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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세종대왕 [박종화] 08

by Casey,Riley 2023.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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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 8권
박종화


    영화는 슬퍼라
  상왕 태종이 친국령을 내린 날 좌의정 박은은 상왕께 알현을 청했다.
  "급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명나라에 사은사를 보내시는데 한장수를  임명하신 일이 있습니다. 아직 떠나
지 아니했으니 영의정 심온으로 바꾸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명나라에서 태종이 세종한테 선위한  것을 인정했다 해서 사은사를 보내게 된 
것이다.
  상왕은 박은의 말을 듣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무슨 연유로 바꾸라 하는가?"
  "병조의 옥사가 일어난다면 자연 전임 병조장관이었던 심온에게 누가 미칠  듯
합니다. 일국의 대신인 영의정을 대우하는 예가 아닐  듯합니다. 잠시 몸을 피하
여 명나라로 가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리석은 의견을 감히 아뢰옵니다."
  상왕은 박은의 말을 듣자 그럴 듯하게   생각했다. 심온은 며느님 되는 왕비의 
아버지다. 옥사를 다스리는데   두 가지로 난처한   일이 있다. 심온은 영의정이
다. 아무리 실권 없는 영의정이라 하나 죄수를  다스리는데 영의정의  의견을 묻
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는  전임 병조판서다.   심온이 병조판서로 있을 때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옥사가 전복되어 성립되지 않기가 십상팔구다.  심온
이 서울  안에 있는 것이 첫째로  마땅치 않은 일이요, 옥사가  성립되어 죄상이  
판명되는 날 만약 심온이 개재하게 된다면  왕비의 아버지요, 또다시 일인지하에  
만인지상인  영의정을 옥에 내려  국문하기 어려운 일이 둘째 이유다. 
  상왕은 한동안 생각한  후에 좌의정 박은의 말을 좇았다. 이심전심  뜻이 통했
다.
  "사은사를 바꾸기로 합시다."
  상왕은 말씀을 내린 후에 곧 내관을 불러서 정원 승지의 입내를 명했다. 
  이윽고 승지가 추창해 부복했다. 
  "무슨 분부가 계시오니까?" 
  "사은사로 임명했던 한장수를  대신해서 영의정 심온에게 사은사의 직책을  맡
게 하고 불일로 곧 채행해서 떠나게 하라.   상감한테도 이일을 알리고 전송하는 
데 극히 우대해서 떠나게 하라."
  "봉행하겠습니다." 
  승지는 명을 받들고 경복궁으로 들어가  상감 세종께 아뢴 후에 곧 영의정 심
온의 집으로 나가 사은사로 임명한 첩지를 전했다.  
  까닭을 모르는 심온의  집에서는 명나라 사신이 되어  가는 행차 준비에 바빴
다. 심온은 내심에   약간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병조에 옥사가   생긴 일이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자기가  없더라도 무사하게  타첩이  되려니 
하고  생각했다. 곧  자비를 차려서 경복궁에 사은을  한  후에 다시 수강궁으로 
들어가 고별하는 숙배를 드렸다. 
  상왕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우악한 말씀을 내린다. 
  "이번에 경으로  사은사의 중임을 맡긴 것은  신왕의 즉위를 인정한  명황제에 
대한 인사인지라 경 같은 일급대신이 가야만 저편의 환심을 사겠기에 특명을 내
린 것이니, 국가의 일을 위하여 원로에 수고를 해주어야 하겠소."
  "힘을 다하여 성지를 받들겠습니다." 
  심온은 감읍하며 물러나왔다.  심온은 수강궁과   경북궁 두 분 전하께 하직숙
배를 드린 후 왕비전에 고별승후를 하러 들어갔다. 
  왕후 심씨는 이때  보령이 24세다.  대왕보다 두 해가  위다.  그러나 벌써 세 
분 아기씨의 어머니다.   세자빈이 되기 이전 18세  문종이  될 큰아드님을 낳았
고 21세  때는 세조가 될 수양대군을  생산했고, 올해 또 연년생으로  뒤에 글씨 
잘 쓰기로 이름이 높았던 안평대군 용을 낳았다. 
  요사이 수물네 살쯤 된 여자라면  아직도 완성된 한 사람의 여인 구실을 하기 
어려운 나이지만 지난날의 한국 여인들은 스물네 살이면 완전히 한 사람의 여자 
구실을 했다.
  더구나 심왕후는 영의정까지 지낸 심덕부의 손녀다.    자연 가풍이 좋고 교양
이 풍부한 가정 교훈을 받았다.  침선방적에  막힐 것이 없고 사서삼경을 서렵하
기도 했다. 
  뿐만 아니었다.  용모는  십오야 밝은 달밤 달덩이같이 덕성스럽고, 온후 겸허
한 마음씨는 유한하고 정정했다.   웃어른을 받으는   데  극진한 정성을 다하고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는  데 너그럽고 두터웠다.   만사람의 찬양과  존경을 받을 
만한 젊은 왕후다. 
  친정 아버지 영의정이 돌연  사은사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로 나가는 고별승후
를 하기  위하여 알현을 청한다는 내관의  아뢰는 말씀을  상궁을  통하여 듣자, 
심왕후는 곧 인견하기를 허락했다. 
  심온은 상궁에게 인도되어 장지문 밖에 부복했다.
  심왕후는 달덩이 같은  환한  얼굴에 반가운 웃음을  풍기며 보료에서 일어나 
아버지 영의정을 맞이했다. 
  심온은 아뢴다. 
  "신은 이번에   상왕전하의 분부를    받자와 사은사의   임무를 띠고 중국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삼가 고별문후를 드리러 들어왔습니다." 
  심왕후는 두 손길을 마주잡고 서서 미소를 지으며 옹용한 태도로 아버지 왕의
정에게 말씀을 내린다.  
  "이번에 또 중책을 맡으시고   명나라로 가시게 되니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
로 염려되는 바 많소이다.   더구나 일기  차차 찬  계절이온데 노래에 몸조심하
시어 안강하게 돌아오시기 축원합니다."
  "천은이 감격하옵니다." 
  심온은 여전히 부복한 채 고개를 들고 아뢴다. 
  젊은  왕후는 두 손을 마주잡은 채 단정히 서서 다시 말씀을 내린다. 
  "소녀 생각하기에 아버님께오서는  영광이 너구나 괴해서 항상  염려되옵니다.  
소녀 전하의 배필이 된 탓으로 아버님께오서 부원군이 되신 일은 당연하다 하겠
으나 왕은이 망극하시와 아버님께 또다시  일인 지하에 만인지상인 영의정의 대
명을 내리시고 이번에  또 사은사의 중임을 맡기시니, 너무나 영화가  겹치고 겹
쳐서 과중하옵니다.   원로에 왕반하시는 데 건강에  조심도  하시려니와 부귀영
화가 너무나 극하오면 시기하는 사람이 많사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극히 조
심하옵소서."
  낭랑하게 내리는 심왕후의 말소리는  슬기로운 예지를 싸안은 백옥 구슬이 금
반에 구르는 듯했다.   심온은 따님인  왕후의 영롱한 말씀에  마음 속으로 감탄
했다.  퍼뜩  머릿속에 좌의정 박은과 병조 탄핵의 일로 다투던 일이 떠올랐다. 
  병조참판 강상인 이하 병조의 관원들이 의금부에  하옥된 일도 머리에 떠올랐
다.   사은사로 내정되었던 한장수를  명나라에 보내지 아니하고  돌연 영의정인 
자기로 바꾼 일도 어쩐지 달갑지 아니한 마음에 걸리는 일이다. 
  이러한 외부의 정치적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하는 젊은 왕비의 슬기로운 말씀
은 노련한 심온의 가슴에 폭폭 배어 들어가지 아니할 수 없었다. 
  "온당하옵신 분부올시다.  벼슬이 높고   영화가 한몸에 넘칠수록 항상 두렵고 
조심스럽습니다.  더구나, 마마의  생정아비라는  이 일로 인하여  신은 엷은 얼
음장을  밟고 강을 건너듯  조심조심 치세를 합니다.  내리신 말씀, 삼가 폐부에 
새겨두겠습니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 할말은   태산 같았으나 지엄한 궁중 지밑에는 엄한 규율
이 있었다.  더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심부원군은 심왕후께 배를 올리고 물러난다.
  "안녕히 몸조심하시고 돌아오십쇼."
  때는 9월 초순, 소슬한   늦가을 바람이 서리를 재초하는 계절이었다.  수강궁 
상왕전하는 경복궁에서 아침 문안 들어온 세종대왕께 분부를 내렸다.
  "날이 제법 쓸쓸하구려.  부원군 심온이 길을 떠난다고 내게 숙배를 드리고 물
러갔는데, 행장을 차려서 떠났는가?"
  "내일쯤 떠난다 합니다."
  대왕은 시립해서 대답했다.
  "갔다가 온다면  적어도 두  달은 걸릴 거야.   동지 섣달  찬 겨울이  되겠지.   
늙은  사람이 감기들면 큰일이나 전하는 특별히 사은사에게 잘배자와 모관을 내
려서 중신을 대접하는 예를 소홀하게 하지 말도록 하오."
  "하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세종은 상왕의 명을 받들고 곧 경복궁으로  환어하자, 중관을 심부원군 집으로 
보내서 상왕전하의 특명이라 이르고 초구와 모관을 내렸다.
  실로 왕은은 바다보다도  깊었다.  심온은 눈물을 머금고 잘배자와  모관을 받
았다.
  마음으로  결초보은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   다음날 떠나는  날이 되었다.      
상왕전하는 또다시 내관을 경복궁에 보내서 전갈을 했다.
  "오늘은 심부원군이 떠나는 날이다.  나도 내관을 모화관까지 보내서 심부원군
을 전송할 테다.  전하와 중전도 특사를  보내서 원로에 평안히 다녀오라고 전송
하라."
  모화관 심온이 떠나는  곳에는 상왕의 특명으로  백관들은 말할 것 없고, 상왕
전하와 왕전하, 왕비전하의  특사가 나와서  전별했다.   심온은 또 한  번 감읍
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상왕 태종의 정치적 수단은 이같이 높았다.
  심온이 사은사가 되어 천여 리 의주 길을  거쳐 압록강을 건넜을 때, 금부에서
는 병조의 모든 직원을  대여부도로 모는 옥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친국령을 내린  옥사다.   모든 죄수의  공초를  상왕이   친히 수강궁 안에서 
받았다. 이 까닭에  왕전하인 세종은 무슨 옥사가 어떻게 벌어졌는지  내용을 자
세히 몰랐다.
  먼저 병조참판 강상인이 친국청으로 잡혀 들어갔다.   상왕전하는 수강궁 정전
에 옥교를 타고 친림해 앉았고, 월대 아래에는  금부 당상들이 좌기를 차리고 있
었다.
  뜰 아래는 형틀이 놓여 있고 주장, 곤장을  든 금부 나졸과 집장사령들을 위시
하여 금도끼, 은도끼와 기치창검을 든  무사들이 위엄을 떨쳐 늘어섰다.  
  현직  병조참판이건만 강상인은 죄인으로 지목을 받은  사람이었다.   갓과 탕
건을 벗기고 맨상투 바람으로 뜰에 꿇려 있었다.  
  주심인 판의금이 먼저 강상인을 향하여 묻는다.
  "그대는 아경 지위에 있는   국가의 중신이지만 이네 죄인의 의심을  받았으니 
당연히 죄수로 대접할 것이다.  조금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라."
  강상인은 현직인 아경을 별안간 역적이라 해서 친국명령을 내리고 죄상을  심
문한다 하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했다.  더구나   상왕전하가 친국
령까지 내렸으니 기가 막히고 미칠 지경이었다.   멍하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이다.
  금부 당상은 소리를 높여 묻기를 시작한다.
  "너는, 이놈, 네 죄상을 네가 알리라.  어찌하여 내역부도의 죄를 지었느냐?"
  '대역부도'란 소리를 듣자 강상인은 기가 막혔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소.   대역부도란 말은 곧 역적질을 했다는 말인데,  제
가 일개 병조참판의 힘으로 어떻게 역적모의를 할  수 있었겠소.  천부당 만부당
한 문초요."
  "잔말 말고 이실직고하렷다.  횡설수설하면 장살을 면치 못하리라."
  "천위지엄하신 어전에서 제 어찌 감히   횡설수설을 하오리까.  추호도 불충한 
일이나 불충한 말을 한  일이 없소이다.   밝고 밝은  하늘이 소스하게 굽어보십
니다.  저를  보고 대역부도라고 지목하시니 죄목을 말씀해주시오."
  "네가 천위지엄하신 앞에 빨리   죄상을 실토하지 아니하니 내가 대신  네  죄
상을  밝여주리라.   상왕전하께서 금상전하께 선위하실 때 모든  행정은 금상이 
재결하려니와 단지 군사에 대해서는  상왕께서 친히  재가해서 결정하시겠다 했
는데, 너희들은 어찌해서  병조판서 이하  참판, 참의와 미관말직인   정랑, 좌랑
에 이르기까지  한데 모의를  하고 상왕전하께는 재결을 받지  아니하고 상감전
하께만 품한 후에 너희들 맘대로  처결해버렸느냐.   이것은 곧 상왕전하를 무시
한 일이다.  대역부도의 짓이 아니고 무엇이냐!"
  판의금은 추상같이 얼러댔다.   
  병조참판 강상인은 기가 막혔다. 군사 일에 대해서   상왕의 재가를 받지 아니
하고 병조에서 마음대로   처결한 일은 추호도 없었다.  고개를  번쩍 들고 대답
한다.
  "절대로 군사면에 대한 일을 병조에서  마음대로 처리한 일은 없소이다.  현임 
병조판서는 박습이지만, 전임 병조판서는 영의정이요, 금상전하의 국구인 심온입
니다.  심부원군은 국가의 국척으로  충성이 극한 근신하는  분입니다.  어찌 이
러한 분이 금상전하께만 재가를 맡고  상왕전하께는 품달하지 아니했을 리 만무
합니다.   그분 밑에 있는  참판, 참의나 정랑과 좌랑이  감히 일을 소홀하게 했
을 리 있겠습니까.   만약에  상왕전하께 재가를 받지 않고  처리한 일이 있다면 
어느 날 어느 시에 무슨  일을 재가받지 아니하고 처리했는지 일을 일일이 들어
서 증거를 보여주시오."
  재가받지 아니하고 병조에서   맘대로 처결한 증거를 모여달라는 말에 판의금
의 말문이 잠깐 막혔다.
  전사에 임어한 상왕의 봉안이 노기를 띠어 치솟았다. 
  안정에 열기를 뽐았다.
  "폼을 했어야 문서가 증거가 남아  있지, 애당초 품을 하지 아니했는에  '비망
기'에 무슨 증거가 남아 있겠느냐. 무고로다. 바른 말이 토설되도록  엄하게 다스
리라."
  상왕전하의 호령이 추상같이 떨어졌다.  
  판의금은 어명을 받아들였다. 
  "죄인을 형틀에 매달고 엄치하랍신다.  시각을 지체치 말고 거행하라."
  금부 니졸들은 비호처럼  달려들어 병조참판 강상인을 형틀 위에 달았다.   집
장사령들이 주장을 들고   좌우편으로 갈라섰다.  둔부가 드러나면서   주장대로 
허공을 박차면서 세차게 떨어졌다.  병조참판은 몸부림을 쳤다.
  "되게 치라!"
  엄한 호령이 전상에서 다시 떨어졌다.  매는  강상인의 애절한 외마디 소리 속
에 십여 개가 떨어졌다.  볼기살이 흩어졌다.
  "매를 그치고 다시 물어라."
  전상에서 또다시 옥음이 내렸다.
  판의금은 강상인을 묶은 채 다시 묻는다. 
  "너 이놈, 그래도 대지 못하겠느냐.  상왕전하께서 친국을 하시는데, 증거를 대
라 하니 괘씸하기 짝 없는 놈이다. 다리뼈가 부러지기 전에 바른 대로 토설하라.  
다시 횡설수설한다면 장살을 면치 못하리라." 
  강상인은 아픔을  참지 못했다.   더구나 장살시킨다는 말에  겁이 더럭 났다.   
벌벌 떨면서 대답한다.
  "군국대사에 대하여 상왕전에 재가를   맡지 않고 처결환 일은 한 번도   없었
습니다마는 병조의 관원들이 이 일에 대하여 공론들을 한 일이 있소. "
  당하에 있는 판의금과 전사에 임어한 상왕의 귀가 번쩍했다.
  판의금은 주먹으로 상을 치며 묻는다.  전상에 임어한 상왕도 귀를 기울였다.
  "무어야, 병조의 관원들이 모여서 공론을 했다? 무슨 공론을 했단 말이냐?"
  "일을 품해서 처리하는  데  천천히 할 일도 시각을  지체치 않고 빨리  처결
할  일도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오랑캐 군사가 쳐들어 온다고 경보를 가지
고 파발말이  급히 달려들어왔을  때 한편으로 상감께 주달해서 처분을 묻고 또
다시 상왕전에 아뢰어서 결재를 얻은 후에 대비책을 세운다면   적병은 벌써 변
방을 함락했을 테니 이 일이  장차 어찌 되겠소? 우왕좌왕하다가 일은  다 그르
치고 말것이니 딱한 일이 아니냐고 탄식들을 한 일은 있소."
  판의금은 호통을 치면서 병조참판 강상인을 꾸짖는다.
  "일이  급하게 되었다면  군사권에  대해서는 상왕께서  결정하시겠다  했으니    
상왕전하께만 아뢰어 빨리 처결하면 그만 아니냐.  쓸데없는 논법이다."
  강상인은 고개를 번쩍 들고 대답했다.
  "판의금도 이 아라의 신자십니다.   말이 그렇지 그 자리에 앉아보시오.     엄
연히 주상전하께서 계신데 비록  상왕전하께서 군사권에 대해서는 당신이  처결
하시겠다 했으나, 어찌   신자된 도리에 주상전하께는 알리지   아니하고 상왕전
하께만 아뢴단  말씀요. 그렇다면 적병이 쳐들어와도    나라의 왕이신 주상전하
는 까맣게  모르고  앉아 계셔도 좋단 말씀요.  그러하니  간소하게 한 군데서만  
재가를 해주시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공론들을 한 일이 있을 뿐이요."
  판의금은 신자를 들고  나오는 바람에 말분이 막혀  더 묻지도 못하고 멍하고 
말았다.
  전상에 임어한 상왕은 강상인의 대답하는 말을 듣자, 불쾌하기 짝 없었다.
결재하기가 번거롭다는 말은 곧  상왕 자신에게 행정뿐 아니라 군사권도 상관하
지 말고 상감인 세종께 맡기라는 말과 같았다.  노여운 생각을 금할 길 없었다.
  판의금에게 분부를 내린다.
  "공론했다는 놈들이 누구누군가, 이름을 대어보라 하라."
  상왕의 분부를 받은 판의금은 음성을 돋우어 강상인에게 묻는다.
  "두 곳으로 다니면서 결재를 받기가 번거롭다고 말한 자들이 누구누구냐?"
  강상인은 소인스럽게 누구누구라고 이름을 대기 싫었다.
  "병조의 관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같이 한뜻을 가졌습니다."
  "너도 그런 뜻을 가졌느냐?"
  "뜻만 가진 것이 아니라 한 군데서 결재를 해야 일이 속하게 되겠다고  말까지 
했소."
  "너 이외에 누구누구냐? 어명이시다, 빨리 이름을 대어라."
  "병조 관원은  모두  다 그런 생각을  가졌다고 말하였소.  더 물을 것이 없지  
않소. 우리는  나라일을 위하여 전일하게 충성을  다한 것뿐 아무 다른  뜻이 없
소."
  전상에서 상왕의 열화같이 진노한 음성이 또 떨어진다.
  "저놈의 입에서 공모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도록 되게 치라!"
  주장, 곤장을 든 나졸들은 다시 비호처럼  달려들어 강상인의 흩어진 볼기살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형틀 위에 유혈이 낭자하게 흘렀다.
  매는 또다시 십 도가 넘었다.
  강상인은 아픔을 참을 길 없었다.  소리쳐 고한다.
  "이름들을 대오리다."
  매질은 그쳐졌다.  판의금이 묻는다.
  "그럼, 함께 공론했다는 사람들의 이름을 숨김 없이 대어라."
  강상인은 불기를 시작한다.
  "병조판서 박습, 참의 이각,  정랑  김자온, 이안유, 양여공, 좌랑  송을개, 이복
숙, 채지지 등이 다 불평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병조에  있는 관원    전부가 상왕께 군사에 대한  일을 보고 하지   
않았단 말이로구나!"
  판의금은 또다시 뒤집어씌우면서 을러댄다.
  "보고하지 아니한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일이 있을  때마다 두 분 전하께 
다 아뢰어 재가를 맡았습니다.  다만 일이 급할   때 두 곳으로 뛰어다니며 재가
를 맡아야만 하니 번거로울 뿐  아니라 정말 큰일이 벌어진다면 탈이니 한 군데
서만 결재를 맡도록 해야겠다고 말한 것뿐이오."
  전상에서 병조참판 강상인의   공초를 귀기울여 듣던 상왕은 판의금에게 분부
를  내린다.
  "공론한 무리 중에 전임 병조판서는 끼여 있지 아니했나 물어보아라."
  판의금은 상왕의 하문을 강상인한테 전했다.
  강상인은 고개를 번쩍 들고 반문한다.
  "전임으로 있던 병조판서가  하도 많은데 막연하게 누구라고  대답할 수 없소.  
명확하게 이름을 대어주오."
  전상에서 상왕의 벼락 불덩이 같은 노한 목소리가 떨어진다.
  "현임 바로 직전의 판서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놈 못알아듣겠느냐? 심
온이 말이다!"
  "예, 현임 영의정 심온이 말입니까? 심온은   병조판서로 있을 때 뿐아니라 요
사이 영의정이 된 후에도 저희들과 함께 개탄을  하고 있었습니다.  국방에 대한 
보고와 대책을 결정하는 데는 한 군데서 처리해야만 한다고 항상 주장했소이다."
  강상인의 공초를 받자 상왕의 얼굴빛은 주톳빛으로 변했다.
  "심온이 영의정이 된  후에도 그따위 언행을  취했더란 말이냐.   금부 서리는 
일일이 죄인의 공초를 빠짐없이  기록해두라.  그리고 이놈들은 대역부도다.  능
지처참에  처해야 할 것이다.   의금부  당상들과 판의금은 아까 죄인의  입으로 
토설한 현임 병조판서 박습 이하 모든 병조 관원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하옥하고 
다름 내 명령을 받으라!"
  상왕은 친국을 마치고 노기가 등등하여 수강궁으로 돌아갔다.
  상왕인 태종은 자부심이 강했다.  정치와   국방을 자기만큼 처리할 사람이 없
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자였던  아우 방석을 죽여서까지  군사혁명으로 왕위를 
차지했던 분이었다.   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군사권은 자기 자신의  한평생 동
안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싶지 아니했다.  이 위대한 군사권을   내놓는 날
은 자기는 한  개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기 때문에   아드님 
세종에게 선위하는  날, 만조백관들을 앞에 불러놓고, 
  '다른 행정은 다 신왕에게 맡길 수 있으나 다만 군사권만은 과인이 장악한다.'
  선포했다.
  뿐만 아니었다.   그는  의구심이 너무나  지나치도록 많았다.  외척을 지극히    
두려워했다.  그 실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태종은 처음에 양녕을  세다로 봉했을 때 세자의 외숙이요, 자신의  처남인 정
란좌익공신 민무질, 민무구 형제를  모조리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그리해서 왕
후 민씨의  가슴에  일평생 원한의 못을 박아주었다.  이것이  기틀이 되어 양녕
은 폐세자의 행동을 자취했던 것이다.
  이같은 태종에게 대사헌 허지는 병조의 장관인 판서 이하 모든 관원들이 상왕
전하의 명령을 어기고 군사에 대한 일을 보고하지 아니했다고 탄핵했다.
  태종은 불같이 노했다.  이리하여 신왕 세종이  즉위한 벽두에 큰 옥사가 벌어
진 것이다.   그러지 아니해도 태종은 며느님 심씨로 세종왕후를  봉해서 공비의 
칭호를 내린 후에, 그의 친정 아버지 심온의 병조판서의 직위를 내놓게 하고, 거
죽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취해서 부원군 겸 영의정의  자리에 앉게 했다.  왕후의 
아버지에게 삼군을 통솔하는 병조판서의 직권을 맡기기 싫었던 때문이다.
  한편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인   영의정의  대명을 받았다고  기뻐했던 심온은    
허수아비의 대배를 받았다.   정승의 실권은 함빡 태종이 신임하는  좌의정 박은
에게 있었다.
  이리해서 대사헌 허지의 탄핵  상소가 들어간 후에 좌의정 박은의 방약무인한 
태도에 노한 심온은,
  '영의정의 자리를 내놓고 좌의정이 되겠다.'
  하고 한탄을 했었다.
  좌의정 박은은 심온의 말을  꼬부장하게 생각하고 상왕인 태종께 좌의정의 사
표를 내겠다고 아뢰기까지 했던 것이다.
  상왕은 심온을 병조옥사에  관련시켜서 의심했다.  전임  병조판서였던 때문이
다.  심온이 나라 안에 있으면 병조의 의옥사건이 흐지부지될 것을 염려했다.
  상왕은 돌연 중국으로   보낼 사은사로 내정했던 한장수를 체임시키고 심온으
로  사은사를 임명해서 융숭한 대접으로 잘배자와 모관까지 내리고 잘 다녀오라
고 칙사를 모화관까지 보내어 전송했던 것이다.
  친국을 마치고 수강궁으로 환어한 상왕은 좌의정 박은에게 입시를 명했다.
  박은은 소명을 받고 상왕전에 입대했다.
  상왕은 엄숙한 얼굴로 좌의정 박은에게 묻는다.
  "병조에서 과인의 명을 거역하고, 군국대사에   대하여 공론이 분분한 중에 또
다시 보고를 태만했으니 대역부도의 일이오.  다른 일은   참을 수 있으나 이 일
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소.  오늘  과인이 친국을  하여 그들의  죄상이 역력히 
드러났으므로 대역의 죄로 처단하려 하니, 경의 의햐은 어떠하오?"
  박은은 황공한 얼굴빛을 지으며 부복해 아뢴다.
  "상왕전하의 분부를 거역한 죄는 태산보다도  더 중하옵니다.  더구나 이 일은 
군국대사에 관한 일이오니   단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엄벌에   처하시는 일
이 타당한 줄로 아뢰오."
  상왕은 고개를 끄덕여 점두하며, 다시 묻는다.
  "병조의 말단 관원들은 당연히  참형에  처하려니와 판서와 참판은 정경과  아
경들, 지위 높은 사람이라 말단 관원과 함께 극형에  처하기 극히 곤한하오.  경
의 의향은 어떠하오?"
  상왕은 짐짓 좌의정의 의향을 떠보았다.
  박은은 정색하고 아뢴다.
  "군국대사를 품하지 아니한  일은 말단 관원보다 장관의  허물이 더 크옵니다.  
대역의 죄로 처리하신다면 당연히 해조의 장관이 당해야 합니다."
  상왕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현임 병조판서 박습은   모든 병조의 관원과 함께 대역부도의  죄로  
 처결하려니와 전임 병조판서로 이에 관련이 되었다 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박은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고 반문해 아뢴다.
  "전임 병조판서가 누구오리까?"
  "영의정 심온이 말이오.   두 군데서 재가를 맡는 것이  부당하다 하고 공론한 
것은 전임 병조판서 심온 때부터 논란이 되었다 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소.  뿐
만 아니라 영의정의 대배를   받은 후에도 이와 같은  말을 방언했다 하니 주동
자는  심온이 분명하오.  
제 감히 국구의 몸으로 근신하는  태도가 없을 뿐 아니라 현직 영상으로서 아름
답지 못한 마음을 품고 조정의 물의를 일으켰으니 대역부도의 죄명을 도망치 못
할 것이오.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로 곧 정형에 처하게 하오."
  박은은 심온을 구원하는 말을 내지 아니했다.
  "지당하신 처분이십니다."
  겨우 한 마디를 아뢰고 부복해 있었다.
  "심온이 만약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조정에서 잡는다는 소문이 퍼지면  도망
갈 우려가 있으니 절대로 비밀에 부치도록 하오."
  박은은 '예' 하고 대답했다.
  국구 심온에게 사사를 내릴 것을  이미 마음 속에 결정한 상왕의 눈에는 어렴
풋 유순하고 공손한 며느님 공비의 아리잠직하고 착한 얼굴이 떠올랐다.
  '제 아비 어찌 감히  역적질을 모의했으리까.  원통한 죄명이옵니다.   다시 한  
번 살펴주옵소서.'
  어질고 맑은 눈매네 나타나는 며느님 왕비의 가련한 환상을 얼른 쓰러뜨려 버
렸다.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한 번 마을을 굳혔다.
  "좌의정!"
  큰 소리로 좌의정 박은을 불렀다.
  "예."
  박은이 황망하게 대답했다.
  "심온이 내 명령을 거역하고 군국대사를 나에게 보고하지 아니한 죄를  경복궁
에 들어가 상감에게 말하오.   그리고 대역부도로 몰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대
로 곧 사사를 내리기로 결정했다고 이르오."
  상왕은 말을 마치자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하교대로 봉행하겠습니다."
  박은은 상왕께 배를 드리고 추창해 물러갔다.    곧 평교자를 몰아 경복궁을로 
들어가 상감께 알현을 청했다.
  젊은 상감은 때마침 편전에서 '춘추좌전'을 탐독하고   있다가 내관을  통하여 
좌의정이 뵙기를 청한다는 말을 듣자 곧 편전으로 들 것을 허락했다.
  박은이 입대하자 젊은 상감은 읽던 책을 덮으며 미소를 지어 신하를 대했다.
  "좌상이 어찌 들어왔소.  무슨 좋은 일이 있소?"
  '무슨 좋은 일이  있소?'    하고 하문하시는 젊은 전하의  말씀을 듣자, 박은
의 가슴은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황공무지하오이다.  상왕전하의  하교를  받들어 좋지 아니한  말씀을 아뢰러 
왔습니다."
  젊은 상감의 용안이 잠깐 흐려졌다.
  "그저 황공하옵니다."
  좌의정 박은은 얼른 사유를 아뢰지 못한다.
  인자하고 도량 넓은 상감이지만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좌상은 말을 하오.  무엇이 황공하고, 무엇이 좋지 않은 일이란 말요."
  전하의 음성이 약간 높았다.  박은은 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쭈크렸다.
  "상왕전하께서 전하께  선위하실   때 만조백관을 부르시어 앞에 앉혀  놓으시
고  다른 행정은 다  새 상감이 맡아서 처리하겠지만 다만 군국기무에 대해서는 
상왕께서 친히 처리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렇지, 다 아는 일이지."
  "그러한데 병조에서 상왕전하께 보고를 태만히 해서 지금 의금부에 판서  이하
가 모두 다 하옥이 되고, 오늘은 상왕전하께오서 친국까지 하셨습니다."
  "그 일은 나도 보고를 받아 짐작하고 있소."
  젊은 전하는 용안에 화기를 잃지 않고 말씀했다.

    전하의 오뇌
  박은은 전하의 용안을 곁눈질해 살피며 다시 아뢴다.
  "신은 몸둘 바를  모르며 감히 아뢰옵니다.  오늘 알현을  청하온 것은 소신의 
뜻이 아니오라, 상왕전하의 전교를 받들어 아뢰옵니다."
  전하의 용안은 긴장된 빛을 띠었다.
  "상왕전하께서 무슨 전교를 과인에게 내리셨소?"
  "이번 병조옥사에 대하여 상왕전하께오서는 죄인들을 친국하시와 공초를  받으
신 후에 병조판서 박습 이하  모든 병조 관원들을 대역의 죄로 결정하시고 정형
에 처하여  북음을 내리라 하셨습니다.   그리하옵고 전임  병조판서였던 심온도 
주모자의 우두머리가 되니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로 사사를 내리라 하셨습니
다.   그리하옵고  이 뜻을 전하께 아뢰라는 하교가 계시와  황공하오나 감히 아
뢰옵니다."
  젊은 전하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심온에게도 죽음을 내리라 했다는 한 
마디는 전하의  가슴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전하의  용안이 잠깐 흐려졌다.   
순간 전하는 젊은 용안에 태연한 빛을 띠고 장중한 옥음을 내렸다.
  "심온이 비록 국구의  신분을 가졌다 하나  죄가 있다면  도망치 못할 것이오.  
상왕전하의 분부를 받드는 것이 당연하오."
  젊은 전하는 말씀을 마치고 무겁게 입술을 닫았다.
  놀라는 빛이 없이  태연하게 상왕의 뜻을   받아들이는 전하의 장중한 태도를 
뵙자, 박은은 더 아뢸 길이 없었다.   마음 한편  구석에 불안한 생각을 품은 채 
몸을 굽혀 아뢴다.
  "상왕전하의 하교를 품달했사오니 소신은 물러가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여 말없이 대답했다.
  박은이 물러간 후에 전하는 좌우 시자를 물리치고,  고요히 눈을 감고 명상 속
에 빠졌다.
  병조에 옥사가 일어나  친국까지 하신 일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
러나 이 옥사의  불똥이 왕비의 아버지 심온에게까지  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젊은 전하 자신이 알기에는  군국기무에 대한 일은 상왕전하께서 선위하실 때 
선포하신 대로  병조에서는 일일이 수강궁에  아뢰었다.  전하가  상왕께 아뢰어 
재가를 맡은 일을  소상하게 아는 것은   병조에서는 반드시 상왕전하의 재가를 
맡은 후에 전하 자신께 또 한 번 아뢰고 일을 처결했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상왕전하께서 군사에 대한   일은 전결하신다 했으나, 병조에서는 
신자된 도리에 금상전하인 당신에게 아뢰지  아니할 도리가 없어서 경복궁에 또 
한 번 재가를 청하는 것이다.  당연하고 또 타당한 일이었다.
  이리해서 병조의 사무는 번거로웠다.  때문에   말단 관원들이 두 곳으로 다니
면서 번거롭다고 한 소리도  전하의 귀에까지 들어온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러한 일은 말단 관리들에게 견책 정도로 꾸짖을  일이요, 정경 이하 모조리 대역
보도로 처단하기는 너무나 심한 일이다.
  더구나 현임 병판  이외에  전임 병판이었던  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주모자로 
몰아 죽인다는 일은 전하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젊은 전하는 다시 명상 속에 잠긴다.    왕비의 아버지 심온이 역적이 될 사람
은 절대로 아니다.
  심온이 무엇이 부족해서 역적질을 하겠는가.   그의 아버지는 정묘조때 좌의정
을 지낸 청성군 심덕부요, 자기 자신은 친정  아버지로  부원군의 칭호를 받으면
서 불과 며칠 전에는 상왕전하의 은총을 받아  영의정의 대명까지 받았을 뿐 아
니라 지금은 또 상왕전하의 특지를  받들어 사은의 큰 임무를 띠고 명나라로 간 
사람이다.
  무엇이 부족해서 심온이 대역부도의 역적질을 했을   것인가.  어느 모로 보나 
천부당 만부당한 말이다.
  그러나 역적으로 한번 몰린 이상 심온을 구할 도리는 없다.
  당신은 온 나라  사람이 받드는 금상전하다.  그러나 당신  위에는 상왕전하가  
계시다.  불덩이  같은 성질이요, 한번 결당한   일은 돌릴 줄  모르는 성격이다.  
비록 당신이 임금이라는, 조선에서  제일인자의 권위에 서 있으나,  아버지 상왕
전하를 간할  도리는 없다.
  사사로운 체계로  본다면 심온은  장인이요,  아내의 친정 아버지다.   당신이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아내의 아버지를 구해주지 못하니 딱하기 한량
없는 노릇이다.
  "어찌하면 좋을꼬----."
  전하는 혼자 말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서서 생각해도 별도리가  없다.  곤룡포 두 자락을 바로잡고  어수를 옥대 
뒤로 넘겨 뒷짐을 지고 어정어정 거닐어본다.
  가슴이 답답하다.  숨이 막힐 듯하다.  한숨을 길게 쉬어본다.
  별도리가 없다.   영의정을  죽인다는데,  간곡하게 간할 만한  사람은 그래도  
삼정승 중의 두 사람인 좌의정과 우의정인데,  좌의정은 상왕전하의 죽이라는 명
령을 받들고 왔으니 말할 것이 없고 우의정은 꼴도 보이지 아니한다.
  이 답답한 심정을 누구한테 말하고, 호소할 길이 없다.
  사랑하는 아내 왕비 심씨의 아리잠직 예쁜 얼굴이 눈앞에 아렴풋 떠올랐다.
  안개 같은 눈물이 기름한 속눈썹을 적셨다.   울음보가 터질 듯한 슬픈 표정을 
억누르고 가련한 목소리로 소곤소곤 애원한다.
  '상감마마, 첩의 아비를 살려주옵소서.   제 아비 어찌해서 역적이 되어   죽음
을 당합니까.  제 아비   역적이라면 신첩도 역적이올시다.  역적의 딸년이 어찌 
왕비의  자리에 앉아 있겠습니까. 먼저 신첩을 죽여 주시고, 제 아비를 죽이시옵
소서.'
  슬프게 호소하는 왕비  심씨의  애절한 목소리가 당글당글  구슬을 옥반에 굴
리는 듯 높고 낮게 애원성을 지어 전하의 귓전을 울리는 듯했다.
  전하는 어수를 들어 완자창문을 밀었다.
  마치 왕비 심씨가 창문 밖에 서서 흐느껴 우는 듯한 느낌이 든 때문이다.
  아무도 없다.  내관과 시녀들을 멀리했으니,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전하는 문을 다시 소리 없이 닫았다.
  다시 방  안에서 넋을 잃고 어정어정  거닐었다.  마치 몽유병에  든 사람처럼 
휘적휘적 거닐었다.
  인왕산 너머로 석양은 꺼지고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늦은 가을 서늘한 바
람은 경복궁을 휩싸안았다.
  등촉방 내시가 어전 전각에 등불을 켜려   했으나 좌우 시자를 물리쳤으니, 감
히 전에 올라 불을 켜지 못했다.
  젊은 전하는 어둠이 깃든 줄도 살피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오뇌가 심했다.
  한동안 괴롭게 거닐다가 펄썩 보료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눈을 감았다.  어마마마의 늙고 수척하신 얼굴이 떠올랐다.
  낙치가 되어 오물오물 주름진 입으로 말씀을 내리신다.
  '네가 아직도 영문을  몰랐구나. 네 아버지의 잔인무도한 가혹한 성격을  ---- 
너의 외숙들도 모조리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너의 외조부도 분통이 터져 돌
아가셨다. 너는 바보요, 천치다.  선위를 받았을때, 내두일을 생각하지 못했더냐? 
너의 아버지는 의심 많은 사람이다.  외척들은  씨를 남겨놓지 아니하고  죽여버
리고 가산까지 적몰해서 폭삭  망하게 한 사람이다.  네 형  양녕이 일부러 미친
놈이 되어 세자의 자리를  내논 일을 너는 생각지 못하느냐.    양녕은 지인지감
이 있는 사람이다.   두고 보아라.   한동안 나를 폐위시킨다고 떠들썩하듯이, 네 
장인을  죽인 후에는 반드시 네 아내도 내쫓는다고 할  것이다!  내가 왜 이같이  
병객이 되어 바스러진  것을 너는 모를 게다.   내 동생들을 모조리 죽이고   내 
친정을 망해논 것이 철천지한이 되어  병객이  되었다.  너는 양녕만큼 슬기롭지 
못한 바보다!'
  어마마마의 병들고 야윈 모습이  안개 속으로  숨바꼭질하듯 나타났다가 스러
지고 스러졌다가 나타났다.  젊은 전하는 또 한  번 넋을 잃고 한숨을 쉬면서 눈
앞에 스러지는  어마마마 민왕후의 환상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어마마마의  
환상은 잡혀지지 아니했다.
  전하의 가슴은 답답하고 괴로웠다.  어마마마의   환영이 푸념을 하신 대로 과
연 자기는 양녕 형님만큼 슬기롭지 못했다.   어리석게 둘째 형 효령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덥석 왕세자의 자리에 나갔다.  진실로 바보였다.
  전하는 곰곰   생각해본다.   아바마마께서 외삼촌들을 역적이라  해서 몰살해 
죽일 때, 당신은  철이 나지 아니했다. 어찌 된 까닭을  몰랐다. 정말 외삼촌들이 
왕의 자리를 뺏으려고 역적질을 한 줄로만 알았다.
  이제 생각해보니 아바마마는 어느 외척을 막론하고  권력이 커지는 듯하면, 모
조리 처치해버리는 상습작인 수법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젊은 전하는 캄캄한 절벽 같은 어둠 속에서  또다시 일어서본다.  괴로워서 그
대로 배겨낼 도리가 없다.
  뒷짐을 지고 또다시 어둠 속을 거닐었다.
  창창한 제왕의 길이다.  항상 이같은 어둠 속에서 일평생을 해맬 것만 같았다.
  "장차 어떻게 내 손으로 내 장인의 목을 벤단 말인가!"
  전하는 절벽 같은 어둠 속을 거닐면서 혼자 말했다.
  밤은 점점 깊었다.  장지 밖에서 옥비녀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깨어지는 옥비녀 소리
  "똑 똑 똑똑똑 똑똑똑!"
  아자창 문틈을 조심성스럽게 옥비녀로 두드리는 맑은 음향이 일어났다.
  그러나 젊은 전하는 생각 속에 골똘하게 파묻혀  있었다.  옥비녀 두드리는 맑
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극히 조심성스럽게 두드리는 소리다.  음향은 맑았으나 크지 못했다.
  "똑똑, 똑, 똑똑똑!"
  백지종이로 바른 창호지 한 겹을  통해서 캄캄한 절벽 같은 어둠 속에 은은하
게 불빛이 비쳤다.
  미미하게 비치는 불빛이었다.  그러나 별안간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빛을 뿜
는 광력은 캄캄한 방 속에서  오랫동안 헤매고 있는 전하의 눈이 부시도록 환한 
느낌을 받았다.
  젊은 전하는 꿈 속에서 깬 듯 비로소 창문으로 눈을 보냈다.
  "똑똑, 똑똑, 똑!"
  전하의 귀는 비로소 창 밖에서 두드리는 옥비녀의 맑은 음향을 들었다.
  "누구냐?"
  "저올시다."
  곱고 안상한 여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저가 누구냐?"
  "공비올시다."
  전하의 가슴이 출렁하고  물결쳤다.   공연히 용안이  화끈하고 달았다.  순간 
대답을 못했다.
  만약 내관이나 궁녀가 문을 두드렸다면, 우울한  심정에 금잡인을 하라 했는데 
어찌해서 당돌하게 문을 두드렸느냐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왕비는 창문을 두드리던 옥비녀를  머리에 꽂은 후에 조용히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비 심씨의 등 뒤에는 시녀가 촛불을 받들고 섰다.
  그러나 방 안에서는 전하의 옥음이 얼른 떨어지지 않는다.
  전각 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다만 시녀가  받들고 서  있는 촛불만이 미풍에 
흔들려 벌룽거릴 뿐이다.   전하의 옥음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오뚝  창 밖에 서 
있는 심씨는 갑갑한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누구냐?'
  하는 전하의 옥음을 듣고 나이  염려되고  궁금했던 마음이 적이 풀리기는 했
으나, 직접 용안을 뵙지 못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아직도, 창문 밖에 서 있습니다.'
  하는 군호를 보내고 싶었다.   가벼운 목소리로 서너 번 기침을 했다.  반응이 
있었다.
  "들어 오시오."
  장중한 전하의 옥음이 비로소 떨어졌다.
  왕비 심씨는 영리하고  총명했다.  전하가 어떠한  고민 속에  빠져 있는 것을 
짐작했다.
  시녀에게서 촛불을  받아 손수   들었다.   뒷손질을 해서  시녀를 멀리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소리 없이 창문을 열었다.
  왕비의 손에 들려진 촛불빛이 캄캄했던 방 안에 가득했다.
  젊은 왕비는 젊은 전하께 목례를 올린 후에 손에 든 황납초를 윗목에 놓인 와
룡촛대에 꽂아놓고 전하 앞에 남스란치마를 휩싸안고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고민 속에 빠져 있는  젊은 전하의 용안은  윤기를 잃어 야윈 듯했다.   그 별
빛보다도 광명을 뿜던 총명한 눈동자도 빛을 잃었다.    번민 속에 빠져 있는 모
습이 완연하게 불빛 아래 드러났다.
  왕비 심씨는 명모를  들어 전하의  용안을 살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반
드시 큰 곡절이 있는 듯했다.  안상한 음성으로 전하께 묻는다.
  "전하, 웬일이시오니까? 무슨 근심이 계시오니까?"
  전하는 사랑하는 왕비를 눈앞에  대하고보니 그의 아버지 심온의 얼굴이 힐끗 
떠올랐다.  머리 풀고 약사발을 받는 흉악한 모습이 떠올랐다.
  젊은 전하는 등에 소름이 쭉 끼쳤다.    눈앞에 나타난 심온의 환영을 얼른 후
려쳐 쫓았다.
  억지로 얼굴빛을 화하게 지었다.  겨우 왕비의 묻는 말에 대답을 보낸다.
  "내가 무슨 근심도리  일이 있겠소.   잠깐 고단해서  시자들을 물리치고 누워 
있었을 뿐이오.  중전은 어찌해거 여기까지 나왔소?"
  "내관과 궁녀들이 모두 다 큰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낮에 시자들을 물리
치신 후에 밤이 어두워 술시가 지나도록 부르시는   동정이 없사옵고, 수라를 젓
술 시각이 지났건만 문을 닫으신  채  감감 소식이 없으시니 황공쩍어 신첩에게 
전하의 동정을 살피라 했습니다.   신첩도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황
공함을 무릅쓰고 황망히 나온 길입니다."
  전하는 이 기막힌 사정을 왕비한테 알으켜불 수 없었다.
  "무엇 그것쯤을 그다지 놀랐단 말요. 임금의 자리가 그리 쉬운 줄 아오.  왕이 
되어 보니 이런 일 저런 일 생각이 많구려.    내가 밤이 늦도록 불을 켜지 아니
하고 앉아 있는 일을 과히 염려하지 마오.
  "어째 안색이 좋지 아니하신 듯하오이다.   환절기에 혹시 감기가 들지 아니하
셨나 염려되옵니다.  열이 있는 듯합니다."
  왕비는 옥수를 들어   전하의 이마를 짚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전하의 이마
에  닿았다.  왕후의 장심은 전하의 이마에서 미열을 느꼈다.
  "에구머니나, 미열이  계신 듯합니다.   내국에 기별해서  약을 지어  올리오리
까?"
  "하하하, 중전은 과히  근심하지  마시오.  아무리  환절기라 하나  젊은  사람
이  무슨 감기가 든단 말요.  아무 일 없소.  염려 마오."
  왕비는 그래도 맘이 놓이지 아니했다.  전하의 이마를 짚은 채 다시 아뢴다.
  "너무 시장하셔도   미열이 뜨시옵니다. 지금 술시가 지났습니다. 아무리  만기
를 살피어  바쁘시다 해도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수라를 드셔야 합니다.   저녁 
수라를 받드오리까?"
  전하는 입맛조차 잃었다.  아무것도 자시고 싶지 아니했다.
  그러나 지성으로 보살펴주는 왕비의 간곡한 마음을 뿌리칠 수 없었다.
  "아직 생각이 없소이다마는 마마가 하도 권하니 그럼 수라상을 내오라 하오."
  왕후 심씨의 입숙가엔 비로소 안심하는 웃음이   흘렀다.  창문을 향하여 시녀
에게 분부했다.
  "빨리 대전마마의 수라를 올려라."
  창 밖에 대기하고 서   있던 시녀는 왕후마마의 분부를 받고 종종걸음을 걸어 
수라간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전하의 수라상이  나왔다.  왕후 심씨는 손수 수라상을  어전에 받들고 
전하께 들기를 권했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지 않던 전하는 돌연 술을  한잔 마시고 싶은 생각이 났다.  
이 울적한 심정을 술로 달래보자는 것이다.
  "마마, 술 한잔을 주구려."
  왕후 심씨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전하는 대군으로 있을 때도 술
을 멀리하고 들지 아니했다.   더구나 왕위에 오른  후에는  더욱더 몸을 조심하
고 술을 들지 아니했다.  형님  되는  양녕대군이 너무나 지나치도록 술과  색을 
가까이해서 아바마마께 근심을 끼쳐드리고  마침내는 폐세자까지 된 것을 잘 기
억하는 때문이다.
  심왕후는 총명한 눈매를 흘려 전하의 용안을 살피며 묻는다.
  "약주룰 달라 하셨습니까?"
  "음, 오늘 밤엔 어째 술생각이 간절하오.  한잔 가져오라 시녀에게 분부하오."
  "평상시에 별로 젓숫지 않던 술을 오늘은 웬일이십니까?"
  "그저 마시고 싶소.  어서 가져오라 이르오."
  전하는 일부러 너털웃음을 껄껄 웃으며 술을 재촉했다.
  왕후는 친히 일어나 내주로 향했다.  때마침 구월이라 국화주가 농익었다.
  왕후 심씨는 친히 입에 대어  맛을 본 후에 청자수주에 향기로운 국화주를 가
득 담아 손수 들고 나왔다.
  전하는 은쟁반에 청자수주를   손수 받들고 나오는 왕비의 침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우울한 심사가 잠깐 풀리는 듯했
다.   미소를 풍기며 왕비를 향하여 말씀한다.
  "궁녀들을 시킬 것이지, 마마가 친히 가져오니 미안하구려."
  심왕후는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아뢴다.
  "국화주는 신첩이  손수 담근    술이오라  잘 익었는지  먼저 맛을 보느라고    
수라간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고맙소.  어처의 나에게 대한 지극한 정성은 무엇으로 보답할지 모르겠소."
  전하는 국화주 술병을  상 앞에 고요히 놓고  남치마 자락으로 무릎을 휩싸는 
젊은 왕비의  불수같이 고운 손을 이끌었다.   무한한 애정이 전하의  가슴 속에 
소용돌이쳐졌다.
  젊은 왕비는 부드러운  손을 전하의 송네 맡긴채  아미를 다소곳 숙이며 아뢴
다.
  "아이들이 보옵니다.  어수를 내리시옵소서."
  유연한 목소리로 호소하는 듯 속삭였다.   단순호치 사이로 그윽하게 새어나오
는 젊은 왕비의 고운 목소리는 향내가 이는 듯 했다.
  "아이들이라니?"
  "시녀들 말씀이올시다."
  전하는 왕비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껄껄 웃으며 말씀을 보낸다.
  "궁녀들이 본들 무슨  흉허물이 되오.  의좋은 내외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이
야기를 나누는 것을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어처는 새색시모양  부끄럼이 많구
려.  하하하."
  "그래두 그렇지 아니합니다.    점잖으신 체통에, 약주를 따라 올릴 테니    손
을 놓아줍시오."
  젊은 전하는 슬몃 젊은 왕비의 손을 놓았다.
  왕비는 수라상 위에 놓여   있는 청자상감 국화잔에 국화주를 가득히 부어 두 
손으로 받들어 전하께 올렸다.
  국화, 싱그러운 꽃내음이 전하의 코에 스쳤다.   코에 스칠 뿐이 아니었다.  마
시기 전에 맑은 향기는 배 안에 가득했다.
  전하는 한 손으로 잔을 들었다.  잔대는 왕비가 두 손으로 받들고 있다.
  전하는 국화주를 입술에 댔다.  감국 꽃판 떨어진  꽃잎이 두세 올 잔 위에 떴
다.  전하는 주욱  국화주를 단숨에   마시었다.  맑은  향기가 입안에 가득했다.  
창자   속까지 향기가 스며드는 듯하다.   스며드는 맑은 향기에  시름과 근심도 
스러지는 듯했다.
  "과연 술맛이 좋소.  어처가 손수   담그고 또다시 손수 따라주니 술맛은 더할 
나위가 없는데  국화잔, 국화주에  국화잎까지  떴으니 속된 내 창자가   어처의 
덕분에 향기로운 창자로  바뀌는구려.  하하하.   이 밤이 지새지 말고 오래오래 
멈췄으면 좋겠소."
  왕비는 상아저를 들어 동자송이 한 점을 진장에 찍어 전하의 입에 넣었다.
  "안주를 젓수시고 약주를 드셔야 합니다."
  이번엔 담박한 송이 향기가 전하의 입에 가득했다.
  전하의 용안엔 웃음이 연파를 지었다.
  "어처의 밝은 덕으로 인해서 내 시름이   다 스러지는구려.  국화 향기에 취하
고 송이 향내음에 어리고 ----."
  젊은 왕비는 이때를 놓치지 아니했다.  얼굴빛을 바로하고 묻는다.
  "전하! 무슨 시름이 계셨습니까?"
  젊은 전하는 마음 속으로,
  '아차, 내가 실수를 했구나!'
  후회했다.  급히 변명했다.
  "아니, 시름은 무슨  시름. 그대로 멋지게 한번  해본 말이지. 어서, 술이나  한   
잔만 더 따라주구려."
  "취하시면 어찌하옵니까?"
  "내 비록 술을 자주  마시지 아니하나, 한 잔 술에 취할 리 있소?  어서 한 잔
만 더 따라주오."
  젊은 왕비는 슬기롭고  영리했다.  전하의 초조하고 근심하는 까닭을  알고 싶
었다.  술로 전하의 마음을 풀어 시름하는 원인을 알고 싶었다.
  "정 젓수고 싶으시다면 한 잔을 더 올리오리다."
  왕비는 다시 청자 술병을 들어 상감 국화잔 위에 국화주를 따라 올렸다.
  전하는 또다시 국화주를 마시었다.
  왕비는 전하의 마시고 난 빈잔을 잔대에 받들어 내렸다.
  날렵하게 상아저로 전복쌈을 집어 전하의 입에 넣어드렸다.
  "술비위엔 짭짤한 것으로 안주를 하셔야 합니다."
  말린 전복을 물에  촉촉하게 축여서 얇게 저민 후에 실백으로 소를 넣어 만두 
빚듯 양편 부리를 얌전하게 접어서 쌈을 싸는 전복쌈은 천하의 일미였다.
  전하는 전복쌈을 맛본 후에 정색하고 왕후에게 말씀을 내렸다.
  "이것은 울산 전복을 말려서 실백으로 쌈을 싼 것이 아닌가?"
  "그러합니다."
  "곤전!  앞으로 전복쌈은 내 밥상이나 술상에 놓지 않도록 하시오.  너무나 사
치스럽소.  이러한  진미에  맛을 들인다면 백성들을  어찌 다스리겠소.  궁항벽
촌 농가에서는  쌀이 귀해서 먹지를   못한다는데 내 어찌  이러한 귀한 물건을   
혼자 먹겠소.  사치스런  입버릇을 기르면 마음이 해이해지는 법이오.  이담부터
는 아예 이러한 사치스런 음식은 내 밥상에 놓지 말기를 바라오."
  시름이 첩첩한 속에서도 젊은 전하는 사치를 멀리하고 백성들을 생각했다.
  "앞으로는 명심해서 전하의 수라상에는  전복쌈을 올리지 않겠습니다.  내수사
에서 상왕전에 올리고 경복궁으로  진상을 보냈삽기 신첩이 손수 장만했던 것입
니다.  굽어살피시고, 용서하옵소서."
  유한정정한 왕비는 전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용서를 청했다.
  전하의 용안에는 다시 만족한 웃음빛이 돌았다.
  "술 한 잔을 더 따라주시오."
  "어머나, 아니 젓수시다가 또 젓수시면 취하실 텐데 ----."
  "주불쌍배라니, 두 잔 술이 어디 있소.  어서 따라주오."
  왕후 심씨는 어명을 어길 수 없었다.  다시 국화주를 따라 올렸다.
  전하는 석 잔  술을 자시고 난 후에 또다시 술을  청했다.  칠팔 배가 넘었다.   
취기가 돌았다.
  그러나 시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장인 심온이 압록강을 건너오기만   하면 당장 죽음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기
가 막힐 지경이다.
  더구난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촛불 아래 유한정정한  태도로 지성껏 당신을 
받드는 젊은 왕비를 대하고보니 가련한 생각이 밀물 일듯 밀려들었다.
  전하는 왈칵  왕비의 손을  이끌었다.   너무나 돌발적인  전하의 행동이었다.  
아까 손목을 이끌던 부드럽던 그 풍경이  아니었다. 격렬하게 돌풍이 회오리바람
을 일으켜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광경이었다.
  젊은 왕비는 깜짝 놀랐다. 전하의 용안을 바라보았다. 안정이 벌겋게 충혈되었
다.  전하는 젊은 비의 손목을 강하게 잡은 채 외친다.
  "불쌍하구나.  아까운 사람이 죽는다.  가련하구나!"
  큰 소리로 외쳤다.
  왕비 심씨는  깜짝 놀랐다.   전하의 외치는 소리가  가슴에 뭉클하고 걸렸다.   
순간, 몸을 틀어 잡힌 손을 뽑고 일어났다.
  비의 몸이  흔들거리면서 칠흑 같은  머리쪽에  꽂혀 있던  옥비녀가 '댕그렁' 
소리를 내며 방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아까 문을 두드리던 그 옥비녀
다.  옥비녀 떨어지는 소리에 전하도 놀라고 비전하도 당황했다.
  전하의 술기운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스러졌다.    불길한 예감이 전하와 비의 
가슴을 휩싸안았다.
  밖에 대령하고 있던 궁녀들이 수라상을 물리고 깨어진 옥비녀를 쓸었다.
  궁녀들이 물러간 후에 비전하는 전하의 앞에 무릎을 꿇고 대죄를 청했다.
  "신첩 몸가짐이 칠칠치 못하와 지존이신 전하 앞에 소루한 행동을  취하와  경
망한 죄를 범했사오니 만사무석이옵니다.  대죄를 청하옵니다."
  "무슨 말씀요.   과인이 주기를 띠어  격한 언동으로  비마마를 놀라게 했으니 
허물은 과인에게 있고 마마한테 있는 것이 아니오.  과히 심려하지 마시오."
  전하는 미소를 지어 비를 위로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비전하는 다시 전하를 우러러뵙고 아뢴다.
  "수라상을 다시 받드오리까?"
  "아까 술과 안주를 많이 들어서 생각이 없소."
  "시장하시면 어찌합니까? 신첩의 미거한 죄로 ----."
  "천만에, 마마가  그저 미안해한다면 과인이 미안하오.   딴말은  말고  조용히 
이야기나 합시다."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한숨 소리를 듣는 비전하의 가슴은 쥐어짜지는 듯했다.
  쾌활하고 상냥하고 다정하던   젊은 전하가 난데없이 온종일 밤중까지 금잡인
을  하고 깊은 고민 속에 빠지신 일,  옥비녀를 여러 차례 두드려도 생각에 골몰
해서 비녀 소리도 못듣던  일, 평상시에 멀리하시던 술을 자포자기로 마시던 일, 
급기야는 취기를 띠어  혼자 말씀으로,
  '불쌍하구나.  아까운 사람이 죽는다.  가련하구나!'
  큰 소리로 외쳤던 일 모두 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깜짝 놀라 낯을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옥비녀는 떨어져서 산산조
각이 나서 부서졌다.
  아까 창문을 두드리고 난 후에 엉겁결에 비녀를 설꽂아서 떨어진 것이 분명했
다.  그러나 어쩌면 산산조각이  나도록 바서져버리는가.  모두 다 보통 일이 아
닌 것 같았다.
  더구나 지금  전하는 술기운이 가신 후에  가만히 한숨을 쉬지 않는가.   젊은 
비전하의 안은 타는 듯했다.   입술이 바작바작 말랐다.   까닭도 모르고 공연히  
마음이 슬펐다.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전하께 까닭을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물어야 좋을지, 아니 물어야 좋을지 한
동안  망설이고 있었다.  가슴은 두근두근 두 방망이질로 치는 듯했다.
  비전하는 전하께 꾸지람을 듣더라도 물어보리라 결심했다.
  "전하!"
  전하를 부르는  비전하의 옥음은 가늘고  떨렸다.  가만한  바람결에 머리털이 
흔들리는 듯했다.
  기름한 속눈썹에 눈물이 이슬을 머금듯 했다.
  "왜?"
  전하의 음성도 작았다.
  용안에도 강잉히 미소를 흘렸다.
  전하는 기름한  속눈썹에   맥맥히 눈물을 머금고  바라보는 비전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묻는다.
  "마마, 무슨 할말이 있소?"
  "신첩이 뵈옵기는 모든 일이 심상치 않은 듯하옵니다."
  "무슨 일이?"
  전하는 또다시 용안에 억지로 미소를 짓고 딴전을 한다.
  "평소에 쾌활하시던 전하께서 오늘은   온종일 금잡인을 하신 채 수라도  젓수
지  아니하시고,  아니 젓수던  약주를 많이 드신  일이라든지,  또 누구를 향해 
하신   말씀인지는 모릅니다마는 가련하고  불쌍타신 말씀, 도무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신첩,  비록 우둔하오나 전하의 배필입니다.  한  말씀 내리시어 신첩의 
애타는 심정을 녹여주시옵소서."
  전하는 대답을 해주어야  좋을지 아니해야 좋을지  망설였다.   만약에 심온의 
일을 대답해준다면, 착하고  마음이 소명한 비는 당장 곧 까무러쳐  쓰러질 것같
이 생각되었다.
  술기운에 공연히 '불쌍하구나!  가련하구나!' 하고 탄식했던 말을 모두  후회했
다.   그러나 전하 자신의 괴로운 심경은 또다시 무심코 터져나왔다.
  "양녕 형님은 과연  철인이야.  나도 임금의 자리를 내놓고  양녕처럼 매인 데 
없는 자유스럽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소!"
  말을 마치자 전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비전하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깜짝 놀란다.
  "임금의 자리를 내놓으시다니, 무슨 말씀이오니까.  이 나라는 어찌 하시고, 이 
백성들은 어찌하실 텝니까.   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다 전하의  어지신 덕과 밝
은 정치를 바라고, 원하고 있습니다.  왕의 자리를 내놓으시다니 말씀이 됩니까."
  비전하는 총명한 눈을 반짝 들어 전하를   우러러보며 아뢴다.  이제는 속눈썹
에 반짝반짝 서렸던 눈물도 보이지 아니했다.   호수같이 맑은 눈매가 촛불 아래 
빛났다.
  "세상 만사가 모두 다 귀찮구려!"
  전하는 또다시 고개를 가로 흔들며 한숨을 지었다.   한숨을 짓고 전하는 혼자
말을 했다.
  "임금 노릇은 독한 사람이라야 해!"
  비전하는 다시 전하의 용안을 살폈다.
  "독하지 않게 하시고 어질게 하시면 그만 아닙니까?"
  "내 맘대로 되지 않을 것을, 나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없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과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없어!' 하는  말에 
총명 영리한 왕비는 퍼뜩 느꼈다.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 들었다.
  "상왕전하께서 누구를 죽이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까?"
  전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오리까?"
  전하는 대답을 아니했다.
  "신첩의 친정 아비 부원군이 아닙니까?"
  왕비는 매섭도록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은  백지장보다도 더 희게 질렸
다.  옥안에는 눈물 한 점 비치지 아니했다.
  전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왕비가 벌써 알았나 했다.
  "전하! 상왕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제 아비를 죽이십시오!"
  비전하의 음성은 싸늘하면서 장중했다.

    소헌의 원광
  젊은 전하의 간담은 서늘했다.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 일을 알았소?"
  이제는 숨기려야 숨길 도리가 없다.
  비전하는 온후한 얼굴에 아미를 찡그렸다.  차근하게 아뢴다.
  "달이 만월이 되어 둥근 후에는 반드시   기울어 그믐달이 됩니다.  꽃이 화사
하게 핀 뒤엔 반드시 떨어지고야 맙니다.  이것은  소소한 하늘 이치올시다.  제 
아비, 병조판서로  부원군이 되고   또 다시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부원군으로   
영의정이 될 때 신첩은  벌써, 아비가 죽는다는 예감을 가졌습니다.  부귀영화가 
한 사람에게 영속할 수는   없습니다.  아비가 돌연 사은사로 떠날 때   저는 이
러한 일이 일어날 줄 알았습니다.  아비, 사은사로 떠날 때  벌써 병조의 옥사는 
일어났습니다.   저는 이  옥사를 주시했습니다. 신임 병판 박습이나 병참  강상
인을 죽이려는 옥사가  아니라 신첩의 아비를 장차 죽이려는 옥사입니다.   신첩
은 아비가 고별하러   들어왔을 때 지위가 높을수록 근신을  하라고 일렀습니다.  
판연히 죽을 줄 알면서도  ---- 역시 피가 통하는 지친이라 아니 말할  수는 없
었습니다."
  전하는 어안이 벙벙했다.  말을 이루지 못했다.
  "전하, 상왕전하께오서는 모조리   외척을 죽이셨습니다.  역적질을 했다고  몰
아  죽이셨습니다.  전하의 외숙  여러 형제분도 모두 다 죽이셨습니다.  왕권을 
혹여나  외척에게 뺏길까보아 죽이셨습니다."
  비전하가 여기까지 아뢰었을  때  전하는 새삼 왕비의  소명한 통찰력이 비범
한 것을 느꼈다.
  비전하는 다시 아뢴다.
  "전하! 신첩은 다만 전하께오서   장차 성주 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큰일을 
하시자면 작은 불평과 작은  근심은 참으셔야 합니다.   첩의  아비의 일신상 문
제로 이같이  근심하시고 고민하시는 일, 참으로  감격한 마음 이루 다  아뢸 길 
없습니다.  하해   같으신 은총은 머리털을 베어 신을 삼는다  해도 갚사올 길이 
없습니다.  폐부에 새겨  지성으로 전하를 받들겠습니다.  그러하오니 신의 아비
에 대한 일은 잊으시옵소서.   사사로운  작은 일이올시다.  장차 천하를 경륜하
시는   전하에게는 창해  바다에 좁쌀을 던지는  듯한 하치 아니한  일이올시다.  
그저 시름을 억제하시고 참으시옵소서."
  전하는 비전하의 넓고 넓은 태도에 이제 어이가 없었다.
  친아버지의 죽음을 직면한  비가 슬픔과 놀라움과  원한 속에,  초조하게 굴기
는 커녕 도리어 고민하고 자학에 빠지려는 자기를 향하여 참으라 했다.
  전하는 비의 높고 큰 인품에 감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다시 한 번 비의 신색을 살핀다.
  옹용하고 조신한 채, 단아하고  장중했다.  슬픔을 보이지 아니하고 한을 풍기
지  아니했다.  너무나 지나친 숙녀의 모습이었다.
  전하는 마음 속으로,
  '참는 것도 분수가 있지 저럴 수가 있는가?'
  생각했다.
  전하는 비의 태도를 위선이라 의심했다.  장중한 말씀을 내린다.
  "아직 일은  실행이 되지 아니했소.    그러나 몇 달 후에  부원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상왕전하께서 내  이름으로 부원군을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렸을  때 
곤전은 어떠한 태도를 취하겠소?"
  비전하는 또렷이 전하를 우러러보며 아뢴다.
  "놀라지 않겠습니다."
  너무나 간결하고 소명한 대답이었다.
  "슬프지 않겠소?"
  "왜 아니 슬프오리까.  그러나  참겠습니다.   이 몸은 전하를 위하여 이미  살
아온 몸, 전하의 장차 다가올 성업을 위하여 참겠습니다."
  명료한 대답은 만 근의  무게가 있었다.  은근히 전하를 격려하는 말씀이었다.  
 비전하의 말씀은 절대로 위선이나 가작이 아니었다.
  전하의 마음도 차차 안정을 얻기 시작했다.  다시 왕후에게 묻는다.
  "부원군에게 사사를 내린 후에   상왕께 첨하는 무리들이 혹시 마마를  폐하라
고   떠들어댈는지도 모르오.  마마는  어떠한 태세를 취하겠소?  너무나 잔인한 
말을 물어서 미안하오마는 ----."
  "대비마마 적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외숙 어른들을 죽이신 
후에 폐비론이 대두된 줄로 아옵니다.  그것은  전하의 하실 탓이지 신첩에게 하
문하실 바 아닙니다."
  대를 쪼개는 듯한 쨍쨍한 비전하의 음성이었다.    전하의 입가에는 엷은 고소
가 떠돌지 아니할 수 없었다.
  다시 묻는다.
  "과인이 마마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상왕전하의 엄하신  분부를 받들어 마지
못해서 폐했을 때 마마는 어찌하겠소?"
  "일편단심 전하의 성업이 성취되기를  바라고 축원하는 신첩이올시다.  궁중에 
있으나 여염에 있으나 다만  왕실과 이 나라가 잘되기를  빌  뿐입니다.  또다시 
이뢸 것은 전하께서 자의로 버리신  신첩이 아니라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신첩을 
생각하시어  어전으로 다시 부르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자 비전하는 조개볼을 지어 입가에 미수를 머금었다.
  말끝마다 향기가 이는 듯했다.  전하는 어수를 들어 비전하의 손을 당겼다.
  "현처는 나의 스승이오.  오늘 나는 배운 것이 많소.  현처의 말씀대로 참으리
다.  만사를 참으리다."
  왕비 심씨는 다시 조용하게 아뢴다.
  "전하께서는 마치 달에 비한다면 초승달이십니다.   이제 겨우 빛을 뿜기 시작
하십니다.  만월이  될 때까지 참는 공부를 하시옵소서.   괴로워도 참으시고, 화
가 나시어도 참으십시오.   무능해서 참으시는 것이 아니라, 대성이 되시기 위하
여 참으십시오.  양녕대군께서도 큰 인물이십니다.   그러나 참지를 못하시어 백
성들을 버리셨습니다.   나라를 버리셨습니다.   전하! 전하의 뒤에는 억조창생이 
있습니다.  조선이란 나라가 있습니다. 참으십시오!"
  젊은 전하는 비의 손길을 굳게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전하의 번민을 대범하게  위로하고 내전으로 돌아온 비전하는 조용히 침
실에 들었다.
  이번에 자기  아버님을 상왕께서 죽이는 일로  말미암아 대왕도 양녕대군마냥 
까딱 잘못하면 자학의 길로 떨어지시기 십상팔구였다.  큰일이었다.
  죄가 없으면 역적의  누명은 언제든지 벗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서 나라가 결딴이 난다면 큰일이었다.  모처럼   일어난 이 이씨조선이 또다
시 어지러운 혼란  속에 빠져서, 만백성이 도탄에 빠진다면 이씨조선은  영영 보
존이 되지 못할 것이다.
  자기는 이미 이씨왕실로 시집온 이씨집 사람이었다.   왕실과 종묘를 구해야겠
다고 생각했다.
  비전하는 남편이신 전하의 총명  영리하고 박학다문하신 인격을 잘 알고 있었
다.  전하가 아니면  이 나라를 중흥시킬 사람이 종실 안에  또다시 없다고 생각
했다.
  그리해서 놀라움과 슬픔을   억제하고 대왕의 감정으로 흐르는 자학하려는 싹
을  누르고, 국가의  큰  형편과 억조창생을 도탄에서 건지시라고   격려했던 것
이다.  작은 일에 구애하시지 말고 참아서  장래에 크나큰 성주가 되시라고 눈물
을 머금고 아뢰었다.
  그러나 막상 침실로 돌아와 조용히  앉아보니 슬픔은 홍수 때 봇물 터지듯 복
받쳐 쏟아졌다.
  아버지가 죽는다!  그래도  와석종신을 하는 것이  아니다.   비명횡사를 한다.  
비명횡사를 한다 해도   자식의 정리에 땅을 쳐서 통곡할 텐데,   역적으로 몰려
서 사사를 당한다!  기막힐 일이다.  그나 그뿐인가, 자기는 역적의 딸이 된다.
  역적의 딸로 어찌 나라 지존의 배필인 왕비가 될 수 있는가?
  반드시 폐위가 되고 말 것이다.  말썽 많은  조신들은 큰일이 난 듯 폐위를 주
장할 것이다.   더구나 상왕전에 아부하는 무리들은 기어코 폐비가  되도록 공작
을 하고 말 것이다.
  비전하는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애가 굽이굽이   끊어지는 듯했다.  눈물이 샘
솟듯 쏟아진다.  소리를 죽여 울었다.
  측근에 모신 시녀들은 전하와 비전하의 비밀한 심정을 알 까닭이 없었다.
  문 밖에서 비전하의 동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전하는 저녁 수라상을 받으셨지만  비전하가 저녁 진지를 젓숫지 아니한 일은 
잘 알고 있었다.
  명이 내리기를 기다렸으나 감감하게 아무런 분부가 없다.
  시녀들은 초조하게 방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참다 못하여 한 시녀가 문 
밖에서 조용히 아뢰었다.
  "중전마마께 아뢰옵니다.  저녁 진지를 어찌하오리까?"
  애통 속에 잠긴 비전하의 귀에 시녀의 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시녀는 다시 아뢰었다.
  "저녁 진지를 어찌하오리까?"
  비로소 비전하의 귀에 들어갔다.
  "아니 먹겠다.  물러들 가고 퇴등을 시켜라."
  슬픔에 싸인 비전하의 음성이 고요히 흘렀다.
  시녀들은 조심스런 표정으로 퇴등령을  놓아 등불을 물리고 조용히 자기 처소
로 돌아갔다.
  비전하는 시녀가 물러간 후에도  여전히 침소에 들지 못하고 체읍속에 파묻혀 
있었다.
  생각하고 생각해도 심씨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말 것이다.  공연히 까
닭도 모르고 왕실로 시집온 것이 한이 된다.   왕실로 시집올 때 왕비가 될 것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다.  이것은 대왕 자신도 양녕대군  대신 세자가 
될 줄 몰랐고,   또다시 세자가 된 후에도 태종께서 생존해  계신 동안에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모두 다 운명이라 생각해본다.  그러나 왕비라는 이름을 띤 지 몇  달이 채 못
되어서 이같은 혹화를 당하게 될 줄은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몰랐을 것이다.  왕
비는 촛불을 끄지 않은 채 금침 위에 엎드려 무한한 슬픔을 안았다.
  밤은 이미 깊어 삼경이 넘었다.  비전하의   전각은 깊은 가을 어둠에 싸여 호
수 밑바닥같이 조용했다.
  이때 조용조용 걸음을 옮기는 발자취 소리가 외전 복도에서 내전 복도로 향했
다.  발자취 소리는 비전하의 침실 앞에 딱 멈춰졌다.
  부드럽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두세 번 들렸다.
  비탄 속에 빠져 있는 비전하는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뜻밖이었다.  삼경이 넘었는데   누가 감히 침전문을 두드릴 리 만무했다.  시
녀가  왔다  해도 '아뢰오' 소리를 낼 것이지,  방자하게 문을 두드릴 수는 없는 
일이다.
  비전하는 슬픔에 잠겼던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바로한 후에 장중한 음성을 
냈다.
  "누구냐, 깊은 밤에 감히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창 밖에서는 두세 번 기침 소리가 났다.
  "나요, 놀라지 마시오."
  전하의 음성이었다.
  비전하는 소스라쳐 놀랐다.  급히 일어나 문을 열고 시립했다.
  "웬일이시오니까.  기별도 없이 단신으로 ----."
  촛불에 비쳐지는 전하의 용안엔 고요한 미소가 흘렀다.
  "마마가 잠을 이루지 못하실까 해서 위로하러 왔소."
  젊은 전하는 미소를 지어 옥음을 내리고 비전하를 바라본다.
  등불에 비쳐진 비의 얼굴은   슬픔에 휩쓸려 구름 같은 머리는 흐트러지고 별
빛 같은 안정은 충혈이 되어 부었다.
  전하의 마음은 민망한 정을 이길 길 없었다.
  "울으셨구려!"
  전하는 어수를 늘여 비전하의 등을 어루만졌다.
  비전하는 비통한 모습을 전하 앞에 나타낼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 두 손길
을 마주잡고 고요히 미소를 지었다.
  "아까는 마마가 과인을  위로하러 왔지만 이번엠 과인이  마마를 위로하러  왔
소이다. 통기도 없이 별안간 온 것을 허물하지 마시오."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비전하의 옥수를 이끌어 자리를 갗이해 앉았다.
  전하는 촛불 아래 고요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비전하를 바라보며 다시 부드
럽게 옥음을 내린다.
  "내가 한밤중에 곤전을 찾아뵈오러 온 것은 아까 곤전이 나를  위로하고  격려
해준 그 큰 정을 감사하는 뜻으로 위안하러 왔소이다."
  비전하는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여미며 나직이 대답한다.
  "왕은이 너무나 융숭하십니다.  신첩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눈물 흔적이 마르지   아니한 채 초연히 수심을 머금어 대답을 올리는 
비전하의 태도는 하룻밤 폭풍우에 휩쓸린 한 떨기 황모란의 자태다.
  대왕은 정을 이길 수 없었다.  비전하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짓는다.
  "아까 마마는 내 마음을  평정하게 해주고, 바로잡게 해서 짐짓 여장부인   듯, 
나라일을 걱정하고 억조창생을  생각해서 앞으로 큰 사업을 완성하라고  격려해
주었소.  이제 내 마음은  얼마쯤 안정이 되었소.  그러나 마마가 내전으로 돌아
간 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찌 마마의 속마음이  평안하실 리  있겠소.  아버
지와 딸, 혈육을  같이한  지친의 사이라,  비록 나라 풍속에 출가외인이란 말이 
있으나 천륜을 어찌하겠소?  혼자 계실 때 마음이 평온하실 리  만무하오.  그리
하여  마마의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잠시라도 위안해드리기 위하여 밤늦게 찾은 
길이니 용서하시오."
  전하의 다정하신 말씀을 듣는  비전하는 부부애의 지극한 정에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 방울방울 옷깃으로 떨어진다.
  젊은 전하의 정은 더한층 흔들렸다.  용포  소매에서 눈빛 같은 손수건을 꺼내 
비전하의 눈물을 닦았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비전하는 감격에 넘쳐 목이 메었다.
  "신첩의 아비  일로 우는 것이  아닙니다.  극직하신 왕은에  감격화와 우옵니
다."
  이내 말끝을 어우르지 못했다.
  젊은 전하는 또다시 왕비를 달랜다.
  "아까 마마는 과인더러 참으라 하지 않았소."
  "네."
  왕비의 목메인 소리는 아직도 가라앉지 아니했다.  가늘고도 떨렸다.
  "비마마도 참으시오.  참아야 합니다."
  "……."
  아까 왕전하께 참으라고 간곡하게  권하던 비전하는 참으라는 말씀에 얼른 대
답이 나오지 아니했다.
  "마마!"
  전하는 다시 마마를 나직하게 불렀다.
  "네----."
  "마마는 장차 세자가 될 큰아들이 있지?"
  전하는 '장차 세자가 될 큰아들'이란 말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비전하는 대답하지 아니할 수 없다.
  "네----."
  "다음에 둘째 수양이 있지?"
  "네!"
  "다음에 셋째 안평이 있지?"
  "네!"
  "또다시 몇 아이를 생산할지도 모르지만,   우선 세 아이를 보아서라도 마마는 
참아야 하오.  슬픔을 참아야 하오!"
  비전하는 또다시 '네!' 하고 대답했다.

