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멀리 나는 도요새
박경리 (소설가)
20대 이후 가파로웠던 생활 탓이었는지 노래를 배울
겨를이 없었고 기억에 남아 있는 노래 같은 것도 거의 없
다.
6.25 당시 고향을 피난 갔을 무렵 전진(戰塞)을 미처
털어내기도 전에 들은 음악이 아득하게 멀고 무감동했던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근자에 와서 우리는 싫든 좋든 텔레비전에서, 라디오
에서, 다방 같은 곳에서, 혹은 차 속에서, 심지어 길거리
에서도 매일같이 흔하게 듣는 것이 가요다. 더군다나 무
슨 순위에 올랐다 하면 오나 가나 귀가 따갑도록 되풀이
하여 들려오는 곡목. 그러나 열 번 스무 번 그 이상을 들
어도 들을 그때뿐이지 가사 한 줄, 멜로디 한 토막 내 마
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아마 기억 감퇴의 현상이
아닌가 싶다.
그랬는데 요즘 이상하게 머리 속에서 맴도는 노래가
있는 것이다. "을지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아아아
우리의 서울"이 그것이며 또 하나는,"가장 높이 나는 새,
가장 멀리 나는 새, 도요새 도요새".
가사가 정확한 지 모르겠다. 그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구절뿐이다.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그 목청이 울
때마다 나는 어린 날 그림이 아름다운 동화책을 펴 보
던 순간의 황홀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
은 순간이요, 말할 수 없는 비애와 분노에 휘말린다. 을지
로에 사과나무를 심어보자고?
서울, 과연 우리의 서울은 있는가. 사탕발림도 유분
수, 신경을 긁는 데도 한량이 있는 법이다. 온갖 질병을
앓으면서 단발마와도 같이 흉측스럽게 변모되어 가는 서
울, 땅 속에도 하늘에도 두터운 오염이 막을 이루고 머지
않아 유령도시의 목쉰 신음소리라도 들려올 것 같은 것을
상상하게 하는 서울, 그 도시에는 지금 통 속에 든 미꾸라
지처럼 1천만을 육박하는 인구가 몸부림치고 있는데 그게
찬미하고 사랑하는 우리의 서울이겠는가.
을지로 죽어버린 땅에 사과나무를 심어보자고? 차라
리 처참한 느낌마저 든다. 십여 년 전 산등성이에 진딧물
같이 다닥다닥 붙은 집들을 멀리 바라보면서 집 한 채를
중심하여 서너 채 정도씩 솎아내어 나무를 심었으면 하고
나는 공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십여 년 동안 솎아내지
못한 이유(빈곤)를 짓이기듯 서울에는 너무나 엄청난 양
의 시멘트를 쏟아부은 것이다.
산등성이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 두 팔 가지면 살수
있는 그곳에 향수를 느낄 지경으로, 나는 전문가가 아니
어서 정확하게 아는 것은 없으나 짐작하기에 서울을 때려
부수고 다시 건설을 하자면 해체의 비용만으로도 천문학
적 숫자가 될 것이다, 게다가 해체물(解體物)을 어디다 처
분할 것인가. 바다 속도 우리가 사는 현장이요, 산꼭대기
도 우리가 사는 현장이고 보면 지구 밖으로나 내다 버릴
판국이다.
버릴 수도 살 수도 없게 된 서울, 엉거주춤 뭉개고 앉
아서 대전이다, 어디다 하며 수도 이전 얘기가 알쏭달쏭
나돌기도 하는 모양인데 언제까지 유지될까. 시간 문제만
남아 있는 게 아닐까. 하나의 도시가 그것도 수도가 수백
년을 두고 생성해 온 것이라면 이십여 년 동안을 순간으
로 볼 수 있고, 바로 십여 년이란 순간에 서울은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가난이라는 강박관념이 저지른 범행이다.
우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서울을, 국토를, 그 소
중함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한 것을 벌기 위하여 나락이
도사린 발전을 위하여, 따지고 보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오늘 먹기 위하여 미래를, 내일을 저당잡힌 꼴일까. 일본
의 쯔찌다 다까시 교수가 쓴 <공업사회의 붕괴>
속에 산림지대를 개간하고 유휴지를 경작한다면 일본 인구
가 2억이라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유기농업을 주장
하면서도, 그 말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것이다.
