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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시험 지옥 [니시무라 교타로]

by Casey,Riley 2023.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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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험 지 옥
                                               니시무라 교타로
                                    
                       1
 일어나서 반사적으로 머리맡의 시계에 눈을 준 기무라 마사히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리 다시 보아도,시계바늘은 오전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급히 침대에서 뛰어내려온 마사히코는 테이블 위의 전화를 집어들었다.

 시보를 알려주는 번호를 돌린다는 것이 그만 일기예보 번호를 돌리고 말았다.당

황하여 다시 걸었다.그러나 전화의 시보도 8시 40분이었다.

 "이런 병신!"

 마사히코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7시에 벨이 울리도록,틀림없이 시계를 맞추어 놓았었는

데.

 얼마 전에 새로 사서 몇 번 테스트까지 해본 시계였으므로 오늘 아침 벨이 울리

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어젯밤,시험에 대한 이런저런 걱정과 좀 미진하다 싶은 수학을 복습하느라 새벽

3시에야 잠이 들었었다.아무래도 그것이 화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잠을 자지 말걸,하고 후회가 되었다.

 오늘 T대학의 입시는 9시가 시작이었다.택시를 타고 아무리 빨리 간다해도,20분

만에 T대학까지 도착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적어도 30분은 걸릴 터였다.

 문득 부모님의 얼굴이 마사히코의 눈앞을 스쳤다.T대학은 중학생때부터 꿈꾸어

왔던 마사히코의 희망이기도 했지만 나고야에서 공무원을 하고 계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다.그런 까닭에 지방공무원인 아버지는 과장이라

고는 해도 무리한 지출인 T대학이 있는 도쿄에 작은 맨션을 세내어 마사히코로 하

여금 유명한 입시학원을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있었다.

 비록 계모이긴 했지만,어머니인 유미코도 마사히코의 합격을 위해 멀리 큐슈의

다자이후까지 불공을 드리러 다녔다.특히 마사히코가 3수를 하고 있는 올해엔 거

의 매주 다녀오다시피 했으며 부적도 여러 번 사다 주었다.

 금년이야말로 그런 부모님의 기대에 꼭 보답해야 한다고,마사히코는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시험을 여섯 달 앞두고부터는 잠도 4시간으로 줄였고 학원에 가

는 일 외엔 외출도 전혀 하지 않았다.정말 필사적으로 공부한 한 해였다.

 부모님의 기대도 기대였지만 마사히코 자신도 4수는 하기 싫었다.그리고 스무 살

이 지나도록 부모님의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도 점점 부담스러워지고 있었다.이래

저래 이번 시험은 마사히코로선 꼭 합격해야만 하는 마지막 시험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험이 있는 오늘,늦잠을 자고 만 것이다.

 피를 쏟아가며 공부했던 1년간의 노력이 이렇게 끝나고 마는구나,싶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15분 이내의 지각이라면 들여보내주지만 그 이상의 지각은 허용하지 않는 것이 

오늘 T대학의 입시요강이었다.

 마사히코는 한번 더 시계를 보았다.

 8시 43분.헬리콥터를 타고 날아가지 않는 한,9시 15분까지 대학구내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눈앞이 캄캄했다.시험을 쳐보기라도 하고 떨어진다면 부모님께 변명할 수가 있

다.그러나 늦잠 때문에 시험을 치지 못했다고 하면 뭐라고 하실까.면목없는 일이

다.친구들도 비웃을 테지.

 "바보같은 놈.차라리 죽어버려!"
 
 하고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그런다고 상황은 달라질 것이 없었다.이러고 있는 사

이에도 시간은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그러나 벌써 9시 10분 전이었다.어쨌든 가

보자.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럴듯한 이유를 댄다면,혹시 들여보내 줄지도 몰라."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마사히코는 일어나서 문쪽으로 걸어 나갔다.그러나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

다.

                              2

 마사히코는 숨을 죽이고 전화기를 들었다.그리고 T대학의 교무과 전화번호를 돌

렸다.손가락이 떨리기는 했지만,시험을 치지 못해 나중에 조소당할 것을 생각하

면 두렵지는 않았다.

 "네.T대학 교무과입니다."

 중년남자의 목소리가 말했다.

 "잘 들으시오!"

 마사히코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상대에게 말했다.고등학교때의 연극반

활동이 이런 경우엔 얼마간 도움이 되었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T대학에 원한이 많은 사람이다.그래서 시험장에 시한폭탄을 장치해 두었

다.수험생들이 모두 시험장에 들어갔을 때쯤 폭발하게 된다.이제 몇 분 후면 T

대학은 박살이 나는 거다."

