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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아름다운 여름 고은주

by Casey,Riley 202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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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여름(제2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고은주

     푸른노트
  이 스튜디오에 처음 들어서던 날의 그 어둠을 기억한다. 한낮의 햇살 같은 조명을 온몸으
로 받아내던 데스크, 그 주변을 포위해  들어오는 검은 실루엣, 그리고 나머지 공간을  가득 
채우며 말없이 나를 압도하던 어둠.......
  그때 그 시간을 기록해 둔 필름에 크로마키 기법이 사용된 걸보면 데스크 뒤에 파란색 배
경판이 서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내 기억엔 감감하기만 하다. 묵직한 카메라와 모니터 따
위가 어울려 자아내던 금속성의 분위기  역시 흐릿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다.  지금 내 기억 
속에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그때 본 빛과 어둠의 선명한 대비뿐이다.
  9년 전 입사 시험 때였다. TV 주조정실의 안쪽 깊숙이 자리잡은 스튜디오의 육중한 철문
을 밀고 들어서면서 나는 그 빛과 어둠을 보았다. 시험지처럼  주어진 뉴스 원고를 읽기 위
해 크고 작은 조명이 집중되고 있는 데스크 앞에 앉았을 때에도 불빛은 내 상반신까지만 쏟
아져 내렸다. 내 얼굴을 비추던 커다란  렌즈의 카메라도,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바퀴  달린 
받침대도,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던 엔지니어의 모습도 모두 어두운 실루엣일 뿐이었다.
  그 어둠의 질감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조명 아래에 앉아 있어도 빛보다 
어둠을 더욱 의식하게 되는 것 또한 여전하다. 하지만 이 아침, 무언가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다. 9년 전 스튜디오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 9년 전 스튜디오에는 없었으나 지금
은 존재하는 것.
  저것들일까.......
  부메랑처럼 휘어진 데스크의 어두운 한쪽 끝에서 아까부터 내 시선을 끌어당기던  꽃들을 
바라본다. 녹화 때 사용된 꽃이  스튜디오의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오늘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조명 아래서 헐떡이다가 이윽고 시들고 말라버린 그 모습은 어쩌
면 내게 익숙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지금 조명등의 빛살 아래에  앉은 나는 먼발치 어둠 속
의 꽃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
  수반 안에서 물을 흠뻑 머금어 꽃들의 가짜 오아시스가 되어주었을 녹색 스펀지도 이제는 
버석하게 말라붙어 있을 것이다. 스펀지는 지금쯤은 오히려 흡혈귀처럼 꽃과 줄기의 마지막 
물기를 빨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방송 진행자의 얼굴을 가리지 않기 위해 한껏 몸을 낮
춰 장식된 꽃들은 지쳐 시들어서도 여전히  저마다의 얼굴을 최대한 보여주기 위해  앞으로 
몸을 비틀어 내밀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또다시 작은 움직임 하나가 내 안을 헤
집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 아침이 있다. 무언가 다른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아침, 혹은 무언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아침. 그러나 그 기미는 번번이 금세 사라지고 만다. 무언가 기대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고 세상은 변함없이 견고할  뿐임을 매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아침도 그런 
아침 중의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다. 창문을 열면서 감지한 공기의 흐름, 거울 속 내  얼굴에 
깃들인 아침의 표정, 세면대에서 느껴본 물의 감촉, 그 모든 것에 작은 움직임이 일렁거렸지
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움직임의 하나가 기어이 이곳까지 따
라 들어와 지금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반사적으로 정면의 카메라를 쳐다본다. 카메라 꼭대기에 붙어 있는 빨간 램프가 켜지면서 
동시에 카메라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모니터에 내 얼굴이  떠오른다. 자료 화면에 맞춰 뉴스 
원고를 읽다가 중간중간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는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동안에도  나는 
무언가에 붙들려 있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집요하게  내 마음의 평정을 방해
하고 있는 움직임.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관자놀이를 따라 땀이 흘러내리며 뉴스 리허설이 끝나갈 무렵, 나는 비로소 눈을 크게 뜬
다. 원인은 공기다. 땀을 흐르게 하는  이 무더운 공기는 분면 조명  탓만이 아니다. 어느새 
겨울의 바닥을 뚫고 새로운 봄이 움트고 있는 것이다. 계절이 자리바꿈하는 시기의 공기, 그 
특유의 색깔과 냄새가 불러들이는 기억의 시간은 결코 피해 갈 수 없다.
    리허설이 끝나고 서울 뉴스가 방송되는 사이 짧고 긴장된 대기 시간 동안 어쩔수 없이 
그를 생각한다. 지난해 봄, 함부로 내 삶을 침범해 왔던 사람. 그리고 여름 내내 내 삶을 간
섭했던 사람. 어둠 속에서 간헐적으로 빛이 명멸하던 그의 노트를 생각한다. 역시 그였는가. 
그가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가.
  가볍게 고개를 흔든다. 모니터를 바라보니 그 사이에 땀이 흘러 흐트러진 내 모습이 보인
다. 옆에 놓아두었던 손가방을 끌어당겨 파우더 콤팩트를 꺼내는 동안에도 데스크의 어두운 
한쪽 끝에 엎드려 숨죽인 꽃들이 자꾸만 내 시선을 부르는  것 같다. 그들을 애써 외면하면
서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번들거리는 얼굴에 파우더를 덧칠한다.
  서울에서 전국으로 방송되는 뉴스는 이미  막바지에 이르러 외신을 전하고  있다. 적당한 
선에서 자르고 들어가 지역 뉴스를 내보내야 할 시간이다. 어김없이 인터폰이 열린다.
  [네임 사인 받고 들어갑니다]
  지금 외신을 전하고 있는 기자가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신호로 화면은 가
차없이 이쪽으로 넘어올 것이다. 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어깨를 똑바로 편다.
  저 카메라의 빨간 램프가 켜지는 순간, 이 도시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비춰지는 내 얼굴
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작은 도시의 전경을 배경으로  화면에 떠오를 얼굴은 어쩌면 땀으로 
번들거리며 잔뜩 굳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소리없이 아에이오우를 발
음하며 카메라를 바라본다.
  [워싱턴에서 JBS 뉴스 김정욱입니다]  
  내 귀에 들려오던 소리들이 일시에  사라지며 온 에어 램프가 빨갛게  눈을 뜬다. 오로지 
나 혼자서 떠안아야 할 생방송의 시간이 다가왔다.
  [이어서 지역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오프닝이 약간 흔들렸다. 하지만 곧 자료 화면이 나가고 뉴스 원고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는 다행히 생방송 특유의 긴장감에 힘입어 상황에 몰두하고  있다. 긴장감이 아니라 습관
의 힘이라고 해도 좋다. 예고 없이 나를 찾아온 작고  집요한 움직임을 물리치고 있는 그것
은 아마도 9년 동안 내 몸과 정신에 들러붙은 습관의 관성일 것이다.
  [이상으로 뉴스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카메라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인 후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얕은 한숨을  내쉰다. 내 머리 
위로 조명이, 그의 시선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또다시 미묘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데스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멍한 눈길로 뉴스 원고를, 그의 푸른 노트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기록 1
  지난 며칠 동안 2인칭의 소설을 쓰려고 애썼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낟. <당신>이라는 주어
로 시작하는 글을 꼭 한번 써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다지 실망스럽지는 않습니다. 실패
라는 건 내게 숨쉬기처럼 익숙한 일이니까요.
  대신 이렇게 <당신>을 향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빼어난 2인칭 소설을 읽을 때마다 한
숨을 쉬곤 했던 내가 모처럼 한숨 없이 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시작이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군요. 더구나 이 글은 소설도 아니고 편지는 더욱 아닙니다. 굳
이 따지자면 수필쯤 될까요. 그것은 이 글이 완성된 이후에나 따져볼 일입니다.
  사실 나는 이 글이 완성되리라 믿지는 않습니다. 완성이라니요. 그런 단어는 내 인생과 전
혀 관련이 없습니다. 완성에 대한 믿음은  더더욱 그렇지요. 오늘 나는 그저 시작만을  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자동차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돌연히 가방을 열
고 노트를 꺼내들었던 것입니다.
  이 노트는 아무것도 씌어져 있지 않은 새 것이지만, 쉽사리  새노트라 부를 수 없을 만큼 
낡아Ttq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던 것이지요. 언젠가  연희에 대한 얘기를 꼭 쓰
리라 다짐했던 때에 마련한 것이니까요. 연희가 누구인지는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앞으로 나는 이 노트에 당신에 대한 얘기를 쓰게 되겠지만 그것은 결국 연희에 대한 얘기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파트  상가의 약국에서 당신을 가까이  보게 되었을 때,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지요. 연희야, 라고 비명처럼 말입니다.
  당신이 연희를 그토록 닮지 않았다면 당신에  대한 내 관심도 이처럼 강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이처럼 노트를 꺼내들고 글을 써나가는 일도 생기지 않았겠지요. 당신의  얼
굴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이전의 며칠 동안 계속 당신이 먼발치에서 내 시선을 끌었던 이유
를 알 것 같았습니다.
  처음엔 당신의 하얀색 차가 눈에  들어왔었습니다. 나는 11층 베란다의  난간에 매달리듯 
서서 멍한 눈길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요. 그것은 이곳  누나 집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생긴 버릇이었습니다. 아파트 11층은 매혹적인 높이입니다. 이보다 더 높다면 아마도 지나치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겠지요. 이보다 낮은  위치에서는 지상의 답답함이 늘  함께 머물러 
얽혀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11층의 베란다에 서면 나는 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나를 기묘한 심리 상태로 이끌곤 했지요. 저  아
래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살아간다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나는 지난 두 달 동안 이 매혹적인 높이에 취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차는 어느 날엔가부터 내 눈에 익숙해졌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지요. 작고 하얀  그
저 평범한 소형차일 뿐이었는데..... 물론 그 차를 모는 당신의 모습이 시선을 끌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11층의 높이에서는 그런 점이 그다지 크게  작용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니까
요. 여기서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젊은 여자가 차를 몰고 나가는 구나, 그 차가 다시 
들어오는구나, 하는 정도였을 뿐입니다.
  원인은 아마도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출퇴근 시간이 아닌 때에 움직이는 차.  하루에
도 두세 번식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왔다가 나가곤 하는 차. 그 차가  보이고 그 차에서 
당신이 내려서는 시간, 당신이 보이고 그 차가 내 눈앞에서 멀어지는 시간, 그러한 시간들이 
어딘지 특별했던 것입니다. 그때는 대개  아파트 주차장 안이 정적에 싸여  있어 내 시선이 
아주 먼 곳에 닿아 있을 경우가  많았지요. 그러한 나의 시신경을 자극하는 미묘한  움직임. 
그것이 바로 당신의 하얀색 소형차인 경우가 몇 차례 반복되면서 당신은 내게 익숙한 인물
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차츰 당신을 발견하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당신의 차가 나타나면 반가웠고 당신
이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날 약국의 투명한  유리창 
밖으로 하얀색 소형차가 와서 멎고 거기서 당신이 내려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는 그저 단순
한 호기심에 불과한 것이었지요.
  그때까지 나는 당신에 대한 관심을  좋은 방향으로 심화시켜 볼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런 노력을 할 것도 없이 이미 긍정적인 면으로 관심이 확대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무엇이든 집중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라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가 새삼 떠오르면서 나는 나
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약국  안으로 들어서던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은 흐트러지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내 고통의 근원을 일깨웠고, 그래서 어쩌면  앞으
로 내 앞에 더욱 큰 고통을 가져다  줄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이 두렵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싫지만, 미치도록 싫지만, 이런 나를 당신은 더욱 싫어하게 될  테지
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나는..... 겨우 이런 사람인 것입니다.
  그날도 나는 수면제를 넣은 약을 조제해 달라고 부탁한 뒤 약국의 유리문 너머로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잠에 빠져드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입
니다. 우울증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지요. 우울, 불안, 공허, 절망, 무기력 같은 단어는 
마치 내 몸의 일부분처럼 익숙합니다.  그런 나 자신을 위해서 그날도  수면제 따위나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그때, 당신의 차가 내 눈앞에 와서 멈춰 서는 것이 믿어지지 않더군요. 게다가  틀림
없이 당신이 그 차에서 내렸습니다. 나는 잠시 호흡이 멎는 기분이었지요. 그 얼굴은 어쩌면 
그리도 연희를 닮았는지.
  당신은 무척 밝고 예의바르게 보였습니다. 아니, 이건 너무 안이한 표현입니다. 정확히 말
해서 당신은......... 밝고 예의바르게 보이기 위해서 어떤 말투를 쓰고 어떤 몸짓을 해야 하는
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을 대하는 일에 이력이 난 듯한 모
습이기도 했습니다. 목이 아프다며 증세를  자세히 설명하고, 약사가 조제할 동안  반듯하게 
서서 기다리고, 약을 받아들며 값을 치르고..... 그 모든 행동들이 늘 해오던 일처럼 익숙하게 
보이더군요. 정말 그런 일들에 익숙해서라기보다는 모든 일에 자신감이  있어 그러는 것 같
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당신은 우울, 불안, 공허, 절망, 무기력 따위의 감정은 전혀 모르는 여자 같았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행복한 삶이겠지요. 돌아보면 나라는 남자, 그런 감정들에 치여 떠밀려 다니며  살
아왔을 뿐입니다. 늘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고 어딘가 비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지요.
  새해가 시작되던 그 시간에도 나는 어머니 곁에 앉아 알 수 없는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었
습니다. TV 화면에서 울리는 제야의 종소리를 듣다 보니 참  많이도 살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 종은 서른 번이 넙게 울린다고 하지요. 나는 이제 서른 해를 넘게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까 종이 한번 울리는 동안 내가 살아온 1년이 휙휙 지나가는 느낌이었습니
다. 그게 어떤 기분인지 당신은 짐작할 수 있을지.
  한 달 동안 새해를 시작하는 각오와  다짐만 되풀이하다가 2월이 되면서 짐을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부모님의 눈길로부터 당분간 떠나  있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늙어 지친  모습의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점점 힘겨워지고 있었지요. 어머니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나 집을 떠나와도 달라진 것은 없군요. 겨울에 서울을  떠났는데 봄이 시작되는 이즈
음에도 나는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이 도시의 누나  집에 머물러 있습니다. 잠시 머물
다 가려고 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며칠 동안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날씨가 계속되더니 오늘은 제법 봄 기운이 감도는군
요. 3월, 학교마다 새학기가 시작되는 달입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한 해의 시작을 
해야 하는 때로군요. 하지만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밥벌이도, 
내 가정을 꾸리는 일도, 사내로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어떤  것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겁니
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만 보이는 그런 일들이 내게는 왜 이다지도 어려운 것일까요.
  요즘은 그저 당신을 바라보는 낙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내 마음속에 
새롭게 들어온 대상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기쁨을 당신은  모르겠지요. 그 기쁨 속에서 
간간이 느껴지는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짐작할 수도 없겠지요.
  당신을 가까이에서 본 이후로 나는 당신이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에 맞춰서 베란다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누나와 매형이 가끔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기도 하는 베란다 탁자에서 글
을 끄적이는 버릇도 생겼습니다. 멀리서라도 가까이 보고 싶은  마음에 비디오 카메라의 줌
렌즈를 이용해서 당신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매형의 카메라를 들고  녹화까지 할 
수는 없었지요. 그저 당겼다 멀리했다  하면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뷰파인더  안에서 
당신의 모습을 마음대로 당겼다 멀리했다 할  수 있는 위치, 11층은 그러한 곳입니다.  요즘 
나는 태양이 떠 있는 동안에는 베란다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최근에 알게 된 것은 당신이 매일 아침 출근 시간대에 집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새
벽 일찍 어딘가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것인지, 혹은..... 밤늦게 나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출근하느라 바쁜 시간이면 어김없이 당신의 차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모
습이 보였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에  조금은 지쳐 보이는 모습이
곤 했지요. 그러나 점심 시간이나 오후 시간에는 언제나 화사한 얼굴이었습니다.
  혹시 그날을 기억하는지요. 산책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오후에 당신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
가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당신이  막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얀색 소형차의 5미터 반경을  어슬렁거리면서 나는 당신을 흘금거렸습니다.  그때 당신이 
차에 올라 후진을 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런데 당신의 차 뒤쪽으로 비스듬히 스쿠터 한 대가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모른 채 당신은 계속 후진을 하고 있었지요. 나는 급히  다가가 
손을 내저었습니다. 스쿠터 쪽을 가리키면서 말입니다. 방해물이 백미러의 사각 지대에 있어
서 그런지 당신은 상황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자동차의 트렁크를 탕탕 치면서  당신을 막았지요. 그리고 정신없이  스쿠터를 밀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당신은 차에서 내려  뒤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한  듯 
나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가  들더군요. 감청색의 모직 투피스는  고급스러워 보였고 
눈썹과 아이라인이 강조된 얼굴 화장은 진했습니다. 그러나 엷은  미소가 떠오른 당신의 얼
굴은 틀림없이 연희를 닮아 있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여자입니다. 아침마다 집으로 들어올 때 보여주던 맨얼굴, 때때
로 보여주던 화장기 짙은 얼굴이 전혀 달라 보이면서도  한결같이 연희를 떠올리게 합니다. 
집을 드낟는 시간대를 봐서는 도무지 무슨 일을 하는 여자인지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궁금
증은 날로 더해 가고 있지요. 그 궁금증 속에 3월이 어느덧 훌쩍 지나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알고 있는지, 내가 이렇게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이런 남자 하나가 당신의 
아파트 바로 뒷동 건물 베란다에서 이렇게 하루의 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그 여름이 오기까지
  그가 내 차를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 언제쯤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고층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란 내게 아무런 상관도 관심도  의미도 
없는 존재였다. 비단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아파트를 드나들 때마다 
고개를 들어 힘겹게 십몇 층까지 올려다보며 두리번거릴 이유가 도무지 없는 것이다.
  그가 내 차 뒤의 방해물을  치워줬다는 것이 언제인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내게는 불분명하다. 거리에서 내게  이런저런 호의를 보인 사람들은 
무수히 많았고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인 적도 무수히  많았다. 텔레비전에서 봤다는 이
유로, 혹은 그것까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막연히 낯이 익다는 이유로 내게 정도 이상의 친절
을 보이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어쨌거나 그날은 내가 짙은 화장을 하고 오후에 집
을 나섰다고 하니 아마도 [TV 매거진]의 야외 촬영이 있는 날이었던 것 같다.
  4월 개편 이전에 나는 아침의 라디오 정보 프로그램과 정오의 AM 가요 프로그램, 그리고 
주간 [TV 매거진]의 리포터를 맡고 있었다. 오전 7시부터 8시까지 계속되는 라디오 방송이 
끝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집으로 들어와서 휴식을 취하다가 11시쯤 다시 방송국으로 나
갔다. 그리고 가요 프로그램이 끝나는 오후 1시에 다시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챙겨  먹었다. 
점심 시간에 방송을 하다 보니 혼자 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잠시
라도 집에 들어와 쉬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나흘에 한번씩 하게 되는 저녁 8시 라디오 
뉴스 또한 대개 일찍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은 뒤 시간에 맞춰 나가곤 했다.
  그렇게 하루에도 두세 번씩 집을 오가는 데다 때로는 오전과 오후의 차림새가 많이 달라
지기도 하는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토록 세밀히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도 새삼 섬뜩한 기분이 든다.
  그가 나를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보았다는 그날의 약국은 기억한다. 물론 그를 기억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무렵의 독감을 기억한다는 얘기다. 내가 목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걸 보았다
니, 2월 말이나 3월 초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때 나는 다소 어지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 내  곁을 떠나려는 사람이 
있었고 이어서 예기치 않게 나를 찾아 온 사람이 있었다. 그런 일들이 나의 내부에 작은 폭
의 떨림을 가져오는가 싶더니 차츰 그 진폭이  커지면서 내 몸에 독감까지 몰고 온 것이었
다. 그러나 그것은 이후로 내게 다가올 본격적인 진동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 작은 떨림이 최초로 감지된 것은 1월의 어느 날부터였다. 그 무렵, 해마다 그랬듯이 아
나운서 일지를 쓸 때마다 매번 98년이라 적어야 할 자리에 97을 쓰다가 고치기를 반복하면
서 나는 새롭게 시작된 한 해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아침 7시의 라디오 뉴스를 끝내자마자 
집어든 아나운서 일지에 자연스럽게 98년이라고 쓰면서 홀가분함을 느꼈던 그날, 나는 휴일 
당직 근무중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아침부터 굳이 스튜디오  안을 지키며 방송 원고
를 썼던 날이었다. 98년이란 확실히 97년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야흐로  세
기말의 카운트다운이 절정에 이른 듯한 느낌, 어쩌면 나는 그 경쾌한 질주의 기분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국 뉴욕 중심가에 있는 라디오 시티 맨 꼭대기층의 전망 좋은 홀과  룸은 1999년 12월 
31일 저녁을 위해 25년 전에  이미 예약이 끝났다고 합니다. 런던의  일류 호텔들도 대부분 
같은 날 저녁 시간대의 예약이 완전히 끝난 상태라고 하고요.....]
  설날 연휴가 끝나고 나갈 [가요 데이트]의 오프닝 멘트였다. 늘 시간에 쫓기면서 쓰고  원
고를 며칠 전에 여유있게 준비하는 까닭이었을까. 내 마음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었다.
  [.......... 인류가 기원 후 두 번째로 맞이한 1천 년이 이렇게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될 그날을 위해 여러분은 어떤 계획들을 세워놓고 계신지요]
  그리고 나는 이어서 프랑스의 샴페인 제조업체들이 2000년 신년 파티를 대비해서  생산량
을 늘려잡고 있다는 얘기를 덧붙여 적었다. 늘 그래왔듯이  신문과 잡지에서 오려낸 기사들
을 짜깁기하는 중이었다. 남이야 샴페인을 터트리든 말든 나는 2000년 1월에도 여전히 00이
라 적어야 할 자리에 99를 쓰다가  고치기를 반복하면서 습관적으로 새로운 연대에  적응해 
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00이라고 쓰게  되는 순간에 1900년대가 정리
되어 버렸음을 느끼며 사뭇 홀가분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내 생각에 대해서는 원
고에 쓸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을 적기 위해 애쓰고 싶지도 않았다.
  약간의 감상과 적당량의 희망을 양념처럼 버무려 넣으면서 적절한 수준의 표현을  유지해
야 하는 방송 원고 작성에서는  그저 무난한 내용만을 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너무 
길어도 안되고 너무 짧아도 안 되었다. 너무 가벼워도 안 되고 너무 심각해도 안 되었다. 그
러한 원고에 내 생각을 끼워넣으려면 이리저리 시간을 재고 표현의 수위를 조절하며 궁리를 
해야만 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런 일로 고민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한번 읽혀지고 잊혀질 원고였다. 한낮에 방송되는 AM 가요  프로그램의 방송 멘트란 
그런 것이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부담없이 듣기 원하는 내용만을  염두에 둔 채 나는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원고를 써나갔다.  엄밀히 말하자면 21세기는  2001년부터 시작된다는 것에 
대해서, 보너스처럼 저마다의 컴퓨터에 찾아올 밀레니엄 버그에 대해서, 그리고 또 2000년이
라는 단어와 함께 늘 거론되어 오던 이런저런 과장된 어둠과 비현실적인 밝음에 대해서.
  그래, 누구도 미처 경험하지 못한 변화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어. 하지만 어느 누구도 무
언가를 충분히 경험하고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잖아?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 앞에 다가올 변
화가 뭐그리 특별할 것 없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지.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을 멋대로 조각내
고 이름붙인 인간들의 호들갑스러운 호사라고 해도 그만이잖아.
  97년과 98년을 가르는 일상적인 경계 하나를 슬쩍 뛰어넘으면서,  한 거대한 경계에 대해 
무시하듯 나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원고에 쓰는 내용들은 여전히  일반적인 생각을 
벗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함께 확인하고 참여하고  싶어하는 평범한 호들갑을 부각시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너무 가라앉아도 안 되고 너무 튀어도 안 된다.
  아나운서로 입사해서 아직도 아나운서로 불리고 있긴 하지만 2년 전부터 아나운서부가 라
디오 제작팀 소속이 되면서 나는 라디오 프로듀서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우리끼리 하는 
말로 아나듀서라고 부를 만큼 일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프로듀서 대
접을 제대로 받는 것도 아니었다.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직접 곡을 선택하고 방송 원
고를 쓰는 정도일뿐, 본격적인 프로그램 제작에 나서는 것은 드문 경우였다. 갈수록  좁아지
는 아나운서의 영역을 넓히려다가 오히려 독립적인 위치를 잃은 셈이었다.
  나는 한껏 단순해졌고, 그런 내게로 밝고 환한 음색이 가볍게 달라붙었다. 정오 뉴스를 시
작하는 내 목소리가 헤드폰을 통해  가증스러울 만큼 명랑하게 들려왔다.  가식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음색이었다.
  언제부터 내가 이런 목소리를 내고 있었을까.......
  사실 그것은 어이없는 발견이었고 스스로에 대한 의미없는 시비였다.  그 동안 나는 그런 
목소리를 갖기 위해 애써 왔으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혹은 그러므로, 그건 분명  내 본래의 목소리가 아닌 것이
다. 더구나 그 명랑한 음색이라니.
  그 무렵, 나는 무기력증에 빠진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긴 모든 게  시들
해질 무렵이기도 했다. 신입 아나운서였던 이십대 중반의 생기로운  시절은 저 멀리 사라져
버렸고 습관적으로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이에 어느덧 나는 삼십대의 나이로 접어들어 있었
던 것이다. 하지만 무기력증과 비례해서 내 목소리의 활기는 끝없이 뻗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이제 비로소 내 목소리가  물오른 듯 제대로 나오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불현 듯 그 모든 것이 가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날로 무기력해져 가는 스스
로를 숨기기 위해 분칠을 하듯 명랑한 목소리를 지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오후로 접어들어서도 나는 내내 라디오 스튜디오 안에서 <가식>이라는 두 글자에 붙들려 
있었다. 한번 나를 사로잡은 생각은 그리  쉽게 떠날 태세가 아니었다. 오전과는 달리  방송 
원고가 잘 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어지러운 생각들과 상관없이 3시 뉴스 역
시 낭랑한 목소리로 진행을 했다. 습관의 힘이란 그토록 지겨운 것이었다. 후끈 달아오른 얼
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스튜디오의  두꺼운 철문을 미는 순간,  비로소 집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점심이든 이른 저녁이든 챙겨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강변도로로 들어서면서 차창으로 내다본 강물은 오후의 햇살아래 현란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하지만 그 반짝이는 물결 위에도 <가식>이라는 단어가 일렁이는 듯했다. 나는 정면으
로 고개를 돌리며 가속 페달을 힘주어 밟았다.
  [점심은 어떻게 했어요?] 
  주말을 맞아 집에 다녀오겠다고 떠났던 유화가 어쩐 일인지  일찍 돌아와 있었다. 그녀의 
고향인 동쪽 도시가 이곳에서 가깝긴 했지만 항상 밤늦게야 돌아왔던 터라 의아했다.
  [때를 놓쳤어. 이제 먹어야지]
  [그런 함께 억어요. 선배님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유화는 곧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몇 년을 함께 살면서도  그런 식으로 서로의 늦은 끼
니를 챙겨주지는 않았던 까닭에 나는 또다시 의아해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언
뜻 바라본 그녀의 얼굴이 초췌해 보였다. 하지만 그만큼  더욱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도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묘한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얼굴이었다.
  어쪘든 무언가 할말이 있어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겠지 싶어서 나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
으로 그녀를 돕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막상 식탁 앞에 마주  앉자 평소에도 말이 없던 유화
가 더욱 굳게 입을 다무는 바람에 나는 다소 난감해지고  말았다. 식탁 주변을 떠도는 향수 
냄새가 새삼스레 나를 자극하는 느낌이었다. 그 무렵 유화는  날로 향수를 진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함께 쓰는 거실에서나 책상을 마주하고 있는 사무실에서  나는 자주 눈살을 찌푸려
야만 했다. 그녀가 방송을 하고 나간 스튜디오에 곧이어  들어가는 것도 곤혹스러운 일이었
다. 젊음을 영원히 지켜줄 방부제라도 되는 듯 유화는 향수를 뿌려대고 있었던 것이다.
  나보다 2년 뒤에 입사한 유화는 카메라에 딱 맞는 얼굴로 주요 프로그램을 도맡아 진행해 
오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이 작은 방송국의 꽃이었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그녀를 둘러
싼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유부남인 박 차장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허PD에 이르기까지 방송
국 안에서의 스캔들뿐만 아니라 밖에서의 소문, 그리고 대학을 다닐 때의 일까지 유화를 둘
러싼 이야기는 끝도 없이 어디선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늘 담담한 태도였고 늘 화사
하고 아름답기만 했다. 커다란 갈색 눈동자에 깎아내린 듯한 콧날을 가진, 바라보면 그 서구
형의 미모 자체가 무언가 많은 이야기를 전해 줄 것만 같은 유화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3월에 결혼 날짜를 잡았어요]
  [허 PD?]
  나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아뇨. 그건 헛소문이에요. 지난 가을에 선을 봤던 사람하고 결혼하는 거예요]
  [난 이번엔 그저 소문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
  [결혼 결정하고 나니까 제일 홀가분한 게 바로  그 부분이에요. 이제 그 지긋지긋한 소문
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것......  ] 물론 허 선배도 나한테 잘해  줬어요. 하지만 결코 
진지한 태도가 아니었죠. 흔히들 보여주는  호의에 불과했어요. 더구나 미영 선배랑  헤어진 
직후였으니까...... 그래서 어떤 면으로는 피해 의식같은 것도 느꼈죠]
  [너 같은 여자도 피해 의식을 느끼는 모양이구나]
  [나 같은 여자? 그게 어떤 의미죠? 그래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겉으론 꽤나 화
려해 보이죠. 하지만 선배님도 알다시피 내 주변엔 진지하게 얘기를 나눌 만한 상대가 없었
어요. 여자들은 왠지 나를 따돌리는 것 같았고 남자들은 나를 인형처럼 보고 있기만을 원했
죠. 사람들이 내게 드러내 보인 건 호기심이었지 관심이 아니었던 거예요.  길을 걷다 보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데 나는 왜 이렇게 외로운가 싶어서 쓸쓸할 때가 많아
요. 다들 나를 딴 세상 사람처럼 쳐다보기만 하고.....]
  유화의 말대로 나 역시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녀가 소문에 휩싸일 때에도  진심으로 걱정해 본 기억은 없었다. 어쩌면  나는 
유화의 화려함에 대해 질투를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녀가 겪는 수난 역
시 당연하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선배님은 서른 살을 넘기면서 이런 불안함이 없었나요?  나는 굉장히 불안해요. 이제 서
른이 되었는데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을까,  서른이 넘은 내 얼굴은 텔레비
전 화면에 과연 어떻게 비취질까, 그런 생각들...... 이제  삼십대라고 생각하니까 모든 게 다 
걱정이 돼요. 어쩌면 결혼도 그래서 서두르는 건지 몰라요. 서둘러 결혼하고, 방송도 서둘러 
끝내고 싶어요. 그래요...... 그만두기로 했어요. 오늘 결정한 일이에요]
  유화의 말에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
나운서가 아닌 유화, 조명을 받지 않는 유화를 상상하는 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사실, 최고로 대접받을 수 있는 시기에 실컷 해본 셈이잖아요. 더 이상 미련도 없고 애착
도 없어요. 나중에 초라하게 계속하느니 지금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시들기 전에 스스로를 폐기 처분하려는 그녀의 결단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내 머릿속 한
구석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어떤 부분을 건드리는 유화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미영을 생
각하고 있었다. 미영은 허 PD와 결혼 직전에 헤어지고 만 것이 바로 일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나운서 일을 계속하려는 자신의 마음을 허 PD가 전혀 배려해 주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어쨌든 같은 방송일을 하면서 같은 집에서 함께 생활해 오던 우리 세 사람의 일상에 균열
이 찾아든 셈이었다. 끝까지 방송국에 남아서 일할 결심을 굳힌 미영과 달리 유화는 서둘러 
떠나갈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과연 그 둘 중에서  어떤 쪽에 가까운 
부류라고 할 수 있을지......
  저녁 뉴스를 하기 위해 다시 방송국으로 향하면서 나는  이런저런 회상에 빠져들었다. 방
송국 시험을 보러 다녔던 8년 전의 겨울, 유화가 입사하면서 미영과 함께 셋이서 집을 구하
러 다녔던 6년 전의 겨울..... 뺨에 와닿는 차가운 바람이 지난 겨울의 기억들을 차례로 일깨
우기 시작했다. 유난히 매서웠던 추위에 떨면서 성탄특집 방송을 하던 기억이며 불우이웃돕
기 생방송을 하다가 눈물을 참지 못했던 기억까지.......
  하지만 그렇게 인상적인 겨울은 이 도시에 내려온 후 3 ~ 4년이 지나면서 다시는  찾아오
지 않았다. 일이든 생활이든 안정적으로 자리가 잡히면서 나는 조금씩 권태로워졌고, 웬만한 
추위나 웬만한 슬픔은 어지간히 견뎌낼  만한 내성도 갖게 된 것이다.  어느 사이엔가 나는 
새롭게 다가오는 겨울을 습관처럼 맞이하고 무감각하게 보내고 있었다. 계절에 특히 민감한 
방송일을 하다 보니 오히려 개인적으로 맞이하는 계절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져 버린  셈이었
다. 어디 계절뿐이랴. 모든 시간에 대해서,  그 시간 속에 놓여 있어야  할 삶에 대해서까지 
나는 무딜 대로 무뎌진 것만 같았다.
  결혼을 포기하면서까지 일을 계속하는 것에도, 결혼으로  도피하면서 일을 그만두는 것에
도, 분명 무언가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그 어떤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았
다. 내 삶의 동력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무기력한 가운데 나는 그저 떠밀려 가고 
있을 뿐이었다.
  저녁 8시의 라디오 뉴스를 끝내고 나와 어두운 거리를 달리면서 나는 케이크를 사기로 결
심했다.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생일이라고 하더라도 오늘만큼은 촛불을 밝혀야 할 것 같았다. 
양초에 하나하나 불을 밝히다 보면 나의 내부에서도 어떤 기운이 솟아오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랬다.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던 그날은 바로 나의 서른한 번째 생일이었다.
  나는 집 근처 단골 빵집의  문을 밀며 점원을 향해 습관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잡아채기라도 하듯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었던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경은 씨, 전화야. 남잔데?]
  수화기를 넘겨주는 안 차장의 말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현우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담담하게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2월 셋째 토요일의 늦은  오전, 
그는 어김없이 터미널에 도착했고 나는 라디오 생방송을 앞두고 있었다.
  [그럼, 여기 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커피 전문점에 들어가 있을게. 방송 끝나는 대로 와라]
  [그래. 이따가 보자]
  통화하는 동안 줄곧 아래로 내리깔았던 시선을  그대로 책상 위의 방송 원고로  옮겼지만 
퇴근을 앞둔 사람들의 무료한 시간 앞에서 그 한 통의 전화가 그냥 마무리될 리가 없었다.
  [누가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최 부장에 이어서 후배 하동욱까지 가세했다.
  [누구예요? 애인?]
  나는 내 옆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는 유화를 의식하며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정말 남의 사생활에 신경 좀 꺼줄 수 없나?]
  유화의 얼굴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웃음을  감지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문의 벽 
속에 갇혀 지내던 그녀도 일주일 뒷면 해방될 것이었다. 유화는 결국 사표를 썼고 2월 말까
지 근무하기로 결정이 된 상태였다.
  [정말 누구야? 숨겨둔 애인이야?]
  라디오 스튜디오로 향하는 계단을 함께 오르며 최 부장은 여진히 짖궃은 말투로 물었다.
  [그냥 대학 때 친구예요. 근처를 여행할 일이 있다고 해서 잠시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래...... 아무튼 조심해. 지난번엔 강유화하고 서미영이 함께 얽혀서 소문이 나는 바람에 
얼마나 난감했었어?]
  [네. 알겠습니다]
  정오 뉴스를 진행하기 위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는 최 부장에게 나는 큰 소리의 대답
으로 안심을 시켰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주조정실로 들어가 내 방송이 시작될 때를 기다리
며 큐시트와 원고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몸살 기운 때문에 힘이 들었는데 점차 한
기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어깻죽지 아래를 주무르는 일과 팔짱을  꼈다가 푸는 일을 반복하
던 나는 이윽고 최 부장이 뉴스를 끝내자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생방송을 하는 동안, 지금 나가고 있는 방송의 전파가 닿는  곳에 현우가 와 있다는 사실
이 새삼스러워졌다. 그리고 조금씩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
는 걸까, 생각하며 나는 마음을 가볍게 가지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때 이미 내 곁에는  독감
이 현우와 함께 바짝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사흘 전에 나를 찾는 전화가 집으로 걸려왔을 때 나는 곧 그가 현우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내가 그렇게 금방 알아차리자 그는 할말이 없어진 듯 잠시 머뭇거렸다.
  [여기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니?]
  침묵을 깨려고 나는 기껏 그렇게 물었다.
  [알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지]
  현우가 말했다. 그의 진지한 태도가 전화선을 타고 되살아나는 듯했다. 문득 그가  그리웠
다. 아주 진지하게.
  그는 대학 시절 내 친구의 연인이었다. 하지만 내 친구와  그는 자주 다투었고 나는 얼떨
결에 둘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곤 했었다. 그러다가 현우와 내가 은근히 가까워진 사실
을 알게 되었을 때, 내 친구는 오히려 재미있어했다.
  [생각해 보니까 너하고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나하고는 아무래도 근본적으로 뭔가 잘 안 
맞는 것 같았거든. 이참에 둘이서 한번 잘해 봐. 왜? 무슨 중고 물건이라도 건네받은 기분이
니? 그래도 그만하면 꽤 쓸 만한 중고잖아. 내가 품질을 보증한다고]
  성격 좋은 그 친구는 그렇게 떠밀다시피 나와 현우를 묶어주려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 
현우와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친구의  연인이었기 때문이라서가 아니었다. 현우는 나와  잘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나를  닮아서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부류였던 것이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겁을 먹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현우가 근접해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때 내게는 이미 준이라는 존재의 그림자가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준에 대해서는 무엇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는 많은 부분에서 나와 달랐다. 때로는 
아예 나와 종류가 다른 인간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 이질감은 나를 매료
하기에 충분했다. 내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모습까지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느
껴졌다. 게다가 어머니가 준을 싫어한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자극했다. 요컨대 나는 그 무렵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신물이 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친구들이 모여서 자식들의 대학  입학 축하 모임을 가졌던 그날,  나는 거의 십 
년 만에 준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옅은 회색 바지에  하얀 티셔츠와 코발트빛 후드 점퍼를 
입고 나타난 준은 내가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훌쩍 키가  자라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그는 어린 시절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특히  내 시선을 끌었다. 체육학과라는 의
외의 전공도 어딘지 모르게 특별하게 느껴졌다. 말수가 적어진  그는 조금은 과장되고 독특
한 몸짓으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듯했다. 물컵 하나를 쥐는 데에도 특별한 제스처를 쓰는 게 
느껴졌고 벌떡 일어나 점퍼를 벗고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에서는 오로지  몸으로
만 말하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것 같았다. 덜 익은 생각으로 떠들어대기만 하는 아이들 사이
에서 준은 그런 모습으로 가뿐히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후로 어머니들이 빠지고 아이들끼리만의 만남이 이어지면서 나는 그에게 호감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다. 준과 나는 자연스럽게 따로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는 나를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오래된  연인처럼 별다른 열정도 없이, 별다른  변화도 
없이, 아주 가끔씩 만나는 일이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그런 상태가 혼란스러웠다. 준이 나
를 좋아하는 것인지 싫어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그에게서 
색다른 무언가를 원했듯이 그 역시 내게서 색다른 무언가를 원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나를 훌쩍 들어올려 다른 세계로 끌고 가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오히려 제자리를 
지키는 나를 가끔씩 만나는 일을 즐겼던 것 같다. 어쨌든 그때 나는 준을, 준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면 늘 시야가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시 준을 만나면 모든 게 명료해졌다. 유난히 검은 그의 머리카락은 언제나 적당
한 길이로 정리되어 있었고 가방과 신발은 물론 손목시계의 줄까지도 색깔을 맞춰 차려입은 
옷차림은 항상 말끔했다. 그 정돈된 모습은 내게 이상한 안정감을 안겨주었다. 짙은  눈썹과 
날렵한 턱선, 길고 탄탄한 팔과 다리, 무심히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하얀 손가락의 움직임, 
그러한 것들로 그는 자신을 간단히 설명했고  나는 그런 시각적인 것들만으로 충분히  그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착각 속에서 나는 때로 행복했을 것이다.
  외면하고 싶은 어둠이 너무 많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준의 옆에  있을 때면 나는 그 모든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항상 눈에 보이는 명확한 것들만을 이야기했다. 자신의 몸
과 그 몸을 치장하는 것들과 그 모든 것을 실어나르는 자동차, 혹은 그 모든 것들을 과시할 
수 있는 카페와 나이트클럽. 그런 얘기들만으로 그의 세계는 충만했다. 그런 피상적인  것들
만 충족되면 그는 간단히 행복해했던 것이다. 참으로 단순하고 명료한 태도였다. 세상의  모
든 어둠을 잊어버리고 도피하듯 만나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준만큼 적당한  인물이 없었다. 
하지만 준과 함께 보낼 수 잇는 시간은  너무나 짧았고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보내야만 했다. 그러는 가운데 결국은 이 어둠  속에서 무언가와 부딪쳐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질 무렵, 현우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어쩌면 그 만남은 필연이었는지도 모
른다.
  세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그러 물끄러미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발자국도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현우를 만나면 그 시절 그 또래의  젊은이들을 지배했던 갈등이나 고민이 자연스
럽게 토로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의 생각이 나와 너무나 비슷하다는 점에 놀랐고,  자신의 
내부를 지나치게 들여다보려는 습성마저도 나와  너무 닮았다는 사실에 때로  짜증이 났다. 
현우에게 근접할수록 나 자신의 본질에 근접하게 될 것만 같아서 나는 그가 지나치게 가까
이 다가오는 것을 경계했다.
  준에 대한 얘기를 현우에게 숨김없이 했던 것도 그러한  경계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
나 현우는 개의치 않고 기꺼이 일그러진 삼각형의 한 변이  되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준과 
현우 사이를 오가며 내 젊은 날의 한때를 보냈다. 두 개의 점을 오고 가는 기계적인 진동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아무튼 그런 식으로 내게도 어떤 움직임이 있었고 그 움직임을 위한 에
너지가 존재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현우가 삼각형을 무너뜨렸던 그날  이후 모든 것은 사
라지고 말았다.
  여느 때처럼 함께 산책을 하듯 그의 학교  뒷동산에 올라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앉았던 그
날.... 처음에, 나는 현우가 내게로 쓰러지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엉겁결에 그를 온몸으로 
받쳐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곧 내가 감지해 낸 건 그의 뜨겁고 축축한 입술이었다. 첫키
스에 대한 메마른 상상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가며 동물적인 
촉각만이 꼿꼿이 일어서던 그 순간.
  거기서 그를 밀쳐낼 수도 있었다.  이어서 그의 손이 촉수처럼 내  몸 곳곳으로 뻗어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를 머뭇거리게 만든 그 순간적인  힘
의 이름은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때까지도 내 몸을 조심스럽게 대하던 준
에 대한 반발심이었을 것이다. 준에게 보란 듯이 나는 내 몸을 함부로 다루고 싶었다.  그래
서 현우가 이끄는 대로 그를 쓰다듬고 그의 애무를 받았다. 감정 없는 순길로, 감정없는  몸
으로, 오로지 동물적인 호기심과 촉각만을 곧게 세운채..... 그러나 현우가 내 몸을  짓누르며 
옷을 벗기려 할 때 온몸으로 저항했덧 것 또한 준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내 모든 생각과 
행동이 오로지 준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듯했던 시절이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의 만남에 대한 나의 거부를 현우는 예상했다는 듯 받아들였다. 
그가 너무나 쉽게 포기했으므로 조금 섭섭하기도 했었던가.
  정오의 가요 프로그램은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현우는 왜 갑자기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것인지..... 기억 속에 매장된 일그러진 삼각형이  슬며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바라보
면서 나는 착잡한 기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윽고 나는 생방송의 마지막 곡을 내보내면
서 다시금 나를 덮쳐오는 두통과 한기 때문에 한동안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만 했다.
  현우는 멋진 청년이 되어 있었다. 불안정하고 미숙해 보였던 스무 살 무렵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다를 보고 싶다는 그를 옆에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며 나는 
이제 본 듯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세월 저쪽의 친밀감이 산뜻하게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막상 바다를 앞에 두고 앉았을 때, 우리는 서로 조금쯤 어색해져 있었다. 통유리창
을 통해서 바다가 그토록 가까이 눈에 들어오는 찻집을  택한 것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풍경은 때로 사람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만든다.
  [그 사람, 아직도 만나니?]
  왜 아직 결혼을 안했냐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다가 잠시  대화가 끊어진 사이였다. 갑자기 
현우가 그렇게 물었다.
  [누구?]
  나는 짐짓 모른척했다. 그렇게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면 어떡하냐는 힐난이 내 말 속에 묻
어 있었다. 현우는 말없이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시절에도 준에 대한 이야기는  의
식적으로 피했던 우리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겠지.
  [준을 말하는 거니? 역시 넌..... 준을 의식하고 있었구나. 난 그때  아무리 내 쪽에서 만남
을 거부한다고 해도 우리 사이가 그토록 간단하게 정리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날
의 일과 그 이후의 진행 과정에서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아]
  당시의 내 마음이 얼마나 완강했던가를 잘 알면서도 나는 그헣게 말했다. 지나간 일에 대
해서 남을 탓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넌 처음부터 내가 감정 따위를 품을 여지를 주지  않았잖아. 널 만나는 동안 나는 늘 이
런 의문을 갖고 있었어. 난 누굴까,  난 도대체 무엇일까..... 혼란스러웠지. 너라는  존재에게 
차지하는 내 존재의 비중 같은 것  말이야.  그날 나는 아마 그 의문을  거칠게 풀어버리고 
싶었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더욱더 혼란스러워지고 말았지.  솔직히..... 아직도 그 의문
은 유효해]
  [처음부터 내가 준에 대해서 숨김없이 말했던 이유를  그렇게도 모르겠니? 난 그때, 준의 
그림자로부터 나를 끌어내 줄 사람을  기다렸던 거야. 뒤늦게 준에 대해  알게 되는 것보다 
처음부터 알고 함께 극복해 주기를 원했던 거지.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했던 걸까?]
  거짓말. 나는 생각했다. 그건 현재의  기대이지 그 시절의 기대가  아니었다. 그때 실제로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 스스로 깨닫지 못한 무의식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현
우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다행히도 그가 적절하게 정리를 해주었다.
  [나, 다음달에 결혼해. 참 이상하지? 막상 결혼 날짜가 정해지고 나니까 네가 자꾸만 떠오
르는 거야. 뭐랄까.... 벼랑 끝에 선 기분 같은 것..... 그 벼랑에서 너를 불러 무슨  말이든 해
야만 할 것 같은..... 그래,  여전히 내 감정을 설명하기가 힘들구나.  시간이 흐르면 모든 걸 
명확히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은 남게 되는 모양이야]
  찻집을 나오면서 나는 내가 하나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음을 느꼈다. 크게 보아 그것은 내 
청춘의 경계이기도 할 것이었다. 문득 문득  떠오르던 현우의 얼굴, 그가 보낸 편지나  그와 
함께 읽던 책을 다시 들춰보면서 느끼던 감회, 몇 년  만에 그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
나오던 순간의 긴장감, 그런 사소한 흥분마저도 이제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는 이제  결혼이
라는 것을 하게 될 것이고 나는 또 하나의 돌아올 수 없는 경계를 넘게 될 것이었다.
  그날 밤, 그가 숙소로 잡은 해변 여관에 함께 들어갔던  이유에 대해 나는 지금 설명하기
가 힘들다. 그런 것이야말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의 이야기들
일 것이다. 나는 지금 그날의 바닷바람과 내 혼미한 머리를 짓누르던 두통만을 또렷이 기억
해 낼 뿐이다. 무언가가 내 몸을 세차게 떠미는 것도 같았고, 저리듯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
가는 것도 같았다. 그런 것들이 원인이라면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의 옆에 눕자 나는 아무 얘기도, 아무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현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낯선 느낌에 빠져들면서 나는 그저 이불만 끌어당기고 있었다.  온몸에 한기가 돌면서 또다
시 두통이 몰려왔다.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이따금씩 파도소리가 밀려들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아주 먼 곳으로부터 수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멀리  해
변에서 통곡하는 여자의 목소리 같은..... 여관 건물  근처의 거리에 누군가 쓰러져 신음하는 
것 같은..... 소리는 귀가 아니라 머리로 먼저 스며들었다. 소리에 마비된 머리는 느리게 의식
을 불러들였다.
  그것이 옆방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을 의식한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
이 서로를 끌어당겼다. 바로 옆방이 아니라 위층 옆방쯤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쉽
사리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던 익명의  신음소리를 덮어버리기 위해서 현우와 나는  부산히 
몸을 움직였다. 어색한 분위기를 덮기  위해 좀더 큰 동작으로 좀더  많은 소리를 내면서.... 
그가 내 안에서 크게 호흡할 때, 그와 내가 동시에 물결처럼 일어설 때, 함께 출렁일 때, 그
때마다 나는 머리로 먼저 스며드는 내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10년 전에는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졌던 내 몸이, 그토록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던 몸짓들
이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그저  그와 내가 함께 나누는 담백
한 섹스일 뿐이었다. 아무런 약속도 의무도  필요하지 않은, 함께 차를 마시고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과도 같은.
  이윽고 그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와  내 머리를 내 목소리로 꽉채웠다.  그리고 곧 썰물로 
빠져나가며 뜻밖의 느낌 하나를 남겨주었다. 그것은... 힘껏 쥐고 있던 것을 맥없이 놓아버리
는 순간에 다가오는 짜릿한 손 저림과도 같은, 일종의 해방감이었다.
  3월이 되기까지 나는 꼬박 일주일을 앓았다. 몸살과 두통으로 맹위를 떨치던 독감이 마지
막으로 편도선을 부어오르게 하며 나를 떠날 채비를 하던 때에 유화는 미련없이 이 도시를 
떠났다. 그리고 나는 어떤 감회를 느낄 사이도 없이 새 얼굴을 맞이해야 했다. 노란색과  빨
간색의 튤립을 분홍색 부직포로 감싼 꽃다발을 들고 첫 출근을 한 그녀의 이름은 정수림이
었다.
  어쩐 일로 빨리 충원이 되나 했더니 수림은 계약직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제 
아나운서는 더 이상 정규 사원으로 뽑지 않을 것이라는  풍문은 그렇게 사실로 확인되었다. 
미영과 나는 다소 착잡한 마음으로 수림을 우리들의 집으로 맞아들였다. 서른을 두려워하며 
떠난 유화의 빈 방에 스물넷의 그녀가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수림은 이삿짐을 들여오는 날
에도 꽃다발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직 날이 추워서 꽃이 비쌀 텐데..... 이건 백합 종류니? 정말 예쁘구나]
  미영이 꽃다발을 받아들며 말하자 수림은 특유의 생기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리꽃의 일종이에요. 이름은 마르코폴로. 예쁘죠?]
  백합을 닮았지만 한층 부드러워 보이는 여섯 개의 꽃잎이 한껏 벌어져 있었다. 꽃술 밑동
까지 훤히 속을 드러낸 그 하얀 꽃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커다란 꽃잎 안쪽의 깊은 곳
마다 작고 붉은 점이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수림은 대학 시절에도 몇몇 케이블 방송사에서 리포터로 일한  경력이 있다고 했다. 이런 
작은 도시까지 내려와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것에 불만은 없냐고 묻는 미영에게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6년 후, 혹은 8년 후에 수림은 과연 어떤 모
습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을지..... 나는 유화를 생각하고 또  나 자신을 생각하며 수림의 얼
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수림을 통해 문득문득 예전의 내 모습을 되살려보는 사이에 어느덧 4월이 다가왔다. 건조
주의보가 내려진 상태에서 때이른 초여름 날씨가 계속되는 가운데 방송국은 봄철  프로그램 
개편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내다본 거리에는 짧은 소매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
마저 보이는 4월의 어느 날, 나는 개편과 함께 라디오의 아침 방송을 그만두고 텔레비전 뉴
스를 진행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입사 초기에 한동안 진행을 맡았던  오전 10시의 TV 뉴스
였다.
  [날씨도 이렇게 더운데..... 힘들겠다.....]
  창 밖 풍경을 물끄러미 내다보던 나는 문득 좁고 무더운 TV 스튜디오가 떠올라 나도 모
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기록 2
  그날 나는 오전 10시 무렵의 텔레비전 뉴스를 귓가로  흘려듣고 있었습니다. 주부 대상의 
시간대라서 그런지 앵커는 30대 후반의 여자 아나운서였지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던 나는 누나가 걸레를 들고 가까이 다가와 바닥을 닦으려 하자 두 
발을 모두 소파 위로 올려놓았습니다. 내 앞에 엎드린 누나의  오른쪽 어깨가 문득 눈에 들
어오더군요. 습관적인 움직임을 반복하는 그 우울한  어깻죽지를 나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
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마흔을 넘겨버린 누나의 나이를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때, 브라운관 안에서 초등학교 교사처럼 이상고온 현상을 친절히 설명하던 부드러운 목
소리를 제치고 갑자기 카랑카랑한 목소리 하나가 끼여든 것입니다.  이어서 지역 소식을 전
해 드립니다, 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쫓아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 여자.... 이 아파트에 살던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었습니다. 누나는 걸레질을 계속하며 무심히 말하더군요.
  [어, 아나운서가 바뀌었구나. 맞아, 여기 사는 여자야.  너도 봤니? 요 앞동에 JBS 아나운
서들이 모여 산다고 하던데.....]
  그리고 또 무어라고 덧붙이는 누나의 목소리는 더 이상  내게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기자 
리포트가 끝나고 다시 당신의 얼굴이 나올 때를 기다리며 나는 화면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지요. 당신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다니....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는 당신의 짙은 화장이 잘 드러나지  않더군요. 조명 아래서 당신의 
얼굴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고 그래서 그 얼굴은 정말  완벽하게 연희를 닮아 있었습니다. 
나는 연희의 증명 사진이 눈앞에 재현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느새 장식장 근처로 다가간 누나는 텔레비전의 전원을 끄고 라디오를 켜고 있었습니다. 
나는 황급히 리모컨을  찾아 들었지요. 누나의  놀림 속에 JBS로  텔레비전 채널을 맞추고 
JBS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나날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향하는 시간들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지난 한달 내내  당신을 지켜보고 
당신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당신이 들려주는 음악을 들으며 보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집
중했고 어느때보다도 맑은 정신을 가질  수 있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금방 
지나가 버리는 것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것 같습니다.
  나는 뉴스를 진행하는 당신이 좋습니다. 아무런 표정 없이  조금은 도도한 목소리고 기사
를 전하기만 하는 당신의 모습이 진짜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요일 저녁에 보게 되는 당신의 
얼굴은 아직 내게 낯섭니다. 풍부한 표정과 함께 밝고 상냥한 목소리로 리포터 역할을 해내
는 당신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라디오의 가요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에도 그런 목소리가 나오긴 하지만 조명 아래의 얼굴을 함께 보는 것이 아니어서인지 그건 
또 그것대로 당신의 다른 한 모습처럼 여겨지는데 말이지요.
  그날 처음 뉴스에서 당신을 발견한 뒤,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당신이 진행하는 프로그
램들을 챙겨 보고 들으면서 나는 점점 더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저 여자를 만나고 싶다,  만
나서 무슨 말이든 나눠보고 싶다, 내 앞에서 말하는 표정과 몸짓을 지켜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그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가요데이트]의 주말특집 공개방송
이 진행되는 곳, 시내 한 백화점의 특설 무대로 말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
어서 나는 겨우 앞으로 다가가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을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 오는 것이 얼마 만인가 싶더군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은 내
가 본능적으로 외면하는 장소입니다.
  무대는 사람들이 앉은 의자 바로 앞에 둥글게  공간을 만들어 마이크 세 개를 세운 것이 
전부였습니다. 바닥에 어지럽게 깔린 전선들과 그 뒤쪽으로 유리로  작게 만든 공간 속에서 
엔지니어인 듯한 사람들이 각종 기계를 만지는 모습 정도가 방송국 시설다운 면모를 보여주
고 있었지요.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당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다른  사람이 대신 진행하는 것
인가 싶어서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름 같은 5월이었지요. 온몸에 땀이  배어나고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불현 듯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
더군요. 그러나 나는 이미 낯선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작게 
쪼그려 앉은 나는 넋을 놓은 사람처럼 식은땀마저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문득 당
신을 향한 알 수 없는 분노가 맹렬히 솟아나기도 했습니다.  호흡마저 편안히 할 수 없었던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이따금씩 눈앞이 아득해질 무렵, 비로소 당신이 나타나더군요. 틀림없는 당신이었지만  거
기서는 또 달라 보였습니다. 청취자가 직접 참여해서 노래자랑을 벌이는 형식의 방송이라서 
그런지 당신은 거기서 무척 친근감 있게 보였습니다. 리허설을 할 때에는 더욱  그렇더군요. 
출연자들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중간중간 농담을 던지면서 활짝 웃는 모습이 때로는 수다
스러운 새댁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차분하게  정돈된 분위기와 티끌 하나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말끔함으로 요약되던 당신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흐트러지는 느낌이었지요.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연희를 닮아 있었고, 나는 당신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히고 있었습니다.
  어떤 게 저 여자의 진짜 모습일까.... 누나 집으로 돌아와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만나 당신의 진짜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커져 갔습니다. 나중에는 당장
이라도 당신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지더군요. 가슴을 옥죄는  초조감 때문에 그날 
밤엔 참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나는 변함없이 편지만 쓰고 말았지요. 만나기는커
녕 전화도 제대로 걸지 못하고 말입니다.
  하나의 얼굴만을 가진 사람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양면성이라
는 것이 있고, 또 상황에 따라 다른 표정과 행동을 보이게 마련이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진
행하는 프로그램마다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먼발치에서 바라보아도 또 그때마다 저마
다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모습들 가운데 공통점이 있다면 오로지 연희를 닮았다는 점
뿐일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런 모습대로 저런 모습은  저런 모습대로 당신에게는 연희의 
이미지를 꼭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게 진짜 당신의 모습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연희처럼 당신도 나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당신, 혹시 잉에보르크 홀름을 알고 있는지..... 소년 토니오의 사랑이었던 잉에는 파란  눈
과 금발을 지닌 밝은 유형의 인간을 대표하는 인물이지요. 나는 그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일
상적인 사람들을 늘 부러워합니다. 인식하고 창작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저주로부터 벗
어나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했던 토니오 크뢰거처럼 말입니다. 연희에게서 또한 
당신에게서도 나는 처음부터 잉에의 모습을 보았기에  그토록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연희는 그 평범한 부러움조차도 내게 허락하지 않았지요. 그 생각을 하다 보면 다시 
가슴이 죄어드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 역시 나를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않는군요. 애초에 내가 당신에게서  보았던 잉에의 
모습은 이제 희미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 나는 당신의 이마에서 흐릿한 낙인의 흔
적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수천 명 가운데에  섞여 있어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낙인. 토니오 
크뢰거가 말했던 그러한 낙인을 지닌 당신은 분명 불타오르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
다. 그것을 숨기기 위해 당신은 그토록 다른 얼굴과 표정으로 매번 자신의 모습을 위장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나는 지금 그렇게밖에는 당신의 다변적인 얼굴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단순하게 시작되었던 당신에 대해 관심이 이토록 무섭게 나를  짓누르고 있는 요즘, 나는 
여태 당신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오로지 편지만 써 보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잔뜩 
어깨에 힘을 준 채 쓴 글들을 당신이  진행하는 정오의 가요 프로그램 앞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지요. 당신이 내 편지를 방송에서 읽어주는 그날, 나는 용기를 내어 당신에게 전화를 걸
어볼까 합니다. 그러나.....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벌써 저녁 7시가 되어가는군요. 오늘은 당신이 [TV 매거진]의 리포터로 텔레비전에 나오
는 날입니다. 이제 당신을 볼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욕조 속의 마네킹
  그가 보낸 편지들을 기억한다. 누구라도 기억할 것이다. 정성을 다한 글씨로 써 내려간 긴 
사연에 매번 발신인 이름도 없이 들국화의 노래만 신청곡으로 적어오던 그 편지들을.
  편지보다는 엽서를, 엽서보다는 팩스를, 팩스보다는 전화나 PC통신을 선호하는 요즘 청취
자들의 취향으로 볼 때 그것은 상당히 특이한 경우였다. 그러나 감상적인 어투로 써 내려간 
그 기나긴 글을 읽어줄 만큼  방송 시간이 여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끝까지 
읽다 보면 왠지 사람을 지체가 하는 듯한  무거운 내용도 많았고 일기를 쓰듯 그저 지루한 
일상을 나열하기만 한 내용도 많아서 나는 매번 그의 편지를 한쪽으로 밀어놓을 수 밖에 없
았다.
  그러나 그 정성을 계속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섯 번 째든가 일곱 번 째든가의 편
지를 받으면서 나는 사연의 일부분이라도 방송에서 읽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적당
한 방송 멘트가 떠오르지 않아 고심하던 중이었다. 나는 그의  편지를 앞에 놓고 그나마 방
송에 지루하지 않게 들려줄 만한 내용을 찾아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 오늘 하루는 침대에 누워  다 보낸 것만 같습니다. 지난밤의  불면을 해소하기 위해 
내내 침대에 누워 뒤척이기만 하다가 오후엔 산책을 나갔습니다.  벌써 성하의 기운이 천지
에 널려 있었습니다. 하늘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유심히 살표보지는 아니하였지만 단박에 그
렇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황혼 무렵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으려니 참 허
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더욱 허전했습니다. 운
동하는 사람들은 뭘 믿고 저리도 활달한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란 육식동물에게 한번도 목
을 물려본 적이 없나 궁금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순진합니다. 어둠을 덮어쓴 괴물보다는  햇
살로서 위선하는 밝음의 동물이 더욱 위험하다는 걸 모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남아 있
는 밤 시간 동안에는 책을 읽을 것입니다. 밖은 더욱 어둡습니다. 시간은 딴 사람을  먹으러 
가나 봅니다. 오늘은 또 누가 당할지 안타깝습니다. 어둠의 장막을 램프 빛으로  걷어올리고 
방문, 창문, 꼭꼭 닫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안전할 것입니다. 이제 그만 써야겠습니다. 또 편
지하겠습니다.>
  레코드실로 올라가 들국화의 음반을 찾아 들면서 나는 문득 그 편지의 주인공에 대해 생
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십 연도 더 지난 이 음반의 노래들만 신청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십대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 편지  글의 단어 사용이나 어미 처
리 등으로 보아 꽤나 낭만파인 남자일 것 같다는 생각, 아마도 그 정도였을 것이다.
  나는 헤드폰을 쓰고 습관적인 손놀림으로 음반을 고르기 시작했다. 청취자들이 신청해 온 
곡들 중에서 우선 몇 곡을 선택한 뒤 새로 들어온  음반들을 들춰보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
인지 자꾸만 들국화의 노래가 귓가에 맴돌아서 선곡이 쉽지 않았다. 가까스로 열두 장의 음
반을 골라놓고 큐시트 작성까지 끝낸 뒤 결국 나는 들국화의 음반을 플레이어에 넣었다. 그
리고 레코드실 한쪽 구석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방송 멘트를 써나가면서 익숙한 그 음
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들국화 라이브 공연장에서부터 그 무렵의  영화관, 서점, 소극장, 대학로  등 현우와 함께 
했던 공간들이 차례로 눈앞에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시절을  회상하지 않으려고 
원고를 쓰는 내내 애를 써야만 했다. 회상 이후에 찾아들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어쩐지 감
당할 자신이 없었다. 당연히 방송 원고는 잘 씌어지지 않았다. 문득, 짜증이 솟아올랐다.  끈
질기게 보내오는 편지에 들국화의 노래만을 신청곡으로 적었던 그  남자를 향해. 그래서 기
어이 나는 그 시절의 기억 속으로 끌어들인 그 남자를 향해.
  정오의 방송이 시작되자 나는 그의 편지를 읽어준 뒤, 이런 말을 덧붙여 보냈다.
  [이 편지에는 발신인의 이름도 수신인의 이름도 없지만 적어도 이 방송을 듣는 분 모두가 
수신인이라는 것만은 알 것 같습니다. 또 편지하리라고 쓴 마지막 구절을 이제 일상으로 돌
아가겠다는 의미로 읽어도 괜찮을까요? 이제  이분은 일상의 삶 속에서 살아있는  행동으로 
타인과 소통하게 되리라 기대하고 싶군요. 삶 자체가 글이 될 수 있도록 말이죠]
  
