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封印)된 시간(時間)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j Tarkowskij)
2. 이상을 향한 동경으로서의 예술
특별히 영화 전문적인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 나의 예술관을 표명하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게 여겨진다.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누가 예술을 필요로 하는가? 예술은 도대체 누구에 의해서 사용되어지는가? 이 모든 질문들은 비단 예술가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예술을 수용하거나 소비하는 모든 사람들이 제기하는 질문들이다. 이같은 이야기들은 오늘날 빈번하고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으며 유감스럽게도 20세기의 예술과 관객의 관계를 폭로하듯이 나타내 주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그리고 예술과 관계있는 모든 사람이 해결책을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알렉산더 블록. Alexander Blok(1880-1921): 러시아 시인, 러시아 상징주의의 대표자.
은 시인은 혼돈 속에서 조화를 빚어내는 사람이라고 말했으며, 푸쉬킨은 시인에게 예언자의 재질을 부여했다. 모든 예술가는 다른 예술가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자기 자신의 독창적인 법칙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마치 하나의 상품처럼 소비되어지기를 원하지 않는 모든 예술의 목적은 자기 자신과 이 세상에 삶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설명하려는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지구상의 인간 존재의 근본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인간들에게 분명히 하는 일이다. 또는 설명하려 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일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것부터 시작하여 보자: 논란의 여지 없이 예술의 기능은 내게는 인식시키는 일이다. 어떤 형태로 충격과 카타르시스로 나타나는 파급 효과를 얻어 낼 것인가? 이브가 선악과라는 인식의 과일을 먹은 그 순간부터 인류는 영원한 진실 탐구라는 언도를 받은 셈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담과 이브는 제일 먼저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인식했고 그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들은 깨쳤기 때문에 부끄러워했으며, 그들은 상호간의 즐거운 인식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끝없는 길의 시작이었다. 영적인 무지의 상태로부터 속세의 절대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광야로 내던져진 자의 비극은 충분히 이해될 만하다.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 19).
“만물의 정화”라고 하는 인간은 지구 위에 그렇게 나타났으며, 지구 위의 삶에 적응해 왔다. 인간이 그 이후로 걸어온 길을 우리들은 흔히 진화라고 표시한다. 이 길은 또한 동시에 인간의 자기 인식의 고통스런 과정이기도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삶의 본질과 자기 자신, 자신의 가능성과 목적을, 그때마다 새롭게 인식한다. 그런 인식 과정에서 인간은 기존에 축적된 지식을 총체적으로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도덕적 자기 인식이라는 것은, 매번 새롭게 겪어야만 하는 그때그때의 경험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이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되며, 이 세계를 획득하려는 고통스런 요구에 내몰린 채, 자신이 직관적으로 감지한 이상과 이 세계를 조화시키고자 애쓴다. 이 채워질 수 없는 요구야말로 인간적 불만과 자기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고통의 영원한 원천인 것이다.
예술과 학문이란 그러니까 인간이 세계를 자기것으로 소화하는 형식인 것이며, 소위 “절대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는 인간의 인식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창조적 인간 정신의 두 가지 표현 형태의 공통성은 끝난다. -나는 감히 주장하지만- 그러나 창조성이라는 것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문제시되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인식의 학문적 형태와 미학적 형태의 근본적인 차이인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인간은 현실을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서 파악한다. 학문에 있어서는 인간적 지식은 끝없는 계단의 단계를 좇게 되며, 세계에 대한 낡은 인식은 항상 새로운 인식으로 바뀌어져 나간다. 이것은 객관적인 세부 인식을 바탕으로 서로 일관성 있게 견해를 지양해 나가는 단계적인 방법이다. 이에 반해서 예술적 견해와 발견은, 매번 하나의 새롭고 유일무이한 세계상으로서, 절대진리의 한 상형문자로서 이루어진다. 예술적 견해와 발견은 공개적 표명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세계의 모든 규칙적 양상을 직관적으로 포착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성급하고도 번뜩이는 정열적 소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세계의 아름다운 것, 추한 것, 인간적인 것, 잔인한 것, 무한적인 것, 제한된 것. 이 모든 것들을 예술가는 독특한 방법으로 절대적인 것을 포착하는 한 형상의 창조 속에서 제현하는 것이다. 이 형상의 도움으로 끝없는 진리에 대한 느낌이 제한적 수법을 통하여 표현된다: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을 통하여,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을 통하여 표현된다. 예술이란 실증주의적이고 실용적인 실천이 우리들에게 감추고 있는 저 완전한 정신적 진리와 함께 맺어져 있는 이 세계의 한 상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이 자신을 이런 또는 저런 학문적 시스템과 연결시키고 싶다면, 그는 자신의 논리적 사고를 가동시켜야만 한다. 그는 반드시 특정한 교육과정을 거치고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술은 작품이 우리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고, 가슴으로 느껴지고, 감정적인 충격을 자아내고, 감상자들에게 받아들여진다고 하는 희망을 갖고 모든 수단을 사용한다. 그리고 예술은 인간을 그 어떤 가차없는 지적인 논증에 예속시키지 않고, 오히려 예술가들이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예의 정신적 에네르기에 의존한다. 그리고 교육적인 기초 대신에 실증적인 의미에서, 정신적인 경험을 요구한다.
