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10권
박종화
김종서
며칠 후의 일이다. 우의정 자리에서 평안도 도안무찰리사로 임명된 최윤덕은 새로 설
치된 자성, 무창, 여연, 우예의 사군과 평안도 전지역을 순찰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어전
에 배알하고 하직을 고했다.
전하는 특별히 백관을 경회루에 회동케 하고 친히 납시어 환송연을 열었다.
압록강 이남를 경계로 하여 서북면 일대의 지역이 얼마나 국가의 중요한 위치에 놓
여 있다는 것을 정부 관원과 백성들에게 인식시키자는 뜻이다.
최윤덕을 전송하는 이 자리에는 정삼품 이상의 관원은 말할 것 없고, 세자저하를 위
시하여 모든 왕자와 대군들도 참집케 했다.
세종 전하는 최윤덕에게 친히 전별하는 술 한 잔을 따라주시며 말씀을 내린다.
모든 사람들은 귀를 기울여 전하의 말씀을 듣는다.
"경을 위시하여 모든 장성들이 파저강 여진을 소탕한 일은 국가에 대하여 크나큰 이
익과 복을 주게 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 경이 안무찰리사의 책임을 맡고 새로 설치한
사군을 지키고 다스리러 가는 일은 여진의 소굴을 응징한 그 일보다도 더 큰 책임을
맡았다 할 것이다. 첫째로 경은 득민심을 해서 서민들을 평안케 하라. 둘째로 비록 여
진의 족속이라 하나 원수로 다루지 말라. 귀화해서 복종하는 자는 후하게 대접해서 원
한을 품지 않도록 하라. 셋째로는 국방을 튼튼히 해서 비록 불모의 땅이라 할지라도 한
치만한 국토도 잃어서는 아니된다. 만일 그리 된다면 경이 대군을 거느려 건주위 이만
주를 성토한 일도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우리가 방어할 대상은 유독 여진 족속
만이 아니다. 명나라도 우리 땅을 노려보고 있다. 명나라는 지금 요동을 관장하고, 차츰
차츰 두만강 줄기까지 손을 뻗치려 한다. 우리의 적은 여진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겉으
로 명에 대해서 우방, 또는 선린으로 수교하고 있으나 명이 또한 이러한 아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들은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
전하의 옥음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했다.
모든 신하들은 숙연히 고개를 숙여 말씀을 듣는다.
전하는 다시 한 말씀을 강하게 내린다.
"뜬소문이 되기를 바란다. 명에서는 지금 우리의 황폐한 땅을 범해서 공주에 공주위
를 설치하려 한다는 풍설이 떠돌고 있다. 알아듣겠는가?"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결연히 입술을 다물었다.
말씀은 만조백관의 폐부를 강하게 찔렀다.
최윤덕이 국궁하고 아뢴다,
"전하의 하교는 명심하겠습니다."
세종은 친히 술 한 잔을 다시 부어 내렸다.
최윤덕은 두 손을 모아 잔을 받들고 돌아서 마진 후에 어전에 고별 인사를 올렸다,
전하는 최윤덕의 등을 어루만지시며 다시 부탁한다.
"잘 가서 다스 리라?"
말씀을 내린 후에 장중한 걸음으로 누에서 내려 육교에 올라 대전으로 환어했다.
변지로 보내는 중신 대접이 이같이 융숭하고 은근했다,
이날 최윤덕은 여진통사와 종사관, 군관 등 가십여 명을 거느리고 홍제원, 구파발, 벽
제관을 거쳐 임소로 향했다.
말꼬리는 다시 건주위 여진 이만주에게 돌아간다.
최윤덕의 개선군이 파저강과 압록강을 건너 개선한 후에 건주위 추장 이만주는 정신
을 수습하고 초토 속에서 다시 살아갈 태세를 취했다.
모든 추장들을 로아 패전 후의 대책을 강투했다.
조선 군에 대항한 때문에 군량으로 서속을 많이 소비했다.
이제는 압록강을 건너 여연파 강계로 노략질하러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조선
정부에 대해서 전과 같이 보리와 쌀을 구걸할 염치도 없다.
백성들에게 적극적으로 사냥하는 일을 권장해서 멧돼지와 노루며 토끼 등 야생동물을
잡아서 충복하게 냈다.
다음엔 군사를 점고해보았다. 좌군 부대는 반수 이상이 꺾어지고 좌군 부대장과 퉁맹
가가 전사했다.
우군 부대 이천여 명은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이 고스란히 인솔하고 패군으로
가장한 후에 아내와 함께 우디거로 달아났다.
기막힐 일이었다.
거여, 마천, 올라, 팔리수, 임카라 등 모든 부락의 병력도 3분의 2이상의 군사들이 죽
어버렸다.
이만주는 분하고 원통했다. 더구나 우군 부대장이 조선편에 내응을 해서 거짓 싸우다
가 우디거로 달아난 그 일은 참을 수 없었다. 철천지한이었다.
이만주는 모든 추장을 향하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며 이를 갈아 한탄한다.
"조선에 대해서는 힘이 모자라서 어찌하는 수가 없지만, 이놈, 이 우군 부대장 내외
의 원수를 어찌하면 갚는단 말이냐?"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거여 추장도 눈을 부릅떠 분개하며 말한다.
"그놈이 더욱 가증한 것은 우리편의 제일 가는 모사 퉁맹가를 죽이고 달아난 일이
더욱더 분합니다. 어쨌든 우디거로 달아난 우군 부대장 내외를 잡아 죽여서 원수를 갚
아야 합니다?"
모든 추장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응한다.
"원수를 갚아야지 ?"
이만주는 다시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한숨을 짓고 말한다.
"원수를 갚자면 군사를 이끌고 우디거로 쳐들어가서 도성을 두려뺀 후에 사위와 딸
년을 붙잡아서 능지처참을 해야겠는데, 우디거를 무찌를 힘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어
찌하면 이 원한을 풀어본단 말이냐?"
이만주는 다리를 번쩍 들어 땅을 굴렀다.
팔리수 늙은 추장이 주름지고 이빠진 얼굴에 구슬픈 빛을 띠고 기운 없이 말한다.
"막막강병인 조선 군사까지 대항하려던 우리 건주위 여진 부대가 우디거 따위를 토
벌할 힘이 없으니 기막힌 일이로세! 이런 때 퉁맹가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좋은 뫼라도
낼 수가 있으련만, 모든 일이 답답만 하구나"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젊은 추장 한 사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친다.
"일은 모두 다 쥐새끼 같은 모사 퉁맹가란 놈 때문에 망쳐왔는데, 여러분은 그래도
퉁맹가만 생각하신단 말씀이오?" 퉁맹가란 놈이 밴댕이 속 같은 얕은 뫼를 써서 좌군
을우디거로 변장시키고 거짓 항복한 때문, 이것이 탄로가 되어 조선룬에 응징을 당한
것 아닙니까?" 건주 위를 오늘날 망하게 한 놈은 퉁맹가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밤낮
퉁맹가만 생각한단 말씀이오?" 딱하기 한량없소?"
말을 마치자 부아가 끓는 듯 침을 탁 뱉었다.
모두들 바라보니 마천의 젊은 추장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기상이 씩씩했다.
젊은 추장의 따지는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아니했다. 보두 다 묵묵히 말이 없다.
젊은 추장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퉁맹가의 죄툴 제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 계교를 한번 써보실 생각은 없소?"
이만주를 향하여 씩씩하게 말한다.
이만주는 무색한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묻는다.
"자네한테 좋은 계책이 있다면 서슴지 말고 말해보게나. 좋은 계교라면 아니 쓸 리가
있나. 어서 말을 해보뻬나. 내 마음이 심히 답답하이"
"지금 우리 병력으로는 우디거를 쳐서 딸과 사위를 잡아 죽일 힘이 없소! 다른 부락
의 힘을 빌려서 원수를 갚자는 거요 알아들으시겠소?"
이만주의 입이 딱 벌어진다.
"어서 빨리 말을 해보게, 다른 부락의 힘을 빌려서 원수를 갚겠다하니, 다른 부락은
어떤 부락인가?"
여러 추장들도 귀를 기울였다.
"두만강 남안 조선 땅, 오음회에 거접하고 사는 '오도리' 부락의 추장인 퉁맹가 티무
르는 죽은 퉁맹가의 아버지입니다."
"그렇지. 퉁맹가 티무르의 막내아들이지 "
이만주는 대답했다.
팔리수 늙은 추장은 이만주의 말에 뒤를 받는다.
"그렇지, 퉁맹가는 퉁맹가 티무르의 막내아들로서 이곳에 장가를 들어서 이만주 지휘
의 모사가 되었던 것이지"
팔리수 늙은 추장은 퉁맹가가 건주위로 온 내력을 말했다.
"아따, 그 내력을 누가 모른답디까. 내 말씀이나 들어보시오"
젊은 추장은 늙은 추장을 윽박질렀다.
"자아, 어서 말을 해보게. 자네 계책을-
이만주는 재촉을 했다,
"지금 두만강 유역 오음회에 살고 있는 퉁맹가 티무르는 까맣게 막내아들 숭맹가가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의 손에 죽은 것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을 급히 티무
르에게 알려준다면 티무르는 반드시 우디거를 치고 말 것입니다. 이리 된다면 우리는
한 사람의 병력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우디거 딸과 사위의 원수를 갚을 수 있습니다. 어
떠합니까, 내 계책이?"
마천 젊은 추장은 이만주 이하 모든 추망들을 둘러보며 씩씩하게말했다.
이만주의 우울했던 얼굴에 활짝 기쁜 빛이 떠돌았다. 입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좋은 계책이다?"
찬성하는 목소리가 명랑하게 떨어졌다.
모든 추장의 그늘진 얼굴에도 일제히 밝은 빛이 떠돌았다.
"과연 좋은 꾀로구나?"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원수를 갚는단 말이지. 하하하"
"고것이 어부지리 라는 것이야. 하하하, "
"서투른 퉁맹가의 뫼보다 훨씬 낫구먼?"
제각기 벙긋벙긋 웃으며 한 마디씩 지껄였다.
젊은 추장은 팔을 걷어붙이며 다시 말한다.
"이같이 해서 오도리 족속인 퉁맹가 티무르가 우디거를 멸한 후에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오도리족과 연합세력을 펴서 조선 땅 오음회를 차지한다면 우리는 다시 살아날
길이 눈앞에 환하게 터집니다. 이것이야말로 돌팔매 하나로 새 두 마리를 맞히는 격입
니다. 어떻습니까, 내 계책이?" 퉁맹가의 서투른, 소갈머리 없는 죄보다는 백 갑절, 천
갑절 낫습지요. 하하하"
'낫다마다. 자네 죄는 정말 삼국시절의 제갈양 같은 꾈세. 퉁맹가의 죄는 오랑캐 우
리 족속을 망친 죄가 아닌가베, 자네 죄는 참말 기기묘묘한 꾈세"
젊은 추장에게 항상 핀잔만 맞던 팔리수 늙은 추장이 이 빠진 얼굴에 애교를 떨어
아첨을 하며 말한다.
젊은 추장은 벌컥 성을 내며 대꾸한다.
"아무리 늙으신 분이라 하나 주견을 좀 세우시오, 주견을! 아까는 퉁맹가가 없어서
아쉽다고 하더니 이번엔 그래 내가 제갈양보다 낫단말씀요. 노인이라도 주견이 없으면
아니되오?"
늙은 추장은 무안했다.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이만주는 젊은 추장을 향하여 다시 계책을 묻는다.
"자아, 그렇다면 한시바삐 퉁맹가 티무르를 찾아서 아들 죽은 경위를 이야기해서 우
디거를 치도록 해야겠는데, 누구를 보내어 이 일을 알리는 것이 좋겠나?"
젊은 추장이 기운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소장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오음회로 칼을 달려, 퉁맹가 티무르를 달래서 우디거를
치도록 하겠습니다."
이만주는 마천 추장의 등을 어루만졌다.
"장하다! 빨리 갔다 오라. 그대 같은 지략을 겸비한 사람이 아직도 건주위에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으랴. 기어코 성사하고 돌아오라"
젊은 추장이 다시 고한다.
"그러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슨 청인가?"
"빈손 들고 갈 수는 없습니다. 백금천 냥과 호피 석장을 예물로 주셔야 하겠습니다."
"호피 석 장은 내놀 수 있지만 백금 천 냥은 내놓기가 좀 난처하군"
마천의 젊은 추장은 버럭 화를 냈다.
"큰일을 하려 하는데 백금 천 냥을 아까워하십니까?" 퉁맹가 티무르를 꼬드겨 우디
거를 멸한 후에 우리는 다시 티무르를 쫓아내고 조선땅 오음회를 차지할 생각을 하십
시오. 이리 된다면 그까짓 백금 천냥쯤이 무엇입니까?" 크게 앞을 내다보십시오?"
이만주의 귀가 번쩍 열렸다.
"티무르를 이용해서 우디거의 원수를 갚은 후에, 다시 조선 땅에 살고 있는 피무르를
쫓아낸다?"
"그렇습니다. 퉁맹가 티무르가 살고 있는 오음회는 조선에서 고려때부터 이미 포기한
땅입니다. 우리는 우디거를 멸해서 원수를 갚은 후엔 슬몃 티무르를 쫓아버린다면 우디
거, 오음회가 모두 다 우리 세력권 안에 들게 됩니다. 이리 된다면 여연과 강계는 저절
로 우리 땅이 됩니다. 조선의 최윤덕 같은 장사 열 사람이 나타난다 해도 다시는 꼼짝
달싹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만주는 비로소 입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한번 시험해보기로 하세. 백금 천 냥과 호피 석 장을 내어줌세"
"또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우디거의 딸은 절세미인이라 합닌다. 화공을 시켜서 절묘하게 미인도를 한 쪽 그려
줍시오"
"우디거로 도망간 계집을 어찌 그린단 말인가. 실물이 없는데. 도대체 무엇에 쓰려
나?"
"실물이 언더라도 예쁘게만 그리면 됩니다. 예물과 함께 가지고 가렵니다. 쓸데가 있
습니다."
"어렵지 아니하이. 곧 화공에게 그리라 하겠네"
"또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웬 청이 그리 많은가, 말해보게나"
"죽은 퉁맹가의 아내는 절염입니다. 과부가 된 증거로 함께 가야 하겠습니다."
말을 듣자 이만주의 얼굴엔 당황한 빛이 현연히 나타났다. 대답이 없다.
마천 젊은 추장은 버럭 소리를 지른다.
"퉁맹가의 아내가 과부가 됐다고 장군이 짝사랑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티무르
에게 자식 죽은 증거를 보여야 하겠습니다. 건주위 전체를 위해서 내놓으셔야 합니다."
모든 추장들은 물끄러미 이만주의 태도를 바라본다.
이만주의 얼굴엔 고민하는 빛이 떠돌았다. 여전히 대답이 없다.
젊은 추장은 이만주의 고민하는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결기있는 목소리로 외
친다.
"만약 장군이 과부를 내놓지 아니하신다면, 나는 티무르를 만나러가지 아니하겠소 큰
일을 하려면 사랑하는 아내라도 내놓는 것이 예사인데, 남의 아내 되었던 헌 계집 하나
쯤을 연연불망해서 내놓지 아니하려 하니 딱한 일이오! 장군은 건주위 오랑캐 족속을
통솔할 자격이 없소 그만두시오 나도 다 집어치우고 아니 가겠소"
마천 젊은 추장은 부아가 나는 듯 걸쭉한 침을 탁 뱉어버린다.
모든 추장들이 이만주에게 권한다.
"마천 추장의 말대로 퉁맹가의 아내를 함께 가도록 하^d시오. 그리해서 남편이 죽은
구슬픈 사연을 시아버지 티무르와 형제들에게 하소연해야 합니다. 과부를 불쌍히 생각
해서 정을 뚜시는 듯합니다마는 건주위 장래 일을 생각해서 내주셔야겠습니다."
이때 도지휘 이만주와 과부 사이의 정사는 건주위 일판에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이만주는 하는 수 없었다.
"정 그렇다면 데리고 가도록 하게나"
기운 없는 목소리로 허락을 내렸다.
두어 날이 지났다. 우디거 딸과 흡사한 미인도는 화공의 손으로 그려졌다.
백픔 천 냥과 호랑이 껍질 석 장도 이만주의 광 속에서 마천 추장에게 전해졌다.
이만주 이하 모든 추장들이 나열한 속에 마천 젊은 추장은 길 떠날 차비를 차렸다.
호사스러운 상모술과 워낭을 늘인 준마 십여 필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조선 장수들의
말 호사하는 것을 본뜬 것이다.
말 한 필마다 군복 차림의 견마잡이 마부가 두 명씩 딸려 있었다.
호위하는 기마대는 세 패로 나뉘었다. 한 패는 백금과 호피와 미인도를 담은 부담농
짝 실은 말을 호위하고, 한 패는 마천 젊은 추장이타고 갈 말을 호위했고 한 패는 과부
미인이 타고 갈 말을 둘러싸고 있었다.
모든 준비는 다 되었다. 떠나야 할 시각은 얄팍얄팍 다가왔다. 그러나 절세미인의 소
문이 높은 퉁맹가의 아내는 바타나지 아니했다.
떠날 시각은 지나갔다. 일고삼장이 되었다.
모두들 목을 길게 빼고 과부 미인이 나타나기를 고대했다. 침내 마천 젊은 추장은 부
아가 터졌다. 이만주를 향하여 벌컥 소리를 지른다.
"도대체 가라는 거요, 말라는 거요?"
이만주는 무안했다. 주먹맞은 감투가 되었다, 어슬렁어슬렁 본궁으로 들어갔다. 떨어
져 가기 보다는 과부를 애가 타도록 달랬다. 앞을세우고 나왔다.
모든 사람의 눈길이 과부의 모습으로 흘렀다. 새까만 상복을 입고 수심에 싸여 걸어나
오는 태도는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추파를 흘려 잠깐 말안장을 바라본다. 기름한 속눈썹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차
마 비밀하게 사귄 두 번째 남편 이만주를 떨어지기 싫은 모양이다.
필자는 잠깐 두만강 유역에서 발호하던 여진족의 내력을 독자에게 이야기하려 한다.
고려 예종 년(1108)에 북진사상의 명장 윤관은 십칠만 대군을 거느리고 항상 변방을
소란케 하는 여진 족속을 정벌해서 흑룡강성과 포염사덕에 국경비를 세우고 다시 길림
성 연길현에 정계비를 세웠으며, 또다시 서백리아 수청층벽에는 고려 대장군 윤관이 이
곳을 지나갔다는 글을 새겨서 크게 나라의 위세를 드날렸다. 다시 예종께 상소하여 아
흡 성을 쌓았으니 이것이 요사이 지명으로 덕원, 함흥, 북청, 단천, 길주, 경성, 종성, 경
원, 혼춘이다, 경원에는 내방어소를 설치하고 혼춘에는 성벽을 굳게 쌓아서 방어선을
구축하니, 고려의 판도는 전무후무한 확장을 이룩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가 막힌 일이
었다. 이 크나큰 위대한 사업은 2년 후에 슬프다, 한 굽이 물거품으로 흘러내리고 말았
다. 예종 5년에 무능한 문신들은 지키기 어려운 불모의 땅이라 해서, 여진은 자자손손
대를 이어 조공을 바치고, 고려에 대하여 종노릇을 하겠다는 조건 아래 피땀 흘려 개척
해논 아홉 성을 고스란히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이리해서 고려말에는 겨우 길주에 만호
부를 두어 방어선을 삼았던 것이다. 천 년 전 옛일이건만 주먹으로 책상을 쳐 통탄할
일이다.
그 후에 세종대왕의 6대조 이안사는 전라도 전주에서 감사와 틈이 벌어져서 쫓기고
쫓겨서 여진 족속들과 이웃해 살기 시작했다,
세종대왕의 증조부 이자춘은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가 되었고, 세종대왕의 할아버지
태조는 용맹스런 명성이 여진 일대에 자자하면서 고려에 출장입상을 했다.
이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해서 조선을 개국한 후 에 태조는 이씨의 발상한 고향
이라 해서 두만강 일대의 여진을 후하게 대우했다.
두만강 하류에 사는 모련위 오랑캐와 오도리 족속은 태조가 즉위하자 부름을 받아 벼
슬을 받았다. 공주에는 목조로 추존한 이안사 내외분의 능이 있었다.
태조는 왕위에 오르자 아들 방원을 보내서 소분을 하고 치제를 지낸 일도 있었다.
다음해인 태조 2년에는 여진 출신의 퉁두란을 동북면 안무사로 임명해서 공주와 갑
산에 성을 쌓아 서민들을 진무 했고, 7년에는 정도전으로 선부순찰사를 삼아서 지방 군
현의 지계를 획정하고, 공주를 경원부라 한 후에, 단천 이북의 군량미 천 섬을 경원으
로 수송하고 강상에는 10척의 병선을 배치하여 경비를 튼튼히 해서 여진족의 망동이
근절되게 했다.
그러나 국가가 어지러우면 외구는 틈을 엿보아 날뛰기 시작하는 것이 상례다. 정안대
군 방원이 세자인 아우 방석을 죽이고 정도전이 실각한 후에 함흥차사의 변이 나자 여
진은 움직이기시작했다.
태종 9년의 일이다. 영고탑 방면에서 남으로 내려온 우디거는 경원 동편에 있는 소다
로로 쳐들어와 노략질을 했고, 다음해 타종 10년에는 오랑캐족과 우디거족이 합세해서
경원을 재침하니 병마사 한흥보가 전사했다. 찰리사 조연은 급히 길주에서 군사를 거느
리고 경원의 북방인 두문까지 강을 건너 쳐들어가서 오랑캐를 대파하고 추장을 죽여서
위세를 회복했다.
그러나 여진은 또다시 경원으로 쳐들어와서 병마사 곽승우가 전사하니, 공주 곧 경원
을 유지랄 도리가 없었다. 뿐만이 아니다. 경원에는 태종의 5대조 이안사의 덕릉과 배
위인 이씨의 안릉이 있었다. 태종은 오랑캐의 말굽 아래 짓밟히게 할수 없었다. 단을
내려 함흥으로 이장하고 경원부를 경성으로 후퇴시키니 야인의 방어선은 겨우 경성이
되어버렸고 그 이북 땅은 마침내 여진족의 일추인 오도리족의 추장 퉁맹가 티무르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지금 필자가 묘사하는 장면, 이만주의 부하 마천 젊은 추장이 과부미인을 데리고 우
디거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찾아가는 곳은 경성 이북 퉁맹가 티무르가 사는 두만강 이
남, 조선이 포기한 땅이다.
마천 추장은 전사한 퉁맹가의 아내 과부 미인과 함에 천 리 길을 달렸다. 오음회에
당도하자 성을 지키는 장수에게 전갈을 전했다.
"건주위 이만주의 특사 마천 추장은 막내 자제 퉁맹가의 아내와 함께 폐백을 올리고
뵈옵기를 청합니다."
성 지키는 장수는 급히 말을 달려 추장 퉁맹가 티무르한테 품했다.
티무르는 기뻤다.
'막내며느리가 왔단 말이냐?" 아들애가 지난해에 혼인했다는 소식만 듣고 아직 며느
리 아이를 만나보지 못했더니 이제 나를 찾아보러 왔구나! 내외가 함께 오지 아니하고
어찌해서 며느리만 왔다 하더냐. 빨리 들여보내라?"
건주위한테 장가갔던 막내아들의 새 며느리가 근친을 왔다는 소식을 듣자 남녀노소
의 추장붙이들은 구름 모이듯 모여들었다.
이윽고 성 지키는 장수에게 인도되어 마천 추당과 과부 미인은 티무르 앞에 나타났
다. 모든 오랑캐들의 눈결이 두 사람에게 몰렸다.
새까만 혹의에 구름 같은 검은 머리를 틀어올리고 기름한 속눈샙 아래 가을 호수 같
은 푸른 물결을 흘리며 티무르 앞에 선 미인의 탯거리는 천하절색이었다.
모든 오랑캐들의 눈은 부시도록 아름다움을 느꼈다. 시선은 마천 추장에게 보다 아름
다운 막내아들의 아내한테로 집중되었다.
이곳 저곳에서 소곤소곤 찬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과연 천하절색인데 ?"
"막내는 복도 많지 ! 어쩌면 저런 미인한테로 장가를 갔나?"
"저만큼이나 예쁘니까 고향을 등지고 건주위로 가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겠나, "
모두 다 침을 삼키며 미인을 바라보았다,
마천 추장은 티무르한에 정중한 인사를 보낸 후에 미인을 소개했다.
"이 아씨는 막내아드님 퉁맹가의 아내올시다."
여인은 수삽한 탯거리로 티무르한테 공손히 절을 드렸다.
늙은 티무르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여인의 절을 받으며 말한다.
"오오, 네가 내 막내며느리로구나! 길이 멀어서 새사람을 이제야 만나는구나! 먼 길
에 고생이 많았구나. 잘 왔다. 내 생전에 너를 만나보니 이런 다행한 일이 없구나"
늙은 티무르는 아름다운 막내며느리를 바라보며 대견하고 귀여운 정을 억제할 길 없
었다.
티무르의 아들 형제와 아장들의 눈결은 매력에 넘치는 여인의 태깔에 취한 듯 홀린
듯 넋을 잃고 바라본다.
마천 추장은 다시 티무르에게 홍보를 끌러 백금 천 냥과 호피를 꺼내서 두 손을 보
아 바친다.
"이것은 저희 추장 이만주가 어른께 바치는 예물이올시다. 약소하오나 이웃해 사는
정리로 보낸다 합니다, "
햇빛에 백금덩이가 반사되어 눈이 부시도록 찬란했다. 호피도 상벌이다.
티무르의 입이 떡 벌어진다.
"물건을 아니 가져오면 어때서 가져왔나. 과분하이. 하하하"
늙은 추장 티무르의 웃음소리는 방 안에 가득하게 퍼졌다.
"아니올시다. 그저 정성이올시다. 더구나 새며느리가 시아버님을 처음 뵙는데 폐백을
아니 가져올 수 있습니까. 저희 추장이 그래서 특별히 보내는 것입니다."
"고맙군, 고마워 1"
늙은 티무르 추장은 백금덩이와 호피를 거두었다.
마천 추장이 다시 고한다.
"그런데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일이 있습니다. 우리 추장은 어른께서 들으시면 놀라
실까보아 말씀을 아니 드리려 했는데, 제가 그래도 알려드리지 아니하면 아니된다고 우
겨대서 결국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늙은 티무르의 얼굴빛이 변해진다.
"깜짝 놀랄 일이 있다니 무슨 일인가?"
티무르의 큰아들 피카르와 아장의 무리도 심상치 아니한 마천 추장의 말을 듣자 눈
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였다,
"놀라지 마십쇼. 막내 자제 퉁맹가가 전사했습니다."
"무어야, 내 아들이 죽었어?" 전쟁터에서 죽었단 말인가?"
"조선 군사와 대결해 싸우다가 죽었으면 도리어 영광일 텐데,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
대장과 우디거의 딸의 손에 목이 떨어졌습니다."
"웬일인가, 무슨 까닭에?"
"우군 부대장 내외는 조선군한테 매수가 되어 내응을 하면서 거짓싸우는 체했습니다.
저희 장군은 눈치를 채고 자제를 진터로 보내서 문책을 하는 순간, 우디거의 사위는
자제를 죽이고 2천 명 군사를 거느려 우디거로 달아났습니다. 이 까닭에 조선군은 물밀
듯 들어와서 건주위는 결판이 나고 말았습니다. 어른께서는 자제의 원수를 갚아서 구천
에 떠도는 외로운 혼을 위로해주셔야 합니다. 우디거를 쳐서 딸과 사위를 죽이시고 이
철천지한을 풀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또 혈혈단신 의탁할 곳 없는 청춘 과부를 불쌍
히 여겨주십시오?"
마천 추장의 '혈혈단신 의탁할 곳 없는 청춘 과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소연
하는 말을 듣자, 혹의미인은 별안간 아미를 숙여 흑혹 느꼈다. 눈물이 방울방을 떨어졌
다.
여긴의 애틋하게 느껴 우는 철읍 소리는 뭇 사내들의 애를 설레게 했다.
늙은 티무르는 주먹을 불끈 쥐고 고함을 친다.
"우디거 딸과 사위놈이 그래, 내 막내를 죽였단 말이냐! 이 연놈의 간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다. 기어코 원수를 갚으리라?"
티무르의 큰아들 피카르와 아장들도 일제히 소리친다.
"죽일 연놈들입니다. 속히 우디거를 쳐써 아우의 원수를 갚아주어야 합니다."
이때였다. 마천 추갈은 보 하나를 또 끌렀다. 둘둘 말은 족자를 꺼냈다. 끈을 풀었다.
한 폭 미인도가 활짝 펼쳐겼다.
기막힌 절색의 여인도다.
"이 여자가 바로 우디거 딸이올시다. 막내 자제를 죽인 장본인이올시다, 어떻습니
까?" 천하절색이지요 계집의 서방을 잡아서 원수를 갚으신 후에 계집은 어른의 첩으
로 삼으십시오?"
티무르 이하 모든 사람들의 눈길은 우디거의 딸이라는 그림폭으로 쏠려들었다.
우디거 딸의 모습을 그려논 인물 그림은 과연 글자 뜻 그대로 기막힌 미인도다.
한동안 미인도를 바라보던 티무르의 입은 헤 하고 벌어진다. 마천추장의 '원수를 갚
으신 후에 계집은 어른의 첩으로 삼으십시오?" 하는 말을 듣자,
"늙은 사람이 첩은 두어서 무엇하나. 하하하"
너털웃음을 크게 웃었다.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늙으실수록 소실이 있어야 합니다, 뒷배를 보아드릴 젊은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습
니까?"
"그도그래."
티무르는 손수 우디거 딸의 그림을 말기 시작했다.
큰아들 피카르와 아장들은 티무르가 손수 마는 족자를 곁눈 질 해보고 다시 앉아 있
는 퉁맹가의 아내 과부 미인을 바라본다.
우디거의 딸도 절색이지만 청상과부는 더한층 절염이다.
두 미인을 꽃에 비한다면 우디거의 딸은 백모란 송이 같구 퉁맹가의 아내 청상과부
는 요염한 흑장미 한 떨기 같았다.
티무르의 큰아들 피카르듸 추파와 젊은 아장 파쿠타의 눈결은 자주 자주 흑장미 같
은 퉁맹가의 아내 청상과부의 몸으로 흘렀다.
늙은 추장 티무르는 우디거 딸의 초상화를 손수 말아 문서궤에 간직한 후에, 엄숙한
얼굴로 큰아들과 아장들에게 명을 내린다.
"나는 우디거를 쳐서, 기어코 막내아들 퉁맹가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했다. 너희들은
내일부터 군사를 조련해서 한 달 안에 우디거를 격파할 태세를 취하라"
아들과 아장들은 일제히 명을 받았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티무르는 다시 큰아들 피카르에게 명령을 내린다.
"건주위 특사 마천 추장은 먼길에 오시느라고 매우 고단하실 것이다. 춥지 않도록 객
관에 모시어 특별한 공궤를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소 너의 제수는 한적하고 깨끗한 별
당에 거처하게 해서 소루한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 하겠습니다."
티무르의 큰아들 피카르는 명을 받았다.
모든 사람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청상과부와 마천 추장은 티무르 큰아들의 인도를 받아 객관과 별당으로 제각기 거접
하게 되었다.
이튿날부터 공주의 '오도리족' 들은 우디거록을 치기 위하여 군대의 훈련이 강화되었
다.
궁방에서는 활과 살을 만들고, 대장간에서는 창과 칼이며, 쇠뇌를 조성하는 풀무 소
리와 메질 소리가 요란했다.
넓고 넓은 황야에는 말을 달리는 마군의 뛰닫는 소리가 적막했던 강산을 뒤흔들고
즐비하게 벌여 세운 과녁 터에서는 일중, 이중, 삼중의 과녁을 맞히는 궁수들의 묘기가
나날이 계속되었다.
늙은 추장 티무르를 위시하여 아들과 비장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말을 달려 훈련하는
장병들을 격려했다.
퉁맹가 티무르의 아장 파쿠타와 큰아들 피카르는 죽은 퉁맹가의 아내 과부를 대해
본 후에 혹장미 같이 요염한 아리따운 자태에 넋을 잃었다. 마음이 설레 였다. 일이 손
에 잡히지 아니했다.
큰아들 피카르는 동생의 아내라 해서 친히 별당에 나가 청소하는 여인들을 감독하면
서 정갈스럽게 청소하라고 잔소리와 분별이 대단했다. 손수 캉을 바로잡고 경대와 유경
의 먼지를 털기도 했다.
"아주머니, 멀리 오시느라고 피로하셨을 텐데 편히 캉 위에 누우시오."
요염한 제수를 향하여 은근하게 갈을 붙여보기도 했다.
피카르는 아우 퉁맹가에 비하여 보잘것없는 추남이었다. 키는 늘씬하지 못하고 땅딸
막했다. 누르고 검게 생긴 메주덩이 같은 얼굴에 구레나룻은 멋없이 괴살같이 뻗었다.
그러나 가슴만은 떡 벌어졌다. 눈은 부리부리하고 콧구멍은 뻥코다. 음침하고 욕심이
많게 생겼다.
퉁맹가의 아내 청상과부는 피카르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갖지 아니했다.
그러나 남편 되었던 퉁맹가의 형이라 해서 어려워하는 생각을 가졌다.
"관계치 아니합니다. 조금도 피곤하지 아니합니다. 바쁘신 터에 손수 이같이 분별해
주시니 황공하여 이다."
나직나직 고마운 뜻을 말했다.
제수의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고운 음성은 피카르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했다. 메주
덩이 같은 못난'얼굴에 벙긋벙긋 웃음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터졌다.
"황공하다니 무슨 말씀요. 집안간인데. 모두 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아우
도 없는 터에 누가 당신을 보살펴줍니까. 내가 대신 돌봐주어야지"
"고맙습니다."
아우 퉁맹가의 아내는 의례적으로 살포시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메주덩이 같은 피카르는 여태껏 이와 같은 매력 있는 여자의 눈웃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금방 참혼칠백 (프챗-쵸)이 스러지는 듯했다. 자기한테 제수는 호감을 갖는다
고 생각했다.
"얘들아, 어서어서 세숫물도 갖다드리고 잡수실 음식도 갖다드려라"
심부름하는 여인들에게 분별을 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별당 아래로 내려간다.
이때 아장 파쿠타는 과부 미인의 부담농짝을 말에서 끌어내려 가지고 별당으로 올라
가픈 길이었다. 내려가는 피카르와 마주쳤다.
"그것이 무엇인가?"
"건주위 아기씨의 부담농짝일세. 장군께서 별당으로 갖다드리라 해서 가지고 올라가
는 길일세"
"졸개 아이들을 시키지, 왜 자네가 손수 가지고 올라가는가?"
메주덩이 같은 피카르는 시기하는 마음이 자기도 모르는 결에 생겼다.
퉁방을 같은 불량한 눈을 번뜩이며 말했싸,
"노장군의 명령을 어찌 내가 거역할 수 있나. 그리고 아씨의 부담 농에는 소중한 물
건이 들어 있을 텐데, 어떻게 졸아치한테 맡겨서 보낸단 말인가?" 젊은 장군도 망령일
세"
파쿠타는 빙글빙글 웃으며 시침 떼고 부담농을 들고 별당으로 올라간다.
파쿠타도 피카르가 제수 과부한테 지분지분하며 구는 것을 눈치챈 까닭이다.
피카르는 말이 막혔다. 부담농짝을 들고 별당으로 올라가는 파쿠타를 잠시 바라보고
섰다가 급히 뒤를 쫓았다.
"파쿠타! 거기 잠깐 섰게나"
"왜 그러나?"
"농짝이 무거워 보이네 그려. 내가 거들어줌세. 함께 가지고 올라가세"
"무겁지 아니하이, 너끈히 혼자 가지고 올라갈 수 있네"
"아냐, 자네 말대로 농짝 안에 소중한 물건이 들어 있을지 모르네.
깨디거나 부서지면 큰일일세. 곱게 추장님 모시듯 해야 하네. 함께 가지고 가세"
피카르는 황소 뛰듯 뛰어올라 성큼 농짝 머리를 억센 주먹으로 덥석 당겨쥐고 앞을
서서 나갔다. 파쿠타는 하는 수 없었다. 기가 찼다. '흐흐흐' 혼자 소리쳐 웃으며, 농짝
뒤편을 받들어 쥐고 피카르와 함께 별당으로 올랐다.
젊은 과부는 캉 위에 걸터앉았다나 뜰 아래를 바라보니 메주덩이 같은 남편의 형 피
카르와 훤칠하게 잘생긴 청년 장교 한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왔던 부담 농짝을 마주
들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부리나케 캉 위에서 내렸다.
"에구머니나, 미안해서 어찌하나. 아랫사람들을 시키시지 손수 이렇게 가지고들 올라
오시나"
아리따운 교성과 교태는 두 젊은 사나이의 마음을 좀 집듯 했다.
피카르가 '흐흐흐' 웃으며 말한다.
"이 사람이 조심성 없이 함부로 들고 오는 것을, 혹시 상하기 쉬운 소중한 물건이 들
어 있으면 어찌하느냐고 타일러 내가 함께 가지고 왔소이다, "
연해 호들갑을 떨어 공치사를 했다.
과부는 두 손으로 농짝을 받아놓고 슬며시 청년 장교를 바라보았다.
씩씩하고 잘생긴 사나이다. 눈은 어글어글하고 코는 우뚝 섰다. 이맛전은 반듯하고
턱이 받쳤다. 키도 컸다. 기상이 씩씩했다. 메주덩이 같은 피카르는 말할 것 없지만 죽
은 남편 퉁맹가보다도 인품이 몇 등 윗길인 것같이 보였다.
과부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추파를 흘렸다.
과부가 보내는 추파를 받자 파쿠타는 비로소 용기를 얻썼다. 과부의 앞으로 두어 걸
음 가까이 갔다.
"아까 건주위 마천 추장과 함께 오실 때 먼 발치에서 뵈었습니다마는 인사를 못 드
렸습니다. 죽은 퉁맹가하고는 어릴 때 친구올시다. 남편을 전쟁터에서 잃으셔서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저는 티무르 추장님의 막하에 있는 아장 파쿠타올시다. 앞으로 기어코
돌아가신 남편 뿡맹가의 원수를 꼭 갚아드리겠습니다."
과부는 새침하게 서서 파쿠타의 말을 듣다가 다정스럽게 파쿠타의 얼굴로 눈을 보내
며,
"고맙습니다."
한 마디를 했다,
옆에 있는 피카르는 과부 제수와 파쿠타의 눈길이 마주치는 것을 보자 시기하는 마
음이 불현듯 일어났다,
"자아 파쿠타, 인제 짐을 다 전했으니 우리들은 어서 빨리 나가보도록 하세. 제수는
고단할 거야"
피카르는 파쿠타의 등을 가볍게 밀쳤다.
파쿠타는 불쾌했다. 그러나 처음 대하는 여인 앞에서 큰 소리를 치기도 난처했다.
"나가기로 하세"
목례를 과부한테 보내고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이날 저녁이었다. 큰아들 피카르는 아버지 티무르를 찾았다.
티무르는 건주위 마천 추장이 갖다 바친 우디거 딸의 초상화를 펼쳐놓고 아름다운
자태에 취해서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가, 아들 피카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황황하
게 족자를 말아 뒤로 감추었다.
피카르는 마음 속으로 웃었다.
'아버지도 별수없구나. 몸은 비록 늙었어도 마음은 늙지 아니한 모양이다. 우디거의
딸을 뺏어오고 싶은 모양이다.'
늙은 추장 티무르는 혼자서 골똘파게 우디거 딸의 초상화를 들억다 보다가 아들한테
들킨 것이 무료했다. 시치미를 떼고 딴소리를 한다,
"마천 추장 앞에서 우디거를 쳐서 막내의 원수를 한 달 안에 갚기로 단단히 약속을
했는데, 군비가 한 달 안에 잘 완비되겠느냐?"
"틀림없이 잘 되겠습니다. 오늘 곧 영을 내렸씁니다. 대장간에서는 칼과 창이며 쇠뇌
를 만들고, 솰을 만드는 궁방에서는 밤을 새워 살과 활을 만들라 했습니다."
"졸개들의 교련도 곧 시작해야 한다."
" 내일부터 각 부락에 영을 내려서 활쏘기와 말 달리는 연습을 맹렬하게 시작하겠습니
다."
"졸개와 패장들 에게만 맡겨서는 아니된다. 두목 되는 사람들이 솔선수범을 해서 무
술의 기예를 연마해야 한다. 너도 한몫을 단단이 보는 사람이지만 파쿠타의 무예는 출
중하다고 할 수 있다. 파쿠타를 시켜서 모든 패장과 졸개들의 무예를 가르치도록 해라"
"그리 하겠습니다."
피카르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내일이고 모레고 내가 한번 관전을 해야겠다. 전부락의 모든 추장과 족속들
을 모아놓고 크게 무술을 감상하는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피카르는 마음속에 딴 생각이 있어서 아버지를 찾은 것이다.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생각이 골똘했다.
"네, 네, 그리 하겠습니다."
또 한 번 건성 대답을 했다.
아비 티우르가 잠시 말을 그치는 틈을 타서 자식 피카르는 말을 꺼낸다.
"아버님께 한 말씀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죽은 아우 퉁맹가의 아내가 참 가엾고 불쌍합니다. 자식도 없는 터에 혈혈단신 외로
운 몸이 되어 개밥에 도토리같이 지낼 생각을 하니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저한테 본처
는 있습니다마는 함께 데리고 살까 합니다. 아버님께서 허락만 해주시면 그리 할까 합
니다."
이때 오랑캐 풍속에는 형이나 아우가 죽으면 형수나 제수를 데리고 사는 야만의 풍
속이 있었다.
"대해보니 똑똑하고 묘하더라. 제수가 싫다고만 하지 않는다면 데리고 살아보려무나"
아비 티무르의 허락을 받은 큰자식 피카르는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그럼 제수의 의견을 물어보겠습니다."
피카르는 마음이 거뜬했다. 휘파람을 불며 아비 앞에서 물러났다.
아비 티무르에게 제수를 데리고 살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피카르는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주보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했다. 쇠뿔은 단김에 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
다.
빼주 한 병과 양고기 튀김을 한 반 싸가지고 과부가 거처하는 별당으로 올라갔다. 밤
이 이슥하니 과부는 캉 위에 금침을 펴고 누워있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고단했다. 대답을 아니했다. 두 번, 세번, 요란하게 문을 두
드셨다.
"누구세요?"
"나요 나, 피카르요 문을 좀 열어주오"
메주덩이같이 보기 싫게 생긴, 죽은 남편 퉁맹가의 형이라는 피카르 목소리다. 귀치
않게 생각했다.
"밤이 깊었는데 웬일이시오?""
"좀 의논할 일이 있어 왔소 문을 열어주시오"
"자리에 누웠습니다. 내일 의논하시죠"
"긴히 오늘 밤 안으로 의논할 일이 있소 빨리 문을 열어주오"
"여자혼자 있는데, 깊은 밤중에 무슨 의논할 일이 있습니까?" 내일 낮에 의논하시죠"
"아버지 티무르의 명을 받아 왔소 어서 문을 열어주시오"
과부는 시아버지 티무르의 명을 받아 왔다는데 문을 아니 열어줄 수는 없었다.
흐트러진 머리와 의상을 바로잡고 안으로 걸린 문고리를 벗겼다.
불쑥 들어서는 피카르의 텁석부리 입에서는 술냄새가 물씬 났아.
마주치는 퉁맹가의 아내는 혐오의 감정이 왈칵 일어났다. 두어 걸음 물러섰다. 고개
를 돌렸다.
피카르는 머리가 둔한 데다가 술기운이 거나했다. 제수의 싫어하는 표정을 살피지 못
했다,
"흐흐흐, 내가 무어 남입니까. 한집안 식군데. 무얼 그리 스스러하시오. 흐흐흐"
치골 웃음을 연방 웃었다.
퉁맹가의 아내는 눈을 동그랗게 즈고 오똑 섰다. 어이가 없는 표정이다.
피카르는 술병과 안주를 사선상 위에 놓고 덥석 퉁맹가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앉으시오. 좀 할 이야기가 있소"
퉁맹가의 아내는 깜짝 놀랐다. 잡은 손을 홱 뿌리쳤다,
"손을 뿌리칠 것 무어 있어. 한집안 식군데, 흐흐흐 자아 앉으라고 아버지에 허락을
받았어"
"무슨 허락을 받으셨단 말씀입니까?" 말씀을 하십쇼"
"어떻게 서서 말을 하나. 자아 앉아요?"
퉁맹가의 아내는 마지못해서 캉 위에 반쯤 걸터앉았다.
피카르도 덜컥 캉 위에 앉았다. 사선상 위에 놓인 술병을 들었다.
"자아, 술을 따라주오. 한 잔 하시고 이야기를 꺼내지, "
팁석부리 시커먼 구레나룻이 뻗친 입에서는 여전히 술냄새가 물씬물씬 났다.
퉁맹가의 아내는 구역이 날 지경피었다. 백랍으로 빛어 붙인 듯한 예쁜 코가 살몃 냄
새를 피해 돌려졌다.
피카르는 술도 취했지만, 과부의 예쁜 코가 냄새를 피하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손에
든 술병을 억지로 과부의 손에 쥐어주었다.
"자아, 어서 술 한 잔을 따라주어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할 테니!"
과부는 시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송충이같이 징글맞은 시숙을 옆에
앉힌 채 술병을 받아 잔에 따라주었다.
피카르는 제수의 고운 손으로 따라주는 술잔을 받자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단숨에
쭉 들이켰다.
"안주를 집어 달라구"
과부는 기가 찼다.
"술은 따라드렸지만, 안주야 어찌 집어드립니까?""
"술을 따라준 것이나, 안주를 집어주는 것이나 매일반의 일이 아닌가. 흐흐흐. 술까지
따랐는데, 안주쯤 못 집어준다는 것은 말이 아니되네. 어서 집어주게, 입이 텁팁하이,"
이제는 말까지 반말이다.
"도대체 시아버님이 무슨 말씀을 했습니까?" 갑갑합니다. 어서 말씀합시오"
이때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는 듯했다.
피카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아무런 반응도 없다.
"누구야"
피카르는 벌떡 일어났다. 뚜먹뚜벅 걸어서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캄캄한 마루청에서 찬바람이 쏴아 하고 몰려들어왔다.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
"바람 소리로구나!"
피카르는 혼자 말한 후에 안심하고 문을 드르륵 닫았다. 과부의 앞으로 가까이 가서
다시 걸터앉았다.
"자아, 어서 안주를 집어 달라구. 안주를 먹은 후에 아버지의 말씀을 전할게"
과부는 하는 수 없었다. 양고기 한 점을 집어서, 팁석부리 수염 속에 벌려진 입 속으
로 넣어주었다.
"자아, 인제 어서 말씀하세요"
"가만히 있어! 씹고 난 후에 이야기를 할게,"
놈팽이는 양고기를 목구멍으로 꿀떡 삼키고 입을 열었다. 다정한 체 무릎을 과부의
다리 앞으로 밀었다. 술냄새와 양고기 냄새가 물씬 과부의 코를 또 찔렀다.
과부는 벌떡 일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참았다. 무슨 이야기인지 듣고 싶은 때문이다.
피카르는 대담하게 과부의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나는 당신을 가엾게 생각했소 내 아우가 뜻딴에 죽어서 청상과부가 되었으니 젊으
나 젊은 몸이 어찌 혼자 산단 말요. 더구나 아무런 소생도 없이 ! 참말 가여워요. 이곳
이 비록 시집이라 하나, 혼자 산다면 외롭고 쓸쓸해서 어찌한단 말이오. 그야말로 개밥
의 도토리지. 그래서 나는 아버지한테 말씀을 드렸어. 내가 당신을 아내로 삼아서 데리
고 살겠다고 우리 풍속에는 형수나 제수가 흘로 되면 데리고 살아야 하는 법이거든. 그
랬더니 아버지는 잘 생각을 했다고 벙글벙글 웃으면서 허락을 했어. 그리고 당자의 말
을 들어보라구 해서 오늘 밤에 승낙을 받으러 온 길이야"
과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캉에서 발딱 일어섰다. 오똑 서서대답한다.
"싫습니다?"
또렷하게 대답했다.
죽은 남편 퉁맹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둘째 번으로 몸을 허락했던 건주위 투
장 이만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두 피카르보다 사내답게 잘생긴 남자들이다. 정절을
지키자는 것은 아니다.
두 번씩이나 사내를 겪어보았다. 메주덩이같이 못생긴 치골 피카르한테는 정이 떨어
졌다. 십 리만큼 달아나고 싶었다, 아무리 과부 형수와 과부 제수를 데리고 살게 하는
이 고장 풍속이라 하나 지지리 못난 치골인 텁석부리 피카르에게 몸을 허락해서 남은
평생을 살고 싶지는 아니했다.
앞으로 시집인 이곳에서 골을 뉘게 된다면 피카르 아닌 딴남자를 얻어서 살아야 하
겠다고 생각했다.
어제 부담농짝을 가지고 들어왔던 파쿠타의 훤칠하게 잘생긴 사내다운 그 얼굴이 떠
올랐다. 죽은 남편 퉁맹가보다도 잘생겼다. 이만주보다도 잘생겼다. 기왕 남편을 세 번
째나 고친다면 훨씬 사내다운 남자한테 몸을 바치리라 생각했다.
"왜, 싫어?"
피카르의 두 눈이 실쭉하게 올라붙었다. 시커먼 구레나룻이 고슴도치 털 뻗치듯 꼿꼿이
일어섰다,
"앉아서 말을 하라구"
잼처 질뚝배기 깨지는 소리가 떨어졌다.
과부는 새침하게 여전히 오똑 섰다. 피카르의 갈고리 같은 억센 손이 연약한 과부의 팔
을 억세게 휘어잡았다. 우격다짐으로 캉 위에 앉혔다.
"왜 싫어?" 내가 못나서 싫단 말인가?""
"아니올시다. 천만에,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러면 왜 싫단 말야, 바른 대로 대답을 하라구"
피카르의 치떠진 눈에는 불이 붙었다. 왈칵 과부의 연약한 어깨를 흔들었다.
"나하고 살기 싫다는 까닭을 어서 대보란 말야!"
목소리는 점점 저 괄하고 높았다. 과부는 대답에 궁했다. 퍼뜩 머릿속에 섬광이 번쩍
했다.
"저는 압록강 북편에서 생장한 건주위 태생이올시다. 압록강 남안에 살고 있는 예의
의 나라 조선 사람들의 훌륭한 풍속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알 뿐만이 아니라 건주위 사
람들은 모두 다 조선 풍속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불취동성이라 해서 성
만 같아도 피가 통했다고 혼인을 아니합니다. 황차 어떻게 죽은 아우의 아내를 첩으로
삼고 형수를 아내로 삼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개나 돼지의 짓이올시다. 그래서 건주
위 제 고장에서는 형수와 제수를 아내로 삼는 이 풍속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까닭에 저
는 싫다고 말한 것입니다."
"무어야, 개와 돼지 같다?" 건방지타다 형수나 제수가 무슨 피가 섞였단 말야. 당치
않은 소리 말라구! 쓸데없는 객담 작작하고 나하구 살자구?"
피카르는 과부의 손을 또 한 번 잡아당겼다.
과부는 피카르의 잡은 손을 뿌리쳤다.
피카르는 말로 달래서 듣지 아니할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한테 허락을 맡았어. 너는 내 계집야!"
버럭 소리를 지르자, 우격다짐으로 과부의 허리를 번쩍 껴안아 캉 위에 자빠뜨렸다.
옷과 치맛자락이 흐트러졌다. 과부는 사람 살리라고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위기일
발의 형세였다.
뜻밖이었다. 홀연 지게문짝이 활짝 열렸다. 한 사람의 청년이 장검을 뽑아들고 꾸짖
으며 뛰어들었다.
"이놈, 이것이 무슨 개, 돼지 같은 수작이냐?"
남녀가 바라보니 아장 파쿠타다.
과부는 살았다고 한숨을 짓고 피카르는 무안하기 짝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야?""
청년은 칼을 번쩍 들어 사선상을 후려쳤다. 빼주병과 양고기 담은 소반이 와르르 상
아래로 쏟아졌다.
과부는 캉에서 일어나 의상을 바로잡고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었다. 피카르는 무안
한 얼굴로 변명을 한다.
"그런 게 아냐. 제수가 하도 외롭고 불쌍하고 가엾기에 아버지한테 말하고, 허락을 얻
었어, 아내로 삼아도 좋다구"
무료하고 면난한 얼굴로 파쿠타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변명을 했다.
"그래, 제수도 허락을 했나?""
피카르는 말문이 막혔다. 고개만 끄덕였다.
파쿠타는 벌컥 소리를 질렀다.
"허락을 했다면 사람 살리라고 외마디 소리를 칠 리가 있나! 이 뻔뻔스런 도둑놈아?"
파쿠타는 칼끝으로 피카르의 얼굴을 향하여 상앗대질을 했다.
이제는 피카르도 참을 수 없었다. 골이 벌컥 났다. 계집 앞에서 계속해서 수모를 당할
수는 없었다.
"이 자식아, 남의 일에 무슨 참견이냐. 왜 뛰어들어왔어?" 누구를 훈계하는 거냐?"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파쿠타의 턱을 후려쳐 갈겼다.
파쿠타는 끄떡도 아니했다. 긴 칼을 짚고 떡 버키고 섰다.
"순력을 돌다가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 뛰어들어왔다! 이 부락에 순력을 도는 것
은 추장님이 나에게 맡긴 임무다! 들어와보니 이 꼴이로구나! 네가 차마 이따위 개 같
은 짓을 할 줄은 몰랐다. 네가 제수가 맘에 있어 데리고 살고 싶으면, 아무리 부모의
허락을 맡았다 해도 당자의 승낙을 받아야 하는 것이 관례다. 그리고 또다시 모든 부락
사람들에게 혼인을 공포한 후에 잔치를 하고 비로소 신방을 치르는 법이다. 이것이 무
슨 짐승의 짓이냐?"
파쿠타는 쾌쾌하게 피카르를 꾸짖는다. 의젓하고 씩씩한 태도는 실로 사나이다됐다.
과부의 아름다운 눈길이 자주 파쿠타의 사내다운 모습을 취한 듯 바라본다.
파쿠타의 시원스럽게 잘생긴 눈이 과부에게로 향했다.
"아주머니는 피카르의 둘째 아내 되기를 원하십니까?""
흑의미인은 상긋 웃었다. 파쿠타에게 강한 매력을 풍겨주는 요염한 웃음이었다.
"원치 아니합니다?"
또렷하게 대답했다.
파쿠타는 슬몃 미소를 풍기며 흑의미인을 향하여 다시 묻는다.
"어찌해서 원치 아니하십니까7"
"아무리 기구하게 팔자를 타고난 계집이라 하나 아우에게 몸을 바쳤던 여자가 어찌
그 형에게 또다시 몸을 허락할 수 있습니까. 저희 고장 건주위에서는 예의지방인 조선
풍속을 배워서 금수같은 풍속이 없어진 지 오래올시다. 사람의 짓이 아니라 금수의 짓
띠라 해서. 그래서 저는 이런 일을 원치 아니합니다."
과부 미인의 말을 듣자 청년 파쿠타는 유쾌한 듯 소리를 높여 껄껄웃었다.
"좋은 말이올시다. 형제간에 함께 살던 여자를 또다시 아내로 삼는 다는 일은 과연
야만의 짓이올시다. 우리 오도리족도 대국 조선의 본을 떠서 차차 이러한 짐승의 짓을
없애야 합니다. 당신은 좋은 훈계를 우리 족속들에게 주시었습니다."
파쿠타는 말을 마치자 짚었던 칼을 칼집에 꽃고 얼굴빛을 부드럽게 해서 피카르의
등을 툭툭 쳤다.
"피카르! 자아, 이제 우리 나가기로 하세. 남들이 들으면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일세.
흔인 약속도 아니하고 먼길에서 온 불쌍하기 그지없는 과부 제수를 욕뵈려 했다구. 참
으로 수치스런 일일세. 군사들이 들으면 사기까지 떨어지네. 두목이란 것이 저 꼴이냐
고. 졸아치들에게 군령이 서지 않을 것일세! 그리고 자네 제수는 자네와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또렷이 말했네 ! 단념하고 나가세!
이때 피카르는 몸에 촌철도 갖지 아니했다. 파쿠타는 칼을 가졌으나, 피카르는 술과 안
주를 가지고 오느라고 칼 한 자루, 화살 한대도 몸에 지니지 아니했다. 맨주먹이었다.
생각대로 한다면 곧 파쿠타를 칼로 찌르든지, 살로 쏘아 숙이고 싶었다. 그러나 도리
가 없었다. 맨주먹으로 대결할 수는 없었다.
자기가 취중에 너무나 급하게 서둘렀던 것을 후회했다.
파쿠타의 말대로 부락 사람들한테 제수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통문을 돌린 후에 서
서히 잔치를 하고 아내를 삼을 것을 너무나 급히 서둘렀다고 생각했다.
못이기는 체 기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쿠타는 또 한 번 호방하게 웃었다.
"피카르도 역시 사내 대장부다! 장차 아버지 티무르의 뒤를 이어 우리 오도리족을
통솔할 큰 인물이다. 그렇지, 모든 일을 사내답게 탁 단념하고 나가야지?"
파쿠타는 야유하는 듯, 추어올리는 듯 쾌활한 음성 속에 웃음을 반죽해서 말하면서 피
카르의 팔을 끼고 뚜벅뚜벅 걸었다. 나가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혹의미인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밤늦게 너무나 놀라셨습니다. 이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문을 걸어 잠그시고
안심하고 주무십시오"
흑의미인은 씩씩한 청년의 행동에 취했다. 말없이 눈웃음을 보냈다.
피카르는 주먹맞은 감투가 되어 파쿠타에게 힘없이 끌려나갔다.
원래 오도리족의 아장 파쿠타는 한선 퉁맹가의 아내였던 과부 혹의미인을 대해본 후
에 피카르와 매한가지로 흠모의 정을 주체할 길 없었다.
부탁도 아니했던 혹의미인의 행리를 별당에 자리잡은 과부의 처소로 가져가기도 하
고, 추장의 큰아들 피카르를 만나서 은근히 시샘하는 자극을 받아보기도 했다.
그 눈, 어글어글한 그 맑고 푸른 과부의 호수 같은 눈길이 매력 있는 다정을 피카르
에게보다 자기에게 보냈을 때, 파쿠타는 확실히 과부가 자기에게 더 호감을 가지고 있
는 것을 느꼈다. 그 눈, 그 아름다운 다정한 눈의 세례를 한 번 받은 파쿠타는 잠시도
그아름다운 눈을 잊을 수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눈이 머리에 떠올랐다. 말을 타고 달릴 때도 그 눈이 마와 같이
눈앞에 떠올랐다. 활을 쏠 때나 창을 쓸 때도 그 아름다운 눈은 아련히 앞에서 어른거
렸다.
파쿠타는 오도리 성안을 순찰하는 책임을 맡은 두목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과부가
거처하는 별당도 파쿠타가 순력을 도는 지역 안에 들어 있었다.
파쿠타에게 있어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 바퀴 성안을 돈 후엔 반드시 별당 근처로
열 번 스무 컨 순력을 돌았다.
혹시나 또 한 번 요염한 과부의 자태를 가까이할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염원에서
였다.
이날 밤도 한 바퀴 성안을 돈 후에 별당 주위를 몇 차례 돌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으슥한 곳에서 별당의 불빛을 멀리 바라보고 있을 때 돌연 멀리서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콧노래를 부르며 별당으로 향해오는 자가 있었다.
멈칫 걸음을 멈추고 어두컴컴한 곳에 몸을 숨겨서 바라보았다.
키가 작달막하고 뚱뚱한 자가 손에 술병과 반-을 들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별당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피카르다.
'저자가 또 치골의 추태를 부리러 과부한테로 올라가는구나!'
삼분의 호기심과 칠분의 시기심이 불꽃 튀듯 일어났다.
콧노래 부르며 올라가쁜 피카르의 뒤를 슬몃슬몃 들키지 아니할 정도로 따랐다.
피카르는 별당에 오르자 잠겨진 문을 두드렸다. 과부는 문을 열어주지 아니했다.
자꾸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고 애걸을 하는 모양이다.
과부는 밤이 늦었다고 아니 열어주는 모양이다.
피카르는 아버지의 명을 받아서 왔다 했다. 겨우 문이 열려졌다.
파쿠타는 발자취를 죽여 가만히 별당 마루청으로 올랐다.
방 안에서 발자취 소리를 들은 또양이다. 피카르는 방문을 획 젖혔다. 누구냐고 호통
을 쳤다.
파쿠타는 날쌔게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아무도 없었다. 피카르는 바람 소리라고
중얼거리며 문을 다시 닫았다.
제수보고 술을 따르라 했다. 치태가 계속해서 벌어졌다. 파쿠타는 주먹을 쥐고 부르
으 떨었다. 사람 살리라는 소리가 일어났다. 파쿠타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위기일발의
사이에 칼을 빼어들고 방안으로 들어가 난륜을 모면케 했던 것이다.
며칠 후의 일이다. 오도리족의 늙은 추장 퉁맹가 티무르는 돌연 관 전령을 내렸다.
티무르는 밤마다 시자들을 물리치고 건주위 마천 추장이 갖다 바친 우디거 딸의 아
름다운 초상화를 벽에 걸고 바라보고 있었다.
볼수록 예쁘고 아름다웠다. 막내아들 퉁맹가의 원수도 갚으려니와 마천 추장의 말대
로 우디거의 아름다운 딸을 뺏어다가 낙을 보고 싫은 생각이 가슴 안에 뿌듯했다, 당치
아니한 노욕 이었다.
전쟁준비를 하라고 한 달 기한을 준 그 시기가 너무나 길었다고 생각했다. 일각이 삼
추 같았다. 어서어서 우디거를 쳐부숴버리고 아들의 원수를 갚은 후에 우디거의 딸을
사로잡아서 소실을 삼아놓고 무궁한 행락을 누려보고 싶었다.
티무르는 큰아들 피카르와 아장의 꼭지인 파쿠타에게, 돌연 관전명령을 내린 것이다.
두목과 졸개들의 무예가 출중하게 되면 한 달 기한이 차지 아니했다 하더라도 군사글
휘동하여 우디거를 습격할 작정이었다.
늙은 추장 티무르의 관전명령을 받은 오도리족의 군사 오천 병마는 일제히 성 밖 넓
은 벌에 집결되었다.
보병과 마군은 기치창검을 휘날리며 부서에 따라 정돈되어있고, 장대 넓은 단 위에는
늙은 추장 퉁맹가 티무르를 위시하여 남녀노소 각 부락의 추장과 파자들이 자키잡고
있었다.
티무르의 옆에는 죽은 퉁맹가의 아내 혹의미인과 건주위의 특사로 왔던 마천 추장도
참관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관전식은 요란한 호가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보졸의 일대대가 화살 꽃은 전통을 어깨에 메고, 칼을 빼어들고 지휘하는 패장 피카
르의 뒤를 이어 뚜벅뚜벅 발을 맞추며 장대 앞에 나와 티무르 노추장을 향하여 군례를
드렸다. 티무르는 만족한 듯 손을 흔들어 답례를 했다. 모든 추장들의 손뼉치는 소
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티무르 노추장 옆에 앉아 있는 퉁맹가의 아내였던 과
부 미인은 손뼉을 치지 아니했다.
저희 고장 건주위 보졸에 견주어 행군하는 걸음걸이와 태도는 반의 절반도 미치지
못했다. 더구나 영솔한 패장은 메주덩이 같은 얼굴에 구레나룻이 고슴도치 털같이 뻗친
치골한인 피카르다. 며칠 전날 밤의 일을 생각하니 구역이 날 지경이었다. 제수인 자기
방에 연통도 없이 쫓아들어서 욕을 뵈려던 위인이다. 칼을 들고 지휘하는 꼴도 변변치
못했다. 가래침을 메주덩이 같은 얼굴판에 탁 뱉어버리고 싶었다. 손뼉이 쳐질 까닭이
없었다. 얼굴에는 모멸의 표정이 가득하게 넘쳐흘렀다.
동행했던 건주위 마천 추장이 옆에서 말했다.
"보졸을 거느리고 나오는 패장은 오도리족의 노추장의 큰아들 피카르라 합니라. 손뼉
을 쳐줍시오. 아씨의 큰 시아주버니가 됩니다, "
과부는 싱긋 웃었다.
"우리 건주위 군사들의 행진하는 규율에 비한다면 바무것도 아닙니다. 박수를 쳐줄
건덕지가 있어야 쳐주지요"
냉랭하게 대답했다.
보졸의 행진이 지나간 후에 붉은 깃발을 펄럭이며 마군 일부대가 줄을 지어 나왔다,
앞을 서서 지휘하고 나오는 꼭두 패장은 사내답게 잘생긴 파쿠타였다. 머리에 붉은 복
닥이 쓰고 철편으로 비늘을 달아 지은 갑옷을 입었다. 철총준마 위에 높이 앉아 긴칼을
뽑아들고, 전군을 지휘한다. 눈에는 별빛 같은 정기가 초롱거리고 호령 소리는 장대 위
마루판을 쩌렁쩌렁 울렸다. 뚜벅뚜벅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는 보조가 척척 5들어
맞았다. 마군들의 모습도 씩씩하고 정돈되어 있지만, 짐승인 말들까지도 일사불란의 훈
련이 되었다,
파쿠타는 장대 앞에 당오하자 장검을 비껴들고 우레 같은 구령을 불렀다. 2천 병마가
일제히 장대를 향하여 칼을 번쩍 들었다.
싸늘한 백광이 창공 위에 일제히 횐 무지개를 뿜었다.
파쿠타의 마군이 단상을 향하여 군례를 드리는 것이다.
박수갈채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며 일어났다.
단상에 앉은 흑의미인은 입이 함박만큼 벌어졌다. 손바닥이 아프도록 손뼉을 쳤다.
맨 처음 자기가 이곳 별당으로 왔을 때 친절하게 짐짝을 갖다주었던 파쿠타다. 단 한
번에 그에게 정이 들었다, 너무나 사내답게 잘생긴 탓이다. 죽은 남편 퉁맹가보다도 인
품이 위요, 둘째번으로 몸을 허락했던 건주위 추장 이만주보다도 더 잘생긴 탓이었다.
더구나 지난번에는 시숙 피카르가 치태를 부려서 난폭한 행동을 하려던 찰나에 자기
몸을 구해주었던 은인이다.
흑의미인은 파쿠타에 대한 연정이 양춘가절 양지쪽에 애탕쑥 솟아나듯 파릇파릇 솟
아났다.
다른 사람들이 열 번 박수를 칠 때, 흑의미인은 스무 번 서른 번 손뼉을 쳤다.
손뼉만 칠 뿐이 아니었다. 잔잔한 웃음물결이 아름다운 눈매와 입가에 다실 줄을 모
르고 넘쳐흘렀다.
손뼉을 치고 웃을 뿐만이 아니었다. 공연히 마음이 군성거렸다. 옆의 사람에게 말이
하고 싶었다.
마천 추장의 소매를 지그시 손가락으로 눌렀다,
"저 사람이 마군 지휘 파쿠타라지요?"
"그렇답니다."
"사내답게 씩씩하게 잘생겼습죠?"
"잘생겼구먼_-
"말도 잘 타고 군사들의 훈련도 잘 시켰는데요"
"그렇습니다."
"아까 보졸 지휘보다 월등하게 낫죠?"
'탓습니다."
"아까 보졸 지휘는 우리 죽은 남편의 형이라는데, 천양지판 이로군요. 지지리 못생겼습
니다."
"얼굴도 메주덩이 같고, 텁석부리 구레나룻은 고슴도치 털같이 뽀죽뽀죽 뻗쳤군요"
혹의미인의 마음 속을 알지 못하는 마천 추장은 목낭청 대답하듯 싱겁게 대답만 했
다.
사열이 끝난 후에 마눈과 보졸의 무예 겨룸이 시작되었다. 먼저 활쏘기 놀음이 시작
되었다. 보졸 대표로는 피카르가 전통에 백우전을 가득 꽃아 어깨에 메고 나오고, 마군
편에서는 파쿠타가 화궁을 들고 금비전을 메고 나타났다. 모두들 두 패장의 모습을 눈
을 씻고 바라본다. 퉁맹가의 아내 과부도 맑은 눈을 들어 두 장수의
모습을 바라돈다. 역시 마군 패장인 파쿠타의 늠름한 모습이 눈에 들
었다.
과녁은 백 걸음밖에 세워 있었다.
두 장수는 뚜벅뚜벅 걸어 마주섰다. 병졸 한 명이 뛰어나왔다. 반위에 접은 종이를
받쳐들었다. 누가 먼저 쏘고 나중 쏘는 차례를 정하려는 것이다. 파쿠타와 피카르는 접
은 종이 하나씩을 펴보았다.
피카르의 입이 벙긋 벌어졌다.
"내가 먼저다!"
소리치며 과녁이 놓인 백 걸음 밖 사수썬골)가 서 있을 곳으로 달음질쳐 나갔다. 남
에게 지지 아너하려는 성격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파쿠타는 유유하게 웃으며 대꾸한다.
"잘되었네. 먼저 쏘게나?"
피카르는 과녁을 향하여 깍지를 엄지손가락에 끼고 쏘려는 자세를 취했다.
북이 '두리둥둥 울렸다.
활시위에 메겨진 백우전 화살은 푸르르 날았다.
살은 소리치며 허공을 끊었다. 정통을 맞히지 못하고 셋째번 테두리 안에 꽃혔다.
단상의 모든 시선이 과녁으로 모여들었다.
"아깝다!"
소리가 일어났다.
북소리가 또 한 번 '두둥둥 울렸다.
이번에는 파쿠타가 의젓이 걸어나가 백 걸음 밖에 섰다.
금비전 한 대를 전통에서 쑥 뽑아 현에 메기고 활을 힘껏 당겼다. 금비전 화살은 바
람을 끊고 과녁을 쏘아 '팍' 소리를 내었다.
과녁 한복판을 보기 좋게 쏘아 맞혔다. 환호성이 일어났다. 손뼉을 치는 소리가 우레
같았다.
그중에 많이 손뼉을 치는 사람은 죽은 퉁맹가의 아내 청상과부였다.
피카르는 세 번을 쏘아 겨우 한 번을 맞혀서 일중을 하고, 파쿠타는 세 번을 쏘아서
내리 삼중을 했다.
환호성은 천지를 진동했다. 과부의 손뼉은 터질 듯했다.
삼중을 쏜 파쿠타는 태연자약했으나 피카르의 얼굴은 누르락푸르락 했다.
다음은 다시 창쓰기 경기가 시작되었다. 진짜 창을 쓴다면 상할 염려가 있다. 길고
긴 죽창 끝에 헝겊을 두둑하게 싸서 끄나풀로 매고 헝겊에는 회칠을 했다, 찔리는 대로
흔적이 남아 있어서 몸체 회 자국을 많이 받은 자가 지게 되는 것이다.
파쿠타와 피카르는 북소리와 함께 창쓰기를 시작했다. 치고 찌르고 피하고 찔렀다.
북이 울리며 싸움은 그쳤다.
파쿠타의 몸에는 휜 자국이 두 점뿐이요, 피카르의 몸에는 만신창이다.
박수 소리가 또다시 진동했다. 과부의 손뼉은 더욱 열을 올렸다.
이번에는 마군들의 무예 자랑이었싸. 마군 백여 기는 일제히 청룡도와 장창을 들고
준총 위에 높이 앉았다.
위수패장은 파쿠타다. 무쇠빛 철총을 타고 장창을 비껴 들었다. 위풍이 늠름했다. 붉
은 복닥이 밑에 드러난 얼굴판은 두었다 보아도 정말 미남자다. 죽은 퉁맹가의 아내 혹
의미인은 단상에서 얼이 빠진 듯 파쿠타의 일동일정을 바라보고만 있다.
마군들은 큰북 소리를 군호로 하여 달리기를 시작했다. 넓고 넓은 허허벌판에 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앞선 말이 떨어지고 뒤의 말이 앞을 섰다. 손뼉치는 소리가 우레같이
일어난다. 앞서기 뒤서기를 열 번 스무 번 번복했다. 그러나 언제나 유유하게 앞장을
서서 달리는 말은 파쿠타의 말 철총이었다.
말도 품이지만 말을 어거하는 마술이 능란한 때문이다.
이곳 저곳에서 칭찬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파쿠타가 제일이다?"
"역시 대장감이다?"
도처에서 파쿠타를 칭찬하는 소리를 귀담아듣고 있는 혹의미인의 입가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끊일 사이 없이 서려졌다. 그러나 마졸편에서 바라보고 있는 피
카르의 눈은 실북하게 올라붙었다.
다음에는 장애물이 놓인 마술경기다. 나무로 등상을 만들어서 산더미같이 쌓아놓았
다.
마졸들은 두 층 세 층을 놓고 뛰어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섯 층, 여섯 층을 놓고는 뛰어넘지 못했다.
파쿠타의 철총은 일곱 층, 여덜 층을 놓아도 어려움 없이 훌훌 뛰어넘었다.
손뼉치는 소리가 또다시 하늘과 땅을 흔들었다. 혹의미인은 손에 땀이 자르르 흘렀
다. 간장이 오그라질 듯하다가 펴졌다. 즐거운 외마디 소리가 쇠도 끊을 듯 분홍 장미
같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발을 동동 굴렀다.
마졸편에 서서 바라보는 피카르는 손뼉치는 부하에게 퉁명스럽게 말을 던진다.
"말이 용하지 파쿠타가 말을 잘 타는 것은 아니다. 나도 파쿠타가 가진 철총마들 탄
다면 그 이상은 뛰어넘을 것이다!"
졸아치 군사들은 외면을 하고 소리 없이 픽 웃었다.
관전식은 큰북 소리를 군호로 하여 끝이 났다.
모든 추장들은 무예가 출중했던 장졸들에게 상을 주기 위하여 일등과 이등과 삼등을
고르기 시작했다.
일등에는 활을 쏘아 삼연중을 하고 마술에 능통한 파쿠타요, 이등에는 티무르 늙은
추장의 아들 피카르였다.
늙은 추장은 파쿠타와 피카르를 단상으로 불러 올렸다,
티무르는 파쿠타에게 화궁 한 개와 보검 한 자루를 주고, 피카르에게는 각궁 한 개를
내렸다.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이때 죽은 퉁맹가의 아내 혹의미인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회오리바람 일듯
일어나는 애련의 충동을 이겨낼 수 없었다.
대담했다. 자기 목에 걸었던 분홍 산호 목걸이를 훌떡 벗어서 파쿠타의 목에 걸어주
었다.
손뼉치는 소리가 온 군중에 요란하게 일어났다.
파쿠타는 늙은 추장 티무르가 내리는 화궁 한 개와 보검 한 자루보다도 혹의미인이
아름다운 목에 걸었던 분흥 산호 목걸이를 손수 자기 목에 걸어준 뜻밖의 일이 더욱
기뻤다. 코가 사뭇 벌룽거렸다.
티무르 추장한테 예를 마친 후에 혹의미인을 향하여,
"영광스럽습니다?"
한 마디를 하고 뚜벅뚜벅 걸음을 걸어 단 아래로 내렸다.
피카르는 제수인 혹의미인이 흘연 산호 목걸이를 벗어서 파쿠타의 목에 걸어주는 광
경을 보자 시기하는 마음이 불꽃을 뿜었다.
성난 눈으로 흑의미인을 흘겼다. 눈에 불이 활활 붙었다. 쌍심지가 타올랐다. 제수를
향하여 눈을 부릅떠 노려보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무료하게 단하로 내려서서 보졸들
이 나열한 곳으로 향했다.
군사들이 수군수군 지껄여댄다.
"야! 파쿠타야말로 영광이로구나! 추장이 주는 상보다도 과부가 자기 목에 걸었던 산
호 목걸이를 주었으니, 얼마나 좋겠느냐!"
"좋구말구. 더구나 조인광좌 중에 과부가 손수 목에다 걸어주었으니 얼마나 행복스러
우냐 말이다."
"아마 과부가 파쿠타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지?"
"미상불 파쿠타야말로 여자들이 보면 마음이 아니 흔들릴 수 없게 잘생겼느니라. 거기
다가 무예가 그만큼 출중하니 내가 여자라도 반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또 파쿠타
는 마직도 장가 전인 총각이 아니냐?""
이때 한 자가 '흐흐흐' 웃음소리를 크게 내며 말한다.
"흐흐흐, 배아픈 사람이 한 사람 있을 것일세"
"누가 배를 앓는단 말인가?"
"배꼽이 두려빠지도록 배아픈 사람이 한 사람 있단 말야!"
"사촌이 땅을 샀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배를 앓는단 말인가?"
"추장님의 큰아들 피카르 말일세, "
"피카르 패장이 왜 배를 앓는간 말인가?"
