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제목:세종대왕9
육진개척
박종화
알성과
세종대왕이 친히 시관이 되어 뽑은 장원급제 박팽년과 최항의 삼일유가는
장안에 크나큰 화제가 되고 구경거리가 되었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사람 물결을 이루어 젊은 학사들의 신선 같은 모습을
바라보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묘령의 처녀들은 감히 한길로 나오지는 못하고 발돋움을 해서 담너머로 젊은
학사들의 훤칠하게 잘생긴 모습을 바라보고 넋을 잃었다.
두 학사는 삼일유가를 끝낸 후에 제각기 고향으로 내려가 사당에 뵙고 선조의
묘소를 찾아 소분을 했다.
온 고을이 떠들썩했다. 한 집안의 경사만이 아니었다. 한 고을의 영광이었다.
두 학사의 집은 일약 박한림댁, 최한림댁으로 불려졌다.
감사가 자비를 놓아 치하하러 감영에서 나오고, 군수가 육방관속들을
거느리고 문안차 찾았다.
글을 잘 배워서 과거를 본 후에 한 번 장원이 되기만 하면 이만큼 호강을
했던 세종 시대였다.
두 학사는 소분까지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온 후에 홍문관에 입직했다.
집현전의 정원은 열 사람뿐이므로 아직 홍문관에 적을 두게 한 것이다.
대왕은 두 학사를 얻은 후에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어서 어서 많은 영재를
구해서 국가의 문명을 드높이고 싶었다.
대제학 변계량을 명소했다.
"지난번 춘당대 친시에 박팽년과 최항 두 젊은이를 얻게 된 것은 국가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오. 또다시 과거령을 내려서 인재를 구해야겠는데,
어느 때쯤 과거를 보였으면 좋겠소?"
대제학이 아뢴다.
"원래 식년제 과거는 3년 만에 한 번씩 보이는 것이올시다. 지난번에 박팽년과
최항 두 학사를 뽑았으니, 이제 3년 후에나 과거령을 내리게 됩니다. 좀더
기다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3년 동안을 어찌 기다린단 말인가. 그 동안에 훌륭한 인재를 다 놓쳐버리지
않겠소?"
대왕은 젊은 어진이를 구하려는 마음이 간절했다. 일각이 삼추인 듯 길고
길었다.
"나라에서 법을 정하기를 그리했습니다. 한 번 과거에 한두 사람의 훌륭한
인재가 나타났으므로 좋은 인재는 바닥이 났을 것으로 생각해서 3년마다 한
명씩 뽑는 식년제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대제학의 말을 듣자 세종대왕은 고개를 가로 흔드셨다.
"아무리 학문이 풍부한 실재라 하나 과거에는 운이 있는 거야. 병이 나서
과거에 참예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비록 과장에 들어왔다 하나, 시관의 눈에
띄지 못해서 낙방을 하는 수도 있거든. 3년마다 식년제로만 과거를 뵌다는 것은
합당치 못한 일이라 생각하오. 3년마다 뵈는 식년제는 그대로 두고 또다시
별도로 과거를 볼 수 있게 하는 방법을 강구해보도록 하오."
대제학 변계량이 아뢴다.
"성의가 정 그러하시다면 3년마다 뵈는 과거는 그대로 두시고, 전하께서
수시로 과거령을 내리시어 선비들을 뽑으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내가 국가의 동량지재를 구하려는 마음은 마치 한여름 삼복중에 목마른
사람이 감로수를 생각하는 그 마음과 방불하오. 어서 어서 훌륭한 젊은이들을
구해서 이 나라를 태평성대로 만들어야 하겠소."
"감축한 말씀이올시다."
변계량의 고개가 수그러졌다.
전하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한동안 생각하다가 이내 옥음을 내린다.
"수시로 과거를 본다면 법으로 정한 식년제 이외에 또다시 과거를 보게
한다는 뚜렷한 명분이 서야 하겠소. 이번에 만약 과거를 또 한 번 보게 한다면
춘당대에서 보게 하지 말고 과인이 성균관 대성전에 나가 공자의 위패에 알성한
후에 과거 이름을 '알성과'라 해서 인재를 뽑는 것이 어떠하겠소?"
수시로 전하가 성균관에 나가 대성전에 참배한 후에 유생들에게 과거를 보게
하고, 명분을 세워서 과거 이름을 '알성과'로 하자는 전하의 소명한 말씀을 듣자
대제학의 입은 벙긋벙긋 벌어졌다. 기쁜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손을 모아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 절하고 아뢴다.
"과연 명철하신 하교올시다. 이 말씀을 유림들이 듣느다면 얼마나들
감격하겠습니까. 넓고 크신 성덕을 춤추어 구가할 것입니다. 명명하신 알성과는
한 달에 한 번씩 보셔도 유생들은 모두 다 느긋해할 것입니다."
전하는 즉석에서 내시를 불러 예조판서 허조의 입시를 명했다.
예반이 급히 소명을 받고 어전에 입시했다.
세종대와은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말씀한다.
"변대제학이나 허판서나 모두 다 이 나라의 크나큰 보필의 양상들이다. 그러나
무정한 세월은 사정없이 흘러서 경들은 벌써 원로의 경지에 이르렀다. 과인의
마음은 무척 아프다. 경들과 같은 후계자를 구해서 이 나라를 더욱 복되게 해야
할 텐데, 조정에 있는 인물은 제한되어 있어 그 수가 극히 적다. 새로운 인재를
많이 구해야 할터인데 3년에 한 번씩 뵈는 과거로는 백년하청격이다. 어느
하가에 인재를 구할 수 있으랴. 대제학과 의논해서 3년마다 보이는 식년제 과거
이외에 수시로 과거 뵐 것을 생각해보았다. 역시 그리한다면 과거 뵈는 명분이
서야 할 것이다. 과인이 성균관에 참배한 후에 알성과라는 이름을 붙여서 곧
과거를 또 한 번 보이기로 했으니, 예조판서의 의향은 어떠한가?"
예조판서도 입이 함박만큼 열렸다. 모두 다 유가들이었다.
"다시 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거룩하신 처분이올시다."
"그렇다면 곧 알성과를 시행하도록 하라."
예조판서와 대제학은 청명하고 물러났다.
박팽년, 최항 두 젊은 학사가 춘당대에서 장원급제를 하여 예문관 수찬,
부수찬이 된 지 얼마 아니되어 나라에서는 또다시 알성과의 과거령을 내렸다.
알성과는 세종전하가 이 나라에 처음 실시한 과거다. 공자의 인의의 사상과
그의 생활철학을 존숭해서 문묘인 대성전에 세종전하가 친히 참배한 후에
명륜당에 임어하여 유생들의 준총을 시험 보아 뽑기로 한 것이다.
문묘의 별칭은 반궁이라고도 했다. 동북으로 담을 쌓고 서남편에 내가
흐르므로 개울물을 반수라 하고 반수 위에 궁전을 지었다 해서 반궁이라 한
것이다. 중국 옛글에도 나타나 있다.
세종전하가 성균관에서 처음으로 알성과를 보인다 하니 유생들의 기쁨은
절정에 올랐다. 해동에 나타난 성군이란 칭송이 팔도 유림에 자자했다. 궁중에서
과거를 보이지 아니하고 전하가 성균관인 문묘까지 나와서 공자의 사당에
알현한 후에 나라의 영재를 선발하는 시험을 보게 하니 공자의 인과 의를
바탕으로하여 학문을 연수하는 유생들에게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팔도 유림에서는 알성과를 보러 오는 선비들이 다시 구름 뫼듯 성균관으로
모여들었다.
과거날이 되자 세종대왕은 대제학과 예조판서와 모든 시관들을 거느리고
경복궁에서 문묘로 향했다.
임금이건만 대성전 앞까지 연을 타고 들어가지 못했다.
대성문 앞 주연대서 연에서 내려 대성문 2층 디딤돌을 밟고 대성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붉은 옷에 검은 건을 쓴 수복이는 대성전 만전창문을 활짝 열고 전하가
듭시기를 기다렸다.
전하는 면류관 곤룡포를 보석을 밟고 대성전으로 올랐다.
전하는 지성선사 문선왕의 위패를 향하여 향을 사른 후에 네 번 절하여
알현을 했다.
모든 시신들은 전 밖에서 금관조복과 사모품대로 전하의 절하는 대로 배례를
드렸다. 이때 풍악은 자지러지고 향연은 전 안에 가득했다.
전하는 배례를 마친 후에 천천히 옥보를 옮겨 일각문 밖으로 나갔다.
아름드리 은행나무 가지가 천 줄기 만 줄기 푸른 잎으로 윤기를 뿜는 명륜당
뜰 앞 금잔디밭에는 팔도에서 모여든 유생들의 천막이 질서정연하게 벌여
있었다.
유생들은 전하의 임어를 바라뵙자 천호만세를 불러 성주를 맞이했다.
전하는 미소를 지어 환호하는 만세 소리에 답례를 하며 성균관 대사성의
인도롤 명륜당에 올랐다.
이번에도 전하는 즉석에서 과제를 냈다.
과제는 쉽고도 어려웠다. 성균관 사성이 어명을 받들어 과제를 크게 써서
내걸었다.
'명륜이란 무엇인가? 뜻을 밝히라.'
역시 이번에도 과거 보는 시험문제를 누설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전하는
명륜당에 오르자 즉흥적으로 이같은 글귀를 내었다.
"너희들은 항상 명륜당을 바라보면서 경학 풀이로 입씨름만 하고 있으나
실지로 인간의 가지가지 윤리를 어떻게 밝혀야 하는가? 그 실천방도를
논술하라."
너희들은 밤낮 명륜당을 바라보면서 경학 풀이로만 입씨름을 하고 있지만
실지로 인간의 가지가지 윤리를 어떻게 밝혀야 하겠는가? 그 실천방도를
논술하라는 것이다.
이번에도 시관들은 시험문제를 까맣게 몰랐다. 과연 쉽고도 어려운 과제다.
대제학과 부제학들도 이 문제를 바라보자 혀를 둘렀다.
수많은 유생들도 모두 다 붓방아를 찧었다.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망건편자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솟았다.
이중에서 몇 사람만은 글제를 바라보자 신명이 났다. 시지를 펼쳐 놓고
일필휘지로 글을 지었다.
해가 너윗너윗 서산으로 기울어질 무렵 파장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선비들은 분주하게 명륜당 앞 시관석에 시권을 바쳤다.
춘당대 과장에서 하듯 시관들은 주필을 들어 등급을 매기기 시작했다.
가상지상으로만 뽑아서 전하 앞에 올렸다.
전하는 가상지상 중에서 다시 몇 개 글을 뽑았다.
이번 알성과의 성적은 지난번 춘당대 성적보다도 좋았다.
1등 2등을 구별하기 어려운 글들이 많았다.
전하는 그중에서 다섯 장을 뽑았다.
다섯 장이 모두 다 훌륭한 술책이었다.
전하는 대제학 변계량과 부제학에게 말씀을 내렸다.
"이 다섯 장 시지의 논술은 모두 다 훌륭하다. 어느 하나를 버릴 길이 없다.
경들은 한 번 다시 살펴보라."
두 사람은 전하의 하교를 받자 다시 한 번 살폈다.
역시 전하의 보신 눈이 틀림이 없었다.
"다섯 시지가 모두 다 훌륭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알성과는 다섯 사람의 장원을 뽑으라!"
"법에는 장원급제로 두 사람을 뽑기로 했습니다."
"법이란 사람이 만든 것이니 고쳐도 좋지 아니한가? 그리고 알성과는 새로
만들었으니 놓치지 말고 다섯 사람을 다 뽑으라!"
부제학은 세종대왕이 임어한 어전에서 시지 끝에 봉해놓은 장원급제 다섯
명의 이름을 뜯기 시작했다.
모든 시관의 눈이 부제학이 뜯는 시지로 집중되었다.
다섯 개 시지 중에서 한 장을 뜯었다.
부제학이 읽는다.
"이개, 본관은 한산, 부는 계주!"
세종대왕은 눈을 감고 조용히 들었다.
다음 사지 끝을 뜯었다.
"성삼문, 본관은 창녕, 부는 승!"
세종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부제학은 또다시 한 장을 뜯는다.
"신숙주. 본관은 고령, 부는 장!"
세종은 눈을 번쩍 뜨셨다.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라!"
"신숙주올시다. 신장의 아들이올시다."
세종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눈을 감았다.
부제학은 또 다음을 뜯었다.
"하위지. 본관 단계, 부는 담!"
세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제학은 또 다음 시지 끝을 뜯었다.
"유성원. 본관 문화, 부 사근!"
전하의 용안에는 기쁜 빛이 가득했다.
"급제 다섯 사람의 이름이 다 나타났구나! 그렇다면 이름을 발표하고
급제들을 과인의 앞으로 부르라!"
어명이 떨어지니 사성은 소리를 높여 세 번 방을 불렀다.
"이개!"
"성삼문!"
"신숙주!"
"하위지!"
"유성원!"
다섯 사람의 대답하는 소리가 차례차례 일어났다.
과장에 가득히 모여서 응시했던 유생들의 부러워하는 눈초리는 일제히
대답하고 장막 밖으로 나서는 다섯 사람에게로 모여들었다.
창방이 끝난 후에 전하는 도승지에게 분부를 내린다.
"다섯 사람의 장원급제에게 벼슬을 주라. 모두 다 부교리 직책을 제수하라!"
도승지는 붓을 들어 다섯 벌 홍패에 성명과 직위를 썼다.
내관이 준비했던 모대와 흉배 다섯 벌얼 받들고 앞에 나가고, 도승지는
홍패를 받들어 뒤에 따랐다.
다섯 사람의 장원급제들은 제각기 자기 처소에서 도승지와 내관을 맞이했다.
유생의 옷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었다.
풍악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속에 다섯 명의 급제는 도승지와 내관의 인도로
천천히 명륜당으로 올랐다.
과장 안에 가득하게 모여 있는 유생들은 임관이 되어 명륜당으로 오르는 다섯
학사들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전하는 이번 알성과에서 다섯 사람이나 되는 젊은 인재를 얻은 것이 무한
기뻤다.
용안에 흐뭇한 웃음을 띠고 명륜당으로 오르는 새 장원들을 굽어보신다.
모두 다 훤칠하게 잘생긴 깎은 서방님들이었다.
이개의 얼굴은 갸름하고 말쑥하고, 성삼문은 준수하면서 동탕했다. 신숙주는
색깔이 희고 눈에는 총기가 또렷또렷 서렸다. 하위지는 약간 거무튀튀한데
고지식하고 고집이 세어 보이고, 유성원은 너부죽한 얼굴이 점잖고 의젓해
보였다.
다섯 장원들은 차례차례로 어전에 숙배를 드렸다.
전하는 내시가 올리는 어사화 가지를 이개의 사모에 꽂아주고 말씀을 내린다.
"네가 이개냐?"
"네, 그러합니다."
"너의 아버지가 계주라지?"
"네, 그렇습니다."
"목은 선생의 후예로구나!"
"그렇습니다."
이개는 또렷이 대답했다.
"목은 선생은 태조대왕께서 존경하셨던 옛 친구셨지! 너의 선조의 높으신
고절을 생각해서 나라에 크나큰 동량이 되게 하라."
이개의 초롱초롱한 맑은 눈매에 눈물이 글썽했다. 선조를 추모하는
눈물이었다.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전하는 성삼문을 바라보신다.
"네 아버지가 총관 성승이냐?"
"네, 그러합니다."
"제 아버지는 호반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어찌해서 너는 문과에 장원급제를
했느냐. 장한 일이로다."
성삼문은 주저치 아니하고 또렷하게 대답한다.
"장한 일 될 것은 없습니다. 문도 있고 무도 있어야 그 국가가 잘됩니다.
대대로 무만 숭상해도 아니되고, 문만 숭상해도 아니됩니다. 태조대왕 전하와
상왕정하는 무로써 건국을 하셨고 전하께서는 문치로 국가를 빛내려 하시니
소신도 전하를 보필하여 성대의 조그마한 일꾼이 되려 하와 글을 배웠습니다."
성삼문의 대답은 유창하면서 뼈가 있었다.
전하는 마음 속으로 기뻤다. 장차 큰 그릇이 될 인물이라 생각했다. 기특하게
여기는 마음이 유연히 일어났다.
"네 이름을 어찌해서 삼문이라 지었느냐?"
"이름은 소인이 진 것이 아닙니다. 아비와 어미가 지었습니다. 어려서는
까닭을 몰랐습니다마는 장성한 후에 어미한테 듣자오니, 소신이 거적 자리에
떨어지려 할 때 공중에서 '어린이가 나왔느냐?' 하고 세 번을 묻는 소리가 있은
후에 비로소 소신을 낳았다 합니다. 그리하와 아비는 제 이름을 삼문이라
지었다 합니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깃거리올시다. 성상께서 하문하실 일이
아니올시다."
전하는 삼문의 말을 듣자 더한층 마음으로 삼문을 사랑했다.
"네 이름은 삼문이라 하려니와 너의 자는 무어라 하느냐?
"근보라 합니다."
전하는 다시 성삼문에게 하문한다.
"어찌해서 근보라 했느냐?"
묘소년인 성삼문은 동탕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아뢴다.
"근보라는 자는 소신이 스스로 저의 처신하는 행동을 경계하기 위하여
지었습니다."
"어떻게 행동을 경계하느라고?"
전하도 미소를 풍기시며 하문하셨다.
"소신의 이름을 아비와 어미가 삼문이라 지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소신이 생산될 때 공중에서 신인이 아이가 탄생되었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어본
후에 소신이 나왔다 해서 삼문이라 지어주었다 합니다. 황공한 말씀이오나
사람이란 쓸데없는 이러한 하치 아니한 전설을 믿게 된다면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방자하기 십상팔구올시다. 그리하와 어미가 지어준 이름을 고칠
수도 없고, 소신의 마음과 행동을 항상 경계해서 모든 일을 삼가서 행동하자고
자경하는 마음으로 근보라 했습니다."
세종전하는 삼문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다시 한 번 성삼문의 영민한 모습을
유심해서 바라보셨다.
어수로 어사화 한 가지를 친히 잡아 성삼문의 머리에 꽂아주시며 말씀을
내린다.
"앞으로 집현전에 나가서 많이 공부하도록 하라. 과인의 자문에도 응하려니와
세자의 학문을 연마하는 데 반려가 되기도 해라!"
성삼문은 황공 감격했다.
숙배를 드리고 어전에서 물러나려 한다.
대왕전하는 다시 손짓해 삼문을 부르셨다.
"네 나이, 내 셋째 아들 '용'과 동갑이로구나! 안평도 글씨를 제법 쓴다. 잘
사귀어두라!"
성삼문은 더한층 황감한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뒷걸음을 치어 어전에서 물러난다.
성삼문이 물러간 후에 전하는 성균관 대사성을 돌아본다.
"다음번 장원이 누구냐?"
"여기 대령해 있사옵니다. 신숙주올시다."
"오, 신숙주. 신장의 아들이로구나. 이리 가까이 오너라!"
셋째번 장원 신숙주가 호리호리한 키와 해사한 얼굴로 어전에 숙배를 드렸다.
맑은 눈에 까만 동자가 반짝반짝 총기를 뿜었다.
전하는 한동안 신숙주의 얼굴과 의표를 바라보신다. 용안에는 반가운 빛이
현연하게 돌았다.
"네가 신장의 아들이냐?"
"네, 그러합니다."
"너의 아버지는 글도 잘 하고 글씨도 명필로 이름이 높은 사람인데 네가 또
장원급제를 했으니 가상한 일이다. 옛말에 용생룡 봉생봉이라 하더니, 헛말이
아니로구나!"
신숙주는 황공했다. 감히 대답을 올리지 못하고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었다.
전하는 다시 신숙주를 향하여 한 말씀을 내린다.
"더한층 의로운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너의 아비의 아름다운 이름을 더럽히지
말게 하라!"
신숙주는,
"네!"
하고 대답했다.
전하는 내시가 받들고 섰는 어사화 한 가지를 받아서, 신숙주의 사모 쓴
머리에 꽂아주셨다.
신숙주가 사은숙배를 드리고 물러났다.
전하는 다시 앞에 서 있는 급제들을 바라보며 묻는다.
"다음은 누구냐?"
"하위지올시다."
대제학이 아뢴다.
하위지가 부복해 절을 올렸다. 약간 거무튀튀한 얼굴에 코가 우뚝서서 고집이
있어 뵈었다.
"네가 하위지냐?"
"네, 그러합니다."
"경상도 진주 태생이로구나."
"네, 그러합니다."
"너의 아버지는 누구냐?"
"과거는 했습니다마는 권문세가가 되지 못한 하향 선비라서 겨우 종부소윤을
지낸 하담이올시다."
하위지는 두려움 없이 꿋꿋하게 대답했다.
옆에 시측해 있던 내시가 당황했다. 하위지를 향하여 '쉬---' 하고 가만히
소리쳤다.
전하는,
"조용해라!"
내시를 꾸짖었다.
하위지는 눈동자를 곧게하여 내시를 똑바로 바라본다.
대제학, 부제학들도 황황망망해서 어찌할지를 모른다.
전하는 하위지를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나는 아직 네 아비를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마는 너의 아비는 과연 행복스런
사람이다. 너 같은 아들을 두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하위지는 아직도 격분했다. 손을 들어 내시를 가리키면서 전하께 아뢴다.
"전하께서는 소신에게 이미 부교리의 직분을 내리셨으니 감히 신자의 도리로
아뢰옵니다. 전하께서는 저 같은 간특한 인의 장막의 무리를 측근에서
제거시키시옵소서. 신하가 사실대로 바르게 아뢰는데 요망한 내시가 제 어찌
감히 어전에서 바른 말을 아뢰지 말라고 '쉬---' 소리를 칩니까. 방자하기 짝이
없습니다. 죄당만사올시다. 만번 죽여 마땅합니다. 권문세가가 아닌 하향
선비들은 과거에 뽑히지도 못하고, 설혹 만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뽑혔다 해도
밤낮 당하관으로 돌아다니다가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오늘날 이 나라의
실정이올시다. 전하께서 아비의 직분을 하문하시기에 감히 소신이 바른 대로
대답한 것뿐이온데 제 어찌 감히 어전에서 방자하게 '쉬---' 소리를 칩니까.
소신보고 전하께 바른 말씀을 아뢰지 말라는 군호올시다. 앞으로 저런
무리들이 가로막고 전하께 바른 말씀을 못하게 한다면 이 나라는 망하고
맙니다."
소년 학사 하위지는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아뢴다.
하위지에게 지탄을 받은 어전내시는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리고, 시측해 섰는
예조판서, 대제학, 부제학, 대사성들은 등에 진땀이 흘렀다.
겨우 이제 장원급제를하여 새로 어사화를 받고, 사은숙배를 드리는 이 마당에
도도 수백 마디의 강직한 말씀을 아뢰는 하위지의 언동은 과연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모두 다 떨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종전하는 하위지의 강직한 말이 끝나자 옥음을 높여 껄껄 웃으며 말씀을
내린다.
"과인이 오늘 복이 많아 너 같은 훌륭한 사람을 장원으로 뽑았구나! 앞으로
뜻을 굽히지 말고 조정 신하들의 잘못 처리하는 일을 기탄없이 충고해서
과인으로 하여금 밝은 인군이 되게 하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어사화를 하위지의 머리에 꽂아주셨다.
하위지는 공손히 숙배를 드린 후에 조용히 아뢴다.
"어전에서 너무나 무엄하게 바른 말씀을 올려서 성심을 번거롭게 했으니
죄당만사올시다."
세종전하는 미소를 지으시며 대답하신다.
"과인이 오늘 친시로 알성과를 보아, 너희들 다섯 사람을 뽑은 것은 국가를
위하여 바른 말 하는 동량의 재목을 얻기 위하여 문묘에 배알하고 너희들을
뽑은 것이다. 이제 너의 바른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흐뭇하다. 너희들은 다
나를 위하여 직언을 해서 나라를 복되게 하라."
이내 죄우 시신을 둘러보고 말씀했다.
"아닌게아니라 우리 조정의 실정은 가벌과 문벌만을 숭상하는 폐단이 너무나
많다. 공신의 아들과 손자라야 출세할 수 있고, 대신의 아들과 손자라야만
수령방백으로 나가게 된다. 인물 본위로 등용하지 아니하고, 혈족과 낭당만을
쓰게 되니 인재가 나올 리 만무하다. 모든 조관들은 새 학사 하위지의 말을
유념해서 앞으로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라!"
모든 신하들은 국궁하고 전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었다.
전하의 어진 마음은 바다같이 넓었다. 일개 새물 청어 같은 학사 하위지의
곧은 말을 구김살없이 얼른 받아들이는 전하의 큰 도량에 새 학사 하위지의
눈에는 감읍하는 눈물방울이 단령 옷깃으로 뚝뚝 떨어졌다.
전하는 다시 대제학을 바라보시며 말씀을 내린다.
"또 한 사람의 장원이 있지 아니하냐?"
"예, 대기하고 있습니다. 유성원이올시다."
"이리 가까이 데려오라."
성균관 대사성이 유성원을 어전에 인도했다.
유성원이 어전에 나와 숙배를 드렸다.
다섯 장원 중에 그중 나이가 들어 보였다. 용모가 전아하고 걸음걸이가
장중했다. 나이가 젊은 데 비하여 유가의 풍도가 짙었다.
전하는 한동안 유성원의 절하는 모습과 걸음걸이를 바라보신다. 역시 글도 잘
하거니와 예의 범절도 법도가 있다고 생각하셨다.
전하는 미소를 풍기며 하문한다.
"네가 유성원이냐?"
"네, 그러합니다."
"제법 유가의 풍도가 있구나. 네 아비의 이름을 무어라 하느냐?"
"사자 근자올시다."
"오오, 장령 유사근의 아들이로구나. 어쩐지 네 행동이 숙성하고 의젓하구나.
역시 집안의 가풍이란 대단한 것이다. 네 아비가 벼슬은 비록 정사품밖에
아니되는 사헌부 장령이지만 목이 곧고 강직한 말을 잘 해서 헌부에서는
'호랑이'란 별명을 듣는 사람이다. 앞으로 더욱 학문과 덕행을 닦아서 네 아비와
함께 과인을 도와 달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어사화 가지를 집어 유성원의 머리에 꽂아 주셨다.
유성원은 숙배를 드리고 한 걸음 물러섰다.
다섯 사람의 새 학사들은 어사화를 꽂고 어전에 시립했다. 전하가 보기에
귀엽기도 하고 근감했다.
전하의 용안엔 미소가 떠날 새가 없었다.
예조판서와 대제학 이하 모든 시신을 둘러보시며 말씀을 내린다.
"과인은 오늘같이 기쁜 날이 없다. 지난번 춘당대 친시 때는 겨우 박팽년,
최항 두 사람을 뽑았는데 이제 문묘에 참배하고 알성과를 뵌 오늘은 다섯
사람템이나 되는 천하의 영재들을 얻었으니 내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모두 다
선성이 과인에게 복을 내려 동량의 재목을 구해주신 것이다. 특별히 다섯 새
학사를 거느리고 다시 대성전에 올라 두굿기는 마음으로 고별인사를 드리고
환궁하리라!"
대제학과 대사성이 일시에 아뢴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대사성은 전하의 뜻을 사성에게 전하고, 사성은 급히 수복을 불러 대성전
문을 다시 열게 했다.
전하가 알성과를 보이기 전에 대성전에 올라 문선왕의 위패에 전배하고,
또다시 과거를 마친 후에 새로 뽑은 다섯 학사를 거느리고 문묘에 고별인사를
드리는 일은 전무한 일이었다.
시신 이하 성균관 재생들은 선성을 예우하는 전하의 지극한 성심에 크나큰
감격을 느꼈다. 사기가 으쓱 문묘 안에 가득히 솟구쳤다.
대성전 문은 또다시 수복의 손으로 활짝 열렸다.
전하는 어사화 꽂은 다섯 사람의 새 학사를 거느리고 명륜당에서 천천히 내려
싱싱하게 푸른 윤기를 벽공에 드날리는 은행나무 사이로 옥보를 옮겨
대성전으로 올랐다.
향연이 그윽한 속에 전하는 다섯 학사와 함께 경건하게 사배를 올렸다.
전하의 가슴엔 어서 어서 이 나라를 평화롭고 복된 국가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구름 일 듯 일었다.
태종도 빈손 들고 가네
세종대왕이 대마도를 평정하고 내치에 힘을 써서 집현전을 창설하고 젊은
학사들을 뽑아 한창 나라의 문명을 지향하려 할 때 일대의 영걸이요, 권욕의
화신인 상왕 태종을 호색이 빌미가 되어 병들어 위독했다.
과부를 새로 얻어 천달방 신궁을 짓고 수강궁에서 나와 동거하다가 돌연 병이
들어 위독했다. 때는 세종 4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세종전하는 당황했다. 친히 약을 달여 시탕하고 명산대찰에 불공을 해서 재를
올리는 한편, 옥문을 크게 열고 일급 이하의 죄수들을 석방했다.
그러나 약도 효험이 없고 불공도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5월 10일 눈을 감았다. 춘추가 겨우 56세!
하늘 아래 둘도 없는 권세와 욕심의 육신이건만, 결국을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갔다.
정권을 뺏기 위하여 고려의 우왕과 공양을 죽였다. 고려의 충신인 최영
장군과 포은 정몽주 선생을 죽였다. 도은 이숭인을 죽이고, 목은 이색이 여주로
가는 길에 소주에 독약을 타서 전송하는 술을 내려 연자탄 배 속에서 죽게
했다. 뿐인가. 목은의 두 아들은 목은보다 먼저 옥사를 했다. 두문동 칠십이인을
불질러 죽였고, 고려 왕씨의 일족을 바닷속에 던져버렸다. 여기까지는 역성의
혁명이라 해서 잠깐 붓을 거두어도 좋다.
그러나 집안 싸움은 너무도 잔인하고 무도했다. 왕권을 뺏기 위해서 아우인
세자 방석을 죽이고 방번을 죽였다. 또다시 방간과 칼을 겨누어 조카를 죽였다.
아버지 태조와는 원수가 되어 함흥차사의 일이 벌어지면서 조사의의 난이
일어나 부자가 칼을 겨누는 비극을 이루었다. 여기까지도 또다시 왕권의
쟁탈이라 해서 잠시 붓대를 멈추어본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조강지처였던 내조의 공이 큰 민비를 질투가 심하다하여
내치려 했고, 정국공신이었던 그의 처남들을 모조리 죽여서 처가를
멸문해버렸다.
이로 인하여 반항과 자학으로 떨어진 양녕을 폐위시켜버렸다. 뿐만인가.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부원군이요 영의정인 심돈을 군사권 문제로 심씨 일문을
도륙했다. 기막히도록 잔인한 권욕의 화신이었다. 천하의 짝을 구할 수 없는
독주자요 독재자였다. 이러한 극한성을 지닌 아버지 밑에서 성주 세종이 탄생한
것은 왕조 초기의 흉포한 천 길 파도를 잔잔한 맑은 하수로 가라앉게한 갸륵한
위업이라 할 것이다.
태종은 권욕의 화신일 뿐 아니라 정력도 절륜했다.
왕후 민씨 이외에 효빈 김씨, 신빈 신씨, 궁녀 안씨, 숙의 최씨, 선빈 안씨,
의빈 권씨, 궁녀 이씨들의 몸에서 12남 17녀, 모두 29남매를 생산했다.
그리고 또 부족한 생각이 들었다. 젊은 청상 과부 조씨와 이씨를 맞이해서
천달방에 새 집을 짓고 수강궁에서 나가 있다가 돌연 발병이 되어 칠, 팔일
만에 모든 탐욕을 다 털어버리고 공수래 공수거로 허허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태종은 재위한 지 18년이료, 세종께 왕위를 전한 후에 상왕의 위에 있은 지
4년 만에 세상을 버렸다.
태종이 이 나라에 크게 찬양할 만한 업적을 남긴 것은 3년 계미에 주자소를
대궐 안에 설치해서 구리로 활자 10만자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목판본 이외에
모든 서책을 자유자재로 조판하여, 오늘날 활자 인쇄의 시초가 되게 하였으니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큰일을 한 것이다.
세종은 돌연 상왕의 승하를 당하자 애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발벗고 머리
풀어 백관을 거느려 거애한 후에 모든 상제를 옛법에 의거해서 거행했다.
소렴에 쓴 수의가 19벌이요, 대렴에 쓴 수의가 90벌이었다. 재궁을 오랫동안
천달방 신궁에 모실 수 없었다. 전하는 재궁을 받들어, 상왕이 평소에 거처하던
수강궁으로 옮겨 빈소를 정했다.
세종은 빈전 옆에 여막을 정하고 조석전과 상식전이며 삭망제를 친히
거행했다.
왕의 장사는 다섯 달 만에 지내는 것이다.
빈전도감, 산릉도감, 국장도감을 정하고 영의정 유정현으로 산릉사, 신임
좌의정 이원으로 총호사를 삼고, 신임 우의정 정탁으로 국장도감 도제조를
제수했다. 이때 좌의정 박은은 태종이 돌아가기 하루 전날 세상을 떠난
때문이다. 태종의 저승길 치도를 하러 먼저 떠난 것 같다.
태종을 장사지낼 산릉은 광주로 정하고 능 이름을 헌능이라 했다.
궁중에는 아직도 고려 때와 신라 때 풍속이 의연히 남아 있었다. 승려들은
빈전 뜰 아래서 범패를 불러 독경과 염불을 하고, 고승들은 궁녀를 상대로하여
법석을 펴고 설법을 했다.
태종의 후궁이었던 의빈 권씨와 신녕궁주 신씨는 삼단 같은 검은 머리를 잘라
중이 되었다.
효령대군도 빈전 앞에 엎드려 불경을 썼다.
모든 후궁들은 두 사람의 후궁이 머리를 깎아 중이 되는 것을 보고
다투어가며 머리를 깎았다. 상왕과의 옛정을 생각해서 그의 명복을 빌면서 모두
다 중이 되는 것이다.
이 소식은 여막에 거처하는 전하의 귀로 들어갔다.
전하는 애통한 중에도 제조상궁을 불렀다.
"대행 상왕전하의 후궁들이 머리를 깎아 중이 되고 빈전 아래서 승려들이
범패를 불러 법석들을 차린다 하니 유도를 국시로 하는 아조에서 맞지 않는
일이다. 후궁들과 승려에게 알려서 금지하게 하라!"
상궁은 전하의 뜻을 받들어 후궁들에게 전했다.
후궁들은 아무리 전하의 엄명이라 해도 듣지 아니했다.
"대행 상왕전하께오서 마지막 가시는 길에 평생에 전하를 모시었던 후궁
우리들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고 아프지 아니하리오. 죽지 못해서 중이 되는
것이니 이 사정을 아뢰오!"
전하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한편 상왕의 부음은 광주에서 이천으로 거처를 옮긴 앙녕대군한테 전해졌다.
양녕은 멀리 서울로 향하여 망곡하고 발상했다. 베두건을 쓰고 베중단을
입었다.
그러나 서울로 들어가 대행 상왕 빈전에 전을 드린다는 분부가 없었다.
전이란 사람이 마지막 가는 길에 아들과 딸들이며 가까운 친구들이 제수를
차려서 술 한잔을 따라 올리고 영결의 정을 표하는 이 나라의 풍속이었다.
양녕은 폐세자가 되어 일단 서울에서 쫓겨나 갖은 풍상을 다 겪었다.
그러나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형님인 양녕을 생각해서 상왕한테 간곡하게
고해서 서울로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대신 박은 이하 여러 신하들은 한번 내친 양녕을 성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우겨댔다.
그리하여 태종과 전하는 성문 밖 낙천정에서 몇 차례 만난 일이 있었다.
이리해서 태종과 양녕 사이는 겉으로 적이 화기가 도는 듯했다.
그 후부터 양녕은 추방되었던 광주에서 왕명으로 이천에 집을 짓고 새로운
살림을 시작했던 것이다.
양녕이 발상거애를 해서 상복을 입은 후에 서울 대궐 안 빈전으로 들어가
전을 드린다는 말이 없으니, 한평생 고락을 같이하고 앞에서 일을 보살피고
있는 명보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명보뿐만이 아니었다. 양녕이 폐세자가 되어 광주로 나갈 때부터 양녕의
인품을 숭배해서 항상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호위하고 있던 장사패들도 명보와
매한가지로 궁금하게 생각했다.
명보와 장사패들은 양녕의 침실로 향했다.
"아뢰옵니다. 이번 상왕전하께서 빈천하시니 망극하온 말씀 아뢸 길 없습나다.
연하옵고 서울 빈전에 듭시어 전드리신다는 분부가 아직 아니 계시오니
궁금하와 감히 아뢰옵니다. 만약 전을 드리신다면 준비를 해야겠사옵니다."
양녕은 한숨을 짓고 간단하게 대답한다.
"예라는 것은 정에서 우러나서 예를 차리는 것이다. 나는 대행 상왕전하의
상복을 입었으니 상왕전하에 대하여 예절은 다한 것이다."
"그래도 전을 드리셔야 합니다. 저희들도 섭섭하게 생각됩니다."
"도대체 나는 가선과 가식은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다. 하기 싫어할 뿐 아니라
절대로 아니한다. 똑똑히 상제 노릇도 못하고 쫓겨올 텐데 전은 드려
무엇하느냐!"
양녕은 정색하고 잘라 말했다.
명보가 다시 고한다.
"상왕께서는 생전에 모든 일을 많이 뉘우치신 듯하셨습니다. 낙천정에서도
여러 차례 대군마마르 부르시어 술회를 하시면서 당신의 허물을 말씀하셨다
하지 않습니까. 이미 승하하신 분에게 원망이 계신다면 불가한 줄로 아뢰오."
명보는 정색을 하고 고했다.
"보아라. 그러기에 나는 지금 아버지의 상복을 입고 있지 않느냐. 만약에 대행
상왕께서 낙천정에서 뉘우치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는 지금 거상옷도 아니 입었을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예는 정에서 나오는 법이다. 공연히 더 묻지 말라!
나는 다만 아버지의 거상을 입을 뿐이다. 자식이 된 도리로 상복을 정성껏 입는
것이다!"
양녕은 거침없이 말했다.
경위가 또렷이 밝았다.
명보와 장사패들은 다시 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양녕 앞에서 물러나 서로들
면면이 마주보며 말없이 혀를 둘렀다.
그럭저럭 다섯 달이 지났다. 서울에서는 성대한 국장이 진행되고 산릉에
안장하는 인산까지 치렀다.
그러나 양녕은 이천에서 거처하면서 상복을 입고 여막에 들어앉았다.
근신하면서 글씨로 세월을 흘렸다.
인산이 끝나고 빈전은 혼전으로 바뀌었다. 아침 저녁의 조석 상식과 초하루
보름의 삭망제가 진행되었다.
어느날 세종대왕은 효령과 모든 왕제들과 함께 혼전에서 삭망제를 지내다가
양녕의 생각이 불현 듯 났다.
제사를 끝낸 후에 대왕은 연침으로 돌아가 내관을 불렀다.
"요사이 혹시 양녕대군의 소식을 들었느냐?"
내시는 양녕의 소식을 알 까닭이 없었다.
"황공한 말씀이오나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대행 상왕마마의 국상을
모시느라고 황황망망하와 소식을 알아볼 틈이 없었습니다."
대왕은 모든 형제가 다 삭망제에 참여하고 있는데 오직 양녕만이 폐세자라
해서 부모의 삭망제에도 참례치 못하고 있는 것을 민망하게 생각했다.
대왕은 홀연 지나간 어마마마 국상 때 양녕대군이 서울로 들어와 빈전에 전을
드리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양녕은 폐세자라 해서 몸은 올 수 없었다. 대신 사람을 보내어 전이나
드리겠다고 국장도감한테 전갈을 했다.
양녕대군의 전갈을 받은 국장도감에서는 물론이 분분했다.
"쫓겨난 폐세자가 어찌 전을 드린단 말이오. 불가하오."
"폐세자라 하더라도 아들이 아닌가? 몸소 대궐 안으로 들어와서 빈전에 뵐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전만은 올리도록 하는 것이 인정상 좋지 않습니까?"
"안될 말이지. 죄를 짓고 쫓겨난 아들이 어찌 전을 드릴 수 있소!"
당시의 좌의정은 강경하게 전도 못드린다고 반대했다.
도감 제조는 처리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전하께 아뢰었다. 세종대왕은 특명을
내렸다.
"말이 아니된다. 폐제사라도 아들은 아들이다. 더구나 양녕대군은 왕통을 잇지
아니하셨다 하나 장자시다. 아들이 어찌 어마마마께서 마지막 가시는 길에 약주
한 잔을 못부어 올린단 말이냐. 전을 대행할 것이 아니라 친히 입궐해서 전을
드리고 나가시도록 해라!"
대왕의 말씀은 바다같이 넓었다.
이리해서 양녕은 폐세자이면서 친히 제수를 받들고 빈전으로 들어가
어마마마의 임종은 못했을망정, 한평생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두둔해주었던 어머니 신체 앞에서 일장통곡을 하고, 다시 이천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상왕의 국상 때는 양녕이 전을 드린다는 기억이 나지 아니했다.
세종은 다시 내관에게 묻는다.
"이번 국상 때 양녕대군께서 빈전이나 혼전에 전을 드리신 일이 있느냐? 몸소
오시지는 못했더라도---."
내시는 황망했다. 창졸간 생각이 나지 아니했다.
"황공하오나 소인이 맡은 직책이 아니오라 기억이 나지 아니합니다. 다만
대군께서 궁중에 맘대로 들어오지 못하시므로 모든 절차에 참례치 못하신
것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혼전도감 제조를 들라 해라."
내시는 혼전도감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혼전도감 제조가 어전에 부복했다.
"경에게 물어볼 일이 있다. 이번 국상 때 양녕대군께서 전을 드리신 일이
있는지 기록을 살펴보라."
제조가 아뢴다.
"양녕대군께서 대행 상왕비 때는 친히 빈전에 드시어 전을 드리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대행 상왕전하 때는 전을 드리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기록을 살펴보고 아뢰겠습니다."
도감 제조는 신중한 태도로 아뢴 후에 도감에 나가서 왕자공손이며 모든
종척들이 전드린 기록부를 살폈다.
모든 대군을 위시하여 공주와 부마들과 종척들이 전드린 기록은 있었으나
양녕이 전을 드렸다는 기록은 없었다. 도감 제조는 곧 대왕꼐 아뢰었다.
"여러 왕자와 공주, 부마의 전드린 기록은 있습니다마는 양녕대군께서 전을
드리신 일은 없습니다."
"알겠다. 물러가라."
대왕은 머리를 끄덕였다. 혼전도감이 물러간 후에 대왕은 혼자 눈을 감고
깊은 생각 속에 빠졌다. 양녕을 극진히 아끼고 존경하는 때문이었다.
얼마 후에 대왕은 별감을 불렀다.
"너는 별감 옷을 벗은 후에 사복으로 갈아입고 이천으로 내려가서
양녕대군께서 요사이 어찌 지내시나 알아보고 오너라. 그리고 이번 국상 때
전을 드렸다는 말이 없다. 가는 길에 전드리지 아니한 이유도 수소문해
알아보고 오너라."
별감은 대왕의 분부를 받은 후에 곧 홍의와 초립을 벗고 사복으로 바꾸어
입은 후에 양녕이 거처하고 있는 이천으로 내려갔다.
양녕을 모시고 있는 명보는 전에 서울에 있을 때부터 별감과 잘 알던
사이였다.
별감은 이천으로 내려가는 길로 즉시 명보를 만났다.
사사로운 볼일이 있어서 이천까지 왔다가 과문불입할 수 없어 명보를
찾았노라 말했다.
명보는 반갑게 별감을 대했다.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막걸리를 대접했다.
별감은 대왕의 분부에 따라 양녕의 동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공사로 내려온 것이 아니고 사사로운 일로 내려온 길이지만 기왕 내려온
길이니 대군마마께 문안이나 드리고 갔으면 좋겠네."
"어렵지 아니한 일일세. 그로지 아니해도 대군마마께서는 항상 서울 일을
궁굼하게 생각하고 계신 터이니 자네가 뵙겠다면 반갑게 만나보시리---."
명보는 쾌하게 허락했다.
명보는 곧 별감을 데리고 양녕이 거처하는 사랑채로 들어갔다.
"서울서 대전별감 노릇을 하고 있는 애가 사사 볼일로 내려왔습니다.
과문불입할 수 없어서 소인을 찾아왔습니다. 온 길에 마마께 문안을 드리고
가겠다 하옵기 데리고 왔습니다."
양녕은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서울서 왔느냐. 상감께서는 안녕히 부지하시느냐?"
별감이 뜰 아래서 굽실하고 아뢴다.
"네, 안녕하십니다. 소인은 여기까지 온 길에 잠깐 문안을 드리고 물러가려고
왔습니다."
별감의 눈에 비치는 양녕은 상왕비의 국상 때와 마찬가지로 베두건, 베중단의
상복을 입고 있었다.
별감은 이미 양녕의 상복 입은 것을 살폈다. 더 동정을 살필 것이 없었다.
"소인은 이제 문안을 드렸으니 물러가겠습니다."
굽실하고 뜰 아래서 절을 했다.
"일부러 나를 찾아보러 왔으니 고맙다. 잘 들어가거라."
양녕은 간단히 대답하고 창을 닫았다.
별감은 나오면서 명보한테 물었다.
"그런데 참, 자네한테 물어볼 말이 있네. 대군께서는 상왕비 국상때는 전을
드리셨느데 이변 국상 때는 들어오시지도 아니하시고 전도 아니 드리셨으니
웬일인가?"
"나도 궁금해서 여쭈어보았더니, 예라는 것은 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부자지간인 도리로 상복만 입겠다고 말씀하시데---."
명보도 간단히 대답했다.
별감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울로 돌아가 대왕께 복명했다.
"이천에 다녀왔습니다. 양녕대군의 동정을 살폈습니다. 대군께서는 대행
상왕마마의 상복을 입고 계셨습니다. 베두건을 쓰고 베중단을 입고 계셨습니다."
별감의 복명을 듣는 대왕의 용안에는 미소가 떠돌았다.
"상복을 입고 계셨구나!"
대왕은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별감에게 하문했다.
"전에 대한 일도 수소문을 해보았느냐?"
"대군께야 어찌 감히 여쭈어봅니까. 모시고 있는 명보에게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았습니다. 상왕비 국상에는 친히 서울까지 들어와서 전을 드리셨는데
이번에는 어찌해서 들어오지도 아니하시고 전도 아니 드리셨느냐고 이번에는
어찌해서 들어오지도 아니하시고 전도 아니 드리셨느냐고 물었더니, 예라는
것은 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간단히 말씀하시더라고 했사옵니다."
대왕은 별감이 전해서 아뢰는 말씀을 듣자 솜방망이로 허리를 꽉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상왕과 양녕의 지나간 일을 눈감고 생각해보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뜻이 맞지 아니했다. 한평생을 두고 대립되는 위치에 서
있었다. 양녕의 강렬한 반항의 행동은 마침내 폐세자가 되게 되는 크나큰
사건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태종이 비록 말년에 크게 뉘우치고, 당신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대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잠시 서울과 낙천정에서 대면한 일이 있으나 폐세자까지 된 양녕의
반항 정신은 용이하게 사라질 리 만무했다.
대왕은 양녕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본다. 양녕이 상복을 입은 것만해도 자식의
도리를 잘 지킨 것이라 생각했다. 예출어정이란 양녕의 말이 백 번 옳았다.
슬프지도 아니한데 겉으로 울고, 올리고 싶지 아니한 제물을 영전에 드린다는
것은 허식이요, 가선의 행동이다.
양녕의 강직한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알았다. 물러가거라."
대오아은 별감을 내보낸 후에 양녕에 대하여 어떠한 대우를 취해야 할 것을
궁리했다.
이튿날 대왕은 편전에서 승지를 불렀다.
"대신들을 입시케 하라."
승지는 즉각으로 대신들에게 소명을 전했다.
대신들이 한 사람 두사람 어전으로 모여들었다.
대왕은 대신들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과인이 왕위에 오른지 이미 여러 해다. 경들의 보필하는 힘을 입어 국가가
승평하고 국운이 중흥되어 가고 있다. 모두 다 경들의 진충갈력한 공이라
하겠다. 국가가 승평하니 왕실도 화락해야 할 것이다. 과인의 형인 양녕은
아직도 이천에 있다니 내 마음이 아프다. 서울에 새로 양녕이 거처할 집을
지어서 형제가 수시로 만나 담소하는 기회를 가지려 한다. 경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대왕의 말씀이 끝나니, 일전에 세상을 떠난 좌의정 박은과 함께 양녕의
입성을 반대하던 신임 좌의정 이원이 아뢴다.
"전에도 박은과 함께 누누이 아뢰었습니다마는, 어느 나라에서나 폐세자를
나라의 수도로 불러들인 일은 없습니다. 신은 아직도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왕은 옥음을 높여 껄걸 웃었다.
"옛 사기에 폐주나 폐세자를 수도로 불러들이지 아니한 이유는 그위 후환이
있을까 염려한 때문이다. 양녕은 일부러 과인에게 자기 자리를 넘겨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스스로 폐세자 되기를 원한 분이다. 털끝만큼도 환욕이나 왕권에
대하여 욕심이 없는 것을 그대들도 짐작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세대가 바뀌었다. 양녕은 상왕께 죄를 얻어서 폐세자가 된 분이지, 과인에게
죄를 얻은 분은 아니다. 경들은 이점을 살펴야 한다. 또, 한 가지 경들에게
말해둘 일이 있다. 상왕께서는 국가를 바로잡고, 기업을 정하기 위하여 형제가
칼을 겨눈 불행한 일이 있었다. 극히 불유쾌한 일이다. 그것은 대국적으로 볼 때
무가내하의 일이었다. 오늘같이 국가가 승평한 시대에 형제가 화목치 못해서
서울 출입을 못하게 하고 형님을 감시한다는 일은 과인으로서는 원하지 않는
바이다. 그대들은 과인의 마음을 살펴서 양녕의 서울 입주하는 일을 반대하지
말라! 더구나 양녕은 대행 상왕비께서 애지중지하시던 분이다. 경들은 이 점을
깊이 생각하라. 나라를 다스리는 데 법이 있다. 그 묘득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다. 자기 몸을 닦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임금 노릇을 하며, 집안을
화목하게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며,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천하를 평정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조금도 양녕을
의심하지 말라! 과인은 형제지간의 지극한 정을 펴서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나라를 평안케 할 것이다."
세종대왕의 간곡한 말씀은 대신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태종의 재세시부터 적극 반대하던 대신들도 세종의 간곡한 부탁 말씀에 더
반대를 하지 못했다.
오래간만에 재상의 지위에 다시 돌아온 황희가 아뢴다.
"전하의 하교는 극히 명철하신 분부올시다. 먼저 종실지친의 화기가 있은
연후에 국운이 더욱 발전될 것입니다. 전하의 극진하신 우애는 만백성의 모범이
될 것입니다."
황희의 찬성하는 말을 듣자 모든 대신들이 아뢴다.
"전하의 성덕에 양녕도 감복할 것입니다. 성의대로 처리하시옵소서."
대왕은 모든 대신들의 찬동을 얻자 용안이 극히 화려했다.
"그러면 양녕의 일에 대히서는 나에게 일임하라."
모든 대신들은 청령하고 물러났다.
대신들이 물러간 후에 대왕은 선공감 제조를 불렀다.
"양녕대군을 이천에서 서울로 모셔올 테다. 서울 왕도 안에 대군궁을 지어서
안돈해서 사시도록 하라."
선공감 제조가 아뢴다.
"장소를 어느 곳으로 정하올지 하교해주심이 좋겠습니다."
대왕은 눈을 들어 남산편을 바라보며 한 곳을 손으로 가리킨다.
"저기 남산 기슭 왼편에 숲이 무성한 곳이 있다. 한적하고 경개가 좋아
보인다. 그 동리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그곳은 도동이라 합니다. 봄에 복사꽃이 아름답게 핍니다. 그래서 이름을
도동이라 합니다."
"복사밭이 많은 모양이로구나. 당양해서 좋고 반도천년이라고 신선이 즐기는
과실이다. 그곳에 집을 짓고 산다면 장수해서 좋을 것이다. 도동에다가 대군의
저택을 지으라."
선공감에서는 대왕의 명을 받들어 일등목수와 비장이며 석수를 불러서 집을
짓기 시작했다. 다섯 달 만에 집은 준공이 되었다.
선공감에서는 집이 완성된 것을 대왕께 아뢰었다.
대왕은 승지를 데리고 친히 양녕의 거처할 새 집을 살폈다.
마음에 극가하다고 생각했다. 환궁한 후에 곧 내시를 양녕한테로 보냈다.
"형제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울적한 회포를 항상 이길 수 없었소이다. 서울
남산 아래 도동이란 곳에 정결한 한 채 궁실을 짓고 형님을 맞이하오니
내외분이 함께 들어와 한 번 구경한 후에 마음에 들거든 서울 살림을 하시도록
하시옵소서."
양녕은 내시의 전갈을 받자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아우님의 왕은에 감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사양할 도리가 없다.
"분부하시는 대로 곧 입궐하여 사은하오리다."
내시에게 회답 전갈을 보내는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내시가 돌아간 후 양녕은 이 일을 부인과 명보한테 알렸다. 온 집안 식구들은
왕은에 감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소식이 한 번 퍼지니 이천 고을이 번쩍했다.
이천 원이 육방관속을 거느려 치하하는 문안을 드리러 나오고 수많은 고을
사람들은 세종대왕의 우애지정에 감탄하는 소리가 높았다.
며칠 후에 양녕대군은 부인과 함께 교자를 타고 대궐로 들어가 왕은이 우악한
것을 말씀드렸다.
대왕은 미복으로 양녕과 함께 도동 새 집으로 나가서 안채와 바깥채며,
산정사랑을 두루 구경시켰다.
볕이 잘 드는 남산 아래 송백은 푸르러 무성하고 복사꽃은 분홍빛으로
아름다웠다.
새로 지은 기와집은 학이 날개를 벌려 벽공으로 나는 듯했다. 아름답고
오붓한 건축이었다.
양녕의 마음은 흐뭇했다.
"왕은이 지중하옵니다."
"곧 옮기도록 하시오."
"오늘부터 이천으로 가지 아니하고 이곳에 살겠소이다."
대왕은 만족했다.
이리하여 양녕은 서울 남산 밑 도동에 새 터전을 잡았다.
양녕은 도동으로 옮긴 후에 남산 기슭에서 유유하게 거닐면서 한가로운
세월을 보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서 태종의 상기도 지났다.
상복도 벗었다. 이제는 맨 데 없는 물외한인인 자유스런 몸이 되었다.
양녕은 세자의 자리를 아우한테 넘겨버린 것을 무한한 행복으로 생각했다.
만약 폐세자가 아니되고 그대로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들, 오늘쯤은 임금의
자리에 나가서 모든 나라 정치를 보살펴야 할 것이다.
삼천리 강산과 수천만 백성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밤과 낮으로 머리를 썩혀서
그 큰 군왕의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도저히 자기의 성격으로는 이 큰
책임을 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제 아우님이 되는 상감은 나라를 잘 다스려주고 있다. 조정에는 어질고
슬기로운 신하가 가득했다. 임금 자신은 경연을 열고 밤 깊도록 신하들과
공부하면서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까를 궁리하고 있다.
학문하는 선비들을 모아서 집현전을 창설하고 학문의 심오한 진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제 아버지의 강포했던 시대는 가고 나라는 완전히 기틀이 잡혔다.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도 세상을 버렸다. 새시대다.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잘 지도하여 번듯하게 국가를 중흥시키는
아우님의 새시대다. 대왕에게 저항하고 반항할 까닭이 없었다.
양녕은 기쁜 마음으로 이 나라가 잘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다.
아우님 대왕의 정치를 고요히 지켜보면서 자유스런 여생을 즐겁게 마치리라
생각했다.
하루는 세종대왕이 모든 정사를 살핀 후에 편전에 들렀다가 홀연 도동에 있는
큰형님 양녕의 생각이 났다.
내관을 불렀다.
"도동에 나가서 양녕대군께 잠깐 들어오시라 해라."
내관은 남산 아래 있는 도동으로 나가서 양녕을 뵙고 상감의 전갈을 전했다.
양녕은 곧 대군의 조복으로 바꾸어 입고 대궐로 들어가 어전에 부복했다.
"초야에 묻힌 몸을 부르시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형제의 지극한 정
대왕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씀한다.
"홀연, 형님의 존안을 대해보고 싶어서 잠시 들어오시라 했소. 과인이 나가
뵈어야 마땅할 것이나 나가자면 구속됨이 많고 시끄러워서 불경이 되는 줄
알건만 형님을 청했소이다."
양녕도 미소를 짓고 대왕의 말씀에 대답한다.
"그러하오이다. 소신의 몸은 맨 데 없는 자유스런 몸이오라 죽장망혜로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어디 그러하실 수 있습니까. 한 번 대내
밖으로 납신다면 의장에 병졸에 온 장안이 들끓어대니 한 번 거둥행차하시기가
과연 어렵습니다."
양녕의 아뢰는 말을 듣자 대왕은 드높게 웃었다.
"과연 임금의 자리는 구석이 너무 많아서 괴롭소이다. 어느 때는 형님이
부럽기 한량없소이다."
대왕은 말씀을 마치자 협실에 있는 시녀를 불렀다.
"거기 누구 있느냐?"
협실문이 조용히 열리며 시녀가 들어왔다.
"양녕대군께서 들어오셨다. 형제가 오래간만에 담소하면서 술을 한잔씩 나누려
한다. 주안상을 올려라."
시녀는 명을 받들고 물러가 담박한 주안상을 받들고 들어왔다.
"물러가거라, 너는. 형제가 오붓이 술을 나누리라."
대왕은 시녀를 내보내고 친히 어온을 옥잔에 가득 부어 양녕에게 권했다.
양녕은 황감했다.
"먼저 전하께서 드셔야 할 것을---."
"향당에 막여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인이 비록 왕위에 있다 하나, 이곳은
왕실 지밀이 아니오니까. 형님이 먼저 드시오."
양녕은 황감했다.
술을 마시고, 잔을 대왕께 올렸다.
옥잔에 향기로운 술이 가득했다.
전하는 양녕이 올린 술을 마신 후에 양녕에게 묻는다.
"요사이는 무엇으로 소견하십니까? 좋은 일이 있으면 들려주시오."
"좋은 일이 별로 있을 리 있겠습니까. 그저, 글씨 쓰고 활 쏘고 남산길로
거니는 것이 신의 일과올시다. 명철하신 전하의 노력하시는 정치 밑에서 그저
성세일민이 되어 자유스럽게 지내니 도대체 이제는 시름과 근심이 다
스러졌소이다. 장차 전하의 윤허를 받자와 팔도강산의 명승지를 유람하기
소원이올시다."
대왕은 양녕이 팔도강산의 명승을 두루 살펴보겠다는 말에 용안이 화려하게
웃음을 열었다.
"좋으신 생각이올시다. 쉬 한 번 떠나보시옵소서."
대왕은 다시 술 한 잔을 따라 양녕에게 권한 후에 묻는다.
"우리 나라 팔도강산에 명승지는 간 곳마다 많다 합니다. 과인도 정저와마냥
우물 안 개구리로 궁중에만 틀어박혀 있습니다마는 한 번 보고 싶은 곳이
많습니다. 먼저 어느 곳으로 가보시렵니까?"
양녕이 웃으며 대답한다.
"중국의 송때 시인 소식의 시가 있지 아니합니까. 원생 고려국하여
일견금강산이라고 한 천하에 이름 높은 우리 나라의 명승 금강산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강릉 경포대, 양양 낙산사, 고성 삼일포, 삼척 죽서루,
간성 청간정, 울진 망양정, 통천 총석정, 평해 월송정의 관동팔경도 구경하고
싶습니다. 다시 산으로 오른다면 묘향산, 속리산, 지리산을 보고 싶습니다마는
우선 서경의 절승인 평양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대왕은 양녕이 우선 평양구경을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듣자, 용안에 미연히
웃음이 떠돌았다.
"형님의 풍류가 아직도 왕성하도록 남아 계십니다. 하필이면 평양으로 먼저
가시려 하오?"
"높은 산과 큰 바다의 절경도 좋지마는 그림같이 고운 금수강산 평양성을 한
번 둘러보고 싶습니다."
양녕은 변명하여 웃으면서 대답했다.
대왕은 양녕에게 석 잔 술을 권한 후에 시녀를 불러 상을 물렸다. 대왕은 석
잔 이상의 술을 마시지 않는 때문이다.
시녀가 상을 물린 후에 대왕은 양녕을 향하여 다시 말씀을 꺼낸다.
"형님이 평양구경을 원하시니, 원대로 한 번 가보십시오. 그러나 주의하실
일이 있습니다. 자고로 평양은 색향이라 합니다. 풍류를 좋아하시는 형님이 아무
일이 없이 조용히 돌아오실는지 의문이올시다."
양녕이 얼굴ㅇ르 붉히며 대답한다.
"풍류를 좋아했던 일은 다 옛날 일이올시다. 세자의 자리를 내놓기 위해서 한
일이니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 되었습니다. 전하의 어질고 밝은 정치 아래,
자포자기하는 반항의 정신은 눈 녹듯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과거지사는 묻지
마십쇼. 하, 하, 하."
양녕은 소리 높여 웃었다. 양녕의 말을 듣자 대왕도 웃으며 대답한다.
"사람의 천성이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본연의 천성이요, 하나는 제이의
천성이올시다. 습관으로 이루어진 제이천성은 스러져 없어진 듯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나타나는 법입니다."
"명철하신 말씀이올시다. 그러나 극복해서 이기면 되는 것입니다. 과히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양녕은 평양으로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기어코 대왕의 허락을 얻으려
했다.
대왕은 다시 웃으며 양녕을 향하여 말씀한다.
"형님께서 정 평양을 가보시겠다 하면 두 가지 일에 조심하셔야 합니다."
양녕은 시침을 떼고 묻는다.
"두 가지 일이 무엇이오니까?"
양녕의 묻는 말에 대왕은 근엄한 표정으로 말씀한다.
"한 가지 일은 술을 절주해서 삼가셔야 합니다. 약주를 잡숫되 섯 잔을 넘기지
마셔야 합니다."
양녕은 미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술은 오늘도 석 잔밖에 아니 마시었습니다. 대왕께서 상을 물리시니 더
마시려야 더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술 마시는 일은 꼭 전하의
애주하시는 법을 따르려 합니다. 다음 또 어떠한 일이 오니까?"
"다음엔 색을 멀이하셔야 합니다. 형님께서는 어느덧 호색하기는 성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부러 하기 시작한 일이 버릇이 되어 제이천성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리'로 하여금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게 한 일도
형님의 호색한 때문이올시다. 평양은 예로부터 색향이라 합니다. 만약에 평양에
가서 기생한테 빠지시어 헤어나지 못한다면 큰일이올시다. 양녕대군이 평양까지
내려가서 기생과 추태를 부렸다는 소문이 한 번 퍼지게 되면 왕실에 크나큰
불명예올시다. 이러하니 형님을 평양으로 보내놓고 마음을 놓지 못하겠습니다."
양녕은 옷깃을 바로잡아 정색하고 아뢴다.
"술도 삼가려니와 색도 삼가겠습니다. 다만 평양 옛 도읍의 아름다운 풍물울
구경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대왕은 다시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그러시다면 다녀오시도록 합시오. 형님을 믿습니다. 모든 일에 자유스런
행동을 취하도록 합시오."
양녕은 기뻤다.
"삼가 전하의 성지를 받들어 몸을 함부로 굴지 않겠습니다."
양녕은 평양 가는 허락을 받은 후에 사은숙배를 드리고 어전에서 물러나 도동
집으로 돌아왔다.
곧 부인과 명보한테 대왕께 평양 가는 허락 얻은 것을 이야기하고 길 떠날
행리를 꾸렸다.
이튿날 양녕은 갈아입을 옷 몇 벌을 부담농짝에 담아 나귀 등에 싣고
죽장망혜 홀가분한 차림으로 부인을 작별한 후에 명보와 함께 서관대로로
향했다.
무악재 고개를 지나 고양, 파주, 장단, 송도, 사리원, 봉산, 황주, 중화를 거쳐
평양에 당도했다.
소문을 놓고 가지 아니했건만 고을마다 지공이 대단했다.
한편 세종대왕은 양녕이 평양으로 떠나기 전에 선전관을 불러 밀지를 내렸다.
"이번에 양녕대군께서 평양으로 유람을 가시게 되었다. 과인이 대군께 술과
색을 조심하라고 권고했더니 대군께서는 과인 앞에 술과 색을 조심하겠다고
굳게 약속하셨다. 이번 행차에 필연코 조심하고 사양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호협한 성격에 평양 같은 산천과 인물이 좋은 곳에 가서 무료하게 지내다가
돌아온다면 한평생 한이 될 것이다. 네가 넌지시 평안감사한테 가서 과인의
뜻을 비밀히 전하고 대군의 객회를 풀어드리라고 일러라. 그리고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을 과인한테 올려보내라고 일러두라."
선전관은 대왕의 분부를 받들어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역마를 달려
평양으로 향했다.
천리준총을 달리는 선전관은 양녕이 겨우 파주, 장단에 당도했을 때 벌써
평양 감영에 당도했다.
소복미인
선전관은 감영 삼문으로 들어가 평안감사에게 비밀한 어명을 전했다.
감사는 상감의 밀지를 받자, 곧 평안도 내 군수들한테 영을 놓아 서울서
내려오는 양녕대군의 행차를 극진히 공궤하라 했다.
각 고을 원들은 감사의 전령을 받고 양녕의 행차를 맞이햐여 지극한 대접을
했다.
감사의 전령이 있을 뿐 아니라 양녕은 일찍이 세자 노릇을 한 분이요, 임금의
손자요, 임금의 아들이요, 금상전하의 형님이다. 고을마다 존경하고 우대했다.
연회를 차리고 기생을 불러 노래와 춤으로 대군의 여로 피곤을 위로했다.
그로나 양녕은 대왕과 약속한 일이 있었다. 일체 술을 입에 대지 아니했다.
고을마다 원들은 객관으로 아름다운 기녀를 보내서 수청을 들게 했다. 그러나
양녕은 영영 사양하고 기생 수청을 받지 아니했다. 각 고을의 보고는 연달아
감사한테로 들어갔다.
감사는 속으로,
'과연 선전관을 통해서 내리신 밀지와 같구나. 양녕은 일체 주색을
피하는구나!'
탄식했다.
며칠 후였다. 양녕의 행차는 평양에 당도했다.
감사는 군관과 아전들을 미리 성 밖으로 내보내서 양녕의 평양 당도하는
시각을 짐작해보았다.
부랴사랴 성문 밖 십 리까지 나가서 양녕을 맞이했다.
감사는 연광정에 크게 연회를 배설하고 평양서 제일 가는 명기와 명창 등을
불러서 멀리 온 양녕의 피곤을 풀어주기로 했다.
양녕은 평안감사와 인사를 나눈 후에 연광정에 올라 풍경을 바라보았다.
산세는 점점이 묵화 한 폭을 친 듯 곱고 명미한테 물빛은 초록 물감을 끼얹은
듯 맑고도 아름다웠다.
양녕은 서울과 송도에서 보던 풍경과 비교해본다. 제각기 일취가 있었다.
평양성중의 경광은 마치 아름다운 여인이 능라 비단 치맛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면서 아리따운 미소를 머금고 멀리 온 길손을 반갑게 맞이하는 듯하다.
양녕은,
"명불허전이로군!"
탄식하면서 평양성중을 굽어본다.
대동강 물은 푸른빛을 날려, 유유하게 흘러가고, 원포귀범의 놀잇배들은
수심가를 흥겹게 부르며 흥청거려 돌아들었다.
강물가에 적벽을 이루어 비취빛 창공을 떠받들고 있는 청류벽도
절경이거니와, 비단 휘장을 둘러친 듯 천사만사 능라도의 수양버들 늘어진
가지들은 그림인 양 아름답다.
양녕은 취한 듯, 어린 듯, 연광정 위로 거닐었다. 붓과 입으로 형용해서
나타낼 수 없는 천하의 절승이다. 정신이 쇄락했다. 홍진만장인 티끌 속에
파묻혔던 몸이 신선들이 사는 등선각에 오른 듯했다.
양녕은 문득 고려 때 시인 정지상의 시가 생각났다.
비 그친 뒤
활짝 갠,
길고 긴 둑엔
푸른 풀
싱싱하게 우거졌건만,
나는 어찌
남포가에
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나.
대동강 물
어느 때나 마르리,
이별 눈물 해마다
강물만을 보태네.
양녕은 가만한 소리로 시를 읊으며 멀리 탁 터진 벌판을 바라보았다.
입에서는 또다시 유명한 김황원의 시가 새어나온다.
긴 성, 한 굽이엔
흘러가는 강물인데
넓은 벌, 동편엔
점점이 산이로다.
양녕은 시흥이 높았다.
감사가 양녕에게 고한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약주를 드시면서 풍광을 상주십시오."
양녕은 감사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앞에는 산해진미의 주안상이 놓여
있고, 옆에는 평양 명기들이 연분홍 저고리, 노랑 저고리, 연둣빛 저고리에
남치맛자락을 휩싸고 교태를 부려 앉았다.
양녕은 눈을 들어 미인들을 바라본다.
남남북녀라고 예로부터 귀가 젖도록 들었다. 과연 곱고 예뻤다.
서울서 봉지련을 위시하여 수많은 기생들을 세자 때부터 보아왔고 이제는
고인이 된 어리도 천하절염으로 알았지만 평양 기생들에 비해보니 확실히 북쪽
기생이 윗길이었다.
양녕은 강산 풍경과 미녀 풍정에 마음이 약간 흔들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감사는 눈치를 챘다.
"대감께 어서 약주 한 잔을 부어 올려라."
분홍 저고리에 남치마를 입은 기생이 백자 술병을 들어 백자잔에 평양 명주
감홍로를 따라 올렸다.
술 빛깔이 불그레했다. 감칠맛이 있어 보였다.
"무슨 술빛이 이같이 고운가? 마치 진달래 꽃송이같이 붉고 곱구나!"
양녕의 입에서 무심코 술빛을 칭찬하는 말이 떨어졌다.
술 따르던 기생이 생긋 웃으며 아뢴다.
"빛깔이 곱습지요? 향취도 높습니다."
감사가 고한다.
"이 술은 평양에 유명한 감홍로올시다. 한 잔 들어보십쇼. 풍미가 진진합니다."
감사와 기생은 양녕의 술 비위를 돋우었다.
양녕은 홀연 서울서 대왕께 약속했던 일이 번개치듯 머리에 떠올랐다.
술을 마셔서는 아니되겠다고 생각했다.
"요사이는 술을 못한다."
양녕은 한 마디 하고 기생의 술을 받지 아니했다.
기생은 술잔을 들고 있었다.
"한 잔만 드시죠."
"못마시는 술을 어찌 마시나. 미안하다."
멋쩍게 대답했다.
"듣자오니 대군께서는 유주무량으로 무한 약주를 즐기셨다는데, 술이 비록
궁중의 아름다운 술만은 못합니다마는 평양의 제일 가는 술이올시다.
집배만이라도 하십쇼."
감사의 권하는 말이 떨어저니, 기생은 술잔을 든 채 다시 권한다.
"팔이 아픕니다. 못생긴 쇤네가 권해서 아니 잡수십니까? 손이 부끄럽습니다.
입매만이라도 하십시오."
기생은 교태를 지어 매달렸다.
양녕의 눈에는 기생의 아양도 보이지 아니했다. 미소를 띠고 지켜보는
세종대왕의 얼굴이 또다시 떠올랐다.
손이 말을 듣지 아니했다. 차마 잔을 받을 수 없었다.
"몰풍취한 사람이라고 나무라지 말라. 내 몸이 불편해서 술릉 마시지
못하겠다. 미안하다."
양녕은 기생한테 미안하다고 용서를 청했다.
기생도 하는 수 없었다. 무료한 얼굴로 술잔을 상에 놓았다.
감사도 하는 수 없었다.
"그럼 약주를 아니 자시는 대신 음식이나 많이 듭시오."
양녕은 수저를 들고 신선로와 구수장국을 먹었다. 그러나 목에서는 술 생각이
간절했다.
호탕한 기상에 미인의 손을 만지며 농담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얼굴이 또 떠올랐다.
혀끝을 깨물었다. 예쁜 기생 아가씨들을 외면하고 앉아 있었다.
평안감사가 대접하는 연광정 잔치는 몰풍취한 놀이가 되어버렸다. 뜰 아래서
멀리 바라보고 서 있는 명보는 벙긋벙긋 웃으며 배꼽을 안았다.
평안감사는 무료한 연광정 놀이를 파하고 양녕을 깨끗한 사처로 인도했다.
감사는 아름다운 기녀 한명을 데리고 양녕의 사처를 찾았다.
"저녁 문안을 드리러 왔습니다."
양녕은 고맙다고 답례를 했다. 뒤미처 밤참상이 나왔다.
감사의 명을 받들어 내아에서 특별히 장만한 밤참이었다.
평안감사는 이번엔 술을 권하지 아니했다. 기생도 옆에 앉아서 음식을 권할
뿐 술은 권하지 아니했다.
양녕과 감사는 평양 풍물을 이야기하면서 밤참을 먹은 후에 상을 물렸다.
얼마 후에 감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녕을 향하여 고단한데 일찍 취침하라고 인사한 후에 기생에게 분부한다.
"너는 대군마마의 시중을 들어라. 고단하실 테니 이불도 펴드리고 다리도
주물러드려라."
말한 후에 다시 양녕을 향하여 고한다.
"평양에서 첫손을 꼽는 얌전한 아이올시다. 얼굴도 아름답지만 가무도
능란하고 시서금기도 하는 체합니다. 수청을 들이십시오."
감사는 말을 마치고 발길을 돌렸다.
양녕은 당황했다. 발길을 돌리는 감사를 급히 불렀다.
"여보 사또, 기생 수청은 안들여도 좋소. 내가 데리고 온 사람이 있으니 아무
염려 마오. 기생은 도로 데리고 기시오."
양녕은 손을 저어 펄쩍 뛰었다.
뜰 아래 서 있던 명보는 빙그레 소리 없이 웃으며 바라본다.
