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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비평

by Casey,Riley 2023.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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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신 분 석  비 평
                              
1. 정신분석의 핵심사상-- 프로이트(1855-1939)와 라캉(1901-1981)

   (1). 무의식의 발견: 인간이 동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자연주의 사상과 에너지의 총량은 같다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서 힌트를 얻어 의식은 무의식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가설 주장. 무의식이란 인간이 태어나서 약 3년 간의 경험으로 아이가 성장하여 사회 속으로 들어가도 이 때의 경험이 평생동안 그의 의식에 잠재해있다는 가설이다. 의식 (혹은 현실원칙, 오이디푸스 단계)로 들어온 후에 유아기( 혹은 쾌감원칙, 오이디푸스 전단계)의 경험은 억압되지만 결코 제거되지 않고 위장된 모습으로 인간의 모든 선택을 좌우하고 갈등과 양가성을 야기한다. 
  예). 사랑은 왜 쉽게 증오로 바뀌나?
   유아기에 아이는 처음에는 구강기, 항문기 등 몸의 단계를 지나 어머니와 아버지 상이라는 이마고를 형성하게 된다. 아이는 자신이 결핍의 존재인줄을 모르고 어머니와 자신을 한 몸으로 인식한다. 이것이 자발적 성애(auto-erotism) 의 단계이다. 이런 애정성향은 어머니를 갖고 싶은 연인으로, 아버지를 되고싶은 남자로 삼게되는데 이것이 이마고 혹은 <자아 이상>이다. 아이는 곧 어머니가 아버지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머니를 단념하면서 성장한다. 사춘기에 이르러 이런 성본능은 대상을 향해 투사되는데 어머니 같은 연인은 이 세상에 없다. 그가 얻는 것은 관능 성향일 뿐이다. 그는 연인의 사랑을 받으면 자아이상이 충족되어 만족을 느끼고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아에 대한 비난으로 우울증에 빠지거나 대상을증오하고  파괴하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이것이 근원적 나르시즘과 이차적 나르시즘이다.
   프로이트의 근원적 나르시즘이 라캉의 <거울단계>이다. 무의식에 구조주의 언어관을 대입한 라캉은 6개월부터 18개월까지를 <상상계>the Imaginary 라고 이름 붙인다. 이차적 나르시즘은 <상징계> the Symbolic로 진입한 주체가 겪는 전이되고 분렬된 나르시즘이다.   

   <이마고 imago>
   이마고는 자아이상이 대상에게 투사된 이상적 타자이다. 프로이트는 후에 무의식을 이드로 이름 붙이고 자아이상을 수퍼에고로 하는 지형도를 만든다. 이 지형도에서 수퍼에고는 이드의 변형으로 에고에게 아버지처럼 될 것을 명령한다. 아버지의 법인 수퍼에고가 자아를 지나치게 비난할 경우, 우울증에 빠지거나 자살, 타살, 파괴등 죽음충동으로 변형될 수 있다. 여기에서 리비도의 다른 측면인 죽음충동이 태어난다. 증오와 사랑의 양가성은 무의식이 있다는 증거이다. 사랑은 에로스요, 증오는 타나토스이다. 프로이트의 리비도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로 이루어진다. 삶충동은 죽음충동이 지연된 것이다.  라캉에게 에로스는 욕망(desire)이요, 타나토스는 주이상스 (jouissance)다. 그리고 이 둘을 연결시키는 것이 <실재계> the Real 다.

(2) 죽음충동의 발견
   프로이트는 사회가 금지한 무의식이 억압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고 꿈으로 소망을 충족하거나, 연인에게 투사하거나 사회가 인정하는 예술로 승화시킨다고 보았다. 사회 속에서 벌을 받지 않으면서 우회하여 금지된 꿈을 실현시키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유아기에 상실한 어머니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은 현실 속에서 이마고를 추구하지만 잡고 보면 늘 아니기에 죽음이라는 대타자에 이를 때까지 대상의 추구를 계속한다. 이것이 반복강박이다. ?세상자의 주제?, ?쾌감원칙을 넘어서?는 반복강박과 죽음충동이 관한 글이다.  반복은 라캉의 욕망이고 삶충동이다 반복을 하게 만드는 동인이 <프티 오브제 아>(a)이다.  그러기에 욕망의 공식은 $<>a 이다. $는 거세된 주체,  <>는 환타지, a 는 아무 것도 아닌데 모든 것처럼 보이는 욕망의 대상이다. 
 
