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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by Casey,Riley 2023.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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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트                     
                                              

   (1)

   좋은 추억만 남기고 살 수는 없다.
   지나간 기억들은 싫었건 좋았건 '추억'이란 이름으로 남게 된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이 추억은 
   처음엔 아주 좋은 느낌으로 시작됬었다.
   하얀 종이가 점점 검고 더러운 오물로 지저분해지듯
   시간이 흐를수록 그렇게 더럽혀져 가서 탈이었지만...
   
   6월 22일 밴쿠버에 도착한 이후,
   거의 일주일 동안은 시차 적응이 안 되서 무척 피곤했다.
   초저녁이면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새벽 3,4시면 발딱 일어나기 일쑤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삼일이 지나면 그럭저럭 괜찮아진다던데
   난 유독 오랫동안 이 'jet lag'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 때의 밴쿠버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여름의 밴쿠버는...너무나 사랑스럽다.)
   집에서만 빌빌대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밖으로 나갔다.
   
   7월의 첫째 주 금요일.
   그 곳에선 금요일 오후부터가 주말이다.
   학교도 오전 수업 밖엔 없었다.
   오늘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구경 좀 해야지..마음을
   먹었던 터라 수업이 끝나자 마자 거리로 나오긴 했는데,
   막상 돌아다니려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리고 길눈이 어두운 나는 여행자용 지도를 봐도 
   언제나 길을 잃어 헤매기 일쑤였다.
   
   '어,저거 뭐야.콜로세움 비슷한 건물이 있네.'
   그 때 내 눈에 보인 것은 로마의 콜로세움과 비슷한
   연갈색의 둥그런 건물과 그 건물을 반쯤 감싸고 있는
   기와처럼 둥글게 휜 높다란 빌딩 한 쌍이었다.
   가서 보니 그 두 건물은 Vancouver Public Library였다.
   그 것들은 내가 본 도서관 중 최고로 예술적인 건물이었다.
   외양 뿐 아니라 내부 시설도 최고였다.
   깨끗한 건 말할 것도 없고 
   7층까지 엘리베이터 뿐만 아니라 에스컬레이터로 
   모두 연결되어 있는 등 편의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우리 나라 도서관들이 
   대부분 '독서실' 분위기인 것에 비해 
   그 곳은 말 그대로의 '도서관'이었다는 것.
   (답답하고 딱딱한 분위기가 전혀 들지 않는..)
   
   또 하나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했던 것은 
   도서관 내의 컴퓨터 시설이었다.
   씨디롬을 비롯해 마이크로 필름 등을 자유롭게 대여해서
   도서관 컴퓨터로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인터넷을 공짜로 이용할 수 있었다.
   
   이 기회에 한번 인터넷을 해 봐야지...
   한번도 인터넷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
   노란색 표지가 붙은 컴퓨터를 찾아 그 앞에 앉았다.
   그런데,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 거야.
   그 땐 영어만 보면 예민해지는 연수 초기 증상(?) 때문에 
   깨알같이 박혀 있는 초기 화면의 설명을 읽으려니 
   머리가 아파질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바로 옆에 앉은 남자는 능숙하게 컴퓨터를 다루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안경을 쓴 동양인이었다.
   옆모습만으로도 한국인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 Excuse me..May I ask you something..?"
      
   인터넷에 몰두해 있던 그 남자는 갑작스런 내 질문에 놀란 표정
   이었지만 " Sure." 하고 대답을 했다.
   
   " I'd like to do.. internet..but I'm a beginner.
     So..Can you teach me..how to do it? "
     
   지금도 그렇지만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를 한다는 건
   지극히 피곤한 일이다.가뜩이나 그 땐 갓 도착했을 때였고,
   짧은 말도 조심스럽게(틀린 구석은 없는지 마음 졸이며)
   천천히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Okay,하면서 처음 접속하는 법과 Yahoo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 내게 어떤 정보를 원하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 신문을 보고 싶다고 말했고,
   그러자 그는 내게 'Are you Korean?'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안녕하세요.'하고 우리말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외국인에게서 우리말을 들으니 무척 반가웠다.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니,했더니 'I'm Taiwanese' 그런다.
   
   그는 영어에 능숙한.. 중국 사람이었다.
   
   (2)

  중요한 몇 가지 기능을 그로부터 배운 후
  나는 인터넷의 광대한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역시 컴퓨터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중앙 일보 영자판을 읽다가(한글은 깨져서 볼 수가 없었다.)
  눈이 아파 더이상 읽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 Thanks for your teaching.Bye- "
  " Bye."
  
  그 날은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친절함이 몸에 배어 있는 밴쿠버 사람들을 매일 보아오던 터라
  그 정도의 친절은 특별히 기억에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은 무뚝뚝했던 말투에 
  '역시 아시안은 아시안이야..' 하고 생각했으니까.
  
  그 다음 주 월요일.
  나는 다시 V.P.L에 갔다.공부를 하러 간 거였지만
  책상 앞엔 몇 분 앉아 있지도 못하고 
  컴퓨터를 찾아 인터넷에 접속을 했다.
  중앙 일보도 다시 들어가 봤고,한국 관련 사이트는
  모조리 훑고 다녔다.
  서태지와 아이들 팬 클럽에도 들어가서
  오랜만에 태지의 사진도 보았다.^^
  지나가던 한국 애들이 모니터의 태지 사진을 보고
  쿡쿡 웃기도 했다.
  - 밴쿠버에는 한국 학생이 셀.수.없.이. 많다.
  특히 도서관 체질(?)인 한국 학생들은 곧잘 V.P.L에 
  모여 있곤 한다.내가 보기에 도서관에 있는 사람들 중 
  적어도 반 정도는 한국 애들이었음.(여기 외국 맞아..??)
  
  " Hi~ Are you enjoying? "
  
  흐악.태지 사진을 보며 실실 웃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봤다.
  저번의 그 Taiwanese였다.
  
  " Hi..how are you..? "
  또 봐서 반갑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게 갑자기 생각이
  나야 말이지..그 때나 지금이나 말이 안 나와서
  답답하긴 마찬가지..
  그는 지금 노란 표지가 붙은 인터넷 전용 컴퓨터가 
  모두 사용중이라 빈 자리를 찾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내 컴퓨터를 사용하라고 말하며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그냥 옆에서 내가 하는 것을 구경하겠다면서
  앉아도 되냐고 묻는다.
  
  그 때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내가 그 때까지 밴쿠버에서 보아온(겨우 보름 남짓이었지만) 
  중국 남자 중에서 그렇게 멋진 사람은 처음 봤던 것 같다.
  
  밴쿠버에는 홍콩,대만 사람들이 무척 많다.(본토인도 물론)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대부분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뎅그란(!) 안경을 쓰고 다녀서
  표정이 맹맹해(?) 보였기 때문에 
  일본인이나 한국인과는 또다른 
  아주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게다가 그들의 말이 또 오죽 특이한가.
  중국 사람이 한 서너 명만 지나가도 시끄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다.하여간 그 때까지만 해도 
  중국인에 대한 나의 인상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그 많은 홍콩과 대만의 가수와 배우들.
  얼마나 잘 생겼고 예쁜가.(푸...)
  예외도 있는 법.내 눈 앞의 이 남자가 바로 그 예외?
  
  그 때부터 그와 나는 한국과 대만 관련 사이트를 번갈아 가며
  들어갔고,그는 내게 Yahoo말고도 다른 곳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한 세 시간은 족히 흐른 것 같았다.
  저녁 7시가 다 되어 있었다.
  
  " Aren't you hungry?"
  내가 먼저 물었다. 배가 고프댄다.
  오늘도 너한테 많이 배웠고,그래서 고마운데 내가 저녁을 사도 되겠니?
  하고 물었다. 사달랜다.^^
  
  도서관을 나섰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그는 키가 무척 컸다.
  (키 큰 남자한테 약한 ariel...)
  Granville street에 있는 Kitto(吉桃)라는 일식 레스토랑에 갔다.
  자루소바랑(모밀국수) 스시를 앞에 놓고 
  못하는 영어로 떠듬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네!
  
