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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我)의 확립과 타(他)의 부정

by Casey,Riley 202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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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我)의 확립과 타(他)의 부정: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槪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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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새 정부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1868년 정월, 대외정책에 대해서 開國和親이라는 근본 방침을 밝히고, “무릇 외국과 교제하는 방식[外國交際之儀]은 우내지공법(宇內之公法)에 따라야 할 것이며, 이 점을 알아야 할 것”이라 하여, 국제 관계를 ‘우내지공법’에 의해 규율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메이지 일본의 국제사회를 향한 이러한 이와 같은 희망과 동시에 고난에 찬 출발에 즈음하여, 아직 급격한 정세의 전환에 적응하는 방도를 잃어버리고 있던 국민에 대해서 근대화라는 큰 길[大道]을 제시한 지도적 사상가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꼽아야 할 사람은 후쿠자와 유키치일 것이다. 바쿠후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에 걸쳐서 후쿠자와가 근대적 자유의 길잡이였다고 한다면, 근대 국제사회에서의 국가의 위치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기초다짐이 후쿠자와에서 처음으로 시도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박충석?김석근 공역, ?근대일본사상사에서 국가이성의 문제?, ?충성과 반역?(나남출판, 1998)


*“어쨌든 나를 너무 믿어서는 안됩니다. 곧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자신이 기만당한 앙갚음으로 잔혹한 복수를 하게 될 겁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죠?”
“전에는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려놓으려는 결과를 낳는 겁니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현재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보다 한층 쓸쓸한 미래의 나를 참는 대신 쓸쓸한 지금의 나를 참으려 합니다.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에 충만된 현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그 대가로 모두 이 쓸쓸함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서석연 옮김, ?마음?(범우사, 1990)



1 왜 일본의 ‘근대사상’인가: 동아시아 근대의 형성과 관련하여

1)일본에 대한 오해와 이해: 연구사 비판
2)일본 근대사상의 형성과 후쿠자와 유키치―일본 근대사상의 원점
3)일본의 근대와 동아시아의 근대―‘새로운 근대성?’


2 후쿠자와 사상의 형성 배경

1)역사적 배경
   *미국 사절 페리, 우라가(浦賀)에서 우호통상 강요(1853)―미일 화친조약 조인, 쇄국 무너지고 바쿠후 독재 파탄(1854)―왕정복고 선언, 절대주의 천황제의 창출(1867)―천황 정권, 내란에서 승리. 메이지 정부 수립(1868)―다이묘의 영주권 박탈(版籍奉還: 1869)―廢藩置縣, 절대주의 통일국가 수립(1871)―국민징병제?의무교육제 제정/도쿄-요코하마 철도 개통/?학문을 권함? 출간(1872)―정부 내의 征韓論派 패배, 관료독재의 공고화(1873)―民選議員設立建白(1874)―西南戰爭, 士族 최후 최대의 반란(1877)―자유민권 운동의 전국 조직 ‘國會期成同盟’ 결성(1880)―자유당 결성(1881)―개진당 결성(1882)―내각제 시행(1885)―대일본제국헌법 발포(1889)―敎育勅語 발포/최초의 자본주의적 공황(1890)―청일전쟁 개시(1894)―청일 강화조약/삼국간섭(1895) 한국에 출간된 일본역사서로서 가장 신뢰할 만한 것은, 井上淸/서동만 옮김, ?일본의 역사?(이론과실천, 1989)이다.


   *일본 근대의 다섯 가지 딜레마: ①민족의 아이덴티티 즉 正體性의 문제-전통과 서구화 또는 전통과 근대화의 문제 ②제도적인 혁명과 정신혁명 사이의 문제-문명개화의 진전과 독립자존의 딜레마(후쿠자와) ③국내의 개혁과 대외적 독립 확보의 딜레마-내셔널리즘과 인터내셔널리즘의 충돌-민권론과 국권론 ④민주화와 집중화-‘公議輿論’과 ‘政令の歸一'의 딜레마 ⑤富國과 强兵의 선후문제----?문명론의 개략?의 의의! 상세한 내용은, 丸山眞男, ?文明論之槪略?を讀む(東京: 岩波新書, 1986) 上 참조.


2)후쿠자와 사상의 형성
   *일본 계몽기 사상의 판도: 國學派-儒學派-洋學派---‘萬國의 오야쿠니(親國)’사상과의 대결
   *學社의 형성(1873)-메이로쿠샤(明六社)---민의원 개설 운동과 사상의 스펙트럼 김용덕, ?明治維新과 당시의 지식인?, ?일본근대사를 보는 눈?(지식산업사, 1991) 참조.
/cf)살롱?커피하우스
   *下級武士-후쿠자와?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자유롭게 떠 다니는 근대적 인텔리겐차’ 마루야마 마사오/박충석?김석근 공역, ?서구화와 지식인?, ?충성과 반역?(나남출판, 1998) 참조.

   *지식인의 딜레마: ‘개성적 자유 이념과 내셔널리즘의 갈등’의 내면화/보편주의와 특수집단주의/자연생장적 근대화와 목적의식적 근대화/보편인(l'uomo universale)과 특수인---제3세계 근대 지식인의 딜레마 또는 후쿠자와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와 관련하여!
   *기조(Francois P.G. Guizot)?버클(H.T.Buckle)?스펜서(H.Spenser)의 영향-계몽적 진보사관 및 상대주의와 실용주의---‘후쿠자와에게 있어서 문명론의 창조라는 기획은 서양의 문명론이 휘두르는 내면에 대한 지배 압력으로부터 지적 독립을 의도한 것.’ 松澤陽弘, ?文明論における‘始造’と‘獨立’?, ?近代日本の形成と西洋經驗?(東京: 岩波書店, 1993) 참조.

   *‘번역’으로서의 근대 Lydia H. Liu, Translingual Practice: Literature, National Culture, and Translated Modernity―China, 1900~1937(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5) 참조.
---사상의 ‘의역’과 ‘직역’의 문제 丸山眞男, ?文明論之槪略?を讀む
-?西洋事情? ?학문을 권함? ?문명론의 개략?(1875)---계몽주의자에서 사상가로.


3 ?문명론의 개략?을 ‘다시’ 읽는다

1)머리말
   *민심의 소란은 지금도 여전하며, 날이 갈수록 심하다. 그 소란은 분명히 일본의 국민이 문명을 향하여 전진하려는 發奮의 표현이다. 일본의 문명에 만족하지 않고 서양 문명을 섭취하려는 열성의 표현이다. 따라서 그 期約하는 바는 결국 일본의 문명을 서양 문명처럼 만들어 그것과 어깨를 겨루게 하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보다 앞서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것이다(8 텍스트는 후쿠자와 유키치/정명환 옮김, ?文明論의 槪略?(광일문화사, 1989)이다. 괄호 안의 숫자는 면수를 뜻하며 이하 동일하다.
: 이탤릭체 강조는 인용자-이하 같음).
   *오늘날 일본의 문명은 말하자면 불을 물로 바꾸고 無에서 有로 옮아가려는 것이므로, 그 급격한 변화는 단순히 개진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창조라고 함이 마땅할 것이다.(9)---일본 ‘근대
문명론‘의 창조!

2)論議의 本位를 정립하는 일(제1장)---‘교통정리’ 또는 ‘우선 순위 설정’
*상대적인 입장에서 무거운 것으로 판정되고 선으로 판정된 것을 논의의 본위라고 한다.(12)---상대론적 입장의 명료화
*사물의 이해득실을 논함에 있어서는, 우선 그 利害得失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잘 살펴서 그 輕重是非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중략] 지금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느냐 뒤로 물러서느냐, 앞으로 나아가 문명의 길을 따르느냐 뒤로 물러서서 야만의 상태로 돌아가느냐는 進退의 두 글자가 있을 뿐이다.(20)---수구파와 개혁파의 장단점 파악-수구파는 개혁파를 반드시 미워할 필요가 없고 개혁파도 수구파를 경멸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문명으로 매진하는 길밖에 없다, 왜? 

3)서양의 문명을 목표로 삼는 일(제2장)---중국문명 비판-화이사상의 극복을 통한 독립론
*文明?半開?野蠻이라는 명칭은 세계의 통념이 되어 있고 세계의 국민이 모두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21)
*문명에는 끝이 없는 것이며, 현재의 서양제국을 만족한 상태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중략] 문명이란 죽은 물건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일정한 과정을 순차적으로 밟아 나가는 법이다. 다시 말해서 야만은 반개로 향하고 반개는 문명으로 향하며, 그 문명이라는 것도 순간순간 진보하는 과정에 있다.(23쪽)---사회진화론-사회유기체설
*외국의 문명을 섭취하여 반개의 나라에 적용함에는 당연히 취사선택이 適正해야 한다. 그러나 문명에는 밖으로 나타나는 사물과 안에 존재하는 정신의 구별이 있다. 밖의 문명은 섭취하기 쉽고 안의 문명은 추구하기가 어렵다. 한 나라의 문명을 꾀함에 있어서는 그 어려운 것을 먼저 생각하고 쉬운 것을 뒤로 돌려야 한다.(24)
*어떤 사람들은 다만 문명의 외형만을 논하고 문명의 정신에 대해서는 무심하고 이를 따지지 않는 것같다. 그렇다면 그 정신이란 무엇인가? 국민의 기풍이 바로 그것이다.(25)---근대적 국민(nation)의 형성과 관련하여!-知德의 계발-자유 원리의 확보
*문명을 진보시키는 要諦는 모름지기 일을 다양화하여 需用을 늘려가고 사물의 輕重大小를 불문하고 이를 더욱더 많이 받아들여 정신의 작용을 더욱더 활발하게 해 나가는 데 있다.(29)---이는 조물주의 깊은 뜻이자 선천적인 것-그런데 이러한 정신적 계발을 위해서는 자유의 원리가 확보되어야 하는데 이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국문명이다!
*至尊의 관념과 至强의 관념이 서로 상대화하여 그 사이에 여지가 생겨 다소라도 사상의 움직임이 가능해지고 이성이 작용할 수 있는 단서를 열 수 있게 된 점은 일본의 요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32)---지존과 지강이 결합된 중국의 경우와 비교. 중국문명 비판. 중국의 원리는 하나이며 일본의 원리는 둘, ‘중국은 일단 변모하지 않는 한 일본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國體를 지켜가면서 서양문명을 취사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도대체 국체란 무엇인가? [중략] 국체란, 한 종족의 국민이 서로 모여서 고락을 함께 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해서 自他의 구별을 짓고, 서로를 대할 때 타국민보다 더 중히 여기고, 타국민을 위해서보다 자기들 서로를 위해서 더욱 힘을 바치고, 한 정부에서 자치를 하여 다른 정부의 지배를 받기 싫어하고, 禍福을 모두 스스로 걸머지고 독립하는 것을 말한다. 서양말로 내셔널리티(nationality)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33) 
*국체는 나라의 근본이다. 政統도 血統도 국체라는 근본을 지키면서 盛衰를 거듭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중략] 이 시점에 처하여 일본인의 의무는 오직 국체 보전이라는 한 가지일 뿐이다. 국체를 보전한다는 것은 제 나라의 정권을 잃지 않는 것이다. 한데 정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의 智力을 발전시켜야 한다. 지력 발전에서 가장 급하고 필요한 것은 낡은 습관에 빠져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서양 문명의 정신을 섭취하는 것이다.(40)---서양 문명정신의 수용-지력의 계발-국체의 보존-독립의 확보

4)문명의 本旨를 논함(제3장)
*문명이란 인간관계가 점차로 달라져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양상을 두고 하는 말이며, 野蠻無法의 독립에 반하여 한 나라의 모양을 갖춘다는 뜻이 된다.(47)---문명과 국민국가(nation state) 형성의 문제
*문명이란 몸을 안락하게 하는 동시에 마음을 드높이는 것을 말하며, 의식을 풍부하게 하는 동시에 人品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중략] 문명이란 안락과 품위의 진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또한 사람의 안락과 품위를 베풀어주는 것은 智德이기 때문에 문명이란 결국 사람의 지덕의 진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50) ---근대인(문명인)의 품성/문명은 극장이며 바다이고 창고다! 또한 문명이란 어떤 한 사람에 관해서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 전체의 양상을 보고 하는 말이다.---국가 또는 국민의 氣風

5)한 나라 국민의 智德을 논함(제4장)
*예로부터 영웅호걸이 세상에서 큰일을 이루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재주로 국민의 지덕을 발전시켰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지덕의 발전을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72)---時勢 또는 지덕의 상황-衆論의 변화 모색-국민 전체의 지덕의 발전을 꾀해야
*옛 사람들은 우선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했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서 가장 긴급한 일은 우선 중론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는 데 있다. [중략] 중론의 길에는 천하에 적이 없다. [중략] 따라서 오늘날의 학자는 정부를 탓하는 대신 중론의 잘못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81)

6)앞장의 계속(제5장)---중론과 지덕의 상관성
*중론이란 국내의 民衆의 議論인데, 그것은 그 시대에 있어서 인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지덕의 양상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이 중론을 통해서 민심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83)
*개혁(메이지 정권의 개혁-인용자)의 대업을 처음으로 기도하고 성취한 것은 사람 수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지력으로써 뭇 사람을 눌렀기 때문이다. [중략] 일의 성패는 사람 수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지력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92)---지력의 양? 누구의?-지식인의 역할 문제
*한 나라의 중론도 그 결정된 차원에서 보자면 매우 고상하고 유력한 것이지만, 그 의론이 훌륭한 이유는 고상하고 유력한 인물이 그것을 주창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훌륭하게 결합하여 그 동료들 전체 내에서 스스로 의론을 세울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다.(95)---지식인과 인민을 동시에 포섭하려는 서술전략에 주목할 것!---그러므로 인민들이 고루한 관습에서 벗어나 지력을 쌓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7)지덕의 판별(제6장)---智와 德의 구별-지력의 우위 해명
*덕은 德義의 뜻이며 서양말로 모랄이라고 한다. 모랄이란 마음의 예절이다. 자신의 내심이 평화롭고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것을 말한다. 지는 지혜의 뜻이며, 서양말로는 인텔렉트라고 한다. 사물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납득하는 작용이 이것이다.(99)
*덕의란 일체의 외적인 변화에 구애되지 않고 세상의 비방이나 영예를 돌보지 않고, 권위나 무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가난하고 천한 형편에서도 끝끝내 지켜나가려는 확고부동한 내적 존재를 말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외적 대상과 접촉하여 그 이해득실을 생각하고 한 일을 하다가 불편하면 다른 방법을 쓰고, 내가 편리하다고 생각한 것이라도 세상사람들이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다시 고쳐나가고, 한때 편리한 것이었다 해도 더욱 편리한 것이 새로 생기면 그것을 채택하는 것이다. [중략] 이렇듯 외적 대상과 접촉해서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하는 지혜는 그 양상이 덕의와는 전혀 상반되며 이것을 외적 기능이라 할 수밖에 없다.(106)---덕의-내적 수양-개인적 차원-완결성-불가시성/지혜-외적 실천-사회적 차원-가변성-가시성
*덕의는 지혜의 작용에 따라서 그 영역을 넓히고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109)---私德에서 公德으로/私智에서 公智로!
*요컨대 덕의는 개인의 행실이며 그 효능이 미치는 영역이 좁은 반면에 지혜는 전달이 빠르고 그것이 미치는 영역도 넓다. 덕의는 개벽 이래 이미 결정되어 있어 진보할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지혜의 작용은 날로 진보하여 한이 없다. 덕의는 有形의 기술로서 가르칠 수 없고 그것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마음가짐에 따르는 반면에, 지혜에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의 방법이 있다. 덕의는 갑자기 성할 수도 쇠할 수도 있지만, 지혜는 일단 획득하고 나면 상실되는 법이 없다. 지덕은 서로 의존하면서 그 효능을 발휘한다. 선인도 악을 행할 수 있고 악인도 선을 행할 수 있다.(133-134)

8)지덕이 행해질 시대와 장소를 논함(제7장)

*古人이란 옛 시대에 살면서 옛 일을 한 사람이다. 나는 오늘날을 살면서 오늘날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어찌 옛것을 배워서 오늘날에 실천해야 할 이치가 있겠는가? 온몸이 활짝 열리고 천지간의 어떤 것이라도 내 마음의 자유를 가로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미 정신의 자유를 얻은 이상 어찌 신체의 속박을 받겠는가?(142)---전통적 가치관 및 윤리관의 부정-이제야말로 지덕의 도움으로 문명이 꽃필 시대!
*仁政은 문명 이전의 야만 세계에서가 아니면 소용이 없고, 仁君은 문명 이전의 야만적인 백성과 접하지 않는 한 귀한 존재가 아니며, 私德은 문명의 진보에 따라 점차 힘이 상실된다고 말할 수 있다.(145)---신분제의 파기-역할의 분업화-계약-근대적 국민의 형성 ###문명의 이상 또는 문명의 평화(145)
*(지덕이 행해질 장소는 시혜 또는 덕의의 원리에 입각한 가족관계나 군신관계가 지배적인 사회가 아니라 지금 냉혹한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냉혹한 규칙의 덕분으로 겨우 사물의 질서가 유지되며, 사람들은 나쁜 마음을 잔뜩 품고 있지만 규칙의 통제를 받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고 규칙이 허락하는 한계점에서 겨우 머물러, 마치 날카로운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중략] 규칙은 결코 냉혹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오늘날의 세상의 至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오늘날의 상황에서 세상의 문명을 진보시키는 수단은 규칙을 제외하면 다른 길이 없다.(152-153)---규칙에서 법률로!

9)서양문명의 유래(제8장)---기조의 ?유럽문명사? 요약 소개

10)일본문명의 유래(제9장)---일본사회의 권력 편중 비판
*(일본의 역사를 보건대) 권력을 멋대로 휘둘러서 그 偏重을 초래하는 것은 결코 정부만이 아니라 온 국민의 기풍 때문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172)---권력의 私有化
*(그 결과) 건국 2500년 동안 정부라는 것은 동일한 종류의 일을 반복했으며, 그것은 마치 한 권의 책을 되풀이 읽는 것과 같고 동일한 제목의 연극을 몇 번이나 상연하는 것과도 같았다. 즉 (유럽과는 달리) 정부는 바뀌지만 나라의 대세는 바뀐 일이 없다.(178)
*따라서 일본은 옛부터 지금까지 아직 나라를 이루지 못했다 해도 마땅하다. [중략] 내가 일찍이 일본에는 정부만 있을 뿐 국민(네이션)이 없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일을 두고 한 말이다.(180)---즉 일본의 국민은 국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벽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일본 전국에서 독립시민과 같은 존재는 꿈에도 꾸어본 일이 없다.(182)
*(학문에 있어서도 그 권리를 모른 채) 옛것을 믿고 옛것을 섬길 뿐 조금도 스스로 궁리하지 않고, 이른 바 정신의 노예(멘탈 슬레이브)가 되어 사람의 道를 위해서 온 정신을 바치고 오늘날의 세상에서 옛 사람의 지배를 받고 그 지배를 전승하여 오늘날의 세상을 지배하고, 인간 사회 곳곳에 停滯不流의 요소를 주입시킨 것, 이것이 바로 유학의 죄라고 할 수 있다.(191)---불교나 神道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일본의 무인은 개벽시대부터 이 나라를 지배하는 사회적 관례에 따라 권력 편중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고 항상 남에게 굴종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서양의 인민이 자기의 지위를 중시하고 자신의 신분을 소중히 여기면서 저마다의 권리를 펴나가는 것에 비하면 그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중략] 결국 그 근본을 따지자면 일본의 무인에게는 개인으로서의 기상(인디비듀얼리티)이 없기 때문에 그런 비열한 행위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194-195)
*권력이 편중되면 난세이건 치세이건 간에 문명이 진보할 수 없다.(202)
*(이는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일본의 경제에서도 원래부터 권력의 편중 때문에 축적자와 소비자의 두 족속으로 구분되고 쌍방 간에 맥이 통하지 않았다.(210)

11)일본의 독립을 논함(제10장)
*문명에 선진과 후진이 있는 이상, 앞선 자는 뒤진 자를 지배하고 뒤진 자는 앞선 자에게 지배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215)---자국의 독립과 문명진보의 상관성/脫亞論 및 제국주의론의 맹아!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제에서는 오직 다음의 두 가지 형태가 있을 따름이다. 즉 평상시에는 물건을 매매하여 서로 이익을 다투고 유사시에는 무기를 들어 서로 죽이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오늘날의 세계는 상업과 전쟁의 세계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223)---국제관계의 인식-존왕양이론자와 기독교론자 그리고 회고의 정에 빠져 있는 한학자와 皇學者 비판
*제 나라의 권익을 신장시키고 제 나라의 국민을 부자로 만들고 제 나라의 지덕을 기르고 제 나라의 명예를 빛내려고 애쓰는 사람을 애국적 국민이라 부르고 그 마음을 애국심이라 부른다. 그 안목은 다른 나라에 대해서 自他의 구별을 짓고, 비록 다른 나라를 해칠 의향은 없을망정 제 나라를 소중히 여기고, 다른 나라를 가볍게 여겨, 제 나라를 독자적으로 세워가려는 데 있다. 따라서 애국심은 일신을 위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를 제것으로 알고 위하려는 마음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지구를 여러 개로 구분하고 그 구역 내에서 집단을 형성하고 그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여 그것을 제것으로 삼으려는 偏頗心이다. 따라서 애국심과 편파심은 명칭은 다르나 같은 내용의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일시동인이나 사해형제와 같은 大義는 애국충정이나 건국독립의 대의와는 어긋나고 용납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224)---후쿠자와 사상의 핵심: 아의 확립과 타의 부정!---대외관계론으로
*생각이 얕은 사람은 최근의 세상이 옛날과 다른 양상을 띤 것을 보고 이것을 문명이라 부른다. 그리고 우리의 문명은 대외관계의 덕분이니, 그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면 문명 역시 진보하리라고 기뻐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문명이라고 이름짓는 것은 다만 겉모습에 불과하다. 그것은 물론 내가 바라는 바 아니다. 비록 그 문명을 매우 고차적인 것으로 발전시킬망정, 전국의 국민에게 한 가닥 독립심도 없다면, 문명 역시 일본에는 아무 소용이 안되고 그것을 일본의 문명이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이다.(237)
*국민된 자는 정초에 한번 뿐 아니라 매일 아침 서로 경각심을 돋우어, 대외관계에 정신차리라고 말하고 난 후에야 밥을 먹어도 좋을 것이다.(239)---!!!!???
*암살이나 攘夷를 내세우는 주장은 아예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것이지만, 한 걸음 더 나가 군비만을 갖추는 것도 실용에 맞지 않고, 또한 앞서 언급한 국체론, 기독교론, 漢儒論 역시 민심을 바로 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길이 있겠는가? 목적을 정하고 문명을 향해 나가는 길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란 무엇인가? 내외의 구별을 분명히 하고 일본의 독립을 보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독립을 보전하는 길은 문명 이외에는 달리 없는 것이다.(241)
*오늘날의 일본의 문명이란 문명의 본뜻이 아니다. 우선 그 첫 걸음으로 자국의 독립을 도모하고 여타의 것은 둘째 걸음으로 물려두어서 후일 그것을 위해 일하자는 취지인 것이다.(244)---輕重緩急의 문제--다시 처음(1장)으로!


4 마무리

*?문명론의 개략?의 핵심---지덕의 함양-문명의 수용-근대적 국민(nation)의 창출-애국심과 내셔널리즘-자국의 독립-그리고? 문명의 상대성과 기능성에 대한 인식-異質的 文化와의 접촉에서 오는 자기발견이라는 창조적(차별적) 사고의 전개-일본 문명에 대한 엄격한 비판과 자부심이 중국과 조선 멸시 사상에 이어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사상으로 연결
*다시 일본 근대 사상의 원형을 찾아서
 















[부록1]

문명개화와 독립정신: 福澤諭吉 ?학문을 권함?

정  선  태

1

   흔히 말하듯이 일본 근대사의 두드러진 현상은 세계를 보는 시각의 갑작스런 변화이다. 한 민족으로서 일본 사람들은 특별한 ‘지적 기동성’, 이를테면 외국인을 싫어하는 태도에서 좋아하는 태도로, 서양 야만인을 증오하는 데서 서양문화에 아양떠는 데까지 지도자들이 지배적인 여론을 바꿀 수 있는, 놀랄만한 사상의 유연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예컨대 1868년 권력을 잡은 새 지도자들은 어린 천황으로 하여금 ‘세계 만방으로부터 지식을 추구하여 천황 통치의 바탕을 강화할 것이다. 옛 시대의 어리석을 풍습을 타파하고 모든 행동은 국제적 쓰임에 바탕할 것이라’고 천명케 함으로써 그 순발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러한 선언은 외부세계에 대한 새로운 열린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서양문물과 사상에 중독된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그 뒤 20여 년 동안 여는 때와 다른 ‘차용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이처럼 서구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의 급작스런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많은 서구화 주창자들이 어떤 면에서는 반서구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서구화란 곧 반서구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이를테면 서양 사회의 제도와 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나라에서 드러내고 있는 모든 서양 세력을 제거해 버릴 수가 있다고 꿈꾼 것이다. 외국 사람들을 쫓아버리려는 斥洋主唱者의 목적이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갑작스런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로는 빌려오는 데 익숙한 일본의 문화적 전통과 일본에서의 서양의 도전이 내부의 정치적 혁명 기운과 겹쳐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던 새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의 성격이다. 메이지유신의 지도자들은 젊었다. 1868년 그들의 평균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대부분이 옛 사무라이 엘리트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서양의 군사력과 과학기술의 밑바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의 문사계급과는 달리 일본의 힘을 기르는 데 필요한 어떠한 변화라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춘 지도자들이었다. 즉 토지에 밀착되어 있지 않았던 그들은 근대적 관료로서 새로운 생각과 제도에 놀랄만큼 수용적이었으며 변화를 이끄는 ‘효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케네스 B. 파일/박영신?박정신 옮김, 근대일본의 사회사(현상과인식, 1985) 93-9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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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변혁의 시기를 산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1월 11일 오오사카에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蘭學을 배운 후 1858년 에도(江戶)로 나와 洋學塾을 열었으나, 1860년 幕府가 칸린마루(咸臨丸)을 미국에 파견했을 때 승선, 渡美하였다. 같은 해 귀국 후 幕府의 외무 분야에 고용되어 외교문서 번역에 종사했다. 1862년 바쿠후가 사절을 유럽에 파견했을 때에도 수행원으로 동행한 바 있으며, 1867년에는 바쿠후의 군함 수취위원 자격으로 도미하는 등 幕府말기에 3회에 걸쳐 구미제국을 여행했다 구미각국 여행 과정에 대해서는, 福澤諭吉, 新訂 福翁自傳(東京: 岩波文庫, 1978) 105-17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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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8년 慶應義塾을 창설하였으며,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로서 교육?저술활동을 전개하하여 일본 각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를 강조하는 근대적 합리주의의 입장에서 봉건적 사상을 비판하고 實學을 장려하여 官尊民卑 풍조에 맞섰다. 1901년 2월 3일, 20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세상을 떠난 후쿠자와의 일생은 봉건시대가 반생, 일본이 근대국가로서 길을 걷기 시작한 메이지 시대가 반생, 실로 두 시대를 함께 체험한 19세기의 선각자였다 春原昭彦, ?福澤諭吉의 對韓觀?, 김정기 편저, 明治日本言論의 對韓觀(탐구당, 1987) 7-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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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자와만큼 서양문화를 전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를 설득력 있게 또는 영향력 있게 쓴 사람은 아무도 없다. 페리함대의 도전(1853)과 항구를 열라는 강압적인 요구에 일본이 무릎을 꿇은 것은 처음에는 도쿠가와 정부가 비판의 대상이 된 정치적 실패 때문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군사적인 우월의 실상을 차츰 이해하게 됨에 따라 그 실패는 전면적이며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문화적인 것으로 인식되곤 하였다. 그리고 후쿠자와는 이 주장의 지도적인 인물이었다.

