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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허구

by Casey,Riley 2023.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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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Pierre BOURDIEU) 의 [맞불 (Contre-feux)] 중에서 발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허구

현재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소비에트식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대안 없는 전지구적 유일 사상으로 우리 앞에 엄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자유주의가 현시대의 유일한 대안으로 인식되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소극적으로는 언론인, 일반 시민, 그리고 특히 적극적으로 일단의 지식인들의 부단한 상징적인 선전이 있어 왔다. 이렇게 지속적이고 가공할 만한 주입은 결국 말 그대로 하나의 믿음으로까지 발전해 왔다. 우선 우리는 이런 신자유주의 담론의 생산과 유통 과정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영국, 미국, 프랑스에서 최근 많은 연구 논문들이 이런 세계관이 어떻게 생산, 전파되고 일반인들에게 선전, 교육되어 신앙화되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들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어떻게 지식인, 언론인 그리고 기업인들이 연계되어 지속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시각 - 본질적으로 가장 케케묵은  보수주의에 입힌 경제학적 합리화의 포장에 지나지 않는 - 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주입되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모든 신문들이 주기적으로 최근의 미국이나 영국의 경제적 '기적'을 보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언론매체들이 행하고 있는 가랑비에 옷젖기 식의 상징조작(물론 대부분의 언론인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악의없이 이러한 반복적인 상징조작에 참여하고 있다)은  마치 신자유주의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우리 시대의 필연인 것처럼 주입시키는 엄청난 효과를 내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내포하는 몇 개의 전제들은 마치 재론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것처럼 보여지는데. 예를 들면, 생산성과 경쟁력 향상이 인간 행위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목표로서, 혹은 경제적 논리 앞에 다른 논리(즉 정치, 사회, 문화 논리 등)는 부차적 논리로써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또 다른 중요한 전제는, 우리가 신문을 펼칠 때마다, 라디오를 들을 때마다  일단의 상식화된 개념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엄습하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적나라한 현실을 순화된 개념으로 기만하는 역할을 한다(euphemism). 프랑스의 경우, 대량해고라는 말이 기업의 "체중감량"으로, 고용주가 "국가의 활력소"로 점점 언론에 대체되고 있다. 또한 어떤 기업이 2,000명의 인원을 대량해고하는 것을 보도하기 위해 "알카텔 사의 용기있는 구조개혁"이란 헤드라인을 뽑는다.  또한 탄력성, 유연성, 규제철폐, 등의 낱말의 조합과 함축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메시지가 마치 인간해방의 보편성을 띈 메시지 인양 믿게 한다.


세계화란 이름의 괴물

세계화란 다름 아닌 복지국가의 이름으로 성취한 사회적 제권익을 파괴하기 위한 신보수주의자들의 주요 무기이다. 예를 들면, 세계화의 이름으로 최저 생계비 제도조차 존재하지 않는 나라, 노동조합이 없는 나라, 혹은 아동노동을 시키는 나라의 모델을 우리 유럽 노동자들에게 적용시키려 하며, 또한 바로 이 모델의 미명하에 우리에게 노동의 탄력성 - 자유주의의 또 다른 키워드이기도 한 - 을 강요한다. 즉 야간근무, 휴일근무, 불규칙적인 노동시간 등 모든 사용자가 그토록 꿈에 그리는 내용들... 결국 신자유주의는 유행 첨단의 현대적인 메시지의 외피아래 가장 케케묵은 사용자의 오랜 지나간 꿈을 되찾아 실현하려 하고 있다. (미국의 한 잡지는 용기있게 대량해고를 실시한 순서에 따라 소위 "충격적 기업인"들의 순위를 게재하면서 그들의 천문학적인 연봉을 게재한 예도 있다.) 소위 말하는 보수주의 혁명이라는 것의 속성, 즉 30년대 나치 혁명, 영국의 대처 혁명, 미국의 레이건 혁명 등등의 속성은 일종의 복고를 마치 혁명으로 미화한다. 이 혁명은 과거 30년대 나치 독일의 보수주의 혁명의 기치, 즉 이상화된 과거로의 회귀나 지난 농경사회적인 화석화된 슬로건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슬로건 - 성장, 합리성, 과학 (특히 경제학) - 을 앞세우면서 복고를 합리화시키며 진보적 사상과 행동들을 낡은 것으로 매도한다. 이 혁명은 현실 생활의 모든 실천을 시장의 원리, 즉 강자의 원리의 이상화된 규범 아래 묶으려 한다. 또한 이 혁명은 우리가 흔히 칭하는 금융시장의 지배를 주장하고 이를 신격화한다. 다시 말하면, 일종의 급진적인 자본주의로의 회귀 즉, 이익 극대화의 법 이외에 아무런 법도 존재치 않는, 브레이크 없는 자본주의, 그런 한편 현대적 양식의 지배형태인 경영기법과 시장조사, 마케팅, 상업광고와 같은 새로운 조작 테크닉을 통해 경제효율 극대화의 극한까지 합리화된 자본주의인 것이다.