"이 사람, 아주 맹문일세그려. 그렇게 눈치를 못챘나?" 우리 패장은 연신 제수한테
반해서 사족을 못쓰는 판일세. 건주위에서 제수 과부가 올 때부터 그 예쁜 얼굴에 흘딱
반했거든. 손수 별당을 청소해주고, 밤이면 술에다가 고기에다가, 갖은 공궤를 다해 받
들었지, 그렇지만 제수는 거들떠보지도 아니했거든. 하하하, 소박쓸 당했단 말야. 흐흐
흐
"너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나는 두 번씩이나 별당 보초를 서서 대강 알고 있다. 과부는 파쿠타한테 마음이 있
나보더라, 아까도 산호 목걸이를 자기 목에서 훌떡 벗어서 파쿠타의 목에 걸어주지 않
더냐. 그러니 피카르 패장이 배가 아프지 않겠느냐 말이다. 일등상도 파쿠타한테 뺏기
고 제수의 산호 목걸이 또 파쿠타에게로 돌아갔으니 얼마나 분하고 배가 아프겠느냐
말이다?"
모두들 이와 같이 찧고 까불고 있을 때 심통이 잔뜩 뻗친 피카르가 보졸들 앞에 나
타났다.
보졸들은 일제히,
"쉬--"
소리를 쳤다. 그러나 피카르는 '얼마나 배가 아프겠느냐' 하는 소리가 귓결에 들렸
다.
심통이 잔뜩 난 피카르에게 불을 더한층 붙여준 격이 되었다.
피차르는 자기를 비웃는 소리인 것을 직감했다. 손에 들었던 등채를 높이 들어 지껄
이고 있던 보졸들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아이쿠'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일어났다.
"이놈들아, 무어 어쩌고 어째?" 배가 아파! 누구 배가 아프겠단 말이냐?" 대답을 해
보아라!"
피카르는 등채로 모조리 사매질을 쳤다.
말한 놈이나 말하지 아니한 놈띠나 옥석구분 격이 되었다.
말참견도 아니했던 한 자가 까닭 없이 사매질을 당하는 동료들을 보자 기가 막혔다.
부아가 불끈 터졌다. 벌떡 일어섰다.
"패장님 ! 너무나 심하십니다. 졸아치들은 아주 죽을 놈들입니까?" 교련을 마친 후에
패장이 수고했다고 졸아치들을 위로는 못해줄망정, 배가 아프겠다는데 왜 모조리 사매
질을 치시오?" 교련 끝에 체증이 생겨서 배를 앓는 놈도 있고, 구토 설사하는 놈도 있
을 텐데, 배아프단 말이 무슨 죄가 되어서 함부로 두들겨주오?" 나는 입 한 번 벌린 일
없소마는 의분을 참을 길 없어 한 마디 하오?"
말을 마치자 불끈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피카르는 더욱 분통이 터졌다.
"무엇이 어쩌고 어째?" 교련 뒤에는 체증이 생기는 놈도 있고 구토 설사하는 놈도
있다?" 이 자식, 건방지구나?"
등채를 번쩍 들어 면상과 목줄기를 사정없이 짓갈겼다.
얼굴과 목덜미에서 유혈이 낭자했다.
수백 명 보졸들은 이 잔인무도하고 포악한 행동을 목격하자 의분이일시에 폭발되었
다.
일제히 '악' 소리를 치고 일어났다. 피카르를 향하여 주먹질을 하고 소리친다.
"왜 쇠 없는 군사들을 두들겨주는 거냐?" 패장이면 제일강산이냐?""
금방 곧 변란이 일어날 것 같았다.
이때 건너편 마군편에서 이 모양을 바라보던 파쿠타는 보졸들이 피카르를 둘러싸고
난동질을 치는 것을 보자 심상한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급히 걸음을 옮겼다.
보졸들의 얼굴엔 유혈이 낭자하고, 피카르는 주먹질이 어지러운 사면초가, 곤궁한 속
에 빠져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위기일발의 상태였다.
파쿠타는 유혈이 낭자한 보졸의 얼굴을 씻어준 후에 지휘봉을 흔들어 큰 소리로 보
졸들을 어루만져 위로한다.
"추갈님이 모처럼 관전을 하시고, 앞으로 우리들은 큰일을 해야 할 이 시기에 여러분
보졸들이 이같이 무질서한 행동을 취한다면 장래 일이 어찌 되겠나! 자아, 무슨 일인지
는 모르지만 여러분은 참으시고 질서를 유지해주시오"
파쿠타의 목소리는 장중했다. 모든 졸아치들은 파쿠타의 인품에 눌렸다. 피카르를 둘
러싼 것을 풀어놓고 한 사람 두 사람 제자리로 돌아갔다.
파쿠타는 피카르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이것이 도대체 웬일인가?" 자네는 몹시 피곤했나보이. 영 안으로 들어가 잠깐 쉬는
것이 좋겠네?"
피카르의 눈이 실쭉하게 찢어졌다. 파쿠타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자 눈이 뒤집혔
다.
"이 자식아, 너는 무슨 참견야?"
등채로 파쿠타의 뺨을 갈겼다. 계속해서 파쿠타의 목에 걸린 산호 목걸이를 잡아채
낚았다.
분홍빛 산호 목걸이 줄이 탁 끊어지면서 등글등글한 산호 구슬이 와르르 땅바닥으로
흩어졌다, 피카르는 흙발길로 산산이 흩어진 산호 구슬을 으깨려 했다.
이때 단 위에서 아직 물러가지 아니하고 있던 혹의미인은 급히 단 아래로 내려가 파
쿠타가 봉변을 당하는 곳으로 달음질쳐 뛰어갔다. 건주위에서 동행했던 마천 추장도 급
히 뒤를 따랐다.
흑의미인은 파쿠타에게 지극한 연모의 정으로 바친 잔심의 산호알이 진흙발길에 밟
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산호알을 알알이 주웠다. 마천 추장도
황황히 산호 구슬을 주워서 미인에게 넘겨주었다. 보졸들도 우르르 달려나와서 구슬을
주워 과부 미인에게 넘겼다.
한편 파쿠타의 태도는 여유가 작작했다.
등채로 자기 몸을 후려쳐 갈기는 피카르◎ 손을 탁 잡았다.
"이 사람아, 노갑이을도 분수가 있지, 군사들에게 노한 것을 왜 나에게 분풀이를 하
나. 자네 오늘 군사훈련을 시키느라고 심신이 몹시 피로한 모양일세. 자아 나하고 영문
으로 들어가 잠깐 쉬기로 하세, "
피카르는 파쿠타의 달래는 말이 귀에 들어가지 아니했다.
또다시 등채를 들어 파쿠타의 뺨을 갈겼다.
"이 사람아, 왜 이러는 건가?" 머리가 돌았구나. 이쪽 뺨을 마저 때려주게나! 하하하"
파쿠타는 껄껄 웃으며 피카르의 앞에 왼편 뺨을 들이댔다.
이쯤 되니 피카르는 다시 더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등채를 홱 땅에 내던지고,
"항할 자식. 네깐 놈하고 함께 가지 아니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서 교련장 밖으로 사라졌다.
청낭과부 흑의미인은 마천 추장과 보졸들의 도움을 받아 흩어진 산호 구슬을 모조리
주워서 수건에 쌌다.
파쿠타는 미인 앞으로 다가서서 목례를 보내고 은근하게 인사를 보낸다.
"모처럼 주신 패물이 땅에 떨어져서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소박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과부는 방긋 웃고 대답했다.
"관계치 않습시다. 산호알은 한 개도 깨진 것이 없습니다. 마천 추장님과 보졸들이
도와주셔서 한 알도 잃어버리지 아니했습니다. 다시 줄에 꿰어서 당신한테 올릴 테니
틈 계시는 대로 한번 들러주십쇼"
과부는 파쿠타에게 미소를 지어 인사한 후에 마천 추장과 함께 별당으로 향했다.
쿠타는 자기의 휘하인 마군들을 휘동하여 교련장에서 라가고, 패장이 없는 피카르의
휘하 보졸들은,
"멋대가리 없는 패장이다?"
"어리가 돌았나보다!"
"부하 한 명도 거느리지 못하는 패장이 어떻게 우디거를 쳐서 동생의 원수를 갚는단
말이냐?"
제각기 한 마디씩 하고 무장지졸이 되어 흩어졌다.
티무르 늙은 추장은 까닭을 모르는 채 자기 처소로 돌아가고, 건주위 마천 추장은 무
엇을 느꼈는지 이튿날 총총히 티무르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에 이만주한테로 돌아갔다,
며칠 후의 일이다. 파쿠타는 밤에 순력을 돌다가 산호 목걸이 생각이 났다. 과부 미
인은 끊어진 산호 목걸이에 줄을 다시 레어줄 테니 틈나는 대로 자기를 찾아 달라 했
던 것이다.
파쿠타는 오도리 부락의 순력을 마치고 별당 근처를 한 번 돈후에 창에 불빛이 은은
하게 비치는 미인의 방을 찾았다.
부드럽게 문을 두드렸다. 미인은 피카르의 치태가 있은 후부터 어느 때나 항상 문고
리를 안으로 잠그고 있었다.
파쿠타는 별당에 올라, 문을 가떱게 두드렸다.
"누구요?"
파쿠타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응했다.
나올시다. 파쿠타올시다. 일전에 한번 찾으라 해서 올라온 길이올시다."
음성은 틀림없는 파쿠타의 목소리였다.
안에서는 반가움을 이기지 못했다. 미인은 얼른 고리를 벗겼다.
파쿠타는 웃음을 가득 얼굴에 싣고 들어섰다.
"앉으십시오. 한동안 적조했습니다, "
미인은 캉에 앉기를 권했다.
파쿠타는 권하는 대로 캉 위에 앉으며 말한다.
"잃었던 산호 목걸이를 다시 찾으러 왔습니다."
"잃어버리쳤던 것은 아니시죠-악마가 샘을 놓아서 줄을 끊어 버렸던 것이지요. 호호
호. 이제 다시 새 실로 구슬을 레었습니다, 오늘밤에 목에 걸어드릴 테니, 이번에는 곱
게 간수하십쇼! 그럼 잠깐 기다리셔요?"
미인은 흰 이를 드러내 방긋 웃고 의장으로 향했다. 다정한 목소리는 따스한 훈기를
일으켰다. 미인은 장문을 열구 차곡차곡 손수건에 싸논 산호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은은한 불빛 아래 비치는 분홍색 산호 목걸이는 지난번 낮에 볼 때보다도 더 한결
화사한 빛을 뿜었다.
미인은 파쿠타의 앞으로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자아, 머리를 숙이셔요., 목에 걸어드릴게, "
파쿠타는 머리를 숙이고 고개를 내밀었다.
과부 미인의 향긋한 체취가 코에 스쳤다.
산뜻하고 매끈한 찬호 목걸이가 파쿠타의 목에 다시 걸려졌다.
과부 미인은 만족한 듯 재잘댄다.
"아,름답습니다. 훤하신 신관이 더한층 훤출하십니다. 이 산호 목걸이에는 알알이 첩
의 단심이 서리고 엉겨 있습니다. 고이고이 간직해줍시오?"
말을 마치자, 과부 al인은 부드러운 두 손을 들어 파쿠타의 볼을 쓸었다.
파쿠타는 이내 불덩이 같은 충동을 느꼈다.
덥석 과부 미인의 허리를 껴안았다.
"내 아내가 되어주시렵니까?" 나는 아직 총각이올시다?"
"원하신다면?"
과부 미인은 속삭이면서 파쿠타의 든든한 가슴판에 얼굴을 묻었다.
"알알이 산호 목걸이에 엉기고 서린 당신의 사랑을 한평생 고이고이 지니오리다?"
파쿠타는 무한한 유열 속에 들면서 과부 미인의 등을 쓸었다.
파쿠타와 혹의미인이 한동안 소리 없는 법열 속에 들었을 때, 돌연 밖에서 황당한 걸
음걸이의 인기척이 났다, 남녀 두 사람은 바싹 귀를 기울였다. 황하게 문짝을 잡아당기
는 모양이다. 그러나 안에서 문고리를 걸어 잠갔으니 열려질 까닭이 없다.
"문을 열어라?"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피카르의 질뚝배기 깨지는 듯한 목소리다.
얼싸안았던 남녀의 몸과 몸은 떨어졌다.
"문을 아니 열어주면 부수고 들어갈 테다!"
분노에 찬 벽력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문고리 배목이 뚝 부러졌다,
문짝은 덜컥 자빠졌다.
피카르는 분노에 찬 눈으로 방 안을 바라본다. 호젓한 방 속, 은은한 등불 아래 파쿠
타와 제수가 의좋게 캉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더구나 눈에 번쩍 띄는 것든 자기가 흙발로 짓밟았던 분홍빛 산호목걸이가 또다시
파쿠타의 목에 화사하게 걸려있다.
피카르의 눈은 뒤집어지면서 왈칵 상기되었다, 노기는 화산이 터지듯 폭발되었다.
피카르는 허리에 찬 긴 칼을 쑥 뽑아들었다.
"이 더러운 음부년아?"
소리치며 흑의미인을 찌르려 했다. 기막힌 찰나였다. 파쿠타가 벌떡 일어났다. 환도를
뽑아들고 마주섰다.
"웬 해거냐!"
"저 음부년을 먼저 죽이고 너도 찔러 죽여야 하겠다!"
피카르는 눈이 찢어지도록 부릅뜨고 악성을 질렀다.
흑의미인이 오뚝 일어섰다. 눈 한 번 깜짝하지 아니했다. 씩씩한 애인 파쿠타를 믿는
때문이다. 칼칼한 쇠된 목소리로 대꾸한다.
"개만도 못한 이 치골아, 누구보고 감히 음부라고 하느냐. 제수를 겁탈하려는 놈은
성인군자냐?" 금수 같은 놈!"
혹의미인의 맑은 눈웨도 핏줄이 섰다. 뺨에는 싸늘한 찬바람이 이는 듯했다.
"무어야, 개만도 못해?"
피카르는 파쿠타를 밀치고 혹의미인을 찌르려 했다.
파쿠타의 환도는 흑의미인을 찌르려는 피카르의 긴 칼을 탁 막았다.
칼과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댕그렁' 소리를 애며 불빛 아래 찬서리를 뿜는다.
혹의미인의 비단을 찢는 듯한 꾸짖는 목소리가 또 일어난다.
"사내답게 굴어라! 무어냐?" 추하게 왜 과부 제수 방을 엿보고 다니느냐. 너하고 살
기가 싫다는데 왜 이리 추잡하게 쫓아다니고 엿보느냐. 치태 부리지 말고 썩 물러가거
라! 네 아우가 죽어서 혼이 있다면 먼저 네 목을 벨 것이다?"
제수인 흑의미인의 독을 뿜는 날카로운 소리에 피카르의 등골이 써늘했다.
찌르려던 날카로운 칼이 잠깐 떨렸다.
파쿠타는 이 틈을 타서 피카르를 방문 밖으로 밀었다.
밀리는 피카르는 칼을 다시 번쩍 들어 파쿠타를 치려 했다.
파쿠타는 몸을 슬쩍 돌려 피카르의 예봉을 피하면서 소리친다.
"네가 나를 찌르려 하느냐. 무슨 까닭에 나를 해치려 빠느냐?"
"이놈, 너는 내 제수를 뺏은 놈이다. 파렴치한 무뢰한이다. 나는
너를 죽여야 하겠다!"
"네가 정 나를 죽이고 싶다면 사내답게 싸워보기로 하자! 자아, 저 넓은 마당으로 내
려가 정정당당하게 싸워보자!"
파쿠타는 피카르를 끌고 별당 아래 넓은 마당으로 내려섰다.
검은 하늘엔 별빛이 총총하게 초롱거렸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종콩 들렸다.
끌려나온 피카르도 대담하게 마음을 도사려 먹었다. 긴칼을 빼어들고 딱 버티고 섰
다.
파쿠타도 환도를 뽑아들고 가슴에 겨눈 채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피카르를 바라보며 외친다.
"자아, 누가 죽나 결투를 해보자! 찔러보아라!"
피카르는 대답 없이 두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한동안 겨누다가 '악!' 소리를 치며 파
쿠타의 목을 향하여 긴칼을 후려쳤다. 번득 하며 서릿발같은 흰빛이 캄캄한 허공을 가
로 끊었다.
파쿠타의 장대한 몸집은 나비 날듯 했다. 어느 틈에 피카르의 몸 뒤에 환도를 겨누고
섰다. 피카르의 긴칼은 캄캄칠야 허공을 갈기기만 했다.
파쿠타가 등뒤에 칼을 겨누고 선 것을 직감한 피카르는 가슴이 섬뜩했다. 금방 파쿠
타의 환도가 자기 어깨를 내리쳐 찍을 것만 같았다. 소름이 쭉 끼쳤다. 급히 단전에 힘
을 주고 담력을 부풀어 올렸다. 숨을 쉬고 몸을 홱 돌렸다.
파쿠타는 별빛 같은 눈에 웃음을 가득 싣고 두 손으로 칼을 잡은 채 피카르를 응시
하고 섰다.
찌르려고 덮치는 그 자세보다 웃음을 머금은 그 눈과 입이 더 무서웠다.
피카르는 허장성세로 '악?" 소리를또산 번 쳤다. 장검을 번쩍 들어 파쿠타의 어깨를
찍었다.
그러나 장검은 또한 번 허공을 찍었을 뿐, 파쿠타의 몸은 물찬 제비같이 피카르의 측
면에 서 있다.
피카르는 약이 바싹 올랐다. 이번엔 파쿠타의 버티고 서 있는 하체를 노렸다.
긴칼로 버티고 서 있는 -다리 정강이를 후려갈겼다.
파쿠타의 몸은 날쌔게 공중으로 솟아 후려갈기는 알을 뛰어넘었다. 온몸의 힘을 칼
한 자루에 모아 파쿠타의 정강이를 갈기려 했던 피카르는 힘을 받아줄 대거리가 없어
졌다. 피카르는 칼자루를 잡은 채 왈칵 땅 위로 거꾸러졌다. 파쿠타는 날쌔게 몸을 놀
렸다.
오른편 무릎을 번쩍 들어 쓰러진 피카르의 칼 잡은 팔죽지를 지그시 눌렀다,
'아야!' 하고 부르짖는 피카르의 비명 소리가 목구멍에서 터져나왔다.
파쿠타는 몸을 굽혀 피카르의 팔을 잡은 채 칼 잡은 손목을 바싹 비틀었다.
"이놈아, 아프다. 놓아라"
피카르의 구슬픈 비명 소리가 또 들렸다.
파쿠타는 대답 없이 씁쓸한 웃음을 소리 없이 웃으며 피카르의 긴칼을 뺏어들고 우
뚝 섰다. 늠름한 자세다.
피카르는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파쿠자에게 이미 칼을 뺏겼다.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파쿠타는 껄껄 웃으며 소리친다.
"하하하, 너는 나의 적수가 아니다. 무기로 대결해보니 너는 아직 입에서 젖내가 난
다. 차마 내 칼로 네 목을 벨 수는 없다. 인생이 불쌍해서 너를 살려주는 것이니 다시
는 네 제수에 대해서 치골의 마음을 먹지 말고 나에게 절을 해서 항복해라."
피카르도 천치와 백치는 아니었다, 그래도 명색이 사내자식이었다. 더구나 추장의 아
들이다. 비록 무예가 부족해서 파쿠타에게 칼을 뺏겼을 망정 절을 해서 항복하기는 싫
었다.
넘어져서 흙 묻은 손을 탁탁 털고 소리친다.
"무어야, 날 보고 절을 하고 항복을 하라고?" 시러베 아들놈! 내가 네 깐 놈한테 항
복을 할 사람이냐. 칼은 뺏겼다마는 맨주먹으로 더 싸워보자"
피카르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들었다.
파쿠타는 피카르 한 테서 뺏은 칼과 허리에 찬 환도를 풀어서 땅 위에 던지고 쾌활
하게 대답한다.
"좋다. 그러지 아니해도 칼을 뺏은 것은 무기로 결투를 하다가는 네놈이 상할까 해서
뺏은 것이다. 맨주먹으로 싸워보기로 하자. 얻어터져도 치명상까지는 아니되게 해줄 테
다. 자, 육탄전이다. 덤벼들어라?"
파쿠타는 말을 마치자 웃옷을 훌떡 벗었다.
피카르도 웃옷을 벗어버렸다. 모두 다 알몸뚱이다.
팔뚝마다 근육이 돌덩이같이 부풀어올랐다. 가슴패기마다 젖통이 두드러져서 힘차 보
였다.
젖통과 팔뚝의 근육은 비슷비슷했다. 그러나 파쿠타는 키가 크고 피카르는 키가 작았
다.
퍼카느는 복받쳐 오르는 분한 마음을 참을 길 없었다. 주먹을 번쩍 들어 파쿠타의 명
치를 후려갈겼다.
파쿠타는 피카르의 주먹이 들어오는 찰나, 슬쩍 몸을 돌렸다.
피카르의 주먹은 파쿠타의 둔부를 스쳤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파쿠타가 피카르의 어깻죽지를 후려갈겼다. 어찌나 주먹이 빨리 날아들었는
지 피카르는 피할 겨를이 없었다. 어깨를 쇠망치로 후려치는 듯했다. 뼈가 우지직했다.
피카르는 아픔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차마 아프다 소리는 칠수 없었다. 고양이
식혜 먹은 상을 하고 분통이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번엔 주먹을 단단히 쥐고 파
쿠타의 불두덩을 되게 질렀다.
파쿠타의 눈은 번갯불보다도 빨랐다. 양다리를 확 벌리고 공중으조 몸을 솟구쳤다.
피카르의 주먹은 파쿠타의 양다리 틈으로 들어갔다. 허탕을 쳤다.
파쿠타는 버릇을 톡톡히 가르쳐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파쿠타의 차례가 되었다. 주먹을 번쩍 들어 피카르의 눈두덩을 되게 갈겼다.
피카르는 '아이쿠, 사람 살려라?" 소리를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이때 별당 마루 끝에는 흑의미인이 두 팜자의 결투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멀
리 문 앞에는 졸아치들이 보초를 보고 있었다.
'아이쿠, 사람 살려라!' 하는 구슬픈 외마디 소리를 듣자 흑의미인은 별당에서 쫓아오
고 졸개들은 순라청에서 횃불을 들고 뛰어나왔다.
졸개들은 쓰러져 있는 피카르의 앞으로 달려가 횃불을 들고 비춰보았다. 쓰러져 있는
피카르의 코에서는 유혈이 낭자하게 흐르고 눈퉁이는 시퍼링게 멍이 든 채 퉁방울같이
부었다.
흑의미인은 파쿠타를 또렷이 쳐다보았다. 먼저 분홍 산호 목걸이가 궁금했다.
"결투를 하시더니 그예 한 분이 쓰러지셨군요 산호 목걸이는 말짱합니까?""
"무사합니다. 자아, 보시오! 옷은 벗었지만 목걸이야 벗을 까닭이 있습니까?""
파쿠타는 졸개들이 들고 섰는 횃불 앞에 가슴을 내밀었다.
떡 벌어진 가슴, 풍윤한 근육이 남성답게 보이는 뜬뜬한 쌍 젖통 위에 분홍 산호 목
걸이는 불빛을 받아 조요하게 드리워졌다.
"저는 산호 목걸이가 또 한 번 끊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끊어지면 다시 꿰어줄 분이 있지 아니합니까?" 그러나 고이고이 간직하느라고 애가
탔습니다."
파쿠타는 조용하게 말하고 미인을 향하여 웃었다. 파쿠타는 벗어 던졌던 웃옷의 먼지
를 털어 입으며 사졸들에게 이른다.
"크게 다치지는 아니했다. 코피를 닦아주고 영문으로 갖다 뉘어라. 까불어대면서 결
투를 하자고 하다가 조금 다쳤느니라"
졸아치들에게 싸운 내력을 말했다.
한편 졸아치들에게 코피를 닦아주면서 부축을 받아 일어서는 피카르는 퉁퉁 부어 터
진 눈으로 앞을 바라보니, 제수인 흑의미인이 서있었다.
열이 벌컥 올랐다. 미친 듯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이년! 네가 나를 죽이라 했지?" 결투를 해서 나를 죽이라 했지?" 이 음부 년아?"
졸개들이 있는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포함을 했다.
흑의미인은 기가 막혔다, 오뚝 서서 차가운 눈으로 피카르를 노려보며 대꾸도 아니했
다.
졸개한테 부축되어 별당 대문 밖으로 나가는 피카르는 이번엔 파쿠타를 향하여 호통
을 친다.
"이놈, 이 반적아! 너는 나를 죽이고 다음엔 우리 늙은 아버지를 죽이고, 그리고 나서
이 오도리족을 네 손아귀에 집어넣으려고음모를 꾸몄지! 그러한 후에 내 제수를 뺏어
서 네 아내로 삼으려 했지! 이 대역부도의 도둑놈아! 그래서 오늘 밤에 나를 죽이려고
결투를 하자고 했지 ! 천참만육할 놈!"
피카르는 미친 듯 포함을 준다.
파쿠타는 피카르의 이성을 잃은, 발광적으로 부르짖는 말에 대거리도 하지 아니했다.
"피카르 패장이 관전식에서 진 것이 분해서 나한테 결투를 하자고 했다가, 또다시 져
서 분한 모양이다. 지나치게 등분이 된 모양이니 업고들 나가서 영안에 편안히 눕게 해
라"
줄개들에게 말했다. 졸개들은 기운 빠진 피카르를 구히쳐 업고 나졸 영문 패장청으로
들어가 캉 위에 눕게 했다. 보졸들이 피카르를 업고 별당 문 밖으로 나간 후에 흑의미
인은 대담하게 파쿠타의 손을잡았다.
"항으로 들어가십시다. 할말이 있습니다, "
파쿠타는 싫지 아니했다.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할말이 있소?" 감히 청할 수는 없소마는 진심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하하하"
호걸스럽게 웃었다.
미인은 이마를 찡그리고 대답한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어서 빨리 들어갑시다. 급히 한 말씀 할말이있소 "
"접수화 해수혈하듯 따라간다니까, 염려 말라구"
"이분이 왜 이리 정신을 못차리나. 물은 아니 자셨는데 술에 취할리도 만무하구. 어
서 노닥거리지 말고 빨리 올라갑시다."
"임자가 나보다 열 갑절 더 재잘대면서 날 보고 노닥거린다니 기막힐 일 아닌가베.
대관절 무슨 좋은 일이 있기에 이같이 재촉이오?""
흑의미인은 초조했다. 몸을 흔들고 눈을 흘겼다.
"일각이 삼추같이 급한 일야요. 어서어서 빨리 올라갑시다.
화색이 박두했소"
미인의 목소리는 어둔 밤 속에 비단을 찢는 듯 쨍했다.
"무어, 차색이 박두했어?"
파쿠타는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농지거리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땅에 던졌던 자기의 환도와 피카르에게서 뺏은 장검을 주섬주섬 찾아들고 혹의미인
의 손을 잡고 별당으모 올랐다.
혹의미인은 파쿠타를 캉에 앉힌 후에 새카만 눈을 반짝 떠서 정색하고 묻는다.
"당신은 진정 나를 사랑하죠?""
"여부가 있나!"
"아직 아내가 없다죠?" 장가 전인 총각이라죠?"
"숫배기야, 흐흐흐"
"나하고 한평생을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습니까?""
"임자가 나를 남편으로 삼아주기만 한다면 한평생뿐 아니라 저승에 까지라도 쫓아파
서 함께 살지"
"진정이죠?""
"여부가 있나!"
"저를 헌계집이라 해서 버리시지는 아니하실 테죠?""
"저승에까지 함께 가서 살다가 또다시 태어나서 사람이 되든지 축생이 되든지간에
함께 살아본다니까!"
"그것이야말로 삼생가연이라는 게죠?" 저는 당신과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말을 마치자 혹의미인은 파쿠타의 뺨에 볼믈 대고 품안으로 기어들었다.
훈훈한 연정이 봄바람 일듯 무르녹은 속에 파쿠타는 혹의미인의 감겨진 팔을 가볍게
밀치며 묻는다.
"도대체 화색이 박두했다고 어서 올라가자고 하더니, 그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
으니 어찌 된 일요?""
애정낭만의 회오리바람 속에 쉽쓸려 도취의 심연속으로 빠졌던 혹의미인은 잠깐 이
성을 잃었던 것이다.
미인은 정신을 수습했다. 흐트러진 머리털을 가다듬었다.
"아 참, 곧 말씀을 드린다는 것이 당신이 하도 내 손을 잡고 아니 놓아준 때문, 그만
마음이 헷갈렸어!"
미인은 정이 담뿍 실린 눈으로 파쿠타를 가볍게 흘겼다.
"기막힐 소리를 다 하네. 임자가 내 손을 결투장글서부터 꼭 붙들었지, 내가 언제 임
자 손을 꼭 잡았었어?" 하느님 맙소사. 그리고 내 뺨에 볼을 누가 먼저 댔나. 흐흐흐
자 아, 그것은 어떻든간에 덮어두기로 하고 화색이 박두했다고 초조하게 굴던 그 일
은 무슨 일야?".
혹의미인의 새까만 눈동자가 불빛 아래 반짝했다.
"피카르는 우리 두 사람을 죽이고 말 것입니다."
"피카르가 어떻게 우리를 죽여?" 제 맘대로 죽일 수 있는가?" 더구나 티무르 추장은
임자의 전 남편 퉁맹가의 원수를 갚겠다고 우디거를 치려고 군비확장을 하는 중인데-.
나를 죽이고 어떻게 전쟁을 하려구?""
흑의미인은 슬기가 가득 서려 있는 눈을 반짝 떠서 파쿠타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까 결투장에서 피카르가 당신한테 발악을 해서 푸념 주던 말을 못들었습니까?"
피카르는 먼저 나를 욕했습니다. '이년, 네가 나를 죽이라 했지?" 결투를 해서 나를 죽
이라 했지?" 이 음부년아! 이같이 입에 못담을 욕을 한 것을 못들으셨습니까?" 다음엔
또 당신을 역적으로 몰았습니다. '이놈, 이 반적아! 너는 나를 죽이고 다음엔 우리 늙은
아버지를 죽이고, 그리고 나서 이 오도리족을 네 손아 귀에 집어넣으려고 음모를 꾸몄
지 ! 그러한 후에 내 제수를 뺏어서 네 아내로 삼으려 했지! 이 대역부도의 도둑놈아!
그래서 오늘 밤에 나를 죽이려고 결투를 하자고 했지 ! 천참만육할 놈?" 피카르가 이
같이 발악을 하던 소리를 잊어버리셨습니까?" 피카르는 당신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다음에는 말을 아니 듣는다고 나를 죽일 것입니다. 밤 안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하겠습
니다. 이거야말로 진정 화색이 박두한 일이올시다."
흑의미인은 피카르의 뱃속을 환하게 들여다보는 듯 슬기로운 판단을 내렸다.
파쿠타는 진솔한 사람이었다. 흑의미인 말을 듣자 빙긋이 웃었다.
"그것이야 피카르란 자가 나한테 언제나 지게 되니 분심이 나서 떠들어댄 소리지, 제
가 어떻게 나를 대역부도로 몰수가 있나?" 더구나 우디거를 치려는 이때 나를 죽이고
우디거를 어찌 칠 수가 있나. 미친놈의 헛소리지"
"당신 그렇게만 아시면 큰일납니다. 지금 우디거를 친다는 것은 나의 죽은 남편 퉁맹
가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는 것인데, 피카르는 동생의 원수 갚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 관
심도 없습니다. 다만 나를 겁탈하려는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나하고 탕신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혹의미인의 입술은 초조해서 침이 말랐다,
혹의미인의 조리 있게 설명하는 말을 듣자, 파쿠타도 그럴 듯하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나 임자나 살 궁리를 해야지, 더럽게 피카르의 손에 개죽음을 해서야 쓰
겠소 어찌하면 좋소?"
혹의미인은 총명스런 까만 눈을 굴려 파쿠타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한다.
"피카르는 이제 당신을 풍채로도 당할 수 없고, 무예로도 당할 수 없고, 힘으로도 당
할 수 없으니, 못난 생각에 반드시 당신을 죽이려 생각할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우
리들의 사이를 시기하는 탓이죠. 당신을 죽인 후에 나를 뺏으려는 것입니다."
파쿠타는 침묵을 지켜 귀기울여 듣고 있다.
"힘으로 보나 무예로 보나 또는 사졸들의 당신에게 향하는 인망으로 보나 도저히 당
신을 당해낼 도리가 없으니, 흉계를 꾸며서 당신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아버지 티무르께
고할 것입니다."
"설마?"
파쿠타는 반신반의하는 태도다.
"설마가 사람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고 보십쇼 피카르는 꼭 그리 할 위인입니
다. 지난번 당신하고 다툴 때 역적이라고 악성을 질러 부르짖던 일을 잊으셨습니까?"
이번에 그는 눈두덩이 터져서 부풀어올랐습니다. 이것을 증거로 아버지 티무르한테 고
자질을 해서, 당신을 역적으로 몰아 죽일 것입니다?"
흑의미인의 말을 듣는 파쿠타의 몸에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어찌하면 좋소?"
파쿠타의 음성은 황겁했다.
"달아나야 합니다?"
"어디로?"
"우디거로 달아나야지요"
"우씨거로 달아나다니 말이 되나?" 당신의 그전 남편 퉁맹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우리가 지금 군사를 조련하는 중인데, 어떻게 정벌하려는 원수한테로 달아난단 말요?"
흑의미인은 눈동자를 깜박이며 새침하게 대꾸한다,
"원수를 갚는 일도 내 몸이 살아 있어야 원수를 갚는 것이지, 내 몸이 죽게 됐는데
원수이고 나발이고 다 무엇입디까. 우선 살고 봐야 합니다?"
"우디거에서 받아줄 리가 있나?"
파쿠타는 잠깐 회의에 빠졌다.
"폭로를 하면 됩니다, 오도리족이 우디거를 침략한다고?"
흑의미인의 눈에는 반짝 불이 붙었다. 애인 파쿠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대담하게
슬기를 뿜었다.
"증거가 있어야지. 오도리족이 우디거를 치려고 하는 그 증거가 있어야지"
"내가 가지고 온 우디거 딸의 초상화를 훔쳐가지고 가면 됩니다. 티무르 추장이 아들
퉁맹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우디거를 쳐부숴 망하게 한 후에 우디거 딸의 미에 취해
서 뺏어다가 첩을 삼으려고 한다고-"
파쿠타의 남성미에 도취되어 온몸의 애와 정을 기울여 바치는 흑의미인 청상과부는,
죽은 남편 퉁맹가의 원수를 갚는 그 일보다도 새로 정이 든 애인 파쿠타의 생명을 구
하기 위하여 혹수정 같은 눈을 반짝이며 슬기로운 지혜를 영롱하게 짜냈다.
"좋구먼?"
파쿠타는 입이 헤 하고 벌어지며 손뼉을 쳤다.
혹의미인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나는 지금 곧 시아버지 티무르의 침실로 내려가서 동정을 살피고 있겠습니다. 만약
피카르가 아버지한테로 클어가 당신을 대역으로 몰고 포박명령을 내리기로 한다면, 나
는 급히 당신한테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당신은 마군 영문으로 돌아가서 심복 졸개 한
사람을 내 처소로 배치해주십쇼. 가부간 곧 연락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만
일을 생각해서 우디거로 달아날 태세를 취하십시오. 나는 당신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파쿠타는 애인 혹의미인의 치밀하고 주도한 계획에 탄복하지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곧 내 처소로 돌아가 만반준비를 차리고 연락만 기다리고 있으리다. 모
든 일을 조심해서 처리하오"
"걱정 마세요. 그리고 당신은 심복 마졸 한 명을 이곳 별당으로 보낼 것을 꼭 잊지
마시오?"
"염려 마오. 위급한 연락을 받기만 하면 당신이 타오 달아날 준마 한 필까지 곁들여
보내리다."
고조된 젊은 남녀의 사랑은 이같이 뜨거웠다. 남편을 죽인 원수도 업고 적도 없었다.
도리어 자기네의 사랑을 박해해서 생명을 위협하고 억압하는 일가와 친척이 원수요, 적
이었다.
이런 것이 인간생활에 있어서 본연의 욕구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활의 단층을 이루면
서 변의 물결 속으로 휩쓸려 흘러가는 인간성의 원리다.
파쿠타와 혹의미인은 모든 계획을 세워서 곧 실천에 옳길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일
의 성패가 어찌 될지 몰랐다. 꼭 계획대로 척척 맞아들어갈지 조바심이 생겼다.
"어서 그럼 가보세요. 당신의 마군영으로"
"나는 곧 가겠소마는 임자도 어서 티무르 추장한테로-"
"나는 당신이 가신 후에 곧 갈 테니, 염려 마시고-"
"이러다가 우리들의 영이별이 되면 어찌하나?"
파쿠타는 혹의미인에게 달려들어 버썩 가는 허리를 껴안았다.
미인은 조용히 포옹을 허락하면서, 가볍게 눈을 흘겼다.
"바보 같은, 불길한 소리 하지 말아요. 잠자코 나 하라는 대로만-"
두 남녀의 온몸엔 다시 사랑의 물결이 넘쳐 흘렀다. 혹의리인은 파쿠타의 뜬뜬한 가
슴에 두어 번 뺨을 문지른 후에 가볍게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밀쳤다.
"시간이 없어요, 어서 가봐요"
파쿠타는 비실비실 밀려 가다가 퍼뜩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럼 ?"
한 마디를 남기고 별당 아래로 내려섰다.
혹의미인은 파쿠타의 스러지는 모습을 한동만 바라보다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머리와 옷매푸새를 고친 후에 별미 한 반을 들고 천천히 늙은 추장 티무르의 침실로
향했다.
이때 늙은 추장 퉁맹가 티무르는 밤이 깊어 조용하니 건주위에서 마천 추장과 과부
며느리가 백금 천 냥과 합께 가지고 왔던 우디거 딸의 미인도를 흘린 듯 펴보고 있었
다. 어서어서 우디거를 쳐서, 막내아들 퉁맹가의 원수를 갚고 천하절색인 우디거의 딸
을 뺏어다가 첩을 삼고 싶었다.
우디거 딸의 미인도는 볼수록 아름다웠다.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아니했다. 어
서어서 뺏어다가 무궁무진한 행락을 누리고 싶었다. 밤마다 미인도를 펼쳐놓고 즐거운
환상 속에 빠져 있는 것이 늙은 추장의 일과였다.
이때, 방문이 가볍게 소리 없이 열렸다.
우디거 딸의 미인도를 펴놓고 앉았던 늙은 추장 티무르는 황망히 그림폭을 말아 치
우며,
"누구냐?"
소리를 쳤다.
"저올시다. 막내며느리올시다."
혹의미인은 만면에 웃음을 생글생글 띠고 반을 받쳐들고 들어섰다. 초롱같이 맑은 눈
은 늙은 추장이 황망하게 말아 감추는 미인도의 그림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어쩐 일이냐?"
늙은 추장은 황망하게 악내며느리한테 묻는다.
혹의미인은 들고 들어온 별미 음식 소반을 늙은 추장 앞에 조용히 놓고 날아갈 듯
문안 절을 드렸다.
늙은 추장은 며느리의 절을 아니 받을 수 없었다. 얼굴에 웃음을 띠고 절을 받았다.
"며칠 동안 못보았구나. 그 동안 잘 있었느냐?"
"예, 염려해주신 덕택으로 별당에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혹의미인은 온화한 음성으로 미소를 짓고 조용히 섰다.
늙은 추장 퉁맹가 티무르는 막내며느리가 받들고 들어온 반을 바라보며 묻는다.
"그것이 무엇이냐?""
혹의미인은 반에 받쳐논 음식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맛있어 보이는 구수한 냄새가 늙은 추장의 비위를 건드렸다.
"제가 건주위에서 온 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마는 아버님께 아직 효도를 다하
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와 오늘은 별미를 한 가지 만들어보았습니다. 이것을 잡수시면
불로장수하시고 만수무강하신다 합니다."
불로장수하고 만수무강한다는 말에 늙은 추장의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도대체 무슨 음식이기에 불로장수를 한단 말이냐?""
"원숭이의 골을 삶아서 만든 별미올시다. 저희 건주위에서는 최고급의 음식이올시다.
원숭이 골을 한 벌만 먹으면 한평생 병이 없고 백세향수를 한다 합니다."
말을 마치자, 혹의미인은 미소를 풍기면서 반을 받쳐들었다.
늙은 추장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원숭이의 골? 그것 참 희귀한 진미로구나. 쇠골을 먹어도 좋다 하는데 원숭이 골이
라면 참 기막히게 좋을 것이다. 어디 한번 먹어보자?"
늙은 추장은 저를 들어먹기 시작했다.
매우 비위에 당기는 모양이었다.
'맛이 참 좋구나. 천하별미다?"
"원숭이 골은 불로장수할 뿐 아니라, 슬기 있는 영물의 두뇌라 해서 이것을 한번 잡
수시면 정력이 열 갑절 느시고 총명스런 슬기가 백 배나 난다 합니다."
흑의미인은 또다시 생긋거려 웃으며 반을 받들었다.
늙은 추장은 정력이 열 갑절이나 는다는 바람에 원숭이 골을 순식간에 다 먹었다.
"너희 건주위에서는 누가 원숭이 골을 먹느냐?"
"원체 귀한 물건이 오라, 여느 사람들은 먹고 싶어도 먹을 도리가 없습니다. 건주위
지휘 이만주가 겨우 한 벌을 먹었다 합니다."
"어떻게 네가 이곳에서 원숭이 골을 구했느냐?"
"아버님께 한번 봉양을 해드리고 싶어서 모아두었던 돈 천 금을 써서 원숭이 한 마
리를 사서 골을 꺼냈습니다."
흑의미인은 새빨간 거짓말을 야금야금 지껄였다. 사랑하는 사람 파쿠타를 구하기 위
하여 염소 골을 백숙으로 고아가지구, 원숭이 골이라 해서 늙은이의 환심을 사면서, 피
카르의 동정을 살펴보려 한 것이다.
"기특하다, 네 효심이 ! 잘 먹었다?"
늙은 추장 티무르는 흐뭇한 마음으로 막내며느리를 칭찬하면서 저를 놓았다.
이때 문 밖 마루청에서 발자국 소리가 '쾅쾅' 황당스럽게 들리면서 미닫이문이 홱
열렸다.
코가 터져서 비뚤어지고 눈두덩이 청대 빛이 되어 시퍼렇게 멍이 든 피카르가 기침
을 쿨룩거리며 반송장이 되어 기어들었다.
늙은 추장 티무르는 반송장이 되어 기어 들어오는 큰아들 피카르의 참담한 모습을
보자 깜짝 놀랐다,
"웬일이냐?"
피카르는 아버지 티무르의 묻는 말에 대답할 사이도 없었다. 제수인 흑의미인이 이곳
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깜짝 놀랐다.
"아아, 도대체 웬일이냐?" 왜 그 꼴이 되었느냐?"
늙은 추장 티무르는 아들을 향하여 펄쩍 뛰며 묻는다.
피카르는 제수 흑의 있는 곳에서 말할 수 없었다. 쭈뼛쭈뼛하고 얼른 대답을 못했다.
"왜 그 꼴이 됐느냐? 가뜩이나 메주덩이같이 못난 얼굴이 반 동강이 나서 떨어져 달
아난 것 같구나! 왜 그 꼴이 되었느냐 말이다?"
피카르는 퉁퉁 부어서 비뚤어진 입술을 겨우 벌려 대답한다.
"옆방으로 좀 가셨으면 합니다."
혹의 입은 제수는 파쿠타를 극진히 사랑하는 만이다. 제수 앞에서 참 소질을 할 수는
없었다.
"왜, 여기서는 말을 못하겠느냐?"
"급박한 군사기밀이올시다."
피카르의 입에서 무심코 나왔다.
혹의미인은 눈치를 챘다. 못들은 체 외면을 하고 돌아섰다.
급박한 군사기밀이란 말에 늙은 추장은 깜짝 놀랐다. 며느리도 자식은 자식이지만 며
느리 앞에서 급박한 군사기밀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대답 없이 옆방으로 들어갔다. 피카르도 뒤를 따랐다. 문이 드르륵 닫혀졌다.
혹의미인은 바싹 문 앞으로 다가섰다.
목소리가 가늘어서 잘 들리지 아니했다. 두루두루 문작을 둘러보았다. 약간 벌어진
틈이 빠끔하게 보였다. 귀를 바싹 댔다. 피카르의 음성이 미미하게 들렸다.
"파쿠타란 놈이 별안간 흥악한 마음을 먹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믿는 사람인데."
늙은 추장 티무르의 목소리다.
"별안간 그놈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제수한테 반했습니다. 제수도 그놈에게 마음이
있나봅니다. 아버지, 왜 관전식 날 제수가 그놈한테 산호 목걸이를 준 것을 보지 못하
셨습니까? 그놈은 저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인 후에, 제수를 계집으로 삼아가지고 오도
리족을 통치하려 합니다. 그래서 먼저 저를 두들겨 패서 이 꼴을 만들었습니다. 병신이
되어서 대항하지 못하게 하느라고-."
그럴 듯한 말이었다. 앞뒤 부리가 맞아들어갔다.
"어느 때 맞았느냐?"
"오늘 저녁 때 파쿠타란 놈이 별당에서 별안간 뛰어나와서 저를 두들겨 패서 병신을
만들었습니다. 꼭 죽을 것인제 보초 보던 군사들이 구해주어서 겨우 목숨을 보전했습니
다."
"날이 밝는 대로 곧 포박명령을 내려서, 옥에 가두어놓고 신문을 하리라?"
"아니됩니다. 내일 새벽이면 늦습니다, 오늘 밤 안으로 제 부하 보졸 수천 명을 동원
시켜서 마군 영문을 습격하고 파쿠타란 놈을 포박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해라!"
늙은 추장 퉁맹가 티무프는 파쿠타를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엿듣고 있던 흑의미인은 일이 급했다. 자기가 미리 생각했던 추측이 꼭 들어맞았다.
급히 몸을 돌렸다. 늙은 추장 티무르가 밤낮 들여다보고 있던 우디거 딸의 초상화를
아까 감추어둔 곳에서 얼른 꺼냈다. 허리춤에 급히 간직했다.
원숭이 골이라고 속였던 먹고 난 빈 그릇을 한 손에 들고, 사뿐 소리 없이 늙은 추장
의 큰방에서 벗어났다. 별당으로 줄달음쳤다.
별당에는 미리 약속한 파쿠타의 심복 부하가 준총 찬 필을 끌고 와서 대기하고 있었
다.
혹의미인은 전갈로 파쿠타에게 설왕설래할 틈이 없다고 생각했다.
"말고삐를 잡아주오! 나하고 함께 마영으로 달립시다!"
파쿠타의 심복 졸개는 명을 받았다.
흑의미인은 간단한 행리를 말 위에 얹은 후에 선뜻 마상에 올라 마군 졸개에게 견마
를 잡히고, 나는 듯이 파쿠타의 마군 영문에 당도했다.
이때 파쿠타는 약속대로 마군 정예부대 2천 병마를 대기시켜놓고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문 밖에 말 뛰닫는 소리를 듣자, 파쿠타는 문을 열었다.
뜻밖이었다. 심복 졸개가 전갈을 까지고 오지 아니하고, 혹의미인이 직접 말을 타고
달려왔다.
"어찌 되었소?"
파쿠타는 혹의미인을 말 위에서 번쩍 안아 내렸다.
"일이 급하게 되었소 추측한 그대로입니다. 전갈을 보내서 왔다 갔다 할 틈이 없어서
내가 바로 곧장 왔습니다. 오늘 밤 안으로 당신에게 포박명령이 내립니다. 어서 빨리 2
천 병마를 거느리고 우디거로달사납시다!"
파쿠타도 머리는 좋았다.
"우디거 딸의 초상화는?"
"자세한 말은 나중 이야기합시다. 우디거 딸의 초상화는 내 몸에 고이 지녔소이다.
염려 마시오?"
"됐다?"
파쿠타는 쾌활하게 한 마디를 부르짖은 후에 칼을 빼어들고 영문마당으로 나갔다.
횃불이 번쩍 들려졌다. 대장의 횃불이 켜지니 2천 병마의 횃불이 일제히 줄불 켜지듯
켜졌다.
횃불은 대낮같이 밝았다. 대기하고 있던 2천 마병은 일제히 마상에 올랐다.
파쿠타는 긴 칼을 뽑아들고 호령을 내린다.
"너희들 마병들은 모두 다 나의 사랑하는 사졸들이다. 이제 나는 신변에 위급한 일이
생겼다. 나를 죽이려 한다. 이곳을 떠나야만 하게 되었다. 원하는 사람은 나의 뒤를 따
르고 원치 않는 사람은 아니 따라도 좋다. 자아, 나는 지금 떠나야 한다. 여러 사졸들은
한 길을 택하라."
2천 마병들은 파쿠타의 신상에 큰 변이 생긴 줄 비로소 알았다. 일제히 소리쳐 대답
한다.
"부모 같은 장군님을 우리가 어찌 떨어져 살겠소 장군의 뒤를 함빡 따르오리다!"
마졸들의 응낙하는 소리는 우레 같았다.
파쿠타와 혹의미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파쿠짜는 쾌활하게 말 위에 올라 지휘검을 휘둘렀다.
"자아, 그렇다면 너희들은 내 뒤를 따르라!"
2천 마병은 말굽 소리 가볍게 파쿠타의 뒤를 따랐다.
파쿠타의 탄 말 뒤에는 혹의미인이 말을 타고 달렸다.
파쿠타는 다시 명령을 내린다.
"자아, 횃불을 높이 들어라. 만약 뒤에서 우리를 쫓는 군사가 있다면 누구를 물을 것
없이 활과 창으로 막아대라! 쫓는 군사는 우리의 적이다?"
2천 마병은 일제히 소리쳐 대답한다.
"알겠습니다. 모조리 쏘아대겠습니다!"
말굽 소리 드높게 앞을 바라보고 달리는 마병들의 높이 든 횃불은 줄불을 이루어 검
은 하늘을 사를 듯했다,
홀연 뒤에서 일대 군마가 역시 횃불을 높이 들고 뒤를 쫓는다.
한 사람의 패장이 큰 소리로 호통친다.
"반적 파쿠타야, 달아나지 말아라. 모든 죄를 용서해줄 테다. 마병들을 거느리고 되돌
아오라!"
피카르의 질뚝배기 깨지는 듯한 목쉰 소리다.
파쿠타는 껄껄 웃으며 소리를 높여 대답한다.
"사내 대장부가 한 번 결단한 일을 네깐 놈의 치골의 유혹하는 말을 듣고 번복할 수
있느냐. 잔소리 말고 어서 돌아가 깨어진 눈두덩에 약이나 바르고 자빠져 있거라!"
피카르는 또다시 목청을 돋우어 소리치며 군사를 거느려 뒤를 쫓는다.
"2천 마병들아, 나의 소리를 들어라. 너희들은 오도리족의 당당한 마군이지 파쿠타의
마군은 아니다. 반적을 따르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오라. 만약 말을 아니 듣는다면 너희
도 반적이다. 모조리 쏘아 죽이리라!"
파쿠타는 피카르의 떠들어대는 말을 듣자 번쩍 지휘검을 높이 들었다.
"귀치 않구나. 쏘아붙여라?"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마군들은 일제히 말머리를 돌렸다.
2천 사수들은 일제히 전통에서 살을 뽑아 활에 메겼다.
2천 개 화살은 허공을 끊으며 보졸 쪽으로 날았다.
피카르도 고합쳤다.
"이편에서도 쏘아붙여라?"
양편의 화살은 어지럽게 날았다.
그러사 원체 보졸들의 사수는 무예가 마군을 따르지 못했다.
보졸편에서는 '에쿠' 소리를 치며 자빠지는 자의 수가 많았다.
파쿠타는 군령을 내린다.
"마군편에서는 활 쏘는 것을 중지하라! 보졸도 우리의 형제다! 크게 상해서는 아니된
다. 내가 한 대 화살로 저들의 쫓는 것을 막으리라!"
파쿠타는 말을 마치자, 친히 화궁을 높이 들어 살을 메몄다.
보졸 앞에서 소리치며 지휘하는 피카르를 향하여 활을 가득히 당겼다.
살은 바람을 끊고 소리쳐 날아 피카르가 타고 있는 검은 말의 다리를 보기 좋게 맞
혔다. 말은 비명을 부르짖어 쓰러지고 피카르는 말 위에서 떨어졌다.
보졸들은 급히 피카르를 구해가지고 오음회로 달아난다.
파쿠타는 자기 손으로 고향의 보졸들과 피카르를 상하고 죽이고 싶지 아니했다. 일부
러 피카르의 말 다리를 쏘아서 다시는 더 쫓아오지 못하게 한 후에, 유유히 2천 마병과
혹의미인을 거느리고 우디거로 향했다.
때마침 두만강은 얼음이 굳게 얼었다. 2천 마병은 모두 다 북방 족속으로 언 강을 건
너기에 익숙했다. 거침없이 강을 건너 우디거 도성 백 리 밖에 당도했다.
파주타는 2천 마병을 도성 백 리 밖에 대기시킨 후에 혹의미인과 함께 도성 문 밖에
당도했다.
2천 마병과 함께 도성 가깝게 간다면 우디거의 의심을 사기 쉬운까닭이다.
파쿠타는 수문장에게 신분을 밝히고 귀화하기를 청했다.
이때 박호문과 만났던 늙은 추장은 나이 많아서 그 동안 세상을 떠나고 무남독녀인
우디거 딸의 남편이 새로 우디거의 추장이 되었다.
수문장은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추장한테 고했다.
"오도라족의 대장 한 사람이 2천 병마를 백 리밖에 주둔시키고, 검은 상복 입은 아름
다운 각시와 함께 귀화하기를 청합니다."
우디거의 사위와 딸은 함께 앉아 있다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오도리족의 대장이 2천 병마를 백 리밖에 대기시키고 귀화하기를 청한다?" 이상하
구나. 그리고 또 검은 상복 입은 색시와 함께 왔다?" 아내도 아니고 누군가. 만나보기
로 하자. 그러나 군용을 정제한 후에 만나기로 한다. 성문 안에서부터 전각 안까지 의
장병을 엄하게 배치한 후에 오도리족의 대장을 인도하라?"
추장의 명이 한 번 떨어지니, 우디거의 군사들은 일제히 무장을 가리고 성안 십 리
길과 전각 안 전후좌우에 서릿발같은 창자 칼을 햇빛에 번득이며 위엄기 있게 도열했
다.
모두 다 건주위에서 모사 퉁맹가를 죽인 후에 우디거로 데리고 온 2천 명의 정예부
대다.
모든 의장이 정돈된 후에 수문장은 파쿠타와 검은 상복 입은 미인을 우디거의 사위
와 딸 앞에 인도했다.
파쿠타와 검은 상복의 미인은 공손히 젊은 추장 내외를 향하여 절을 올렸다.
젊은 추장 내외는 검은 상복 입은 미인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꼭 들어맞았다.
검은 상복 입은 미인은 자기 손으로 목을 베어 죽인 건주위 모사 퉁맹가의 아내다.
우디거의 딸도 깜짝 놀란다. 날마다 건주위에서 끼웃해 지내던 모사 퉁맹가의 아내
다.
젊은 추장 내외의 등골에는 소름이 쭉 끼쳤다.
검은 상복 입은 미인은 예를 마친 후에 고운 얼굴에 웃음을 담뿍 싣고 우디거의 사
위와 딸 앞으로 가까이 갔다.
"저를 물라보시겠습니까? 저는 건주위 모사였던 죽은 퉁맹가의 아내올시다."
우디거의 사위 전 건주위 우군 부대장은 검은 상복 입은 퉁쟁가의 아내를 향하여 대
답할 말이 꽉 막혔다.
"아아, 참 그러시군요. 낯이 익습니다."
겨우 한 마디를 웅얼거리고 혀끝이 굳어졌다.
그러나 우디거의 딸은 능소능대했다. 얼른 검은 상복 입은 미인의 손을 탁 잡았다.
"이게 누구야?" 퉁맹가의 아낙 아닌가베! 얼마만야. 어떻게 왔소?"
웬일야, 참 반갑구려. 이게 꿈인가 생신가? 잘 왔어, 잘 왔어!"
정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상복 입은 미인의 손을 어루만지다가 버썩 허리를 껴안
았다.
혹의미인은 말없이 상글상글 웃음으로 대답을 표시했다.
우디거의 딸은 또다시 수다를 떤다.
"잘 왔어, 잘 왔어, 그런데 어떻게 오도리한테서 오는 거요?"
"까닭이 있어서 오음회 오도리한테로 갔습니다. 오도리 노추장 퉁맹가 티무르는 죽은
퉁맹마의 아버지가 아닙니까. 저의 시부가 되고, 오도리는 말하자면 저의 시댁이 사는
곳이죠"
"아 참, 그렇구먼. 퉁맹가가 본시 오도리 사람으로 당신한테 장가를 들어서 건주위로
왔으니, 말하자면 오도리는 당신의 시댁이 사는 부락이지 ?"
혹의미인은 다시 상글상글 웃으며 우디거 딸에게 말한다.
"자세한 말씀은 차차 드릴 테니 좌우간 오도리 마군대장 파쿠타와 저의 귀화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2천 마병도 우디거에 귀화시키겠습니다."
우디거 딸은 배짱이 컸다, 속으로는 자기들의 손에서 치명상을 당해 죽은 퉁맹가의
아내가 2천 명이나 되는 마병들을 거느리고 귀화를 하겠다 하니 의심스런 접이 있기도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했다. 호협한 웃음을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받아주지, 받아주어! 여부가 있나. 더구나 2천 병마까지 데리고 와서 우디거 군사가
되기를 원한다는데 아니 받아줄 리가 있나. 그렇죠 추장님. 받아주시겠죠?"
우디거의 사위인 남편을 향하여 묻는다.
우디거의 사위도 졸장부는 아니었다.
"받아주지 ?"
쾌활하게 대답했다.
흑의미인은 그제서야 건주위 이만주가 마천 추장의 말을 듣고 우디거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건주위 자체는 슬쩍 빠지고 퉁맹가 티무르한테 아들의 원수를 갚으라고, 과부인
자기를 시아버지한테 보낸 일이며, 우디거 딸의 초상화를 건주위 화공들에게 그려서 우
디거를 친 후에 우디거의 딸을 뺏어다가 퉁맹가 티무르 늙은 추장의 첩을 삼으라 했다
는 사실을 일장설파했다.
이때 옆에 있던 파쿠타는 품안에서 우디거 딸의 초상화 족자를 꺼냈다.
젊은 추장 내외 앞에 활짝 펴놓았다.
"자아, 이것이 건주위 이만주가 마천 추장편에 오도리 추장 퉁맹가 티무르에게 보낸
추장님 부인의 초상이올시다. 뺏어다가 첩을 삼으라고-."
족자가 활짝 펴졌다.
백모란같이 청초하고도 화사한 우디거 딸의 모습이 드러났다.
우디거 사위와 딸의 눈이 깁 바탕에 그려진 미인도로 쏠렸다. 눈이 환했다.
완연히 앞에 앉아 있는 우디거 딸의 모습이다.
"실물보다 더 잘생겼는데. 하하하. 오도리의 늙은 색마가 욕심도 낼 만하군. 하하하"
우디거의 사위, 새로 된 추갈은 어깨를 으쓱거려 호걸스럽게 웃었다.
추장의 아내 우디거의 딸은 새침하게 자기 므림을 들여다본다. 눈에는 살포시 노한
빛이 떠돌았다.
우디거 사위는 아내를 향하여 농담을 했다.
"어때, 오도리 늙은 추장한테로 시집을 가보는 것이? 하하하."
우디거의 딸은 노한 눈으로 남편을 홀겼다.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더 들은 후에 음흉한 이만주 놈과 퉁
맹가 티무르의 목을 잘라놔야겠소이다?"
우디꺼의 사위는 아내의 말을 듣자 움찔하고 농담하던 입을 다물었다.
우디거의 딸은 손수 자기의 초상화를 두르르 말았다.
흑의미인과 파쿠타를 향하여 묻는다.
"아까 대강 이야기를 들어서, 건주위에서 오도리로 간 내력은 알았소마는, 무슨 까닭
에 마군대장은 2천 병마를 거느리고 와서 과수댁과 함께 귀화하기를 원했소?" 그리고
나의 초상화는 늙은 추장 티무르가 가지고 있었을 터인데, 어찌해서 두 분의 수중으로
들어왔는지 까닭을 자세히 말해주오"
이번엔 파쿠타가 대답한다.
"퉁맹가 티무르에게는 이분의 남편인 막내아들 퉁맹가 이외에 큰아들 피카르가 있습
니다."
"그렇지. 건주위로 퉁맹가가 장가들러 왔을 때 형이 한 사람 있다는 말을 들었지."
우디거의 사위인 추장이 말대꾸를 했다.
"옆에 두고 말하기는 미안합니다마는, 보시다시피 과수댁은 참말미인입니다. 큰아들
피카르는 제수를 보자 그만 초면에 넋을 잃었습니다."
"저 런-."
우디거 사위인 추장의 목소리다.
"단통 제수를 아내로 삼으려 했습니다. 혼인을 하자고 강박을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
티무르한테 허락을 맡고..."
김종서 75
이때 혹의미인은 잠깐 얼굴을 붉히며 외면을 했다.
"오도리족들은 아직도 형이나 아우가 죽으면 둘째 아내를 삼는 풍습이 남아 있군
요?"
이번엔 우디거의 딸이 탄식조로 말했다,
"그래서?"
우디거의 사위가 다음을 이야기하라고 재촉을 한다.
파쿠타는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때 저는 순력을 도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과수댁이 거처하오 있는 별당 앞을 도는
중인데 별안간 '사람 살리라' 는 급한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쫓아 들어가 보니 욕을
당하려는 찰나이었습니다. 그때 과수댁은 형수나 제수를 범하는 일은 금수의 짓이라 하
고 혼인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나는 곧 큰아들 피카르의 등을 밀어 내쫓았습니다. 이후
부터 피카르는 앙심을 먹고 나를 죽이려 했습니다?"
파쿠타는 말을 계속한다.
"한편 오도리 늙은 추장은 어서어서 우디거를 쳐 무찌르고 우디거 추장님의 부인을
약탈해다가 첩을 삼으려 했습니다. 일변으로는 막내의 원수를 갚고 일변으로는 절세가
인을 뺏어다가 향락을 하자는 작정이지요. 그래서 전쟁준비가 완성됐습니다. 그 후에
관전식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피카르의 모든 무예는 나를 따르지 못했습니다. 저
분은 나에게 칭찬하는 뜻으로 자기 목에 걸었던 산호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주었습니
다. 그 후부터 우리들의 정은 깊어지고. 피카르의 시기하는 마음은 절정에 올랐습니다.
마침내 몇 번인지 결투를 했습니다. 번번이 피카르는 나한테 졌습니다. 그러해서 피카
르는 나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내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저의 아버지한테 참소하는 고자
질을 해서 나를 잡아 죽이라고 포박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쯤 되니 저분은 나를 구하기
위하여 비밀하게 내린 포박명령을 알려주고 부인의 초상화를 증거물로 훔쳐 가지고 와
서, 오도리가 우디거를 공격하려는 실정을 폭로하면서 우디거로 귀화하기를 원한 것입
니다."
우디거 젊은 추장 내외는 비로소 파쿠타와 혹의미인의 귀화하기를 원하는 까닭을 환
하게 알게 되었다.
젊은 추장은 덥석 파쿠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졸지에 오도리족의 침략을 받아서 큰 변을 당할 뻔했소
이다. 두 분의 귀화를 쾌하게 허락하오?"
젊은 추장은 파쿠타의 손을 더 한 번 굳게 잡아 흔들펐다.
한편 우디거의 딸 추장 아낙은 부끄러운 듯 외면하고 앉은 흑의미인의 허리를 껴안
고 말했다.
"당신이 아니었더면 나는 별 수없이 오도리한테로 끌려가서 늙은 추장의 첩이 되었
을 것이오. 감사함을 형언해 말할 수 없소! 더구나 당신의 남편을 죽게 한 우리들 부부
를 원수로 대하지 아니하고 은혜를 끼쳐주시니 이 크나큰 덕을 무엇으로 갚으오리까?"
과부인 흑의미인은 보시시 웃으며 대답한다.
"제 남편이었던 퉁맹가를 죽이신 일은, 일부러 죽이려 해서 죽이신 것이 아닌 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만주의 명을 받아, 퉁맹가가 부대장님과 부인을 해하려 하므로 부대
장께서 저의 남편을 죽이고 우디거로 달려오신 것이 아닙니까?" 선수를 쓴 것은 저의
남편이요. 부대장님이 아니십니다. 허물은 이만주와 죽은 저의 남편한테 있습니다. 저는
절대로 두 분을 원수로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혹의미인의 대꾸하는 말은 입에처 향기가 도는 듯했다. 비록 여진족속의 여인이나,
아름다우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였다.
"고맙소, 말씀만이라도-. 두고두고 당신들의 은혜를 갚으오리다."
우디거의 젊은 추장 내외는 모든 의심을 활짝 풀어버렸다.
"피곤하시겠소이다. 객관으로 인도할 테니 편히 쉬시도록 합시오"
시자에게 분부해서 편히 쉬게 했다.
우디거 젊은 추장 내외는 객관으로 내보낸 파쿠타와 과수댁에게 진수성찬과 좋은 금
침을 내보내서 우대한 후에 또다시 군영주보에 명을 내려, 백 리밖에 머물러 있는 파쿠
타가 거느리고 온 2천 병마에게 밥을 지어 배불리 먹이라 했다.
이튿날 젊은 추장 내외는 객관으로 친히 나가 멀리 귀화해온 파쿠타와 과수댁을 위
로한 후에 함께 백 리밖에 있는 오도리 2천 군마를 열병하러 나갔다.
젊은 추장과 그의 아내 우디거의 딸은 건주위에서 부대장으로 있던 경험 많은 장교
했다.
오도리에서 파쿠타가 훈련시킨 2천 병마의 무예를 시험해보려는 것이다.
파쿠타 역시 우디거 추장의 무예를 소문 들어 짐작하고 있었다. 자기 휘하에서 조리
있게 훈련된 군사들의 무예를 자랑하고 싶었다.
마상에 높이 앉아 있는 우디거 추장 내외 앞에서 스스로 장검을 빼어들고, 2천 병마
를 호령하며 지휘했다.
2천 병마는 싸쿠타의 지휘에 따라 우디거 추장 내외에게 군례를 드린 후에 무예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말달리기, 창쓰기, 철퇴쓰기, 활쏘기, 가지각색의 무술을 자랑해 보였다.
우디거 추장 내외는 항상 만족한 웃음을 띠고 무예가 끝날 때마다 손뼉을 쳐서 칭찬
을 했다.
열병이 끝난 후에 우디거 추장은 파쿠타에게 말했다.
"장군은 2천 병마를 우시거에 귀속하기를 원했으니, 오늘부터 나의 휘하에 배치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겠소?"
파쿠타는 공손히 대답한다.
"허락이라니 말씀이 됩니까? 추장님께서 받아주신다면 그런 다행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도와 아장이 되구 2천 병마는 곧 입성을 시켜서, 우디거의 마
병에 편입시키겠소이다."
"물리치지 않고 거두어주시니 이런 다행이 없습니다. 곧 2천 마병에게 높으신 분부를
전하겠습니다."
파쿠타는 말을 마치자 마상에서 지휘검을 빼어들고 호령을 내린다.
"지금 추장님께서는 너희들의 좋은 무술을 사열하신 후에 매우 만족하게 생각하셨다,
너희들에게 입성을 허락하시고 나를 아장으로 삼으신 후에 너희들을 우디거 군졸로
편입시킨다 하셨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당당한 우디거의 병졸들이다. 충성을 다하여 우
디거 추장님을 받들도록 하라?"
2천 병사는 환호성을 높이 올렸다.
파쿠타는 다시 군령을 내린다.
"아까는 객병의 쥐치에서 군례를 드리고 무술을 자랑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들은 우디
거 추장님을 대장군으로 모시었다. 우디거 병졸로서의 군례를 드리라?"
2천 마병들은 파쿠타의 구령에 따라 일제히 긴칼을 높이 빼어들고 우디거 추장 내외
를 향하여 휘하에 예속된 군례를 드렸다.
추장 내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군례를 받았다.
우디거 젊은 추장은 아내와 함께 새로 귀화한 2천 마병의 군례를 받은 후에 대장의
자격으로 군령을 내린다.
"자아, 너희들 오도리 2천 마병은 이제부터 나, 우디거 추장의 군졸이다. 충성을 다하
여, 우디거의 간성이 되라?"
2천 마병은 또다시 칼을 빼어들고 군례로 대답했다.
"자아, 입성이다-."
우디거 추장은 또 한 번 군령을 내린다.
2천 마병은 구령에 따라 엄숙히 행진을 시작했다.
우디거 추장이 아내와 함께 앞을 서 말을 타 나가고, 다음에는 파쿠타와 흑의미인이
따르고, 다음에는 2천 병마가 뒤를 이어 말굽 소리 드높게 성안으로 들어갔다.
우디거 부락의 오랑캐들은 힘 안들이고 정병 2천을 얻은 것이 기뻤다. 거리거리 손뼉
을 울리며 새로 귀화한 병졸들을 맞이했다.
우디거 추장은 병졸들을 영문에 배속시킨 후에 추장의 거실로 들어가 파쿠타와 흑의
미인에게 술과 안주를 내어 대접했다.
단란한 좌석이었다.
술기운이 거나하게 돌았을 때 우디거 젊은 추장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아내에
게 말한다.
"나는 오늘 밤에 기럭아비가 될 테니, 당신은 중매어미가 되는 것이 어떻겠소?"
"좋은 말씀입니다. 즐겁게 중매어미가 죄겠숱니다."
파쿠타와 흑히미인의 떨어질 수 없는 연정을 짐작한 우디거 추장내외는 파쿠타와 흑
의미인을 사라보면서 슬몃 말을 던졌다.
흑의미인은 생긋 웃고 고개를 돌리고, 파쿠타는 벙글벙글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때, 파쿠타! 이제는 내 아장이 되었으니 내 명령에 복종해야 하네!"
"여부가 있습니까. 절대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지요."
"그렇다면 자네는 오늘밤에 흑의미인과 동방화촉을 밝혀야 하네?"
"네, 상관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추장의 아내인 우디거의 딸이 말을 가로막는다.
"안부로 자처한 분이 중매어미를 제쳐놓고 동방화촉을 밝혀라 마라 하니 주제넘은
일이오. 안부란 기러기를 받들고 혼인날 신랑을 인도하는 것이오. 동방화촉을 밝히라
하는 것은 중매어미가 할 일이지, 당신이 간섭할 노릇이 아니오"
"아아, 참 그렇던가. 그럼 임자가 총각과 색시한테 내외가 되려느냐고 물어보구려 !
하하하"
우디거 추장은 괘사를 떨며 호걸 웃음을 웃었다.
우디거의 딸은 일부러 과수댁에게 묻는다.
"파쿠타가 마음에 들지?"
과부는 생긋 웃고 대답이 없다.
"자, 그러면 오늘 밤에 동방화촉을 밝힙시다?"
방안에는 화기가 가득했다.
이날 밤에 파쿠타와 흑의미인은 정식으로 혼인을 했다.
이리하여 파쿠타와 흑의미인은 공공연하게 내외가 되어 즐거운 사랑의 결실을 이룩
했다.
한편 우디거 젊은 추장은 오도리 늙은 추장 퉁맹가 티무르가 크게 군사를 조련하여
우디거를 정복한 후에 아내를 뺏어다가 첩을 삼으려한다는 정보를 파쿠타에게서 듣자
크게 노했다.
파쿠타와 혹의미인의 삼일 신방이 끝난 후에 우디거 추장은 곧 파쿠타 내외를 불렀
다,
"이제 자네들은 기회를 잘 잡아서 사랑의 결실을 이루어 소원이 성취되었네. 그러나
나도 내 일을 좀 해야 하겠네, 오도리 추장 퉁맹가 티무르를 쳐서 설욕전을 시작해야
하겠네. 좋은 의견을 말해주게!"
옆에 있던 우디거의 딸 추장의 아내가 말참견을 한다.
"나를 첩으로 삼겠다는 놈은 죽여버려서 버릇을 톡톡히 가르쳐주어야 하오. 그대로
공격만 해서는 분이 풀리지 아니하오. 죽여야 합니다?"
흑의미인은 이제는 파쿠타의 아내가 되었다. 검은 상복을 벗고 화려한 푸른 옷을 입
었다. 옆에서 한 마디 한다.
"저도 이제는 파쿠타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티무르와 피카르와도 연이 끊어졌으니 한
마디 합니다. 피카르에게서 곤욕을 당하던 생각을 하면 치가 떨립니다. 피카르도 처치
해줍시오?"
"아무렴, 피카르도 처치해버려야지, 그놈은 나를 모함해서 죽이려던 자가 아닌가!"
파쿠타는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자아, 그럼 내일이라도 출군을 하면 어떠한가?" 우디거의 정예부대가 2천 명이 있고
파쿠타의 마병 2천 명을 합치면 4천 명이 되니 이만하면 넉넉히 오도리족을 진압할 수
있지 않겠는가?" 파쿠타, 의견을 말해보게나."
우디거 젊은 추장은 파쿠타를 향하여 물었다.
"지금 오도리 부락에는 피카르가 거느린 보졸 2천 명밖에 없습니다. 우디거의 2천 병
마는 장군이 건주위에서 인솔해오신 정예부대요, 소장이 데리고 달려온 2천 마병은 오
도리에서 쏙쏙 뽑아 논 날랜 군졸들이올시다. 두 편의 사졸을 합세해서 몰아 들어간다
면 대쪽을 쪼개내듯 거침없이 쳐들어갈 것입니다. 아무 염려 마십쇼!"
파쿠타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일 곧 출병을 하기로 하세?"
우디거 추장은 단을 내렸다.
파쿠타가 다시 말한다.
"편대에 대하여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오도리 부락이 있는 오음회로 쳐들어갈 때 소장이 선봉이 되겠습니다."
우디거 추장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대답한다.
"내가 자네한테 부탁하려 했더니, 자네가 먼저 말을 하네그려. 지세도 알고 저쪽 형편
을 잘 알고 있으니 다시 더 할말이 없네. 자네가 선봉대장이 되어주게."
"나도 앞장서서 가게 해주시오. 내 손으로 늙은 추장 티무르를 죽여야 하겠소?"
추장의 아내 우디거의 딸이 말한다.
"저도 앞에 나가서 치골 피카르를 죽이겠습니다."
이번엔 파쿠타의 아내가 청한다.
"좋다!"
우디거 추장은 쾌하게 허락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우디거 젊은 추장은 전군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우디거의 군사 2천 명과 파쿠타가 거느리고 들어온 군사 2천 명, 도합 4천 병마는 기
치창검을 창공에 번득이며 출전명령에 대기하고 있었다.
우디거 추장은 스스로 대장군이 되어 붉은 복닥이 쓰고 백마 위에 높이 앉아 청룡도를
번쩍 들어 전군을 지휘한다.
"아장 파쿠타는 소속 부대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오라?"
파쿠타는 푸른 복닥이 쓰고 철총마 위에 높이 앉아 2천 마병을 거느리고 말굽 소리
드높게 앞으로 나와 도열했다.
"나의 아내에게는 좌익조전장의 명호를 준다. 아장 파쿠타의 왼편으로 나오라!"
우디거의 딸인 추장의 아내가 누른빛 복닥이 쓰고 유월내 말 타고 긴 칼 비껴들고
달려나와 파쿠타의 왼편으로 나섰다.
추장은 다시 군령을 내린다.
"아장 파쿠타의 아내에게는 우익조전장의 명호를 준다. 아장 파쿠타의 우익이 되어
적진으로 돌격하라?"
지난날 퉁맹가의 아내였고 새로 파쿠타의 아내가 된 흑의미인은 이제 상옷을 벗고
청의미인이 되었다. 남색 복닥이에 푸른 옷 입고 장창을 비껴들고 백마를 달려 파쿠타
의 오른편에 섰다.
추장은 다시 또 영을 내린다.
"세 장수는 선봉이 되어 2천 마병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가라! 나는 후군이 되어 선
봉의 뒤를 받치리라?"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선진은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추장은 뒤를 이어 2천 병마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향해 나갔다.
강물은 아직도 땅땅 굳게 얼어붙었다. 도강작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4천 병마는 거
리낌없이 수월하게 강을 건넜다.
선봉장 파쿠타는 오음회 지평에 당도하자 2천 병마에게 영을 내린다.
"너희들은 원래 오도리 족속들이다. 무능하고 탐욕 많은 지휘자인 티무르와 피카르로
인하여 나를 따라 우디거로 피했던 것이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티무르 부자를 응징
하러 가는 길이다. 이들 부자 이외에는 절대로 군사와 백성들을 죽이고 상하게 해서는
아니된다. 칼과 창으로 엄포만 주고 화살이 비오듯 쏟아질지라도 방패를 들어 막아대기
만 하라. 절대로 동족상잔을 해서는 아니된다. 다만 꼭지 두 사람만 응징할 테다."
모든 군졸들은 일제히,
"좋습니디-."
하고 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한편 오도리측에서는 파쿠타가 혹의미인과 함께 정예부대 2천 병마를 이끌고 우디거
로 넘어간 후에 크게 낙망이 되었다. 군사들의 사기도 뚝 떨어졌다.
