게 되면 기다하라와 결혼할 수 없어.’
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요코는 하늘을 쳐다 보았다. 거리의 밤하늘은
어슴푸레하게 밝았다.
“미안합니다. 기다리게 해서.”
기다하라의 여동생이 요코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했다. 요코는 저도 모르게 말을 걸었
다.
“저…….”
“……?”
기다하라의 여동생이 의아한 듯이 멈추어 섰다.
“실례합니다만, 기다하라 구니오 씨의 여동생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아아, 당신이 쓰지구치 요코 씨군요?”
기다하라의 여동생이 친근감을 보였다.
“쓰지구치입니다.”
요코는 그 다음에 할 말이 없었다.
“오빠는 바로 저기 보이는 책방에 갔어요.”
기다하라의 여동생은 상냥하게 말했다.
요코는 인사를 하자마자, 신호도 확인하지 않고 뛰어가려고 했다. 평상시의 요코에게는 결코
없는 일이었다.
사거리를 건너자, 모퉁이에서 두 번째 집이 책방이었다. 책방 안은 복잡했지만 그다지 큰 곳
은 아니었기 때문에 장신의 기다하라는 바로 눈에 띄었다. 밝은 형광등 아래서 기다하라는
책을 손에 들고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요코는 기다하라의 옆으로 가는 것이
망설여졌다.
‘왜 내가 기다하라 씨를 믿을 수 없었단 말인가? 나의 둘도 없는 사람으로서 왜 믿을 수
없었단 말인가?’
요코는 자신이 한심했다. 우선 그 사이가 좋은 것 같은 사진에 요코는 상처를 받았고, 다음
으로 나쓰에가 말했던,
“그 여자가 기다하라 씨의 연인이라는 사람이야.”
라는 말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게다가 도루가,
“기다하라는 여자에게 인기가 있어.”
라고 말한 데다가,
“기다하라와는 결혼할 수 없어.”
라고 했던 이야기들이 요코에게 결정타를 먹여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확인도 하
지 않고 의심했던 자기가 경솔했다고, 기다하라의 모습을 사람들 너머로 바라보면서 후회하
고 있었다. 기다하라가 책을 두 권 사서 입구로 다가가는 것을 보자, 요코는 다시 숨어 버렸
다.
“여동생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
라는 말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요코는 생각했다. 기다하라의 편지를 열어 보지도
않고 태워 버렸던 날의 격심한 분노를 요코는 회상하고 있었다.
‘이제 기다하라의 품으로 돌아갈 자격이 없다.’
요코는 편지를 태워 버리는 것이 사랑이라는 격렬함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만약에 거꾸로 기다하라 씨가 이런 의심받을 짓을 했다면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요코는 자신이 더 선하고, 더 이성적이고 의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코는 겨우 5~6미
터 앞을 걸어가는 기다하라의 뒷모습을 주시하면서 걷고 있었다.
‘기다하라 씨가 병에 걸렸다고 했는데도, 나는 병문안도 가지 않았다. 건강한 기다하라 씨
가 어쩌면 평생에 한 번 입원생활을 했을는지도 모르는데도……. 역시 나는 기다하라 씨와
는 교제할 자격이 없다.’
3가에서 기다하라는 좌측으로 돌았다. 3가 거리는 조금 어두웠다. 요코도 기다하라의 뒤를
따라서 갔다. 기다하라는 3가 식당으로 들어갔다. 3가 식당은 지하여서 계단을 내려가야 했
다. 요코는 지하의 입구에 서서 계단을 내려다 보았다.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함박눈
이 내리는 밤거리에서 요코는 기다하라가 나올 때까지 꼼짝도 않고 서 있고 싶었다.
‘다키가와에서 아사히카와까지 뭐하러 오셨을까?’
오버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지도 않고, 요코는 상점의 전등불이 비추어지지 않는 골목
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오빠가 돌아왔을 때, 왜 사진의 여학생이 기다하라 씨와 어떤 관계인가를 물어보지 않았
을까?’
그러나 그것은 소녀인 요코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요코의 자존심이 그러한 말을 허
락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오빠는 왜 그 사진을 아무런 설명도 붙이지 않은 채 보내왔을까?’
왠지 도루가 그 사진을 보내왔던 이유를 지금에 와서 알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오빠는 그런 마음씨를 가진 사람은 아니야. 오빠는 남자답고 상냥한, 아주 좋은 사
람이야.’
기다하라와 도루를 공평하게 비교해 보면, 도루가 기다하라보다 못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
다.
‘하지만 오빠보다 기다하라 씨 쪽이 좋은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오빠는 오빠로서 좋은
거야!’
요코는 함박눈이 내리는 데도 내내 서 있었다. 떠들썩한 징글벨 노래도, 밝은 네온사인도,
지금은 요코의 마음을 방해하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기타를 가슴에 멘 두 명의 남자
가 사라져 갔다.
기다하라 구니오 씨.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드릴 자격이 없다는 것을 더할 나위없이 잘 알
고 있습니다. 혹은 이 편지가 뜯어지지도 않은 채 난로 속으로 내던져질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면서도, 역시 사과의 말을 드리지 않고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기다하라 씨, 부디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요. 제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도루 오빠가 보내
왔던 사진 속에서 나는 기다하라 씨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포플러 가로수길을 어떤 여학생
과 정다운 듯이 팔짱을 끼고 걷고 계시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기다하라 씨의 연인이야.”
어머니가 그 사진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나의 기분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내 몸뚱아리가 쪼개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 그때 쓰기 시작했던 편지도, 소중하게 간
직하고 있었던 당신에게서 온 편지도, 나는 슬픈 나머지 불에 태워 버렸던 것입니다.
“그 여학생은 누구입니까?”
하고 한마디 물을 수 있는 겸손함만 갖추고 있었더라도 이러한 오해는 생기지 않았을 것입
니다. 그 후로는 기다하라 씨로부터의 편지를 나는 뜯지도 않고 불태워 버렸어요. 오해라고
는 해도 당신의 인격을 의심했던 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후회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 나는 당신의 여동생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서점에서 나오는 당신의 뒤를 따라갔었
습니다. 기다하라 씨가 서점을 나와서 식당으로 들어가실 때, 나는 눈 속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짓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이 나에게 주는 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는 당신을 꼼짝도 않고 기다리
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식당을 나오고 나서 역을 향해서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나는 당
신이 입원해 있을 때조차도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 나의 냉정함을 생각하면서 당신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역에는 여동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여동생의 쇼핑가방을 들어주고, 개찰구로 들
어가고 나서 잠시 거리 쪽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그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나
를 보았나,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는 플랫폼에는 들어가지 않고 대합실에서 당신을 전
송했습니다.
기다하라 씨, 뭐라고 쓰면 사과의 편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뭐라고 써도 나의 지금의 심정을
전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기다하라 씨, 지금은 다만 뵙고 싶을 뿐입니다.
요코가가
제38장 피 아 노
제38장
피 아 노
기다하라에게 편지를 보낸 지 사흘이 지났다. 요코는 밖에서 눈을 치우고 있었다. 기다하라
가 요코의 편지를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불안했다. 찢어 없애 버렸다 해도 별 도리가 없
다고 생각하며 요코는 있는 힘을 다해서 눈을 치우고 있었다.
지금 비로소 요코는 자신의 편지를 애타게 기다렸던 기다하라가 얼마나 쓸쓸했던가를 헤아
릴 수 있었다.
“속달이에요.”
뒤돌아보니 우편 배달부가 요코에게 편지를 건네 주었다. 기다하라로부터 온 편지였다.
요코는 현관의 마루에 앉았다. 다리가 떨리는 것 같아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답장을 해주셨구나!’
그러나 봉투를 뜯어 보기가 두려웠다.
“방금 우체부가 왔지?”
나쓰에가 외출복차림으로 현관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네.”
“누구에게 온 거야?”
“저에게 왔어요.”
나쓰에는 현관 마루에 앉아있는 새파랗게 질린 요코를 바라보았다. 요코는 힘없이 미소지었
다. 그것은 나쓰에가 보기에도 마음이 아플 만큼 슬픈 미소였다.
“다쓰코 씨 집에 있을 테니까 용무가 있으면 전화해라. 아버지는 오늘도 늦는다고 말씀하
셨으니까 저녁밥은 요코 혼자 먹어야겠구나.”
요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신장에서 나쓰에의 방한화를 꺼내서 가지런히 놓았다.
“기운을 내. 돌아올 때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다 줄게.”
나쓰에는 요코에게 좋지 않은 편지가 왔구나, 하고 혼자서 그렇게 생각을 했다. 맥 빠진 요
코의 얼굴을 보자 자기까지 약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쓰에의 상냥함이 감수성이 예민해 있는 요코의 가슴에 솔직하게 전달되었다.
“버스로 가세요?”
현관을 나온 나쓰에에게 요코가 물었다.
“큰길까지 걸어간 후 농협에 들렀다가 차를 탈 거야.”
검은 코트 아래로 엷은 파란 생사로 짠 수단옷이 아름다웠다.
요코는 거실의 스토브 옆에 앉아 가위로 기다하라가 보내준 편지봉투를 잘랐다. 지금까지
열어 보지도 않고 불태워 버렸던 일이 또 다시 후회스러웠다. 요코는 기도하는 것 같은 심
정으로 편지를 폈다.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내가 오해하고, 이번은 당신이 오해했습니다. 이제 우리
는 한 번씩 오해를 했으니 비겼군요. 어젯밤, 몇 십 분 동안이나 눈 속에 서 있었다니, 상당
히 엉뚱한 아가씨군요. 감기는 걸리지 않으셨습니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6시에 당신의 집을 방문하겠습니다. 정정당당하게 방문하지 않았던
내가 나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동생에게서 당신을 만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안부 전하라고 했습니다.
기다하라 구니오 도
‘크리스마스 이브라면 오늘 저녁이다.’
요코는 편지를 들고 허둥지둥 일어섰다. 기다하라의 편지에 감동된 것이다. 거기에는 원망하
는 말이 한 마디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방문하지 않았던 자신이 나빴다고까지 말하고 있었
다. 그리고 다시 기차를 타고 아사히카와까지 와주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자 요코는 기다하
라라는 인간의 관대함과 성실함에 감동했다.
해가 지자, 요코는 괜히 집안을 배회했고, 몇 번이고 시계를 보기도 하는 등 어쩐지 기분이
들떠 있었다. 자신이 무섭고 어리석은 여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간의 마음속에 우매
한 부분이 없으면 남을 사랑하는 일 같은 건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요코는 생각했
다. 밖에 자동차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요코는 당황해서 시계를 봤다. 아직 5시 반이었다.
종종걸음으로 나와서 현관문을 열자,
“잘 있었어?”
하고 문등 아래에 도루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서 있었다.
“어머, 오빠!”
기다하라가 아닌 것을 알고 약간 실망했다.
“놀랐지? 섣달 그믐날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도루는 요코의 놀란 표정에 만족한 듯했다.
“어서와. 어머니가 깜짝 놀라시겠어.”
요코에게 있어서 도루는 다만 한 사람의 오빠일 뿐이었다. 오랫만에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이 기뻤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니?”
도루는 오버를 벗으면서 물었다.
“다쓰코 아주머니의 집에. 전화할까?”
“됐어. 돌아오셔서 갑자기 얼굴을 마주하는 편이 더 즐겁겠지. 아버지는 늦으시니?”
“그런가 봐. 오빠, 식사는 했어?”
“기차 안에서 먹었지.”
도루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곧바로 여행용 가방을 열었다.
“요코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왔어.”
도루는 기쁜 표정이었다. 전등불 때문에 도루의 그림자가 다다미 위에서 흔들렸다.
“어머, 고마워. 무엇일까?”
요코는 시계을 쳐다보았다. 기다하라의 방문이 마음에 걸렸다.
“뭘 사왔는지 맞추어 보렴.”
“글쎄, 무엇인지 모르겠어.”
