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트브잡스의 야망(1)
미국 첨단산업의 주역을 꼽으라면 스티브 잡스를 빼놓을 수 없다.
애플 컴퓨터사를 세워 매킨토시 PC를 처음 개발해 컴퓨터업계의 신화적 존재가 된 스 티
브 잡스는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새로운 기술과 사업을 일구어 왔다.
잡스는 85년 애플사를 떠나 넥스트 컴퓨터사를 설립해 이제 또 하나의 신화를 꿈꾸고 있
다. 사업의 성패와 더불어 나타나는 그의 이상과 불의 투지는 많은이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본지는 캐나다 맥스웰 맥밀란사가 최근 출판한 "스티브 잡스와 넥스트사의 장래(Steve Jobs
and the Ne.t Big Thing) 랜덜스트로스 저)"를 입수, 매주 3회(월, 수, 금요일)독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처음에 거기에는 제록스가 있었다.
컴퓨터의전문가들이 총집결되어 훗날 명성을 날리게 될 기관이 1970년 설립 되었다.
증권분석가들을 대상으로 한 어느 연설에서 제록스사의 피터 매컬러 회장은 자신도 정확히
모르면서 "정보시대"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강연했다 . 그는 정보통신기술 개발을 통해 새로
운 "지식폭발"에 대처하겠다는 의욕을 밝히면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부회장에게 다음과 같
이 지시했다. "내가 말한 개념을 구현할 수 있는 연구소를 세우시오." 이처럼 제록스사의 팔
로 알토 연구소는 정보통신기술과 미래사무실을 개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 연구소는 약자인 PARC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이름은 인근 스탠퍼드 대학이 조성한
녹음이 우거진 공원내에 위치한 사실에비추어 "공(Park)"과 발음이 같은 것이 흥미롭다.
PARC는 마치 대학 캠퍼 스의 종합과학관처럼 보였다.
본부건물은 매우 인상적인 현대적 감각을 지니고 있고 뒤에는 농구코트도 있었다. 연구원
들은 근무시간을 자율적으로 정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출퇴근했 는데 어떤 이들은 티셔츠를
입기도 하고 또 "의문권위자"(Question Authori ty)라는 배지를 달고 다니는 연구원도 있었
다. 출퇴근은 주로 자전거를 이용했다. 그러나 PARC는 마치 여름방학에 들어간 학부생이
없는 대학캠퍼스처럼 텅빈듯이 조용했다. AT&T가 역벨사로 분할되기 전 한때 직원수가 2
만5천명에 달했던 벨연구소와 비교해볼 때 PARC는 너무나도 작은 규모의 연구 소였다. 70
년대 PARC의 직원수는 2백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나오는계보처럼 개인용
컴퓨터 분야에서 이룩한 모든 중요한 발전을 추적해 올라가보면 근원은 오직 하나임을 알
수 있다.
PARC가 연구개발사업에 착수했을 당시만 해도 컴퓨터는 개인적으로 사용하는제품이 아니
었다. 당시에는 "기계는 빠르고 사람은 느리다"라는 관념에 젖어있어서 기계 한대를 가지고
여러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했다. 60년대에는 이같은 정도의 기술발전도 대단한 일이었다. 컴
퓨터 한대를 한사람이 사용하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컴퓨터 한대를 나눠 쓴다는 것은 비능률적이었다.
컴퓨터를 동시에 연결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컴퓨터가 어느 한 사람의 명령에
반응하는 속도는 그만큼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가령 컴퓨터는 A라는 사람에게 천분의 몇초 동안 서브하다가, B라는 사람에게 옮겨가고,
이어 C에게 옮겨가는 식으로 해서 기다리고 있는 사용자들을 모두 한번씩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다시 A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 중앙처리장치가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사람을 상대하게 되면, 사람들은 컴퓨터가 마치 기어다니는 것처럼 느려졌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도 사용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요인이 되었다.
컴퓨터가 받아들이게끔 명령을 하려면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언어에 통달해야만 했으며 그
명령은 자판을 두드려야만 전달될 수 있었다.