  " I'm Sophie."
  
  내 영어 이름은 Sophie이다.
  한국 애들은 내 이름을 들으면 다들 네가 소피 마르소냐,
  하면서 놀렸다.
  아니,세상에 소피가 소피 마르소 하나 뿐인가??
  나의 영세명이 Sophia이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을 뿐인데.
  
  " I'm Chris."
  
  크리스는 이 곳의 칼리지를 다니다가 다른 학교(유니버시티)로
  옮기려고 휴학중인 학생이었다.전공은 Economics.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았고(7년 째) 캐나다에 온 지는 2년이
  되었다고 했다.그래서 영어를 그렇게 잘 하는구나... 
  
  저녁을 먹고 나와서도 우린 길을 걸으며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Granville을 지나..쇼핑가로 유명한 Robson street으로 접어들어
  'HMV' (타워 레코드 같은 대형 레코드 샵.) 에 들어가
  씨디를 구경하기도 했고,
  식품점에서 포도를 한 송이 사들고 한 알씩 먹으며 걷기도 했다.
  (캐나다의 포도는 껍질을 깔 필요가 없고 씨도 없다.
  물에 슬슬 헹궈서 그냥 먹으면 되는데,맛도 기가 막힘!)
  
  다리가 아파서 Robson square로 가서 좀 앉기로 했다.
  이 곳은 시내 중심에 있는 커다란 휴식 공간인데
  폭포같은 분수도 있고,넓은 계단과 벤치가 많아서 
  앉아 쉬기엔 아주 좋은 곳이었다.
  
  나는 영어를 배우러 이 곳에 왔는데,와서 보니까
  언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느는 것이 아닌 것 같아,걱정이야..
  크리스는 자기도 처음에는 그랬다면서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 위로(?)를 했다.
  그리고 6개월은 너무 짧은 시간이니까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도 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그 곳에서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한숨만 나오는 내 영어 실력으론 그와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지만,어쨌건 내가 중국어를 모르고 그는 한국어를 모르니
  우린 영어로 대화를 할 수 밖에.
  
  그 날의 대화로 내가 느낀 그는...
  상당히 Westernized 된 사람이며,
  고생을 모르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아온 
  '부잣집 귀한 아들'이라는 것.
  (밴쿠버에서 공부하는 중국 학생들은 
  대부분 갑부집 자식들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약간 제멋대로인 듯한 면은 보였지만,
  자기 확신이 강해 보였고 주관이 뚜렷했다.
  (ariel은 이런 남자에게 약하다..)  
  그리고 한국 남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면들이 있었다.
  그 걸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어쨌든 그랬다.
  
  -아.그리고 중국 남자들은 참 매너가 좋다.
  난 매너 좋은 남자한테 약해지는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게 아니구나..싶었다니까.
  한국 남자들이 젤로 무례(?)하고 직선적이며 여자를 무시하는데도
  일등이라는 건 거기 가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다.
  일본 남자나 중국 남자만 해도 그러진 않거든.
  캐나디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날 우리는 랍슨 스퀘어에서 밤 10시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여름의 밴쿠버는 낮이 길다.서머 타임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나라보다 위도상 높기 때문에 
  7,8월엔 밤 10시 쯤에야 해가 진다.)
  
  (3)

  처음 밴쿠버에 도착한 이후,가장 놀랐던 점은
  왠 놈의 한국 학생들이 이렇게 많냐..하는 거였다.
  길 거리에서도 마주치는 사람들의 적어도 삼분의 일은
  한국 애들이었던 것 같다.
  도대체 내가 캐나다에 와 있는 건지 
  서울에 외국인들이 많이 와 있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니까...
  
  학원에선 말할 것도 없었다.
  10명 정도의 클래스에서 적으면 3,4명
  많으면 8,9명이 한국인이었다.(평균 5,6명.즉 50%)
  한국인이 자주 가는 다운 타운의 한 pub에서는 
  김건모나 클론의 노래가 흘러 나오기도 했고,
  한글 안내판이 있는 상점도 많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은
  제발 Canadian 좀 만나 봤으면..하는 
  기가 막힌 소원(?)을 품게 된다.
  가게에서 물건 살 때 잠깐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그런 점원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영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캐.나.다.친.구. 말이다.
  
  이처럼 내가 분명 캐나다에 와 있기는 한데
  정작 본토인과 친구가 되기는 어려웠다.
  기껏해야 만나는 애들이 학원 친구들...
  ;일본 애들,중국 애들,남미 애들,가끔 있는 유럽 애들,
  그리고 곳곳에 널린~ 한국 애들.
  캐나다 사람만 빼곤 다 만날 수 있는 아이러니가 벌어지는 거다.
  (홈스테이 하는 사람은 예외일 수도 있음.
  하지만 그것도 맘씨 좋은 홈스테이 가족을 만나야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지,거지같은 집 걸리면 헛 일이다.)
  
  나 역시 그 때 그런 상황이었다.
  홈스테이 마더 Nancy는 낙천적이고 상냥한 
  스코틀랜드 아줌마였지만,
  직장을 나가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아서 
  나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 집은 아줌마 혼자 살았기 때문에
  나는 집에 돌아가면 고양이 샬로티와 함께 단 둘일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젠 수업 시간 외에도 영어를 쓸 일이 생겼던 거다.
  Tutor처럼 돈을 낼 필요도 없다.
  speaking을 늘리는 데에는 native와 사귀는 것이 
  최고라는 말이 공공연한 곳이었다.
  크리스는 비록 네이티브는 아니었지만 내가 보기엔
  준 네이티브 수준이었고,발음도 괜찮았다.
  (중국 애들 발음은 한국이나 일본 애들과는 
  비교도 안 된다는 걸 알지요? 훨 나음.)
  
  처음엔 이런 계산 속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게다.
  물론 그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불가능했겠지만.
  아무리 영어에 목숨 걸었다 한들 
  다시 보기도 싫은 남자와 지속적으로 만난다는 건...
  왠만한 악바리 아니고는 어려운 거니까.
  
  이렇게 해서 첫 만남 이후,우린 계속 만났다.
  그런데 그 당시의 그는 휴학생,즉 '백수'였기 때문에
  생활이 너무나 불규칙했다.
  낮에는 오후까지 내내 자다가 한밤중이 되면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거다.
  그가 일어나는 오후 2시쯤에서부터 밤 10시정도까지가 
  만날 수 있는 시간대였다.
  내가 학교가 끝나는 시간이 3시 40분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 때 전화를 하거나 삐삐를 쳐서
  그를 불러내곤 했다.
  
  매일같이 만나는 건 아니었지만
  얼굴을 못 본 날은 전화라도 해서 안부를 묻곤 했고
  그 때 전화는 주로 내가 먼저 했다.
  여기에 얽힌 얘기가 하나 있는데...
  
  처음 만나서 밤 10시까지 같이 있었던 날,
  내가 집으로 가는 240번 버스를 타려고 할 때
  그는 이렇게 소리쳤었다.
  
  " Just give me a call! I hope you're not gonna be disappeared."
  
  내가 집에 들어가면 11시가 다 될 거라고 했더니
  그가 너무 늦다면서 걱정되니까 전화해 달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나는 집에 돌아와서 그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무슨 심보였는지 몰라도 수화기를 들고 번호까지 누르다가
  그냥 끊어 버렸던 거다.
  진짜 걱정되면 지가 하겠지 뭐.
  내가 왜 먼저 전화를 해...하는 유치한 발상이었던 것 같다.
  
  11시가 조금 넘어 전화가 왔다.
  크리스였다.조금 화가 난 목소리였다.
  돌아왔으면서 왜 전화를 안 했지? 벌써 까먹은 거야?
  ...네가 했잖아.그럼 됐지 뭐.(나의 대답.푸.)
  