일변 피카르는 파쿠타를 잡아죽이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추적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낙상을 한 후에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치료가 된 후에는 날마다 군사들만 패주
고 볶아댔다. 사졸들의 원성은 나날이 높아갔다. 우디거를 공격해서 추장의 아내를 뺏
어오려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퉁맹가 티무르와 아들 피카르는 정신이 산란하게 지내고 있을 때 돌연 오음회 성문
을 지키고 있던 수문장은 급히 말을 달려 변을 고했다.
"우디거 쪽에서 사오천 명의 마병들이 두만강을 건너서 홍수 밀 듯 쳐들어옵니다?"
"무어야, 우디거 쪽에서 군사 사오천 명이 두만강을 건너서 홍수 밀듯 쳐들어온다?"
퉁맹가 티무르와 피카르는 깜짝 놀랐다.
"네, 그렇습니다. 위수대장은 파쿠타입니다. 그리고 우편에는 혹의미인이 청의미인으
로 변장해서 장창을 비껴들고 파쿠타를 도와 말을 달려 들어오고, 좌편에는 일위 미인
이 장검을 휘두르며 파쿠타를 도와 짓쳐 들어옵니다."
파쿠타가 위수대장이 되어 쳐들어오고 혹의미인이 조전장이 되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피카르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무어야, 파쿠타가 앞장을 서서 쳐들어오고 제수가 조전장이 되어온다? 아버지, 어찌
하면 좋습니까. 파쿠타란 놈이 기어코 반란을 일으켜 쳐들어옵니다 그려!"
피카르는 부들부들 떨었다. 금방 경풍이 될 지경이었다.
아비 티무르는 그 동안 우디거 딸의 미인도를 잃어버린 후에, 거의 성광 지경에 이르
렀다. 일위 미인이 파쿠타의 좌익조전장이 되어 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급히 수문장에게
묻는다.
"파쿠타의 좌익조전장이 되어 쳐들어온다는 일위 미인은 우디거의 딸이 아니더냐?"
수문장은 우디거의 딸을 알 까닭이 없었다.
"소인은 우디거의 딸을 본 적이 없습니다."
"참, 그렇지. 그러면 지난번에 건주위 마천 추장이 가지고 온 미인도의 얼굴판 같더
냐?"
수문장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대답한다.
"소인은 건주위가 가지고 온 미인도를 본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미인도란 어떠한 것
입니까?"
"예끼놈, 무식한 놈이로구나. 미인도란 아름다운 여자의 그림이란 말이다."
"그렇습니까?" 미인도라는 것은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마는 어떻든 얼굴이
아주 예쁜 절대가인입니다."
"아아 그렇더냐? 절대가인이더냐? 반드시 우디거 딸이 분명하구나! 내가 꼭 사로잡
아서 별실을 삼아야 할 텐데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늙은 추장 티무르는 노망이 든 모양이다, 적병이 쳐들어온다 하는데 적을 막아 몰아
낼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미인 생각에만 골똘했다,
수문장은 급하고 초조했다.
"도대체 적병이 쳐들어오는데, 막아낼 생각은 하지 아니하시고 미인도 타령만 하시
니, 장차 이 일을 어찌하려 하십니까?"
퉁맹가 티무르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났다. 급히 설렁줄을 흔들어, 보졸 패장을 불렀
다.
"반적 파쿠타가 군사를 거느려 쳐들어온다 한다. 빨리 보졸을 동원하여, 수문장과 함
께 막아내라. 그리고 피카르는 도지휘가 되라"
티무르의 동원령이 떨어지니 피카르는 아니 일어날 수 없었다. 벌벌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도리의 보졸 2천 명은 피카르와 패장의 지휘를 받고 황황히 활과 살을 준비하여
오음회 성문 밖으로 나갔다.
피카르는 명색이 도지휘가 되었으니 먼저 앞을 서서 나가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
나 머릿속에는 제수 혹의미인의 아리따운 모습과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 했던 파쿠타의
일이 가득하게 떠올랐다. 마음이 불안하고 산란했다.
칼을 빼어들고 말을 달려 앞에 나갔으나 거의 지휘할 능력을 상실할 단계에 빠져 있
었다. 피카르의 다음 줄에서 말을 달려 나가던 패장이 엄하게 호령을 내리면서 군졸들
을 지휘하고 나갔다.
성 밖 오 리쯤 갔을 때 우디거에서 오는 대군과 마주쳤다. 군사마다 일기당천의 기세
로 말은 '어흥' 소리를 쳐 반공에 굽을 솟구쳐 달려들고, 군졸들은 함성을 질러 밀물 밀
어닥치듯 물려들었다.
말굽 뛰는 소리, 고함쳐 들레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켜 뒤훈들었다.
피카르는 칼을 빼들고 쳐들어오는 적을 바라보니 과연 위수대장은 파쿠타다. 푸른 복
닥이 쓰고, 철총마 위에 높이 앉아 장창을 비껴들고 전군을 지휘한다.
피카르는 다시 정신을 수습하여 바라보니, 파쿠타의 옆에는 수문장이 말한 것같이 제
수인 흑의미인이 청의미인으로 변하여 남빛 복닥이 쓰고 백마를 달려 짓쳐 나오고, 좌
편에는 또 한 사람의 여인이 누른 빛 복닥이 쓰고 유월내 말을 달려 파쿠타를 도와 나
온다.
피카르의 기가 푹 죽었다. 어찌할지 모르고 있을 때, 파쿠타는 오도리 보졸의 앞을
서서 나오는 피카르를 발견했다. 장창을 번쩍 들었다. 홍종 같은 목소리로 꾸짖는다.
"이놈 피카르야, 그 동안 잘 있었느냐? 나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 했지만, 이제는
네가 죽을 차례다! 목을 길게 늘여 심판을 받아라!"
파쿠타의 꾸짖는 말이 떨어지자 아름다운 여인의 교성이 꾀꼬리 소리모양 곱게 들려
왔다.
"아재, 그 동안 태평했소. 치골의 짓도 많이 하고-. 이제 나는 파쿠타와 결혼을 했소!
그래서 검은 거상 옷을 벗어버리고 푸른 화복을 입었소. 이제 당신과는 아재와 제수의
의리는 끊어졌소. 천벌을 밟으오"
피카르는 비로소 제수가 혹의를 벗고 푸른 옷을 입은 내력을 알았다. 파쿠타와 결혼
을 했다는 말을 듣자 오장육부를 날카로운 칼날로 난도질을 치는 듯했다.
혼백이 아찔했다. 손끝 발끝이 꽁꽁 얼었다. 잡았던 칼이 뚝 떨어졌다. 말고삐를 놓쳤
다. 말이 뛰었다. 피카르는 화살 한 대 맞지 않고 말 위에서 떨어졌다.
오도리 보졸들은 낙마된 피카르를 급히 구해서 후방으로 돌렸다.
피카르가 낙상이 되어 후방으로 돌려지니, 오도리 군사들의 도지휘는 보졸 패장이 되
는 수밖에 없었다.
칼을 빼어들고 앞으로 나섰다.
급히 호령을 내린다.
"오도리 보졸 전군은 일제히 활을 쏘아 쳐들어오는 적을 막으라!"
오도리 패장의 명이 한 번 떨어지니, 보졸들은 일제히 활시위에 살을 메겨 우디거 마
군들을 향하여 쏘았다.
화살은 소리치며 비오듯 쏟아졌다.
파쿠타는 급히 군령을 내린다.
"이편에서는 절대로 활을 쏘지 말라! 출군할 때도 일러두었다마는 2천 마병, 너희들
은 모두 다 오도리와 피를 같이한 한 겨레다. 절대로 동족상잔을 해서는 아니된다. 방
패로 화살을 막으라!"
우디거 마군들은 일제히 방패를 들어 날아드는 화살을 막으며 돌진했다.
오도리 보졸들은 파쿠타의 '동족상잔을 하지 말라' 는 장중한 목소리를 듣자, 모두 다
감격했다. 더구나 파쿠타는 오도리에 있을 때 군사들의 추앙을 받던 인물이었다. 인품
에 눌리고 피를 같이한 한 겨레란 말에 모두 다 가슴이 뭉클했다.
한 군사가 급히 산등성이로 올라 큰 소리를 친다.
"우디거의 선봉대장은 일찍이 우리가 상사로 모시었던 파쿠타다! 우리가 어찌 상사
를 향하여 화살을 쏘아 대항할 수 있느냐. 더구나 그분은 마군에게 명을 내려, 대항하
지 말고 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전진하라 했다. 우리를 상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우
리도 어찌 동족을 향하여 활을 쏠 수 있느냐? 모두 다 활을 버리고 항복을 해서 다 함
께 살기로 하자!"
모든 군사들은 옳다고 생각했다.
"옳다! 파쿠빠 장군이 거느린 2천 마병은 본시 우리들의 형제다.
형제끼리 어찌 칼과 창과 화살로 찌르고 쏘고 죽일 수 있느냐? 활을 내리고 화친하
기로 하자!"
행렬 속에서 또 한 명의 군사가 호응했다.
또 다른 한 사람의 군사가 떠들어댄다.
"파쿠타 장군은 우리의 존경하는 대장이었다. 추장의 아들 피카르가 치골의 짓을 해
서 제수를 겁탈하려 한 대문에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파쿠타 장군의 인품을 존경
한다. 자아,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살기로 하자!"
오도리 2천 보졸들은 일제히 활과 무기를 버렸다.
오도리 패장도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2천 군사의 의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들었던 지휘도를 땅에 던졌다.
말에서 내려 파쿠타의 앞으로 나갔다. 패장 역시 파쿠타의 하관이었던 사람이다. 공
손히 예를 올렸다.
"장군의 인덕과 동족상잔을 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씀에 모든 군사들은 일제히 감격해
서 활과 무기를 모두 다 땅에 버렸습니다. 군사들의 순박한 뜻을 받아주시오!"
파쿠타는 기뻤다.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허물로 인해서 만백성을 살육과 도탄과 초토 속에 몰아넣는
다는 일은 차마 할 짓이 아니오. 오도리의 보졸들이 다 나의 뜻을 알아서 싸우기를 포
기했다 하니 이런 다행한 일이 없소! 우리들의 전진을 막지만 말아주오?"
"예, 그러하겠습니다!"
패장은 쾌하게 허락했다. 곧 길을 돌려 오도리 보졸들에게 영을 내린다.
"오도리 군사들은 파쿠타 장군의 입성을 막지 말라!"
오도리족의 보졸들은 일제히 길을 비켰다.
파쿠타의 2천 마병과 우디거 추장의 2천 군사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오도리성
을 통과했다.
파쿠타와 우디거 추장은 전군에 엄중한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오도리 군사들의 열복을 받아 한 사람의 생명도 상하지 아니하고 수윌하게
입성하게 되었다. 군사들의 행동이 점잖고 의로운 때문이다. 앞으로 성안에 들어갈지라
도 민가에 대해서는 추호도 범하지 말고 점잖게 행동을 하라. 더구나 내가 거느린, 오
도리에서 우디거로 갔던 군사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아내와 자식들이 얼마나 반갑게 그대들을 맞이할 것인가? 각
별히 조심해서 의젓하게 행동을 취하라?"
모든 군사들은 일제히 소리쳐 대답한다.
"삼가 군령을 받들겠습니다."
4천 명 군사들은 엄숙하게 질서를 지키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별안간 난리가 났다고 피란 보따리를 싸들고 갈팡질팡 도망가던 백성들은 화살 한
대 쏘지 않고, 칼 한 번 휘두르지 아니한 채 화평한 모습으로 입성하는 군사들의 모습
을 바라보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남부여대했던 피란 보따리를 길가에 내려놓고 바라본다.
"웬일이냐?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더니, 벌써 싸움을 다했느냐? 이상한 일이다. 군사
들은 살기 없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들어오니 웬일이냐?"
한 백성이 행진하는 군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소리친다.
"앞에서 말 타고 지휘하는 대장이 마군대장이었던 파쿠ㄷ타가 아니냐?"
한 백성이 눈을 씻고 바라본다.
"아 참, 바로 파쿠타로구나. 그리고 자세히 보아라. 파쿠타 옆에 여장군 두 사람이 말
을 타고 나오는데 첫 여자는 누군지 모르겠다마는, 한 여자는 추장 티무르의 과부 며느
리다. 건주위에서 서방이 죽은 후에 과부가 되어 시집으로 왔던 흑의미인이 분명하다.
지금은 청복을 입었구나!"
"아 참, 그렇구나. 바로 그 여자다!"
이곳 저곳에서 이야기가 분분할 때 홀연 길 건너편에서 늙은 노파 한 사람이 큰 소
리로 부르짖으며 군졸의 행렬 속으로 지팡이를 짚고 뛰어들었다.
"아이고, 네가 타루화치가 아니냐. 나는 꼭 네가 죽은 줄만 알았구나! 이생에서는 다
시 못 만나볼 줄 알았더니, 이같이 만나보니 꿈이냐, 생시냐?"
"아이고, 어머니!"
늙은 할미와 군사 한 사람은 얼싸안고 반가운 울음을 터뜨렸다.
파쿠타를 따라 우디거로 갔던 마군 한 사람의 늙은 어머니다.
모든 군사와 피란가던 백성들은 이 광경을 바라보자 멍하니 얼이 빠져 감격 속에 잠
겼다.
이때, 파쿠타는 2천 명에게 분부를 내렸다.
"나의 부하 2천 마병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왔다!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 부모와 처자
를 찾아라?"
파쿠타의 군령이 떨어지니 2천 마병의 환호정은 천지를 진동했다.
파쿠타는 고향으로 돌아온 2천 마군을 해산하여 부모와 처자를 찾게 한 후에 우디거
추장과 함께 오도리 패장을 향도로 하여, 우디거 군사를 거느리고 퉁맹가 티무르와 피
카르 부자가 있는 곳을 찾았다.
이때 티무르는 우디거가 쳐들어온다는 수문장의 보고를 받자 급히 보졸을 출동시켜
아들 피카르오 도지휘를 삼고 패장으로 지휘를 삼아 오음회 성문 밖에서 적을 방어하
라 하고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아들 피카르는 겁에 질려 적에게 화살 한 대 쏘지 못하고 수각이
황란해서 말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고 돌아왔다. 불안하기 짝없었다. 허리를 다쳐 누
운 피카르와 함께 좋은 전과만 기다지고 있었다.
별안간 거리가 소란하면서 우디거의 2천 병마는 티무르의 궁실을 포위해버렸다.
시자가 급히 들어와 고한다.
"지난번에 과부와 함께 2천 마병을 거느리고 우디거로 달아났던 파쿠타가 우디거 군
사 2천 명과 합세하여 도합 4천 명이 쳐들어왔습니다. 젊은 추장이 낙마하고 돌아온 후
에 파쿠타는 동족상잔을 하지 말라고 영을 내려서 오도리 군사들에게 활을 쏘지 아니
했습니다. 군사들은 여기 감복해서 모두 활과 칼을 버려서 무혈입성을 했습니다. 파쿠
타는 입성을 하자 우디거로 데리고 갔던 2천 마병을 부모와 처자의 품안으로 돌려보냈
습니다. 환성이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파쿠타는 이제 크게 민심을 얻었습니다. 지금 우
디거 2천 군사만이 이곳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위급하기 짝 없습니다. 풍전등화 올시
다?"
시자의 보고를 듣는 티무르와 아들 피카르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한 마디 말을 못하
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시자 한 명이 또 뛰어들어왔다.
"지금 우디거 추장과 여장군들이 칼과 창을 비껴들고 이곳으로 들어옵니다. 빨리 몸
을 피해 달아나셔야 합니다?"
"어떻게 달아난단 말이냐. 2천 병마가 포위를 했다면서..."
늙은 추장 티무르는 무녀가 대를 잡고 떨 듯했다. 턱까지 떨었다. 이가 마주 부딪쳐,
'랄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낙마를 해서 허리를 다친 피카르는 꼼짝달싹을 못하고 누워 있었다. 겁에 질렸다. 얼
음판에 자빠진 소모양, 눈을 멀뚱멀뚱 뜨고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
"소장의 옷을 바꾸어 입고 사람 틈에 끼여 빨리 달아나십시오!"
"횐 머리와 횐 수염이 유표한데 어찌하느냐?"
"머리에는 검은 복닥이를 쓰고 횐 수염은 깎고 달아납시다!"
"나는 달아나지만 낙상이 되어 자빠진 저 피카르는 어찌한단 말이냐!"
"소장이 업고 달아나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 누웠던 피카르는 소리를 벌컥 일렀다.
"나는 죽었다. 꼼짝없이 잡혀 죽는다!"
늙은 추장 티무르는 황급하게 검은 복닥이를 센 머리에 뒤집어썼다. 칼을 뽑아 흰 수
염을 잘랐다. 시자와 옷을 막 바꿔 입으려 할 때 문밖에서 '쿵, 쾅' 발자국 소리가 요란
하게 들렸다.
방문이 '드르륵' 황하게 열렸다.
한 사람의 대장이 서릿발같은 긴칼을 비껴들고 들어섰다. 미목이 청수했다. 기상이
늠름했다.
뒤미처 명모호치에 쌀쌀한 기운을 얼굴에 가득히 떤 여인이 단검을 뽑아들고 들어섰다.
늙은 추장 퉁맹가 티무르는 겁에 질려서 수염 깎던 칼을 내던지며 바라보았다. 기막
히지 않은가. 자기를 노려보고 섰는 여장군은 건주위 마천 추장이 우디거를 쳐서 아들
퉁맹가의 원수를 갚고 일석이조로 우디거 딸을 뺏어다가 첩을 삼으라고 했던 바로 그
미인도와 똑같은 여장군이다.
늙은 추장 티무르는 '악' 소리를 치며 펄썩 주저앉았다. 손발이 오그라지며 벌벌 떤
다.
여장군은 단검을 뽑아들고 바싹 늙은 추장 티무르 앞으로 다가섰다.
"네가 늙은 추장 티무르냐?"
티무르는 대답을 못하고 벌벌 떨 뿐이다.
"나는 우디거의 딸이다! 네가 우디거를 짓밟은 후에 나를 뺏어다가 첩을 삼겠다던
그 여자다. 자아, 내가 여기 네 앞에 섰다. 첩을 삼아보아라!"
여장군은 날카롭게 티무르를 꾸짖는다.
"이 늙은 치한아, 도망을 가려고 개털 같은 센 대가리를 복닥이로 가리고 횐 수염을
잘랐구나. 어디 센 대가리 꼴이나 좀 보자"
우디거의 딸은 칼끝으로 티무르의 머피에 쓴 복닥이를 번쩍 들어 팽개쳤다.
허연 머리털이 드러났다. 우디거 딸은 까르르 웃어댄다.
"센 대가리를 해 가지고 무슨 놈의 힘이 있다고 나를 첩을 삼겠다고 했느냐?" 개털
같은 구레나룻을 깎고 도망을 가려는 주제에-. 자아, 내 얼굴이나 흠뻑 바라보아라! 눈
요기라도 실컷 하고 지옥으로 떨어져라?"
늙은 티무르는 고개를 푹 숙였나.
옆에서 장검을 비껴들고 씁쓸한 미소를 풍기며 미인의 곁에 섰던 우디거 젊은 추장
이 티무르의 앞으로 다가섰다.
분노에 찬 음성으로 격하게 꾸짖는다,
"늙은 놈이나 젊은 놈이나 너희 부자들은 난륜의 축생들이다. 과부 제수를 첩으로 삼
으려 하고, 이웃을 정벌해서 유부녀를 약탈하러 드는 악한 무리다. 여진 족속의 얼굴에
똥칠을 한 놈들이다. 천주를 받아라!"
긴칼이 번쩍 들렸다. 횐 무지개를 뿜으며 퉁맹가 티무르의 흰머리는 땅으로 굴러 떨
어졌다.
우디거 젊은 추장은 다시 발길을 아들 피카르의 앞으로 옳겼다.
"지옥으로 떨어져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좋은 사람으로 환생을 해라"
아비의 목을 자른 서릿발 같은 칼날은 다시 아들 피카르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이때, 파쿠타와 흑의미인은 일부러 밖에서 대기해 있고 방안으로 들어오지 아니했다.
차마 자기들의 손으로 상사였던 티무르와 시숙이었던 피카르를 죽일 수는 없었던 것
이다.
우디거 추장 내외는 퉁맹가 티무르와 피카르를 처치한 후에 파쿠타와 혹의미인과 오
음회에 사는 오도리족을 위안한 쿠에 영토에 대한 크나큰 꿈을 품고 두만강 국경을 넘
나들었다.
오음회에 변란이 일어나자 오도리족의 비장 범찰과 대이는 급히 길주에 있는 함길도
관찰사 조말생을 찾아와 애통한 말로 호소했다.
"우디거 추장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음회로 쳐들어와서 추장 퉁맹가 티무르 부자를
찔러 죽였습니다.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지금 오음회 저희 족속들이
살던 곳은 우디거 사람들에게 세력을 빼앗겨 부지해 살 도리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오
음회 조선 땅에 살게 해주셔서 크나큰 은혜와 신세를 졌습니다마는, 저희들의 사정을
불쌍하게 생각하시어 경원 근처에 살게 해주신다면 은혜는 백골난망이겠습니다."
두 사람은 울면서 애걸했다.
조말생은 크게 놀랐다. 그러나 이러한 중대한 일을 관찰사가 맘대로 처리할 수는 없
었다.
"곧 조정에 장계를 올려서 가부간 회답을 내리려니와, 어찌 된 까닭으로 우디거가 침
범해서 너희들의 추장 부자를 한꺼번에 살해했단 말이냐?"
범찰과 대이는 건주위 이만주의 농간으로 우디거를 공격해서 티무르의 막내아들 퉁
맹가의 원수를 갚는 한편, 우디거의 딸을 뺏어다가 첩을 삼으라 한 일이며, 피카르가
과부 제수를 아내로 삼으려 하다가 파쿠타와 사랑의 적이 되어 파쿠타를 죽이려던 일
이며, 파쿠타가 과부와 함께 우디거로 달아나서 티무르가 우디거를 공격하려던 일을 이
야기해서 일이 발단된 것을 일일이 설파했다.
조말생은 범찰과 대이에게 돌아가 기다리라고 이른 후에 급히 파발마를 달려 위와
같은 사유를 보고했다.
장계가 정원에 올려지니 도승지 김종서는 곧 빈청에 을라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
성, 우의정 최윤덕 삼정승과 함께 세종전하께 뵙기를 청했다.
전하는 내시를 통하여 알현을 허락했다.
도승지 김종서는 삼정승을 어전에 인도했다.
전하는 삼정승과 도승지가 입시하는 모습을 바라보자 옥음을 내려 묻는다.
"도승지가 삼정승을 인도하여 들어오니 무슨 중대한 일이 있는가?"
김종서는 장계를 올리며 아뢴다.
"함길도 관찰사 조말생이 급한 장계를 정원에 올렸습니다."
전하는 장계를 받아본 후에 어수로 무릎을 치시며 용안에 가득 미소가 떠돌았다.
장계를 책상 위에 놓고 장중하게 말씀을 내린다.
"때가 왔구나!"
눈치 빠른 도승지 김종서는 전하의 뜻을 알았다. 김종서의 입가에도 웃음이 떠돌았
다. '때가 왔구나?' 말씀하는 전하의 뜻을 잘 아는 때문이다.
그러나 영의정, 좌의정들은 전하의 '때가 왔구나?' 말씀하는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건주위를 응징해서 사군을 설치한 최윤덕 우상이 어렴풋이 전하의 말씀하는 뜻
을 짐작할 뿐이다.
도승지 김종서가 아뢴다.
"함길도 관찰사에게 어떠한 하교를 내리시올지, 대신과 국책을 의논하심이 좋을 듯합
니다."
세종전하는 삼정승을 향하여 옥음을 내리신다.
"지난번에 우상 최윤덕이 서북면 도절제사가 되어 사군 설치를 단행했을 때, 도승지
김종서는 단결에 야인의 무리를 국경 안에서 추방하자고 두만강 동북면에도 동시 출병
을 주장한 일이 있었소. 이곳 함경도 일대는 나의 선조의 발상지지라 내가 어찌 한시라
도 이 땅을 회복하지 아니하려 했겠소? 과인은 서북면을 정리하는 그 일보다도 동북면
의 잃었던 땅을 더욱 빨리 찾고 싶었소 그러나 여연으로 쳐들어오는 건주위 이만주란
놈을 그대로 버려두고 함경도 동북면에 손을 댈 수는 없었던 것이오. 당시에 김종서는
동시출병을 주장했소 그러나 나는 두 손에 떡을 쥐는 격의 만용이라 해서 때를 기다리
자고 종서한테 타일렀던 것이오. 그러나 이제는 사군을 든든하게 설치해서 압록강 대안
의 야인족의 침범을 막아서 큰 근심이 없게 되었소. 이제 장계에 의하면, 동북면 일대
의 야인들은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우리 땅 안에 살던 퉁맹가 티무르 부자를 죽였다 하
니, 이러한 일은 하늘이 정히 실지 회복의 기회를 준 것일라 하겠소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유능한 장재를 뽑아서 육진개척을 단행하기로 합시다."
도승지 김공서가 아뢴다.
"지난번에 여연을 침범한 이만주를 응징하실 때 신은 성정이 조급하와 함경도 일대
에 살고 있는 여진 족속들도 국경 밖으로 추방하자고 주장했습니다마는, 당시에 전하께
서는 막대한 국력의 소비를 염려하시어 다시 때를 기다리자고 하셨습니다. 신도 역시
전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해서 여태껏 정세만 살피토 있었습니다. 이제 함길도 감사의
장계에 의하면, 여진 족속들은 자중지란이 나서 오도리와 우디거가 서로 다툰다 하니,
전하의 하교대로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두 무리를 다 내쫓으시어 강토를 회복하시
옵소서."
전하는 대신들의 의향을 듣고 싶었다.
삼정승을 향하여 말씀한다.
"나라의 큰일이다. 과인의 뜻대로 결정할 수 없나. 경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좌의정 맹사성이 아뢴다.
"고려 이후 삼사백 년 내던졌던 황막한 불모지지 수 만리 땅에 잡거해 생활하는 여
진족을 두만강 밖으로 몰아내고 진을 두어 개척한다면 이 일은 전쟁을 치르는 일보다
도 더 힘이 드는 큰일이올시다, 일년 이태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깊이 통촉하시어
처리파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김종서가 좌의정의 아뢰는 말을 듣자, 반박해 아뢴다.
"동북면의 6진을 개척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닌 줄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은 단순하
게 침범해 들어온 적병을 막아서 싸워 물리치는 전쟁만이 아닙니다. 3대, 4대 섞여서
살던 여진 족속들을 두만강 밖으로 내쫓고 우리 백성들에게 안주의 땅을 마련해주는
일이니, 하루 이틀에 성사가 되는 일이 아닌 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 땅을
외족한테 맡겨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제왕이 되어 나라 다스리기가 어렵다
는 것이 아닙니까?"
김종서는 열을 띠어 맹정승의 말을 반박한다.
좌의정 맹사성과 도승지 김종서의 찬부 양론을 들으신 세종전하는 장중한 비상으로
한 말씀을 내린다.
"일이 어렵다 해서 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선조께서 사시고 지켜오시던 땅이다.
한 치의 흙덩이라도 포기해버릴 수는 없다?"
전하의 용안에는 굳센 표정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힘차게 말씀을 맺는다.
김종서가 다시 아뢴다.
"만약 이번 기회에 동북면 함경도 땅을 정리하지 못한다면 여진 족속들이 사는 것은
고사하고 명나라 땅이 되어버립니다!"
김종서는 말소리를 높언 삼정승을 향하여 말한다.
명나라 땅이 되어버린다는 김종서의 말에 정승들의 얼굴엔 놀라는 빛이 떠돌았다. 좌
의정 맹사성이 묻는다.
"명나라 땅이 되어버린다니 무슨 소리요?"
김종서는 쾌쾌하게 대답한다.
"정보에 의하면,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도리족을
위무하러 왔던 흠차관 배준은 변란이 일어나니, 백여 명 군사들을 거느리고 가만히 영
북진으로 도망쳐 내려왔다 합니다. 앞으로 자칫 잘못했다가는 함경도 일판은 명나라 땅
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래도 동북면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아니하시렵니까?"
김종서의 온몸은 불덩이같이 달았다. 열기 가득 찬 눈으로 대신들을 둘러본다.
명나라 땅이 된다는 말에 대신들은 비로소 간담이 서늘했다. 그럴듯한 말이다. 명나
라는 차츰차츰 요동과 요서를 차지하고 여진에도 위를 두기 시작했다. 조선 땅 무인지
경을 차지하기란 여반장의 일이다.
"대신들은 손바닥 안만 들여다보지 마시고 멀리 십 년 뒤, 백 년 뒤 일을 바라보시면
서 정치를 하셔야 합니다!"
김종서는 또 한 번 대신들에게 대화의 폭죽을 터뜨렸다.
좌의정 맹사성도 속이 탁 터진 인물이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아뢴다,
"옛적 주의 소공은 하루에 백 리씩 나라 땅을 개척했다 합니다. 함경도 공주는 선대
왕들이 대대로 사시던 곳이올시다. 지금은 황폐하여 야인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전하
께서는 차마 버려 두실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개척을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드디어 손을 들었다.
전하는 장중하게 말씀을 내린다.
"지난번에 최윤덕이 파저강을 건너 이만주의 소굴을 응징하여 크나큰 공을 이루었거
니와 이제 동북면 오음회에 둥맹가 티무르 부자가 죽은 후에 그의 부하 범찰이란 자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경원으로 옮아 살겠다 한다. 만약 오도리족이 다른 곳으로 간 후에
빈틈을 타서 다른 강적이 와서 산다면 또다시 땅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 이 기
회를 놓치지 말고 영북진을 회령으로 경원을 소다로 옮겨서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한다.
나는 공을 이루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라 땅을 찾으려는 것이다. 내 뜻이 이
미 정했노라"
모든 대신들은 고개를 숙여 찬동하는 뜻을 표했다.
전하는 도승지 김종서에게 명을 내린다.
"붓을 들어 유시를 쓰라. 과인이 친히 부르리라"
도승지 김종서는 붓과 벼루를 다가놓고 전하가 친히 부르는 유시문을 받아 쓴다.
세종전하는 옥음 낭랑하게 글을 부른다.
"예로부터 제왕은 왕업을 일으킨 땅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니, 써 근본을
삼는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북으로 두만강을 경계로 하여 하늘이 만들었고 땅이 베풀
었으며 웅번이 호위하여 강토를 한정했다."
"태조께서는 처음 경원부를 공주에 두셨고, 태종께서는 마을을 소다로로 옮기셨으니,
다 이룩하신 터를 소중하게 여기신 일이다. 지키는 신하가 잘 막지 못해서 부거로 물러
왔다."
"태종에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호인이 와서 살거든 곧 내쫓아서 도둑의 소굴이 되게
하지 말라 하셨다. 지금 소다로 공주는 잡풀이 우거졌고, 방자한 오랑캐 말발굽이 짓밟
고 뛰달려서 사냥터가 되어버렸다."
"나는 항상 이를 생각할 때 아픈 회포가 간절했다. 또 알목하는 곧 두만강 남쪽 우리
경계 안에 있다. 땅이 기름져서 농사짓고 목축하기에 마땅할 뿐 아니라 바로 요충이 되
는 것이니 큰 진을 합설해서 북문을 막으라."
"옛적에 퉁맹가 티무르가 공손히 귀순하니 태조께서는 사이를 두어 지키시는 뜻으로
잠시 허락-하셨던 것이다. 이번에 자중지난으로 멸망이 되니 번리가 일공되었다. 찾아
든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된다. 선왕의 뜻을 이어 받들어 타시 경원을 소다로로, 영북
진을 알목하로 옮겨서 백성을 모집해 지키게 하라"
"삼가 조종의 천험 봉강을 지켜서 변지 백성들의 수 자리하는 수고로움을 조금이라
도 덜어주려는 것이다. 내가 공을 이루기를 좋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나라 땅을 개
척하려는 것이다. 병조에서는 이 뜻을 몸 받아 조건을 합행하고 계속해 의논해서 복명
해 아뢰라."
세종전하는 청산에 물 흐르듯 병조에 내리는 유시를 친히 불렀다.
도승지 김종서는 쓰기를 다했다.
김종서는 전하께 유시문을 받들어 올렸다.
세종전하는 받아 보신 후에 영의정 황희에게 주시며 말씀한다.
"삼정층은 돌려서 보라!"
황희, 맹사성, 최윤덕이 돌려가며 읽었다.
"삼가 유시를 받들어 병조에 내리겠습니다."
삼정승은 일제히 몸을 굽혀 아뢰었다.
전하는 다시 삼정승에게 하문하신다.
"넓고 황폐한, 버렸던 땅을 개척하려면 한 해 두 해의 일이 아니다. 야인을 굴복시켜
서 변경 밖으로 쫓아내야 하고, 박토를 옥토로 바꿔야 하고, 이민을 시켜서 편안하도록
자리를 잡아주어야 한다. 슬기를 기울여 일을 바로잡아야 하고 용기와 담력으로 야인과
대결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물이 아니면, 도저히 이 크나큰 일을 담당할 수 없을 것
이다. 경들은 문무겸전한 장재를 천거토록 하라!"
우의정 최윤덕이 아뢴다.
"옆에 도승지 김종서가 시립해 있사옵니다마는 신은 주저치 아니하고 김종서를 천거
합니다. 종서는 비록 문과출신이오나 한 몸이 도시 담덩어리올시다. 그러하옵고 슬기로
운 지혜는 경천위지의 재주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올시다. 신이 일찍 압록강과 파저
강을 건너 건주위를 정복하고 사군을 설치했을 때, 종서는 안에 있어 전하를 오와 병력
과 군량과 군수를 조달하는 등 운주유악의 큰일을 많이 했습니다. 만약 종서가 아니었
던들 신은 성과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육진개척은 사군 설치의 유가 아니라 생각합
니다. 삼가 김종서를 전하께 추천합니다."
좌의정 맹사성이 최윤덕의 뒤를 이어 아뢴다.
"신은 처음에 함길도의 육진개척을 반대한 자올시다. 그러나 다음에 명이 이 지역을
탐낸다는 말을 듣고 전하께 선왕의 발상지지를 회복하시라 했습니다. 역시 큰일이올시
다. 이 일을 완성하자면 결국 김종서밖에 다른 인물이 없습니다."
좌의정 맹사성도 김종서를 천거했다.
다만 영의정 황희만이 묵묵히 대답이 없다.
전하는 황정승을 향하여 하문한다.
"영상은 어찌해 말씀이 없는가?"
황희는 부복해 아뢴다.
"종서는 신이 전하께 승지로 쓰십시사고 천거한 사람이올시다. 신은 후배를 앞에 두
고 칭찬하고 싶지 아니합니다. 되지 않은 풋기운을 양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종서는 겸
손하지 아니하고 고집과 패기가 너무나 많습니다. 후배를 아끼는 마음으로 종서를 천거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하께거 꼭 필요하시다 면 한번 써보십시오"
황정승은 엄숙한 얼굴로 아뢴다.
옆에 시립해 섰는 김종서의 얼굴빛은 마치 아버지의 꾸지람을 듯 황공한 빛을 띠었
다.
세종전하는 껄껄 웃으며 김종서를 향하여 말씀한다.
"김종서는 복이 많구나, 경이 저 황정승 같은 선배를 모시었으니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 경은 황의정께 절을 드려라!"
김종서는 어명을 받들어 황정승께 배를 드렸다.
전하는 다시 만족한 웃음을 띠고 말씀한다.
"김종서도 복이 많거니와 과인도 복이 많구려. 황의정, 맹의정, 최의정, 김종서 같은
훌륭한 신하들을 두었으니 내가 어찌 복이 없다 하겠소 하하하"
전하는 크게 만족하셨다. 쾌활하게 소리를 높여 웃으셨다.
전하는 다시 문 앞에 모시어 있는 내관을 향하여 분부를 내리신다.
"정원에 나가서 좌승지를 들라 해라"
내시는 황망히 어명을 받들고 정원으로 나가 좌승지를 데리고 들어왔다.
전하는 좌승지에게 명하신다.
"붓을 들라"
좌승지는 종이와 붓을 마련하고 어전에서 연상을 대하고 부복했다.
"도승지 김종서로 함길도 감사 겸 도절제사의 중임을 맡기라!"
좌승지는 무릎을 꿇고 교지를 써서 전하께 올렸다.
전하는 삼정승이 시립한 자리에서 친히 함길도 감사 겸 도절제사의 교지를 김종서에
게 내리며 말씀한다.
"어려운 일을 경에게 맡긴다. 힘과 슬기를 다하여 나라 땅을 개척하라! 전에도 말했
거니와 한 치만한 흙덩이라도 야인들의 사냥터가 되게 할 수는 없다!"
김종서는 도절제사의 교지끌 받은 후에 황공 감격했다.
"힘을 다하여 선왕의 발상지지를 야인의 손에서 회수하겠습니다."
말씀을 아뢰고 사은하는 큰절을 올렸다.
종서는 다시 교지를 받들고 삼정승을 향하여 목례를 보냈다.
전하는 다시 삼정승을 둘러보시며 말씀을 내린다.
"오늘 나는 큰일을 결정했다. 이러한 큰일은 아무리 내가 하고 싶어도 사람을 얻지
못하면 결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옛말에 고장난명이란 말이 있다. 외손뼉은 아무리 소
리를 내려 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제 훌륭한 정승들의 보필을 받아서 어진 장수를
얻었으니 내 마음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오늘 삼정승과 술 한잔을 함께 하리라"
말씀을 마치자 전하는 곧 내시에게 선온의 분부를 내렸다.
지윽고 내시는 담박한 선온상을 받들어 나왔다.
전하는 김종서가 따라 올리는 약주 한 잔을 받아 마신 후에 어수를 늘여 친히 삼정
승과 김종서에게 한 잔씩 따라주셨다.
신하를 대접하는 은근한 전하의 지정에 신하들은 감읍했다.
이징옥
김종서는 세종전하의 망중한 부탁을 받아 함길도 감사 겸 도절제사의 큰 임무를 맡
게 된 후에 집으로 돌아가 대호군 박호문을 청했다.
박호문은 일찍 최윤덕 장군을 도와 압록강밖에 있는 건주위 오랑캐를 정복할 때, 우
디거까지 가서 그의 사위와 딸을 조선편이 되게해서 건주위 싸움에 내응이 되게 하여,
크나큰 전과를 이룩한 것을 김종서는 잘 아는 때문이다.
박호문은 흔연히 김종서를 찾았다,
김종서는 당 아래까지 내려가 박호문을 맞이했다.
박호문은 먼저 김종서의 중임 맡은 것을 치하하고, 김종서는 육진 개척에 대하여 많
이 도와줄 것을 당부했다.
수인사가 끝난 후에 김종서는 박호문에게 묻는다.
"영감이 최윤덕 장군을 도와 사군을 설치할 때 전하의 어명을 받들어 오랑캐의 정세
를 자세히 살폈고, 또다시 이만주 오랑캐가 우디거족에게 죄상을 뒤집어씌운 진상을 조
사하기 위하여 친히 우디거까지 간 일이 있었으니, 그곳 형편과 인심들을 자세히 가르
쳐주기 바라오"
박호문은 서북면 압록강 밖에 사는 오랑캐와 동북면 두만강 안 밖에 사는 오랑캐들
의 일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이번에 알목하에서 우디거족이 오도리 추장 부자를 죽인 일도 연락을 받아서 잘 알
고 있었다.
박호문은 김종서를 향하여 웃으며 대답한다.
"좋은 기회올시다. 이번에 우디거 젊은 추장이 오도리 추장 부자를 죽인 이 기회를
타서 야인들을 모두 다 두만강 밖으로 내쫓고 우리 백성들을 이민시켜서 경원, 종성,
회령 등 옛 강토를 찾는다면 지난번 압록강 유역에 설치했던 사군과 함께 북방의 방위
는 금성철벽이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과연 크나큰 용단을 내리셨습니다."
김종서는 다시 묻는다.
"우디거 추장은 영감이 회유를 시켜서 건주위 파저강 싸움에 내응까지 하게 한 인물
이지만 난화지맹이 아니겠소?"
"씩씩하고 호걸스런 인물입니나. 본시 건주위 이만주의 우군 부대장이었으나 우디거
의 사위가 된 때문, 내가 우디거를 응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더니 아내의 족속인 우더
거가 결단날까 하여 슬몃 우리편이 되어 내응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디거의
젊은 추장인 이 사람보다도 그의 아내인 우디거의 딸이 더 걸물입니다, 활발하고 속이
탁 터져서 앞을 바라볼 줄 압니다. 그때 이만주가 여연에서 납치해 갔던 우리 장정들을
함빡 데리고 온 것도 모두 다 그들 내외의 주선해준 힘이 큽니다. 앞으로 부임하시게
되면 이들 내외를 불러다가 잘 타이르시면 저항하지 아니하고 복종할 것입니다."
"내가 상감께 아뢰어 영감을 종사관으로 모실 테니, 고생이 되지만 사양치 마시고 동
북면 개척에도 힘을 써주셔야 하겠습니다."
김종서는 간곡하게 부탁했다.
"어명이 내리신다면 사양할 도리가 없습니다."
"허락을 해주시니 감사하오. 그리고 또다시 의논할 일이 있소."
김종서는 정중하게 말을 보낸다,
"무슨 의논할 일이 있습니까?"
"야인들을 내치고 황폐해버린 땅을 옥토로 또 만들자면, 일년 이태의 일이 아닐 뿐
아니라 훌륭한 장수들을 얻어야 할 터인데, 영감은 서북면과 동북면의 일을 잘 아는 터
이니 나와 함께 일할 만한 좋은 장수를 두서너 사람 천거해주시오."
박호문은 한동안 깊은 생각 속에 들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사람 좋은 장재를 천거하겠습니다. 이징옥이란 사람을 만나보신 일이 있습니까?"
"이징옥? 아직 만나본 일이 없는데, 어떤 사람이오?"
"내가 평양윤으로 있을 때 강계에서 호랑이를 때려 잡아서 용맹스런 이름이 평안도
일대와 여진족에까지 자자했던 소년장사올시다. 함길도 부거의 책을 지키는 수문장으로
있다가 지금 서울에 있는 그의 형 징석을 찾아와서 무과에 급제를 했습니다, 아직 나이
이십 세 안팎이올시다 마는, 앞으로 크나큰 인물이 될 대장군 감이올시다."
"이징석의 아우라! 징석은 지금 내금장으로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징석도 훌릉한 장사지"
"징석은 징옥에 비하면 아류밖에 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함경도와 평안
도 여진의 일을 잘 모릅니다."
김종서는 박호문에게 신신당부한다.
"그렇다면 이징옥을 한 번 만나보게 해주오."
박호문은 쾌하게 허락하고 이징옥의 소년 때 지난 일을 이야기했다.
이징옥은 본시 양산 사람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만 모시고 있었다. 형
의 이름은 징석이요, 아우의 이름은 징옥이었다. 어릴 때부터 형제가 모두 다 씨름판에
서 소년 장사의 이름을 듣고 황소를 땄다, 이로부터 형제는 활 쏘는 법이며 창 쓰는 기
술을 배우고 말을 또한 잘 달렸다. 징옥은 점점 자랄수록 완력이 형을 능가했다. 사냥
을 하면 노루와 멧돼지를 형보다 갑절씩이나 잡았다. 동네에서는 징옥을 첫째 장사라
하고 형 징석을 둘째 장사라 해서 형제장사가 한집안에 났다고 칭찬하는 소리가 자자
했다.
징옥이 열네 살이 되고 징석키 열여덟 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늙은 어머니는 산에 있는 멧돼지를 보지 못했다. 돼지 구경도 하고 고기도 먹고 싶었
다,
"멧돼지도 집돼지 같으냐? 한 번 구경했으면 좋겠다. 너회들이 힘이 세다 하니 멧돼
지를 한 마리씩 잡아오너라. 고기 맛도 볼 겸."
두 아들은 일제히 소리쳐 대답했다.
"염려 마십쇼. 곧 잡아오겠습니다."
두 아들은 제각디 창과 활을 들고 나갔다.
어둑어둑한 땅거미질 때가 되었다. 사립짝 대문 밖이 요란하면서 마당에 '꽝' 하는 소
리가 들렸다. 뒤미처 동네 아이들이 떠들어댄다.
"야! 멧돼지다. 살을 맞아 죽었구나?!
늙은 어머니가 급히 나가보니 징석이 땀을 씻으며 싱글벙글 웃고 있다가 마루 끝으
로 나오는 어머니를 보자 기쁜 음성으로 소리쳤다.
"어머니, 멧돼지를 잡아왔습니다. 힘이 워낙 세어서 산채로 잡지는 못했습니다마는
죽은 놈이라도 구경을 합쇼."
"용하게 잡았구나! 다친 데는 없느냐?"
"이까짓 것을 잡는 데 다칠 까닭이 있습니까? 활로 쏘고 창으로 찔렀습니다. 산 채로
잡아오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어머니는 기뻤다. 큰아들과 함께 멧돼지 배를 갈라서 구워 먹기 시작했다.
밤은 점점 어두웠다. 그러나 작은아들 징옥이는 돌아오지 아니했다.
"이애가 웬일일까! 범한테 물려 갔나보다."
"설마 범한테 물려가기야 했겠습니까. 그러나 궁금합니다."
어머니와 큰아들은 걱정이 분분했다.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러나 징옥이는 돌아오지 아니했다.
또다시 하루낮 하룻밤을 지냈다. 어머니와 큰아들은 초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틀째 되는 날이다. 징옥은 사립문을 열고 빈손으로 들어섰다. 어머니는 반가웠다.
무사하게 돌아온 것만 기뻤다. 그러나 아니 물어볼수 없었다.
"남들이 말하기를, 너는 네 형보다도 힘이 더 세다 하는데 형은 그저께 멧돼지를 잡
아왔다. 너는 이틀씩이나 밖에서 지냈으면서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웬일이냐?"
징옥은 웃으면서 대답한다.
"어머니, 죽은 멧돼지는 보셨지만 산 놈은 구경을 못하셨을 것입니다. 산채로 잡아서
어머니께 구경을 시켜드리려고 이틀 동안이나 멧돼지와 싸우다가 주먹으로 때려잡아
가지고 왔습니다. 나가보십쇼."
산 채로 멧돼지를 잡아왔다는 징옥의 말을 듣자 어머니와 큰아들 징석은 깜짝 놀랐
다.
"산 채로 뗏돼지를 잡아왔단 말이냐?"
어머니와 큰아들은 급히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과연 황소 만한 큰 멧돼지가 눈을 멀뚱멀뚱 뜨고 기진맥진이 돼 갈빗대를 들먹이며
숨을 쉬고 있었다.
징옥은 산속에서 멧돼지를 만나자 어머니에게 기어코 살아 있는 놈을 보여주고 싶었
다. 활과 창을 쓰지 아니하고 맨주먹으로 고함을 치며 쫓았다. 앞으로 몰고 옆으로 쫓
았다. 쫓기는 체하다가 덤벼들고 잡히는 체하다가 길길이 뛰었다. 산을 넘고 골짜기를
뛰어넘으며 몰았다. 이러하기를 하루 낮 하룻밤을 지내며 멧돼지와 격투를 했다. 멧돼
지는 결국 힘이 탈진되었다. 숨이 턱에 차서 어릿어릿할 때 징옥은 한 주먹으로 머리통
을 갈겨서 산채로 끌고 왔던 것이다.
소문은 온 고을에 자자하게 퍼졌다. 뿐만이 아니다. 징옥은 범을 잡는 데도 명수였다.
눈을 부릅뜨고 한 번 소리를 지르면 어찌 된 셈인지 범은 벌벌 떨면서 고개를 숙이
고 눈을 감아버린다, 이때 징옥은 활을 가득하게 당겨 살을 쏘기만 하면 범은 그대로
고함을 치고 쓰러져버리고 만다.
징옥은 일가 되는 사람이 김해부사로 도임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발신하기 위해서
불원천리하고 찾아갔다. 그러나 부사는 냉대하고 만나보지 아니했다.
징옥은 하는 수 없어 돌아오는 길인데 젊은 여인 한 사람이 길가에 서 땅을 두드리
며 구슬프게 통곡을 하고 있었다. 까닭을 물었다.
"범이 우리 남편을 물어갔소."
"어디로 물고 갔소?"
여인은 흐느껴 울면서 푸른 대가 무성하게 우거진 대밭을 손으로 가리켰다.
징옥은 팔뚝을 걷어붙이고 대숲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아니되어 대숲 속에서 범 한
마리를 번쩍 안고 나왔다.
"탐편의 원수를 갚아주리다."
징옥은 한 마디를 하자, 칼로 범의 배를 짝 갈랐다.
기막히지 않은가. 남편의 상투와 발목 한 개가 튀어나왔다.
징옥은 유골과 유발을 여인한테 내주었다.
"자아, 이제 남편의 원수를 갚았으니 선산을 찾아서 장사를 지내시오. 그리고 이 호
퍼는 김해부사한테 전하고, 이징옥이가 원님한테 주더라고 말하시오."
징옥은 말을 마치자, 휘적휘적 다시 길을 걸었다,
젊은 여인은 백배 치사를 한 후에 관가에 들어가 사또한테 고했다. 사또는 사령을 시
켜서 범의 가죽을 가져다 보니 과연 허언이 아니다.
냉대한 것을 후회했다. 급히 이방을 시켜서 이징옥을 불렀다.
이방은 말을 달려 이징옥의 뒤를 쫓았다.
"사또께서, 범을 잡았다는 말을 들으시고 만나보자 하시네."
이징옥은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일없다고 전하게. 나도 사내자식일세. 만나지 아니하려던 사람을 내가 다시 볼 까닭
이 없네!"
말을 마치자 징옥은 뒤도 아니 돌아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소년 시절 이징옥의 행장이었다.
다음날 박호문은 이징옥을 데리고 삼군부로 김종서를 찾았다.
"이 사람이 이징옥이올시다."
박호문은 김종서에게 이징옥을 소개했다.
이징옥은 김종서를 향하여 절을 올린 후에 두 손을 모아 시립했다.
김종서가 바라보니 과연 치상이 늠름했다.
나이 약관에 지나지 않건만 얼굴은 동탕하고 눈은 이글이글 정기가 넘쳐흘렀다. 키는
구척 장신이요, 허리통은 둘레가 두 아름이 넘을 듯했다.
김종서는 마음 속으로 우선 장재라고 생각했다.
"너는 열 네 살 때 너의 어머니께 보여드리려고 황소 만한 멧돼지를 산채로 잡아서
바쳤다 하니 사실이냐?"
김종서는 입가에 웃음을 띠고 물었다.
"대수롭지 아니한 일을 하문하시니 부끄럽습니다. 그저 어릴 때 장난 겸 힘을 시험해
본 것뿐입니다. 자랑할 거리가 못됩니다."
이징옥은 눈을 내리깔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래, 어찌 자랑할 거리가 아니라 하느냐?" 호반은 우선 힘이 세야하는 법이다."
김종서는 기특하게 생각했다. 이같이 한 번 격려해주었다.
"힘만 강한 것은 필부의 용맹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슬기 있는 사람이라야 크나큰 장
수의 재목이 된다 합니다. 소인 따위야 아직 장수의 재목이 되려면 한동안 공부를 해야
하겠습니다."
김종서는 더한층 기특하게 생각했다.
"호랑이가 산골 속에서 너를 만나기만 하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버리면서 너의
처분만 기다린다 하니 과연 그러냐?"
"범이란 본시 어진 짐승입니다. 사람을 잡아먹어도 착하고 어진 사람은 잡아먹지 아
니합니다. 그러기에 심산궁곡에 시묘하는 효자는 감히 잡아먹지 못 합너다. 못하는 것
이 아니라 아니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잡아먹습니다. 범이 어린아이
들을 잡아먹는 일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부모가 죄가 많은 까
닭에 어린것을 잡아가는 것이올시다. 그러나 그것도 죄가 되니 정직한 사람을 보면 고
개를 숙입니다."
김종서는 머리를 끄덕인 후에 벽상에 걸어논 많은 활 중에서 그중 큰 각궁 한 개를
꺼냈다. 길이가 5척이 넘었다.
김종서는 다시 철전 세 개를 내놓았다. 화살 한 개의 무게가 여덟 냥쭝이나 되는 쇠
로 만든 큰 화살이다.
삼군부 넓은 뜰 한 귀퉁이에는 과녁판이 놓여 있었다.
삼군부 대청에서 과녁판이 놓여 있는 거리는 오 백 보가 넘었다,
김종서는 이징옥을 향하여 묻는다.
"여기 내논 철전은 전쟁 때 쓰는 화살이다. 네가 능히 이 철전으로 삼중을 하겠느
냐?"
"시험해보겠습니다."
이징옥은 선뜻 대답하고 커다란 각궁을 번쩍 들어 쇠살을 메겼다.
육중한 철전이건만 원체 명수다. 철전은 새털 꽃은 화살마냥 가볍게 날아 과녁 복판
을 보기 좋게 맞혔다.
김종서의 입이 소리 없이 벌어진다. 삼군부 안에 모여 있는 모든 군관들도 이징옥의
철전을 다루는 수단에 모두 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징옥은 또 하나의 철전을 집어서 활시위에 메겼다. 쇠화살은 바람을 끊고 소리를
치면서 먼저 과녁에 박혀 있던 쇠 화살을 맞혀 떨어뜨렸다.
이제는 박수갈채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징옥은 남은 철전 한 개를 마저 활에 메겼다.
세 번째 쏘아붙인 쇠 화살은 두 번째 쏘아서 과력에 박혀 있는 화살을 두 동강이 내어
떨어뜨렸다. 손뼉 치는 소리가 우레 일듯 일어났다.
"신궁이다!"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일어났다.
김종서는 마음속으로 기뻤다.
활을 조용히 놓고 서 있는 이징옥을 향하여 손으로 삼군부 담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 삼군부 담은 높이가 아홉 길이다. 네가 능히 저 담을 뛰어넘겠느냐?"
"어렵지 아니합니다."
이징옥은 직령과 갓을 벗었다. 동저고리 바지 바람으로 성큼 뜰 아래로 내려섰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솟구쳤다.
까맣게 허공으로 솟아오른 이징옥은 아홉 길 되는 삼군부 담을 거침없이 뛰어넘었다.
순간 밖으로 떨어졌던 이징옥은 다시 삼군부 안으로 넘어들었다. 넘고 뛰고. 뛰고 넘기
를 십여 차 했다.
구경하는 군사들의 손뼉은 자지러지게 쳐지고. 김종서의 위엄기있는 눈에도 웃음빛이
끊이지 아니했다.
이징옥은 십여 차 담 넘기를 반복한 후에 허리춤에 꽂았던 수건으로 땀을 씻고 다시
의관을 정제한 후에 김종서 앞에 조용히 꿇어앉았다.
김종서는 이징옥을 향하여 장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만하면 너의 용맹을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들으니 너는 그 동안 동북면 함길도 부
거책을 지키고 있었다 하는데, 어찌하서 한양으로 올라왔느냐?"
"소인은 본시 양산이 고향이온데 아는 사람이 김해부사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발
신하기 위하여 찾아갔더니 만나보지 아니하고 푸대접을 했습니다. 그래서 북관으로 가
서 수자리하는 군사가 되었다가 부거에서 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년 졸아치
로만 있을 수야 있습니까. 그 동안 공주를 해서 무과에 급제를 했습니다."
"네 기개와 고집이 참 무던하구나. 말 들으니, 네가 김해부사한테 냉대를 당한 후에
길에서 호환에 죽은 사람의 원수를 갚아서 범을 때려잡았다는 말을 듣고 김해부사는
깜짝 놀라서 사람을 보내서 청하니 너는 선하심 후하심이냐고 코웃음을 치고 함길도로
갔다 하니, 사실이냐?"
"예, 그랬습니다."
"네 기개가 과연 사내답다!"
김종서는 이징옥을 칭찬한 후에 다시 묻는다.
"네가 병서를 공부했다 하니 내가 묻는 것을 대답하라. 적병이 우리 군사를 포위해서
양도를 끊어서 나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게 된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전군을 살릴
수 있는가?"
이징옥은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그것은 곤병이올시다, 빨리 돌격전을 전개하면 살수가 있고, 망설여서 앞뒤를 재어
보다가는 반드시 패하게 됩니다. 이런 때는 사진충격법을 써서 세 사람씩 짝을 지어 힘
을 합쳐서 백병전으로 돌격해 나가야 합니다."
김종서는 빙긋이 웃으며 다시 묻는다.
"적진과 대치해 있을 때 적군의 허실을 알자면 어떠한 방법으로 알아볼 수 있는가?"
이징옥은 다시 서슴지 아니하고 대답한다.
"장수는 천도와 지리와 인사를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먼저 높은 곳에 올라 적의
진지와 병졸의 행동을 살펴보면 허하고 실한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 알아볼 수 있는가?"
"적의 병사가 수백 채 벌여 있다 해도 나뭇가지에 쌔 떼들이 놀라지 아니하고 날아
다니면 이 병영에는 군사가 적어서 허한 것이요,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요란치 아니하
면 이것은 허장성세로 허수아비와 기치창검만을 벌여 논 것이 분명합니다. 한 번 무찔
러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김종서는 다시 묻는다.
"장수의 재목을 말할 때, 어떠한 사람을 양장이라 하는가?"
"양장에 다섯 종류가 있습니다."
"다섯 종류를 말해보라."
"용장, 지장, 인장, 신장, 충장입니다."
"그들의 특징을 말해보라"
"용맹스런 장수는 감히 범하지 못하고, 슬기 있는 장수 앞에는 협사를 부릴 수 없고,
어진 장수는 사졸을 사랑하니 군사들이 복종하고, 신용 있는 장수 앞에는 군율이 철통
같고, 충성스런 장수는 이심이 없습니다. 이 다섯 종류의 장수는 모두다 양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종서는 다시 웃으며 묻는다.
"네가 만약 양장이 되고 싶다면 어떤 종류의 장수가 되고 싶은가?"
이징옥은 자리를 피하며 대답한다.
"소인이 어찌 감히 양장이 될 자격이 있겠습니까마는, 꿈을 꾸어본다면 용장이 되고
싶습니다."
김종서는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상감께 아뢰어 너를 양장감이 되게 할 테니, 네가 능히 감당하겠느냐?"
이징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배를 올리고 대답한다.
"버리지 아니하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다음날 김종서는 소년 무사 이징옥을 데리고 예귈했다.
징옥을 정원 문 밖에 대기시친 후에 세종전하께 배알을 청했다.
전하는 곧 종서를 인견하셨다. 만면에 미소를 띠시고 하문한다.
"언제쯤 임소로 떠나려는가?"
"불일간 떠날 예정이올시다. 그러나 중대한 임무를 받자왔으므로 좋은 인재를 모아
함께 떠나려 합니다."
"당연한 생각이다. 혼자 힘으로는 극난한 일이다. 좋은 인재가 있다면 함께 데리고
가도록 하라. 누구들이 경의 마음에 드는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리라."
"황감하옵니다. 윤허해주신다면 감히 아뢰겠습니다. 집현전 학사 신숙주를 종사관으
로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학문이 넓을 뿐 아니라 슬기가 대단합니다."
"좋다. 함께 가도록 하라!"
세종전하는 쾌하게 허락했다.
"다음에 박호문을 종사관으로 쓰겠습니다. 건주위 이만주를 정벌할때 여진의 지세와
풍속이며 허실을 살펴가지고 왔을 뿐 아니라 이번에 퉁맹가 티무르의 부자를 죽인 우
디거 추장 내외를 회유해서 내응이 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디거를 어거할 수 있는
인물이올시다."
"좋다! 종사관으로 쓰라!
김종서는 다시 아뢴다.
"다음엔 용맹스런 장재가 필요합니다. 나이 아직 약관메 지나지 않습니다 마는, 오랫
동안 함길도 부거책장으로 있어서 용맹스런 이름이 두만강 일대에 자자한 인물이올시
다. 이 사람에게 절제사의 임무를 맡겼으면 합니다."
"성명이 무언가?"
"이징옥이라 합니다."
김종서는 이징옥의 내력을 소상하게 아뢰었다.
세종전하는 어미를 위하여 황소만한 멧돼지를 잡은 일과 김해에서 범을 잡아서 청상
과부의 원수를 갚아준 일이며, 김종서가 삼군부에서 취재 본 일을 일일이 들으신 후에
말씀한다.
"신숙주와 박호문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거니와, 이징옥은 본 일이 없다. 한 번 만나
보면 좋겠다."
"그러지 아니해도 정원 문 밖에 대기시켜 있습니다."
"불러들여라!"
이윽고 김종서는 이징옥을 어전에 배알케 했다.
세종전하는 슬기로운 안정을 들어 이징옥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신다.
"네가 이징옥이냐?"
"예, 그러합니다. 하향의 천한 몸이 감히 천안을 우러러뵈오니 황공무지하오이다."
이징옥은 아뢰기를 다하자 두 손을 마주잡고 의젓이 시립했다.
떨지도 아니했다. 나이 어리나 기상이 씩씩하고 늠름했다.
전하는 한동안 살피신 후에 김종서를 향하여 한 말씀을 내리신다.
"경이 곧잘 사람을 보았다. 데리고 쓰라!"
하경복
전하는 승지를 불러 이징옥에게 영북진 절제사의 첩지를 내리라 했다.
일개 함길도 부거책장이었던 이징옥은 김종서의 주천으로 일약 영북진 절제사가 되
었다.
이징옥이 사은숙배를 드리고 물러간 후에 김종서는 다시 아뢴다.
"신에게 함길도 감사 겸 도절제사의 중임을 맡기시어 육진을 개척하라 하시니 일신
에 넘치는 은총이이옵니다. 지혜와 힘을 다하여 기어코 이 일을 완성하겠습니다. 그러
하오나 이 크나큰 일은 일년 이태에 성취되는 일이 아니올시다. 막대한 국력과 무비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소신의 힘만 가지고는 어려운 일이 많을 줄 압니다. 소신의 윗자
리에 살펴주시는 재상 한 사람을 배치해주시옵소서."
세종대왕은 껄껄 웃으며 대답하신다.
"내가 경의 슬기와 역량을 짐작하므로 감사 겸 도절제사의 중한 직책을 맡긴 것인데,
경의 위에 또다시 재상을 보내서 감동해서 살핀다는 일은 옥상가옥을 두는 부질없는
일이다. 당치 않은 말을 하지 말고 혼자서 중임을 도맡아 처리하라?"
김종서는 슬기 있는 사람이었다, 육진개척은 일년 이태에 끝날 일이 아닌 것을 잘 알
고 있었다. 전하 또한 알고 계신 일이다. 그러나 해마다 국비는 적지 않게 들고 일년
이태 삼년 사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이를 알지 못하는 무리들은 반드시 헐뜯는 조
리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무게 있는 재상을 윗자리에 앉게 해서 큰일에 지장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슬기
로운 생각이었다.
김종서는 다시 간곡하게 고한다.
"황공만만하오나 다시 아룁니다. 이번 일이 비록 크나큰 정벌이 아니라 하나 위엄으
로 오랑캐를 쫓아내고 노력으로 폐기된 국경을 개척하는 일이올시다. 크나큰 전쟁 이상
의 힘드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군제에 도절제사가 있으면 반드시 전하의 몸을 대신해서
모든 일을 감동하는 재상이 있는 법이올시다. 전하께서는 깊이 통촉하시와 소신의 뜻한
바를 윤허해주시기 바랍니다."
전하는 비로소 김종서의 간곡하게 아뢰는 뜻을 짐작했다.
"그렇다면 전시체제를 그대로 답습해서 도절제사 위에 도체찰사를 두어 달란 말인
가?" 노재상 중에 이러한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은 최윤덕 밖에 없는데, 최윤덕은 우의정
에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임하고 있으니 난처하구나. 영의정 황희나 좌의정 맹사성은 나
의 곁에서 떠나게 할 수가 없고...."
김종서가 다시 아뢴다.
"신이 외람되오나 감히 한 사람의 재상을 천거해도 좋겠습니까?"
전하는 미소를 지으시며 대답하신다.
"말해보라"
"판중추원사 하경복은 태종께오서 신임하시던 무장이올시다. 감히 천달합니다."
전하는 판중추원사 하경복을 천거한다는 김종서의 말씀을 듣자, 미연히 웃으시며 대
답하신다.
"하경복은 순진한 무관출신이라 용맹은 대단하지만 우직하기만 하고 슬기가 없을 듯
하다. 과인의 몸을 대신해서 모든 일을 감동하는 도체찰사의 임무를 맡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을 듯하다. 경은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
전하는 약간 어려운 빛을 용안에 띠고 대답하신다.
김종서는 다시 아뢴다.
"육진을 개척하는 데는 야인들을 떨게 할 용맹스런 장수가 필요합니다. 지혜와 꾀는
소신이 담당하겠습니다. 다만, 우직하고 용맹스런 장상으로 도체찰사를 삼으시어 오랑
캐들이 굴복하도록 하시는 일이 상책이올시다."
전하는 옥음을 높여 껄껄 웃으시며 말씀한다.
"내가 소시 때 태종대왕께 말씀을 들으니, 태종대왕께서 정란을 일으키실 때 하경복
은 대궐 안에 있는 금군 한 사람을 찾아갔다가 홍주 밀듯 몰려드는 정란군에게 잡혀서
죽게 되자 황소 같은 무서운 힘으로 군사들을 뿌리치고 어전으로 뛰어가 아뢰기를, '나
같은 장사를 죽여서 나라에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소?' 하고 소리치니, 태종께서는 담
력이 무던하다고 생각하시고 목숨을 살려서 금군에 편입시키셨다는 말씀을 들은 일이
있다. 어떻든 장사는 장사니라."
김종서도 웃음을 짓고 아뢴다.
"그렇습니다. 무척 우직한 사람이올시다. 하경복은 본시 경상도 진주사람이올시다. 금
군이 되어 상림원을 지키고 있을 때 마침 동지 때였더랍니다. 따뜻한 양지에 매화를 길
러서 어전에 바치려고 두서너 분을 벌여왔는데 하경복은 예쁘게 핀 매화꽃 한 가지를
뚝 꺾어서 산수 털벙거지에 멋들어지게 꽃았더랍니다. 매화꽃을 관리하던 관원이 깜짝
놀라서 꾸짖으니 경복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합니다. 우리 시골엔 울타리마다 핀 것이
모두 다 이 꽃이구 나뭇가지를 부러뜨려서 아궁이에 불을 때기도 하는데 무엇이 그리
대단한 꽃이라고 가지 하나쯤 꺾은 것을 이같이 야단들을 떠느냐고 도시어 투덜댔다
합니다. 이때도 태종께서는 우직하다고 칭찬하신 후에 죄를 주지 아니하시고 살려주셨
다 합니다."
"무식하지만 담력이 대단한가보더라."
"천하장사올시다. 당금 세상에 장상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는 하경복 한 사람이 있고
젊은 사람으로서는 이징옥이 있을 뿐이올시다. 야인을 굴복시키는 데는 이러한 장사가
필요합니다. 이징옥도 범을 때려잡기를 손바닥 뒤집듯 합니다마는 하경복도 심산궁곡으
로 사냥을 갔다가 범을 잡았는데, 몰이꾼들은 다 도망을 가고 혼자서 범의 골통을 주먹
으로 쳐서 쓰러뜨린 후에 번쩍 안아서 낭떠러지 물 속으로 동댕이쳐서 박살을 했다는
천하장사올시다. 기어코 이 사람을 등용하시기 바랍니다."
"영의 의향이 정 그러하다면 하경복으로 도체찰사를 삼으리라"
세종전하는 쾌하게 윤허하셨다.
다음날 전하는 황희, 맹사성, 최윤덕, 김종서가 시립한 자리에서 하경복을 명소하여
유시를 내렸다.
"경은 일찍이 태종께 여러 차례 후은을 입은 무장이다. 이번에 김종서로 육진을 개척
하라 하여 도절제사의 책임을 임명하였거니와, 경에게는 나의 몸을 대신하여 모든 군사
를 감찰하는 도체찰사의 중한 임무를 맡기나니, 경은 정성을 다하여 큰일을 완성하라"
하경복은 한가로운 벼슬인 판중추원사로 있다가, 별안간 명소를 받들어 들어갔던 것
이다. 뜻밖에 함길도 도체찰사라는 영광스런 대명을 받게 되니 당황해서 어찌할지 몰랐
다.
도체찰사는 영의정, 좌의정 등 증경 문관재상이 전시에 맡는 자리다. 황공하기 짝이
없었다.
하경복은 황정승, 맹정승 등 문관재상들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이내 꿇어앉아 사양하
는 말씀을 아뢴다.
"소신은 호반이올시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식합니다. 다만 젊었을 때 범을 때려잡은
일이 있사와, 장사의 헛된 이름을 들었을 뿐이올시다. 전하께서 사람을 잘못 보시고 막
중한 도체찰사의 대명을 내리시니 소신은 감히 받지 못하겠습니다."
하경복은 벌벌 떨면서 떠듬떠듬 아뢴다.
우직하고 진솔한 하경복의 태도는 전하의 마음을 도리어 흐뭇하게 했다.
전하는 웃으며 말씀을 내린다.
"내가 경을 잘못 본 것이 아니다. 꼭 경이 필요해서 이번에 도체찰사를 맡기는 것이
다. 사양치 말고 받으라! 범을 때려잡던 그 솜씨로 불복하는 야인들을 때려잡으면 족하
지 아니한가, 하하하"
하경복은 두 번째 사양한다.
"소신이 범을 잡던 일은 소시 때 일이올시다. 지금은 힘이 많이 줄었습니다, 산골에
서 범을 만나게 되면 이제는 팔이 떨려서 능히 잡을는지 의심스럽습니다."
하경복은 너무나 진솔했다. 망건편자에 진땀이 솟았다. 말소리조차 어눌했다,
전하는 옆에 시립해 섰는 별운검에게 분부하신다.
"군기시에 나가 강궁 한 벌을 가져오너라."
별운검은 황망히 군기시에 나가 백 근 무게가 넘는 단궁 한 벌을 받들고 들어왔다.
전하는 하경복에게 말씀을 내린다.
"경이 늙어서 힘이 많이 줄었다 하니 내가 친히 경의 힘을 시험해보리라. 활을 꺾어
보라!"
장중한 어명이었다. 하경복은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하경복은 백 근템이나 되는 박달나무로 만든 큰 활을 한 손으로 번쩍 들었다. 모든
재상들의 경탄하는 시선이 하경복에게로 몰려들었다.
하경복은 두 어깨와 두 팔과 두 주먹에 힘을 버썩 모았다. 사모 쓴 관자놀이에 푸른
힘줄이 불끈 솟았다. 이를 악물었다.
'학' 소리가 나면서 백 근 무게 나가는 박달나무 큰 활은 우지끈 부러졌다.
"장사로다! 늙지 아니했다. 사양치 말라."
세종대왕의 칭찬하시는 말씀이 떨어졌다.
하경복은 더 사양할 수 없었다. 마침내 도체찰사가 되었다.
한 치의 땅이라도 오랑캐들의 말굽이 치달리게 하는 터전이 되게 해서는 아니 되겠
다는 세종전하의 크나큰 결심으로 이루어지는, 엄청나고 장한 육진개척의 행군은 한양
서부터 이천 리 길 두만강변까지 뻗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선발대로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이 군관들을 거느려 떠나고, 다음엔 경원 절제사 송희
미가 이징옥의 뒤를 이어 나가고, 다음엔 함길도 감사 겸 도절제사 김종서가 종사관 신
숙주, 박호문과 함께 정예군관 백여 명과 만여 명의 기마대를 거느려 나가고, 다음엔
도체찰사 하경복이 군량미 수천 석과 군수품을 가득 싣고 동북면으로 향했다.
세종전하는 김종서와 하경복이 떠날 때 일일이 선온을 베푸시고 귀가리와 어의로 잘
배자 한 벌씩을 내렸다. 변지의 중책을 맡기는 때문 특별한 은전을 내리시고 또다시 정
중한 말씀으로 당부한다.
"북방은 매우 추운 곳이다. 겨울에는 삭풍설한에 소변을 보면 오줌줄기도 떨어지는
족족 곧 얼어붙어서 고드름이 된다 한다.
몸을 덥게 해서 독감에 걸리지 않도록 하라?"
신하를 아끼시는 전하의 지극한 배려에 김종서와 하경복은 감격한 마음을 억누를 길
없었다. 눈시울이 화끈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극히 몸조심을 하여 성심을 번거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함길도 감사 김종서가 대답했다.
"국가의 천년 위업을 이룩하는 일이올시다. 아무리 풍설 사나운 북방이라 하오나 역
시 사람들이 사는 곳이올시다. 소신의 몸이 비록 늙었다 하오나, 그까짓 추위쯤을 감내
치 못하오리까, 성상께서는 과히 근심하지 마시옵소서."
도체찰사 하경복이 아뢴다.
전하는 또다시 당부하신다.
"버렸던 땅을 개척하는 것이요, 잃었던 땅을 찾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더구나 완민-
들을 회유해야 하고 오랑캐들을 방어해야 하는 일이다. 그뿐 아니다. 성벽을 굳게 쌓아
야 하고 불모지를 개간해야한다, 오랑캐을 몰아내는 일이며 수자리하는 군사들을 위안
시키는 일이며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일 등, 어려운 일이 거듭거듭 첩첩할 것이다. 물자
와 군수는 뒤에서 과인이 다 대어줄 테니 기어코 큰일을 완성하도록 하라?"
김종서가 다시 아뢴다.
"옛글에 '사위지기자사' 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상께오서 소신들을 이같이 알아주시
고, 모든 일을 만 리 밖에서 미리 소상하게 통촉하시니 진실로 소신들 감격하와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몸이 진토가 될지라도 육진개척은 기어코 완성해놓고 말겠습니다."
지휘하는 임금과 명을 받드는 신하 사이에는 털 끝 만한 간격이 없었다. 마음으로 기
뻐하고 정성껏 복종했다.
전하는 합문까지 출어하여 두 신하를 전송했다.
수렵
알목하에 우디거 추장이 쳐들어와서 오도리족의 추장 퉁맹가 티무르 부자를 죽인 후
에 오도리족은 갈팡질팡 어찌할지를 모르고, 우디거족들은 콧대가 높아져서 이제는 알
목하가 제 영토나 된 듯 국경을 넘나들었다. 한편 길주, 명천, 경성 일대의 조선 사람들
은 불안 초조한 중에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돌연 파발마가 서울서 달려왔다. 함길도 감사 조말생이 갈리고, 새로 문무 겸전에 도
시 담덩이라고 소문 높은 도승지 김종서가 함경도 감사 겸 도절제사가 되어 부임이 되
고, 당대의 명장으로, 서북면에서 파저강 야인 이만주의 소굴을 무찌르고 압록강에 사
군을 설치한 최윤덕 장군과 대등한 인물. 하경복이 도체찰사가되어 내려온다는 소문이
퍼지니, 조선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돌리고, 알목하의 오랑캐들은 내두일이 어
찌 되나 하고 불안한 속에 형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발대가 기세좋게 말을 달려왔다. 이징옥이 영북진 절제사가 되어왔다는 것이다.
"부거책장으로 있던 이징옥이 일약 영북진 절제사가 되어 내려왔단 말이냐?" 기막힌
발신을 했구나, 나이 겨우 이십이 될락 말락한 사람인데-."
"범을 쥐새끼 잡듯 하는 천하장사 이징옥인데, 나이 비록 어리다하나 넉넉히 대장 노
릇을 할 사람일세. 이제는 오랑캐들의 장난이 용이치 못하게 되었네. 천만다행일세."
조선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돌리고, 오랑캐들은 깜짝 놀랐다.
"무어, 이징옥이 절제사가 되어 내려온단 말인가?" 부거책장으로 있을 때, 맨손으로
범을 잡아서 사지를 비비틀어 죽였다는 바로 그 이징옥이가 절제사가 되어 온단 말이
냐?" 이제 우리들은 꼼짝달싹도 못하게 되었구나?"
"그렇지만 우리한테 설마 해를 끼치겠나?" 우리들은 조선 태조대왕이 당신의 고향이
라 해서 땅을 빌려주어서 여지껏 삼사 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아닌가? 혼날 놈들은 우
리 추장 부자를 죽여버리고 우리를 박해하는 우디거 족속들일세?"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살해를 당한 퉁맹가 티무르의 족속들이었다.
한편 퉁맹가 티무르의 부자를 죽이고 코가 우뚝해서 강을 건너 알목하로 넘나드는
우디거 족속들은, 이징옥이 천하장사라는 선성을 듣자 모두들 가슴이 뜨끔했다.
"소년 장사 이징옥이 절제사가 되어 내려온다니, 알목하에 인제는 맘대로 못드나들게
되나보다!"
모두 다 겁을 집어먹었다.
이같이 조선 백성들은 안심하고 오랑캐들은 두려움과 회의 속에 빠져 있을 때, 오랑
캐들에게는 더한층 두려운 소식이 전해졌다. 김종서와 하경복이 최고대장이 되어 온다
는 것이다.
"조선 임금의 제일 신임을 받는 도승지 김종서가 함길도 감사에 도절제사가 되어 내
려오고, 천하장사 하경복이 왕전하의 몸을 받아 도체찰사가 되어 부임이 된다 한다?"
