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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서쪽으로 사라진 까닭은

by Casey,Riley 2023.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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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서쪽으로 사라진 까닭은 



서언
서양 사상의 원류를 고대 그리스.로마 사상과 크리스트교를 든다면 동양사상은 유교,노장사상,그리고 불교를 꼽는다. 유교와 노장사상은 중국의 2대사상으로서 춘추전국시대에 발생하였고,불교는 인도가 발상지로서 일찌기 고대 인도의 종교였던 브라만교가 퇴락을 거듭하고 있을 때 새로운 사상,종교 경향의 하나로 대두된 것이다.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노장사상은 유교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면을 많이 띠고 있는데 사상적 경향으로는 오히려 불교와 접근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표자로는 [도덕경]을 남기고 멀리 서쪽으로 사라져 버린 중국의 부처라는 노자,그리고 그와는 책을 통해 만난 제자인 장자가 있다. 그는 노자의 난해한 언설을 재치있는 비유와 환상적인 우화로서 잘 묘사하여 '비유와 우화의 천재'란 평을 들었는데 저서로는 [장자]가 있다. 이글은 노자의 사상을 그가 서쪽으로 사라진 까닭에 촛점을 맞추어 조명해본 것이다.

1. 백성의 몰이해에 대한 슬픔에서 였을까?
영화 '원효대사'에서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많은 의문을 지니고 설총이 그를 찾았을 때 원효는 대빗자루를 주면서 말한다. "뜰의 낙엽부터 쓸거라" 완전히 싹쓸이로 쓸고나자 원효가 다시 나와 말한다. "잘못 쓸었다. 가을의 뜨락에는 낙엽이 조금은 뒹구는게 멋이니라" 그러고는 낙엽을 한웅큼 쥐고는 뿌려 놓고 들어가 버린다. 이것은 성인(聖人)들이 종종 취하는 말없는 가르침이다. 그 행위는 지극히 자연스러운,그러나 많은 의문을 지니고 온 설총에 대한 주변의 지형지물(地形地物)을 최대한 활용한 완벽한 가르침이었다.
성인이라면 우리는 내면에 어떤 번뇌도 없는 완벽한 맑음의 상태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상태를 향하여 분투 노력한다. 한마디로 "돌격,앞으로!" 그러나 "돌격,앞으로!"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그 상태에 들어갈 수 없다. 그 상태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번뇌들을 '그대로 두고 애정의 시선으로 보아주는' 방식이 있을 뿐이다. 이 방식을 취할 때 그 번뇌들은 번뇌임을 그치고 놀라운 빛으로 변화한다. 길은 이 길 뿐이다. 설총의 '돌격,앞으로!'의 방식에 대하여 원효는 '그대로 두고 애정의 시선으로 보아주는'방식을 설한 것이다. 
우리는 학생들을 모두 100점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100점을 향하여 "돌격,앞으로!"를 외친다. 그러나 '돌격,앞으로!'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모든 학생을 100점을 만들 수 없다. 모든 학생을 100점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부족한 점수들을 '그대로 두고 애정의 시선으로 보아주는'방식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함인가. 한마디로 100점이 되어야만 훌륭한 상태라는 생각을 씻어버리고 교과목을 가지고 학생들과 한바탕 흐드러지게 놀아버리는 일 그 자체를 중히 여기는 것이다. 이 방식을 취할 때 0점을 받은 학생마저도 0점을 들고서 개선장군이 된다. 다시 말하면 0점이 0점임을 그치고 놀라운 빛으로 변화한다. 또다시 말하면 0점은 0점으로서의 100점이며,10점은 10점으로서의 100점이며...90점은 90점으로서의 100점이며,100점은 100점으로서의 100점이 된다. 
이치는 이렇다. 교과목을 가지고 학생들과 한바탕 흐드러지게 논다는 말을 이해하는 교사는 0점은 100점이나 모자라고,10점은 90점이나 모자라며...90점은 10점이나 모자란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교사가 진실로 모자란다는 생각이 없을 때 학생 또한 모자란다는 생각을 가지지 못한다. 오직 놀이에서 나타나는 싱싱한 생명력만이 있을 뿐.