  나중에 이 이야기를 다시 한 적이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는 아주 처음 만나서 전화를 할 땐
  남자가 먼저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을 했더니
  (요즘 신세대는 안 그런다구요? 왠 조선 시대냐구요?
  전 그래요~말리지 마요~)
  그는 당장에 나를 공격하기 시작...
    
  너는 conservative한 걸 싫어한다고 했으면서
  정작 너 자신은 아주 그렇다는 걸 아니?
  왜 자기 표현을 솔직하고 당당하게 하지 못 하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Don't be shy!
    
  그래서 나는 정말 그 이후로 크리스 앞에서만은
  무지 솔직하게 나를 표현했다.
  
  그가 보고 싶으면 바로 전화를 해서
  " I wanna see you..right now."
  하고 이야기를 했고,
  " I like your voice.", " I like your smile face."...
  이렇게 그때 그때 내가 느끼는 그에 대한
  감정을 숨김없이 다 얘기했으며,
  함께 있다가 손이라도 잡고 싶으면 
  " Can I..?"
  하면서 그의 손을 살짝 잡아 버리기도 했다.하하하.
  
  한국 남자였다면 절대 그렇게 못했을 거다.
  (내가 그때 미쳤었지.^^)
  그는 그런 내가 귀.엽.다.고. 했지만
  한국 남자였다면 무.섭.다.고. 했겠지.
  
  크리스도 그랬다.
  자기 감정을 숨기거나 돌려서 말하는 일이 없었다.
  우리에겐 흔히 말하는 그 '밀고 당기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거다.
  
  그는 남의 눈치란 걸 보고 살아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고
  하고 싶은 건 거침없이 다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만큼 내게는 솔직하게 자기표현을 다 했고
  나는 그런 그가 남자다워 보이고 믿음직스러워서 좋았다.
        
  영어 공부하러 와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물론 했다.
  그렇지만,이것도 새로운 경험이고...
  어쨌든 크리스와 있는 동안은 계속 영어를 쓰고 있으니까
  (비록 버벅거리는 수준이지만.)
  괜히 한국 애들 만나서 수다나 떠느니 이게 낫지,싶었다.
  한 가지 더 좋았던 점은
  내가 틀린 표현을 말할 때면 그가 꼭 바로잡아 줬다는 것.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 그게 문제야.

  한번은 영화를 보러 갔었다.
  'Independence day'(디따 재미없었지만.)
  무슨 소린지 하나도 안 들리더라.
  SF물이라 더 어려운가봐...
  한글 자막,아니 영어 자막이라도 좀 떴으면...
  그러다가 나는 가끔씩 크리스에게 '지금 쟤가 뭐라고 한 거냐.'
  '저게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냐.'등등을
  물어 봤는데,첨엔 그럭저럭 대답을 해 주더니
  나중에는 귀찮은지,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그림만 보라고' 그러네.
  
  순간 구겨지는 자존심...
  사실 맞는 말이었는데,괜시리 자존심이 상했다.
  잘났다,크리스.좋겠다,크리스.
  그래.넌 저게 무슨 말인지 다 이해한다 이거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그의 말대로 '그림만 보던' 나는
  어느 순간 그의 웃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다들 웃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와 크리스만 빼고는 다 웃고 있었다.
  하하하.그래.너도 뭐 별 수 없구나.
  야,웃어봐.웃어봐~~ 
  
  이런 유치한 강혜은 같으니라구.
  그는 못 알아 들은 게 아니라..자고 있었던 거다..
  
  이 정도는 그냥 에피소드 축에도 못 끼는 얘기지만..
  어쨌든 가끔은 별 일 아닌 것에도 마음이 상할 때가 있었다.                 
  대부분이 언어의 장벽에서 오는 일이었고
  그럴 때마다 답답하고 속상한 건 내 몫일 뿐,
  
  그는 이런 내 마음을 십분의 일도 몰랐을 거다.
  그저 저 여자는 왜 저렇게 예민하고 감정변화가 심한 걸까,
  한국 여자들은 다 저런가...이 정도로만 생각했겠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답답하다.
  한국말로 의사소통을 완벽히 하면서도
  싸우는 커플이 수도 없는데,나와 크리스는 오죽했을라구.
  처음에는 서로의 '다름'에 끌렸던 그와 나 사이에
  점점 갭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언어는...생각보다도 훨씬 더 중요했다.
  
   (4)

  우린 참 많이 싸웠다.
  사소한 말다툼이 주로였지만,그는 한번 싸웠다 하면
  절대 지지 않으려고 했고,그럴 때는 그가 
  얼마나 차갑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나는 조그만 다툼에서도 도저히 그의 말발을 당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조금 맞받아 치다가 나중엔 그냥 입을 다물고
  일방적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집중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해도 잘 안 되는 게 영어 회화 아닌가.
  열 받고 흥분하면 알던 것도 다 까먹고
  머릿속은 빈 깡통처럼 텅 비워져 버린다.
  
  나는 점점 그와 대화를 하면서 가끔씩 
  극도로 예민해 질 때가 생겼다.
  그는 말이 빠른 편이었고 더 나빴던 것은 'mumbling'하는
  버릇이 있다는 점.
  제발 발음 좀 정확하게,큰 목소리로 얘기해 달라고
  수십 번이나 부탁을 했지만 그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Pardon?' 'What?'하고 되묻는 것도 얼마나 지겨운 지 모른다.
  결국은 나의 리스닝 부족에서 오는 일들이지만
  어쨌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화를 하는 것에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주문할 때 그가 liter로 시킬래,
  하고 물은 것을 'later'로 들어서 O.K.하는 바람에 
  이따~만한 항아리같은 병에 가득 담긴 와인을 
  둘이 다 마시느라고 밥은 제대로 먹지도 못 한 적도 있다.
  (비싼 와인이라 남기기가 아까웠거든..)
  그럴 때면 미안하기도 하고,챙피하기도 하고,
  돈도 아깝고,우습기도 하고,하여간 그랬다.
  
  이런 얘긴 그래도 재밌는 편에 속하는 거지만
  이와는 다른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았다.
  대부분이 '언어'에서 오는 일들이었고.
  그럴 때마다 생각이 많아지는 건 나일 뿐,그는 아무 것도 몰랐을 거다.
  나중에는 조금만 트러블이 생겨도 내가 지레 화가 나서 
  지나친 반응을 하거나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그는 'You're too sensitive.' 'You think too much.'
  하면서 나를 나무란다.
  
  내가 왜 예민해질 수 밖에 없는지,너한테 섭섭한 점은 뭔지,
  하나하나 다 얘기하고 싶기도 했지만,그러기엔 골치가 너무 아팠고
  그러면서 대충 넘겼던 것들이 마음 속에 쌓이기 시작했다.
  
  아.안 좋았던 일들은 우선 덮어 두고..
  그와 있었던 좋은 추억들을 되새겨 보고 싶다.
  기분 좋았던 일들까지 모두 잊고 싶은 건 아니니까.
  
  7월 21일,나는 밴쿠버와는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위치한
  North Vancouver를 떠나, Vancouver 다운타운의 한 아파트에서
  한국인 룸 메이트 2명과 함께 살게 되었다.
  (밴쿠버,노스 밴쿠버,버너비,뉴 웨스트 민스터 등의
  몇몇 지역을 통틀은 것이 밴쿠버 시.)
  - Nancy 아줌마한테 사정이 생겨서 그 집을 나와야 했는데,
  그 전 홈 스테이에서(fuck! ^^) 한번 톡톡히 데어 본 경험이
  있는지라 겁이 나서 다시 홈 스테이로 들어가기는 싫었다.
  Nancy처럼 좋은 사람을 또 만나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으므로...
  