"김종서는 최윤덕이 이만주를 굴복시키고 평안도에 네 고을을 설치했을 때 모든 슬
기와 군수품을 빈틈없도록 마련해 보냈던, 옛적 장양과 제갈공명 같은 사람이라더라?"
"그뿐인가, 최윤덕이 건주위 이만주를 응징할 때 여진말을 잘 하면서 외교 사정에 능
란했던 박호문과 글 잘 하는 신숙주가 종사관이 되어 함께 온다 한다. 소문 들으면 우
리 여진 족속을 두만강 밖으로 다내보내고 성벽을 굳게 쌓아서 고려 때 윤관 장군이
하듯 국경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대대로 우리 땅으로 알고 살던 우리들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
"좌우간 하회를 두고 보자. 우리도 버티어 보아야지!"
야인들은 허탈한 속에 비탄과 울분으로 세윌을 보내며 조선편의 동정을 바라보고 있
었다.
한편 선발대로 영북진에 당도한 이징옥은 먼저 위엄을 뵈게 하기위하여 첫 공사를
내렸다.
"내일 모레, 나는 영북진 절제사로 도임된 것을 선포하기 위하여 수렵대회를 열기로
했다. 군관민은 말할 것 없고 여진 부락에서도 매호에 장정 한 명씩 활과 살과 창을 가
지고 대회에 참가하라. 만약 명령에 불응하는 자가 있다면 군법시행을 하리라-."
포고문은 영북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 부락과 여진 부락 방방곡곡에 붙었다.
군법시행을 한다는 엄명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목이 달아나는 판이다. 여진족들은 벌
벌 떨었다.
한 집에서 장정 한 명씩이 활과 창과 사냥개를 끌고 나왔다.
영북진 넓고 넓은 병영에는 말 탄 군사 천여 명과 몰이꾼으로 등대 한 조선 백성들
이며, 야인 족속 수백 명이 기치창검이 번득이는 대장기 앞에 모여들었다.
이윽고 이징옥은 밀화패영을 단, 안 올린 벙거지에 화사한 공작 깃을 비껴 꽂고 남철
릭 구군복에 동개 메고 활 차고 마상에 높이 앉아 군령을 내린다.
"너희들 여진족들은 오래 이곳에 거접해서 지리에 밝을 것이다. 앞을 서서 가장 사냥
하기 좋은 곳으로 인도하라. 그리고 조선 사람들은 몰이꾼이 되어 사냥개를 몰고 나오
라!"
소년 장군 이징옥의 군령은 여율령 시행이 되었다.
징소리, 북소리가 '둥둥' 울리며 수렵대회의 행렬은 씩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
진 족속들은 말을 달려 앞을 인도했다.
산은 첩첩하고 물은 굽이쳐 흘렀다. 말굽 뛰닫는 행진 소리를 듣자 바위 틈에 엎드렸
던 노루와 사슴과 토끼들은 깜짝 놀라 뛰달아나기 시작했다.
몰이꾼들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소년 장군 이징옥은 급히 대장기를 흔들어 군령을 내린다.
"오늘 사냥은 절제사가 된 나와 영북진에 살고 있는 여진 야인과의 재주를 시험해보
기로 한다. 나를 능가해서 가장 많이 짐승을 사냥하는 여진 사람이 있다면 전하께 아뢰
어 천호희 장이 되게 하고 여진족 천 집을 거느려 비 땅에 영주케 하리라?"
여진 사람들은 선성만 들었던 이징옥과 한번 무예를 겨루어보고 싶었다.
모두 다 심산궁곡에 사는 사냥의 명수들이었다, 이징옥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일
제히 소리치며 대답한다.
"장군의 용맹한 선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제 무예를 비교해볼 기회를 주시니 재주
없으나 한번 대결해보겠습니다."
모두 다 웃으며 대답했다. 북소리가 강하게 울렸다. 징소리, 바라소리가 뒤를 이어 소
란하게 일어났다. 놀란 토끼가 바위틈에서 내다보다가 뛰어나왔다.
여진족 한 사람이 잽싸게 활을 당겼다. 토끼는 다리를 맞고 쓰러졌다.
이징옥은 미소를 머금고 일부러 활을 당기지 아니했다.
여진족의 기를 꺾지 아니하려는 까닭이다.
여진족들의 환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몰이꾼들이 뛰어 달아났다. 사냥개가 뛰달려 쓰러진 토끼를 물고 돌아왔다.
다음 순간 노루가 놀라서 산골에서 뛰어나왔다.
또 한 사람의 여진 사람이 팔을 걷어붙이고 활을 당겼다.
노루는 눈알에 살을 맞고 쓰러졌다. 여진족들의 환호성은 또다시 천지를 진동했다.
소리쳐 뛰달리며 쓰러진 노루을 결박지어 내려왔다.
이번에도 이징옥은 일부러 미소를 짓고 활을 들지 아니했다. 구경하는 조선 사람들은
무슨 까닭으로 이징옥이 활을 한 번도 당기지 않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또다시 북소리, 징소리, 몰이꾼들의 고함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꽃사슴 한 마리가 보관인 듯 고운 뿔을 머리에 이고 놀란 눈으로 산등성이로 뛰닫는
모습이 보였다. 이징옥은 비로소 활을 번쩍들었다. 날렵하게 편전을 시위에 걸었다.
이때 여진 사람도 활을 당겼다. 두 개의 살이 한꺼번에 날았다. 이징옥의 편전은 여진
사람의 살을 맞히어 떨어뜨리고 번개치듯 계속해 날아 꽃사슴의 명치를 맞혔다.
기막힌 신궁의 솜씨다. 중간에 날으는 살의 살을 맞치어 떨어뜨리고, 계속해서 날아
사슴을 쏘아버린 것이다. 진짜 환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여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혀를 홰홰 내둘렀다. 먼저 쏘아 날아가는 자기편 화살을
맞혀 떨어뜨리고, 다시 그 남은 힘으로 뛰어 달아나는 사슴을 번개같이 쏘아 맞혔다는
것은 기록에도 없는 전무한 일이다. 얼마나 이징옥의 눈이 밝고, 조준이 정확하고, 또다
시 팔 힘이 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일이다. 과연 천하에 둘도 없는 신궁이었다.
모두 다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사냥은 계속되었다. 몰이꾼들의 요란한 환성 소리를 듣고 또 다른 짐승 한 마리가 뛰
어나왔다. 황소만 한 멧돼지를 여진족 중의 한 사람이 활에 살을 메겨 쏘았다. 여진 사
람도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살은 용하게 멧돼지를 맞혔다. 그러나 시커먼 털이 사납게
뻗친 껍질 피부는 돌덩이 마냥 강했다.
멧돼지는 멱을 따는 듯 성난 울음소리를 부르짖고 뛰닫는 바람에 화살은 반발이 되
어 땅에 떨어지고 멧돼지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이징옥은 이번엔 활을 들지 아니했다. 길이 넘는 장창을 비껴들고 말을 달려 뛰닫는
멧돼지를 쫓았다. 산을 넘고 계곡으로 뛰었다. 빠르기 비호같았다. 달아나는 멧돼지보다
앞을 질렀다. 흘연 이징옥은 말머리를 급히 돌려, 달아나는 멧돼지의 정수리를 퍽 찔렀
다. 내리치는 힘이 어찌 억세고 강했던지 멧돼지는 벽력같이 울부짖고 그자리에 쓰러졌
다. 몰이꾼들의 박수갈채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했다. 사냥개들이 줄을 지어 뛰달
렸다. 입으로 물어뜯어 쓰러진 멧돼지를 끌어내렸다. 환호하는 소리가 또 한 번 일어났
다. 푸른 산이 울먹이는 듯 들먹였다, 여진 족속들은 또다시 혀를 홰홰 내둘렀다.
몰이꾼들이 몰고 들어가는 산골은 더욱더 깊고 으슥했다. 찬바람이 골짜기에서 일어
났다.
낙락장송들이 우거진 곳에 큰 바위 들이 이곳 저곳에 벌여 있고, 바위 밑에는 큰 구
멍이 뻐끔하게 뚫어져 있었다. 음산한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굴속에서는 몰이꾼들의
들레는 소리에 놀라 한마리의 큰 범이 주홍 같은 입을 벌려 '어흥' 소리를 치고 뛰어나
왔다.
이징옥은 말에서 급히 내려 장창을 비껴들고 눈을 부릅떠 범의 앞에 버티고 섰다.
호랑이는 이징옥의 용맹스럽게 버티고 섰는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주홍 같은 입을 다
물었다.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징옥의 위풍에 눌린 것이다.
범은 자기를 해칠 뜻이 없는 것을 짐작한 모양이다. 꼬리를 흔들고 굴 속으로 엉금엉
금 기어 들어가 버렸다.
모든 사람들은 조선 사람이나 여진족을 가릴 것 없이 손에 땀을 쥐고 이 광경을 바
라보았다.
호랑이가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돌렸다.
이징옥이 백수지왕이요, 산중 영웅이라는 범을 꼼짝 못하도록 다루는 솜씨를 바라보자
모든 사람들은 숙연했다.
여진족들은 이징옥의 발 앞에 엎드려 고한다.
"소인들은 눈이 있어도 망울이 없는 놈들입니다. 감히 장군님과 사냥을 해서 무예를
겨룬다는 일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부는 격이올시다. 다시는 장군 앞에
서 사냥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징옥은 일부러 풍을 치며 대답한다.
"너희들은 오랫동안 산중에 살아서 사냥하는 데 모두 다 훌륭한 솜씨를 가졌다. 계속
해서 사냥을 해보자꾸나. 약속대로 나보다 많이 잡는 사람에게는 천호의 직책을 주리
라!"
여진족들은 손을 모아 대답한다.
"천호 아니라 만호의 벼슬을 주신다 해도 장군 앞에서는 기운이 떨어지고 손이 떨려
서 사냥을 못하겠습니다. 백 번 절하고 사양합니다."
"정 그렇다면 하는 수가 없구나. 사냥령을 거두리라."
이징옥은 장중하게 대답한 후에 군관들에게 사냥을 중지하고 영문으로 돌아가라는 영
을 내렸다.
해는 아직도 높았다. 영북진 군사와 몰이꾼들은 이징옥이 사냥한 멧돼지, 사슴, 노루,
토끼들을 목도질해서 어깨에 메고 호탕하게 노래를 부르며 영북진으로 돌아간다. 뒤에
는 여진 궁수들이 따랐다. 영북진 여진 부락에는 거리마다 여진족의 노소남녀들이 사냥
하고 돌아오는 행진을 구경하고 있었다.
조선 사람 절제사가 없던 영북지방에 범을 공기 놀리듯 하는 소년장사 이징옥이 강
토를 정리하기 위하여 도임이 되었다 하니, 첫째로 소년 장사의 신언서판을 대하고 싶
었고, 둘째로 수렵대회를 여는데 이징옥이 여진 사람들과 무예를 겨루어서 만약 이기는
여진 사람이 있다면 천호의 벼슬을 준다는 소문을 듣고, 궁금증이 나서 몰려 나왔던 것
이다.
그들은 먼저 소년 장사 이징옥의 당당한 위풍에 눌리고, 다음 이징옥이 여진 궁수의
날으는 살을 쏘아 떨어뜨렸다는 말을 듣자 구경꾼들도 혀를 돌려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징옥은 마상에 높이 앉아 전후좌우에 인산인해를 이루어 구경하는 사람들을 둘러
보자 군관들에게 영을 내린다.
"오늘 수렵대회에서 사냥해 잡은 많은 짐승들을 모조리 여진 야인들에게 나눠주라?"
군관들은 절제사의 영을 받들어 늙고 병든 여진 부락 사람들에게 고루고루 나눠주었
다.
이징옥은 힘이 억세고 무예가 절등할 뿐 아니라, 버린 땅을 다시 찾는 데는 민심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도 상책이라 생각했다. 역시 병서 공부를 한 때문, 이 같은 문무 겸
전한 술책을 썼던 것이다.
무순
선발대 이징옥과 송희미가 동북면으로 향해 떠난 후에, 도원수 격인 함길도 감사 겸
도절제사 김종서와 도체찰사 하경복이 종사관 신숙주와 박호문을 대동해서 군사와 군
수품과 양곡을 싣고 나가는 제2진의 행렬은 위세가 당당했다.
연도의 백성들은 전쟁이 일어난다 하고 깜짝 놀랐다. 김종서는 가는 곳마다 향리의
부로들을 불러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오랑캐들의 발호하는 행동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국경에 진을 설치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한다는 뜻을 설명하니, 고을마다 백성들
은 이마에 손을 얹어 감축한 뜻을 표했다.
김종서는 길주, 명천, 경성을 일일이 순시한 후에 한양에서 거느리고 온 군사들을 분
군시켜 주둔시키고, 다시 경원, 영북에 당도하여 이징옥, 송희미에게 오랑캐들의 정황을
들은 후에 알목하로 을라갔다.
퉁맹가 부자가 우디거 오랑캐에게 참변을 당해 죽은 오도리족들의 본거지다. 오도리
족속들은 추장 부자가 죽은 후에 갈팡질팡 어찌할지를 모르고, 우디거 족속들은 제 영
토나 된 듯 행패와 박해가 무쌍했다.
오도리족들은 생명과 재산의 위협을 받다가 조선 도절제사 김종서의 도임을 보자 천
신이 강림한 듯 기뻐했다. 거리거리 나와서 김종서를 맞이했다. 그대로 경의를 표해서
맞이할 뿐 아니라 울면서 호소했다.
"장군님, 저희들을 살게 해주십시오. 조선의 혜택을 입사와 대대로 알목하에 살던 저
희들은 우디거 족속들의 랭패로 토저히 생업을 하고 살아갈 도리가 없습니다. 황공합니
다마는 저희들을 경원으로 들어가 살게 해주십시오."
경원은 알목하보다도 더한층 조선 땅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곳이다.
김종서는 껄껄 웃었다.
"너희들이 이곳에 살기 때문에 국경이 항상 소란했는데 더한층 깊숙하게 들어와서
우리 땅에 살겠다 하느냐? 아주 우리 나라 수도 한양으로 들어와 살려무나. 하하하"
"그렇게 해주신다면 오죽이나 좋아들 하겠습니까. 염치없습니다."
"너희들이 머리 꼬랑이를 잘라서 상투를 틀고 호복을 벗고, 조선옷을 입은 후에 조선
말을 배워서 귀화를 한다면 상감께 아뢰어서 한양에라도 살게 해주리라. 그러나 너희들
이 한 달 안에 사람마다 모두 조선말을 잘 하고 조선옷을 입고 상투를 짜고 도포를 입
을 수 있다면 될 법도 하다. 그리고 계집사람들도 오그렸던 발을 크게 하고 쪽을 틀어
올려야 하느니라."
김종서는 반농담으로 웃으며 말했다.
오도리 오랑캐는 울면서 고한다.
"장군님, 그것은 농담이십니다. 한 달 안에 어떻게 저희들 남녀노소가 모두 조선말을
배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계집들의 전족이 어찌 별안간 펴질 수 있습니까? 한평생
가도 다시 펴질 수는 없습니다. 장군님! 그저 살던 곳에서 멀리 가지 않도록 해주십시
오. 아까 말씀한 대로 경원 근처에 살도록 해줍시오."
김종서는 다시 호방하게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경원이나 한양이나 모두 다 조선 땅이 아닌가? 역시 귀화를 한다면, 남자나 여자나
모두 다 조선 사람다워야 하지 않겠느냐. 발가락을 오그라뜨리고 호인 말을 하면서 어
떻게 조선 백성 노릇을 하겠다하느냐? 우디거 족속에게 박해를 당하지 않도록, 좋은 땅
을 택해서 안온하게 살도록 해줄 테니 잠시 동안만 기다리고 있거라."
좋은 땅을 택해서 안온하게 살게 해주겠다는 김종서 장군의 말을 듣자, 오도리 오랑
캐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사또! 그저 감사합니다. 어떻든 죽지 않고 살게만 해주십시오. 그저 하라시는 대로
복종하겠습니다."
김종서 장군은 군량관에게 분부한다.
"저애들 오도리족은 추장 부자가 참변을 당한 후에 우디거족에게 박해를 당해서 살
길이 막연한 모양이다. 우선 입에 풀칠은 해야 할것이다. 백미 이십 섬만 내려주어서
늙은 부모와 어린 자식들에게 밥을 지어 먹이도록 하라?"
군량관은 사또 김종서의 명을 받들어 오도리 오랑캐들에게 백미 이십 섬을 즉석에서
내주었다.
오랑캐들은 눈물을 흘리며 치사를 올린다.
"의탁할 길 없는 저희 족속들에게 살게 할 땅을 마련해주겠다 하시고, 다시 또 귀한
백미를 이십 섬템이나 내려주시니 굶주려 죽게 된 늙은 어미, 아비와 어린 자식들을 잘
먹여 살리겠습니다."
오랑캐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백배치사하고 물러갔다.
오랑캐들이 물러간 후에 김종서는 종사관 박호문을 불렀다.
"지금 이곳에 당도해보니 마치 무법천지나 매일반이로구려 ! 본거민이었던 오도리족
은 통솔하던 퉁맹가 티무르 부자가 참살이 된 후에 우디거들의 행패가 무쌍해서 살아
갈 길이 막연하게 되었고, 우디거 무리들은 정복자나 된 듯 영토와 권익을 차지해서 그
행동이 망유기극하구려 나는 장차 국경 안에서 날뛰는 오랑캐들을 다 내쫓아서 육진개
척을 단행하려니와, 영감은 최윤덕 장군과 함께 서북면에 사군을 설치했을 때, 우디거
를 찾아서 딸과 사위를 회유시킨 일이 있으니, 수고스럽지만 한번 찾아서 그들의 족속
들이 알목하 안에서 발호를 못하도록 엄하게 명령을 내리시오. 만약 불응할 때는 십만
대병으로 서북면 오랑캐 이만주를 무찌르듯 우디거의 소굴을 소탕하겠다고 엄포를 놓
고 돌아오시오."
"지금 우디거의 젊은 추장은 이만주의 우군 부대장으노 조선에 내응이 되었던 우디
거 늙은 추장의 사위올시다. 알아듣도록 타이르겠습니다. 만약에 응치 않는다면 사또의
말씀대로 대군을 이끌어 응징하는 것이 가합니다."
종사관 박호문은 당일로 단기를 달려, 두만강을 건너 우디거로 향했다.
박호문은 서북면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막막강적인 건주위 이만주의 소굴을 찾찼을
때도 대담무쌍하게 단검한 자루만 품에 품고 적의 허실을 손살피같이 살피고 돌아왔던
호담무쌍한 인물이었다.
우디거쯤은 문제도 삼지 아니했다. 천리준총인 사랑하는 말을 놓아 우디거로 치달렸
다. 성문 앞에 당도하여 통자를 하니, 수문장은 나는 듯이 우디거 젊은 추장에게 고했
다.
추장은 깜짝 놀랐다. 아내띤 우디거 딸과 의논한다.
"박특사가 왔다 하니, 어찌하면 좋은가? 반드시 퉁맹가 티무르 부자를 죽인 것을 문
책하러 온 것이 분명하니, 무어라 대답하면 좋겠나?"
활달한 우디거 딸은 웃으며 대답한다.
"무엇을 그리 무서워할 것이 있소? 사실대로 이야기하시구려. 건주위 이만주가, 우리
가 조선편이 되어서 내응이 된 것을 앙심먹고. 마천 추장편에 나의 초상화와 퉁맹가의
아내였던 청상과부를 보내서 우디거를 공격한 후에 나를 납치해서 첩을 삼으라 했다는
일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박특사도 속이 탁 트인 인물이라, 우리를 꾸짖지는 아니할 것
입니다. 증인이 환하게 있는데, 무슨 걱정이란 말씀요. 파쿠타 내외가 있지 아니합니까?
마음을 탁 놓시오."
"그도 그렇소마는 우리의 꿈은 다 깨지는구려!"
우디거 딸은 걸물이었다.
"알목하를 우리가 차지하려던 꿈 말이죠? 오도리족을 쳐서 설욕을 한 것만으로 만족하
시오. 모든 것이 천시입니다. 지금은 아직 이릅니다. 앞으로 운이 터지면 꿈을 실현할
때도 돌아오겠지요. 박호문은 결코 우리를 박해할 인물이 아닙니다, 보시오. 지난번 우
리 아버지를 찾았을 때와 같이 이번에도 단기로 왔다 하지 아니합니까? 어서 만나보십
시다."
내외는 의논하고 일지군마를 거느려 성문 밖까지 나가 마중을 했다.
우디거 젊은 추장 내외는 객사로 들어가 박호문을 영접했다.
지난해 건주위 싸움터에서 총총히 작별한 후예 다시 만나는 화사한 모습이다. 반가웠
다. 젊은 추장 내외는 먼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 후에 덥석 박호문의 손을 잡았다.
박호문도 반가웠다. 마주 손을 잡았다.
"아아! 박특사, 어떻게 누추한 곳에 왕림하셨습니까?"
"참말 반갑습니다. 일차 건주위 전쟁터에서 헤어진 후에 다시 뵐 기회가 없을 줄 알
았더니 참 기쁩니다. 이같이 찾아주시니 저희들 우디거의 영광이올시다. 어서어서 성
안으로 들어가사이다."
우디거의 딸은 너스레를 치면서 얼굴에 가득 웃음을 싣고 박호문을 맞아들였다.
"나 역시 반갑습니다. 먼저 두 내외분이 이곳 우디거의 추장이 된것을 축하합니다."
박호문도 외교 사령을 했다.
우디거 젊은 추장 내외는 곧 박특사를 성안으로 인도했다. 진수성찬을 차려 공경히
접대했다.
사사로운 담화가 끝난 후에 박특사는 얼굴에 위엄기를 띠고 묻는다.
"알목하는 조선 땅인데 그대들이 배은망덕을 하고 함부로 군사를 거느려 침범했으니
해괴한 일이다. 우리 왕상전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크게 진노하시어 지금 알목하
에 십만 대병을 주둔시키고 문죄를 하라는 하교를 내리셨다, 철부지들도 아닌 터에 어
찌해서 끄따위 짓을 감행했는가? 지금 알목하에는 문무 겸전한 김종서 사또가 함길도
감사에 도원수를 겸임해 있고, 범 같은 장수 하경복 장군이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도임
되어 있고, 소년 장사 이징옥이 영북진 절제사로 너희들을 응징하기 위해서 진을 치고
있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반심을 먹고 대국의 국경을 범했느냐?"
박호문의 꾸짖는 말소리는 추상 같았다.
박호문은 서북면과 동북면 정세에 정통했다. 서울서부터 우디거가 오도리족을 침공
해서 퉁맹가 티무르 부자를 죽인 까닭을 잘 알고 왔으면서도 일부러 엄포를 주어 꾸짖
는다.
젊은 추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범 같은 장수 이징옥, 하경복에 도승지를 지낸 문무 겸전하다는 김종서가 알목하에
십만 대병을 거느려 대기하고 있다는 말에 사뭇 간담이 서늘했다.
"저희들이 어찌 감히 배은망덕을 하겠습니까? 알목하에 오도리족을 치러 들어간 것
은 막부득이한 처사였습니다. 대국에 반기를 들었던 서북면 밖에 있는 이만주란 놈의
흉계로 오도리 늙은 추장을 시켜서 저의 아내를 납치해가도록 만들어놓았으니 제 어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이리하여 알목하로 들어가서 늙은 추장과 치골한인 그
의 자식을 처치한 것뿐이올시다. 이곳에 증인이 있습니다. 특사께서 잠시 만나보시고
김종서 대감께 억울한 사정을 말씀드려 주십시오."
말을 마치자 추장은 아내에게 말한다.
"빨리 파쿠타 내외를 불러서 박특사께 쉽게 자고 해혹해 올리도록 하게!"
추장의 아내는 급히 나가 대기하고 있던 파쿠타와 청상과부였던 파쿠타의 아내를 데
리고 들어와 박특사에게 대면을 시켰다.
"이 사람이 본시 오도리의 부장 파쿠타올시다. 그리고 저 사람은 건주위 모사였던 퉁
맹가의 아내였다가 지금은 파쿠타의 아내가 된 사람이올시다."
박호문은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모르는 체, 엄숙한 표정으
로 물었다.
"속이지 말고 지난 일을 실토해 말하라!"
파쿠타와 그의 아내는 마천 추장이 이만주의 명을 받아 오도리로 왔던 이후의 일을
자세히 설파했다.
파쿠타 내외의 말이 끝나자 우디거의 딸이 하소연을 한다.
"만약 저 파쿠타 내외의 일이 아니 일어났던들 첩은 오모리 늙은 추장의 둘째 계집
이 되고 저 사람은 짐승 같은 추장의 큰아들 피카르의 욕된 계집이 될 뻔했습니다. 특
사 나리, 이쯤 일이 되었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나리께서도 바꾸어 생각
해보십쇼."
"그는 그렇다 하고 어찌해서 이런 사정을 상국 인 우리 국왕전하께 아뢰지 아니하고
맘대로 국경을 범했단 말인가?"
"일이 급하니 어찌합니까? 퉁맹가 티무르와 피카르는 곧 쳐들어올 형편이고, 수천 리
밖에서 어느 겨를에 국왕전하의 윤허를 받아서 처리하겠습니까?" 그것은 무정지책이올
시다."
우디거의 딸은 열을 올려 변명했다.
박호문은 다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장중하게 말을 꺼낸다.
"그는 그렇다 하고, 내가 전하의 명을 받들어 김종서 장군과 함께 와보니, 지금 알목
하에는 우디거 사람들이 국경을 맘대로 넘어들며 오도리족을 박해해서 그 태도가 방약
무인하다. 그대들이 조선이란 상국을 무시하고 나라 땅을 짓밟는 것이 아닌가? 단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우디거 젊은 추장은 황공한 듯 이마에 손을 얹고 대답한다.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저희들이 어찌 감히 상국을 무시하오리까. 저희 부하들이 잠
시 승전한 기세로 알목하로 넘나들면서 우쭐대는 듯합니다. 다시는 건너가지 못하도록
엄하게 단속하겠습니다."
박호문은 다시 준엄하게 꾸짖는다.
"말로만 단속한다 해서는 단연코 용서치 못하리라. 왕군이 이번에 출동한 것은 그대
들 여진 족속의 난폭한 행동을 우리 국경 안에서 엄금하려는 작정이다. 만약 불응하는
일이 있다면 이만주의 소굴을 무찌르듯 추호의 용서도 없을 테다. 요량해서 처리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오늘 곧 사람을 알목하로 보내서 우디거 사람들을 철수시키겠습니
다."
우디거 젊은 추장 내외는 굳게 맹세했다.
박호문은 다시 파쿠타 내외를 향하여 말한다.
"그대들은 본시 오도리 족속이다. 추장 부자가 죽은 후에, 오도리 족들은 갈팡질팡
마음을 잡지 못해서 어찌할지를 모른다. 우리 국왕전하께서는 정상을 불쌍하게 생각하
시어 두만강 밖에 따로 좋은 땅을 택해서 옮아 살도록 주선해주라 하셨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영도할 인물이 없다. 김종서 도원수께 고해서 그대 내외를 오도리 추장으로
새로 임명할 테니 그대들의 뜻이 어떠한가?"
파쿠타 내외는 오도리 추장이 되라는 말에 마음 속으로는 기뻤다.
그러나 자기들은 추장 부자를 죽인 장본인이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마는 오도리 사람들이 응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일은 염려 말라. 김종서 장군이 퉁맹가 티무르 유족에게 타일러 처리하리라."
"참 좋은 일을 하십니다. 그리 해주신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우디거 젊은 추장 내외도 크게 찬동했다.
박호문은 우디거 추장 내외에게 새로 오도리 추장으로 임명될 파쿠타 내외를 도와줄
것과, 우디거 무리들은 일체 알목하에 드나들어서는 아니된다는 다짐을 받은 후에 곧
알목하로 돌아가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복명을 했다.
김종서는 곧 박호문의 수고를 칭찬한 후에 파쿠타 내외를 불러, 오도리족을 거느리고
두만강 건너 양지바른 곳을 택해서 옮겨 살게 하고, 콧대가 세며 꺼떡거리던 우디거 무
리들은 본곳으로 돌아가게 했다.
알목하와 공주 일대에 대대로 자리를 잡고 살아가던 여진 야인들은, 세종전하의 문무
겸전한 위세와 덕화에 눌려 모조리 보따리를 싸가지고 남수여대하여 두만강 밖으로 물
러났다.
김종서는 여진족들이 함빡 물러간 후에 거칠고 쓸쓸한 수천 리 국토를 새로 개척해
야만 했다. 군사들을 수자리시켜서 한편으로 성벽을 굳게 쌓아서 국방을 튼튼하게 하
고, 한편으론 밭을 갈아서 식량의 자족자급을 계획했다.
김종서는 친히 성터를 살피고 돌을 운반하여 성 쌓는 일을 감독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엄하기 추상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군사와 비장들을 극진하게 사랑했다.
날마다 역사가 끝나면 비장과 군사들에게 술과 밥을 푸짐하게 대접했다. 보통 저녁밥
상이 아니다. 날마다 크게 연회를 차려서 공궤했다.
비장만 백 명이 넘었다. 한 사람 앞에 우각 한 다리씩을 뜯어먹게 했다. 비장만 삶아
먹는 소가 한 끼에 25필이다.
쇠다리와 족만 뜯어먹는 것이 아니다. 갈비, 양지머리, 우둔, 대접살에다가 내장으로
는 허파, 간, 천엽, 콩팥, 우랑, 우신, 곤자소니를 푸짐하게 삶아먹고, 쇠대가리 편육에
골까지 삶아서 술안주를 해서 흥겹게 먹었다.
비장뿐만이 아니다. 졸아치 군사들가지도 일이 끝나면 곱창과 대창을 삶아서 갖은 양
념을 한 후에 소주 안주를 하게 하고 곰국에 밥을 말아먹게 했다.
비장 이하 군사들의 입은 떡 벌어졌다. 김종서 사또의 칭송이 대단했다.
날마다 돌을 날라 성을 쌓고 부지런하게 밭을 갈았다, 한 사람이 세 품 네 붐의 일을
했다.
허허벌판 잡초가 무성했던 곳이 양전옥답으로 변해지고 두만강 연변엔 화강석 든든한
돌성이 높고 높게 쌓여져서 장엄한 관문과 길고 긴 성벽은 만리장성을 이루어 나날이
새 천지로 변했다.
장교와 군사들을 잘 대우해서 일만 끝나면 저녁마다 크게 잔치를 해서 소가 30필이
넘는 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들어갔다.
김종서를 시기하는 재상 한 사람이 전하께 아뢴다.
"김종서는 여진족을 내쳐서 육진개척을 합네 빙자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해서 날마다
큰 잔치를 하고, 매일 밤 소는 30필씩이나 잡아서 술을 마시고 호탕하게 논다 합니다.
하룻밤에 소를 30필씩이나 도살한다면 한 달이면 9백 두가 도살되고, 일년이면 만여
두가 도살됩니다. 함경도의 소는 멸종이 되고 말 테니 이같이 국력을 낭비한다면 큰일
이올시다. 전하께서는 사실을 알아보시옵소서."
전하는 사신을 보내어 축성과 개간하는 일을 살피라 하시고, 유시를 내렸다.
'서울서 유사들의 말을 들으니, 경은 군사들과 매일 잔치를 해서 용도가 사치하다 하
니 과연 사실인가? 조신들의 탄핵이 없도록 잘 처리하여라.'
김종서는 유시를 받자 곧 종사관 신숙주에게 장계를 쓰라 해서 올렸다.
'신 김종서는 돈수백배하옵고 삼가 성상께 아뢰옵니다.
북쪽 변방은 왕업을 일으키셨던 흥왕의 땅이옵니다. 이제 성상의 용단으로 버렸던 강
토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장졸들은 멀리 고향을 떠나서 장차 십 년 동안이나 객지에
서 수자리를 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후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면 울쩍해하는 그
들을 위로할 도리가 없습니다. 장졸들은 무슨 낙으로 고생들을 하겠습니까? 지금은 비
록 장사 한 명 앞에 쇠다리 한 개를 대접합니다 마는 육진개척이 끝난 후에는 닭의 다
리 한 쪽도 차례에 가지 아니할 것입니다. 굽어살펴주시옵소서.'
봉명하고 내려갔던 사신은 성 쌓는 일과 박토가 옥답으로 변한 것을 아뢰고 김종서
의 장계를 올렸다.
전하는 장계를 보신 후에 용안에 미소를 풍기고 말씀한다.
"삭풍이 휘날리는 옥돌같이 찬 변지에 고향을 떠나 수자리하는 장졸들이 먹는 낙도
없이 어찌 일을 하겠느냐. 더구나 완강한 오랑캐놈들을 쫓아내면서-. 덮어두어라!"
이민
종서를 시기하는 신하들은 다시는 말을 못했다.
한편 여진 족속들은 비록 조선 땅이라 하나 대대로 오래 살던 공주와 알목하다. 불만
을 품은 무리들이 가끔가끔 밤이면 아직 성벽을 쌓지 못한 곳으로 목책을 넘어 뛰어들
어오기도 하구 몰래 조선 사람의 복색으로 변장한 후에 도절제사 김종서를 암살 할 것
을 획책하기도 했다.
김종서는 오랑캐들의 이러한 행동과 음모를 미리 다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
체 사색을 드러내지 아니했다. 쥐새끼 같은 무리들의 조그마한 반발이었다. 6진이 함빡
완성되는 날이면 이런 것들은 저절로 소멸이 될 것을 뻔하게 아는 때문이다.
하루는 전례와 같이 성쌓기를 끝마친 후에 비장과 군사들을 불러 풍악을 갖추고 소
를 잡아 크게 잔치를 하는 중이었나.
기생들 수십 명이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불러서 주흥을 돋우었다.
기생들은 사또인 김종서의 앞으로 나가 권주가를 부르며 술을 권했다.
김종서는 기생들을 시켜서 비장들에게 술을 권한 후에 주흥이 도도했다. 천천히 자작
시조를 노래해 읊는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윌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수백 명 장병과 기생들은 호쾌한 사또의 청 좋은 시조 소리를 귀기울여 들었다.
종장에, '긴파람 큰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하는 노랫소리가 끝나자 모두 다 손뼉
을 치며 환성을 올렸다.
기생 한 명은 술잔에 가득 술을 붓고 사또의 노래에 화답한다.
'적토마 살찌세 먹여 두만강에 씻겨 세고 용천검 드는 칼을 선뜻 빼어 둘러메고 장부
의 입신양명을 시험할까 하노라.'
여창이건만 역시 호탕 장쾌했다.
노래가 끝나면서 사또 김종서가 대백 큰 술잔을 들려 할 때 화살 한 대가 푸르르 날
아와 김종서의 잡으려는 놋 술잔에 떨어졌다.
김종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화살을 집어던지고 태연히 큰잔을 기울였다.
호담무쌍한 김종서의 기풍에 만좌는 옷깃을 여몄다.
사또는 범인을 잡으라는 영을 내리지 아니했다. 태연히 시조 한 수를 또 한번 읊는
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랴. 어떻
다, 능연각상에 뉘 얼굴을 그릴꼬.'
웅장한 목썽은 허공을 흔들어 푸른 하늘에 떠도는 횐 구름장을 흐트러뜨리는 듯했다.
술잔에 화살을 쏜 자는 조선옷으로 변장한 야인이었다. 머리를 싸매고 쥐새끼 숨듯
숨어버렸다.
김종서는 이같이 온몸이 담덩이다.
야인들은 김종서를 시험해본 후에 다시 도체찰사 하경복의 힘을 시험해보려 했다, 이
번에는 조선 사람으로 변장을 하지 아니하고 공공연하게 야인 복색으로 수십 명이 나
타났다. 도체찰사에게 뵙기를 청했다.
"저희 족속들은 대대로 은혜를 입사와 오랫동안 이곳에 살다가 두만강 밖으로 떠나
게 되니 섭섭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대감께 인사나 여쭙고 떠나려 합니다."
하경복은 거절하기 어려웠다.
"불러들여라."
선뜻 허락했다.
여진족 수십 명은 나배를 드리고 아뢴다.
"상국 토지를 제 땅인 양 사오 대 내려오면서 정들여 살다가 이제 딴 곳으로 옳아
살게 되니 섭섭한 정을 이길 길 없습니다. 저희들은 오도리 여진족을 대표해서 물러가
는 인사를 도체찰사 대감께 고하려 왔습니다. 앞으로도 먹을 것이 없으면 많이 도와주
시기 바랍니다."
하경복은 얼굴에 가득 화기를 띠고 대답한다.
"오래 살던 곳을 떠나게 되니 어찌 서운들 하지 않겠느냐? 너희들을 보내는 나 역시
서운하구나,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을 해다오. 함길도 감사 김종서 장군
께 말을 해서 전과 같이 유루없이 잘 대접하게 하리라!"
하경복은 말을 마치자 비장을 불러 명한다.
"김종서 장군께 품해서 저 애들에게 양식 이십 석을 내주시라 아뢰어라. 그리고 주보
에 기별해서 전별하는 술상을 올리도록 하라!"
비장은 청명하고 물러갔다.
이윽고 좁쌀 스무 섬이 마바리에 실려 도체찰사 아문으로 들어오고, 여진 대표들을
대접할 주안상이 떡 벌어지게 차려 나왔다.
하경복 도체찰사는 비장을 시켜 여진 대표들에게 술을 권하게 했다.
여진 대표는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큰 활을 예물로 도체찰사에게 바치고 고한다.
"이 활은 저희들의 선조가 쓰던 활이올시다. 무게가 백 근이올시다. 자손들이 점점
잔졸 해지고 힘이 줄어서 도저히 이 활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곳을 떠나는 기념으로
사또께 바칩니다. 사또께서는 천하장사라 하니 넉넉히 사용하시리라 믿습니다."
여진 대표끈 두 사람이 힘을 모아 도체찰사 앞에 받들어 놓았다.
하경복이 살펴보니 과연 여진의 큰 활이다. 쇠로 만든 화살을 사용하는 활이었다.
하경복은 여진 대표들이 자기의 힘을 시험해보기 위하여 거짓 기념으로 바친다는 그
들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옛날 철전에 사용하던 활이로구나?"
말을 마치자 두 팔에 힘을 주어 양편 아귀를 우그러뜨렸다. '딱'소리가 나며 백 근 무
게 나가는 철궁의 중통이 딱 부러졌다.
여진 족속들은 어이가 없었다. 놀랐다. 눈을 허옇게 뒤집어썼다.
"천하장사십니다?"
여진 족속들은 절을 하고 물러들 났다.
이후부터 여진 족속들은 김종서와 하경복을 범같이 두려워했다. 다시는 장난들을 하
지 못했다.
두만강변 수천 리 황막한 땅에 새로 육진을 개척한다는 일은 용이치 아니했다.
만여 명의 수자리 군사와 본고장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동원시켜서 우선 경원진과
영북진을 설치해놓았으나,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서 개간을 하지 아니하면 또다시 허사
가 된다.
김종서는 경원, 영북 두 진을 개척한 후에 급히 파발마를 달려 장계를 올렸다.
'아뢰옵니다, 경원과 영북에 우선 두 진을 설치하옵고 절제사 밑에 토관을 두어서, 본
도 백성 1,100호를 영북으로 옮기고, 1, 100호를 경원에 이주시켜서 부지런히 농사짓게
하고, 관에서는 결전을 받지 아니해서 백성들의 후생하는 방책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본도에서 옮길 만한 백성의 집은 합쳐서 2,200호 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경기, 충청, 강
원, 황해, 평안, 경상, 전라도에 특명을 내리시어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양인은 발
탁해서 토관 벼슬을 주게 하고, 향리와 역리는 영구하게 천직을 면제케 하고, 천인들은
영구하게 양민이 되는 대우를 하도록 윤허해주시기 바랍니다.'
전하는 김종서의 장계를 받아보신 후에 비답을 내려 좋다 했고, 곧 승지를 시켜서 7
도 감사에게 방을 붙여 이민을 모집하라 했다.
양민에게 토관 벼슬을 주고, 향리와 역졸들은 천한 직업에서 떠나서 자유스런 몸이
되게 하고, 천인들은 영원히 면천을 해줄 뿐 아니라 무상으로 땅을 주어 농사짓는 데
거저 해먹고 지세도 받지 아니한다 하니, 빈궁한 생활과 역경에 처해 있는 백성들은 너
도 나도 하고 다투어 함경도로 올라가기를 자원했다.
함경도 경원, 회령, 종성, 삼수, 갑산으로 남부여대하고 이민가는 무리들은 낙역부절
길이 메어 올라갔다. 그들은 한편으로 성을 쌓아 국경을 튼튼하게 하고, 한편으로 황무
한 땅을 개척해서 문전옥토를 이루었다.
김종서는 인구가 점점 늘어가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더욱더 북으로 북으로 개척해 들어갔다.
김종서는 영북진을 다시 백안수소로 옳겨서 종성군이라 하고, 알목하 최북단에 또다
시 성을 굳게 쌓고 회령부라 했다.
다음해 을묘에는 공주 옛성을 중수한 후에 첨사를 두어 진관을 설치하고 다시 현령
을 두어 공성이라 이름했다.
다음게는 목조가 살던 곳을 경흥이라 하고 격을 높여 도호부를 설치했다.
다음에는 다시 북으로 올라가 성을 다온평에 쌓고 이름을 온성이라 했다.
다음에는 이민 1천 호를 부거에 옮기고 고을 이름을 부령부라 했다.
이리하여 길고 긴 세윌에 군 관 민의 땀과 슬기와 일치 단결된 협력으로 세종대왕의
국토를 찾아 개척한 큰 위업이 이룩되니, 이것이 곧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 육진 개척의 대위업이다.
밝은 임금 어진 신하
크나큰 육진개척의 위대한 사업을 완성하는 동안, 삭풍설한 모진 눈바람 속에 장병
과 이민들의 고생은 기막히도록 많았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김종서를 중상하고 모략했
다. 무능하고 나약한 무리들이다. 나라를 망치는 자라 했다. 목을 베자고 주장하는 자까
지 나타났다. 그러나 세종전하는 끄떡도 하지 아니했다. 철석같이 신하를 믿는 때문이
다.
고려 때 윤관장군이 구성을 쌓아서 국경을 확장했던 것을, 나약하고 무능한 신하들이
다시 글안족게 돌려주었던 것을 뼈아프게 생각했다. 더구나 함경도는 조상의 발상지 였
다. 글안이 망한 후에 여진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세종은 한치의 땅이라도 버려 둘 수
는 없다고 굳세게 선언했다. 조상이 살던 곳도 곳이지만 국가와 겨레의 만년대계를 생
각했다. 이 사업은 기어코 당신 생전에 이룩해야만 하겠다고 결심을 했던 것이다.
김종서는 경원, 경흥, 부령, 회령 사진을 설치한 후에 다시 두만강 끝까지 올라가 종
성, 온성을 축성해서 줄기차게 육진개척을 끝마치려 했다.
조정에서는 물의가 또다시 물끓듯 일어났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헌관이란 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지금 동북면 함길도 방면에는 경원, 경흥, 부령, 회령 네 진만 설치해도 오랑캐들은
침범해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그만 개척하는 일을 중지하도록 하십시오. 그 동
안 근 십 년 동안에 국가의 물자는 기막히도록 소모되었습니다. 북방에는 첫해에도 큰
눈이 쏟아져서 수자리하고 있는 군사와 이민간 백성들이 동상을 당했을 뿐 아니라, 성
도 쌓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했습니다. 다음에는 괴질이 퍼져서 사람과 가축이 허다하게
죽었다 합니다. 여기다가 오랑캐들은 끊일 사이 없이 앙심을 먹고 습격을 해 들어오니,
성을 쌓고 진을 두었다 해도, 모두 다 허사가 되기 쉽습니다. 또다시 김종서는 장사와
군사들을 잘 먹여야 한다고 날마다 소와 돼지를 수백 필씩 잡아서 큰 잔치를 하고 풍
악까지 잡혀서 사치스런 호강으로 세월을 보낸다 하니, 밑 빠진 가마솥과 깨진 독에 물
길어 붓기입니다. 자칫하면 국력이 탕진될 테니 큰 걱정이올시다. 김종서는 육진을 개
척한다고 칭탁하고 오랑캐와 부동하여 반란의 뜻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김종서는 국적
이올시다. 목을 베어 죽이십시오.'
전하는 대간들의 상소를 보시자, 무능한 신하들을 타이르는 비답을 내렸다.
'사간원과 사헌부 관원들의 글윌은 잘 읽었다. 너희의 나라를 위하여 근심하는 뜻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러나 너희들의 생각은 바늘로 창구멍을 뚫고 하늘을 쳐다보며
지껄이는 소리다. 창문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혹독한 북녘 땅에 군사와 백성들이
약간 동상에 걸렸다 해서 나라의 강토를 포기할 수 있는가? 따뜻한 온실에 안일하게
누워서 콧노래 같은 소리를 하지 말라. 겨레와 백성들의 만년대계를 위하여 국토를 확
충하는 것이다. 약간의 국력이 소비되는 일은 당연하지 않은가? 다시 훼방하는 말을 하
는 자가 있다면 참하리라.'
대왕의 준엄한 비답이 한 번 내리니 무능하고 나약한 신하들은 다시는 중상과 모략
하는 상소를 올리지 못했다.
발 없는 말은 천 리까지 날아가는 법이다
조정에서 무능한 신하들이 대왕께, 김종서는 국적이니 목을 베어 마땅하다고 글월을
올렸다는 소식은 도절제사 김종서의 귀로 들어갔다.
김종서는 곧 종사관 신숙주를 시켜서 글을 지어 소를 올렸다.
'덕으로 나라 땅을 넓히는 자는 얻기가 쉽고 잃지 아니하며, 힘만으로 땅을 개척하는
자는 얻기도 어렵거니와 잃기도 쉽습니다, 일은 같은 듯하나 길이 다른 때문이올시다.'
'진실로 길이 있는 바에 저곳으로 가서 전쟁을 해도 좋습니다마는 하물며 우리 강토
를 회복하는 일이겠습니까? 이러하니 싸우지 아니하고 덕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왕건 태조가 잘 삼한을 통합했다 하나 위력이 삭방까지는 미치지 못했고, 다만 철령
으로 경계를 삼았습니다. 그 뒤 예종 때 오랑캐들을 물리쳐서 구성을 설치했습니다마는
곧 잃어버리고 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국가의 경역은 모두 다 후방에 있습니다.'
'태조께서 삭방에 일어나시어 대동을 두시니, 남으로는 바다까지요, 북으로는 두만강
까지 다다랐습니다. 이에 공주, 경성, 길주, 단천, 북청, 홍성, 함주 일곱 골을 설치하시
니 동방에 개국한 이래 일찍이 없었던 성업이었습니다.'
'나라가 승평한 지 오래되니 지키는 신하가 막지를 못해서 경성 이북이 그만 적의 소
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상께서는 옛 강토를 회복하시는 일을 계승하시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모든 신하들이 의논해 말하기를, 경원진을 총성으로 후퇴시키면, 북방의 배
치가 적당하고 민폐가 없어진다고들 했습니다.'
'성상께서는 굳게 결단하시고 미신에게 명하시어 대신들과 의논해서 영북진을 석막에
두어서 계역을 정하라 하셨습니다.'
김종서는 도도수천언에 이르렀다.
김종서의 상소문은 다시 계속된다.
'신이 지금 북방에 있어, 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듣지 아니한 말이 없습니다. 부거
와 석막은 모두 다 우리 국경의 한계가 아니올시다. 그리고 용성도 또한 관이나 요새
가 될 곳이 아닙니다. 물이 없어서 적을 막을 수 없고, 산이 없으니 거점을 견고하게
설치할 곳이 못됩니다.'
'사읍 요충에 크게 진을 설치하여, 경원, 경흥, 부령, 회령 네 고을이 연락을 취한다면
좋습니다마는, 논란하는 이들의 말과 같이 용성으로 한계를 삼는다면 오랑캐들의 침범
하는 근심을 면치 못할 것이요, 이쯤 되면 또다시 후퇴해서 마천령으로 한계를 삼자 할
것이요, 또다시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면 또다시 후퇴해서 철령으로 한계를 삼자고 할 것
입니다.
'용성으로 한계를 삼는다면 첫째로는 의롭지 못한 일이 있고 둘째로는 이하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선조가 사시던 땅을 버리게 되니 의롭지 못한 일이고, 산천의 험한 곳
이 없어서 막고 지킬 수 없는 곳이니 이하지 못합니다. 두만강으로 한계를 삼는다면 첫
째로 큰 의가 있고, 둘째로 큰 이익이 있습니다. 흥왕의 땅을 회복하니 큰 의가 있는
것이요, 장강을 끼고 웅거하니 둘째로 크게 유리합니다.'
'첫해에 내린 눈이 비록 많이 왔다 하나 소와 말의 죽은 수가 많지 아니하고 다음해
역질이 크게 퍼졌다 하나 백성들의 죽은 자는 많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의 병
화는 비록 중하다 하나 옛적 경흥, 부령, 승우의 전몰과 용성이 결단나던 패전에 견준
다면 진실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해 있어 여러 번 침략을 당하게 되니 성곽을 수보하는
일과 갑병을 훈련시키는 일이 다른 도에 비하여 백 갑절이나 됩니다. 비록 금년에 한
성을 쌓고 명년에 또 한 성을 쌓아 해마다 성을 쌓는다 한들 무엇이 의리에 해로운 일
이라 하겠습니까?'
상소문은 계속된다.
'성스러운 계획이 신묘하시어 백성 한 사람도 채찍질 아니하시고 아전 한 사람도 벌
주지 아니하셨건만, 수만 명의 백성들은 겨우 한달 만에 새로운 땅으로 함빡 모여들어
서 큰일이 쉽게 성취되고 새 고을은 영구하게 건설되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부박한
무리들이 초년에 내린 큰 눈과 다음해에 퍼졌던 역질을 빙마해서 뜬소문을 퍼뜨려 인
심을 선동시켰으나, 다행히 성상의 밝으신 영단으로 뜬소리가 스러지고 민심이 안정되
었습니다. 더욱이 지극한 어진 혜택이 흡족하시니 백성들은 수고로움도 잊어버립니다.
오늘날 사읍을 건설하는 것은 전혀 북방을 울타리로 삼자는 것이요, 오늘날에 성곽을
쌓는 것은 번병을 든든하게 하자는 것이요, 오늘날 군사로 수자리를 시키는 것은 적을
방어해서 우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자는 것이올시다.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은 듯하
나 신명합니다. 어찌 이일을 모르고 원망해서 방자한 마음을 일으키겠습니까?'
'한 백성이 신에게 말하기를, 회령과 경원은 이미 성을 쌓았거니와 앞으로 종성과 온
성에 성을 쌓아서 두 성이 완공된다면, 우리 백성들은 걱정이 없겠노라 했습니다. 모든
서민들의 마음은 이로 미루어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은 오랫동안 북방에 있어서 야인들의 정황을 잘 살펴보았습니다, 비록 부자지간이
라 할지라도 욕심이 발동되면 서로 죽이고 서로 해롭게 해서 구수지간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비록 날마다 천금을 준다 해도 마음으로 사귈 수는 없습니다. 혹 이로써 사
귄다 해도 이가 없어지면 사독해집니다. 겉으로 회유하는 체하고 안으로 비어하는 일을
한다면 우리 형세는 저절로 강대해지고 저의 세력은 굴복될 것입니다. 신이 성곽을 쌓
고 병갑을 수선하고 사졸을 훈육하고 양곡을 비축하기에 급급한 것은 이러한 까닭이올
시다.'
'신은 듣자오니 선한 사람이 나라를 위하여 백년대계를 마련하게되면 잔폭한 무리를
없이할 수 있다 합니다. 그러나 비록 선인이라 하더라도 십 년 동안 다스리지 못하면
다스려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상소문은 다시 계속된다.
'하물며 신읍을 설치하는 일은 십 년이 채 못되지 아니했습니까? 어찌 한 가지 일의
득실로 근심했다가 기뻐했다가 하겠습니까?'
'자고로 밖에서 일을 건설하는 신하는 반드시 참소와 비방을 만나서 화를 면하지 못
하는 자가 많습니다. 전조 신 윤관 같은 이도 그 표본의 하나올시다. 윤관은 국가의 큰
공훈을 세우고도 명공거경으로도 거의 화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신은 자와 마디
만한 공도 없을 뿐 아니라, 또 사업을 건설할 만한 재질도 없어서 일이 많이 어긋났으
니 어찌 한심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만지장서의 수만 언의 상소문은 육진개척의 어려운 충정을 피력하고, 모해하고 참소
하는, 비방하는 무리들을 아프게 꾸짖으면서 국가의 만년대계를 세우는 벅차고 씩씩한
흥금을 토로했다.
한 번 읽어서 눈물이 머금어지고, 두 번 읽어 의분을 금할수 없고, 세 번 읽어서 어
깨가 으쓱거려지는 천하의 명문이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제갈양의 출사표에 비길 만한 대문장이다.
세종대왕은 김종서의 상소문을 세 번 네 번 읽어보셨다.
한 마디의 첨도 없었다. 한 마디의 허식도 없다. 그대로 나라의 한 치 땅이라도 적에
게 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을 고생을 참아가며 훼방을 참아가며, 찾아놓고 개척해야 하겠
다는 충정을 토로한 것이다.
당신의 굳은 결심을 잘 받아 이행하고 실천해주는, 조정에 다시 짝을 구할 수 없는
어진 신하다.
세종대왕은 상소문을 다시 더 한 번 읽으며 스스로 혼자 탄식했다.
"내가 복이 많아서 좋은 신하를 두어 나라 땅을 회복하는구나! 국가의 천년대계를
위하여, 또는 자손만대에 물려주어야 할 크나큰 유산이다. 국가의 정치를 맡은 임금과
신하는 반드시 이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
독백을 마친 후에 곧 승지와 집현전 학사 성삼문을 명소했다.
전하는 성삼문에게 분부한다.
"내가 불러줄 테니 김종서에게 보내는 비답을 써라."
성삼문은 붓을 잡았다.
'삭방만리에 어려운 일을 결행하는 경의 수고와 고생을 잘 알고 있다. 조정에서 경을
모해하고 비방하는 무리가 비록 천만명이 있다 할지라도 과인은 경을 믿는다. 과인과
경은 우리들 후손을 위하여 육진개척하는 일을 기어코 성사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여진 땅이나 명의 땅이 되고 만다. 종성과 온성을 마저 개척해서 이 큰 사업을 완성하
라. 나는 결코 고려 때 윤관처럼 경을 박대하지 아니하리라. 내 옷 한 벌을 보낸다.'
성삼문은 쓰기를 다하고 어전에 받들어 올렸다. 한 글자의 착오도 없었다,
전하는 다시 승지에게 분부한다.
"상의원 별좌와 내관을 불러라."
이윽고 전하의 어의를 관장하고 있는 상의원 별좌와 내관이 배알했다.
전하는 상의원 별좌에게 하명한다.
"솜을 두둑하게 둔 나의 비단옷 한 벌을 빨리 들여오너라."
상의원 별좌는 곧 어의 일습을 자개함에 넣어 받들고 들어왔다.
전하는 내관에게 분부한다.
"너는 곧 영북진으로 말을 달려 비답과 어의를 김종서에게 전하고 그의 노고를 위로
하여라!"
내관은 어명을 받아 어의와 비답을 받들고 천리마를 타고 영북진으로 달려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연통했다.
김종서는 중관이 당도하자 삼문 밖까지 나가 맞이했다. 왕명을 받들고 온 때문이다.
운주루 앞에 한양을 향하여 배석을 깔고 네 번 절하여 비답과 어의를 받았다.
뜰 앞에는 도체찰사 하경복 이하 각진 절제사와 비장과 사병들 수천 명이 모여 도절
제사의 성교와 어의 일습을 받는 광영을 배관하고 있었다.
김종서는 무릎을 꿇고 전하의 비답을 읽는 도중, 감격한 눈물이 쉴새없이 옷깃을 적
시었다.
읽기를 다하자 다시 한양 대귈을 향하여 네 번 절하여 왕은을 감사한 다음 칙사를
향하여 치사한다.
"우악하신 왕은을 어찌 다 보답하오리까. 국가와 백성, 그리고 우리들 자손만대를 위
해서 분부하신 대로 종성과 온성을 마저 개척해서 성은의 만분의 일을 갚겠소이다. 이
뜻을 성상께 아뢰어주오-."
내관도 왕명을 받들어 관북 천 리 길에 말을 달리는 도중에 황폐했던 버린 땅에 곳
곳마다 수천 명의 이민들이 돌성을 쌓고 밭과 논을 갈아 문전옥답을 이루어, 한편으로
야인의 침노를 막고 한편으로는 식량을 확보하는 눈물겨운 개척의 상황을 살퍼자, 감탄
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김종서를 향하여 치하한다.
"여러 해 동안 고생도 많이 하셨소이다마는, 천 년 동안 황폐했던 국토가 이같이 낙
토로 변했으니 모두 다 대감의 슬기와 용기와 자애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본 대로 전하
께 아뢰어 대감과 장병과 백성들의 노력을 주달하오리다."
의식이 끝난 후에 칙사인 중관은 전하께서 장병에게 내리는 술과 쌀과 포육을 고루
고루 나누어주었다.
수자리하는 군사들은 대왕전하의 자식같이 사졸들을 사랑하는 성심에 감동되지 아니
할 길 없었다.
종성과 온성 험준한 산골 속에 또다시 성을 쌓고 진을 설치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
중관이 돌아간 후에 김종서는 곧 두만강 끝까지 올라가, 종성과 온성을 마저 개척해
서 성을 쌓고 진을 설치하고, 밭과 논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조정의 어리석은 무리들이 아무리 중상하고 훼방을 했으나 이제는 두 진을 마저 개
척하라는 왕명을 받았으니 아무 거리낄 것이 없었다.
김종서가 몸소 종성과 온성으로 올라가 축성하는 일을 지휘하고 있을 때 뜻밖의 일
이 생겼다. 팔순 노모가 서울서 세상을 떠났다. 아들 김종서에게 부음이 전해지기 전에,
이 소식은 천청에 주달되었다.
전하께서는 곧 장비를 후하게 내리신 후에 중관에게 천리마를 달려 김종서에게 분상
을 허락하시고 위로하는 글윌을 내렸다.
'경의 팔십 노모가 세상을 버렸다 한다. 천 리 객지에서 부음을 듣게 되니 망극한 마
음 더한층 각별할 것이다. 국가를 위하여 육진을개척하는 책임이 중하고 크지마는 자식
된 도리에 어찌 분상을 하지 아니하랴. 잠시 부하들에게 일을 맡기고 주야배도하여 만
년유택을 정하고 자손의 도리를 다하라.'
종서는 팔순 노모의 부음을 듣자 나라일로 집을 떠나서 지성껏 봉양을 못했을 뿐 아
니라 어머님 가시는 마지막 길에도 임종조차 못한 일이 죄스럽고 한스러웠다. 그러나
신하를 알아주는 전하의 위로하는 글월과 분상을 허락하는 분부를 받으니 감격한 마음
을 금할 수 없었다.
눈물을 주먹으로 닦고 곧 천리마를 달려 황황히 분상길에 올랐다.
김종서가 서울로 돌아가 장례를 치르는 동안, 전하는 여러 차례 중관을 보내어 위문
하고 장사날은 특별히 치제까지 내렸다. 김종서의 강직하고 슬기롭고 충직한 것을 사랑
한 때문이다.
이때 김종서가 잠시 서울로 돌아가 어머님의 장례를 치르는 중에 동북면 경원진에는
크나큰 불상사가 일어났다.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경원진 절제사로 부임되었던 송희미 관
내에 일이 벌어졌다.
송희미는 술과 색이 항상 과했다. 날마다 성 쌓는 감독을 한후엔 밤에는 반드시 술을
마시고 기생수청을 들였다.
도절제사 김종서의 책망도 여러 차례 당했다. 조금 근신하는 체하다가 김종서가 어머
니의 친상을 만나 서울로 올라간 후엔 다시 술을마시고 기생수청을 영문 안에 밤마다
들였다.
오랑캐들은 도절제사 김종서와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에게는 꿈쩍을 못하고 있었으나
경원진 송희미는 항상 얕잡아보았다.
밤이면 곤드레만드레 술에 대취해서 기생을 끼고 잔다는 내막을 수 소문해 들은 때
문이다.
더군다나 범 같은 도절제사 김종서가 어머니가 돌아가서 서울로 분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랑캐들은 이 기회를 타서 경원진을 습격해서 육진개척을 훼방하려 했다.
경원진 북방에 칠팔백 명의 오랑캐들은 활과 창과 칼을 준비해가지고 굴을 파고 매
복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송희미는 경원진 수띱 리 밖에 오랑캐들이 무기를 들고 매복해 있는 것을 까맣게 모
르고 있었다.
도절제사 김종서가 없는 틈을 타서 마음놓고 술을 마셨다.
좋아하는 기생들을 데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러기를 십여 일을 했다. 오랑캐들은
조선말 잘 하는 자에게 조선옷을 입혀 변장을 시킨후에 날마다 송희미의 동정을 살폈
다.
절호한 기회였다. 온유향에 빠져서 취안이 몽롱해진 송희미의 경원진을 습격할 만반태
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느날 새벽의 일이다. 송희미와 베개를 같이하고 누웠던 기생은 베개 위에서 송희미
에게 꿈 이야기를 속삭였다.
"영감! 간밤에 무서운 꿈을 꾸었소 오랑캐 군사 수천 명이 별안간 쳐들어와서 크나
큰 싸움이 썰어졌는데, 구군복을 차리고 앞장서 나가시는 영감을 흥악하게 생긴 호장이
장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어서 영감의 목을 잘라가지고 달아나는 악몽을 꾸었습니다. 어
찌나 무서운지 온몸에 진땀이 죽 흘렀습니다. 지금까지 소름이 끼칩니다."
송희미는 기생의 꿈 이야기를 듣자 마음 속에 불길한 생각이 번쩍들었다. 그러나 겉
으조는 태연한 체했다.
"꿈이란 것은 별것이 아니다. 낮에 생각했던 일이 꿈이 되는 법이다. 그러기에 주사
야몽이란 문자가 있느니라. 네가 평상시에 오랑캐들이 쳐들어오면 어찌하나 하고 항상
겁을 집어먹고 있으니까, 그런 꿈을 꾸었느니라."
타이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마치고 막 밥상을 대하고 있을 때, 돌견 오랑캐 칠팔백 명이
무기를 휘두르며 성을 뛰어넘어 들어왔다.
성 지키던 군사들은 급히 진관으로 달려가 변을 고했다.
"오랑캐들 칠 팔백 명이 칼과 창과 활을 들고 쳐들어옵니다."
송희미는 수청들던 기생의 꿈이 영절스럽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나가기만 하면 꿈땜
을 해서 목이 잘라져 죽을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겁이 벌컥 났다.
"영문을 굳게 닫고 응전을 하지 말아라."
군사들은 영문을 굳게 닫고 한 사람의 병졸도 나가서 싸우지 못했다.
오랑캐들은 마을로 뛰어들었다. 민가에 불을 지르고 대항하는 백성들을 쳐죽였다, 곡
식을 약탈하고 말과 소 수백 필을 몰아가지고 달아났다.
비장들은 송희미에게 간곡하게 간했다.
"오랑캐들의 적세를 살펴노니 천 명 미만의 오합의 무리올시다. 나가서 싸우면 반드
시 이길 것입니다. 겁을 내지 말고 싸웁시다!"
송희미는 겁에 질려 싸우자는 비장들의 말을 듣지 아니했다, 꼼짝도 하지 아니하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기생의 꿈 생각만 가득했다.
군사 한 명은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칼을 빼어들고 성을 뛰어넘어 노략질해 가는
오랑캐의 뒤를 쫓았다. 오랑캐 십여 명의 목을 자르고 노략질해 가는 마소 십여 필을
뺏어 돌아왔다.
백성들이 송희미를 원망하는 소리는 단박 서울에까지 전해졌다.
김 형석
한 치의 땅이라도
세종대왕은 크게 진노했다.
"한 치의 땅이라도 오랑캐들의 진흙발길이 국경을 넘어 뛰달리게 해서는 아니된다
했는데, 소위 절제사라는 중한 책임을 맡은 놈이 주색에 침혹해서 정신을 못차리고
오랑캐들이 쳐들어와도 겁에 질려서 문을 닫고 막아내지 못했다 하니 말이 되느냐.
금부로 잡아 올려서 엄하게 국문한 후에 죽음을 내려라!"
금부 도사는 전하의 어명을 받들고 함길도 경원진으로 말을 달려 금부로 잡아온
후에 새남터 행형장에서 죽음을 주었다.
전하는 송희미 사건이 일어난 후에 쓸모 있는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귀중한 것을
알았다. 김종서 한 사람이 분상을 해서 동북면을 떠난 때문, 이러한 불상사가
일어났다. 더한층 김종서를 신임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 관례에 부모가 돌아가면 벼슬을 버리고 거상을 해서 삼년상을 마쳐야만
다시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 불문율의 관례이다.
세종전하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김종서로 다시 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의 직책을
맡겨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승지를 특사로하여 김종서에게 유시를 내렸다.
'경이 친상을 당하여 서울로 돌아온 후에 경원진에는 송희미의 불상사가 일어났다.
나는 비로소 쓸모 있는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을 깨달았다. 경이 효도를
다하여 삼년거상을 한다면 육진개척의 큰일은 완성되기 어려울 것이다. 국가의 큰일을
생각해서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는 길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기복하여
도절제사의 임무를 맡아서 곧 발정하게 하라.'
김종서는 전하의 유시를 받자 곧 상소를 올려 사양했다.
'죄신 김종서는 돈수백배하고 삼가 글월을 성상전하께 올리옵니다. 죄신의 죄,
태산같이 중하와 자모를 잘 봉양치 못하여 세상을 버리게 했사옵고, 또다시 죄가
바다같이 깊사와 신의 부하 송희미가 죄신이 없는 동안 적을 막지 못했사오니, 신은
이 소식을 듣사옵고 거듭거듭 몸둘 바를 모르옵던 중 특사를 보내시어 죄신을
위로하시고, 또다시 기복을 명하시니, 황공한 마음 이길 길 없습니다. 하오나 죄신은
공사간의 죄가 지중한 자올시다. 대임을 면케 해주시기 바라옵니다.'
전하는 김종서의 답상소를 보시자, 다시 승지를 보내 밀유를 내렸다. 밀유란 비밀한
교시다. 명나라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하자는 것이다.
'경의 사양하는 뜻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송희미가 경원에서 저지를 일은 경이
없는 동안 일어난 일이니 경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내가 내 생전에 육진을
개척해서 국경을 바로잡자는 것은 다만 여진 야인의 발호를 막자는 것뿐이 아니다.
장내관이 공주에 유련하면서 해동청과 토표 사냥을 한다 한다. 경이 없는 동안에
이곳에 위를 설치한다면 큰일이다. 한 치의 땅이라도 명나라한테 뺏겨선 아니된다.
깊이 생각하라!'
김종서는 전하의 국가를 위하여 백년대계를 정하시는 위대한 뜻을 더한층 절실하게
깨달았다.
전하의 육진개척을 결단한 큰 뜻은 조선에 대해 종 노릇 하는 여진족의 발호를
막으라는 것뿐만이 아니다. 명나라는 원을 멸하고 새로 정권을 잡은 이래 강대한 힘을
가지고 요서와 요동에 손을 뻗어 자꾸자꾸 위라는 것을 오랑캐 땅에 건설하고 있다.
여진의 위라는 명칭을 붙인 곳은 모두 다 명의 세력권에 속한다.
만약 명나라 내관 장이란 자가 공주에 재미를 붙여서 두만강 남안인 우리 땅에
위라는 것을 설치하겠다고 우겨댄다면, 이것은 꼼짝 도리 없이 명나라에 뺏기고 마는
것이다.
전하의 한 치만한 땅도 내버려두어서는 아니된다는 큰 결심은, 드러내어 놓고
말씀은 아니했지만 실상은 강대국인 명나라가 이 땅을 뺏어갈 염려가 있는 때문이다.
김종서는 감히 다시 더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혼자말로 독백을 한다.
"그렇다. 한 치만한 땅이라도 뺏겨서는 안된다!"
"여진은 막기만 하면 굴복시킬 수 있지만, 명의 손에 들어간다면 다시는 우리 땅이
되지 않는다. 싸워서 무찌를 수도 없다!"
"한 치만한 땅이라도 명나라에 뺏겨서는 아니된다!"
"고려 말엽에 원에게 이 땅을 뺏기듯이 명한테 뺏겨서는 아니된다!"
김종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김종서는 마음 속으로 고민했다. 사대부가 아버지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
삼년상을 치르지 아니한다면 크나큰 불효자식이라고, 유가에서는 사람으로 쳐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라에 위급한 큰일이 있다. 명나라가 우리 땅으로 들어와서 위를
설치하며 군대를 주둔시킨다면 이러한 위험천만한 일은 없다. 당장 눈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마음을 태평하게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명나라 황제의 칙사인 장내관이란 자는 알목하에 있다가, 추장 부자가 참살을
당해서 여진 내란이 일어난 후에 몸을 피해서 공주인 경원으로 내려와서 토호질을
해서 해동청 보라매와 표범을 사냥한다 하고 명나라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명철한 세종전하는 이 일을 아시고 밀유를 내리신 것이다.
과연 불세출의 영주라고 생각했다.
일이 이쯤 전개되어, 오랑캐들의 흙발길 대신 명나라 군사들의 말발굽이 두만강
이남 동북면 일대를 유린한다면 여태껏 자기가 쌓아올렸던 먼젓번의 사진개척도 윤관
장군의 옛일처럼 노이무공이 되고 한줌 물거품이 되어 스러져버리고 만다.
김종서는 주먹을 들어 상을 쳤다.
'사사로운 집안 일로 국가의 큰일을 내버려둘 수는 없다. 삼년상을 아니 지켰다고
유가들의 비방을 받아도 좋다! 나라가 있고 내 집과 내 몸이 있다. 어머님도 영이
있다면 아실 것이다. 의례적인 삼년거상을 줄이고 마음 속으로 삼년거상을 받들자!"
김종서가 마음 속으로 전하의 기복 명령을 받들기로 결심하고 있을 때, 전하는
또다시 특사를 내보내 유시를 내렸다.
'나는 경이 효도를 다하여 삼년상을 마치려고 하는 그 충정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의
자식이 되어 당연한 도리다. 그러나 어제 밀지를 내린 바와 같이, 내가 육진을
개척하여 선조가 사시던 우리의 국토를 한 치라도 버리지 아니하려 하는 것은
오랑캐들의 발호를 막으려는 것뿐만이 아니다. 강대국인 중국이 슬며서 우리 국토로
들어와 위를 설치하고 오랫동안 군대를 주둔시킨다면, 반드시 명나라 땅이 되고야
만다. 이리 된다면, 나는 만대의 죄인이 되고 만다. 한 치의 땅이라도 왜 남에게 내줄
수 있는가? 경은 나를 보필하는 신하다. 내가 용렬한 임금이 되어 자손만대의 죄인이
된다면, 나를 보필하는 경도 나와 함께 무능하고 용렬한 자손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경은 굳게 기복시키는 나의 지시를 거절하지 말라! 나와 그대는 다 함께
만대의 죄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지극한 부탁을 저버리지 말라! 옛법에
백일종상이 있다. 경은 옛 예법을 따라 삼년거상을 단축하여 백일로 제복하고 나와
경이 다 함께 자손만대의 죄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소를 버리고 대를 취하라.
고기 열 근을 보낸다. 상제 노릇을 하느라고 나물만 먹어서 몹시 쇠약했을 것이다.
몸을 소복하기 위하여 고기를 먹도록 하라! 경이 만약 삼년상중이라 해서 내가 보낸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왕명을 거역하는 불충이다! 알아듣겠는가? 효만
중하다고 생각하고 충을 무시한다면 이것 또한 불효다! 옛말에도 효자의 집에
충신이난다 하지 아니했는가? 어서, 고기를 들고 기운을 차려서 백일에 일어서라!'
김종서는 네 번 절하고 유시를 받들어 읽자, 눈물이 뎅겅뎅겅 굴건제복의
'눈물받이'위로 떨어졌다.
인자하고 다정하면서 대의명분을 밝혀서, 믿는 신하에게 충정을 털어 간곡하게
부탁하는 유시다.
'상제 노릇을 하느라고 나물만 먹어서 몹시 쇠약했을 것이다. 몸을 소복하기 위하여
고기를 먹도록 하라!'
'한 치의 땅이라도 왜 남에게 내줄 수 있는가? 경은 나를 보필하는 신하다. 내가
용렬한 임금이 되어 자손만대의 죄인이 된다면, 나를 보필하는 경도 나와 함께
무능하고 용렬한 자손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내가 보낸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왕명을 거역하는 불충이다! 알아듣겠는가?
효만 중하다고 생각하고 충을 무시한다면 이것 또한 불효다!'
김종서는 이 대목에 이르자 목을 놓아 흐느꼈다.
김종서는 눈믈을 닦고 유시를 받들어 상에 올려놓은 후에 특사를 향하여 고한다.
"광대무변하옵신 왕은을 어찌 저버리오리까. 자손만대의 죄인을 면키 위하여 전하의
성지를 받들어 백일로 제복하고 동북면으로 간다고 아뢰어주시오."
김종서는 마침내 왕명을 받들었다.
김종서는 백일 되는 날 졸곡제를 마치고 탈상을 한 후에 기복이 되어 어전에 나가
고별을 올렸다.
세종전하는 만면에 기쁜 빛을 띠시고 김종서에게 말씀을 내린다.
"고기는 좀 먹었느냐? 얼굴이 야윈 듯하구나!"
지극히 신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한 마디 말씀은 김종서의 뼛골 속으로 포근히
스며들었다.
김종서의 눈에는 감격한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다만 한 마디를 아뢸 뿐이었다.
"떠나려느냐?"
전하는 또 한 번 간단한 말씀을 내린다.
"오늘로 떠나겠습니다."
전하의 용안엔 만족한 빛이 현연하게 넘쳐 흘렀다.
"기어코 종성, 온성을 마저 개척해서 육진을 완성하라!"
"명심하겠습니다."
전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좌우를 돌아보신다. 승지와 내관이 장지밖에 시립해
있었다.
어수를 들어 승지와 내관을 가리키며 말씀한다.
"너희들은 잠깐 물러가거라."
승지와 내관은 전하의 분부를 듣자 황망히 몸을 피해 물러갔다.
넓은 편전 안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김종서와의 독대다.
"온성과 종성엔 다시 더 이민을 시키고 땅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게 하는 한편, 돌로
성을 굳게 쌓아서 국경을 확정시키겠지만 지금 공주에 내려와서, 해동청과 토표를
사냥하면서 토호질을 치고 있는 명나라 장내관은 우리에게 화근덩어리다. 어찌
조처하려 하느냐?"
"죄신도 명나라 사신 장내관에 대하여 많이 생각을 해둔 바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았단 말이냐?"
"이자는 본시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건주위 이만주의 영채를 순찰하던
자올시다. 전하께서 최윤덕 장군에게 하명하시어 건주위 이만주의 소굴을 응징하실
때, 난을 피하여 알목하로 왔었습니다. 알목하게 우디거가 들어와 퉁맹가 부자를
죽여서 난이 일어나니 혼비백산이 되어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공주(경원)에 또다시
내려와서 매사냥과 새끼범을 잡으며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겁이 많은
자올시다. 문제 없이 쫓아내버리겠습니다."
"어떻게 쫓아낼 수 있느냐? 경의 의도를 말해보라."
"이번 경원진에는 송희미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곧 장나관이란 자를
경원에서 쫓아내는 좋은 기회가 되겠습니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올시다."
"전화위복? 어떻게 전화위복이 된다 하느냐?"
"'우리는 오랑캐의 습격을 응징하기 위하여 크게 전투를 개시할 준비가 완성되었다.
이곳은 불바다가 되기 십상팔구다. 빨리 몸을 피해 건주위로 돌아가라.'고
이르겠습니다. 그리 하면 그자는 겁이 많은 자올시다. 시각을 지체치 않고 달아날
것입니다."
전하의 용안엔 미소가 떠돌았다.
"좋다. 그리 하라. 한 치의 땅이라도 잃어서는 아니된다!"
김종서의 비밀한 독대는 끝이 났다.
"그럼, 오늘로 곧 발정해서 떠나겠습니다."
김종서는 말을 마치고 숙배를 드렸다.
전하는 분합문까지 납시어 다시 멀리 가는 김종서에게 부탁하신다.
"한 치만한 땅이라도 뺏겨서는 아니된다. 만일 그리 된다면 경과 나는 만대의
죄인이 된다. 육진개척은 내 생전에 기어코 완성이 돼야 한다."
전하는 더 한 번 당부가 은근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하는 어수를 들어 멀리 가는 김종서의 모습이 스러질 때까지 바라보신다. 전무한
광영이었다.
김종서는 마음 속으로,
'밝고 어질고 결단성 있는 성주를 모시었구나!'
감탄하면서 곧 천리마를 다려 동북면으로 향했다.
