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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맛있는 시

by Casey,Riley 2020.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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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방송 원고를 쓰기 위해 매일 청취자에게 들려줄 좋은 시를 찾는 과정에서 유독 음식에 관한 시에 인생의 의미가 깊게 배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백석의 [선우사]부터 한강의 [어느 늦은 저녁 나는]까지, 이 책에 차려진 67편의 시들은 다양한 맛으로, 온도로, 촉감으로 다가온다. 때로는 지나간 어떤 순간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깊고 심오한 성찰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엄마처럼 따뜻하게 마음을 안아주기도 한다. 
 
맛있는 시 
 
 

▣ Short Summary 
 
생굴을 넣어 미역국을 끓이고 조기가 구워지는 동안 불고기를 볶아 채 썬 대파를 올릴게요. 새로 꺼낸 배추김치를 먹기 좋게 썰고 달달 볶은 묵은지에 데친 두부 몇 조각도 곁들이겠습니다. 자, 고슬고슬갓 지은 밥 한 그릇 내어놓습니다. 당신을 위한 ‘시 밥상’이에요. 맛있게 드세요. 마음대로 아무 때나 꺼내 읽으면 됩니다.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울 때, 사랑 때문에 아플 때, 이유 없이 쓸쓸하고 공허할때, 울고 싶을 때, 힘들어 지쳤을 때 책을 펼쳐 서랍 속에 넣어둔 초콜릿 꺼내 먹듯 드세요. 여러 편을한 번에 읽어도 배탈이 나지 않아요. 통째로 다 먹어도 안전합니다. 
 
음식은 마음의 상태를 보여줄 때가 많습니다. 할 일이 태산이라 정신없이 바쁜데 밀가루 반죽을 숙성 시켜서 한 장 두 장 얄따랗게 떠 넣으며 끓이는 수제비를 먹을 수는 없으니까요. 급할 때는 후딱 끓여낸 라면이 최고죠. 지쳐서 쓰러질 것 같을 때는 달콤쌉싸래한 초콜릿이 진리입니다. 속이 상할 때는 눈물 나게 매운 떡볶이를 찾게 되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 햄버거를 우물거리는 날도 있습니 다. 
 
2012년부터 EBS FM <시(詩) 콘서트> 방송 원고를 쓰면서 매일 시집을 읽으며 청취자에게 낭독해줄 좋은 시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음식에 관한 시가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런 말, 하잖아요.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밥 먹고 합시다.’ 시인들도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쓰는 건지, 음식에 관한 시에는 걸쭉하고 진한 농도로 인생이 녹아 있습니다. ‘시’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음식을 새롭게 만나고, 인생의 맛까지 느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맛있는 시>, <시가 놓인 식탁>, <화요詩식회> 등 음식과 관련된 시를 소개하는 코너를 꾸려왔어요. 그러다가 쌓여가는 이야기들을 책으로 묶고 싶어졌고 결실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방송에서 소개된 시도 있고 그렇지 않은 시도 있습니다. 간장, 된장, 고추장, 소금, 설탕 등음식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식재료들에 관한 시도 들어 있어요. 이 시편들이 추가되면서 맛의 기본이 갖춰지듯 책의 내실도 단단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필을 시작하던 무렵, 몹시 힘든 시간을 보내 
 
- 2 - 맛있는 시 
 
고 있었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엄마 손을 놓친 꼬마처럼 큰 상실감에 빠져서 뭘 어떡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어요. 숨쉬기도 힘든 시간이었지만 시를 읽고 글을 쓰면서 폭염을 이기듯 슬픔을 견뎠습니다.
그러는 사이, 마음 한구석부터 조금씩 따뜻해졌고 마무리를 하고 난 지금은 많이 편안해졌습니다. 이책에 실린 시와 글들로 외롭고 배고픈 당신을 위해 식탁을 차렸습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세 요. 
 
“당신을 위한 ‘시 밥상’이에요. 맛있게 드세요.” 
 