스토브에 불을 미리 켜 놓았기 때문에 응접실은 따뜻했다. 차도, 과자도 준비해 두었다. 그
렇게 생각하면서도 요코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도루에게 기다하라가 오는 것을 말하려
고 했지만, 도루는 즐거운 듯이 가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생각해?”
재차 도루가 물었다.
“액세서리지?”
도루가 이제까지 요코에게 무엇인가를 사올 때는 브로치, 머플러, 장갑 같은 것이었다.
“맞았어! 액세서리야.”
도루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고 나서, 싱글벙글 했다. 자못 기쁜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선
물과는 다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요코는 도루의 웃는 얼굴을 봤다.
도루는 요코와 기다하라의 교제가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 기다하라만 멀어지면 요코는 반드
시 자기를 사모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빠로서가 아니고 이성으로 생각해 주지 않겠니?”
하고 여름방학에 돌아왔을 때, 도루는 요코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이 요코의 마음속에
서 어떠한 형태로든 싹트고 있다고 도루는 기대하고 있었다. 오빠와 여동생으로 사이좋게
지냈던 이상, 자신의 희망대로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기
대가 도루에게 오팔 반지를 사게 했던 것이다.
‘여동생인걸. 무엇을 사주어도 그것은 우습지 않다.’
그것을 요코에게 약혼 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말하는 것은 빠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액세서리라고 해도 종류가 다양하지.”
좀처럼 맞추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자, 도루는 기뻤다.
“그것은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나누어서 말한다면 상반신에 사용하는 것이지?”
“응, 그래.”
“그럼, 머리와 가슴으로 나누면 머리에 붙이는 거야?”
“틀렸어.”
“그럼 가슴에 차는 거야?”
요코는 기둥시계를 쳐다보았다. 6시가 다 되었다.
“틀렸어.”
“설마, 팔찌나 반지는 아닐 테고…….”
그때 현관의 벨이 울렸다.
“어머, 기다하라 씨야!.”
요코는 확 하고 얼굴을 붉히고, 급히 현관으로 나갔다.
“반지야.”
하고 말하려고 했던 도루는 갑자기 입 안에서 뭔가를 억지로 삼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
다.
‘그런가? 오늘밤 기다하라가 오기로 되어 있었던가?’
요코가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 기다하라였다는 것을 알고, 도루는 자신을 비웃고 싶었다.
‘역시, 나는 요코에게 오빠일 뿐인가?’
도루는 사왔던 오팔 반지를 손바닥 위에 놓았다. 전등 아래에서 엷은 녹색과 핑크색이 미묘
하게 변하는 것을 도루는 꼼짝도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남매로서 자란 요코가, 도루를 오빠
로밖에 여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도루는 반지를 여행용 가방
속에 다시 넣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여동생으로서 요코를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난로가 시끄럽게 소리를 내고 타고 있는 것조차 도루에게는 쓸쓸했다.
“오랫만이군요.”
기다하라는 수줍은 듯이 미소를 짓고 현관에 서 있었다.
“미안해요.”
요코는 눈물을 글썽였다.
“눈 속에 서 있어서 감기에 걸리지 않으셨습니까?”
기다하라의 말에 요코는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다.
“올라가게 해주세요. 현관에 오랫동안 서 있으니 어색하군요.”
기다하라는 웃으면서 구두를 벗었다. 웃음소리에 끌려서 요코도 덩달아 웃으면서,
“어머, 미안해요. 어서, 어서 올라오세요.”
하고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어머님은 어디 가셨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오늘은 늦어요. 하지만 오빠가 와있어요.”
“아아, 쓰지구치가 돌아왔습니까? 아르바이트 때문에 섣달 그믐에 돌아온다고 했는데.”
“아까, 막 돌아왔어요.”
기다하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꼼짝도 않고 요코를 주시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뭐라고 사과를 드려야 좋을지…….”
“무승부입니다. 요전에는 내가, 이번에는 당신이, 젊다는 증거겠지요. 이런 일로 진지해져서
노하기도 하고, 오해하기도 하고…… 그리고 점점 더 성숙해져 가는 것 아닌가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의자에 앉았다.
“성숙해져 갈까요?”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요코는 차를 준비하기 위
해 일어서려고 했다.
“아, 잠깐, 그 전에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는데…….”
기다하라는 정색한 어조가 되었다.
“뭔데요?”
요코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물어서 좋은 일인지 어떤지 몰라 망설였지만, 역시 물어보고 싶어요.”
“어머, 뭔데요?”
요코는 불안한 얼굴을 했다.
“사실은요, 쓰지구치로부터 당신과 쓰지구치와는 한 핏줄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네, 나는 태어나서 얼마 안 있어서 이 집에 입양되어 왔다고 해요.”
요코는 기가 죽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쓰지구치의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어요.”
“마음에 걸리다니…… 뭐가 말입니까?”
“쓰지구치가 당신을 다만 여동생으로서 귀여워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쓰지구치의
기분을 당신은 알고 있지요?”
“우리들은 남매입니다. 나는 오빠가 좋아요. 너무 좋아요. 하지만 그것은 오빠로서 좋아하
는 감정이지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요코는 그렇게 말하면서 뭔가 선물을 사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알아 맞추게 하면서 즐
거워하던 도루의 얼굴을 생각했다. 혼자 내버려두고 가 버린 것 같아서 도루가 불쌍해졌다.
거실에 가니까, 도루는 가방에 손을 걸친 채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기다하라 씨가 왔어, 오빠. 오빠도 응접실로 와.”
요코는 도루의 옆에 앉아서 말했다.
“그래, 곧 갈게.”
도루는 요코를 힐끗 봤다. 요코는 코코아와 귤을 쟁반에 얹어가지고 일어섰다.
“오빠 몫도 그쪽으로 가져다 놓을게.”
“그래, 조금 쉬었다 갈게.”
도루는 벌렁 누웠다. 거실을 나오려던 요코가 뒤돌아 보니 가슴이 뜨끔할 정도로 쓸쓸한 표
정이 된 도루가 요코를 쳐다보고 있었다. 요코는 그 자리를 떠나기가 어려웠다.
“곧 갈게. 먼저 가 있어.”
응접실로 들어가고 나서도 요코는 도루의 쓸쓸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오빠는 잠깐 쉬고 나서 온다고 해요.”
“그래? 아르바이트로 상당히 피곤해져 있는 건가!”
기다하라는 코코아를 스푼으로 휘저었다.
‘피곤해서 그럴까?’
요코는 도루가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고만은 생각되지 않았다.
“요코 씨!”
“네?”
“이번에 3학년이지요? 진학은 어디로 하기로 했어요?”
“나는 진학하지 않아요.”
“왜요?”
놀란 듯한 기다하라는 코코아를 마시던 손을 멈추었다.
요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미소지었다.
“그래요? 왜 그렇게 결정했나요?”
기다하라는 말뜻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양녀이기 때문에 진학은 안되는 것인가!’
“기다하라 씨는 대학원에 가시지요?”
“가려고 해요. 그래서 앞으로 나도 요코 씨도 상당히 정신차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
요. 당신은 아직 고등학생이고 나는 대학원생이 되면, 결혼할 때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할테
니까 말이에요. 서로 오해를 한다든가 해서는 안되지요.”
기다하라는 진지하게 말했다.
“용서하세요. 이제 오해같은 거 하지 않아요.”
“아니, 나도 쓰지구치하고 당신이 서로 타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서 아무래도 마음이 편
치 않아서…….”
기다하라는 약간 우울한 듯했다.
“싫어요.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변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나는 변하지 않아요.”
요코가 성난 듯이 말했다.
“요코 씨, 그런 말을 해서는 안돼요. 인간이란 다음날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존재니까 말이
에요.”
“어머, 그럼 기다하라 씨는 변할려고요?”
“변한다고도 변하지 않는다고도 단언할 수 없어요. 지금은 평생 동안 변하지 않을 작정입
니다만 말이에요. 끝까지 변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기분이고, 영원히 변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군요. 그렇기 때문에 결혼 약속도 나는 하지 않아요.”
요코는 기다하라의 말에 성실함을 느꼈다. 하지만 조금은 쓸쓸했다.
“영원을 맹세하지 않는다.”
라는 기다하라의 말을 수긍하면서도, 요코는 역시 맹세를 하고 싶었다. 요코의 얼굴을 보고
기다하라는 미소지었다.
“불만입니까, 요코 씨? 몇 억의 남녀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든가 결혼을 하겠다든가 하고
맹세를 하면서도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깨져 버리는 경우가 많지요. 모두가 자기 자신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서로 맹세하지만 말이에요.”
요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코 씨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고, 나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요코 씨가 기다하라 구니오
이외의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고 해도 별도리가 없는 일이잖아요.”
“어머, 싫어요. 그런 말…….”
“나도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서로의 자유거든요. 만약 좋은 사람이 나
타난다면, 말해 주세요. 나의 바람은 날마다 성실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성실한
생활의 결과가 이별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요코는 기다하라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러한 말을 하는 기다하
라는 아마 마음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알았어요. 그럼 오빠를 불러올게요.”
요코는 거실의 미닫이 문을 열었다. 아까까지 있던 곳에 도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행
가방도 오버도 없었다. 2층 도루의 방에 있는가 하고, 요코는 계단을 올라갔다. 도루의 방은
어두컴컴했다. 요코는 불안해져서 계단을 뛰어 내려와서 다시 거실로 들어갔다. 역시 도루는
없었다. 문득 찬장 위를 보았더니, 접힌 편지지가 놓여 있었다. 요코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갑자기 눈이 없는 설을 지내고 싶어졌습니다. 가야가사키의 할아버지 집에 가겠습니다. 즐거
운 설을 맞이하십시오.
수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요코는 가슴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아까 숨막힐 것 같은 도루
의 쓸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기다하라에게 도루가 없는 것을 알리려고 하다가, 요코는 그만
두었다.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가야가사키로 떠나지 않고는 있을 수 없었던 도루의 심정을
누구에게도 숨기고 싶었다. 요코는 차를 따라서 기다하라 있는 곳에 갖다 놓았다.
“용서하세요. 오빠는 피곤해서 잠이 든 것 같아요.”
기다하라는 꼼짝도 않고 요코를 주시했다. 도루가 얼굴을 내밀지 않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기다하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피아노에 몸을 기댔다.
“이 파아노는 당신이 칩니까?”
“아니요, 아무도 치지 않아요.”
“장식입니까?”
“어머니께서 어릴 때부터 치셨던 피아노라고 해요.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도 치지 않아요.
열쇠를 잃어버렸대요.”
요코는 이 피아노가 열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피아노는 언제나 다만 여기에 놓여 있
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피아노는 이상한 존재였다.
“그럼, 여러분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기다하라는 악수를 청하지도 않고 현관을 나왔다.
“또 오세요.”
“1월 2일에 오겠어요.”
그때 휙 하고 차의 헤트라이트가 눈길을 비추었다.
“어머, 아버지일까, 어머니일까?”
자동차가 문 앞에 정지하자, 차 안에 불이 켜졌다. 나쓰에였다. 자동차에서 내린 나쓰에는
기다하라를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안 계시는 동안에 실례했습니다.”
기다하라는 시원시원한 밝은 태도였다.
“오랫만입니다. 벌써 돌아가세요?”
나쓰에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기다하라를 봤다. 그러나 삿포로의 다방에서 갑자기 자리를
떴을 때의 기다하라를 나쓰에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기다하라가 가자 나쓰에는 요코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요코, 아무도 없을 때는 남자를 집에 들이지 않도록 해라.”
나쓰에는 그렇게 말하고, 크리스마스 케이크 상자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어요. 하지만 어머니, 기다하라 씨가 오셨을 때는 오빠가
돌아와 있었어요.”
“어머, 도루가 돌아왔어?”
나쓰에가 방 안을 휙 둘러보았다.
“네, 하지만…….”
요코는 도루가 써 놓았던 편지지를 나쓰에에게 내밀었다. 나쓰에는 의아한 듯이 그것을 손
에 들고 읽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나쓰에는 얼굴색이 변하면서 요코를 봤다. 요코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오늘밤에 돌아와서 오늘밤에 곧바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거지? 너는 왜 말리지 않
았어?”