감사는 선전관을 통해서 상감의 밀지를 받은 까닭에 양녕이 술도 아니 자시고
색도 멀리하는 까닭을 짐작해 알았다. 그러나 대왕은 양녕의 객회를 풀어주고
슬며시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을 올려 보내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어떠한
수단을 쓰든지 양녕을 오입판으로 떨어뜨려 놓아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술은 아니 자신다 하니 색으로나 유인해보리라 했다.
그리하여 평양 기생 중에 첫손을 꼽는 기녀를 데리고 양녕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양녕이 펄쩍 뛰고 기생 수청을 아니 받겠다 하니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정 그러시다면,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대군께서는 전과 달리
몰풍류하십니다. 하하하."
감사는 기가 찼다. 소리를 높여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더욱 무안해하는 것은 기생이었다. 감사, 병사, 방어사에 각읍 수령 쳐놓고
수십 명을 겪어보았으나 퇴짜를 맞아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얼굴이 뾰로통하게 변색이 되었다.
"별꼴을 다 보네."
양녕한테 인사도 아니하고 싹 돌아섰다. 감사의 뒤를 따라 뒤도 안 돌아보고
치마 꼬리를 휩싸안은 채 바람같이 문 밖으로 사라졌다.
양녕은 기생을 그대로 돌려보낸 후에 마음이 우울했다. 공연히 대왕과 약속을
하고 왔구나 하고 마음이 불쾌했다.
부왕이 계실 때도 자기의 자유를 막을 사람이 없었다. 거리낌없이 맘대로
행동을 취했던 것이다.
세자궁으로 기생과 가객을 불러들였고, 유부녀의 집 담까지 뛰어넘어서 남의
첩을 뺏어오기까지 했다. 뿐만인가, 걸인이 되어 막천석지를 해보기도 했다.
자기의 자유 행동을 구속할 사람은 하늘 아래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아우가 임금이 된 이때 도리어 자기 자신은
어느덧 자유를 뺏긴 듯이 되고 말았다. 구속을 받는 함정 속으로 슬몃
빠져버리고 말았다. 양녕은 여기까지 생각이 드니, 자유를 잃은 듯한 자신의
몸이 가엾기도 했다. 구슬프고 우울했다. 밤에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몸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명보가 한동안 코를 골고 자다가 선잠이 깼다. 눈을 비비고 묻는다.
"왜 여태 아니 주무십니까?"
"잠이 오지 않는구나."
명보는 양녕이 잠들지 못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한 번 익살을 부려본다.
"왜 잠을 못주무십니까?"
"그저 잠이 오지 않는구나."
양녕은 점잖게 대답했다.
명보는 눈을 멀뚱멀뚱 떠서 천장을 바라보며 혼자 말하듯 푸념을 한다.
"펀하절색인 평양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셨으니 잠이 올 리가 있습니까?
내일은 평안감사가 또 기생을 제리고 와서 수청을 들이겠다 하거든 덥석
받아들이시오. 그래야만 잠이 오리다. 공연히 상상병 들면 큰일입니다."
명보는 시치미를 떼고 웅얼거렸다. 명보의 응석부리는 농담을 듣자 양녕은
빙긋 웃었다.
"이놈!"
거탈로 꾸짖었다.
명보가 또다시 짓궂게 말한다.
"나리께서 서관 제일강산이란 색향에 오셔서 약주 한 잔 맘대로 마시지
못하고 기생 오입 한 번 못하시고 간다면 나리의 호협하셨던 과거지사가 모두
다 허탕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같은 명승지에서 그대로 멋없이 유하셨다가
가신다면 천추의 한이 되실것입니다. 전에 세자 때처럼 한 번 호탕하게
노시다가 올라가십쇼. 공연히 병환 나시면 후회막급입니다."
"이놈아, 입을 닥쳐라. 쓸데없는 말 지껄이는구나!"
양녕은 또 한 번 꾸짖는다.
명보는 빙긋빙긋 웃으며 응석조로 말한다.
"나리님, 왜 약주도 아니 잡수시고 기생 수청도 들이지 아니하십니까? 무슨
이유가 계십니까?"
바보처럼 물었다.
"이놈아, 이유가 무슨 이유냐. 마시기 싫으니까 아니 마시는 것이지. 대답하기
싫다. 만사가 귀찮다!"
양녕은 버럭 화증을 낸다.
"나리 마님, 소인한테까지 숨기신다면 소인은 참 섭섭합니다. 어려서부터
소인은 한평생을 모셨는데 소인에게까지 숨기시니 과연 야속합니다."
명보는 너스레를 놓아 응석을 계속해 부린다.
양녕은 명보의 야속하다는 말을 듣자 비로소 웃으며 대답했다.
"이놈아, 야속할 것까지야 무엇 있느냐. 네가 정 섭섭해하는 눈치니 내가
터놓고 말해주마. 서울서 평양으로 내려올 때 상감과 약속한 일이 있다. 술과
색을 멀리하기로---."
명보는 양녕의 대답을 듣자 히히덕거려 웃으며 대답한다.
"원, 나리께서도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아무리 상감마마께 주색을
멀리하겠다고 말씀을 하셨다 하더라도 천하절경 아래 천하절색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 오셔서 그대로 쓸쓸하게 다녀가신다니 말이 됩니까. 그리고 약주 한
잔쯤 잡수시고 오입 한 번쯤 하신댔자 죽 떠먹은 자리가 아닙니까? 오백 리 밖
구중궁궐에 계신 상감마마께서 어찌 아십니까.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 마시고
어서 평안히 주무신 후, 내일부터는 호협하게 노시고 감사가 권하는 대로
수청도 받아들이십시오."
"아니된다. 임금을 속이는 법이 어디 있느냐."
양녕은 점잖게 대답했다.
옛날 호협했던 양녕의 기상은 찾아볼 도리가 없이 근엄했다.
명보는 또 한 번 킬킬거려 웃어대며 말한다.
"나리, 망령이십니다. 전의 태종대왕 때는 밤낮 속이시고 다니시던 분이
이제는 임금을 속이지 못하시겠다 하시니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때와 지금은 경우가 다르니라. 그때는 세자 노릇을 아니하기 위하여 일부러
한 짓이고, 오늘은 신하의 도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양녕은 의젓이 대답했다.
다음날이 되었다. 감사는 양녕을 찾아와 문안을 드린 후에 다시 평양의
명소를 구경시켜 주었다.
먼저 모란봉에 올라 평양성을 굽어보고, 부벽루, 을밀대, 기자능을 돌아본
후에 다시 대동강에 용배를 띄워 선유를 했다.
용배 안에는 삼현육각 풍류 소리가 자지러지고, 배반이 벌어진 곳에 평양
명기들이 화사한 의상으로 노래를 불러서 양녕을 환영했다.
그러나 양녕은 선유놀이에서도 술을 안 들고 기생들을 가까이하지 아니했다.
다만 점잖게 담소하면서 청류벽 능라도를 돌아 경치를 살필 뿐이었다.
어느덧 해는 지고 선유는 파했다. 양녕은 사처로 돌아가고, 감사는 선화당으로
올라 깊은 궁리 속에 빠졌다.
세종께서 특별히 선전관을 보내어 양녕을 오입시켜 드리라고 부탁하시고 다시
오입한 그 증거품을 올려 보내라고 하셨는데, 양녕은 술 한 잔 들지
아니할뿐더러 기생을 거들떠보지도 아니하니 딱하기 한량없는 일이다.
만약 양녕을 오입 한 번 못시키고 그대로 올라가게 한다면 세종의 특별한
분부를 어기는 일이 된다. 소위 감사로 앉아 있으면서 이만한 수단이 없다면
감사의 자격이 없게 된다.
감사는 크나큰 걱정거리를 만난 셈이다. 이리저리 백방으로 궁리를 해보았다.
그러나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아니했다.
감사는 생각다 못해 이방을 불렀다.
"이번에 양녕대군이 내려오셨는데 오시기 전에 서울서는 상감께서 양녕대군께
주색을 멀리하라고 당부하신 모양이다. 상감께서는 겉으로 형님을 단속하셨으나
색향으로 유명한 이곳까지 내려와서 무료하게 지내다가 올라간다면 일생일대의
한이 될까 생각하시어 슬며시 선전관을 나에게 보내시어 밀지를 내리셨다.
양녕이 아무리 사양하더라도 오입을 시키고, 그 증거물을 올려 보내라 하셨다.
나는 상감의 분부를 받고 백방으로 양녕을 유혹했으나 양녕은 일체 응하지
아니하니 딱한 일이로구나! 소위 감사로 앉아 있으면서 이 일을 하나 처결 못
한다면 내 꼴은 무엇이 되며 나중에 서울에 올라가서라도 상감마마를 어찌
뵙겠느냐? 너에게 묘안이 있거든 한 번 똥겨주려무나."
이방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감사한테 고한다.
"거, 참 난처한 일이올시다. 소인도 얼른 묘책이 생각나지 아니합니다. 이 일은
슬기 있는 기생 아이에게 문의해보십쇼. 얼굴만 반주그레한 화초기생 따위로는
묘한 생각이 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감사는 이방의 말을 듣자, 그럴 듯하게 생각했다.
"네 말이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평양 감영 기생 중에 가장 지혜가 많고 수단
높은 애가 누구냐?"
감사는 이방 앞으로 무릎을 바싹 밀었다. 이방은 한동안 생각하다가 아뢴다.
"감영 안 기생 중에 정향이란 기생이 있습니다. 얼굴도 똑똑하고 예쁘려니와
머리가 좋아서 백령백리합니다. 사또께서 한 번 친히 불러서 하문하옵소서."
"그렇다면 곧 불러오너라."
이방은 감사의 명을 받고 곧 기방으로 나가 정향을 데리고 들어왔다.
감사가 바라보니 명모호치에 살결이 눈같이 희고 자색이 겸비했다.
감사는 손짓해서 정향을 앞으로 가까이 불렀다.
"네가 양녕대군을 녹여낼 재주가 있겠느냐?"
정향은 상긋 웃으며 대답한다.
"양녕대군께서 아름다운 평양 기생을 데리고 놀고 싶은 생각은 꿀떡
같으시지만, 상감마마 앞에서 주색을 멀리하겠다고 맹세를 하고 오신 까닭에
감히 기생들을 가깝게 하지 못한답니다. 호호호."
정행은 간드러지게 웃었다.
"네가 어찌 그 일을 아느나?"
감사는 깜짝 놀라 묻는다.
정향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한다.
"눈치 빠른 기생들이 어찌 그 일을 모르겠습니까? 그 일로 인해서 선전관이
내려온 일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감사는 또 한 번 놀랐다.
"그렇다면 네가 한 번 양녕대군을 파계시켜 볼 재주가 있느냐?"
감사의 말을 듣자 정향은 밝은 눈에 웃음을 담뿍 싣고 생글거려 대답한다.
"해보라 히시면 한 번 해보겠습니다."
정향의 대답 소리를 듣자 감사는 비로소 입이 딱 벌어졌다.
"그렇다면 양녕대군을 네가 모시고 지냈다는 증거까지 가져와야 한다.
상감마마의 분부시다."
"염려 마십쇼."
정향은 미소를 지으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네가 흠뻑 수단을 부려보아라."
"이방님과 의논해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정향은 이방과 함께 감사 앞에서 물러났다.
정향은 선화당에서 나와 이방청으로 나갔다.
이방이 웃으며 정향에게 묻는다.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 양녕대군을 녹여낼 테냐?"
"그것은 해봐야 동이 될지, 서가 될지 말씀합지요. 해보기도 전에 어떻게
말씀을 드립니까. 좌우간 집 한 채만 얻어줍시오. 바로 양녕대군께서 사처하고
계신 옆집이나 뒷집이라야 쓰겠습니다. 그리고 토인 한 명만 내보내줍시오."
이방은 한동안 생각해보았다. 양녕대군이 사처하고 있는 옆집은 바로
김토인의 집이었다.
"집은 전체를 쓰려느냐, 방 한 칸만 쓰려느냐?"
"제 집으로 쓸 테니 들어 있는 사람들은 나가야 합니다."
"좋다. 바로 김토인의 집이 양녕대군께서 사처하고 계신 곳과 격장이라
내놓으라고 하마."
이방과 정향은 약속하고 헤어졌다.
한편 이방은 김토이의 집으로 옮긴 후에 양녕대군이 사처하고 있는 집의
격장된 담을 사람 하나 드나들 만큼 터놓았다.
한편 양녕대군은 제일강산이라는 평양으로 구경을 왔으나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모한봉, 을밀대, 부벽루의 승경이며 능라도, 청류벽, 연광정의 절승이
아름답지 아니한 바가 아니언만, 술 한 잔 아니 마시고 색을 멀이하고보니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본시부터 입에 술을 대지 못하고 미인을 어루어보지
못앴던 사람이라면 별로 큰 영향이 없었겠지만 워낙 놀기를 좋아하고 풍류의
멋을 잘 알아서, 제이천성을 이루다시피 한 호협한 앙녕이었다.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낮에는 감사한테 끌려서 명승을 구경하고, 밤에는 사처로 돌아와 고침단금에
전전반측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감사는 정향과 약속을 한 후에 넌지시 이방한테 일러서 양녕을 모시고
온 명보를 딴집으로 가서 거처케 했다.
명보도 눈치를 채고 양녕한테는 며칠 동안 친구가 청한다고 외수를 써서
딴곳으로 사관을 정했다.
양녕은 명보마저 업승니 더한층 쓸쓸하고 적적했다. 때마침 칠월보름께가
되었다. 선들바람은 쓸쓸하게 불어오고 가을 하늘 드높은 중에 밝은 달빛은
은물결을 이루어 대지에 가득하게 흘렀다.
어느덧 밤은 깊어 자정 때가 되었다. 평양성중은 달빛 속에 파묻혀서 조용히
잠들었는데 한 조각 밝은 달만이 창공에 높이 떴고, 삽살개 짖는 소리는 적막한
강산을 흔들었다.
양녕은 잠을 이루려 하나 잠이 오지 아니했다. 더구나 밝은 달빛이 휘영청
창경으로 흘러드니 교교한 달빛이 이불 자락에까지 비쳐서 마음이 산란했다.
양녕은 배겨낼 수 없었다. 이불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나 달빛을 밟으며 뜰
안이나 거닐어보리라 생각했다.
창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달빛은 여전히 뜰에 가득했다.
달을 사랑하던 시인 이태백의 생각이 났다.
달을 두고 글을 지었던 소동파의 생각도 났다.
달을 바라보며 시를 읽어보고 싶었다.
양녕은 신을 신고 댓돌로 내려섰다. 달빛이 은빛이 되어 넓은 마당안에
가득하게 깔렸다.
양녕은 은빛으로 흐르느 달빛 속으로 들어섰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호호한 하늘에도 달빛이 그득했다.
별이 달빛에 에워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풀벌레가 은방울을 흔드는 듯
울어댄다.
양녕은 대우주의 허명한 속에 발길을 옮기며 유유히 거닐었다.
홀연, 새까만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뜰 옆 담 터진 곳에서 깡충 뛰어내렸다.
양녕은 깜짝 놀랐다. 뛰어내리는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미처 담 터진 곳에서 인기척이 났다.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
눈빛같이 흰 소복을 입은 여인이 부지깽이를 들고 담 터진 곳에서 나타났다.
급히 고양이를 쫓아오는 모양이었다.
아리따운 교성으로 고양이를 꾸짖으며 뛰어들었다.
"요놈의 고양이, 발칙한 놈의 고양이, 어디로 갔느냐?"
고양이는 삽시간에 살같이 달아나서 자취를 감추었다. 찾을 길이 묘연했다.
양녕이 달빛 아래 소복 입은 밍니을 바라보니 기가 막힌 절색이다.
풍정 있게 틀어 얹은 머리는 달빛을 받아 칠흑같이 윤이 흐르고, 밝은
눈동자는 별빛보다도 초롱거렸다. 여기다가 면화송이로 짜입은 수목 소복은
백설공주가 달빛 아래 나타난 듯했다.
양녕은 아닌 밤중에 고양이를 쫓아온 소복 미인의 형색을 아니 물어볼 수
없었다.
"깊은 밤중에 웬 여자가 남의 사처한 집으로 뛰어드오?"
소복 미인은 황망히 손에 들었던 부지깽이를 내던지고, 허리를 굽혀 절하려고
한다.
"깊은 밤중에 죄송하기 짝 없습니다. 귀하신 손님이 계신지 모르고,
분정지두에 담 터진 곳으로 뛰어들어 황공만만이올시다. 저지른 죄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월광 속에서 사죄를 하는 여인의 모습은 진정 아름다웠다. 뿐만 아니었다.
부끄러워하는 수삽한 그 태깔이 더한ㅊ 소박하고 고왔다.
양녕은 고양이를 쫓아 들어온 그 내력을 알고 싶었다.
"무슨 까닭에 깊은 밤중에 자지 아니하고 고양이를 쫓아 들어왔소?"
소복 미인은 고개를 숙여 나직한 말씨로 대답한다.
"소인은 본래 이 고을 아전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남편 되는 사랑이 병을
얻어 삼년 전에 그만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청상과부의 몸이
되었습니다. 오늘 밤은 망부의 대상날이올시다. 마지막 삼년상을 마치는 대기
날이오라 대상제를 지내기 위하여 없는 돈에 적고기를 마련해서 제사를 받들려
했더니 부엌에 둔 고기를 저놈의 고양이가 물고 달아납니다. 분정지두에 귀인이
서 계신 줄 모르고 담 터진 곳으로 고양이를 쫓아 들어왔다가 존안을 대해 뵙게
되오니 황공하고 죄송한 말씀 이루 다 형언해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양녕은 소복 미인이 청상과부요, 오늘 밤에 마침 상복을 벗는 대상날이란
말에 가련한 생각이 들었다.
"청춘과부댁으로 대상날을 당해서 정성들여 마련했던 적고기를 고양이한테
물려보냈으니 오죽이나 마음이 찌연하겠소. 돌아간 남편도 영혼이 있으면
짐작할 테니 적고기는 빼놓고 제사나 정성스럽게 지내시오."
소복 미인은 양녕의 말을 듣고 고맙다는 듯 인사를 했다.
"크게 꾸짖지 아니하시고 돌려보내 주시니, 바다같이 넓으신 도량을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면 소인은 죄를 짓고 물러갑니다."
소복 미인은 초연히 몸을 돌려 담 터진 곳으로 들어갔다.
돌아서서 가는 그 자태가 양녕의 눈에는 더한층 아름답게 보였다.
양녕은 미인을 보낸 후에 다시 달 밝은 뜰을 거닐었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던 달빛도 신명이 나게 보이지 아니했다.
눈에는 달빛 대신 담이 터진 곳으로 들어간 미인의 얼굴만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양녕은 곧 미인의 뒤를 쫓아 담 터진 곳으로 들어가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발길을 두어 걸음 옮기려 했을 때 홀연 눈앞에 세종대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양은 색향입니다. 색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근엄한 표정으로 말씀을 내리는 대왕의 옥음이 귀에 쨍했다.
양녕은 한숨을 짓고 발길을 돌렸다.
쓸쓸하고 고적한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쓰고 누워보았다. 잠이 올 까닭이 없었다. 눈은 점점
반반하게 떠졌다. 소복 미인의 고운 자태가 쉴 사이 없이 눈에 밟혔다.
양녕은 마음이 괴로웠다.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이불을 박차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복 미인이 말하기를 남편의 삼년상을 탈상하는 대상제를 지낸다 하니
제사지내는 구경이나 해보리라 생각했다.
창문을 열고 마루로 나간 후에 신을 신고 담 터진 곳으로 향했다.
휘영청 밝은 달밤이었다. 밤이 깊었으나 어둡지 아니했다.
양녕은 도둑고양이모양 발소리를 죽이고 담 터진 곳으로 들어섰다.
바로 소복 미인의 집 안마당이다. 마당에서는 환하게 대청마루가
들여다보였다.
과연 대청에는 제상이 배설되어 있고 황춧불이 촛대에 꽂혀서 벌룽거렸다.
향탁에 놓인 향로에서는 자단향 푸른 연기가 일어나고 소복 미인은 잔을
올리며 제를 지내고 있었다. 잔을 올리며 절하는 그 모습은 너무나 가련하고
청초했다.
미인은 네 번 절하고 잔을 올린 후에 제상 앞에 꿇어앉아 느껴 울며 넋두리를
한다.
"이제 삼년상도 다 마쳤습니다. 돌아가신 영혼이나. 삼년 동안을 살아 계신 듯
모시었더니 이 밤에 궤연마저 폐하게 되니 기가 막힙니다. 당신의 혼령을
의지해서 삼년을 살았더니 혼령마저 가시니 나는 누구를 의지해 삽니까? 아아,
누구를 의지해 삽니까?"
소복 미인은 마루판을 치며 통곡한다.
마당 한 귀퉁이에 숨어서 엿보고 있던 양녕의 눈시울이 화끈했다.
'누구를 의지해 삽니까?' 하는 청상과부의 넋두리는 양녕의 가슴을 강하게
찔렀다.
양녕은 호협한 성격에 참을 수가 없었다. 세종대왕의 근엄한 당부도 다
잊어버렸다. 대청으로 뛰어올랐다.
제상 앞에서 넋두리를 하고 울며 엎드렸던 미인은 발자국 소리에 깜짝
놀랐다.
뒤를 돌아다보니 양녕이 우뚝 서 있다.
소복 미인은 소스라쳐 놀라는 시늉을 했다.
얼굴빛을 정색하고 양녕을 꾸짖는다.
"점잖은 양반이 깊은 밤중에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오시니 웬일입니까?
청상과부 불쌍한 여인이 혈혈단신으로 죽은 망부의 대상제를 지내는
중이올시다. 해괴망측한 일입니다. 빨리 나가주시오!"
준절하게 꾸짖는 미인의 음성은 백옥을 부수는 듯 싸늘하고, 제단에 놓인
촛불 아래 비치는 미인의 얼굴은 더 한층 가련하고 어여뻤다.
양녕은 변명할 말이 없었다.
"과수댁의 곡성이 하도 처량하므로 가여운 생각이 나서 들어왔소. 담을 넘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고양이를 쫓아서, 나의 사처로 들어왔던 담 터진
곳으로 들어왔소. 허물치 마시오. 들어올 길을 가르쳐준 사람은 당신이오. 내가
담 터진 곳이 있는 줄 알 까닭이 있소?"
소복 미인은 양녕의 변명을 듣자, 얼굴 표정이 더한층 얼음장같이 쌀쌀하게
굳어졌다.
"담이 비록 터졌기로서니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함부로 남의 집 내정돌입을
하십니까? 빨리 나가시오."
얼음장같이 쌀쌀하게 꾸짖는 소복 미인의 태도는 교태를 부려서 웃는 웃움
가락보다도, 옥을 부수는 듯 아름답게 들렸다.
양녕의 호탕한 마음은 마칠 듯했다.
덥석 미인의 백옥 같은 손을 잡았다.
"아무도 없는 이 밤중에 누가 본다고 나가라 하오. 기왕 들어왔으니 이야기나
좀 해봅시다."
소복 미인은 양녕의 잡은 손을 뿌리쳤다.
"아이고머니나, 해괴망측스러워라. 점잖은 분이 이게 웬일이오. 수절하는
청상과부의 손을 함부로 잡는 법이 어디 있소."
양녕은 껄걸 웃었다. 농을 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청상과부의 손이니까 잡지, 늙은 과부의 주름진 손이라면 누가 잡겠나.
좌우간 소란 떨지 말고 이야기나 해보세."
양녕은 뿌리치는 미인의 손을 다시 휘어잡았다.
미인은 비단 찢는 소리를 쨍하게 냈다.
"이 동리엔 아무도 없소? 제사지내는 청상과부의 집에 외간남자가 뛰어들어와
겁탈을 하려 하오!"
양녕은 주춤했다. 약간 겁이 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감사와 짜고 하는 노릇이었다. 동네에서 누구 한 사람 나올 까닭이
없었다.
사면 팔방은 여전히 조용했다. 달빛만이 그림잘르 옮길 뿐이었다.
양녕은 다시 마음을 놓았다. 빙긋 웃으며 다시 소복 미인의 손을 잡았다.
"이게 대상도 다 지냈으니 자네는 돌아간 망부한테 할 일을 다 했네. 어린것도
없는 무의무탁한 청춘과부가 장차 한평생ㅇ르 어찌 허송한단 말인가. 나하고
사는 것이 어떠한가?"
소복 미인은 깜짝 소스라쳐 놀라는 시늉을 한다.
"아니됩니다!"
쌀쌀하게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아니될 것이 무어 있나. 나하고 한평생을 같이하세."
미인은 양미간을 찡그리고 대답한다.
"아니됩니다. 얼토당토한 말씀입니다. 절대로 아니됩니다. 어서 빨리
나가주십쇼. 소문이 나면 피차에 다 창피합니다."
양녕은 마음이 달았다. 입술이 탔다.
"그러지 말고 어서 허락하게나. 삼년상도 다 지냈는데---."
양녕은 과부댁이 자기의 신분을 모르는 줄 알았다. 애걸하다시피 졸랐다.
이인은 양녕의 잡은 손을 또 한 번 뿌리치며 대답했다.
"듣자오니, 나리는 귀인이라 하십니다. 이만저만한 귀인이 아니라 상감마마의
맏형님이신 양녕대군이라 합니다. 나라의 지존이신 상감의 형님께서 저 같은
하천의 계집과 백년해로를 하시겠단 말씀은 입에 발린 말씀이올시다. 한 번
소녀를 훼절시켜 놓으신 후엔 헌신짝 버리시듯 할 테니 과부의 꼴만 사납고
몸은 영영 결딴이 날 테니 말이 아니됩니다. 쓸데없는 말씀 작작하시고 어서
돌아사십시오."
양녕은 깜짝 놀랐다.
"자네가 내 행색을 어찌 짐작하나?"
소복 미인은 양녕의 묻는 말을 듣고 생긋 웃었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웃음이었다. 웃는 그 자태가 무한 아름다웠다.
"양녕대군 나리께서 내려오신 것은 평양 일판이 다 아는 노릇이올시다. 소녀가
비록 집 안에 들어박혀 있는 수절과부올시다마는, 어찌 모르겠습니까? 관가에서
나리의 사처를 잡으실 때 격장해 있는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양녕은 기왕 탄로가 났으리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양녕인 것까지 알았으니, 자네는 마음을 놓고 나한테 몸을 허락하게. 내
체통을 본들 청춘과부인 자네를 훼절시켜 놓은 후에 벼랑에 헌빗 머리듯 내던질
도리가 있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나."
미인은 또 한 번 생긋 웃고 고개를 가로 흔든다. 양녕을 뇌새시키자는
수단이다.
"싫습니다. 망부의 제상 앞에서 어찌 몸을 허락하겠다는 말씀을 합니까.
낯가죽이 솥뚜껑같이 두껍더라도 말이 나오지 못하겠습니다. 망부의 영혼이
있다면 크나큰 벌을 줄 것입니다. 소녀는 한평생 수절을 하고 살겠습니다."
미인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딱 잡아떼면서도 약간 의향이 있는 듯 했다.
양녕은 미인의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내가 자네 망부의 영위 앞에 축을 고해서 자네를 맡겠다고 허락받겠네. 자네
남편이 인정이 있다면 자식도 없는 자네보고 일평생을 공규로 늙으라고 할 리가
있나. 자아, 내가 축을 고해보겠네."
말을 마치자, 양녕은 제상 앞에 일어서서 향을 사르고 축을 고한다.
"혈혈단신 무의무탁한 그대의 아내는 오늘 밤부터 내가 짝을 지어 맡으리다.
영이 있거든 허락하라."
양녕은 고축을 마친 후에 소복 미인의 앞으로 갔다.
"자네 남편도 허락을 내렸네. 향연이 곱게 퍼지고 황촛불이 벌룽거려 소리를
냈네. 신도 허락을 했으니 나와 백년해로할 것을 이 자리 자네 망부 궤연
앞에서 맹세하세."
양녕은 여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여인은 못이기는 체 일어났다.
부끄러운 듯 제상 앞에 고개를 숙이고 고요히 섰다.
"자아 절을 하세."
양녕은 소복 미인과 함께 백년해로할 것을 염하면서 궤연을 향하여 재배를
했다.
정향
양녕은 절을 한 후에 소맷자락을 걷어붙였다.
"자, 이제는 대상제도 다 지냈으니 철궤연을 하세."
말을 마치자 제상의 제물을 내렸다.
소복 미인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제물을 받아서 천장에 넣고, 양녕과 함께
제상과 말끔하게 치운 후에,
"자아 이제는 우리가 내외지간이 되었으니 방으로 들어가세."
양녕은 미인의 손을 잡았다. 미인도 이제는 손을 뿌리치지 아니했다. 못이기는
체 양녕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한편 마당 옆 으슥한 나무 그늘 밑에서는 감사와 이방이며 명보가 양녕과
미인의 행동을 엿보고 있었다.
양녕이 미인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 감사와 명보는 빙긋
웃고 발자취를 죽여 담 터진 곳으로 스러졌다.
양녕은 방으로 들어간 후에 소복 미인과 금침을 같이했다.
미인의 아름다운 자태와 고운 목소리며 교양 있는 행동은 양녕이 여태껏
대해본 수많은 여인 중에 그 짝을 구해볼 수 없도록 맵자하고 뛰어났다.
천하절색이라고 생각했던 죽은 어리도 소복 미인에 대면 몇 길 아래라
생각했다.
양녕은 자리 속에서 여인의 이름을 물었다. 여인은 조신하게 대답했다.
"성은 정씨요, 이름은 향이올시다."
"이름 참 좋구나. 향기로운 나무를 정향수라 하지 않느냐. 정향나무는 두
종류가 있다. 백정향꽃도 피고 자정향꽃도 핀다. 백 가지 꽃 중에 제일 강한
향을 발산하는 꽃이 정향꽃이다. 너는 여인 중에 제일 가는 향녀로구나!"
사람이 아름답게 뵈니 이름도 곱다고 생각했다.
양녕은 다음날부터 평양의 절승 경개도 마음에 없었다.
자나깨나 정향을 애무하면서 곁에서 떨어지지 아니했다.
평안감사가 연회를 차려놓고 청좌를 보내도 양녕은 몸이 아프다고 핑계하고
나가지 아니했다.
굳게 대문을 닫아걸고 담 터진 곳으로 미인의 집을 왕래하면서 방속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명보는 양녕과 정향이 거리낌없는 쾌락을 취하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얼굴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양녕은 명보까지 잊었다. 찾을 생각도 아니했다.
양녕과 정향의 애정은 청산처럼 첩첩하고 동해 물결처럼 파도를 쳤다.
하루는 정향이 양녕을 향하여 속삭였다.
"나리께서 서울로 가시는 날 저는 어찌합니까?"
"나는 서울로 가지 아니하련다. 평양에서 한평생 너하고 같이 살 작정이다."
정향은 새침하고, 양녕의 콧 등을 간지려본다.
"눈을 깜박거리시면, 거짓말입니다. 거봐, 눈을 깜박거리시네요. 나리께서
한평생 평양에 사신단 말씀은 거짓말입니다. 만약, 상감께서 내일이라도
부르시면 어찌하실 텝니까?"
정향은 눈웃음을 치며 묻는다.
양녕도 호협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평양도 조선 땅이다. 서울로 가지 않고 평양에서 살겠소 하고 허락을 받으면
그만이다."
"상감께서 나리를 평양에서 일평생 살라고 분부하실 리 만무합니다. 아니될
말씀입니다. 나리, 서울로 가실 때는 꼭 저를 데리고 가셔야만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저는 죽는 몸이올시다."
정향의 눈에서는 홀연 눈물이 글썽거렸다.
"만부득이해서 서울로 가는 경우에는 너를 데리고 가지, 여부가 있느냐.
쌍가마를 태워 데리고 가마."
"짜짱, 정말이십니까?"
"여부가 있느냐."
양녕과 정향은 이같이 사랑을 속삭였다.
하루는 돌연 명보가 나타났다.
마침 담 터진 곳에서 탕건을 삐딱하게 쓰고 괴춤을 엉덩이에 걸치고 나오는
양녕과 마주쳤다.
명보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나으리마마, 이게 웬일이십니까? 대낮에 젊은 과부집에는 왜 들어갔다가
나오십니까? 평양 일판에 소문이 쫙 퍼지면 어찌하시렵니까?"
양녕의 얼굴은 무안에 취해서 홍당무같이 붉어졌다.
"담이 터졌기에 잠깐 마당을 기웃하고 나오는 길이다."
"다른 사람은 다 속이셔도 소인은 속이지 못하십니다. 저 집은 평양 감영
이속의 집입니다. 남편이 죽어서 청춘과부가 홀로 수절하고 사는데 일가들이
무척 많습니다. 만약에 일가들이 들고 일어나면 나으리께서는 톡톡히 욕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문이 서울 상감마마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장차
어찌하실 텝니까?"
명보는 괘사를 떨었다.
명보의 말을 듣자 양녕의 머리에는 퍼뜩 세종대왕의 용안이 떠올랐다.
또다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과부댁의 일가붙이가 많다는 말에 겁이 났다.
과부가 서울로 데려가지 아니하면 죽는 몸이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이속의 집에 일가들이 많다더냐?"
"여간 많은 게 아니랍니다. 무척 번열하고 행세들을 똑똑히 한다 합니다.
그리고 일가들은 과부가 옳게 수절을 하나 하고 지켜본다 합니다."
명보는 팔을 흠뻑 벌려 많다는 시늉을 하며 풍을 쳤다.
양녕의 얼굴빛은 누렇게 질렸다. 풀이 죽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실은 내가 과부와 뜻이 맞아서 동침을 했다. 어떻게 무마할 도리가 없느냐?"
양녕은 과부와 사귄 전말을 자초지종 자세히 이야기했다.
명보는 눈을 끔벅거리며 한동안 생각하는 체했다.
"만약 일가들이 들고 일어난다면 어떻게 감사한테 말씀해서 무마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양녕은 펄쩍 뛰었다. 손을 홰홰 저었다.
"감사한테 이야기해서는 아니된다. 서울로 단박 소문이 들어간다. 큰일난다."
양녕의 얼굴을 세 번째 변했다.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렸다.
명보는 또다시 무엇을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쩍 휘갑을 친다.
"제가 이곳으로 내려온 후에 사귄 이속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떠들어대지
않도록 무마해보겠습니다."
양녕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그럼, 네가 자 맡아서 처리해라. 무사타첩이 된다면 후한 상급을 주리라."
양녕은 말을 마치자 비로소 길게 한숨을 지었다.
이후부터 양녕은 정향과의 일을 명보한테 숨기지 아니했다.
하루는 명보가 감사와 짜고 양녕한테로 들어왔다.
"서울서 선전관이 내려왔습니다."
"선전관이 왜?"
양녕은 놀랐다.
"상감마마께옵서 특별히 선전관을 평안감사에게 보내서 명령을 내리셨다
합니다. 양녕대군께서 내려가신 지가 벌써 여러 달이 되었는데 올라오지
아니하시니 웬일이냐고 하문하시면서 급히 대군을 서울로 올라오시도록 치장을
차려드리라고 분부를 내리셨다 합니다."
양녕은 명보의 말을 듣자 낙담이 되었다.
서울서 평양구경을 간다고 상감께 고하고 온 지도 벌써 어언간 석달이
넘었다. 상감이 물어보는 것도 용혹무괴한 일이다.
아니 올라갈 수는 없다. 올라가면 정향과 이별을 하게 될 테니 기막히고 딱한
노릇이다.
그렇다고 정향을 데리고 갈 수도 없다.
"상감과 색을 멀리하겠다고 약속은 단단히 해놓았다. 작첩을 해가지고 올라갈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다."
양녕은 번민 속에 빠지기 시작했다. 얼굴엔 저절로 우울한 표정이 떠돌았다.
명보는 속으로 웃으면서 물러갔다.
이날 승석 때 감사는 양녕의 사처를 찾았다.
감사는 문후를 마친 후에 외수를 전했다.
"황공하오나 한 말씀 여쭙니다."
양녕은 감사가 나온 것을 보고 벌써 눈치를 챘다.
아까 명보가 전한 말을 감사가 친히 하려고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침을 떼고 묻는다.
"무슨 할말이 있소?"
감사는 얼굴빛을 고치고 정중한 태도룰 말한다.
"대감께서 곧 행장을 차리셔야 하겠습니다."
"무슨 행장을?"
"상감전하께서 선전관을 내려보내시고 대감을 빨리 올라오시게 하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쉬 서울로 올라가셔야 하겠습니다."
양녕은 양탈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좋은 구경을 하고 감사한테 폐를 많이 끼쳤소이다. 상감도
궁금해하신다 하니 쉬 행장을 차리도록 하리다."
양녕은 마음이 씁쓸했으나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좋게 대답하고 감사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온종일 우울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밤이 되었다. 양녕은 전과 같이 담 터진 곳으로 들어가 정향의 방을 찾았다.
그러나 마음은 우울하고 뒤숭숭했다. 심사가 좋지 아니하니 얼굴빛도
명랑하지 못했다. 맥이 풀렸다. 슬며시 목침을 베고 자리에 누워 버렸다.
감사의 지시를 받아 미인계를 쓴 정향이 양녕의 우울해하는 까닭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내색을 아니하고 묻는다.
"나으리, 어디가 편치 아니하십니까?"
정향의 얼굴에도 근심이 서린 듯했다.
"아니---."
양녕은 시침 떼고 대답했다.
"아니가 무엇입니까. 기운이 없어 보이시고 맥이 빠지신 듯합니다.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다리를 쳐드리오리까?"
정향은 말을 마치자 양녕의 다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얹고 녹신녹신 두 손을
모아 주물렀다.
그러나 양녕의 얼굴빛은 여전히 침울했다.
정향은 근심스러운 듯 양녕의 얼굴을 향하여 볼이 닻을 듯 말 듯 들여다보며
가만가만 속삭인다.
"편치 않으시면 어디가 편치 않다고 말씀해주십시오. 야속합니다. 저에게 왜
숨기십니까? 수심이 계신 듯합니다. 저한테도 숨기시는 비밀이 있습니까?
너무나 박정합니다그려."
정향은 누워 있는 양녕의 얼굴에 이번엔 뺨을 대고 살살 비비며 졸랐다.
"어서 말씀해주십쇼. 무슨 근심이 계십니까?"
양녕은 농익도록 다루는 정향의 애정에, 술에 취하듯 얼이 취했다. 홀연
눈시울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너와 나는 이제 이별을 해야만 한다. 아무리 해도 이제 나는 쉬 서울로
올라가야만 하게 되었다."
양녕은 마침내 토설을 했다.
정향은 깜짝 소스라쳐 놀라는 시늉을 했다.
"무어, 올라가셔요? 서울로 올라가시면 저는 어찌합니까? 부인께서 재촉을
하십니까?"
"상감께서 너무 오래 평양에서 유한다고 선전관을 보내서 올라오라고
감사한테 분분를 내리셨단다."
"그럼 저도 데리고 가셔야 합니다."
정향의 음정은 떠는 듯 애원성을 지었다.
양녕은 얼른 대답을 못한다.
"꼭 데리고 가셔야 합니다."
정향은 이번엔 양녕의 허리춤을 휘어잡았다.
양녕은 한숨을 지으며 대답한다.
"결국 데려가기는 해야겠지만 이번 행차엔 어려울 것 같다."
정향은 허리춤을 놓제 아니했다.
"왜 어렵습니까? 백년해로를 하자고 수절하는 과부를 감언이설 꾀어내서 몸을
망쳐놓고 이제 와서는 데리고 갈 수가 없다 하시는 웬 말씀입니까? 나으리 같은
존귀한 분도 일구이언을 하십니까? 저를 데리고 가지 아니하시면 혼자는
못가십니다!"
정향은 말을 마치자 방바닥을 쳐 통곡을 한다.
양녕은 도리가 없었다. 서울서 평양으로 내려올 때 세종대왕께 일체 주색을
멀리하겠다고 맹세했던 일을 일장설파했다.
정향의 울음은 여전히 그쳐지지 아니했다. 양녕은 난감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했다.
양녕은 엎드려 우는 정향의 등을 어루만지며 사정을 한다.
"올라가서 상감께 사죄를 드리고 기회를 보아 데려가리라."
정향은 계속해 울면서 넋두리를 한다.
"아니됩니다. 나를 데려가기 전에는 못가십니다."
정향의 애타는 울음소리는 양녕의 간장을 토막토막 칼로 에어내는 듯했다.
"울지 마라, 정향아. 내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상감께 고한 후에 꼭 너를
데려가리라."
양녕도 눈물을 머금고 정향을 끌어안았다.
정향은 양녕의 품에 안겨 한동안 느껴 울다가 천천히 눈물을 씻고 고한다.
"상감께 주색을 멀리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오신 분에게 당장 데려가시라고
졸라댄들 일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나으리께서 먼저 서울로 올라가셔서 일을
주선해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곧 데려갑시오."
정향의 말을 듣자 양녕의 입이 딱 벌어졌다.
"착하다. 네가 제법 소견스럽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준다면 내가 안심하고
서울로 가겠다. 너를 꼭 데려갈 테니, 조만간 기다리고 있거라."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언제쯤 올라가시겠습니까?"
"곧 올라가야지. 선전관까지 내려보내셨는데 지체할 수 있느냐. 내일 아니면
모레쯤 올라가야 하겠다."
정향은 양녕의 말을 듣자 대꾸 없이 양녕의 품에서 벗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정향은 연엽주반에 간단한 술안주를 받들고 들어왔다.
"서울은 이곳에서 오백 리 길이 됩니다. 나으리께서 한 번 가신 후엔
그리워하는 상사몽으로 긴긴 밤을 지새야 할까 봅니다. 오늘 이 방에 이별주를
올려서 서운하고 애타는 간장을 달래볼까 합니다."
정향은 말을 마치자 옥잔에 가득 술을 부어 양녕한테 권한다.
이별주란 말에 양녕의 눈시울이 화끈했다.
"하늘이 사람을 만나게 해놓고 왜 잠시라도 이별을 하게 만든단 말이냐. 한을
풀어보려 하니 아니 마실 수 없고, 마시고 난들 무엇하나. 또다시 정이 서리는
것을!"
양녕은 잔을 비운 후에 정향에게 잔을 넘긴다.
"자아, 이별주다. 너도 한 잔 마시어라!"
정향은 고개를 살랑살랑 가로젓고 잔을 받지 아니했다.
"저는 이별주를 아니 마시겠습니다. 이별이란 소리만 들어도 가슴에 난도질을
치는 듯합니다. 장차 서울로 데려가신다 하니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대신 청이 있습니다. 들어주십시오."
양녕은 정향의 말을 듣자 역시 가슴이 뭉클했다. 잔을 반 위에 놓고 술을
권하지 아니하고 묻는다.
"무슨 청이냐? 들을 만한 청이라면 들어주마."
이별
정향은 사뿐 고개를 떨어뜨리고 고한다.
"제가 수절하던 청상과부로 절개를 깨뜨려서 나리께 몸을 바쳤으니 망부와의
삼생가연은 이미 다 허튼 수작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옵고 나리와는 남들이
다 알게 육례를 갖추어 혼인한 것이 아니고 아니 밤중에 남몰래 의 아닌 짓을
범한 몸이 되었습니다. 친정과 시부모들이 알면 저는 죽는 몸이올시다. 나리께서
만약 저를 버리신다면 호소무처입니다. 나리께서 저와 연을 맺었다는 증거로 글
한 수를 지어주십시오."
양녕은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어렵지 아니한 일이다. 먹을 갈아라."
정향은 벼루를 내놓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양녕은 시흥이 도도했다. 스스로 잔에 술을 따라 연거푸 서너 잔을 마시었다.
"시를 치마폭에 써주마. 치마를 끌러라."
정향은 멋지다고 생각했다. 입었던 연옥색 순린치마를 끌렀다.
양녕은 문갑 위에 놓인 백자필통에서 양호무심대필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먹을 듬뿍 찍었다.
"치마폭을 잡아라!"
정향은 치마를 활짝 폈다. 두 손으로 양편 끝을 잡았다.
양녕은 연옥색 치맛자락 위로 붓을 달렸다.
연옥색 치맛자락에 먹글씨가 꿈틀꿈틀 시를 뿜었다.
이별 길에
그대 향기
구름 되어 흩어지고
초정에 걸린 조각달
은갈고리 같구나.
가여워라, 잠 못이루는 그 밤
뉘 다시 남은 시름 위로해주리!
양녕은 쓰기를 다 하자 붓을 던졌다.
정향은 청을 가다듬어 가만히 읊어본다. 호수 같은 눈엔 눈물이 이슬처럼
서렸다.
양녕은 청에 맞추어 연엽주반 변죽을 울린다.
정향은 영시를 끝낸 후에 눈물을 닦고 양녕한테 술을 따라 올리려고 한다.
"한평생 고이 지니고 있겠습니다. 다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양녕은 정향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묻는다.
"무슨 할말이 있느냐?"
"시 한 수를 더 지어주십시오. 이번엔 제 이름을 넣어서 지어주십시오.
그래야만 더 보배가 되겠습니다."
정향은 말을 마치자 의장문을 열고 치마 한 벌을 또 꺼냈다.
이번엔 홍공단 불구슬빛 같은 호화찬란한 비단치마다.
"이 치마는 망부와 혼인했을 때 초례청에서 입었었던 치마올시다. 이제 나리와
다시 연을 맺었으니 이 치맛자락에 제 이름을 넣어서 시를 지어주십시오."
술회를 하는 정향의 가련한 모습은 마치 한 떨기 백하이 향을 뿜는 듯했다.
양녕은 사양치 아니하고 다시 붓을 잡았다.
홍공단 치맛자락이 활짝 펼쳐졌다.
양녕은 벼루에 붓을 담갔다. 듬뿍 먹을 찍어 쓰기를 시작한다.
양녕의 시흥은 더한층 높고 글씨는 더욱 신명이 났다. 홍공단 치맛자락에는
용과 뱀이 꿈틀거려 뛰는 듯했다.
정향은 무릎에 손을 얹고, 손가락으로 장단을 치면서 나지막하게 시를
읊어본다.
한 번 이별한 후
잃어버린 고운 음성
아리따운 그대 맵시
아렴풋 안개 속일세.
초대의
꿀 같던 그 인연
어느 곳에 찾으리.
조그마한 안방 속
화장 마친 그대 얼굴
누가 있어 보아주나,
봄시름 서린 그 눈썹
거울만이 알아주네.
달 밝은 밤에는
수베개를 엿보지 말라.
무심한 새벽 바람
비단휘장 흔드누나.
다행타 뜰 앞에
정향나무 한 그루
옛정을 휘어잡아
다시 한 번
그 가지 꺾어보리라.
시를 읊는 정향의 맑은 눈엔 눈물이 어려서 글썽거렸다.
양녕도 정향의 시음 소리에 따라 청을 높여 읊어본다. 자기가 지은 이별이에
도취되어 눈물이 줄줄 뺨으로 흘러내렸다.
정향은 영시를 끝내자 양녕을 향하여 절을 하고 고마운 치사를 한다.
"한평생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다시 이 치마를 펴놓고 화촉을 밝힌 후에
고담삼아 이야기할 때가 속히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정향은 말을 마치자 연옥색 순린치마와 홍공단 붉은 치마를 차곡차곡 개켜서
의장 속에 넣었다.
이별하는 마지막 밤이었다. 양녕과 정향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긴긴 밤을
말없는 애무로 지새면서 차마 떨어지지 못했다.
두 사람은 잠을 이룰 수 없는데, 무심한 새벽 달빛은 창경으로 기어들었다. 두
사람의 이부자리엔 은물결이 소리 없이 부어내렸다. 뜰 앞에서 홀연 고양이가
'아웅' 소리를 치며 쥐를 잡으러 담 터진 곳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양녕과 정향의 인연을 맺어주었던 바로 그 고양이다.
양녕은 정향의 등을 어루만지며 속삭인다.
"저 고양이를 잘 길러라. 고기도 좀 많이 주고---. 우리들의 가연을 맺어준
중매로구나---."
정향은 자리에 누워 대답 없이 보시시 웃었다. 창경으로 새어드는 달빛 아래
소리 없이 웃는 모습은 마치 호수 속에 누워서 미소를 짓는 인어처럼 마냥
아름다웠다.
양녕은 다시 정향ㅇ르 어루만지며 속삭인다.
"정향아, 내가 서울로 올라간 뒤엔 네가 고양이를 쫓아서 내 사처로 들어왔던
터진 저 담도 막아두어라."
정향은 까르르 웃어댔다.
"나으리께서는 의처증이 심하십니다그려. 호호호. 또다시 나리 같은 분이 터진
담으로 기어들까 겁이 나십니까? 호호호. 이제는 제사 지낼 상청도
없어졌습니다. 고양이가 제사에 쓸 적고기를 물어갈 까닭도 없습니다. 나으리
떠나가시기 전에 터진 담을 막겠습니다. 아무 염려 마십쇼. 아주 담 막는 것을
보시고 돌아가십쇼. 호호호. 그러기에 어서 소인을 데려가십쇼."
고단한 줄도 모르고 두 사람의 치화와 치정이 무르녹은 안방 동창엔 어느덧
햇빛이 환하게 비쳤다.
한낮이 되었다. 한편 평안감사는 양녕의 서울 갈 행구를 차려가지고 사처로
찾아갔다.
"전하께서 매우 기다리시는 모양이올시다. 속히 올라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녕은 서울 갈 것을 결정했으나 막상 당하고보니 정향을 떨어지기 난감했다.
한 번이라도 더 대해보고 싶었다.
"곧 서울로 가기는 가야 할 텐데 미진한 일이 한 가지 있소."
"무슨 일이오니까?"
"평양까지 내려왔다가 안주를 못보고 간다면 한평생 한이 될것이오. 청천강
구경을 한 번 하고 서울로 올라가겠소."
평안감사는 양녕의 원하는 마음을 꺾기 어려웠다.
"그럼, 안주 청천강을 한 번 둘러보시고 평양으로 오시어 서울로 가십시오."
감사는 쾌하게 허락했다.
양녕은 안주구경을 핑계로하여 다시 평양에서 정향을 만나보고 서울행을
하자는 내심이었다.
양녕은 잠시 서울행을 중지하고 안주로 향했다.
평안감사는 양녕이 안주로 향한 틈을 타서 선화당으로 정향을 불렀다.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을 얻었느냐?"
정향은 영리했다. 감사가 물어볼 것을 예측했다. 가지고 갔던 비단보를 감사
앞에 풀었다.
홍공단 치마와 연옥색 치마를 펼쳐놓았다.
치마폭마다 양녕이 친필로 쓴 이별시가 묵향을 뿜어 화사했다.
감사의 입이 딱 벌어졌다.
"수고했다!"
감사는 정향을 위로했다.
감사는 양녕이 안주로 간 틈을 타서 정향과 치마폭에 쓴 이별시를 안동해
서울로 보내어 상감께 증거로 바칠 것을 결정했다.
탑전 배알
평안감사는 즉시 감영 군관을 불러 분부를 내렸다.
"너는 곧 정향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거라. 입성하는 즉시 정원으로 들어가
나의 장계를 올려라."
군관은 청령하고 곧 감사의 장계를 받은 후에 행리를 수습하여 정향과 함께
주야로 말을 달려 서울로 향했다.
세종대왕은 정원에서 바치는 평안감사의 장계를 받고 친감했다.
'신 평안감사는 삼가 성상 탑전에 아뢰옵니다. 양녕대군은 평양에 내려온 후에
일체 술과 기생을 가까이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는 수 없사와 근심하고 있던
차에 명기 정향이 자진해서 계교를 내었습니다. 스스로 청상과부로 거짓 꾸며서
양녕대군이 사처한 옆집에 미리 담을 터놓고 제육을 물어간 고양이를 쫓는
체해서, 달밤에 소복을 입고 담 터진 곳으로 들어가 양녕의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이리하여 대군은 마침내 정향의 수단에 넘어가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되었삽고, 정향은 치마폭에 이별시를 받아서, 그 증거를 삼았습니다. 양녕대군이
안주로 유람간 틈을 타서 군관편에 정향과 이별시 쓴 치마 두 채를 안동해
올립니다. 정원을 통하여 탑전에 아뢰오니 굽어 살피시옵소서.'
대왕은 평안감사의 장계를 읽으시자 용안에 화려한 웃음이 소리 없이
떠돌았다.
곧 승지에게 분부했다.
"평안감사가 올려보낸 정향이란 기생을 불러들이라."
이윽고 승지는 정향을 어전에 인도했다.
정향은 전각 아래서 사배를 올렸다.
"가까이 오르게 하라."
정향은 전상에 올라 홍보에 싼 치마를 어전에 바치고 두 손을 모아 시립했다.
"네가 정향이냐?"
"네, 그러하옵니다."
대왕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과연 절세미인이었다.
대왕은 미소를 지어 자문했다.
"네가 양녕대군을 파계시키고 이별시 받던 전후 전말을 상세하게 말하라."
정향은 수삽한 태도로 감사의 명을 받아 양녕을 유인하던 일을 자세히
아뢰었다.
"보를 끌러라."
정향은 어전에 꿇어앉아 보를 끌렀다.
연옥색 순린치마와 홍공단 붉은 치마 두 채가 펼쳐졌다.
기막힌 이별시가 치마폭마다 묵향을 뿜었다. 확실한 양녕대군의 용사가
비등하는 듯한 필적이었다.
전하는 미소를 띠고 승지에게 분부를 내렸다.
"정향울 관습도감에 출사케 하고 과인이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게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승지는 어명을 받들었다.
전하는 다시 정향에게 분부한다.
"양녕대군께서 써주신 치마 두 폭은 네가 좋이 간직했다가 내가 찾을 때 다시
바치도록 하라."
"네."
정향은 대답하고 치마폭을 보에 싸 승지와 함께 어전에서 물러났다.
한편 양녕은 안주로 나귀를 몰아 백상루에 올랐다. 청천강을 둘러보며 고구려
때 을지문덕 장군이 침입해 들어온 수병 백만을 무찔러 대패해 달아나게 했던
옛일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매불망하는 정향을 잊을 수 없었다. 급히 행장을 수습하여 평양으로
돌아왔다.
사처로 돌아온 후에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슬며시 담 터진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인기척이 없었다. 목소리를 나직하게하여 정향을 불러보았다. 반갑게
뛰어나와서 맞아주어야 할 정향이 나오지 아니했다.
진둥한둥 대청으로 올라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다. 텅 빈 방이다. 세간조차
없어졌다.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어리친 강아지 새끼 한 마리 없는 텅 빈 집이다.
양녕은 당황했다. 어찌 된 곡절을 알아보고 싶었으나 누구한테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양녕은 입맛이 썼다. 발길을 돌려 사처로 돌아가 새우잠을 자고 말았다.
이튿날 양녕은 황황하게 감사를 작별했다.
정향과의 비밀을 말할 수도 없었다. 부랴부랴 명보와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도동 집으로 가서 행리를 푼 후에 다음날 세종을 뵈러 대궐로 들어갔다.
대왕은 멀리 다녀온 양녕을 위로하기 위하여 잔치를 차리고 양녕을 맞이했다.
술이 두어 순배 돌았을 때 대왕은 양녕에게 물었다.
"이번 평양행차에 풍류기상이 어떠하시오니까?"
양녕은 정색하고 아뢴다.
"이리 전하께 주색을 멀리하겠다고 아뢰고 내려갔습니다. 술 한 잔 입에 대지
아니하고 기생 한 번 건드리지 아니했습니다. 평안감사가 다 알고 있는
일이올시다."
양녕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대왕은 양녕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쾌활하게 웃으셨다.
"형님, 무던히 참으셨습니다. 이제는 현인 지경에 가셨습니다. 감축합니다."
양녕은 대답을 해놓고도 대왕의 찬사를 받으니 양심의 가책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얼굴이 화끈하고 붉어졌다.
이때 풍악 소리가 자지러지게 일어나면서 기생들이 노래를 불렀다. 손과 손을
서로 잡고 둥글둥글 원무를 추기 시작했다.
양녕은 춤추는 기생들을 바라보며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괴상한 일이다. 한 기생이 자기가 평양에서 지은 이별시를 부르지 않는가!
깜짝 놀랐다. 노래하며 춤추는 기생을 바라보았다. 양녕이 전하와 함께 앉아
있는 어전과 기생이 춤을 추고 있는 곳은 상당한 거리에 있었다.
양녕은 눈을 씻고 바라본다.
기생이 춤을 출 때 펄럭거리는 홍공단 치맛자락에 글씨가 꿈틀거렸다. 흡사
자기가 평양에서 정향에게 이별시를 써주었던 그 치맛자락과 비슷했다.
그러나 양녕은 오백 리 밖 평양에 있는 과부 정향이 기생이 되어 어전에서
춤을 출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말을 못하고 마음 속으로 괴상한 일이라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춤은 끝나고 노래가 멎었을 때, 세종은 어수를 들어 행수기생을 부르셨다.
행수기생이 어전에 부복했다.
"저기 저 치마에 시를 써서 입고 춤을 추던 기생을 가까이 불러라."
행수기생은 어명을 받들어 치맛자락에 글을 써서 입고 춤추던 기생을
어전으로 인도하여 배알시켰다.
어전에 큰절을 네 번 올리는 화관 쓴 기생은 요염하도록 아리따웠다.
옆에서 대왕을 모시고 앉은 양녕이 눈을 들어 바라본다.
깜짝 놀랐다. 소복 미인 정향이 아니라, 화관 몽두리에 이별시 치마를 두른
기생 복색의 정향이었다.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뚝 떨어졌다.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도깨비에 홀린 듯했다.
대왕이 기녀에게 말씀을 내린다.
"과인의 형님 양녕대군이시다. 이 어른께도 절을 드려라."
기녀는 미소를 띠고 양녕을 향하여 큰절을 올렸다.
양녕은 숨이 가빴다. 얼굴이 화끈 달았다. 어찌해야 좋을지 몸둘곳을 몰랐다.
대왕은 기녀에게 명을 내리셨다.
"치맛자락에 글을 써서 입었구나. 멋진 풍류다. 어디 시를 좀 읽어보자. 치마를
끌러라."
기생은 치마끈을 풀었다. 용사비등하는 필력 있는 필치로 휘둘러 쓴 홍공단
치마폭이 어전에 펼쳐졌다.
"활짝 더 펴라!"
기녀는 홍공단 치마폭을 활짝 펼쳐놓았다.
전하는 옥음을 높여 시를 읊어보신다.
옆에 있는 양녕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전하는 더한층 옥음을 높여 이별시의 글귀를 읊는다.
"정전행유정향수 합파춘정갱절지."
"좋은 이별시로다! 다시 만나자는 말이지."
전하는 용안에 미소를 풍기며 기녀에게 대답했다.
"네 이름이 정향이냐?"
"네, 그러하옵니다."
정향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여 나직하게 대답했다.
대왕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또다시 기녀에게 묻는다.
"누가 이 이별시를 너에게 지어주었느냐? 보통 풍류랑이 아니로구나!"
정향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양녕의 등에서는 진땀이 흘렀다.
전하는 또 한 번 미소를 짓고 양녕을 향하여 물었다.
"형님! 이 글씨가 꼭 형님의 글씨체와 방불합니다. 혹시 치마의 주인인 이
사람을 짐작하십니까?"
양녕은 평양의 모든 비밀이 탄로난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어전에 부복했다.
"신의 죄 만 번 죽어 마땅하옵니다. 군상을 속인 죄를 면치 못하오리다."
양녕은 말을 마치자 갓을 벗었다. 전하 앞에 엎드려 죄를 청했다.
대왕은 부복해 죄를 청하는 양녕을 친히 일으켰다.
양녕은 일체 감사의 권하는 술과 색을 받지 아니했다가 우연히 달밤에 저지른
일을 일일이 고했다.
대왕은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그것은 형님의 죄가 아니올시다. 과인이 형님의 울적하신 회포를
위로해드리라고 평안감사에게 비밀한 지령을 내려서 기생 정향이 과부가 되어
담 터진 곳으로 고양이를 쫓게 한 것이니 과히 근심하지 마시오. 허물은
과인에게 있습니다."
대왕은 말씀을 마치자 껄걸 웃었다. 양녕은 비로소 까닭을 알았다.
"왕은이 지중하옵니다."
한 마디를 아뢰고 비로소 안심하는 숨을 지었다.
모든 시신과 궁녀들은 전하의 우애가 넘치는 지극한 정을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하는 정향에게 명하여 양녕에게 석 잔 술을 올리게 한 후 다시 양녕에게
말씀한다.
"정향을 소실로 삼으시어 한평생을 안락하게 모시도록 하오리다."
양녕은 감격한 정을 이길 수가 없었다.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왕은이 산같이 높고 바다같이 깊습니다."
다시 감축한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전하는 정향을 바라보시며 분부를 내린다.
"너는 슬기롭고 아름다운 지혜를 써서 나의 형제지정을 더한층 돈독하게
했으니 가상하기 이를 데 없다. 한평생 대군마마를 받들어 모시어서 안락한
생활을 하시도록 하라."
정향은 두 번 절하여 왕명을 받들었다.
전하는 궁녀에게 명하여 정향에게 비단과 피륙을 후하게 내리시어 상을
주시고 연회를 파했다.
전하는 다시 선공감에 영을 내려 양녕의 집을 격장으로하여 조그맣게 별당을
짓고 정향을 거처하게 하라 했다.
정향은 특명으로 기안에 이름을 뺀 후에 양녕대군의 부인께 뵙고 상감이
내리신 별당에 살게 되었다. 담 하나를 격하여 큰집이 있었다. 큰집과 별당
사이에 일각문을 세우고 양녕은 아침 저녁으로 드나들었다.
평양 사처에서 담 터진 곳으로 드나들면서 정향과 꿀 같은 사랑을 남몰래
속삭이던 양녕은 아침 저녁으로 정향의 별당에 드나들었다. 어리를 잃은 양녕은
전하의 배려로 다시 정향이란 소실을 얻었다.
양녕과 정향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고담같이 세상에 자자하게 퍼졌다.
양녕을 서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대신들도, 전하가 은밀한 분부를
평안감사에게 내려서 그의 호방한 성격에 주름살이 가지 않도록 처리한 전하의
우애지정을 알게 되자 다시는 입을 벌려 양녕이 서울 사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리어 성대에 갸륵한 일이라고 칭송하는 소리가
높았다.
확장되는 집현전
이야기는 다시 집현전으로 돌아간다. 세종은 식년제 과거와 알성과를 통하여
유능한 젊은 학사 박팽년, 최항, 이개, 성삼문, 하위지, 신숙주, 유성원 등을 얻은
후에 집현전 학사의 정원을 확장해서 늘릴 것을 결심했다.
먼젓번 처음으로 집현전을 창설했을 때 정원수를 10인으로 정했다. 그러나
대신과 대제학들이 뽑은 이 열 사람의 인재만 가지고는 학문과 예술을
전공시켜서 나라를 빛내게 할 동량의 재목을 양성하려는 집현전 창설의 근본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너무나 그 수가 적은 것을 전하는 절실하게 느꼈던
까닭이다. 이리하여 전하는 친히 춘당대에 임어하여 식년제 과장을 열어
박팽년과 최항을 뽑았고, 또다시 더욱더 준재를 얻기 위하여 문묘에 나가
알성을 한 후에 이개, 성삼문, 하위지, 신숙주, 유성원을 뽑아 아직 예문관에
배속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전하는 대제학 변계량을 어전에 명소해서 분부를 내렸다.
"과인이 원래 집현전을 창설한 것은 경도 아는 바와 같이 젊은 문인들을
발탁해서 문학과 예술로 나라의 문화를 더욱 발전시키게 할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을 두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국가의 제술과 외교사령은 예문관
학사만으로 족하다. 집현전 학사는 역시 벼슬은 벼슬이지만 정사와 잡무에
관여하지 말고 다만 더욱더 학문을 연마해서 슬기로운 예지로 문명을 창조
발전케 하는 기관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나라의 역사와 지리를
정리하고 예악과 문물을 중흥시키고 농사와 경제를 확충하고 과학을 진흥시켜서
천문, 지정, 의약, 복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을 개척해서 크게 국가에
이바지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때다. 나는 이 점을 생각해서 집현전 학사의 수를
늘리려 한다. 경의 뜻은 어떠한가?"
대제학 변계량은 전하의 원대한 경륜과열성 가득한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집현전을 창설했을 때 시안을 정인지 학사와 창안했건만 창립 정원이
열 사람밖에 아니되는 때문에 정작 시안을 작성한 정인지도 감히 열 사람 속에
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에 전하는 어찌해서 정인지가 끼지 못했느냐 하고 하문한
일까지 있었다.
그 후에 전하는 더욱 연소한 문사를 더 뽑기 위해서 식년제 과거에
친림하시고 또다시 알성과를 뵈어서 훌륭한 청년 준재들을 친선했던 것이다.
대제학 변계량은 전하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문형을 잡은 대제학으로 반대할 도리가 없었다.
얼굴에 가득 화한 기운을 띠고 부복해 아뢴다.
"전하의 원대하신 성의를 쌍수를 받들어 찬동하옵니다. 곧 집현전 학사의 수를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전하는 어느 때나 신하를 대하여 말씀을 내릴 때는 항상 용안에 화한 기색을
띠고 웃음을 지어 대화를 나눈다.
"대제학이 집현전 학사 증원하는 일에 찬동하니 내 마음이 상쾌하다. 속히
안을 만들어 실천에 옮기도록 하라."
변계량이 아뢴다.
"지금까지의 정원 열 사람이 적다 하오면 몇 사람쯤 늘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교해주시옵소서."
전하는 껄걸 웃으며 말씀한다.
"경은 내가 전제하는 군왕으로 아는가. 하하하. 먼젓번 집현전을 창설할 때도
집현전의 정원수와 학사 뽑는 일을 대신과 대제학이며, 이조의 장관이 모여서
결정한 일이 아닌가. 전례에 의해서 경들이 인원의 수와 학사를 선정해서
보고케 하라. 나라일은 나 혼자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 다 경들이 합심하고
협력해서, 이 국가를 잘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묘당에 있는 경들이 좋도록
성안해주기 바란다."
너그럽고 부드럽고 포용성 있는 전하의 말씀에 대제학은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성의 정 그러하시다면 다시 학사들의 정원을 정하고 인물들을
선출하겠습니다."
"속히 결정하도록 하라."
대제학 변계랴은 어전에서 물러난 후에 영전사와 부제학과 이조장관을 모아
전하의 분부를 전하고 집현전 학사의 정원과 학사를 재편성하기 시작했다.
여러 날을 두고 회의를 거듭한 결과 결론을 얻었다. 집현전 학사의 정원은
30명으로 하고, 한림학사들을 예문관 속에서 옮겨서 뽑았다. 이중에는 대왕의
의중의 인물인 젊은 준총들도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정인지를 필두로하여 권채, 남수문, 신석조, 박팽년, 이개, 성삼문, 신숙주,
하위지, 유성원, 최항, 권제 등 신임된 학사를 위시하여 정원 10명 때
임명되었던 탁신, 이수, 신장, 김자, 어변갑, 감상직, 설순, 유상지, 유효통, 안지,
김돈, 최만리 등이 유임되고 여기에 영전사와 대제학이 포함되었다.
대제학 변계량은 정원을 늘리고 인선을 마친 후에 곧 어전에 복명했다.
"집현전 학사의 정원을 늘리고 인선을 끝냈습니다. 재가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전하는 흔연히 대답했다.
"정원은 몇 명으로 했는가?"
"전보다 20명을 늘려서 30인으로 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전하의 용안의 화려했다.
"하하하. 30명씩이나 했는가. 좋은 인재가 그렇게 많았던가. 국가의
다행이로다!"
대제학은 명단을 올렸다.
"젊은 준재들 20명을 예문관 학사 속에서 옮기고 전임 10인을 합하니 30인이
되었습니다."
명단을 살펴본 대왕은 크게 기뻤다.
"대제학이 영도해서 잘들 해보라!"
전하는 명단 끝에 '쾌하게 윤한다', 어필을 썼다.
다음날 세종대왕은 새로 임명된 집현전 학사 30명을 어전에서 인견하셨다.
백수를 흩날리는 원로대신 영전사와 대제학을 위시하여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이석형 등 약관의 젊은 학사들이 제제다사로 사은숙배를 드리고 어전에
시립했다.
젊은 학사들은 전하가 친히 시관이 되어 급제로 뽑은 후에 처음 대면하는
장면이었다. 전하는 극히 만족한 얼굴로 젊은이들을 바라보신다.
젊은 학사들의 기상은 장원급제를 해서 어사화를 받들 때보다도 더욱
청수하고 윤기가 흘렀다. 눈에는 총명한 기운이 샛별같이 반짝거리고, 몸가짐은
더한층 장중하고 의젓했다.
전하는 용안에 가득 미소를 풍기시며 젊은 학사들에게 말씀을 내린다.
"너희들을 과장에서 창방할 때 대면하고 처음 만나는구나. 옛글에 사별삼일에
괄목상대라 하더니 너희들의 용모가 훨씬 더 좋아지고, 의젓해졌구나. 그 동안
학문들을 많이 연마했나보다. 너희들의 얼굴이 좋아진 것을 보니 내 마음이
기쁘다."
젊은 학사들은 다만 감격할 뿐이었다. 모두 다 고개를 숙여 황공한 뜻을
표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이번에 너희들이 집현전 학사로 뽑힌 것을 나는 무한히 기뻐한다. 집현전은
국가의 문화정책을 맡은 최고기관이요, 과인의 자문기관이다. 너희들이 국가를
융성케 해보려는 과인의 만 가지 정치에 대해서 자문에 응하자면 만 가지
학문을 탐구해서 나의 자문에 응대해야 한다. 너희들이 나의 만 가지 학문을
탐구해서 나의 자문에 응대해야한다. 너희들이 나의 만 가지 자문에 막힘 없이
대답하자면 만 가지 학문을 연구하고 연마해야 한다. 이 까닭에 나는 이
집현전을 만들었다. 그러하니 집현전은 국가의 사무를 보는 벼슬하는 기관이
아니라 관리의 대우를 받으면서 순전히 공부를 연마하는 연구기관이다.
너희들은 이 뜻을 받아서 경사자집은 말할 것 없고 천문, 지리, 병서, 의약,
복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을 전심으로 섭렵하고 연구해서 그 학문의 힘으로
위대한 국가를 창업하는 실천행동에 옮기도록 하라! 옛적에 고려와 중국의
당에서도 집현전이란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 아조에 있는 예문관과
같이 국가의 사령과 외교문서를 제술하는 관청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과인이
의도하는 집현전은 순전히 학문을 연구케 하는 기관이다. 너희들은 과인의 뜻을
받아서 대성하도록 하라."
전하는 집현전을 창설한 근본 뜻을 소상하게 밝혀 말씀했다.
학사 정인지가 모든 학사를 대표해서 아뢴다.
"신 등 미거한 무리, 감히 영예로운 집현전에 뽑혀서 학문을 더욱 연마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성심성의로 정성을 다하여 성의에 어긋남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때 30명 집현전 학사 중에는 글 잘 하고 글씨 잘 쓰기로 이름 높은 신장과
그의 아들 신숙주가 다 함께 뽑혀 있었다.
전하는 신장 부자를 바라보시며 찬탄하는 말씀을 내린다.
"중국 송나라 때 소노천과 소동파, 소철 삼부자가 당송팔대가에 뽑혔더니,
우리 집현전에 부자 학사가 났으니 가상한 일이로다!"
전하의 말씀이 떨어지자, 반열에 시립해 있던 늙은 학사 신장이 어전에 나와
부복해 아뢴다.
"왕은이 융숭하시와 성대에 창설되는 집현전 학사에 부자가 동참하는 광영을
입사오니 황공 감격하온 하정을 이루 다 아뢸 길 없사옵니다. 전하께옵서는
소신의 부자에게 삼부자 문장 삼소에 비하셨사오나 소신의 부자가 어찌 감히
삼소를 따르오리까. 전하께옵서는 일찍이 동궁에 계실 때부터 오늘날 제왕의
자리에 앉으시어 만기를 총람하시는 분망하신 중에도 책을 대하시면 백독,
천독을 하셨다 합니다. 저희들 집현전 학사들은 전하의 독서하시는 성근을
본받아 전심 독서하여, 성의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 합니다."
늙은 선비 신장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전하는 용안에 화려한 웃음을 띠고
대답하신다.
"과인 같은 노둔한 사람이야 다만 도능독으로 책만 읽었을뿐이지, 무엇을
확실하게 알았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서전' 천독을 하고 '시전' 천독을
한 후에 '춘추좌전'과 굴원의 '초사'를 백번을 읽고 또 백 번을 읽어서 2백 번을
읽었다. 그러나 용속한 재질이라 겨우 사물을 희미하게 짐작할 뿐이다. 연소배의
학사들은 모두 다 영민하고 총명한 사람들이니 과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집현전을 잘 이용해서 크게 대성하여 나라의 문화를 흠뻑 드높게 하라.
그대들이 원하는 모든 서적은 경사자집을 위시하여 유루 없이 집현전에
비치하리라."
젊은 학사들은 대왕이 '서전' 천독에 '시전' 천독을 하고 '좌전', '초사'를 1백
번씩이나 읽었다는 말씀을 듣자 모두들 마음 속으로 놀라고 탄식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같이 문학과 사학을 천독, 이천독한 임금인 까닭에 학문의 연구기관으로
집현전을 장설해서 이 나라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려는 위대한 생각을
가졌구나 했다.
젊은 학사들은 아직도 '서전' 천독을 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많이 읽었어야 열 번쯤 아니면 스무 번쯤 읽었다.
모두 다 전하는 위대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고개들을 숙여 혀를 홰홰 둘렀다.
전하는 다시 한 말씀을 내린다.
"해서 아니되는 법은 없다. 하면 되는 것이다. 노력을 하라. 노력 끝에 영광이
생기는 법이다. 그리하여 집현전을 빛나게 하라. 오늘날 창설한 이 집현전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너희들 젊은 학사을의 손에 달렸다. 잘들 해보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내관을 불러 미리 준비했던 사찬과 선온을 내렸다.
집현전 학사들은 더한층 감격했다.
전하의 말씀에 취하고 향기 가득한 천일주에 취했다. 마음속으로 굳게 굳게
공부할 것을 다짐하면서 어전에서 물러났다.
새로 확장된 집현전에는 만 권 서적을 쌓아놓고 젊은 학사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제각기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책을 펴놓고 자유롭게 공부를 했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 경서를 연구하는 사람, 정치 경제를 연구하는 사람,
시가를 탐독하는 사람, 자유자재다.
그러나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읽고 연구한 그 결과로 자가류의 학설을
창안해야 했다. 독자적인 시풍을 창조해야 했다.
집현전 학사도 관직은 관직이지만 사무와 잡무를 보는 관직이 아니다.