  이사를 간 곳은 Comox street의 한 아파트.
  Nelson street의 크리스가 사는 아파트와는 
  걸어서 겨우 2,3분의 거리였다.
  큰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이웃해 있었던 것.
  (일부러 가까운 곳에 집을 얻은 건 아님.
  그를 알기 전에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이젠 집에 가는데 버스로 1시간 씩 걸리지도 않고,
  늦어도 차 끊길 걱정이 없었다.
  
  집이 가까워진 이후,우리는 더 자주 만났던 것 같다.
  나는 그가 전화를 하면 늦은 밤에도 튀어 나가곤 했다.
  그 때 우리가 주로 갔던 곳은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바닷가,English bay였다.
  백사장 이 곳 저 곳에 널려 있는 통나무 위에 앉아
  멀리 떠 있는 섬들과 커다란 배들의 불빛,
  그리고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늑해져서 참 좋았다.
  
  " I like you,Sophie."
  " Me too."
  " Are you serious?" (웃는다.)
  " Yes.I'm not kidding."
  " Why do you like me? "
  
  네가 왜 좋으냐고? 그건 말이지...
  솔직해서,,똑똑해서,,눈이 예뻐서,,키가 커서,,
  목소리가 좋아서,,말을 잘 해서,,영어를 잘 해서,,마음이 착해서......
  
  나는 이렇게 그가 좋은 이유를 별 시시콜콜한 것까지 
  들어가며 길게 이야기했었다.
  
  " And,why do you like me,Chris? "
  " I don't know why.I think,there is no reason..."
  
  이렇게 말하는 그가 참..어른스러워 보였다.
  
  밝히건데,그는 76년생 용띠다. ^^
  하지만 나는 그가 어리다는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외모가 나이보다 성숙한 탓도 있었고,
  (난 처음에 적어도 73년생은 된 줄 알았다.)
  영어로 이야기를 하면 그가 말을 훨씬 잘 하니까
  오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또 영어에는 높임말이라는 게 없기에,
  서로 '누나,~~~에요?' '그래,귀여운 동생아...'
  뭐 이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는 우리말과는
  분위기가 전혀 틀릴 수 밖에 없다.
  80먹은 노인한테도 you,갓난 애기한테도 you니까.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연상,연하라는 느낌을 제거하게 되는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외국 사람들에게 연상,연하 커플이 많은 것이 아닐런지.
  
  밤의 바닷 바람이 너무 춥게 느껴질 때 쯤에는
  그 곳에서 가까운 Denman street의 Bread garden이란 
  커다란 빵집에서 얼 그레이 tea를 마셨고,
  그러고 나서 집까지 걸어올 때는 기분이 참..좋았었다.
  
  아,덴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끔 스컹크를 볼 때가 있었다.
  난 스컹크만 보면 미친듯이(!) 도망을 갔고,
  크리스도 엉겁결에 같이 따라 뛰었다.
  한밤에 왠 100미터 달리기?
  스컹크 냄새가 한번 몸에 배면 3개월이 간다는 얘기가 있거든..
  그래서 오밤중에 둘이서 힘껏 달린 일이 몇 번 있었다. ^^
  -밴쿠버에선 다람쥐,너구리,스컹크 같은 동물을 자주 볼 수 있다.
  지금은 그 스컹크마저 그립네..
  
  밴쿠버에서는 해마다 7월 말과 8월 초에 걸쳐 
  큰 불꽃 놀이 경연 대회가 벌어진다.
  그냥 불꽃 놀이 축제가 아니라,몇몇 나라의  대표팀이
  참가를 해서 누가 더 멋지게 불꽃 놀이를 연출하는가를
  겨루는 경연 대회다.
  올해는 스페인,포루투갈,그리고 캐나다 팀이 있었고,
  불꽃 놀이는 총 4일에 걸쳐 벌어졌다.
  아주 유명한 행사이기 때문에 불꽃 놀이가 시작되는
  밤 10시가 되기 훨씬 전부터,행사장인 English bay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바다 위의 커다란 배에서 불꽃을 터트림.)
  나 역시 이 행사를 구경하고 싶었고,그래서 크리스에게 
  함께 보러갈 것을 물어 봤지.
  
  " Firework?? No way...too croweded! "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인 그가 no way를 연발했지만
  난 기어이 그를 끌고 불꽃 놀이를 보러 갔다.
  하지만 잉글리쉬 베이는 죽어도 안 간다기에(수만 명이 모이니까.)
  조금 떨어진 Burrud bridge 위에서 보는 걸로 하고.
  
  아.그 날의 불꽃 놀이는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까만 밤 하늘을 색색으로 수놓던 불꽃들의 환상적인 움직임...
  단순한 놀이가 아닌 경연 대회니만큼
  그 때까지 내가 보아오던 불꽃 놀이와는 수준과 규모가 달랐다.
  온갖 형태로 불꽃들이 터졌고,색깔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불꽃 놀이는 약 40분간 쉴새없이 계속되었다.
  
  '저 불꽃들은 어제 오락실에서 했던 '갤러그'를 생각나게 한다,그지..
  저건 모양이 버드나무를 닮았네.우리 나라엔 저 나무가 
  참 많은데,여기선 한 번도 못 봤어...........'
  (여전히 뚱한 표정의 크리스 옆에서 난 이렇게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
  
  (5)

  8월 11일은 22번 째 맞는 내 생일이었다.
  그 때쯤 크리스는 친구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전공 공부를 다시 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가장 친한 친구인 Jacky라는 역시 Taiwanese인
  남자애가 있었다.
  그 날 크리스는 재키를 데리고 나를 픽업하러 왔다.
  아아니,이런 날 왠 친구를 데리고 온담.
  순간 나는 김이 좀 빠졌지만 뭐라고 할 수 있나.그냥 웃을 수 밖에.
  
  하지만 재키는 명랑하고 재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첫 대면이었지만 친근감이 느껴져서 별로 어색하지가 않았다.
  크리스가 도서관에서 만났다는 Korean girl이 바로 너니.
  하면서 자기는 크리스의 best friend이기 때문에
  그 girl friend의 얼굴도 알아둬야 한다는 거야.
  
  우리 셋은 Richmond에 있는 가라오케에 갔다.
  노래방을 워낙 좋아하는 나는 오랜만에 마이크를 잡고 신이 났지...
  그 곳엔 팝송을 비롯해서 중국 노래,일본 노래,
  그리고 한국 노래까지 모두 있었다.
  크리스와 재키는 신이 나서 중국 노래를 불렀고,
  나 역시 이은미의 '기억 속으로',다섯 손가락의 '수요일에는 빨간..',
  김현철의 '끝난 건가요',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등등,나의 애창곡들을 열심히 불러 제꼈다.
  
  참,그 때 크리스는 박진영의 '너의 뒤에서'를
  한국어로 멋지게 불러 나를 놀라게 했는데,
  그의 한국인 친구가 녹음해 준 한국 가요 테잎에서 듣고는
  노래가 너무 좋아서 가사를 다 외워 버렸다고.
  
  약 1시간 반 동안의 열창을 끝내고 저녁을 먹은 후,
  재키는 다른 일이 있다면서 먼저 집으로 갔다.
  크리스와 나는 다시 다운타운으로 돌아왔고,
  그는 Landmark hotel 앞에서 차를 세웠다.
  내가 그 곳 46층 전망 레스토랑에 가 보고 싶다고 했거든. 
  랜드마크에서 내려다 보는 밴쿠버의 야경은 
  최고라는 말이 있을만큼 유명한 곳이지만,
  그 곳 레스토랑의 칵테일 바는 호텔인데도 저렴한 편이었다.
  칵테일 한 잔에 5불에서 8불 정도?(약 3000원~4800원.)
  
  저녁을 그리스 레스토랑에서 배부르게 먹었던 우린
  랜드마크의 바에서 칵테일만 시켰다.
  소문대로 전망이 너무나 멋졌다.
  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는 그 곳은 회전 레스토랑&바였다.
  원형의 레스토랑이 아주 천천히 돌고 있었다.
  1시간 정도면 한 바퀴를 완전히 돌기 때문에 
  밴쿠버의 전경을 모두 볼 수 있다고 했다.
  
