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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이 써레질하는 땅

by Casey,Riley 2023.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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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이 써레질하는 땅 
농부 이영문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참 아름다운 말이다. 되새겨 볼수록 가슴을 저미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이다. 이 짧은 
한마디 속에 사람이 살아가야 할 근본이 담겨 있는 듯하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알몸뚱
이로 태어났으니 부질없는 욕심내지 말고. 양심에  맞게 살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라는 '공수
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 정신을 읽을 수도 있다.

이 말은 만물은 마치 한 점에서 시작한 동그라미가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처음 시작한  지점
에서 만나듯이 순환한다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과  자연은 원래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어느 한쪽이 한쪽을 무시하거나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겸허함을 가르치고 있는  자연친화적인 발상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 말은 
내게 더욱 절실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농부로 살아온 이십여년의 세월 동안 방안에서 지낸 시간보다는 논밭에서 흙과 더불어 지낸 
시간이 더 많았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그랬다. 한시도 흙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해질녘 붉은 노을이 깔린 들판으로 나가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 있노라면 새파랗게 물이 오
른 벼이삭도 노을 먹빛 어둠에 점차 젖어들기 시작하는 시간이면 내 귀에는 저 깊은 땅속에
서 왕성하게 살아 움직이는 수많은 생명의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
고, 보잘것 없는 듯 보이기만 사실은 무한한
생명력을 지니고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 그치지 않는 힘이 있음을 그 순간에 더욱 가까이 느
끼게 된다. 

흙과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농부들이다. 흙 위에 씨앗을 뿌리고 키우고 거두는 농
부들은 흙이 살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좋은 농부는 
흙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한줌의 흙속에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보다도  더 많은 항생물질이 왕성하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이런 사실을 잘 알고 활용했다. 일터에서 작은 상처가 나면 주위
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흙을 그대로 환부로 바르는 것으로  치료를 다했다. 선조들은 이러한 
흙속에 우리 인간의 먹을 거리가 되는 여러 씨앗들을 뿌렸다. 씨앗은 새싹을 틔워서 인간에
게 기쁨을 주었고, 잘 자라서 인간에게 꼭 필요한 엽록소, 광물질, 비타민, 미네랄 등을 주었
기에 인간은 건강을 자연치 유산이라 믿고 살아왔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현대 도시
문명의 눈부신 발달은 사람들을 점점 흙에서 멀리 떼어놓고 있다  '하루종일 걸어도 흙밟을 
일이 없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마치 자랑처럼 내뱉는다. 겹겹이 깔린  아스팔트와 밑창이 
두꺼운 신발은 흙과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다. 그러니 자연  현대인들이 점점 황폐한 토양
에서 웃자란 벼 이삭처럼 모가지만 길어지고 연약하기 이를데없어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꼴
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요즘 젊은 여자들은 미용을 위해서 진흙을 얼굴에 바른다고 한다. 진흙으로 목욕도 하고 마
사지도 한단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있는 흙이 아니다. 
흙을 정말 흙답게 만드는 미생물들은 다 죽여버리고 온갖 화학약품 
으로 처리해서 죽은 흙을 비싼 돈을 주고 사 바르면서 뭐가 몸에 좋다고 저렇게 안달들일까 
싶다. 결국은 화학약품을 얼굴에 덕지덕지 바르는 것과 매한가지인데.


혈기방장한 기운이 넘치던 젊은 시절. 우리 땅과 자연  조건에 맞는 농기계를 만들어보겠다
는 뜻을 세우고 남과 다는 농사를 짓겠다고 동분서주하며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던 시절에는 
나는 흙에서 진정한 감흥을 받지 못했다. 흙이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인간의 힘
으로 경운하고 정지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골똘히 묻혀 있었다. 흙이 본래 지니고 있는 생명
력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70년대 초반에 일제 경운기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농정을 지도하는 정부기관에서는 이런  농
기계들을 적극 사용하도록 권장했다. 농민들은 너도나도  쟁기를 던져버리고 빛을 내서라도 
경운기를 들여놓았다. 그런데 이 비싼 기계가 어찌나 고장이 잦았던지 굴러가는 시간 반, 서 
있는 시간 반이었다. 특히 바쁜 농사철이면 더욱 말썽을 부려서 애를 태우게 만들었다.