▣ 차례 
 
작가의 말 
 
1장 위로맛 詩 - 토닥토닥, 너만 그런 거 아니야 허락된 과식_ 나희덕 / 저녁 스며드네_ 허수경 / 만찬晩餐_ 함민복 / 비빔밥, 이 맛_ 권영상 / 통영의 봄은 맛있다_ 배한봉 / 진미 생태찌개_ 고두현 / 국수가 먹고 싶다_ 이상국 / 혼자 먹는 밥_ 임영조 / 풋앵두_ 정진아 / 삼학년_ 박성우 / 한 잔의 커피를 마실 때마다_ 용혜원 / 선우사膳友辭 - 함주시초 咸州詩抄 4_ 백석 / 그래서_ 김소연 / 숟가락은 숟가락이지_ 박혜선 / 꽃밥_ 엄재국 / 라면의 힘_ 정진아 / 짜장면을 먹으며_ 정호승 
 
2장 사랑맛 詩 - 사랑한다, 사랑한다, 나 너를 콩밥 먹다가 ―딸아이에게_ 정다혜 /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_ 다니카와 순타로 / 복숭아_ 강기원 / 적막한 식욕_ 박목월 / 비에 정드는 시간_ 신현림 / 비굴 레시피_ 안현미 / 고백을 하고 만다린 주스_ 이제니 / 평상이 있는 국숫집_ 문태준 / 설렁탕과 로맨스_ 정끝별 / 봄비_ 박형준 / 포도밭으로 오는 저녁_ 김선우 / 평양냉면_ 신동호 / 밀가루 반죽_ 한미영 / 물맛_ 장석남 / 한솥밥_ 문성해 /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_ 김종삼 
 
3장 인생맛 詩 - 간장, 소금, 설탕, 된장, 고추장, 인생의 기본 맛어떤 항아리_ 나희덕 / 눈물은 왜 짠가_ 함민복 /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_ 최치언 / 항아리속 된장처럼_ 이재무 / 가을 햇볕_ 안도현 / 된장찌개_ 이재무 / 순대국밥집_ 나태주 / 두부_ 서윤규 / 식탁_ 이성복 / 어느 늦은 저녁 나는_ 한강 / 잡초비빔밥_ 고진하 / 호박죽_ 이창수 / 밥 한 그릇 - 항암치료_ 조향미 / 멍게 또는 우렁쉥이_ 정두리 / 김밥 싸야지요_ 박노해 / 감자의 맛_ 이해인 / 칼로 사과를 먹다_ 황인숙 / 김밥 한줄 들고 월드컵공원 가는 일_ 손택수 / 밥_ 천양희 
 
4장 엄마의 맛 詩 - 그리움이 피어오르는 시간 흰죽_ 고영민 / 굴전_ 한복선 / 함박눈_ 이정하 / 고향집 먼 마을엔 싸락눈이 내리고_ 우미자 / 적경寂 境_ 백석 / 미역_ 신혜정 / 잔치국수 한 그릇은_ 김종해 / 엄마의 김치가 오래도 썼다_ 성미정 / 엉뚱한 생일 선물_ 강인석 / 그게 비빔밥이라고 본다_ 윤성학 / 김치찌개_ 한순 / 연금술_ 이문재 / 팥칼국 수를 먹으며_ 이준관 / 보리밥_ 조재도 / 어느 저녁 때_ 황규관 
 
- 3 - 맛있는 시 
 
맛있는 시 
 
 
1장 위로맛 詩 - 토닥토닥, 너만 그런 거 아니야 
 
꽃밥_ 엄재국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마른 나무에 목단, 작약이 핍니다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정비공장 장미꽃』, 애지 
 
담양에서 태어났지만 갓난아이 때 이사 온 후 쭉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궁이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밥을 짓는 풍경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본 게 전부. 당연히 가마솥 밥을 먹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이 시의 매력에 빠져든 것 같습니다.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아궁이에 마른 장작을 밀어 넣어봅니다. 불이 붙은 나무에서 함빡함빡 목단, 작약이 피어납니다. 나무는 활활활 꽃을 피워 내며 한 생을 다합니다. 그 뜨거운 생을 받아든 가마솥이 밥을 끓입니다.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겠지요. 씨앗처럼 작은 생명으로 세상에 와서는 한 시절 줄기를 뻗고 잎을 틔우고 활짝 꽃을 피웁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마른 장작처럼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기도 하겠지요. 
 