    산호동곳
  젊은 전하는 다시 비전하의 등을 쓸었다.  조용히 말씀을 계속한다.
  "마마! 마마가 아까 지성으로  나에게 참는 학문을 일깨워주었듯이, 나는 지금 
마마한테 참으라는 인생철학을 권하오."
  비전하는 대답이 없다.
  "왜,  대답이 없소?"
  "전하는 장차  조선을 중흥시키실  영주시고,  신첩은 비록 왕비라 하나,  역시  
치마 두른 한낱 여자올시다.   실상 말씀이지  아녀자의 감정으로 죄  없이 역적
으로 몰려 죽는 아비의  일을 바라보고 어찌 감히 참사오리까.   할 말씀이 무궁
무진 많사오나 이미  가라 앉으신 성상의 마음을  다시 흔들까 저어하와 말씀을 
줄이겠사옵니다."
  전하는 소리를 드높여 껄껄 웃었다.
  "나는 이미 태산부동이오.  양녕  형님의 본을 떠서 만승제왕의 자리도 내던지
려 했더니, 마마의 바른 말씀을 들어 황연히 깨닫고 태산부동이오.  아버지가 다 
못하신 일, 할아버지가 다 못하신 일을 내 힘으로 다 성취할 작정이오.  모두 다 
아까 마마가 깨우쳐준 덕택이라 하겠소.  마마 아니었다면, 아마 나도 미칠 뻔했
소.  내가 이 밤 안으로 마음이 가라앉은 것은 모두 다 현처의 덕택이오."
  "전하는 과연 명철하십니다.  이제는 신첩이   비록 이 세상에 살지 못한다 해
도 마음을 놓겠습니다."
  비전하의 한 마디 말씀은 전하의 귀에 거슬렸다.  가슴이 아팠다.
  "마마! 무슨 말씀요.   방수에 꺼리는 좋지 못한  말씀 하지 마시오.   이 세상
에 살지못한다는 말씀은 도섭스런 말씀요.   아예 다시는 입에 담지 마시오.  부
원군이 비록  비명횡사를  한다기로서니 딸이 어찌  하종을 하겠소.   만고에 없
는 말씀요.  그저  참으시오.  날 보고 참으라고 권하듯이 마마도 참으시오."
  비는 이제 상왕께 대한 반항심이 강하게   일어났다.  기름한 속눈썹에 서렸던 
눈물방울도 이제는 말랐다.
  "아비, 죽어서 슬프고 아니 슬픈   일은 신첩의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마는 역
적의 딸이라 하여 내치는 경우, 참는   것으로 일이 펴게 될 리 만무합니다.  신
첩은 왕비로 있으나 서인으로  있으나 다만 전하의 불세출 대업이 완성되시기를 
정성껏 축원할 뿐이옵니다."
  전하는 비전하의 말씀을 듣자 가슴이 메어지는 듯했다.
  "마마, 과인은 마마 앞에  다짐하리다.  내 힘으로 장이의 비명횡사는   구하지 
못할망정, 절대로 마마를 폐위시킨다는 말이 일어날  때는 임금의 특권으로 실행
하지 못하도록 하리다."
  정숙하고 단아한  비전하이언만  전하의 말씀을 듣자 냉소하는 웃음이 입가에 
돌았다. 
  "아니될 말씀입니다. 상왕전하께서는 당신을   도와서 창업지주까지 되게 하신 
대비마마도 페하려 하셨는데, 황차 저 같은 미미한 존재겠습니까."
  전하는 다시 비전하를 달랜다. 
  "그 일은 곤전이 궁에  들어오시기 전의 일이라 내막을 잘 모르고 남의   말만 
듣고 그저 생각하시는 것인가 하오. 실상은  어마마마께서 너무나 의지가 강하셔
서 후궁들을 푸대접하신 때문, 폐비론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비전하는 또다시 차갑게 웃으며 말씀한다.
  "그것은 전하께서  너무나  상왕전하만 두둔하시는  말씀이십니다. 대비마마의  
동생들, 민무질, 민무구 형제분은 당시 세자이셨던  양녕대군 어른의 외삼촌이시
지만 전하의 외삼촌도 되십니다. 세자를 빙자해서  다소간 권력을 좀 부렸기로서
니 역적으로 몰아서  민씨네 일족을 깡그리 멸문시키신  일은  너무나 잔인하신 
처사였습니다. 이리해서 양녕대군께서도  임금의 자리가 싫다 해서   양광행세를 
하셨고, 대비마마께서도  격분하신 마음에  불평과 불만이  계셨던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오니까. 이로  인해서 조강의 아내이셨던 대비마마를  폐위까지 하자고 
주장하셨던  일은 너무나 혹독하신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어른이 군사권에 대해
서 병조의 말단 관원들이 두  군데로 다니며 재가를 받기가 난처하다 했다고 현
직도  아닌  제 아비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라  하셨으니, 저 같은  것은 역적의 
딸이라 해서 폐서인을 만들어 내쫑으시기는 여반장의 일인가 합니다."
  비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고개를 숙여 한숨을 짓는다. 
  대왕전하는 잠시 말씀이 막혔다. 비전하는 얼굴빛을 다시 화하게 지었다. 
  "신첩은 이미 전하께 향하여   앞으로 이 나라와 이 백성들을 위해서 모든  불
만과   불평을 참으시라 아뢰었습니다. 신첩도  참겠습니다. 이 나라가 흥왕하게 
되어   전하께오서 성주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죽을 때까지  빌고 바라겠습니
다."
  "고맙소. 이제 과인과 마마는 사사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씨왕
조의 주춧돌이 되고 굄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만백성의   공복이 되어 이 나라
를 부강케 하고 나라의 학문과 문화를 높여서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 지지 않는 
훌륭한 국가와 국민이 되게 해야 하겠소이다. 모두  다 마마가 아까 나의 괴롭고 
아팠던 마음을  풀어주고 돌려준 때문입니다.  과인은 이제 이같은  굳은 결심을 
했소이다. 마마도 더욱더 과인을  도와서 나를 격려해주시오."
  "신첩은 다만 전하를 위하여 생겨난 몸,   비록 운이 비색해서 아비 죽음을 당
한 후에 궁문  밖으로 쫑겨난다 할지라도 자나깨나  전하를 도와 성주가 되시게 
하오리라."
  비전하는 아직도 가슴  한복판에 불안한 마음이 서려  있는 것을 씻어버릴 수 
없었다.   씻을 도리가 없었다.  감정을 누르고 참겠다 하면서도 역적의  딸이란 
낙인이 찍혀서 쫓겨난 것만 같았다. 공포감이   항상 검은 그림자처럼 몸을 엄습
했다. 말끝마다  쫓겨난다는 말씀을 되풀이했다. 
  전하의 마음은 쥐어짜지는 듯했다. 비의 앞으로 나가 다시 등을 쓸었다. 
  "과인을 믿으시오, 과인을."
  비전하는 와룡촛대 벌룽거리는 촛불  아래 다소곳 고개를 숙여 쓴웃음을 짓고 
아뢴다. 
  "믿으라는 말씀,   신첩이 어찌  아니 맏겠습니까.   제가 하늘 같으신  전하의  
정중하신 말씀을 아니 믿고 누구의 말씀을 믿겠습니까? 그러나……."
  비전하는 '그러나……' 하는 한 마디로 간명하게 회의하는 심경을 표명했다. 
  "그러나……  어찌했단 말씀이요?"
  전하도 고소를 던지며 묻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왕전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하께서 무슨 힘으로 막겠습니까?"
  "과인이 비록 우유부단하다 하지만 후마마를 폐하라는 분부가 만약   내리신다
면 왕의 자리를  내놓을지언정 결코 봉행하지 아니하겠소.  삼수갑산으로 쫓겨간
다 할지라도 마마를 내치고 떨어져 살 수는 없소!"
  전하의 음성은 열에 띠어 높았다.
  "신첩은 아까 대전에서 고민하실  때 내두일을 생각하시어 나라를  위하여  참
으시라고 아뢰었습니다. 신첩도  전하를  위하여 참겠다고 아뢰었습니다. 일신의 
파탄!  국가의 파탄나는 꼴을 전하께서는 어찌 차마 보시렵니까.  그러하니 첩은 
비록 페비가 되어 쫓기는 모이 될지라도 참고 불평을 아니하면서 그늘에서 전하
의 성업이 성취되시기만 바라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백만 가지 일은 다 참는다 해도 마마를  폐하는  일에 대해서
는 참을 수가 없소. 다투고 간하리다. 다투고 간해도 듣지 않는다면 왕의 자리를 
헌  짚신짝같이 버리리다.  내 비록  양녕만큼 결단성이 없다  하지만 이 일만에  
대해서는 참을 수가 없소!  당신을 버리고  누구와 함께 이 나라를  다스린다 말
요.  당신의 내조 없이 내 어찌 임금 노릇을 하겠소!"
  전하는 격했다. 용안이 불그레 상기되었다.
  "……."
  비전하는 침묵을 지켜 대답이 없다.
  "자 ---- 천지신명이   굽어보시는 앞에 맹세하오리다. 대신들이 폐비론을 들
고  일어나고 상왕전에서 엄한 분부를 내리실지라도 나는 당신을 놓지 아니하오
리다."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머리에 쓴 인모탕건을   훌떡 벗었다. 상투 끝에 꽂혀진 
동곳을 쑥 뽑았다. 황금마구리 산호동곳이 불빛 아래 찬란한 빛을 뿜는다.
  "자 ---- 이것으로 맹세하는 신표를 삼아 마마께 드리오리다!"
  전하는 휘황찬란한 산호동곳을 장심에 받쳐 비전하께 전한다.
  비전하는 감격한 생각이 뼛골 속속들이까지 스며들었다.
  "아니 받자올 도리 없습니다!"
  비전하는 두 손으로  전하의 산호동곳을 받든 채 회오리바람  같은 격정에 휩
쓸렸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전하 앞에 쓰러져 울었다.
  맹세를 다짐하는 전하의  산호동곳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들고,  감격한 정에 
휩쓸려 느껴 우는 비전하의 칠흑 같은 머리쪽은 비녀 없이 쪽을 튼 탓으로 구름
같이 풀어졌다.
  전하는 사랑에 넘치는 웃음을 용안에 가득 풍기고 비마마의 어깨를 받들어 일
으킨다.
  "자아, 그만 우시고  마음을 진정하시오. 너무나 정에 얽매이면 몸이  쇠약해집
니다."
  전하는 비를 어루만져 달랬다.
  울음을 그치고 일어앉는 어깨 위로 구름같이 풀어졌던 검은 머리채가 툭 떨어
졌다.  연분홍 저고리  날씬한 어깨  위로 꿈틀거려 떨어진  검은 머리채는 불빛 
아래 아름다운 풍정울  일으켰다. 비마마의 자태는 전하의 눈에 유난히  매력 있
게 뵈었다.
  비전하는 황망히 두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채를 올렸다.
  "죄송하옵니다. 복에   넘치는 왕은을  입사와 복받치는   정을 누를 길  없어,  
꼴사나운 모습을 어전에 보이니, 만사무석이옵니다."
  전하는 비의 아름다운 자태에 취했다가 이내 껄껄 웃으셨다.
  "옥비녀가 깨어진 탓으로 마마의 풍정  있는 자태를 바라보게 되었소. 좀더 바
라볼 것을 공연히 황급하게 다스리는구려."
  전하는 말씀을 마치고 소매 속에서 백옥비녀 한 개를 꺼냈다.
  "자 ---- 깨어진  비취옥비녀  대신 결곡한  백옥비녀를 꽂으시오. 아까 비녀 
없이 발길을 돌리시는 마마의 모습을   보고 마마의 애운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
하여 이 비녀를 가져왔던 것이오."
  불빛 아래 조요하게 비치는 비녀는 눈보다도 더 깨끗한 백옥죽절 비녀다.
  옥에도 제일 가는 백옥이요, 곧고 굳은 뜻을 상징하는 죽절비녀다.
  비전하는 급히 손에   쥐었던 황금마구리 산호동곳을  치마춤에  감추고 무릎 
꿇어 두 손으로 백옥죽절비녀를 받아들었다.
  눈으로 감사한 뜻을 펴하는   목례를 올린 후에 구름같이 흩어진 머리채를 풀
어 죽절옥비녀를 꽂았다.
  다시 단아하고 단정한 왕비의 자세다. 몸을 굽혀 전하께 아뢴다.
  "이제 아비의 일로  깨어졌던  비취옥비녀의 일은 다  잊어버리겠습니다. 새로 
내리신 옥죽절을 한평생 꽂아, 전하의 크나큰 위업을 돕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비전하는  조용히 일어났다. 눈빛같이  흰 면말이  가볍게 남치마 
자락을 찼다. '사각사각' 치마 끌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비전하는 주홍빛 이층장문을 열었다.
  이윽고 조그마한 자개상자를 꺼내 어전에 바쳤다.
  "신첩도 전하께  맹세를 드리옵니다. 신표로 이  물건을 드리고,  아비의  일을 
잊겠습니다. 참겠습니다."
  상자에서는 금동곳이 나왔다.  천 년을 지나도 빛이 아니 변한다는  순금 동곳
이다.  비전하는 손수 전하의 상투에 산호동곳 대신 금동곳을 꽂아드렸다.
  전하는 만열의 기쁜  표정을 지으셨다. 내외분의 정리는 비 내린  후에 다져진 
땅과 같았다.

    심부원군의 최후
  병조옥사는 엎치락 뒤치락 두   달을 끌다가 마침내 판서 박습과 심온의 아우 
심정을 서교로 끌고 나가 참형에 처하고, 참판 강상인은 수레에  끌어  조리돌
려 죽이고, 이각, 채지지, 송을개 등 말단 직원들은 고부와 무장으로 귀양보냈다.
  상왕은 특히 영의정 겸  부원군 심온을 군국대사를 품달하지 아니한 주모자로 
판정했다.
  금부에 엄명했다.
  "사은사로 명나라에 나갔던 심온이 돌아올   때가 되었다. 금부에서 진무를 의
주로 보내서 압록강에서 건너오는 대로 시각을 지체치 말고 포박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금부 당상은 하교를 받들었다.
  상왕 태종은 또다시 영을 내린다.
  "심온이 만약 명나라 사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오거든, 심온은 병이 들었다
고 명사에게 속여 말하고 심은을 딴곳에 감금해두라.  만약 사신이 알게 되면 
귀찮은 일이 많을테니 미리 말해두는 것이다."
  상왕은 분부를 내린 후에, 마침 문안을 들어온 전하에게 말씀을 내린다.
  "전하에게 할 말이 있소. 병조옥사에   대해서는 형조판서와 글부 당상이 자세
한 전말을 전하에게도  품달했으려니와, 옥사를 다스려보니, 일의 주모자는 부원
군 심온으로 판명이 되었소. 심온이  비록 왕비의 생정 아비고  전하의 국구라 
하나 대역부도의 죄를 저지른 바에야 어찌할 도리가   없소. 일간 심온이 압록
강을 건너온다 하니, 오는 대로  곧 포박을 하라고 금부 당상에게 영을 내렸소. 
전하도 알고 품달하거든 윤허하시오!"
  의논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전하는 마침내 '올 때가 왔구나!' 생각했다.
  눈앞에 퍼뜩 왕비의 현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옥비녀가 떨어져 깨지던 모습,  
산호동곳을 비에게 주며 달래던 장면, 금동곳과  죽절비녀를 주고받던 모든 일
이 숨바꼭질하듯이 눈앞에 나타났다.
  '앞으로 큰일을 하시기 위하여 모든 일을 참으셔야 합니다!'
  '양녕대군같이 되시면 아니되십니다.'
  '참으십시오. 저도 참겠습니다.'
  현숙한 왕비의 부드러운 음성이 귓전에 쟁쟁했다.
  전하는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심온이 국가에 대하여 대역부도의   죄를 저질렸다면 아무리 왕비의 생정  
아비라  하나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유사가 품하는 대로 허락하겠습니다."
  전하의 음성은 장중했다.
  얼굴빛조차 변하지 아니했다.
  상왕은 눈을 들어 슬며시 전하의 표정을 살폈다.
  화하고 부드럽고 장중한 태도는 비록 나이 젊으나 법도가 있었다.
마음 속으로,
  '나보다 낫구나!'
  생각했다.
  "이것은 다 나라를 위하고 전하를 위해서 하는 일야 ----."
  상왕은 한 마디로 대답했다.
  전하는 다만 '네!' 하고 대답했다.
  한편 금부의 진무사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심온을 잡기 위하여 의주로 말을 
달렸다.
  상왕은 또다시 내관을 보내거 진무사에게 일렀다.
  "심온을 의주에서 잡은 후에 서울로   포박해온다면 체모에 되지 아니한다. 경
기 수원으로 데려가서 죄를 다스려라."
  진무사는 영을 받고, 다시 말을 달려서 의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때 심온은 사은사의 임무를  무사하게 치르고 북경에서 요동을 지나 압록강
에 당도했다.
  섣달 찬바람에 강은 얼어붙고 산과 들은 허연 눈으로 덮였으나 오래간만에 고
국산천을 바라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먼저   집안일이 궁금하고 왕전하와 왕
비전하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강물이 얼어붙었으니   배는 다니지 아니했다. 사람들은  얼음을  타고 국경
을 넘었다. 심온의 일행은 가마를 타고 강을 건넜다.
  압록강 찬바람은 잎 떨어진 나뭇가지를   뒤흔들고, 교군꾼들의 수염은 삭풍
에 입김이 서려서 고드름이 달렸다.
  심온이 탄 가마에는 찬바람을  막기 위하여 휘장을 두 벌, 세  벌 둘렀건만 
펄럭거리는 창경 틈에서  들어오는 매운 바람은 심온의  콧부리를 떼가는 듯 매
웠다.
  심온은 상왕전하가 명나라로 갈 때, 모화관까지  내관을 보내서 특별히 내리
신 잘배자를 입었다.
  새삼 상왕인 태종의 은총을 느꼈다.
  '상왕전하께서 잘배자를 아니 내리셨던들 큰 병이 날 뻔했구나!'
  '때로 엄하시기는 해도 정말 다정하신 분이다!'
  '갈충보국하리라. 더구나 나는 왕비의 아버지가 아닌가!'
  심온은 이같이 생각하면서 쌀쌀한  삭풍이 천지를 뒤흔드는 압록강을 건너 의
주 땅에 당도했다.
  선발대는 기세좋게 의주 통군정으로 향했다. 사은사의  일행은 가마를 타고 
뒤를 따랐다.
  보통 사은사가 아니다.  부원군에 영의정까지 겸한 심온의 행차였다. 수행하는  
역관과 서리는 말할 것 없고  가마를 멘 교부까지 거드름을 빼면서 의기가 양양
해서 통군정으로 올랐다.
  통군정 앞에는 의주목사가 육방관속을 거느리고 나와서 취타를 불면서 영의정 
겸 사은사의 행차를 맞이했다. 이때 의주의  지방장관은 부윤이라 하지 아니하
고 목사라 했다.
  기치창검은 햇빛을 가리고, 북소리, 징소리, 취타 소리는 강변을 흔들었다.
  의주목사는 구군복 화려한  복색으로  사은사 심온을 향하여  예를 드린 후에 
문후를 했다.
  "일기 찬데 무사히 왕반하시니 감축하외다."
  심온은 거드름을 피고 대답했다.
  "수고하오."
  한 마디가 채 떨어지기 전에 목사의 뒤에 섰던 진무사가 붉은 기를 높이 흔들
었다.
  매복했던 금부 나졸 수십 명은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며 범같이 달려 들었다.
  오랏줄이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심온의 어깨로 떨어졌다. 꽁꽁 묶어졌다.
  불의의 변을 당한 심온은 어이가 없었다.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노기가 충천했
다.
  "이놈들, 너희 놈들이 누구냐? 감히 영의정을 포박하느냐?"
  목이 터지도록 호통을 쳤다.
  진무사가 앞에 나와 대답한다.
  "어명이오. 대감은 대역부도로 몰리셨소----."
  심온은 기가 막혔다.
  "어명야? 누가 대역부도야? 주상전하의 어명이란 말이냐?"
  자기의 사위 되는 상감이 자기를 포박하라고 할 리 만무했다.
  "상왕전하의 어명이십니다."
  심온의 머릿속에는 명나라로  갈  때 내관을 모화관까지 보내어 춥겠다고  잘
배자까지 내리신 상왕전하가 두 달이 못되어서 포박명령을 내리실 리 만무했다.
  아까까지도 자기는 가마  속에서  상왕전하의 은총을 다시 한  번 되새겨봤던 
것이다. 기막힌 일이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어명이란 증거를 보여라!"
  진무사는 소매 속에서 병부 한쪽을 꺼내 뵈었다.
  확실했다.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왕전 병부의 반쪽이 분명했다.
  심온의 머리에는 명나라로 떠날 때,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권의 일로 금부
에 투옥되었던 일을 생각했다.  좌의정 박은이 영의정인 자기한테는  말하지 아
니하고 빈청에 같이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판의금을 불러 강상인을 하옥하라
고 분부하던 일이 생각났다.
  상왕전에 들어가 심온이 권력  좋은 좌의정이 되어봤으면 좋겠다 말했다고 사
표를 올렸다는 소문이 떠돈 일도 머리에 떠올랐다.
  '틀림없이 좌의정의 조화로구나!'
  탄식했다.
  왕명을 반항할 수는 없었다. 그대로 묶인 채 사관으로 들어갔다.
  기가 막혔다. 앞으로  변명을 하면 사필귀정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잠이 
올 리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호기롭게 사신이 되어 상왕과  왕전하며 왕비가 보내신 칙사의 전송을 받으며 
명나라로 나갔던 영의정은 돌아올 때는  결박을 당한 죄수의 몸이 되어 한양 천 
리를 달렸다.
  무악재 고개를 넘어  서울에  당도했다. 집에서 누가  나와 보나 했다. 그러나 
아들도 아니 나오고 아우의   얼굴도 뵈지 않았다. 혹여나 궁에서   왕비가 나
인이라도 내보내지  아니했나 하고 두루두루 살폈으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아니
했다.
  서대문으로 들어섰다. 의금부로 끌려가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종로를 지나 남대문 밖으로 나섰다.  칠패, 팔패, 청패를 거쳐 삼남대
로로 나가는 것이다.
  심온은 버썩 의심이 들었다.
  "나를 죄인으로 몰아 잡아간다면 의금부로 가지 아니하고 어디로 가는 거요?"
  진무사한테 물었다.
  "수원으로 가서 문초를 하라 하시었소."
  금부 진무는 간단히 대답했다.
  말죽거리에서 점심을 먹고 한양성에서 팔십  리 길 되는 수원 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심온을 수원으로 압송한 진무사는 밤을 도와 말을 달려 한양으로 올라왔다. 
  무사하게 심온을 수원에 하옥한 일을 상왕전에 아뢰었다.
  심온을 그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상왕은 판의금을 불러 분부를 내렸다.
  "판의금은 금부 당상들과 함께 수원으로  내려가 심온을 심문하라.  먼저 처형
된 박습, 심정, 강상인들의 토설로  보아,  심온이 대역의 죄를 범한 것은 확실
한 일이다. 그러나 한  차례 형신을 아니할 수  없으니, 엄하게 문초한 후에 사
사에 처케 하라."
  심온에게 대역의 죄목으로 죽음을 내리는 일은  이미 기정의 사실이었다. 다
만 형식적으로 공초를 받아보라는 것이다.
  금부에서는 상왕의 명을 받들고  금부 당상과 판의금들이 수원으로 내려가 심
온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이때 심온은 아직도 자기 아우 심정과 병조판서 박습이며 참판 강상인을 참형
에 처하고 조리돌려 죽인 것을 감감하게 몰랐다.
  첫 번째 형신에 심온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병조의 옥사를 나는 알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나라 안에 있지  아니하고  
연경에 갔을 때 일어난  일인데 내가 어찌 알겠소. 당치 않은  일에 나를 관련
시키지 마시오."
  쾌쾌하게 죄 없는 것을 밝혔다.
  추관들은 강상인과  박습이 전임 병조판서 심온과  함께 의논했다는 공초를   
들려주었다.
  "이같은 증거가 있는데도 감히 불복을 하겠는가?"
  호통을 치며 고문을 시작했다.
  심온은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왕명을 거역하고  역적질을 하겠소. 내  사위가 금상전
하고, 내딸이 중전마마요. 세  살 먹은 동자한테 물어보더라도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할  것이오. 더구나 병권을 잡지 아니한 내가 역적질을 어찌하겠소."
  추관들도 딱한   줄 알면서도 상왕전하의 지엄한  명령이었다.  어찌하는 수
가 없었다. 심온에게 복죄를 시켜야만 했다.
  "대감이 아무리 불복을 한다 해도  소용이 없소. 모든 사람들의 공초에 대감이 
주모자라고 한 것을 어찌하오. 빨리 자백을 하시오!"
  "한 일이 없는 것을 자백을 하라 하니  말이 되는 소린가. 청천하늘이  굽어보
시오. 나는 복죄할 수 없소. 압록강을 건너오면서도 상왕전하께서 내리신 잘배자
를 입고  왕은이 화해 같으신 것을  감읍한 나요.  나하고  공모했다는 사람들
을 무릎맞춤해서 대질시켜주시오."
  심온은 목구멍에서 피가 나올 지경이었다. 고함쳐 부르짖는다.
  판의금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한다.
  "대질해서 변명할 상대편이 한 사람도  없소. 병조판서 박습과 대감의 아우 도
총제 심정은 서대문 밖에서 참형이 되고 병조참판 강상인은 조리돌려 갈려 죽었
소!"
  영의정 심온은 이 소리를 듣자 '앗' 소리를 치며 까무러쳤다.
  형리들은 기절된 심온의 얼굴에 냉수를 뿜었다.
  한 식경 만에 소생이 되었다.
  판의금은 다시 심에게 묻는다.
  "어찌할 테요. 조용히 복죄를 하시오. 피하려야 도리가 업소----."
  심온은 자기 아우와 병조장관들을   벌써 다 처형했다는 말을 듣자 죽을 것을 
각오했다. 기막히고 원통했으나 소용이 없다.
  "복죄한다. 내가 역적질을 하려고 했다 ----"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침을 탁 뱉었다. 가래가 끓어올랐다. 붉은 피가 점점이 섞였다.
  "우리 딸이 지존을 모신 왕후이건만, 나는 역적이 되었다!"
  심온은 또 한 번 고함치고 붉은 피를 탁 뱉었다. 
  금부 당상과 판의금은 심온이 복죄한 것으로 인정했다.
  문서를 꾸민 후에 심온을 다시 옥에 내리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상왕전으로 올랐다.
  "어찌 되었느냐?"
  상왕은 물었다.
  "자복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금부에서는 내 명을 받들어 약사발을 내려라."
  "하교대로 봉행하겠습니다."
  판의금이 아뢰고 마악 발길을 돌리려 할 때, 상왕은 다시 판의금을 불렀다.
  "얘, 국구인데,  내 어찌 차마  약사발을 내리겠느냐. 저보고  자진하라고 일러
라."
  상왕 태종은 심온을 죽이면서도 며느님 공비한테 미안한 생각이 약간 들었다.
  "네 - 성지를 전하고 자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상왕은 또다시 하문한다.
  "경복궁에 가서 심온이 복죄한 일을 품했느냐?"
  "아직 아니 올렸습니다. 수원서 올라와서 상왕전하께 아뢰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경복궁에 가서 상감에게도   심온이 복죄한 일을 아뢰고 다시  내
가 약사발을 내리기가 미안해서 저보고  자진하라는 명을 내린 것을 소상하게 
고해라."
  상왕은 심온을  죽이면서도 대접해서 죽인다는 일을  경복궁에 알리려고 애를 
썼다.
  "지금 곧 경복궁으로 가서 상감께 아뢰고, 바로 수원으로 내려가겠습니다."
  판의금은 상왕전에서 물러난 후에 경복궁으로 들어 입대를 원했다.
  정원 승지는 판의금을 어전에 인도했다.
  "황공하오나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압록강에서 심온을 수원으로 압송하여  병조에 대한 일을 자백받았습니다. 그
리하와 상왕께 품달했더니  상왕전하께서는 특별히 생각하시고 약사발을 내리지 
말고 자진케 하셨습니다."
  젊은 전하는 '올 때가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얼굴빛을 고치지 아니하고 태연
히 말씀했다.
  "처분대로 거행하라!"
  판의금이 물러갈 떼 젊은 전하는 다시 분부를 내린다. 
  "심온이 자진한 후에 금부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복명하라."
  장중한 분부를 내렸다.
  "지체치 아니하고 복명하겠습니다."
  판의금은 경복궁에서 물러난 후에 다시 수원으로 내려갔다.
  옥에서 나오게 한  후에 사처방을 정했다. 옥 속에서 죽이지  아니하고 예우
해서 죽게하려는 대접이었다.
  심온은 옥에서 석방이 된 혹시나 하는 일루의 희망을 잠시 가지게 되었다. 
  금부 관원들은 좋은 음식으로 심온을 배불리 대접했다. 
  얼마만큼 시각이 지났다. 판의금이 나타났다. 왕명을 받으라 했다.
  심온은 의관을 정제하고 상을 앞에 논 후에 굻어앉았다.
  판의금은 상왕의 칙지를 읽었다.
  "대역부도의 죄인 심온에게 약사발을 내릴 것이나 여러 모로 보아  자진하도
록 한다."
  판의금은 형리를 시켜서 약그릇과 목을 졸라 맬 수건을 내놓았다.
  자기 손으로 약을 마시고 죽든지  목을 매 죽든지 양단간에 한 가지를 취하여 
죽으라는 것이다. 
  심온의 눈에서는  더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말문이 막혔다. 아무말도 못했
다.
  판의금이 묻는다.
  "유언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댁에다가 전하겠습니다."
  기막힌 소리다.
  심온은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한 마디를 남겼다.
  "우리 집에 돌아가거든 죄의정의 집안하고는 대대로 혼인을 말라고 이르시오."
  좌의정은 박은을 가리킨 말이다.
  심온은 말을 마치자 앞에 놓인 약그릇을 들어 단숨에 마시었다.
  이때 심온의 나이는 44세였다.  만사는 이미 다 끝나버렸다. 부귀영화도  일장
춘몽이었다.
  판의금은 심온이 자진한 후에 수강궁으로 들어가 상왕께 일이 끝난 것을 아뢰
고, 이내 경복궁에 들어가 심온의 최후를 고했다.
  젊은 전하의 용안에는 잠시 척연한 빛이 돌았다.
  "자진해 죽은 날짜를 기록했느냐?"
  "12월 25일 경자올시다."
  판의금은 날짜 적은 쪽지를 올렸다.
  젊은 전하는 받아 상 위에 얹은 후에 다시 묻는다.
  "죽을 때 다른 말은 없더냐?"
  "할말이 있으면 유언을 하라고 했더니, 서울에 돌아가거든 집안 사람들에게 좌
의정의 집안하고는 대대로 혼인을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전하는 묵묵히 듣고 대답이 없었다.
  판의금이 물러난 후에 전하는 심온이  절명된 날짜 적은 쪽지를 용포 소매 속
에 넣었다.
  잠자코 침묵 속에 빠졌다.
  예와 이제, 제왕들이 나라 다스리는 법도와  조정에 참여하여 벼슬하면서 영
화와 환란을 겪고 누리던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회상해보았다.
  젊은 전하는 심온의 죽음으로 해서 크나큰 인간생활의 새로운 철학을 배웠다.
  예나 이제나  세상은 각박하고 잔인했다.  심온이 한번 역적으로  몰려 자진
해 죽은 후에 심온에게 줄을 대고  등을 대서 벼슬자리를 구하고 먹을 것을 청
하던 모든 무리들은 모두 다 외면을  하고  돌아섰다. 그도 그럴 것이, 심온과 
평시에 친분이 있었던   사람은 덮어좋고 잡아들이고 일가친척들  삼족을 멸하
는  판이니, 외면하고 몸을 사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조정에서 약간 심온과 사이가  좋지 아니했던 자들은 덮어놓고 심온을 헐뜯고 
모함했다. 
  금부에서는 왕전하께 입대를 청해서 건의했다.
  "심온이 이미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받았으니 국법에 의하여 가산을  적몰
하고  심온의 아내와 모든 자녀들은 속천을 해서 관비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금부 당상의 아뢰는 말을 듣는 젊은 전하는 등골에 소름이 쪽 끼쳤다.
  머리에 퍼득 양녕대군이 생각났다.
  판의금이 아뢰는 나라 법이란 것은 너무나 잔인했다.
  가사, 심온이 정말 역적지를  했더라도, 어찌 차마 이 일을 시행하라고 인정상 
허락을 내릴 수 있는가.
  가산을 적몰한다는 것은 도리어 둘째 문제다. 어찌  차마 현재 왕비로 있는 
사랑하는 아내 공비의 어머니를 관비로 만들고, 동생들을 종으로 삼겠다 하는
가?  젊은 전하는 입술에 침이 말랐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또다시 왕의 자리를  박차버리고 나간 양녕의  모습이 퍼뜩  떠올랐다. 양녕
은 호방한 웃음을 전하를 바라보는 듯했다.
  현숙한 왕후 심씨의 향기로운 모습이 떠올랐다. 울면서 아뢴다.
  '참으십시오. 전하께서는 참는다 하시지 아니하셨습니까! 그저 참으십시오.'
  '전하께서는, 신첩보고  참으라 하지 아니하셨습니까? 저고  참겠습니다. 전
하! 그저 참으십시오.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참으십시오!'
  "어찌 하오리까?"
  판의금이 재촉해 아뢰는 바람에 전하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섰다.
  "군국기무에 대한 뒤처리가 아닌가? 상왕전에   나가 재가를 얻으라. 상왕전하
께서 가타 하시면 과인도 윤허하리라."
  전하는 참는 공부를 해왔다. 무한히 참았다. 의젓하게 말씀을 내렸다.
  판의금은 더 아뢸 말이 없었다. 수강궁으로 들어가 아뢰었다.
  상왕은 대뜸 판의금에게 하문했다.
  "경북궁에도 이 일이 품했느냐?"
  "주상전하께서는 군국기무에 대한 일은 상왕전하께서는 전결하시는 것이니, 상
왕전하의 재가만 맡으면 윤허하겠다 하셨습니다."
  상왕은 만족한 얼굴빛을 지었다.
  "정리에 박한  듯하나 어찌하느냐. 나라 법은  어길 수 없다. 국법대로  처리
해라." 
  이같이 해서 급부에서는 현 왕비의 친정집 재산을 적몰하여 국가의 소유로 하
고, 왕비의 어머니는 관비를 박고, 아들과 딸들은 천민을 만들어 노예가 되게 했
다.

    중전 풍경
  부원군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서  자진해 죽은 일은 극비에 부쳐서 중전에서는 
모르도록 했다.
  그러나 싸고 싼 사향내도   퍼지게 되는 법이다. 소문이 아니  날 까닭이 없
었다.  중전에서 거행되는  무예청과  별감이며 내시들의 입을 거쳐서   중전 
소속의 나인과 상궁의  귀로 심부원군의 역적으로 몰려 자진해 죽은  일이며, 
금부에서는 왕후의 친정 어머님인  국대부인을 관비로 박고 가산을 적몰했다는 
기막힌 소식이 들어갔다. 
  중전엔 침울한 기운이 가득했다. 별감은  별감들끼리, 내시는 내시들끼리, 나
인은 나인들끼리 공론이 분분했다.
  더구나 왕비를 지척에 모신 급높은 상궁들의 놀라움은 그지없었다. 
  면면이 서로들 얼굴을  바라보며 귀엣말로 탄식했다. 
  "여보, 항아님, 이거 웬 변고요. 부원군 대감께서 역적으로 몰려서 자진을 하셨
다니?"
  급높은 늙고 젊은 상궁들은,   존칭해서 서로들 항아라 불렀다. 선녀 곧  월궁
항아라는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명나라에서 오시는 길로 댁에도   못들어가게 하고 바로 수원으로 압송을  
해서  들어가시게 했다 하니 이것이 웬일이고!"
  "그나 그뿐인가. 국대부인을  관비로 박고, 가산을 적몰했다 하니   세상천하
에 이런 변괴가 어디 있단 말씀요." 
  "그리고 또 염려되는 일이 한 가지 있소."
  "무슨 일이?"
  "중전마마의 신상이 큰 염려요."
  "구중궁궐 깊은 곳에 가만히 계신 중전마마께 무슨 누가 끼친단 말씀요?"
  "아니 그렇지  않아. 역적의 따님이라 해서  그대로 둘 리가 만무하오.  반드
시 무슨 조처가 있기 십상팔구요. 아무 영문조 모르시는 어지신 우리 마마께 누
가 기친다면 이거 큰일이구려.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소?"
  나이  많은 상궁들은 한숨을 짓고 한탄했다.
  "아까 아침 문안을 들어갔을 때도 뵈었지만 중전마마께서는 아직도   아버님
이 자진하신 일을 모르시는지 전과 다름없이 태연하게 계십디다."
  "까맣게 모르시는 모양입디다. 저도 아까 들어가 세숫물 시중을 하고 나왔습니
다마는 조금도 다른 눈치가 아니 계십디다."
  젊은 상궁이 대답했다.
  "만약, 조정 대신들이 역적의 따님이라  해서 폐비론을 주장한다면  이거 큰일
이오, 마마께서 까맣게 모르고 계시다가  돌연  이 끔찍한 일을 당하신다면 속
수무책이 될 것이니 우리는 어떻게  폐비론이 일어나더라도 실행이 되지 못하도
록 대비책을  세워놓아야 하겠소이다."
  노상궁이 말을 꺼냈다.
  "조정 대신들이 상왕마마를   공송해서 폐비론을 주장하는 것을 우리들 중전
시녀들이 무슨 힘으로 막아냈단 말씀입니까?"
  젊은 상궁이  탄식했다. 여보, 항아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있지 아니하오. 우리, 그 예쁘고 고우신 준전마마께서  사지에 빠지시는 
것을 보고  어찌  차마 가만히 앉아서  바라만 보고 있겠소. 어떠한  방편을  
찾아서라도 마마를 구해내야 합니다."
  늙은 상궁이 주장했다.
  "어떤 방법으로 중전마마를 구해드립니까?"
  젊은 상궁은 노상궁에게 물었다.
  "마마께서는 부원군  대감께서 역적으로 몰리셔서  수원으로 잡혀가 자진하신  
일을 전혀 모르시는  모양이니, 비록  놀라신다 하더라도 이 일만은 알려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강궁의 엄하신 태도를 마마게 자세히  말씀드려서 
앞으로 설혹  페비론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중전마마께서  미리 대왕마마께 말씀
을 드려서 이 끔직한 일이 실현되지 않도록 막아줍시사 하고 당부를 하시라고 
아뢰는 일이 가장 좋은 방책인가 하오."
  "좋은 말씀입니다. 노상궁의 말씀이 옳은가 합니다."
  여러 상궁들은 일제히 찬성했다. 
  이날 밤에 모든  상궁을 대표해서 늙은 상궁이  중전의 침실로 사후를 들어갔
다.
  침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와룡촛대의 밀촛불빛도 전과 같이 안온하고 명랑했다.
  비마마의 신관도 아무런  일도 없는 듯 그대로  화평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
다.
  늙은 상궁은 비전하의 침소를 위하여 금침을 내렸다.
  비전하는 전과 같이 아무런 말씀도 없이 안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늙은 
상궁은 마음 속으로,
  '부원군의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전혀 모르시는구나!' 하고 괴탄했
다.
  금침을 다 편  후에 늙은  상궁은 혹시나  비전하가 무슨 말씀이 계실까 하고 
두 손길을 마주잡고 서  있었다. 그러나 비전하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 말씀도 아니 계셨다.
  늙은 상궁은 또다시 비전하의   신관을 살폈다. 여전히 태평한 얼굴 빛이었다.  
이윽고 말씀이 떨어졌다.
  "금침을 다 깔았으니 물러가 쉬는 것이 좋겠다."
  늙은 상궁에게 편히 나가서 쉬라는 다정한 분부를 내렸다.
  늙은 상궁은 마음 속으로 기가 찼다.
  '이같이  세상  소문을 모르신단  말인가. 과연  구중궁궐 속에 파묻힌 왕비의  
팔자는 딱하기도 하구나!'
  혼자 탄식했다.
  그러나 아까 상궁들이 의논한 대로 도저히 비전하께 부원군의 일을 아니 아뢸 
수 없었다.  자기네들마저 아렵고 무섭다 해서  이  일을 휘하고  아니 알린다
면 비전하는 영영  폐서인이 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반드시  구해드려야 하겠
다도 결심을 했다. 
  "황공하오나 중전마마께 한 말씀 아뢸 일이 있습니다."
  늙은 상궁은 떨리는 목안의 소리로 겨우 말문을 열어 아뢰었다.
  "무슨 할말이 있는가? 아직 밤도 깊지 아니했으니 앉아서 말해보라."
  비전하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늙은 상궁에게 앉기를 권했다.
  "황공하오나 마마께 아뢸 일이 있사옵니다.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할말이 있나? 상궁이 말하는데 허락  여부가 있을 가닭이 있나. 어서 말
을 하게나."
  젊은 왕비의 옥안은 여전히 화기가 가득했다. 
  "아니 아뢸 길이 없사와 감히 아룁니다. 놀라지 마시옵소서 부원군 대감께오서 
압록강을 건너시자마자 금부 도사한테 수원으로 압송이 되시와  불우의 변을 당
하셨습니다.!"
  늙은 상궁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왕비의 옥안이 잠깐 핼쑥하게 변했다.
  기름한 속눈섭에 이슬이 서렸다. 그러나 조금도 금언한 태도를 잃지 아니했다. 
  "어디서 들었는가?"
  "싸고 싼 사향내도 나는 법이옵니다.  아무리 함구령이 내렸다 하오나 중전 일
판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변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늙은 상궁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했다.
  젊은 왕비는 여전히 몸가짐이 단정했다.
  조용히 말씀을 내린다. 
  "모든 일은 하늘에 달려 있다. 천도를 어길 도리는 없느니라. 달이 차면  기우
는 법이요. 꽃이 피면  지는 법이다.  내 어찌 마음이 타고,  가슴이 아프지 아
니하랴! 그러나 누구를  원망하랴. 지나친 부귀영화가 나의 친정에  주어진 탓이
다. 눈물을 씹고 참고, 조심하는 것만이  이 기막힌 절벽에 서 있는 순간, 나의 
취할 태도다. 너희들도  말조심을  하고 나한테  친정집에 대한 일은 일체  말
하지 말라."
  심왕후의 태도는 상냥하면서도 엄숙했다.
  "마마, 마마께서는 그럼 이 일을 벌써 아셨습니까?"
  "복이 과하면 화가 쫓는 법, 나는 항상 엷은 얼음을 밟는 듯한 심경이었다.  
다시 나에게 더 묻지 말라."
  늙은 상궁은 차마 소회를 아니 아뢸 수 없었다. 
  "황공무지하오이다. 마마의 갸륵하신  심경은 천백 번 잘 알고 있습니다.  다
시는 더 아뢰지 않겠습니다. 그러하오나  꼭 한 말씀만 더  드리고 물러가겠습
니다."
  "간단히 말하라."
  "부원군 대감의 뜻아닌  일로 인하와,  혹여나 마마의 신상에  해가 미칠까 하
와 감히 아뢰옵니다.  대전마마께 말씀을 아뢰시어 어떠한  불미한 여론이 조정 
신하들의 입에서 나온다 할지라도  절대로 윤허하시지 않도록  미리 아뢰어두시
옵소서. 저희들 시녀들 일동이 일편단심으로 아뢰는 바올시다."
  젊은 왕비는 눈물을 머금고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의 간곡한 부탁, 내 어찌 저버릴까마는 천기는 누구도 모르는 것,  다
만 지성을 다하여 삶은  누리려 한다. 긴말 말고 조용히 물러가서  아무 일이 
없는 듯 대기하고 있으라! 너희들의 고마운 뜻은 가슴 안에 새겨두리라."
  젊은 왕비는 안상하게 늙은 궁녀에게 타일렀다.
  늙은 궁녀는 소리 없이 눈물을 머금고 물러갔다. 
  한편 상왕의 어명을 받들고 수원에 내려가 심온을 자진하여 죽게한 의금부 진
무 이양은 일을 마친 후에 수강궁 상왕전에 나가 심온을 처치한 일을 아뢰었다.
  상왕 태종은 이제  며느님인 왕후 심씨의 우익을 꺾어버린 것이다.  마음이 
거뜬했다.
  그러나 체면을 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승지를 불러 분부했다. 
  "심온이 이미 자진해   죽었다 하니 역적으로 죽음을  당한 자에게 예장은  
지내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왕비의 아버지다. 박하게 장사를 지내게 할 수도 없
는 일이다. 승지 네가  수원으로 가서 장지를 택하고 수원부에게 장비를  당해
서 후하게 장사지내게 하라."
  상왕은 또다시 내관을 불러서 본부했다.
  "내가 내리는   부의를 가지고 수원으로  내려가서 호장을 하고  수원부사에
게 치제케 하라."
  승지와 내관은 어명을 받고 심온의 마지막 길을 처리하기 위하여 수원으로 향
했다. 
  일변, 진무 이양은 상왕전에 보고를 드린   후에 경복궁으로 들어가 젊은 전
하께 심온의 최후를 아니 아뢸 수 없었다. 알현하기를 청했다. 
  전하는 용안에 우울한 빛을 띠고 진무 이양을 대했다.
  "황공무지하옵니다. 심온은 자진해 죽었습니다."
  "상왕전하의 홍은이 갸륵하다. 대우해서 자진을 하게 하셨구나!"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입술을 다무셨다. 이양이 다시 젊은 전하께 아뢴다. 
  "상왕전하께서는 승지와  내관을  불러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역적의 죄명으
로  죽은 사람이니  예장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차마 박장은 할  수 없으니 승
지와 내관이 내려가서  산지를 정해서  수원부사가  후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하
고 국가에서 부의를 내리라' 하셨습니다. "
  젊은 전하는 고요히 눈을 감고 진무의 아뢰는 말씀을 들었다. 진무이양의 아
뢰는 말이 끝나니 젊은 전하는  고요히 어진 눈길을 들어 이양을 바라보며 말씀
을 내린다. 
  "심온도 지하에서 허물을 뉘우치고 상왕전하의 넓으신 은택에 감읍 하리라."
  젊은 전하는 이같이 조심하는 언동을 취했다.
  행여나 상왕의 비위를 거스를까 저어한 때문이다. 
  이양이 아뢰기를 마치고 물러가려 할 때 전하는 다시 하문했다.
  "심온이 자진한 날짜를 똑똑리 기억하느냐?"
  간단하게 한 마디를 물었다.
  "네, 알고 기억했습니다. 적바림해 가지고  왔습니다. 무술년 12월 25일 경자올
시다."
  이양은 소매 속에서 쪽지 한 장을 꺼내 올렸다.
  젊은 전하는 조용히 쪽지를 받아 문간 위에  놓았다. 진무 이양이 아뢰기를 
다하고 어전에서 물러나려 할 때 젊은 전하는 또다시 묻는 말씀을 내렸다.
  "심온이 죽을 때  아무런 말이 없이 죽더냐? 혹시  유언 같은 말을 하지 않더
냐?"
  "예, 유언을 한 마디 하고 죽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사오나, 박은의 집안
하고는 대대로 혼인을 하지 말라고 자손들한테 전해 달라했습니다."
  전하는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여 점두하고 계실 뿐이었다. 
  진무 이양이 물러난 후에 전하는 온종일 깊은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이날 밤이 깊은 후에   젊은 전하는 좌우 시자들을 물리치고 단신으로 중전의 
침실로 향했다. 
  중전시녀들도 전하께서  훗훗이 비마마의 침전으로 향하시는  것을 뵙고 몸을 
사려 피했다. 
  전하의 친림하시는 것을 뵙자 왕비 심씨는 옥안에 미소를 머금고 공손히 맞이
했다.
  "밤늦게 기별도 없이 왕림하시니  황감하여이다. 무슨 알리실 말씀이 계시오니
까?"
  젊은 전하도 태연히 웃음빛을 용안에 띠었다.
  "알리긴 무엇을 알릴 일이 있겠소. 그저 불현듯 비마마가 보고파서 왔구려."
  전하는 아무 일리 없는 듯, 중전이 앉았던 보료 위에 앉았다.
  왕비 심씨는 두 손길을 마주잡고 어전에 시측해 아뢴다.
  "시녀에게 듣자오지 오늘 밤 저녁  수라를 적게 젓수셨다 합니다. 찬이 구미에 
당기지 아니하셨습니까? 마음에 송구그러웠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는구려. 백성들는 쌀밥으로 고루 풀칠을 못한다 하는데 과인이 
어찌 찬이 부족하다  말하겠소. 아침 수라를 많이 들어서 저녁밥은  조금 들었
을 뿐이오.  중전은 수라를 드셨소?"
  전하는 다정하게 왕비의 저녁 자신 것을 물었다.
  "네, 벌써 저녁을 마쳤습니다."
  중전은 조신하게 대답했다.
  "다리 아프겠소. 내 앞으로 가까이 와 앉으시오."
  전하는 비마마에게 앉기를  권했다. 왕비 심씨는  아버지의 일이  있은 후부
터 전하의 마음을 혹여나 괴롭힐까 저어하여 항상 얼굴에 화한 기운과 아름다운 
웃음빛을 더한층 잃지 아니했다.
  왕비는 전하 앞에 치마를 쓸고 앉으면서 조용히 아뢴다. 
  "차를 올리오리까?"
  "차, 좋지. 무슨 차가 있소?"
  "겨울이라, 귤병다를 장만해두었습니다."
  "귤향이 높은  귤병다로구려. 말만 들어도 입안이  개운하오. 한 잔 맛을  보
게 
해주오."
  젊은 왕후는 미소를 머금고 어전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전하는 혼자 마음 속으로 탄식한다.
  '진선진미한 사람이로다!'
  '어쩌면 이 기막힌 슬픔 속에서 저같이 유한정정할 수가 있는다!'
  전하는 비의 고운  마음씨를 혼자 감탄하고  있을때, 장지문이  소리없이 열
리며 젊은 왕후는 손수 다반을 들고 들어왔다. 비의 걸음걸이는 그림같이 고왔
다.
  행여나 다수가 다종에서  넘칠까 하여 조심조심  걸었다. 눈같이  흰 버선코
가 가볍게 남갑사 치맛자락을 찼다.  '사각사각' 끌리는 차맛자락 소리가 사죽 
소리같이 고왔다.
  귤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젊은 전하는  귤 향기에 취아고, 비전하의  걸
음걸이에 취했다. 
  비전하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귤병다를 다반에 받들어 올렸다.
  "따뜻합니다. 식기 전에 젓수시옵소서."
  젊은 전하는 미에 취하고 향에 취했다.
  한동안 사랑하는 비전하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없이 만족한 웃음을  
소리 없이 보냈다.
  "차가 식으면 맛이 없습니다.   귤병다는 따끈할 때 젓수셔야 합니다. 감기 기
운도  막는다 합니다."
  젊은 비전하는 두 손으로 다반을  받든 채 눈웃음을 머금고 젊은 전하를 마주 
바라본다. 
  백자 다종에서는 더운 김이 안개를 뿜으며   보얗게 일어났다. 전하는 비가 
권하는 대로 어수로 다종을 들어 입술에 대었다.
  따뜻한 다종이 한겨울에 싸늘해진 전하의 손길을 녹여주었다.
  귤 향기가 입안에 가득햇다. 혀끝이 거뜬했다.
  전하는 천천히 다종을 기울였다.
  "과연 천하의 진품이다. 귤향도 좋거니와 얼었던 몽이 훗훗하게 풀리는구려."
  "귤병다는 감기에도 좋거니와 위장에도   양약이라 합니다. 전하께서는 귤병다
와 같이 정치를 하십시오.  만백성의 병을 낫게 하시고, 만백성의 몸을 훗훗하게 
해주시옵소서."
  젊은 왕비의 의미 깊은 말씀에 전하의   마음은 흐뭇함을 느꼈다. 소리를 높
여 드높게 웃는다.
  "허, 허, 허. 국모로구려. 나자깨나 과인보다도 나라를 생각하고  백성을 염려
하는구려.비는 나의 스승야-- 하, 하, 하."
  "스승이란 말씀은 농담의   말씀이시고 신첩은 다만 전하께오서  대임을  맡
으신 이상,  다만 성주가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편단심으로  이같이 아
뢰는 것뿐입니다."
  심왕후는 정색하고 고했다.
  "옳은 말씀요. 앞으로 지성껏 나라를   다스려서 어느 나라에 지지않는 조선국
을 건설해보기로 마음을 굳혔소이다.  할아버님과 아버님께서 울타리만 짜놓으
신 조선이란 나라를 충실하게 안으로 다스려보겠소이다. 형님   양녕과 같이 왕
위를 박차버리지 아니하고 받은  이상, 내 슬기와 힘을 다하여 이  나라를 다스
려보겠소이다."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다종에 남은 귤병다를 다시 들었다.
  총명 영리하고 부덕이  높은 젊은 왕비였다. 전하가 깊은 밤에  급히 단신으
로 통지 없이 임어하신 일은 반드시 곡절이  있다고 생각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무슨일로 왕림하셨느냐고  아뢰기는 난처했다. 정녕코  친정 아버지의   불길한 
일을 전하기 위하여 오신 것을  십중팔구 짐작하면서도 전하의 마음과 침실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왕후심씨는 귤병다를 먼저 전하께  올려서 이 
슬픈 밤의 장면을 부드럽게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전하가 다종을 내리자 왕비는 여전히 화기 가득한 얼굴빛을 띠고 전하께 묻는
다.
  "전하께오서, 왕비인 신첩의 침실로 깊은   밤에 단신으로 듭시는 일은 당연하
신 일이옵니다마는 연통도  없이 듭신 일이 이상스럽고, 듭신 후에  용안에 비
록 화색을 잃지 아니하셨다 하나 억지로 지어서   하신 일이 판연합니다. 저에
게 이르실 말씀이  계시다면, 휘하지 마시고 일러주시옵소서."
  젊은 비전하는 간곡하게 심정을 털어 고했다.
  전하도 이제는 딴전을 해서 시각을 보내기 난처했다.
  "중전이 용하게 나의 온 일을 짐작하고 물었소.  사실은 마마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소문내지 아니하고 조용히 왔소이다."
  말을 마친 젊은 전하의 얼굴빛은 근엄하게 변했다.
  "말씀해주옵소서. 무슨 일이오니까?"
  전하는 용포 소매 속에서 쪽지를 꺼내 들었다.
  "부원군은 운명을 했소!"
  간단한 한 마디였다.
  젊은 왕비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소문을 듣고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그러
나  막상 운명했다는 소리를  듣고보니 가슴이 출렁하고 염통이 뚝 떨어지는 듯
했다. 
  정신이 아뜩했다. 쓰러질 뻔하는 몸을 겨우 가누었다.
  비의 눈에는 가슴츠레 눈물이 흘렀다.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어느 날이오니까? 어떻게 운명을 했다 합니까?"
  겨우 목안의 소리로 물었다.
  "12월 25일 경자에 운명했다 하오."
  전하는 쪽지를  비전하에게  내주었다. 비전하는 이제  눈물도 말랐다.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받들었다. 
  "날짜나 기억해두었다가 일후에 안정이  되거든, 아이들보고 제사나 정성껏 받
들라 하오."
  얼마나 인자하고 후한 소리였던가. 
  '일후에 안정이 되거든,  아이들보고 제사나 정성껏 받들라  하오' 기막히조록 
고마운 말씀이었다. 비전하의 가슴에는 전하의 한 마디 말씀이 폭폭 스며들었다.
  하도 고마운 말씀이라,  무어라고 감사로운 말씀을  올려야 할지  입이 열리
지 아니했다. 그대로 아버지가 돌아간 날짜 적은 쪽지를 받든채 꿇어앉아 있었
다.
  전하는 심온이 죽을 때 박은의 집안하고는 대대로 혼인하지 말라는 유언을 일
부러 말하지 아니했다.
  "자아 만사는 끝이  났소! 이제는 나라를 도와서 좋은 일을  많이 하도록 해
주시오."
  전하는 비전하의 손을 굳게 잡았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전하는 대전으로 납시면서 비전하께 훈수를 했다.
  "나는 있다가, 내시를  비마마한테 보내서, 부원군이 자진한 일을 정식으로  
선포할 테니, 비마마는 발상을 한  후에, 곧  수강궁 상왕전으로 나가서 대죄를 
하시오. 이같이 하면 앞으로 처신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 같소."
  전하는 다정하게 왕비에게 타일렀다.
  왕비도 총명했다. 밝은 눈을 들어 전하께 묻는다.
  "죄인의 딸이 어찌 발상거애를 할 수   있습니까. 왕후의 정복을 벗고 몸을 피
하여 아래채로 내려가 두문불출하겠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었다.
  보통 죄인도 아니다. 상왕전하께   사사를 받았다가, 특별히 왕비의 낯을 보아  
자진해 죽게 한 역적의 딸이었다. 엄연히 정전에서 발상거애를 할 수 없었다.
  만약, 이같은 일을 한다면 단통 상왕전에   이 소식이 들어가서 숙호충비 격
으로 크나큰 야단이 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비의 말씀을 듣자, 전하는 미소를 짓고 대답한다. 
  "마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씀요. 지금 중천  처지에 발상을 해서 아
버지의 복을 입는다면 되지 못한  조정 대신들의 여론이  또 한번 물끓듯 할 것
이오. 그러나 죄인의 딸이 되었다 해서   상왕전에 대죄하기 위하여 머리를 풀
고 소복 입고  사왕전으로 나간다면 감히  누가 말할 사람이  없으리다. 이러한
다면 자식이 되어 한편으로는 부모의 거상을 입는 일도 되고  한편으로는 상왕
전하의 마음도 녹여드리는 일도 될 테니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 되는 일이
오. 앞으로 폐비 문제가 나오더라도  얼마쯤 도움이 되는일이 될  테니 내 말대
로 명심하고 단행하시오."
  "명심하고 전하의 말씀대로 실행하겠습니다."
  젊은 전하는 더 한 번 비의 등을 어루만져 위로한 후에 대전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한낮이 지난  후에 젊은 전하는 대전내시를  불러 심온이 대역의 죄를 
얻어 명나라에서 건너오는 즉시  수원에 압송되어 자진한 일을 정식으로 중전에 
선포하라 했다.
  소문으로만 듣고 뒷구멍으로   쑥덕공론만 하고 있던 중전의 시녀와 액정들은  
놀라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중전 심씨는 전하를 통하여  미리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장지문 밖에서 정
식으로 전갈을 올리는 대전내시의  보고를 받자,  상궁들이 시립한 중에  눈물
을 머금고 왕후의 정복을 벗었다.
  이내 젊은 왕비는 다시 상궁에게 분부를 내렸다.
  "뜻밖에 내가 역적의  딸이 되었다. 안연히 중전 정침에  거쳐 할 수 없다. 뜰  
아래 작은 채를 치워서 거처케 하라."
  상궁들은 눈물을 머금고 아래채를  치웠다.
  비전하는 중전 정침을 비워놓고 아래채로 내려갔다.
  죄인의 딸이라 하여 스스로 죄인으로 자처한 것이다.
  머리를 풀고, 눈같이 흰 소복으로 갈아입었다.
  상궁에게 분부했다.
  "내 이미, 사약을 받아  자진한 죄인의 딸이 되었으니, 안연히 아래챌망정   
평안히 앉아 있을 수 없다.   수강궁 상왕전으로 나가 대죄를 할 작정이다. 내관
에게 명하여  거적과 소교을 대령케 하라."
  비전하가 죄인의 몸이 되었다 해서 상왕전에 대죄를 하겠다 하는데, 어느 누
가 감히 만류할 사람이 없었다.
  중전상궁은 곧 내관에게 왕비의 뜻을 전하고,  내관은 무예청에 기별해서 불
시로 소교를 장만해서 대령했다.
  비전하는 상궁 두  사람을 거느리고  곧 수강궁  상왕전 뜰 앞에 나가 머리를 
풀어 산발한 채 거적 자리레 엎드렸다.
  중전상궁은 수강궁 상왕전 상궁을 통하여 상왕인 태종께 아뢰었다.
  "왕비마마께오서 상왕전에 석고대죄하고 계십니다."
  태종은 며느님 되는 왕비가 돌연 석고대죄를 드린다 하니 의아하게 생각했다.
  "왕비가 대죄를 드린다? 무슨 일이냐!"
  태종은 깜짝 놀랐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사사를 받은 죄인의 딸이  되었다 하여 안연히 왕후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다 하와 대죄를 드린다. 합니다."
  태종은 비로소 까닭을 알았다.
  "어떤 모습으로 대죄를 드리더냐?"
  "소복으로 머리를 풀어 산발하옵고 짚 깔고 앞드렸습니다."
  상왕은 마음 속으로 맹랑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아니해도 지금 상왕 태종의  마음 속에는 심비를 폐하고 다시 어진 규
수를 물색해서  왕비로 봉하려고 간택령을  내리려는 참이었다. 대신  중에 어
느 대신이든지 누가 먼저  폐후론을 주장하기만 하면 곧  이 일을 단행하려던 
판이다.
  아비를 역적으로 몰아  죽여놨으니, 그의 딸로 도저히 왕비를 삼을  수는 없
는 일이다.
  비록 겉으로 원한을 나타내지  않는다 해도 이미 가슴 속에는 철천의 한이 못
박혀져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이미 원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몸에서 나온 아들들로 세손을 봉해거 왕사를 삼기도 난처하다.
  역시 할아비가 외할아비를 죽인  일을 잘 알  것이다. 대대로  한이 되어 금
이 가기 십상팔구다. 
  인정상 매정하고 쌀쌀한 일이지만  애당초 싹을 잘라서 심씨를 폐비 시키려는 
생각이 농후했던 것이다. 
  태종은 며느님의  석고대죄를 받을 수가  없었다. 나가서 받기만  하면 정상
을 생각해서 그만두라는 영을 내려야만 한다. 
  그만두라는 영을 내리기만 한다면 체면상 폐비는 시킬 수 없다.
  대죄를 받을 수도 없고 아니 받을 수도 없다.
  태종은 며느님 왕비한테 선수를 뺏긴 셈이 되고 말았다.
  왕비가 석고대죄를 드린다고 상왕전  상궁이 아뢰는 말에 태종은 침묵을 지키
고 아무런 대답이 없다.
  상궁은 지엄한 상왕께 다시 더 아뢸 수 없었다.
  조용히 장지문을 닫고, 밖으로 물러났다.
  한낮부터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거적 자리 위레 엎드려 대죄를 드리는 왕비 
심씨는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 당거미질  때까지 몸 한 번 움직이지 아니하고 죄
를 청하고 있었다.
  섣달 그믐, 막바지였다. 날씨는 혹독하게 차다.
  궁궐 안 넓은 마당엔 삭풍이 가끔가끔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왕비는 추위를 무릅쓰고 계속해서 엎드려 있었다. 손이 얼고 발이 얼었다.
  콧부리가 빠지는 듯했다.  창자까지 얼어들어갈 지경이었다. 그러나 왕비 심씨
는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상감과 약속하고 맹세한  대로 모든 일을 참아야  한다고 이를 악물고 엎드려 
있었다.
  수강궁 뜰을 완전히 어둠 속에 파묻혔다.
  등촉방 내시는 전각 앞에 청사초롱을 달아 불을 켰다.
  오들오들 떨며 엎드려 있는   왕비 심씨의 모습을 보는 모든 액정과 궁녀들은 
동정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왕 태종이 어떤 분부를 내리기 전에는 꼼짝달싹 어찌할 도리가 없었
다. 
  모든 상궁들은 너무나 태종의 엄한 태도에 불만이 자자했다.
  "너무나 무뚝뚝하시구려. 섣달 대목  엄동설한에 진종일 밤중까지 대죄를 드리
시는 왕비에게 가타부타 한  마지  말씀도 아니하시니, 너무나 지독하시오. 저러
다가 강시나  되면 어찌하오."
  "아무리 친정  아버님이 역적으로 몰렸다 하나,   현재 왕비신데, 왕비  대접
을 저같이 할  수 있소. 빨리 말씀을  드려서  대죄를 받으시든지  아니 받으시
든지 판단을 서둘러야 하지 않겠소. 도대체, 무엇을 우물쭈물하고 있는 거요."
  "제조상궁도 하오 엄하시니  무서워서 감히 아뢰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소. 딱
하다고 말만 하지 말고  어서 제조상궁을 충동해서 상왕마마께 아뢰어서 처분을 
내려달라 합시다."
  상궁들은 제조상궁을 재촉해서, 상왕께 다시 품해 달라 했다.
  제조상궁은 벌벌 떨면서, 다시 상왕 침전으로 들어갔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처분을 내려주시옵소서."
  상왕은 노안을 들어 제조상궁을 바라보며 반문한다.
  "무슨 처분을 내려달라 하느냐?"
  시침을 뚝 뗐다.
  "공비마마께서 아직도 뜰  아래서 대죄하고  계십니다.  날씨 극한이온데 벼이 
날까 두렵습니다."
  "여태 있었단 말이냐. 네가 나가서  말을 전하고 대죄하는 일은 알았으니 물러
가라 일러라."
  상왕은 간단히 대답해버렸다. 아직도 마음 속으로  어떠한 결정을 내리지 못
한 모양이었다.
  수강궁 제조상궁은 상왕전에서 물러나  모든 궁녀들과 함께 대죄하고 있는 왕
비의 앞으로 나갔다.
  "마마, 옥체를  일으키시옵소서.  상왕전하께서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대죄하
는 일은 알았으니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이제 날씨 극한이온데 공연히 감환이 
드시면  큰일이올시다. 어서 일어나 환궁하옵시오."
  머리 풀어 산발하고 엎드려  있는 왕비는 귀를 기울여 제조상궁의 전하는 말
을 들었다. 
  상왕이 내렸다는 분부는 아무리 해도 석연치 않은 분부다. 
  '대죄하는 일은 알았으니 물러가라.'
  너무나 며느리  자식을 대접하지 않는 분부다. 며느리라도  사사로눈 민가의 
며느리가 아니다. 명색이 왕비다. 옥동같이  얼부풀어오르는 섣달 막바지 혹독한 
추위 속에 진종일, 밤준까지 한데서 떨면서 죄를  청하고 있으니 상왕이 친히 
나와서 한 마디쯤 위로의 말씀이  있어야  할 텐데, '알았으니 물러가라'  하는 
전갈은 너무나 사람대접이 아니다. 
상왕의 마음 속에는 안중에 왕비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안중에 왕비가 없는 것은 장차 곧 비를 내치려는 생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비전하는 한편으로 억울하고 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젊은 전하의 앞길을 
위하여 모든 일을 참아야 하겠다 생각했다.
  짚자리에 엎드린 채 고개를 들어 제조상궁한테 말씀을 내린다.
  "죄를 용서하신다는 쾌한 분부가 계실 때까지 그대로 이곳에 있겠소."
  모든 상궁들은 일제히 비전하를 부축해 일으켰다.
  "무슨 말씀이시오니까. 이 추운 겨울에  어찌 한둔해서 밤을  새운단 말씀입니
까. 마마는 국모십니다.  환후 계시면 큰일이올시다.  대죄드린신  일을 상왕께
서 아셨다 하니, 어서 환궁하사이다."
  궁녀들은 억지로 비전하를 부축해서 소교 위로 모시었다.
  다정하고 착하고 어진 왕전하였다.  경복궁에서는 왕전하가 왕비전하의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전하가 상왕전으로 대죄드리러간  것을 이미 알고 
계신 때문이다. 
  "중전마마께서 돌아오셨느냐?"
  몇 번인지 시측한 궁녀들에게 물었다.
  전하는 밤이 깊어도  비전하가 돌아오지 아니하니,  친히 내관을  불러서 분
부를 내렸다. 
  "어찌 되었느냐? 상왕전으로 대죄하러 가신 비전하께서 아직도 돌아오지  아
니하시니, 네가 나가서 동정을 살피고 오너라. 날은 옥동같이 추운데 병이 나면 
큰탈이로구나!"
  젊은 전하는 안절부절을 못하고 비전하의 신상을 생각했다.
  얼마 후에 내관은 궁녀들과 함께 비전하의  소교를 배행하고 돌아왔다.
  전하는 저 밖까지 나가 소교에서 내리는 비전하를 맞이했다.
  "얼마나 추웠소. 몸이 꽁꽁 얼었구려!"

    폐비론
  비전하가 밤늦게 경복궁으로 돌아간 후에 상왕 태종은 제조상궁을 불렀다.
  "왕비는 어찌 되었느냐, 돌려보냈느냐?"
  "아니 가시고, 밤이 새도록 대죄를   드리겠다고 하시는 것을 저희들이 상왕전
하의 분부를 받들어 억지로  돌아기시게 했습니다.  필시 엄동설한에 큰 병환이
나셨을 듯합니다."
  "대죄를 드릴 때 어떤 모습으로 드렸느냐?"
  "머리 풀어 산발하시고 소복에 맨발 벗고 대죄를 드렸습니다."
  "경복궁에서는 정침에 여전히 거처한다더냐?"
  "아니올시다. 전하께서 정식으로 심부원군의  사사를 발표하시자 곧 죄인의 딸
이라 자처하시고, 아래채  조그마한 궁녀방에 문을 첩첩이  닫고 두문불출하신
다 합니다."
  "혹시 나를 원망하는 행동이나 기색이 없다 하더냐?"
  "황공한 말씀을   하문하십니다. 착하고 유순하고  효성스런 왕비올시다.  누
가 말씀도 올리지 아니했건만 죄인의 딸이라   해서 먼저 정침에서 몸을 피하여 
아래채 궁녀의 방으로 내려가셨고, 다음에는 자진해서 머리  풀어  산발하고 발 
벗어서 폐비 되시기를 원하면서 밤 깊도록 대죄하셨습니다. 상왕전하께서  만약 
돌아가라신 분부를 아니  내리셨던들, 비금 자시가 다 되었습니다마는, 아직까지
도 대죄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태종의 마음은 약간 풀리기 시작했다. 왕비의  태도는 지나치도록 법도에 맞
았다.
  자기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정침에서 몸을 피하여 아래채로 내려갔고 또다시 
대죄까지 드려서 분부를 물었다.
  더구나 당신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을 대하지 않는다는 말에 마음이 흐
뭇했다.
  "내일 또 대죄를 드린다 하거든, 번거롭게 또 하지 말라 일러라."
  태종은 고민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앞뒤 생각  없이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 죽이듯 죽여놓고 뒤처리를 해서 휘갑을 치기가   극히 곤란했다. 왕비 자
신이 나쁘지 아니한데, 며느리 되는 왕비를 폐위시키기란 극히 난처한 일이다. 
더구나 첫째로 아드님인  왕의 뜻을 물어야 한다.   다음엔 왕비의 몸에  아들
이 셋이나 있다. 왕비를 폐한다면  세아들도 관련이 된다. 더구나 장손은  장차 
세자감이다. 곤란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또다시 생각해본다. 만약에 왕비를 폐
하지 아니했을 경우에 비록 왕비는 겉으로 유순하고 효성스런 체했으나 마음 속
에는 한평생 원이 되어 자기를 원망할 것이다.
  또다시 그 아들, 많은 아들들,  곧 자신의 손자인 왕손들은 모두 다 자기를 원
망할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만약  폐비를 한다면 다시 새 왕비를 간택해서  맞아들여야 
한다.
  새 왕비가 들어오게 되면 또다시 아들이 생길  것이다. 그리 된다면 이 아이
가 당연히 세자가 될  것이다. 이쯤되면 집안꼴, 곧  왕실꼴은 말이 아니될  것
이다. 또다시 골육상잔이 된다.
  태종은 번민에 빠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상왕 태종의 비위를   맞추어서 왕비의 아버지 심온을 역적으로 몰아 죽
인 무리들은 육조판서와 함께  대사헌 허지와 사간 정수홍을 앞장세우고 수강궁 
상왕전과 경복궁 왕전하의 계신 곳으로 나가서 하례하는 말씀을 올렸다.
  "성상의 명단이 아니었다면 어찌 대역을 목베이셨겠습니까? 과연 잘  처치하
셨습니다. 신의 무리는 기뻐서 하례를 올립니다."
  수강궁의 상왕은, 
  "하늘이 시킨 일이고 사람이 한 일이 아니다. 하례할 것까지는 없느니라."
  의젓하게 대답한다. 그러나 왕전하는 다만 고개를 끄덕여 점두할 뿐이었다.
  장차 이 무리들은  앞으로  폐비를 주장하기  위하여 먼저 대역부도의 역적을 
잘 처치했다고 치하를 한 것이다.
  다음날 조정 빈청에는 유정현, 박은, 이원, 허지들이 모였다.
  좌의정 박은이 먼저 발론을 한다.
  "왕비전하는 대역부도로 죽음을 받은 죄인의 딸인데 이분을 왕전하의   배필
로 모시기는 난처하오. 당연히  폐위를 시키고 다른 분을 간택해서 새  왕비를 
모시도록 해야 하겠소. 상왕께 품해서 실천하는 것이 좋을 줄 생각하오."
  영의정 유정현이 대답했다.
  "소문 들으니 왕비전하께서는 죄인의 딸로 자처하시며 정전에서 몸을   피하
여 아래채로 내려가시고, 또다시  머리를 풀어 산발하시고는 상왕전에  대죄까
지 드렸다 하니 우리가 주장할 것이 아니라 상왕께서 처분이 내리실 때까지 기
다려보는 것이 좋겠소."
  유정현의 말을 듣자 대사헌 허지가 말한다.
  "금부에서는 상왕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심온을 사형에 처했으니 금부는   죄
인의 사후처리도 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오.  금부 당상은 당연히  폐비하는 
주장을 올려야 할 것이오."
  대사헌 허지는 맨 처음 병조에서 상왕께, 군자에  대한 일을 한만히 했다고 
탄핵한 인물이었다. 금부에서는 폐비론을 올리라 주장했다.
  좌의정 박은이 판단을 내렸다.
  "허대사헌의 말씀이 옳소. 폐비에 대한  금부에서 주달하는 일이  옳다 생각하
오. 금부당상은 지체치 말고 죄인의 따은 왕비가  될 자격이 없으니 폐비를 해
야한다고 상소를 드리시오."
  좌의정의 말이었다. 누가 감히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소위 정부의 대관이란 무리들은  백성들의 질고와 나라일을 다스릴 생각은 하
지 아니하고 일신의 영화를 위하여  궁중 지밀 왕비의 일까지 참견을 하고 간섭
을 했다.
  금부에서는 상왕께 상소를 드렸다.
  '왕비 심씨는 역적 심온의 딸이올시다. 역적의 딸이 왕비가 될 수 없습니다. 
심씨를 폐하여 서인을 만드시옵소서.'
  상왕은,
  '생각해보는 중이다!'
  하교를 내렸다.
  금부에서는 같은 뜻으로 왕전하께도 상소를 올렸다.
  왕전하는 분함을 이길  수 없었다. 곧 금부 당상을 파면시킬  생각을 가졌으
나 꾹 참았다. 아무런 비답도 내리지 아니했다.
  다음날 젊은 상감 세종은 수강궁으로 상왕 태종께 아침 문안을 들어갔다.
  문안이 끝난 후에 상왕은 세종을 향하여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묻는다.
  "어제, 의금부에서 올린 상소를 전하도 보았소?"
  "네, 보았습니다."
  세종은 장중하게 대답했다.
  "폐비를 하라고 하는 거지?"
  "네, 그러합니다."
  "나는 생각해보겠다고 비답을 내렸는데 전하는 어떻게 비답을 내렸소?"
  "소자는 아직 비답을 내리지 아니했습니다."
  "금부의 주장도 그럴 듯한 소리야.   역적의 딸이 어찌 국모가 될 수 있나.  
그대로 왕비의 자리에 있게 된다면 백성들이 의심할 거야!"
  태종의 의사는 폐지하는 편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어느 때나 항상 아버지   상왕의 의사를 존중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던 세
종은 정색하고 아뢴다.
  "금부 당상들의 주장은 주제넘고  건방집니다. 자기들의 직분을 생각하지 아니
하고 함부로 날뛰는 일인가   합니다. 금부는 죄인을 다스리는  곳. 다만 죄인에 
대해서 처분을 물어서  결정할 것이고, 나라의 왕비가 죄인이 아닌  이상 저희
들이 감히 왕비를   폐해라, 말아라 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유사
라는 것은 다 각각 맡은 바 책임이  있습니다. 월권을 해서 지껄이는 무리들,  
가증하기 짝 없습니다.  아바마마의 의향을 받들지 못하여 유보하고 비답을  아
니 내렸습니다마는, 이따위 월권해서 까부는 무리들은 당연히 파직을 시켜야 합
니다. 그대로 둔다면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유순하기 양 같다고 생각했던 태종은 가슴이 뜨끔했다.
  "전하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금부에서는 원래  역신들을 다스리던 곳이니만
큼 그런 건의를 한 듯하니 과히 꾸짖지 마오."
  상왕 태종은 폐비를 하자고 주장한 금부 관원들을 휩싸서 말한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상왕 태종은  노안을 들어 젊은 상감의 눈
치를 살피며 다시 묻는다.
  "좌우간, 일은 결정해야 하겠는데 어찌하면 좋은가?"
  "왕비 심씨가 만약 죄가 있다면 당연히 폐해야 하고 죄 없다면 경솔하게 '폐
비' 두 글자를 거론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왕비 심씨가 죄가 있나 하는 것
을 생각해서 처리하십시오."
  젊은 상감 세종의 말씀은  씩씩했다. 아버지 태종은 말문이 막혔다.
  젊은 상감은 또다시 아뢴다.
  "옛시절 무식한 법에는 연좌법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아비가 역적이면 자식은 
죄가 없건만  연좌되고, 자식이 역적이면 죄  없는 아비까지 잡혔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벌써  폐기된 지 오랩니다. 황차  심씨는 여자올시다. 여자 중에도 궁궐 
속에 들어 있는 왕비올시다. 어느 겨를에 친정  아비와 함께 역적모의를 할 틈
이 있겠습니까. 사실하시어 만약 죄가 있다면 내치시옵소서."
  젊은 상감의 말씀은 구구절절 사리에 맞았다. 상왕은 코가 맥맥했다.
  젊은 상감은 다시 아뢴다.
  "지금 왕비 심씨는 소생이 삼형제나 있습니다.  만약 심씨를 내치고 다시 왕비
를 구한다면 반드시 어미  다른 왕자가 또 생산될 것입니다. 이때  가서 왕사 
문제를 어찌합니까? 만약 소자가  왕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군으로 있었다면 
관계가 없겠습니다마는 왕으로 있는 이상 반드시  분규가 일어날 것이 분명합니
다. 또 한  번 이 나라에는 골육상잔의  슬픈 풍파를 겪어야 할  것입니다. 왕실
에서 겪는 기막힌 풍파는 국민들의 비웃음과  탄식 속에 왕실의 추태를 연출할 
뿐 아니라 백성들은  헐벗어서 궁지에 떨어지고  나라의 힘은 말이  아니될 것
입니다. 
비록 아바마마께서  폐비를 하시고 싶은  뜻이 계시다 할지라도,  소자는 단연
코 봉행치 못하겠습니다. 이미 아바마마께서 밟으셨던 그  뼈아픈 전철을 소자
는 도저히 다시 밟을 수 없습니다. 만약 소자가  그대로 순종한다면 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
  젊은 상감 세종은 뜻밖에 강경했다. 결연히 폐비할 것을 반대했다.
  이미 방석의 난을 겪어  아름답지 못한 부자상극과 골육상잔의 쓰라리고 비참
한 경험을 가졌던 태종은 가슴이 뜨끔했다. 얼굴이 화끈 달았다. 대답할 말이 없
었다.
  한동안 후에 상왕은 입을 열었다.
  "왕비 심씨는 정전을 피하고 아래채로 내려가 두문불출한다 하니, 전하는 적적
하기 짝이 없겠소. 그래서 하는 말이지."
  혼자 소리로 한 마디를 했다.
  젊은 전하는 다시 아뢴다.
  "적적한 것은 한때 일이올시다. 이 한때  적적하고 불편한 일로 인하여 백대의 
피비린내 나는 화근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젊은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결연히 입술을 다물었다.
  상왕 태종이 말하는 적적하다는  뜻은 왕비 심씨가 죄인으로 자처해서 정침에 
있지 아니하고 몸을 피하여 아래채로  내려가 있으니 왕의 시중을 들 사람이 없
다는 아버지 태종의 노파심이었다.
  젊은 상감 세종은 적적한 것은 한때 일이고,  또다시 새 왕비를 맞이하여 왕
자를 낳는 경우에  골육상잔의 환란이 또 일어나는 것은 백대의  치욕이요, 국
가의 손실이라고 일축했다.
  젊은 상감은 다시 고한다.
  "소자, 경험이 없으므로 군사권에  대해서는 일체 관여하지 아니하고 아바마마
께서 처리하시도록 했습니다마는 왕비를  폐하고 아니 폐하는 일에 대해서는 소
자의 아내올시다. 소자의 뜻을 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젊은 상감은 정정당당하게 당신의 뜻을 표명했다.
  태종은 마음 속으로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일호의 차착이 없는 젊은 전하의 논리였다.
  약간 마음에 거슬리게 생각되기도 했으나  원체 옳은 말인 것을 어찌할 길 없
었다.
  "나도 왕비가 죄 없는 것은 잘 알고  있소. 다만 대신들이 우겨대니 난처한 일
이로구려."
  어름어름 한 말씀을 했다.
  "일을 모르는 대신들은 파면시키십시오!"
  젊은 전하는 씩씩하게 한 마디를 남기고 물러갔다.
  이때 태종의 신임을 가장 두텁게  받아서 정부 세력의 중추적 인물이 된 사람
은 좌의정 박은이었다.
  전세자 양녕을 폐위시키자고 주장한 사람도 박은이요,  양녕이 폐세자가 된 
후에 한양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역간한 사람도 박은이다. 황희가  양녕의 
폐세자와 민비의 폐위를 적극 반대한 때문에 귀양을  간 것도 박은 때문이요, 
세종을 세자로 봉하자고 주장한 사람도 박은이다. 이번에  영의정 심온을 역적
의 주모자로 만든 것도 박은이다.
  이쯤 되니 조정 세력은 함빡 좌의정 박은한테로 집중되었다.
  육조판서인 행정부는 말할  것 없고 기강을 다스리는 사헌부, 법을  장악한 
금부, 언론을 맡은 사간원이 함빡 박은의 계통이요, 박은의 편이었다.
  그의 관록은 이같이 무거웠다.
  박은은 벎은 상감 세종한테보다 상왕인 태종께 더한층 충성을 드렸다.
  크고 작은 일을  상감인 세종을 제쳐놓고 태종께 아뢰어 결정했다.  이러한 
까닭에 상감이 두  분이란 불평이 일어나서 결국  심부원군은 역적으로 몰려 죽
은 것이다.
  의금부 당상들은 젊은 상감이 상왕께 문안을 들어가서 폐비에 대한 일을 적극 
반대한 일을 알 까닭이 없었다.
  다만 태종이 '생각해보겠다' 한 한 마디 비답을 받고, 용기를 다시 내었다.
  '역적의 딸로 정궁을 삼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옵고 심온은 상왕전하의 원수올
시다. 아버지의  원수인 심온의 딸로 전하께서  어찌 왕비를 삼을  수 있습니
까? 빨리 폐위를 하십시오.'
  하고 또 상소를 상왕한테 올렸다.
  그들은 젊은 전하는 안중에 두지도 아니했다.
  두 번째 금부의 상소를 받은 상왕 태종은 여러 대신들을 연침으로 불렀다.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원임 이원, 대사헌 허지들이 입대를 했다.
  상왕은 모든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씀을 내린다.
  "금부에서 여러 차례 왕비를 페하라고 주장을 하는데 나의 생각에는  금부에
서 이러한 일을 주장하는 것은 월권이라 생각하오.  금부는 죄인을 다스리는 곳
이니 죄인이 아닌 왕후까지 참견해서 주장하는 것은 불가하다 생각하오."
  상왕은 왕전하가 주장했던 말을 옮겨서 말했다.
  대사헌 허지가 아뢴다.
  "그것은 금부의 뜻만이 아닙니다. 조정공론이 그러합니다. 당연히 중궁은  폐
해야 합니다. 심온은  상왕전하의 원수입니다. 아드님 되시는 전하께서,  어찌 
아버님의 원수의 딸을 정궁으로 삼으실 수 있습니까? 내치셔야 합니다."
  옆에 있던 좌의정 박은이 슬몃 거든다.
  "뿐만 아니라, 듣자오니 왕비전하는 죄인으로 자처하시어, 정침에 피하시어  
아래채로 별거하신다 합니다. 전하의 시중들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적막해서 어
찌하십니까?"
  정면으로 폐위시키라는 말보다도 한층 더 교묘한 말이다.
  태종은 어제, 젊은 상감이 '골육상잔하는 전철을 또다시 밟는다면 나라가 망한
다'는 말에, 이미 마음이 흔들렸다.
  상왕 태종은 다시 모든 신하를 돌아보며 말한다.
  "나라의 연좌법에도 출가한 여자는 적용이 되지  않는 법인데, 황차 왕비는 효
성이 지극하고 법도가 있는  사람이라, 경들의 말은 너무나 지나친 일이니, 다시 
두말을 하지 말라. 그 대신 한 가지 일을 경들과 의논하려 한다."
  상왕은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모든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오니까?"
  전임대신 이원이 묻는다.
  "좌의정 박은이 아까 말하기를 궁중이 너무  적막할 것이라 하니 생각이 나오. 
예로부터 제왕은 후궁을  두는 법인데 금상은 아직 후궁을 두지  아니하였소. 
후궁을 두서너 사람쯤 두어서 궁중이 적막하지 않도록 하면 어떠하겠소?"
  영의정 유정현이 얼굴에 가득 웃음빛을 띠고 아뢴다.
  "과연 밝으신 조처올시다. 옛법에 제왕은 한  중궁과 아흡 후궁을 거느리는 법
입니다. 그리하옵고 왕실에는  왕자들이 많으신 것이 좋습니다. 좋은 생각이십니
다."
  상왕 태종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나도 전에 예관의 말에 따라서 후궁들을 몇  사람 두었소. 모두 다 큰 도움이 
되었소. 그렇다면 곧 금혼령을 내려서 젊은 상감의 후궁울 간택하도록 하겠소."
  폐비론을 주장하던  박은, 허지들은  딴소리가 나와버리니 주먹맞은  감투격
이 되어버렸다.
  "후궁을 간택하시는 일은 역시 젊은 상감께서 아셔야 합니다."
  상왕은 껄껄 웃었다.
  "후궁을 간택하는 일은 내가 주장할 일이지 상감이 아는 체할 일은 아닐세. 곧 
간택령을 놓겠네."
  모든 신하들은 더 폐비론을 주장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때 박은은 병조에 나가서 당상관들에게 말했다.
  "상왕께서는 폐비하는 일을  보류하시자 하시지만 심왕후는 죄인의 딸인데 어
찌 정궁이 될 수 있는가. 말도 아니되는 일이오."
  하고 또다시 조정여론을 일으키려 했다. 그는  심온을 역적으로 몰아죽인 장
본인이다.
  심왕후를 그대로 둔다면 일후 자기에게 해가 일어날 것이 두려웠던 때문이다.
  이 소리는 다시 상왕의 귀로 들어갔다.
  상왕은 다시 의정부 삼공과, 예조판서 허조, 대사헌 허지들을 불렀다.
  "또다시 폐비일건으로 조정여론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있다 하니 딱한 일이다. 
내가 일전에 금상에게 후궁을 몇  사람 간택해서 두자 한 것은 한편으로 궁중에 
쓸쓸한 기운이 들지  않게 하고 한편으로는 왕손들을 번영케 하자는  것이다. 
경들은 아직도 내 뜻을 모르는 모양일세. 전에  상왕비 민씨가 그의 오라비들이 
불충한 일로 인하여 잠시  폐비를 하려 했을 때, 황희 같은  사람은 목숨을 내
걸고 역간했을 뿐 아니라  모두 다 폐비를 해서는  아니된다고 했는데 어찌해서 
오늘 그대들은 극성스럽게 폐비를 주장하는가. 모를 일이다.  다시 두말 하지 말
라. 곧 금혼령을 내려서 후궁을 간택케 하라."
  모두들 '좋습니다' 하고 물러갔다.
  젊은 상감의 강유겸전한 의연한  태도로 인하여 상왕과 대신들이 심왕후를 내
치려던 일은 좌절되고 말았다.