사용자가 화면상으로 볼 수 있게끔 해주는 소프트웨어의 개발은 타자기에 있는 글자와 숫
자만 표시해주면 된다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화면은 눈에 보이지 않는 네모로 나누어졌고
각 네모안에는 글자나 숫자가 한개씩 자리를 차지하게끔 했다. 이런 시스템은 타자를 쳐서
컴퓨터에 명령을 내릴 경우에는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왔으나 그림이나 그래프를 표시할 경
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텍스트를 띄울 때에도 문제가 있었다. 글자 크기나 글자체를 달리
하는 것이불가능했던 것이다. 네모칸은 글자의 크기를 제한했고 특정글자나 숫자를 나타내
라는 명령을 받을 때마다 반복해야 했다.
예를 들어 "G"자를 치면 소프트웨어는 오로지 같은 크기의 한가지 글자체만 을 화면에 띄
웠던 것이다.
PARC의 연구진들은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했다. 그들은 "개개인 컴퓨터"를 모든 사람의 손
에 쥐어줄 방도를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한대의 중앙컴퓨터를 공유케 하는 대신 개인을 위
한 기계를 고안하고 또 개발해냈던 것이다. 한대 의 컴퓨터를 공유하는데서 오는 번거로움
과 지체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컴퓨터개발에 참여했던 한 연구원은 "밤이 되
면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반면 PARC컴퓨터과학연구
실은 융통성없는 글자와 숫자로 표시하는 고정된 칸에서 해방되어 화면을 무한하게 다양한
마크로 뒤덮을 수 있게 해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냈다.
작성일자 : 1994.10.31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2)
이른바 "비트 맵 디스플레이"라는 것을 개발해 냄으로써 화면에 있는 개개의점 즉 모든 픽
셀이문자이건 아니건간에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컴퓨터에 더 많은 부담을 주었
다.
PARC 초창기의 연구요원이었던 버틀러 램슨이 말했듯이 컴퓨터가 "사람이 원하는 대로
작동" 하도록, 즉 몇분의 1초도 안될 만큼 극히 짧은 시간에 화면 상에 멋지게 포맷처리된
텍스트와 그림을 그려주게 됨으로써 종전에 가졌던관념이 완전히 뒤집어지게 되었다. 이제
"사람은 빠르며, 정작 느린 것은 컴퓨터이다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컴퓨터 한대가 한사
람 이상의 인원과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따라서 개인은 혼자서만 사용하는 컴퓨터를
한대씩 가져야만 하게 되었다. PARC 설립 3년뒤인 73년, PARC의 연구진은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알토(Alto)를 개발했다.
대형 컴퓨터에 길들여진 컴퓨터 사용자들이 각자가 자신만의 전용컴퓨터를 갖는다는 사실
에 적응하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PARC의 상위급 연구 요원중 하나인 짐 호닝은 잠
시나마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 얼마나 마음이 불안했었는지를 호소했다. 그것은 너무
도 불합리한 낭비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알토" 는 단순히 따로 떨어져 있는 개인용
컴퓨터만은 아니었다. RARC의 알토는 서로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었는데, 이는 PARC
의 전자우편 개발을 가져온 또하나의 혁신이었다. PARC에서는 최초의 전국적인 전자복권 ,
최초의 전자광고우편 및 최초의 전자부고 등 최초로 개발된 것이 많이 있다. 최초 의 행진
은 계속되었다. 최초의 레이저 프린터, 다른 프로그램에도 쉽게 재사용될 수 있는 자가 모듈
을 사용한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소프트웨어 개발, 자판을 두
드리는 대신 한손으로 잡고 책 상위에서 굴려 컴퓨터에 명령을 내리는 "마우스"라 부르는
장치를 개발한 일등이 그다. 이것은 나중에 다른 것들과 함께 한데 묶여서 "윔프(Wimp)" 인
터페이스라 불리게 되었다. 즉 이는 윈도즈(Windows), 아이콘(Icons), 마우스 Mo-use 풀다
운 메뉴(Pull-down men-us)등의 머리문자를 딴 약어인 것이다. PARC가 이룩한 업적을 열
거하자면 많다. 과거 PARC에서 일했던 연구요 원들은 PARC를 떠난 훨씬 뒤인 90년대까지
도 더이상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필요는 없고 다만 당시의 기술들을 기억해내기만 하면 된
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PARC의 연구개발요원들은 훌륭했고, 또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약점을 명확하게 보지 못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그들은물론 컴퓨터 산업에 종사하던 다른 모든 사람들은 PARC의 역사에 먹구름을 안겨주
는 이른바 "창조신화"를 이루어냈다. 그 신화는 다음과 같은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옛날 옛적 인류가 타락하기 전인 에덴 동산 시절, 천사들이 이 세상에 개인용 컴퓨터라는
것을 선물했는데 제록스라는 어리석은 부모가 거절해버리고말았다. 관료주의적이고 우둔한
제록스는 PARC의 발명가들이 열심히 개발해낸 것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간파하지 못했다.