삶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의 생명을 이어주는 꽃밥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곁에 있는 사람에게 실망해서 마음에 시린 바람이 불고 있다면 꽃불로 끓여낸 가마솥 꽃밥을 먹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밥알 하나하나에 고인 뜨거움이 마음에 부는 시린 바람을 다사로운 훈풍으로 바꿔줄 거예요. 
 
- 4 - 맛있는 시 
 
짜장면을 먹으며_ 정호승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짜장면보다 더 검은 밤이 올지라도 짜장면을 배달하고 가버린 소년처럼 밤비 오는 골목길을 돌아서 가야겠다 짜장면을 먹으며 나누어 갖던 우리들의 사랑은 밤비에 젖고 젖은 담벼락에 바람처럼 기대어 사람들의 빈 가슴도 밤비에 젖는다내 한 개 소독저로 부러질지라도비 젖어 꺼진 등불 흔들리는 이 세상 슬픔을 섞어서 침묵보다 맛있는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열림원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대표작 [해변의 묘지] 한 구절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읽고 매료되었던 구절이기도 합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했을 때, 사랑이 끝났을 때, 입사 시험에 떨어졌을 때…… 절망의 고비에서 이 구절을 읽으며 힘을 냈습니다. 
 
주저앉고 싶을 때, 살아볼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음식 하면 짜장면을 빼놓을 수 없지요. 검고 빛나는 소스에서 풍겨 나오는 향은 식욕을 자극하고 삶의 의욕까지도 끌어냅니다. 
 
짜장면, 참 많이도 먹었습니다. 생애 첫 외식 날, 입학식과 졸업식, 새 집으로 이사하던 날, 김장을 하느라 바쁠 때도 짜장면을 시켜 먹곤 했습니다. 야근을 할 때도 간단하지만 든든하게 속을 채워주는 짜장면을 배달시켜서 먹었어요. 입맛이 없을 때도 주머니가 가벼울 때도 짜장면 한 그릇이면 모든 게 해결됐습니다. 짜장면 하나면 충분히 행복했던 어린 날처럼 삶의 무게 때문에 힘겨울 때 짜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습니다. 행복하게 잘 살아갈 마음을 품어야겠습니다. 
 
2장 사랑맛 詩 - 사랑한다, 사랑한다, 나 너를 
 
설렁탕과 로맨스_ 정끝별 
 
처음 본 남자는 창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씨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씨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앉아 한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앉아 한번 더 마주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 5 - 맛있는 시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번도 안보고 그렇게 한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평생과단 한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평생이 추적추적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내와 설렁탕집에 
 
『와락』, 창비 
 
누구나 로맨스를 꿈꾸지만 현실에서의 로맨스는 드라마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입니다. 낯선 여자가 낯선 남자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합석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이 밥을 먹었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헤어집니다. 
 
다음 날 두 사람이 또 우연히 만납니다. 남자는 여자의 밥값을 계산해주고 사라집니다. 그다음 날 두사람은 또다시 만나고, 이것은 필연이라며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사랑은 다릅니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다시 만날 확률부터 희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여자와 남자도 만나고 사랑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연인에게는 서로 다른 사랑의 방식이 있습니다. 설렁탕처럼 오랜 시간 우려낸 사랑, 아이 스크림처럼 달콤하지만 금방 녹아버리는 사랑, 잘 구워낸 쿠키처럼 고소하지만 좀 딱딱한 사랑, 솜사 탕처럼 허망한 사랑, 전복죽처럼 속 편한 사랑도 있습니다. 
 