나는 경운기를 수리하면서 기계에 대해 잘 알게 되면 될수록 이놈이 우리 토양에 맞지 않는
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경운기로 갈고 심은 모의 깊이가  원래 쓰여지던 쟁기로 갈고 심은 
모의 깊이보다 훨씬 깊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땅은 화강암 토양인데 반해서 일제 경운기
는 일본의 화산재 토양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토양에 맞는 농기계를 만들자'는 벅찬  꿈을 안고 농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농기계를 
사용하게 되면서 농약과 화학비료가 우리 땅의 기운을 빼앗는다는 데서 크나큰 위기감을 느
끼게 되었다. 


경운기가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원래 관행농법에서는 씨앗을 뿌리기 전에 흙을 갈아엎어 준다.  흙을 부드럽게 만들어서 물
빠짐이 잘되고, 씨앗이 뿌리내릴 자리를 마련해 주는 작업인데, 예전에는 소가 끄는  쟁기로 
하던 작업을 이제는 경운기가 대신하고 있다. 경운기로 땅을 갈게 되면서 잡초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 이유는 경운기로 갈아엎는 작업이 땅속 깊은 곳에 잠들
어 있던 잡초 씨앗을 흔들어서 싹트기 좋은 위치에 갖다놓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손으로 뽑기 힘들 만큼 돋아나는 잡초를 없애려고 독성 이  강 제초제를 뿌리고, 그 때문에 
벼가 잘 자라지 못하게 되니 다시 화학비료를 주고. 땅속 미생물과 천적이 사라져서 해충이 
득실거리니 농약을 뿌리는 악순환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는 다시 자연에 모든 것을 맡기는 농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를 알게 된 후부터는 지엽
적인 문제가 아니라 더 큰 테두리로 '자연주의 농법'이라는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자연에 경배심을 가지고 있으면 자연히 길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
서 흙속에는 수많은 미생물들이 살고 있고, 그들이 먹고 움직이고 배설하는 그 모든 작용들
이 끊임없이 땅을 써레질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로 놀랍고 도 경이로운 깨달음이
었다. 


애초부터 우리 땅에 맞는 경운기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땅은  아예 갈아줄 필요가 없는 것
이다. 화학비료가 땅심을 망쳐놓지 않은 건강한 논에서는 수천, 수만의 미 생물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땅을 갈아엎고 있다. 인간이 손으로 써레질을 하는  것보다 더 부드럽게 물빠짐
도 잘되고, 충분한 산소가 흘러다닐 수 있는 최적의 환경으로 써레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3만6천 평 땅에 십여년째  혼자 힘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농촌에서 보편적으로 하고 
있는 관행농법대로 하자면 어림도 없 일이다. 그런데 수확과 동시에 파종이 되도록 내가 고
안한 농계를 이용해서 수확하고 씨를 뿌린 이후에는 논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루에 한 번쯤 
별탈없이 잘 자라는지 휘둘러보면 그만이다.

"참 태평한 사람이구먼. 뭘 믿고 저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거야."


처음에는 다른 논에서 일하던 이웃들은 작업복도 안 입고 평상복 차림으로 오가는 내 모습
을 보고 걱정스럽다는 듯 이렇게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짐짓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걱정 마이소. 내 논에는 내가 안해도 일꾼들이 득시글득시글 합니더." 

내 논에서는 많은 사람의 일손을 빌리지 않아도, 기계로 경운 정지를 하지 않고, 농약도  비
료도 주지 않아도 훨씬 실한 알곡이 맺힌 벼를 풍성하게  수확한다. 땅의 본래 주인인 미생
물이 열심히 써레질하고 땅의 친구들인 거미 무당벌레, 개구리  같은 해충의 천적들과 더불
어 농사를 짓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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