전심으로 독서를 하고 학술을 탐구하는 관직이었다.
새벽에 일찍 출사해서 밤이 늦어서야 비로소 퇴근을 했다.
또다시 일직과 숙직의 제도를 윤번으로 해서 번차례가 된 학사들은
집현전에서 밤을 새워가며 연구를 했다.
30명의 집현전 학사 중에 학문과 재예와 시가와 문장으로 뛰어나게 이름을
드날려서 세상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학사들은 유의손, 권채, 남수문, 박팽년,
이개, 성삼문, 신숙주, 이석형 등이었다.
이들은 집현전에서 독실하게 공부를 쌓아서 더 한 번 중시라는 과거를 보아
장원급제의 영광을 얻었다.
중시는 한 번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한 사람에게 계속해서 공부에 관심을
갖도록 격려하는 뜻으로 당하관에게 또 한 번 보게 하는 과거제도다. 이
영광스런 중시에 합격이 되면 벼슬 계제가 높아지고 명예와 대우가 융숭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세종대왕은 당신이 창설한 집현전 학사 중에서 중시장원이 쏟아져 나오게
되니 집현전 학사를 옳게 뽑은 것이 무한 기뻤다.
항상 집현전 학사들의 동정에 크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루는 대제학 변계량이 입시했다. 전하는 변계량에게 말씀을 내린다.
"집현전 학사 중에서 중시에 합격된 사람이 많이 나왔으니 내 마음이 기쁘오.
앞으로 국가의 동량지재가 될 사람을 과인이 옳게 뽑았나 보오."
변계량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아뢴다.
"모두 다 전하의 홍복이요, 국가의 다행인가 합니다. 그리하옵고 전하께 아뢸
말씀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집현전 남편 양지바른 뜰 앞에는 옛날부터 큰 버드나무가 있었습니다. 전에는
그러한 일이 없었는데 요사이 희한한 일이 생겼습니다. 흰까치가 와서
보금자리를 치기 시작하더니 요사이 새끼 10여마리를 낳아 버들잎 푸른 사이로
하얀 까치새끼가 마치 면화 꽃송이가 바람에 흩날리듯 풀풀 날고 있습니다.
귀엽기 그지없습니다. 크나큰 길조인가봅니다."
전하의 용안이 활짝 열렸다.
"흰까치가 새끼를 쳤다? 과연 희한한 일이로다. 원래 까치는 깃이 검고
뱃바닥이 흰 것인데 순백으로 흰까치가 새끼를 쳤다 하니 범사한 일이
아니로다!"
전하는 크게 기뻤다. 곧 내시에게 분부를 내린다.
"집현전 뜰 앞 버드나무에 흰까치가 새끼를 쳤다 한다. 상서로운 조짐이다.
대제학을 동반해서 내가 친히 가보리라. 떠들지 말고 조용히 앞을 서라."
내시가 아뢴다.
"자비를 놓으오리까?"
"소란을 떨지 말라. 보행으로 가리라."
내시는 청명하고 앞을 섰다. 전하는 대제학 변계량과 어깨를 가지런히하여
승정원 옆을 지나, 집현전 앞뜰에 당도했다. 평민적인 전하의 소탈한 성격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대제학 변계량은 황공 감격했다.
전하의 옥보는 집현전 앞뜰에 당도했다.
과연 길이 넘는 수양버들 큰 나무 다섯 주가 푸른 장막을 이룬 한복판
상상가지에 휜까치가 집을 지어놓고 주위에는 무수한 새끼 까치들이 풀솜덩이가
날 듯 이 가지 저 가지로 반가운 희작의 소리를 노래하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전하는 용안에 가득 웃음을 짓고 한동안 흰까치새끼들의 즐겁게 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 나라 속담에, 까치가 짖으면 반가운 손이 오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기쁜
소식이 들린다는 길조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나무에 까치가 집을 지으면
장원급제가 나온다는 전설도 있다. 보통 까치가 집을 짓고 새끼를 낳아도 귀한
일이 생긴다 하는데 황차 흰까치가 집현전 뜰 앞에 집을 짓고 많은 새끼를
깠으니, 이것은 보통 길조가 아니다. 더구나 버드나무가 다섯 그루 서 있는 곳에
희까치가 집을 짓고 새끼를 낳은 것은 집현전 학사들이 앞으로 크게 문화를
진작시킬 조짐이다. 과연 크나큰 길상이로다."
대제학 변계량이 옆에서 아뢴다.
"옛적에 도연명은 문전에 버드나무 다섯 주를 심은 까닭에 그의 문학과
청절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오류 선생이라 해서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미담이올시다. 이제 집현전 뜰 앞에는 오류에다가 다시 흰까치들이 많은 새끼를
쳤으니 도연명보다도 더 훌륭한 맑은 절개와 품 높은 문학을 창조할 인사들이
많이 배출될 것입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점두하고 내관을 돌아보며 분부를 내렸다.
"집현전에도 수복과 비자들을 두어서 모든 학사들의 편의를 보게 하고,
흰까치를 잘 보호해서 다른 곳으로 가지 않도록 하라."
"각별히 시행하겠습니다."
내관은 청명했다.
전하는 다시 대제학 변계량을 돌아보시며 말씀한다.
"내가 이곳까지 왔으니 집현전에 올라 학사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리라."
변계량은 당황했다. 혹시 학사들이 산만한 태도로 앉아 있을까 겁이 났다.
그러나 전하의 행동을 만류할 길 없었다. 조심조심 전하를 집현전으로 인도했다.
돌연 통기도 없이 전하가 집현전에 올랐건만 제제다사의 젊은 학사들은
일사불란한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 학문을 탐구하고 있었다.
전하는 마음 속으로 크게 기뻤다. 격려하는 말씀을 내리고 대전으로 돌아갔다.
이후로부터 전하는 집현전 학사들에게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젊은
학사들을 마치 친아우와 자질같이 생각했다.
하루는 밤이 깊었다. 전하는 천독했다는 '서전'을 다시 읽었다. 자정이 넘었다.
훌륭한 정치를 하고 싶었다. 천독까지 한 '서전'을 또 한 번 읽어보는 것이다.
대전 침실에 불이 켜 있으니 왕후 심씨와 모든 후궁들도 감히 취침하는
자리에 들 수 없었다.
대전과 내전에 불이 켜 있으니 시녀와 입직 내관들도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자시를 알리는 종루의 인정 소리가 들렸다. 왕후 심씨는 시녀에게 명했다.
"대전에 아직도 불이 켜 있나 알아보고 오너라."
시녀는 봉명하고 나가, 전하의 동정을 살폈다. 이윽고 돌아와 복명했다.
"아직도 취침하시지 아니하시고 글을 읽고 계십니다."
왕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녀에게 다시 분부했다.
"혜빈 양씨를 불러라."
혜빈 양씨가 명을 받들고 왕비전으로 들어왔다.
심왕후는 웃으며 양씨에게 말씀한다.
"너도 아직 자리에 들지 아니했구나."
"대전마마와 중전마마께옵서 아직 침소에 듭시지 아니하셨는데 소인네들이
어찌 감히 한만스럽게 자리에 드옵니까."
두 손을 모아 시립해 대답했다.
"지금 전하께서 아직도 취침을 아니하시고 글을 읽고 계시다. 저녁 수라를
받으신 지 여러 시각이 되었다. 독서하시는데 피로하시면 아니된다. 너는 곧
밤참을 가볍게 준비해서 올리도록 하라."
혜빈 양씨는 후궁 중에 수라를 감독하는 책임을 맡은 때문이다.
"무슨 음식으로 하오리까?"
"가벼운 음식을 올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온면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혜빈 양씨는 곧 수라간에 나가 온면을 준비한 후에 왕후께 복명을 했다.
"밤참 수라가 다 되었습니다."
"네가 친히 수라상을 받들어라. 내가 앞을 인도하리라."
왕후 심씨의 범절은 이같이 법도가 있었다. 전하의 침식에 대해서 주밀한
관심을 가져 후궁들을 일일이 지휘했다.
왕후 심씨가 앞을 서고 후궁 양씨는 밤참 수라를 받들어 대전으로 향했다.
전하는 글을 읽다가 조용히 문을 열고 나타나는 왕비와 혜빈 양씨가 받든
수라상을 보았다.
"그것이 무엇이냐?"
"자정이 넘었습니다. 피로하실까보아, 가벼운 음식을 받들었습니다."
"자정이 넘었다? 현처와 혜빈이 정성스럽게 주는 밤참이니 어디 조금
들어봅시다."
전하는 유쾌하게 면 수라를 받았다.
홀연 생각이 났다.
"집현전에 불이 켜 있나 알아보라 하오."
왕비를 향하여 말씀했다.
초구(잘배자)
왕비는 곧 어전에서 일어나 시녀에게 명했다.
"공사청에 나가 입직 내관을 불러라."
시녀는 나는 듯이 공사청으로 나가 내관을 데리고 들어왔다.
"집현전에 나가 학사들의 동정을 살피고 오라고 분부를 내리셨다. 곧 알아보고
복명을 드려라."
내관은 곧 집현전으로 나가 학사들의 동정을 살폈다.
때는 벌써 자시가 훨씬 넘었건만 젊은 학사들은 제각기 책상 앞에 유경을
놓고 자세를 바로하여 글을 읽고 있었다.
한 사람도 태만한 기색이 없었다. 정숙하고 조용했다. 다만 가끔가다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유경의 등심 튀기는 소리가 들릴뿐이었다. 늙은 내관도 학사들의
공부하는 태도에 감동되지 아니할수 없었다.
내관은 곧 대전으로 돌아가 전하께 복명했다.
"집현전 학사들은 지금 자시가 훨씬 넘었건만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서
등블을 돋우고 공부들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전하의 용안은 화려하게 웃음을 웃었다.
"허허, 가상한 일이로다. 누구누구들이 공부하더냐?"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이석형, 이개, 최항, 하위지, 유성원, 권채, 남수문,
신석조들이올시다. 그리하옵고 제학 정인지는 딴방에서 불을 돋우고 혼자
공부하고 있습니다."
전하는 내관의 복명하는 말을 듣자, 곧 왕비를 돌아보며 말씀한다.
"이제 젊은 학사들이 자시가 넘도록 자지 않고 이와 같이 공부를 한다 하니
장차 이 나라가 잘될 것 같소. 현처는 내가 밤늦도록 책을 읽는데, 피로하겠다고
밤참을 주었소마는, 내 어찌 또한 젊은이들을 생각하지 아니하겠소. 혜빈에게
분부해서, 집현전 학사들의 밤참을 차려서 곧 내보내도록 하시오."
전하는 또다시 내관에게 분부했다.
"혜빈이 밤참을 차려주거든, 너는 곧 음식을 가지고 집현전에 나가 학사들을
접대하라."
전하는 내관에게 분부한 후에 또다시 혜빈 양씨와 왕비께 당부한다.
"나에게는 밤참으로 가벼운 음식을 택해서 국수를 주었지만, 한창 식욕이
왕성한 젊은 학사들한테는 국수장국으로는 간에 기별도 아니갈 테니, 곰탕을
끓여서 내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소? 하하하."
전하는 말씀을 마치고 옥음을 높여 웃었다.
심왕후도 웃으며 대답한다.
"전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한창 장년인 젊은 학사들에게는 면만 가지고는
부족할 듯합니다. 마침 숙설간에는 곰국이 있을듯합니다. 혜빈, 그러면 네가
친히 나가서 학사들의 밤참을 지휘하라."
"지체없이 거행하겠습니다."
혜빈도 웃음을 짓고 급히 숙설간으로 향했다.
전하가 이같이 집현전 젊은 학사들을 생각해서 자질과 같이 사랑하는 그
이면에는 화기 가득찬 왕비와 후궁들의 내조의 공이 컸던 것이다.
이윽고 대내에서는 집현전에 숙직하는 학사들의 밤참이 나갔다.
곰탕뿐이 아니다. 너비아니에 전유어에 차돌박이, 양지머리편육에 수란,
청포무침이 안주로 놓여 있고, 반주로 용안 여지 당대추를 조합한 약주가
옥호로병에 가득 담겨 나왔다.
자시가 넘도록 글을 읽고 있던 학사들의 눈이 둥그래졌다.
"이거 웬일인가?"
서로들 돌아보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늙은 내관이 만면에 웃음을 짓고 고한다.
"전하께옵서 여러분 학사들이 자정이 넘도록 공부에 전념하신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왕후마마와 후궁마마께 분부를 내리시어 밤참을 대접하셨습니다.
소인이 접대하라는 분부를 받들었습니다. 많이들 잡수시오."
집현전 학사들은 비로소 전하께서 사찬하신 것을 알았다.
모두 다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원래 집현전을 창설해서 좋은 인재를 양성하려는 전하의 뜻은 알았지만,
이같이 대접이 융숭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아니했다.
모두들 감격하는 마음으로 내관이 권하는 대로 마시고 먹었다.
생전 처음 마셔보는 용안여지주의 향기로운 술맛은, 한평생 잊지 못해하는
그들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이튿날 늙은 내관은 대전에 들어가 간밤에 집현전 학사들을 대접한 일을
고했다.
"지난밤에 집현전에 나가 전하께서 내리신 음식을 학사들에게 권했습니다."
"무슨 음식으로 했느냐? 곰탕반을 권했느냐?"
"중전마마께오서 혜빈마마께 분부하시어 곰탕 이외에도 술과 안주를 내리시어
학사들은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하옵고 융숭하옵신 전하의 배려에 모두 다
감격하와 어찌할 바를 몰라들 했습니다."
"술은 무슨 술을 내보냈더냐?"
전하는 잼처 물었다.
"상감마마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집현전 학사들이라 해서 중전마마께는
용안여지주를 주라고 특별한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리하와 학사들은 생전
처음 마셔보는 아름다운 술맛을 보고 모두 다 입이 놀란다고 감탄들을
했습니다."
전하는 내관의 아뢰는 말을 듣고 마음이 흐뭇했다. 용안에 화창한 웃음을
가득 띠고 분부를 다시 내린다.
"중전에 들어가 마마를 모시고 나오너라."
이윽고 왕후 심씨가 대전으로 나왔다. 뒤에는 늙은 내관과 궁녀가 따랐다.
"부르셨습니까?"
전하는 희색이 만면해서 대답했다.
"간밤에 마마가 친히 혜빈을 지휘해서 집현전 학사들에게 내리신 술과 음식을
학사들은 배불리 먹고 무한 좋아들 했다 합니다. 과인이 말씀한 탕반 이외에
마마께서 더한층 생각을 하셔서 좋은 술과 안주까지 내리셨다 하니 내조하신
힘이 과연 컸소. 학사들이 감격했다 합니다."
"전하께오서 집현전을 창설하시고 학사들을 자질같이 생각하시니, 제 어찌
자질같이 느끼지 아니하오리까. 내조란 성지는 지나친 말씀인가 하옵니다."
심왕후는 조용히 대답했다. 어디까지나 양처현모의 현숙한 태도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꺼낸다.
"학사들이 잘 먹었다는 말을 들으니 과인의 마음이 흐뭇하오. 내일부터는 번을
든 학사들의 아침밥은 안에서 내보내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마마, 괴롭지
않겠소이까?"
"전하, 괴롭다니 무슨 말씀을 그리 내리십니까? 전하의 젓수시고 난 어선만
해도 조석으로 수십 인을 접대할 수 있습니다. 숙설청의 수십 궁녀는 두었다가
어느 때 쓰겠습니까. 아무 염려 마십쇼. 분부대로 입직 학사들의 아침 저녁은
대내에서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좋소. 고맙소."
전하는 왕후를 대할 때 언제나 제왕의 권위를 허장성세로 뽐내는 상감마마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안상하고 부드럽기 짝 없는 착한 남편이었다.
전하는 다시 늙은 내관에게 말씀한다.
"여태껏 숙직하는 학사들의 밥은 어찌했다 하더냐?"
"집에서 번상을 받들어 왔습니다."
"청빈한 선비들의 번상보다 궐 안의 음식이 영양이 있을 것이다. 네가 내 뜻을
받아서 잘 접대하라."
내관은 명을 받았다. 이리하여 집현전 입직 학사들의 아침과 저녁을 대내에서
내리게 되었다.
어느덧 겨울이 되었다. 구중궁궐 임금이 거처하는 호화로운 곳이언만, 역시
삭풍이 살을 에도록 불어오는 추위는 막을 길이 없었다.
더구나 낙목한천에 눈이 하얗게 쌓인 겨울밤은 더한층 춥고 쓸쓸했다.
대왕이 거처하는 침전에도 방장과 문면자를 겹겹이 쳤건만, 방 속엔 찬
기운이 돌았다.
전하는 백동화로에 백탄을 피워놓고 경궤 앞에 단정하게 앉아 책을 연구하고
계셨다.
낮에는 대신들을 불러 정치에 대한 지도를 하는 때문에 책을 볼 틈이 없었다.
어느 때나 저녁 수라를 끝낸 후에는 밤늦도록 독서를 하는 것이 전하의
일과다. 이날 밤에도 전하는 자정이 지나도록 글을 읽고 있었다.
밤이 깊으니 추운 기운은 전하의 몸을 더한층 엄습했다. 등이 으스스하다.
벽에 걸어논 잘배자를 떼어 입었다. 아까 왕후 심씨가 잘베자를 내전에서 손수
들고 나와서 입으라고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하는, 아직 춥지 아니한데 잘털을 댄 배자를 입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라 해서 입지 아니했다.
왕후는 하는 수 없었다.
새벽녘에 추우시면 입으시라고 말씀을 올리고 벽에 걸어놓고 내전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자정이 넘으니 백동화로에 숯불도 사위기 시작했다. 찬바람은 문풍지를 더욱
강하게 흔들었다. 전하는 초저녁때 왕후가 벽에 걸어놓고 간 잘배자를 떼어
입었다.
전하는 유경에 등심을 돋우고 다시 글을 읽기 시작했다. 문득 집현전
학사들의 생각이 났다.
하도 밤이 깊고 차니, 입직한 젊은 학사들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려니 하고
생각했다.
"이리 오너라---."
전하는 입직 내관을 불렀다.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젊은 내시가 들어왔다.
"너, 집현전에 나가서 번든 학사가 누구며, 자고 있는지 글을 읽고 있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내시는 명을 받들고 집현전으로 나갔다.
집현전 학사청에는 불이 환하게 켜 있었다.
내시는 발자취를 죽이고 가만히 창문 틈으로 청 안을 들여다보았다.
신숙주가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읽고 있었다.
내시는 곧 발길을 돌려 전하께 들어가 아뢰었다.
"집현전 학사는 아직도 글을 읽고 있습니다."
"입직 학사가 누구더냐?"
"신숙주올시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가 있거라."
내관은 옆방으로 물러갔다.
축시가 지났다.
전하는 다시 내관을 불렀다.
"집현전에 다시 나가보아라. 동정이 어떠한가."
내시는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내시가 돌아와 전하께 고했다.
"아직도 신숙주는 책상 앞에 당정히 앉아서 글을 읽고 있습니다."
"축시가 넘었는데도 아직도 자지 않고 글을 읽고 있더란 말이냐!"
전하는 감탄했다. 가상하다고 생각했다.
"네, 그러합니다. 조금도 피곤한 빛이 없이 글을 읽고 있습니다."
"방이 매우 차겠구나?"
"쓸쓸하고 소랭합니다. 곱돌화로에 숯불도 꺼진 듯했습니다."
"허허, 감기가 들면 어찌하나?"
전하는 마치 자식같이 생각이 들었다.
"조금 있다가 또 한 번 나가보아라. 그만 공부하고 이불을 덮고 자면
좋겠는데---."
내시는 물러갔다. 어느덧 인시 초가 되었다.
내시는 또다시 집현전으로 나가 신숙주의 동정을 살폈다. 신숙주는 여전히
책상머리에 꿇어앉아서 글을 연구하고 있었다. 전하의 심부름으로 왔다갔다하는
내시건만 감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어전으로 돌아왔다. 전하도 아직 침소에
들지 아니하셨다.
"아까 분부하신 대로, 인시가 되었삽기 집현전에 또다시 나가보았습니다.
아직도 입직 학사 신숙주는 책상 앞에 단정하게 꿇어앉아서 책장을 넘기면서
무엇이지 연구하고 있습니다."
전하는 들으시자 더욱 감탄했다.
"허허, 기특하구나! 반드시 성공을 하고야 말 사람이다."
전하는 이내 말씀을 마치고 입으셨던 잘배자를 벗었다.
내시는 마음 속으로, 날이 찬데 배자는 왜 벗으시나 생각하고, 어전 등뒤로
돌아 배자 벗으시는 시중을 들었다.
전하는 배자를 벗은 후에 내시에게 내주시었다.
"덩그런 집현전 청사에 밤을 새워 공부하느라고 얼마나 춥겠느냐. 내가 입었던
잘배자를 가져다가 덮어주어라. 지금 자지 않고 깨어 있는데 입으라 하면 받지
아니할 것이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리에 들어 잠이 들거든 덮어주어라."
천고에 드문 인자한 제왕의 마음씨다. 사람을 기를 줄 알았다. 학자를 대접할
줄 알았다.
심부름을 하는 내시의 눈에서도 감격한 눈물이 핑 돌았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두 손으로 전하의 잘배자를 받들고 집현전으로 나갔다.
그러나 신숙주는 아직도 잘 생각을 아니하고 글을 읽고 있었다.
내시는 추호라도 어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신숙주가 책상을 밀고 자리에 들기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시는 춥지만
참고 있었다.
어느덧 파루를 치기 시작했다. 닭이 홰를 치며 '꼬끼오' 울었다.
그제서야 신숙주는 책상을 밀어놓고 유경의 불을 끈 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한동안 후에 신숙주의 코고는 소리가 창문밖에 들렸다.
내관은 껴안고 있던 잘배자를 들고 소리 없이 창문을 열었다.
발자취 소리를 죽이고 잠이 든 신숙주 몸 위에 전하의 잘배자를 덮어주었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집현전 뜰 앞 버드나무 가지에 흰까치들이 반가운
소리로 깍깍거렸다.
해가 동창에 환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신숙주는 까치 소리에 잠이 깼다. 어찌
된 일인지 몸이 훗훗하다. 가슴에 손을 얹어보았다. 부드러운 털이 손 끝에
닿아졌다. 새벽 오경 때 자기가 덮었던 이불은 무명이불인데 털붙이가 웬
것인가 했다.
벌떡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기막히지 아니한가. 얄따란 무명이불 위에 약과
무늬 잘배자가 덧덮여 있었다.
윤이 자르르 흐르는 잔털이 반듯반듯 네모진 갈색 털과 황색 털로 아름답게
조각조각 붙여진 잘배자다.
신숙주는 난생 처음 이런 물건을 대해보았다.
양털 배자나 토끼털 투수는 노인들이 입고 끼고 하는 것을 본 일이 있으나,
이같이 차분하면서 부드럽고, 반듯반듯 정방형의 아름다운 질서를 유지하면서
갈색과 황색의 조화미를 풍기는 잘배자는 갖옷이 아니라 곧 예술품이었다.
신숙주는 망연히 넋을 잃은 채 손으로 부드럽고 고운 털을 쓰다듬고
어루만져보았다. 그러나 이 털배자 이름을 무슨 갖옷이라고 부르는지 몰랐다.
신숙주는 도리어 멍하니 고민 속에 빠졌다. 털배자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은 고사해놓고, 도대체 이 좋은 훌륭한 모의가 어떻게 해서 자기 몸 위에
덮여져 있었던가, 그 까닭을 알 길이 없었다.
자기는 간밤에 오경 때가 넘어서 파루 치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책을 덮고
자리에 들었다.
도대체 이 털배자를 덮어준 사람이 누군가?
간밤에 숙직한 학사는 자기 한 사람뿐이다. 덮어줄 사람이 없다. 더구나 이
모의는 고귀한 값진 물건이 분명하다. 이 값진 물건을 집현전에 들어와
자기에게 덮어줄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괴상한 일이다. 귀신이 있다는 말은 글에서도 읽어보고, 속담으로도 들었다.
귀신이 덮어주었을까? 신숙주는 등판에 오싹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기쁜 듯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버드나무 가지에서는 흰까치들이 여전히 반가운 소리를 내며 깍깍 거렸다.
마당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마당 쓰는 소리가 났다.
수복이가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쓰는 모양이다.
신숙주는 인기척을 들으니 반가웠다. 무릎 위에 덮여 있는 잘배자를 차곡차곡
개켜서 옆에 놓았다.
무명 이부자리를 개켜서 벽장 속에 집어넣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싸늘한 겨울 바람이 '쏴아' 하고 방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아침 기온은 무한 신선했다.
신숙주의 머리는 싸늘하게 식었다. 정신이 쇄락했다.
흰까치들이 또다시 버드나무 가지 위로 오르고 날며 반가운 소리로
깍깍거렸다.
미닫이 여는 소리를 듣고 마당을 쓸던 수복이가 굽실했다.
"학사님, 안녕히 주무셔곕쇼."
신숙주는 수복이가 아침 인사를 하는 것을 보자 반가웠다.
"창손인가? 밤 사이 잘 지냈나?"
"예, 잘 잤습니다."
수복이가 대답했다. 창손이는 수복이의 이름이다.
신숙주는 수복이를 대해보니 문득 생각이 났다.
"여보게 창손이, 자네 간밤에 어느 때쯤 잠이 들었나?"
"학사님께서 밤늦도록 공부를 하시니 소인이 어찌 일찍 잘 수 있습니까. 자정
때 한 바퀴 경내를 둘러본 후에 문을 걸고 잤습니다. 그건 왜 물어보십죠? 혹시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닐세. 별일은 없네마는, 파루를 친 후에 집현전에 혹시 누가 다녀간 사람이
없었나?"
"파루 칠 때는 소인들은 잠이 깊이 들어서 모릅니다. 자정 때까지는 알고
있습죠. 대전내시가 한 번 다녀간 일은 있습니다. 학사님께서 밤늦도록 공부를
하시나 아니 하시나 하고 밖에서 살피고 들어간 일은 있습니다. 소인이 순력을
돌다가 내관이 기웃거리는 것을 보고 '어째 나오셨소?' 했더니, 내관은 빙긋
웃으면서 상감마마께서 학사님들이 공부들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오라고
분부가 계셔서 알아보고 간다고 대답하고 갔습니다."
"그러면 파루 친 이후의 일은 전혀 모르겠네그려."
"자정이 넘어서 잤으니 깜빡 새벽잠이 깊이 들었습니다. 왜, 실물을 하신 일이
있습니까?"
수복이의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물건을 잃어버린 일은 없네마는, 이상한 일이 있어서 그러네. 내가 파루
치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갖옷이 내 몸에
덮여져 있네그려. 누가 와서 덮어줬는지 까닭을 모를 일일세. 하도 괴상해서,
혹시 자네가, 누가 온 것을 아나 하고 물어본 것일세."
"갖옷을 학사님께 덮어드렸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파루 친 후의 일인데,
누가 첫새벽에 잠을 자지 아니하고 이곳으로 들어왔겠습니까. 거참 괴상한
일이올시다. 더구나 구중궁궐 대궐 안인데---필연코 내관이 또 나왔다가
덮어드린 것이 아닐까요? 어디, 갖옷을 좀 보여줍시오."
신숙주는 수복이를 공부하는 서재로 불러들였다. 차곡차곡 개켜논 털옷을
보여주었다.
수복이는 깜짝 소스라쳐 놀랐다.
"에구머니나, 이것은 약과 무늬 잘배자올시다. 네모 반듯한 방약과를 모아논
것 같다 해서 약과문 잘배자라 합니다. 귀하기 짝없는 모의올시다. 우리
나라에서는 귀인이 아니면 구해 입을수 없는 귀한 물건입니다. 혹시
상감마마께서 입으셨던 의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수복이의 말을 듣자 신숙주도 또 한 번 놀랐다.
수복이와 함께 잘배자를 들고 다시 살폈다.
잔털을 댄 거죽은 자주 공단 바탕에 수복 무늬를 수놓았고, 띠를 죄는 황금
고리엔 여의주를 희롱하는 용두를 아로새겼다.
수복이는 깜짝 소스라쳐 놀란다.
"어허, 어물이올시다."
수복이가 어물이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신숙주는 황공 감격했다. 눈을 씻고
다시 한 번 잘배자 좌우편에 달린 황금 고리를 살폈다. 고리 주위에는 여의주를
휘롱하는 용머리와 다섯 개 발톱이 교묘하게 아로새겨 있다. 확실히 상감의
옷이 분명했다.
신숙주는 도리어 정신이 얼떨떨했다.
"잘 간수하십시오. 학사님께서 감기 아니 드시도록 상감마마께서 파루 친 후에
내관을 보내시어 덮어드린 것이 분명합니다. 소인은 그럼 물러갑니다."
수복이는 굽실하고 물러갔다.
해가 높이 동천에 오르기 시작했다. 출사하는 학사들이 한 사람 두 사람씩
집현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권채, 남수문, 신석조, 이석형, 박팽년, 이개,
성삼문, 하위지, 최항, 최만리 들이 모여들었다. 제학 정인지도 들어오고, 대제학
변계량도 나타났다.
여러 학사들의 눈에 먼저 띄는 것은 황금 고리 달린 자줏빛 잘배자였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너무나 호화찬란한 배자에 눈이 현란할 지경이었다.
청빈한 살림 속에서 자라난 젊은 학사들은 모의인 것만은 알았으나, 잘이라는
털은 구경한 사람이 없었다. 이름조차 몰랐다.
모두 다 숙직했던 신숙주에게 물었다.
"저 호화찬란한 자주 배자가 웬 것인가?"
신숙주는 확실하게 모르는 일을 상감이 내린 것이라고 속단해 말할 수는
없었다.
"글쎄, 괴상한 일일세. 내가 파루 칠 때까지 글을 읽다가 불을 끄고 잤는데,
새벽에 깨어보니 이 갖옷이 내 몸 위에 덮여 있었네. 자세히 보니, 배자띠를
죄는 양편 금 고리에 여의주를 휘롱하는 용이 새겨 있네그려. 도대체 까닭을
몰라서, 지금까지 정신이 얼떨떨하이."
신숙주의 말을 듣자, 모든 학사들은 일제히 금 고리를 살펴보았다. 확실히
용이 조각되어 있다. 대제학 변계량이 백수를 흩날리며 말한다.
"아하, 상감께서 내리신 의대로구나!"
한 마디를 했다.
모든 학사들은 더 한 번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때 안에서 늙은 내관이 학사들의 아침 밥상을 영거해 왔다.
만면에 웃음을 웃고 신숙주를 향해 말한다.
"밤새도록 공부하시느라고 얼마나 고단하셨습니까. 파루 친 후에 소인이
어명을 받들고 나와서 잘배자를 덮어드렸는데도 매우 고단하신 듯 코를 골고
주무시더군요."
내관은 지난 밤 어명을 받들고, 여러 차례 나왔다가 들어간 일을
일장설파했다.
모든 학사들은 비로소 잘배자의 출처를 확실하게 알았다. 선비들을 융숭하게
대우하는 전하의 지성스런 뜻에 모든 학사들은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신숙주는 총명 영리한 준재다. 학사들의 조반이 끝난 후에 대제학에게 고했다.
"왕은이 융숭하시와 새벽에 의대를 내리신 일은 한평생 잊지 못할
광영이올시다마는, 잠들어 모르는 중이오나 어의를 몸에 얹힌 죄---태산
같습니다. 대제학께서 집현전을 대표하시어 사은을 드리신 후에 어물을
반정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대제학은 그럴 듯하게 생각했다. 곧 어전에 들어가 사은을 올리고 잘배자를
도로 바쳤다.
전하는 껄껄 웃으시며 하교를 내렸다.
"추운 겨울 밤에 새벽녘까지 학문을 탐구하는 그 성의에 내가 감동되어 내린
것이다. 감기가 들지 않게 일직 학사들에게 돌려가며 덮게 하라."
대제학은 잘배자를 다시 받들고 나와서 모든 학사들에게 전하의 뜻을 전했다.
학사들의 감격해하는 마음은 비길 길이 없었다.
사가독서
세종전하는, 밤잠을 자지 않고 학문을 탐구하는 집현전 학사에게 잘배자를
내린 후에도, 항상 학사들의 동정을 살폈다. 어떻게 하든 이 뽑아논 준총들이
하루라도 빨리 학예를 대성해서, 국가를 중흥시킬 크나큰 인물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때문이다.
학사들은 낮에 집현전에 나와서 제각기 맡은 바 학문을 연구한 후, 밤에는
모두 다 집으로 돌아가고, 윤번으로 한 사람만이 숙직을 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전하는, 어떻게 하면 이 훌륭한 자질을 가진 젊은이들이 한치만한 시각이라도
허송하지 말고 학문에만 전심하게 할 방도는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물론 집현전 학사들에게는 다른 관청의 관리들이 하는 모든 사무적인 잡무는
보지 않게 하고, 다만 집현전에 나와서 학문을 연마하고 때로는 경연에
참여하여 전하의 자문에 응대하는 특권을 주었다.
그러나 역시 입궐하고 퇴궐하는 번잡한 일이 공연한 시간 낭비가 된다.
전하는 집현전 학사들에게 돌려가면서 윤번제로 휴가를 주어서 집에 돌아가
공부를 하게 할 것을 창안했다.
대제학 변계량을 명소했다.
"경에게 의논할 일이 있다. 집현전 학사들은 모두 다 훌륭한 자질을 가진
인재들이다. 하루빨리 옥이 되도록 연마시켜서 국가 중흥에 이바지하도록
학문을 권장해야 하겠다. 날마다 궁중으로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일도 크나큰
시간 낭비다. 학사들에게 윤번제로 휴가를 주어서,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집에서
글을 읽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
대제학 변계랴은, 젊은 학사들을 생각하시는 전하의 지극한 배려에 감복했다.
그러나 벼슬하는 관리에게 사가독서를 하게 하는 일은 예와 이제를 말할 것
없이 만고에 없는 일이다. 부복해 아뢴다.
"젊은 학사들에게 휴가를 주어 글을 읽게 하시는 우악하신 뜻은 감읍할
일이올시다. 그러하오나 벼슬하는 사람들에게 휴가를 주어 글을 읽게 하는 일은
전고에 없는 일이올시다. 중국의 한 시대에도 금마문과 승명려, 천록각 등이
있고, 당 시대에도 문학관 집현전이 있었으며, 우리 나라 고려 때에도 집현전이
있었습니다마는, 학사들에게 사가독서를 하도록 은전을 내린 일은 없었습니다.
너무나 전례가 없는 은혜로우신 처사이기에 감히 말씀을 드리옵니다."
변계량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전하는 옥음을 높여 크게 웃으며 말씀을
내린다.
"무슨 일이든지 좋은 일이라면 전례와 관습을 깨뜨려서라도 곧 실천에 옮기는
것이 가하다고 생각하오. 과인이 이번에 집현전을 설치한 것은 이름만의
집현전이 아니라 실제로 어진 사람들을 모아놓아서 국가에 유용하게 쓰도록
하자는 것이 아닌가? 어서 빨리 좋은 인재를 양성해서 훌륭한 사업을 전개시켜
보자는 작정이오. 대제학은 내 뜻을 받아서 우선 몇 사람을 뽑아서 사가독서를
하게 하오."
대제학 변계량은 다시 더 반대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말미를 주어 공부를 하게 하는데, 몇 사람을 뽑아서 어디에 얼마
동안 독서를 하게 하옵니까?"
"사람을 뽑는 것은 대제학에게 일임하니 알아서 인선을 하고, 독서하는 곳은
집에 돌아가 거리낌없이 자유스럽게 공부를 하도록 하오. 그리고 말미를 주는
기간은 석 달쯤 하는 것이 좋겠지---."
변계량은 명을 받들고 물러갔다.
이튿날 대제학은 말미를 주어서 집에 돌아가 글을 읽게 할 사람을 뽑아서
아뢰었다.
"사가독서할 학사들을 뽑았습니다."
"누구누구들인가?"
"권채, 남수문, 신석조 세 사람을 뽑았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점두한 후에 이내 말씀을 내린다.
"사가독서하는 일은 처음 시작하는 일이니 과인이 친히 면유하리라. 세 사람을
명소하라."
대제학은 집현전으로 나가 세 학사를 대동하고 어전에 시립했다.
전하는 봉안을 맑게 떠서 젊은 학사들을 바라보았다. 기억력이 대단했다.
"네가 교리 권채냐?"
"네, 그러하옵니다."
권채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너는 저작 신석조지?"
"그러하옵니다."
신석조는 두 손을 마주잡고 대답했다.
"너는 정자 남수문이로구나!"
"네, 그러하옵니다."
남수문이 국궁하고 아뢴다.
젊은 학사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기억하시는 전하의 총명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삼정승, 육조판서, 참판, 참의 등 수백 명 관리 속에 이제 겨우 학사로
출세한 미미한 자기들의 이름과 직함을 어떻게 미리 기억하고 계시나 하고
감탄하기를 마지아니했다.
전하는 다시 세 학사를 바라보시며 말씀을 내린다.
"내가 집현전을 창설하고 너희들에게 집현전관을 제수한 것은, 나이 젊어서
장래가 있는 사람들이라 독서를 많이 해서 국가에 유용하도록 실효를 거두려 한
것이다. 그러나 제각기 직무를 맡고 보니 전심독서할 겨를이 없구나! 오늘부터는
본전에 출사하지 말고 집에서 자유스럽게 공부해서 크나큰 성과를 내도록 하라.
독서하는 규범에 대해서는 대제학 변계량의 지획을 받으라."
옆에 시립해 있는 대제학 변계량 이하 모든 학사들은 명을 받아 몸을 굽혔다.
"자아, 그러면 물러가 열심으로 공부들을 하라."
전하는 또 한 번 격려하는 말씀을 내렸다.
세 학사들은 사은숙배를 드린 후에 집현전으로 돌아갔다.
모든 동료 학사들은 천고에 없는 세종대왕의 사가독서를 내리는 슬기로운
처사에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기막히게 선비를 아끼고 문인을 대접하는
처사다. 모두 다 손을 꼽아 자기의 차례 되기를 기다렸다. 뿐만 아니었다. 모든
관리들은 집현전 학사를 천상의 선관같이 부러워했다.
신석조, 권채, 남수문 세 학사들은 영광스런 사가독서의 분부를 받고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 자기들의 전공하는 학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세종전하는 내관을 불러 특명을 내렸다.
"집현전에 번을 들어서 공부하는 학사들에게는 가끔 사찬을 해서 주식을
대접하는 것이 전례가 되었지만, 이제 처음으로 시작한 사가독서를 하는
학사들은 집에 있기 때문, 사찬하는 은전을 입지 못하게 되니 딱한 일이다.
청빈한 선비들의 집에 먹을 것이 넉넉할 까닭이 있느냐. 가끔 주효를 내리고,
밤에 공부하다 먹으라고 방약과와 만두과며 제주 황귤을 보내서 과히 무료하지
않게 하라."
내관은 전하의 명을 받들었다.
어주에서는 전하가 수라를 받았던 퇴선을 갸자세 틀에 나누어 실었다.
산해진미를 백지종이로 깨끗하게 봉과해서 가득하게 실었다.
대궐 안에서 만든 꿀과 밀가루를 흐무러지게 반죽해서 펄펄 끓는 기름에
지져낸 목침만한 방약과와 주먹덩이 같은 만두과며 황금 같은 제주귤은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내관은 액정들에게 갸자를 메게 한 후에 학사의 집을 차례로 돌아서 전하의
특별한 분부를 전했다.
뜻밖에 사찬의 별은전을 받은 학사들은 기가 차도록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벼슬을 하면서 집에서 편안하게 독서를 하라는 분부를 받은 것도
기막힌 영광인데, 더군다나 사찬을 내리고, 사찬 중에도 여염에서는 한평생
구경해보지도 못했던 만두과, 방약과에 황금보다도 더 귀한 제주귤을
대하고보니 모두 다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학사들의 광영일 뿐이 아니었다. 일문의 영광이었다.
일가들이 치하하러 모여들었다. 동리의 부로들이 사찬하신 음식 구경을 하러
모여들었다.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니 친구들이 찾아와 치하들을 했다.
공부를 하기 위하여 집으로 나온 학사들은 치하하러 온 사람들을 접대하기에
바빴다.
사찬을 받은 후 사흘 동안은 마치 크나큰 잔칫집과 같았다. 신학사, 권학사,
남학사는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사흘이 지난 후에 학사들은 방문을 닫아 걸고 일체 사람을 대하지 아니했다.
밤을 새워가며 공부들을 하기 시작했다.
꿀과 밀가루를 흐무러지게 반죽을 해서 펄펄 끓는 기름가마에 넣어 지져진
주먹덩이 같은 만두과와 목침만한 방약과는 자시, 축시가 넘도록 공부하는
그들에게는 크나큰 영양과 도음을 주었다.
학사들은 글을 읽으면서 약과를 입에 넣을 때마다 세종전하의 가이 없는 넓은
마음을 생각했다. 뼈가 부서지도록 학문을 닦아서 그 은총을 갚으리라 결심했다.
그들은 전하가 세자 때 손에 책을 놓지 않고 글을 읽었다는 일을 생각했다. 석
달 기한 안에 '시경' 천독을 하고 '서경' 천독을 했다. '주역'을 읽고, '춘추'와
'강목'을 연구했다. 이같이 독서하는 것만이 세종전하한테 보답하는 길이라
결심한 때문이다.
첫째번 사가독서의 기한이 지난 후에 권채, 남수문, 신석조 세 학사는 다시
집현전으로 돌아왔다.
대제학 변계량은 세 학사와 함께 탑전에 배알했다. 세종전하는 미소를 지어
세 학사를 접견하시며 물었다.
"그 동안 곰부들을 많이 했느냐?"
권학사가 대답해 아뢴다.
"전하께오서 오경을 천독하셨다 하옵기 소신들도 독실하게 공부를 하는
체했사오나 아직도 미숙한 점이 많사옵니다."
"학문의 길은 한이 없는 것이다. 애들 많이 썼다."
전하의 말씀은 어느 때나 너그럽고 후했다.
"그래, 집에서 공부를 하니 조금 전심이 되더냐?"
전하는 다시 하문했다. 남학사가 대답해 아뢴다.
"군은이 망극하시와 특별히 주식을 내리시니 황공 감격한 영광을 아뢸 길
없었습니다. 이 전고에 없는 은총이 내리신 소문이 나자 친척과 고구들이
찾아와 치하를 하는 통에 처음엔 공부에 많은 방해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사가독서를 내리실 때는 이 점도 하촉해 두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남학사의 아뢰는 말을 듣자, 대제학 변계량이 아뢴다.
"남수문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학사를 우대하시어 전고에 없는
사가독서의 특권을 주시고, 또다시 내관을 보내시어 어선을 내리시니, 이 소문을
듣고 일가친척이며 향당고우들이 어찌 모여들지 않겠습니까. 은총을 받은
집현전 학사의 영광일 뿐 아니라, 향리의 광영이올시다. 이러하니 공부하는 데
다소 방해가 되었을 듯합니다. 앞으로는 말미를 주시어 글을 읽게 하실 때,
독서하는 장소를 약간 달리 생각하셔야 하겠습니다."
전하는 말씀을 들으시자 껄껄 웃으셨다.
"말을 듣고보니, 휴가를 주어 집에서 글을 읽게 하는 일도 폐단이 있구려.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달리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소신의 생각에는, 산이 깊고 물이 맑은 절간이 좋을 듯합니다."
대제학 변계량이 의견을 말씀한다.
"불도를 배척하는 고루한 선비들이 쓸데없는 말을 하면 어찌하오. 하하하."
"예로부터 선비들의 삼동 공부와 한여름 공부는 모두 다 절간에 들어가
학문을 탐구했습니다.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을 택하는 까닭이올시다. 불도
인간을 선한 길로 인도하는 대자대비의 도입니다. 유학하는 사람이 절에서
공부한다 해서 염불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옳은 말요. 너무나 세상을 좁게 보는 탓이지. 그렇다면 앞으로 사가독서하는
처소는 조용한 절간을 택해서 공부를 하게 하오."
"그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대제학은 다음에 말미를 주어 독서시킬 사람들을 뽑도록 하오."
변계량은 청명하고 세 학사와 함께 어전에서 물러났다.
대제학 변계량은 두 번째로 말미를 주어 독서할 학사들을 뽑았다. 명단을
들고 탑전에 배알했다.
"제이차로 사가독서할 사람들을 뽑았는가?"
전하는 정중하게 물었다.
"예, 뽑았습니다. 여기 이름 적은 명단을 바치옵니다."
대제학은 두 손으로 명단을 받들어 올렸다. 전하는 어수를 늘이어 명단을
받아 들고 적혀진 학사들의 이름을 읽어보신다.
"박팽년, 이개, 하위지, 성삼문, 신숙주, 이석형."
모두 다 전하가 평소에 촉망하던 학사들이다.
전하는 만족했다.
"모두 다 총명 영리한 준총들이로군. 이번엔 여섯 사람인가?"
"네, 그러하옵니다."
"다 함께 불러들이라."
대제학은 집현전으로 나가 여섯 학사를 거느리고 다시 들어왔다.
여섯 학사들은 곡배를 드린 후에 조용히 시립했다.
전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여섯 학사를 바라보시며 말씀을 내린다.
"너희들에게 전심독서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대제학에게 인선을 부탁했던
것이다. 너희들은 내 뜻을 받아 앞으로 국가에 유용한 인물이 되도록 더욱
학문을 연마하라."
여섯 학사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혀 명을 받았다.
전하는 대제학을 향하여 다시 말씀한다.
"지난번에 권채 등 세 사람에게 집에 가서 공부를 하도록 말미를 주었더니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연구에 방해가 되었다 하오. 인적이 희소한 절간을
택해서 전심독서하도록 처소를 정하라 했는데, 그동안 처소를 정했는가?"
"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정하려 합니다. 어느 절이 좋은지 하교해 주시옵소서."
"아무리 해도 절간이 좋을 듯하오. 고양에 있는 진관사에서 공부를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
전하는 충녕대군 시절에 조졸한 아우 성녕의 수륙재를 올릴 때, 한 번 가본
일이 있었다. 이리하여 북한산 밑에 있는 진관사가 조용하고 그윽한 곳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변계량은 진관사에 가본 일이 없었다.
"분부대로 진관사로 보내서 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대왕의 뜻을 받들 뿐이었다.
전하는 미소를 풍기시며 여섯 학사를 향하여 물었다.
"글을 읽는 것은 박학다문하기 위하여 읽는 것이다. 너희들이 비록 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 하나, 너희 나라의 산천과 너희 나라의 예악문물과 너희
나라의 교학은 대강 짐작해야 한다. 이것을 모른다면 서민을 교화할 수 없고,
정치를 바르게 할 수 없다. 아까 내가 말한 진관사는 어느 곳에 있으며 어느 때
세워졌는지 아는 사람이 있으면 대답해보라."
돌연 전하가 하문하는 진관사에 대하여 모두 다 얼떨떨했다. 사서오경의
유학을 전공하는 선비들이었다. 대제학 변계량도 어느 대 진관사가 창설이 되고
어느 곳에 붙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무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위지와 이개도 덤덤히 다른 학사들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진관사의 내력을 모르겠느냐?"
전하는 웃으며 다시 하문했다.
이때, 성삼문이 고개를 들고 대답한다.
"불가의 일을 전공하지 못하와 확실하게 알지는 못하옵니다마는, 진관사는
북한산 뒤 고양 땅에 있습니다. 고려 현종 때 창건한 절이라 합니다."
대답 소리는 또렷했다. 전하는 성삼문의 총명영오한 대답에 마음 속으로
놀랐다.
"네 어찌 불도가 아닌데 진관사를 창설한 내력을 똑똑히 아느냐?"
"목은 이색의 ' 금경록'에서 읽은 듯합니다."
"그래, 그것이 박학다문하는 공부하는 사람의 학문하는 태도다. 자기 나라의
전고를 선비가 모른다면 어찌 정치를 하겠느냐. 그러한 자세로 공부들을 하라."
전하는 성삼문을 격찬했다. 성삼문의 옆에 있던 소년 학사 신숙주가 싱긋싱긋
웃으며 아뢴다.
"소신은, 전하께오서 아직 등극하시기 이전 충녕대군으로 계실 때 잠깐
진관사에 들르셨던 일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는 또 한 번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무슨 일로 내가 진관사에 갔던 것을 네가 기억하느냐?"
"옛 기억을 불러일으켜 죄송만만하옵니다마는, 성녕대군께서 하세하신 후에
수륙재를 올렸을 때 전하께서 우애의 지정이 높으사 잠시 진관사에 왕림하신
줄로 아옵니다."
"너 어찌 그 일을 아느냐?"
"아비 장에게 들어 알았습니다."
전하는 무릎을 치며 탄식했다.
"네 말대로 내가 한 번 진관사를 가본 일이 있다. 너희들은 과연 총명한
자질을 가졌다. 더욱더욱 슬기를 닦아서 나라에 유익한 일꾼이 되도록 하라!"
전하는 신숙주와 성삼문을 가상하다고 칭찬하신 후에 대제학에게 분부했다.
"그렇다면 진관사에 기별해서 정갈한 처소를 택해서 내일부터 독서를 하게
하오."
변계량은 명을 받들고 젊은 학사들과 함께 숙배를 드리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다음날 여섯 학사들은 나귀 등에 책을 가득히 싣고 고양 땅 북한산 밑
진관사로 향했다.
전하는 내관에게 명해서 사찬과 과종과 좋은 술을 가끔 내렸다. 여섯
학사들의 영광은 말할 나위 없었다.
새벽이면 종소리와 목어 치는 소리에 잠을 깨어 불경 대신 학문을 연구했다.
표고국과 튀각에 입맛을 돋우고, 도라지 생채나물과 두부, 소전골로 배를
불렸다. 석벽 사이로 흐르는 맑은 계곡에 발을 담그고, 바위를 타고 휘파람을
불어 호연지기를 길렀다. 그들온 또다시 서실로 돌아가 밤이 깊도록 공부를
했다.
삼월삼질, 구월구일
봄이 되었다. 겨울은 가고 하늘과 땅에는 봄 기운이 가득했다. 청산마다
진달래와 개나리가 연분홍빛과 황금빛을 뿜었다. 새 소리는 더한층 산뜻하고,
잔디밭마다 속잎이 파릇파릇 윤기를 흘렸다. 전하는 훈훈하게 불어오는 봄
바람에 용포 자락을 날리며 편전 뜰 아래를 거닐었다. 전하의 거니는 뒤에는
내관 두 사람이 따랐다. 멀리 집현전이 보였다.
전하는 내관에게 말씀을 내린다.
"일기가 매우 화창하구나. 오늘이 삼월 초하루냐?"
"네, 그러하옵니다."
"저 집현전에 건너가서, 학사들이 모두 다 모여 있는지 살펴보고 오너라."
내관이 명을 받고 물러간 후에 전하는 또다시 다른 내관에게 분부했다.
"너는 성균관에 나가서, 유생들이 재실에서 무엇들을 하고 있으며, 명륜당에는
누구들이 모여 있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또 한 사람의 내관이 어명을 받들고 물러갔다.
전하는 두 사람의 내관을 보낸 후에 흰구름이 떠가는 만리장공을 바라보며
유유하게 잔디밭을 거닐고 있었다.
이윽고 집현전으로 건너갔던 내관이 복명해 아뢴다.
"말미를 받자와 진관사로 나간 학사를 제하고 한 사람 빠짐없이 열심히
독서하고 있습니다. 소인이 보기에도 근감스럽습니다."
전하는 내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이어 성균관에 나갔던 내관도 돌아와 아뢴다.
"성균관에 나가보니, 진사들은 재실마다 한 방씩을 차지하고 글 읽는 소리가
끊일 사이 없사옵고, 명륜당에서는 대사성과 사성들이 모여서 성리학에 대한
강론이 대단합니다."
전하의 용안에는 만족한 미소가 떠돌았다.
"들어가자---."
전하는 전상으로 올랐다. 내관에게 명했다.
"대제학, 대사성과 도승지를 들라 하라."
내관들은 다시 집현전과 성균관과 정원으로 달렸다.
얼마 후에 도승지를 위시하여 대제학과 대사성이 입시했다.
전하는 말씀을 내린다.
"오늘 내가 알아보니, 집현전 학사들과 성균관 선비들은 일기가 화창한
날이건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부지런히 독서를 하고 강론을 한다 하니
가상한 일이다. 일년 삼백육십일에 공부만 하는 것도 몸에 좋지 않다. 내일
모레가 삼월삼질이 아닌가. 봄과 가을에 하루쯤 쉬게 하는 것이 좋겠다.
민속에도 삼월삼질과 구월구일 중양날은 이름있는 날이니, 금년부터 이 두 날은
아주 휴일로 정해서, 집현전 학사뿐 아니라 모든 관리들도 답청을 하면서
놀도록 하라."
뜻밖에 내리는 큰 은전이었다.
학사를 우대할 줄 아는 임금은 역시 관리들도 생각할 줄 알았다.
도승지와 대제학, 대사성은 입이 벌어지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곧 빈청에 나가서 대신들에게 성지를 전갈하고, 삼월삼질과 구월구일을
휴일로 공포하겠습니다."
전하는 다시 대사성을 향하여 말씀한다.
"성균관에서도 유생들이 촌음을 아껴서 공부들을 한다 하니 내 마음이
흡족하다. 특별히 술잔을 내리니 이 잔에 술을 따라, 삼월삼질과 구월구일에
술을 한 잔씩 마시도록 하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문갑 위에 놓인 백자 술잔과 고청으로 그림을 그린
술잔을 어수로 친히 들어 대사성에게 내렸다.
전무후무한 영광이었다. 대사성은 너무나 감격했다. 떨리는 손으로 술잔 두
개를 받들었다.
"유생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왕은의 융숭하심을 두루두루
전달하오리다."
도승지와 대제학, 대사성은 감격하면서 어전에서 물러났다.
이리하여 삼월삼질과 구월구일은 벼슬하는 사람들의 공휴일이 되고, 학사들
덕에 온 조정이 놀게 되었다. 세상에서는 집현전 학사들을 존경하는 풍조가
더한층 높았다.
한편 성균관에서는 세종이 내리신 백자 술잔을 보배로 삼아서 진사들에게
돌려 보이고 수백 년 동안 대대로 진장했다.
삼월삼질이 되었다. 전하는 특명을 내려, 진관사에서 사가독서하는 학사들에게
사찬과 선온을 내려 독서하는 노고를 위로하고, 조정의 관리들에게는 들 밖으로
나가 하루 동안 소풍을 허락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답청놀이라 했다.
세종의 학자와 문사를 우대하는 슬기로운 처사는 앞으로 왕조문화의 결정적인
황금시대를 이룩하게 되었다.
학사들이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를 한 후에는 장의사에서 독서를 하게 했다.
세종은 다시 집현전 학사의 정원을, 20명은 경연에 배치하여 전하의 자문에
응하게 하고, 10명은 서연에 배치해서 세자를 보필하여 학문을 연구하게 했다.
세자가 차차 장성해서 학문에 열중한 때문이다.
세종이 숭하한 후에도 학사를 우대하는 집현전과 사가독서의 제도는 문종,
단종 때도 계속해서 시행되었다. 그러나 국가에는 큰 변이 생겼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의 자리를 뺏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일이 사전에 발각되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을 새남터 행형장에서 죽였다.
이들이 저 유명한 사육신이다.
세조는 문신을 미워했다. 집현전을 폐지해버렸다. 이같이 되니 독서당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음지는 다시 양지로 돌아왔다.
성종은 홍문관 학사들에게 용산에 독서당을 설치케 했고, 다음에는 연산 때
또 한 번 수난을 당했는데, 중종이 즉위한 후에 다시 독서당의 제도가 부활되어
정업원에 두었다가 두모개로 옮겼다. 이리하여 독서당의 이름을 호당이라고도
했다.
용산 독서당은 한강 남쪽에 있으므로 남호요, 두모개는 한강 동편에 있으니
동호다. 저 유명한 율곡의 '동호문답'이란 글도 두모개 독서당에서 저술된
것이다.
이같이 해서 세종이 창설한 독서당의 제도는 정조가 규장각으로 개편할
때까지 이어지다가 끊어지고 끊어졌다가 이어져서 이 나라에 크나큰 문화를
진흥시켰다. 모두 다 세종의 위대한 영단이었다.
안간존중
세종이 나라의 문명을 위하여 젊은 학사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을 때 홀연
집현전 학사 중에 명예스럽지 못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형조판서 노한이 초헌을 타고 식전 일찍이 형조로 사진해 나가고
있었다.
행차가 샌전병문에서 황토마룻고개를 넘어 들어가려 할 때, 길 앞에 괴상한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떠꺼머리 총각 녀석이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이고, 흰
홑이불로 송장 같은 것을 덮어서 업고 가는 것이었다.
형조판서는 종자인 별배한테 물었다.
"저기 저 떠꺼머리 총각놈이 업고 가는 것이 무엇이냐? 마치 송장을 업고
가는 것 같지 아니하냐?"
"글쎄올시다. 이상스럽습니다."
"빨리 가서 사실해보아라."
별배는 달음질쳐서 앞에 가는 총각에게 호통을 쳤다.
"게 섰거라. 가지 말고 걸음을 멈춰라!"
연거푸 벽력 같은 큰 소리로 가지 말라고 호령을 했다.
떠꺼머리 총각은 깜짝 놀랐다. 벌벌 떨면서 별배가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별배는 걸음을 급히하여 총각 앞에 당도했다.
"네 등에 업은 것이 무엇이냐? 사람 죽은 송장이냐?"
총각은 벌벌 떨며 대답한다.
"아니올시다. 산 사람이올시다."
"이놈아, 산 사람을 왜 홑이불로 씌워서 업고 가느냐?"
별배는 의심이 덜컥 났다. 바싹 총각 앞으로 다가섰다. 홑이불을 훌떡 벗겼다.
깜짝 놀랐다.
송장은 아니지만 명재경각인 금방 죽을 듯한 젊은 여자다. 머리를 빡빡
깎았다. 얼굴은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렸고 온몸은 피골상접이 되어 뼈가
앙상하게 드러났다. 금방 죽을 것만 같았다.
이때, 형조판서의 초헌이 당도했다.
"무엇이냐?"
"죽은 송장은 아니옵고 산 사람을 업었사온데 피골이 상접해서 금방 죽을 것
같은 젊은 계집입니다."
"총각놈을 안동해서 형조로 잡아들여라!"
판서는 영을 내리고 본조로 들어갔다.
별배와 형리들은 총각과 업힌 여인을 안동해서 형조로 데리고 들어갔다.
형리는 판서에게 물었다.
"어찌하오리까?"
"내 앞으로 데리고 오너라."
총각과 젊은 계집은 형조 전당 뜰 앞에 대령되었다.
그러나 젊은 계집은 몸을 가누지 못했다. 형리들은 뜰에 거적을 펴고 젊은
계집을 눕게 했다.
판서가 내려다보니 젊은 계집은 머리를 깎인 채 살이 쭉 빠져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기진맥진이 되어 말을 물어보아도 대답을 할 것같지
아니했다. 형리에게 명했다.
"빨리 미음을 끓여 오너라. 서늘한 곳에 누이고 우선 청심환 한 개를 개어
먹여라."
별배와 형이들은 황황히 젊은 계집에게 미음을 고아서 먹이고 청심환을 개어
먹였다.
총각 녀석은 벌벌 떨면서 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한 식경이 지난 후에 형조판서는 대청에 좌기를 차리고 먼저 총각을
문초했다.
"이놈, 너는 어디 사는 누구며, 저 여자는 어떠한 사람이냐? 만약 조금이라도
사실을 은닉해서 거짓 대답을 하는 일이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형조판서는 추상같이 엄포를 내렸다. 총각 녀석은 벌벌 떨며 대답한다.
"소인이 어찌 추호인들 기이오리까. 바른 대로 말씀을 아뢰오리다. 소인은
집현전 권학사댁 상노이옵고, 저 여자는 역시 그 댁의 비자올시다."
형조판서 노한은 집현전 권학사 집 상노란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권학사라니, 그분의 이름이 무어냐?"
"집현전 응교로 계신 권채십니다."
형조판서는 또 한 번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권채는 집현전 학사 중에도
가장 고참인 사람이요, 전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어 제일차로 사가독서의
은전을 내린 사람이다. 이러한 점잖은 사람의 집 상노놈이 무슨 고약한 일을
저질렀나 하고 마음이 긴장되었다.
"그래, 네가 권학사댁 상노요, 저 계집이 권학사댁 비자라면 어찌해서 이른
아침에 저 여자를 죽은 사람처럼 홑이불을 씌워가지고 어디로 향해 가는
길이냐?"
"소인은 자세한 까닭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씨께서 저 여자가 도망을 가려
했다고 나리한테 말씀해서, 나리는 격분하신 나머지 광 속에 자물쇠를 채워
가둬두시고 음식을 주지 않은 채 피골이 상접하도록 문초를 하셨습니다.
그리해서 결국은 죽게 되니 소인보고 문 밖 여승들이 있는 암자로 갖다두라
해서 지금 탑골 승방으로 데리고 가는 길이올시다."
"권학사의 부인의 성을 네가 아느냐?"
"정씨 부인이올시다."
형조판서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부리는 종년이 도망을 치려 한다고 저렇게
머리까지 빡빡 깎아놓고 뼈만 앙상하도록 학사 자신이 사고문을 했다는 일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지막지한 무뢰배도 아니요,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으로 더구나 상감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명예스런 집현전 응교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드시 내면에 어떤 복잡한 곡절이 있을 것같이
생각되었다. 자세한 내용을 계집한테 물어보리라 판단했다. 형리에게 분부했다.
"권채의 비자라는 애가 정신을 좀 차렸느냐?"
"미음과 청심환을 먹은 후에 정신기가 훨씬 든 듯합니다."
"계집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묻는 말에 정신을 차려서 대답할 수 있는가?
마구 다루지 말고 부드럽게 물어보아라!"
형릴는 판서의 명을 받들어 계집한테 물었다.
"대감께서, 물으시는 말씀에 정신을 차려서 대답할 수 있느냐 하문하신다.
기운을 차려서 대답할 수 있겠나 대답해보라."
계집은 업혀 갈 때보다 통기가 되어 기운이 소생된 것 같았다.
"물으시는 말씀이 계시면 숨김 없이 대답하겠습니다."
가냘픈 목소리로 형리한테 대답했다.
"대답해 아뢰겠다 합니다."
형리는 판서에게 고했다.
형조판서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부드럽게 계집에게 물었다.
"이제 정신기가 좀 났느냐?"
"네---."
계집이 모기 소리만큼 대답했다.
"너를 업고 가던 저 총각이 집현전 학사 권채 집 상노라 하니 사실이냐?
그리고 너는 그 댁의 비자가 틀림없느냐?"
"네, 그러합니다."
"너의 이름은 무어라 하느냐?"
"덕금이라고 부릅니다."
"왜 종의 신분으로 도망을 가려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권학사한테 사고문을
당해서 그 꼴이 되었느냐?"
덕금이란 비자는 말이 막혔다. 얼른 대답을 못했다.
형조판서는, 피골이 상접되어 기진맥진한 계집을 차마 매질해서 문초할 수는
없었다. 얼굴빛을 부드럽게 해서 묻는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거든 숨기지 말고 나한테 말해라. 좋도록
처리해주리라."
계집은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대답이 없다.
"어서 말해라. 네가 무슨 잘못한 일이 있는 게로구나.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니, 필시 네가 큰 죄를 저질렀구나. 도망을 치려 했다고, 저다지 참혹하게
고문을 했을 리 만무하다. 어서 말을 해라."
"부끄러워서 말씀을 아뢰기 어렵습니다. 쇤네는 참 억울하게 이 꼴이
되었습니다. 그저 한시바삐 죽기만 소원이올시다."
말을 마치자 해골이 다 된 젊은 계집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형조판서는 피골이 상접된 젊은 계집의 눈에서 더운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것을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죽는 사람이 부끄러울 것이 무엇 있느냐. 포원을 하고 죽으면 죽어도 원귀가
된다. 내가 신원을 해주리라. 어서 털어놓고 말을 해보아라."
판서의 인자하게 묻는 말에 계집은 감동이 되었다.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댁의 서방님이 집현전에서 말미를 받으시어 집에서 석
달 동안 공부를 하실 때 쇤네는 찬비가 되어 진짓상을 받들었습니다."
"그래서?"
"원체 공부에 골똘하시어 안방에는 아니 들어오시고 사랑방에서만
거처하셨습니다. 그리해서 쇤네는 항상 진짓상을 받들고 사랑에
드나들었습니다."
"그래서?"
"밤에는 이부자리도 보살펴드렸습니다."
"자연 그렇게 되겠지."
형조판서는 웃으며 대답했다.
"어느날 밤이었습니다. 쇤네가 서방님의 자리를 펴드리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책상 앞에서 글을 읽으시던 서방님께서 돌연 쇤네의 손목을
잡으셨습니다."
형조판서는 비로소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뿌리치고 뛰어나가려 했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를 지르면
아씨가 알게 되고---그래서 마침내 처녀의 몸이 깨뜨려졌습니다."
계집은 말을 마치자 흐느껴 울었다.
비자 덕금의 공초를 받는 형조판서 노한은 더한층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어서, 울음을 그치고 다음을 이야기해라."
"서방님께서 말미를 받아 집에서 공부하시는 석 달 동안에 쇤네는 그런 일을
여러 번 당했습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하룻밤엔 아씨한테 들키고
말았습니다. 눈치를 채고 뒤를 밟아서 등시포착이 된 것입지요. 서방님은
아씨한테 호랑감투를 써서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쇤네는 이내 광 속에 갇혀서
갖은 악형을 아씨한테 당하고 밥을 주지 아니해서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악형은 누가 가했느냐?"
"아씨가 했습니다."
"상노의 말에는 네가 도망을 치려 하니까 권학사가 너를 고문했다고 했는데,
말이 어긋나는구나!"
"그것은 아씨가 쇤네를 나리한테 거짓말로 모함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서방질을 해서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 했다고 터무니없는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리도 서방질을 했단 말에 분이 나서 쇤네의 머리를 잘라버리고 친히
고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광 속에 갇혀 있는 년이 어떻게 서방질을 하며
달아날 수가 있습니까. 참으로 억울합니다."
종년은 목을 놓아 통곡했다. 기운이 없었다. 통곡 소리는 느껴 우는
철읍성이었다.
"그래 어떻게 악행을 당했느냐? 울지 말고 말을 해라."
"목구멍에 살을 꽂고 씹으라고 조련질을 했습니다. 날마다 큰 바늘로 항문을
찔렀습니다. 시시 때때로, 하루에도 몇번씩 당한 고통은 말로 형언해 아뢸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깎이고 격일해서 개밥 주듯 밥을 주었습니다. 이러기를
여러 달 하니 자연 피골이 상접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누가 먼저 악형을 가하기 시작했느냐?"
"아씨가 시작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서방님을 모셨다는 죕지요. 그리고
아씨께서 서방님이 집현전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바가지를 긁어 달달 볶아대니,
서방님은 아씨와 함께 쇤네를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조판서 노한은 의분을 느꼈다.
"정씨란 여인은 명색이 학사의 부인이라 하면서 너무나 악착하고 잔인하구나.
그리고 권채는 정말 판관이로구나! 트릿한 일은 자기가 저질러놓고 도리어 너를
바늘로 찌르다니 말이 되느냐. 괘씸한 일이다. 곧 위에 아뢰어 처분을
물으리라!"
형조판서는 형리에게 분부했다.
"총각은 아직 형조옥에 가두어두고, 비자 덕금은 민가에 맡겨서 몸을
추스르도록 조리시키라."
형리는 판서의 명을 받들어 총각과 덕금을 정당 앞에서 데리고 나갔다.
형조판서는 시각을 지체치 않고 곧 대내로 들어가 알현을 청했다.
"오늘 아침에 길에서 해괴한 일을 보았습니다. 감히 탑전에 아룁니다. 집현전
학사로 응교 벼슬 한 권채가 비자 덕금을 첩으로 삼았다가 사사로이 집에
구금하고 갖은 고문과 악형을 가해서 기지사경이 되었습니다. 전하께옵서
사랑하시는 집현전 학사의 일이오라 감히 형조에서 독단하지 못하고 처분을
기다립니다."
세종전하는 형조판서 노한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깜짝 놀랐다.
"권채는 집현전 학사로 그중 고참인 사람이요, 제일차로 사가독서까지 받은
사람이다. 지금 벼슬이 교리에서 한 등 올라서 정사품 응교가 된 사람이
아니냐? 평소에 매우 안상한 사람으로 알았는데 어찌 그같이 잔인무도한 짓을
했단 말이냐. 반드시 그 아내 정씨가 투기가 심해서 이런 흉포한 일을 저지른
모양이다. 아무리 집현전 학사라 하나 사람을 학대한 잔인무도한 자를 그대로
둘 수 없다. 곧 의금부로 넘겨서 엄하게 치죄하도록 하라."
세종전하는 크게 노했다. 당신이 신임하는 집현전 학사 중의 한 사람인
때문이다.
형조판서는 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권채 집 상노라는 떠꺼머리 총각과 비자
덕금을 금부로 넘기고, 정원에서는 금부 당상에게 권채와 그의 아내 정씨를
엄하게 문초하라는 전하의 특명을 전했다.
금부 당상은 곧 어명을 받들어 좌기를 차렸다.
금부 도사는 당상의 명을 받들어, 집현전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온 권채와
그의 아내 정씨를 금부로 잡아들였다.
권채는 금부 도사가 자기 집으로 나졸을 거느리고 잡으러 들어오는 것을 보자
크게 노했다.
"내가 누군데 도사 따위가 감히 나를 잡으러 들어오는가?"
호령이 추상 같았다.
"네, 훌륭하신 집현전 학사인 것을 다 알고 왔습니다. 그러나 어명이올시다.
상감의 분부시니 어찌하는 수가 없습니다."
상감의 분부라는 말에 권채의 얼굴빛은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글쎄, 그것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부인 정씨도 함께 들어 가셔야
하겠습니다. 금부에서는 두 분의 명예를 위하여 교자 두 채를 마련해 가지고
왔소이다."
아내까지 금부에서 데려간다는 말에, 권채는 비로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덕금의 일이 탄로난 줄 알았다.
어젯밤에 아내가 이불 속에서, 덕금이란 년이 다 죽게 되었으니 상노에게
분부해서 절에다가 맡겨두겠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상노놈이 덕금을 업고
가다가 길에서 금부 나졸이나, 사헌부 관원한테 들킨 것이라 생각했다.
권채는 기가 죽었다. 더 앙탈할 수 없었다.
새파랗게 질린 아내와 함께 교자를 타고 금부로 들어갔다.
의금부에서는 전하의 특명이었다.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총각과 덕금이며
권채 내외를 신문하기 시작했다.
권채 내외는 총각과 덕금을 보자 더한층 몸둘 곳을 몰랐다.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금부 당상은 권채를 향하여 준엄한 태도로 물었다.
"저 떠꺼머리 총각은 학사댁 상노라 하니 틀림없는가?"
"그러합니다."
권채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금부 당상은 다시 시선을 돌려 떠꺼머리 총각에게 묻는다.
"너는 어찌해서 이른 아침에 송장이 다 된 저 계집을 업고 어디로 가다가
형조판서 대감께 들켰느냐?"
"아씨의 분부를 받들어 승방으로 업고 가다가 길에서 들켰습니다."
"어찌해서 다 죽어가는 송장 같은 사람을 승방에 갖다두려 했느냐?"
"그것은 소인이 알 수 없는 일이올시다. 그저 상전께서 갖다두라 하시니
명령에 복종한 것뿐이올시다."
옆에 있던 권채와 그 아내 정씨는 비로소 상노놈이 덕금이를 업고 가다가
형조판서 노한의 눈에 띈 것을 알게 되었다.
권채의 마음은 죄어 짜지는 듯했다. 형조판서 노한은 강직하기로 유명한
재상이다.
벼슬하는 사람 중에 털끝만한 부정과 불륜한 일이 있다면 가차없이 엄벌에
처하는 표범같이 무서운 사람이었다. 권채는 마음 속으로 되게 걸렸구나 하고
개탄했다.
금부 당상은 다시 눈을 들어 덕금에게 묻는다.
"너는 권학사댁 비자였다 하니 틀림없느냐?"
"네, 그러합니다."
덕금은 아직도 쇠약했다. 기운 없이 대답했다.
금부 당상은 다시 권채를 향해 물었다.
"틀림없는 학사댁 비자죠?"
권채는 또다시 고개를 숙인 채,
"네---."
하고 대답했다.
"어찌해서 네가 그 꼴이 되어 다 죽게 되었느냐?"
덕금은 상전 권채와 부인 정씨가 있는 앞에서 대답하기가 난처했다.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아니했다.
"왜 대답이 없느냐?"
금부 당상의 목소리는 높았다. 덕금은 마음이 몹시 괴로운 모양이었다. 고개를
땅에 박고 몸을 틀었다. 여전히 대답이 없다.
금부 당상은 사을 치며 꾸짖는다.
"네가 토설을 아니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덕금은 마지못해 대답한다.
"쇤네는 이미 죽게 된 몸이올시다. 그저 죽여줍시오. 상전의 앞에서 어찌
상전의 허물을 말씀하오리까. 기왕 죽게 병든 몸이오니 속히 죽여줍시오."
덕금의 구슬프게 하소하는 소리에 금부 당상도 측은하게 생각했다.
"네가 상전 앞에서 상전의 허물을 말하기가 난처하다면 형조판서께서 너를
신문했던 원안이 금부로 넘어왔으니 내가 묻는 대로 대답하라---."
덕금은 다만 고개를 약간 끄덕일 뿐이었다.
금부 당상은 서리에게 명했다.
"형조에서 넘어온 신문한 원안을 가져왔느냐?"
"네, 준비해놓았습니다."
"이리 자져오너라."
서리는 형조에서 넘어온 원안을 당상 앞에 올렸다.
금부 당상은 형조에서 넘긴 신문한 원심을 살폈다.
금부 당상은 형조에서 보낸 신문한 서류를 한동안 살핀 후에 다시 덕금에게
물었다.
"너는 너의 상전 나리가 사가독서하라는 어명을 받들어 집에서 공부할 때
찬비가 되어 음식 시중과 침실 청소하는 책임을 맡았느냐?"
"그러합니다."
덕금이 모기 소리만큼 대답했다.
"어느날 밤에 나리께 몸을 바친 일도 사실이냐?"
덕금은 차마 대답을 못했다.