예술이 태어나고 발전되는 곳은 다름아닌 정신적인 것과 이상을 향한 저 영원하고 쉴새 없는 동경이 가득 찬 곳이며, 예술의 주변으로 인간들이 모이도록 만드는 곳이다. 단지 독자성이라는 이름 아래 삶의 의미를 찾는 맹세를 파기한 현대 예술이 제시한 길은 올바른 길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창조적 행위라는 것은 단지 그들의 자기 중심적인 행위의 일회적인 가치의 정당성만을 추구하는 기이한 사람들의 이상한 짓거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는 개성이 진실임을 판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좀더 보편적이고 좀더 높은 이념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에술가란 자기 자신에게 마치 기적과 같이 부여된 재능에 대해 소위 관세를 물어야만 하는 하인이다. 진정한 개성이란 오로지 희생을 통해 얻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점을 점점 망각하고 따라서 우리들의 인간적인 결정을 위한 감정조차도 잃어버린다.
아름다움을 향한 노력에 대해 말한다면, 즉 이상을 향한 동경으로부터 태어난 예술의 목적이 또한 바로 이 이상이라고 해서, 나는 결코 예술은 속세의 추한 것들을 피해가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술적인 형상이란 항상 한 가지를 다른 것을 통해서 대신하는, 보다 큰 것은 보다 작은 것을 통해서 대신하는 일종의 상징인 것이다. 활력에 넘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예술가는 사멸한 것을 끄집어 내고, 무한한 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기 위하여 유한한 것을 소개한다. 하나의 대용물! 무한한 것은 구체화할 수 없다. 우리들은 무한한 것의 상상적 환영, 그 형상만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추한 것 속에 덮여 있듯이, 추한 것은 똑같이 아름다운 것 속에 덮인 채로 들어 있다. 삶은 이 부조리할 정도로 대단한 모순 속에 얽혀 있으며, 이 모순은 예술 속에서 조화적이면서 동시에 극적인 단위로 나타난다. 예술적 형상은 모든 것이 서로 인접해 있고, 모든 것이 서로 범람하는 가운데에서 예의 조화적 극적 단위를 인지하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우리들은 한 형상의 이념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다. 그 본질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각이란 말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에 의한 묘사란 결코 생각을 올바르게 담아낼 수 없다. 한 형상이란 창조하고 느끼고 공감하거나 거부할 수는 있지만, 사건의 이성적인 의미의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무한한 것에 대한 생각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아니 묘사하는 것조차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오직 예술만이 이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예술만이 무한한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절대적인 것은 오로지 믿음과 창조적 행위를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고유한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한 예술가의 투쟁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예술품 창조에 이바지하겠다는 자세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예술 창조는 가장 비극적인 의미에서 예술가에게 진정한 “스스로의 의무”를 요구한다. 만일 예술 작업이 이렇게 절대진리의 상형문자로 이루어진다면, 이 상형문자들의 하나하나는 모두 작가가 최종적으로 작품 속에 투영시킨 이 세계의 형상인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이고 냉정한 현실 인식이 끝이 없는 계단에서의 단계적 전진이라면, 예술적인 인식은 내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폐쇄적 영역들의 끝없는 시스템을 연상시킨다. 이 영역들은 서로 보충하고 모순될 수는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서로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 반대로 이들은 서로를 보강하고 전체적으로 무한한 것을 향해 성장하는 특별히 포괄적인 영역들을 형성한다. 스스로 옳다고 확증하는 영원한 타당성을 시적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인간이 같은 인간들을 인식하고 표현해 낼 수 있다는 능력을 증언해 주는 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이해가 창조적인 마지막 목표(삶의 묘사)의 중요한 단편을 차지하기 때문에 예술은 그 외에도 깊이있는 상호 교류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학문과는 달리 예술 작품은 물질적으로 의미가 있는 어떤 실용적인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다. 예술이란 일종의 넓은 의미의 언어이다. 이 언어의 도움으로 인간들은 서로 접촉을 시도하며, 이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남에게 알리고 다른 사람의 낯선 경험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도 결코 실용적인 이익을 위한 짓은 아니며, 실용주의와는 완전히 대치되는 희생정신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랑이라는 생각 때문 인 것이다. 한 예술가가 순전히 자기 실현만을 위해서 창작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상호 간의 이해없는 자기실현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정신적인 연결이라는 이름 아래 행하는 자기 실현은 아무런 쓸모도 없고 궁극적으로 타인의 커다란 희생을 요구하는 고통스러운 짓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예술과 학문이라는 직관은 아마도 첫눈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소화의 형태를 서로 좁혀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직관이란 정서적인 창작 과정에서는 학문에서와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하지만 예술과 학문 모두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해”라는 개념 역시 예술과 학문의 영역에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학문적 의미에서의 “이해”라는 논리와 이성의 차원에서의 공감을 의미한다; 학문적 이해란, 학문적으로 관찰한 것의 증명과 유사한 지적인 행위이다. 