  다음날 아참, TV 뉴스를 끝내고 내 자리로 돌아와 분장을 대충 지워내고 있을 때였다. 
  [이 아나! 받아봐. 팬인 것 같은데?]
  최 부장이 건네준 수화기에서 낯선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이 어제 들국화의 노래
를 신청한 사람이라고 밝힌 뒤, 편지 사연을 읽어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의례적인 인
사로 응답했다. 그런 식으로 방송 뒤에 따로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이 가끔은 있어왔던 터였
다. 하지만 그럴 때 찾아오는 약간의 감동에 흔들려서 대화를 길게 이어나가다가는 결국 나
만 피곤해지고 만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가급적 사무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제가 편지를 보내는 게 부담스럽습니까? 제 글 뒤에 덧붙여 하신 말씀이, 제게는 
그렇게 들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말라는.....]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
  다만..... 그 다음에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몰라 나는 머뭇거렸다. 아니라고 부정을 하기
는 했지만 사실 그는 정확하게 내말의 의도를 이해한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저로서는 그 편지가 그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지 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확
인한 걸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는 걸 허락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말씀하신 일상의 삶으로 돌아갈 자신이 아직은 제게  없고..... 능력도 부족하고.... 아무튼 당
분간은 그런 글들을 쓰고, 또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그저 읽어만 
주십시오. 짐작하셨겠지만 그건 당신을 향해서 쓴 글들이니까요]
  <당신>이라는 호칭이 전화선을 타고 내게로 흘러오는 순간,  나는 느닷없는 긴장감을 느
꼈다. 물론 그 편지가 나를 수신자로 삼아 쓴 글임을 짐작하고는 있었다. 그보다 앞선  편지
들에서도 짐작을 뒷받침할 만한 구절이 많았다. 때로는 부담스러울  만큼 명확한 구절도 있
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헛수고를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멘트를 했
던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라니.
  내가 당황하는 사이에 그가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토니오 크뢰거를 아시죠?]
  뜻밖의 질문에 나는 그만 얼떨결에 대꾸를 했다.
  [소설 말인가요? 토마스 만의.......]
  [그래요, 당신은 분명 그 소설을 읽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확연한 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그만 어수선한 마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왜 내가 그 소설을 읽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느낌이죠. 당신의 이마에 새겨진 흐릿한 낙인이 그걸 말해 주고 있기도 하고.....]
  [낙인? 그건 또 뭐죠? 길 잃은 시민의 상징 같은 건가요?]
  [길 잃은 시민의 상징.... 역시  그 소설을 읽었군요. 비슷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저주의 상징이라고 해야겠죠. 문학이란 소명이 아니라 일종의 저주라고 토니오 크뢰거가 말
하지 않았습니까? 평화로워야 할 어린 시절부터 그 저주가 찾아온다고....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갈등에 빠져들면서 말입니다. 고독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낙
인은 그렇게 이마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가 하는 얘기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저는 당신에게서 잉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시죠? 토니오가 짝사랑했던 금발
의 잉에보르크....... 밝고 행복한 인간의 샘플 같은 여자 말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게 되었죠. 아무래도 당신은 잉에보다 토니오에 가까운 인간
인 것 같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신의 말 속에 무언가가 깃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방송에서 들려주는 여러 이야기들 속에....]
  [그저 평범한 내용일 뿐이에요. 그야말로 방송용 멘트들이죠]
  [물론 표면적인 이야기만 들어보면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건 그 속
에 깃들인 어떤 무늬 같은 겁니다.  평범한 내용을 말하는 것 같지만 숨길  수 없는 무늬가 
드러나는 걸 저는 느낍니다. 미리 준비해 놓은 원고를 읽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에서는 더욱더 확연히....]
  [죄송합니다. 이제 스튜디오로 올라가야 할 시간이 되었어요. 다음에 또 얘기 나눌 기회가 
있겠죠.  그럼....]
  그의 말을 자르고 들어가 일방적으로 말한 뒤 나는  곧바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동안 수화기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손을 떼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스토커?]
  턱짓으로 내 손을 가리키며 하동욱이 말했다. 그가 옆에 와 있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나
는 턱없이 큰 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냐. 그냥 청취자야]
  나는 전화기에서 손을 떼며 심상한 듯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에 묻어나는 짜증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게 그 소리죠, 뭐. 꽤 심각해 보이던데? 그쪽에선 무슨 얘길 그렇게 많이 했어요?]
  [모르겠어.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한 건지..... 녹음은 벌써 끝난 거야?]
  지나치게 친근한 척하는 그의 태도가 새삼스레 못마땅해져서 나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요. 삼년차 아나운서가 그 정도 예고 방송 녹음쯤이야 한방에 끝내야죠. 그런데 나는 
왜 삼년차가 되도록 스토커는커녕 소박한 여성 팬 하나도 없는 걸까? 이러다가 언제나 장가
를 가게될지....]
  나는 하동욱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며 서랍을  열었다. 방송용 원고지와 큐시트 
용지를 꺼내고 볼펜을 챙겨들면서 그를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집요했다.
  [유화 선배가 예전에 스토커들한테 그렇게 시달렸다면서요? 하긴 그럴  만한 인물이긴 했
죠. 서른이 다 되어서도 그 정도였으니 초창기엔 오죽했을까.....]
  정말 그런 건 유화에게나 해당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좀 느낌이 다르다. 유화의  경
우처럼 텔레비전에 비춰지는 외양만 보고서 무작정 달려드는 스타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그 전화는 오늘 처음 온 거였나요? 그  사람도 꽤 최향이 특이하구먼. 경은 선배
한테 관심이 있는 걸 보면.... 혹시, 나이 지긋한 아저씨?]
  [나 지금 멘트 써야 해]
  농담인 줄 알면서도 나느 하동욱의 말을 매정하게 자르고 말았다. 내 시선은 계속 원고지
에 가 있었지만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그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는 내
가 그런 식으로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자신도 전
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무언가가 나를 간섭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불쾌
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원고를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글들을  짜깁기해서 써보려고 해도 그 
단순한 편집 행위조차 여의치가 않았다. 나는 책상 위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우편물을 끌
어당겨 [가요 데이트] 앞으로 온 것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청취자들이 보내준 사연으로 어
떻게든 방송 시간을 채워가야 할 터였다.
  그날의 우편물 속에도 어김없이 그  남자가 보낸 것이 들어 있었다.  그는 며칠째 잇달아 
편지를 보내오고 있는 중이었다. 여전히 발신인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이미 내 눈에 
익숙해진 필체가 그 남자의 존재를 말해 주고 있었다. 여성스러운 필체를 숨기려는 듯 작게 
적어놓은 글자 하나하나에서 그의 음성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그의 사연에서라도 방송에 적합한 내용을 발견하
게 된다면 다행일 것이었다. 벌써 1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편지를 앞에 
놓고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가 말했던 저주의  낙인이 다름아닌 그 
편지 속에 또렷이 찍혀 있는 것 같아서였다.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서, 저 혼자 굴러가는 세
상에 대해서, 끝없는 불화를 느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외로움......
  그랬던가. 그 낙인이라는 것이 외로움의 상징이었던가. 기억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의 토니오 크뢰거는  길 잃은 시민이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 책을 읽은 게 언제였는지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이십대  초반, 그래, 그 무렵에 
자전적인 소설을 꽤 많이 읽었던 것도 같다. 작가보다도 그  작가의 개인적인 삶에 더욱 관
심이 많았던 때였다. 작가란 대체 어떤 운명의 사람들일까,  라는 호기심. 그의 말대로 저주
받은 운명의 낙인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게 토니오 크뢰거를 추천해 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현우였을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 시절의 기억은 희미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애써 그 혼미한 시절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
려고 했던 것 같았다. 아마도 나는 그때 길을 잃는다거나  무언가 명확하지 않은 것을 바라
본다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염증을 느끼려고  애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책을 덮으면서도 나는 결코 이렇게 길 잃은 시민이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문학의 길을 향한 토니오의 독백은 비장했지만 그만큼 내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
었다. 진실로, 혹은 역설적으로, 나는 평범한 시민으로 이 사회에 편입되기를 희망했었다.
  사실, 기억마저 희미한 그 무렵의 잡식성 독서에서 그나마  토니오 크뢰거를 기억하게 된 
것은 나의 부모님 때문이었다. 토니오가 사랑했던 밝은 성격의  인간들과 그 자신의 어두운 
내면 세계에 대한 대비보다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양면적인 기질의  대비가 
내겐 훨씬 더 공감이 갔던 까닭이었다. 명상적이고 철저하며 정확한 성품의 아버지,  관능적
이고 충동적이며 방종한 성격의 어머니, 그것은 소설 속에서  아버지의 청교도적인 북쪽 기
질과 어머니의 정열적인 남국의 혈통으로 대비되고 있었다. 비상한 가능성과 비상한 위험성
을 내포한 혼혈로 태어난 토니오는 예술의 세계 속으로 길을 잃은 시민이었다. 훌륭한 가정 
교육에 대한 향수를 지닌  시민과 보헤미안으로서의 예술가, 그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는 
인물이 바로 토니오 크뢰거였던 것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상반된  기질이 한 인간 속에
서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주목하며 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 나는 줄곧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 기억이 허락하는 최초의 시간인 대여섯 살 무렵부터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상반된 모습
으로 회상된다. 물론 그 상반됨은 토니오의 부모에게서 보여진 것과는 형질이 달랐다.  게다
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기 자식이 최고인 줄로만 아는 평범한 젊은 부모였다는 점에
서 서로 공통된 면까지 갖고 있었다.
  내가 어린아이답지 않은 또박또박한 말투로 예기치 않은 질문을 던지거나 의외의  느낌을 
말할 때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일찌감치 내게 한글을  가르치고 서툴게 
알파벳이나 한자로 내 이름을 쓸 수 있게 가르쳐준 사람도 아버지였다. 말이나 글에서 내가 
도래들보다 조금 앞서가는 편이라는 사실은 늘 아버지의 긍지였다.
  하지만 내게 레이스 달린 동화풍의 옷만을 골라 입히고 내 긴 머리를 갖가지 모양으로 묶
고 땋기를 즐겼던 어머니는 달랐다.  유치원 재롱잔치 무대일지라도 어머니는  내가 화사한 
모습으로 무대에 오르는 걸 좋아했다. 내가 어른들 앞에 섰을 때 어버지에게는 [고것 참 똑
똑하구나]가 최상의 칭찬이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애가 정말 예쁘네요]가 최상의 칭찬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받아온 시험지와 성적표와 상장 따위를 모
두 간직하고 있다. 내가 그나마 남들에게 크게 뒤처지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데에는 그
러한 아버지의 관심과 기대가 동력이 되어준 것이 분명하다.
  [여자이기 때문에 더욱 힘을 길러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라. 사회적으로 공인받기만 하면 
그 누구도 널 무시하지 못할 거다. 너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러나 어머니는 또 얼마나 달랐던가. 아버지의 확신에 찬  말투가 내 귓가에서 사라지기
도 전에 그녀는 내게 조용히 말하곤 했던 것이다.
  [공부 잘하는 여자는 고달퍼. 너처럼 예쁜 애가 왜 고달픈 길을 택하니?]
  그나마 내게 다행이었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세속적인 출세지향주의자였다는 점
이다. 그런 점에서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꽤 적절한 타협안이 될 수 있었다. 안정된 직장인인 
동시에 화려해 보이는 모습의 방송인이 되면서  나는 두 사람의 희망을 적절히  화해시켰던 
것이다. 아버지는 뉴스를 진행하는 나를 보며 만족했고 어머니는 MC나 리포터 역할을 해내
야 한다는 것은 사실 혼란스러운 일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이미 어릴 때부터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시선과 기대를 경험한 사람답게 그러한 일에 금방 익숙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 이토록 오래  머물 생각은 아니었다. 그해 겨울  내가 응시한 서울의 
방송국 시험에는 경력 있는 아나운서들이 유난히도 많이 응시했고,  그들과 함께 최종 면접
까지 겨루었던 나는 그들처럼 얼마간 경력을 쌓아 다시 시험에 도전할 생각으로 이 도시까
지 내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듬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서울 방송국의 사원 모집 공고
를 애써 무시하며 보냈고 이후로는 그런 쪽으로 거의 관심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아마도 이 도시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보다  나은 환경에서 일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나 부모님을 좀더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 따위를 휘발시켜 버리는 
이상한 기운이 이 도시에 있었다. 그냥 이렇게 되는 대로 살아가면 뭐 어떠랴, 하는  생각을 
가뿐하게 안겨주는 기운이었다. 이곳에서는 시간조차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느린 
걸음으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모든 것이 저절로 다 해결될 것만 같
은 느낌도 들었다. 적당한 절충의 결과로  얻어낸 적당한 만족 속에 느낌도 들었다.  적당한 
절충의 결과로 얻어낸 적당한 만족 속에 나는 쉽게 안주했으며 모든 것이 그 속에서 굳어갔
다. 굳어진 것들을 새삼스레 흔들거나 허물고 싶지도 않았다.
  낮고 둥근 풍경의 아늑한 이 도시에 처음 들어섰을 때, 물결처럼 내게로 밀려들던 무채색
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푸르거나 붉게 느껴지던  다른 도시들과 달리 이 도시의 
첫인상에는 색깔이 없었다. 이후로도 때로는 흰색에 가깝다거나 검정에 가깝다거나 하는 식
으로 명도의 차이는 보였으나 색상과 순도는 보이지 않았다. 돌아보니 이 무채색의 도시 안
에서 나는 어느덧 내 본래의 빛깔을 잃어버리고 똑같은 무채색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지금 이런 기억들을 되살리고 있는가.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미래를 기대
하지도 말 것, 그것이 이 작은 평화의 전제 조건이 아니었던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문득, 어쩌면 이 도시의 분위기는 표면적인 이유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눈치를  채고 몸을 사렸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 일이 내게 
많지 않는다는 것, 나는 이 일에 평생을 걸 마음이 없다는 것...... 하지만 그런 건 모두 부질
없는 생각이었다.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이미 여기서 아나운서라는 이름으로 
8년을 훌쩍 넘기고 있지 않은가. 이제 와서 새삼스레 뭘 어쩌자는 말인가.
  나는 그의 편지를 봉투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밀봉하듯 입구를 힘주어 닫고 봉투를 반으
로 접었다. 그 어떤 상념도 되살아나서는 안 된다. 단순해져야 하는 것이다. 생각이 많은 사
람은 불행에 빠져들기 쉽다. 그렇지 않아도 그 즈음 나는  문득문득 과거의 기억 속으로 끌
려 들어가는 나 자신을 낯설어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그 남자의 자력에까지 이끌려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반으로 접은 편지 봉투를 또 한번 반으로 접었다. 속에  들어 있는 편지지의 두께 때문에 
봉투는 곧 다시 원래 형태대로 펼쳐졌다. 나는 힘주어 봉투를  접어 구기다가 책상 옆의 쓰
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원고지와 큐시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았다.  2년 전, 어설프게 <아나듀서> 노릇을  시작하던 
무렵, 써야 할 원고량이 늘어나면서 내 머릿속으로 갖가지 상념이 틈입하기 시작했다.  평화
로운 속에 몇 년 동 안 굳어가던 내 머리는 그것을 무척이나 번거로워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나는 지난  2년 간 내 생각과 감정을  배제하며 기계적으로 일을 
해나가는 요령을 터득하는 데 시간을 다 바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그럭저럭 안정
을 되찾게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무쪼록 나는 그 안정감을 오래오래 누리고 싶을 따름
이었다. 회상이나 간섭 따위가 내 평화를 방해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방송 시간이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책꽂이에서 서둘러 책 한 권을 찾아들었다. 센티
멘털리즘으로 충만한 가운데 서푼짜리 희망을 제시하는 베스트셀러 수필집이었다. 인스턴트 
식품으로 밥상을 차리는 여자처럼 나는 그 속에서 글을  뽑아 원고지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대체 이런 원고에서 무슨 무늬가 느껴진다는 말인지..... 낙인은 또 무슨 얘긴지......
  이윽고 나는 급조된 방송 원고와 큐시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결재를 받기 
위해 라디오 제작팀장의 책상을 향해 서둘러 다가갔다.
  