    인의 조화
  다음날 젊은 상감 세종은 상왕 태종께 아침  문후를 들어갔다. 젊은 상감이 
날마다 아버님 노상왕께 효성을 드리는 일과다.
  그러나 오늘 드리는 문안은  꿋꿋하게 아내인 왕비 심씨를 폐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했던 다음날의 대면이었다.  비록 부자지간이라 하나 서로  상대편의 마음
을 더듬어보려는 미묘한 심경 속에 들지 아니할 수 없었다.
  문안 절을 받은 후에 상왕은 젊은 상감에게 미소를 지어 말씀을 시작했다.
  "어제 상감의 의사를 들은 후에 나는 왕비의 일에 대하여 무한 생각하였소. 대
신들을 불러  물어보니 모두 다 폐비를  주장했으나, 나는 차마 죄  없는 왕비
를 폐위시키는 데 동의할 수 없었소. 그리하여  강경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회
유하기 위하여 대안을 내었소."
  대안을 내었다는 상왕의 말씀에 젊은 상감은 귀를 기울였다.
  "대신들은 왕비가 정침에서 피해서 아래채에 근신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궁
중이 너무 적막해서 어찌하느냐고 우겨대는구려. 그들의  근본 뜻은 상감을 위
해서 쓸쓸할 것을  걱정하면서, 한편으로는 폐비를 한 후에 새  왕비를 맞아들
이자는 주장이지. 그래서 나는 후궁 두 서너  사람을 두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대안을 냈어!"
  상왕은 다시 말씀을 계속했다.
  "원래 제실에는 정궁인 왕비 이외에 구빈을 두는 것이 옛법인 거야----. 그러
니 구빈까지는 둘 수 없으나. 우선 양가의  현숙한 처녀를 간택해서 두서너 사
람쯤 후궁을 삼는 것이  좋겠다 했소. 그랬더니 여러 대신들은 모두  다 좋다고 
했소. 처녀를 간택하는  일은 내가 담당할 테니,  상감은 그리 알고 앞으로 후궁
을 맞아들이도록 하오."
  젊은 상감은 귀가  번쩍 떠졌다. 우선 사랑하는 심비가 폐위되지  않는 것만
이 기뻤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상감의 허락을 받은 상왕의 얼굴빛은 화창했다.  당신의 의도가 그대로 실현
되는 것이 기쁜 때문이다.
  상왕 태종이 당장  폐비를 주장하지 아니하고, 후궁 두는 것으로  대안을 삼
은 것은 뒷일을 생각한  것이다. 후궁 중에서 왕자가 생산되면 생긴다면  심비
를 폐하고, 후궁으로  정비를 봉할 수도 있는  자유자재한 길을 취하려는 까닭
이었다. 
상왕은 다시 젊은 상감에게 다짐하는 말씀을 내린다.
  "그렇다면 나는 금혼령을 내려서 양가의 처녀들을 간택하라 하겠소."
  젊은 상감은 또다시.
  "네."
  하고 대답했다.
  세자가 된  후부터 자나깨나 인간의  처세할 길을 생각하고  생각한 전하였
다. 
이제는 틀이 잡힌 젊은 상감이었다. 인의 철학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젊은 상감은 슬기로웠다. 상왕의 폐비 대안인 후궁  둘 것을 승낙한 후에 얼
굴빛을 화하게 하여 상왕께 아뢴다.
  "성의 융숭하시어 이미  폐비 아니하실 것을 결정하시었으니  공비, 이 소식을 
듣는다면 하해 같으신  은총을 저버릴 길이 없을 것입니다. 듣자오니  공비는 
그 아비의 죄로 인하여 자기 역시 죄인이라 하여 상왕전에 석고대죄를 드렸삽고 
아직도 정전에서  몸을 피하여 궁인 처소에  칩복해 있다 하오니 후궁을  맞는 
날, 체모에 마땅치 않은가 합니다. 특별히 생각하시어  정침으로 돌아가라 분부
를 내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젊은 전하의 경위 밝은 말씀은 상왕으로 하여금 꼼짝없이 허락을 내리게끔 만
들어놓았다.
  "전하의 말을 들으니 과연 그렇구나! 후궁인 빈들이  가례를 치르고 현신을 
할 때 어찌 아래채에서 절을 받겠는가.
  전하의 말이 옳으니 내가  친히 상궁을 보내어 정전으로 올라가도록 타이르리
라."
  상왕은 말씀을 마치자 호협하게 웃음을 웃었다.
  젊은 상감은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다시 고한다.
  "아바마마께 또 한 가지 처분을 묻자올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태종은 손으로 수염을 쓸며 묻는다.
  "왕비가 폐위되지 아니하고, 그대로 정궁에 머물러  있게 된다 하오면 그의 친
정 어미와 동생들을 천민인 관비와 관노로 박아둘  수 없습니다. 이미 그의 아
비는 죄를 받아 자진했습니다. 이 점 어찌하올지 감히 아룁니다."
  총명 영리한 전하의  말씀을 듣는 상왕은 이번에도  또다시 꼼짝할 도리 없이 
허락을 내리게 되었다.
  "전하의 말이 당연하오. 심온의 일은 이미  처치된 일이니 다시 거론할 거리가 
없고, 현존한 왕비의 어머니와 동기들을 그대로 종이  되게 할 수는 없으니 유
사에게 분부해서 왕비의 어머니에게는  국대부인의 칭호를 다시 내리게 하고 그
의 자손들은 면천을 하도록 하오. 그리고 적몰했던 가산도 돌려주라 이르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젊은 상감은 문안을 마치고 유유하게 수강궁에서 물러났다.
  슬기로운 젊은 상감은 사랑하는  아내 왕비를 위하여 물샐틈없이 한편으로 체
면을 갖추게 하고 한편으로 호신책을 마련해 놓았다.
  이 일은 다만 왕비의 체면을 유지시키고, 왕비의  몸을 보호하는 데 그칠 뿐
만이 아니었다.
  장차 앞으로 후궁들이 들어와서 왕서자를 무수하게  탄생하는 날, 또다시 상
왕의 전철을 되풀이 하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튼튼하게 거멀못을 
박아놓는 훌륭한 일이기도 했다.
  상왕 태종은 젊은 전하를 돌려보낸 후에 마음 속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
  하고 두 번, 세 번 감탄했다.
  이날 젊은 전하 세종은 수강궁 상왕전에서 경복궁으로 돌아온 후에 내관을 통
하여 중전 아래채에 임어할 것을 정식으로 통고했다.
  지난번에는 상왕궁에 소문이 들릴까  하여 항상 미행을 했으나 이번에는 드러
내놓고 근신하고 있는 아래채 왕비의 처소를 찾으려는 것이다.
  중전궁녀들은 전하가 정식으로 왕비를 찾으신다는 연총을 받자 비전하께 아뢰
고 분주하게 아래채 왕비의 침실을 정리했다.
  이윽고 전하는 내관에게 호위되어 중전 아래채로 임어했다.
  왕비 심씨는 아직도 죄인으로 자처해서 머리에  나무비녀를 꽂고, 몸에는 백
설 같은 무명소복을 입었다.  한편으로는 나라의 죄인으로 자처하는 것이요, 한
편으로는 마음 속으로 원통하게 누명을  쓰고 세상을 버린 아버지의 거상을 입
은 것이었다.
  전하는 내관과 궁녀들의 옹위를 받으며 만면에 미소를 띠고 아래채 침실로 들
어섰다.
  심비는 조용히 일어나 젊은 전하를 맞이했다.
  검은 머리 흰옷으로 초연하게  일어서서 상감을 맞이하는 비전하의 모습은 지
난날 풍유했던 화용월태는 아니었으나  약간 야윈듯한 고운 얼굴은 마치 휘몰아
치는 첫서리 속에 청초하게 고절을 지니고 서 있는 백운타 흰국화 한 송이 같았
다.
  비전하는 전하가 정식으로 임어하실  것을 통지하고 오시는 것은 반드시 이유
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한층 정중하게 몸을 가졌다. 얼굴에는 미소조차 보이지 아니했다. 고개를 다
소곳 숙여 두 손을 마주잡고 아뢴다.
  "돌연 죄인을 찾으시니 왕은이 망극하옵니다."
  젊은 전하는 껄껄 웃었다.
  "죄인은 무슨 죄인, 어서 앉으시오."
  시녀와 내관들은  전하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뒤로 두고, 조용히  발길을 돌
려 물러갔다. 장지문이 소리 없이 닫혀졌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건넨다.
  "오늘 내가 정식으로 마마를  찾은 것은 상왕전하의 의사를 미리 전달하러 온 
것이오. 조금 있으면 수강궁에서 내관이나 궁녀가 올 테니 미리 알고 계시오."
  왕비는 수강궁에서 내관이나 궁녀가  온다는 전하의 말씀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폐비가 되는구나!' 했다.
  대신들이 자기를  폐위시키자고 상왕께 아뢴다는 말은  궁녀들을 통해서 귀에 
젖도록 들었다.
  아무리 젊은 전하께서 자기를 두둔해주시는 것은 잘 알고 있으나 무섭고 엄한 
상왕이었다. 그분이 한번  결단을 내린다면 젊은 전하도 별도리가 없는  것을 
잘 아는 때문이다. 산호동곳까지  뽑아서 주었던 전하의 맹세도 상왕의 말씀  
한 마디에는 한 굽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있다.
  비전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은 채 입이 굳었다. 아무 대답도 못했다.
  전하는 비전하의  우울한 표정을 살폈다.  얼굴에 가득 미소를  풍기며 말씀
을 계속한다.
  "놀랄 것은 없소.  상왕께서는 반가운 소식을 마마께  전할 것이오. 먼저 마막 
아래채에 거처하는 것을 아시고 정침으로 올라  거처하라는 분부가 계실 것이
고, 다음엔 국대부인을  관비로 박았던 일을  풀어서 원래대로 복원시킬  뿐 아
니라, 적몰했던 가산집물을 도로 환수하라 하시었소. 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내관과 상궁을 보내실 것이오."
  전하의 말씀을 듣는 비전하의 얼굴엔 비로소 안도와 환희의 빛이 떠돌았다.
  "과연이십니까. 성은을 어찌 갚사옵니까!"
  비전하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과연이라니, 내가  말씀을 듣고 온  길이오. 상왕께서는 대신들이 폐비하자고 
우기는 말씀을 듣지  아니하시고 이같은 처분을 내리신 것이오. 오늘  아침 문
안 때 내가 친히 말씀을  듣고 왔소이다. 모두 다 마마가 잘  참고 슬픔과 괴로
움을 견디어낸 덕이라 하겠소."
  왕비는 자리를 피해 앉으며 말씀을 올린다.
  "모두 다 전하께서 변변치 못한 신첩을 지도해 주시고 두호해주신  덕택이올
시다. 황공무지하여이다."
  "그러나 한 가지 미안한 일이 있소……."
  전하는 광채나는 눈으로 왕비를 바라본다. 차마 말씀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미안하시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리어 듣기에 죄송스럽습니다."
  비전하는 상감이 또 무슨 말씀을 꺼내나 하고 유심하게 상감의 용안을 바라뵙
는다.
  "날 보고 후궁을 두라고 하시는 거야, 하하하."
  전하는 웃음으로 말끝을 맺었다. 비 앞에 조금 쑥스럽고 무색한 모양이었다.
  "전하께 후궁을 두라 하셨습니까?"
  "음, 그래."
  "상감이 되시면 으레껀으로 후궁을 거느리시는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늦으셨
습니다."
  왕비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은 했으나 아름다운 눈초리에 
미미한 경련이 이는 듯했다.
  눈치 빠른 젊은 전하다. 비의 눈초리에 가만히 이는 경련을 놓칠리 없었다.
  "나는 도대체 후궁 두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 사람요. 두면 일이 많거든, 하하
하하. 도대체  사람들을 어거하기 귀찮은  중에 여자를 어거하기란  더욱 귀찮
은 거야. 옛 성인의  말씀에도 여자를 다루기는 소인을 다루기보다도 더  어렵
다 했거든, 하하하. 그래서  나는 반대를 했는데, 상왕께서는  대신들과 폐비를 
아니하는 대신 후궁 두서너 사람을  두시는 것으로 약속을 하셨다고 나에게 강
제로 후궁을 두라고 금혼령을 내리셨다  하오. 어찌하오, 조건부로 하신 일이니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구려."
  "염려 마십시오.  신첩은 소인이 아닙니다, 호호호.  전하의 참으시라는 분부를 
한평생 고이 간직하려 합니다. 절대로 투기는 아니하겠습니다."
  비전하의 푸른 살쩍이 파르르 흔들렸다.
  "원, 별말씀을. 비마마가 어찌 소인이겠소. 하하하."
  전하는 이제 왕비에게 더 알릴 것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씀한다.
  "모든 일은 마마의  말씀대로 참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소. 사람은 기뻐하고, 
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네 가지 감정을 가졌소.  그러기에 다른 동물보
다 존귀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감정을 제한 없이 그대로 펼쳐논다면  결국
에 가서는 방종으로  흘러서 파탄이 나고 마는  법이오. 이 네 가지  감정보다 
당신과 나에게는 더한층 크고 중요한 사업이 있소. 곧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오. 
남의 나라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나라로 만들어놓아야  하겠소. 백성들은 헐벗
고 굶주리지 않는 부유한 생활을 하도록 해야겠소. 외적이 침범하지 못하는 강
대한 국가가 돼야 하겠소. 그래서 나라의 문화가 훨씬 높아져서 중국을 능가하
는 겨레가 돼야 하겠소. 나나 당신이나 조그마한 사정속에서 한평생을 얽매여 
지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되겠소. 
  젊은 대왕의 크고 넓은 포부를 듣는 심비는  캄캄한 운무 속에서 한 줄기 큰 
빛을 바라보는 듯했다.
  형언할 수 없는 크나큰 희망이 가슴 안에 벅차게 부풀어올랐다. 젊은 대왕의 
모습엔 오늘 따라 더한층 위대한 힘이 발산되는 듯했다.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더욱 참겠습니다. 그리하여 대왕을 도와 견마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소! 
  젊은 전하는 한 마디를 남기고 대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전하가 환어한 지 한 
식경이 지났을 때였다.
  수강궁 상왕전에서는 상궁과 내관이 분부를 받들어 나왔다.
  적막하고 쓸쓸했던 중전 아래채에는 별안간 활기가 가득했다.
  뜰에는 깨끗한 황토를 뿌려놓고 당상에는 홍보를 덮은 사선상이 반듯하게 놓
였다.
  왕비는 소복으로 상왕의 특사를 맞이했다.
  상왕전 상궁은 사선상 앞에 서서 상왕 태종의 전갈 말씀을 전했다.
   지난번 석고대죄한 가상한 일은 잘 알고 있다. 비는 조금도 죄스러울 것이 없
으니 안심하라. 
   죄를 받은 심부원군원의 일로 인하여 국대부인을 관비로 박았던 것이다. 그러
나 왕비의 친정 어머니를 오랫동안 천민으로 대우할 수 없다. 도로 국대부인의 
칭호로 환원시키노라. 
   국법에 의하여 심씨네 가산을 적몰했으나 이미 국대부인의 칭호와 명예를 환
원시켰으니 가산집물을 도로 환급하는 것이다. 
  왕비는 수강궁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상왕전의 전갈을 받들었다.
  상왕이 왕비에게 내리는 전갈 중에 젊은 상감에게 후궁을 두게 하기 위하여 
금혼령을 내리고 가례도감을 설치하겠다는 분부는 쑥 빠졌다.
  아버지인 상왕의 절대한 권한으로 아드님에게 후궁을 두게 하는 일이므로 며
느님 되는 왕비한테는 알릴 필요가 없다고 태종은 생각한 때문이다.


  상왕 태종의 분부는 곧 실행되었다. 왕비 심씨는 아래채에서 중전 정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예절을 존중하고 근신하는 심비는 정당 옆에 따로 짚을 덮어 여막을 
짓고, 상복을 입고 채 짚베개를 짚고 있었다. 여전히 죄인의 몸으로 자처하여 죽
은 아버지의 삼년 거상을 입자는 것이다.
  궁녀를 시켜서 상왕과 젊은 상감께 전갈을 올렸다.
   왕은이 망극하시어 죄인의 딸을 내치지 아니하시고 다시 곤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은 공이요, 사는 사입니다. 자식의 도리로 죽
은 아비의 상복을 입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중전 옆에 초막을 짓고 삼년 거상
을 하려 하오니 윤허해주시옵소서. 삼년 거상중 상왕전하께 문안을 드리지 못하
옵고 상감마마의 수라와 건즐을 받들지 못하오니 더욱 황공하기 짝 없습니다. 
듣자오니 상왕전하께오서 이곳 사정을 통촉하시어 상감마마께 후궁을 두시게 한
다 하니 거상중이오나 기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하루바삐 가례를 치르시어 
궁 안에 화한 기운이 감돌게 하옵소서. 
  전갈을 받은 젊은 상감은 빙그레 웃었다.
   역시 잘 참는구나 ……. 이만하면 집안과 나라일이 잘되겠다.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전갈 나온 궁녀에게 물었다.
   상왕전에도 이 뜻을 아뢰었느냐? 
   예, 소인이 가서 아뢰라는 분부를 받자왔습니다. 
   어서 가서 아뢰어라. 상왕께서도 무한 기뻐하실 것이다. 
  전갈을 받들고 나온 궁녀도 기뻤다. 생기가 났다. 활개를 치면서 수강궁으로 
들어가 상왕께 같은 말씀을 올렸다.
  상왕은 더한층 기뻤했다.
  아비의 거사을 입어 초막을 짓고 짚베개를 짚어 삼년상을 입겠다는 것보다 젊
은 상감의 수라상과 시중을 들지 못하겠다는 말과 빨리 후궁을 두어, 궁 안에 
화기가 돌도록 해달라는 부탁이 더욱 가상하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혹여나 며느리 되는 왕비가 오해할까 해서 아드님에게 후궁을 두게 한
다는 말을 전하지 아니했는데, 도리어 먼저 후궁을 두어 자기의 일을 대신하게 
해달라고 당부를 하니 세상천하에 이같은 미덕을 가진 여자는 드물다고 생각했
다.
   과연 예법과 범절이 높은 왕비로다. 곧 돌아가 왕비한테 답전갈을 해라. 왕비
가 청하는 대로 곧 가례색을 설치하여 좋은 규수를 가려서 후궁 두서너 사람을 
뽑아 왕비의 일을 돕도록 하리니 안심하라. t
  상궁은 노상왕의 전갈을 받들고 왕비의 초막으로 돌아가 두 분 전하의 전갈과 
상왕의 만열하는 모습을 아뢰었다.
  이후부터 심비는 상중울 핑계하고 젊은 상감의 수라를 받들지 아니하고 침전
에도 들지 아니했다. 젊은 상감이 부탁한 모든 일을 참고 견디도록 노력했다.
  이로 인하여 심온의 집안은 다시 햇빛을 보게 되고, 무사하게 유지되어 나갔
다.
  상왕 태종은 예조판서 허조를 불러 분부를 내렸다.
   전자에 대신들과 의논해 결정한 대로 왕비는 폐하지 아니하고 후궁을 두어 
주상 궁중의 적막을 제거하려 하니, 경은 예조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라 가례색
을 설치하고 나라 안에 금혼령을 내려서 규범 있는 후궁 두서너 사람을 간택케 
하라. 
  허조가 부복해서 아뢴다.
   전자에 전하께서 여러 대신들과 함께 왕비전하를 폐위한다는 의논을 철폐하
시고, 후궁을 두어 주상전하의 건즐을 받들게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신은 마음 
속으로 전하의 넓으신 성덕에 감동하였습니다. 곧 분부대로 예조에 돌아가 가례
색을 설치하고 금혼령을 전국에 내려서 어진 규수를 간택하여 아뢰도록 하겠습
니다. 
  예조판서 허조는 청렴결백하고 강직하기로 이름 높은 사람이었다. 태종은 특
별히 분부를 내렸다.
   경의 말이 옳다. 무엇보다도 어질고 덕이 있는 여자라야 한다. 비록 자색이 
뛰어나게 절묘하다 할지라도 심덕이 없으면 마땅한 여인이라 할 수 없소. 
   삼가 성의를 받들어 먼저 가문과 규범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그러하옵고 한 
말씀 성상께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후궁을 거느리시는 일은 상왕전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오라, 주상전하의 적
막하신 것을 풀게 하기 위하여 주상전하께서 거느리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상
전하의 뜻에 맞아야만 일이 순조로울 것이니, 최후로 인물을 선택하는 일음 주
상전하께 맡기도록 하시는 일이 가할 듯합니다. 심히 황공한 말씀을 드렸습니
다. 
  허조는 태종의 성격을 잘 안다. 마치 아드님의 후궁 두는 것을 당신의 후궁을 
두는 듯 독재를 하려 드는 때문이다.
  허저의 강직하게 아뢰는 말은 한편으로 태종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고 한편으
로 태종의 얼굴을 무색하게 했으나 원체 바르고 옳은 말이었다. 더욱이 예조판
서 허조는 강직하기 짝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말을 탄해서 꾸짖을 도리가 없었
다. 태종은 하는 수 없이 껄껄 웃었다.
   경의 말이 옳다. 모든 일을 주상께 품하여 잘 결정하라. 
  허조는 일부러 미리 한 마디를 올려서 자기의 바른 뜻을 밝혔다. 만약 미리 
말씀을 하지 아니하고 후궁 두는 일을 젊은 상감과 의논했다가는 심온이모양 역
적으로 몰릭 십상팔구인 까닭이다.
  허조는 상왕의 다짐을 받고 물러간 후에 경복궁에 나가 알현을 청했다.
  젊은 상감은 항상 허조의 강직하고 예의바른 인품을 존경했다. 지체치 아니하
고 알현을 허락했다.
   예관이 오늘 불시에 어인 일로 만나기를 청했소? 
  만면에 화색을 띠고 하문했다.
  허조 역시 얼굴에 화색을 띠고 아뢴다.
   좋은 일을 아뢰기 위하여 알현을 청했습니다. 
  젊은 전하는 다시 미소를 띠고 하문했다.
   무슨 좋은 일을 말하러 왔소? 
   상왕전하께서 주상전하의 궁위가 너무나 적적할 것을 염려하시어 소신에게 
가례색을 설치하여 금혼령을 내린 후에 후궁울 간택하라 하셨습니다. 이 어찌 
좋은 경사가 아니오리까. 감히 이 뜻을 전하께 아뢰어 가례색을 설치하옵고 온
나라에 금혼령을 내려서 현숙한 규수를 선택하려 합니다. 
  전하는 이미 부왕인 상왕께 비를 폐하지 않는 교환조건으로 후궁 둘 것을 면
종한 일이 있었다. 반드시 어떤 대신이든 상와의 명을 받들어 가례색을 둔다고 
연통이 올 줄 예측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당신이 항상 마음 속으로 존경하는 
허조가 올 줄은 몰랐다.
  짐짓 허조를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과인은 평시에 항상 경의 근엄하고 강직한 인격을 존경했는데 오늘 경은 나
에게 후궁 두기를 권고하니 괴이쩍은 일이오. 한 지어미는 한 지아비를 받들고 
한 지아비는 한 지어미를 거느리라고 주장하는 경으로서, 오늘날 과인에게 후궁
을 두라 권하니 우습지 아니한가? 내가 평일에 경에게 바라던 바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구려 ----."
  허조는 옷깃을 바로잡고 경건한 태도로 아뢴다.
  "황공무지한 말씀이올시다. 당연하신   분부십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권도가   
있습니다. 죄 없으신 중전마마를 폐하시는 대신 후궁을 두시라 하시는  일이니 
전하께서는 묵묵히 순종하시는 것이 가한 줄  아뢰오. 그리하옵고 군왕은 예로
부터 후궁을 5, 6명  내지 7, 8명씩이나 거느리셨습니다. 과히 변될 일고 아니올
시다."
  허조의 아뢰는 말을 듣자 젊은 상감은 정색하고 대답한다.
  "경의 주장은 항상 일부 일부가 좋다고 했는데, 어찌해서 좋다고 주장했는가?"
  "서인의 집에 처첩이  많으면 항상 투기와 압력이  끊일 사이 없이 일어나서  
나중엔 집안이 패하여 결딴나는 일이  많은 까닭에 반드시 한 지아비는 한 지어
미를 맞이해서 화락한 가정을 이룩하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은 어찌해서 과인에게 후궁을 많이 두라 하는가?"
  "그것은 예로부터 군완은 구빈을 두라 했습니다."
  젊은 상감은 다시 정색하고 말씀을 내린다.
  "군왕은 첩을 많이 두어도 망신패가가 되지 않는가?"
  허조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코가  맥맥했다. 등에 땀이 흘렀다. 임기응변으로 
대답한다.
  "왕가는 번영해야 좋은 것이올시다.  그러기에 '시전'에도 '종사우선선'이란 
글이 있습니다. 왕자가 많으라고 비빈을 많이 두었습니다."
  젊은 상감 세종은 빙긋 웃으며 야유하는 말씀을 내린다.
  "그것은 임금이란 독재자가 자기의  색욕을 채우기 위하여 아름다온 여색을 
제한  없이 구했고, 그 밑에서 벼슬깨난 하는 작자들은 독재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양기 좋은 메뚜기가 씨를 많이 퍼뜨리는 거와 같이 후궁 속에서 자식을 
엄청나게 두었다고 예찬한 글이란 말요. 아첨이지.  경같이 강직한 사람이 꿋꿋
하게 간하지는 못할망정  나에게 첩을 세 사람씩이나  두라고 금혼령까지 내리
라 하니 평일에 내가 존경하는 허조가 아니로구려."
  허조의 등에 흐르는 땀은 관디 등솔까지 배어올랐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배다른 왕자가 많아서 나라가 어지러웠던 일은 예나 이제나 똑같은  길을 밟
고 잇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극간하지 못하고, 나로 하여금 전철을 또 밟으라 하
는가?"
  허조는 겨우 모기 소리만하게 대답해 아뢴다.
  "어리석은 소신은  다만 폐비되지 아니하시는 일만이  기뻐서 그저 순종하고  
극간을 못한 것뿐이올시다."
  대왕은 또다시 미미하게 웃으며 말씀한다.
  "경은 과부의 재혼하는 것까지 못하도록 법을 마련한 사람이 아닌가?"
  "네, 그러하오이다."
  "어찌해서 그 법을 마련했는가?"
  "삼강오륜을 밝혀서 한 번  출가한 여자는 윤기를 지켜서 수절하도록 권장한  
것입니다."
  젊은 전하는 껄껄 웃었다.
  "경은 일부함원에 오월비상이란 글뜻을 아는가?"
  "네, 압니다. 그러나 삼강오륜을  밝히지 아니하면 짐승이나 매한가지가 됩니
다. 그러므로 과부들의 원망은 많이 받을 줄 알면서 이법을 제정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경이 나를  위해 온 나라에 금혼령을 내려서 처녀색시를  
혼인하지 못하게 하고, 왕비의 눈에 가시가 되는  후궁울 뽑는 일은 오월비상이 
된다소 생각하지 않는가? 그것은 일부함원이  아니라 천부함원이요, 만부함원이 
되는 일일세. 경은  아직 이 일을 생각해보지 아니했던가?"
  명철한 말씀이었다. 과부의 재가를 금지시킨 일보다도 더 크고 무서운 죄악이
었다.
  허조는 이제 무어라 더 변명할 말이 없다.
  전 바닥에 고개를 푹 박고 엎드렸다.
  "나도 아름다운 여색이 싫지  않소! 팔선녀도 꾸며보고 싶고, 삼천궁녀를 모두 
다 내 손아귀에 집어넣고도  싶소. 그러나 욕심대로 한다면  왕실이 결딴나고 
나라가  망하오. 나도 사람이오. 왜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욕심이 아니 나겠소. 
욕심을 한량없이  편다면 넓고 넓은 저  푸른 하늘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오. 그
러나  욕심을 줄이면 주먹 안에도 들 수 있소. 나는 참으려 하오. 이것이 극기라
고 생각하오."
  젊은 상감의 말씀은 구구절절 크나큰 인간 철학이었다.
  허조는 젊은 상감의 심오한 인생관에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낫살먹은 소신이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전하께서 깨우쳐주시닌  고루하
고 완고했던 가슴이 활짝 열리는 듯합니다."
  젊은 상감은 미연히 웃으며 다시 허조를 향하여 말씀을 한다.
  "후궁을 두게 하는 일은 과인도  상왕전하께 분부를 받들었소. 그러나 과인이 
적극적으로 반대해서 아뢰지 아니한 것은 아까 경이 말한대로 무죄한 왕비를 까
닭 없이 내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묵송한 것뿐이오. 이제 경은 상왕께 후궁을 
간택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아니 거행할 도리가 없소. 상왕전하의 분부대로 가
례색을 두게 하오. 그러나 절대로 금혼령을 내려서는 아니되오.  왕비를 간택하
는 것도 아니고 일개 후궁을  뽑는데, 전국에 금혼령을 놓아서 처녀와  총각이 
시집과 장가를 가지 못하게 한다는 일은 아까도 말했지만 일부함원에 오월비상
이 아니라.  천부함원격이 되는 일이니 예판은 절대로 금혼령을 내리지 마오!"
  말씀을 마친 상감 세종의 얼굴은 엄숙했다.
  허조는 금혼령을 내리지 말라는  말씀을 듣자, 엄두가 나지 아니했다. 어찌해
야  좋을지 몰랐다.
  "성상전하의 어질고 밝으신 뜻은 잘 알겠습니다마는 금혼령을 내리지  아니하
고 어떻게 양가의 규수를 선택하올지 밝으신 하교를 묻자옵니다."
  "경은 과인이 존경하고 신임하는 재상이다. 경이 문벌과 덕행 있는 집 규수를 
조용히 수소문해서 나에게 천거하라. 중전이 보시고 선택하면 되리라. 그리고 권
문세가의  딸들은 절대로 취하지 말라!"
  중전이 보시고 선택하면 된다는 것과, 권문세가의 딸들은 절대로 취하지 말라
는 말씀에 허조는 마음 속으로 또 한 번  감복했다. 젊은 상감의 명철한 예지를 
경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과연 전하는 제가를 잘 하는구나!'
  생각했다.
  "중전께 어진  규수를 간택하라 하신다면 앞으로  왕실의 화기는 면면하시고  
국가는 번영할 것입니다."
  전하는 또다시 예조판서 허조에게 주의를 준다.
  "경의 의향에 맞는 양가의 규수가 있다 하더라도 혼자 마음  속으로 결정해서 
나에게 천거해서는 아니되오. 반드시  그 부모와 당자의 쾌한  허락을 받은 후
에 천거케 하오. 그리고 이미 다른 사람에게 허혼한 규수가  있다면 절대로 거
론하지 말라. 남에게 적악을 하는 일이니 조심하오."
  허조는 더한층 경복했다.
  "명심해서 거행하겠습니다."
  상감 세종은 또다시 당부하는 말씀을 내린다.
  "경은 상왕전하께서도 특별히  신인하시는 터이니 '금혼령을 내렸느냐'고  하
문하시거든 '내렸습니다'고 대답하고 중전이 간택한다는  말씀은 올리지 않도록 
하라. 다만 경이 천거한다고만 아뢰라."
  "일일이 명심하겠습니다."
  허조는 젊은 상감 세종의 지시를 받고 어전에서 물러났다.
  예조에는 가례색이 설치되고 허조는 당상관이 되었다. 젊은 전하 세종의 하교
대로 전국에 금혼령은 내리지 아니하고 조용히  사대부집 규수를 물색했다. 그
러나 권문세가의 딸들은 절대로 취하지 않기로 했다. 세종대왕의 뜻을 그대로 
받든 것이다.
  금혼령을 반포하지 아니하니 온  나라 안에 당혼한 총각과 처녀들의 물끓듯 
하는 소란도 없었다.
  그러나 욕심 많은  권문세가에서는 가례색인 예조에 좌청우촉하면서 자기 딸
로  젊은 전하의 후궁을 삼게 해달라고 졸라대는 대감이란 자들이 많았다.
  삼정승의 청도 들어오고, 육조판서  중에 청편지를 하는 자도 많았다. 겉으로
는  청백한 체하는 간관들 중에도 제 딸을 후궁으로 뽑아 달라고 예조판서에게 
청탁을 하는 자도 있고, 국가의 풍기와 백성들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헌부의 
고관대작들도 당년한 딸이 있으니 간택에 끼이게 해달라고 예판에게 뇌물을 보
내는 자까지 있었다.
  어떤 심한 대관은  딸이 없으니 급작스럽게 양녀를  만들어서 친딸이라 하고 
혐잡을 한 후에 생년월일의 사주를 적어서 단자를 만들어 예조에 바치기도 했
다.
  모두 다 이 김에 국권의 한몫을 단단히 잡아보자는 컴컴하고 더러운 배짱들이
었다.
  이자들은 모두 다  폐비하려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딸이 한번 후궁으
로 뽑혀 들어가서 왕자를 낳는  날 상왕의 비위를 잘 맞추고  젊은 전하의 은총
을 독점한 후에 무의 무탁한 심왕비를 폐위시키고 자기 딸로 왕비를 삼아서 외
손으로 세자를 삼아보자는 비루한 생각이 오장육부 속에 가득 차 있는 자들이었
다.
  허조는 청백하고 꼿꼿한 곧은 사람이었다. 이자들의  배짱을 유리붙인 듯  들
여다 보았다. 권문세가에서 보내온 단자를 일체 기록에 올리지도 아니했다.
  섣불리 뇌물을 보내는 자가 있으면 단자는 받지 아니하고 뇌물을 돌려보냈다.
  어떤 대신은 허조를 위협까지 했다.
  '한평생 그대는 가례색만 보고 있을 것인가. 내 청을 아니 들어준다면 그대는  
심온이 꼴이 되고 말리라!'
  무서운 협박편지다. 빗발치듯 날라 들어왔다.
  그러나 허조는 끄떡도 하지 아니했다.  깐깐하고 청백하고 강직한 성격도 성
격이려니와 뒤에는 젊은 상감 세종이 계셨다. 대왕의 근엄한 분부를 받든 때문
이었다.
  젊은 상감의 갸륵한 분부를 받들어 악법중의 하나인 금혼령을 내리지 아니하
고 조용히 양가의 처녀를 물색해서  부모와 당자의 허락을 받고 간택에 참례케 
한다는 갸륵한 소문은 서울을 위시하여 시골 변지에까지 퍼졌다.
  노소남녀 백성들은 모두 다 세조의 높은 덕을 칭송했다.
  "이 나라에 오래간만에 성주가 나셨구나!"
  "임금은 백성들의 부모라 했지만, 백성들의 사정을 알아주는 분이 나셨구나!"
  "민폐를 알 줄 아는 임금이면 진짜 임금이지!"
  더구난 혼담이 이룩돼서 당혼한 아들과 딸을 둔 부모들은 더한층 세종을 예찬
했다.
  가례색의 장관인 허조가  세종대왕의 명을 받들어 권문세가의 딸들을 취하지  
아니하고 청백하고 깨끗한 규범 있는 처자들을  뽑는다 하니, 서울과 시골에서
는 금혼령을 내리지 아니했건만 자원하는  규수들이 많았다. 순연히 젊은 상감  
세조의 너그럽고 어진 덕을 흠모한 때문이다.
  허조는 이중에서 처녀 십여 명을 뽑았다. 모두 다 청빈한 선비집 딸들이었다.  
교양이 높고 재색을 겸비한 처자들이었다.
  먼저 상왕께 고한 후에 젊은 전하 세종께 품했다.
  "가례색에서는 후궁의 후보로  십여 명을 뽑았습니다. 삼가  명단을 바치오니 
처분을 내려주시옵소서."
  세종은 명단을 받기 전에 먼저 하문했다.
  "어떠한 방법으로 그들을 뽑았는가?"
  "성지에 따라서 금혼령을 전국에 내리지 아니하고 청백하고 범절 높은  선비
집 딸 중에서 초벌간택을 했습니다. 모두 다 성덕을 흠모하여 자원한 처녀들이
올시다."
  "민원이 없도록 했는가?"
  "네,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권문세가의 딸들을 취하지 말라 했는데 어찌했는가?"
  허조는 고소하며 아뢴다.
  "삼정승. 육조판서, 사헌부,  사간원, 쩡쩡 울리는 대관들이 쟁두를 하며  자기 
딸들을 뽑아 달라고 좌청우촉이 대단했습니다. 
  어떤 자는 자기 딸이 없건만, 급작스럽게  호적을 고쳐서 양딸로 만들어 놓고 
간택에 참여케 해달라는 자도 있었고, 어떤 자는 편지로 위협과 공갈을 마구 하
는 자도 있었습니다."
  젊은 세종은 용안에 노기를 띠었다.
  "어떻게 위협 공갈을 했더란 말인가?"
  "너는 밤낮 가례색 차지만 하고 있겠느냐?  내 딸을 뽑아주지 아니하면, 역적
으로 몰겠다고 했습니다. 망유기극한 노릇이올시다."
  세종은 기가 찼다.
  "어떤 자가 그랬단 말인가?"
  "미친 자의  성명을 거론할 것리가 못됩니다.  전하께서는 다만, 세태가 이러
한  줄만 알아두십시오."
  젊은 상감은 껄껄 웃었다.
  "기막힌 세정이로구려,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소?"
  "앞으로 전하께서, 덕으로 이러한 무리들을 감화시키신다면 악한 무리들은 선
한 사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과히 염려하지 마시고 지극한 정성으로 백성을 
다스립시오."
  허조는 후궁 뽑는 일을 아뢰면서도 나라를 잘 다스려 달라고 아뢰었다.
  젊은 전하는 허조의 인품을 사랑했다.
  "경의 말을 명심하리라. 그리고 간택에 대한  일은 과인이 어찌 남의 집 처녀
를 함부로 대해 보겠소. 두서너 사람만 뽑을 작정인데  왕비께 간택을 하라 할 
테니 단자만 두고 나가시오."
  젊은 상감의 도량 넓은 말씀에 허조는 마음 속으로 깊이 탄복했다.
  "명철하신 하교올시다."
  허조는 처녀 명단을 두고 물러갔다.

    화음
  대왕은 허조가 물러간 후에 한동안 묵상 속에 잠겼다.
  무슨 일을 생각했는지 한 식경 후에 대왕은 어전내시를 불렀다.
  "상궁에게 내가 중전으로 들어간다고 연통을 해두어라."
  대왕은 왕후 심씨가 아래채에서 상와의 명에  의해서 정침으로 오른 후에, 아
직 왕비를 찾지 아니했다. 심비는 폐비를 면한 후에도, 상중에 있다 해서 정침 
옆에 여막을  짓고 그곳에 거처하면서 전하의 시중을 받들지 아니한 때문이다.
  전하의 임어한다는 기별을 받은 상궁은 여막에 있는 왕비를 모시고 정침으로 
올랐다. 
이윽고 전하는 내관을 거느리고 중전 정침으로 발길을 옮겼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비전하를 향하여 묻는다.
  "그 동안 별일 아니 계신 줄 아오마는 침식이 어떠하시오?"
  "잘 자고 잘 먹고 지냅니다. 아무 염려 마시옵시오."
  비전하는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아지고 옥안에 혈색이 붉지 아니하고 두  볼이 야윈 듯합니다. 지난 일을 다 
잊으시고, 마음을 턱 가라앉혀서 평심서기를 하시오."
  "전하께오서 이같이 신첩을 염려하시어 괴이시는데 제 무슨 까닭에  마음을 
상하오리까. 거상중이오나, 그저 어린것들을 보살피면서 잘지냅니다.
  어린것들을 보살피고 잘 지낸다는 비전하의 말씀을 듣자 전하는 불현듯 세 왕
자들이 보고 싶었다.
  옆에 모시고 서 있는 늙은 상궁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내가 그 동안 정무에  바쁠 뿐 아니라, 자주 중전에 들지  못해서 아기씨들을 
본 지 오래다. 봉보부인들에게 말해서 세 아기씨를 다 이곳으로 데려오라."
  상궁은 청명하고 물러갔다.
  이윽고 봉보부인 세 사람은 왕자 아기씨들과 함께 들어왔다.
  큰왕자 '향'은 올해 여섯 살이었다.
  영리하고 똑똑했다. 얼굴은 왕비  심씨를 닮아서 얌전하고 유순했다. 그러나 
몸이  가냘프고 약해 보였다. 분홍  중지막을 입고 머리를 땋서 갑사 댕기를 늘
였다. 봉보  부인에게 인도되어 전하와 왕비전하계 절을 드렸다. 뒷날 세자로 책
봉되었다가 문종 임금이 될 아기씨다.
  다음에 둘째 아기씨가 들어왔다. 금년에 세살이  되는 왕자다. 이름을 '유'라 
했다. 겨우 발을 옮겨서 내디딜  줄 알았다. 얼굴판이 마치 조부 태종을 닮았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콧대가 오뚝 섰다. 입술이 두껍고 귀가 짚신짝만했다. 심술
궂고 욕심깨나 있어  보였다.
  셋째 아기씨가 들어왔다. 금년생이다. 이름을  '용'이라 지었다. 아직 갓난이라 
확실하게 누구를 닮았다고 판정할 수는 없으나, 입매 콧매 눈매가 총명 영리하
고 착하게 생겼다. 대충 닮은 모습을 살펴본다면 금상전하인 세종의 모습과 약
간 비슷했다.
  전하가 앉아 계신 어전에 왕자의 유모인 봉보부인들이 오래 지체할 수 없었
다.
  아기씨들을 전하와 비전하 앞에 두고 뒷걸음을  쳐서 문 밖으로 물러났다. 측
근에 모
시고 있던 상궁도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비전하는 봉보부인이 비전하 앞에 뒤고 나간 갓난아기씨 '용'을 포대기에 싼 
채  가로 
안고, 전하는 세 살 된  '유'을 안았다. 여섯 살 된 '향'은 전하와 비전하 두 분  
무릎 앞
에 앉았다. 물샐틈없는 오붓하고 알뜰한 다섯 식구의 아늑한 풍경이었다.
  "이놈은 꼭 저의 할아버님 상왕전하의 모습을 닮았어!"
  전하는 귀여운 듯 '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짓고 말씀했다.
  "엉뚱하게 상왕전하를 왜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비전하도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도 웃으며 대꾸한다.
  "유전이지. 대를 걸러서 닮기도 하거든."
  전하는 한동안 세 살짜리 '유'를 어그다가 한 손으로 앞에 앉힌 '향'의  뒷머
리를 쓸었다.
  "이제 '향'은 벌써 여섯 살이 되었으니, 해만 바뀌면 곧  일곱 살이 된다. 내년
에는 글씨를 배우기 시작해야지!"
  여섯 살 된 '향'은  흑수정 같은 새까만 눈동자를 굴려서 전하의 용안을 바라
보며  말한다.
  "궁녀들한테 듣자오니 일곱 살이 되면 입학을  한다 합니다. 어서 빨리 일곱 
살이 되어서 글을 배우고 싶습니다."
  '향'의 목소리는 또렷또렷했다. 
  옆에서 향'의 말을 듣는 비전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아무렴, 어서 글을 배워야지. 그래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 너도 큰아들이니까 
앞으로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할 세자감이다. 더욱 열심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전하는 든든한 듯 '유'를 안은 채 '향'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말씀했다.
  "아바마마, 세자란 무엇입니까?"
  여섯 살 된 '향'은 별 같은 눈을 다시 반짝거리면서 전하의 용안을 쳐다보고 
묻는다.
  "하 하 하, 고것  똑똑하다. 세자라는 것은 장차 이 나라를 다스릴 임금의  자
리에 나
갈 수 있는 책임이 무거운 자리다. 앞으로 나의 뒤를 이어서 왕 노릇을 하는 것
이 세자
다. 많은 공부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
  '향'은 아바마마의 말씀을 어렴풋 알아듣는 모양이었다.
  "입학을 하면, 열심으로 공부하겠습니다."
  비전하는 전하가 '향'을 쓰다듬으며 '장차 세자감이다' 하는 말씀을  듣자 마
음이 새삼 
흐뭇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향'아. 한 달만 지나가면 해가 바뀌어서 네가 일곱  살이 된다. 아바마마와 
상왕전에 어서 입학을 해주십사 해서 내년부터는 글을 열심히 배워라."
  '용'을 안았던 한 팔 손을 내려서 '향'의 딴 머리채을 쓰다듬어주었다. 
  이때, 전하는 별안간 용포 자락이 차근차근함을 느꼈다.
  "아, 이놈이 오줌을 싸는 구나!"
  "저를 어쩌나!"
  비전하는 황망히 '용'을 내려놓고  '유'를 전하한테서 받아서 기저귀를 뽑았
다. 기저귀를 뽑는 동안 세 살 난 '유'는 심술 사납게 목통을 내어 발버둥을 치
며 큰 음성으로 울었다. 장차, 자라서 수양대군이 될 아기다.
  봉보부인이 뛰어들어왔다. 제각기 세  아기씨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유모들이 
세  아기씨를 안고 나간 후에 대왕은 만열된 심경으로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놈 심술 대단한데---- 보통내기가 아니야. 형제 중에 그중 왈패가 
되겠는데, 까딱 잘못하다가는 형을 윽박지르겠는데---."
  "어린것이 심술이 대단합니다. 유모가 젖을  조금만 늦게 주어도 발버둥을 치
고 목을 놓아 울어댑니다. 그리고 한번 울기 시작하면 그칠줄을 모릅니다. 어린
것이 무섭습니다. 너무 심술이 과합니다. 앞으로 자라게 되면 버릇을 단단히 가
르쳐놓아야 하겠습니다."
  "하 하 하,  그야 사내자식이 좀 곁기도  있고 심술도 있어야지, 너무나 얌전
만  하고 나약해도 못쓰거든. 하여튼 외양도 그렇지만 성격도  제 조부 상왕전
하를 많이 닮은 듯해 ---- 하 하 하."
  "황공한 말씀이오나 어지러운  세상에는 상왕전하 같으신 성격이 좋습니다마
는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승평세월에는 상왕전하 같으신 대담 쾌할하신 성격은 
도리어 분란을 일으키지 십상팔구올시다. '유'는  자라는 대로 전하께서 다른  
아이들에 비하여 더한층 엄하게 교훈을 내려주셔야 할 것입니다."
  비전하는 어린 아기씨들의 장래를 위해서 슬기롭게 말씀을 올렸다.
  세종은 점점 더 마음이 흐뭇했다.
  "좌우간 중전은 앞으로 또 훌륭한 아들을  많이 낳겠지만, 지금 저 애들 삼형
제가 다 영특해서 사람으로서의 한  구실씩은 다 할 테니 과인의 마음이  진정 
기쁘오. 모두 다 마마가 어질고 슬기롭고 덕이 높으신 때문이오."
  "무슨 말씀을 황공쩍게 그리하십니까. 모두  다 전하의 갸륵하신 심덕으로 용
속지 아니한 어린것들이 생산되었나봅니다."
  비전하는 고개를 숙여 미연히 웃으며 대답했다.
  어린이들 삼형제를 앞에 놓고  바라보는 왕과 왕비의 마음은 모든 시름과 근
심을 잊은 채 한결같이 훗훗하고 흐뭇했다.
  "한평생 우리 잘 지냅시다. 좋은 일 많이 하고 ----."
  전하는 마음이 푸근했다.
  소복 입은 비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씀한다.
  비의 마음도 흐뭇했다. 그러나  유학의 훈육을 엄하게 받고 자라난 심왕후다.  
무의식중에 제이천성으로 고질화된 유교의 체취를 발산했다.
  정색을 하고 몸을 피하여 아뢴다.
  "신첩의 몸에는 아비의 거상옷을 감았습니다. 친압하시는 전하의 손기을 감히 
받자옵지 못합니다. 오늘날 신첩이  전하의 건즐을 받들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때문이올시다. 굽어살펴주시옵소서. 삼년상을 마친 후에 다시 전하를 모시기로 
하겠습니다."
  몸을 피해 앉으며 쌀쌀하게  아뢰는 목소리는 옥을 바수는 듯 쨍쨍 하면서 찬
바람이 이는 듯했다.
  전하는 무색했다. 머쓱해 앉았다.
  비는 다시 아뢴다.
  "상왕전하께서 후궁을 구하라시는 것도  그 때문이십니다. 대신들이 궁중이 적
막하겠다고 한 말도 신첩이 거상중인 때문인가 합니다."
  전하는 비를 향하여 껄껄 웃었다.
  "하하하, 대신이란 자들이 나를 동정하는  체하고 궁중이 적막하겠다고 말한 
것은 당신을 내쫓고 새 왕비를  맞이하자고 반론하려고 한 말이지 결코 당신이 
바버지의 상중에 있어서, 내  시중을 못들게 되므로 궁중이  적막하겠다고 한 
말은 아닙니다.  마마가 장인의 거상을 위하여 나를 소박한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지, 하하하. 마마의 효심을  꺾을 수야 있소. 삼 년 동안을 수절하고 고이 기
다리리다. 하하하."
  비도 웃음을 짓고 아뢴다.
  "세상천하에 남자 수절도 있습니까? 그러기에 신첩 대신 후궁을 두시라는  것
이 아닙니까. 호 호 호."
  "꿩 대신 닭이란 말인가? 하하하."
  전하는 호탕하게 웃었다.
  비전하의 겉으로 쌀쌀했던 얼굴 표정도 봄바람이  이는 듯 부드러워 졌다. 소
리 없는 웃음을 입술가에 풍겼다.
  이윽고 전하는 정색하고 말씀을 꺼낸다.
  "실상인즉, 오늘 나는 후궁에 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마마를 찾았소."
  비는 얼굴을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슬기로운 눈으로 대답하는 표정을 보냈다.
  "아침에 예조판서 허조가 들어와서  후궁으로 자원해 들어온 처녀 십여 명을  
나더러 간택하라 하는데, 내 어찌  남의 집 처녀들을 몸소 대면해서 간택하겠소. 
내 대신  마마가 후궁 서너 사람을 뽑아주시오."
  "정궁을 뽑으시는 일이  아니고, 후궁을 선택하시는 일인데  삼간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친히 보시고 뽑으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그야, 대상이 세 사람인데 세 사람을  뽑는다면 아무 관계가 없겠소마는 십여 
명 처자 중에서 단지 세  사람만 뽑는데 나머지 낙선된 처녀들의 처지가 곤란하
지 아니하겠소? 이애들은 점박이가  되어서 앞으로 시집을 가는데도  난처한 일
이 많을 테니 이번 간택은 꼭 마마가  친히 선을 보아서 뽑아주어야만 하겠소. 
다시  두말 말고 후궁 뽑는 일을 맡아주시오."
  전하는 앞으로 궁중의 화기를  더한층 조성시키기 위하여 궁리 끝에 이같은 
넓은 도량을 취했다.
  비의 마음도 흐뭇했다.
  "신첩이 뽑았다가 만약 전하의 마음에  들지 아니하시면 어찌합니까. 무를 수
도 없고--- 호호호."
  "어처는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내 배필인데 어처가 뽑아주는 내 후궁이 어찌  
마음에 들지 아니하겠소. 조금도 탓하지 아니할 테니 두말 말고 뽑아주시오. 만
약 어처가  못뽑아주겠다고 굳이 사양한다면 상왕전에서 뽑는다고 하실 테니 다
시 제론하지 말고 책임을 맡으시오. 그래야만 왕실은 화기가 애애하게 돌고 자
손들에고도 후환이 없게되오."
  자손들에게 후환이 없게 되고 왕실은 화기가 애애하게 된다는 전하의 슬기로
운 말씀에 왕후 심씨는 황연히 깨달았다.
  "정 하교가 그러하시다면 책임이 중하오나 삼가 간택하는 일을 봉행하겠습니
다."
  "옳게 생각했소. 당부하오."
  이날 전하는 왕비와의 화목한 대화를 나누고 의전으로 돌아갔다.

    일비삼빈, 이상침
  후궁을 뽑기 위하여 예조 안에 설치된  가례색에서는 황도길일, 좋은 날을 택
하여 자원해서 세종대왕의 후궁이 되기를 원하는 처녀,  십여 명을 대궐 안으로 
들여보내게 되었다.
  전하로부터 예조판서 허조에게 후궁을 뽑는 일은 왕비 심씨가 친심한다는 분
부를 내린 때문이다.
  궐 안에서는 내관과 상궁 수십 명이 말과 보교를 타고 나와서 처녀들을 맞이
해 들어갔다.
  예조 판서가 말을 타고 앞에 서고 내관이  뒤에 따랐다. 상궁이 탄 보고 십여
체와 처녀들이 탄 꽃가마 십여 채는 판서와 내관의 뒤를 따라 줄을 이어 거리를 
휩쓸었다.
  장안 한복판 종로 네거리에는 구경꾼들이 삽시간에 모여들었다.
  가마 옆채에 꽃가마 십여  채가 줄을 지어 나가고 호위군사에 등롱꾼과 교부
까지 합쳐서 육칠십 명이 벽제 소리를 치며 길을 메워 나가니 지나가는 남녀노
소의 이목을 끌지 아니할 수 없었다.
  더구나 유소보장의 오색이 휘황한  꽃가마 십여 채가 줄을 지어 나가는 행차
는 더한층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무어냐, 무슨 행차냐? 꽃가마 십여 채씩이나 나가니, 예쁜 각시들이  한날 한
시에 한꺼번에 시집을 갈 리도 없고----."
  떠꺼머리 거러지 총각 한 녀석이 지껄였다.
  낫살먹어서 세상 물정을 다소 짐작하는 늙은 홀아비 거지가 대답한다.
  "나라님이 첩을 뽑으라고 간택령을 놓았는데 뽑아 달라고 자원해서  들어가는 
꽃각시 행차란다."
  "어이구 나라님도 망령이다. 한꺼번에  첩을 십여 명씩이나 둔단 말인가? 제기
랄,  나같은 놈은 떠꺼머리의 총각으로 사십 평생을 지나건만 씨암탉 같은 계집
년 한 명 따라 오지 않는데--- 십여명씩이나 자원해 들어가다니 참말 콧구멍이 
막힐 지경이다.!"
  "그러기에 세상일이 고르지가 못하단 말이다. 야, 이놈아. 너만 그런  줄 아느
냐. 나도 상처를 해서 아내가 죽은  지 이십 년이 넘었다마는 자식새끼는 우글
거리고 홀아비 생활이 말이 아니다. 너는 씨암탉 같은 계집년 한 명 안따라온다
고 한탄을 하지만 나한테는 메주덩이 같은 헌 계집 한 명도 따라오지 않는다. 
이놈아, 계집년도 다 빨아먹을  것이 있어야 따라오지 집 한 칸 없어서 세발 막
대 거칠 것이 없는 우리들한테 어느 년이 따라온단 말이냐?"
  "여보  영감님, 우리도  한번 임금질을  해봅시다. 제기랄.  공평치도  못한 세
상이야----."
  떠꺼머리 거지 총각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늙은 걸인은 그래도 세상 물정을 짐작했다.
  떠꺼머리 총각이 임금질을 해보자고 큰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간이 콩알 만큼 
오그라졌다.
  "쉬---."
  소리를 치면서 떠꺼머리 거지 총각의 입을 꽉 틀어 막았다. 
  순간 어디서 뛰어왔는지 벙거지에  날랠 용자를 딱 붙인 검은 더그레를 입은 
군노사령이 떠꺼머리 거지 총각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놈아, 무어야? 임금질을 해보겠어?"
  별안간 청천벽력이었다.
  뺨을 맞은 떠꺼머리 눈에서 불이 났다.
  "왜 때리는 거야?"
  떠꺼머리 총각은 고함을 치며 반항했다.
  "이놈아, 임금질을 해보겠어? 역적질을 해보겠단 말이지. 이놈, 가자!"
  벙거지에 날랠 용자를 딱 붙인 군노사령은 떠꺼머리 총각의 멱살을 잡아끌었
다. 벙거지에 날랠 용자를 딱 붙인 군노사령은 떠꺼머리 총각의 멱살을 잡아끌
었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본 늙은 거지는 겁이 덜컥 났다. 어마 뜨거라 하고 앞을 향
하여 줄달음질을 쳤다.
  늙은 거지가 달아나는 것을 보자, 떠꺼머리 총각도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서 
달아나는 것이 제일 상책이라  생각했다. 멱살잡힌 군노사령의 손을 뿌리치고  
늙은 거지의 뒤를 따라 줄달음질을 쳤다.
  떠꺼머리 총각을 놓친 군사령은,
  "저놈 잡아라!"
  소리를 치며 뒤를 쫓았다. 군노사령이 '저놈 잡아라' 소리를 치며 떠꺼머리 총
각의 뒤를 쫓는 것을 보자, 가례색 처녀들의  꽃가마를 호위해가던 동료 군노들
이 일제히 뛰어나와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를 잡으려 했다.
  늙은 거지와 떠꺼머리 총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달아나 꽃가마를 영
솔해 나가는 예조판서의 행차를 앞질렀다. 군노사령들도  거지들을 놓칠세라 이
를 악물고 뒤쫓았다.
  이 통에 꽃가마 행차는 길이 막혀서 나갈 수가 없었다.
  예조판서는 크게 노했다.
  "무엄하고나. 어찌해서 이같이 소란들을 떠느냐?  누가 감히 이 행차를 막느
냐? 상감마마의 후궁을 뽑는 행차다!"
  호통이 추상같이 떨어졌다.
  배행하던 내관들도 말 위에서 내시 특유한 기이한 말소리로 군노사령들을 꾸
짖었다.
  "왜 이리 무질서하냐? 어떠신 행차인데 감히 앞을 막느냐?"
  늙은 거지와 떠꺼머리  총각은 군노사령들에게 휩싸인 채 주먹다짐의 격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는 결국 군노사령
들의  오랏줄에 묶어져서 예조판서의 행차 앞에 꿇렸다. 
  예조판서는 거지들을 바라보면서 군노에게 물었다.
  "웬일들이냐? 곡절을 말해라!"
  처음에 떠꺼머리 총각을 붙들었던 군노가 대답한다.
  "이놈들이 색시들의 꽃가마 행차가  줄을 지어 나가는 것을 보고 저희들도  
임금질을 해보겠다구 했습니다. 역적모의 하겠단 뜻입니다. 그대로 놓아둘 수가 
아벗어서  잡느라고 부산을 떨었습니다."
  "무어, 임금질을  해보겠다구 했어? 무엄한 놈들이로구나.  금부에 넘겨서 치
죄케  해라!"
  옆에서 듣던 대전내시도 발을 동동 구르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거지들의 뺨을 갈긴다.
  "임금질이라니? 임금 노릇을 해보겠단 말이자, 이놈들. 임금질을  하기 전에 
치도곤을 먼저 맞알. 괘씸한 놈들!"
  거지들은 금부 나졸한테로 넘겨지고, 꽃가마 행차는  다시 줄을 지어 종로 거
리를 휩쓸면서 황토마루 고개를 지나 해태를 바라보고 광화문을 거쳐 영추문으
로 돌아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예조판서와 내관은 편전으로 들어가 세종께 복명했다.
  "가례색에서는 후궁으로 자원한 처녀  십여 명을 꽃가마에 태워 지금 대내에  
도착했습니다."
  세종은 고개를 끄덕여 점두한 후에 예판 옆에 모시어 섰는 내시에게 하문했
다.
  "도중에 별일은 없었느냐?"
  "아무러한 지장은 없었습니다마는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 한 놈을 잡아
서  금부에 넘겼습니다. 
 세종은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냐?" 왜 거지들을 잡아서 금부에 넘겼단 말이냐?"
  "임금질을 하겠다고 해서 잡아 넘겼습니다."
  "임금질을 하다니?"
  예조판서가 옆에서 아뢴다.
  "무식한 놈들이라서 말을  할 줄 몰라서 임금질을 해보겠다구  한 것 같습니
다. 임금 노릇을 해보겠다는 말인가봅니다."
  세종은 빙긋이 웃었다.
  내시가 까불어대면서 아뢴다.
  "아주 무엄하기 짝 없는 놈들입니다. 임금질을 한다는 말은 역적질을 해 보겠
단 말입니다. 대역부도올시다. 능지처참을 해야겠습니다."
  세종은 계속해서 미연히 웃으며 말씀한다.
  "가만 있거라. 거지놈들은 어디 있었고, 임금질하겠다는 말은 누가 먼저 들었
느냐?"
  예조판서가 아뢴다.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는 구경꾼  틈에 끼여 있었고, 그놈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호위군사인 군노가 듣고 쫓아가 잡느라고 잠시 소란을 떨었습니다."
  "처녀들의 궐 안으로 들어오는 행차가 좀 분요했구려. 그러기에 구경꾼들이 모
여들었지?"
  "예, 조금 분잡했습니다. 마중나간 상궁들의 가마가 십여 채에, 처녀들이 탄 꽃
가마가 십여 채가 되고 호위군사와  등롱꾼까지 합쳐서 칠팔십 명이 움직였으니 
거리가 좀 분요해서 구경꾼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민폐를 끼친 일은 없는가?"
  "절대로 없습니다."
  "꽃가마와 가마가 근 삼십 채나 움직였으니 거리는 한동안 화려했겠군."
  "예, 그러합니다."
  "꽃가마에 누가 탄 것을 백성들은 알았는가?"
  "가례색이 설치되고 금혼령이 내린다는 소문이 퍼졌으니, 나라에서 후궁을 뽑
기 위하여 처녀들이 대궐로 들어가는 행차인 것은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전하는 비로소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들의 임금질을 해보겠다는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예판에게 분부한다.
   금부에 기별해서 잡아 가두었다는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를 지체 말고 
궐 안으로 불러들이게 하라. 
  예조판서와 어전내시는 천만 뜻밖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명을 아니 받들 길 없었다.
  곧 총각과 거지를 대내로 데려오라고 금부에 영을 내렸다.
  