2

   하급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후쿠자와는 어렸을 때 봉건적 위계질서의 제약에 대해 분명히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카츠라는 마을에서 나를 가장 불행하게 한 것은 관직과 신분상의 억눌림이었다. 공식적인 경우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만남에서, 또는 어린이들 세계에서조차 높고낮음의 구별은 뚜렷이 규정되어 있었다. 우리와 같이 낮은 사무라이 집안 출신의 어린이들은 높은 사무라이 출신 어린이들에게 공손하게 말해야 했지만 이들은 늘 우리에게 오만하게 굴곤 했다. (……) 학교에서 나는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고 어떤 어린이도 그곳에서는 나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교실 바깥에서 그들은 나보다 윗 계급으로서의 위엄을 보였다. 그러나 나는 육체적인 힘에서조차 조금도 처지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나는 어린아이였지만 이 모든 면에서 불만을 아니 가질 수 없었다.’ 福澤諭吉, 앞의 책. 24-25쪽. 그리고 중류계급의 학자들이 서양의 문명을 이끌었다고 판단하고 있는 ?학문을 권함? 83쪽에서도 저간의 사정을 엿볼 수 있다.
라고.
   이러한 불만을 감추고 있던 후쿠자와가 자신의 생각을 처음으로 정리한 것이 1866년에 펴낸 ?西洋事情?이었다. 미국과 유럽 여행을 마친 후였다. 이 책은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서양 여러 나라의 일상 생활에 관계된 사회 여러 제도들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후 짧은 간격으로 그는 계속 수많은 글을 발표하여 서양에 관한 정평있는 권위자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유신운동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새 정부가 개혁 문제에 호의적임을 알았을 때 그의 논조는 변하기 시작했다. 서양 사회에 관한 정보를 단순히 기술하는 대신, 서양의 가치와 제도를 받아들여 일본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용감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후기의 저작에서는 전통의 가치나 사회관습을 보존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사쿠마 쇼잔 등의 개혁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후쿠자와는 유교 원리가 과학적인 사회 습성과는 융화될 수 없는 자연관과 사회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유교 원리에 매달려서는 서양 과학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대 문명의 본질은 개개인의 독립정신, 독창력 및 자립성을 길러가는 풍토 속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봉건제도나 유교의 가치체계가 이러한 자질을 갖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까닭에 그는 전통적 일본 문화를 전면적으로 공격하고 나서기에 이른다.
   이러한 정신적 상황에서 胚胎된 저서 ?학문을 권함?(1872-1876)에서 그는 그 유명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있게 하지도 않았다’는 말로 글을 시작하여, 도쿠가와 말기부터 움터온, 단단하기 그지없었던 세습신분 제도에 대한 분명한 반론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리고 공리적인 지식 습득 여부에 따라 젊은이의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학문을 권함?에서 사상의 전체적인 윤곽을 보여준 그는 뒤이어 나온 ?문명론의 개략?을 통해 일본 문화의 근본적인 결함이 근본적으로 가족제도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가족 제도는 한쪽으로는 절대적인 권력 의식을, 다른 쪽에서는 의심의 여지없는 복종을 강요함으로써 서양문명을 낳게 한 독립정신을 파괴하여 버린다는 게 주장의 핵심이다.

3

   ?서양사정? ?학문을 권함? ?문명론의 개략?으로 이어지는 후쿠자와의 사상적 편력에 있어 ?학문을 권함?이 차지하는 의의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단순히 서양의 제도를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서 자신의 개혁 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 같은 맥락에서 후쿠자와의 사상을 전기와 후기로 나눌 경우 ?학문을 권함?은 전기의 총결산임과 동시에 후기 저작의 출발이라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저작이 일본 근대 교육제도의 기본적인 ‘교과서’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학문을 권함?은 총 1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편의 핵심적인 내용은 본서 253-267쪽 <해설>에 정리되어 있다.
. 그 핵심적인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문벌주의 계급주의에서 탈피하여 자유평등주의로 나아갈 것
   ②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의 인격을 믿고 독립자존의 정신을 지킬 것
   ③봉건시대의 和漢學을 배척하고 서양의 새로운 과학을 중요시하여 생활에 입각한 실학에 뜻       을 둘 것
   ④관존민비의 풍습을 타파하여 민업을 왕성케 하고 민간의 학문을 진흥할 것
   ⑤청소년은 자신의 작은 성공에 안주하지 말고 뜻을 크게 두어 국가와 사회에 공헌할 것
   ⑥과거의 권위에 맹종하지 말고 창조와 비판의 정신을 배양할 것
   ⑦폭력행사를 삼가고 법질서을 준수할 것
   ⑧남존여비의 弊風을 고치고 여성의 해방과 가정의 정화에 애쓸 것
   ⑨社交를 적극적으로 하여 대화 변론의 양식을 기를 것

   이처럼 ?학문을 권함?은 봉건적 동양적 가치관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에 입각해 있다. 물론 제15편에서 ‘서양을 가벼이 믿지 말라’ ‘서양도 완전하지 않다’ ‘서양을 맹종하지 않아야 한다’ 등의 유보 조항을 볼 수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어조나 글의 기조는 일본 문화 전반에 관한 비판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4

   동아시아 3국의 계몽적(또는 서구지향적)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후쿠자와 역시 가치관과 제도 및 풍습을 파악하는 데 있어 동양과 서양을 이항대립 구도로 파악하고 있다. 즉 일본적인 것은 부정되어야 마땅하며 서양적인 것이야말로 최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한다.
   후쿠자와에 따르면 문명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세 가지 조건은 학문?기술과 경제 그리고 법률이다. 그런데 민중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요구하는 봉건적 전제정치 하에서는 이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전제정치의 근본적인 원인은 국민들의 무지몽매함과 무기력함에 있다. 해답은 간단하다. 국민들의 무지몽매함과 무기력함을 깨는 일, 즉 교육이 급선무일 수밖에 없다. 후쿠자와가 학교를 세우고 나아가 私學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한 것, 서양학문을 배워 관리로 나아가는 것보다 교육하는 데 더 주안점을 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문명 추진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짊어질 자는 천하에 단지 하나가 있으니 곧 서양학문을 하는 이자들의 무리가 점점 증가하여 혹은 원서를 연구하고 혹은 번역서를 읽는 등 열심히 공부하고 있들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양학자들조차 그다지 믿을 수 없는 까닭이 있다. 그것은 이 양학는 것 같으나, 애써 서양의 문장을 읽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정신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정신은 이해해도 실제로 실행할 성의가 없는 것인지, 그들의 행동에는 나 같은 사람이 볼 때 이상하게 여겨지는 점이 적지 않다. 무엇이 이상한가 하면, 이 당당한 학자 선생들이 모두 정부에만 추파를 던지고 민간의 사업에는 전혀 마음이 없는 것이다. 정부의 관리가 될 것만 생각하여 민중 사이에 살아있어야 함을 모른다. 이것은 결국 봉건시대 한학자들의 버릇이 뿌리뽑히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래서는 마치 한학자의 몸에 서양의 옷을 걸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후쿠자와 유키치/엄창준?김경신 옮김, 학문을 권함(지안사, 1993) 67-68쪽.


   세상의 문명을 추진하려면 정부의 힘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한학자나 국학자는 물론 일반 백성이나 상인들에게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유일하게 서양 학문을 배운 사람들을 믿을 수밖에 없는데, 지금 소위 서양학문을 배웠다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관에 들어가 편안하게 국록을 받으며 살 궁리에 여념이 없지 않은가. 이와 같은 관존민비 사상을 버리고 ‘민간 사업’ 곧 백성을 가르치고 계몽하는 일, 민중 사이에 살아있는 일을 팽개쳐 두고야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후쿠자와의 판단이다. 지식인들이 민중적 토대를 상실하고서야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진단이야말로 후쿠자와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그의 저술활동이나 저널리스트로서의 활약 역시 게이오의숙을 창설한 의도와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민간사업 즉 교육을 통한 민중의 계몽을 전제로 하지 않는 개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후쿠자와 사상의 요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후쿠자와는 학교와 언론 그리고 연설 등을 통한 다각도의 민중계몽이 이항대립 구도를 깨고 문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열쇠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렇듯 중요한 교육의 핵심적인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독립정신이다. 독립정신야말로 후쿠자와 사상을 가로지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독립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먼저 개인이 독립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물론 개인의 자각을 전제로 한다. 교육과 계몽을 통해 독립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을 때라야 개개인은 관존민비나 남존여비 및 온갖 봉건적 인습의 사슬을 끊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자각을 토대로 하여 민간인 각각은 정부로부터 독립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의 暴政에 대해서는 정의를 주장하며 자기 몸을 희생하여 저항해야 한다 같은 책. 108쪽 이하.
. 그리고 ‘정부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하면 무턱대고 마구 격찬하여 대서특필하는 것은 마치 창녀가 손님에게 교태를 부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같은 책. 69쪽.
 정부의 눈치만 볼 게 아니라 국법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개개인이 독립자존의 정신을 지켜나갈 때, 국민의 힘과 정부의 힘이 균형을 이루어 일본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 요컨대 권리를 자각한 국민 개개인이 정부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건실하게 구축할 수 있을 때라야 국가도 외세로부터 독립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후쿠자와는 이와 같은 독립정신이 바로 문명정신의 기초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데, 독립정신의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다음과 같다.

본디 한 나라의 문명은 겉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학교나 공업이나 육군이나 해군이나 하는 것들은 모두 문명의 외적인 모습이다. 이 외관을 만드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돈만 있으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다. 그러나 널리 국민들 사이에 퍼져 있어 그 작용은 심히 크다. 만일 그것이 빠져 있다면 앞서 언급한 학교 이하의 여러 요소도 실제의 소용이 되지 못할 정도로, 실로 문명의 진수라고 해야 할 중요하고 불가결한 요소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국민의 독립심이다. (……) 결국 국민에게 독립심이 없으면 문명의 외관도 완전히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같은 책. 80쪽.


   독립정신을 물질적인 독립과 정신적인 독립으로 나누고 후자에 무게를 두고 있는 그의 생각은 ?학문을 권함?을 관통하고 있다 같은 책. 225쪽 이하 참조.
. 여기에서 우리는 메이지 신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즉 富國强兵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던 정부 관료들을 향한 통렬한 비판의 일단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적인, 갑갑하기 짝이 없는 ‘야만 풍속’에서 벗어나 문명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독립정신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것이 ?학문을 권함?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공리적인 實學의 중요성을 곳곳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부차적이다. 요컨대 후쿠자와는 ?학문을 권함?에서, 명분에 빠져 인민을 기만하고 있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무라이 사회에서 벗어나 진정한 문명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 곧 독립정신을 확립하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5

   동양적 관습의 폐단이나 폐쇄주의 등에 대한 후쿠자와의 비판은 길게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연설에서 사교로 이어지는 그의 ‘개방적인’ 문명수용방법론 역시 상세하게 재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다만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의 버티는 근간으로 독립정신을 강조함으로써 일본적 근대화의 礎石을 마련한 점은 재삼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문제는 남는다. 이러한 독립정신에 기초한 문명개화 사상이 소위 ‘脫亞論’으로 이어지는 문맥을 꼼꼼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조선이나 중국에서 전개된 문명개화론과 후쿠자와의 독립정신 배양의 사상이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미세한 차이겠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라야 동아시아 3국 지식인들의 계몽의 기획을 보다 깊이 있게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부록2]

일본 근현대 문제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책들

강동진, 일본근대사(한길사, 1985)
김기정 편저, 明治日本言論의 對韓觀(탐구당, 1987)
김용덕, 일본근대사를 보는 눈(지식산업사, 1991)
박영제외, 19세기 일본의 근대화(서울대출판부, 1997)
차기벽?박충석 편, 일본현대사의 구조[6판](한길사, 1987)
최영, 한?중?일 근대정치사상(현음사, 1998)
한배호 외, 현대일본의 해부[6판](한길사, 1986)
한상일, 일본군국주의의 형성과정(한길사, 1982)
한상일, 일본의 국가주의―昭和維新과 國家改造運動(까치, 1988)
한준석, 文의 문화와 武의 문화(다나, 1991)
한태호, 근대일본정치문화사(명륜당, 1988)
현대일본연구회, 國權論과 民權論[2판](한길사, 1982)

가라타니 고진/박유하 옮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 1997)
가라타니 고진/김경원 옮김,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산, 1999)
가토 슈이치 외/김진만 옮김, 일본문화의 숨은 形(소화, 1995)
구노 오사무?쓰루미 슌스케/심원섭 옮김, 일본근대사상사(문학과 지성사, 1994)
나지타 테츠오/박영재 옮김, 근대일본사―정치항쟁과 지적 긴장(역민사, 1992)
나카네 지에/양현혜 옮김, 일본사회의 인간관계(소화, 1996)
나카네 지에/이광규 역, 일본사회의 성격(일지사, 1979)
마루야마 마사오/김석근 옮김, 일본의 사상(한길사, 1998)
마루야마 마사오/김석근 옮김, 일본정치사상사연구(통나무, 1995)
마루야마 마사오/박충석?김석근 공역, 충성과 반역(나남출판, 1998)
마루야마 마사오/신경식 옮김, 현대일본정치론[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고려원, 1988)
마루야마 외/고재석 옮김, 사상사의 방법과 대상(소화, 1997)
모리모토 준이치로/김석근?이근우 옮김, 일본사상사(이론과실천, 1989)
미나미 히로시/서정완 옮김, 일본적 자아(소화, 1996)
스즈키 노리하사/김진만 옮김, 무교회주의자 內村鑑三(소화, 1995)
스즈키 마사유키/류교열 옮김, 근대 일본의 천황제(이산, 1998) 
쓰다 소키치/남기학 옮김, 중국사상과 일본사상(소화, 1996)
쓰루미 슌스케/강정중 옮김, 일본제국주의 정신사 1931-1945(한벗, 1982)
아오키 다모쓰/최경국 옮김, 일본문화론의 변용(소화, 1997)
오카 요시타케/장인성 옮김, 근대일본정치사(소화, 1996)
우치무라 간조/김갑수 옮김, 나는 어떻게 크리스찬이 되었는가(홍성사, 1986)
우치무라 간조/전호윤 옮김, 구안록[2판](설우사, 1996)
우치무라 간조/최운걸 옮김, 所感[2판](설우사, 1996)
우치무라 간조/김유곤 옮김, 一日一生[2판](설우사, 1993)
이에나가 사부로/이영 옮김, 일본문화사(까치, 1999)
이치이 사부로/김흥식 역, 明治維新의 철학(태학사, 1992)
이타사카 겐/정형 옮김, 일본인의 논리구조(소화, 1996)
이토 세이 외/유은경 옮김, 일본 사소설의 이해(소화, 1997)
이토 세이/고재석 옮김, 근대 일본인의 발상형식(소화, 1996)
하가 토오루/손순옥 옮김, 명치유신과 일본인(예하, 1989)
하마구치 하루히코/김석근 옮김, 근대일본의 지식인과 사회운동(삼지원, 1988)
후지타 쇼오조오/이홍락 옮김,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창작과비평사, 1998)
후쿠자와 유키치/엄창준?김경신 옮김, 학문을 권함(지안사, 1993)
후쿠자와 유키치/정명환 옮김, 文明論의 槪略(광일문화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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邵雲瑞?李文榮/박강 옮김, 일제의 대륙침략사(고려원, 1992)
尹健次/하종문?이애숙 옮김, 日本: 그 국가?민족?국민(일월서각, 1997)
尹健次/정도영 역, 현대일본의 역사의식(한길사, 1990)
絲屋壽雄?稻岡道/윤대원 역, 일본민중운동사1823-1945(학민사, 1984)
石田雄/황원권 역, 일본의 정치문화―동조와 경쟁(학민사, 1984)
石田寬治/이병천?김윤자 역, 일본경제사(동녘, 1984)
石井良助 編/丘秉朔 譯, 일본의 근대화와 제도(교학연구사, 1981)
高橋幸八郞 外 編/차태석?김이진 역, 일본근대사론(지식산업사, 1981)
谷川健一/김효자 역, 일본민속의 이해(교학연구사, 1981)
立花隆/박충석 옮김, 일본공산당사(고려원, 1985)


福澤諭吉(1835~1901): 일본 메이지(明治)시대 계몽사상가. 오사카 출생. 1854년 나가사키에서 난학(蘭學)을 배우고 이듬해 오가타 고안(緖方洪庵)의 숙(塾)에 들어가 공부한 뒤 58년 에도(江戶)에 난학숙을 열었다. 60년 바쿠후(幕府)의 견미사절(遣美使節) 수행원, 61~62년 유럽 6개국 파견사절, 67년 견미사절 등으로 미국?유럽을 각각 순방, 새로운 서구문화를 흡수하고 돌아와 일본 봉건관료주의에 대항하였다. 69년 세계 각국의 역사와 정치제도를 소개한 ?서양사정?을 간행하여 일본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난학숙을 게이오의숙(慶應義塾)으로 개칭하고 교육과 언론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메이로쿠사(明六社) 동인으로서 ?학문의 권유(1872~76)?를 저술하였다. 82년 ?시사신보?를 창간하였으며, 일본의 변혁과 부국강병?관민조화론, 남존여비의 철폐와 여성의 해방 등을 주장하여 민주주의 및 일본 근대문명 발달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저서에 ?후쿠옹자전(福翁自傳)? ?신여대학(新女大學)? 등이 있다.[한메디지틀 백과사전에서]

































2000년 2월 10일, 강사: 고미숙
수유연구실 강좌: 동아시아 근대 강좌 : 계몽의 담론, 계몽의 사상가1. 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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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적 비전’과 ‘분자적 욕망’ 사이 : 강유위, ?대동서? 



                                                                         고 미 숙 




      1. ’강유위(1858-1927)’, 무술정변, 그리고 ?대동서?

   강유위의 정치적 활동은 청일전쟁(1894년 8월 - 1895년 2월)의 패배로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 1895년 4.15일 시모노세키에서 중국과 일본간에 합의된 강화조약(남만주와 타이완을 할양. 2억 냥에 달하는 배상금. 양쯔강 상류까지 일본기업이 진출할 수 있도록 허용)을 맺자 강유위는 이때 과거를 보러 베이징에 몰려 온 수천 명의 擧人들을 규합하여 불평등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청원서를 만들어 약 1만 8천자에 달하는 ?공거상서(公擧上書)?를 작성. 여기서 중국의 경제와 교육제도 전반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을 촉구. 강유위라는 사상가가 동아시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1858년 광동성 남해현의 비교적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조부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유교경전과 불교의 명상세계 속에서 청년기를 보내면서 10대와 20대 초반에 이미 하늘이 자신으로 하여금 중국 성현의 하나가 되어 인류를 구제할 지혜와 능력을 부여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879년 22세 되던 해 겨울에 홍콩을 방문하고서 “우아한 서양식 건물, 깨끗한 거리, 효율적인 치안‘에 감탄하여 서양의 과학서적 번역서를 집중적으로 탐독했다.(cf. 魏源의 ?海國圖志?) 23세때부터 공양학에 입문하여 유년기부터의 학문적 토대였던 신유학의 전통과 결별(->1891년 ?신학위경고?, 1897년 ?공자개제고?), 공양삼세설에 입각한 정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하였다.
   1898년 조정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고 황제 앞에서 제도개혁의 필요성을 설파했고, ‘보국회’‘不纏足會’를 조직하고, 만목초당을 여는 등 맹렬한 활동을 개시. 공부주사라는 관직에 임명되자, 형식적인 팔고문을 철폐하고 국립대학을 설립하며, 지방 서원을 학교로 개편하고 상업을 진흥시키고 농업과 산업을 육성할 전담 개혁기구를 설치한다는 조칙을 발포. 다른 한편 ?일본변정고?를 써서 광서제를 근대적 개혁의 주체로 고무시키고자 했다. 그의 제자인 양계초를 비롯하여 그의 이념에 동조하는 인물들이 합류,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 33세의 담사동(?仁學?). 이렇게 해서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 등 보수세력이 주축이 되었던 양무파에서 변법파로 이념적 축이 이동. 보수파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강유위는 황제에게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가야한다고 주청.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서태후의 친위쿠데타가 일어나 변법운동은 100일 천하로 끝나고 만다. 강유위는 천진으로 몸을 피해 영국 배를 타고 상하이를 거쳐 홍콩으로, 양계초는 일본으로 망명. 탈출을 거부하고 궁중 연금상태에 있는 황제를 구출하려 했던 담사동도 체포. ‘나는 도적떼를 죽이려 했지만 세계를 바꿀 만한 힘을 갖지 못했다.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이다. 기쁘다, 기쁘다.’ ->무술 육군자의 처형. 
   홍콩에서 화교들의 환대를 받고, ‘보황회’를 조직. 1900년 의화단의 난 - 서양 선교사를 아편밀수상과 침략군의 뒤를 좇아 들어온 타락의 마수로. 반기독교적인 감정과 98년 서구 열강의 북중국 침략에 대한 분노가 중국 고유의 무술이나 민족종교적인 전통과 어우러져 의화단을 탄생. 이즈음 서태후가 실권을 상실한 광서제를 폐위시키고 어린 만주족 왕자를 등극시키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강유위는 한커우 봉기를 결심. 경험 부족으로 총 한방 쏘아보기도 전에 30명의 지도가자 붙잡혀 청조에 의해 즉결 처형. 
   1901년 낙담한 상태에서 인도를 여행, 다질링의 한적한 집에 정착. 히말라야 산맥 언저리에 위치한 이름난 휴양지. 양계초와 화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중국이 서구 열강과 일본에 의해 분할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점진주의가 필요. 비록 만주인일지라도 황제가 복위해서 한족이나 만주족 관리들과 함께 건설적으로 일한다면 강하고 합법적인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 역사는 비약이 없으며 반드시 일정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 전제정에서 공화정으로 건너뛰면 큰 혼란이 온다고. 대동서의 이념들을 구상. 공양삼세설에다 불교사상이나 번역본으로 읽은 서양의 유토피아이념과 융합하여, 1902년 ?대동서?가 완성. 이것이 ?대동서?라는 텍스트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대략의 경로이다.대동서 이후의 궤적 : 보황회를 중국개혁회로. 공교회를 설립. 1908년 이후 광서제에 이어 서태후가 사망하자 지지기반이 와해. 노일전쟁 이후 가장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손문에게 주도권이 넘어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더욱 분명. 다시 위안 스카이의 반동. 1913년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중국으로 귀환. 군벌 장훈과 접촉하여 복벽운동을 하다가 거센 저항으로 실패. 베이징의 미국 공사관에서 일곱 달 가량 피신해 있다가 18년 상하이로. 만년에는 우주여행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바오딩 상공을 직접 비행한 뒤로 마음이 하늘을 배회했다고 한다. 26년 ‘비행학회’를 결성하면서 언젠가는 중국의 역사 전설과 맞먹을 화성의 지리사전을 만들겠다는 꿈을. 서구 천문학이 과학적으로 관찰한 실제 세계와, 수백 만 층의 하늘로 겹겹이 둘러싸인 것으로 여겨 온 전통적인 우주관을 종합하기에. 장개석이 군벌을 몰아내고 상하이로 입성한 27년 뇌출혈로 사망.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조너선.스펜스/정영무, ?천안문?(이산, 1999)를 참조할 것.  

 
  ?대동서?의 사상적 스펙트럼 혹은 사유의 지층들은 상상을 불허하는 폭과 깊이를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무술정변이라는 강유위의 정치적 실천과 분리되지 않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는 도저히 환원되지 않는 광대한 지평을 포괄한다. 기존의 연구들은 대체로 중국의 근대사상이 ‘양무-변법-혁명’이라는 궤적을 밟아나갔다는 정식에 입각하여 ‘자산계급의 관념론과 공상’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것은 이 텍스트를 오로지 강유위의 정치적 실천의 차원으로, 혹은 몇가지 명제로 추상화하여 재단하는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환원이 아니라, 도대체 이 광대한 사유의 지층들이 어떻게 충돌하고 길항하면서,(혹은 지층화/탈지층화하면서) 근대적/탈근대적 문제설정을 만들어가는가에 대한 탐사일 것이다.    

     2.?대동서?의 몇 가지 지층들

     (1)우주적 비전, 그 이념적 근거   

   ?대동서?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놀라게 되는 것은 이 텍스트가 포괄하는 시선의 광할함이다.  시간적으로는 저 아득한 태고적으로부터 천년, 이천 년 뒤의 미래가, 공간적으로는 동.서양 오대주 육대양은 말할 것도 없고, 화성, 목성, 수성 외계까지도 그 시선이 미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 들면서 인간의 삶을 세밀하게 재구할 뿐 아니라, 초목, 가축, 맹금 등의 고통에 대해서까지도 ‘쫀쫀하다고 여겨질 만큼’ 섬세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아마 동아시아 계몽의 담론 가운데, 아니 세계 유토피아 사상서 가운데 이보다 더 넓고 깊은 폭을 지닌 텍스트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같은 지구에 태어났으므로 온 세상 여러 나라의 모든 인류는 나의 동포로서 모습만 다를 뿐 
   이므로 그들과 얼굴을 마주 대하면 곧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도.그리스.페르시아.로마  
   및 근세의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 여러 나라 선철들의 사상의 정수를 이미 충분히 섭취했고  
   그것을 혼과 꿈속에서까지 통하였다. ... 다른 나라가 진화하면 함께 진화하게 되고 퇴보하면  
   함께 퇴보하며, 그들이 즐거우면 함께 즐거워하고 괴로우면 함께 괴로워하게 되었다. 이는 전 
   기가 어디든 통하고 공기가 어디에든 있는 것과 같다. ....화성.토성.목성.천왕성.해왕성 등에 살 
   고 있는 생물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직접 접촉할 수 없다. 어느 때나 이들을 접하게 될 
   지 지금으로는 기약할 수 없고, 내가 인을 베풀려고 해도 거리상 멀어 베풀 수가 없다. 거대한  
   항성과 은하계의 뭇별들, 제천의 모습은 눈으로 본래부터 보아왔고, 상상으로도 항상 더불어  
   노닐곤 했다.“(37면) 

   황당할 정도로 거대한 이런 우주적 비전의 이념적 근저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우선 그의 우주론은 <體用一源> : 체란 대우주의 본체. 그는 원기(元氣)를 본연지체로 보고, 용이란 대우주의 작용으로 이것에 의해 만물이 생겨난다고 보는 것으로 일종의 생동의 철학, 변화의 철학최성철, ?강유위의 정치사상?(일지사,1988), 69면.
. 주역의 변역주의, “隨時易變, 窮卽變, 變卽通”. 그러므로 변이란 천지만물의 보편적 법칙. 
  변하는 것이 거역할 수 없는 이치라면 그럼 대체 어떻게 변하는가? 역사는 크게 거난세, 승평세, 대동세 등 3단계로 나아간다는 것. 이 이론은 공양삼세설의 순환적 시간관을 진화론적으로 펼쳐 놓은 것. 먼저, 공양학은 고대 중국 유가의 금문경학의 주요 경전인 ?춘추공양전?에 공자의 ‘微言大義’가 담겨 있다고 보는 학파. 이 학설은 하휴와 동중서를 통해 해석이 성립되었는데, 공자를 고문경학의 조술자가 아닌, 창교자로서 이해. 강유위는 “동자(동중서)에 의해서 공양에 통하고, 공양에 의해서 춘추에 통하고, 공자의 도를 엿본다”고(최성철, 94면). ?춘추공양전?에는 “所見世 -공자가 몸소 겪었던 시대” “所聞世 - 공자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고 타인의 말을 들었던 시대” “所傳聞世 - 공자가 말로만 듣고, 말한 사람도 몸소 경험하지 못했던 전설의 시대”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 삼세가 바로 공자의 ‘미언대의’라고 보았던 것. 청조의 공양학은 위원, 공자진과 같은 경세가를 거쳐 廖平으로부터 강유위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  강유위는 특히 ?예기? 예운편에서 말하는 대동/소강 ?예기? 예운편 : 옛날 큰 도가 행하여진 일과 三代의 英賢한 인물들이 때를 만나 도를 행한 일을 내가 비록 볼 수는 없으나 삼대의 영현들이 한 일에 대하여는 기록이 있다. 천하의 큰 도가 행하여지자 천하를 공공의 것으로 생각하였고, 어질고 유능한 인물을 선택하여 서로 전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誠信함을 강습하고 화목함을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의 어버이만을 섬기는 일이 없었으며, 또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늙은이로 하여금 그 생을 평안히 마칠 수 있게 하고, 장년은 그 쓰일 곳이 있게 하고, 어린이로 하여금 의지하며 성장할 곳이 있게 하고, 과부, 고아, 질병에 걸린 자로 하여금 다 부양을 받을 수 있게 하며, 남자는 사농공상의 직분이 있게 하면, 여자는 돌아갈 남편의 집이 있었다. 재화가 헛되게 땅에 버려지는 것을 미워하지만 사사로이 감추어 두지 않았으며, 힘이란 것은 사람의 몸에서 나오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그 노력을 반드시 자기 자신의 사리를 위해서 힘쓰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간사한 꾀를 부리는 자가 없고 절도와 난적이 없었다. 따라서 대문을 잠그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세상을 천하가 공도를 같이하는 대동의 세계라고 말한다.  
   지금의 세상은 천하를 공유로 하는 대도는 이미 없어지고 천하를 私家로 생각하여 각각 자기의 어버이만을 친애하며, 각기 자기의 자식만을 사랑한다. 천자와 제후는 세습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성곽과 溝池를 견고하게 스스로 지킨다. 예의를 기강으로 내세워 그것으로써 임금과 신하의 분수를 바로잡으며 부자 사이를 돈독하게 하고 형제를 화목하게 하며 부부 사이를 화합하게 한다. 제도를 설정하여 전리를 세우며 용맹함과 지혜있음을 어질다고 하고 공은 자기를 위한 일에 이용한다. 그런 까달겡 평화는 유지할 수 없으며 전란이 계속되는 것이다. 우.탕.문.무.성왕.주공의 육군자는 그중에서도 출중하여 백성들에게 공도있음을 명시하였다. 아무리 권세가 있는 사람이라도 이와 같은 예를 존중하지 않으면 화를 입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사회를 소강이라고 한다. 