  North Vancouver와 Vancouver를 연결하는
  바다 위의 다리 Lions gate bridge의 불빛,,
  노스 밴쿠버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Grauss Mt.과 Seymore Mt.,,
  다운 타운에 우뚝 솟은 높다란 빌딩들,,
  죽 따라가면 태평양으로 나가게 되는 잉글리쉬 베이 너머의 바다...
  
  피냐 콜라다를 마시며 전망이 참 좋다고 감탄하고 있는데,
  그가 'Your birthday gift'하면서
  포장한 작은 상자를 내민다.
  알마니의 향수 'Aqua di Gio'였다.
  ..여름 내음,바다 내음이 가득한 밴쿠버를 꼭 닮은 향수였다..
  
  그 날까지가 그와 나 사이에 있던 좋은 기억들의 끝인 것 같다.
  짧은 시간에 가까워졌던 우린,
  헤어지는데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엇갈림은 내 생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날 시작되었다.
  
  그 날은 학교에서 day trip으로, 
  배를 타고 2시간 거리의 밴쿠버 아일랜드에 위치해 있는 
  B.C 주의 수도 Victoria에 갔다 온 날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밤 12시가 다 되어 있었고,
  종일 걸었던 나는 너무 피곤해서 세수만 하고 
  그냥 뻗어 막 잠이 들려는 참이었다.
  
  전화가 울렸다.크리스의 친구 Jacky였다.
  긴장한 목소리로 크리스한테 문제가 생겼는데,
  돈을 좀 빌려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게 지금 뭔 소리야.정말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무슨 문제가 생겼는데..? 그리고 왜 돈이 필요한 거야?
  하지만 재키는 설명할 시간이 없다면서
  돈을 빌려 줄 수 있는지만 얘기해 달라는 거였다.
  크리스가 옆에 있느냐고도 물었지만 지금 없다면서
  계속 같은 질문만 되풀이한다.
  
  도대체,돈이 얼마나 필요한 건데 그래?
  1000달러 정도..(약 60만원) 지금 가지고 있어?
  (켁.얘는 내가 무슨 은행인 줄 아나.그렇게 큰 돈이 지금 어딨어.)
  아니,없지..뱅크 머쉰에 가서 인출하면 몰라도..
  너 어디 은행이지?
  Royal Bank.
  그럼 내일 아침,학교 가기 전에.. Hornby street에 있는
  로열에서 1000불만 뽑아 줄래? 그 앞에서 8시 반에 만나자.
  .........Okay,but,
  나는 뭔가 더 말을 하려 했지만 그는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얼떨떨.황당.의아함.걱정스러움............
  갖가지 감정이 솟아 오르면서 당연히 잠은 다 달아나 버렸다.
  
  어디서 무슨 사고를 쳤길래 돈까지 빌리고 야단이야.
  차 사고 난 거 아냐?
  이 자식,술 마시고 운전했나..?
  그렇다면 혹시 감옥 가는 건 아닌지..? 돈은.. 빌려줘야 하는 걸까..?
  아.도대체 무슨 일이지.
  
  혼자서 오만 가지 상상을 해 가며 불안해 하고 있을 때,
  또 전화가 왔다.잽싸게 받아 들었더니 다시 재키.
  돈 필요없댄다.다 해결되었다네.
  무슨 일인데, 어떻게 해결이 난 거야?
  하지만 내일 크리스한테 물어보라면서 재키는 다시 전화를 끊어 버린다.
  이 망할 녀석.지금 장난치는 거야 뭐야!
  크리스한테는 아까부터 삐삐를 쳐도 응답이 없고..
  하여간 난 그 날 피곤해 죽겠는데도 잠을 설쳐 버렸다..
  
  다음 날 아침,나는 그의 집에 전화를 했지만
  누나 Alicia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받더니
  크리스 어젯밤 집에 안 들어 왔어..그런다.
  삐삐는 10번도 넘게 쳤지만 소용이 없다.
  
  학교는 갔는데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머릿속에 들어 오지 않았다.
  Tina(선생님)가 오늘 왜 그러냐고 계속 물을만큼
  수업 시간엔 내내 벙어리나 마찬가지였고..
  점심 시간,참지 못하고 그의 집으로 찾아 갔다.
  ......아무도 없었다.
  
  걱정이 섭섭함으로,다시 분노(!)로 바뀌어 갔다.
  연락을 해야 할 거 아냐.전화 한 통 못할 만큼 비상 사태냐고.
  그래.니 맘대로 해.내가 걱정하건 말건 상관도 안 하는 거지.
  나도 상관 안해.다시 돈 빌려 달라고만 해봐라.1불도 안 꿔 줄 거야.
  
  그렇게 3일이 지나 갔다.
  그에겐 연락이 전혀 없었다.
  무슨 일이 다시 생긴 걸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참을성 없고 마음 약한 나는 그에게 전화를 해 버렸다.
  세상에.그가 버젓이 전화를 받는 거다.
  대번에 소리를 지르며 너 왜 그러느냐고 화를 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기가 막히게도 그는 너무나 태연하다.
  진정하라고,오늘 전화할 생각이었다고,미안하다고,
  하지만 별로 미안한 것 같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얘길한다.
  그러면서 지금 너무 피곤하니까 나중에 다시 전화하자네.
  오히려 지가 더 짜증을 내지 뭐야!
  
  열..받았다..열 받으면 난 영어를 더 못 한다.
  씩씩대다가,같은 말만 되풀이하다가,
  나중엔 제풀에 화가 나서
  그냥 한국말로 '너 진짜 나쁜 놈이야.''아.신경질 나.'.....
  이렇게 혼잣말처럼 지껄이다가,내가 먼저 끊어 버렸다.
  
  이런 놈은 다시 만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 그 날 화가 났고,그에게 실망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동안 쌓였던 감정들이 모두 일어나기 시작했지.
  
  그는 미안해 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기적이고 참을성이 없었다.재키도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크리스는 patient가 없는 사람'이라고.
  10대 초부터 외국에 나와 혼자 살았기 때문에
  부모님한테 통제를 받은 기억이 없는 거다.
  자기에 대해 조금만 터치를 해도 못 견뎌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자기보다 영어를 못 하는 것에 대해서도
  많이 답답해 했다.
  중국 애들은 그들의 말이 영어랑 어순이 비슷해서 그런지 
  한국이나 일본 애들에 비해 영어를 좀더 쉽고,유연하게 말한다.
  한국 애들이 자주 실수하는 부분은 일본 애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중국 애들은 우리가 왜 그런 걸 틀리고 헛갈려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한 마디로 일본 애들과는 동병상련(?)을 느끼며 
  서로를 다독거릴 수 있음.
  그러나 일본 애들과 자주 놀면 발음을 버리게 되므로
  조심해야 함.^^)
  그 역시 내가 저번에도 틀린 부분을 자꾸 틀린다면서 
  핀잔을 줄 때가 많았다.
  어떨 때는 자존심이 무지 상하도록... 
  
  가끔씩 느꼈던 그의 냉담한 성격에 대해서도 문득 떠올랐다.
  오늘은 친절하고 따뜻하지만,내일 조금만 기분이 틀려져도
  180도로 달라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느껴 왔었다.
  