회사측은 알토를 시장에 내놓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뒤늦게 81년이 되어서야 알토의 후속
제품인 스타 Star 를 발표했지만 그것은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른 실패작이었다. 멍청한 거인
제록스사는 미래를 손바닥위에 올려놓고는 그만 그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둔 꼴이 되었다. 신화는 그렇게 계속되었다.
PARC의 연구요원들은 천사처럼 하얀 옷을 입었고, 제록스 왕국은 악마같은 빨간 옷을 입
었다. 이는 대기업이 안고 있는 경직성을 증오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고무적인 신화가 될지
모르나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PARC도제록스사가 개인용 컴퓨터시장에서 무참히 실패
한 점에 대해서는 책임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컴퓨터업계가 이 사실을 아무리 무시하려 한
다 해도 PARC는 한 조직의 오만성이 실패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사
례다. 그러한 오만성은 직원선발과정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PARC의 컴퓨 터과학
연구실에 취직하려 하는 사람들은 긴장된 가운데 일련의 발표와 인터뷰를 계속해야만 했는
데 이는 연구실 부실장인 로버트 테일러의 말에 의하면 의도적으로 " 지원자들의 신경체계
의 우수성"을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는것이다. 호된 시련을 견디어내고 최고로 뽑힌 사
람들은 "양손에 떨어진 벼락 을 자유자재로 다루는데 익숙"해진 극소수 몇명뿐이었다. 테일
러는 우수하더라도 훌륭하지는 않은 후보들은 과감히 실격시켰다.
모든 조직체는 응시자중에서 가장 우수한 후보를 채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PARC가
우수한 후보대신에 훌륭한 후보를 선호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PARC가 연구
소와 바깥세계를 이질화시키는 선을 긋는 방향으로 연구원들을 선정했다는데 있다. 즉 하나
는 명석한 두뇌로 구성된 PARC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덜 우수한 나머지 사람들로 혼합
된 외부세계가 그것이었다. PARC는 디지털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이진법의 단순성을 자신들
의 이분 법적 견해에 그대로 반영하여 연구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PARC의 요원들은 그
관리층과 보조를 맞춰 능력을 인정받든가, 아니면 "멍청한" 사람이 되어멍청하다는 소리를
직접 면전에서 듣게 되든가 둘중의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작성일자 : 1994.11.02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 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3)
특수한 재능을 가진 정신박약자처럼 뛰어나게 똑똑한 컴퓨터 과학자는 어느 한가지 분야에
서는 탁월할 수 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약할수도 있다. PARC의 연구진은
새로운 컴퓨터시스템을 개발하는 재능은 가지고있었지만 연구실에서 개발한 발명품을 상점
에 내놓을 제품으로 바꿔놓는 데는 적격이 아니었다. 그들은 잠재적 소비자들을 위해 컴퓨
터를 개발한 것이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PARC의 "우리가 만든 것을 사용합시다"라는 표어는 연구소가 개발해낸 기술 을 즉각적이
고도 지속적으로 시험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에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일반사용자들보다는 컴퓨터 전문가들의 손에서만이루어지고 있었다.
PARC의 알토를 사용한 유일한 외부 사용자들은 제록스사의 다른 부서였다.