백일제상을 하고 다시 임소로 돌아오는 김종서 도절제사를 맞이하자, 수자리하는
군사와 모든 백성들은 조모상을 당해서 고향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아버지를 맞이하는
듯 한편으로는 애절한 복제인사를 하고 한편으로 태산같이 믿는 든든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송희미의 잘못으로 뜨거운 화를 겪은 뒤라 비로소 안도의 숨들을 돌렸다.
김종서는 모든 이민과 수자리하는 군사들을 위로하고, 용감하게 오랑캐를 단신으로
추격하여 마소 수십 필을 뺏어온 군사에게는 특별히 후한 상을 주어 사기를
북돋워주었다.
군민의 위로를 끝마친 후에 김종서는 비장 십여 명과 종사관들을 위세좋게 거느리고
경원에 우거하는 중국 내관 장을 찾았다.
장내관은 김종서가 모친상을 당해서 한양으로 갔다가 백일탈상을 하고 왕상전하의
특명으로 기복이 되어 다시 임소로 돌아오게 된 것을 소문으로 들어 알았다.
장내관은 겁이 많은 자였다.
부하 병졸 삼백 명을 거느리고 다니면서도 날쌔고 표독한 오랑캐들한테 변을 당할까
두려워서 항상 겁을 집어먹었다. 황제의 명을 받아 요동에 설치해놓은 위들을
순무하러 왔건만 마음은 늘 불안했다.
이만주의 소굴 건주위에 영문을 차리고 있을 때는 최윤덕 장군이 건주위를 무찌르게
되니 난리통에 횡사할 염려가 있었다.
조선진에 청을 해서 알목하로 들어와 영문을 설치하고 있었다.
알목하에 오도리족과 우디거 추장의 싸움이 벌어져서 퉁맹가 티무르 부자가 죽게
되니 또다시 경원으로 내려와 영문을 짓고 삼백 명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경원은 산천이 수려하고 논과 밭이 기름졌다. 오랑캐 땅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명나라 사신이라 해서 대우도 융숭했다. 할 일이 없으니 해동청 보라매를 잡아서
길을 들이고, 범의 새끼를 사냥해서 가죽을 벗겨 수십장의 표범껍질을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조선 보라매 값과 표범껍질 값은 수천 금이 되는 때문에 일보다도 이에
눈이 밝은 장내관은 강대국의 힘을 빙자하고 오랑캐 못지않게 포수들을 들볶으며 못된
짓을 많이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경원에 두류하면서 건주위로 갈 생각을 아니했다.
경원진에 두류하면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는 명나라 황제의 요동특사 장내관은
반갑게 도절제사 김종서의 일행을 맞이했다. 먼저 김종서에게 경건하게 예를하여
조의를 표한 후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반갑게 손을 잡으며 말한다.
"사또가 분상하신 동안 나는 오랑캐놈들한테 죽는 줄 알았소이다. 아주 혼이
났습니다. 경원 절제사 송희미가 쳐들어오는 오랑캐들을 막지 않는 바람에
오랑캐놈들은 동리에 불을 지르고 민가로 뛰어들어가서 마구 약탈을 해갔습니다.
송희미는 참 겁이 많은 무능한 절제사입니다."
김종서는 호방하게 웃으며 장내관을 놀려댔다.
"왜 다인(대인의 중국말음)은 중국 군사를 삼백 명씩이나 거느리고 있으면서
오랑캐들을 쫓아내지 못했소?"
장내관은 얼굴빛이 변해졌다. 오만무례한 명나라 사람 특유의 노기를 눈망울에 띠고
대답한다.
"나는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요동을 순무하러 온 특사요! 명나라 특사가 무슨
까닭에 조선으로 쳐들어온 오랑캐들을 막을 책임이 있소? 그것은 사또의 당치 않은
책망이외다."
김종서는 장내관의 말을 듣자, 또 한 번 호방한 웃음을 웃으며 급소를 찔러 말한다.
"그야 그렇지. 다인이 잠시 우리 땅으로 피란 들어온 명나라 관리니까, 조선 땅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오랑캐를 막아 싸울 책임은 없지! 그렇지만 그때 만약, 오랑캐
마적들이 당신이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뛰어들어왔다면 당신은 어찌했겠소?"
장내관이란 자는 껄걸 웃으며 대답한다.
"싸워야지. 그러나 오랑캐놈들은 너무나 악독한 놈 아닌가베! 도끼로 머리통을 막
찍어대는 놈들이니 어찌하겠소. 그날 나는 무서워서 영문을 굳게 닫고 나가보지도
못했소. 하하하."
김종서는 다시 껄걸 웃었다.
"그러면서 무슨 송희미가 겁쟁이고 무능하다고 조롱을 하오? 문을 철벽같이 닫고
엎드려 있기는 매일반 아니겠소? 다시는 송희미를 겁쟁이라고 흉보지 마시오."
장가는 무안했다. 얼굴을 붉히며 슬쩍 말꼬리를 돌려 묻는다.
"참, 송희미는 어찌 되었습니까? 소문 들으니 금부 도사가 와서 한양으로 잡아갔다
하는데?"
"왕상전하께서 크게 노하시어 곧 군법시행을 해서 죽음을 내리셨소이다. 귀국에서는
이런 장수가 있다면 어찌하십니까?"
또 한 번 장내관이란 자를 놀려댄다.
장가는 또다시 얼굴이 화끈 달았다. 그러나 대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매일반이올시다. 사형에 처합니다."
김종서는 점잖게 얼굴빛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꺼낸다.
"그러나 장다인, 또다시 피란을 가야 하겠소이다."
장가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왜 또 무슨 난리가 납니까?"
"무슨 난리라뇨, 우리 왕상전하께서는 이번 오랑캐놈들이 장난한 것을 크게
진노하시어 이곳에 있는 오랑캐놈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두만강을 건너서 소굴을
응징하라 하셨소이다. 이같이 돼 경원 일대가 불바다가 될 것입니다. 빨리 피신을
하시오! 그렇지 않다면 나와 함께 일선에 나가 오랑캐와 싸웁시다!"
명나라 특사 장내관은 경원 일대가 불바다가 되고, 일선에 나가서 함께 오랑캐를
막아 싸우자는 김종서의 말을 듣자, 버쩍 겁이 났다. 둔사를 부려 변명한다.
"나는 조선 사람이 아니라 명나라 사람입니다. 조선으로 노략질해 들어오는
오랑캐들을 막아 싸울 대의명분이 없습니다."
김종서는 서슴지 않고 대답힌다.
"그렇다면 어서 피란을 가시오! 공연히 이곳에 있다가 후림불에 은사 죽음을 한다면
큰일입니다."
장내관은 당황했다.
"언제쯤 난리가 일어납니까?"
"뻔한 일 아닙니까. 내가 왕명을 받들어 삼년상도 마치지 못하고 백일제상을 하고
온 것은 오랑캐를 응징하자고 온 것이 아니겠소? 내일이라도 기병을 하겠소!"
김종서는 위엄기 있는 얼굴빛을 짓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오랑캐들을 무순시키기 위하여 요동으로 왔다가 건주위가 소란한
까닭에 알목하를 거쳐서 이곳으로 잠시 옮긴 것인데, 다시 요동으로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소. 싸움은 내가 떠난 후에 시작해주시오."
장가는 비겁한 눈웃음을 치며 청을 했다.
장내관의 말을 듣자, 김종서는 얼굴에 노기를 띠고 대답했다.
"당치 않은 말을 하는구려. 당신 한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 쳐들어오는 오랑캐놈들을
막아 싸우지 않고 내버려둔단 말씀요. 전쟁을 마음대로 늦추기도 하고 빨리 끝내게 할
수 있소? 어린애 같은 수작을 하는구려. 내일 새벽에 곧 떠나시오. 만약 내 말을 아니
듣는다면 오랑캐와 싸워서 이곳이 불바다가 되더라도 나는 당신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소!"
김종서는 쾌쾌하게 장내관을 꾸짖었다.
워낙 경위에 막히는 말을 해 놨으니 제 아무리 강대한 명나라 특사라 하나, 꼼짝할
도리가 없었다. 무안에 취해서 얼굴을 붉히며 대답한다.
"사또께서 정 그렇게 말씀하시면 내일 아침에 일찍 발정해서 건주위로 가겠소이다."
김종서는 비로소 부드러운 말씨로 대답한다.
"잘 생각하셨소. 건주위는 우리가 압록강 남안에 사군을 설치하고 성벽을 굳게 쌓은
후에 이만주가 다시는 침도할 생각을 보기했소이다. 이제는 아무런 병화도 일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오랑캐들을 잘 무마하고 교화시키시오. 그리 하는 것이
명나라 황제의 뜻을 받드는 길이라 생각하오."
김종서는 어린애르 ㄹ훈계하듯 타이른 후에 곧 큰 소리로,
"이리오너라!"
비장을 불렀다.
비장이 청령하고 군례를 드렸다.
"장내관이 우리 나라 소산인 해동청 보라매와 호피를 매우 좋아하는 모양이다. 잘
길들인 매 한 쌍과 곰쓸개 한 보와 표범껍질 다섯 장을 가져다가 선물로 보내라."
비장은 명을 받들어 곧 물건을 들여와 장내관한테 전했다.
탐욕 많은 명나라 특사는 입이 딱 벌어졌다.
"사또! 감사하오. 가보로 삼겠소. 내일 곧 떠나오리다."
"그리 하시오."
김종서는 작별을 하고 일어섰다.
다음날, 명나라 특사 장내관은 경원에 병화가 일어나서 불바다가 된다는 바람에
겁이 덜컥 났다. 황황히 삼백 기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서북면 압록강 밖 건주위로
향해 떠났다.
김종서는 성 밖까지 친히 나가 좋은 말로 장내관을 전송한다.
"육진을 완전히 개척해서 오랑캐들의 소요가 없게 되거든 다시 한 번 다인을
청하리다. 그때 가서는 아므놓고 녹혈도 자시고 매사냥도 하고 범사냥도 하시오."
"또다시 놀러오거든 녹용과 인삼이며 호피와 해동청을 많이 주시오. 그럼 큰일 많이
하시기 바라오."
명나라 장내관은 섭섭한 듯 인사를 하고 떠났다.
김종서는 담략과 슬기가 훌륭할 뿐 아니라 외교수단도 이같이 능란했다. 전하가
항상 염려하는 골치덩어리인 명나라 내관을 이같이 힘안들이고 국경 안에서
쫓아내버렸다. 애써서 개척해놓은 땅을 강대국인 명나라에서 이러니저러니 하고
욕심을 내서 도독부나 위 따위를 설치하겠다고 한다면 큰일이었다.
김종서는 알목하에서 피란온 명나라 사신을 압록강 건너 건주위로 내쫓은 후에,
경원진의 성벽을 더 수축해서, 다시는 오랑캐들이 방자한 마음을 먹지 못하게 했다.
다시 알목하로 올라가 아직도 안정되지 못하고 방황하는 오도리 족속들을 위하여
두만강 건너 양지바른 옥토에 평안히 살도록 안주의 땅을 정해주고, 약속한 대로 죽은
추장 퉁맹가 티무르 대신 파쿠타와 그의 아내 흑의미인에게 양식과 우마와 농경기구를
풍무하게 주어서 나라의 울타리가 되게 하고, 다시 종사관 박호문을 우디거로 보내서
건주위를 응징할 때, 내응이 되어 조선에 귀순했던 우디거의 딸과 추장에게 건주위
이만주의 간특한 계교를 말살시킨 공로를 찬양한 후에 천리마와 비단과 인삼을
상급으로 내려서 길이길이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울타리가 될 것을 다짐받았다.
김종서는 다시 종성과 온성으로 올라가 두 진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일변으로 일을 하면서,일변 전하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리기 위해서 종사관 박호문을
한양으로 보내서 명나라 사신을 쫓아낸 일을 아뢰었다.
'경원에서 매사냥과 범사냥을 하면서 포수와 백성들을 괴롭게 하던 명나라
장내관이란 자를 서북면 국경 밖 건주위로 쫓아내버렸습니다. 녹용과 노루피를
마시면서 호강에 취해서 아니 가는 것을, 오랑캐가 쳐들어올 때 함께 막아서 싸우자
했더니 그만 겁이 나서 달아났습니다. 갈 때 해동청 한 쌍과 표범껍질과 웅담을
주었더니 탐심많은 자이오라 무한 기뻐했습니다. 이제 명나라가 국경 안에 도독부나
위 따위를 설치할 기우는 없어졌습니다. 먼저 전하께 주달하와 성심을 편안케
해드립니다.'
전하는 박호문을 통하여 올리는, 명나라 사신 장내관을 국경 밖으로 쫓아냈다는
김종서의 장계를 받으시자 크게 기뻐하셨다.
박호문을 어전에 불려 인견하시고 분부를 내린다.
"김종서한테 잘 처리했다고 일러라. 앓던 이가 빠진 듯해서 시원스럽다! 수자리하는
군사들에게 거핵(솜) 천 근을 보내니 두둑하게 옷을 지어 입히게 하라!"
삭풍이 살을 에는 듯한 극한지방인 온성과 종성에서 마지막으로 육진개척의 충성을
하는 군사들은, 전하께서 종사관 박호문이 돌아오는 편에 거핵 천 근을 내리시어
눈보라치는 찬 겨울에 두둑하게 옷에 솜을 두어 입으라 하셨다는 말씀을 듣자 모두 다
감격한 눈물을 흘렸다.
김종서는 곧 이민온 백성들의 아내에게 솜옷을 지으라 해서 군사들을 두둑하게
입혔다.
수천 리 고향 땅을 떠나서 수자리하는 군사들의 고생을 알아주시는 어진 임금의
따뜻한 정은 군사들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다.
괴롭고 추운 것도 잊어버리고 이틀이나 사흘에 할 일을 하루에 해치워버렸다. 모든
군사가 합심이 되니 온성, 종성 두 진의 성 쌓는 일은 예정보다도 한 달이나 앞당겨
완성이 되었다.
김종서 이하 모든 종사관과 군사들의 기쁨은 하늘만큼 크고 벅찼다. 무한대의
기쁨이었다.
육진의 길고 긴 성곽과 높고 높은 관문은 호호탕탕 수천 리의 만리장성을 이루어
푸른 하늘가에 외외하게 솟았다.
성곽 안 수천 리, 오랑캐들의 말굽이 뛰닫던 넓고 넓은 황폐한 땅은 평안, 황해,
충청, 전라, 경상, 함경의 이민들의 억세고 힘찬 괭이질과 가래질로 옥야천리로
변했고, 청산이 병풍치듯 둘러싼, 푸른 솔과 잣나무가 무성한 양지바른 곳에는
골짜기마다 열집, 스무 집씩 배산임류해서 아늑하게 새 마을을 이룩했다.
근 십 년 만에 육진 개척은 끝이 나고, 추위가 혹독했던 삭방에도 양춘가절이
돌아왔다.
도절제사 김종서와 도체찰사 하경복은 모든 종사관과 여러 비장들을 거느리고 경원,
경흥, 부령, 회령, 온성, 종성, 여섯 진을 순찰했다.
마을마다 질펀한 밭고랑에는 보리와 옥수수며 조이삭이 파릇파릇 싹을 뿜어서
만간들이 푸른 담요를 펼쳐논 듯하고, 젊은 이민들은 소를 몰아 밭을 갈고 괭이질과
가래질로 개울물을 돌려내서 보 막기에 바빴다.
이민들에게는 십년 동안 땅세를 받지 아니한다 하니 더한층 벅찬 희망이
부풀어올랐다. 동리마다 집집마다 아낙네들은 낮과 밤으로 부지런히 길쌈을 해서
북포를 짜고 다듬이질을 해서 남편의 옷을 지었다.
붉은 저고리를 입은 아이들은 희희낙락거리며 한편에서는 씨름을 하고 한편에서는
제기를 찼다.
동리마다 차츰차츰 자리가 잡혔다. 울타리 안에서는 닭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고 울타리 밖 우릿간에는 돼지가 죽을 먹느라고 꿀꿀거렸다.
고려 예종 이후, 삼사백 년을 포기해버렸던 황폐한 천여 리 땅은 이제야 비로소
국경을 완전히 찾아서 호지로 변했던 불모지가 완연히 옥토로 바뀌어졌다.
완성된 여섯진을 돌아보는 김종서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까닭 없이 국비를 너무 소비한다고 자기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던 자까지 있었다.
김종서는 그자들을 데려다가 한 번 보이고 싶었다.
김종서의 눈에서는 또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번에 흐르는 눈물은, 모든 오나고한 신하들의 중상모력을 단연히 물리치고 이
크나큰 사업을 완성하도록 한 치의 땅이라도 뺏겨서는 아니된다고 격려해주신 밝은
임금의 용단을 감사하는 눈물이었다.
김종서가 육진을 돌아보는 동안 고을마다 백성들은 아버지를 대하는 듯 반갑게
맞이했다.
김종서가 도임한 이래 여섯 진 안 천여 리 땅에는 오랑캐 군사들의 노략질하는
흙발길이 끊어졌고, 철벽같이 쌓아 올린 천리장성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은혜로운 성벽이었다.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복되게 하자는 김종서의 피눈물나는
정성과 얼이 화강석벽의 돌부리마다, 백성들의 마음 속마다 깊이깊이 굽이쳐 스며든
때문이다.
더구나 멀리 전라, 경상, 충청, 경기, 황해도에서 이민온 백성들은 하늘같이
김종서를 우러러보았다.
대대로 구박을 받아가며 간구한 생황을 해온 천민들이었다. 고리백정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양반의 자식들은 어린애들까지도 너라고 부르고 해라를 했다.
대대로 내려오며 철천지한이 되었다. 역졸도 하대를 받았다. 아전도 양반이라는 족속
앞에서는 행세를 할 수 없었다.
이제 이민이 되어 육진개척의 돌 몇 덩이를 굴리고 나무 몇 짐을 나른 탓으로
면천이 되어 양민이 되었다.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고개를 번쩍 들고 가슴을 활짝 펴서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의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그나 그뿐인가. 양지바른 곳에 수간초옥을 짓고 처자식과 오손도손 된장찌개를
바글바글 끓여 먹으며 단란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 생겼다.
문 앞에는 하루갈이 강냉이밭, 이틀갈이 보리밭에 사흘갈이 고량밭이며 한숨갈이
채마밭이 돈안주고 자기 땅이 되었다.
그나 그뿐인가. 나라에서는 십 년 이십 년 동안 결전 한 푼을 받지 않는다 한다.
이민으로 온 백성들은 노소남녀를 말할 것 없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김종서에게 절을 하고 치하를 했다.
"사또! 사또 덕택에 이제는 저희들이 베개를 편안히 베고 잘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습니까?"
"사또! 저희들은 이민이올시다. 사또 덕택에 상놈이 면천이 되어 양민 행세를
하면서 처자식을 거느리고 고개를 번쩍 들고 버젓이 살게 되었습니다. 대대로
내려오면서 양반님들의 갖은 학대를 받던 그 철천지한을 이제는 사또 덕택에 싹
풀어버리게 됐습니다. 하해같은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사또! 땅을 거저 주시고 결전도 받아가지 안니하니 이제는 부지런하게 일만 하면
온 집안 식구들이 배를 두드리고 잘살게 되었습니다. 모두 다 사또의 덕택이올시다.
오랑캐놈들고 꿈쩍을 못하게 되고..."
김종서는 가는 곳마다 미소를 지어 백성들을 위로했다.
"모두 다 성상의 은덕이시고 너희들의 합심 협력한 덕으로 이 크나큰 육진개척의
사업이 이룩되었다! 이제는 오랑캐들도 감히 국경을 엿보지 못할 것이다. 자자손손
복을 많이 누리어 잘들 살아라!"
김종서의 말에 백성들은 더 한 번 감격했다.
김종서는 자신의 지휘와 감독으로 완성이 된 크나큰 육진개척의 일이 끝난 후에
전하께 장계를 올려 처분을 물었다.
'함길도 도절제사 신 김종서는 삼가 글월을 성상전하 탑전에 올리나이다. 전하의
크나크신 영산으로 결행하신 육진개척의 위대한 사업은 이제 완성이 되었습니다.
두만강변과 압록강변에 뻗친 수천리 황무의 땅은 인구가 풍성한 옥야천리로 변했고,
높고 굳게 쌓아올린 성벽과 관문은 천리장성을 이루어 호기는 감히 엿볼 기회를
잃었을 뿐 아니오라 국경을 명확하게 정해놨으니, 이웃 강대한 나라에서도 딴생각을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남에서 옮긴 민초들은 부지런히 밭과 논을 개간해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시작했고, 마음마다 계견의 소리가 한가로워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성상전하의 특명으로 옮긴 백성들에게는 면천을 해서 양민이 되게 하였고,
또다시 논과 밭을 나누어주어 세를 나라에 바치지 아니하도록 별은전을 내리시니,
서민들은 춤을 추며 노래를 불러 성대의 편안한 백성이 되었다고 기리는 소리가
대단합니다. 이제 소신의 임무도 끝났습니다. 함경도 출신의 정예 군사들만 수천 명
남겨두고 십 년 동안 수자리했던 서울 군사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서, 늙은 부모를
봉양하고 오래간만에 처자식과 만나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황공무지하오나, 소신 또한 과만이 지난 지 이미 오래올시다. 도절제사의
임무를 면제해주시옵기 엎드려 바라옵니다. 연하옵고, 다시 아뢰옵니다. 도체찰사
하경복도 연만한 재상으로 십 년 가까운 세월에 노고가 많았습니다. 서울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도록 처분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육진개척의 큰 사업이 완결되었다는 장계가 올라가자 전하는 크게 기뻐하셨다.
곧 승지를 불러 비답을 내린다.
'한 치의 나라 땅도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경들의 지극한 노력으로 이제
육진개척의 일이 완성되었다 하니, 내 마음 기쁘기 한량없다. 첫째로는 경 이하 여러
절제사의슬기와 노력으로 이 큰 사업이 오나성되었고, 둘째로는 수자리하는 사졸들의
끈기 있게 참은 일로 이 큰 사업이 이룩되었다. 셋째로는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생을
창조하기 위하여 이민온 백성들의 진지한 노력으로 이 큰 사업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기쁜 일은, 한 대의 화살과 한 자루의 칼을 쓰지 아니하고 이
거창한 사업을 이룩했으니 이제 나는 베개를 편안히하여 다리를 뻗고 안심하며 침소에
들게 되었다. 지난번에는 만리창파를 헤치고, 대마도를 소탕하여 나라의 위엄을
드높였고, 이번에는 서북면과 동북면의 오랑캐들을 응징한 후에 국계를 명확하게
정해놓았으니, 이제 나는 선조의 업적을 계승해서 자손만대에 크나큰 복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모두 다 경 이하 군과 민에게 고맙다는 말을 보낸다. 끝으로 경의 소원에
의하여 하경복의 도체찰사와 경의 함길도 감사 겸 도절제사의 임무를 면케 한다.
그러나 경의 후계자가 있어야 하겠다. 경을 대신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라. 그리고 십
년 동안 수자리했던 군사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라!'
천만년 지켜라
전하의 비답을 받는 특사는 곧 육진으로 달렸다.
김종서는 체임을 허락하시는 하교를 받자,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도체찰사
하경복에게 자랑한 후에 곧 후계자를 천거하는 생소를 특사편에 올렸다.
'왕은이 망극하시와, 하경복과 소신의 면직을 허락하시고 수자리하는 군사들을
고향으로 도렬보내라 하시니, 군사들이 하교를 듣는다면 얼마나들 기뻐하겠습니까? 곧
성지를 사병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하옵고 신의 후계자는 오랑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으로 도절제사를 삼으시고, 도체찰사는 원만한 재상
황보인으로 정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삼가 아뢰옵니다.'
특사는 전하께 올리는 김종서의 상소문을 한양으로 돌아가 전하께 바쳤다.
전하는 다시 승지를 불러서 김종서에게 보내는 유시를 쓰게 했다.
'들으니, 이징옥은 나이 비록 젊다 하나 경의 밑에서 십년을 일하는 동안 많은
경험과 실력을 더욱 쌓았을 줄 안다. 경의 말을 받아들일 작정이다. 서울로 돌아올 때
함께 입조하라. 그리고 황보인은 나도 생각했던 바다. 무력으로 위풍을 오랑캐들에게
떨치는 이징옥과 인자한 행정으로 서민을 지도할 줄 아는 황보인으로 도절제사와
조체찰사를 임명한다면, 크게 변경을 이롭게하여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 서울로
돌아올 때, 이징옥을 대동해 오너라.'
김종서는 전하의 유시를 받자 도체찰사 하경복과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을 대동하고
한양으로 올라가 어전에 배알했다.
전하는 곧 승지에게 명하여 삼정승, 육조판서며 사헌부, 사간원 모든 신하들을 불러
입궐케 했다.
모든 신하들은 어전에 모여 제각기 무슨 말씀을 내리나 하고 일제히 부복하여
천안의 동정을 우러러 살피고 있었다.
전하는 백관을 돌아보시며 엄숙하게 말씀을 내린다.
"내가 처음 육진개척을 단행했을 때, 경들은 거의 모두 다 육진개척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제 육진은 김종서 이하 모든 장병들의 슬기와 지혜로 개척이 완성되었다.
과연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김종서가 아니었다면 내가 아무리 육진을 개척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김종서가 또한 아무리 이 일을 완성하고
싶다 할지라도 내가 아니었던들 이 일은 완성치 못했을 것이다! 영상 이하 모든
각료들은 이제 고개를 숙여 생각해보라! 고려 이래 사오백 년 동안 오랑캐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던 나라 땅은 완전히 경계를 찾아 회복했다! 이 엄연한 국토는 다시 어느
누가 침범해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공치사를 받기 위하여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들은 나라의 부를 이룩하기 위하여, 또는 자손만대에 물려주는
유산으로 경들이 반대한 이 일을 단행한 것이다. 나는 반대했던 사람들의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 경들은 너나할것없이 이 육진을 천 년 만 년이 가도록
꿋꿋하게 지켜 나가도록 하라!"
전하의 엄숙한 말씀이 떨어지니 육진개척을 반대했더 ㄴ무리들은 걸굴빛이
누르락푸르락 변하면서 진땀이 등골로 흘렀다.
더구나 김종서는 막대한 국비를 소모하면서 오랑캐들과 결탁해서 딴마음을 먹고
있는 역적이니 잡아다가 목을 베어 죽이자던 대관이니 언관이니 하는, 글치레나 하는
잔졸한 무리들은 코를 땅에 박고 입이 뻣뻣해서 한 마디 말을 못하고 바람기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전하는 다시 무능하고 못난 무사주의와 안일만 취하는 군신들을 둘러보시며 또 한
번 장중하게 말씀을 내린다.
"경들은 고려 때 윤관 장군이 바로 이 두만강밖에 구성을 쌓은 큰 공을 잊어버리고
도로 글안한테 땅을 내주었던 일을 가슴 깊이 명기해서 절대로 전철을 밟아서는
아니된다. 고구려의 요동 옛터를 찾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압록강과 두만강 이내의
현재 우리 국경은 촌토라도 빼앗겨서는 아니된다. 경들의 자손이나 내 자손은
자손만대까지 이 땅을 지켜야 한다. 그러한 기백이 없다면 이것은 모두 다 국가를
보필하는 경들이 나라를, 이 나라를 결딴내는 용렬한 무리들이다. 그대들은 국록을
공연히 먹어서는 결코 아니된다. 자손만대의 죄인이 되지 말라."
옥음을 가다듬어 군신들을 향하여 말씀하는 전하의 온몸에 열기가 드높게 올랐다.
군신들은 숙연히 고개를 숙이고 전하의 불을 토하는 듯한 열렬한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섰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세상에 난신적자라는 것이 따로 있지 않다. 임금을 시해해서, 정권을 뺏는 것만이
난신적자가 아니다. 그것은 성즉군왕이요 패즉역적이 되어서, 성공이 되면 인군이
되고 패하면 역적이 되는 것이지만, 제 나라 땅과 제 나라 강산을 못지켜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인군과 신하는 진실로 국가와 겨레의 난신적자다. 알아듣겠느냐?
임금은 국민의 추앙을 받아서 통치하는 권한을 잡고 있다. 임금을 보필하는 신하들은
백성들의 노력으로 생산된 세를 받아서 일하는 대가로 국록을 먹고 산다. 백성을
위하여 잘살게 해달라고 백성들은 땀흘려 일한 곡식과 물건으로 세를 바쳐서 벼슬하는
사람들에게 녹을 주는 것이다. 왜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려 가면서도 나라에 세를
바쳐서 벼슬하는 사람들이 녹을 먹게 하는가? 자기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고
앞으로도 세상을 편안케 해주고 가멸케 해서 잘살게 해달라고 세를 바치는 것이다.
벼슬하는 사람들이 받아먹는 국록은 임금인 내가 그대들에게 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임금인 내가 무슨 재물이 있겠는가? 장사를 하니 돈이 있겠는가? 농사를 지어 곡식이
있겠는가? 국민들의 세를 받아서 나라의 행정을 잘 보아 달라고 수고하는 대가로
국민을 대신해서 그대들에게 전달하는 것뿐이다. 정치르 ㄹ하느라고 장사를 할 수
없으니 처자식을 먹여가면서 더욱 잘 일을 보아 달라고 권하는 것이요, 백성들을
위하여 나라일을 전심으로 하게 되니 농사를 지을 틈이 또한 없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경들에게 세를 보내서 녹을 먹게 하는 것이다. 경들이 백성들보다 인품이 잘나서 거저
먹고 호강을 하라고 녹을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국록을 먹는 공경대부들
벼슬하는 사람들이 백성을 천대하고 백성을 멸시하면서 나라 땅 하나 똑똑히 지키지
못한다면 난신적자다. 남이 죽도록 노력해서 국방을 튼튼히 하고 불모지를 개척해서
옥토로 만든 이 마당에 조정에 편안히 앉아서 가장 나라를 위하는 체하고, 일하는
사람을 중상하고 모략해서 국토 수천 리를 오랑캐의 소굴로 되게 하고, 강대한 나라의
정령토가 되게 한다는 것은 진실로 한심하고 딱한 일이다... 일찍이 이 크나큰 일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깊이 반성하고 뉘우쳐서 쓸데없는 탁상공론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거듭 말하거니와, 내가 공을 세우기 위하여 육진개척을 한 것이 아니라 한
치만한 땅이라도 자손만대 백성들의 행복을 위하여 단행한 것이다!"
전하의 심경을 토로하시는, 국가를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광대무변한 말씀은
진실로 제왕의 철리와 벼슬하는 신하의 도리를 투철하게 판단해서 교시하시는 민본
사상을 가진 성주의 말씀이었다.
언언구구 서민을 아끼고 사랑하는 성주의 말씀이었다.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최윤덕들 국가 최고의 삼정승은 모두 다
일대의 명재상이요, 육진개척을 찬성한 사람이지만 '일 아니하고 국록을 먹는 자는
난신적자다'라는 준엄한 말에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전하는 다시 한 말씀을 더 내린다.
"다시 말하거나와, 나는 육진개척하는 일을 반대했던 사람을 책망하지 아니한다. 또
중간에 일을 폐지하라고 간하던 사람도 더 꾸짖지 아니한다. 김종서를 역적으로 몰던
사람도 꾸짖지 아니한다. 역시 그들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간한 것이다. 그러나
목전의 작은 이해관계만 생각하고 앞으로 나라의 크게 발전될 일을 생각하지 못한
때문이다. 다 반대했던 일을 잊어버리기로 하자! 다만 내가 경들에게 부탁할 것은
과인이 임금의 자리를 버리고 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서북면과 동북면,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은 굳게 지켜서 우리 겨레 자손만대에 훌륭한 터전이 되게 하라. 또다시
부탁한다. 바다 밖의 대마도도 소홀히 생각하지 말라. 한 치의 땅이라도 남의
족속에게 빼앗겨서는 아니된다!"
전하의 말씀은 엄숙하면서도 부드럽고, 화기 가득한 속에 강철보다도 단단한 결심이
있었다.
영의정 황희가 군신을 대표하여 아뢴다.
"전하의 철석같이 굳으신 결의는 장차 이 나라 백성들에게 크나큰 복을 주실
것입니다. 신의 무리 미욱하오나 성주를 모시어 서민들을 편안케 하옵고 성스럽게
이룩하신 육진을 굳게 지켜서 자손만대에 전하겠습니다."
전하는 황정승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용안에 만족한 빛을 띠셨다.
다시 한 말씀을 내린다.
"임금이란 자는 백성들의 추앙을 받아서 질서 있게 국가를 통솔하면서 나라를
발전시키고, 백성들을 아들같이 생각하고 사랑해서 그들의 생활을 자꾸자꾸
향상시켜주어야 할 책임자다. 백성의 세금으로 호화로운 궁궐을 짓고 삼천궁녀를
거느려서 주지육림 속에 빠져서 갖은 행락을 다하는 것이 임금의 일이 아니다!
공경대부도 그렇다. 열두 줄행랑이 늘어서 있는 솟을내문 안에 남종 여종을 수십명씩
거느려 놓고, 남녀, 초헌을 타고 벽제 소리를 드높게 질러 백성들을 구박하고
호통치는 것만이 관리들의 일이 아니다. 옛글에 백성들을 적자라 했다. 빨가숭이
어린애를 기르듯 보호해주고 사랑해주고 교육시켜주라는 뜻이다. 모든 백관들은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백성들을 위해서 정성을 다하여 지성껏 일을 해줘라. 이것이
임금의 책무요, 벼슬하는 사람들의 임무다. 한 가지 일을 해도 이 나라 백성을 위하여
일을 해야 하고, 두 가지 일을 해도 이 국가에 생활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일을 해야
한다. 만약 이 자리에 모인 한 사람이라도 백성을 위해서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호강을 하기 위해서 벼슬길에 나온 사람이 있다면 당장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라!"
전하의 옥음은 또렷하고 엄숙했다.
세종전하가 이같이 영의정 이하 군신들을 편전 안에 불러놓고 치국의 대도를
순순하게 긴 시간 말씀하시는 일은 즉위 이래 이번이 처음이다. 육진개척을 완성하신
후에 국가의 질서와 포부를 선포하시는 것이다.
전하는 용안을 부드럽게 해서 다시 말씀을 내린다.
"경들은 소년시절부터 글을 많이 읽고 배웠다. 글을 잘 배워서 과거에 뽑히기를
원했다. 과거에 뽑혀서 나라의 동량의 재목이 되기를 원했다. 동량이란 무엇인가?
크나큰 집의 대들보와 기둥이다. 서까래나 도리나 화방이나 창틀조각이 되지 아니하고
대들보와 기둥이 되기를 원한 것은, 국가라는 크나큰 집을 흔들리지 않도록 버티고
유지하자는 큰 목적을 갖는 때문이다. 국가라는 것은 무엇인가? 백만, 천만의
백성들이 모이고 모여서 나라, 곧 국가라는 큰 집에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대들보와 기둥은 이 수많은 백성들을 받들어주고 살게 해주고 즐겁게 해주고 복되게
해주는 소임을 맡은, 크고 중대한 책임을 맡은 재목이다. 경들은 넓게 배우고 많이
읽어서 나라에 벼슬을 해서 이 백성들을 복되게 할 생각으로 과거에 뽑혀서 벼슬을
했다. 그러나 한 번 버슬 자리를 얻은 후에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화려한
금관조복을 입고 옥퍄를 술띠에 늘이며 의젓하게 갈짓자 걸음으로 날마다 조당에
모여들어 곤두가래침을 뱉고 탁상공론만 하고 앉았다. 이것이 소위 동량의
재목들인가?"
전하는 초롱초롱한 안광으로 만좌를 둘러본다.
모두들 벌벌 떨며 코를 땅에 박고 엎드렸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나는 글 잘 하는 신하들을 뽑아서 집현전을 설치했다. 모두 다 훌륭한 준재들이다.
글들을 잘 짓는다. 풍월도 잘 짓고 경학 해설도 잘 한다. 한 곳 나무랄 데 없다.
그러나 말이다. 글만 유려창달하게 지어서 무슨 국가의 동량이 되겠는가. 상량문을 잘
지어가지고 들보 속에 넣었다 한들 그 들보가 국가의 위급한 일과 백성들을 위하여
글을 지어야 한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문명의 길로 끌고 나가게 하는 글을 지어야
한다! 백성들이 잘 살도록 농사짓는 법을 글로 밝혀야 한다. 백성들의 아프고
괴로워하는 병을 다스리게 하는 책도 저술해야 한다. 이것이 경들이 동량의 재목이
되어서 출장입상하는 길이다. 말로만, 또는 글자치레로 동량의 재목이 되었다고
뽐내지 말라! 실지로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동량의 재목들이 되어야 한다!"
전하의 물 흐르듯 군왕의 포부와 신하들의 책무를 말씀하는 훈훈한 훈시는 원로대신
이하 젊은 문신들의 폐부를 꼭꼭 찔렀다.
모두 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아 주옥 같은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다.
원래 소년시절부터 모든 경학과 제자백가의 저술이며 천문지리, 예약, 병서에
이르도록 달통한 세종이었다. 소위 경륜과 학문이 섬부하다는 노사숙유의 경연관들도
꼼짝을 못하고 전하의 정치철학을 경청하고 있었다.
전하는 육진개척에 대한 유시를 마치시자 도승지를 앞에 불러놓고 삼정승한테
하문한다.
"오늘 백관들은 육진개척을 단행한 나의 심경을 이제 다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육진을 설치해놓고 계속해서 다스리지 못한다면 또다시 황무한 땅이 되어버린다.
이곳을 잘 육성하고 보존하자면 오랑캐들을 굴복시킬 만한 훌륭한 장수와, 덕과
교화로 백성을 무마할 어진 재상이 필요하다. 과인의 욕심대로 한다면 하경복과
김종서에게 더 일을 보아달라고 하겠으나 십년 가까운 세월에 또다시 일을 보아
달라기 너무나 염치가 없다. 노재상 황보인으로 함길도 감사에 도체찰사를 명하고,
현임 영북진 절제사 이징옥으로 도절제사를 삼으려 한다. 경들의 의향이 어떠한가?"
황보인은 영천 사람으로 지중추원사 황보임의 아들이다.
태종 갑오에 문과친시에 급제하여 군기에 밝은 중진이요, 이징옥은 청년 절제사로
일찍이 김종서를 도와서 호담무쌍한 용맹스런 행동으로 명성이 동북면과 서북면에
떨쳐서 야인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크나큰 인물이었다.
누구 한 사람 감히 반대할 사람이 없었다.
영의정 황희가 군신을 대표하여 아뢴다.
"황보인은 군기에 밝고 경험이 많은 재상이옵고, 이징옥은 김종서와 함께 직접
육진을 개척한 사람이올시다. 비록 나이 연소하다 하오나 넉넉히 맡은 바 임무를 다할
것입니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세종전하는 단 한 사람의 벼슬 자리를 임명할 때라도 반드시 대신들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하고 절대로 독단하는 일이 없었다.
세종은 점두하시며 말씀을 내린다.
"영상이 모든 신하를 대표하여 좋다고 말하니 이 자리에서 곧 두 사람에게 대임을
맡기리라."
말씀을 마치자 옆에 시립한 도승지에게 분부한다.
"정원에 나가 곧 두사람의 교지를 써 올리라."
도승지는 급히 정원으로 나가 함길도 도체찰사와 도절제사의 교지를 받들고
들어왔다.
전하는 친히 교지를 황보인에게 전하시며 부탁하시는 말씀을 내린다.
"경의 너그럽고 후한 덕망은 온 조정과 백성들이 다 아는 바다. 일기 고르지 못한
변지에 나이 많은 경을 보내는 내 마음, 미안하다. 그러나 국가와 국민의 천년대계를
생각해서 내 몸을 대신해서 도체찰사의 임무를 맡기는 것이니 사양치 말고 받아라."
노재상 황보인은 네 번 절하고 교지를 받들며 아뢴다.
"이미 김종서와 하경복이 개척해논 곳이올시다. 소신이 어찌 감히 전하의 뜻을
받들지 아니하오리까. 정성을 다하여 뒷일을 처리하오리다."
전하는 다시 이징옥에게 도절제사의 교지를 내리시며 분부하신다.
"네가 아니면 또다시 준동하는 오랑캐들을 막을 사람이 없다. 잘 지키도록 하라!"
이징옥은 감격한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네 번 절하고 교지를 받들었다.
전하는 호아보인과 이징옥에게 육진을 관리하는 큰 임무를 맡기신 후에 다시 영의정
황희 이하 군신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임금된 사람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하지면 잘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야
하고 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어야 한다. 이것은 임금 자신에게 개인으로 상과 벌을
주는 것이 이낟. 국민을 대표해서 상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해
방자한 행동으로 서해안 일대를 침범했던 대마도를 응징해서 항복을 받았을 때
도절제사 이종무에게 좌찬성에 보국의 영예를 주었고, 지난번 서북면에 사군을
설치하고 멀리 파저강 건너 이만주의 소굴을 응징한 공로로 최윤덕에게 중의를 물어
우의정의 대배를 받게 했다. 이것이 이른바 논공행상이다. 그러나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군왕이라는 내 개인이 결코 사사로이 주는 상이 아니다. 국가의 큰일을 잘
해주었다고 국민들이 주는상이요, 잘못했으면 벌을 주는 것이다. 일전에 김종서가
자모상을 당해서 소울로 분상한 동안 주색에 침혹해서 쳐들어오는 오랑캐를 막아내지
못한 송희미는 이미 죽음을 내렸거니와, 십 년 동안 긴 세월에 육진을 개척한 몇몇
사람에게는 논공행상을 해서 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군신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좌의정 맹사성이 아뢴다.
"육진을 개척해서 고려조 이래에 잃어버렸던 땅을 찾고, 황폐했던 오랑캐의 소굴에
이민을 해서 옥야천리로 만든 일은 대마도를 정벌한 일에 비할 바가 아니옵니다.
외람되온 말씀이오나 도체찰사 하경복에게는 사궤장을 하기고, 김종서에게는 대마도를
평정했던 이종무의 전례에 따라 좌찬성을 제수하시고, 종사관 신숙주는 집현전
부제학을 시키시고, 종사관 박호문은 사군설치와 육진개척에 다 공이 큰
사람이올시다. 호조판서로 발탁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전하는 조의정 맹사성의 아뢰는 말씀을 들으시자 마음이 심히 흡족하셨다. 미소를
지어 고개를 끄덕이신다.
이때, 침묵을 지키고 대답이 없던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좌의정 맹사성의 논공행상을 해서 처분을 묻자와 아뢰는 말이 다사리에
적합합니다. 그러하오나 소신은 소희 있사와 감히 이론을 주달합니다. 굽어 살피시기
바라옵니다."
인망 높은 영의정 황희의 말이었다. 전하는 미소를 던지시며 하문한다.
"무슨 이론이 있는가?"
"김종서는 본시 소신이 천거한 사람이올시다. 지위가 높게 될 수록 소신의 마음도
좋습니다. 하오나 좌찬성의 자리는 너무나 과합니다. 곧 정승으로 올라갈 자리올시다.
아직 연부역강해서 한창 일할 때올시다. 국가에 대하여 공을 이룬 일은 당연합니다.
벌써 재상의 지위를 준다면 교만 방자한 생각이 듭니다. 김종서에게 좌찬성의 자리를
주는 일을 반대합니다."
황희 황정승이 김종서에게 좌찬성을 주는 것을 반대하는 말씀을 아뢰자,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최윤덕 이하 모든 신하들의 얼굴빛은 깜짝 놀라 당황하는 빛을 띠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모두들 마음 속으로,
'웬일인가?'
'변괴로다!'
'자기가 소시 때부터 천거한 사람을 저같이 박대할 수가 있는가?'
'황정승도 나이 먹더니 망령이 났구나!'
하고들 생각했다.
면면이 전하의 용안과 김종서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러나 얼굴빛이 변하지 아니한 사람은 오직 세종전하와 말씀을 아뢴 황정승과 폄을
당한 당사자 김종서뿐이었다.
김종서는 태연히 두 손길을 마주잡고 전하의 측근에서 시립해 있다.
세종전하는 잠시 눈을 감아, 무엇을 생각하셨는가 이내 눈을 뜨시고 용안에 미소를
지으시며, 황정승을 향하여 말씀한다.
"김종서 이외에 다른 사람들의 일은 어떠하다 생각하는가?"
"김종서만 빼놓고 맹정승이 아뢴 대로 다 좋다고 소신도 생각합니다."
황희 황정승의 말씀은 장중했다. 천 근의 무게가 있는 듯했다. 일국의 대임을 한
몸에 도맡은 영의정다운 진중한 태도다.
김종서는 부드러운 화한 얼굴빛으로 어전에 여전히 시립해 있다.
전하는 다시 미소를 지어 황정승에게 물어보신다.
"논공행상은 기필코 해야 한다. 그렇다면 김종서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좋겠는가?"
전하의 옥음은 화기가 가득했다. 제왕의 자리에 앉았다고 항명하는 대신의 말에
대하여 털끝만큼도 불쾌한 생각을 갖지 아니했다. 용안에는 그대로 봄바람이 훈훈하게
일었다.
믿는 때문이다. 신하를 믿는 때문이다. 대신을 존경하는 때문이다.
"김종서에게는 아직 재상자리가 이름니다. 정경 자리인 병조판서쯤 맡기시는 일이
좋을 듯합니다. 되지 않게 재상이라고 뽐내는 한가한 벼슬 좌찬성보다도 국가의
국방을 맡는 병조판서의 직책을 맡기시옵소서. 젊은 사람은 뼛골이 빠지도록 국가를
위하여 일을 해야만 합니다. 공연히 재상이 되었다고 교만 방자한 마음을 먹으면
아니됩니다. 황공하오나 다시 전하께 아뢰옵니다. 옥은 갈수록 빛이 납니다. 지금
반둥전둥, 사람이 될둥 말둥한 김종서 따위를 재상의 자리에 앉히신다면 김종서도
반둥전둥의 인물이 되어버리고 국가에도 큰 손실이라 생각하옵니다. 명철하오신
처분을 내리시기 바라옵니다."
모든 사람들은 혀를 둘렀다. 비로소 황정승이 진심으로 김종서의 앞길을 위해주고,
공으로는 국가를 위하여 참다운 동량의 재목을 완성시키게 하려는 영의정다운 재상의
태도로 전하께 아뢰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세종전하는 황희 황정승의 재상다운 장중한 말씀을 듣자 용안에 가득 기쁜 빛을
띠시고 말씀한다.
"영의정의 말은 과연 나라를 위하고 후배를 아끼는 지성스런 말이다. 내 어찌
영상의 말을 아니 들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김종서에게 병조판서의 임무를
맡기리라."
좌의정 맹사성이 아뢴다.
"처음에 소신은 김종서의 큰 공적을 감안하와 좌찬성으로 승직시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제 영상의 말씀을 들으니 진실로 후배를 아끼는 지극한 마음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아뢰었던 좌찬성 추천을 유보하겠습니다."
우의정 최윤덕이 아뢴다.
"김종서는 지위의 낮고 높은 것을 가려서 불만을 품을 사람이 아니올시다. 일편단심
나라만을 생각하는 호담무쌍한 인물이올시다. 김종서는 비록 문과 출신이라 하나 문무
겸전하여 지략이 대단한 사람이올시다. 더구나 병조는 전략과 지리에 밝고 통솔력이
있는 사람이라야 능히 전하를 보필할 수 있는 자리올시다. 김종서는 병조를 통솔할
적임자올시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이시고 승지한테 분부한다.
"함길도 도체찰사와 도절제사의 교지는 황보인과 이징옥에게 이미 넘겨주었거니와,
김종서 이하 신숙주, 박호문의 교지를 빨리 작성해서 올려라."
승지는 정원으로 달려가 주서들을 동원시켜 김종서 이하 종사관 신숙주, 박호문
등의 교지를 써서 받들고 들어왔다.
전하는 먼저 김종서에게 병조판서의 교지를 내리시며 다시 분부를 주신다.
"병조판서의 책임은 육진을 개척한 힘보다도 더한층 크다. 군적을 엄밀하게
정리해서 백 년, 오십 년 전에 죽은 군인들의 이름을 제거시키고, 새로 군사들을
모집해서 명단을 똑똑히 삽입시키게 하라. 그리고 바다를 막는 해방 또한
엉망진창이다. 범연히 처리해서느 ㄴ아니된다. 백 년, 이백 년 전에 조성했던 배다.
대부분 썩어서 물이 새고 곰팡이가 났다. 각별히 주의해서 해방을 일신케 하라!"
모든 신하들은 국방의 선박에 대해서도 전하께서 주도하고 면밀하게 손살피같이
알고 계신 데 대해서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모두 다 마음속으로 '명철하신 성주를
모시었구나'하고 새삼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김종서는 일어나 사배하고 교지를 받들었다.
김종서는 전하께 교지를 받은 후에 영의정 황희한테 나아가 두 번 절하고 감격한
눈물을 흘렸다.
"성상전하를 모신 앞에 다시 아까시는 은혜는 폐부 속에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한편 전하는 계속해서 종사관 신숙주에게 집현전 부제학의 교지를, 박호문에게는
호조판서의 교지를 내렸다. 모두 다 일대의 영광이었다.
화기애애한 속에 육진개척의 논공행상의 큰일은 끝이 났다.
육진을 개척한 이 위대한 사업은 세종 일대의 큰 사업만이 아니다.
조선 왕조 역대 5백여 년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한제국 광무, 융희에 이르기까지
두만강과 압록강, 함경도와 평안도 수천 리 땅은 천부금탕을 이루었다.
자자손손, 세종성주의 용단성 있는 명철한 계획으로 만백성의 문화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세종 자신이 하신 말씀 그대로 이 육진개척의 큰 사업은 김종서가 아니었다면
이룩될 수 없었고, 김종서가 아무리 우겨대서 개척을 하자고 주장했다 해도 세종의
용단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이룩되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세종의 성스런 정치 사업이 하도 엄청나도록 많지만, 삼천리 강산의 나라
땅을 든든하게 정계해논 이 사업은 오백여 년동안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자리잡고
사는 만백성들의 생활을 편한하게 했고 가멸케 해서 국가의 위신을 크게 떨쳐서
경제와 문화를 향상시키고 민생의 생활을 번영케 했던 것이다.
오늘날 다시 세종의 사업을 돌이켜 생각해볼 때 왕조 오백 년 동안에 세종 같은
제왕은 한 사람도 없었다.
김종서가 상소한 그대로 한 대의 화살과 한 자루의 칼을 쓰지 아니하고 삭풍설한에
수자리하는 군사들과 이민온 백성들이 성을 쌓고 땅을 개간해서 무한한 고생들을
했으나, 가장 평화로운 속에서 한 진 두 진씩 여섯 진을 이룩한 것은 실로 세종대왕의
넓고 큰 덕화로 쌓여진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실로 세종대왕은 불세출의 성주요, 온 겨레의 지도자다.
왕조 오백 년 이후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어리석은 황제와 난신적자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나라를 실국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뜨려서 삼십육 년의 세월을 외인의
식민지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세종전하가 정해논 삼천리 강산은 의연히 강산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들 외인들의 이권을 찾아 활약하는 무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금광이
터져나오고 철광이 쏟아졌다. 무진장의 석탄의 보고가 열렸다. 무진장의 수력 전기가
불야성을 이룩했다. 슬픈 일이다.
그러나 하늘 운수가 다시 돌아서 세종전하의 정계해논 삼천리 성지에 다시 복지와
광명이 있을 줄 알았더니, 뜻밖에 또다시 슬픈 일이 벌어졌다. 우리 겨레 5천만은 다
함께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삼천리 강산은 반 동강으로 허리가 잘려졌다.
겨레는 쪼개어지고 부모처자와 형제자매는 흩어져서 형상 없는 38선은 한탄의 고개와
절망의 고개를 이루면서 광복 3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스러운 일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룩된 외세의 흑책질이다!
우리는 오백여 년 전에 명철한 지도자 세종대왕이 개척했던 육진과 사군을 다시
찾아내야 할 것이다.
한 겨레가 다시 모여서 평화로운 낙토를 이룩해야 하겠다. 지하에 계신 세종대왕의
영혼이 있다면 상을 치고 발을 굴러 호통을 하실 것이다.
김종서와 이징옥이 지금 세태를 당했다면 범 때려잡던 솜씨로 오랑캐된 자들을
무찔렀을 것이다.
세종전하는 육진개척의 논공행상을 마친 후에 다음날, 도승지를 통해서 영의정
황희와 예조판서에게 입시를 명했다.
두 신하는 급한 부름을 받고 시각을 지체치 않고 예궐하여 어전에 알현했다.
전하는 만면에 희색을 띠고 영상과 예판에게 말씀을 내린다.
"지난해 대마도르 ㄹ정벌해서 왜추의 소굴을 응장하여 쾌한 승리를 얻어 국위를
선양한 후에 곧 종묘에 봉고제를 올리고 사직에도 개선제를 지낸 일이 있다. 이번에
사군을 설치하여 서북면 평안도 일대에 노략질하는 건주위를 소탕하고, 동북면 함길도
일대 천여 리 땅에 육진을 개척해서 선조의 발상지지를 수호했을 뿐 아니라, 남도에서
이민을 옮겨서 불보의 땅을 옥야로 이룩한 일은 대마도를 소탕한 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과인의 생각에는 종묘에 크게 봉고제를 올리고 사직에도 모든 신위에 대하여
국가의 큰 경사를 고유할 생각이다. 경들의 의사는 어떠한가?"
황정승이 아뢴다.
"어제 논공행상이 끝난 후에 신의 소견에도 그러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고려 이후에
버렸던 땅 수천리를 금성철벽과 옥야천리로 화하게 한 일은 일찍이 역대왕조에 없었던
일이올시다. 종묘에 봉고하여 선대왕 신위에 고하는 일도 당연한 일이올시다마는,
크게 사직대제를 지내서 만백성과 함께 이 기쁨을 알리게 하는 일은 민심과 사기를
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될까 합니다. 그러하옵고 또 한가지 영의정의 자격으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이번 일은 역대에 일찍이 없었던 국가의 크나큰 경사올시다. 팔도
감사와 한성판윤이며, 형조판서와 의금부 당상들에게 영을 내리시어 옥문을 크게
열어, 모든 죄수들을 석방해주시는 대사령을 내리시어 국가의 큰 경사를 함께
즐기도록 하시는 일이 좋을 듯하와 감히 아뢰옵니다."
천하의 죄수들을 석방하여 나라의 큰 경사를 백성들과 함께 즐기겠다는 황정승의
의견을 들으시자, 전하는 미처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용안이 활짝 화사하게
열려지며 쾌하게 말씀을 내린다.
"대사령을 내리겠다는 생각은 과인도 미처 생각을 못했던 바요. 이제 영상의 말을
들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대재상의 뜻을 비로소 알겠소. 그렇다면 모든 관계되는
장관들에게 곧 입시를 명하오."
전하의 기쁨은 전신에 넘쳐 흘렀다.
영의정 황희는 곧 어전에서 승지에게 소관 장관들의 입시를 분별했다.
정원에서는 어명이므로 대전별감들을 동원시켜서 관계 분야의 장관들을 급히
입시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대전별감들의 홍의 자락은 각부 장관의 처소로 펼럭이며 기세를 올렸다.
종묘와 사직대제
먼저 좌, 우의정이 들어오고 형조판서가 예궐했다. 금부 당상 판의금이 입궐했다.
전하는 군신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지금, 영의정과 예조판서와 의논했다. 육진을 개척한 일은 나라의 큰 경사다. 먼저
내가 친히 종묘와 사직에 봉고제를 올려 국가의 큰 경사를 열성조에 아뢰고, 만백성과
함께 사직단에 대제를 지내야 하겠다. 나 자신뿐 아니라 백대의 후손들이 한 치의
땅도 남에게 뺏겨서는 아니된다는 굳센 정신과 강한 의지를 갖도록 하자는 것이다.
예조판서는 내 뜻을 받아서 종묘 친제의 사직대제를 곧 택일하여 거행케 하라. 다음에
형조판서와 판의금에게 당부한다. 고려 예종 이후 반천년 만에 국토통일을 이룩한 큰
경사다. 소위 군왕이란 자가 아들 하나 낳아도 경사가 났다고 죄수들을 풀어주는데,
황차 이제는 우리가 뚜렷하게 삼천리 강산을 지니게 되었다.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형조판서와 판의금은 대사령을 놓아 극악죄인이라도 개전의 희망이 있는 자는 모두 다
석방을 시켜서 청천백일 아래 새로운 국민이 되게 하라. 국가를 다스리는 치민하는
정치는, 엄할 때는 가을 서리와 같이 싸늘해야 하고 화하게 할 때는 봄바람이 불 듯
훈훈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모든 신하들이 일제히 대답한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여러 신하들은 부복해 대답했다.
"특별히 대제를 성대하게 거행하게 하라."
평소에 궁중에서 검소하고 절제 있는 근검한 풍속을 실천하던 전하가, 이번에
한해서는 특별히 성대하게 거행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전하는 또 승지에게 분부한다.
"내가 종묘대제를 봉행할 때는 백관을 대동하고 지내려니와, 사직대제를 지낼 때는
만백성이 다 함께 의식에 참여하여 정신적으로 통일된 이 나라 땅을 더욱더 굳게
지켜야 하겠다는 확고한 뜻을 갖도록 해야 하겠다. 금잡인을 하지 말고 크게 사직
대문을 열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승지를 위시하여 예조와 형조와 판의금들은 일제히 명을 받들었다.
형조판소와 판의금은 퇴궐한 후에 정원을 통하여 대사령을 내렸다. 오 년, 육 년
내지는 십 년, 이십 년의 옥중 생활을 계속하던 죄수들은 진실로 꿈밖이었다. 더구나
출옥하게 되는 남편과 자식을 맞이하게 되는 가족들은 하늘판큼이나 넓고 크게
기뻤다.
죄수들은 출옥이 된 후에 비로소 육진개척으로 인하여 대사령이 내린 줄 알았다.
세종의 위대한 큰 힘을 비로소 알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서민들은 이 소문을
듣고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에 웃음을 가득히 띠고 전하를 칭송하는 소리가 높았다.
"우리 임금은 동방의 요순이실세!"
"요순은 우리가 보지를 못했으니 말만 들었지 알 도리가 없지만, 진짜 우리 상감은
불세출의 성주라 생각하네."
존경하는 소리가 높았다.
종묘와 사직에 육진을 개척했다는 전하의 봉고제는 명에 의하여 곧 거행이 되었다.
예관들은 오례의알종묘 의식에 준하여 모든 절차를 차렸다.
세종전하는 특별히 왕비 심씨의 내조한 숙덕을 지극하게 생각하셨다. 이번
종묘알현에 왕세자와 함께 전배할 것을 하교했다. 그러나 겸손한 심왕후는 사양하는
말씀을 옹용한 태도로 전하께 아뢰었다.
"보통 봉고제로 열성조께 고하시는 일도 아니옵고 국가의 큰 사업을 성취하신 일을
봉고하시는 제례에 외람되이 신첩이 전하를 배종하여 참사한다는 일은 방자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삼가 성지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조용조용 화기 가득한 나직한 말씀으로 아뢰었다.
전하는 껄껄 웃으시며 비전하께 말씀을 보낸다.
"나와 비마마는 일심동체가 아닌가. 비마마의 내조가 아니었던들 어찌 이러한 큰
사업을 완성했겠소. 정궁에 계신 비마마가 이번 봉고제에 배알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두말 말고 출어하도록 하시오."
전하는 사양하는 어진 후비의 태도가 마음에 더욱 흐뭇했다. 만면에 미소를 지니며
말씀을 했다.
비전하는 또 한 번 부드러운 화음으로 조신에게 아뢴다.
"아무리 몸이 중궁에 처했다 하나 궁규에 깊이 처해 있는 아녀자올시다. 하교를
거두어주시옵소서."
전하는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과인의 개인의 마음으로 비전하께 동참하자는 것이 아니외다. 이것은 오례의에
뚜렷하게 규범을 정해놓은 글발이 있고 대신과 유사들이 다 권하는 일이니, 아무리
겸손한 미덕을 가지신 비마마라 하나 어찌하는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두말 말고 모든
채비를 차리도록 하시오."
만면에 웃음을 지녔던 용안은 어느 결에 엄숙한 빛으로 변했다.
비전하는 다시 더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오례의 예법에 있다 하옵고 유사들이 이미 절차를 정했다 하니 어찌하는 도리가
없습니다. 삼가 상감의 분부에 따르오리다."
비전하는 대례복 의상으로 바꾸기 위하여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전하는 다시 화색을 용안에 띠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비전하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씀을 던진다.
"내 비록 비마마를 존경하고 사랑해서 내 마음대로 예문에 없는 일을 함부로
주장했다면 단박 간관들이 들고 일어날 텐데, 내 어찌 그러한 일을 하겠소.
안심하시고 상궁들을 시켜서 의상을 고치시오. 내 역시 대례복으로 바꾸어 입어야
하겠소이다."
비전하도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신첩이 빨리 옷을 고친 후에 전하의 면복을 받드오리다."
전하와 왕비의 의초는 이같이 화락했다.
세종전하는 상왕 태종 때 국구 심부원군이 까닭 없이 간신의 참소로 비명횡사를
당한 후에도 비전하는 상왕에 대하여 일호의 원망하는 사색을 나타내지 아니하여 항상
왕실의 파탄을 일으키지 않도록 했을 뿐 아니라, 비빈과 후궁을 법도 있게 거느려
화기가 가득했으므로 그 차원 높은 아름다운 인품에 항상 감동이 되어 오늘날까지
사랑의 은정이 청산처럼 푸르고 벽해처럼 깊었던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형태란 겉으로 형상이 없다. 그러나 길고 긴 푸른 강물에 따
흐르는 물과 배와 같았다.
장강이 흘러가듯 사랑은 물결을 따라 굽이치며 흘러간다. 삿대도 없이, 돛대를 달지
아니했건만 심왕후의왕께 향한 사랑은 일엽편주가 되어 세종이라는 분의 사랑의
물결을 따라 임자류를 했다.
종묘 제향에 참여하기를 사양했던 심왕후는. 오례의의 예문을 들어 순순하게
타이르는 전하의 말씀에 조용히 미소를 짓고 내전으로 건너가 궁녀들에게 분부하여
예복을 입었다.
왕후의 대례복인 낭자 족두리에 적의를 입은 심왕후는 내전으로 건너가 시녀들과
함께 전하의 곤룡포와 면류관을 받들어 올렸다.
전하는 흐뭇했다.
백합꽃인 양 청조한 옥안에 팔보 구슬로 장식한 족두리를 쓰고, 금사로 수를 놓은
황홀한 찬란한 적의를 입고 서 있는 심왕후의 모습은 선녀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더 한결 젊어 뵈고 더한층 고와 보였다.
존엄한 지존이건만 한 번 농담을 걸어본다.
"아니 가시겠다고 앙탈을 하시더니 부지런도 하시오. 참배하자고 졸라대던
과인보다도 더 빨리 예복을 차리셨구려!"
비전하는 미소를 머금고 대답한다.
"대명을 거역할 도리가 있습니까? 더구나 상감마마의 의대를 받드는 일은 신첩의
도리올시다. 만약 지체해서 신첩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면 전하께 벌을 받아야
합니다. 어찌 도리를 지키지 아니하오리까. 그리하와 일찍 몸단장을 했습니다."
미소를 짓고 나직나직 말씀을 아뢰는 심왕후의 엷은 홍순 사이엔 옥 같은 덧니가
반짝 광채를 뿜는다.
전하는 한 마디 농담을 걸었다가 도리어 한 대를 얻어맞은 셈이 되었다.
전하는 껄껄 웃으며 다시 한 번 말씀을 내린다.
"과인이 비마마께 농담을 걸었다가 도리어 주먹맞은 감투 격이 되었소이다.
하하하... 비마마도 왕비 노릇 십 년에 말주변이 매우 늘었구려. 확실히 과인이
비마마한테 졌소이다. 하하하하하!"
두 분 전하의 정의는 이같이 청산과 녹수 같았다.
비전하는 더 말씀도 대답도 올리지 아니했다. 이것이 우리 나라 여성의 높은
미덕이다. 손수 곤룡포 받침 청포를 입혀드리고, 다음엔 곤룡포를 포 위에
덧입혀드렸다. 황금 실로 쌍룡을 수놓은 둥근 흉배를 앞뒤로 달아드리고 서각에
비취옥판을 박은 제왕의 띠를 둘러드렸다. 맨 나중에 인모 탕건 위에는 황금술을
앞뒤로 늘인 황홀 찬란한 면류관을 씌워드렸다.
밖에서는 무예청 시위들이 전하와 비전하의 타실 오색이 찬란한 황금 연을 대령하고
있었다.
이윽고 승전빛 내관이 두 분 전하 앞에 나타났다.
"종묘로 행차하실 자비가 대령된 지 오래옵니다. 출어하실 시각이 임박했사옵니다."
전하와 비전하는 옥좌에서 일어났다.
내관과 상궁들이 뒤를 따랐다. 전하와 비전하는 월대에 대령된 연위에 부액을 받고
올랐다.
전하의 연 옆에는 무예청 통장을 위시하여 별감들이 홍의 자락을 펄럭이며 옹위해
나가고, 비전하의 연에는 상궁 이하 모든 궁녀들이 흰저고리 남치마의 예장으로
전후좌우를 옹위했다.
두 채의 연은 높고 낮은 주란화각을 돌아 만간들이 푸른 잔디밭을 밟으며 물 흐르듯
광화문 삼문 밖으로 나갔다.
삼문 밖에는 왕세자저하(뒤에 문종이 될 분, 단종의 아버지)가 원유관에 강사포를
입고 옥교에서 내려 두 분 전하의 타신 연을 지영하고 있고, 그 뒤는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최윤덕을 위시하여 육조판서와 만조백관들이 몸을 굽혀 두 분
전하를 맞이했다.
이중에는 육진개척에 공이 큰 김종서, 하경복을 위시하여 신임 도체찰사 황보인과
도절제사 이징옥의 얼굴도 보이고, 종사관으로 애를 썼던 신임 집현전 부제학
신숙주와 신임 호조판서 박호문의 모습도 보였다.
어가는 엄숙하게 운종(종로) 거리를 거쳐 종묘 앞으로 백관의 배종으로 근감하게
나간다.
육진개척의 큰 위업을 열성조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 고유하기 위하여 전하와
비전하며 왕세자저하가 마조백관과 함께 종묘로 나간다 하니, 서울을 위히사여 부근
백리 안팎의 서민들은 근감하고 복스러운 거둥행차를 배관하기 위하여 인산인해의
사람물결을 이루었다.
구경하는 선비와 서민들은 행차를 바라보면서 제각기 찬탄하는 말을 한 마디씩
한다.
"인제 진짜 임금이 나셨네. 나라가 되는 판일세!"
"진짜 임금이고 말고. 밤낮 부자 형제가 임금 자리 싸움을 하느라고 나라와
백성들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살육지변만 냈으니, 어느 하가에 백성을 돌보고 나라를
부강하게 할 틈이 있었던가? 이제 우리들 서민들은 태평세월을 만나게 되었네."
"당저인 상감도 공부를 많이 해서 학식이 많은 영특한 분이지만, 큰아들이면서
세자의 자리를 일부러 헌 짚신짝 내던지듯하고 유유하게 평민이 되어 지내는
양녕대군도 무던한 인물야! 다 보통 사람들이 아니거든!"
"왕가나 사가나 집안이 되려면 그런 인물들이 나와야 하네. 어떻게 우리들한테도
경사스런 일일세."
거리거리 백성들은 전하와 양녕대군의 덕을 찬양하는 소리가 높았다.
전하와 비전하의 어가는 종묘 삼문 앞에 당도했다.
영녕전 사당을 모신 곳에는 임금이라도 연을 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두 분 전하는 연에서 내렸다. 간단한 옥교에 올라 전하는 동문으로 듭시고,
왕세자는 서문으로 들어서서 동협문으로 들어가 정해논 자리에 서 있었다.
전하는 면류관과 곤룡포를 바로한 후에 홀을 잡고 정문에 들어가 판위 앞에 나가
서향해서 네 번 절을 올리고 왕세자 이하 모든 백관들은 뜰 아래서 전하의 뒤를 따라
사배를 드렸다.
이때 풍악소리가 은은히 악공들의 반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하는 다시 동계로 오르고 왕세자도 뒤를 따랐다. 제일실을 위시하여 각실을
봉심한 후에 사당 남문으로 나와 보행으로 걸어서 영녕전에 당도했다. 경건히 사배를
드리고 육진개척의 고유를 드렸다.
이동안 승사, 시위, 백관들은 묘문 밖으로 물러나고, 비전하는 적의의 정장으로
정문에 올라 동향해 서고, 전하는 다시 나와 서향해 섰다. 왕비는 네 번 큰절을
올리고, 전하의 뒤를 따라 보행으로 다시 영녕전에 올라 사배를 드리고, 전번에
전하와 세자가 하듯 봉심을 하고 봉고제를 마친 후에 환궁을 했다.
전하는 왕비와 세자와 함께 환궁한 후에 이어 사직제단으로 향하여 육진개척을
고유하는 의식을 행했다.
사직에는 왕비는 참여하지 아니했고 세자와 백관들만이 배종했다.
전하의 어명에 따라 사직제에는 서울 장안에 있는 부로들을 모두 다 참석케 해서
나라의 발전을 크게 축복하게 했다.
아관박대로 차린 늙은 선비들을 위시하여 지게꾼, 엿장수, 등짐장수들까지 온
국민이 차별없이 전하께서 올리는 사직대제에 참례케 하는 영광을 주었다.
만백성들에게 한 치의 나라 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이 국토를 만세까지 가도록
굳게 굳게 지키게 하는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 전하는 당신이 올리는, 육진개척을
고유하는 친제에 참례케 하는 영광을 준 것이다.
전무한 일이었다. 백성들은 대마도를 평정해서 왜를 응징하고 육진을 개척해서
옥야천리를 만든 후에 오랑캐들의 침범을 막게 한 불세출의 성주인 대왕의 용안을 먼
발치에서라도 바라뵙기 위하여, 새벽부터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도시락을 싸들고
구름 일 듯 모여 들었다.
사직에서도 악공들이 아뢰는 풍악 소리를 군호로하여 대제는 시작이 되었다.
전하는 역시 곤룡포, 면류관으로 단을 향하여 사배를 올리는 초헌을 드린 후에,
대신들은 아헌, 종헌 석 잔 술을 올렸다.
독축이 끝나고 사신을 한 후에 대제는 끝났다.
전하는 친히 예조에 명하여 제사에 바쳤던 소와 돼지와 양고기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라 했다. 백성들 머릿속에 국토를 강하게 지켜야 한다는 정신을 깊이
심어주자는 때문이었다.
화음, 격음
세종대왕은 종묘와 사직에 육진개척의 위업을 고유하는 친제를 백관과 서민과 함께
지내서 마음이 흡족했다. 그러나 한 가지 미흡한 생각이 들었다.
종묘와 사직에서 제례를 올릴 때 악공들이 풍악을 잡는 그 음향과 가락이 꺽꺽하고
탁탁하고, 질뚝배기를 깨뜨리는 소리 같아서 심히 귀에 거슬렸다.
소위 아악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맑고 화락하고, 유창하고 아름다운 가락을
지니면서, 속악과는 판이해서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화한 기운이 가득히 반공에
사무쳐서, 사람들의 마음을 자중하고 경건하고 평화롭게 하는 것이 아악이다.
그러나 도대체 두 곳에서 올린 소위 아악이란 것은 기생들이 멋있게 거문고와
가야금을 타고 노랫가락을 부르는 속악만도 못해다.
이래가지고 국가 대전 의식 때 올리는 아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더구나 외국의
사절들이 공식으로 찾아왔을 때 연회석상에는 반드시 풍악을 차려서 그들의 흥취를
도와야 한다.
아악이라 하면서 도리어 향악만큼도 가락이 맞지 않고 고저장단의 음계가 틀려서
엉망진창이다.
옛 예법에 제례를 지낼 때 악을 올리는 것은 음식을 흠향하는 신으로 하여금
유쾌하게하여 제례를 잘 받아 흠향하도록 하자는 데서 풍악을 올리는 행사가 시작된
것이다.
하필 신뿐이 아니라 산 사람들이 잔치할 때도 술을 마시고 밥을 배불리 먹어서 흥이
나면 노래를 부르고 장단을 맞추면서 춤을 춘다. 이것은 평화로운 민족들이
승평시대에 누가 하지 말라 해도 저절로 즐거워서 하느이다. 말도 못하는 신에게
정성을 다하여 제례를 드리면서 가락도 맞지 않는 질뚝배기 깨뜨리는 악음과 격음을
낸다면 신은 오히려 불쾌해서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버릴 것이다. 신과 인의 정은
유명은 다르다 하지만 매일반이다.
도저히 이따위 풍악을 가지고 장엄 경건한 의식중에 중요한 절차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할 수는 없다고 전하는 생각했다.
전하는 젊어서부터 장중한 성격을 가졌다는 글만 읽고 글씨만 썼다. 그러나 형님
양녕의 덕으로 거문고 뜯는 소리도 들었고 가야금 타는 멋도 알았다.
명기 명창들을 가깝게 하고 애무해본 일은 없었으나, 가락의 맑은 것과 탁한 것이며
화음과 격음은 판단할 수 있었다.
전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음악이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생각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는 국민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기 위하여 훌륭한 화음으로 교화를
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밤에 등불을 돋우고 당송 팔대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당 시대의 대문호요,
철학자요, 재상이었던 한유의 '송맹동야서'라는 글을 읽어본다.
한유의 자는 퇴지니, 세상에서는 한퇴지라고도 부른다. 철학과 문학과 정치와
음악에 조예 깊은 대가다.
맹동야는 한유의 선배 친구로서 본이름은 맹교요, 동야는 자다. 역시 글을 잘 하고
시도 잘 지었다. 성정이 개결하고 인격이 높았다. 권문세가에 드나들지 아니하니 나이
50에 겨우 진사가 되었을 뿐이다. 진사는 백두다. 벼슬이 아니다. 다만 명예로운 높은
선비의 자격을 가진 것뿐이다. 한퇴지는 여러 차례 나라에 쓸 만한 사람이라고
천거했다.
그러나 권문세가의 인사권을 맡은 사람들은 한퇴지의 천거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탐관오리의 그들이 깨끗하고 꼿꼿하고 자기 집으로 찾아오지 않는 개결한 선비
맹동야를 써줄 까닭이 없다. 한유는 겨우 청을 해서 미관말직을 시켰다.
맹동야는 시인으로서 훌륭한 포부를 가졌으나 나라에서 써주지 아니해서 등용이
되지 못하니 어찌하는 수 없었다. 시골 구석 강물이 흐르는 나룻가의 뱃사공을
감독하는 미관말직이 되어 떠나게 되었다. 예나 이제나 아무리 글을 지어서 이름이
높다 하나 글짓는 사람도 밥은 먹고 살아야만 했다. 변방의 나루터를 지키는 뱃사공
감독이라도 해서 구복을 채워야 했다.
맹동야는 한유보다도 오히려 연상 친구다. 미안하기 짝 없었다.
맹동야는 죽장망혜로 괴나리봇짐을 어깨에 메고 터벅터벅 시골 나룻가로 향하여
떠나갔다.
한퇴지는 딱하고 애달팠다. 이리해서 연장의 벗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 글을 지은
것이다.
이 글 속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벌어져 있는 동물과 식물과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자연의 발로에 붙여서 그 우러나는 소리와 만물의 관계를 흥청대서 펴놓고 비틀어댄
불세출의 명문이다.
까닭에, 전하는 종묘대제와 사직대제의 미타하게 들렸던 악공들의 반주를 듣자 먼저
음에 대한 원리를 생각해보다가 퍼뜩 한유가 지은 '송맹동야서'가 생각났다. 책을
펴놓고 읽기 시작한다.
"대개 물건이란 것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면 우나니, 풀과 나무는 소리가 없건만
바람이 와서 흔들어 울리고, 물은 소리가 없이 흘러가건만 바람이 불어와서 뒤흔들어
울려댄다."
전대문을 읽는 전하의 눈은 환하게 무엇을 깨닫는 듯했다.
전하는 계속해 읽는다.
"그 뛰는 것을 바람이 박차서 격하게 하고, 그 달리는 것을 바람이 막아서 못가게
하며, 그 용솟음치는 것을 불로 끓이기도 하고, 쇠와 돌의 소리 없는 것을 두들겨
쳐서 울리게도 한다."
"사람의 언어도 또한 그러하다. 부득이한 경우에 말을 하나니, 노래는 생각이
있어서 나오는 것이요, 우는 것은 회포가 있어서 우는 것이니, 입에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은 모두 다 불평한 데서 일어나는 것인가?"
"악이란 것도 울적한 마음이 밖으로 새어나와서 음악이 되는 것이다. 그 잘 우는
자를 택하고 빌어서 울게 하는 것이니, 쇠와 돌과 실이며 대와 바가지와 흙과 가죽과
나무 여덟 가지 물건은 잘 울리는 물건이요, 천시만 해도 또한 그러해서 잘 우는 자를
빌려 울게 하나니 이러므로 새로써 봄을 노래하게 하고 우레로써 여름을 알리게 하고
벌레는 가을을 노래하게 하고 바람 소리로 겨울을 울리나니, 춘하추동 사시절의
추탈하는 것도 또한 반드시 그 평하지 못한 데서 일어나는 일인가 한다."