    해오민지온혜
  금부에서는 세조의 어명을 받들어 잡아 가두었던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
를 대궐 안으로 호송했다.
  근정전 넓은 뜰에는 기치창검이 휘황찬란하고 호위군사가 나열한 속에, 떠꺼
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가 벌벌 떨면서 가쁜 숨을 쉬고 엎드려 있었다. 금방 곧 
죽이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세종은 예조판서와 금부 당상이며, 모든 시신을 거느리고 전상에 납시
었다. 떠꺼머리 총각과 늙은 거지는 벌벌 떨면서 머리를 땅에 박은채 고개를 들
지 못했다.
  세종대왕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먼저 늙은 거지를 향하여 엄숙하게 옥음을 내
린다.
   고개를 들고 내 말을 듣거라. 
  늙은 거지는 이제는 죽나보다 하고 후들후들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보아하니 낫살깨나 먹어서 철이 날 만한 위인인데 부지런히 일을 해서 살아
나갈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어찌 저꼴을 하고 다니느냐? 
   본시 어렵게 지내는 중에 중년 상처를 해서 홀아비로 지냅니다. 홀아비로 어
미 없는 자식새끼들을 길러 나가려니 아무리 노동을 하오나 밑빠진 가마솥에 물
붓깁니다. 그래서 이꼴이올시다. 
   네 나이가 몇 살이냐? 
   마흔다섯 살입니다. 
   어찌해서 임금질을 하자고 했느냐? 
   그런 말을 한 적은 절대로 없습니다. 마음 속으로 팔자 한탄만 했을 뿐입니
다. 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서 후궁들을 꽃가마에 태워서 십여 명식이나 데려
가는데, 나는 팔자가 왜 이꼴인가 하고 마음 속으로만 부러워했을 뿐입니다. 임
금질을 하겠다고 말한 것은 저기 떠꺼머리 총각놈입니다. 소인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저놈의 입을 틀어막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저 살려줍시오. 
  손을 들어 싹싹 비비며 말했다.
   죄가 없는데 그럼 어찌 달아났느냐? 
  세종은 일부러 음성을 높여서 호령을 했다.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 하지 아니합니까. 저놈하고 같이 있었으니 잡히기만 
하면 큰일이 날 체니 달아난 것뿐입니다. 
  늙은 거지는 솔직하게 고했다.
   자식이 몇이나 되느냐? 
   어미 없는 어린것들이 담불담불 다섯 놈이나 됩니다. 
  늙은 거지의 누에서는 더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고
개를 숙였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임금을 원망했구나 ----. 
  늙은 거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 못씻은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대답
한다.
   억울한 말씀이올시다. 소인이 어찌 임금님을 원망했겠습니까. 다만, 중년에 상
처를 해서 자식새끼들은 기르지 어렵고 ---- 기구한 제 신세를 한탄했을 뿐입
니다. 제가 죄를 범했다면,  쉬----  소리를 치고 달아난 죄밖에 없습니다. 그저 
죽여주십시오. 자식새끼 기르기도 어렵습니다. 
  세종은 늙은 거지의 대답하는 말을 다 들은 후에 떠꺼머리 총각을 향하여 말
씀을 내린다.
   듣거라. 너는 무엇하는 놈이며 어찌해서 임금질을 해보겠다 했느냐? 만약에 
일호라도 기만하는 일이 있다면, 큰 벌을 면치 못하리라. 
  큰 벌을 면치 못한다는 대왕의 으름장 놓는 말씀을 듣자, 총각은 겁이 덜컥 
났다. 우둔한 눈을 번쩍 들어 전상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나는 원해 거짓말을 해서 남을 속일 줄 모르는 놈이올시다. 언제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실토해서 말하는 놈이올시다. 그런데 아무리 속이지 않고 
바른 대로 토설을 한다 해도 믿지 아니하고 거짓말이라 하고 벌을 준다면 큰일
입니다. 내 말을 거짓말이라 하지 않고 곧이 들어서 받아주겠습니까? 
  너무나 당돌하고 고지식한 대답이었다. 총각은  소인 이란 말도 쓸 줄 몰랐다. 
임금 앞에서  나 라고 대답했다.
  옆에 시립해 있던 판의금은 황공하고 민망하게 생각했다.
   이놈아, 무엄하고나. 어전에서 내가 무어냐? 소인이라고 아뢰지. 그리고 방자
하게 잔소리가 너무 많구나! 
  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나는 소인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오. 왜 욕을 하고 꾸지람을 하
오? 나는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후에 오늘날까지 나를 나라구 했소. 큰 벌
을 준다 하니까 속이지 않고 말을 해도 거짓말이라고 하면 어찌하겠느냐고 물어
본 것이 무엇이 잘못이오? 
   이놈, 방자한 놈이다. 저놈을 매질해라. 
  판의금은 나졸들에게 호령을 내렸다.
  전상에서 대왕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아서라, 매질은 하지 마라. 내가 다시 물어보리라 ……. 
  곤장을 들고 달려들던 집장나졸이 물러났다.
   도대체 네놈의 나이 몇 살이냐? 
   똑똑히 나이는 모릅니다마는 근 삼십 되었습니다. 
   이놈아, 네 나이도 모른단 말이냐? 
   아비 어미가 일찍 죽었습니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압니까? 대충
으로 짐작할 뿐입니다. 
  대왕을 위시하여 모든 사람들은 웃지 아니할 수 없었다.
   무슨 생업을 하느냐? 
  대왕은 다시 물었다.
   장돌뱅이 노릇을 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돈이 모이지 아니합니다. 
   왜 돈을 모으지 못했느냐? 
   남을 속여서 거짓말을 할 줄 알아야 돈이 모이는데, 죽어도 거짓말은 하기 싫
고 비싸게 속아 사서 싸게 파니 돈이 모이지 아니하고 밤낮 이꼴로만 지냅니다. 
   그래서 여태껏 총각으로 있고 장가를 못들었구나. 
   장가  소리를 듣자 떠꺼머리 총각 녀석은 싱글벙글 웃고 대답을 아니했다.
  대왕은 다시 미소를 짓고 물었다.
   왜 임금질을 하겠다고 말했다가 붙들렸느냐? 
   임금님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나도 한번 임금질을 해보았으면 좋겠다구 혼
자말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군노사령들이 덤벼들어서 따귀를 치고 나를 잡았습
니다. 
  떠꺼머리 총각의 꾸밈없는 순직한 대답에 대왕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아
니했다. 계속해서 묻는다.
   어찌해서 임금이 부러웠느냐? 
  대왕의 용안에 항상 미소가 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본 떠꺼머리 총각은 공포에 
휩쓸렸던 마음이 차차 풀리기 시작했다. 벙긋벙긋 웃으며 대답한다.
   꽃 같은 처녀색시 한 사람을 첩으로 두는 일도 나 같은 장가 못든 놈에겐 부
러운 일인데,  꽃가마를 탄 처녀색시 십여 명이 나라님의 첩이 되어 대궐로 들
어간다 하니 어찌 부럽지 않겠소. 그래서 나도 한번 나라님이 되는 임금질을 했
으면 좋겠다고 혼자말을 했소. 그랬더니 저 늙은이가  쉬!  하고 내 입을 틀어막
았소. 
  좌우 시자들은 떠꺼머리 총각의 기탄없이 대답하는 말을 듣자,
   저런 무엄한 놈이 있나! 
  발들을 동동 굴렀다.
  대왕은 소리를 높여 껄껄 웃으며,
   가만두어라. 정말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놈이다. 진솔해서 좋다! 
  말씀을 마친 후에 다시 묻는다.
   그래서 군노사령들한테 잡혔구나 ----. 
   지금 생각해도 기막힙니다.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 사령이 뛰어나오
더니 날 보고 역적질을 했다고 따귀를 갈깁니다. 어찌 부아가 나지 않겠습니까? 
사령의 복장을 쥐어지르고 저 늙은이를 쫓아가다가 여러 사람한테 잡혔소. 원통
하오. 내가 무슨 역적질을 했단 말씀요? 나는 나이 삼십이 넘도록 장가를 못든 
놈이올시다. 꽃 같은 처녀색시를 십여 명씩이나 꽃가마를 태워서 대궐로 데려가
는 나라님이 부러웠을 뿐이오.   
  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사정을 잘 알겠다. 
  말씀을 내린 후에 예조판서와 판의금에게 분부를 내린다.
   두 사람을 다 무죄석방시켜라! 총각은 나이 삼십지년이 되었건만 장가를 들
지 못했으니 화려한 꽃가마 행차를 보고 괴탄하는 소리를 낸 것은 인간의 상정
이고, 늙은 홀아비가 자식들 거느리기 또한 극난한 일이다. 예판은 총각에게 색
시를 구해서 장가를 들게 하고, 늙은 이에게는 과부를 구해서 속현을 해주도록 
하라. 
  뜰 아래 엎드렸던 늙은 거지와 떠꺼머리 총각은 전상에서 내리는 대왕의 옥음
을 듣자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눈을 둥그렇게 떴다. 대왕은 다시 어전내시에
게 분부한다.
   너는 내수사에 나가서 별좌에게 내 말을 전해라. 총각과 늙은이의 혼수비용을 
내수사에서 일체 부담할 뿐아니라 초가삼간씩을 마련해서 신접살이를 장만해주
라 해라. 그리고 생계가 마련될 때까지 매월 쌀 한 섬씩 대주라 하라. 
  세종은 다시 늙은 거지와 떠꺼머리 총각에게 말씀을 내린다.
   너희들을 무죄백방하고 아내를 구해주라 했으니 앞으로 부지런히 일하면서 
유자생녀하고 잘살아라. 
  늙은 거지와 떠꺼머리  총각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전 뜰 앞에서 뭉울 덩실덩실 추었다. 예조와 내수사에서는 대왕의 분부를 
일일이 받들어 시행하니 대왕의 성덕은 바다같이 넓었다.
  한편 꽃가마 십여 채는 상궁들의 인도로 영추문을 통과해서 금교에서 내린 후
에 처녀들은 보행으로 합문을 지나 중전에 당도했다.
  이때 왕비 심씨는 소복단장으로 제조상궁과 감찰상궁 등 일곱 상궁들을 거느
리고 처녀들을 맞이했다.
  처녀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왕비의 앞으로 나가 절을 올렸다.
  모두 다 달더이같이 환하고 꽃송이같이 아름다웠다.
  노랑 회장저고리에 분홍 치마를 입은 처녀, 연두 회장저고리에 진당홍 치마를 
두른 처녀, 옥색 회장저고리에 남치마를 입은 처녀, 색동저고리에 염분홍 치마를 
입은 처녀, 은회색 회장저고리에 은옥색 치마를 두른 처녀, 사람의 꽃밭을 이루
었다.
  저고리 앞섶마다 성씨와 아버지의 직위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왕후는 대왕을 대신해서 후궁을 뽑는 소중한 임무를 맡았다.
  어렵고 무거운 책임이다.
  뿐만 아니라 한번 잘못 뽑아논 뒤엔 왕후 자신의 한평생 한이 될 장본인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얼굴이 아름답고도 심덕이 있는 규수를 뽑아야만 했다.
  왕비는 예조에서 올린 명단과 처자들의 저고리 앞섶에 붙인 성씨를 일일이 대
조해보면서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예조 가례색에서 훌륭하다고 추천해 올린 십여명의 처녀 중에서 단지 세 명만
을 뽑는 어려운 간택이었다.
  왕비는 조심하고 신중하게 인물과 명단을 살피면서 항상 미소를 띠어 상냥한 
말씨로 처녀들에게 물었다.
   아버님은 무엇을 하시느냐? 
   글 읽은 선비올시다. 
   너도 글을 좀 배웠느냐? 
    소학 까지 읽었습니다. 
   여자가  소학 까지 배웠으면 족하지. 바느질도 할 줄 아느냐? 
   아버님의 도포도 지어봤습니다. 
   도포까지 지었어? 무던하구나. 반찬은? 
   청빈한 선비집에서 무슨 찬수를 잘해 먹겠습니까? 된장찌개쯤은 끓일 줄 압
니다. 
   된장찌개 간을 맞출 줄 알면 그만이지. 다른 음식은 차차 배우면 된다. 
  왕비는 이러한 조로 처녀색시들을 상냥스럽게 취재했다.
  마음 속으로 세 사람을 점찍어놓았다. 그러나 당장 이 자리에서 발표할 수 없
었다.
  심왕후는 처녀들의 점고를 마친 후에 얼굴에 가득 화색을 띠고 처녀들에게 분
부를 내린다.
   참, 잘들 생겼다. 용모들도 아름답거니와 행동거지가 모두 다 향기롭다. 옛말
에 난형난제한 말이 있더니, 그야말로 너희들을 두고 이름 말 같다. 내 욕심 같
아서는 모두 다 대왕전하의 빈을 삼아 건즐을 받들게 하고 싶다마는 상왕전하의 
하명에 의하여 다만 세 사람만 궐내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유감천만한 
일이다. 그러나 비록 입궐되지 않는다 해도 너희들은 자유로운 몸이 되어 좋은 
집으로 출가하여 양처현모가 되게 하라. 뽑힌 사람은 추후 기별하리라. 
  왕후는 처녀들을 위로한 후에 제조상궁을 향하여 분부했다.
   오늘 입궐한 처자들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비단 열 필에 거핵 열 근과 백미 
열 섬씩을 주어서 앞으로 입궐이 되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시집을 가게 될 때 저
축해두었다가 혼수에 보태 쓰게 하라. 그리고 나갈 때는 들어올 떄와 같이 꽃가
마를 태워서 공주와 같은 대우를 해서 나가게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제조상궁운 승명하고 처녀들을 휘동하여 중전 정전에서 물러났다.
  꽃가마는 한 채씩 한 채씩 궐문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꽃가마 뒤에는 왕후의 어명에 의해서 비단 열 필과 솜 열 근이 가자에 실려 
나가고, 그 뒤에는 백미 열 섬을 실은 마바리가 줄을 이어 따랐다. 의장은 공주
와 같은 대우를 해서 나갔다.
  왕비는 낙선된 집안의 처자들이 혹시나 나라의 대왕을 원망할까 하여 공주의 
대우까지 내리면서 돌아가는 처녀들을 후하게 치송했다.
  자진 간택을 원했던 처녀들의 집안에서는 모두 다 흐뭇하게 생각했다. 집집마
다 처텨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서로들 칭송하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왕후의 
덕을 찬양했다.
   젉은 상감이 착하고 어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왕비께서도 무한 후덕하
신 분이로구려. 입선이 안됐다 하더라도 자유스럽게 좋은 집으로 시집을 가서 
현모양처가 되라 하셨다니, 얼마나 고마운 말씀요. 
   그나 그뿐요, 장래 일까지 생각해서 혼수에 보태 쓰라고 비단 열 필에 거핵 
열 근, 그리고 백미 열 섬씩을 내리셨다 하니 이같이 후덕한 분이 세상천하의 
어디 또다시 있겠소. 
   어디 그것뿐이가, 돌아갈 때는 공주님의 대우를 해서 의장까지 내리셨으니, 
이런 우대가 어디 있겠소. 역사에도 없는 일이란 말야 ----. 
   내 딸이 비록 후궁으로 뽑히지 못한다 해도 조금도 섭섭한 생각이 아니드오. 
   공주 대우를 받았는데 더 말할 것이 있나. 하하하. 
   우리 딸이 설사 후궁이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공주님의 대우를 받았으니 인
제 부마 같은 사위를 얻어야 할 거야. 호 호 호. 
  간택에 들어갔던 여자의 집에서는 뉘집을 말할 것 없이 모두 다 이같이 지껄
이고 왕후와 대왕의 덕을 기렸다.
  이날 심왕후는 처녀들의 간택을 마친 후에 최후로 뽑아논 세 처자의 명단을 
책상반 위에 단정히 놓고 제조상궁에게 분부했다.
   대전에 나가서 대왕전하께  간택을 마쳤습니다  아뢰고,  명단을 어찌하오리
까 , 분부를 물어 오너라. 
  제조상궁운 비전하의 명을 받들어 대전으로 나갔다.
  때마침 전하는  시전  관저편을 읽고 있다가 상궁이 아뢰는 왕비의 전갈을 받
았다.
  천천히 시편을 덮고 회답을 내렸다.
   중전으로 들어가 뽑으신 명단을 본다고 아뢰어라. 
  상궁은 승명하고 물러갔다.
  이윽고 전하는 옥보를 중전으로 옮겼다.
  왕비는 화한 얼굴로 전하를 맞이하여 자리에 좌정한 후에 단자 세통을 홍보 
덮은 책상반에 받쳐 전하 앞에 놓았다.
   처자 세 사람을 어명에 의하여 뽑았습니다. 
  전하는 미소를 머금고 간지를 펼쳐보기 시작했다.
   김씨 라 적혀 있었다.
  다시 한 장을 펼쳤다.
   강씨 라 적혀 있었다.
  또 한 장을 펴 보았다.
   양씨 라 적혀 있었다.
  대왕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왕비에게 말씀을 건넨다.
   김씨, 강씨, 양씨 세 사람을 뽑으셨구려. 권문세가의 딸들은 아닙니까? 
   아니올시다. 모두 다 얌전한 선비인 양가의 딸들이올시다. 외양과 심덕이 난
형난제격으로 무던들 합니다. 가례 때 보시면 전하께서도 마음이 흐뭇하실 것입
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절색을 뽑았다고 꾸지람을 마십쇼, 호 호 호. 
   꾸지람을 할 리가 있소. 마마가 뽑았는데, 세 사람이 모두 한결같이 마마의 
심덕을 닮고, 또다시 절색이라면 다시 더 말할 나위가 있겠소. 권문세가가 아닌 
청빈한 집 딸이라 하니 내 마음이 흐뭇하오. 
   그리하옵고 한 말씀 다시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십여 사람 중에서 세 사람을 점찍어놓고 곧 그 자리에서 발표한다면 나머지 
사람의 처자들은 무안하기 짝 업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기별하기로 하고 
그대로  다 돌려보냈습니다. 
   잘했소이다. 
   또 한가지 아뢰지 아니하고 실행한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십여 사람 처자 중에 세 사람만 간택에 뽑히고 나머지 사람이 낙선되었으니 
처녀들의 실망이 클 것입니다. 앞으로 시집을 가게 될 때 공주가 출가하는 예를 
취하게 하고, 신랑감은 결혼예식 중에는 부마의 대우로 대접하라 일렀습니다. 그
리고 퇴궐할 때 비단 열 필과 거핵 열 근과 백미 열 섬씩을 내수사에 주라고 기
별해서 앞으로 혼수에 보태 쓰라고 전갈해서 내보냈습니다. 추호라도 전하와 나
라에 원성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이같이 처리했습니다. 
  대왕의 용안은 활짝 열렸다.
   잘했소. 잘했어. 과연 현처의 훌륭한 처사요! 
   전하께서 세 처녀가 가합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곧 가례색을 부르시어 처녀집
에 기별한 후에 좋은 날을 가려서 입궐시키시는 일이 가할까 합니다. 
   예조판서를 불러서 명단을 넘기고 상왕전에 아뢴 후에 곧 가례를 거행하도록 
이르리다. 
  대왕은 상궁에게 명단을 받들게 하여 대전으로 돌아간 후에 예조판서 허조를 
불러 명단을 넘겼다.
  허조는 명단을 받들고 상왕전으로 나가 승인을 얻은 후에 처녀집에 연통하고 
황도길일을 택하여 가례를 치르기로 했다.
  예조 가례색에서는 황도길일을 택했다.
  세 후궁이 한날 한시에 대궐로 들어가 가례를 치르게 되었다.
  후궁 한사람이 가례를 치르러 대궐로 들어가는 행차도 화려찬란한데 후궁 세 
사람이 일시에 대궐로 들어가게 되니 전배, 후배의 옹위해 들어가는 행차는 지
난번 꽃가마 열 채가 들어갈때 보다도 더한층 장관을 이루었다. 꽃가마는 변하
여 황금덩 세 채가 되고, 상궁과 하님들은 녹색저고리 남치마의 예장으로 줄을 
지어 호위했다. 청사초롱, 황사초롱이 오십 쌍씩 황금덩을 옹위했고 향불을 받든 
아기 나인들은 쌍쌍이 황금덩의 앞을 섰다. 금전지 상모술에 근봉을 달아맨 붉
은 함보와 청청한 미나리 한줌을 붉은실로 한 허리를 질끈 동여 청수에 띄워 하
님이 이고 가는 밥소라며 청동화로에 창출을 피워 푸른 향연으로 사기를 헤치고 
가는 하님들의 행렬도 볼 만했다.
  부원군의 참혹했던 일로 인해서 냉락하고 소조했던 중전엔 봄빛이 활짝 찾아
들었다. 궁녀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대전별감과 내관을 위시하여 
모든 액정들의 어깨도 으쓱거렸다.
  후궁들의 입궐하는 행렬은 이같이 화려했으나, 왕비를 맞아들이는 정궁이 아
닌 때문에 세종대왕은 초례와 친영례를 하지 아니했다.
  세 후궁들은 먼저 왕비 심씨의 중전으로 들어가 활옷과 낭자로 차례차례 사배
를 올린후 에 다시 왕비의 인도로 대전에 나가 대왕께 배알했다.
  대왕은 처음으로 김씨, 강씨, 양씨의 세 후궁을 대면했다.
  왕비 심씨가 아뢴 대로 모두 다 안존하고 아름답고, 품격을 갖춘 고운 처녀들
이었다. 대왕은 우선 마음에 싫지 아니했다.
  이윽고 세 후궁에게는 사찬이 내려졌다. 민간에서 신부가 혼인날 받는, 큰상을 
받는 행사와 매한가지의 일이다.
  넓고 큰 교자상에 생과, 유과가 자가 넘게 괴어지고 다담상에는 면이 올랐다.
  그러나 형식적인 허례였다. 아무리 후궁이 되겠다고 자원해서 간택에 뽑힌 여
자요, 산해진미가 앞에 놓였다 하나 식욕이 움직여질 까닭이 없었다.
  상궁들이 권하건만, 젓가락질만 두어 번 하다가 저를 놓았다.
  상은 물리고 후궁들은 이미 도배단장을 말쑥하게 꾸며논 후궁으로 인도됐다.
  후궁은 채채로 나뉘어 따로따로 떨어져 있었다.
  채마다 장원이 둘러 있고 분벽사창에 죽세렴이 어른 거렸다.
  김씨에게 한 채를 내리고 강씨가 한 채를 차지하고 양씨에게 한 채를 내렸다.
  채마다 시녀 두명씩을 배속시켰다.
  이윽고 해는 기울고 어둠이 전각으로 찾아들기 시작했다.
  대왕은 후궁과 더불어 동방화촉을 치러야 했다.
  세 후궁을 한꺼번에 괴일 수는 없었다.
    
    동방화촉
  왕비 심씨는 늙은 상궁을 거느리고 대전 연침에 나가 세종대왕께 미소를 머금
고 아뢰었다.
  "밤이 이미 깊었습니다. 오늘 황도길일 좋은 밤에 전하께서는 동방화촉 신방에 
듭셔야겠습니다. 한밤 한시에 후궁  세 사람을 다 거느리실 수는 없습니다. 어느 
처소에서 먼저 신방을 치르시겠습니까?"
  대왕도 마주 웃으며 왕비에게 말씀한다.
  "새 신랑 새 서방님이 어느 처소에서 신방을 치르겠다고 부끄러워서 자원할 
수가 있소? 중매아씨가 하라는 대로 할 테니 그저 처분만 기다리겠소. 하 하 
하."
  "제가, 아무리 중매할미라 하나 신부가 한 사람이 아니고, 세 사람씩이나 되니 
어디로 가십소사고 아뢰기가 난감합니다. 새 서방님께서 이미 신부 세 사람을 
보셨으니, 명토를 박아서 분부를 내려주십시오. 호호호."
  "나는 신부들 방에서 신방을 치르는 것보다도 중매아씨 방에서 동방화촉을  
꾸며보았으면 종겠소. 하 하 하."
  전하는 여자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시앗을 보는 왕비의 서운한 마음을
만분의 하나라도 위로하기 위하여 이같은 농담을 건네보았다.
  심비의 옥안양협에 약간 홍조가 돌았다.
  "망령의 말씀을 다 하십니다. 가례까지 치르시고 무슨 말씀이시오니까.  더구
나 신첩의 몸에는 아비의 거상을 입었습니다. 희롱의 말씀을 내리시지 마시옵소
서."
  비의 옥안엔 홍조는 사라지고  흑수정 같은 슬기로운 눈동자에는 싸늘한 빛이 
서렸다.
  "마마, 내가 일부러 좀 농담을 했소이다.  사과를 하리다. 그러나 진정 어느 곳
으로 먼저 가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소. 귀치 않지만  마마가 지시해주
시오. 일이 그렇지 아니하오. 하하하."
  전하는 다시 눅여서 말씀을 내렸다. 비전하도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같이 하시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전하께서도 보셨지만 모두  다 나이도 비슷비슷하고, 난형난제올시다.  그러
나 생일이 조금씩 다릅니다.  한 날이라도 먼저 난 신부에게 우선권을  주어서 
전하를 모시도록 하는 일이 좋겠습니다."
  "그것 참 희한한 명답이로구려. 좋소. 그같이 합시다. 그렇다면 누가 제일 생일
이 먼저 되오?"
  "김씨의 생일이 먼저올시다."
  "그 다음에는?"
  "강씨올시다. 다음엔 양씨올시다."
  "그렇다면 오늘 밤엔  김씨한테로 가서 신방을 치르고,  내일 밤엔 강씨한테로 
가서 신방을 치르고, 모레는 양씨한테로 가서 신방을 치르도록 합시다."
  "삼일신방을 치르지 아니하시고  단 하룻밤씩 동방화촉을 밝히시렵니까? 너무 
박정하십니다."
  "삼일씩 신방을 치른다면 33은  9, 아흐레 동안인데, 나라 정사는 살피지  아
니하고 신방만 치르겠소. 생략하고 하룻밤씩만 치르기로 합시다. 하 하 하."
  "그러시다면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상궁들에게 분부해서 오늘 밤엔 김씨의 처
소에 화촉을 꾸미게 하겠습니다."
  처녀 김씨의 처소에는 첫 번째로 신방이 꾸며졌다.
  정면에는 백자동십첩병풍을 명화의 솜씨로  그려서 아늑하게 둘러쳤고, 아랫
목에는 홍공단에 청룡 한 쌍을 수놓은 이불에 봉황장침을 곁들여 황홀하게 펴놓
았다.
  금박대홍초는 와룡은촉대 초꽂이 위에 빛을 뿜어  어룽거리고, 촛대 옆에는 
처녀 김씨가 족두리 큰머리에 대홍단 활옷을 입고 단정히 앉았다가 왕후와 전하
의 임어하시는 것을 보자, 시녀들의 부축을 받고 단정히  일어서서 두 분 전하
를 맞이했다.
  비전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처녀 김씨에게 말씀을 내린다.
  "네가 생일이 먼저인 까닭에 후궁 중에서  맏이 되었다. 그리해서 오늘 첫날밤
은 네가 먼저 전하를 모시게 되었다. 모든  일을 너한테 맡기니 진선진미하게 
전하를 모시도록 해라."
  비전하는 부드럽고 다정한 말씀을 김씨에게 내린 후에 다시 함박꽃 같은 웃음
을 전하께 향하여 풍기며,
  "이제 중매어미는 소임을 다했습니다. 물러갑니다. 침소 안녕히 듭시고  즐거
운 밤을 보내시옵소서."
  세종은 눈에 가득 웃음을 머금고 말없이 웃음으로 대답했다.
  시녀들도 비전하의 뒤를 따라 물러갔다.
  신방에 남은 사람은 전하와 처녀 김씨 단 두 사람뿐이었다.
  전하는 무거운 예장으로 단정히 서 있는 김씨에게 첫 말씀을 내린다.
  "앉거라. 온종일 큰머리  낭자에 거창한 예복을 입었으니  몸이 매우 고단하리
라. 어려워하지 말고 자리에 앉거라."
  김씨는 자원해 들어와서 간택에 뽑히기는 했으나 하늘 아래 제일 높은 이라는 
임금을, 그리고 생전 처음 남성을 홋홋하게 대하고  있게 되니 그저 무섭기만 
했다.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전하는 처녀 김씨의 두려움에 빠져 있는 빛을 살폈다.
  "두려울 것이 없다. 어서 게 앉거라."
  전하는 어수를 처녀의 어깨에 얹었다. 애무의 뜻을 표했다.
  처녀는 숨을 죽이고  사르르 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공포에 싸여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전하는 바들바들 떠는 숫처녀 김씨의 가련한 모습이 먼저 마음에  들었다. 그
것은 마치 독수리에게  채여진 씨암탉의 모습 같기도 했다. 전하는  귀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두려울 것이 없다. 마음을 놓아라.  사람과 사람이 대했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임금이니 상감이니 하는 것은 명칭일  뿐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는 똑같은 사람
이다. 너와 나는 오늘부터  내외지간이 된다. 마치 저 왕비마마가 나를 도와주듯 
너는 나를 도와주는 소임을 맡은 것이다.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다."
  처녀 김씨는 다소곳 고개을 숙이고 전하의 다정한 말씀을 귀기울여 들었다.
  "자아, 이제는 예복을 벗어라."
  첫날밤이었다. 신부는 자기 손으로 예장을 끄를 수  없는 것이 이 나라의 아
름다운 예절이요, 풍속이었다.
  신부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앉아 있었다.
  "목이 아프겠다. 내가 친히 큰머리 낭자를 내려주리라."
  전하는 여러 해 전에 왕비 심씨와 가례를 치를 때 첫날밤에 왕비의 의상을 벗
기던 그때 일을 연상했다.
  먼저 칠보 구슬로  꾸민 족두리를 내리고, 다음 큰머리에 가로질러  꽂아논 
길고 긴 황금용잠을 뽑았다.
  가체, 큰머리를  상자에 담고 경대  서랍에서 죽절백옥 비녀를  꺼내 밑머리
를 틀어 꽂아주었다. 공작을 수논 화사한 붉은  활옷을 벗겨놓으니 노란바탕에 
자주깃과 자주끝동을 단 회장저고리가  궁초남치맛자락과 함께 촛불 아래 빛의 
조화를 이루어 처녀 김씨의 얼굴은 달덩이같이 환했다.
  거추장스런 대례복과  번폐스런 덧머리를 내려 밑맵시로  대하고보니 열 배나 
돋보이고 아름다웠다.
  눈은 호수같이 맑은  중에 정기가 별빛마냥 서려 있고, 솜털같이  부드럽게 
누워 있는 검은 눈썹 사이는 답답하지 않게 양미간이 트여서 마음씨가 넓을 것 
같았다. 입술은 주홍을 칠한 듯  혈색이 좋고, 녹빈에 풍성하게 드리운 두 뺨은 
희고도 윤이 흘렀다.
  이마는 넓고 좁도  아니하고 상아로 다듬어논 듯한  도둑한 코는 높지도 않고 
얕지도 않았다. 턱은 복성스럽게 받혀서 상중하 삼정이 고르게 균형을 잡았다.
  여자로서의 원만하고 나무랄 곳 없는 복상이었다. 첫째로 슬기스럽고, 덕이 있
고, 입이 무겁고, 참을성이 많은 것 같았다.
  세종은 와룡촛대리  화선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신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
다.
  비록 후궁이라 하나 일후에 왕실에 재난과 풍파를 일으켜서는 아니될 것을 절
실하게 느낀 때문이다.
  세종은 우선 만족했다. 처녀의 몸에서 발산되는 슬기와 덕기를 느낀 때문이다.
  동방화촉의 밤은 점점 깊어서 삼경으로 접어들었다.
  사면에는 사람의 발자위 소리조차 없었다. 다만 들리는 것은 와룡촛대에 등심
이 튀는 소리만 들렸다.
  대홍초 청심이 툭툭 소리를 내며 불로초의 형국을 그리며 쌍심지로 벌룽거렸
다. 이제는 진짜로 신부의 밑옷을 벗길 참이 되었다.
  세종은 신이 아니었다. 거짓 인간의 본능을 외면하는 체하는 썩은 선비도 아
니다. 순수하게 착하고 어빌고 슬기로운 한낱 사람이었다. 사람 이상의 사람도 
아니고 사람 이하의 사람도 아니다. 한 사람의 인간다운 성실한 사람일 뿐이었
다. 사람인 이상 사람의 테밖으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다만 극한과 극한에서 조
절하고 탈피하려는 인의 철학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일 뿐이었다.
  사람인 세종은 달덩이같이 아름다운 처녀 김씨를 동방화촉 아래 대하고 보니 
인간 본연의 춘정이 아늑하게 움직였다.
  후궁을 정하게 된 것은 이미 기저의 사실이었다. 어떠한 이유로 후궁을 두게 
된 동기는 말할 것 없이, 이미 가례까지 치렀다.
  뿐만 아니었다. 동서고금의 역대 제왕은 모두 다 삼천궁녀와 비빈등 첩을 두
었다. 새삼스럽게 변덕을 피워서 색을 멀리한다는 가짜 성인의 가식을 본받고 
싶지는 아니했다. 다만 인생을 바르고 아름답게 미로 조절해서 살아나가려 했다.
  와룡은촛대 벌룽거리는 촛불 아래 노랑회장저고리 남치마로 눈을 내리까고 조
용히 앉아 있는 처녀 김씨의 달덩이같이 환한 모습은 전하의 눈에 볼수록, 볼수
록 더욱 아름답게 뵈었다.
  멀리서 닭이 홰를 치며  꼬끼오  울었다. 촛불이 벌룽거렸다. 불빛이 바람을 타
서 꺼질 듯하다가 이내 환했다. 전하는 어수로 화선을 돌렸다.
  화선 뒤에 비치는 신부 김씨의 얼굴은 은은한 불빛을 받아 더한층 춘정 있게 
보였다.
  전하의 마음은 봄바람이 이는 듯 움직였다.
  어수를 들어 처녀 김씨의 손을 잡았다. 혈분이 좋은 탓인지 처녀의 손길은 명
주를 만지는 듯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처녀 김씨는 조용히 앉은 채 전하의 손길을 받았다. 놀라지도 아니하고, 피하
지도 아니했다.
   밤이 깊었구나! 눈을 붙여야 하겠다. 
  처녀는 대답 없이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새침하게 앉았다.
  전하는 어수를 들어 노랑회장저고리의 자주고름을 풀었다. 다시 속고름을 끌
렀다. 모시 분홍 속적삼이 나타났다. 한산 세모시를 다듬어서 당홍물을 들여 지
은 속적삼이다.
  전하의 손은 처녀의 등에 촉촉히 땀이 서린 것을 느꼈다. 처녀 김씨의 살내음
이 전하의 코에 스쳤다.
  전하는 적삼 단추를 풀으려 했다. 단추만 풀면 속살이 드러난다. 처녀는 단추 
고를 손으로 막았다.
  얼굴에는 부드러운 빛을 띠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록 후궁이라 하오나 가례를 치르고 빈의 자격으로 맞아들이신 소인이올시
다. 천첩과 다르옵니다. 
  처녀 김씨의 얼굴빛은 깔끔했다. 전하는 놀랐다.
   아차, 내가 실수를 했구나! 
  생각했다.
   내, 미처 생각이 들지 못했구나. 용서해라. 
  말을 마치자 소맷자락으로 와룡촛대의 촛불을 후러쳐 껐다.
  촛불은 꺼지고 심이 타는 내음이 잠시 방 안에 가득했다.
  어둠 속에 들어 있는 처녀 김씨의 얼굴에는 만족한 미소가 고요히 흘렀다.
  백옥같이 깨끗하고 고귀한 숙녀의 승리의 웃음이었다.
  그러나 아깝게도 전하는 어둠 속에서 이 향기로운 웃음을 바라볼 수 없었다.
  불을 끈 전하의 손길은 어둠 속에서 다시 처녀의 적삼 단추를 찾았다.
  이제 처녀의 손은 대왕의 손을 막지 아니했다. 단추는 풀어지고 세모시 분홍
적삼은 전하의 두 손으로 곱게 벗겨졌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김처녀의 젖가슴은 관음보살의 조각같이 미끈하고 화
사했다. 따스한 동정의 살내음이 전하의 후각을 교란시켰다. 전하의 심장은 총각
마냥 두근댔다. 도다시 핀잔을 맞을까 두려웠다. 순수한 동정의 향훈이 떠도는 
살결에 손을 대지 못했다.
  전하의 할일은 또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역시 첫날밤 신방을 치르는 행사의 
하나다. 저고리를 벗긴 전하의 손길은 더듬더듬 어둠 속에서 치마끈을 찾았다. 
전하는 또다시 처녀의 손길이 막을까 겁을 냈다.
  아무러한 지장도 없었다. 이제는 불빛 없는 어둠 속에 있다. 부끄러울 것이 없
는 모양이었다. 만 가지를 모두 다 전하께 맡긴 몸이었다. 적나라한 육체를 마음
으로 숭배했던 전하께 아낌없이 바치는 모양이었다.
  처녀 김씨는 사모의 절정에서 이제 광대무변한 사라의 심연으로 몸을 던지려
는 것이다.
   사각사각  남치마를 끄르는 소기라 어둠 속에서 일어났다.
  온몸에서 솟아오르는 처녀의 훈향은 난향보다도 짙었다. 전하는 또 한 번 동
정의 여향에 취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망연히 자신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전하는 번개치듯 김처녀의 알몸을 
가로 안았다. 마치 솔개가 병아리를 채가듯 청룡 황룡이 어우러져 있는 수단 금
침속으로 집어넣었다.
  김처녀는 아무런 저항도 아니했다.
  이제는 전하가 자신의 의대를 벗을 차례다. 앞으로는 삼빈을 맞아들였으니 김
씨, 강씨, 양씨 세 사람이 번을 들어서 뒷배를 보다 드리겠지만 아직은 동방화촉
의 첫밤을 치르는 때라 스스로 옷을 벗어야만 했다.
  옷을 끄르고 면말을 벗었다. 신부를 뉜 금침 속으로 들어가 함께 누웠다.
  먼곳에서 바람결에 개 짖는 소리가 콩콩 들려왔다.
  은한은 삼경이 지났고, 북두칠성도 기울어진 듯했다.
  전하는 잠이 오지 아니했다. 팔을 늘여 처녀 김씨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사랑
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이란 따로 있는 별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 두 이성 사이에 마음이 기울
어지기만 하면 사랑이 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전하는 신부 김씨를 말없이 애무하기 시작했다. 처녀 김씨도 대왕을 사모하는 
정이 홍수처럼 부풀어올랐다.
  소리 없이 전하의 애무하는 손길을 받았다.
  전하는 처녀 김씨를 어루만지면서 물었다.
   네가 무엇 때문에 나의 후궁이 되기를 자원했느냐? 부귀영화를 취하려고 궁
중에 들어오기를 자원했느냐? 
   아니올시다. 부귀를 취한다면 하필 부자유한 궐내에 들어와 후궁노릇을 하겠
습니까? 떳떳한 정실이 될 곳이 민간에도 허다하게 많습니다. 소인은 부귀를 누
리기 위하여 후궁을 자원한 것이 아닙니다. 
  뜻밖에 두려움 없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자원을 했느냐? 
   소문으로 상감마마의 어지신 덕을 듣고, 마음으로 사모해서 마마의 후궁 되기
를 자원했습니다. 
   내가 무슨 어진 덕이 있기에 네가 소문을 들었단 말이냐? 
   말씀을 아뢰어도 좋습니까? 
   어서 말해보아라. 
   상왕전하께서는 심의정대감에게 사약을 내리신 후에 역적의 따님이라 하시어 
중전마마까지 내치시려 했다 합니다. 그런데 상감마마께서는 죄 없는 왕비를 폐
하느냐고 극력 간하시어 결국 폐위가 되지 아니하셨다 합니다. 이 일로 인해서 
민간의 백성들은 상감마마의 칭송이 대단합니다. 소인도 아비한테 이 말씀을 듣
자옵고 상감마마를 숭배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이만큼 아내를 사랑하실 줄 
아시는 상감마마라면 후궁도 넉넉히 거느리실 것이라 생각하와 방자하게 전하의 
건즐을 받들 마음을 먹었습니다. 
  전하는 김씨의 솔직하게 아뢰는 말씀을 듣자 처녀의 마음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여운 마음이 더한층 일어났다.
  전하는 다시 김씨를 애무하며 말씀한다.
  "궁중이란 곳은 근엄해서 처신하기 극히 어려운 곳이다. 더구나 남자보다도 여
자들이 많아서 말이 많은  곳이다. 극히 몸조심을 해서 위로 중전마마를 받들고, 
아래로 삼백궁녀들을 거느려야 한다. 네 책임이 실로 무거우니라."
  " '소학' 을 읽어서 처신하는 법을 약간 배웠습니다. 여자 셋이 모이면 간자가 
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위로 상감마마와 중전마마를 받들고, 아래로 동료들과 
함께 궁녀들을 거느려서 온 궁중이 화목하도록 하겠습니다."
  온 궁중이 화목하도록 하겠다는 김씨의 대답을 듣자 전하는 크게 기뻣다.
  우선 이만하면 좋은 후궁의 자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밤이 깊구나. 뜬눈으로 밝힐 수는 없다. 무궁무진한 이야기는 살면서  말하기
로 하고 이제 잠을 청하기로 하자."
  전하는 김씨의 몸을 이끌어 당겼다. 어둠 속에 따듯한 포옹이 이루어졌다.
  멀리서 닭이 또 한 번 홰를 치며 울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전하는 신부 김씨가 바치는 은대야에 세수를  마치고, 
외전으로 나가 정무를 살폈다.
  한낮이 지난  후에 김씨에게는 신빈의  칭호가 내렸다. 이리하여 신부 김씨는 
신빈 김씨가 되었다.
  신빈 김씨와  동방화촉을 치른 다음날  저녁이었다. 전하는 저녁  수라를 새
로 맞이한 신빈의 시중으로 맛있게 마치고 다시 외전 연침으로 나가 정무를 살
피고 있었다.
  이, 호, 에, 병, 형, 공의  육조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의 품의화 상소를 
일일이 살피며 재결하는 비답과 수결을 두고 있었다.
  밤은 술시를 넘어 해시에 가깝게 되었다.
  제조상궁이 어전에 나와 아뢴다.
  "오늘 밤에도 가례를 치른 후궁의 처소에서 신방을 치르셔야겠습니다. 어느 처
소에 동방화촉을 밝히실는지 분부를 내려주십시오."
  전하는 비로소 오늘 밤에도 새 사람을 대해야만 하겠다고 깨달았다.
  "어제 중전마마께서 너희들한테 분부를 내리셨을 줄 안다.  그대로 시행하려무
나."
  "세 후궁의 나이가 비슷하므로 생일을 따져서 신방을 꾸미라 하교하셨습니다."
  "분부대로 하면 좋지 않겠느냐?"
  "신빈 김씨의 다음은 강씨올시다. 양시보다 생일이 위올시다."
  "그렇다면 강씨 처소에 침소를 차리도록 하라."
  상궁은 명을 받고 물러갔다.
  전하는 여전히 유사들이 올린 품의를 재결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왕비 심씨와 제조상궁이 어전에 나타났다.
  "중전이 어찌해서 또 왕림을 하셨소?"
  전하는 만면에 웃음을 짓고 물었다.
  왕비 심씨도 옥안에 가득 웃음을 띠고 아뢴다.
   오늘 밤도 중매어미 노릇을 해야 합니다. 어제는 신빈의 매파가 되었습니다마
는 오늘 밤엔 강씨와 전하의 월로승 노릇을 해야 하겠습니다. 내일 밤까지만 소
임을 마치면 신첩은 책임을 다하게 됩니다. 삼일 신방을 치르신 후에 뺨 세 번
을 때리시든지 술 석 잔을 내리시든지 마마의 처분대로 하십시오. 호호호. 
  비전하는 명랑하게 웃음을 웃으며 전하의 일기를 재촉했다. 면랑하게 웃고 말
씀하는 비전하의 태도에 세종의 마음도 흐뭇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설마, 신부가 마음에 들지 않기로서니, 감히 중전마마의 뺨을 내 어찌 세 번
씩이나 때릴 수 있겠소. 맘에 들지 않는다면 상급으로 약주 석 잔을 드리는 대
신 벌주로 석 잔을 드리오리다. 하하하. 
  전하와 비전하는 이같이 무르녹도록 화합했다. 모든 일을 서로 이해하고, 모든 
일을 서로 믿고, 모든 일을 서로 참는 때문이었다.
  전하는 결재하던 모든 서류를 손수 정돈했다.
   갑시다! 
  쾌활하게 한 마디를 한 후에 비전하의 뒤을 따랐다.
  또 다른 한 채 아담한 전각이었다. 그러나 주란화각이 아니었다. 민간의 여염
집모양 단청을 칠하지 아니한 아담한 집이다. 흰나무를 대패로 밀어서 그대로 
지은 소박한 건축이었다. 세종은 검소한 기풍을 조성하기 위하여 후궁의 전각들
은 일체 단청을 칠하지 아니하고 민가와 같이 건축을 하도록 일찍부터 분부를 
내렸던 것이다.
  일각문에 들어서면 괴석 서너 개를 화단 위에 세워 논 잔디밭이 있고 두견, 
철쭉, 동청이며 수양버들 네댓 주가 어른거리는 맞은 편에는 한 채 백옥이 두 
벌 석계 위에 학이 날개를 편 듯 천 줄 기왓골이 활짝 팔을 벌려 푸른 하늘을 
멋지게 이고 있다. 미끈한 모기둥과 아자 영창엔 일부러 주칠을 아니한 탓으로 
청청한 관솔향내가 싱그럽게 코를 엄습했다. 명공의 솜씨가 울연히 이조의 건축
미를 자랑했다.
  육간 대청에 안방이 사간, 건넌방이 삼간, 뜰 아랫방이 이간, 찬간이 삼간, 부
엌이 삼간, 순전한 민가의 구조 그대로다.
  전하는 왕비 심씨와 상궁의 인도로 안방에 들어섰다.
  방 안에는 홍초가 빛을 뿜고, 처녀 강씨는 상감이 임어하는 발자취 소리를 듣
자 족두리와 당의 대례복으로 함께 있던 시녀의 부축을 받고 사뿐 일어서서 전
하와 왕비를 맞이했다.
  
  왕비는 만면에 웃음을 짓고 처녀 강씨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내렸다.
   오늘은 네가 전하를 모시어 동방화촉을 치르는 밤이다. 수줍어하지 말고 전하
를 편안하게 모시어 다복하게 지내도록 해라. 
  분부를 내린 후에 다시 왕전하께 치하하는 말씀을 올렸다.
   요조숙녀를 잘 다루십시오. 신첩은 이제 물러갑니다. 둘째번 소임을 마치었습
니다. 
   미안하오. 연일 고단하시겠소. 
  전하 역시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화한 기운이 방 안에 가득했다.
  왕비와 상궁이며 시녀들은 조용히 장지문을 닫고 물러섰다. 둘째번 신방에는 
전날 밤처럼 전하와 신부 단 두 사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처녀 강씨는 촛불 아래 두 손길을 마주잡고 그림같이 초연히 섰다. 오늘 밤부
터는 몸과 마음을 오로지 전하에게 바치겠다는 초연한 태도다.
   앉거라. 
  전하는 손을 늘여 처녀 강씨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는 지난밤 신빈 김씨
의 손길보다 싸늘했다. 혈분이 약간 김씨보다 부족한 모양이다. 그러나 강씨는 
신빈 김씨모양 무서움을 타지 아니했다. 황겁하지 아니했다. 차근하게 자리에 앉
았다.
   이제는 예복을 벗어야 하겠다. 내가 큰머리를 내리고 예복을 벗겨 줄 테니 놀
라지 말아라! 
   처녀 강씨는 친정집 부모한테 미리 신방을 치르는 방식을 교양받은 모양이었
다.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했다. 안상한 얼굴빛으로 태연한 자세를 취했다.
  전하는 전날 밤 신빈 김씨의 대례복을 풀듯 처녀 강씨의 큰머리와 낭자를 내
리고 머리를 틀어 비취옥비녀를 꽂아준 후에 한삼 당의를 벗겼다.
  평상복이 드러났다. 연둣빛 바탕에 자주깃과 끝동을 단 청초한 모습이 신빈 
김씨보단 다른 또 하나의 일취가 있었다. 신빈 김씨는 달덩이같이 환한 얼굴이
라면, 처녀 강씨는 마치 백수정으로 아름답고 균형 있게 명공의 솜씨를 빌려 조
각해논 차갑고, 맑고, 말쑥한 조형예술의 싸늘한 미를 풍기는 듯한 얼굴빛이었
다.
  눈은 흑수정이 까맣게 움직이는 듯했다. 코는 오똑하고, 얼굴파은 비둘기알같
이 색깔이 희고 갸름했다.
  전하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러나 약간 성깔이 있겠구나 생각했다.
  전하는 처녀 강씨의 평복을 끄르기 위하여 전날 밤에 신빈 김씨에게 하듯 은
촛대의 불을 끄려 했다.
  순간, 처녀 강씨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신첩은 한평생 전하를 받들어 모실 몸이올시다. 조급하게 굴지 마시고 먼저 
침소에 편안히 듭시옵소서. 신첩은 몸을 끄르지 않은 채 불을 밝히고 전하를 모
시오리다. 
  처녀 강씨의 말소리는 싸늘했다. 그러나 부드러운 애운성을 잃지 아니했다.
  전하는 흠칫했다.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랐다. 보통 여자가 아니라 생각했다. 전
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물었다.
   불을 끄지 아니하고 자려 하느냐? 
   네, 신첩의 지극한 정성스런 소원이올시다. 전하께서는 먼저 편안히 침소에 
드시옵소서. 
   그러면 너는 자리에 들지 아니하려 하느냐? 
  전하는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동침을 거부하는 줄 알았다. 궁금하기 짝이 없었
다. 한편으로는 괘씸하다고도 생각했다.
   어찌 신첩이 전하를 모시지 아니하오리까. 한평생을 전하께 바친 몸이온데 
---- 전하께서 침소에 듭시면 옷 입은 채 전하 옆에서 시측을 해서 자겠습니
다. 
  전하는 어이가 없었다.
   첫날밤에는 새 서방이 신부의 옷을 벗겨주고 동침하는 것이 이 나라에 몇천 
년 내려오는 풍속이 아니냐? 만약 그렇게 아니한다면, 신부집에서는 신부가 소
박을 당했다고 불길히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냐? 
  처녀 강씨의 아름다운 입가에는 미소가 약간 흐르는 듯했다. 지체치 않고 대
답을 올린다.
   그러한 속담은 민간에 자자하게 떠도는 어리석은 통설이올시다. 앞으로 성주
가 되실 전하의 취하실 일이 아닌가 합니다. 한평생 부부의 길을 의롭게 지키기
를 천지신명께 맹세한 전하와 신첩이올시다. 모시는 첫날밤부터 친압한다는 것
은 창부의 짓과 다름이 없습니다. 두고두고 전하의 우악하신 사랑이 감천에  샘
물이 솟듯, 항상 새로워서 마지않기를 바라옵니다. 그리고 또 말씀을 아뢰겠습니
다. 전하께오서는 어젯밤에 신빈 김씨의 처소에 신방을 치르셨습니다. 오늘 밤에
는 편안히 취침하시어 피로를 푸시옵소서. 만약 육체 과로하신다면 큰일이올시
다. 이 점 깊이 통촉하시옵소서. 
  처녀 강씨의 도란도란 아뢰는 화한 음성은 마치 옥소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했
다. 조리가 있고 명랑했다. 전하는 비로소 신부 강씨의 불을 끄지 아니하고 옷을 
벗지 아니하는 차원 높은 심경을 황연히 깨달았다. 경근한 마음이 가슴에 벅차
게 물결쳤다. 과로할까 염려하는 지극한 정서이요, 교양 높은 의연한 태도다.
   네 말을 들으니 내가 오히려 부끄럽구나. 네 비록 한 여자에 지나지 않는 몸
이라 하나 내 어찌 제 간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랴. 너는 앞으로 나의 스승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길이길이 나를 도와 복되게 하라. 
  전하는 말을 마치자 처녀 강씨의 원하는 대로 은촛대의 불을 끄지 아니했다. 
처녀의 몸에도 더 손을 대지 아니했다.
  흐뭇한 마음으로 자신의 의대를 끄르고 금침 안에 들어 편안히 누웠다.
  방 안의 온도는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했다. 이불을 덮지 아니해도 취
를 느끼지 아니할 정도다.
  처녀 강씨는 조용히 일어나 은촛대의 화선을 돌렸다.
  행여나 불빛이 전하의 얼굴에 비쳐서 잠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한 때문이다.
  저하는 금침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아니했다. 눈을 감은 채 처녀의 동정을 살
폈다. 처녀는 사뿐 일어났다. 전하는 은촛대의 화선 돌리는 것을 실눈을 떠서 보
았다. 불빛이 가려지고 전하의 누운 곳에는 그늘이 졌다. 전하는 마음 속으로 생
각했다.
   백령백리하구나! 
  전하는 잠이 든 듯 약간 코를 고는 시늉을 했다.
  이윽고 여자가 전하의 누운 금침 곁으로 가까이 갔다.
  전하가 손수 덮은 이불은 귀가 들리고 자락이 쏠렸다.
  처녀는 전하의 잠이 깰세라 조심스럽게 이불귀를 누르고, 비뚤어진 이불자락
을 꼭꼭 눌러서 바로잡았다. 행여나 방 안의 외풍이 전하가 덮은 이불 안으로 
새어 들어갈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전하는 거짓 잠을 자고 있었다.
  처녀의 하는 짓을 다 살피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희한한 여자다! 
  하고 차탄하기를 마지아니했다. 다음 동정을 살폈다.
  처녀는 뺨을 전하의 얼굴 위로 향했다. 귀를 기울여 전하의 숨소리를 들어보
는 모양이었다.
  전하는 잠이 깊이 든 듯 코를 골았다.
  처녀는 안심이 된 듯 가벼운 한숨을 지었다. 굽혔던 몸을 조용히 일으켜 이불
을 덮지 아니한 채 치맛자락을 단정하게 매만지고 소리 없이 전하 곁에 누웠다. 
자신도 잠을 청하는 모양이다.
  저하는 고요히 눈을 감은 채  이 영리하고 소명한 여자의 행동을 살피자 감탄
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불 속에서 길게 기지개를 켰다. 잠이 들었다가 깨는 시늉을 했다.
  하품을 한 번 크게 했다.
  옆에 누웠던 여인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전하는 옆에 있는 여인을 누운 채 바라보았다.
   여태껏 자지 않았느냐? 
  놀라는 채 물었다.
  여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마악 모시고 자려고 누웠다가 일어난 길이올시다. 
   네 고집도 무던하구나. 감기 들면 어찌하려고 이불도 덮지 아니하고 누웠더
냐? 
   방안이 훈훈하와 덮지 아니해도 좋습니다. 그저 전하께서 피로하지 아니하시
도록 안녕히 침소에 듭신 것만 고마웠습니다. 
  처녀 강씨는 상긋상긋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는 시침을 떼고 대다했다.
   네가 속옷을 벗지 말고 그대로 자라는 바람에 나는 편안하게 한잠 잘 잤다. 
옷을 벗지 않았을망정 내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줄 알았더니, 그대로 댕그머니 
누웠더란 말이냐? 얄밉도록 악지가 세구나. 
  전하는 귀여운 정을 이길 길 없었다. 이불 속에서 손을 빼어 여인의 손을 이
끌었다.
   소인은 그저 전하께오서 안녕히 취침하시는 숨소리를 듣잡고 마음에 행복을 
느꼈을 뿐이옵니다. 그저 전하께선 항상 강건하시어 이 나라, 이 백성들을 영화
롭게 다스려 주시기만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옵니다. 
  전하는 참으로 양처현모감이라 생각했다. 또 한 번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네가 나를 위하고 생각해준 그 덕으로 오늘 밤은 초저녁부터 평안하게 잘 잤
다.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할 테니 옷 입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오너라. 
  전하는 이불자락을 헤치고 여인의 손을 강하게 이끌었다.
  옷 입은 채 이불 안으로 들어오라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여인은 미소를 머금
은 채 항거하지 아니했다.
  안심하고 전하의 곁으로 들었다. 이제는 비로소 완연한 한 쌍 내외다.
  전하는 예절 높은 처녀의 행동에 더 한 번 도취되었다.
  베개를 함께 한 전하는 처녀에게 물었다.
   너희 부모는 다 구존하냐? 
   네, 다 살아 있습니다. 양친시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무슨 벼슬을 했느냐? 
   백두올시다. 벼슬은 하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 합니다. 소과때 급제해서 진사
올시다. 
   왜 벼슬을 아니하기로 작정을 했다 하더냐? 
   벼슬을 하면 추한 사람이 되기 쉽다 해서 일부러 대과 과거를 보지 아니했습
니다. 
  전하는 비로소 처녀의 교양이 높은 까닭을 짐작했다.
   벼슬이 추하다고 생각하는 집안의 딸로, 너는 어찌해서 간택에 자원을 했느
냐? 
   아비가 항상 추한 세상을 한탄하므로 어진 전하께서 더욱 성주가 되시도록 
하올 주제넘은 생각이 있사와, 아비의 반대를 물리치고 감히 자원했더니 다행히 
간택에 뽑혔습니다. 
   무슨 글을 읽었느냐? 
     대학 과  논어 를 읽었습니다. 
  전하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어허, 그랬더냐 ----. 
  전하는 한 마디를 하고 다시 또 한 마디를 했다.
   나를 잘 도와서 밝은 임금이 되게 해다오! 
  이러해서 둘째번 신방을 치렀다.
  날이 밝자, 대왕은 대전으로 나가 전과 다름없이 모든 정무를 살핀후에 승지
를 불러, 강씨에게 영빈의 칭호를 내리라 했다.
  승지는 명을 받들고 정원에 나가 첩지들을 쓴 후에 어보를 눌러 대왕께 올리
고, 대왕은 첩지를 감한 후에 내관과 상궁을 시켜 강씨에게 전달했다. 이리하여 
강씨는 빈의 대우를 받아 영빈 강씨가 되었다.
  어느덧 석양은 꺼지고, 또다시 황혼에 접어들었다.
  전하는 신빈 김씨와 영빈 강씨가 거행해 올리는 수라를 마쳤다.
  등촉을 밝히고 어전에서 거닐고 있을때, 왕비 심씨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나타났다.
   저녁 수라를 진어하시었다는 말씀, 궁녀들을 통하여 듣자왔습니다. 새 사람들
의 거행이 소루하지나 아니하였습니까? 
   곧잘들 거행하는구려. 어처의 주밀한 것만은 못하지만, 그만들 하면 급제야! 
하하하. 
   공연한 말씀이십니다. 제가 무엇 잘했습니까. 그러나 모두 다 소명하고 영리
한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신첩보다 백 배나 나을 사람들입니다. 이제 스스럼이 
가시면 진선진미할 것입니다. 중매어미의 부탁이올시다. 많이 괴어주십시오. 
   어처의 부탁을 내 어찌 받지 아니하오리까. 분부대로 고루고루 괴이오리다. 
하하하. 
  전하와 비전하 양위분의 화음으로 주고받는 말씀을 듣자, 옆에 모시었던 신빈 
김씨와 영빈 강씨도 고개를 다소곳 숙여서 미소를 머금었다.
   전하께 또 한 가지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또 있소? 어서 말씀하시오. 
   오늘 밤은 중매어미의 소임이 끝나는 날이올시다. 유종의 미를 거두려 하와 
전하를 모시러 왔습니다. 삼일째 되는 신방을 치러줍시오. 
  비전하 심씨는 말씀을 마치자 방긋 웃음을 옥안에 띠었다. 입술 사이로 흰 이
가 산뜻 드러났다. 맑고 고운 자태다.
   어처의 수고가 과연 많구려. 앙탈을 한들 되겠소. 중전마마의 분부대로 복종
을 하오리다. 지상명령이니 어찌할 수가 있나, 하 하 하. 
  비전하는 이내 장지 밖에 있는 상궁을 불렀다.
  상궁이 응답하고 들어왔다.
   너는 신빈과 영빈을 모시어 자기 처소로 돌아가게 하고 제조상궁을 들라 해
라. 
  비전하는 다시 신빈과 영빈에게 분부했다.
   너희들은 각기 네 처소로 돌아가 편히 쉬도록 해라. 
  두 빈은 비전하와 전하께 배를 올리고 상궁의 뒤를 따랄 어전에서 물러났다.
  이윽고 제조상궁은 등촉을 밝히고 어전으로 들어왔다.
  전각 앞에는 등촉방 내지 두 사람이 청사초롱을 받들어 전하와 비전하를 또 
한 채의 후궁으로 인도했다.
  또 한 채의 후궁은 영빈 강씨의 처소와 같이 아담하고 정결한 일좌별당이었
다. 전하는 비전하의 인도를 받고 대청을 거쳐 큰방으로 임어했다.
  세 번째 신부는 처녀 양씨다. 역시 신부의 대례복을 입고 전하와 비전하를 맞
이했다.
  두 분 전하께 배를 올리고 두 손을 모아 초연히 섰다.
  비전하는 전하께 당부해 아뢴다.
   신빈과 영빈보다 어린 태가 많습니다. 마음이 풀솜같이 곱습니다. 길이길이 
괴어줍시오. 신첩은 이제 큰 임무를 다했습니다. 물러가옵니다. 
  미소를 지어 전하의 마음을 편안케 한 후에 양씨의 어깨에 손을 얹어 다정하
게 말씀을 내린다.
   오늘부터 한평생 전하께 몸을 의탁해서 지내야 할 너다. 일편단심으로 전하를 
받들어 모시어라. 신빈과 영빈을 형같이 생각하고 궁중이 화합해 지내야 한다. 
  비전하는 안상하게 말씀을 내리고 제조상궁과 함께 어전에 목례를 드린 후에 
걸음을 옮겨 중전으로 돌아갔다.
  전하는 이제 삼일 신방을 치르기에 능숙했다.
  신부 양씨에게 먼저 분부했다.
   앉거라. 
  신부 양씨는 전하가 시키는 대로 사르르 앉았다. 어찌나 얌전하게 앉는지 팔
보화관 족두리에 달아논 금나비조차 흔들리지 아니 했다.
  전하는 한동안 양씨를 바라보았다. 중전의 말씀대로 마음이 무척 곱겠다고 생
각했다. 모도 약해 보였다. 옷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가련한 생각이 들었다.
  얼른 무거운 짐을 풀어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족두리를 내리고 큰머리를 
거두었다. 산호비녀를 꽂아 머리를 틀어얹었다. 활옷을 벗기고 나니 회장저고리
에 남끝동을 단 처자의 모습은 마치 연연한 진달래꽃 한 가지가 수줍은 듯 고개
를 숙인 듯했다.
  전하는 애처로움을 느꼈다. 더 이상 어리고 고운 처녀를 시달리게 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영빈 강씨에게 하듯 첫날밤 옷 벗기는 풍속을 취하지 않기로 했다.
   아비가 있느냐? 
  양씨는 가만한 음성으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미는? 
   양친이 다 있습니다. 
   네 어찌 후궁 되기를 원했더냐? 
   그저 상감마마께서 어지시단 말씀을 듣잡고 후궁 되기를 원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어진 것을 알았느냐?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전하께서 어지시다 한다고 
아비와 어미들이 항상 공송하는 말을 하기에 소녀는 한평생을 전하께 의탁하려 
하와 자원을 했습니다. 
  대답 소리는 너무나 소박하고 솔직했다.
  전하는 더 한 번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은 후에 고이 안아 금침 속에 눕게 했다.
  이튿날 대왕은 신부 양씨에게 혜빈의 칭호를 내렸다.
  
  
      누흔
  이제 세 후궁의 동방화촉의 행사는 끝이 났다.
  궁중 의례에 의해서 왕비 심씨는 정식으로 삼빈의 알현을 받아야 했다.
  이 일은 마치 조정에서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조현하는 예절과 흡사했다.
  왕비는 내전의 자존이요, 빈  이하의 모든 후궁들은 신하의 명분이 뚜렷이  있
는 때문이다.
  삼일 신방을 치른  후 나흘째 되는 아침,  중정 소속 제조상궁은 새로  은총을 
받은 삼빈의 처소로 궁녀들을 보내서 중전께 배알하라는 영을 내렸다.
  신빈 김씨, 영빈  강씨, 혜빈 양씨들은 일제히  족두리를 머리에 얹고 푸른 빛 
당의의 예복을 갖춘 후에 제조상궁의 인도로 왕비 심씨도 왕비의 대례복인 적의
에 봉황을 수놓은 홍배를 달고 중전 정침에 임어했다.
  넓고 넓은  대청에는 화탄자가 깔려 있고,  화탄자 위에는 백간들이  화문석이 
펼쳐졌다. 좌우 옆에는  빈의 다음 가는 계급인  귀인, 소의, 숙의, 소용,  숙용, 
소원, 숙원들, 상왕인 태종의 후궁과 궁인의 직위로 상궁, 상의, 상복, 상식,  상
침, 상공, 상정, 상기,  전빈, 전의, 전선, 전설, 전제, 전언,  전찬, 전식, 전약, 
전등, 전채, 전정, 주궁, 주상, 주각, 주변치들, 주치, 주우,  주변궁, 내명부가 일제
히 눈을 현란케 하는 여장의  대례복으로 좌우 편에 직위의 순서에 따라 비전하
를 시립하고 있었다.
  세종대왕은 왕비는 있으나 아직껏 후궁이 없었다. 이러므로 이번에  신방을 치
른 신빈, 영빈,  혜빈이 비로소 후궁이 되었다. 빈의  다음가는 귀인서부터 숙원
까지의 내명부는 함빡 상왕인 태종의 후궁들이었다.
  비록 아버님인 상왕의 후궁이라 하나 왕비에게는 신하가 된다.  이러하므로 크
나큰 예식인 조현례식에 내명부의 자격으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궁서부터는 비록 내명부라 하나  육체적으로 임금의 은총을 받은 후궁이 아
니다. 다만 제각기 궁중의 소임을 맡은 궁인들이다.
  비록 아버님인 상왕의 후궁이라 하나 왕비에게는 신하가 된다.  이러하므로 크
나큰 예식인 조현례식에 내명부의 자격으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궁서부터는 비록 내명부라 하나  육체적으로 임금의 은총을 받은 후궁은 아
니다. 다만 제각기 궁중의 소임을 맡은 궁인들이다.
  상궁은 상감과 왕비의 측근에  있어 모든 궁중 안의 일을 보살피는  책임이요, 
상의는 의례의 책임을 맡은 궁인이요, 상복은 의복의  책임을 맡았고, 상식은 음
식의 책임을 맡았다.
  상침은 임금의 침소의  일을 맡고, 상공은 궁녀들의 공과를  심사하고, 상정과 
상기는 기록을 책임맡았다.
  전빈 이하는 손님을 대접하는  책임을 맡고, 전약은 약을 맡은 여의요, 전등은 
등불을 차지한 나인이다. 주궁 이하는 궁상각치우의 음률하는 나인들이다.
  이 가지각색의 내명부들은 삼빈의 조현례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왕후 심씨
를 시립해 있었다.
  주궁, 주상, 주각,  주우들이 녹의 홍상의 관복을 입고 악기를  타서 오음의 풍
악을 알연히 아뢰는  속에 신빈 김씨, 영빈  강씨, 혜빈 양씨는 단정한 걸음으로 
제조상궁의 인도를 받아 삼층 옥계를 밟고 중전에 서서히 올랐다.
  태종대왕의 후궁들을 위시하여 모든 내명부들의 시선은 삼빈의 들어오는 태도
로 집중되었다.
  이번에 왕비전하가 친히  간택해 뽑은 세 사람  후궁들의 자색과 걸음걸이 등 
일거수 일투족의 모든 행동을 주시해 보는 것이었다.
  삼빈은 상궁의 인도를 받아 차례차례 줄을 지어 들어왔다. 푸른 당의, 붉은 치
마에, 석웅황, 비취옥, 산호주,  자마노, 백옥, 야광주, 진주, 자수정 등 팔보  구슬
을 단 족두리를 머리에 얹고, 사뿐사뿐 소리  없이 걸어 들어오는 삼빈의 모습은 
모든 사람들의 눈을 현황케 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마치 움직이는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신빈 김씨의 얼굴은 달덩이같이 환하고, 
영빈 강씨의 모습은 한  떨기 흰 백합이 훈향을 뿜어 움직이는  듯 청초하고, 회
빈 양씨의 모습은 달빛 아래 진달래꽃이 이슬을 머금고 걸어 들어오는 듯했다.
  모두 다 걸음걸이가 우아하고 유유해서 여유가 작작했다.
  눈같이 흰 면말이 홍상을  가볍게 차면서 조심조심 발을 옮겼다. 고개를  다소
곳 숙이고 화문석을 가볍게  밟았다. 혹공단 족두리 한복판에 단 팔보  구슬들이 
바르르 떨렸다.
  세 사람의 새 후궁들은 왕비 어전 열 걸음밖에   횡으로 줄을 지어 조용히 섰
다. 난형난제의 절대가인들이었다.
  좌우편에 벌여 서 있는 내명부들은 모두 다 탐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비전하의 눈은 과연 보통이 아니시군. 어쩌면 저같이 일매지게 아름답소."
  소곤소곤 속삭였다.
  "어지신 비마마시라 성심을  다해서 어진 사람들을 고르셨으니  저같이 아름답
구려."
  "모두 다 심덕이 있어 보이기도 하는구려."
  "왕실에 대하여 흥복이요, 국가에 대해서도 큰 경사올시다."
  이때 제조상궁은 상의 세 사람에게 지휘했다.
  "배알을 드리게 하오."
  상의 세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삼빈의 곁으로 나갔다.
  왕비가 진좌하신 옥좌를 향하여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주궁들이 아뢰는 풍악 소리가 또 다시 자지러지게 일어났다.
  청아한 풍악 속에 큰절을 네 번, 비전하를 향하여 올렸다.
  사배는 끝이 나고  풍악은 멈춰졌다. 비전하는 옹용한 화한 얼굴로  삼빈의 배
알을 받은 후에 미리 준비했던 예물을 상궁들을 통하여 내렸다.
  오동궤에 홍보로 싸서 내리는 예물이었다.
  수백 명 내명부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예물상자를 바라보았다.
  상궁은 신빈, 영빈, 혜빈에게 하나씩 하나씩 예물상자를 내렸다.
  왕후 심씨는 예물을 받든 세 사람 빈에게 미소를 머금고 말씀을 내린다.
  "내가 너희들에게 내리는 예물이다. 끄러보아라."
  신빈, 영빈, 혜빈 세 후궁은 무릎을  꿇고 공손히 옹보를 끌렀다. 오동상자 뚜
껑을 열었다.
  모든 내명부와 궁녀들은 금은  보화의 찬란한 패물들이 들어 있는 줄  알았다. 
침을 삼키며 눈을 똑바로 뜨고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금은보화가 아니다. 책이 한 권씩 들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뜻밖이라 생각했다.
  실망의 표정을 짓는 궁인까지 있었다.
  왕비 심씨는 삼빈을 향하여 말씀을 내린다.
  "예물은 속인들이  생각하는 금은주옥의 패물이  아니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책이다. 서중자유황금옥이라고 한 옛  철인의 말씀이 있느니라. 
'소학'이란 책이다. 틈나는  대로 자꾸 읽어라. 반드시 너희들한테  큰 도움이 되
리라."
  세 후궁들은 일제히,
  "삼가 의지를 받들어 교양을 쌓겠습니다."
 아뢴 후에 책을 받들어 사은하는 절을 올렸다.
  모든 내명부들은 근엄한 왕비 심씨를 새삼 다시 우러러보았다.
  왕비는 다시 세 후궁에게 말씀을 내린다.
  "너희 세 사람은  오늘부터 나의 다름 가는 지위에 있는  빈이다. 정일품의 최
고의 대우를  받는다. 조정으로 친다면  삼공의 지위에 해당한다.  승상접하해서 
왕실을 번영케 하고, 국가를 중흥시키는 굄돌이 되게 하라."
  순순히 이르는 왕비의 옥음은 엄숙하면서 다정했다.
  왕비는 계속해서 말씀을 내린다.
  "궁중은 여자가 많은  곳이다. 자연 말이 많다. 수구여병격으로 말조심을  해서 
항상 화기가 애애하도록 하라!"
  삼빈을 위시하여 모든 내명부들은  숙연히 옷깃을 바로잡고 귀를 기울여 듣는
다.
  비전하는 또 한마디 분부를 내린다.
  "이곳이 비록 구중궁궐 깊은 곳이라 하나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자면 가시덤불 같은 고난의  길이 있고 때로는 천 길 절벽과 같은 
험난한 행로도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을 참고  극복하는 곳에 비로소 해탈과 광명
이 나타나는 법이다.  너희들은 의와 신을 근본으로 해서 참는  경지를 개척해야
만 한다. 나도 이러한 철리를 전하께 배워서 한평생을 노력하는 중이다. 너와 나 
다 함께 이 길을 밟아서 전하께서 성주가 되시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 비와 빈의 
맡은 바 임무다. 우리 다 함께 노력하면서 전하를 받들기로 하자!"
  모든 내명부와 시로  된 삼빈은 자애 깊은  비전하의 말씀에 감동되어 눈물을 
머금는 이까지 있었다.
  말씀을 마친 왕비 심씨의 기름한  속눈썹에도 촉촉히 이슬이 서린 듯 눈물 흔
적이 보였다.
  인의 철리를 새 후궁들에게 말할 때 아련히 비명횡사한 친정 아버지 심의정의 
원한 품은 모습이 떠올랐다.  폐비를 막기 위하여 상왕께 후궁 세  사람을 둘 것
을 승낙한 전하의 명철한 처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기도 
했다. 왕후 심씨의  품안에는 한평생 마음을 벼니 않겠다고 상투에  꽂았던 산호
동곳을 거침없이 뽑아 맹세했던 전하의 신표를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참읍시다. 참읍시다. 나도  참고 당신도 참읍시다!'
  이같이 당부하던 전하의 옥음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모든 지난 일을 생각하고, 오늘 후궁 세 사람의 조현례를 받고보니 눈에  눈물
이 안개 일 듯 서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상궁이 비전하께 아뢴다.
  "이제 조현 의식은 끝났습니다."
  비전하는 미소를 지어 묻는다.
  "다음엔 무슨 절차가 남아 있느냐?"
  "사찬 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사찬 의식  때는 전하께서 비전하와 함께 임어하
시어 같이 즐기십니다."
  "그렇다면 의식을 마치고 자리를 바꾸도록 하라."
  비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연침으로 돌아갔다.
  또 한 곳 연회장에는 사찬상이 준비되었다.
  정면으로 남향해서 왕과 왕비의 수라상이  놓였다. 좌편에는 신빈, 영빈, 혜빈 
세 후궁의 사찬상이 놓이고, 우편과 북향판에는 귀인 이하  내명부들의 사찬상이 
벌여 있었다.
  분합 밖에는 여악들이 화관당의로 거문고, 비파,  가야금, 아쟁 줄을 고르고 있
었다. 생과, 유과, 당속,  다식이며 정과, 편육, 전유어, 약식, 편들을 벌여논  산해
진미의 음식상 위에는 상마다  공작미와 수파련 꽃을 꽂아서 봄기운이 무르녹았
다.
  상의는 삼빈 이하 내명부들를 차례차례 맞이하여 사찬장으로 인도했다.
 알현할 때 입었던 대례복들을 고치지 아니했다.
  넓고넓은 사찬장은 녹의홍상으로 꾸민 화사한 내명부들의 의상으로 인해서 백
화난만의 꽃동산을 이루었다.
  이윽고 삼현육각이 어련히 전각 안에 화음을 아뢰는 속에 세종대왕과 왕후 심
씨는 상의와 상궁의 인도로 옥좌에 임어했다.
  춘산이 뭉그러지는 듯 울긋불긋  녹의홍상의 내명부들은 일제히 일어나 두 분 
전하를 맞이했다.
  전하는 손을 들어 내명부들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뜻을 표했다.
  일제히 일어나 천자만홍의 화려한 동산을 이루었던 미인들은 또 한 번 옥산이 
뭉구러지는 듯 소리없이 물결을 지며 자리에 앉았다.
  전선 차지 궁인들이 분주하게  수라상과 사찬상의 분과한 백지를 끄르기 시작
했다.
  상선 차지 궁녀가 옥잔에 가득 술을 부어 전하께 올렸다.
  세종전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잔을 들며 궁인에게 분부했다.
  "비마마께도 한 잔 올려라."
  비전하도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제 어찌 술을 마실 줄 압니까. 그만두어라."
  "오늘 조현례를 받으신  날인데 사양하시면 아니됩니다. 새  후궁들의 낯을 보
시어 집배만 하십시오."
와비 심씨는  전하의 말씀을 거절할 수  없었다. 궁녀가 따르는 술을  잔에 받아 
조용히 상위에 놓았다.
  새 후궁 이하 모든 내명부들도 저를 들었다.
  전하는 석 잔 약주를 마신 후에 왕비 심씨에게 묻는다.
  "조현례를 받으신 후에 필시 후궁들에게 예물을 내리셨을  터인데 무슨 예물을 
내리셨소?"
  "그저 미미한 예물을 내렸습니다."
  왕비는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제조상궁이 옆에 모시었다가 아뢴다.
  "소중한 큰 예물을 내리셨습니다. 책을 내리셨습니다."
  책을 내렸단 말을 듣자 전하도 의외라고 생각했다.
  "책을 내리셨다니 무슨 책을?"
  "세 빈 마마께 '소학'을 한 권씩 내리셨습니다."
  전하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더 한층 왕비를 존경하는 생각이 가슴  안에 
벅차게 올랐다.
  "'소학'을 내리셨어! 그것  참 크나큰 예물이로구나. 과인도  미처 생가지 못한 
바다. 비마마께서는 과연 나의 스승이로구나!"
  전하의 용안에는 경건하면서 흐뭇해하는 모습이 떠돌았다.
  왕비 심씨는 치마를 쓸며 조용히 대답했다.
  "모두 다 평시에 전하께서 신첩을  항상 가르치시고 지도해주신 덕택이올시다. 
제 무슨 슬기가  있어 패물 대신 책을 내렸사오리까. '소학'은  신첩이 전하의 교
시를 받들어 항시  읽던 책이올시다. 후궁들에게 크나큰 교양이 될까  하와 예물
로 내린 것이올시다."
  전하와 비전하의 수작하시는  말씀을 듣자 사찬상을 받고 앉았던  신빈, 영빈, 
혜진은 저를 내리고 끓어 앉아 두 분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있다.
  모든 내명부들도 저를 놓고 두 분 전하의 말씀을 듣는다.
  제조상궁이 곁에 시립해 있다가 다시 세종전하께 아뢴다.
  "중전마마께서는 '소학' 예물을 내리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속인들이 
생각하는 좋은 금은주옥의 패물이 아니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책이다. 서중자유항금옥이다.'하시는 좋은 말씀까지 내리셨습니다."
  "중전마마께서 그같은  말씀까지 내리셨더란  말이냐! 과연  그러니라. 황금의 
집뿐이랴. 글 속에는 우주와 천지간의 모든 섭리가 가득하게 있느니라."
  세종대왕은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제조상궁이 또 아뢴다.
  "그리하옵고 중전마마께서는 이런  말씀을 또 내리셨습니다. '너희들은  승상접
하해서 왕실을 번영케 하고,  국가를 중흥시키는 굄돌이 되게 하라.'고 분부하셨
습니다."
  '국가를 중흥시키는 굄돌'이  되게 하라고 후궁들에게 당부했다는 말을 세종전
하는 상궁에게 듣자 왕후를 향하여 고개를 숙였다.
  "진실로 고맙소. 모두 다 나라를 위해서 굄돌이 되어주시오. 중전의 크나큰 내
조의 공을 과인은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다만 감격할 뿐이오."
  왕후 심씨는 자리를 피하여 아뢴다.
  "새 사람들에게 당연히 행할 길을 지도해준 것뿐이옵니다. 불감하여이다."
  상궁은 곁에서 또 아뢴다.
  "중전마마께오서는 도 다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궁중은 여자가  많은 곳이
다. 자연 말이 많다. 수구여병 격으로 말조심을 하라.'하셨습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궁은 또 아뢴다.
  "중전마마께서 또 이런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이곳이 비록 구중궁궐 깊은  곳
이라 하나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자면 가시덤불  같
은 고난의 길이 있고 때로는 천 길 절벽과 같은 험난한 행로도 있게 된다.  이러
한 것을 참고 극복하는  곳에 비로소 해탈과 광명이 나타나는 법이다.  너희들은 
의와 신을 근본으로 해서 참는 경지를 개척해야만 한다. 나도 이러한 철리를  밟
아서 전하께서 성주가  되시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  비와 빈의 맡은 바  임무다.  
우리 다 함께 노력하면서  전하를 받들기로 하자!' 이같은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곁에서 듣던 소인들도 어찌나 훈훈하고 다정하시면서 명철하신 말씀인지 마음이 
감동되어 눈물들을 흘렸습니다."
  세종대왕은 상궁을 통하여 이 말씀을  듣자 형용해 말할 수 없는 감사로운 마
음을 느낀다.
  더구나 '나도 철리를  전하께 배워서 한평생을 노력하는  중이다. 너와 나, 다 
함께 이 길을 밟아서 전하께서 성주가 되시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 비와 빈의 맡
은 바 임무다.' 하는 대목어 가서는 전하의 안정에도 감격한 눈물이 눈시울을 적
셨다.
  "어어참, 오늘 말을 들었군!"
  전하는 한 마디를 한 후에 또다시 말씀한다.
  "이제 우리 나라는 훌륭한 나라가 아니되려야  아니될 수가 없다. 어진 왕후가 
계시어 여러 후궁들을 지도하시고 모든 빈들은 왕후전하의 뜻을 받들어 한맘 한
뜻으로 나를 도와줄테니  내 무슨 걱정과 근심이 있으랴! 실로  복스럽고 기쁘구
나."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다시  신빈, 영빈, 혜빈을 향하여 사은하는 절을 올리고 
내 말을 들어라."
  신빈, 영빈, 혜빈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전하를  향하여 큰절을 드린 후
에 조용히 서서 전하의 말씀을 기다렸다.
  "상궁을 통하여  중전마마께서 너희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을 들으니  마디마디 
내 마음까지 감동시키게 하는 갸륵한 말씀이다.  너희들은 이 말씀을 폐부에  새
겨서 왕실과 국가를 번영케 하는 굄돌이 되라. 내가 할말을 중전께서 다  하셨으
니 나는 도리어 할 말이 없다. 중전마마를 자모같이 길이길이 모시어라!"
  전하는 삼빈에게 당부한 후에  천천히 어상에서 일어나 비전하와 함께 중전으
로 향했다.
  삼빈 이하 모든 내명부들은 두 분 전하의 뒤를 이어 제각기 처소로  돌아갔다, 
복스러운 조현례와 사찬잔치는 화기 가득찬 속에 파연이 되었다.
  전하는 중전까지 왕비 심씨를 들게  한 후에 다시 정무를 살피기 위하여 외전
으로 출어했다.
  날은 저물고 밤은  차차 깊어들었다. 왕후 심씨는 예복을 벗은  후에 편복으로 
고쳐 입고 조용히 자리에 누웠다.
  온종일 행사를 치른 피로가 온몸으로 엄습했다.
  조현래를 받은  오늘 하루의 피로뿐만이  아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전 날도 
삼일 동안 신빈,  영빈, 혜빈의 신방을 치르기 위하여, 전하를  모시고 행여나 실
수가 있을 가 하여 만 가지 신경을 썼던 피로가 일시에 조수 밀듯 몰려들었다.
  온몸이 풀솜처럼 풀리고 나른했다.
  단지 이것뿐이  아니다. 왕후도 사람이다. 사람  중에도 감정이 날카로운 여자
다. 비록 현숙하고 참을성이 많은 심비라 하나  홀로 사랑했던 전하를 세 사람의 
젊은 여인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교양과 범절이 무던한 심비다.  모든 것을 참고 참아서 겉으로는 항상  부드러
운 미소와 온화한 말씨로  전하와 후궁들을 대해서 그야말로 승상접하하는 가지
가지의 일을 향훈이 돌도록  진선진미하게 잘 맞추었으나, 마음 하편 구석엔  쓰
리고 아프고 섭섭하고 서운한 생각을 씻으려야 씻을 길 없었다.
  전하의 후궁 맞아들이는 크나큰 행사를 무사하게 마치고 나니 몸의 피로와 마
음의 한이 일시에 밀어 닥쳤다.
  뿐만인가. 이 후궁을 맞아들이는 일은 전하가 자의로 맞아들이는  후궁이 아니
다.
  상왕인 태종의 명을 받아 자기를 폐비시키는 대신 맞아들이는 가례다.
  마음은 더 한층 쓰리고 죄스럽고 괴로웠다.
  자리에 누워 지난 일을 곰곰히 생각하니 만가지 회포가 복받쳐 올랐다.
  등촉방 상궁이 불을 켜러  들어왔다. 비전하가 동그마니 누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연일 피로하시어 고단하신가 봅니다. 금침을 내리오리까?"
  "아서라. 그만두어라. 잘시 쉬었다가 일어나리라."
  "촛대에 불을 켜겠습니다."
  "불도 켜지 마라. 잠시 편히 누우리라. 물러가 있거라. 부를 때까지."
  등촉방 상궁은 비전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 조심조심 물러났다.
  왕비 심씨는 다시 눈을 감고 고요히 누웠다.
  아버지 심의정의 원통하게 돌아간 모습이 감은 눈 속으로  어렴풋이 나타난다. 
참는다고 전하와 천  번 맹세를 했으나 이  일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아닌 체하고 태연했으나 도무지 참을 수 없다.
  그리고 또 전하의 사랑을 분산시켜서 뺏긴 일도 참을 수 없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씻고 씻어도 자꾸자꾸  흘렸다. 베겟모가 촉촉하도록 
젖었다.
  밤은 점점 짙어들었다. 등촉방  상궁은 중전 연침에서 나온 후에 비전하의  태
도가 염려스러웠다. 제조상궁의 방을 찾았다.
  "제조상궁님께 고합니다."
  "왜, 항아님, 무슨 일이 있소?"
  "중전마마께서 사찬연을 받으시고  들어가신 후에 너무나 큰일을 많이 치르셔
서 몸살이 나신 모양입니다.  그대로 동그마니 누워 계십니다. 등촉을 밝히러 들
어갔더니 불도 켜지 말라 하시고, 금침을 내려 드리려 해도 그만 두라 하십니다. 
감기가 듭실까 염려올시다. 제조상궁님께서 들어가보십시오."
  "불도 켜지 말라 하시고  누워 계시단 말씀요? 아마 몸이 몹시 불편하신 모양
이로구만."
  제조상궁은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진둥한둥  중전 연침을 향하여 걸었다. 
등촉방 상궁도 뒤를 따랐다.
  이때 마침 세종전하는  저녁 수라를 마친 후에  연일 후궁들의 가례를 위하여 
진심으로 심혈을 기울여 수고해준  왕비에게 감사한 뜻을 표하기 위하여 아무런 
연통도 내리지 아니하고 옥보를 중전 침실로 옮겼다.
  '너와 나 다 함께 전하를 도와서 성주가 되시도록 하자.'
  후궁들에게 내린 중전의 고마운  말씀이 가슴 깊이 서려서 그대로 지내버리기 
어려웠던 때문이다.
  전하가 길고 긴 복도를 지나  중전 침실에 당도했을 때 제조상궁과 등촉방 상
궁의 발길도 침실 문 앞에 나타났다.
  상궁들은 허리를 굽혀 대왕을 맞이했다.
  장영창 문은 캄캄한 어두운 빛으로 휩싸여 있었다.
  전하는 상궁들에게 물었다.
  "웬일이냐. 밤이 깊었는데 어찌해서 침전에 등촉을 밝히지 아니했느냐?"
  전하는 등촉방 상궁과 제조상궁은 황공했다. 사실대로 고하지 아니할  수 없었
다.
  "아까 승석 때  쇤네는 침전에 등촉을 밝히러  들어갔사옵니다. 그러나 중전마
마께서는 몹시 피로하신 듯  누워 계시어 불을 켜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하옵
고 금침을 내려드리려 해도 잠시  누워 있을 테니 내리지 말고 물러가라 하셨습
니다. 혹시 감기나  드실까 염려옵니다. 그리하와 쇤네는 제조상궁과  함께 다시 
문후를 아뢰러 들어오는 길입니다."
  세종전하는 깜짝 놀랐다. 병환이 나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침전에 들어가지 전에 어서 이곳에서 불을 밝혀라!"
  등촉방 상궁은 황망히 침전 밖에서 등불에 불을 밝혔다.
  어둠속에 가라앉았던 침전 장영창에 불빛이 환하게 비쳤다.
  침전 안에서,
  "누구냐?"
  하는 심왕후의 음성이 가늘게 드렸다. 목소리는  흐느껴 오열한 후에 일어나는 
콧소리다.
  전하는 반가웠다.
  "나요, 나야!"
  제조상궁이 곁에서 고한다.
  "상감마마께서 듭십니다."
  제조상궁은 침전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전하는 침전안으로 옥보를 옮겼다.
  등촉방 상궁이 와룡촛대에 불을 밝혔다. 불빛이 환하게 방안에 가득했다.
  전하가 듭시는 것을 안 비전하는 황망히 일어났다. 의상이 약간 흐트러졌다.
  불빛에 비쳐지는 비전하의 옥안엔 눈물을 흘렸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났다.
  비전하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짓고 한 손으로  옷깃을 매만지며 전하께 묻는
다.
  "어떻게 연통도 없이 임어하셨습니까. 미리  나가 맞이하지 못하와 죄송스럽습
니다."
  전하는 이슬 서린 비전하의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속눈썹, 한 올 한 올에 엉클어진  가늘고 가는 세립자의 눈물방울은 와
룡촛대 휘황한 불빛을 받아 자그마한 오색 무지개가 영롱했다.
  비전하의 애수어린 모습은 무한한 풍정을 자아냈다.  미소 속에 엉클어진 애수
를 바라보는 전하의 마음은 죄어짜지는 듯  뭉클했다. 직감적으로 왕비의 애수어
린 심리를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연히 말씀했다.
  "과인 때문에 연일 수고를 많이 하셨기에 불현듯 뵙고  싶어서 연통도 없이 왔
소이다. 그랬더니 복도에서  상궁들을 만났소이다. 불도 아니 켜시고  금침도 펴
지 아니하신 채 누워 계셨다 하니 몸이 편치 아니하십니까, 염려됩니다."
  전하는 다정하게 비전하의 손을 잡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비전하는 오른편 손을 전하께 잡힌 채 왼편 손은 슬몃  뒤로 
감추고 보이지 아니했다. 여전히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아무렇지도 아니합니다. 다만  몸이 조금 고달프기에 불을  켜지 아니하고 누
워 있었을 뿐입니다. 불을 켜면 눈이 부신 탓으로."
  등촉방 상궁은 두  분의 다정히 말씀하시는 것을  뵙자 자리를 피하여 물러났
다.
  전하는 손을 이끌어 자리에 함께 앉았다. 비전하의 속눈썹엔  이제는 이슬방울
도 말라서 보이지 아니하고  오색 무지개도 스러졌다. 다만 입가에 미소가  여전
히 떠돌 뿐이었다.
  전하는 비전하의 애수띤  눈물 흔적이 마음에 걸렸다. 상궁들도  물러갔다. 조
용히 비전하의 심경을 더듬어보고 싶었다.
  비전하의 오른편 손을 잡은 채 상냥하게 묻는다.
  "왜 우셨소? 마마!"
  "언제 신첩이 울었습니까?"
  "어질고, 착하고,  순진한 비전하도 거짓말을  하십니까? 나는  속이지 못합니
다."
  "절대로 운 일이 없습니다."
  비전하의 눈웃음은 도담한 두 볼 사이로 흘러 입가로 아름답게 서렸다.
  그러나 비전하의 왼편 손은 여전히 뒤로 감추고 보이지 아니했다.
  전하는 빙긋 웃으며 비전하의 얼굴을 마주보며 말씀한다.
  "아까 과인이 들어올 때 마마의 안정에 눈물이 서려  있는 것을 확실히 보았습
니다. 불빛에  반사되어 가름한 속눈썹에 오색이  영롱한 이슬이 방울방울  맺힌 
것을 보았습니다."
  왕비는 이제, 더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미소를 짓고 대답이 없다.
  전하는 왕비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왜 우셨소?"
  전하의 음성은 면화송이같이 포근하고 다정했다.
  비전하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을 뿐 답이 없다.
  "아버님 생각이 나서 우시었소?"
  "아니올시다. 지난일을 생각한들 소용이 있습니까. 아니 생각했습니다."
  비전하의 얼굴엔 잠시 미소가 사라지고 쓸쓸한 빛이 떠돌았다.
  "그럼 무슨 회포가 일어 우시었소?"
  이때, 비전하의 왼편 손은 여전히 뒤로 돌려 감추고 있었다.
  전하는 손을 감추고 있는 수수께끼를 풀어보고 싶었다.
  "마마! 무엇을 손에 감추고 계시오?"
  "아니올시다. 감춘 것이 업습니다."
  비전하의 얼굴엔 약간 당황한 표정을 띠었다.
  "아까부터 자꾸 손을 뒤로 돌리셨는데!"
  전하는 치맛자락 뒤로 돌린 비전하의 팔을 이끌었다.
  "무엇입니까, 손에 잡으신 것이? 나한테 보여서는 아니되실 것입니까?"
  "대범하신 전하께서 아녀자의 소소한  일을 물어 무얼 하십니까? 묻지 마시옵
소서."
  비전하는 손을 펴지 아니한 채 방긋 웃었다.
  전하도 웃지 아니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남자는 대범해야 한다지만 마마와  과인은 부부간이올시다. 왕과 왕비
라 해서 체통을 지킨답시고 마음과 마음이 천 리 만 리로 갈려 있다면 왕실꼴도 
아니되고 나라일도 아니됩니다.  모든 일을 말씀해주시고, 모든 회포를 설파해주
십시오."
  전하의 용안엔  만인지상의 제왕이라는 독선의 위엄보다도  한 사람 지성스런 
필부의 소박하고 순후한 진정이 서려 있었다.
  비전하는 여전히 손바닥을 펴지 아니한 채 조용히 아뢴다.
  "전하의 고결하신  인품과 수신제가하시는 갸륵한 점을  신첩이 어찌 모를 리 
있사오리까. 전하의  넓으신 금도와 크나큰  홍은 밑에 잔명이  부지해 살아가는 
신첩이올시다. 어찌 추호인들 전하를 기이오리까. 그러나 지금 신첩의 손에 감추
어 있는 물건은  전하도 이미 다 아시는 물건입니다. 그래서  보여드리지 않습니
다. 신첩이 어찌 전하를 기이오리까."
  비전하의 옥안엔 여전히 화평한 미소가 떠돌았다.
  전하는 풀지 않는 비전하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다시 말씀을 내린다.
  "과인이 이미 아는 일이라 하니, 더욱 알고 싶습니다. 내가 알고 싶은 일은 마
마가 무엇 때문에 불을  끄고 금침도 아니 덮고 눈물을 흘리셨는지, 그 점을  알
고 싶어서 이같이 안타까워 하는 것입니다. 지금 마마의 손에 쥐신 물건이  무엇
인지는 모르겠소이다마는  그 물건과 관련해서 마마는  눈물을 흘리셨으니 비록 
과인은 마마의 눈에서 다시는 눈물이 나지 아니하도록 하오리다.  그러기 위하여 
이같이 안타깝게 보여 달라고 보채는 것입니다."
  전하의 지성에 비전하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미소를 머금은 채 살몃 손바닥을 폈다.
  전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펼쳐진 손바닥에는 찬란한 빛을  뿜는 황금마구리 
산호동곳이 놓여 있었다.
  벌써 오래 전 일이다.  한창 폐비 문제가 일어나고 후궁을 두어야  하느니, 마
느니 하고 온 궁중이 불안 속에 빠졌을 때 전하는 마음이 변치 않는다는 신표로 
상투에 꽂았던 산호동곳을 거침없이  뽑아서 비마마에게 주었던 바로 그 산호동
곳이다.
  전하는 비로소 왕비의 눈물을 머금고 울었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불도 켜지 아니하고 금침도 아니한 채 애수에 잠겼던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있
었다.
  아무리 마음이 너그럽고 참을성  많은 착하고 어진 왕비라 하나 역시  여자다. 
폐비가 되는 대신 당신의 손으로 후궁들을 비록 뽑았다하나 마음 한구석에는 섭
섭하고 서운한 생각이 아니 들 리 만무했다.
  혼자 차지했던 전하의 사랑을 세 사람 후궁에게 고루고루 나누어주게 되니 슬
프기도 했다. 시름이 안개 일듯 가슴 안에 첩첩이 서리기도 했다.
  더구나 크나큰 절차, 세 사람 후궁들의  가례와 신방시에 알현례와 사찬연까지 
다 치르고 아니 몸도 고단했지만 마음은 허탕 속으로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왈칵 
울음보가 터졌던 것이다.
  전하는 다정하게 비전하를 바라보며 묻는다.
  "마마, 혹시나 내 마음이 변할까하여 신표를 바라보며 울으셨구려?"
  "아니올시다. 전하의 마음이 변하실 리야 있겠습니까? 우연히  몸에 지녔던 신
표를 꺼내보니 까닭없이 눈물이 흘렸습니다."
  왕비의 음성은 조용하면서 애원성을 머금었다.
  전하는 다시 왕비를 위로한다.
  "마마! 마마는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단 하나인 나의 귀의처입니다. 조금도 시
름하지 마시오,  내가 누구를 의지하고 사오리까.  비마마는 나의 계심으로 해서 
나라의 모든 일이  잘됩니다. 내 어찌 비마마께 대한 지성스런  마음이 추호인들 
변하오리까? 다시 더 한 번 천지신명 앞에  맹세합니다. 산호동곳을 고이고이 한
평생 지니시옵소서."
  비전하의 눈에서는 감격한 눈물이  또 한 번 방울방울 떨어졌다. 전하는  용포 
소맷자락으로 떨어지는 왕비 심씨의 눈물방울을 씻어주었다.