그리하여 0점은 구김살 없이 0점에 맞는 일거리를 찾아,10점은 구김살 없이 10점에 맞는 일거리를 찾아...90점은 구김살 없이 90점에 맞는 일거리를 찾아 100점은 구김살 없이 100점에 맞는 일거리를 찾아 제각기 즐거웠다. 모두가 저 나름대로 즐거웠기에 누가 더 즐거운지 비교하는 일마저도 즐거웠다. 
그러나 교과목을 가지고 학생들과 한바탕 흐드러지게 논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사는 0점은 100점이나,10점은 90점이나...90점은 10점이나 모자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에 학생 또한 자기가 모자란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당연히 열등감이 내면에 깊숙히 자리잡게 된다. 
그리하여 0점은 죽지못해 0점에 맞는 일거리를 찾아,10점은 마지못해 10점에 맞는 일거리를 찾아...90점은 아쉬움 속에 90점에 맞는 일거리를 찾아 괴로웠고,100점만이 우월감속에 100점에 맞는 일거리를 찾아 즐거웠다. 100점만이 즐거웠기에 나머지는 모두 불행했고,나머지가 모두 불행했기에 100점의 즐거움도 그렇게 편안한 즐거움 만은 아니었다. 
세상의 윗사람들은 모든 이에게 가치있다고 여겨질만한 어떤 그럴듯한 목표를 세워 놓고 "돌격,앞으로!"를 요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다다를 수 없게 되며,이에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열등감에 빠져들게 되고,그런 열등감에 빠져든 사람들을 윗사람들은 아주 주눅이 들게끔 닦아 세운다. 주눅을 들여 놓으면 관리하기가 얼마나 편리한지 아는가. 그래서 윗사람들은 관리의 편의를 위하여 '돌격,앞으로!'의 성격이 강한 종교를 국교로 채택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종교 내용을 왜곡하여 국교로 삼기도 하였다.
이에 비하여 노자는 모든 이에게 가치있다고 여겨질만한 그럴듯한 어떤 목표를 세워놓고 '돌격,앞으로!'를 내세우는 것을 인위적인 짓이라 하였는데,인위적인것 그 자체가 삶을 망친다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주장을 '무위(無爲)'='자연(自然)'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100점을 향하여 '돌격,앞으로!' 이것이 바로 '위(爲)'이며,교과목을 가지고 학생들과 한바탕 흐드러지게 노는 것,이것이 '무위(無爲)'즉 자연스런 태도이다. 
우리가 노자의 '무위자연설(無爲自然說)'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진실로 삶을 윤택하게 하는 길임을 간파해낼 만한 사색의 깊이가 없다는 점이요,부차적으로는 너무나 오랫동안 윗사람들이 '돌격,앞으로!'의 사고방식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세뇌시켰기에 거기에 그만 길들여져 버렸다는 점이다. 
노자는 진실로 백성을 위하여 '돌격,앞으로!'를 거부하고,춤추고 노래하자고 외쳤건만 백성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 모든 나라들의 윗사람들이 말 잘하는 선비들을 총동원하여 백성들을 향하여 '돌격,앞으로!'를 외치고 있었다. 그 소리는 너무나 커서 노자의 소리는 보일 수 없었다. 그는 그 슬픔을 이길 수 없었으리라. 먼 후세를 위함인가? 요약에 요약을 하여 [도덕경]만 남긴채 서쪽으로 사라져 갔다. 

2. 지식인들의 오만과 나태함에 대한 낙망에서인가?
우리는 학생들에게 항상 타이른다. "우등생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타이르는 행위의 전문가들이 학자들이다. 그러나 노자는 타이르는 행위 그 자체가 학생들을 다버려 놓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노장사상을 '자유방임주의(自由放任主義)'라고 말하는 지식인들도 있다. 
지식인들은 그렇게 자기들 마음대로 이론적인 규정을 해 놓고는 일방적으로 비판을 해대는 고약한 버릇이 좀 있다. 왜냐? 그 속에서 자기 우월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맛에 취해있다. "그렇게 타일러도 안되는데 자유방임이라니!"