전하는 여기까지 읽어 내려가다가 무릎쳐 탄식하면서 소리를 높여 다음 글을
읽는다. 흥이 저절로 난 것이다.
한유는 이같이 말한 후에 역대 호걸, 정치가, 학자, 문장, 시인들을 벌여놓아
시세를 잘 만나서 한 세상을 잘 울린 사람들과, 시세를 잘못 만나서 애닯게 썩어
문드러진 불평객들을 열거한 후에 다시 말했다.
"모르겠다, 하늘은 장차 그의 소리를 화하게 해서 국가가 융성해지도록 울리게 할
것인가? 장차 그 몸을 굶주리는 궁한 곳으로 몰아넣어서 그 마음 속을 근심스럽게하여
스스로 그 불행한 것을 울게 만들 것인가?"
한유는 이같이 끝을 막아서, 뜻을 펴지 못하고 시골 구석 나룻가의 뱃사공을
감독하러 가는 연상 친구 맹동야를 보내면서 이 글을 지은 것이다.
전하는 한유의 글을 읽기를 다한 후에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해본다.
이 글은 어느 시대에 가더라도 훌륭한 진리를 내포한 명문일 뿐 아니라, 세도인심의
상태를 곡진하게 그림 그리듯 그려낸 글이다.
사람은 불평이 있으면 울분하는 것이다.
울분하면 격할 것이요, 격하면 소리치고 발을 구르는 것이다. 격하지 않고 불평이
없게 하는 방법은 없는가? 이쯤 생각해본다.
옛말에 무위이화란 말이 있다.
하늘은 말이 없다.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는 속에 아무일도 아니하는 듯하면서
크나큰 일을 억천만년 해나간다.
봄에는 화한 바람과 단비를 내려서 만화방창의 시절이 되게 하고, 여름엔 더운
기운을 뿜어서 성숙의 시기를 이룩하고, 가을엔 결실하는 미덕을 가져서 백곡과
백과를 풍윤하게 하고, 겨울엔 동장의 저축을 가져서 다시 돌아오는 봄을 맞이하도록
한다.
대지는 또한 하늘과 조화를 이룩하면서 묵묵한 속에 만유를 길러낸다.
이것이 곧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듯하면서도 크나큰 질서와 크나큰 모든 일을 운영해
나가는 진리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손뼉은 마주 부딪쳐지면 소리가 난다. 화한 소리, 화음으로 일어나는 소리는 듣기가
좋다. 사월훈풍에 벗을 부르는 꾀꼬리 소리 같은 것, 맑은 물을 쌍쌍이 박차고 나는
'물찬 제비'가 재잘대며 의좋게 나는 그 소리, 이런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화음이다.
그러나 노기 가득한, 질뚝배기를 깨뜨리는 소리, 바가지를 발로 밟아 부수는
끔찍스런 소리들은 격음이다.
전하는 한유가 지은 '송맹동야서'를 읽고 크게 깨달았다.
정치를 해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듯하면서, 하늘과 땅이 만물을 육성하듯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인재를 등용해 쓰는 데도 권문세가에 맡기지 말고 친히 적재를
적소에 등용해서 쓸 만한 사람을 놓치지 아니하고 국가에 헌신하도록 해서, 유능한
인재가 시세를 얻지 못했다고 하는 불평과 불만이 없도록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음악도 그렇다. 화음으로써 온 사람과 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에 울린 종묘 봉고제 때와 사직대제 때 아뢴, 소위 중국의 아악이란 것은
악공들의 기예가 부족한 까닭인지, 중국에서 가져온지가 오래서 그런지 도대체
화음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일어나지 아니했다. 가락도 맞지 아니했다. 소리도 탁했다.
음이 격하고 탁하고 산란했다. 차라리 향악의 멋진 화성과 흥청거리는 가락만도
못했다.
그러나 조정의 큰 의식과 종묘대제 등 거룩한 의식에 향악만을 쓸수는 없었다.
전하는 우선 정악을 바로잡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이튿날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을 어전에 명소했다.
"악은 예로부터 예와 함께 국민의 성정을 순화시키고 정신을 고상하게 해서 화한
기운이 나라안에 가득하게 하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교양이다. 이리하여
태평한 세월에는 서민들이 사는 거리와 동리마다 거문고 타는 소리와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아니했다. 이것은 선현의 기록에도 현송이 부절이란 글도 있다. 이제 우리
나라는 북편 오랑캐와 남쪽 해적을 물리쳐서 외환이 줄어졌다. 예악을 강구해서
위로는 조선의 업적을 빛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화기가 온 나라에 가득해서
문물의 번영을 더욱 이룩하고 백성들의 성정을 순후하고 고상하도록 인도해야 하겠다.
한편으로 예법을 바로잡고 한편으로 화락한 정악을 정돈해서 살벌하고 난잡했던
인심을 부드럽게 해야 하겠다. 경은 예문관 대제학이다. 음률과 악에 대하여 조예가
있는 사람이 있거든 천거하라."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은 한동안 부복해서 생각하다가 아뢴다.
"한 사람, 지음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음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전하는 반가웠다. 용안에 희색을 띠고 하문한다.
"박연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박연! 조관인가?"
"네, 그러합니다. 지금 봉상시 판관으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곧 부르도록 하라. 누구의 아들인가?"
"영동 사람으로 삼사좌사를 지낸 박천석의 아들이올시다. 선대왕 태종 신묘년에
문과에 급제했사옵고, 효행으로 이름이 높아서 나라에서 효자홍문까지 내린
사람이올시다."
"효자 정려까지 받았단 말인가? 훌륭한 사람이로구나!"
"아직 지위는 높지 아니합니다마는 지음을 잘 할 뿐 아니라 효자로 이름이 높으니
사류의 존경을 받습니다. 초명을 연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연자로 개명을 했고, 자를
탄부라 하고 호를 난계라 하옵니다."
전하는 곧 승지에게 분부했다.
"봉상시 판관에 박연이란 사람이 있다 한다. 곧 입시를 명하라."
승지는 명을 받고 곧 대전별감을 시켜서 봉상시에 나가서 판관 박연에게 입시의
명을 전했다. 판관은 당상관이 아니라 당하관이다.
당하관으로 어전에 입시의 명을 받는 일은 극히 드물다.
난계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로 전하가 입시를 명하시는지 알 까닭이 없었다.
대전별감에게 묻는다.
"무슨 일로 부르신다던가?"
"소인도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승지한테 들으니, 예문관 유대제학이 입시한
자리에서 소명이 내리셨다 합니다."
난계 박연은 황망히 조복을 갖추어 입고 예궐했다.
사모관대로 조복을 갖춘 박연은 승지의 인도로 대전에 들어가 예문관 에게 목례를
보낸 후에 분합 밖에서 전하께 곡배를 드렸다. 지존한 제왕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데
바로 정면해서 바라보며 절을 드리는 것이 공손치 못하므로 사선으로 전하를 향하여
절을 하는 것을 곡배라 하는 것이다.
전하는 박연의 절이 끝난 후에 옥음을 부드럽게 해서 말씀을 내린다.
"대제학한테 경이 지음을 한다는 말을 듣고 만나고 싶어서 부른 것이다. 오늘부터
나의 스승이 돼야 하겠다. 당부한다."
전하는 태종 때 문과에 급제를 했고, 더구나 효자의 정문까지 받은 사람인 것을
대제학을 통하여 들은 까닭에, 박연이 아직 당하관이라 하나 존경하는 뜻으로 너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특별히 경이라 불렀다.
박연은 황감했다. 어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소신이 어찌 감히 음을 안다 하오리까. 대제학이 과찬해서 아뢰었나봅니다. 다만
선비의 장난으로 거문고를 약간 타보았을 뿐이옵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경은 선대왕 때 효행으로 정문까지 내리시는 광영을 받았다 하니 가상한 일이다.
효행으로도 나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 고마운 일이다!"
전하는 효자를 우대하는 말씀을 또 한 번 내렸다.
박연은 내리 감격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부복하여 아뢴다.
"자식이 되어 어버이를 받드는 일은 누구나 다 할 일이올시다. 우연히 선대왕께옵서
유신들의 말씀을 들으시고 선비들에게 권장하는 뜻으로 내리신 일이올시다. 은총이
지중하신 것을 항상 죄송스럽고 부끄럽게 생각하옵니다."
전하는 미소를 던지시며 화제를 돌린다.
"내가 오늘 경을 부른 것은 우리 나라 악에 대하여 미타하게 생각해서 경에게
묻고자하여 의논하려고 부른 것이다. 지난번 종묘대제를 거행할 때 악공들이 아뢰는
소위 아악이라는 음률이 해음을 갖지 못하여 황하기 짝이 없다. 악이란 화한 가락으로
신과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아뢰는 것이다. 이 해음을 못가지 ㄴ조리
없는 음악으로 어찌 종묘의 대제와 국가의 장중한 의식에 악이라고 내놓을 수 있는가?
차라리 향악만 못하니 딱한 일이 아닌가. 내 비록 경과 같이 지음은 하지 못하나
음치는 아니다. 이것을 바로잡아야 하겠다. 아까도 말했거니와 경은 나의 악의 스승이
되어 향악과 정악을 새로운 방향으로 창조해야 하겠다. 악은 국가가 태평성대가
되도록 신과 만민이 함께 즐기면서 화한 기운을 조성시키는 정치 이상의, 국가의
지도자가 행할 바 정사 중의 하나다. 예문관 대제학 이하 악에 대한 책임을 맡은
유사들은 나의 뜻을 협찬해서 예와 악을 바로잡는 일에 힘을 써라!"
대제학 유사눌과 봉상시 판관 박연은 전하의 말씀을 듣자,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악은 국가가 태평성대가 되도록 신과 만민이 함께 즐기면서 화한 기운을
조성시키는 정치 이상의, 국가의 지도자가 행할 바 정사 중의 하나다.'하시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과 봉상시 판관 박연은 기가 차도록 감탄했다.
마음 속으로,
'참말 불세출의 성주를 만났구나!'
생각했다.
사실상 악은 인간의 정신적 자세를 화하고 바르게 정립시켜주는 최고의 예술이다.
실로 국가의 지도자가 정치 이상의 정사로 생각해서 음악을 장려한 것이다. 제례에도
악을 쓴다. 신도 사람도 음악의 화음으로 마음을 감동시켜서 국가라는 커다란 집안을
화기속에 휩쓸리게 하자는 것이 음악이다.
박연이 아뢴다.
"전하의 분부는 과연 명철하신 판단이옵니다. 소신들의 미칠 바가 아니올시다.
악이란 하늘에서 솟아나서 인간에 의하여 무에서 발생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올시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면서 굽이굽이 혈맥을 통하여 정신으로
흘러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동되는 바가 같지 아니함에 따라 소리가 또한
같지 아니합니다. 즐거운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유쾌하여 백학이 푸른 하늘을 박차고
나는 듯하고, 노기를 띤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거칠고 격해지고, 슬픈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애닯고 초조해집니다. 기쁜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감동되어서 덩실덩실 춤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박연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전하의 용안엔 활짝 웃음이 물결쳤다. 무릎을 탁 치며
말씀한다.
"그렇지! 옳은 말이다."
박연이 다시 아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소리의 같지 않은 것을 합쳐서, 하나의 규율로 만드는 것은
군상으로 계신 분이 지도하기에 달렸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들으신다.
박연은 말씀을 계속한다.
"인도하는 데는 정과 사의 구별이 있습니다. 음악은 크게 풍교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음악이 도로서 크게 국가 치화에 영향을
주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박연은 음악의 도가 국가의 흥망까지 관계되는 일을 순순하게 아뢰었다.
그의 음악론은 철저했다.
전하는 박연의 논리정연한 음악서론에 경건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어서 더 말을 해보라!"
"중국 오제 때의 악을 말씀드린다면, 당우 때가 가장 성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후직이 협찬해 이룩된 것입니다. 삼왕 때의 악을 논한다면 주 시대의 악이
으뜸이올시다. 주공이 만든 것으로서 당시에 실시했던 방법이 모두 다 '주례'에
자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박연의 말씀을 듣는 전하는 흥이 도도했다.
"옳다! 나도 '주례'를 읽어보았다. 대강 짐작한다."
창조 아악
박연은 전하의 악을 알아주시는 말씀을 듣자 역시 신명이 났다. 다시 아뢴다.
"그때 정치하는 분들은 국민교화를 하는 데 모두 예악으로 먼저 주를 삼고 형벌을
다음으로 삼아서 백성들을 다스린 까닭에 풍교가 크게 순화되어서 만백성이 악한 일을
저질러 죄를 범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옥은 텅텅 비어서 사십 년 동안의
치적을 이루었다 합니다. 악의 효과는 이같이 국가의 성하고 쇠하는 큰 기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다! 악은 그 나라 풍교에 미치는 영향이 지극히 큰 것이다. 그러하므로
아까 나는 경들에게 말하지 아니했는가? 악은 국가에 태평성대가 되도록 신과 백성이
다 함께 즐기면서 화한 기운을 조성시키는 정치 이상의 정사라고 하지 아니했던가!"
옆에 시립해 섰던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이 아뢴다.
"그러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주공과 같이 만백성과 함께 즐기는 음악을 창조하시어
죄짓는 백성이 없게 해서 옥이 텅텅 비도록 만들어주시옵소서."
"내 어찌 주공을 따르랴! 박연은 다시 악에 대한 말을 계속하라."
전하는 박연의 음악론을 더 듣고 싶었다.
박연이 계속해 아뢴다.
"주공 이후에 세교는 쇠퇴해서 순박했던 풍속은 쓰러지고 각박하게 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형벌로만 다스리는 정치를 했습니다. 이러하니 옥을 맡은 관리들은 예의
있는 선비를 천대해서 선대의 예악문물은 모두 다 탕진되어 찾을 길이 없고, 숭상하는
음악은 다만 황음부미한 음탕한 노랫가락과 무당들의 굿거리 장단, 창부 타령 따위로
변해져버렸습니다. 이쯤 되니 사광의 지음을 잘 하는 총명한 인물이나 공자 같은
성인으로도 능히 이 어지럽고 난잡한 세상 풍속을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옳은 말이다, 그대의 말이! 그러므로 공부자도 '시경'을 산삭해서 편집하시면서도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탕한 노래를 그대로 '시경'속에 넣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역사는 속일 수가 없는 때문입니다."
이번엔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이 대답해 아뢴다.
박연이 아뢴다.
"이같이 되니 주공이 창조했던 정악은 모두 다 흩어지고 슬어져버렸습니다. 한
시대에 내려와서 숙손통이란 이가 잿더미 속에서 겨우 의식의 문서를 얻었을 뿐 주
시대의 악보는 찾을 길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진 시대의 것으로 태묘의 악을
삼았었으나 조잡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후엔 정악이 모두 다 소멸되었구나!"
세종대왕은 탄식하기를 마지아니했다.
"그렇습니다. 한무제가 악을 바로잡으려 애를 써서 이연년을 시켜서 경방에
육십률을 만들었다 하나 억지로 부회한 누를 면치 못했습니다."
박연의 강의는 계속되낟.
"진 시대와 당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공의 정악을 복구하려 했으나, 당현종은
옥수후정화와 예상우의곡을 양귀비와 함께 방탕하게 즐겼을 뿐, 정악의 근본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송 시대에 와서도 정악의 미묘한 이치를 탐구한 사람이 몇 사람
있었습니다마는 단지 그 지엽을 어루만졌을 뿐이었습니다. 그중에 오직 채원정의
'율려신서'가 깊이 율의 원류를 연구해서 소리를 화하게 조화시키는 법칙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악의 정도를 개간했습니다마는 아직 호미질을 했을 뿐 가래질을
못한 혐이 있습니다."
동양 역대의 악에 대한 학식을 막힘 없이 장강유수처럼 탁 터놓고 아뢰는 박연의
말씀을 듣자, 전하는 감탄하기를 마지 아니했다. 박연의 악에 대한 박학에 공경하는
마음이 은연히 일어났다.
"경은 과연 과인의 스승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해서 항상 밤을
새워가며 공부를 했더니 몸이 쇠약해지고 병이 자주 난 일이 있었다. 그때 태종께서
중관을 보내서 내 방에 있는 책을 모조리 거두어 가신 일이 있었다. 과인의 건강을
걱정하신 때문이다. 그러나 병풍 뒤에 마침 가려져 있는 통파 문집과 구양수의
서간집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것으로 나의 글 일고 싶어하는 욕심을 풀어본 일도
있었다. 악에 대해서도 몇 가지 책을 읽은 일이 있으나 아직 채원정의 글은 읽어본
적이 없다. 학문의 길이란 과연 넓고 멀구나! 도대체 채원정은 어떠한 사람인가?"
전하는 감탄하여 박연에게 묻는다. 박연이 다시 아뢴다.
"채원정은 송 시대 회암 주희의 제자올시다."
전하는 깜짝 놀란다.
"그래, 주자의 제자란 말인가?"
"네, 그러합니다. 채발이란 사람의 아들이온데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배워서
학문이 대단했습니다. 장성한 후에 주희를 알게 되었지요. 학문에 대하여 물어볼 일이
있어서 주자의 집을 찾았습니다. 주자는 크게 놀라서 채씨의손을 잡아 맞이하면서,
제자들에게 '이 사람은 내 옛 친구다. 제자로 대접할 수 없는 사람이다.'하면서 상을
대하여 밤을 새워가며 경학을 강론해주었다 합니다."
"대단한 분이로군!"
전하는 탄복한다.
"이쯤 되니 사방의 학자들은 반드시 학문에 대하여 채원정을 찾아 질정을 받아야만
했다 합니다. 사이비학자 한모란 자가 채씨를 시기해서 위학자라고 조정에 참소하여
도주란 곳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사방의 젊은 학자들은 구름 모이듯
모여들어 그에게 배우기를 원했다 합니다. 경학에도 통달했을 뿐 아니라 음악에도
정통해서 '율려신서'를 저술했습니다."
"대단한 선비로구나!"
전하는 또 한 번 탄복한다.
대제학 유사눌이 옆에서 한 마디 아뢴다.
"주자가 그 분에게 학문을 물었다 하니 다시 더 말할 나위 없는 분이올시다."
박연이 다시 아뢴다.
"또 한 가지 그분을 존경할 만한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그는 제자들에게 귀양한 적소에서 이런 글을 지어서 보였다 합니다."
"혼자 갈 때라도 자기 그림자한테라도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을 해야 하고, 혼자 잘
때라도 덮고 자는 이불한테라도 부끄러운 짓을 해서는 아니된다. 내가 비록 죄를
얻었다 하나, 그 까닭으로 짐짓 원망하고 자포자기를 해서 몸과 마음을 해이하게
해서는 아니된다는 뜻이구나! 과연 주자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다!"
박연이 다시 아뢴다.
"그는 '율려신서'뿐 아니라 '팔진도'와 '홍범해'며 '태연상설', '연악원변',
'황극경세', '태현습허지요', '상등서산절정', '인기독서' 등의 무수한 저술을
남겨놓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서산 선생이라고 존경해서 불렀다 합니다. 그가
돌아간 후에 비로소 나라에서는 죄를 풀고 추시로 문절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합니다."
대왕은 손뼉을 어루만지면서 탄식한다.
"좋은 인재가 세상을 잘못 만나서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했구나! 그러나 많은 저술을
해서 뒷사람들을 유익하게 했으니 고마운 일이다. 예나 이제나 간신배가 조정에
있으면 큰일이다!"
말씀을 마친 전하의 얼굴빛은 엄숙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종전하는 다시 박연을 향하여 하문한다.
"나의 공부가 아직도 미흡한 것을 한탄한다. 내가 채원정의 '율려신서'를 아직 읽지
못한 게 한스럽다. 집현전이나 예문관에 이 책이 있겠는가?"
전하는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을 향하여 물었다.
아무리 대제학이라 하나 예문관이나 집현전에 쌓인 만 권 서적을 일일이 기억할
까닭이 없었다. 더구나 악에 대해서는 유사눌의 전공이 아니다.
유대제학은 당황했다.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아뢸 수도 없다. 그렇다고
'조사해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얼굴빛이 변했다. 얼른 대답을 올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을 때 박연은 대제학의
심정을 알아차렸다.
대제학을 대신해 아뢴다.
"누추하오나 소신이 읽고 있던 때묻은 책이 있습니다. 추하다 생각하지
아니하신다면 소신이 집에 나가 대전별감편에 바치오리다."
전하는 기쁜 빛이 용안에 가득했다.
"경솔한 말이로다. 경의 책을 어찌 추하다 할 수 있으랴, 곧 들여 보내라. 그리고
예문관과 집현전에 책의 있고 없는 것을 아뢰라!"
"예, 봉명하겠습니다."
대제학이 대답했다.
전하는 다시 박연에게 말씀한다.
"채씨의 '율려신서'는 보내주면 내가 읽어서 공부하려니와, 다시 우리 나라 향악에
대해 경에게 묻겠다. 신라 때부터 삼현 삼죽이 전해왔고 우륵의 가야금과 왕산악의
거문고에 옥보고의 새로운 가락 삼십 곡이 있다 하는데, 여기 대해서 아는 대로
강론해보라."
박연은 전하가 나라의 고유한 향악까지 연구해보려는 마음을 지니신 데 대해서 마음
속으로 기쁨을 이길 길 없었다.
"남구 북적을 막으시며, 정무가 다단하신 터에 어찌 향악에까지 관심을 가지려
하십니까. 악을 연구하는 소니으로서는 황공 감격한 마음 이길 길 없습니다."
박연은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이길 수 없다. 눈에 감격한 눈물이 핑 돌았다.
여태까지 소위 임금이란 이들은 음악을 천대해서 노리개감으로 알았다.
음악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악공이라 하고 여자들은 여악이라 하고 기생과 광대라
불렀다.
기껏 우대한다는 것은 사대주의로 아편 진이 노랗게 몸에 배듯,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얻어온 깨어진 종과 기왓장 조각으로 된 편경을 영광스런 소위 아악이라
해서 조정의식과 종묘제향 때 율도 맞지 않고 가락도 통일되지 않은 것을 푸대접하는
악공들을 시켜서 마구 두들겨대던 것이다.
전하의 묻는 말씀을 듣자, 악의 묘리를 아는 박연의 눈에서 감격한 눈물이 핑 돌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하는 박연의 말씀을 듣자 용안에 활짝 화려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이 사람아, 경의 말로 예와 악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라 말하지 아니했는가.
그뿐인가, 옛 성현이 정치를 시작했을 때 어진 위정자는 먼저 제례작악을 했던
것일세. 주가 덕화로 천하를 통일했을 때 무엇보다도 주공은 먼저 그 조카 성왕을
도와서 예를 마련하고 악을 창조했네! 정치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백성들을 잘살게 하고, 백성들을 배불리 먹게 하고 백성들의 교양을 더욱 높여서 그
나라의 문화가 풀과 나무에까지 미치도록 하자는 것이 정칠세. 그러므로 '천자문'에도
화피초목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정치를 지도하는 임금으로서 제 나라의 향악을
알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무엇이 그리 대수론 일이라고 생각하나. 우리
나라에 전해오던 악과 악기에 대해서 말을 해주게."
전하는 이제는 박연에게 해라를 하지 아니하고 하게란 말까지 썼다. 말씀하는
동안에 그의 학식의 깊고 넓은 것을 알게 되니 아무리 제왕이라 하여, 또는
미관말직인 당하관 박연이라 하나 전하의 입에서는 저절로 경대하는 말씀이 나와서
경이라고 하고 하게를 써서 말씀했다.
박연이 아뢴다.
"소신도 향악에 대해서는 더욱 아는 바가 충실치 못하옵니다. 그러나 신라 때부터
전래한 삼현 삼죽은 거문고, 가야금, 비파를 삼현이라 합니다. 줄로 타는 때문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부는 대금, 중금, 소금은 대로 만들었으므로 삼죽이라 합니다."
전하는 나라에 고유하게 전해온 향악에도 관심이 컸다.
"가야금을 창조한 우륵은 본시 신라 사람이었지?"
"네, 그러합니다. 우륵은 신라 진흥왕 때 사람으로 우리 나라 삼대 악성의 한
사람이올시다. 본시 가야국 사람으로 가실왕 때 열두 줄 거문고를 만들고 십이율을
상징한 상가야, 하가야 등 열두 곡을 지어서 가야금이라 했습니다. 가야가 쇠하자
신라로 몸을 피했습니다. 진흥왕은 우륵의 소문을 듣고 우륵과 그 제자들을
하림궁으로 청해서 가야금을 연주하게 했습니다. 이때 우륵은 새로이 하림조와
눈죽조를 지어서 연주하니 왕은 크게 기뻐해서 그들을 굳원에 살게 하고 가야금의
수법을 계고, 주지, 만덕 등에게 전습시켰습니다. 이리하여 우륵의 가야금이
오늘날까지 전해왔습니다. 충주 대문산 아래 금휴포란 곳이 있고, 이곳에 탄금대가
있습니다. 이 금휴포와 탄금대가 우륵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올시다."
"옥보고도 신라 사람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옥보고는 신라 경덕왕 때, 사찬 벼슬 했던 공영이란 사람의
아들입니다.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현금을 50년동안 공부했다 합니다. 스스로 새
곡조 30곡을 창작했고, 이 금법을 제자인 속명득에게 전했다 합니다. 금오산 산턱에
금송정이란 정자가 있었다 합니다. 이곳이 바로 옥보고가 거문고를 타고 놀던 곳이라
합니다."
박연의 아뢰는 말씀을 듣는 세종전하는 탄복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이러하니, 신라는 삼국통일을 해서 백성들은 평화로운 예악으로 문화가 융성하여
잘살게 되었구나!"
전하는 언제든 항상 백성을 본위로 삼는 말씀을 했다.
"왕산악의 내력을 알거든 말하라."
"고구려 양원왕 때 진나라에서 칠현금이 들어왔으나 탈 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정부에서는 상을 걸고 칠현금 타는 사람을 구했다 합니다. 왕산악은 칠현금을
개조해서 백여 곡을 지어서 타기 시작하니, 거문고 소리를 듣고 현학이 날아와서 뜰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까닭에 왕산악이 개조한 칠현금을 현학금
또는 현금이라 부릅니다. 우리말로 순전히 부른다면 검은고올시다. 현이란 글자는
까맣다 하는 글자니, 칠현금이 바뀌어 거문고가 된 것입니다."
전하는 나라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삼현 삼죽의 악기와 삼대악성의 이력을 박연을
통하여 듣자, 연해 탄식하는 말씀을 내린다.
"우리 나라에도 이렇게 천하에 자랑할 만한 삼대악성이 있는데, 뒤를 받치려는
사람들이 없으니 실로 한심하구나!"
세종은 모둔 학문에 대하여 지나치도록 관심이 많았다. 다시 박연을 향하여
물으신다.
"향악에 대해서는 대강 들었거니와, 소위 중국의 아악이란 것은 어느 때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했는가?"
박연이 아뢴다.
"문헌에 의하면, 고려 예종 때 송휘종이 제악으로 종경 각 한 틀씩과 금, 슬, 생,
우, 소관 등 악기 두 부를 보냈다 합니다. 그 후 공민왕 때 홍건적 난리통에 모두 다
탕진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늙은 악공 한 사람이 종경을 못 속에 던졌다가 난이
평정되자 꺼냈다 합니다. 본조에 내려와, 명에서 태조와 태종이 악기를 보냈으나
음향과 가락에 맞지 아니하고 제악도 팔음이 미비해서 말이 아악이옵지, 악이
아니올시다. 소위 경이란 것은 기왓장 조각으로 만들었고, 종이란 것도 잡박하게
달려져서 몇 개가 되지 아니하여 악의 형편이 말이 아니올시다."
전하는 깜짝 놀란다.
"무어야, 돌로 만든 경석이 아니라 기왓장 조각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그러하니
화음이 날 도리가 있으냐! 질뚝배기 깨뜨리는 악성과 격음만이 날 뿐이지. 놀랄
일이로구나!"
악에 대한 소양이 없고 악기를 알지 못하는 배신들도 비로소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래도 중국에서는 이것을 소위 와경이라 한다 합니다."
박연은 웃으며 아뢴다.
"경 돌이란 옥돌 같아야 그 음향이 맑아 청아할 수 있는 것인데, 기왓장 조각을
아무리 잘 쪼아 만든다 한들 청아한 음향이 날 수 있는가? 과인이 실지로 한 번
감상하고 싶다. 예문관 대제학은 예조판서와 의논해서 봉상시에 있는 악기와
관습도감의 악기와 여악을 동원해서 편전에서 한 번 보게 하라.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최윤덕 이외에 악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관원도 참석케 하고, 특히
봉상시 판관 박연은 봉상시에 보관한 악기와 관습도감의 향악에 대하여 모든 절차를
지휘해 주기 바란다."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과 봉상시 판관 박연은 국궁하며 대답한다.
"이틀 동안 말미를 주시옵소서. 모든 준비를 차려 어전에 아악과 향악을 아뢰도록
하오리다."
"좋다!"
전하는 이틀 동안의 준비기간을 주는 허락을 내렸다.
어전에서 물러나온 박연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을 향하여 말한다.
"대감이나 시생이나 불세출의 성주를 만났소이다. 상감께서는 악은 정치 이상의,
국민의 정신을 화기로 도야시키는 정책이라 하셨습니다. 과연 달관하신 말씀이올시다.
옛적 주 시대에 주공이 제례작악을 하듯 나라의 예악을 바로 잡을 의향이 계신
듯합니다."
"그렇소이다."
유사눌도 탄복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이틀 후에 봉상시와 관습도감에서는 전하의 명을 받들어 악공들과 여악들이
궁중으로 들어왔다.
전하는 전상에서 황희 이하 삼정승과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봉상시 판관 박연, 경시주부 정양을 배석시키고 편종과 편경을 위시하여 삼현 삼죽과
모든 여악을 친히 감상하기 시작했다.
경시주부 정양이란 사람은 역시 악리에 달통했다 해서 박연이 천거해서 특별히
입시를 명한 것이다.
전각 아래는 큰 북이 좌우편으로 놓여졌다. 이것을 절고라고 불렀다.
다음엔 한 개로 된 큰 종과 한 개로 된 기왓장으로 만든 경이 양편으로 놓였다.
이것은 특종과 특경이라 했다. 그 앞에 박을 치는 악사가 오모에 청포를 입고 섰고,
다음엔 거문고를 가진 악공 여섯 사람이 검은 복두에 붉은 홍포를 입고 정제하게
앉았다.
다음 줄에는 비파를 타는 악공 여섯 명이 역시 줄을 맞춰 앉았고, 다음 줄에는
관습도감에서 뽑혀 나온 아름다운 기생 스물네 명이 화관에 푸른 옷, 붉은 치마를
입고 좌우편으로 갈라져서 두 열을 이루어 교태를 머금고 두 사람 행수기생 도창의
지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창은 순전한 우리말로 바꾼다면 선소리를 주는 기생이다.
다음 줄 바른편엔 틀에 달린 편종이 상단 하단으로 나뉘어 한 단에 여덟 개씩
팔음계를 이루어 도합 16개가 달려 있다.
다음엔 바른편에 놓인 편종을 응해서 왼편에 편경이 역시 수를 늘인 틀에 상하
이단으로 나뉘어 여덟 개씩 16개가 달려 있다.
다시 한 계단 아래에 대, 생, 화, 약, 관을 들고 좌우편으로 열 사람이 앉았고, 그
다음 줄에는 훈, 지, 소, 봉소를 부는 사람들이 네 사람씩 좌우편으로 여덟 사람이
붉은 홍포에 검은 관을 쓰고 정제하게 나열해 앉았다.
세종전하는 총명한 안정을 굴려 일일이 악기와 악공이며 기생인 여악들을
살펴보신다.
"악을 아뢰오리까?"
경시주부 정양이 아뢴다.
"시험해보라! 어떤 악을 울려보려 하는가?"
정양이 아뢴다.
"우리 나라에는 정악이 아직 서 있지 아니합니다. 중국에서 비록 종경이 들어왔다
하나 연구세심해서 악기의 형편이 말이 아니옵고, 이런 중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당악과 고대로부터 전해온 순수한 우리의 향악이 있습니다. 어떠한 것을 아뢸지
분부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향악이란 것은 속악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사기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 팔관회라는 거국적인 국민대회의 의식
때 비로소 향악을 썼고, 향악은 대개 기녀들이 악기에 올려서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 후에 고려가사에 전해오는 '만전춘', '쌍화점', '정과정', '상대별곡',
'청산별곡'들의 가사가 다 향악에 속합니다. 우선 '만전춘'을 아뢰어볼까 합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양은 악사의 앞으로 나가 '만전춘'의 곡을 올리라 했다.
악사는 여러 악공과 모든 여악들에게 박을 쳐서 '만전춘'곡조를 아뢰게 했다.
큰 북이 '두둥둥'소리를 내며 특종과 특경이 울렸다. 거문고 여섯 틀이 비파 여섯
틀과 함께 맑은 음향을 내면서 대나무로 만든 퉁소, 피리 등 여러 악기가 일제히
거문고와 비파 소리에 응해서 푸른 하늘 흰 구름장 사이로 흩어진다. 편종 열여섯
개와 편경 열여섯 개가 울렸다.
관습도감 기생 스물네 명이 일제히 '만전춘'을 가락에 맞추어 노래한다.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임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임과 나와 얼어 죽을 망정
정둔 오늘 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기생들은 첫절을 가락 높이 부른 후에 행수기생인 도창의 뒤를 이어 둥글게 원무를
추며 다음 절을 노래한다.
기생들은 화관 족두리 화려한 녹의홍상을 입고 원무를 추며 다음 노래를 부른다.
'만전춘'가락은 더한층 흥청거렸다.
경경고침상에
어디 잠이 오리오,
서창을 열어하니
도화발하두다.
매화는 시름 없어
소춘풍하나다, 소춘풍하나다.
아름다운 미녀들은 싱긋싱긋 웃음을 띠고 단순호치를 방싯방싯 벌려 서로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추며 노래한다.
넋이라도 임을 한데 녀닛경 너기다니
넋이라도 임을 한데 녀닛경 너기다니,
뉘러시니있가 뉘러시니있가,
올하, 올하, 아련 비올하
여흘란 어듸 두고
소에 자라온다
소, 곧 얼면, 여흘도 좋으니.
노래와 춤은 관현에 맞추어 점점 고조되었다.
미녀들은 서로 잡았던 손길을 풀고 제각기 푸른 소매, 붉은 띠를 펄럭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려 춤을 춘다.
외씨 같은 희고 흰 삼승버선코 끝으로 제비가 물을 차듯 붉은 치맛 자락을 가볍게
박차며 노래를 계속한다.
남산에 자리 보아
옥산을 베여 누워
금수산 이불 안에
사향 각시를 안아 누워
약든 가슴을 마초압사이다
마초압사이다.
흥은 절정에 올랐다.
전하는 귀를 기울여 여악들의 노래와 관현의 조화며 종, 경의 화음을 살폈다.
거문고, 비파와 대로 만든 악기들의 해조는 제법 어율려 들어갔다. 그러나 편종과
편경은 엉망진창이다.
박이 세 번 울렸다. '만전춘'의 향악은 끝이 났다.
기생들은 전하께 향하여 국궁해 절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쳐 제자리로
돌아갔다.
전하는 친히 옥좌에서 일어나 전 아래로 발길을 옮겼다.
시신들은 깜짝 놀라 전하의 뒤를 따랐다.
전하는 편경과 편종이 놓인 곳으로 향했다.
편경과 편종을 치던 악공들이 전하께 목례를 드리고 물러섰다.
전하는 옥보를 옮겨 친히 편종과 편경을 어수로 만져본다.
편종 틀에는 깨지고 이빠진 종이 수두룩했다. 편경은 옥돌같은 맑은 돌이 아니다.
모두 다 기왓장 조각을 갈아서 달아놓았다.
전하는 뒤를 따른 예문관 대제학과 집현전 대제학을 돌아보시며 탄식하는 말씀을
내린다.
"기왓장으로 경을 만들었으니 좋은 음향이 나올 수 있느냐!"
전하는 편종과 편경을 살피신 후에 다시 옥좌로 돌아가 군신을 향하여 말씀한다.
"무엇보다도 악을 바로잡자면 편경과 편종을 새로 창조해 만들어야 하겠다. 박연은
이에 대해서 연구를 해보라! 그리고 당분간 정악이 창조될 때까지는 편경과 편종을
제외시키고 삼현 삼죽으로 향악을 반주하여 화음을 내는 도리밖에 없다. 만약 깨진
편종의 이지러진 소리와 기왓장으로 엮어진 편경을 사용한다면 화성이 나지 아니하고
악성만 나와서 다른 악기에서 나타나는 좋은 소리와 아름다운 노래 곡조를
깨뜨려버리고 만다. 정악을 창조할 때까지 당분간 향악을 쓸 도리밖에 없다."
정양이 아뢴다.
"성상의 하교는 명철하신 분부올시다. 박연에게 하명하시어 우리 나라 풍토와 우리
나라 오행기후에 알맞은 아악을 창조하도록 하옵소서. 중국에서 온 것이라 해서 깨진
종 조각과 기와 조각으로 편성해놓은 종경을 종묘대제와 사직대제에 그대로 쓴다는
것은 쓸데없는 사대벽이올시다. 우선 삼현 삼죽, 고유한 우리의 조화된 악기와
관습도감 아이들의 청아한 가곡으로 신과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화하도록 하시는
것이 상책이올시다. 편종과 편경을 제외시킨 후에 다시 우리의 고유한 향악을
시청해보시옵소서."
정양의 아뢰는 말씀이 끝나자 박연이 아뢴다.
"향악 중에도 '정과정'의 진작은 음곡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군상 되시는 분은 한
번 가사의 뜻을 음미해보실 만한 향악이올시다."
전하는 물우신다.
"진작이란 어떠한 것인가?"
"진작이란 것은 향악의 곡조를 이름한 것이올시다. 악부진작에 1, 2, 3, 4의 구별이
있습니다. 1진작, 2진작, 3진작이라 하옵는 바, 소리의 느리고 급한 것을 표현한
말이올시다. 1진작은 소리가 가장 느린 것이고, 2, 3, 4진작은 더 느린 것이올시다."
전하는 박연의 말씀을 듣자 미소하며 말씀을 내린다.
"경의 말에 의하면 인군된 사람은 한 번 그 가사의 뜻을 음미해볼만하다 하니,
'정과정'곡을 한 번 들어보기로 하자. 아까도 말했거니와, 향악을 아뢸 때 깨진
편종과 기와로 구워 만든 편경의 반주는 합주에 넣지 않기로 하라!"
소위 중국에서 전해왔다는 조잡하고 크고 작은 종이 난잡하게 달린 편종과 와경은
음의 혼란을 일으켜서 악이 될 수 없는 것을 전하는 확실히 판단을 내렸다.
봉상시 악공들은 분주하게 편종과 편경이 달린 가자틀을 중문 밖으로 옮겼다.
전하의 윤허를 받은 정양은 악사에게 눈짓해서 '정과정'곡을 아뢰게 했다. 박이
울리고 이번엔 편종과 편경을 제외한 거문고, 가야금, 비파의 삼현과 대금, 중금,
소금이 청아한 음향을 일으켰다.
여기 맞추어 관습도감의 명기 명창들이 진작의 가사를 부르기 시작한다.
내 님을 그리아와 우니다니
산접동새 난 이슷(비슷)하요이다.
아니시며(아닌 체하며) 거츠르신들(거칠게 하시니) 아으
잔월효성이 아래시리다.
넋이라도 님은 한 대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과도 허물도 천만 없오이다.
말힛(말을) 마러신져 살읏부져, 아으
이미 나를, 하마(차마) 이자시니있가
아소(아스시오) 님아, 도람(돌이켜) 드르사 괴오(사랑)소셔.
기생들의 애원성을 머금은 청아하고 구슬픈 가락은 삼현 삼죽의 요요한 음향과 함께
전상에 싸늘한 가을 바람을 일으키는 듯했다.
노래가 끝나고, 거문고와 퉁소 소리는 은은히 여운을 흘리며 멈춰졌다.
멀리서 바라보는 늙고 젊은 궁녀들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이가 허다했다.
전하도 용안에 약간 쓸쓸한 빛을 띠었다.
박연에게 묻는다.
"이 가사는 고려조에 정서가 지었다는 노래가 아닌가?"
"네, 그러하오이다. '고려사 악지'에 나타난 것을 보면, 내시랑 정서는 인종의
척의가 있는 사람으로 많은 괴임을 인종에게 받았습니다. 인종이 돌아간 후에 의종이
즉위하자 참소를 입어서 그의 고향이 ㄴ동래로 내치게 되었습니다. 의종은 정서를
보낼 때 조정공론에 의하여 마지못해 보내지만 미구에 곧 다시 불러들이겠다고 했다
합니다. 그러나 근 20년이 되도록 불러들이지 아니하여 정서는 이 노래를 지어서
회포를 풀었다 합니다. 그 후에 의종은 이 노래를 듣고 감동되어 다시 불렀다 합니다.
과정은 정서의 호올시다. 하도 가사가 처절해 악부에 올라서 오늘날까지 고려가사로
전합니다."
전하가 말씀한다.
"고려 때 익재 이제현의 '소악부'를 보면 시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노래를
한시로 표현한 것이로구나!"
박연이 대답한다.
"네, 익재 선생의 '소악부'는 바로 '정과정'가사를 한시로 표현한 것이올시다.
그러하오나 우리말로 지은 이 가사의 아기자기하고 애원성 있으며 그 함축성 있는
처절한 맛은 아무리 한자를 빌려 표현한다 해도 십분의 일도 그 뜻을 바로 나타내지
못합니다."
세종전하는 초연히 한숨을 짓고 탄식하며 말씀한다.
"어서 어서 정악도 바로잡아야 하려니와, 우리말을 우리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창조해내야 하겠다. 이 곡진한 가사와 우리말의 오묘한 표현을 글로 나타내어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이것도 나의 할 일의 하나로구나."
전하는 혼자 말씀하듯 이같이 푸념 비슷한 말씀을 했다.
그러나 전하의 이 뜻깊은 말씀을 알아듣는 신하는 한 사람도 없었다. 영의정 이하
삼정승과 문형을 잡았다는 집현전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들도 무슨 말씀인지 전하의
참뜻을 촌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좌의정 맹사성이 딴전을 해 아뢴다.
"전하께서는 빠릴 종묘대제나 문묘석전에 아뢸 아악을 바로잡으시고 향악은 일체
폐지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세종은 정색하고 말씀을 내린다.
"향악은 자연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음이요, 악이다. 몇천 년 내려오는 이
겨레의 거짓 없는 순박한 노래를 제왕의 권력이나 경들의 힘으로 막을 도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공식적인 종묘대제와 조정의식에 어서 어서 정악을 바로잡아 슬 뿐이다.
향가는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노래다. 천지와 인산 가이에 조화되고
빚어지는 정과 한과 탄식을 경의 힘으로 어찌 막겠는가? 좋은 향가는 그대로 보존해서
편곡을 해두어야 한다. 경은 비록 좌상의 권위를 가졌다 하나 자연의 힘으로 발생해
나오는 향가와 향악은 막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일부러 옥음을 높여 껄껄 웃으셨다.
좌의정 맹사성은 그래도 전하의 넓고 깊은 음악 원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전하의 말씀이 끝나자 맹사성이 다시 아뢴다.
"태종께옵서 상왕으로 계실 때 일이올시다. 조정 연회 끝에 소신과 변계량을 대하여
하교를 내리신 일이 있습니다. '후진작은 그 음절이 비록 아름답고 좋다 하나 듣기가
괴란하구나.'말씀하시기에 소신이 대답한 일이 있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올시다.
지금 악부에서는 그 곡만 악에 올리고 가사는 쓰지 아니합니다. 진작에는 만조와 평조
등 몇가지가 있습니다. 이 진작이라는 것은 교려 충혜왕이 자못 음성을 좋아해서
사랑하는 궁녀들을 후전에 두고 새로운 음사를 짓게 해서 악에 올렸다 합니다. 이
노래를 그때 사람들이 이르기를 후전진작이라 했습니다. 가사만 나쁠 뿐 아니라
곡조도 좋지 못합니다.'하고 아뢴 일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선왕의 명철하셨던 뜻을
참조해 살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외람되오나 감히 아뢰옵니다."
향가와 처용무
전하는 맹사성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용안에 엄숙한 기색을 띠며 말씀을 내린다.
"나도 당시에 승지를 통해서 태종께서 경들에게 연회 끝에 내리셨다는 말씀을
들었다. 태종께옵서 내리신 말씀은 조정연회와 종묘대제때 음풍이 있는 향악을 써서는
아니된다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 정악을 아악답게 바로잡아서 조정의식과
종묘대제때 또는 문묘석전 의식에 악공들을 가리켜서 아뢰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천 년 내려오는 향악을 강제로 폐지시킬 수는 없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음탕한
곡조나 가사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하는 지도자가 음탕하고 악한 일을 하니
백성들은 음탕한 가사를 짓고 곡조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달뜨게 하는 것이다.
죄는 음악에 있지 아니하고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정과정'같으 ㄴ가사와 곡조는
군왕을 사모하는 연주의 지정이 넘쳐 흐르지 않는가? 이러한 향악은 계속해서 민간에
유지시키도록 하라."
세종전하는 재상 맹사성의 생각보다 훨씬 앞을 바라보는 원대한 악철학을 가졌다.
좌의정 맹사성은 코가 맥맥했다.
다시 아뢸 말이 없었다.
경시주부 정양이 아뢴다.
"전하께오서는 만기를 총람하시는 중에, 향악에 대해서 다시 감상하실 기회가 드물
줄 압니다. 신라 때부터 전해오는 향악정재를 한 번 살피시는 것이 어떠하올지 감히
아뢰옵니다."
전하는 모든 배신들을 둘러보시며 하문했다.
"어떠한가, 경들의 의향은?"
전하는 작은 일이라도 어느 때나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모두다,
"좋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무슨 정재를 보여주려 하느냐?"
"악과 춤에 대한 정재를 어람하시도록 하겠습니다."
"어떠한 춤과 악이냐?"
"학연화대와 처용무를 합쳐서 정재하겠습니다."
전하는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탈춤, 처용무는 원래 신라의 유명한 향가 처용 노래와 함께 발전되어 내려온 춤과
노래다.
세종전하가 앞으로 훈민정음인 한글을 창조하기 이전, 저 신라 때 유명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 난 대학자 설총이 한자를 빌려서 이두문을 만들어 이같이
우리말을 이두문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노래는 교려 때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나타나 있다.
한글로 풀어본다면,
서라벌 밝은 달에 밤들어서 노니다가,
들어 자리에 보곤 가랄이 너이러라.
둘은 내해였고
둘은 뉘계런고.
본시 내해이다마는
앗어랄 어찌하릿고.
이같이 노래부른 처용을 본떠서 향가와 탈춤을 만든 것이다.
이 노래와 춤의 기원은 신라 헌강왕때 일어난 일이다.
왕이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개운포로 순행했다가, 해일을 만났다. 왕은 부처를
위하여 절을 지어주겠다고 기도했다. 이상한 일이다. 다시 평온한 날씨로 변했다.
이때 동해 용왕의 아들이란 젊은이들이 왕 앞에 나타나 축하하는 노래와 춤을 추었다.
왕은 그중에 제일 미소년인 처용을 서울로 데리고 돌아와서 아름다운 여자를 골라
장가를 들이고 둘한이란 벼슬을 주어 꽃서방님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처용에게는 행복스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행복스런 일엔 마가
끼이기 일쑤다.
신라 경주 서울의 정월 대보름날 달밤은 밝고도 밝았다. 꽃서방님 화랑들은 패를
지어 달빛 속에 즐겁게 놀았다. 처용도 이 틈에 끼여 밤 깊은 줄 모르고 흥겹게
놀았다.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보니 기막히지 않은가? 아름다운 자기 아내의 곁에는 알지
못할 남자 한 명이 누워 있었다.
이 해괴망측스런 모양을 바라본 처용은 허리에 찼던 칼을 뽑아 간부를 찌르려
하다가 슬몃 마음을 돌렸다.
뽑았던 칼을 칼집에 도로 꽂은 후에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이 노래, '서라벌 밝은
달에...'하는 노래를 부르며 지게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간부는 처용이 꼭 자기를 죽일 줄 알았다.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나 처용은
호탕하게 노래를 부르며 나가버린다. 그 넓고 넓은 태도에 감동되었다. 나가는 처용을
쫓아가 절하며 신분을 밝혔다.
"저는 사람이 아니라 역신이올시다. 모든 죄를 용서합시오. 이후부터 당신의 모습을
그려 붙인 집에는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습니다."
처용은 대답없이 껄걸 웃으며 휘적휘적 밖으로 나가버렸다. 과연 사내다웠다.
이 소문은 서라벌 전국에 퍼졌다. 온 나라 사람들은 역신을 쫓기 위하여 섣달
그믐날이 되면 집집마다 처용의 얼굴을 대문에 그려 붙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바가지에 처용의 얼굴을 그려서 탈박을 만들어 쓰고 탈춤을 추었다. 역신과 사귀를
물리치는 풍속이 되어 몇천 년을 흘러왔다.
고려 때 유명한 재상이요 시인인 익재 이제현은 처용의 탈춤을 보고 시를 지었다.
붉은 얼굴 자개 이로
밤 달을 노래하고,
솔개 어깨에
자줏빛 소매로
으쓱 비쓱
봄바람에 두둥실 춤을 춘다.
이같이 탈춤 추는 풍속을 읊었던 것이다.
'처용가'와 처용무는 신라에서 교려를 거쳐서 조선왕조까지 흘러내려온 향악이요,
향무다.
원래 처용탈춤은 한 사람이 추었던 것이다.
검은 옷에 붉은 소매를 달고 처용탈박에 사모를 쓴 후에 '처용가'를 높이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던 것이다.
한 사람이 검은 옷을 입고 탈춤을 추던 처용무는 시대가 변천됨에 따라 오방
처용으로 탈춤을 춘다. 천지간의 오행방위인 동서남북 중앙 다섯 방위의 빛깔에
응해서 청, 황, 적, 백, 흑 오방 처용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동방은 봄에 속하니 푸른 옷을 입고, 서방은 가을에 속하니 흰 옷이요, 남방은
여름에 속하니 붉은 옷이다. 북방은 겨울에 속하니 검은 옷이요, 중앙은 흙에 속하니
누른 빛이다. 이리하여 청, 황, 적, 백, 흑의 오방 처용이 구성된 것이다.
이같이 도교에서 기원을 가졌던 처용놀이는 또다시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적 색채가
섞여졌다. 보살의 연화희까지 이루게 되었다.
전각 앞에는 못이 있고 돌로 쌓아올린 석가산이 있었다. 석가산 아래 백간들이 넓은
곳에 강화 화문석이 펼쳐졌다.
봉상시 판관 박연과 경시주부 정양은 관습도감 악사와 악공이며 기생들을 지휘하여
화문석 위에 학연화대 처용무를 시작한다.
화문석 동편 끝에는 기생 한 명이 청학이 되어 학의 옷을 입고 섰고, 서편 끝에는
또 한 명의 아름다운 기생이 백학의 옷을 입고 섰다.
화문석 자리 위 동편에 청련 한 송이가 화려하게 피어 있고, 서편엔 백련이
조촐하게 봉오리를 열었다.
박이 울렸다. 해금, 당비파, 향비파, 가야금, 현금, 아쟁, 대금, 장구가 일제히
화음을 일으켜 청아하게 울렸다.
모든 향악 소리에 맞추어 인도하는 기생이 화관 족두리로 무동이 되어 좌우편에서
춤을 추고 들어온다. 다음엔 절을 든 기생이 춤을 추며 동쪽 서쪽 양편에서 춤을 추고
들어오고, 다음에는 일산을 든 무동이 역시 좌우 양편에서 춤을 추며 들어온다.
화문석 북편엔 오방 처용이 나열해 섰고, 화문석 남쪽엔 꽃무동 네 명이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춘다. 그 밖으로 동기 열네명이 역시 음률에 맞추어 상긋상긋 웃으며
교태를 지어 춤을 추었다.
박이 또 한 번 울린다. 오방 처용이 동서남북 중앙 제자리에 서서 탈춤을 덩실덩실
추기 시작했다.
탈춤을 위시하여 무동들의 춤이며, 기생들이 추는 춤은 향악 가락에 서로서로
조화되면서 해음과 화음을 일으켜 일호의 차착이 없었다.
전하는 귀를 기울여 해조된 향악의 열두 가락과 율에 맞추어 늠실늠실 추는 춤의
멋이 한 덩어리가 되어 조화되는 것을 느꼈다.
마음 속으로 탄식했다.
'향악과 향무는 율의 조화가 소위 송, 명에서 건너왔다는 아악에 비할 바가 아니다.
훌륭한 가락과 춤이다. 썩은 선비들은 향악을 우습게 보지마는, 아악을 새로 정리하는
동시에 향악도 힘서 길러주어야 하겠다.'
전하는 이같이 생각하면서 늠실늠실 춤을 추는 처용들을 바라본다.
박이 또 한 번 울렸다. 율 가락이 변했다. 웅장했다. 우조다.
모든 무동과 기생들은 춤을 멈췄다.
오방 처용만이 늠실늠실 멋들어진 춤을 춘다. 기생들이 처용만기, 봉황음을 느린
조로 일제히 부른다.
신라성대 소성대
천하태평, 라후덕처용 아비
이시인생에 상불어하시관대
이시인생에 상불어사기관대,
삼재팔난이 일시 소멸하샀다.
어와 아비즈이여, 처용아비즈이여,
만두삽화 계오사, 기우러신 머리에
아으, 수명장원하사, 넘거신 이마에
산상 이슷(비슷), 길어신 눈닙(눈썹)에
애인상견하사, 오알어신 눈에
풍입영정하사,
우글어신 귀에
홍도화같이 붉어신 모양에
오향 마터사, 응긔어신 코에
아으, 천금 머그사,
어귀어신 입에
백옥 유리가티 히여신 이빨에
인찬복성하사, 미나거신 턱에
칠보 계우사 숙거신 어깨에
길경 계우사 늘의어신 사매 길에
설미 모도아 유덕하신 가삼에
복지구속하사 브르거신 배에
홍정(붉은 가죽띠) 계우사 굽거신 허리에
동락태평하사
길이신 하퇴에
아으, 계면도라사 넙거신 발에
누고 지어세니오, 누고 지어세니오,
바늘도 실도 없이
바늘도 실도 없이
처용아비를 누고 지어세니오.
마아만, 마아만하니어
십이제국이 모다 지어세온.
아으, 처용아비를 마아만하니어,
머자, 외야자, 녹이야, 빨리나
내 신고 할매야라,
아니 옷 매시면 나리어다 머즌말
동경 밝은 달에 새도록 노니다가
들어 내 자리를 보니
가랑이 네히로세라.
아으, 둘흔 내해어니와
둘흔 뉘해어니오.
이런저기 처용아비 옷보시면
열병신이야 회갓이로다.
천금을 주리어, 처용아바,
칠보를 주리어, 처용아바,
천금, 칠보도 말오,
열병신을, 날 자바주소서.
산이여 뫼이여 천리외에
처용아비를 이여러거져.
아으, 열병대신의 발원이ㅅ다.
이십여 명의 기생들은 탈박을 쓰고 으쓱 비쓱 멋들어지게 춤을 추는 오방 처용을
항하여 어깨를 으쓱거려 마주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여성인 기생들이 남성인 처용을 공경하고 예찬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탈박을 쓴
오방 처용도 모두 다 아름다운 기생들이다.
이 장면에 나타난 '처용가'는 신라 때 처용 자신이 노래한 처용노래가 아니다.
뒷세상에서 열병신을 추방하면서 처용의 모습을 가사로 묘사해서 예찬한 노래다.
박연이 전하께 아뢴다.
"이 '처용가'와 처용무는 신라 때 역신이 죄를 범한 자기를 죽이지 아니한 데
감동되어, 처용의 화상을 문 앞에 그려 붙인 곳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데서
기인이 되어, 신라 때부터 전해오는 역신을 쫓는 민속춤과 노래올시다. 본조에서도
해마다 섣달 그믐하루 전 오경때 구나를 하는 행사를 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습니다.
그 까닭에 처용이 직접 부른 노래와는 가사의 내용이 많이 다릅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한다.
"가사는 우리말이지만 어려운 한문문자가 많이 섞였다. 한문을 배우지 못한 우리
백성들 중에는 뜻도 모르면서 덮어놓고 입으로만 부르니 딱한 일이다. 말과 글이 서로
통해야만 한다. 우리글을 빨리 만들어야 하겠다."
전하는 탄식하며 말씀을 내린다.
박이 울렸다. 오행으로 대열을 이룬 회무 춤이 시작된다.
삼현 삼죽의 모든 관현악이 제각기 아름다운 화음을 내며 울렸다. 오방작대의
처용이 춤을 다시 춘다.
북편에 흑처용이 늠실늠실 춤을 춘다. 중앙에 황처용이 누른 옷을 입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남편에 적처용이 붉은 소맷자락을 올렸다 내렸다 멋들어지게 춤을 춘다.
세 사람의 처용이 일렬을 이루어 춤을 추고 동편에 청처용 한 사람, 서편에 백처용
한 사람이 동편과 서편에서 대무를 춘다.
오방 처용이 으쓱거려 춤을 추는 앞에 푸른 옷 붉은 치마 남치맛자락이 바람에
펄럭인다. 화관 족두리를 쓴 기생들이 둥글게 원을 그려 회무를 추기 시작한다.
절을 든 행수기생이 원무의 앞에 서서 춤을 추며 나가고, 다음엔 일산과 꽃가지를
든 기생들이 춤을 추며 나간다.
다음엔 이십여 명의 기생들이 화관 족두리에 눈같이 흰 한삼자락을 펄럭거려 장단에
맞추어 붉은 치마 남치맛자락을 맵시 있는 수혜로 가볍게 박차 나가고, 다음엔
향피리, 퉁소, 비파, 대금, 해금, 장구, 현금, 가야금, 월금, 방향, 아쟁, 대쟁,
교방고, 동발을 울리는 악사와 악공이 풍악을 잡히며 나가고, 다음엔 청학, 백학,
관음보살이 나가고, 또다시 연화꽃을 든 기생 수십 명이 뒤를 따랐다.
춤은 둥글게 원진을 이루어 풍악 소리와 함께 자지러졌다.
마치 만 떨기 붉고 푸르고 누른 꽃이 일시에 피어 둥글게 둥글에 움직이며 향과
빛을 뿜는 듯했다.
원진과 대를 이루어 멋들어지게 춤을 추고 있던 오방 처용들은 무척 흥이 난
모양이다.
중앙에 섰던 누른 옷 입은 탈박 쓴 황처용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만간들이 화초밭
같은 화려찬란한 원진 속으로 다리를 들었다 폈다하며 한몫을 같이 보자는 듯 춤을
추며 뛰어든다. 뒤를 이어 붉은 옷 입은 남방처용이 나도 한몫 보자고 늠실늠실
뛰어든다. 다음에는 북방에서 춤을 추던 검은 옷 입은 처용이 같은 자세로 원진
속으로 뛰어든다. 꽃가지를 든 기생들은 흰 이를 드러내 방싯방싯 웃으며 처용에게
자리를 열어준다. 푸른 옷의 동방처용과 흰 옷의 서방처용도 나도 한몫 같이하자고
뛰어든다.
풍악은 원진 속에서 걸어가면서 청청하게 울어대고, 울긋불긋 푸르고 누른 옷을
입은 기생들의 화사한 춤들은 음률 가락에 맞추어 묘기를 자랑해 보인다.
편전 아래 넓은 뜰에는 마치 만간의 움직이는 화단이 음악을 울리며 생동했다.
전하는 용안에 기쁜 빛이 가득했다. 박연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관습도감에서 무던히 교방 아이들을 가르쳤구나! 향악과 향무는 오히려 중국에서
왔다는 아악 종경의 음률보다 낫구나!"
박연이 아뢴다.
"향악과 향무는 어느 나라 악과 무에 견주어보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손색이
없을 뿐 아니오라 앞으로 악사와 무사들이 열을 올려 잘 지도만 한다면 천하 악계에
첫손을 꼽을 것입니다. 다만 정악인 아악만은 전하께오서 새로 제정하셔야 국가의
장중한 식전과 종묘대제 때 점잖게 아뢸 수 있습니다."
이때 큰북 소리와 구리방울, 동발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악사의 박이 딱딱 쳐졌다.
원무가 그쳐지고 풍악도 소리를 멈췄다.
사람의 두근 꽃밭이 풀려지면서 순식간에 일렬횡대로 질서있게 변했다.
전하의 계신 옥좌를 향하여 일제히 몸을 굽혀 배례를 올렸다.
전하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 악공과 여기들의 배례에 답을 주셨다.
또다시 큰북과 동발과 박이 일시에 울렸다.
일렬횡대는 다시 정방형의 대오로 변했다.
오방 처용 다섯 사람은 전반으로 물러서고, 방진에는 연꽃이 좌우편으로 갈려서
놓이고, 그 밖에는 청학, 백학이 자리를 잡고 섰다.
이윽고 또다시 풍악이 청아하게 아뢰어지면서 흰 옷을 입은 묘령의 관음보살이 일지
연화를 들고 의젓이 걸어 들어와 중앙 교의에 청초한 때깔로 앉았다. 마치 성처녀의
모습 같았다.
풍악은 다시 청초하게 일어났다.
동편에서 청학이 움직인다. 한 다리를 번쩍 들었다. 깃을 탁탁 쳤다. 펄쩍 뛰어
청련 쪽으로 달려들었다. 주둥이로 푸른 연꽃을 쪼기 시작했다.
서편에서도 백학이 움직였다. 역시 다리를 번쩍 들고 날개를 툭툭쳤다. 껑충 백련
쪽을 향해 뛰었다. 삐죽한 입부리로 흰 연꽃 봉오리르 ㄹ쪼았다.
청련, 백련의 꽃판이 뚝뚝 날아 떨어진다.
꽃잎에 다 떨어지면서 연꽃 속에서는 청의미인과 백의미인이 나타났다.
나이 어린 동기들이다.
중앙 교의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관음보살을 항하여 아장아장 걸어갔다. 두 여인은
관음보살에게 합장을 올리고 배를 했다.
이때 풍악은 더 한 번 청아한 가락을 울렸다.
관음보살은 한 가지 연화꽃으로 두 여인의 머리를 번갈아 애무해 주었다.
음률은 또 한 번 자지러지게 아뢰어진다. 청학과 백학은 깜짝 놀라 화문석 밖으로
날아가버린다. 이것이 학연화대의 놀이다.
정읍사
박연이 전하께 아뢴다.
"연화대와 처용탈춤은 신라의 화랑정신과 불교의 자비의 신념으로 혼합된 향가와
향무의 최고의 악과 춤이올시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한다.
"좋은 정신을 가진 악과 춤이다. 잘 육성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학연화대에
관음보살이 되어 나온 아이는 누구라 하느냐? 이름이 무엇이냐?"
경시주부 정양이 박연을 대신해서 아뢴다.
"관습도감 중에 나이는 어리나 기예가 그중 출중한 아이올시다. 이름은 취옥이라
합니다."
"거문고도 잘 뜯느냐?"
"음률에 정통합니다. 거문고, 비파, 가야금, 퉁소, 피리에 다 능통할 뿐 아니오라,
가무가 또한 절묘합니다. 지금 관습도감 안에서는 취옥이 위에 갈 아이가 없습니다.
그리하옵고 궁, 상, 각, 치, 우 다섯가지의 이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점두하셨다. 이때 악사는 다시 박을 쳤다.
박 소리에 응해서 악공 열여섯 사람이 동편 난간으로 어전에 올라 북받침 열여섯
대를 전상에 놓고 나간다.
박이 또 한 번 울렸다. 악공은 북방망이 열여섯 개를 역시 동편 난간으로 안고
들어와 북 앞에 놓고 나갔다.
박이 또 한 번 울렸다. 고수 열여섯 명과 무기 스무 명이 전상으로 올랐다. 열여섯
개 북방망이가 '두둥둥' 북을 울리기 시작했다.
기생 이십 명이 일제히 청을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춤과 노래가 북잡이의 북 장단에 맞추어 멋진 가락으로 삼부예술을 이루었다.
달하(달아) 높이곰(높이) 도다사(돋으사)
어긔야 머리곰(멀리)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저재 녀러(가시었나요)신고요
어긔야 즌데(진 곳)를 디디올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는 데 점그랄(빠지실)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이십 명 기생들은 열여섯 명의 고수들이 북을 울리는 장단에 맞추어 어깨를
으쓱거려 목을 뽑는다.
노랫소리는 청아해서 너무나도 맑고도 고왔다. 노랫가락과 북 장단과 멋들어진 춤은
한데 어울려 절묘했다.
달빛이 비치지 않는 한낮이건만 전각 안에는 달이 휘영청 밝아서 은빛 같은 달빛을
부어내리는 듯했다. 마치 기생들은 달빛 속에서 춤을 추는 듯하고, 북은 달빛 속에서
월광곡을 울리는 듯했다.
이중에 취옥이란 기생의춤과 노랫소리는 경시주부 정양이 전하께 아뢴 대로 뭇 닭
속의 학이요, 뭇 새중의 봉황조다.
노래와 춤과 북소리는 악사의 박소리와 함께 멈춰졌다.
박연이 전하께 아뢴다.
"이 노래는 신라에서 전해온 노래가 아니옵고 백제의 백성들이 애송하던 가사로서,
백제의 노래로서는 안타깝게도 다만 이 '정읍사' 한 곡이 남아 있을 뿐이올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지 아니한 것을, 다행히 전하께서 '고려사'를
고본대로 수정하라 하신 까닭에 새로 편찬한 '고려사 악지'의 고본에 의해서 이
가사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전하는 박연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크게 탄식하며 말씀한다.
"아깝구나! 백제 때 가사로는 '정읍사' 하나만이 전해진다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가사 이름만은 몇 개가 적혀 있습니다마는 내용은 전해지지 아니하니 가슴이 아픈
일이올시다."
"이름만 적혀 있다는 것은 어떤 것들이냐?"
"선운산, 무등산, 방등산, 지리산, 정읍이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정읍 이외에 네 가지 가사는 모두 다 인멸돼 전해지지 아니합니다."
"지금 '정읍사'의 가사를 들으니 순전한 우리 옛말인데... 우리 글자가 없는데
어떻게 '고려사 악지'에 적혀 있더란 말이냐? 이두로 씌어 있더냐?"
전하는 학에 대한 관심만이 깊을 뿐 아니다. 악과 가사에 대해서도 범연히 넘기지
아니했다.
박연이 다시 아뢴다.
"'정읍사'는 '고려사 악지'에는 이름만 적혀 있습니다마는, 다행이 기생들의 입으로
전해져서 오늘날까지 가사의 명맥을 전하고 있습니다. 정읍은 전주의 속현이올시다.
정읍에는 등짐장수의 행상이 많았습니다. 남편 되는 사람이 장사하러 나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니, 그 아내가 혹이나 남편이 진구렁에 빠져서 해를 당했을까
염려하여 조바심을 치면서 달밤에 산에 올라 이 노래를 불렀다 합니다. 그리하와
세상에서는 서민들이 망부석 노래라고도 합니다."
전하는 또다시 하문한다.
"고구려의 가사도 전해지는 것이 없구나!"
"그러하옵니다. '고려사 악지'에 다면 내원성, 연양, 명주의 세 곡이 있다 했을 뿐
역시 내용은 기록되지 아니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솔밭같이 섰을 때,
제각기 훌륭한 가곡이 있었으련만, 신라 향가만 겨우 이두문으로 몇 수가 전해 있을
뿐,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가사는 다만 백제의 '정읍사'만이 입으로 전해졌을
뿐입니다."
"고려 김부식이 한문 아닌 우리 속어는 기재할 수가 없다 해서 일체 싣지 아니했다
하니 가소로운 사대벽이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이 아니었던들 신라의 향가 몇
수도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어서 어서 우리글을 만들어야 하겠다!"
세종전하는 어느 때나 말씀 끝에는 '어서 어서 우리글을 만들어야 하겠다.'고
강조했다.
전하는 또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그러나 '정읍사'는 너무나 오래된 옛말이 되어서, 요사이 사람들이 입으로
부르면서도 그 뜻이 무슨 뜻인지 알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황공하옵니다마는 진정으로 아룁니다. 소신도 그 뜻은 대강 짐작합니다마는 자세히
풀이하라면 막히는 구절이 많습니다."
박연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전하도 옥음을 높이하여 껄걸 웃으시며 말씀한다.
"나 역시 경과 매일반이다. 알 듯하면서 도 모를 곳이 있다. 하하하, 누가 아는
사람이 있다면 자세히 풀이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전하의 말씀을 듣자, 옆에 모시어 섰는 배신들도 어전이라 감히 소리를 내어 웃지는
못하나 입가엔 미소를 머금었다.
경시주부 정양이 아뢴다.
"기녀 중에 뜻을 풀이할 줄 아는 아이가 한 사람 있습니다."
전하는 의외라고 생각하셨다.
"기녀 중에 뜻을 풀이하는 아이가 있다? 희한하구나! 누구란 말이냐?"
"아까, 학연화대와 처용무 정재를 아뢸 때 일지 연화를 들고 관음보살이 되었던
취옥이가 제법 뜻을 풀이할 줄 압니다."
"그렇다면 그애를 가까이 오게 하라."
경시주부 정양은 전각 아래 난간으로 내려가 관습도감 행수기생에게 취옥을 전하께
배알시키라고 지휘했다.
취옥은 뜻밖이었다. 일대의 광영이었다. 옷깃을 매만지고 매무새를 바로잡았다.
향수기생에게 인도되어 사뿐사뿐 층계를 밟고 전상에 올라 어전으로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겼다.
"관습도감 기 취옥이 알현이오."
행수기생이 목소리를 곱게 가다듬어 옥좌를 향하여 아뢰었다.
취옥은 행수기생의 아뢰는 말이 끝나자 장지밖에서 손을 모아 큰 절을 네 번
올렸다.
전하의 시선과 배신들의 눈길이 함빡 취옥의 큰절을 드리는 곳으로 향했다.
나이는 열팔구 세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큰절을 올릴 때마다 화관 족두리에 달린
자그마한 금나비 한 쌍이 바르르 떨었다. 좁쌀같이 잘디잔 진주 구슬과 산호
구슬알들이 춤을 추는 금나비와 함께 황금빛, 진주빛, 산호빛이 서로 빛깔의 조화를
이루어 푸른 금삼, 붉은 금박 띠와 함께 오색이 눈을 현란케 했다.
취옥은 큰절을 네 번 드리자, 다시 뒷걸음을 곱게 걸어 장지문 밖으로 나가, 한삼
속에 손을 넣고, 눈을 내리깔아 조신하게 서 있었다.
전하는 눈을 들어 취옥의 큰절을 받으며 일거일동을 유심하게 바라보신다.
밝은 눈매, 붉은 입술에 콧날이 오뚝 섰다. 비둘기 알같이 갸름하고 둥근, 아름답고
총기 있는 얼굴판이다. 허리는 한줌인 듯 가늘었다. 까만 눈동자가 반짝했다. 재치
있어 보였다.
전하는 옥음을 내린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취옥은 사양할 길이 없었다. 고개를 다소곳 숙이고 치맛자락을 왼손으로 휘어잡아
사뿐사뿐 걸었다. 비단치마 끌리는 소리가 사각사각 일어났다. 다시 두 손을 모아
어전 가까이 시립했다. 전하는 봉안을 굴려 한동안 취옥을 바라보다가 말씀을 내린다.
"네가 아까 학연화대 정재 때 관음보살로 나왔던 여악이냐?"
전하는 기생일망정 인간을 존중하게 생각했다. '기생이냐?'하고 묻지 아니하고
'여악이냐?'하고 물었다.
"네, 그러합니다."
취옥은 불그스름한 두 볼에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아까 '정읍사'도 네가 선소리를 주어서 가락을 메긴 줄 아는데..."
"네, 그리 했소이다."
"'정읍사'를 메기는 네 목이 매우 곱다고 생각했다."
취옥은 몸을 굽혀 국궁하고 아뢴다.
"황공하기 그지없사옵니다."
전하는 취옥에게 다시 말씀을 내린다.
"'정읍사' 노래는 순전히 우리말로 된 가사다마는, 천 년 전 옛말이 되어서 그 뜻을
알아듣기 극히 어렵다. 네가 그 뜻을 알고 노래를 불렀느냐?"
취옥이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대답해 아뢴다.
"황공하오이다. 선생한테 배워서, 그 뜻을 약간 풀이해보았습니다마는, 정확하게
알았는지 쇤네도 모르겠습니다. 선생 역시 고로들에게 전해 듣고 쇤네에게 풀이를
해준 것입니다."
전하는 선생에게 '정읍사'의 풀이를 배웠다는 취옥의 아뢰는 말을 듣자 귀가
번쩍했다.
"너의 선생은 어디 있느냐?"
"'정읍사'의 본고장인 정읍에 살았습니다마는, 연만해서 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하는 탄식한다.
"허허, 아깝구나. 살았더라면 내가 풀이를 해달라고 할 것을. 그렇다면 네 고향도
정읍이냐?"
"네, 그러합니다. 그 까달게 '정읍사' 가사를 선생한테 많이 익혔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아는 대로 한 번 풀이를 해보아라."
취옥은 입가에 방실 웃음을 띠고 아뢴다.
"선생한테 알기 쉽게 노래로 풀이해서 배웠습니다. 주변 없는 말씀으로 풀이해
올리는 것보다, 선생한테 배운 대로 노래로 풀이해 올리겠습니다. 상감마마께오서
윤허하신다면 배운 대로 풀이를 해보겠습니다."
전하는 흥취있게 생각했다.
"그것 더욱 좋구나! 노래로 풀이를 한다면 삼현 삼죽을 다 불러들여야 하겠구나."
"아니올시다. 음의 장단을 맞춰주는 고수 한 명만 배치해주시면 좋습니다."
전하는 경시주부 정양에게 분부한다.
"그렇다면 고수 한 명을 전상으로 불러 올려라."
정양은 전하의 분부를 받들었다. 이윽고 붉은 악복을 입은 고수 한 명이 북과
북채를 들고 전상으로 올라 어전 지척에 북을 놓았다.
"자아, 풀이한 노래를 시작해보아라."
전하는 친히 지휘를 내렸다.
취옥은 자리를 옮겨 곱게 일어섰다. 고수에게 눈짓을 했다.
북이 '둥둥' 울렸다. 취옥은 목을 가볍게 가다듬었다.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달아 높이 돋으시어
어긔야 멀리 비추어주소서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저자에 가시었나요
어긔야 진 데를 밟으실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어느 곳에 노시다가
어긔야 냇물에 빠지실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취옥은 북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맑은 노래와 묘한 춤은 전상에
전하를 모신 모든 시신들의 마음을 여지없이 도취시켜버렸다.
전하도 취옥을 귀엽게 보셨다. 은근히 봉안을 들어 미소를 보내셨다.
고수는 마지막 변죽을 북방망이로 '두둥둥' 울리고 방망이를 놓았다.
취옥의 노래와 춤도 북 장단과 함께 멈춰졌다.
고수는 자리를 떠서 물러가고, 취옥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바로잡은 후에 전하의
옥좌를 향하여 배를 드린 후에 치마꼬리를 휩싸안고 뒷걸음을 쳐 물러간다.
"게 있거라. 이제 네 선생이 요새 말로 풀이해준 네 노래를 들으니, 비로소 이
노래를 지어서 부른, 돌아오지 ㅇ는 남편을 향하여 안타까워했던 그 여인의 간절한
심정을 짐작해 알겠다. 네 선생이 살아있었던들 향악에 대해서 여러 가지 물어볼 일이
많았을 텐데,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니 아쉬운 마음 간절하다."
취옥은 영리했다. 관습도감인 교방에서 훌륭한 교양을 많이 받았다. 이런 때는 어른
앞에서 함부로 말을 많이 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공하오이다."
한 마디를 올리고 화관 쓴 머리를 다소곳 숙여 조용히 섰다.
새침한 조선적 여인미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청초하게 흘렀다.
전하는 바라보시며 더욱 귀엽게 생각했다.
취옥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정읍사' 첫 연에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고 한 '머리곰'을 무슨 뜻인지
몰랐더니 네가 풀이한 노래를 듣고보니, 과연 '멀리'란 뜻이 옳고, '저재
녀러신고요'한 '녀려'의 뜻도 '간다'는 뜻이 옳다. '천자문'에도 행을 '녈행'이라고
읽는다. 그리고 둘째 연 둘째 구에, '즌데를 디디올세라'했으니 셋째 연 둘째 가락에
'내 가는 데 점그랄세라'는 네가 풀이해 노래한 대로 '냇물에 빠지실세라'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한자의 침자를 '잠길침'이라 읽지 않느냐? 멀리 간 남편이 돌아올 때가
되어도 오지 아니하니 '행여나 진구렁에나 빠지지 아니했나? 냇물에나 빠지지
아니했나?' 하고 초조하게 지내면서 산에 올라 바라보는 그 여인의 모습이 눈에 환히
보이는 듯하구나!"
취옥은 두 손길을 마주잡은 채 고개를 숙여 미소를 지어 전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을 뿐 말씀 대꾸를 아니한다.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가 아뢴다.