    궁녀 해방(宮女解放)
  심온의 일로 인하여 폐비 논란이 일어났던 일도 이제는 옛 이야깃거리가 되었
다.
  세종전하는 왕비와 삼빈을 거느리고 화락한 왕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전하
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아버님  상왕이 계신 수강궁에 나가 문안을 드리고 조
반을 자신 후에는 신하들의 입대를 받은 후에  국정을 살폈다. 밤에는 삼빈을 번
갈아 대하면서 화락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이지 날이 몹시 가물었다.
  정월서부터 농촌의 '보릿고개'라고 하는  오월이 되도록 눈도 한 번 아니 오고 
비도 아니 왔다. 서울 안뿐이 아니었다. 팔도 강산이 다 그러했다.
  서울 근교를 위시하여 지방에서는 논틀 밭틀에  먼지가 펄썩펄썩 일었다. 봇물
은 끊어지고 저수지에도  물이 말랐다. 백성들은 못자리를  못하겠다고 술상이었
다.
  전하는 각읍 수령들이 올리는 장계를 받았다.
  전하는 승지를 불러서 호판과 이판에게 긴급명령을 내렸다. 각읍  수령에게 지
령을 내려서 논두렁마다 우물을 파게  하고 물고를 터서 모판을 앉힌 후에 하지 
전에 우선 호미모라도 심으라 했다.
  전하는 친히 후원에 나가  기우제까지 지냈다. 그러나 비는 여전히 오지  아니
했다. 해는 쨍쨍하게 눈이 부시도록 날마다 푸른  하늘 한복판에 높이 떠올랐다. 
마치 젊은 세종임금의 애타하는 모습을 비웃는 듯했다.
  젊은 세종은 나라의 농사 형편과 서민들이 굶주릴 생각을 하니 마음이 죄어서 
밤에 잠이 오지 아니했다.
  아침마다 일관을 불렀다.
  "비는 언제쯤 오겠느냐?" 
  "글쎄올시다. 아직 같아서는 비  올 가망이 망연합니다. 황공하기 짝이 없습니
다."
  대답은 날마다 신통치 아니했다.
  "옛사람은 바람도 일으키고  비도 오게 해서 호풍환우도 했다 하는데  그래 그
런 재주도 없단 말이냐?"
  젊은 세종은 초조했다.
  "그런 말은 다 야사나 패설에서 나온 이야기옵지, 현실로는 불가능한 일이올시
다. 탕 임금 시대에도 칠년대한이 있었다 합니다. 그저 하늘 뜻이 돌아야만 합니
다."
  "그렇다면, 속수무책이란 말이냐? 이 가엾은 백성들을 장차 어찌한단 말이냐!"
  "그저 진인사대천명이올시다. 나라 안에 원통해하는  모든 원기를 사라지게 하
시고, 지성으로 하늘을 감동케 하옵소서."
  세종은 일관을 탓하고 꾸짖을 수도 없었다.
  또다시 비원에 올라 진종일 기우제를 지내고 팔도에 영을 내려 모판을 마르지 
않도록 하라고 분별했다.
  전선에게 영을 내려서 수라상에  반찬을 줄여서 감선을 하고, 옥문을 크게  열
어서 사람을 죽였거나 패륜한 극악한  죄수 이외에는 모드 다 백방을 시키라 했
다.
  세종임금의 지성스런 소식을 들은 팔도의 백성들은 밤을 도와 우물을 파고 용
두레질을 해서 모판에 물을  부었다. 팔도 감사와 육십여 고을의 수령들은  대왕
의 본을 떠서 백성들과 함께 기우제를 지냈다.   
  그러나 가뭄은 여전히 해소되지 아니했다.
  다시 한 달이 지나도 비는 오지 아니했다.
  세종전하는 용안이 초췌하게 되었다. 마치 당신이 정치를 잘못해서  이러한 가
뭄이 계속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구름이  끼었나 하고 뜰에 내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이 
이슥하면 단신으로 후원을 거닐며  별빛이 구름장에 가리지 아니했나 하고 천기
를 살피기도 했다.
  하루는 저녁 수라를 마친 후에 농사에 대한 서적을 밤깊도록 뒤적거리다가 홀
로 후원에 내려 별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은 깊어서 이미 삼경이  지났다. 대궐 안에는 퇴등령이 내려 전각과  누각은 
어둠 속에 잠겨 있고 움직이던 사람들은 모두 다 잠 속에 들어서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하늘엔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황황한 빛을 뿜고 허허한 한복판에는 은한
이 부옇게 가로질러 좁쌀 같은 별빛이 가물거렸다.
  아직도 비는 올 가망이 없다.
  세종전하는 한숨을 길게 쉬고 마음속으로 탄식하며 서서히 발길을 옮겼다.
  또 한 굽이 후원에  당도했다. 온 궁중이 등불을 꺼서 어둠 속에 잠겼는데  이
상한 일이었다. 멀리서 은은히 한 점 불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전하는 괴상한 일이다 생각했다. 불빛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희미하게 불빛이 비치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말단 나인들이 거처하는 곳이
었다.
  전하는 괘씸하게 생각했다.
  '퇴등령이 내렸는데 영을 무시하고 불을 켜고 있으니, 요망한 년이다.'
  호통을 치려 했다.
  걸음을 빨리 하여 걸었다.  가까이 가보니 불빛이 비치는 곳은 한곳뿐이  아니
다. 또 한 채 나인의 처소에도 불빛이 송림  사이로 은은히 비쳤다. 전하는 이제
는 노여움보다도 호기심이 움직였다.
  '무슨 까닭에 자지 않고 불들을 켜고 있을까?'
  전하는 가만가만 걸었다. 발자취 소리를 얕게 했다.
  먼저 불빛을 찾아낸 곳으로 가까이 갔다. 사람의  소리가 도란도란 들렸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전하는 귀를 의심했다. 다시  발길을 멈추고 조용히 들
었다.
  한 사람의 음성은 앳된  여인의 목소리요, 한 사람의 말씨는 사나이의  목소리
다. 
  전하는 깜짝 놀랐다.
  '해괴한 변이 생겼구나.'
  생각했다.
  어수가 부르르 떨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입이 뻣뻣했다.
  '지엄한 궁중 안에 이러한 변이 생길 수 있나!'
  열화 같은 노한 피가 머리 위로 솟구쳤다.
  '사내놈은 별감놈이냐? 무감놈이냐?'
  와싹 창문을 발길로 박차고 들어가 보려 했다.
  그러나 교양 높은 전하였다.  더구나 참는 공부를 해서 인의 철리를  실천궁행
하려고 노력하는 전하였다.
  꾹 참았다. 좀더 동정을 살피리라 했다.
  더 한 걸음 창 앞으로 다가서서 귀를 기울였다.
  불빛은 창 앞에 우연히  비치는데 방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주고받는 목소리가 
완연했다.
  "밤이 깊었소이다. 자아, 이제 첫날밤 신방을 치릅시다."
  사나이 목소리다.
  "부끄러워 어찌하나, 불을 먼저 끄십시오."
  애원성을 지닌 처녀 색시의 음성이다.
  전하는 가슴이 죄었다. 다리가 다시 떨렸다.
  방안에서는 또 목소리가 났다.
  "불을 끄면 어떻게 옷을 벗기나, 껌껌해서."
  "어림치고 벗기시구려!"
  "첫날밤에 불을 끄고 옷을 벗기면 내외지간에 금슬이 좋지 않다는데."
  전하의 가슴은 뜨끔했다.
  바짝 창 앞으로 다가섰다.  문틈이 빠끔 벌어졌다. 눈을 창틈에 대고  숨을 죽
여 들여다보았다.
  뜻밖이었다. 방안에는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있는 줄 알았더니 단지 궁녀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맞은편에는 백지로 싸논 인두판 한  개를 벽에 기대 놓고 남자와 여자의 목소
리로 혼자 대화를 해서 신랑 신부의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하는 맥이 탁 풀렸다.
  다리가 휘청했다.  불쌍하고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이 
강하게 머리를 엄습했다.
  '모두 다 내 죄로구나. 살피지 못한 탓이로구나!"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행여나 궁녀가 알세라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바로 곧 대전으로 돌아가려 하다가 멀지 아니한 또 한 곳에 송림 사이로 어른
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저곳에도 과년한 처녀  궁녀가 궁중에 들어와서 꼼짝  못하고 갇혀 있게 되니 
회춘의 정이 간절해서 신방 놀이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침전으로 들어가려 하다가 기왕 궁중 속이나마 민정을 살
피는 길이니 더 한 번 보고 들어가리라 생각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걸어서 송림 사이로 들어섰다.
  이곳에도 은은히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는 또다시,
  '남자와 여자가 대화하는 시늉을 하는구나!' 
  생각했다.
  솔바람 소리가 일어나는 곳에 청아한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려 왔다.
  여자의 구슬을 굴리는 듯한 우아하고 맑은 목소리다.
  전하는 발길을 멈췄다. 다음에 남자의 목소리가 나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음성은 나타나지 아니했다.
  전하는 도리어 이상하게 생각했다. 다시 발길을 옮겨서 창문 가까이 갔다.
  전하는 귀를 기울였다.
  여인의 아름답고 고운 목소리는  은방울을 굴리는 듯 끊어졌다 이어졌다 높고 
낮은 음향을 내었다.
  솔바람 소리가 간간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흐리게 했다.
  역시 남자의 음성은 나타나지 아니했다.
  전하는 비로소 당신이 지레짐작했구나 생각했다.
  '또 하나 다른 미정을 살필 기회가 왔구나!' 했다.
  다시 발자취 소리를 죽이고 조심조심 창문 앞으로 갔다.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는 사람과 대화하는 이야기  소리도 아니요, 글  읽는 
소리도 아니다. 노랫소리다.
  전하는 바싹 귀를 창  앞에 댔다. 요요하게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듯  가만
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름 우에 대님 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어름 우에 대닙 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정 둔 오늘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기막힌 시다. 노래조로 높고 나게 길고 짧게 장단을 맞춰서 곱게 불렀다.
  전하는 노래 사설을 언제 어디서인가 들어보았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출렁했다.
  노랫소리는 또 다시 일어났다.
  '경경고침상에
  어느 잠이 오리요
  서창을 열어하니
  도화 발하도다.
  도화는 시름없이
  소춘풍하나다.'
  목소리는 더한층 애조를 띠었다.
  전하의 마음도 애틋한 심사가 가득했다.
  노랫소리는 계속된다.
  '넋이라도 님을 한데 녀잇경 너기더니
  넋이라도 님을 한데 녀잇경 너기더니
  뉘러시니이까, 뉘러시니이까.'
  '올하, 올하, 아련비홀하
  여흘란 어데 두고
  소에 자라온다
  소 곧 얼면, 여흘도 좋으니
  여흘도 좋으니.'
  전하는 아름다운 사설에 명연히  넋을 잃었다. 다음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
었다.
  '금수산 이불 안에 사향 가시를 안아 누어
  남산에 자리보아 옥산을 베어 누어
  약든 가슴을 맞추옵사이다. 맞추옵사이다.
  아소 님아, 원대평생에 여힐 줄 모르옵세.'
  기막히도록 정염을 일으키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농도 높은  연정을 하소연하
는 노래다.
  전하는 고려 때부터  불러오던 '만전춘'이란 가사인 것을 깨달았다.  전하는 문
틈으로 노래하는 궁인의 모습을 살폈다.
  궁녀는 이십 가량 된 여자다. 베개를 껴안고 장단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것
이었다.
  베개는 임이요, 임은 남자다. 베개가 대신 궁녀의 임이 된 것이다.
임 대신 베개를 껴안았다. 얼음 위에 댓잎으로 자리를 삼아 옥돌같이 추운  겨울
밤, 얼어 죽을망정 뜨거운  포옹으로 정든 오늘밤을 더디더디 새워 보자는  노래
다.
  외로운 베개 위에 눈은  반반, 잠은 아니 오고 시름만 가득하다.  벌떡 일어나 
창문을 밀어 보니 도화는 활짝 피어 만발했다. 도화는 시름이 없어 봄바람에  한
들한들 웃는구나.
  육신은 따로따로 떨어져 있지만  넋이라도 임을 한데 모시려 했더니, 한데  모
시려 했더니, 누가 우리들의 기막힌 이 사랑을 뻐개 놓으셨나.
  여인은 한이 깊어 비오리를 불러 보는 것이었다.
  비오라 비오라 어여쁜 비오라
  장류수로 소리쳐 흘러가는  여울물은 어디 두고 답답한 늪속에서만  자랐느냐. 
늪이 얼거든, 소리쳐 흘러가는 자유스런 여울에서 놀려무나.
  금수산 이불 속에 향기론  가시를 안아 뉘어 남산에 자리를 보아, 옥 같은  임
을 베고 누워 향기로운 가슴을 맞추어 봅시다. 이리하여 길고 긴 원대평생에  헤
어지지 맙시다. 헤어지지 맙시다.
  사랑의 정열이 빙산도 녹일 듯한 작열된 노래다.
  전하는 자신이 이 정열 속에 흽싸여 감겨지는 듯했다.
  노여움보다도 가련하고 가엾은 정을 느꼈다.
  꾸짖고 나무랄 수가 없었다.
  임금인 당신이 무슨 큰 죄를 저지른 듯한 야릇한 느낌이 일어났다.
조용히 창 앞에서 떨어져 발길을 돌렸다.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했다. 다리가 휘청휘청, 걸음이 가볍지 아니했다.
  솔밭을 향해 걸었다. 서늘한 솔바람이 와스스 전하의  머리를 식혀 주었다. 새
로운 정신이 전하의 선뜻해진 이맛전에 일어났다.
  당신은 오늘밤에 가뭄을 근심하여 천문을 살피러 후원으로 나온  것이다. 새삼 
하늘의 별빛을 더 한 번 살펴야 할 생각이 났다.
  머리를 들어 허허한 창공을 바라본다. 하늘엔 여전히 구름 한 점 없다.
  북극성은 그대로 황황한 빛을 뿜는데, 북두칠성은 사경이 넘어서  자루가 앵돌
아졌다. 은한은 연기 같은 빛을 뿜으며 수천 개 별이 여전히 깜박거린다.
  '이 가뭄을 어찌하나!'
  전하의 머리에는 다시 가뭄을 탄식하는 시름으로 가득 찼다.
  '내가 임금이 된 후에 한 사람이라도  굶어 죽었다는 사람이 이 나라에 있어서
는 아니된다!'
  '어찌하면 비를 오게 한단 말인가?'
  전하는 또다시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슬이 축축하게 전하의 용포를 적시었다.
  전하는 연침에  돌아가 의대를 풀었다. 모든  궁인들은 전하가 퇴등령을  내린 
후에 침소에 듭신 줄만 알았다.
  온 궁중은 조용히 잠 속에 들었다.
  전하는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아니했다.
  이 생각 저 생각 뜬눈으로 밤을 꼬빡 새웠다.
  새벽이 되었다.
  '어찌하면 단비가 쏟아져서 가뭄이 풀리고 모를 심게 하나!'
  여전히 이런 생각으로 마음이 초조하고 있을 때, 돌연 창문 밖 복도에서  후닥
닥 짐승이  뛰닫는 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가 뛰달리는 소리가 아니다.  두서너 
마리가 뛰닫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는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고양이의  강렬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뒤미처 
또 한 마리 고양이의  받아넘기는 앙탈하는 소리가 강하게 일어났다. 고양이  떼
는 후닥닥거리면서 괴상야릇한 음향을  냈다. '아옹, 아옹', 으르렁거리며 복도로 
달렸다. 쫓기고 쫓고 앙칼지고 함축성 있는 교성을  발산했다. 고양이 떼는 상감
의 존전인지도 모르고 앙탈을 하고 으르렁거리고 복도로 뛰달렸다.
  수직하던 내시가 빗자루를 들고 쫓아 들었다.
  "요놈의 고양이, 어느 존전이라고 감히 여기까지 뛰어들어왔느냐."
  내시는 빗자루를 휘두르며 고양이 떼를 쫓았다.
  고양이 떼는 얼른  달아나지 아니했다. 눈이 뒤집힌 모양이다.  여느때 같으면 
인기척만 나도 쏜살같이 달아날 텐데 새파란 눈깔에 불을 붙이고 내시를 쏘아보
면서 꼼짝달싹을 아니했다. '아옹 아옹', 으르렁대는 소리는 여전했다.
  내가는 부아가 벌컥 났다. 빗자루를 거꾸로 잡고  고양이 떼를 후려쳐 갈겼다. 
고양이 떼는 그제야 후닥닥 분합 밖으로 뛰어나갔다.
  "왜들 그러느냐?"
  방안에서 전하의 옥음이 떨어졌다.
  내시는 황망해 빗자루를 박에 던지고 전하 앞에 부복했다.
  "왜들 소란을 떠느냐?"
  "홀레 고양이들이  무엄하게 복도 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하와 쫓느라고 
소란을 좀 떨었습니다."
  "내버려둘 것을 그랬구나. 봄이 된 것이로구나."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이내 침묵 속에 빠졌다.
  내시가 물러간 후에 신빈 김씨는 조반상을 받들고 들어왔다.
  "무어냐?"
  "조반 수라올시다."
  신빈이 조용히 아뢰었다.
  전하는 정색하고 분부한다.
  "오늘부터 조반은 아니 들기로 하겠다. 상을 물리도록 해라."
  신빈은 깜짝 놀랐다.
  "보반을 들지 아니하시면 어찌합니까? 옥체에 해로우십니다."
  "날이 이같이 가문데  내 어찌 세 끼니를 다 먹겠느냐.  백성들은 굶는 사람이 
많을 텐데, 점심과 저녁 두끼만 먹어도 족하다. 조반은 아니 들기로 한다."
  "지난번부터는 감선까지 하셨는데, 또 다시 조반을 아니 드시면 어찌합니까?"
  "단비가 내기기만 하면 다시 먹기로 한다. 내  마음이 편치 않아 먹을 수 없구
나."
  신빈은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황공한 마음을 지닌 체 조반상을 받들고  물
러가려 할 때 전하는 다시 분부를 내린다.
  "내가 의논할 일이  있다. 중전마마께 아뢰고 너희들  후궁 세사람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들어오시라 아뢰어라."
  신빈은 분부를 받고 물러났다.
  전하가 이른 조반을 물리치고 받지 아니했다는 소식을 신빈을 통해서 들은 비
전하는 깜짝 놀랐다.
  "웬일이시냐?"
  "굶주리는 백성들을 생각하시어 가뭄이 해소될 때까지 점심과  저녁 두끼만 잡
수시고 조반은 폐하겠다  하십니다. 옥체에 해로우시다고 지성스럽게 간해  아뢰
어도 막무가내십니다."
  "큰일이로구나!"
  비전하의 얼굴에도 수심이 엉키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의논하실 말씀이 계시다고, 마마께 듭시라 하셨습니다. 소
인들도 마마를 뫼시고 함께 들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영빈과 혜빈한테도 기별해서, 곧 모이도록 해라."
  신빈은 두 후궁에게도 즉시 전갈을 보냈다.
  이윽고, 왕비 심씨는 신빈 김씨, 영빈  강씨, 혜빈 양씨를 거느리고 대전 연침
으로 들어가 전하께 문후를 드렸다.
  듣자오니 전하께서는 조반을 받지 아니하시고 물리치셨다 하니 황공 송구하와 
하정의 민망한  말씀드릴 길이 없습니다. 혹시나  이로 인하여 용체  허약하시면 
어찌하십니까? 다시 분부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전하는 소리를 높여 껄걸 웃으며 말씀을 내린다.
  "내 몸은 아직 장년인데, 아침  조반쯤 궐했기로 지장이 있을 리 만무하오. 가
뭄이 극심해서 백성들은 굶주리는 사람이  많다 하는데 내 어찌 삼시 끼니를 하
겠고. 가뭄만 해소되면 다시 시작할 테니 마마는 과히 염려하지 마시오."
  "그렇지 아니합니다. 저하께옵서  강년하시와야, 백성들의 일도 보살피십니다. 
물리치지 마시고 다시 조반을 드시옵소서."
  "염려마오. 그는 그렇고  노늘 마마와 세 후궁을 청한 것은  간절히 부탁할 말
이 있어 청한 것이오."
  "무슨 말씀인지 교시를 내려줍시오."
  비전하는 치맛자락을 단정히 쓸고 대답했다.
  "요사이 날이 너무  계속해서 가문 것은 궁중에 원기가 가득해서  이같이 윤기
가 없나보오. 이 억울한 원기를 풀어 주어야 하겠소."
  궁중에 원기가 있을 리 있습니까. 전하께서는 여러  차례, 친히 기우제를 지내
시고 또 천하에 대사령까지  내리시어 옥에 가둔 죄수들을 풀어 주셨습니다.  천
하의 원기도 풀어졌을 텐데, 궁중에 원통한 기운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비전하는 궁중에 원기가 서려 있다는 전하의 말씀에 부정의 태도를 취했다.
  전하는 껄걸 웃으며 비전하의 말씀에 대답한다.
  "비전하께서도 모르는 말씀요.  궁중에 원기가 서려 있다는  과인의 말을 듣고 
마마는 놀라셨으리라 마는 사실상  궁중에는 원통한 기운이 서려 있소이다.   속
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더니, 과연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었습니다. 
과인도 여지껏 이 원통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가 어젯밤과 오
늘 새벽에 원기가 서려 있는 이 사실을 비로소 발견하고 깨달았소이다."
  전하는 용안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은근하게 말씀을 내린다.
  '어젯밤 오늘 새벽에 궁중에  원기가 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깨달았다'는  전
하의 말씀에, 비전하를 위시하여  세 후궁들의 얼굴엔 놀라는 빛이 현연히  드러
났다. 멍하니 전하의 용안을 우러러볼 뿐이었다.
  전하는 말씀을 계속한다.
  "궁중은 권력이 집중되어  잇는 곳입니다. 이러므로 보통  사람들의 눈에 비치
는 궁중은 호화스럽고  휘황하게만 보여지는 법입니다. 부귀영화가 하늘  끝까지 
뻗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십상팔구입니다. 보시오, 삼각,  북악이 장엄하게 
자리잡은 아래 주란화각은 칭송  사이에 은은하게 벌여 있고 기화요초와 기암괴
석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만간들이 그  잔디밭에는 녹의홍상의 삼천궁녀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쌍쌍이 짝을 지어  다니니 겉으로 보아 이곳에 무슨 한이 있
고 무슨 시름이 있어 보이겠고. 겉으로 보면 그저 부럽기만 하고 그저  행복스럽
게 보이기 마련이오, 이 까닭에 여염에서는 딸을 낳아서 대궐 안에 궁녀로  들여
보내기를 소원했소. 한 번 제왕의 눈에 드는 날은 부귀영화가 따라가게 되니  그
야말로 '딸의 덕에  부원군'이란 말도 생겨났고, '부중생남중생녀'란  그도 명시가 
되었소. 그러나 한평생 임금의 눈에 들지 못한 궁녀들은 그대로 늙어 병들어  해
골이 돼야만 궐 안에서  나가게 되니 그 아니 딱하고 가엾은 일이 아니겠소.  그
애들이 감히 말은 하지 못하나 얼마나 가슴에 한이 서려 있겠소. 그리하여  나는 
궁중에 있는 장년 궁녀들을 모조리 내보내서 자유롭게 시집을 가도록 하기로 결
심을 했소이다.  그래서 비마마를 청해서 의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궁중에 가득히 서려 있는 이 원한의 기운을 풀어 줍시다."
  비전하와 모든 후궁들은 비로소 궁중에 원한의 기운이 서려 있다는 말씀을 깨
닫게 되었다.
  비전하의 어진 눈매에  감격한 빛이 떠돌았다. 신빈, 영빈,  혜빈 세 후궁들도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어쩌면 아이들의  심정을 이같이 밝고  넓게 살피셨습니까.  삼천궁녀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만고에 드무신 성은이십니다.  하느님도 
감복하시어 흐뭇하게 단비를 내리시어 삼천리 강산에 가뭄이 해소될 것입니다."
  비전하의 말씀을 듣자 전하의 용안은 활짝 화려했다.
  "어처께서도 나의 생각이 가합하다 생각하신다면 곧 상궁을 불러서 이  말씀을 
내리시고 장성한 나인들을 조사하라 이르시오."
  비전하는 전하의 말씀을 듣자 미소를 짓고 아뢴다.
  "곧 분부대로 제조상궁에게 장년 된 궁인들을 일일이  사실해서 아뢰라 하겠습
니다마는, 아까 전하께서 하교하신  말씀 중에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 궁중에  원
기가 서려 있는  것을 비로소 발견하셨다고 하셨으니  그 점이 무한 궁금하옵니
다. 무슨 일을 보셨습니까?  황공하온 일이오나 한 말씀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궁녀를 감독하는 책임은 신첩에게 있삽기 감히 아룁니다."
  전하는 비전하의 말씀을 듣고 껄껄 웃었다.
  "그 점은 밝히지  아니하겠소이다. 그저 나 홀로 그러한 원기가  궁중 안에 감
돌고 있는 것을 짐작하고 잘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과인에게 맡겨 두시고  장성
한 궁녀들이 몇 명이나 되는 것을 알려주시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비전하는 옥안에 엄숙한 빛을 띠었다.
  "아까도 말씀을 올렸습니다마는, 빈 이하의  모든 내명부와 궁인들을 통독하는 
책임을 신첩은 가졌습니다. 어떠한 궁녀들이 어떠한 행동을 해서  원한의 기색을 
발산했기에 전하께서 그 점을 느끼셨습니까? 앞으로 궁중을 다스리는데 좋은 참
고가 될까 하와 감히 아뢰옵니다."
  전하는 근엄한 왕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비의 성격은 부드러운 듯 강하
고, 엄하면서도  화했다. 만약 어젯밤에 본  궁녀의 풍경을 솔직하게 말씀한다면 
엄한 성격을 가진 비전하는 궁녀를 그대로둘리  만무했다. 도리어 한가닥 풍파거 
소용돌이쳐 일어날 것 같았다. 여전히 미소를 풍기며 말씀한다.
  "그저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도 비가 내리지 아니하니 천기를 
살피러 단신으로 후원을 거닐었습니다. 홀연 고양이 떼가 앞을  가로막으며 회춘
의 울음을 울었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우연히 잠을  깨니, 복도에서 역시 수코양
이와 암코양이가 으르렁대는 소리가 났습니다. 내시가 빗자루를 들고  쫓기에 내
버려두라 했습니다.  천지간에 자연한  이치올시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과인은 
임금이라 해서 마마이신 정궁 이외에  신빈, 영빈, 혜빈을 거느렸습니다. 이럼에
도 불구하고 삼천궁녀들은 한창  꽃다운 나이에 조롱속에 가두어둔 새들과 같이 
한평생 대궐 안에  가두어 두었다가 병들어 해골이  된 후에야 비로소 내보내니 
그 아니 딱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임
금이라 해서 나  혼자 특권을 누리고 유자생녀할  젊은 처녀들을 가두어 둔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어찌 원기가 서려  있지 않겠습니까. 하늘도  노할 것입니다. 
이리해서 훅심한 가뭄이 계속된  줄 압니다. 이러므로 오늘 과인은 마마와  상의
해서 젊은 처녀 궁인들을  제 집으로 돌려보내려 하는 것입니다. 조금도  괘념하
지 마시오."
  전하의 해명을 듣자 비전하는  비로소 원통한 기운이 궁중에 서려있다고 말씀
한 전하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옥안이 부드럽게 풀렸다.
  "전하의 넓으신 뜻을 비로소 짐작하겠습니다. 곧 상궁을 불러서 장성한 궁인들
을 조사하겠습니다."
  "오늘 해 안으로 젊은 궁녀들을 조사해서 자유로운 몸이 되게 합시다."
  비전하는 즉석에서 제조상궁을 불렀다.
  "전하께서 장성한 궁녀들이 현재 대내데 몇명이나 있는지 조사해 아뢰라  하시
니 해 안으로 보고하도록 하라."
  제조상궁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아뢰옵기 홍공하오나 젊은 궁녀들이 무슨 불미한 일을 저질렀습니까?"
  세종은 옆에서 웃으시며 말씀을 내린다.
  "그것은 네가 알 바가 아니다. 빨리  몇 사람이 되는가 조사하라. 그리고 신빈, 
영빈, 혜빈도 제조상국과 함께 일을 거들어라."
  세종은 특별히 삼빈에게도 장성한 궁인을 조사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영빈이 고한다.
  "막연하게 장성한 궁녀라고 하교하시면 추리기  극히 었습니다. 연기를 지정해 
주심이 좋을까 합니다."
  "그도 그렇구나, 십육칠 세부터 삼십 세까지로 규정하느 것이 좋겠다."
  "삼가 하교대로 봉행하겠습니다."
  신빈, 영빈, 혜빈은 제조상궁과 함께 어전에서 물러났다.
  삼빈은 제조상궁과 함께 궁인의  명부를 펴놓고 연치를 참고하면서 젊은 나인
들을 한 명씩 불러 대조했다.
  궁녀들은 한 사람 두사람 계속해서 불려 들어갔다.
  궁녀마다 나이를 묻고 태도를 살폈다.
  나인청에 소문이 쫙 퍼졌다. 모두 다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무 죄도 없는데 웬일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이중에 두 사람의 젊은 궁녀는 부들부들 떨었다. 간밤에 객들이 한  짓
이 있기 때문이다.
  한 궁녀는 인두판을 마주  대해서 새서방님과 새색시가 동방화촉을 밝히는 신
방놀이를 했고, 또 한 궁녀는 '얼음 위에 댓잎 자리를 보아 임과 나와 어어 죽을 
망정, 임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하는  애련한 연가를 밤이 지새도록 부렀던 일이 
있었다.
  두사람은 모두 다 자격지심이  들어서 간밤 일로인하여 그일이 탄로되어 크나
큰 벌을 받게 되나 하고 전전긍등하는 마음을 주체할 길 없었다.
  그러나 제조상궁과 신빈. 영빈, 혜빈 세 빈마마는 생년월일과 부모들의 형편을 
묻고 궁녀 명부와 대조할 뿐  아무 꾸지람도 내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물러가 있
으라 했다.
  두 젊은 나인은 더 불안하고 궁금했다. 자기  처소로 물러간 후에도 손에 일이 
잡히지 아니했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불려들어간 젊은  나인의 수는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아니했다.  오십여 명이나 
되었다.
  의아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인청만이 아니다. 내관들이  모인 공사청
을 위시하여 별감, 무예청,  액정 소속의 모든 처소에서도 수군대며 까닭을 몰라
서 의구심을 품었다.
  십육칠 세로부터 삼십 세까지의 묘령의궁녀들은 무려 오십이 넘었다.
  해 안에 조사하라고  분부를 내린 전하의 말씀에 따라, 초저녁때나  되어서 조
사는 겨우 끝이 났다.
  신빈, 영빈, 혜빈 세 후궁과 제조상궁은 명단을 받들고 어전으로 들어갔다.
  전하와 비전하는 묘령 궁녀들의 명단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었다.
  "늦었구나. 어찌 그리 더디었느냐?"
  신빈을 위사하여 영빈, 혜빈과 재조상궁이 대답했다.
  "의외로 어리고 젊은 애들이 많사와 해 안에 마치지 못하고 저물게야 끝이 났
습니다."
  전하와 비전하 앞에 명단을 받들어 올렸다.
  "모두 몇 명이나 되느냐?"
  "오십여 명이나 되옵니다."
  신빈이 웃음을 머금고 아뢰었다.
  "오십 명씩이나  된단 말이냐. 내가 일찍  살피지 못해서 크나큰  적악을 했구
나!"
  빈전하가 명단을뒤적거리며 말씀을 받는다.
  "나라법이 애당초  그러했지, 어찌 전하께서  적악을 하신 것입니까. 지나치신 
겸사의 말씀입니다."
  "천만에, 소위 임금이란  백성들의 부모라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리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정권을 잡았으니  그 백성들은 자기의 어린 아들과딸처럼 사랑
하고 보살펴주라고경계하는말입니다.  그러기에 서민들을  적자라고도 했습니다. 
갓난이기 같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어린애같이사랑하고 보살폊라는 말입니다. 
내가 임금 노릇한  지 비록 일천하다 하나 임금의  자리에 임해 있는 이상 벌써 
이 젊은 궁녀들의 한스럽고 원통한 사정도 살펴주었어야 한 텐데 이제야 비로소 
오십여 명씩이나 되는 아이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책임을 맡은 과인으
로서 미안하고 죄스럽지  아니하겠소. 당연히 하늘이 노해서  꾸지람하는 책망을 
받아 싸게 되었소이다. 기우제를 천 번, 만 번지내도 삼천리 강상이 땅이 갈라지
도록 타게 되는 그 까닭을 알게 되었소."
  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스스로 자신을  책하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비전하를 
위시하여 세 후궁들은 고개를 숙연히 숙였다.
  제조상궁도 비로소 전하가 젊은 궁녀들을 사실해서 올리라는 저의를 미미하게 
잠작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어찌하는 수 없다. 삼빈과 상궁은 내일 일찍 일제히 오
십여 명 젊은 나인들데게 기별해서 과인과 비전하거 임어해 있는 정전으로 모리
게 하라."
  삼빈과 재조상궁을 명을 받들고 물러났다.
  전하는 다시 비전하께 지시를 내린다.
  "내수사에 분부하시어 내보내는  궁녀 오십여 명에게 줄 거핵 오백여  근과 수
목 오백여 필을  내탕고에서 들여오라 이르시오. 내보내는 궁녀들에게  혼수감으
로 비전하께서 내리셔야 하겠소이다."
  "삼가 명을 받들어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내수에서는 전하와 비전하의 분부를 받들어 전하 전용인 내탕고에서 거핵(솜) 
오백여 근과 수목 오백여 필을 밤 안으로 내전에 들여왔다.
  다음날 이른 아침이 되었다. 전하는 수강궁에 나가  아침 문안을 드린 후에 경
복궁으로 돌아와 삼정승과 육조판서를 불렀다. 돌연 부름을 받은  장관들은 무슨 
분부가 계신가 하고 서로들 면면이 바라보면서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전하는 외전에 출어하여 옥좌에 좌정한 후에 서서히 말씀을 내린다.
  "요사이 일기가 너무 가물어서 백상들의 농사  형평이 말이 아니다. 과인뿐 아
니라 나라의 국록을 먹으면서 유사의 책임을 맡은 경들도 크게 근심하는 마음이 
절실했을 줄 안다. 과인은 대사령을 놓아 억울한 죄수들을  석방하고 팔도강산에 
기우제를 지내서 정성을 다했건만 하늘은 아직도 비를 내리자  아니한다. 과인이 
덕이 없어 하늘이 과인을  징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밤과 낮으로 나의  잘못을 
반성해 보는 중  궁중에는 어느 때부터 시작된  풍속인지 모르지만 여염의 귀한 
딸을 아기나인으로 뽑아 들여서 인생의  행악을 모르는 체 칠팔 십이 되어 해골
이 된 후에야 비로소 본집으로 돌려보낸다. 이 어찌  차마 할 일인가. 이것은 인
간 본연의 생태를 무시하고 사람의 인권과 자유를 말살해 버리는 크나큰 죄악이
다. 과인은 우리 속에 갇혀 있는 젊은 궁녀들을 해방시켜서 자유로운 몸이  도이
어 사람 본연의 길을 걷게 할 적정이다. 오늘 이 일을 결행하려 하니 경들은  그
리 알라!"
  모든 신하들은 비로소 전하의 명소한 뜻을 알았다.  어느 한 사람 반대하는 이
가 없었다.
  영의정 유정현이 군신을 대표하여 아뢴다.
  "이제 전하의 하교를 듣자오니 너무나 크신 왕은에 황감하와 다시 더 아뢸 말
씀이 없습니다. 하늘도  전하의 성심에 감동이 되어 패연히 단비를  내릴 것입니
다."
  전하는 다시 예조판서에게 말씀을 내린다.
  "모든 유사들이 다 나의 뜻에 찬동하니  기쁘기 한량없다. 예판은 나가는 궁녀
들의 혼처를 간음해 맡아서 좋은 낭재들을 구하여 유자생녀하는 즐거운 일에 극
력 협조해주라!"
  예조판서 허조가 아뢴다.
  "해방시켜 내보내실 젊은 궁녀의 수는 몇 사람이나 되옵니까?"
  "어제 비전하와 빈마마들에게 십육칠 세부터 삼십 안팎의 젊은 애들을  조사해
보라 했더니 무려 오십여 명이나 된다 하오."
  허조가 다시 아뢴다.
  "젊은 나인들이 나간 후에 궁중 일에 지장이 있으면 어찌합니까?"
  세종전하는 소리를 높여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속담에 '꿩 대신 닭'이란 말도  있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먹는다'는 말도 있
지 아니한가. 늙은 궁녀 오십여 명을 대신 배치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하하하."
  전하의 웃음소리는 쾌활했다. 전하는 군신을 불러 젊은 궁녀들을  해방하는 일
을 선포한 후에 내전에 돌아가 제조상궁을 불렀다.
  "오늘 아침에 젊은 궁녀들을 내보낼 것을 대신들에게 선포했다. 비마마께 어제 
조사한 젊은 궁녀들을 거느리고 입대하시라 일러라."
  제조상궁은 청명하고 물러났다.
  이윽고 왕비 심씨와 신빈, 영빈, 혜빈 세후궁은  제조상궁과 함께 어제 심사했
던 젊은 궁녀 오십여 명을 거느리고 어전에 나타났다.
  전하는 옥좌에서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궁녀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푸른 저고리 붉은  치마, 노랑 저고리 남치마, 연두색  저고리에 분홍치마, 자
주깃에 백설  같은 흰저고리, 그야말로 만자천홍의  꽃봉오리 같은 어리고  젊은 
여인들이다.
  오십여 명 아름다운 여인들이  전각 안으로 일시에 들어서니, 전 안에는  때아
닌 봄이 찾아 들어 백가지 꽃이 일시에 만발한 듯했다.
  전하는 제조상궁에게 분부를 내린다.
  "명단에 오르지 아니한 늙은 궁녀와 여러 직책을 맡은  상궁들도 다 함께 모이
라 해라."
  대내 안에 있는 모든 궁녀들은 시각을 지체치 아니하고 의상을 정돈하여 대전 
안으로 모여들었다.
  부름을 받은 오십여  명 젊은 궁녀들을 위시하여  늙은 상궁과 늙은 궁녀들은 
까닭을 몰랐다.
  무슨 분부가 계시려나 하고 마음속으로 모두 다 떨면서 모여들었다.
  전각 안은 녹의 홍상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한 폭의 현란한 여인군상도를 이루
었다.
  전하는 비전하와 함께 옥좌에 앉아 옥음을 내리기 시작한다.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 하는 것은 그  본연의 슬기로운 지혜로 사람
의 직분을 다할 수  잇는 자유를 지닌 때문이다. 자유는 하늘이 사람에게 준  특
권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의 위치에 있으면서 강압적으로  다른 사람
의 특권을 꺾어 버리고  말살시켜서 자기 혼자만의 욕심을 채우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하늘의 이치를 무시하고 거역하는 무리들이다. 내가 왕이란  자리에 오른 
지 비록 일천하나 가만히 궁중의  모든 배치를 살펴보니 이치에 맞지 아니한 일
이 많다. 그중에  하나는 궁중에 있는 아기나인들의 일이다.  어쩌자고 어린것들
을 대궐 안에 끌어들여서 나이 장성한 후에도 사람 구실을 못하게 하고,  한평생 
남녀의 정을 모르고  지내다가 해골이 되어 병든  후에야 비로소 집으로 내보내 
주게 하니, 이 어찌 가엽소  불쌍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느냐? 이제 나는 깊이 
생각한 바 있어 중전마마께 말씀을  드리고 십육칠 세부터 삼십 세 사이의 궁녀
들을 모조리 해방시켜서 제 집으로 돌아가 자유스런 몸이 되게 하는 것이다.  너
희들 젊은 궁인 오십여 명은  집에 돌아간 후에 좋은 서방을 구해서 유자생녀하
면서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라. 그리고  궐 안에 암아 있는  늙은 
궁인들은 더욱더 갑절이나 노력해서 왕비전하와 빈마마를 받들어 궁중의 질서를 
엄하게 하라."
  뜻밖에 전하의 말씀을  듣는 묘령의 젊은 궁녀들은  별빛 같은 맑은 눈동자에 
안개가 서렸다. 자유의  몸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기쁨보다도, 사람마다 
우러러보는 낙원같은 궁중을 떠나가는 서운한 마음이 앞을 가렸다.
  그러나 옆에 시측히 있는  노상궁과 삼십이 넘은 궁인들은 전무후무한 전하의 
처사에 감동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모두 다 불혹지년을 넘어선  늙은 궁녀들이
다.
  궁중 안의 지엄한 풍속을  샅샅이 알았다. 꽃다운 청춘을 허송해 버린  지나간 
세월이 한스러웠다. 회한의 정이 가슴을 울먹였다.
  '나이 좀 젊었던들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을.'
  이같은 생각들을 했다. 왈칵 눈물이 흘러서 속눈썹을 적셨다.
  한편으론 왕은이 홍대무변한 것을 감격하고, 한편으론 쓸쓸하게 푸른  봄을 흘
려보냈던 옛일을 생각해서 눈물이 눈시울을 적신 것이다.
  제조상궁이 전하께 고한다.
  "해방이 되어 돌아가게 되는 아이들이  하직을 고하는 숙배를 올려야겠습니다. 
어찌하오리까. 한명씩 사은을 올리오리까, 알제히 올리오리까? 하교를  내리시옵
소서."
  "오십여 명이 어찌 따로따로 사은을 하겠느냐. 일제히 배를 올리도록 하라."
  제조상궁은 전하의 명을 받들어 아기나인들에게 일렀다.
  "너희들은 이제 융숭하옵신  상감마마와 중전마마의 은총을 입어 자유로운 몸
이 되어 제각기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하직을 고하는  큰절을 올
려야 한다. 일제히 일어나 하직을 고해라."
  제조상궁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한 궁인이 조용히 반열에서 일어나 아뢴다.
  "왕은이 지중하시어 쇤네들에게 자유의 몸이 되게 하시니  바다같이 넓으신 은
총을 그저 감읍할 뿐이옵니다. 연하오나 쇤네는 열한살때 대궐로  들어와서 이제 
삼십이 되었습니다. 거의 이십 년의 세월을 궐안에서  보냈습니다. 모두 다 상왕
전하와 상감마마의 덕택으로 잔뼈가 굵어졌습니다. 지금 가라하신들 갈  곳이 없
습니다. 굽어 통촉해 주시고 그대로 궐안에 머물러 있게 해주옵소서."
  궁녀는 말을 마치자 눈물이 비오듯했다.
  또 한 궁녀가 고한다.
  "황공하오나 상감마마와  중전마마께 아뢰옵니다.  소녀는 다박머리때  궁중에 
들어와서 궁중의 모든 어른들을  부모같이 섬겼습니다. 집에 비록 어미 아비  있
다하나 정이  아니들어 남과 매일반이올시다. 정든  이곳을 떠나서 어느  곳으로 
갑니까? 갈 곳이 망연합니다.  시집을 아니 가도 좋습니다. 한평생 이곳에 두시
어 중전마마의 시중을 들게 해줍시오."
  이십대의 궁녀다. 이내  슬픔이 폭발해서 목을 놓아 울었다.  터지는 울음소리
에 따라 오십여 명의 젊은 궁녀들은 일제히 울음보가 터졌다. 정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이중에는 신방놀이를  하고 '얼음 위에 댓잎자리'의  노래를 불렀던 궁녀도  다 
함께 목을 놓아 울었다.
  울긋불긋 만자천홍의 꽃밭을 이루었던 대전 안 넓은 처소는 이별의 정을 아쉬
워하는 울음바다로 변했다.
  제조상궁은 소리를 높여 젊은 궁녀들을 꾸짖는다.
  "무엄하게 어전에서  이것이 무슨  해거들이냐. 빨리 울음을  그치지 못하겠느
냐."
  모든 궁녀들은 슬픔을 억제하고 목소리를 죽였다.
  저하와 비전하의 용안에도 척연한 빛이 감돌았다.
  이윽고 세종전하는 오십여 명 젊은 궁인들에게 말씀을 내린다.
  "정이란 대단한 것이다. 사람이 정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이 십년 또
는 이십년 대궐안에서 살았으니 떠나게 되는 오늘날 어찌 서운한 마음이 없겠느
냐. 당연히 목을 놓아 울만도 하다.  그러나 정만으로 한평생을 지낼 수는 없다. 
사람은 공연히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공연히 죽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  노
릇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남자는 아내를 맞이하고 여자는 남편을 만나서  배필
이 된 후에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유자생녀해서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게 하는 것
이 인간의 원칙이다. 이별하기  아쉬운 정으로 인해서 너희들이 하늘 이치를  꺾
어버린다면 그  허물은 임금이 나에게 있다.  욕심대로 말한다면 너희들  오십여 
명의 젊은 궁녀들을  모두 다 내 후궁을  만들어서 너희들 본능을 만족시키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오늘 너희
들을 자유스럽게 내보내는 것은,  사감이면서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 
악법을 깨뜨려 버리고 너희들에게 사람다운 권리를 찾아 주려는데 그 목적이 있
는 것이다. 잠시 정을 꺾고 집으로 돌아가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가서  유자생녀하
고 잘살도록 하라. 그리고 의지할 곳이 없는 아이들은  예조판서에게 부탁했느니 
예조에 나가 소지를 올리라."
  전하의 말씀은 봄바람이 이는 듯 훈훈했다.
  인두판을 세워  놓고 신방놀이를 하던 궁녀도  고개를 숙여 눈시울을  닦았다. 
'얼음 위에 댓잎 자리를 보아'하는 연가를 노래하던 궁녀도 머리 숙여 눈물을  닦
았다. 모두 다 눈물을 닦았다.
  제조상궁은 모든 젊은 궁녀들에게 영을 내린다.
  "일제히 일어나 전하와 비전하께 사배를 드리라."
  오십여 명 젊은 궁녀들은 일제히 상감과 중전께 하직하는 절을 올렸다.
  비전하가 옥음을 내린다.
  "너희들의 혼수로 상감마마께서 거핵 열근과  수목 열필씩을 내리셨다. 상궁들
은 빠짐없이 나누어주도록 하라."
  상궁들은 청명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전하와 비전하는 삼빈을 거느리고 침전으로 돌아갔다.
  젊은 궁녀들은 거핵 열근과 수목  열필씩을 받아 들고 자유의 몸이 되어 집으
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사흘이  채 못되서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까
고 쾌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이내  장마로 변했다. 팔도강산의 농부들은 
격양가를 높이 부르게 되었다.

    대마도 정벌
  한국말에 바다속에 있는 육지를 '섬'이라 불렀다.
  일본 사람들을 '시마'라 한다. '시마'의 음을 자주 부르면 곧 '섬'이 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일본말 '시마'는 곧  우리 나라 '섬'이란 말이 옮겨간 것이다. 
대마도는 한자로 쓰면 대마도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두섬'이라 불렀
다. 일본 사람들도 '두시마'라 부른다.
  우리 나라 사람은 학을 '두루미'라 부른다.
  일본 사람들도  학을 '두루'라고 부른다. 곧  우리 나라 사람들의  학을 부르는 
소리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대마도, 곧 두섬은 일본 본토보다도 우리 나라에 가깝게 있다.
  그리해서 우리 나라 '동국여지승람' 경주편 고지도에도 우리 나라에 부속돼 있
는 섬으로 뚜렷하게 바닷속에 그려져 있다.
  원래 신라의 영토였던 것을 쓸모 없는 척박한 땅이라 해서 내버려두었던 모양
이다.
  날씨 좋은 날 부산서 멀리  동편을 바라보면 대마도가 바다 위에 가물가물 보
인다.
  그러나 대마도는 땅이 척박한 바윗덩어리로  된 섬인 때문에 섬 속에 사는 토
인들은 섬만 의지하고 살수가 없었다. 우리 본토의 해변가로 기어들었다. 낮에는 
고기잡이 어부가 되어 배를 타고 섬과 포구로 횡행하다가 사람을 만나면 협박하
고 죽이고 약탈하고,  밤이 되면 인가의 담을 뛰어넘어 동네로  돌아다니면서 간
상배와 결탁해서 물건을 밀수하고 싸움질하고 간음하는 해적떼로 변했다.
  '고려사'를 보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공민왕 17년 가을  7월에 대마도 만호가 사신을 보내어  토산품을 바치니 윤7
월에 강구사  이하생을 대마도로 보내다.  11월에 대마도 만호  종종경이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니 종종경에게 쌀 천 섬을 하사하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대마도 종종경은 고려의 만호 벼슬을 했고 속국이라 해서 
세미 천섬을 내렸던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대마도는 일본 본토보다도 우리 나라에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고, 
우리 나라 땅에서 단국물을 얻어먹으려 했고 또 얻어먹어야 살 수 있었다.
  때로는 복종하는 체,  때로는 대항하는 체해서 대마도 해적의 떼는  역대로 우
리 나라의 두통거리요, 자차분하게 귀찮음을 끼치는 화근덩어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고려 공양왕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공양왕 원년 봄에 경상도 원수 박위는 병선  백 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정벌
해서 왜선 삼백 척을 불살라 버렸다.'
  무한 까불어댔던 모양이다. 경상도 원수가 병선을  거느리고 가서 까불어 대는 
놈들에게 삼백 척을 불살라서 지진두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세종은 한동안 가뭄을 걱정하여  젊은 궁녀들을 대궐에서 해방시켜 자유의 몸
이 되게 한  후에 단비가 계속해 내려서 근심이  적이 풀렸을 때 또다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걱정거리가 생겼다.
  바로 세종 원년 음력으로 5월 7일의 일이다.
  충청도 관찰사 정진은 급히 파발마를 달려 장계를 올렸다.
  '이달 초5일 새벽에 왜적은 50여 척의  병선을 거느리고 비인현 도두음곶에 나
타나서 우리 병선을 포위하고 불살라 버렸습니다.'
  세종은 급히 사실을 상왕인 태종께 고했다.
  태종은 크게 노했다.
  "요망한 해적들이 무서운 줄을 모르고 까불어 대는구나!"
  곧 승지를 불러 대마도 해적떼를 소탕할 계획을 세웠다.
  "총제 성달생으로  경기, 황해, 충청도 수군도처치사를  삼고, 상호군 이각으로 
경기 수군첨절제사에 임명하고, 이사검으로  황해도 수군첨절제사를 삼아 물길의 
왜적을 격퇴케 하라.  해주목사 박영으로는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겸직시켜서 육
지로 침범하는 적을 막게  하고 상호군 평도전으로 충청도 조전병마사를 제수해
서 충청도로 상륙하는 해적들을 막으라.
  명령을 내렸다.
  원래 평도전은 본시 왜인으로 대마도에서 귀화한 자였다.
  일부러 항왜인 대마도 왜인을 발탁해서 막으라 한 것이다.
  특히 평도전에게는 그의 부하인  반왜 열여섯 사람을 거느리고 충청도로 내려
가게 했다.
  세종과 태종은 막 모든 장수들의  직책을 맡겨서 출전의 태세를 취했을 때 충
청도 관찰사 정진은 또다시 파말마를 달려서 급히 장계를 올렸다.
  '만호 김성길은 왜적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했고  성길의 아들 윤은 전사했습
니다. 적병은 이긴 힘을 빌려 뭍으로 올라  서천성을 여러 겹 포위하여 하마터면 
함락될 찰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기일발에 서천군수 김윤과  남포진 병마사 
오익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와서 적병은 겨우 포위망을 풀고 달아났습니다.'
  장계를 보자 세종전하는 비로소 적세가 만만치 않은 것을 알았다.
  급히 어가를 몰아 수강궁 상왕전으로 나가 두 번째 올린 충청관찰사의 장계를 
올렸다.
  "만호 김성길의 아들이 전사했다 합니다.  다행히 서천군수와 남포진 군사들이 
도착해서 적병은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하오나  만만치 아니한 모양이올시다. 좀
더 유눙한 장수를 빨리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종전하는 한 사람의 젊은 군인이 전사한 것을 가엾게 생각했다.
  상왕 태종은 한동안 침묵을 지켜 생각에 빠졌다가 이내 분부를 내린다.
  "병조판서를 불러 첨총제로 있는 이중지를 충청도 조전병마도절제사를  시키고 
상군 '조치'로 충청도 체복사를 제수하여 해안으로 군사를 조발하여 상륙하는 적
을 격퇴케 하라."
  세종은 상왕의 명을 받았다.
  "곧 병조판서에게 상왕전하의 어명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리하옵고 한 가지 아
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만호 김성길의 아들 '윤' 이 젊은  나이로 적과 싸워서 전사했다 합니다. 갸륵
한 일이올시다. 충청감사에게 명하여 만호 김성길의  자식 죽인 것을 위로하시고 
'윤'이란 아이에게는 후하게 부의를 내려 표창해 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세종전하는 간곡하게 아바마마께 고했다. 태종은 미소하며 대답한다.
  "전하의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는 인자한 마음을 짐작해 알겠소. 전하가 특명
을 내려 감사에게 시행하도록 하오!"
  뜬뜬하기 바윗덩이같이 정에 휩쓸리지 않는 상왕 태종이건만 세종전하의 애민
하는 태도에 마음이 움직였다.
  세종은 곧 경복궁으로 돌아가  병조판서를 불러 상왕의 명령대로 이중지와 조
치에게 군사를  거느려 당일로 충청도로  내려가게 하고, 한편  감사에게 교유를 
내려서 만호 김성길을 위로하고 전사한 그 아들에게 부의를 내려 의기를 표창하
게 했다.
  이중지 병마도절제사와 체복사  조치의 거느린 군사가 충청도로  내려가고, 만
호 김성길과 그 아들  전사한 '윤'을 위로하는 세종전하의 특별한 은전이 감사를 
통하여 전달되니, 충청도  일대와 서천을 위시하여 서해의  방어진은 세종대왕의 
백성을 아끼는 지극한  정성을 보고, 민심과 사기가 더욱 고조되어  적을 소탕할 
의기가 바다와 육지에 창일했다.
  충청도로 도절제사가 내려간 지  얼마 아니되어 이번에는 황해도 감사가 파발
마를 달려 장계를 올렸다. 세종은 급히 장계를 뜯었다.
  '이달 열하룻날 조전절제사 이사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막기 위하여 해주 
연평도에 대기하고 있는 중, 적선은 안개가 자욱한  틈을 타서 섬을 포위하고 양
식을 달라고 공갈 협박이 대단했습니다. 이를 거부했더니 적의 무리는 말하기를, 
저희들은 본시 중국으로 가려고  항해하는 도중에 양식이 떨어져서 이곳까지 왔
다 하고 만약 양식만 주면 곧 물러간다 하므로 이사검은 아전을 시켜서 쌀과 술
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적의 무리는 쌀과 술을 받아먹은 후에  물러가지 아니하
고 오히려 아전을  구속한 채 또다시 양식을 토색합니다. 괘씸하기  짝없는 놈들
이올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  배를 구속하려 합니다. 지금 이사검과 대치해서 상
지 중에 있습니다.'
  세종전하는 두통거리라 생각했다. 한동안 방침을 연구하고 있었다.
  세종은 병서에 허즉실  실즉허의 원리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곧  장계를 손수 
품안에 품고 상왕전으로 향했다.
  "이번엔 황해감사한테서 급한 장계를 올렸습니다."
  "어떠한 장계인가?"
  전하는 품안에서 황해감사의 장계를 꺼내 친히 읽었다.
  상왕전하의 안색은 누르락푸르락 노기가 대단했다.
  "요망한 해적놈들이 하늘  무서운 줄을 모르고 방자하게 날뛰는구나!  곧 대신
들을 불러 의논한 후에 대군을 발동해서 일거에 지진두가 되도록 하오!"
  상왕은 전하에게 분부했다.
  "일이 가볍지 않으므로  상왕전하께 아뢰고 곧 대신들을 명소하여 어전회의를 
열려 했습니다."
  세종전하는 말씀을 마치자 즉석에서 내관을 불러 도승지의 입시를 명했다.
  도승지는 부르시는 어명을 받고 급히 들어왔다.
  "아까 황해감사의 장계를  받았거니와 여기 대해서 상왕전하를 모시고 어전회
의를 열겠으니 곧 대신들을 입시케 하라."
  도승지는 청명하고  정원으로 물러가 모든 대신과  대장들에게 지급히 입시를 
명했다.
  대신 유정현, 박은, 이원,  병조판서 조말생, 대언 이명덕이 두분 전하 앞에 부
복했다.
  상왕이 먼저 말씀을 내린다.
  "대마도의 해적들이  발호해서 처음에 서천에 들어와  작란을 한 것은 경들도 
이미 잘 아는 사실이지만,  이놈들은 다시 서해 바다 연평도로 올라가서 '중국으
로 가는 길인데  양식이 떨어져다' 하므로 첨사 이사검은  회유책으로 쌀과 술을 
보냈더니 이놈들은 도리어 곡식을 가지고 간 아전을 잡아 놓고 지재지삼 곡식을 
또 달라고 할 뿐 아니라 우리 병선들을  납치하려 한다 하니 천인공노할 일이다. 
이 요망한 무리들을 어찌 처치하는 것이 좋을 지 여러 대신들은 의논해보라!"
  좌의정 박은이 아뢴다.
  "지금 충청도  방면에는 여러 절제사들이 내려가  적을 방어한 까닭에 육지로 
상륙은 하지 못하고 서해 쪽으로 올라가  노략질을 하는 모양이올시다. 방어첨사 
이사검이 연평도까지 가서 대기하고 있는 일은  잘한 일이올시다. 전하께서는 다
시 유능한 장수를 뽑아서 서해  바다의 병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일이 타당한 줄
로 아뢰오."
  우의정 이원이 아뢴다.
  "박의정의 말이 옳습니다. 대마도 해적들은 중국으로 노략질을 하러 가는 모양
이올시다. 적세는 불과 오십여 척의 병선을 가졌다 하니, 우리는 오십여 척의 갑
절되는 백여 척의 수군을 출동시켜서 엄하게 방비한다면 적은 저절로 다른 곳으
로 달아날 것입니다.  바위를 튼튼히 해서 수세를 취하는 일이  안전한 대책인가 
합니다."
  두 대신의 의견은 공세를 취하지 말고 수세를 취하자는 것이다.
  이때 영의정 유정현은 침묵을 지키고 말이 없다. 상왕은 유정현에게 묻는다.
  "영의정은 아직껏 말씀하지 아니하니 의사를 말해 보는 것이 어떠하오?"
  유정현은 눈같이 흰 수염을 흩날리며 장중한 목소리로 아뢴다.
  "신은 여러 중신들의 의견을 더 들어본 후에 천천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종전하는 경솔하지 아니한 노재상의 말을 미덥게 생각했다.
  상왕은 다시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묻는다.
  "병판의 생각은 어떠하오?"
  조말생이 아뢴다.
  "대마도 해적의 떼는 오십여 척의 배로 노략질을 하러 나왔습니다. 대마도로서
는 전군력을 움직여서  노략질을 하러 나온 것입니다.  병법에 '허즉실이요, 실즉
허'란 말이 잇습니다. 천고의 격언이올시다. 지금  대마도의 병력은 텅 비어 있습
니다. 저놈들이 실한 체하고 나왔지만 저희 곳은 텅 비어 있을 테니, 이 틈을 타
서 한편으로 우리의 해안의  방어태세를 튼튼히 하고 한편으로 명장을 선택해서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로 직충해서  해적의 소굴을 소탕해 버린다면 앞으로 다
시는 더 교만방자하게 까부는 일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병조판서 조말생의 아뢰는 말은 조리가 있었다.
  세종전하는 당신이 연구하고 생각한 뜻에 부합이  되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상왕께 아뢴다.
  "소자 한 말씀 아바마마께 아뢰겠습니다. 소자는 아까 황해감사의 장계를 받고 
한동안 연구하고  생각했습니다. '실즉허요, 허즉실'은  병가의 일뿐 아니라 모든 
처세하는 일에도 좋은  참고거리가 되는 격언이올시다. 지금  병조판서의 아뢰는 
말씀이 극히 타당하다 생각됩니다. 이미 나온 왜적들은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저
희가 중국으로  간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마는 양식을  약탈하는 노략질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능한 수군들을 황해,  경기, 충청도에 배치시키는 한편 수군 
대부대를 편성시키시어 적의 소굴인  대마도를 무찌른다면 이미 나온 자들은 독
안에 든 쥐새끼가 될 것이요, 대마도는  속수무책, 항복하고 말 것입니다. 병조판
서의 말씀을 들으시어 양면 작전을 취하시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이리하
여 국가의 위신을 바다와 뭍으로 크게 떨치게 하시옵소서."
  세종전하는 병조판서 조말생의 편을 들어 상왕께 아뢰었다.
  박은이 아뢴다.
  "전하! 불가하옵니다. 대마도를  가볍게 보지 마시옵소서. 대마도는  본시 오리
의 땅이었다 하나 이제는 왜국 본토 구주와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
리의 대군이 깊이 대마도로 들어갔다가 본토 왜적의 항전을 만나게 된다면 크나
큰 전쟁이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그저 대마도 해적들만 쫓아  버리게 하시옵소
서."
  좌의정 박은은 대마도 정벌을 반대했다.
  대마도 정벌을 반대하는 좌의정 박은의 말을 듣자 우의정 이원이 아뢴다.
  "좌의정 박은의 말이 옳습니다. 바닷길 천 리에 수백 척의 전선을 움직여 대마
도를 정벌한다는 일은 큰일이올시다. 막대한 국비를 소모하고, 적을 쳐부순다 해
도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저자들은 항상 주림을 못이겨 노략질을  하는 무리
들이올시다. 우리는 저자들에게  항상 세견미를 주어 회유해왔습니다. 이미 들어
온 무리들을 격퇴시키고 원정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대언 이명덕도 아뢴다.
  "소신의 의견도 좌상과 우상의 뜻과 같습니다. 크게 일을 벌이지 말고 나라 안
으로 침입한 왜적들을 쫓아내는 일이 온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다 무사주의로 나라 안에 침입한 왜적을 쫓아내자고 주장했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좌의정이나 우의정과 이대언은  너무나 무사주의를 취하십니다. 대마도놈들은 
난화지맹이올시다. 강하게 누르면 쥐새끼마냥 구멍을 찾아 엎드리고, 내버려두면 
승냥이 떼같이 날뛰는 요망한 무리들입니다. 고려  때 대마도를 무찔러 혼뜨검을 
내게 한  일이 있습니다마는, 아조에  들어와서는 들어온 놈들에게만  혼을 내게 
했고 항상 쌀과  잡곡을 주어 저들을 회유했을 뿐입니다. 이제  나라가 건국된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하여 저자들은  한번 까불어 
대는 모양이올시다. 국위를 선양시키기 위해서라도 적의  소굴은 한번 무찔러 놓
아야 합니다. 그리고  좌상은 일본 구주 본토의 왜인들이 항전을  할까 염려하지
만, 일본 원씨의 사신들은 지금도 조공을 바치고 우리나라에 와 있습니다. 이 사
람들에게 우리는 침략해 들어온  대마도 해적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대마도를 소
탕하는 것이고 결코 일본 본토를 정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해서 돌려보
내면 됩니다. 조금도 주저할 것이 없습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왜적의 성격과 대마도의 허실이며 일본 본토와의 관련성을 
들어 청산유수같이 도도하게 논리를 폈다. 세종전하가  천천히 입을 열어 상왕께 
과한다.
  "아바마마께 아룁니다. 신도  대마도의 일에 대해서 문적을  살핀 일이 있습니
다. 본시 신라 때 서라벌 경주에 소속된  땅이었으나 바윗덩이와 돌부리로 된 불
모지였습니다. 소용이  없으니 방치해 두었던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우리사람은 
살지 아니하고 오랜 세월에 해적떼의 소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대마도의 
지리적 위치로 볼  때 일본 구주보다도 우리 부산진이 가깝습니다.  이리하여 이
자들은 항상 우리  땅에 와서 노략질을 하고 무법천지의 행동을  해왔습니다. 그
러나 회유도  정도가 있습니다. 때로는  봄바람이 화하게 부는  듯한 춘풍대아의 
정치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가을 서리가 내리는  듯한 추상열일의 기상을 보여주
어야 합니다. 병조판서의 판단이 극히 가한 줄로 아뢰오!"
  세종전하의 말씀은 씩씩하고  호방했다. 안상하고 얌전하고 문기가  의표에 항
상 넘치는 전하의 풍채에서 이같은 강경하고 호쾌하고 대담한 주장이 나올 줄은 
뚯밖이었다.
  좌의정 박은과 우의정 이원은 무안하기 짝이 없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크나큰 힘을 얻었다.
  "명철하신 성상전하의 말씀이 지극히 타당하십니다. 상왕전하께서는 쾌하게 대
마도 정벌을 윤허하시옵소서."
  상왕도 세종전하와 병조판서의 주장을 옳다고 생각했다.
  영의정 유정현에게 묻는다.
  "영상은 아까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다 들은 연후에 소신을 말씀하겠다 했는
데, 이제는 왜적을 토멸하는 일에 대하여 두  의견이 대립되어 있으니 어느 편을 
취하는 것이 좋다 생각하오, 말씀해보오."
  묵묵히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영의정  유정현은 천천히 입을 열어 
아뢴다.
  "좌의정과 우의정의 수세를  취해서 들어오는 왜적들의 행패를 막자는 의견도 
일리는 있습니다마는, 만약 이것이 버릇이 되어  왜적들이 우리의 힘을 대수롭니 
않게 보고 자꾸 침노해  들어온다면 그자들의 방자한 행동을 나중에는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성상전하와 병판의 판단대로 적의 오십척  병선이 우리 땅에 들어온 
틈을 타서 적의 소굴을 무찌르고, 한편으로는  서해에 들어왔다가 돌아가는 적을 
소탕한다면 일거양득의 전과를  올리리라 생각합니다. 신도 대마도  정벌을 찬성
합니다."
  영의정도 비로소 대마도 정벌을 찬성했다.
  "그렇다면 나도 대마도  원정 계획을 찬성한다. 그러나  일이 가변비 아니하니 
호반대장을 한번  불러서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다. 누구를 불러  의논하는 것이 
좋을꼬?"
  세종대왕이 상왕께 고한다.
  "대장 이종무는 노련하고 담략이 있는 장수올시다. 종무를 불러 하문하심이 좋
을 듯합니다."
  아드님 세종의 말씀을 듣자 상왕은 만면에 쾌활한 웃음을 띠었다.
  "우리 전하는 문치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무장의 일까지 소상히 알고 있으니 
이제는 내가 근심이 없다.  이종무는 수륙 전투에 모두 능통한 노련한 대장이다. 
전하의 말대로 이종무를 불러 의논하리라."
  상왕은 합문 밖에 대령하고 있는 어전내관을 불렀다.
  "대장 이종무를 급히 명소하라. 어전회의가 있으니 시각을 지체 말고 입시하라 
이르라."
  어전내관을 청명하고 직접 자신이 대장청으로 나갔다.
  "지금 어전회의가 열리고 있습니다. 상왕마마와 상감마마께서 임석하신 자리에 
영상 이하 병판들  모든 대감들이 시립해 계십니다.  상왕전하와 상감마마께서는 
대감께 급히 입시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대장 이종무는 벌써 대마도 정벌로 인한 어전회의가 열린 것을 짐작했다.
  적이 벌써 서천에서 연평도까지 올라가서 혹작질을 하고 있는 모든 보고를 병
조를 통해 받았다. 마음속으로 전략을 연구하고 있었다.
  명소를 받은 대장  이종무는 잠시 생각속에 빠졌다가 문득 문갑을  열었다. 둘
둘 말은 두루마리 한 축을 꺼내서 천천히 품안에 간직했다.
  "곧 알현을 하겠네."
  한 마디를 한 후에 대전내관을 따라 수강궁으로 들어갔다.
  "대장 이종무 알현이오."
  하는 어전내시의 아뢰는 소리와 함께 지밀 연침문은 활짝 열렸다.
  상왕 태종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들라 해라!"
  허락을 내렸다.
  구군복 밀화패영에  공작미 화려한 깃을 안올림벙거지에  꽂은 대장 이종무는 
잠시 눈을 들어 전후좌우를 살폈다.
  전면 옥좌에는 상왕전하 태종과 주상전하 세종이  진좌해 계시고, 좌편에는 영
의정과 좌의정이 부복해  앉았고, 우편에는 우의정과 병조판서가 모시고 앉았다. 
대장 이종무는 어전 삼 보 밖에 나가 두 분 전하께 재배를 드렸다.
  "신 이종무 부르심을 받자와 입시하옵니다."
  세종전하는 미소를 지어  대장 이종무를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상왕 태종은 
호방한 음성으로 말씀을 내린다.
  "경은 국가의 간성이다. 근래 대마도 왜추들의 작란에 대하여 심모원려를 이미 
깊이 연구했으리라 믿는 바이다. 왜추들의 작란은  비록 서절구투라 하나 방치해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경도 이미 다 아는 바와 같이  서천으로 들어와 백령도에
서 작란하는 적의 무리에  대해서는 수륙양면으로 철통같은 작전을 시도하고 있
거니와, 왜적을 섬멸하는 근본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경을 불렀으니 경은 수륙
양면에 경력이 많은  대장이다. 어찌하면 적의 망동을 영구하게 제어할  수 있는
가, 좋은 방책을 말하라."
  이종무가 부복해 아뢴다.
  "신은 외람되이 대장의 직책에  있어 미리 왜추의 발동을 방비하지 못하고 두 
분 성상께 심려하시게까지 했사오니 죄 태산  같사옵니다. 역사적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고려 때 크게  적의 소굴을 무찔러 소탕한 일이 있을 뿐이옵고 그 후
에 아조에 들어와서는  항상 들어오는 왜추들을 몰아냈을 뿐, 소굴을  소탕한 일
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적은 우리의 힘을 시험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이 흘러간 
틈을 타 오십여 척의 배로 노략질을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이자들이 다시 고개
를 들지 못하게  하려면, 대군을 출동시켜서 한편으로는 서해 바다로  들어온 적
은 돌아갈 길을 끊어서  독 안의 쥐를 만들고, 한편으로 큰  군사는 대마도 소굴
을 무찔러서 다시는  야망을 품지 못하도록 양면작전을  취하는 일이 제일 가는 
상책이라 아뢰옵니다."
  이종무는 쾌활하게 소신을  아뢰는 말씀을 듣자, 세종전하와  병조판서 조말생
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돌았다.
  대마도 정벌을 반대하던 좌의정 박은이  대장 이종무 앞에서 한 마디 하고 싶
었다.
  "왜국은 대마도 이외에도 구주 등 본토들이  있다 하오. 섣불리 대마도를 건드
렸다가 그 뒤에 있는 왜국들이  들고 일어난다면 크나큰 사태를 빚어내게 될 테
니, 장군은 이 뒷일을 어찌 처리하려고 대마도 정벌을 주장하시오?"
  박은은 깐깐하게 이종무를 향해 묻는다.
  이종무는 정색하고 대답한다.
  "좌의정께서는 지나친 염려를 하십니다. 왜국은  지금 통일된 나라가 아니올시
다. 지역마다 번벌을 이루어서 영토를 차지하고  대명들이 제각기 대장군이 되어 
전국시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마도는 왜국 본토에  예속되어 있는 
땅이 아닙니다. 본시 우리 나라 서라벌에 소속되었던 땅입니다. 그리하여 한문으
로 대마도라 하지만 우리말로는 '두섬'이라  부릅니다. 저 사람들도 '두섬'이라 부
릅니다. 지리적으로도 왜국 본토보다도 우리 부산이 더 가깝습니다. 땅이름이 우
리말인 것으로 보아, 본시 우리 땅이란 것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옛지도를 보아도  우리 땅이 확실합니다. 섬 자체가 척박한  돌산과 바윗
덩이로 되어 있는  때문에 서라벌 때 다스리지 않고 내버려두었던  것입니다. 이 
불모지에 죄지은 왜신과  해적들이 몰려들어서 지금의 대마도로  변했습니다. 그 
증거로는 왜국 본토의 원씨가 지금 국서를 바치고 서울에 유하고 있지 아니합니
까? 절대로 왜국 본토의  무리가 대마도를 소탕하는 데 항의하거나 합세하지 못
합니다. 자아, 전하께 아뢰기 위해서 소장이  옛 지도를 가지고 왔소이다.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장 이종무는 품안에서 고지도  두루마리를 꺼내서 천천히 어전에 펼쳐 놓았
다.
  한국의 삼천리 강산이 점점이 그려 있고 남해 바닷물 속에 제주도, 대마도, 울
릉도, 독독들이 소상하게 실려 있다.
  "자아, 보십쇼, 대마도도 제주도,  울릉도, 독도와 함께 우리 판도안에 들어  있
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이놈들은 예로부터 우리한테  와서 곡식을 얻어먹고 배가 
고프면 또다시 강도질을 하고 노략질을 합니다.  톡톡히 버릇을 가르쳐서 다시는 
못된 짓을 못하도록 혼뜨검을 내주어야 합니다."
  좌의정 박은은 말문이 막혀서 대답을 못했다.
  두 분 저하를 위시하여 박은을  제외한 모든 대신들은 이종무가 펼쳐 논 고지
도를 자세히 살폈다.
  한동안 후에 상왕이 다시 말씀을 내린다.
  "대마도를 소탕한 후에 아주 우리 땅으로 다시 환원시키면 어떠할꼬?"
  상왕 태종은 세종 이하 좌우 시신을 둘러본다.
  세종전하가 상황께 아뢴다.
  "아바마맘께서 하교하신 말씀은 일리가 있사옵니다마는, 어리석은 생각에는 실
현되기 어렵습니다."
  "어찌해서?"
  상왕 태종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전하에게 묻는다.
  "신라 때부터 두섬을 버려둔  것은 소용없는 불모의 땅이라 해서 불문에 부쳐
버린 것입니다.  이곳에 왕화가 미치도록  하자면 우선 우리  백성을 이민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리해서 산업을 일으키고 문화를  전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척박하니 농경을 할 도리가 없습니다. 백성을  이민시켜 놓고 차마 굶어 죽
게 할 수는 없습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선한  우리 백성들을 몰아서 악한 무리
로 전락되게 하기 십상팔구올시다.  그저 적의 소굴을 소탕해서 앞을 징계할 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세종전하의 아뢰는 말씀은  사리에 지극히 적절했다. 땅을  점령했다해서 문화
수준이 높은 백성들을  불모지인 굶주리는 땅에 도저히  몰아 놓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영의정 유정현이 아뢴다.
  "주상전하의 말씀은 실로  애민여자하시는 성군의 말씀이올시다. 상왕전하께서
는 그저 대마도의 적의  소굴을 소탕하시어 까부리는 무리들을 응징하시고 이민
하시는 일은 중지하시는 일이 좋을 듯합니다."
  상왕 태종도 마음 속으로 아드님 전하의 백성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지극한 정
성에 크게 감동되었다.
  호방하게 쾌활한 웃음을 웃고 말씀을 내린다.
  "나는 욕심이 항상 많아서  대마도가 본시 우리 땅이니 불모지지라도 도로 찾
으려는 생각인데, 어진 상감은 백성을 적자같이  생각해서 추호도 고생을 시키려 
하지 아니하니 내 어찌 전하의 뜻을 좇지  아니하겠소. 그럼 대마도 정벌은 적굴
을 소탕해서 국위를 선양시키고 적의 무리를 응징하는 데 그치도록 하오."
  세종전하는 별빛같이 밝은 눈을 들어 다시 상왕께 아뢴다.
  "아바마막게 다시 아룁니다.  만약에 우리 군사가 대마도를  정벌한 후에 비록 
불모지라 해도 영구하게 점령한다면  그때 가서는 왜국 본토의 무리들이 그대로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크나큰 병화를 일으켜서  백성들을 전화 구덩이로 빠지게 
할 우려가 십중팔수 있습니다. 다만 대마도의  왜추들을 응징하시는 데 그치시기 
바라옵니다."
  세종전하의 평화를  사랑하는 갸륵한 말씀은 어전회의를  더욱 훈훈한 화기고 
이끌었다.
  대마도 정벌을 반대하던  박은도 비로소 전하의 큰 뜻을 알았따.  부복해서 세
종전하께 아뢴다.
  "소신 미욱하와 처음에 대마도 정벌을 반대했습니다. 그것은 공연히 크나큰 병
화의 혼단을 일으켜서  국난을 초래할까 염려한 까닭이올시다.  이제 성상전하의 
강유겸전하신 심모원려를 배청하오니 소신 너무나 미련하고 불초하기 짝 없습니
다. 삼가 성지에 따라 반대하던 의견을 철회하옵니다."
  세종전하는 빙긋이 웃고 대답이 없었다.
  어전회의의 모든 의논은 침범해 들어온  왜적들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어 소
탕해버리고 한편으로는 국가의 위세를  크게 드날려 다시는 망동을 못하도록 대
군을 휘동하여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결정했다.
  상왕 태종은 대장 이종무를 향하여 묻는다.
  "대마도 원정은 이미 결정하였거니와 안팎으로 양명 작전을 취해야 할 터인데, 
전함의 모든 장비와 수군들의 인원은 충분하게 조달될 수 있는가?"
  이종무가 부복하고 아뢴다.
  "내륙과 영해로 침범해 들어온 왜구를 소탕하기 위하여 출전한 장병에게는  좀
더 강력한 후송부대를  파견하시면 넉넉히 소탕될 것이옵고,  대마도로 원정하는 
수군과 전함은 각도에서  징발해서 거제도로 집합시키면 됩니다.  지금 대마도에
는 우리 군사를 대항할  만한 적군이 없습니다. 적의 배 오십여  척이 함빡 우리 
땅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전함  2백여 척과 군사들이 먹을 석 달  양식을 싣고 간
다면 파죽의 형세로 대마도를 소탕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자 이종무는 다시  지도를 펴들고 거제도 앞바다에서 주사를 출동
시킬 계획을 아뢰었다.
  태종은 크게 기뻤다. 곧 세종전하께 분부를 내린다.
  "대마도 정벌에 대한 일은 이종무에게 맡기고 병조판서와 함께 의논해서  모든 
일을 처리하라!"
  세종전하는 승명하고 대신과 대장들을 거느리고 상왕전에서 물러났다.
  어전회의를 마치고 경북궁으로 돌아온 세종전하는 곧 대마도의 정벌의 태세를 
취했다. 먼저 승지를 불렀다.
  "대마도를 정벌한다는 국가의 결정을 먼저 중외에 선포하라!"
  승정원에서는 지체없이 명을 받들었다.
  서울 사대문에 크게 방이 붙었다.
  '대마도의 왜적들이 오십여 척의  배를 몰아 바다를 어지럽게 한다. 그대로 좌
시할 수 없다. 국가의  위엄을 보여 적의 소굴 대마도를 소탕할  것을 정부는 결
정하였다. 관민은 다 함께 힘을 합하여 적을 응징하라!'
  파발은 각도 감사와 각읍 수령에게 말을 달렸다.  감영 앞과 고을 삼문마다 서
울 사대문에 붙인 방과 똑같은 방문이 붙었다.  모든 백성들은 의분을 참지 못했
다.
  "우리 나라에서 주는 세견미로 처자식들을 먹여서 잔명을 보전하는 쥐개끼  같
은 무리들이 배은망덕을  하고 흑작질을 한단 말이냐! 쌩 요놈의  새끼들을 그대
로 둘 수는 없다. 한번  버릇을 톡톡히 가르쳐 놓아야 하겠다. 나도 자원 출정을 
한다!"
  고을마다 감영마다 출정을 원한다는 사람들이 백절치듯 모여들었다.
  감사와 원들은 사람들의 직업을 살폈다.
  나루터 도선장과 포구에서 생장한 노 잘 젓는 뱃사공이 그중 많고 한량, 재인, 
향리, 평민 중에 헤엄 잘치는 사람들이 다음이었다.
  각읍 수령들은 병조에 상신했다. 병조에서는 노수를  주어 각도의 수군과 함께 
거제도로 모이게 했다.
  한편 세종전하는 대마도에 출정할 장성을 임명했다.
  영의정 유정현으로 삼군도통사를  삼아 전국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이종무
에게는 숭록대부 장천군의 군호를 봉한 후에 대마도를 정벌하는 주장을 삼아 삼
군도 체찰사의 중직에 임명했다.
  중군 절제사에는 우박, 이숙무,  황상이요, 좌군 도절제사는 유온이요, 좌군 절
제사는 박초, 박실이요, 우군 도절제사는 이지실이요, 우군절제사는 김을화, 이순
몽이다. 삼군 장성의 부서가 결정되니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전국에 훈령을 내
렸다.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병선 2백 척은 하번갑사 별패 시위패와 수성군, 영속 
재인, 화척이며 한량, 인민, 향리, 양반 중에 배 잘 타는 사람들은 왜구의 돌아가
는 길을 끊으면서  유월 팔일로 기약을 정하여  각도의 병선과 함께 견내량으로 
모이라!'
  세종전하의 선전포고가  내리고 삼군도체찰사  이종무의 격문이 각도감사에게 
번개같이 파발마를 달려 전해지니  경상, 충청, 전라도 각읍 수령들은 동원 준비
에 바빴다.
  세종전하는 다시 병조판서 조말생을 명소했다.
  조말생이 어전에 추창해 들어와 부복했다.
  "우리가 적을 응징하기 위하여 대군을 휘동하여 정벌하는 마당에, 비록 적이라 
하나 그 죄상을 수죄하여 엄주하는 뜻을 밝혀야  할 것이다. 지금 대마도 도주의 
이름은 종정성이란 자가 아닌가?"
  "네, 그러하옵니다. 점잖게 부르는 이름은 종정성이옵고 저희들끼리 부르는  이
름은 도도웅환이라 합니다. 왜말로는 '구마마루'라 하옵는데, 우리말로 한다면 곰 
같은 놈이라 하는 소리라 합니다."
  세종전하는 소리를 높여 껄껄 웃으셨다.
  "과연 그놈 참  곰같이 미련한 놈이로구나! 어쩌자고 배은망덕을  하고 악당들
을 몰아 노략질을 하는가?  좌우간 놈들에게 대군이 당도하기 전에 정벌하는 까
닭을 밝히는 글월을 보내도록 하라!"
  조말생이 아뢴다.
  "도체찰사 이종무가 대마도에  당도하기 전에 호유하기는 글월을 보내기는 좀 
난처한 듯합니다."
  "왜? 글월을 가지고 갈 사람이 없다 하는가?"
  "예, 그러합니다. 인명을 상할까 염려올시다."
  "그깐 놈들에게 무슨 사신을 보낸단  말인가? 항왜가 있지 아니한가. 이번에도 
항복한 자들이 많이 있지 아니한가. 이자들을 보내도록 하오."
  병조판서 조말생은 마음속으로 전하의 슬기로운 임기처사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세종전하의 밝은 슬기에 감탄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주상전하의 총명하신 판단은 어리석은 소신이 감히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항
복한 왜추들에게 효유하시는 글월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글월은 내가 부를 테니 경이 받아 쓰라!"
  병조판서 조말생은 또  한 번 놀랐다. 당연히 홍문과 제술관이나  승지를 불러
서 효유문은 짓는  것이 전례인데 전하가 친히 글을 지어서  불러주겠다 하시니, 
어느 겨를에 이러한 어려운 글까지  친히 지을 줄 아시나 하고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병조판서는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어전에 지필묵을 벌여 놓았다.
  전하는 글월을  구술했다. 아직 한글을 창조하기  이전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한자로 불렀다. 필자는 한글로 바꾼다.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에 예속된  본시 우리 나라 땅이다. 이것은 문적에 소소
하게 기재되어 있다. 다만 땅이 심히 협소하고  또 해중에 있어서 왕래가 막혔고 
백성들이 살지 아니하니 왜국에서 추방되어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모두 모여들어
서 굴혈이 되었다.  때로는 좀도둑이 되어 평민을 겁략하여 돈과  곡식을 양탈하
는 등 해를  거듭할수록 극악 국흉했다. 태조 강헌대왕께서는 문화로  덕을 펴시
고 무위로 징발하시어  은위로 회유하셨고, 짐이 대통을 이은 후에도  또한 선왕
의 뜻을 받들어  더욱 너희들을 무휼하였다.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혹시 좀도둑
질을 하는 불공할  태도를 갖는다 해도, 너 도도웅환의 아비  종정무의 모의수성
한 충성을 생각해서 너희들의 사자가  올 때마다 관에 유숙케 하고 예조로 하여
금 후하게 위로해 주었을 뿐  아니라 너희들이 살기 어려운 것을 생각해서 장사
하는 배가 왕래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해마다  수만 섬의 경상도 곡식을 주어
서 너희들의  형제를 기르게 하고  너희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뜻밖에 배은망덕하는 너희들은 요망하게 변경을 어지럽게 하여 화태를 자초해서 
복망의 길을 취했다.'
  전하는 여기까지 부르자 잠깐 숨을 돌렸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전하의 숨돌리시는 틈을 타서 조용히 아뢴다.
  "부르신 선지의 문맥으로  보아 주상전하께옵서 대마도 왜추에게 내리시는 글
이 아니옵고 상왕전하께서 내리시는 글이 됩니다."
  "그렇지!"
  세종전하는 얼굴빛을 정색하여 대답했다.
  조말생이 다시 아뢴다.
  "대외적으로 주상전하께서는 나라의  대표이신 국왕이십니다. 상왕전하께서 내
리시는 선지로 해서는 아니될 듯합니다."
  "잔말 말고 그대로 쓰라!"
  전하의 용안은 엄숙했다.  조말생의 가슴이 뜨끔했다. 지난번에 상왕전하께 죽
음을 당했던  전임 병판이요, 영의정이요,  부원군이었던 심온의  일이 생각났다. 
아차 실수를 했구나 생각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새삼 전하의 넓고 큰 도량에 감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하의 엄숙했던 얼굴빛은 다시 화기가 가득한 빛을 지었다.
  "다시 계속해서 받아 쓰라."
  조말생의 망건편자에는 진땀이 솟았다. 다시 붓을 잡았다. 전하는 계속해 글을 
불렀다.
  '그러나 평일에 투하한  자와 흥리통신하기 위하여 오는 자  및 이번에 항복하
는 자들은 모두 다 죽이지 아니하고 여러 고을에 배치해서 옷과 밥을 주어 생활
을 보장해 줄 테다. 한편 변방장수에게 명하여  병선을 거느려 너의 소굴을 포위
해서 권토내항하기를 기다리라  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아직도  망설이고 깨닫지 
못했다. 나는 심히  민망하게 생각한다. 섬안의 토지는 모두  돌산이요, 기름지지 
못해서 농사가  부실했다. 이 까닭에 틈을  타 도둑이 되어 남의  재물과 곡식을 
훔쳐서 그 죄악은  하늘과 땅에 가득했으니 어찌 주륙을 면할까보냐!  그러나 번
연히 뉘우쳐서 항복을 한다면 도도웅환  너에게는 좋은 벼슬과 후한 족을 줄 것
이요, 다음 대관들에게는  항왜 평도전과 같은 대우를  할 것이다. 또 그 나머지 
군소에 대해서도 모두 옷과 양식을  넉넉하게 주어서 기름진 땅에 살게 하여 우
리 백성과 같이하여 일시동인 모두  도둑의 누명을 벗고 의리에 사는 기쁨을 알
게 할 것이다.  이것은 자신하는 길이요, 생활하는 원리다. 만약  너의 본토로 돌
아가지도 아니하고 우리에게 항복하지도 아니하고 도둑질할 마음을 먹어 계속해
서 섬에 머물러 있다면 크게  병선을 바다에 띄워 십만 대병으로 섬을 포위하여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화와 복이 달려  있는 소소하게 밝은 일이다. 항복하든지, 
본토로 돌아가든지 둘 중에 한 길을 택하라!'
  세종전하는 부르기를 마쳤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붓을 놓았다.
  전하의 부르는 그은 진실로 명문이었다.
  그대로 글만 잘  지은 것이 아니다. 천지의 조화를 그대로  형성시키려는 평화
로운 사상이 글  안에 가득했다. 비록 까불어 대는 부랑패류의  흉악한 왜인이라 
하나 항복만 하면 좋은 벼슬을 주어 우대하고 좋은 옷과 밥을 주어 기름진 땅에 
농사를 짓게 해서 우리 국민과 같이 일시동인하는 혜택을 준다 했다.
  뿐만 아니었다. 세종전하는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했다. 일본 본토인 왜국과는 
흔단을 일으키지 아니하려 했다. 대마도는 척박하지만 본시 우리 땅이다. 항복을 
할 테면 항복을 하고, 그렇지 아니하다면 대마도를  비워 놓고 너희의 본토인 왜
국으로 돌아가라 했다. 본토인 왜국의 평가나  원씨들도 꼼짝달싹할 말이 없도록 
글을 섰다.
  정벌을 대마도 국지정벌로  만들고, 더 이상 왜국 본토는 공격을  하지 않겠다
는 뜻을 밝힌 수단 높은 정치외교의 뚜렷한 자세를 취한 선포문이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세종전하의 능란한 외교정책과 빛을 뿜는 예지에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조용히 붓을 놓고 아뢴다.
  "항복하면 일시동인의 혜택을 주고 그렇지 아니하면 대마도를 비워 놓고  왜국 
본토로 돌아가라! 만약  두가지 일을 다 이행하지 않는다면 십만  대병으로 도륙
을 시키겠다는 말씀, 과연 적의 간담이 서늘할 것입니다. 분만 아니라 본토의 왜
인들도 대마도의 국지정벌만인  것을 밝히 알아서 전하께  심열성복할 것입니다. 
소신이 비록 병판이라 하오나 감히 생각도 못했던 바올시다."
  "흔단을 내는 무리들을 응징할 뿐, 죄  없는 무리들을 정벌한다는 일은 화기를 
숭상하는 왕도정치가 아니라 생각하오!"
  세종전하는 간단하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조말생이 다시 아뢴다.
  "효유문을 가지고 수강궁에  나가 상왕전하께 아뢰고 항왜들에게 주어 대마도
주 도도웅환에게로 보내겠습니다."
  "그리하오. 그리고 병조판서는 왜국 본토에서  조공하려 들어온 원씨의 사자를 
병조로 불러서 대마도로 보내는 효유문을  또 한벌 써서 준 후에 대마도 정벌이 
대마도에만 국한된 일이고, 왜국 본토를 정벌하는 일이 아닌 것을 밝혀주오."
  "명심해서 거행하겠습니다."
  조말생은 세종전하가 구술한 효유문을 받아 들고 상왕전으로 향했다.
  상왕전하는 조말생이 올리는 효유문을 친히 보았다. 만족한 모양이었다.
  "홍문관의 어느 제술관이 지었는가?"
  "주상전하께옵서 친히 구술하시고, 소신이 어전에서 받아썼습니다."
  상왕 태종은 깜짝 놀라는 기색이 용안에 현연하게 나타났다.
  "평소에 어릴  때부터 손에 책을 놓지  아니하고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의 글을 
독실하게 공부하더니 제술하는 글도 천하 명문이로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아뢴다.
  "홍문관 옥당, 교리는 말할 것이 없고 나이 지긋한 대제학,  부제학이라고 이에
서 더 훌륭한 제술은 못할 것입니다."
상왕의 용안에는 희색이 가득했다.
  "대마도 왜추들에게 너희  본토로 돌아가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항복을 하든지 
두 길에서 한 길을 택하라. 만약 항볼하면  우리 백성들과 함께 일시동인을 하겠
다는 말은 경이 상감한테 가르쳐 주었는가?"
  "아니올시다. 신은 감히  생각도 못한 일이올시다. 모두다 삼감께서 계책을  정
해서 부르셨습니다. 신은  그저 받아쓰기만 했을 뿐입니다. 주상전하의 평화로운 
왕도정치를 본받으시라는 넓고 넓은 큰뜻에 소신은  그저 놀랐을 따름입니다. 그
리하옵고 왜국 본토는 공격하지  말고 대마도 왜추들에게 혼뜨검이 나도록 국지
공격만 하란 말씀에 더욱 탄복했습니다."
  "좋아, 그대로 처리하라!"
  상왕은 쾌하게 효유문 보내는 모든 일을 허락했다.  