나쓰에가 하는 말은 당연했다.
몰랐다고 해서 끝나는 일은 아니었다. 곧바로 차를 타고 쫓아가면, 도루가 기차를 타는 것은
말릴 수가 있었다고 요코는 생각했다.
“죄송해요.”
요코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니, 도루하고 싸움이라도 했다는 말이냐?”
나쓰에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니요.”
“싸움도 하지 않았는데, 부모도 만나지 않고 가 버리다니…….”
기다하라의 방문이 도루에게 있어서 그 정도로 커다란 쇼크였다고는 나쓰에도 생각할 수 없
었다.
“요코, 너는 도루가 없는데도 태연하게 기다하라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단 말이냐?”
나쓰에는 도루가 요코에게 쫓겨나서 먼 여행을 떠난 것처럼 생각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요코는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게이조가 돌아왔다. 나쓰에가 현관에 마중나왔을 때의 표정을 보고, 게이조는 움찔했다. 나
쓰에는 차가운 가면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실로 들어가자 요코는 고개를 숙이고 앉
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출생의 비밀을 말해 버렸는가!’
하고 무심코 게이조는 나쓰에를 뒤돌아 보았다. 결코 요코에게 해서는 안되는 말을 나쓰에
가 해버렸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나쓰에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도루가 쓴 편지지를 게
이조 앞에 놓았다. 게이조는 그것을 재빨리 읽고 말했다.
“뭐야, 도루가 돌아왔어?”
게이조는 적어도 요코에 관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오자마자 집을 나가다니,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나쓰에는 요코를 쏘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되다니? 이렇게 쪽지까지 써 놓은 것을 보니까 도루가 몰래 집을 나갔구나. 그때
요코는 집에 있었니?”
게이조가 상냥하게 물었다.
“기다하라 씨와 응접실에 있었어요. 오빠가 잠깐 쉬다가 온다고 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
었는데, 거실에 와 봤더니 벌써 보이지 않았어요.”
요코는 도루의 쓸쓸한 것 같은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괴로웠다.
“그럼, 별도리가 없군.”
위로하듯이 게이조는 요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다니요? 당신, 여기는 도루의 집이에요. 일부러 살금살금 나가지 않아도 되는 곳
이라구요.”
“별로 집을 나갈 이유가 없잖아. 급하게 동경에라도 가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젊은 시절
에는 갑자기 그런 일을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요코는 알았다면서 왜 바로 역으로 가지 않았어?”
나쓰에는 끝까지 요코를 나무라고 싶었다.
“기다하라가 있는데 요코가 어떻게 집에서 나갈 수 있겠어? 도루는 가야가사키는 물론이
고, 프랑스, 아프리카도 혼자서 갈 수 있는 나이야. 더욱이 누가 나가라고 한 것도 아니고
부모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않고 가 버린 것은 도루야. 요코가 책임을 지게 될 일은 아니라
고 생각해.”
게이조는 요코가 기운없어 하는 것을 보자 불쌍했다. 나쓰에는 게이조의 말을 듣고는 입을
꽉 다물었다. 도루가 여행을 떠난 것이 기다하라와 요코 때문이라는 것을 나쓰에는 그제서
야 알아차렸다. 두 사람의 친한 것 같은 모습에 도루가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닌가 하고, 나쓰
에는 생각했다. 요코의 부모가 누구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정도로 요코를 사랑하고 있
었는가를 생각하자 나쓰에는 무서워졌다. 이대로 내버려둘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다하라와 요코가 맺어지는 것은 도루에게 있어서는 기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
쓰에는 기다하라와 요코에 관한 일을 기뻐할 수 없었다. 나쓰에는 기다하라로부터 받았던
굴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나쓰에는 요코를 질투하고 있었다.
제39장 문
제39장
문
새해가 되었다. 조용한 설날이었다. 많은 연하장 중에는 가야가사키에서 도루가 보낸엽서도
있었다.
바다를 건너서 여기에 도착한 순간에 설은 역시 눈이 있는 곳에서 지내는 편이 좋겠다고 생
각되었습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요리가 그립습니다. 1월 달은 내내 이쪽에 있을
작정이었습니다만, 20일까지는 돌아가겠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다른 사
람도 별고 없고요.
나쓰에는 이 엽서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어두운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쓰에는 안
심했다. 특히,
‘지금은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요리가 그립습니다.’
라고 한 말에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뻤다.
도루가 멀리 여행을 떠난 것이 요코와 기다하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기분도 이상하리
만큼 누그러졌다. 몇 년 이래로 맛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설 기분으로 그날 하루 나쓰에는
요코에게도 애써 상냥하게 대했다.
세배 손님 때문에 피곤한 게이조가 일찍 잠자리에 든 다음, 나쓰에는 요코에게 기분좋게 말
했다.
“요코, 내일 너의 기모노를 사러 가자.”
쓰지구치 집안의 딸로서 갖고 있어야 할 것은 대충 갖추어 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나쓰에는 기모노를 좋아했다. 그것이 비록 요코의 것이라고 해도 기모노를 산다는 것은 즐
거운 일이었다.
“어머, 내일요? 모래는 안될까요, 어머니?”
“왜 그래? 무슨 일 있니?”
나쓰에는 기세가 꺾였다고 생각하고,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내일은 기다하라 씨가 와요.”
요코가 흰 스웨터를 입은 팔을 가볍게 끼는 듯이 하고 나쓰에를 봤다. 그것은 나쓰에가 가
장 싫어하는 몸짓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시건방진 태도로 보여, 모처럼의 기분 좋은 설날이
요코 때문에 짓밟혀진 것같이 느껴졌다. 더욱이 기다하라가 요코를 방문한다는 말을 듣고,
나쓰에는 심한 굴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흥, 신바람이 나서 건방진 태도로 말을 하다니,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면서!’
수년 동안 생리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요코에 대한 미움에 문득 불이 붙은 것 같은 생
각이 났다.
‘좋아. 내일 기다하라 씨 앞에서 모두 털어 놓아 버릴 거야.’
나쓰에는 순간에 마음을 결정했다.
‘기다하라는 놀라서 요코를 떠나겠지.’
라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그것은 가야가사키로 여행을 떠난 도루를 위해서 하는 일이야.’
그리고 그렇게 해봤자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하튼, 내일 기다하라에게 모든 것을
말해 버리자고 마음을 정하자, 나쓰에의 노여움이 조금 가라앉았다.
“기다하라 씨는 무엇을 잘 먹더라?”
나쓰에의 기분이 좋아진 듯이 보여 요코는 겨우 안심했다.
“기다하라 씨는 카레라이스를 좋아한대요.”
“어머, 카레라이스라고? 추울 때는 냄비 요리가 좋아. 모듬냄비나 나이시가리 냄비는 어떤
지 몰라?”
나쓰에는 돌변해서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글쎄요.”
“맥주는 마시던데, 정종이나 양주는 어떨까?”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어머, 잘 모르겠다니? 요코, 소중한 친구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다니 말이 안돼. 무엇을
좋아하는지 이번에 꼭 물어 보거라.”
나쓰에는 가볍게 요코의 어깨를 두들기며 웃었다. 요코는 나쓰에의 갑작스런 수다에 뭔가
불안감이 느껴졌다. 냉담했던 나쓰에의 태도가 어떻게 갑자기 돌변했는지 요코는 그것이 이
상했다.
“그럼, 오늘은 일찍 자거라.”
“네, 안녕히 주무세요.”
요코가 떠나자 나쓰에는 소파에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다하라와 요코 앞에서 모
든 것을 알릴 내일의 일을 생각하니, 요코의 괴로워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피해자인
우리들만이 오랫동안 괴로워해 왔는데도, 가해자측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부당하
게 생각되었다. 요코도 고통을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어린 아이라면 몰라도 요코는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야. 스스로 어른이라고 말하고 있는
걸. 지금쯤 모든 것을 알아야 해!’
지난해 겨울 요코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표시예요. 저도 이제 어른이 되었어요.”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일이 생각나자, 나쓰에는 심술궂은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아이는 괴로워하지 않고, 가슴을 펴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나쓰에는 요코의 중학교 졸업식 때의 답사를 회상했다.
“울리려고 하는 사람 앞에서 우는 것은 승부에서 지는 것입니다. 그때야 말로 방긋 웃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코는 그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요코는 태연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나
쓰에의 미움을 부채질했다.
‘요코도 괴로워해야만 한다.’
나쓰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일어섰다. 침실로 들어가자, 게이조는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자
고 있었다. 깨어 있는 것 같아 스탠드의 갓을 기울여 얼굴 가까이까지 비추었으나 게이조는
자고 있었다.
‘당신도 요즘은 괴로워하고 있지 않는 것 같아 .’
나쓰에는 자기 자신만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문득 도루의 일을 생각했다. 도루만은 무서웠다. 요코의 비밀을 폭로했다는 사실을 알고 도
루가 얼마나 화를 낼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요코가 결코 고자질할 성격이 아닌 것에
나쓰에는 안심하고 있었다.
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리문이 쉴 사이도 없이 덜커덩 덜커덩 하고 소리
를 냈다. 나쓰에는 바람소리에 눈을 떴다. 이러한 눈보라에도 기다하라가 올까, 하고 나쓰에
는 머리를 쳐들고 머리맡의 시계를 봤다. 어둠속에서 야광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눈을 뜸과 동시에 오늘은 모든 것을 털어 놓으리라고 생각하자,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거실에서 난로를 피우는 소리가 났다. 요코도 바람 소
리에 잠이 깼는지, 그렇지 않으면 기다하라가 방문하는 날이라서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인지
일찍 일어났다. 나쓰에는 잠자리에서 거실의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이 많이 부는군.”
옆에서 게이조가 자다가 몸을 뒤척였다.
“설이 되자마자 날씨가 사나워졌어요.”
“그래.”
게이조는 엎드린 채로 머리맡의 전기 스탠드를 켰다.
“나도 가야가사키에 가고 싶어요.”
“3월에 요코를 데리고 가도록 해.”
“요코는 수학여행을 가는걸요.”
“그러나 가야가사키에는 들르지 않잖아.”
“여보!”
“왜?”
“가야가사키에 뭐하러 요코를 보내려고 하세요?”
“뭐하러라니?”
게이조는 나쓰에가 무엇인가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데리고 가지 않겠어요.”
“마음대로 하구려.”
게이조는 입을 다물고 전기 스탠드의 갓을 기울였다. 불빛이 나쓰에의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윤기나는 머리였다.
“나쓰에, 요코의 부모에 관한 일은 이제 잊어 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게이조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쓰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게이조는 나쓰에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아차릴 리 없었다.
“살인 시효도 15년이오. 더구나 그 장본인은 이제 죽고 없지 않소?”
게이조는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살아 있어요. 나의 눈 앞에 살아 있어요.”
나쓰에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 아이에게 죄는 없어.”
“기가 막혀요. 그렇게 남의 일처럼 말씀하시다니. 요코에게는 죄가 없는지 몰라도, 그 아이
가 누구의 자식인가를 생각만 해도 나의 가슴은 터져 버릴 것 같아요.”
게이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둔 거실에 요코가 있었다. 이야기가 새는 것을 게이조는 두려워했다.
“일어나지 않을 거요? 잠이 깨면 아무래도 이불 속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게이조는 나쓰에의 입을 봉하듯이 방을 나왔다.
“눈보라가 조금 가라앉은 것 같구나.”
게이조는 세수를 끝마치고 따뜻해진 부엌으로 들어갔다.
“열차가 몇 편인가 운휴 된다고 텔레비전에서 들었어요.”
요코가 스토브의 재를 털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기다하라 씨가 못 올지도 모르겠구나?”
나쓰에는 아까 침실에서의 말을 잊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 오늘 기다하라 군이 오기로 되어 있었나? 와도 도루가 없으니 안됐구나.”
밖은 차츰 밝아져 왔다. 시계가 7시를 쳤다.
“기다하라 씨는 도루에게는 볼일이 없어요.”