우등생이 되어야 한다고 타이르는 것을 '위(爲)'라면, '무위(無爲)'란 타이르지 않고 마음대로 내버려 둠을 말함이 아니라,교과목을 가지고 한바탕 흐드러지게 놀아주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놀이 속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문제는 놀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데 있다. 지적(知的)인 이해는 필요없다. 지적인 이해로는 결코 삶에서 굽이쳐 흐르는 힘을 얻을 수 없다. 오직 행(行)을 통해서만이 문득 깨달을 수 있으니 이를 '돈오(頓悟)'라 한다. 돈오없는 지식의 양적 팽창은 인간을 공허와 자만에 차도록 만들 뿐이며, 돈오없는 상태에서 씌어진 글은 글이 아니다. 글이 아닌 글은 자연히 어렵다. 인용문구가 많고 화려하게 보여도 알맹이는 하나도 없다. 지 식인이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어렵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모자란 사람이며,자기들처럼 어려운 표현이 아니면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병든 사람일 뿐이다.
영화 '원효대사'에서만 해도 그렇다. 당대의 이름난 학승이 10년이나 걸릴 경전해석을 두어달 만에 거침없이 해치울 수 있는 것은,그것도 너무나 투명하고 생명이 넘치는 언어를 구사하여 써내릴 수 있는 것은 돈오의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다. 이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글은 결코 그렇게 쉽게 쓰여지지 못한다. 역으로, 글이 가슴깊이 와닿는 힘이 있으면서도 너무나 쉽게 쓰여져 있다면 돈오의 단계를 지난 사람이다. 그 단계를 지난 사람은 글을 그 렇게 밖에 쓸 수가 없어진다. 
간단한 예로 자전거를 배울 때에도 먼저 균형을 잡을 줄 알아야 한다. 시행착오 끝에 문득 균형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니 이를 '돈오(頓悟)'라 한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푹 익혀야 한다. 우리 고장은 도로가 워낙 세계적으로(?) 좁아 푹 익히지 못하면 시내주행은 어렵다. 푹 익히는 수련이 있어야 하니,이를 '점수(漸修)'라 한다. 합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가 된다.
'무위자연(無爲自然)',즉 교과목을 가지고 한바탕 흐드러지게 놀아 주는 것,그것은 "우등생이 되어야 한다"고 타이르는 일을 부정함이 아니요,오히려 너무나 세련된 타이름이어서 타이르는 교사는 자기가 타이르는 줄을 모르고,학생들 또한 타이름을 당한 줄 모른채 타일러진 상태이다. 타이름이 너무나 세련되었을 때는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부처는 중생을 향하여 수없이 많은 타이른 말을 해 놓고도 "나는 한마디도 한적이 없다"고 한 것이 다. 그렇다면, 나무라고 매를 때려준 선생님이 고맙고 기억에 남는다는 말은 얼마나 어설픈 말인가. 기억에 남았다면 이미 틀렸다. 기억에 남는 교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노자는 행(行)으로 달성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경지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설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지식만을 파먹고 사는 지식인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자유방임주의니,현실도피적이니 사족(蛇足)을 달아 깎아 내림으로써 자기들의 현명함을 돋보이려 들었다. 노자는 진실로 지식인을 위하여,지식의 완성의 경지,대자각과 대자유의 경지를 설했건만 지식인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말 잘하는 지식인들이 우대받던 시기였다. 그 풍조는 너무나 극심하여 노자의 소리는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낙망을 금할 수 없었으리라. 먼 후세를 위함인가? 요약에 요약을 하여 [도덕경]만 남긴채 서쪽으로 사라져 갔다. 

3. 집단의 비인간적인 모습에 대한 실망에서인가?
석가,예수와 마찬가지로 대각성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느껴지는 노자는 왜 석가,예수처럼 제자를 모으고 교단을 조직하여 자기의 뜻을 펼치지 않았을까. 얼핏보면 이것은 그의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 같다. 그러나 집단을 형성하여 활동하지 않은 것에 상당한 뜻이 있었다면 그것은 집단을 형성하여 활동하고 있는 불교나 기독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내용이 될것 같다. 
부처나 예수 역시 노자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변화를 추구함에 있어,사람들의 불완전한 상태를 비판하면서 어떤 고상한 가치를 내걸고 '돌격,앞으로!'의 방식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완전한 모습을 '그대로 두고 애정의 시선으로 보아주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들은 단지 곁에 있었다. 당시로서는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될 천민들과도 어울려 떠들고 웃고 놀았다. 그리고 그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놀랍도록 변화되어 갔다. 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자연스런 모임이 형성되어 갔다. 
