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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바다로 떠난 허수아비

by Casey,Riley 2020.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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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허수아비의 유머 넘치는 생각과 질문들 그리고 남자의 애틋한 이야기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들에게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이 누구를 위한 삶인지, 우리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되돌아보게 한다. 잠깐 동안의 외유를 마치고 다시 바다로 떠나는 허수아비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치유의 시간을,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이 책은 가장 진부하지만 가장 중요한 주제인 인간의 삶과 자아의 의미를 인간이 아닌 허수아비의 눈을 통해 신선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바다로 떠난 허수아비 
 
 

 
▣ Short Summary 
 
『바다로 떠난 허수아비』에서 허수아비가 던지는 질문과 생각들은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흔히 품어 왔던 삶과 존재의 의미를 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마치 우리가 어른이 되는 사고의 여정을 보여주는 것만 같고, 그래서 다시 한 번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 책은 우리의 인지와 감성의 보편적인 틀 안에서 그리고 유머와 공감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우리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부조리에 대해 묻고 대답하려 한다. 
 
저자는 “현대철학은 인간 실존의 소중함에 대한 강조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철학은 삶과 존재의 이유를 밝히는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인간의 부조리는 피상적으로는 개인과 사회의 부조리라 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의미 없는 세계에서 의미 있는 것을 건져내려는 부조리, 즉 실존적 부조리가 참다운 부조리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존재의 소중함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책의 중반 ‘댓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다’의 장에서, 우리들이 추구하는 순수와 영원성의 의미가 사실은 댓잎 하나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아프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감들이 우리 사회를 만들고 우리 자신을 만든다. 그 점에서 주인공이 “우습게도 우리에게는두 갈래 길밖에 없다. 우리는 남을 따라 남과 함께 사는가, 아니면 남과 달리 남과 함께 사는가의 기로에 서 있을 뿐이다.”라고 독백하는 부분은 우리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때로는 슬픈 얘기들이 마음을 잔잔히 적시고 때로는 유머 있는 질투심이 우리를 미소 짓게 하면서도, ‘허수아비’는 서서히 인간의 본질적인 면을 탐색해 나가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터널 끝 희망과 힐링의 빛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공감의 끄덕임은 각자의 감수성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 책은 대화의 기회를 제공할 뿐 어느 것도 강요하려는 책이 아니다. 열려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본질이다. 
 
▣ 차례 
 
가을 하늘 
 
- 2 - 바다로 떠난 허수아비 
 
으스대는 CCTV를 만나다 애완견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다 늙은 라일락나무 댓잎 떨어지는 소리를 듣다 보석 같은 사랑 초대장을 쓰다 보름달 바다를 향해 작가의 말 
 
- 3 - 바다로 떠난 허수아비 
 
바다로 떠난 허수아비 
 
 
가을 하늘 
 
밤사이 내린 빗물이 잇달아 강으로 모여들자 물살은 더욱 급해져 나는 강 아래쪽으로 빠르게 떠내려 갔다. 내 몸은 강 여기저기에서 바위들에 부딪히기도 했고, 바위가 없는 곳에서는 강둑을 스쳐 지나 가기도 했다. 수면 아래에서는 물고기들이 물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넉넉해진 수량을 즐기는지 물고기들은 이리저리 재빠르게 헤엄치면서 바위들에 부서진 거친 물결들과 함께 내 몸을 간질였다. 
 
떠내려가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전부였다. 물결에 흔들리는 내시선을 따라 가을 하늘은 그네를 타듯이 흔들렸다. 가을 하늘, 나는 가을에 태어났다. 엄밀히 말해서 나는 가을에 태어난 게 아니라 가을을 위해서 태어났지만, 어쨌든 가을은 내가 가장 아끼는 계절이었 다. 물결 따라 그렇게 춤추는 가을 하늘에, 구름들은 수를 놓고 참새들은 떼를 지어 구름을 훼방 놓고 있었다. 
 