  객관적으로 이렇게 따지다 보니,
  그는 생각만큼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왜 좀더 일찍 깨닫지 못했지?
  느껴왔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지..
  사실 좋을 때도 많았잖아.
  그에 대해 이만큼 알게 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이야.
  역시 말이 문제였지.한국 사람이었다면 몇 번만 만났어도
  금방 파악이 되었을텐데...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아마도 내가 크리스를 만나면서
  공부는 뒷전이었으리라고 생각하실런지 모르겠지만,
  그를 만났던 기간 동안이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때였다는 사실.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고,표현 하나라도 더 익혀서
  그 와의 차이를 조금이나마 줄여 보려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외국 사람은 역시 안되는구나,싶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보다 훨씬 더 경솔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6)

  예상대로 그는 차 사고를 냈었다.
  Richmond의 친구 집에서 있었던 파티가 끝난 후 
  돌아오는 길에 과속으로 차를 몰다가 중앙선을 넘어서서
  반대편의 차와 충돌을 했다는 거다.
  크리스는 그 때 술까지 꽤 마신 상태였댄다.(장난 아니군..)
  다행히 상대편 운전자가 핸들을 크게 꺾어 피하는 바람에 
  두 쪽 모두 차만 좀 부서졌을 뿐,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전적으로 그의 과실이었기 때문에 
  그가 모두 배상을 하고 책임을 져야 했다.
  
  더 기가 막힌 건,그가 이미 면허 정지를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6월 말 경,역시 과속으로 달리다가 단속에 걸려 면허가 정지됬단다.
  난 그런 줄도 몰랐네.
  그동안 무면허 운전자의 차를 타고 다녔던 거다!
  무면허 음주 운전에 중앙선 침범 사고라니.
  이런 바보같은 자식...
  
  무면허이기 때문에 보험 회사에 연락을 할 수도 없는 거랜다.
  연락하면 보험 회사에서 경찰에 알릴테고,
  그럼 구속될 지도 모르니까.
  그냥 쌍방의 합의로 크리스가 보상을 한 후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가 가진 돈 만으로는 모자란 액수여서
  급하게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 돈을 빌리기로 했지만
  1000달러가 모자랐고,그래서 그 밤중에 재키가 내게 전화를 했던 거다.
  근데 그 때 다른 한 친구에게서 
  돈을 빌려 주겠다는 연락이 왔기에 
  내겐 다시 돈 필요 없게 되었다는 전화를 했고....
  
  피곤하니 다음에 다시 전화하자던 그가
  그날 저녁 전화를 해서 들려준 '난리법석'의 전말이었다.
  얘기를 듣고 있자니,화도 났지만
  사고가 났었다는 말에 걱정도 들었다.
  
  다친 곳은 정말 없어? 그래도 병원에 가야 되는 거 아냐?
  사고 다음날 바로 병원에 갔다 왔어.이상 없다던데.
  그럼 왜 3일이나 연락을 안 해? 걱정하는 거 몰라?
  좋은 일도 아니고..그냥 얘기하기 싫었어.
  뭐라구?......(할 말을 잃었다..)
  넌 너 밖에 모르는 사람이구나.그게 이유가 되니?
  
  말 했잖아.그 땐 너한테 얘기하기 싫었다구.
  무면허로 음주 운전하다가 차사고 낸 걸 알면 
  네가 또 난리를 피울 거 아냐.
  You're too sensitive..
  I can't stand it.
  
  더 할 말이 없었다.아니,할 수가 없었다.
  내가 책망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연락도 안 했다는 사람에게
  무슨 잔소리를 더 할 수 있겠어.
  이런 애랑 내가 그동안 뭘 한 건가.. 싶었다.
  
  나이보다 어른스러운 줄 알았고,
  당당하고 시원스러워 보였던 그가
  점점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의 남자로 변해 가고(?) 있었다.
  이기적이고,무모하고,인내심 없는,
  서양 나이로 이제 갓 스무 살의.. 철 없는 남자였다.
  
  근데 얘가 더 깨는 소리를 하네.
  자기 누나는 차 사고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고 있고,몰라야만 하는데
  (부모님한테 말하면 거의 뭐,강제 귀국당할 거랜다.)
  이번 주에 누나와 함께 뭘 사기로 했었다는 거다.
  차 때문에 돈을 다 써버려서 자긴 지금 bankrubt 상태라면서
  다음 주,대만에서 돈이 오는대로 갚을테니
  내게 300불만 꿔 달라는 거야.
  
  300불(18만원 정도)..빌려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마음이 영 내키지가 않았다.
  갚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아니라,
  그냥 돈을 빌려 준다는 자체가 꺼려졌다.
  
  그렇다고 내게 돈이 있는 걸 뻔히 아는 그에게
  (바보같이..얼마전 한국에서 송금을 받았단 얘기를 
  그에게 했었거든.) 돈 없어서 안 된다고는 말 못하겠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까진 그를 믿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크리스는 이런 바보가 아니었거든.
  그가 내 생각만큼 그런 바보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진짜 바보는 크리스가 아니고 바로 나였지..)
  
  전화를 끊고 나는 크리스의 아파트 앞으로 가서
  그와 함께 Hornby st.에 있는 Royal bank로 갔다.
  사실 돈을 빌려 주기로는 했지만
  아직 내 마음이 다 풀린 건 아니었다.
  다투기 싫어서 입을 다물고는 있었어도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은행까지 가는 동안 나는 꾹 참고 한 마디도 안 한 채 
  앞만 보고 걸었고,그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때,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더랬다.
   
  뱅크 머쉰에서 300불을 찾아 그에게 건네 주면서
  나는 참다 못해 이렇게 쏘아 붙이고 말았다.
  
  넌 지금까지 날 왜 만나 왔던 거니?  
  나는 너한테 돈이나 빌려 주는 사람이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랬더니 얘가 대뜸 표정이 변하면서 받았던 돈을 확 내민다.
  나 이 돈 필요없어.
  네가 그렇게 이해심이 없는 사람인 줄 몰랐어.
  
  졸지에 이해심 하나 없는 밴댕이 속알딱지 지지배가 되버렸다..
  
  '야.넌 남자애가 뭐 그러냐.넌 나보다 더해.
  속은 바늘구멍만도 못 해가지고.. 
  지금 뭘 잘 했다고 돈 빌리는 주제에 큰 소리야.'
  
  물론 이 말들은 그저 내 입 속에서만 맴돌았고,
  영어로는 그냥 'Just take it.'하면서 다시 돈을 내밀었을 뿐이다.
  거기서 똑같이 '그래,나도 너 같은 애한테 돈 빌려 주기 싫어.'
  하면서 그 돈 받아들어 챙겨 넣을 수는 없더라....
   
  서로 아무 말도 안하고 어색하게 그의 아파트 앞까지 왔을 때,
  재키의 빨간 폰티악 차가 보였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그는 우리를 보자 마자
  자기 친구 생일 파티에 함께 가자고 신이 나서 얘기한다.
  크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가고 싶으면 가,그런다.
  남의 친구 생일 파티에 갈 기분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화난 듯한 그 때문에 망설여졌지만..
  에라 모르겠다,가서 기분 전환이 될 지도 모르잖아,
  하는 생각에 따라가 버린 에리얼.
  
  Richmond에 있는 한 가라오케 겸 술집을 빌려서 하는 파티였다.
  - 리치먼드는 홍콩,대만에서 온 
  부유한 중국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미신을 잘 믿는 중국인들은 'rich'라는 말이 들어간 
  리치먼드에서 살면 부자가 된다는 생각에 
  그 곳으로 모여드는 거랜다.(한심하긴...)
  
  온통 중국 애들 밖에 없었다.
  당연히 중국 말로 떠들어 댔고,영어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다.
  처음 들어간 순간부터 나는 기가 팍 죽어 버렸다.
  재키가 나와 크리스를 그들에게 소개할 때
  몇몇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을 뿐,
  나는 음식이 놓인 식탁 앞에 앉아 가만히 접시만 쳐다 보고 있었다.
  기분이 여전히..우울하네.아.중국말은 너무 시끄러워..
  
  크리스는 나와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크리스,나,그리고 재키가 그 옆에 앉아 있었는데
  잠시 후에 크리스는 재키 옆자리로 옮겨 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심심하게 앉아 있는 나를 외면하고 
  옆에 앉은 어떤 여자애랑 큰 소리로 웃고 떠들어대는 거다.
  중국말로 이야기를 하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아무도 말을 시키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재키하고만 이야기를 하는 수 밖에.
  