을 삼세설과 연관시켜 해석. 즉, ‘소전문세’가 거난, ‘소문세’가 승평, ‘소견세’가 태평에 해당. 때문에 경전에 나오는 요순시대의 민주와 태평의 이상세계는 공자가 만들어 낸 것, 유교는 곧 공자교. 
  이런 바탕에 입각하고 있는 까닭에 텍스트는 어느 분야를 다루건 간에 거난세에서 승평세, 대동세를 가로지르며 서술되고 있고, 또 대동세상의 구체적 상에 대한 전거를 늘상 공자의 언급에서 끌어내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공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인바, 강유위가 대동세상의 도래를 굳게 믿음과 동시에 단계를 비약하는 어떤 실천도 혼란이라고 본 것도 거기에 입각한 것이었다. 혁명과 반혁명의 굳은 결합! 
  물론 이 텍스트의 장중하고도 완만한 호흡이 단지 공양삼세설에 근거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강유위는 역사적 질곡으로부터의 해방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이 생사의 경계를 넘어 천상을 노니는 것을 꿈꾸었던바, 그것은 겉보기에는 텍스트의 후반부에 형식적으로 접합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역사의 온갖 질곡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귀를 누리는 인간들 혹은 더 나아가 미물들에 이르기까지 생로병사, 느닷없는 천재지변 등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을 주체하지 못하는 ‘비탄어린’ 문체에서 이미 깊이 습합되어 있다. (“승평이라고 떠들어대지만 기실은 세상 천하 집집마다 원망의 기운이 가득 찼고 다투는 마음이 촉발된 것 같아 黃霧보다 더 해롭고 瀛?보다 더 고립되어 있는 듯하다. 백성들이 서로 해치고 나라간에 다투어 죽은 사람이 성안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가 강물을 채우니 만년 동안이나 이어지는 대참극이다. 아, 통탄할 일이로다! 백성이 화를 입음이 극심한데도 구할 방법이 없고, 사람들은 진정한 국가가 없음을 걱정하는데 국가가 있어서 생기는 해가 이와 같다니!”(33) “나에게는 한 가지 큰 소원이 있으니, 그것은 현재 8억이나 되는 여자들을 고통의 늪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다....이 세상에서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자를 어떻게 대해왔는가를 보면 경악과 분노가 치밀어 눈물이난다. 그 불평등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지난날 억울하게 수많은 여자들을 억압해온 고약하고 못된 무수한 남자들을 용납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사유는 정치,역사적 지평을 훌쩍 날아올라 종교적.형이상학적 차원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공자조차도 종교적으로 신봉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해주는 것이라면, 그 근저에 불교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공자에 대한 숭배가 불교적인 것을 흡수하도록 추동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되, 어쨋든 강유위는 모든 억압과 차별이 사라진 대동세상이 오면 그 다음에 인간들이 지향해야 할 바를 나름대로 구체화시켜 놓고 있다.   

     “오직 사람은 공정부의 교육과 양육을 20년 동안 받는데, 그것에 보답하기 위해 20년간 일 
    을 해야 한다. 이것은 난세의 사람들이 부모에게 보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아무도  
    없는 산에 들어가 살기를 원하면 반드시 40세가 지난 후에야 일을 사퇴하고 전적으로 도를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한다. 신선은 대동세인의 마지막 귀착점이다. 몸을 잘 섭생하는 마지막  
    단계에는 매우 특별한 점이 있다. 정신과 영혼을 기르는 것에 전념해서 윤회에서 벗어나 무 
    극의 세계에서 노닐게 된다. 마침내 사람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 
    도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신선학이 융성한 다음에는 불교가 흥하게 될 것이다. 마지 
    막 단계에서는 빛과 전기를 타고 기를 조절해서 지구를 벗어나 다른 별로 가게도 된다.  
    이것은 대동세의 극치이며 인류의 지혜가 또 한번 새로워지는 때이다. (616)
     기독교는 하느님을 받들고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착한 일을 가르치며 죄를 뉘우치는 것과,  
    마지막 심판을 통하여 죄를 짓는 일을 가장 두려워한다. 태평세에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스스로 죄가 없게 된다. 이것은 하늘의 작용이 스스로 그 
    런 것임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을 높이지 않는다.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이 허공에  
    떠서 기다린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지막 날의 심판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가르 
    침은 대동세에 이르면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 회교는 국가와 군신.부부의 윤리와 덕을 말하는  
    종교인데, 일단 대동세에 들어가면 쇠멸한다. 비록 영혼이 모두 하늘을 향해 간다고 가르치지 
    만 그 거칠고 얕은 가르침은 믿을 것이 못되므로 가장 먼저 없어지게 된다. 대동.태평의 이상 
    은 곧 공자의 뜻이다. 대동세에 이르면 공자의 삼세설도 모두 이루어진다. ....... 병이 다 나으 
    면 약이 소용없고, 언덕에 오르면 뗏목 또한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대동세는 오직 신선사상 
    과 불교 두 가지만 크게 성행할 뿐이다. ......두 가지를 비교하면 신선술은 낮은 진리이며, 불 
    교는 높은 지혜이다.“(618면) 
 
  그는 단지 정치적 해방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고, 생사의 경계를 초탈한 무극의 자유까지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2)세계주의적 사유의 지평  
  
  모든 억압과 불평등을 벗어나 인간적인 행복과 즐거움을 만끽한 후 도를 닦아 무극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그의 정치적 ‘프로젝트’라 할 때, 거기까지 가기에는 숱한 난관과 장애물이 있다. 우선 그가 보기에 이 우주에는 온갖 괴로움으로 그득한데, 그 괴로움의 근원은 1)국가적 경계 2)계급의 경계 3)인종의 경계 4)성적 경계 5)가족의 경계 6)직업들간의 경계 7)난계 8)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 9)괴로움 사이의 경계 등 9가지의 경계 때문이다. 이것들이 ‘억만 년업’으로 유전되어 끊임없이 슬픔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동세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구계를 없애고 속박을 풀어야 한다. 
  이 아홉 가지의 경계들은 서로 긴밀히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지만, 일단 계몽의 담론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국가, 계급, 인종과 관련한 언표들이다. 이 세 가지는 근대성의 담론을 구성하는 주요 범주였고, 민족주의나 제국주의 역시 이 개념들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것이었다.  
 
    “국가란 인간이 만든 단체의 시초이므로 반드시 부득이한 것이지만 산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으로는 거대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문명국일수록 전쟁으로 인한 참화는 더욱 극렬했 
   다. (194면)/그러므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자는 군대를 없애지 않으면 안되고, 군대를 없 
   애려 하는 자는 국가를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국가란 난세에는 부득이한 보호책이  
   지만, 평세에는 전쟁과 살인 등 큰 해만 준다. 그러나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들이 항상 <천하 
   국가>라 말하여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으니, 이것이 큰 오류 
   인 것이다. (196면) /대개 분열과 병합의 형세는 자연스런 도태의 현상으로, 강한 자가 병합 
   해 삼키고 약소한 나라는 멸망하는 것 또한 다만 대동의 선구일 뿐이라 생각된다. 독일과 미 
   국이 방국들을 연합해서 국가를 세운 것은 나라를 합병하는 더욱 교묘한 술수로서, 약소국들 
   로 하여금 자기 나라가 망한 것을 잊게 만든다. 앞으로 미국이 아메리카주를 거둬들이고 독일 
   이 유럽을 거둬들이게 되는 것은 이에 달려 있을 것이니, 이것이 점차적으로 대동에 이르는  
   궤도인 것이다.(198면)“

   ?대동서?는 도저히 공존불가능해 보이는 논리들이 상충하는바, 국가에 대한 것도 비슷하다. 앞의 텍스트를 보면 국가라는, 당시로서는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졌던 전제를 간단히 부정해버리고 있는가 하면, 뒤의 부분을 보면 그것이 대국에 의한 소국의 병탄이라는 제국주의적 입장을 ‘대동의 선구’라고 추켜세우고 있다. 그로서는 국경의 장애를 넘는 연합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이에 바탕하여 그는 국가 통합의 세 가지 체제를 제시한다. 1)각국이 평등한 연맹체제 : 거난세의 체제  2)공정부가 통치하는 연방체제 : 승평세의 체제 3)국가를 없애고 세계를 합일하는 체제 : 태평세의 체제 등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인식 속에서 권력과 법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브라만교의 97개 교파에서는 번뇌를 벗어나려면 부득이 출가를 해서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출세간의 법도 강자들에 의해 창출되어 스스로 편하고자 약자를  
    능멸하지 않는 것이 없다. 국법은 군법에서 온 것이니, 실제 내용은 장수의 명령을 준행하고  
    사졸을 권위로 다스리는 법을 국가에 행하는 것이다.”(44면)
  
     “대개 부락이나 방국이라는 이름이 생기고서 곧 전쟁과 살인의 참회가 있게 되었다. 오랫동 
   안 쌓이고 찌들어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어 말만 하면 반드시 가 
   정.국가.천하를 언급하면서 세계 안팎의 공리이기 때문에 없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리 
   고 대의를 펼 때면 반드시 애국을 이야기했으므로 자기 나라를 사사롭게 위하여 남의 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무용이라고 여겨왔는데, 거난세에 있어서는 세상이 하나로 되지 않아서 종족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국이라는 글자가 있어서  
   스스로 국경을 만들어 그 해독이 막대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히 다투는 마음을 갖게하여  
   화목하지 못하게 했으며 영구히 사심을 갖게하여 공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국이라 
   는 글자와 뜻을 깨끗이 없애버리지 않으면 사람마다 다투려는 뿌리, 죽이려는 뿌리, 사사로운  
   뿌리를 어디서부터 없애야 할지 방법이 없고, 성품은 무엇을 통하여 선에 이르게 할지 방법이  
   없게 된다.“(217면)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국가, 법, 애국 등 자명한 공리로 여겨져 온 것들이 간단하게 강자가 약자를 통치하기 위한 도구로써 파악된다. 그 연장선에서 다른 종류의 위계 역시 당연히 부당한 것일 수밖에 없다. 즉, 국법이 그러하듯, 신분의 위계, 가부장제의 위계, 성적 위계 등 또한 “압제가 오래 계속되다가 드디어 도의로 굳어져 버린”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유명한 명제가 연상되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모두 하늘에 근본을 두었으니 모두가 형제이며 실로 평등한데, 어찌  
   함부로 등급을 나누고 경중을 두어 배척할 수 있겠는가?“ (258면)

  그래서 앞에서 제국주의적 확장을 세계연합의 징조로 환영하는 한편, 세계연합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민권이 신장되어야 한다는 입장도 함께 주창한다. 즉, “국가에는 군주의 권한이 있어 각자 사사로이 하여서 합하기가 어렵다. 만약 민권이 보장된다면 연합 또한 쉬울 것이다. 백성이란 단지 자기의 이익만을 구하므로 인인(仁人)이 대동의 즐거움과 이익을 널리 알리면 저절로 인심에 합해질 수 있다. ....민권이 흥기하고 헌법이 흥기하는 것은 뭇 균산설에 합치하는 것으로, 모두 대동의 선성이다. 만약 헌법을 제정하여 군주가 이미 권한이 없다면 또한 민주주의와 같은 것이니, 그때가 되면 군주라는 명칭이 또한 서서히 없어지면서 대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식으로. 그리고 이때의 민권은 단지 중세적 신분질서의 타파뿐이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격화될 빈부의 격차로 인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장벽의 철폐까지도 아우르는 개념이다. 
 
    “빈부의 불균형은 마치 하늘과 땅처럼 격차가 생길 것이다. 더욱이 옛날에는 토지를 넓혀 귀 
   천을 논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 여겼으나, 앞으로는 공장과 시장을 넓혀 빈부를 논하 
   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옛날처럼 국토를 확장하려는 정열은 식어지고 새롭 
   게 나라를 확장하는 법이 출현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방법이 인간에게 줄 재앙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생존경쟁에서 불평등하면 울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형 
   세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노동자들이 근년에 무리를 지어 다투고 업주에게 대항하는 것은 다 
   만 시작에 불과하다. 노동자들의 조합 결성은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이 분명하니, 아마도 더욱 
   큰 화를 초래할 것이다. 이제 다툼은 강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경제력의  
   차이에서 있게 될 것이다. 이후 백년간 전세계는 이 점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근 
   자에 경제학설들이 더욱 분분하고, 균등한 분배를 주장하는 경제학이 더욱 번성하는 것은 바 
   로 후대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 가정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사유재산이  
   그대로 존속된다면 이러한 몹시 큰 전쟁을 고루 다스려 구제할 방도는 없을 것이다.”(500)


   그는 앞으로 전세계가 사유재산을 둘러싸고 계급적 분화가 가속화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계급철폐는 사회주의 혹은 무정부주의의 요소까지 흡수하고 있다.(cf. 19세기 후반 중국에 러시아 무정부주의가 수용되었다고 함)   
  인종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것 역시 극히 자연스럽겠으나, 주목할 것은 거기에는 철저한 인종주의가 담겨있다는 점이다. 즉, 그는 인종차별을 극렬 반대하는 한편, 대동세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인종개량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흑인종에서 황인종으로, 그 다음에 다시 백인종으로. 이것은 이미 백인종의 문명이 우월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인위적인 힘을 가해서라도 통일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듯 그의 세계주의는 국가, 인종 혹은 민족, 계급 등 근대를 구획짓는 것들을 넘어섬으로써 놀라운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한편, 식민지적 병합이나 인종적 위계를 그대로 추인하는 모순을 동시에 노정한다. 
  
    (3) 미시적 욕망의 자유로운 흐름

   어떠한 종류의 위계나 차별도 없어야 한다! 이 명제는 인간의 본성은 모두 동일하다는 관점의 소산이다. 강유위는 인간의 본성은 윤리적으로 중성이라는 告子의 견해에 입각하여, 생이란 타고난 그대로의 활동, 즉 생에의 욕구일 뿐이어서 선악, 도덕의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 최성철, 앞의 책, 81면.
 고자의 말을 인용하여, “食色이 성이다.” “인간에게는 성정이 있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정치의 목적은 오직 인민에게 낙을 주는 것일 뿐이다.

    “무릇 인도(人道)에는 다만 자기에게 맞고 맞지 않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맞지 않 
    는 것이란 괴로운 것이고, 자기에게 맞추어주고 맞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란  
    사람을 기준하여 만들어진 것이나, 사람을 기준으로 한 도에는 고와 낙이 있을 뿐이다.(39면)  
    사람들의 성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지만 단언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인도에는 괴로움을 구 
    하고 즐거움을 버리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법을 만들고 종교를 창시하여 사람들에게 즐거 
    움을 주고 고통을 없애준다면 선인 중의 선인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움이 많게 해주고  
    괴로움이 적어지게 해줄 수 있다면 선인이지만 아직 완전한 선인은 아니며,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이 많고 즐거움이 적게 한다면 선인이 아니다.”

    “교화가 진보되었는지 퇴보되었는지, 그리고 정치가 문명적인지 야만적인지의 차이는 모두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느냐 아니면 즐거워하느냐에 달려 있다.” (359면)

   도의 기준, 진보와 퇴보, 문명과 야만, 이 두 극단을 구분하는 것은 오직 苦와 樂일 따름이다.  이것은 일종의 스피노자식 윤리관이라고 할 수 있는바, 욕망의 보편적 긍정이라는 특이성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묵자에 대한 장자의 평가, 곧 “그 도는 훌륭하다. 그러나 천하의 인정과 위배되어 세상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과도 괴리되어 왕도와도 거리가 멀다.”(43면)는 것에 동의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즐거움의 가장 원초적인 것은 성적 욕망이다. 이 지점에서 전통 유학은 늘 ‘비린탕척’이나 ‘온유돈후’라는 교화적 관점으로 미끄러졌는데, 강유위는 그러한 주자학적 금압을 돌파하여 과격할 정도로 욕망을 긍정한다.   
  
     “인간은 지각이 있는 동물이어서 반드시 혼자인 것을 싫어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한 
   다. 또한, 사람은 욕망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짝을 지어 서로 합하기를 좋아한다. 도 
   에는 음양이 있고 짐승들에게는 암수가 있으며 날짐승도 암컷과 수컷이 있고 꽃과 나무에도  
   또한 그것이 있다. 인간에게 남자와 여자의 바탕이 있는 것은 곧 하늘이 날 때부터 그렇게 하 
   도록 한 것이다. 인도라는 것은 천도로 인하여 움직이는 것으로, 그 바탕을 잘 펴고 드날려 발 
   휘시키면 즐겁게 되고 그 욕망을 꼭 닫아두고 막아버리면 답답하게 된다. 먼 옛날에는 남녀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음란함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성인이 천도에 순응하면서도 인욕을 감안하 
   여 볼 때 그치게 할 수 없음을 알았으므로 제도적으로 부부를 맺어서 서로 합치게 하였다. 처 
   음에는 천성에 따라 서로 기쁘고 서로 즐겁게 한 것이었고, 이어서는 가정을 꾸며서 서로를  
   보호하고 사랑하게 하였다.”(90면)

  그런데 역사는 잘 알다시피, 이와는 반대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여성의 욕망이 극도로 억압되었을 뿐 아니라, 남성 역시 제도와 관습의 굴레에서 성의 자유로움을 저당잡힐 수밖에 없었다.
 강유위는 문자와 산수.음악,미술 등 인류의 문명이 모두 여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정도로 여성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그 이후 그것들이 남성들에 의해 전유되면서 얼마나 가혹하게 여성들이 억압을 당했는지에 대해 분노에 찬 슬픔을 감추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남성이 여성을 억압한 것은 강한 힘을 소유한 남성들이 여성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무릇 남자가 이미 강한 힘으로써 여자를 부리고 또 남자의 성을 종족에게 전하게 되어 남자 
   는 마침내 완전히 인도의 주인이 되고 여자는 그 종이 되었으며, 남자는 완전히 인도의 임금 
   이 되고 여자는 그 신하가 되었다. 대세가 압박하고 옛 풍속이 쌓여서 여자는 마침내 완전히  
   남자의 사사로운 소유물이 되었다. 남자 역시 여자가 한 사람의 사유물이라고 생각하여 여자 
   의 공적인 지위가 향상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미 사유물이 되었으니 명분상으로는 비 
   록 동등하다고 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노예나 물건과 같다. (352면) 여자의 음란한 행위를 방 
   지하는데에 이처럼 무거운 형벌을 가한 것은 여자를 한 남자의 사유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남자의 사유물이 어떻게 나라일에 간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국법도 특별히 여자를 사유 
   물로 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하여 편벽되고 혹독한 행위로써 음란의 근원을 방지하도록 조 
   장한다. ..그러나 남자는 자기 멋대로 음란한 행위를 한다. (355면) 가령 모든 것을 남자와 마 
   찬가지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주거나, 혹 각기 명분이 있거나 혹은 각기 진심으로 원하는  
   바를 들어준다면 어찌 쟁란이 일어나고 서로 죽이는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러므로 법률 운운 
   하는 것은 모두 위로 남주여종의 옛 풍속을 계승한 것이며, 예의 운운하는 것도 역시 위로 남     강여약.남성여부의 유풍을 따른 것일 뿐이지 공리는 아니다. .....일부종사의 도리는 나중에 생 
   겨났다. 그리하여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고 말하게 되었는데, 이는 오직 열녀라야 그     런 것이다. 계속해서 사람들은 남편이 죽은 뒤 수절하다가 굶어죽는 것을 사소한 일로 여기고,     절개를 잃는 것만을 큰 일로 여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수절하는 과부가 도처에 즐비하게 되었 
   다. 중국에서도 월지방 여자들이 지켜야 할 도리는 더욱 엄격하다. 내 고향 친척들 중에 눈에     뜨이는 여자는 모두 과부다. (356면)

  요약하면, 남성이 여성을 사유물화하면서 욕망을 억압하기 위해 제도나 풍속을 조장,강요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사실 최근의 페미니스트들의 급진적 논리와 거의 간극이 없다. 그만큼 그는 여성의 억압과 고통에 대해 깊은 공감을 표명했는데, 그 이면에는 욕망은 결코 금지될 수 없다는 관점이 자리하고 있다. 즉, 그가 공자가 ?예기?에서 말했듯이, ‘여자를 홀로 우뚝 서게 하고’, ‘안에는 원망하는 여인네가 없게 하려면’ 무엇보다 가족제도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단지 여성해방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남성 또한 숱한 금지의 망 속에서 압박당하고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가족제도는 이처럼 그 내력이 오래되었지만, 중국에서처럼 발달하고 구비되었으며  
   역사가 오래 된 나라도 없을 것이다. 중국은 인구로 볼 때 유럽 나라들의 수만 배나 되며, 전 
   세계인구의 1/3이나 차지하는 으뜸가는 나라다. 이것은 모두 부부.부자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 
   제도에서 연유하는 것이며, 공자가 어지러운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마련했던 제도다. ... 
   그러므로 부부.부자.형제의 관계를 모으고 무한히 확대시키려면 반드시 중국의 가족제도와 같 
   은 방법을 실행해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만 편파적으로 친하고 사랑을 주 
   면 결국 다른 편에 대해서는 소원해지고 미워하는 사이가 되게 마련이다. ...오랜 동안 종적인  
   통합에 익숙해지게 되면 국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고 다만 성만을 중시할 뿐이다.(386-7면)  

    “중국의 벼슬하는 집안에서부터 서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문밖에서 보면 화기애애하지만 실제 
   로는 원망의 기운이 가득 넘치니 모든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만     석군의 가규나 유씨의 세범과 같이 겉으로 효성과 우정으로 이름난 집안일수록 집안의 원망은  
   더욱 심하다. 국가에는 태평한 날이 있어도 집안에는 태평한 날이 없다. (408) ...그러므로 브라 
   만교의 96도는 석가모니의 출현으로 어쩔 수 없이 출가의 법이 되어 육친의 관계를 끊고 그로  
   인한 번뇌의 소멸을 추구했다. 부처가 어찌 부모의 은혜를 끊고 친척의 사랑을 버리는 것이  
   잔인한 일이라는 것을 몰랐겠는가? 그러나 세상의 번뇌와 원한으로 안간의 순수한 영혼을 잃 
   기만 하고 또한 가족과도 화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연히 집을 나선 것이다.(411)
   ->남의 물건을 탐내어 사람을 속이는 일. 도둑질.살인.약탈 등은 죄악 중에서도 큰 죄악이다.     이런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 원인을 보면, 모두 자기 집안을 부유하게 만들려는 동기에서 비롯     된다.(414면) 
   ->인간의 성품이 모두 선하고, 인격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모두 넉넉한 생활을 하며, 모두 건 
   강하고 인품이 온후하고, 풍속과 교화가 모두 훌륭한 세상이 바로 태평세다. 그러나 이것이 실 
   현되려면 가족제도를 폐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가족제도란 거난세와 승평세에서는 필요 
   한 제도이지만, 태평세에서는 단지 큰 방해물일 뿐이다.....태평세에 이르고서도 가족제도를 그 
   대로 둔다면, 이것은 마치 흙은 지고서 샘을 파나가는 격이요, 또한 땔나무를 가지고 불을 끄 
   려 하는 것과 같아서, 갈수록 어려워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421면) ....이렇게 하면 모든 사람 
   이 출가하는 괴로움 없이도 가정을 떠난 즐거움을 누리게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인간이 만 
   든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낳은 존재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늘에 속해 있다. 또한, 공립정부 
   는 사람들이 공공으로 세운 것이니 공립정부는 마땅히 공공으로 양육하고 교육하며 돌봐주어 
   야 한다.(422)”

    “태고대에는 어머니의 성을 따랐었다. 그 시대에는 어머니만 알았지 아버지의 존재는 몰랐다.  
   후세에 와서는 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되었는데, 부모가 똑같이 자식을 사랑해도 아버지의 영 
   향력을 더 존중한 결과였었다. 아버지의 성을 따르든, 어머니의 성을 따르든 부모가 양육해준  
   공이 크므로 자식은 마땅히 부모의 성을 따라야 한다. 따라서, 승평세에서는 부모의 두 성을  
   다 따서 복성으로 하고, 대동세에서는 양육을 공공기관에서 전적으로 하므로 부모 중 어느 쪽  
   성을 따라 구분지을 필요가 없다. 자식 때문에 아버지가 울고 어머니가 통곡하는 때는 거난세 
   이고, 부모를 모두 따르는 때는 승평세이며, 부모의 성을 버리는 때는 태평세다. 성이 있으면  
   부모가 있고, 부모가 있으면 사사로움이 있어 천하에 공리가 행해지려면 반드시 성이 없어야 
   겠다. 각 인본원에는 어디든 갑.을 등의 호수가 붙어 있고, 인원에 따라 증설한다. 인본원 각  
   방에는 제각기 어느 날에 태어났다는 숫자가 있고, 출생한 도.원.병실.생일 등의 명칭가 숫자들 
   이 이름을 대신한다.”(451)


  이 지점이 대동서가 지닌 가장 혁명적인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사실 이것이야말로 주자학적 금욕의 도덕을 넘어설 뿐 아니라, 욕망의 자기통제라는 근대적 표상체계로부터 탈주하고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의 대중심리?로 잘 알려진 라이히가 소리높여 주장했듯이, 가족제도는 성의 억압에 기초하고 있고, 그 억압은 스스로의 죽음과 지배를 욕망하는 파시즘을 불러들인다. 말하자면, 가족제도가 있는 한 여성을 비롯하여 인간의 욕망은 기본적으로 억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식의 문제설정은 30년대 라이히의 불운이 잘 보여주듯이(그는 프로이트주의자들에게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에게서도 추방되었다) 근대적 사유의 외부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가족을 통해 각 구성원들을 영토화시키는 근대권력의 속성을 염두에 둘 때, 부부관계의 해체를 주장하는 강유위의 구상은 진정, ‘전복적’이다. 
  그는 부부관계의 해체를 자기가 좋아하는 상대와의 교합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 금지에 대한 전면적 거부!
  
   “보통 사람의 정으로써는 다른 얼굴을 보면 마음도 달라지는 법이고, 오래되면 싫증이 나서  
  새로운 상대를 바라게 되고 아름다운 상대를 좋아하게 마련이다. 예전에 합약하여 이미 가인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 재능과 학식이 높고 모습이 아름다우며 성품이 온화하고 재산이 풍 
  부한 상대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애모하는 마음이 생기고, 상대를 바꾸어 교제하기를 바랄 것 
  이다. 그리하여 상대를 만나는 데에 따라, 또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좋아하는 사랑의 유형이 달 
  라질 것이므로, 반드시 그 욕구를 좇아 옛 사람을 버리를 새 사람을 얻고자 할 것이다. (371면)  

    “만일 영원히 기쁨을 같이할 사람이 있다면, 그 희망에 따라 자주 합약을 갱신하여 계속하면  
   서로 종신토록 같이 살 수 있는 일이므로 인정에도 합당하고 그들의 자유도 보장되는 셈이다.  
   그러면 그 규칙을 지키기가 쉽고 새로운 즐거움도 있을 것이며, 기한을 채우기도 어렵지 않다.  
   약속한 기한은 너무 짧게는 하지 않음으로써 인종이 마구 섞이지 않게 되고, 욕심이 많은 사 
   람이라도 건강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뜻이 맞으면 평생 같이 살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새로운 교제가 생기면 상대를 바꾸는 것을 허락한다. 혹은 예전에 좋아하던 사람과 다시  
   맺어지기를 원해도 역시 약속을 맺는다. 이렇게 한다면 모든 것이 자유로우며, 인정에 순응하 
   고 천리에 합당한 일이라 하겠다. (372면) /뜻이 맞으면 머물러 살고, 뜻이 맞지 않으면 떠나 
   가며, 마음의 불행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합당한 일이다.”

    “이제 서로 좋아하는 마음에 따라서 기한을 약속하고, 합치고 헤어지는 것을 뜻대로 할 수  
   있게 된다면, 뜻이 맞으면 약속을 계속하여 영구히 화합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맺어지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약속을 바꿀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사랑하고 사모하는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어 더욱더 즐거워질 수 있다. 그러나 싫어지면 헤어질 수도 있으니, 합법적으로 허락되는 일 
   이며 도덕적으로도 어긋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입장에서 이런 일들을 항상 보아 익 
   숙해지면 마을사람들이 욕하는 일도 없고, 관청에서 관여하는 일도 없으며, 신문에서 논평할  
   틈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 우스갯거리로 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은 싫은 것 
   을 참고 견뎌야 할 필요가 없으니, 이 세상에서 이혼이나 절교의 괴로움도 없어진다. 누구나  
   바라는 바를 얻고 구하는 바를 얻어 즐기고 싶은 대로, 또 좋아하는 대로 따를 수 있으니 이 
   야말로 여러 악기가 화음을 이루듯 즐거운 일이다. 비록 오늘은 계속적인 합약을 맺지 못했다  
   하더라도 훗날을 다시 기약할 수 있고, 때때로 다시 만나게 되면 마치 옛친구를 다시 만나듯  
   그 사이는 더욱 친근해질 것이다. 어찌 옛풍속에서 한번 이혼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고, 마 
   치 원수처럼 대하는 것과 같겠는가? 이미 인권의 자유를 보장하고 인도적인 면에서 개인의 뜻 
   을 만족시킨다면, 비단 남녀간에 상대방을 원망하는 슬픔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음탕한 마음 
   과 간통의 문제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둑을 높이 쌓을수록 수위는 더욱 높아지며, 작은 개미구멍이라도 막지 않으면 무너 
   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음란한 풍조는 막으면 막을수록 더욱더 성하는 것이니, 차라리 둑을 없 
   애버리면 물이 넘칠 염려도 없어질 것이다. 이제 대동세가 되면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할 수 있게 되어 서로 사랑한다면 합약을 맺어 그 욕구를 달설할 수 있을 것이므로  
   간음이란 있을 수 없다.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간음하는 일이 벌어지며, 그래 
   서 거난세와 태평세에서는 형벌로써 이를 엄히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나 대동세에는 모든 사 
   람이 바라는 일을 쉽게 이룰 수 있으며 누구나 배워서 알게 될 것이므로 그 욕망도 담담해질  
   것이다. ....여자가 학교에 입학하지 않았거나 학업을 마치지 못했으면 졸업증서를 받을 수 없 
   으며, 자립할 수 없으므로 남편의 부양에 의지해야 하니 이 경우에는 독립권을 부여할 수 없 
   다. ...예컨대 여자가 평생 남편의 부양을 받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버림을 받을 경우 그 보상이  
   공평하지 못할 것이다. 혹은 남자가 여자를 의심하여 버릴 경우에도 역시 그 후의 생활문제가  
   불인하다. 그러므로 여성이 자립할 수 있으려면 학문과 능력을 겸비하고, 공민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그때까지는 잠시 남편에 의존하여 부양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인정이 
   라고 하겠다. 그리고 여성으로 하여금 독립적인 권리를 갖도록 하려면 더욱더 학문에 노력하 
   도록 권장하여야 한다.” (375-6)


   그렇다면 아이의 양육문제는 어떻게 처리되는가? 그것은 공민이라는 관념안에 담겨 있다. “이제 태평세에 이르면 남녀가 평등하여 각자 독립적이며, 아기가 태어나면 공공의 집에서 양육되므로 어느 한 집안의 사사로운 개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민이 된다.”(373) 그렇기 때문에 잉태순간부터 20세가 되는 시기까지 공정부에서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돌봐준다. 이렇게 되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사랑과 섹스를 통해 겪게 되는 구속은 전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동세에 있어서 남녀의 관계는 개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으면서 세상의 관습에 막힐 것도 없고 명분이나 한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오직 두 사람의 애정에 속하는 일인 것이다.”(581)
   그럼 동성애는? 물론 그것 역시 긍정되어야 한다. 
  