금부 당상은 엄숙한 얼굴로 이번엔 권채에게 묻는다.
"금부 당상은 상감의 명을 받들어 신문하는 것입니다. 만약 거짓말을 한다면
상감을 속이는 일이 됩니다. 권학사는 기군망상하는 죄를 저지르지 말고
대답하오. 덕금이 형조에서 공초한 말에 틀림이 있다면 말씀하시오."
기군망상을 해서는 아니된다는 금부 당상의 준엄한 말에 권채는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얼굴이 화끈 달았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부끄럽기 한량없습니다."
권채는 고개를 ㅍ 숙였다.
"부인께 들킨 일이 있었소이다그려."
"네."
권채의 고개는 더한층 수그러졌다.
금부 당상은 정씨한테 비로소 물었다.
"학사와 덕금의 사이를 안 후부터 부인은 덕금을 학대하기 시작했군요?"
정씨의 얼굴은 새빨갛게 홍조를 띠었다.
"바른 대로 말하시오."
금부 당상은 소리치며 책상을 쳤다.
정씨는 황겁했다.
"네---."
하고 대답했다.
"질투하는 마음이 불 일 듯 일었구려. 날마다 바늘로 항문을 찌르고, 살대를
목구멍에까지 넣어서 씹으라 한 일이 있었지요?"
정씨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권학사한테 모함을 해서 간부를 얻어가지고 달아나려 했다고
터무니없는 고자질을 했구려!"
정씨는 부끄러운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쳐 울었다.
금부 당상은 권채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당신은 판관 중에도 제일 가는 머드러기 판관이로구려! 덕금을 괴어서
몸까지 버려줄 때는 언제고, 안에서 바가지를 긁는다고 내외가 한자리에 앉아서
항문을 바늘로 찌르다니 말이 되오? 사람에게는 사람 대접을 해야지, 이러한
잔인무도한 짓이 있더란 말요? 글을 잘 해서 집현전 학사가 되고 벼슬이
청환으로 응교의 대접을 받는 것이 아깝소---."
금부 당상은 조롱하는 말씨로 권채를 꾸짖었다.
권채 내외는 입이 있으나 말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을 뿐이다.
금부 당상은 형리에게 명을 내렸다.
"위에 아뢰어 처결할 테니 권학사 내외와 상노며 비자를 하옥시키라. 한 곳에
가두지 말고 별간에 따로따로 가두라!"
금부 형리는 권채 등 네 사람을 하옥했다.
난생 처음으로 금부옥에 갇히게 된 권학사 내외는 신세가 처량했다. 인간을
잔인하게 학대한 죄를 뼈아프게 후회했다.
금부 당상은 형조판서와 의논했다.
"글자나 배운 집현전 학사로 비자의 몸을 결딴냈다면 당연히 첩으로 대우해서
집안을 화합하게 처리해야 할 것인데, 질투하는 야내한테 발목을 잡혀서 함께
악형을 가했으니 가통한 일입니다. 어찌 처결하는 것이 좋겠소?"
"나도 동감입니다. 선하심 후하심으로 아무리 비자라 하나 인간을 그같이 말라
죽도록 잔인하게 혹대할 수 있소? 비록 집현전 학사라 하나 그대로 불문에 부칠
수는 없소이다. 위에 아뢰고, 권채는 곤장 구십 도를 때리고, 그의 아내 정씨는
비록 여자라 하나 곤장 팔십 도를 때려서 뒤에 또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금부 당상과 형조판서는 곧 예궐을 했다. 정원 숭지와 함께 탑전에 아뢰었다.
"권채의 일 때문에 알현을 청했습니다."
"어찌 되었느냐? 자세히 신문을 했느냐?"
"형조에서 비자 덕금에게 받은 공초와 같이, 권채와 그의 아내 정씨는 비자
덕금을 여러 날 동안 밥도 주지 않고 바늘로 항문을 찌르고 쇠꼬챙이가 박힌
화살을 입 속에 넣어서 씹으라하여 말라 죽게 한 일을 다 시인했습니다."
세종전하는 말씀을 듣자 대로했다.
"사람이 어찌 사람을 그다지 잔인하게 사형할 수 있느냐. 권채란 자도 미친
자로구나! 비자의 몸을 더럽혔으면 당연히 첩을 삼을 것이지, 처음엔 감언이설로
여자의 몸을 결딴냈다가 아내한테 들켜서, 판관이 되어가지고, 함께 바늘찜질을
하고 밥을 아니 주어서 말려 죽게 했다니 말이 되느냐? 그래, 금부에서는 어찌
처결할 작정이냐?"
금부 당상이 아뢴다.
"금부에서는 권채에게 곤장 구십 도를 치고, 권의 아내 정씨는 비록 사대부 집
아내라 하나 인간을 너무 잔학하게 유린했습니다. 곤장 팔십 도를 쳐서 후일을
경계하려 합니다."
세종전하는 봉안을 치올리시며 크게 진노하셨다.
"권채는 내가 지극히 신임했던 학사다. 평소에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같이 제가를 해서 한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니 가증, 가악하다. 삭탈관직을
해서 벼슬을 뺏고 곤장 구십 도를 쳐서 멀리 원악도로 귀양을 보내라. 그리고
그의 아내 정씨는 금부에서 말한 대로 곤장을 친 후에 덕금을 첩으로 대우하여
한평생 말이 없게 하도록 하라. 만약 정녀가 이행치 않는 경우에는 다시 중벌을
면치 못한다고 일러라!"
전하의 분부는 추상 같았다.
정원 승지는 명을 받들었다. 대신의 동의를 얻어서 집현전 대제학에게 어명을
전달했다.
'집현전 응교 권채는 제가를 잘못해서 사비를 사랑했다가 질투하는 아내를
어거하지 못하고 아내와 함께 비자를 사형했을뿐 아니라 밥을 주지 아니하여
굶어 죽게 만들었다. 크게 집현전 학사의 명예를 손상시켰으니 가증 가통한
일이다. 삭탈관직을 해서 벼슬을 뺏고 곤장 구십 도를 때리라고 금부에 명했다.
모든 학사들은 다시는 이러한 아름답지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라!'
전하의 분부가 전달되니 집현전 학사들은 깜짝 놀랐다.
모두 다 눈을 둥그렇게 떴다.
"웬일인가? 권응교는 참한 사람인데 어찌 된 일인가?"
"비자를 사랑했다가 질투하는 아내를 어거하지 못하고 함께 사형을 했다 하니,
보기엔 그렇지 아니한 사람이 무척 공처증에 걸렸던 모양일세그려."
"도대체 어떻게 사형을 했다는 것인가?"
학사들은 궁금증이 났다.
"집현전 학사의 명예에 소관되는 일이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네. 금부에
대표를 보내서 물어보기로 하세."
집현전 학사들은 곧 대표를 뽑아서 금부로 보냈다.
덕금의 공초와 권채가 대답한 형안을 보고 돌아왔다. 모든 학사들에게
보고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아니하고 짐승 이하로 대했다 해서 전하께서 크게
노하신 모양일세."
"도대체 어떻게 대접했다는 것인가?"
"부리는 종년을 감언이설로 꾀어서 정조를 유린한 후에, 아내한테 들키자
아내와 함께 날마다 바늘로 항문을 찌르고 머리를 빡빡 깎은 후에 광에 가둬서
밥을 주지 아니하니 피골이 상접해서 기지사경이 되었다는 것일세."
모든 학사들은 일제히 눈살을 찌푸렸다. 의분을 느꼈다.
"아아, 잔인무도한지고. 어찌 글자나 배웠다는 점잖다는 사람이 그러한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나!"
모두 다 탄식했다.
"도대체 집 속에서 일어난 일을 전하께서 어떻게 아셨단 말인가?"
"종년이 다 죽게 되니 절에다 맡겨두라고 상노놈을 시켜서 홑이불을 씌워
보내는 것을 형조판서가 길에서 발견하고 곧 형조로 데리고 가서 문초한
모양일세."
학사들은 더한층 분개했다.
"전하께서는 삭탈관직을 하고 귀양을 보내라 하셨지만 우리들은 집현전 학사
명단에서 제명을 해버려야 하겠네. 만약 앞으로 귀양이 풀려서 다시 돌아오는
날 또다시 집현전으로 온다면 큰일일세. 집현전 학사의 파면 결의를 하세."
학사들은 일제히 찬성했다.
몇 해 후에 권채는 귀양이 풀리고 다시 서용이 되었다. 그러나 집현전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동부승지 벼슬을 하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전하의 특명으로 덕금은 첩의 대우를 받았고, 정씨는 다시는 질투하는 악착한
버릇을 못하게 되었다. 전하는 이같이 해서 인간의 존엄한 것을 만사람에게
알게 했다.
창설 단군사
세종대왕은 제례에 밝았다. 종묘대제와 사직대제를 지낸 후에 대제학
변계량을 어전에 불렀다.
"대제학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우리 나라의 삼한시조는 단군이다. 단군이
나라를 다스리던 그 시대에는 문자가 없어서 역사를 기록한 문헌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 '위서'에는 '2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단군왕검이란 분이
있는데,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와 같은 시대'라 하였고, 그 후에 고려
원종때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는 '초수개국계풍운 석제지손명단군.
병여제요흥무진 경우역하거중신. 어은호정팔을미 입아사달산위신'이란 시가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 때 일연선사가 저술한 '삼국유사'에는, '요가 즉위한 지
50년 되는 경인에, 도읍을 평양성에 정하고 비로소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
고 했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단군은 우리 나라를 개국한 첫째번 임금이다.
이분에 대해서 국가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다음 가는 제사를 받들어야 마땅할 줄
안다. 이러한 일은 온 겨레와 백성으로 하여금 자기의 근본을 알게 하고 국가를
사랑할 줄 아는 정신을 배양하는 길이다. 국가에서 사우를 창건하고 정식으로
제사지내는 절차를 마련하여, 국민의 정신을 진작시키는 것이 어떠한가?"
대제학 변계량은 전하의 말씀을 듣자 마음 속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갸륵하신 성지올시다. 국민이 조선의 연원을 모르고, 나라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을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예악과 문물이
전진되어 나갈수록 고대의 선인들의 소박하고 어질었던 인간의 발자취를 알아서
그 근본을 잊지말아야 할 것입니다. 겨레의 성장은 하루아침에 이룩된 것이
아닙니다. 항상 선조를 숭앙하는 마음을 국민의 가슴 속에 품게하여 겨레와
국가의 양양한 앞길을 발전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러하므로 소신은 일찍이
선대왕 시절에 단군께 제천의식을 드리자고 주장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대하는 썩은 선비들의 반대를 받아 실천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제천의식은 아니하신다 하더라도 정식으로 사우를 창설하신다면 소신은 두 손을
들어 찬성하겠습니다."
변계량의 아뢰는 제천의식이란 말에 전하는 귀가 번쩍 떠졌다.
"제천의식은 신라 때도 있었고 고려 때도 있던 것 아닌가?"
"어디, 신라 때뿐이오니까. 단군시대는 말할 나위도 없고 부여와 고구려며
신라 때도 다 있었던 일입니다. 더욱이 고려 왕건 태조는 팔관회에다가
관등까지 합쳐서 제천의식을 거행했으니, 말하자면 국민 전체가 모여서 단군께
제사를 지내고 나라의 융성을 축복하는 국민대회의 의식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삼한의 시조 단군을 받드는 한편, 불을 예찬하는 것을 겸한
제천의식이라 하겠습니다. 아조에 들어와서 사대와 척불로 인하여 제천의식이
사라졌습니다."
변계량의 아뢰는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세종전하는 제천에 대하여 관심이
컸다.
"요사이 유학만 숭상하는 선비들은, 하늘한테 제사드리는 행사는 천자의
나라에서만 받들 수 있다 하지 않는가?"
"모두 다 썩은 선비들의 좁은 소견이올시다. 첫째로 강대국인 명나라의 간섭이
두렵고, 둘째는 우리 겨레의 고유했던 신라의 화랑정신과 불교를 배척하면서
스스로 소중화라 자처하고 안일하게 소에 만족하는 때문이올시다. 선대왕
재세시에 소신은 고대의 제천의식을 부활하자는 상소를 올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조정에서는 소신을 선도와 불도에 아첨한다고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조롱하는 말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탄식할 일이었습니다."
전하는 미연히 웃으며 말씀한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경을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까지 있었던가? 하하하."
세종전하는 소리를 높여 웃었다. 대제학 변계량은 분개한 어조로 아뢴다.
"네, 바로 선대와 재위 16년 병신 유월의 일이었습니다. 그해에 일기가 몹시
가물었습니다. 석 달 동안이나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가물었는데, 곡식은 바싹
말라서 타버리고, 논과 밭은 거북등같이 갈라져서 민심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소신은 미관말직인 경승부윤으로 있었으니 감히 천안을 대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어서 상서로 제천하기를 주장했습니다. 그랬더니 당시
조정의 소위 대관들은 펄쩍들 뛰었습니다. 하늘한테 제를 드리는 일은 중국의
천자나 할 일이지 제후의 나라에서 참람하게 하늘에 감히 어찌 제사를 지낼 수
있느냐고 떠들어서 바로 소신이 역적이나 된 듯 꾸짖고 조롱들을 했습니다."
"주책없는 사람들이로군!"
전하 역시 개탄하는 빛을 용안에 띠었다.
"신이 그때 제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요점을 대강 들어 아뢰겠습니다.
단군은 우리 동방의 시조올시다. 하늘이 우리 동방에 탄생케 하신 분이요, 중국
천자가 땅을 떼어 분봉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하니 단군을 우리 나라 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헌상으로 보더라도 여요병입이라 했으니, 요임금이 우리
나라를 번방으로 정해서 제후가 된 것이 아니라,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따로 한 천지를 정해서 천자가 된 것이올시다. 이리해서 3천여 년의 역대를
가졌고, 그러하니 당연히 독립된 제천의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 고증은 진수
'삽국지', '위서'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다
시월제천의 국민대회를 거행했습니다. 하늘을 받들고 단군을 받을어 제사지낸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분봉된 나라가 아닙니다. 독립국가올시다. 어찌해서
제천을 못합니까."
세종대왕은 변계량의 말씀을 듣자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 빛을 보였다.
변계량이 다시 말을 계속해 아뢴다.
"가물 때 하늘에 제천을 해서 비를 빈다고 꼭 비가 내린다고 보장할 수는
없는 일이올시다. 그러나 집안이나 국가나 큰 걱정과 근심이 있을 때 맘을
바로해서 잘못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성심성의로 하늘과 조상께 비는 것은
인정이올시다. 수천 년 내려오던 제천을 왜 못합니까? 명나라가 무서워서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도 제후나라에서 제천한 예가 있습니다. 노라는
나라에서도 천자가 허락했다 해서 들 밖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우리는
당당하게 하늘과 단군께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변계량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러나 신은 또한 현실을 생각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제천을 못한다면
산천에라도 기우제를 지내자고 적극 주장했습니다. 선대왕 전하께서는 신의
상서를 보시고 감동이 되시어 팔도 감사와 수령에게 명하시어, 한량, 고로, 대소
양반들에 이르기까지 나라에 잘못이 있으면 바른말을 하고 단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라 했습니다. 그리고 전하 또한 산천과 사직에 납시어 비를
비셨습니다. 얼마 후에 과연 비가 줄기차게 내려서 민심이 희희낙락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상께서는 우리 나라의 시조 단군을 위하십시오!"
세종대왕은 변계량의 말을 듣자 용안에 화려한 웃음을 띠고 말씀을 내린다.
"우리 나라 민속에 시월이 되면 상달이라 해서 집집마다 고사를 하고 사대
이상 되는 조상의 묘사에서는 종중이 모여 시제를 지내지 않는가. 이것은 우리
겨레의 수천 년 내려오는 풍속이다. 모두 다 제천에서 흘러온 유풍이라 할
것이다.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것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의 조상을
경건하게 숭배하는 정신을 강하게 마음 안에 심어주어야 하겠다. 그리하여
단군의 사우를 국가에서 정식으로 받들 것을 마음 속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제
대제학의 의사가 나와 같아서 나의 뜻에 찬동하니 내 마음이 기쁘노라."
전하는 곧 예조판서를 부러 분부를 내렸다.
"국가에서 정식으로 단군께 제사를 봉행한 일이 있는가?"
"평양에 기자묘와 함께 단군묘가 있고, 황해도 구월산에 삼성사가 있다
하오나, 모두 다 토속으로 백성들이 모신다는 말씀을 들었을 뿐, 국가에서는
정식으로 제례를 정한 일이 없사옵니다."
전하는 용안에 약간 불쾌한 빛을 띠었다.
"국가의 예를 맡은 장관으로서 한 지방의 서민들의 생각만도 못하다면 말이
되는가. 경들은 도대체 무슨 예를 맡았다고 정경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
밤낮으로 사례니 육례니 하고 떠들어대면서, 나라의 첫 임금이요 백성의 시조인
단군에 대하여는 생각조차 하지 아니하니 딱한 일이 아닌가. 단군의 제사는
종묘와 사직의 다음 가는 중사로 법을 제정하고, 평양과 구월산에 관원을
보내서 현재 민간에서 받드는 사우나 사당이 있고 없는 것을 빨리 ㅣ살펴서
복명케 하라."
예조판서는 등에 진땀이 흘렀다.
"곧 관원을 내려보내서 살펴 올리겠습니다."
예조에서는 부랴부랴 평양과 구월산으로 관원이 내려갔다.
먼저 평양에 내려갔던 사온주부 정척이 상소를 올려 보고를 드렸다.
'평양에 당도해보니 단군의 위패는 기자사당 안에 모시었는데, 기자의 위패는
남향을 해서 정면에 있고, 단군의 위패는 동편에서 서향을 해 모시었습니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반드시 기자묘를 찾는 까닭에, 국가에서는 기자사당을
공자를 모신 문묘 동편에 세웠고, 그 후에 또 단군을 모시라 해서 이같이
주객이 전도되었습니다. 단군이 계신 후에 천여 년을 지나서 기자가 들어왔으니,
단군을 기자묘 안에 모시는 것이 불편합니다. 그리하옵고 위토까지 있어서
초하루와 보름에 삭제와 망제를 지내는데, 단군한테는 위답조차 없어서
수복이가 섭섭하게 생각해서 봄, 가을에 약주 한 잔만을 부어 올린다 합니다.
기자한테는 삭망제를 지내고 단군께는 같은 사당 안에서 춘추에 박주 한 잔만
올린다하니 미안하기 짝 없습니다.'
세종전하는 평양에서 보고를 올린 사온주부 정척의 상소를 보시고 크게
불만하게 생각했다.
곧 승지에게 명을 내려 삼정승과 예조판서며 대제학의 입시를 명했다.
모든 중신들은 무슨 일이 계신가 하고 급히 모여들었다.
전하는 사온주부 정척이 올린 상소문을 중신들 앞에 내놓고 말씀한다.
"국가에는 역대의 연원이 있고, 사가에는 조상이 있는 법이다. 국가의 역사와
연원을 국민이 모르게 되고 사사로운 집에서 아비와 어미와 할아비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 이것을 문명한 민족이라 할 수 있는가. 단군은 삼한의 시조다.
그대로 시조일 뿐 아니라, 조선이란 우리 나라를 처음으로 창설한 분이다.
종묘와 사직단에 대제를 모신 후에 과인은 문득 단군의 생각이 났다. 내가
어렸을 때에, 평양에 기자사당이 있고, 황해도 구월산에 단군의 사당이 있다
하는 말을 들었다. 지금 어떻게 형편이 되었나 하고 예조판서에게 명하여
사실해보라 했다. 평양에 갔던 사온주부 정척이 복명하는 글월을 올렸다. 경들은
정척의 상소문을 돌려서 보라---."
말씀을 마친 대왕의 용안은 엄숙했다. 모든 신하들은 정척의 상소문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먼저 입을 열어 아뢰는 사람이 없다.
"도대체 이같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사대사상에 후줄른하도록 휩쓸려졌으니,
나라 백성들의 정신이 건전할 수 있으며, 국가의 운명이 강대해질 수 있는가?
도대체 평양의 기자사당은 어느 때 세워졌다 하는가?"
한 사람 아는 사람이 없다.
"아마 고려 말년에 세워진 듯합니다."
한동안 뒤에 변계량이 겨우 대답했다.
세종전하는 봉안을 치켜떴다. 번쩍하는 광채가 대신들의 흐리멍텅한 눈을
쏘았다.
"단군은 이 나라를 창설한 분이요, 기자는 중국에 변란이 일어나서 국가의
형태가 바뀌니 몸을 피하여 우리 나라로 도피해 왔다가 이 땅에 교화를 편
분이다. 이러므로 단군시대를 고조선이라 하고, 기자시대를 후조선이라 한 것은
외국 역사에까지 다 실려 있는 바이다. 어찌해서 평양에 단군을 모시는데
기자사당 안에 모시게 했고, 모시는데도 기자의 위패는 정면을 해서 남향해
앉게 하고 단군의 위패는 모퉁이 동편에 앉혀서 서향을 하게 했으니, 이것은
기자가 주가 되고 단군은 종이 되었다. 이같이 무식하게 주객이 전도될 수
있는가? 그리고 기자의 위채한테는 위토가 있어서 초하루 보름에 삭망제를
지내고, 단군의 위패는 더부살이가 되어 기자사당 안에 모신 것도 미안한데, 옆
자리에 있는 기자는 삭제와 망제를 받아서 흠향하고, 옆에 있는 단군 위패는
촐촐히 굶고 있다가 수복이의 선심으로 봄, 가을에 막걸리 한 잔씩을 대접받게
되었다 하니 기막힐 일이다. 집안 어른은 곁방살이를 해서 굶기고, 손님은
정당에 살게 해서 진수성찬으로 공양하는 것이나 매일반의 일이다. 도대체
이따위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대왕은 자못 격분했다. 음성이 높았다. 계속해 말씀을 내린다.
"이것은 도대체 지나친 사대사상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의 얼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중국 사람들이 와서 기자사당을 찾는다고 해서 기자위패는 정당에
주석으로 모시고, 그보다 더 높은 단군은 곁으로 모시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제사까지 차별했다는 것은 조선 사람인 우리 겨레의 졸렬하고
비굴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과인은 결코 기자사당을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는 기자대로 정성스럽게 모시게 하고, 단군은
단군대로 경건하게 추모해야 할 것이다. 기자사당 외에 따로 단군사당을
창설해야 할 것이다. 경들의 의사는 어떠한가?"
대제학 변계량이 아뢴다.
"소신은 전번에도 아뢴 바와 같이, 단군을 중심으로하여 제천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옳다고 선대왕전하께 상서를 올려서 주장했던 사람이올시다. 단군의
사우를 평양에 따로 독립해서 모시고 구월산의 삼성사를 크게 중수하시어, 두
곳에 봉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평양은 단군이 태백산 아래에 강림하시어
홍익인간의 교화를 펴시던 곳이요, 구월산은 선화하신 곳이니 전대로 삼성사를
두시어 만백성에게 억만년이 가도록 국조의 성덕을 추모케 하옵소서."
전하는 대제학의 말씀을 들은 후에 모든 대신들을 둘러본다.
"대제학은 나의 뜻을 찬성하였거니와 다른 이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모든 신하들은 전하의 뜻이 이미 굳은 것을 알았다.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좋습니다. 평양에서는 단군위패를 기자사당에서 분리하시어 따로 사우를
건설하시고, 다음에 삼성사는 중수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찬성했다.
전하는 즉석에서 예조판서에게 분부했다.
"예판은 곧 단군위패를 기자사당에서 분리해서 따로 사당을 짓고 종묘와 사직
대사에 다음 가는 중사로 모시어, 마치 성균 문묘와 동등한 제천의식을
받들도록 하라. 그리고 만백성으로 하여금 단군이 국조이신 것을 확실히
머릿속에 넣게 하라."
예조판서가 봉명하자 대제학 변계량이 다시 아뢴다.
"황공한 말씀을 한 마디 더 아뢰겠습니다. 글자나 한다는 선비들이 도리어
자기 나라의 국조인 단군을 모르옵니다. 오늘날 그래도 단군을 존숭할 줄 알고
삼성사와 기자사당 안에 모신 단군위패에 절을 하고 제향을 올리는 사람은 모두
다 글을 읽지 아니한 아녀자와 무식한 백성들이올시다. 민간에서 아기를 낳으면
해산방에 반드시 미역국을 끓여서 삼신메를 올립니다. 삼신은 곧 삼성이십니다.
글한다는 선비와 벼슬이 높은 대관들은 단군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건만,
백성들은 모두 다 경건하게 나라의 조상을 받들고 있습니다. 수천 년 내려오는
민속이올시다."
변계량의 아뢰는 말이 떨어지가 우의정 유관이 아뢴다.
"황해도 문화현은 신의 고향이올시다. 젊었을 때 자주 내려가 부로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단군의 사정을 안 지 오래올시다. 구월산은 고을 주산인데,
단군조선시대에는 아사달이라 했다 합니다. '아사'는 '아침'의 옛말이요, '달'은
일월의 달이 아니라 양달 음달 하는 '벌'의 뜻이니, 아침해가 잘 비치는 벌판, 곧
한자로 변해서 조선이 되고, '아'의 음을 가진 아홉구자, 구월산으로 한자화가 된
것입니다. 신라 때 와서는 궐산이라 했습니다. '궐'의 음을 느리게 내면 또
구월산이 됩니다. 우리말이 한자로 변해서 이같이 번거롭게 되었습니다.
구월산은 웅장하고 커서 산줄기사 안악현까지 뻗어나갑니다. 고개 한마루,
산중턱에 신당이 있는데, 어느 때 세워졌는지 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 사당
북벽에는 환웅천왕을 모시고 동벽에는 환인천왕을 모시고 서벽에는 단군천왕을
모시어서 그곳 사람들은 이 사당을 삼성당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산아래 마을
이름도 성당리라고 부릅니다. 사당 안에는 새떼와 짐승들도 감히 들어가지
않는다 합니다. 그리고 큰 가뭄이 있을 때 백성들이 빌게 되면 반드시 단비가
내린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단군이 아사달에 들어와 신이
되었으니 단군이 만년에 도읍을 정하신 곳이 이 구월산 아래일 것이요, 또
문화현 동편에 장장이란 지명이 있는데 노인들은 그곳이 단군이 도읍했던
곳이라 합니다. 전하께서는 단군의 도읍한 곳을 더 한층 조사하시어 사당을
세우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전하를 모신 중신들의 의논이 분분할 때 정원에서 동부승지 한 사람이 상소를
받들고 들어왔다.
한성판부사 유사눌이 올린 글월이다.
"신이 세년가를 읽어보니 단군은 조선 시조입니다. 여기 의하여 고증한다면,
단군은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백악에 도읍했고, 무정 팔년 을미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했습니다. 지금 단군의 사당이 구월산인 아사달에
있으니, 어찌 증거가 없다 하겠습니까. 그리하옵고 구월산에 세운 단군의
삼성사는 고려 때 세워서 그 사우와 위판이 아직도 있습니다. 전하께서
단군사를 세우신다면 다른 곳에 세우지 마시고 이곳에 세우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유사눌은 바로 유관의 조카다.
전하는 상소를 보시고 여러 신하에게 돌려보이신 후에 하교하신다.
"평양은 옛 지명이 왕검성이요, 왕검은 곧 단군이다. 단군이 처음 백성을
다스려 도읍한 곳은 평양이요, 천여 년을 살았다는 것은 그의 자손들이
계승해서 나라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뒤에 기자가 은이 망한 후에 주의 신하
노릇을 하기 싫어서 우리 나라 평양으로 도피해 오니, 단군측에서는 아사달로
도읍을 옮긴 것이 분명하다. 평양에도 따로 단군의 사우를 모시게 하고, 문화
구월산 삼성사도 크게 중수하여 중사의 예로 모시게 하라!"
예조에서는 명을 받들어 평양에 단군사를 세우고, 문화현의 삼성사를 크게
중수하여 춘추로 제향을 받들었다.
자아의식
세종전하는 단군의 사우를 세우고 기자묘를 수리한 후에 대제학 변계량에게
명하여 기자묘 앞에 비문을 지어 세웠다.
며칠 후에 다시 예조에 명을 내렸다.
"과인이 일전에 단군의 사적을 고증하여, 평양 왕검성과 문화 아사달 삼성사에
봄 가을로 중사 대제를 올리도록 한 것은, 나라 백성들에게 스스로 자기를 알고,
자기 자신들의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가슴 속에 간직해서 앞으로 자기의
조국을 더욱 사랑해서 부강과 문명ㅇ르 누리게 하려는 데 그 근본 뜻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의 소위 공부했다는, 글자나 배웠다는 선비들은 제 나라
조상들이 어떻게 생겨난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남의 나라의 시조는
계보까지 소상하게 알고, 제 나라의 역사를 물어보면 한마디도 대답을 못하는
위인들이 남의 나라의 역사와 사적은 막힘 없이 줄줄 외어서 청산유수처럼
대답한다. 탄식할 만한 일이다. 이러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백 번 천 번 글을
읽는대야, 제 나라의 부강을 이룩하고 제 나라의 문명을 향상시킬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제 단군의 사우를 창설해 모신 것을 계기로하여, 역대 왕조의
시조묘를 창설하여 국가에서 봉안하고, 각기 사우를 수직하는 참봉을 두어서
춘춘대제를 봉행케 하라. 이것은 곧 어리석은 백성들에게까지 자기의 조상을
알게 하는 한편, 자기의 서 있는 땅을 굳건하게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다!"
예조에서는 하교를 받자 곧 대신과 대제학을 대동하고 탑전에 배알했다.
"하명하신 일은 그대로 봉행하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역대 왕가의 시조묘를
어느 곳에 세울지 일일이 하교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예조판서가 먼저 아뢰었다.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 후에 기자의 교화가 있었고, 다음에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이 정립해 있었던 것은 사기가 증명하는 바이다. 고구려 동명성왕은
평양에 도읍하였고, 신라 시조 혁거세는 지금 경주인 서라벌에 도읍을 정했고,
백제 온조왕은 남한산성 아래 처음 도읍을 정했으니, 각기 그 도읍했던 곳에
사당을 세워서, 단군을 봉안한 거와 같이 춘추대제를 중사의 예로 받드는 것이
온당하다."
"그러하오면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사당은 평양으로 모시겠습니다. 묘호를
어찌하오리까?"
전하는 잠시 생각하시다가 이내 말씀을 내린다.
"동명성왕의 묘호는 숭령전이라 하면 어떻겠는가?"
변계량이 아뢴다.
"국초에 태조대왕께서 고려 왕건 태조의 사당을 연천에 세우시고 묘호를
숭의전이라 하셨습니다. 동명성왕은 신령스런 분이니 숭령전이라고 명명하시는
것이 과연 좋을 듯합니다."
대제학의 말에 따라 모든 대신들도 '좋습니다'하고 찬동했다.
예조판서는 다시 아뢴다.
"그러하오면 다음엔 신라 시조의 묘호를 내려주시옵소서."
"신라의 건국은 서라벌이니 경주에 모시게 하라. 그리고 박혁거세 '불그내'
어른은 덕이 많은 분이다. 숭덕전이란 묘호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겠다."
모든 신하들이,
"좋습니다."
아뢰었다.
"다음엔 백제 온조왕의 묘호를 내려주십시오."
예조판서가 다시 고했다.
세종전하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이내 말씀을 내린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은 묘호를 숭령전이라고 정했고, 신라 시조
혁거세대왕의 묘호는 덕이 많다고 해서 숭덕전이라 했고, 고려 왕건 태조는
태조대왕께서 이미 숭의전이란 묘호를 내리셨다. 숭령, 숭덕, 숭의 등 좋은
글자를 다 골라놓고 보니 좋은 글자 생각이 얼른 나지 아니한다."
말씀을 마치자 세종전하는 껄걸 웃으셨다. 역대 시조들의 사당 세우는 일에
신하들이 까다롭게 이론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모두 다 찬동하니 마음이 흡족한
까닭이다.
대제학의 뒤에 있던 제학 정인지가 아뢴다.
"백제 시조 온조왕은 부여에서 겨우 시자 열 명인 십제를 거느리고 내려와서
백제를 이룩했으니 고생도 많이 했고 대단한 분입니다. 매울렬자를 넣어서
숭렬전이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세종전하는 무릎을 치며 칭찬했다.
"대단 좋다! 그럼, 백제 시조 온조왕의 묘호는 숭렬전으로 결정하라."
예조판서가 다시 아뢴다.
"고구려의 동명성왕과 신라의 박혁거세대왕은 도읍한 곳이 확실하니 평양과
경주에 세우겠습니다마는, 백제는 여러 번 천도를 했으니 어느 곳에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까?"
"경의 말이 옳다. 백제는 도읍을 하남위례성에 정했다가 광주 바람들이로
옮겼고, 또다시 공주를 거쳐 부여로 옮겼으니, 어느 곳에 사당을 세울지 충분한
고증을 두어 세우게 하고, 우선 동명성왕과 신라 시조의 사우를 곧 착수해서
건축하도록 하라."
예조판서가 다시 고한다.
"평양의 단군사우와 구월산 삼성사 이하 모든 사우에 국가에서 정식으로
위패를 봉안한다면 전하께서는 제문ㅇ르 올리셔야 하고 직제를 마련하여 관원을
임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분부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우가 완성이 된 후에는 과인이 승지를 보내서 제문을 읽게 하리라.
그리고 모든 사우에는 6품직인 영 한 사람과 9품직인 참봉 한 사람씩을 두어서
사우를 수호케 하고, 그 고을의 존위와 유생들은 제례 때마다 함빡 참사하여
크게 애조 애향하는 정신을 기르게 하라. 자기의 조상과 자기의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은 곧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요,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곧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먼저 조상을 추모해서 국풍을
진작케 하라."
평양의 단군사당과 동명성왕의 숭령전이며 구월산 삼성사와 경주
혁서세대왕의 숭덕전을 짓기 위하여 세종대왕의 특명을 받들고 일등 편수와
목수들이 장인들을 거느리고 세 곳으로 내려갔다.
지방마다 풍헌, 약정, 유림들을 위시하여 남녀노소의 백성들은 세종전하의
성덕을 기리는 소리가 높았다.
사당집은 일등 편수들의 솜씨로 완성되고, 기둥과 도리와 서까래의 울굿불긋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단청예술이 고을 사람들의 눈을 현란케 했다.
모든 사당이 준공되니 세종전하는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사당을
창설하여 중사로 받드는 제문을 지었다.
말할 것도 없이 세종대왕이 단군과 동명성왕과 신라 시조 혁거세대왕께
올리는 글월이다. 정중하고 경건했다.
전하는 승지 세 사람을 불러 엄숙사게 분부를 내렸다.
"너희들은 나를 대신해서 초헌관이 되어 제문을 올리는 것이다. 제각가 맡은
바 묘소에 내려가서 목욕재계하고 엄숙하게 제사를 올리라. 아헌관을 해도의
관찰사로 임명한다. 삼헌관은 유림과 부로 중에서 망중한 이를 택해서 거행토록
하라."
전하는, 제관으로 평양과 구월산이며 경주로 내려가는 세 사람의 승지들에게
일일이 분부를 내렸다.
승지들은 봉명하고 기구를 차려 내려갔다.
승지가 제문을 받들고 전하를 대신해서 내려가니, 평양과 경주와 구월산에는
관찰사와 군수가 마중을 나오고, 풍헌, 약정, 유림, 한량들이 구름 모이듯
모여들었다.
대제가 거행되는 날에는 한 고을 남녀노소들이 줄을 지어 새로 된 전각
앞으로 모여들었다.
전상에 삼현육각의 풍악이 청아한 음향을 흰구름 밖으로 날리고, 세종전하를
대신하여 현관제복을 입은 승지가 네 번 절하여 초헌을 올리니, 향연은 제단
위에 푸른 기운을 뿜고, 낭랑한 제문 읽는 소리에 단군과 동명왕이며 신라
시조는 감격하여 저를 들어 흠향하는 듯했다.
전각 위에 참사하는 제관들이나 전각밖에 모여서 참배하는 수천 군중들은
한맘 한뜻이 되어 조상을 받드는 경건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국가에서 사당을 새로 짓고, 영과 참봉을 두어 사우를 수직하고, 나라님이
친히 제문을 지어 칙사를 보내어 대제를 지내게 한 일은 왕조가 개국한 후에
처음되는 일이었다.
소문은 평안도, 경상도, 황해도 일대에 자자하게 퍼졌다. 서민들은 거리거리
주막마다 사랑방마다 만나고 모이기만 하면 대왕의 덕을 칭송했다.
"밝은 임금이 나오셨네. 나라가 잘될 것일세. 조상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에
어찌 행세를 하고 살 수가 있나. 우리 백성들이 초초하게 모시던 사당집을
나라에서 중사로, 종묘 다음 가게 모시게 됐으니, 조상들도 기뻐서 큰 복을
내리실 것일세."
"아무렴!"
고을마다 동네마다 백성들은 이같이 기뻐했다.
세종전하의 제문을 받들고 평양을 위시하여 문화 구월산 삼성사와 경주 신라
시조 숭덕전에 창설 대제를 마치고 돌아온 승지들은 어전에 나가 제례를
성대하게 마치고 돌아온 일을 일일이 복명했다.
"신라 시조 혁거세 어른의 숭덕전을 새로 모시고 중사 제례를 지내는 날, 경주
일판은 말할 것 없고 경상도 전지역에서 유림과 부로들을 위시하여 수만 수천의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어 경건하게 제사를 받들었습니다. 그리하옵고
온백성들은, 다시 신라 때 화랑정신이 솟구쳐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촌락마다,
밝은신 나라님을 모시었다고 기뻐들 하는 소리가 빗발치듯 했습니다."
경주로 내려갔던 승지의 아뢰는 말씀이 끝나니, 평양에 갔던 승지가 아뢴다.
"가자사당에서 새로 지은 단군사당으로 단군신위를 모시어 남향해 모시고
따로 제사를 받드니, 수천 수만의 백성들이 환호성을 올려 크게 기뻐들
했습니다. 뒤에 들어온 기자님이 주석이 되어 남향해서 앉았는데, 그분보다
천유여 년 전에 조선을 개국하신 단군할배께서 더부살이처럼 모로 앉아 계시니
항상 미안하고 불쾌스럽게 생각했다가, 이제 단군 할배의 사우를 따로 모시고
나라님이 칙사까지 보내서 대제를 올리시니 비로소 일이 바로잡혔다고 기뻐들
하면서 밤새도록 두레패를 모아 춤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즐거워했습니다.
그리하옵고 고구려 동명왕 사당을 신축한 숭령전 앞에서도 단군 할배의 다음
가는 할배의 사당이라 해서 제사를 지낸 후에도 백 리, 이백 리, 삼백 리 밖에서
남녀노소 백성들이 짚신감발로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사당 앞에 메를 올리고
절하는 사람 물결리 끊일 사이 없었습니다. 조상을 숭배하는 순진한 백성들의
모습이 눈물겨웠습니다."
평양으로 내려가 기자사당 안에서 단군위패를 분리해서 모시고 다시 고구려
동명성와 사당에 제사를 드리고 돌아온 제관의 복명이 끝나니, 구월산 삼성사에
칙명을 바들고 내려갔던 승지가 아뢴다.
"초라하고 보잘것없던 삼성사를 크게 이룩하여 주란화각이 산마루에 벽공을
어루만지며 솟아 있으니, 마치 천상옥경의 백옥루인 듯 성스럽게 보였습니다.
신위는 전대로 삼성을 모시었습니다. 이곳에 올라 배를 드리고 전하의 제문을
읽으니, 삼신이 미소하시며 흠향하시는 듯했습니다. 과연 성역이요, 신기가 도는
듯한 절경이었습니다. 첩첩한 청산은 구름밖에 둘려 있고, 옥야천리는 눈 아래
트여서 옛날 장당경의 서울이 방불하게 눈앞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서당리
백성들을 위시하여 문화, 안악 먼 곳에서 남녀노소들이 연락부절 모여들어서
정성껏 참배를 하고 단군 할배를 불러 추모하는 정성이 대단했습니다.
그리하옵고 산 아래 모여 사는 가난한 백성들이 시월 상달이면 소를 잡고
돼지를 잡아서 제를 지내던 삼성사에 나라님이 크게 사우를 중수하시고 큰
제사를 춘추로 지내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다고 고마워들 하는 소리가
대단했습니다."
전하는 모든 승지들의 아뢰는 말씀을 조용히 들었다. 만족해하는 미소가
입가에 은은히 서렸다.
세종전하는 역대왕조의 시조묘를 세워 춘추제향을 받들게 한 후에 다시
호조판서와 예조판서를 불렀다.
"일전에 단군 이하 각 왕조 시조왕의 사우를 지어, 춘추로 절사를 받들게 한
후에 과인의 마음은 심히 흡족하다. 문명과 문화는 하루하침에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예절과 행동과 학식이 수천 수백 년 동나 발전되고 쌓여서
비로소 이룩되는 것이다. 지나간 시대의 모든 사적과 문물을 끊임없이 잘
보존해서 옛것을 돌이켜보면서 새로운 새시대를 형성하는 것이 우리들
살아나가는 사람의 임무요 책임이다. 흔히들 왕조가 바뀌고 역성이 되면
전시대의 유적과 문물은 돌보지 않는 것이 역대의 폐풍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태백의 시에도 '오궁화초매유경 진대의관성고구'란 시가 있다. 이래서는
아니된다. 다 없어진다면 어찌하나? 무엇을 가지고 문화와 전통이 있는
겨레라고 증명할 것인가? 나도 항상 숭배하는 분이지만 여조 때 유신
원천석이란 분도 이러한 시조를 읊었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에 붙였으니 석양에 지나는 손이 눈물겨워하노라.' 이래서는
아니된다. 비록 왕조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만월대는 깨끗이 보존돼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인들이 문명을 쌓아놓았던 유적인 때문, 우리는 이렇나
유적들을 꼭 보존해야만 한다. 오늘 내가 호판과 예판을 불러서 묻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평안도 일대에는 고구려의 유적인 고분이 얼마나 있으며, 개성에는
고려 시조 아하 왕릉이 몇이나 님아 있으며, 서라벌 일대에는 왕릉이 몇 기나
보존되어 있는가? 아는 대로 대강 대답해보라."
돌연 전하의 부름을 받아 입궐한 호조판서는 평양과 송도며 경주에 왕릉이
있고 없는 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벼슬이 판서라는 높고 높은 장관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꿈에라도 한 번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다.
판서들은 등에 진땀이 흘렀다. 서로들 얼굴만 물끄럼말끄럼 바라보고 있을 뿐,
입을 벌려 아뢰지 못했다.
전하는 한동안 두 신하의 태도를 바라보다가 음성을 높여 껄껄 웃으셨다.
"도대체 나라의 중책을 맡은 정경들이 제 나라 제 땅에 어떠한 유물과
유적들이 있는지 알지 못하니 장차 나라를 어찌 다스린단 말인가? 하, 하, 하.
딱한 일이로다!"
호조판서와 예조판서는 더욱 몸둘 곳을 몰랐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번엔 망건편자에까지 진땀이 송골송골 솟아올랐다.
전하는 다시 미소를 짓고 말씀을 내린다.
"경들만 나무라고 탓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ㄹ 교육이 글렀다. 내 역사를
가르치지 아니하고 내 나라 지리를 배우지 아니했으니 알 도리가 있는가.
경들을 꾸짖지 않는다. 그러나 곧 사람을 각처로 보내서 선대의 왕릉들을
조사해 올리라!"
호조판서는 전하의 특명을 받들어 정랑 좌랑들을 평안도와 경상도며 개성부에
급파해서, 관찰사와 부사며 군수들에게 어명을 전했다.
유적과 고분과 능묘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고관대작들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났다. 토호질이나 쳐서 백성들의 등을 쳐먹고, 기생수청이나 들여서 주지육림
속에서 만날 호강으로 세월을 보내던 감사, 부사들이었다. 글자는 배웠다 해도
제 나라 사기에 관심이 없었고, 제 나라 지리를 알아본 적이 없으니, 동명성왕의
능묘가 어디 있고 주몽이 누구의 이름인지 알지 못하도록 무식했다. 별안간
알아들이라는 어명이 내리니 당황했다. 감사와 부사들은 급히 이방과 호방을
불렀다.
"조정에서 전하의 특명을 받들고 호조정랑이 내려와서 옛날 고분과 능묘를
사실해 올리라 하니 급히 조사해서 바치도록 하라. 원래 나는 서울서 부임해
왔으니 이곳 유적을 알 까닭이 없구나. 너희들은 이곳에서 누대 생장한
사람들이니 이곳 형편ㅇ르 샅샅이 잘 알 것이다. 빨리 사실해서 유루가 없도록
하라."
아전인 이방과 호방도 제가 생장한 고향이지만 역시 유적에 대해서는
등한했다.
"소인들 역시 소상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부로한테 물어서 대답해
아뢰겠습니다."
아전들은 황황하게 노인들을 찾아서 지방의 유적과 능묘를 묻고 찾았다. 과연
세종전하께서 말씀한 대로 이태백의 시 그대로다. 옛 능묘들은 모두 다 고구가
되어버렸다. 무식한 농부들이 무너진 궁궐터와 무덤 위에 밭을 갈아버렸다. 모두
다 보리밭이 되고 밀밭이 되고 천수답 다랑이논이 되어버렸다. 남아 있는 몇 곳
아니되는 능묘도 황폐하기 짝이 없었다. 원천석의 시대로 무성한 추초뿐이다.
어떠한 유적인지 누구의 능묘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방과 호방은 노인들에게 물어서 겨우 아는 곳만을 감사와 부사한테 고해
바쳤다.
각도의 지방장관들은 조사된 대로 호조와 예조에 보고를 올렸다.
평안감사한테서 장계가 들어왔다.
'평양에서 동북편으로 30리가량 가면 대성산이란 산이 있습니다. 이 산 남쪽에
고구려 왕궁터라고 전하는 안학궁지가 있고, 여기서 동편과 서편에 천수백 기의
석총과 토분이 무수하게 있습니다. 또 순천과 용강이며 운산, 위원, 그리고
황해도 봉산에도 무덤이 황폐하게 흩어져 있는데, 모두 다 고구려 시대의
고분들이올시다. 그리하옵고 평안도 강서 삼모리에 있는 옛 무덤 현실에 그린
벽화 청룡 백호도는 그 웅건한 필치가 천하일품이옵고, 진지동에 있는 쌍영총의
인물도는 말과 소와 수레의 그림과 함께 그 섬세하고 정교한 필치가 감탄케 할
뿐 아니라, 당시 고구려 때 풍속을 완연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무덤이
누구의 무덤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하옵고 광개토왕의 왕릉이
만주 집안현 통구 동편 토구자 산허리에 있고, 산 아래에는 유명한 광개토왕
비가 있다 하옵는 바, 가보지 못하와 죄송스럽습니다.'
호조와 예조에서는 급히 평안감사의 장계를 전하께 올렸다.
세종전하는 장계를 보자 탄식했다.
"역대 제왕들이 너무나 무관심하고 소홀했다. 이 모든 수천 수백의 선인들의
유적이 그대로 잘 보관되어 누구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도움이
되었으랴! 그리고 광개토왕의 능묘와 비석은 멀리 있으나 집안현 통구에 자
보존되어 있다 하니 기쁜 일이다. 요동진관에 글월을 보내서 적극 보호해
달라고 공문을 띄워라. 그리고 강서의 고분과 벽화는 평안도백이 책임을 지고
잘 보관하도록 하라!"
호조판서와 예조판서는 명을 받들었다.
선인의 유적에 대한 보고는 계속해서 들어왔다. 경상감사가 장계를 올렸다.
'신라시대의 옛 무덤은 옛 도성이었던 경주 부근에 무려 수만 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구, 양산, 선산 등지에도 많이 있습니다. 신라의 고분은 시대의 변천과
문화가 전진되는 데 따라서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고대로 올라가면
단순한 구분으로 이룩되었고, 통일시대 이후로 내려오면 분묘 후면에 호석을
두고 석난간 석상 등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좀더 높은 분의 분묘에는 망주석과 문무석인이며, 석사자와 혼유석,
장명 등을 배치하고 아름다운 조각으로 돌난간을 둘러서, 그 의식이 자못
장려합니다. 여기 또 비석과 비각이 있어서 누구의 능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보존되어 있는 능은 성덕, 경덕, 헌덕, 흥덕왕들과 그 위로
올라가서 태종무열왕, 문무대왕의 괘릉이 장엄하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전하는 경상감사가 올린 장계를 받아 읽은 후에 용안에 가득히 웃음이
떠돌았다.
장계를 받들고 들어온 승지와 판서들에게 말씀을 내린다.
"신라 옛 도읍 경주에는 그래도 누대 왕릉이 보존되어 있구나! 비석이
보존되어 있고 능침이 남아 있는 것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까닭으로
이같이 유지된 것이다. 감사와 경주부에 교서를 내려서 현재 남아 있는 왕릉을
적극 수호케 하고, 이름 없는 구릉과 같은 큰 무덤도 농민들이 함부로 밭을
일궈 훼손하지 못하도록 하라!"
승지와 판서들이 명을 받들고 있을 때, 정원에서 동부승지 한 사람이 또 한
벌의 장계를 받들고 들어왔다. 개성부에서 올린 장계다.
'고려 왕건 태조와 왕비 유씨를 합장해 모신 현릉이 개성 중서면 곡령리에
있습니다. '고려사' 세가편에도 실려 있습니다마는, 태조의 유명을 받들어 중국
한 위의 능제를 참고하여 화려장엄하게 조성되었다 합니다.'
전하는 개성부의 장계를 여기까지 읽자, 고려 태조의 능침이 한과 위의
능침제도를 참고했다는 말에 감탄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전하는 좌우 시신을 둘러보며 말씀을 내린다.
"왕건 태조는 과연 대단한 분이로다! 자주독립의 의식이 뚜렷한 분야. 외세를
빌리지 아니하고 국가를 통일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천자가 되어 천수원년이란
연호를 쓰고 제천의식을 단행했으며, 단연코 자신을 가리켜 짐이라 일컫고,
교지를 조서라 하고, 자기가 죽은 후에도 능침은 중국의 황제의 능침과 똑같이
하라 했으니, 이러한 자주정신이 고려 국민에게 끼친 영향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연호를 마음대로 못쓰고, 짐 소리를 못하면서 과인이라 하고, 조서라고
못하고 교지라고 하는 내 신세가 딱하다. 어깨가 좁아지는 듯하구나! 어찌하면
외세에서 벗어나서 황제라고 할 수 있는가!"
전하는 땅이 꺼지도록 길게 탄식하는 한숨을 지었다.
눈에 울분한 기운이 가득했다. 모든 시신들은 감히 고개를 들어 대답을
아뢰지 못한다.
전하는 길게 한숨을 쉰 후에 다시 개성부에서 올ㄹ니 장계를 계속해 읽는다.
'그리하옵고 혜종의 순릉은 개성 지하동에 있고, 다음 정종의 안릉은 청교면에
있고, 광종의 헌릉은 잠남면 되넘이고개에 있고, 경종의 영릉은 진봉면 숫골에
있고, 성종의 강릉은 청교면 강릉골에 있고, 현종의 선릉은 곡령리 능골에 있고,
문종의 경릉은 장단에 있고, 순종의 성릉은 상도면 풍천리에 있고, 숙종의
영릉은 장단 진서면 판문리에 있고, 예종의 유릉은 역시 청교면에 있고, 고종의
홍릉은 강화에 있고, 원종의 소릉은 영남면에 있고, 충목왕의 명릉은 중서면
여릉리에 있고, 공민왕의 현릉과 노국공주의 정릉은 쌍분으로 되어 중서면 여리
정릉골에 있고, 고려 태조한테 항복했던 신라 경순왕의 능은 장단 고랑포에
있습니다. 그리하옵고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쌍릉은 화려장엄하여 왕건 태조의
현릉과 함께 고려 능침의 쌍벽이라 하겠습니다. 장명등, 망주석, 문무석 외에
석호, 석양을 배치하고 석난간으로 토분을 둘러서 아름다운 극치를 이루었고,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가 분명한 장풍향양한 대지올시다.'
전하는 개성부에서 올린 장계를 다 읽은 후에 개성부윤의 주밀한 조사에
흡족했다.
승지와 판서들에게 분부했다.
"신라와 고려에 나타나 있는 왕릉은 호조와 예조에서 관장하고, 감사와 군수로
항상 살펴서 절대로 훼손되는 일이 없게 하라. 모두 다 연면히 계승되는 나라의
문화인 것을 주의하라---."
판서들은 명을 받들었다.
고려사 문제 세종전하는 역사에 대하여 관심이 컸다. 정치의 득실과 제왕
의 규범을 알기 의하여 '서경', '시경'으로부터 사마천의 '사기'와 '춘추좌전'이며 '
주자강목'과 '자치통감'을 탐독했다. 우리 나라에 관한 사승으로도, 김부식의 '삼
국사기'와 일연 대사의 '삼국유사'에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이규보의 '동명왕편',
이제현의 '사략'과 이색의 '금경록'을 읽었다. 그러나 '고려사'가 아직도 완전하게
편성되지 못한 것을 항상 마음으로 개탄했다. 전하는, 개국이래 단군을 위시하
여 역대 왕조의 시조묘를 창설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능묘를 일신 보수하여
문화의 연원을 정리한 후에 전조인 고려의 역사를 완전하게 편성할 것을 결심했
다. 전하는 어느 날 경연에서 학문의 강독이 끝난 후에 여러 경연관을 향하여
하문했다. "우리 나라에 '삼국사'는 있지만 전조인 고려에 대하여는 익재 이제현
의 '사략'과 목은 이색의 '금경록'이 있으나 너무나 간략하다. 내가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 '고려사'는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경연관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나라의 역사와 실록 편찬을 관장하고 있는 지춘추관사 변계량이 아
뢴다. 이때, 변계량은 집현전 대제학도 겸하고 있었다. "'고려사'는 한 번 편찬이
된 일이 있었습니다. 태조대왕 4년 때일 이올시다. 당시에 판삼사 정도전과 정당
문학 정총이 '고려사'를 편찬해서 태조대왕께서 크게 찬양하시고, 정도전에게는
백금 일정에 채단 한 필과 명주 한 필에 어구마 한 필을 내리시고, 정총에게는
은 오십 냥에다가 어구마와 명주 한 필까지 내리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
이 있었던가? 태조대왕 4년이면 과인이 세상에 나오기 바로 2년 전의 일이로구
먼. 그렇다면 어찌 아직껏 책이 되지 아니했는가?" 변계량이 다시 아뢴다. "그
후에 선대왕 태종 14년에 선대왕께서는 정도전과 정총이 편수한 '고려사' 초본을
보시고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어찌해서?" "정도전은 공민왕 이후의 일을 여
러 군데 틀리게 기록했습니다. 그리하옵고 자기 아버지는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열전에다가 굉장한 인물로 기록해놨습니다. 태종께서는, 그때 일은 누구보다도
태종께서 잘 아시는 일인데, 역사를 이같이 잘못 기록해놓는다면 큰일이라 하시
고, 당시의 재상이었던 하윤과 지춘추관사 한상교와 소신에게 명하시어 '고려사
'를 다시 편찬하라 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벌써 여러 해 전 일인데 어찌해
서 끝을 내지 못했는가?" "하윤은 선대왕전하의 하교를 받들고 이제현의 '사략
'과 이색의 '금경록'을 대본으로 하여 소신과 한상교와 세 사람이 원고를 3분하
여 수정하던 중에 하정승이 그만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중단이 되었
습니다." 세종전하는 변계량의 아뢰는 말을 듣자 용안에 적이 불쾌한 빛이 떠돌
았다. "하정승이 작고했다 해서 역사를 편찬하던 일을 중단했다 하니 말이 되는
소린가. 한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 해도 두 사람은 살아 있지 아니한가? 사관들
이 모여 있는 춘추관이 엄연히 있는 이상, 어찌해서 일을 계속하지 아니했단 말
인가. 만약에 과인이 묻지 아니했더라면 '고려사'는 영영 편찬이 되지 아니할 것
아닌가? 하정승이 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여러 해가 되지 않았는가. 대신 편수
할 사람을 어찌해서 임명치 아니했던가? 너무나 태만하구려!" 대왕의 옥음은
높았다. 변계량은 송구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황공무지하오이다. 변명 같사오
나, 본조의 사실이 아니고 지나간 전조의 일이오라 소신들이 자의로 붓을 대기
어려워 아직 완성이 되지못했습니다." 전하는 여전히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황공무지하오이다." 변계량은 얼굴이 붉어지며 연해 '황공무지' 소리를 되풀이
할 뿐이었다. "경연이 파한 후에 춘추관에 기별하여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사'와
하윤이 주재했다는 '고려사' 초본을 편전으로 들여보내오!" 세종은 말씀을 마치
자 자리에서 일어나 내전으로 들었다. 모든 경연관과 지춘추관사 변계량은 황
황망망 어찌할지 몰랐다. 변계량은 곧 춘추관으로 나가 정도전이 태조 때 편찬
했던 '고려사' 초본과 태종 때 하윤, 변계량, 한상교가 편수하다가 중단한 초본을
받들고 춘추관 편수관들과 함께 편전으로 들어가 배알을 청했다. 편수관인 정초,
윤회, 정인지, 이석형의 얼굴도 보였다. 변계량이 사관들을 대표하여 아뢴다.
"정도전의 '고려사'초본과 하윤이 죽음으로써 중단되었던 초본을 올립니다."
전하께 올린 두 종류의 초본은 무려 수십 책이었다. 전하는 모든 사관들에게
명했다. "모두들 앉으라. '고려사'는 내가 생존해 있는 동안 기어코 완성해야
하겠다. 오늘부터 경들은 나와 함께 사관을 확실하게 세워서 이 크나큰 사업을
완성해야 할 것이다. 내가 공부하던 익재 이제현의 '사략'과 목은 이색의
'금경록'을려 대조해서 경들에게 물어볼 터이니 경들은 기탄없이 대답하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문갑 속에서 책 두 권을 꺼내놓았다. 모두들 바라보니
과연 '사략'과 '금경록'이다. 사관들은 대왕의 박람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하는 차근차근 손수 책을 들어 어전에 쌓아놓았다. 사관들은 황송했다.
전하의 쌓아놓는 책을 바로잡으려 했다. 전하는 손을 저어 막았다. "책을 보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사관들은 마음 속으로 또 한 번 놀랐다. 전하는 먼저
이제현의 '사략'을 폈다. 다음, 정도전이 편수했다는 '고려사' 초본을 펴놓았다.
다음, 하윤과 변계량이 태종의 명을 받들어 편수에 착수했다가 중단되었다는
초본을 펴놓았다. 한동안 말씀 없이 세 가지 종류의 사본을 비교해보았다.
시신들이 둘러앉은 편전 안은 근엄한 침묵 속에 빠졌다. 가끔 가끔 전하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누구 한 사람 기침하는 소리조차 없었다.
한동안 후에 전하는 책에서 눈을 돌려 사관들을 둘러보고 말씀한다. "고려의
왕건 태조가 천자만이 쓸 수 있는 연호를 써서 천수라 하고, 고려를 개국한
벽두부터 천자라야 하늘에 지내는 제천의식을 거행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가?"
변계량이 대답한다. "네, 그러하옵니다." "고려 때 이제현과 이색 두 문호가
기록해 논 '사략'과 '금경록'에도 그같이 씌어 있구먼!" "네, 그러합니다."
이번에는 정초가 대답했다. "폐하라는 말은 천자에게만 한해서 쓰는 말이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제후는 전하라는 말을 쓰고, 큰 나라의 천자, 곧
황제만이 폐하라는 존칭을 받습니다." 이번엔 윤회가 대답했다. "짐과 과인은
어떻게 다르고, 조서와 칙어며 교서 또는 교지는 어찌 구별되는가?" 전하는
알면서도 일부러 묻는다. 신하들은 '아시는 일을 왜 물으십니까?' 하고 아뢸
수도 없었다. "황제가 내리는 글월을 조서라 하옵고, 말씀을 칙어라 합니다.
제후가 내리는 글월을 교서 또는 교지, 하교라 하는 것이 전례올시다." 이번엔
이석형이 대답했다. 전하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묻는다. "여러
사관들이 마침 한 자리에 모여 있으니 내가 묻는다. 나라의 역사를 뒷세상
사람들이 쓸 때 자기의 형편대로 적당하게 뜯어고쳐서 거짓말로 꾸며놔도
좋은가?" 늙고 젊은 사관들은 전하의 물으시는 저의가 어느 곳에 있는지
알길이 없었다. 서로들 얼굴을 보면서 얼른 대답을 올리지 못한다. "왜 대답이
없는가?" 재촉이 내렸다. 그러나 조마조마해서 모두들 입만 달싹거렸다. 말이
나올 듯하다가 대답을 못한다. 대왕은 용안에 근엄한 빛을 띠고 세 번째
재촉한다. "사관들이 사기를 쓰는데 사실이 틀리게 써도 관계치 않은가 하고
물었다. 대답하기가 어찌 그리 어려운가? 속히 말해보라." 지춘추관사로 있는
늙은 재상 변계량이 아니 대답할 도리가 없었다. "사관이 역사를 다루는데 어찌
사실과 틀리게 쓸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변계량의 대답이 떨어지자 정초가 아뢴다. "역사는 직필을 하는 것이올시다.
그러기에 춘추필법이라 합니다. 이 까닭에 저희들 사관들이 일하고 있는 곳도
춘추관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경들은 어찌 사실을 쓰지 않고 역사를 함부로
뜯어고쳤는가?" 대왕의 용안에 불쾌한 빛이 떠돌았다. 변계량, 정초, 윤회 이하
모든 젊은 사관들의 얼굴빛이 당황하게 변했다. 모두들 '억울한 말씀을
내리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번계량이 아뢴다. "절대로 그럴 리 없습니다.
전하께 다짐두고 말씀합니다. 저희들 사관은 곡필해서 사기를 편찬한 일이
없습니다." 전하는 이제현의 '사략'과 정도전의 '고려사' 초본을 사관들 앞에
펴놓았다. "자아, 보라. 왕건 태조는 어느 나라로부터도 제재를 받지 않는
고려국 천자로 자처하였다. 그리하여 연호도 천수 원년, 곧 하늘이 준 원년이라
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짐이라 했다. 그러므로 신하들은 그를 폐하라 하고,
그가 내린 글월을 조서라 하고, 그라 말씀한 말을 칙어라 하고, 그라 보내는
사람을 칙사라 했다. 그러나 정도전의 '고려사' 초본에서는 폐하를 전하로
고치고, 조서를 교서라 했으니, 이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아니하고 틀리게
쓴 것이 아니고 무었인가?" 사관들은 비로소 전하의 물으시는 저의를 알았다.
"그것은, 정도전이 명의 간섭이 있을까 두려워서 폐하의 칭호를 전하로 고치고
조서를 교지라 했습니다." 전하는, 태종 때 하윤이 변계량 등과 다시 '고려사'를
편찬하다가 하윤이 죽은 때문에 중단했다는 초본을 변계량 앞에 펴놓고
말씀한다. "정도전은 명에 아첨하기 위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적지
아니했거니와, 경은 어찌해서 다시 '고려사'를 하윤과 함께 편찬할 때 정도전의
본을 떠서 폐하를 전하라 하고 조서란 말을 교지라고 썼는가?" 변계량은 아니
대답할 도리가 없었다. "당시 하윤과 함께 선대왕 태종전하께 아뢰고 한
일이올시다. 역시 명나라에서 말이 있을까 하여 그같이 쓴 것이올시다."
세종전하는 길게 한숨을 짓고 탄식했다. "경들이 폐하를 전하로 고쳐서 쓰고
조서를 교리라 쓴 것을 결국 역사를 뒤엎어서 삐뚤어지게 쓴 것이 아닌가?
당시의 사실을 사실대로 쓰면 족한 것이다. 명나라 사람이 천백 번 트집을 한다
하더라도 그때 그 현실은 거짓이 아니요 사실이었던 것을 그 사람들도 잘 알
것이다. 저편에서 말도 아니했는데 이편에서 미리 지레 짐작으로 겁을 집어먹고
그같이 썼으니 과연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저 사람들도 그때 형편을 잘
알고 있다. 더구나 사필을 맡은 사람이 사실대로 적는 일은 저 나라에도 있는
일이다. 경들은 이러고도 춘추필법으로 사필을 잡았다 할 것인가?" 전하는
근엄했던 용안이 탁 풀어지면서 옥음을 높여 껄껄 웃었다. 흉악해서 웃는
웃음소리가 아니다. 사관들을 야유하는 웃음소리다. 이내 말씀을 계속한다.
"경들은 아까 무어라고 말했는가. 사관은 춘추필법으로 사실대로 쓰는 때문에
절대로 거짓말이나 곡필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아니했는가. 그래서 사관들이
일하고 있는 집도 춘추관이라 했다고 뽐내지 아니했는가. 그렇다면 그대들은
어찌해서 폐하를 전하라고 맘대로 고쳐 쓰고, 저서를 교지라고 바꿔 썼는가.
어찌 이것을 정사라고 할 수 있는가. 경들은 죽은 뒤라도 저승에서 후세
자손들을 무슨 낯으로 대할 터인가?" 사관들은 꼼짝달싹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전하는 말씀을 계속한다. "경들은 명이 간섭할까 두려워서 역사를 고쳐 썼다고
변명하지만, 지나친 사대병에 걸려 있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고려 때는,
몽고군이 쳐들어오기 이전 원종 때까지는 당당한 천자의 나라였다. 시호도 전부
조와 종이라 했던 것이다. 다만 왕이라 한 것은 충렬왕 이후의 일이다. 명나라
조정에서 혹시 탄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했다면 그만
아닌가.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이 역사라는 것은 그 사람들도 잘 알
것이다. 왜 지레 겁을 집어먹고 이따위 비겁한 짓을 했느냐 말이다. 그래도
경들은 남을 대해서 춘추필법으로 글을 쓰는 사관이라고 얼굴판을 들고 뽐낼
터인가?" 사관들은 고개를 숙이고 한 마디 말씀을 못한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나는 일전에, 경들이 수록하는 '태종실록'을 좀 보고 싶었다. 내
아버님의 정치하셨던 일을 쓴 것이 좀 보고 싶었다. 이것은 사람의 상정이다.
결코 내 아버님의 일을 잘 써달라고 부탁하려고 보려 한 것이 아니다. 또 우리
아버님의 욕을 썼다면 사관들에게 벌을 주려고 실록을 보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춘추관에서는 응하지 아니했다. 두 번, 세 번 청해도 말을
아니 들었다. 나중에는 노재상 맹사성이 나를 간했다. 임금이 실록을 보게 되면
사관들이 바르게 직필 할 수 없습니다 했다. 나는 그만 감복했다. 그랬는데 이제
경들은 '고려사'를 이 모양으로 써서 엉망진창을 만들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항상 용안에 화창한 기색을 잃지 아니했던 전하는 싸늘한 바람이
눈썹 사이로 이는 듯했다. "춘추관에서는 '고려사'를 다시 개수해서, 그때 그
당시 그 사실대로 기록하라. 제학 정인지는 책임을 지고 편수를 지도하라!"
명을 내렸다. 정인지는 두 번 절하고 분부를 받들었다. "미욱한 신에게
'고려사'를 다시 편수하랍시는 중임을 맡기시니, 한편으로 영예롭고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거운 것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모든 사관들과 함께 진심갈력해서
대임을 완수하겠습니다." 전하의 용안은 차차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경은
나하고 자치동갑이다. 연부역강한 터이니 아무 가치 없는 사대병에 걸리지 말고
사실을 사실대로 거짓 없이 기록하라!" 정인지는 부복하고 아뢴다.
"고려시대에는 세자를 태자라 하고 대비를 태후라 하고 비를 후라 했습니다.
그대로 쓰겠습니다." "당연한 일이다. 그뿐 아니라 '태조, 혜종' 하는 조와 종도
시호를 올린 대로 그대로 쓰라. 다만 충렬왕 이후부터는 시호가 없으니 그때
실정대로 왕이라고 쓰는 것이 옳다. 다만 곡필이 아니 되도록 그때 사실대로만
쓰라." 젊은 편수관 이석형이 아뢴다. "공민왕 때까지는 '사략'과 '금경록'에
적혀 있습니다마는 그 이후의 사실은 어디다가 고증하여 편수하옵니까?" 가장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전하는 서슴지 아니하고 대답한다. "공민왕 이후의 일은
대행태조대왕, 대행태종대왕께서 두 분이 다 함께 겪으시고 아시는 일이다.
태조와 태종께서 증인이 되시어 정도전과 하윤에게 명하시어 '고려사'를 편수케
하신 일이 있으니, 이 두 가지 사료에서 취사선택해서 편수하도록 하라. 내가
주장하는 것은 충렬왕 이전의 모든 문구가 지나친 사대병에 걸려서 스스로
강등해서 기록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따위는 크게 국민의 기세를
저하시키는 일이다!" 편수관 신석조가 아뢴다. "신우, 신창을 역사의 정통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여기 대해서 전하의 뜻을 명확하게 밝혀주십시오."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세종은 서슴지 아니하고 선뜻 대답했다. "우왕과 창왕이 실지로
왕의 노릇을 한 것은 사실이다. 어찌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는단 말인가.
만약 우왕과 창왕을, 선하거나 악하거나, '고려사' 정통에 넣지 않는다면 역사는
공백이 되어 절름발이 역사가 되지 않겠는가." 세종은 또렷하게 대답했다.
정인지가 한동안 생각하다가 한 가지 묘안을 올린다. "우왕과 창왕 때 일은
열전 속에 넣어 보충하면 될 듯합니다." 대왕은 마음이 흡족하지 아니했다.
그러나 태조와 태종의 낯을 보아 정통으로 우겨댈 수도 없었다. "그 점은
대신과 의논해서 처리하라!" 한 마디를 남겼다. 오랜 세월을 거쳐서 세종이
승하한 다음해에 우왕, 창왕을 열전에 넣어 '고려사' 는 완성되었다.
여진 한국은 동북으로 두만강과 서북으로 압록강을 격하여 만주대륙과
접경해 있고, 남해 바다를 격하여 섬나라 일본과 이웃해 있다. 일본은 예로부터
우리 나라의 문화와 식량의 혜택을 많이 입어서 성장해왔고, 대륙 만주에
흩어져 있는 여진 족속들도 우리의 졍제력과 문화며 식량의 뒷받침을 받아서
생활을 영위해왔다. 일본에 대해서는 부산진, 울산, 웅천 삼포를 개방하여
그들의 입주와 왕래를 허락하고, 해마다 세견미의 명칭으로 몇천 섬의 쌀을
주어서 먹여 사렸다. 여진에 대해서도 고려때부터 그들을 위무하여 호군과 만호,
천호의 벼슬을 주고, 조공을 바치러 들어오면 후하게 상을 주어서 벼슬가자를
올려주기도 했다. 더구나 여진은 태조의 출생지인 함흥, 영흥과 거리가 가까울
분 아니라. 태조의 고조 이안사가 고향인 전주에서 감사와 기생을 두고 사랑
싸움으로 다투다가 감사의 노여움을 사서 신변이 위태로우니 가족과 낭당
수백명을 데리고 삼척 활기동으로 솔가도주를 했다. 그 수에 감사가 또다시
삼척의 안렴사로 부임하게 되니, 이안사는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격이
되었다. 부랴부랴 가솔을 데리고 덕원 적전사로 달아났다. 이 때 이 땅은 원의
영토로 있는 때문에 감사는 다시 이안사를 잡지 못했고, 이안사는 교제와
활동을 잘해서 원의 벼슬 다루가치까지 받고 대대로 살았다. 그 후에 태조가
왕이 되어 용명을 안팎에 떨치니, 여진 족속들을 한국을 상국으로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조공을 바치고 명예로운 칭호를 얻는 것을 일대의
영광으로 삼았다. 그러나 땅은 넓으나 산은 험하고 토지는 척박했다. 배가
고프면 노략질하러 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오랑캐들은 여자가 또한 귀했다. 우리
백성들의 촌락에 불을 지르고 젊은 여자와 처녀들을 겁탈해 달아나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그 행동이 마치 대마도 왜적의 떼와 흡사했다. 왜와 여진은 우리
나라의 남과 북에 있는 골치 아픈 암의 존재였다. 여진은 원래 퉁구스족의
혈통을 받은 동북 만주의 원주민이었다. 우리 나라 고려시대에는 금국을
건설하여 글안의 요를 멸하고 만주를 장악한 시대도 있었다. 그 후에는 몽고인
원의 지배를 받았다. 여진 족속은 세 부류가 있었다. 흑룡강 줄기와 연해주에
걸쳐서 고기잡이로 생활해 내려오는 야인여진이 있고, 수렵과 목축으로
생활하는 두만강과 압록강 북편 산간부락에 살고 있는 건주여진이 있고, 송화강
유역, 하얼빈, 장춘 등지에 걸쳐 있었던 해서여진의 세 종류가 있었다. 여진은
지세로 보아 중국의 대륙과 한국 반도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었다. 이 까닭에
한국과 중국의 미묘한 이해관계를 갖게 했다.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에까지 큰
세력을 뻗었던 부여와 고구려의 시대를 지나서 고려 때는 동북면과 서북면의
지역을 불모의 땅이라 해서 돌아볼 생각을 아니했고, 중국은 왕건이 교체되어
나라 이름이 바뀔 때마다 영토의 확장을 위해서 자주 여진 부락을 정벌했다.
그러나 워낙 요동은 본토에서 먼 까닭에 정복하고 관찰하는 데 무한한 힘이
들었다. 이런 까닭에 여진족들은 제법 방자하기 시작했다. 강을 건너 우리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여 분탕질했다. 변지의 백성들은 밤에 베개를 편히 베고 잘
수 없었다. 고려 예종 때 일이었다. 윤관 장군은 조정 문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임금의 밀지를 받들어 불모의 땅으로 버려두었던 북편 땅을 찾으려
했다. 역시 북진사상의 발로였다. 고려민족이 흥왕하게 뻗어나갈 길은 오직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서 북으로 뻗어나가 고구려의 옛 강토를 찾아야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가졌다. 이러한 사상은 묘청과도 서로 통하는 생각이었다.
윤관은 17만 매병력과 승군 3백 명을 항마군이라 표방하고, 마천령 험악한 산과
고개를 넘어서 국경 안에 있는 여진을 소탕한 후에 흑룡강성과 포염사덕에
국경비를 세우는 한편, 길림성 연길현에는 정계비를 세우고, 시베리아
수청층벽엔 '고려대장군 윤관 과차'라는 글씨를 새겨서 크게 위세를 떨쳤다.