그러나 오늘날의 종교단체는 더이상 그러한 애정의 시선을 가진 인물에 이끌린 자연스런 모임이 아니다. 오늘날 종교단체는 사람들의 불완전한 상태를 비판하면서 어떤 고상한 가치를 내걸고 '돌격,앞으로!'를 외치는 인위적인 모임일 뿐이다. 도저히 이를 가망이 없어 보이는 그 가치들 앞에서 인간은 누죽이 들고,결과적으로 속세에서 윗사람들의 관리에 편리한 심성을 형성시켜 놓는다. 여기에서 결과적으로 정교야합(?)의 길이 열린다. 
'돌격,앞으로!'를 외치면서 사람을 주눅이 들게 만드는 점에서는 오늘날의 종교단체나 속세의 윗사람들이나 똑같다. 아니 어쩌면 종교단체가 더 지독하다. 나의 다정한 친구인 부처나 예수를 하늘 높이 떠올려 놓고,무릎 꿇고 끝없이 추앙의 예배를 드리게 한 자가 누구인가. 누가 나의 다정한 친구를 앗아 갔는가.
제2,제3의 부처나 예수가 계속 나타나지 않는한 모든 종교적 모임은 그렇게 퇴락하여 간다. 껍질과 형식만 남긴채 인간위에 군림하는 거대한 조직체가 되어간다. 따라서 노자는 일체의 교단조직 자체마저도 거부해 버린 것이다.
또다른 면에서 고찰해 본다면 우리가 어떤 단체에 소속됨은,혼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에서 생기기 쉬운 어려움을 서로 격려해가면서 굳건히 정진해 가자는 의미에서 였다. 그러나 오늘의 종교단체는 더이상 그러한 도반(道伴)의 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신의 특별하신 배려로,혹은 전생의 인연으로 맺어진 선민(選民)들이고 우리는 위대한 인물을 섬기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사람들이라고 서로가 서로를 비행기나 태워주면서 즉 서로가 서로를 속여주면서 아집과 독선을 키워주는 단체로 전락하고 있다. 아집과 독선이나 불태우면서 사회를 분열시키는 방향으로 종교단체가 흘러갈 것이 뻔한 것임을 내다본 노자가 어찌 교단조직을 만들 수 있었겠는가.
끝으로 이런 면도 있다. 집단에 소속되면 개개인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치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고 보면,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인물도 집단의 명에 따라 지극히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소위 집단적 이기주의가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삶의 진실을 추구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개인적 바램은 여지없이 꺾이고 집단은 그 자체의 속성에 의해 통제될 수 없이 굴러가게 된다. 오늘날 종교단체를 보라.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타집단의 파괴와 비방을 서슴치 않는 만행들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도 성전(聖戰)이란 이름하에서... 이를 내다 보았을 노자가 어찌 교단조직을 만들 수 있었겠는가.
때는 춘추전국시대,우후죽순처럼 돋아난 각 나라가 집단적 광란에 휩쓸려 있을 때였다. 그 풍조는 너무나 극심하여 노자의 소리는 보일수가 없었다. 그는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먼 후세를 위함인가. 요약에 요약을 하여 [도덕경]만 남긴채 서쪽으로 사라져 갔다. 

결어
여태까지한 이야기를 간추려 본다면 인간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현재의 어떤 목표를 정해 놓고 '돌격,앞으로!'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부족함을 '그대로 두고 단지 애정의 시선으로 보아주는 일'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접근방식이라고 할때,이는 결코 '돌격,앞으로!'의 인위적인 접근방식과 대립된 개념이 아니라고 했다. 무기교의 기교,무계획의 계획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러한 '무위자연'의 경지는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행(行)을 통한 '돈오(頓悟)'에 의해 체득되고 '돈오'는 '점수(漸修)'에 의해 숙성된다고 보았다. 또 한가지, '무위자연'의 경지를 체득하기 위해 어떤 단체를 조직하는 것은,단체의 속성상 오히려 본래 목적을 상실케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우리가 노자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인간과 사회의 변화를 위한 가장 근원적인 시각을 열어 보였다는 점이요,
둘째,지적인 이해에 치우쳐 머리만 비대해져 가는 현대적 삶의 양상에 행을 통한 진정한 앎을 강조했다는 점이요,
세째,사회의 각 집단들이 빠지기 쉬운 비인간적인 면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을 위한 집단이 되기 위한 운영방안을 모색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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