예술적 형상의 이해란 이에 반해 예술적 아름다움을 정서적 근거, 아니 오히려 초정서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학자의 직관이란 마치 계시나 영감처럼 나타나더라도 결국은 논리적 발전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한 논리적 변형은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점검받는 것이 아니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논리적 사고에 있어서 의식적인 도약은 해당되는 학문 영역의 법칙을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런 학문적 발견이 마치 어떤 계시나 영감의 결과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식인, 학자의 영감과 예술가의 영감은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한 예술 형상의 탄생은- 독창적이고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형상, 비이성적 차원에서 빚어졌으며 비이성적인 차원에서 존재하는 형상- 지성의 도움을 받는 경험적 인식과정을 통하여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예술가가 형상을 창조하면 그는 그 자신의 생각을 억제하게 된다. 생각이란, 세계를 정서적으로 인지해 낸 형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예술적 형상이란 작가에게는 자신을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공고물인 것이다. 생각이란 단명하지만 예술적 형상은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감수성이 있는 인간이 한 예술 작품에서 받는 인상과, 순수한 종교적 체험 사이의 유사성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인간의 정신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시인은 어린이의 상상력과 심리를 갖고 있는 인간이다. 시인이 세계로부터 받은 인상은 그가 어떤 위대한 이념에 사로잡혀 있는지에 상관없이 직접적이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세계를 “묘사”하지 않는다- 세계가 바로 그 자신이다.
예술 작품 수용을 위해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은 예술가를 신뢰하고 믿으려는 자세와 가능성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서적으로 파악하는 시적 형상이라고 하더라도 때때로 이해되기 어려운 경우들이 있다. 신에 대한 진정한 신앙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인에 대한 믿음 역시 특별한 영적 자세, 특수한, 전적으로 정신적인 잠재력을 전제로 한다.
이같은 생각들은 때때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나오는 슈타브로긴과 샤토프의 대화를 연상시킨다“ ”나는 오직 당신이 스스로 신을 믿는지 안 믿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니콜라이 브제볼로도비치는 그를 강렬하게 쏘아 본다.
“나는 러시아와 러시아 정교를 믿습니다. ... 나는 예수의 성체를 믿습니다. ... 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러시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 믿습니다.” 샤토프는 정신이 나간 채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신을 믿으시냐요, 신을?”
“저... 저... 믿어 보겠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인가? 이 장면은 어찌할 바 모르는, 당황한 영혼의 상태를 천재적인 수법으로 포착하고 있다. 정신적 가난과 정신적 불안은 점점 더 현대인의 움직일 수 없는 특징이 되어가고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현대인을 정신적 무능력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의 눈에는 감춰진 채로 보이지 않는 법이다.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와 목적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채로 예술을 수용하고 평가하는 자의 정신적 무능력은 흔히 다음과 같은 통속적으로 간결화된 상투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맘에 들지 않아!” “재미없군!” 이것은 강렬한 추론이긴 하지만 무지개를 묘사하려 하는 장님의 추론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는 예술 창작 과정에서 고통을 겪게 되며, 이는 그런 고통을 통하여 얻은 진실을 남들에게 알려 주기 위함이다. 상투적 표현으로 일축하는 정신적 무능력자들은 예술가의 이런 고통을 알지 못한다.
그럼 진실이란 무엇인가?
우리 시대의 가장 슬픈 특징 중의 하나는 오늘날 평범한 보통 사람이 아름다운 것과 영원한 것에 대한 반응과 관계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현대의 대중 문화- 의수, 의족, 의안의 문명- 는 영혼을 기형화시키며, 인간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점점 더 차단하고, 정신력을 소유하는 존재의 하나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도 점점 더 가로 막는다. 그러나 예술가는 유일무이하게 자신의 창조적 의지를 결정해 줄 수 있고 제어할 수 있는 진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외면해서도 안된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예술가는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이 믿음이 없는 예술가는 마치 장님으로 태어난 화가와 같다.
한 예술가가 자신의 테마를 찾는다는 말은 틀린 말일 것이다. 테마란 예술가의 내면에서 마치 과일처럼 익어가는 것이며, 그 형상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 생명의 탄생과 같은 것이다. 예술가는 자랑스러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예술가는 상황의 주인이 아니고 하인이다. 창조성이란 예술가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형태이며, 자신의 작품 하나하나는 자신이 자유롭게 거절할 수 없는 하나의 행위를 의미한다. 논리에 맞는 특정한 조치의 필연성과 그 규칙성에 대한 감각은 이상을 향한 믿음이 있을 때에만 생기는 법이다- 오직 이 믿음만이 예술 형상들을 조직적으로 뒷받침하여 준다.