    “노인들도 정열을 가진 사람이므로 양로원 안에서 남녀가 동거하는 것을 허락한다. ..남자끼 
    리 동거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483)

    “늙은 미남들 가운데 어린 남자애들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었다.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비록 음양의 정도에는 벗어나는 일로서 사람몸에 해로움을 끼칠 수도 있 
    으나, 색을 좋아하여 해로움을 당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남녀의 관계가  
    자유롭게 된 상태에서 자유스럽게 사귀는 것은 금지할 이유가 없다. 강제로 교합한 사이가  
    아니면 금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진리에는 본래 선과 악이 없는데, 여기에다 시비를 붙인  
    것은 모두 성인들이 그런 것이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악이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선이라 보인다. 옛날에 남자들의 동성연애를 금지한 까닭도 또한 한 가지에는 좋 
    아도 다른 것에는 나쁜 것으로, 후손이 끊겨 인구가 줄어들까 걱정하여 금지한 것이다. 태평 
    세의 남녀는 평등하고 서로 간섭을 하지 않으며 자유롭다. 의복에도 차이가 없고 직업을 갖 
    는 것도 모두 같아 더 이상 남녀의 차이가 없다. 또한 남녀의 교합이나 동성끼리의 교합에도  
    차이를 두지 않는다. 이때 사람들은 매우 안락한 생활을 하므로 인류가 번영하지 못할까 걱 
    정할 필요는 없다. 서로 성적인 관계를 갖는 사람들이 남녀끼리든 동성끼리이든 모두 정책적 
    으로 인정한 것이므로 다른 논쟁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짐승과 교합하는 것은 만물 
    의 영장인 인간의 종족을 크게 어지럽혀 퇴화시키는 것으로 엄히 금하지 않을 수 없다.          (583)”

   분자적 욕망의 자유로운 유로! ?대동서?가 지닌 가장 고유한 특이점이 이것일 터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성적인 욕망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가 근대 권력의 주요 핵심이라고 할 때, 대동서의 이런 언표들은 68년 5월 혁명 때 제기된 슬로건보다 더 급진적인 것들이다. 국가와 계급의 철폐가 20세기초 이후 혁명가들의 거대담론과 연관된 장위에 있다면, 욕망의 해방이라는 측면은 미시정치적 영역으로 그것이 본격적으로 담론의 장에 솟아오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떻게 이런 상상을 선취할 수 있었을까?  

     (4) ‘균질화된 세계’, ‘닫힌 체계’로서의 대동세 

   모든 위계와 차별이 철폐되고, 각 개인이 자신의 욕망의 흐름에 따라 즐거움을 최대한 증식하는 세상. 이것이 대동세라면 대동세는 일종의 카오스가 아닐까? 아마 강유위로서도 이 점이 심히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그런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 그는 차별과 함께 차이조차도 최소화하려는 작업을 수행한다. 앞서도 이미 말했듯이, 예컨대, 인종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종을 개량해서 균일화해야 한다. 즉, 거주지를 이동하거나 혼인을 통해 황인종에서 백인종으로 일치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흑인종, 갈색인종은 아무리 해도 야만의 상태, 미개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원초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바, 이것은 하나로 통일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대동 후 천년 동안 동화를 시행하면 전지역 인종의 얼굴색이 같아지고 모습도 동일하고 크 
   고 작음도 같아지고 지혜도 같아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인종의 대동이다. 하나로 합쳐 같아지 
   는데 천년이면 된다. 천년이면! 이때가 되면 전세계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고 훌륭해져서 지금  
   의 관점에서 보면 신선인 듯 바라보일 것이다.(268-9면)”

  말하자면, 그가 생각하는 대동은 사물들의 차이를 동일한 차원으로 균질화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재능과 성격.지식.형태.체격에 평등하게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평등하게 하는 것”(275면)이 대동인 것이다. 그래서 <개량인종>을 위해 최선을 다하되, 불가능할 경우, 혹은 치명적 결함이 있는 경우는 인위적으로 생식을 막아 도태시키는 방법도 불사한다. 그렇게 본다면, 그의 대동이념에는 “너절한 흑인의 못된 종자들이 우리 좋은 종자들을 더럽히고 퇴화시키게 할 수는 없다. (282면)”는 강한 인종편견이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또 그것은 결국 현금의 인종차별을 불가피하다고 묵과하는 실천적 태도와 불가분하다.(->언청이 등 다섯 감각기관에 나쁜 병이 있거나 폐결핵 따위에 걸려 신체가 완전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남녀간에 교합의 약속을 맺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그 종자를 도태시킨다. 그래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청에 보고하여 남자끼리 서로 교합의 약속을 맺는 것은 들어주어도 된다. 그러나 이때에는 로봇이 사람을 대신한다.(477))
  국가와 민족을 연합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문자를 일률적으로 통일시켜야 하는데, “이미 전세계의 사람을 합쳐 학식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음악과 언어에 통달한 철학사들로 하여금 연구하게하여 혀놀림이 가장 가볍고 맑으며 원활하고 간단하고 쉽게 하는 자를 택하여 한 음을 골라서 공통음을” 만들고, “또 한 지역을 택하여 높고 낮은, 맑고 탁한 음으로써 가장 쉽게 통하는 것으로 자모를 만들게”(219) 해야 한다. 
  사유재산을 철폐하기 위해서 모든 산업분야를 일률적으로 통제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이것은 일종의 재영토화하려는 강렬한 욕구의 투영인데, 그런 지향은 각각의 구성원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가 이상적인 타입으로 설정한 인류는  건강한 신체, 훌륭한 자질, 뛰어난 인품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태아때부터 정교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인본원에 들어가면 몸가짐을 조심하고, 욕심을 적게 가지며, 도를 배우고, 신체를 잘 보양      하는 것이 가장 큰 덕목이요 준수사항이다. 비록 남자들이 인본원에 출입하는 것을 허용하더 
   라도 교합은 의삭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임신중에는 교합을 조심해야 하므로 되도록 한 상대 
   와 교합하도록 하고, 횟수와 사람수를 한정해서 태아에게 지장이 없도록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는 교합을 금지시켜 태아를 보호한다. ...출산은 여자의 중대한 임무이므로 공공정부는 임부를  
   존중하고 공경해야 한다. 아이를 가진 사람은 공직에 종사하는 관리와 같아 성실히 공무를 수 
   행해야 한다. 임부는 즐겁게 마음을 가져 사특함이 없도록 하고, 정욕으로 인해 몸가짐을 흐트 
   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435) 그러므로 사사로운 즐거움을 좇아서는 안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과의 교합을 끊어야 한다. 그렇지만 10개월간의 금욕이란 어려운 일이고, 특히 이 때문에  
   낙태하는 일이 잦아지면 도리어 큰 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일로 욕망을 대체시켜주어 
   야 한다. 꼭 부득이한 경우에는 가능한 달수 안에서는 교합을 허락하고, 그 대신 상대를 바꾸 
   어서는 안된다. 임부는 오로지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난잡한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만약 상대 
   방 남자가 병이 들거나 죽는 우환이 생기면, 관청에서는 임부로 하여금 그와의 왕래를 중단시 
  키고 다른 남자와 교제하게 하여 임부의 감정을 조절한다. 모든 법에는 폐단이 있고, 이것 역시  
  부득이한 방법이라 할 것이다. (436)
 
   “육영원은 어린아이에게 가장 적합한 구조로 만든다.... 장식하는 그림이나 조각 등에는 모두  
  인애롭고 자상한 모습을 담아 어린 아이들에게 어진 마음을 길러주도록 배려한다. 육영원 안에 
  는 싸움.도둑질.사기 등등의 나쁜 일들은 완전히 제거해서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사악한 요소가  
  스며들지 않도록 한다. 어린아이들의 노래와 음악에도 역시 마찬가지다.(455)

   “아동이 나다니고 놀고 춤추는 등의 놀이를 너무 속박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너무 자유롭게  
  풀어주어 악습에 빠져들게 해서도 안된다.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도 체력 신장을 우선으로 하고,  
  지혜의 개발은 그 다음으로 미룬다. 학습과제를 적게 하고 활발하게 놀게 두어 혈기를 왕성하 
  게 하고 신체를 튼튼하게 도와준다. 그러나 수시로 감시를 하여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한 
  다.“(459)

   “대동세에는 전문적인 기술이 아닌 직업은 하나도 없고, 전문적인 학식을 갖추지 않은 사람도  
  없다. 세상이 발전되어갈수록 분업이 이루어지고, 연구는 더욱 세밀해지며, 연구의 방법도 더욱  
  정밀해진다. ... 배우지 않으면 놀지 못하고, 배우지 않으면 무리에 끼지 못하며, 몸을 나란히 하 
  여 함께 나아가되 물러서는 일이 없고 앞서가는 일도 없으며, 모두가 머리를 나란히 하여 향상 
  을 꾀한다.” (467)
    
   결국 다시 선악과 도덕이라는 규준으로 되돌아가고 마는 것인가? 욕망을 자유롭게 흐르게 하되, 그것을 높은 도덕의 수준에서 향유할 수 있도록 철저히 점검, 양육되어야 한다?! 이렇게 수태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보호, 관리되는 이른바 생체권력이 작동하기 때문에 인간의 유전적 형질의 우열여부, 건강체크, 등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절대적 권리를 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다시 근대 계몽담론의 자장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만다. 건강한 신체, 순결한 정신, 전문적 기술, 욕망의 자기조절 등은 계몽의 사상가들이 근대인에게 요구했던 바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면밀하게 통제, 관리된 균질화된 욕망이란 이미 ‘타자’에 의해 주입된 것이지, 예기치 않은 생성과 변이를 만들어내는 바의 그것은 아니다. 
  이러한 균질화된 평등에의 희구는 환경에 대해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대동세에는 전지역이 대동하므로 국토의 구분, 종족간의 차별, 군사적인 다툼이 모두 없어진 
   다. 따라서, 산을 나누어 요새를 만들거나 물을 이용하여 수비할 필요가 없으므로 험란한 지형 
   을 모두 깍아 평탄한 길로 만든다. ....그리고는 이런 곳을 정리해서 주거지를 만들고, 터널을  
   뚫고 길을 내어 도회지로 만들고 고을까리 서로 통하게 한다. 철도를 놓아 끊어진 골짜기를  
   잇고, 수레와 말이 사막을 왕래할 수 있다. 또한 문명이 발달해서 새 기계가 많이 나와 동떨어 
   진 지역이 없어지고 문명의 혜택이 골고루 미치게 된다.”(539)

    “대동세가 되면 공정부는 산을 개간하고 길을 만들며, 사막을 변화시키고 바다를 건널 수 있 
    게 하는 것을 제일 큰 일로 삼는다. 인구가 날로 많아지고 사용되는 물건은 더욱 번잡스러워 
    지는데 이때가 되면 깊은 산, 굽은 계곡, 막다른 샘, 깊은 밀림 속이라고 통하지 않는 곳이  
    없고 이 역시 한 동네와 같아진다.(554)”

    “대동세가 도래하면 지구상의 짐승 중에 사납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동물은 멸종시킨 
    다.... 이러한 때가 오면 전 지구는 인간이 완전히 다스리는 땅이 된다. 짐승과 인간의 조상은  
    같지만, 둘 중 재주와 지혜가 조금 아래인 쪽이 전멸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진화에 있어  
    우수한 종자가 남고 열등한 종자가 멸한다는 원리가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사람에게 잘 길 
    들여진 동물은 살아 남아서 종자가 번식되나, 사람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은 멸종하게 되 
    니, 사람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큰 매나 독수리같이 사람을 해치는 새는 멸종 
    시킨다. 이것은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 부득이한 일이다. 만약 공작이나 꿩.백학.구관조.화미  
    등 그 소리가 아름다워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 새들은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다.“(598-9)

   철두철미한 인간중심주의! 인간을 위해서는 울창한 삼림이나 사막은  모두 개간되어야 하고, 인간을 위협하는 사나운 맹금들은 멸종되어야 한다. 강유위는 스스로 진화론은 인간의 경쟁을 부추기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결국 더 나은 종을 위해 열등한 것들은 사라져야 한다는 식으로 진화론을 더욱 속류적으로 추인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환경을 오직 인간에 종속시켜 배치하는 이러한 관점은 근대 기계문명에 대한 맹목적 찬양과 맞물려 있다. 

    “대동세에는 사람들이 모두 공공의 집에 사므로 개인의 집을 따로 지을 필요가 없다. 일하는  
   곳 외에는 큰 여관이 있을 뿐이다. 그때 여관은 매우 크므로 수천만 개의 방이 있고 손님의  
   처지에 따라 여러 등급의 객실이 준비되어 있다. ...행실.비실.해선.비선 네 가지가 제일 상급에  
   속한다. 행실은 통로에 모두 큰 궤도를 만들어놓아 큰 차가 지나갈 수 있다. 차의 넓이는 수십  
   장이며, 길이도 수백장이고, 높이도 수장이나 되어 마치 지금의 큰 빌딩에 있는 정교한 방 같 
   은데, 전기로 달리게 하여 아무 곳에나 갈 수 있다. ...예전의 건물은 꽉 막혀 있어서 움직일  
   수 없어 하늘의 맑은 공기를 호흡할 수 없었다. ..이것은 주거 생활에서 느끼는 수천 년간의  
   고통이었다. 그러나 건물을 옮겨가며 놀 수가 있다면, 마음에 딱 맞는 흡족한 일이다. ...태고대 
   의 유목생활이 중세에는 가옥에 정주하는 생활로 되었고, 태평세에서는 다시 나라를 돌아 다 
   니는 생활로 바뀌게 되니, 주거환경이 마치 순환하는 것처럼 된다...비옥과 비선은 정밀하게 만 
   든 기구인데, 나날이 규모가 크게 되어 하나의 작은 집을 이루게 된다. ...공중에 떠다닐 때는  
   식량을 준비.휴대하고 한가하게 경치를 구경한다. ...태평세의 사람들은 산 위나 물 가로 옮겨 
   다니며 살기를 원하지 한군데에 정착해서 살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태평세의 사람들은 유 
   람하기를 좋아하고 한곳에 머물러 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풀과 나무는 생물 중 가장 어리 
   석기 때문에 한곳에 박혀 움직이지 못한다. 양과 돼지는 풀과 나무보다는 나아서 움직일 수는  
   있지만 멀리 갈 수가 없다. 그러나 대붕과 황곡은 한 번에 천리를 간다. 古世에는 늙어 죽도록  
   고향을 떠나지 못한 것이 어리석은 초목같았고, 중세에는 유랑하여 마치 양과 돼지 같았으나,  
   태평세에는 모든 사람이 대붕과 황곡 같아질 것이다. ...공공장소와 여관은 여름에는 모두 기계 
   를 설치해서 물을 막아 바람을 일게 하여 서늘한 공기가 뼈에 스미도록 한다. 겨울에는 전기 
   로 난방하여 화로를 설치하지 않아도 따뜻한 공기가 사람을 감싸서 살아가는 데 적합하게 된 
   다. ...대동세에는 저절로 가는 배가 있고, 저절로 가는 차도 있다. ...사람들이 모두 자동차를  
   소유해서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가지 못하는 곳이 없으며, 순식간에 수백.수십 리를 갈 것이다. 
   (608-9)

    “대동세에는 기구들이 정교하고 기이하며 비행기가 날아다녀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 
   이 많을 것이다. 탁자나 침상에는 모두 음악이 녹음되어 사람이 굽히고 움직이는 데 따라 음 
   악소리를 길게도 짧게도 크게도 작게도 할 수 있다. 저녁 때 누워 쉴 때는 가볍고 미묘한 음 
   악이 나와 정신을 몽롱하게 한다. 만약 남녀가 서로 교합할 때는 무드 있는 음악이 나온다. 침 
   대에 눕는 것은 모두 건강에 좋은 일이고 신선과 천인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남녀 
   가 정을 주고 받는 것과 만물이 변하는 것은 실로 전지구와 인간 도의 근본이라 하겠다. 그러 
   므로 마땅히 리듬이 있어야 하며 박자에 맞아 움직이고 어울려야 한다. 그래서 밖으로는 인간  
   욕망의 즐거움을 다하고 안으로는 인류 생산의 바른 근본을 나타내게 한다. 그래야만 인류의  
   자손을 전달하는 일이 조화롭고 절묘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대동세에는 머리칼로부터 수 
   염.눈썹에 이르기까지 모두 깍아버린다. 온몸의 모든 털을 다 깍되 오직 코털만은 먼지와 더러 
   운 공기를 막기 위해 약간 남겨둔다. 사람의 몸은 깨끗해야 하므로 털은 모두 소용이 없다. 새 
   나 짐승은 온몸이 털로 덮여 있고 야만인의 몸에도 털이 많으나, 문명인은 그렇지 않다. 태평  
   세의 사람은 가장 문명화되었으므로, 모든 털을 없애버려 몸을 깨끗하게 한다. 털이 많은 사람 
   은 짐승과 멀지 않고, 털이 적은 사람은 짐승과 멀지만 짐승과 완전히 떨어진 것은 아니며, 오 
   직 털이 없는 사람만이 최고의 문명인이다. (612-3)


   대개의 유토피아는 기계문명에 대한 낭만적 거부에서 시작하여 자연과의 신비적 합일로 나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다. 원시시대에 대한 향수로서의 반근대! 그런데 특이하게도 대동서는 자연에 대한 절대적 지배를 구축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동력을 기계의 힘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사유재산의 문제에 있어서 앞으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순이 격화되리라고 예견했던 강유위는 서구 자본주의 문명의 토대인 기계에 대해서는 인간을 해방시키는 측면만 보았던 것이다. 그 기계가 문명 자체를 파괴하는 무기로 전화할 수도 있는 ‘디스토피아’에 대해서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대동세에는 인류가 최고의 도덕적 경지에 이르기 때문에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일까? 혹은 국가, 계급, 가족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도덕적 제약들이 해체된 시대의 인간, 그리고 환상적일 정도로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기계의 발달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토록 모든 것을 통일시키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차별을 없애면서 차이도 사라지게 만드는 끔찍한 동일화의 자력!  요컨대, 그의 유토피아는 자연을 굴복시키고, 기계문명을 절대적으로 낙관했다는 내용구성에 있어서는 매우 상이하지만, 결국 ‘닫힌 시.공간’이라는 차원에서는 공통적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될 경우, 사실 그의 유토피아는 근대적 평면을 조금도 넘지 못한다.   
  그런데 욕망의 분자적 흐름과 차이 없는 동일성이란 하나의 평면위에 존재할 수 없는 개념들이다. 전자는 언제나, 이질적인 것들의 예측불가능한 접속과 변이를 낳는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무수한 이질성들이 범람하게 된다. 결코 동일화시킬 수 없는 이질성들의 세계. 어쩌면 대동서의 공상성은 바로 이 지점, 공존불가능한 것을 공존가능하다고 착각한데에 있을지도. 

  **푸코의 ?말과 사물?에 나오는 다음의 진술을 참고할 것. 

    “<유토피아>는 위안을 준다. 비록 그것이 어떠한 실재적인 장소를 점유하고 있진 않더라도  
   그것이 전개될 수 있는 불가사의한 균질의 공간이 있다. 유토피아로 향하는 길은 공상적일지 
   라도 유토피아는 거대한 가로수 길과 훌륭하게 꾸며진 정원을 갖춘 도시를, 살기 좋은 나라들 
   을 개방시킨다. 헤테로토피아는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밀리에 언어를 침식해들어가 
   며, 이것과 저것을 명명할 수 없게 하며, 공통명칭을 분쇄하거나 혼란시키며, 미리 <통사법>,  
   즉 우리가 문장을 구성하는 통사법뿐만 아니라 말과 사물들을 결합시키는 덜 명확한 통사법을  
   붕괴시키기 때문이다.”(14면)  
 

      3. 프롤로그 : ?대동서?에서 무엇을 ‘절단,채취’할 것인가?

  1)문체적 특이성, 그 대국적 원천은?(후쿠자와나 한국의 계몽주의자들과의 차이에 대해) 
  2)세계주의는 동양적 근대화의 한 코스인가? 아니면 서구문명에의 낙관주의의 투영인가?   
  3)성의 해방, 가족의 철폐라는 주장의 혁명성?(나쓰메 소세키의 내면탐구/한국 계몽주의의 도덕    적 내면화/탈근대 담론과의 관련성) 





2000년 2월 24일, 강사: 정선태
수유연구실 강좌: 동아시아 근대 강좌 : 계몽의 담론, 계몽의 사상가1. 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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倫理에서 物理로
―혜강의 ?기측체의?와 ?氣學?에 관한 몇 개의 주석―


정 선 태



   바다에 선박이 두루 다니고 서적이 서로 번역되어 이목이 전달됨에 따라 좋은 法制나 우수한 器用이나 양호한 토산 물품 등이 진실로 우리보다 나은 점이 있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로 보아 당연히 취하여 써야 한다. 風俗과 禮敎에 이르러서는 風氣의 마땅한 바와 薰陶되어 온 습관이 있음으로 비록 우리보다 나은 것이 있다 하여도 갑자기 변경할 수 없다. [중략] 필경의 勝敗優劣은 풍속이나 예교에 있지 아니하니, 오직 실용에 힘쓰는 사람은 이기고 虛文을 숭상하는 사람은 패하며, 남으로부터 취하여 이익을 삼는 사람은 이기고 남을 그르다 하여 고루한 것을 지키는 사람은 패한다.(?기측체의: 추측록 제6권?[국역본] 148쪽)

마음에 궁구하는 것은 반드시 실제의 見聞이 따라야 하지만, 다만 한스러운 것은 먼 곳의 것을 듣는 것이 가까운 곳의 자세함만 못하며, 문자는 또 형상이 서로 다른데도 글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 알지 못하여 막히는 탄식이 있고 번역하는 사람은 잘못 전하는 것이 많은 점이다. 그러니 만일 각국의 총명하고 뜻 있는 사람이 각각 그 나라의 지도와 地誌를 밝히되 허망한 것은 제거하고 실적만을 보존하였다가 후일에 종합하여 대성하기를 기다리면, 어찌 아름다운 혜택을 후세에 베푸는 것이 아니겠는가.(같은 책, 160쪽)


1

   그는 눈여겨 볼만한 사승관계마저 불투명한, 그러면서도 시대정신(Zeitgeist)을 직시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로’ 묵묵히 저술에 맹진한 '별볼일 없는 양반'이었다. 족보를 금쪽같이 여기는 삭녕 최씨 후손들에게는 서운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최한기(1803-1877)는 양반이되 양반 축에 낄 수 없는, 그야말로 窮班寒族의 일개 서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아니 지극히 당연하게도, 이러한 신분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그는 기존의 권력 또는 주류 담론체계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재구성할 수 있었다.
   氣라는 화두 아래 變通과 變易으로 자신의 사상을 직조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진 기존의 담론체계로부터 과감한 탈주를 감행한 그가 있어 19세기 조선의 사상계는 그 허허로움을 메꿀 수 있다. 잠시 권력의 중심에 있다가 평생 주변으로 밀려나 살아야 했던 다산(1762-1836)과 비교하여 혜강의 모습을 김용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촛불의 한 가운데는 오히려 어둡고 덜 뜨겁다. 혜강은 다산과는 달리 촛불의 한 가운데, 권력의 핵심부, 서울 한복판의 어두운 밀실에서 그 촛불을 통째로 폭파시켜 버릴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하고 있었다!(?讀氣學說? 65쪽)
   조선의 19세기를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 세도정치, 派爭, 정치적 중심의 진공화, 타락한 소중화주의에 입각한 극도의 ‘傲慢’, 피폐한 민중의 삶, 그리고 무방비 王國이라 규정한다 해도 크게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산 사상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시대는 그에게 무엇을 요구했고 그는 시대에 무엇을 원했을까. 그가 구상한 ‘새로운’ 인간상과 세계상은 어떠했을까. ―이를 일컬어 內發的 近代精神이라 할 수 있을까.


2

   책장수들이나 몇몇 중인층에 속하는 사람들과 놀던 보잘것없는 궁반한족으로서 최한기의 에토스는, 述而不作 정신에 입각, 經典 주석을 통해 자신을 생각을 전개했던 기존의 어떤 사상가들의 그것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이를테면 이러하다. 권력의 정당성을 지키는 데 동원되었던 이데올로그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 재야에 묻혀 평생을 살면서 聖人의 길을 더듬으며 쓰디쓴 풀잎을 씹고 있던 이른바 비분강개형의 고고한 삼림들은 견고한 천하사상의 구도와 無謬의 '聖人' 思想에서 한치도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사상적 역학관계의 변화는 그야말로 天理를 거스르는 大逆罪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 고고한 '存天理去人慾'이라는 숭고한 사상을 떠올려 보라.
   이들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던 사상사의 공간 다른 한켠에 다산을 비롯한 이른바 '실학파'들이 웅숭거리고 있었다. 이들의 立論이나 사상사적 의의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治學의 方法에 있어서는 앞의 두 패거리와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 역시 중화보편문명의 논리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六經 혹은 十三經이라는 문자의 해석체계를 중심으로 하는 학문 방법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자 하는 것이다. 이들은 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재정립하는 전거를 마련하긴 했지만, 래디컬한 방법론적 단절을 시도하지 않았던 이상 사유방법에 있어 패러다임의 전환은 기대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3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이러한 학문 방법론 또는 사유구성 방법으로부터 일탈/탈주한다는 것은 곧 인식론적 단절의 시도를 의미한다. 神氣通+推測錄=氣測體義(1836)과 氣學(1857)을 관통하고 있는 저술 형식에서도 여실히 볼 수 있거니와, 그의 방법상의 인식론적 단절은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창조하기 위한 비약/도약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회귀를 꿈꾸지 않는 탈주는 도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혜강의 탈주, 그 도달 지점을 찾아가는 행로는 결국 한국 근대사의 질곡의 원인을 찾고, 새로운 ‘근대구성’의 원천을 발견하기 위한 至難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지적 모험의 길임은 미리 알아야 한다. 


4

   理/성인의 가르침이라는 허구를 폭파하라! 무의식의 영역까지 침범해 버린 조선중화주의, 그 알량한 조선중심주의라는 거짓 담론의 정체를 밝혀라! 이 선언이야말로 혜강의 저술을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문제의식의 표명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당대 조선 사회에서 서구 과학기술 문명에 대해 가장 풍부한 지식을 소유하고 이것의 우수성과 필요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별볼일 없는' 양반 최한기에게 있어 가장 절실했던 문제는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사상적 기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결여한 껍데기 문명 수용이 초래하는 화가 어떠한가는 지금, 박정희 기념관을 신 밀레니엄축제의 무대로 준비하고 있는 천민자본주의를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살아내고 있는 우리가 절감하고 있는 바이기에 부언을 피하기로 한다)
   새로운 사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유체계를 비판하고 이를 넘어서야만 한다. 그런데 한치의 빈틈도 없이 그 영역을 확대해 가는 자본의 논리를 외면하는 기존 사유체계의 핵심을 격파할 수 있어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변죽만 울려가지고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조선사회를 지배해온 사상적 원리의 핵심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최한기 사상의 핵심을 이른바 '기일원론'이라 일컫거니와, 이를 역추적하면 혜강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즉 氣와 한 쌍을 이루되 조선 사상사에서 몇몇 변주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무너뜨릴 수 없는 인식론상의 권좌를 독점해 왔던 理, 불변의 법칙, 聖人의 진리가 바로 타격 대상이었던 셈이다. 理라는 항성을 움직이는 별로 바꾸지 않고서는 그 어떤 노력도 에피고넨의 푸념을 넘어설 수 없다.