    구주본토 회유
  병조판서 조말생은 상왕과 세종전하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에 귀화했던 항왜 
등현의 무리 5명을 병조로 불렀다.
  "주상전하께서 대마도 왜추들의  장난을 크게 노하시어 효유하시는 글월을 도
도웅환에게 내리시는 한편,  병선 수백 척과 수군 10만을 동원하여  대마도를 소
탕하라고 엄한  분부를 내리셨다.  만약 도도웅환이 항복한다면  일시동인하시는 
갸륵하시니 뜻으로 용서를  포섭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구주 본  곳으로 돌
아가고 대마도를 비워놓으라 하셨다. 두가지 중에  한 가지도 실행하지 아니하고 
노략질을 계속해서 저항한다면 대마도의  소굴을 정병 10만으로 포위하여 한 놈
도 남기지 아니하고 말끔하게 소탕할 테다.  이뜻을 도도웅환에게 전하고 주상전
하의 효유문을 전하라."
  "예,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등현의 무리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거려, 세종전하의 효유문을  받들어 품
안에 넣었다.
  "배는 부산포에서 타고  바로 대마도로 직행하라! 너희들의 신분은  보장해 주
고, 노수와 여비는 충분하게 주리라!"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등현의 무리 다섯 사람은 고두백배하고 물러갔다.
  한편 예조판서 허조는 병조판서  조말생과 함께 세종전하의 명을 받들어 일본 
구주절도사 정우의 무리 네사람을 불렀다.
  정우는 승려의 몸으로 일본 구주의  사자가 되어 여러날 전부터 조선에 와 있
던 자였다.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는 연회하는 자리를 베풀고, 정우의 일행을 대했다.
  정우의 일행은 두 장관을 향하여 합장하고 자리에 꿇어앉았다.
  예조판서 허조가 곡차를 정우에게 권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왜국 본토의 사신들을 청한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대마도 왜구들의 침
입에 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청한 것이다.  대마도 무리들이 병선 오십여 척
을 거느리고 서해 바다로 노략질하러  들어온 일은 그대들도 이미 소문 들어 알
았으리라 생각한다."
  왜역관이 통역했다.
  왜승 정우는 합장을 올리며 자리를 피하여 대답한다.
  "대마도는 왜국 본토보다도 항상 조선의 힘을 입어 굶어 죽지 않고 사는 무리
들이온데 배은망덕하고 물길을 따라 장난을 하니 괘씸하기 짝이 업습니다."
  왜승 정우는 몸둘 곳을 몰랐다. 천번 만번 고개를 굽실거렸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위업기 있는 음성으로 말한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크게  노하시어 침입해 들어온 대마도 왜추들은 독 안
의 쥐를 만들어 징계하시고 전함 수백 척과  수군 십만으로 대마도를 정벌, 소탕
하랍시는 엄한 분부를  내리셨다. 그러나 왜국 본토에 대해서는 조금도  다른 뜻
이 없으시니  이 점을 본토 대명들에게  알려주기 바란다. 그러나 만약  구주 등 
본토에서 대마도 왜추들을 두둔해서  흔단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또한 너의 본토
에까지 대군을 휘동하여 불의를 응징할 것이다! 이 뜻을 전하라."
  왜국 구주총관 원도진의 사신 중 정우는 손을 모아 굽실거리며 대답한다.
  "대마도 해적들의 난동을 저희 본토에서 진압하지 못하고 귀국의 국경과  바닷
가를 소란케 했으니  죄송한 말씀 이루다 아뢸  길이 없습니다 저희 본토에서는 
대마도 정벌하시는 일에  대하여 추호만치라도 불쾌한 감정을  갖지 아니합니다. 
배은 망덕하신 일입니다. 더구나 저희 본토를  원망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대마도
를 정벌하신다 하니 당당한 정의를  지키는 왕군에 대하여 다만 감사를 그릴 따
름입니다. 거룩하신 국왕전하의 크고 넓으신 뜻을  저희 본토 장군한테 전달하겠
습니다."
  왜승 정우는 합장을 올리며 백배치사했다.
  술이 서너 순배 돈 후에 정우는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를 향하여 고한다.
  "소승은 조선에 와서 보니 찬연한 문화와 법도 있는 예절과 당당한 의기에 감
탄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한동안 조선에 유하면서 모든  학문과 불교에 
관한 일을  배우고 연구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허락해 주신다면  은혜를 길길이 
잊지 않겠습니다."
  왜통사는 다시 이 뜻을 통변했다.
  예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의 얼굴에는 화기로운 웃음이 가득했다.
  예조판서가 대답한다.
  "왜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 문화를 숭상해서 오늘의 문명을 이룩한 것이다. 왜
국의 글과 말과 직조와 도자와  건축이며 회화 등 모든 생활고 예술이며 기예는 
모두 다 우리 고구려, 신라, 백제 사람들로 인해서 조성되고 전수되지 않은 것이 
없다. 불교도  역시 우리나라를 거쳐서  건너간 것이니 공부하는데  많은 참고가 
되리라. 우리 주상전하께 아뢰어 좋은 기회를 줄 테니 안심하기 바란다."
  왜승 정우는 기쁨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꼭 전하께 아뢰시어 얼마 동안  유해서 좋은 공부를 하도록 해주
시옵소서."
  본토 왜인을 대접하는 연회는 화기애애한 속에 파했다.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는 연회를 파한 후에 대궐로 들어가 세종께 아뢰었다.
  "왜국 본토 원씨의 사자 중 정우를 음식을 주어 우대하고 우리는 대마도를 응
징할 뿐 본토는  공격하지 아니한다 했더니 백배치사를 했습니다. 곧  부하를 저
희 장군한테 보내서 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세종전하는 용안에 미소를 지으셨다.
  "잘 처리했소!"
  한 말씀을 내렸다.
  예조판서가 다시 아뢴다.
  "사자 왜승은 우리의 찬연한  문화와 의리있는 풍속에 심취돼 좀 더 묵으면서 
공부하기를 원합니다. 어찌하오리까?"
  "그래? 그렇다면 묵게 해주지. 그것이 왕화라는 거야! 하하하."
  세종전하의 용안에는 만열의 빛이 떠돌았다.
  예조판서 허조가 다시 아뢴다.
  "그렇다면 왜승을 어느 곳에 두어 공부를 하게 하오리까?"
  세종전하는 답을 내린다.
  "정동에 흥천사가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 두어 우리나라 승려들과 함께 불경
공부를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정동의 흥천사는 태조대왕의 계비인 방석의 모후의 능 정릉의 원찰이  있어습
니다. 규모가 대단히 크고 우람합니다. 외국 사신을 거처케 할 곳이 못됩니다."
  "강비의 묘소는 상왕전하께서  연전에 성북 정릉동으로 이장해서 능침이 없으
이, 왜국사람이 거처한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고, 또 사찰의 규모가 크고 화려한 
것은 나라의 자랑거리도 되는 것이니, 왜사를  우대해서 대접하는 뜻에서 흥천사
에 묵게 하는 것이 좋겠소."
  "전하의 의향이 정 그러하시다면 성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예조판서는 전하의 명을 받들어 왜승 정우를 흥천사에 유하게 하고 모든 것을 
우대해 대접했다.
  왜승 정우는 조선 정부에서  능소의 원찰이었던 웅장 화려한 흥천사에 유하게 
하여 극진하게 편의를  보아주니 심열성복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부사를 본국으
로 보내서 빨리 조선국왕께 사은하는 뜻을 표하라 했다.
  정우의 편지를 받아  본 일본 서해로 축전주  석성부관사 평만경은 곧 사신을 
보냈다.
  '조선국 예조판서께 아뢰옵니다. 조선국 왕전하께서 의 아니 대마도 무리를 응
징하시고, 구주 본토는 정토하지  아니하신다 하니, 감격한 마음 형언할 길 없습
니다. 조공으로 토산품을 바치오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옵고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통호에 주시는 기념으로  소인 평만경의 인자를 한 벌 내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곧 예궐해서 세종
전하께 아뢰었다.
  "전하의 흥대하신 외교정책이 크나큰 효력을  내렸습니다. 일본 구주의 서해로 
총관 평만경은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바치고,  본토 공격을 아니하신다는 성지에 
감격하여 원합니다. 그리하옵고  통호하는 것을 윤허하시는 기념으로  자기의 도
장을 새겨서 하사하신다면 한평생 저희 국가문서에 사용하겠다고 원합니다."
  세종전하는 두 신하의 말씀을 듣자 용안이 화려했다.
  "옛말에 이이제이란  말이 있지 아니한가! 이것이  왕도정칠세, 평화로운 속에 
만백성을 어거하는 것이 천도요 곧 인도가  아니겠는가. 왕도정치란 별것이 아닐
세. 사신을 우대해  주고, 좋은 옥돌로 도장을 새겨서 주도록  하게. 도장이 조각
된 후엔 내가 친히 왜사를 인견하고 회유해 보내기로 하리라!"
  두 신하는 청명하고 물러났다.
  왕도정치를 하는 천자의 나라에서는  제후가 조공을 바쳐서 변방이 되기를 원
하면 면복과 도서를 내리는 것이 전례다.
  일본 구주의 서해로를 총관하는  평만경이 통호하기를 원한 후에 도장을 내려
줍소사 하고 조선국왕께 청구한 것은 역시 이러한 전례와 관습에서 위해진 일이
었다. 한편 대마도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예조판서는 도자전 도영수를 불렀다.
  "지금 대왕께서는 침입해 들어오는 대마도 외적을 정벌하기 위하여 대군이  출
동을 개시하는 중이거니와 일본  본토의 왜인들은 우리나라 위엄에 눌려서 조공
을 바치고 도장을 내려줍시사  원하므로 상감께서는 좋은 인재를 구하여 조각해
주라 하셨고, 전하께서 왜왕에게 하사하시는 도장이니  특별히 홑벌로 새겨야 하
겠소. 좋은 옥돌로 된 인재가 있겠소?"
  도자전 도영수는 허리를 굽혀 대답한다.
  "마침 백옥으로 된 인재가 한 벌 있기는 합니다마는, 크기가 얼마나 하면 되겠
습니까?"
  "사방 두치 가량이면 볼품이 있어 좋겠소."
  "사방 두치 되는 백옥 인재라면 극히 귀합니다. 그러나 국가의 위신을 보여 전
하께서 왜왕에게 내리시는  인장이니 극력 조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각
은 어찌 새기오리까?"
  "일본 서해로 총과 평만경인이라 전자로 새기게 하오."
  "전서는 사자관에 명하시어 도자전으로 보내주십쇼."
  "며칠이나 걸리겠소? 전하의 엄하신 분부시오."
  "글씨만 써서 보내주시면 밤을 도와 일을  하겠습니다. 국가 비상시에 처한 중
대한 일이온데 어찌 한만히 거행하오리까. 이틀 말미만 주시옵소서."
  예조판서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사자청에서는 고전체로 왜왕의  이름을 
써서 도자전으로 넘겼다.
  이틀 후였다. 도자전 도제조는 사방 두 치의  백옥 도장을 비단으로 바른 도장
함에 넣어 예조에 바쳤다.
  형산의 백옥 한 덩이가 조선으로 굴러 들어와서 도자전 도영수의 손에 보장되
었던 일품이었다.
  예조판서도 난생 처음 보는 백옥 인장이었다.
  말쑥하게 티 한점 없는 깨끗한  백옥 도장은 차가운 듯 부드럽고 부드러운 듯 
차가웠다. 맑은 기운이 사람의 눈을 현란케 했다.
  예조판서는 감탄했다.
  "이것이 무슨 옥인가? 눈이 부시도록 깨끗하구려."
  "그것은 형산백옥이란 옥돌입니다!"
  "형산백옥? 글에서 읽기만 했더니 실물을 얻어서  인제 보는구먼! 옛날 중국의 
진시황이 화씨벽을 얻어서 이사를 시켜 새겼다는 옥새와 비슷한 그 옥돌인가?"
  "화씨벽만은 못합니다마는 우리나라에 몇 개 아니되는 형산백옥이올시다."
  왜인에게 주기는 너무나 과한데."
  예조판서는 아까운 듯 이리저리 옥도장을 어루만졌다.
  "정 그러시다면 상감마마께 아뢰어 보시고 처분을 내려줍시오, 그 다음가는 옥
돌은 여러개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예조판서는 도자전 도영수가 새겨  바친 백옥도서를 들고 대왕께 뵙기를 청했
다.
  세종전하는 지체치 않고 연침으로 예판을 불러들였다.
  "전하께옵서 왜왕에게 내리실 도서가 완성되었습니다."
  허조는 소매 안에서 도서를 꺼내 받들어 올렸다.
  "경이 보아서 좋다면 그대로 전할 일이지 과인에게까지 감하게 하지  아니해도 
좋지 아니한가?"
  전하는 웃으며 말씀을 내렸다.
  "너무나 과한 듯하와 뵙고 바꾸려 합니다."
  "얼마나 좋은 물건이란 말인가?"
  전하는 미소하시며 어수로 도서를 받으셨다.
비단상자가 열었다. 맑고 깨끗한 백옥 도장이 광채를 뿜었다.
  세종전하는 옥돌의 품질도 짐작했다.
  "이것은 중국에서 생산되는 형산백옥의 일종이로구나.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옥
이로다!"
  "그러합니다. 도자전 도영수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도 몇개 없는 물건이라 
합니다. 너무나 과해서 처분을 묻자옵고 다음 가는 옥돌로 바끌까 합니다."
  전하는 미소하며 대답했다.
  "이왕 주는 바에야 홑벌로 주어야지 않겠소. 큰나라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상품 
도장을 주어야지. 뿐만 아니라, 공손하게 조공을 바치는 성의를 보아서라도 가상
하게 대접을 하는 것이 좋겠소. 그대로 주도록 합시다."
  언제나 전라의 마음은 크고 너그러웠다.
  "성의 그러하시다면  그대로 봉행하겠습니다. 평만경의 사신을  전하께서 친히 
인견하시고 도장을 내려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와  있던 승려 정우까지 입시케  한 후에 사신을 불러서 주는 
것이 좋겠소."
  예조판서 허조는 명을 받들고 물러났다.
  이윽고 전하는 근정전에 임어했다.
  전상과 전 아래 품계석 앞에는 영의정 이하 만조백관들이 순서를 따라 금관조
복과 사모품대로 엄숙히 나열해 있고, 좌우편에는  기치창검의 의장이 햇빛을 받
아 눈이 부시도록 휘황했다.
  조금 뒤에 예조참판은 일본 구주 평만경의 사신과 승려 정우를 대동하고 들어
와 세종전하께 사배를 드려 알현케 했다.
  일본 구주 사신은  예조에 올렸던 평만경의 통호를  구하는 글월을 전하 앞에 
부복해서 낭독했다.
  세종전하는 친히 옥음을 내린다.
  "일본 구주의 서해로 총관 평만경이 조공을 바치고 통호하기를 청하면서  도장
을 하사하라 하니  가상한 일이다. 앞으로 더욱 정성을 다해서  대마도 해적들을 
제압하라. 먼저 건너온 승려 정우도 우대해서 흥천사에 유아게 했다. 이 뜻을 만
경에게 전하라.  그리고 원에 의하여  형산백옥 도장을 평만경에게  내리니 더욱 
정성을 다하여 평화롭게 통호하는 일을 계속하게 하라!"
  세종전하의 옥음은 낭랑하고도 엄숙했다.
  구주 본토의 왜국  사신과 승려 정우는 머리를  조아리고 백번이나 절을 드려 
사은했다.
  전하께서는 다시 예조판서에게 분부했다.
  "예조판서는 평만경에게 내리는 옥도장을 왜사에게 전하라!"
  예조판서 허조는 준비했던 옥도장과 곽을 비단보에 싸서 사자에게 전했다.
  왜사는 다시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분부를 내린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에게 영을 내려서,  구주 본토에서 조공을 바치매 왕래하
는 왜사들에게는 절대로 적대행동을  취하지 말고 보호케해서 차질이 없도록 하
라. 그리고 병조에서는  일일이 표신을 홰사에게 주어서 대마도 해적이  아닌 것
을 증명해주도록 하라."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는 전하의  작은 일에까지 빠짐없이 소명하게 처리하시는 
일에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아뢴다.
  "왜인들의 복색이 본토와 대마도의 구별이  없사와 판단하기 극히 곤란합니다. 
이제 주상전하의 특별하신 분부를 받들어 병조에서는 표신을 마련해 줄 뿐 아니
라 내보낼 때마다 비당 한사람씩 안동에서 모든 해방진에 통고하여 착오가 생기
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세종전하는 다시 한말씀을 내린다.
  "난폭한 무리를 정토하고 평화를 숭상하는 선민을 유도하여 보호하는 일은  천
지조화의 원칙이요, 왕도정치의  근본이다. 비록 겨레가 다른 이족이라하나 착하
고 죄 없는  자에게 해가 되는 일이 있게  한다면 이것은 하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다. 비록 정토하는 왕군을 움직이는 이때라  할지라도 옥석이 구분되지 않도
록 명심해서 처리하고 모든 장병들에게 나의 뜻을 선포하라."
  장중한 전하의 말씀을 듣자 만조백관들은 도량 넓은 성주를 모신데 대한 흐뭇
하고 느긋한 회포가 가슴마다 가득했다.
  왜국 사신들도  전하의 말씀을 왜역을  통해서 듣고 감격한  눈물을 머금었다. 
전하의 명에 의해서 남해바다  삼엄한 경비속에서도 왜국 본토의 사신들은 무사
하게 왕래할 수 있었다.
  소문은 일본 전토에  퍼졌다. 조선은 대마도의 국지정토를 할 뿐  왜국 본토를 
공격하지 않는 뜻을 확실하게 알았다.
  본토 왜인들은 기뻤다. 일본 서해로 구주총관  우무위 원도진은 평만경이 사신
을 보내듯이 조공으로 토산품을 바치고,
  '남만선의 해적의 떼가 조선해협으로 향하는 듯하오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상소를 올렸다.
  이때 서양해적의 배가 구주해협으로 침범했던 모양이다.
  예조에서는 원씨의 사자를 우대해 주고,
  '대마도 적도들이나 잡아 보내라!'
  답서를 주어 보냈다. 그 후에 남만선은 조선해협으로 오지 아니했다.
  세종전하의 평화를 사랑하는 왕도정치는 왜국 본토에 자자하게 퍼졌다.

    대군 진격
  삼군도체찰사 이조무는 대마도 정벌의  대명을 받은 후에 모든 군비를 정돈했
다. 경기, 충청, 전라, 경사 사도의 수군과 전선들은 속속 거제도로 집결되었다.
  세종 개해 유월 십칠일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중군, 좌군, 우군의 삼군을 통
솔하고 아홉 명 절제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늘 대마도 출정을 결행할 것이다. 모든 준비는 다 되었느냐?"
  "질서정연하게 삼군의 전함과 수군들이 함빡 정돈해 있습니다."
  아홉 절제사는 일제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곧 출동명령을 내리라. 천기를 바라보니 하늘에 구름 한점 없고, 바
다에 물결 또한 드세지 않다. 곧 거행하도록 하라!"
모든 아장들은 일제히 삼군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북소리가 '두둥둥' 울렸다. 병선마다  대장기가 바람에 펄펄 날렸다. 항구 안에 
겹겹이 정박해 있던 전함은 일제히 돛대를 올리고 닻줄을 풀기 시작했다.
  군사들의 들레는 소리와 전성마다  북을 울리는 소리는 산과 바다를 뒤흔들었
다. 호탕한 기세에 놀라 어룡도 물결을 박차고 바다 밑으로 쭈그렸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갑옷 입고 투구 쓰고 장검을 비껴 들고 장대위에 높이 
올라 군례를 받았다.
  아홉 절제사는 단 아래 서고  바다 위에는 전함이 학익진의 형세를 이루어 북
소리를 울리며 기를 높이 들어 삼군도체찰사를 향하여 군례를 드렸다.
  취타 소리, 징소리,  나팔소리, 태평소 소리, 바라  소리는 군례를 드리는 동안 
천지를 진동했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군례를 받은 후에 절제사들에게서 보고를 받는다.
  도절제사가 구군복 화려한 옷에 전통 메고 장대 앞에 나와 아뢴다.
  "삼군 병선 총수는  227척 이옵고 장사의 총수는 17,280명이요, 그리하옵고  군
사들이 싸우면서 먹을  양식은 65일 동안 밥을  지어먹을 양곡을 확보해서 배에 
실었습니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전군에 향하여 훈령을 내린다.
  "너희들은 하늘을 대신하여 대대로  우리 땅에 침략해 들어오는 악한 무리 대
마도 해적들을 토벌하는 정의로운 군사다. 다만  대마도를 포위하여 항복받을 뿐 
구주 본토의 왜인들은 정벌하지 아니하기로 했다.  이것은 왕도정치의 크나큰 덕
화를 펴시는  우리 왕상전하의 너그럽고  크신 신책시다. 절대로  무죄한 백성과 
늙고 어린 자들에게는 손을 대지 말도록 하라!"
  모든 군사들은 일제히 청령했다. 대답 소리는 또다시 하늘과 땅을 흔들었다.
  이종무는 또다시 훈시를 계속한다.
  "우리가 행군하는 길은 바다다.  지금 날씨는 무척 청명하고 바람 한 점 없다. 
그러나 바다의 천후는  삽시간에 변한다. 극히 조심해서 척후배 세척은  앞을 서
서 나가라! 전후를 살피며 기를 흔들어 군호하며 나가라!"
  모든 장사들은 도체찰사 이종무의 명령에 복종했다.
  대장군인 도체찰사 이종무는 담력과  효용이 절륜할 뿐 아니라 조수의 간만과 
천후의 변화를 빨리 살필 줄 아는 명장이었다.
  스스로 중군이 되어 전함 장대 위에 높이 올라앉아 망망한 만경창파를 박차며 
진군을 개시했다.
  227척의 전함이 중군 전함을  호위하고 좌우 함대가 학의 날개를 편듯 호호탕
탕 기세좋게 현해탄을 향해 나갈  때 홀연 하늘에 검은 구름이 끼기 시작하면서 
돌풍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앞에 나갔던 척후배 세척에서 기가 힘차게 흔들렸다.
  대장군 이종무가 중군 장대  위에서 바라보니 세척의 척후배에서는 일제히 검
은 기를 높이 흔들며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종무가 당초에 척후배를 앞질러 보낼  때 푸른 기, 붉은 기, 검은 기 세벌씩
을 나누어주었다. 붉은 기는 비가  쏟아질 때 흔드는 거요, 푸른 기는 일기가 청
명한 것을 알려주는 거요,  검은 기는 돌풍과 해일이 일어날 조짐이  있을 때 흔
들기로 약속한 신호기다.
  대장군 이종무는 침착했다.  만에 하나라도 사고가 발생되면  큰일이라 생각했
다.
  곧 장대 위에 친히 올라 대장기를 흔들고  북을 울렸다. 학익진을 벌여 나가던 
전함들은 대장선에서 흔드는 기를 보고 북소리를 듣자 일제히 닻을 내렸다.
  대장군 이종무는 급히 전령을 내렸다.
  "천기가 수상하다. 하루 이틀 진군이 늦다  하더라도 한 척의 전선이나 한명의 
군사라도 희생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빨리 뱃머리를 돌려  거제항으로 집결시켜
라!"
  대장군의 전령은 순식간에 전군함에 전해졌다.
  학익진을 이루었던 227척의 전함들은 일제히 돛대를 내리고 키를 돌렸다.
  전함들은 시각을 지체치 않고 일제히 거제항으로 집결되었다.
  대장군 이종무는 또다시 전령을 급히 내린다.
  "오늘 초저녁 때부터 크나큰 폭풍과 해일이 일어날 것이다. 연환계를 써서 2백
여 척의 배를 함빡 철환으로  연결시켜서 배가 전북되지 않게 하고 수군들은 밤
을 도와 수직하라!"
  대장군의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군사들은 일제히 배에 닻을 내리고 쇠고리로 
배와 배를 연결시켜 폭풍우와 해일에 대비했다.
  아니나다를까, 이날  밤 초저녁 때부터  바람이 강하게 불고  비가 쏟아지면서 
바다 위에는 돌풍과 해일이 길길이 솟구쳐 일어났다.
  그러나 거제항은 예로부터 바람과 해일과 돌풍을 막는 양항이었다.
  흉악하고 무서운 돌풍과 해일 속에 배 한척 전복되지 아니하고 군사 한 명 다
친 사람이 없었다.
  돌풍과 해일은 이틀 동안을 계속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이틀동안 쉬는  사이에 군사들에게 고기와 술과 밥을 배불리 
먹였다. 사기는 충천하고 대장군 이종무의 슬기로운  용병을 찬양하는 소리가 높
았다.
  227철의 대함대는 이틀 밤을 거제 남면 주원방포에서 묵었다.
  6월 19일  임진이 되었다. 날은 다시  쨍쨍하게 개고 바다에는  바람도 드세지 
아니했다. 해변은 다시 안온하도록 고요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새벽부터 천기를 살핀 후에 전함대에 영을 내렸다.
  "돌풍과 해일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일기가 명랑한 법이다. 그러므로 태풍일과
라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이제부터는 하늘에는 아무런  이변이 없을 것이다. 모
든 장병들은 마음을 턱 놓고 다시 전함대를 출동시키라!"
  원래 명장의 믿음직한  지휘였다. 모든 장수와 사병들은 이틀 동안  배불리 먹
어 기운이 왕성했다. 어깨를 으쓱거려 출전준비에 바빴다.
  사시가 되었다. 227척에 분승한 17,280명의 수군 용사들은 일제히 전함을 띄워 
대마도로 향했다.
  바다의 불결은 잔잔하고  징소리, 북소리 나팔소리에 놀란  백구때들은 산지사
방 펄펄 날았다.  하루낮, 하룻밤을 지나 동이 환하게 텄다.  대마도가 바로 지척
에 보였다. 20일 오시가 되었다. 대장군 이종무는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먼저, 전함 10척은 기를 내리고 전함대의 앞에 서서 대마도로 상륙하라. 나머
지 2백여 척은 서서히 대마도를 포위할 것이다!"
  대장군의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전위부대였던 전함 10척은 기를 내리고 쏜살
같이 대마도로 향했다.
  대마도 왜적들은 10척의 배가  쏜살같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조선으로 노략질
하러 갔던 저희들 배가 크나큰  재물과 양식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는 것으로 잘
못 알았다.
  "배가 온다! 조선으로 갔던 우리 배가 온다!"
  바닷가에 나갔던 한놈이 헐레벌떡거리고 대마도로 뛰어들어갔다.
  "무어야, 배가 몇 척이나 오느냐?"
  "여남은 척이 오는 것 같다."
  "50여 척 간 배 중에서  선발대가 오는 구나. 애를 썼다. 물건을 많이 뺏어 올 
것이다. 빨리 나가서 마중을 해라."
  늙은 놈팡이가 지껄였다.
  이 소문은 대마도 온 동리에 퍼졌다.
  여자들이 뛰어나왔다.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아버지가 온다. 금은보화  조선 보물을 산더미같이 싣고 오는 모양이다.  어서 
빨리 해변으로 나가보자."
  한편에서는 늙은 놈팡이들이 지껄였다.
  "마중을 나가는데 빈손으로 나갈 수 있느냐.  곡식과 재물을 태산같이 싣고 오
는데, 죽다가 살아오는 사람들을  어찌 빈손으로 나가 맞이한단 말이냐. 술을 거
르고 소를 잡아서 고생한 사람들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
  온 섬사람들은 노소남녀를  말할 것 없이 술을  거르고 고기를 재어서 제각기 
아비와 자식과 형제들 도둑놈들 맞이하러 해변으로 나갔다.
  대마도 앞바다에는 새까맣게  왜추들이 모여들었다. 늙은 자는  한손에 지팡이
를 짚고 손에 술병을 들었다. 젊은 계집은  새끼를 업고 바구니에 담은 고깃덩어
리를 들었다.
  어린것들은 누런 코를 줄줄 흘리며 손가락을 입에 물고 도둑질해 돌아오는 아
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는 점점 가까이 왔다.
  늙은 놈, 늙은  어미, 젊은 계집, 어린 자식들은 가깝게  포구로 들어오는 열척
의 배를  보고 깡충깡충 뛰면서 손뼉을  치고 손을 흔들어 환성을  오렸다. 젊은 
여자들은 머리에 썼던 수건을 벗었다. 저희 남편이  돌아오는 줄 알고 팔이 떨어
져라 하고 수건을 흔들어 댔다.
  열척 배는 포구에 닿아졌다. 배 안에서  사람들이 우둥우둥 뛰어내리기 시작했
다.
  왜추들이 바라보니 저희들  대마도 사람들이 아니다. 칼과 창과 활을  답은 조
선 장사들이었다.
  수백 명 조선 군인들이 날랠 용 자 벙거지를 머리에 쓰고 범같이 소리치며 육
지로 달려들었다.
  대마도 왜추들은 '으악' 소리를 치며 기절초풍을 했다.
  "조선 군사들이다!"
  고꾸라지며, 자빠지며, 술병과 고기뭉치를 내던지고 혼비백산이 되어 섬안으로 
달아났다.
  대마도 섬 안은 발끈 뒤집혔다.
  "조선군사가 쳐들어온다. 수백 척의 큰 병선에 십만 대병이 쳐들어온다."
  "무어야, 조선군사 십만 대병이?"
  모두 다 경풍이 되어 눈알을 희번덕거렸다.
  "노략질하러 갔던 우리 군사가 오는 줄  알았더니 조선 군사가 온다. 우리군사
는 모두 다 함몰이 되어 죽은 모양이다. 어찌하면 좋으냐?"
  발들을 동동 굴렀다.
  "도망을 가야 한다. 어서 빨리 달아나자. 잘못하다가는 다 죽어 버린다."
  "어디로 가느냐?"
  "별수 있느냐, 산골 속으로 피해가야 한다."
  섬 백성들은 양식 보따리를 들고 어린 자식들을 업은 채 험난한 산골 속 바윗
돌 틈으로 기어들었다.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은 조선  수군이 대병이 풍우같이 상륙한다는 소식을 듣
자 황겁하기 짝이 없었다.
  갈팡질팡,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일지병마를 거느리고 배를 타고  장기로 달
아났다.
  한편 열척의 척후배를 선두로 했던 220여 척의 병선과 1만 7천여 명의 아군은 
대장군 이종무의 지휘에 따라 서서히 섬으로 상륙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항왜를 통하여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에게 항복하라는 격문을 
보냈다.
  그러나 섬은 이미 텅 비다시피 하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상륙한 대부대는 길을 세곳으로 나누어 상도와 하도의 적을 수색했다.
  왜추들은 해변과 산골 험한 바위 틈에 복병을 구고 아군을 대항했다.
  전투는 사흘 동안을 계속했다.
  아군은 파죽의 형세로 적의 병선 129척을 노획하고, 적호 1,939호를 불살랐다.
  적병 114명을 목베고 121명을 사로잡았다.
  이밖에 중국 사람 남녀 131명을 노획했다.
  중국에서 물길을 따라 대마도에 거접했던 한인들이었다.
  대장군 이종무는 한인들을 진무한 후에 도망친 왜추들의 상황을 물었다.
  "너희들은 배은망덕한 왜추들이 아니고 한인이다.  너희들의 목숨을 보장해 줄
테니 겁내지 말고 이실직고하여 묻는 말에 대답하렷다."
  한인 부로들은 고두백배하고 대답한다.
  "저희들은 중국에서 배를 부리던 사공들의  후손입니다. 선대적에 풍랑에 휩쓸
려 이곳에 왔다가 이내 거접해 살고  잇는 무리들입니다. 살려주신다니 은혜로운 
말씀 이루 다 아뢸 길 없습니다. 물으시는  대로 왜추들의 사정을 은휘하지 아니
하고 아뢰겠습니다."
  "저항하는 왜적 수백 명은  이미 다죽이고, 항복받았거니와 꼭지두목인 도도웅
환의 무리는 어디로 달아났느냐?"
  "도도웅환은 처음에는 배  열척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으로 노략질하
러 갔던 저희 배가 들어오는 줄 알고  무한 기뻐했다가, 급기야 상륙하는 군사가 
조선 군사인 것을  알자 친위군의 일부를 매복해서 대항하라 했다가,  수백 척의 
큰함대가 계속해서 상륙한다는 소식을 듣고 망지소조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직속 부대의 일지병마를 거느리고 황황히 배를 저어 장기로 달아났습니다."
  "장기는 왜국 본토 구주의 서편 끝이 아니냐?"
  "네, 그러합니다."
  "데리고 달아난 군사의 수효는 얼마나 되느냐?"
  조선으로 노략질하러 나간 군사가 천여 명이고,  이번 장군의 위하를 대항하다
가 죽고 상한 자가 백여명이 넘었으니 데리고 달아난 군사는 불과 천 명 이내일 
것입니다. 저자들은 필시 구주 본토의 구원을  얻으려고 그곳으로 달아난 모양이
나, 구주 사람들은 이번  싸움에 개입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조선 국왕전하께 조
공을 바치고 좋게 지내자고 사자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니, 도도웅환을 도와 줄리 
만무합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한인의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주주  본토의 사자들이 
조공을 바치러 본국에 드나드는 것을 이종무는 잘 알고 있는 때문이다.
  다시 한인에게 묻는다.
  "적이 배에 싣고 장기로 달아난 군량은 얼마나 되겠느냐?"
  "잘해야 수십 섬밖에 못 실었을 것입니다."
  "수십 섬을 가지고 천 명 군사를 어찌하여 먹여 살린단 말이냐?"
  "구주 사람들한테 얻어먹을 작정을  한 모양입니다마는, 구주 사람들이 대마도 
사람들에게 군량미를 대어 줄리 만무합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해마다 기막힌 흉
년이 들었습니다. 돈많은  부자들도 달아날 때 창졸간의 일이라 한두  말밖에 가
지고 달아나지 못했습니다. 전쟁은커녕 모두 다 굶어 죽을 판입니다."
  이종무는 한인의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밤에 대장군 이종무는 좌우중군 삼군의 아장들을 장청에 불러 놓고 전략
을 협의했다.
  이종무는 아장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제장들도 한인에게 적의 정보를 들어 알았거니와, 지금 적의 괴수 도도웅환은 
아군의 위세에 눌려서 황겁하게  일지병마를 이끌고 대마해협을 거쳐 구주 본토
의 서편인  장기로 도망을 쳤다하오.  그러나 구주 본토의  대명들은 우리나라에 
조공을 드리고 있으니  절대로 대마도 군사들을 도와줄 리 만무하오,  말을 들으
니 천여명 대마도  군사들은 급히 달아나느라고 군량미조차  싣고 간 것이 불과 
수십섬이라 하니, 우리 군사를 대항하기는커녕 굶어  죽게 되어 자중지난이 일어
날 것이 분명하오. 멀리 잡고 한달 가량만  지나간다면 적들은 항복하고 말 것이
니, 오래 묵을 계획을 차리는 것이 좋겠소."
  우군도절제사 이지실이 출반하여 말한다.
  "대장군의 말씀과 같이 구주 본토의 왜인들은 상왕전하의 위엄에 눌려서  대마
도 정벌에 대항하지 아닐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하나 우리는 도도웅환이 군사
를 거느리고 이곳까지  도로 와서 항복하기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군사
들의 사기가 떨어져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바다를  건너 장기까지 나가서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우군도절제사 이지실의 말을 듣자 좌군절제사 박실이 출반해 말했다.
  "이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 군사들은  모두 날쌔고 용맹스런 군사들입니
다. 전쟁터에 나와서  적과 대결할 기회가 없다면 도리어 기운이  떨어지고 권태
증이 생기는 법입니다. 바다 물결을 박차고 장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옳습니다. 이 도절제사와 박 절제사의 의견이 가한 줄 아뢰오."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다  대마해협을 건너서 도도웅환이 도망가 있는 장기까지 
진격할 것을 주장했다.
 이종무는 역시 이름난  장수다. 독선을 취해서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지 아니했
다.
  "여러분의 의향이 정 그러시다면  한 번 장기까지 나가서 대마도 도둑의 괴수
를 생포하기로합시다. 병선이  2백여 척에 여룡여호한 수군이 수만  명이고 또한 
양식까지 넉넉하것다 무엇을  주저하겠소.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에 출정준비를 
완료한 후에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대마해협으로 건너기로 합시다."
  대장군 이종무는 쾌하게 결단을 내린다.
  모든 장군들은 다시 출정준비에 바빴다.
  한편 이종무는 또다시 삼군에 전령을 내린다.
  "지금 오월기후다. 척박한 땅이라서 아직도 보리  타작을 아니한 곳이 많다 이
것을 그대로 둔다면 적의 식량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구주 장기로 출발하기 
전에 말끔하게 타작을 해서 우리 전함에 싣고 청야를 하도록 하라."
  청야란 말쑥하게 들을 깨끗하게 치워서 적군의 양식이 되지 안도록 하게 하는 
병법 중의 하나다.
  재장군의 명이 떨어지니  수만 명의 조선 군사들은  일제히 농군이 되어서 상
도, 하도에 흩어져 있는 보리밭을 샅샅이 찾아서 타작하기에 바빴다.

    장기원정
  만여명의 아군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일변 보리를 베고 일변 타작을 해서 곡식
을 털기 시작했다.
  타작한 보리는  무려 수천 섬이었다. 작석을  해서 병선마다 가득가득 실었다. 
만여 명이 두어 달  먹고도 남을 만한 풍부한 군량미다. 사기는  백 배나 솟구쳤
다.
  대장군 이종무는 대마도의 청야를 마친 후에 일진 좋은 길일을 택하여 장기로 
향하는 진격명령을 내렸다.
  일기는 온화하고 바람은 잔잔했다. 창파를 헤치며 2백여 척의 병선은 북을 '둥
둥' 울리며 대마도 해협을 건넜다.
  바다 위에서는 위풍당당한  아군의 기세에 눌려 왜선  한척 대드는 일이 없었
다.
  망망대해다. 하루낮, 하룻밤을 행선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중군장대에 높이 올라 바다 밖을 바라본다.
구주 반도의 서편 첨단인 장기 항구가 가물가물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급히 북을 쳐서 전령을 내린다.
  "장기 항구가 가까워졌다. 일기  해협만 지나가면 바로 장기다! 병선마다 크게 
위세를 보여 징과  꽹과리와 북을 어지럽게 쳐라. 그리하고 모든  군사는 일제히 
긴장된 태세를 취해서 활과 창을 들어 임전태세를 취하라!"
  좌군, 우군, 중군은 대장군의 명령을 듣자 질서정연하게 학익진을 이루어 일기 
해협을 통과했다.
  이때 돌연 왜선 큰 배  한 척이 흰기를 어지럽게 흔들며 바다 위로 나타나 쏜
살같이 우리 병선을 향하고 달려왔다.
  척후배가 급히 대장군 이종무의 중군선에 가까이 가서 아뢴다.
  "왜배 한척이 백기를 흔들며 저어옵니다.  대마도 왜추의 항복하는 배인가봅니
다."
  대장군 이종무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구주까지 달아난 대마도 해적의 괴수가 아직 항복하러 들지는 아니할 것이다. 
협사를 하고 온 놈인지 모르겠다. 배 안에는  몇 놈이 타고 있더냐? 그리고 복색
은 어떻게 차렸더냐?"
  "관원복색을 차린 세 사람뿐입니다. 무장은 하지 아니했습니다."
  "어디서 오는 자인지 똑똑히 물어 보고 몸수색을 한 후에 나한테로 데리고 오
너라!"
  척후배는 다시 살같이  달려갔다. 이윽고 왜선 한척을  인도해서 대장군선으로 
가까이 왔다.
  척후배 장교가 다시 고한다.
  "일기주총관의 사자이온데 우리나라 왕상전하께 조공을 바치러 가는  길이라합
니다. 때마침 조선 수군대장의 함대를 만났으므로  장군께 경의를 표하고 조선으
로 들어가는 허가를 얻으려 한다합니다."
  이종무는 비로소 일기의 왜인들이  조선 수군의 위세에 놀라서 혹시나 장기로 
향하는 도중에 일기를 공격할까  두려워서 구주총관들의 본을 떠서 부랴부랴 조
선정부에 조공을 바치러 가는 것임을 짐작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척후배 장교에게 명령을 내린다.
  "왜국 일기주총관의 사자라는 자들을 대장선으로 인도해라."
  이때 조선 병선 2백여 척은 왜배 한 척이 대장선으로 접근해오는 것을 바라보
자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 대장선을 호위해 둘러샀다.
  왜추들은 어마어마한 조선 병선의 기세에 눌려 부들부들 떨었다.
  척후장교는 일기주총관의 사신이라는 자들을 대장선으로 인도했다.
  왜추들은 대장군 이종무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사배를 드렸다.
이종무는 갑주에 투구 쓰고 호상에 높이 앉아 묻는다.
  "너희들은 어느 곳에 소속된 왜추들이며 요망하게 일엽편주를 저어 감히  나를 
만나보겠다 했느냐? 왕군의 항해를 방자하게 범했으니 군법시행을 해서 목을 베
리라."
  이종무는 일부러 노기를 얼굴에 가득 띠고 추상같이 얼러댔다.
  왜추들은 바들바들 떨었다. 턱에 경련이 일어났다. 이빨이 다그락 다그락 소리
를 내며 달달 떨었다.
  "그저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목숨을 살려줍시오. 철이 없고 무식해서  대함
대의 항해를 멈추게 했으니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하오나 좁은 소견에 급
히 아뢸 일이 있어 백기를 흔들어 충정을 전하려 했습니다."
  "무슨 소회가 있어서 내 배를 멈추게 했더냐?"
  이종무는 여전히 노기등등하였다.
  "소인들은 일기주총관 상만호  도영의 신하로서 토산품을 받들고 조선 국왕께 
조공을 바치러 가는  길이옵니다. 뜻밖에 해상에서 대마도를  토벌하시는 대장군
의 대함대를 만났습니다. 경의를  표해서 이 사실을 장군께 고하고, 허가를 얻어
서 조선으로 향하려  합니다. 저희들은 대마도의 해적과는 다른 구주  본토에 소
속된 왜인들이옵니다. 굽어살피시어  귀국으로 조공드리러 가는 것을  허락해 주
시고 무사하게 한양에 당도하도록 표신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왜추들은 이내  품안에서 일기총관이 조선 예조판서에게  보내는 국서와 조선 
국왕전하께 바치는 조공 물목을 꺼내 보였다.
  대장군 이종무가 받아 보니  틀림없는 일기총관이 조선국왕께 신하가 되어 통
호하기를 원하는 글월이었다.
  이종무는 즉석에서 놋쇠로 만든 수묵통 뚜껑을 열고 필낭에서 붓을 꺼내서 부
산포 진관에게 보내는 글월을 썼다.
  '왜국의 일기주총관이 우리나라  주상전하께 칭신을 하고 조공을  바치기 위하
여 사자 세사람이 가는 길이니  입국을 허락해 주고 한양까지 가는 편의를 보아
주기 바라오. 정동대장군 도체찰사 이종무.'
  이종무는 쓰기를 마치고 수결을 두어 일기 사신에게 내주었다.
  일기 사신들은 고두백배하고 대장군의  글월을 품안에 간직한 후에 자기 배로 
돌아가 일로 조선으로 향했다.
  세종대왕을 주상전하로 모신 조선의 위세는 바다 밖 모든 나라의 추앙하는 좌
표가 되었다.
  조선함대 2백여 척은 일기 사신을 떠나보낸 후에 더한층 사기가 왕성했다.
  "구주 본토의 왜추들이 우리나라 위세에 눌려 변방이 되기를 원해서  조공까지 
바치러 가는 판국인데 우리의  옛땅이었던 대마도에 사는 해적들이 까불어 댄들 
몇 푼어치나 까불어댈  테야! 아주 이번에 씨를 말려 버리고  대마도는 무인지경
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저놈들이 장기로 달아났지만 일본 국왕 이하 구주의 모든 총관들이  우리나라
의 신하되기를 원하는  판인데 대마도놈들을 도와줄 리 만무하다. 빨리  해적 괴
수들이 도망간 곳을 수탐해서 깡그리 산채로 잡아서 항복을 받아야 한다.!"
  2백여 척의 병선에서는  군사들이 노를 저어 푸른물결을 박차며 박장대소들을 
하여 떠들어댔다.
  위풍당당한 대함대는  호호탕탕 승전고를 울리며 일기  해협을 지나 서편으로 
내려가 장기현 하현군 대선월 이란 곳에 당도했다.
  옛 지명으로는 훈내곶이라고도 하는 곳이다.
  대장군 이종무는 급히 전령을 내렸다.
  "먼저 적의 정세를 살펴야 할 것이다. 다음 명령이 내릴 때까지 병졸들은 전함 
위에 머물러 잇고 일체 상륙하지 말라!"
  대장군의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학익진을 벌여 호탕한 기세로 바닷가에 들어
왔던 2백여 척의 대함대는 일제히 북소리,  징소리를 거두고 일자진을 쳐서 해상
에 닻을 내린 채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군 이종무는 모든  아장들과 향도로 데리고 갔던  항왜 두 명을 거느리고 
장대 위에 올라 육지를 바라보았다.
  멀리 항구 뒤에는 겹겹이 둘어싼 산줄기가 솟아 있고 해변가에는 촌락이 점점
이 벌여져 있었다.
  다시 부두  앞을 바라보니 본토백성들이 고기잡이배와  대마도 해적들이 끌고 
간 병선들이 함께 섞여서 수백척 나열해 있었다.
  대장군 이종무는 향도에게 물었다.
  "이곳이 대마도 도도웅환이란 자가 피신해온 곳이로구나!"
  "네, 그러합니다."
  "저기 보이는 저 산 이름은 무슨 산이라고 부르느냐?"
  "누까오까라고 하는 산이올시다. 이곳에서 삼십 리  가량 되는 곳에 있는 두지
포라는 곳에 있는 산이올시다."
  "산이 좀 험상맞아 보이는구나!"
  "그렇습니다. 가파르고, 험한 골짜기가 많습니다."
  "나무도 무성하구나!"
  "왜국은 기후가 습하고 안개가 많아서 어느 곳이나 나무가 많습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로 어떠한 전략을 생각해 보는 모양이었다.
  대장군 이종무는 다시 항왜한테 묻는다.
  "대마도 해적의 괴수 도도웅환이란 놈은 필시 저 산골 속에 숨어 있을 듯하다. 
너희들은 이곳 지리를 짐작하고 있느냐?"
  "네, 잘 알고 잇습니다.  도도웅환은 구주 본토 속으로 깊이 들어가 있지는 못
했을 것입니다. 해안선  일대에 숨어서 조선군의 동정을 엿보고 있을  것이 분명
합니다."
  "왜 구주 본토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 있지 못하느냐?"
  이종무는 구주 왜인과 대마도  왜인과의 관계를 대강 짐작하면서도 일부러 한 
번 물었다.
  향도가 대답한다.
  "구주 대명들은 조선국왕께 통호를 하자고 조공을 바치고 있습니다. 만약 도도
웅환을 받아들인다면 구주까지  조선군이 토벌을 할 것입니다.  이러하니 도도웅
환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뿐만 이니라 지금 구주도 식량이  부족한 형
편인데 대마도에서 쫒겨온  군사들을 어떻게 먹여 살립니까? 이러하므로 구주에
서는 도도웅환의 군사를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향도들에게 분부했다.
  "이제 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일이 있으면 다시 부르리라."
  향도들이 물러간 후에 이종무는 모든 아장들을 불러 명령을 내린다.
  "오늘 하루는 군사들을  배 안에서 편히 쉬게  하고 내일은 이른 새벽에 밥을 
지어 먹인 후에  일제히 상륙을 개시해서 야산에  올라 나무를 작벌하여 해안선 
일대에 목책을 두르게 하라."
  좌군 지휘관 박실이 묻는다.
  "지금 군사들의 사기는 충천해 있습니다. 상륙하는  즉시로 절이 있는 곳을 수
탐해서 적의 괴수를 사로잡는 일이 상책이올시다. 공연한  힘을 나무 베는 데 허
비해서 사기를 태만케 하는 것은 불가한 줄로 아뢰오."
  대장군 이종무는 고개를 가로 흔들면서 웃고 대답한다.
  "자리를 모르고 군사를  함부로 움직인다는 일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오, 
먼저 목책을 해안선 일대에 둘러쳐서  적의 도망갈 길을 끊고 적의 전선을 모조
리 불살라 버린다면 적은 진퇴유곡이 되어 항복하고 말 것이니 공연히 군사들을 
위험한 땅에 빠뜨리게 할 까닭이 없소. 대장은  항상 군사들의 귀중한 생명을 생
각할 줄 알아야 하오."
대장군 이종무의 말을 듣자 좌군  지휘관 박실의 얼굴엔 약간 무안한 빛이 떠올
랐다.
  "용장이 지장만 못하다고 합니다마는, 싸울 때는 싸워야하지 않겠습니까.  공연
히 우유부단한다면 날짜만 천연할 뿐입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박실의 말을 듣고 껄걸 웃었다.
  "우유부단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정세와 지리를 살피자는 것이지. 그리한 후에 
용병을 한다면 백전백승하는 법이오. 두말 말고 대장의 군령을 지키시오."
  좌군 지휘관 박실은 무료하게 물러났다.

    적전상륙
  대장군 이종무가 군사들을 일제히 상륙시켜서 야산 숲 속의 나무를 베어 해안
선 일대에 목책을 두르자 한 것은, 돌 한  개를 던져서 새 두마리를 맞히자는 계
획이었다.
  첫째로 장기 훈내곶이포에는 부둣가에 고기잡이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약간 보
일 뿐 대마도 왜병들의 모습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아니했다.
  조선의 대함대가 이곳까지 쫓어온 것을 적의 괴수 도도웅환이 모를 리 만무하
다.
  반드시 복병을 숲속에 매복시켜서 대항할 것이  분명했다. 비교적 평탄한 곳에
서 적을 유인해서  진살시켜 버리자는 것이요, 해안 일대에 목책을  두르자는 것
은 오도가도 못하는 피곤한 왜적이  주림을 면치 못하여 저절로 항복하러 올 것
을 예기한 계획이었다.
  이때 대마도  해적의 두목 도도웅환은 훈내곶이에  있지 아니하고 두지포에서 
10리 되는 험준한 산악지대 '누까오까'라는 곳에 있었다.
  대마도에서 쫓겨온 도도웅환은 조선  수군의 대병이 설마 구주 본토인 나가사
키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다. 당황하고 낭판이 떨어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본시 구주로 도망쳐 온 것은 구주의 모든 대명들에게 구원병을 청하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여러 곳 대명들에게 교섭했으나  모든 대명들은 조선과 통호하기를 원해서 제
각기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바치는  중이라 모두 다 냉담하게 고개를 가로 흔들
어 구원할 것을 거부했다.
  식량은 얄팍얄팍 떨어져가기 시작했다.
  훈내곶이 포구에 배치해  둔 오십여 척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해적질을 하며 
달아나고도 싶었다.
  그러나 훈내곶이에는 벌써 조선의 대함대 2백여 척이 일자진을 쳐서 정박하고 
있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리할 수도 없었다. 강악  산골 속에 갇힌 몸이 군사들과 함께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되었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하나 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장탄식을 했다.
  밤은 이미 깊었다.
  도도웅환은 깜박거리는 호롱불 아래 이리 뒤치락,  저리뒤치락 한숨만 쉬고 누
웠을 때 보발 군사가  급히 뛰어와 문을 두드리며 고한다. 어부  복색을 하고 정
탐꾼이 되어 훈내곶이로 내려갔던 자다.
  "장군님, 큰일났습니다."
  "훈내곶이에서 돌아왔느냐? 무슨 큰일이 났느냐"
  "내일 이른 아침에 조선 수군 일만 칠천여 명은 일제히 훈내곶이로 상륙을 한
다 합니다."
  도도웅환은 크게 놀랐다. 혀가 굳어서 말꼬리가 얼얼했다.
  "또 한가지 큰일난 일이 있습니다."
  "무어냐, 또 큰일난 일이 있다? 무어냐?"
  "야산에 올라 나무를 베어서 해안선 일대에 책을 두른다 합니다."
  "저런 변이 있나, 꼼짝달싹 달아날 길이 막혔구나. 어찌하면 좋으냐?"
  도도웅환은 좌불안석을 했다.
  도도웅환의 아장 한 사람이 고한다.
  "지금 우리 군사의  형편으로 보아서는 조선군에 항복하지 않는다면 중국으로 
달아날 탈출구를 찾아야 합니다. 바다로 달아나자면 배가 필요합니다. 지친 우리
들의 배는 함빡  조선군이 정박하고 있는 훈내곶이에  매어두었습니다. 조선군이 
배에 불을 질러  태워버리기 전에 빨리 밤을  도와 전군을 휘동하여 훈내곶이로 
달아나 야산 기슭에 숨었다가  상륙하는 조선군을 뚫고나가서 배를 타고 달아나
야합니다. 이것이 우리들 수천 정병의 목숨을 수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어두운 
밤을 터서 장군께서는 전군을  휘동하여 훈내곶이 야산으로 내려가시는 것이 상
책이올시다."
  또 한 장수가 고한다.
  "아장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 군사가 누까오까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다면 
독안에 든 쥐의 형국이올시다. 굶어 죽게  됩니다. 때마침 일이 잘되었습니다. 조
선국이 해안선에 목책을 두르기 위하여 내일 아침에 야산으로 상륙을 한다 하니 
밤을 도와 야산에 복병을 두었다가 상륙하는 조선군을 시살하고 배를 저어 달아
나게 하십시오. 하늘이 우리를 살게 하는 절호한 기회올시다."
  도도웅환은 두 장수의 말을 듣자 그럴 듯하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곧 전군에  출동명령을 내려서 밤안으로 훈내곶이로 내려가 야산에 
매복을 끝내도록 하라!"
  도도웅환의 허락이 떨어지니 대마도  해적들은 일제히 무장을 한 후에 어두운 
밤을 타 발자취를 죽이며 훈내곶이로 내려갔다.
  앞에는 도도웅환이 갑옷투구에  일본도를 들고 말을 달려나가고,  뒤에는 아장
들이 군사를 거느려 길고 긴 야산 일대 으슥한 숲속에 왜병들을 매복시켰다.
  어언간 날은 밝았다.  한편 조선군 대장 이종무는 큰북을 울려  전장병을 집결
시키고 엄한 군령을 내린다.
  "지금 곧 상륙작전을 감행하는데 주의할 몇 가지를 일러둔다. 나무를 작벌하러 
가는 야산 숲에는 반드시 적의 복병이 있을  것이다. 군사들은 뿔뿔이 헤어져 단
독 상륙을  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열사람씩 대오를 지어서  일제히 돌격작전을 
취하라. 한 대오 열사람 중에 다섯 사람은  도부수가 되어 도끼를 들고 기어들어
가 먼저 나무를 찍어 쓰러뜨리고  다섯 사람은 궁수가 되어 화살을 쏘아 적병을 
쓰러뜨리라. 적이 쓰러지면 적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날 것이다. 궁수들은 반드시 
화살 백 대씩을 준비해서 활을 쏘면서 돌격을  개시하라. 또 한가지 당부할 일이 
있다. 육박전이 개시될 때 왜적들은 장검을 잘 쓴다. 우리 군사들은 날카로운 장
극 한벌씩을 준비해서 창으로 적을 찔러 죽여라.  만약 열사람씩 대오를 짜지 않
고 단독 상륙하는 군사가 있다면 참형에 처하리라!"
  대장군 이종무의 엄한 군령이  떨어지니 좌군, 우군, 중군 삼군의 일만 칠천여 
명의 군사는 일제히 몇  사람씩 대로를 짰다. 한 대오마다 다섯  사람은 양편 손
에 날카로운 도끼를 들고 다섯  사람은 화살을 가득히 전통에 꽂아 어깨에 메고 
예리한 창을 등에 메었다.
  삼군의 지휘관들은 일제히 대오 짠 군대를 점검했다.
  큰북이 '두둥둥' 울렸다. 대장선의 기수는 대장기를 높이 흔들었다.
  대장군 이종무의 호령이 떨어진다.
  "적전 상륙을 개시하라!"
  2백여 척의 전함에는 일만 칠천여 명의 전투부대가 뛰어내렸다.
  일만 칠천여 명이 대장군의 명령대로 열 사람씩 대오를 짰다.
  일천칠백의 소대는 가로 횡대를 이루어 일제히 돌격을 시작했다.
  아니나다를까, 간밤에 누까오까에서 야산  일대로 집결되었던 마마도 왜적들은 
숲속에 잠복했다가 조선군의 돌격작전을 보자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다.
  조선군의 도부수들은 도끼를 들고 엉금엉금 숲속으로 기어들었다.
  뒤에서는 궁수들이 화살을 쏘아 엄호작전을 취했다.
  큰 솔, 작은 솔, 이름모를 나무들이, 기어들어간 도부수들의 억센 도끼날로 '우
지끈 뚝딱' 잘려지고 쓰러졌다.
  울창한 푸른 숲속에 몸을 숨겨서 화살을 쏘아붙이던 대마도 복병의 모습은 청
천백일 아래 환하게 드러났다.
  원래 조선군은 활을 잘  쏘는 명궁들이었다. 뿐만 인다. 대장군의 주밀한 명령
을 받들어 한  군사가 백 대씩 화살을  가졌다. 적의 살이 열 대가  날아왔을 때 
조선군은 백번을 쏘아 붙일 화살을 풍부하게 가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살끝마다 
독을 칠했다. 맞기만 하면 독이 퍼져 죽어버린다.
  때마침 바다에는 강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은 산과 숲으로 향하여 
강하게 불었다. 적이 내려쏘는  화살은 바람에 막혀서 날아가는 힘이 약했다. 그
러나 조선군이 쏘아대는  화살은 강하게 부는 바람을  타고 힘차게 날아서 적을 
쏘아 맞혔다.
  나무는 도끼로 갈겨 계속해서 쓰러지고 복병들은 살을 맞아 고꾸라졌다.
  머리가 깨지는 놈, 눈알이 빠지는 놈, 명치에 살이 박혀 비명을 질러 자빠지는 
놈, 아비규환의 구슬픈 소리가 조선군의 함성과 함께 천지를 진동했다.
왜적들은 조선군을 대항할  도리가 없었다. 풍비박산이 되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은 마상에서 장검을 빼어 들고 아장들과 함께 군사를 지휘
하다가, 전세에 불리함을 보다 급히 말머리를  돌려 누까오까를 향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때 좌군 지휘관 박실은  달아나는 도도웅환을 발견하자 급히 전통에서 화살
을 뽑아 화궁을 당겼다. 살은 시위소리를 강하게 내며 푸르르 날았다.
  급히 달아나는 도도웅환의  투구 끝을 쏘아 맞혔다. 투구는 땅에  떨어지고 도
도웅환의 간담은 싸늘해서 콩알만큼 오그라졌다.
  도도웅환은 겁결에 목이 떨어진 줄 알았다. 급히 아장에게 물었다.
  "내 목이 어디로 굴러 떨어졌느냐?"
  "아니올시다. 목은 붙어 있습니다. 투구가 떨어졌습니다."
  아군의 고함소리는 천기를  진총했다. 박실은 혼비백산이 되어  달아나는 도도
웅환의 뒤를 쫓았다. 다시 화궁을 가득히 당겼다.
 달아나는 도도웅환을 쏘았다.
 살은 또다시 도도웅환의 어깻죽지를 맞혔다.
  그러나 철갑을 입었다. 살을 꿰어뚫지 못했다.
  도도웅환은 철갑에 화살이  꽂아진 채 아장의 구원을  받아 누까오까 깊은 골 
속으로 달아났다.