  며칠 후 나는 서울에 다녀왔다. 신정 연휴 이후 처음이니 거의 6개월 만이었다. 갈수록 서
울을 찾는 시간의 간극이 길어지고 있었다. 서울 방문은 내게 점점 더 의무적이고 의례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준을 만난 것도 거의 6개월 만이었다. 그는 결코 [내가 그쪽으로 내려갈까?]라는 말을  하
지 않았다. 준은 늘 바빴고 늘 무언가에 몰두해 있었다. 그 몰두의 대상이 너무 자주 바뀐다
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는 명확한 것에만 몰두한다는 나름대로의 일관성
은 있어 보였다. 주인공의  배경쯤으로 등장하는 CF 모델이나  방송국 쇼 프로그램의 보조 
스탭 등을 아르바이트로 하던 대학 시절부터 준의 관심은 늘 그렇게 시각적인 것에만 머물
러 있었다. 졸업 후 잠시 커피 전문점을 꾸려가던 때에도 그는 커피 맛보다 실내 장식에 더 
공을 들였고 어찌어찌 뮤직 비디오를 찍는 프로덕션에 들어가 조감독 노릇까지 하게 된 지
금도 그의 관심은 뮤직 쪽보다 비디오 쪽에 더 기울어 있었다. 게다가 함께 모델 일이나 방
송 일을 하던 여자들, 자주 바뀌었던 커피 전문점의 아르바이트 여자들, 뮤직 비디오에 출연
하거나 스탭으로 참여하는 여자들, 그들 가운데 준의 눈에 명확히 예뻐 보이는 여자라면 어
김없이 몰두의 대상이 되는 눈치였다.
  오랜만에 준의 곁에 누운 나는 문득 그 여자가 궁금해졌다.  지금 이 순간 준이 몰두하고 
있을 미지의 여자. 그 여자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면 준은 분명 이렇게 대답할 것이었다.
  [신경 쓸 것 없어. 너하고 종류가 다른 여자니까]
  준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매번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음으로 해서 그 여자가 자신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강조하곤 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의미있는 여자는 오로지 나 이경은뿐이라는  식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준의 그  여자들은 늘 
바뀌었다. 준이 멋대로 구분해 놓은 여자의 종류가운데에서 어쨌든 나는 최상급인 모양이었
다. 10년이 넘게 그를 만날 수 있는 영광이 내게 주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계획대로
라면 나는 머지않아 그의 아내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의 세부 일정은 그가 몰두하
는 일이나 사람에 따라 끝없이 수정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물끄러미 준을 바라보는 것 이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세월이 흘러온 것이었다. 거짓말처럼.
  이토록 지리멸렬한 관계를 이제 어쩔 것인가.... 나는 습관적인 섹스에 몸을 맡기면서 생각
했다. 내 스무 살 무렵의 도피성 몰두, 그것을 간단히 받아들여 주었던 준, 이후로 속수무책 
그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갔던 나, 그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가 싶었다. 몇 달 전에 현우와 함께 밤을 보내며 느꼈던 짜릿한 해방감마저 꿈처럼 
아득했다. 준과의 관계를 훼손하기 위해 몸부림치듯  현우에게 다가갔지만 결과적으로 달라
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토요일 오후를 그렇게 준과 함께 보냈다. 그리고 늦은 밤, 나는 또 다른 의무적 의례를 위
해 부모님의 집으로 향했다. 그 행사의 중요한 소도구인 녹화 테이프를 챙겨 들고서 말이다. 
이번 테이프에는 [TV 매거진]의 리포터로서의 내 모습과 뉴스  앵커로서의 내 모습이 함께 
들어 있었다. 한동안 TV 뉴스를 맡지 못한 탓에 아버지가  섭섭해하던 것을 생각하니 마음
이 홀가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앵커인 나를 보면서, 어머니는 리포터인 나를 보면서 
각자 마음의 위안을 얻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 것인지.....
  비디오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집어넣으면서 나는 전날 밤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랜만
에 보게 되는 새 테이프 앞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대에 찬 표정이었지만 그만큼 내 마음
은 무거워 질 수밖에 없었다. 미영의 어두운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걔는 일을 놀이로 생각하는 것 같아. 매주  출장을 가야 하는 프로인데도 불평은커녕 오
히려 재미있어하는 걸 보면 말이야]
  그 전날 밤, 식탁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는 미영을 햐애서 나는 말하고 있었다. 손에  세제  
거품을 잔뜩 묻힌 채 설거지를 하던 터라 미영의 표정을 살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솔직히 그건 애드리브도 아니고.... 그냥 혼자서 노는 거지 뭐. 아무튼 걔한테 딱 맞
는 프로야]
  봄 개편 때부터 수림이 진행을 맡고 있는 [카메라 여행]이라는, 혼자 여행지에서 카메라를 
향해 얘기하고 설명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였다. 설명은 돌아와서 따로 나레이션을 넣게 
되지만 현장에서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적절한 감탄사와 함께 혼자 말도 해야 하는 형식
이었다. 리포터로 일한 경력을 감안하더라도 수림은 의외로 아주 잘해 내고 있었다.
  [걘 겁이 없어서 그래. 국장이나 부장한테 애교  떠는 것처럼 카메라를 향해서 농담을 하
는 분위기더라구. 어휴, 난 도저히 그렇게 못할 거야]
  나는 수돗물을 틀어 그릇을 헹궈내면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의식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수
림이 출장을 가는 날이면 그렇게 종종 그녀에 대한 얘기를 하곤 했었다. 아나운서의 위상이 
점점 위태로워지면서 생겨난 계약직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입사를 한 수림은 그만큼  우리와
는 입장이 달랐기 때문에 그녀 앞에서 하지못할 말이 더러  있었다. 그녀 특유의 튀는 행동
들에 대해서도 그랬고 전격적으로 입사 한 달 만에 실무에 투입된 것에 관한 껄끄러움에 대
해서도 그랬다.
  그날 미영은 계약직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아나운서는 정규 사
원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라는 전망에 미영과 나는 일단 동의했다. 우리가 동의하지 않
더라도 대세가 그랬다. 다른 직종들도 서서히 계약직으로 변해 가고 있는 추세였다.
  [현재로서는 계약직이 월급도 적고 여러 가지  조건도 나쁘지만, 앞으로는 개별적으로 능
력만 인정받으면 더 많은 연봉을 받게 될 거야. 결국은 그렇게 선진화될 거야]
  미영이 그날따라 낙관론을 펼쳤으므로 나는 비관론을 들먹이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과연 그럴까? 최소한 여기서만큼은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여자 아나운서들을 낮은 임
금으로 부려먹다가 나이 들고 결혼하면 내보내기에 딱 좋은 제도 아니겠어?]
  미영이 달리 대꾸를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덧붙여 말했다. 
  [수림이를 저렇게 일찍 방송에 투입한 것도 다 그런 이유 아니겠어? 우리 때야 평생 직장 
개념이 있었으니까 수습 기간도 길고 엄격하게 했지만 계약직은  다르잖아. 적당한 경력 갖
춘 애들을 뽑아서 일찌감치 써먹다가 실컷  다 썼다 싶으면 내보낼 생각이겠지. 쓰고,  버리
고, 다시 값싸고 젊은 인력을 충원하고....  그게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회사 입장에서 볼  때 
우리처럼 나이 먹어가는 정규 아나운서만큼 처치 곤란한 존재가 또 어디 있겠니?]
  나는 그릇을 닦고 개수대 주변을 닦으며 열심히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이제 그만 좀 해!]
  느닷없이 튀어나온 미영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행주를 손
에 든 채 뒤돌아보는 나를 향해 그녀는 다시 말했다.
  [좀 그만둘 수 없느냐구]
  [뭘?]
  [그거. 닦는 것 말이야]
  어이가 없어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설거지를  해야 할 차례가 되어서 열
심히 하고 있는 중인데 그만두라니.....
  [좀 대충대충 할 수 없어? 헹구고 또 헹구고,  거기다가 싱크대 주변까지 닦고 또 닦고.... 
보는 사람이 짜증나]
  [이왕 하는 거 좀 깨끗하게 하려고....]
  [됐어. 이리 와서 차나 마셔]
  말하는 그녀의 서슬에 눌려 나는 가만히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물기를 제대로 닦아내지 
못한 개수대 쪽으로 자꾸만 신경이  쓰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식탁  위에 놓인 찻잔에는 
어느새 작설차가 여린 녹색으로 우러나 있었다.
  [네가 깔끔하다는 거 잘 알지만, 또  그걸 좋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게 너무  심하면 함께 
사는 사람이 부담스러워지기도 하는거야]
  나는 아무 말 없이 차 향기만 맛보고 있었다.
  [사실은 수림이가 오늘 떠나기 전에 나한테 부탁을  했어. 네가 너무 깔끔을 떨어서 불편
할 때가 많다고, 그 얘길 전해 달라고 그랬어]
  [왜 그런 얘길 나한테 직접 못한다니? 평소에 무슨 말이든지 잘도 하면서.....]
  [나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말이 나온 건데 내 생각도 그렇게 때문에  내가 얘길 하기
로 했던 거야]
  [그건 그냥 내 버릇 같은 거야. 특별히 남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 자체로 불편함을 주는 건 아냐. 처음엔 오히려 좋지. 그런데  갈수록 마음이 부담스럽
고 불편해지는 것 같아. 좀 편하게 있고 싶을 때는 더 그렇지. 아, 이 얘기도 이렇게 갑자기 
꺼낼 생각이 아니었는데..... 내가 요즘 좀 그래. 담배.... 괜찮겠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담배와 재떨이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자신
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요즈음의 상황에 대해서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어렴풋이나마 짐작
하고 있던 것이긴 했지만 미영의 입을 통해  직접 듣게 되는 상황은 생각보다 많이 심각한 
것 같았다. 아니, 많이 심각한 것으로 미영이 과장되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난 요즘 엄청난  위기 의식을 느껴. 텔레비전  쪽과 자꾸 멀어지는 것,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의식을 안할 수가 없어. 흔히들 나를 보고 오디오가 좋다고 칭찬
들을 하지만, 그건 결국 비디오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거잖아. 내가 마
지막으로 카메라 앞에 섰던 게 언제인지 아니? 벌써 5년 전이야]
  벌써 그렇게 되었나? 나는 미영의 입에서 발음된 5년이라는 세월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
에 없었다. 그렇게도 무심히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해서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알지? 유화가 들어온 이후부터야. 너야 계속  TV를 했으니까 관심도 없었겠지만.... 하긴 
너도 유화가 들어오면서 조연급으로 밀려났지. 그때부터  우리 방송국의 텔레비전 주인공은 
유화였잖아]
  그랬던가... 그렇다면 유화가 입사하기 전까지는 내가  주인공이었다는 얘기일까? 굳이 따
져보자면 그럴 수도 있겠다. 미영이  텔레비전 쪽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미영은 겉으로 태연했던 것이다. 주연급이니 조연급이니 하는 우스운 구분까
지 해가며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리라고 짐작도 못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제 유화는 떠났잖아]
  나는 겨우 그런 말로 미영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 동안  유화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했었지. 하지
만 유화가 떠나고 난 뒤에 [TV 매거진]의 여자 MC 자리를 계속 비워두는 걸  보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너야 거기  리포터로 출연하니까 MC를 볼  수 없는 상황이고, 결국 
남은 여자 아나운서는 나밖에 없었잖아. 그런데도 결국은 안  차장 혼자서만 진행하는 걸로 
결정이 나고 말았지. 그만큼 나를 텔레비전 화면에 내세우기 싫다는 의미 아니겠어?]
  [너무 예민한 것 아니니? 남자 MC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해서 그랬겠지. 게다가 네가 
진행하는 라디오 생방송과도 시간이 겹치고......]
  [라디오야 녹음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남자 MC 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면 왜 갑자
기 다음주부터 수림이를 MC로 투입하겠다고 그러겠니? 이런  식으로 사람 물 먹이고 수모
를 줘서 사표라도 쓰게 만들 모양이지? 어림없는 일이야]
  찻물을 따르던 손을 멈추고 나는 미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건 또 어디서 나온 얘기야? 나는 계속 안 차장 혼자 진행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오늘 수림이가 출장 떠나기 전에  나한테 얘기했어. 한 부장한테서 통보를  받았대. 한두 
달 여행 프로그램 맡겨봤더니 쓸 만하다 싶었던 모양이지.  결국은 수림이한테 돌아갈 자리
였겠지만 개편 시즌도 아닌 때에 전격적으로 이럴 줄은 몰랐어. 정말 기분이 엉망이야]
  TV 제작팀 한 부장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문득 선배들 생각이났다.  미영과 내가 함께 입
사했을 때 이 방송국을 지키고 있던 두명의  선배 여자 아나운서들.... 그 무렵 출산  휴가에 
들어갔던 선배는 이후로 누구나 상상할 만한 갈등을 겪다가 결국 이곳을 떠났고 다른 한 선
배는 레코드실 관리직으로 발령을 받은 뒤 얼마 안 있어 사표를 쓰는 방식으로 이곳을 떠났
다.  스스로 떠나도록 그들을 몰아간 분위기에 우리도 분명 한몫을 했을 것이다. 물론 그때 
우리는 처음 받아보는 조명에 들떠서 전혀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바로 지금 수
림이 그런 것처럼.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건 그저 기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 든 선배들이 회
사를 떠난 것도 결국 그들이 그 기분을 이겨내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텔레비전만 하든 라
디오만 하든, 혹은 레코드실에서 음반만 정리하고 있든 똑같은  월급에 똑같은 사원 신분은 
유지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내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미영이 말했다.
  [하긴 뭐...... 텔레비전을 안해서 편한 점도 있지. 분장이나 의상을 챙길 필요도 업속, 이동
하거나 대기하는 무의미한 시간도 피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  수림이 같은 계약직 사원들이 
계속해서 나가고 들어오고 하더라도 나는 전문적인  라디오 진행자로 승부를 걸면 되는  것 
아니겠어? 다 생각하기 다름이지, 뭐]
  신포도를 바라보는 여우처럼 심드렁한 말투였지만 사실이  그랬다. 텔레비전 출연에 연연
하지만 않는다면 현재 미영의 처지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음악적  지식과 감각 있는 
멘트, 그리고 차분한 진행 능력 덕분에 FM 디제이로서의 전문성을 상당히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미영은 그런 전문성이라도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기어이 우리는 아껴두었던 위스키 병의 뚜껑을 열었다. 내가  얼음을 준비하는 동안 미영
은 CD 플레이어에 음반을 골라 얹었다. 다만 그 분위기에 취하는 것일 뿐, 술은  내게 여전
히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차가운 위스키를 한동안 입에 머금고 있다가 눈을 질끈 감으
로 삼켰다. 아주 조금씩.
  [그런데 역시 문제는, 그 생각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된다는 거지. 제 세상 만난 듯
한 수림이가 자꾸만 눈에 거슬리거든. 게다가 사람들이 나를 아예 한물간 여자 취급하면 수
군대는 것도 무시하기 힘들고.... 허 PD가 나하고 헤어진 뒤에 유화랑 사귄다는 소문이 났을 
때도 내가 얼마나 시달렸는지 아니? 결국  그 남자가 나보다 젊고 예쁜 여자를  선택했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시선들 말이야]
  [그래도 그건 헛소문이었잖아]
  [소문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당사자가 받는 상
처가 중요한 거지. 그래.... 모든 게 다 괜한 피해망상일 수도 있어. 그만큼 내가  약해졌다는 
증거일 테고..... 사실 난 처음부터 유화를 싫어했지만  그애가 떠나고 나니까 비로소 그애의 
고충을 이해할 것 같더라. 결국 유화는 유화대로 나는  나대로 사람들에게 시달렸다는 공통
점이 있잖아. 그게 바로 여자 아나운서의 운명 아니겠어? 처음  입사했을 땐 강아지 귀여워
하듯이 쓰다듬어주다가, 한동안 그렇게 꽃을 보듯 바라보다가, 그게 지겨워질 때쯤이면 입에 
올려놓고 멋대로 씹어대지. 술안주처럼......]
  안주도 없이 술을 마셔가며 담배를 피워가며 그녀는 쉴새없이 말했고 나는 힘겹게 술잔과 
싸우고 있었다.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슈만은 지나치게 청량해서 오히려  내 속에 애써 잠재
운 것들을 되살아나게 만들었다. 피아노 소리가 머리를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다른 곡 없어? 사람 목소리를 듣고 싶어....]
  취기로 달아오른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미영이 오디오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사람 목소리라면 역시 LP로 들어야 제격이겠지? 난 아직도 보컬만큼은 LP로 듣고 싶어. 
이젠 CD 음색에 어지간히 적응이 되긴  했지만..... 하긴, 이렇게 모든 게 너무나  빨리 변해 
가는 시대에 그나마 익숙해지지 못한다면 견뎌낼 수가 없을 테지]
  [그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 무거운 LP 음반들을 양팔가득  안아들고 스튜디오로 레
코드실로 힘들게 움직였는데 말이야]
  어느새 미영은 김민기의 음반을 턴테이블에 얹고 있었다.
  [이런 명품은 요즘 몇만 원씩 줘야 살 수 있대. 벌써 골동풍이 되어버린 거야. 알지? 삼년 
전부터 레코드판 생산이 중단된 것.... 아마 턴테이블도  생산이 중단됐을 거야. 우리가 애지
중지하던 이 기계도 이제 축음기와 같은 운명이 되어버린 거지]
  [세월을 견딘 것들은 비록 실용성이  없어지더라도 골동품으로 대접을 받는  법인데.... 왜 
여자들의 운명은 그렇지가 않을까?]
  [글세..... 그게 바로 물건과 사람의 차이점 아닐까? 생산이 중단된 물건은 새로 구할 수가 
없지만, 여자는 어디선가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니까....]
  말하면서 그녀는 종이 수건으로 술잔을 닦아내고 있는 내 손을 잡아챘다.
  [이것 봐. 얼음이 녹으면서 잔  바깥으로 물기가 생겨서 흘러내리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그냥 놔둘 수 없어? 닦아내도 또 생기잖아. 너 아까 녹차 마실  때에도 그랬던 거 알아? 차
를 따르다가 조금만 흘려도 찻잔과  바닥을 행주로 닦았지? 술잔을  닦고, 테이블을 닦아내
고... 제발 그러지마. 좀 가만히 내버려 뒤 보라구]
  미영의 말에 수긍하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술을 따르고 나서 병 표면으로 흘
러내린 술자국이며 테이블을 어지럽히는 물기를 그냥 두고 보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
니었다. 저걸 행주나 종이 수건으로 싹  닦아내야 하는데, 생각하며 나는 두 손으로  술잔만 
꼭 잡고 있었다. 손이 조금씩 시려왔다.
  그래, 스스로 생각해도 지겨울 때가  있어. 뭐든지 그냥 쉽게  넘어가질 못하지. 흐트러져 
있으면 견디질 못해.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 티끌 하나 없이 단정한  상태, 자꾸만 날 그런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서서히 머리 꼭대기로 뜨거운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뒤엉키는 생각들 사이
로 미영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혀가 굳어진 것도 같고 풀어진 것도 같은 그녀의 
발음이 재미있어서 나는 쿡쿡 웃었다. 다이어 스트레이츠, 장필순, 마리아 칼라스, 호세 펠리
치아노.... 위스키와 함께 내 의식의  밑바닥으로 스며들다가 불쑥불쑥 솟아오르던  생각들.... 
그러다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듯한 느낌에 일부러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을 때, 내 
귀에 낯설게 들려오던 나 자신의 목소리... 
  나는 비디오 화면에 눈길을 둔 채 그 밤의 기억을  어지럽게 되살리고 있었다. 잠깐 동안
의 행복을 맛보는 데에 열중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미영이처럼 텔레비전에서 밀려나고 선배들처럼 다른 부서로 발령이라도 난다면 아버지와 어
머니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왜 다시 서울로 올라올 생각을 안하느냐고 다그치던 부모님도 언젠가부터 적당한 체념 속
에서 비디오 테이프로 만족하는 눈치였다. 우리 세 사람은  주기적으로 테이프를 함께 돌려
보면서 현재의 처지가 그다지 불행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몇 년의 시간을  견뎌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내게 기대를 걸었던 아버지가 더 이상 내게 꿈을 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
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홀가분해지는 기분이었다. 꿈이 실현되는 행운을 기대하느니 차라리 
체념하고 편안해지는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에게 축하의 인
사라도 보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홀가분함이  완전해지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바로 얼마전까지도 끈질기게 나를 압박했던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끝까지 버릴 수 없었던 꿈, 그것은 바로 화려운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이었
다. 단순한 웨딩드레스로는 안 되었다. 반드시 화려한 웨딩드레시여야만 했다. 외형적으로만 
화려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웨딩드레스... 
그러니 어머니가 준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대체 걔는 허우대 멀쩡한 것 빼고 뭐가 볼 게 있니? 어려움 모르고  자라서 철없는 것 
하며.... 제발 당장 그만둬.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어]
  하지만 어머니가 맞선의 형식을 빌려 내 앞에 데려다 놓은 남자들 역시 준보다 더 그럴듯
한 명함을 내놓는다는 점 이외에는 별다를 게 없었다. 어머니가 원하는 결혼이 어떤 것인지 
너무 빤히 들여다보여서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토록 숨가빴던 결혼 독촉이 시들해진  것은 내 나이 서른을  넘기면서부터였다. 화려한 
결혼에 관한 전문가였던 어머니는 그  누구보다도 여자의 나이에 대해서  민감했던 것이다. 
결혼 시장에서 내가 받을 상처가 두려웠던지 어머니는 더 이상 내게 맞선을 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내게 완벽한 평화가 찾아드는 것  같았다. 그랬다. 그런 것 같았었다. 
하지만 이 평화가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플레이어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빼내다가 또다시 미영의 어두운 얼굴이 떠올라 나는  천천
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시작된 월요일 아침, 나는 이  도시의 강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강을 끼고 달리면서 AM과 FM을 번갈아 들으며 내가 속한 세상으로 진입하기 위한 워밍업
을 하는 시간이었다. 주말을 이용해 서울에 다녀오고 난 뒷면 자동차의 속도를 천천히 하는 
방식으로 워밍업 시간을 조금 더 길게  가져가야 했다. 카메라 앞에서의 밝은 미소,  마이크 
앞에서의 밝은 목소리, 함께 일하는 사람들 앞에서의 밝은 표정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거듭 
다짐하면서. 그래야만 하는 나 자신을 딱하게 여기면서.
  명랑함에 대한 내 편견은 사실 터무니없는 것이긴 하다.  진지함의 겨여, 가벼움, 깊이 없
음 따위의 말들로 설명되기에는 그것이 지닌 편안함, 유쾌함, 자연스러움 등의 미덕이 더 클
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내게 맞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었다. 명랑함을 필요로 하는 
이 일이 내게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진실로 내게 맞는 일이란 무엇일까. 그런 일
이 이 세상에 있기나 한 것일까.
  신호를 받는 동안, 오른쪽으로 바짝 다가온 옆 차의 운전자가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는 것
을 감지하면서 나는 비로소 강이 흐르는 이 도시에 와  있음을 느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
이 없는 도시에서 나를 몰라보는 사람이 없는 도시로 왔다는 자각은 늘 그런 끈끈하고 호기
심 어린 시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서울의 거리를  걸으면서 내가 왜 그렇
게 편안한 기분이었던가를 비로소 깨닫곤 하는 것이다.
  광고가 나가는 동안 FM으로 주파수 밴드를 바꾸자 미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함께 살
고 함께 일하는 그녀였지만 방송을 통해서 만나면 전혀 딴 사람처럼 느껴지는 건 여전했다.
  [...... 밥 딜런을 향한 사랑을 노래했다는  바로 그 곡이죠. 인권운동가이자 환경 운동가인 
이 지성적인 여자에게도 사랑은 때로는 다이아몬드 같고  때로는 얼룩 같고 녹 같은 알 수 
없는 혼미한 것이었나 봅니다. 이 아침, 이런 노래는 어떻습니까. 다이아먼즈앤 러스트...]
  조운 바에즈였다.  자신이 무척 좋아하는 가수였지만 미영은 감정을 배제한 채 특유의 가
라앉은 목소리로 잔잔하게 소개를 한 후 곡을 띄웠다.  아나운서부가 라디오 제작팀으로 통
합되기 이전에도 방송 멘트를 직접 써오던 그녀였다. 그녀의 멘트는 차분하면서도 따뜻했고 
지적이면서도 소박했다. 그 내용에 있어서나 그것을 전해 주는 목소리의 음색에 있어서나..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것이 생소하고 어색했다. 사무실 안이나  집 안에서의 미영은 방송
에서 만나는 서미영 아나운서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늘 무언가에  불만이고, 
작은 일에도 흥분하고, 타인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밝혀 말하는 타입이었다. 요컨대  오로지 
자신만이 옳고 자신만이 피해를 당한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던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 처지
가 된다면 억울할 법한 상황도 많긴 했지만 미영의 반응은  분명히 과장된 데가 있었다. 하
지만 방송을 통해서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더없이 넓은 마음을 지니
고 더없이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여자, 그것이 바로 방송에서 느껴지는 서미영 아
나운서의 이미지였다. 가식의 차원을 넘어선 어떤 경지로까지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실생활에서의 그녀와 방송에서 만나는 그녀와의  부조화를 몇 년이나 바라보았지만  나는 
아직도 그것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애드리브에 강하다는 그녀에 대한 일반적
인 평가조차도 내게는 삐딱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애드리브에 강하다는 건 임기응변이 
능하다는 얘기, 결국은 상황에 대한 변명과 포장술에 능하다는 얘기였다. 미영의 겉  다르고 
속 다른 듯한 태도를 대할 때마다 나는 그녀가 구사하는 능숙한 애드리브의 정체를 엿본 느
낌을 받곤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변함없이 그녀의 멘트는 매끄러웠고 나는 그것에 대해 변함없이 질린 듯한 기분
을 느끼며 방송국 정문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서둘러 현관으로 향하는 순간,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날 밤 이 도시의 공항에 닿자마자 내 의식 속에서 되살아난 목소리였
다. 기나긴 편지와 함께 들국화의 노래만을 신청해 오던 그 남자.... 환청임을 알면서도 나는 
천천히 뒤돌아 보았다.
  역시 그랬던가. 그가 서울까지 따라와 자꾸만 내 안을 들여다보게 만들었던 것인가.  하지
만 그 남자 또한 나의 외부적인 이미지만 보고 호감을  가졌을 것이 분명하다. 삶들이 방송
을 통해서 느끼는 미영의 이미지나 그 남자가 방송을 통해서 파악한 나의 이미지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허상을 바라보며 다가온 남자에게 왜 내가 휘둘려야 하는가.
  나는 단호히 몸을 돌려 사무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자 그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애써 기억해  내려고 해도 다시 떠오
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다시 그를 느끼게 되었다. 이번에는 목소리
가 아니라 눈길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끈질긴 시선.
  수요일, 수림이 [TV 매거진]의 MC로 첫 등장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사무실 안에서 미
영의 눈치를 보며 괜히 긴장하고 있었던 탓인지 점심 무렵이 되자 온몸이 뻐근한 느낌이 들
었다. 의상을 고르고 분장을 걱정하며 들떠 있는 수림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내게도 편안
한 일은 아니었다. 낮 방송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챙겨먹은 뒤 나는 샤워를 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오후에 있을 녹화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내 책상 위를 점령하고 있던 그의 길고 무거운 편지 때문이었을까. 욕실
에 들어서서 천천히 옷을 벗는  동안 문득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전히 들국화의 노래를 
신청곡으로 적어온 그 편지의 갈피마다에서 감지되던 시선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욕실의 
천장과 벽을 휘 둘러보았다.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면서 온몸의 감각이 바짝 일어서는 느낌
이었다.
  계속해서 나를 따라붙는 것만 같은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 나는 욕실장으로 다가가 과장된 
몸짓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얌전하게 자리잡은 거품목욕용 보디클린저를 꺼내어 
욕조 바닥에 듬뿍 부은 후 수도꼭지를 활짝 열어제쳤다. 수압을  받아 욕조 안에는 금세 하
얀 거품이 가득 찼다. 거품과 함께 향기도 솟아 올랐다. 피곤할 때 내가 즐겨 사용하는 오리
엔텔 계열의 향이었다. 향기로운 물 속에 몸을 담그면 머리가 좀 맑아지겠지.
  수증기로 뿌옇게 흐려진 거울 속으로 내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거울을 뒤덮고 있는 
자잘한 물방울들을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러서 내 몸이 말갛게  비춰 보이도록 해보았다. 다
소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삼십대가 되고 갑자기 늙어버리는 일 따
위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서른두 살이란 생각처럼 많은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거울 속의 
내 몸이 말해 주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 젊다고  여겨지는 
내 몸이지만 타인에게는 어딘가가 늘어지고 있는 게 한눈에 보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가볍게 샤워를 마친 후 드디어 욕조 속에 몸을 담그고  편안한 자세로 발을 뻗었다. 욕조
에 들어가기 전에 대충 손을 닦고 미리 준비해 둔  읽을거리를 챙겨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틀 전에 샤워코롱을 사려고 들른 목욕용품 전문점에서 얻어온 그것은 제품  카탈로그인지 
사외보인지 정체가 불분명했다. 아무튼 읽을 거리보다는 볼거리에 가까운 그 컬러 인쇄물은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보기에 아주 적당할 듯 싶었다.
  새로 산 샤워코롱을 온몸에 바를 시간을  기다리며 나는 정체불명의 인쇄물을 천천히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많은 모델들이 등장하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실오라기 하
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몸을  움츠리거나 가리고 있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마네킹이었던 것이다.
  옷을 벗은 마네킹들은 물론 모두 여자였다. 대개 검은색이나  금발의 길고 짧은 가발들을 
쓰고 있지만 아예 머리카락이 없는 모습도 있었다. 가발을  제외하면 미끈한 알몸에 체모라
고는 없었다. 물론 젖가슴의 가장 높은 지점에 착색된 부분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저  온몸
이 매끈할 때름이었다. 그녀들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반쯤  감은 채 서 있거나 욕조
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처럼 거품이 가득한 욕조 속에 누운 마네킹은 머리에 타월을 두르고 
곱게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이건 참 효과적이다 싶었다. 사람을 모델로 썼다면 이렇게까지  세세한 욕실 장면을 찍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네킹이기 때문에 가능한 자연스러운 자세는  욕탕 안의 나른함을 충분
히 효과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입장에서도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오직 피
사체로서만 존재하는 수동적인 마네킹을 대상으로 작업을 했을 테니까.
  갑자기.... 뒷머리가 저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이러한 마네킹의 상태야말로 내
가 간절히 꿈꾸어온 것이 아니었던가.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나는 대학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우편으로 보낸 입사  지원
서가 서류 전형을 통과했다는 연락을 받고 실기 시험을 치르기 위해 내려왔던 것이 바로 이 
도시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 달리는 밤차에 몸을 실은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다름아닌 그 무렵 어떤 신문에 실렸던 [브라운관의 뉴스 마네킹] 이라는 칼럼의 내용이었다. 
제목 그대로 그것은 화려한 의상을 매일 갈아입으며 뉴스를  단지 [읽기]만 하는 여성 앵커
들은 마네킹에 비유한 글이었다. 그 칼럼을 읽는 순간, 나는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내 마음을 
들켜버린 느낌이었다. 나야말로 마네킹과 같은 상태를 꿈꾸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무런 생
각도 없이 표피적으로만 매끈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은 욕심으로.....
  그래서 그날 이 도시에 도착한 직후에 내가 했던 것은 터미널 근처의 미장원으로 들어가 
머리를 만지는 일이었다. 서울에서의 아나운서 시험 때에는 미처 몰라서 신경 쓸 수가 없었
던 그런 일들을 나는 기꺼이 했다. 마치 엘리베이터 걸의  유니폼 같은 단순한 실루엣의 선
명한 초록색 투피스를 사 입고, 미장원에서 머리를 만지고, 화장을 고치고....  기꺼이 마네킹
이 되기 위해 그런 일들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변함없는 마네킹 특유의 표
정으로 카메라 앞에 앉아 뉴스를 전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진행되는 뉴스의 뒷부분을 적당
히 자르고 들어가서 전달하는 지역 뉴스를.
  브라운관을 통해 비쳐지는 내 모습이란 결국 그러한 마네킹의  외양에 불과한 것이다. 거
리로 나서면 내 얼굴을 알아보고 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여유 있게 웃
어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저 마네킹의 미소를 보았을 따름이었다. 그 남자 역시 그런 많
은 사람들 중의 하나일 뿐이겠지.
  나는 다시금 그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새 눅
눅해진 인쇄물을 선반 위로 던져버리고 욕조 깊숙이 몸을 눕혔다. 하얀 거품이 순식간에 아
랫입술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다지 산뜻한 기분이 아니었다.
  욕조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사과향의 샴푸를 골라 손바닥에 붓고 거품을 내서 머리카락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씻어내듯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움직여 거품
을 가득 일으켰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샴푸 거품이 섞인 물이 이마를  지나 눈앞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손등으로 그것을 닦아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왼쪽으로  한번, 그리고 오른쪽으로 
한번. 당연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혼자 픽 웃고  난 뒤,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물을 
틀어 머리카락 사이에 가득 들어차 있는 거품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거품이 다 헹궈질 즈음에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번갈
아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번엔 천장까지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웃음이 나오지
는 않았다. 웃음 대신 솟아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나는 청소용 솔을 찾아들었다. 그리고 욕
조 안과 세면대 주변, 욕실의 벽과 천장까지 구석구석 힘주어 닦아나가기 시작했다.

  세트에 그림처럼 앉아 오프닝 멘트를 맞춰보는 안 차장과 수림을 바라보며 나는 분장사에
게 얼굴을 내맡기고 앉았다. 미영은 내가 자신과 처지가  다르다고 말했지만 나로서도 후배
인 수림이 MC를 보는 프로그램에  리포터로 출연하는 것이 마음 편하지만은  않았다. 엠씨 
자리에 앉은 수림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더더욱 불편해지는 느낌이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미소가 저절로 퉁겨져 나올 것 같은 수림의 얼굴은 언제나 내게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MC를 하던 때에 비하면 억지로 웃어야 하는 일이 훨씬 줄어들었지만, 한 코너를 맡은 리
포터로서 생방송 중에 출연해 연결 멘트를  하면서 미소지어야 하는 어려움은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카메라 현장] 이라는 이름의 그 코너는 더러 심각한 내용을  다루기도 
했는데 그럴 때조차도 MC들과 얘기를 나누고 도입부를 설명할 때에는 카메라 앞에서 웃어
줄 것이 요구되었다. 아무리 현장  고발 성격의 내용이라고 해도 보도국  기자가 아닌 이상 
밝은 미소로 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 한 부장의 생각이었다. 재래 시장의 문제점들을 보여
주고 현대화가 시급하다는 얘기를 하면서 어떻게 생글생글 웃을  수가 있다는 말인지. 조명 
아래에서 애매한 표정으로 말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앞이  막막한 기분이었다. 좀더 웃으면
서 말할 수 없냐는 한 부장의 고함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오는 듯했다.
  그날 [TV 매거진]의 무대는 방송국 안의 정원에 마련되었다. 강변 둔치나 시민공원, 혹은 
대학 캠퍼스 등으로 돌아다니며 야외 생방송을 해오던 프로그램이지만 그날은 중계차에  무
슨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담당 PD인 재희  선배는 종일 어디론가 뛰어다니더니 결국 방송
국 정원 안에 무대 세트를 꾸며 놓았다.  TV 주조정실까지 케이블을 길게 연결해서 아쉬운 
대로 야외 생방송을 할 수는 있게 된 것이었다.
  바로 일주일 전, 아이템 회의를 할 때만 해도 이번엔  또 무슨 얘깃거리를 찾아보나 서로 
암담해하기만 하던 스탭들이 어느새 다시 모여 제각각 마들어온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 역시 시장을 돌아다니며 촬영한  테이프의 일부가 흘러내리는 바람
에 그 전날 재촬영까지 해가면서 어떻게든  내가 맡은 일은 끝낸 상태였다. 편집실  VCR에 
문제가 있었는지 [영상칼럼] 코너의 녹화 테이프마저 뒤늦게 흘러내린다고 야단이더니 그것
도 어떻게 해결이 된 모양이었다. 오후가 되면서 과연 오늘  방송이 제대로 나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느새 시간이 되자 리허설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배들의 말처람 [그래도 방송은 나간다] 였다.  그 동안 갖가지 악조건을 겪어봤지만  단 
한번도 방송이 중단된 적은 없었다. 어떻게든 시간이 되면 방송은 나갔고 우리는 숨돌릴 틈
도 없이 다음 방송을 준비해 왔다. 앞이 캄캄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
면 어떻게든 프로그램은 만들어져 있었고, 5일 전에 편집이 완료되는 5분 전에 편집이 완료
되든 상관없이 정해진 시간에 방송은  나가게 마련이었다. 그랬다.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이 
되면 방송은 나가는 법이었다. 그래도 방송은 나가듯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고, 그래도  나는 
저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을 수 있겠지.
  [오늘은 표정 관리가 잘 안 될 것 같으니까 밝게 보이도록 해 줘요.]
  [왜요?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네..... 좀 그렇네요]
  밝은 베이지색 파운데이션을 듬뿍 묻힌 스펀지가  얼굴을 향해 다가오자 나는 눈을  감았
다. 분장사가 아닌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불리길 원하는 그녀가 싹싹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나운서들은 참 힘들 것 같아요.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웃어야 하고.... 지난번에 최 
부장님 모친상 당하셨을 때 보니까 참 안돼 보이더라고요]
  [그렇죠. 내가 아나운서고 리포터이면서도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신기해요. 모두가 어쩌면 
저렇게 생기발랄하고 즐겁기만 할까, 혹은 어쩌면 저렇게 늘  근엄하고 예의바를 수가 있을
까, 어떻게 사람이 늘 저럴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알고 보면 모두 다 허상인 
거죠]
  [그래도 사람들에게 꿈을 주잖아요.  아침에 라디오를 틀거나  텔레비전을 켜면 새벽부터 
일어나서 방송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데, 그 표정과 목소리 때문에  나까지 힘이 나는 것 같
거든요. 꿈과 희망을 주는 방송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난 이렇게 방송국에 와서 일할  때가 
참 즐거워요. 다들 열심히 바쁘게 일하는 모습에 자극도 많이 받고....]
  꿈과 희망을 주는 방송..... 과연 그럴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 브라운관에서  반
짝이는 그림들이 과연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것일까? 오히려 방송이란, 현실을 슬
쩍 덮어버리고 헛된 환상을 꿈꾸게 하는 일종의 환각제는  아닐까. 거기에 빠져서 허우적대
다 보면 꿈과 희망이 더욱 멀어지고 마는.
  눈을 감은 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싫어져서 나는 얕은 신음소리까지 내면서 눈을 
크게 떴다.
  [뭐가 잘못 됐어요? 내가 어딜 잘못 건드렸나요?]
  마지막 손질로 얼굴에 남아 있는 여분의 파우더를 털어내던 분장사가 놀라며 물었다.
  [아뇨. 눈을 감고 있으니까 잠이 와서요. 정신차리고 방송해야죠]
  이미 리허설은 시작된 상태였다. 내가 맡은 꼭지는 마지막 코너로 배당되어 있었다.  나는 
원고를 펼쳐들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날 따라 한 부장이  일찍부터 나와서 리허설 진행 
상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잘 웃지 못하는, 그래서 그것 때문에 늘 그에게 지적을 받는  나로
서는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미친년처럼 좀 웃어봐, 아니면 섹시하게라도 웃어보든지. 그게 뭐냐?]
  그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와 나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  말았다. 머릿속에 가득한 생
각들은 깨끗이 잊어버려야 한다고, 모두 잊고 이제  저 도도한 방송의 물결에 휩쓸려야 한다고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짐했다. 조명을 받으며 카메라 렌즈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렌즈 가까이 올라가 있던 AD의 손이 재빠르게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나는 단호히 고개
를 돌렸다. 웃음을 한입 베어문 듯한 수림의 목소리가 나를 이끌었다. 
  [이경은 아나운서는 이번에 어디를 다녀오셨죠?]
  [네, 몇 군데 재래 시장을 둘러봤는데요.......]
  한 부장이 가까이 있는 것 같은데 별다른 얘기가 없는 걸 보면 내가 지금 제대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확실하다 싶어 나는 안심했다. 그 안심이  내 얼굴을 좀더 미소짓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 그럼 저와 함께 그분들을 만나보시죠]
  너무나 식상해 두드러기가 돋을 지경인 연결 멘트를 나는  변함없이 반복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무신경한 구성 작가가 늘 똑같이 반복하는 그 문장을 어떻게든 토씨 하나라도 바꿔 
말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지만 그날만큼은 그럴 마음이 아니었다. 습관처럼 늘 해오던 일을 
늘 해오던 방식대로 하는 것조차 벅차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리허설은 무리없이 진행되었고 그날의 생방송은  별 
탈 없이 나갔다.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그의 기록 3
  어제는 아파트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내가 들어섰을  때 당신은 몇 가
지 물건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있었지요. 슈퍼의 주인 아주머니는 연신 웃음을 흘리며 당
신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 아주머니의 말에 일일이 대꾸를 해 주더군요. 그때 옆에서  엉거주춤 서 있던 나를 의식
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의식했다 한들 그게 바로 나였음을 알 수는 없었겠지요.
  여기서 한번 말을 걸어볼까. 내 목소리를 들으면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아직도 나를  기
억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당신은  가게 바깥으로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주인 아주머니는 슈퍼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더군요. 화면보다 실물이 낫다, 아니다 실물보다 화면이 더  낫
다, 이 아파트에 사느냐, 몇 동에서 누구랑 사느냐, 뭐 그런 얘기들이었지요.
  나는 잠시 멍한 상태로 진열대 앞에 서 있었습니다. 내가 사려던 물건이 뭐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것이기라도 한 듯 
자꾸만 신경이 쓰였습니다. 내가 이러할진대  당신은 과연 어떨까 싶어지더군요. 늘  저렇게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고 그들이 나눌 이야기를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무척 피곤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 역시 당신을 지켜보며 당신의  생활에 관심을 갖는 저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이겠지요. 하지만 나의 시선과 관심은 분명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지난달
에 방송국으로 전화를 했을 때, 그때도 당신은 나를 그들  중의 하나로 취급해 응대를 해주
었겠지만 그 짧지 않은 대화를 통해 결국엔 나를 조금 색다른 인물로 여기게 되었으리라 기
대하고 있습니다. 그 색다름의 느낌이 과연 어떤 빛깔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당신의 목소리는 방송에서 듣던 것과 달리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지더군요. 아무래도 방송에서 쓰는 말투와 평상시에 쓰는 말투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그 살아 숨쉬는 듯한 생동감 있는 말투 덕분에 당신의 존재가 한층 더 입체적으로 내게  다
가왔습니다. 당신 모소리가 조금 딱딱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그건 아마도 그곳이 사무실  안
이라 그랬을 거라 생각합니다. 근무 시간 중이었으니까요.
  갑작스럽게 전화를 해서 너무 내 얘기만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 같아 지금도 후회가 됩니
다. 그러나 나는 그날의 통화로 당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충분히 파악할 수가 있었지요. 
이제는 당신의 말에 오랫동안 귀기울여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다시 전화를 거는 일이 쉽지 
않군요. 아직은 그저 예전처럼 지켜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아마 당신은 이전에 라디오의 새벽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던 모양입니다. 텔레비전 화면에
서 당신을 발견한 이후부터 나는 아침에 맨얼굴로 집으로 들어오는 당신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대신 그 시간이면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 짙은 화장
을 한 얼굴로 집을 나서는 당신을 볼 수 있게 되었지요. 그리고  한두 시간 후면 단정한 헤
어스타일로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나는 걸로 보아 아마도 당신은 그 길로 미장원에라도 가는 
모양입니다. 간혹 점심 무렵에나 오후에는  아침보다 더욱 짙어진 화장으로  집을 드나드는 
모습을 볼 수도 있는데 그때는 아마 [TV 매거진]의 촬영이나 방송이 있는 날이겠지요. 이제 
한낮의 라디오 방송이 끝나고 나면 몇 분 후에 당신의 차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지
도 대충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모른 채 무작정 기다리고 있던 때에 비하면 기다림이 한결 
수월해진 반면 그만큼의 아쉬움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상상해 온  당신의 모습을 빼앗긴 것 
같기도 하니까요. 게다가 화장기가 하나도 없이  조금은 지쳐 보였던, 아침의 맨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것도 아쉬운 일입니다. 늘 화사하고 늘 밝은 모습의 당신을 보고 있노라면 다시
금 잉에보르크가 떠오릅니다. 연희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 모습 속에 감춘  당신의 
내면을 엿보고 있는 까닭에 이제 나는 예전처럼 혼란스러워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게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 같습니다. 그날  전화선을 통해 내 
귓가에 들려온 당신의 음성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자기 조절 능력이라고나 할까
요. 내게는 너무도 부족한 능력이기 때문에 나는 그걸 금방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주차를 하는 당신의 모습까지도 예사로이  보아넘길 수가 없습니다. 당
신의 성격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그 주차 습관을 당신은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지요. 바닥에 
그어진 흰색 주차선에 맞추어 비뚤어지지 않도록, 왼쪽 창문을 열어  목을 길게 뺀 채 바닥
을 보며 다시 짧게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당신의 모습을 나는 그 동안 숱하게 보아왔습니
다. 주차를 끝내고 차에서 내려선 뒤에도 반드시 자동차  주변을 둘러보고 현관으로 향하지
요. 자동차 바퀴가 조금이라도 주차선과  어긋나 있다거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면 당신은 
어김없이 다시 운전석에 올라 짧은 전진과 후진을 반복합니다.
  운전이 서투른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러는 것은 아마도 옆에 서 있는, 혹은 나중에 옆에 서
게 될 차에 대한 배려일 것입니다. 그처럼 깔끔한 당신의 평소 생활은 과연 어떠할지,  요즘 
부쩍 궁금해질 때가 많습니다. 당신  집의 분위기는 어떨까, 방은  어떻게 정돈해 놓았을까, 
사무실 책상 위의 모습은 또 어떠할까.....
  처음엔 당신이 밝고 행복한 인간의 샘플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당신이 반듯하고  모범적인 
인간의 샘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겉모습을 위장하든  나는 그 속에 자리잡
은 당신의 진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로지 같은 종류의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특
별한 눈으로 말입니다.
  정서적인 불안, 만성적인 두통, 불면증, 악몽, 우울감, 피로, 과민, 흥분, 기장, 갈등..... 나를 
괴롭히는 그 모든 것들이 당신과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새겨진 낙인
의 흔적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전혀 겉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놀라운 능력이지요. 혹시, 이런 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지요.
  