나쓰에의 말에 요코는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게이조는 나쓰에의 말을 흘려 듣고 신문
을 펴면서 말했다.
“요코, 올해 몇 살이지?”
“열아홉 살이 되었어요.”
나쓰에는 식탁을 닦고 있었다.
“허, 19세? 열아홉 살 봄이라. 액년이구나. 세월 참 빠르군.”
게이조는 신문에서 얼굴을 들고 요코를 봤다. 볼에서 턱까지 이어지는 선이 포동포동하고
야무진 것이 참으로 싱그럽게 보였다.
“싫어요. 19세라니. 아직 17세인걸요, 아직.”
“아버지는 동양식으로 세는 나이가 더 실감나는구나. 옛날의 19세라는 나이는 특별한 느낌
이 있었다. 그래, 그래. 당신은 요코의 나이에 약혼을 했지?”
나쓰에가 애매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20살에 결혼했으니까. 요코도 그 나이가 되었다는 건가?”
게이조는 다시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나쓰에의 몸을 만졌을 때의 그 나이에 요코
가 이르렀다는 것이 게이조는 감개무량했다.
요코는 식사를 준비하면서 이따금 밖을 보고 있었다. 기다하라는 거친 눈보라 때문에 올 수
없을 것같이 느껴졌다. 요코의 모습을 힐끗힐끗 보면서 나쓰에도 기다하라를 생각하고 있었
다. 모든 것을 안다면 기다하라는 요코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어찌 또 이런 가엾은 일이 있나?”
신문을 보고 있던 게이조가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에요?”
나쓰에가 밥공기를 게이조 쪽에 놓으며 말했다.
“응, 개척 농가의 미망인의 집에 도둑이 들어서, 현금 2만 엔을 도둑맞고, 한가족이 집단자
살을 했다는 거요.”
“어머, 그건 지난 연말의 신문이잖아요?”
나쓰에가 웃었다.
“아아, 그런가? 12월 30일자 신문이군.”
게이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면서 젓가락을 집었다.
“2만 엔이면 남자들이 하룻밤이나 이틀 밤에 마셔 버리는 돈이에요. 그 정도의 일로 죽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3살짜리와 5살짜리 아이도 함께 죽었다고 하던데요.”
나쓰에의 말에 게이조는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2만 엔 정도를 도둑 맞았다고는 하지만 개척 농가에서 3살, 5살짜리의 아이를 거느린 생
활 속에서의 2만 엔은 큰 돈이야.”
경제적으로 고생을 한 적이 없는 나쓰에라도 알 것 같은 일이라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하지만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함께 죽어 버린 어린아
이들이 가엾잖아요.”
일단은 지당한 말이었다. 그러나 게이조는 그 미망인이 어떤 계기로든 죽은 것은 사실이라
고 생각했다. 여자 혼자서 개척농가의 생활 속에서 2만 엔의 현금을 손에 쥔다는 것이 얼마
나 필사적인 생활의 몸부림이었던가를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다.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서, 그 사람은 피로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을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하여 달리고 있을 때에는
조그마한 돌에 채여도 다시 일어날 힘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이조는 마사키 지로가 퇴원을 앞두고 자살한 일을 떠올렸다. 생활에 지친 개척 농가의 미
망인의 죽음으로 보면, 마사키지로의 죽음은 사치스럽게 보였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간이
죽으려고 할 때에는 다른 사람이 보아서는 알 수 없는 깊은 절망이 있다고 게이조는 생각했
다.
“절망이었을까?”
게이조가 중얼거렸다.
“네?”
나쓰에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자살을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나쓰에는 문득, 루리코가 살해되었을 때도 죽지 않고 살아온 자신을 회상했다. 게이조가 그
것을 지적한 것 같았다.
“자살이란 제멋대로 결정한 것이에요. 죽는 것보다 더 큰 괴로움은 누구에게라도 있어요.”
“하긴 그렇군. 제멋대로 하는 것이니까.”
게이조는 요코를 봤다. 요코는 미소를 지으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요코는 어떻게 생각해?”
“자살에 관해서요? 저는 지독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에요. 죽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피살되
어도 살아났을지도 몰라요. 저는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의 기분을 잘 모르겠어요.”
살고 싶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자살하는 사람은 여하튼 자기 멋대로이지요.”
나쓰에가 되풀이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자기의 목숨을 걸고까지 자기의 주장을 편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말이야.
하지만 꼭 그렇다고만도 할 수 없어.”
“당신은 절대로 자살하시지 않을 거예요. 언제나 냉정하시니까요.”
나쓰에는 차를 끓이면서 게이조를 봤다.
“글쎄, 갑자기 유혹을 받은 듯이 죽을 수도 있지.”
게이조는 행방불명이 된 지 몇 년이나 되는 마쓰사키 유카코를 생각하고 있었다. 유카코라
면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매년 설 때마다 혹시나 어디에 살아있는 것은 아
닌가 하고 은근히 기다렸는데, 유카코의 연하장은 올해도 오지 않았다.
1월 2일에 오겠다고 약속했던 기다하라는 눈보라 때문인지 끝내 오지 않았다. 기차가 다시
다니면 금방이라도 오지 않을까, 하고 요코는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음날도 그리고
10일이 지나도 기다하라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요코는 매일 외출도 하지 못하고 마음이 차분하지 않았다. 그 이상으로 나쓰에도 마음이 편
치 못했다. 그날 14일은 아침부터 따뜻한 날씨였다. 요코는 소학교 시절의 동창회가 1시부터
있었기 때문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만약 기다하라 씨가 찾아오면 전화를 해 줄게.”
나쓰에는 요코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이 말했다.
“고마워요.”
요코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요코가 나가자, 나쓰에는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
다. 요코는 나쓰에에게 반항한 일도,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코가
아무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요코의 존재 그 자체가 나쓰에에게는 감정이 상하는 것이었
다. 다정하면 다정한 대로 나쓰에는 신경질이 났다.
‘아무리 상냥해도…….’
밝은 웃음소리를 들으면 괜히 화가 났다.
‘나는 진심으로 웃을 수도 없는데…….’
여하튼 나쓰에는 요코가 진저리났다. 그것은 루리코의 어머니로서 당연한 감정이라고 나쓰
에는 생각했다. 요코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책임도 감정도 나쓰에에게는 없었다. 한솥
밥을 먹고, 옷을 입히고, 학교에 보내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코가 동창회에 나가고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현관의 벨이 울렸다. 짧고 조심스러운 듯
한 벨소리였다. 나쓰에는 이런 식으로 벨을 누르는 것이 누구였는지 생각이 났다.
무라이 야쓰오가 벨을 누르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무라이는 3일 날, 부부동반으로 세배하러
왔었다. 무라이의 방문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쓰에는 현관으로 나갔다. 기다하라였다.
“잘 오셨어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쓰에는 기다하라와 무라이가 벨누르는 방법이 비슷하다는 것에 가벼운 놀라움을 느꼈다.
기분 좋은 놀라움이었다.
나쓰에는 응접실로 기다하라를 안내하고, 가스난로에 불을 지폈다. 기다하라는 차가운 방 안
에서 어색하게 서 있었다.
“어머, 어서 앉으세요.”
굳은 표정을 보이고 서 있는 기다하라에게 나쓰에는 어른다운 상냥함을 보이고 있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나쓰에는 평범한 듯한 연초의 인사를 정색한 태도로 말하고서,
“다키가와에서 기차로 오셨어요?”
하고 웃는 얼굴을 했다.
“네.”
“다키가와는 여기보다 눈이 더 많이 왔죠?”
나쓰에는 끝까지 상냥했다. 어머니 같은 상냥함이었다. 그것이 기다하라가 가장 바라고 있는
태도인 것을 나쓰에는 잊지 않고 있었다.
방 안이 따뜻해졌다. 가스난로 위에 얹은 주전자의 뜨거운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차가운 방으로 안내해서.”
“아니에요.”
가다하라의 굳은 표정이 어느 사이엔가 풀려 있었다.
“오늘은 무엇을 대접할까요? 술 마실래요?”
기다하라는 저도 모르게 나쓰에의 얼굴을 주시했다.
‘삿포로의 다방에서 도중에 자리를 떴을 때의 실례를 이 사람은 잊고 있는 것일까? 그때
이 사람이 특별한 감정을 나에게 나타낸 것같이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기다하라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나쓰에는 아주 상냥했다.
“……저, 술은 별로 마시지 않습니다.”
기다하라도 솔직하게 말했다.
“설이잖아요. 조금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네, 양주라면 조금…….”
이 세상에 이 정도 상냥하게 웃는 얼굴을 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하고 기다하라는 나쓰에를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쓰지구치는 참 행복하겠구나.’
기다하라는 나쓰에가 모성적인 것에 강하게 마음이 끌렸다.
나쓰에가 방을 나가자 기다하라는 찾아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요코에 관한 일도 나쓰에
는 양해해 주겠지, 하고 안심했다. 나쓰에가 양주와 치즈를 가지고 왔다.
“도루의 안주는 언제나 납작한 초콜릿이에요. 아시지요?”
“그렇습니까? 몰랐어요.”
“어머, 기숙사에서는 초콜릿을 먹지 않았나 보죠? 부끄럽다고 생각해서 그랬나?”
나쓰에가 기다하라의 컵에 위스키를 따랐다. 나쓰에는 요코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지 않
았다. 기다하라는 차분하지 않았다.
“저, 도루는 집에 없어요?”
기다하라는 요코의 이름을 말할 기회를 놓쳤다.
“도루는 가야가사키에 갔어요.”
“그래요? 좋은 곳에 갔군요.”
기다하라는 나쓰에를 보고 미소지었다.
‘도루가 왜 가야가사키에 갔는가를 이 사람은 모른다. 만약 도루가 요코를 사랑하고 있다
는 것을 안다면, 기다하라는 어떤 얼굴을 할까?’
“저…… 요코도 가야가사키에 갔습니까?”
기다하라는 얼굴을 붉혔다.
나쓰에는 기다하라를 꼼짝도 않고 보고 있었다. 기다하라의 딱 벌어진 어깨하며, 터질 것같
이 솟아오른 넓적다리를 나쓰에는 감상하고 있었다. 나쓰에는 문득 숨이 답답한 듯한 압박
감을 느꼈다. 살짝 몸을 움직이고, 나쓰에는 눈을 내리깔았다.
“요코도 가야가사키에 갔습니까?”
기다하라는 나쓰에가 뭔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다시 물었다. 나쓰에는 질투를 느
끼면서 기다하라가 요코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요코가 누구의 자식인가를 안다면, 일이 어떻게 될까?’
“요코는 동창회에 나갔어요.”
나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창의 유리가 수증기로 흐려 있었다.
“동창회에요?”
그제서야 겨우 안심한 듯이 기다하라가 말했다.
“어서 드세요.”
나쓰에는 기다하라에게 양주를 권했다. 기다하라의 어떤 점에 매력이 있어서 끌리는가를 나
쓰에는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다. 맨 처음에는 청년다운 시원시원함과 곧바로 수줍어 하는
싱싱하고 천진난만한 점에 마음이 끌렸었다. 그러나 기다하라가 자신을 이성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나쓰에는 자기가 생각해도 화가 치밀 정도로 기다하라의 환심을 사고 싶
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를 기다하라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기다하라가
경멸할까 두려웠다. 나쓰에는 기다하라의 딱 벌어진 가슴 언저리를 봤다.
“아주머니는 드시지 않으십니까?”
기다하라는 아무 말 않고 있는 나쓰에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술만 먹으면 얼굴이 금방 빨개져서…….”
나쓰에는 실컷 취해 보고 싶은 느낌도 들었다. 그때 문을 노크하고 요코가 들어왔다. 요코를
보는 순간, 기다하라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나쓰에는 봤다.
“어머, 역시 기다하라 씨셨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요코의 목소리도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엄마, 다녀왔어요. 기다하라 씨, 언제 오셨어요?”
요코는 추위 때문에 붉어진 볼을 양 손으로 감쌌다.