종교적 진실의 의미는 희망이다. 철학은 인간 이성의 한계와 인간 행위의 의미, 인간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는 가운데 진실을 추구한다. 이 주장은 한 철학자가 인간의 존재와 행위는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입장에 도달했더라도 그대로 해당된다.
흔히들 가정하는 것과는 달리 예술의 기능적 규명은 사고를 촉발시킨다든가 이념을 전달한다든가 혹은 하나의 사례 구실을 하는 데 있지 않다. 아니 예술의 목적은 인간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의연히 준비하게 하고, 인간이 죽음을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서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데 있다.
인간은 훌륭한 예술 작품을 대하게 되면 그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예의 그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게 된다. 이와 같은 예술 작품을 접하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자는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심오한 충격을 경험한다. 훌륭한 예술 작품과 그 작품을 감상하는 감상자 사이에서 생성되는 예의 특수한 긴장 관계 속에서 인간들은 이제 자유를 갈망하는 그들 인간 존재의 가장 훌륭한 측면을 의식하게 된다. 우리들은 이 순간에 우리들이 가진 고갈되지 않는 가능성 속에서,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심오한 감정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발견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예술적 걸작품- 그것은 그 절대적 타당성으로 말미암아 현실에 대해 완벽하고도 완결된 판결을 내리는 작품을 말한다. 걸작품은 작품이 인간적 개성을 영적인 것과의 합동 유희 속에서 얼마나 포괄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가를 가치 척도로 삼는다.
위대한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작품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매우 보편적인 느낌 이외에도,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서 걸작품이라고 인정받게 하는 분명한 판단 기준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의 가치는 그때 그때의 수용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상대적이다. 일반적으로 한 예술 작품의 의미는 이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작품과 사회 사이에서 맺어지는 관계 속에서 측정될 수 있다고들 생각한다. 보편적으로 볼 때 이 생각은 틀림없이 옳다. 역설적인 것은 다만 이럴 경우에 예술 작품은 완전히 그 수용자들에게 얽매이게 된다는 점이다. 작품과 전세계를 결합시켜 주는 것, 현실을 어떻게 파악하는가를 보여주는 개성, 그 작품 속에 주어진 인간적 개성과 작품을 결합시켜 주는 것, 이런 것들을 과연 그 수용자가 감지해 낼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모든 것이 좌우된다. 좋은 책을 쓰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좋은 책을 읽기도 똑같이 어렵다고 말한 괴테의 말은 옳다. 자기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평가를 객관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판결이 단지 상대적으로 객관적일 수 있는 가능성조차도 해석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예술 작품이 대중들과 다수의 눈에 위계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비친다면 그것은 대부분 우연한 상황의 결과이다. 예를 들면 그 작품이 그 작품을 좋아한 해설자를 만난 행운 때문인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한 인간의 미학적 친화력은 때때로 예술 작품 그 자체에 관해서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하곤 한다.
예술 작품의 해설자는 원칙적으로 한 특정 부분을 다루는데, 이는 이 부분에서 어떤 특정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해설자는 작품 자체와 감정적으로 생생하고 직접적인 접촉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와 같이 순수한 작품 수용을 위해서는 요컨데 독창적이고 독립적인, 소위 오류가 없는 판단을 위한 특풀한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보편적으로 자신에게 이미 알려진 사례와 현상의 맥락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해 줄 것을 찾게 되며, 따라서 예술 작품을 흔히 주관적인 상상이나 개인적인 경험에 입각해서 판단한다. 다른 한편 예술 작품은 다양한 판단들을 통해서 확실히 변동적이고 각양각색의 생명력을 얻게 되고 이를 통해서 더욱더 풍성해지며 일종의 존재의 다양화를 이룩한다.
쏘로우. Henry David Thoreau(1817-1862): 미국의 작가. 1845-7년까지의 발덴(Walden) 호숫가에서의 생활 체험을 일기(Walden or life in the wood, 1854)에 묘사, 발표하였다.
는 그의 위대한 작품 Walde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 위대한 작가의 작품들은 아직도 인류에 의해 읽혀지지 않았다- 오직 위대한 작가들만이 그 작품들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대중들은 마치 별자리를 읽어 내듯이 이런 작품들을 읽는다- 천문학자들처럼이 아니고 점성술사들처럼. 우리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계산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마치 협잡을 당하지 않고 지출을 자세히 조사할 수 있기 위함인 양, 읽는 것도 단지 편리함을 위해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고귀한 정신적 연습으로서의 독서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독서란, 독서란 말이 뜻하는 가장 고상한 의미로서의 독서를 말한다. 예컨데 우리들의 가장 고귀한 감정들을 잠재우면서 잠자리에서 우리를 달콤하게 잠들게 하는 그런 독서가 아니라, 우리들이 발뒤꿈치를 들고 까치발로 접근해야만 하는 그런 독서, 우리들이 우리들의 의식이 가장 초롱초롱하게 깨어 있는 순간들을 바쳐서 하는 그런 독서를 말하는 것이다.”