하늘은 내게, 사람들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때로는 사랑하는 연인이었고 때로는 자랑스러운 친구 였다. 물론 하늘 전체가 내 것은 아니었다. 사실 하늘은 내게는 언제나 밀짚모자 아래에서만 존재했 다. 눈을 치켜떠도 밀짚모자 위의 높고 청명한 하늘은 볼 수 없었다. 그것은 액자 바깥의 그림처럼 마음속에서 상상으로만 그려졌다. 그런데 오늘은 가을 하늘이 통째로 내 눈앞에 무한히 펼쳐졌다. 
 
가을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오자 나는 내 처지도 잊은 채 물 아래서 마음껏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가소롭게만 느껴졌다. 우쭐해진 나는 거친 물결에 떠내려가면서도 두려움 없이 느긋하게 하늘을 감상했 다. 물살은 더욱 거세졌다. 가을을 떠나보내는 비가 여러 시간 내린 까닭이었다. 수많은 작은 개울들 에서 흘러온 황토물이 연달아 강에 합류했고, 그 덕에 내 몸은 점점 더 높이 떠올랐다. 참새나 매가 기류를 타고 하늘을 날듯이 나는 물결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나를 물속에 던져버린 그 아이가 미웠다. 그 아이는 나를 기둥으로 떼어내 괴롭히다가 갑자기 물속에 던져버렸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재미삼아 그랬다. 하지만 가을 하늘이 다 열리고 내가 자유로워졌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 아이가 고마워졌다. 강둑 위에 올라선 키가 큰 나무들과 창공에서 군무를 추는 새떼들이 내 눈앞의 액자에 드나드는 것을 보면서, 나는 혼잣말로 그 아이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앞으로 어디에 도달할지, 어느 들판에 세워져 낱알을 지켜야 할지,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하늘은 아름답고 물살은 즐거울 뿐이었다. 
 
가을 하늘 말고도 내 기대를 부풀린 건 바다였다. 벼에 낫질을 하면서 사람들이 바다에 대해 얘기할 때면 궁금증은 절로 자라났다. 여름이 되면 그들은 나는 그대로 내버려둔 채 바다로 떠났었다. 반쪽 밖에 보이지 않는 하늘이라 하더라도 하늘은, 그리고 산과 들은 언제나 내 친구들이었지만, 바다는 아니었다. 눈, 비를 맛볼 수 있고 폭풍과 우박도 익숙했지만, 바다는 내게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다.
아니 본 적이 없으니 상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단지 바다라는 그 이름으로만 존재했다. 
 
- 4 - 바다로 떠난 허수아비 
 
강물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만 해도 나는 사람들처럼 내 뜻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다거나 하는 욕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자기의 인생과 운명을 스스로 결정 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들은, 내게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일종의 교만처럼 보였다. 주어진 삶, 사람들이 세워준 기둥 위에 올라서 들판을 바라보는 삶, 가끔은 참새들에게 인상을 찌푸려 속임수를 쓰는 그정도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니 그때만 해도 나는 진정한 의미의 ‘나’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세상을 바라보며 즐기면 되지, 굳이 나는 이렇고 나는 저렇고 하는 생각조차 할 이유가 없었다. 
 
현기증이 가실 무렵 그 사람이 보였다. 휑한 눈, 그리고 벼의 밑단처럼 뭉텅 잘려나갔다가 다시 자란 수염들이 코 밑과 턱 주위에 거뭇거뭇했다. 며칠이나 씻지 않았을까? 그는 평범했고 초췌했고 불쾌감을 느끼게 할 만큼 지저분했다. 그렇지만 그는 내 눈에 익숙한 농부들과는 달랐다. 특히 눈길을 끈건 그의 공허한 눈빛이었다. 그는 허수아비인 나보다도 더 텅 빈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허, 너도 버려진 놈이구나.” 그가 툭 내뱉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나를 들고 몇 번이고 그의 다른 손바 닥에 두들겼다. 물방울들은 내 몸 여기저기에서 허공 여기저기로 튕겨져 나갔다. 기대감의 상실과 불쾌감과 현기증이 허공 속에서 마구 엉키는 가운데 그의 말 한마디 때문에 여러 가지 의문들이 마음속 에서 생겨났다. 그는 왜 나를 강에서 건져냈을까. 그는 이렇게 물살이 센 위험한 강 주변에서 혼자서뭘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의 눈은 왜 허수아비의 눈빛을 지녔을까. 
 