  <..... 문학이란 아까도 말했듯이 혼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혼의 문제를 다룬다 함은 
외로움이 거의 전제 조건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 혼이란 비유하자면 깊은 우물이나 구멍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수한 재능을 가
진, 아니 재능이라기보다는 성격적으로 파탄이 난 사람들이 그 구멍을 들여다봅니다. 문제는 
그 구멍의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가, 어느 정도 깊이까지 내려갈  수 있는가로 문학이나 
예술이 성립하는 셈인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내려간 다음  반드시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려간 채 거기에 머물러버리면 자살이나 그 외의  다양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 작품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후에야  비로소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죠.
  ....... 이 혼이란 구멍은 상당히 매력있지만, 들여다보거나 내려갈 때 강인한 의지와 체력이 
없으면 되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내려가는 것뿐이라면 평범한 사람이라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반드시 다시 올라와야 하는  것이 예술가들의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두  가지 
재능이 필요합니다. 한 가지는 그 구멍에  매력을 느끼고 내려가 보고자 모험하는 재능,  또 
한 가지는 그 구멍에서 무언가를 획득하여 올라와서는 세상에  보여주는 재능. 즉 성격적으
로는 결함이 있지만, 그 성격을 컨트롤하는 또 다른 하나의 자신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격적인 결함만 가지고는 범상한 재능이랄 수밖에 없죠. 결함이 있고 파탄이 난 성격을 견
제하는, 서로 상반되는 재능을 가진 예술가만이 훌륭한 작품을 잉태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양립하는 재능을 동시에 갖고 있는 예술가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분명 그 극소수에 포함되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런 부류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지요. 아, 이 글은 마루야마 겐지가 한국의  번역
문학가와 나눈 대담의 일부분입니다. 이 글을 옮겨적다 보니 다시금 그에 대한 부러움이 솟
아나는군요.
  산기슭에 자리잡은 외딴 집에서 오로지 소설만 쓰면서  살아가는 사람, 쓰고 싶을 때만 쓰고 
그래서 그 수입에 맞추어  생활하는 사람,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더없이 절제된 삶을 
사는 사람, 내가 원하는 것은  소설을 쓰는 것이지 그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호히 
말하는 사람. 그 사람, 마루야마 겐지는 언제나 내게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내가 몇 
년 전에 저 대담을 읽었을 때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아내 때문에 그가 부러웠습니다.
  그는 다니던 회사가 도산 위기에 놓여서 무슨 일이든 다른 일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
황이었기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사무실에서 상사의 눈을  피해 가며 소설을 써 
내려갈 때, 옆자리에서 망을 보아주던 여직원이 바로 지금의 아내라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
녀는 그의 협력자였다는 얘기지요. 그런 그가 부럽습니다. 마루야마 겐지는 외로움을 문학의 
전제 조건이라 말하면서도 저토록 훌륭한 동반자를 옆에 두고 있지 않습니까.
  왜 나에게는 그 같은 열정도 그 같은 동반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 그런  것까
지는 정말 바라지도 않습니다. 마음 편하게 나 자신을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겠습니다. 마음 
편하게 누군가를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겠습니다. 최소한, 나 자신에게 상처받고 누군가에게 
상처받는 일만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내 심정을 당신은 조금이나마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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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샐비어 꽃
  지난 여름은 유난히도 길었다. 이른 봄부터 초여름 같은  날씨가 계속되어 실제로 여름이 
길어진 탓도 있었지만,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서 내게 진득진득한 소문의 그림자까지 들
러붙는 바람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스스로 마네킹이 되어버린 내 
모습을 새삼스레 의식하게 된 까닭이었을까. 사람들은 뒤늦게 내게 소문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면서 내가 단순한 마네킹의 역할만을 하는 게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좀더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소문은 아주 미묘한 낌새와 더불어 내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차라
리 누군가 내게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면 오히려 극복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조금씩 퍼즐을 맞추어가듯  스스로 알아내야만 했다. 최초에  어떤 징후를 
느낕 이후부터 차츰 사람들의 말 속에서 미세한 기운들을 포착해 내는 동안 나는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갔고, 급기야는 소리에 대한 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소리에 대한 극
도의 예민함과 극도의 무감각이 한꺼번에 느껴지는 일종의 착란 현상 같은 것이었다.
  쓸데없이 작은 소리에는 민감해지는 반면 꼭 들어야 할 중요한 소리는 잘 듣지 못하는 일
이 잦아지면서 나는 차츰 자신감을  잃어갔다. 그것이 소리의 크기뿐만  아니라 집중력과도 
관계되는 현상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는 더욱 그랬다. 무언가에 집중하지 못하고 안절부
절못하는 순간이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날도 나는 최 부장이 정오 뉴스를 진행하는 동안 AM  주조정실의 소파에 앉아 다음에 
이어질 내 방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엔지니어들의 대화가 뉴스의 배경 음악처럼 내 귀를 스
쳐가고 있었다. 한 사람은 콘솔 앞에, 또 한 사람은 소파에 앉아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무슨 
얘긴가에 열중하고 있던 터였다.
  [무슨 여자 목소리가 그렇게 굵은지. 하여튼 표가 난다니까, 표가 나]
  난데없이 불거져 나온 한 사람의 커다란 목소리와 다른 한 사람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두 사람은 동시에 나를 멀뚱거리며 쳐다보더니 곧 웃음을 거
두었다. 그들이 앞서 나누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나와 관련되어 있으리라고 직감적으로 
느껴진 순간이었다. 
  [목소리가 굵다뇨? 누가요?]
  나는 생글거리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이럴 땐 짐짓 모른척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으응...... 이 아나 얘기가 아니고 말이야]
  [물론 내 얘긴 아니겠죠. 내 목소리는 하나도 안 굵은데요, 물]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싹싹한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서미영 씨 얘기야. 미영 씨가 워낙 저음이라서 우리가 고생을 좀 하거든]
  그제서야 콘솔 앞에 앉은 엔지니어가 스튜디오 창 너머의 최 부장으로부터 눈을 떼며 말
했다.
  [미영이 목소리는 그게 매력인데, 고생은 무슨......]
  [그냥 듣는 거하곤 또 달라. 콘솔 계기판에서 바늘이 뛰는 걸 보면 알 수 있거든. 너무 낮
아서 다른 사람 목소리하고 맞추기가 힘들어.  매끈하게 들리게 하려면 우리가 기계적인 조
작을 좀 해 줘야 해]
  [글쎄요. 기계적인 거야 저는 잘 모르니까.....  그런데, 표가 난다는 건 무슨 얘기죠?]
  [그건..... 그러니까...... ]
  그가 다시 최 부장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소파에 앉아 있던 엔지니어가 빙글거
리며 나섰다.
  [예전하고 다르다는 얘기지 뭐. 서 아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저음은 아니었다고 하는데]
  [그래, 바로 그 말이야. 여자들은 말이지, 목소리의 변화가 심한 편이거든. 경은 씨도 요즘 
목소리가 많이 변했고....]
  두 사람이 묘한 웃음을 주고받는 사이에  허 PD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이야기는 
거기서 중단되고 말았다. 어느덧 방송 5분 전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큐시트와 방송 원고
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가요 데이트... ]
  시그널 음악이 흐르다가 큐 사인이 들어온 순간, 한껏 명랑한 목소리로 외쳐야 할 타이틀
을 나는 그만 책을 읽듯 읽어버리고 말았다. 스튜디오 창 너머에서 허 PD의 표정이 일그러
지고 있었다. 다시 음악 소리가 높아졌다가 낮아지는 순간,
  [안녕하세요? 이경은입니다.........]
  오프닝 멘트의 첫 부분이 그대로 가라앉고 말았다. 나른해지기  쉬운 정오 무렵의 방송인
지라 특히 밝은 음색으로 진행해야 할 프로그램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 심야 음악 방송 때
보다도 더 처지는 목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기분을  고조하려 할수록 바닥으로 달라붙
듯 소리가 내려않았다.
  [.... 오늘도 날씨가 꽤  무덥군요. 장미 직전의 후텁지근한  날씨를 산뜻한 음악으로 한번 
이겨볼까요?]
  멘트를 겨우 마무리한 후 가까스로 곡 소개를 마치고  나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끈적끈
적하고 불쾌한 기분이었다.
  [경은 씨, 왜 그래? 어디 아파?]
  주조정실과 스튜디오 사이에 연결된 인터폰을 켜고 허PD가 말했다.
  [아, 미안해요. 잠시 머리가 아지러워서요. 이제 괜찮아요. 견딜 만해요]
  [목소리가 너무 가라앉았어. 조금만 살려보라고]
  허 PD의 목소리 뒤로 엔지니어들의 대화가  언뜻 섞여들었다. 그렇다니까, 모르지 뭐, 여
자들은, 따위의 말들이 잡히다가 이내 사라졌다. 주조정실 쪽에서 인터폰 스위치를 내려버린 
것이었다. 
  방송중인 음악 소리만 크게 울리고 있는 밀폐된 스튜디오 안에서 나는 유리 너머의 세 사
람이 나누는 대화에 빳빳이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애써도 들을 수 없는 소리
였지만 그들은 분명 내 얘기를 나누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한번씩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웃어가며 말하는 세  사람의 입모양을 뚫어지게  주시하다
가.... 그러다 나는 한순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걸  느꼈다. 스피커 볼륨을 한껏 높게 
해두었는데도 음악 소리가 순간적으로 들려오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라디오 모니터에 연결
된 헤드폰으로 서둘러 양쪽 귀를 덮고 볼륨을 한껏 높였다. 
  방송을 마친 뒤 나는 조심스럽게 허PD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말했다. 내가 심상치 않
아 보인 까닭인지 그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허 선배.... 사람들이 지금.... 나에 대해서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거죠?]
  식사를 마치고 방송국 근처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나는 성급히 말문을 열었다.
  [여직원들한테 물어보면 말하기를 꺼리고, 나를 위해서 그러는지 어쩌는지 몰라도 무조건 
모른다고 하니 갑갑해요. 말해 줘요. 아마도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더 직접적으로 말들을  하
겠죠?]
  [그건 알아서 뭐하지? 어차피 근거 없는 소문이라면....]
  [한 부장과 관련된 소문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이미 눈치채고 있어요. 하지만 도대체 왜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는지 이유라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유를 
알고, 현재의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파악이라도 하고  있으면 그나마 극복하기가 좀 
쉬울 것 같아서요]
  말하면서 나는 금세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결국 그가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한때 미영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해서 그를 너무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소문이란 건 원래 그래. 노력한다고 해서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지만 굳이 알고 
싶다면 내가 아는 대로 말해 볼게. 우선 내가 처음에 듣기로는....]
  허PD의 입에서는 뜻밖에도 해변 여관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벌써 여러 달 전에 내가 현
우와 함께 밤을 보냈덧 그곳, 해변  여관이 나에 관한 소문의 진원지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나를 보았던 누군가에 의해서 남자와 함께  여관을 드나드는 아나운서에 대한 소문이  퍼졌
고, 그러다가 어떻게 결합이  되었는지 그 아나운서의 상대가  방송국 부장이라고 이야기가 
비약된 것이었다.
  [한 부장이 경은 씨 집으로 찾아간 것도 누가  봤던 모양이야. 나야 물론 세 사람이 어떻
게 생활하는가도 잘 알고 한 부장 스타일도 아니까 그  소문을 믿지 않았지. 하지만 사람들
은 그런 구체적인 얘기들이 결합되면  쉽게 믿어버리거든. 아니, 어쩌면 자기들도  그런저런 
상황을 다 알면서 모른척하고 소문을 즐기려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날 밤 수림은 무슨 일인가로  외출을 했고 미영과 
나는 함께 늦은 저녁을 차려 먹었다. 그리고 한두 시간쯤 지났을 때 경비실에서 인터폰으로 
연락이 왔다. 텔레비전 제작팀의 한 부장이었다. 그는 술에 취한 목소리로 근처를 지나다 들
렀다고 말했고, 함께 포장마차로 가서 소주라도 마시자고 말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
만 그런 식으로 술을 마시다가 아나운서들을 불러내려는 시도를 더러 했던  사람이었으므로 
우리는 지겹고도 난감한 표정을 동시에 지으며 서로 마주보았다.  하지만 미영은 곧 대수롭
지 않은 듯 말했다.
  [그냥 여기 들어오라고 하자. 커피나 한잔 마시게 하지, 뭐]
  그러고 보니 그때가 바로 유화가 회사를 떠난 직후였다. 아마도 미영은 한 부장이 자신을 
다시 텔레비전으로 불러들일지도 모른다고 내심 기대한  모양이었다. 그의 영향력을 과신한 
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술을 달라고 하다가, 없으면  사오라고 하다가, 한동안 횡설수설하
던 한 부장은 느닷없이 [미영아, 너를 보면 내가 안타깝다]로 시작되는 타령을 늘어놓기  시
작했다. 서른이 넘었는데 시집도 못 가고  있어서 안타깝고, 이제 더 이상 텔레비전  화면에 
예쁘게 나오지 않아서 안타깝고.....]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미영의 안색이 나빠지는 걸 확연히 느낄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그녀에게는 그냥 앉아 있으라는 눈짓을 하고 혼자서 그를 아
파트 현관까지 배웅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그걸 누군가 보았던 모양이었다. 하긴 조심성 없
는 행동이기는 했다. 늦은 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중년 남자를 혼자 집 앞 현관에서 배웅
하다니..... 이미 얼굴이 알려질 대로 알려진 내가 말이다. 
  [그냥 잊어버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입에서 부풀려져 만들어진 소문일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려. 그것밖에 방법이  없지 않겠어? 나서서 
해명하려 할수록 더 이상해질 수도 있으니까. 아주 근거 없는 얘기에서 시작된 소문도 아니
고...]
  그러니까, 어쨌든 남자와 함께 여관을 드나든 건 사실이 아니냐는 소리였다. 그 결과가 아
무리 부당한 것이라고 해도 원인 제공을 했으니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말이었다.
  [허 선배는 자기 일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난 아까 방송중에도 그쪽에서 
다들 내 얘기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방송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어느새 애절하게 변해 있는 내  목소리 때문에 점점 더 비참해  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허 PD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냐. 아까 우린 경은 씨에 대한 얘긴 전혀  안했어. 정말 많이 예민해져 있는 모양이네. 
자, 자, 이제 그만 다 털어버리고, 일어나자고]
  반쯤 몸을 일으키며 건성으로 말하는 그에게 나는 서둘러 말을 내뱉었다.
  [아까 허 선배가 들어오기 직전에 엔지니어들이  이상한 얘길 했었어요. 여자 아나운서들
의 목소리에 대한 거였는데..... 기계적인 측면에서 뭔가를 느낄 수 있다면서.... 그런 얘기 안
했어요?]
  그는 그제야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 웃음을 지었다.
  [응, 그건 말이지. 그냥 농담으로 평소에도 엔지니어들이 하던 말인데.... 그러니까 말이야...]
  [무슨 얘긴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하기 힘든 말인가요?]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는.. 전부터 어떤  엔지니어가 자주하던 얘기였는데, 아나운서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처녀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나 뭐라나, 하여튼  그런 웃기는 소리였어. 결혼을 
하고 나면 음색이 변하는 게 콘솔 계기판의 바늘이 아래로 달라붙는 걸로도 보인대. 그거야 
당연히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목소리가 굵어지는 현상일 뿐인데, 괜히 그러는 거지 뭐]
  그럼 결국 무슨 얘긴가.  미영이나 내 경우엔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도  음색이 변했다는 
것? 그런 얘길 심심풀이로 떠들어대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런 얘길 허 선배도 함께 했어요?]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저절로 미소까
지 지어졌다. 그래,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모질게 먹고 평상심을 유지할 것.
  [아니. 방송 들어가면서 다시 얘기하진 않았어. 그냥 엔지니어들끼리  농담으로 하던 얘기
였다니까. 나도 농담으로 들었고....]
  [그런데 말이죠, 그 사람들이 앞서 얘기할 때 화제의 주인공은 미영이라고 말했어요. 그러
니까 그건 미영이가 처녀가 아니라는 걸 비웃는 소리였는데.... 허 선배도 함께 그 농담을 즐
겼나요? 이젠 나하고 상관없는 여자라는 생각으로?]
  굳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뜻밖에도 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미영이에 대한 말이었다고?]
  [그래요. 허 선배는 미영이와의 관계가 끝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미영이 입
장에서는 그런 거예요. 남자는 어떤지 몰라도 여자는 두고두고 그런 식으로 남의 입에 오르
내리게 되는 거죠]
  [미영이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는 뭔가 오해가.....]
  [됐어요. 나도 신경 안 쓸래요. 그거야말로 이제 다 끝난 일이잖아요.]
  내뱉듯 그에게 말을 한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송국으로 들어와 사무실의 내 자리
에 앉기까지 갖가지 생각이 뒤섞여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런  어지러운 생각에 깊이 빠져들
어서는 안된다고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저 무시해  버리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지 않느냐고 체념하면서.
  이제 와서 새삼 소문 따위가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만 굳어진 일상을 비집고 들
어온 내부적인 진동만으로도 벅찬 이때에 왜 하필 이런 외부적인 간섭에까지 시달려야 하는 
가 싶어서 화가 났던 것이다. 소문이 빚어낼 결과가 두려운  게 아니라 거기에 신경을 쓰고 
시달려야 하는 과정이 나는 싫었다. 자꾸만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세
상에 대해서 되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건 정말이지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를 좀 내버려둘 수 없는가. 그냥 이대로 죽은 듯이 살아갈 수 있도록.
  혼자 전투를 치르는 듯한 기분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내 시야에 느닷없이 꽃이 가득 
들어찼다. 꽃다발을 품에 안은 수림이  불쑥 사무실로 들어선 것이었다. 그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자신이 사들고 온 꽃들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꽃꽂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아나운서 부장으로부터 꽃꽂이를 지시받은 이후로 몇 년 동안 마지못해 꽃을 사들고 와서 
매번 난감한 기분으로 화병에 장식을 해왔던 나와는 달리 수림은 꽃꽂이에 자발적이었고 스
스로 꽃을 즐기며 보고 싶어했다. 국화꽃이 화병에서 제일 오래간다는 소리를 듣고 내내 그 
꽃만 사다 꽂는다거나 자주 화병을 텅 빈 상태로 놓아두어서 부장에게 핀단을 듣던 나와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그건 뭐니?]
  수림이 다듬고 있는 꽃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그녀가 꽃으로부터 벗겨내는 얇고 투
명한 플라스틱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요? 꽃받침이죠. 이 꽃은 꽃잎의 모양이 쉽게  흐트러지기 때문에 이렇게 받침을 씌
워서 모양을 유지하는 거예요. 하지만 꽃꽂이를 할 때는 벗겨내는 게 좋죠. 줄기도 잘  상하
기 때문에 이렇게 원예용 테이프를 감아서 팔아요]
  [그렇게 약한 꽃을 잘라서 굳이 눈앞에 두고 봐야 하는 건지.....]
  [그래도 예쁘잖아요]
  [꽃 이름은 뭐니?]
  초록빛 반투명 유리병에 하나씩 꽂히고 있는  짙은 주홍색의 꽃들을 바라보며 나는  물었
다.
  [거베라]
  [거베라?]
  [네. 처음 봐요?]
  [아니. 보긴 몇 번 봤는데 이름 같은 건 별로 관심이 없어서....]
  어찌 보면 조화처럼 보이기도 하는 꽃이었다. 그 인공적인 느낌에 대해서 말하려고 할 때
였다. 꽃병 옆에 놓여진 전화기가 벨소리를 울려대기 시작했다. 수림이 받아서 내게 전해 준 
수화기에서는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 들국화의 노래들을 신청했던......]
  [아,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군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고쳐 들었다.
  [저, 오늘 [가요 데이트]에서 하신 말씀 때문에.... 전화를 걸게 되었습니다]
  [어떤 얘기 말인가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불과 한두 시간 전의 일인데도  내가 오늘 마이크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싶었다. 
스튜디오 창 너머에 잔뜩 관심을 집중한 채 가까스로 방송을 끝냈던 터라 원고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삶의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삶의 다양성? 제가 그런 얘길 했던가요?]
  되묻고 나서야 비로소 희미하게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집단 따돌림 현상에 대한 이야기 끝에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아이들 사이의 따돌림에 대한 얘기를 하고 나서.... 사람에 따라서는  외로움을 즐길 수도 
있는 것이고 또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삶이라고 해서 반드시 불행한 것도 아닌데 요즘 
사회 분위기는 그런 걸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집단 따돌림 현상을 개탄
하는 목소리들이 오히려 고독한 삶 자체를  따돌리고 있는 것 아니겠냐고.... 결국  외향적인 
성격의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고 내성적인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규정짓는다
는 얘기였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삶도 물론 좋지만  내면의 세계에 침잠해서 고독하
게 살아가는 삶도 나쁘지 않은데 그다지 가혹하지 않은 따돌림까지 지나치게 문제삼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 그런 삶을 자꾸 불행하게 여기도록 만든다는 거였죠]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 내가 한 말을 다시  전해 듣다 보니 참 장황하게도 이야기를 했다 
싶었다. 정말 내가 그렇게 길게 얘기를 했던가 의아해지기도 했다. 신문 기사를 참조해서 집
단 따돌림에 대한 일반적인 개탄과 염려를 담은 내용으로 원고를 썼던 나는 준비한 내용을 
다 읽고 난 뒤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마지막 곡으로 준비해 놓은 가요는 4분 10초짜리였는
데 시간은 5분이 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럴 경우엔 대개 시그널 뮤직을 덧붙여 보냈지
만 1분이 넘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 곡이 나가기 전에 30초쯤은 어떻게든 해결
을 해줘야만 했다. 그래서 방금 읽은 원고와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한답시고 되는 대로 말을 
이어 나갔던 것이다.
  시계 초침을 바라보며 애드 리브를 할 때에는 말의 내용보다 시간에만 잔뜩 신경을 곤두
세우게 마련이므로 나중에 무슨 말을 했던가 싶어질 때가  많았다. 심오한 내용은 고사하고 
그저 문장의 아귀만 맞아 떨어지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말을  하기 때문이었다. 10초 혹은 
20초 안에 딱 끝내야 하는  말이란 그야말로 시간에 종속된 공허한  말들이었다. 그 공허한 
말을 그 남자가 멋대로 해석하고 덧붙여서 내게 다시 전해 주었다 해도 나로서는 어쩔 도리
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다양한 삶을 인정하자는 요지의 말을 했던 것은  분명했다. 그쪽에서 나를 싫어한
다면 나도 그쪽을 싫어하면 그만인 것을 굳이 상처받으면서까지 그쪽 세계에 편입하려고 애
쓸 이유는 없다는 것이 평소의 내 생각이었다. 실제로는 그러지도 못하면서..... 타인에게  따
돌림당하기 싫어 내 안의 나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으면서....
  [그런 이야기들에 정말 공감이 가더군요.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숨길 수 없는 무늬가 뚜렷
이 드러나는 걸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이쯤에서 그의 말을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송을 무척 열심히 들으시는 모양이네요. 하지만 저는 라디오 방송에 그렇게 심각한 의
미를 부여하지는 않아요. 시간에 맞춰서 적당히 말을 이어나가는 편이죠. 아무튼 제  방송을 
애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방송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죠. 제가 자발적으로 텔
레비전이나 라디오를 켠 적도 없었습니다.  우울한 날,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명랑한  음성을 
듣는 기분이 어떤지 아십니까? 텔레비전 화면에서 넘쳐나는 과장된  활기는 또 어떻고... 하
지만 우연히 당신을 알게 되어 당신의 방송을 유심히 보고 듣게 되면서 무언가 다른 기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나운서는 다만 최종 전달자의 역할을 할  뿐이에요. PD의 기획과 연출에 따라서  구성 
작가들이 만들어낸 원고나 기자들이 작성한 뉴스를 읽어내기만 하는 거죠]
  [하지만 라디오 방송에서는 미리 써놓은 원고 이외에도 자기 생각을  많이 말하지 않습니
까? 그리고 저는 지금 방송 내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목소리와 얼굴 표정에
서도 뭔가 다른 느낌이 옵니다. 그러다 간혹 애드 리브처럼  들리는 말에서 그 느낌을 확인
받는 겁니다.]
  참으로 집요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그저 수화기에 귀만 대고 있었다.
  [부정하셔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낙인의 흔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그 흔적을 애써 
지우고 다른 생을 살아보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는 올바른 
길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필연이라고 토니오 
크뢰거가 말했죠. 저는 아직 작가 지망생에 불과하지만 당신은  이미 방송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며 작가로서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마음 편한 대로 생각하세요. 역시.... 그러셨군요. 작가 지망생이라....]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이 그 동안 왜  그토록 턱없이 내 마음을 교란시켰
는지 비로소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더 이상 휘말려 들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나는 등허리
를 곧게 세우며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무언가에 취한  듯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그의 목
소리는 멈출 줄 몰랐다.
  [깊은 우물이나 구멍과도 같은 인간이 심연을 들여다보는 사람..... 저는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게다가 당신은 그 우물에서 빠져나오는  능력도 가지고 있을 겁니
다. 당신의 목소리, 말투, 표정, 그 모든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
에게서 애증을 동시에 느낍니다. 저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분명히 저와 동
일한 종류이면서도 제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부분까지 당신은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수화기를 왼손으로 바꿔들며 단화하게 말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모든 건 전파를 통해서 전달되는 저의 외면적인 이미지일 뿐이에요]
  [저는 거리에서 실제로 당신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이 방송국의  전파가 닿는 지역 안에서  제 행동은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늘 카메라를 의식하는 기분이죠. 당신은 저의 그런 의식적인 모습에 일종의 환
상을 덧씌워서 방송 내용에까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거예요. 결국 당신은 방송을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어느 틈엔가 방송에 길들여지고 만 것이 아닐까요?]
  나야말로 어느 틈엔가 그에게 <당신>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다. 그의 말투네 길들여지
고 만 것이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서둘러 급한 일을 핑계대며 전화를  끊고 
말았다. 어차피 이야기를 계속해 봤다 복잡해지기만 할 것이었다. 그 남자에게 무언가를  설
득하려고 했던 나 자신이 어리석게만 여겨졌다. 끊임없이 무언가의 본질을 캐려고 하는,  해
답도 없는 질문을 되풀이하는, 불필요한 감수성만 잔뜩 끌어안고 사는, 그런 종류의  인간과 
또다시 마주쳐야 한다는 것은 악몽 같은 일이었다.
  악몽 같은 추억의 공간, 어두운 서클룸, 문학 청년들의 치기어린 몸짓들....  꽃들이 별안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나를 혼란스럽게 하던 그 시절,  나는 스무 살 대학 신입생이었
다. 봄꽃들로 내 눈은 어지러웠고 내 속은 울렁거렸다. 그것은 멀미였다. 캠퍼스에서 일제히 
꽃들이 피어나던 그때, 노랗고 빨갛고 하얀 봄꽃들은 나를 자꾸만 떠밀었다. 이제 너도 이렇
게 피어나라고, 꽃잎을 활짝 펴보라고, 꽃들은 내게 속삭이며 색정적인 빛을 내뿜고 있었다. 
따갑고 건조한 햇살과 수많은 봄꽃들과 수많은 젊음들이 뒤섞여 발산하는 현란함 속에서 나
는 문득문득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또 여름은 어떠했던가. 샐비어 꽃무리의 붉은 빛이 빛어내는 어지러움. 그것은  파
스텔 색조를 띤 봄꽃들의 느낌과는  또 달랐다. 학생회관 건물에 가려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그늘 속에서 그 빛은 섬뜩하리만치 강렬했다. 샐비어  화단은 나날이 푸른 빛을 
더해 가는 신록 속에서 더욱 귀기를 띠며 붉어가고 있었다.
  샐비어 꽃 때문에 휴학을 하고 끝내 자살에 이르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은 후에 
나는 화단을 가로지르는 길을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항상 주변을 빙 둘러서 건물로 들어서
곤 했다. 샐비어가 마치 태양 아래 선혈을 뚝뚝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는 소설 속의 주인공
이 이해가 되고 또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자살이나  휴학은커녕 그 시절에 흔했던 수
업 거부나 시험 거부에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끝없이 갈등했던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다.
  그해 봄과 여름 내내 나는 그저 내가 몸담았던 문학  서클 안에서 욕지기만 참고 있었다. 
내가 왜 이곳을 찾아들었던가, 나는 왜  아직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가, 매일매일  나 
자신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열 살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곧잘 백일장에서 상을 받아  오기 시작했고 간혹 내 글
이 어린이 신문이나 학생 잡지  따위에 실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기뻐한 사람은 의외로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아마도 어머니는 그것을 통해 내가 외양만 화려한 여류작가가 
되기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연애  편지를 보물처럼 간직하는 어머니였
지만 그것은 다만 겉멋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혼 조건으로 아버지의 붓을  꺽게 하고 내처 
장사꾼의 길로 내몬 사람이 바로  어머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택은 결국 
아버지 스스로 한 것이었다.

  한때 문학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그 성품을  내게 고스란히 물려 주었으면서도 내가  문학 
쪽으로 관심을 갖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스스로의 선택을  끝끝내 혐오한 까닭에 자식들
은 아예 그런 갈등 자체를 피하게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그래야만 했을
까. 단발머리 여중생이던 내가 흔들의자에 앉아 헤르만 헤세나  앙드레 지드에 빠져들고 있
을 때, 조용히 다가와 꼭 그 책들을 덮어버려야만 했던 것일까.
  [감상적인 것에 빠져들지 말아라. 그건 네 인생을 힘들게 만들뿐이야. 이런  책 읽을 시간
에 수학 문제라도 하나 더 풀어]
  내가 동경했던, 그리고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일을 그토록 가뿐히 무시해 버리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칭찬을 받는 것에 너무 길들여져 있었다.  칭찬이 
사라지자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칭찬을 돌려받기 위해서 내가 아껴읽던 책들을 기꺼이 
접었다. 학교 안의 오래된 도서실, 그 안에서 빌려 읽던 낡은 책들의 냄새와 그 곁을 떠돌던 
분위기와 문예반 아이들의 치기와 국어 선생님의 근사한 목소리까지 모두 떠나보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허공에 발을 딛고 선 듯 나는 내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부유하는 내 마음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들로부터 애써 눈길을 돌렸지만 그
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원하는 그럴듯한 성적을 얻지도 못했다.  가까스로 얻어낸 점수에 맞
춰 결정했던 대학과 전공학과는 나를 더욱 헤매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쉽게 꿈을 접
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시 길을 제대로 찾아들려면 국가고시를 치르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사법고시든 행
정고시든 네가 원하는 대로 뒷바라지 해 줄 수 있어. 고급 공무원 시험을 봐도 좋겠고...]
  그러나 그때에도 어머니는 한결같이 내게 속삭였다.
  [됐어. 이제 대학에 들어갔으니 좋은 신랑감만 만나면 되는 거야]
  그래서 그 어두운 서클룸으로 찾아들었던 것일까. 그곳에서 오래된 도서실과 낡은 책들의 
기억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일까. 해답도 없는 질문만을 되풀이하는 사람들, 
불필요한 감수성만 잔뜩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 거기에 저마다  벅찬 시대의 사명감까지 부
여안은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
  어쩌면 꽃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봄꽃의  현란함이  나를 유혹했고 여름꽃의  강렬함이 
나를 붙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예술도 현실 참여도 내게는 모두 벅찼다. 가을이 되면서 나는 
가까스로 서클을 탈퇴했고 시간이 어서 흘러가 주기만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
다. 아버지가 원했던 시험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고 3학년이  되면서부터 시작된 어머니의 
맞선 권유도 끈질기게 피해 나갔다. 나는 그때 오로지 준에게만 마음을 두고 있었다. 준처럼 
단순하고 명확하게, 머리를 텅 비워버리고 움직이는 몸으로만 살고 싶었다. 스무 살에서  한 
살 두사 나이를 보태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이 싫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현
우를 만나 어두운 서클룸의 분위기를 뒤살리는 일에 몰두하곤 했다. 정말이지 나 자신을 이
해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새 다가온 졸업을 앞두고 서둘러 선택한 어정쩡한 정충의 결과로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주체못할 생동감으로 나를  떠밀던 대학 캠퍼스의 꽃이 아
니라 화병속의 뿌리 잘린 꽃들을 바라보는 자리. 원예용 테이프로 줄기를 감고 플라스틱 받
침대로 꽃잎을 떠받든 저 거베라처럼 잠시  사람들의 주목을 끌다가 곧 어디론가  사라지게 
될 존재.
  [왜요? 다시 전화가 걸려올까봐 글요?]
  어느새 꽃꽂이를 다 끝내고 테이블 주변을 정리하던 수림이 내게 물었다. 아무래도 내 표
정이 심상치 않아 보인 모양이었다.
  [아냐.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좀 하느라고....]
  그 남자의 자력에 다시 이끌려 들어간 셈이었다. 지나간  시간들을 새삼스레 돌아봐서 뭘 
어쩌자는 것인지.... 그의 목소리가 흙먼지처럼 되살아났다. 저는 거리에서 실제로 당신 모습
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누구였을까,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열성 팬인 모양이죠? 걱정 말고 촬영 준비하세요. 또 전화가 오면 내가 적당히 처리하죠. 뭐]
  수림의 말에 나는 비로소 책상 위에 놓인 원고를 집어들었다.  외워야 할 원고량이 꽤 많
아 보였고 오후의 야외 촬영 시간은 어느새 바짝 다가와  있었다. 나는 따로 분장을 받으러 
가는 것을 포기하고 사무실에 앉은 채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장마가 시작되면서 찾아든 습한 기운 속에서 나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마치 소리의 덫에 
걸려든 사람처럼 작은 소리에 민감해지고 큰 소리에는 오히려 둔감해진 데다가 알 수 없는 
고립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장마가 끝나도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날도 마찬가지
였다.
  잔뜩 날이 선 상태로 TV 뉴스와 [가요 데이트]를 마친  나는 점심 시간에 집으로 들어와 
손을 씻다가 그대로 얼굴을 적시기 시작했다. 세수라도 하면서 기분 전환을 하지 않으면 오
후의 촬영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서둘
러 수도꼭지를 잠근 후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다시 욕실로 들어와 물을 틀고 세수를 시작했다. 그러자 또다시 전화벨 소리가 들려
왔다. 손바닥을 맞비비며 비누 거품을 내던  나는 급히 손을 헹구고 수도꼭지를 닫았다.  순
간, 벨소리가 멈췄다. 다시 수도꼭지를  열자 물소리에 섞여서 들려오는  벨소리, 역시 물을 
잠그면 들리지 않고.....
  이젠 환청까지 나타나는군.
  어이없어하며 나는 거친 손놀림으로 세수를 마쳤다.  물소리인지 전화벨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뒤섞여 내 귀를 괴롭히는 소리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그러나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때, 이번에는 정말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미영과 수림이 공
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거실 전화기가 아니라 내 방의 전화기였다.
  [여보세요?]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해할 수 없는 설렘이 찾아들고 있었다.
  [집에 있었구나. 휴대폰은 왜 꺼놨니?]
  찬물을 끼얹듯 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웬일이야?]
  [그냥.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왜? 또 누구랑 헤어지기라도 했니?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걸 확인하려고 
전화한 거니?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묻지 않았다. 그런 물음이 오히려 준에 대한 집착을 드러낼  것
만 같아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상태에서 힘겹게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한다는 게 귀
찮았다.
  [잘 지내지?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서울엔 또 언제 올라오니?]
  내가 덤덤한 태도를 보이자 준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은 결국 
내가 초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를 이처럼 쉽게 대하게 된 것은 그의 모든 행
동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했던 내 탓이었다.
  [언제 한번 내가 거기로 내려갈게]
  내가 계속 예사롭게 대꾸하자 준은 급기야 그런 소리까지 했다. 이 도시에 내려온 이후로 
처음 듣는 얘기였다. 하지만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든지. 미리 전화만 하면 기다릴게]
  준과의 짧은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화장대 위에 놓인 전화기에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나
는 잠시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전화벨 소리가 들려오던  순간의 두근거림이 되살아나는 기
분이었다.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전화벨 소리가 가져다줄  전환 같은 것이 
아직도 내 인생에 남아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문득,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내 안에 들어와 있음이 느껴졌다. 언젠가부터 희미하게  감지
되던 어떤 기미가 아니라 분명한 기척으로 그것이 느껴졌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자꾸만 나를 뒤흔드는 그 무엇의 희미한 자취가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았
다. 하지만 아직은 희미할 뿐이었다.
  나는 결국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샤워까지 마친 뒤 젖은 머리카락에 헤어컬을 감았다. 미
장원에 가는 대신 집에서 쉬는 쪽을 택한 만큼 서둘러야만  했다. 전화벨 소리와 함께 내게
로 찾아들었던 낯선 느낌들을 애써 떨쳐내면서 나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화장을 하기 시작
했다.
  그날 나는 [TV 매거진]의 리포터가 아니라 서울에서 방송되는 프로그램의 리포터로서 촬
영을 나가야 했다. 지역 방송사들이  매주 한번씩 참여하는 프로그램이라서  거기에는 전담 
리포터가 따로 있었지만 그 리포터가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느닷없이 내게 일이 떠맡겨진 
것이었다. 그녀가 일을 그만두기까지 떨돌아다녔던 소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가 
않다. 예외없이 그것은 한 부장과  관련된 소문이었고 지금도 나는 그  리포터의 겁먹은 듯 
커다랗고 검은 눈동자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부터 앞선다.
  헤어컬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립스틱을 바르자 아나운서 이경은의 얼굴이 거울 속에  떠올
랐다. 등뒤로 손을 돌려 원피스의 지퍼를 힘겹게 올리면서 시계를 쳐다보았다. 준의  전화를 
받고 샤워까지 하느라 시간을 너무 써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서둘러 핸드백을 챙겨들었다.
  그러나 방문을 열고 나서려다가 결국엔 다시 방안으로 몸을 돌려 화장대 위를 치우기 시
작했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화장품 가루를 물티슈로 닦아내고  얼룩이 남지 않도록 다시 
한번 화장지로 닦았다. 아무리 바빠도 지저분한 흔적을 그대로 두고 나갈 수가 없었다. 아무
도 내 방을 들여다보지 않겠지만 언제나 스스로 그런 모습을 참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나는 
비로소 방을 나서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긋지긋해....]
  어느새 성큼 여름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었다.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앉아 나는 잠시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아파트 단지 안의 나무들이 언제 이렇게 무성해졌나 싶었다. 절정에 다다른  푸
른빛 잎새뿐만 아니라 어느새 훌쩍 자라 있는 키까지  새삼스러웠다. 아파트의 좁은 진입로 
양쪽으로 늘어선 나무들은 우거진 잎사귀들로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 푸르름에 질
린 듯한 기분에 빠져들다가 이윽고 차를 후진시킨 후 핸들을 꺾으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 나오면서 과속 방지턱을 넘는 순간  차체가 심하게 울렁거렸다. 갑
자기 속력을 올린 탓이었다. 약한 멀미  같은 흔들림 속에 돌연히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는 거리에서 실제로 당신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거리의 사람들 모습이 예사롭게  보
이지 않았다. 나는 라디오의 볼륨을 높이면서 큰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곧 차량의  흐름에 
몰두하면서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하동욱의 우스개에 과장된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터무
니없이 속력을 높여보기도 하면서 방송국까지 오는  동안 나는 겨우 그의 목소리를  털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나를 기다리고 있는 스탭들과 합류하면서 일에 몰두하려고 애썼다. 강
이 흐르는 이 도시를 떠나 또 다른 강을 촬영하러가는 길이었다. 섬진강, 은어 낚시, 은어를 
이용한 요리법.... 큐시트를 한번 살펴본  후, 나는 구성 작가가 써준  오프닝 멘티를 외우기 
시작했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한번씩 창 밖을 바라보면서.
  [저.... 전에 음악이 흐르는 밤을 진행하셨죠?]
  내게 말을 붙여온 사람은 카메라 보조 일을 맡고 있는 청년이었다. 낯선 얼굴이다 싶었지
만 워낙 자주 바뀌는 사람들인지라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따로 인사를 나누지 않고 함께 차
에 오른 상황이었다. 그래도 의자를 돌려 마주앉아 가는  승합차 안에서 서로 모른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먼저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왔다.
  [제가 고등학교 때 그 프로 자주 들었거든요.  전화 연결도 한번 됐었는게 기억하실지 모
르겠네요. 전화 퀴즈를 할 때였는데.....]
  그는 열심히 내게 자신을 일깨우려고 애썼지만 나는 그를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었다. 아, 
네, 알 것 같아요, 라고 대충 얼버무리면서 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때 고등학생
이었다면 지금은 겨우 스물한두 살일 것이었다. 비록 방송 장비를 들고 따라 다니는 일일지
라도 방송국 일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한 얼굴이었다. 팔이  아프도록 조명 기구를 들고 
서있을 때에도 흐뭇할 것이고 스탭들이 마실 음료수를 사러 갈 때에도 저절로 신이 나서 달
려갈 것이다. 그 기쁨이 그의 얼굴에 선연하게 드러나보였다.
  봄이면 이제 봄이 왔다고, 여름이면 덥다고, 가을이면 벌써 가을이라고,  겨울이면 춥다고, 
그렇게 목청을 높이는 방송 멘트의 순환 고리는 달이 바뀔  때에도, 해가 바뀔 때에도 유효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에 대한 달콤한  회상이나 미래에 대한 장밋빛 꿈이면 되었다.  그 
정도면 오늘도 내일도 충분히 방송이 나갈 수 있었다. 그렇고 그런 리듬과 멜로디가 끊임없
이 반복되며 연주되는 그렇고 그런 변주곡이 바로 내가  겪어온 방송이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 방송을 동경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대체 방송의 무엇이 그들을 미혹에 빠지게 
하는 것일까.
  저는 거리에서 실제로 당신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문득, 이 청년이 혹시 그 남자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서 얼굴을 붉혀가며 말하는 한  젊은이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나
는 곧 씁쓸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날의 촬영 장소 근처에 쌍계사가  있다고 했다. 쌍계사는 예전에 촬영  때문에 두 번을 
갔었다. 두 번 다 벚꽃이 피는  계절이었다. 십리 벚꽃길이라는 그 아스팔트 도로를  오가며 
나는 두 번다 거의 같은  내용의 리포트를 했다. 하지만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같은 내용의 
리포트는 계속될 것이다. 벚꽃을 올려다보며 과장된 감탄사를 연발한 후 리포터는 쌍계사로 
가는 교통편, 벚꽃이 피는 시기, 벚꽃 축제 등을 설명할 것이고 적당한 사람을 붙들고  인터
뷰를 할 것이다. 아마도 그 인터뷰  내용까지 거의 변함이 없을 것이다.  오직, 마이크를 든 
리포터의 얼굴만이 해마다 새롭게 바뀔 것이다.
  그날의 촬영도 마찬가지였다. 강변에서 낚시꾼들의 모습을 한동안 카메라에 담은 뒤 인터
뷰를 하고, 횟집의 주방에서 은어를 요리하는 장면을 찍고, 회를 먹고 있는 사람들도 인터뷰
하고.... 강이 흐르고 은어가 모천회귀를 계속하는 한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변함없이  방송될 
그림과 소리를 우리는 카메라에 담았다.
  촬영을 모두 마친 뒤 횟집 마당의 평상  위에 다들 둘러앉아 강을 바라보며 은어 튀김과 
매운탕을 먹기 시작했지만 나는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요리하는 과정부터 촬영을 하면 
늘 그랬다. 조명 아래서 자세히 살펴보며 말로 요리하던 음식을  다시 상 위에서 만나면 식
욕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다. 생업에 대한 일종의 멀미 증세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까지 
멀미가 날 듯했다.
  [다음주에도 또 제가 나와야 해요?]
  [일단 한번 나왔으니까, 새 리포터가 올 때까지는 계속해야 겠죠]
  [새 리포터가 언제 오는데요?]
  [그거야 한 부장 마음이겠죠]
  담당 PD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하자 자동차 시트에 기댄 채 늘어져 있던 카메라맨이 
덧붙여 말했다.
  [이번엔 글래머가 하나 올 거야. 그럴 차례가 됐거든. 계속 귀엽고  순진한 타입만 왔었잖
아? 원래 한 부장 스타일은 그게 아닌데 말이야. 이번엔 틀림없이 글래머를 데리고 올 거라구]
  [그거 기대되는데요]
  운전을 하던 기사까지 한마디 거드는 바람에  달리는 차 안은 남자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굳어진 얼굴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글픈 푸른빛이 감도는 옅은 홍조가 
어느덧 세상에 가득했다. 기나긴 여름날의 기나긴 하루 해가 그렇게 노을 속에 스러지고 있
었다.
  