   <반복>
   프로이트는 어린 손자가 어머니의 부재를 견디기 위해 실패를 던졌다가 끌어당기는 놀이를 하면서 “포르트“,  “다“ 라고 소리치는 데서 암시를 얻어 반복강박이라는 이론을 만들었다. 실패가 보이면 던지고, 안보이면 다시 끌어당기는 놀이의 반복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반복과 같다. 유아기에는 어머니에 품에서 결핍을 모르는 평화를 느낀다. 성인이 되면 연인의 품에서 이런 평화를 갈망하다가 늙으면 아무도 안아주지 않으니 대지의 품안에 안기어 영원히 잠들기를 원한다. 이것이 실패놀이와 같은 우리의 삶이다.  상실한 어머니는 오직 대지의 품안에 안길 때 다시 얻게되므로 죽음은 정신분석에서 단 하나의 대타자 (M)Other 이다.
  이것을 라캉의 욕망이론에 대입해보자. 아이가 잡았다가 던지는 실패는 어머니의 대리물이다. 어머니의 부재는 유아기의 완전한 평화(어머니)를 상실한 우리의 삶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머니의 대리물인 대상을 향해 이마고를 투사하고 그 대상을 추구한다. 그러나  죽음만이 대타자이기에 삶은 대상을 잡는 순간 미끄러지고 다시 잡는 반복이다, 어머니 대리물은 라캉의 <오브제 프티 아>이다. 주체는 환타지를 통해 대상을 본다. 충동의 주체는 타자 속으로 들어서며 살기 위해 <프티 오브제 아> 라는 환상의 투사물을 만든다. 이것이 <전이> transference 다. 그러기에 그 환상의 대상은 아무 것도 아닌데 왜곡된 상으로 <모든 것>, 바로 그것(the Thing)처럼 보인다. 남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해골이다.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단 하나의 대타자는 죽음(해골) 뿐이지만 태어나서 곧장 죽는 것은 억울하기에 우리는 죽음의 대리물을 향해 가고 또 간다. 실패는 <프티 오브제 아>이다. “보인다”는 대상이 <바로 그것>으로  보일 때이고 “없다”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즉 해골로 보이는 순간이다. 인간이 텅 빈 죽음을 보는 순간이 <실재계>이다. 

   <실재계>
   죽음의 순간은 아주 짧다. 인간이 꿈속에서 듣는 현실의 소음 같은 것이다. 잠은 짧은 죽음이다. 긴 죽음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짧은 죽음을 수없이 반복한다.  잠은 실재계와의 만남(tuche)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소망을 충족시키는 길이라고 했지만 라캉은 주체는 환타지를 통해 대상을 본다는 의미에서 삶은 꿈이요, 삶 속에서 대상의 실체인 죽음을 보는 순간이 실재계라고 했다. 주체는 죽음을 우회하고 미루기에 실재계를 겪는 순간 곧 바로 다시상상계 속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상상계는 상징계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었기에 상상계는 상징계 속에서 <프티오브제 아>를 만들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실재계를 경험하고 상상계로 들어간다. 이것이 반복이다. 실재계는 반복의 동인이다.      
   실재계의 핵심은 죽음이다. 반복은 죽음충동 때문에 일어난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쾌감원칙 너머에는 반복강박이 있고 반복은 죽음충동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했다. 정신분석에서 반복은 삶 그 자체이다. 프로이트에게는 삶충동이요, 라캉에게는 욕망이다. 반복을 있게 하는 죽음충동 혹은 실재계는 상징계의 산뜻한 기획을 무산시키는 상상계의 힘이다. 프로이트는 의식의 기획을 무산시키는 무의식을 ?문명과 그것의 불만?에서 암시했다. 문명은 사악한 아버지를 실해하고 세워진 상징체계이다. 죽은 아버지는 수퍼에고로서 되돌아온다. 문명은 죽음충동이라는 블랙홀을 살짝 감춘 베일이다. 베일 뒤에는 죽음뿐이다. 죽음이 베일처럼 보이는 것은 <응시>gaze 때문이다.
   라캉은 실재계의 저항을 강조하여 프로이트를 정치적인 문화이론으로 바꾼다. 그의 타자란 프로이트의 사악한 눈으로 상징계의 기획을 무산시킨다.  실재계의 저항은 상징계를 전복하는 힘이고 주이상스의 정치성은 상징계를 전복하지만 결코 상징계를 벗어나지 않는 정신분석의 윤리다. 그리고 라캉은 프로이트의 전이라는 개념을 확장하여 정신분석의 윤리성을 강조한다. 