벼를 수확할 때 내보이는 만족스러운 눈빛이나 오랜 시간 일을 하고 난 뒤의 피곤에 싸인 눈빛, 새떼 들이 나락을 망쳐 놓았을 때 보여주는 분노의 눈빛, 나는 농부들의 그런 눈빛들에 익숙했다. 사람들은 늘 감정에 충실했고 눈빛은 언제나 의미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게 사람과 허수아비의 다른 점이었 다. 그렇기 때문에 얄미운 새떼들도 사람들이 오면 얼른 달아나지만 나 같은 허수아비는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는 그런 허수아비의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에 의해 강물에서 건져졌다는 상황을 파악한 순간 나는 그런 의문과 더불어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한 가지 강렬한 욕망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 내 눈앞에 펼쳐졌던 드높은 가을 하늘을 마음껏 즐기고 싶다는 자유에 대한 소망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내 스스로의 주인이기를 바랐다. 사람들처럼 내 몸의 주인이 되어 마음먹는 대로 원하는 곳에 갈 수 있기를, 그리고 내 시선의 주인이 되어 무엇이든 내 뜻에 따라 볼 수 있기를, 나는 그때처럼 간절히 바란 적이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나를 쥐고 걷기 시작했다. 내가 내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그가 걷기 시작하면서 더욱 커져만 갔다. 그는 내 머리를 땅바닥으로 향하게 한 채 내 다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걸었고, 나는 그의 집에 이르는 내내 위아래가 뒤바뀌어 거꾸로 흔들리는 세상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산자락에 위치한 몇 개의 주택 중 하나로 향했다. 벽돌 담장이 둘러싸고 있는 철제 대문의 이층집이었다. 담장 위에는 여러 개의 고정식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담장 너머로 감나무와 라일락나무, 대나무들이 보였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절망감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정말이지 나는 사람들처럼, 내 자신의 주인이 되어 내 뜻대로 살고 싶어.” 나는 또 한 번 되뇌었다. 세상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듯싶었다.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 행동하며,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 대로 살아가는. 
 
- 5 - 바다로 떠난 허수아비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다 
 
감나무 아주머니가 그렇게 인간의 자아가 질병이라는 어이없고 지루한 얘기를 반복하는 까닭에 나는 잠시 딴 생각을 하고 말았다. 사람이 CCTV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시간이 아니라 의식이 아닐까?
사람이 스스로에게 주체적 존재인 이유는 스스로의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치듯 말했다. “CCTV 아저씨는 의식이 없잖아요? 사람과 같은 존재라면 세상을 느끼는 의식이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때 비로소 나 자신의 주인이 된단 말이죠. 그런데 아저씨는 단지 세상을 바라보는 눈만 가지고 있을 뿐이잖아요? 느끼는 게 아니라 설계된 대로 그저 세상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란 말이에요. 그것만으로는 아저씨가 사람과 같은 존재가될 수 없는 거죠.” 
 
그렇게 말하고 보니 그 말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로봇이 자기 몸의 주인이 아닌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오리 사냥개가 비록 애완견일지라도 로봇과 달리 그 자신의 주인이라 할 수 있다면, 그건 세상을 느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CCTV는 의식이라고 할 만한 걸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CCTV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를 꺼냈다. 
 