 
    강악대전
  이때 대장군 이종무는 멀리 장대 위에 서서 전투를 바라보다가 왜적이 대패해
서 누까오까로 구명도생해  달아나는 것을 보자, 급히 쟁을 쳐  군사를 거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군과 중군은 훈내곶이 야산 앞에서 군사를 거두니,  적의 죽고 상한 자가 무
려 오백여 명이나 되었다.
  좌군 지휘관  박실은 좌군 일대를 거느리고  누까오까로 달아나는 도도웅환의 
무리를 쫓아 몰살을 시키려다가 대장군이 급히 쟁을 쳐 군사를 거두라는 명령을 
듣자 발을 동동 굴렀다.
  "반나절만 전투를 더 계속했더라면 왜적들을 씨를 남기지 아니하고 다  처치해 
버릴 것을 아깝구나, 일이 분하다!"
  박실은 장탄식을 하면서 군사를 거두어 훈내곶이 야산 아래로 내려갔다.
  삼군이 모두 다 집결된 후에 대장군 이종무는 다시 명을 내린다.
  "모든 장병들의 신출귀몰한  슬기와 용감무쌍한 전투로 인하여 왜적을 쾌하게 
무찔러 크게 국위를  떨치게 했으니, 군사를 통솔한 책임자로서 기쁨을  이길 수 
없다. 모든 전공을 일만 칠천여 명 장병들에게 돌려보낸다. 아직 싸움은 일단 중
지하고, 처음에 선언한  바와 같이 군사들은 야산에서 작벌한 나무로  해안선 일
대에 목책을 두르게 하라!"
  모든 장병들은 고개를 숙여 대장군의 명령을 들었다.
  이종무는 다시 명령을 계속한다.
  "군사들은 배불이 점심을  먹은 후에 삼군으로 나뉘어  우군 6천여 명은 목책 
두르는 소임을 맡고,  좌군 6천여 명은 바닷가에 정박해 논  적의 전선을 모조리 
불살라 버려라. 그리고 중군 5천여 명은 적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고 상한 적
병들은 포로로 삼아서 상처에 약을 발라주라. 비록  적이라 하나 인도를 지켜 덕
화를 베풀라."
  일만 칠천여 명의 장병들은  대장군 이종무의 슬기롭고 너그러운 처사에 환성
을 올려 '조선군 만세'를 높이 불렀다.
  점심때가 되었다. 음식  맡은 숙수들은 전승한 군사들을 위하여 소를  잡아 곰
국을 끓였다.
  야산 앞 넒은 벌에는 가마솥을 수백 개 걸어 놓았다.
  가마솥마다 곰국 끓는 구수한 냄새가 뿌연 김을 뿜어 푸짐하게 일어났다.
  특별히 전승한 좋은  날이라 해서 잡곡으로 밥을  짓지 아니하고 흰쌀로 밥을 
지었다.
  일만 팔천여 명이 먹을  밥이요, 국이었다. 넓은 야산 벌에는 수백개 가마솥에
서 밥이 익어가는 더운 김과  고깃국이 용솟음쳐 끓는 누릿한 냄새가 한데 어루
러져 승전고를 울리는  장병들의 코를 벌름거리게 했다. 모두 다  비위가 꿈틀거
렸다.
  일만 칠천여 명의 군사들은 숙수 병졸들이 국자로 퍼주는 국과 밥과 고깃덩이
를 뚝배기에 받아 들고 단번에 먹어댔다.
  꾀 많고 눈치 빠른 군졸들은  곰국을 두 그릇 세 그릇씩 뒷손질해서 받아먹었
다. 양지바른 쪽에 누워 네 활개를 펴고  배를 두드리며 콧노래를 부르는 천진난
만한 광경도 이곳 저곳에 보였다.
  대장군 이종무는  장대에서 내려 친히  군사들의 배불리 먹는  모습도 살폈다. 
미소를 풍기며,
  "많이 먹어라. 더 먹어라!"
  군사들의 등을 일일이 어루만져 주었다.
  점심이 끝난 후에  군사들은 대장의 명령을 받들어  세 부대로 나누어 작업을 
개시했다.
  중군 5천여 명은  살에 맞아 죽은 적병들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이룩해 주
고, 상한  군사들에게는 부러진 팔과 다리를  접골시켜서 포로 수용소로 보냈다. 
우군 6천여 명은 해안선 일대에 목책을 둘러서 다시는 적의 침범이 없도록 요새
지대를 만들어 놓고,  좌군부대 6천여 명은 일제히 적선 50여  척에 불을 질러서 
적의 달아날 길을 막아버렸다.
  그럭저럭 밤이 되었다.  화광은 충천하고 바닷물은 이글이글 끓었다. 나가사키 
항구 일대는 연옥의 불바다를 이루었다.
  목숨을 구해서 누까오까 깊숙한 산골 속으로 달아나던 도도웅환은 기진맥진이 
되어 자리보전을 하고 신음하며 누웠을 때 홀연 군사들이 뛰어들어 고했다.
  "큰일났습니다!"
  머리를 싸매고 신음하며 누웠던 도도웅환은 깜짝 놀라 일어났다.
  "무슨 또 큰일이 났단 말이냐?"
  도도웅환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놀란 가슴이다. 경풍이 될 지경이었다.
  "바다가 시뻘겋게 타오릅니다."
  "바다가 시뻘겋게 타다니?"
  해적의 괴수 도도웅환은 아장의 부축을 받고 굴 밖으로 나가 해변을 바라보았
다.
  과연 50여 척의 대마도 배가 일일이 불을 뿜어 화광이 하늘을 사를듯했다.
  멀리 조선 전함 2백여 척은 바다  한복판에 위풍당당하게 군림하였고, 부두 앞
에 매어 두었던 자기 군사의  배 50여 척은 돛대가 '우지끈 와지끈' 부러지고 거
꾸러지면서 연기와 불길을 뿜고 있다.
  "저것이 모두 다 우리 배로구나!"
  도도웅환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렇습니다. 50여척 우리 배가 함빡 타버립니다."
  "이제는 옴치고 뛸 수도 없구나, 꼭 죽었구나!"
  도도웅환은 대성통곡을 했다.
  "그렇습니다. 다시는 도망갈 길도 없어졌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적병들은 적의 괴수의 손을 마주잡고 발을 동동 굴러 대성통곡을 했다.
  "공연한 짓을 했다. 배은망덕을 하고 조선으로 노략질을 하러 들어가라고 허락
했던 것이 내 잘못이다. 천벌을 받아야 마땅하구나!"
  말을 마치자 도도웅환의 목구멍에서는 대갈일성에 붉은 피가 쏟아졌다.
  화기가 가슴으로 치밀어 토혈이 된 것이다.
  아장과 패잔병들은 깜짝 놀랐다. 급히 도도웅환을  등에 업고 황황히 굴속으로 
들어갔다.
  피를 거의  한 말이나 쏟았다. 패잔병들은  지혈제 등 갖은 수단을  써서 겨우 
생명을 구했다.
  패잔병들은 눈을 붙이지 못한 채 꼬박 밤을 새웠다.
  새벽이 되었다. 배가 고팠다. 굴속에 세로 가로 쓰러졌다.
  주보에는 곡식도 떨어져서 얄팍해 갔다.
  주먹밥 한 덩이씩으로 겨우 주린 창자를 채웠다.
  한편 조선군 우군은  나가사키 해안선 일대에 목책을  끝마쳤다. 훈내곶이에서
부터 두지포까지 뻗친 길고 긴 방위선이었다.
  목책이 끝난 후에 대장군 이종무는 영을 내렸다.
  "비록 목책 두르는 방위선이 완성되었다 하나 수직하는 보초를 두지  아니한다
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좌, 우, 중 삼군은 각기 책임을 맡아  방위선 일대에 보
초를 두게 하라.  우군과 중군은 훈내곶이 일대의 책임을 맡고  좌군의 전병력을 
두지포 일대를 수직하라."
  모든 아장들은 대장의 명을  받들어 해안선 목책에 경비하는 군사를 배치하였
다.
  대장군 이종무는 다시 군령을 내린다.
  "지금 적은 누까오까라고 하는 강악에 잠복해 있다. 강악에서 내려오는 길목은 
바로 두지포다. 2백여 척의 전 함대를  두지포로 이동시켜서 적의 무리를 위압하
라."
  군령이 한 번 떨어지니 모든 부대에서는 책임 맡은 각부대의 척후병과 보초병
을 남겨놓고 2백여 척의 대함대는 서서히 배를 움직여 두지포에 닻을 내렸다.
  누까오까 굴속에 숨어 있던  대마도 척후는 조선군 대함대가 두지포로 옮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병들어 누워 있는 괴수 도도웅환에게로 급히 달려갔다.
  "큰일났습니다. 조선의 대함대가  함빡 두지포로 이동을 했다. 무슨 계교를  쓰
려고 전함을 이동시키는지  알 길이 없다. 그대들은 조선군의 계책을  추축해 보
라!"
  한 장수가 고한다.
  "조선군은 우리들의 식량이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해안선 일대에 목책
을 둘러놓고 우리 배를 모두 다 불살라버렷습니다.  우리들의 도망갈 길을  영영 
끓어버렸습니다. 고스란히 굶어  죽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기다가 우리가 잠복
해 있는 누까오까에서 가장  가까운 길목 두지포에 대함대를 이동한 것은, '이놈
들 꼼짝 말라'고 위협하는 전술을 쓴 것입니다."
  한 장수가 또 고한다.
  "그렇습니다. 굶어 죽든지 항복하든지 두 가지 중에 한가지를 택하라는 엄포올
시다!"
  도도웅환은 또다시 간담이 서늘했다.  땅이 꺼져라 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기
운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은가. 굶어 죽어야 옳은가? 항복을 해야 하나?"
  왜추들은 독종이었다. 한 장수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말한다.
  "차라리 배를 갈라서 할복자살을  할지언정 어찌 차마 항복을 합니까?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다가 죽어야 합니다."
  말을 마치자 눈을 부릅떴다.
  "무슨 힘으로 만칠천여 명의 조선군을 대항해  싸운단 말인가. 천여 명 군사가 
반 넘어죽었고, 양식 또한 떨어졌는데. 할복자살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닐세. 처자
식과 늙은이들은 함빡 대마도에 떨어져 있고."
  도도웅환은 눈물이 비오듯했다.
  한장수가 도도웅환에게 고한다.
  "소장에게 한 가지 묘한 계책이 있습니다."
  모두들 바라보니 대마도  왜장 중에 가장 젊은 얼굴이었다. 눈알에  정기가 초
롱거렸다.
  "무슨 묘한 계교가 있단 말이냐?"
  도도웅환이 묻는다.
  "우리는 굶어 죽을 수도 없고 항복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배를 갈라서 할
복자살한다는 것은 더구나 무의미한 노릇입니다."
  "그러니까 걱정이 아니냐. 도대체 묘책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이냐? 속  상한다. 
어서 말해보아라."
  "달아나야 합니다."
  "달아나? 어디로 달아난단 말이냐. 승천입지를 한단 말이냐. 둔갑법을 쓴단  말
이냐. 얘가 미쳤나, 헛소리를 하는구나!"
  도도웅환은 기가 막혔다.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듯 껄껄 웃었다.
  "에잇, 못난 자식!"
  퉁명스럽게 한 마디를 내던졌다.
  모든 아장들도 조롱하는 웃음을 드높게 웃었다.
  젊은 장수는 정색하고 고한다.
  "웃으실 일이 아니올시다. 차근하게 저의 말씀을 들어봅시오."
  도도웅환은 화를 벌컥 냈다.
  "그래 어떻게 달아난단 말이냐?"
  "지금 우리가  있는 누까오까는 일부당관에 만부막개하는  천험의 요지올시다. 
지난번 훈내곶이 싸움에서 중과부적으로  우리가 패했습니다마는, 만약에 조선군
이 누까오까까지 추격을 해왔더라면 만여 명 군사가 아니라 10만 대병이라도 참
담하게 패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조선군에는  슬기로운 장수가 있어서  쟁을 쳐 
군사를 거둔 때문, 강세가 꺾이지 아니했습니다."
  대마도 왜추의 꼭지 도도웅환은 화증을 벌컥 낸다.
  "도대채 너의 조선군 칭찬만 하고 앉았느냐. 어서, 어서 달아날 묘책이란 것을 
말해보라!"
  "첫째로 조선군은 누까오까 산악지대로 유인해 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째 달아나는 길이란 말이냐?"
  "굴속마다 복병을  매복시켜서 조선군이 들어오는 족족  활로 쏘고 칼로 찔러 
죽여버립니다. 소장은  누까오까에 있는 석굴을  조사 해보았습니다. 두지포에서 
산으로 올라오는 연도에  굴이 수백 개 있습니다. 군사를 매복시킬  절호한 곳이
올시다. 이리해서 조선군을  지진두를 만든 후에 두지포로  내려가서 조선함대를 
뺏어가지고 대마도로 승전고를 울리면서 돌아갑니다. 어떻습니까. 이 묘책이?"
  도도웅환을 위시하여  모든 왜추들은 굴을 이용해서  조선군을 패하게 한다는 
젊은 왜추의 말에 약간의 마음이 동했다.
  "그렇다면 누까오까까지 조선군을 어떠한 방법으로 유인한단 말이냐? 네 말대
로 조선편에는  슬기로운 장수가 많다.  처음에 조선군의 일부가  쫓아오는 우리 
뒤를 추격해올 때  저편에서는 쟁을 쳐서 군사를 거두지 아니했더냐.  만약에 우
리가 유인을 해도 꾀에 넘어가지 않는다면  어찌하느냐. 지혜있는 장수라면 싸우
지 아니하고 우리가 굶어 죽기를 기다릴 것이다."
  도도웅환은 말을 마치자 또다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짓는다.
  젊은 왜추가 고한다.
  "조선편에 아무리 슬기로운 대장이 있다 하나 격노시켜서 유인할 방법이  있습
니다."
  "격노시켜 유인을 한다?"
  도도웅환이 묻는다.
  "그렇습니다. 사람이란 감정적 동물입니다. 아무리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하나 
격하게 감정이 움직이면  물불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덤벼듭니다.  이러한 격동적
인 감정을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먼저 야음을 타서 결사대 십여 명을 내보내서 두지포를 막은 목책을 뚫고 조
선 병선에  불을 지릅니다. 그리된다면  조선편에서는 깜짝 놀라  소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때  가서 결사대는 목책을  넘어서 누까오까로 성난  범같이 뛰어들 
것입니다. 이때 우리들은 굴속에 분산되어 매복해  있다가 돌격해 올라오는 조선
군을 무찌르고 두지포로  내려가 조선 배를 타고 다시 대마도로  달아나든지, 중
국으로 달아나든지 맘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것 참 된수다."
  모든 왜장들은 젊은 왜추의 말을 듣자 박수갈채를 했다.
  도도웅환도 그렇 듯하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오늘밤으로 곧 이 일을 결행케 해라!"
  왜추들은 도도웅환의 명령이 떨어지니 패잔병들로 결사대를 조직했다.
  질끈질끈 머리에 검은  수건을 동여매고 단검과 장창과 활을 들었다.  백여 개 
석굴과 바위틈마다  사오 명씩 결사대를 매복시켜서  조선군이 쳐들어올 길목을 
지키게 한 후에 밤이 깊은 자시 때 열 명의 결사대는 두지포로 향해 내려갔다.
  만물이 잠든 깊은 밤이었다. 2백여 척의  조선 병선이 정박된 바다위에는 파도 
소리만 높았다.
  길고 긴 해안선  일대 목책을 두른 곳에 보초를  보는 군사와 배 위에서 번을 
든 병졸을 제쳐놓고는 만여 명의 군사가 모두 다 혼곤하게 잠이 들었다.
  두지포 일대의 방위선은 좌군 지휘관 박실의 책임 아래있었다.
  대마도 왜적 열 명의 결사대는 캄캄칠야 한밤중에 누까오까 산악지대 험한 산
길을 내려와 발자취를 죽이고 가만히 목책 안에 잠복해 있었다.
  보초 보는 군관들은  백보마다 한사람씩 서 있었다. 왜적의 결사대들은  한 시
각 동안이나 잠복해서 보초의 동정을 살폈다.
  보초는 긴긴 밤에 한  곳에만 서 있을 수 없었다. 전통을  어깨에 메고 장검을 
비껴든 채 백보 안을 순찰하고 있었다.
  왜적의 결사대들은  이 틈을 노렸다.  보초하는 군사가 목책을  등지고 백걸음 
끝까지 나갔을 때 결사대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나머지 한놈의 어깨를 타고 사
뿐사뿐 목책을 뛰어넘었다. 마치 도둑고양이가 지붕을 타고 뛰어내린 듯했다. 번
개보다 빨랐다.
  백 걸음 밖에 있던 보초는  캄캄한 어둠 속에 무엇이 뛰어내리는 것을 희미하
게 발견했다.
  '누구냐!' 소리를 쳤다. 장검을 뽑아 들고 쫓아 들었다.
  왜적 결사대들은 장검을 들고 쫓아드는 보초에게로 일제히 달려들었다.
  두 놈은 장창을 들고  달려드는 보초의 칼 잡은 손등을 후려쳐  갈겼다. 두 놈
의 보초의 뒤로  돌아 준비했던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보초는  호통을 쳤으
나 소용이 없었다.  다섯 놈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보초를 결박지어  목책 기둥에 
묶어 놓았다.
  캄캄한 어둠 속이었다. 보초는 아무리 고함을  치고 몸부림을 쳤으나 꼼짝달싹
할 도리가 없었다.
  네 놈은 묶어 논 보초 옆에 지켜 섰고,  다섯 놈은 미리 준비했던 기름통을 들
고 쏜살같이 조선  배로 내려가 번든 군사가 졸고  있는 틈을 타 수십개 화승을 
기름에 담가 불을 붙여 배 안에 던졌다.
  별안간 배 한척에 화광이 일기 시작했다.
  번든 군사가 놀라서 '불이야' 소리를 치며 옆배로 뛰어내렸다.
  왜적의 결사대들은 불길이 이는  것을 보자 도둑고양이 모양 한 놈,  두 놈 모
두 다 목책을 사뿐사뿐 넘어 누까오까로 향해 달아났다.
  좌군 병선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군사들은 황황망망, 불붙은 배를 격리시
켜 불을 끄고 보초들은 횃불을 들어 목책을 둘러보았다.
  기막히지 않은가. 보초 한명이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로소 왜적의 결사대가 목책을 넘어 들어와 보초를 묶어 놓고 포구로 내려가 
배에 불을 지른 것을 알았다.
  좌군 지휘관 박실은 불같이 노했다.
  "훈내곶이 싸움 때 강악으로  쫓아 올라가 이놈들을 다 몰살시키는 것을 공연
히 쟁을 쳐 군사를 거두는 바람에 이같은 후유증이 생기게 하는구나!"
  말을 마치자 곧 군령이 내렸다.
  "좌군 전부대는 동이 트는 대로 곧  누까오까로 진격할 것이다. 전투준비를 완
료하라."
  좌군 지휘의 영이 한번 떨어지니 좌군 전부대는 일제히 전투준비를 끝냈다.
  좌군 모사 한 사람이 박실에게 고한다.
  "좌군이 출동하기 전에 대장군께 출사한다는 말씀을 아뢰고 떠나는 것이  좋겠
습니다."
  박실은 불같이 노했다.
  "일이 급한데 어느 하가에 삼사십리 밖에 있는 훈내곶이까지 내려가  대장군께 
고하고 간단 말이냐? 용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적을  멸할 수 없다. 내가 떠난 후
에 대장군께 아뢰어도 좋다. 좌군 지휘는 내가 맡은 책임이다."
  박실은 모사의 말을 물리쳤다.
  어느덧 동이 환하게 터졌다. 박실은 좌군  일대를 거느리고 누까오까로 치달렸
다.
  삼백여 명의 정예부대다.
  지난번 훈내곶이 싸움에 누까오까로 달아나는 적병을 추격하려다가 대장군 이
종무가 쟁을 쳐 군사를 거두는  바람에 무료하게 날랜 기세를 펴보지 못했던 부
대다. 용기가 하늘도 찌를 듯 용솟음쳤다.
  "우리들 좌군의 힘으로 대마도 해적들을 항복받고 승전고를 올려 돌아온다."
  고함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기치창검은 아침 햇빛 아래 번들였다.
  강악은 강파로웠다. 오르기에 힘이 들었다. 그러나  사기는 왕성했다. 한 번 싸
워서 크게 이기고 항복을 받을 뻔했던  왜추들이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도도웅
환을 산채로 묶어서 대마도로 끌고 갈 배짱이었다.
  험하고 강파른 길로 고함치며 기어올랐다. 적병이  나타나기만 하면 모조리 쏘
아 죽일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산골 속은 너무나  조용했다. 산새 소리조차 들리지 아니했다. 적의 순
라도 보이지 아니했다.
  한 고개를 넘었다. 두  고개를 지났다. 양장구곡같이 구불구불 험한 길 사이로 
땀을 흘리며 올랐다.
  좌우편에는 크나큰 바웟덩이와 깎아지른  절벽이 푸른 숲 사이에 즐비하게 벌
여 있었다.
  앞을 서 가던 지휘관 박실은  산길이 하도 조용하니 불안한 마음이 약간 들기 
시작했다.
  전후좌우를 살피면서 화궁에  살을 메게 조심조심 나갔을 때, 돌연  고개 위에
서 적병이 고함치며 쏟아져 내려왔다.
  박실은 몇째 안가는 활 잘 쏘는 명궁이었다.
  전통에서 백우전을 민첩하게 뽑아 적장 서너  명을 쏘아붙였다. 왜추는 쓰러지
고 자빠졌다.
  그러나 적의 예기는 꺾어지지 아니했다. 칼과  창을 휘두르며 좌군을 돌격하여 
쫓아들었다.
  좌군에서도 지휘관 박실을 위시하여 용기가 꺾이지 아니했다. 화살은 날고, 칼
과 창은 번득였다.
  싸움은 백병전으로 들어갔다. 적의 쓰러지고 죽는 자가 수십 명이 넘었다.
  적이 적세가 꺾이려 할 때, 돌연 바위틈마다  굴속마다 검은 수건을 쓴 왜적의 
결사대들이 뛰어나왔다.  일본도를 휘두르며 좌군을  에워싸고 육박해 들어왔다. 
박실은 비로소 복병의 유혹을 받아 포위망에 빠진 줄 알았다.
  급히 쟁을 쳐 군사를 거두면서 악전고투하며 포위를 뚫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올라갈 때 무인지경이라 생각했던  좌우편 바윗돌 틈에서는 가는 곳마다 십여 
명씩 왜적 결사대가  나타났다. 좌군 지휘관 박실은 기막힌 곤경에  빠졌으나 담
력이 컸다.
  한편으로 장검을 휘둘러 적의 목을 후려쳐 갈기고 한편으로 활을 당겨 쫓아드
는 적의 눈알을 쏘아 맞혔다.
  아군편에서도 죽고 상하는 군사가 많았다. 그러나 예기는 꺾이지 아니했다. 싸
우면서 달아나고 달아나면서 싸웠다.
  그러나 누까오까의 산골  속은 길고 깊었다. 용기가 충천해서 올라갈  때는 괴
로운 줄을 몰랐으나, 전세가 불리해서 포위망을  뚫고 내려오기란 어렵고 괴로웠

  굽이쳐 도는 길목마다 또다시 바위틈에서는 오륙 명씩 사오 명씩 왜적의 결사
대가 길을 막고 덤벼들었다.
  이제는 용장이라 하나 박실도 기진맥진되었다.
뒤를 돌아보니 삼백여 명의 좌군 정예부대 중에 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박실이 정히 초민하고 있을때 홀연 강악 언덕길에 티끌과 연기가 자욱하게 일
어나며 조선 군사들의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박실은 조선 군사들의  고함소리를 듣자 정신이 번쩍 났다. 앞을  바라보니 티
끌과 연기가 자욱한 곳에 '정동대장군 도체찰사 이종무'라고 쓴 대장기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좌군 지휘 박실은 대장군  이종무가 대군을 휘동해서 구원하러 들어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용기가 백 갑절이나 솟구쳤다.
  쫓겨 내려오던 좌군을 향하여 소리쳤다.
  "좌군 일동은 용기를  내어 다시 돌격정을 개시하라! 대장군의  구원병이 당도
했다!"
  좌군 일동이 바라보니 과연 티끌과 연기가 자욱한 곳에 대장군의 군기가 바람
에 번뜩이며 위풍당당 앞에 서서 달렸다.
  좌군은 다시 기운을 회복하여 몸을 돌려  돌격전을 개시하고, 적병들은 조선군
의 대부대를 바라보자 혼비백산이 되어 좌왕우왕 어찌할지 몰랐다.
  대장군 이종무는 친히 말을 달려 대군을 지휘했다.
  제1진 5천 명은  활과 쇠뇌를 잡은 궁노수들이었다. 화살과 쇠뇌를  쏘며 산상
으로 치닫고, 제2진 5천 명은 홰를 묶어 불을 댕겼다. 햇빛이 쨍쨍한 대낮이건만 
만여개의 횃불이 일시에 타오르니 화광은 충천했다.
  제3진 5쳔여 명은 도부수들이었다.  칼과 창과 도끼를 들어 1진, 2진을 호휘하
며 강악 산길로 치달았다.
  대장군 이종무는 마상에 높이 앉아 호령을 내린다.
  "제1진 궁노수들은 활과 쇠뇌를 쏘면서 급히 능선으로 뛰어올라 좌군 지휘 박
실 이하 모든 장병들을 구출하라!"
  제1진 궁노수들은  일제히 적진으로 활과 쇠뇌를  쏘면서 장병의 포위를 풀기 
시작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계속해서 군령을 내린다.
  "제2진 홰를 든 군사는  바위 밑 굴속마다 횃불을 던져서 굴속에 잠복해 있는 
적병을 화공법을 써서 질식시키라!"
  "제3진 도부수들은 굴속에서 쫓겨나오는 적병들을 발견하는 족족 생포해서 결
박지어라!"
  명령이  한  번 떨어지니 만여 개의  횃불을 든 군사들은 길고 긴  관악 산골, 
석굴과 바위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조선군 궁노수들이  쏘아붙이는 화살과 쇠뇌는 적병을  향하여 우박 쏟아지듯 
쏟아졌다. 죽고 상하는 자가 부지기수다. 좌군 부대를 포위했던 적병들은 완전히 
싸울 맘을 잃었다. 뿔뿔이 흩어지면서 굴속으로 몸을 감춰 버렸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굴속으로는 햇불이 던져지며 불벼락이 떨어졌다. 
  홰마다 기름을  뿌려서 불을 댕긴  횃불이었다. 불은 이글이글  타오르면서 굴 
속에 퍼져 있는 잡초의 짚더미로 옮아 붙었다.
  독한 연기와 뜨거운 불길 속에 적의 결사대들은 배겨날 도리가 없었다.
  한 놈 두 놈씩 뛰어나왔다.
  제3진인 도부수들은 굴속에서 뛰어나오는 결사대들을 도끼와 창으로 위협하면
서 모조리 결박지어 방복받았다.

    대군 개선
  대장군 이종무는 좌군 지휘  박실을 구출하고 대마도 왜적의 결사대들을 결박
지어 항복받은 후에 항왜의 젊은 장수에게 물었다.
  "너희 괴수 도도웅환이 잠복해 있는 곳을 밝히라!"
  항복한 왜장은 손을 들어 누까오까의 상상봉을 가리키며 대답한다.
  "이곳에서 십 리 가량 올라가면 크고도  넒은 암굴이 있습니다. 굴속은 구불구
불 천엽 속같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려진 석종유의 기암괴석으로 이룩된 암굴
입니다. 장군님께서 천병만마를  거느리고 들어가신다 해도 길이  현란해서 우리 
대장을 생포하시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도도웅환을 호위하고 있는 군사는 얼마 가량이나 되느냐?"
  "아직도 이삼백 명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대장의 친위군이올시다.  그러
나 양식이 떨어졌을  뿐 아니라 저희들의 패한 꼴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기진맥진이 되었습니다. 항복하지 말래도 항복할 것입니다."
  "도도웅환은 훈내곶이 싸움에서  두 번씩이나 살을 맞았는데 상하지는 아니했
느냐?"
  "한 번은 투구가 떨어졌고 한 번은 팔에 화살이 떨어졌으나, 철갑을 입어서 상
한 곳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놀라서 정충증이 생겼습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이때 해는 이미 신시가  넘어서 서편
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다시 대군을 휘동하여 양장구곡의 험한 길을 올라가서 천엽 속 같다는 석종유
골 속으로 들어간다면 아무리 횃불을 밝힌다 하나 밤 안으로 도도웅환을 생포하
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머리에 퍼뜩 병서 한 구절이 떠올랐다.
  '궁구막추!'
  궁한 도둑을 쫓지 말라 했다.
  적이 주저하고 있을 때 홀연 산꼭대기에서 왜적 일대가 백기를 흔들며 달려왔
다. 모두들 바라보니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의 부장이 일지 군대를  거느리고 내
려오는 것이었다.
  대장군 앞에 군례를 드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대장군 이종무는 향도로 대동했던 한인 통사에게 물었다.
  "누구냐?"
  "도도웅환의 부장인 가봅니다."
  이종무는 점두한 후에 엄숙한 표정으로 적장을 향하여 물었다.
  "요망한 무리들이 어찌해서 또다시 대군의 진머리를 범하느냐?"
  적의 부장은 백기를 높이 흔들며 아뢴다.
  "소장은 도도웅환의 부장이옵니다. 도도웅환의 항복하는 글월을 가지고 왔습니
다. 다행히 죽이지 아니하시고 받아 주신다면  다시는 노략질을 아니하고 오래오
래 조공을 바쳐서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
  왜장은 품안에서 하서를 올렸다.
  이종무가 받아보니  틀림없는 도도웅환의  항복하는 글이었다. 항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은 고두백배하옵고 정동대장군 휘하에 글월을 올립니다. 
저희들의 부하 군졸들이 배은망덕하고  바다를 건너 변경에 작란을 일으킨 일은 
만 번 죽이셔도 마땅한 일이올시다. 그러나  대마도는 아시다시피 땅이 척박하와 
민생이 아사지경에 빠졌습니다.  어리석은 무리들이 죽지 못하여  대역부도의 죄
를 범했사오니 그저 호생지덕을 내리시어 전명을 보존해 주신다면 분골쇄신해서 
장군의 은혜를 갚겠습니다. 삼가 항복하는 글월을  아장편에 보내오니 거두어 주
시기 바랍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마음속으로 슬며시 항복을 허락할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한
번 엄포를 놓아 꾸짖지 아니할 수 없었다.  얼굴빛을 엄숙하게 하여 벼락같이 호
통을 내렸다.
  "요망한 도도웅환이 친히 와서 항복을 한다 해도 받을 둥 말 둥한데 방자하게 
아장을 보내서 항서를  바치니 반드시 협사한 것이 분명하다. 이제  대군을 휘동
하여 너의 소굴을 소탕한 후에, 너 도도웅환을 산채로 잡아 묵베어 효수하리라!"
  아장은 머리를 땅에 박고 두 손을 들어 싹싹 빌었다.
  "도도웅환은 두 번씩이나 살을  맞고 이내 정충증이 생겨서 험한 산길에서 내
려오지 못합니다.  그저 굽어살피시고 항복을 받아  주십시오. 다시 바다를 건너 
노략질을 아니할 것입니다."
  대장군 이종무는 또다시 꾸짖는다.
  "교활하기 짝없는  네놈들의 말을 누가  곧이듣겠느냐? 잔말 말고 도도웅환을 
데리고 오너라!"
  이종무는 장검을 뽑아 땅을 드르륵 긁었다.
  겁에 질린 왜추의 목은 자라목 오그라지듯 했다.
  "네 이놈, 도도웅환이 친히 와서 항복하지  아니한다면 네놈의 목을 먼저 베리
라!"
  말을 마치자 이종무는 또다시 칼을 번쩍들어 옆에 있는 생나무 가지를 후려쳤
다.
  가지가 와지끈 부러지며 적장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적의 모가지는 또 한 번 오그라지고 간담은 싸늘하게 핏기를 잃었다. 
  함께 왔던 또 한 자의 아장이 벌벌 떨며 고한다.
  "장군께서 친히 도도웅환을  보시고 항복을 받으신다면 아무리 병들었다 하나 
소장이 기어코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러나 한 말씀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무슨 말을 내려 달라 하느냐?"
  이종무는 눈을 부릅떠 호통을 치며 물었다.
  "장군께서 도도웅환을 죽이지 아니하신다는 한 말씀을 확실하게  내려주신다면 
소장은 도도웅환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이종무는 소리를 높여 드높게 껄걸 웃었다.
  "어진 장수는 대항하는  적은 죽일지언정, 항복하는 적은 죽이지 않는  법이다. 
내 어찌 쥐새끼  같은 무리들에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진정으로 항복할  뜻이 있
다면 도도웅환이 친히 와서 항서를 바치라!"
  말을 마치자 이종무는 항복한다는 항서를 적장의 머리위로 내던졌다.
  백기를 흔들고 항서를 받들어 내려왔던 적의 아장들은 벌벌 떨며 황황망망 내
던진 항서를 받들고 다시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원래 도도웅환은 이종무가 죽일까  겁이 나서 아장을 보내서 항복하는 글월을 
드렸던 것이다.
  아장들이 백기와 항서를 들고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자 도도웅환은 겁이 더럭 
났다.
  "조선대장군이 항복을 받지 아니하더냐?"
  "말씀 마십쇼. 장군께서 친히 내려와 항서를  바치지 아니했다 해서 항복을 받
지 아니한다 합니다!"
  아장들은 목이 메어 울었다.
  "내가 친히 항복하러 내려갔다가 죽음을 당하면 어찌한단 말이냐!"
  도도웅환은 벌벌 떨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좌불안석을 하면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짓는다.
  항서를 가지고 갔던 아장이 아뢴다.
  "그런 염려가 있사와 저희들은 다짐해 묻고  왔습니다. 만약에 우리 주장께 해
를 끼치는 일이 있으면 어찌할 테냐 물었더니  '어진 장수는 대항하는 적은 죽일
지언정, 항복하는 적은 죽이지 않는 법이다. 내 어찌 쥐새끼 같은 무리들에게 거
짓말을 하겠느냐. 진정으로 항복할 뜻이 있다면 친히  와서 항서를 바치라!' 하는 
담을 받고 왔습니다."
  도도웅환은 아장의 말을 듣고도 안심이 되지 아니했다.
  "그야, 말은 번드르해서  좋다마는 누가 아느냐. 구천에 떠도는 원통한  귀신이 
될 뿐이로구나!"
  도도웅환은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하고 한숨을 쉰다.
  옆에 있던 도도웅환 종정성의 아우 종준이 고한다.
  "제가 형님을 대신해서 항복하러 나가겠습니다."
  왜추 중에 의표가 늠름했다.
  "날 보고 친히 나오라는데 네가 나간다고 항복을 받을 리 만무하다. 공연히 일
만 그르칠 뿐이다."
  종준이 다시 고한다.
  "제 얼굴은 형님의 얼굴과 비슷합니다. 우리 군사들이 보아도 구별해 알아내기 
어려울 판인데 황차 조선  사람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제가 내려
가겠습니다.!"
  종준은 쾌활하게 대답했다.  대마도의 늙은 장수 중도만호  좌위문대랑이 출반
하여 고한다.
  "젊은 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조선대장과 군사들이 알 까닭이 없습니다.  젊
은 장군의 충성과 우애를  높이 찬양하기고 주장님으로 가장하시어 항서를 받들
어 나가시도록 하십시오."
  "일이 탄로나면 어찌하느냐. 그리고 내 어찌  차마 아우를 죽는 땅에 몰아넣는
단 말이냐!"
  늙은 항서를 받들어 나가시도록 하십시오."
  "일이 타로나면 어찌하느냐. 그리고 내 어찌  차마 아우를 죽는 땅에 몰아넣는
단 말이냐!"
  늙은 장수 좌위문랑이 다시 고한다.!"
  "염려 마십시오. 저편에서 말한 대로 항복하는 장수는 절대로 죽이지 아니합니
다. 소장이 들으니 지난번에 새로 등극하신  조선 국왕전하께서는 젊으신 분이지
만 인자하고 덕이 높으신 분이라 합니다. 이런 임금  밑에 있는 신하가 한 번 말
한 이상 일구이언은 할 리 없습니다. 마음놓고 젊은 장군이 가시도록 합시오."
  늙은 장수의 간곡하게 고하는 말을 듣자 도도웅환은 약간 마음이 놓였다.
  "모르겠다! 아우가 정  간다 하면 나도 어찌하는  수가 없구나! 다만 무사하게 
돌아오기만 기다릴 뿐이다."
  교활하고 완패한 왜적의 괴수건만, 그래도 형제간 우애의 정은 대단했다. 종준
이 씩씩한 모습으로 고한다.
  "대마도 영수인 듯 몸을  의젓하게 가져서 절대로 탄로가 나지 않도록 하겠습
니다. 그리고 원래 조선은  예의범절이 높은 관후장자의 나라올시다. 한 번 해치
지 않겠노라 말한 대장이 항복하는 주장을 죽일  리 만무합니다. 아무 염려 마시
고 기다려주십시오."
  늙은 장수 좌위문대랑이 말한다.
  "젊은 장군의 씩씩하신 모습은 대마도의  복이올시다. 소장이 나이비록 늙었으
나 아직도 세 치  혀를 놀려서 저편 대장을 감동시킬 만한  언변이 있습니다. 젊
은 장군을 뫼시고 가겠습니다."
  도도웅환은 늙은 장수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넋두리를 한다.
  "중도만호가 내  아우를 호위해 간다  하면 내 괴로운  마음이 적이 놓이리로
다!"
  "염려 마십쇼!"
  늙은 장수와 젊은 종준은 대답하고 준비를 차렸다.
  종준은 대마도  수호의 화려한 복색을 차렸다.  은투구, 은갑주에 장검을 왼편 
허리에 차고 등에는  엄나무 가시를 묶어 얹었다. 항복하는 장수가  부형하는 죄
인의 모습을 취한 것이다. 늙은 장수도 가시나무  가시를 등에 짊어지고 아까 울
렸던 항서를 허리춤에 간직한 후에 막대를 짚고 나섰다.
  이때 정동대장군 이종무가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강악 중턱 평평한 곳에는 조
선에서 세종대왕의 특사 훈련관 최기가 조칙을  받들고 건너왔다. 대마도의 첩보
를 받으신 세종전하께서는 이  사실을 상왕께 아뢰고 격려하는 글월을 삼군도체
찰사 이종무에게 내리신 것이다.
  이종무는 서향하여 네 번 절하고 조칙을 받들었다.
  '크게 이겼다는 첩보를  받으니 기쁘기 한량없으며, 국가의  홍복이다. 경 이하 
모든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왕자는 호생지덕을 가져야 한다. 되도록 투항케 
하고 죽이지 말도록  하라. 또한 이겼다고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  방심하고 태만
하지 않도록 하라.  7, 8월 사이에는 대마도에 폭풍이 많다.  빨리 개선하고 해상
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라!'
  진실로 어질고 착하고 너그럽고 후한, 만물을  생육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대왕
의 말씀이었다.
  조칙을 받들어 읽는 이종무의 눈에는 감격한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종무는 모든 장병을 모아놓고 대왕전하의 성지를 전달했다.
  이겨서 기쁘고, 격려해 주신 말씀도 좋지만, 칠팔월에는 대마도에 폭풍이 많으
니 오래 머무르지 말고 빨리 개선해 돌아오라는,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 같은 말
씀에 모든 장졸들은 감격한 눈물이 비오듯 흘러서 옷깃을 적시었다.
  모든 장병들이  세종전하의 인자스런 유시에  감격한 눈물을 뿌리고  있을 때, 
대마도 부수호 종준과 늙은 장수 좌위문대랑이 등에 가시를 지고 나타났다.
  진문앞에 당도하여 보초에게 고했다.
  "아까 대장군의  꾸지람을 듣고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은 황공한 마음을 이길 
길 없어 친히 나와 항서를 올립니다."
  늙은 왜장 좌위문대랑이 통역을 통하여 뜻을 전했다.
  보초는 진문 안으로 들어가 장대 위에 앉은 대장군 이종무에게 품했다.
  "적의 괴수 도도웅환이 친히 항서를 받들고 항복을 청합니다."
  이종무는 세종전하의 칙사가  와 있는 이때 적장의  항복을 받는 일은 절호한 
기회라 생각했다.
  "이번에는 틀림없는 대마도 수호라 하더냐?"
  "네, 그러합니다. 확실한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이라 합니다. 늙은 장수를 대동
하고 가시를 등에 지고 죄를 청하러 왔습니다."
  이종무는 급히 모든 장성들을 소집했다.
  단상에 칙사와 좌,우,중군 모든 절제사들을 배석시키고 다시 전령을 내렸다.
  "삼군 전대는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후에 항장을 인도하라!"
  기차창검이 휘황하게 번뜩이며 만  칠천 명의 삼군은 좌우편으로 갈라서서 엄
숙하게 도열되었다.
  창을 비껴 든 순령수가 대장군의 명을 받들어 호령을 내린다.
  "항장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을 진 속으로 인도하라!"
  채장 군사가 총총걸음을 걸어 진문 밖으로 나갔다.
  대령하고 있는 왜장들에게 영을 전한다.
  "항장은 들어와서 항서를  바치라. 대장군의 분부가 내리셨다. 빨리 행동을  개
시하라!"
  대마도 부수호  종준은 허리에 찼던 칼을  풀어 두 손으로 가로  받들고, 늙은 
적장은 짚었던 작대기를 땅에 던진 후에 몸을 굽혀 삼군이 나열한 진 속으로 들
어섰다.
  대장군 이종무가 단상에서  바라보니 대마도주란 자는 은투구,  은갑주에 등에 
엄나무 가시를 짊어지고  무장해제를 해서 두 손으로 칼을 가로  뉘어 들어오고, 
늙은 왜장 한 명은 역시 가시를 등에 진 채 주장을 따라 들어왔다.
  이종무는 경험이 많은 백전대장이다. 마음 속으로  저놈도 진짜 대마도주 도도
웅환이 아닌 것을 직감했다. 화살을 두 번씩이나  맞고 토혈까지 해서 병이 들었
다는 도도웅환의 걸음걸이가 저 같이 꿋꿋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짐짓 모르는 체했다.
  대마도 부수호 종준은  장대 앞 열 걸음밖에  엎드려 패검을 받들고 이종무를 
향하여 머리를 숙여 네 번 절을 올렸다.
  종중의 뒤에는 늙은  왜장이 종준이 절하는 대로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
다.
  대장군 이종무는 세종대왕의 칙사 이하 모든 장성들이 배석한 중에 호피 교의
에 걸터앉아 적장을 굽어보며 꾸짖는다.
  "너 이놈 듣거라. 이번에는 진짜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이냐?"
  "네, 그러하옵니다. 도도웅환이란 별명을  가진 종정성이올시다. 몸이 불편해서 
대신 아장을 보냈던 아까 일은 만사무석이올시다. 꾸지람을 들어 당연합니다. 그
저 몸이 아파서 그랬사오니 통촉해 주시고 항복하는 글월을 받아주옵소서."
  옆에서 늙은 왜장 좌위문대랑이 대신 대답한다.
  "저놈은 왜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느냐? 왜 네가 대신 대답하느냐?"
  이종무는 벽력같이 호통을 쳐 꾸짖는다.
  "장군님, 그저 통촉해주옵소서. 두 번씩이나 화살을 맞고 또다시 배가 전부 타
는 것을 보고 놀라서 토혈을 한 말이나  했습니다. 얼이 빠지고 정충증이 생겨서 
나오지 못하는 것을  소장이 억지로 부축해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굽어살피시고 
그저 항복을 받아줍시오."
  대마도 부수호 종준은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칼을 두 손으로 받들고 있다.
  이장군 이종무는 늙은 왜추의 교활한 언변인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궁한 도둑을 더  쫓지 않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일부러 
옆에 있는 좌군절제사 박실을 향해 물었다.
  "좌군절제사는 훈내곶이 싸움에서  저자를 두 번이나 쏘았으니 저자의 용모를 
짐작하겠구려. 틀림없는 도도웅환인가 자세히 살펴보오."
  누까오까 싸움에 패군지장이 된  박실은 기운이 떨어졌다가 대장이 묻는 말에 
기운을 얻었다. 얼굴 모습이 도도웅환과 비슷했다.
  "네, 틀림없는 도도웅환이올시다."
  황망하게 대답했다. 이종무는 일부러 호통을 놓았다.
  "도부수들 어디 있느냐? 저놈, 도도웅환의 목을 베어라!"
  호령이 추상같았다.
  좌우편에서 도부수들이 장검을 뽑아 들고 우르르 달려들었다.
  늙은 왜추가 종준의 몸을 가로막으며 엎드렸다.
  "병서에 어진 장수는 항복하는 적을 죽이지  않는다 했습니다. 더구나 조선 나
라는 인의의 나라요, 예절이 높은 상국이십니다. 그저 죽을 죄를 범한 쥐새끼 같
은 무리에게 호생지덕을 내려주십시오. 정 죽이실  생각이 계시다면 소인의 목을 
베어주십시오."
  늙은 왜추는 교활하게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했다.
  이종무는 다시 호령을 내린다.
  "네가 진정으로 항복할 의사가 있다면 대마도는  본시 조선 땅이니, 영토 전부
를 우리 나라에 바쳐서 권토 항복할 의사가 있느냐?"
  "네, 그저 먹여 살려주신다면 백 번이라도 땅까지 바치겠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이 가련하다. 목숨을 살려줄 테니 항서를 바치라!"
  종준은 비로소 고개를 들고  칼을 바쳤다. 다음, 늙은 장수는 품안에서 항서를 
꺼내서 종준을 주어 바치게 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사자가 받아 올리는  칼과 항서를 받은 후에 다시 왜추를 향
하여 명령을 내린다.
  "내가 개선해 돌아간  후에 너희들은 우리의 왕상전하께 권토내항한다는 항서
를 정식으로 올리도록 하라! 만약에 사자가 오지 않는다면  다시 재정을 할 것이
다. 알아듣겠느냐?"
  종준과 좌위문대랑은 연거푸 '네, 네' 소리를 치며 고두백배를 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다시 곡식 맡은 아장을 불렀다.
  "저놈들이 비록 침략했던 적장들이라  하나, 양식이 떨어져서 기지사경일 것이
다. 보리 스무 섬만 배에서 내려주어라!"
  적장들은 죽이지 않고 곡식까지  주는 이장군의 분부를 듣자 이번엔 진정으로 
감격함을 느꼈다.
  애마도 왜추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장군께 고한다.
  "저희들을 죽이지 아니하시는 은혜만 생각해도 백골난망이온데 소중한  양식까
지 주시니 하해 같은  홍덕을 어찌 다 갚사오리까. 대마도로 돌아가는  날 곧 국
왕전하께 항복하는 사자를 정식으로 보내겠습니다."
  "빨리 시행하도록 하라!"
  대장군 이종무는 장중하게 대답을 내렸다.
  이때, 두지포에 정박한 전함 위에서는 양식 스무 섬을 하륙했다.
  지난번 대마도에서 청야를 해서  보리를 수확했던 곡식 중에서 적장에게 기아
를 면케 하기 위하여 돌려주는 것이었다.
  곡식 맡은 부장이 짐을 풀고 장군 앞에 나타나 고했다.
  "곡식 스무 섬을 하륙했습니다."
  "적장에게 운반해서 가져가라 일러라!"
  이종무는 분부를 마친 후에  대군을 휘동하여 두지포로 내려가 하룻밤을 지내
고, 이튿날 동이 트자  일만 칠천여 명의 대부대는 전함  2백여  척에 문승한 후
에 승전고를 울리며 일기 해협과 대마도 해협을  지나, 개선의 길에 오르니 대조
선의 위풍은 망망대해를 격하여 일본천지를 휩쓸었다.
  한편 칙사 최기는 경첩한 배를 타고 부산포에 상륙하여 한양 천 리 길에 마을 
달려 궐하에 들어가 대군 개선의 첩보를 올렸다.
  세종전하를 위시하여 상왕전하의 기쁨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세종전하는 친히 최기를  인견하셨다. 최기는 당악에서 대장군  이종무가 도도
웅환에게 항복을 받던  일이며, 나중에는 청야해서 전함에 싣고 갔던  군량미 중
에서 보리 스무 섬을 항복한  적장에게 주림을 면케 하기 위하여 내어준 사실을 
일일이 품달했다.
  세종대왕은 미소를 용안에 띠시고 칭찬의 말씀을 내렸다.
  "이종무는 과연 명장이로다!  추상같은 무위로 적을 항복받은 일도  쾌한 일이
지마는, 호생지덕을 내려서 기아를 면케 한 일고  또한 어진 장수의 높은 솜씨니
라!"
  최기은 또 좌군절제사  박실이 훈내곶이에서는 크게 이겼으나,  강악에서는 패
전을 해서 군사 백여 명이 상한 일을 아뢰었다.
  세종전하는 미간을 잠깐 찡그리셨다.
  "나중에 사실하려니와 용맹만 믿는 장수와 교만한 장수는 슬기로운 장수만  못
하니라!"
  탄식하는 말씀을 내렸다.
  정동대장군 이종무는 개선방병 만 칠천 명과 사로잡은 항왜와 한인 수백 명을 
2백여 척의 병선에 분승시켜서 승전고를 울리며 호호탕탕 거제항에 새선하니 때
는 7월 3일, 일진으론 병오의 일이다.
  6월 19일 거제도에서 출정하는 장한  길에 올라서 불과 10여일에 적의 배 129
척을 뺏고,  적호 1,939호를 불사르고, 앞  뒤 싸움에 적장 114명을  목베고 다시 
구주 장기까지 대마도주 도도웅환의 항복을 받고 돌아오는 이 사실은 왕조 건국 
이래 전무했던 쾌한 승리였다.
  이종무 장군의 해상작전은  질풍신뢰와 같았고, 바람과 조수의  형세를 치밀하
게 살펴서 한  척의 전함도 손실이 없게 한  일은 시로 슬기로운 명장의 신묘한 
전술이었다.
  개선주사가 거제도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파되자, 왜구의 노략질을  받아 항
상 불안 속에 빠졌던 부산포, 내이포, 염포(울산)와  남해 바다 일대에 살고 있는 
수만 수천의 주민들은 구름 뫼듯  모여들어 소를 잡고 술을 걸러 환호성을 울리
며 개선장병들을 환호했다.
  개선장군 이종무는 밀화패영에 화려한 구군복 차림으로 모든 장졸들을 대표하
여 만면에 웃음을 띠고 백성들에게 일일이 답례를 했다.
  늙은 부로들이 갓  쓰고 막대 짚고 허리 굽은  몸으로 장군 앞에 가까이 가서 
치하의 말씀을 보낸다.
  "장군의 덕택으로 삼포의 백성들뿐 아니라 연해의 생업하는 어민들이 모두  다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자게 되었습니다.  나라의 위세를 드높이시어 왜적들을 
항복받으신 일도  크게 감사합니다나는,  가난한 고기잡이들이 이제는  마음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러한 기쁜  일이 또다시 어디 있겠습니까. 장
군의 은혜잊을 길이 없습니다."
  이종무 장군은 쾌활하게 웃으며 늙은이의 손을 잡고 대답했다.
  "어찌 나 혼자의 힘으로 완악한 왜적을  항복받았겠소. 모두 다 명철하신 성상
전하의 홍복이시고 모든 장졸들이 잘 싸워준 덕택이외다."
  또 한 사람의 놁은이가 앞으로 나가 말한다.
  "도대체 불과 열흘 동안에 어떻게 두 섬을 정벌하시고 또다시 왜국 본토인 구
주까지 가셔서 왜추들을  섬멸하셨습니까? 자운의 용병하시는 솜씨는 시를 질풍
신뢰와 같습니다. 장자방이나 제갈양이 부생한다 해도  장군의 용병보다 더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천만에, 지나친 과찬이오."
  이종무 장군은 손을 흔들어 사례하고 전함으로 돌아갔다.
  경상도에 주둔하고 있던 도통사  유정현도 참찬 최윤덕과 함께 육정대를 거느
리고 개선주사를 맞이하러 말을 달려 거제로 내려왔다.
  거제 일대는 숭전고를 울리며 며칠 동안 환락의 거리를 이루었다.
  정동대장군, 사문도체찰사 이종무는  진무 송유인을 먼저 한양으로  보내서 개
선함대가 거제도에 돌아온 것을 세종전하께 고했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돈수백배하옵고,  삼가 상왕전하와 성상전하께 아뢰옵
니다. 대마도 도도웅환을  항복받은 일은 이미 전편에 장계를 올려  상세하게 아
뢰었거니와 주사 전군은 배 한 척의 손상이 없이 무사하게 거제도로 돌아왔습니
다. 6월  19일에 거제항에서 출범하와 7월  3일에 개선했사오니 불과  10여 일에 
대마도와 구주 장기를 토벌하와 나라의 위세를  떨쳤습니다. 모두 다 명철하옵신 
상왕전하와 성상전하의  홍복이시옵니다. 삼가  개선함대가 거제에 돌아온  것을 
아뢰옵니다.'
  대마도 정벌에는 나가지 아니하고 경상도에 육전대를 거느려서 후방전선을 통
솔하고 있는 영의정  겸 삼군도통사 유정현도 장계를  올려 대군의 반사를 고했
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크나큰 전과를 올려서 대마도 왜추를 항복 받고, 거제
도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나라의 근심이 덜어졌습니다. 모든 군사를 휘동하여 한
양에 당도하자면 거의  한 달이 걸리겠습니다. 두 분 전하의  강녕하시기를 기원
하면서 우선 장계를 올립니다.'
  두 대장의 장계를 받아  보신 제종전하와 상왕전하의 만족하시는 모습은 말할 
것 없고, 육조판서와 삼사 백관들은 궐하에 나가 전승의 쾌보를 축하하고, 온 나
라의 서민들은 백  년의 암이었던 대마도 해적의  무리를 섬멸했다 해서 어깨를 
으쓱거리고 팔을 뽐내 자랑했다.
  한편 나라 안으로 침략해  들어왔던 대마도 왜적들은 황해도 웅진 백령도에서 
우리의 주사에게 크게 패해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침입했다.
  때마침 중국에 사신으로 따라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통사 김청은 패해 달아났
던 왜적의 정세를 정부에 보고했다.
  '대마도에서 서해로 침략해  들어왔던 왜적은 백령도에서 우리  수군에 대패한 
후에 금주위로 침입했습니다. 명의 도독 유강지는  대군을 휘동해서 왜적들을 몰
살시키고 산채로 잡은 포로들은 북경으로 압송하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 돌
아왔소이다.'
  연달아 쾌한 소식이었다.  승정원에서는 이 사실을 세종전하와  상왕께 아뢰었
다.
  세종전하는 좌의정과 병조판서에게 분부를 내렸다.
  "대마도의 소굴을 무찔러  항복받고 또다시 노략질해 들어왔던 왜추들이 우리 
수군에게 패전을 당한 후에 명나라 금주를 침범했다가 섬멸을 당했다 하니 모두 
다 쾌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혹이나 사잇길로 배를 저어 대마도로  도망가는 무
리들이 있을지 모른다. 병조판서는 아직 돌아오지  아니한 장병들에게 서해 바다
와 동해 바다를 엄하게 초계해서 유루가 없도록 만전의 태세를 취하라!"
  세종전하의 분부를 받은 병조판서 조말생은 다시 한 번 전하의 주밀한 배려에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감격한 말씨로 세종께 아뢴다.
  "밝고 주밀하신 배려를 조수하지 않도록 받들겠습니다. 나라 안에 있는 장졸들
에게는 아직 출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아니했습니다. 성상전하의  명철하신 뜻
을 받들어 방비를 튼튼히 하여 미꾸리새끼같이 빠져 달아나는 왜적들이 비록 몇 
놈 아니된다 하더라도 모조리 잡아 버리겠습니다."
  좌의정 박은이 아뢴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에게 명령을 내리시어 대마도를 재정케 하시옵소서."
  좌의정 박은은 엉뚱한 소리를 한 마디 했다.  좌의정이라 가만히 낮아 있을 수
가 없었던 모양이다.
  "재정이라니?"
  세종전하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정면으로 박은을 바라보고 말씀을 내렸다.
  박은은 반문하시는 세종전하의 말씀에 얼른 대답을  아뢰지 못한다. 고개를 숙
이고 잠자코 있다.
  세종전하는 다시 하문하신다.
  "이종무보고 다시  대군을 휘동해서  대마도를 정벌하라고  영을 내리란 말인
가"?
  "네, 그러합니다."
  "이종무는 대마도뿐  아니라 대마도주 도도웅환이  도망가 있는 구주장기까지 
가서 크게 이겼을 뿐 아니라 항복을 받고  승전고를 울려 거제로 돌아왔는데, 좌
의정은 무슨 까닭에 또다시  재정을 하라 하는가? 도대체 항복받은 놈을 어찌해
서 또다시 치라 하는가?"
  "중국 명나라에서 노략질을 하다가 쫓겨서 대마도로 달아나는 자가 있을  것입
니다. 아주 씨를 말리기 위하여 다시 대마도를 치자는 것입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어이가  없었다. 어전이었다. 껄걸 웃을 수도  없었다. 엄숙
한 얼굴로 좌의정 박은을 향하여 말한다.
  "도대체 대감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왜구가 처음 우리나라로 노략질
하러 들어왔을 때  소인은 대마도를 쳐부수자고 정벌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
나 그때 대감은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대마도를 정벌하면 후환이 크게 두럽다
고 극력 반대론을  제창하셨습니다. 그러던 분이 이번엔 다시 치자고  주장을 하
시니 도대체  대감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항복받은 적을 무슨  까닭에 재정해야 
합니까. 군사를 움직여 적을  치는 데는 당당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중국에서 
쫓겨 달아나는 몇 명의 왜적이  있을까 해서 2백여 척의 큰 전함과 만 칠천명의 
많은 군사를 움직여서 다시 바다를 건넌다는  일은 가소롭기 짝없는 일이올시다. 
처음에는 출전을 반대했다가 이제 크게  이기고 나니 또 한 번 쳐보자는 말씀입
니까? 좌의정 대감, 생각해보시오.  왕사는 당당한 정의와 대의명분을 밝히고 움
직이는 법입니다. 다 쓸어버려서 항복받은 잔적을 왜  다시 치자 하십니까? 절대
로 아니됩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쾌쾌하게 좌의정 박은을 공박했다.
  세종전하는 미소를 지으시며 병조판서가  박은을 공박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
었다.
  박은은 무안에 취해서 얼굴빛이 홍당무가 되었다.
  박은은 원래  자기의 이름자 그대로 비평하기를  좋아해서 강직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상왕인  태종의 비위를 잘 맞추어서 벼슬이 좌의정의  높은 자리
에까지 올랐다.
  나리일을 다스리는데 사건 전체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아니하고 입바른 것으로 
자기의 주장을 삼아서 다른 사람과 타협하기를 싫어했다.
  이러한 까닭에 세자를 폐하여 양녕으로 강등시킬 때도 박은이 앞장을 서서 적
극 주장했고, 양녕을 광주로 쫓아낸 후에 세종이  동궁이 된 우에 어마마마의 뜻
을 받들어 다시 서울로 들어오게 하려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사람도 박은이
었다.
  다음 세종이 즉위한 후에 국구인  심온을 역적으로 몰아 자진해 죽게 한 배후
의 장본인도 박은이었다.
  왜구가 서해 바다로 쳐들어와서 정벌론이 일어났을  때, 박은은 절대로 대마도
를 정벌해서는 아니된다고 여러 차례 역설했다.
  오직 병조판서 조말생만이 이 기회에 배은망덕하는 왜추들을 응징하지 아니하
면 마침내 크나큰 두통거리가 된다고 힘차게  주장해서, 결국 이종무로 대장군을 
삼아서 대마도 정벌을 단행해서 적구의 소굴을 소탕하고 멀리 구주 장기까지 적
을 추격해서 유사 이래의 큰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제 대마도 정벌을  반대하던 박은이 이종무의 첩보가  들린 후에는 돌연 첫 
번째 자기의 주장을 완전히 뒤엎고, 당당하게  항복받은 적을 재정하자고 주장하
니 병조판서 조말생은 귓구멍이 막힐 지경이었다.
  뒤늦게나마 재정론을  주장해서 먼젓번 반대했던 어리석은  일을 씻어 버리고 
새판으로 논곤행상에 한몫 끼여보자는 배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의정 유정
현은 영의정인 까닭에 최고지휘관 도통사가 되었고,  병조판서 조말생은 적극 주
전론자인 역시 수훈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좌의정은 이번 대마도 정벌에는 아무런 공이 없다.
  공이 없을 뿐만이 아니다. 대마도 정벌을 적극 반대한 사람이었다.
  크게 이겨서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2백여 척의 전함과 만 칠천여 명의 개
선군을 맞이하게 되니, 좌의정의 높은 자리에 있어서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명나라에서 쫓겨서 대마도로 달아나는 피라미새끼 같은 왜적 몇 명을 잡기 위
해서 다시 대마도를 치자고 주장해 본 것이다.
  세종은 명철하고 관후장자의 품격을 지닌 임금이었다.
  만면의 웃음을 용안에 띠고 좌의정과 병조판서 두 신하를 바라보고 말씀을 내
린다.
  "좌의정의 주장도 옳기는 옳소. 원래  왜추들은 간휼무쌍한 놈이라 면종복배하
는 일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칠월, 팔월은 바닷바람이  억세고 위험하오. 그러
기에 이종무한테도 칠팔월이 되기  전에 항복을 받았으면 속히 돌아오라고 칙사
를 보낸 일이 있었소. 이제 크게 이기고  돌아왔으니 하회를 보아 다시 의논하기
로 합시다."
  세종전하는 둥글게 두 신하를 타일렀다.
    논공행상
  그러나 좌의정 박은은 마음이 흡족하지 아니했다.
  첫째로 병조판서한테 논박을  당한 것이 분하고, 주상전하가  얼른 동조해주지 
않는 것도 마음속에 불만이 있었다.
  경복궁에서 물러난 후에 바로 수강궁으로 향하여 상왕께 알현을 청했다.
  상왕은 좌의정 박은을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편전에서 술까기 대작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당신의 비위를 잘 맞추는 때문이다.
  박은이 알현을 청하니 상왕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알현을 허락했다. 만면에 웃
음을 띠고 박은을 맞이했다.
  "좌의정이 어찌해서 알현을 청했소?"
  "군국대사에 대하여 긴히 아뢸 일이 있사와 뵙기를 청했습니다."
  군국대사란 말을 듣자  상왕은 깜짝 놀랐다. 나라에 또다시 왜구가  침략한 줄 
알았다.
  "군국대사라니, 나라에 무슨 이변이 생겼단 말인가?"
  "아니올시다. 변란이 생긴  것은 아니옵고 대마도에 대하여  아뢸 일이 있습니
다."
  "무슨 일인가? 대마도 정벌에 대해서는  이미 대첩했다는 장계가 들어왔고, 이
종무는 거제도로 개선을 해서 곧 한양으로 반사를 하는 도중에 있지 아니한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소신은 대마도 재정을 주장합니다."
  "개선하는 군사에게 대마도를 다시 정벌하란 말인가?"
  상왕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네, 그렇습니다. 이종무의 개선부대가 한양까지 돌아오기 전에 급히  개선군을 
돌려서 더 한 번 대마도를 무찌르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까닭을 말해보오."
  "명나라에서 돌아온 통사 김청의 말을 듣자오니 우리 나라로 노략질하러  들어
왔던 대마도 왜적들은 중국  금주로 들어갔다가 도독 유강지한테 몰살을 당하고 
산채로 잡힌  놈들은 북경으로 잡혀갔다  합니다. 그러나 필시  중간에서 도망을 
쳐서 대마도로 달아나는 놈이 있을 것입니다.  이종무의 거느린 군사는 한양으로 
돌아오지 말고 거제에서 다시  배를 돌려서 대마도로 갔다가 중국에서 도망쳐서 
소굴로 돌아가는 놈들을 모조리 시살해버린다면 영영 후환이 없으리라 생각합니
다. 사반공배올시다. 힘 안들이고 대마도놈들의 씨를 아주 말려 버리는 일이올시
다. 전하께서는 또 한 번 용단을 내리십이오."
  상왕 태종은 박은의  말이라면 어느 때나 그럴  듯하게 생각하는 습성이 있었
다. 그도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좌상의 말도 일리가 있소. 그럴 듯한 생각이오. 그리해봅시다."
  박은은 군국기무의 중하고  큰일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건의가 통과되
는 것만이 기뻤다.
  "꼭 재정을 하도록 성지를 내려주십시오."
  박은은 배례를 드리고  물러났다. 의기가 양양해서 빈청으로 나갔다. 병조판서 
조말생을 청했다.
  "이제 상왕전하께서는 대마도 재정을 허락하셨소.  곧 삼군부에 하명이 계시오
리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박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가만히 좌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박은하고 옳고 그른 것을 따져서 말한댔자 소용이 없는 노릇이었다.
  침묵을 지켜 대답을 아니하고 곧 경복궁으로 들어가 세종대왕께 뵈었다.
  "좌의정 박은이 상왕전하께 아뢰고 대마도 재정을 주장해서 곧 이종무에게  다
시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릴 듯합니다. 공연히  국력만 소비하고 해적들에게 비웃
음을 받는 당치 않은 일이올시다. 이 일을  막으실 분은 오직 주상전하께서 계실 
뿐이올시다. 속히 상왕전에 납시어 재정하랍시는 분부를 막아주십니오."
  세종전하도 깜짝 놀랐다.
  "상왕전하께서 재정하라는 분부를 내리실 것이라는 말을 누구한테 들었는가?"
  "좌의정이 소신으로 빈청으로  청해서 곧 재정분부가 계실 것이라고 대기하고 
있으라 말했습니다. 필연코 좌의정이 건의를 올린 듯합니다."
  "군사를 움직이는 일은 삼군부 회의를 열어서  처리할 일이지, 어찌 좌의정 한 
사람의 의사로 결정이 되겠소. 과인이 곧 상왕전하께 아뢰어 바로잡으리다. 병판
은 염려 말고 물러가오."
  "명철하신 처분이올시다. 재정은 절대로 불가합니다."
  "삼군부 회의가 열리거든 지체없이 나오도록 하오."
  병조판서 조말생은 마음속으로 '과연 명군이시로구나!' 하고 탄복했다.
  조말생이 퇴궐한 후에 세종전하는 곧 수강궁으로  상왕께 문안을 들어갔다. 상
왕은 아드님 배례를 받은 후에 웃음을 머금고 말씀을 내린다.
  "그러지 아니해도 전하를 청하여 의논할 일이 있었는데 마침 잘 들어왔소."
  세종전하는 무릎을 꿇고 상왕께 묻는다.
  "무슨 하문하실 일이 계시오니까?"
  "아까 좌의정 박은이  입궐해서 이종무의 개선부대가 한양으로 돌아오기 전에 
다시 대마도로 가서 중국에서 도망쳐 오는  왜적들을 모조리 섬멸시키자 하기에, 
일리가 있는 말이라 그렇게 하는 것도 좋겠다고 허락했소."
  세종전하는 조금도  용안에 흐린 빛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부드러운 말씀으로 
대답한다.
  "군국의 대사는 모두 다 아바마마께서 처결하시는 일이올시다마는  아바마마를 
도와드리는 삼군부가 있습니다. 한번 회의를 열어  처결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
다."
  세종전하는 아바마마의 불덩이 같은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비단결같이 곱고 
부드럽게 말씀을 올렸다.
  "전하의 말이 옳소. 내 비록 처결하는 권한을 가졌다 하나 군사를 움직이는 큰
일을 어찌 독단하겠소.  지난번 대마도 정벌을 결정할 때도 전하와  함께 중신회
의를 열어서 비로소 단행했던 것이오."
  비단결같이 곱고  곱게 아뢰는 세종전하의  말씀에, 독재적 강한  성격을 가진 
상왕도 한결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영의정인 도통사 유정현이 돌아오고, 실전을 치른  이종무도 온 후에 다시 의
논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하리다."
  이리해서 박은이 주장한 대마도 재정론은 일시 보류가 되었다.
  가을 하늘 드높은 팔월이었다. 들에는 고개를  속인 벼이삭이 황금물결을 이루
고, 산에는  밤나무 가지마다 송이송이 아람이  부풀어 터졌다. 촌락마다 충성한 
가을을 맞이하는 즐거운 한가위 철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흠뻑 평화와 풍윤 속에  격양가를 높이 부르고 있을  때, 또 
한 가지 국민들의 마음을 더한층 기쁘게 해주는 일이 있었다.
  우리 수군 만 칠천여 명은  바닷가 변지를 시끄럽게 했던 해마도 왜적의 소굴
을 무찔러 소탕한  후에, 도망치는 도주 도도웅환을 구주 장기까지  추격해서 크
게 싸워 항복을 받고 승전고를 울려 돌아온다는 소식이었다.
  개선하는 대군이 거제에서 한양까지  돌아오는 천 리 길에는 고을마다 역말마
다 남녀노소들이 줄을 지어 연도에 나와서 개선군을 환영했다.
  동리마다 닭을 잡고 돼지를 삶았다. 술을 거르고 밥을 지었다.
  국을 끓여 동이로 나르고 떡을 쳐서 소래기로 옮겨서 개선하는 병사들을 대접
했다.
  마을마다 동리의 풍헌과 약정들이며 칠십 팔십 나이 많은 노인들이 막대를 짚
고 나와서 개선장군 이종무 이하 모든 절제사들한테 치하를 했다.
  "간휼무쌍한 대마도 왜적들을 일망타진해서 무찌르시고 국가의 우엄을  사해에 
떨치셨으니 이런 기쁠 때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이제는 우리들 변지에 사는 백
성들은 베개를 높이 해서 마음놓고 자겠습니다."
  "불과 열흘 동안에 험한  풍랑과 독한 장기를 물리치시고 완패한 왜적을 소탕
해 돌아오신 과연 불세출의 명장이십니다. 우리들  변지 백성들은 이장군의 위대
한 업적을 폐부 속에 길이길이 새기오리다."
  대장군 이종무는 모든 아장들과 함께 만면에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모두 다 주상전하의 홍복이시고  국민 여러분들이 한데 뭉쳐서 뒤를 받쳐 주
신 덕택입니다."
  가는 곳마다 이장군은 간곡하게 환영하는 부로들에게 감사하는 말을 보냈다.
  다만 이중에 얼굴빛이 쾌활하지 못하고 우울한 표정을 항상 띠고 있는 장군이 
있었다. 용기만 믿고 싸우다가 잠시 패전을 한 박실이다.
  서울로 향해  돌아오는 개선군이  한강변에 당도하니, 상왕전하와  세종전하는 
칙사를 보내서 어사주를 내리고 대장군 이하 모든 장병을 위로했다.
  대장군 이종무는 곧 서울로 들어가 세종전하와 상왕전하께 뵈었다.
  세종전하는 병조판서와 모든 승지들이 시립한 중에서 우악한 말씀을 내렸다.
  "불과 열흘에 대마도 왜적을 소탕하여 항복받은 일은 청사에 길이 빛을 낼 일
이다. 경에게 찬성사의 높은 벼슬을 주어 노고를 치하한다."
  이종무는 감격한 눈물을 머금고 교지를 받들었다.
  다음에 논공행상에 참여한 장병은 그 수가 2백여 명이나 되었다.
  한편 병조판서 조말생은  구주 장기 강악 대전에서  일시 패전한 박실을 어찌 
조처할 것을 세종전하께 물었다.
  "개선 중에 잠시  하자라고 할 수 있는  좌군절제사 박실의 패군한 죄를 어찌 
처결하려는지 감히 아뢰옵니다."
  세종전하는 한동안 말을 아니하고 깊은 생각 속에 빠졌다가 천천히 말씀을 내
렸다.
  "박실은 효자다. 이  까닭에 상왕전하께서 극히 사랑하시는 사람이다. 비록  강
악에서 패군한 죄가  있다 하나, 훈내곶이에서는 적의 괴수 도도웅환을  두 번이
나 화살로 쏘아 크게 이긴 공로가 있다 한다. 공과 죄를 상쇄해서 공, 죄를 밝힌 
후에 삭탈관작을 면케 하라!"
  원래 박실은  무과출신 박자안의 아들이다.  태조가 왕위에 있고  태종이 아직 
잠저에 있을 때  박자안은 경상도 절제사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
게도 군기를 태만하게 처리했다. 
  태조는 크게 노하여 옥에 가두고 참형에 처하려 했다.
  자안의 어린 아들  박실은 정안군(태종이 되기 전의 군호)을  찾아보고 울면서 
아비 대신 죽여 달라 간곡하게 고했다.
  정안군은 나어린 박실의 효심에 감동이 되었다.  태조께 아뢰고 박자안의 죽음
을 면케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박실은 항상 정안군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게 되었고 정안
군이 방석을  토벌했을 때, 장교의  한사람으로 출전하여 공신의  칭호를 받았던 
것이다.
  세종전하는 아버지 상왕과 박실의  인연을 생각해서 죄를 공으로 상쇄해서 관
작을 그대로 두라는 분부를 내린 것이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세종전하의 특명을 받들어 병조로 나가 회의를 열었다.
  아무리 조상전하의  특명이라 하나 병조판서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었
다. 비록  왕권이 존엄하다는 왕조의 제도라  하나, 그대로 유유낙낙해서 임금의 
말에 덮어놓고 복종하지 아니하는 것이 또한 왕조 신료들의 꿋꿋한 기풍이었다.
  임금도 맘대로 못하고 대신도 맘대로 못했다. 반드시 여론을 들어서 판정했다. 
이것이 전제 왕조이면서도 임금 혼자도 독재를 못하게 했던 왕조의 엄연한 질서
요, 이로 인해서  왕조는 비록 전체적 통치시대였다 하나 그  수명이 5백여 년이
라는 길고 긴 역사와 세월을 유지했던 것이다.
  병조에서는 판서 조말생을 위시해서 병조참판,  참의, 정랑, 좌랑들이 질서정연
하게 모여 앉았다. 먼저 병조의 장관인 판서 조말생이 말을 꺼냈다.
  "이번 대마도 개선장병에 대하여 논공행상을 하는 중 삼군도체찰사 이종무  장
군에게는 장천군의 군호를 내리시고 의정부 찬성으로  특진을 시겼으면, 모든 은
전을 받은 장병들이  2백여 명이나 된 것은 여러분들도 다  아는 일이지만, 잠시 
패군을 한 좌군절제사 박실에 대하여 어찌 처리할 것을 전하께 아뢰었더니 비록 
허물이 있었으나 공과 죄를  상쇄해서 삭탈관작을 면하도록 하라는 분부가 계시
었소. 어찌 처리해야 할지 여러분의 의견을 말씀하시오!"
  그중 벼슬 계제가 나은 병조좌랑이 말한다.
  "공과 죄를 비겨서 상쇄하기 이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패군지장을 
불러서 패군한 죄를 묻지도 아니하고 덮어놓고 주상의 명령이라 해서 미리 공과 
죄를 상쇄한다는 일은  군법을 문란시키는 일입니다. 박실을  구금시켜서 치죄한 
후에 처단하는 일이 당연합니다."
  새로 대과급제를 해서 좌랑에 임명된 새파란 청년 학사의 주장이었다.
  다음에 삼십대를 겨우 넘어선 병조정랑이 말한다.
  "좌랑의 말이 옳습니다.  먼저 치죄를 하고 증심을 한 후에  상을 주든지 벌을 
주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덮어놓고 공으로 죄를  속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아니
합니다. 아무리  주상전하나 상왕전하의  분부라 할지라고 봉행하지  못하겠습니
다."
  정정당당한 정랑의 태도다. 병조참의가 말을 꺼낸다.
  "좌랑과 정랑의 말이  옳습니다. 한번 군법이 구부러진다면  장차 다음번 군법 
처리를 어찌하실 작정입니까?  정실관계로 군법을 굽힐 수는 없습니다.  먼저 박
실을 문초하여 죄상을 다스린 뒤에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서 처결하는 일이 옳
습니다. 덮어놓고 주상전하의 분부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병조참의는 박실과 상왕의 인연이 깊은 일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낌없이 정정당당하게 정론을 주장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좌랑, 정랑,  참의의 말을 귀기울여 들은 후에 잠자코 침묵
을 지켜 앉았는 병조참판에게 의향을 묻는다.
  "참판 영감의 의향은 어떠하오? 말씀해보시오."
  병조참판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참의 영감 이하 모든 관원들의 말씀이 다 옳은 줄 생각합니다. 사실의 곡직은 
여하간에 먼저 패군지장을  하옥한 후에 치죄를 해야 합니다. 이리해아  만 칠천
여 명의 장병들이  비로소 납득이 될 것입니다. 그리한 후에  삼군도통사와 사문
도체찰사가 임석한 후에 증언을 들어서 공죄를  결정할 것입니다. 더구나 삼군도
체찰사는 현지 일선에서  주상전하의 몸을 대신해서 삼군을  지휘한 사람입니다. 
휘하 장두 박실의 공과 죄를 잘 알아  판단할 것입니다. 당연히 도체찰사와 도통
사가 임석해서 병조에 심증을 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대감께서는 오늘 우리
들 병조의 회의한 일을 주상전하께 아뢰고 박실을 치죄하자 주장하십시오."
  병조판서 조말생도 식견이 높은 사람이다. 대마도  출정을 적극 반대했던 좌의
정 박은을 누르고 기어코 대병을 출동시켜서 오늘의 큰 승리로 국위를 드높이게 
한 녹록지 아니한 병조의 장관이었다.
  모든 막료들을 향하여 장중하게 말한다.
  "여러분의 정당한 말씀을 나도 옳다고 생각하오. 곧 입궐해서 상왕전하와 주상
전하께 병조의 정론을 아뢰고 박실을 우선 치죄하기로 합시다."
  병조 장관인 판서의 당당한 태도에 모든 사람들은 미덥게 생각했다.
  "정정당당하게 병조의 질서와 법을 지키시오록 합시오."
  젊은 좌랑이 한 마디 덧붙였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자비를 타고 곧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주상전하께 아뢰옵니다. 박실의 패군의 일에 대하여 결정했습니다. 만약에  이
러한 일을  취하지 아니한다면 상벌이  분명치 아니하게 됩니다.  상벌이 분명치 
않게 된다면  기강이 없어져서 군령을  내릴 수없고, 군령이  행하지 아니한다면 
앞으로는 왜적을 토벌하는 군사를 출동시킬 수 없습니다."
  조말생은 차근차근 조리를 따져 아뢰었다.
  세종전하는 미소를 지어 대답한다.
  "과인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당연히 치죄를 하는 일이 옳은 줄 안다. 그러나 
경에게는 아직 말을 하지 아니했으나 저번에 과인이 상왕전에 문안을 들어가 대
마도의 일을 아뢰었을 때 박실의  첫째번 승리와 둘째번 패한 일을 말씀드린 일
이 있었다. 그때  상왕께서는 '공과 죄를 비겨서 상쇄하는 것이  좋겠다' 하신 말
씀이 있었으므로 상왕전하의  뜻을 거스르지 아니하려고 경에게  부탁한 말이다. 
내비록 임금이라 하나 어찌 국가의 군법을 어길 수 있는가? 상왕께 간곡하게 아
뢰고 병조에서 잘 처단하라!"
  어디까지나 경우에 밝고  명철한 임금이었다. 병조에서 처단할  것을 허락하였
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신하들의 말을 눌러버리고 독재의 위세를 뵈지 않는 냉철
한 전하의 말씀에 감복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다만 부왕인 상왕의 뜻을 거스르지 아니하려 하여 공과 죄의 상쇄론을 분부한 
일을 알게 되었다. 박실도 효자지만 세종대왕도 효자라고 생각했다.
  "전하의 효심이 해와 달같이  빛나신 것은 조야의 창생들이 다 아는 바이옵니
다. 상왕전하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 내리신 말씀인  줄 비로소 알고 황공함을 금
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법은 법이옵니다. 법을 한번 굽힌다면 앞으로 만백성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전하의 효심은 깊이 가슴속에 간직한 채  상왕전에 아뢰어 
공평무사하도록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어전에서 물러난 후에 궐하에서  자비를 돌려 수강궁으로 
나가 상왕께 뵈었다.
  "대마도에서 개선한 장병들에 대하여 아뢸 일이 있사와 알현을 청했습니다."
  "장천군 이종무 이하 2백여  명에 대하여 논공행상은 이미 끝난 줄 아는데 또
다시 누구에게 상을 줄 일이 있는가?"
  "상을 주는 일이 아니오라 패군한 죄를 진 박실에 대하여 치죄를 해야 하겠습
니다."
  "일전에 나는 상감에게 박실이  비록 패한 일이 있다 하나 먼젓번에는 대마도 
괴수를 두 번씩이나 활로  쏘아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하니, 공과  죄를 서로 비
겨서 전직에 그대로 머물러  두게 하라 말한 일이 있다. 경은  아직 사암에게 어
떠한 분부를 받지 아니하였는가?"
  병조판서 조말생은 능소능대한  재상이었다. 행여나 상감과 상왕  사이에 털끝
나치라고 틈이 벌까 염려했다.
  "먼저 군사권을 장악하신 상왕전하께 품달한 연후에 상감께 아뢰려고 아직  말
씀을 드리지 아니했습니다. 상왕전하의 하교를 바라옵니다."
  상왕 태종은 만면에 웃음이 화려했다. 병조판서의  대답이 비위에 맞는 모양이
었다.
  "아까 내가 상감한테 말했다 하지 아니했던가.  치죄할 것 없이 그대로 시행하
는 것이 좋겠네."
  상왕은 유아독존의 분부를 거침없이 내렸다.
  조말생이 다시 고한다.
  "패군지장을 심사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둔다면 묘당에 여론이 비등할 뿐  아니
라 앞으로 사기에  크나큰 영향이 미칩니다. 병조에서는 군법을 무시할  수 없다
하여 일단 치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법을 유린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병조판서는 정색하고 아뢰었다.
  상왕의 화려한  웃음빛은 금방 사라졌다.  독재의 화신인 상왕의  용안은 돌연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렇다면, 병조에서는 꼭 박실을 잡아다가 치죄를 하겠단 말인가?"
  "네, 조정 여론이  무섭고 죽도록 싸워서 이기고 돌아온 수군  만 칠천여 명의 
사기의 크나큰 영향이 미칩니다."
  조말생은 꿋꿋하게 대답했다.
  상왕의 안색은 현연하게 불쾌한 빛이 역력히 떠돌았다. 가슴속에는, 
  '감히 내 말을 어떤 놈이 항거한단 말이냐!'
  불덩이 같은 화기가 치밀었다.
  그러나 조말생은 병조에 없지 못 중진이다.  또한 패군지장을 치죄하겠다는 이  
일을 가지고 병조 장관을 호통쳐서 꾸짖을 일도 못된다.
  상왕은 목까지 뻗쳐오르는 불덩이 같은 화기를 꽉 참았다.
  잠깐, 마음을 돌렸다. 
  "그렇다면, 병조에서는 기어코 박실을 잡아다가 치죄를 해야 하겠단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병조의 여론이 그러합니다. 뿐만 아니라 상왕전하께서는 국가
의 군국기무를 금상전하께 맡기시지 아니하시고 친히 통솔하시는 처지에 계십니
다. 박실이 패군의  죄를 어찌해서 저질렀는지 사실해보지도  아니하시고 덮어놓
고 면해주신다면 뒷날 사관들이 춘추필법으로 사실을 쓰기 어려울 것입니다."
  병조판서의 조리정연한 말에,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맹호 같은  성격을 가진 
상왕이건만 어찌하는 도리가 없었다.
  "병조의 여론이 정 그러하다면 박실을 의금부로 넘겨 심문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 뜻을 상감께 전하라!"
  조말생은 비로소 숨을 돌렸다.
  "영명하신 상왕전하의 뜻을 상감께 품하겠습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상왕전에서 물러나 다시 자비를 경복궁으로 돌렸다.
  세종은 미소를 풍기며 병조판서를 인견했다.
  "박실의 일을 상왕께 아뢰었는가?"
  "네, 아뢰었습니다. 치죄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조말생도 화색이 만면해서 대답했다.
  "용하게 허락을 맡았구려!"
  세종전하는 소리를 높여 웃으셨다.
  "상왕전하께서 주상전하를 대신해서 군국기무의 중대한 책임을 통솔하시는  처
지에 패군지장을 문죄도 아니하고 벼슬을 위임시킨다면 뒷날 사관이 춘추필법으
로 붓을 들기 어렵습니다 하고 아뢰었더니  필경엔 허락을 내리셨습니다. 전하께 
아뢰옵고 의금부에 나수하여  치죄하라 하셨습니다. 소신도 이제는  병조 여론에 
대하여 면목이 서게 되었습니다."
  "영명하신 상왕전하께서 어찌 병판의 강직하고 조리 있는 말을 아니  들으시겠
소. 일이 잘 처리되리다."
  말씀을 마치자 도승지를 불러 의금부 제조 변계량에게 입시를 명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상왕인 태종의  강인한 성격과 아드님 세종의 우아한 성정
이 제각기 특색을 가져 현저하게 판이한 것을 새삼 느꼈다.
  이윽고 의금부 재조 변계량이 도승지의 인도로 어전에 부복했다.
  변계량은 호를 춘정이라 부르는 당대의 글 잘 하는 재상이었다.
  세종전하는 옥좌에서 일어나 배례드리는 춘정을 맞이했다.
  "경에게 당부할 일이  있소. 이번 대마도 정벌은  적굴을 소탕했을 뿐 아니라, 
도주를 항복받아 크게 국위를  선양했으나, 좌군 박실이 약간 패전을 했다 하오. 
상왕께서 박실을  사실하라는 분부가 계시니 의금부에  나수하여 패군한 까닭을 
묻게 하오."
  병조판서가 시립한 속에 변계량에게 장중한 분부를 내렸다.
  변계량은 국궁하고 대답했다.
  "하교대로 봉명하여 전말을 품달하겠습니다."
  세종은 또다시 한 말씀을 당부한다.
  "박실이 비록 패군한 일이 있다 하나 먼저 싸움에는 적장을 두 번씩이나 쏘아
서 산골 속으로 쫓아버렸다 하오. 모든 일을  상세히 사실해서 원통한 일이 없도
록 처리하오. 또한 박실은  공신의 아들일뿐 아니라, 극진한 효자라 해서 상왕전
하께서 매우 촉망을 두셨던 사람이오. 의금부 제조는 잘 처리하도록 하오."
  자상하고 어질고 자비스런  말씀이었다. 강직한 병조판서 조말생도  시측해 듣
고 전하의 어진 마음에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의금부 제조 변계량은 병조판서와 함께 어전에서 물러났다.
  의금부에서는 곧 박실을 나수했다. 제조 이하  모든 당상관들이 좌기를 차리고 
박실을 문초하기 시작했다.
  박실은 지장은 되지 못하나 용장이었다.
  금부 당상들 앞에 나타나 부끄럼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구주 장기 두지포 일대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소. 왜적의 결사대
들이 목책을 넘어서  보초를 묶어놓고 해변으로 내려와 우리 배에  불을 질렀소. 
왜추들은 이틈을 타서 달아나자는  배짱이었소. 어찌 가만히 앉아 보겠소. 곧 좌
군 일부대를 휘동하여 강악까지 적을 쫓다가 복병을  만나 패전을 한 것이오. 곧 
이종무 대장군께 연락을 취한 후에 행동하고 싶었으나 일이 급하니 좌군만 데리
고 산악지대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때 어떠한 장수라도 참을 수는  없었을 것
입니다. 다행히 이종무 장군이 대군을 휘동해서  굴속에 있는 적병들을 화공하는 
바람에 마지막판에 큰 승리를 얻어서 도도웅환을  항복받았소. 나는 성정이 너무
나 급했던 것을 후회할 뿐이오. 그리고 용장이  슬기 있는 장수만 하지 못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소. 패군한 죄를 받아야 마땅하오."
  박실은 조금도 비겁한 태도가 없었다. 솔직하게  자기가 성미 급한탓으로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험한 산속으로 뛰어들어갔다가 복병을  만나 패전한 까닭을 
진술했다.
  의금부 제조  변계량은 증인으로 배석해 있는  삼군도체찰사 이종무에게 묻는
다.
  "좌군절제사 박실의 진술에 대해서 틀림이 없습니까?"
  "틀림이 없습니다."
  담담하게 대답했다.
  금부 당상 변계량은 다시 증인으로 불러온 목격자 한인 포로에게 물었다.
  "너는 좌군에 예속되었던 한인 포로로서 강악 싸움을 목격한 자라한다. 박장군
의 진술이 틀림없느냐?"
  한인 포로는 뜰 아래서 대답했다.
  "네, 틀림없습니다.  박장군은 비록 일시 패했다  하나 훌륭하신 장군이십니다. 
맨 처음  훈내곶이 싸움에 적을  추격해서 도도웅환의 투구룰  쏘아 떨어뜨리고, 
두 번째  화살은 도도웅환의 어깻죽지를  맞혀서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습니다. 
어쨌든 박장군은 잠시 복병을  만나 패군한 일이 있다 하나, 첫  번 싸움에 크나
큰 공을 세운 분입니다."
  금부 당상 변계량은 서리에게 명하여 모든 공초를 기록하게 했다.
  변계량은 다시 임석해 있는 영의정에 도통사를 겸한 유정현한테 묻는다.
  "대감께서는 이번 대마도 정벌에 삼군을 통솔하시던 도통사이십니다. 새선하는 
즉시 어찌해서 패군지장을 죄주지 아니하시고 병조에서 규탄하는 물의가 일어날 
때까지 아무 말씀을 아니하셨습니다?"
  도통사 유정현이 정색하고 대답한다.
  "내가 비록 도통사라 하나 군에는 질서와  관장하는 책임이 따로 있습니다. 전
방 전지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사람은 삼군도체찰사가  있습니다. 나는 박실이 패
군한 일을 보고받고,  현지의 총지휘관인 이종무 장군에게 물어습니다. 어찌해서 
패군한 죄를 묻지 않느냐  했더니, 이장군의 대답이 박실은 약간 패군한 일이나, 
그때 그 경우를 당하면, 누구나 어찌하는 수가  없고 첫 번 훈내곶이 싸움에서는 
박장군이 적장을 두 번씩이나 쏘아서  수백 명을 참획했을 뿐 아니라 적의 세력
을 크게 꺽어 치명상을 이루게 했으니, 죄를  공으로 비겨서 논죄를 하지 않겠다 
했소이다. 군대를 다스리는 것은 전방 지휘관의 관할에 속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임금이 대장에게 군권을 맡길 때 대장이 탄 수레를 밀어주면서 곤이내는 과인이 
치지하고 곤이외는  장군이 치지한다는 말이  있소이다. 내 비록  도통사라 하나 
현지 지휘관의 말을 어찌 아니 듣겠소. 이리해서  불문에 부치고 위에 말씀을 드
리지 아니한 것입니다."
  영의정 겸 도통사 유정현은 사리를 따져서 여유작작하게 대답했다.
  금부 당상은 다시 이종무 장군에게 묻는다.
  "장군께서는 일선의 총지휘관으로  어찌해서 패군지장을 죄주지 아니하셨습니
까?"
  "패군이란 전쟁터에 나가 적과 싸워서 패해 돌아와야만 패군입니다. 전쟁을 하
는 중에 국부전으로  일승일패는 병가상사입니다. 전체를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
장병에게 무슨 패군지장이란 불명예를 씌웁니까. 이  까닭에 나는 박실을 죄주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당당한 개선장군의 한 사람입니다. 만약에 내가 대마도 정벌
에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면 패군지장의 죄를 내가 질  것입니다! 그러
나 나는 당당하게 우리들 부하와  함께 대마도 소굴을 소탕한 후에 대마도 왜추
의 항복을 받고 돌아왔소이다. 어찌 내부하의  한 사람이라도 패군했다는 허물을 
씌우리까. 이 까닭에 나는 잠시 패군한 일을 거론도 하지 아니하였소. 박실은 나
와 같이 당당한 개선장군입니다."
  이종무는 씩씩한 말투로 정정당당하게 박실을 두둔해서 대답했다.
  도통사의 대답과 이종무의 말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수긍시키지 아니할 수 
없었다.
  금부 당상 변계량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물었다.
  "병판 대감은 두 분 말씀을 다  들으셨습니다. 병조에서는 다시 이론이 없겠습
니까?"
  병조판서 조말생이 천천히 대답한다.
  "대마도 정벌을 적극 주장한 것은 병조입니다.  이제는 쾌한 승리를 거두어 적
을 항복받고 국위를  선양해 돌아왔으니 국가의 큰복이올시다.  모든 개선장병의 
크나큰 노고에 대하여 치하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논공행상하는 일도 또
한 병조의  임무입니다. 박실의 패군 한  일이 있어 장교 중에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사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통사와 도체찰사는  아무러한 말씀이 없으니 
논공행상을 하기가  극히 어려웠습니다.  이러하므로 병조에서는 박실의  패군이 
비록 국지에 제한되었던 일부분의 패전이라 하나 논공행상을 위하여 그 죄를 명
확하게 밝히자는 것입니다. 삼군을 통솔하셨던 도통사와  도체찰사 두 분이 미미
한 죄라 해서 다 함께  불문에 부치신다 하면 병조에서도 더 우기지는 아니하겠
습니다. 다만 두 분 전하의 처분을 따를 뿐입니다."
  병조판서는 경위를 밝혀 대답했다.
  금부 당상 변계량은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며 사문을 끝낼 것을 선언했다.
  "그렇다면 금부에서는 공초를 마치고 위의 처분을 받들어 결정하겠소이다."
  변계량은 금부의 사문을 끝내고 곧 수강궁  상왕전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세종
전하도 상왕을 모시고 있었다.
  "금부에서 박실의 패군한 일을 소상하게 사문하여 아룁니다."
  "도통사와 도체찰사도 임석을 하게 했는가?"
  "두 사람뿐 아니라 박실이  패군했을 때 좌군에 소속되었던 목격자 한인 호로
도 불러서 패군한 일을 자세하게 알아봤습니다."
  "무어라고들 하던가?"
  "박실은 솔직하고 순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의 결사대 몇  놈이 목책을 넘어 
들어와 보초를 결박진 후에 해변으로 내려와 우리 배에 불을 지르고 이 틈을 타
서 왜추들이 달아나려  하니, 급한 마음에 직속부대 좌군만 데리고  적의 소굴인 
험한 산중으로 올라갔다가  복병을 만나서 패군을 했다고  솔직하게 고했습니다. 
그리고 용맹스런 장수는 슬기로운 장수만 못하다고 한탄을 했습니다."
  "눈으로 보았다는 한인도 그같이 말하던가?"
  "그뿐만 아니라 박실이 첫 번 훈내곶이 싸움에는 왜추를 두 번이나 쏘아서 큰 
공을 세웠다 합니다."
  "도체찰사는 무어라 말하던가?"
  "패군이란 적과 싸워서 패해  돌아와야만 패군이지 전쟁을 하는 도중에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는 것은 병가상사인데, 전체를 이기고 돌아온  개선장병에게 패
군장이란 누명을 어찌 씌울  수 있는가? 그러므로 박실한테 죄를 묻지 아니했다 
증언했습니다."
  "병조에서는 무엇이라 말하던가?"
  "논공행상에 명분을 밝히기 위하여 여론이  일어난 것이라 했습니다. 도통사와 
도체철사의 증언을 들은 후에 병조판서는 비로소  마음이 석연히 풀렸습니다. 두 
분 전하의 뜻을 따를 뿐이라 했습니다."
  상왕은 금부 당상 변계량의  소상하게 아뢰는 말을 듣자 아드님 세종전하에게 
의향을 물었다.
  "지금 금부 당상의 보고를 종합해 들으니 도통사와 도체찰사도 박실을  죄주려 
하지 않는 모양이니 전하의 뜻은 어떠하오?"
  "전면 전투에 있어 국위를 크게 드날려서 개선한 장병들이올시다. 작은 실수를 
따져서 죄를 준다는 일은 지나친 일이라  생각합니다. 너그러운 처분을 내려주시
기 바랍니다."
  세종전하는 안상하게 대답했다.
  상왕은 만면의 미소를 띠고 말씀을 내린다.
  "주상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나도 주상의 뜻을 따르겠소. 박실은 공신의 아들일
뿐 아니라 이름난 효자니 죄를 면하게 해줍시다.
  말씀을 마치자 시립했던 승지에게 분부를 내렸다.
  "병조판서 조말생을 들게 하라."
  이윽고 병조판서가 배알했다.
  "이제 금부의 공초받던 말을 들은즉, 박실이 비록 일시 패전한 일이 있다 하나 
공이 또한 클 뿐 아니라  도통사와 도체찰사도 대승적 안목으로 보아 박실을 죄
줄 수 없다 하니  불문에 부치고 죄를 면케하라. 내 혼자서  독선하는 일이 아니
다. 병조에서 우겨대는  대로 금부에 부쳐서 사실한 것이니 병조판서는  다시 여
론이 없겠는가?"
  상왕은 미소를 풍기며 병조판서를 향하여 물었다.
  "병조에서 또다시 이론이 있을 리 만무하옵니다. 처음네는 박실의 패전한 사실
을 묻지도 아니하시고  죄를 면해주라 하시었으므로 여론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제, 금부에 넘겨 모든  공죄를 사실했으니 여론이 일어날 까닭이 없습니다. 전
하께서는 직언하는 신하 두신 것을 기뻐하시옵소서."
  상왕은 아드님 세종전하 이하  모든 신하들을 둘러보며 호기롭게 성음을 높여 
웃었다.
  "세상에서는 나를 사람 호랑이요, 독재자라  부르는 사람이 많다 한다. 그러나, 
나는 독재자가 아니다. 내 맘대로 하던 일을  굽혀서 병조의 의견대로 박실을 의
금부에 넘겨서  사실해 묻지 아니했던가? 나는  사람 호랑이도 아니고 독재자도 
아니로세. 하하하?"
  상왕 태종은 옥음을 높여 호방하게 웃었다.
  모든 일이 당신의 마음먹은 대로  되고 왜적을 쳐서 크나큰 승리를 거둔 때문
이었다.
  이날 상왕은 세종과 함께  수강궁 선양정에 잔치를 베풀고 유정현, 이종무, 최
윤덕, 이지실, 이순몽,  우박, 박초, 박서양 등 대장과  종사관들을 부러 어사주와 
사찬을 내려 개선을 축하했다.
  술이 서너 순배 지난 후에 도통사 유정현이 대표로 말씀을 드린다.
  "전하께서는 잠시라도 창업하기 어려운 것과 수성하기 또한 쉽지 아니한  것을 
잊으셔서는 아니됩니다."
  상왕은 아드님 전하를 바라보시며 말씀한다.
  "영의정의 말이 옳다! 잘 들어라."
  세종전하는 고개를 속여 말씀을 받았다.
  잔치가 파할 때 위에서는 좋은 말 한 필과 화사한 말안장 한 벌씩을 공신들에
게 내렸다.