사랑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분홍물이 듭니다. 이렇게 좋은데 왜 사랑하지 않는 걸까요? 부디 사랑하세요.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가슴에서 출렁이는 사랑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서 자주자주 들려 주세요.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고 마음에만 담아둔 사랑은 사랑을 깨뜨리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평양냉면_ 신동호 
 
열두 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요선동 평양냉면을 첨 먹어봤다. 친구가 없던 아버지는 복더위에 삼계탕이나 개고기를 드실 때 꼭 날 데려갔다. 냉면 맛은 참 밍밍했다. 아버지 인생이 그랬다. 전쟁 통에 청각이 포격 소리와 함께 진흙탕에 묻혔다. 낚시찌처럼 강물 위에서 말없이 흔들리는 게 인생이었다.
사랑이랍시고 절망에 몸부림치거나 시대에 모든 걸 바친다고 유치장과 감옥을 들락거렸으니 , 꽤나 드라마틱한 삶 같지만 결국은 고만고만한 게 인생이다. 분노도 삭고 열등감 따위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았을 때 냉면집 문턱이 닳도록 다니게 되었다. 양념 하나 없는 투명한 육수가 오래된 친구들 같아서 낮술에 자주 쓰러지던 시절, 전투력 없이도 툭툭 끊어지는 면발 앞에서 자주 무너지던 나이였다. 참으로 밍밍한 게, 뭐가 잘난지도 모르게 된 내 맘 같았다. 
 
- 6 - 맛있는 시 
 
서른일곱 살 때, 첨 대동강변에서 평양냉면을 먹어봤다. 유산 한 푼 없이 낚싯대 몇 개 남기고 간 아버 지의 인생, 가끔이었지만 그 원망스러운 날들이 밍밍하게 희석되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인생과 인생이 만나서 얼마나 더 질기게 한을 남겨놓겠는가. 고명들처럼 소박하게 어울리는 게 인생이다. 우리만한 마음이 수두룩한 평양이었다.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실천문학사 
 
평양냉면, 좋아하세요? 슴슴하고 밍밍한 맛의 평양냉면은 극명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 중 하나예요.
기대했던 것만큼 실망의 쓰나미가 몰려들기도 하죠. 그런데 이게 한번 맛을 들이면 자꾸만 생각나는 별난 음식입니다. 
 
한국전쟁 후 고향을 떠나온 평안도 사람들에게 평양냉면은 고향의 맛이면서 어머니 그 자체였을 겁니다. 하지만 어린 소년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맛이었겠지요. 전쟁 통에 청각을 잃어버린 아버지, 강물 위에서 말없이 흔들리는 낚시찌처럼 고요하게 생을 이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소년은 다른 삶을 꿈꿉니다.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선택했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사랑 때문에 몸부림치고 시대를 위해 많은 걸 바친 후 고만고만한 게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어,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아버지의 땅에서 고향을 맛봅니다. 후루룩- 냉면을 삼키며, 아버지가 애틋하게 그리워져 가슴이 저몄을 겁니다. 그러면서 아들을 떠올렸을 겁니다. 이제 아버지와 같이 먹던 평양냉면을 아들과 먹겠지요. 
 