“흠, 내게 의식이 없다고? 이봐, 어린 허수아비 친구. 도대체 의식이 뭐라고 생각하지? 의식은 생각 처럼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야. 의식이라는 건 감각기관에서 얻은 감각정보를 처리하는 하나의 시스 템일 뿐이야. 물론 너는 너무 어려서 이렇게 어려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우리 허수아비 친구를 위해 쉬운 얘기를 들려줄 테니 잘 들어봐. 이 얘기를 듣고 사람들의 의식과 우리가 가진 시스템이 얼마나 비슷한지 스스로 판단해 보라구. 그러면 의식이 대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CCTV의 친구는 도시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도심 한복판의 번잡한 사거리 교차로 위에 설치된 방법용 CCTV였다. 그는 초현대적 전자장치인 수백 메가 픽셀의 초고해상도 디지털 카메라를 장착하고 24시간 내내 일대의 거리를 감시했다. 수백 미터 떨어진 사람의 얼굴도 인식해서 분석했는데, 초고속 안면 인식 프로그램은 경찰청의 데이터베이스와 연결되어 있어, 대상자가 지명수배자인지 불분명한 경우에는 연락망을 통해 다른 CCTV와 연동하여 그 사람을 지속적으로 감시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그래봤자 CCTV는 여전히 기계일 뿐이잖아요?”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고 툭 쏘아붙이고 말았다. 몇 번에 걸쳐 내 예상이 빗나가자 나는 점점 성마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흠, 아직도 모르겠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란 게 뭐겠어? 사람들이 가진 의식 대부분은 시각에 기초한 거야. 눈을 통해 보는 사물의 정보가 그의 뇌 속에서 세상을 펼쳐 보이게 하는 거지. 의식한다거나 느낀다는 것, 그게 뭐겠어? 바로 시각기관과 같은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파악한다는 걸 말하는 거야. 눈을 통해 보는 것, 귀를 통해 보는 것, 그게 바로 느끼고 의식하는 작용 이고, 피부를 통해서 촉감이나 온도를 느끼는 것, 이런 것들도 느끼고 의식하는 거야. 다시 말해 의식 한다거나 느낀다는 건 그런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파악한다는 뜻일 뿐이야.”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상식들을 동원해 반격을 시도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만, CCTV는 그저 카메라를 통해 왜곡된 세상을 보는데 불과하잖아요? 사람들이 사람들의 눈을 닮은 구조로 만들었다고 해도, 카메라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사람들이 의도한 대로 밖에 볼 수 없단 말이에요. CCTV는 사람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기계에 불과한 거죠.” 
 
- 6 - 바다로 떠난 허수아비 
 
“흠, 그것 참 어리석은 생각이군. 허수아비 친구, 넌 그러면 사람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어떻게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거지? 눈이라는 시각기관을 통해서 보는데 그 눈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지, 아니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필요한 것만 보여주는지 그걸 어떻게 알지?”
“사람들이야 특별한 목적 없이 세상을 보니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죠. 하지만 CCTV는 사람 들이 계획한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니까. 그 범위 내에서만 보는 거잖아요?” 
 
“흠, 그럴까? 사람들도 어떤 목적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생명의 목적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그목적 범위 내에서만 볼 뿐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지 않겠어. 도대체 있는 그대로라는 게 있다면 말이야. 세상을 본다고 말하는 순간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거지. ‘있는 그대로’와 ‘본다’는 말은 그 자체로 서로 모순이야.” 
 
나는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이 사실은 ‘사람 들이 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보다’는 말과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 그 자체로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니, 나는 이제 정말로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하자면 카메라와 마이크가 장착되고 정보처리 능력까지 갖춘 CCTV는 인간의 의식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그럴듯한 논리에 맞서본 적이 없었다. 그는 표면에 녹이 슬만큼 나이만 든 게 아니라 지나온 세월만큼 유식하고 철학적이었다. 
 
늙은 라일락나무 
 
CCTV의 말대로 사람이 가진 의식이나 CCTV의 의식이나 다를 바가 없다면 의식만이 인간의 조건은 아닐 듯 싶었다. 게다가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할 뿐인 CCTV가 주체적 존재라 한다는 건 수긍할 수 없었다. 기계에 불과한 CCTV보다는 차라리 허수아비인 내가 사람에 더 가까웠다. 나는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되는 데에는 CCTV와 같은 그런 기계적 의식 외에 틀림없이 다른 무엇인가가 더 필요 하다고 생각했다. 
 
병들어 쇠약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느닷없이 내 생각을 가로질렀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지 껍질은 온통 뒤틀려 있고, 두 갈래로 갈라진 큰 줄기 중 하나는 받침목에 간신히 몸을 버티고 서 있는 늙은 라일락나무였다. “에고, 난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그래도 이 몸은 아직까지 꽃을 피우고 싶은 게야. 4월 봄볕이 들면 말이야. 연보랏빛 꽃을 멋지게 피운단 말이지. 그 향기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달구는지 알아? 무식한 영감들은 값싼 향수 냄새를 풍기는 아카시아와 혼동을 하더 라구. 하지만 이 몸은 아카시아와는 달라. 이 몸은 말하자면 귀족 출신이라구.” 
 