(3) 삶충동-- 전이, 정신분석담론, 사랑. 응시     
   프로이트의 전이는 유아기에 형성된 이마고가 현실 속의 특정 대상에게 투사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이트는 초기의 “도라 분석“에서 보여주듯 환자가 분석자에게 전이를 일으켜 분석이 중단되었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면 분석자 역시 전이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라캉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분석은 전이에 의해 이루어지며 긍정적인 전이야말로 사랑이며 대화이고 역사가 지속되는 동인이라고 말한다. 상상계와 상징계의 차액이 <프티 오브제 아>이고 어머니의 대리물, 즉 이마고의 투사물이다. 전이는 이렇게 주체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우수리요 타자이다. 차액은 상징계의 얼룩이고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동인이며 반복은 전이 때문에 나타난다. 전이는 기표의 순환을 일으킨다. 패러다임은 기표의 순환에 의해 일어나는 잠정적인 진리이다. 
   분석자는 환자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담론이다. 라캉은 이것을 입센적인 물음이라고 말한다.  분석자는 <안다고 가정되는> 주체이다. 환자는 분석자의 해답을 얻기 위해 그의 욕망을 읽고 채우려 애쓴다. 분석자는 a 이고 환자는 $이다. 그리고 분석은 대화가 지속되는 사랑의 담론이요, 죽음을 지연시키는 삶충동이다. 안다고 <가정되는 주체>란 대화의 주체이다. 데카르트적인 코기토가 아니라 <주체와 뗄 수 없는 타자>를 인정하는 욕망하는 주체이다. 나는 아는 것 보다 더 말하고  말하는 것 보다 더 말한다. 주체에는 늘 넘치는 주이상스의 언어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정신분석의 윤리다.  네가 연인이 무엇을 하는지 다 안다고 믿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응시>  
   <응시> 란 시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욕망이다. 바라봄과 보여짐이 교차하는 데서 응시가 생겨난다. 응시는 상상계적인 소유, 환타지, 주이상스의 시선이 상징계 속에 들어온 것이다.  응시는 시각의 타자이다. <프티 오브제 아>이고 꿈을 연장하려는 욕망이다. 나는 나비 꿈을 꾸는 장주인가, 장주의 꿈을 꾸는 나비인가. 장주를 응시하는 나비. 베일로서의 응시(속임 그림. 제우시스와 패러시오스의 그림내기).  깡통도 나를 바라본다. 사르트르의 놀램. 흉내내기(mimicry), 부풀리기, 너는 왜 내가 보는 곳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는가. 나는 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는가. 진실은 진실의 제스쳐다.

   주이상스의 윤리성--잉여 주이상스를 모른 칸트는 사드와 다를 게 없다. 칸트는 법이 욕망을 낳는 것을 몰랐다. 명령은 수퍼에고의 것이고 수퍼에고는 이드의 변형이다. 그리고 이드이 목적은 주이상스이다. 그러므로 수퍼에고는 주이상스에 대한 꿈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현실에 들어온 주이상스가 잉여 주이상스이다.  나치즘은 잉여 주이상스를 몰랐다.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 그리고 라캉의 신경증과 도착증은 정신분석의 윤리를 다룬다. 그리고 서사분석에 많이 쓰인다.