  휴가철로 접어들면서 어수선해지기 시작한 사무실에 꽃다발 하나가 배달되었다.
  [이거 정말 굉장한데요! 아마 백 송이가 맞을 거예요]
  공익 광고 녹음을 끝내고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때였다. 수림이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큰 소
리로 말하며 꽃다발을 이리저리 들춰보고 있었다.
  [이것 봐요, 여기 리본에 <이경은 아나운서에게? 라고 씌어 있죠? 보낸 사람 이름은 없어
요. 하지만 그 스토커가 보낸 거 맞계죠?]
  하동욱까지 내게 달려들며 말하는 바람에 잠시 현기증이 느껴졌다. 수림의 손에서 하동욱
의 손으로 옮겨간 꽃다발은 바싹 마른 드라이플라워였다. 초록색  망사에 둘러싸인 장미 송
이들은 말린 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크기가 골프공만큼씩은 했다.  말리기 전에는 그 크
기가 상당했을 듯 싶었다.
  [흠.... 말려도 향기는 남네. 그런데 본래의 향기와는 좀 달라요. 아주 독한 향수 냄새 같아]
  수림에게 이끌려 가까이 코를 대고  맡아본 장미향은 아닌게아니라 아찔할  만큼 독했다. 
성장을 멈춘, 이미 죽은 꽃에서 나는 향기란 어차피 산뜻할 수 없는 것이겠지.
  [향수를 너무 많이 뿌린 여자처럼 천박해. 자연스러운 게 좋은 데..... 혹시 이건 무슨 약품
을 써서 말린 게 아닐까? 색깔이나 모양이 지나치게 선명하잖아. 전자렌지를 이용해서 건조
시키기도 한다던데..... 잔인해]
  말하며 나는 그 꽃다발을 책상 한 켠에 밀치듯 놓아두었다. 장미는 수분을 모두 빼앗기고
도 그 색을 잃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불필요한 수분이 제거되어 더욱 정제된  붉은색
을 말하고 있었다. 끔찍하리만치 선명했던 그 검붉은 빛깔.....
  [그런데 정말 스토커예요? 지난번에 전화왔던 그 사람?]
  수림의 말에 나 대신 하동욱이 대꾸했다.
  [또 전화가 왔었어? 그럼 진짜  스토커 맞네. 생화도 아니고  이렇게 바삭바삭 말린 꽃을 
보내고 말이야. 이런 건 애완동물 시체를 보내는 것하고 같은 맥락 아니야?]
  [하동욱 씨! 생방 들어갈 시간 다 되지 않았어? 수림이  넌 저렇게 꽃을 어질러놓고 뭐하
는 거야?]
  나는 그만 턱없이 화를 내고  말았다. 하동욱은 사무실을 나서면서  수림에게 한마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수림 씨! 그 스토커 얘기만 나오면 이 선배가 예민해지니까 조심하라고]
  새로 사온 하얀 꽃들로 꽃꽂이를 시작하던 수림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화
제를 돌린답시고 자신이 하고 있는 꽃꽂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 이렇게 해야 철사가 안에서 힘을 받아 쉽게 원하는 곡선을 만들 수 있거든요]
  말하며 수림은 아무렇지도 않게 날카로운  철사를 꽃의 줄기 속으로  밀어넣었다. 백합을 
닮은 하얗고 정갈한 꽃이 진저리를 치듯 몸을 곧게 펴는 모습을 바라보자니 내 몸 어딘가가 
쓰라려오는 것 같았다. 그냥 두어도 충분히 아름다운 꽃인데.... 단지 줄기의 곡선을 좀더 살
리기 위해서 철사를 제 몸에 찌르고 있어야 하다니.
  [그 꽃은 이름이 뭐니?]
  [칼라예요. 난 결혼식 때 이 꽃 한 송이만 손에 들고 싶어요. 요란한 부케는 싫어]
  요란한 부케.... 언젠가 친구의 결혼식에서 그런 부케를  받은 적이 있었다. 화려한 부케는 
한동안 벽에 걸린 채 내 좁은 방안을 향기롭고 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꽃들이 시들어가며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냄새였다. 차마 버릴  수 
없어 며칠을 고민하다고 결국은 밖에 내다 버리고 난 이후에도 한동안 내 방안에는 부패의 
냄새가 머물러 있었다.
  그랬다. 그 꽃들도 철사를 제 몸에 박고 있었다. 꽃을 버리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양란
과 백장미 위주로 장식된 그 부케는 줄기 자체가 아예  철사로 되어 있었다. 원래의 줄기를 
떼어내고 꽃받침에 철사를 박아 초록색 테이프를 감아놓은 것이었다.  그러니 그 꽃이 비명
을 지르듯 고약한 냄새를 풍긴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얀 웨딩드레스와 화려한 부
테로 상징되는 결혼식에서 친구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내게 그 결혼식은 언제나 꽃
이 부패하는 냄새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부패의 냄새로 기억되는 친구도 있다. 여행중에  잠시 이 도시에 들러 나
를 찾았던 친구였다. 유난히 꽃 선물을 즐겨했던 그녀는 나중에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 기억하니? 내가 너한테 프리지어 꽃다발 선물했는데 막 싫은 표정을 지었던 거....]
  [그랬었니?]
  [기억 못하지? 난 그때 얼마나 민망했는데.... 내가 거기  놀러갔을 때 말이야. 네 방에 놓
으라고 프리지어 사들고 갔었잖아]
  [알아, 알아. 나도 미안하니까 기억 못하는 척하려는데 꼭 그걸 말을 하네. 그때도 말했지
만, 난 꽃을 받으면 난감해.  이걸 어떻게 장식해야 하나 걱정도  되고, 시들고 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곤혹스럽고....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차라리 먹을 걸 사와라.  알았지?]
  어김없이 그 꽃들도 시들었고, 시들면서 줄기 아랫부분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풍겨왔다. 꽃
병의 물을 갈아줄 때마다 나는 프리지어 꽃의 향기와 줄기의 냄새가 빚어내는 부조화에 머
리가 어지러웠다. 줄기가 썩어가면서도 프리지어 꽃은 강렬한 향을 내뿜고 있었다. 독약  같
은 향기였다.
  이 꽃은 적어도 그런 경험을 다시 안겨주지는 않겠구나.... 마른 장미꽃 다발을 보면서  나
는 왠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 정말 스토커예요?]
  어느새 꽃꽂이를 다 마친 수림이 또다시 내게 슬그머니 물어왔다. 얕은 수반에 장식된 칼
라 꽃들은 줄기 속에 철사 따위는  품고 있지 않다는 듯이 시침 뚝  떼고 아름다웠다. 한쪽 
방향으로 유연하게 휘어진 허리를 자랑하면서.
  [그런 건 아냐.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스토커보다 더 지독해. 자꾸만 집요하게 내 안의 무
언가를 건드리거든. 혹시 너도 몸 안에 철사 따위를 찔러넣고 유연함을 자랑하는 건 아니냐
고 캐묻는 것 같아]
  수림은 잠시 멀뚱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곧 자기 앞의 꽃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날 밤 그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꽃을 보냈으니 무언가 연락이 있으리라 생각은 했
지만 방송국이 아닌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아
무렇지도 않은 듯 우선 그 동안 보내준 편지에 대해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조심스럽
게 혹시 마른 꽃을 보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건 마른 꽃이 아니라 말린 꽃입니다.  제가 보낸 꽃들이 당신 곁에서 시들어 
죽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제가 하나하나 말렸습니다. 그러니까 말린 꽃이죠. 마른 꽃이 아닙니
다.]
  장미 하나하나를 말리는 남자의 모습....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
는 상냥하게 말했다.
  [아, 네. 그렇군요. 말린 꽃.... 고맙습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괜찮으시다면.... 내일 [가요 데이트]의 첫곡은 저를 위해 골라주시겠습니까? 당신이 권해 
주는 노래는 무엇이든 좋을 것 같군요]
  [네. 그건 어렵지 않아요. 사연을 다 소개도 못해 드리고 신청곡도  제대로 내보내지 못했
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예전보다 편지가 뜸한 것 같던데....]
  괜히 부담스러워서 그런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에게 뭐가 부담스럽냐고 물었고 
그는 그저 괜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어서 그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오히려 
내 쪽에서 점점 더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그는  내 방송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
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말이죠, 당신 목소리가 아주 이상하게 들렸던  날이 있었습니다. 막 흐
느껴 울고 난 것 같은 목소리로 한 문장을 읽고 나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읽고 그러더군요. 
오후 세시의 라디오 뉴스였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 그때 제가 누구 대신 뉴스를 해야 하는 날이었는데 깜빡잊고 있다가 급히 뛰어 올라
가서 했거든요. 숨이 차면 목소리가 그렇게 나온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죠. 아주 혼이 났어요]
  [네..... 괜히 제가 걱정을 했군요. 어디 아픈 건 아닌지,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그때 여기 어떤 국장님은요, 누가 뒤에서 총을 들고 협박이라도  하는 줄 아셨대요. 잔뜩 
검에 질린 목소리로 들렸다나요? 지금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저 그때 얼마나 야단을 많이 들
었는데요]
  [그랬군요. 혹시.... 그날도 주차 때문에 시간을 빼앗긴 건 아니었습니까?]
  [네?]
  [주차선에 맞춰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차를 세우느라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몇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무척 남을 배려하는 사람인 것 같더군요]
  그게 아니라고, 그건 옆 차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비뚤어진  주차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하
는 내 성격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배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시시껄렁
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내가 하는 방송을 모두 보고 듣지 않았다면 할수 없는  질문
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내 생활까지  꼼꼼하게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주차하는 
모습을 언제, 어디서, 몇번이나 보았던 것일까. 무언가 끈끈한 것이 온몸에 들러붙는 기분이
었다.
  이번엔 또 무슨 핑계로 전화를 끊어야 하나 궁리하는 동안 그가 갑자기 우울증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우울증에 심하게 빠지는 편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얘기였다. 나는  언젠가 
잡지 기사를 인용해서 방송 원고를 쓴 적이 있던 터라 전문가처럼 말해주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같은 거래요. 그만큼 흔한 병이고 치료도 쉽다는  얘기죠. 꼬 심리
적인 것만도 아니어서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제를 사용하면 쉽게  나을 수도 있대요. 긍정적
으로 생각하거 적절히 치료를 받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것을 그대로 방치해서 큰 병을 만들
기도 한다더군요. 그러니까 지나치게 우울증에 빠져 있지 말고 병원에 한번 가보는 게 좋겠
네요]
  그는 작은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번엔 웬일인지 그가 먼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말린 꽃을 서랍장 위에 장식해 준다고 방안에 들어와 있던 수림이 내게 물었다.
  [누구예요? 이 사람?]
  수림은 꽃다발에서 떼어낸 초록색 리본을 흔들어보였다.
  [응. 이번엔 우울증이라고 그러네. 전에는 무슨 불치의 병에 걸렸다면서 매일 엽서를 보내
오던 청취자가 있었는데.....]
  말하며 나는 씁쓸히 웃었다. 그러나 다음날 [가요 데이트]의 첫 곡으로  그를 위한 노래를 
내보내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예쁘게 말린  꽃들과 함께  이 노래를  청해 오신  분이 있습니다.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
  노래가 흐르는 스튜디오 안에서 나는 준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레코드실에서 유재하
의 음반을 골라들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며칠 전의 통화  때 그가 이 도시에 내려오겠다
고 말한 것이 쉽게 잊혀지지 않은 까닭이었을까.
  언제 한번 내가 거기로 내려갈게.... 그 목소리는 아주 오래전 어느 날의 목소리를 꼭 닮아 
있었다. 우리 이 다음에 결혼하자.... 그때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이런 것도 청혼일까.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가까운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플레이보이들의 낡은 수법이야]
  우리의 만남을 지켜보았던 친구는 간결하고도 확신에 찬 분석을 해 주었다.
  [아마 그런 식으로 만나는 여자가 열두 명쯤은 될걸? 그리고 그  여자들 모두에게 그렇게 
프로포즈를 했겠지]
  시니컬한 말이긴 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느 조언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어머니를 비
롯한 가까운 이들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면 보일수록 나는 점점 더 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싶어졌다. 엉뚱한 청혼 이후에도 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특히 육체적으로  너무
도 신사적이었던 그의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마 더욱더 조급해졌을 것
이다.
  이듬해 겨울에 나는 결국 준과 함께 시내의 한 작은  호텔을 찾아들게 되었다. 그 과정에
서 그는 한동안 머뭇거렸고 나는 그 머뭇거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
  [나 다음주에 맞선을 봐야 해. 이제 곧 졸업반이니까 슬슬 시작해 봐야 한다나. 엄마 때문
에 정말 미치겠어]
  내 딴에는 비장한 마음으로 꺼낸  얘기에 준은 뜻밖에도 그러라고 했다.  이제 너도 결혼 
준비를 해야 할 게 아니냐고. 나 같은 놈 말고 좋은 신랑감을 만나라고.
  [그런 나랑 결혼하겠다고 한 얘긴 뭐야?]
  [그거야 내 욕심이지]
  [내 욕심도 그거야. 그리고 더 욕심을 내자면 지금 당장 결혼하고 싶어. 그러니까 이제 그
만 머뭇거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줘]
  낯선 호텔 방에 들어가 어두운 커튼을 열었을 때, 바깥 세상은 아직도 태양 아래  환했다. 
늘 나의 귀가 시간을 챙기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행여 조금이라도 늦으면 안절부절
못하며 나를 변명해 주던 어머니의 얼굴도 떠오랐다. 태양  아래서도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
는 것을 어른들은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모든 게 우스워졌다. 하지만 준의  입술
이 처음으로 내 입술에 닿았을 때, 나는  분명 떨고 있었다. 떨림 속에 비로소 안도감  같은 
것도 느껴졌다. 이제 나는 완벽한 몰두에 이르렀다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동안 지나
온 시간들은 준에게 몰두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를 완전히 내던지지 않았는데 어
찌 그것을 몰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곧 끝날 거야, 조금만  참아... 이렇게 온몸에 힘을  주고 있으면 어떻해? 긴장을  풀어야
지... 그래, 그렇게.....]
  나는 준에게 이끌려 준에게로 몰입해 들어가면서 비로소 준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나이답
지 않게 능숙한 그의 몸짓을 느끼면서 왜 그가 그 동안 내게 그토록 신사적일 수  있었는지
도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아마도 그 동안 그가 만나왔을, 어쩌면 그가 나와는 종류가  다
르다고 믿어왔을 수많은 여자들의 모습이  꼭 감은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지만 나는 곧 
내 몸을 꿰뚫는 아픔에 힘주어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어느새 어둑해진 거리로 나서서 준과 함께 택시를 탔을 때, FM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
고 있었다. 내 손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의 체온을 느끼면서 나는 아주  간단히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기로 마음 먹었다. 내 인생, 내 몸, 내 꿈, 그 모든 것을 준에게 떠넘기고 명확하
게 정해진 길을 편안하게 걸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단순하게 늙어가고 싶었다. 더 이상  내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갈등하기 싫었다.
  [그대여 길을 터주요. 가리워진 나의 길.....]
  노래가 끝나고 CM이 나가는 동안 나는 어쩔 수 없이  말린 꽃다발을 보낸 그 남자를 생
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졌다. 어쩌면 그
에게도 이 노래가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곡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감정에 
빠져서 엉뚱한 사람을 내 인생에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음 곡을 소개하기 직전에 나는 마이크를 끌어당기며 중얼중얼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길에 비유하고는 합니다.  그 길을 찾고, 개척하고, 걸어가는 과정
에서 사람들은 또 흔히 누군가에게서 힘을 얻기를 기대하기도 하죠. 때로 그것은 타인을 향
한 비정상적인 몰두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반드시 길을 찾
아내고 그 길을 올곧게 걸어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가려진 길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삶
도, 때로는 그 길을 포기하고 주변을 배회하는 삶도, 충분히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의 기록4
  이 도시에 내려온 뒤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오래 머물 생각은 
아니었는데.... 서울을 떠나면서 나는 아마도 나 아닌  나를 간절히 꿈꾸었을 것입니다. 이제
는 그 시간, 그 기억마저 까마득하게 여겨집니다.
  애초에 이 여행을 떠나면서 나는 어떤 시인의 산문집을  챙겨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떠나
고 있다, 휴가는 어제부터 시작되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짧은 여행의 기록]이 실려 
있는 책입니다. 나는 시인의 기록 속 여정을 그대로 따라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시인보
다 훨씬 더 천천히 움직였지요. 나는 시인처럼 짧은 휴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무한한 시간
을 눈앞에 둔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여정은 서울에서 대구, 전주, 광주, 순천을 거쳐 마지막으로 부산으로 향하는 것이
었지요. 나도 그렇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행선지인  부산을 향하다가, 시인처럼 기
차를 타고 가다가, 시인의 기록에는  객실 창 밖으로 스쳐가며 이름만  귀에 익은 고장들로 
묘사된 곳 중의 하나인 이 도시에서 그만 내려버리고 만 것입니다.
  기차에서 내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나늗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단지 그렇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라고.  그곳이  시인의 마지막 
여행지인 부산을 두고 한 생각인지 결국은 다시 돌아가야 할 서울을 두고 한 생각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내 남루한 일상을 두고 한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예정대로 부산을 거쳐 서울로 돌아갔지요. 그리고 그 이듬해에.... 영원으로 돌아갔
습니다. 결국은 가게 될 그곳으로 그토록 서둘러 돌아간 것입니다.
  [사실 이번 휴가의 목적은 있다. 그것을 나는 편의상  '희망'이라고 부를 것이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시인은 그렇게 적고 있었습니다. 나 역시 이번 여행의 목적을 희망으로 정했습니다.  그러
나 내게는 권태가 이유가 아니었지요. 권태라기보다는 지나친 욕망이 오히려 희망을 억누르
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내가 싫었습니다. 기차에서 내
리기 직전에 나는 시인의 여행 기록 속에서 [나는 이제 다르게 살고 싶다]라는 문장에 굵은 
밑줄을 긋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의 작은 역에 내리자 참으로 막막한 기분이 들더군요.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공중전
화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전화기 앞에서도 한참을 머뭇
거리다가 동전을 넣었지요. 그리고 다시 아득한 기다림의 시간이 흐른 후, 달려나온  누나의 
얼굴을 바라보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내게는 누나가 둘입니다. 여동생도 하나 있지요. 나는  부모님의 유일한 아들입니다. 지금 
함께 있는 이 누나는 그분들의 처딸입니다. 나를 향해  엄청난 기대를 쏟아부었던 부모님과 
달리 누나는 내게 따뜻한 손길과 미소만을 넘치게 주었지요.
  태어나 한번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린 적이 없습니다. 자라는  동안 내 의지와는 무관하
게 성적표나 합격증 따위로 그분들을 즐겁게 해드린 적은 있었겠지요. 그러나 철이 든 이후
로 나는 그분들의 뜻을 거스르는 쪽으로만 달려온 것 같습니다. 아니, 달리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그저 비틀비틀 도망치기만 했던 것입니다. 한번도 나  자신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누나들처럼 사람들과 잘 화합하지도 못하고 여동생처럼 모든 면에서 뛰어나지도 못한  나
를 아버니는 늘 아타까워했지요. 이런 저럼 상을 휩쓸어오고 반장이니 회장이니 도맡아하는 
여동생을 보면서 둘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나도 평균 이상은 되었던  것 같은데, 그런 아버지 앞에서는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큰누나가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누나는 늘 따뜻하게 나를 감싸주었지요. 고등
학교 문예반 시절에 시화전을 열게 되었을 때, 내 시를 적을 멋진 바탕 그림을 그려준 사람
도 누나였습니다. 누나의 그림과 내  시가 어루러진 패널을 찢어버린 사람은  아버지였지요. 
사내자식이 무슨 시 나부랭이나 끄적이고 있냐며 호통을 치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아직까지
도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누나가 결혼하던 날, 부끄럽지만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울 때에도 혹시  아버지
가 이런 내 모습을 보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던 기억이 더  크게 남아 있습니다. 결혼한 누나 
집에 자주 찾아가는 것조차 아버지는 탐탁지 않아 하셨지요.  그러나 이제는 아버지도 지치
신 모양입니다. 이곳에 이토록 오래 머물러 있는데도 별다른 말씀이 없으신 걸 보면 말입니
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조심스럽게 대한다는 느낌도 듭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누나도 그랬지요. 어딘지 모르게 쩔쩔매는 듯했던 누나의  태도
가 변한 것은 내가 당신에게  몰두하면서부터였습니다. 누나는 나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당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보면 나 역시 누나와 더불어 즐겁게 떠들던 어린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곤 했지요. 하지
만.... 역시 그 소문은 내게 전해 주지 않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누나는 아직도 나를 제대
로 모르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 소문이 나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할지 정말 그렇게도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이 동네에 안개가 자주 찾아드는 것은 저 위의 인공 호수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아파트가 
서 있는 이곳이 예전에는 비만 오면 강이 범람해 물에 잠기던 낮은 지역이라는 얘기도 들었
습니다. 댐을 쌓으면서 침수의 걱정은 덜었지만 그 대신 안개가 흔한 동네가 되었다고 누나
가 말을 해주었지요.
  안개가 아니더라도 심상치 않은 아침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눈을  뜨면서 나는 문득 꿈의 
한순간을 기억해 냈습니다. 물에 잠긴 아파트의 모습. 단지 그것뿐이었지요. 다른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고 오로지 그 모습만 또렷이 내 머릿속에  되살아났습니다. 당신의 집도 누나의 
집도 모두 물에 잠겨 있었지요.  아파트 전체가 물에 잠기고 사람들은  옥상 위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한눈에 지켜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나 봅니다. 높고 먼 그곳
은.... 과연 어디였을까요?
  누나가 일찍 외출을 하면서 혼자 집 안에 남게 되자 나는 왠지모를 두려움 때문에 베란다
로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베란다로 가서 밖을 내려다보면 거기 무언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잇을 것만 같았습니다. 구름의 바닥이 지상에 도달한 것이 안개이며, 본질적으로 안개는  구
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습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베란다에서 나는 무
언가 두려운 것을 볼 것만 같았지요. 그 예감은 누나가 외출에서 돌아오면서 적중했습니다.
  당신은..... 장말 나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어쩌면 그것까지도 연희를 그처럼 꼭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 머릿속은... 말할 수 없이 혼란스럽습니다.
  당신은 아마 아니라고 하겠지요. 소문에  대해서는 어떤 여자든 다들 그러더군요.  연희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연희를 둘러싼 남자들은 달랐지요. 나는 그들의 말을 더 믿을 수밖에 없
었습니다. 그들은 연희에 대해서, 허벅지가 말랐다든가 음모가 유난히 길다는 것까지 속속들
이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결국은 당신도 그런 종류의 여자일 뿐이었습니까? 모든 여자들이 다 그런 건가요? 나 혼
자만, 어딘가 특별한 여자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살아온 것일까요?
  스무 살에 연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나와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입학한 동기생이
었지요. 강의실에서 처음 연희를 보았을 때... 그랬습니다. 첫눈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내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평화와 밝음이 연희에게는 넘쳐니고 있었지요. 하지만 끝내 그것은 짝사
랑일 뿐이었습니다. 토니오에게 잉에보르크가 그러했듯이.
  내가 연희에게 한 일이라곤 그녀가 좋아한다고 말하던 들국화의 음반을 사서 선물로 건네
준 것뿐입니다. 연희는 고맙다고 말하며 내게 웃어주었지요. 그녀와 나 사이에 무언가  대화
가 시작될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곧 연희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것이 내게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그녀 자신도, 그리고 당신도 결코 모를 것입니다.
  연희를 향해 키워왔던 환상이 깨어지던 순간의 고통, 강의실에서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
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서둘러 자원했던 군 입대, 그리고 복학해서도 캠퍼스 곳곳에 남아 
있는 그녀의 얼굴을 지우지 못하던 일.... 그런 모든 기억들이 이제야 겨우 희미해져 가고 있
었는데..... 당신까지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지금 들끓는 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돌고 있는 소문을 누나가 조심스럽게 내게 전해 주었
을 때, 나는 마치 내 자신의 치부를 보인 것처럼 부끄러웠습니다.
  이제.... 당신을 향해 더 이상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모르겠군요.

     마음의 감기
  그날은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하루였다. 안 차장의 휴가 때문에 나는 새벽부터 라디오 프
로그램을 대신 진행하고 몇 가지 일을 더 해야 했으며 유난히 무더웠던 오후에 시작된 [TV 
매거진]의 야외 촬영은 밤이 늦어서야 끝났다. 게다가 한낮에는 방송사고까지 있었다. 
  [가요 데이트]에서 청취자의 전화 희망곡을 받는 코너에서였다. 오늘의 첫  번째 청취자와 
지금 전화 연결이 돼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라고 묻는 순간 난데없이 내 귀로 욕설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연이어 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생방송 중에 간혹 
일어난다는 사고였지만 나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 욕설은 헤드폰을 쓰고 있는 내귀에 두려우리만치 명확히 들
려왔다. 특별히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무조건 퍼붓는 듯한 욕이었지만 
왠지 나는 그것이 정확하게 나를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황급히 전화 연결 스위치를 내리는 엔지니어의 모습과 하얗게 질린 허 PD의 얼굴이 스튜
디오 창 너머로 보였다. 잠시 꺼졌던 온에어 램프에 다시  불일 들어오자 마이크 가까이 입
을 가져가 무언가 말을 하기 시작한 건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아, 네, 날씨가 덥긴 더
운 모양이군요.... 나는 아마 그렇게 말을 시작했을 것이다.
  [전화 거신 분은 시원하게 스트레스를 풀었겠지만 듣는 저희들은 더  짜증이 났는데 어떡
하죠? 죄송합니다. 여러분. 생방송이라 여러분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을  살리려
고 했는데 이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에는 너무 소홀했군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자, 그럼 다음 분 전화를 한번 받아볼까요?]
  창 밖의 허PD가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둥그렇게 모아 오케이 사인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나느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이번에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  전화를 하지는 않으셨겠죠? 안년하세요, 이경은
입니다]
  그 다음 청취자와의 통화는 무난히 진행되었다. 나는 능청스럽게 무더운 날씨와 불쾌지수, 
스트레스 해소법 등을 화제로 삼아 대화를 이끌었고 상대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잘 받아
주었다.
  [미리 통화하면서 정말 그렇게도 모르겠던가요?]
  [알았으면 내가 연결을 시켰겠어? 정말 멀쩡하더라니까. 전형적인 삼십대 화이트 칼라 목
소리였어. 내가 이 장사 한두 번 하는 적도 아니고.... 정말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
  [아무튼 경은 씨가 잘 넘겨줘서 다행이에요. 수고했어요]
  [그래. 이 아나, 많이 놀랐지?]
  방송이 끝난 후, 허 PD와 엔지니어가 나누는 말을 뒤로 한 채 나는  밖으로 나왔다. 그제
서야 가슴이 두근거려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긴장이 풀리면서 그
러는 거야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자꾸만 그때의  욕설들이 나를 향한 것이었던 듯  느껴지는 
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부장과의 스캔들에  휘둘리다 보니 너무 예민해진 탓이리
라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점심을 챙겨먹고 사무실로 들어오자 수림이 진저리를 치듯 말을 퍼부어왔다.
  [경은 선배! 내가 아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그녀가 특유의 튀어오르는 목소리로 갑자기 크게 말하는 바람에 스포츠 신문에 얼굴을 박
고 있던 최 부장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 끝난 방송이 또 화제가  되려나 싶어 나는 짜증 섞
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선배가 나가고 난 뒤에 스튜디오에 들어갔다가  고막이 터질 뻔했다니까요. 모니터 볼륨
을 왜 그렇게 높게 해놨어요? 멋모르게 헤드폰을 썼다가 기절할 뻔했네....]
  호들갑을 떨어대는 수림을 바라보며 최 부장은 웃음을 섞어 말했다.
  [정 아나도 차차 익숙해질 거야. 나도  꽤나 높게 볼륨을 올려 듣는 편인데  말이지, 그게 
점점 더 그렇게 된다니까. 아나운서 경력과 모니터 볼륨 크기는 정비례한다구. 시간이  흐를
수록 자기 소리를 점점 더 크게 들으려는 경향이 생겨나지]
  [저도 부장님이 소리를 크게 듣는다는 건 알아요.  부장님 나가시고 나면 제가 항상 볼륨
을 낮추는걸요. 하지만 아까는 정말 소리가 컸어요. 아마 최고로 올려놓았던 것 같은데... 경
은 선배가 갑자기 아나운서 경력이 늘어난 것도 아닐 테고 하여튼 깜짝 놀랐다니까요]
  수림은 아예 나를 제쳐놓고 최 부장과만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애교가 넘쳐흐르는 목소리
가 한없이 귀에 거슬려 나는 정색을 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컸다면 헤드폰을 손에 드는 순간부터 소리가 들렸을텐데, 무슨 고막이 터질 뻔했
다고 그래? 귀에 대기도 전에 벌써 시끄러운 걸 알고  모니터 볼륨을 낮췄을 거면서... 고장
이 너무 심한 거 아냐?]
  그제서야 수림은 조심스레 내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웃자고 해본 소리였는데... 언니, 화났어요?]
  [언니라고 부르지 마. 내가 네 언니야?]
  [왜 그래? 점심 잘 먹고 들어와서 왜들 그러냐고]
  최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바람에 우리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이 아나도 벌써 히스테리 부릴 나이가 되었나? 왜 그래? 요새 무슨 일 있어?]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린 후 부장은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억누르고 있던 감정들이 화르르 
되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책상 위의 큐시트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선배님.....]
  고개를 들었을 때, 걱정스런 표정이 가득한 수림의 얼굴이 눈 앞에 있었다.
  [괜찮아. <님>자까지 붙일 필요는 없어. 그냥 이 선배나 경은 선배라고 불러]
  [그게 아니고요, 제가 몇 번을 불렀는데도 대답을 안하길래....]
  [몇 번? 몇 번이나 불렀는데?]
  [네? 두..... 번 불렀어요]
  [두 번 부른 것 가지고 그래? 방송 준비를 열심히 하다 보면 못 들을 수도 있는 거지. 천
재는 집중력이 강하다는 거 몰라?]
  제법 여유를 부려가며 농담으로 말을 받았지만, 심각한 상황이었다. 또 소리를 제대로  듣
지 못한 것이었다. 
  [방송 준비가 아니라 딴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그러죠. 상사병 걸린 여자처럼 요
즘 왜 그렇게 넋을 잃고 있을 때가 많아요? 이거 봐요.  지나간 방송 큐시트 가지고 복습까
지 하는 거예요?]
  옆으로 다가와 내 책상 위를 가리키며 말하는 수림의 얼굴을 외면한 채 나는 자리에서 일
어섰다. 안 차장 담당인 라디오 3시 뉴스를 내가 대신 진행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튜디오를 향해 천천히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서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계단 하나를 오
를 때마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거듭 생각했다.
  [왜 이렇게 예민해졌지?]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해 버린  순간,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래, 그저 예민해져 있는 것 뿐이야. 특별히 달라질 것도, 달라진 것도 없어... 
  난데없는 갈증이 느껴져서 나는 창문으로 다가가 한동안 바깥 바람을 맞았다. 강변도로로 
향하는 길에 시선이 닿자 불현 듯 강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러나 어느새 
3시 20분전이었다.
  스튜디오로 들어선 나는 소리 내어 뉴스 원고를 읽어보기  시작했다. 라디오 뉴스는 방송 
전에 일단 내용을 훑어본 후 입 안에서 웅얼거리듯 한번쯤 읽어보는 게 보통이었지만 그날
은 처음부터 또박또박 큰 소리로 원고를 읽어보았다. 그러나 다  읽고 난 후에도 그게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다시 집중해서 읽어보고, 또 읽어보고 하는  동안 
어느새 시계 바늘은 3시를 향해  바짝 다가가 있었다. 나는  헤드폰을 집어들면서 모니터의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심호흡과 함께.....

  그날 밤,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 힘겹게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요란한  전
화벨 소리가 살얼음 같은 내  잠을 깨뜨리고 말았다. 수화기를 들자  흥분한 목소리 하나가 
다짜고짜 쳐들어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 여보세요?  누구시죠?]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죠?]
  상대는 계속해서 횡설수설 떠들어댔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비로소 그의 말이 한 부장
과의 소문에 관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런 경우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  무
엇보다도 그가 누구이며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은 것인지  궁금했지만, 나는 마음을 다스리
려 애쓰며 최대한 건조한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사실무근입니다]
  [당신이 그런 여자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제가  당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
는지 아십니까?]
  그제야 짚이는 게 있어 나는 재빨리 물었다.
  [들국화..... 맞죠? 말린 꽃을 보내주신 그분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힘을 잃는 것 같았다. 그러나 쉽게 포기할 태세는 아니었다.
  [분명히 사실무근인가요? 그런데 왜 그런 얘기가 저 같은 사람에게까지 들려오는 거죠?]
  그는 다시 따져 물었지만 조금 전까지 당당하게 나를 힐난하던 그 목소리는 이미 아니었
다. 힘이 빠진 그의 목소리는 비로소 내가 알던 목소리의 빛깔을 띠는 것 같았다.
  [분명히 사실무근입니다.]
  나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미안합니다]
  이제 그는 완전히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그런 그가 왠지 안쓰럽게 여겨져 나는 무슨 말이
든 해주고 싶어졌자.
  [어디서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원래 방송국 안팎으로는 근거없는 소문이 많이 나돌아요. 
오죽하면 말 공장이라고 그러겠어요?]
  [하지만 아무런 근거 없이 그런 얘기들이 나오지는 않았겠죠]
  꺼지지 않는 불씨 같았다. 내가 대꾸를 하면 할수록 되살아날 불씨였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로서도 할말이 없습니다]
  그럼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라고 덧붙이는 순간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닙니다. 제자 잘못했어요. 어제 그 소문을  듣고 너무 흥분해서,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
지 않아서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납에도 전화를 했던 것이고......]
  [전화라고요?]
  [라디오 생방송중에..... 그 전호, 제가 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결국 내 예감대로 그것은 나를 향한 욕설이었던 것이다. 기분 나쁜 적중이었다.
  [그러셨군요. 어쨌든 방송 사고는 일어난 것이고... 지나간 일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편이
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대신 오늘  새벽에 해야 할 방송을 위해서 제가 잠을  좀 잘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생각과는 달리 그는 또 전화를 걸어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잠을 청하기 
어려워 한동안 뒤척이고 있었다. 그러다 어슴푸레 새벽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 눈
을 붙인 모양이었다. 그 남자가 다시 전화를 걸어와 나를 괴롭히는 꿈, 전화선을 뽑아버리려
고 하는데 죽어라고 그것이 뽑혀지지 않는 꿈에 시달리다가 그 꿈의 장면을 깨뜨리는 전화
벨 소리에 놀라 나는 화들짝 눈을 떴다.
  [여보세요?]
  꿈의 끝자락 같은 현실이었다.
  [이경은 씨?]
  [네....]
  귀에 익은 목소리이긴 했으나 누구인지 금세 떠오르지 않아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뭐해요? 잊어버렸어요?]
  [네?]
  [빨리 나와요. 일단 나오라고요]
  전화는 거기서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더 말할 것도 없는 얘기였다. 안 차장의 휴가 때문에 
내가 하기로 되어 있던 오전 7시 라디오 뉴스를 펑크낸 것이었다. 서둘러 집을 나섰지만 차
에 시동을 걸자 라디오에서 이미 서울 뉴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로컬 방송이 나가야 할 시
간에 서울 뉴스가 나가다니....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뉴스를 준비하고 있던 최 부장이 뛰어 올라왔지만 어쩔 수가 없었
다고 말하며 엔지니어가 내게 물었다.
  [시계를 안 맞춰놨어요?]
  [모르겠어요]
  정말 모를 일이었다. 나중에 확인해 본 알람 바늘은  분명히 6시에 맞추어져 있었지만 선
택 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벨이 울릴 때 잠결에 눌러 꺼버렸던 것인지 알 수
가 없었다. 시계를 하나만 맞춰놓았던 것이 잘못이었다. 어쨌거나 문제는 그 어떤 변명도 통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시말서를 쓰고 징계니 감봉이니 하는 단어들로 어수선한 마음에 빠져드는 가운데 나는 다
시 한번 말린 꽃을 보낸 그  남자를 생각했다. 시계 바늘 끝에 매달려  살아가는 내 신세를 
잠시라도 그에게 이해받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만큼 나는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나는 지쳐 있었다. 이 도시에  내려와 보낸 시간의 무게가 누적되어 갑자기  나를 
덮쳐오는 것만 같았다. 가위 눌린 사람처럼 과거로 이끌려  들어가 옴짝달싹 못하는가 하면 
소리에 대한 예민함과 둔감함의 극점을 오가면서 때때로 중심을  잃기도 했다. 이상하게 늘
어져 길어진 듯한 여름은 나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 부장이 [TV 매거진)의 
여름특집을 기획하면서 지난번에 다루었던 재래 시장 현대화 문제를 심층 취재해서 끼워 넣
겠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거의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하기 싫지? 나도 그래. 이거 아무래도 냄새가 나거든. 산뜻한 여름특집에 재래 시장 현대
화 문제가 왜 끼여드냔 말이야. 한 부장이 또 뒤로 뭘 좀 챙긴 모양인데.... 그러니까 대충대
충 하자는 얘기야]
  재희 선배가 속닥이며 내게 원고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아나운서 테이블에 있는 컴퓨터를 
좀 쓰겠다며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어쨌든 모든  뒤치다꺼리를 도맡아야 하는 담당 
PD보다는 내가 좀더 편한 입장이라는 생각으로 기분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백화점이나 대형 슈퍼마켓의 식품 코너에만 익숙한 내게 재래시장이란 신기하고 정감어린 
장소였지만, 지난번 취재에서는 시장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만 골라서 보았던 터였
다. 옷자락을 조심해 가며 좌판 사이로 오가던 그 좁은  시장통 길만이 재래 시장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좌판의 배후 건물에는  낡고 좁은 계단을 통해 연결
되는 2층이 있었고 더 올라가면  무허가 시설물로 빽빽한 위태로운  옥상도 있었다. 모두들 
현대화 계획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었지만, 막상 옥상에 올라가서 시장의 모습을 내려다보
자니 참으로 막연하게 여겨질 따름이었다. 저 복잡한 사업에 검은 뒷거래는 또 얼마나 기승
을 부릴 것인지... 엄연한 현실을 자꾸만 일깨우는 그런 풍경들이 나는 싫었다.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이나 찍으러 가면 좋겠다....]
  [그러게 말이지. 해변이나 계곡으로.... 하긴 뭐 카메라 앞세우고 가봤자 짜증만 나겠지만]
  [그래도 그 답답한 번영회장하고 인터뷰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그건 맞는 얘기다]
  재희 선배와 나는 동시에 낮게 킬킬거렸다. 써준 원고조차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 마이크 
앞에서 땀을 흘리던 중부시장 번영회장의 번들거리는 얼굴이 재희 선배의 머릿속에서도  떠
올랐을 것이다. 연속된 NG 때문에 그의  입 가까이에서 마구 후들거렸던, 마이크를  들었던 
내 오른손에 다시 통증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오른쪽 팔목과 어깻죽지가 괜히 시큰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때 뜻밖에도 미영이 사무실로 들어와 청첩장을 돌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남자가 꽤 마음에 든다는 얘기는 했었지만 결혼에 대해서까지는 말한 적이 없었으
므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니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 정말 가는 거야?]
  [어디 보자. 흠.... 신랑 이름이 멋지군]
  청첩장을 받아들며 사람들은 저마다 호의적으로 한마디씩을 던졌다. 하지만 그건 분명 결
혼을 앞둔 여느 여직원들에게 하던 말과는 달랐다. 말꼬리를  쉽게 내리지 못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는 다른 표정을 지어보이던 그들의 눈앞으로는 아마도 허  PD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전의 그 일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미영이 언제 어느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얘기까지 도시 전체에 떠돌던 
그때, 그녀는 텔레비전 저녁 뉴스의 진행을 맡고 있었다. 얼굴이 알려질 대로 알려진 아나운
서에 대한 소문은 이 작은  도시의 사람들에게 즐거운 가십 거리가  되어 주기에 충분했다.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무신경하다고 해야 할지.... 사무실을 나서는 미영의 뒷모습을 바라보
며 다시 한번 그녀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간부들은 껌을 씹듯 얘기를 나누기 시작
했다.
  아니, 결혼하고도 계속 여기서 일할 거란 말이야? 정말 대단한 여자야..... 부장님, 저 시집
가요, 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얘기하는데 내가 다 부끄럽더라고... 지 마누라 과거 모르는  남
편만 바보 만드는 일이지. 회사 밖에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고. 서미영이가 겁이  없긴 
없는 애야, 아무튼.....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는 걸 몰랐니?]
  사람들의 반응에 새삼 놀랐다고 말하자 재희  선배는 그렇게 짧게 되묻고는 다시  컴퓨터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말할수록 더욱 답답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굳이 여기서 계속 일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조금쯤 재희 선배를 선동하는 기분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무슨 얘기든 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생각대로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내게 말했다.
  [허 PD와의 예전 관계 때문에 껄끄러운 것이야 당사자들  문제인데 왜 다른 사람들이 나
서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일이 대체 무슨 상관이야? 혹,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왜 허 
PD가 이곳을 떠나길 바라지는 않는 거지? 한물간 여자 아나운서보다야 남자 PD가 훨씬 더 
직장 구하기가 쉬울 텐데....]
  [내 얘긴 말이죠, 사람들한테 그런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계속 여기서 일하려는 미영이가 
답답하다는 거예요. 결혼까지 하고서도 굳이 여기서 일할 필요가 없잖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재희 선배는 먼저와 똑같은 어조로 다시 물었다.
  [.... 아뇨]
  대답하며 나는 슬쩍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웃으며  우리가 
나누어가진 감정에는 자조적인 서글픔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사무실 안에서 속삭이듯 얘기
하고 속삭이듯 함께 웃던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얼른 웃음을 거두고  말하기를 
그쳤다.

  그날의 촬영도 늦게야 끝이 났다. 대충 찍자던 재희 선배는 막상 촬영에 들어가자 사소한 
부분까지 꼼꼼히 챙겼고 중부시장 번영회장은 여전히 더듬거렸으며 동부시장 번영회 사무실 
사람들은 시간 약속을 안 지켰다. 게다가 생선 찌꺼기가 주를  이룬 쓰레기 더미 앞에서 견
뎌내야 했던 그 후텁지근한 날씨라니.
  쓰레기 분리 수거라든가 유원지의 쓰레기 불법 투기 등을 촬영하면서 더러는 카메라 앞에
서 맨손으로 더러운 것들을 헤치기도 했던 나였지만 그날 시장에서 보았던 생선 쓰레기 앞
에서는 금방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스탭들과 함께 늦은 저녁을 먹는 둥 안에도 그 장
면이 떠올라 음식을 제대로 삼킬 수가 없었다.
  재희 선배와 차를 마시며 미영의 결혼에 대해서, 그리고 한 부장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
를 나누다가 집으로 들어오니 어느새 밤이 꽤 깊어 있었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어서 
빨리 들어가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간, 아파트 단지  안에는 
차를 세울 마땅한 자리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몇 바퀴를 돌아 내가 사는 동에서 한참 떨어
진 곳에 겨우 주차를 한 뒤 천천히 걸어와 현관으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경비실 뒤쪽의 
화단에서 누군가가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언뜻 보였다.
  저런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 뭘 하고 있었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곧이어 그 사람이 나
를 뒤따라오는 것을 느끼면서 조금은 두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무심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
간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려 할 때 여린 목소리로 그 사람이 나를 불렀다.
  [저, 잠깐만요]
  돌아보니 작고 야윈 체격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경은 씨죠? 저, 전데요.....]
  틀림없는 그 목소리였다. 말린 꽃을 보내준 그 사람......
  [아, 네.... 그런데 이 시간에 웬일이시죠?]
  그제서야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질린 듯이 하얗고 작은 얼굴, 이 남자였는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무슨 말인데요?]
  그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요....]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우리 아파트의 현관문은 방음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에게 놀이터로 가자고 말했다. 그는 순순히 내 뒤를 따라왔다. 놀이터의 벤치를 향해 걷는 
동안 나는 자꾸만 그가 아니라 그의 눈이 내 뒤를  따라오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한쪽 
눈꺼풀에만 깊게 주름이 잡힌 외쌍꺼풀. 그것은 바로 십 년 전의 내 눈매를 꼭 닮아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보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 역시 예전의 내 얼굴처럼 이중적인 인상을 지니고 
있을 것이었다.
  대학 4학년이 되어 취업상담실에 제출할 증명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내 눈에 대한 불만을 말했다. 한쪽 눈에만 쌍꺼풀이 있어서  눈화장을 하면 양쪽 눈의 크기
가 너무 달라 보인다고, 쌍꺼풀이 있는 눈 때문에 홑꺼풀의  눈이 더욱 작고 날카롭게 보여
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고, 때로는 사람을 흘겨본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고.
  [그럼 수술을 하면 되잖아]
  어머니는 간단하게 처방을 내려주었다. 그 처방이 너무나 명쾌해서  나는 고민하고 말 것
도 없이 어머니와 함께 성형외과를 찾아 오른쪽 눈을 의사  손에 맡겼다. 여름 방학이 지나
고 난 뒤 내 인상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늘 오른쪽으로 앞머리를 길게 내리던 헤어스타일
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왼쪽 얼굴을 앞으로 향하게 하던  버릇도 
없어졌다. 자신있게 눈화장을 하고 찍은 증명 사진을 앞에 놓고 어머니는 말했다.
  [이제 됐지? 그런데 너..... 아나운서 같은 걸  해보면 어떻겠니? 이렇게 정장 차림으로 증
명 사진 찍은 걸 보니까 꼭 아나운서 같아]
  그러고 보니 그때 처음으로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떠올려보았던 것 같다. 아버지가 원하는 
시험 공부는 자신이 없었고 대학원에서 무얼 더 배우는 것도 싫어서 취업상담실을 드나들고
는 있었지만 딱히 무엇을 하겠다는 의욕은  없던 때였으므로 그 정도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아버지에게도 그다지 실망스러운 선택은 아닐 것 같았다. 그토록 
즉흥적인 선택의 결과로 지금 여기에 내가 이르른 것이었다.
  [그때.... 제가 오해했던 것, 그리고  방송중에 전화로 욕하고, 또  한밤중에 전화를 걸고.... 
그땐 흥분해서 정신이 없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꼭 이렇게 직
접 뵙고 사과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놀이터의 벤치에 나란히 앉자마자 시작하는 그의 말을 나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정망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다 이해가 되더군
요. 이제는 사실무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의 전화 덕분에 잠을 설치고 아침 방송을 펑크내기까지 했던 일이 떠올랐다. 방송 시
간에 매달려 살아가는 내 처지를 그에게 이해받고 싶어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 순간도 마
찬가지였다. 무너질 듯 피곤한 몸으로 놀이터의 벤치에 앉은  나는 그에게 무언가를 위로받
고 싶은 마음에 빠져들고 있었다. 더 이상  견딜수 없을 만큼 나는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 
대상이 무엇인지도 명확히 모른 채.
  그는 나에 대한 소문을 우연히  접하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말하는 소문의 내용이 방송국 안에서 떠돌던 것과는  또 다른 것에 놀랐다. 소문
의 그 왕성한 생명력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얘기 이제 그만하죠. 다른 얘기 해요. 우리]
  그는 내 시선을 피해 허공을 바라보았다. 내 오른쪽에 앉은 그는 쌍꺼풀이 없는 옆얼굴을 
내게로 보이고 있었다. 홑꺼풀의 눈. 아버지의 눈이었다.
  아버지를 닮은 나의 홑꺼풀 눈은 십 년 전에 그렇게  사라졌다. 아버지를 닮아 안으로 침
잠하며 스스로의 내부를 들여다보던 습관도 그와 함께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아주 부
드러워진 인상으로 단순하고 밝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졌다. 선명한 쌍꺼풀을 지닌 어머
니에게로 내 유전자가 좀더 기울어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두 눈만 억지로 균형을 맞춰놓았을 뿐  내 얼굴 전체는 여전히 오
른쪽과 왼쪽이 불균형했다. 보조개도 왼쪽에만 있었고 사랑니도 왼쪽 것만 뽑았고 주근깨도 
왼쪽이 더 많았다. 자고 일어나면  항상 오른쪽 머리카락만 바깥으로 뒤집어  지는 것 또한 
여전했다. 무엇보다도 최근 들어 자세히  보면 오른쪽 눈이 왼쪽 눈보다  더 작아졌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새로 만든 쌍꺼풀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얼굴은, 아니, 사람은 그렇게 쉽사리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머뭇거리던 그는 지난주에 방송된 [TV  매거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직장인  볼링 
동호회를 찾아가서 찍어온 장면에 대한 얘기였다.
  [활기찬 볼링장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당신 모습이 그곳에 잘 어울리더군요. 아마 
저한테는 없는 부분이라서 그랬을 겁니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저녁 시간에 볼링장을 찾아 촬영했던  테이프가 편집 과정에서 예
기치 못한 실수로 일부분이 못 쓰게 되는  바람에 며칠 뒤에 재촬영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동호회 회장과의 인터뷰 장면이 특히 그러해서 우리는 낮에 그 부분을 다시 찍
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것을 몰랐을 것이다. 재희 선배의 매끄러운 편집 덕분에  화면은 
감쪽같았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그날 저녁인 것처럼 해설을 했던 것이다.
  인터뷰 중간에는 나도 말을 좀 씹고  회장이라는 사람도 많이 더듬거렸지만 재희  선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단어 사이에 불필요한 말들을 잘라내고 그 부분에 다른 화면을 덧씌워서 
말끔히 편집을 해놓았다. 회장의 눌변은 달변으로 바뀌었고, 볼링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멋진 순간들만 선택되어 빠른 장면 전환으로 세련되게 화면에 나타났다. 거기에다가 경쾌한 
배경 음악까지 입혀놓으니 모니터 안의 볼링장은 내가 다녀온 그곳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나는 그 환상의 세계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나레이션을 했다.  분명히 실제로 존재하는 사
람들과 볼링장의 모습이지만 모니터 안의 그것은 다듬어지고 윤색된 또 하나의 세계로 존재
했다. 거기에는 남루한 일상이 숨겨져 있고 하릴없이 보내야 하는 시간이 잘려져 있었다. 오
직 보여주고자 하는 것만이 드러나 있는 계산된 이미지의 파라다이스였다.
  그것을 보고 그는 볼링장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볼링을 배우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사실 저는 그 장면에서 어떤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밝은 곳만 골라 딛고 사는 것 
같은 여자였죠. 대학 시절 우리 과에는 여학생이 적었는데 그  중에 당신을 꼭 닮은 여학생
이 하나 있었던 겁니다. 물론 예뻤죠. 인기도 많았고....]
  [그 여자도 한쪽 눈에만 쌍꺼풀이 있었나요?]
  나도 모르게 그런 엉뚱한 질문을 던지면서 나는 문득  낙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가 
내게서 발견했다는 낙인의 흔적이라는 것도 어쩌면 홑꺼풀의 흔적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뇨. 양쪽 눈 다 크고 예쁜  쌍꺼풀이 있었죠. 당신처럼..... 당신처럼 부드럽게 반짝이는 
눈이 아주 인상적인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이건 가짜예요. 내 눈의 쌍꺼풀 중 하나는 수술로 만든 것이고, 반짝이는 건 콘택
트 렌즈죠]
  역시 그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가 남들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내가 왜 그에게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지 의아해졌다.
  그는 무언가에 취한 듯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녀의 남자 
관계는 다소 복잡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소문들이 그에게는 상처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그녀와 닮았다는 것은 사실 흔해빠진 얘기였고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들렸
다. 더구나 그녀를 닮은 나를 보면서 키워왔던 감정을 말하면서  그가 다시 내 스캔들에 대
해서 언급하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날더러 뭘 어쩌라는 말인지....
  나는 벤치에서 일어서며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봐야겠어요]
  그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러자고 했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누나 집이 바로 이 
아파트의 우리 집 뒷동이라는 성명을 덧붙이면서.
  [그렇다면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하는군요. 이 시간에 함께 걸어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지도 모르니가 먼저 가세요]
  [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그는 순순히 내 말을 따르며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의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그토록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문득 몸이 떨리는 기
분이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전, 그의 뒷모습이 잠시 휘청거린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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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기록5
  33세의 아침.
  어쩔 수 없이 십자가의 의미에 눈을 뜨며 한 남자의 음성을 귀청 가득히 듣는다.
  지금 죽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어서 가서 네 일을 하여라.
                                - 김승희 에세이, [33세의 팡세] 중에서
  이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예수는 33세에 죽었다.  아니 33세에 무덤에서 
부활하였다]라는 구절은 한동안 내 스무 살을 따라다녔습니다. 죽음,  묘지, 파멸, 자살 등의 
단어로 점철된 이 글을 읽으면서 그려본 33세는 내게 얼마나 두렵고 까마득한 나이였던지요.
  그 나이 33세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만 33세에 이르렀을 때, 내 앞에는 새로운 연
대가 펼쳐져 있겠지요. 그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  나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새로운 연대, 
그것도 새로운 한 세기를 여는 연대와 함께 33세로 접어들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의미심
장한 일인지.... 지금 그 나이가 뚜벅뚜벅 내게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 죽지 않으면 영원
히 죽음에 머물러 있어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부활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나를  떠나보
내고 새롭게 태어나기 위하여, 나는 지금 죽음을 준비해야 만 합니다.
  33세의 아침이.... 두렵습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고 내  두려움을 죽이지 못하고 그 아침을 
맞게 된다면 나는 분명 새로운 연대의 새로운 세상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삶을 살게 되겠지
요. 내게 너무도 맞지 않았던 이 세상을 나는 그 동안 가까스로 견뎌왔습니다. 새로운 희망, 
새로운 연대, 새로운 세상, 앞으로 다가올 그 모든 것은 지금 내게 너무도 벅차게  느껴집니
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서 가서 나의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체 어
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요? 과연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선,  깊은 우울의 늪에 
빠져버린 내 무릎부터 건져내어야 할 터인데....
  마음의 감기라고 했던가요. 내가 우울증에 대해서 말하자 당신은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
다고 말했지요. 그러나 병원이라면 이미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처음엔 멋모르고 내과를  드
나들다가 신경성이라는 진단만 받았지요. 그러다가 정신과 검진을 받게  되었고 내 병이 당
신 말대로 마음의 감기라는 것을, 그것도 아주 심한 독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치료
를 받긴 했지만... 언제나 그때뿐이었지요. 항우울제라는 것은 단지 뇌 속의 어떤 물질을  활
성화하는 데에만 기여했을 뿐, 내가 느끼는  상실감이나 무기력감까지 없애주지는 못했습니
다.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 확인시켜 주기만 했을 뿐이지요.
  어제는 출판사로 소설 원고를 보냈습니다. 이미 여러 번  여기저기 보냈다가 아무런 반응
도 얻지 못했던 원고인 만큼 크게 기대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마 당분간 더 깊은  우울감과 
좌절감에 빠져들게 되겠지요.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틈틈이 소설을 손질하고 다시 깨끗하게 
원고지에 옮겨 쓰긴 했지만 자신이 없는 건 여전합니다.
  무거운 원고 뭉치를 누런 종이로 싸들고 우체국에 갔을 때, 접수하는 여직원이 겉면에 쓰
인 출판사 주소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것  같더군요. 나도 알고 있습니다. 1,500매가 
넘는 장편 소설을 아직도 이렇게 원고지에 쓰고 있는  사람은 드물겠지요. 컴퓨터는커녕 타
자기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나는 분명 이쪽분야에도 부적응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어느 한 부분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렇게 적응이 느리고 또 제대로  적
응을 해내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취업 시험을 치를 때에도  번번이 면접에서 실패를 하
곤 했었지요.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다만 몸이 날래고 눈치가 빠
른 사람들을 보면서 내게 모자란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지요.
  취업 시험의 면접을 보면서도 많이 느낀 것이지만, 세상은 패기 있고 야망 있는 젊은이만
을 원하는 것 같더군요. 솔직히 나는 활력이니 기백이니 하는 말만 들어도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원하는 삶은 아주 조용하고 여유로운 풍경 속에 있을 뿐입니다. 천천히 
책장을 넘기고 글을 쓰면서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안온한 나날을 보내는 것.... 그런데  그것
이 정말 쉽지가 않군요.
  내 마음의 도피처였던 소설 쓰기는 내게 끝없는 절망감만  안겨주고 있고, 최초로 낭만적
인 감정을 꿈꾸었던 그녀에게서 받은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으로
부터 벗어나 새롭게 시작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되는군요.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
니다. 그 동안 내게 많은 위안이 되었던 당신마저도 나를 부담스러워하고 때로는 나를 하찮
게 여기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얼마나 싫은지 당신은 
이해할 수 있을지....
  오늘 우연히 매형이 누나에게 언성을 높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내가 이곳
에 머무른지도 벌써 반 년이 훌쩍 지나있더군요. 매형을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섭섭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누나에게 미안할 뿐이었지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내가 가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야 할 때]란 다
시 말해 [포기해야 할 때] 이겠지요. 모든 것으로부터 외면당한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야 할 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지금까지는 내가 세상을 등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 문득 세상이 나를 멀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내게 명백한 것은 이제 떠나야 할 때라는 사실뿐입니다. 그
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시는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 오래전부터 시는 저 뒤쪽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
었고 시인은 다만 그걸 찾아낼 뿐이라고 노래한 사람은  얀 스카첼이었지요. 그것을 실현한 
이는 카프카였고, 그것을 내게 가르쳐준  이는 쿤데라였습니다. 그들이 바라보았던 저  뒤쪽 
어디, 바로 그곳을 향해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그 동안 하염없이 바라보았지만 아
무것도 내게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저 뒤쪽 어딘가를 향해서.... 내 눈으로 시를 볼수 없으니 
아예 저 뒤쪽 어딘가로 내가 걸어 들어갈 수밖에요.
  그래요. 떠나겠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그곳에서 과연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도
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말입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영원히 떠나지 못할 것이니... 지
금 출발하지 않으면 그 어디에도 영원히 닿지 못할 것이니.....