라일락나무가 사람과 같다니, 그건 사람 모습을 하고 있어 내가 사람과 가깝다는 얘기보다도, 사람과 같은 눈이 있어 CCTV가 사람과 같다는 얘기보다도, 몇 배는 더 이상한 얘기였다. 라일락나무는 금방 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굵은 받침목이 버텨주고 있었지만, 늙은 가지들은 수액이 전부 말라 버려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져 가루가 될 것처럼 보였고, 또 먼지와 이끼가 수없이 쌓여 말라비 틀어진 껍질 골 사이에 엉켜 있는 모습은 바람도 없는 어느 날 스스로 쓰러져 생을 마친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이 몸은 꽃을 피운다구. 꽃을 피우면 사람들은 나를 아름답다고 치켜세우지. ‘천사처럼 아름다운 꽃이야, 이런 향기를 평생 간직하고 싶어’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면서 말이야. 비록 내가 늙기는 했지만 
 
- 7 - 바다로 떠난 허수아비 
 
내가 피우는 꽃들은 얼마나 예쁜지 모를 거야. 사람은 오직 인정받으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존재거든. 사람들은 오로지 남들에게 인정받으려 산단 말이야. 인정받기 위해 돈을 벌고, 인정받기 위해 성형수술도 받고, 인정받기 위해 텔레비전 오디션에도 나가고, 또 인정받기 위해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을 하기도 하지. 사람들에게는 그게 전부야 전부.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그게 다라구.” 
 
라일락나무의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 해 가을 벼 타작을 하러 나온 주인아주머니가 생각났다. 그녀는 일하기 편한 작업복 차림에 머리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차양이 넓은 낡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터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알이 굵은 진주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다. 김 씨 아저 씨는 수시로 핀잔을 주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들을 자랑스럽게 내보이 면서 작업을 계속했다. 라일락나무의 말이 옳았다. 사람들은 인정받기를 원했고 인정받는 기쁨으로 살아갔다. 
 
생각해 보니 내게는 그런 욕망이 없었다. 나는 새들이 날라 와 나락을 쪼아 먹으려 할 때 있는 힘을 다해 참새들을 노려보며 그들을 쫓아냈고, 그런 내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확의 즐거움을 더 크게 누렸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또 나를 만들어 들판에 세워 준 주인아저씨나 다른 어느 누구도 내게 참새를 쫓아내줘 고맙다고 칭찬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비결은 나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욕망이었다. 
 
댓잎 떨어지는 소리를 듣다 
 
나는 라일락나무의 얘기들을 되새기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남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추구하는 것일까, 아니면 남들이 뭐라 하던 스스로의 길을 가는 것일까?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만일 라일락나무의 말대로 타인과 사회의 인정이 사람들의 존재의 조건이라면,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홀로 주체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뜻일까? 
 
나는 한 번도 라일락나무처럼 욕망과 두려움에 춤추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한말들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욕망과 두려움에 떠는 마음을 갖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단지 내 몸을 마음대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바다를 향해 떠나고 싶었다. 
 
나는 그 순간 소원을 빌었다. 꼭 누군가에게 소원을 빌었다기보다는 내 안에 있을지 모르는 혹은 저멀리 우주에 있을 초월적 존재를 향해 기도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모았다.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두려움에 떠는 인간이 아니라, 욕망을 좇아 필사적으로 분투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소망했다. 
 
나는 갑자기 모든 게 허무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삶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게 변해가기 때문에 허무하다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좋았던 시절의 영화를 생각하면서 삶이 허무하다고들 했지만 나에게는 변화 없는 삶이 오히려 허무했다. 그러고 보니 허무는 삶의 본질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좌절에서 비롯된 감정상태일 뿐이라는 철학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 밤하늘을 맑게 울리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수아비야, 사람이 되려면 말이야.” 그 
 
- 8 - 바다로 떠난 허수아비 
 
목소리와 함께 내 몸은 계속해서 흔들렸다. “허수아비야, 사람과 같은 존재가 되려면 말이야, 어떤 부족함을 가지고 있어야 해. 그건 말하자면, 채워지지 않는, 그리고 반드시 채워져야 할 어떤 부족함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욕구를 부르는 그런 부족함 말이지.” 
 