밀가루 반죽_ 한미영 
 
냉장실 귀퉁이 밀가루 반죽 한 덩이 저놈처럼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동그란 스텐그릇에 밀가루와 초면(初面)의 물을 섞고 내외하듯 등 돌린 두 놈의 살을 오래도록 부비고 주무른다 우툴두툴하던 사지의 관절들 쫀득쫀득해진다 처음 역하던 생내와 좀체 수그러들지 않던 빳빳한 오기도 하염없는 시간에 팍팍 치대다보면 우리 삶도 나름대로 차질어 가겠지마는 
 
서로 다른 것이 한 그릇 속에서 저처럼 몸 바꾸어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물방울무늬 원피스에 관한 기억』, 문학세계사 
 
- 7 - 맛있는 시 
 
결혼 생활은 한마디로 밀가루 반죽이었습니다. 어쩌자고 시작했을까요? 하얗고 부드럽고 후- 불면 날아가는 고운 밀가루로 살지, 동그란 스텐 그릇에는 왜 뛰어들었을까요? 물이 부어진 후 뒤섞여 하나가 된다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던 거겠지요. 
 
고운 가루가 한 덩이 반죽으로 완성되기까지 울기도 많이 울고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고함을 지르던 날도 셀 수 없습니다. 그 시간들로 팍팍 치대 완성한 말랑말랑한 반죽. 자, 이제 어떡할까요? 국수를 삶을까요? 빵을 구울까요? 
 
3장 인생맛 詩 - 간장, 소금, 설탕, 된장, 고추장, 인생의 기본 맛 
 
식탁_ 이성복 
 
아이들이 한바탕 먹고 떠난 식탁 위에는 찢긴 햄버거 봉지와 우그러진 콜라 패트병과입 닦고 던져놓은 종이 냅킨들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를 모르고 가까이 혹은 조금 멀리 있다 
 
아이들아, 별자리 성성하고 꿈자리 숭숭한 이 세상에서 우리도 그렇게 있다 하지만 우리를 받아들인 세상에서 언젠가 소리 없이 치워질 줄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사 
 
직업을 물어서 ‘방송 작가’라고 대답하면 상대방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입니다. 화려하고 멋진 직업이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밝고 강렬한 조명들이 찬란하게 켜진 무대가 있고 신기할 정도로 예쁜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점, 또 마이크와 카메라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멋진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것같습니다. 
 
하지만 실제 현장은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방송이 끝나서 카메라와 조명이 꺼지고 나면 나무판에 불과한 세트가 원래 모습을 드러냅니다. 화려한 조명 뒤의 그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어서 마음이 울적해지는 날도 있습니다. 
 
음식으로 가득했던 식탁 위도 마찬가지겠지요. 따뜻하고 정겨운 자리였지만 다 먹고 떠나고 난 후에는 밥찌꺼기와 설거지거리만 남습니다. 누군가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식탁 위를 깨끗하게 치우겠죠.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지금은 한창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있지만 언젠가 소리 없이 치워질 거라고요. 그래요. 살다 보면 별자리 성성하고 꿈자리 뒤숭숭한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옵니다.
그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길이에요. 다만, 그날이 나를 찾아오는 날, 조금이라도 덜 후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8 - 맛있는 시 
 
밥_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서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진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작가정신 
 
루쉰의 소설 [아큐정전]의 주인공 아큐는 동네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툭하면 매를 맞곤 합니다.
이렇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아큐는 ‘정신적 승리법’이라는 이론에 자신을 적용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든 사람을 다 이겼다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루쉰은 아큐의 태도를 통해 중국 사회를 비판하고자이 작품을 썼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아큐의 ‘정신적 승리법’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특히 마음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정신적 승리법’으로 내가 나를 어루만져주고 격려합니다. 
 
코코 샤넬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용감한 행동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큰 소리로.” 맞습니다. 조금은 부끄럽고 쑥스럽더라도 내가 나를 헐뜯고 끌어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가끔은 용감하게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서 나를 두둔해주세요.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 삼키면서 정면 돌파하는 것! 이게 방법일 때도 있습니다. 다른 생각 말고 온전히 나를 위한 선택을 하세요. 인생의 모든 순간에 나는 나 자신을 먼저 챙겨야 합니다. 그 누구도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4장 엄마의 맛 詩 - 그리움이 피어오르는 시간 
 