예술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완결성, 명작의 탄생은 작품 전체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이념적 의미에서나 미학적 의미에서 그 어떤 부분도 사라지거나 두드러지게 하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훌륭한 명작에서는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 중에서 몇 가지만을 선호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최종적으로 선택한 목적과 과제를 형상화하고 있는 예술가의 손을 붙잡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오비드(Ovid)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예술의 본질은 사람들이 예술을 눈치채지 못하는 데 있다.” 그리고 엥겔스(Engel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으면 있을수록 예술을 위해서는 더더욱 좋다. ...”
모든 자연의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예술 또한 서로 대립하는 요소들의 싸움 속에서 존재하며 발전한다. 대립되는 요소들은 이 싸움 속에서 서로 섞이게 되며 동시에 이념을 끝없이 지속적으로 전진시켜 준다. 한 작품을 예술로 끌어 올리는 이념은 작품을 구성하는 모순들의 균형과 평형 속에 감추어진다. 예술 작품에 대한 결정적인 평가, 그 의미와 과제를 분명하게 밝히는 작업은 따라서 불가능한 것이다. 어떤 예술 작품의 평가가 용이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 작품은 그만큼 훌륭한 작품이라는 괴테의 언급은 이런 연유에서 나온 것이다.
명작이란 결코 냉각되지도 과열되지도 않은 폐쇄적인 공간이다. 아름다움이란 부분들의 균형인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작품 창조가 완성되면 될 수록 그 작품이 주는 연상 작용은 적어진다는 점이다. 완성된 작품이란 일회성을 가진다. 명작은 또한 결국은 똑같은 것이지만서도 수많은 연상들을 가능케 해준다. 예술학자들의, 작품의 의미 또는 그 작품이 다른 작품에 비해 우수한 점들에 대한 발언들 중에는 얼마나 우발적인 것들이 많이 있는가?
이런 맥락에서 물론 객관적인 판단이라는 부담 없이 나는 몇 가지 미술사의 예를 들고 싶다.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절에서: 나를 오로지 혼돈시키고 낯설게 만들기만 했던 작품 평가가 얼마나 많았던가!
라파엘과 그의 <시스틴의 마돈나>에 대해 쓰지 않은 사람이 도대체 있는가? 사람들은 이 우르비노(Urbino) 출신의 천재가 이 작품에서 철저하고 완전하게 인간의 생각을 형상화시켰으며 인간의 개성도 훌륭하게 형상화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는 중세적인 신 앞에서 수백년간 무릎 꿇고 기도한 연후에 드디어 자신의 내면과 외부에서 세계와 신을 발견했으며, 그의 시각은 그때까지 신에게로 너무 경직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윤리적 역량은 제대로 펼쳐질 수가 없었다. 이 화가의 경우는 정말 그렇다고 우선 한 번 가정하여 보자. 왜냐하면 이 예술가의 묘사 속에서 성모 마리아는 정말로 한 평범한 시민 계층의 부인이며 화폭에 나타난 그녀의 영적인 심리 상태는 삶의 진실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간들에게 희생물로 바쳐질 자기 아들의 운명 때문에 불안해 하고 있다. 아무리 그녀 아들의 죽음이 인간들을 구하기 위함이라 할지라도, 인간들을 원죄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이 희생된다고 할지라도, 라파엘의 마리아는 불안에 떨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실제로 아주 분명하게 그림 속에 새겨져 있다. 너무 지나치게 분명하다는 것이 나의 견해인데, 왜냐하면 예술가의 이념이 유감스럽게도 지나치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이 화가의 달콤하고 비유적인 성향에 의해 편안하지 못한 감동을 받는다. 이런 성향은 전체 형식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 그림의 순전한 회화적 우수성 역시 이런 성향을 위해 고용되고 있다. 라파엘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의도를, 한 생각의 설명과 자기 작업의 사변적 구상에 집중시킨 나머지 그림이 표피적이 되고 생명력이 없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나는 미술의 긴장감을 자아내는 법칙, 넘치는 힘 그리고 화가의 의지에 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것들은 내게는 절대적인 것들로 여겨진다. 이 법칙들은 라파엘과 동시대인인 베니스의 비토레 카르파치오. Vittore Carpaccio(1455-1526): 초기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화가.