그는 이내 군사를 머물러 아홉 성을 쌓으니, 덕원, 함흥, 북청, 단천, 길주, 경성,
종성, 경원, 혼춘이다. 경원에는 내방어소를 두고, 혼춘에는 외방어소를 두어서
다시는 여진 족속들이 침범치 못하도록 튼튼한 방위선을 이룩했던 것이다.
이후로부터 여진은 고여에 조공을 바치고 충성을 다했다. 이러하므로
'문헌통고'에는 '신사글안 노사고려'라 했다. 신하가 되어 글안을 섬기고 종이
되어 고려를 섬겼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후 고려의 위정자들은 점점
문약해졌다. 윤관 장군이 십칠만 대병과 함께 피 흘려 쌓아논 아홉 성을
포기해버려, 글안이 망한 후에는 몽고족인 원의 세력권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이러구러 고려말이 되었다. 공민왕은 원나라 황녀 노국공주와 혼인한
후에 고여에 돌아와 쌍성을 회수했다. 쌍성은 영흥과 함흥이었다. 이때 쌍성
회수에 내응이 되어 공이 컸던 사람이 바로 이자춘이다.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요, 세종대왕의 증조부다. 이자춘은 그의 증조 되는 이안사가 전라도
전주에서 사랑하는 기생을 감사한테 뺏기고 싸움을 하다가 감사의 보복이
두려워서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로 거접한 후에 대대로 그곳에 살아서 원의
만호 벼슬을 했다. 여러 대를 살아온 그의 세력은 여진과 쌍성에서 대단한
존재였다. 원의 국세가 약해지는 것을 살펴본 이자춘은 조국인 고려의
공민왕을 찾아뵙고 자기가 내응이 되어 쌍성을 탈환할 계책을 건의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크게 기뻤다. 곧 밀직부사 유인우로 십만 대병을 거느려
쌍성을 치게 하고, 이자춘은 내응이 되어 원나라의 쌍성총관 조소생을 계교로
사로잡았다. 이로 인하여 고려 고종 때 원나라한테 뺏겼던 서북과 동북 수천
리 땅이 완전히 고려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이 공로로 이자춘은 쌍성소윤이
되고, 아들 이성계는 소년 명장으로 용맹을 떨치면서 고려의 장성이 되어
벼슬이 문하시중에까지 올랐는데, 마침내 원을 배반하고 명한테 호감을 사는 저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해서 칼을 본국으로 향하여, 고려조정을 쳐부수고
조선국을 창업하여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이후부터 여진은 태조 이성계의
위엄에 더욱 눌렸다. 조공을 바치면서 다시 종 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종
노릇을 하는 것은 덮어놓고 종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귀하니, 먹고 입기 위하여 종 노릇을 하는 것이다. 조공을 바치고
상급을 받아가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들은 배가 고프면 몇십 명, 몇백 명씩
작당을 해서 우리 촌락을 습격했다. 곡식과 소와 말을 노략질하고 여자를
뺏어갔다. 군사를 움직여 쫓으면 달아나고, 부드럽게 무마하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우리 땅에서 살았다. 땅이 기름지고 모든 물화가 자기네들보다
월등하게 좋은 때문이다. 그들은 산악지대에서 성장한 때문에 사냥을 잘하고
말을 잘 탔다. 말 탄 불한당 떼가 되기도 하고 명화적 패가 되기도 해서
촌락을 무찔러 사람들을 괴롭게 했다. 이럴 때마다 우리편 진관과 저편의 마적
떼와는 크고 작은 충돌이 항상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일이 조금 크게
벌어지면 여진 추장들은 사실을 보내서 조공을 바치고 죄를 청했다.
이편에서는 화하기 어려운 백성이라 해서 언제나 항상 회유책을 썼다. 뿐만
아니다. 왕조로서는 조상이 대대로 살던 곳이요, 또 한편으로는 왕업을 이룬
발상의 땅이었다. 뿐만 아니라 선조들의 능묘가 있는 곳이라 해서 언제나
은혜와 위엄이 병행하는 정책을 써서 그들을 포섭하고 대접했다. 이것이,
여진족과 우리 국민이 혼동해서 사는 함경도의 끝과 평안도의 말단인 동북면과
서북면을 다스리는 국가의 정책이었다. 그러나 세종 때 크나큰 사건이
압록강의 대안에서 일어났다.
서북 사군과 동북 육진 테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에 쓰러지는 원을
멀리하고, 새로 일어나는 한족인 영에 대해서 선린 정책을 썼다. 명도 또한
신흥한 조선에 호의를 가졌다. 명나라에서는 중원을 통일한 후에 만주에 손을
뻗쳐 영토경략을 시작했다. 압록강 북편 서북 여진에, 이만주라는 추장 아래
강력한 족속이 있었다. 압록강의 큰 지류인 파저강에서 남으로 내려온 오랑카이
족속이었다. 요동에서 명나라 군사와 크게 싸우다가 패잔병의 일부인 56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서 우리 국경 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명나라에서는
선린인 우리 나라에 패잔병을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예조에서는 명나라에서
보낸 공문을 받자 곧 전하께 품했다. "명나라가 건주여진 오랑캐를 정복하려고
싸우는 중, 오랑캐의 패잔병이 압록강을 건너서 우리 땅으로 도망해
들어왔습니다. 명나라가 여진의 도망병을 자기 나라로 넘겨달라 하니, 어찌
처리해야 좋을지 몰라 감히 아룁니다." 전하는 말씀을 듣자 난처하게 생각했다.
한동안 침묵을 지켜 생각속에 빠졌다가 이내 분부를 내렸다. "대신과 장신들로
조직된 중추원 회의를 열게 하라." 이때, 전부터 있던 삼군부는 정삼품
아문으로 강등이 되고, 의정부 대신과 대장군 등으로 조직된 최고회의의
중추원이 설립된 때문이다. 정원에서는 어명을 받들어 대신과 장신들을 급히
소집해서 어전회의를 열었다. 영의정 황희를 위시하여 육조판서가 모여들고,
장군측으로는 최윤덕, 김종서 등 위풍당당한 범 같은 대장들이 참여했다.
중추원 인원들이 다 모인 후에 전하는 옥좌에 임했다. "예조를 통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보낸 공문을 경들도 이미 알았을 것이다. 나 혼자 독단을 내리기
어려워 경들을 부른 것이다." 전하는 먼저 어전회의를 소집한 경위를 설명한
후에 다시 말씀을 내린다. "명나라는 국세가 차차 신장이 되어,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만주에 손을 뻗쳐 건주여진과 싸움을 시작했다. 이기고 지는
판가름은 아직 나지 아니했으나. 여진 군사 수천 명이 명군과 싸우다가 패잔병
5백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우리 영토 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한다. 일이
간단치 아니하고 미묘하므로 경들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극히 작은 일인
듯하나 큰일이다. 경들은 좋은 의견을 말하라." 좌의정 맹사성이 아뢴다.
"압록강 이남 서북면 말단은 비록 우리 영토라 하나 고려 때 윤관이 구성을
쌓았다가 이내 폐기하다시피 했습니다. 지금 여진과 우리 백성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여진의 도망병을 잡기 극히 곤란할 듯합니다. 하회를 좀 기다려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좌의정 맹상성의 진언을 듣자 세종전하도 의견을 말씀한다.
"나 역시 속단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진은 우리 나라를 상전같이
생각하고 있고, 명나라는 또 우리와 선린의 관계를 맺고 있다. 여진을 해롭게 할
수도 없고, 명나라의 청하는 일을 물리치기도 어려운 일이니, 극히 난처한
일이다." 전하가 막 말씀을 끝마쳤을 때, 정원에서 급히 장계 한 통을 받들고
승지가 들어왔다. "서북면 병마절도사가 파발마를 달려 장계를 올렸습니다."
"무슨 장계냐? 읽어보아라!" 전하는 승지에게 낭독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승지는 장계를 받들어 읽는다. "서북면 절도사 신, 삼가 장계를 아뢰옵니다.
명나라 요동총관이, 예부에 자문을 보낸 지 여러 날인데 어찌해 아직껏 소식이
없느냐 하고, 빨리 여진의 도망한 군사 5백여 명을 잡아서 넘겨 달라 합니다.
여진은 본국 사람들과 혼동해 사는 때문에 수색하기 극히 곤란할 뿐 아니라,
때로는 국경을 넘어서 노략질을 하는 무리들이올시다마는, 소국으로 자처해서
신하 노릇을 하는 오랑캐를 잡아서 인도하기는 인정상 어렵습니다.
요동총관에게 어찌 대답해야 좋을지 하교를 바랍니다." 전하를 위시하여 모든
중신들은 장계 읽는 소리를 귀기울여 들었다. 전하가 막 말씀을 꺼내려 할 때,
정원에서 또 한 사람의 승지가 장계 한 장을 받들고 어전에 바친다. "무어냐?"
"서북면 절도사가 또 파발마를 달려서 장계를 올렸습니다." "여러 대신들이 다
듣게 크게 읽어보아라." "먼젓번 장계는 하감하셨을 듯합니다. 이번에는 건주
오랑캐 이만주가 신에게 사자를 보내서 조선 국경을 넘어간 저희 군사 5백여
명을 명나라 군사한테 넘겨주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인정상
딱합니다. 두 틈에 끼여서 처리하기 난처합니다. 속히 교시해주시옵기 바랍니다."
세종전하를 위시하여 모든 대신들은 사태가 점점 긴박해지는 것을 마음 속으로
느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전하는 좌우에 모인 대신들을
바라보시며 말씀을 내린다. "연거푸 들어오는 장계를 보니, 일이 미묘한 것을
벗어나 약간 긴박해지는 듯하다. 아까 맹정승의 하회를 기다려보자는 말은 이미
시기가 지난 것 같다." "그러합니다. 좌의정 맹사성의 시기를 기다려보자는
의견은 이미 때가 늦은 듯합니다. 여진편을 들든 명나라편을 들든 두 길 중에
한 길을 택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입이 무거워 말이 없던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오랑캐가 바다의 왜추들과 함께 예로부터 우리 나라의
암 덩어리인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라도 조공을 바쳐서 복정하는
무리를 죽는 땅으로 넘겨주는 것도 인정상 어려운 일이로구나!" 전하는 아직도
인자한 말씀을 내린다. '다른 나라의 족속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어찌 5,6백
명씩이나 죽는 땅으로 넘겨줄 수 있느냐' 하는 인자한 대왕의 말씀을 듣자,
명성이 일세를 진동하는 노장군 최윤덕이 백수를 흩날리려 아뢴다. "전하께서는
너무나 어질고 착하십니다. 그러나 종묘사직과 국가의 안위는 인자하신 것 한
가지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국가와 민족은 고립해 살 수 없습니다.
국제간의 정세를 소상하게 살피셔야 합니다. 지금 명나라는 중원 천지를
통일하고 다시 손을 뻗어 요동을 경영한 후에 또다시 만주를 겸병하려 합니다.
만약 인정에 구애되어 여진을 옹호한다면, 반드시 명나라 조정은 우리를
의심하여 크나큰 보복 행동을 취하리라 생각합니다. 공연히 5,6백 명의 여진
군사를 두호하다가 크나큰 해를 우리가 입게 된다면, 이것은 마치 대하의
홍수를 호미로 막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통촉하시와, 절도사로
하여금 여진의 패잔병을 명나라 군사에게 넘겨주라 엄명을 내리시옵소서."
대장군 최윤덕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큰일을 위하여 작은 인정을
버리시옵소서. 서북면 절도사에게 급히 전교를 내리시어, 도망쳐 들어온 여진
군사를 명나라 요동총관에게 인도해주라 하시옵소서." 전하는 길게 한숨을 짓고
말씀한다. "그 지긋지긋한 사대를 경들은 나에게 권한단 말인가?" 대제학
변계량이 고한다. "그것은 사대가 아니올시다. 한낱 외교의 방침이올시다.
능란한 정치외교는 물건의 중량을 저울질해 알아보듯 이해를 비교해서 처리하는
것이올시다. 태조대왕의 위화도 회군도 역시 국제정세를 재빨리 판단해서
처리하신 것이올시다. 만약에 태조대왕께서 고려조정의 말씀만 들어서 원을
돕고 명에 대하여 칼을 뽑으셨던 들, 백성들은 까닭없이 명의 병화를 입어
어육이 되고, 이 땅은 초토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덮어놓고 사대라고
펴할 것이 아니라, 기민하게 국제정세를 살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점을 살피시옵소서." 대장군 최윤덕이 다시 고한다. "전하! 소신은 아직
늙지 아니했습니다. 만약에 건주여진이 자기편 도망병을 명군에게 인도했다
해서 공손치 않은 일이 있다면, 소장이 압록강을 건너 오랑캐의 소굴을
무찔러서 절대로 후환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너무 인정에 구애되지
마시옵소서. 오랑캐는 왜추와 같이 우리 나라의 화근덩이올시다!" 최윤덕의
씩씩한 기개는 만좌를 눌렀다. 최윤덕은 자를 여화라 하고 호를 임곡이라 했다.
그의 선조는 통천에 살았고, 그의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최운해다. 최운해는
태조대왕을 섬겨서 삼군을 통솔했던 이름난 명장이었다. 최윤덕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구슬픈 이야기가 있었다. 윤덕이 거적자리에 떨어진 지 몇 달이
못되어서, 어머니는 산후에 뒤끝이 좋지 못해서 애처롭게 세상을 떠나버렸다.
이때 그의 아버지 최운해는 호반인 때문에 변지를 지키고 있었다. 나라의
국방을 맡은 몸이었다. 아내가 죽었다고 집으로 돌아갈수도 없었다. 인편으로,
이웃에 사는 고리백정의 아내에게 젖을 먹여서 길러 달라고 부탁을 했다.
백정의 아내는 항상 최씨댁 은고를 많이 받으며 살아왔던 터이다. 혈혈단신
의탁할 곳 없는 핏덩이 아기가 가엾고 불쌍했다. 친자식처럼 강보에 싸서 젖을
먹여 길렀다. 아버지 최운해는 윤덕을 백정의 집에 맡긴 후에 여전히 변지로
돌아다니며 만호, 첨사, 조방장 노릇을 했다. 남으로 가면 왜적을 막고, 북으로
부임하면 오랑캐와 싸웠다. 어린 아들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백정 내외는
윤덕을 친자식과 같이 길렀다. 윤덕도,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아버지의 용모도
알지 못했다. 백정을 친부모로 생각했다. 돌이 지나고 세 살 네 살이 되었다.
다섯 살이 되니 동리 서당을 찾아가서 입학을 시켰다. 윤덕이 백정의 자식이
아니라 무관 최운해의 아들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뒷길을 보아 정성껏
가르쳤다. 윤덕은 총명했다. 동리의 여느 아이들보다 글공부가 일취월장이
되었다. 백정은 사냥을 잘 했다. 말을 잘 타고 활도 잘 쏘았다. 노루를 잡고
사슴을 쏘았다. 윤덕은 나이 십여 세가 되자 백정을 따라다니며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백정은 윤덕에게 활 쏘는 법과 말 달리는 묘법을 가르쳐주었다. 몇
해가 지났다. 윤덕의 나이 십육칠 세가 되었다. 산속으로 말을 달려 제법 노루와
사슴을 잡아서 짊어지고 내려오기도 했다. 하루는 윤덕이 나무를 하러
산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별안간 칡범 한 마리가 숲속에서 사람 냄새를 맡고
'어흥' 소리를 치며 뛰어나왔다. 윤덕은 깜짝 놀랐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
허리에 찼던 활을 잽싸게 끌렀다. 살을 시위에 메겨, 주홍같은 입을 딱 벌리고
덤벼드는 칡범의 목구멍을 향하여 정통으로 쏘아붙였다. 칡범이 천둥 같은
비명을 지르며 붉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화살 한 대로 본때 좋게
백소지왕인 맹호를 쏘아 죽였다. 윤덕은 뜻밖이었다. 살 한 때로 칡범을 쏘아
죽일 줄은 자기 자신도 몰랐다.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유유하게 칡범을 끌고
동리로 내려갔다. 온 동리가 발끈 뒤집혔다. 소년 장사가 났다고 떠들어댔다.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동리 사람들은 호랑이를 끌고가 관가에 바쳤다. 성주는
비로소 윤덕이 최운해의 아들인 것을 백정에게 들어서 알았다. 백정에게
가상하다고 칭찬한 후에 상금을 후히 주고 군관을 시켜서 윤덕을 그의
아버지한테로 데려다주어 장군의 재목이 되게 하라 했다. 이때, 윤덕의 아버지
최운해는 합포진 첨사로 있었다. 윤덕과 백정은 군관의 인도로 여러 날을
걸어서 합포진에 당도했다. 윤덕은 비로소 아버지를 뵙게 되었다. 백정은
윤덕이 칡범을 화살 한 대로 쏘아 잡은 일과 모든 무예가 뛰어나게 출중한 것을
자랑했다. 아버지 최운해는 흐뭇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윤덕을 향하여
물었다. "말을 달릴 줄 아느냐?" "조금 타보았습니다." 꿇어앉아서 공손히
대답했다. "사냥도 좀 해보았느냐?" 옆에서 백정이 대신 대답한다. "사냥을
잘 하고말굽쇼. 노루와 사슴을 부지기수로 잡았습니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디 내일 나하고 사냥을 한번 해보기로 하자!" 이튿날,
합포진 첨사 최운해는 군관들에게 사냥령을 내렸다. 몰이꾼이 수십 명 앞을
서서 나가고, 첨사 최운해와 아들 윤덕은 준마 두 필에 각각 올라 몰이꾼의
뒤를 따랐다. 청산은 첩첩하고 계곡은 무성한 숲 사이로 양장구곡을 이루었다.
아버지가 앞에서 말을 달리고 아들이 뒤를 따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 달리는
기술을 구경하려 했다. "네가 앞에서 달려라!" 길목이 몹시 좁았다. 옆은
천야만야한 낭떠러지 절벽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어찌하는지 꼴을 보려는
것이다. "아버님의 앞을 서기 죄송합니다." 윤덕은 조용하게 대답했다.
"관계치 않다." "그러면 뛰겠습니다." 윤덕은 말을 마치자 고비를 바싹 당겼다.
발로 말 배때기를 강하게 질렀다. 말은 '어흥' 소리를 지르며 공중으로 까맣게
솟구쳤다. 앞에서 달리는 아버지의 머리 위로 퍼뜻 뛰어넘었다.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를 살짝 피해서 아버지의 앞을 섰다. 아버지는 마음 속으로 기뻤다
그러나 칭찬하는 말은 일부러 보내지 아니했다. 산골 속에서 몰이꾼의 함성이
크게 울리면서 토끼와 노루와 멧돼지들이 몰려나왔다. 윤덕은 좌우로 번개치듯
달리며 활을 쏘았다. 짐승들은 질펀하게 쓰러졌다. 열 번 쏘아 일고여덟 번은
어렵지 않게 맞히었다. 몰이꾼들의 환호성이 천지에 진동했다. 도령 최윤덕의
활 잘 쏘고 말 잘 타는 칭송이 대단했다. 아버지 최운해는 마음 속에 가득히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런 칭찬도 하지 아니했다. 어린 아들에게
교만한 생각을 갖게 해서는 아니되겠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얼마 후에 사냥을
파하고 내아로 돌아왔다. 밤에 군관과 백정이 있는 앞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웃으며 일렀다. "너의 활 쏘고 말 달리는 모습을 보니 제법 민첩하고 날쌔다.
그러나 아직도 미흡한 점이 상당히 많다. 법을 배워야 한다. 병서를 읽어서
진법을 터득해야 하겠다." 이튿날부터 아버지는 아들에게 병서와 진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몇 해 뒤의 일이다. 최윤덕은 무과를 보아 당당하게 급제를
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변지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윤덕의 지위는 점점
높아졌다. 세종 원년에 대마도 왜적들이 서해 바다를 침범해 들어와서
노략질과 야료가 무쌍했다. 세종대왕은 크게 노하여 최윤덕으로
삼군도절제사의 중임을 맡겨서 도체찰사 이종무와 함께 전함 칠백여 척과 주사
만칠천 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다. 최윤덕은 천신산 아래서 적을
소탕하고 크게 이겨 돌아왔다. 개선군이 들어오자 세종대왕은 낙천정까지 친히
납시어 삼군을 호궤한 후에 윤덕에게는 우찬성 겸 평안도 병마도절제사에
안주목사를 염임케했다. 최윤덕은 이처럼 당대의 큰 장성이었다. 최윤덕은
장신의 높은 자위에 있은 지 삼십 년에, 검소하고 부지런하고 청백했다.
안주목사로 있을 때 일이다. 삼문 옆에 빈터가 있었다. 윤덕은 한 치만한
땅이라도 공지로 버려두는 것은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공무를 본 여가에 손수
괭이질을 해서 밭을 갈고 참외를 가꾸고 있었다. 아랫사람들이 다투어 간했다.
"사또께서 어찌 손수 괭이질을 하시고 밭을 가십니까. 소인들에게 맡겨주십쇼."
"사또는 별사람이냐? 사또도 일을 해야 한다. 사람은 일을 해야만 입에 밥이
들어가는 법이다. 보아라. 일하니 저렇게 훌륭한 참외가 탐스럽게 열리지
아니했느냐? 하늘은 부지런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법이다." 모든 아전과
군노사령들은 크게 감동했다. 안주 일판에 새로운 근로 기풍이 울연히 일어났다.
먼 촌락에 떨어져 사는 젊은 백성 한 사람이 있었다. 원님한테 송사할 일이
있어 읍으로 들어왔다. 삼문 옆에서 텁수룩하게 차린 농부가 참외밭에서
참외를 가꾸고 있었다. 촌 백성은 안주 병영에서 일하는 머슴으로 알았다.
"여보게, 지금 사또께서 어데 계신가?" "왜 그러오? 사또는 왜 찾소?" 윤덕은
시침을 떼고 물었다. "소지를 바치고 송사할 일이 있어서 그러네." "저기, 저
삼문 안으로 들어가면 사또가 계신 대청이 있소. 그리로 들어가서 물어보오."
윤덕은 속여서 대답하고 뒤로 돌아 운주루에 올라 관복으로 갈아입고, 청에
나와 송사를 받았다. 소지를 울리는 백성이 바라보니, 사또는 별사람이 아니라
삼문 옆에서 참외를 가꾸던 사람이었다. 깜짝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서 안주목사 최윤덕의 부지런하고 검소한 일은 안주 한고을뿐 아니라
평안도 일판에 자자하게 퍼졌다. 백성들은 모두 다 혀를 둘러 자탄하며
존경했다. 사또의,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실천궁행하는 행동은 평안도와 함경도
일판에 새로운 근로 정신을 물결쳐 일으켰다. 같은 해의 일이다. 하루는 젊은
여자 한 사람이 호곡하면서 삼문안으로 들어와 사또를 뵙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안주목사 최윤덕은 지체없이 곧 여자를 청 앞으로 불러들였다. 젊은 여자는
호흡을 텅치 못할 정도로 애통한 울음을 느껴가며 울고 있었다. "웬일이냐?
말을 해라. 슬피 울기만 하면 어찌했느냐. 울음을 그치고 말을 해라!" "쇤네는
산골 외딴 속에 화전을 갈아 먹고 사는 백성이올시다. 간밤에 호랑이가
내려와서, 제 남편을 물어갔습니다. 호랑이를 잡아줍시오. 남편을 살려줍시오!"
여인은 말을 마치자, 이내 땅에 쓰러져 곡지통을 했다. 울음소리가 너무나
애절하고 처량했다. 목사 최윤덕은 창자를 에는 듯한 젊은 여인의 울음소리에
유연히 마음이 흔들렸다. "간밤이라 하니 어느 때쯤 되었느냐? 초저녁이란
말이냐, 새벽이란 말이냐? 기삭을 말해보아라!" "산골에서 시각을 어찌
짐작합니까. 한잠 늘어지게 자다가 이 봉변을 당했습니다." "호랑이가 네
집으로 뛰어들어 물고 갔느냐?" "아니올시다. 제 서방이 소피를 하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별안간 사립작문 밖에서 외마디 소리를 치기에 급히 쫓아나가보니
바윗덩이만한 칡범이 쇤네의 서방을 입에다 물고 나는 듯이 달아났습니다. 그저
사또님, 남편을 살려줍시오." "한잠 늘어지게 자다가 호랑이한테 물려갔다면 네
서방은 벌써 죽은 사람이다. 호랑이가 여태껏 살려두었을 리 만무하다. 어찌하는
수가 없구나?" 젊은 여인은 최목사의 말을 듣자 목은 놓아 통곡했다.
최윤덕은 관비를 불러, 여인을 어루만져 달래게 했다. 여인은 엉엉 울면서
당상을 바라보며 애원한다. "사또! 제 서방이 이미 죽었다면 하는 수
없습니다마는, 사또께서 원수를 갚아줍시오, 이 철천지한을 어찌합니까?" 젊은
여인은 몸부림을 치며 데굴데굴 굴렀다. 최윤덕은 여인을 향하여 물었다.
"식구가 몇이나 되느냐?" "늙은 시어미와 단 세 식구가 화전을 갈아 먹고
살다가 이 지경을 당했습니다. 쇤네의 뱃속에는 태기가 있습니다. 사또, 그저
원수를 갚아줍시오! 명정지하에 그저 호랑이를 잡아서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여인은 또다시 목이 메어 울었다. 뱃속에 태기가 있다는 말에 최목사의 마음은
또 한 번 움직였다. "태기가 있다니 몇 달이나 되었느냐?" "만삭에
가까웠습니다. 아홉 달이 되었습니다." 최목사가 자세히 여인의 몸을 바라보니
과연 배가 불렀다. "화전을 갈아서 무엇을 붙여먹고 생활을 했느냐?" "율무와
감자를 심어서 모진 목숨을 세 식구가 살아가다가 이 지경을 당했습니다."
"어린것을 낳으면 유복자가 되겠구나!" 여인은 목에 메어 대답을 못하다가
다시 아뢴다. "호랑이를 잡아서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앞으로 유복자를 대할
낯이 없습니다. 그저 원수를 갚아줍시오!" 최목사는 수하 군관들 십여 명을
불렀다. 여인의 소지를 설파한 후에 군관들에게 물었다. "여인의 정경이 하도
애절하고 딱하다. 너희들 중에 호랑이를 잡아서 불쌍한 여인의 원수를 갚아줄
사람이 있거든 앞으로 자원해 나오너라!" 군관들은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갔다는 말을 듣자 모두 다 겁에 질렸다. 호랑이를 잡아보겠다고 자원해
나오는 군관은 한 명도 없었다. 최윤덕은 혀를 찼다. "못난 것들! 그래,
호랑이가 무서워서 잡아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이냐.
이래가지고 오랑캐를 지키는 변지의 중임을 어찌 맡는단 말이냐! 그만두어라.
내가 친히 호랑이를 잡아보겠다. 너희들은 나의 뒤를 따르라!" 최윤덕은 말을
마치자, 벽상에 걸린 화궁과 전통을 친히 떼어 어깨와 허리에 차고 통인에게
분부를 내렸다. "보행으로 가면 지체가 많이 될 것이다. 내가 탈 말 이외에
여인이 탈 조랑말 한 필을 준비해라. 그리고 군관들은 창을 들고 나의 뒤를
따르라." 사또의 분부가 한번 떨어지니, 삼문 밖에 자비가 여율령 대령되었다.
"너도 말을 타라! 그래야 빨리 가서 호랑이를 잡을 것이다. 앞서서 길을
인도해라. 그리고 군노 한 명은 이 여인의 견마를 잡아주어라!" 여자가 탄 말을
전도로 하여 최윤덕 일행은 첩첩산중으로 말을 채찍질해 달렸다. 여인이
화전을 갈아 먹고 산다는 외딴집 앞에 당도했다. 길을 좁고 산을 험했다.
이제부터는 말을 타고 달릴 도리가 없었다. 최윤덕과 여인은 말에서 내렸다.
"호랑이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가보자!" 최윤덕은 여인을 앞세우고 숲이
우거진 험한 산길로 기어올랐다. 군관들도 창을 들고 빽빽하게 들어선 밀림을
헤치고 뒤를 따랐다. 집채 같은 바윗돌이 울창한 숲 사이에 즐비하게 흩어져
있었다. 홀연 강한 바람이 낙락장송 휘어진 가지를 뒤흔드는데, 누런 칡범 한
마리가 벽력 같은 소리를 치며 숲속에서 뛰어나왔다. 글자 그대로 맹호출림이다.
여인은 기절이 되어 쓰러지고, 뒤를 따르던 군관들은 꽁무니를 빼었다.
안주목사에 절도사를 예겸한 최윤덕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급히 동개에서
금비전 화살 한 대를 꺼내어 칡범의 목줄대기를 향해 쏘았다. 칡범은 비로소
비틀하고 쓰러졌다. 그제서야 군관들은 창을 들고 달려들었다. 군관들은
쓰러지는 범을 마구 찌르려 했다. 최윤덕은 급히 소리쳤다. "범은 이미 기진이
되었다. 함부로 찔러서는 아니된다. 뱃속엔 소중한 물체가 있을 것이다. 절대고
배는 찌르지 말아라!" 이미 범은 절명이 되었다. 금비전 두 대에 범은 왕생을
한 것이다. 이 동안에 기절했던 여인은 다시 소생이 되었다. 최윤덕은 군관과
군노들에게 명했다. "이제 범은 무섭지 않다. 가죽만 유명할 것이다. 여러
사람이 목도질을 해서 메고 읍내로 들어가거라." 여러 사람들은 생기가 돌았다.
신명이 났다. 저희가 호랑이를 잡은 듯 떠들어대며 환성을 올렸다. 최윤덕은
젊은 여인과 함께 산에서 내려 삼문 안으로 들어가자, 죽은 호랑이를 동헌 뜰
안으로 끌어들였다. 서방을 잃은 여인은 죽은 호랑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넋을 잃고 느껴 울고 있었다. 최윤덕은 다시 명을 내렸다. "소 잡는 백정을
불러들여라!" 이윽고 백정이 들어와 현신을 했다. "날카로운 연장으로
호랑이의 배를 갈라라!" 백정은 사또의 영을 받자, 죽은 호랑이를 반듯이
젖혀놓고 예리한 칼로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최윤덕은 청상에서 다시 분부를
내렸다. "칼을 함부로 놀리지 말고 조심해서 곱게 갈라라!" 넋을 잃고 느껴
울던 여인도 울음을 그치고 호랑이 배 가르는 모습을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호랑이 배 껍질은 무한 두꺼웠다. 한 가닥 한 가닥씩 갈라지고 젖혀졌다. 붉은
피가 댓줄기마냥 뻗쳐올랐다. 내장이 갈라졌다. 사람의 뼈가 튀어나왔다.
갈빗대가 토막토막 끊어져 나타났다. 손가락 발가락 뼈가 마디마디 쏟아져
나왔다. 엉클어진 머리칼이 나타났다. 구리 동곳이 꽂혀진 상투가 칼끝에 묻어
나왔다. 죽은 호랑이가 젊은 여인의 남편을 잡아먹은 것이 분명했다. 최윤덕은
여자에게 물었다. "살과 뼈만 가지고는 누구의 것인지 분간을 못하겠지만,
머리칼은 씹혀지지도 아니하고 삭아버리지도 않는 법이다. 너는 저 상투를
자세히 살펴보아라. 상투 끝에 동곳이 그대로 꽂혀 있다. 네 서방의 동곳인지
자세히 보아라." 젊은 여인은 바싹 백정의 앞으로 가까이 가서 상투를
들여다보았다. 구리 동곳이 눈에 번쩍 띄었다. 틀림없는 자기 남편의
동곳이었다. 여인은 상투를 두 손으로 덥석 안았다. 목을 놓고 통곡했다. 새삼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마치 남편의 운명을 지키는 청상과부의 처절한
울음소리였다. 최윤덕은 관비들을 시켜 여인의 울음을 그치게 한 후에 분부를
내렸다. "상투에 꽂혀 있는 구리 동곳은 네 서방의 것이 확실하냐?"
"틀림없습니다." "내가 묻는 대로 대답해보아라. 네 서방과 함께 화전을
이룩해서 구명도생을 하다가 이제 네 서방은 호환을 만나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으니, 늙은 어미와 핏덩이 유복자를 데리고 어찌 지낸단 말이냐.딱하기
한량없다. 네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관청에 두어 찬비로 부릴 테니 네 의향이
어떠하냐?" 안주목사 최윤덕의 인정 넘치는 후한 말을 듣자, 젊은 여인은
감사로운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두 번 절하며 고한다.
"호랑이를 친히 잡아서 서방의 원수를 갚아주신 일만 해도 은덕이 바다같이
깊사온데, 또다시 죽지 못해 사는 저희들의 생활을 통촉하시어 관가에서 일을
보아 먹고 살게 하시니, 하늘보다 더 큰 은택을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최목사는 옆에 시립해 있는 이방에게 분부했다. "호랑이
뱃속에서 나온 유골은 후하게 장사지내 주게 하고, 저 여인은 늙은 시모와 함께
동네로 내려와 살게 해서, 찬비의 명목으로 요차를 주어 생계를 도와주라.
그리고 장차 유복자가 나올 것이다. 호생지덕으로 잘 기르게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이방은 최목사의 명을 받고 유골과 호피를 거둔 후에, 여인과
함께 삼문 밖으로 나가 뼈를 묻어 장사지내고, 화전하던 시모와 여인은 관가
앞에 있게 했다. 한 달 후에는 유복자 어린애까지 나서, 세 식구가 걱정 근심
없이 살게 했다. 안주목사 최윤덕의 호담무쌍한 용맹과 애민여자하는 관후한
풍도는,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는 말할 것 없고, 그의 위풍은 강을 건너
여진에까지 자자하게 퍼졌다. 이 소식은 서울에까지 파다하게 퍼져서,
세종전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최윤덕의 이러한 모든 행적은 깊이 전하의
신임을 받았다. 여진에 대해서도 인심을 잃지 않고 명에 대해서도 선린정책을
포기하기 어려운 난처한 자리에서 번뇌를 느끼던 세종전하는, 용맹스런 대장군
최윤덕의 강경한 주장을 듣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윤덕은 지략을
겸비한 백전장군이다. 덮어놓고 용맹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슬기가 또한
대단하여 멀리 앞을 보고 결단하는 사람이니, 윤덕의 건의를 아니 받아들일 수
없다. 평안감사에게 명을 내려서, 압롱강 안으로 도망해 들어온 5백여 명의 여진
패잔병을 명나라편에 인도해주라!" 전하의 분부가 승지한테 내리니, 장군
최윤덕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전하께 두 번 절하며 아뢴다. "어려운 일을
좋이 처단하셨습니다. 만약 이번 일을 그같이 결단하지 아니하셨더라면 장차 큰
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뒤의 일은 소장이 담당하겠습니다." 최윤덕은 장담하고
아뢴다. 옆에 시립했던 김종서가 아뢴다. "만약 전하께서 여진을 생각하시는
정에 얽매이시어 더욱 지의하셨다면 최윤덕의 말대로 큰 화가 다닥칠 것입니다.
명철하신 처사였습니다." 김종서도 여진의 패잔병을 명나라에 넘겨주는 일을
크게 찬성했다. 중추원 중대 회의는 끝이 나고, 전하의 전교는 파발마를 달려
승지가 평안감사에게 전해줬다. 세종전하의 유시를 받은 평안감사는 곧 병사와
건주여진의 도망병 잡을 계획을 의논한다. 원래 건주여진의 족속들은 압록강만
건너오면 곧 기름진 우리 땅이었다. 이 까닭에 금령을 놓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건만, 연구세심 어느 결에 들어와서 이곳 저곳에 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말도 통하고 물건도 서로 교역했다. 마적떼 큰 군사가 노략질하러
들어오지 않는 한, 백성과 백성끼리는 평화롭게 오고가며 살았다. 이만주의
도망병들은 강을 건너 쫓겨온 후에 열 명 스무 명씩 흩어져서 여진 부락에 묵고
있었다. 이편에서도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아니하니, 그들은 마음을 놓고 안온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더구나 이만주가 조선조정에 대하여 도망병을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해놨으므로, 그들은 더한층 방심을 하고 있었다. 평안병사는
평안감사에게 계교를 냈다. "전하께서 승지까지 보내시어 도망병을 잡아서
명군에 인도하라 하시니, 정중하신 하교를 아니 받들 수 없소이다. 곧 포박을
해서 넘기기는 넘겨야 할 텐데, 수가 많아서 오륙백 명이나 되니 난처한
일입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교전 상태로 빠져서 무고한 우리 백성들이 많이
상하게 될 테니 큰 걱정이외다." "나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가졌소이다. 오백여
명을 잡는다면 마주 붙어서 싸워야 할 텐데, 그리 된다면 죄 없는 양민들
사상자가 적지 않게 생길 테니 엄두가 나지 않는구려!" 평안감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한다. 병사가 무릎을 치며 말한다. "저에게 한 가지 계교가
있습니다. 사또께서 들어주실는지 의문이오." "무슨 좋은 계교가 있소? 속
시원하게 말씀해보시오." 감사는 병사 계교가 있소? 속 시원하게
말씀해보시오." 감사는 병사 앞으로 무릎을 바싹 밀었다. "때마침 원소절이
며칠 아니 남았소이다. 저 사람네 풍속이나 우리 풍속이나 정월 대보름날 밤엔
백사를 제쳐놓고 모두 다 즐겁게 노는 날이니, 우리 병영에서 저들을 청해서
한번 유쾌하게 놀아보자 합시다." "원소절 놀이를 한번 해보잔 말이로구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편의 오륙백 명과 우리 군사 천여 명을 대접하자면
무려 이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대접해야 할 테니 음식 준비가 대단하겠구려."
감사는 눈이 휘둥그래진다. 병사는 픽하고 웃으며 대답한다. "아따, 국가흥망이
달린 일입니다. 전쟁이 터진다면 그까짓 이삼천명의 한 끼니 먹을 음식 걱정만
하게 되겠습니까? 빼주 여남은 고리쯤 모아들이고, 소 열 필에 돼지 백 마리쯤
잡으면 넉넉할 것입니다. 그리고 흥을 돕기 위하여 기생과 무당을 불러들여서
검무춤이나 추게하고 창부타령이나 부르게 하면 족할 것입니다." 병사는 호방한
목소리로 자기의 계교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여진 도망병들에게
술을 흠뻑 먹여서 대취케 한 후에 모조리 결박을 지어서 명나라 요동진관에게로
넘기잔 말이로구려." "아니올시다." 병사는 고개를 가로 흔든 후에 감사의
귀에 입을 바싹 대고 무슨 소린지 한동안 수군거렸다. 감사의 입이 차츰차츰
벌어지기 시작했다. 병사의 입술이 감사의 귓전에서 떨어지자, 감사는 무릎을
치며 말한다. "되었소. 묘한 계책이오. 병사는 당대의 을지문덕이오!" 감사는
연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벙긋벙긋 웃었다. 정월 대보름 달 밝은 원소절이
되었다. 평안감사는 군사권을 잡은 절도사였다. 여진 부락에 흩어져 있는
도망병들을 청했다. 달도 밝고 명절도 되었으니 객지에 쫓겨와 있는 도망병에게
객회를 위로하기 위하여 소를 잡고 돼지를 삶아서 술을 한 잔 함께 하자고
사자를 보내서 청했다. 부락마다 흩어져 있는 여진 군사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희희낙락 지껄여대면서 조선 병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넓고 넓은
병영 앞에는 명석이 깔려지고 군막 휘장이 이곳저곳 바람에 날려 펄럭였다.
즐비하게 줄을 지어 걸어논 가마솥에서는 쇠대가리와 돼지를 삶는 구수한 곰국
냄새가 도망병들의 코를 스쳐서 비위를 움직였다. 좌우 옆으로는 빼주를 담은
고리가 군막마다 열 개, 스무 개씩 놓여 있었다. 오백육십여 명의 여진
도망병들은 패장을 앞세우고 병영 뜰로 들어섰다. 평안감사는 절도사의
복색으로 밀화패영 전립에 구군복하고 육방관속과 군관이며 기생 수십 명을
거느리고 친히 운주루에서 나와 도망병들을 맞이했다. 도망병들은 조선말을 잘
했다. 강 하나를 격해서 수백 년 이웃해사는 때문이다. 패장이 앞을 서서
절도사한테 인사를 했다. "사또, 도망해 들어온 저희들을 쫓아내지 아니하고
눈감아 두시는 일도 감지덕지한데 이같이 수많은 저희들을 불러서 좋은 음식을
주시니 고마운 말씀 사뢸 길 없습니다. 노야, 감사합니다." 평안감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대답한다. "오늘은 원소절 좋은 날이 아닌가. 여러분들이 만약
고향에 있었던들 오늘같이 좋고 좋은 날 부모 처자와 함께 완월장취를 할 텐데
객지에 나와 고생이 막심하오. 객지 고생의 만분의 하나라도 잊게 하게 위하여
오늘 여러분에게 박주 한 잔씩을 대접하려 한 것이니 마음 탁 놓고 유쾌하게
놀다 가시오." 감사는 말을 마치자 이내 군관들에게 지휘했다. "손님들을 열
명 스무 명씩 군막마다 앉혀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게 하라!" 육방관속과
군관들은 여진 도망병들을 차례차례로 군막 안으로 인도했다. 이어서 군막마다
기생들이 열두 명, 열세 명씩 배치되어 들어갔다. 도망병들은 아름다운 기생들의
화사한 의상과 예쁜 자태를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대며 떠들어대고 좋아들 했다.
군막마다 병영 군사와 여진 도망병들이 자리를 함께 하여 좌우편으로 갈라
앉았다. 좌편에는 병영 군사가 앉고, 우편에는 여진 도망병들이 앉았다.
기생들도 좌우편으로 갈라 앉아서 술을 따랐다. 이때 병사는 군막 밖에서 술을
감독하고 있었다. 빼주를 담은 술병은 두 종류가 있었다. 좌편 병영 군사에게
기생이 따르는 술병은 백병이요, 우편 여진 군사에게 기생이 권하는 술병은
화병이었다. 백병에는 빼주에 물을 타고, 화병에는 독한 빼주가 담겨 있었다.
병사는 병영 군사와 기생들에게 미리 연통을 해놓고 밖에서 친히 술 나르는
것을 감독하고 있었다. 여진 군사들은 주린 김에 고기와 술을 대하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사양치 않고 돼지다리를 뜯고 빼주를 마셨다. 기생들은 교태를
지어 술을 권하고 노래를 불렀다. 노랫가락을 청좋게 부르고 창부타령을 멋지게
뽑았다. 병영 군사들은 냉수를 마시고도 취한 체했다. 젓가락 장단을 치면서
기생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오랑캐 군사들은 진짜 빼주를 맘놓고 마셨으니
취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창부타령을 흉내냈다. 달은 하늘
높이 떠서 휘영청 밝았다. 군막마다 노랫소리와 흥겨운 춤이 절정에 올랐다.
기생들은 더한층 오랑캐들의 흥을 돋우기 위하여 승무를 추고 검무를 췄다.
취기 가득한 오랑캐들은 신명이 났다. 비틀거리며 기생들을 껴안고 활개춤을
추었다. 또다시 무녀들이 패를 지어 들어왔다. 주립에 남전복을 입고
그림부채를 쫙쫙 펴면서 군막마다 좇아들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오랑캐들은 손뼉을 치면서 무녀들을 맞아들였다. 무녀들은 '웬수' 소리를
치면서 빼주를 사발로 따라 오랑캐들에게 권했다. 오랑캐들은 흥에 겨워 춤을
추면서 죽죽 들이켰다. 군막마다 질탕하게 노는 오랑캐들의 고함소리는 적막한
변지 강산을 흔들었다. 어느덧 둥그런 보름달이 서편으로 기울어지고 동이
트기 시작하니, 새벽 찬바람이 소슬한 나뭇가지를 더한층 앙상한 모습으로
변해놓았다. 이때 군막 밖에서 술 나르는 것을 감독하고 있던 병사는 빼주
담은 고리에 하얀 가루를 넣었다. 오랑캐에게만 권하는 그림 그린 술병에는
흰가루를 탄 빼주가 부어져서 군막 안으로 날라졌다. 무녀들은 하얀 가루가
타진 화병 술을 오랑캐들에게 권했다. 오랑캐들은 더한층 흥겹게 마시며
뛰었다. 동이 환하게 터질 무렵, 오랑캐들은 한 명 두 명 새 명 네 명 쓰러지기
시작했다. 수십 채 군막 안에서 오백여 명의 오랑캐들이 일제히 쓰러져 정신
모르고 코를 골았다. 병영 군사들은 일시에 오랑캐들을 준비했던 동아줄로
결박을 지었다. 군막마다 주안상이 물려지고, 기생과 무녀들은 소임을 다한
후에 제각기 흩어졌다. 다만 오랑캐들만이 정신을 잃은 채 군막마다 손과 팔이
묶여서 쓰러져 있었다. 일고삼장이 되었다. 대여섯 시각이 지났다. 오랑캐들은
한 명 두 명씩 차차 정신을 차려서 소생이 되기 시작했다. 눈을 떠보니 간밤에
질탕하게 놀았던 일은 일장춘몽이 되어버리고, 자기들의 팔과 손목이 질탕하게
놀았던 일은 일장춘몽이 되어버리고, 자기들의 팔과 손목이 동아줄로 꼭꼭
묶여서 꼼짝달싹할 수 없는 부자유한 몸이 되어버렸다. 군막마다 똑같은 상태다.
오랑캐들은 비로소 계교 속에 떨어진 것을 직감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군막마다 신호를 보냈다. 오백육십여 명이 다 똑같은 경위를 당하고 있었다.
원망하고 욕하는 소리가 폭죽 터지듯 터졌다. 그러나 아무 효력도 없었다.
이윽고 감사와 병사가 전립에 군복 차림으로 천여 명 병영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병사가 군령을 내렸다. "군막으로 들어가서 오랑캐들을 일으켜라!"
창과 채찍을 든 천여 명 병영 군사들은 일제히 군막 안으로 들어가 도망병들을
일으켜서 비웃두름 엮듯 열 명 스무 명씩 밧줄을 늘여 묵었다. 이미 팔과
손목이 묶여진 도망병들이다. 반항할 도리가 없었다. 도망병들은 소리쳤다.
"우리들을 묶어가지고 어디로 갈 테냐?" "너희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병영 군사들은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했다. 병영 군사들은 도망병들 오백여
명을 소 몰듯이 몰았다. 삭풍이 내리질리는 압록강변으로 향했다.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다. 배를 탈 필요도 없었다. 병사는 백마를 타고 앞에 나가고, 병영
군사들은 좌우편으로 갈라져서 도망병들을 호위해 나갔다. 도망병들은 모두 다
눈치를 챘다. 자기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명나라 요동총관에게
넘겨주려는 이편 계략을 비로소 깨달았다. 오백여 명의 도망병들은 틈만
있으면 달아날 궁리를 했다. 일부러 걸음을 걷지 아니했다. 소걸음을 걸었다.
병영 군사들은 호통을 치며 채직질해 나갔다. 그렇게 청명하던 날씨가 별안간
하늘이 먹장 갈아 분 듯하면서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했다. 압록강 일대는
삽시간에 은세계를 이루었다. 함박같이 내리는 눈은 휘몰아치는 강풍과 함께
사람들의 눈과 코를 덮었다. 숨쉬기도 곤란했다. 강행군이었다. 병영 군사들은
도망병들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얼음판 위의 가득히 쌓인 눈을 헤쳐나갔다.
멀리 대안이 보였다. 명나라 요동총관의 군사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요동총관이 이미 감사의 도망병 넘겨주겠다는 연통을 받은 때문이다. 강
건너는 일이 겨우 끝이 났다. 병사는 요동총관에게 여진 도망병 오백육십여
명을 피 한 방울 아니 흘리고 계책을 써서 고스란히 넘겨 주었다. 빼주에 탄 흰
가루는 몽혼약이었다. 건주여진 이만주는 자기네 도망병 오백여 명이 쥐도
새도 모르게 조선군에 의해 명나라로 인도된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얼마
후에 강을 건너간 여진 사람들에게서 이 소식을 들었다. 이만 주는 크게 노했다.
용맹스런 장수 십여 명과 말 잘 타는 기병 사백여 기를 뽑아서 압록강 굳은
얼음을 타고 여연으로 쳐들어왔다. 자성 백성들은 창졸간에 변을 당했다.
적병은 민가에 침입하여 소와 말을 뺏고,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를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잡아갔다. 하룻밤 사이에 여연 한 고을은 분탕질을 당하고 화염이
충천한 불바다가 되었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와 강계 절제사 박초는 급보를
받자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자성으로 쫓아가 적과 대치해 싸웠다. 그러나 큰
승리를 얻지 못했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는 곧 파발마를 달려 사실대로 장계를
올렸다. '야인 사백여 기가 여연에 돌입해서 인민을 표략했습니다. 강계 절제사
박초는 곧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잡혀간 백성 이십육 명과 말 삼십
필, 소 오십 필을 뺏어왔습니다. 이 싸움에 전사자가 열세 명이요, 살에 맞아
상한 군사가 이십오 명입니다. 해가 저물어서 더 쫓아가지 못했습니다.'
정원에서는 곧 평안도 관찰사의 급한 장계를 세종전하께 올렸다. 전하는
장계를 보시자 크게 진노하셨다. 곧 승지에게 대신들의 입시를 명했다.
대신들이 급히 내전으로 모여들었다.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을 위시하여
찬성 권진, 입번도 진무 조말생, 병조판서 최사강, 집현전 대제학 정초 등이
입시했다. 전하는 평안도 관찰사의 급한 장계를 보이시며 말씀을 내린다.
"오랑캐는 항상 나라의 두통거리다. 이만주란 자는 우리가 명나라의 요구에
응하여 도망병을 요동총관에게 인도해주었다 해서 앙심을 먹고 감히 우리 땅
영연에 침범해서 일군을 소란케 했으니 가증하기 짝 없는 일이다. 당장 큰
군사를 일으켜 배은망덕하는 야인을 소탕할 작정이다. 그러나 우리가 압록강을
건너 여진으로 진격하자면 옆에 명나라의 관할인 요동이 있으니, 일단 명나라
황제한테 야인 공격하는 것을 통고하고 대군을 휘동하는 것이 어떠한가?"
좌의정 맹사성이 아뢴다. "상교가 지당하십니다. 그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의 의향대로 하라고 찬성했다. 대제학 정초가 마땅치 않은 얼굴빛을 띠고
아뢴다. "전하! 명나라 황제한테 알릴 까닭이 없습니다. 이번에 이만주가
앙심을 먹고 여연에 들어와 고약한 행동을 한 것은 명나라 때문에 일어난
일이올시다. 구구하게 우리가 고개를 숙여서 저자세로 명나라 황제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제학 정초의 논지는 당당했다. 전하는 대제학
정초의 당당한 의견에 마음이 기울어졌다. 승지에게 분분했다. "최윤덕과
김종서를 명소하라!" 전하는 범 같은 두 장신의 의사를 들어보자는 것이다.
부름을 받은 노장군 최윤덕과 범 같은 인물 김종서는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급히 어전회의에 참석했다. 전하는 두 장신의 배알을 받자 마음이 든든했다.
항상 두 신하를 주석지신으로 생각하는 때문이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하문한다. "저번에 명나라의 요청에 의하여 건주여진의 패잔병들이 우리 땅으로
도망쳐 들어온 것을 조정 공론에 따라서 명군에게 넘겨주었더니, 여진 추장
이만주가 우리 땅 여연으로 돌입해서 백성들을 살육하고 우마를 약탈해
방약무인한 태도를 감행했다. 이제 평안 관찰의 급한 장계에 의하면, 강계
절제사 박초가 곧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서 잡혀갔던 백성과 우마를 뺏어왔다
하나 크나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군사들만 수십 명이 상한 모양이다. 곧
대군을 일으켜 톡톡히 야인들의 버릇을 가르쳐야 하겠다. 그러나 출병에 대해서
양론이 있다. 압록강을 건너면 명나라 요동이 되니, 명나라 황제한테 여진
공격을 통고하고 출병하는 것이 좋을지, 명에 통고하지 아니하고 출병하는 일이
좋을지 아직 결정을 짓지 못했다. 좌의정 맹사성은 명나라에 알리고 출병하는
것이 좋다 하고, 대제학 정초는 명나라 때문에 이 분쟁이 일어났으니 단독으로
처결할 일이지, 명에 대하여 저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양론에
대하여 경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백전노장인 최윤덕이 백수를 흩날리며
아뢴다. "일찍이 명에서 여진 도망병을 넘겨달라고 요구할 때 전하께서는 정에
끌리시어 종으로 부리던 여진 사람을 어찌 차마 명에 넘기겠느가 하고
지의하셨습니다. 그때 소신은 작은 정을 버리시고 큰 것을 생각하시라 했습니다.
만약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명나라는 반드시 우리를 의심하여
우리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형편이 다릅니다. 명에 대해서는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우리 땅을 침범한 오랑캐를 우리 힘으로 응징하는데
구구하게 명나라 조정에 연통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제학 정초의 말씀대로 여진
응징하는 일을 알린다면, 이것을 쓸데없는 저자세가 됩니다. 절대로 명나라
황제한테 알릴 까닭이 없습니다. 공연히 그자들의 코만 우뚝해집니다. 전하! 이
기회에 우리 땅에 사는 여진 족속을 모조리 국졍 밖으로 쫓아내버리고 강역의
한계를 명확하게 만들어 놓으시는 것이 가한 줄로 아뢰오." 최윤덕의 말이
끝나자, 온몸이 도시 담덩어리라는 별명을 듣는 김종서가 오척 단신 작은
체격에 열을 띠어 아뢴다. "최윤덕 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침범한 여진을 응징하는데 명나라한테 통고할 까닭이 없습니다. 공연히
명군이 거들어준다고 하다가 우리 땅으로 건너온다면 큰일이올시다." 김종서의
아뢰는 말은 논리가 정연했다. 최윤덕 장군의, 명에 대해서 저자세를 취하지
말고 여진 족속을 모두 다 국경 밖으로 내쫓아서 국토의 한계를 바로잡자는
씩씩한 말과, 김종서 장군의, 쓸데없이 명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출병을 알려서
명군이 도와주는 체하다가 국경 안으로 몰려든다면 골치 아픈 일이라는 놀리
정연한 말에, 만좌는 모두 다 고개를 숙여 엄숙한 태도로 귀를 기울여 들었다.
명나라 황제한테 사신을 보내서 알린 후에 출병하는 것이 좋다고 아뢰었던
좌의정 맹상성도 다시 더 이론을 내지 못했다. 전하의 마음은 두 장신의
씩씩한 주장을 듣자 명나라에 알리지 아니하고 자주적으로 출병할 것을
결심했다. "두 장신의 씩씩한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든든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곧 대군을 일으켜 응징할 준비를 차려야 할 것이다. 아직은 압록강
물이 얼어붙었으니 개춘이 되는 대로 곧 출병할 태세를 취하라!" 장군
최윤덕이 아뢴다. "전하께서는 한량과 무사들에게 별시를 보여서 크게
우대하시고, 훈련원에 열병을 하시어 사기를 복돋워주시옵소서." 김종서가
아뢴다. "우리 나라의 화포는 여진이 가장 두려워합니다. 화약쳬을 확충하시고
화약장이를 우대하시어 화약을 풍부하게 저장하시옵소서." 세종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신다. "무사를 뽑아서 훈련시키고 화약을 풍부하게 제조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얼음이 풀리게 되면 배로 군사를 건네야 할 것이다.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을 내려서 전함을 수백 척 만들도록 하라." 시립했던 병조판서가
대답한다. "하교하신 대로 평안 관찰사에게 명을 내려서 사수색을 다시
설치하고 밤을 도와 전선을 만들게 하겠습니다." 세종전하는 또다시 분부를
내린다. "대군이 강을 건너서 오랑캐의 소굴을 무찌르자면 군사행동이 신속해야
할 것이다. 부교를 놓아 대군을 질풍신뢰같이 전격적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경들은 부교를 놀 방법도 연구해두라!" 최윤덕, 김종서를 위시하여 모든
대신들은 전하의 슬기로운 말씀을 듣자, 마음 속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압롱강에 부교를 놀 생각은 명장 최윤덕이나
김종서로도 생각지 못한 일이올시다. 성상의 슬기는 신들의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세종전하는 소리를 높여 웃으며 대답한다. "그것을 무슨 슬기라
하랴. 아무리 크고 긴 강이라 하나 좁은 길목이 있다. 이러한 곳에 칡을 얽어서
다리를 놓고, 그 위에 흙을 얹은 후에 행군을 한다면, 길목이 짧은 때문,
배보다도 속히 건너갈 수가 있을 것이다. 평안도 일대에 영을 놓아서 우선 산골
속으로 들어가 칡덩굴을 거두어서 부교 놓을 준비를 해두게 하라!" "칡덩굴을
거두는 일도 평안 관찰사에게 하교대로 지시하겠습니다." 병조판서가 뜻을 받아
아뢰었다. 세종전하는 다시 하교를 내린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의논한
여진정벌에 대한 일은 평안 관찰에게는 비밀을 지켜서 아직 알리지 말라.
개춘이 되어 출병할 일을 미리 알린다면 소문이 야인한테로 들어갈 것이다.
앞으로 야인의 침범을 잘막으라 이르라." 병조판서는 명을 받았다. 서울과
평안도, 함경동 일대는 삭풍이 살을 에는 혹독한 추위건만 은밀한 속에
전쟁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다. 대장간에는 대장장이가 이글이글 불을 피워 칼과
창을 만들고, 궁방에서는 일류 장인들을 뽑아서 화궁과 백우전이며 금비전을
차근하게 만들었다. 화약청에서는 화포에 쓸 화약을 무진장 만들고, 청천강
일대에 즐비하게 늘어선 사수색에서는 새로운 전함을 짓기에 분주했다. 평안
관찰사는 병조판서의 비밀한 지령에 의해서 백성들에게 상금을 주어 칡덩굴을
거두어 헛간마다 산더미같이 쌓아놓았다. 무슨 까닭으로 칡덩굴을 이같이
저축해 두라는 것인지 까닭을 알지 못했다. 감사도 모르고 병사도 몰랐다.
더구나 백성들은 알 까닭이 없었다. "칡은 무엇에 쓰려고 이같이 거둬들이나?"
"약에 쓰려는 것이 아닌가?" 똑똑한 체하는 한 사람이 대답했다. "이 사람아,
약에 쓰는 것은 칡뿌리, 갈근일세, 칡덩굴이 무슨 약제가 된단 말인가?" 또 한
사람이 말한다. "이 사람아, 갈포가 있지 않은가. 칡을 두들겨서 실을 뽑아
가지고 베를 만들려는 게지!" "아 참, 그렇다. 문자에도 갈건야복이란 말이
있거든. 나라에서 칡으로 베를 짜려고 상금을 주고 칡덩굴을 거둬들이나보다."
그자나 배웠다는 서당 촌학구는 자기 멋대로 이같이 풀이를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슬기로운 머리에서 창의된 이 칡덩굴 수집이 앞으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하여 얼마나 크나큰 도움을 주게 될지 짐작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조정에서 최윤덕과 김종서가 전하의 뜻을 알고 마음
속으로 깊이 탄복했을 뿐이었다. 한편 서북면 압록강 연안 일대에서는, 지난번
오랑캐 추장 이만주가 양심을 품고 4백여 기를 거느리고 여연으로 쳐들어와서
사람과 우마를 끌어가고 불을 질러 초토를 만든 후에도 계속해서 지근댔다.
강계 절제사 박초는 군사를 거느려 여연으로 달려가 여진 군사를 추격하여
잡혀갔던 남녀노소 약간 명과 말과 소 수십 필을 찾아온 일이 있으니, 여진은
감사 박규와 절제사 박초의 군사쯤은 코방귀 같다고 생각했다. 이만주는
또다시 여연과 강계로 압록강 얼음을 타고 들어와서 불을 지르고 곡식을 약탈할
후에 여자와 소와 말을 뺏어 달아났다. 여연 절제사 김경과 강계 절제사
박초와 도절제사 문귀는 지난번 이만주의 4백여 기가 여연으로 돌입해서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었을 때도 적과 싸워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번에도
적을 미리 막아내지 못하고 백성과 우마를 적지 않게 적에게 뺏겨버렸다.
평안도 관찰사는 파발마를 달려서 또다시 막아내지 못한 사실을 급히 아뢰었다.
전하는 크게 진노했다. 곧 상호군 홍사석과 의금부진무 조서강을 긍계와
여연으로 보내어 패전한 죄상을 국문하라 했다. 홍사석과 조서강은 어명을
받들고 주야배도하여 강계와 여연으로 말을 달려 패전한 실정을 살피고
평안감사 박규와 도절제사 문귀 등을 국문한 후에 지체없이 어전에 복명했다.
"평안감사 박규는 무능하기 짝이 없고, 도절제사 문귀와 강계 절제사 박초는
모두 다 장재가 아니올시다. 두 번씩이나 여진의 습격을 당했으면서 미리
방어할 태세를 취하지 아니하고 당황해하고만 있습니다." 전하는 크게 노했다.
곧 정원에 명하여 평안감사 박규와 문귀와 강계 절제사 박초의 직위를 해제시킨
후에 장군 최윤덕을 명소했다. "오랑캐 이만주의 작란이 격심하니 여연과 강계
백성들의 고초가 대단하다. 한번 크게 응징해서 다시는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버릇을 톡톡히 가르쳐놓아야 하겠다. 지금 이 시점에 있어 큰 임무를
완수할 사람은 경밖에 없다. 경은 사양치 말고 서북면 평안도 도절제사의
중책을 맡으라!" 최윤덕은 두 번 절하고 어명을 받들었다. "신이 비록
불민하오나, 전하의 명철하신 뜻을 받들어 오랑캐를 응징하여 강계와 여연의
백성들이 베개를 높이하여 평안히 자도록 국경을 튼튼히 하여 다시는 후환이
없게 하겠습니다. 절대로 명나라 관할인 요동의 세력을 빌리지 아니하고
자력으로 오랑캐를 격멸해서 전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세종전하는 최윤덕의
아뢰는 말씀을 듣자 용안이 화려했다. 미소를 풍기며 말씀한다. "지난번 중추원
회의 때도 경의 정당하고 씩씩한 의견에 따라서 은밀한 속에 군비를 확충하고
있는 일은 경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바다. 평안도 사수색에서는 전함을
조성하고 있고, 화약청에서는 화약을 충분히 저장했었다. 활과 창이며 무기에
대하여 뒤를 이어 수송할 테니 경은 부임한 후에 군수품에 대한 걱정은 하지
말고 병졸들을 잘 훈련시켜서 때를 가려 응징하도록 하라!" "아직 겨울이라
압록강은 얼음이 얼어 있습니다. 봄이 되는 대로 곧 출병을 하겠습니다. 정병 만
명은 가져야 하겠습니다." "서울에서도 그 동안 한량과 무사들을 많이
양성했으니, 경이 떠난 후에도 소문 없이 뒤를 이어 서북면으로 군사를 보낼
것이다. 이 점에대해서는 과히 염려하지 말라." 전하는 차근하게 군수품과 병졸
수송에 대하여 계획을 말씀했다. 최윤덕이 다시 아뢴다. "전쟁에는 용맹스런
장수와 날랜 군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적에 대해서 성토문과 격서를 보내야
할 때는 글 잘 하는 문사가 있어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한 사람의 글 잘 하는
선비를 주시어, 막하를 삼게 하옵소서." 전하는 촌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명장의 말이다. 집현전 참사 신숙주를 줄 테니 막하를 삼으라." 최윤덕의 입이
딱 벌어졌다. "황감하오이다." 전하는 곧 내관에게 분부했다. "집현전에 나가
수찬 신숙주를 입시케 하라." 내관은 명을 받들고, 집현전에 입직하고 있는
신숙주에게 어명을 전했다. 신숙주는 까닭을 몰랐다. 황망히 조복으로 갈아입고
어전에 올랐다. 전하는 신숙주의 문장과 재질이며 면학하는 태도를 항상
사랑했다. 잘배자까지 내려서 영광을 주신 전하다. 숙주의 배알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전하는 용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하문하신다. "요사이도 밤 늦도록
독서를 하느냐?" 옆에는 대장군 최윤덕이 아직도 시립하고 있었다. 신숙주가
음성을 화하게 하여 아뢴다. "요사이는 독서보다도 모든 학사들과 함께
'고려사'를 편수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고려사'를 춘추관에서
수정하지 아니하고 왜 집현전 학사들이 편수하느냐?" "춘추관에는 인원이
부족하와 집현전에서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대제학이 춘추관의 일을 겸임한
때문에 집현전에서도 분담하여 편수 교정하는 일부분을 맡았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말씀한다. "가상한 일이다. 춘추관이나 집현전이나 결국은
국가의 일이다. 애들 많이 쓴다!" 칭찬한 후에 다시 신숙주를 향하여 말씀한다.
"너, 이분을 짐작하느냐?" 옆에 시립해 있는 최윤덕을 손으로 가리키며
하문했다. 신숙주가 조용히 아뢴다. "문무의 길이 달라서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하는 다시 미소를 풍기시며 말씀한다. "천하명장 최윤덕을
모른다니 말이 되느냐. 범을 강아지 잡듯 하고, 대마도를 소탕해서 천하에
용맹을 드날린 최윤덕 노장군이다. 뵈어라!" 전하는 숙주를 자질같이 사랑했다.
숙주는 어명을 받들어 최윤덕 장운에게 절하고 고한다. "우레 같은 존함은 귀에
젖도록 들었습니다마는, 문무의 길이 달라 시생이 항상 가깝게 모시지 못해서
죄스럽습니다." 최윤덕 장군은 허리를 굽혀 답례하며 대답한다. "성상께서
잘배자까지 내리시어 격려하셨다는 말씀, 잘 알고 있소이다. 어전에서 문창성을
대하니 눈이 부신 듯하오." 세종대왕은 최윤덕과 신숙주의 주고받는 수작을
들으시자 소리를 높여 껄껄 웃으시며 말씀한다. "이 사람은 젊은 문창성이지만,
이 사람의 아버지는 늙은 문창성일세. 글씨 잘 쓰고 글 잘 하는 신장이가 바로
이 사람의 아버지일세. 양대 문창성이지. 하하하." "네, 신은 무변이라
무식하오나 다 알고 있습니다." 최윤덕은 미소를 머금은 채 허리를 굽혀
대답한다. 세종대왕은 용안을 다시 장중하게 바로하신 후에 신숙주에게
말씀한다. "오늘 이 자리에 너를 부른 것은, 너에게 중한 책임을 맡기자는
것이다. 너는 잠시 집현전을 떠나야 하겠다!" 집현전을 떠나야 한다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신숙주는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랐다. 어안이벙벙해서 말씀 대답을
아뢰지 못한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지금 국가에는 큰일이 있다.
너희들은 비록 글만 숭상하는 학사지만 서북면과 동북면의 오랑캐들이 자주
변방을 침노해서 백성들이 평안한 생활을 누리지 못한다. 지난번에는 남해와
서해를 혼란케 하는 대마도 왜적을 소탕하여 버릇을 가르쳤거니와, 이번에는
오랑캐 소굴을 응징해서 나라의 근심을 덜게 할 작정이다. 이제 최윤덕으로
평안도 도절제사를 임명하여 대임을 완수케 할 작정이다. 너에게 최윤덕의
막하를 삼아 종사관으로 임명하니 군문에 나가 성심성의로 최윤덕을 도우라."
신숙주는 전하의 하교를 듣자 두 번 절하고 아뢴다. "삼가 어명을 받들어
군령을 준수하고 최장군의 지휘에 복종하겠습니다." 전하는 즉석에서 정원
승지를 불렀다. "최윤덕에게 평안도 도절제사를 임명하는 교서와 신숙주에게
종사관의 직책을 주는 교지를 써 올리라." 승지는 봉명하고 정원으로 나가 두
장의 교지를 써서 받들고 들어왔다. 대왕은 최윤덕에게 교서를 친히 주시며
격려의 말씀을 내린다. "서북면 일대의 일은 모두 다 경에게 맡긴다. 맡아서 잘
방어하고 톡톡히 오랑캐의 버릇을 가르쳐 응징하라. 그리하여 백성을
평안케하고 국가의 위신을 크게 선양하라!" 최윤덕은 두 번 절하고 교서를
받들었다. 전하는 다음에 종사관의 교지를 친히 신숙주에게 주신다. "너에게
평안도 도절제사 종사관의 책임을 준다. 명민한 머리와 슬기로운 지혜로
최윤덕을 도와 큰 공을 이루고 돌아오라!" 교서와 교지를 어수로 친히
내리시는 일은 유례 없는 일이었다. 늙고 젊은 두 신하는 감격한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묵묵히 뒷걸음을 걸어 어전에서 물러난다. 전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긴 최윤덕을 전송하기 위하여 친히 옥보를 옮기어 분합까지 나갔다.
어수를 들어, 전각을 나가는 최윤덕에게 은근한 정을 표했다. 신숙주가 최윤덕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전하는 멀리 서서 신숙주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내린다. "요사이 우리 나라에는 문관이 무관을 업신여기는 풍습이 있다.
잘못된 일이다. 문무겸전해야만 그 나라는 흥왕할 수 있다. 신숙주는 문관
학사라 해서 무인을 우습게 보면 아니된다. 최윤덕에게는 도절제사의 절월을
주었다. 군령을 어기면 군법시행을 당할 것이다. 명심하라!" 신숙주는 발길을
멈추고 전하의 옥음을 귀담아들었다. 세종전하는 최윤덕에게 도절제사의
중책을 맡기고 신숙주로 종사관을 임명한 후에 이순몽으로 중군절제사를 삼고,
김효성에게 도진무의 책임을 주고, 최치운으로 경력을 명했다. 세종전하는 모든
장수들의 부서를 친히 임명한 후에 중추원부사 최해산을 어전에 불렀다.
최해산은 군기의 조달을 맡은 관원이었다. "이제 야인을 응징하기 위하여 장군
최윤덕이 도절제사가 되어 장차 서북면으로 향할 것이다. 우선 서울에서만도
군사 만여 명이 출동할 계획이다. 이 밖에 서북면 일대와 동북면에 결쳐 있는
변방 군사와 승군들을 합하면 도합 2만 대병이 될 것이다. 토벌을 하자면
주밀한 계획과 날랜 군사가 필요하지만, 예리한 무기와 방어할 갑옷도 필요하다.
이들, 장도에 오르는 장졸들에게 뒤를 대어줄 군수품이 어찌 되었는지 알고
싶다. 네가 맡은 바 군기의 비축한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라." 최해산은 별안간
전하의 소명을 받았을 때, 벌써 군기조달에 대해서 하문이 계실 줄 알았다.
군기를 비축한 기록을 미리 가지고 입궐했던 것이다. "신은 전하께오서
북벌하실 뜻이 계시와 군기에 대하여 하문하실 것을 짐작하옵고, 대충 물목을
적어 왔습니다." 최해산은 말을 마치자 품안에서 군기를 비축한 기록을 꺼냈다.
전하는 점두하며 하문한다. "우선 갑옷, 투구는 몇 벌이나 조성이 되어
있느냐?" "장수가 입고 쓸 갑옷, 투구가 오십 벌이옵고, 병졸들이 입을 갑옷이
만오천 벌가량 됩니다." 전하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씀한다. "만오천 벌도 좋이
만들었다. 그러나 외지에 있는 군사들을 생각해서 만 벌쯤은 더 만들어야 할
것이다. 도절제사의 대군이 출발한 후에라도 계속해서 더 만들도록 하라."
최해산은 고개를 숙여 대답한다. "명심해서 계속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창과 칼은 어찌 되었느냐?" "현재 군졸들은 한
사람 앞에 창 한 벌과 칼 한 자루씩 다 가지고 있습니다. 뒤를 이어 수송해
보낼 창검은 밤을 도와 풀무장이들이 만들고 있습니다." "화약청에서 만드는
화약은 어느 정도 조성되었느냐?" "이번에 출전할 화포는 백 문이올시다. 화약
천 궤가 조달되었습니다." "활과 살도 충분하냐?" "활과 살은 염려 없습니다.
대마도 정토 이후에 계속 만들어서 충분하옵니다." 전하는 일일이 살피고
만족한 빛을 띠었다. 주밀한 전하는 또다시 최해산에게 묻는다. "도절제사
최윤덕이게도 의논한 일이지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서 오랑캐를 응징할
시기는 봄이 좋을 것이다. 얼음이 풀리면 배를 사용해야 한다. 사수색을 더욱
확장해서, 서울 오강에서도 전선을 짓도록 하라." "서울에서도 전선을 짓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만들겠습니다." 서북면 도절제사 최윤덕은 수하 군관 수십
명과 중군, 우군, 좌군 삼군을 통솔한 후에 대장기를 바람에 펄럭이며 서소문 밖
의주가도를 통과하여 고양, 파주, 장단을 거쳐 서관으로 향해 나가니,
기치창검은 햇빛에 반사되어 더한층 선명하고, 북소리, 징소리, 취타 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 대군은 평양 대동강 얼부푼 강을 건너 안주에 당도했다.
안주 백성들은 멀리 떨어져 살던 아버지가 오래간만에 돌아온 듯 춤을 추며
기뻐했다. 옛날 안주목사 때 칡범을 친히 잡아서 화전민 아내의 원수를 갚아
주고 찬비의 직책을 주어서 유복자를 잘 기르게 했던 바로 그 최윤덕
장군이었다. 지난날 목민지장이었던 안주목사 최윤덕이 삼군을 통솔하는
대장군이 되어 만여 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서북면 일대를 방어하기 위하여
평안도에 당도하니, 오랑캐 무리들의 침략을 받아 항상 평안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도탄 속에 빠졌던 남녀노소 백성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대군이
지나가는 거리 거리마다 백성들은 백절치듯 모여들었다. 논두렁 밭두렁에서
정월 놀이로 잔디에 쥐불을 놓던 총각 머슴애들도 손뼉을 치며 최윤덕 장군의
근감하고 씩씩한 행군을 환영했다. "야, 맨 앞의 은안백마에 높이 앉아
갑옷투구로 대장기를 휘날리며 장검을 비껴 들고 나가는 저분이 누군지 아느냐?
안주목사로 있었던 최윤덕 장군이다!" "아아, 바위 틈에서 무서운 칡범을 때려
잡았다는 그 안주목사냐?" "그렇다. 바로 그 최목사다. 호랑이가 물어간
화전민의 원수를 갚아주고, 유복자를 잘 기르라고 그 아내를 먹고 살게
해주었던 바로 그 양반이다!" "저같이 무서운 장수가 인정도 많구나!