 
    대마도의 걸항과 일본국왕의 통호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은 정동대장군 이종무한테 약속한 대로 정식으로 항복하
는 글월과 토산품으로 조공하는 예물을 예조에 바쳤다.
  사자로는 도이단도로라는 대마도의 원로였다.
  '대마도 수호 도도웅환은  삼가 항복하는 글월을 대조선국  예조판서합하께 올
립니다. 대왕전하께 아뢰시어  모든 배은망덕한 죄를 사해주시옵소서. 다시는 방
자한 행동이 없을 것입니다. 크나큰 홍덕을  내리시어 불쌍한 무리들을 돌봐주시
옵소서. 번신이 되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어여삐 여기시어 인신을 내려주신다면 
천은을 길이 폐부에 새겨서 자손만대에 전하겠습니다.'
  인신을 청하는 것은 천자가  제후에게 내리는 전례에 따라 정식으로 항복하는 
글을 올리고 신하되기를 원한 것이다.
  대마도 수호는  조선국왕과 대등한 지위에 있지  아니하므로 직접 왕전하에께 
항복하는 글을 올리지 못하고  조선 예조판서한테 항서를 올려서 왕전하의 재가
를 받자는 것이다.
  예조판서 허조는 대마도 사자를 접견하고 항서를 받아 읽은 후에 곧 세종전하
께 알현하고 항서를 받들어 올렸다.
전하는 친히 항서를 받아본 후에 말씀을 내린다.
  "대마도 도도웅환은 궁해서  항복하고 조공을 바쳐서 애걸했으나 땅을 송두리
째 바쳐서 권토내항한다는 말이 없으니 아직도 가증하구려!  원래 간특하고 속임
수가 많은 무리들이 아닌가. 권토내항한다는 말이 없다면  믿을 수 없는 일이 아
닌가?"
  시측에 있던 우의정 이원이 아뢴다.
  "말이 그렇지 권토내항을 한다 해도 처치하기 곤란할 것입니다."
  전하가 말씀한다.
  "수만 명밖에 아니되는 무리들인데, 처치하기가 무엇이 곤란할 것이 있는가?"
  우의정 이원이 다시 아뢴다.
  "비록 수만 명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마는  실지로 땅을 바쳐서 항복한다 하면, 
귀치 않은 일이 많을  것입니다. 또 저자들도 궁하니까 하는 수  없어 조공을 바
치고 신하 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땅을 바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그대로 항
복하는 것을 받으시고 좋은 낯으로 교호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수밖에-좌우간 항복하는 글은 받게 하라."
  예조판서 허조가 아뢴다.
  "대마도를 정벌하기 전에도 일본  사신이라 해서 칼 한 자루쯤 바치고 내왕하
는 자가 많았습니다. 이자들은 떼거리를 쓰며 물건을  사고 팔고 해서 열읍에 폐
를 끼치는 일이 많았을 뿐 아니라 국가에서는 해마다 1만여 섬의 곡식을 주었습
니다. 이제 다시  통호를 허락하신다면 따로 왜관을 도성밖에 정해주시고  성 안
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세종전하는 예조판서 허조의 아뢰는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통호를 다시 허락한다면  경의 말과 같이 특정한 지역에 왜관을 정해
서 그 부근에서만 왕래하게 하고  도성 안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않게 하도록 하
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세종전하는 예조판서에게 다시 말씀을 내린다.
  "이번에 들어온 대마도 사자는 병조판서와 함께 잘 타일러서 다시는  배은망덕
하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고, 저자들이 권토내항을 하든지 아니하든  지간에 엄
포로 기한을 정해서 권토내항하라는 글월을 도도웅환에게 보내서 혼뜨검이 나도
록 하라. 답서는 전례에 의하여 예조판서의 이름으로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그리하옵고 소위 대마도의  사자라는 자가 만약 알
현을 청한다면 어찌하오리까?"
  예조판서의 묻는 말을 듣자 우의정 이원이 아뢴다.
  "전례에 의하면 대마도 사자는 국왕전하께서 직접 인견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
러므로 대마도에서 항상 예조판서를 상대로 하여  글월을 보내왔습니다. 이번 항
서도 예조판서를 통하여  국왕전하께 항복한다는 뜻을 표했으니,  아까 전하께서 
분부하신 대로 예조판서와 병조판서가  사자를 대면해서 타이른 후에 인신과 답
서를 내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하옵고 정  알현을 청한다면 궐하에서 망배
를 드려서 사직을 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의정의 말이 옳다. 그리 시행하도록 하라."
  예조판서 허조가 우의정을 향하여 묻는다.
  "소문 들으니 이번에 우리  수군이 대마도와 구주 장기에서 전무했던 큰 승리
를 거둔 후에  우리의 국위는 온 일본천지를 습복시켰다 합니다.  그리해서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바치고 통호하기를  청한다 합니다. 만약 일본국왕
의 왕신이 온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예조판서가 우의정에게 묻는 말씀을 전하께서 듣자, 미연히 웃으며 말씀한다.
  "그야 대마도 수호와  일본국왕의 지위는 다르지 아니한가.  하늘과 땅의 차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일본국왕의 사신이 온다 하면 신하의 예로  대접해서 알현을 
허락해야 하겠지."
  "전하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일본국왕의 사신과 대마도의  사자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국왕의 사신은 만나보셔야 합니다."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전례도 있는 것이니 그때 가서 결정하기로 하고, 예판
은 병판과 함께 예조로 나가  과인을 대신하여 사자를 불러보고 아까 내가 말한 
대로 대마도 사자에게 순순히 도리로 타이르라."
  우의정 이원과 예조판서 허조는 어전에서 물러났다.
  이원은 빈청으로 돌아가고,  예조판서 허조는 병조로 나가  병조판서 조말생에
게 전하의 분부를 전한 후에 함께 예조로 들어가 대마도 사자를 불렀다.
  예조 대청에는 예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이 대마도의 원로사자 도이단
도로를 불러놓고, 준절하게 타이른다.
  "대마도 수호의 애걸하는 항서는 우리  왕상전하께 바쳤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크게 진노하셨다. 어찌해서  대장군 이종무와 약속한 대로  권토내항하지 아니하
고 그대로 항복한다고 애걸만 했느냐?"
  늙은 사자는 고두백배하고 고한다.
  "농사도 아니되고 수목조차 무성치  아니한 척박한 상도와 하도 두 섬을 바친
들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설혹 바친다 해도  상국에서는 돌보실 틈이 없으실 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의 대마도 수호가 두  섬을 조선에 바친다면 구주의 모든 
대명들이 도도웅환을 죽일  것입니다. 이러므로 신하가 되기를  원하면서 애걸해
서 항복합니다."
  구주의 모든 대명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도도웅환을 죽이려 한다는 말은 일리
가 있는 소리였다.
  예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은 시침 딱 떼고 꾸짖는다.
  "대마도 두 섬은 본시  신라 때 우리 땅이 아니냐? 그러므로 너희들도 두시마
라 부르지 않느냐.  조선 땅을 조선에 도로  바쳐서 귀순하는데, 어느 놈이 감히 
이러니저러니 말을 한단 말이냐. 금년 섣달까지  기한을 정해줄 테니 도도웅환에
게 자세히 말해서 대마도를 조선에 바쳐라."
  늙은 사자는 더 앙탈하지 아니했다.
  "네, 말씀대로 수호한테 이르겠습니다."
  병조판서의 말이 끝나자 예조판서는 왜사에게 답서와 인신을 주며 말한다.
  "답서의 내용은 지금  병조판서께서 말씀한 대로 권토내항하면 우리 왕상전하
께서 너희들을 우리 백성과 같이 일시동인으로 먹이고 입혀서 살릴 테니 도둑질
을 하는 악한 마음을 먹지 말고 선한 사람이  되라고 하신 뜻을 적은 것이다. 그
리고 이 도장은  청동으로 '대마도 수호' 다섯 글자를 부어서  만든 것이다. 대마
도를 잘  수호하라는 뜻이다. 전하께서  너희들의 원에 의하여  내리시는 것이니 
자손백대에까지 길이 사용하도록 하라."
  대마도 사자는 공손히 예조판서의 답서와 세종전하께서 내리시는 청동 인신을 
받들어 품안에 거두고 감격한 인사를 두 번 세 번 드린 후에,
  "내일은 곧 서울서 떠나겠습니다. 궐하에  나가 왕은이 융숭하심을 사은하겠습
니다."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는 영을 내려 곧 자비를 차렸다.
  판서들은 남녀를 타고, 대마도 사자는 마부를 곁들여 제주말에 오르게 했다.
  승정원에 연통하여  알현을 청하니, 승지는  전하께 아뢴 후에  대마도 사자를 
근정전 대문, 근정문 밖으로 인도하여 정상을 바라보며 사은숙배를 드리게 했다.
  대마도 사자는 장엄화려한  경복궁을 바라보며 아찔하게 현기를  느꼈다. 고두
백배를 드리며 황공해 물러갔다.
  세종대왕이 대마도를 평정한 후에 우리 나라의 위엄은 일본 전국을 휩쓸었다.
  일본국왕 원의지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우리 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
하여 원로 승려  양예를 사신으로 하고, 대마도 왜추들이 처음  서천으로 침입했
을 때 납치돼  갔던 전 사정 강인발과 대마도  정벌 때 사로잡혔던 갑사 김정명 
등 네 사람을 데리고 부산포로 들어와 조공을 바치기를 원했다.
  원래 일본에는 이름뿐인 천황이 있고 일본의 군사와 정치를 통솔 장악한 실권
자는 원씨의 성을 딴 대장군 족리였다.
  우리 나라에서 일본국왕이라고 한 것은 족리의지의 아버지 도의에게 명황제가 
일본 국왕의 칭호를 내린 데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족리는  자기 위에 허수아빌망정  천황이 있으니,  공문서에는 '왕'이란 
글자를 쓰지 아니했다.
  다만 '일본국  원의지'라고만 썼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왕의  권력을 능가하는 
대장군으로 일본 전국을 통솔했다.
  대마도 도도웅환에게 엄명을 내려서  우리 나라 안에서 납치해갔던 사람과 박
실의 강악  싸움 때 잡혔던 세  사람을 내놓으라 해서, 통호하자는  글월과 조공 
바칠 물건과 함께 부산포로 데리고 들어와 입국 허가를 원한 것이다.
  병조와 예조에서는 보고를 받자 곧 전하께 아뢰었다.
  "일본국왕이 통호하자는 글월과 조공을 바치면서 입국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
옵고 대마도 왜추들이  처음 서해 바다에 침입했을 때, 서천에서  납치됐던 사정 
벼슬 했던 강인발과 대마도 강악 싸움 때 포로가 되었던 갑사 세 사람을 송환해
왔다 합니다. 나라의 위세가 크게 떨치니, 일본국왕이 조공을 바치고 친화하기를 
원하는 것이올시다. 새삼 전하의 성덕이 융숭하심을 느끼옵니다."
  "일본국왕의 사신은 어떠한 자라 하던가?"
  "고승 양예라 합니다.  일본에는 불교의 고승이면 대개 왕족이라 합니다."
  "국왕의 사신이라면 구주의 여러 대명과 대마도  사자와는 유가 다르다. 한 등
을 올려서 대접하고 입국을 허락하라."
  예조와 병조에서는 전하의 윤허를  받자 곧 경상감사에게 입국을 시키라는 공
문을 보냈다.
  육로로 오는 행차다. 거의 한 달이 걸렸다.
  예조에서는 한양에 당도한다는 기별을 듣자 육품관을 한강까지 내보내서 환영
한다는 뜻을 표하고 문 밖 객청에 사처를 정해주었다.
  사신을 따라온 일행은 십여 명이었다.
  병조에서는 정랑과 좌랑이 객청으로 나가서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강인발과 포
로로 잡혔던 김정명  등 세 사람을 인계해 받고, 예조에서는  왜통역사를 대동하
고 객청으로 나가서 모든 편의를 도와주었다.
  일본 사신 양예는  불도에 통하는 고승일 뿐 아니라  시를 잘 짓고 글씨도 쓸 
줄 알았다. 양예는 예조 관원에게 청했다.
  "조선은 동방에 제일  가는 예의지국일 뿐 아니라 글 잘  하는 나라라 합니다. 
글하는 선비와 불도 높은 고승들과 함께 이야기하기를 원합니다."
  첫 술회를 했다. 예조정랑은 빙긋 웃으며,
  "먼저 국왕전하를 알현한 후에 소견을 아뢰시오."
  흔연히 대답해주었다.
  정부에서는 일본국왕의 사신이  전하께 알현하는 시기를 정했다.  백관이 정초
에 조하드리는 날을 택하여 겸행하기로 했다.  일본국왕의 사신은 곧 일본국왕의 
몸을 대신해 온 것이다. 일본국왕을 신하로 대접하여 인견하는 것이다.
  세종 2년 경자 정월 초육일 을사가 되었다.
  해가 바뀐 새해에 만조백관들이  신년 새해에 처음으로 조하를 드리는 경사스
러운 날이었다.
  창덕궁 인정전에는 동천에 떠오르는 새아침의 욱일승천하는 찬란한 햇빛을 받
아 만줄기 청기왓장에 서기가 오색을 뿜어 영롱하고,  전각 앞 넓은 뜰에는 동서
양반의 품계석의 위치를 따라  문무백관들이 금관홍포와 사모품대로 두 손에 백
옥홀을 잡고 숙연히 늘어섰다.
  이때, 예조정랑은 일본국왕의  사신 양예를 인도하여 서반 삼품 서열에  서 있
게 했다.
  일본국왕을 삼품 벼슬로 대우하여 신하의 반열에 세운 것이다.
  이윽고 악사들의 주악이  자지러지게 일어나면서 세종대왕은 면류관 곤룡포의 
대례복으로 옥교에서 내려 만조백관들에게  미소를 던지며 정전 용상 위에 올랐
다.
  풍악을 아뢰는 소리는 여전히 자지러졌다. 주악이  멈춘 후에 월대에서는 찬자
가 만조백관들에게 조하를 드리라는 구호가 떨어졌다.
  "국궁, 배하, 망."
  만조백관들은 찬자가 부르는 구호에 따라 전각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다시 절
하고 바라보고 이같이 하기를 네 번 반복해서  사배를 드렸다. 만세를 부르는 소
리는 북악을 흔드는 듯했다.
  영의정이 백관을 대표해서 전상에 올라 신년하사를 올렸다.
  육조판서가 한 사람 한 사람씩 차례로 전상에 올라 자기의 맡은 바 새해 계획
을 글월로 써서 바쳤다.
  이윽고 조하가 거의 끝날 무렵, 전하는 예조판서에게 하문했다.
  "일본국왕의 사신이 조하에 참례했다 하는데, 서열에 배치되어 있는가?"
  "네, 서반 삼품 서열에 입시해 있습니다."
  "예우해서 전상으로 오르게 하라."
  예조판서는 어명을 받들고 통사 윤인보와 함께 백관들이 늘어서 있는 서반 삼
품석 앞으로 가서 일본국왕의 사신인 양예한테 일렀다.
  "지금 우리 성상전하께서 별은전을 내리시어 전상으로 올라 알현하는 것을  윤
허하셨으니 나의 뒤를 따르오."
  양예는 황공 감격했다. 의복을 바로잡고 예조판서와 통역의 뒤를 따랐다.
  화강석 용틀림 조각이 미의 극치를 이룬 열두  층 포석을 추상해 밟았다. 주란
화각 단청이 어른거리는 전상으로 올랐다.
  양예는 잠시 눈을 들어 전상을  바라보니 청산에 해와 달이 둥두렷이 솟아 있
는 벽화를 배경으로 하여 황금장식과 주칠한 향목으로 난간을 조각한 용상 위에 
세종대왕은 인자한 봉안에 미소를 지어 앉아 계셨다.
  양예는 기가 질렸다. 손을 모아 합장한 후에 머리를 조아려 사배를 드렸다.
  세종대왕은 일본국왕 사신에게 말씀을 내린다.
  "풍수 험난한 길에 조공을 바치러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구나!"
  통사 윤인보가 통역을 했다.
  양예가 부복하고 아뢴다.
  "저희 나라는 상덕을 하도  많이 입사와 감사한 말씀을 무어라 형용해서 아뢸 
길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다시 말씀을 내린다.
  "너희는 과인에게 무엇을 구하고 싶어하느냐?"
  "그저, 황공합니다. 대장경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전하는 용안에 미소를 풍기시며 대답한다.
  "대장경은 우리 나라에서도 희귀한 책이다. 그러나 한 부를 내려주리라."
  양예가 다시 머리를 조아리고 부복해 아뢴다.
  "저희 나라는 항상 전하의 은혜를  많이 입사와 이루 다 황공한 말씀 아뢸 길 
없습니다."
  세종전하는 다시 하문하신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숨김 없이 다 말을 해라."
이때 전하의 옥음이 어찌나  부드럽던지 마치 대자대비한 부처가 말씀을 도란도
란 내리는 듯했다. 양예가 대답해 아뢴다.
  "입을 벌려 말씀으로 아뢸 길이 없습니다. 다만 시를 지어 성덕을 읊어서 충성
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삼가 올립니다."
  양예는 말씀을 마치자 품안에서  시축을 꺼내서 시측해 있는 예조판서에게 전
했다.
  예조판서는 양예가 지은 시를 전하께 바쳤다.
  세종전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시축을 받아 보신다.
  단필로 쓴 한시다.

  산천을 넓히시니 우임금의 공덕이요,
  요임금의 하늘같이 해와 달이 높았어라.
  성조의 황화를 무엇으로 갚으리,
  단정하게 손잡아 세 번 만세 부르네.

  일본국왕의 사신 양예가 세종대왕께 올린 시는 대왕의 위대한 성덕을 극구 찬
양한 글이다.
  '산천을 넓히시니  우임금의 공덕'이란 구절은  세종전하가 대마도를 정벌해서 
국토를 넓게 개척한 것을  찬양한 말이요, '요임금의 하늘같이 해와 달이 높았어
라' 한 것은 대왕의  덕화가 마치 요지일월 같은 거룩한 선덕으로  나라 안이 태
평연월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성군의 황화를 무엇으로 갚으리'  한 글귀는 일본이 대왕의 황화를 입어서 갚
을 길이 없다고  영탄한 소리요, '단정하게 손잡아 세 번  만세 부르네'라는 구절
은 대왕의 높은 덕을 숭배하고 사모하여 오래오래 만만년을 사십쇼 하고 축수를 
하는 시다.
  대왕은 보시기를 다하고 옆에 시측해 섰는 홍문관 대제학에게 넘겨 주었다.
  대제학도 양예의 시를 읽고 얼굴에 만족한 웃음을 띠었다.
  전하는 다시 양예를 굽어보고 말씀을 내린다.
  "네가 일본으로 돌아가거든,  너희 국왕한테 이르라. 내가 대마도를 정벌한  것
은 무단히 군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마도  해적들이 기아
와 곤궁에 빠진 것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해마다  만 섬 곡식을 주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번에는 오십여 척의  배를 움직여 우리의 변지로 침입하여 백성들
을 살육하고 불놓고 약탈해서 방약무인한 악한 행동을 취하니 참다 못해서 소굴
을 소탕한 것이다. 그리하여 도도웅환이란 자가  구주 장기로 달아나고보니 두지
포까지 추격해서 적의 항복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하여 권토내항을 하라 한 것이니 너희 국왕도 알아두라 이르라!"
  "네, 알았습니다. 저희 대장군도 잘 알고 있습니다."
  "대마도는 본시 우리  땅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서 두섬이라 부른다.  너
희 나라에서도 '두시마'라 하지 않은가. 이것은 윗섬과 아랫섬으로 된 때문, 두섬
이라 부른 것이요,  너희들도 우리가 부르는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두시마'
라 부른 것이다.  이것은 우리 땅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고도  남는 고증이
다. 너희 국왕한테 이점도 말을 해두어라."
  "네, 그리하겠습니다."
  양예는 두 번 세 번 고두하며 대답했다.
  "만약 대마도가 권토내항해서 부모와 자녀들을 다 거느리고 땅을 바쳐  온다면 
나는 우리 백성과 같이 일시동인해서 대마도 사람들을  잘 무육할 것이다. 이 점
도 국왕한테 전해라."
  "네, 전하의 성지를 전하겠습니다."
  양예는 또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는 옆에 모시고 있는 내관에게 분부했다.
  "일본국왕의 사신에게 사찬을 내리고 네가 대접하라."
  특별한 은전이었다.
  양예는 내관의 인도로 어전에서 사찬을 받고 객청으로 돌아갔다.
  일본국왕의 사신 양예는  한 달 동안을 조선에서 유하고 있었다.  팔도의 명산
대찰을 두루 구경하고 아름다운 산천과 품격 높은 삼한 예술에 마음 속 깊이 감
탄했다.
  글 잘 하는 선비와 불도 높은 고승을 찾아다니며 시와 글씨를 청했다.
  한 달 후에 양예는  예조에 찾아가 귀국할 것을 고하고, 한  번 또다시 세종전
하께 뵙기를 원했다.
  예조판서는 이 일을 전하께 고하니 전하는  기억력이 대단했다. 만기를 보살피
는 중에도 한 달 전에 일본 사신이 원했던 일을 잊지 아니했다.
  "일사가 돌아간다 하니 생각이 나는구나. 대장경을 달라 했는데, 갈 때 선물로 
주어야 하겠다. 곧 준비해서 궐 안으로 들여라."
  예조에서는 사찰에 명해서 대장경 한 벌을 구해 올렸다.
  전하는 어전에 드신 후에 양예의 입궐을 허락하셨다.
  양예는 전과 같이 예조판서와 어전통사와 함께 전상에 올라 부복했다.
  전하는 미소를 머금고 하문하셨다.
  "네가 온 지가 한 달이 되었구나. 이제  귀국을 한다 하니 과인의 마음이 서운
하구나."
  전하의 말씀은 부드러운 봄바람이 부는 듯 훈훈하고 다정했다.
  "성은을 이루 다  갚사올 길이 없습니다. 그 동안 조선의  훌륭한 문물을 많이 
배워 돌아갑니다. 하직을  고하려고 배알을 청했더니 이같이  허락하시어 천안을 
다시 우러러뵙게 되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전하는 웃으시며 탁상에 놓인 대장경 한 벌을 내관을 통해 내리셨다.
  "이것은 네가 처음 입궐했을 때 원했던  대장경이다. 네 정성이 갸륵하기에 선
물로 보낸다."
  양예는 두 손으로 대장경을 받들고 목이 메어 감읍했다.
  "융숭하신 성은을 어찌 다 갚사오리까. 본국으로 돌아가 불법을 더욱 홍통시키
면서, 성덕을 길이길이 잊지 아니하오리다."
  양예는 고두백배하면서  대장경을 받들어 하직을 고하고  예부에 나아가 모든 
관원을 작별한 후에 부산포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국왕의 사신이 돌아간 후에  왜국의 모든 대명들은 서로들 다투어 조공을 
바치며 통호하기를 원했다.
  대마도 도도웅환도 한 달에 거의 한 번씩  사자를 보내서 공물을 바쳤다. 뿐만 
아니라,
  '가라산에 대마도 사람들을 옮겨서 농사를 짓도록  해주시고 대마도를 조선 경
내에 주군을 두시는 전례에 따라 고을 이름을 정해주시고 군수의 인신을 내리신
다면 신절을 다하겠습니다.'
하고 시응계도라는 사자를 보내서 글월을 올렸다.
  전하는 예조에 명해서 답서를 보냈다.
  '대마도는 경상도에  예속해 있다. 모든  품계는 반드시  관찰사에게 정보하고, 
직접 예조로 바치지 말라.  원하는 인장은 회개편에 보내노라. 요사이 그대의 대
관과 만호들이  제각기 사람을 보내서  통관하기를 원한다. 정성은  좋으나 심히 
체통에 어긋난다. 그대가 친히 서계를 써보내면 예접하리라.'
  보낸 도장은 '종씨도도웅환'이라고 각했다.
  이같이 하여 대마도의 확실한 항복을 받았다.

    집현전
  세종대왕은 대마도를 평정하고 일본국왕을 회유한 후에 나라 안의 예악문물을 
더욱 발달시켜서 겨레의 문화를 찬연케 할 것을 결심했다.
  외적을 막는 데는 무비를 든든히 하여 장성의 재목을 길러내는 것도 필요하지
만, 내치를 바르게 하자면 글 잘 하는  어진이들을 양성해서 과학과 문학을 권장
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량의 재목이  되게 한 후에 구세안민의 정치를 하는 것이 
나라를 통솔하는 지도자의 맡은 바 소임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대왕이  어릴 때부터 항상 손에  책을 놓지 아니하고 밤늦도록 
글을 읽은 독서의 힘이었다. 여기서 그의 인품이  한 사람의 의젓한 격을 이루었
고, 여기서 그의 슬기로운 예지가 백금빛을 싸느랗게 뿜었다.
  예지는 경륜을 낳고 경륜은 실천으로 행해졌다.
  전하는 책을 읽으면 한  번이나 두 번만 읽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경
·사·자·집을 반드시 백 번씩 읽었다.  더욱이 '춘추좌전'과 '초사'같은 책은 백 
번에 또다시 백 번을  더 읽었고, 구양수와 소동파의 문집은 천  번 가량이나 읽
었다.
  이러하니 그의 머리에는  예와 이제, 국가를 영도한 제왕들의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린 일을 밝고 밝게  판단할 수 있었고, 사람을 쓰고 어거하는  방법을 글 속
에서 얻었다.
  전하는 무엇보다도 인재를 기르는 것이 급하다고 생각했다.
  전하는 어느날 연침에서 대제학 변계량과 젊은 학사 정인지를 불렀다.
  변계량은 호를 '춘정'이라 하고 자를 '거경'이라 했다.
  고려 말년의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 영리해서 열네 살 때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열일곱  살에 대과에 급제했다. 왕권이 바뀐 뒤에  왕조에 벼슬해서 
예문관 직제학, 예조참의를 거쳐 오늘날 대제학이 된 사람이다.
  모든 나라 안의 유시와 제문이며, 외국에 대한  외교 문한이 거의 춘정의 솜씨
로 되어 있었다.
  정인지는 호를 '학역재'라  하는 소장학사다. 세종보다 한  해가 연상인 병자생
이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격전에  기도를 드린 후에 학역재를 낳았다는 것이
다. 다섯  살에 글을 배우기 시작해서  열여섯 살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십구 세 
때 대과급제를 해서 태종의 신임을 받았다.
  어느날 상왕 태종이 아드님 세종과 함께 자리를 같이했을 때 정인지가 알현했
다.
  상왕은 세종에게 말씀을 내렸다.
  "저 사람이 정인지로구나. 말은 익히 들었으나 처음 본다. 후일 주석지신이 될 
테니 잘 유념해두라!"
하는 말씀을 내린 일이 있었다. 이리하여 전하는  나이 많은 변계량과 당신과 연
상약한 정인지를 연침으로 부르신 것이다.
  전하는 나이 지긋한 대제학  변계량과 소장학사 정인지를 향하여 말씀을 묻는
다.
  "집을 짓는 데  좋은 기둥과 좋은 보를  구하려면 재목이 없는 것을 걱정하기 
전에 미리 나무를  심어야 하고, 국가 다스리는 동량의 재목을  구하려면 사람다
운 사람이 귀하다고  탓하기 전에 먼저 사람을 심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과인의 
의사가 어떠하오?"
  의미 깊은 전하의 말씀에 늙고 젊은 두 신하는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나이 많은 변계량이 먼저 아뢴다.
  "그렇습니다. 예로부터 경제에 밝은 지도자는 산과 들에 나무를 무성하게 길러
서 재목으로 이용하고, 어진 인국은 흥학하는  기풍을 조성하고 학교를 이룩하여 
인재를 양성합니다. 그러므로  아조에도 사학을 두시고 성균관을  설립하시어 국
가에서 인재를 기를  뿐 아니라 시골마다 향교가 있고, 또다시  사사로운 서당이 
있어서 향학하는 열이 대단합니다."
  전하는 변계량이 대답하는 말을 듣자 미소를 풍기며 말씀한다.
  "대제학이 말씀하는 사학과 성균관에서 유생을 양성하는 일은 과인도 잘  알고 
있소. 과인이 지금 동량의 인재를 기르고자는 뜻은, 좀더 나의 측근에 젊은 학사
들을 양성해서 직접 국가정책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크나큰 인재를 양성하자
는 것이오. 다시  말하자면 대과급제를 해서 이미 출륙이 되어  벼슬자리에 있는 
준재들에게 더욱 학문을 연마해서 모든 문화를 창조케 하자는 말이오."
  서장학사 정인지가 아뢴다.
  "이제 하교를 듣자오니, 진실로 명철하신 배려이십니다. 총명하고 영민한  준재
들이 성균관에 나가서 소과급제를 치르고 다시 대과에 뽑힌 후에는 그대로 벼슬
자리에만 연연하여, 그 좋은  자질을 연마할 기회가 없습니다. 학문의 길은 한정
이 없습니다. 연구하고 토론하여 옥을 다루듯 갈고 갈아야만 빛이 납니다. 이 빛
나는 윤기로 국가정치에  방광하는 것이 곧 겨레의  찬란한 문화가 되는 것입니
다. 성상께서는 이러한 기구를 측근에 두시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자문하신다면 
크나큰 힘을 얻으실 것입니다."
  학역재 정인지의 아뢰는 말씀을 듣는 전하의 용안엔 화사한 웃음이 활짝 열렸
다.
  "학역재의 말이 옳다. 과인의  뜻이 역시 그곳에 있소. 한번 과거에 급제만 하
면 어서 낭에서 대부의 자리로 올라가기에만 급급해서 영영 공부는 하려고 들지 
않는단 말야. 다만 자신의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바랄  뿐 그 좋은 천질을 썩여
버리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탐관오리로  떨어져버리기가 십상팔구란 말야. 그러하
니 나라꼴이  될 수 있는가. 벼슬을  준 것은 나라를 번영시키기  위하여 제각기 
책임을 맡긴 것이지 결코 특권계급을 양성하기 위하여 만든 자리가 아니거든-."
  전하의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 늙고 젊은  두 신하의 폐부를 날카롭게 찔렀
다.
  변계량과 정인지는 이구동성으로 일제히 아뢴다.
  "명철하신 하교십니다. 그러한 기구를 전하의 측근에 두시어 젊은 학사들의 연
구하는 기관을 만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는 대제학 변계량을 향하여 말씀한다.
  "지금 대제학이 영도하고 있는 예문관은 글 잘 하는 젊은 학사들이 국가의 사
령과 문한을 맡고 있을 뿐 더 이상 학문을 탐구하고 사색하는 태세를 취하고 있
지 못하단 말씀요."
  "네, 그렇습니다. 좀더 공부하고 연구하는  기관은 되지 못합니다. 다만 지난날
에 공부했던 실력을 그대로 발휘해서 글을 제술할 뿐입니다."
  젊은 학사 정인지가 솔직하게 아뢰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태상왕 재위시에 집현전이란  기구를 잠시 두신 일이 있었으나 유명무실했단 
말야. 어진이들이  모여 있는 전각이라 했으니  이름이 참 좋지  아니한가? 다시 
집현전을 설치해서 젊은 학사들이 더욱 학문을 연마하는 기관을 두는 것이 좋겠
소."
  "좋습니다."
  두 신하는 일제히 대답했다.
  전하는 다시 말씀을 내린다.
  "옛날 당에서도 집현전을  대궐 안에 두고, 그곳에  젊은 학사들을 입직시켜서 
경서를 간행하고  흩어진 고서를 수집해서  문화에 이바지한 일이  컸던 것이오. 
뿐만 아니라 우리 고려  때도 수문전, 집현전, 보문각이란 것들을 두어서 중국과 
비슷한 제도를 두었지만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벼슬하는 사람들의 일보는 
기관만이 되지 않게 하고 실지로 학문과 예술을 더욱 탐구하고 사색하는 연구하
는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오."
  원래 고전과  역사가 정통한 전하다.  대제학 변계량이나 젊은  학사 정인지가 
입을 벌리지 못할 정도로 술술 전고를 고증해서 말씀했다.
  두 신하는 마음 속으로 감탄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좋습니다. 태상왕 전하  때의 집현전을 부활시키고 기구를  대궐 안에 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대신들과 의논해서 결정할 테니 경들은 집현전을 새로 설치하는  기
구와 인원에 대하여 안을 만들어 올리라."
  변계량이 고한다.
  "집현전의 기구를 구성한다면 역시 다른 관아의 전례에 의하여 대신들이  운영
하는 기구에  참여하도록 하고, 그  아래 연구하는 학사들을  배치시켜서 학문을 
연마케 하는 것이 어떠하올지 감히 아뢰옵니다."
  "좋소. 앞으로 국가의  문화를 창달시킬 최고기관이 될 것이오. 문관인  대신들
로 운영하는 소임을  겸임케 하고 가장 우수한  젊은 학사들을 극소수로 뽑아서 
전문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부서를 형성하도록 하오."
  두 신하는 명을 받고 물러났다.
  다음날 변계량과 정인지는 집현전을 구성하는 시안을 전하께 바쳤다.
  집현전을 영솔하는 영전사  2인을 두는데 정일품이요, 대제학  2인은 정이품이
요, 제학이 2인인데 종이품이다.
  이 사람들은 영의정, 좌의정 등 지위 높은 사람들로써 겸직을 하게 했고, 다음
에는 부제학 정삼품, 직제학 종삼품, 직전  정사품, 응교 종사품, 교리 정오품, 부
교리 종오품, 수찬 정육품, 부수찬 종육품,  박사 정칠품, 저작 정팔품, 정자 정구
품으로 집현전에 전속시켜서 경연에 참여하고 학문을 연구하게 했다.
  학사의 정원은 모두  10명으로 궐이 있어야만 보결을 하게 했다.  그리고 집현
전 학사를 임명하는  방법은 가장 엄중했다. 집현전 당상과 이조  당상이며 의정
부 의정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인물을 전형하여 망에  붙여서 전하께 올린 후에 
전하가 점을 찍어서  임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므로 한번 집현전  학사가 되기
란 아무리 준재라 하나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세종전하는 변계량과 정인지 두 신하가 올린 시안을 보시고 만면에 웃음을 띠
고 칭찬하셨다.
  "좋다. 이래야만 집현전 학사의 권위가 설 것이다. 곧 대신과 의논해서 경들의 
시안을 결정한 후에 규정에 의하여 집현전 학사 10명을 선정하리라."
  변계량, 정인지 두  신하도 기뻤다. 진정 나라를  위하여 기둥과 보가 될 만한 
인재들을 뽑아서 전속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기관을 만들게 되니 장차 
국가에는 크나큰 문명이 이루어질 것이 분명했다.
  "하루 속히 집현전을 이룩하시어  이 나라 이 백성들을 더욱 복되게 하시옵소
서."
  "염려 말라. 그리고 집현전은 과인의 측근인 궐 안에 두어서 모든 학사들을 입
직시켜서 낮과 밤으로 내 곁에 있게 하리라."
  "감격하온 왕은을 이루 다 아뢸 길 없습니다."
  두 신하는 마음이 느긋했다.
  숙배를 드리고 물러갔다.  전하는 삼공을 불러 안을 보이고 집현전을  새로 둘 
것을 자문했다. 전고가 없는 갸륵한 처사다. 누가 감히 반대할 사람이 없었다.
  전하는 곧 규정대로 의정부와  이조에 교지를 내려 영전사 이하 대제학까지의 
겸관과 부제학 이하 열 사람의 전임 집현전  학사를 전형해 올리라 했다. 이조판
서는 인사권을 맡은 때문에 정승들과 의논해서 결정하는 관례를 가졌다.
  의정부 빈청에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이조판서가 모였다. 특히 이조에서
는 이조정랑과 좌랑도  참석을 했다. 비록 팔품과 구품에 지나지  않는 벼슬아치
지만 전관의 청환이 되는 때문에 회의에 참석해서 결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회의는 극비 속에 연삼일을 열려서 겨우 결정이 되었다.
  이조와 정승들이 연석회의에서 전형된 명단은 세종전하께 바쳐졌다.
  전하는 이조판서가 올린 새로 구성되는 집현전 학사들의 명단을 살펴보았다.
  좌의정 박은과 우의정 이원이 영전사요, 유관·변계량이 대제학이다. 탁신·이
수가 제학이요, 신장·김자가 직제학이요,  어변갑·김상직은 응교요, 설순·유상
지는 교리요, 유호통·안지는 수찬이요, 김돈·최만리는  박사다. 세종은 새로 천
망에 오른 집현전 학사의 명단을 세 번 네  번 반복해 보셨다. 전하의 의중이 인
물이 많이 빠졌다.
  전하는 이조판서에게 물었다.
  "영의정 유정현은 과거 보지 아니한 음관이라 해서 최고의 영의정이면서도  영
전사로 뽑히지 못했는가?"
  "네, 그러한 줄로 아뢰오."
  이조판서가 대답했다.
  전하는 또다시 하문했다.
  "최만리는 집현전 학사의 명을 받았는데 어찌해서 정인지는 이번에 끼지  못했
는가?"
  가장 전하가  인재로 인정해서 크게  관심을 갖는 정인지다.  더구나 정인지는 
세종과 자치동갑이었다. 뿐만 아니라 집현전의 시안까지 마련한 사람이다.
  처음 설치되는 집현전 학사 중에 정인지가 빠진 것이 매우 서운했다.
  이조판서가 아뢴다.
  "정인지도 처음에는 물망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최만리가 나이가 좀 많은 때문
에 겨우 끝으로 뽑혔습니다."
  전하는 마음 속으로 약간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도 내색하지 아니했
다. 부드럽게 말씀을 내린다.
  "원래 학문의 길은 글을  많이 읽어서 경험이 풍부한 노사숙유가 관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 설치하는  집현전은 순전히 젊은  문사들의 연구를 
조장시켜서 새로운 동량의  재목을 양성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대
제학까지는 나이 많고  지위 높은 재상들을 겸임하도록 한 것이요,  부제학 이하
의 전임학사들은 될 수 있으면 젊은 문사들을  등용해 쓰자는 것이다. 이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만 우선권을 준다면 과인이 애당초 집현전을 구상한 그 근본 뜻
과는 어긋나지 않는가?"
  전하의 말씀을 듣자, 이조판서는  황공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손을 모아 공손
히 아뢴다.
  "전하의 성의 그러하시다면 다시  회의를 열어 젊은 학사들로 보충해 뽑는 것
이 어떠하겠습니까?"
  전하는 장중하게 말씀을 내린다.
  "이조와 의정부에서 이번 뽑은 사람들은 법을  어겨서 뽑은 것은 아니다. 다만 
좀더 젊은이들을 집현전에  참예치 않게 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이름이 
정해졌는데 과인이 퇴짜를 논다면 그 사람들에게 미안치 아니한가? 돌려가며 하
는 것이니 다음 기회를 보기로 하자."
  전하의 크고 너그러운 성격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세종은 집현전을 편성한 후에 대궐 안 승정원 서편 전각 한 채를 내려서 학사
들의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을  만들고 어필로 '집현전'이라 크게 써서 현판을 달
았다.
  전하는 날마다 정사를 보살피는  일이 끝나면 친히 집현전에 출어하여 경연을 
열었다.
  경연에는 전임인 집현전  학사 이외에 좌우의정인 영전사와  대제학들, 원로대
신의 겸관들이 참예하는 것이 전례다.
  주로 사서오경을 토론했다. 정치학에 대한 자문에  응대하고 제도와 역사를 고
증해서 학문에 대한 의의를 밝혀놓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만 권 고서를 수집하여 학문을  연구하는 기틀을 만들고, 한편으로
는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고 선현의 고전을 간행하는  등 크게 문은을 진작시켰
다.
  전하는 집현전을 신설한 후에 경연에 임어해서 학문을 토론할 때마다 항상 전
임된 학사의 정원수가 너무나 적을 뿐 아니라 장래 국가의 기둥이 될 만한 젊은 
학사들이 끼여 있지 않은 것을 탄식했다.
  대제학 변계량을 어전에 불렀다.
  "금년에 과거령은 어느 때쯤 내리게 되는가?"
  "곧 과거령을 내려서 모춘 삼월쯤 시관을 정해서 개장하려 합니다."
  "모춘 삼월이면 기후가  대단히 온화할 때다. 이번에는  창덕궁 비원 춘당대에 
과장을 설치하라. 과인이 친히 임어하여 준재들의 모습을 바라보리라."
  "상감께서 직접 과장에 임어하시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올시다. 문묘에 배알하
실 때 알성과를 성균관에 개장합니다. 그때  상감께서 친림하시는 것이 전례올시
다.”
  "국가에 소용되는 훌륭한 인재를 뽑기  위하여 과거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아
무 때라도 내가 나가서 창방하는 구경을 한다면  좋지 않겠나. 긴말 말고 시행하
도록 하오"
  "전하께서 알성과 이외에도  과장에 친림하신다 하오면 팔도 유생들이 얼마나 
황감하게 생각하겠습니까. 나라의 인걸들이 구름모이듯 모일 것입니다."
  대제학 변계량도 전하께서 젊은  인재들을 구하려로 무한 애쓰시는 정성을 잘 
알고 있었다. 쌍수를 높이 모아 찬성한다.
  "그렇다면 곧 기일을 정해서 과거령을 내리도록 하오."
  "영전사와 예조에 의논해서 곧 과거령을 내리고 기일을 정해서 팔도에  반포하
겠습니다."
  변계량은 어전에서 물러난 후에  집현전 영전사와 예조판서 허조와 의논한 후
에 과거령과 과시장을  공포하고, 이번 과장은 춘당대인데  상감께서도 친림하신
다고 반포했다.
  과거령은 팔도 감사를 통해서 감영과 고을마다 전파되었다.
  이번 과장에는  세종대왕께서 춘당대에 친림해서 취재를  하신다 하니 평소에 
전하의 명철하신 성덕을 추앙하는 선비들은 어깨가 으쓱했다.

    춘 당 대
  과거날이 되었다. 팔도의 선비들은 구름 모이듯 비원 춘당대로 모여들었다.
  선비들은 대궐 삼문 안에  들어서자 먼저 웅장화려한 주란화각 아름다운 건축
미에 눈이 현란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모두 다 경이의 눈빛으로 사면을 둘러보면 춘당대로 향했다.
  생전 처음 대하는 왕궁의 장엄미다.
  다섯 걸음에다 정자가 세워졌고 열 걸음마다 전각이 웅장하다.
  울긋불긋 단청을 칠한 처마는 천줄기  기왓골을 머리에 인 채 학의 날개를 벌
려 벽공에 솟아 있고,  익랑 월대는 병풍처럼 둘러 있다. 수양버들은 천사만사를 
이루어 청청하게 어구로 드리웠고, 옥수 같은  물은 서편에서 동편으로 소리치며 
흘렀다. 정면에 돌다리가  번듯하게 보인다. 왕궁 안의 금교다.  연꽃을 아로새겨 
난간을 만들었고, 난간 좌우편에는 해태 한 쌍씩을 앞뒤로 조각해놓았다. 명공의 
솜씨다.
  인정문 안에  인정전이 있고 인정전  동편에는 선정전이 있다.  아득히 비취빛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대궐 안에 제일 큰 두 채 전각이다.
  인정전은 경복궁 근정전과 같은 대전으로 군신들의  조하를 받는 정전이요, 선
정전은 전하의 연침인 편전이다.
  기와는 푸른 유리빛으로 된 청기와요, 천장은 황금으로 쌍룡의 용틀임을 했다. 
계단에 오르는 포석마다 봉황과 공작을 아로새겨서 예술의 극치를 이루었다.
  선비들은 비원 문을 거쳐 춘당대로 향했다.
  영화당 남쪽 만간들이 금잔디밭에 크고 작은 차일들이 수백 채 벌여 있었다.
  높고 큰  차일 안에는 시관들의 자리가  포진되고, 작은 차일 안은  과거 보러 
선비들이 응시할 장소다.
  수백 선비들은 과지와 필묵을 갖춘  후에 차례차례 질서를 지켜 자기의 글 지
을 장소로 찾아들었다.
  이윽고 시관들이 들어왔다.  집현전 영전사와 대제학, 부제학이 예조판서와 함
께 시관 자리에 참석했다.
  조금 뒤에 세종대왕은 도승지와  시신들을 거느리고 모든 유생과 시관들의 환
영을 받으며 도시관의 자리로 임어했다.
  임금이 친히 도시관이 되어 시관석에 앉은 일은 전고에 없던 일이다.
  유생들은 감격했다. 세종대왕께 '천호만세'를 했다.
  세종대왕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어수를 들어  유생들에게 답례를 보냈다. 천천
히 옥좌에 진좌했다.
  이윽고 집현전 학사는 글제를 달았다.
  큰 글씨로 써 있는 시제는 '치국지도'라  씌어 있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서술하라는 것이다.
  세종전하가 즉석에서 글제를 낸 것이다. 시관들도 까맣게 몰랐다. 며칠 전부터 
시관들은 전하께 글제 낼 것을 아뢰었다. 그러나  전하는 시장에 임어한 후에 이
번에는 친히 과제를 내겠다고 하교가 계신 때문,  시관들이 감히 과거 글제를 내
지 못한 것이다.
  전하는 말씀 없는 중에 모든 시관들의 협사한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행동을 막
기 위하여 이같이 직접 당석에서 과제를 내신 것이다.
  시관들은 글제를 보고 면면이 서로 보며 혀를 홰홰 둘렀다.
  대제학은 유생들을 향하여 이번  과제는 전하께서 임석하신 후에 시관들도 모
르게 전하께서 직접 출제하신 것을 선포했다.
  유생들이 있는 정막 속에서는 또다시 '천호만세' 소리가 높았다.
  대왕의 명철하신 처사에 감격한 기쁨을 발로하는 환호성이다.
  여태껏 장원을 뽑는 과거에 시관들은 공평무사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면을 들추
어보면 별별 추태가 많았다. 시관들한테 권문세가의  콧김이 들어가서 미리 과제
를 알아서 장원급제가 되기 일쑤요, 엉뚱한 사람이  천금을 받고 글을 대신 지어
서 장원급제가 되는 사람이 겅성드뭇했다.
  이 까닭에 하향 먼 시골 사람으로 권문세가에 등을 댈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
리 경학에 달통하고  시문이 주옥같이 유려하다 해도, 칠십 팔십이  되어도 과거
에 장원은  커녕 급제도 못했다.  과거 때마다 괴나리보따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한양 천 리  길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올라왔다가  낙방거자가 되어 한숨만 짓고 
내려가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기에 과거에  깨끗하게 급제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도 더 어려웠던 
것이다. 이리하여 천하에 기댈 곳 없는 궁조대가  되어 글 배운 것을 한탄하면서 
서당의 훈장질을 하다가 굶어 죽는다. 이것이 왕조시대의 커다란 폐풍이었다.
  이제 전하가 시관들에게 글제를 내게 하지 아니하고 직접 과장에서 당신이 출
제를 했다 하니 권문세가의 자제를  빼놓고 세력 없는 진짜 선비들의 기쁨은 형
용해 말할 수 없었다.
  과장마다, 진짜 선비들은 싱글벙글 웃었다. 가만가만 수군거렸다.
  "이번에 홍판서의 막내아들이  과거를 본다 했는데, 과제를  미리 알지 못해서 
탈이로군!"
  "홍판서의 아들뿐인가, 판서보다도 더 세력이 센  서 보국대감의 큰 아들도 똑 
될 줄 알았는데, 시관들도 꼼짝을 못하게 되었으니 낭패로다! 흐흐흐."
  "이 사람, 서보국의  아들은 이번에 장원급제를 해서  어사화를 머리에 꽂기만 
하면 김의정의 막내딸하고 혼인을 할 야망을 가졌는데 다 틀렸구나. 하하하!"
  "거참, 김의정의 딸은 천하절염이라네. 이번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는  사람이라
야 딸을 준다고 그랬다네!"
  "자네 한 번 장원급제가 되어서 어사화도 꽂아보고, 천하절염한테 장가도 들어
보게나!"
  "어림도 없네. 나 같은 하향 선비가 장원급제를 한다 한들 정승의 고명딸이 내 
차례에 오겠나. 어서어서 나라 다스리는 방책이나 지어보세."
  "이번에는 세력 없는 선비들 속에서 장원급제가  꼭 나올 것일세. 상감은 과연 
영특한 분야!"
  공신들의 집안과 고관대작들의 아들들을 제외하고 세도 없는 시골선비들은 흥
그러운 마음으로 제각기 붓을 들어 글을 짓기 시작했다.
  세종전하는 옥좌에서 일어나 모든  시관들과 함께 젊은이들이 글짓고 있는 과
장을 미소를 머금고 둘러보았다.
  성미 급한 유생들은 치국하는 길을 일필휘지로 갈겨 써서 시관석에 바치는 사
람도 많았다.
  글을 짓는 과장에서 주어진 시각이 다 되었다.
  시관석의 집사들은 종을 쳐서 마감이 된 것을 알렸다.
  유생들은 일제히 시권을 접어 시관석으로 올렸다.
  도시관인 세종대왕을 위시하여 모든 시관들은 주필을 들고 끊기 시작했다.
  전하는 백 통이 넘는 유생들의 제술을 일일이 친감했다.
  시권은 상·중·하로 매겨지고 차상, 차중, 차하도 있었다.
  그중 잘된 것은 상지상이요, 더 잘 지은 것은 가상지상이었다.  
  책상 아래로 차하, 차중, 차상이 낙엽 떨러지듯 흩어졌다.
  장원급제는 원래 세 사람을 뽑는 것이 전례다. 그러나 인재가 없으면 두 사람, 
또는 한 사람만 뽑는 것이다.
  차상이 떨어진 후에는  하짜리가 한 뭉치가 되어 떨어지고, 다음에는  중이 한 
묶음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백여 장의 시권은 열 장으로 줄어들고, 열  장의 시권은 다시 시관들을 통하여 
전하께 바쳐졌다.
  가상지상의 알 관주를 맞은 시권이 두 장 나타났다.
  알 관주와 주점이 가득 찍혀진 두 장의 시권이 전하 앞에 단정히 놓여졌다.
  전하는 두 번 세 번 다시 살폈다. 용안에 미소가 감돌았다.
  "성명을 뜯어보라!"
  시관 중의 한 사람인 대제학이 시지 끝에 밀봉해 붙인 끝 폭을 뜯었다.
  '박팽년. 본관 순천, 부 중림.'
  대제학이 아뢴다.
  "박팽년이올시다. 본은 순천이옵고 그의 부친은 박중림이라 합니다."
  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박팽년의 글을 읽어보았다.  글줄마다 나
라를 다스리는 근본 방책을 도도하게 진술했다.
  시관들이 붉은 붓으로 칭찬한 비점과 알 관주가 글귀 옆에 가득했다.
  대왕은 기쁜 빛이 용안에 가득헀다.
  "가상지상이 또 한 편 있지 아니한가?"
  "네, 또 한 편 있사옵니다."
  "뜯어보라!"
  대제학은 또 한 편의 시지 끝을 뜯었다.
  '최항. 본관 삭녕, 부 담.'
  대제학은 전하께 아뢴다.
  "최항이올시다. 본은 삭녕이고 부친은 담이라 합니다."
  "최담의 아들 최항이라!"
  전하는 다시 최항의 글을 재심했다. 역시 시관들의 주점이 많았다.
  "난형난제로구나! 또다시 가상지상은 없느냐?"
  "가상지상은 두 편뿐이옵니다."
  "그렇다면 이번 장원은  두 사람으로 해서, 곧  창방을 하라! 그리고 어사화는 
준비되었느냐?"
  "네,  준비되어 있습니다."
  시측했던 도승지가 대답했다.
  모든 유생들은 시관석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창방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권문세가의 자제들은 대왕께서  즉석에서 글제를 내신  때문, 미리  과제를 알
지 못한 탓으로  게발개발 엉망진창으로 글을 지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요행
을 바라는 마음에서 대감,  영감, 낯익은 시관들의 얼굴의 표정을 살피며 목이빠
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집현전 유사는 큰 소리로 방을 불렀다.
  '장원급제에 박팽년!'
  '급제에 최항!'
  유사는 목청 좋게 세 번 불렀다.
  춘당대 넓은 뜰은 물로 씻은 듯 조용했다.
  유생들은 숨을 죽이로 귀를 기울여 들었다.
  장원과 급제는 다만  두 사람일 뿐, 모두  다 낙방거자가 되었다. 엄선 중에도 
엄선이다. 일호의 사가 없는 친시다.
  장원급제는 전하께 임관명령을 받아 배알하는 것이 관례다.
  이조판서가 전하께 아뢴다.
  "장원과 급제들에게 무슨 직책을 맡기오리까?"
  "장원 박팽년에게는 수찬 벼슬을 주고 최항에게는 부수찬의 직함을 주라!"
  도승지는 이조판서와 함께 장원급제의 홍패와 수찬,  부수찬의 지첩을 써서 미
리 준비했던 어사화 두 벌과 함께 어전 탑 아래 올렸다.
  이윽고 사알 두 사람은 준비했던 사모품대에 단학을 수놓을 흉배를 곁들여 장
원급제한 박팽년과 최항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 조복으로 갈아입게 했다.
  검은 유건과 푸른 도포를 벗고  새로 임관이 되어 조복으로 바꾸어 입는 박팽
년, 최항 두 사람의 눈물이 글썽거렸다.
  박팽년과 최항은 생전  처음 입는 관복에 명예로운  백학 흉배를 가슴과 등에 
달고 사알에게 인도되어 어전으로 올랐다. 박팽년과 최항의 일대의 광영이었다.
  수백 유생들의 부러워하는 눈동자가 두사람의 몸으로 집중되었다.
  어전 지척에 들어선 두 젊은 학사에게 사알이 창을 불렀다.
  "국궁, 사배, 사은!"
  두 학사는 좌우편으로 갈라서서 사알이 부르는 대로 몸을 굽히고 절하고 부복
해서 사은을 올렸다.
  전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먼저 장원급제 박팽년에게 말씀을 내리신다.
  "네가 박중림의 아들이로구나! 공부가 무던하다. 너에게는 특별히 수찬을 제수
하는 것이니 더욱더 공부를 해서 나라의 동량이 되게 하라!"
  전하는 친히 어수를 들어  장원급제의 홍패와 한림학사 수찬의 직첩을 내리시
고, 또다시 어사화를 사모 위에 꽂아주었다.
  다음엔 최항의 차례다.
  "급제 최항도 많은 공부를 쌓았다. 갈충보국하도록 하라!"
  전하는 박팽년에게 주시듯  홍패와 작첩과 어사화를 친히  내리시었다. 전하는 
두 사람의 젊은 인재를 얻어 마음이 흐뭇했다.
  과장은 파하고 전하는 환궁을 했다.
  예문관에서는 전임학사들이  모여들었다. 박팽년과 최항을  어깨에메고 헹가래
를 치며 신래를 불렀다.
  신래란 새로 들어온 학사를 환영하는 뜻에서 얼굴과 눈에 먹칠을 하고 사지를 
번쩍 들어 공중으로 솟구쳐서 환영하는 장난을 치는 것이다.
  새로된 집현전에는 열 사람의 정원이  있으므로 새로 뽑힌 두 학사는 아직 예
문관에 소속되어 있게  되므로 예문관 학사들이 나와서  신래를 불려 주는 것이
다.
  이 나라 학사들이  모여 있는 관습법에 지체가  낮은 사람이나 덕행이 부족한 
사람들의 자제는  아무리 고관대작의 아들이라 해도  신래를 불려주지 아니하는 
것이 전례다. 학사원에서 환영을  하지 않는 뜻을 강하계 표현하는 것이다. 말하
자면 탐관오리의 자식이 협잡으로 과거를 했으니 학사 자격이 없다고 동료로 치
지 않고 거부해버리는 것이다.
  이리해서 과거에 급제를 해도  신래를 받지 못한 집안에서는 좌청우촉해서 신
래를 받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학사들은 아무리 콧김이센  영의정이나 부원군
의 자식이라도 텁텁하고 구린내가  나는 권문세가의 자제들은 일체 신래를 불려
주지 아니했다.
  이러므로 과거 보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신래를 당하는 것은 학자로서의 크나
큰 영광이었다.
  박팽년과 최항은 명예로운 신래를  받은 후에 얼굴에 먹칠한 광대모습을 세수
해 닦은 후에 미리 대령해논 은안백마에 올라 어사화를 꽂고 삼일유가로 들어섰
다.
  '삼일유가'란 왕명으로 장원급제에게 호강을 시키고 한편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이같이 잘 해서 장원급제가 되면 영광과 우대를  받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젊
은이들에게 면학하는 기풍을 조성시켜주는 아름다운 풍속의 하나다.
  삼현육각의 길풍악을 아뢰는 악공들이 전도가 되고 구종별배들이 좌우로 호위
안 속에, 백팽년과  최항은 사모품대에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장안을  사흘 동안 
돌았다. 젊은 두  학사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안 안 남녀노소  만백성들은 칭찬이 
자자했다.
  "글도 잘 해서 장원급제가 되었지만  어쩌면 저같이 선풍도골들인가. 남중일색
들일세!"
  "박팽년은 호리호리한 키에 몸이 학체로구나!  얼굴도 미소년이지만 성성이 강
직하겠다. 깔끔하게 생겼는걸! 나중에 큰 기둥감이다!"
  또 한 사람은 최항을 평했다.
  "박평년 학사에 비해서 얼굴에  기름기가 흘렀구나! 무척 순하게 생겼는데. 남
하고 시비는 하지 않을 사람이다."
  "최학사는 박학사보다 강직하지는 못할 거야!"
  "그럼 사방미인이 될 사람이란 말인가, 하하하."
  모두들 한편으로 부러워하고 한편으로는 인물평까지 했다.
    (제9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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