“조금 전에 왔어.”
나쓰에는 기다하라가 오면 전화로 알려 주겠다고 했던 자신의 말을 잊은 듯한 얼굴을 했다.
“1월 2일에 오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오늘에야 오시다니 너무하군요. 기다하라 씨.”
요코는 밝은 목소리로 원망하듯 말했다.
“미안합니다. 실은 1월 2일 눈보라가 치는 날부터 감기에 걸려서 그저께까지 병석에 누워
있었습니다. 나도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어요. 작년에 맹장염이 악화되고 나서 몸이 조금 약
해졌어요.”
기다하라는 요코를 뚫어지게 보았다. 나쓰에는 기다하라의 시선을 살폈다.
“어머, 그거 큰일이군요. 이제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보시는 봐와 같이.”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서 방긋 웃었다. 나쓰에는 자신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스난로의 불을 줄이는 나쓰에의 옆 얼굴이 얄궂은 미소를 띠고 있는데도 두 사
람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머, 양주를 마시세요?”
요코는 기다하라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이 했다.
“조금은 마셔요.”
기다하라가 수줍어서 머리를 어루만졌다. 요코가 기다하라의 잔에 양주를 따랐다. 두 사람은
즐거운 듯이 서로 미소지었다.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군요.”
나쓰에도 미소지었다. 상냥한 표정이었다.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요코와 기다하라는 수줍어했다.
“아주머니, 우리들은 서로의 기분을 잘 몰라서 여러 가지 오해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겨우 다시 화해를 했어요.”
기다하라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때 요코와의 교제를 나쓰에 앞에서 확실히 말해 두고 싶었
다.
“그래요? 하지만 서로 오해가 있었기 때문에 사이가 더 좋아지지 않았어요?”
나쓰에는 얄궂은 미소를 띠고 기다하라와 요코를 번갈아 봤다.
“……아주머니가 하신 말씀의 뜻을 잘 모르겠는데요?”
기다하라는 어리둥절해서 나쓰에를 봤다.
“이제는 오해 같은 거 하지 않겠어요.”
요코도 한 마디 거들었다.
“오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서로 상대를 과대 평가하고 계신
거예요.”
나쓰에는 기다하라를 봤다.
“과대평가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조금은 있는 것 아닙니까?”
기다하라는 나쓰에의 말투에 가시가 있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정도가 아니예요.”
나쓰에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도 침착하게 말했다. 기다하라가 잠시 생각하는 것 같
은 표정을 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우리들이 교제하는 일을 별로 찬성하고 계시지 않는 것 같아요.”
“어머, 이제서야 알아차렸어요? 언제인가 내가 당신의 편지를 요코를 대신해서 되돌려준
적이 있지 않았어요. 그것으로 나의 기분은 알게 되지 않았어요?”
“우리들의 일을 오해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우리들은 진지하게 사귀고 있는 중이에요.
남녀관계로 사귀는 것은 아니에요. 손 한 번 잡은 적 없으니까요.”
“나는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모성에 끌린다고 말하면서 어깨를 주물러 주는 기다하라
씨인걸요.”
나쓰에가 차갑게 웃었다. 기다하라는 너무 어이 없는 말에 어리둥절했다.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이상한 오해를 한 것은 당신 쪽이에요. 무슨 착각을 하셨는지 삿포로의 다방에서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나, 그렇게 부끄러운 경험을 했던 적은 없어요.”
나쓰에의 교묘한 말투에 기다하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요코는 꼼짝도 않
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기다하라 씨도 여자 친구들이 많이 있다지요? 도루가 그렇게 말했어요.”
나쓰에는 우선 요코의 마음에서 기다하라를 쫓아내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 기다하라 씨에 관한 일을 그렇게 말씀하시면 실례예요. 기다하라 씨의 사진도 엄
마는 애인처럼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여동생이었어요. 나는 그로 인해서 기다하라 씨에게 사
과를 했어요.”
나쓰에는 꿰뚫어 보는 듯한 눈초리로 꼼짝도 않고 요코를 주시했다.
‘흥, 사이시의 딸년에게 지고 있을까 보냐?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공공연하게 애인이라고
자처하다니…….’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애초부터 우리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습니다.”
기다하라는 감정을 억누르고 정중하게 말했다. 나쓰에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하라를 다
시 보았다. 마침내 기다하라가 자기를 한 번도 돌아본 척도 안했다는 생각이 나쓰에의 기분
을 새롭게 자극했다.
“어째서 요코와 내가 사이좋게 지내면 안됩니까?”
기다하라는 요코를 위해서 공손하게 물었다.
“그것을 꼭 말해야 하나요, 기다하라 씨?”
나쓰에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지장이 없으시다면…….”
기다하라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요코는 이 경우에는 기다하라에게 일임하는 수밖에 없다
고 생각했다. 아까의 꿰뚫을 것 같던 나쓰에의 시선이 요코를 불안하게 했다.
“지장이 있어요.”
나쓰에는 요코를 뚫어지게 보았다.
“저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저는 아주머니에게는 다방에서 박차고 나온 실례
밖에 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쁜 점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고치겠습니다.”
기다하라는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해서 …… 이 사람은 요코를 얻고 싶은 것일까? 출생의 비밀을 모른다는 것
이, 이렇게 젊은 사람을 속아 넘어 가기 쉽게 하는구나.’
나쓰에는 어떻게 말을 꺼낼까 하고 생각했다. 스스로 말하고 싶어서 말한 것이 아닌 것같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지장이 있다고 말씀드린 것은, 요코에 관한 일이에요.”
“요코에 관한 일이요?”
기다하라가 요코를 봤다.
“네. 말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내 입으로 그 말을 꺼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편지를 돌려보냈습니다. 그것은 나의 호의였습니다. 나의 호의를 당신들이 어떻게 받
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요.”
“무슨 말씀이에요, 어머니?”
요코가 조용히 물었다.
“무슨 말이라니? 기다하라 씨가 들으면 도망칠 일이야. 말해도 좋을지 몰라?”
나쓰에는 요코의 얼굴을 다시 봤다.
“저는 도망가지 않아요. 무슨 말을 들어도.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면, 듣지 않는 것
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알고 있는 요코 씨만으로 충분합니다.”
기다하라는 나쓰에의 말에 요코가 상처받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했다.
“그것 보세요. 역시 기다하라 씨는 듣기가 무섭지요?”
나쓰에가 웃었다.
“무서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듣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면 가다하라 씨가 너무 가엾어요.”
“제가 가엾다구요? 불쌍해도 괜찮아요.”
기다하라는 더욱더 요코의 앞에서는 아무 것도 듣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알고 싶어요, 어머니. 제가 기다하라 씨에게 귀찮은 존재라면 기다하라 씨에게 죄송
한 일인걸요.”
요코의 눈이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이 나쓰에의 증오를 부채질했다.
“말해도 좋아? 너의 비밀을?”
나쓰에는 요코를 뚫어지게 보았다.
“좋아요. 무엇을 말해도.”
“아주머니, 그만 두세요.”
기다하라는 비밀이라는 말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요코가 말해도 좋다고 하잖아요.”
나쓰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빨리 듣고 싶어요.”
요코의 말이 나쓰에에게는 뻔뻔스럽게 들렸다.
“기다하라 씨, 요코의 아버지는 도루의 여동생을 살해한 범인이에요.”
나쓰에의 목소리가 흥분해서 쉬어 있었다.
“아주머니!”
기다하라는 대들 듯이 일어섰다. 요코는 잠깐 슬픈 표정을 짓더니 거의 표정의 변화가 없었
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요코는 너무나도 뜻밖의 말에 오히려 놀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몇 번이라도 말하겠어.”
나쓰에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루리코는 너의 아버지에게 피살된 거야.”
요코가 나직이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거짓말이야!”
기다하라가 외치면서 요코의 옆으로 달려들었다. 요코는 어느 사이엔가 피아노 옆에 서 있
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나쓰에의 눈이 치켜올라가고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면 그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세요. 요코가 범인의 딸이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요코의 어깨를 안은 채로 기다하라는 나쓰에를 매섭게 쏘아 보았다.
“지금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나쓰에는 급히 응접실을 나갔다. 요코도 기다하라도 화석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
만, 나쓰에가 돌아오는 것을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쓰에는 색갈이 변한 오래된 신문
지와 일기장을 껴안고 들어왔다.
“이것을 보세요. 이것이 루리코가 피살되었을 때의 신문입니다. 이 사진의 남자가 사이시
쓰치오라는 범인입니다. 이 사람이 요코의 아버지입니다.”
기다하라는 신문을 손에 들고 대충 읽더니,
“이 신문이 무슨 증거가 됩니까? 요코의 부친이 그 남자라는 것이 어디에 써 있습니까”
하고 엄하게 추궁했다. 나쓰에도 기가 죽지 않았다.
“이 오래된 일기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요코는 태어난 지 한 달 되어서, 곧바로 다카키 씨
가 촉탁하고 있는 유아원에 맡겨졌어요. 내가 루리코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여자아이를 기르
겠다고 다카키 씨에게 부탁했던 것이, 하필이면 요코였던 거예요.”
“이야기가 조금 우습군요.”
기다하라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왜 웃으십니까?”
“하지만, 그 이야기만으로는 요코가 확실하게 범인의 딸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아요.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 않습니까?”
기다하라는 의심스러운 듯이 나쓰에를 봤다. 해가 지기 시작해서 방 안이 어두컴컴해졌다.
기다하라는 전등 스위치를 켰다.
“이 일기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설마 범인의 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그 아이를 귀여워하며 기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혹한 일이 생겼어요.”
나쓰에는 미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요코를 봤다. 요코는 기다하라에게 어깨를 기대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째서 다카키라는 사람이 일부러 범인의 딸을 여기로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요? 그 점을 알 수 없어요.”
기다하라는 다시 침착해져 있었다.
“쓰지구치가 나빴어요. 쓰지구치가 다카키 씨에게 범인의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부탁했어
요.”
“아주머니에게는 비밀로 하고 뭣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나쓰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무라이와 나쓰에의 사이를 게이조가 질투했다고 말할 수는 없
었다.
“뭐, 만약에 아저씨가 그렇게 부탁했다고 해서 요코가 반드시 범인의 딸이라고 할 수는 없
지 않습니까? 범인의 딸이라고 하고 다른 아이를 보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어떤 증거
도 없는 일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라면 그 증거를 보지 않는 동안에는 결코 믿
을 수 없어요. 그렇죠, 요코 씨?”
기다하라는 옆에 있는 요코의 얼굴을 보았다.
요코는 새파래진 채로 아무 말 않고 나쓰에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증거라니요?”
나쓰에는 차갑게 웃었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한다면, 기다하라 씨가 당신 부모의 아들인가 아닌가를 무슨 증거를 가
지고 믿겠습니까?”
“…….”
기다하라는 나쓰에의 역습에 조금 질렸다.
“그것 보세요. 당신이 아버지를 믿듯이 우리들 부부도 다카키 씨라는 사람을 믿을 수 있어
요. 다카키 씨는 쓰지구치의 친구입니다. 쓰지구치의 신뢰를 배반할 그런 분이 아니예요. 당
신은 다카키 씨라는 분을 잘 모르시니까 증거들을 이야기하십니다만, 다카키 씨는 거짓말
같은 것은 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깔끔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나쓰에의 말에 기다하라가 다시 웃었다.
“더욱 이상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 깔끔하고 남자다운, 거짓말을 하지 않는 다카키라는
남자가 어째서 아저씨와 짜고 아주머니를 속였을까요?”
나쓰에는 비웃음을 당하자 입술을 깨물었다. 무엇보다도 요코가 범인의 딸이라는 사실을 기
다하라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분했다.
“어쨌든 요코 씨는 범인의 딸이 아니예요. 나는 삿포로에 가서 다카키라는 괘씸한 놈과 단
판을 짓고 오겠어요. 분명한 증거가 있는지 꼭 알아 내겠어요.”
“그러세요. 틀림없이 요코에게는 살인범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요.”