  나: 크리스 화났어.난 이해가 안가.
  그래서 얘기를 해 보고 싶은데,쟤는 지금 나랑 말하기도 싫어해.
  저거 봐.난 이렇게 놔두고 다른 사람들하고만 놀고 있잖아.
  재키: 크리스는 원래 변덕이 좀 심해.기분도 잘 변하고.
  나한테도 그럴 때가 있어.하지만 좋은 애야.알지? 
  나: 하,좋은 애? 그래..아마 좋은 애겠지..(비아냥거린다.)
  재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한번 얘기를 나눠봐..
  잘 들어 줄 거야.자리 바꿔 줄께.
  
  재키는 크리스에게 귓속말을 하고는 그를 
  내 옆으로 앉게 했다.
  
  우리,할 얘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그 사고 얘기라면 다음에 해...                                       
  파티까지 와서 그 일을 다시 떠올리긴 싫어.
  그래.그건 담에 하자.근데 너 지금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뭘? 보다시피 지금 중국 애들만 모인 파티에 와 있잖아.
  오랜만에 즐기고 있을 뿐이야.
  먹고,마시고,중국어로 얘기도 나누고... 
  너 또 예민해지기 시작하는구나.그것 좀 그만 둘 수 없어?
  
  분명히 지금 자기가 나를 따돌리고 있으면서 
  오히려 내가 언제나처럼(?)  
  너무나 sensitive하게 나오기 시작한다는 얘기였다. 
  내가 조금만 불평을 하거나 싫은 소리를 할 때,
  그가 항상 들고 나오는 레파토리는 
  바로 그 'sensitive'라는 단어였다.
  
  난 그 말이 참 싫었다. 
  이유없이 노파심만 가득하고,신경이 날카로운 여자라는 말처럼 들려서.
  하지만 네 앞에선 내가 10배는 더 예민해질 수 밖에 없는 거,
  아직도 모른단 말이야?
  
  그 파티는 다시 기억하기도 싫을만큼 끔찍했다.
  모두들 즐겁게 먹고,마시고,한편으론 노래를 불러가며
  한껏 즐기고 있었지만,
  크리스와 싸운 나는 아는 사람도 없는 그 곳에서
  완.전.히. 이방인이었다.
  그는 이제 아까 그 여자애랑 마이크를 같이 잡고 
  노래를 부른다.얼씨구.신났군. 
  집에 가야지...택시를 불러야겠어.
  (밴쿠버에선 길 가다가 그냥 택시를 잡는 일이 별로 없다.
  보통 콜택시처럼 전화로 불러낸다.)  
  
  택시 회사에 전화를 하려는 참이었는데, 
  크리스가 그만 돌아가자면서 나를 불렀다.
  
  (7)

  너 면허도 없다면서 또 운전할 거야?
  술까지 마셨잖아.
  
  내 얘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는 재키의 차에 올라탔다.
  이 차 타기 싫으면 택시 불러.
  핸드폰을 내민다.    
 
  그냥 타버렸다.. 
  우린 리치몬드를 벗어날 때까지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운타운이 가까워 올 때쯤,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우리가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We are so different.
  You have your own style and I also have my style.
  I don't wanna be controlled..Do you understand?
  I don't want to hurt you..But I think..we'd better..
  
  무슨 얘긴지 알 것 같았다.
  
  내 생각도 그래.우린..많이 다르지.
  말도 잘 못하는 나 때문에 답답한 적 많았을 거야.
  나 역시 너 때문에 화나고 답답한 적 많았어...
  하지만,사람은 모두 달라.
  단지 내가 너와 다르다는 이유때문에 네가 그러는 거라면 
  넌 너무 이기적이고 참을성이 없는 거야.
  그렇다고 너의 그런 점을 고치라고 설교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너 스스로가 control 당하기 싫다고 분명히 얘기하기도 했구...
  
  생각을 정리하며..천천히 이렇게 얘기를 하다 보니 
  벌써 우리집 앞에 다 와 있었다.
  
  그래서,이제 우리 그만 보는 게 좋겠다는 얘기니?
  
  Just friend..It's better,don't you think..?
  
  아무 느낌없이 '그래,그게 좋겠어.나 역시 너한테 실망했거든.'
  이랬다면 내가 사람이었을까.
  이성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마음이 철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자존심 때문에 다른 얘긴 안하고 그냥
  Okay,I agree,그러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 봤다. 
  그저 마음이 허탈할 뿐이었다.
  물론..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떤 확신을 가지거나
  앞날을 생각하며 만났던 건 전혀 아니었다.
  어차피 얘는 외국 사람이고,나는 곧 한국으로 돌아갈테고,
  서로가 그걸 뻔히 알면서 그냥 만났던 거다.
  내가 그를 사랑했던 것도 아니고,그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우린 like이란 말은 서로에게 많이 했지만,
  love라는 단어는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뭐 아무 사이도 아니었네.
  사랑과 우정사이..? 아니면 또다른 제 3의 감정..?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을 그렇게 이성적으로만,논리적으로만
  처리하고 정의내릴 수는 없을 거다.
  
  분명했던 것은,우린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었고 좋아했다는 것.
  그게 오래가지는 못했고 우습게 되버리긴 했지만
  후회는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후회를 하다보면 쓸데없는 짓에 시간만 버렸다는..
  그런 자책이 자꾸 들어서 나 자신이 참을 수가 없었다.
  
  좋아서 헤어졌건 싫어서 헤어졌건
  그 기간이 길었건 짧았건..
  '깨졌다'는 사실은 사람을 참 심난하게 하지 않는가..
  그 날 이후로 난 얼마 동안 의기소침할 수 밖에 없었다.
  
  공부하러 와서 괜히 다른 데 한눈 팔고,
  그래서 벌 받는 거지 뭐..하고 자학을 하기도 했고,
  재수도 되게 없었지.평소엔 잘 가지도 않더만
  하필 그 날 도서관엔 와가지고 나랑 마주쳤담..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다가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빌려준 돈 300 달러!
  
  그렇게 헤어진 날 이후로 우린 서로 연락을 끊었더랬다.
  난 그가 당연히 전화를 해서 돈을 갚는다는 얘길 할 줄 알고
  그 문제에 대해선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거다.
  
  하루는 룸 메이트 언니와 그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 언니는 중문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대만에 가서 1년 동안 연수를 하고 온 적도 있다고 했다.
  내 얘기를 다 듣더니 '그럼 돈을 아직 안 갚았단 말야?'
  하고 놀란다.
  연락하겠지 뭐.돈 떼어 먹을 애는 아냐..
  그랬더니 이 언니가 겁을 잔뜩 주지 뭐야.

  " 야.너 그건 모르는 거야.
   내가 대만에 있을 때 친했던 대만 친구한테 돈을 빌려줬는데
   얘가 끝까지 안 갚는 거야...결국 그 돈 못 받고 왔다니까.
   돈이라는 거 함부로 빌려주면 안돼..아무리 친구라도..
   안 갚을 땐 빌려준 사람이 오히려 더 구차스러워지는 거 아니?
   내 돈 내놓으라고 협박할 수도 없고..나도 마음이 그렇게
   모질지가 못하거든.보니까 너도 그런 거 같은데?
   게다가 넌 그 애랑 끝난 사이라며.
   어영부영하다가는 돈 떼이고 만다,너.
   부잣집 애들이 더 무서워.그런 애들,돈 알기를 우습게 알잖아.
   빌려 놓고도 그 까짓 300불..하면서 넘겨 버릴지도 몰라.."
   
  지금 생각나는 건 대충 이런 정도였지만,
  그 때 언니는 이보다 훨씬 더 길고도 무섭게(!) 설교를 했다.
  그러면서 그 애도 돈 개념이 희미한 부유한 집 아이같다며,
  내가 먼저 연락을 해서 빨리 돈을 받으라고 재촉을 했다.
  