 "이,이봐.잠깐 기다려!"

 전화의 저쪽에서 남자가 당황하고 있었다.

 "기다려도 소용없다.이제 곧 폭발할테니까.수험생들을 죽이고 싶지 않으면 빨리

대피시켜라."

 "폭탄을 장치했다는 게 정말인가?"

 "학생들이 떼죽음당하는 꼴을 보고 싶으면 마음대로 생각해라.하지만 곧 후회하

게 될걸."

 "도대체,이유가 뭐요?"

 "T대학에 원한이 있다고 말했을 텐데.나는 다섯 번이나 T대학의 시험에서 떨어

졌다.이제 T대학이라면 이가 갈린다.게다가 우리 아버지도,T대학 출신의 회사간

부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해고당했다.평생 직장을 위해 몸바쳐 오신 아버지로

선 큰 충격이셨지.결국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시고 아버지는 페인이 되셨어.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된 것은 다 너희 T대학 놈들때문이다.그래서 나는 복수를

다짐하고 오늘처럼 좋은 기회를 기다려 왔다.서두르지 않으면 모두 몰살당하고

말 것이다!"

 최후는 큰 소리로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마사히코는 맨션을 달려나갔다.

 과연 이 협박전화가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마사히코도 알 수 없었다.되든 안

되든 한 번 던져본 주사위였다.실패하면 그것으로 그만이겠지만 만약 T대학측이

마사히코의 전화를 믿어준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수

험생들을 대피시키고 시험장 안을 조사한다면- 지금 출발하더라도 시험을 칠 수

있다.

 밖으로 나와 곧 택시를 탔다.그리고 T대학을 향해 달렸다.

 T대학의 정문에 도착한 것은 9시 32분이었다.

 "저것 보세요,손님.학교에 웬 경찰차들이 저렇게 많지요?"

 눈썹을 찌푸리며 운전기사가 말했다.

 그가 말한대로,언뜻 보아도 십여 대가 넘는 경찰차들이 교내에 주차돼있었다.

 "틀림없다.전화의 효과가 나타난거야."

 자신도 모르게 마사히코는 히죽이 웃고 말았다.

 택시 운전기사는 그렇게 웃고 있는 마사히코를 이상한 듯이 쳐다보았지만,마사

히코가 요금을 지불하자 액셀레이터를 밟으며 휑하니 달려가버렸다.

 마사히코는 교문을 지나서 시험장으로 갔다.예상 했던대로 수험생들은 모두 밖

으로 나와 있었다.

 마사히코는 자신이 들어갈 시험장 앞으로 갔다.그리고 다른 수험생들 속으로 섞

여들었다.

 시험장 안에는 제복차림의 경관과 T대학의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아

마도 문제의 시한폭탄을 찾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건물 밖에도 경관들이 지키고

서서,건물 가까이 다가서려는 수험생들을 향해

 "위험하다.물러서라!" 하고 무서운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수험생들은 불안과 호기심이 뒤섞인 얼굴로 시험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 놀라게 하는군,젠장."

 누군가 가시돋힌 소리로 말했다.

 "설마 폭탄이 있을라고?"

 "아냐,틀림없어.과격파의 짓이 분명해.그들에겐 이 T대학이 좋은 공격목표가 될

테니까."

 "폭발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른 시험장이라도 마련해줄까?"

 이렇게 분분한 의견이 오고가는 한편,시험장에 등을 돌리고 이틈에 영어단어를

하나라도 더 암기하려고 하는 수험생도 있었다.

 모든 시험장을 구석구석 조사했다.

 핸드마이크를 쥔 담당자가

 "수험생 여러분! 안전이 확인되었습니다.모두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주십시요."

 수험생들에게 알린 것은 대략 1시간이 지난 후였다.

 마사히코도 다른 수험생들과 함께 시험장에 들어가서 자신의 수험번호가 쓰여진

책상에 앉았다.전화작전은 감쪽같이 성공한 셈이었다.

                              3

 일단 체념했던 시험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마사히코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평소

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야구로 비유하면,파울 플라이를 쳐서 아웃되기 일

보직전의 타자가 상대선수의 낙구로 다시 기회를 잡고,심기일전하여 멋진 안타를

날리는 경우라고나 할까?

 지나간 두번의 시험 때는 자신이 없어서 합격발표를 보러 가기가 두려웠었다.결

국 두번 모두 떨어지고 말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다.

 "이번에는 틀림없습니다."