5

   모든 것은 움직인다. '活動'한다. 변화한다. 적어도 변화를 꿈꾼다. 역동적 에네르기를 품부받지 않은 物은 없다! 大槪, 혜강의 사상을 大氣運化와 統民運化를 핵심으로 지적할 수 있겠거니와, 대기운화는 자연의 변화하는 법칙을, 통민운화는 역사의 역동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별 무리가 없을 줄 안다. 그리고 이 대기운화와 통민운화를 인식하는 주체의 의식과 관련된 神氣運化를 덧붙여야 한다. 여기에 비추어 보면, 근엄하고 엄숙하기 짝이 없는 자기동일성(identity)의 확립이라는 명령이야말로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완결된 아름다운 질서는 허구다. 바꿔 말하자면 지배의 코드로서의 문화를 한층 강화하기 위한 담론 전략이다. 이 전략을 구사하는 사제의 뒤에 성인의 후광이 휘황하게 감싸고 있다. 성인/신의 후광에 눈먼 사람들에게 이 아름다운 질서/문화는 거역할 수 없는 진리로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그리하여 사상은 화석화한다. 윤리라는 이름으로, 질서라는 이름으로, 픽션이라는 이름으로, 아니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렇다면 이러한 지배의 코드로서의 倫理를 해체할 수 있는 동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자연과학적 진리, 곧 物理이다. 물리는 도덕적인 것이며 혜강은 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윤리와 물리를 전혀 별개의 원리로 보아 전자를 중시하고 후자를 경시하는 기존의 사유체계를 전복하려는 최한기의 사상적 기획(project)의 一端을 여실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물리는 물리를 究明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물리의 구명을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윤리 즉 시대변화에 걸맞는 윤리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기존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타파하고 새로운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사상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요컨대, 물리는 물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물리의 구명의 통해 새로운 윤리의 창출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이제 새로운 윤리는 閉塞된 숨통을 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6

   ?기측체의?에서 우리는 혜강의 인식론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 장황하지 않다. 다음 몇 개의 어휘만으로도 충분하다: 諸竅諸觸通-周通-神統과 神測-變通-證驗-體認-準的의 수립[이에 관해서는 손병욱, ?최한기의 인식론?, ?실학의 철학?(예문서원, 1996)을 보라.] 이와 같은 物理를 파악하기 위한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토대를 두고, 혜강은 인간의 인식 범위를 사회에 역사로 확대해 나간다. 인간질서 변화의 필연성과 역사의 역동성(진보?)은 한국사상사에서 이제 可視圈으로 들어온다. 위의 인식론적 구도에서 '推測된' 구체적인 양상을 비교적 후기 저작에 속하는 ?氣學?과 ?仁政?에서 볼 수 있는 바, 여기에서는 ?기측체의?와 ?기학?만을 보기로 한다. 다음은 그의 육성이자, 고독한 지적 혁명가의 절규이다.


7
   ○나라의 제도나 풍속은 고금이 각각 다르고, 曆算과 物理는 후세로 올수록 더욱 밝아졌으니, 주공과 공자가 통달한 大道를 배우는 자는 주공과 공자가 남겨준 형적이나 고집스레 지키고 변통하지 않아야 하겠는가, 아니면 장차 주공과 공자가 통달한 대도를 본받아서 지킬 것은 지키고 변혁할 것은 변혁해야 하겠는가.(?기측체의: 신기통?1, 35쪽)
   ○주공과 공자의 학문은 實理를 좇아 지식을 확충하고 이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데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니, 氣는 실리의 근본이요 推測은 지식을 확충하는 要法이다.(36쪽) ▷학문의 방법론
   ○耳目口鼻가 어찌 한갓 그 이목구비의 외형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리요? 반드시 형체에 들어있는 神氣가 이목구비에 통한 신기의 이목구비이다. 그러므로 이로써 천지와 인간 만물이 한가지로 통하는 소리와 빛과 냄새와 맛에 미루어 나가면, 안과 밖이 서로 응하고 저것과 이것이 서로 비교되고 증험될 수 있는 것이다.(41쪽) ▷학문의 출발-경험-지각
   ○體通: 諸竅는 기를 통한다(43쪽)
   ○지각과 추측은 모두 스스로 얻는 것이다.---어린 아이 시절로부터 장성하기까지 얻은 知覺과 사용하는 推測은 모두 내 스스로 얻은 것이지 하늘이 나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선하냐 선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선택하여 취하는 데 달려 있고,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힘쓰기에 달려 있다.(45쪽) ▷주체의 선택
   ○예와 지금을 참작하는 것이 비록 학문을 완전히 갖추는 것이 되지만, 옛시대에만 통하고 지금을 통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에 통하고 옛시대를 통하지 못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고금을 통하여 변하지 않는 經常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으므로 반드시 옛것을 빌어다가 지금에 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여러 세대의 경험을 통하여 뚜렷이 드러난 것에 이르러서는 日曆의 이치와 地球만큼 큰 것이 없다, 천지의 이치가 점점 밝아지면 사람의 事理도 이에 따라 밝아지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하늘과 사람의 神氣이다. [중략] 하늘과 땅과 사람과 물건은 바로 한 신기의 調和이다. 천지의 이치가 점점 밝아지고 氣說이 차츰 천명되면서부터 하늘과 땅과 사람과 물건에는 더욱 증험하고 시행할 방법이 생겼다.(67쪽)
   ○경험이 바로 지각이다(89쪽)
   ○마땅히 人情과 物理를 절충하여 바름[正]을 얻어 準的을 삼아야만 상벌과 권선징악하는 것이 거의 베푸는 데 있어 마땅한 한계가 있게 된다. [중략] 준적이라는 것은 사물이 귀속하는 궁극적인 이념이니, 이야말로 부분적인 경우에만 맞는다거나 일시적으로만 부합하는 것을 가지고 성급하게 질정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통하는 것이 두루 원만하고 익숙해서 상하와 사방 어느 쪽으로도 치우쳐 막히는 것이 없고, 古今과 始終의 어느 때나 막힘이 없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자연히 준적이 세워져서 때에 따라 변통하여 經常의 도와 權道에 자연스럽게 맞는다.(93-94쪽)
   ○사람의 마음은 때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 선이 변하여 악이 되기도 하고, 악이 화하여 선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내가 남의 선이 변질되고 악이 변화하는 것을 잘 통하지 못하면, 이것은 나의 통하는 것이 극진하지 못한 것이다.(97쪽)
   ○目通: 눈동자는 내외를 출입하는 관문이다.(104쪽)
   ○만물 가운데서 사람이 오직 귀한 것은, 五倫 三綱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서적의 공효 때문이기도 하다. 四庫書籍 수십 만 권을 통계해 보면, 實을 숭상한 책은 절반이 되지 않고, 虛를 숭상한 것이 반이 넘으니, 이미 그 3분의 3는 제거된다. [중략] 알 수 있는 이 서적을 가려서 사색하고 연구한다면, 천하 만사를 두 눈동자를 가지고 통달할 수 있고 천고의 성인을 두 눈동자를 가지고 대면할 수 있다.(106쪽)
   ○耳通: 온갖 소리를 미루어 통한다.(114쪽)
   ○일을 처리할 때를 당해서는 들을 만한 것을 듣지 않으면 일을 해치고, 들어서는 안될 말을 들으면 비단 일을 해칠 뿐만 아니라 뿌리 없는 喜怒와 等閒한 풍파가 부질없이 虛浪한 사람으로 만든다.(121쪽)
   ○鼻通: 몸의 기를 풀무질한다.(124쪽)
   ○口通: 말하고 먹는 것은 서로 응한다.(128쪽)
   ○탐욕한 관리가 백성의 밥을 빼앗는 것은, 곧 조정이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을 뽑아서 백성의 재산을 빼앗고 개인을 살찌우며 나라를 좀먹게 하는 것이다.(132쪽)
   ○生通: 인류가 生生 번식하는 것은, 천지의 氣가 따뜻이 길러줌과 부부의 情에 의한 産育의 덕분이다. 천지와 인간 만물이 영원히 지속하여 그치지 않는 大道는 生生하는 通에 있을 뿐이다.(139쪽)
   ○手通: 공能이 가장 많다.(146쪽)
   ○내 몸의 工匠 器械는 두 손이고, 나라의 공장 기계는 모든 工匠의 두 손이다.(149쪽)
   ○足通: 발의 힘은 짐을 감당한다.(151쪽)
   ○멀리까지 이르는 것은 발로 걷는 데 달린 것이 아니다. 비록 평생을 쉬지 않고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얻는 것은 대동소이한 風氣?物産과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얻는 道聽塗說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원근의 서적을 모아 전 세계의 典禮와 沿革을 閱歷하고, 전 세계의 賢人?達士와 수작하는 것에 비하겠는가? 크게는 曆象에서 작게는 器用에 이르기까지 정밀히 연구하여, 정신은 六合에 소요하여도 막힘이 없고 기운은 一體에 流通하여 추측한다면, 비록 문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더라도 저 평생 동안을 쉬지 않고 돌아다닌 자와 비교하여 그 소득은 절로 優劣이 있을 것이다.(153-154쪽)
   ○觸通: 내외의 기가 서로 응한다.(154쪽)
   ○周通: 많은 것을 참조하여 증험한다.(156쪽)
   ○不通?偏通?周通(158쪽)
   ○變通: 이미 지나간 옛일은 그것을 가지고 나의 변통의 勸懲으로 삼는다. 또 현재 당면하고 있는 일은, 마치 수레를 모는데 말에게 채찍질을 하여 軌道로 가게 하고, 배를 操縱하는데 바람을 따라 키를 돌리는 것처럼 하여, 동쪽으로 가든 서쪽으로 가든 형세에 따라 변통하는 것이다. 장래에 닥쳐올 일은 미리 일의 성격과 내용에 유의하여,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을 이루고 시초에서 그 결과를 생각하여 신중하게 하면, 추후의 변통은 힘은 적게 들여도 공은 클 것이다.(161쪽)
   ○文理를 연구하고 해석하는 것은 변통에 달렸다.(168쪽)
   ○政事와 敎化의 변통은 變易을 이름이 아니라, 그 통하지 못하는 것을 변화시켜 통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169쪽) ▷계몽의 문제!


8

   ○하늘을 이어받아 이루어진 것이 인간의 본성[性]이고, 이 본성을 따라 익히는 것이 미룸[推]이며, 미룬 것으로 바르게 재는 것이 헤아림[測]이다. 미룸과 헤아림은 예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말미암는 大道다.(?기측제의: 추측록?1, 179쪽)
   ○推測提綱: 마음은 따로 능한 것이 없고 氣를 말미암아서 미루고 性을 말미암아서 헤아려, 점차로 계제를 밟아서 그 功效를 이루니 이것을 이름하여 앎이라 한다. 그러니 추측하는 것 외에 어찌 아는 방법이 있겠는가?(195쪽)
   ○추측이 있어 천하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혼자 보고 천하의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혼자 말하는 것은 탁월한 재주이고, 추측이 없이 뭇 사람이 보지 않는 것을 혼자 보고 뭇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을 혼자 말하는 것은 狂妄이다.(211-212쪽)
   ○천하의 사물은 무궁하고 나의 추측은 有限하니, 내가 이미 안 것을 미루면 ‘마음 밖에 물건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나, 내가 미처 모르는 것을 헤아리면, 마음 밖에도 수많은 사물이 있는 것이다. 더욱 이미 안 것 가운데에도 미처 알지 못한 깊은 것이 있으니, 아는 것은 실로 얼마 없는 것이다.(227쪽)
   ○ 推氣測理: 천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氣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기를 헤아리면서 理를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또한 기를 헤아리지 못하는데 理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결코 들어보지 못하였다.(234-235쪽) ▷大象(하늘과 땅)은 하나의 氣이다!
   ○지구는 오른쪽으로 돈다.(238쪽) ▷혜강의 자연과학 이해 수준을 보여주는 항목!
   ○理는 氣 가운데 있다.(247)
   ○理는 모름지기 기에서 알아내야 한다. 그러나 기를 리로 아는 것은 옳지 않으며, 기를 버리고 리를 구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만물의 한 근원을 논하면 기도 하나이며 리 역시 하나이고, 만물의 分殊를 논하면 기가 만이면 리도 만이다.(247-248쪽)
   ○自然이란 천지 流行의 理이고, 當然이란 人心의 추측의 理이니, 학자는 자연으로 표준을 삼고 당연으로 공부를 삼는다.(268쪽)
   ○推情測性: 사람과 만물로서 하늘의 氣와 땅의 質을 품부받은 것은 성과 정이 없는 것이 없으니, 그 生의 理를 성이라 하고, 성이 밖으로 나타난 것을 정이라 한다. 대개 성은 보기가 어렵고 정은 알기 쉬우므로 정을 미루어 성을 헤아리는 것이다.(?기측체의: 추측록?2, 9쪽) ▷四端七情論 비판!
   ○推動測靜: 천지의 순환은 끝이 없어서 지난 것이 동이 되고 오는 것이 정이 되며, 사람과 물건의 作息은 때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 동이 되고 쉬는 것이 정이 된다. 그러므로 간 것을 미루어 올 것을 헤아리고, 일어나는 것을 미루어 쉬는 것을 헤아린다.(23쪽)
   ○推己測人: 모든 功績은 인심과 화협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고, 또한 인심과 어그러지면 실패하지 않는 것이 없다. 내가 남의 마음을 아는 것이 和요, 남에게 나의 마음을 알게 하는 것이 協이다.(38쪽)
   ○몸을 닦고 집을 제어하고 마을에 거처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創業과 守成과 敗亡이 있으니, 창업하는 사람은 미룸을 넓혀 선을 택하고 수성하는 사람은 그 법도를 준수하고 패망하는 사람은 스스로 편협하여 잃어버린다.(66쪽)
   ○推物測事: 한 사람이 일생 동안에 천하의 사물을 궁구하고자 하면 자연 하나를 미루어 만을 헤아리는 방식이 있으나 천하의 사물을 행하고자 하면 감당해 낼 겨를이 없으니, 마땅히 그 중에서 취해야 할 것은 취하고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한다.(83쪽)
   ○物을 버리고 일을 헤아리면 일이 아득하여 階梯가 없으나, 물을 인하여 일을 헤아리면 일이 切近하여 조리가 있다.(102쪽)
   ○古法은 本旨를 숭상하고 지금의 풍속은 流弊가 많으므로, 옛것에 얽메인 사람은 지금의 時務에 소홀하고 풍속에 물든 사람은 옛 도리에 어둡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로 본지를 들어 유폐를 막으면, 단지 바로잡아 구제하는 것이 조리가 있을 뿐 아니라, 고금의 공통된 의리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104쪽)
   ○古書를 궁구하고 익히는 것은 나의 마음을 닦는 것으로 極功을 삼고, 글을 저술하는 것은 백성의 일을 구제하는 것으로 제1의를 삼는 것이다.(105쪽) ▷실천적 공부!
   ○천지로부터 나를 본다면 대양의 한 泡沫이요, 만물로부터 나를 보면 평지의 한 모래알이다. 그러나 나의 추측으로부터 천지를 본다면 無始보다 앞서고 無終보다 뒤에 하며 大塊를 용납하고 無際를 함유하며, 추즉으로부터 만물을 본다면 터럭끝이라도 분석하고 금석이라도 通透하여 들어간다.(113쪽)
   ○習俗은 점점 바뀌어 가고 事義는 오래되면 泯滅되는데, 고금의 군자들이 급급히 일삼아 잠깐도 해이함이 없는 까닭은 바로 습속이 바뀌는 것을 말미암아 선한 데로 인도하고 사의가 민멸하는 것을 말미암아 그 의리를 扶植하려고 하기 때문이다.(139쪽)
***○物理는 일정하나 事理에는 일정한 것이 없다.―만물에는 천부의 리가 있으므로 모두 추측의 리에 말미암는다. 물리와 사리에는 하늘과 사람의 나뉨이 있어 異同이 생기므로 공부는 오직 천리를 따르고 추측을 정하는 데 달렸으니, 그런 뒤에야 추측을 통하여 물리와 화합할 수 있다. 만약 물리와 사리의 분별이 없으면 義外니 義內니 하여 귀일하기 어렵다.(140쪽) ▷물리의 터득을 통한 새로운 윤리의 확립/자연과 당위의 문제와 관련하여.
   ○무거운 물건을 안치하거나 형체를 운동하는 데는 모두 重心의 垂線이 있으니, 중심의 수직선이 합당함을 얻으면 동정이 모두 평온하나 중심의 수직선이 합당함을 잃으면 기울어져 넘어지기 쉽다. 학문의 時中도 이것을 미루어 마땅함을 헤아릴 수 있다.(147쪽)
   ○천하의 經綸은 모두 地誌圖에 있으니, 전체 국면을 상고하고 형세를 살펴서 착수하는 緩急을 정하며, 이웃 나라를 관찰하고 우열을 비교하여 적절한 조처의 취사를 결정한다.(159쪽) 


9

   ○기의 본성은 원래 活動運化하는 데 있다.(氣學 序) ▷실체는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자연물 뿐만 아니라, 人情도, 사회도, 제도도, 그리고 역사도. 2권 84장을 보면 활은 生氣, 동은 振作, 運은 周旋, 化는 變通이라고 되어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변천은 무한하고 上下四方의 순환은 끝이 없으니, 만약 지금 사람의 눈, 귀로 보고 듣고 기억하고 움직이거나 시행하는 것으로 根基와 표준을 삼지 않으면 손댈 곳이 매우 아득해져서 배울 바도 더욱 흐리고 불분명해질 것이다(1권 1장) ▷몸이 곧 우주이다. 신기통을 참조하라.
   ○옛부터 지금까지 전해오는 문자가 매우 많지만 그 가운데 기와 무관한 것과 기를 벗어난 것을 제거해 버리고, 기를 궁구하고 밝히는 말에만 귀를 기울이되, 다시 쓸데없는 것들을 제거하고 허황한 것들을 없애버려서, 근거가 있어서 정확하고 참되어 기의 법이 될 만한 것만을 따온다면 겨우 만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1권 10장) ▷지금까지의 文字 학문체계의 효용성은 이제 그 힘을 잃었다. 변화하는 세계를 받쳐줄 새로운 학적 체계의 수립이 필요하다.
   ○神과 理는 氣化 중의 일이니 마땅히 기화 가운데서부터 구별하여 두면 신이나 리에 모두 일정한 의미가 있게 되어서 간단하고도 쉽게 된다. 신은 이미 드러나 볼 수 있는 유형의 것인 셈이니 다분히 뒤섞여 구분하기가 곤란한 형체 없는 것이 아니다. ▷理-형이상학의 세속화!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배운 바는 옳고 다른 사람이 배운 바는 그르다고 하는데, 여기에 맞는 경우도 있고 맞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마땅한 경우도 있고 부당한 경우도 있다. 한쪽 귀퉁이의 작은 나라의 습속에 젖은 학으로써 천하인이 마땅히 해야 할 학을 비난하면서, 상고시대의 캄캄하게 어두운 학문을 들어서 방금의 상세하게 갖추어진 학을 비난한다. 각각 경우가 다른데 자기가 배운 바가 아니라고 하여 헐뜯거나 모두 잘못이 있는데 남의 잘못만 보고서 헐뜯는 것은 모두 맞지 않는 것이며 부당한 것이다.(1권 34장. 1권 55장도 함께 보라) ▷‘方今’과 ‘上古’의 사유구도를 보라. 지구본을 돌리던 박규수의 생각이 이렇지 않았을까. 중심/中華의 해체 징후가 如實하다. 지배코드로서의 문화는 이렇게 해서 어떤 타격을 입었을까?
   ○가령 氣學이 크게 밝혀져 세상에 두루 미치게 된다 하여도 어찌 모든 사람들이 다 알기를 바라겠는가? (다만) 견문에 두루 미치고 떳떳한 행실에 익숙하여 어긋나거나 지나치지 않고 잘못된 인식에 따르지 않는다면 부지중에 깨우쳐 아는 자도 적지 아니할 것이다. 또 종신토록 알지 못하는 자라도 모두 같은 人氣運化에로 귀일하여 미풍양속을 이룬다면 그 행하는 바가 아는 자와 차이가 없게 되어 이를 일컬어 온 천하를 모두 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1권 63장) ▷혜강의 꿈, 너무나 아득한?
   ○견문이 점차 많아지고 광범위해지면 취하는 것과 버리는 것은 사실 여부에 달려 있게 된다. 서적을 조사하고 열람하여 그 기화의 실마리를 찾고 사물을 경험하여 기화와 부합하는 것을 찾게 된다. 이렇게 쌓인 공이 인기의 운화를 이루고, 이를 미루어 도달한 경험이 천지의 운화에 미치면, 먼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과 다름이 없게 되고 다른 나라의 풍속도 大同의 풍속으로 귀일할 수 있을 것이다.(1권 73장) ▷다시 혜강의 꿈. 천인운화와 우주만국 대동의 꿈/상상력의 힘 또는 사유의 깊이.
   ○(가르침의) 종지에는 크게는 우주운화의 기가 있으니 歷數를 정리하여 그 대강을 제시함이다. 다음으로 인민운화의 기가 있으니 정치와 교육을 닦고 밝혀서 바른 길로 인도하여 이르게 하는 것이다. 작게는 기용의 운화가 있으니 책을 지어서 간직하고 기계와 도구를 제조하여 백성의 쓰임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합하면 一氣運化가 되고 나누면 三氣運化가 된다.(1권 93장) ▷다시 말하거니와 운화는 움직여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움직여 변화하는가, 변화해야 하는가. 천인운화를 논하고 있는 2권 6장을 보라. 그리고 ‘運’의 의미는 2권 61장에 나와 있으며, ‘化’에 대해서는 2권 59장이 자세하다.
   ○운화라는 것은 하늘과 사람이 운행하는 것이요, 추측이라는 것은 사람이 인식하는 것이다.(2권 7장) ▷여기서 하늘은 일월성신을 포함한 자연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天氣와 人氣는 본래 둘이 아니다. 2권 14장을 보라.
   ○천인운화의 기학은 온 천하의 사람들이 보고 들은 것을 종합하여 귀와 눈으로 삼고, 온 천하 사람들이 경험하고 시험한 것을 통괄하여 법도로 삼아서 천하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얻고 천하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2권 25장) ▷혜강은 되풀이해서 자신의 ‘기학’을 기존의 학문과 구별하고 있다. 즉 기학은 기존의 허황된 것들과는 질이 달라도 한참 다른 새로운 학문이다. 그 도도함이라니! ‘기학’의 정의는 2권 52장 및 95장에 나와 있다.
   ○무질서한 利己의 세계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통민운화할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2권 51장) ▷이제 혜강은 추상적이었던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친다. 임금을 섬기는 것도, 관리들의 행동도 바로 이 통민운화에 기초해야 한다. 이를 상세히 개진해 놓은 것이 <仁政>이다. 철학사상이 정치사상과 사회사상으로 확산되어가는 고리를 파악해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권오영, 최한기의 학문과 사상 연구(집문당, 1999)가 상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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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자. 모든 것은 변화한다. 혜강의 탈주가 지향했던 회귀 지점은 현실이었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현실, 이를 두고 세계사의 흐름이라 얘기할 수도 있고, 서세동점에 따른 위기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다. 죽어라고 별 쓸모있어 보이지도 않는 지도만 그리러 다니던 김정호가 혜강의 둘도 없는 벗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혜강은 ‘새로운’ 인식의 지도를 그리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기학이라는 이름으로. 고지도를 뒤져서 독도가 조선땅임을 밝히는 증거로 이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가상하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로부터의 탈주를 통해 다시 새롭게 현실을 꿈꾸고자 했던 혜강의 생각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 훨씬 가치 있어 보인다. 물론 이때 혜강의 꿈은 역사적 상상력 또는 해석학적 상상력과 다르지 않고, 그것은 지금 여기의 삶을 추동하는 힘으로 ‘운화’해야 제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혜강의 꿈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시도는 아주 작은 실마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2000년 3월 2일, 강사: 김정인    
수유연구실 강좌: 동아시아 근대 강좌 : 계몽의 담론, 계몽의 사상가1. 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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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開化를 통한 지상천국의 건설 : 혁명이냐 개혁이냐
               - 金玉均의 『治道略論』外, 兪吉濬의 『西遊見聞』-   


                                                                      김 정 인



1. 삼일천하로 끝난 혁명의 길, 金玉均(1851~1894) 

김옥균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던 1851년 충청도 공주군에서 안동김씨인 김병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서당훈장으로 밥벌이를 하는 ‘勢道’와는 관련없는 빈한한 시골 향반에 불과했다. 김옥균은 어릴 적부터 영민하고 얼굴이 백옥같이 희고 외양이 준수했다고 한다. 김옥균은 5살부터 ‘科擧之學’를 시작했다. 당시 향촌에서는 과거시험에 매달려 입신출세에 급급해 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月雖小 照天下」라는 싯구를 지을만큼 영특해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영특하더라도 세도정치하에서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것은 ‘연줄’없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당시 세도가에서는 자식이 변변치 않을 때는 양자를 들여 가문의 세도를 유지하는 풍조가 일반적이었다. 재주가 뛰어난 김옥균 역시 7살의 어린 나이에 김병태의 6촌형이자 중앙관직에 진출해 있던 김병기의 양자가 되어 한양 도성에 입성했다. 당시 김옥균의 집은 북촌의 화동에 있었는데 바로 이웃집에는 후에 개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김홍집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북촌은 당시 서울의 상류계급의 거주지였다. 세도가의 양자로서의 인생!
양부 김병기는 김옥균에게 본격적인 과거공부를 시켰다. 김옥균에게는 특별한 스승이 없었다. 양부에게 문장과 중국고전을 배우고 양부가 강릉부사로 부임했을 때 율곡사당이 있는 송담서원에서 공부한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시국이 어수선하던 1866년 한양으로 돌아온 김옥균은 학문은 물론이요 시문, 글씨, 그림, 음율 등에서도 탁월하여 북촌의 양반자제들 사이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김옥균의 주위에 명문가의 재주있는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김옥균은 그들을 이끌고 도성 일대와 주변의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시회를 열고 노래와 가야금을 즐기며 술에 흥취를 돋우는 몇 년을 보냈다. 김옥균은 1872년 22살의 나이로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김옥균은 이제 세도가의 양자로서의 부채감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세계로의 항해를 시작한다.
김옥균을 눈여겨 보는 이가 있었다. 박지원의 손자로 병인양요 당시 평안감사를 지낸 박규수였다. 박규수가 김옥균을 만난 것은 평양감사에서 돌아와 한성판윤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박규수와 김옥균의 만남에 대해 신채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옥균이 일찍 우의정 박규수를 방문한 즉, 박씨가 그 벽장 속에서 地球儀 一座를 내어 김씨에게 보이니, 該儀는 곧 박씨의 조부 연암선생이 중국에 유람할 때에 사서 휴대하여 온 바더라. 박씨가 지구의를 한번 돌리더니 김씨를 돌아보며 웃어 가로되, ‘오늘의 중국이 어디 있느냐.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며,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어, 어느 나라든지 中으로 돌리면 중국이 되나니, 오늘에 어디 정한 중국이 있느냐’ 하니 김씨 이때 개화를 주장하여 신서적을 좀 보았으나, 매양 수백년래 유전된 사상, 곧 대지 중앙에 있는 나라는 중국이요, 동서남북에 있는 나라는 四夷니 四夷는 중국을 높이는 것이 옳다 하는 사상에 속박되어 국가독립을 부를 일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가 박씨의 말에 크게 깨닫고 무릎을 치고 일어났더라. 이 끝에 갑신정변이 폭발되었더라. 신채호, 「지동설의 효력」『개정판단재신채호전집』하권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든 인물들. 우선 그의 知人인 오경석과 유홍기. 역관이었던 오경석은 청을 오고가면서 ‘세계 각국의 각축하는 상황을 견문하고 크게 느낀 바가 있어 列國의 역사와 흥망사를 연구하여 자국의 정치의 부패와 세계의 대세에 실각되고 있음을 깨닫고, 앞으로 언젠가는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 하여 크게 개탄하는 바가 있었다.... 그는 곧 知人인 劉鴻基와 함께 자국의 형세가 실로 風前의 燈火처럼 위태하다고 크게 탄식하고 언젠가는 일대혁신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상의하였다’. 세계사의 전환기, 서양세력의 위협에 쩔쩔매는 청을 지켜보면서 중인출신의 역관 오경석이 생각했던 것은 ‘권력’으로의 접근가능성이었다. ‘어떤 날 유대치가 오경석에게 우리나라의 개혁은 어떻게 하면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묻자, 오경석은 먼저 동지를 북촌의 양반자제 중에서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고균기념회편, 『김옥균전』(상권), 경응출판사, 1944
 그리고 박규수의 사랑방으로 젊은이들을 불러 들였다. 
김옥균, 김옥균의 친척이자 자신의 외삼촌인 김성근의 집에서 수학하던 서재필, 박규수의 친척이자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와 그의 형 박영교, 5대째 판서를 지낸 명문가의 자제 서광범 등이 모여 들었다. ‘귀족청년’들과 ‘중인’이 둘러앉아 나누는 시국담. 그 속에서 국내외에서 고조되고 있는 위기와 그에 대한 대응책들이 오고가고. 농민항쟁. 동학의 흥기와 서학의 전파. 서세동점의 현실 그리고 북경함락. ‘세도’의 축복 속에서 권력의 깊은 속내를 잘 알고 있던 특권층 출신 젊은이들의 비분강개는 곧 권력의 ‘질’을 바꾸려는 욕망으로 승화되어가고 있었다. 국가는 ‘再造’되어야 한다. 그러나 희망은 우리 ‘안’에 없다. 개화만이 살 길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 “개화당”으로서의 정치세력화가.  
김옥균은 관직에 진출한 이후에도 동지를 모으는데 급급했다고 한다. 김옥균은 개화를 위한 同志가 될 수 있는 이들이 반드시 국내에만 있다고 보지 않았다. 김옥균은 승려인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해 각국 공사관의 외교관들과 접촉하도록 하는 등 밖으로부터의 엄호세력을 부식하는데도 정성을 기울였다. 일본 정계와 서양 외교관들은 이제 공공연하게 김옥균, 박영효 등을 ‘한국개혁당’ 혹은 ‘혁명당’으로 불렀다. 그들의 실체가 공개되는 만큼 반‘개화당’세력과의 정치투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동인이 암살되기도 했다.
1881년 겨울에는 김옥균이 직접 도일했다. 동경에서 그는 주로 福澤諭吉의 주선으로 일본 정계의 고관과 명사들을 만나고 1882년 6월 하순, 임오군란 직후에 귀국했다. 그리고 그 해 8월 김옥균은 수신사로 파견되는 박영효와 함께 또다시 도일했다. 이때 먼저 귀국하는 박영효를 통해 고종에게 올린 글이 바로 『治道略論』이다. 고종의 특령으로 김옥균에게 맡겨진 임무는 일본으로부터의 차관도입이었다. 그런데, 조선정부에 대한 청의 간섭이 노골화되고 있던 차에 일본정부가 차관을 빌어 줄 리 만무했다. 이후에도 김옥균은 차관문제로 한차례 더 도일한다.
1884년에 들어와 반개화당 세력의 공격은 청을 등에 업고 점차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원세개를 비롯한 청의 ‘섭정’세력과의 갈등도 고조되었다. 청이 볼 때, ‘개화당’은 친일세력이었다. 그리고 개화당의 입장에서 보면 청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저해하는 오랑캐요 수구세력이었다. 고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던 박영효가 좌천된 사건이 발생하자 ‘개화당’은 1884년 여름 일본자객들과 더불어 ‘반개화당의 주구’들을 암살하고자 했다. 그런데 청불전쟁이 발발했다. 다시 조선문제에 적극성을 띠게 된 일본은 공사관을 통해 개화당에 접근했다. 
김옥균은 일찍부터 국가재조를 위한 권력장악의 방법으로 ‘정변’을 중시했다고 한다. 김옥균은 사실상 1883년 봄부터 군부 내에 동지를 부식하는 등 정변을 준비했으며 세번째로 일본에 갔다온 직후 1884년 9월에 단독으로 정변을 결정했다. 이러한 김옥균에게 때마침 일본이 도움을 주겠다는 의향을 비쳤던 것이다.   