의 그림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들이 당면했었고 그 당시 사람들에게 밀어닥쳤던 “인본주의적” 현실 때문에 소외되었던 모든 도덕적 문제들을 극복하고 있다. 이 화가는 그러나 문학적 수단이 아니라 순수한 미술적 수단으로 이와 같은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라파엘의 <시스틴의 마돈나>는 약간 성직자의 설교와 같은 인상, 신앙심을 고취시키려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카르파치오는 개성과 물질적 현실 간의 새로운 상호관계를 용감하고도 고귀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그는 지나치게 감상에 빠지지 않으며 인간 해방을 위하여 자신의 정열을 자제하고 있다.
고골은 1848년 슈코프스키. Wassilij Schukowskij(1783-1852): 러시아의 낭만주의 이전의 시인, 번역가.
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설교하듯이 가르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예술이란 설교 없이도 이미 교육입니다. 내가 할 일은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형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삶을 삶 그 자체로 형상화하여야만 하며, 삶을 작품 속에서 다루어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말인가! 삶을 다루어 보려고 할 경우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수용자에게 강요하게 된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강의실에 앉아서 책을 펴들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영리한 사람들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작가란 다만 형상을 통해 생각하고 독자와는 달리 자신의 세계관을 이 형상의 도움을 받아 유기적으로 판을 짤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은 그 누구에게도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사실, 인류는 4천년 동안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분명하지 않단 말인가?!
만일 우리들이 예술의 경험들, 즉 예술 작품 속에 표현된 이상을 우리들의 것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우리들은 이미 오래 전에 보다 더 훌륭한 인간들이 되어 있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오직 충격과 카타르시스(심성정화)를 통해서만 선(善)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라고 가정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정조를 지키려 하는 푸쉬킨의 여주인공 타챠나의 긍정적인 본보기에도 결국은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비록 소련의 문학 강의는 이를 가능하다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인간은 배움을 통해 착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다시 르네상스 시대의 베니스로 돌아가 보자. 카르파치오의 인물의 풍성한 구성들은 그 동화적 아름다움으로 우리들을 감동시킨다. 이 그림들 앞에 서 있으면 예언의 격앙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우리들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비로소 설명된다고 믿게 된다. 도대체 이 화가의 그림에서 무엇이, 헤어날 수 없는, 예의 심리적 긴장감을 자아내게 하는가 하는 것을 나는 이제껏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감상자를 충격으로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아마도 몇 시간이 지나면 카르파치오 미술의 조화의 원칙을 인식하기 시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을 완전히 이해하고 난 후에는 대번에 처음에 받은 인상과 그 작품의 아름다움 속으로 잦아들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이 조화의 원칙은 결국 극도로 간략한 것이며, 고귀한 의미에서 르네상스 예술의 인간적인 정신을 규정해 내고 있다- 나의 견해로는 라파엘보다 훨씬 더 월등하게 르네상스의 인간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즉, 그의 그림 속에 나오는 인물들 하나하나가 모두 작품 구성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인물들 중의 어느 하나를 집중적으로 관찰해 보게 되면 즉시 그 인물의 주변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 이를테면 주변 환경과 주변 상황은 다만 그 “우연한” 인물을 돋보이게 하여 주는 것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놀라울 정도로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림을 훓어보게 되면, 감상자의 명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작가가 의도한 감정 논리의 흐름을 고집스럽게 쫓아가게 되고 군중 속으로 휩쓸리는 얼굴들을 따라 이 얼굴에서 저 얼굴로 옮아가게 된다.
나는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의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나의 견해를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카르파치오가 라파엘보다 더 훌륭한 예술가라고 생각토록 하려는 의도 또한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내가 단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일 모든 예술이 궁극적으로 편파적이고 스타일 자체가 바로 편파성이라고 할지라도, 이 편파성이란, 묘사된 형상의 다양한 깊이 속에 휩쓸려 파묻히든가 아니면 라파엘의 <시스틴의 마돈나>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내기 하기 위하여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 조차도 소파에서 비어져 나온 스프링 용수철처럼 되지 않도록 예술은 그 경향성을 반드시 숨겨야만 한다고 말했다.