 마사히코는 맨션에 돌아와서 나고야의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석간신문은 T대학의 폭탄소동을 크게 싣고 있었다.

 <T대학시험장에 폭탄소동>

 <범인은 T대학에 원한을 품은 남자?>

 <수험생 5천 5백명이 1시간동안 대피.>

 그런 활자가 신문의 사회면을 떠들썩하게 했다.

 텔레비젼 뉴스에서도 상기된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함께,사건 발생 당시의 취재

장면인듯,T대학을 향해 긴급출동하고 있는 경찰차들을 화면으로 내보냈다.

 맥주를 마시면서 그런 뉴스를 보고 있자니 마사히코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아마 이번 사건은 범인을 찾아내지 못한 채 이대로 끝나리라.역탐지당할만큼 전

화를 길게 하진 않았으니 내가 범인인줄은 짐작도 못할거다.경찰은 오늘 입학시험

을 치지 못한 사람 가운데 범인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따라서 시험을 친 마사히코

는 절대 안전하다.

 마사히코의 예상대로 경찰이 그를 찾아오는 일도 없었고 범인이 곧 밝혀질 것 같

다는 보도도 없었다.그러는 사이에 합격자 발표의 날이 되었다.

 봄인 듯 촉촉한 단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마사히코가 교문을 들어섰을 때에는 텔레비젼 중계차를 비롯한 각 일간지와 주간

지 기자들의 취재열기가 한창이었다.마사히코는 게시판 옆으로 갔다.가슴이 두근

거렸다.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아 나갔다.그리고 마사히코는 자신도 모르게 "있

다!" 하고 작게 부르짖었다.합격하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자신의 수험번호와 이름

을 확인할 때까지는 그래도 불안했었다.

 까닭모르게 눈물이 흘러 나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그것이 멋적어진 마사히코

는 교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자꾸 헛딛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서 이 소식을 부모님에게 전해드려야지,하고 생각했지만 공중전화는 합격한 수

험생들로 모두 만원이었다.

 "하는 수 없군,아파트로 돌아가서 전화할 수 밖에."

 마사히코는 교문을 나섰다.

 바로 그때,뒤에서 누가 어깨를 두드렸다.

 뒤돌아 보니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였다.낡은 점퍼에다 올이 다 헤어진 청바지,그

리고 너덜너덜한 운동화,꽤나 지저분한 차림새였다.

 나이는 스물 두세 살 쯤 될까.

 마사히코가 모르는 남자였다.

 "자네,기무라군 맞지? 수험번호는 1309번일테고...."

 "예,그렇습니다만."

 마사히코는 정중히 대답했다.어쩌면 이 남자는 T대학의 재학생인지도 모른다.

 "내 이름은 사토 고이치로다."
 
 상대는 자신을 소개했다.
 
 "제게 무슨 용건이라도?"

 "자넨 합격했더군.어쨌든,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떨어지고 말았다.이번이 다섯 번 째지.T대학 외에는 가고 싶

지도 않고......내년에 또 도전해 볼 생각이야."

 사토는 낮게 중얼거렸다.

 '재학생이 아니고 수험생이었군.'

 마사히코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상대의 용건을 한번 더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불렀죠?"

 "어디 다방이라도 가지 않겠나? 여기선 좀 곤란한데."

 "미안합니다.급한 일이 있어서요."

 "그럴테지.합격했으니 집에도 빨리 알려야 할테니까."

 "그런건 아닙니다만."

 "좋아,합격했으니 한 시라도 빨리 알려드리는게 도리겠지.그러나 내 용건도 급한

일이다."

 "말씀하세요,무슨 일인지."

 마사히코는 당혹스런 얼굴이 되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나는 이번에도 떨어졌다.또 일년동안 T대학을 목표로 시

험공부를 해야 한다."

 "그게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죠?"

 "자네도 알겠지만,시험공부라는게 어디 돈없이 되는 일인가? 6수를 하려고 해도

난  부모님에게 신세를 질 형편이 못 돼.그래서 그 비용을 자네한테 받으려고 하

는 거지.한달에 10만엔 정도가 좋겠지.내년 시험 때까지니까.결국 자네한테 받아

야 될 돈은 모두 120만엔이다."

                              4 

 마사히코는 웃고 말았다.

 사토라고 하는 이 남자의 이야기가 너무 엉뚱했던 것이다.

 "저.....?"

 "사토다.사토 고이치로.나이는 스물세 살."

 "네,사토씨! 내가 왜 당신의 생활비를 내야 하죠? 나 때문에 당신이 떨어진 건 

아닐텐데요."