나는 누가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찾고 있으면서도 그 말이 논리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부족함은 주인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노예나 하인의 처지에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람들과 같은 삶의 주인으로 서의 존재가 된다는 건 부족함이 아니라 오히려 채워짐이고 보다 완전해짐이었다. 그러니 설령 사람 들이 조금씩은 부족한 상태에서 살고 있다 해도 그런 부족함 자체가 사람이 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될리는 없었다. 
 
대나무는 부족함이 사람다운 삶을 만든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부족? 욕구? 쾌락? 그런 게도대체 뭔데? 왜 그런 것들이 사람이 되는 요건이 된다는 거지?” CCTV가 거칠게 되묻자 대나무가 다시 영롱한 목소리로 내 몸을 흔들었다. “욕구의 순환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과 같은 삶의 주인이 된다는 말이죠. 부족함, 부족함에서 생기는 요구, 간절함, 고통, 두려움, 부족함을 채우는 데서 오는 쾌락, 결여와 만족으로부터 생겨나는 감정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람을 삶의 주인으로 만드는 씨앗이거 든.” 
 
CCTV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흠, 그건 말도 되지 않는 얘기야. 욕구와 충족이라는 동물적 사이클이 있어야만 자기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지. 저 오리 사냥 개를 봐. 저 아이도 욕구가 있고 충족과 쾌락도 느끼지. 하지만 저 애는 인간과 달라. 그저 어리석은 동물일 뿐이거든.” 
 
이번에는 내가 생각해도 CCTV의 말이 옳았다. 동물적인 욕구가 사람과 같은 존재가 되는데 필수적 요건이라는 말에는 쉽게 동의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대나무의 생각은 확고했다. “인간이 자아를 가지 려면 반드시 불안정한 마음을 가져야 해요. 불안한 마음은 부족함과 욕구라는 게 없으면 불가능해요.
욕구가 충족되었다가 다시 부족함의 상태로 돌아가요. 그러면 또 새로운 충족을 원하죠. 그런 불안정한 사이클 속에서 인간은 자아를 형성하는 거예요. 자아 이미지는 그런 거죠. 만일 불안정하지 않은 자아가 있다면 그건 이미 자아가 아니에요. 자아를 만드는 불안정성은 욕구와 충족, 쾌락과 결여, 그런 것들의 순환 사이에서 생겨나는 거예요. 영원히 충족된 존재는 주체가 될 수 없단 뜻이에요.” 
 
나는 두 주장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나 역시 바다를 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리고 아직 바다를 보지 못했기에 그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아무리 사람들이 불안정하다 하더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나’를 가지고 싶었다. 
 
초대장을 쓰다 
 
내가 원한 것은 바다를 보러 가는 여행이었지 끝없이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그런 불안정한 여행이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복잡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랑스 럽게 생각하는 ‘나’로 살아가고, 또 언제라도 원하기만 하면 바다를 향해 여행을 떠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나무 아주머니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었다. 
 
집주인아저씨의 노트들 중 어떤 건 수십 년은 되어 보였다. 하얀 종이가 누렇게 변색된 데다 손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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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지덕지 묻어 본래의 색깔을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첫 번째 노트의 첫 장은 “드디어 책과 노트를 샀다. 이제는 돈을 벌면서 공부도 할 수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그 아래 “노력, 성공, 행복한 가정.”이라는 단어들이 연이어 이어졌다. 그 뒤로 그는 수십 장의 노트에 때로는 성공에 대한 꿈을, 때로는 기술을 배우는 고통을 그려나갔다. 손이 찢어진 날에도 그의 노트에 “이를 악물자.”라고 썼고, 손가락 하나가 부러진 날에는 푸시킨의 <인생>이라는 시가 등장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미국에 대한 동경이 시작됐고, 미국에서 성공해서 돌아오리라는 손때 묻은 그의 다짐이 노트의 여러 면을 채워나갔다. 
 