우리들은 수년래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각고진력을 해왔으나 그 공효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금일 이미 사지에 들어가게 되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人을 制하여 策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정세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미 우리들의 결심에는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秘書類簒朝鮮交涉資料伊藤博文篇』상권


그리고 삼일천하. 결국 그다지도 경계하던 청군의 개입으로 쿠데타는 실패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은 망명하고 그들의 가족들은 대부분 살해되거나 官奴가 되었다.  
실패한 혁명가의 쓸쓸한 망명생활은 조선에서 파견된 자객들로 인해 늘 긴장감이 돌았다. 김옥균이 일본의 무뢰한을 데리고 조선을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풍미하고 자객이 밀파되면서 신경이 날카로와진 일본정부는 김옥균을 오가사와라라는 외딴 섬으로 유배했다. 그것마저 위험해지자 김옥균은 다시 북해도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3년만인 1890년 가을 김옥균은 동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주춤했던 조선으로부터의 자객밀파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호기있게 모든 사람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홍장을 만나고자 호랑이굴인 중국 상해로 향했던 김옥균. 그는 1894년 3월 28일 상해 동화양행이라는 여관방에서 자객 홍종우의 총탄에 암살되고 만다. 그리고 시체는 인도되어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먼저 시체를 땅에 누이고 4개의 나무조각을 두손과 두발 밑에 깔고 머리를 잘라 내고 다음에 바른 손의 손끝을 잘라 내고 다음에 왼손의 중지를 잘라  내고 다음에 두 발목을 자르고 다음에 동체의 등 한가운데에 깊이 1寸, 길이 6寸씩 세군데에 자국을 냈다. 이렇게 하여 동체는 땅위에 방치하고 머리와 잘라 낸 수족은 굵은 새끼줄로 묶어 동체의 옆에 세워진 기둥에 매어 달고 거기엔 『謀反大逆不道罪人玉均 當日楊花鎭頭不待時陵遲處斬』이라고 쓴 팻말이 세워지고 사흘동안 이렇게 방치한 후에 동체는 한강에 던지고 목은 경기도 죽산부 조피산에 버리고 수족은 각각 하나씩 2개조로 나누어 팔도에 모조리 돌리고 나서 버려졌다.

2. 過猶不及, 그 개혁의 길  兪吉濬(1856~1914)

유길준은 1856년 한양의 북촌인 계동에서 杞溪兪氏인 참봉 유진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기계유씨 가문은 노론계의 명문가로 명성을 떨치다가 1800년 이후 세도정치기에 접어 들면서 정치적으로 失勢하여 유신환으로 대표되는 덕망높은 학자집안으로 행세하였던 양반가문이다. 유길준의 집안은 조부가 청송부사직에서 물러난 다음 부친 유진수가 참봉 벼슬 밖에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빈한하였다. 
어린 시절 유길준은 북촌의 양반자제들이 그러하듯이 철저한 과거 지향의 한학교육을 받았다. 그의 과거공부는 18살까지 계속되었는데, 처음에는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우다가 11살때(1866)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선영이 있는 廣州로 피난가 서당에서 수학했다. 그후 서울에 돌아와서는 都正(종4품)의 벼슬에까지 올랐던 외조부 이경직 슬하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유만주가 세운 낙산서재에서 과거공부를 지속했다. 여기서 유길준은 이후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로 위기에서 자신을 번번이 구해주던 척족 민영익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18살(1873)이 되던 해에 유길준은 박규수를 만나게 된다. 박규수는 유길준이 쓴 시를 읽어 본 다음 그가 ‘國器’임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옥균이 박규수의 주선으로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전복’을 꿈꾸던 동지를 만난 것과는 달리 유길준은 박규수를 만나면서 과거공부를 집어치운다. 그리고 「科文弊論」이라는 글을 써서 ‘국가의 부강을 성취하고 인민의 安泰를 이룩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과거제도의 폐지를 적극 주장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과거의 폐단은 ‘과업은 문안의 도적, 洋敎(-서학)는 문밖의 도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회붕괴의 요인으로 파악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이것은 가문 내에서도 일종의 반역행위였다. 당시 적극적인 정계진출을 주장하던 유신환학파의 성향과는 배치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과거공부 대신 일본어 공부에 맹진하던 유길준은 그 덕에 1881년 봄 신사유람단의 魚允中의 수행원으로 발탁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유길준에게 명치기 일본은 자신의 눈을 뜨게 만들어준  開眼者였다. 서양인은 야만족이 아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지 18년째 되는 신사년(1881) 봄에 나는 동쪽으로 일본에 시찰하러 갔었는데, 그곳 사람들의 부지런한 습속과 사물의 풍성한 모습을 보니 내가 혼자서 생각하던 것과 달랐다. 일본 사람 가운데 견문이 많고 학식이 넓은 사람과 더불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그들의 의견을 듣고 새로 나온 기이한 책들을 보며 거듭 생각하는 동안, 그 사정을 살펴보고 실제 모습을 들여다보며 진상을 파헤쳐 보니, 그들의 제도나 법규 가운데 서양의 풍을 모방한 것이 십중 팔구나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맺은 뒤부터 관계가 친밀해짐에 따라 시대적인 변화를 살피고 그들의 장점을 취하며 여러 제도를 답습함으로써 삼십 년 동안에 이처럼 부강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붉은 머리와 푸른 눈의 재주와 견식이 남보다 뛰어난 자가 반드시 있을 테니, 내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순전히 야만족에만 머물지는 않은 것 같다.
 
유길준은 동행한 유정수와 함께 그 해 6월 8일에 동경에 있는 慶應義塾에 입학했다. 최초의 일본 유학생. 경응의숙은 福澤諭吉이 1858년에 문을 연 학교로 英學에 치중하였는데, 근대적 교과과정을 도입하면서 영어로 된 교재도 쓰고 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1880년부터 두 명의 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영어도 가르쳤다. 이 곳에서 1년 반 가량 공부하는 동안 유길준은 서양의 역사?지리?정치?경제?법률 등에 관해 강의를 듣는 한편 그 당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였던 福澤諭吉의 『학문을 권함』?『西洋事情』『文明論之槪略』 등을 탐독하였을 것이다. 유길준은 福澤의 ‘門生’임을 자처하였다. 그리고 박규수의 사랑에서 만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일본에 건너오면 그들을 만나 개화를 모색했다. 그러나 유길준의 동경유학은 1882년 7월에 임오군란이 발발함으로써 중단되었다. 고종의 명령으로 소환된 유길준은 개화정책의 시행기구인 統理機務衙門의 主事로 임명되었다. 과거를 포기한 유길준은 특채의 형식으로 이렇게 관리의 길에 입문했다. 이 때 유길준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漢城旬報』의 창간이었다. 
그리고 1883년 가을, 영어를 할 줄 아는 유길준은 최초의 대미 외교사절단인 보빙사의  正使인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발탁되어 도미했다. 유길준을 포함한 보빙사 일행이 일본을 거쳐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883년 9월 2일이었다.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차를 타고 시카고를 경유 수도인 위싱턴에 도착했다. 일행은 보스턴?뉴욕?워싱턴 등지의 정부공공기관, 군사?경제?교육시설, 우편국?신문사?병원?공장?시범농장?박람회 등을 시찰한 다음 11월 16일에 귀로에 올랐다. 이 때 유길준은 민영익의 지시에 따라 미국에 유학생으로 남아 유학하게 되었다. 최초의 미국유학생. 
유길준은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에 있는 피바디박물관의 모오스(Edward S. Morse) 관장의 집에 머물면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유길준이 ‘정직하고 과학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던 모오스는 원래 동물학자로 다윈주의의 신봉자였다. 그는 1877년부터 1880년까지 동경대학 최초의 미국 초빙교수로 있으면서 일본의 고고학적 유물발굴에 관심을 기울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유길준은 이미 동경 유학시절에 그 명성을 익힌 모오스의 집에 반년 가량 머물면서 영어의 이해수준을 높인 다음 1884년(29세) 9월에 대학입학 예비고등학교인 담머학교 3학년 학생으로 편입했다. 그러나 국내의 불안한 정국으로 인해 유길준의 미국유학은 또다시 좌절되고 만다.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이 발발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유길준은

깜작 놀라서 얼굴빛이 바뀐 채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 때 큰 눈이 정원 소나무 위에 쌓이고 음산한 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려, 밤이 다하도록 침상 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갑신정변은 북촌에서 함께 자라고 박규수의 사랑에서, 일본에서 자신과 함께 시국을 논하고 개화를 꿈꾸던 김옥균?서재필?홍영식 등이 일으킨 정변이었다. 나에게는 어떤 화가 미칠 것인가. 더군다나 자신의 후원자인 민영익은 그들에 의해 치명상을 입었다! 유길준은 급히 고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혁명당은 임금과 나라에 충성을 다할 때에는 나의 좋은 벗이었지만 그들이 역적이 되어 나라에 큰 해를 끼친 이상 이제는 나의 큰 원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자신이 그들과 무관함을 변명했다. 그리고 궁중의 통역관으로 고용할 터이니 귀국하라는 고종의 명령이 하달되자, 1885년 9월 귀국길에 오른다.    
죽음이 자신을 기다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유길준은 귀로로 태평양을 선택하지 않고 그 역로를 택한다. 그는 뉴욕항에서 영국행 기선을 타고 런던에 들러 돌아 본 다음 영국을 떠나 이집트의 새이드항을 경유, 홍해를 통과, 싱가포르와 홍콩을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 미국을 다녀오는 동안 지구를 한바퀴 돈 셈이다. 아마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서양의 면모를, 서양의 힘을. 일본에서 그는 망명 중인 김옥균을 만났는데 김옥균은  귀국을 극력만류했다고 한다.  
1885년 12월 중순 제물포에 도착한 유길준은 궁중의 통역관이라는 관직 대신 한규설의 집에 유폐를 당하고 만다. 1887년 가을부터는 가회동의 취운정 아래 작은 기와집에 연금되었다. ‘도성 내 유폐’라는 전례없는 처벌.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와 어울렸다는 세평이 자자한 터에 귀국 길에 동경에서 김옥균을 만난 일까지 있기 때문에 원세개 및 집권층으로부터 김옥균과 한통속이라는 혐의를 샀음에도 불구하고 유길준에 대한 처벌이 그나마 유폐에 그친 것은 민영익의 변호덕분이었다. 1885년 말부터 1892년 겨울까지 7년간의 유폐생활 동안,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에 맞아 죽은 한규직의 아우인 한규설이 유길준의 보호자 역할을 했던 것 역시 그의 절친한 친구인 민영익의 부탁때문이었다. 이 연금생활 기간 중에 탄생한 것이 바로 『서유견문』이다. 
유길준은 갑신정변과 같은 혁명적 방법에 의한 개화에 보조를 맞추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갑오개혁기에는 協辦?內務大臣 서리?내무대신으로 적극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한다. 그러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친러파 정권이 수립되자, 유길준 역시 김옥균처럼 일본으로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를 총애했던 총리대신 김홍집은 가두에서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다. 일본에서 유길준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청년장교들과 정권전복의 쿠데타를 기도하다가 발각되고 만다. 그리고 바로 김옥균이 유배당했던 오가사와라 섬으로 끌려갔다. 일본으로의 망명, 그리고 외딴 섬으로의 유배! 망명생활 11년만인 1907년 귀국한 그를 기다린 것은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 기독교로의 귀의였다. 

3. 國家再造 프로젝트

19세기 조선에서 서양문물에 대한 소개와 서양과의 개국통상을 주장하는 일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조선후기 중국을 통한 천주교의 전래와 함께 소개되기 시작한 서양의 문물은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결코 경이로운 것이 아니었다. 서구문명을 접했을 때의 충격,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예수교 신부들을 통해 들어온 것은 당시 발흥하는 서구의 근대문명이 아니었다. 유학자들은 補儒論的 입장에서 천주교를, 서양의 문물을 대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중국 중심의 세계관은 명이 망하고 小中華思想이 등장하면서부터 이미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위 북학파가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의 탈피의 자극제 혹은 인도자가 되었다는 평가도 안이한 발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자본주의 문명을 앞세운 서양은 군사적으로 동양의 평화를 위협하는 강자?패자로 등장했다. 관심의 급증은 安危를 위해 당연한 것이었다. 서학을 통해서 알고 있던 서양과는 다른 서양의 모습. 지식인들은 청에서 들여온 『해국도지』?『영환지략』를 통해 西洋地誌에 대해 새삼 이해하기 시작했다. 『조선책략』을 놓고 고민하던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조선은 서양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는 외교적 開明을 이룰 수 있었다. 갑신정변 단계에서는 서양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가? 대답은 No다.   
그렇다면, 도대체 개화는 무엇이며, ‘開化黨’은 어떻게 개항이전부터 존재가능했던가. 개화는 바로 권력의 전복을 노리는 신흥정치세력의 이념적 모토였다. 내부의 모순을 해결할 방책은 내부에 존재하지 않기에 희망은 저 수평선 너머에 있다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김옥균과 유길준은 이 신흥정치세력의 자양분 속에서 자라나면서 ‘개화’의 의지를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름의 국가재조의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1)김옥균 :『치도약론』『갑신일록』 外

혁명을 꿈꾸는 김옥균에게 현실은 절망 그 자체였다. 인민은 고통 속에 신음하고. 

인민이 한가지 물건을 만들면 양반이나 관리의 무리가 이것을 빼앗아가고, 백성이 辛苦해서 조금만 곡식을 저축해 놓으면 양반이나 관리가 와서 이것을 약탈해 갑니다. 그런 때문에 인민은 말하기를 ‘자력으로 농사를 지어서 옷을 입고 밥을 먹으려 하면 양반이나 관리가 그 이익을 빼앗아갈 뿐만 아니라 심한 때에는 귀중한 생명까지도 잃을 염려가 있으니 차라리 농상공의 모든 생업을 버려서 위험을 면하는 이만 못하다 합니다. 이리하여 놀고 먹는 백성이 전국에 가득 차서 국력이 날로 소모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나이다. 

그리고 국가의 장래에는 조금도 관심없는 무능한 관리들. 

오늘 우리 조선 나라에서 영국이라는 이름을 아는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나이까? 가령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라도 영국이 어디에 있는냐고 물으면, 망연히 대답지 못하는 자가 하나둘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하면 어떤 물건이 와서 내 몸뚱이를 물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물건이 나를 무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국가의 존망을 이야기한다는 바가 어리석은 사람의 꿈 이야기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옵니다.

간신배들이 천하대세를 알지 못하고 나라를 망치는 일만 지어 내어서 결국은 국가를 장차 외국에게 빼앗기게 됨을 알지 못하고 있다.

조선의 내정은 그 전복의 기틀이 이미 드러나서 재정의 붕괴와 정법의 문란과 인민의 도탄은 차마 열거하기 어려우며 듣기만 해도 마치 계란을 쌓아 놓은 것과 같이 위급하므로 만회하여 진작시키는 방법을 도모하고자 하면 小智와 小能으로서는 불가하게 되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정치현실은 자신들의 목숨조차 압박하는 청의 내정간섭.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3천명의 군대와 군함 5척을 파견하여 대원군을 납치하고 민씨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방조했다. 그리고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내정을 장악해 들어가고 있었다. 김옥균이 보기에 그들은 이미 수평선 너머로 완전히 저버린 태양이거늘... 그는 ‘조국이 청국의 종주권하에 있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여 어찌하면 이 수치를 벗어나 조선도 세계각국 중에 평등과 자유의 일원이 될까 주야로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등장한다. 獨立!. 사실상 독립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청의 속국 시절부터 등장한 중요한 정치적 ‘화두’였다. 

자래로 청국이 스스로 속국으로 생각해 온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조선)가 振作의 희망이 없는 것은 역시 여기에 원인이 없지 않다.

김옥균으로부터 들은 말에 의하면 ‘서양각국은 모두 독립국가다. 어떠한 국가든지 독립한 연후에야 비로소 타국과 화친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은 오직 청국의 속국이 되어 있는 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조선도 언젠가는 독립국가가 되어 서양제국과 동렬에 서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신중모의 공술」 『推案及鞫案』


그는 이렇게 절규했다. ‘조선도 힘있는 현대적 국가를 건설하는 길밖에 없다.’ 아시아의 불란서가 되자!

그리고 그는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아세아의 불란서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꿈이었고 또 유일한 야심이었다. 서재필, 「회고갑신정변」 『갑신정변과 김옥균』(민태원, 1947) 
 

일본에서도 자신의 동지들을 구하려고는 했지만 정작 김옥균에게 일본은 청과 마찬가지로 自守에 급급할 수 밖에 없는 약소국일 뿐이었다.  

이제 조선을 위하여 계획하려면 청국은 본래부터 족히 믿지 못할 것이요, 일본도 역시 그러합니다. 이 두나라는 각기 자기 나라를 유지하기에 남은 힘이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어느 겨를에 남의 나라를 부조할 수가 있겠습니까. .... 오직 밖으로는 널리 구미 각국과 신의를 가지고 친교를 맺고 안으로는 정치를 개혁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문명의 길로 가르치며 상업을 일으켜 재정을 정리하고 또 군사를 길러서 국력을 강하게 해야 할 것이오나 이것은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영어를 배워라, 그리하여 서양의 문명도 일본을 경유하지 않고 직수입해야 한다.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나던 1882년에 동남개척사로 있는 김옥균씨가 사신으로 일본에 와서 나를 보고 일본말만 배우지 말고 영어를 배워야 일본을 경유치 않고 태서문명을 직수입할 수 있다고 권고함으로 일본어는 그만큼 하고 영어를 배우기로 결심하였소. 윤치호의 회고, 『동아일보』 1930년 1월 11일 자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지금이 바로  우리나라가 ‘大更張之會’인 것이다.   

지금 사세가 부득불 대경장지회에 처해 있는데도 만약 그대로 因循姑息할 계획만 생각한다면 宗社와 生靈의 福이 아니다. 

『치도약론』에서는 이러한 경장의 시기에 맞추어 여러 가지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세상은 급속히 변화,발전하고 있다. 

만국이 교통하여 수레와 배가 바다 위로 마구 달리고 전선이 온 세계에 그물처럼 널렸으며 광을 열어 금은을 캐내고 쇠를 녹여 모든 기계를 만드는 등 일체의 민생과 일용에 편리한 일들을 자못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더럽고 지저분하다. 비위생적이다.   

수십년 이래로 괴질과 역질이 가을과 여름 사이에 성행해서 한 사람이 병에 걸리면 그 병이 전염되어 백명, 천명에 이르고 죽는 자가 계속해서 생기고 죽는 자의 대다수는 일을 한창 할 장정들이었다. 이것은 비단 거처가 깨끗치 못하고 음식물에 절제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더러운 물건이 거리에 쌓여 있어 그 독한 기운이 사람의 몸에 침입하는 까닭이다. 

그 대책은 주문외고 부적쓰는 정도에 그치다니.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는 김옥균은 이렇게 내뱉는다. “외국의 조소를 받을 일이다.” 

이 때를 당해서 혹시 富厚하고 존귀한 자로서 조금 攝養할 줄 하는 자는 이것을 초초하게 여겨 마치 뜨거운 화로 속에 앉아 있는 것처럼 여겨서, 기도하고 빌고 주문을 외우고 부적을 써 붙이는 등 별짓을 다한다. 또 조금이라도 의술을 아는 자는 이러한 장소에서 도망하여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해도 되지 않아서 이리 닫고 저리 달려 창황하게 돌아다닌다. 이리하여 요행히 살아 남으면 문득 말하기를 ‘올해는 운기가 그렇다’고 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관청에서부터 민가의 마당에 이르기까지 물이 번지고 도랑이 막혀서 더러운 냄새가 사람을 핍박하여 코를 막아도 견디기 어려움의 탄식이 있으니 실로 외국의 조소를 받을 일이다.  세상은 치료법조차 없는 콜레라가 만연하고 있다. 1819년 인도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1821년에 한국에 들어와 3년 동안 각지에 10만명도 넘는 환자가 발생했다. 이후에도 콜레라는 계속되었다. 전염병의 시대! 당시 위생문제는 그만큼 절박한 생존의 문제였다. 유길준도 『서유견문』에서 위생문제에 대한 대책을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집과 길을 깨끗이 하는 일도 건강을 돌보는 방법에 깊은 관계가 있다. 전염병 가운데 괴질 염병 같은 종류는 오로지 더러운 기운의 독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더라도 각처 도회지에는 해마다 초봄이 되거나 초가을 환절기에는 유행병이 자주 그 독을 퍼뜨린다. 만약 이러한 병을 운수에 달렸다고 한다면 어지 더러운 지방에만 있고 여러 나라의 정결한 도시들에는 없는가. 집마다 변소가 있는데 땅 속에 묻은 관으로 수십리나 이어져 바닷물이 드나들 때 씻어 내려간다. 이는 시내에서 행하는 방법이다. 

   뿐만 아니라 동학 역시 이러한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창도된 것이었다. 김옥균이 비난한 것처럼 부적 태우고 주문외우는 동학에도 다음과 같은 위생규칙은 있었다. 
 
   1. 의복을 단정히 하라 
   2. 길에서 먹지 말라
   3. 뒷짐진 채 거닐지 말라
   4. 상한 고기를 먹지 말라 
   5. 찬 샘에 급히 들어가지 말라


그런데, 김옥균의 대책은 간단하다. 서양을 본받고자 하는 김옥균은 위생과 함께 農桑, 治道를 중시하는데, 전답에 거름을 주는 것으로 위생문제를 해결하고 길을 닦음으로써 공업기술에 힘쓸 여력이 생기도록 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오늘날 급히 해야 할 일은 농업을 일으키는 일보다 더한 것이 없고, 농업을 일으키는 요점은 실로 전답에 거름을 많이 주는 데 있다. 전답에 거름을 부지런히 주면 더러운 것을 없앨 수 있고, 더러운 것을 없애면 전염병도 없앨 수 있다. 가령 농사짓는 일이 제대로 되었다고 할지라도 운반이 불편하다면 양식이 남는 곳의 곡식을 양식이 모자라는 곳으로 옮길 수 없다. 그러므로 길을 닦는 일이 시급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길이 이미 잘 닦아져 車馬가 편히 다닐 수 있게 되면 열사람이 할 일을 한 사람이 할 수가 있을 것이니. 나머지 아홉 사람의 힘을 工業의 기술로 돌린다면, 옛날에 놀고 먹기만 하던 무리들은 모두 일정한 항구적 직업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 국가를 편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 이보다 나은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 일은 계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마땅히 솔선수범해야 한다. 즉 김옥균에게 국가재조의 주체, 혁신의 주체는 자신이면서 동시에 국가였다. 하지만 현존의 정부가 아니라 개화의 의지를 갖고 있는 자신이 참여한 개명한 정부여야 했다.     

여기에 쓴 각 조목은 마땅히 관청에서 실행해야 할 것이요, 결코 백성들에게만 명령해서 실효를 거두기를 기약할 것이 아니다. 국가의 큰 정치에 관계가 되는 것이니 어찌 많은 돈이 소비되는 것을 아까와하겠는가? 오직 돈을 마련하는 방법은 알 일이 못된다. 그러나 폐단이 있는 것을 개혁하고 번거로운 것을 간략히 하고 쓸데없는 것을 없애고 많은 것을 줄이고 숨겨져 있는 것을 나타나게 하고 허한 것을 실하게 한다면 재량하고 구별하는 방법이 반드시 그 속에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정부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첫째,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순검은 매 50호마다 1명 꼴로 두는 순검제를 실시하고 刑政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근대서구의 경찰제도와 감옥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죄수들에게 속죄를 할 수 있는 기회로 노동을 강제했던 ‘부르조아의 노동의 윤리학’도 등장한다.    
 
못 한 개, 송곳 한 개만 훔쳐도 아무렇게나 중죄에 처하고 한 사람의 부호나 세력있는 사람을 욕만 해도 死刑에 처해서 사람의 목숨이 가볍기가 풀 한포기보다도 더하니 和氣를 손상시키는 것이 여기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고 있다. 어진 사람과 군자의 마음에 어찌 통한스럽고 슬프지 않겠는가? 요순 때에 백성들이 어찌 악했으리오마는 그래도 법관이 있었고 벌칙이 있었으니 이것이 징역의 법이 생긴 유래다. 지금은 마땅히 새로 법률을 정해서 모든 경한 죄를 범한 자들을 데려다가 工人을 만들어 일을 시켜서 스스로 속죄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김옥균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경장의 때는 오지 않았다. 개벽은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국가재조 프로젝트를 현실화시키기 위한 정변을 감행했다. 혁명적 실천으로의 비약!  

4백년 누적된 頑俗을 갑자기 변화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대세는 부득불 정부를 한번 대경장개혁한 연후에야 君權을 높일 수 있고 민생을 보전할 수 있다. ..독립을 바라면 정치와 외교를 불가불 自修自强해야 하는데 이 일은 지금의 정부 인물로서는 될 수 없으므로 군권을 위태롭게 하고 권세만 탐내는 고식배들을 역시 불가불 한번 소제(!)할 수 밖에 없다
   
허망한 삼일천하, 망명과 유배의 생활, 생명의 위협.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의 의지는 쉽게 꺽이지 않았다. 일본에서 고종에서 보낸 상소문을 통해 김옥균은 여전히 지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개진하고 있다.  

하루 속히 무식무능하고 守舊하고 고루한 대신이나 輔國들을 내쫓아 문벌을 없애고 인재를 골라  중앙집권의 기초를 확실히 세우며 인민들의 신용을 얻게 하고 널리 학교를 세워서 사람들의 지혜를 개발하고  또 외국의 종교를 도입하여 교화에 도움을 주는 것과 같은 일도 역시 한가지 방편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김옥균에게 보낸 ‘고종’의 대답은 자객의 밀파와 잔인한 처형이었다. 갈가리 찢겨진 신체, 기둥에 매달린 잘려진 머리와 손발, 그것은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하고 자신의 우월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 통치권력이 연출한 스펙타클이었던 것이다. 

 2) 유길준 :『서유견문』

서유견문은 ‘지구는 우리 인간들이 사는 세계인데, 역시 유성의 하나다’로 시작되는 세계인문지리서이면서 구미의 정치?사회?교육제도 등을 소개하는 일종의 폭넓은 정치학 교과서다. 그리고 유폐생활을 반영하듯 아주 조심스럽게, 가끔은 솔직하게 자신의 국가재조론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토로한 제안서다.  우선, 서유견문의 목차를 살펴보자. 