    인디언 서머
  [흔히 인디언 서머라고 부르는 이런 가을 늦더위를 독일에서는 노처의 여름이라고 한다더
군요. 러시아에서는 또 노부인의 여름이라고  부른다죠. 달갑지 않은 더위라서 이런  표현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어요. 늙어갈수록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족으로부터도  소외 당하는 게 현
실인데, 특히 노처녀나 노부인은 늙음에 대해서 유독 예민하고  저항도 심한 사람들이 아니
겠어요? 그래서 가을을 위해 시들어가는  여름의 미련을 노처녀나 노부인의 심정에  비유한 
모양입니다. 어떤 글에서 보니까 젊은이들이 늙은 사람들을 예전보다 더 심하게 소외시키는 
바람에 늦더위마저 예년보다 더 덥고 더  길어진 것 같다는 내용이 있더군요. 글쎄요.  세월 
앞에서야 모두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겠죠. 하지만 떠나야 할 때는 미련 없이 떠나주는 것
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어쩌면 그날, [가요 데이트]를 진행하면서 지껄였던 나의 이 멘트 역시 그의 귀에는  예사
롭지 않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더운 날씨에 대해 말하면서 별 생각 없이 덧붙인 내용일지라
도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의미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며칠 뒤 그것을 행동으로 증
명해 보여주었다.
  인디언 서머를 이야기했던 그날 저녁, 그가 나를 찾아왔다. 미영은 결혼 준비로 서울에 올
라갔고, 수림은 [카메라 여행]의 촬영의 위해 출장을 떠난 날이었다.  텅 빈 집에서 혼자 저
녁을 차려 먹은 직후에 그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지금.... 놀이터로 나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처음엔 나가지 않겠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아니, 나갈 수 없다고 무
언가 핑계를 댈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직 해가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우릴 보게 될 거예요. 어두워지면  만나든지... 아니면 지
금 이쪽으로 오시죠]
  [그쪽이라면....]
  [203호예요. 지금 저 혼자 있어요. 괜찮아요]
  나는 내가 왜 그런 제의를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그가 편지를 보내오고 전
화를 걸어오던 때의 기묘한 자력 같은 것에 또다시  휩싸이는 기분이었다. 놀이터에서 헤어
진 뒤 한달 가까이 그로부터  편지도 전화도 없었다는 게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아쉬운 건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기분이 들던 나날들이었다.
  [어쨌든 만나서 뭔가 매듭을 짓고 정리를 해야지]
  나는 혼자말을 하며 대충 거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 동안 곳곳에서 헝클어지며 나는 떠
밀던 생각의 멀미와 더불어 수시로 출몰했던 그였던 만큼 우선 그의 존재부터 정리해야 내 
주변도 정리가 될 것 같았다.
  잠시 후 그가 머뭇거리며 집으로 들어섰다. 젖어 있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비를 흠뻑 
맞은 듯한 분위기였다. 나는 그를 거실 소파에 앉게 한 뒤 서둘러  재스민 차 두 잔을 만들
기 시작했다. 
  내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조금 불안정한 자세로 집안을 둘러보는 눈치였다.  찻잔을 
쟁반에 얹으며 언뜻 바라보니 그의 시선이 내 방쪽으로 가  있었다. 방문이 열려 있긴 했지
만 그가 앉은 위치에서는 서랍장 위의 말린 꽃들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차를 들고 다가가자 그는 확신한 듯 말했다.
  [저 방이 이경은 씨 방이로군요]
  유난히 가늘고 하얀 그의 손가락이 정확하게 내 방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죠?]
  [느껴져요. 잘 정돈된 모델 하우스 같은 분위기가....]
  쑥스러운 듯, 그러나 정답을 맞춘 어린 아이 같은 기쁨을 드러내며 그가 웃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정면으로 본 그의 얼굴은 의외로 균형이  잡혀 있었다. 예전의 내 얼
굴처럼 양쪽 옆모습이 각각 달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약간 비틀린 듯한 인상을 
줄 뿐이었다. 하지만 그 균형감 때문에  양쪽 눈의 불균형은 더욱 강조되어 보였다.  무언가 
약간 어긋나 있는 듯한 그 느낌은 오히려 더욱 예전의  내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특성이 융화되지 못하고 각각 얼굴 반쪽으로 나뉘어 드러났던 그 어색한 이미지의 
얼굴을.
  [이렇게 밝은 곳에서 가까이 보니까.... 실물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 얘기 
많이 들으시죠?]
  [네, 뭐.... 이곳 방송국은 스튜디오가  작아서 조명을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대요. 그래서 
얼굴이 살아나지 않는 편이죠. 분장이나 의상도 서울만큼 전문적이지는 못할 테고....]
  늘 들어오던 소리에 대해 늘 해오던 설명을 하면서도 나는 문득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
다. [실물]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생격하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실물의 상대어는 무엇일까. 그
가 말하는 실물보다 못하다는 그것은.....
  나는 오디오 앞으로 다가가 파워 스위치를 눌렀다. 미영이  아끼며 모아놓은 음반들 중에 
다행히 들국화의 라이브 콘서트 앨범이 있었다. 스피커에서 들국화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그
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여자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온순한 태도로 그의 말을 들
어주었다. 그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다  끌어낸 이후에 내 말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주는 내 앞에서, 그는 주로 그녀가 어떤  여자였으며 어떻게 자신을 실망시켰
는가를 설명했다. 지난번에 놀이터에서 했던  말과 반복되는 부분도 많았다. 그의  목소리가 
점차 빨라지면서 흥분으로 발음조차 불분명해지는 데에까지 이르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생각해 버리는 건 어떻겠어요?  그녀는 그저  자유롭게 살아간 여자였다고, 나와 
잘 맞지 않는 여자였을 뿐이라고.... 솔직히 요즘 그런 여자들 많잖아요]
  [그래요. 세상은 이미 그렇게 변해 버렸죠. 나도 내 생각이 낡고 굳은 것이라는  걸 잘 압
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너무 특별했거든요]
  [당신에게 특별했다고 해서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죠]
  [네, 그렇죠. 하지만.... 모든 게 잘 안  됩니다. 소설을 써도 그런 답답한 기억들만 떠올라
서 아주 소심한 주인공을 내세우게 되죠. 사실 요즘은 자유분방한 생활과 적당한 냉소를 즐
기는 주인공이 낯설고 새로운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환영받는데.... 저는 늘 작은 일에 고민하
면서 세상의 여러 가지 문제를 끌어안고 심각해하는 사람들만 그리고 있거든요. 그러면서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느닷없이 소설 얘기를 꺼내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두 뺨이 어느새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당신도 방송에서 주로 그런 얘기들을 해왔지 않습니까? 작고 아름다운 얘기들, 머뭇거리
면서 함께 생각해 볼 만한 여러 가지 사연들.... 새롭고 낯선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깊이  들
여다보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그건 방송이니까 그렇죠. 방송에서 하는  말, 그리고 방송에서 보여지는 내  모습이 진짜 
이경은의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나는 세상에 흔해 빠진 한 명의 여자일 뿐이에요. 듣고 
보니 그동안 제가 아주 그럴듯하게 보여진 모양인데.... 당황스럽군요. 전, 세상에 대해서  상
당히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고, 그냥 되는 대로 살아가는 편이죠. 쓰시고 있다는 진지한 
소설도 아마 읽지 않을 거예요. 저 역시 보통 사람에 불과하니까요]
  [아닙니다. 당신은 분명 저 같은 사람의 말에 귀기울일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지켜본 제가 그걸 알아요]
  [그쪽에서 지켜본 건 저의 허상이지 실체가 아니잖아요]
  답답한 마음으로 소리치듯 말하는 순간,  그가 지갑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허둥거리며  그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끄집어내었다. 지갑 속에 넣기 위해  그런 듯 가장자리를 많이 잘라
낸 사진이었다.
  색이 바랜 사진 속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층층이 굵은 
웨이브가 wu 있고 앞머리는 이마를 많이  가리는 스타일이었다. 오래전에 유행한 헤어스타
일을 보는 기분이 새로웠다. 그 밖에  특이한 점은 없었다. 청바지와 하얀 티셔츠  차림으로 
어느 계곡의 바위에 앉아 있는 그 여자의 얼굴은 그저 예쁘장하게 평범했다.
  [다신과 많이 닮았죠?]
  그러니까 그녀라는 얘기였다.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 물었다.
  [이 여자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요?]
  [그냥.... 첫눈에 반했습니다. 티끌 한 점 없는 밝은 분위기에 맹목적으로 빠져든 거죠]
  [그런데, 왜 그녀가 순결하지 않다는 것이 충격이었나요? 그게 목적도 아니었을 텐데]
  [그건..... 그건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요. 설명하기 어렵겠죠. 맹목적이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니까... 무조건 빠져 들어가
서 그 상대에게 자신을 맡겨버리고 터무니없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거예요. 저도 알아요. 저
도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덧붙여 말했다. 한  남자에게 맹목적으로 빠져들어 흘려보낸  나의 이십대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맹목적인 몰두라는 게 결국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그래도 당신은 오로지 한 남자만을 사랑했군요]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  때문에, 그리고 결국 그런 말을 이끌어낸 나  자신 
때문에... 그러다 나는 곧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내가 이 어리석은 남자와 무엇이 다를 것
인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가 준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  역시 이 남자의 낡고 굳은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논리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준 역시 이 남자와 같
은 생각으로 끝까지 나를 책임지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그렇게도 중요한 일인가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목
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지금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어서....]
  [죽고 싶을 만큼? 그래서 그랬던 건가요?]
  [네?]
  [그래서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인 노래들만 골랐던 거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그 동안  당신이 
방송에서 제게 들려주었던 세 곡의 노래는 모두 죽은 이가 부른 곡이었죠. 모르셨나요?]
  그랬었던가. 나는 찬찬히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말린 꽃다발을 받고 유재하의 노래를 틀어
주었던 것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전에는 김광석,  또 한번은 김현식이었던가... 매번 들국
화의 노래를 내보낼 수 없어서 대신 선곡했던 노래들은 아마 대충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일부러 그렇게 고른 건 아닌데.... 하지만,  죽은 이가 부른 곡이
라니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겠어요? 그들은 모두 노래를  부르고 난 후 
세상을 떠난 것이죠. 그리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더욱  우리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것일 테고...]
  [그래요.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은 특별하게 기억되는 법이죠. 저만 해도  올해 초에 집을 
나서면서 요절한 한 시인의 산문집을 챙겨들었으니까요. 사실  저는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일찍 포기했습니다. 시인은 타고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소설은 다를 거라
고 생각해쬬. 소설은....]
  그의 말이 또다시 하염없이 길어질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을 다져 먹었다.
  [그런데 이 사진 속의 여자 분 말이죠. 미안하지만... 전혀 저를 닮지 않았군요]
  그의 얼굴빛이 변하는 걸 느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정말 이쯤에서 끝내고 싶다
는 생각뿐이었다.
  [소설을 잘 쓰실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상상력이 아주 풍부하신가 봐요. 하지만 그 상상
이 너무 뻔하게 전개된다는 생각은 안해 보셨나요? 예전에 좋아했던 여자를 꼭 닮은 여자가 
나타나서 또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이건 무척이나 낡은 소재인데... 아무래도 처음부터  그런 
상황을 설정하고 저를 주목하신 것 같군요. 그런데... 별로 재미가 없어요. 다른 소재를 한번 
개척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내친김에 계속했다.
  [다른 소재라도 어쩌면 마찬가지겠네요. 요즘 같은 세상에 소설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
겠어요? 더 재미있고 더 감각적이고 더 자극적인 것들이 많은데... 솔직히 말해 보세요. 처음
에 그 여자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뭐였죠?  그리고 저를 주목하게 된 이유는 뭐였죠? 결국 
겉으로 드러난 모습 때문이 아니었나요? 그래요, 시각적인 것. 우리는 모두 단지 하나의  시
각적인 이미지로부터 사랑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이미지에 상대를 맞춰나가는 거죠. 
그게 잘 되면 실망하고 괴로워하고....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
지만 제가 그렇듯 당신도 이제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났으면 좋겠군요]
  그가 비로소 입을 열어 말했다.
  [어차피 처음엔 누구나 눈으로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겠지만, 그 마음을 키워나가는 것
은 결코 그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인간미라는  것이 남아 있고 영혼의 
교류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제 글에 대해서는, 아
니, 소설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말았으면 합니다.]
  [네. 그러죠. 하지만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대체 어떤 식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을까요? 
말이나 글로 어떻게 다 드러낼 수가 있을까요? 세상에는 모두 헛것들뿐이에요. 모두들 자신
의 본래 모습을 감추고, 생각을 감추고, 겉으로 멀쩡하게  보이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죠. 이
를테면 나라는 여자, 그 여자하고 다를  바 없이 지내왔어요. 말하자면 여러 남자와  동침을 
했다는 얘기죠]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왜요? 내가 그냥 한번 해보는  소리인 것 같아요? 천만에요.  당신의 논리대로 말하자면 
나는 아주 파렴치한 여자죠. 하지만 나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나 자신의 생각
대로 살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요?]
  순간 나는 당황했다. 그의 얼굴 근육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손사래를 치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또다시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지쳐 있어서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네요.  제 생각은.... 이제 모든 
걸 잊고 좀 밝게 살아가셨으면 하는 거예요. 저에 대한 불필요한 환상도 깨뜨리면 좋겠고.... 
그건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잖아요.]
  어느새 음악은 멈췄고 오디오 앰프의 팬이 돌아가는 소리만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멍한 시선으로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 또 소설 공모에 응모했는데.... 아홉번째예요. 아마 이번에도 아무 소식이 없을 것 
같아요....]
  원고를 보내놓고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심리적으로 너무나 힘들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까지 해도 안 된다는 건 스스로 소설가로서의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겠냐는 말을 하고 싶었
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 어두워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저에게는 맞지 않는 세상인 것 같아요]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아주 느리게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겨 비틀거리듯 문을 열
고 나서는 그를 나는 붙잡지 않았다. 안녕히 가세요, 라고 문 앞에서 말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한마디 더 하긴 했었다. [아, 저기....]하고 이제까지 보다 더 간절한 눈빛으로  내 눈
을 바라보며 무슨 말인가 할 듯  말 듯 잠시 머뭇거린 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몸을 돌리며 어깨 위로 짧게 손을 들어보였을 뿐이었다.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다. 어두운 
복도에서 잠시 창백하게 빛났던 그 가늘고 하얀 손가락들....
  이윽고 그는 뒤로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내 앞에서 사라졌다.
 
  마치 내가 집 안에 바이러스를 풀어놓고 가기라도 한 듯,  다음 날부터 얼굴에 가렵고 아
픈 느낌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뺨과 턱 주변에 빨갛게  달아오른 작은 종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보름 동안 나는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그 [바이
러스성 피부염] 때문에 꼼짝없이 집 안에 갇혀 지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가 다녀간 다음날의 근무를 그럭저럭 마칠 때까지만 해도 그토록 심각한 지경이 되리라
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그 동안 몸과 마음이 모두 피곤했던 탓이려니 여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에 염증이 온 얼굴에 퍼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꺼풀 주변에까지 마구 돋아난 종기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기도 힘들었다.
  [몸에 저항력이 떨어져서 그렇답니다. 보통 몸 전체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데 저는 이
상하게 얼굴만 이렇게 되었어요. 그동안 분장과 조명 때문에 얼굴 피부가 약해져서 그런 모
양이라는데.... 무조건 휴식을 취하는 게 가장 빨리 낫는 방법이래요]
  휴가계를 내면서 의사의 말을 그대로 전하자 최 부장은 내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쉬면서 몸조리나 잘해. 자기 몸 관리 제대로 하는 것도 아나운서의 책임이고 능력이야]
  이후로 며칠 동안 가끔씩 병원을 찾는 것 이외에는 줄곧 방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면서 나
는 철저하게 나라는 존재의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방송은  나간다]가 아니라 
[너 없이도 방송은 나간다]였다. 내가 빠진 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대체될 수 있는  자리에서 
그 동안 내 전부를 걸고 서 있었던 셈이었다. 방송이라는  거대한 메커니즘 안에 내가 어떤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는가를 냉정하게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그것까지는 그래도 견딜 만했다. 어쨌거나 나 없이도 무리없이 방송이 나간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동료들에게 미안함을 조금 덜 느껴도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한 집에 살고 있는 
수림이나 미영이 내 일을 대신하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에 대한 
쓸쓸함으로 그들에 대한 미안함을 상쇄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갑작스럽게 다가온 의욕이었다. 아침 뉴스를 진행하는 수림과 [TV 매거진]에 리포
터로 등장한 새 얼굴을 지켜보면서, [가요 데이트]를 유연하게 이끌어가는  미영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처음에는 낯설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일을 뺏겨버린 듯
한 기분을 느끼면서 빨리 나가 다시 일하고 싶다는  조급함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하루하루 
시간만 채워나가는 듯한 태도로 해오던 방송일이었는데 막상 그 일에서 벗어나니 왜 그리도 
허전한 느낌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이크와 카메라, 눈부신 조명이 수시로 눈앞에  어른
거렸고 신문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뉴스를 하듯 기사를 소리 내어 읽는 일도 잦아졌다.
  하지만 그것은 일주일이 고비였다. 일주일이 지나면서 나는 의외로 편안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큐 사인이 떨어지기 직전의 긴장감, 생방송중의 팽팽한 분위기, 10초 혹은 20초의 
엄중함, 그리고 방송이 끝난 후의  허탈감 섞인 피로와 끊임없이 써내야  하는 뻔한 내용의 
원고들....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다는 홀가분함이 그제서야 비로소 내 몸에 와닿기  시작
했던 것이다.
  돌아올 시간을 계산하며 멀리 휴가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침대에 누워 늘 해오던 
방송을 새삼스레 보고 듣는다는 것은 그처럼 특별한 경험이었다.  처음엔 무언가 아쉬운 느
낌이 들다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처음엔 
습관적인 시선으로 방송을 바라보다가 점차 다른 각도에서 방송을 되돌아보았기 때문이  아
닐까 싶다. 9년 가까운 시간 동안 떠밀려오던 관성을 누구러뜨리는 데에는 일주일쯤의 시간
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어느새 나는 어디론가 훌쩍 들어 올려져서 지금까지의 내 모습을 차분히 내려다보고 있었
다. 그렇게 며칠을 내려다보니 헛된 집착과 권태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직도 이리저리 이
끌려 다니는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녀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
다. 그 여자를 움직이려면 내 자신이 좀더 그녀와의 거리를 넓혀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미영이 따로 이사를 나간 뒤, 그 동안 미영이 써왔던 큰 방으로 내 짐을 
옮겼다. 그 넓은 방에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아 잠을 설치고 일어난 새벽이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물을 선 채로 미사고 있을 때 수림이 방에서 나왔다.
  [왜 벌써 일어났니?]
  [근무하러 가야죠. 오늘 미영 선배 결혼식이잖아요. 부장님하고 차장님은 결혼식에 참석하
려고 새벽에 서울로 출발하신대요]
  [너한테 여러 가지로 미안하게 됐구나. 힘들지?]
  [그러니까 빨리 나을 생각이나 해요..... 어디 얼굴  좀 봐요. 이제 거의 다 가라앉았네. 이
제부터는 치료보다 회복에 신경을 써야겠어요. 들어가서 좀더 자요. 근무는 내가 다  맡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이러다 내가 일어나면 네가 드러눕겠다]
  [그러게 말이에요.  사람들은 이런 것도 모르고 아나운서는 잠깐씩 화면에 얼굴만 비추는 
걸로 생각하죠. 새벽이고 밤이고 나가서 근무하고, 스탠바이하고,  때로는 십 분 방송하려고 
열 시간을 준비하면서 끝도 없이 일에 치여 사는 것도 모르고....]
  [미안해]
  [그런 말 들으려고 한 얘기가 아니에요]
  이제 우리 둘만 남았다는 생각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가 애틋해서 나는 정말 미안했다. 월
요일부터는 미영의 결혼 휴가까지 시작될 터이니 아무래도 서둘러 출근을 해야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다시 방송을 할 생각을 하니까 제일 먼저 미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름이나  쉬
었으니 방송 감각이 쉽사리 회복될지 어떨지도 걱정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미영과 같은  열정
이 과연 내게 존재하는가 하는 근원적인 의문이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힘들게 계속할 만큼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유망하다고 생각한? 이 일을 평생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삿짐을 꾸리는 미영에게 나는 그런 질문을 던졌었다. 미영은 잠시 일손을 놓고 나를 바
라보더니 곧 다시 짐을 싸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거 생각 안해 봤어. 방송 일은 내가 해왔던  일이고, 할수 있는 일이고, 또 내게 가
장 맞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하려는 것뿐이야]
  남편의 직정이 있는 서울과 이 도시와의 중간 지점에 신혼 살림을 차리기로 했다는 미영
은 바쁜 가운데서도 씩씩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뭘라고 하든 그녀는 거
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표면적으로만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강한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유화의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나는 유망 사업을 찾아헤매는  사업가가 될 생각은 없어.  유망하지 않더라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 희망보다 절망이 더 많을 거라는 게 빤히 보이는데도 그
만둘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지....힘들더라도 그런 일을 갖고 있는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하다
고 생각해. 유망한 쪽만 찾아다니면서 스스로를 쉽게 포기하는 사람보다 말이야]
  나는 미영의 말에 귀기울이며 우리가 함께 했던 세월을 꼽아 보았다. 같은 직장에서  9년, 
같은 집에서 7년.... 하지만 그 세월속에서도 끝까지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부분이 분명
히 있었다. 같은 일을 하는 동료로서 어쩔 수 없는 한계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넌 잘해 낼 거야.  무엇보다도 일에 대한 열정이  있으니까.... 아무튼 결혼 축하해. 
이 얼굴로는 예식장에 안 가는 게 좋을 테니 미리 축하할게]
  [얼굴이 많이 아픈 건 아니지? 이 기회에 푹 쉰다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먹어]
  미영은 짐꾸러미 앞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남편 될  사람이 담배 피우는 
걸 싫어하니 아물도 끊어야겠다며 마지막으로 원 없이 한번 피워 보자면서.
  [담배 피우는 거 싫어한다고 끊을 생각을 다 했어?]
  나는 조금쯤 의아해서 물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은 다 가능한 쪽으로 몰고 가는 그녀답지 
않아서 였다.
  [치사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일을 계속하는 걸 이해해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우니까 이 정
도는 양보해야지. 그 사람, 굉장히 포용력 있는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그렇지도 않아. 맞벌이
가 자기한테도 부담이 덜 되니까 이해해 주는 측면도 있는 셈이지. 다 그런거야. 난  결혼에 
대한 환상 따위는 없어. 그럴 나이도 지났잖아]
  집에 들어와서는 자기 방안에서만 몰래 피워야  했던 담배를 그녀가 거실에 앉아  피우고 
있었다. 그녀 말대로 원없이 한번 맛보기 위해서.....
  담배 피우는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이 소도시의 꽉 막힌 
분위기 속에서 미영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어떻게든 해나가고  있었다. 때로는 맞서 싸우고 
때로는 비난받아 가면서, 또 때로는 어리석을 정도의  시행착오도 거듭해 가면서.... 나는 묻
고 싶어졌다.
  [넌 이 좁은 도시에서 일하는 게 답답하지 않니?]
  [답답하지]
  미영은 간단히 대답했다. 나는 정색을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떠날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다른 곳에서 일을 할 수도 있잖아]
  [내가 그럴 능력이나 있나.... 차라리 여기서  어떻게든 내가 설 자리를 만들어가는  게 낫
지. 힘든 거야 어딜 가든 마찬가지잖아. 서울의 어느 방송국은 여자 아나운서들이 나이가 들
면 지방으로 발령을 내는 모양이야. 그것 때문에 불만도 많고 사표 쓰는 여자들도 많대.  그
래도 여긴 그런 건 없잖아. 하긴 뭐 더 이상 갈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픈 몸으로 열흘이 넘게 방안에서만 지낸 탓이었을까, 아니면 이제 그녀가 이 집을 떠난
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나는 미영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왜 그 동안 내가 미영을 내심 못마땅해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세상을 그녀의 방식대로 헤쳐나가는 것,  나로서
는 그런 것들을 바라보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 철저한  자기애가 내게는 결핍되어 있
었으므로.

  보름 만에 출근한 방송국은 생각보다  낯설었다. 특히 라디오 방송중에  헤드폰을 통해서 
듣게 되는 나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  입술과 혀를 움직여 내는 소리
인데도 그 소리가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 낯선 이질감이 섬뜩하기조차 했다. 누군가 
나 대신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발음하는 것과 동시에 마이크와 각종 기
계 장치, 송신소를 거쳐 전파를 타고 다시 내 귀로 들려오는 나의 목소리.... 그 거리감이 불
현 듯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도 지난 몇 달 동안 소리에 민감해져 있었던 까닭인지도 몰랐다. 무척이나 힘든 시기
였지만 덕분에 나는 주변의 소리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나 자신의 소리도 새롭게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불필요한 소리와 격렬하게 싸우고 나서  비로소 진짜 소리를 
만나게 된 느낌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새삼스러우면서도 두려워졌다. 무언가 낯선 변화의 
기운이 다가와 내 존재의 기저를 뒤흔드는 것만 같았던 그날.
  그날 오후에 그의 누나가 방송국으로  찾아왔다. 연락을 받고 휴게실로  내려가자 사십대 
초반의 여자는 온화한 표정으로 한동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낯선 이름을 대면
서 그의 누나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것이 그 남자의  이름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
었다. 그와 동시에 [기어이]하는  느낌으로 무언가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들국화]라든지 [말린 꽃] 따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4대 독자에 대한 기대를 
담았다는 그 거창한 이름을 그는 무척이나 싫어했다고 한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차라리 나았을 아이였지요. 다음 세상에서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내게 얇은 노트 한 권을 건네주었다.  노트는 푸른색이었지만 많이 낡아
서 회색처럼 보였다.
  [이걸 왜 제게...]
  [이경은 씨에게 전해 달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어요]
  나는 노트를 내려다보던 눈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의 유품입니다.]
  그러니 받으십시오, 하고 낮지만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유품이라는  단
어가 낯설고도 껄끄럽게 내 몸에 달라붙고 있었다.  
  [우린 곧 이사를 갈 거예요. 고층 아파트에서는..... 이제 다시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의 얼굴이 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나는 가까스로 그녀를 부축해서 
방송국 정문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인사를 하며 그녀는 이제 그만 들어가 보라고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흐려져 있는 내 시야에서 천천히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
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그날 밤 그의  뒷모습이 겹쳐졌다. 현관문을 나서며 어
두운 복도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내게 무슨 말인가 할 듯 말 듯하다가 어깨 위로 짧게  손을 
들어 보이며 자신의 몸을 돌려 세웠었지.... 그때 어둠 속에 빛났던 그 가늘고 하얀 손가락을 
떠올리며 나는 그의 이름만 되뇌고 있었다.
  11층 베란다에서 몸을 던졌다는 그의  이름,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된  그의 이름을.... 그는 
그렇게 세상을 버린 것이었다. 아니, 이 세상에서 자신을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
든 내가 되뇌는 그것은 이미 죽은 자의 이름일 뿐이었다.
  그는 나와 동갑이라고 했다. 그의 누나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나는 내 존재의 네
거 필름을 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음화와 양화의 관계. 어쩌면 그와 나는  이
란성 쌍둥이처럼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유전자를 물려받았지만 다만 서로 좌우가  다르고 
명암이 반대로 찍혀나온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유품으로 노트
를 건네받을 때 어떤 꺼림칙함 속에서도 거역할 수 없는 힘을 느꼈던 것 또한 바로 그런 생
각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노트는..... 며칠 뒤에야 겨우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노트를 펼치면서부터  비로소 
그의 죽음이 실감되어 온몸이 떨려왔기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마지막  장까지 읽은 뒤 나는 
그 노트를 태워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곧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만 두고야 말았다. 노
트를 없애기 위한 시도를 몇 번이나 거듭하던 그 며칠 동안 나는 도무지 내가 어디에 서 있
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무언가에 들려 있는 듯한 상태에서 준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은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너 단단히 화가 났구나. 어떻게 그렇게 전화를 안할 수가 있니?]
  장마 무렵에 전화를 해온 이후 처음이었지만 준은 여전히  당당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네가 한번 내려오겠다고 하길래 기다리고 있었지. 너한테 꼭 할 얘기가 있었거든]
  [무슨 얘기?]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 얘길 하기 위해 직접 만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
  [무슨 얘긴데?]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는 얘기....]
  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우리 이제 그만 만나. 난 그러길 원해. 너도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다고 말해 주기를 나는 간절히 원했다. 생각해  보자거나 그럴 수 없다고 말한
다면 다시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준은 이렇게 말했다.
  [괜찮겠니?]
  그 말로 모든 것이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한순간에 정말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괜찮아]
  [그래.... 나도 알고 있었어. 나를 향한  네 마음이 오기로 변해 가고 있었다는  걸 말이야.  
하지만....]
  [알고 있었다면 됐어. 내 집착 때문에 네가 멍들어서는 안 되겠지. 우리의 관계는 이미 빛
을 잃었고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오기로 변한 내 마음이  언
젠가부터 체념과 권태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야.  넌 그걸 느끼지 못했겠지만  나는 절실히 
깨닫고 있었어. 그리고 그게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 체념과 권태에 몸을  맡
겨버리면.... 그 순간부터 내 삶은 없어지고 마는 거야. 끔찍한 일이지. 나는 지금 살고 싶어. 
어떻게든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까 날 좀 도와줘]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
울 속의 지친 내 모습 뒤로 서랍장 위의 말린 꽃이 보였다. 백 송이의 장미는 어느새 그 크
기가 많이 줄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검붉은 빛깔은 퇴색했고 향기마저 변질되어  갔다. 
말린 꽃이라고 해서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생화보다 더 흉하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말린 꽃 다발을 통째로 들고 나가 부엌의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쓰레기 봉투를 묶어 들고  집 밖으로 나가 수거함에 던져넣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정리해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모든 것이 내 주변에서 사라지기를.... 모든 것이 내게
서 멀어지기를......
  그날 이후로 내게 찾아든 어지러움을 잊을 수 있는 방법은 일에 모둘하는 것밖에 없었다. 
큐시트와 원고를 작성하고 음반을 고르고 생방송을  하고 리허설을 하고 뉴스를 하고  야외 
촬영을 하고 녹음을 하고 녹화를  하고..... 그러다 보니 나는 어느덧  겨울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지난 겨울의 어느 날부터 미묘하게 시작되어 여름 내내 그 진폭을 키워가며 정신없
이 내 안에서 움직여대던 진동도 언젠가부터 멎어버렸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다.  어느새 
새로운 겨울이, 그리고 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어 있었다.

   에필로그
어느 남자가 꽃집에 들어가
꽃을 고른다.
꽃집 처녀는 꽃을 싸고
남자는 돈을 찾으려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꽃값을 치를 돈을.
동시에 그는
손을 가슴에 얹더니
쓰러진다.

그가 땅바닥에 쓰러지자
돈이 땅에 굴러가고
그 남자와 동시에
돈과 동시에
꽃들이 떨어진다.
돈은 굴러가도
꽃들은 부서져도
남자는 죽어가도
꽃집 처녀는 거기 가만 서 있다.
물론 이 모두는 매우 슬픈 일
그 여자는 무언가 해야 한다
.......
                        ....프레베르, [꽃집에서] 중에서

  노트의 맨 마지막에 적혀 있는 시를 다시 한번 숨죽여 읽어 본다. 
  오늘 아침 변함없는 일상 속에서 불현 듯  느껴졌던 작은 움직임은 지금 내 안에서 크게 
흔들리며 이런 말을 전해 오고 있다. 이제 그 노트를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고, 어서  서둘러 
겨울로부터 걸러 나오라고.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 동안 애써  억눌러 두었던 움직임이 기지개를 켜
는 이 순간, 또다시 어딘가로  도망치려 한다면 나는 영원한 무기력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나는 이제 움직임을 따라 방향을 잡으며 어디론가 나아가야만 한다.
  [커피 마실래?]
  답답한 사무실을 벗어나 복도로 나서니 자판기 앞에 서 있던 미영이 손짓을 한다. 미영이 
뽑아주는 종이컵의 커피를 입에 가져가는 순간, 화사한 꽃꽂이를  든 여자가 현관문을 밀고 
들어선다. [월요 초대석]의 녹화 때 쓰일 꽃인 모양이다. 그 프로그램의 MC를 맡고 있는 미
영이 여자를 향해 인사를 한다. 나는 미영에게 말한다.
  [(월요 초대석)이 꽤 반응이 좋은 모양이더라. 외부 모니터를 보고  국장이 아주 흡족해했
다던데......]
  [아직 몇 회 안 나갔으니까 그렇지. 이런 형식은 인터뷰 대상 선정이 제일 중요하잖아. 앞
으로 계속 적당한 인물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여긴 워낙  인구도 적고 문화적으로도 
소외되어 있는 터라 특별한 사건이나 특별한 인물이 드물어서 ......]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어. 넌 라디오 진행할 때에도 일반 청취자
들한테서 훨씬 더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끌어냈잖아. 사실 [월요 초대석]도 그 능력
을 인정받아서 맡게 된 것일 테고.....]
  [어쨌든 나로서는 좀 뜻밖의 일이긴 했어. 방송사 합병이니 뭐니 해서 분위기가 어수선해
진 데다 로컬 방송 비율도 늘어나는 바람에 나한테까지 MC 자리가  돌아온 것일 테지만..... 
다들 자기 목숨 챙기느라 바쁘고 어지러울 때일수록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잘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어. 네 말대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끌어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회사가 합병이 되든 흡수가  되든 개인적으로는 전문성만 있으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거잖아. 달리 어떤 방법을 찾는 것보다.....]
  미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TV 스튜디오의 문이 열린다.  조금 전에 싱싱한 꽃꽂이를 
들고 들어갔던 여자가 시들어 고객 숙인 꽃꽂이를 손에 들고  나온다. 오늘 아침 뉴스 데스
크의 어두운 한쪽 끝에서 내 시선을 끌어당겼던 바로 그 꽃들이다.
  시든 꽃과 싱싱한 꽃이 자리바꿈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착잡해진다. 뿌리 
쪽의 줄기를 잘라버리고 오로지 절정의 한순간만을 붙잡아 놓은 저 꽃들.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불임의 존재. 그는 비겁했다. 젊음의 절정에서 스스로 뿌리와 줄기를 잘라버리다니. 
그렇게 해서 꽃으로 남는다 한들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니? 아직도 그 사람 생각하니?]
  내가 아무 말 없이 커피만  홀짝거리자 미영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한다. 지난 가을과 
겨울을 건너오는 동안 내게 가장 큰 의지가 되어 주었던 미영이었다. 그녀에게 모든 얘기를 
털어놓으면서, 그리고 그녀를 따라 방송에 몰입해 들어가면서 나는  저 혼미한 시간들을 견
뎌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견딤의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이제는 그 견딤을  넘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그 남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는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거
리는 확보가 된 것 같아.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그 남자가 세상을 버린 것은 어쩌
면 삶에 대한 집착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  집착이 부러워. 난 그 동
안 내 삶으로부터 도망치면서 내 삶을 방치한 채 살아왔거든]
  내 말에 미영은 양손으로 종이컵을 구기며 말한다.
  [어쩌면 그 남자, 알고 보면 지독한 자기 도취병 환자였는지도  몰라. 자살을 기도하는 사
람이나 특정인을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 스토커의  공통점이 뭔지 아니? 바로 자기  자신을 
극도로 소중히 여기는 자기애 인격장애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야. 병적인 나르시시스트인 
셈이지. 하지만 그 남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허상에 더욱 극단적으로 집착한 
경우였나봐. 허상이 사라져버렸거나 자신을 만족시켜 주지 못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
지. 그래서 폭력을 행사해 버린 거야. 허상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해서]
  미영의 손 안에서 완전히 구겨져 버린 종이컵을 나는 그저 묵묵히 바라본다.
  그날 밤, 어두운 복도에서 [아, 저기.....]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내 눈을 바라보며  잠시 머
뭇거리던 그 순간, 그가 내게 하려고 했던 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내게서 몸을 돌리며  어
깨 위로 가늘고 하얀 손가락들을 올려 보였던 그 짧은 손짓의 의미는......