새로운 국제연대를 위하여

그러면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현 경제이론이 내포하는 암묵적인 한계부터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경제이론은 한 정책의 수행에 있어서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사회비용의 규모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현재 프랑스 대도시 근교의 빈민폭동의 근본적인 원인이 70년대 (지스카르 데스뗑 대통령의) 신자유주의적 주거정책에 기인한다는 사실은 사회학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상식으로 통하는 일이 되었지만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이는 아무도 없다. 결국 망각이 죄를 사해 주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모든 우리 사회 비평세력들은 경제정책의 결정과정에 있어서 사회비용의 문제를 절대적으로 제기하여야 한다. 대량해고가 장기적으로 고통, 질병, 자살, 알콜중독, 마약복용, 가정폭력 등의 형태로 얼마나 엄청난 사회비용을 야기시키는 지를 끊임없이 제기하여야 한다. 또한, 현상태에서 지식인, 노동조합, 시민단체의 투쟁은 우선적으로 국가의 소멸을 방지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국민국가는 현재 밖으로부터는 국제자본의 힘, 그리고 안으로부터는 이 힘의 공조세력인 국내자본과 소위 작은 정부의 미명하에 움직이는 고위 경제관료들에 의해서 잠식되고 있다. 나는 피지배 세력인 민중(people)이 국가, 특히 복지국가 형태로서의 국가를 이러한 제 세력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는 하나의 합리성을 갖춘 힘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또한 지배세력을 위해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국가가 더 이상 지배세력의 도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단지 브뤼셀(유럽연합 집행부 소재지)의 "유로관료"들에 저항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최소한 유럽단위에서 나마 새로운 형태의 인터내셔널리즘을 창조하여 한편으로는, 경제위기의 여파로 유럽 제국가들이 2차대전 직전처럼 국수 파시즘으로 회귀하는 것을 방지하고, 또한 자본시장 세력을 통제하고 사회적 제 권리들을 유럽적 차원에서 지켜 낼 수 있는 기구를 건설하여야 한다. 따라서 개별 국가의 노동조합들도 연합하여 초국가적인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제자본의 힘이 초국가적 차원에서 행사되기 때문에 이 곳에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대항하기 위한 실제적 역량을 갖춘 진정한 인터내셔널의 조직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다. 


지식인의 거듭남을 위하여

그런데, 대다수 지식인들은 왜 이 모든 문제에 관해 미적지근하고 애매모호한 입장을 보이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서 지식인들의 이 문제에 대한 회피, 심지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공조행위들을 폭로, 열거하지는 않겠다(그러기에는 너무 잔인한 것 같고 또 글도 너무 길어질 것이다). 한가지 예만 들겠다. 소위 모던, 혹은 포스트모던이라고 자타가 일컫는 철학자들의 토론을 볼 것 같으면, 그들은 현학적인 게임에 몰두하여 이성이니 합리적 대화니 하는 것의 말장난 수준의 방어에 연연하거나, 심지어 어떤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종으로 "이데올로기의 종언의 이데올로기"를 마치 요즈음 잘 나가는 사상으로 상품화하여 지난날의 진보적인 사회변혁 사상들을 생매장하고 과학정신에 대한 니힐리스트적인 저주를 일삼고 있다. 사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힘은 일종의 신사회적 다윈이즘(new social dawinism)에 기초한다. 그것은 소위 하버드 대학의 모토이기도 한 "the winner is the best and the brightest"의 사상인데(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Becker는 다윈이즘이 경제주체들의 합리적 계산능력의 기반이라고 주장한다) 지배자 인터내셔널의 세계화적 비젼뒤에는 이러한 소위 능력위주의 철학이 있다. 그것은 결국 능력있는자(승자)는 좋은 직업을 얻고, 실업자(패자)는 따라서 무능력자라는 것이다. 능력위주의 이데올로기는 주인과 노예의 이분법적 시각을 정당화시키는데 상당히 적절한 사상이다. 한쪽에는 능력을 갖춘, 초 고임금을 받는 직업에 종사하면서 국제노동시장에서 언제든지 최고수준의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지위를 독점하여 심지어 자신 마음에 드는 고용주를 선택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과, 다른 한쪽에는 임시고용과 실업의 양자택일의 운명에 처한 대다수의 사람의 존재를 당연시한다.

막스 베버는 말하기를 지배자들은 항상 <특권의 형이상학화된 신학>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즉, 그들이 특권화된 계층이라는 점을 이론적으로 정당화시키는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능력위주의 논리가 바로 이 지배자들의 논리이며 또한 민중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 오늘날 우리는 지난날의 참여 지식인 시대에서 탈참여 지식인 시대로 퇴보했는가? 이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은 지적 자본의 소유자로서의 지식인들은 비록 이들이 지배계층내에서는 피지배적인 위치에 있지만 그들은 어쨌든 지배계층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그들이 현재의 투쟁에 머뭇거리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 대다수가 이미 학벌에 기초한 이 능력위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한편으로는 혼동을 느끼면서 내심 동조하며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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