요코가 기다하라의 팔에 안긴 채 비틀거렸다.
“괜찮아요, 요코 씨?”
요코는 새파래진 채로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아주머니, 미리 말해 두지만요, 요코가 비록 살인범의 딸이라고 해도 나는 절대로 요코를
버리지 않겠어요. 요코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일이니까요.”
요코는 겨우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래요, 요코 씨? 이러한 때야말로 힘을 내야 해. 당신은 절대로 살인범의 딸이 아니예
요. 그것을 믿어야 해요.”
“이젠 됐어요.”
요코가 희미하게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뭐가 됐단 말이에요, 요코 씨?”
지금에야 비로소 요코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소학교 1학년 때 나쓰에에게 목졸린 일,
중학교 졸업식 때 답사지를 바꿔치기 당한 일, 그러한 사건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요코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요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쓰에를 주시했다. 주시한 채로
요코는 느릿느릿 나쓰에의 옆으로 다가갔다. 나쓰에는 겁이 난 듯이 물러났다. 요코는 그 나
쓰에를 눈 안으로 빨아들일 듯이 꼼짝도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증오의 눈은 아니었다. 슬플
정도로 쓸쓸한 눈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너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몰라.”
나쓰에는 뒷걸음질치면서 그렇게 말하고서 황급히 방을 나갔다. 요코는 나쓰에가 나가 버린
문을 꼼짝도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엉터리 말에 신경쓸 필요 없어요.”
기다하라는 요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요코는 아무 말 않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신문
을 손에 들었다. 요코는 한 장 한 장 정성들여 읽어 나갔다.
‘범인 사이시의 아이(생후 1개월)는 시립유아원에 맡겨졌다.’
고 하는 기사에 빨간줄이 그어져 있는 것을 요코는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다. 그런 요
코의 모습이 어쩐지 기분 나쁘게 생각될 정도로 조용했다.
“요코 씨, 이제 그런 것은 읽지 말아요.”
기다하라는 요코의 손에서 신문을 빼앗아 들었다.
“내일은 삿포로의 다카키라는 놈에게 가서 따지고 와야겠어.”
기다하라는 그렇게 말하고 요코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 됐어요.”
“이제 됐다니,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요코 씨답지 않아요. 자, 힘을 내세요.”
요코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 눈을 기다하라 쪽으로 돌렸다. 기다하라는 순간 뜨끔했다. 어두
운 눈이었다. 요코 특유의 타는 것 같은 반짝이는 모습은 없어졌다. 뭔가 섬뜩한 것 같은 기
분을 기다하라는 느꼈다.
“안돼요, 요코 씨. 당신이 범인의 자식일 리는 없어요.”
기다하라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요코를 세게 껴안았다. 요코는 기다하라가 하는 대로 가
만히 있었다.
“요코! 당신은 아주머니의 말을 믿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범인의 자식이라고 해도,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쨌든 꼭 같은 일이니
까.”
요코가 쓸쓸하게 웃었다.
“농담하지 마세요. 같은 말이 아니예요. 크게 달라요.”
기다하라는 요코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갑자기 요코와 대화가 통하
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뻐꾸기 시계가 4시를 알렸다. 기다하라는 이대로 요코를 놓
아 두고 돌아가는 것이 불안했다.
“밖에 나가지 않을래요? 차라도 마시면서 지금 아주머니의 히스테릭한 잠꼬대 같은 소리를
잊어버려요”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아요.”
요코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설마…… 죽지는 않겠지.’
하고 말하려다가, 기다하라는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면 요코가 정말로 죽어 버릴 것같이 생
각되었다. 지금 요코는 기다하라의 어떠한 위로의 말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너무 가혹한 말을 했구나.’
기다하라는 나쓰에에 대한 증오를 참을 수 없었다. 기다하라는 요코의 볼을 양 손으로 감싸
고 자기의 얼굴 있는 쪽으로 가져갔다. 요코는 기다하라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기다하
라는 입술을 가까이 하고 요코를 봤다. 요코의 창백한 마른 입술이 애처롭게 보였다. 기다하
라는 얼굴을 뗐다. 지금은 키스를 할 수도 없었다.
겨울방학 동안 식사 준비는 요코가 했다. 그러나 그 날은 5시가 지나도록 요코가 얼굴을 내
밀지 않았다. 4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기다하라가 현관에서 뭔가 장황하게 요코에게 말하고
있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쓰에는 전송하러 나가지 않았다. 그후 요코가 외출하는 기색은 없
었다. 아마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겠지, 라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아무리 강심장인 요코라 하더라도 자기의 아버지가 루리코를 살해했다고 들은 지금은 식
사 준비도 할 수 없겠지.’
나쓰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두워진 창의 커튼을 잡아 당겼다. 아까 요코의 모습을 생각
하자, 울음을 터트리지 않은 것이 묘하게 얄밉게 생각되었다.
‘더 많은 말을 해 주었어야 했다.’
기다하라가 범인의 딸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말을 꺼냈기 때문에
생각하고 있었던 일의 10분의 1도 말할 수 없었던 것이 분해서, 나쓰에는 화가 났다. 게다가
요코의 출생을 들은 기다하라가 요코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그
말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비록 범인의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 말도 의외
였다.
‘요즘 젊은 남자들은 애인의 부모가 살인을 해도, 도둑놈이어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지 몰라. 나라면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말을 들으면 도망치지
않고는 있을 수 없을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내일부터 요코의 태도가 볼 만하겠구나.’
그러나 오늘 이성을 잃지 않은 요코를 생각하자, 나쓰에는 요코야 말로 정말 뻔뻔스러운 인
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가 막혔다. 식사 준비가 다 되어도 요코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구태여 내가 먼저 비위를 맞추려는 듯이 부르러 갈 필요도 없다.’
나쓰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게이조와 자신의 두 사람 몫만을 식탁에 차려 놓았다. 돌아온 게
이조가 식탁을 보고 말했다.
“요코는 어디 갔어?”
“글쎄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는가 봐요. 방에 있는 것 같아요.”
“허, 요코답지 않은 일이구먼. 내가 가 볼까?”
“아니, 내가 가 보고 오겠어요.”
복도로 나가자 별채로 되어 있는 요코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나쓰에는 요코의 방까지
가지 않고 돌아왔다.
“자고 있는 것 같아요.”
나쓰에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래? 요코가 없으니까 쓸쓸하군. 그런데 도루는 언제 돌아오지?”
살이 찐 연어를 젓가락질하면서 게이조가 말했다.
“연하장에는 분명히 20일까지 돌아온다고 쓰여져 있었어요.”
나쓰에는 달력을 쳐다 보았다. 도루가 돌아오는 것이 왠지 무서웠다.
“오늘이 14일인가? 아직 며칠 남았군.”
아무 것도 모르는 게이조는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제40장 유 서
제40장
유 서
오랫동안 쓰지구치 집안의 딸로서 길러 주신 은혜에 아무런 보답도 없이 죽어 버린다는 것
이 정말로 죄송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 며칠 전 저는 ‘죽임을 당해도 살아날 것이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살 같은 건 어떤 일이 있어도 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제 스스로 생
각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확신이 이렇게도 허무한 것일까요? 자살이라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다 해도 자살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역시 죽기로 했습니다. 죽어야겠다는 각오를 하자 마
음이 아주 편안해졌습니다. 저는 소학교 4학년 때에 제가 쓰지구치 집안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이전부터 막연하게나마 그
걸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친딸이 아니니까, 결코 그러한 일로 비뚤어지지 않겠다
는 강한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중학교 졸업식 때, 답사가 백지로 되어 있었을 때에는 어머
니(지금은 이렇게 부르는 일을 용서하여 주세요)의 심술궂음에 놀랐습니다.
저는 건방지게도,
“이러한 심술궂은 사람을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의 성격을 비뚤어지게 하는 바
보 같은 일은 하지 않겠다. 나를 곤란하게 하려고 한다면 곤란해 하지 않을 것이고, 괴롭히
려고 한다면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 대담한 각오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꽤 밝게 행동하면서 살아 왔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루리코 언니를 살해한, 미워해야만 할 사람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
어머니가 나에게 심술궂게 하신 것도 결코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이 당연한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연하다고 하는 것보다 얼마나 괴로운 나날이었을까, 하고 진심
으로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적어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한의 애정으로 저를 길러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
다. 누가 자기의 딸을 죽인 사람의 아이에게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고 학교에 보내서 20년
가까이나 한지붕 아래서 지낼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니까 할 수 있었던 일이고,
다른 사람은 하루도 흉내낼 수 없는 일입니다. 정말로 저의 이러한 말만은 믿어 주세요.
저는 죽음을 앞에 두고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마음속으로 감사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 아버지가 어린 루리코 언니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는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제 아무리 고통
스러울 때도 꼼짝도 않고 참을 수가 있었던 것은, 나는 결코 나쁘지 않다, 나는 정직하다,
순수하다고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살인자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 제가 기대야 할 곳을 잃어 버렸습니다. 현
실로는 저는 남을 죽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법에 저촉되는 죄를 범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살인을 했다고 하는 일은 저에게도 그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만 정직하다면 비록 가난하건 남에게 욕을 먹든 심술궂게 구박당하건, 가슴을 펴고 살아
갈 수 있는 강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한 일로 상처받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
면 그것은 제 밖의 일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러나 제 마음속에 죄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저는 살아갈 희망을 잃었습니다.
어떤 때라도 위축되는 일이 없었던 저는, 요코라는 이름처럼 이 세상의 빛과 같이 밝게 살
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 제가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화가 날 정도로 뻔뻔스러운 사람이
었겠지요. 그렇지만, 지금 저는 생각합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요코의 마
음에도 빙점(氷點)이 있었다는 것을!
제 마음은 얼어버렸습니다. 저의 빙점은 너는 죄인의 자식이다, 라고 하는 데 있었던 것입니
다.
저는 이제 남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 앞에서도 말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견디고 살아갈 때야 말로 진짜 살아가는 방법을 알 수 있다는 기분
도 듭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저는 이제 살아갈 힘이 없어졌습니다. 얼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부디 루리코 언니를 살해한 아버지를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 이렇게 쓰고 있는 순
간, ‘용서’라는 말에 섬뜩함을 느낍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렇게 남에게 용서받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용서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세계
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핏속을 흐르고 있는 죄를 확실하게 ‘용서한다.’고 말해 줄 권위
있는 존재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럼, 부디 건강하세요. 앞으로는 제가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 주세요. 가능하다면
저는 영혼이 되어서라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지켜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루리코
언니가 제 아버지에게 피살된 강가에서 약을 마시겠습니다. 어젯밤의 눈이 그쳐서 춥지만
조용한 아침이 왔습니다. 저처럼 큰 죄를 짊어지고 태어난 사람이 죽기에는 과분한 맑고 깨
끗한 아침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렇게 솔직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졌던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요코 올림도
기다하라 씨에게
짧은 인연이었습니다만 다정하게 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기다하라 씨, 저는
죽습니다.
‘너에게는 살인범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하는 어머니의 말씀이 귓속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저는 벼락을 맞은 것 같았습니다. 내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이 홀연히
잠을 깼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 자신의 죄의 깊이입니다. 일단 잠에서 깬
이 생각은 맹렬하게 나에게 밀어닥쳐 옵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죄 많은 자다.’라고 하는 죄의식이 가차없이 저를 비난하는 것입니
다.
기다하라 씨, 이제 제가 누구의 딸이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살인범의 딸이
아니라고 해도, 아버지 쪽의 부모, 또 그 부모, 어머니 쪽의 부모, 그리고 또 그 부모로 더듬
어 찾아가면, 나쁜 일을 한 사람이 한두 사람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내 자신 속에 한 방
울의 악도 보고 싶지 않았던 오만했던 나는, 죄가 있는 사람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참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싫습니다. 자신의 추악함을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것이 싫
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내 속에 죄를 보아 버렸습니다. 이러한 내가 어떻게 남을 사랑
할 수 있겠습니까?
안녕히 계세요. 기다하라 씨,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요코가
도루 오빠에게.