  오후의 햇살을 받은 자동차는 이 세상 물건이 아닌 듯  눈부신 흰빛을 뿜어내고 있다. 점
심 시간을 이용해서 세차를 끝낸 덕분에 그 빛은 더욱 현란하다. 저  빛에 취한 채 그냥 이
대로 살아간다 해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적당히 월급을 받고 저축도 하고 차도 바
꾸고 집도 넓혀가면서.....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는 아마 거울 속의 나를 볼 때마다 내 얼
굴의 음화도 함께 보게 될 것이다. 마치 나의 잃어버린 이란성 쌍둥이 같았던 그 남자의 얼
굴도 함께.
  창 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사무실 안으로 돌린다.
  항아리 모양의 투명한 유리병은 보라색과 흰색이 뒤섞인 자잘한  꽃들로 가득하다. 늘 다
른 꽃ㅢ 배경으로 쓰이던 꽃들이 오늘은  유리병을 가득 채우며 주인공으로 자리잡은  것이
다. 나는 이제 저 꽃의 이름을  안다. 미스티 블루.... 안개보다 진하지만 이슬비보다는  여린 
비가 내려서 우울증 환자가 많아진다는 날씨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내 서른두번째의 생
일과 함께 미스티 블루의 습한 일기가 찾아왔을 때, 수림은  같은 이름의 꽃을 내게 선물했
다. 벌써 한 달 전의 일이다.
  꽃을 바라보자니 저 작은 꽃  하나마다 지나온 시간들이 되살아 나는  것 같다. 스스로를 
혐오하며 준에게 몰두하는 것으로 도피했던 시간, 나 자신의 꿈보다 부모님의 꿈을 절충하기에 
바빴던 시간,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외면하며 무기력의 늪에  빠져 살아왔던 시간, 그러다 
예기치 않은 한 남자의 간섭을 통해 내 존재와 정면으로 마주설 수밖에 없었던 시간.....
  그러한 시간들을 거쳐 나는 지금 여기에 으르렀다. 내가 떠나 보내려 했고 무시하려 했으
며 차마 가까이 할 수 없었던, 명확하지는 않으나 그 안에 무언가 분명히 깃들여 있는 세계
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냐고 중얼거리는 지금 이 시간.
  지난 가울, 그의 노트를 서랍 깊숙이 넣어둔 채 나는  한동안 게속해서 꼬리를 물고 이어
지는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삶이 왜 하필 나의 삶 속으로 얽혀 들어왔는지, 지난 여름 
내내 떠밀려가듯 치러낸 생각의 멀미들이 왜 하필 그의  죽음으로 마감되어야 했던 것인지, 
나의 일상으로 틈입해 들어와서 나의 삶에 함부로 개입한 그 남자의 의미는 과연 무어인지, 
그 모든 것에 대체 어떠한 연결 고리가 숨어 있는  것인지... 끝없이 이어지는 그 질문을 피
해서 나는 본능처럼 몸을 움츠리고 얼어붙은 계절 속으로 숨어버렸던 것이다.
  이제까지는 그랬다. 본래의 나를 감춘 자리에 늘 타인을 의식하며 타인 앞에 보여지는 내
가 있었다. 그것을 본래의 나라고 생각했다. 아니, 아닌  줄 알면서도 그렇게 믿고 싶어하며 
살아왔다. 낙인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덮고 감추어도 끝내 본래의 제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저주의 상처를. 어쩌면 그는 그 말을 하러 내 안에 들어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네가  가야 
할 길은 그게 아니라고. 더 늦기 전, 네 안에 감춰진 진짜 너의 모습을 보라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다시금 노트를 내려다본다.
  그가 내 안에 들어왔던 봄에서  가을까지. 그리고 그가 스스로 세상을  버리며 내 곁에서 
떠날 가을에서 붐까지.
  아주 긴 잠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이다.  이제, 숨가쁘게 나를 몰아붙이던 그 숱한  질문과 
정면으로 마주서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겠다.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
국은 이런 날이 내게 다가오리라는 것을. 삶의 불가해한 모습 앞에서 내가 궁극적으로 어떤 
포즈를 취할 것인가를.
  서랍을 열어 얌전히 노트를 집어넣은 후, 희고 깨끗한 종이 한 장을 꺼낸다.
  삶이 내게 후려친 질문에 대해서 나는 앞으로 한순간에 사라질 말이 아니라 기나긴 글로
써 대답을 해나갈 작정이다. 우선, 분과 초를 다투며 구어체로 글을 써오던 습관부터 버려야 
할 일이다. 끈질기게 한뜸 한뜸 써나갈 글이 끝내 요령부득의  대답이 되어 버린다 해도 어
쩔 수가 없다. 삶이 내게 요구하는  것은 어차피 그 대답을 위한 과정일  뿐임을 나는 지금 
체질처럼 깨닫고 있으므로.
  눈앞에 명멸하는 숱한 단어들과 씨름하는 동안에는 컴퓨터 자판도 두드리지 않을  생각이
다. 가능하면 펜으로 쓰고 싶다. 뒷걸음질치듯. 그래,  나는 지금 뒷걸음질치려는 것이다. 저 
뒤쪽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그 무엇을 발견해 내기 위해 어리석고 뒤늦은 출발을 하려는 것
이다. 빠르고 명확하고 현란한 것들만이 환영받을 게 분명한 새로운 세상이 임박해 오는 이 
시점에서.... 그러나 미영의 말대로 [희망보다 절망이 더 많을 거라는 게 빤히 보이는데도 그
만둘 수 없는 일]을 드디어 갖게 되었으므로 나는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막상 펜을 손에 들자, 무겁다. 하얀 종이마저도 무겁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이제 때가 되었다고, 나는 나를 격려한다. 
  어딘가 낯선 도시로 옮겨가 조그만 서점이나 문구점을 차려놓고 무작정 시간을  흘려보내
는 것은 어떨까. 늘 시계 초침을 의식하며 살아야 했던 시절들이 아득해질 때까지.... 그러다 
보면 나는 서른세번째의 생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땐 내 앞에 새로운 연대가 시작되어 
있겠지.
  서른셋에 내 인생의 리셋 버튼을 누른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그다지 새롭거나 의미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그러한 표면적인 변화를  지나치게 두려워했던 한 남자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리셋 버튼을 누르려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라고.  서른
셋은 리셋 버튼을 누르기에 아주 적당한 나이가 아니겠냐고.
  내 앞에 놓여진 종이 한 장.
  그 하얀 빛에 초점이 흐려지며 눈앞이 아득해진다. 1년 전, 그리고 10년 전, 20년 전의 기
억들..... 모든 것은 하나의 중심에 닿아 있었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인 것 같다. 흐르
고 흘러 제자리로 돌아오면 그 테두리 바깥으로 또 하나의 원을 반복해서 만드는 동심원과 
같은 것.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며 우리는 삶의 나이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33세를 향해 달
려가는 나는 지금 그 중심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다.
  이 도시를 떠나야만 한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깊이 침잠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솟아올라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 남자처럼 세상의 통념에 휘둘려서는 안  될 
일이다. 경직된 생각을 버리고 좀더 유연해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진
정 나 자신이 원하는 내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누군가와 소통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  진
정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고 싶다.
  펜을 쥔 손에 잔뜩 힘을 준 채 또박또박 글자를 적어 내려간다. 
  머뭇거리는 마음이 고개를 들 때마다  아침에 보았던 꽃들을 생각한다.  시들고 말라버린 
채 어둠 속에 엎드려 있던 꽃.... 이제 내 앞의 꽃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자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흔적이 화석이 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그 
흔적을 고스란히 되살려내어야 하는가. 그것은 지금 내 앞에 무거운 숙제로 남겨져 있다.
  이윽고 나는 내가 써놓은 사직서의 낯선 글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참으로 오랜 망설임의 시간이 끝났다. 새로운 봄과 함께 다가온  내 안의 움직임은 더 이
상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일으켜 세운다. 이제 내가 가야  할 곳은 꽃이 아닌 열매의 
시간. 그러자면 물론 오랜 불임기를 거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내 정신의 이란성 쌍둥이가 
그랬듯 영원히 그 불임기에 멈춰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내 삶
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처럼 쉽게 꺾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이제 새롭
게 가고자 하는 내 길의 운명이며 한계라면 그 운명과 한계조차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열
매의 시간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본래의  내가 아닌 누구에겐가 보여지기  위한 꽃으로서의 
시간은 이제까지로도 충분하다. 나는 한 손에 사직서를 들고  제작국장의 책상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리고 내 인생의 첫 번째 여름을 향해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긴다.
  그 여름은 아름다우면서도 뜨겁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벌써 얼굴에 닿는 햇살이 제법 따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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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리

  다행히도 나는 세 군데의 대학에  모두 합격했다. 하지만 이미 우리  집이 경매에 넘어간 
상태에서 들려온 그 합격 소식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당장 옮겨갈 집을 걱정하는 
엄마와 아빠 아에서 나는 차마 어느 대학에 등록해 줄  거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잘못하
면 대학 가지 말고 당장 아디든 취직이라도 하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2월로 접어들어 등록 마감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는데도 여전히 아빠와 엄마는 내
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K 프로덕션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그
의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때때로 잔심부름을 하기도 하면서,  간혹 그가 촬영을 나가면 
가게를 지켜주기도 하면서.
  [직원도 한 사람 없이 그 동안 불편하지 않았어요?]
  [원래 여직원이 하나 있었어. 한때는 촬영 보조를 따로 두기도 했었고]
  [일짜감치 정리해고를 한 모양이군요]
  [그래, 작년 말부터 일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바람에.....]
  내가 이곳을 드나든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도 일거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무료함을 참지 못해 가게 문을 걸어놓고  커튼 뒤의 침대에서 둘이 함께 
뒤엉켜 들때에도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일은 이제 거의 없었다. 그는 주로 포르노 테이프를 
CD에 옮겨서 수없이 복제하고, 그것들을 포장해서 등기로 부치고, 수시로 울리는 호출에 응
답해 통장 계좌번호를 불러주는 일 따위로 시간을 보냈다. 간혹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나가
서도 결혼식 장면이나 담아올  뿐이었다. 가게의 유리문에 붙어  있는 [방송용 디지털 영상 
제작 시스템 완비]라는 글자들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영상 홍보물 제작은 물론이고 컴퓨터
를 이용해서 사진을 편집하고 장식해 주는 일거리조차 이제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하긴 특별한 현상도 아닐 것이었다. 세상 전체가 어두운 수렁에 빠져든 것 같은 분위기에
서 그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수렁 속에서 그가  은밀히 불법 
CD를 제작하고 그것을 누군가 은밀히 구입하고 있듯이, 아빠도 어디선가 은밀히 무슨 일인
가를 벌이고 있으리라 나는 믿고 싶었다. 마감 직전에 등록금을 턱 내놓으며 서울로 올라가
거라, 말할지도 모른다는 눈먼 기대에 빠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  눈이 
너무 밝았다.
  차라리 다른 일에 빠져들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속편한 상황이었다. 나는 그에
게서 본격적으로 홈페이지 제작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내 홈페이지에  단순한 이미지 
나열보다 복잡한 테크닉을 적용해 보고  싶었다. 태그 사용법에 익숙해질수록  그것은 내게 
무척 흥미로웠다. 모든 것이 내가 의도한 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참으로 황홀한 일이었다. 오
늘 그는 내게 웹에서 이미지를 다루는 방법을 꼼꼼히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잘하면서 당신은 왜 홈페이지를 안 만들어요?]
  [지금 구상중이야. 난 완벽하게 구상한 뒤에 일을 시작하는 편이거든. 더구나 단순히 취미
로 시작할 일도 아니라서.... 신중해야지]
  [어떤 걸 구상하고 있는데요?]
  [뭐든 돈이 될 수 있는 것.  예를 들어 포르노 잡지를 생각해봐. 인터넷에  웹진 형식으로 
만들어 올린다면 종이 값 안 들지, 인쇄비 안 들지, 검열 허술하지, 하여튼 엄청나게 이점이 
많은 거야. 물론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홍보를 열심히 해야겠지만. 아니면 다들 알아서 
찾아올 만큼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치는 곳으로 만들든가]
  유통망으로서의 인터넷에 대한 얘기는 언젠가 동현이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아이의 
꿈은 돈벌이가 아니라 컴퓨터 애니메이터가 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새삼스레 동현이의 얼굴
이 떠올랐다. 두 달 전, 내 홈페이지에 사진을 올리기  위해 스캐너를 물색하던 그때, 이 가
게가 아니라 동현이를 찾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우리 관계는 다시 회복되었을
까. 하지만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대충 어떤 방향으로 구상하고 있는지 말해 줄 수 없어요? 정말  포르노 웹진이라도 창간
할 생각인가요?]
  그는 대답 대신 입술 한쪽 끝을 슬쩍 올려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내게 되물었다.
  [너야말로 도대체 뭘 만들고 싶은 거니? 테크닉 실험을 하기 위한 페이지도 아닐 텐데..... 
뭔가 주제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도대체 저 홈페이지의 테마가 뭐니?]
  [테마는 내 몸이에요. 이제 천천히 만들어가야죠.  지금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이
를테면, 검은 옷을 딱 달라붙게 입고 사진을 찍는 거예요. 내 몸의 실루엣을 표현하는 거죠. 
그걸로 뭔가를 말해 보고 싶어요. 분노라든지 권태라든지.....]
  [그걸로는 부족해.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다고. 재미있는 사이트들이 셀  수 없이 많은
데 누가 그런 막연한 걸 애써  보러 오겠니? 그렇게 소극적이어서는 안  돼.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뚜렷이 밝히는 게 중요해.  일단 말이지, 자기를 철저하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한번 
해봐. 나는 광고 모델이 되고 싶다, 나를 써달라,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는 식으로....]
  [광고 모델 같은 건 싫어요]
  [그럼 대체 뭘 원하는데?]
  [몰라요. 아무튼 특이한 것. 뭔가 다른 것. 그런 걸로 나를 알리고 싶어요]
  말하면서 나는 답답했다. 아직까지도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홈페이지를 만들어 올리고 몇 달이나 지났는데도 나는  여태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 말했다.
  [일단 그걸로 시작부터 해. 광고 모델이 뭐가 어때서  그래? 넌 지금 구체적인 실행이 필
요한 단계야. 너를 알리기엔 광고 쪽  일이 제격이지. 너를 충분히 알린  다음에, 그 다음에 
뭔가 다른 것을 추진해도 되잖아]
  그는 지금 당장 시작하자며 디지털 카메라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 나를 커튼 앞으로 몰아
세웠다. 나는 엉겁결에 푸른 커튼을 배경으로 그를 향해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카메라 앞에서 표정이 굳어지는 것 때문에 늘 걱정이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자연스
러운 표정과 자세가 나왔다. 내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내가 그에게 익숙해졌다는 증거였다.
  나는 어느새 비슷비슷한 자세가 지겨워져서 겉옷을 하나씩 벗어들고 있었다. 그가 키득거
리며 재미있어했다. 내친김에 나는 그를 커튼 뒤편으로 끌어들여서 속옷까지 다 벗어버리고 
말았다. 일단 한번 찍어보자는 생각이었다.  디지털 카메라이므로 따로 현상과 인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좀더 대담하게 만들었나 보다.
  [역시 테마로 삼을 만한 몸이야. 특정 부분만  강조되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몸이거든. 게다가 그 몸을 잘 살려주는 얼굴형이고..... 작은 얼굴, 작은 턱.  전형적인 세기말
의 미인형이지. 너한텐 다 벗고 나오는 광고가 제격일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나는 괜히 흐뭇해지고 있었다.
  [일단 홈페이지를 이력서처럼 활용하기만 해도 충분해.  이 정도면 이력서에 넣을 사진은 
넉넉하겠다]
  카메라를 컴퓨터에 연결하자 방금 찍은 내 모습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플래시 없이 형광
등 아래에서 찍었지만 그럭저럭 깨끗하게 나온 듯했다. 커튼 뒤에서 찍은 누드는 형광등 불
빛이 제대로 비치지 않은 터라 어두운 실루엣처럼 보여서 더  마음에 들었다. 그가 사진 편
집 프로그램으로 적당히 손질을 하자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괜찮네요. 하지만 다음에 제대로 준비해서 찍을게요. 이건 너무 아마추어 모델 같아]
  [준비할 게 뭐 있어? 이 정도로도 아주 좋아. 완전히 누드도 아니고,  지금 그대로 홈페이
지에 실어도 되겠네, 뭐. 광고 회사나  모델 에이전트 같은 곳에 따로  메일을 보내봐. 일단 
홈페이지까지 찾아오기만 하면 누구라도 관심이 생기겠어. 이건 쉬운 일이잖아. 나처럼 복잡
할 것도 없지]
  [당신은 대체 무슨 사업을 구상중이길래 그렇게 복잡해요?]
  [비밀이야]
  하지만 대충 짐작할 수는 있었다.
  [혹시 저 포르노 파일들을 인터넷에다 올려놓으려는 거 아니에요?  다운로드 받으려면 신
용카드 번호를 적으시오, 뭐 그렇게.....]
  [대강 비슷해. 역시 넌 눈치가 빠르구나]
  [요즘 당신 관심사가 그거잖아요. 하지만  위험하지 않겠어요? 우리나라에서 그게 가능할
까?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이미 낡은 방식 아닌가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겠지. 새로운 방식도 얼마든지 궁리해 볼 수 있는 거고..... 그러니까 
지금 계속 구상중이라고 하는 거잖아]
  그의 주장은 이런 거였다. 요즘 같은 경제 불황으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때에 사
람들은 대개 무언가 강렬한 것에 빠져들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도박, 마약, 섹스,  특히 
공격적인 성폭력.... 하지만 그런 것을 쉽게 행동에 옮길 수 없는 까닭에 사람들은  잠시라도 
대리 체험을 느낄 수 있는 비디오나 게임 같은 것을 찾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쪽 산업
이 활성화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 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순간적으로 현실의 고통을 덜어주기는 하
겠지만 어차피 고통을 없애지는 못하잖아요. 더구나  먹고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한가롭게 
그런 걸 볼 시간이나 있겠어요? 오히려 의욕이 떨어지면 성욕도 떨어져 매춘 같은 것도 줄
어들 거라는데]
  나는 어떻게든 우겨보고 싶었다. 인간이  그렇게 단순한 동물이라는 걸  어쩐지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 자신도 그렇게 답답한 현실의 도피처로 매일 이곳을 찾고 있는 형편이면서도.
  [아니야. 지금이 무슨 전쟁중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써가며 놀러다닐 처지는 못 되
니 대부분 방안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 맞아, 남자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발기도  제
대로 안되고 그러지. 하지만 그런 만큼 더욱더 대체물이 필요해지는 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심리적인 본능은 죽지 않거든]
  [섹스에 대한 대단한 낙관론이로군요]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왜  그런다고 생각하니? 그게 실제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
니? 사람들은 그저 그런 것에 목을 맬 뿐이야. 어딘가에  매달리면서 답답한 현실을 잊어버
리고 싶은 것이지. 옛날이 좋았다, 하는 식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도 마찬가지일 거야. 하긴 
뭐 다들 그 게 복고풍의 드라마나 소설에  빠져서 예전의 헝그리 정신을 되살리고  가족을 
챙기고 하는 식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들은 그들대로 그렇게 사는 거야. 나는 내 
방식대로 사는 거고. 나는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 돈이 안 되더라도 앞서가는 게 낫지, 
뒷걸음질치는 건 우선 내가 싫어]
  [그건 나도 그래요. 다들 손 붙들고 이겨보자고  맨정신으로 외치느니 차라리 나 혼자 환
상에 빠져 허우적대는 게 훨씬 낫죠]
  우리는 같은 결론에 도달한 사람답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  받으며 커튼 뒤로 향했다.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이미 우리는 약간의 몸짓만으로도 의사 소통이 가능해지고 있
었다. 섹스 직전의 가벼운 논쟁은 우리에게 아주 효과적인 전희였다. 그와 나는 침대 근처에 
이르자마자 성급히 엉겨붙기 시작했다.
  뜨거운 기운이 천천히 목젖까지 올라와 이윽고 정수리를 타고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완벽
하게 몰두했고 정말로 모든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었다. 내가  어
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그런 것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 나는 그의 몸 위에 올라앉아 헤드뱅잉을 한다. 음악은 필요 없다. 내 몸 깊은 곳에서
부터 밀려오는 파동, 내 머릿속을 미친 듯이 맴돌고 있는 귀울림, 그것이면 충분하다. 몇 달 
동안 다듬지 않은 머리카락은 어느새 어깨를 덮을 만큼 길게 자라나 사정없이 내 얼굴을 때
리고 있다. 그는 침대에 반듯이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가끔씩 엉덩이를 힘차게 
들썩거리며 내 몸짓에 장단을 맞추기도 한단.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며 머리를 흔들다보면 때로는 그의 가슴이, 때로는 그의 무릎이,  내 
눈앞에 낯설게 떠오른다. 그의 가슴이, 그의 무릎이, 내 눈앞에서 점점 거대해진다. 나는  기
어이 그의 가슴에, 그의 무릎에, 무너지듯 파묻히고 만다.

  [도대체 넌 어딜 그렇게 싸 다니는 거냐?]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빠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현행범을  붙잡은 듯 의기양양한 목소리였
다. 나는 현관에 선 채 아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잔뜩 술에 취해  있었
다. 그렇다면 대꾸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신발을 벗고 2층을 향해  발걸음
을 떼기 시작했다.
  [대답해 봐. 어딜 다녀오는 길이야?]
  아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좀 놔둬요. 저도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엄마가 소파에 앉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녀에게 모든 걸  맡
기고 나는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져주기만 하면 될 것이다.
  [도대체 뭘 하고 돌아 다니는 거야? 내일이 등록 마감인 거 알기나 해?]
  나는 계단을 오르다가 멈춰 섰다. 그래, 그거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지. 내일이 대
입 등록 마감일인 걸 알기나 하냐고.......
  [마감이면 뭘해요? 저 가고 싶은 대학에는 가지도 못한 텐데......]
  여전히 힘없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계단에 주저앉았다.  어쨌거나 나에 대한 얘
기가 진행중이니 한번 들어나 봐야겠다 싶었다. 마감 전날 밤이니 어떻게든 결론이 날 모양
이었다.
  [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서 어떻게 살아? 여기 대학이라도 보내주는 게 어디야? 서울에 
있는 대학은 날 속이고 응시한  거잖아. 도대체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뱃속에 허영만 잔뜩 
집어넣었어?]
  [그게 왜 허영이에요? 남들은 가고 싶어도 성적이 안 돼서 못가는 대학이에요]
  [여기 사범대가 거기보다 커트라인이 높아. 그런데도 마음에 안 든다는 게 허영이 아니고 
뭐야?]
  [서울 보내봤자 등록금 조금 더 보태고 하숙비만 마련하면 되는 건데.....]
  [등록금 조금? 하숙비? 그럼 마음대로 해봐.]
  [어떻게든 되겠죠. 왜 유리 앞길을 나서서 막으려고 해요?]
  [남들이 들으면 웃어. 멀쩡히 대학 보내주는 아빠더러 딸 앞길 막는다고  하지 마. 당신이 
무슨 할말이 있어? 옷 가게 확장만 안했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됐어]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말아요. 내 가게는  당신 사업 규모에 비하면 구멍가게나 마찬가지
잖아요]
  엄마의 목소리가 비정상적으로 커졌다. 그 길고 하얀 목에  핏대가 오르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주제를  벗어
나버린 이상 계속해서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내  방에 들어와 문을 닫은 뒤에도 
두 사람의 목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언제나 가련한 모습을  연출해서 아빠의 흥분을 가라
앉히던 엄마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더 흥분하고 있었다.
  [자기가 잘못해서 회사가 그렇게 된 걸 가지고 왜 나한테 와서 이래요? 옷 가게에 투자하
면 얼마나 했다고..... 이제 와서 그 돈이 아까워요?]
  [내가 뭘 잘못했어? 난 최선을 다했다고. 그런데도 모든 게 엉망이 돼버렸어]
  [나는 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줄 알아요? 가게에 앉아서 놀기만 했냐구요]
  [그래서 이 모양이 된 게 다 내 탓이란 말이야?]
  [그럼 내 탓인가요?]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흘렀다. 이런 상황에 웃음이라니....... 거울 앞에 서보니 틀림없
이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올라 있다.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미소였다. 입술 한쪽 끝이 묘한 
각도로 올라간 낯익은 형태의 미소. 아니, 냉소.
  두 사람 다 방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거실에서 고함을 지르는 건 나를  의식
해서일까? 이런 식으로 나를 설득하려는 것일까? 이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그러니 무
조건 이해하라고.....
  음악을 틀어서라도 귀를 막아보려고 나는 오디오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비명처럼 들려
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나를 다시 방문 앞으로 이끌었다.
  [어서 등록금이나 내놔요.]
  그래, 어떻게든 등록은 하고 볼 일이다. 어느 대학이든. 그러나 아빠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그건 당신이 해결하기로 했잖아]
  [나한텐 이제 한푼도 없어요]
  [잘한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그 돈도 없어?]
  [당신이야말로 어쩌다가 그 정도도 못 내놓게 됐어요? 숨겨둔 돈이 있어도 당신한테 있지 
나한테 있겠어요? 게다가 유리는 장학금도 못 받는대요. 사범대 합격한 것만 해도 다행이라
구요]
  [그럼 대학 보내지 마. 언제부터 계집애들을 대학까지 보냈다고.....]
  [어서 등록금 내놔요. 우리 유리 서울에 못 보내는 것만 해도 억울해 죽겠어]
  [그럼 아예 둘이 나가 죽든지]
  [내가 왜 죽어요? 당신한테 유리 등록금  받기 전에는 못 죽어요. 등록금뿐인가.  내 젊은 
날을 다 돌려받기 전에는 못 죽어요.  당신이 사장시킨 내 모든 것들을 보상받기  전에는..... 
내가 바보였어. 유리가 뱃속에 들어서버려 당신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니.... 이렇게도 끝날 수 있는 게 인생인데....]
  신파극이 따로 없었다. 무언가 끈적끈적한 것들이 온몸에 들러 붙는 기분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뭐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다. 그저  깔끔하고 세련되게 살아갈 수만 있다
면 족한 것이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깔끔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단절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 들어갈수록,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질컥질컥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돌아보니 주변이 온통 진창이었다.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세상은 막연한 꿈만으로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집이란 결코 사랑으로 유지되는 곳이 아니었다.
  엄마는 정말 바보였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은 이 세상에  어쩌자고 나를 내보낼 생각을 
했던 것일까. 불행의 순환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과감한 단절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 나를 뱃속에 품고 있던 그 젊었던 엄마에게.
  내게 생명을 주고 아빠에게 종속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엄마가  잃은 것은 무엇일까. 도
대체 그녀의 무엇이 사장된 것일까. 스스로의 능력? 더 좋은 남자를 만날 가능성?
  [그러지 마. 제발 그러지 마.  그러지 않아도 강물만 보면  뛰어들고 싶어. 높은 건물에만 
올라가도 뛰어내리고 싶다구. 미치겠어. 날 자극하지 말아, 제발....]
  아빠의 목소리가 호루라기 소리처럼 들려왔다. 나는 단숨에 방문을 열고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와 현관을 나섰다.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나는 집을 
빠져나와 시내의 한 작은 카페로 숨어들었다. 그 집안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나는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동현이를 만나던 시간들을 회상하려고 애썼다. 그 카페는 동
현이를 만날 때 약속 장소로 자주 이용하던 곳이었다. 그  아이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카페 
안 곳곳에 묻어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까닭인지 동현이의 얼굴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하려 애쓸수록 더욱 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테이블에 놓여진 작은 전화기를 끌어
당겼다. 그리고 동현이의 삐삐 번호를 누른 뒤 음성 사서함에 대로 중얼중얼 말하기 시작했다.
  [나야.... 어떻게 지내니? 난 요즘 모든 게 엉망이야. 등록 마감이 내일인데.... 대학이나 갈 
수 있을 지 모르겠어. 정말 막막해. 꿈을 이루기 위해서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가출까지  했
던 네 용기가 부러워. 우습지? 너한테 이런 말이나 하다니.... 너 지금 어디 있니? 여긴 코지
야. 여기 계속 있을 테니까 메시지 듣는 대로 나와줘. 안 되면 음성이라도 넣어주든지...]
  카페 코지에서 나는 세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동현이는  나타나지 않았고 내 호주머니 
속의 삐삐도 끝내 울리지 않았다. 늦은 밤, 내가 갈 곳은 K 프로덕션밖에 없었다. 그곳이 내
게 또 하나의 거대한 진창이 될 것을 예감하면서도 나는 터벅터벅 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
다. 차라리 그가 가게를 비우고 있었으면,  하고 잠시 바라기도 했지만 막상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그 유리문 앞에 당도하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그와 함께 잠들었다. 커튼 뒤의 침대는 비좁았고, 시트는 온통 축축하게 젖
어버렸지만, 거기서 나는 꿈도 없는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잠들기 직전까지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내 모든 기운을 일시에 빼앗아가 버린 손길이었다. 집요하게 내 중
심을 파고들어 기어이 울컥, 울컥, 희열을 내뿜게 했던 손가락들이었다.
  그날 나는 언젠가 동현이가 말했던 내 몸의 색다른 반응이 어떤 것인가를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내 몸에서 맑고 투명한 희열이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것을 분명히 감지할 수 있었
던 것이다. 끝없이 젖어들면서 나를 애태우던 그 무엇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에야 비로
소 하나의 물줄기가 되어 솟아올랐다. 그의 손과 입술이 펌프처럼 내 깊은 곳에서 물줄기를 
끌어올린 것이었다.
  껍데기만 남아 어디론가 한없이 흘러가는 듯한 느낌. 온몸이 텅 비어버린 듯한 느낌. 그것
은 자포자기의 대가로 얻어진 쾌감이었다.  날 마음대로 해요, 당신  마음대로 해요. 그에게 
내 몸 구석구석을 활짝 열어주며 끝없이 말하는 동안 나는 완벽한 체념의 상태에 이르렀고 
바로 그때 울컥, 새로운 쾌감이 배설되었던 것이다.
  날 마음대로 해요, 당신 마음대로 해요, 그날 밤 나는 잠결에도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고 한다.

  다음날 아침, 나는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 그와 한 차례 더  섹스를 나눈 뒤 정오가 다 되
어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전날 밤과 아침의 섹스를 번갈아  떠올
리면서 오래도록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줄기가 몸에 와닿는  감각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
졌다. 몸 전체가 아주 예민해진 느낌이었다.
  샤워를 끝낸 뒤 머리카락이 채 마르기도 전에 나는  침대에 누워버렸다. 이상하게 자꾸만 
졸음이 밀려들었다. 깨어보니 늦은 오후였다. 털레텔레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부엌에서  인기
척이 느껴졌다.
  [오늘 등록했다]
  무를 썰고 있던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그 말부터 했다. 내가 어제 외박을 하긴 했던가, 어
리둥절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내가 어디서 잠을 잤는지 전혀 궁금한 기색이 아니었다. 하긴, 
어쩌면 엄마도 어디선가 외박을 하고 들어왔을지 모를 일이었다.
  [돈 없다면서?]
  나는 퉁명스레 말했다. 어디서 잤니? 어느 대학에 등록했는데?  따위의 당연히 오가야 할 
질문들이 슬쩍 생략되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 무심한 척했다. 어
차피 뻔한 대답으로 돌아올 질문들, 해봤자 속만 상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낼 등록금이야 왜 없겠니? 앞으로가 문제니까 그러지]
  [천천히 썰어. 손 다치겠어, 엄마]
  [너도 각오하고 있어야 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 못하는 상황이야]
  [등록만 했으면 됐어. 이제부턴 나한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쓰니?]
  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내 방으로 올라왔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일단 상황은 
정리되어 있었다. 허탈한 기분 속에 나는 또 한번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렇게 잠에 취해서 흘려보냈다.  하지만 깊은 잠에 빠져들지는 
못하고 내내 어지러운 꿈에 시달려야만 했다. 악몽을 꾸게 되면 또 다른 꿈으로 그 꿈을 지
우려고 뒤척이며 억지로 잠을 청하는  식이었다. 오랫동안 내 침대 머릿장  안에 갇혀 있던 
곰, 토끼, 혹은 호랑이 모양의 봉제 인형들이 번갈아 그 어수선한 잠의 파트너가 되어  주었
다. 나는 동물원 우리의 녹슨 철문을 열 듯 삐걱거리는  머릿장 문을 열고 동물들을 차례로 
탈출시켜 내 잠의 베개로 삼았다.
  그 인형들을 끌어안지 않으면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던 때가 있었다. 소꿉장남보다 동물 
구경을 좋아하고 바비 인형보다 동물모양의 인형을 더 좋아하던 나를 위해서 아빠는 이 도
시의 작은 동물언을 지겹도록 드나들어야 했고, 엄마는 여러 가지 동물 인형을 구하느라 애
써야 했다. 생각해 보면 그리 멀지 않은 때의 기억이다. 그래, 그런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삼수생으로부터의 호출이 내 잠을 깨웠을 때, 나는 호랑이 인형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내
가 서울의 입시 학원에서 재수를 하는 동안  같은 종합반에 속해 있었던 그는 나를 만나러 
이 도시까지 내려왔다고 말했다. 정말 삼수생다운 행동이었다. 9개월 내내 우직하게 책만 들
여다보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한동안 호랑이의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섰다. 사흘 만의 외출이었다.
  [서울엔 언제 올라갈 거죠?]
  터미널에서 나를 보자마자 삼수생이 물었다. 나는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다음주 중에요]
  합격했느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렇죠? 저도  PC통신으로 찾아봤어요, 
이유리라는 이름이 있더군요, 동명이인은 아닐 거라 생각했어요, 라고 말하며 삼수생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그 대학에 가지는 않을 거예요, 라고 말하려다가 나느 그만두고 말
았다. 굳이 그런 말을 덧붙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얼떨결에 다음주 중에 
서울에 올라갈 거라고 말해 버리면서 나는 거짓말을 시작하고  말았다. 일단 시작하고 나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다시 안 만나면 그만이잖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돼. 삐삐 번호만  바꿔버리면 
해결될 거야.
  나는 가볍게 마음을 정리했다. 그리고 동현이와 함께 드나들던 여관으로 삼수생을 안내했
다. 오후 내내 이 도시의 곳곳을 헤매고 다니다 보니 어느새 우리 앞에 밤이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관에서 방으로 따라 들어가려는 나를 삼수생이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
는 씹던 껌을 뱉어내듯 말했다.
  [왜 그래요? 촌스럽게..... 정말 잠만 자려고 여관으로 가자고 했어요?]
  무엇이든 처음이 중요한 법이다. 거짓말이든  섹스든 얼떨결에 첫 테이프를  끊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어려운 것도 없어지고 두려운 것도 없어진다. 동현이와 함께 생애 첫 섹스를 
경험한 지 일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벌써 세 번째  남자를 경험하려고 한다. 세 번째
가 아니라 서른번째쯤 되는 남자라고 삼수생에게 거짓말을 해가면서.
  지금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내 몸밖에 없어.
  그런 생각으로 나는 최대한 자극적인 포즈로 옷을 벗기  새작했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삼
수생은 곧 결심한 듯 내게도 다가왔다. 내 정체를 파악했다는 표정이었다. 다행히도  삼수생
은 여자와 성에 대한 이중적인 사고 방식만은 충실히 익혀둔 모양이었다.
  그래, 네 맘대로 생각해. 그게 나한테도 편하니까.
  하지만 그러한 마음과 달리 내 몸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불편하고 재미없는  섹스였다. 
이젠 어느 정도 이력이 붙은 터라 자신있게 몸을 던졌지만 역시 섹스는 혼자서 하는 게  아
니었던 것이다. 삼수생은 너무나 서툴렀다. 그렇다고 해서 동현이와 같은 친밀감이 느껴지는 
몸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나는 허탈한 기분으로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기 전에 잠시 몸을 돌려 삼수생에게 말했다.
  [잘 자요. 푹 쉬고, 내일 아침에 연락해요]
  하지만 나는 내일 아침 호출기를 꺼놓고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내려온 삼수생에 대한 예
의는 이걸로 다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이 섹스는 나 자신을 완전히 방기하는 일종의 통과 의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낸 것 같다. 이제부터는 정말 어떤 남자든 다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졌다. 내 스스로가 정
말 하찮아졌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내 인생이 안쓰러울 이유도 없는 것이다.
  여관을 나서면서 나는 문득 내 친구 진아가 궁금해졌다. 지금쯤 무얼하고 있을까.  브래드
와 함께 떠났으니 분명히 이런 작은 여관이 아니라 근사한 호텔이나 콘도에 머물고 있을 것
이다. 이 시간쯤이라면 함께 침대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물론 다녀와서는 방을  따로 
썼다는 둥 밤새 얘기만 했다는 둥 내숭을 떨 게 분명하지만.
  오로지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진아에게 사정없이 무시당하는 비운의 브래드는 정말이지 
브래드 피트를 꼭 닮았다. 브래드네 집이 돈은 많은 모양인데.... 라며 머리를 굴리던 진아는 
결국 최근에 만난 법대생 쪽으로 마음이  기운 모양이지만 고교 시절부터 수시로  브래드를 
만나오던 습관을 여태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림]이 되는 남자를 옆에 끼고 다니고  싶어
하는 진아의 허영은 그만큼 집요했던 것이다.
  진아가 브래드와 헤어지지 못하는 건  어쩌면 섹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하고 재미없는 모범생인지라 진아도 어쩔 수 없이 [그 녀석]이라고 부르는 그 법대생보
다야 브래드가 훨씬 더 날렵하고 감각적일 것이다. 춤을 추는  모습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록카페의 조명 아래서 브래드의 유연한 몸은 가끔 나를 도발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너 그냥 브래드만 만나. 너한테는 브래드가 더 어울려. 그 녀석은 너무 답답하지 않니?]
  혹시라도 그 법대새안테서 연락이 오면 말을  잘 맞춰야 한다며 전화를 걸어온  진아에게 
나는 어제 그렇게 말했다. 진아의 사생활을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나한테까지 귀찮은 일을 
요구하는 건 어쨌든 짜증나는 일이었다. 암묵적인 용인 정도야 백 번이라도 해줄 수 있지만 
말이다.
  [브래드 걔는 비전이 없잖아. 지금이야 보기  좋지만 십 년 후를 생각해 봐.  걔가 도대체 
뭘 하고 있겠니? 기껏 장사나 하고 있지 않겠어?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덜떨어졌던 여자애
들이 의사 부인, 검사 부인 소리 들으면서 잘난 척하는 꼴 난 못 봐]
  [그럼 브래드하고만 놀다가 졸업하고 나서 의사나 검사랑 선을 보든지]
  [넌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너한텐 그게  가능할 지 몰라도 난 안 돼. 평범한 
회사원의 딸이 중매 시장에서 뭐 그리 인기가 있겠니? 어떻게 해서든지 지금 내 힘으로 비
전 있는 남자를 붙들어 둬야 한다고. 3학년만 돼도 늦어. 그 녀석만큼 무던한 애도 다시  구
하기 힘들단 말이야]
  누가 진아에게 그러한 세상의 이치를 가르쳐주었을까.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여겨지는 것
은 바로 진아와 나의 환경 차이였다. 부족할 건 없는  환경이지만 그래도 나 때문에 상대적
인 박탈감은 제법 느꼈을 법한 진아였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진아는 일찌감치 현실에 눈을 
떴는지도 HFMS다. 하지만 이제는 나 역시 중매 시장에서 인기를 얻기는 불가능해졌다. 내 
마음을 진아보다 한층 느긋하게 만들었던 우리집의 경제적인 여유가 사라져버린 지금, 이제
부터 나는 진아의 처세술을 부지런히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또 한번 철
이 들어가는 것일까.
  집으로 들어가려면 K 프로덕션을 피해 갈 수가 없다. 집을 나와서도 그곳을 피해 시내로 
갈 수가 없다.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위치에 그의 가게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벌레들
을 유혹하는 파리지옥풀이나 끈끈이주걱과도 같은 모습으로.
  지나가던 벌레가 슬쩍 닿기만 해도 순식간에 조개처럼 잎을 오므려 소화액으로 벌레를 분
해시켜 버리는 파리지옥풀, 혹은 잎에서 분비한 점액으로 곤충을 잡아먹는 끈끈이주걱. 나는 
수시로 저 유리문과 커튼 뒤로 빠려들어가는 한 마리  벌레와도 같았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벌레의 모습에서 탈피해 보자고 생각하면서 나는 K 프로덕션의 유리문 앞을 과감히 지나치
려 했다. 정말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곳 쇼윈도에 걸린 사진들이 느닷없이 나를 
잡아끌었다.
  장난스럽게 포즈를 취한 연인들의 사진, 소프트 포커스의 결혼사진, 쌍둥이처럼 닮은 어린 
남매와 함께 찍은 부부의 사진. 그의 손에 의해 컴퓨터로 편집되어 커다란 벽걸이에, 티셔츠
에, 물컵 혹은 열쇠고리 속에 자리잡고 앉은 그 사진들을 나는 새삼스레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마도 행복의 절정에서 찍은 사진들이겠지. 카메라의 렌즈를 바라보며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유리 너머의 사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잠깐 움직였을  때,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얼굴이 낯설어 나는 잠시 유리 표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
다. 간판의 노란 조명 아래서 과장된 명암을 드러낸 그  얼굴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사흘 동안 뭐하고 지냈니?]
  그의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문에 기댄 채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
었다. 오래전부터 그러고 있었던 것처럼.
  [그냥 좀..... 바빴어요]
  [들어가자]
  [지금 집에 들어가야 해요]
  [그럼 그러든지]
  그는 여전히 유리문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느닷없이 취위가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커피.... 끊여줄래요? 따뜻한 걸 한잔 마시고 싶어요]
  [냉장고 속의 캔 커피밖에 없어]
  [전에 내가 사다놓은 커피 믹스가 남아 있을 텐데.....]
  [이런, 기억력이 대단하군]
  그가 비로소 가게 안쪽으로 몸을 돌리며 덧붙여 말했다.
  [들어와. 끓여줄게]
  나는 또 이렇게 파리지옥풀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커피 믹스를 어디에 두었었지?]
  그의 목소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끈끈이주걱 옆으로 다가간다.
  [잠깐만 있다가 가 ]
  커튼 뒤편에서 그의 손이 허리에 와닿는 순간, 나는 몸을 빼며 가까스로 말했다.
  [어제부터 생리가 시작됐어요]
  그러고 보니 정말로 생리가 시작될  때가 된 것 같다. 갑자기  허리 아래쪽이 묵직해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싫다구?]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만이라도 그냥 집에 들어가도록 하자.
  [그럼 저쪽에 앉아 있어. 네가 침대 근처에 있으면 난 자제력이 약해져]
  [그럴게요. 커피 믹스는 저기 싱크대 위쪽 선반에 있을 거예요]
  그는 커튼 뒤편 한쪽 구석의 간이  싱크대로 향하고, 나는 커튼 바깥으로 나왔다.  비디오 
작업대 앞의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커튼 뒤에서 들려왔다.
  [전쟁은 아닌 모양이군]
  [뭐가요?]
  [전쟁중에 피난민 생활이 시작되면 신기하게도 여자들의 생리가  대부분 멈춘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런 것도 자연의 조화일지 모르지. 그러니까 생리가 순조롭다는  건 아직 살 만하다는 
얘기 아니겠어? 모두들 요즘 세상이 전쟁터 같다길래 난 정말 전쟁이라도 벌어졌나 했었지]
  그가 큰소리로 말하는 동안, 비디오 작업대 위에 계산기와 함께 놓여진 서류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카드 이용 대금, 자동차 할부금, 대출금 안내 등의 각종 명세서와 청구서였다.  독
촉장이라고 제목이 적힌 종이들도 꽤 보였다. 자세히 보니 명세서마다 미납금액란에 숫자가 
빾빽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래? 생리중에도 섹스를 잘만 하더니....]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그냥.... 피곤하기도 하고....]
  [벌써 권태기인가? 그렇다면 진짜 살 만한 모양이지?]
  [왜요? 당신은 살기가 힘들어요?]
  [응. 죽고 싶어]
  그가 두 개의 커피잔을 들고 나타났다.
  [이런 것 때문에?]
  나는 작업대 위의 독촉장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명랑한 목소
리로 말했다.
  [그래. 그게 다 나더러 죽으라는 소리잖아. 장비에 너무 투자를 많이 했어.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 손님들도 눈이 높아져서 싸구려로 하면 쳐다보지도 않았지. 야외촬영 비
디오를 찍을 때도 신랑 신부를 모실 자동차까지 신경 써야 하다 보니 집도 없는 내가  중형
차부터 마련하고....]
  [집이 없어요?]
  [늘 여기서 사는 거 안 봤어?]
  [난 따로 집이 있는 줄 알았어요. 일 때문에 여기서 먹고 자는 줄 알았죠. 아니면 나 때문
에.....]
  말하면서 조금 쑥스러웠다. 마침 주전자가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재빨리 커튼 
뒤로 달려갔다.
  주전자를 들고 와 커피잔에 끓는 물을 따르며 그가 말했다.
  [집이 따로 있으면 뭐 하겠니? 여기서 충분히 다 해결되는 데.....  난 기계들이 좋아. 돈만 
생기면 기계부터 사고 싶고, 좋은 기계들을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내 것으로 만들
고 싶어져.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기계가 시원찮으면 실력 발휘를 할 수가 없잖아]
  [그건 그래요. 무엇보다도 기계는 정직하죠. 투자한 만큼의 만족을 돌려주니까요. 나도 컴
퓨터나 오디오 기기에 관심이 많은 데... 하지만 점점 더  좋은 성능의 기계를 찾다 보면 그 
자체로 일종의 중독에 빠지는 것 같아요]
  커피잔을 받아들며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모뎀을 최신형으로 바꾸지 못해 속상한 
마음이 되살아난 까닭이었다. 컴퓨터에 관한 한 나는 이미 업그레이드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뭐든 마찬가지지. 우리를 즐겁게 하는 모든 것에는 중독성이 숨어 있는  거야. 기계든 술
이든 섹스든.... 실험실의 생쥐나 사람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고]
  [실험실의 생쥐?]
  [내가 얘기 안 했었나? 쥐를 이용한 실험.... 동물의 뇌 속에는 쾌락의 중추라는 게 있어서 
그걸 건드리면 어김없이 쾌락을 느낀대. 시상하부라던가, 하여튼 그런 이름인데.... 한번은 이
런 실험을 해봤대. 두 개의 버튼이 있는  작은 방에 쥐를 가두고, 한쪽 버튼을 누르면  먹을 
것이 나오게 하고 다른 쪽을 누르면 쥐의 뇌에 달아놓은 자극기가 움직여서 쾌락의 중추를 
건드리게 한 거야. 이때 쥐가 어느 쪽 버튼을 눌렀을 것 같니?]
  [양쪽 다 적당히 눌렀겠죠. 쾌락도 좋지만 먹고사는 것도 중요하니까]
  [아냐. 쥐들은 굶어 죽었어. 먹을 것이 나오는 버튼은 누르지 않고 쾌락을 주는 버튼만 일
분에 백 번도 넘게 미친 듯이 눌러대다가.....]
  푸른 커튼에 시선을 둔 채 커피를 홀짝이던 나는 한순간 숨을 멈췄다. 저 커튼 뒤의 침대, 
그리고 커튼 앞의 기계들은 쾌락의  버튼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미친  듯이 쾌락의 버튼을 
눌러대다가 굶어 죽는 생쥐의 모습에 내 얼굴이, 그리고 그의 얼굴이 겹쳐졌다.
  유리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찬바람과 함께 여자가 들어섰다. 이곳에서  제작되는 
영상 홍보물의 원고를 쓰는 일을 맡아 하는 여자였다.
  [지나가다가..... 이 늦은 밤에 불이 켜져 있길래 들여다봤어요. 마침  유리 학생도 있고 해
서....]
  오랜만에 마주쳤지만 처음 이곳에서 인사를  나눌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길고 두꺼운 
회색 원피스에 검은 반코트를 걸치고 갈색 뿔테 안경을 쓴 모습. 한 손에 편의점 비닐 봉지
를 들고 있는 것만 그때와 달랐다. 저  여자는 늘 저런 차림으로 다니는 것일까. 약간  들뜬 
듯한 목소리로 그녀는 두서없이 말을 이어가도 있었다.
  [요즘은 일이 많지 않은  모양이죠? 다들 그렇다고 하더군요.  통 연락이 없길래..... 아니, 
유리 학생이 와 있는 걸 보니 일이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그랬다. 한때 나는 이곳에서 비디오  제작물의 내용을 설명하는 나레이터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내게 접근해 온 과정의 하나일  뿐이었다. 사진을 스캔하려고 처음 
이 가게를 찾았을 때, 목소리가 참 예쁘군요, 라던 그의 첫마디는 미끼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 네... 이제 막 녹음을 끝냈어요. 물론 여기도 경제난의 영향을 톡톡히 받고 있죠. 이렇
게 가끔씩 일감이 들어오기도 하는데, 요즘은 거의 제가 원고를 써요. 경비를 줄이려니까 그
렇게 까지 됐네요]
  슬쩍 둘러대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여자의 목소리
가 과장되게 명랑해졌다.
  [그래요. 글쓰기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니까....]
  [아뇨. 그렇지는 않죠. 지금은 간단한 내용들이라서  제가 억지로 쓰고 있는 거죠. 복잡한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또 신세를 질 겁니다. 연락처는 그대로죠?]
  [네, 그럼.....]
  그녀는 그에게 목례를 하고 난 뒤 내 쪽을 흘깃  한번 바라보다니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유리문에서 채 사라지기 전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겠다고 말했다. 더 머물
러 있다가는 또다시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의외로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리고  생
리가 끝나면 꼭 오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 전에 오면 안 되나요?]
  [물론 언제든지 환영잊. 하지만 생리중에는 촬영을 할 수가 없잖아]
  [촬영?]
  [응. 유리가 제일 예쁠 때 모습을 찍고 싶어. 비디오로....]
  [생리중엔 안 예쁜가?]
  [아무튼. 생리 끝나면 꼭 와]
  알았다고 대답하며 나는 유리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을 막 밀고 나서는 순간, 둔탁한 검
은 물체 하나가 내 앞으로 가로막고 있는 바람에 잠시 멈칫했다. 조금 전에 이 문을 나섰던 
검은 반코트의 그 여자였다. 뿔테 안경을 고쳐 올리며 그녀는  나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
어보였다.
  [커피는 다 마셨어요?]
  [네?]
  뜻밖의 질문에 나는 그저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커피를 다 마셨는지 어땠는지 기
억도 나지 않았다.
  [커피물 끓이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늘 캔 커피를 마시잖아요. 손님들한테
도 그걸 권하고]
  [제가 사다 놓았거든요. 커피 믹스]
  [커튼 뒤의 싱크대에?]
  쇼윈도 너머의 커튼으로 눈길을 주며 그녀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주택가를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전 이쪽으로 가요]
  [우리집도 그쪽이에요. 그래서 늘 이 앞을 지나다니게 되죠. 가끔은 환한  대낮에도 이 유
리문이 잠겨 있을 때가 있었어요. ..... 저 남자, 참 특이한 사람이죠?]
  나는 말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이상한 여자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며  어
떤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일까. 여자는 집요하게 나에게 따라붙으며 말했다.
  [오늘 뉴스 봤어요? 동물원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는데.... 여기  호수공원 아래에 있는 
동물원 말이에요]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삼수생과 함께 오후 내내 이 도시 곳곳을 돌
아다녔지만 그쪽으로는 가지 않았던 터였다. 뉴스를 볼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난 그 동물원에 자주 가는데.... 하필 오늘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요. 좋은 구
경거리를 놓쳤잖아요. 동물원은 정말 세상의 축소판인 것 같죠? 그토록 은밀한 위험과 은밀
한 자극을 숨기고 있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진 순간, 여자는 왼쪽으로 몸을 틀며 말했다.
  [난 이제 이쪽으로 가야 해요. 궁금하면 뉴스를 봐요]
  그리고 곧 그녀의 뒷모습은 작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정말 이상한 여자였다. 그 골목의 모
퉁이를 지나치는 내 발걸음이 갑자기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후로 내내 뒷머리가 저린 느
낌이 들었다.
  우리 집 대문 앞에 이르러 나는 휙,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달이 한찬  부풀어올라 
있었다. 음력 정월 대보름의 달이었다. 곧, 생리가 시작될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다보니  갑
자기 내가 아주 동물적으로 변해  버린 느낌이 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이 오로지 
몸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달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간절히 꿈꾸던 시
절이 내게도 있었는데......
  그때 나는 일곱 살이었다.  추석 전날, 유치원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소원]이라는 단어를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추석날 달을 향해  소원을 빌어보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그  낭만적인 
숙제에 나보다 더 들떠서 달이 뜨기를 기다리던 엄마는, 소원은 남에게 말하지 않고 마음속
으로만 간직해야 이루어진다고 내게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내가 보름달을 바라보며 한동안 
눈을 깜박거린 뒤, 엄마는 곧바로 내게 무엇을 빌었냐고 물어보았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엄
마였다.
  [괜찮아. 나한테만 살짝 이야기해 봐]
  엄마는 끈질기게 질문을 계속했지만 나는 끝내 입을 꼭  다물며 고개만 흔들었다. 그것을 
말하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게다가 그 내용을 엄마가 알면 야단
을 칠 것만 같아서 더더욱 말해 줄 수 없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소원이라는 단어를 설명하
며 예로 들었던 것이 바로 부모님의 건강을 기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부모
님을 제쳐놓고 우리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의 건강을 소원했던 터였다. 갓 태어난 새끼를 어
디선가 데려와서 1년 가까이 정을 붙이고 지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그 무렵 강아지가 시름
시름 앓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젊디젊은 부모님의 건강보다 병든 강아지가 훨씬 더 
염려스러웠던 일곱 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아지는 죽었다.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빈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서였다. 그때 내가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부모님은 이후로 집안에 애완 동물을 들이지 않
았다. 그 대신 아빠는 나를 동물원에 더 자주 데려가 주었고 엄마는 강아지 대신 껴안을 수 
있는 동물 인형을 더 많이 사다 주었다. 이후로 내가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비는 일 따
위를 하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다. 나는 너무 빨리 죽음을 경험했고 너무 빨리 체념을 배웠
다. 살아 있는 강아지보다 봉제 인형 강아지가 휠씬 더 다루기 쉬울 뿐만 아니라 결코 내게 
슬픔을 안겨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저 보름달 덕분에 나는 예방주사를 맞듯 일
찌감치 희망과 절망의 상관관계를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저 보름달을 향해 소원을 빌어보고  싶어진다. 체념할 때 체념하
더라도 무언가를 간절하게 염원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대체 뭘 빌어야  하는 걸까? 몇 가지 
소원들이 두서없이 떠올랐지만 곧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막막한 기분으로 
한동안 보름달을 올려다보다가 뻣뻣해진 목으로 고개를 숙였다.