흰죽_ 고영민 
 
무엇을 먹는다는 것이 감격스러울 때는 비싼 정찬을 먹을 때가 아니라 그냥 흰죽 한 그릇을 먹을 때말갛게 밥물이 퍼진, 간장 한 종지를 곁들여 내온 흰죽 한 그릇 
 
늙은 어머니가 흰쌀을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물을 부어 끓이는 가스레인지 앞에 오래 서서 조금씩 조금씩 물을 부어 저어주고 다시 끓어오르면 물을 부어주는, 좀 더 퍼지게 할까 쌀알이 투명해졌으니 이제 그만 불을 끌까 오직 그런 생각만 하면서 죽만 내려다보며 
 
- 9 - 맛있는 시 
 
죽만 생각하며 끓인 
 
호로록, 숟가락 끝으로 간장을 떠 죽 위에 쓰윽, 그림을 그리며 먹는 
 
『사슴공원에서』, 창비 
 
가끔, 쓸쓸할 때 꺼내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입니다. 밋밋하고 소박한 흰죽은 오래 아팠다가 막기운을 차리는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음식입니다. 아픈 딸을 위해 또는 아들을 염려하며 늙은 어머니가 오래오래, 세상의 좋은 기운을 죄다 끌어모아서 끓인 것 같은 맑은 시를 읽으니, 마음 한 켠에 수액 처럼 눈물이 차오릅니다. 아, 우리는 여직 사랑받고 있구나……. 잊었던 그 사랑을 느끼며 다시 살아갈 힘을 냅니다. 헛헛하고 외로울 때마다 꺼내 드세요. 위로와 사랑의 흰죽. 
 
연금술_ 이문재 
 
배추는 굵은 소금으로 숨을 죽인다.
미나리는 뜨거운 국물에 데치고 이월 냉이는 잘 씻어 고추장에 무친다.
기장멸치는 달달 볶고 도토리묵은 푹 쑤고 갈빗살은 살짝 구워내고 아가미 젓갈은 굴속에서 곰삭힌다.
세발낙지는 한손으로 주욱 훑고 
 
안치고, 뜸들이고, 묵히고, 한소끔 끓이고 익히고, 삶고, 찌고, 지지고, 다듬고, 다지고, 버무리고 비비고, 푹 고고, 빻고, 찧고, 잘게 찢고 썰고, 까고, 갈고, 짜고, 까불고, 우려내고, 덖고 빚고, 졸이고, 튀기고, 뜨고, 뽑고, 어르고 담그고, 묻고, 말리고, 쟁여놓고, 응달에 널고 얼렸다 녹이고 녹였다가 얼리고 
 
쑥 뽑아든 무는 무청부터 날로 베어먹고 그물에 걸려 올라온 꽃게는 반을 뚝 갈라 날로 후루룩 알이 잔뜩 밴 도루묵찌개는 큰 알부터 골라먹고 
 
이른봄 두릅은 아침이슬이 마르기 전에 따되 겨우내 굶주린 짐승들 먹을 것은 남기고 바닷바람 쐬고 자란 어린 쑥은 어머니께 드리고 청국장 잘 뜨는 아랫목에 누워 화엄경 읊조리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 10 - 맛있는 시 
 
음식을 차려내는 엄마는 한마디로 연금술사입니다. 부엌에서 치러지는 엄마의 연금술로 우리들은 자라고 살찌고 마음까지 풍요로웠습니다. 
 
아주 오래전 어느 날 새벽, 정겨운 도마 소리와 맛있는 음식 냄새에 눈을 떴습니다. 엄마였습니다. 거기 엄마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바깥일을 하느라 늘 새벽부터 바쁜 엄마였는데, 그날은 무슨 일인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언 마음까지 녹일 듯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엄마라는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나는 엄마 같은 엄마가 될수 있을까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다지 좋은 엄마는 아니지만, 잘못했을 때는 빨리 사과하는 엄마이고 싶네요. 그럼 이쯤에서 “미안해, 아들.” 
 
 
- 11 - 맛있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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