지금 요코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오빠입니다.
요코가 누구를 가장 사모하고 있었는가를 지금에야 겨우 알았습니다. 오빠, 정말 미안해요.
P.S.
다쓰코 아주머니에게 안부전해 주세요. 아주머니에게는 못나게 자살했다고 하면 얻어 맞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어머니를 비난하지 말아 주세요. 어머니 덕분에 저의 추악함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안이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지금 죽는 편이 저에게는 행
복한 것이니까요. 안녕히 계세요.
요코가도
세 통의 유서를 다 쓰고 나서 요코는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집 안은 아주 고요했
다. 요코는 검은 스웨터에 검은 바지를 입고 오버를 입었다. 지금 죽으러 가는데 오버를 입
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이상했다.
제41장 죽 음
제41장
죽 음
생각했던 것만큼 눈이 많이 싸여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숲속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무릎까지 파묻히는 눈 속을 요코는 한 발 한 발 걸어갔다. 이따금 소리도 없이 나무 위에서
눈이 떨어졌다. 눈이 한쪽만 쌓여 있는 흰 소나무 줄기에 요코는 손을 짚었다.
손도 발도 차가웠다. 겨우 스트로부스 송림을 빠져 나가자, 제방이 있었다. 요코는 기듯이
하여 제방으로 올라갔다. 제방에 올라서 뒤돌아 보니까, 자신의 발자국이 눈 속에 계속되어
있었다. 똑바로 걸었는 줄 알았는데 흐트러져 있었다. 요코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뒤
돌아 보았다.
날이 밝았다.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 가족들이 자살한다는 낌새를 알아채면 큰일이라고 생각
하자 갑자기 요코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숲 저쪽에 있는 쓰지구치의 집에 이별을 고하고 요
코는 제방을 내려갔다. 독일가문비 숲속으로 들어가려다가 요코는 깜짝 놀라 멈추어 섰다.
비바람을 그대로 맞아서 단단해진 눈 위에, 까마귀가 엄청나게 많이 죽어 있었다.
흰 눈 위에 죽어 있는 검은 까마귀는 아름답기조차 했다. 요코는 숨을 죽이고 까마귀를 바
라보았다. 주위에 살아 있는 까마귀가 한 마리도 없는 것이 너무 쓸쓸했다. 죽어서 눈 속에
파묻혀 있는 까마귀도 있는 것 같았다. 눈 속에 묻혀 있는 까마귀를 생각하자,
“쓸쓸하구나.”
하고 요코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자기의 죽음과 이들 까마귀의 죽음이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인가, 하고 요코는 생각했다. 인
간의 죽음도 까마귀의 죽음도 아주 똑같다고 생각하니 쓸쓸했다.
‘사람은 많은 추억을 안고 죽는 것이다. 어떤 추억을 몰래 간직하고 죽는다면 그 추억은
싸늘한 송장 속에서도 살아 있지 않을까?’
하고 요코는 생각했다.
요코는 도루를 생각했다. 자기의 출생을 알고 있으면서도 상냥하게 대해 주었던 도루를 정
말로 만나고 싶었다. 까마귀의 시체를 비켜 가면서 요코는 독일가문비 숲속으로 들어갔다.
눈이 있어서 그런지 숲이 의외로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도루와 술래잡기를 하던 일들이 회
상되었다. 그 당시 요코는 기다하라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자, 도루의 쓸쓸함을 안타까
울 정도로 잘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놀았던, 추억이 많은 숲이다.’
요코는 한 발 한 발 깊은 눈 속을 걸어서 너무 지쳐 있었다. 간신히 숲을 빠져나오자 비에
이 강의 물결이 아름답게 빛났다. 강바람이 볼을 찔렀다. 강이 얼어붙은 곳으로 건너서, 요
코는 루리코가 살해되었다고 들었던 강가에 겨우 도착하였다. 요코는 조용하게 눈 위에 앉
았다. 아침의 햇살이 찬란해서, 눈은 어렴풋하게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아름다운 눈 속에서 죽을 수 있다니.’
요코는 눈을 단단히 뭉쳐서 강물에 적셨다. 그것을 입에 넣음과 동시에 수면제를 먹었다. 몇
번이고 눈을 강물에 적시고 나서는 약을 먹었다.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을까?’
만일 괴로워하여 죄가 없어지는 것이라면 아무리 괴로워해도 좋다고 생각하며 요코는 눈 위
에 누웠다.
도루는 역에 내리자 마자 곧바로 차를 잡았다. 가게도 아직 문을 닫은 채로여서 이상하게
서먹서먹하고, 고향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돌아올 마음이 되었을까?’
가야가사키에서 돌아오는 도중 2, 3일은 삿포로에서 푹 쉴 작정으로 도루는 지난 밤 삿포로
에 도착했다.
인기척이 없는 기숙사에는 그래도 몇 사람인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
아 있는 학생들이 있었다. 도루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잠이나 푹 자려고 했으나 묘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무언가 불안했다. ‘예감’이라고 흔히 말하는 그러한 느낌이 들었다.
참다못해 전화로 집안의 안부를 물을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
고 싶었다. 그러한 생각으로 돌아와서, 동네가 죽은 듯이 적막하고 사람의 그림자도 드문드
문한 모습을 보자 불안은 한층 짙어졌다. 졸린 듯이 무뚝뚝해 있는 운전사에게 말을 거는
일도 귀찮아서 도루는 초조하게 몸을 앞으로 내밀 듯한 자세로 밖을 보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더니 7시 50분이었다. 국기를 걸어 놓은 집이 한 채 있었다. 오늘이 성인의 날이
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 집을 2백 미터나 지나서였다. 축일이었기 때문에 새벽의 거리에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도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축일이라면 우리집도 8시가 지날 때까지 자고 있겠구나.’
요코만은 일어나 있을지도 모른다고 도루는 생각했다. 오늘이 성인의 날이라는 것을 깨닫자,
지난 밤부터의 불안이 씻은 것처럼 사라졌다. 도루는 요코에게 선물하려고 한 반지를 생각
해냈다. 여행용 가방의 밑바닥에서 반지 상자를 꺼내서, 도루는 윗옷 주머니에 넣었다.
요코가 기다하라를 사랑하고, 그것이 행복하다면 그 행복이 영원한 것이 되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을 하리라고 도루는 다짐했다. 기다하라와 요코를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무엇이
든지 해주려고, 이번 여행에서 도루는 결심했다. 자기가 아니면 요코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
다고 생각했던 일을 도루는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기다하라가 나보다 훌륭한 인간이다. 기다하라라면 요코의 출생을 알았다 해도 계속해서
요코를 사랑해 줄 수 있음에 틀림이 없다.’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요코가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가엾게도 어쩌다가 그런 운명을 타고 태어났을까?’
멀리 떨어져 있자니 요코의 일이 한층 더 가련하게 생각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기다하라와 행복하게 지내는 날이 곧 올테니까 앞으로 2, 3년만 참고 견디면 되는 거야.”
돌아가면, 요코에게 그렇게 격려해 주고 싶었다. 집 앞에서 차를 내리자, 도루는 조금 쑥스
러운 기분으로 자기 집을 바라보았다. 뒷문이 열려 있었는데도 집안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로도 피어 있지 않았다. 도루는 오버를 입은 채로 난로의 재를
털었다. 겨울 동안은 몇 개월 동안 난로의 불을 끄는 일이 없었다. 재를 털자 불은 곧바로
타기 시작했다. 도루는 오버를 벗어들고 살짝 부모의 침실 앞에 섰다.
“어머니, 저 돌아 왔어요.”
“아니, 도루냐?”
나쓰에는 깨어 있는 듯했다.
“어서 오너라. 일찍 왔구나. 나도 지금 막 일어날 참이다. 벌써 8시인걸.”
도루는 침실의 미닫이 문을 열었다. 나쓰에는 이불 위에 않아서 도루를 쳐다 보았다.
“웬일이냐, 이렇게 일찍?”
게이조가 누운 채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가야가사키에서 가져온 선물이 많이 있어요.”
하고 도루는 방을 나왔다.
“너의 외갓집 식구들은 다들 건강하시더냐?”
나쓰에가 미닫이 문 너머로 물었다.
“외할아버지는 작년보다 더 젊어지신 것 같았어요.”
도루는 그렇게 말하고 복도를 돌아서 요코의 방 앞에 섰다.
“요코, 나 왔어.”
대답이 없었다.
“요코.”
절대 그런 일이 없었는데 아직도 자고 있는가, 하고 생각했다. 요코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다.
“요코?”
역시 대답이 없었다. 도루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결심하고 미닫이 문을 열었다. 요코
는 없었다. 지금까지 여기에 있었다고 하는 기색도 없었다. 방은 단정히 정돈되어 있었다.
도루는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흰 봉투 3통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도루는 재빨리 달려가 편
지를 집었다.
부모님 앞으로, 기다하라 앞으로, 도루 앞으로 된 봉투였다. 도루는 자기 앞으로 된 봉투를
찢듯이 하면서 폈다. 손이 떨렸다.
‘오빠, 정말 미안해요.’
하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요코가, 요코가?”
도루는 큰소리로 복도를 뛰어 돌아왔다.
“왜 그래?”
잠옷을 입은 채로 게이조가 얼굴을 내밀었다.
“요코가 자살했어요.”
도루가 헐떡이듯이 외쳤다. 게이조가 당황해서 요코의 방으로 뛰어갔다. 요코가 방에서 죽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쓰에도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듯이 달려왔다. 그 광경을 바라
보고 잠시 멍하니 있던 도루는 이윽고 요코의 유서를 움켜쥔 채로 복도의 벽 쪽으로 넘어졌
다. 뛰어 돌아온 게이조가,
“도루, 정신차려라!”
하고, 외치며 도루의 볼을 때렸다. 정신을 잃은 것 같았던 도루는 곧 정신이 들었다. 게이조
는 이미 전화기에 매달려 있었다.
“나 원장 쓰지구치요. 간호사 두 명과 위세척기, 비타캠퍼, 링거, 안티발비, 응 그래, 해독제
야. 이상 급히 내 집으로 가져와 주기 바래요.”
게이조의 긴장된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렸다.
“살아날 수 있겠어요, 아버지?”
도루는 불안한 듯이 요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집으로 옮기고 나서도 요코는 창백한 얼
굴로 혼수상태가 계속 되었다.
“약을 먹은 시간을 알면…….”
게이조는 말을 애매하게 했다. 병원 차가 도착해서 위를 세척했던 것이, 8시40분 지나서였
다. 약을 먹은 후 2시간 이내라면 살아날 수 있다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리고 싶다.’
다만 이 한 가지 일만이 지금 게이조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이조는 요코의 맥을 짚
었다.
“괜찮아요, 아버지?”
다시 도루가 물었다.
“심장은 괜찮은데…… 그러나 …….”
게이조는 괴로운 듯이 입을 다물었다. 간호사 두 사람이 요코의 발 밑에 앉아 있었다. 두 사
람은 게이조를 주시하고, 대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나쓰에가 들어왔다.
도루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쓰에를 보았다. 나쓰에를 뒤따라서 다쓰코가 들어왔다. 다쓰코
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꼼짝도 않은 채 요코를 들여다 보았다.
어째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살 수 있는지도 다쓰코는 묻지 않았다.
나쓰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일부러 죽으려 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기 자신에게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약을 먹어 버린 요코를 나쓰에는 책망하고 있었다. 가
엾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무시했다고 나쓰에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대로 죽어 버린다면 남들이 나를 뭐라고 할까?’
나쓰에는 그런 일이 걱정되었다.
“유서는?”
잠시 후에 다쓰코는 낮은 목소리로 게이조에게 물었다. 게이조는 잠시 주저하다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자기들 부부 앞으로 보낸 유서를 다쓰코에게 건넸다. 다쓰코는 엄숙한 표정으로
유서를 읽었다. 다 읽고 나서 긴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여 눈꺼풀을 눌렀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을 보자 도루는 비로소 슬픔이 북받쳐왔다. 참지 못하고
방을 나오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현관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다쓰코가 살짝 일어서서 나
갔다. 현관에서 뭔가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 약을 마셨어?”