"맘이 착한 사람은 잘 되는 법이다. 그러기에 이번엔 십만 대병을 거느린
대장군이 되어 우리들을 편안히 살라고 오랑캐를 무찌르러 나오는 것이다!"
행군이 안주성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남녀노소들은 길에 나열해서 최윤덕 장군을
맞이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한 손에 막대를 짚고 한 손에 술병을 들어
최장군의 앞으로 나갔다. "사또, 대장군이 되시어 안주로 다시 오십니다. 이
기쁨을 어찌합니까. 소인은, 사또께서 삼문 밖 빈터에서 참외밭을 가꾸실 때
진짜 사또를 모르고 사또가 어디 계시냐고 무례한 말을 했던 바로 그자올시다.
이같이 다시 오셔서 저희들을 편안케 해주시니, 고마운 말씀 사뢸 길 없습니다.
그저 박주 한 잔을 올립니다." 최윤덕 장군은 빙긋이 웃고 마상에서 손을
내밀어 늙은이의 올리는 술을 받으며 치사했다. "고맙소. 옛일을 아직껏
기억하는구려. 조용히 언제 한번 다시 만납시다." 늙은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뒤미처 한 여인이 총각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사또, 쇤네를 기억하십니까?
호랑이 원수를 갚아주신 화전민의 아내올시다. 그때 낳은 유복자가 사또 덕택에
이같이 자랐습니다." "오오, 그렇더냐?" 장군은 총각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백절치듯 구경하는 사람들은 감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서북면 도절제사
최윤덕 장군의 인기는 절정에 올랐다. 최윤덕 장군이 평안도 도절제사로 만여
명 정병을 거느리고 서북면에 도임한 일은 서북면 일대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반면, 압록강 건너편 혼강 일대에 쭈그려 있는 오랑캐 무리들에겐 크나큰
위협을 주었다. 일찍이 소년시절부터 범을 때려 잡았고, 바다 건너 왜추들이
거접하고 있는 대마도를 소탕한 최윤덕 장군의 혁혁한 명성은 몇 해 전
안주목사로 있을 때부터 오랑캐 무리들의 가장 두려워하는 바였다. 소문은
강을 건너 단통 오랑캐 부락에 번개치듯 퍼졌다. "조선 명장 최윤덕이 만여 명
정병을 거느리고 서북면 도절제사가되어 부임했다 안다. 큰일이다. 우리를
무찌르러 강을 건너오면 어찌하나!" "연전에 왜추 대마도를 쳐서 지진두를
만들었다는 그 최윤덕이 아니냐?" "그렇다. 바로 그 최윤덕이다. 지략이 겸전할
뿐 아니라 활도 잘 쏘는 천하명궁이다. 지지난번 안주목사로 있을 때는 화살 한
대로 범을 쏘아서 백성의 원수를 갚아주었다는 기막힌 장수다!" "여남은 살
때부터 칡범을 주먹으로 때려 잡았다는 천하장사라 하더라!" "이만주 추장이
공연히 지난번에 여연을 집적댄 때문, 최윤덕이 도절제사가 되어 우리를 치러
온 것이 아니냐. 큰일났구나!" 오랑캐들은 공론이 분분했다. 공포와 불안 속에
빠졌다. 오랑캐 추장 이만주도 겁이 덜컥 났다. 아장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조선에서 평안감사 박규와 도절제사 문귀며 강계절제사 박초를 해임하고
최윤덕으로 도절제사를 삼아서 만여 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서북면에 부임했다
하니, 필시 우리를 응징하러 온 것이 아닌가? 앞으로 우리는 어떠한 태세를
취해야 할지, 여러 아장들은 의견을 말해보라!" 아장 한 사람이 대답한다.
"지난번 우리가 4백여 기로 여연을 돌격해서 크게 전과를 올렸으므로,
조선조정에서는 패군한 문귀, 박규 등을 해임시키고 이름 있는 장수 최윤덕을
대신 보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겁을 내지 말고 최윤덕이 우리한테
쳐들어오기 전에 먼저 기선을 제어해서 여연과 강계를 한 번 더 무찌르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조선군의 예기를 꺾어야 합니다."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한 장수가 말한다. "최윤덕은 박규나 문귀같이 넘볼 장수가
아닙니다. 공연히 선손을 걸어서 혼단을 일으키지 말고 가만히 형세를 살펴서
처리하는 일이 온당할 듯합니다." 또 한 사람의 오랑캐가 의견을 말한다.
"조선 군사들은 얼음 위에서 말을 달리지 못합니다. 압록강 얼음이 풀리기 전에
1천여 명의 말 탄 군사를 움직여서 이편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여연, 강계는 우리들의 젖줄이올시다. 우리는 기어이 이 두 곳을 우리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오랑캐 장수들은 강경론을 주장해서 더 한 번 여연과
강계를 압록강 얼음이 퓰리기 전에 돌격해보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모든
아장들의 강경론을 듣고 있던 모사 퉁맹가가 손을 저으며 의견을 말한다. "여러
아장들께서 압록강 얼음이 풀리기 전에 여연과 강계를 더 한번 공격해서 우리의
위엄을 떨치고, 우리 족속들이 마음놓고 여연과 강계에 살아서 민생문제를
해결해보자고 한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마는, 최윤덕은 호락호락한 장수가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정병 만여명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여기다가 다시
동북면의 군사를 합세한다면 이만 명 이상의 큰 군사가 될 것입니다. 공연히
잘못 건드렸다가 잠든 호랑이의 코를 찌르는 격이 될 것입니다. 덮어놓고
강경론만 주창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장수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만주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는가?
퉁모사는 뚜렷하게 의사를 발표하라!" 퉁맹가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다.
"아까 아장 한 분이 말씀한 바와 같이 여연가 강계는 우리들의 젖줄이올시다..
만약 섣불리 최윤덕을 건드렸다가 일이 실패되는 날이면 게도 구럭도 다
잃어버리고 우리 부락은 대마도처럼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니 화해를 해서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은 격으로 우리의 젖줄도 아니 끊어지고 조선편에서도
군사를 아니 움직이도록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퉁모사는 화해를
주장하는 말일세그려." 이만주는 모사를 향하여 묻는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화해하는 일을 적극 주장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난국에 처한 생왕방이올시다."
추장 이만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선편에서 화해를 들어줄 리 만무하지.
최윤덕은 우리가 여연과 강계에 침략한 일을 앙갚음하기 위하여 대군을 휘동해
왔는데, 화해하자는 우리 청을 들어줄 리 만무하지." "장군, 저한테 한 계교가
있습니다. 말이 새어나가면 아니됩니다. 별실로 잠시 듭시면 계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좋다!" 이만주는 허락하고 별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든
아들은 항명할 수 없었다. 묵묵히 추장 이만주와 모사 퉁맹가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사 퉁맹가는 여러 아장들에게 눈웃음을 치며,
"미안합니다." 한 마디를 하고 이만주의 뒤를 따라 별실로 들어갔다. 한동안
후에 여진 추장 이만주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아장들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뒤따라 모사 퉁맹가가 의가양양해서 간특한 웃음을 띠고 나타났다.
만주는 아장들을 향하여 호탕한 음성으로 말한다. "퉁맹가 모사는 화해를
주장하지만 나는 결코 비굴하게 화해할 생각이 없다. 재장들의 의견에 따라
록강이 풀리기 전에 다시 4백여기를 거느려 여연을 돌격하리라!" 호기만장하게
떠들어대는 추장 이만주의 여연, 강계를 다시 돌격하겠다는 말을 듣자 모든
아장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좋습니다! 용단을 잘 내리셨습니다. 이번에도
소장을 선봉이 되어 압록강을 건너가겠습니다!" "퉁모사의 화해론을 듣지
아니하신 일이 기쁩니다. 여연과 강계는 우리가 차지해서 먹고 살아야 합니다.
강물이 풀리기 전에 나가야 합니다. 호랑이 때려 잡은 최윤덕이 무섭다고
우물쭈물하다가 기회를 놓치면 큰일입니다.!" "조선 군사들은 얼음 위에서
싸우지 못합니다. 강물이 풀리기 전에 쳐들어가야 합니다." 뚝심만 가진
어리석은 오랑캐들은 다시 압록강을 건너 여연으로 쳐들어간다는 추장의 말에
신명이 나서 떠들어댔다. 추장 이만주는 다시 큰 소리로 영을 내린다. "이번
돌격에는 내가 친히 대장이 되어 4백 기를 통솔할 것이다. 제장들은 일체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 한 장수가 고한다. "지난번에도 소장들이 나가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장군께서 친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소장들에게
맡기시옵소서." 추장 이만주는 눈을 부릅떴다. "다시 이론을 일으키는 자는
군법시행을 하리라! 사흘 후에 출병을 한다. 모든 명령에 일체 복종하라!" 여러
아장들은 고개를 숙인채 다시는 딴말을 거론하지 못했다. 사흘 후가 되었다.
추장 이만주는 스스로 대장 옷을 입고 장창을 비껴들고 장대에 올랐다. 4백 명
기마군이 좌우편으로 2백 명씩 갈라서서 추장 이만주의 호령을 대기하고
있었다. 장대 아래는 그림 그릴 줄 아는 화공 수십 명이 화필을 들고 서
있었다. 아장과 군사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전쟁하러 나가는 데 환쟁이은
웬일인가." 했다. 추장 이만주는 군령을 내린다. "화공들은 좌군 2백 명의
얼굴에 우디거 족속들이 자자하는 모습으로 채색을 칠해 그리라!" 명령이 한번
떨어지니 십여 명 화공들은 채필을 들고 장대 좌편에 나열해 서 있는 2백명
좌군 앞으로 달려갔다. 울긋불긋 세로 가로 곡선과 각선으로 아름답게 칠을
했다. 흡사 토인의 원주민들이 얼굴에 먹을 넣어 자자를 한 형국과 방불했다.
좌군 2백 명의 오랑캐 군사들은 순식간에 우디거 토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모든 장수와 오랑캐 군사들은 까닭을 알지 못했다.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추장 이만주의 엄한 군령이었다. 누구 한 사람 감히 반발할 수 없었다.
다만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모사 퉁맹가와 추장 이만주뿐이었다. 좌군 2백
명의 자자가 끝난 후에 추장 이만주는 군령을 내렸다. "자, 전진이다. 좌군 2백
명은 선진이다!" 오랑캐 추장 이만주는 대장기를 앞세우고, 우디거 복색으로
가장한 좌군 일대를 거느려 앞을 서서 나갔다. 뒤를 이어 모사 퉁맹가가
거느린 2백 명의 우군 오랑캐가 따랐다. 말굽 소리 드높게 찬바람을 헤치며
압록강 얼음 위로 달렸다. 대안이 멀리 보였다. 조선 땅 여연이었다. 최윤덕
장군이 도절제사로 부임된 후에 목책이 철옹성을 이루어 둘러쳐지고, 이곳
저곳엔 망루가 세워졌다. 조선 군사들은 목책과 망루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삼엄한 경비는 전에 비하여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목책 앞에는 대환구가
이곳 저곳에 걸려 있고, 보초를 선 군사들은 든든하게 방한구를 갖추고, 활을
메고 창을 잡고 있었다. 추장 이만주는 멀리 조선진의 질서정연한 형세를
바라보자 간담이 서늘했다. 마음 속으로 모사 퉁맹가의 계교 들은 것을
천만다행한 일이라 생각했다. 추장 이만주는 돌연 호령을 내렸다. "좌군 2백
명은 조선군의 보초가 서 있는 대안까지 돌진하라!" 엄한 군령이었다. 얼굴에
자자한 모습으로 칠해서 우디거족으로 가장한 오랑캐 좌군은 일제히 칼과 창을
빼어들고 대안인 목책 앞으로 말을 달려 들어갔다. 기세가 흉맹했다.
조선측에서는 대환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화살을 쏘아댔다. 돌연 추장
이만주는 백기를 높이 흔들었다. 조선측에서는 화살이 멈춰지고 대환구의
화포가 침묵을 지켰다. 이만주는 모사 퉁맹가가 거느린 우군 앞으로 급히 말을
달렸다. 숨가쁘게 군령을 내린다. "우군 2백 명은 좌군 2백 명을 모조리
포박하라!" 모사 퉁맹가는 우군 2백 명을 거느리고 급히 말을 달려
우디거족으로 가장한 좌군 2백 명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좌군 2백 명은
줄지어 우군이 달려들어 잡으려 하니, 초록은 동색인데 까닭을 알 길 없었다.
분기가 탱중했다. 서로 치고 서로 갈겼다. 자빠지고 넘어졌다. 고래고래
소리치고 싸웠다. 고함소리는 얼어 붙은 압록강 얼음장을 흔들었다.
조선측에서는 급히 이 사실을 장군 최윤덕에게 고했다. 최윤덕은 살같이 말을
달려 망루에 올라 적세를 바라보았다. 해괴하기 짝 없는 일이었다. 아장이
아뢴다. "얼굴에 먹을 넣어 자자한 놈들은 우디거족이고, 깔때기 쓴 놈들은
이만주의 오랑캐족이올시다. 지금 이만주의 오랑캐 군사와 우디거족이 서로
격투를 벌여, 싸움을 하는 모양이올시다." 최윤덕 장군은 묵묵히 듣고 강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오랑캐 우군 2백 명은 무슨 군호를 했는지
우디거족으로 변장한 좌군 2백 명을 고스란히 묶어서 말을 채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최윤덕 장군은 흩어져 돌아가는 오랑캐 군사들을 망루에서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압록강 얼음 위에서 이같은 소동이 일어난 지 며칠 후의
일이다. 오랑캐 건주위 추장 이만주는 모사 퉁맹가로 특사를 삼아 말 탄 군사
수십 기를 거느리고 백기를 흔들며 강을 건너 국경 망루 앞에 당도해서 최윤덕
장군께 뵙기를 청했다. 망루에서 수직하던 장수는 급히 말을 달려
도절제사청인 윤주루로 들어가 이 사실을 고했다. 최윤덕 장군은 한동안 생각
속에 들었다가 이내 명령을 내린다. "따라온 오랑캐 군사들은 목책 밖에
세워두고 사자란 자만 인도해 데려오라!" 얼마 후에 오랑캐 모사 퉁맹가는
비장에게 인도되어 호피 교의에 걸터앉은 최윤덕 장군 앞에 폐백을 바친 후에
군례를 드렸다. 장군이 앉아 있는 전후 좌우에서는 기치창검이 햇빛에
반사되어 엄숙한 기운이 서릿발을 날리는 듯했다. 최윤덕 장군은 통맹가의
군례를 받은 후에 홍종 같은 소리로 위엄기 있게 묻는다. "너는 어떠한 놈인데
감히 강을 건너 나를 보기를 원했느냐?" 통맹가는 청상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아뢴다. "소인은 건주위 이만주의 비장으로 이만주 추장의
친서를 받들어 대장군 휘하에 바치러 온 자올시다. 이름은 퉁맹가라 하옵니다."
최윤덕 장군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꾸짖는다. "요망한 오랑캐놈이
배은망덕하게 국경을 어지럽게 하여,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재물과 곡식을
약탈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을 감행한자들이 건방지게 무슨 글월을 보낸단
말이냐? 네 이놈, 하늘이 무섭지 아니하냐." 최윤덕 장군은 발을 굴러 추상
같은 호통을 내렸다. 튱맹가는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고한다. "대장군께서
저희들 오랑캐들의 실정을 모르시어 그같이 오해하시고 진노하셨습니다. 저희들
건주위는 대대로 조선국의 전하의 후하신 은총을 받아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태산 같은 은혜를 자자손손 각골난망 중이온데 어찌 감히
배은망덕을 하여 여연과 강계를 침략했으리까. 저희들 오랑캐는 여러 족속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여연으로 돌격해 들어간 족속들은 건주위 저희들이 아니고
우디거 족속들이올시다. 깊이 통촉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랑캐 모사 퉁맹가의
아뢰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윤덕 장군은 책상을 주먹으로 치며 호통을
내린다. "요망한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크나큰 죄를 범해놓고 간특한 둔사를
꾸며서 감히 나를 현혹하게 하느냐? 저놈의 목을 베어 뒷날을 징계하리라!"
최장군은 또 한 번 엄포를 내렸다. 건주위 모사 퉁맹가는 손을 들어 싹싹 빌며
애걸해 아뢴다. "감히 장군전에 다시 아룁니다. 소장의 목은 백 번 베어
죽이셔도 한이 없습니다. 소장은 죽음을 각오하고 추장의 친서를 가지고 지엄한
휘하에 바치러 왔습니다. 다만 종같이 부리시던 건주위가 배은망덕하지
아니했다는 것을 소장이 죽은 후라도 아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우디거
족속들이 못된 짓을 한 죄를 저희들 건주위가 뒤집어쓰는 일이 원통해서 글월을
받들고 온 것뿐이옵니다." 최윤덕 장군은 다시 호통을 친다. "네 이놈,
지난번에 여러 차례 여연과 강계로 노략질해 들어온 것이 너희들 족속이 아니고
우디거 족속들이 짓이라는 것을 증명할 증거거리가 있느냐?" "장군님! 그것을
아직도 모르셨습니까? 일전에 압록강상에서 큰 격투가 벌어졌습니다.
우디거족들은 또다시 압록강을 넘어서 여연을 침범하려 했습니다. 이 기미를
미리 안 저희 추장 이만주는 급히 기마대 2백여 기를 거느리고 추격해서
우디거족들을 모조리 포박해서 여연 침공을 막았습니다. 이 일은 목책을 지키고
있던 조선측 망루에서도 자세히 살펴서 아셨을 것입니다. 저희들 건주위는
이같이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저 평화로운 것이 좋습니다. 여연과
강계는 저희들이 젖줄이올시다. 조선으로 인해서 먹고 사는 저희들이 어찌 감히
여연을 침범해서 쑥밭을 만들 리가 있습니까? 모두 다 우리거족의 일이올시다."
최윤덕 장군은 지난번 압록강 망루에서 오랑캐들의 난동을 바라보았을 때 벌써
건주위 이만주의 교활한 복선이 있는 것을 짐작해 알고 있었다. 이제 이만주가
퉁맹가를 보내어 여연을 침범한 죄를 우디거족에게 뒤집어씌우고 슬며시 조선의
성토를 모면하자는 간특한 술책이 분명했다. 곧 사자의 목을 베고 소위
친서라는 것을 받지 않고 싶었으나 아직도 겨울이다. 강이 풀려야만 응징하는
군사를 움직일 계획이었다. 좀더 군사행동의 기밀을 지키고 싶었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엄숙한 호령을 내린다. "지난번 여연을 침범했던 일이 너희
족속이 아니고 틀림없는 우디거족의 작란이란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하늘을 가리켜 맹세합니다. 저희들은 지금 우디거족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어두고 있습니다. 저희 추장의 친서를 받아보시면 자세한 일을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추장이 보낸 편지를 바치라!" 최윤덕 장군은 비로소
편지 바치는 것을 허락했다.
모사 퉁맹가는 다시 머리를 두 번 조아리고 품안에서 홍보에 싼 이만주의
친서를 꺼내 시립해 있는 군관에게 전했다. 군관은 청에 올라 홍보를 끄러,
호피료의에 높이 앉은 최윤덕 장군께 바쳤다. 최윤덕 장군은 이만주의 편지를
읽어본다. '건주위 지휘 이만주는 삼가 조선국 대장군 휘하에 글월을 올립니다.
지난번에 우디거 야인의 무리가 2백여 기의 인마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또다시
여연을 침범한다 하므로 건주위의 인마 2백여 기를 거느리고 성야 추격하여
그들을 포박하였습니다. 그리하옵고 우디거들이 지난번에 납치해 갔던 남자와
여자 64명을 탈취해 왔습니다. 이들을 강계로 보내오니 관원을 보내시어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건주위 저희들은 항상 조선조정의 은혜를 잊지 못합니다.
변방을 시끄럽게 하는 일은 모두 다 다른 부류의 짓이올시다. 굽어 통촉하시기
바랍니다." 최윤덕 장군은 편지를 다 읽은 후에 이만주의 사자 통맹가를 향하여
엄숙한 음성으로 묻는다. "우리 사람들을 어느 때 강계로 보냈느냐?" "소인이
떠날 때 강계로 보낸다 했으니 아마 지금쯤 당도했을 것입니다." 최윤덕 장군은
우선 납치되었던 백성들을 받아들이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했다. 급히
행수군관을 불렀다. "말을 달려 강계로 가서 부사에게 말을 전하고, 납치되었던
백성들 64명을 받아들였냐고 사실해보라!" 명령을 내린 후에, 오랑캐의 사자는
별실에 대기케 했다. 행수군관은 급히 말을 달려 강계로 향했다. 과연
건주위에서는 예순네 명의 남녀를 강계부로 인도하고 돌아갔다. 군관은 곧
말머리를 돌려 절도영으로 돌아가 백성들이 틀림없이 돌아온 사실을 보고했다.
최윤덕 장군은 이만주의 간특할 계책인 것을 짐작하면서도 일부러 속아넘어가는
체했다. 대기해놓았던 오랑캐의 사자를 불렀다. "너희 추장은 충성을 다하여
우디거족을 무찌르고 우리 백성들을 탈환해서 강계까지 돌려보내 주었으니
가상한 일이다. 곧 우리 나라 왕상전하께 아뢰어 후한 상을 내리게 하리라.
앞으로도 충성을 다하여 흉악한 부류들의 불공한 행위를 막으라고 이르라!"
"네, 명심해 이르겠습니다." 이만주의 사자 퉁맹가는 백배 사례를 드리고
물러갔다. 최윤덕은 오랑캐의 사자를 돌려보낸 후에 곧 파발마를 달려 장계를
올렸다. '며칠 전에 건주위 이만주는 압록강 얼부푼 강상에서 우디거 족속으로
꾸민 병졸들과 난투극을 벌여 포박해간 일이 있었습니다. 소신은 이 일이
어떠한 협사가 있는 일인 것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오늘
이만주는 사자를 보내서 지난번 여연을 침략한 일과 이번에 다시 압록강으로
향한 군사는 모두 다 우디거의 일이라 하옵고, 납치되어 간 남녀노소 64명을
탈환해서 강계로 보낸다 했습니다. 신은 군관을 강계로 보내서 사살해보니, 과연
64명의 백성들이 강계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우리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서
응징할 태세가 갖추어져 있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노략질한 허물을 우디거
무리에게 전가하는 간휼한 흉계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강이 얼어서 출정할
시기가 아니므로 가상하다고 칭찬하고 사자를 좋게 돌려 보냈습니다. 살피어
통촉하옵소서." 정원에서는 급히 최윤덕의 장계를 어전에 올랐다. 전하는
장계를 보신 후에 급히 영의정 황희 등 삼정승과 육조판서며 삼군도진무 등을
명소했다. "서북면 도절제사 최윤덕의 장계를 보니, 확실히 이만주는 최윤덕이
부임했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서 거짓 요공을 해서 죄책을 모면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가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최윤덕의 말대로 아직 강이
얼었고 날씨가 극한이다. 봄이 완연히 온 후라야 응징하는 군사를 동원하는
일이 마땅하다. 과인의 생각으로는, 사자를 건주위에 보내서 잘 했다고 칭찬한
후에, 한편으로는 오랑캐들의 민정과 산천의 험하고 편한 길을 샅샅이 살펴서
응징하는 데 편리케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영의정
황희를 위시하여 모든 신하들이 일제히 고한다. "과연 좋으신 생각이올시다.
먼저 이만주의 행동의 진가를 살피고 용병하는 데 필요한 지세를 탐지하고 오는
일이 좋겠습니다." 세종대왕은 모든 신하를 둘러보며 하문하신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내서 건주위의 진가를 탐지하고, 산천의 험하고 평탄한 것을 살펴서
앞으로 군사행동에 대비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는가?"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첫째로 슬기가 있고 담이 큰 젊은 사람이라야 하고, 구변이 좋을 뿐 아니라
여진말도 능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물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종서가
아뢴다. "전하께 한 사람을 천거하겠습니다. 호조참판 박신생의 아들 호문은
소윤 벼슬을 지냈습니다. 나이 이십여 세에 총명 영오하여 문무가 겸전할 뿐
아니라 중국말과 여진말에 능통합니다. 앞으로 크나큰 장재가 될 인물이올시다.
이 사람을 도절제사 최윤덕의 휘하에 두어서 이만주의 정상과 그곳 산천의
험하고 평이한 지세를 살피고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세종전하는 옥안에 미소를 띠며 말씀한다. "호조참판 박신생이 그러한 훌륭한
아들을 두었더란 말이냐. 그렇다면 집현전 부제학 박강생의 친조카로구나."
김종서가 다시 대답해 아뢴다. "네, 그러합니다. 박호문의 아비가 4형제가
있사온데, 큰사람은 강성병마사 박지생이옵고, 둘째는 전하께서 말씀하신 집현전
부제학 나산경수 박강생이옵고, 셋째는 판내섬시사 박눌생이요, 맨 끝이
박호문의 아비 박신생이올시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더란 말이냐.
좋은 집안의 자제로구나. 그렇다면 박호문을 곧이 자리에 불러들여라." 시립해
있던 도승지는 곧 대전별감을 시켜서 박호문에게 입시를 명했다. 대전별감은
초립에 홍의 자락을 흩날리며 호조참판 박신생의 집으로 달려가 하님을 불러
박호문에게 어명을 전했다. "별입시의 분부가 내렸소이다. 빨리 입궐하시오!"
소윤 박호문은 벼슬이 갈려 집에 있다가 별안간 입시의 분부를 받자, 까닭을 알
길 없었다. 아버지는 비록 호조참판이라 하나, 일개전임 소윤에게 별입시의
은전을 내린다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별안간 웬일이신가. 무슨 일인지
아나?" 박소문은 초조해서 물었다. "지금 영의정 대감 이하 육조판서가
어전회의를 열고 계십니다. 무슨 일인지 소인도 까닭을 알 수 없소이다. 어서
빨리 들어가십시다." 박호문은 더욱 의아하게 생각했다. 황황히 조복으로
바꾸어 입고 말을 달려 대궐로 향했다. 박호문은 대전별감에게 인도되어
삼정승 육판서와 삼군 짐누들이 시립한 속에 전하께 숙배를 드렸다. 전하는
용안에 화려한 웃음을 띠고 하문하신다. "네가 박호문이냐?" "네,
그러하오이다." "전직이 소윤이라지?" "네, 그러합니다. 평양소윤을
지냈습니다." "네, 아비가 호조참판 박신생이구, 네 중부가 집현전 부제학
박강생이냐?" "네, 그러합니다." 박호문은 샛별 같은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공손히 대답한다. "네가 일찍 평양소윤으로 있어다 하니, 서북면 일을 대강
짐작하겠구나." "평양서 가끔 민정을 살피러 여연과 강계 등지를 둘러본 일이
있습니다." 전하는 박호문의 재목을 시험하기 위하여 짐짓 묻는다. "그래,
민정이 어떠하더냐?"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올시다. 남쪽 모양으로 토지는
기름지지 못한데다가 일기는 차고 산은 첩첩합니다. 그리하와 감자와 귀리로
겨우 월동을 하여 지내는 처지올시다. 이런 중에 오랑캐들이 변지를 침범하는
일이 잦으니 그야말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렇다면 네 생각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할 수 있느냐?" 박호문은 또렷한
눈으로 전하의 용안을 우러러보며 주저없이 아뢴다. "소신이 주제넘게 감히
무슨 방책을 진언하겠습니까? 맡은 임무가 없는 일개 미관말직이 어전에서
방자하게 국가의 중대한 일을 아뢴다는 것은 일이 아니올시다. 전하께서는 새로
임명하신 도절제사 최윤덕 장군에게 하문하시옵소서?" 조리 정연하게 또렷한
말씨로 아뢰는 박호문의 말을 듣자, 시립해 있는 삼정승, 육판서의 입가엔 소리
없는 미소가 떠돌았다. 전하도 용안에 웃음을 띠고 말씀한다. "네 비록 맡은
바 없는 연소배라 하나, 네가 일직 평안도에서 소윤을 지냈으니 민생문제에
대하여 생각한 바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변지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할
수 있는가, 그 점을 말해보라는 것이다." 박호문은 손을 마주잡고 조용한
음성으로 아뢴다. "성상께옵서 간곡한 하교가 계시니 방자함을 무릅쓰고 감히
아뢰겠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너무나 여진을 우습게 보고 업신여겨
보았습니다. 여진은 호락호락한 족속이 아니올시다. 일찍이 금국을 건설한 요의
찬연한 시대를 이룩했던 일이 있는 족속이올시다. 항상 회유책을 쓰시고,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는 성벽을 굳게 하여 방어를 든든히 하옵소서. 그리하여
고랴 때 윤관 장군의 옛일을 본받으시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전하는
용안에 미소를 짓고 박호문을 향하여 말씀한다. "내가 평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마는, 저자들이 항상 강을 건너와 백성들의 양식과 우마를 약탈해
가고 촌락을 어지럽게 하니 딱한 일이 아니냐. 그리고 우리는 구태여 여진
족속을 멸시하려는 것도 아니다." 박호문은 다시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해
아뢴다. "당돌하게 한 말씀 오리겠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때 윤관
장군이 북진의 기세를 잠시 올렸으나 이내 폐기해버려서 불모지가 되었습니다.
아조에 들어와서도 적극 정책을 쓰지 않고, 거의 공한지대가 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이러하니 오랑캐들이 마음대로 들어와 섞여 살고, 또다시
강을 건너 노략질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신의 생각에는 한번 응징하는 완군을
발동시켜서 오랑캐를 성토하신 후에 국경에 성곽을 굳게 쌓고 남쪽 백성들을
이민시켜서 인구와 물화를 번창케 한다면, 오랑캐들이 감히 국경 안으로 허락
없이 발길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올시다." 젊은 신하 박호문의 대답은 녹록지
아니했다. 세종전하가 마음 속으로 계획하는 생각과 일치했다. "좋은 말이다.
과인의 의사도 너의 소견과 비슷하다. 장차 네 의견에 따라 행동을 시작하겠다.
그러나 오늘 너를 부른 것은 어려운 부탁을 너에게 하려는 것이다. 네 능히
사양치 아니하고 내 부탁을 받겠느냐?" 박호문은 옷깃을 바로잡고 얼굴빛을
정색하여 아뢴다. "국가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면 신이 어찌 물불을
가리오리까? 하교를 받들겠습니다." 세종대왕은 다시 미연히 웃음을 띠고
말씀한다. "응징하는 대군을 움직이려면 먼저 적의 허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
오랑캐 추장 이만주는 최윤덕이 도절제사로 부임한 후에 두려운 마음을
먹었는지 지난번 여러 차례 여연과 강계를 침범한 일을 우디거 족속이 한
일이라 하고 변명을 하면서 잡혀갔던 백성 64명을 강계로 돌려보냈다 한다.
너는 여진말을 할 줄 안다 하니, 최윤덕 도절제사의 사신이 되어서 건주위로
건너가 적의 진가와 산천의 지세를 탐지해 오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네 능히
용기를 낼 수 있느냐?" 박호문은 서슴지 않고 아뢴다. "누대국은을 입은
몸이온데 신이 어찌 죽는 땅이라하여 피하오리까! 하교대로 곧 출발하겠습니다."
세종대왕의 용안은 활짝 화려했다. "장하다! 그렇다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사명을 다하고 돌아오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병조판서와 도승지를
돌아보시며 분부했다. "전소윤 박호문에게 상호군의 직책을 주고 도절제사
최윤덕에게 이 뜻을 전해서, 주야배도하여 소임을 다하게 하라!" 병조판서와
도승지는 곧 어전에서 상호군의 첩지를 주었다. 박호문은 상호군의 첩지를
어전에서 받은 후에 사은숙배를 올리고 대궐에서 물러났다. 박호문은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호조참판 박신생과 중부 집현전 부제학 박강생께 뵈온 후에
전하의 특명을 고했다. 아버지들은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했다. "네, 능히 중한 책임을 다하고 돌아오겠느냐?" 중부인 집현전
부제학 나산경수가 물었다. "이미 국가에 몸을 바친 자올시다. 어찌 위태로운
사지라 해서 나라일을 피하겠습니까. 정성을 다하여 책임을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장하다, 네 뜻은! 그러나 교활하기 짝 없는 오랑캐다. 극히
몸조심하고 돌아오너라!" 중부인 박강생은 조카를 격려했다. 박호문은
아버지들에게 하직을 고한 후에 안에 들어가 어머니께 뵙고 아내에게 어린
아들을 부탁한 후에 말을 달려 서북면 절제사영으로 향했다. 도절제사 최윤덕은
박호문이 당도하기 전에 벌써, 파발마를 달려온 선전관이 상호군 박호문이
어명을 받들고 내려온다는 것을 전해서 잘 알고 있었다. 흔현이 박호문을
절도영으로 맞아들였다. 군례가 끝난 후에 종사관 신숙주와 함께 주안을 차려
관대하면서 오랑캐와 접촉할 일을 상의했다. "언제쯤 강을 건너갈 작정이오?"
"어명이 지중하시니 내일이라도 일찍 떠나려 합니다. 사또께서는 곧 저에게,
저선국 서북면 도절제사의 사자라는 신표를 주시옵소서." "내일은 너무나
급하지 아니한가. 천여 리 먼 길을 달리느라고 몸이 몹시 피곤할 텐데, 조금
피로를 풀고 가는 것이 어떠한가?" 최윤덕 장군은 젊은 선비를 사지로 보내는
것이 애틋했던 것이다. 박호문은 얼굴빛을 바로하여 고한다. "지금 전하께서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시고 나라 땅을 하루바삐 정돈하실 것을 궁리하고
계십니다. 어서어서 적정을 탐지하여 오랑캐를 응징하여야 하겠습니다." 최윤덕
장군은 박호문의 등을 어루만져주면서 말한다. "젊은 몸으로 기상이 장하오!
그렇다면 만난을 무릅쓰고 적정을 자세히 탐지해가지고 돌아오시오. 이편에서는
모든 군비를 유루 없이 정돈했다가, 봄이 되어 강만 풀리면 곧 대군을 휘동해서
응징할 작정이오." "좋습니다. 이만주한테는, 우리편 군사 행동은 극비에
부치겠습니다. 다만, 이번에 침범해 들어오려는 우디거족을 격파해서 결박짓고,
전번에 납치해 갔던 우리 나라 사람들을 탈환해주어서 사또께서는 가상하게
생각하시고, 소인을 특사로 보내셨다고 말하겠습니다." 최윤덕 장군은, 슬기로운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청년 박호문을 미덥게 생각했다. "옳은 말이요. 첫째로
저자들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눅여주고, 둘째는 진정 우디거족이 우리를 침범한
것이지, 오랑캐들이 허불을 우디거족에게 전가시켜서, 간특한 계교를 써서
압록강 위에서 소란을 떤 후에 납치했던 부녀자들을 돌려보낸 것인지, 그
진가를 판별해야 하오. 그리고 산천의 험한 곳과 평탄한 지세를 자세히 살펴서
돌아와야 합니다." "전하께서도 상세한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삼가 사또의
분부를 명심하겠습니다." 상호군 박호문의 말이 떨어지자 최윤덕 장군은 옆에
있는 종사관 신숙주를 향하여 당부했다. "신종사관은 상호군이 가지고 갈 나의
친서를 써주시오. 집현전 학사의 명문은 오랑캐들한테는 너무나 과분한
글이지만, 하하하." 최윤덕 장군은 회해를 부려 호방하게 웃었다. 옆에서
박호문도 웃으며 한 마디 한다. "오랑캐들한테 과분할 뿐 아니라, 사자로 가는
저도 보한대가 지은 글을 가지고 가니 품안에 문향이 가득하게 풍겨지겠습니다."
최윤덕 장군은 박호문의 뒤를 이어 호탕하게 대꾸한다. "여보게 상호군, 집현전
학사가 지은 글을 품고만 가도 품안에서 향기가 난다면서 어찌해서 내 말은
없나? 정작, 내성명을 품에 품고 가면서.... 그래, 대장군의 성명 삼자는 집현전
학사의 글만 못하단 말인가? 섭섭하이그려! 하하하." 박호문은 상긋 웃으며
응구첩대로 잽싸게 대답한다. "사또께 아룁니다. 조금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쇼. 소인은 사또의 몸을 대신해서 가니, 곧 호랑이를 두 번씩이나 때려잡은
대장군이 올시다. 자신이 어찌 자신을 칭찬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신학사! 사또, 죄송합니다." 박호문은 어렵지 않게 슬쩍 받아넘겼다. 최윤덕
장군은 친히 잔에 가득 술을 부어 박호문에게 주며 말한다. "용하다, 자네
구변이___. 잘 눅여낼 것이다. 사양치 말고 이 술을 받으라!" 박호문은 두
손으로 잔을 받들어 단숨에 마시었다. 국난을 당하여 임전태세를 취하고 있는
운주루의 광경은 이같이 여유가 작작하고, 화한 기운이 가득히 감돌았다.
종사관 신숙주는 술상을 물린 후에 오랑캐들에게 보내는 글을 지었다.
'대조선국 서북면 도원수 최윤덕은 상호군 박호문을 특사로하여 건주위 지휘
이만주 장하에 보내노라. 여진은 항상 조선을 존숭하여 조공을 바치고 벼슬
자리를 원했으며, 조선은 또한 후하게 식량을 주어 자애롭게 대하여 형제의
선린을 이루었다. 그러나 요사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 여연과 강계를 자주
침범하여 부녀를 강탈하고 우마를 도적질해 가니 가증 가악하게 생각했다.
성상전하께서는 크게 진노하시어 나를 보내어 국경을 바로잡고, 포악한
무리들을 응징하라 하셨다. 나는 건주위 여진의 행동을 주시하던 중 지난번에
퉁맹가를 보내어 건주 여진의 짓이 아니고 우디거의 짓이라 하여, 우디거가
납치했던 무리를 탈취해 보낸 일을 상세하게 들어서 알았다. 가상한 일이다.
이제 내 몸을 대신해서 상호군 박호문을 특사로 보내어 우디거 물리친 일을
찬양하고 상으로 소 열 필과 돼지 백 마리와 양식 오십 석을 보내노니, 받아서
너희 굶주린 백성들을 먹이라. 그리고 계속해서 우디거 족속들을 단속해서
대국의 국경을 어지럽게 하지 말게 하라.' 신숙주는 쓰기를 다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읽었다. 최장군을 크게 칭찬한 후에 친히 수결을 두어 박호문에게
넘겼다. 이튿날 박호문은 도절제사영에서 최윤덕 장군에게 군례를 드려 고별한
후에 단기로 소와 돼지와 양곡을 이끄는 인부들과 함께 얼음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박호문은 도시 담 덩어리였다. 아무런 무비도 갖추지 아니했다. 관
쓰고 도포 입은 선비 복색이었다. 다만 회중에 날카로운 단도 한 자루와 세
치만한 달변의 혀를 지녔을 뿐이다. 삭풍을 무릅쓰고 길고 긴 언 강을 건넜다.
소와 돼지 떼와 곡식 실은 마바리가 뒤를 따랐다. 다시 파저강인 혼강을 건너
건주위 오랑캐 땅 경계선에 당도했다. 강가에는 오랑캐 보초와 영문이
즐비하게 이곳 저곳에 벌여 있었다. 단기로 소와 돼지 떼를 몰고 곡식을 싣고
들어오는 박호문을 보자, 오랑캐 보초 군사는 단통 창을 비껴들고 누구냐고
호통을 쳤다. 박호문은 마상에서 씩씩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나는 조선국
서북면 도원수 최윤덕 장군의 아장 박호문이다. 지난번에 너희 추장 이만주가
사자 퉁맹가를 보내서 우디거 족속들의 난동을 격파하고, 그들이 납치해 갔던
조선 백성들을 돌려보냈으므로, 우리 도원수께서는 가상하게 생각하시어 나를
특사로 해서 치하하는 글월을 전하고, 상급으로 소와 돼지와 많은 곡식을
내시는 것이다. 빨리 너희 추장을 만나게 하라." 유창한 여진말이다. 오랑캐
군사놈들은 특사 박호문보다도, 듬직한 황소와 꿀꿀대는 돼지며 푸짐한 백미가
더욱 반가웠다. 보초놈들은 달음질쳐 두목이 있는 영문 안으로 뛰어들어가
사실을 고했다. "조선서 사신이 왔습니다. 여진말을 썩 잘 합니다. 소 열 필과
돼지 백 마리와 쌀 오십 섬을 가지고 와서 추장님께 뵙기를 청합니다."
두목이란 자도, 특사보다도 소 열 필에 돼지 백 마리와 백미 오십석이 조선서
온다는 졸개의 말을 듣자, 입이 딱 벌어졌다. "정말 여진말을 잘 하더냐?" "잘
합니다. 아주 능란합니다." "간첩은 아니겠느냐?" "당치 않은 말씀이올시다.
지난번에 추장님께서 모사 통맹가 편에 친서를 보내시고 납치했던 조선
사람들을 돌려보내서 고맙다고 도원수의 친서를 가지고 왔다 합니다. 특사를
어찌 간첩이라고 의심하십니까. 한번 만나보십쇼. 간첩은 몰래 잠복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까?" "만나보기로 하자." 강변을 지키고 있던 현지의 두목은
박호문을 영문 안으로 청해 들였다. 두목이 바라보니 풍채가 헌앙한 젊은
선비다. 아관박대에 문기가 훈훈하게 온몸에 돌았다. 칼 한 자루, 화살 한 대
지니지 아니했다. 변지 두목은 박호문의 풍채에 눌렸다.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최윤덕 장군의 특사시라지요?" "그렇소. 나는 최윤덕 장군의
아장 박호문이오. 도원수님의 친서를 당신의 대장 이만주에게 전하러 왔소. 빨리
대장한테 연락하오." 능란한 여진말이다. 조선 나라 대관으로 이만큼 여진말을
잘 하는 이를 만나보지 못했다. 두목은 공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다.
"잠깐만 '캉'에 앉으셔서 불을 쬐십시오. 곧 모시고 가겠습니다." 옆에서는
질화로의 백탄불이 이글거렸다. 박호문이 언 몸을 녹이고 있을 때 별방으로
들어갔던 두목이 양털 호복한 벌을 들고 나와서 박호문에게 바치며 말한다.
"우리 땅은 너무나 춥습니다. 우선 추위를 막기 위하여 이 옷을 입으십시오.
지금 추장님한테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흠뻑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박호문은
아무리 춥다 하나 호복을 입을 까닭이 없었다.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속에
추위 막을 옷을 든든히 입었소. 아무 염려 마시오. 당신의 후한 뜻을 잘 받아서
가슴 안에 기억하리다." 우리 나라 선비의 외유내강한 깐깐한 풍도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사양 마시고 입으십시오. 매우 춥습니다." "아니오, 아니오. 내
염려는 조금도 마시오. 뜨듯하게 방한이 될 내의를 속에 입었소." 박호문은
얼굴에 가득히 웃음을 띠고 손을 저어 흔들었다. 변지 두목은 호복을 입기
싫어하는 선비의 깐깐한 심경을 비로소 느낀 모양이었다. "정 그러하시다면
어한하시도록 술이나 한 잔 권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벽장 문을 열고 술병과
잔을 꺼냈다. 오지병에 담긴 상품 빼주다. 이것조차 아니 받을 수는 없었다.
박호문은 호방한 웃음을 껄껄 웃으며 손을 내밀어 술잔을 받았다. "좋소이다.
두 번씩이나 호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지요. 하하하."
두목과 박호문은 석 잔 술을 나누고 영문 밖으로 나섰다. 영채 밖에는 호장이
탈 오추마와 박호문이 타고 온 눈같이 흰 백마가 대령되어 있고, 뒤에는 소와
돼지와 곡식 실은 마바리가 줄을 지어 있었다. 박호문이 타고 온 백설마는
은안장에 붉은 상모술을 화려하게 늘이고 금방울을 단 홑벌 준마다. 오랑캐
두목 호장은 소와 돼지와 곡식도 좋지마는 박호문의 은안백마가 탐이 났다.
역시 말을 어거해본 장수다. 호장이건만 눈이 높았다. 문 앞에 나서자 선뜻
백설마 앞으로 가까이 갔다. 고삐를 움켜잡고 말 궁둥이를 툭툭 쳤다. 백마는
콧김을 강하게 뿜었다. 입으로 '어흥' 소리를 질렀다. 네 굽을 모아 소스라쳐
뛰는 시늉을 했다. 호장은 박호문을 바라보며 씽긋 웃었다. "좋은 말이다.
천리마로구먼. 고구려 때 을지문덕 장군이나 어거할 말이지, 선비가 타기에는
너무나 벅찬 말인데!" 오랑캐 장수는 농담을 붙였다. 박호문은 속으로 웃었다.
'저놈이 말이 탐나는 모양이로구나!" 슬몃 대꾸를 한다. "하필 을지문덕
장군뿐이겠는가. 선비들도 용마를 어거할 줄알지." 박호문은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호장은 눈을 찡긋하고 묻는다. "선비도 말을 잘 어거할 줄 압니까?"
"이 사람아, 나도 말을 타고 수천 리 길을 달려왔는데 어거할 줄아느냐는 것이
무슨 말인가? 우리 나라 선비 쳐놓고 천리마를 탈 줄 모르는 사람은 없네. 지금
자네 앞에 서 있는 나도 은안백마 천리마를 타고 왔네. 자네, 글을
못배웠네그려. 예악사어서수란 말이 있네. 선비란 덮어놓고 글만 읽어서 문약한
것이 아닐세. 예절을 잘 지킬 뿐 아니라 풍류도 알아야 하고, 활도 쏠 줄 알고,
말도 잘 타야 하고, 글씨도 잘 쓰고, 수학도 잘 풀어야 한다는 말일세. 이런
까닭에 우리 나라 선비 쳐놓고 말 탈 줄 모르는 사람은 없네. 이 까닭에 우리
나라 선비들은 내 말과 같은 용마가 아니고는 타지를 않네!" 박호문은 능란한
여진말로 풍을 한 번 흠뻑 떨었다. 호장은 무안했다. "무식해서 조선의
선비님들이 그같이 말까지 잘 타는 줄을 몰랐습니다." 두 손을 잡고 읍을 했다.
"말만 잘 타는 것이 아닐세. 아까도 말했지만, 사정에서 활을 익혀서 쏘는 법도
제일일세. 백발백중일세." 호장은 또 한 번 두 손을 마주잡고 공손히 존경하는
뜻을 표했다. 박호문은 호장을 주먹 안에 넣고 흠뻑 주물렀다. 천천히 호장의
오추마 앞으로 다가섰다. 처음에 호장이 하듯, 오추마의 고삐를 한 손으로 바싹
잡았다. 한 손으로는 말 궁둥이를 힘차게 탁탁 갈겼다. 호장의 오추마는
뒷발질을 사납게 했다. 박호문은 웃으며 말했다. "기름지게 먹여서 털이 윤기가
난다마는 천리마는 못되는구나! 하루에 오백 리밖에 못달리겠다." 호장도 빙긋
웃고 대답한다. "참말 견식이 높으십니다. 용마의 아류밖에 아니됩니다. 우리
추장 이만주 장군이 타는 말이 제일 가는 준총이고, 그 다음 아장들은 모두 다
소장 같은 말을 가졌습니다." "그래? 여진엔 좋은 말이 많다고 들었는데 어제
그런가?" "천 리를 달리는 용마가 어디 그리 흔할 수 있습니까..그저 저희들
아장이 타는 말이 상지중이고, 추장이 타시는 말이 그중 상지상이올시다."
호장의 말이 떨어지자 박호문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묻는다. "자네, 내 말과
바꾸어 타보려나?" 호장은 기뻤다.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나 한 번 사양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까짓 것 잠시 바꿔 타면 무얼 합니까. 그대로 가십니다."
"잠시가 아니라 아주 자네한테 나의 사랑하는 애마를 넘겨줌세." 호장은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정말이십니까?" "내가 일구일언을 할 사람인가. 아주
자네한테 나의 백설마를 넘겨 줄 테니 지금부터 바꿔 타기로 하세." 말을
마치자 박호문은 호장의 오추마 위로 선뜻 올랐다. 호장은 못이기는 체하면서
화려한 상모술을 늘인 은안백마 위로 올랐다. 수백 명 오랑캐 병졸들은, 입을 헤
벌리고 은안백마에 오르는 호장을 바라보고 웃었다. 박호문은 첫째번 관문에서
호장을 떡주무르듯 해서 외교의 승리를 얻었다. 호장은 박호문의 은안백마를
바꾸어 타고 달렸다. 마음이 흠뻑 흐뭇했다. 채찍으로 연방 치며 앞으로 달린다.
백마는 호장의 채직을 받으며 네 굽을 모아 허송을 향하여 솟구쳐 뛰었다.
박호문이 바꾸어 탄 호장의 오추마는 까맣게 뒤에 떨어졌다. 호장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속으로, '과연 천리준마로구나!" 탄복했다. 백마를 시험해본
호장은 뒤에 따르는 오추마를 기다리기 위하여 말고삐를 늦추어 잡았다. 백마는
신통하도록 영리했다. 말곱삐가 늦춰지자 뛰달리던 굽을 슬며시 멈추고
의젓하게 뚜벅뚜벅 걸었다. 호장은 더한층 백마를 사랑하게 되었다. 호장은
만면에 웃음을 싣고 박호문에게 감사한 말을 보낸다. "과연 명마올시다. 이같이
좋은 말을 소장에게 넘겨주시니, 은혜로운 일을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박호문은 호방한 웃음을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자네들한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다만 전과 같이 신의를 잘 지켜서 국경을 소란하게 하지 말고
젊은 여자와 장정들을 납치해 가지 않기를 바랄 뿐일세. 오늘 내가 최윤덕
도원수의 명을 받들어 자네네 추장 이만주를 만나러 온 것은, 잡아갔던
남녀노소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우디거 부류를 물리쳤다 해서 가상하다고 치하를
하러 찾아온 길일세. 전처럼 조공을 잘 바치고 신하 노릇을 잘 한다면, 그까짓
천리마 한 필쯤이겠나. 백 필이라도 줌세." "조선에는 천리마가 그같이
많습니까?" "나 같은 선비가 천리마를 타는데, 정말 장군들이야 말할 거 있나.
모두 다 천리준총 용마를 타네. 그리고 우리 도원수 최윤덕 장군이 탄 말은
하루에 이천 리를 달리는 용마일세. 서북면에서 최장군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달리신다면 아무리 첩첩산중, 태산중령이라 할지라도 반나절이면 당도하실
것일세." 호장은 기가 죽었다. 대답 없이 말 고삐를 나란히 해서 나간다.
박호문은 호장과 함께 고삐를 가지런히 하여 재를 넘고 물을 건넜다. 도중의
모든 경광을 범연히 지나치지 아니했다. 땅 이름과 산 이름도 기억했다.
압록강과 혼강을 건너서 추장 이만주가 있는 소굴에 이르기까지 거리와 지세를
똑똑하게 살피고 기억해두었다. 산은 갈수록 험준했다. 천 갈래 만 갈래
천태만상으로 벌어졌다. 백두산 저편에서 천지만엽이 되어 흘러내린 산간
부락들이었다. 천엽 속같이 복잡했다. 이곳에 평평한 땅을 골라 마을이 생겨서
부락을 이루고 저자가 벌어졌다. 남자들은 모두 다 소매 긴 푸른 청복을 입고,
머리를 땋아내렸다. 여인들은 머리꼬리를 땋아서 뒤통수에 붙였다. 박호문은
초롱 같은 눈동자를 굴려 말없는 중에 모든 것을 기억해 두었다. 한나절이
지난 후에 호장과 박호문은 이만주가 거처하는 추장의 궁실에 당도했다.
호장과 박호문은 말에서 내렸다. 소와 돼지와 곡식 실을 마바리도 밖에
대기시켜 놓았다. 층암절벽을 돌고 돌아서 돌로 쌓은 홍예문으로 들어섰다.
푸른 기와를 얹은 돌집 궁실이 나타났다. 오랑캐 졸개들이 창과 칼을 비껴들고
빳빳이 서서 좌우편으로 갈라서 있었다. 졸개들은 변지 호장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괴상한 여진말로 소리를 꽥 지르며 손을 번쩍 들어 예를 붙였다. 호장이
손을 들어 답례를 한후에 두목 졸개에게 한동안 무슨 말인지 지껄여댔다. 두목
졸개는 호장의 말을 들은 후에 궁실 안으로 스러졌다. 호장이면서도 맘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두목 졸개가 다시 나타나 호장에게
들어가라는 전갈을 보냈다. 호장은 박호문을 향하여, "잠시 좀 기다려줍쇼. 곧
다녀 나오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다정하게 인사를 하고 스러졌다. 박호문은
갑갑한 것을 참았다.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마음 속으로, '오랑캐들도 하는
시늉은 다 하는구나!' 생각하면서 뒷짐을 지고 호궁의 전경을 예민한 눈으로
둘러보며 거닐었다. 두목 졸개는 아관박대에 도포를 입은 사람이 조선의
귀빈인 것을 알았다. 졸개들을 시켜서 화톳불을 피워놓고 걸상을 내다주면서
앉기를 청했다. "고맙네. 오랑캐 사람들은 인정이 많군그래. 우디거
사람들보다는 훌륭한 사람들이지?" 능란한 여진말로 말문을 열었다. 오랑캐
졸개들은 아관박대로 차린 조선 귀빈이 여진말을 하는 것을 보자, 의외로
생각했다.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조선의 대관이십니까?"
대화가 열리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는 것은 인정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기틀이다. "조선서 이만주 추장에게 치하를 하러 온 상호군 박호문일세."
"상호군은 높은 벼슬입니까?" "높고말고. 조선국왕 전하의 명령을 너희 추장
이만주에게 전달하러 온 사람이다." 졸개들은 깜짝 놀랐다. 황망히 읍을 하고
다수를 바쳤다. 졸개 한 놈이 묻는다. "조선국왕 전하께서 무슨 하교를 저희들
추장한테 내리셨습니까?" "너희들의 알 일이 아니다마는, 우디거 부류가
여연으로 쳐들어오려는 것을 너희 추장이 쫓아내고, 잡아갔던 우리 백성들을
강계로 곡식을 내리시는 것이란다!" "최윤덕 장군이 치러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까?" "미친 놈! 상급을 전하께서 내리시는데 최윤덕 장군이 어찌 감히
왕명을 어기고 너희들을 치러 오시겠느냐." "그렇다면 참 좋겠습니다. 피난간
사람들을 내려오라고 해야겠습니다." "누가 어디로 피난을 갔느냐?" "늙은이와
어린이들을 모두 산속으로 피신시켰습니다." "미친 놈들, 이 추운 겨울에
늙은이와 어린것을 왜 산꼭대기로 피난을 시켰단 말이냐!" 박호문은 호방한
웃음을 껄껄 웃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좋은 정보를 탐지했다고 생각했다.
"조선 군사가 쳐들어올까보아 먼저 늙은이와 약한 어린이들을 피신시키라고
대장군이 분부를 내리신 것입니다." "너희 대장은 우리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인데, 까닭 없이 너희를 정벌할 리가 있느냐. 지난번에도 우디거 무리가
여연을 침범하려는 것을 너희 대장이 쫓아버리고, 잡아갔던 우리 백성들을
빼앗아 돌려보내 주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라! 너희들을 괴롭게 할
까닭이 있느냐? 조선은 인의의 나라다. 죄없는 자는 치지 아니한다. 우디거
부류를 응징할지언정, 충성을 다하는 너희를 칠 까닭이 있느냐. 급히 백성들을
피난시킨 것은 못된 짓이 있는 것이로구나. 도둑이 발이 저리다고?" 두목
졸개는 얼굴이 벌개지면서 얼른 대답을 못했다. 박호문은 마음 속으로
건주위들이 협사를 한 것이 분명하다고 심증을 얻었다. 박호문은 다시
졸개들에게 묻는다. "우디거 부류들이 사는 곳은 여기서 거리가 얼마쯤
되느냐?" "멉니다. 첩첩산중 길로 이백 리가량이나 됩니다." "우디거 놈들이
우리 땅을 범하려면 반드시 너희 부락을 통과하게 되겠구나?" 졸개는 무심코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박호문은 이만주의 사자 통맹가의 말이 확실히
거짓인 것을 깨달았다. 이백여 리 밖에서 살고 있는 우디거가 건주위 땅을
통과해가지고 여연을 침공했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되는 소리다. 우디거는 모든
점이 건우쥐에 비해서 월등하게 약한 부류다. 비록 여연에서 우마과 곡식과
백성들을 약탈했다 할지라도 건주위를 통과하는 길에서 건주위에게 뺏길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미련한 우디거라 하나 그러한 무모한 짓을 할 리가 만무했다.
모두 다 이만주가 속이는 수단이라는 생각을 더한층 갖게 되었다. 한편
이만주가 거처하고 있는 궁실 안에서는 긴장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강변
호장이 이만주에게 들어가 박호문이 조선국 도원수 최윤덕 장군의 명을 받들어
소와 돼지며 곡식을 싣고 와서 감사한 뜻을 표한다는 말을 듣자, 이만주의 입은
딱 벌어졌다. 마음 속으로 자기 계책이 맞아들었다고 생각했다. 벙글벙글
웃으며 옆에 있는 모사 퉁맹가를 보며 말한다. "우리의 책략이 맞았네그려.
최윤덕이 비록 호랑이를 때려잡은 맹장이라 하지만 모사 통맹가의 슬기를
따르려면 아직도 얼었네. 하하하. 우리 꾀에 속아넘어갔어! 좌우간 소와 돼지와
곡식은 며칠 동안 내 배를 기름지게 하겠네. 하하하." 이만주는 기뻐서 연해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이만주와 통맹가가 모략이 맞아들어갔다고 만면에
기쁜 웃음을 띠고 손뼉을 치며 있을 때, 전후 좌우로 둘어앉았던 많은 추장
속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사람의 추장이 이만주를 향하여 말한다. "장군님,
소장의 생각에는 소와 돼지와 곡식을 준다고 덮어놓고 기뻐만 하실 일이 아닌가
합니다. 혹시 박호문이 우리의 정세를 염탐하러 온 간첩이 아닌가 의심됩니다.
깊이 생각해서 처리하십시오." 늙은 추장의 말이 떨어지자 여러 추장들이
일제히 말한다. "그렇습니다. 방심하고 기뻐만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속셈을 든든하게 차리고 앞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모사 퉁맹가가
말한다. "우리는 최윤덕이 치러 오지 않는다고 방심을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우리들의 힘을 기를 때까지 맹장 최윤덕의 예봉을 막아버자는
것입니다. 저편에서 보내는 호의는 참이든지 거짓이든지 간에 받아들이고, 다음
단계는 우리의 힘을 기르면서 변하는 대로 임기응변하는 계책을 써야 합니다.
이 까닭에 우리 장군께서는 우리 군사들에게 우디거 군사의 모습으로
가장시켜서 압록강상에서 격투를 시키고, 또 나를 최윤덕에게 보내서 잡아왔던
조선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이 아닙니까? 좌우간 간첩이든 아니든 간에 조선에서
보낸 물건은 받아들이고 박호문은 좋은 낯으로 만나보셔야 합니다." 한 장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친다. "아니됩니다. 지금 왔다는 박호문을
잡아 가둔 후에 목을 베어서 돌려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형편을 샅샅이
알아서 최윤덕에게 보고하는 날은 큰일입니다. 소와 돼지와 곡식을 주었다고
덮어놓고 좋다고만 할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을 꺼냈던 백발이 성성한 늙은
추장이 말한다. "박호문을 죽이고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당장 최윤덕의 대군이
얼음을 타고서라도 강을 건노올 것입니다. 그저 방심을 하지 말고 우리들의
병력을 기르는 한편, 퉁맹가 모사의 말대로 임기응변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상책입니다." 박호문을 죽이라는 젊은 추장이 다시 주장한다. "조선 군사는
대개 보병들입니다. 아무리 최윤덕이 백전백승의 장사라 하나 얼음을 잘 타지
못하는 군사를 가지고 어찌 겨울에 강을 건너겠습니까. 우리는 이 기회를 타서
한번 강을 건너서 최윤덕의 군사를 무찌르고 우리의 젖줄인 여연과 강계 땅을
손아귀에 넣어야 합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추장은 덮어놓고 떠들어댄다.
박호문을 인도해 들어간 강변 장수가 비로소 한 마디 한다. "천만에, 조선
군사는 보병만이 아닙니다. 말 잘 타는 기병이 서울에서 많이 온 듯합니다.
오악사어서수의 육예를 존숭하는 나라이라 선비들도 천리준총을 잘 어거할 줄
압니다. 지금 최윤덕의 특사로 온 박호문도 은안백마 천리준총을 타고
달려왔습니다. 선비가 이러하니 황차 무관과 군사들이 말을 못탈 리 만무합니다.
얼음을 타고 건너오지 못한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모든 추장들의 공론을
듣고 있던 이만주는 박호문이 은안백마 천리준총을 타고 강을 건너왔다는 말에
귀가 번쩍했다. 강변 호장에게 묻는다. "박호문이 천리준총을 타고 왔더란
말이냐?" "네, 그러합니다." "박호문은 선비라면서?" "얌전한 선비올시다.
아관박대에 도포를 입고, 촌철도 차지않고 왔습니다. 얼굴은 분을 바른 듯 희고,
소능 여자같이 부드럽습니다. 무인이 아니라 확실히 선비올시다." "선비가 천
리를 뛰는 용마를 어거해서 왔다는 일은 과연 어려운 일이다.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선비들도 육예를 익혀서 활 쏘고 말
달리는 일을 모두 다 배웠다 합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좋은 명마가 많이
생산되는 모양이올시다. 최윤덕 장군이 타는 말은 하루에도 능히 이천 리를
달린다 합니다. 조선군은 넉넉히 얼음을 타고라도 건너올 것입니다." 이만주는
잠시 고개를 숙여 무엇을 생각했다. "좌우간 박호문을 한번 만나본 후에 다시
의논하기로 하자." 건주위 도지휘 이만주는 비로소 단을 내렸다. 모든 추장들은
명에따를 수밖에 없었다. 강변 호장이 다시 고한다. "그럼 박호문을
불러들이오리까?" "곧 대리고 들어오라!" 강변 호장은 비로소 궁실 밖으로
나가, 졸개들과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는 박호문을 청했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기 짝 없습니다. 우리 지휘께서 청하시니 들어가십시다."
"지루할 것 없었네. 병졸들이 화톳불을 피워주고, 좋은 다수까지 주어서 때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네." 박호문은 미연히 웃으며 강변 호장의 인도로 이만주가
거처하는 처소로 들어갔다. 정면, 양털로 교의를 덮은 곳에 이만주가 앉아
있고, 좌우편에는 여러 부락의 추장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이만주는 강변
호장에게 인도되어 들어오는 박호문을 보자 교의에서 일어나 경의를 표했다.
모는 추장들도 일제히 일어났다. 강변 호장이 이만주를 향하여 고한다.
"이분이 최윤덕 장군의 친서를 가지고 온 상호군 박호문이십니다." 이만주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박호문을 향하여 읍하고 맞이했다. 박호문도 답하는
읍을 보내며 맑은 눈초리로 이만주의 모습을 살폈다. 구릿빛 얼굴에 몸집이
비대했다. 눈에는 욕기가 가득하게 엉기고 서려 있었다. "추운 겨울에 언 강을
건너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셥소이다." 이만주는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무어
대단치 않소이다. 천리준총을 타고 강을 건너니 아무리 얼음이 꽝꽝 얼었다
하나 순식간에 달려왔소이다. 아무런 고생도 없었소." 박호문은 능란한
여진말로 천리준총을 타고 왔다고 풍을 쳐서 이만주의 기를 우선 눌렀다.
달변인 여진말을 듣자 이만주는 깜짝 놀랐다. "여진말을 참 잘 하십니다.
보아하니 선비신데 용하게 천리마를 잘 어거하셨습니다. 천리준총은 무인들도
어거하지 어렵습니다." 박호문은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선비란 모든 것을 다
할 줄 알아야 하오. 그러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선비 되기가 극히 어렵소. 외국
말도 잘 해야 하고, 활도 잘 쏘고, 말도 잘 탈 줄 알아야 하오. 글만 잘 하는
것이 아니오. 그래야 치국안민을 하지 않겠소? 하하하." "다시 한 번 상호군
어른을 존경합니다. 무불통지이십니다." 박호문은 다시 웃으며 말꼬리를 돌린다.
"자아, 칭찬하는 외교사령은 그만 하고 우리 도원수 최윤덕 장군의 친서를
받으시오." 말을 마치자 박호문은 청포 소매 속에서 최윤덕 장군이 이만주에게
보내는 글월을 꺼내서 전했다. 이만주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상품 장지에
종사관 신숙주가 달필로 짓고 쓴 글월이었다. 옆에 섰던 모사 퉁맹가가 글뜻을
풀이했다. 퉁맹가는 한자를 짐작하는 때문이다. 여연을 침범하려는 우디거
부류를 물리치고, 잡아갔던 남녀노소를 탈환해주었다는 대문에 이르러 이만주의
입은 딱 벌어졌다. 자기네 꾀가 맞아들었다는 기쁨이었다. 또다시 가상한 뜻을
표하기 위하여 소와 돼지와 곡식을 보내준다는 말에 더 한 번 입이 벌어졌다.
퉁맹가의 풀이가 끝나자, 이만주는 이마에 손을 대고 박특사를 향하여
감사하다는 경의를 표했다. 인해 모든 추장들을 둘러보며 말한다. "자아,
최윤덕 장군이 우리에게 보낸 소와 돼지며 곡식을 보러 나갑시다." 말을
마치자 박특사와 함께 뚜벅뚜벅 걸어 궁실 밖으로 나갔다. 모든 추장들이 뒤에
따랐다. 궁실 밖 넓은 마당에는 조선에서 보낸 소며 돼지며 곡식이 즐비하게
하륙되어 있었다. 이만주는 손뼉을 치며 '좋다!'소리를 치고 기뻐했다. 홀연
이만주의 눈결은 화려한 금은주옥으로 꾸민 백설마를 발견했다. 강변 호장에게
묻는다. "이 말이 박특사가 타고 오신 은안백마 천리준총인가?" "네,
그렇습니다." 강변 호장이 대답했다. 이만주는 뚜벅뚜벅 말 앞으로 걸어갔다.
윤이 번지르르 흐르는 풍윤한 갈기털을 쓰다듬어준 후에 말궁둥이를 툭툭 쳤다.
말은 '어흥' 소리를 치면서 네 굽을 모아 공중으로 까맣게 치솟았다. "좋은
말이다. 천리준총이로구나!" 이만주는 감탄하기를 마지아니했다. "한번 타봐도
좋습니까?" 박호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섰던 강변 호장의 가슴이
뜨끔했다. 이만주는 나무등걸에 매어놓은 견마 줄을 손수 끄르고 선뜻 마상에
올라 고삐를 잡았다. 말 궁둥이를 발뒤꿈치로 강하게 걷어찼다. 말은 소리치며
네 굽을 모아 뛰기 시작했다. 바람을 끊고 번개같이 뛰었다. 광야를 달리고
냇물을 껑충 뛰어넘었다. 삽시간에 층암절벽으로 까맣게 달렸다. 말도 잘
뛰거니와 이만주의 말을 어거하는 솜씨도 대단했다. 이 모양을 바라보는 모든
추장들은 손뼉을 치며 잘 탄다고 부르짖었다. 한동안 쾌활하게 백설마를
달리던 오랑캐 장수 이만주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본고장으로 돌아왔다.
모든 추장들은 박수갈채를 하며 이만주와 백마를 맞이했다. 이만주는 말에서
선뜻 내리자 호방한 목소리로 지껄여댄다. "과연 천리준총이다. 세상에 드문
용마! 내 생전에 이런 좋은 말은 처음 타보았다. 훌륭한 말이다." 말을 마치자
이만주는 박호문에게 묻는다. "도대체 이런 용마를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박호문이 웃으며 대답한다. "구하다니? 우리 나라에는 이같은 말이
거재두량입니다. 이 말보다 더 좋은 말을 최윤덕 장군은 가지고 계십니다."
이만주의 얼굴에 부러워하는 빛이 현연히 나타났다. 모든 추장들도 박호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헤 하고 벌리고 있었다. "도대체 조선에서는 이런 좋은
종자를 어디서 기르십니까?" "우리 나라 남해 속에 제주 한라산이란 명산이
있소이다. 중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삼신산 불로초가 나는 곳이라 해서 침을 만
길이나 흘리는 곳이지요. 이 산 아래, 넓고 넓은 청초 우거진 광야가
바닷가에까지 쫙 퍼졌고, 여기서 천리용마 수천 필을 방목하고 있소이다. 새끼말
망아지들이 나면 불로초와 가지각색의 향초들을 따먹고 자라니 어찌 용마가
아니되겠소. 이 까닭에 글 읽는 선비 나한테까지 천리준총이 차례왔소이다."
박호문은 정색하고 풍을 치며 대답한다. "그렇다면 조선에는 준총이 매우 흔한
모양인데, 어찌해서 여연과 강계에는 이러한 말을 보내지 아니하십니까?"
박호문은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여연과 강계 변장들에게 그런
용마를 주었다가 만약 당신네 여진족들이 노략질을 해서 다 가져가게 된다면
큰일이 아니겠소. 그러하니 강계와 여연 변장들한테는 준총을 주지 않는 것이오.
다만 최윤덕 장군만은 천하무적의 대장군이므로 우리 성상께서 특별히 하루에
이천 리 뛰는 용마를 내리셨소." 박호문은 여진 오랑캐들의 급소를 찔렀다.
이만주 이하 모든 추장들은 무안에 취하여 할말이 없었다. 얼굴빛이 붉어질
뿐이다. 이만주는 얼굴 가죽이 두껍고 뱃심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이내 곧
무안한 얼굴빛을 스러뜨린 후에 얼굴에 가득 웃음빛을 띠고 박호문에게 다시
말을 건넨다. "박특사, 청할 일이 한 가지 있소이다." 박호문도 웃는 얼굴로
대답한다. "무슨 청인가?" "소와 돼지와 곡식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오이다마는, 특사께서 타고 오신 저 백마를 나에게 넘겨주실 수
없겠습니까?" 박호문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어찌하면 좋은가. 때가 조금
늦었는걸. 말은 이제 내 말이 아니라, 저기 서 있는 저 강변 호장의 말이
되었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얼른 못알아듣겠소이다." 이만주는 박호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박호문은 벙긋벙긋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압록강에서 백마를 타고 건너올 때 저 친구가 하도 내 말이 좋다고 하길래 선뜻
넘겨주고 바꿔 타고 온 길이오. 일이 이쯤 되었으니 이제는 저 친구의 말이지
내 말은 아니오. 지휘가 정 갖고 싶다면 저 친구보고 달리시오. 이제는 내
소유가 아니거든. 하하하." 이만주와 모든 추장들은 비로소 까닭을 알았다.
박호문을 인도해왔던 강변 호장의 얼굴에 또 한 번 당황한 빛이 떠돌았다.
"그렇습니까?그것 잘되었습니다." 이만주는 쾌활하게 말하고 강변 호장에게
영을 내린다. "그렇다면 너는 나한테 말을 양도해라. 이제부터 백설마는 내
말이다! 너한테는 대신 내 말을 주마." 강변 호장은 꼼짝달싹할 도리 없이
상사인 이만주에게 백설마를 뺏기게 되었다.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말은 못하고 가슴만 쓰리고 아팠다. 얼른 대답을 못한다. 이만주는
다시 강변 호장에게 분부한다. "이제부터 백말은 내것이다!" 강변 호장은
어찌하는 수 없었다. 식혜 먹은 고양이 상을 하고, "네." 하고 대답했다.
이만주는 강변 호장의 허락하는 대답을 듣자, 마음이 호쾌했다. 아장을 불러
분부한다. "저 애한테는 내가 타던 말을 주어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강변 호장은 꼼짝 도리 없이 백마를 뺏겼다. 이만주는 손수 백설마를 궁실 앞
나무등걸에 맨 후에, "자아, 내 처소로 다시 들어가십니다." 박특사를
인도했다. 특별한 우대다. 모든 추장들은 이만주의 분부가 없으니 감히 따라
들어갈 수 없었다. 박특사가 인도된 곳은 아까 대면했던 큰방이 아니라, 아늑한
침실이었다. 오랑캐 북색을 차린 남녀 소해자들이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만주는 말채직을 '캉' 위에 쾌활하게 내던지며 시동들에게 분부한다. 천리마를
얻어서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조선서 대관이 친서를 가지고 오셨다. 술과
안주를 빨리 준비해 내오너라." 이윽고 소해자들은 상품 빼주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염소탕이며 돼지찜밖에 없습니다. 식성에 맞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만주는 빼주를 권하며 말했다. "추울 때는 기름진 음식이 좋습니다. 우리
조선에도 가리찜과 불고기며 양지머리 편육 등 기름진 음식이 많습니다. 특별히
좋은 음식을 주시니 맛있게 먹겠습니다." 박특사는 노린내나는 염소탕을 억지로
마시면서 이같이 능란하게 외교사령을 했다. 술이 서너 순배 돈 후에 이만주는
박특사를 향하여 말한다. "아까 말씀한 제주 한라산의 준마 씨를 좀 받고
싶습니다. 망아지 몇 필을 보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박호문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대답한다. "이만주 지휘는 항상 우리 나라에 충성을 다하시는 분입니다.
지난번에도 여연과 강계로 침범해 들어오는 우디거를 막아주고, 잡아간
사람까지 빼앗아 돌려보냈으니, 우리 성상전하께서도 가상하다고 생각하시는
중이올시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디거라든지 오도리족 따위를 감시하고
격파해준다면, 제주도의 용마 새끼뿐이겠소. 강원도의 펄펄 뛰는 백점박이
사슴도 보내주리다." 이만주의 입이 딱 벌어진다. "참, 소문 들으니 강원도의
사슴뿔과 사슴피는 불로장생하는 보약이라 합니다!" "여부가 있나. 강원도의
강용과 녹혈은 사람이 한번 먹으면 백 세 향수를 한다는 것이지요. 어디
그것뿐인가. 강원도 심심산골에서 나는 삼삼은 한 뿌리만 먹으면 역발산
기개세하는 장사가 된다는 것이죠!" 박호문의 말을 들은 이만주는 당장 녹용과
녹혈이며 산삼을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거 참, 그렇다는 소문을
들었소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고려인삼을 천하보배로 생각한다 합니다.