그 후로는 주로 새로운 사업계획, 확장, 귀금속의 구입과 판매 등에 대한 얘기들과 돈을 세는 숫자들 만이 노트를 채웠다. 그리고 한참 후에 제임스의 이름이 등장했다. 제임스는 무미건조한 생활 속에서 고향에 대한 향수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게 해 준 유일한 친구였고, 때로는 아버지나 형제 같은 사람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제임스와의 의절과 이어진 제임스의 비극은 그로 하여금 견디기 어려운 번민과 회의의 날들을 보내게 했다. 
 
제임스의 이름이 등장한 후 결혼이라는 단어 뒤에는 유난히 물음표가 뒤따랐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 에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겪은 상처와 자신이 되갚은 상처들이 마음 깊은 곳에 남겨놓은 뚜렷한 흔적들을 아직 지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 후 아내가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부터는 설렘과 기대가 노트 곳곳에 흘러넘치기 시작했 다. 아내의 배에서 느껴지는 태동의 신비로움, 밤을 자다가 태중의 아이가 발길질을 하자 깜작 놀라 일어났던 기억, 첫 딸이 태어나고 또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의 몇 년 동안의 육아와 즐거운 가족 여행 들, 이런 소중한 기억들이 노트를 빼곡히 채웠다. 
 
그리고 금고, 아이, 병원, 수술, 이런 단어들이 그의 노트에 있었다. 진혁 아저씨는 귀중한 보석들을 지키기 위해 금고를 들였지만 금고는 보석보다 더 소중한 딸아이를 불구로 만들어 버렸다. 그로 인해 그의 아내에게서 버림받았고 교도소에까지 다녀와야 했다. 나는 그제야 그가 허수아비처럼 텅 빈 눈빛을 가진 이유와 그가 강변에서 나를 보고 내뱉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책장을 넘기던 그의 손이 “이방인”이라는 작은 글자 옆에서 멈췄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대해 그는 “의미와 무의미의 대결”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 아래에 낙서들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인간은 죽음 직전에도 삶을 꿈꾸는가? 단두대를 향하면서도 선택하고 싶은 처형장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린단 말인가? 이게 인간의 모습이란 말인가? 끝없이 의미를 만들어내 살아가려는 모습, 이것이 내 모습이 라는 말인가? 무의미한 삶 속에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모습, 이것이 진정한 내 모습인가? 도대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살아야 할 이유를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는 적어도 나보 다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그에게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었고 그에게는 아직 멀리 있지만 장차 아빠를 그리워하게 될 아이들이 있다고 큰 소리로 알려주고 싶었다. 최소한 대나무에 걸려 꼼짝도 못하고 있는 이 허수아비보다는 살아야 할 이유가 훨씬 더 많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진혁 아저씨의 손끝은 쉬지 않고 따라갔다. “결국 존재의 의미는 오로지 관계 속에서의 의미일 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의미가 없다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의미가 내가 원하는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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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미치지 못하다는데 불과한 것이다. 보석들도 그렇지 않은가. 보석도 언제나 다른 장신구들 사이에서 의미를 가질 뿐이지 않은가 말이다. 하나만 존재하는 보석은 이미 보석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점차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산다는 게 저토록 의미를 갈구하고 저토록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의미를 위해 죽음을 선택해야 할만큼 간절한 부족함의 상태에서 사는 것이라면, 나는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죽음을 초대하는 그의 탄식은 끝이 없었다. 한 사람이 자기의 존재의 의미를 부인하며 스스로의 삶을 말살하려 한다면 기억하고 싶은 사연이 얼마나 많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의 존재에 대한, 의미에 대한 질문 사이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을 죽음으로 초대하면서 길을 잃었는지 잠시 펜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자신에 대한 마지막 초대장을 적어 나갔다. “선택할 시간이야. 내가 사랑한 사람들이 나를 사랑 하지 않은 이유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지 못한 이유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렇게도 실패하는 게 두렵고, 그렇게도 자식들이 불행해질까봐 두려웠기에, 오히려 딸자 식의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그리하여 내 인생은 실패로 끝났음을 겸허히 인정 하기에. 이제 나는 죽음이 아니고서는 나에게 용서와 사랑을 회복시킬 어떤 방법도 없음을 알기에 선택한다. 죽음만이 이 무거운 비난과 고통의 십자가를 내려 주리라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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