 "자네 탓도 있다."

 "터무니 없는 소리군요.그리고 학생인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다른 사람의 생활

비를 냅니까?"

 "자네가 아니라 자네 부모님이 내는 거지."

 "그런 억지는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마사히코는 화가 나서 뒤돌아섰다.

 그러자 사토는 마사히코의 팔을 붙들며 나직히 말했다.

 "나는 알고 있다!"

 "알고 있다뇨?"

 "물론,시험날 발생한 폭탄소동을 말하는 거지.그건 자네가 한 짓이었어."

 마사히코는 말을 잃은 채,멍하니 사토를 바라보았다.

 사토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히죽이 웃으며 지저분한 수염이 덮고 있는 턱을 만지

작거렸다.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마사히코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알고 있을 텐데.자네가 한 짓이니 모를 리가 있겠어? 자네,시한폭탄을 장치했다

고 협박전화를 건게 얼마나 무서운 죄인줄 알아? 벌금형으로 간단하게 끝날 일이

아니야."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그때 그 폭탄소동 말이다.시험이 지연되는 바람에 한 시간 동안 바깥에 나와 있

지 않았었나? 기억 나지 않는단 말인가!"

 "그 일이라면 물론 기억하지요.하지만 그 일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러시

는 겁니까? 그땐 나도 피해자였단말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사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합격한 일행들일까.5,6명의 그룹이 떠들썩하

게 두 사람의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텔레비젼 중계차가 교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다방으로 갑시다."

 마사히코가 말했다.

 두 사람은 T대학 근처에 있는 다방으로 들어갔다.구석에 자리를 잡은 후 커피를

주문했다.사토는 부스럭거리며 세븐스타를 꺼내더니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로 

던졌다.그리고 1개피를 빼어물었다.

 "파칭코에서 딴 거다.재수생활 5년에 파칭코와 마작 솜씨만 늘었지,젠장!"

 사토는 또 턱수염을 쓰다듬었다.사토의 그런 너스레에 참을 수 없어진 마사히코

는 언성을 높였다.

 "용건만 말해요.난 바쁘니까."

 "서두르지 말게.우선 커피부터 마시자구."

 그렇게 말한 사토는 운반되어온 커피에 잔뜩 설탕을 집어넣고는,맛있다는 듯이

마셨다.

 마사히코는 마실 기분이 아니어서 그대로 있자,사토는 "마시지 않을텐가?" 하고 

물었다.마사히코는 고개를 끄덕였다.사토는 서슴없이 자기 앞으로 잔을 가져가 또

잔뜩 설탕을 집어넣었다.

 "그날......"

 사토는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마사히코의 표정을 살폈다.

 "나는 8시 30분에 시험장에 도착했었다."

 사토는 또 힐끗 마사히코를 쳐다보았다.

 "그런데요?"

 "9시 정각,드디어 시험이 시작되려나보다 했지.하지만 웬걸.시험은 커녕 우리들

은 느닷없이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어.시험장에 시한폭탄을 장치했다고 하는 전화

가 걸려왔고,그것을 조사한다는 것이었지.갑작스런 사태에 모두들 얼이 빠졌어.

1년 동안 피를 말리며 공부와 씨름해온 수험생들에겐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지.

만약 그때 범인이 내가 그랬소,하고 나섰다면 수험생들에게 몰매를 맞고 살아남지

못했을걸? 어때,내 말이 틀렸나?"

 "글쎄요."

 "경찰차가 여러 대나 왔지만 조사는 꽤 오래 걸렸지.그래서 나는 교문쪽으로 갔

어.기다리기에도 지쳐서 바람이나 쐬려고 했던 거지.거기서 자네를 보았네."

 "......."

 "택시가 한 대 달려오더니 교문 앞에 멈추더군.그리고 자네가 내렸어.그때 무슨 

일인지 자넨 히죽이 웃고 있었지.지각했지만 시험이 늦어져 기분이 좋은가보다 했

지.달리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늦게 온 자네는 T대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터였어.그것이 당연하지.그래서 근처에 있는 수험생이나 T대학의 직원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 볼 거라고 생각했지.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었고.하지만 자넨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고,곧장 206호 교실쪽으로 걸어가더군."