제1편 지구세계의 개론/6대주의 구역/나라의 구별/세계의 산 
제2편 세계의 바다/세계의 강/세계의 호수/세계의 인종/세계의 물산
제3편 나라의 권리/국민의 교육
제4편 국민의 권리/인간세상의 경쟁
제5편 정부의 시초/정부의 종류/정부의 정치제도
제6편 정부의 직분
제7편 세금 거두는 법규/납세의 의무
제8편 세금이 쓰이는 일들/정부에서 국채를 모집하여 사용하는 까닭
제9편 교육하는 제도/군대를 양성하는 제도
제10편 화폐의 근본/법률의 공도/경찰제도
제11편 당파를 만드는 버릇/생계를 구하는 방법/건강을 돌보는 방법
제12편 애국하는 충성/어린이를 양육하는 방법
제13편 서양학문의 내력/서양군제의 내력/유럽종교의 내력/학문의 갈래
제14편 상인의 대도/개화의 등급
제15편 결혼하는 절차/장사지내는 예절/친구를 사귀는 법/여자를 대접하는 예절
제16편 옷?음식?집의 제도/농작과 목축의 현황/놀고 즐기는 모습
제17편 빈민수용소/병원/정신박약아학교/정신병원/맹아원/농아원/교도소/박람회/
       박물관과 동?식물원/도서관/강연회/신문
제18편 증기기관/와트의 약전/기차/기선/전신기/전화기/회사/도시의 배치
제19편 각국 대도시의 모습/미국의 여러 대도시/영국의 여러 대도시
제20편 프랑스의 여러 대도시/독일의 여러 대도시/네덜란드의 여러 대도시/
       포르투갈의 여러 대도시/스페인의 여러 대도시/ 벨기에의 여러 대도시

서유견문의 앞부분(1,2편)과 뒷부분(19,20편)은 세계인문지리에 대한 소개다. 그리고 15-18편은 주로 유길준이 미국에서 직접 견문한 것들에 대한 소개다. 서유견문의 핵심은 「나라의 권리」로 시작되는 3편에서 「개화의 등급」으로 끝나는 14편까지다. 바로 이 부분에 半開化상태의 조선국민을 계몽시키고 나아가 조선의 독립과 부강에 필요한 제도개혁을 도모함으로써 便利民國하자고 했던 유길준의 국가재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유길준은 조선의 정치체제를 다음과 같이 간접적으로 비판하면서 ‘경장’의 당위성을 추출해낸다.   

임금이 명령하는 정치 체제에 귀족이 주장하는 정치체제가 겸해진 까닭은 그 나라에 일정한 규범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나 세대가 변천하면서 어울리지 않는 것도 있게 되고, 사세가 바뀌면서 개정할 것도 있게 되었지만, 정부의 관리 가운데 공평한 마음을 품은 자가 많지 않고 또 국민도 애국하는 정성이 부족하므로 자기 한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만 부리면서 전국의 기강을 돌보지 않다 보니 빈부와 귀천의 차이가 현저하게 되었다. 세력있는 자는 법을 어겨도 처벌되지 않고 힘이 없는 자는 죄가 없어도 마음대로 손발을 놀릴 수가 없게 되었다. .....이처럼 정부와 국민 사이에 情義가 통하지 않게 되고 조그만 일도 서로 맞지 않게 되면 정부는 국민을 속박하고 국민도 정부를 원망하게 된다. 국민이 정부에서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당연히 내야 할 세금도 공연히 바친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진취적 기상과 독립적인 정신이 부족하게 되어, 나라에 부끄러운 일이 생겨도 국민들이 분노하지 않게 되고 정부에 더러운 사건이 생겨도 국민들이 씻어 내자는 의논을 하지 않게 된다. 모든 사물이 구차하게 경영되거나 고식적으로 계획된다. 아시아주의 커다란 나라가 유럽주의 조그만 나라에게 모욕을 당하고 치욕을 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니 심사숙고할 문제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하지만, 유길준은 조선의 군주제를 옹호하면서 미국식 공화제나 영국식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반대한다.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우주의 원리, 道理다.   

나라의 규범 가운데는 천만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는가 하면 시세에 따라 바뀔 것도 있다. 변하지 않는 규범으로는 임금이 국민의 위에 서서 정부를 설치하는 제도라든가, 나라가 태평하기를 도모하기 위한 대권, 국민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그 정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일 등이 있다. 이는 인생의 커다란 기강이다. 해와 달같이 빛나고 밝으며 천지와 함께 장구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옮기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가 선호했던 것은 영국형 군민공치체제였다. 그는 서양에 있는 여러 나라가 아시아주에 있는 나라들보다 백배나 부강한 이유는 인종적인 天質의 차이나 재주와 지식의 등급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제도나 규범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하지만 한나라의 정치란 항상 그 인민의 지식수준에 따라 그 제도의 등급이 성립되기 때문에 정체의 종류는 그 나라 인민의 개화의 등급에 따라 그 인민이 自取한 것으로 인민의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타국의 좋은 정체라고 무조건 도입하면 오히려 나라에 큰 혼란의 싹을 뿌리는 것이라고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인민을 교육하여 국정에 참여하는 지식이 있게 한 연후에 그 정체를 논의함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국민의 신상에 고통이 가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을 이끄는 국민교육을 널리 시행하는 것이 바로 정부의 직분인 것이다. 참정권 역시 교육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유길준은 인민의 지식이 부족한 나라는 졸연히 그 인민에게 국정을 參涉하는 권을 허락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서유견문』에는 선거, 의회 등 민주주의제도와 관련된 부분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다. 조선의 정치개혁에 초점을 맞춘 제안서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조치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국가중심적 사고를 하면서 충을 강조한 유길준에게는 개인과 개인주의의 가치에 대한 심층있는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식의 평가는 부적절한 것이다. 유길준은 서양경제를 소개하는 부분에서조차 부국과 강병의 기초를 공업보다는 상업에서 찾는 현실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김옥균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정부가 개화의 주체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가장 주목받는 부분은 ‘개화의 등급’이다. 여기서 유길준은 과감하게 개화를 모든 사회에서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방향이자 목표인 至善極美한 경지라고 주장한다.  

개화란 인간 세상의 천만가지 사물이 지극히 선하고도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오륜의 행실을 독실하게 지켜서 사람된 도리를 안다면 이는 행실이 개화된 것이며 국민들이 학문을 연구하여 만물의 이치를 밝힌다면 이는 학문이 개화된 것이다. 나라의 정치를 바르고도 크게 하여 국민들에게 태평한 즐거움이 있으면 정치가 개화된 것이며 법률을 공평히 하여 국민들에게 억울한 일이 없으면 법률이 개화된 것이다. 기계 다루는 제도를 편리하게 하여 국민들이 사용하기 편리하면 기계가 개화된 것이며, 물품을 정밀하게 만들어 국민들의 후생에 이바지하고 거칠거나 조잡함이 없으면 물품이 개화된 것이니, 이 여러 가지의 개화를 합한 뒤에야 개화를 다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유길준은 半開化 단계에 조선을 배정한다. 여기서도 현실에 대한 비판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반쯤 개화한 자는 사물을 연구하지 않고 경영하지도 않으며 구차한 계획과 고식적인 의사로써 조금 성공한 경지에 안주하고 장기적인 대책이 없는 자다. 그러면서도 또한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는 마음은 있어서, 사람을 접대할 때에 능한 자에게 칭찬하는 일이 적고, 능치 못한 자는 깔본다. 언제나 거만한 기색을 띠고 망령된 생각으로 스스로를 높이되, 지위의 귀천과 형세의 강약에 의해 아주 심하게 인품을 구별한다. 그러므로 국민이 저마다 자신의 영화와 욕심을 위해 애쓸 뿐이지, 여러 가지의 개화를 위해서 마음을 쓰지는 않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유길준 자신도 반개화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반개화한 조선에서 개화된 자다.

국민들이 한꺼번에 개화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니 사람의 도리를 지키며 사물의 이치를 연구한다면 이는 오랑캐 나라에 있더라도 개화한 자이지만, 인생의 도리를 지키지 않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지 않으면 개화한 나라에 있더라도 아직 개화하지 않은 자다. 

어떻게 개화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 지혜로? 용단으로? 위력으로? 지혜로 불가능하다면 용단으로! 이러한 논리가 그로 하여금 갑오개혁에 참여하는 것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개화당과 같은 위력행사는 물론 반대한다.  

지혜로써 개화한 자는 규모가 온전하고 폐단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주인의 형세를 유지하고 있다. 용단으로 개화한 자는 완전한 법도가 적고 무수한 폐단이 생기므로 차질을 빚는 일이 많았다. ... 위력으로써 개화한 자는 국민의 지식이 모자라는 것을 이용하여 억지로 행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그 규모가 어떻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폐단은 오히려 용단으로써 개화한 자에 비하여 적은 편이다. 그러나 정부가 위태하니, 나라 안에 커다란 적이 있는 것과 항상 같아서 가장 어려운 나라다. 

하지만 개화는 실질적이어야 한다. 虛名의 개화는 하나마나다.

개화는 실상의 개화와 허명의 개화로 분별된다. 실상의 개화는 사물의 이치와 근본을 깊이 연구하고 고증하여 그 나라의 처지와 시세에 합당케 하는 경우다. 허명의 개화는 사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서도 남이 잘된 모습을 보면 부러워서 그러든지 두려워서 그러든지 앞뒤를 헤아릴 지식도 없이 덮어놓고 시행하자고 주장하여 돈을 적지 않게 쓰면서도 실용성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다. 외국과 처음으로 통한 자가 한번씩은 허명의 개화를 겪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수없이 많은 경험을 얻게 되면 비로소 실상의 개화로 나아가게 된다.   

그 실질적인 개화에는 분명한 주체의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유길준의 눈에 몰주체적인 개화당은 개화의 죄인이며 너무나 폐쇄적이라 오히려 주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수구당을 개화의 원수일 뿐이다. 그리고 간도 쓸개도 다 내놓고 서양풍에 빠져 있는 이들은 개화의 병신이다.      

개화하는 일은 남의 장기를 취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전하는 데에도 있다. 남의 장기를 취하려는 생각도 결국은 자신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돕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남의 재주를 취하더라도 실용적으로 이용하기만 하면 자기의 재주가 되는 것이다. 시세와 처지를 잘 헤아려서 이해와 경중을 판단한 뒤에, 앞뒤를 가려서 차례로 시행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친 자는 아무런 분별도 없이 외국의 것이라면 모두 다 좋다고 생각하고 자기 나라의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외국 모습을 칭찬하는 나머지 자기 나라를 업신여기는 폐단까지도 있다. 이들을 개화당이라고 하지만 이들이 어찌 개화당이랴, 사실의 개화의 죄인이다. 
한편 모자라는 자는 완고한 성품으로 사물을 분별치 못하여, 외국 사람이면 모두 오랑캐라 하고 외국 물건이면 모두 쓸데없는 물건이라 하며 외국 문자는 천주학이라고 하여 가까이하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만이 천하 제일이라고 여기며 심지어는 피해 사는 자까지도 있다. 이들은 수구당이라고 하지만 이들이 어찌 수구당이랴. 사실은 개화의 원수다.
성인 말씀에 “지나침과 모자람은 같다”고 하셨지만, 개화하는 데에 있어서는 지나친 자의 폐해가 모자라는 자보다  더 심하다.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지나친 자는 자기 나라를 빨리 위태롭게 하고 모자라는 자는 자기 나라를 더디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중용을 지키는 자가 있어서 지나친 자를 조절하고 모자라는 자를 권면하여 남의 장기를 취하고 자기의 훌륭한 것을 지켜서, 처지와 시세에 순응한 뒤에 나라를 보전하여 개화의 커다란 공을 거두어야 한다. 입에다 외국 담배를 물고, 가슴에는 외국 시계를 차며, 소파나 의자에 걸터 앉아서 외국 풍속을 이야기하거나 외국말을 얼마쯤 지껄이는 자가 어찌 개화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는 개화의 죄인도 아니고 개화의 원수도 아니다. 개화라는 헛바람에 날려서 마음 속도 주견도 없는 한낱 개화의 병신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개화로의 비약 아닌 ‘전진’의 희망은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공자의 말씀을 상기하자. 교육과 계몽을 통해 우리도 노력하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고려청자, 거북선, 금속활자를 발명한 찬란한 역사가 있지 않은가. 

사람의 지식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신기한 것과 심묘한 것들이 쌓여져 나온다. 이처럼 신기하고 심묘한 이치는 옛날에는 없었다가 요즘에야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다. 천지간의 자연스러운 근본은 예나 이제나 차이가 없지만 옛 사람들은  그 이치를 다 밝혀 내지 못했고 요즘 사람들은 깊이 연구하여 터득한 것이다. 이를 말미암아 본다면, 요즘 사람의 재주와 학식이 옛사람보다 훨씬 나은 듯하지만 실상은 옛 사람이 처음 만들어 낸 것에다 윤색한 것일 뿐이다....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이 깊이 연구하고 또 연구하여 편리한 방법을 경영하였더라면, 이 시대에 이르러 천만 가지 사물에 관한 세계 만국의 명예가 우리 나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후배들이 앞사람들의 옛 제도를 윤색치 못하였다.

유길준은 이처럼 『서유견문』에서 막연하게 ‘개화당’의 모토에 불과했던 ‘개화’의 형식과 내용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국가재조의 이념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사상으로의 승화에는 실패했다. 현실대응의 논리로 출발한 개화론을 과연 ‘개화사상’이라 부를 수는 있는 것일까. 사상으로의 승화가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4. 오만과 편견 속에 우뚝 솟아오른 절대경지 : ‘개화’ 

하지만 개화의 현실은 유길준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미끌어졌다. 국내외의 위기가 고조되는 격랑 속에서 ‘개화의 병신’이 넘쳐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개화의 근본논리는 미개를 문명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개혁노선이나 사회모순을 구조적?역사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민중의 개혁요구는 서구가 개화인 이상 미개로 치부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개화의 주장은 개혁의 내적 필연성과 섞이는 동시에 이와는 상관없이 그 주장자들의 현실적 利害와 다시 얽히면서 외국자본과 그 문물?사상에 추종하고 심취하는 비극의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개화지상주의자들을 양산했다.    
실제 이들 대다수는 지주이면서 관료이고 고리대업자들이었으며 이 선상에서 배출되는 지식인들이었다. 또한 당쟁의 최종 귀결인 세도정치권에 속하는 이들로서 자기 개혁없이 그대로 ‘外勢’와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나갔다. 개화의 명의하에 그 처신의 유지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국내외 위기가 고조되고 열강의 회유와 침입이 격증할수록 자신의 우월성만 고취하고 국가와 민인을 보위하고 자긍하는 사명감은 상실하여 갔다. 그들은 미개의 조선 위에서 우뚝 서 있는 개화로서의 자신만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개화는 일본?청?서양의 문물의 이식과 그 향도의 역할을 수행했다. 주장자들은 조선이 개혁기에 걸어야 할 길이 오직 개화뿐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조선인들의 의식?감정?사고 또한 구미?일본처럼 곧 개화의 상처럼 변모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자면 이들 개화국과 그 국민의 정신을 본따야 하고 나아가선 그들의 종교 곧 기독교인화하여야 한다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개화는 유일신앙화하였고 다른 일체는 미신이고 몽매이고 무지였다. 이러한 개화는 그 대상을 미개?원죄로 단정하고 그것을 변개?회개시키는 것이 본질이었다. 대상 스스로가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자기주체와 내력을 부정하게끔 하여야 개화는 시작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실제는 洋化이고 일본화였다. 개화의 죄인이나 원수보다 병신이 넘쳐나는 사회의 불행이란! 
그렇다면 오늘날 개화에 대한 이미지는 어떠한가.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우리에게 ‘개화사상’은 낯설지 않은 개념이다. 그런데, “개화사상의 내용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궁색하다. 주자학이나 실학에 대해 동일한 질문을 던질 경우, ‘사상’으로서의 그 내용의 풍부함 때문에 무엇을 먼저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깐 망설이겠지만 ‘개화사상’의 내용을 추궁당할 때는 다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미개를 문명으로 한다는 것이지요.” 당장에 이런 반격이 들어 올 것이다. “ 아니, 그렇다면 그것을 감히 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끼?” 우주관도, 인생관도, 자연관도 없는 사상?!.    
물론 개화는 사상이 아니다. 그 안에 인간과 세계를 보는 독특한 觀이 있을 리 만무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과대포장된 ‘개화사상’이라는 개념을 아무런 의심없이 관성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개화사상서로서 최고의 지위를 누린 것이 바로 『서유견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서유견문』에는 현실대응의 논리로서 ‘開化論’이 넘쳐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개화파에게서 굳이 ‘국가의식’과 ‘민족애’를 끌어내고자 했던 후대의 지식인들이 과대포장해서 내놓은 상품이 바로 “개화사상서 『서유견문』”이다. 그런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유길준을 개화사상가로, 『서유견문』을 개화사상서로 추앙하는데 열을 올린 후대의 지식인들은 대개 친미적 성향이 확연한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이데올로그였던 박종홍은 유길준을 이렇게 과감하게 평가했다.

개화사상은 서세의 동점에 따라 구미의 사정이 전달되는 데서 발단한 것이라 하겠거니와 중국과 일본이 이 점에 있어서 우리보다 한걸음 앞섰던 만큼, 한말의 개화사상은 먼저 이들을 통하여 도입되었다. 그런데 유길준은 서적으로 그 당시 중국의 새로운 사상을 배웠고 일본에 유학하여 개화운동의 중심인물들과 친히 사귀었으며, 더구나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유학생으로서 구미의 근대적인 생활을 몸소 체험하여 그 사상의 진수를 이해한 사람이다

부언하자면, 북한 역사학계에서는 일찍부터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해 김옥균은 부르주아 혁명가이며, 갑신정변은 부르주아혁명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정치현실이 개혁이 아닌 혁명을 요구하는 한, 그들에겐 유길준보다 김옥균이 더 필요했다. 남한의 정치현실에서 김옥균이 주목받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박정희의 쿠데타 덕분이었다. 하지만 최초의 일본유학생이자 최초의 미국유학생이었던 유길준은 남한에서는 언제나 활용가능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현실로부터 탈주는커녕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역사와 역사학, 그것은 굴레이자 속박이다. 
김옥균과 유길준, 그들은 국가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일체화시키도록 훈련받은 한양 북촌 명문가의 적자요, 양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기약된 입신양명의 길을 걷지 않았다.    한 사람은 혁명을 통한 비약을, 한 사람은 ‘中道’의 길을 추구하며 개혁을 꿈꾸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혁명의, 개혁의 주체는 民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이었다. 자신들의 혁명적, 개혁적 실천을 통해 권력에 도전하고 권력의 질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두 사람의 開化를 통한 지상천국 건설의 프로젝트는 당시 민란을 통해 분출되고 있던 민중의 혁명적 에네르기를 흡수하면서 교세를 확장하고 있던 동학의 지상천국 건설의 길과 사못 대조적이다. 
인심풍속이 고이하고 민심이 淆薄한 이 세상에 졸부들이 설친다. 전염병이 돈다. 곳곳에서는 민란이 일어난다. 북경이 함락되었다! 脣亡齒寒. 서양인은 뜻한 바를 모두 이루는 괴물이다. 조선인은 이제 輔國安民의 계책을 마련해야 한다. ‘편작이 다시 와도 당해낼 수 없는 선약을 갖고 있는 범도 되고 용도 되는 만세의 名人’ 최제우의 치료법은 간단하다. 약은 필요없다. 지극정성으로 주문을 외워라. 그리고 부적을 태워 먹으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다했다.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온다.’ 후천개벽이 온다. 최제우에게 희망의 근거는 변함없는 자연의 질서다. 이치대로 간다. 희망은 내세가 아니라 永世한 ‘현세’의 몫이다. 후천개벽이 되고 지상천국이 건설되면, 깨끗한 옷을 입고 잘 먹고 잘 놀 수 있는 세상이 온다. 지금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는 세상! 그것은 ‘時’를 기다리면서 ‘誠敬’으로 하느님을 모시면 된다. ‘봄빛을 좋아하지 않음은 아니나 봄이 오지 않음은 다만 때가 아닌 탓이로다. 이에 마땅한 절기가 오면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오리’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제시된 두가지의 비젼.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낯익고 더 낯설은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가? 괴롭지만 이런 힘겨운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진다. 도대체 우리의 역사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근대’는 무엇이고 ‘근대성’은 무엇인가. 여전히 질문으로만 머물러 있는, 깊은 사유의 바다를 헤치고 나가야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우리의 근대’ ‘우리의 근대성’. 오늘도 항해는 계속된다.       





2000년 3월 9일, 강사 : 고미숙 
수유연구실 강좌: 동아시아 근대 강좌 : 계몽의 담론, 계몽의 사상가1. 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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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몽의 파토스, 그 정점에서의 사유
                            -단재의 민족주의에 대한 몇 가지 단상
                     
                          
                      고 미 숙 
      


      1.프롤로그 - 근대계몽기, ‘열혈남아’들의 세계

  
    今에 熱血力을 試論하노니 現世界에 覇權을 握執하는 者와 獨立自主는 國이 悉皆其國  
   人民의 熱血이 沸騰한 效力이라 대저 만물이 皆熱力으로 생하니 熱力이 유하야 諸天이  
   생하고 熱力이 유하야 태양이 생하고 태양은 열의 최극한 자라 능히 地를 생하고 만물 
   을 생하며 ....세계역사에 열사와 지사와 의사와 인인이 수가 熱血人이 아니리오 고로 其 
   成就의 大小가 其熱力의 다소를 從하야 分하나니 만일 사업이 微한 자는 心力이 약한  
   자오 심력이 약한 자는 熱力이 減한 故라 만일 기인의 熱力이 一大火團과 如하면 無物 
   不灼할 거시오 ....세계인류가 皆有熱血이어날 何獨韓人은 熱血이 無하리오 차는 풍기가  
   미개하고 인지가 미달하야 인이 기심력을 배양치 못한 연고라  
                                                        (<대한매일신보> 1905.10.13.)


  보다시피, 근대계몽기는 피끓는 열정의 도가니였다. 낡은 시,공간이 붕괴되면서 그 심연으로부터 용틀임하는 무규정적인 힘들의 분자적 흐름, 그리고 그것들의 거대한 교차였다. 흔히 생각하듯이, 한일신협약(을사조약) 이후 절망과 암흑의 그림자가 시대를 온통 감싼 듯이 여기기 십상이지만, 그것은 정말 오해다! 오히려 개항 이후 저 깊은 심층에서 혹은 돌출적으로 요동치던 계몽의 담론들이 이제 노일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누구나 시대를 진단하는 사상가가 될 수 있고, 어디서든 애국적 열정을 고취하는 무대가 마련될 수 있었던, 한마디로 계몽의 파토스가 흘러넘치는 열혈남아들의 시절이 도래했던 것이다. ->단재는 이 파토스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다. 


       2.‘단재’라는 기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단재 신채호 : 1880년 생. 신숙주의 후예지만 몰락양반. 전통 유학의 코스를 충실히 밟았고, 1897년, 양원 신기선(1851 - 1909)을 만나 개화문물에 접하고, 독립협회 운동에도 가담. 신기선의 후원에 힘입어, 성균관에 입교, 박사가 된다.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이 되고, 1906년 황성신문의 폐간과 함께 최고의 정론지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필명을 날린다. 1907년 비밀결사 신민회에 참여.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 대종교에 입문.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반이승만 노선을 천명, 이탈하고 1923년 무정부주의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요청으로 저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을 기초. 27년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28년 체포되어 36년 여순감옥에서 옥사.   
 ->이 짧은 약력 속에서 우리는 전통유학에서 전투적 계몽주의로, 다시 그 지평을 훌쩍 넘어 무정부주의로 나아가는 한 지식인의 장엄한 도정을 본다. 그는 매단계마다 최정점에 있었고, 그리고 그 강렬도에 힘입어 자신의 경계를 돌파해 나갔다. 어쩌면 단재의 특이성은 그의 지적 궤적에서보다 바로 이 강렬도 자체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풍운이 起하는 듯, 홍수가 ?하는 듯, 雷震이 鳴하는 듯, 潮가 打하는 듯, 火가 焚하는  
    듯, 이십세기 제국주의여(영토와 국권을 확장하는 주의). 신성한 門羅主義가 白旗를 壹 
    竪한 후로, 동서육주에 소위 육대강국이니 팔대강국이니 하는 열강이 모두 만강혈성으 
    로 차 제국주의를 숭배하며, 모두 분투쟁선하여 차 제국주의에게 굴복하여 세계무대가  
    일제국주의적 활극장을 성하였도다. 연즉 차 제국주의로 저항하는 방법은 何인가. 왈 민 
    족주의를 奮揮함이 是이니라.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우리의 세계 무산대중! 더욱 우리 동방 각 식민지 무산민중의 血.皮.肉.骨을 빨고, 짜 
    고, 씹고, 물고, 깨물어 먹어 온 자본주의의 강도제국 野獸群들은 지금에 그 창자가 꿰 
    어지려 한다. 배가 터지려 한다. 그래서 彼等이 그 최후의 발악으로 우리 무산민중- 더 
    욱 동방 각 식민지 민중을 대가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박박 찢으며 아삭아삭 깨물어, 우 
    리 민중은 사멸보다도 더 陰慘한 不生存의 生存을 가지고 있다. 아, 세계무산민중의 생 
    존! 동방무산민중의 생존! ......
     아, 殘虐.陰慘.不道한 야수적 강도! 강도적 야수! 이 야수의 유린 밑에서 고통과 비참을  
    받아 오는 우리 민중도 참다 못하여, 견디다, 못하여, 이에 저 야수들을 퇴치하려는, 박 
    멸하려는, 재래의 정치며, 법률이며, 도덕이며, 윤리며, 기타 一切 文具를 부인하자는 군 
    대며, 경찰이며, 황실이며, 정부며, 은행이며, 회사며, 기타 모든 세력을 파괴하자는 분노 
    적 절규 <혁명>이라는 소리가 大地上 일반의 耳膜을 울리었다.  ... 이 야수세계, 강도 
    사회에 <정의>니 <진리>니가 다 무슨 방귀이며, <문명>이니 <문화>니가 무슨 똥물 
    이냐?                                                              (<선언문>)  


    앞의 것은 민족주의자 단재의 목소리이고, 뒤의 것은 무정부주의자 단재의 것이다. 언표의 표현내용은 ‘국민에서 민중으로’, ‘조선에서 세계로’ 바뀌었지만, 언표체계의 방식은 유사한 평면 위에 있다. 그것은 단재, 단재주의를 구성하는 담론의 특이성으로서의 파토스이다. 그것은 근대 계몽기가 공유하는 것이었으면서, 동시에 단재가 그 지면 위에서 더욱 강도높게 획득한 것이기도 했다. 그 격정의 파토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근대 계몽기가 허여한 사유의 경계를 넘어 세계무산대중으로 향하게 했던 원초적(?) 에너지가 아니었을지. (-->후쿠자와나 소세키, 양계초나 강유위, 혹은 노신의 텍스트에서는 이런 격정의 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이런 특유의 언표방식, 담론의 구성방식이 한국적 근대담론의 특이성일 수도) 
   그에 비해 단재라는 기호를 감싸고 있는 이미지는 얼마나 강팍하고 경직된 것인지. ‘꼿꼿하게 서서 세수를 했다’는 춘원의 목격담 혹은 그 유사계열의 스캔들(?)은 단재 신채호를 오직 이념과 지조의 체현자로 각인시킨다.송건호, ?언론인으로서의 단재?, 강만길 편, ?신채호?(고대 출판부, 1990) 참고. 
 물론 그는 자신의 이념을 온몸으로 실천한, 식민지 시대를 관통하여 비교대상을 찾기 어려운 독종(!)이다. 그러나 그 힘, 일개 지식인으로 하여금 그러한 견결한 투쟁을 가능케 했던 동력이 이념의 견고함, 지조라는 규범의 평면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그렇게 환원하는 것조차 근대적 이분법의 소산은 아닐지. 그리고 그럴 경우 우리는 단재가 식민지 해방투쟁에 일생을 걸었으면서도 굳이 민족주의를 넘어 아나키스트의 지평으로 나아갔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 단재와 그의 담론적 실천의 효과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이념의 두터운 외피를 뒤집어 그 내부를 구성하는 그의 열정,- 사랑과 저주, 혹은 풍자와 해학 등을 체감해보는 것이 절실한 일이리라. 
  일단 지금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전투적 민족주의자로서의 단재이다. 이후 그가 간 경로에 대해서는 생각을 접기로 하고, 일단은 시선을 1910년 이전에 맞추고 단재라는 텍스트에 접근해보기로 하자. 계몽주의자 단재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1)근대 계몽기 담론들을 정치적 신원의 주술에서 해방시킬 것! 다시 말해, 친일개화냐, 개화자강이냐, 동도서기 혹은 서도서기 등과 같이 역사 교과서가 분류하는 몇 가지 도식들로 이념을 배치하고 거기에 줄을 세우는 방식을 반복하지 말자! 그것은 사실 담론을 오직 정치적 실천, 혹은 최후의 결과물로 환원함으로써 계몽기의 담론들의 두께를 한없이 얇게 만들어버리는 비극을 낳고 만다. 표면적 언표밑에 다양한 지층을 구성하면서 웅성거리는, 혹은 ‘하얀 공간’(푸코)들을 만들어내는 인식론의 구도를 탐사해야.  

  2)적어도 근대계몽기에 있어 단재라는 기호는 집합적 주체이다. 잘 알고 있듯이, 1905년에서 1910년 4월 망명을 떠나기 전까지 <대한매일신보>가 단재의 지적 영토였다. 이 신문은 전국적으로 분출되었던 계몽의 담론들이 흘러 들어왔던 저수지이자 개화의 만화경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여러 신문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계몽기를 주도한 전위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매일신보>와 단재의 고유성 사이의 경계는 넘나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시기는 장르간, 인물간, 담론간 횡단이 무쌍하게 벌어지는 것을 특징으로 했던바, 그것의 명확한 가르기는 가능하지도, 의미있지도 않다.   

  3)그가 실험한 글쓰기는 유형화하기가 힘들 정도로 광범하다. 역사전기물, 논설, 역사, 잡문, 계몽가사, 자유시, 소설 등 문학과 비문학을 넘나들었고, 문체에 있어서도 순국문체와 국한문체, 한시, 등 당시에 공존했던 온갖 문체적 층위를 두루 망라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니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근대문학사의 일탈자다. 수많은 양식을 실험했지만 어떤 텍스트도 사적 계보를 그리기 어렵다는 점에서. 소위 역사전기물도 그렇고, ?꿈하늘?이나 ?용과 용의 대격전?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많은 것을 넘나들었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저자. 그의 텍스트의 바다 속에서 역사학자 단재, 문학인 단재, 논설인 단재를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심해의 일부인 것을. 일단은 텍스트를 가로지르면서 그의 인식론적 핵심테제를 절단,채취하기로 한다.   