창조적 행위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밝히기 위하여 이제 나하고 특히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영화 예술가인 루이 브뉘엘의 작품 세계로 눈을 돌려 보도록 하자. 그의 영화에서 우리들은 항상 비타협주의라는 열정과 대면하게 된다. 브뉘엘의 정열적이고 결코 화해하지 않으며 가차없는 저항은 무엇보다도 바로 관객들을 감정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드는 그의 작품의 감정적인 구조 속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저항은 머리를 짜내어 생각해 내고 지성적으로 만들어 낸 계산된 저항이 아니다. 브뉘엘은 오로지 정치적이기만 한 격정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예술가적 감각을 충분하게 소유하고 있다. 나의 견해로는, 정치적 격정이 한 예술 작품에 직접적으로 표현되면 그것은 항상 진실된 격정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브뉘엘의 영화 속에 담겨 있는 정치적 사회적 저항은 단연코 수많은 배우는 과정 속의 감독들에게 영향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브뉘엘은 무엇보다도 시인적 의식에 투철한 감독이다. 그는 영화의 미학적 구조가 어떠한 선언문적 성격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예술의 강점은 보다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 즉 감정적인 설득력, 위에서 인용한 편지 속에서 고골이 말하고 있는 예의 일회적인 생생함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브뉘엘의 창작은 고전적인 스페인 문화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세르반테스와 엘 그레꼬, 고야, 로르카, 피카소 그리고 살바도르 달리와 아라발의 강력한 영향력이 없었더라면 브뉘엘의 작품은 탄생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분노에 가득 찼으면서도 부드럽고, 팽팽한 긴장감과 저항에 가득 찬 이들의 예술 세계는 조국 스페인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생기 발랄함이 없이 천편일률적인 틀에 대한 미움, 감정 없이 차갑기만 한 이성의 논리에 대한 철저한 미움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철저한 미움으로 인하여, 이들은 인간들과 절실한 연관을 갖지 않는 모든 것, 신적인 섬광도 없고, 돌투성이의 화로같이 뜨거운 스페인의 땅 속에 수백년간 배인 예의 익숙한 고통이 담겨 있지 않은 모든 것들을, 그들의 시야에서 추방해 버렸다.
이들은 모두 예언자적 자세를 성실하게 고수함으로써 위대한 인물들이 되었다. 엘 그레꼬의 풍경화가 풍기는 긴장감 있고 선동적인 격정은 바로 다름아닌 이 화가의 위와 같은 자세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 그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폭발적인 동작성, 과장된 배분의 역동성, 차가운 색채감, 그의 그림의 이러한 측면들은 화가의 동시대인들에게는 낯설게 받아들여졌지만 현대 미술의 애호가들에게는 훨씬 친숙하게 느껴진다. 이 화가의 표현 대상과 공간을 기형적으로 배분하는 현상은, 심지어 이 화가의 눈이 난시라는 전설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자. 그러나 이같은 설명은 몹시 진부한 설명이라고 여겨진다.
고야는 끔찍한 왕정의 폭압에 대항하여 외로운 투쟁을 벌인 사람이었으며, 종교 재판에 대항하는 폭동을 시도한 사람이었다. 그의 무시무시한 작품 Caprichos는 그 자신을, 분기탱천하는 저주와 삶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무지와 사악한 자들에 대한 돈키호테 식의 승강이와 독기어린 분노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드는 예의 어두운 기(氣)들을 형상화했다.
인간적인 인식의 체계를 위해서는 천재의 운명은 주목할 만하며, 또한 교훈적이다. 끝없는 전진과 개혁을 위해서 파멸의 길을 걷는 이들, 신에게 선택된 순교자들은 행복을 향한 노력과, 이 행복이 하나의 구체화시킬 수 있는 현실로서 그리고 하나의 실현 가능한 상태로서 존재할 수 없다라고 하는 확신 사이에서의 동요라는 모순적 상황 속에 빠져 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행복, “행복스러운” 행복이란 아시다시피 이 행복을 향한 노력 속에 있는 것이며, 절대적 가치로서의 행복을 인간은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완전한 인간적 의지의 자유라는 현상으로서의 행복, 이런 행복이 인간에게 성취되어질 수 있다고 한 번 가정하여 보자. 이 행복이 성취되는 순간에 인간의 개성은 없어지고 말게 될 것이다. 인간은 마왕처럼 외로워지게 될 것이다. 인간 사회와의 연결은 마치 신생아의 탯줄처럼 끊어질 것이며 따라서 그 결과로 이 사회 또한 파괴되고 말 것이다.
행복이란 것을 우리들은, 주머니 속에 소유하는, 스스로 얻어 낸 이상이라고 부르기는 힘들 것이다. 시인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 세상에 행복이란 없다. 다만 평화와 자유가 있을 뿐이다!” 단지 단 한 번만 훌륭한 예술 작품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 작품의 강렬하고 비밀에 가득 찬 힘에 젖어보는 것이면 족하다. 그렇게 되면 그 작품의 기묘하고도 동시에 성스러운 의미가 떠오를 것이다. 마치 끔찍스런 위험의 표지판처럼 이들 걸작품들은 인간들의 길 위에서 포고하고 있다: “조심! 접근하지 마시오!”