 "나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아는지 모르는지 내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면 알거야.어쨌든,나도 그 교실이 시

험장이어서 자네의 뒤를 따라 걸어갔지.그런데 206호 교실 앞에 가서도 자네는 그

곳에 있는 수험생들에게 아무것도 물으려고 하지 않았어.정말 이해할 수 없는 태

도였지.늦게 왔는데도.T대학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단 말인

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그리고 결론을 내렸어.자넨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그래서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는 것이다,하고.자네가 무슨 일이 있었는

지를 어떻게 알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

 "가능한 일이지.왜냐하면 시험장에 폭탄을 장치했다고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바

로 자네였으니까!"

 거침없이 말하고,사토는 살피듯이 또 마사히코를 쳐다보았다.

 마사히코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있어서,얼

핏 보아서는 지독히 둔할 것 같은데,대체 이 남자의 어디에 이런 날카로운 추리력

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마사히코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그만두지 못해요!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란 

말예요!" 하고 말했다.사토는 빙그레 웃었다.

 "자네가 하긴 한 모양이군,그렇게 발끈하는 걸 보니.자네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

라면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올텐데.그게 정상적인 반응이지.하지만 터무니없이 

화를 내는 거 하며,얼굴이 대뜸 붉어지는 거 하며,아무래도 수상해.자네가 한 짓

이 틀림없어.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발끈해서 내말을 부정하고 있지만 자네의 표

정은 그게 아냐.내가 했소,하고 얼굴에 쓰여 있는데,뭘!"

 사토는 묘하게 느린 어투로 말했다.그것이 마사히코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내가 했다는 증거라도 있다는 겁니까?"

 "상황증거란 게 있지.내가 증인이야.시험날 자네의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내

가 증언한다면,경찰도 상당히 흥미를 가질 거네.일단 조사해 보려고 할테지.거짓

말탐지기를 사용할지도 모르고.게다가 자네가 타고 온 택시의 운전기사도 자네가 

지각한 사실을 증언해 줄 것이야.그렇게 되면 간접적으로 내 증언의 진실성이 증

명되는 셈이고,따라서 자네는 빠져나갈 길이 없지.이래뵈도 나는 기억력이 좋아.

자네가 탔던 택시는 구형 볼보였고 회사는 태양교통,번호는 3975였다.운전기사는 

45,6세 쯤 된 사람으로 대머리였지."

 사토의 말은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마사히코는 사토가 말한  택시번호가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어쨌든 그

당시에는 택시번호를 보아 둘 이유도 경황도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운전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정확했다.나이가 45,6세 된 대머리 운전수라고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따라서 택시번호도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설령 그렇다고 칩시다.하지만 이유를 모르겠군요.내가 왜 당신에게 돈을 지불해

야 하나요?"

 "이제 협박전화를 건 사실을 시인하는가?"

 "천만에요!"

 "어쨌든,훌륭했다.멋진 생각이었어.시험시간을 늦추게 하는 데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아마 없었을 거야.나도 자네의 입장이었다면 마찬가지였을걸.틀림없이 자

네와 똑같은 일을 했을 거다.아니,난 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그만한 용기가 없으

니까.그저 자네의 그런 용기가 부러울 따름이야."

 "그런데도 돈을 내놓으라고 하니,이상하군요?"

 "내가 합격했다면 그런 요구는 하지 않지.오히려 축하술이라도 사야겠지.자네의 

지혜와 용기를 높이 사는 뜻으로 말일세.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야.나도 스릴과 

모험이라면 무척 구미가 당기는 사람이니까 자네완 좋은 동지가 될 수도 있을 거

야.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떨어지고 말았거든!"

 "그래서요? 그게 내 책임이란 말입니까?"

 "자네때문에 컨디션을 망쳐 버렸어.이번에야말로 꼭 합격해야지,하고 단단히 벼

르고 시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갑작스런 폭탄소동으로 시험장에서 쫓겨나고 말았

어.이래뵈도 난 꽤나 예민한 사람이라구.그 소동으로 신경이 곤두 선 탓에 제대로 

시험을 칠 수가 없었고 결국 난 떨어지고 만거지.그래서 범인인 자네에게 그 변상

을 요구하는 거라구.그게 피해자인 나로선 당연한 권리니까.더구나 범인인 자네는

시험에 합격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어?"

 사토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늘어놓았다.마사히코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어

처구니없는 요구였다.

 "당신 말대로 전화를 건 사람이 설령 나라고 해도,시험에 떨어진 건 어디까지나 

당신의 책임이예요.왜 나더러 당신의 생활비를 내라는 겁니까?"

 "그건 몇 번이나 말하지만 자네가 범인이기 때문이지.그것으로 충분해."

 "증거가 없으니 경찰이 날 체포할 순 없을겁니다."