       3. 어떻게 ‘근대적 주체’를 생산할 것인가?
     
   단재 혹은 근대 계몽기의 담론의 방향이 민족주의라는 것(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그 최종 결론 역시 교육과 지식을 통한 국민의 형성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아, 처량한 바람, 음울한 비에 삼천리 강산이 안색을 바꾸고, 뜨거운 불, 깊은 물에  
     이천만 동포가 슬픈 울음소리를 내는도다. 그런즉 어떻게 하면 우리 한국이 능히 승리 
     의 노래를 부르며,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며, 어떻게 하면 우리 
     한국이 능히 부강의 기틀을 열어 국민의 위력있는 기백을 빛낼까. 대답하되 이것은 오 
     직 국민동포가 20세기의 새 국민이 됨에 있는 것이다........     
       대저 20세기의 국가경쟁은 그 원동력이 한두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국민 전 
     체에 있으며, 그 승패의 결과가 한두 사람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그 국민 전체에 
     서 말미암아, 정치가는 정치로 경쟁하며, 종교가는 종교로 경쟁하며, 실업가는 실업으
     로 경쟁하며, 혹은 무력으로, 혹은 학술로 하여 그 국민 전체가 우수한 자는 이기고,  
     뒤떨어 지는 자는 패하나니 .....                               (<20세기 신국민>)


   그리고 20세기가 원하는 새국민은 민족과 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자신의 행복으로 삼는 존재를 말한다.  

       我의 求하는 바는 二十世紀 新東國英雄이 是니, 영웅 영웅 이십세기 신동국영웅이여.  
     ...단지 其이상이 우주에 超하며 其精誠이 天日을 貫하여 삼천리 강토를 其家舍라 하며,  
     이천만 민족을 其권속이라 하며, 과거 四千載 역사를 其譜牒이라 하며, 미래 억만세 국 
     민을 其자손이라 하며, 艱難險저의 경력을 其學敎라 하며, 사회공익의 사업을 其生涯라  
     하며, 애국우민 四字를 其天職이라 하며, 독립자유 一句는 其生命이라 하고, 其 磅?鬱 
     積한 血誠公憤으로 천지간에 立하여 국가의 威靈을 仗하고 天魔百怪와 戰하며 동포의  
     생명을 위하여 前途의 荊棘을 剪하는 者니, 是가 新東國 英雄이며 신동국 대영웅이니 
     라. ....오호라. 국민적 영웅이 유하여야 종교가 국민적 종교가 될지며, 국민적 영웅이  
     유하여야 학술이 국민적 학술이 될지며, 국민적 영웅이 유하여야 실업가가 국민적 실 
     업이 될지며, 미술가가 국민적 미술가가 될지오, 종교.학술.실업. 미술가 등이 국민적  
     종교. 국민적 학술. 국민적 실업가. 국민적 미술가가 된 연후에야, 동국이 동국인의 동 
     국이 될지니, 國民乎며 英雄乎여.                      (<20세기 신동국지 영웅>)


    이 텍스트를 영웅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단선적이다. 여기서 단재가 대망하는 것은 민족의식과 애국주의적 열정에 불타는 근대적 국민인 것이지, 길 잃은 양떼를 인도하는 메시아나 지휘자가 아니다. 모든 개개인을 민족이라는 새로운 집합체 속으로 흡수하여 재배치하는 것, 그것이 단재를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의 이데아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계몽이성에 대한 전폭적 신뢰가 자리하고 있다. 세계에 대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로서의 계몽이성은 그 자체로 개개인을 전면적으로 변이시켜줄 ‘신’의 다른 이름이었다. ‘교육’과 ‘지식’이라는 정치적 구호는 그런 점에서 단지 도구적으로 습득할 중간단계가 아니라, 그것은 그것을 흡수하는 순간 애국적 열정으로 휩싸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명제였다.  

 
       국가에 대한 애정을 무엇으로 기를까. 심리학자는 사람의 심리를 지.정.의 세 가지로  
     나누고, 교육학가는 교육의 강령을 덕.지.체 세 가지로 나누나니, 교육학가의 이른바 지
     육은 곧 심리학상의 智를 가르침이요, 교육학가의 이른바 지육은 곧 심리학상의 지를  
     가르침이요, 교육학가의 이른바 덕육은 곧 심리학상의 情.意 兩者를 包含한 것이다. 愛 
     는 情이요, 애국은 국가에 대한 애정이니, 愛國君子가 만일 애국의 道를 전국에 홍포하 
     려 할진대, 불가불 정육에 주의할지라. 운동과 경기는 체육의 일이요, 학문과 예술은  
     지육의 길이니, 지.체 양육은 인위로 할 수 있거니와, 정육은 이와 별건이라 신체를 단 
     련하는 듯이 하여서도 되지 않으며, 지성을 開悟하듯이 하여서도 되지 안하는 자이라.  
     오직 그 양심의 천연부터 계도하며 순성할 뿐이니라. 정이란 격하여 지면 분노불평의  
     감정이 되고, 觸하여 내면 비애우수의 鬱情이 되나니, 정육이라 함은, 그 감정과 울정 
     을 돋우자 함이 아니요 그 애정을 기르자 함이니, 애정이란 순결하며 貞固하여, 薰習  
      侵漬로 얻는 정이요, 鼓動觸發로 얻는 情이 아니니라. ......
    .미는 애정을 담는 그릇이라. ...국가에도 국가의 미가 있나니, 자국의 풍속이며, 언어며,  
    습관이며, 역사며, 종교며, 정치며, 풍토며, 기후며, 외지 온갖 것에 그 특유한 미점을 뽐 
    아, 이름한 바 國粹가 곧 국가의 미니, 이 미를 모르고 애국한다 하면 빈 애국이라. .... 
    정육도 이와 같아서 물젖듯 漸하며, 싹나듯 漸하여, 부지불각에 들어가여야 深摯한 情이  
    되나니, 학교의 교육에나 사회의 교육에서 매양 이 점에 주의하여 국민의 애국심을 기 
    르려면, 高聲疾呼로 애국하라 애국하라 함보다 차라리 조국위인의 전기를 이야기하며,  
    역내산천의 독본을 읽게 하여, 내 나라에 대한 관념을 깊게 함이 나으리라 하노라. 그러 
    면 감정 같은 것은 꼭 억제하여야 깊은 애정이 나게 될까. 아니라, 아니라. 내가 상문에  
    감정을 배척함은 교육에 대한 말이라. 그러나 다른 방면에서는 도리어 감정이 신성하나 
    니, 專制를 깨어 역사의 꽃을 피게 한 불란서의 혁명도 감정으로 된 것이며, 권리를 찾 
    아 자유종을 울린 합중국의 독립도 감정으로 된 것이니, 나의 정신과 권리가 남에게 침 
    욕을 당할 때에, 칼과 총의 앞에 죽기를 무릅쓰고 강개 격렬하게 나아감은 감정의 작용 
    이니, 감정이 없고야 어찌 사람이 사람의 노릇을 하며, 나라가 나라 노릇을 하리오.                                                                 (<신교육(정육)과 애국>) 

  
   폭포수같은 열정, 질풍노도의 애국심, 이것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교육의 최종목표인바, 계몽의 스펙트럼이 인문학적으로도 광범할 뿐 아니라, 종교, 여성, 언어, 위생, 예술, 등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두루 뻗어나갔던 것도 그 때문이다. 단재 자체도 수많은 양식의 글쓰기를 시도했지만,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과 잡보를 보면, 계몽담론이 근대적 사유와 습속을 포괄하고 있다. 즉, 정치적 슬로건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 ‘새로운 언어, 새로운 앎의 습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영국의 富를 誰가 造하였는뇨. 金錢乎아. 鑛山乎아. 曰 否라. 非也라. 書籍이 造하였느 
    니라. 덕국의 부를 誰가 造하였느뇨. 槍乎아. 大砲乎아. 曰 否라, 非也라. 書籍이 造하였 
    느니라. ...고로 서적을 간행, 廣布하는 자 국민의 제일공신이니라. ....한국의 신서적은 必 
    也 한국 풍속상.학술상의 고유한 특질을 발휘하며 서구외래의 신이상 신학설을 調入하 
    여 국민의 심리를 활현하여야 是가 한국의 신서적이니라. .... 가족주의가 일국인의 심리 
    를 지배하여, 만일 吾家의 直祖만 아니면 비록 국민의 고통을 拯救한 최도통의 열성도  
    불문하여, 외적의 기염을 ?折한 이충무의 웅략도 불고하고, 유 자기 칠대조 팔대조 繩 
    鳴蚓叫의 시문만 수집하니, 苟或 子孫이 無하거나 雖有하여도 貧寒 或 無識하면, 비록  
    생전에는 萬古英名이 輝赫할지라도 死後에는 九原추초만 荒凉하나니, 其嘉言과 遺集이  
    有한들誰가此를간행하리오.                                                                                                                           (<舊書刊行論>)
  

      今 韓國의 國漢文 交用文은 尙且 其法이 無하도다. ...漢文으로는 國民知識 均啓함이  
     難함을 大覺하며, .... 故로 今日에 文法統一이 卽亦一大急務라. 此를 統一하여야 學生의 
     精神을 統一하며 國民의 知識을 普啓할지어늘, 乃者 如此 不規則 無條理의 文으로 敎 
     科를 編하여 國人子弟를 敎授하며....                           (<문법을 宜統一>)
 

   그러므로 이런 인식구도 하에서 의병투쟁과의 연합전선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계몽오성 혹은 근대적 지식의 습득만이 유일한 전투의 무기’였던 당시의 담론적 배치상 의병투쟁은 그저 소모적, 산발적 소요 이상이 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 투쟁을 통해서 개개인이 근대적 국민국가의 주체로 만들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군국주의 열강의 각축 속에서 절실하게 요청되는 ‘상무정신’조차도 이성적 사유를 통해서만이 가능할 뿐이다. 모든 종류의 불평등, 신분, 성, 적서 등을 타파해야할 필요도, 가능성도 모두 여기에서 도출된다. 민족국가라는 사회적 지평 위에서 자신의 삶을 정초할 수 있는 개인들의 탄생! 이것이야말로 계몽담론의 핵심이었고, 아마도 그것이 개항 이후 그토록 짧은 시기 동안 근대적 지식들을 맹렬하게 흡수한 동력이었을 터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구도는 10년을 넘어 이광수나 20년대 민족주의자들에게도 비슷하게 변주되지만, 중요한 것은 사실 개념의 동일성이 아니라, 배치라고 할 때 춘원이나 준비론자들의 교육과 지식은 이미 계몽기나 민족주의자 단재의 그것과는 판이한 ‘용법’을 갖게 된다. 

        4.‘계몽의 프로젝트’로서의 역사담론  - ?을지문덕?, <독사신론>  

   ‘새로운 앎’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문명의 습득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과거를 재구하는, 역사의 재구성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앞의 텍스트에서도 계속 말하고 있다시피, ‘국수’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계몽적 사유의 핵심인 것이다. 이는 어쩌면 식민지를 통해 근대로 나아간 소수민족들의 보편적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신채호는 양계초가 쓴 <이태리건국삼걸전>을 번역했고, 이후 <을지문덕> <이순신> <최도통전> 등의 역사전기물을 저술했다. 박은식이나 장지연 역시 이러한 작업에 동참. 뿐 아니라, 각종 신문에서도 ‘인물전기’물이 숱하게 시도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영웅주의적 사관의 문제가 아니다. 즉, 이런 저작들이 겨냥하는 바는 그야말로 과거의 영웅을 불러들여 중세적 신민들을 ‘국민’으로 재조직하려는 계몽적 프로젝트의 일환일 뿐이다. 

 ?을지문덕?의 몇 대목.

     “단 일국의 강토는 기국의 영웅이 신을 헌하여 장엄케 한 자며 일국의 민족은 기국의  
   영웅이 혈을 류하여 보호한 자라 정신은 산립이며 은택은 해활이거늘 기국의 영웅을 기 
   국의 민족이 부지하면 기국이 국됨을 기득하리오 고로 대가의 사필로 영웅의 진면목을  
   전사하며 재자의 사부로 영웅의 대공덕을 찬미하고...... 영웅이 무하거던 흉중으로 영웅영
   웅하며 영웅이 유하거던 안중으로 영웅영웅하여야 영웅이 출현할지어늘 내아국은 영웅숭     배하는 근성이 하여시박약한지....” 

    “시시로 당하매 시종굴강의 태도를 수하고 독립을 보지하여 지나와 대치한 자는 유일고 
   구려라” “이천년전의 고구려는 즉 18세기의 영길리러니라 성재라 고구려여 사천재 역사 
   상에 제일명예적 기념비를 입하였으며 위재라 을지문덕이여 억만세 대동인의 절호모법을  
   수하엿도다”  

  그가 호명한 고구려와 을지문덕은 여러 왕조 가운데 하나, 여러 애국지사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조선민족, 조선역사를 관통하는 어떤 정신, 어떤 실천인 것이며, 그것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변주된 ‘조선적인 것’의 발현이다. 아니, 진정으로 표현되기를 열렬히 희구하는 어떤 것이다. -> “과거의 영웅을 寫하여 미래의 영웅을 招하노라”

     “김춘추는 일왕조의 현군이라 기사업이 신라와 相終始할 而已니 혁거세의 왕통이 旣絶     하매 김춘추의 정신이 亦泯하엿다함도 可커니와 을지문덕은 실로 영양왕조의 을지문덕이  
   아니라 단군자손의 을지문덕이며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아니라 조선민족의 을지문덕이며  
   일시의 을지문덕이 아니라 대동억만세의 을지문덕이니 주몽왕통은 망하얏스되 을지문덕 
   은 망치 아닌 자며 김춘추는 死하얏스되 을지문덕은 사치아닌 자라 기혁혁한 정신이 만 
   고에 상존하야 懷遠鎭강화에 失名氏의 努가 되야 楊家驕童隨煬帝가 其胸을 傷하며 안시 
   성전역에 양만춘의 矢가 되야 당대영주이세민이 其目을 失하고 尹瓘의 馬가 되야 만주야 
   를 취답하며 강감찬의 검이 되야 여진난을 토평하고 수십수의 倭艦을 ?却하던 鄭地의  
   화약도 되며 풍신수길의 강병을 부퇴하던 이순신의 철갑선도 되야 산붕해갈하야도 공의  
   원력은 불마며 천번지복하야도 공의 기백은 不壞하나니 오호라 개지금까지 기국왈대한국 
   이라 하며 기민왈 대한민이라 하야 사에 생하며 사에 노하며 사에 유하며 사에 조하며  
   사에 가하며 곡하는 자가 기혹을지공의 遺烈 아닌 者 有乎아”
    
 
  김춘추와의 대비를 통해 을지문덕이라는 기호는 그 의미가 한층 뚜렷해진다. 이민족의 침입을 가차없이 물리친 ‘전쟁인’이라는 표상. 이것은 물론 기존의 담론, 즉 김부식이 정립한 반도라는 영토에 갇혀버린 ‘정착민의 역사’에 대한 전복이다.  그가 보기에 김부식 이래 조선사는 중화주의의 그늘 아래 포섭된 것이고, 그럼으로써 단군 -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고대사의 역동적 힘이 위축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 “비열한 역사” <독사신론>에서도 김부식의 역사기술에 대한 비판이 도처에서 제시되고 있다. 
  요컨대 그는 단군과 부여족을 정통으로 삼음으로써 성리학적 계보를 배제하고자 했으며, 고대사를 중흥함으로써 중세사를 전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기존의 역사에서 침묵,봉쇄되었던 태고적 에너지를 다시 불러들여 근대의 국면을 돌파하고자 함이다. 맑스의 말을 빌리면, “이 혁명들에 있어서 사자들의 부활은 낡은 투쟁을 모작하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새로운 투쟁을 찬양하기 위하여 소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을지문덕은 철저히 근대적인 기표체계이다. -- 자주적 독립영웅으로! 
  그렇게 본다면, 그에게 있어 역사는 여러 분과학문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이 자기 나라에 대한 관념”이 없어질, 말하자면 민족과 등가화되는 위상을 지닌다. 

      今 夫國이란 者는 一家族의 結集體며 歷史란 者는 一國民의 譜牒이라. ....偉哉라 歷史 
   여, 我를 歌케 하는 者-歷史며, 我를 哭케 하는 者 - 歷史며, 我를 怒케 하며 躍케 하는  
   者 歷史로다. .... 嗚呼라, 歷史가 無하면 彼國의 國民인들 愛國心이 何處에서 生하리오.  
   我國民에 愛國心의 薄弱함을 足怪할 바 無하도다. ... 我가 國을 愛하려거든 歷史를 讀할 
   지며, 人으로 하여금 國을 愛케 하려거든 歷史를 讀케 할지어다. ...歷史를 讀하되 幼時부 
   터 讀할지며, 歷史를 讀하되 終老토록 讀할지며, 歷史를 讀케 하되 男子뿐 아니라 女子도  
   讀케 하며, 歷史를 讀케 하며, 歷史를 讀케 하되 上等社會분 아니라 下等社會도 讀케 할 
   지어다. ...여자라도 역사를 不讀케 하면 是는 胎內의 論介를 墮함이며, 襁褓中의 羅蘭夫 
   人을 夭케 함일뿐더러, 抑又 二千萬人中에 半數되는 女子를 壓殺하여 國民됨을 不許함이 
   요, 下等社會라고 歷史를 不讀케 하면 是는 을파소를 초採에 老케 함이며, 加里波地(가리 
   발디)를 魚舟生涯에 葬케 함일뿐더러, 抑又 二千萬人中에 最多數되는 丈夫를 寃埋하여  
   國民됨을 不聽함이니, 연卽 我가 國을 愛코자 한들 誰와 共히 愛하리오. ....대저 역사란  
   자는 必也向에 云한바, 內를 尊하며 外를 岐하고 民賊을 誅하며 公仇를 戮하는 等, 一定 
   主義 一貫精神을 伏하여 民族進化의 狀態를 ?하며 國家治亂의 因果를 推하여, ?者-立 
   하며, 頑者-悟케 하여야 於是乎 歷史라 可稱할지니, 噫라, 我國의 果然 此等 價値- 有한  
   歷史가 有한가.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

  단재가 그토록 많은 양식을 넘나들면서도 생애 최후까지 역사기술에 주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역사담론의 특권화! 
      
         5. ’도덕적 주체’, 그리고 ‘유기체적 전체’ - 계몽담론의 소실점    

 
     “所以로 을지문덕주의는 적이 대하여도 我必進하며 적이 강하여도 아필진하며 적이 銳 
   하던지 勇하던지 아필진하여 일보를 퇴함에 其汗이 背에 沾하며 一毫를 讓함에 其血이  
   腔에 沸하여 此로 자신을 勵하며 차로 동료를 鼓하며 차로 전국민을 작흥하야 其生을 朝 
   鮮으로 以하며 其死를 조선으로 以하며 其一息一飽를 조선으로 以한 결과에 여진부락이  
   皆是我의 식민지를 作하고 지나천자를 幾乎我手로 生擒케 되얏으니 토지의 대로 기국이  
   대함이 아니며 兵民의 衆으로 기국이 강함이 아니라 惟自强自大자가 有하면 其國이 강대 
   하나니 賢哉라 을지문덕주의여 을지문덕주의는 何主義오 曰此卽제국주의니라“

 
     “오호라 민족을 보전코자 하는 자가 차 민족주의를 버리고 무엇을 취하리오. 이런 연 
    고로 민족주의가 팽창적 웅장적 견인적의 광휘를 양하면, 여하한 극렬적 괴악적의 제국 
    주의라도 감히 참입치 못하나니, 요컨대 제국주의는 민족주의가 박약한 국에만 참입하 
    나니라.”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이 두 텍스트에 제기된 제국주의라는 개념은 함의가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앞에서는 을지문덕주의의 전투성, 팽창성을 전제한 까닭에 제국주의가 긍정적 의미로 쓰인 것이고, 뒤에서는 제국주의에 포위된 형국을 전제해야 하므로 민족주의라는 대안적 개념으로 전위한 것. 그렇다면 결국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는 같은 선 위에서 외부의 배치와 형국에 따라 오고갈 수 있는 개념일 뿐.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이념적 동거는 사실 상식적인 사항. 그리고 이것은 불가피한 역사적 상황의 산물. 국권의 상실이라는 정치적 상황의 차원만이 아니라, 당시의 인식론의 기반인 ‘사회진화론’에 입각해 볼 때 더욱 그렇다. 약소국이든 강대국이든 더 광대한 제국을 향해 나아가는 것 말고 다른 것을 사유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차 세계는 제국주의의 세계”(<20세기 신국민>)이고, “인간에게는 싸움뿐이니라. 싸움에 이기면 살고 지면 죽나니” 이것은 “신의 명령”(<꿈하늘>)이라고 전제하는 한, 이외 달리 무슨 길이 있을 것인가?  
  제국주의를 서구문명국가와 일본의 야만적 제국주의로 구분하는 것이 계몽주의자들의 일반적. 계몽주의자들은 전폭적인 근대문명론자이기도 하고, 그들 역시 서구문명국 역시 식민지를 개척하는데 몰두하는 제국주의라는 것을 인지.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제국주의 일반에 대한 적개심은 없었던 것. 그들이 원했던 것은 일본식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서구문명국으로 도약하는 것. 이것은 사실 근대 100년을 지배한 사유구조이기도. 
  그러므로 우리가 좀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정치적 이념의 지향성이 아니라, 이런 계몽의 담론의 근저에 있는 인식론이다. 
 
       是我의 身體라 하며, 是身體를 指하여 曰 是我라 하니, 嗚呼라 我가 과연 여차히 微 
     하며, 我가 果然 여차히 小한가. ...彼는 精神的 我가 아니라 物質的 我며, 彼는 靈魂的  
     我가 아니라 驅穀的 我며, 披는 眞我가 아니라 假我며, 大我가 아니라 小我니, 萬一 物 
     質的.軀穀的의 假我.小我를 我로 誤解하면 是는 必死하는 我라........ 精神的.靈魂的의 眞 
     我.大我를 我로 快悟하면 一切 萬物이 不死하는 者-惟我라. ..   大我는 何오. 卽 我의  
     精神이 是며, 我의 思想이 是며, 我의 目的이 是며, 我의 主義가 是니, 是는 無限 自由 
     自在의 我니, 往코자 하매 必往하여 遠近이 無한 者-我며, 行코자 하매 必達하여 成敗 
     가 無한 者-我라. 輕氣球를 不借하여도 我가 空中에 能走하며, 旅行券을 不得하여도  
     我가 外國에 能往하며, 歷史를 不憑하여도 我가 千萬世 以前 千萬世 以後에 遍在하나 
     니, 何人이 我를 能?하며, 何物이 我를 能推하리오. .......無量恒沙 無量蓮花에 無量의  
     我가 在하여 蓮花의 東에도 一我가 現하며, 蓮花의 西에도 一我가 現하며, .....盖 我의  
     眞面目이 本來 如是하니라.                                    (<大我와 小我>)
 

   여기에는 물질/정신, 그리고 육체/영혼의 이분법이 관통하고 있다. 물론 이 이분법은 철저하게 정신, 영혼의 특권화를 견지한다. 아의 정신, 아의 사상, 아의 목적, 아의 주의, - 이것들이 대아, 곧 나의 진면목을 구성하는 것이다. -- 주체 철학의 탄생!   
  그리고 이러한 대아를 구성하는 사상, 목적, 주의 등은 개별적 주체의 목소리들을 침묵시키는, 일종의 소실점이었다. 이것은 신분적, 성적 억압에서 해방된 개체들을 재수렴하는, 아울러 무규정적으로 흘러 넘치는 욕망의 흐름들을 일의적으로 흡수해버리는 기능을 수행한다. 
  근대 계몽기는 18세기 실학파의 그것과는 단절적인 면을 지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민중의 욕망과 민족의식 사이의 배치의 측면에서 그러하다. 후자의 경우, 당시 지식인들은 자주적 민족의식의 동력을 ‘길거리 민중의 길들여지지 않은 욕망의 이질성들’ 속에서 찾고자 했던 데 반해, 전자의 경우는 어떻게 하면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대중의 욕망을 계몽이성으로 길들일 것인가, 혹은 애국적 열정으로 변이시킬 것인가하는데 몰입한다. 여기에서 근대적 도덕규범에 대한 강한 집착이 도출된다. 
  기독교에 대한 관심도 같은 맥락위에 있다.

      종교는 국민에게 좋은 감화를 주는 일대기관이다. 국민의 정신과 기개가 이에 기초하 
    는 바가 많으며, 국민의 정의와 도덕이 이에서 나오는 바가 많으니, 저 유럽열강이 종교 
    와 교육을 자매의 관계로 보고 보호확장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종 
    교계에 있어서 가장 힘 쓸 것은 (1)유교를 개량하는 동시에 그 발달을 힘쓰며 (2)예수 
    교를 확장하는 동시에 그 정신을 보전함이니  우리는 이 말이 무엇 때문인가 하면, 유 
    교는 한국사람에게 준 감화력이 대단히 크기 때문에 이를 좋은 법으로 발전시켜 현세계 
    의 국민적 종교의 지위를 얻게 하며, 예수교는 각 방면으로 한국 종교계의 제 일의 지 
    위를 점령하여, 과연 20세기 새 국민적 종교의 가치가 있으니 이를 확장하는 동시에 그 
    교도중 부정신자를 깨우쳐 일깨우며 또한 외래의 침략을 물리치면 가히 국민 전도의 대 
    복음을 이룰 수 있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신국민>)


   이 논지는 <서호문답>에서 가장 극단적이고도 체계적인 방식으로 발전한다. <서호문답>은 유,불,선 등 전통 종교의 교리를 낱낱이 비판한 뒤, 오직 기독교만이 민족의 자주성과 독립을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 단재의 텍스트인지는 미지수이지만, <대한매일신보>의 사상적 핵심을 집약한 것은 틀림없다. 도덕적 주체의 구성은 문명의 기호이기도 한 기독교의 교리와 쉽사리 접속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때의 종교는 실존적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계몽적 오성의 전파라는 프로젝트에 복속된 것일 뿐이다. 어찌보면 단재에게 있어 기독교든 대종교든 큰 차이가 없었을 수도 있다. 박은식이 공자교를 통해 민족주의를 고취하려 한 것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기독교과 민족주의가 결합하면서 개인들의 도덕적 호명체계는 더욱 강고해진다.  

    “대저 일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잠시간 왔다가 홀연히 가는 자를 내라 이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여 영구히 없어지지 아니 하는 자는 사회라 이르나니 나는 죽드래 
   도 사회라는 것은 죽지 아니하며 나는 멸하드래도 사회라는 것은 멸치 아니하며 나는 한 
   이 있드래도 사회는 한이 없는 것이라 이러므로 일개 나 하나가 세상 사회에 있는 것이  
   비유할진대 태창에 좁쌀 한낱과 같으며 태산의 흙 한덩이만 할 뿐이로다 ......  세계가 모 
   두 나의 가택이며 억조인생이 모두 나의 신체니 억조인생이 다 수척하드래도 나 혼자 살 
   지며 억조인생이 다 애통하드래도 나 혼자 즐거워함이 가할까 이것은 반드시 되지 못할  
   일이라 그런고로 내가 한 번 사회상에 출생한 이후에는 부득불 이 사회의 사원에 일부분 
   이 되는 책임을 담임하며 직분을 극진히 하여 사회를 보조도 하며 개량도 하여야 사회가  
   영구하며 나도 좇아 영구할지며 사회가 멸망치 아니하며 나도 좇아 멸망치 아니할지니  
   생각하여볼지어다”                                                               
                              (?신보? 1908.3.6. 논설 ‘나와 사회의 관계’ -- 밑줄 필자) 


   이 글은 앞의 소아와 대아의 관계를 확장, 변주시킨 것이다. 사회를 더 큰 ‘나’로 인식하는 것은 나를 국가와 민족의 일구성요소로 파악하는 유기체론이다. 계몽담론의 자유는 한 번도 개인의 자유인 적이 없다.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오직 의무일 뿐. 그것은 오로지 국가와 민족의 단위에서만 구성, 배치될 뿐.  여성.어린이 등 사회적 타자들을 모두 이끌어내 균질적인 구성원의 하나로. ‘이천만분의 일분자’로. ->유기체적 전체성론과 극도의 균질화. 
  당시 신소설, 신연극, 잡가 등 대중예술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도 같은 맥락. ->계몽문학/통속문학(순수문학)이라는 근대적 구획의 출발. 
     
   *신채호, 혹은 한국 민족주의의 기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동아시아적 지평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철저히 반국가주의를 견지하면서 개체의 내면, 자기본위, 개인주를 밀고간 소세키나 반제적 투쟁을 가열차게 수행했으면서도 전통과 습속, 개인을 짓누르는 삶의 질곡을 처절하리만큼 탐사한 노신. 일단 이들과 비교해보더라도 단재의 담론은 매우 독특하다. -->한국문학에는 전체적으로 인간의 내면, 무의식에 대한 탐구가 결핍되어 있다(최원식)는 진단에 동의할 때, 그같은 거대담론적 파토스는 계몽기로부터 연원한다고 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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