2. 정신분석과 문화비평

  (1) 문화비평: 작품이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가정아래 신비평은 작품자체의 내적 긴장을 중시했다. 소설에서는 구성, 인물, 주제를 보았고 시에서는 상징, 모호성, 리듬과 운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철저히 작품 내적인 요소에 초점을 맞추는 비평을 반복하다 보니 오히려 언어가 실재를 지칭한다는 가정을 낳았고 이것에 대한 반론으로 해체비평이 나온다. 언어가 실재를 지칭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증명하고 언어의 비유성을 드러낸 해체비평은 상징계의 우수리, 혹은 넘침 때문에 읽기가 끝없이 반복된다는 알레고리적, 혹은  환유적 읽기였다. 그러나 언어의 구조 속에 초점을 맞추고 인식 속의 맹목을 드러내는 읽기는 언어의 유희와 같은 인상을 주게되고 여기에서 언어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며 정치적이라는 가정이 태어난다. 이것이 문화비평의 시작이다.
   언어는 한 시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기에 읽기는 작품 외적인 상황과 관계를 맺어야한다는 것이 문화비평의 전제다. 작품이 어떻게 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비평은 탈 (후기)식민주의 비평을 낳고 작품이 어떻게 남성지배이념을 담고있는가를 드러내는 비평은 페미니즘 비평이 된다. 정신분석은 이런 경우 남성이나 제국의 무의식을 읽어내는 근거가 된다. 페미니즘과 후기(탈)식민주의란 제도적으로는 식민주의가 끝났으나 여전히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지배와 종속의 이념을 드러낸다. 

  < 문화이론 >
   프로이트와 라캉을 문화이론에 끌어들인 예로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마스크?를 들 수 있고 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를 들 수 있다. 프랑스에 살고 있는 흑인은 제도로서는 자유롭지만 여전히 무의식 속에 잠재해있는 열등의식 때문에 분렬적인 삶을 산다. 그들은 검은 피부에 하얀 마스크를 쓰고 산다. 불어를 잘 할수록, 피부가 백인에 가까울수록 사회적으로 인정받기에 자신들의 언어를 버리고 백인과 결혼하려한다. 백인이 심어놓은 열등감은 흑인에게 흑색공포증을 불어넣었다. 문화적 정체성은 이렇게 무의식 속에 심어지는 정치적인 것이고 분렬된 정체성을 낳는다. 서로의 문화를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파농와 같은 맥락에 있지만 그것과 조금 다르게 바바는 문화의 위치를 혼혈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파농에게 다문화적인 것이 바바에게는 문화적 차이가 된다. 그러나 둘 다 라캉의 타자를 상징계의 지배문화에 저항하고 전복하는 정치적인 것으로 본다. 바바는 프로이트의 전이와 라캉의 응시 등 정신분석과 해체를 연결시키면서 제국이 자신들의 문화를 식민지에 이식하려던 꿈이 양쪽의 무의식에 의해 전복된다고 말한다. 순수문화란 없다는 것이다.      

   <신 라캉학파>
    문화비평 가운데서도 영화나 소설이라는 서사(narrative)와 라캉을 연결시킨 경우로는 <신 라캉학파>가 있다. 신 라캉학파는 라캉의 이론으로 영화나 소설을 읽어내면서 페미니즘, 탈 식민주의, 동성애 등 정치적인 무의식을 드러내고 주장한다.  슬라보이에 지젝 Slavoj Zizek, 조안 코브젝Joan Copjec, 레나타 셀렉 Renata Salecl, 줄리엣 맥카넬 Julia Flower MacCannell, 제임스 멜라드James Mellard, 등이 있다. 이들은 라캉의 여러 가지 개념들로 서사를 읽어낸다