"그러하오이다. 여악이 풀이한 노래가 맞습니다. 전하께서 하교하신 대로 행자는
간다는 뜻이고, 침자는 '점기다', '잠기다' 이같이 읽습니다."
전하는 다시 취옥을 향하여 물으신다.
"노래 끝마다 나오는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란 말은 너희 선생이 무슨
뜻이라 하더냐?"
취옥은 여전히 머리를 다소곳 숙인 채 미소를 짓고 대답해 아뢴다.
"아무 뜻이 없이 본 노래를 흥취 있게 도와주는 말이라 들었습니다."
"옳다, 분명하다. 후렴이로구나."
박연이 아뢴다.
"그것은 마치 같으 ㄴ고려가사 '청산별곡'의 끝절마다 '얄리얄리 얄랑성, 얄라리
얄라'와 동동 노래에 끝마나 나오는 '아으 동동다리'와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경시주부 정양 아뢴다.
"지금도 민간에는 동동 노래가 전해옵니다. 귀여운 어린 것을 안고 얼려줄 때도
'둥둥 둥게야, 둥게 둥게 둥게야' 하고 불러줍니다. 모두 다 아무 뜻 없이 흥을 돕는
후렴이올시다."
거서가 해주에 나고
전하는 모든 배신들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오늘은 좋은 모임을 가져서 과인의 마음이 매우 유쾌하다. 나라를 다르시는 데
예와 악은 백성을 기르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경들은 과인을 도와 국가의
정악인 아악을 새로 제정하려니와 좋은 향악은 관습도감인 교방에서 더욱 육성시켜서
수천 년 내려오는 우리의 문화를 인멸시키지 말도록 하라."
"삼가 성지를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영의정 황희는 군신을 대표하여 아뢰고 어전에서 물러난다. 모든 신하들도 영의정의
뒤를 따랐다.
기생 취옥도 전하께 하직인사를 아뢴 후에 전 아래로 내려가 악사와 악공과
동료들과 함께 관습도감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전하는 승지를 불러 분부를 내렸다.
"봉상시 판관 박연을 불차탁용해서 관습도감 제조에 임명하라."
불차탁용이란 등급을 뛰어서 차서를 밟지 아니하고 발탁해서 쓰는 것이다. 전하는
박연이 악리에 달통한 것을 아시자 일약 관습도감 제조에 임명하신 것이다.
승지는 명을 받들어 교지를 곧 봉상시 판관 박연에게 전달했다.
제조란 관습도감을 통솔하는 당상관으로 관습도감의 최고의 자리다.
박연은 교지를 받들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왕의 은총이 높고 높은 것을 가지가지 느꼈다. 감격한 눈물이 글썽거렸다.
사람을 알아주고 믿어주는 데 마음이 감동된 진정한 눈물이었다.
박연은 집으로 돌아가 뿔관자를 떼고 옥관자를 망건편자에 달았다.
관디에 달았던 단학흉배를 떼고, 당상관이 관복 앞가슴과 등에 다는 쌍학흉배를
달았다.
사은 숙배를 드리기 위하여 곧 예궐했다. 정원에 들어가 전하께 알현할 것을
의뢰했다.
전하는 지체없이 박연을 인견하셨다.
박연은 전하께 네 번 절하여 숙배를 한 후에 국궁하여 아뢴다.
"왕은이 융숭하사 아무것도 모르는 미신에게 관습도감 제조의 임무를 하명하시니
황공 감격한 마음 이길 길 없소이다. 분골쇄신해서 관습도감의 모든 일을
바로잡겠습니다."
전하는 용안에 기쁜 빛을 띠고 말씀한다.
"조정에 악리를 아는 사람은 다만 경 한 사람뿐이다. 경은 전심 연구하여 나라의
독특한 아악을 제작하라."
박연이 아뢴다.
"먼저 소신이 하올 일은 교방의 악사와 악공이며 여악들에게 후한 녹봉을 주어
그들의 생활을 보장해주면서 악에 대한 원리와 실기를 연마하고 발양시키는 한편,
전하께서 항상 미흡하게 생각하시는 정악의 종경을 새로 조성해서 가와 악이
혼연일치되는 경지에까지 이르도록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악사들의 생활을 보장하는
일은 전하께오서 호조에 하명만 하신다면 가능한 일이올시다마는, 송과 명의 종경보다
더 훌륭한 악기를 조성하기는 어려운 일이올시다."
전하는 웃으며 박연이 아뢰는 말씀에 대답하신다.
"사람대접를 박하게 하면서 좋은 수확을 거두라고 할 수는 없다. 악사들도 처자식이
있는 사람들이다. 가족의 생활을 보장해서 후고의 염려가 없도록 한 연후에 비로소
전심전력을 다해서 훌륭한 악을 창조할 것 아닌가? 요사이 악사와 악공의대우가
너무나 박하다는 것은 과인도 잘 알고 있다. 호조에 명을 내려서 그들의 가족의
생활을 보장사키도록 하리라. 다음, 경이 말한 아악에 사용할 종경에 대해서는 경과
과인이 중지를 모아 화음이 나도록 악기를 새로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천하의 만
가지 일이 사람이 해서 되지 않는 법은 없다. 정성과 끈기가 없어서 항상 일을
시작했다가 귀찮다고 내던지는 바람에 일은 와해가 되어버리고 만다. 정성을 다하면
쇠와 돌도 녹인다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주 시대에 마련되었던 아악이 진, 한, 진,
수, 당, 송, 원, 명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민멸되어 정통을 이루지 못하였다.
우리도 하면 된다. 우리는 왜 주공만큼 아악을 창조치 못할 까닭이 있는가. 노력만
하면 될 것이다. 우리는 일심을 다하여 악을 창조하기로 하자!"
전하의 용안엔 패기가 넘쳤다.
박연은 성주를 만나서 자기의 평생 소원인 악을 바로잡게 되는 날이 시작되는 것이
크게 기뻤다.
"전하께오사 악사와 악공들의 생활을 보장해서 후고의 염려가 없도록 하겠다고
하교하시고, 기어코 아악을 예법에 의하여 다시 창조하시겠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시니, 악사들의 사기는 더욱 진작이 될 것입니다. 미신도 성상의 크신 뜻을
받들어 기어코 창악의 굄돌이 되겠습니다."
박연은 말을 마치자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서 전하께 받들어 올렸다.
전하는 어수로 친히 책을 받으시며 하문한다.
"무슨 책인가?"
"일전에 아뢴 바 있는 채씨의 '율려신서'올시다. 한 번시겠다 하셨삽기, 집에
두었던 책을 바치옵니다."
"집현전과 예문관에도 없는 것을 경이 좋이 간직하고 있었다. 나의 음악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 번 읽어보리라."
전하는 기쁘게 '율려신서'를 받으셨다.
박연은 책을 바친 후에 다시 아뢴다.
"소신은 이제 관습도감으로 나가서 전하의 성지를 악사와 악공들에게 전달하고
악리에 대하여 전심하겠습니다."
"그리 하라. 과인 역시 악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보리라!"
전하는 박연의 물러가는 것을 허락했다.
박연은 사은을 마친 후에 부풀어오르는 크나큰 희망을 가득 품고 관습도감으로
돌아간다.
박연이 물러간 후에 전하는 승지를 불러 호조판서의 입시를 명했다.
호판은 전하의 별안간 부르시는 소명을 받고 급히 예궐해 어전에 배알했다.
전하는 호판에 분부한다.
"우리 나라 악사와 악공에 대한 대우가 너무나 녹봉이 박하다. 이제부터 나라의
정악을 바로잡아서 크게 예악 문물을 발양시켜야 하겠다. 악사와 악공들의 녹봉이
얼마나 되느냐?"
"악사의 녹봉은 보통 서리의 녹봉과 같사옵고, 악공들은 훨씬 그 아래올시다."
"말이 되느냐. 악사는 서리 이상의 녹봉을 주고, 악공은 서리와 동등하게
대우하라."
호조판서는 명을 받들고 나갔다.
호조판서는 어명을 받들어 악사와 악공들의 녹봉을 높이는 일을 관습도감에
기별했다.
악사와 악공들의 기뻐하는 모습은 형언할 길이 없었다. 도감의 사기는 부쩍 올랐다.
한편 전하는 박연에게서 채씨 '율려신서'를 받은 후에 밤을 도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박연이 아뢴 대로 악을 구성하는 고저장단의 음의 배치와 종경의 열두 가락은
강론한 이론이 정밀하고 법도가 있었다.
전하는 세 번 네 번 읽으며 탄식했다.
이튿날 전하는 승지에게 경연 자리를 마련하라 했다.
경연은 근정전 북편에 있는 사정전에 마련되었다.
이번 경연관으로 명소를 받은 사람들은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관습도감 제조 박연, 경시주부 정양,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찬성
허주, 총제 정초, 신상, 권진들이었다.
전하는 모든 신하를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오늘 경연을 연 것은 유학을 토론하기 위하여 연 것이 아니라 국가의 예악을
상정하기 위하여 대신 이하 악에 대하여 조예가 있는 이들을 명소한 것이다. 경들은
오늘 과인이 연 경연의 특별한 뜻을 알아주기 바란다."
모든 신하들은 오늘 개최되는 경연의 뜻을 비로소 알았다.
모두 다 귀를 기울여 전하의 말씀을 경건하게 듣는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옛 선각들이 저술한 악에 대한 서론을 읽어보니 과연 탄복할 만한 심오한
천지조화의 이치를 가진 것이 음악이다. 과인이 친히 악서를 읽어서 공부해보니,
나라의 지도자로서 반드시 나라의 정악을 창조해야만 하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다.
임금된 자가 이 일을 성취해놓지 못한다면 임금될 자격이 없다!"
전하의 봉안에는 패기와 열기가 역력히 드러났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악서에 말하기를,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나서 살게 된다. 생활을 하니 정이
있어 유정한 사람이 되고 정이 발해서 소리가 된다 한다. 그럴 듯한 논리다. 그
소리는 무엇을 응해서 일어나는가? 대자연인 하늘 기운의 오분과 대지의 기운 오분이
합해서 십합이 되어 중앙의 흙, 곧 토성을 내는 관이 된다 한다. 진실로 오묘한
학설이다."
박연이 아뢴다.
"그러합니다. 요사이 음악과 악을 모르는 사람들은 사람이 흥이 나서 장단을
두드리면 그대로 음악이 되고 노래가 되는 줄 압니다마는 사람의 말하는 고저장단의
소리도 모두 다 대자연과 합하는 천, 지, 인 세 물체의 조화로 금목수화토 오행으로
이룩된 것이올시다."
전하는 악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시자 신명이 도도하게 일어났다.
"박연은 과인보다도 악에 대하여 연구가 더 깊은 사람이니 경에게는 묻지
아니하리라.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테니 경은 잠자코 있으라."
말씀을 마치자 전하는 쾌활하게 웃으셨다. 모든 신하들도 일제히 웃지 아니할 수
없었다. 경연 자리엔 화기가 가득했다.
전하는 용안에 웃음을 머금고 영의정 황희한테 물으신다.
"궁, 상, 각, 치, 우의 오음은 천지와 조화를 이룬 오행에서 발생되어 다섯 가지
음계를 이루어 중앙토는 궁성이 되었거니와, 상성은 천과 지가 어떤 정도로 결합되어
소리를 내게 되었는가? 영의정은 한 번 대답해보라."
황희는 웃음을 머금고 아뢴다.
"소신은 왕은이 융숭하시어 영상의 대배를 받자왔으나 악리에 대해서는
무식하옵니다. 다만 상성은 서방에 속하니 가을 소리를 내는 줄 알 뿐이올시다."
황희는 순박한 인후장자였다. 솔직하게 꾸밈 없이 대답했다.
전하는 옥음을 높여 쾌활하게 웃으며 말씀한다.
"상성은 가을 소리라 하니, 그만하면 급제라 하겠소. 영상도 악에 대해서는 유식한
편이오. 과인도 더 이상은 몰랐는데, 채씨 '율려신서'에 의해서 큰 공부를 했소이다.
궁성은 천의 오와 지의 오, 곧 십이 합해서 중앙 토성이 되었거니와, 상성은 하늘의
다섯과 땅의 넷, 곧 구가 합해서 금기를 서방에 이룩해서 상성이 되었다 하오.
그러므로 상성은 궁성보다 약하고 애조를 띠었다 할 수 있소."
모든 신하들은 함께 놀랐다. 전하의 악학 공부가 이같이 심오한 줄은 전혀 몰랐다.
서로들 눈짓을 해 감탄한다.
좌의정 맹사성이 전하께 묻는다.
"신은 선비가 하는 짓이라 해서 거문고를 타는 체했습니다만, 악의 이치가 이같이
천지조화로 어울려 일어나는 것인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각성으 ㄴ천지의
어떠한 수치로 구성되었습니까?"
전하는 막힘없이 대답하신다.
"과인도 생이지지한 것은 아니오. 악서에 의하면 하늘의 삼분과 땅의 오분이 합해서
팔이 되어 목기가 동방에 생기니 이것이 곧 각성이 된다 하오. 각성은 나무치는
소리라 대자연과 음향의 관계가 이같이 신묘하구려... 좌상은 거문고를 타면서 이
이치를 음미해 보시오."
박연과 정양 두 사람은 악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 전하의 일람첩기로 악철학에
달통하신 데 대하여 마음 속으로 감탄하기를 마지아니한다.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가 아뢴다.
"신도 악에 대해서는 알려고 노력했습니다마는, 오늘 비로소 전하께 배운 바가
많습니다. 그러하오면 치와 천지간의 관계는 어찌되는지 하교를 내려주옵소서."
전하는 미소를 짓고 대답한다.
"하늘의 칠분과 땅의 이분, 곧 구분이 합해서 남방의 화가 되어 그 소리가 치가
된다 한다. 그럴 듯한 이론이다."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이 아뢴다.
"궁, 상, 각, 치 사음에 대한 원리를 잘 알았습니다. 나머지 우에 대하여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전하는 더한층 신명이 났다. 유사눌을 향하여 옥음을 내린다.
"우의 소리는 하늘의 일분과 대지의 육분이 합해서 칠분이 되어 북방의 수기가 되어
우성이 되었다 한다. 이리하여 다섯 가지 오음은 금, 목, 수, 화, 토 오행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이 확실하다."
"이제 천지오행과 오음과의 관계를 대강 짐작했습니다."
예문관 대제학이 감탄하여 아뢰었다.
전하는 박연을 향하여 하문한다.
"과인은 창졸간에 악서공부를하여 음이 오행에 관계되는 것을 짐작했거니와, 다섯
가지 음의 특징이 어떠한 것인지는 아직 연구해보지 못했다. 경은 아는 대로 그
특징을 말해보아라."
박연이 자리를 사양하며 겸손하게 아뢴다.
"신이 감히 무슨 악리를 잘 안다고 성상전하와 여러 대신들 앞에서 주제넘게 아는
체하고 아뢰겠습니까. 면해주시기 바랍니다."
전하는 정색하고 말씀한다.
"오늘은 공부하는 경연 자리다. 임금과 신하와 대신과 막료의 구별이 있을 까닭이
없다. 바른 말과 옳은 일로 학문을 연구하는 자리다. 사양치 말고 오음의 특징을
말해다오!"
박연은 하는 수 없었다. 자기의 지식을 털어놓는다.
"궁은 중앙에 있으나 군왕의 기상이올시다. 상성, 각성, 치성, 우성을 화창케하여
통솔하게 되니 사성의 벼리가 되는 것이올시다. 음의 성정은 모지지 않고 원만합니다.
그 소리는 마치 소가 굴 속에서 우렁차게 우는 듯라며 그 소리가 웅장하고
홍대합니다. 마치 임금이 만조백관의 신하들을 거느리는 듯한 기상이올시다. 그
가락이 화하면 나라가 태평하고, 그 가라기 격하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
세종대왕은 박연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용안에 숙연한 빛을 띠고 탄식조로
말씀한다.
"국가에 유행하는 음악 한 가지로 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렸구나!"
"그렇습니다. 임금인 지도자가 방탕하니 백성이 방탕하고 음악이 난맥을 이룹니다.
임금이 근검하면 백성이 근검하고, 백성이 근검하면 음악도 정기를 가지게 됩니다."
"과연 지도자가 되는 임금 노릇 가기가 이같이 어렵구나!"
전하는 또 한 번 탄식하며 다시 묻는다.
"다음은 상에 대해서 성격을 말하여라."
"상성의 성격은 모집니다. 소리는 장장 쟁쟁해서 쇳소리, 돌소리가 납니다. 마치
양이 무리 속에서 떨어져서 홀로 우는 듯하지요. 그러하니 법을 맡은 법관의
기상이올시다. 가락이 고르게 일어나면 형옥을 일으키지 아니해도 위령이 서고,
가락이 어지러우면 기강이 무너져서, 관을 불신하게 됩니다."
"다음 각에 대해서 말해보아라."
"각은 물건에 부딛쳐서 일어나는 소리올시다. 그 성정이 강직하고, 그 음향은 마치
닭이 나무를 쪼는 듯한 소리가 납니다. 홰를 쳐서 잘 울게 되면 그 소리가
악악확확해서 족히 큰 사업을 이룩하여 민생이 태평할 수 있고, 가락이 황란하면
민원이 창천하게 됩니다."
전하는 다시 박연에게 물으신다.
"그러면 다음엔 치와 우에 대한 음의 성격을 설명하라."
박연이 지체치 않고 아뢴다.
"치의 음정은 한 마디로 말씀해서 복스럽다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만물이 성대하고
번화해서 그 정이 명랑하니 마치 돼지가 어린 새끼를 등에 업고 희희낙락하게
꿀꿀거리며 소리치는 형국이올시다. 가락이 조화되면 백 가지 일이 잘 다스려지고,
조율이 어지러우면 모든 공적이 수포로 돌아가버립니다."
"우조에 대하여 말해보라."
"우의 음정은 윤택하면서 그 소리는 마치 천리준마가 평원광야로 '어흥'소리를 치며
뛰닫는 듯합니다. 가락이 화하게 나타나면 국가의 백곡이 창고에 가득차고, 그 가락이
난맥을 이루면 백성들은 굶주림을 면치 못합니다."
오음의 성정과 음정이며 가락의 화와 난을 강론받는 전하는, 음악은 실로 천지와
인간의 조화로 이룩되어 국가의 흥망성쇠와 치란득실에 크게 관계되는 것을 깨달았다.
전하는 모든 시신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한다.
"사람이 즐거우면 덮어놓고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고 장단을 맞추는 것으로만
알았더니, 이같이 천지조화 속에 인간이 한몫을 보면서 국가의 흥망성쇠에까지 그
영향이 크게 미치는 거임을 과인은 오늘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예적 선철이 나라를
건국하는 초창기에 있어서 제례작악을 해서 백성들이 행해야 할 예의를 정돈하고
백성들이 즐거워할 음악을 창조한 것은 모두다 까닭이 있는 일이다. 나라가 망하게 될
때 백성들의 부르는 노래가 황음하고, 나라가 흥했을 때 그 노래가 화창한 것은
천고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그러나 우리들 지도자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결코 음과 악이 황하고 어지럽고 격해서 그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다. 죄는 황란한 음악에 있지 않고, 황음무도한 지도자한테 그 원인이 있다 할
것이다. 서민의 행동과 나라의 풍조는 지도하는 사람들을 따라가는 법이다. 임금이
황란하니 대신이 황란하고, 대신이 탐포하니 백관이 부정부패하여 황란한 짓을
감행하고, 백관이 그 꼴이 되니 황란한 음악을 좋아해서 창녀들은 백관의 비위를
맞춰서 난잡한 노래와 춤을 추니 국가의 풍속에 이러한 악풍조에 휩쓸려서 결국 온
나라가 위태롭게 되고 결딴이 나는 법이다. 임금된 자와 보필하는 신하들은 다 함께
명심해서 어진 정치와 화기 가득한 문화와 심오한 학술을 창조하여 백성들을 지도해야
하겠다. 경들은 명심하라!"
전하의 말씀은 엄숙하고 장중했다.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오늘 경연은 성리학을 강론하는 자리보다 더 크나큰 수확을 얻었습니다. 신도 악의
묘리가 이같이 국가 흥망성쇠에 크게 영향이 미치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삼가 앞으로 전하께오서 정악을 창조하시는 데 극진히 보필하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좋다! 아악을 창조하는 데 영의정 이하 모든 백관들의 보필을 바란다."
말씀을 마치자 이날의 경연은 끝났다.
다음날 전하는 승지를 어전에 불러 분부를 내린다.
"나라가 있으면 국민이 있고, 국민이 있으면 그들을 옳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교화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교화를 백성들에게 침윤시켜서 순퓽미속을 질서있게
유지시키는 데는 예와 악이 가장 그 근본이 되는 것이다. 나는 과감하게 예악을
바로잡아서 민심을 진과 선과 미의 길로 인도하려고 결심했다. 이것은 국가를
통솔하는 왕자의 책임이다. 나 혼자 이 거창한 일을 하려하나 힘이 벅차서 되지
아니한다. 여기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이를 선택해서 마치 예문관과 집현전을
설치하여 문학에 전심 연구하듯 악에 대하여ㅛ 전문으로 연구할 곳을 마련해줄
작정이다. 너의 뜻이 어떠하냐?"
전하는 당신의 명령을 전달시키는 승지와 대언에까지도 항상 의견을 물어보는
아름다운 성격을 가졌다.
어려서부터 글을 배울 때, 불치하문이란 말이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준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왕의 최고 지위에 있으면서도 항상 아랫사람들에게 행정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전하의 하문을 받은 승지는 감격했다. 제왕이 되어 백성들을 순화시키기 위하여
따로 연구하는 기관을 설치하겠다는 말씀은 가장 적절한 의사라 생각했다.
"명철하옵신 분부올시다. 정악을 창조하자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닌가 합니다.
전심으로 연구하는 기관을 두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아악을 창제하는 일도 크지마는, 수천 년 전해오는 향악도 바로잡아서 난잡한
노래는 버리게 하고 아름다운 가사를 좋은 곡에 올려서 화한 기운이 한 나라에
가득하도록 정리해야 하겠다. 먼저 구악을 이정시키는 도감을 두고 또다시
의례상정소를 설치하여 소임을 배정시키도록 하여라."
승지는 명을 받들고 다시 아뢴다.
"구악 이정도감에는 누구누구를 배속시키고, 의례상정소에는 누구누구를
배치시킬는지 하교를 내려주시옵소서."
전하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분부한다.
"의례상정소에는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찬성 허조, 총제 정초, 신상,
권진으로 제조를 삼아 의례를 상정하게 하고, 구악이정도감에는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관습도감 제조 박연, 경시주부 정양으로 소임을
겸임시켜서 구악을 정리하고 아악을 창제하는 임무를 맡게 하라."
승지는 어명을 받들고 곧 정원으로 나가 어명에 의하여 집현전 옆에 의례상정소를
설치하고, 관습도감 안에는 구악이정도감을 두게 했다. 일변 전하께서 지명한 대신과
대제학들에게는 맡은 바 임무를 전달했다.
빈청에만 모여서 정사를 살피던 대신들은 정사가 끝나면 의례상정소에 나가
밤늦도록 의례를 심정하고, 집현전과 예문관 대제학들은 날마다 관습도감으로 나가서
박연, 정양과 함께 악에 대한 연구를 강론했다.
전하 또한, 특별히 관습도감에 분부해서 거문고와 가야금과 비파며 대금, 중금,
소금 등 삼현 삼죽을 편전에 배치시켰다. 친히 악서를 보고 악을 연구하려는
의도였다.
전하는 구악이정도감과 의례상정소를 설치한 후에 항상 오음에 율관을 조화시켜서
십이율을 창제하려고 노력했다.
십이율, 곧 열두 가락의 화성을 내는 율은 먼저 황종률을 측정해 놓아야만 열두
가락의 음조가 맞아 들어가는 것이다. 황종은 율의 시작이 되는 때문이다. 먼저
황종을 정해놔야만 십이율이 조화를 이루는 때문이다. 그러나 황종의 율관을 측정할
표준이 없었다. 박연은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연구에 연구를 더했다. 그러나 얼른 효력을 얻지 못했다.
세종전하도 관심이 컸다. 박연을 명소하여 경과를 하문했다.
"그 동안 황종에 대하여 측정할 희망이 있는가?"
"황공하오나 아직도 성취를 못했습니다."
전하도 갑갑증이 났다.
"도대체 황종이란 무엇인가? 두드리는 종소린가?"
박연이 아뢴다.
"황종이란 십이율 중에 처음 시작되는 율관의 명칭이올시다. 십이율이란 양이 여섯
가락이요, 음이 여섯 가락이 되어 십이율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천지조화와
음향오행으로 율이 이룩되는 것이라 합니다."
전하는 더한층 갑갑하게 생각했다.
"황종률을 측정해서 똑바른 음을 내기가 어렵다면 고대에서는 어떻게 황종을
조성했더란 말인가?"
박연이 다시 아뢴다.
"옛글을 참고해보면, 주공은 태란 땅에서 거서를 얻어서 이것으로 율관을 측정해서
가장 아름다운 화음을 내게 했고, 그 후에 한 시대에서는 임성이란 땅에서 거서가
나서 겨우 옛 음절에 근사했고, 수 시대에 와서는 양두산 기장을 구해다가 율관을
만들었으나 소리가 해조를 이루지 못했고, 송 시대에는 경성의 거서를 따서 율을
맞추려 했으나 역시 난조를 이루어 악이 불성모양이 되었다 합니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아무리 거서로 촌과 분을 마련해서 율관을 만든다 하나 야무진 거서를
구하기 전에는 훌륭한 정악을 제작하기 과연 어렵습니다. 이것은 묘한 이치올시다."
박연은 아뢰기를 다하자 가슴이 답답했다. 한숨을 짓는다.
전하도 위연히 탄식하며 말씀한다.
"거서란 것은 검은 기장쌀이 아닌가?"
"그러하오이다. 검은 기장이올시다."
"우리 나라에 검은 기장이 그렇게 귀하단 말인가?"
"기장이 있기는 있습니다마는 극히 귀합니다. 남도의 쌀은 광택이 나면서 비대하고,
경기의 쌀은 수척하고 알이 작습니다. 더구나 동북면으로 가면 가늘고 윤택하지
못합니다. 이러하니 쌀과 마찬가지로 거서가 혹시 있다 해도 크고 작은 차이가 심해서
율관을 제작하는 데 치수를 맞추기 극히 곤란합니다."
전하는 박연에게 분부한다.
"중국의 아악은 주공이 태 지방에서 채취한 거서를 가져서 제일 가는 황종률을
제작했다 하니, 우리 나라에도 혹시 그와 같은 거서가 있을는지 모른다. 경은
낙망하지 말고 팔도 감사에게 영을 내려서 거서가 생산되는 곳을 시급하게 조사하라."
박연은 전하의 분부를 받고 팔도 감사에게 의뢰해서 거서가 나는 곳을 시급하게
조사했다.
거서란 검은 기장쌀이다. 옛날에 생산되던 기장쌀이다.
그러나 백미의 생산량이 풍부하고 맛이 좋으니 농가에서는 기장을 심지 아니했다.
기장을 심는 곳이 극히 드물었다. 이득이 없는 때문이다.
더구나 검은 기장쌀은 극히 드물었다. 팔도 감사는 어명이었다. 고을마다
방방곡곡에 영을 내려 기장을 구해보았다. 그러나 한 군데도 가장을 심은 곳은
없었다.
검은 기장은 더군다나 구할 도리가 없었다. 감사마다 군수마다 검은 기장쌀은 구할
도리가 없다는 보고가 빗발치듯 서울로 들어왔다.
관습도감 제조 박연이 절망 상태에 빠져 있을 때, 홀연 해주 관찰사한테서 역마를
달려서 검은 기장쌀 소두 한 말을 바쳐왔다.
박연이 받아보니 확실히 거서라 하는 검은 기장쌀이다. 알도 굵고 기름져서
윤택했다.
박연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곧 입궐해서 전하께 아뢰었다.
"거서가 황해도에서 났습니다. 황해감사가 역마를 달려서 급히 올려보냈습니다.
알도 굵고 윤기가 흐릅니다. 모두 다 전하의 흉복이올시다. 전하의 지극하신 정성에
하늘도 감동이 되어 거서가 나왔나봅니다!"
전하도 크게 기뻤다.
"거서가 해주에서 나왔단 말이냐? 이리 가져오너라. 나도 검은 기장은 처음
대해본다. 어디 살펴보자..."
박연은 소매 속에서 봉지에 싼 거서 한 봉지를 꺼내어 바쳤다.
윤이 차분하게 흘렀다.
전하의 용안엔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이 주공이 황종률을 제정했을 때 죽관에 율을 측정했던 거서로구려..."
감탄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전하는 다시 박연을 향하여 말씀한다.
"이제 경과 과인의 소원이 성취되려나보오."
"하늘이 주신 복이올시다. 먼저 황종을 조절할 기틀이 생겼습니다."
박연도 기뻤다. 웃음빛이 넘쳐 흘러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전하는 다시 박연에게 하문한다.
"황종률이 정해진 후에는 음과 양으로 나뉘어진 십이율을 고루고루 정해놔야
하겠구려!"
"네, 그러하오이다. '천자문'에도 율려조양이란 글이 있습니다. 율은 양이요, 여는
음이올시다. 율이 여섯이요, 여가 여섯이 되어 십이율이 성립됩니다. 황종의 죽관은
길이가 아홉 치올시다. 거서의 알이 일 푼이 되니 거서 열 립을 쌓아서 한 치를
측정합니다. 이리해서 황종은 거서 구십 립을 누적해서 아홉 치가 됩니다. 그러나
거서의 알이 또한 크고 작아서 고르지가 못하니, 그중 충실한 놈을 골라서 밀로 크고
작은 차이가 나지 않도록 고르게 해서 황종이 성관됩니다."
전하는 박연의 악에 대한 조예를 깊이 믿었다.
"이제 다행히 해주에 거서가 나서 나라의 악을 바로할 기틀을 만들게 되었다. 경은
정확하게 십이율을 조성해서 조정의식과 종묘대제 때 만드시 아악을 아뢰도록 하라."
박연은 청령하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해주에서 거서가 나왔다는 일은 온 나라에 자자했다.
지난번 사정전에서 예악을 토론하는 경연에 참예했던 신상이, 거서가 해주에서 나서
전하와 박연이 크게 기뻐하고, 이어서 박연이 독대를 드려서 황종을 제정하는 악리를
말씀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원을 통하여 전하께 상소를 올렸다.
'거서가 해주에 나서 황종을 제정할 기틀을 얻었사오니 국가의 크나큰 경사올시다.
거서로 율관을 측정하는 일은 한 사람의 슬기만으로는 되기 어렵습니다.
박연이 비록 악리에는 능하다 하오나 중지를 모아서 정확한 아악을 조성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좌의정 맹사성과 함께 율을 조성하도록 분부를 내려주시옵소서.'
전하는 신상의 상소를 보시고 곧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맹사성은 거문고를 사랑해서 오현금을 희롱할 줄 아는 것은 과인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영악의 지위를 주어 영관습도감사를 제수시켰다. 그러나
정무에 일이 많은 좌의정으로 어찌 황종률을 제정하는 일에 전심하라 할 수 있는가?
악리를 연구하는 일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일년 이태 삼년 사년 몇 해가 걸릴지
모른다. 거서로 율관을 만드는 일은 박연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 박연이 율관을
조성한 후에 중국의 황종과, 박연이 조성한 율관과 대조해서 그 음을 살펴본다면
해조가 되는지 불협화가 생기는지 누가 듣고도 다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책임은 유능한 사람을 택해서 한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작사도방이 되면, 제각기
떠들어서 일이 되지 않는 법이다. 박연은 반드시 영악 맹사성에게 진행되는 일을
보고할 것이다. 딴소리 하지 말라...'
신상은 전하의 비답을 받은 후에 다시 말씀을 올리지 못했다.
전하는 한 번 사람의 능력을 판단한 후에는 어떠한 살이 천언만어를 올려도 듣지
아니했다. 능력이 있다고 적재적소에 사람을 써서 확고부동하게 믿는 때문,
아랫사람들은 심열성복해서 온갖 정성과 심혈을 다 기울여 기어코 맡은 바 일을
성취시키고 말게 된다.
이 점이 세종대왕을, 다른 임금들이 성취하지 못했던 천백 가지 큰 일을 가지가지로
성취시켜서 조선왕조의 정치와 문화를 임금 노릇 한지 겨우 32년에 세계사상
유례없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큰 공적을 쌓아올린 성주가 되게 하였다.
대마도 정벌도 국위를 선양시킨 일이지만, 육진개척을 단행할 때도 모든 갑론을박을
물리치고 김종서를 믿고 써서 기어코 큰 성공을 이룩했다.
세종은 항상 말씀했다. 내가 육진개척의 엄두를 낸 것은 김종서의 장한 뜻에서
출발이 되었고, 또 내가 아니었던들 김종서는 육진개척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것이 바로 세종의 인품을 드러낸 것이요, 훌륭한 일을 가지가지로 성공해서
국가와 국민을 복되게 했던 그분의 특출한 성격이었다.
이번 아악을 창제하고 향악을 육성시키는 일에도 세종은 같은 성격을 발휘했다.
박연이라야 반드시 아악을 창제하고 보호육성시킬 만한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육진개척 때와 꼭 마찬가지 경위다.
김종서라야만 육진개척을 할 것을 믿은 거와 같이, 아악의 창제는 박연이라야 꼭
성공할 것을 안 까닭이다.
박연은 신상이 맹정승과 함께 일을 하게 하라는 상소를 올렸다는 일과, 전하께서
작사도방이 되면 일이 성취되기 어렵다는 비답을 내리셨다는 소문을 듣자, 전하의
자기를 알아주시는 그 큰 뜻에 감격한 마음을 억제할 길 없었다.
혼자 서실에 앉아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기어코 정악을 창제하고 향악도 보호해야 하겠다는 결심이 더욱더욱 굳어졌다.
자나깨나 율에 대해서 궁리를 하고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 악서를 연구하고, 한편으로는 단정히 홀로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손으로
장단을 맞추어보기도 했다. 높은 소리, 낮은 소리, 평성, 후성, 맑은 소리, 탁한
소리를 시험해보았다.
밤에도 홀로 앉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같이 심혼을 기울였다.
낮에는 관습도감에 나가 악사들을 데리고 밀을 녹여서 거서와 똑같은 쌀알을 만들어
깎고 저며서 아홉 치짜리 죽관을 만들었다.
악서의 치수에 맞춰서 죽관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율이 황종이 되고 여는 대려가 된다. 율은 태주가 되고 여는 협종이 된다. 율은
고선이 되고 여는 중려가 된다. 율은 유빈이 되고 여는 임종이 된다. 율은 이칙이
되고 여는 남려가 된다. 율은 무역이 되고 여는 응종이 된다.
이리하여 율의 여섯 곡조와 여의 여섯 곡조가 합해서 음양의 십이율을 이룩했다.
박연은 정양과 함께 거서를 얻은 후에 궁, 상, 각, 치, 우 오음에 다시 음향을
조화해서 율과 여 열두 율을 제작했다.
박연과 정양은 도제조 맹사성을 청해놓고, 악사와 악공이며 교방의 여악들을 모아
새로 만들어진 황종의 율과 여를 시험했다.
다섯 음은 열두 율로 가락을 변하면서 청아하고 아름다워 사람의 마음과 혼을
어루만져주고 달래주고 정숙하게 하고 인자하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
관습도감이 설치된 이래 일찍 아뢰어보지 못했던 아름답고 해조된 차원 높은
음향이었다.
모두 다 기쁜 빛이 얼굴에 넘쳤다. 이중에 가장 기쁜 빛을 띤 사람은 좌의정
맹사성과 창조자인 박연을 위시하여, 박연을 도와서 십이율을 성공해놓은 정양과,
아름다운 새 곡조를 마음대로 희롱해서 거문고, 가야금, 대금, 중금, 소금에 올려서
가락에 맞출 만한 재능이 있는, '정읍사'를 노래하던 취옥이었다.
좌의정 맹사성은 이 크나큰 기쁨을 시급히 대왕전하께 아뢰었다.
"전하께오서 항상 관심을 가지고 독려하고 지휘하셨던 황종을 주 시대의 옛법에
의해서 박연이 창제했습니다."
맹사성의 아뢰는 말씀을 들은 전하는 희색이 만면했다.
"뜻밖에 거서가 나와서 경들이 이러한 큰일을 무난하게 성취했으니 국가의 흥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장한 일이다!"
대왕은 영악인 도제조 맹사성에게 찬사를 보냈다.
"모두 다 박연이 침식을 잊고 밤과 낮으로 일심전력을 다하여 이룬 것이올시다.
박연에게 칭찬을 내려주시옵소서."
전하는 껄껄 웃으셨다. 심신이 상쾌한 때문이다.
"박연이 칭찬을 받을 사람인가? 좌상은 아직 박연의 인품을 짐작하지 못하는구려!
그 사람은 칭찬을 받기 위하여 잃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일은 곧 나라를 위하여
하는 일인 것을 잘 알고 있소. 내가 칭찬을 해준다면 도리어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오,
좌상은 염려하지 마시오. 하하하."
대왕의 신하를 부리는 성격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맹사성은 국축해서 아무 말씀도 올리지 못하고 부복해 있었다.
전하는 옆에 모시어 있는 승지를 향하여 분부를 내린다.
"이번에 하늘이 도와서 해주에 거서가 난 것을 계기로 해서 관습도감 제조 박연이
심혈을 기울여 거서를 표준으로하여 황종을 제정하고 ㄸ다시 십이율을 완성했다 한다.
내가 친히 한 번 시청해보려 한다. 지난번에 악에 대한 경연을 열었던 사정전에 당시
모였던 사람과 관습도감의 악사와 악공이며 여악들을 참여케하여 새로 제정된 황종
십이율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봉상시와 관습도감에 기별해서 오늘 안으로 거행케
하라!"
전하는 새로 모든 악을 제정하는 데 근본이 되는 황종을 창제한 것이 무한 기뻤다.
생각대로 한다면 지금이라도 곧 관습도감에 거둥령을 놓아 새로된 율을 듣고
싶었으나, 제왕의 체면상 도감으로 행차할 수는 없었다.
편전에서 새 음악을 들을 결정을 했다.
관습도감과 봉상시에서는 승지를 통하여 어명을 받고 곧 악기와 악사와 여악을
준비해서 관습도감 제조 박연의 지휘로 사정전으로 들어 갔다.
한편 사정전에는 전례와 같이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찬성 허조, 예문과네학
유사눌,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총제 정초, 신상, 권진, 경시주부 정양 등이 전하의
출어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악공과 악사들은 새로 창제한 황종죽관과,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 등의 십이율려의 대로 만든 악기를 잡은 열두 악공들이
오모홍포로 전각 분합밖에 늘어앉았고, 다음 줄에는 황종 십이율을 반주할 예로부터
전해왔던 거문고, 비파, 향비파, 가야금을 안고 있는 악공들이 역시 오모홍포로
후열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새로 제작된 황종률 가락 열두 곡이 변할 때마다 일호의 차착이 없이
가야금으로 반주를 잘 한다고 인정을 받은 '정읍사'의 명가수요, 여악인 취옥이
화관당의에 요조한 태도로 가야금을 앞에 가로놓고 조용히 서서 전하의 납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차 새로 창제된 황종률 십이가락을 전하께 들려 드리려는 장면이다. 전각 안은
긴장될 대로 긴장되었다.
조용하고 엄숙했다. 영의정 황희 이하 관습도감 제조 박연에 이르기까지 제제다사가
금과ㄴ복과 사모품대로 전하의 출어하시기를 기다려 정제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전하는 정식으로 조회받는 자리가 아니라 저모립 통영갓에 인모 탕건을 쓰고
은옥색 도포에 도홍 쌍방울띠를 가슴에 높직이 둘러띠고 승지와 내관을 거느려 만면에
기쁜 빛을 띠고 천천히 옥보를 옮기어 군신과 악공들을 둘러보시며 옥좌에 앉아
말씀을 내린다.
"오늘 영상 이하 제제다사를 한자리에 모아 새로 창제된 황종률과 이에 따른
십이죽관을 감상하는 내 마음 기쁘기 한량없다. 모두 다 경들이 과인을 잘 보필애서
여태껏 우리 나라에서 성취하지 못했던 악을 창제하게 되었으니, 이 일은 과인과
경들과 오늘에 살고 있는 모든 국민들의 경사와 기쁨만이 아니라, 이 정확하고 바른
정악을 우리 후손들에게 전하여 나라의 문물이 얼마나 훌륭했다는 것을 대대손손
자랑하고 사랑하고 지켜가게 될 수 있으니 그 기쁨이 더욱 큰 것이다. 어떻든 우리
나라에서 다른 나라에 이미 없어진 이 갸륵한 황종률의 십이율을 제정한 것은 무한
유쾌한 일이다!"
대왕의 말씀은 마치 구슬이 옥소반에 구르는 듯 음성이 화창하고, 난초잎이미풍에
소리없이 흔들리며 한 송이 백란 꽃에서 맑은 향훈을 발산시키는 듯했다.
모든 신하들은 전하의 격 높은 말씀에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질 뿐이었다.
전각 안은 악사와 악공과 백관들의 옷빛으로 화려했으나 조용한 정적이 잠시
흘렀다.
영의정 황희가 군신을 대표하여 아뢴다.
"오늘 전하의 국가를 사랑하고 국민의 문물을 향상시키시는 이 자리에 한 가지 빠진
일이 있습니다. 동궁저하는 전하의 뒤를 받들어 민초를 육성시킬 분이올시다. 악이
창제되는 이 자리에 반드시 참관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취옥
전하는 영의정 황희의 아뢰는 말을 들으시자 용안이 화사하게 열렸다.
"영성의 말을 들으니 내 잠깐 생각이 들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예악을
제정하는 것은 국가의 대사라, 당연히 세자를 이 자리에 참관케 해야 할 것이다.
내관은 빨리 동궁에 나가 입시를 명하라!"
내관은 곧 동궁으로 나가 어명을 전했다.
이때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은 경복궁 근정전 동편에 있는 자선당이었다.
동궁의 휘는 '향'이니 다음에 문종이 될 분이다.
품성이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했다. 전하가 예악을 새로 제정하시기 위하여 항상
문신들을 모아 악에 대한 경연까지 여시고 실지로 향악과 아악을 감상하신 일이며,
해주에서 거서가 나서 박연이 황종을 제정했다는 소식을 보덕과 필선들 동궁대부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세자는 천성이 너그럽고, 인자하고 지성스러우며 근엄했다.
얼굴은 관옥같이 청수하고 칠흑 같은 수염은 길고도 화사했다. 역대 세자 중에 제일
가는 미남자다. 명나라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세자의 준수한 모습을 대해보고 세상에
짝을 구할 수 없는 품위 높은 웅위한 봉안이라고 칭송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세자가 된 지 20년에 항상, 자선당과 옆에 있는 계조당에 서연을 열고, 조관 중에
학식이 깊고 덕망이 있는 사람들을 뽑아서 첨사의 명칭을 주어 시강을 삼고, 집현전
학사 열 사람을 뽑아서 서연관을 삼아 날마다 성리학을 강론했다.
서연이란 무엇인가 하나, 제왕이 문신들과 학문을 강론하는 자리는 경연이라 하고,
세자가 학문을 연구하는 자리는 서연이라 하는 것이다.
집현전 학사로서, 서연관에 뽑힌 사람들은 정인지, 최만리, 성삼문, 신숙주
등이었다.
동궁은 항상 서연과 거실에서 학문만 연구하고 여색을 가까이하지 아니했다. 학식이
고명해서 고금 서적을 아니 읽어본 것이 없다. 더욱 성리학에 정통해서 일가견을
이루었다. 여러 서연관들과 학문을 토론할 때 학자들은 선철들의 학설을 가지고
이론이 분분하게 되면, 세자는 모든 학문이 성리 길로 귀일이 되는 것을 간명하게
주장해서 모든 학자들이 다시는 입을 벌리지 못할 만큼 세자의 학문은 정통했다.
성리학 공부에만 투철한 것이 아니다. 글씨도 잘 썼다. 체법은 조송설을 무색하게
했다. 초서와 예서도 달필이었다.
동궁은 서연 이외에도 항상 달 밝은 밤이 되면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자선당에서
내려 달빛을 밟으며 집현전으로 향했다. 시자한 사람도 따르지 못하게 했다.
집현전에는 성삼문, 신숙주 등이 숙직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있었다.
돌연 세자가 연통도 없이 집현전으로 오르니, 숙직하던 신숙주와 성삼문은 당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집현전 학사 신숙주, 성삼문 둘은 급히 의관을 바로 하고 세자저하를 맞이했다.
황망히 세자를 향하여 배들을 올렸다.
세자는 손을 들어 만류하면서 답례하며 말한다.
"내가 학사들에게 학문에 대하여 의심되는 일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이같이 어렵게
생각한다면 다시는 오지 못하겠소이다. 세자의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라 친구의
자격으로 찾은 것이니, 이 다음부터는 이러한 형식의 구애는 서로 아니하기로 합시다.
하 하 하."
세자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말했다.
신숙주와 성삼문도 웃음을 짓고 조용히 대답했다.
"집현전 유신으로 있으면서 세자저하께 예를 폐한다면 이 나라에 누가 예와 의를
지키겠습니까. 동궁저하는 아예 그러한 분부는 내리지 마시옵소서. 절하여 맞이하는
것은 선비들의 예올시다."
세자도 미소를 짓고 다시 더 말을 아니했다.
집현전 시동이 향다를 올렸다.
달빛이 휘영청 집현전 마루판에 가득했다.
세자는 손으로 다종을 들었다.
찻잔에 달빛이 가득 떠 있었다.
들었던 찻잔을 다시 청 위에 놓았다.
달빛이 더한층 찻잔에 빛을 부었다.
세자는 웃으며 두 학사를 바라보고 추파를 흘렸다.
두 학사는 세자가 차를 마시려다가 마시지 아니하고 다시 청 위에 놓는 까닭을
몰랐다.
두 학사는 무심코 찻잔을 들었다.
들었다가, 세자가 찻잔을 내려놓고 마시지 않는 것을 보자 자기들이 먼저 마시기
미안했다.
찻잔을 내려놓았다. 까닭은 모르지만 세자보다 먼저 마시는 것이 예에 어긋나는
듯한 때문이다.
세자가 말씀한다.
"향다를 주어서 향기를 마시려 했더니 뜻밖에 달이 찻잔 안에 가득히 떠서 달까지
마시게 되는구려. 기막힌 운치로구려!"
그제서야 두 학사는 세자가 차를 들다가 찻잔을 내려놓고 유심하게 바라보는 뜻을
알았다.
성삼문이 대답해 아뢴다.
"저하의 말씀은 시적 운치올시다. 그러나 저의 의견은 다릅니다. 차는 실존이고
달은 허영입니다. 운치만 가지고 사물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성삼문은 고지식하게 대답한다.
동궁은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성과 이는 어떠하다 생각하오?"
"성리는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향다와 월광을 한꺼번에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의 논리가 아니겠소?
하하하."
동궁은 소리 높여 껄껄 웃었다.
성삼문은 잠시 말대답이 궁했다.
신숙주가 고한다.
"전하의 시운은 성리귀일에 연결됩니다. 허영도 물체는 물체올시다. 허즉실
실즉허올시다."
만좌는 소리 높여 웃었다.
세자는 성리귀일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같이 달 밝은 밤에 집현전을 찾아서 학문을
토론한 것이다.
이후부터 세자는 날마다 인적이 고요한 깊은 밤중이 되면 반드시 집현전을 찾았다.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은 밤이 깊어 자정 때가 넘도록 감히 옷을 풀고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하루는 자정이 지나도 세자의 학보는 움직이지 아니했다.
집현전 학사 성삼문 등은 서로들 의논했다.
"인제 자정이 훨씬 넘어서 닭이 홰를 치기 시작했으니, 세자께서는 오시지 않는
모양일세. 자아, 이제 옷을 풀고 자리에 들기로 하세."
모두들 마음놓고 자리에 들었다.
성학사 삼문도 단념을 하고 누웠을 때 집현전 뜰 앞에 홀연 신발끄는 소리가
일어났다.
"근보! 근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근보는 성삼문의 자다.
세자의 음성이다.
성삼문은 깜짝 놀랐다. 황망하게 자리에 일어나 옷을 고쳐 입고 뜰에 내려 세자를
맞이했다.
밤을 지새며 날이 밝도록 학문을 토론했다.
이후부터 집현전에 있는 성삼문은 밤이 깊도록 옷을 풀지 못하고 세자의 학보를
기다려서 서로의 학문을 토론했다.
세자의 학문을 탐구하는 지성스런 노력은 이같이 대단했다.
세자는 학문의 연구가 심오해서 성리학에 일가견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고금의
제왕들의 선정과 민간의 고락이며 농경과 양잠과 원통하고 억울하게 형벌을 당하는
민정까지 자세하게 살피고 알아두었다. 앞으로 부왕을 보필하여 국가를 융성케
해보려는 책임감을 가진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세자는 글씨를 잘 쓰고 문장도 일류급에 속했다. 글씨는 해자, 행서는
말할 것도 없고 초서와 예서도 능란했다. 글은 붓을 잡으면 낙필성장이다. 생각은
번개치듯 영감을 일으켜서 학자와 유생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까닭에 세자는 거처하는 자선당과 연구하는 계조당 이외에는 나가지 아니하고,
다만 한밤중 달 밝은 밤이면 집현전으로 나가 학사들을 찾는 이외엔 별로 중문밖에
나가지 아니했다. 세종전하가 수렵하는 행차에도 사양하고 배행을 아니했다.
어느날 세종전하는 세자궁에 좌필선을 겸한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와 우문학
최만리를 어전에 불러 물었다.
"경들은 동궁대부의 직책을 겸한 사람들이다. 동궁에 대하여 물어 볼 일이 있다.
숨김 없이 대답하라."
엄숙한 얼굴빛을 짓고 물었다.
정인지와 최만리는 전하의 소명을 받들고 들어갔으나 무슨 일인지 몰랐다가, 엄숙한
빛을 띠고 동궁에 대하여 묻겠다는 하교를 듣자 두 사람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동궁은 평소에 전하의 신임을 받을 뿐 아니라, 조야가 다 존경하는 분이다. 무슨
일을 하문하겠다는 전하의 뜻을 헤아릴 길 없었다.
우문학 최만리가 아뢴다.
"전하께오서 소신들에게 돌연 동궁에 대한 일을 하문하시니, 신은 어의가 어느 곳에
계신지 알 길이 없습니다. 동궁에 대해서는 서연 자리에서 모시고 학문을 토론하는
저희들보다 전하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동궁께오서는 전하께 아침 저녁으로
혼정신성을 하시고 다음에는 자선당과 계조당에서 항상 거처하시면서 한 번도 궁밖에
납시는 일이 없습니다. 다시 아뢰거니와 동궁에 대한 일은 전하께서 더 잘 아실 줄
압니다."
최만리는 고지식하고, 변통성 없는 무뚝뚝한 사람이다. 솔직하게 꾸밈 없이 말했다.
아무런 말재주도 부리지 않고 불쑥 아뢴다. 전형적인 경상도 친구다.
전하는 고지식한 최만리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미소하며 대답한다.
"내가 어찌 내 아들의 성정을 모르랴마는, 근자에 세자는 일체 궁문 밖에 나갔다는
말이 없고, 궁중에만 들어ㅇ아 있으니 혹시 몸이 불편해서 그러한가 염려가 된다.
그렇지 아니하면 희완하는 데로 마음이 쏠려서밖에 나가기를 싫어하는지 까닭을 알 수
없다. 일전에 내가 교외에 거둥을 했을 때도 배행을 하지 아니했기로 경들에게 묻는
것이다."
정인지가 안상한 말소리로 아뢴다.
"동궁저하는 진실로 호학하시는 분이옵니다. 집현전에도 달 밝은 밤이면 반드시
학가를 옮기시어 밤새도록 젊은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십니다. 학문을 일심전력을
다하여 공부하고 연마하는 분이 어느 하가에 매를 날리고 성악을 좋아하며 사냥하는
구경을 하겠습니까? 실로 세자는 앞으로 대왕전하의 정치를 문무 경전하게 이어
받들어서 국가를 번영시킬 분이올시다."
최만리가 다시 무뚝뚝한 사투리로 아뢴다.
"전하는 세자에 대하여 무엇을 근심하십니까. 세자는 성색을 멀리하시고 학문에만
열심하십니다. 어느 하가에 희완을 좋아하실 수 있습니까? 전하느 ㄴ절대로 세자한테
대해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정인지가 또 아뢴다.
"듣자오니 전하께서는 앵도를 좋아하신다 합니다. 그리하와 세자께서는 자선당 옆에
앵도밭을 크게 만들어놓고 손수 정성을 들여 앵도를 심었다 합니다. 이러한 효성이
지극한 세자를 전하는 어찌하여 의심하십니까?"
전하는 웃으며 말씀한다.
"사실 나는 앵도를 좋아한다. 세자가 심은 앵도는 다른 곳에서 진상 들어온
것보다도 구슬 같은 붉은 앵도가 과연 달고도 싱싱해서 아름다웠다. 해마다 잘
먹는다."
최만리가 다시 아뢴다.
"전하는 세자에 대해서 털끝만큼이라도 염려하시는 생각을 두지 마시옵소서. 너무
지나치게 학문에 집착하십니다. 성리학 공부에 대해서는 당금에 있어서 노사숙유라도
따라갈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전하는 마음 속으로 기뻤다.
"지나친 과찬이다!"
전하는 한 마디를 하시고 마음 속으로 세자를 더욱 미덥게 생각했다.
이것이 요사이 전하의 세자에 대한 심정이다.
한편 세자는 전하의 부름을 받고 사정전으로 올랐다.
전상과 전하에는 영의정과 황희, 좌의정 맹사성을 위시하여 박연, 정양, 정초,
정인지, 유사눌들 대관과 관습도감의 악사와 악공이며 여악들이 박연에 의하여 새로
제작된 가지각색의 황종 이하 악기들을 가득히 벌여놓고 있었다.
세자는 원유관, 강사포의 정복을 입고, 추창해서 전상으로 올랐다. 진실로
선풍도골의 풍채였다. 얼굴은 관옥 같고 수염은 아름다웠다.
영의정 황희 이하 모든 조관들은 들어오는 세자를 향하여 경의를 표하고 일제히
일어섰다.
세자는 옹용한 태도로 추창해 전상에 오른 후에, 옥좌에 좌정해 ㅇ으신 세종전하께
사배를 올려 사후를 드리고 미소를 지어 조용히 어전 지척에 시립했다.
전하는 세자의 질서 있는 걸음걸이와 세자다운 전아한 태도에 마음속으로 만족함을
느꼈다. 미소를 지어 화한 옥음을 세자에게 내린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먼저 올바른 예와 악을 정해서 국민의 문화를 높이고, 화한
기운으로 국가를 편안하도록 지도해야 하는 것은 예로부터 치국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신과의 관계도 화평한 기상으로 유명이 다르지만 영감을
교류시켜서 역시 국태민안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례에도 악을 아뢰는 것은
신을 즐겁게 하고 화합하게 하기 위하여 종묘대제를 위시하여 사직제와 문묘에도 악을
아뢰게 되는 것이다. 지난번에 세자도 종묘대제 때 배행해서 참배한 일이 있거니와,
옛날 고려 때 송에서 가져온 악기와 태조 때 명에서 가져온 악기의 음향을 들어보니,
모두 다 화성이 나지 아니하고 조잡하고 격한 소리가 났다. 알아보니 종경의 악기는
기왓장으로 구워 만든 것이다. 이것으로 도저히 국악이라 할 수는 없다. 다행이
지음하는 난계 박연이 있어서 오랫동안 나하고 악기를 연구하던 끝에 하늘이 도와서
해주에 거서가 나타났다. 거서는 옛적 주공이 황종률을 측정하던 표준이다. 이제
거서로 황종 이하 십이율을 새로 제정해서 오늘 새로운 음을 대신들과 함께
시험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예악을 신조하여 시청하는 자리에 세자가 동석을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입시를 명한 것이니 세자도 새로운 율에 대하여 관심을 갖도록
하라."
세자는 고개를 숙여 대답한다.
"황감하옵니다."
다만 간단한 한 말씀을 간명하게 올렸따.
세자의 명랑하면서도 말이 많지 아니한 성격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전한ㄴ 여의정 이하 재신들에게 말씀을 내린다.
"새로운 악기로 황종 이하 십이율을 시험하자면 상당한 시각이 걸릴 것이다. 더구나
황정승과 맹정승은 노재상이다. 섰지 말고 앉아서 새로 된 율을 감상하라."
영의정 이하 모든 시신들은 전하의 분부에 따라 조용히 질서를 차려 앉기 시작했다.
전하는 아직도 지척에 시립해 섰는 동궁에게도 분부를 내렸다.
"세자도 섰지 말고 자리에 앉으라."
시측해 있던 대전내관이 따로 세자의 좌석을 마련해 올렸다.
세자는 두어 번 사양하다가 자리에 앉았다.
넓고 넓은 전각 안에는 강화 화문석을 폭을 연해 가득하게 깔아놓았다. 중앙에는
박연이 새로 제정한 황종률 이하 십이율의 악기를 든 악공들이 음양율려의 순으로
오모홍포의 정장으로 대기하고 있고, 좌우 옆에는 여악이 열두 명씩 악기 음에 응하여
창을 부르기 위하여 화관 당의에 붉은 치마를 두르고 아름다운 자태를 과시하면서
명모단한으로 아리땁게 추파를 흘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황종률이 제정되기 전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삼현 삼죽만으로 신라의
향기와 고려가사의 삼진작이며 백제가사 중에 다만 하나 남아 있는 '정읍사'를
시험해보았거니와, 이제는 향가와 고려가사 이후에 나타는 시조를 창으로 불러서 궁,
상, 각, 치, 우에 배정하여 십이율에 응해 부르는 것이 어떠한가?"
박연이 대답해 아뢴다.
"시조는 순전한 우리말로 조율에 맞추어 창으로만 전해온 것이올시다. 황종률에
의해서 시청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지 아니해도 새로이 율을 바로잡은
후에 관습도감인 교방에서는 많이 시조창법을 가르쳐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시조의 창법을 들어보기로 하리라."
박연이 다시 아뢴다.
"시조의 가사는 고려말 이후부터 창으로 많이 전해졌습니다. 어떠한 시조를
불러볼지 하교를 내려주시옵소서."
세종은 잠깐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이내 말씀을 내린다.
"바쁜 몸에 내가 어찌 시조를 연구해볼 틈이 있으랴. 전해 들으니, 태종께오서
포의로 계실 때 포은 정몽주 선생을 달래기 위하여 시조로 즉흥시를 지어
노래하셨다는 말씀을 들을 일이 있다. 내가 새로이 황종률을 제정하고보니 선대왕
전하를 추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첫 번째로 태종대왕께서 즉흥으로
노래하셨다는 시조를 율에 들어보기로 하자!"
박연은 악사에게 명했다.
태종이 아직 여조에 포의로 계실 때 태조를 위하여 창업을 꿈꿀 때 정포은과
화답했던 시조를 지휘하라 했다.
악사는 여악과 악공들에게 두루 이른 후에 시작하라는 박을 울렸다.
먼저 노랫소리가 시작된다. 뒤에 따라 십이관의 율려로 배치된 화음이 높고 낮게
은근하고 씩씩하게 일어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하리라.
관악에 맞추어 시조의 창을 부르는 여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지난번 처용무
학연화대에 관음보살도 되고 '정읍사'를 풀이하면서 청아하게 불러서 전하의 마음을
약간 흔들어놓았던 바로 그 취옥이다.
새로 거서에 의하여 정확한 황종률의 표준을 얻어서 만들어진 십이율 아름다운
음향은, 율과 여의 음양의 조화를 이루면서 맑고도 씩씩한 악이 되어 옥자루로
금소반을 두드리는 듯했다.
여기다가 관악에 맞추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하리라.
청을 뽑아 창을 부르는 여악 취옥의 화창하고 청아한 목청은 옥을 부수는 듯 금을
울리는 듯 청청하게 넘어가는 가락은, 사정전 대들보 위 높고 높은 소란반자에
황금으로 아로새긴 황룡, 청룡의 용머리를 흔들어놓는 듯했다.
세종전하는 가슴이 활짝 열리는 듯 시원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전하의 고막을 흔들어 여지없이 상쾌하다.
선대왕 태종의 씩씩하고 패기있는 모습이 눈앞에 환하게 떠오른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모습이 나타났다.
연엽 소반 담박한 주안상이 보였다.
전왕 태종이 청자 술병을 들어 송순주를 삼감국화배에 가득 붓고 기운차게 이
노래를 부르면서 쇠퇴해가는 고려 왕실을 버리고 함께 일을 해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보자고 권하는 모습이 눈에 나타난다.
누가 옳고 그르고 간에 창을 듣는 전하의 어깨가 으쓱했다.
취옥의 노랫소리는 마지막 종장으로,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하리라.'
끝을 막는다. 십이율관의 관악이 웅장한 여운을 흘리며 스르르 멈춰진다.
일찍이 전에 듣지 못했던 율과 창의 조화된 아름다운 화성의 절정이다.
전하의 용안이 활짝 열렸다.
세자 이하 모든 시신들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하늘이 나라에 복을 주시어 황종률의 진정한 법칙을 찾았으니 기쁘기 한량없다.
영악 맹사성 이하 관습도감 제조 박연과 경시주부 정양 등의 노고에 치사한다."
맹사성 이하 박연, 정양은 일제히 일어나서 사은하는 뜻을 표했다.
전하는 다시 박연에게 묻는다.
"지금 부른 곳은 우조인 듯한데, 과연 그러한가?"
전하는 그 동안 악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했다.
박연이 미소를 짓고 대답해 아뢴다.
"그러합니다. 우조올시다."
"음조가 화창하면서 매우 씩씩하구나!"
"선대왕 태종의 늠름하신 기상과 가사의 성격에 비추어 우조로 편곡을 했습니다.
우조의 음성은 성률이 청철장려해서 대장군이 철편을 휘두르며, 천리준마를 달려서
백만대병을 지휘하는 기상이올시다."
전하의 용안은 더욱 화창했다. 박연에게 다시 말씀를 내린다.
"음률에 음향이 있고 만 가지 물체에 대가 있듯이, 선대왕 태종께서 창을 하신 데
대해서 포은 선생이 화답한 시조가 전해온다. 이 시조를 율관에 올려서 창을 부를 수
있느냐?"
모든 신하들은 전하의 바다같이 넓고 넓은 아량에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포은은 태종의 반대파였던 때문이다.
박연이 아뢴다.
"성상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당장 율관과 창으로 합추케 하겠습니다."
"당시에 포은은 우리 선대왕을 따르지 아니했지만, 고려조로 볼 때 그분의
정충대절은 신하로서 당연히 취해야만 할 갸륵한 태도다. 모든 신하들은 이분의 높은
절개를 사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나는 포은 선생이 선대왕편이 되지 아니했다 해서
조금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분이 화답했다는 시조를 율관에 올려서 여악으로
창하게 하라!"
모든 신하들은 유림의 정통으로서 충의를 숭상하는 사람들이었다.
세종전하의 너그럽고 넓고 큰 도량을 가진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듣자, 오뉴월
삼복중에 시원한 얼음 냉수 한 사발을 마시는 듯 오장육부까지 시원함을 느꼈다.
경시주부 정양이 악사에게 전한다.
"정포은 선생이 태종대왕의 시조에 화답했던 가곡을 율관과 창으로 합주케 하라."
악사는 악공과 여악 취옥에게 눈짓을 하고 박을 울렸다.
웅장한 관악과 함께 여악인 취옥의 창이 미끈하게 청을 뽑는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창도 처절하고 관악의 울리는 소리도 처절했다.
장사가 긴 칼을 비껴들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막막강병의 적진을 뚫고
적토명마를 타고 최후의 일각까지 횡행천리하며 대항하는 듯한 장쾌한 음조다.
악공들은 자기의 놀리는 죽관 가락에 도취되어 열 손가락을 죽관 구멍에 대었다
놓았다 하며 홍포 자락에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린다.
창을 부르는 취옥도 맑고 맑은 목을 놓아 율관에 맞추어 높고 낮게, 길고 짧게
가락을 굴리면서 기막하고 벅차고, 늠름한 가사에 도취되어 붉은 입술엔 서릿발이
서리고 총기 있는 두 눈엔 진주 같은 눈물이 금방 굴러 떨어질 듯 글썽거렸다.
창을 부르고 악기를 놀리는 취옥과 악공들뿐만이 아니다.
듣는 사람들, 세종전하와 세자의 눈에도 구슬픈 빛이 용안과 봉안에 선연하게
감돌았다.
영의정 황희 이하 모든 시신의 얼굴에도 추연한 슬픈 빛이 떠돌았다. 관디 소매로
잠깐 눈을 가리는 사람도 있었다.
기악과 노래는 그쳐지고 박이 울렸다.
전상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이 노래도 우조로 편곡을 했구나!"
"네, 그러하옵니다."
"창도 잘 불렀고, 율도 상승이다. 율과 창이 얼싸안아 어울려 들어가니, 마치
홍문연 잔치 때 번쾌가 뛰어들어 검무를 추는 듯 웅장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는구나! 가사도 가사려니와 악이란 이같이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구나!"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거서로 황종률을 다시 찾아내어 율도 훌륭하고 창도 좋이 잘 부릅니다마는, 선대왕
태종마마의 호쾌하신 웅지와 포은 선생의 결연한 의기로 엉클어진 즉흥적인 시조가
이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감동시키는 것이올시다."
전하는 껄껄 웃으며 대답을 내린다.
"그러기에 악서에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어서 천, 지, 인 삼재가
조화를 이루어놓는 것이 악이라 하지 아니했는가? 그러므로 훌륭한 악은 간단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두레에 이같이 위대한 감동과 힘을 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연이 아뢴다.
"또 하나의 장쾌 웅혼한 가곡을 아뢰겠습니다."
"누구의 가곡인가?"
"이지란의 시조올시다."
"여진 사람 퉁두란으로 태조대왕을 도와 개국공신까지 되고 태조께서 이씨로 사성을
했던 사람의 시조란 말인가?"
"네, 그러합니다. 시조의 가사가 하도 웅장하기로 이번에 편곡을 하와 교방에
전습시켰사옵니다."
"들어보기로 하자!"
박연은 악사에게 퉁두란의 시조를 율에 맞추어 취옥에게 창을 하라 했다.
악사의 박이 울리고 장구의 장단이 '쿵당 쿵당당'울리기 시작했다.
취옥의 청이 길게 뽑아진다.
협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초산에 우는 범과
패택에 잠긴 용이
토운생풍하니 기세도 장할시고
진나라의
외로운 사슴은
갈 곳 몰라 하더라.
창과 율과 장구는 높고 낮고 길고 짧은 웅장한 창음을 내며, 삼장을 끝마쳤다.
전하는 무릎을 치며 탄식해 말씀한다.
"가사가 웅장 호쾌하구나. 퉁두란은 우리 태종대왕을 패공이었던 한고조에 비하고,
고려의 공양왕을 진나라 외로운 사슴에 비하여 이 노래를 부른 것이로구나!"
"그렇습니다. 태조대왕을 잠룡에 비해서 그 영웅의 기상을 기탁해 지은
노래올시다."
세종전하는 다시 탄식하며 말씀한다.
"이 노래를 잘 보존해서 관습도감에서 더욱 익히게 하라. 취옥의 창법이 좋다고
그애한테만 시키지 말고, 다른 여악들에게도 잘 전승케 하라. 우리말이 있고 우리
가사가 있으나 이런 가사를 우리글로 표현해서 자손만대에 글로 전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전하는 이번에도 우리글로 아름다운 가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했다.
세종은 말씀을 마친 후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전에 모시고 있는 내관에게
분부를 내렸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를 불러라."
이때 김종서는 육진개척을 끝마치고 잠시 아뢸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내관은 어명을 받들고 융무루에 대기하고 있는 김종서에게 급히 입시의 명을
전했다.
김종서는 창황히 어전에 부복했다.
전하는 만면에 화색을 띠고 김종서에게 하문한다.
"과인이 일찍 들으니, 경이 육진개척을 하며 여진 무리들을 쫓아낼 때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하여 기운찬 노래를 불렀다는 말을 종사관 신숙주한테서 들은 일이
있다. 그때 숙주가 옮기는 그 가사를 매우 아름답게 들었다. 지금 황종을 새로
창조해서 좋은 가사를 율에 올려서, 교방에 전습시켜 뒷세상에 전하려 한다. 입으로
옮겨보아라."
김종서는 비로소 율관을 창조한 자리에 뜻밖에 부르신 뜻을 알았다.
부복해 아뢴다.
"황감하여이다. 잠시 사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읊어본 노래를 어찌 감히 천청에
이바지하겠습니까? 분부를 거두어주옵소서."
"별소리가 다 많구나. 노래는 사람의 인품과 기상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사양치
말고 외어보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다시 악사와 취옥을 항하여 하문한다.
"도절제사가 옮기는 말을 듣고 너희들은 곧 편곡을 해서 율관과 창에 맞출 수
있느냐?"
취옥이 아뢴다.
"어렵지 않습니다. 한 번 말씀으로 불러만 주신다면 창을 불러서 율관으로 협화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종서는 더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취옥에게 가사의 내용을 가만 외어주었다.
취옥은 한 번 듣고 초, 중, 종 삼장을 다 기억했다. 노래를 어떠한 조로 불러야 할
것도 판단했다. 곧 장구채를 잡았다. 장구가 '덩더쿵' 울렸다. 청청한 목소리로 시조
삼장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악공들도 취옥의 창에 따라 십이율의 가락을 맞춰준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가사도 웅장했지만 취옥의 창은 더한층 웅장 호쾌했다. 청산이 울렁이는 듯하고
천군만마가 뛰닫는 듯했다.
거서로 치수를 재어 만들어진 십이율관과 명창 취옥의 청청하게 목을 뽑는 가곡은
씩씩한 김종서의 가사와 함께 삼절을 이루었다.
전하와 세자를 위시하여 시립해 듣는 사람들은 어린 듯 취한 듯 넋을 잃었다.
노래가 그치자 전하는 다시 김종서에게 분부한다.
"또 한 수의 시조가 있지 아니하냐? 마저 일러주어서 창을 하도록 하라!"
김종서는 명을 받들어 동북면에서 불렀던 또 한 수의 시조를 외어주었다.
취옥은 다시 정신을 모아 곧 기억했다. 이내 목을 가다듬어 청을 뽑았다. 악공들의
십이율관이 취옥을 뽑아대는 가락에 맞추어 흥청대며 울었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이랴.
어떻다, 능연각상에 뉘 얼굴을 그릴꼬.
취옥의 씩씩하고 장쾌한 노래가 끝났다. 십이율관이 스르르 여운을 흘리며 악은
멈췄다.
노래를 지은 김종서의 단령에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 떨어졌다. 자기의
북진사상을 쾌하게 드러낸 이 시조가, 전하와 세자며 가득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대신들 앞에 기막힌 율이 되고 청이 되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놓는
이 영예로운 장면에 감격의 눈물이 아니 흐를 수 없었던 것이다.
전하는 무릎을 치며 칭찬하는 말씀을 내린다.
"장하다! 창도 좋고 율도 훌륭했다마는 김종서의 사상과 정신이 더욱 탁월하구나!
그렇다. 우리는 백두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수에 말을 씻겨야 한다! 북으로 북으로
나가서, 고구려의 옛딸을 다시 우리가 다스려야 한다."
세자 이하 자리에 가득 앉아 있는 신하들은 얼굴빛이 엄숙해졌다.
이윽고 전하는 취옥을 향하여 하문한다.
"네가 제법 창도 잘 하고 율과 악의 이치를 짐작하는 모양이다. 내가 너한테 악리에
대하여 물어볼 말이 있다. 어려워하지 말고 대답하라."
취옥은 약간 얼굴빛을 붉히며 고개를 다소곳 숙여 대답해 아뢴다.
"쇤네가 감히 주제넘게 어전에서 무엇을 안다고 대답해 아뢰옵니까? 하문을
거두어주시옵소서."
목소리는 나직나직 곱고 향기로웠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아는 대로 대답해보아라. 궁, 상, 각, 치, 우의 다섯 소리를
네가 마음대로 청을 놀려서 노래하는데, 어떤 것이 평성이 되고 어는 것이 상성이
되고 어떤 것이 입성이 되고 어떤 것이 거성이 되느냐?"
취옥은 잠시 생각하다가 아뢴다.
"사람은 사물을 대해야만 감동이 비로소 일어나 소리를 냅니다. 소리 중에 궁이
제일이 되니 상평성이 되옵고, 상이 하평성이요, 각은 입성이 되고, 치는 상성이
되고, 우는 거성이 된다고 스승한테 들었습니다."
취옥은 또렷하게 아뢰었다.
취옥이 거침없이 궁, 상, 각, 치, 우 다섯 소리를 상평성, 하평성, 입성, 상성,
거성으로 구별해서 아뢰는 소리를 듣자, 전하와 세자를 위시하여 모든 경연관과
서연관들도 깜짝 놀랐다.
심지어 박연과 정양까지도 마음 속으로 제법 대답해 아뢰었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마음 속으로 기특하다고 생각했으나, 취옥이 들은 풍월로 나불나불 입으로만
지껄여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용안에 미소를 지어 다시 물어보신다.
"네가 입을 움직여 창을 하는데 어떻게 입을 움직이면 궁성과 상성과 각성, 치성,
우성으로 되느냐? 실지로 입을 움직여서 소리를 내어 보아라."
취옥은 상감이 자기를 시험해보시는 줄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는 부끄럼 없이 당돌하게 대답해 아뢴다.
"궁 소리는 비에서 발생이 됩니다. 입술을 다물고 힘을 주어 소리를 내면 곧 궁성이
나옵니다."
말을 마치자, 취옥은 입술을 다물고 길게 소리를 뽑는다. 과연 황소가 굴 속에서
우렁차게 우는 듯, 그 소리가 웅장했다. 상평성이 확실했다.
취옥은 다시 아뢴다.
"상성은 폐에서 소리를 내서 입을 딱 벌리고 소리를 토합니다. 쇤네가 시험해
뵈겠습니다."
취옥은 붉은 입술을 예쁘게 벌렸다. 소리 기운을 뱉어버린다.
쇳소리가 쨍쨍하게 일어난다. 단단한 차돌이 싸느랗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마치
어린 염소와 양이 어미를 부르는 듯 처절한 소리가 일어났다.
취옥은 또 아뢴다.
"궁성과 상성은 실험해 들으셨습니다. 그러면 각성을 시험하겠습니다. 각성은
간에서 소리를 내어, 이빨을 벌리고 입술 부리로 기운을 모아 쏟아냅니다."
취옥은 백옥 같은 위아래 이를 살며시 벌리고 붉은 입술을 모아 소리를 토한다. 그
음향은 마치 수탉이 주둥이로 나무를 쪼는 듯한 '탁탁' 소리가 났다.
취옥은 다시 아뢴다.
"다음엔 치에 대하여 시험하겠습니다. 치 소리는 심장에서 소리를 뽑아내어 이빨을
다물고 입술을 활짝 벌려서 소리를 뱉습니다."
취옥은 이를 합치고 입술을 벌려서 소리를 냈다.
마치 어미돼지가 새끼를 업고 꿀꿀거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마지막으로 오음 중에 우성을 시험하겠습니다. 콩팥에서 소리를 내어 위아래 이를
벌리고 입술을 모아 소리를 내면 우성이 됩니다."
취옥은 이를 벌리고 입술을 슬며서 다무는 체하면서 기운차게 소리를 냈다.
부드럽고 윤택하면서 마치 천리준마가 평원광야로 '어흥' 소리를 치며 달리는 듯한
호탕한 음성이 일어났다.
취옥은 다섯 가지 음성을 전하 앞에 실지로 시험해보여 드린 후에 어전에 사배를
드리고 사뿐사뿐 뒷걸음을 걸어 장지 밖으로 물러난다.
예쁜 얼굴에는 이맛전과 콧 등에 진땀이 송골송골 솟았다.
어전에서 실천해 옮기기 실로 무진무진 어려웠던 때문이다.
일전에 전하가 박연에게 악리를 들은 것과 추호의 차이가 없었다.
전하는 취옥의 총명영리한 악에 대한 공부와 탁월한 기술을 무한 귀엽게 생각했다.
전하뿐 아니었다. 박연과 정양도 기뻤다. 관습도감 교방 안에 이러한 재색이 겸비한
여악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전하는 뒷걸음쳐 장지 밖으로 물러가는 취옥을 어수로 손짓해 부르셨다.
예쁜 얼굴에 힘이 들어서 이맛전과 콧 등에 진땀이 송골송골 솟아 오른 것을 보신
까닭이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취옥은 어명을 어길 수 없었다. 다시 걸음을 살몃살몃 옮겨 어전에 부복했다.
얼굴에는 여전히 땀방울이 송골거렸다.
"애썼다. 나는 네가 가얏고, 거문고와 창만 잘 하는 줄 알았더니 제법 악에 대해서
공부가 도저하구나! 악사라도 감히 너를 따를 사람이 없겠다. 내 앞에서 오음을
실천해보느라고 힘이 많이 들어서 예쁜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솟았구나!"
말씀을 마치자 전하는 용포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취옥에게 던져주었다.