녹용 한 대와 산삼 한 뿌리만 얻어먹어 보았으면 좋겠소이다." "중국 사람들이
만금을 아끼지 아니하고 사가는 인삼도 좋기는 하지만, 강원도 장산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산삼만 할 수가 있소. 진정 이지휘가 우리 국경을 침범하지
않고 도의와 법을 지켜서 충성을 다한다면 우리 성상전하께 아뢰어 용마며
사슴이며 산삼을 상급으로 내리시게 하리다. 그저 충성만 다하라구." 박호문은
말을 마치자 다시 소리를 높여 껄껄 웃는다. 이만주의 얼굴빛이 약간 붉어졌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모양이다. 그러나 삽시간이었다. 뻔뻔스럽게 웃는 얼굴로
변했다. "박특사! 건주위 우리들은 조선국에 대하여 항상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곡식도 많이 주시고 편의도 많이 보아주시는데 배은망덕을 할
리가 있습니까? 간혹 아랫것들이 철없이 불장난을 하면 엄하게 치죄합니다.
그리고 지난번에도 우디거들이 못된 짓을 하는 것을 우리가 막은 것은 귀국의
오해를 살까보아 그놈들을 압록가에서 쫓아내고 잡아간 조선 사람을 돌려보낸
것 아닙니까? 건주위 우리들은 이같이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알았소. 잘
알고 있소. 그러기에 우리 도원수 최윤덕 장군이 나를 보내서 가상하다고
찬양하고 가축과 곡식을 보낸 것이 아니겠소. 다 잘 알고 있소. 이지휘는 더한층
성의를 다하시오. 그리한다면 성상전하께 아뢰어 모든 좋은 물건을 보내주리다."
"감사합니다." 이만주는 박특사의 손을 잡았다. 박호문이 정색하고 묻는다.
"우디거 부류가 있는 부락은 여기서 몇 리나 되겠소?" "아주 멉니다. 험준한
산골 길로 이백 리가 넘습니다." 이만주는 무심코 대답했다. "내일은 우디거
부류가 사는 부락을 좀 찾아가보아야 하겠소." 우디거 부류가 있는 부락을
찾아가겠다는 박호문의 말을 듣자 오랑캐 추장 이만주는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러나 얼굴빛을 고치지 않고 태연히 묻는다. "우디거 부락은 왜
찾아가시려 합니까? 길이 몹시 험악하고 멉니다. 그리고 위험합니다." "기왕
이곳까지 온 길이니 한번 찾아가서 추장놈들을 단단히 꾸짖어야 하오. 무엇이
위험하단 말요." 이만주는 지난번 협사한 일이 탄로날까 겁이 덜컥 났다.
"그자들은 너무나 독종이올시다. 아직도 사람을 잡아 먹는 원주민이 있습니다.
얼굴엔 자자를 해서 흉악한 악취미를 가졌고, 외국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떼를
지어 창과 칼로 난자질을 해서 죽입니다. 절대로 가시면 아니됩니다." 이만주는
풍을 쳐서 박특사에게 위협을 주었다. 박호문은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건주위 지휘 이만주가 격파한 우디거 족속인데, 대조선 박호문이 칼 한 자루
짚지 않고 평화스럽게 찾아가는 것을 어느 놈이 감히 해치겠소. 만약에 우디거
놈들이 나를 해친다면, 내 뒤에는 최윤덕 장군의 십만 대병이 대기하고 있소.
아무 염려 마시오!" 씩씩하게 말하는 박호문의 말에 이만주는 주눅이 들어서
말이 막혔다. 한동안 후에, "그러 몸조심을 하시란 말씀입니다. 정 가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이만주는 기가 죽었다. 박특사는 다시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청하는 말을 보낸다. "내가 초행길이라 우디거 부락을 알지 못하니, 한
사람 향도자를 내줄 수 없겠소?" 이만주는 박호문을 우디거 부락으로 아니
안도할 수 없게 되었다. 마음 속으로는 꺼림칙하게 생각했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기색을 취했다. "좋습니다. 압록강서부터 특사님을 모시고 왔던 강변
변지 장수를 불러서 모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소." 박호문은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음 속으로 요량하는 바가 있는 때문이다. 이만주는
즉석에서 시동에게 명을 내려 변지 호장을 불러 분부를 내린다. "특사께서
이곳에 오신 김에 우디거 부락을 둘러보시고 귀국하신다한다. 기왕 네가
이곳까지 모시고 왔으니 그곳까지 길을 인도해드려라." 변지 호랑은 '네' 하고
명을 받았다. 박호문은 다시 웃음을 얼굴에 가득 싣고 이만주를 향하여 말했다.
"자아, 이제 나는 지휘한테 친서도 전했고, 후한 대접도 많이 받았소이다.
사관으로 돌아가 하룻밤을 지낸 후에 우디거를 찾고 고국으로 돌아가겠소이다."
이만주도 겉으로 웃음을 짓고 대답한다. "그렇습니까. 먼 길에
피곤하셨겠습니다. 그러면 사관으로 나가시어 편히 쉬시고 내일 일찍이
우디거로 향하십시오." 말을 마치자 이만주는 변지 호장에게 다시 명을 내린다.
"너는 특사를 모시고 사관으로 나가서 편히 쉬시도록 하라. 그리고 내일 떠날 때
나를 잠깐 보고 가도록 하라. 우디거 추장에게 특사를 잘 모시라고 전할 말이
있다." 호장은 '네' 하고 대답한 후에 박호문과 함께 이만주의 처소에서 나왔다.
변지 호장은 추장인 이만주 앞에서는 항상 '네네'하고 대답했으나 백설준마를
뺏긴 뒤부터는 앙앙불락했다. 얼굴에는 현저하게 우울한 표정이 떠돌았다.
박호문은 변지 호장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리를 함께 하여 누웠다.
박호문은 슬몃 변지 호장의 마음을 더듬어본다. "모처럼 자네한테 내가 탔던
천리마를 주었더니, 그만 이만주 추장한테 뺏겼네그려. 하하하. 이만주는 부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인물일세그려!" 변지 호장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변지
호장의 눈이 금방 실쭉해지며 충혈이 되었다. "우리 추장 이만주는 아주
철면피올시다. 부하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 도적놈이올시다. 의리도
없고 신용도 없는 불한당이올시다." "겉으로 보아서는 점잖은 사람 같던데___."
"점잖은 것이 무엇입니까. 청보에 개똥이지요. 부하들의 마누라가 예쁘고
똑똑하기만 하면 물불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모조리 뺏어다가 첩을 삼습니다.
지금 작은계집만 해도 여남은 명이 넘습니다. 말도 좋다는 말은 모조리
뺏어갑니다. 아주 신의 없는 자올시다. 저런 놈은 최윤덕 장군 같은 분이 한번
오셔서 톡톡히 버릇을 가르쳐주셔야 합니다!" 변지 호장의 불평이 가득 찬
소리를 듣자 박호문은 마음 속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아, 최윤덕
장군께서는 이만주가 여연과 강계로 노략질하러 쳐들어오는 우디거 부류를
격퇴해 물리치고 잡아갔던 늙은이와 여인들을 뺏어 보내서 가상하다고 상급까지
주시는 분인데, 버릇을 가르치러 쳐들어오실 리가 있나. 당치 않은 말일세!"
변지 호장은 깔깔 웃었다. "하하하, 그것을 정말로 아셨습니까? 모두
협사올시다. 거짓말로 꾸민 수작입니다. 최윤덕 장군이 쳐들어올까 겁이 나서
그따위 어릿광대짓을 한 것입니다. 우리 추장은 참 신의가 없는 자입죠.
조선에서 그만큼 우대를 해주어서, 먹을 것이 없으면 곡식을 주고, 살곳이
없으면 땅을 빌려주었건만, 걸핏하면 마적 같은 놈들을 몰아와서 약탈을
감행하니 참으로 신의 없는 자올시다. 필경엔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박호문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협사를 했다니, 어떻게 협사를 했단 말인가?"
변지 호장은 빙글빙글 웃는다. "그저 그렇게만 아십시오. 최윤덕 장군이 이만주
추장의 꾀에 넘어 간 줄만 아십시오." "그저 그렇게만 알고 있으라니 말이
되나, 나는 최윤덕 장군을 대리해서 온 사람일세. 속아넘어갔다는 말을 듣고
어찌 가만히 앉아 있는단 말인가? 어서 솔직하게 말을 하게나." "만약, 제가 다
털어놓고 말을 한다면 제 목숨은 보전하지 못합니다. 당장 이만주의 손에 목이
달아나고 맙니다." "이 사람아, 내가 입을 다물고 자네한테 들었다고 말을 내지
아니하면 그만 아닌가? 어서 이야기를 해주게___." 호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어찌 일을 아시고도 입 밖에 말을 내지 아니하실 수 있습니까?
아니됩니다. 제 목이 달아납니다!" 박호문은 앞으로 변지 호장을 심복으로 삼을
생각이 들었다. 허리띠에 차고 있는 노란 염낭끈을 끌렀다. 호장의 눈결이 힐끗
염낭 주머니로 향했다. 박호문은 엄지, 식지, 장지, 세 손가락을 염낭 주머니
부리에 넣어 하얀 종이 봉지를 꺼냈다. 호장의 눈은 박호문이 꺼내는 종이
봉지를 주시했다. "여보게, 그 동안 자네 신세를 많이 졌네. 내일부터는 또다시
우디거까지 함께 가야 하겠네. 신세를 갚기 위하여 이 물건을 자네한테주니
거두어두기 바라네." 박호문은 말을 마치자 흰 종이 봉지를 변지 호장에게
주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변지 호장은 의뭉하게 손을 내밀어
받았다. 손바닥에 묵직한 중량을 느꼈다. 흰 백지를 펼쳤다. 황금빛이 불빛
아래 찬란하게 빛을 뿜었다. 황금동곳이었다. 호장은 깜짝 놀랐다. 너무나
귀중한 선물이었다. "이것은 조선 대관이 상투에 꽂으시는 동곳이 아닙니까?"
"잘 알았네. 조선 귀인들이 상투에 꽂는 금동곳일세. 금값만 해도 좋이 되지만,
앞으로 자네가 쓸 날이 있을 것일세." 호장의 눈이 둥그래진다. "너무나
값비싼 보물을 주셔서 감격한 말씀 아뢸 길 없습니다마는, 앞으로 쓸 날이 있다
하시니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박호문은 껄껄 웃으며 호장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며 말한다. "자네는 앞으로 우리 나라로 귀화하지 낳고는
배겨나지 못할 때가 올 것일세. 그때 가서 이 동곳을 꽂고 우리 나라 귀인이 될
수가 있네." 변지 호장은 그래도 박호문은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눈을
끔벅이며 멍하게 박호문의 표정을 살핀다. 박호문도 얼굴빛을 고쳐서 정색하고
말한다. "자네는 이제 얼마 아니 있으면 이만주의 손에 죽을 사람일세!"
호장은 깜짝 놀란다.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가만히 자네 지휘
이만주의 관상을 보니, 그 사람은 시기와 의심이 많은 사람일세! 자네의
사랑하는 용마를 뺏었으니, 자네가 앙앙불락하고 있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네.
자네가 불평한 맘을 품고 있는 것을 아는 그는 반드시 자네를 의심할 것일세.
자네는 이만주가 우리 나라에 대하여 간교한 수단으로 속임수를 쓴 일을 잘
알고 있네. 자네가 말 뺏긴 것을 앙심먹고 반드시 나한테 이만주가 속임수 쓴
일을 말했으리라고 의심할 것일세. 자네가 절대로 나에게 그러한 비밀을
누설하지 아니했다 할지라도 이만주는 틀림없이 꼭 그리 생각할 것일세.
그러하니 어차피 자네는 이만주의 손에 죽을 사람일세!" 변지 호장의 얼굴빛이
파랗게 질렸다. "아닌게아니라 우리 추장은 의심이 너무나 많습니다. 남의
계집을 뺏고서는 반드시 본서방을 죽여버립니다!" "그것 보게. 애첩을 뺏는
것이나 애마를 뺏는 것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불평하는 마음이 있는 자를
없애버리자는 것이 이만주의 심정이거든!" 박호문의 말을 듣자 변지 호장은
황금동곳을 손에 쥔 채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렇다면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박호문은,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아니하고, 또다시 호장의 설레는 마음을 더
한 번 흔들어놓는다. "자네, 말 들어보게. 많은 아장들 중에 어찌해서 나의
향도자로 자네를 우디거까지 가게 한 일을 대답한다. "그것은 제가 처음부터
대인을 모시고 온 때문, 낯익은 사람을 택해서 보내려는 것이 아닙니까?"
"자네! 참 너무나 착하고 소박한 사람일세그려. 자네를 우디거에가는 향도로
보내는 것은 앞으로 자네를 죽이려는 전조일세. 자네가 불평을 품고 나에게
이만주와 우디거의 비밀한 일을 설파했다는 구실을 삼아서 자네를 죽일
작정일세. 두고 보게. 내일 우디거로 떠날 때 자네보고 들러 가라고 하지
않던가? 반드시 어떠한기미가 보일 것일세." 호장은 한동안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금동곳을 손바닥 안에 바싹 쥔 채 두 번째 안타까운 말을
되풀이한다. "그럼 저는 어찌해야 좋습니까?" "별수없지. 자네는 우리 나라로
귀화해서 조선 사람이 되는 길밖에 없네. 그리해서 늘어뜨린 꼬리머리를
끌어올려서 상투를 틀고 황금동곳을 꽂아서 조선의 귀인이 되게나. 그리 한다면
일평생 부귀영화는 말할 것 없고, 자자손손 문화민족이 되어 복록을 길이 누릴
것일세. 나하고 압록강까지 갔다가 슬몃 건너가기로 하세. 최윤덕 장군께 모든
사연을 잘 말씀해주겠네. 자, 모든 일을 나한테 토설하게나. 자네가 사는 길은
오직 이 길밖에 없네!" 호장은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마음이 무한 괴로운 모양이었다. 박호문도 다시 더 긴 말을 하지 아니했다. 창
밖의 관솔불이 영창문에 은은히 빛을 비출 뿐이었다. 한동안 후에 호장은 길게
한숨을 짓고 말한다. 손에는 여전히 금동곳이 꼭 쥐어져 있었다. "하는 수
없습니다. 대인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기운 없이 대답했다. 박호문은 만면에
웃음을 짓고 덥석 호장의 몸을 끌어안았다. "잘 생각했네. 자네는 이제
생왕방을 찾았네. 훌륭한 조선 사람이 되었네. 자아, 모든 일을 숨김 없이
털어놓고 이야기해주게." "자아, 이제는 저도 결심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지난번 압록강상에서 결전을 했다는 우디거는
진정한 우디거가 아니라 얼굴에 자자한 모습을 그린 저희들 오랑캐 군사올시다."
박호문은 깜짝 놀랐다. 얼마쯤 협사가 있는 줄은 짐작했으나 자자한 모습을
그려서 속여댄 줄은 몰랐다. 박호문은 어이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디거가 잡아갔던 조선 사람들을 뺏어서 돌려보냈다는 것도 순
거짓말이올시다. 이만주가 여연에 침범했을 때 잡아갔던 사람중의 일부분을
돌려보낸 것입니다." 박호문은 이만주가 교활한 꾀로 미봉책을 쓴 것을 비로소
자세히 알게 되었다. "최윤덕 장군이 새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따위
수단을 썼네그려!" "그렇습니다. 전번에 서북면을 지키던 장수들처럼 만만치
아니할 것을 알고, 모사 퉁맹가를 보내서 충성을 다하는 체하고, 최장군의
예봉을 피하려는 한 가지 간특한 수단이었습니다." 박호문은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뜻을 표시한 후에 다시 강변 호장에게 말을 건넨다. "자네는 이제
우리 나라로 귀화할 것을 결심한 사람이니, 건주위 여진 사람이 아니라 훌륭한
조선 사람일세. 이제 조금도 이만주가 두려울 것이 없네. 모든 일을 묻는 대로
더한층 소상하게 말해주게. 숨김 없이 말해줄 수 있겠나?" "대인께서는 저의
목숨을 구해주시는 은인이십니다. 이미 조선 사람 되기를 원한 저올시다.
이만주가 두려울 까닭이 있습니까. 아는대로 은휘하지 아니하고 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물어보십시오." 박호문은 활짝 웃으며 강변 호장의
등을 쓸었다. "좋다, 잘 생각했네. 이제 자네는 조선 사람일세. 우리편일세.
다털어놓고 말을 해주게. 지금, 건주위 여진이 여연과 강계로 화적떼가 되어
들어가서 약탈해온 조선 사람들이 몇 명이나 남아 있는가?" "일전에 퉁맹가가
우디거한테서 뺏어 보냈다고 거짓말을 하고 돌려 보낸 사람들은 반수도
못됩니다. 지금도 아마 칠팔십 명의 장정과 여자들이 고생살이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장정들을 잡아다가 무슨 일을 시키고, 여자들은 어떻게 대접을
하고 있는가?" "남자들은 산을 뭉개서 농사를 짓게 합니다. 척박한 돌산을
뭉개서 밭을 갈게 하니 고생이 대단합니다. 조선 사람들은 농사를 잘짓는다
해서 이러한 노동을 시킵니다. 돌산을 깨뜨리고 뭉개서 좋은 밭을 만들라 하니
그 고생이 어떠하겠습니까. 말을 안들으면 죽도록 패줍니다. 고생들이 참말
대단합니다. 그리고 나어린 여자들은 추장들이 강제로 끌고 와서 첩을
삼아버립니다. 한번 추장한테 잡혀간 계집애들은 집 속에 꼭 가두어두고
세상구경을 못하게 합니다. 도망갈까 해서 발을 묶어 졸라매 꼼짝을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모두 다 계집애들만 잡아왔네그려!" "그렇습니다.
모두 여남은 살 된 애들만 골라서 잡아왔습니다!" 박특사는 길게 한숨을 짓고
한동안 침묵 속에 잠겼다. 어서 빨리 지옥 속에 빠져 있는 이 사람들을
구해내야 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한 때문이다. 이윽고 박특사는 고개를
다시 들고 호장에게 묻는다. "잡혀 와 있는 우리 나라 사람들을 만나볼 도리는
없겠나?" 호장은 고개를 가로 흔들며 대답했다. "도리가 없습니다. 계집애들은
추장네 집 속에 가두어두다시피 했으니 만나보실 수 없고, 장정들은 깊숙한
산속에 한데 모아놓고 파수병들이 지키고 있으니 만나보시기가 극난하실
것입니다" 박호문은 호장을 향하여 다시 묻는다. "깊숙한 산속이라 하니
어디즘 되는가?" "영고탑 방면에서 내려와 사는 우디거들이 있는 중간지접인
험준한 산속에 부락을 이루게 하고, 그곳에서 강제 노동을 시키고 있습니다."
"우디거들이 살고 있는 중간지점이라면 내일 우리들이 찾아가는 길목이
아니겠나? 가고 오는 도중에 한번 우리 장정들을 만나보도록 해주게.
계집애들은 자네가 주선만 잘 해준다면 만나볼 수 있지 않겠나?" "글쎄, 그것이
어렵습니다. 파수병과 파수하는 대장들에게 만나보게 해달라고 말하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 대장 이만주는 퉁맹가를 보내서 최윤덕 장군도
속였는데, 그까짓 파수대장이나 파수병쯤을 속이지 못한단 말인가. 이만주의
명령으로 조선 대관이 우디거를 시찰하러 가는 길에 조선 사람들을 만나보러
왔다고 하면 그만 아닌가?" "그것이 어렵단 말씀입니다. 조선 사람을 파수하는
대장은 우리가 만나본 후에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본부로 달려가 보고를 할
테니, 그 점이 어렵습니다." 박호문은 잠시 생각하다가 무릎을 치며 말한다.
"좋은 수가 있네. 먼저 우디거를 만난 후에, 오는 길에 만나보고 자네와 나는
쏜살같이 말을 달려 압록강을 건넌다면, 이만주가 보고를 받고 자네와 나를
잡으려 해도 잡을 도리가 없을 것일세. 내 꾀가 어떠한가?" 강변 호장은 입이
딱 벌어졌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별 탈이 없겠습니다!" 강변 호장도 쾌히
대답했다. 밤은 어느덧 점점 깊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이튿날 날이 밝자, 박특사와 강변 호장은 우디거로 향할 준비를 차렸다.
외양간에서 말을 배불리 먹이고, 강변 호장은 어제 이만주의 명령대로 궁실로
들어가 지휘를 받았다. 박특사의 추측대로 강변 호장을 향한 이만주의 태도는
엄숙했다. "너에게 박호문을 맡긴 것은 어느 누구보다 너를 믿는 때문이다.
털끝만한 틀림이 있어도 아니된다! 알겠느냐? 우디거들에게 비밀히 내 말을
전해라. 여연과 강계를 침범했다가 나한테 혼이 났다 하라고___. 만약
박호문에게 딴소리를 했다가는 멸종이 된다고 일러라. 그리고 가는 도중에
박호문이 납치해온 조선 사람들이 또 있느냐고 묻거든 절대로 없다고 그래라.
있는 장소를 가르쳐주어서도 아니된다. 지난번 퉁맹가편에 다 보냈다고 일러라.
만약에 기밀을 누설하는 일이 추호라도 있다면 참하리라!" 말을 마치자
군령장을 내밀었다. "여기 네 이름을 써라!" 영을 어기면 목을 바치겠다는
군령장이다. 강변 호장은 벌벌 떨면서 이름을 썼다. 이만주는 군령장을 받은
후에 강변 호장을 더 한 번 노려보며 엄한 소리로 말한다. "털끝만치라도
착오가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잘 다녀오너라." 강변 호장은 사시나무
떨듯 했다. '네' 하고 물러났다. 박호문은 사관에서 강변 호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강변 호장은 풀기 없는 얼굴로 어깨가 축 쳐져서
돌아왔다. "이만주를 만났는가?" 박호문은 웃으며 물었다. "만났습니다."
강변 호장은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슨 명령이 내렸나?" 박호문은
여전히 벙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군령장에 이름을 쓰고 왔습니다."
박호군은 다시 드높게 웃는다. "하하하, 그저 내 말이 옳지 않은가. 자네를
죽여서 없이해버리려는 수작일세. 도대체 무어라 하던가?" "박특사는
간첩이라구 합니다. 그리고 우디거들한테는 박특사가 물어보거든 자기네들이
여연과 강계를 침범했다가 이만주 추장한테 혼이 났다고 대답하라고 비밀히
일러두라 했습니다. 또 한 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박특사가 혹시 납치된 조선
장정들이 또 있느냐고 묻거든 덜대로 없다고 대답하라 했습니다. 만약에
추호라도 명령을 거역한다면 목을 벤다는 군령장에 다짐을 두고 이름을 쓰라
했습니다." 박호문은 강변 호장의 등을 툭툭 쳤다. "아무 염려 말게. 이제
자네는 조선으로 귀화한 사람이 아닌가? 나하고 행동을 함께 하다가 쏜살같이
압록강을 건너가면 그만일세. 조금도 겁날 것이 없네! 자아, 이제는 어서 길을
떠나세." "그저, 대인만 믿습니다." 강변 호장은 비로소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두사람은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2백 리 밖 우디거 부락을 향하여
달렸다. 박호문은 말을 달리며 좌우 산천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험하고 평탄한
곳과 냇물의 깊고 얕은 곳을 자세히 살폈다. 촌락을 지날 때마다 쓸쓸한
한촌엔 사람들의 모습이 극히 드물었다. 박호문은 강변 호장에게 물었다.
"촌락마다 사람들이 겅성드뭇하니 어찌 된 까닭인가?" "최윤덕 장군이 서북면
도절제사로 오신 소식을 듣고 모두 다 산속과 굴속으로 피신을 한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지 아니합니다." 박호문은 지난번 이만주의 궁실 앞에서 졸개
군사들에게서 들었던 말이 사실인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박호문은 다시
물었다. "지금 이만주 휘하에 있는 군사들은 몇 명이나 되는가?" "많습니다.
강변에 배치된 병졸까지 합한다면 삼사만 명이나 될 것입니다." "수자리하는
군사들말고 오랑캐 안에 있는 군사는 몇 명이나 되는가?" "이만 명가량 될
것입니다." "군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아니하니 어디서 훈련을 받고 있는가?"
"모두 다 땅굴 속에서 교련을 받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종유동의 천연으로 된
땅굴이 많습니다. 삼천 병마를 달릴 만한 땅굴이 수두룩합니다. 겨울에 춥지
않고 좋습니다." 강변 호장은 조선으로 귀화할 것을 이미 결정했다. 모든
군사비밀을 박호문에게 다 털어놓곤 했다. 박호문은 모든 것을 일일이 다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 박호문과 강변 호장은 건주위 오랑캐 지방을 벗어나
우디거 부락에 당도했다. 돌연 연통 없이 말을 달려 오는 행차다. 진짜로
얼굴에 먹을 넣어서 자자한 우디거 부락의 남녀노소들은 아관박대에 도포를
입고 말을 달려 오는 진기한 손님 박호문과 건주위 장수의 모습을 보자, 모두들
신기하게 바라보며 급히 늙은 추장한테 고했다. 추장은 급히 버금 추장들을
소집해 거느리고 창과 칼을 비껴들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모두 다 얼굴엔 먹과
채색을 물들인 흉악한 형상을 한 무리들이었다. 늙은 추장이 장창을 흔들며
뛰어나와 호통을 친다. "거기 달려오는 사람들은 누구들인가? 감히 연통도
없이 어찌 남의 부락으로 방자하게 말을 달려 들어오는가?" 강변 호장이 선뜻
말에서 내려서 웃는 낯으로 대답한다. "나는 오랑캐 지휘 이만주의 명을 받들어
좋은 친구의 부락, 우디거를 찾았소이다. 그리고 이분은 조선 국왕전하의 특명을
받들어, 우디거 부락을 순무하러 오신 분입니다. 공손하게 영접하시오."
우디거의 늙은 추장과 젊은 추장들은 조선 국왕전하의 특사라는 말을 듣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선비 복색으로 차린 박호문을 향하여 넙죽 절을
올린다. 박호문은 마상에서 황망히 답례를 하고 말 아래로 내렸다.
"조선국왕의 특사이신 줄 모르고 큰 소리를 질러서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늙은 추장이 손을 모아 다시 예를 올린다. 박호문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대답한다. "이만주의 부락을 거쳐 오느라고 미리 연통할 겨를이 없어서
미안하기 짝이 없소. 죄송할 것이 없소이다." 능란한 여진말이었다. 우디거
추장은 또 한 번 놀란다. 우디거는 건주위 부락보다 조선과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조선이란 나라를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부류들이었다. 아관박대에
신선같이 차린 조선 대관이 이같이 여진말을 청산에 유수가 흘러가듯 잘 할
줄은 몰랐다. "대관께서는 어찌 그렇게 여진말에 능통하십니까? 혹시 여진에서
오랫동안 사신 일이 있습니까?" 추장의 묻는 말에 박호문은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선비란 모든 것을 다 잘 알아야 하오. 박학다문이란 말이 있지
아니한가. 넓게 배우고 많이 들어서 국가의 문화를 더한층 높이는 일이 우리들
조선 선비들의 임무거든. 내가 여진에 살아본 적은 없소마는 당신네들과 이웃해
사는데 서로 통하지 못한다면 어디 친구의 나라라 하겠소? 당신네들과 가깝게
지내기 위해서 일부러 여진말을 배웠소. 하하하." 늙은 추장을 위시하여
남녀노소 우디거 부류들은 모두 탄복하여 존경했다. 늙은 추장은 박호문과
강변 호장을 마을의 집회소로 인도했다. 건주위 부락과 비슷한, 바위와 돌을
이용해 쌓아놓은 동굴 같은 처소다. 동굴 안에서는 화톳불이 이글이글 불길을
뿜었다. 아늑하고 훗훗했다. 얼굴에 먹을 넣어 기괴한 형상을 한 남녀노소들은
조선서 온 진객을 대접하기에 바빴다. 박호문과 강변 호장을 화톳불 옆 요의에
앉게 한 후에 진기한 다래술과 기름진 양고기를 대접했다. 양털옷을 입은 젊은
남녀들은 주흥을 돋우기 위하여 우디거 특유의 악기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여진말을 잘 하는 조선의 대관이라 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최고의
대우를 하는 모양이었다. 밤이 이슥한 후에 늙은 추장을 박호문과 강변 호장을
자기 침실로 인도했다. 특별한 우대다. 우디거 추장도 조선 서북면에는 범 같은
조선 대장군 최윤덕이 여진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사를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소식을 들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캉 위에 양털 이불을 펴고 박호문과 강변
호장에게 편히 누워 쉬기를 청했다. "멀리 오시느라고 매우 고단하실 텐데,
누추한 곳입니다마는 편히 쉬십시오." 박호문과 강변 호장에게 간곡하게 눕기를
청했다. 박호문은 웃으며 대답한다. "노추장의 주밀하고 은근한 대우를 받아서
조금도 피곤하지 아니하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할 텐 천천히 이야기나
합시다." 늙은 추장은 얼굴에 놀라는 빛을 띠고 묻는다. "내일 벌써
떠나시렵니까? 모처럼 오셨는데 천천히 구경이나 하고 가십쇼. 젊은이들도 모두
다 대인을 존경하고 숭배합니다." 늙은 추장은 사심없이 진심으로 만류했다.
박호문은 얼굴빛을 고쳐 정중한 표정을 짓고 말한다. "왕명을 받으러 온 몸이라
한만한 행동을 해서 오래 지체할 수 없소이다. 내일 곧 떠나야 하겠소이다."
"섭섭해서 어찌합니까? 모처럼 오신 고귀하신 손님을 모시고 따뜻하게 서회를
하지 못한 채 작별 인사를 여쭙게 되니 실로 마음에 아쉬움을 느낍니다." 늙은
추장의 태도는 끊임없이 순후했다. 박호문은 다시 얼굴빛을 고쳐 엄숙한
표정을 짓고 말한다. "오늘 내가 우디거 부락을 찾은 것은 한가롭게 유람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왕전하의 엄명을 받들어 그대들의 죄상을 성토하러 온
것이오. 지금 우리 나라 서북면에는 역발산 기개세하는 천하명장 최윤덕 장군이
십만 대병을 거느려, 당신네 우디거를 쳐부술 태세를 취하고 있소! 나는 먼저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이곳을 찾아온 것이오. 공연히 거짓말로
횡설수설했다가는 우디거 부락은 도륙을 면치 못하리다!" 박호문은 말을
마치자 도포띠를 풀었다. 품안에서 날카로운 비수가 나타났다. 섬광이 불빛에
비쳐 싸늘했다. 늙은 추장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두려움을 이길 수 없었다.
떨리는 음성으로 묻는다. "무슨 말씀이오니까? 저희들이 상국에 대해서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최윤덕 장군이 십만 대병을 거느려 저희들을 도륙하시려
하십니까? 저희들은 그저 공손히 상국의 명을 받들 뿐이올시다. 참말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죄상을 밝혀 말씀해주십쇼!" 박호문은 날카로운 비수를 들고 큰
소리로 늙은 추장을 꾸짖는다. "어찌해서 너희들은 강변 호장은 입을 다문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우디거의 늙은 추장은 다시 벌벌 떨며 대답한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저희들이 언감생심 상국의 여연과 강계를
침범하겠습니까. 진정 억울한 말씀이올시다." 박호문은 새파란 비수를 번쩍
들어 캉에 꽂았다. 푸른빛이 또 한번 불빛에 싸늘했다. "증거가 뚜렷하게 있다.
누구를 속이느냐. 얼굴에 기괴한 모습으로 자자한 너희들이 여연을 침범하기
위하여 압록강 얼음을 타고 넘어오는 것을 건주위 이만주 오랑캐가 대군을
휘동하고 와서 너희들 우디거를 모조리 잡아가는 것을 최윤덕 장군과 내가
망루에서 똑똑히 보았다. 감히 누구를 속이려고 어름어름하느냐? 박호문의
문초는 추상 같았다. "이거, 목도해 보셨다 하시니 이 일을 어찌하나? 저희들은
여연과 강계를 침범한 일이 없습니다. 더구나 금년에는 한 번도 압록강으로
나가본 일이 없습니다. 통촉해줍시오. 그런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늙은 추장은
입에 침이 말라 혀가 굳을 지경이었다. 박호문은 다시 소리를 높여 꾸짖는다.
"그뿐 아니라, 너희들이 여연과 강계에서 납치해갔던 조선 사람들을 오랑캐
이만주가 뺏어서 우리한테 돌려보내 주었다. 이만주는 얼마나 충성스런 자이냐!
그리해서 우리 성상께서는 상급으로 소와 돼지와 곡식을 보내서 하사하시고
특별히 나를 사신으로 보내서 찬양하시는 동시에 우디거를 찾아 성토하라
하셨다. 장차 천주를 면치 못하리라!" 늙은 추장이 황황망망 어찌할 줄 모르고
있을 때, 홀연 병풍 뒤에서 우디거의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사뿐사뿐 걸음을
걸어 박호문 앞으로 가까이 와서 두 손을 모아 절을 올렸다. 박호문이 눈을
들어 보니 아리따운 젊은 계집이었다. 계집은 수삽한 태도로 절을 올리고
나직한 음성으로 고한다. "소녀는 우디거의 딸입니다. 여기 계신 추장 노인은
제 아버지십니다. 조선국 대관께 잠깐 아뢸 일이 있어 무례함을 무릅쓰고
당돌하게 들어왔으니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뜻밖의 일이었다. 늙은 추장을
위시하여 모두 다 눈이 휘둥그래졌다. 박호문이 약간 허리를 굽혀 답하면서
묻는다. "노추장님의 따님이라 하니 반갑습니다. 나에게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극히 비밀한 말씀을 아뢰러 왔습니다." 박호문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극히 비밀한 말이 있다?말씀해보오." 유창한 여진말로 대답했다.
계집은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해 말한다. "조선 국왕전하의 대관이신 당신은
오랑캐 이만주의 간교한 술책에 속아넘어가셨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기도
하십니다. 무슨 까닭에 불한당의 괴수 이만주놈에게 쌀과 소와 돼지를
하사하셨습니까? 충성을 다했으니 가상하다구요? 하하하." 젊은 계집은
요염하게 웃어댔다. 계집은 우디거의 딸이라 하나, 얼굴에 먹을 넣어 꾸미지도
아니했다. 때를 벗어 말쑥했다. 여지의 딸로는 드물게 보는 미인이었다.
박호문은 다 아는 일이지만 마음 속으로 까닭이 있구나 생각했다. 강변 오랑캐
호장도 짐작하는 일이지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만주의 간특한 꾀에 조선
국왕전하와 박호문이 속아넘어갔다는 딸의 말을 듣자, 늙은 추장은
친아비이건만 처음 듣는 말이었다.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말참견을 아니할 수
없었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이만주의 간특한 꾀에 조선 국왕전하께서
속아넘어가셨다 하니 무슨 무엄한 불경한 소리냐! 말조심을 해라." 계집은 쌩긋
웃으며 말한다. "아버님께서는 가만히 앉아 계십시오, 우리한테 해가 돌아올까
해서 아직 말씀을 아니 드렸습니다. 차차 말씀을 들어보시면 까닭을 환하게
아실 것입니다." 계집은 말을 마치자 또 한 번 간드러지게 깔깔 웃었다.
우디거의 늙은 추장은 딸을 믿음성스럽고 귀엽게 생각했다. "그래라. 네 말을
차차 들어보기로 하자. 나한테 먼저 말을 아니한것은 우리 부락에 해가 미칠까
해서 입을 봉했다니 가상한 일이다." 늙은 추장은 말을 마치자 박호문에게
비로소 딸을 소개한다. "이 애는 나의 무남독녀 외딸이올시다. 지난해 봄에
건주위 오랑캐 부락으로 시집을 갔습지요. 남편 되는 사람은 바로 이만주의
우군 부대장입지요. 오늘 아침에 내외가 함께 휴가를 받아 친정으로 쉬러
온길이지요. 대관께서는 딸아이의 무례함을 용서하시고 아뢰는 말씀을
들어보십쇼." 박호문은 비로소 딸의 내력을 알았다. 민첩한 머릿속에 섬광이
번쩍 하고 스쳤다. 계집을 향하여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한다. "아아, 노추장의
바로 무남독녀가 되는구려. 반갑기 그지없소. 내가 이만주의 꾀에 속아넘어가서
소중한 곡식 오십 섬과 소와 돼지들을 몰고 온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을 마음놓고
놀려주시오. 당신의 말씀을 달게 받으오리다." 이때 강변 호장은 우디거 늙은
추장의 딸이 이만주 휘하의 우군 부대장이란 말을 듣자, 틀림없는 상관의
아내였다. 시치미 떼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나 계집 앞에
읍을 올렸다. "소인은 압록강에서 수자리하고 있는 변지 호장이올시다. 이만주
추장님의 명을 받들어 이곳까지 박특사를 모시고 왔습니다." 계집은 요염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히 띠고 쌀쌀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오오, 박특사의
금동곳을 받고 조선으로 귀화한 강변 호장이로군! 사람은 살아야 하지. 까닭
없이 개죽음을 해서야 쓰겠나. 어서 조선으로 가서 살게! 하하하." 계집은
대담했다. 또 한 번 요염하게 웃는다. 강변 호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박호문의 얼굴도 노랗게 변했다. 건주위 사관 밀실에서 금동곳을 주고받으며
강변 호장을 조선으로 귀화시킨 일이 탄로난 모양이었다. 우디거의 늙은
추장은 까닭을 알지 못해하고, 박호문과 강변 호장은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계집은 또 한 번 요염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 띠고 강변 호장을 향하여
말한다. "놀라지 말게나. 나는 결코 자네를 해치지 아니할 것일세. 목숨을
구하여 조선으로 귀화하는 사람을 내 어찌 죽게 하겠나. 절대로 이만주
추장한테는 입을 봉하고 말을 하지 아니할 것일세. 마음을 놓게나. 그리고
박특사도 놀라지 마시오. 하하하." 계집은 더한층 대담했다. 또 한 번 요염한
웃음을 웃는다. 강변 호장은 죄인처럼 어깨를 쭈그린채 손을 모아 서 있고,
박호문도 여우에게 흘린 듯 어리벙벙해서 말대꾸를 못한다. 계집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저희 내외는 이만주 오랑캐 추장의 명을 받들어 박특사와 강변
호장의 뒤를 미행해서 행동을 살피러 왔소이다. 박특사께서 금동곳을 강변
장수에게 주시고 조선으로 귀화시킨 일이 탄로났습니다." 박호문과 강변 호장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젊은 계집은 다시 말을
계속한다. "박특사와 강변 호장은 들어보십쇼! 이만주는 박특사가 강변
호장에게 준 천리준총을 뺏은 후에 도리어 강변 호장을 시기하고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두 분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네들이 건주위 사관에서
금동곳을 주고받을 때 저의 남편은 이만주의 비밀한 영을 받고 땅굴 밑에
엎드려 모든 일을 엿들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남편은 내두를 보려고
이만주한테는 강변 호장이 조선으로 귀화하기를 결심한 일을 고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만주는 다시 우리 남편에게 이곳으로 향해 온 두 분의 행동을
자세히 살피라 해서 두 분보다 두어 시간 앞질러 이곳으로 왔습니다. 극비의
일이라 우리들 아버지와 어머니한테도 말씀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다만 친정에
놀러온 것처럼 어머니한테도 말씀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다만 친정에 놀러온
것처럼 반갑게 형제들을 만나보고 태연히 지내면서 마음 속으로 두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과연 당신들은 오셨습니다. 우리 내외는 병풍 뒤에서,
우디거 일족을 도륙하겠다는 박특사의 위협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비록
건주위로 시집을 간 몸이라 하나 우디거의 피를 받은 우디거의 딸입니다.
우디거 족속이 죄 없이 망하는 꼴을 어찌 차마 바라보고 있겠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우디거의 대표입니다. 아무 죄도 없이 최윤덕의 장군한테 참을 당하는
꼴을 어찌 차마 보겠습니까? 그리해서 박특사 앞에 진상을 밝히려고 무례함을
무릅쓰고 급히 뛰어들어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비로소 우디거의 딸이
당돌하게 뛰어들어온 까닭을 알게 되었다. 늙은 추장은 벌떡 일어나 딸을
껴안고 뺨을 비비며 기뻐한다. "오, 우리 딸이로구나! 어서 박특사 앞에 모든
일을 폭로해서 억울한 누명을 듣는 우디거 족속을 구해 다오!" 박호문도
우디거의 딸을 향하여 경건한 말씨로 말한다. "당신은 참 효녀십니다. 멀리
아버지를 구하러 왔구려! 이만주의 비밀한 지령을 받고도 그같이 마음을 돌려서
궁지에 빠진 우디거를 구하러 왔으나, 참 갸륵한 우디거의 딸이오. 그렇다면
모든 일을 내앞에 자세히 설명해주오." 우디거의 딸은 명랑했다. 활발한 어조로
말한다. "제가 특사 앞에 백 번 변명을 한댔자 특사님께서 곧이들이실 리
만무합니다. 이만주는 우군 부대장으로 당시 압록강상에서 가짜 우디거를
만들어 싸우는 체했던 제 남편을 불러들여서 자세한 전말을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우디거의 딸을 자리에서 일어나 병풍 뒤로 스러졌다. 이윽고
우디거의 딸은 한 사람 양털배자에 담벙거지를 쓴 헌칠하게 잘생긴 육척 장신의
남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늙은 우디거 추장은 벌떡 일어나 들어오는 젊은
장수를 껴안는다. "오,우리 귀여운 사위야!" 목을 얼싸안고 뺨을 비볐다.
이윽고 늙은 우디거 추장은 박호문에게 젊은 장군을 소개한다. "이 사람이 바로
내 사위올시다. 건주위에서 상당히 지위가 높습니다. 아까, 내 딸이 말한
이만주의 부하인 우군 부대장이올시다." 박호문은 늙은 추장의 소개하는 말을
듣자, 자리에서 일어나 읍을 보냈다. 강변 호장은 뜻밖에 상관을 묘한 자리에서
만났다. 황망하게 일어나 군례를 드렸다. 젊은 부대장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박호문에게 공손하게 예를 올리며 말한다. "특사께서는 저를 얼른
몰라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건주위에서 여러 차례 먼 발치에서 뵌 일이
있습니다. 지금 제 장인이 소개한 이만주의 아장인 우군 부대를 지휘하는
자올시다." "그러하시오. 뜻밖에 이곳에서 만나서 서정을 하게 되니
반갑소이다." 박호문은 역시 유창한 여진말을 사용했다. "사실인즉 우리 대장
이만주의 비밀한 지령을 받들어 대관과 강변 장수의 수상한 행동을 감시하러
왔다가, 아내 되는 사람이 친정 부락이 결딴나는 것을 구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바람에 그만 판관이 되어서 이만주를 배반할 것을 결심하고 이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하하하." 오랑캐 부대장은 호방한 웃음을 껄껄 웃었다.
"잘 생각하셨소이다. 팔을 안으로 굽어지는 법 아닙니까? 장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구해드리고 아내의 족속들을 초토속에서 살려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 도원수 최윤덕 장군은 여연과 강계를 침범한 우디거를 잔뜩 벼르고
있습니다. 곧 십만 대병이 우디거를 함몰하려고 쳐들어옵니다." 박호문은
장중한 태도로 말한다. "여보게, 어서 진상을 밝혀주게. 청천벽력도 분수가
있지, 우리 우디거가 언제 여연으로 쳐들어갔단 말인가? 한 번도 없었네, 우리는
어느 때나 조선 국왕전하께 충성을 다했네. 왜 불공대천지수 이만주란 놈은
자기가 조선 땅을 범해놓고 우리가 쳐들어갔다고 외수를 써서 우리 족속을
망치게 한단 말인가. 어서 빨리 특사님 앞에서 해혹을 해서 나를 살려주도록
하게. 사위는 자식이 아닌가? 어서 자세한 말을 해서 우리 부락의 화를
면해주도록 하게!" 늙은 우디거 추장은 침이 마르도록 사위를 향하여 애걸했다.
우디거의 딸도 옆에서 거들었다. "기왕 결심을 하신 일이니 시원스럽게 지나간
전말을 특사님 앞에다 털어놓고 고하시오. 우물쭈물할 것이 무엇 있소!" 건주위
부대장은 호방한 웃음을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박특사는 벌써 모든 일을 다
아시면서 우리 장인님을 공갈하시는 거야. 금동곳을 저 사람한테 주고 모든
일을 다 들어 아셨는데 또다시 설명할 것이 무엇 있나. 하하하." 옆에 있던
강변 호장의 얼굴이 화끈했다. "그래도 특사께서는 더 자세한 진상을
알아보시기 위하여 우리 친정 부락으로 오신 것이니 시원하게 당신의 앞뒤 일을
조리 있게 말씀하시오!" 아내는 옆에서 또 한 번 남편을 재촉했다. 늙은
우디거 추장이 사위를 향하여 말한다. "도대체 금동곳이니 은동곳이니 하고
무슨 소리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전혀 영문을 모르겠네. 이만주란 놈이 어떤
거짓 수단을 써서 우리 우디거가 여연으로 쳐들어갔다고 발뺌을 하고 많은
곡식과 소와 돼지를 상받아 먹었단 말인가? 자세히 좀 말을 해주게나!"
"그러면, 특사님은 저 강변 장수를 통해서 대강 짐작하시는 일이니, 장인님의
속을 시원스럽게 하기 위해서 말씀하겠습니다." "답답하이. 어서 말을 해주게!"
"이만주는 그 동안 자주 여연과 강계를 침범해서 많은 곡식과 재물이며 양가의
처녀와 장정들을 약탈해 왔습니다. 그때 조선 서북면에 배치되어 있던 감사와
절도사들은 모두 다 용령하기 짝 없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조선
국왕전하께서는 크게 노하시어 새로이 범 같은 장수 최윤덕으로 서북면
대장군을 삼으시고 여진 오랑캐를 응징하라 하셨습니다. 지금 최윤덕 장군은
착착 행동을 전개할 준비를 차리고 있습니다. 이만주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웠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하던 중에, 모사 퉁맹가의 간교한 꾀를
받아들여서, 우군과 좌군을 편성한 후에, 좌군 2백 명에게는 함빡 얼굴에 자자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우디거 군사같이 만들어놓고, 압록강 얼음판에서
서로들 격투를 벌이게 한 후에, 우군 2백 명이 우디거 병졸로 차린 놈들을 꽁꽁
묶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퉁맹가를 최윤덕 장군한테 보내서, 여연으로
침범하려는 우디거를 격파하고 우디거가 납치해 갔던 조선 장정들 몇십 명을
뺏어서 보낸다고 충성을 다하는 듯, 교활한 수단을 썼습니다. 이러하니
조선에서는, 이만주에게는 상을 주고, 우디거는 고얀 족속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특사님이 우디거를 도륙하러 쳐들어온다고 위협하시는 일도
무리가 아닙니다." 우디거의 늙은 추장은 사위 건주위 부대장의 자세한 설명을
듣자 비로소 모든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저런 죽일 놈이 있나. 이만주란
놈의 원수를 어떻게 갚는단 말인가. 그놈의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겠구나! 어쩌자고 그따위 짓을 감행했단 말인가? 천참만륙을 해도
시원치 않다! 어찌해서 우리 족속을 도륙시키려 했단 말이냐!" 늙은 추장은
입가에 거품을 뿜으며 길길이 뛰었다. 박호문이 말한다. "자아, 사필귀정이오.
모든 일은 부대장을 통하여 자세히 알았소.우리 성상전하꼐 아뢰어서 우디거의
억울한 일을 벗겨주리다. 노추장은 고정하시오." 만면에 웃음을 띠고 늙은
추장을 위로했다. 건주위 부대장인 사위가 박호문을 향하여 말한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 나도 이제는 건주위 사람이 아니라 아내의 교향인 우디거
사람이올시다. 만약 앞으로 최윤덕 장군이 건주위로 쳐들어오는 날, 나는 우리
아내와 함께 조선편에 가담하여 내응이 되리다!" 우디거 사위가 내응이
되겠다는 말을 듣자 박호문은 덥석 사위의 손을 잡았다. "잘 생각했소!
이만주는 항상 배은망덕하는 자이오. 그자 밑에서 일을 하다가는 옥석구분이
되오. 아내와 함꼐 우디거 부락을 번영케 해서 뒷날 크나큰 복과 영광을
누리시오!" 늙은 추장도 기뻤다. "고맙다! 그리 해라. 상국 조선에 대해서
배은망덕을 해서는 아니된다. 나는 무남독녀를 두지 아니했느냐? 내가 죽은
후에라도 내가 우디거로 돌아와서 내 뒤를 이어야 한다." 늙은 추장은 말을
마치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아버지의 비감한 말을 듣는 우디거 딸의
기름한 속눈썹에도 이슬방울이 서렸다. 박호문은 아까 캉 위에 꽂았던
날카로운 비수를 비로소 뽑아 품안에 거두고 말한다. "자아, 이제 모든 일을 잘
알았으니,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겠소. 돌아가서 왕전하께 아뢰어 우디거는
절대로 보호하도록 하겠소." 늙은 추장은 두 손을 번쩍 들어 박특사에게 절을
올리며 감격한 뜻을 표한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습니까? 그저
백골난망이올시다." 박호문이 다시 말했다. "내가 한 가지 청할 일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소?" "무슨 청이십니까? 말씀하십쇼. 특사의 말씀을 아니 들을 리
있습니까?" "좋은 준총으로 삼십 필만 꾸어줄 수 없겠소? 머지않은 날 갑절
이상으로 갚으오리다." "무엇에 쓰시렵니까? 특사께서는 타고 오신 말이 있지
아니합니까?"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오. 나 혼자 삼삼 필템이나 쓸
까닭이 있소? 하하하, 그저 꼭 필요해서 추장한테 청하는 것이오." "드리오리다.
염려 마십쇼." 늙은 추장은 쾌하게 승낙했다. 박호문은 다시 추장의 사위인
건주위 부대장을 향하여 말한다. "장군은 이미 우디거를 위하여 우리 나라에
호감을 가졌으니, 나의 청을 들어주실 수 있겠소?" 만면에 웃음을 띠고
부드럽게 물었다. "말씀하십쇼. 견마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장군은 어제 나를
미행했으니, 내가 돌아간 후에는 불가불 이만주에게 어떠한 보고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건주위 부대장은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렇지요. 불가불 거짓
보고라도 해야겠지요." "기왕 건주위로 가시는 길이라면 나하고 중간까지
동행하실 수 없겠습니까?" 이번엔 건주위 부대장의 아내가 말참견을 했다.
"함께 가시면 더욱 정답고 좋겠습니다. 건주위를 거쳐서 가시렵니까?" 박호문이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건주위를 거쳐서 가다가는 이만주에게 잡히기가
십상팔구입니다. 중간에서 두만강 하류를 거쳐서 돌아가겠습니다." "좋습니다.
중간까지 모시고 가겠습니다." 건주위 부대장이 쾌하게 대답했다. 무엇을
짐작한 모양이다. 이튿날, 우디거 늙은 추장은 간밤에 약속한 대로 말 삼십
필을 추장 집 앞에 등대해놓았다. 박호문과 강변 호장은 건주위 부대장 내외와
함께 늙은 추장 부부의 극진한 대우를 받고 길을 떠났다. 준총 삼십 필을 몰고
나갔다. 한나절이 지나 우디거와 건주위의 갈림길에 당도했다. 박호문이 건주위
부대장에게 청한다. "저 산 속에서, 이만주가 여연에서 납치해간 우리 사람들을
혹사해서 농사를 짓게 하고 있다 하오. 나는 이 불쌍한 사람들을 그대로 이곳에
버려두고 차마 갈 수 없소. 기어코 데리고 가야 하겠소. 그 까닭에 당신의
장인한테 말 삼십 필을 꾸어 달라 했던 것이도. 그곳에는 반드시 우리 사람들을
강제로 노동시키면서 수직하는 병졸들이 있을 것이오. 당초에 나는 이자들을
죽여버리고 조선 사람들을 구출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인데, 다행히 장군을
만나서 사람을 상치 아니하고 조선 사람들을 구해낼 길이 생겼소. 장군은 나와
함꼐 가서 조선 사람들을 풀어주도록 명령을 내려주시오. 나는 이 불쌍한
사람들을 구해가지고 두만강 하류도 달려서 고국으로 돌아갈 작정이오!"
건주위 부대장 내외를 위시하여 강변 호장은 비로소 박호문이 우디거 추장에게
말 삼십 필을 빌린 일과, 건주위 부대장에게 중간까지만 동행하자던 말을
깨닫게 되었다. 건주위 부대장은 박호문의 말을 듣자 마상에서 큰 소리로
탄복한다. "박특사의 머리는 과연 신출귀몰하십니다. 옛적의 장양, 진평도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디거의 딸 건주위 부대장의 아내도 한 마디 한다.
"정양, 진평뿐 아니라, 삼국시대의 제갈양만큼이나 하십니다." 상글상글 웃으며
칭찬했다. 강변 호장은 감히 말참견을 할 수 없었다. 입을 헤 벌리고 소리
없이 소웃음을 웃고 있었다. 건주위 부대장은 호방한 남자였다. 박호문의
슬기를 칭찬한 후에 쾌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사내 대장부의 말 한 마디는
천금보다 무겁다 합니다. 아내의 고향 우디거를 보호하기 위하여 박특사에게
조선을 상국으로 받든다고 맹세한 나올시다. 박특사의 말씀을 거역할 도리거
있겠습니까. 잡혀서 고생하는 조선 장정들을 풀어드리오리다." 박호문은
마상에서 부대장의 손을 굳게 잡았다. 강변 호장은 의기가 양양했다. 삼십 필
말을 체질해 몰고 첩첩한 산속으로 기운차게 앞을 서서 달렸다. 자기의 상관인
우디거의 사위가 행동을 같이하는 때문이다. 무인지경 자갈밭 계곡을 넘고
건넜다. 독바위와 장군바위를 돌고 돌아서 한 곳에 당도했다. 납치된 조선
장정들을 가두어놓고 돌산을 뭉개고 깨뜨려서 십 리에 뻗친 수수밭을 이룩한
곳이다. 겨울이었다. 밭에는 눈이 하얗게 쌓였다. 군데군데 양과 염소를 기르는
초솔한 목사들이 즐비하게 벌여 있었다. 앞에는 철책문이 닫혀 있고, 오두막
수수깡집에는 지키는 군사가 창을 비껴 들고 서 있었다. 강변 호장은 삼십 필
말을 막사앞에 매어놓고, 건주위 부대장 내외는 말을 탄 채 오두막 막사 앞으로
나갔다. 대장 복장을 차린 부대장을 바라보자 파수하던 병졸들은 깜짝 놀랐다.
비껴 들었던 창대를 받들어 들고 군례를 했다. 박호문과 강변 호장이 뒤에
따랐다. 부대장은 채찍을 높이 들고 병졸들에게 분부한다. "나는 우군
부대장이다. 추장님의 명을 받들고 왔다. 너의 상관을 불러라." 병졸은 달음질쳐
철책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이윽고 부락을 수직하는 장교가 황망히 막사
안에서 뛰어나왔다. 부대장의 얼굴을 짐작했다. 손을 들어 군례를 올렸다.
"추장님의 분부가 내리셨다. 정황에 의해서, 노동을 시키던 조선 장정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이분은 조선 최윤덕 장군의 특사시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막사로 인도해라." 수직하던 장교는 황망히 영을 받고, 군데군데
즐비하게 벌여 있는 오두막 초가로 일행을 인도했다. 장정들이 이곳 저곳에서
소문을 듣고 쏟아져 나왔다. 모두 다 얼굴은 때투성이요, 몸에는 모습을 보자
하늘만큼 반가웠다. 큰 소리로 통곡을 하고 박특사를 얼싸안았다. 박특사는
모든 장정들을 어루만지며 외로했다. "많은 고생들을 했네. 이제 자네들을
구해내서 고국으로 데려가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왔네. 막사 밖에
말을 삼십 필가량 등대해놨으니, 말 한 필에 두 사람씩 타도 넉넉하이.빨리
나가도록 하세!" 박특사의 말을 듣자 모든 장정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길길이 뛰며 환성을 올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고생을
하다가 죽는 줄만 알았는데 선비님이 오셔서 이같이 구해주시니 이 은혜는
백골난망이올시다." 장정들은 주먹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씻으며 기쁜 감격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 모양을 바라보는 박특사의 눈시울에도 축축하게 안개가
서렸다. 오랑캐와 우디거들도 이족이건만 이 정경을 바라보고 감동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부대장과 강변 호장도 눈물을 머금었다. 그러나 이중에 수건을 들어
가장 많이 눈물을 닦는 사람은 우디거 추장의 딸인 건주위 부대장의 아내였다.
박호문은 장정들을 재촉해서 두 사람씩 말을 타게 했다. 잡혀갔던 장정들의
수는 모두 예순한 명이었다. 한 사람은 강변 호장과 함께 말을 타게 했다.
철책문 밖으로 나가자 건주위 부대장은 수직하는 장교와 병졸들에게 일렀다.
"너희들은 상부의 명령이 내릴 때까지 이곳에서 양과 염소를 기르며 대기하고
있거라!" 한 마디 이른 후에 마상에 올랐다. 박호문은 육십여 명 장정과 강변
호장의 행렬을 앞세운 후에 말 위에 높이 올라 부대장과 그의 아내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면 개춘이 된 후에 꼭 다시 만납시다!" 말을
마치자 일행을 거느려 두만강 하류도 달렸다. 삭풍 찬 겨울에 눈 쌓인
압록강을 건너 건주위 이만주의 허실을 살펴보고, 우디거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장의 내외를 회유한 후에, 또다시 슬기로운 계교를 써서, 납치되어 갔던
장정들 육십여 명을 거느리고 호구에서 탈출해 나온 박호문은, 두만강 하류를
건너 고국땅을 밟았다. 이만주의 추격이 있을까 하여 일부러 지름길을 취하여
두만강을 건넌 것이다. 박호문은 주야배도하여 함경도 지방을 거쳐서 평안도
도절제사 군문에게 뵈었다. 모든 일을 일일이 보고받은 최윤덕 장군은 크게
기뻤다. 박특사의 크나큰 공을 치하한 후에 종사관 신숙주를 시켜서 전하께
올리는 장계를 짓게 했다. '서북면 도절제사 최윤덕은 삼가 글월을 성상전하께
올립니다. 지난번 특사로 하명하셨던 박호문은 엄동설한에 삭풍을 무릅쓰고
압록강을 건너 호지로 들어가 적장 이만주를 삼촌설로 위협하고 계교를 써서
강변 호장을 귀화시킨 후에 이만주의 사특한 흉계를 알아냈습니다. 다시 깊숙이
우디거까지 들어가 건주위 부대장 내외를 회유하고, 또다시 총명한 지혜로
납치되어 갔던 장정 육십여 명을 구출해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한 달만 지나면
봄이 될 것입니다. 만반준비를 다 차린 후에 얼음 풀린 압록강을 지체 없이
건너려 합니다. 자세한 일은 상호군 박호문을 보내오니 복명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돈수백배하옵고 감히 탑전에 아뢰옵니다.' 신숙주는 쓰기를 다하고
최윤덕 장군에게 올렸다. 최장군은 읽기를 다한 후에 피봉에 넣어 박호문에게
전했다. "파발편에 올릴 것 없이 상호군이 직접 장계를 받들고 전하께 알현을
청하시오. 돌아온 장정들은 내가 안주의 곳을 마련할 것이고, 귀화한 호장은
군문에 두어 앞으로 향도를 삼을 테니, 이 뜻을 주상전하께 아뢰시오."
박호문은 최윤덕 장군에게 하직을 고한 후에 곧 서울로 향하여 말을 달렸다.
천여 리 길을 달린 박호문은 한양에 당도하자 지체치 아니하고 정원에 나가
최윤덕 장군의 장계를 올리고 전하께 복명하기를 청했다. 정원 승지는 최윤덕
장군의 장계를 어전에 올리고 박호문이 돌아온 것을 아뢰었다. 세종대왕은
최윤덕의 장계를 보신 후에 크게 기뻤다. 곧 박호문의 입시를 명했다. 박호문은
탑전에 배알한 후에 여진의 풍토와 자리며 이만주의 협사한 일과 호장을
귀화시킨 일이며 장정들을 슬기로 탈환한 일을 세세히 아뢰었다. "위험하기 짝
없는 호지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웠구나. 기특하고 가상한 일이다." 크게
칭찬하신 후에 승지를 불러 박호문에게 대호군으로 승차하는 직첩을 내렸다.
대군 진발 박호문은 영광스런 종이품 대호군의 직첩을 받고 사은숙배를
올린 후에 품안에서 한 폭 지도를 꺼내 전하께 올렸다. 세종대왕이 받아서
펴보니, 압록강서부터 오랑캐 건주위와 우디거까지 뻗친 길고 먼 땅의 산천이
험하고 평탄한 곳과 작전행동에 유익한 요해처며 적이 집단교련을 하고 있다는
종유동 땅굴 등이 있는 곳이 소상하게 그려진 지도다. 대왕은 일일이 지도의
지세를 살펴보시자 크게 기뻤다. "어디서 이 지도를 구했느냐?" "소신이
목도한 바를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가, 밤마다 그려가지고 돌아온 것입니다.
앞으로 대군이 진격할 때 필요할 듯하와 전하께 품달하옵니다." "네가 친히
그린 지도란 말이냐? 글을 잘 하고 언변이 좋은 줄만 알았더니, 관찰력과 그림
그리는 재주도 대단하구나! 이 지도를 최윤덕에게도 보여주었느냐?" "아직
도절제사한테는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전하께옵서 산천형세와 적의 허실을
샅샅이 살피고 돌아오라는 특명이 계셨으므로, 먼저 전하께 복명한 후에 현지에
있는 도절제사에게 전달할 예정을 했습니다." 전하는 박호문의 안상하고 치밀한
머리를 기특하게 생각했다. 전하는 시측해 섰는 승지에게 분부를 내린다.
"빈청에 나가서 삼정승과 육조판서며 도승지 김종서를 급히 불러라." 승지는
어명을 받들고 급히 추창해 나갔다. 이윽고 영의정 황희를 위시하여
육조판서며 도승지 김종서가 급히 입시했다. 세종저하는 여러 중신들을
둘러보며 말씀을 내린다. "월전에 박호문을 건주위 적진 속으로 보내어 산간과
수로의 험준과 평이한 곳을 살피고 적정의 진가를 살피고 오라 한 것은 경들도
이미 아는 일이거니와, 박호문은 적의 지형과 지세를 자세히 살피고 손수
지도를 그려왔을 뿐 아니라, 이만주란 놈이 우디거 무리를 가장해서 여연을
습격한 일을 우디거에게 전가시킨 확증을 잡았고, 또다시 용감하게 슬기로운
수단을 써서 잡혀가 고생하는 장정 육십여 명을 탈환하고 또 호장을 귀화시키는
한편, 이만주의 우군 부대장 내외를 회유하여 앞으로 군사행동에 크게 유익하게
했으니 가상한 일이다. 경들은 박호문이 손수 그려온 지도를 보고 앞으로의
전략에 대하여 의견을 말하라." 영의정 황희를 위시하여 모든 신하들은 한동안
건주위와 우디거의 지세를 지도로 살펴보았다. 영의정 황희가 먼저 아뢴다.
"지형으로 보아도 우디거가 여연을 침범했다던 이만주의 궤변은 말이
아니됩니다. 건주위와 우디거의 거리가 이백 리나 되는데, 우디거가 건주위를
통과해서 어찌 압록강을 건너 여연을 침범했겠습니까? 박호문이 사실해온 일이
정확합니다. 곧 대군을 진출해서 이만주를 응징하시옵소서." 영의정 황희가
아뢰는 말이 끝나자, 도승지 김종서가 아뢴다. "왕군은 함부로 병과를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대신해서 죄 있는 무리를 응징하는 것이 정정당당한
왕도정치올시다. 성상께서는 집현전 학사에게 명하시어 건주위 오랑캐 이만주를
성토하는 격문을 짓게 하옵소서. 박호문이 탐지해온 그대로 낱낱이 죄상을
밝혀서 수죄하신 후에 대군을 진발시키도록 하시옵소서. 이것이 성군의
체천행도하는 왕도 정치올시다." 도승지 김종서의 말씀을 듣자 세종대왕의
용안에는 기쁜 웃음이 가득했다. "도승지의 말이 옳다. 옛 어진 임금들은 이름
없는 정벌을 하는 일이 없다. 반드시 죄상을 밝혀서 성토를 하는 것이다.
집현전에 명하여 성토문을 짓게 하리라___." 병조판서 조말생이 아뢴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방법은, 가장 중요한 일이 병졸들의 사기를 왕성케
하는 일이올시다. 먼저 사기를 왕성케 하자면 통솔하는 대장의 인격과 용병하는
슬기가 중요합니다마는, 또다시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병법에 말하기를,
'천시불여지리요, 지리불여인화'라 했습니다. 인화를 취하자면 군사들을 배부르게
먹게 하고 넉넉한 무기를 주어서 마음이 흡족하게 해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대군이 행동을 개시하기 이전에 먼저 병졸들이 보는 앞에 많은 군량미와 갑주와
화살이며 화약과 대환구를 충분하게 수송하세어 부족함이 없도록 하시는 것이
병졸들의 사기와 인화를 드높게 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말이다.
병판의 뜻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앞으로 경은 운량관과 무기 조달의 책임을
다하라!" 세종대왕은 훌륭한 신하들의 조언을 달게 받아들였다. 도승지
김종서가 다시 아뢴다. "박호문은 치밀하고 슬기 있는 사람이니 다시
최윤덕에게로 보내시어 서북면의 군사행동을 돕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하옵고 소신이 소회 있사와 삼정승과 육판서가 모인 자리에 감히 전하께
아뢰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충정을 주달하겠습니다." 세종대왕은 흔연히
대답하신다. "과인도 박호문을 서북면 최윤덕에게로 보내기로 이미 마음에
작정한 바 있다. 집현전 학사들의 성토문이 작성되는 대로 대호군의 임무를
주어 보내려니와, 경이 소회 있는 충정을 고하겠다 하니 어떠한 일인가?
김종서는 옷깃을 바로잡고 장중한 음성으로 고한다. "건주위 이만주를
성토해야, 서북면 사군을 회복하는 일에 최윤덕이 능히 성곡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북면 두만강 앞쪽 경원, 경흥, 부령, 회령, 온성, 종성은 선대왕 전하들의
발상지지올시다. 그대로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세종대왕은 선왕들의 발상지지를 그대로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세종대왕은 선왕들의 발상지지를 그대로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게 할
수는 없다는 김종서의 말에 귀가 번쩍 떠졌다. 용안에 엄숙한 기운이 떠돌았다.
김종서와 모든 대신들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서북면의 압록강을 격해 있는
우리의 국토도 중요하지만, 동북면의 함경도 일대는 김종서가 말한 대로 나의
선조가 개척하신 땅이다. 나 역시 오래 전부터 이곳을 폐허로 만들어 여진
야인들의 소굴이 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최윤덕이
경영하고 있는 건주위 이만주를 응징한 후에는 다시 동북면을 정리할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내 어찌 여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랴!" 김종서가 다시 아뢴다.
"전하께서 명철하신 판단으로 함경도 일대의 선대왕 전하들의 기업을 등한하게
생각하지 아니하시는 것은 소신도 이미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있습니다.
서북면을 정리한 후에 동북면을 개척하신다면 또다시 큰 힘이 듭니다. 아주
단결에 동북면 황폐한 땅도 정리해서 개척하셔야 합니다." 대왕은 다시 용안을
부드럽게 하여 껄껄 웃으며 대답하신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 어찌 조상이
사시던 곳을 등한히 생각하겠는가? 사실은 김종서의 생각보다 더 급하다.
오늘이라도 곧 동북면에도 대군을 몰아서 야인들을 국경 밖으로 내쫓고 황폐된
산야를 정리하고 싶다. 이곳에, 고려 때 윤관 장군이 대군을 거느려 구성을 쌓고
야인들을 쫓아낸 일이 있었다. 그 후에 무능한 여조에서 황폐한 땅이라 해서
버린 지 이미 수백 년이다. 나는 기어코 내 생전에 찾아야 하겠다. 그러나 때가
있다. 김종서도 때가 있다고 말했지만, 김종서의 때와 내가 생각하는 때가
다르다! 하하하___." 김종서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모든 노재상들은 귀를
기울여 듣는다. 김종서가 아뢴다. "소신은 미욱하와 감히 전하의 하교를 얼른
분간하여 판단치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의향하시는 때는 어떠한 때이옵니까?"
"나도 나이 늙지는 아니했지만 경은 아직 나이 젊다! 용기만 가지고 때를
판단해서는 아니된다. 기틀을 보아서 때를 꽉 잡아야 한다. 경은 젊은 용기로
때를 잡으려 한다. 그러나 나는 기틀을 보아 때를 잡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과 나의 기틀을 보아 때를 잡는 차이점이다. 알아듣겠는가? 하하하."
김종서는 더욱 의아하게 생각했다. "황공만만하오나 감히 아뢰옵니다.
전하께서는 소신을 향하여 용기로만 때를 잡으려 한다고 하교하셨으나, 소신은
젊은 용기로만 아뢴것이 아니옵니다. 최윤덕이 건주위 이만주를 성토하는
이때를 놓치지 말고 동북면 오랑캐도 단번에 쫓아내자는 것입니다." 김종서는
자신의 동시출정론을 변명했다. 세종대왕은 김종서의 동시출군에 대한 변명을
듣고 다시 용안에 미소를 띠고 말씀한다. "왕도정치란 나라 안에서만 행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 밖의 다른 겨레들에게도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기뻐해서 성심껏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까닭에 왕군의 행동은 대의
명분이 뚜렷해야 한다. 지금 최윤덕으로 건주위 오랑캐를 치게 하는 것은,
저놈들이 국경을 침노해서 변지를 소란케 해놓고 그 죄악을 다른 족속에게
전가하는 못된 짓을 감행했으므로 정정당당하게 문죄하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함경도 일대 동북면에는 아직 이만주의 짓 같은 악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나는,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킬 수는 없다. 이것이
왕도정치의 요체가 되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이해하겠는가?" 전하의 말씀이
끝나자,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 등 늙은 재상들은 일제히 부복해 아뢴다.
"전하의 하교는 과연 명철하십니다." 대왕은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그리고
양수집병격이 되고 만다. 사람의 힘은 한이 있다. 힘을 분산시킨다면 그만큼
약화되는 법이다. 앞으로 동북면을 정돈할 시기가 가까운 시일 안에 꼭 올
것이다. 경은 잠시 천기가 들 때까지 참아보는 것이 어떠한가?" 순순히 말씀을
내리는 대왕의 용안엔 평탄하고 화한 기운이 훈훈하게 넘쳤다. 김종서는
그제서야 감복하는 마음이 가슴에 가득했다. "소신의 만용을 비로소
뉘우칩니다. 전하의 넓고 크신 도량은 감히 소신 따위의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말씀마다 모두 다 진리십니다. 그러나 천기가 당도한 때가 된다면 반드시
소신에게 동북면을 개척하라는 하명을 주시옵소서!" 전하는 옹안에 활짝
웃음을 실었다. "최윤덕에게 지지 아니하려는 경의 용기를 내가 잘 알고 있다.
유사한 때에 경 같은 사람들을 쓰지 아니하고 누구를 쓰겠는가? 모수자천하듯
하지 않더라도 과인은 경을 꼭 쓰고야 말 것이다! 하하하." 전하는 쾌활하게
웃었다. 모든 대신이며 옆에 시측해 있던 박호문의 입가엔 미소가 떠돌았다.
군국대사를 의논하는 어전 회의장엔 화한 기운이 가득했다. 임금과 신하가 모두
다 한맘 한뜻이 된 때문이다. 집현전에서 부제학 정인지가 올리는 성토문을
받아 보시고 하문하신다. "부제학의 제술인가?" "여러 학사들과 합의해 지은
것이올시다." "모든 대신들이 함께 들어보도록 낭독해보라!" 정인지는
성토문을 받들어 읽기 시작했다. '오랑캐 도지휘 이만주는 등에 가시를 얹고
성토하는 글월을 받들어 읽으라. 너희들 파저강에 흩어져 생활하는 오랑캐들은
우리와 경지가 상련한 까닭에 여연과 강계로 항상 들어와서 우마와 자산을
애걸한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조선에서는 너희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너희들이 청하는 대로 응해준 일이 한두해가 아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배은망덕하여, 야인 우디거의 모습으로 변장을 한 후에 강계와 여연 등지로
마적 떼가 되어 들어와서 소와 말이며 곡식과 재물을 약탈했을 뿐 아니라,
고아와 고부며 남의 아내를 살육하고 또 납치해서 잔인무도한 행동을
자행했으니 천주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장차 대군을 출동시켜 너희 소굴을
무찔러 괴수를 생금하여 톡톡히 벌하려니와, 이제 너희들의 죄목을 일일이
들어서 밝히는 바이다." 전하를 위시하여 모든 대신과 시측해 있는 신하들은
귀를 기울여 듣는다. '첫째로, 국경을 넘어서 생활하는 너희 족속을 은혜롭게
대우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도둑의 마음을 먹고 무고한 조선 백성들을 괴롭게
해서 동네에 불을 지르고 장정들을 납치해 가서 강제로 노동을 시키니, 이는
상국인 조선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그 죄상이 하나요, 다음엔 이러한 죄악을
숨기려 해서 간특한 계교로 너희 군사들을 우디거 족속으로 변장시켜서 얼굴에
먹칠을 해서 자자한 형상을 하고 죄를 우디거에게 돌린 후에 거짓 사자를
보내서 했으니 그 죄상이 둘이다. 지난번에는 너를 믿고 가상하다고 생각해서
특사를 보내서 소와 돼지와 곡식을 주어 표창하였거니와, 실지로 조사해보니
사특한 계교를 써서 조선을 속인 일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그대로 버려둔다면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다. 이제 10만 왕군을 파견하여 명분을 밝혀
성토하노니, 목을 늘이어 천주를 받으라!" 정인지는 읽기를 다했다. 대왕은
흡족하게 생각했다. "잘되었다!" 칭찬하신 후에 친히 어수로 성토문을 접어,
박호문에게 주시며 분부한다. "너는 곧 성토문을 가지고 최윤덕에게 달려가서,
출병하기 직전에 오랑캐한테 보내서, 왕군이 출둥하는 명분을 밝히라 이르라.