 "굳이 자네를 경찰에 넘길 필요는 없겠지.자네도 재수생활을 해 본 모양이니 시

험에 떨어졌을 때의 비참한 심정을 잘 알거야.아무리 사소한 구실이라도,바로 그

것때문에 시험에 떨어졌다고 항변하고 싶은 것이 시험에 떨어진 수험생들의 공통

된 심리지.무슨 말이냐 하면,자네가 그 폭탄소동의 범인이라고 소문을 내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얘기지.과연 시험에 떨어진 사람들이 가만 있으려고 할까? 게다

가 범인인 자네는 합격했다고 해보게.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일걸.모르긴 해

도 자네는 T대학을 다닐 수 없게 될거야."

 "날 협박하는 겁니까?"

 "그럴지도 모르지.아니,협박하고 있는 거야.어쩔텐가?"

 "내가 부정한다면?"

 "소용없어.지금까지 자네가 한 이야기로도....."

 사토는 주머니 속에서 천천히 소형녹음기를 꺼냈다.

 "이미 반은 시인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5

 결국 마사히코는 사토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경찰에 체포될 만한 절대적인

증거는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두려움을 사토에게서

느꼈던 것이다.

 T대학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마사히코의 일을 소문내겠다고,사토는 말했다.

 그 정도의 일은 충분히 하고도 남을 어떤 집요함이 그에게는 있었다.

 무엇보다도 마사히코가 두려웠던 건,겨우 소원이 이루어져서 들어가게 된 T대학

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이상한 소문이 나서 퇴학처분이라도 당하면 부모님이나 

친구들을 볼 면목이 없게 된다.그것을 생각하자,마사히코는 사토의 요구를 받아들

일 수 밖에 없었다.

 "정확히 1년입니다.틀림없겠죠?"

 마사히코는 다짐하듯 물었다.

 "맹세하지.나도 이런 생활을 청산하고 하루라도 빨리 대학에 들어가고 싶으니

까.그동안 생활비를 버느라고 제대로 공부를 못했었는데,이젠 안심이야.앞으로 1

년동안 자네가 생활비를 지원해주기로 했으니 공부에만 전념하겠어.반드시 내년엔

T대학에 합격해 보이도록 하지.암,합격하고 말고."

 "그렇게 해주시지 않으면 나도 곤란합니다."

 "내년에 합격하면,내가 후배가 되는가?"

 사토는 그렇게 말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마사히코가 T대학에 합격하자 나고야의 부모는 말 그대로 미친듯이 기뻐했다.즉

시 상경해서,여러가지로 돈이 필요할 거라며 마사히코의 이름으로 100만엔이 예금

된 통장을 건네주었다.현금카드가 딸려있어서 같은 은행이면 어느 지점에서나 인

출이 가능한 통장이었다.

 "아버지가 주시는 선물이야."

 어머니가 통장을 건네주면서 말했다.그러나 절반은 어머니의 돈이라고 나중에 아

버지가 말해주셨다.젊은 계모는 아버지와 맞벌이를 하고 있었다.부모가 나고야로 

돌아가고 난 다음날이었다.

 1통의 편지가 맨션의 우편함에 들어있었다.오른쪽으로 올라가는 버릇이 있는 글

씨로 <기무라 마사히코 앞>이라고 쓰여 있었다.

 마사히코는 눈썹을 찌푸렸다.사토가 보낸 편지였다.

 싸구려 봉투에다,속에 든 편지지도 사둔 지가 1,2년은 된 듯 모서리가 노랗게 변

색되어 있었다.

 '연애편지 쓸 일도 없나보군,이 친구.하기야 그 꼴에 여자친구인들 있을라구.'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사히코는 편지를 펼쳤다.


[ T대학 입학을 축하한다.

  이 말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고 싶어서 나는 5년동안이나 몸부림쳤다.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해주어야 될 입장이라니 가슴이 찢어지도록 괴롭고

  비참한 일이다.자네의 맨션을 가보고 놀랐다.상당히 좋은 맨션이더군.

  자네의 부모님들이 자네에 대해 걸고 있는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알만했다.

  부러울 뿐이다.나도 너처럼 돈많은 부모님이 계셨더라면 고급맨션의 조용한 방

  에서 공부할 수 있었겠지.그랬다면 6수도 할 필요없이 벌써 T대학에 들어갔을거

  다.

  그건 그렇고,이번 달의 생활비를 보내주기 바란다.최대한 빨리.M은행 시로다 지

  점의 보통예금 계좌다.예금주는 사토 고이치로.만일을 위해 써두지만 이 계좌에

  는 이제 6백엔밖에 남지 않았다.빨리 송금하지 않으면 나는 굶어 죽는다.그러나

  그 전에 경찰에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말겠다.기대하고 있겠다.