예술가들은 이같은 위험 표지물을 대부분의 동시대인들보다 먼저 설치한다. 예술가의 천재적 능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위험 표지물의 설치는 빨라지게 된다. 이 때문에 이 천재적 예술가들은 헤겔이 말한 갈등의 역사라는 허깨비로부터 빠져 나오게 될 때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드디어 이 갈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충격과 감동을 받은 동시대인들은 힘과 희망에 가득 찬 이 새로운 작품 경향을 이미 오래 전에 오해의 여지없이 확실하게 작품 속에 상징적으로 표현한 선구적 예술인에게 기념비를 세워주는 법석을 떠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 예술가들은 이데올로기의 대변자, 현대적 예술가로 추대되며, 이들에 의해 예고된 변혁의 촉매자 대접을 받게 된다. 예술의 위대함과 애매모호함은 예술이 “경고, 방사능 위험, 생명의 위험” 등과 같은 경고문을 세우면서 이에 관한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설명도 하지 않으며 아무런 해답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술의 성과는 도덕적, 윤리적 충격과 연관된다. 이들의 감정적인 논거에 대해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거나 이들의 주장을 밎지 않는 자들은 방사능 오염에 의한 원자병의 감염을 무릎쓰는 셈이다- 무의식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구는 평평하고 세 마리의 고래가 떠받치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평화스러운 얼굴 모습에 어리석은 웃음을 띠고 있는 자들이다.
브뉘엘이 그의 작품 <안달루씨아의 개>를 상영한 후 성난 시민들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뒷주머니에 권총 한 자루만 찔러 넣고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상기해 보라!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곧바로 이 모든 것에 역류하는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던 것이다. 영화라는 것을 자신들의 오락을 위한 문명의 선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소시민들은 흥분하였으며 사실상 받아들이기 힘든 이 영화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는 충격적인 영상과 상징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조차도 브뉘엘은 예술가의 자질을 결코 잃지 않고 관객들과 직선적인 언어가 아닌, 감정을 파고드는 언어로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1885년 3월 21일의 일기장에 레오 톨스토이는 놀라우리만치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정치적인 것은 예술적인 것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루어낼 수 있기 위하여 일방적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틀림없는 지적이다. 예술적 형상은 그러나 일방적일 수 없다: 스스로 진실하기 위하여 예술은 현상들의 변증법적 모순성을 작품 속에서 통합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예술 평론가들 조차도 한 작품의 이념 분석에 있어서 그 작가의 시적 형상력을 적절하고 빈틈없이 분석해낼 수 없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 작가의 사고라는 것은 작품의 형상적 표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형상이라는 것도 또한 작가가 현실을 고의적 의식적으로 소화해 낸 것이며, 작가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고유한 경향과 자신의 독특한 세계관에 맞추어 작업하게 된다.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를 나의 어머님은 내가 어렸을 적에 내게 읽어 주셨다. 내가 좀더 나이가 든 후에도 어머님은 톨스토이 산문의 특정한 진수와 세부적인 훌륭함에 대한 나의 주의를 환기시킬 목적으로 자주 이 소설의 긴 대목들을 인용하시곤 했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전쟁과 평화>는 내게 일종의 예술 학교 구실을 한 셈이며, 예술적 감각과 예술적 깊이를 가늠하는 판단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구토감을 일으키는 시원찮은 작품들은 도대체 읽을 수가 없었다.
메레쉬코프스키. Dmitrij Mereshkowskij(1866-1941): 러시아의 평론가, 수필가, 소설가, 시인, 러시아 신낭만주의 대표작가, 종교적 철학적 그룹의 조직가. 1920년 파리로 이민.
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에프스키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톨스토이의 작품 중, 주인공이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철학적 사색을 하는 대목과 주인공이 삶에 대한 설교를 말로만 하고 있는 대목은 실패작이라고 평가했다. 서정적인 작품 속에 담겨 있는 작가의 이념은 오로지 이성에 입각하여 사변적으로만 나타나서는 안된다는 이 입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메레쉬코프스키의 비판은 전적으로 옳다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판으로 인하여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나의 사랑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바로 문제점으로 지적된 대목들도 나의 눈에는 거슬리지 않는다. 천재란 결국 자기 자신을 한 작품의 절대적 완벽성 속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적 성실성과 자신의 정열에 대해 시종일관 책임있게 대하는 자세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진실과 세계 인식 그리고 자기 인식을 향한 정열적인 노력이, 한 작품의 그다지 강렬하지 못한 대목, 아니 심지어 소위 “실패한” 대목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약점이 전혀 없고 부족한 구석이 전혀 없는 걸작품이란 없다. 천재들이 작품 속에 표현하는 매우 사사로운 정열 그리고 개인적인 작품 구상에 신들린 사람처럼 빠져드는 일, 이런 것들은 그들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또한 이들을 기대에 어긋나는 실패자로 만들기도 한다. 다만 문제는 전체적인 세계관 속에 유기적으로 용해되어 있지 못한 것들을, 우리들은 과연 “실패”라고 불러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천재란 자유롭지 못하다.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은 언젠가 다음과 같은 의미의 글을 쓴 적이 있다: 무관심한 것만이 자유롭다. 성격을 가진 것은 자유롭지 못하고, 자신의 성격에 사로잡히고, 성격에 좌우되며, 성격을 좇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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