  [촬영하러 왔어요]
  K 프로덕션의 유리문을 밀면서 나는 노래를  부르듯 말했다. 미장원에 들러서 짧은 커트 
머리로 바꾸고 오는 길이었다.
  산뜻한 기분이었다. 파리지옥풀이나 끈끈이주걱도 그저 예쁜 식물로만 보일 때가 있는 법
이다. 기꺼이 끌려 들어가 그 안에서 완전히 녹아버리면 나는  벌레의 몸에서 저 예쁜 식물
의 일부분으로 변모되지 않을까.
  [머리카락은 다 어디로 갔어?]
  [미장원 바닥에서 뒹굴고 있겠죠. 어쩌면 지금쯤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긴 머리가 더 나은데....]
  [그래요? 유감이군요. 촬영한다길래 예쁘게 하려고 미장원에 갔던 건데....]
  [벌써 생리가 끝났어?]
  [네. 때로는 이렇게 일찍 끝나 버리기도 하죠]
  물론 그런 적은 없었다. 언제나 29일 주기로 4일 동안 찾아오던 멘스였다. 징그러울  정도
록 규칙적이었다. 재수를 했던 지난 1년 간은 태음력과 정확히 일치하기까지 했다. 학원  화
장실에서 피로 흠뻑 적셔진 탐폰을 쓰레기통에 밀어넣고 나오다가 창문 너머에 떠 있는 둥
근 달을 잠시 바라보는 이레 취미를 붙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젯밤에는 보름달이 떴는데도 피가  비치지 않았다. 규칙적인 생활을  했던 재수 
기간이 끝나서일까. 아니면 내 몸이 현재를 전시 상황으로 받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일까.  어
쨌든 이번 달엔 생리가 늦어질 모양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제  시작될
지도 모르는데다 일단 시작되면 나흘은 꼬박 걸릴  그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까 싶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샤워를 하고 미장원을 찾았던 것이다. 어제 그가 말했던 촬영이라
는 단어는 그만큼 내게 매혹적이었다. 내 어떤 모습을 비디오로 찍고 싶다는 얘기일까.
  그는 유리문을 걸어잠근 뒤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렇다면 커튼뒤가 아니라 여기서 촬영을 
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과연 그는 커튼 뒤편 바닥에 깔려  있는 둥그런 카페트를 밖으로 끌
어내기 시작했다.
  [뭘 찍으려고 이렇게 공을 들여요?]
  쇼윈도와 유리문에 회색 블라인드가 덮이고 바닥에 푸른빛의 카페트가 깔리자 가게  안은 
색다른 분위기로 바뀌었다.
  [고래의 물 뿜기를 찍을 거야]
  [네?]
  [있잖아, 네가 오르가슴에 이르면 뿜어내는 물줄기]
  [아..... 그걸 그렇게 부르나요?]
  [그런다고 하더군. 일본말을 번역한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어. 아무튼 끝내 주는 표현
이지]
  [고래의 물 뿜기라.... 그런데 그걸 어떻게 찍지? 힘들 텐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뭐]
  그가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카메라 삼각대며 조명  스탠드 따위를 
곳곳에 세우기 시작했다.
  [나는 누드로 춤추는 장면 같은 걸 찍고 싶었는데.... 힘들게 그런  건 뭐하려 찍으려고 그
래요?]
  [특이하잖아. 흔히 볼 수 없는 장면이라구. 혼자 보기 아까운 장면이지]
  [그래서 누구랑 같이 보려구요?]
  [우선 너하고 봐야지. 네 몸이지만 너도 직접 볼 수 없는 부분이잖아. 넌  네 몸이 그렇게 
반응하는 게 신기하지 않니?]
  [신기하긴 하죠. 아마도 모든 여자들이 다 그렇진 않을 테니까]
  [물론이지. 더구나 너처럼 그렇게 세차게 뿜어올리는 여자는 드물어]
  나는 뭔가 괜히 자랑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당신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과 섹스를 해본 건 아니잖아요? 질속의 어떤 부분이 집중적으
로 자극을 받으면 그렇게 맑은 액체를 내뿜기도 한다더군요. 여자들의 30펴센트쯤이 그렇다
는 통계도 어디선가 봤어요]
  [유리 넌 그쪽으로 학구파구나. 나는 고래의 물 뿜기라는 말밖에 몰라.  그리고 내 경험으
론 30퍼센트가 아니라 3퍼센트도 안될 것 같은데.... 찍고 나서  보면 너도 놀랄 거야. 넌 느
끼기만 했지 난 눈으로 보기도 했거든.  짧은 순간이지만 정말 세차게 솟아올랐지. 그게  내 
뺨에 와닿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해]
  유리 넌 정말 특별한 여자야, 라고 그가 덧붙여 말했다. 목소리가 참 예쁘군요, 라고 말했
을 때와 꼭 닮은 표정으로.
  [그렇게 달콤한 말로 나를 꼬드겨서 촬영한 다음에... 팔아먹을 생각이군요]
  멋모르고 나레이터 노릇을 했듯이 멋모르고 포르노 배우가 될 판이었다. 하지만 그때처럼 
바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포르노를 찍더라도 내가 자발적으로 찍을 것이다.
  그의 입술이 한쪽으로 슬며시 올라가더니 갑자기 빠르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왜? 그것도 나쁘지 않잖아? 우리 두 사람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면 어떻겠니? 음부까지 
클로즈업해서 생생하게 보여주지만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한다.... 그거 기발한 생각  아니야? 
우리 초상권을 보호하면서 검열에 대한 조롱도 겸하는 셈이지, 어때? 수입은 삼 대 일 정도
로 나누기로 하자]
  [그거 괜찮군요. 하지만 누가 삼을 갖는 거죠? 설마 당신은 아니겠죠?]
  컴퓨터 테이블의 의자에 앉은 채 나는 그를 도전적으로 바라보았다.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나 자신도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맞은편 작업대에서 비디오 카
메라를 옮기려다 말고 멈춰 선 그는 이윽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요즘 비디오점에서는 에로틱 스릴러나 쇼킹 아시아  같은 시리즈가 인기라더군. 골치 아
픈 일들을 잊어버리기엔 역시 그게 최고라는 얘기겠지. 최악의  경제난을 반영하는 현상 아
니겠어?]
  언젠가 그가 말했던 대리 체험 산업이 이미 활성화되고  있다는 의미일까. 실직자가 늘어
나 비디오 대여점이 호황이라는 얘기는 나도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건 결
국 성과 폭력과 쇼킹한 사건들이란 말인가.
  [굳이 불황이 아니더라도 섹스는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관심거리겠죠. 인터넷만 해도  수많은 
사이트가 적자를 보고 있는 형편에 유독 섹스 사이트만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더군요]
  [맞아. 그런 거야. 인터넷은 세상을 그대로 비춰보이는 거울과도 같거든]
  [그래서 어떻게든 인터넷과 포르노를 연결시키려고 하는 거군요, 당신. 어때요? 그 사업의 
준비는 잘 되어가나요?]
  작업대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들어올리며 그가 말했다.
  [네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최고의 결과를 얻게 될 거야]
  소니 VX-9000. 디지털 비디오의  명품이 트라이포드 위에 올려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 조그만 6밀리 테이프 안에 내 모습이 선명하게  기록되고 재생될 것이다. 언제든지 컴퓨
터에 연결돼 동영상이나 사진 파일로 변환될 수도 있을 것이다.
  렌즈가 회색 블라인드 쪽으로 향하도록 카메라 위치를 잡은 후 그는 또다른 디지털 캠코
더 두 개를 양쪽 작업대 위에 하나씩 올려 놓았다. PC10 과 VX-1000이었다.
  [대단하네요. 언제 이런 장비들을 다 마련했어요?]
  [틈틈이 사들였지. 전자제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값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요즘엔 환율이 
올라서 중고로 팔아도 더 받는대.  이거 구해다 준 밀수꾼이 어제는  나더러 중고로 팔라고 
전화가 왔더라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나 같으면 당장 팔겠다. 저거 하나만 팔아도 돈이 꽤 될 텐데.....]
  [나는 죽어도 못 팔지. 그런데 왜? 요즘 돈 필요한 데 있어?]
  [돈만 있으면 서울로 도망가고  싶어요. 엄마 아빠가 결국은  여기 사범대에 날 밀어넣어 
버렸거든요]
  [정말이야? 너무했군. 하긴 뭐, 여자가 굳이 서울까지 올라가서 뭘 하겠니?]
  [그래요. 컴퓨터만 켜면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시대에 그까짓  서울, 안 올라가도 상관
없어요. 여기서도 얼마든지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 수 있으니까....]
  카메라의 위치를 마무리하고 조명을 손본 뒤에 그와 나는  사이좋게 옷을 벗었다. 비디오 
카메라 석 대가 삼각형을 이룬  채 동시에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삼각형의 중심에 
놓여진 둥근 카페트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와 나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둘 다 섹스를 처음 해보는 사람들처럼 어색하게 조금씩 조금씩 몸을 움
직이기 시작했다.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그는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내게 힘든  자세를 강요했다. 
카메라의 각도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듯했다. 나는 그가 아니라 카메라와 섹스를 하는 것 같
았다. 아니, 세 개의 카메라  렌즈에 의해서 강간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렌즈를 
위해서 내게 여러 가지 포즈를 요구했고  렌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끝없이  자극했다 
세 개의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좀처럼 몰두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아
무리 쓰다듬고 문지르고 빨아대어도 내 음부는 점점 더 메말라 가기만 했다. 몸 구석구석이 
쓰리고 아팠다.
  나는 결국 비명을 지르며 렌즈를 벗어나 커튼 뒤로 달아나고 말았다. 침대 위에서 살펴보
니 음핵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소음순부터 질 입구까지 온통 화끈거렸다.
  [이건 섹스가 아니라 가혹 행위에요. 스너프 필름이라도 찍을 생각인가요?]
  내 말이 농담으로 들렸는지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넌 역시 눈치가 빨라. 카메라  앞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섹스, 그리고  생생하게 이어지는 
잔혹 행위와 살인.... 멋있잖아? 그런데 그게 스너프라는 건 또 어떻게 알았니?]
  [그래요. 차라리 살인 스너프를 찍자고요. 요즘 같은 세상에는 그게 휠씬  더 인기가 있을 
거옝ㅅ]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멋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맞아. 폭력을 권하는 세상이지. 답답하고 분한  마음을 풀어줄수 있는 건 폭력뿐이지. 하
지만 그런 울분성 폭력이 그대로  터져나오면 너무 많은 사람이 다칠  테니까, 폭력을 대리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차라리 미덕이 될 수도 있을 거야. 사람들이 거리의 이리가 대서 
배회하거나 집단 소요가 일어나는 것보다는 불법 비디오가 활성화되는 게 훨씬 낫지 않겠어?]
  [그렇다고 살인 포르노까지 필요할까요? 그게 과연 얼마나 팔릴까요?]
  내 싸늘한 질문에도 그는 의기양양했다.
  [자극은 또다른 자극을 부르고, 호기심은 또다른 호기심을 부르는 법이야. 그만큼 잠재 수
요가 많다는 거지. 실제로 지금도 시베리아나 일본의 한적한  어촌에서 제작된 스너프 필름
이 전섹적으로 팔려나가고 있어. 그리고  인터넷을 이용하면 시장이야 얼마든지  개척할 수 
있잖아? 교통사고나 총기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적나라한 사진까지 보여주는 곳이  인터넷이
니까 말이야. 너도 알지? 시체 사진만 모아놓은 잔혹 사이트..... 스너프는 그보다 훨씬 더 은
밀하고 재미있지]
  [미쳤군. 다 미쳤어요. 나도 미쳐버릴 것 같아. 다 그만둘래요. 차라리  내 머리에 총을 쏘
는 비디오를 쩍어요. 차라리 그게 덜 고통스럽겠어요]
  속옷을 챙겨입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비로소 내 기분을 눈치챈 것 같았다. 가
만히 등뒤로 다가와 내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그가 속삭였다.
  [미안, 미안.... 많이 아팠던 모양이구나. 잠시 쉬었다가 할까?]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린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다시  침대에 누웠다. 모든 게 지겨웠
다.
  기절한 듯 침대에 누워서 욕지기를 참고 있는 내 앞에  그가 차가운 캔 커피를 내밀었다. 
어느새 그는 망사천으로 된 검은 삼각팬티에 면 스판 소재의 하얀색 반팔 쫄티를 걸치고 있
었다. 메이커는 예외없이 제임스딘에 스톰. 아까 그 위에 입고 있던 펠레펠레의 골반 바지와 
옵트의 광택 나는 비닐 소재 조까까지 생각나서 나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젤을 이용해서 앞머리를 위로 쓸어올린 헤어스타일까지 오
늘따라 강조되어 보인다. 미소 짓는 사람에게 할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뱉지 않을 수가 없
었다.
  [귀를 뚫는 건 어떻겠어요? 아니면 머리를 길러 묶어부든지. 아, 부분 염색을  하는 건 어
때요? 그러면 휠씬 더 어려보일 텐데.....]
  그의 얼굴에서 단숨에 미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나이를 아
직도 내게 밝히지 않을 정도로 나이에 대해서 민감한 그이지만 그 민감함을 언제까지나 배
려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른 중반쯤의 나이가 분명할 텐데도 그는 늘 스무 살짜리들한
테나 어울릴 옷차림을 즐겼다. 요즘 들어 부쩍 더 그러는 것 같았다.
  [너무 애쓰는 것 아니에요? 비주얼하고픈 세대의 비애가 느껴져서 내가 괜히 서글퍼질 때
가 있어요]
  [비주얼하고픈 세대?]
  [그래요. 솔직히 말해 봐요. 그런 옷차림 불편하지 않아요?]
  캔 커피를 받아들며 내가 물었다. 그는 내가 걸치고 있는 T자형 팬티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너야말로 불편하지 않니? 엉덩이가 하나도 가려지지 않는 그런 속옷을  뭐하러 입어? 그
거야말로 벗기 위해서 입는 거 아니야?]
  [단순히 야하게 보이려고 이렇게  마든 게 아니에요. 딱  붙는 청바지를 입으면 엉덩이의 
팬티 선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걸 보완하려고 만든 거라구요. 뒷모습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
니까 훨씬 편하죠. 불편할 거 하나도 없어요. 얼마나 실용적인 속옷인데요]
  [나도 편하고 좋아서 찾아입는 옷들이야]
  그가 흥분해서 말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자극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좋아서 그런다면 누가 뭐라겠어요. 난 당신이 무조건 우리 세대를 따라가려고 그
러는 줄 알았거든요. 불편함을 무릅쓰고 말이죠. 나이 어린 나를 만나면서 더 그런 건  아닐
까 해서 미안하기도 했고요]
  [너무 자만하지 마. 너도 지금 나이를 먹고 있는 중이니까. 여자들이 누릴 수 있는 젊음은 
남자보다 훨씬 더 짧아]
  [알아요. 그러니까 지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서 파일로 보관하려고 이 고생을 하는 거죠]
  그쯤에서 나는 대충 포기하려고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싶었다.  촬영을 하다 말
고 침대에서 이런 얘기나 나누고 있다니..... 나는 차갑게 식어버린 몸과 마음으로 일어나 청
바지와 니트 티와 롱코트를 차례로  찾아 걸쳤다.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천천히 바지를 꿰어입으며 말했다.
  [도대체 너희들은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
  [대단하다고 말한 적 없어요]
  나는 롱코트의 허리띠를 힘주어 묶었다.
  [우리도 억울하다면 억울한 세대예요. 어른들 세계가  흔들리니까 나도 요즘 이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잖아요. 태어나 처음으로 빈곤이라는 것을 맛보면서....]
  [그래도 나만큼 억울하진 않을  거야. 뭔가 잘못  초대받은 세대인 것  겉은 이런 느낌만
큼.... 그래서라도 나는 정말 돈을 많이 벌고  싶어.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기다가 죽고  싶어.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내 방식대로 즐길 수 있을 테니까 그나마 덜 억울하지 않겠어? 결국
은 돈이 문제인 거라구]
  어차피 계속해 봤자 끝이 보이지 않는 얘기일 뿐이었다. 유리문을 향해 몸을 돌리기 직전,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체념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세요. 돈을 버는 일이 당신 생각처럼 그렇게 쉬울 것 같
아요? 세대든 개인이든 그게 바로 타고난 운명이라는 거죠. 유감스럽겠지만 당신은 그걸 인
정해야만 해요]
  말을 마치고 블라인드를 걷어 유리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있을 때였다. 으르렁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내 등뒤로 날아왔다.
  [망나니 같은 계집애. 뭐든지 네 멋대로지. 가진 거라곤 잘빠진 몸매밖에 없으면서....]
  나는 조용히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씹어뱉듯 말해 주었다. 
  [그걸 이용하려는 게 누군데요?]
  [글세..... 누가 누구를 이용하든 일단 끝장을 봐야하지 않겠어?]
  그는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기분 바꿔서 내일 다시 와]
  나는 말없이 유리문을 밀고 나왔다. 이렇게 등을 돌려 나와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가장 좋
은 해결 방법은 역시 단절이다. 끊고 꺾고 부러뜨리면 다시는 되살아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단절을 행하는 것이.... 지금 내게는 왜 이렇게 어려운 일로만 여겨지는 것일까. 아마도 내일 
또다시 이곳을 찾게 되리라는 어두운 예감에 몸을 떨면서 나는 비틀비틀 거리를 걷기 시작
했다.
  겨울 오후의 햇살을 받은 우리 집의 전경이 먼발치에 떠오를 때에야 비로소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당연히 집안에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하며 나는 대문을  열고 느린 걸음으로 마
당을 가로 질렀다. 침대에 편히 누워 쉬고 싶었다. 하지만 현관문 바로 앞에 이르렀을 때 나
는 어수선한 마음으로 멈춰 서고 말았다.
  자잘한 볼록 무늬의 불투명한 현관 유리문 너머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엄
마의 목소리도지지 않고 들려왔다. 나는 몸을 돌려 다시 대문을 향해 걸어가려다가 그냥 그
대로 현관문 앞의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피곤했다. 모든 게 귀찮았다. 저러다 결국은 잠잠해질 터이니 그때를 기다리면 될  것이었
다. 나는 현관문에 몸을 기대며 편안한 자세를 찾아보았다. 현관문 아래쪽의 목재  부분에는 
등허리가, 위쪽의 불투명한 유리 부분에는 뒷머리가 닿았다.
  [내가 모르는 줄 알아? 밖에서 남자들이나 만나고 다니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아냐고]
  아빠의 목소리가 차가워진 내 뒤통수를 때렸다. 남자들? 설마  내 얘기는 아니겠지? 엄마
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분명치 않았다. 나는 현관문 유리에 귀를 바짝 갖다대었다.
  [......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어요?]
  [당신 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 원하는 대로 가게까지 차려줬더니 딴  남자나 만나고 다니
고.... 잘 하는 짓이다, 그래]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했던  사람들이라고 했잖아요. 요즘엔 돈을 막느라 만났
고....]
  [그래서 그놈들이 제대로 막아주기나 했어? 당신 이용만 당한 거  아냐? 그놈들이 그렇게 
돈이 많대? 그럼 그냥 그놈들한테 가 버려]
  역시 그런 종류의 뻔한 얘기였다.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는  상황이 너무나 진부하다는 생
각을 하면서 나는 유리창에서 귀를 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엄마의 목소리가 폭발하듯 
들려오는 바람에 다시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제발 엉뚱한 얘기로 회피하려고 하지 말고 내일 일 좀 걱정해 봐요. 그냥 이대로 길거리
로 나앉아야 하는 건가요? 정망 아무 대책이 없는 거예요?]
  아빠의 목소리가 갑자기 툭 꺾인 채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래.... 내일.... 당장 내일인데.... 그러니까 차라리  당신 혼자라도 살길을 찾으란 말이야. 
나도 오죽하면 이러겠어? 당장 내일까지 집을 비워줘야 하는데.....]
  자꾸만 바닥으로 내려앉는 아빠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나는 현관문 앞의 짧은 계단을 내
려왔다. 그리고 차가원 계단 아래에  쭈그리고 앉으며 점점 탈진하는 듯한  내 몸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되어버려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든 집이든 세상이든....  그러
자 신기하게도 그 불편한 자세에서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되는 대로 잠속으로 빠
져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햇살이 따뜻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시야가 환했다. 짓뭉개지는 듯한 노란색
의 꽃무리가 점점 눈앞으로 다가왔다. 여린 연둣빛의 이파리들이 어디선가 날아들고 있었다. 
그 빛에 눈이 아렸다. 연두색과 노란색이 마구 뒤섞여 내 눈을 가득 채웠다. 가슴이  울렁거
렸다. 봄은 아직도 멀었는데.....
 기계적인 진동이 허벅지 웟부분을 자극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호출기에는 낯선 
전화번호와 함께 음성 메모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나는 그 번호를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자
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가 다리가 저려와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는 순간, 동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카페 코지에서 그 아이에게 음성을 남긴 뒤 닷새가 지나도록 아직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동현이일까.... 비틀거리며 계단을 밟아 올라가면서 나는 느닷없는 기대
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거실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고요했다. 이층으로 향하면서 안방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별다
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현관 계단에 쪼그리고 앉은 나를  밟고 집 밖으로 나갔을 리도 
없으니 아빠 엄마는 분명 안방에 있을 것이었다. 저토록  불길한 공기를 내뿜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긴 내가 궁금해할 일도 아니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전화기 앞으로 다가가 사서함의 음성을 확인했다. 전화를 꼭 해달라는 
삼수생의 목소리였다. 삼수생은 오늘 아침부터  계속해서 삐삐를 쳐오고 있다. 내가  응답을 
해주지 않는 이유를 그렇게도 모르는 것일까.
  눈치 없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삼수생이 끝까지  인내력을 발휘한다면 
결국 호출기 번호를 바꾸든지 해야 할 것이다. 이 참에 아예 해지해 버려도 상관은 없을 테
지. 동현이에게서도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는데 삐삐가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상으로부
터의 반가운 호출은 이제 더 이상 내게 없다.
  혹시라도 동현이로부터 연락이 올까봐 삐삐를 꺼놓지도 못하고 있다고 헛된 기대를  품고 
서둘러 방으로 올라왔던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동현이가 내게  호출을 할 
때에는 항상 마지막에 33이라는 숫자를 찍는다는 걸 한동안 잊고 있었다. 33, 그것은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섹스 체위의 표시다. 옆을 보고 편하고 누운  내 등뒤로 동현이가 다가와 두 
개의 스푼처럼 포개지는 체위를 우리는 숫자로 그렇게 표현했다.  내 등과 엉덩이에 와닿던 
그 아이의 가슴과 아랫배의 감촉, 온몸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포근하게 젖어들던 느
낌, 딱딱해진 성기를 내 안으로 슬쩍  밀어넣으며 [따뜻해]라고 중얼거리던 그 아이의  목소
리, 그 모든 것이 나는 좋았다. 그랬다. 거기에는 정감이 있었다. 자극은 또다른 자극을 불러
올 뿐이지만, 따뜻함은 언제나 그곳으로 회귀하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나는 지금 돌아가
고 싶은 것일까, 그 따뜻한 기억속으로.
  나도 모르게 수화기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동현이에게 또  한번 호출을 하고 싶은 
이 기분을 다스려야만 한다. 또다시 그 아이에게 다가간다면  나야말로 삼수생처럼 눈치 없
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동현이의 침묵을 나는 냉정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진저리치듯 전화기가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튀어오르듯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그
러나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툭툭 끊어지기만 할 뿐 아무것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동현이니, 여보세요,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는 동안 전
화는 그대로 끊어지고 말았다.
  허탈해하고 있는 사이에 전화가 다시 걸려왔고 이번에는 선명한 음질로 진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리야, 나야. 방금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렸니?]
  [응, 전혀. 이상한 잡음만 들렸어]
  [난 잘 들리던데.... 이거 브래드 핸드폰이거든. 잘못 연결된 것  같아서 다시 전화한 거야. 
그런데 넌 뭐 동현이를 찾고 그러냐? 걔 아직도 만나니?]
  [아니. 잡음이 섞이니까 이상하게 네 목소리가 동현이처럼 들렸어. 하긴 이제 그 목소리가 
잘 기억도 안 난다. 요즘 뭘하고 사는지.....]
  [참, 내가 철민이 얘기 안 했었니? 동현이랑 미팅했을 때 내 파트너였던  애 말이야. 지난 
주였나?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거든. 그런데 걔도 요즘 동현이랑 연락이 안 된대. 아마 다시 
집으로 들어간 것 같다고 하던데......]
  [집에 ? 왜?]
  [모르지. 집 전화번호도 바뀐 것 같다고 그러고..... 마지막 만났을 때, 대학에 가고 싶다는 
얘기를 하더래]
  [갑자기 대학은 무슨.....]
  [다 그런 거지, 뭐. 누구나 한때 해보는 방황 같은 것 아니었겠어? 아니면 생활 자체가 너
무 힘들어서 집으로 돌아간 거겠지. 참, 별일없지? 그 녀석한테 연락은 없었지?]
  [없었어. 브래드는 옆에 없니? 거기 어디야?]
  [여기, 고속도로 휴게소야. 브래드는 화장실 갔고....  아무튼 계속 신경 좀 써줘. 다음주에 
그 녀석 생일이거든. 만 20세라고 생일 파티를 근사하게 하겠대. 그때 너 초대할게]
  브래드가 화장실에서 나왔다면 진아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 모범 법대생은 생일까지
도 부지런하게 빠른 모양이었다. 벌써 만 20세 생일이라니.... 하지만 두 달 후면 나도 만 20
세가 될 것이다. 그리고 몇 개월 뒤에는 진아가, 또 몇 개월 뒤에는 동현이가 만  20세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차례로 나이 먹어갈 것이다.
  나는 전화기를 벗어나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PC통신의 전자 우편함에는 광고 메일만 
잔뜩 쌓여 있었다. 부업 정보, 사은잔치, 소자본 창업, 기발한 아이템, 파격세일..... 돈을 벌어
보겠다는 사람, 돈을 벌어보자는 사람,  모두들 돈, 돈, 돈만 생가하고  있는 듯했다. 사이버 
공간 역시 현실의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지겨운 세상이었다. 나와 전혀  상관없
는 발신인의 아이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느새  나는 편지 쓰기 코너로 가서  동현이의 
아이디를 적고 있었다. 메일을 보내는 것쯤은 괜찮겠지.....
  하지만 동현이의 아이디는 해지되었다는  안내가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일까.... 어쩌면 내 
아이디도 곧 이렇게 되겠지. 전화요금 때문에, 통신 사용료 때문에.... 그런 생각이  동현이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부추겼다. 인터넷으로 들어가 보니 그  아이의 홈페이지는 여전히 존재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의 이메일 주소로 선뜻 마우스를 옮길 수가 없었다.  인터넷에까지 
광고 메일이 여러 통 와  있는 것을 보면서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전쟁터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듯 했다. 너도 그래서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
갔니? 동현이에게 묻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윽고 그 아이의 주소를 눌러 메일 박스를 열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뭐라고 
쓸까? 그 모든 게 결국은 겉멋이었던 거니, 라고? 너나  나나 네 친구들이나 내 친구들이나 
결국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구나, 라고? 그래, 모든 게 헛것이었다. 현실의 두꺼운 
벽 앞에서 동현이나 나나 헛것일 뿐임이 확인된 것이었다.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잠을 깨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한동안 
창을 여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내 방에 창문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커튼을 걷고 두  겹의 창문을 차례로 열었다. 하지만 힘있는  동작이 
나와주질 않았다. 바깥의 공기가 방안으로 밀려 들어와도 내  머릿속은 눅진한 생각들로 무
거웠다.
  창 밖 풍경은 이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변함없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느닷없는 상실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창틀에 매달려 두리번
거리다 보니 누군가 현관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니 그는 또 
어느새 현관 계단 아래로 내려가 몸을 움츠리고 있다.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야, 너 왜 그러고 있니?]
  특별한 걸 원한 게 아니었다. 남들과는 다르게, 뭔가 그럴듯하게, 품 나게 살고 싶었을 뿐
이다. 돈 걱정 따위 안 하고, 가족 문제 따위에 얽혀들지 않고,  그저 심플하게, 쿨하게 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다 그렇게  사는 것 같은데, 영화나 TV나 
소설 속에는 그런 인물들만 보이는데, 나도 여태까지는 비슷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문득, 이 집이 낯설다. 곧 떠나게 될 집이라 그런 것일
까. 떤면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게되는 것일까. 그런데 갑자기 이 도시 전체가 낯설게  여겨
지는 것은 웬일일까. 세상 전체가 별안간 서먹하게 느껴지는 것은 또 무슨 일일까. 내게  무
슨 운명의 회오리가 닥쳐오려는 것일까.
  어딘가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온 것 같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
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전혀 모르겠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새 저녁이 이 세상에 내려앉고 있다.  오늘 밤에도 둥근 달이 뜰 
것이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다가오고, 또 모레가 다가오고.... 어쨌든 나는 꾸역꾸역 살아
가게 될 것이다. 지금 내가 명확히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밖에 없다. 봄이 오면 나도 어김
없이 만 20세가 되리라는 것.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을  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속옷은 깨끗했다. 징그러울 정도로 규칙적이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
는 것인지, 나는 문득 두려워졌다.  그 두려움을 덮으며 다가오는 더  큰 두려움에, 혹은 더 
큰 욕망에, 나는 서둘러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몸에 와닿는 물줄기 하나하나가 새삼 
예민하고 느껴져서 욕실에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다.
  내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와 현관을 나서는 동안, 바라던  대로 식구 중의 누구와도 마
주치지 않았다. 과연 오늘 이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나는 애써 고개를 저으면서 대문을 밀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K  프로덕션의 유리문을 힘
차게 열어젖히고 있다. 그의 말대로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어제의 언쟁을 모두 잊은 듯 다정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그러나 막상 그의 얼굴
을 마주 대하자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머뭇거렸다. 그가 내게 묻는다.
  [어제 화 많이 났지?]
  화해의 제스처일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어쨌든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기면서 그
에게 대답했다.
  [아뇨]
  [미안했어. 진심이 아니란 거 알지?]
  [알아요. 나도 미안했어요. 내가 너무 흥분했죠?]
  [흥분하는 건 좋은 거야. 살아 있다는 증거거든]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진다. 그러나 어쨌든 나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편의점에 가려던 중이었어. 아침을 못 먹었거든. 뭐 좀 사다 줄까?]
  나 역시 아침을 먹지 않았지만 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뱃속에 열기가 가득 찬 느낌이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요. 피스타치오로 사다줄래요?  편의점 맞은 편에 있는 아이스크
림 가게 알죠?]
  혼자 남은 나는 쇼윈도로 다가가 회색 블라인드를 내리고 푸른 커튼 뒤에서 푸르고 둥근 
카페트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트라이포드를 찾아서 커튼 앞에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세웠다.
  스티로폼 상자와 비닐 봉지를 양손에 든  그가 나타나 실내를 둘러보며 감동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걸로 화해는 끝났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알록달록한 스티로폼 상자의 뚜껑을 열자 
드라이아이스 조각에 둘러싸인 케이크가 나타났다.  파스텔 톤의 옅은 초록색을  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 케이크 였다.
  [케이크까지 살 필요는 없었는데......]
  나 역시 그를 향해 감동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가 심각하게 말한다.
  [양초는 안 가져왔어. 불을 켜면 다 녹아버릴 것 같아서.....]
  내가 두 개의 플라스틱 스푼으로 요령껏 케이크를 잘라 먹는 동안 그는 김밥 한 줄을  다 
먹고 카메라와 조명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는데도 내  몸은 자꾸만 
뜨거워지고 있다. 이제 곧 멋진 기록이 남게 될 거라고, 그 기록이 세상 어디까지  퍼져나가
든 상관없다고, 나는 뜨겁게 기대하고 차갑게 체념한다.
  [화장을 좀더 진하게 하는 게 어떻겠니?]  
  [왜요? 어차피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할 거 아닌가요?]
  그가 웃었다.
  [말이 쉽지, 그게 잘 되겠어? 화장을 진하게  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일 거야.  네 특유의 
표정도 살리고 말이지. 넌 얼굴 선이 약한 편이라서 평소에도 화장을 진하게 하는 게  예뻐. 
카메라 앞에서는 그보다 더 진해야 할 테고.... 여기 화장품 들어 있지?]
  그가 내 손가방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로부터  립스틱과 아이 
섀도를 건네 받았다.
  [진하게 덧칠을 해봐. 아주 야하게. 흡혈귀처럼 기괴하게. 네 얼굴을 전혀 알아볼 수 없도록]
  내가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눈두덩과 입술에 마음대로 색깔을 칠하고 그리는 동안 그는 거
울 앞에 서서 자신의 머리카락에 부분적으로 블루 컬러 스프레이를 뿌린다.
  [왜 하필 블루죠?]
  [이걸 쓸 거니까]
  그가 내 눈앞에 짙은 파란색의  선글라스를 들어보였다. 렌즈와 테가  곡선으로 이어져서 
얼굴에 꼭 밀착되는 스포츠용 선글라스다.
  [알몸에 선글라스만 쓰겠다고요? 그럼 이 테이프의 제목은..... 파란 색안경쯤 되겠군요. 빨
간 마후라에 필적할 만한 제목이네요]
  나는 한참 깔깔거리다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도 화장을 해요. 내가 그려줄까? 그걸 쓰면 불편하잖아요. 덥고..... 키스도 제대로 못 
하고.....]
  내 입에서 발음된 키스라는 단어에 도발된 것일까. 그가 곧바로 내게 달려들었다.  파란색 
선글라스를 한 손에 든 채  그가 내 입술을 빨아대기 시작한다.  이러면 립스틱이 제멋대로 
번질 텐데......
  내 얼굴 곳곳에 정신없이 키스를 퍼붓던 그가 선글라스를 집어 던지고 내 옷을 벗기기 시
작했다. 그의 입술 주변이 붉게 물들어 있다. 내 얼굴은 아마도 섹시한 흡혈귀에서 우스꽝스
러운 어릿광대로 돌변해 버렸을 것이다. 내 옷을 벗기는 그의 손길이 사뭇 간절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후끈 달아올랐다. 벗겨진 내 몸 구석구석을 입술로 애무하면서 그도 역시 알
몸이 되어가고 있다.
  이윽고 둥근 카페트의 한가운데에 나를 세우고 그가 내 앞에  무릎 꿇었다. 내 몸 한가운
데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의 입술. 그날 밤의 기억이 떠오른다. 커튼 뒤의 비좁은 침대에서 
잠들었던 그날, 모든 것을 포기하는 순간에 찾아들어  세차게 솟아오르던 희열.... 오늘은 좀
더 깊어진 체념과 자포자기가 내 몸 깊은 곳에서 물줄기를 끌어내게 될 것이다. 울컥, 울컥, 
쾌감과 절망이 번갈아 솟아오를 것이다.
  내 귀가 먹먹해질 즈음 그가 돌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조명을 켜고, 케메라의  버
튼을 차례로 누르고, 파란색 선글라스를 찾아 썼다. 잔뜩 흥분된 상태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내게로 그가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 내게 두 다리를 벌리게 한 뒤 그 사이로 미
끄러지듯 들어가 앉으며 발을 뻗었다. 그의 입술이 곧 양쪽 허벅지 사이에 느껴졌다. 그  촉
감이, 그 자세가, 동시에 나를 자극한다. 나를 견딜수 없게 한다.
  이파리를 활짝 펼친 나무처럼 우뚝  선 내 몸이 기어이 신음하기  시작했다. 나의 예민한 
상처에서 분수처럼 수액이 뿜어져 나와  파란색 선글라스의 렌즈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재빠르게 상체를 뒤로 눕히자 이어서 간헐적으로 울컥울컥 솟구치는 나의 수액은  고스란히 
그의 가슴과 배를 적시며 흘러내린다. 나는 고로쇠나무처럼 우뚝 선 채 정면의 눈을 응시하
고 있다. 디지털 캠코더 렌즈 너머에 도사린 보이지 않는 눈.
  그는 내 몸과 마주서서, 혹은 몸 뒤로 다가서서, 혹은  몸 아래에 누워서, 끝없이 내 안으
로 파고들었다. 그때마다 내 상체는 팽팽히 휘어지고, 단단하게 허리를 받쳐주는 그의  손에 
의해서 갖가지 곡선이 연출되었다. 나는 이제 삼각형을 이루며  나를 포위한 렌즈의 시선을 
더 이상 불편해하지  않는다. 아니, 그 시선에 더욱 자극받고, 그 시선을 즐긴다. 내 몸은 간
단없이 휘어진다, 체념을 향해.
  어느새 그도 한 그루의 거대한 나무가 되어 우윳빛 나뭇진을 쏟아내었다.
  [이제 그만 벗어요. 땀 나잖아]
  내가 그의 선글라스를 벗기려 하자, 그는 내 등뒤로 몸을 피하며 말했다.
  [아냐, 아직 남은 게 있어]
  [뭐가 남았.....]
  나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그가 내 등뒤에서 두  손으로 나의 목을 감싸쥐었기 때문이
었다. 이건 대체 뭘까.... 뜻밖의 행위에  나는 당황하고 있다. 그리고 곧 정신이  아뜩해지는 
것을 느낀다. 우악스럽게 내 목을 쥔 채 그는 VX-9000의 렌즈를 향해 내 몸을 돌려 세웠다.
  웅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린다. 나이 들어가는 인간의 비애를 느끼기  전에, 
가장 빛나게 타오르는 이 순간에, 행복하게 떠나도록 해주겠다고 말하는 것 같다. 도대체 그
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그저 허공에 두 팔을 내저으며 버둥거리기만 했다.
  그의 손아귀 안에서 내 목이  점점 조여들고 있다. 필터를 한겹씩  덧씌우듯 시야가 차츰 
하얗게 탈색되어 간다. 그러다가 모든 사물이 한쪽 방향으로 일제히 흐려지기 시작한다.  45
도 앵글의 모션 블러 필터를 쓴 것  같은 느낌이다. 문득, 내 목이 꺾이면서 모션의  각도가 
마이너스 45도로 바뀐다. 이어서 필터의 앵글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컴퓨터 그래픽
에 처음으로 빠져들던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온갖 종류의 필터를 사용해서 내 맘대로 이미
지를 조작하던 그때의 기억. 나는 지금 세상이 아니라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그
때와 다른 점은 내 손에 마우스가 없다는 것. 그 대신 그가  내 목을 그러쥐고 갖가지 화면
을 연출해 보인다.
  그의 손에 짧게 힘이 들어간 순간, 내 시야가 온통 파란색으로 빛난다. 네온 글로우  필터
를 쓴 것 같다. 필터의 컬러는 어느새 블루에서 레드로 바뀌고.... 그리고.... 아, 연둣빛.
  K 프로덕션. 회색 블라인드와 푸른빛 커튼 사이에 그와 내가 있다. 컴퓨터 작업대와 비디
오 작업대 사이에 그와 내가 있다. 작업대를 가득 채운 온갖 기기들. 그리고 그 사이에 어딘
가에 어질러져 있을 독촉장들. 그는 지금 그것들과 나를 맞바꾸려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있다. 세상과의 단절을  원하던 내게 삶은 이러한 단절
로 화답하려는 것일까. 그래, 어쩌면 아주  멋진 에필로그가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지금 나는..... 너무나 고통..... 스럽다.
  어느 순간 나는 문득 허공에서  내 자신의 얼굴을 본다. 순식간에  휑한 바닥을 드러내어 
텅 비어버린 내 눈빛을 내가 본다. 컷아웃, 혹은 팔레트 나이프. 내 얼굴의 윤곽선이 뭉개진
다. 덧씌워지는 필터의 효과에 의해서 내 얼굴은 점점 더 추상이 되어간다. 이번엔 플래스터
다. 석고처럼 굳어져 흑백의 테두리로만 남은 얼굴. 포토샵 필터의 파노라마는 이렇게  끝이 
나는가.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내 마지막 시선이 카메라 렌즈를 향하고 있다. 뷰파인더 속
의 내 표정이 지금 어떨지 궁금하다. 아마도 나는 저  필름을 통해서 앞으로 특별한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대로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고, 나를 찾고, 내게 
열중하게 될지도 모른다. 녹화된 테이프를 한번이라도 보고 떠날 수 있다면.....
  필름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내 숨이 멈추면 저 필름도 멈추게 되겠지. 내 슬픈 어느 
날의 일기와도 같은, 내 젊음의 잔인한 기록.

  호랑이해의 정월 대보름이었던 어젯밤,  각 방송사들은 뉴스를 통해  선명한 화면으로 한 
마리의 호랑이가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장면을 제공했다. 이 도시의  작은 동물원 안을 어슬
렁거리는 호랑이, 총을 겨누는 경찰, 처음 한  방에 뒷다리를 맞아 움직일 수 없게 된  호랑
이, 이어서 호랑이의 머리에 연달아 총을 쏘는  경찰, 두 눈을 퍼렇게 뜬 채 죽어가는  호랑
이, 그 모든 것이 TV 화면을 가득 채웠다. 방송국에서는  신나게 필름을 돌렸고, 나는 두눈
을 부릅뜨고 화면에 몰두했다.
  이틀 전 새끼 두 마리를 낳자마자 새 우리로 옮겨져 신경이 예민해진 그 호랑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해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컷들과 싸움이 붙어 궁지에 몰리자 
높이 5미터 철제 우리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탈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에 미련이 남았
던 것일까. 호랑이는 3미터 높이의  외부 담장은 벗어나지 않고 동물원  구내를 1시간 동안 
배회하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출동한 무장 경찰은 마취총 한번 쓰지 않고 곧바로 K-2 
소총 다섯 발로 그 호랑이를 사살했다.
  오늘 아침 지방 일간지에는 사살 직전과 직후의 호랑이  사진들이 연속 장면으로 실렸다. 
이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그런지  호랑이의 사진과 기사가 1면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별다른 뉴스가 없는 작은 도시의 무료한 기자들이 어지간히  신이 났던 모양이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은 흑백이었지만, 호랑이의 머리 아래쪽으로 흘러내린 피는  내 눈에 너무도 선명
한 붉은색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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