  오늘은 라면 한 그릇밖에 먹지 못했다.] 


 눈물겨운 협박장이었다.마치 애원이라도 하는 듯했다.하지만 이것도 자신이 쳐놓

은 올가미에서 마사히코를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사토의 교묘한 술책이리라.

 마사히코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은행이 끝날 시간은 아니었다.마사히코는 택시를 타고 은행으로 갔다.현금

카드로 10만엔을 인출했다.

 사토가 지시한 계좌에 그것을 입금시켰다.지급으로 해달라고 하자 수수료로 5백

엔을 달라고 했다.그런 일도 마사히코를 화나게 했다.꼭 이렇게까지 해가며 돈을 

부쳐주어야 하나.생판 모르는 사토란 녀석에게 매달 10만엔씩이나 뜯겨야 하다니!

 그러나 송금이 끝나고 맨션으로 돌아오자,한편으로는 마음이 홀가분하기도 했다.

이제 이것으로 4월 한 달은 사토의 일은 잊고 지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T대학생이 되고나서의 생활은 쾌적했다.무엇보다도,지긋지긋한 시험공부를 더 이

상 하지 않아서 좋았다.시험에 붙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선진 몰라

도,시험공부를 하던 시절에는 인생이 온통 회색빛으로 보였었다.하지만 지금은,산

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즐거운 나날이었

다.주위사람들도 T대생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당장 마사히코를 보는 눈길이 달라졌

다.그런 일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 가운데 5월이 되었다.

 사토로부터 어김없이 재촉이 왔고,마사히코는 또 10만엔을 그의 계좌에 입금시켜

주었다.아무래도 마사히코로선 화가 치밀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사토도 그 이상

은 요구 해오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6월이 되어서는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6월 5일에 10만엔을 보내주었는데도,15일이 되자 사토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염치가 없네만,이번 달엔 10만엔 더 필요하군.보내 줄 수 있겠지?"

 말과는 달리 묘하게 강요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때문에 또 10만엔씩이나 더 필요하다는 거예요?"

 마사히코는 화를 내며 물었다.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려니까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수가 있어야지.공부를 해도

머리에 들어 오지도 않고.그래서 여행을 하려는 거야.바람이라도 쐬고나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고,그러면 공부도 더 잘 될테니까 말이야.내가 내년에 또 T대학에 떨

어지게 되면 자네도 곤란해질텐데,안 그래?"

 "곤란해지다니요?"

 "혹시 또 모르잖아.내년에도 자네에게 생활비를 받아야 할지?"

 "뭣이 어째요!"

 마사히코는 고함을 질렀다.

 "아니,떨어진다면 하고 가정했을 뿐이야.T대학에 합격하면 그런 일은 없을테니

까.기분전환을 하도록 돈이나 좀 주게.그래야지 공부도 할 게 아닌가? 초조해져서

그런지 요즘은,모조리 경찰에 털어 놓아 버릴까 하는 생각만 자꾸 든다구!"

 사토는 협박하고 있었다.

 결국 마사히코는 또 10만엔을 사토에게 보냈다.

 7월이 되자 사토는 점점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해 왔다.

 날씨가 더우니 방에 에어콘을 들여 놓아야겠다며,그 대금 15만엔을 생활비 10만

엔과는 별도로 보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끝나자 이번에는 학원의 친구들이 오키나와에 갈 여비가 필요하다고 연락

해왔다.


[ 여름에 미리미리 체력을 단련해두지 않으면 치열한 시험전쟁에서 이겨낼 수가

 없다고,학원의 친구들이 말했어.나도 크게 동감했지.그래서 1주일동안 오키나와

 에 가서 체력을 단련하면서 공부하고 싶다.그에 따른 여비와 기타 경비로 16만

 엔이 필요하다.최대한 빨리 보내주기 바란다.] 


 뻔뻔스럽게도 그런 편지를 보내왔다.마사히코는 이것도 참고 또 16만엔을 입금시

켜 주었다.

 어머니가 준 100만엔은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아버지로부터는 매달 10만엔씩 송

금받고 있지만 그걸로 충분할 리가 없었다.

 입학선물로 받은 론진시계도 전당포로 넘어가고 말았다.궁여지책으로 아르바이트

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때마침 여름방학이어서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기는 했지만

'지금쯤 사토는 오키나와 해변에서 팔자가 늘어졌겠군.그런데 난 이게 무슨 꼴인

가? 더위를 무릎쓰고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신세라니,참 해도 너무 하는군!'하

고 화를 내면서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였다.