복도를 터벅터벅 걷는 다카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게이조도 나쓰에도 얼굴을 들었다. 획
하고 미닫이가 열렸다.
“…….”
다카키의 커다란 몸이 입구를 가득 막고 서 있었다. 게이조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다카키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다카키가 앞으로 쓰러지듯이
앉으면서 양 손을 짚었다.
“미안해. 내가 나빴어.”
다카키를 뒤따라 기다하라가 들어왔다.
기다하라는 요코의 머리맡에 앉자 마자, 잠들어 있는 요코 앞에 한 장의 사진을 쑥 내밀었
다.
“요코, 역시 나의 생각대로야. 이것이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였는데…….”
저도 모르게 모든 사람의 시선이 기다하라가 들고 있는 사진에 집중되었다. 사진을 본 순간
게이조도 나쓰에도 도루도 다쓰코도 숨을 죽였다.
거기에는 요코를 30대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요코와 꼭 닮은 여성과 눈썹이 수려하고 지
적인 청년이 있었다.
“미안하네. 내가 나빴어.”
다카키는 다시 그렇게 말하고, 머리를 떨어뜨렸다가 곧바로 머리를 치켜들고,
“언제 먹었지?”
하고 요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은 확실하지 않지만, 아침이라고 생각해.”
“소변은 보았어?”
“별로 시원치가 않아.”
다카키는 요코의 손을 잡고 맥을 짚었다.
“맥박은 괜찮구나.”
“그래, 심장이 튼튼하니까 조금은 희망을 가질 수 있어…….”
사진 속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 것보다도, 지금 게이조에게 있어서는 요코의 목숨 쪽
이 더 소중했다.
“세척은 몇 시에 했지?”
다카키는 시계를 보았다. 12시 반이었다.
“8시 40분이 조금 지나서 했어.”
“4시간 지났다는 말인데, 너무 오래 자는구나.”
다카키가 불안한 듯이 요코의 얼굴을 보았다.
“응.”
게이조의 목소리도 무거웠다.
“이 남자를 알고 있겠지?”
다카키가 기다하라로부터 사진을 받아서 게이조 앞에 놓았다.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학부에 다녔던 나카가와 미쓰오일세.”
“아, 나카가와 미쓰오!”
학부는 달라도 나카가와 미쓰오의 이름은 대개의 학생들은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수재였
다. 나카가와 미쓰오는 하숙집의 미쓰이 게이코와 연애를 했다. 미쓰이 게이코의 남편이 전
쟁터에 나간 동안에 종전이 되고, 올 때쯤에 게이코는 임신이 되었다. 두 사람은 난처해서
다카키에게 의논하러 왔다. 그때는 아직 간통죄가 있을 때였다. 낙태를 시키는 것도 징역에
처해지는 시대였다. 미쓰이 게이코는 다카키도 잘 알고 있는 산부인과 별채에 5개월 동안
숨어 지내다가 아기를 무사히 낳았다. 나카가와 미쓰오는 아기가 태어나면 자기가 맡겠다고
했었으나, 요코가 태어나기 반 달 전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었다. 그동안에 게이코의 남편
이 돌아온다는 전보가 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요코는 유아원에 맡겨졌다.
“마침 그 무렵이었네. 자네가 범인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한 것이. 자네는 그때 나쓰에에
게는 범인의 자식라고 말하지 않고 기르게 하겠다고 굳게 약속을 했네. 그리고 자네는 ‘너
의 적을 사랑해라.’를 일생의 과제로 삼고 싶다고 말했어. 기억하고 있나, 쓰지구치?”
기억하고 있나라는 말을 듣고 게이조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자네의 그 말을 믿었네. 쓰지구치와 같은 군자라면 정말로 ‘너의 적을 사랑해라.’
라는 말을 실행할 거라고 생각했네. 그렇다면 그 아이가 범인의 자식이건 다른 사람의 자식
이건 귀여워해 줄 거라고 믿었네.”
도루는 무서운 눈초리로 게이조를 노려보면서 다카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쓰에는 완
전히 새파래진 얼굴로 실룩실룩 경련을 일으켰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나쓰에 씨가 가엾었네. 그렇게 온화한 사람이 범인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기른다고 생각하니, 쓰지구치란 놈이 정말로 잔인한 놈이라고 생각되었
네.”
게이조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갈 곳이 없는 요코를 나쓰에 씨에게 기르게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네. 나는 쓰지구
치 자네가 밉기도 했네. 나쓰에 씨에게 반해 있었기 때문이야.”
나쓰에의 울음소리에 다카키는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 왜 요코가 범인의 아이라고 믿고 있었습니까?”
아까부터 요코의 옆에서 기가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던 기다하라가 얼굴을 들었다.
“다카키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야.”
게이조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나도 쓰지구치라는 남자를 믿고 있었네. 인간을 믿기가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쓰
지구치만은 믿고 있었어.”
‘서로 신뢰한다는 것조차 비극이 되는 일도 있구나.’
게이조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서로가 신뢰하면서도 결국은 다카키도 자신도 상대를 기
만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 신뢰라는 것이 이런 것
은 아니다, 라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인간끼리는 마음 밑바닥까지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신 앞에서였더라
면…….’
다카키도 자신도 결국은 신 앞에 선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남의 눈은 속일 수 있으니까.’
게이조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요코의 손을 잡았다.
‘자기 자신조차 속여온 나다.’
여기에 자신을 속이지 않고 냉정하게 응시한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게이조는 요코의 열
려 있는 입가를 주시했다. 그때 갑자기,
“용서해라, 요코.”
하고 나쓰에가 요코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다쓰코가 나쓰에의 어깨를 안고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도 나쓰에는 요코의 이불에 꼭 달라붙어 울고 있었다. 범인의 자식이 아닌 줄도 모르
고 계속해서 미워했다고 생각하자, 나쓰에는 요코도 자기도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사이시도, 나쓰에도, 무라이도, 다카키도, 그리고 나카가와 미쓰오도, 미쓰이 게이코
도, 모두 함께 요코가 여기까지 다다르게 한 원인들이다.’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서로 뜻하지 않게 깊이 엉키어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에 게이조는
새삼스럽게 두려움을 느꼈다.
나쓰에가 다쓰코에게 안겨서 방을 나가자, 다카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게이조는 결심한
듯이 다카키에게 유서를 내밀었다. 꼭 재판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다하라 앞으로의 유서도 요코의 책상 속에서 꺼내 기다하라 앞에 놓았다. 다카키와 기다
하라가 각각 유서를 읽고 있었다. 도루가 요코의 맥을 짚었다. 게이조는 꼼짝도 않고 요코를
지켜 보았다.
‘요코는 아무도 책망하지 않고, 자신만을 책망하며 약을 먹었다.’
게이조는 책망을 받지 않은 것에 더 큰 고통을 느꼈다.
‘내가 처음부터 나쓰에를 용서했더라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몹쓸 짓을 했구나.”
다카키는 다 읽은 유서를 손에 든 채로 중얼거렸다. 다카키는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
았다. 요코는 여전히 혼수상태였다.
‘언제까지 자기만 할까?’
맥이 조금 약해진 것 같았다.
“강심제를!”
게이조의 소리에 도루와 기다하라는 움찔한 것같이 얼굴을 들었다. 간호사가 주사를 놓아도
요코의 얼굴은 움직이지 않았다.
“몇 알이나 먹었나?”
다카키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백 알 정도인 것 같아. 평소에도 가끔 먹고 있었던 것 같아. 잘은 모르지만.”
“거 참.”
다카키가 불안한 듯이 중얼거렸다.
“하루만 빨랐더라도 요코 씨는 자살하지 않았을 터인데…… 유감입니다.”
기다하라의 목소리도 무거웠다.
“아니, 요코는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도 언젠가는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걸세.”
다카키는 지금 읽었던 유서를 회상하면서 말했다.
“그럴까요?”
기다하라는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을 했다.
“아마도 그럴 걸세. 죄에 대하여 이렇게 엄격하게 의식하는 인간은, 누구의 아이로 태어나
도 결국은 같은 생각을 하게 될테니까.”
“하지만 아주머니가 그렇게 심한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
요.”
기다하라는 화가 난 듯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언젠가는 똑같은 죄의식을 느끼게 될거야.”
다카키는 그렇게 말하고 게이조의 얼굴을 봤다.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범한 죄에 관한 일을 문제삼고 있지만, 요코는 죄의 근본으로 고민
하고 있었다. 간통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아도 괴로워할 것이고, 아무런 문제 없이 길
러져도 마찬가지로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
게이조는 자기가 거기까지 고민한 일이 없었던 것을 깨달았다.
저녁식사 때가 되어도 요코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모두를 차츰 말이 없어졌다.
식탁 앞에 앉아서도 모두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혼수상태인 채로 이상하게 요코의 생명은 유지되어 3일째를 맞이했다. 산소 흡입기의 소리
만이 들려왔다. 이틀 밤을 한숨도 자지 않고 요코를 간호하며 울고만 있던 나쓰에도 지금은
다만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기다하라도 다카키도 오늘 아침까지는 일어나 있었는데, 날이 새오자 별실에서 잠이 들었다.
도루는 때때로 졸면서도 요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쓰코의 눈 아래에는 기미가 끼여 있
었다. 이미 모두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게이조는 요코의 의식이 돌아오는 것만을 기다리며 꼼짝도 않고 지켜 보았다. 그러나 요코
는 계속해서 자고 있었다. 게이조는 자기와 다카키가 비록 의사지만 지금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느꼈다.
“어쩌면 살아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게이조의 말에 도루가 얼굴을 들었다.
“살아날 수 없다고요?”
도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났으면 좋겠는데……”
게이조의 말에 도루는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눈물이 오팔 반지를 적셨다. 도루는 살짝
요코의 손을 잡았다.
‘요코가 누구를 가장 사모하고 있었는가를 지금에야 겨우 알았습니다.’
라고 유서에 쓰여 있었던 말을 생각하면서, 오팔 반지를 창백한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게이
조도 눈물이 흘렀다.
밤이 되었다. 요코의 목숨은 여전히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사흘 밤째가 되자, 나쓰에도 도루도 자고 싶었다. 꾸벅꾸벅 졸리다가도, 무엇인가에 덜미를
잡혀 끌리듯이 퍼뜩 잠을 깼다. 그리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 요코를 봤다. 그러나 요코가 죽
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현실감을 동반하지 않아 다시 잠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아침이 되자 기다하라와 다카키가 약간 기운을 차렸다. 게이조는 비틀거리면서도 요코의 머
리맡에 앉아 있었다. 이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썼다. 더 이상 무엇을 해야 좋을지 기진맥
진한 상태였다.
“오늘이 고비일까?”
게이조가 중얼거렸다. 차를 가지고 온 다쓰코가 요코의 얼굴을 살짝 만졌다.
“잘 만큼 잤으면 빨리 일어나야지?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단다.”
다쓰코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간호사가 네 시간마다 폐렴 예방을 위해 페니실린을 놓았다. 순간 게이조는 깜짝 놀랐다. 주
사를 맞던 요코의 얼굴이 처음으로 고통스러운 듯이 찌푸려진 것이다.
‘살아날지도 모른다!’
게이조는 요코의 맥을 짚었다. 미약하지만 정확한 맥이었다. 다카키도 재빨리 손을 펴서 맥
을 짚었다. 다카키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게이조와 다카키는 얼굴을 마주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조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요코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리문이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냈다. 자세히 들어 보니 바람에 숲이 웅웅거리는 소리였다.
또 눈보라가 칠 모양이었다.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백범일지 [김구] (0) | 2023.04.27 |
|---|---|
| 빙점 [미우라 아야코] 01 (0) | 2023.04.27 |
| 정신분석비평 (0) | 2023.04.27 |
| 포스트모더니즘과 미국문화 (0) | 2023.04.26 |
| 이데올로기와 무의식 (0) | 2023.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