군량이와 갑옷 투구며 화약과 궁시는 호퐈과 병판에게 명하여 충분하도록
보내줄 테다. 그리고 대완구는, 서북면에서 철재가 충분하게 생산되니, 그곳에서
많이 주조하도록 하라!" 박호문은 어명을 받고 숙배를 드린 후에 다시
서북면으로 말을 달렸다. 쌀쌀한 겨울 바람이 내리질리던 서북면 산악지대에도
차츰차츰 봄기운이 들기 시작했다. 햇볕은 날이 갈수록 두터워지고, 뫼와
골짜기마다 허옇게 쌓인 눈은 녹아 흘러서 개울물이 소리치며 흘렀다.
차돌덩이처럼 얼어붙었던 압록강 굳은 얼음장도 따뜻한 햇볕을 받아 해빙이
되기 시작했다. 서북면 도절제사 병영에서도 군기가 하늘의 태양열과 함께
무르녹도록 익어갔다. 서울서는 군량미가 끊일 사이 없이 마바리에 실려
들어오고, 제주도 준마들은 마군과 함께 달려왔다. 대장간에서는 창과 칼을
만드는 망치 소리가 요란하고, 궁방에서는 밤을 도와 활과 살을 만드느라
부산했다. 동네마다 장정들은 헛간에 산더미같이 쌓아두었던 칡덩굴을 풀어서,
세로 가로 바둑판 모습으로 엮어나가기 시작했다. 수천 수만 개를 그물 뜨듯
엮어나갔다. 장차 도강작전에 이용하려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기발한 생각으로
칡다리를 만들어보라는 어명을 받아 만드는 것이다. 음력으로 사월 그믐께가
되었다. 도절제사 최윤덕은 비로소 전군데 대하여 출동명령을 내렸다. 태양이
가장 가깝게 이 땅에 내리쬐는 오월단오 단양절을 택해서 적진을 돌격하자는
계획이었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았다. 압록강 물도 푸른 파도를 치며
출렁거렸다. 완전히 천시를 이용해서 적진을 격파하자는 묘한 계교다. 도절제사
최윤덕은, 평안도 마군고 보병 일만 명과 서울 정병 일만 영에 황해도 군사
오천 명과 강계 분군 오천 명을 합세하여, 기치창검을 봄바람에 번득이며
호호탕탕 압록강으로 향했다. 강을 건너는 도강작전은 수륙병진의 태세를
취했다. 말 탄 군사는 세종대왕의 분부대로 압록강 하류 물길이 좁은 곳에
칡다리를 놓은 후에 흙을 덮어 건너게 하고, 보병들은 전함 백여 척을 띄어
건넜다. 대완구도 배로 건너고, 군량미도 선박으로 옮겼다. 도강작전은 배와
다리로 병행한 때문, 질풍신뢰같이 빨랐다. 중군절제사 이순몽은 정병
이천오백십오 명을 거느리고, 지난번에 귀화했던 강변 호장을 향도로 해서
박호문과 함께 이만주의 소굴로 돌진했다. 박호문은 오랑캐 이만주의 성 앞에
당도하자 집현전 학사들이 제축한 성토문을 살끝에 매어 성문 안으로 쏘아
보냈다. 이때 이만주는 박호문이 강변 호장과 함께 두만강 하류를 건너
조선으로 되돌아간 일을 뒤늦게 알고 항상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혹시나
강변 호장이, 여연을 침범한 일이 우디거의 짓이 아니라, 자기들 건주위의 짓인
것을 폭로할까 하여 근심하고 있던 판이었다. 군사들을 풀어 성문을 굳게 닫고
초조한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돌연 최윤덕이 대군을 휘동하여 성문
밖까지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만주는 당황했다. 곧 부하 추장들을
불러 대항할 것을 결정했다. 성을 지키던 수문장이 황황망망 박호문이 화살로
쏘아 보낸 세종대왕 전하의 성토문을 주워 가지고 들어왔다. 박호문이 여진
글자로 번역해 쓴 것이다. 이만주를 위시하여 모든 추장들은 벌벌 떨면서
읽었다. "공연한 짓을 해서 건주위가 결딴이 나는구나!" 늙은 추장 한 사람이
탄식했다. "모두 다 모사 퉁맹가란 놈이 약은 체하여, 우리 군사를 우디거로
변장시켜서 이 꼴을 당하게 했구나. 조선군을 대항하기 전에 이놈을 먼저 찢어
죽여야겠다!" 젊은 추장 한 자가 팔을 걷어붙이고 호통을 쳤다. "여보게,
퉁맹가란 자가 아무리 요사스런 꾀를 냈다 하나, 도지휘가 그 꾀를 쓰지
않았다면 이런 기막힌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허물은 이만주
도지휘가 져야 하네!" 늙은 추장 한 사람이 또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엄숙한
얼굴로 도지휘 이만주를 손가락질해 가리키며 말한다. "애당초에 도지휘가
좌군, 우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으로 나갈 때, 우리들 각 동리의 추장한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퉁맹가란 놈하고 귀옛말을 하고 돌연 환쟁이들을 불러다가 좌군
이백 명의 얼굴에 우디거의 모습으로 칠했던 것 아닌가. 이때 우리들 추장들도
무슨 까닭인것을 까맣게 몰랐네. 그나 그뿐이가. 압롱강으로 나가서도 별안간
우군 부대장한테 영을 내려서 변장한 좌군을 묶으라 하지 아니했던가? 이때도
우리 추장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일체 몰랐네. 이따위 얕은 꾀를 써서, 그래
천하맹장 최윤덕이 속아넘어갈 줄 알았던가? 우리들한테는 비밀을 지킨답시구
의돈도 없이 한 일이니, 이 책임도 도지휘가 져야 하네!" 이만주와 퉁맹가를
원망하는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러나 이만주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건주위를 손아귀에 넣어 지휘해 온 인물이었다. 여러 추장들의 횡설수설
떠들어대는 원망하는 소리를 꾹 참고 듣고 있다가, 별안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긴 칼을 뽑아 들고 사선상을 후려쳤다. "지금 조선군이 와서 건주위를
두려빼려는 이 판국에 너희들은 방어할 대책은 세우지 않고 나만 헐뜯으면
어찌할 테냐? 내가 우리 군사를 우디거로 변장시킨 일은 최윤덕의 예봉을
피하려 한 일이지, 결코 너희들을 해롭게 하려고 한 일이 아니다! 만약에 또다시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자가 있다면 늙고 젊은 추장을 말할 것없이 모조리 군법을
시행하여 참하리라!" 눈을 부릅떠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모든 추장들은
군법시행을 해서 한 칼에 목을 벤다는 말에 모두들 기가 죽어 움찔했다.
이만주는 다시 칼을 번쩍 들어 지휘하는 군령을 내린다. "우군 부대장은 군사
이천 명을 땅굴에서 불러내서 쳐들어오는 최윤덕을 방어하라. 나의 사랑하는
백마를 내주리라! 모든 동리 추장들은 본곳으로 빨리 돌아가서, 땅굴 속에서
교련하는 동리 군사들을 출동시켜서 제 동리를 각기 방어하라!" 모든 추장들은
군령이 무서웠다. 명을 받고 흩어졌다. 이천 병마를 거느리고 제일선에서
조선군을 대항하라는 이만주의 명령을 받은 우군 부대장은 딴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디거에서 박호문과 내응을 약속했던 우디거 추장의 사위였다. 이만주가
내린 백마는 원래 박호문이 강변 호장에게 준 것을 이만주가 뺏었던 것이다.
우군 부대장은 출전명령을 받자 급히 백마를 달려 집으로 향했다. 아내와
작별을 하려는 것이다. 온 성 안이 술렁거렸다. 남녀노소를 말할 것 없이
조선군이 성 밖까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남부여대해서 어린것들을 이끌고
산골로 황황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거리거리마다 피난하는 백성들이 수라장을
이루어 갈팡질팡 호곡하는 소리가 낭자했다. 동리마다 집이 텅텅 비었다.
우디거의 사위는 황망히 말을 달려 집 앞에 당도하자 급히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혹시나 아내가 난리났다는 소식을 듣고 산속으로 피하지나 아니했나
하고 하고 염려되는 때문이다. 중문을 거쳐 안방으로 급히 뛰어들어갔다.
아내는 거울 앞에서 두려움 없이 얼굴을 매만져 단장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방싯 요염한 웃음을 웃고 사뿐 일어나 남편을 맞이했다.
"조선군이 쳐들어온다지요?" 붉은 입술이 꽃판처럼 터지며 남편인 우군
부대장을 껴안았다. "큰일났네. 최윤덕이 십만 대병을 거느리고 쳐들어왔어!
이만주 지휘는 나보고 이천 병마를 거느리고 제일선으로 나가서 방어를
하라는거야! 나는 자네가 피란민과 함께 산골로 들어가지나 않았나 하고 급히
뛰어온 길일세." "호호호, 내가 왜 피난을 가요? 무엇이 두려워서!" 계집은
요염하게 웃었다. "조선군한테 잡히면 어찌하려구?" "호호호, 조선 군사가
나를 잡을 리가 있소? 나는 우디거의 딸인데___. 당신은 지난번 우리 친정에서,
아버지 앞에서 조선군이 온다면 내응을 하겠다고 박특사에게 약속한 일을
잊으셨소? 조선 사람은 의로운 사람들인데, 내응하는 대장의 아내를 잡아갈
리가 있소? 두려울 것 없지요. 호호호." 계집은 태평한 듯, 또 한 번 요염하게
웃었다.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은 눈을 끔벅이며 망설인다. "내응을
하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어떤 방법으로 내응을 한단 말인가!" 혼자말로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이천 명 땅굴 군사를 가지고 십만 대병과 싸울 수도
없고___." "호호호, 무엇이 그리 큰 걱정이 된단 말요. 슬며시 싸우는 체하다가
항복을 하겠소?" "나중에 이만주가 목을 베면 어찌하나?" "참말, 당신은
어리석기도 하오. 우리 친정으로 가서 살면 그만 아니오. 당신은 까마귀 고기를
자셨소? 어찌 그리 건망증이 심하오. 내가 무남독녀 외딸이니 늙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달라고 했던 우리 아버지의 말씀을 잊으셨소? 그때 박호문 특사도
똑똑히 들었는데 무슨 걱정이 되오? 항복한 뒤에 우리는 슬몃 우디거로 가면
그만 아니겠소. 나도 당신을 따라 전장에 나가겠소!" "자네가 전장에
나가겠다?" 우디거의 사위는 깜짝 놀란다. 계집은 장문을 열었다. 여자의 옷을
훌훌 벗었다. 남자의 군복으로 바꾸어 입었다.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은 또
한번 눈이 휘둥그래진다. "언제 군복을 만들어두었나?" "반드시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만들어두었죠.호호호." 다시 보니 기막힌 건주위의 소년 장군이다.
"박특사와 강변 호장이 반드시 이번에 향도가 되어 따라왔을 것이고, 두 사람은
다 내 얼굴을 짐작할 테니, 두말 말고 당신은 나하고 이천 병마를 거느려
나갑시다." 우디거 사위는 판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내로 부관을 삼아, 이천
병마가 있는 땅굴로 향했다. 땅굴 속에 있는 이천 병마의 오랑캐 군사들은
부대장과 젊은 부관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오랑캐 우군
부대장은 젊은 부관과 함께 마상에서 전령을 내린다. "지금 조선군이 성 밖까지
쳐들어왔다. 도지휘 이만주 장군은 나에게 너희들을 거느리고 쳐들어오는
조선군에 대항하라 하셨다. 이제 나는 곧 너희들 전 장병들에게 출동명령을
내린다. 한 사람이라도 태만하는 자기 있다면, 군법시행을 해서 참하리라!
그리고 이 젊은 군관은 나의 부관이다. 모든 일을 부관을 통하여 전달할 테다.
명심해서 군령에 복종하라. 추호라도 어기는 자가 있다면 엄벌을 면치
못하리라!" 모든 오랑캐들은 손을 높이 들어 맹세했다. "자아, 진군이다."
오랑캐 군사들은 일제히 창과 칼과 전통을 메고 우군 부대장의 뒤를 따랐다.
이천 병마는 성벽 안에 기치창검을 벌여놓고 진을 쳤다. 장차 도전하는
조선군에 대항하려는 것이다. 한동안 진세를 정돈한 뒤였다. 우디거의 딸인
오랑캐 군관은 남편의 백마를 채찍질해 타고 조선진을 향하여 기운차게 달렸다.
성문 앞 열 걸음 밖에 당도하자. 잽싸게 활을 당겨 살을 쏘았다. 살은 '윙'
소리를 내며 성문 밖으로 떨어졌다. 오랑캐 군사 이천 명은 소년 군관이
조선군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는 화살인 줄 알았다. 미남인 소년 장군의, 물을
박차는 제비인 양 날렵하게 달리는 행동을 바라보자 발을 구르며 환호성을
올렸다. "잘 달린다!" "활도 잘 쏜다!" "물찬 제비 같구나!" "우리 부관은
천하의 미남자다!" "여자같이 약하게 생긴 군관이 어쩌면 저같이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쏘아!" 오랑캐 군사들의 칭찬하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일어났다.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은 진문 앞에 서서 긴 칼을 짚고, 미소를 입가에
머금어, 아내의 날렵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 군관으로 변장한
우디거의 딸은 화살 석 대를 연거푸 쏘아붙인 후에 잽싸게 말머리를 돌려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오랑캐 본진으로 돌아온다. 오랑캐 군사들은 또다시
손뼉을 두드리고 발을 굴러 환호성을 올리며 무사히 돌아오는 자기편 군관을
맞이했다. 이때 중군절제사 이순몽은 대호군 박호문과 함께 성 밖에서
성토문을 화살로 쏘아 보낸 후에 모든 군용을 정돈하고 일촉즉발의 태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박호문은 중군 이순몽과 귀화했던 향도 강변 호장을
대동하고 망루에 높직이 올라 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성토문이 들어간
후에 적은 항복을 하지 아니하고 대결 행동을 취하는 모양이었다. 2천 병마가
움직였다. 적은 진세를 정돈하는 태세를 취했다. 박호문은 계속해서 적세를
응시하고 있었다. 홀연 소년 군관이 나는 듯이 백마를 달려 뛰어왔다.
박호문이 바라보니 백마를 타고 달려오는 소년 적장의 얼굴은 매우 익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얼른 나지 아니했다. 귀화한 강변
호장의 허구리를 꾹 찔렀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얼른 생각이 나지
아니한다. 자네는 짐작할 테지? 누군가?" 강변 호장동 눈을 씻고 바라보았다.
"저 역시 낯이 익은 듯한데 얼핏 생각이 나지 아니합니다. 건주위에는 저런 소년
군관이 없는데___. 누구일까?" 강변 호장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소년 적장의
달리는 말이 점점 가까이 왔다. 논같이 흰 은안백마다. 박호문의 입에서 별안간
'앗' 하고 놀라는 소리가 나왔다. "저 백마는 내 백마가 아닌가. 자네한테
주었다가 임나주한테 뺏겼던 내 백마야!" 강변 호장의 눈에 불이 일었다.
잊었던 분한 마음이 다시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뛰닫던 소년 적장의 달리던
백마가 우뚝 서면서 화살이 퍼뜩 날았다. 바람을 끊고 허공으로 날아 성 밖으로
뚝 떨어졌다. 박호문은 강변 호장에게 소리쳤다. "빨리 내려가 화살을 주워
오너라!" 강변 호장은 망루 아래로 뛰어내렸다. 화살 한 대를 들고
뛰어올랐다. 살끝에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급히 뽑아 펼쳐보았다. 여진 글자다.
'박특사는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는 우디거의 딸입니다. 이만주는 우리 남편에게
2천 병마를 주고 조선군을 대항하라 했습니다. 나는 약속한 대로 내응하기
위하여 남편을 달래서 남장을 하고 부장이 되어 나왔습니다. 당신들은 성문을
두드려 부수고 들어오시오. 나는 당신과 싸우는 체하다가 우리 남편과 함께
항복을 하리다!" 박호문은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중군 이순몽과 함께 급히
망루에서 내렸다. 중군에 급히 전령을 내렸다. "2천5백 명의 전 중군은 일제히
성문을 두들겨 부숴라___." 대기했던 군사들은 일제히 고함 소리를 치며 철퇴와
도끼로 성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우지끈와지끈' 지동치는 소리와 함께 적의
쇠문이 거꾸로 박혀 넘어갔다. 조선군은 성문 안으로 홍수같이 밀려들어갔다.
박호문은 급히 전령을 내린다. "적장을 산 채로 잡을 테다. 너희들은 돌격을
중지하라!" 군사들은 주춤하고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박호문은 갑주투구에
장창을 비껴들고, 오추마 위에 높이 올라 소년 적장의 앞으로 달렸다. 양편
군사들은 진용을 정돈한 채 멀리 두 장수의 결전을 바라본다. 은안백마를 탄
소년 적장은 서릿발이 싸늘하게 흐르는 듯한 긴 칼을 햇빛에 번뜩이며 칼을
춤추어 박호문의 앞으로 나왔다. 박호문이 바라보니 틀림없는 우디거의 딸이다.
남장으로 변복한 우디거의 딸은 갑주투구의 군복색으로 차린 박호문을 선뜻
알아보았다. 서릿발 같은 장검을 휘두르며 생긋 웃었다. 웃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칼을 휘두르며 가만한 소리로 말을 건넨다. "박특사, 그 동안
태평하셨습니까? 살에 띄워 보낸 편지는 받아 보셨지요?" "받아 보았소."
박호문도 장창을 비껴들고 말을 달려 가만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우디거의
딸이 또다시 장검을 휘두르며 가만히 속삭인다. "편지 사연대로 남편과 함께
항복을 하고 군사를 이끌어 우디거로 달아날 작정입니다. 그러나 십목소시에
당장 항복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몇 차례 싸우는 체하다가 틈을 보아
패주하겠습니다." 계집은 또 한 번 생긋 웃었다. 소용이 가국이다. "좋소!"
박호문도 웃으며 대답했다. "자아, 그럼 싸우는 체합시다." 계집은 또 한 번
생긋 웃고 장검을 번쩍 들어 박호문의 어깨를 치려 했다. 박호문은 마상에서
잽싸게 몸을 피하면서 장창으로 소년 적장의 젖가슴을 향해 찔렀다. 소년
적장은 잽싸게 은안백마의 배때기를 발꿈치로 되게 질렀다. 은안백마는 껑충
뛰어 세 걸음 밖으로 물러서며 박호문의 예봉을 피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양편
진영의 무수한 군사들은 박호문과 우디거 딸의 주고받은 밀어의 대화를 알
까닭이 없었다. 젊은 두 장수의 찌르고 피하고, 피하고 찌르는 농익은 무예를
바라보며 손뼉을 치고 발을 굴러 환성을 보냈다. 박호문과 우디거 딸의 교봉을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창과 칼을 맞부딪치며 '댕그렁' 소리가 끊일 사이 없이
일어났다. 오추마와 백설마, 검고 흰 두 말은 '어흥' 소리를 치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박호문이 찌르려 하면 소년 적장은 말을 달려 급소를 피하고, 소년
적장의 칼이 갑옷투구에 번뜩 닿으려 하면 박호문은 말 배때기로 몸을 피했다.
이럴 때마다 양편 진영의 군사들은 손네 땀을 쥐고 함성을 올렸다. 환성 소리는
호지의 천지 강산을 흔들어놓는다. 젊은 두 장수의 용양호박의 묘기는 겉으로
보기에 청룡 백호가 구름과 안개를 일으키며 싸우는 듯했다. 밖에서 보기에
교봉 수백 합에 승부가 나지 아니했다. 박호문과 우디거 딸의 무예는
난형난제요, 막상막하다. 이제는 팔도 아프고 말도 피곤했다. 뿐만 아니라 해도
저물기 시작했다. 우디거 딸이 또다시 장검을 휘두르며 밀어를 꺼냈다.
"오늘도 해도 저물고 몸도 피곤하니 내일 싸우는 체합시다. 내일은 저의 남편을
싸움터로 내보낼 테니 그리 아시고 며칠 더 교전하는 형태를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박호문도 장창으로 우디거 딸의 찌르는 칼을 막아내려 대답했다.
"좋소! 조금 있으면 우리 주장이 쟁을 쳐서 싸움을 쉬라할 것이오. 그때까지
잠깐만 더 싸워보는 체합시다. 그리고 내일은 더 열성 있게 싸우는 것같이 두
패로 싸우는 것이 어떻겠소?" 계집은 또다시 생긋 웃으며, 박호문의 찌르려는
창을 칼로 막아내며 대답한다. "그거 참 묘안입니다. 열을 내서 싸우는
체해야만 이만주가 의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럼 저도 또 내일 나올 테니,
특사께서도 나와서 한바탕 싸웁시다." 여자 군관은 또다시 방긋 웃으며
장검으로 박호문의 팔을 찍으려 했다. 멀리 밖에서 보기엔 매우 위험한
장면이었다. 박호문은 또다시 슬쩍 몸을 피하면서 우디거 딸의 허구리를
찌르려는 찰나다. 오랑캐 진에서 홀연 종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우디거
딸의 남편 우군 부대장은 아내의 칼 쓰는 모양이 어지러운것을 보자,
피로했다고 생각했다. 종을 어지럽게 쳤다. 싸움을 쉬게하는 군호다.
조선진에서도 중군절제사 이순몽은 박호문에게 미리 말을 들어서 거짓 싸우는
양전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적진에서 휴전을 보하는 종소리가 들려오니,
이편에서도 쟁을 쳐서 싸움을 쉬게했다. 호지의 우디거 딸과 조선진의
박호문은 종소리와 쟁소리를 군호로 하여 제각기 본진으로 말을 달려 돌아갔다.
이날 밤에 호진에서는 우디거 딸이 그의 남편 우군 부대장에게 열성 있게
싸우는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남편도 나가서 함께 싸울 것을 약속하고,
조선진에서는 박호문이 이순몽 절제사와 본영군사만여 명을 이끌고 뒤에 도착한
도절제사 최윤덕에게 건의했다. "우디거의 딸은 과연 영민합니다. 이만주에게
겉으로 열성 있게 싸우는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두 패로 싸우자 합니다. 그럴
듯한 꾀올시다. 내일은 이순몽 장군께서 저와 함께 출전을 하셔야겠습니다."
"역시 거짓 싸우는 거란 말이지? 좋지!" 이순몽은 쾌하게 허락했다. 박호문은
다시 건의한다. "도절제사 최장군과 중군절제사 두 분이 계신 앞에 아뢰옵니다.
우디거의 딸과 그의 남편인 우군 부대장은 정말 충복이올시다. 죽이지 마시고
살려두어야 합니다." 도절제사 최윤덕이 대답한다. "살려두어야지. 대호군의
말이 옳소! 일우에 이용해 쓸 데도 많을거요." "그러나 죽기가 십상팔구입니다.
살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우디거 딸 내외는 죽기가 쉽지, 살기가 어렵다는
박호문의 말에, 최윤덕 장군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박호문에게 묻는다. "우디거
딸 내외를 우리가 아니 죽이면 그만 아닌가. 어찌해서 살기가 어렵단 말인가?"
"대감, 우리가 죽인다는 말이 아니라 적장 이만주가 죽인다는 말씀입니다.
이만주는 의심이 많은 자올시다. 이틀씩이나 싸워서 승부가 나지 아니하는 것을
본다면 반드시 그들의 뒤를 밟을 것입니다. 이리된다면 그들은 죽음을 당하고야
맙니다." "그도 그렇군요. 박호문의 말이 옳습니다." 이순몽이 옆에서
거들었다. "글쎄, 그도 그럴 듯한 말이로군!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디거 딸
내외를 살릴 수 있는가. 묘책이 없겠나?" 최윤덕이 묻는다. "한 가지 묘한
계교가 있습니다. 사또께서 허락하신다면 소장이 실행하겠습니다." 박호문이
대답했다. "묘한 계교를 말해보게나." "내일 접전을 할 때 한동안 교봉을
하다 적병을 거느리고 우디거로 달아나라 이르겠습니다. 그리 한다면 우디거
추장은 무남독녀인 딸과 사위를 반갑게 맞이해서 후계자를 삼을 것입니다. 이리
된다면 이만주의 병력은 약화되고, 우디거 딸과 사위는 호혈을 벗어나서
무사하게 살 것입니다." 최윤덕과 이순몽은 박호문의 계책을 듣자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고 손뼉을 쳐 찬동했다. "좋은 생각이오. 전쟁을 해도 바르고 어진
사람은 살려줘야 하는 법이오. 그러므로 병서에 이르기를, 왕군의 행동은 추상
같은 위엄을 지니는 한편 자애로운 온정으로 호생지덕을 베풀라하였소.
박특사의 계교는 과연 훌륭하오. 한편으로 적의 기세를 꺽고, 한편으로 사람들을
구해서 비록 이족이라 하나 우리 나라의 충성스런 울타리가 되게 합시다." "두
분 사또께서 찬동해서 공명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출전할 때 이
계책을 우디거 딸에게 전하겠습니다." 박호문은 기뻤다. 중군절제사 이순몽도
한 마디 한다. "내일 두 패로 싸움을 한다니, 나도 우디거의 사위한테 싸우다가
달아나라고 생왕방을 가르쳐줘야 하겠소. 하하하." 세 장성들은 화기 가득 찬
속에 전략을 마련하고 각기 야전 움막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날이 밝았다.
조선진에서는 다시 싸움을 돋우는 징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소년 장군
박호문은 어제와 같이 갑옷투구에 오추마를 타고 장창을 비껴들고 나오고,
중군절제사 이순몽은 은투구에 검은 갑옷 입고 적토마를 타고 쌍철퇴를
휘두르며 달려나왔다. 중군절제사의 영기가 펄럭거렸다. 위풍이 당당했다.
조선진에서 징소리가 일어나며 소년 장군이 군사를 거느려 진 앞에 나타나고,
뒤미처 위풍당당한 일원대장이 적토마를 달려 쌍철퇴를 휘두르며 나오는 것으로
버자, 오랑캐 진에서도 종소리가 요란하게 공산을 흔들었다. 오랑캐의 이천
병마가 늘어서 있는 진 문이 활짝 열리면서 이편에서도 소년 장군과 일원대장이
말을 달려 나왔다. 소년 장군은 미모의 주인공인 우디거의 딸이 남자로
변장해서 갑주투구로 은안백마를 채찍질해 나오는 것이고, 일원대장은 우디거
딸의 남편인 적의 우군 부대장이었다. 쌍창을 휘두르며 혹다리를 타고 홍종같은
소리를 외치며 달려 나왔다. 양편 진에서는 군사들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왼편에서는 중군절제사 이순몽과 오랑캐 우군 부대장이 대결의
태세를 취하여 말을 달리고, 오른편에서는 어제 온종일 칼과 창을 맞부딪쳤던
두 사람의 소년 장군들이 오추마와 은안백마를 몰아 창과 칼을 겨누고 있다.
박호문은 장창을 번뜩이며 우디거 딸의 투구 꼭지를 향하여 후려칠 듯하면서
밀어를 보냈다. "밤사이 태평히 잤소?" "추장의 명을 어기고 거짓 싸움을 한
사람이 잠을 잘 수 있소.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웠소." 우디거 딸은 들어오는
박특사의 장창을 장검으로 막아내며 속삭인다. "내가 좋은 꾀를 가르쳐줄 테니
나 하라는 대로 하려오?" "무슨 좋은 꾀요?" 우디거의 딸이 상긋 웃고 묻는다.
박호문은 다시 장창으로 우디거 딸의 목을 겨누는 시늉을 하며 밀어를
계속한다. "오늘은 나와 당신과, 이순몽 절제사와 당신의 남편이 두 패로
갈려서 싸우게 되니, 남들이 보기에는 기막힌 격전이라 생각할 것이오. 한동안
싸우다가 당신 내외는 패해 달아나는 체 2천 병마를 이끌고 당신의 친정
우디거로 달아나시오. 그리한다면 당신네 내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소. 만약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만주의 손에 당신 내외는 죽고 말 것이오! 이만주는
의심이 많은 자요. 우리들의 승부가 얼른 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만주는 오늘쯤
뒤를 밟을 것이 분명하오. 나는 지난밤에 우리 사또들과 의논하고 당신 내외의
목숨을 구해주기로 했소!" 거짓 싸움을 하면서 한 가닥 검은 구름장 같은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우디거 딸의 귀로, 칼과 창이 댕그렁거리며
부딪치는 속에 가만가만 들려오는 박특사의 밀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복음으로
들렸다. 투구를 쓰고 장검으로 박호문의 찌르는 장창을 막아대는 우디거 딸의
면모가 샛별인 양 환희의 안광을 뿜었다. "좋습니다. 하라는 대로 우디거
친정으로 달아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남편에게 알릴 틈이 없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우디거의 딸은 기쁘면서도 마음이 초조했다. 칼 쓰는 수법이
거칠어지고 어지러워졌다. "마음을 놓으시오. 우리 중군대장도 당신의 남편을
절대로 해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당신 내외의 의기에 감동이 된 까닭이죠.
내가 지금 당신에게 묘계를 가르쳐주듯, 이순몽 장군이 똑같은 말을 당신
남편에게 전해주었을 것이니, 마음 턱 놓고 한동안 싸우다가 군사를 이끌로
말을 달려 달아나시오!" 박호문은 다시 장창을 번쩍 들고 소년 적장을 겨누며
밀어를 보냈다. 우디거 딸은 급히 말머리를 돌려 몸을 피하면서 힐끗 옆을
바라본다. 남편 우군 부대장과 조선 중군대장 이순몽의 교전하는 모습이 궁금한
때문이다. 이순몽은 위풍이 당당했다. 고리눈을 부릅떴다. 시꺼먼 텁석부리
수염이 바람에 날려 구레나룻이 흔들거렸다. 적토마를 타고 쌍철퇴를 흔들며
홍종 같은 소리로 남편의 얼굴판을 향하여 후려치는 시늉을 하며 꾸짖는다.
"이놈, 배은망덕하는 오랑캐놈의 부하야. 목을 늘여 내 철퇴를 받아라!"
목소리가 어찌나 크고 거센지, 몇 리 떨어져서 박호문과 대결하는 우디거 딸의
귀에까지 쨍쨍 울렸다. 우디거 딸의 마음이 약간 불안했다. 홀연 남편의
얼굴판을 치려 했던 쌍철퇴는 빗나가면서 허공을 갈기고 말았다. 우디거 딸은
계속해서 박호문의 예봉을 피하면서 남편과 이순몽의 교전하는 동정을 살폈다.
남편의 대항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해서 까닭 없이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우리 땅을 침범하느냐!" 큰 소리를 치면서 쌍창을 들어 이순몽의 적토마를
지르려 했다. 이미 쌍철퇴와 쌍창이 맞부딪쳐지면서 교봉이 농익어 들어갔다.
소곤소곤 말소리가 들릴듯 말듯 새어나왔다. 우디거 딸은 박호문을 피해 말을
달리면서 귀를 기울였다. 조선편 대장 이순몽의 홍종 같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줄어졌다. 우디거 딸은 귀를 기울였다. 박호문이 자기한테 말하듯
하는 가만가만한 음성이었다. 귀를 더 한 번 바싹 귀울였다. "너를 곧
쌍철퇴로 후려갈겨서 결판을 낼 것이다마는, 박특사한테 말을 들어보니, 너희
내외는 가상한 일이 많다. 살려두기로 한다. 나 역시 박특사처럼 거짓 싸워서 헛
철퇴를 쓸 테다!" 남편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쌍창을 번쩍 들어
이순몽의 철퇴를 막는 시늉을 한다. 이순몽의 목소리가 또 가만가만 들렸다.
"이만주란 놈은 너를 의심할 것이다. 이틀이나 교전을 해도 승부가 나지
아니하면 우리와 내통이 된 것을 판단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반드시 너희
내외를 죽일 것이 분명하다. 너희들은 위험한 눈치가 있거든 빨리 우디거로
달아나거라!" 박호문이 자기한테 귀띔한 것과 똑같은 소리다. 남편의 음성이
처음으로 들렸다. 역시 가만한 음성이다. "내 아내에게도 연통을 해주어야 하지
않겠소?" 자기가 처음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다. "박특사가 벌써 너의
아내한테 일러주었을 것이다. 염려 말아라. 자아, 그럼 싸우자!" 우디거 딸의
입가에는 가만한 웃음이 떠돌았다. 한편 박호문은 우디거 딸이 이순몽과
적장의 밀어를 귀기울여 들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눈치챘다. 멀리서 보는
군사들이 눈치를 챌까보아 일부러 우디거 딸의 주위로 말을 달려 빙글빙글
돌면서 장창을 비껴들고 싸움을 돋우는 체, 어르는 태세를 취했다. 박호문은
우디거 딸이 안심하고 방긋 웃는 모습을 놓치지 아니했다. "인제 마음이
놓이오?" 우디거 딸은 박호문을 향하여 안심했다는 뜻을 웃음으로 보내어
대신했다. "자아, 그럼 이제는 싸워야 하오!" "좋소, 싸웁시다!" 우디거 딸은
다시 기운이 솟아났다. 싸늘한 긴 칼을 햇빛에 번뜩이며 박호문의 목을
후려치려 했다. 박호문이 장창을 힘차게 잡은 후에, 들어오는 우디거 딸의 긴
칼을 후려쳤다. '땡그렁' 소리가 강하게 일어나면서 긴 칼 중등이 딱 부러졌다.
오랑캐 진에서는 이 모양을 바라보자 황급하기 짝이 없었다. 비장 한 자가
급히 허리에 찼던 칼을 뽑아들고 말을 달려 뛰어나왔다. 우디거 딸을 대신해서
박호문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박호문은 장창을 번듯 들어 오랑캐 비장의
가슴을 향하여 푹 찔렀다. 교봉 일합이 채 못되어 오랑캐 비장은 말 아래로
떨어졌다. 조선진에서는 고함 소리가 일어나면서 군사들이 제각기 동아줄을
들고 쫓아나와 반죽음이 되어 말에서 떨어진 비장 오랑캐를 꽁꽁 묶었다.
조선진으로 호송했다. 이 모양을 본 오랑캐진에서는 또다시 다음 장수가 급히
말을 달려 박호문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었다. 박호문은 장창을 안장 옆에 꽂고,
급히 화궁을 들어 살을 메겼다. 날카로운 금비전 화살 한 대가 적장의 눈망울을
종통으로 쏘아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또다시 조선진에서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도절제사 최윤덕 장군이 장대 위에 높이 앉아 관전을 하다가
지휘봉을 두드렸다. "금비전 화살 한 대에 눈알이 빠진 적장을 묶어 오너라!"
조선 군사들은 우르르 달려가 말 아래 떨어진 호장을 묶어 들였다. 한편
호진에서는 이만주와 퉁맹가가 장대에 서서 관전을 하다가 비장 두 사람이
연거푸 상해서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것을 보자, 추장 이만주는 의심이 덜컥
났다. 옆에 있는 퉁맹가에게 묻는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글쎄올시다. 우군
부대장이 열을 내서 싸우는 것 같지 않습니다." 모사 퉁맹가도 의아하게 생각한
모양이다. "도대체 이틀씩이나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아니하니 웬일이란 말인가?
일부러 싸우는 체하여 날짜를 천연하는 것이 아닌가." "글쎄올시다!"
"비장들이 두 사람씩이나 상해서 묶여가는데도 우군 부대장은 부하를 구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조선편 장수와 칼춤만 추고 있으니 해괴한 일이로군!" "매우
몸을 사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박특사와 교전을 하다가 칼을 부러뜨린
젊은 장수는 누군가?" "글쎄올시다. 소년 아장인데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소년 아장의 태도도 수상하지 아니한가. 칼이 부러졌으면 부러진 칼로라도
박특사를 찍어대지 못하고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힘이 모자라면 쫓겨서
본진으로 돌아와야 할 텐데 그렇지도 아니하고, 양편에서는 도대체 어르고만
있으니 괴상한 일이로구나!" 이만주는 화가 벌컥 났다. "아니되겠네. 자네 빨리
좌군 부대장과 무장을 갖추고 진터로 나가서 우군 부대장을 소환하게. 그리고
젊은 아장이 누군지 엄하게 사실해보게!" 추장 이만주의 명령은 추상 같았다.
좌군 부대장은 지난해에 우디거 족속의 얼굴로 변장하고 여연으로 침범했던
꼭지 두목이었다. 흉악한 얼굴에 효용이 절륜한 자였다. 이만주의 명령을 받자,
퉁맹가와 함께 급히 달려 진터로 뛰어나갔다. 박호문과 이순몽이 우디거 딸과
우군 부대장과 다시 말을 달려 싸움을 어르면서 바라보니, 적진편에서 말굽
뛰닫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면서 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민감한
박호문이었다. 이만주가 의심을 해서 다른 자웃를 보내는 것이 분명했다. 우디거
딸에게 밀어를 보낸다. "우리가 먼저 추측한 대로 이만주는 의심을 해서 다른
장수를 보내는 것이 분명하오. 이 기회에 적장들을 죽여버리고 우디거로
달아나시오." 우디거 딸이 눈을 씻고 달려오는 장수들을 바라보니, 한 자는
좌군 부대장이요, 한 자는 자기 친정 우디거한테 허물을 뒤집어쒸우게 했던
모사 퉁맹가다. "옳습니다. 우리들을 의심해서 잡으러 오는 것이 분명하오!"
말을 마치자 우디거 딸은, 박호문의 예봉을 피하는체 이순몽과 접전하는 시늉을
하는 남편 앞으로 달려갔다.
소탕 소굴 소년 적장 우디거 딸은 남편을 도와 이순몽을 협공하는 체,
부러진 칼을 흔들며 이순몽과 남편 앞으로 달려들었다. 가만한 말로 속삭인다.
"모사 퉁맹가와 좌군 부대장이 우리를 잡으러 옵니다. 죽이고 달아납시다!"
이순몽이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가 얼른 말참견을 했다. "좋다! 그것이
너희들의 죽지 않는 길이다. 좌군 적장을 내가 맡아서 처결할 테니, 툰맹가란
놈은 네가 맡아서 처치해라!"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적의 좌군 부대장과 모사
퉁맹가가 일지 병마를 거느리고 풍우같이 달려와 우디거의 딸과 우군 부대장을
꾸짖는다. "너는 어떠한 젊은 놈인데 지휘의 허락도 없이 감히 출전을 했으며,
우군 부대장은 무슨 까닭에 싸우지 아니하여 항명을 한 채 이적행위를 했느냐?
나는 지위의 엄명을 받들어 너희들을 수죄하러 왔다!"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도 벌컥 노했다. 눈을 부릅떠 큰 소리로 퉁맹가를 꾸짖는다. "내 어찌
항명하여 싸우지 않았단 말이냐. 사람을 모함해도 분수가 있지 않은가. 아장을
선택하는 일은 부대장의 권한이다. 보아라. 내 아장이 칼이 끊어지도록 싸운
것을 보지 못하느냐? 모두가 퉁맹가 네놈의 모함이로구나!" 우디거의 사위
우군 부대장은 고함치며 퉁맹가한테로 철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우디거의
딸을 슬기로웠다. 부러진 장검을 휘두르며 남편을 도와 퉁맹가를 협공했다.
조선측 절제사 이순몽은 기회를 놓치지 아니했다. 긴 칼을 뽑아들고 오랑캐의
좌군 부대장의 앞으로 말을 달렸다. 박호문도 장창을 비껴들고 달려들었다.
오랑캐 좌군 부대장은 비록 날랜 장수라 하나 한 몸으로 이순몽과 박호문의
예봉을 막아낼 길이 없었다. 교봉 사십여 합에 기진맥진이 되었다. 이순몽의
후려치는 칼이 번뜻하면서 호장의 머리는 구슬픈 비명과 함께 말 아래로
떨어졌다. 조선측 군사들의 고함치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며, 전선으로 몰려
나와 적장의 머리를 거두어 본진으로 돌아갔다. 우디거 딸 내외와 적이 되어
대결하던 퉁맹가는 원래 모사로서 무예가 출중하지 못했다. 한 몸으로 두
사람의 협공을 당하여 칼 쓰는 수단이 황당하던 중에, 옆에서 동행했던 좌군
부대장의 목이 떨어지는 꼴을 보자 손과 발이 떨렸다. 급히 예봉을 피하여
말머리를 돌려 본진으로 달아나려 할 때, 우디거 사위 우군 부대장이 철퇴를
높이 들어 퉁맹가의 머리골을 후려쳐 갈겼다. "반적아!" 소리를 한 마디 크게
지르고 퉁맹가는 마하에 떨어져 죽었다. "빨리 우디거로 달아나 목숨을
구해라!" 박호문이 우디거 딸 내외를 향하여 소리쳤다. 우디거 딸과 사위는
말을 채질해 달렸다. 오랑캐 군사들은 두 장수가 패해 달아나는 줄 알았다.
눈덩이 뭉그려지듯 했다. 우디거로 달아나는 두 장수의 뒤를 쫓았다. 조선
군사들은 고함을 치며 홍수 밀리듯 건주위 본영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도절제사 최윤덕의 만여 명 군사는 대완구를 터뜨리며 뒤를 이었다. 본영
안에서 전과를 기다리던 이만주는 천지가 진동하는 대완구 소리에 깜짝 놀랐다.
측근 장교를 불렀다. "웬일이냐, 천지를 진동하는 저 포성 소리가?" "조선군이
대완구를 몰고 쳐들어옵니다!" "무어야? 대완구를 터뜨리고 들어온다? 우리
군사들은 어찌 되었느냐?" "패해서 달아났습니다." "어디로 달아났단 말이냐?"
"북문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우군 부대장과 아장이 쫓겨 달아나니, 군사들은
눈사태가 난 듯 뭉그러져 달아났습니다." "퉁맹가와 좌군 부대장은 어찌
되었느냐?" "전사를 했나봅니다. 모습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이만주는 수각이
황란했다. 급히 벽상에 걸린 장검을 떼어 들었다. "친위군에 출동명령을
내려라!" 측근 장교는 달음질쳤다. 본영 안의 3천 병마는 명을 받았다.
이만주는 적토마 위에 높이 올랐다. 친위군을 향하여 호령한다. "너희들은
건주위의 가장 날랜 정예부대다. 건주위의 흥망이 너희들 손에 달려 있다. 나와
함께 나가 조선군을 막아내자!" 모든 군사들은 일제히 소리치며 뒤를 따랐다.
이만주는 적토마를 달려 친위군을 지휘하여 앞으로 달려나갔다. 조선군이
쏘아대는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고, 대완구가 이곳 저곳에서 천지를 뒤흔들며
불을 뿜었다. 이만주가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토마를 달리는데, 두 사람의
대장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순몽과 박호문이었다. 박호문이 여진말로 크게
소리쳐 꾸짖는다. "배은망덕하는 건주위 이만주야, 목을 늘여 왕군의 부월을
받으라! 성토하는 글월을 네 이미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합지졸을 몰아
대항하는 태세를 취하니 천주를 면치 못하리라!" 이만주는 박호문을 대하니
더한층 마음이 산란했다. 모든 정세를 파악해서 강변 호장을 귀화시키고, 납치해
있는 조선 사람들까지 뺏어 돌아간 박특사였다. 전쟁터에서 마주 대해보니
얼굴이 화끈 달았다. 그러나 허장성세로 박호문을 꾸짖는다. "누가 배은망덕을
했는지 모르겠다. 여연을 침범하는 우디거를 쫓아내고 잡혀간 조선 사람을
뺏어서 돌려보냈다고 곡식과 돼지와 소를 주어 치하하던 그대가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우리를 공격하니 응전하지 아니할 도리가 있는가. 두말 말고
박특사는 내 칼을 받으라." 박호문은 눈을 부릅떠 호통한다. "네 이놈,
무수하게 국경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해놓고 죄상을 우디거에게 전가시키는
간사한 수법이 가증하다! 너 같은 놈은 천벌을 받아야 한다!" 박호문은 장창을
들어 이만주를 찔렀다. 이만주는 급히 말머리를 돌려 박호문의 예봉을 피하려
했다. 이때 이순몽이 쌍철퇴를 휘둘러 이만주의 투구 꼭지를 후려쳐 갈겼다.
이만주는 혼비백산이 되었다. 황겁결에 목이 떨어져 나간 줄 알았다. 급히 말을
달려 본영을 향하여 달아나면서, 뒤에 따라오는 젊은 아장에게 묻는다. "내
목이 붙어 있느냐?" 혀끝이 굳어져서 말소리조차 어눌했다. 땀이 비오듯
전신에 쏟아져 흘렀다. 아장은 황겁한 중이건만, 웃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목이
떨어지셨으면 어떻게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목은 붙어 있고 투구 꼭지만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만주는 비로소 마음이 약간 진정되었다. 진땀이 비오듯
흘러내리는 모가지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목이 완연히 붙어 있었다. 이만주는
그제서야 한숨을 길게 쉬었다. 급히 본영 땅굴 속으로 몸을 피했다. 한편
이만주의 친위군 3천여 명은 조선진의 대완구와 화살에 맞아 죽고 상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박호문, 이순몽, 최윤덕의 대부대는 세 길로 나뉘어 건주위
본영으로 각일각 육박해 들어갔다. 전구위 3천 병마는 이미 반수 이상이
꺾어져버리고 말았다. 본영부대는 마침내 전투능력을 상실해버렸다. 군사들은
창과 칼과 활을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난다. 세 길로 나뉘어 쳐들어간
조선군은 완전히 본영을 장악했다. 박호문이 지난 겨울에 특사가 되어 이만주와
대화를 나누었던, 바로 그 돌로 쌓아올린 궁실이었다. 한편 중군 이외에
좌군절제사 최해산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부추장의 마을 거여로 진출하고,
우군절제사 이각은 군사 1천7백여 명을 거느리고 마천 촌락을 응징하고,
조전절제사 이징석은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올라로 육박해 들어가고,
김효성은 군사 1천8백여 명을 거느리고 임카라의 이만주 어미와 아비가 있는
곳을 돌격하고, 홍사석은 군사 1천1백여 명을 인솔하고 팔리수로 향하고,
도절제사 최윤덕은 건주위 본영에서 다시 군마를 정돈하여 건주위의 최고
정예부대가 진치고 있는 임카라를 점령했다. 오랑캐 부대들은 우리 군사가
가는 곳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과 같았다. 흩어지고 달아났다. 최윤덕
장군은 완전히 넓고 험준한 오랑캐의 수도 건주위 일대를 자리 말듯 소탕했다.
이때 생금한 남녀가 236명이요, 목 베어 죽은 자가 170명이요, 말과 소 170필을
얻고, 우리 군사의 전사한 사람은 겨우 네 명이요, 살에 맞아 상한 자가
20명이었다. 싸움은 전광석화와 질풍신뢰같이 신속했다. 대군은 지방의 부락을
평정한 후에 건주위 이만주가 있는 본영으로 총집결이 되었다. 한편 패잔병의
일지병마와 함께 땅굴 속으로 피신해서 하룻밤을 지낸 건주위의 총수 이만주는
각처에 흩어져 있는 추장들이 군사를 거느려 구원해 들어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득히 소식이 감감하다. 이만주는 굴 속에서 초조했다.
아장들에게 급히 명령을 내린다. "각처의 추장들은 본영이 함락된 것을 알면
반드시 구원병을 보낼텐데 감감하게 소식에 없으니 웬일이냐? 올라와 임카라와
거여의 추장들은 막막강병을 거느리고 있다. 밖에 아무런 동정도 없느냐?"
"아무런 동정도 없습니다. 건주위 소속의 오랑캐 군사라고는 그림자 하나
없습니다. 조선편 군사들이 거리마다 동네마다 승전고를 올리며 길길이 뛰고
즐거워할 뿐이올시다." "내가 거처하던 대본영 안에는 누구누구들이 거접하고
있느냐?" "박호문, 이순몽, 최윤덕이 있다 했는데, 범같이 무섭다는 최윤덕은
또다시 수천 병마를 거느리고 출진을 한 모양인데, 어디로 갔는지 방향을 알 수
없습니다." "최윤덕이 또다시 출전을 했다? 이거 큰일났구나. 각처의 구원병이
오기는 틀린 노릇 아니냐? 이것 큰 탈이다. 나는 꼭 죽었구나!" 이만주의 얼굴
빛이 해쓱하게 핏기를 잃었다. 발을 동동 굴러 탄식했다. 한숨짓는 소리가 땅이
꺼질 듯했다. 한숨짓는 소리가 땅이 꺼질 듯했다. 아장들은 딱했다.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한 자가 말을 꺼낸다. "저희 아장들이 땅굴 밖으로 뛰쳐나가서
각처의 동정을 살피면서 구원병을 청해가지고 오겠습니다." "나가다가 잡혀
죽으면 어찌하느냐?" "조선 군사들은, 죄없는 백성들은 절대로 잡아 죽이지
아니합니다. 무기를 버린 후에 땅굴 뒷문으로 변장을 하고 나가면 관계치 않을
듯합니다." "어떻게 변장을 하려느냐? 너희들마저 다 나가고 나 혼자 남았다가
죽으면 어찌하느냐!" 이만주는 초조했다. "시위하는 군사들이 있으니 잠시만
참으십시오. 저희들은 거지 복색을 하고 땅굴 뒷문으로 빠져나갔다가 곧 정세를
살피고 돌아오겠습니다." "아무려나 해라!" 이만주는 또다시 땅이 커지도록
한숨을 지었다. 오랑캐 아장 세 사람은 군복을 벗고 무기를 버린 후에
누더기옷을 입고 얼굴에 숯검정을 칠했다. 바가지쪽을 들고 막대를 짚어
절름거리면서 한 사람 두 사람 굴문 뒤편으로 빠져나갔다. 본영을 점령하고
있는 조선 군사들은, 병졸 아닌 백성들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태도를 취했다.
더구나 병신 거지들이었다. 관심을 갖지 아니했다. 변장한 아장들은 비렁뱅이
거지의 행동으로 제각기 자방 추장들이 있는 부락을 살폈다. 가는 곳마다
아비규환의 초토가 되었다. 가는 곳마다 조선 군사들이 흰옷 입은 모습으로
승전고를 울리고 있었다. 환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거지 복색을 한 아장들은
맥이 탁 풀렸다. 제각기 굴 속으로 몰려 들어가 이만주에게 복명을 했다.
"큰일났습니다. 건주위 전지역이 함락되었습니다. 구원병이 들어오기를 바랐던
일루의 희망이 다 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락마다 조선 군사들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아장들의 복명을 듣자 이만주는 금방 동풍이 될 듯했다. 눈을
허옇게 뒤집어썼다. 입술이 굳었다. "본영으로 쳐들어온 병력 이외에 또 다른
조선 부대가 있었구나!" "말도 마십쇼. 지금 이곳 본영을 함락한 군사들은
중군이올시다. 좌군 수천 명은 거여를 점령했고, 우군 수천 명은 마천을
접수하고, 유격부대는 삼로로 돌진해서 올라와 팔리수와 임카라를 함락했습니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 구원병이 올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과연 기막힌
일이올시다. 사면천지에 들리는 소리는 모두 다 조선 군사들의 승전고를 울리는
북소리와 노랫소리뿐이올시다." "고성낙일에 장차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이만주는 큰 소리로 탄식하는 한 마디를 부르짖자, 별안간 목구멍에서 붉은
피를 한 사발이나 토했다. 이장들은 황급했다. 급히 이만주를 침상에 뉘어놓고
손과 팔을 문질러 안정을 시켰다. 한편 조선진에서는 건주위 일대의 소굴을
평정한 후에 거리거리마다 방을 높이 붙였다. '이번에 왕군이 건주위에 출사한
일은, 이만주가 배은망덕하고 자주 국경을 침범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노략질한
죄상을 응징할 뿐 아니라, 그 허물을 우디거에게 전가시킨 악락한 행동을
벌죄하려 한 것이다. 추호도 양민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아니할 것이다. 전일과
같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그리고 이만주는 당연히 체천행도하는 왕군의
천주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왕도정치는 관용으로 근본을 삼는다.
이만주가 성심성의로 옛 잘못을 뉘우치고 개과천선할 것을 다짐두어 항복한다면
특사를 내려 목숨을 살려주고 옛 영토를 지키게 하리라.' 서북면 도절제사
최윤덕 장군의 이름으로, 고유문은 거리와 동네마다 곳곳에 붙여졌다. 건주위
백성들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산으로 피란갔던 사람들이 집을 찾아
쏟아져 내려왔다. 이 소식은 이만주와 아장들이 엎드려 있는 땅굴 속에도
전해졌다. 아장 한 자가 거직 복색으로 밖에 나가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만면에 웃음빛을 띠고 보했다. "장군님, 마음을 놓으십시오. 인제 우리들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던 이만주의 귀가 번쩍 했다.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무어야, 살아나게 되었어?" "최윤덕 장군이
거리마다 높이 방을 붙였습니다. 개과천선을 해서 다시는 노략직하지 않을 것을
다짐두고 군문에 나와 항복을 한다면 목숨을 살려준다 했습니다!" "되었소!
장군, 나가서 항복을 하십시다." 모든 아장들의 얼굴 생기가 돌았다. 이만주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다. 원래 이만주는 의심이 많은 자였다. 항복을 하면
살려준다고 방이 붙었다는 아장의 말을 듣자, 반신반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굴 속에 피신을 하고 나타나지 아니하니, 최윤덕이 유인책으로 항복하면
죽이지 않는다고 방을 붙인 것이 아닌가?" "천만에, 당치 않은 말씀이올시다.
조선 국왕전하의 명령으로 왕도정치를 실행하는 도원수 최윤덕이 속임수로
거짓말을 할 리가 있습니까. 마음놓고 항복하십시오." 여러 아장들도 일제히
권한다. "건주위 전지역을 자리 말듯 한 조선 군사가, 우리가 숨어 있는 이
땅굴을 찾아내기란 여반장의 일이올시다. 그들은 향도를 대도하고 있습니다.
건주위의 지세와 요해처를 손살피같이 다 알고 있습니다. 진정 장군을 잡으려면
벌써 이 땅굴 속으로 쳐들어왔을 것입니다. 자진해서 항복을 하라고 방을 붙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좌우 아장들의 우겨대는 말을 듣자 이만주는 비로소
항복할 것을 결정했다. 먼저 아장 한 사람을 사자고 해서, 백기를 등에 꽂고
본영으로 들어가 이만주가 친히 나와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최윤덕
장군은 죽이지 아니하고 항복을 받는 일을 쾌하게 허락했다. 기라 별같이 모인
장성들은 최윤덕 도원수를 중심으로 하여 금부은월이 햇빛에 번쩍이는 앞에
군용을 정제하고 오랑캐 괴수 이만주의 항복을 받을 채비를 하였다. 이윽고
땅굴 속의 이만주는 무기를 다 버린 채 아장 오륙 명과 함께 발가벗은 나체에
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조선군 대본영으로 나와 고두백배를 드리며 항복하는
의식을 가졌다. 최윤덕 장군은 호피 교의에 갑옷 입고 높이 앉아 모든 장성과
함께 항복을 받았다. 이만주의 항복을 올리는 고두백배가 끝나자 최윤덕
장군은 큰 소리로 훈계를 내린다. "네가 이번에는 진심으로 항복을 하느냐?
지난해 퉁맹가를 보내서 노략질한 허물을 우디거에게 전가한 따위의 간특한
항복은 아니냐?" 이만주는 벌벌 떨며 대답한다. "그저 지난번에는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어리석은 소견에 장군의 위엄이 두려워 그리 한 짓이올시다. 그저
목숨을 살려주시옵소서. 다시는 변경을 침범하지 아니합니다. 진심으로
항복합니다." 이만주는 울면서 애걸했다. "상왕전하의 자애로운 성의를 받들어
너의 항복을 받고 특별히 목숨을 살려두는 것이니, 명심해서 충성을 다하라!"
"왕은을 길이길이 가슴 속에 지녀 충성을 다하오리다." 이만주는 다시 머리를
조아려 백 번 천 번, 아장들과 함께 절을 올렸다. 최윤덕 장군은 다시 부드러운
음성으로 분부한다. "이제 왕사는 너의 항복을 받았다. 너의 본영을 돌려주기로
한다. 전과 같이 이곳에 거처해서 백성들을 잘 애무하고 절대로 도둑의 마음을
먹지 말라!" 말을 마치자 최윤덕 장군은 대군을 휘동하여 개선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전군에 내렸다.
대군 개선 최윤덕 장군은 날짜를 천연하지 아니하고 건주위 이만주의
본궁을 선뜻 내준 후에 대군을 휘동하여 승전고를 기세 좋게 올리며 개선의
길에 오르니, 기치창검은 백 리에 뻗쳤고, 호탕한 기상은 호지의 천지를
뒤흔들었다. 오랑캐 백성 남녀노소들은 위풍이 늠름한 최윤덕 장군의 정제한
군용을 거리거리마다 바라보자 찬탄하는 소리가 높았다. "조선 군사들의 군용은
정제도 하려니와, 정쟁 중에도 우리들 백성들에게는 털끝만큼도 해를 끼치지
아니했으니, 과연 의로운 왕군의 태도다!" "조선 국왕전하의 어진 덕을 받들어
응징하러 온 최윤덕 장군이니, 우리들 서민에게 해와누를 끼칠 리가 있는가?
과연 훌륭한 군사들이다." "이만주가 배은망덕을 해서 공연히 여연과 강계로
자주 넘나들어서 조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게 했으니, 참다 못해서 응징하는
군사가 나와서 버릇을 톡톡히 가르친 것이 아닌가? 이만주의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천만다행한 일일세!" "글쎄, 해마다 적지 않은 곡식과 물화를 받아
먹으면서도 국경을 침범해서 불을 지르고 부녀를 약탈했으니, 그것도 크나큰
죄를 저지른 것이지만, 그 죄상을 우디거한테 넘겨 씌우려고 얼굴에 먹칠을
해서 우디거 군사가 노략질을 한 것처럼 꾸며논 후에 거짓 항복을 하는
체했으니, 그 일이 어찌 탄로나지 않겠나. 그따위 얕은 꾀를 낸 얼간 망둥이
퉁맹가란 놈을 발기발기 찢어 죽여야 하네. 그놈 때문에 우리들 죄 없는
백성들은 공연히 피란을 가서 숱한 고생들을 하지 않았나. 퉁맹가란 놈이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 백성들은 그 놈을 먼저 잡아 죽여야 하네. 또다시
못된 술책을 써서 우리를 괴롭게 한다면 큰일일세!" "그러지 아니해도
퉁맹가란 놈은 전쟁터에서 죽었다네!" "무어, 퉁맹가가 전사를 했다? 그놈
그야말로 천주를 받았네그려!" "죽어도 조선편 군사한테 죽지 아니하고,
우디거로 패해 달아난 우군 부대장의 손에 죽었다네!" "웬일야?" "우군
부대장이 이틀씩이나 조선측과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아니하니, 이만주는 의심이
덜컥 나서 퉁맹가를 보내서 독전을 한 모양일세. 우군 부대장은 퉁맹가한테
더디 싸웠다고 반적 소리를 들으니 어째 부아가 나지 않겠나. 퉁맹가의 목을
한칼에 베어 떨어뜨리고 이천 병마를 이끌어 우디거로 달아났다네." "아아,
그랬구나. 그래서 이만주는 게도 구럭도 다 잃은 채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결딴이 나버렸네그려!" 건주위 서민들은 근감스럽게 개선하는 최윤덕 장군의
행곤을 바라보면서 뉘우치고 탄식하는 전후담이 난만했다. 오월 단오가 훨씬
넘어선 따뜻하고 화창한 초여름 날씨였다. 칼을 압록강 푸른 물결에 씻고
청천강 맑은 물에 전진을 털어버린 이만여 명의 개선병들은 호방한 기상으로
승전고 큰북을 울리며 개가를 높이 불러 안주 도절제사 병영으로 들어가
평화로운 속에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최윤덕은
개선병을 안주 병영과 여연, 강계에 분군하여 주둔시킨 후에 곧 장계를 써서
상호군 박호문을 특사로 하여 어전에 올리게 했다. 박호문은 한양 천 리로
말을 달려 정원에 장계를 바쳤다. 정원에서는 건주위를 소탕한 장계를 어전에
바쳤다. 전하는 친히 장계를 뜯어 보셨다. '서북면 도절제사 최윤덕은
돈수재배하옵고 삼가 장계를 탑전에 올리옵니다. 성상의 높으신 덕화와 크나큰
복력으로 오랑캐 건주위의 소굴을 소탕하여 이만주의 항복을 받고, 대군은
개선해 돌어와서 안주 병영과 강계, 여연에 분군시키고 다시 분부를 기다립니다.
추장 이만주는 당연히 참할 것이오나, 호생지덕을 베푸시는 전하의 뜻을 받들어
후일을 경계하고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이번 싸움에 생금한 자가 236명이요,
참수한 자가 170명이요, 마소 170여 필을 얻었습니다. 우리편에서는 전사자가
겨우 4인이옵고, 활에 맞은 자가 20명뿐이올시다. 불행 중 다행이옵고, 모두 다
전하의 홍복이신가 합니다. 자세한 말씀은 상호군 박호문에게 하문하옵소서.
이만 아뢰옵니다." 전하는 크게 기뻤다. 승지에게 분부했다. "국가의 큰
경사다. 상호군 박호문에게 입시를 명해라." 승지는 어명을 받들고 정원에
대기하고 있는 박호문에게 분부를 전했다. 박호문은 승지의 인도를 받아
어전에 곡배를 드리고 부복했다. 전하는 용안에 화사한 웃음을 띠고 찬양하는
말씀을 내린다. "도절제사 최윤덕의 공도 크다마는, 상호군 너의 공도 작다 할
수 없구나! 지난번에는 강변 호장을 귀화시켜서 이번 싸움에 향도가 되게 하고,
또다시 우디거의 딸과 사위를 회유해서 내응이 되게 했으니 너의 슬기가
가상하다. 필연코 이번 싸움에도 많은 지혜를 짜냈으리라." "황공만만하오이다.
작은 지혜를 무슨 슬기라 하오리까. 다만 우디거 딸과 사위를 회유해서 모사
퉁맹가를 죽이게 하고, 우디거로 패해 달아나는 행동을 취해서 왕사의 응징을
수월케 했을 뿐이올시다. 황공만만하오이다." "도절제사의 중간 징계로 너의
행장을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국가를 위하여 더욱 주석의 힘을 다하라!"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옆에 시립한 내관에게 분부했다. "박호문에게 별전에
사찬을 내려 수고한 공로를 위로하라!" 박호문은 황공 감격하여 몸둘 곳을
몰랐다. 숙배를 드려 사은을 올린 후에 내관의 인도로 별전에서 어사주와
사찬을 받는 영광을 입었다. 이튿날 세종전하는 종묘에 친히 배알하여 파저강
야인을 진압한 대첩봉고제를 올리고, 환궁한 후에 근정전에 출어하여 왕세자와
문무백관들의 대첩을 축하하는 하례를 받고, 곧 교를 내려 만백성들에게 야인
평정한 일을 포고했다. 한편 최윤덕은 박호문의 편에 장계를 올려 야인 평정의
정황을 주달한 후에, 한양 본영에서 출전했던 군사들을 거느리고 개선의 길에
올랐다. 연도 수천 리의 개선장병을 환영하는 인파의 환호성은, 이종무가
대마도를 평정하고 돌아올 때의 환호성과 방불했다. 전하는 궁중에 알현
들어온 최윤덕 이하 모든 장성들을 편전 분합밖까지 나가 맞이했다. 만면에
화려한 웃음을 띠고 말씀한다. "국경을 튼튼히 하고 도탄에 빠진 서민들을
구하기 위하여 만리 이역에 깊숙이 들어가 개선을 올리고 돌아온 경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최윤덕 이하 모든 장성들은 일제히 곡배를 드려 사은한 후에
최윤덕이 대표하여 아뢴다. "소신들의 출정은 국가의 간성으로 당연히 할일을
수행한 것뿐이옵니다. 성덕이 높으시와 오랑캐들이 굴복했으니, 모두 다 전하의
홍복이시옵니다." 전하는 곧 승지에게 분부를 내려 대신들을 회동시키고,
선위연하는 잔치를 근정전 안에서 열라 했다. 세자를 위시하여 만조백관들이
근정전으로 모여들었다. 수파련을 꽂아놓은 화려한 사찬상이 외상으로 한 상항
상씩 질서정연하게 들어왔다. 세종전하는 시측해 있는 왕세자에게 분부를
내린다. "국경을 평안케 하고 국가의 위세를 이적들에게 보여 큰 공을 세운
최윤덕 장군에게 네가 친히 술을 한 잔 따라 권하라!" 전무후무한 파격의
은총이었다. 최윤덕은 황공 감격하여 몸둘 곳을 몰랐다. 세자는 부왕전하의
명을 받들어 최윤덕의 앞으로 나가 옥잔에 천일주를 가득 부었다. 최윤덕은
감히 앉아서 술잔을 받을 수 없었다. 일어나 재배하고 서서 술잔을 받는다.
세종전하는 이 모양을 바라보시자, "앉아서 술을 받으라!" 최윤덕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나 최윤덕은 감히 앉을 수 없었다. "사양 말고 앉아서 받으라.
세자의 팔이 괴로울 것이다!" 최윤덕은 하는 수 없었다. 꿇어앉아서 술잔을
받았다. 전하가 신하를 사랑하는 지극한 정리는 이같이 두터웠다. 술이 서너
순배 돈 후에 전하는 친히 한 잔 술을 최윤덕에게 더 권하시고 말씀을 내린다.
"국태민안한 이 좋은 날, 내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내먼저 춤을 출 테니 경들도
따라서 춤을 추자!" 전하는 옥좌에서 일어나 용포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최윤덕 이하 만조백관들도 전하의 춤에 따라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초여름 신록이 우거진 경복궁 대궐 안에서는 임금과 신하의 태평세월을
구가하는 화기 가득 찬 춤이 절정에 올랐다. 다음날 세종전하는 병조판서를
불러 분부를 내렸다. "이번 야인을 응징하러 부정한 군사 중에 전사한 자가
극히 적어 천만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국가의 간성이 되어 전몰한 장병의
외로운 혼을 위로해주어야 한다. 성대하게 초혼제를 지내서 충혼을 위로하라.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찾아서 평생에 의식 걱정이 없도록 시량을 대어주라.
다음 이십 명의 상한 군사에 대하여는 극진한 치료를 베풀어 완인이 되게 하라."
병조판서는 지체없이 어명을 받들었다. 병영 안의 장졸이 도열한 속에서
초혼제를 성대하게 지내는 한편, 전몰한 병졸의 가족을 찾아 구휼하는 은전을
배풀고, 평안감사에게 어명을 전해서 살에 맞아 상한 군사들을 유감없이 치료케
했다. 전하는 밤이 깊건만 침소에 들지 아니했다. 승지를 불러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병조판서 조말생을 명소했다. 대신들은 어명을 받고 급히
모여들었다. "깊은 밤에 경들을 불러서 미안하다. 파저강 야인을 평정한
장성들에게 논공행상을 해야 할 것이다. 나의 독단으로 처결하기 어려워 경들과
의논하려 한 것이다. 경들은 나의 의향을 듣고 불가한 점이 있거든 말하라."
좌의정 맹사성이 아뢴다. "전하께서는 영명하십니다. 뜻하신 대로
처리하옵소서." 세종전하는 껄껄 웃으시고 대답한다. "국가는 만백성의 국가요,
임금 혼자의 국가가 아니다. 나라의 임금 된 자는 다만 만백성을 대신해서
심부름을 할 따름이다. 그리고 경들은 과인을 보필하는 재상이다. 내 어찌
독재를 하랴. 백성들 대신해서 처리하는 일이 민의에 어긋난다면 큰일이다. 나의
의견을 듣고 혹시나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영의정 황희 이하
모든 대신들은 전하의 투철한 말씀에 얼굴빛에 모두 다 엄숙해졌다. 누구 한
사람 감히 대답을 올리지 못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계속한다. "그러면
과인은 경들에게 의견을 물으리라." "학교를 내리시옵소서." 이번엔 도승지
김종서가 아뢴다. 전하는 미소를 띠고 만좌를 둘러보며 말씀한다. "최윤덕으로
우의정을 삼으려 한다. 경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모두들 얼굴에 당황한 빛을
띠었다. 얼른 대답들을 못한다. 세종전하는 여전히 미소를 풍긴 채 대신들을
향하여 말씀한다. "경들이 얼른 찬성하지 아니할 줄 알았다. 그러기에 과인은
경들에게 먼저 물은 것이 아닌가. 독재를 하기 싫다고___. 경들은 최윤덕이
무인이라 해서 얼른 대답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라가 어려울 때는
호반도 정승이 되어서 국가 대사에 참획해야 한다! 그러나 경들이 정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다면 보류하기로 하리라." 대신들은 반대할 도리가 없었다.
일제히, "좋습니다." 했다. 전하의 어인하는 수단은 이같이 높았다. 이튿날
전하는 세자를 위시하여 정승과 판서들을 정전에 모이게 하고 개선장성들의
논공행상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전하가 어느 때나 공식 의식에 세자를 참석케
하는 것은, 장차 앞으로 세자가 왕위에 나가서 정사를 보살필 때 훌륭한 정치를
하도록 교양을 쌓게 하자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심정에서이기도 했다. 최윤덕
이하 모든 출정했던 장성들은 숙배를 드린 후에 어전에 시립했다. 전하는
내관에게 분부한다. "최윤덕 장군 이하 개선공신에게, 상의원에서 가져온 옷한
벌씩을 전하라." 내관은 명을 받자 최장군 이하 모든 공신에게 주단으로 지은
어사의를 한 벌씩 내렸다. 융숭한 대우요, 지극한 영광이었다. 최윤덕 이하
모든 출정공신들은 사은을 드린 후에 차례차례 어사의를 받았다. 도승지
김종서는 어명에 의해서 논공행상하는 승직을 반포했다. "최윤덕을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한다." 호반으로 정승의 대배를 받는 일은 극시 드문 일이었다.
전하가 충신들의 의견을 들어 결정한 일이다. 최윤덕 한 몸의 영광일 뿐이
아니었다. 국가의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우대하는 전하의 깊은 뜻에 신하들은
모두 다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윤덕은 다시 사은숙배를 올리고 교지를
받들었다. 김종서는 계속해서 어명을 전달한다. "중군절제사 이순몽을
판중추원사에, 조전절제사 이징석을 중추원사, 홍사석을 중추원부사로 임명한다.
평안도 관찰사 박안신을 공조우참판에, 상호군 박호문을 통훈대부 봉상시윤으로
삼는다. 최치운을 통훈대부 지승문원사로 승진하고, 최숙손, 최숙정에게
절충사호군의 가자를 내린다." 모든 공신들은 일제히 절을 올리고 교지를
받들었다. 논공행상의 의식이 끝난 후에 전하는 편전에 임어하여,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새로 임명된 우의정 최윤덕, 도승지 김종서를 명소하여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제 서북 일대에 준동하던 야인들을 응징했으니,
행정하는 구역을 확실하게 정해서 자성, 무창, 여연, 우예의 네 고을을 설치하고,
변지의 백성들이 마음놓고 농사에 편안히 종사하도록 하는 안보의 방침을
확립하라." 영의정 황희가 아뢴다. "오랑캐들은 비록 기세가 꺾였다 하나,
기운을 소복하는 날 또다시 못된 짓을 하기 십상팔구올시다. 유능한 장수로
사군을 통솔케하고 튼튼하게 성을 쌓아서 다시 불우의 변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영의정의 의견은 과인이 생각한 바와 같다. 건주위 이만주의
소굴을 평정했다 해서 안심하고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황폐했던 그
지방을 복구하려면, 먼저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짓고 가축을 잘 길러서 안심하고
거주케 해야 한다. 여기에 대한 방책을 강구하라." 새로 우의정에 임명된
최윤덕이 아뢴다. "국가의 일이나 사가의 일이나 교만하고 안일하면 반드시
화가 미치는 법이올시다. 이제 야인을 응징해서 굴복시켰다고 방심을 해서
버려둔다면 해가 도리어 열 배나 클 것입니다. 먼저 궁정과 백성들의 환심을
사야 할 것입니다. 파저강에 종군했던 향리와 공사천인들을 모조리 양민이 되게
면천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농사짓는 백성과 목축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체
호포와 결전을 받지 아니해야 합니다. 그러하고 축성하는 백성들에게는 그냥
부역을 시키지 말고 반드시 노력한 대전을 주도록 하십시오. 또 수자리하는
군사들의 가족들에게는 후한 요차를 주어서 후고의 염려가 없도록 하시옵소서."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다. "좋은 말이다!" 옆에 시측했던 도승지
김종서가 아뢴다. "이러한 모든 일을 수행하려면 만백성이 존경하고 숭배할 수
있는, 청렴결백하고 통솔력이 있는 사람이 사군을 요리해야 합니다. 먼저
인재가 필요합니다." 전하는 미연히 웃으며 대답한다. "도승지의 말이 옳다.
과인 역시 그리 생각한다. 첫째로 서북면 일대에서 고생하는 백성들은 지도하는
그 사람을 믿어서 의지해야 하고, 변지 밖에 있는 오랑캐 무리가 두려워하는
인물이라야 능히 정토한 후의 야인의 부동을 진정시킬 것이다. 우의정 최윤덕은
수고스럽지만 다시 한 번 서북면을 관장해 다스리라." 영의정 황희 이하 모든
신하들이 일제히 찬성하는 뜻을 표한다. "명철하신 분부올시다. 다시 더 누구를
몰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받는다. "과인이 최윤덕으로
우의정을 삼은 뜻은, 국가의 중대한 이 일을 위임하려 한 것이다. 경은 사양하지
말라!" 세종전하는 최윤덕을 향하여 은근한 분부를 내린다. 최윤덕이 국궁하고
아뢴다. "하잘것없는 신에게 다시 중책을 맡기시니 어찌 감히 사양하오리까.
힘을 다하여 변지의 백성들을 평안케 하겠습니다." 전하는 도승지 김종서에게
다시 분부한다. "최윤덕은 이제 정승인 대신이다. 대신에게 도절제사의 직명을
주어서는 아니된다. 평안도 도안무찰리사의 명칭을 주라." 도승지 김종서는
명을 받들었다. 이윽고 정원에서 승지가 교지를 써서 받들고 들어왔다. 전하는
친히 보신 후에 우의정 최윤덕에게 교지를 내렸다. 최윤덕은 두 번 절하고
도안무찰리사의 교지를 받들었다. "힘을 다하여 변방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전하의 용안에 믿음직한 미소가 떠돌았다.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세종대왕 (0) | 2023.05.25 |
|---|---|
| 세종대왕 [박종화] 10 (0) | 2023.05.25 |
| 세종대왕 [박종화] 08 (0) | 2023.05.25 |
| 세종대왕 [박종화] 04 (0) | 2023.05.25 |
| 세종대왕 [박종화] 03 (0) | 2023.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