    예를 들면 지젝은 라캉의 “궁정풍 사랑”으로 영화,?크라잉 게임?을 읽는다. 그리고 이 영화가 정치성이 없다고 비난받았지만 동성애라는 성의 경계를 무너트린 것에서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맥카넬은 라캉의 ?칸트와 사드?라는 글을 실제로 독일나치즘의 역사에 대입하고 주이상스의 정치성을 밝힌다. 페미니즘은 주이상스로 내려가지 말고 다시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로 올라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살인만 아니라 집단 학살에 대한 법도 만들어져야한다고 말한다.
   맬라드는 영화, ?데미지?를 읽으면서 상징계적 아버지가 근원적 아버지, 주이상스의 아버지로 내려앉는 것은 윤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소설, 헨리 제임스의 ?정글 속의 짐승?을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으로 읽는다. 마쳐의 텅 빈 공간을 채워 넣는 상상계적 어머니, 메이. 그녀가 떠난 후 무덤 가에서 거세를 경험하고 비로소 상징계로 진입하는 마쳐. 짐승은 바로 상징계가 금지한 주이상스였다. 자신의 내부에 짐승이 있다는 깨달음.
   레이 촤우(Ray Chow)는 ?M. 버터프라이?를 라캉의 lure로 읽는다. 데이비드 황의 드라마에서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지만 영화에서는 라캉의 응시와 유혹이 부각된다. 양쪽이 모두 환타지로 대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프랑스 외교관은 순종적인 동양연인에 대한 환상으로 여자를 보았고 나비부인은 그런 남자를 남자로서 사랑한다. 역할이 그를 동성애자로 만든다. 나비부인이 남자였다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나비부인이 되어 죽는 프랑스 외교관은 라캉의 환타지를 포기하지 않고 비록 속였지만 나비부인도 그를 진실로 사랑했다. 라캉은 말한다. “진실은 오류에서 태어난다“고. 이 글은 원작에 대한 사이드적 해석을, 바바적 해석으로 다르게 영화를 읽어낸 것에 독창성이 있다.    

   이런 비평들은 작품을 신 역사주의나 정신분석 등, 작품 외적인 비평의 시각에서 읽어, 언어와 작품이 자의적인 이념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문화가 가치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이념임을 보여주거나, 그런 이념에 저항하는 전략으로 읽어낸다. 특히 적극적인 정신분석 비평은 현대 소비문화의 파시즘적 성향과 그것에 대한 비판, 다문화적 정치성, 페미니즘, 등 사회적인 맥락에서 정치성과 윤리성을 중시한다.  그 외에도 라캉은 프로이트보다 더 사랑에 대해 많이 언급했다. 그래서 사랑의 양상을 정치적인 문맥으로 확장시키는 서사비평이 압도적이다. 라캉은 정신분석이 심리학이 아니라 윤리학이라고 말한다.  
    
   정신분석을 페미니즘에서 긍정적, 부정적으로 적용하는 예는 너무 많기에 별도로 다루어져야할 것이다. 페니스 선망, 거세 콤플렉스가 남성위주의 사회를 인정하고 부추겼다는 여성들의 프로이트 비난을 맨 처음 적극적인 논리로 바꾼 여성이론가는 영국의 마르크시스트인 줄리엣 미첼이었다. 그녀는 프랑스 해체론에서 정치성을 발견하고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상징계를 전복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녀의 책, ?정신분석과 페미니즘?에서 밝힌다. 그러나 가장 적극적으로 수정한 경우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이다. 그녀는 오이디푸스 전 단계를 타자를 품는 어머니의 몸, 진리를 담는 열린 그릇, 코라. 상징계의 언어에 저항하는 기호계 등으로 바꾸어 가부장제인 상징계에 저항하고 상호 대화를 통해 변화를 시도하려 했다. 그 외에도 정신분석에서 소외된 것을 적극적인 개념으로 바꾼다. 거부당한 고통을 힘으로 바꾸는 애브젝션의 정치성, 우울증을 승화시키는 검은 태양, 타자의 윤리성을 탈 식민주의에 적용한 우리 자신 속의 이방인, 실험작가들을 정치적으로 읽어내는 반항의 의미와 무의미 등, 크리스테바는 페미니즘을 남녀를 초월하여 소외를 극복하려는 전략으로 확장했다. 이런 면이 다른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쥬디스 버틀러는 정신분석을 끌어들면서 비판하여 퀴어이론을 만들었다. 이처럼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다양한 저항 담론을 낳고 여전히 서사비평, 문화비평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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