 하지만 가정교사 자리는 꽤 조건이 좋아서 마사히코에겐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T대생이라고 하자 선뜻 월 30만엔을 주겠다고 제의해 왔던 것이다.아이를 둔 부모

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T대생을 선호할 수 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현실에 부딪히자 마사히코는 T대학에 들어오길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한편으론 사토란 녀석때문에 그것을 망쳐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

정도 되었다.

 8,9월로 접어들면서 사토의 태도는 더욱 뻔뻔스러워졌다.명백히 유흥비라고 생각

되는 돈까지 요구해왔다.

 그것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 가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면 공부가 잘 안되기 때문에......] 

 이처럼 태연하게 써보내는 것이었다.

 8월은 40만엔,그리고 9월은 무려 60만엔이나 되는 돈을 사토에게 빼앗겼다.급히

쓸 곳이 생겼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고,겨우 만들어 사토에게 빼앗겼다.

 10월이 되자 마사히코도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자신이 생활해 나갈 돈까지 곤

란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부모에게도 이상의 돈을 요구하기가 어려웠고 전당포에 가져갈만한 물건도 모두

바닥나 버렸다.

 방학이 끝나면 그나마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게 된다.

 학교를 그만둘 수만 있다면 사토의 협박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하지만 3수 끝에 

겨우 들어온 T대학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무엇보다도,T대학을 졸업하면 확실

한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T대학을 그만둔다고 하는 것은 장래

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사토를 죽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10월 초순의 늦은 밤이었다.마사히코는 잭나이프를 사서 주머니 속에 숨겼다.그

리고 사토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사토는 방에 있었다.

 새로 산 쿨러와 컬러텔레비젼,냉장고등으로 4평 남짓한 좁은 방안이 더욱 비좁아

보였다.모두 마사히코의 돈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사토는 마사히코를 보더니 싱긋 웃으며 봉투를 하나 보여주었다.

 봉인을 하고 50엔짜리 우표를 붙인 늘 사용하던 그 봉투였다.또 변명을 늘어놓으

며 마사히코로부터 돈을 뜯어내려는 속셈이리라.

 "내일 아침에 부치려고 하던 참이었다.가져가겠나?"

 사토가 웃으면서 말했다.

 "예.그러죠,뭐."

 마사히코는 봉투를 받아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그리고 동시에 잭나이프를 꺼

냈다.

 사토는 책상에 앉아 또 무엇인가를 쓰려는 듯 막 편지지를 펼치고 있는 중이었

다.

 그 등을 향해 곧장 나이프를 찔러넣었다.

 2번,3번.....지금까지 쌓이고 쌓인 분노를 토해내기라도 하듯이.사토의 몸이 바

닥으로 굴러떨어지더니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마사히코는 나이프를 주머니에 집

어넣고 방안에 묻은 지문을 닦아낸 다음 밖으로 나왔다.

 마사히코는 맨션에 돌아와서 사토가 쓴 편지를 꺼냈다.

 어쨌든 이런 물건은 빨리 태워야 된다.재떨이를 가져와 라이터에 불을 켰다.그러

나 이번에는 또 무슨 핑계로 돈을 요구하려고 했는지,갑자기 궁금해졌다.봉투를

뜯었다.

 
[ 나는 이제 가망이 없다.자네가 주는 돈으로 편안한 생활을 하고 그것을 즐기는

 사이에 어느덧 그런 생활에 젖어 들고 말았다.공부할 의욕도 집념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당황하여 본래의 내 자신으로 돌아가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이젠 틀린

 모양이다.그동안 너무 안일한 생활을 했고,또 의지도 약해서 재기할 희망이라곤

 전혀 없다.이대로 가면 내년에 T대학에 합격할 가능성은 제로다.

 내 자신이 혐오스럽다.그래서 자살한다.다시 재기할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목숨

 을 끊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다.나처럼 T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쓸모없는 인

 간은 살 가치도 없다.

 이 편지가 도착할 무렵엔 나는 자살하고 없을 것이다.그동안 미안했다.이제부턴

 안심하고 공부하게.돈을 달라고 괴롭히는 편지는 더이상 없을테니까.] 






--작가소개

니시무라 교타로(1930-일본)

1965년 '천사의 상흔'으로 11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이후 여러 종류의 추리,모험,서스펜스를 발표.

1981년 '종착역 살인사건'으로 일본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했다.

트래블 미스터리의 일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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