"가장 높이 나는 새, 가장 멀리 나는 새," 서울 가는
차 안에서 그 노래를 들었을 때 나는 마을 속으로 흐느꼈
다. 그것은 생명의 애처로운 비상이었기 때문이다. <토
지>에서도 몇 차례인가 나는 도요새에 대해 쓴 일이 있었
다. 그러나 도요새의 얘기를 쓰자면 상당한 지면이 필요
하겠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하여간 가장 높이 나는 새, 가
장 멀리 나는 새, 그 노래를 듣는 젊은이들은 과연 높은
곳이 무엇인지, 먼 곳의 뜻을 어떻게 헤아리는지 나는 몹
시 궁금하다.
새는 날갯죽지 하나로 망망대해, 수만리 장천(長天)
을 목마름과 배고픔과 또 무서운 폭풍을 견디며 자신의
삶을 구현하는데 그 높고 먼 곳을 행여 야망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아닐는지. 높은 곳은 출세요, 먼 곳을 정
복이라 생각하는 것이나 아닐는지. 오늘처럼 많은 부모나
사회 전반에서 젊은이들을 야망으로 내모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야망 자체도 내용 면에 있어서 상당히 전과는 달라 자
연을 벗삼아 심신을 단련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천하경륜
의 뜻을 키우느니보다 방 속에 죄인 가두듯 시험 과목을
달달 외워 일류대학을 지향하게 하는 풍조, 아니면 이류
를, 그것도 안되면 삼류를, 인생의 결정을 오로지 시험이
한다는 응고된 관념으로 세상은 병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물결은 너무나 거세어 땅에 발을 붙이려는 사람들까지
휩쓸어 간다. 해서 삼류대학에 간 아들을 위해 부모는 빛
을 얻고 파출부로 뛰고 소를 팔고 밭뙈기를 판다.
날갯죽지 하나로 자신의 삶 전체를 구현하는 새, 대
학의 문안과 문밖의 차이가 있을 수 없으련만 생명의 원
천인 흙 한 줌보다 지폐 한 장이 소중하다는 생활 철학에
찌든 현실에서는 문안과 문밖이 있을 뿐 하늘도 없고 땅
도 없다. 따라서 문안에서는 쓸모 없는 지식을 채워 머리
통만 커졌지 삽자루 하나 안 잡는 왜소한 인간을, 한 분야
만 파고들어서 한 부분밖에는 볼 수 없는 무식한 전문가
를 양산하고 문밖에서는 자신의 삶을 장난감 망가뜨리듯
어렵잖게 내동댕이치는 추세가 현저한데 이들 양자가 어
찌 높이 멀리 나는 도요새를 알까보냐.
일부에서는 요즘 청소년들이 편지 한 장 변변히 못 쓰
는 것은 전화 탓이요, 객관적 입시제도 탓이라 왈가왈부
하는데 물론 그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글이란 생각의 흔적
이다 삶에 대한 애환과 생명에 대한 깊은 통찰력없이 생
각의 샘에 물이 괼 수는 없는 것이다. 출세라는, 돈을 번
다는 상자에 넣어진 사고방식, 그 상자는 일본의 전자제
품같이 날로 작아져 간다.
그 상자에서 뛰쳐나온 자만이 우주를 느끼고 높이,
멀리 나는 도요새의 그 뜨거운 생명을 알게 될 것이다. 생
명은 우주를 포옹하고 간다. 인간도 초목도 벌레까지, 그
리고 우리는 도달하는 것이 아니며 영원히 가는 것이다.
옛날 노인이 말하기를 이야기는 거짓말이라도 노래
는 다 참말이다, 오늘 글을 잘 쓴다는 전문가들보다 옛 노
인이 먼저 더 정직하게 예술의 본질을 체득했던 것이었을
까.
아아, 그러나 지금은 노래도 거짓이로구나. 독백하며
일어서보니 밖에서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을 견뎌
낸 나의 나무들이 환희에 차서 간지럽게 일렁이고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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