  휴...당연히 난 그러기 싫었다.
  돈 달라고,너 왜 내 돈 안 갚냐고,
  그런 얘기하려고 전화하기가 너무너무 싫었다.
  그래도 한때나마 좋았던 사이였는데,
  '돈'때문에 메마른 대화를 나누고 싶진 않았다.
  
  근데 이 자식이 정말 연락을 안 하는 거다.
  룸 메이트 언니는 매일 '돈 받았니?'하며 확인(?)을 하고,,
  내 얘길 들은 학교 친구들도 매일같이 '너 미쳤어.빨리 돈 받아 내!'
  하며 성화였다.
  어떤 친구는 자기가 대신 받아 주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이게 왠 난리람!
  
  2주일이 다 되 가던 어느날,드디어 나는 전화를 해 버렸다.
  누나가 받더니 크리스 집에 없다고 그런다.
  다음 날도,그 다음 날도 그는 집에 없댄다.
  이젠 우리집 언니가 더 난리였다.
  아무래도 그 누나가 같이 짜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면서. 
  언니가 중국어로 그 집에 전화를 해 보겠다는 걸 겨우 말리고는,
  (왠 난리야,정말.) 화가 나서 그의 집으로 아예 찾아가 버렸다.
  
  누나한테라도 얘길해서 받던지 해야지,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300불이면 내 한 달 용돈이야..
  그렇게까진 안 봤는데 아주 틀린 놈이었잖아.
  
  집 앞에 섰더니 문 틈으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집에 있군,하면서 문을 두드렸다.
  문이 금방 안 열린다.다시 한번 두드리니까 그 때야 열리는데...
  문을 연 사람은 왠 여자였다.
  그의 누난가 싶어 얼굴을 봤지만 누나도 아니었다.
  
  여자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다.
    
  크리스를 만나러 왔어.할 얘기가 있거든.
  그는 지금 집에 없어.그리고 너 지금이 몇 시인 줄 알기나 하는 거니?
  
  적대감이 가득한 목소리.
  
  늦은 건 알지만,꼭 할 얘기가 있거든.집에 있는 거 다 알아.
  그의 목소리를 들었어.좀 불러 줄래?
  
  집에 없다고 말했잖아.너 굉장히 무례하구나.
  1분 내로 돌아가지 않으면 경비원을 부를 거야.
  
  크리스처럼,영어를 아주 잘 하는 중국 여자애였다...
  더 대꾸하다간 말발에서 딸릴 게 뻔했다.
  그 앤 내가 말을 잘 못하는 걸 알아채고는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거침없이 계속 이렇게 얘기한다.
  
  당장 돌아가 줄래? 
  그리고 앞으로는 크리스 만나지 마.
  그는 내 남자 친구야.
  
  푸..그렇군.(누가 물어 봤어?) 만나래도 안 만날테니 걱정마...
  돈이나 달라고 그래..
  근데 이거,어디서 많이 보던 상황 같다.
  지금 무슨 '싸구려 3류 소설'의 한 장면 같지 않아???  
  
  당황해서 말이 탁 막힌 나는,
  'Just give my message to him..
   I want him..to pay my money back..' 
  간신히 이렇게 얘길했을 뿐이다.
  그러고는 그 싸가지 없는(!) 기집애를 뒤로 하고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기억이 잘 안날 정도다.
  처음엔 너무 분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나중엔 그냥 계속 웃음만 나왔다.
  그 새 여자친구가 생겼군.
  아니,원래 있었는지도 몰라.누가 알아!
  하여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똥 밟았다,정말.으아....
  
  잊지 말자,이 수모.
  영어,잘 하고 말 거야!!!!!!!!!!!!!
  
  결국.. 돈은 받았다.그 얘긴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그 놈의 돈 때문에...마음 고생한 거 생각하면...
  다시는 돈 안 빌려 줄거다.친한 친구라도..

  (후기)
  
  얘긴 여기까지다.
  참 한심하고도 쓸데없는 얘길 길게도 썼지 싶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긴다.
  캐나다까지 가서 그런 일이 다 있었다니,웃기잖아.^^
  한번 크게 웃고 끝내야지.     하.하.하.

   그 일이 있은 후,나는 한동안 심난해서 정신이 없었다..
   별 일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는 내가 그 곳에 처음 가서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만나 도움이 되 주었던 사람이었고,
   우리가 만난 기간은 불과 2달 남짓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곳에서의 2달은 서울에서의 2달과 개념이 틀리다..
   그만큼 자주 보고,자주 연락을 했다는 얘기.
   
   날씨 좋던 9월을 꿀꿀하기 그지없는 마음으로
   그냥 날리다시피 했던 것이 지금도 후회된다.
   마침 여름부터 불기 시작한(연수생들 사이에) 
   Rocky 산맥 여행이 9월엔 막바지에 달아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난 여행이고 뭐고 모든 일에 흥미를 잃어 버려서
   그저 집에 쳐박혀 TV나 보는 게 고작이었거든...
   갔다 온 사람들에게 경치가 어땠냐고 물으면 
   모두 'Behind description'이라고 입을 모아 외치는 곳이
   바로 Canadian Rocky이다.
   10월만 되도 그 곳은 날씨가 추워지기 때문에 
   9월까지가 거의 마지막 투어 시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여간 난 남들 다 가는 Rocky도 못 가봤다. 
   
   하지만 후유증(?)이 그리 오래 간 것은 아니다.
   그래 봤자 나만 손해고,이젠 정말 정신 차리고
   본전은 뽑아야지 않겠느냐,하는 생각에
   그 일 이후로학원도 더 열심히 다니고 도서관도 매일 가는 착실한
   모범생 생활을 잠시(!) 하기도 했었다. ^^
   
   문제는 그의 아파트와 우리 아파트가 너무 가깝다는 점...
   한번이라도 다시 마주치면 기분이 너무 이상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학교에 가려면 꼭 그 아파트를 지나가야만 한다.
   처음엔 일부러 먼 길로 돌아서 학교를 가기도 했다.
   나중엔 그냥 만날테면 만나라,하고
   그 앞으로 씩씩하게 지나갔지만.
   다행히,그 후로는 한번도 그와 마주친 적이 없다.
   신기하게도...
   
   외국에 나가게 되면 
   외국 남자들을 대할 기회가 많아진다.(당연한 얘기지만.)
   개인적으로,일본 남자들은 수줍음을 많이 타고
   말이 별로 없어서(다 그런 것은 아님.) 대하기가 좀 불편했다.
   한국 남자들은 뭐 맨날 봐 왔으니 별로 다를 게 없고...
   남미 남자들은 대체로 굉장히 쾌활하고 떠들썩하다.
   남미 애들이 한번 파티하면 장난이 아니다....
   이웃집에서 시끄럽다고 경찰 불러서 경찰차가 오는 경우도 많다.
   중국 남자들은...잘 모르겠다.
   알다가도 모르겠는게 중국 사람..? ^^
   대국 기질이 아직 남아서 그런지,
   대범한 면이 많이 보이는 것도 같고..
   - 위의 '외국 남자'에 대한 얘기는 전적으로 제 사견입니다.
     저의 주관적인 느낌에서 나온 생각이라는 의미.
     
   어쨌거나 크리스 사건은 내게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켰고,
   그 일로 느낀 바도 크다.(외국 남자 조심..돈 조심..^^)
   지금은 그냥 웃겼던 추억,,정도로 남겨두고 싶다.
   
   심리학적으로,사람은 지나간 기억에 대해, 
   비록 나쁜 기억이었을지라도 그 것을 좋았던 기억으로
   채색해서 간직하려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정신 건강상으로도 그 편이 바람직하댄다.
   하여간,자학하는 것보단 낫지 않수?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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