무한한 영광이었다.
취옥은 던져주시는 손수건을 두 손으로 받들었다. 뜻밖의 영광스런 은전이었다.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취옥은 영리하고 침착했다.
두 손으로 수건을 받들어 잡고 사은하는 큰절을 올린 후에, 한 손으로 치마고리를
휘어잡은 채 소리 없이 뒷걸음을 쳐 물러가는 것이었다.
"땀을 씻어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모든 시선들은 취옥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취옥은 나직한 음성으로 조신하게 대답해 아뢴다.
"황공하오이다. 어전에 어찌 감히 얼굴을 다스리오리까? 내리신 별은전은 한평생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전하는 더욱 기특하게 생각하시고, 시립해 있는 신하들도 취옥의 영리한 행동과
태도를 가합하게 생각했다.
전하는 다시 더 취옥을 향하여 권하지 아니하시고, 박연과 정양에게 말씀을 내린다.
"이제 경들의 발분망식한 정성을 천지신명도 가상하게 생각하여 해주 땅에 좋은
거서가 나서 수천 년 전 옛법에 의지해서 진정한 십이율을 제정하게 되었으니 국가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다. 다음엔 어서 빨리 경석을 구해서 십이율에 맞추어 편경과
편종을 정비해서 훌륭한 아악을 완성하도록 하라!"
박연이 부복해 아뢴다.
"중국에서도 고대에는 경석을 썼습니다마는, 그 후에 절종이 되와 하는 수 없이
기왓장으로 경석을 대신했습니다. 그리하와 악의 부조리를 이루어 우리 나라로 들어온
것도 역시 전하께서 들으시고 마땅치 않게 생각하신 것이올시다. 다행히 거서가 나서
십이율은 정했습니다마는, 경석을 구하는 일이 큰일이올시다."
"우리 다 함께 노력해서 구해보기로 하자. 천하에 정성을 다해서 되지 않는 일이
없다. 기어코 우리는 경석을 얻어보기로 하자!"
박연이 아뢴다.
"경석이란 것은 원래 악석이올시다. '설문'이란 책에 보면 무구씨가 경을 만들었다
하고, '서전' 우공편을 읽어보면 사수빈에 경석이 떴다 했습니다. 현옥 같은 돌이면서
속이 비었으므로 물에 뜰 수 있었던 모양이올시다. '회남자'란 책에 보면 경은 공이라
했습니다. 그리하옵고 경석이 생산되는 곳은 중국 안휘성 영벽현 북방에 있는데, 아까
말씀드린 '서전' 우공편에 말한 사빈부경은 곧 이 산에서 나는 경돌이 물가에 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이름을 경산이라 하고 또 이 산이 영벽현에 있으므로, 경석을
영벽석이라고도 합니다. 빛이 검고 질이 치밀하면서 흰 무늬가 있고, 갈수록 광채가
나서 마치 현옥 같다 합니다. '고공기'라는 옛 서적을 보면, 옥을 갈고 돌을 깎는
공인의 종류가 다섯이 있는데, 그중에 첫째로 치는 공인을 경씨라고 한다 합니다.
주로 경석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세습적인 직업을 가졌다 합니다. 이제는 중국에서도
경석이 나지 아니하고 경석을 다루는 장인도 없나봅니다. 이리하와 기왓장 조각으로
만든 와경으로 퇴보가 된 듯합니다."
전하는 박연의 경석고에 대한 고증을 듣고 크게 탄식하며 말씀한다.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가혹한 인간전쟁과 참혹한 도탄, 환난에 빠져서 시대는
바뀌고 예약문물은 모두 다 소멸되어버렸구나. 그야말로 '오궁화초매유경이요,
진대의관성고구'란 시가 조금도 과장된 시가 아니로구나!"
"그러하오이다. 오궁의 기화요초 화려했던 문화는 오솔길 잡풀 속으로
스러져버렸고, 진 시대의 찬란했던 의관문물은 땅 속에 파묻혀버린 것과 같이 경석도
그만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경석을 만드는 경공까지도 소멸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소위 문명을 자랑한다는 당과 송에서도 기껏해서 와경을 쓴 모양이올시다."
박연도 탄식조로 아뢰었다.
전하는 기어코 와경을 진짜 경석으로 창제하고 싶은 마음이 벅차게 가슴을
흔들었다.
"하늘 땅 호호탕탕한 대자연 속에 산이 있으면 반드시 들이 있고, 들이 있으면
그중에는 금도 있고 옥도 있을 것이다. 중국 안휘성에서 생산되는 경석이 하필 우리
나라 산천에 아니 생산될 리 만무하다. 팔도강산 삼천리 산악지대를 샅샅이 찾아서
기어코 경석을 찾아내도록 하라. 대자연의 이치는 반드시 중국 안휘성에만 나게 할 리
만무하다. 우리땅에도 꼭 생산될 것이다. 노력해서 찾아보기로 하자... 그리고 우리
나라에도 옥을 다루는 도자전이 있고 훌륭한 도자장인이 있다. 이 사람들은 넉넉히
경석을 다룰 줄 알 것이다. 단 모두 다 합심해서 기어코 경석을 찾아보라!"
전하는 또다시 계속해 말씀한다.
"지금 황종률을 발견해서 십이율을 정돈했는데 편경을 못한다면 말이 되느냐? 영악
이하 모든 소임은 전력을 다하여 경석을 구해보라!"
전하는 말씀을 내리고 이날의 모임을 파했다.
세자 이하 여러 대신과 관습도감 제조 박연과 경시주부 정양이 어전에 배알을
드리고 물러가려 할 때, 전하는 '정읍사'와 시조에 창을 잘 부르던 취옥을 어수를
들어 가리키면서 관습도감 제조한테 분부한다.
"경도 알다시피 과인은 그 동안 아악의 십이율이며 종경을 새로 정하기 위하여 악에
대한 학설과 악기들을 편전에 준비해두었거니와, 정치하는 여가에 악리와 실기를
시험하려 하나 서로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 시시 때때로 박연을 부를 수도 없고
정양에게 당부하기도 난처하다. 내일부터 여악 취옥을 날마다 편전에 입시케 하라!"
전하는 장중하게 분부를 내리신다.
관습도감 제조는 감히 반대할 수 없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멀리 장지 밖에서 전하께서 박연에게 내리시는 말씀을 듣는 취옥은 대견하고 기쁜
마음을 억누를 길 없었다. 감격한 마음이 가슴 속에 물결처럼 흘렀다.
멀리서 사배를 드리는 악사와 악공들의 뒤를 따라 물러났다.
이튼날 아침이었다. 대전별감은 어명을 받들고 관습도감에 나타났다. 제조 박연에게
어명을 전했다.
"대전마마께오서 어제 영감께 분부를 내리셨다 합니다. 아악을 연구하시기 위하여
여악 취옥을 매일 편전으로 입시케 하랍십니다. 지금 곧 대령하도록 지시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관습도감 제조는 곧 여악 취옥을 불러서 어명을 전하고 별감을 따라 대궐로 들어갈
것을 명했다.
취옥은 한편으로는 송구스럽고 한편으로는 당황했다.
하늘만큼 기쁘면서 가슴은 울렁거렸다.
취옥은 수세를 마치고 거울을 대하여 몸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전주월소로 칠흑 같은 머리를 곱게 가려서 척척 얹어 땋았다. 붉은 댕기를 머리
끝에 살짝 물려서 구름같이 틀어 올렸다.
관습도감의 기생들은 모두 다 의기와 협기가 많았다. 도감 제조인 박연의 높은
교양을 받은 때문이다.
같은 동료 중에도 그중 나이 어린 취옥이 창을 잘 부르고 악에 대한 교양이 있는
까닭에 특별히 전하의 눈에 들어 날마다 편전으로 입시하랍시는 분부를 대전별감이
받들고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 기생들은 자기가 당한 영광인 양 기뻐하고 흥분했다.
조금도 시새는 빛이 없었다. 서로들 다투어 세숫물을 떠다주고 머리를 땋아주었다.
분세수를 시켜주고 두 손에 실을 감아서 얼굴과 이맛전에 솜털을 뽑아 예쁘게
다스려주었다.
행수기생은 얼굴에 솜털을 밀어주면서 이같이 말했다.
"아무리 네 얼굴이 예쁘고 곱지만 상감마마를 지척에 모실 텐데 조금이라도 얼굴에
추한 기분이 있어서야 쓰겠느냐?"
또 한 기생은 자기가 속치마끈에 찼던 금사향낭을 끌러서 취옥의 속치마 허리띠에
채워주었다.
"이 향은 우리 어머니께서 나에게 준 별사향이다. 장뇌와 반죽을 해서 만들었다
한다. 몸이 항상 가볍고 청신한 향기가 끊임없이 몸에서 떠도는 좋은 향낭이다.
상감마마를 가까이 모시는데 몸에 추한 속기가 떠돌아서야 쓰겠느냐?"
관습도감의 동료 선배들은 이같이 취옥을 돌봐주고 격려해주었다.
취옥은 처음 단신으로 전하의 부름을 받아 대궐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맨머리에
평복으로 알현을 하러 들어갈 수는 없었다. 화관 쓰고 푸른빛 당의에 남수닌(수닌은
춘추 의상용 비단의 일종) 치마를 입었다. 관습도감 제조께 인사를 드린 후에 문
밖으로 걸어나가 판교에 올랐다.
대전별감은 홍의에 초립을 멋들어지게 젖혀쓰고 홍의 자락을 펄펄 날리며 취옥의
판교 뒤를 쫓았다.
판교를 맨 앞채, 뒤채를 잡은 교군꾼들도 기생 취옥을 태워가지고 대궐 앞까지
들어가니 흥이 났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풍우같이 달려나간다.
관습도감의 동료 기생들은 길거리까지 나가서, 행운을 가듣 싣고 전하의 부름을
받아 대궐로 들어가는 취옥을 기쁜 얼굴로 전송들을 했다.
"잘 다녀오너라. 정말 네 몸에는 복이 담뿍담뿍 굴러드는구나!"
"복이란 곰배에 받고 안배에 안아서 너 혼자만 누리지 말아라. 우리들한테도 좀
나누어주려마!"
"잘하면 너는 내명부 후궁이 될는지 모르겠구나! 그때 가서는 우리들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 괄세를 해서는 아니된다."
"세상에 사람팔자 모른다더니 취옥이 네가 이같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앞으로
금지옥엽이나 떡두꺼비같이 한 번 점지해보아라!"
동료 기생들은 이같이 축복하면서 취옥을 대궐로 들여보냈다.
거리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어떤 기생인지는 모르나, 민머리에 평복으로 판교를 타지
아니하고 화관 족두리에 당의를 입고 정장을 차려서 판교를 탔는데 앞에는 상감의
하인인 대전별감이 홍의 자락을 펄럭거리며 앞을 서서 인도해 나가는 것을 보자,
사람마다 호기심을 가지고 취옥의 행차를 바라보았다.
"놀음에 지휘를 받고 가는 기생이면 민머리 남치마로 판교를 타고 갈 텐데, 화관
족두리에 판교를 탔으니 놀음차를 받고 가는 기생이 아니로구먼!"
"화관 족두리에 판교만 탄 것이 아닐세. 앞에 가는 저 별감을 보게. 초립을
멋들어지게 젖혀쓰고 홍의 자락을 펄펄 날리며 가는 품이 제법 호기가 만장일세. 아마
상감마마의 지휘를 받고 연회잔치로 들어가는 모양인가보이."
"이 사람, 자네 모르는 소리 하지 말게. 대궐 안에 연회가 있다면 관습도감
기생들이 열 명 스무 명씩 줄을 지어 들어가서 악사와 악공들과 함께 옷을 갈아입고
노래와 춤을 추는 법일세. 연회에 기생 한 명이 미리 정복을 입고 판교 타고 대궐로
들어가는 법이 어디 있나! 어떻든 희한한 일일세."
"아무튼 기생은 나이 어리지만 무척 예쁘고 똑똑한 절색일세."
또 한 사람이 말참견을 한다.
"전하께서 이 사이 아악을 새로 만드시느라고 무한 애를 쓰시는 중에, 해주에서
거서가 나와서 이것으로 황종률 등 십이율을 만드셨다네. 아마 아악을 더욱
연구하시기 위해서 관습도감 명창 기생에게 별입시를 분부하신 듯하이. 그러기에 홍의
입은 대전별감이 정장으로 차린 기생을 데리고 대궐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그럴 듯한 소릴세."
백성들까지 전하가 나라의 예악을 바로잡기 위해서 아악을 창조하는 데 열을 올리고
계신 것을 알았다.
취옥은 대전별감의 인도로 궐문 밖에서 판교를 내려 보행으로 편전에 들어가 전하께
배알했다.
전하는 반갑게 취옥을 대하였다.
"내가 거문고와 가야금으로 십이율을 맞춰보려 했으나 혼자서 줄을 골라보니
마음대로 율에 맞지 않는구나. 이제부터 내가 너를 부를 때 마다 관습도감에서 대내로
들어와서 나와 함께 거문고를 타보기로 하자!"
전하는 벽에 기대 세운 거문고를 친히 당겨 앞에 놓았다. 천천히 줄을 고르며
취옥을 향하여 다시 말씀을 내린다.
"지난번에 우조를 십이율에 맞추어서 몇 번 들어보았다마는, 계면조를 시험해보려
하니 손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계면조에 이러한 시조가 있다. 내가 불러줄 테니 네가
한 번 노래에 ㅁ추어 거문고를 타보아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시조를 불러주신다.
삼각산 푸른 빛이 중천에 솟아올라
울총가기는 상궐에 부쳐두고
강호에 잔 잡은 늙은이란 매양 취케 하소서.
취옥은 전하 앞에 있는 거문고를 당겨서, 노래에 맞추어 계면조로 타기 시작했다.
거문고 줄이 슬금슬금 울었다.
애원성이 일어난다. 울어대는 거문고 소리는 목이 메어 오열하는 듯 처절했다.
마치 흰 구름장이 푸른 하늘가로 펄펄 날리는 듯 싸늘한 음향이 일어나기도 하고,
굴원의 넋이 강물에 잠겨서 여한이 면면하게 흐르는 듯 기막힌 가락을 내었다.
율은 무한한 화음을 내어 조화를 이루었으나 너무나 가락이 처량했다.
전하는 취옥에게 말씀을 내린다.
"계면조는 조금 처량하구나. 음의 조화는 어울린다마는 역시 평조나 우조같이
씩씩하고 화창하지 못하구나!"
취옥이 대답해 아뢴다.
"악은 반드시 씩씩한 것만이 상승이 아닙니다. 첫째로 가사가 아름답고 좋아야
합니다. 같은 계면조로 다시 창을 하면서 거문고를 타보겠습니다."
"좋다! 시험해보라."
취옥은 거문고를 당겨놓고 줄을 골랐다. 타면서 가만히 창을 부른다. 편전에서
노래하는 때문, 큰 소리로 창을 부르지 아니하고 조심스럽게 불러본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야
잠 못 들어 하노라.
소리는 곱게곱게 애원성을 내며 뽑아대서 굽이굽이 넘어갔다.
그러나 아까 똑같은 계면조로 거문고를 울리던 그 멋과는 훨씬 달랐다.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흔들어놓는다.
전하는 고요히 귀를 기울여 들어시며 탄식한다.
"역시 거문고도 잘 탄다마는, 가사와 창이 모두 다 아름다워야 한다. 삼위일체가
되어야 비로소 좋은 악이 구성되는구나!"
후궁취옥
이같이 해서 취옥은 날마다 대궐 편전으로 들어가 전하의 하문을 받고 거문고를
울리고 가야금도 탔다.
전하의 고문고와 가야금을 타는 솜씨도 점점 늘었다.
평조는 말할 나위도 없고 우조와 계면조며 농과 엮음도 잘 탔다.
전하는 창법도 능숙해지기 시작했다. 평시조는 말할 것 없고, 존자 진한잎, 중허리,
막내는놈, 소용이, 엇까지 부를 줄 알았다.
전하는 풍류를 좋아해서 거문고를 타고 창을 해보는 것이 아니었다.
정악인 아악을 창제하기 위해서 이같이 창악에 대하여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취옥은 전하가 정치를 보살핀 후엔 반드시 관습도감으로 대전별감을 보내서 입시를
명하시는 때문, 항상 교방에서도 밤을 새우며 공부를하여 거문고 타는 수단과 창을
부르는 목청이 아름답게 세련되었다.
전하는 더욱더욱 취옥을 기특하게 생각했다. 틈만 있으면 취옥을 대내 안으로
불러서 악을 즐기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궁중 안에서는 내시며 별감, 무예청, 상궁을 통하여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근엄하신 상감마마께서 날마다 관습도감 기생을 어전에 불러놓고 거문고를 타시고
창을 불러 즐기시니, 상감마마의 마음도 변하신 모양이다."
아악을 제정하기 위하여 악리를 탐구하는 전하의 뜻을 내시와 궁녀 따위들이 알
까닭이 없었다.
"관습도감에서 날마다 불려 들어오는 기생은 참말 천하절색이더라. 눈은
어글어글해서 호수같이 맑고 얼굴판은 비둘기 알같이 갸름하고 아름다운데, 입술은
오월달에 활짝 핀 석류꽃처럼 혈색이 좋고, 전하 앞에서 거문고 줄을 퉁기면서
상긋상긋 웃는 그 모습은 보조개가 오목해지면서 사람의 간장을 마구 흔들어놓더라.
내가 만약 남자라면 그야말로 홀딱 반했을 것이다."
늙은 상궁의 말이었다.
"향아님, 관습도감 기생의 예쁜 모습을 주워섬기시는 모양인데, 몇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가얏고를 안고 기생이 방긋 웃으면 박 속같은 흰 이가 방싯 드러나고, 줄을
퉁기는 예쁜 손가락은 뛰는 듯 달리는 듯 마치 백어가 푸른 호숫가에서 자맥질을 하는
듯합니다."
젊은 궁녀의 말이다.
"아냐. 또 한 가지 홀딱 반하게 하는 모습이 있어요. 연옥색 저고리에 남끝동을
달아 입은 어깨판은 어찌 그리 날씬한지, 거문고 줄을 퉁기면서 어깨를 으쓱대는 그
모습은 과연 절색이야! 천하절염이야!"
또 하나의 궁녀의 말이다.
또 한 궁녀가 내달아서 말참견한다.
"항아님, 아우님들은 기생의 앉은 모습만 바라보고 횡설수설하는 것이지만 어전에서
걸어가는 그 모습을 좀 보아요. 외씨 같은 삼승버선 끝으로 남치맛자락을 사뿐
차면서, 허리를 약간 굽혀서 치마 꼬리를 한편 손으로 휘어잡고 뒷걸음을 쳐서
물러가는 그 모습은 과연 옥황상제가 계신 백옥루의 시녀가 상감마마 앞에 하강한
듯합니다."
"아냐. 도대체, 너무나 예쁘고, 너무나 총명하고, 너무나 요사스러운 계집이란
말야. 마치 당명황이 사랑하고 좋아하던 양귀비의 후신 같아!"
"양귀비가 거문고를 타고 노래했다는 소리는 못들었는데 양귀비보다도 더한층
윗길이지. 이러다가 상감마마께서 홀딱 반해서 후궁을 삼으시면 어찌하나?"
항아들은 이같이 지껄였다. 항아님이란 궁녀들이 서로 존대해서 부르는 대명사다.
편전에 날마다 관습도감 기생이 드나들면서 전하께 거문고와 가야금이며 창법을
말씀드린다는 소식은, 뒷날 소헌왕후의 시호를 받으실 중전마마 심왕후의 귀로
들어갔다.
중전은 대전 상궁을 불러 하문했다.
"관습도감 소 속의 여악이 매일 전하의 부르심을 받아 편전으로 출입한다는 말이
있으니, 너도 들은 바 있느냐?"
대전상궁은 중전의 하문에 피하여 은휘할 도리가 없었다.
"예, 그러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아악을 제정하시기 위하여 요사이 율에 대하여 자못
관심이 크신 듯합니다. 그리하와 일전에도 악에 대한 경연까지 여시고 대신 이하 모든
관원들을 부르시어 강론을 하시고 감상을 하셨습니다. 때마침 악을 아뢰는데 솜씨가
좋은 총명한 여악이 있었다 합니다. 그리하와 정무를 살피신 여가에 여악을 부르시어
거문고를 타게 하시고 창도 들으시면서 악리를 연구하시는 듯합니다."
왕후는 상궁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여악이 편전으로 드나드는 까닭을 자세하게
알았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조금 미타하게 생각했다.
크나큰 연회 때라든가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실 때 여악이 대내에 들어와서 여흥으로
가무를 하는 일은 불가피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매일 관습도감 기생이 편전으로
출입한다는 일은 궁중의 규범과 질서를 문란케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안상하고 온화하고 유순하면서 근엄한 성격을 구비하게 갖춘 소헌왕후였다. 국가의
예악을 창제하는 일도 큰일이지만, 궁중의 질서를 문란케 하는 일은 고려해볼 일이라
생각했다. 마음 속으로 미흡하게 여겼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금도 안색에 불쾌한 빛을 띠지 아니했다. 왕후의 체통을 지키는
때문이었다. 화한 음성으로 상궁에게 말씀했다.
"알겠다. 물러가거라."
아무러한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고 태연하게 말씀했다.
아무 일 없는 듯 훈훈한 기운은 전과 같이 왕후궁에 가득했다.
밤이 되었다. 동궁이 저녁 문후를 자전께 드리러 들어왔다.
동궁이 어마마마께 저녁 문안을 드리고 배를 드려 물러가려 할 때 소현왕후는
동궁에게 말씀을 내린다.
"잠깐 게 앉으라."
동궁은 모후의 명을 받들어 시립했다.
"요사이 드리는 바에 의하면 대전마마께서 관습도감의 여악을 매일 편전으로
부르시어 악리를 연구하신다 하니, 동궁도 소식을 들었는가?"
동궁은 미소를 띠고 아뢴다.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대답했다.
"동궁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바마마께서는 아직까지 나라에 정악이 마련되어 있지 아니한 것을 한탄하시와,
중국보다도 더 훌륭한 아악을 제정하시려하여 악에 대한 관심을 크게 가지셨습니다.
때마침 해주에서 거서가 나타나서 이것을 이용하여 몇천 년 전에 주공이 창제했던
옛법을 참조하여 천지와 인간 사이에 조화된 십이율관을 창제하셨습니다. 앞으로
편경과 편종이 끝나면 천하에 유가 없는 아악을 제정하실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이 일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관습도감에게 지음하는 여악을 명소하시어 정무 여가에
악리를 연구하시는 줄로 압니다."
동궁은 옹용한 태도로 자전께 아뢰었다.
동궁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왕후는 화한 안색으로 다시 말씀한다.
"나도 전하께옵서 태평소대를 이룩하시어 집현전을 창설하시고 국가의 문물을 더욱
발양시키기 위하여 제례작악하시는 홍업을 잘 알고 있다. 내 어찌 전하의 하옵시는
일에 대하여 추호인들 미타하게 생각하는 일이 있겠는가? 더한층 내조를 해드리지
못하는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여악은 곧 교방의 기생인데, 일개 기생의
몸으로 매일 대궐 안에 출입한다는 일은 구중 궁궐의 성스런 질서를 문란케 하는
일이다. 여악이 어떠한 아이인 줄은 모르나 관습도감에는 영악도 있고 제조도 있을
것이다. 여악의 지음하는 수단이 얼마나 높은지는 모르나 하필 기생을 궁중에
무상출입케 한다는 일은 마땅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절대로 여악이라 해서
투기해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동궁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자는 음성을 화하게하여 아뢴다.
"일전에 소자도 아바마마의 명소를 받자와, 거서로 새로 제정한 십이율관을
감상하시는 자리에 시립해 있었습니다. 그때 취옥이란 여악이 있었습니다. 제법
악리를 알고 창이 또한 좋았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앞으로 경석을 구하여 편경과
편종을 완성하시려하여 지음하는 대신들과 악리를 연구하려 하시나, 그들은 또한 맡은
소임이 있어 한가롭지 못합니다. 그러하시와 여악에게 별입시를 분부하시는 것을
목도해 보았습니다. 아바마마께서도 다만 악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여악을 부르신
것뿐, 다른 뜻이 아니신가 합니다."
"나도 상감마마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기생이 궁중에 무상 출입한다는 일은
궁중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단연코 묵과할 수 없다! 동궁은 아바마마께 충간하여
여악의 편전출입을 중지하도록 하라!"
소헌왕후의 얼굴빛은 전에 없이 엄숙한 기색이 떠돌았다.
동궁은 난처했다.
"소자가 어찌 간하옵니까? 아바마마께서는 다른 뜻이 아니 계시고 다만 아악을
완성하시려는 일념에서 여악을 시시로 부르시는 것이옵니다. 그것은 마치 아악 제정을
중단하시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충간이 아니옵니다."
소헌왕후 심씨는 봉안에 엄숙한 빛을 띠고 말씀한다.
"궁중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은 중전의 임무다. 단연코 질서는 유지해야 하겠다!"
동궁은 더욱 난처했다.
"황공하오이다. 질서를 유지하신다는 어마마마의 의지를 잘 아옵니다. 그러하오나,
소자의 입으로서는 감히 아바마마께 아뢸 도리가 없습니다. 죄송하오나 어마마마께서
친히 아바마마께 여악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시라고 아뢰시는 것이 가장 온당한
일인가 하옵니다."
소헌왕후는 장중한 태도로 말씀한다.
"나는 한평생 전하께 대하여 여자의 일로 말씀을 드려본 일이 없다. 다만 왕실을
위하여 질서를 지켜야 하겠다. 그러나 내가 말씀을 올린다면 전하께서는 뒤늦게 내가
투기하는 줄로 그릇 아시기 쉬우니, 그래도 동궁이 잘 말씀을 드려서 여악의
궁중출입을 금하시도록 하라."
동궁은 모후의 마음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악을 창제하려고 정성을
다하시는 부왕께, '여악을 가까이하지 맙소서'하고 아뢰기도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잠깐 침묵 속에 들었다. 예지가 머리에 섬광을 부어내렸다.
봉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자전께 아뢴다.
"황공하오나, 어마마마께 소자 감히 아뢰옵니다. 여악의 일을 어마마마께 잘
처리하도록 하시게 할 방도가 있사옵니다."
한동안 말씀이 없던 동궁이 웃음을 띠고 아뢰는 말씀을 듣자, 소헌왕후도 화색을
띠고 물으신다.
"무슨 좋은 방도가 있는가? 말해보라."
동궁은 또다시 봉안에 웃음을 가득 띠고 아뢴다.
"어마마마, 소자의 방자함을 꾸짖지 마시옵소서."
동궁은 어마마마께 응석을 피우듯 아뢴다.
"동궁은 무슨 말을 그리 하는가. 내 어찌 노성한 동궁을 꾸짖으리요."
소헌왕후도 자애 가득한 눈으로 세자를 바라보고 웃으며 대답했다.
"어마마마께오서 꾸짖지 아니하신다면 감히 소자의 소견을 아뢰겠습니다.
아바마마께오서 아악을 창제하시기 위하여 악리를 연구하시는 일도 국가의 큰
사업이옵고, 어마마마께서 궁중의 질서를 유지하시기 위하여 편전에 여악을 출입하지
말도록 하라는 말씀도 지당하온 분부십니다. 소자의 생각에는 두 가지 일을 다 폐하지
못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소헌왕후는 미소를 띠고 세자를 향하여 하문했다.
"두 가지 일을 다 폐하지 못할 일이라면 그럼 어찌하란 말인가?"
"외람되오나 소자는 한 묘책을 생각했습니다. 다행이 어마마마께옵서 소자의
의견대로 실행해주신다면 모든 일이 다 사무송하게 될 듯하옵니다."
세자는 얼굴에 가득 웃음빛을 띠고 자전께 말씀을 사뢰었다.
엄격한 성격을 지닌 소헌왕후도 아드님 동궁의 화한 안색과 부드럽게 아뢰는
말씀에, 봉안에 미소가 떠흐르며 묻는다.
"동궁은 어떠한 묘책이 있어서 사무송이 될 듯하다 하는가?"
"제왕이 후궁을 여러 명 두는 일은 예로부터 흠이 되는 일이 아니올시다. 여악
취옥을 아주 후궁으로 정하시어 관습도감에서 매일 궁중으로 출입하지 않게 하고 항상
전하를 지척에 모시어 모든 시중을 들게 하는 한편, 또한 악리를 연구하시는 데
보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올지, 감히 소자의 의견을 어마마마께 아룁니다.
이러한다면 기생이 궁중에 무상출입해서 금중의 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어마마마의
걱정도 소멸될 뿐 아니라 아바마마의 국악을 완성하시려는 크나큰 홍업에도 좌절감을
드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아름다운 일은, 어마마마께옵서 한평생 화합하게
후궁을 거느리시어 거룩하시다는 칭송이 온 나라 안에 가득하옵니다. 만약 이번에
아바마마께 여악을 궁중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아뢰신다면, 아바마마는 그같이
생각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밖의 사람들은 왕후마마께서 투기를 하시어 전하의 큰
사업을 저해하신다는 그릇된 판단을 내릴지도 모르옵니다. 소자, 감히 곡진한 충정을
어마마마께 아뢰옵니다. 꾸짖지 말아 주시옵소서. 황공하여이다."
소헌왕후는 동궁의 아뢰는 말씀을 귀기울여 들었다. 동궁의 안상하게 아뢰는 말씀은
과연 빈틈이 없이 사리에 합당했다.
소헌왕후는 크게 감동이 되었다.
"내, 아직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일을 동궁이 깨우쳐서 의견을 말해주니,
그지없이 기쁘도다. 동궁은 역시, 글을 많이 읽어서 격물치지의 경지에 이르렀도다!"
소헌왕후는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동궁은 몸을 굽혀 다시 아뢴다.
"소자의 공부가 무엇이 깊사와 감히 격물치지의 경지에까지 당도했사오리까.
황공하옵니다만 다만 아바마마의 크나큰 일에 꺾이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고,
어마마마의 한평생 어질고 갸륵하신 덕에 누를 끼칠까 염려되와 이러한 어리석은
말씀을 사뢴 것뿐이옵니다."
동궁의 다시 아뢰는 말씀을 듣자, 소헌왕후의 봉안은 활짝 열렸다.
"동궁은 과연 효성이 지극하도다. 전하도 위하고 나의 흠도 드러나지 않게 묘책을
말해주니 이것은 참으로 일석이조의 훌륭한 처사다. 그렇다면 동궁은 대전께 여악을
후궁으로 삼으시라 아뢰라..."
동궁은 소헌왕후의 말씀을 듣자, 다시 만면에 미소를 짓고 아뢴다.
"소자, 비록 동궁이라 하오나, 후궁에 대한 일을 어찌 감히 전하께 두시라, 말라
아뢰오리까. 이러한 일은 어마마마께서 친히 금중규범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고 여악을
후궁으로 봉하여, 궁녀들간의 비웃는 일이 없도록 하시는 것이 적당한 줄로 아뢰오."
소헌왕후도 그럴 듯하게 생각했다.
"동궁의 말이 심히 옳다. 내가 친히 내일 상감께 동궁의 방책대로 아뢰어 잘
처리하리라!"
소현왕후는 동궁의 자감 있는 진언을 마음 속으로 기쁘게 생각했다.
역시 다음 세대에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는 훌륭한 임금이 될 것이라고 당신의
아들을 믿음직스럽게 생각했다.
동궁도 어마마마께서 자기의 진언을 쾌하게 받아들여주신 것이 기쁘기 한량없었다.
밤도 깊어갔다.
"어마마마, 그럼 소자는 물러갑니다. 안녕히 침수에 드시옵소서."
배를 드리고 물러간다.
"오늘 밤에 동궁의 좋은 말씀을 들어서, 내 가슴이 후련하다. 며칠 동안 마음에
걸렸던 일이 활짝 풀어졌다. 동궁의 너그러운 훈수를 들어서 마음이 심히 편하다.
오늘 밤에는 편지 자리라!"
소헌왕후는 문후를 드리고 물러가는 세자를 분합까지 나가 전송했다.
이튿날 아침 소헌왕후는 소세를 마친 후에 제조상궁을 불러 분부를 내렸다.
"대전에 나가 침수문안을 올린 후에 내가 대전마마를 뵈오러 대전으로 나간다고
아뢰어라."
상궁은 중전마마의 명을 받들어 대전으로 나갔다.
어전에 나가 부복한 후에 중전마마의 전갈을 올렸다.
"중전마마께오서 대전마마께 침수문안을 올리라 하시와 문후를 올리옵니다."
세종전하는 아침부터 악서를 대하여 책장을 넘기다가 인자한 눈으로 중전상궁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중전마마께서도 안녕히 침수에 납시었느냐? 나는 별일 없이 잘 지냈다. 이 사이
내가 연구하는 일이 많이서 자주 중전에 들르지 못했느니라. 미안한 말씀을
전해다오."
세종전하는 책장을 덮고 상궁에게 분부했다.
상궁이 부복해 아뢴다.
"중전마마께서도 안녕히 침수에 납시었습니다. 그리하옵고 감히 아뢰옵니다.
중전마마께오서 아침에 아뢸 일이 있어 대전으로 납시겠다 하십니다. 틈을 주시면
뵈오러 나오시겠다고 합니다. 성의를 물어 달라는 하보가 계시었습니다."
"그러하냐. 이 사이 내가 바쁜 일이 많아서 자주 중전에 들르지 못했느니라.
미안하기 짝이 없다. 내가 곧 중전마마를 뵈러 건너가리라. 수고롭게 오실 것 없다고
아뢰어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시립해 섰던 내관에게 분부했다.
"내 곧 중전으로 들어갈 테니 그리 알고 자비를 놓아라."
내관은 명을 받들어 물러가고, 상궁은 배를 올린 후에 중전으로 돌아갔다.
중전상궁은 곧 중전으로 돌아가 소헌왕후께 전하께서 친림하신다는 전갈을 올렸다.
이윽고 중전 앞뜰에는 무예청들의 시위 소리가 들렸다.
전하가 대전에서 옥교를 타고 중전으로 임어하는 것이다.
중전 이하 모든 상궁들은 뜰 아래까지 내려, 상감의 행차를 맞이했다.
전하는 미소를 머금고 맞이하는 중전의 옥수를 잡고 말했다.
"내, 너무 일이 많아서 자주 중전에 들르지 못한 것이 무한 미안하오. 용서해주기
바라오!"
소헌왕후도 봉안에 화기를 가득 띠고 대답한다.
"전하의 만기를 총람하시는 일을 신첩이 어찌 모르오리까? 더구나 요사이는 예악을
제정하시기 위해서 촌가가 없으신 일도 신첩이 잘 알고 있습니다. 흐뭇하시도록
내조를 받들지 못하와 송구하기 짝 없습니다. 그리하와 오늘도 잠시 아뢸 일이 있어
대전으로 뵈오러 나가려 했더니 바쁘신 와중에 이같이 친림을 해주시니 황감하온 말씀
이루 다 아뢸 길 없습니다."
"무슨 말씀요? 마마가 내조를 잘해주시어서 궁중에 모든 질서와 규범이 잘
유지되므로, 과인이 마음을 놓고 정치와 문교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겠소.
비마마는 언제나 지나치게 겸양을 하시니 내 마음이 도리어 미안하오."
전하는 어수로 중전의 옥수를 이끌고 중전 침실로 들었다.
모든 시자들이 물러났다.
전하는 비마마와 다정하게 앉았다.
아직도 사십 미만의 내외분이었다. 전하의 용안은 화사하고 중전의 봉안은 그대로
요조한, 아름다운 태깔이었다. 양궁의 의초는 꽃이 봉접을 부르고, 나비와 벌이 꽃을
사모해서 따르는 태도다.
전하는 다시 비마마의 손을 잡고 묻는다.
"무슨 급하신 일이 있기에 나를 찾아 대전으로 나오신다 하셧소?"
"급한 일은 아니올시다마는 하도 전갈로만 문후를 드려서, 용안을 우러러뵙고파
뵈오러 나가려 했습니다."
근엄한 비마마연만 시자가 없는 곳에서는 전하의 마음을 슬몃 사로잡아볼 줄도 아는
여인다운 교양도 지녔다.
전하는 더욱 비마마를 사랑하고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참말 미안하오. 임금 노릇 하기가 이렇게 어렵구려. 사랑하는 비마마를 시시
때때로 대하지 못하게 되니, 초가삼간에서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놓고 의좋게
지내는 농부의 살림만도 못하구려... 하하하."
비마마는 청초한 얼굴에 웃음을 띠고 대답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늘은 다 제각기 직분을 주시어 한세상을 지내도록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전하의 팔자는 초가삼간에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놓고
내외가 의좋게 담소하고 지내실 사주팔자가 아닙니다. 이 나라의 만백성이 모두 다
평화롭게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며 자식새끼들을 거느려 도란도란 의좋게 지내도록
해주시는 큰 임무를 두 어깨에 짊어지신 팔자올시다. 괴로워도 하는 수 없습니다.
참으십시오. 호호호."
전하와 중전은 다정하게 말씀을 나누었다.
전하도 비마마의 말씀을 듣고 소리 높여 껄껄 웃으셨다.
"비마마의 말씀이 과연 옳소. 하는 수 없구려, 팔자소관이지. 하하하. 그러기에
국가의 큰일을 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중전도 자주 찾지 못하는구려! 그래 내가
보고파서, 중전이 대전으로 나오려 하셨소?"
내외분의 정담과 밀어는 깨가 쏟아지는 듯했다.
이윽고 소헌왕후는 얼굴빛을 고치며 말씀한다.
"오늘 대전마마를 뵈오러 한 것은 잠시 아뢸 말씀이 있어서 의향을 알아보려 한
것이올시다."
전하는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묻는다.
"무슨 의논할 일이 있습니까?"
중전 소헌왕후도 옥안에 미소를 띠고 아뢴다.
"신첩의 아뢰는 말씀을 들으시고 혹시 역하게 생각하실까 하와 겁이 나옵니다."
전하는 왕후의 말씀을 듣자 음성을 높여 껄걸 웃었다.
"내가 언제 마마의 말씀을 역하게 생각했거나 노하게 들은 일이 있습니까. 마마가
한평생 곤위에 오르신 이후에 과인을 불민하고 미타하게 생각하신 적이 손톱만큼도
없는데, 과인이 어찌 후마마의 말씀을 역하게 생각하고 노엽게 들을 리가 있습니까.
하하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소이다마는 절대로 역하게 생각하지 아니하오리다.
하하하."
전하는 또 한 번 쾌활하게 웃으셨다.
왕후는 다시 방긋방긋 웃음을 짓고 아뢴다.
"전하께서 노하지 아니하신다면, 황공하오나 은휘치 않고 아뢰겠습니다. 방자하다고
꾸짖지 마셔야 합니다."
전하도 또 한 번 웃으며 말씀한다.
"후마마께서 한평생 과인에게 정당한 말씀만 하신 것을 과인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후마마의 말씀은 언제나 과인을 보필하여 내조의 큰 덕을 주신 터인데, 내
어찌 감히 하시는 말씀을 미타하게 여기오리까. 어서 말씀해주시오."
"그럼 황공하오나 감히 아뢰옵니다. 전하께옵서 이사이 남만북적을 물리치시어 크게
국위를 선양하시고, 다시 나라 안에 예악문물을 정리하시어 서민들로 하여금
태평연월을 누리도록 하옵시는 홍업에, 비록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신첩이오나 항상
기쁜 마음을 가슴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와 요사이 전하께오서 거서로
십이율관을 제정하시어 나라에 정악을 마련하시는 일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임금으로 할 일이 아니겠소. 비마마께서 궁중의 모든 질서를 잘
유시해주고, 조정의 신하들도 훌륭하게 보필해주는 덕이라 생각하오! 국가의 일은 한
사람의 힘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거든! 마마는 궁중의 모든 질서를 잘 지켜주시어
과인으로 하여금 정사와 교화에만 힘을 쓰도록 하게 했으니, 마마의 내조하신 일은
과인이 밖에서 하는 일보다 못지 않은 큰일이오이다. 후마마의 갸륵한 공덕을 입과
붓으로 표현할 길이 없소이다."
세종전하는 정중한 말씀을 소헌왕후께 보낸다.
전하의 말씀을 듣자, 소헌왕후는 다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을 올린다.
"전하께옵서 궁중의 질서를 지키는 일이 또한 내조의 하나라고 하교하시니 감히
아뢰옵니다. 오늘 신첩이 전하께 알현하옵고 아뢰옵고자 하는 바는 사실 궁중질서에
대하여 품달하옵고자 감히 알현을 청조한 것이옵니다."
중전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전하의 용안에 잠깐 놀라는 듯한 빛이 떠돌았다.
"궁중에 무슨 불미한 일이 생겼소이까?"
중전은 안색을 변치 않고 조용하게 침착한 태도로 대답해 아뢴다.
"놀라실 것은 없습니다. 불미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니올시다마는, 궁중의 풍기와
기강이 해이해질 듯한 일이 있사와 감히 아뢰옵니다."
전하의 용안엔 여전히 긴장한 빛이 감돌았다.
"풍기와 기강이 해이해질 듯한 일이라면 어찌 무관심하게 내버려 둘 일이겠소이까.
중전마마가 이러한 일은 바로잡으시어 궁중질서를 문란치 않도록 하십시오. 중전께서
넉넉히 혼자 처단하실 일이지, 과인한테까지 물어보지 아니하셔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중전은 다시 미소를 띠고 고한다.
"황공하오나 신첩 혼자서 독단으로 처리할 일이 못되와, 감히 아뢰옵니다. 그리하와
아까도 품달했거니와 전하께옵서 말씀을 들으신 후에 노엽게 생각하지 마십사고 아뢴
것이올시다."
전하는 답답하게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씀요? 간단하게 속히 말씀해주시오."
"혹시나 전하께서 하시는 큰일에 방해가 될까하여 이리 주저주저하고 말씀을 얼른
드리지 못합니다."
"관계치 않소. 어서 말씀하시오."
"그러면, 방자함을 무릅쓰고 감히 아뢰옵니다. 전하께옵서 요사이 예와 악을
제정하시기 위하여 정무 여가에 촌가의 틈도 없이 악리를 연구하시는 일은 신첩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와 관습도감의 여악을 시시로 편전에 명소하시어 시빙율을
조정하는 일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국악을 제정하시는 일이 국가의 막중한 대사인
줄도, 아무리 규중에 있는 왕비라 하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관습도감의
여악은 역시 기생이올시다. 전하께서 아무 다른 뜻이 없으신 줄도 신첩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궁중에는 내명부인 후궁과 상궁 들 이하 무수한 궁녀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올시다. 내시, 무예청, 별감 이하 모든 액정들이 보는 바에
관습도감 기생이 편전으로 무상출입을 한다는 일은 궁중의 풍기와 질서를 유지하는 데
크나큰 장애가 생기옵니다."
소헌왕후는 옥안에 화한 빛을 잃지 아니하고 차근차근, 궁중의 풍기와 질서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정정당당한 바른 말이다. 부드러운 솜방망이로 전하의 용포 자락을 쿡쿡 찔러
간하는 듯했다.
전하는 당황했다. 용안이 잠시 붉어졌다.
소헌왕후는 말씀을 계속한다.
"신첩이 이런 말씀을 올린다면 혹시 전하께옵서는 신첩이 젊지도 않은 나이에
별안간 투기하는 마음이 생겨서, 이러한 말씀을 올리는 줄 오해하실까보아 한동안
아뢰기를 주저했습니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옵서도 통촉하시는 바와 같이 지금
궁중에는 후궁들이 여러 사람있습니다마는 모두 다 전하를 받들어, 추호만한 시샘과
알력도 없이 궁중에 화기가 가득하옵고, 왕자와 옹주들을 생산해서 왕실이 창대하고
규범이 찬연하옵니다. 모두 다 성상의 덕화의 은혜로운 바람이 이러한 왕가의 번영을
이룩하신 것이올시다. 이러한 화기가 이룩되는 것은 규범과 질서가 엄격해서 왕실이
번영케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구중궁궐 안에 질서가 서 있는 중에 비록
국가에 폐치 못할 아악을 제정하기 위한 일이라 하오나 관습도감 기생이 편전으로
무상출입한다는 이 사실은 궁중의 기강을 저해시킬까 두렵습니다. 신첩은 절대로
투기해서 아뢰는 말씀이 아니올시다. 궁중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은 왕후의
책임이올시다. 그러하와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
전하는 소헌왕후의 부드러우면서 논리가 정정당당한 말씀을 듣자 용안에 숙연한
빛이 떠돌았다.
용포 옷깃을 바로잡으며 말씀한다.
"중전의 의도와 말씀은 언언구구 나의 폐부를 찔러서 감동케 하는 말씀이오. 나는
하나만 알고 둘은 생각하지 못했소이다. 내 어찌 아름다운 계집에 마음이 있어서
여악을 편전으로 불렀겠소. 다만 이사이 나의 한 가지 마음먹은 일은, 국가가 창설된
지 이미 오래건만 아악다운 국악이 없었소이다. 국가가 있으면 반드시 예악이
있어야만 문명한 국가와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례작악을 하는 데 과인은
전력을 기울이는 중, 다행이 하늘이 도와서 해주에 거서가 나타나 십이율관을
정했소이다. 그러나 아직도 경석이 나타나지 아니해서 더한층 악리를 연구하는 중,
관습도감에 제법 지음하는 아이가 있기에 틈이 나는 대로 악리를 이야기하려하여
편전으로 불렀던 것이오. 이제 곤전의 말씀을 들으니 과연 그러하오. 내명부들도
행동하기 어려운 금중에 여악을 무상출입하게 했으니 확실히 과인이 실수를 했소이다.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하지 못한 탓이오이다. 곤전에게 사과를 하는 동시에
다시는 여악의 궁중출입을 금하오리다."
전하는 정중하게 소헌왕후를 향하여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말씀을 했다.
일국의 제왕이면서 바르고 옳은 정론 앞에는 허심탄회하게 일을 뉘우쳤다. 성주
세종의 인간미가 약여하게 드러난다.
소헌왕후는 오히려 황공하고 당황했다.
잠시 몸둘 바를 몰라했다. 한동안 주저주저하다가 말씀을 올린다.
"전하께옵서 사과하신다는 하교를 내리시니 신첩은 황공 송구하와 과연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소현왕후의 옥안엔 홍훈이 떠돌았다.
전하는 다시 화한 빛을 용안에 띠고 말씀한다.
"사람이란 허물이 있으면 지체없이 고치는 것이 사람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귀중한
도리오이다. 내가 비록 군왕이라 하나 일을 잘못 처리했다 하면 당연히 고쳐야 할
것입니다. 과인의 악리를 연구하려는 일로 인하여 궁중의 규범과 질서가 문란해진다면
어찌 천하를 다스리고, 백성을 어거할 수 있겠소. 내일부터라도 여악의 편전출입을
중지시키고 다른 방법으로 악에 대한 일을 연구할 테니 마마께서는 방심하시기
바라오."
전하는 어디까지나 너그럽고, 정직하고, 겸손했다. 손톱만큼도 제왕의 권위를
휘둘러 뽐내려 들지 아니했다.
다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 당신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하려고 노심초사해서 정성을
다하여 노력할 뿐이었다. 인간으로서 계급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손아래
사람들의 말이라 할지라도 조정에서나 궁중에서나, 바르고 옳은 일이면 자기의 그릇된
주장을 지체없이 버리고 곧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이 어진 임금, 영특한 임금, 성스런 임금이 된 그의 인간자세다.
소헌왕후는 전하의 말씀이 여기까지 이르자, 더욱 황감했다.
옥음을 나직하게 해서 아뢴다.
"전하께오서 신첩이 아뢴 금중질서에 대하여 크게 예지를 내리시어 통촉해주시고,
여악의 금중출입을 곧 중지하겠다 하시니 신첩으로서는 황공무지한 중에, 전하의 바다
같으신 도량에 감읍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 말씀 다시 아뢸 일이 있습니다."
전하는 정색하고 묻는다.
"무슨 말씀이 또 계시오?"
비전하는 다시 공손히 아뢴다.
"국가의 제례작악을 하시는 일은 전하의 큰 임무시옵고, 금중의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는 일은 왕후인 신첩의 맡은 바 책임입니다. 지금 형편으로 말씀한다면 두 가지
일이 다 함께 중대한 일이올시다. 어느 한 가지를 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전하께서는 전과 같이 여악을 시측케 하시어 악리를 연마하시기 바랍니다."
전하는 귀를 의심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 여악이 편전으로 무상출입을 함으로 인해서 궁중의 질서와
규범을 문란케 한다고 과인을 꾸짖었던 후마마가, 이제 다시 제례작악도 불가피한
일이니 그대로 여악을 편전에 시측하도록 하라 하니, 도대체 후마마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소이다. 그것은 과인을 나무에 오르라 한 후에 다시 흔들어서 희롱해보는 수작이
아니겠소? 도대체 후마마의 근본 뜻을 모르겠소이다."
전하의 용안은 엄숙했다.
소헌왕후는 차분하게 안색을 고치지 않고 아뢴다.
"황공무지하옵니다. 신첩이 어찌 감히 하늘 아래 단 한 분이신 전하를
희롱하오리까. 돌팔매 한 개로 새를 두 마리씩 맞히는 격이올시다. 전하께서는 이
일을 허락해주신다면 두 편이 다 좋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전하는 껄껄 웃었다.
"상말에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다 하는 말이 있는 것을 들어본 일이 있었소. 과인의
음악연구에도 좋고 주전의 궁중규범을 지키는 데도 좋다는 말이로구려. 어떠한 방책이
있단 말씀요?"
소현왕후는 옷깃을 단정하게 매만지며 정중하게 말씀한다.
"여악 취옥이를 기생의 몸으로 편전에 출입을 하게 하지 마시고, 아주 내명부
후궁을 삼으시어 전하의 악리를 정리하게 하는 한편, 항상 옆에 두시어 전하의 건즐을
받들게 하옵소서. 이리 하오면 궁중에 잡음이 생기지 않고 질서가 엄하게 유지되니
일거양득이 되옵니다."
전하는 소헌왕후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한 말씀으로 거절한다.
"나보고 후궁을 또 한 사람 두란 말씀요? 당치 아니한 의견입니다. 과인이 취옥으로
후궁을 삼고 싶었다면 벌써 내명부의 직첩을 주어서 내 곁에 두었을 것이지, 이제
후마마가 말씀을 한다 해서 그애로 후궁을 삼겠소이까? 과인은 취옥을 데리고 다만
악에 대한 일을 연구하기 위하여 편전으로 출입하게 한 것이니, 만약 궁중의 규범에
어긋난다면 오늘부터라도 출입을 중지하도록 관습도감에 명을 내리면 관계없으니
후마마는 과히 염려치 마시오."
소현왕후는 다시 옹용한 화기를 띠어 아뢴다.
"전하께오서 제례작악하시기 위하여 지음하는 여악을 시측시키시는 일은 역시
국가발전에 큰 사업이올시다. 지의하지 마시고 신첩이 아뢰는 말씀을 청허하시어
취옥으로 후궁을 정하시옵소서. 이리하신다면 모든 일이 다 순조로울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고집하지 마시고 신첩의 의견을 들어주시옵소서."
전하는 정색하고 대답한다.
"나에게는 지금 후궁이 다섯 사람이나 있소이다. 자, 꼽아보십시다. 영빈 강씨,
신빈 김씨, 혜빈 양씨, 숙원 이씨, 상침 송씨, 이같이 다섯 명이나 있지 아니하오.
모두 다 후마마의 너그럽고 어진 덕화로 궁중이 화합해서, 과인이 마음을 놓고
나라일에만 전념을 하고 있는 터인데, 또다시 나이 어린 후궁을 둔다는 일은 자식들
보기에도 부끄럽소이다. 다시는 두말 하지 마시오. 편전에 여악을 출입시키는 일은
단연코 오늘부터 중지하오리다. 나는 그 동안 악서도 많이 읽어보고 십이율의 가락도
좋이 시험해봤으니 그만하면 대강 악에 대한 원리는 짐작하게 되었소이다. 다시는
궁중의 규범을 문란시키지 아니할테니 안심하시오."
전하의 말씀은 근엄했다. 부드럽고 화하고 착하고 어질어서 가지가지로 총명한
예지를 갖춘 전하였다.
그러나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한 번 정해놓은 후에는 마음이 철석같이 흔들이지
아니했다.
이러한 독특한 성질이 있는 때문에, 신하를 한 번 믿으면 만 사람이 훼방을 놓아도
탁 믿어서 기어코 일을 성공시키게 하는 훌륭한 성격을 가졌다.
소헌왕후는 전하께서 한 번 마음을 정하신 후에는 어떠한 일이라도 용이하게 바꾸지
아니하는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하의 말씀이 여기까지 이르자, 마음 속으로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은 일국의 곤전이라는 왕후의 직책을 다하기 위하여, 궁중의 규범과 질서를
엄숙하게 이행하기 위하여 기생의 자격으로 궁중에 무상출입하는 일을 막고, 여악
취옥을 아주 후궁으로 봉해서 궁중의 모든 유언과 잡음을 막으려하여 전하께 아뢴
일인데, 전하는 법도 있는 중전의 뜻을 받아들여서, 여악의 궁중출입을
중지시키겠다고 말씀하시니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제례작악하는 국가사업을
방해하는 듯한 오해를 받기 쉬웠다.
잠시 마음 속으로 괴로움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하의 용안이 다시 화평한 기상으로 돌았을 때, 소헌왕후는 조용히 전하께 다시
말씀을 아뢴다.
"여악 취옥을 후궁으로 봉하시어 한편으로 궁중의 규범을 문란치 않게 하고
한편으로 전하의 제례작악하시는 큰 사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자는 의견은 신첩
한 사람의 의견만이 아니올시다. 궁중의 여론이올시다."
전하는 여전히 마음이 흥락하지 못했다.
"왕후의 의견이라면 모르되 궁중의 여론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요? 건방지게 어떠한
것들이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왈가왈부한단 말씀요?"
소현왕후는 웃음을 짓고 아뢴다.
"궁중의 여론이란, 신첩이 말씀을 조금 과장되게 아뢴 것이니, 용서해주시옵소서.
신첩은 내조하는 궁중의 질서르 ㄹ유지하는 책임을 맡았기에, 기생 취옥의 일에
대하여 며칠 동안 마음을 괴롭게 지냈습니다. 하루는 동궁이 저녁 문안차 들어왔길래,
여악의 일을 걱정했더니, 동궁은 태연한 태도로 말씀했습니다. 아바마마께 아뢰어
취옥을 후궁으로 봉하라 했습니다. 그리하오면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풀릴 것이라
했습니다. 기실은 취옥을 후궁으로 봉하자는 것은 신첩의 의견이 아니옵고, 동궁의
의사올시다. 신첩도 동궁의 슬기 있는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크게 탄복해서 전하께
품달한 바입니다. 동궁의 슬기 있는 의견을 아름답게 받아들이시어 일이 규각이 나지
않도록 선처하시는 것이 온당할 줄 아뢰오."
전하는 항상 동궁의 학문과 교양 있는 행동을 마음 속으로 크게 미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취옥을 후궁으로 봉하는 일이 가장 좋은 방편이라고 어마마마께 아뢰었다는
소현왕후의 말씀을 듣자, 마음 속으로 동궁을 무한 가상하게 생각했다.
"동궁이 그런 말을 처음 꺼냈더란 말씀요?"
전하의 엄숙했던 용안이 슬며시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미소를 지으며 말씀한다.
"주제넘구려! 동궁이 아비의 후궁까지 걱정을 했더란 말씀요. 하하하."
전하의 굳은 마음은 차차 얼음 녹듯 풀어지기 시작했다.
소헌왕후는 기회를 놓지지 아니했다.
"동궁도 일전에 전하의 소명을 받자옵고 여러 대신들과 함께 취옥이 십이율관에
맞추어 창을 브르고, 마마께오서 하문하시는 악리에 대하여 응구첩대하는 일을
배종해서 목도했다 합니다. 취옥은 아악제정에 크게 도와드릴 아이오니 아주 후궁을
삼아서, 한편으로는 아바마마의 큰 사업을 이루하시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어미의
근심하는 일을 덜어주기 위하여 이같은 지혜를 낸 것이라 합니다. 동궁은 과연
효자이올시다."
소현왕후가 아뢰는 효자라는 말에 세종전하는 마음이 활짝 열려서 유쾌했다.
"후마마도 취옥을 후궁으로 삼으라고 말씀하고 세자도 그리 하기를 원했다 하니
하는 수 없소이다. 그러나 후궁은 과하오. 내일이라도 취옥을 궁인으로 삼으시오.
모든 절차는 다 후마마께서 처리하시오. 하하하."
세종은 마침에 취옥으로 궁인 삼는 일을 윤허했다. 소헌왕후도 마음이 흐뭇했다.
"염려 맙시오. 마마께서 정 그러하시다면 궁인으로 맞아들이오리다. 절차는 모두 다
신첩에게 맡기시옵소서."
대전과 중전은 화락한 웃음을 크게 나누며 헤어졌다.
아닌게아니라 동궁은 자전께 취옥을 전하께 후궁으로 맞아들이시도록 아뢰라고
말씀했으나, 일개 여악을 일약 후궁으로 봉한다는 것은 너무나 절차를 뛰어넘는
일이었다. 소헌왕후도 전하의 궁인으로 봉하라는 분부를 옳게 생각했다.
궁중 안 내명부의 계급은 역시 질서있고 엄하게 정해 있다. 왕후는 곤전인 정궁이니
제왕의 배위다. 임금과 일체가 되는 것이요, 그 아래 내명부가 있다. 정일품 빈
칭호를 받는 이가 있으니 왕후의 다음 가는 자리로서 동궁빈이 있다. 다음에 임금의
후궁으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후궁을 역시 빈이라 한다. 빈 다음 자리에 있는
후궁을 귀인이라 부른다. 정일품에 다음 가는 종일품이다.
다음은 정이품 소의, 종이품 숙의, 정삼품 소용, 종삼품 숙용, 정사품 소원, 종사품
숙원이 있다.
동궁빈을 제하고 정일품 빈마마서부터 종사품 숙원까지는 당당한 임금의 후궁이다.
이러한 후궁들은 대개는 임금의 총애를 입은 후에 왕자와 옹주를 생산해서 종사품
이상의 대우를 받는다.
다음에는 역시 내명부지만 후궁이 아니라 궁인에 속한다.
통칭해서 상궁이라 하는데, 상의는 정오품이니 의전을 맡은 상궁이다. 임금의 옷을
맡은 상궁은 상의요, 음식을 맡은 상궁은 상식이라 하는데 종오품이 된다. 다음에
임금의 침실을 상침과, 궁인들의 공적을 살피는 상공이 있다. 정육품이요, 기록을
맡은 상정과 상기가 있으니 종육품이다.
다음에는 손을 대접하는 전빈이 있고, 옷을 맡은 전의와 찬을 맡은 전선이 있으니
정칠품이다.
다음에 전설은 궁중의 모든 설비를 맡고, 제술을 맡은 전제가 있다. 또다시 언관
비슷한 전언이 있으니 종칠품이요, 궁인의 일을 협찬하는 전찬이 있고, 궁중의 장식을
맡은 전식이 있다. 다시 약을 달이는 전약이 있으니 정팔품이다. 전등은 궁전의
등불을 켜는 책임자요, 전채는 채색을 살피고, 전정은 모든 일을 바로잡는 책임을
맡았다. 모두 다 종팔품이요, 음악을 맡아서 아뢰는 주궁, 주상은 정구품이요,
주변치, 주치, 주우, 주변궁은 종구품이다.
마치 군왕 아래 조정이 있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관원을 정과 종으로 나누어 열여덟
계급을 둔 것과 똑같이, 왕후궁에도 정일품서부터 종구품까지 열여덟 계급을 두어서
내명부를 구성해놓았다.
궁중의 전범과 규율은 이같이 질서가 정연했다.
소헌왕후는 궁중에 매일 출입하는 관습도감의 여악 취옥을 동궁의 진언에 의하여
세종전하께 후궁을 삼아서 궁중의 질서를 유지케 하라고 아뢰었다.
전하는 후궁이 많은 터에 또다시 후궁을 두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극구
사양하다가 동궁의 건의라는 말씀에 감동이 되었다. 후궁은 과하니 궁인의 직첩을
주어서 궐 안에 상주케 하라 하고 모든 절차를 후마마에게 맡겼던 것이다.
소헌왕후 심씨는 전하의 쾌한 윤허를 받은 후에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보았다.
종사품 숙원 이상은 후궁이 되니 취옥을 숙원 이상으로 봉할 수는 없었다.
정오품부터는 상궁인 궁인이다.
궁인 중에는 궁, 상, 각, 치, 우의 음악을 맡은 정구품과 종구품의 주궁, 주상 등이
있다.
그러나 악리에 밝다는 취옥을 그중 말단인 주변궁 따위로 임명하기가 난처하기도
했다.
한동안 이리 궁리, 저리 궁리한 후에 마음으로 정하고 안온한 침수에 들었다.
이튿날 소헌왕후는 대전별감을 내전으로 불렀다.
대전별감이 황망히 뜰 아래에 대령했다.
"너는 곧 관습도감에 나가서 도감 제조에게 일러라. 여악 중에 취옥이란 기생을
기안에서 제적시키라 일러라! 그리고 내가 따로이 상궁을 보내서 궁중으로 맞아들일
테니 기생 취옥은 대기하고 있으라 일러라!"
소헌왕후의 분부를 받자, 대전별감은 홍의 자락을 펄럭거리고 궐문밖으로 나갔다.
곧 관습도감을 찾아서 제조와 취옥에게 왕후의 분부를 전달했다. 소헌왕후의 분부를
별감에게 전해들은 박연은 소헌왕후께서 취옥을 부르시는 일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때마침 편전으로 들어가려고 몸매무새를 곱게 다스리고 있던 취옥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취옥은 두렵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대전별감의 인도로 전하의 편전으로 자주 드나든 일이
있었으나 한 번도 왕후마마를 뵈온 적은 없었다.
소문으로 듣기에, 왕후마마는 성정이 어질고 덕이 많으신 분이나 규율을 지키시는
데 심히 엄격하시어, 궁인들이 추호라도 게으르고 한만한 태도가 있으면 가을
서릿발같이 준엄한 꾸지람을 내리시는 분이란 말씀을 항상 귀에 젖도록 듣고 있었다.
여태껏 여러 차례 편전에서 전하를 모시어 악기를 타고 창을 불렀으나, 후마마께는
한 번도 문후를 드릴 기회가 없었다.
마음 속으로는 한 번 문안이라도 드리고 싶었으나 전하의 분부가 아니 계시고, 또
감히 어떤 궁인을 통해서 문후를 올리고 싶다고 말할 계제도 되지 못했다.
항상 편전으로 들어갈 때마다 멀리 내전인 왕후궁을 바라보고 존엄하게 생각만 할
뿐이었다.
이제 돌연 별감을 통하여 후마마께서 입시를 명하시니 오만가지 별의별 생각이
났다.
'기생의 몸으로 무단히 편전으로 출입한다고 크게 진노하시어 극형을 내리시려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옛이야기를 들으면 중국에서는 투기가 심한 왕후가, 임금이 아름다운 여인들을
가까이하면 잡아다가 손과 다리를 잘라서 측간에 가두어 두고 '사람 돼지'라고 한
일까지도 있었다 한다.
왕후가 잡아다가 죽이지나 아니할까 겁이 더럭 났다.
몸치장하던 일은 집어치우고 급히 관습도감청으로 올라가 제조께 뵙고 말씀을
사뢰었다.
"나리 마님, 곤전마마께서 쇤네를 부르신다 하니 웬일이오니까?"
취옥의 얼굴빛은 당황하고 말소리는 떨렸다.
난계 박연은 진중한 분이다. 얼른 경솔하게 대답하지 아니했다.
"글쎄다. 곤전마마께서 별감을 내보내시어 너 같은 여기를 부르시니 크나큰
영광이다마는, 나도 까닭을 짐작하지 못하겠구나!"
"혹시 국문하셔서 죽이지는 아니하실까요?"
난계는 웃으며 대답했다.
"곤전마마께서는 인자하고 후덕하신 분으로 조야에 명성이 대단한 분이다. 죄없는
너를 국문해서 문초하실 일은 없을 듯하다."
"나리 마님, 세상 일을 누가 압니까. 중전마마의 허락도 없이 전하의 편전으로
무상출입을 했다고 때리시면 맞았지 별수가 있습니까?"
취옥은 겁에 질려서 점점 얼굴빛이 파랗게 질렸다.
이때 별감은 밖에서 어서 가기를 재촉했다.
"곤전마마께서 명소하시는데 일개 여악이 너무나 태만하구나. 어서 판교에 오르도록
하라!"
취옥은 하는 수 없었다. 치마고름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판교 위로 올랐다.
별감이 대동한 취옥의 판교는 풍우같이 대궐로 향해 달렸다. 궐문밖에서 내린
취옥은 별감의 인도를 받으며 전하를 모시고 거문고와 비파를 타던 편전을 멀리
바라보면서 중궁으로 들어가 뜰 아래 대령하고 있었다.
별감이 뜰 아래서 전상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친다.
"관습도감 기생 취옥이 대령이오."
전상에서는 소헌왕후가 별감의 아뢰는 말씀을 들어신 모양이다.
상궁 전의에게 분부를 내리신다.
"네가 나가서 취옥이란 여악을 불러 올리라!"
의전을 맡은 상궁은 소헌왕후의 의지를 받고 뜰 아래로 내려서 부복해 엎드려 있는
취옥을 붙들어 일으켜 전상으로 인도했다.
이때 취옥은 비로소 안심하는 숨을 얄팍한 입술 사이로 가만히 쉬었다. '죽지 않고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죄를 해서 국문을 한다면 뜰 아래서 할 일이지 전상으로 오르라 할 리는 만무한
때문이다.
취옥의 얼굴에는 비로소 생기가 소생되고 눈에는 정신기가 돌아서 반짝했다.
상궁의 인도로 어전으로 들어가니, 넓고 넓은 전각 안에는 소헌왕후가 옥좌 위에
단정히 앉아 계시고, 전후좌우에는 빈 이하 모든 후궁과 궁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시립해 있었다.
취옥은 새물 청어가 아니었다.
전하의 총애를 입어 여러 차례 편전으로 드나들면서 궁중 안 풍습을 짐작해서
훈련된 여자였다.
드떴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두렵고 무서웠던 심정도 진정되었다.
편전에서 전하를 향하여 뵙듯, 장지 밖에서 정면으로 왕후를 바라 뵙지 않고 곡배의
형식을 취해서 보드라운 흰 손을 모아 큰절을 네 번 올렸다.
몸가짐이 가벼우면서도 참을성이 많고 진득했다.
사배를 올리며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모습이 어찌나 고운지, 치맛자락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듯 마는 듯 소르르 일어서고 사르르 앉아서 마치 한 폭의 절하는
미인도가 소리없이 움직이는 듯했다.
소헌왕후는 취옥의 절하는 태도를 바라보시자, 마음 속으로 '제법 교양을 받은
계집이로구나'하고 생각했다.
취옥은 큰절을 마치자, 치마꼬리를 왼손가락으로 곱게 휘어잡고, 살몃살몃 뒷걸음을
쳐서 서너 걸음 밖으로 물러서서 고개를 다소곳 숙이고 조용히 섰다.
내명부들 모든 후궁과 궁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취옥의 왕후께 알현하는 태도로
집중되었다.
모두 다 침을 삼키며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 곳 나무랄 데 없는 교양 높은 탯거리다. 수십 년 궁중에서 거행한 궁인들도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마음 속으로 급제 점수를 주었다.
소헌왕후는 장지 밖으로 물러서 있는 취옥의 태도를 말씀 없이 한동안 유심히
바라보셨다.
다시 마음 속으로,
'재치 있고, 총명하게 생긴 계집이로다! 이쯤 되니 악에 대하여 십이율을 가릴 줄
알아서, 전하의 굄을 받을 만하구나!'
생각했다.
이윽고, 왕후는 어진 눈매를 굴려 손을 들어 취옥을 부르셨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취옥은 사양치 않고 조심조심 맵시 있는 삼승버선의 발길을 옮겨서 장지문을 지나
왕후마마 지척에 모시어 섰다.
"네가 창을 잘 하고 십이율의 악에 대한 공부도 도저하다는구나?"
취옥은 황공했다. 수삽한 태도로 고개를 다소곳 숙여 대답해 아뢴다.
"어려서부터 선생한테 약간 창법을 익혔을 뿐이옵니다. 어찌 감히 공부가 도저할 수
있사오리까."
조용조용 대답해 아뢰는 음성은 나긋나긋 연하면서도 금성을 내어서 은방울이
구르는 듯했다.
소헌왕후는 또 한 번 마음 속으로 생각해본다.
'잘 길들이면 쓸모 있는 계집이 되겠다!'
다시 너그러운 눈을 들어 취옥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내가 오늘 너를 부른 일은 다른 일이 아니다. 요사이 상감마마께서는 아악을
창제하시려고 근념하시는 중에 하늘이 도우셔서 해주에서 거서가 나타나서 더한층
신명이 나셨다. 마침 관습도감에 너 같은 지음하는 아이가 있어서 가끔 편전으로 너를
부르시어 악리를 연구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내 마음도 기뻤다. 그러나 궁중은 지엄한
규범과 질서가 있는 곳이다. 밖의 사람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다. 더구나
상감마마께서 계오신 편전에 외인의 무상출입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소헌왕후의 말씀이 여기까지 내렸을 때, 취옥의 얼굴빛은 두렵고 황공해서 홍조가
가득히 물들면서 가슴이 사뭇 방망이질을 치는 듯 두근거렸다. 등에는 진땀이 쭉
흘렀다.
아까 전상으로 오르기 전의 두렵고 무섭던 마음이 다시 명치끝으로 솟구쳐 올랐다.
마음 속으로 '이제는 꼼짝 도리 없이 전각 아래로 끌려 내려가 죽는 몸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소헌왕후는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그러나 전하께오서는 국가의 큰 사업을 창제하시기 위하여 시시때때로 너를
부르시어 하문하신다 하니 이것 역시 전하의 폐하지 못한 사업의 하나다. 그리 하지
맙시사고 만류할 도리도 없다. 그리하여 나는 전하께 아뢰었다. 너를 내명부 궁인으로
삼아서 아주 궁중에 있게하여 전하를 편전에서 모시게 하기로 작정했다. 네가 능히
그러한 책임을 맡겠느냐?"
소헌왕후의 마지막 말씀을 듣자 취옥은 제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얼떨떨했다.
무어라 말씀을 올려야 좋을지 몰랐다.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얼른 대답 말씀을 올리지 못한다.
취옥이 당황해서 얼른 대답을 올리지 못하는 것을 보자, 옆에 있던 나이 많은
전의상궁이 취옥의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귀엣말로 소곤거렸다.
"궁인이 되라 하시는 크나큰 별은전이다. '네'하고 대답을 올려라."
취옥은 늙은 상궁이 시키는 대로,
"네."
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존엄한 자리에 무어라고 도저히 중언부언 아뢸 길이
없었다.
소헌왕후는 취옥의 소박하고 당황해하는, 세속에 때묻지 아니한 태도가 도리어
마음에 드셨다.
이내 전의상궁에게 분부를 내린다.
"기록을 맡은 상정상궁과 상기상궁이 나와 있느냐?"
"네, 저곳에 시립해 있사옵니다."
"두 상궁을 불러라!"
의전을 맡은 전의상궁은 상정과 상기를 눈짓해 불렀다.
두 상궁이 왕후마마 앞에 부복했다.
"모든 비빈과 궁인들이 모여 있는 이 자리에서 관습도감 여악 취옥에게 내릴 상침의
직첩을 써서 가져오너라!"
상정과 상기 두 상궁은 의지를 받고 장지 밖으로 나가, 연상에 먹을 갈아 죽석에서
첩지를 썼다.
아직 훈민정음이 제정되기 전이었다. 상정과 상기는 진서를 쓸 줄 아는 자로 뽑아서
임명했던 것이다.
두 상궁은 백지장자에 먹글씨로 시를 적었다.
장지종이에 씌여진 먹글씨에는 묵향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상정과 상기는 쓰기를 다하자 첩지를 받들어 왕후전하께 올렸다.
후마마는 첩지를 읽어보시자 미소를 풍기시며 취옥을 부르셨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전의상궁이 취옥을 인도해서 후마마 옥좌 앞에 서게 했다. 왕후전하는 친히
취옥에게 첩지를 내리시며 말씀한다.
"너에게 정육품 상침의 직책을 준다. 상침이란 전하의 편전과 나의 침소의 모든
일을 가암 알아 보살피는 직책이다. 품수도 높아서 육품직이다. 남자로 친다면
대과급제를 해서 장원이 된 후에 출륙을 해서 육품관이 되는 것과 똑같은 지위다.
네가 지음을 해서 악리를 짐작하여 전하를 항상 도와드리게 되므로 불차탁용해서
육품직 상침을 봉하는 것이니 명심해서 지성껏 전하를 모스도록 하라."
취옥은 황공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먼저 사배를 드려 큰절을 한 후 비마마깨서 내리는 첩지를 받고, 또다시 첩지를
두손으로 받은 채 사배를 드렸다.
첩지를 두손으로 받든 채 사은하는 사배를 드리기란 진실로 어려운 일이다. '날렵한
몸가짐과 재치있는 움직임이 아니면 도저히 하기 어려운 일이다.
보통 여인들은 첩지를 옆에 올려놓고 배례를 드리는 일이 보통이다.
소현왕후는 또 한 번 귀엽게 생각하셨다.
소현왕후는 취옥의 사은을 받으신 후에 다시 한 말씀을 당부한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지금 외전에서 정무를 살피고 계시니, 이따 승석 때 너를 나의 침전으로
부르리라. 전의상궁은 취옥을 모든 궁인에게 상호례를 하게 한 후 내가 내리는 사찬을
받게 하고 대기하고 있게 하라."
소헌왕후는 분부를 내리자 중전 침실로 듭시었다.
의식을 맡은 전의상궁은 소헌왕후가 침실로 듭신 후에 취옥을 인도하여 모든
후궁들에게 큰절을 올리게 했다. 영빈 강씨, 신빈 김씨, 예빈 양씨, 숙원 이씨가
차례로 절을 받고, 상침 송씨 이하 모든 상궁들은 상호례로 맞절을 했다. 움직이는
우하한 취옥의 태도는 제법 범절이 있어서 모든 후궁과 궁인들의 호감을 샀다.
이윽고 중전 넓은 대청에는 소헌왕후의 분부대로 왕후의 사찬이 내렸다.
취옥을 궁인으로 봉하는 잔칫상이다. 모든 후궁과 궁인들은 취옥을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화기 가득한 속에 왕후마마께서 내리시는 사찬잔치를 끝냈다.
이윽고 해는 기울어 승석 때가 되었다.
소현왕후는 전의상궁을 불러 전하의 동정을 살폈다. 외전에서 정무를 보살핀 후에
편전으로 듭시었다는 기별을 듣자, 전의상궁을 앞세우고 친히 취옥을 거느려 대전
편전으로 향했다.
이때 궁 안에는 등촉방 상궁들이 불을 밝혀서 등촉이 전각마다 휘황했다.
전의상궁은 먼저 편전문을 가볍게 두드린 후에 장지밖에 부복하여 전하께 아뢰었다.
"중전마마께옵서 새로 봉한 궁인을 거느리시고 친히 듭시옵니다."
전하는 옥좌에 앉아서 악서를 보시다가 책장을 덮고 말씀한다.
"중전마마께서 듭신단 말이냐?"
말씀을 마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전을 대접하는 극진한 예의다.
이때 소헌왕후는 미소를 띠고 편전 안으로 들어오시고, 뒤에는 취옥이 고개를
조신하게 숙여서 후마마의 뒤를 따랐다.
휘황찬란한 등촉 아래 비취지는 취옥의 태도는 낮에만 대해보는 전하의 눈에 더한층
요조한 절세미인으로 보였다. 전하의 눈이 약간 황홀했다.
소헌왕후는 옥안에 담뿍 미소를 풍기시며 전하께 아뢴다.
"관습도감 여악 취옥을 궁인으로 상침 첩지를 내렸습니다. 오늘부터 관습도감으로
내보내지 마시고 항상 전하 곁에 모시고 있게하여 침실을 보살펴드리도록 했습니다.
전하께옵서 옥좌에 진좌하시어 새로 된 상침 취옥의 사은을 받으시옵소서."
소헌왕후는 이내 취옥을 이끌어 전하께 숙배를 드리게 했다.
취옥은 이제는 일개 관습도감의 여악이 아니다. 당당한 궁인이 되었다. 궁인 중에도
어전 지척에 조석으로 모시어 침실을 보살피는 상침상궁이다.
전의상궁의 지도로 전하께 사배를 드렸다.
전하는 사은을 받으신 후에 취옥에게 말씀을 내린다.
"중전마마의 갸륵하신 뜻으로 너를 특별히 발탁하시어 상침이란 직책을 맡기셨으니,
중전마마의 하해같은 은덕을 가슴 안에 깊이 간직해서 양궁의 상침 구실을 극진히
받들도록 하라!"
양궁은 대전과 중전 두 궁을 말씀한 것이다.
취옥은 '네'하고 대답했다.
(제11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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