이들 부서는 각 부서 업무특성에 따라 다른 형태의 컴퓨터를 주문했는데 가격은 1만2천~2
만달러선이었다. 만일 알토를 일반에 판매해서 이익을 남기려면 대당 4만달러을 받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터무니없이 높은 수준이었다. 포춘지 선정 5백대 기업
으로 뽑힐 정도로 재정이 든든해서 자사제품을 "사들이는" 그런 회사보다 일반 소비자는 가
격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가격수준을 뛰어넘으려면 제록스사의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담당하는 직원들과의 공동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PARC의 연구요원들은 자신들의 혁신적
인 발명을 상품 화하려고 제록스 본사와 협의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PARC연구요원들의 오만함이 "창조신화"에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제록스의 다른 직원들은
PARC에서 일할 만큼 두뇌가 명석하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겸손 해야 할 때와 기술적으로
무지하다고 하여 PARC연구원들이 뒤에서 자기들을비웃는다는 것을 알아챌 정도의 머리는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PARC가 제품 화 가능성이 있는 것을 상품화하기 위해 제록스내 다
른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할때 차가운 반응을 얻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창조신화에서 우리가 그토록 많이 들었던 사악한 모회사 제록스가 좀더 진보 적이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상상해보자. 가령 제록스가 PARC에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더이상
너희를 뒷받침해주지 않겠다. 여기 지금까지 네게 쏟아부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있다.
이 돈을 갖고 떨어져 나가라.
이제는 혼자 서서 너희가 개발한 제품을 직접 판매해 보아라. 서든 쓰러지든 혼자 힘으로
해보는거야. 이 새회사에 대해 우리지분은 계속 유지시키겠다" 그랬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
을까. 멍청한 부모에게서 해방된 PARC가 과연PC회사로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을까.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PARC의 알토는 일반 대중 용과는 거리
가 멀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PARC의 환경은 소비자와 너무
도 멀리 떨어져 있는 연구문화였다. 연구원들은 마치 대학에서처럼 자신의 "관심"을 끄는 프
로젝트를 자유롭게 선택했다. PARC에서는 이런 것을 "톰소여의 모험"이라 불렀는데, 누군가
가 어떤 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 다른 연구원들이 그에 관심을 갖게 되고 흥미를 느낀
사람들은 함께 울타리를 하얗게 칠하는 것을 돕곤 하는 식이었다.
PARC에서 각자가 주관하여 얻어진 전문기술지식은 이상적인 연구환경속에서 더욱 축적되
고 발전되어 마케팅, 재정, 마케팅, 생산, 그리고 또 마케팅과 같은 다른 분야의 전문지식과
연결되어야만 했다. 연구요원들은 경비의 제약 을 전혀 받지 않고 엄청나게 비싼 하드웨어
를 남보다 5~10년 앞서 사용할 수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겪어야하
는 가격의 제약은 감안했어야 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예산상의 제약이 없었던 PARC에서
연구 원들에게는 상상력의 부족이라는 한계가 있었으며, 그들은 자신의 PC의 기억 용량을
최대한 활용할 소프트웨어를 설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전설적 인 알토의 주기억용량
은 오늘날 PC의 표준용량인 수백만 바이트 또는 메가바이트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에 불과
한 12만8천 바이트밖에 되지 못했으며 설 계상의 한계로 추가기억용량을 활용할 수 있는 능
력도 제한되었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PARC를 떠난 몇몇 연구원들은 직접 컴퓨터 유관 사업을 시작
하여 상당규모의 기업을 세우면서 성공했지만 대중적인 제품보다 는 전문적인 제품을 취급
했다. 가장 성공한 업체로는 3컴과 아도브 시스템사가 있는데 가족중에 컴퓨터 네트워크나
레이저 프린터 폰트 소프트웨어 등을 잘 아는 컴퓨터 전문가가 있지 않는 이상 이들 회사제
품은 일반가정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PARC연구원 출신들은 비전문가들
에게 자신들을 이해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특수한 재능을 가진 정신박약자처럼 뛰어나게 똑똑한 컴퓨터 과학자는 어느 한가지 분야에
서는 탁월할 수 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약할수도 있다. PARC의 연구진은
새로운 컴퓨터시스템을 개발하는 재능은 가지고있었지만 연구실에서 개발한 발명품을 상점
에 내놓을 제품으로 바꿔놓는 데는 적격이 아니었다. 그들은 잠재적 소비자들을 위해 컴퓨
터를 개발한 것이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PARC의 "우리가 만든 것을 사용합시다"라는 표어는 연구소가 개발해낸 기술 을 즉각적이
고도 지속적으로 시험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에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험은
일반사용자들보다는 컴퓨터 전문가들의 손에서만이루어지고 있었다.
PARC의 알토를 사용한 유일한 외부 사용자들은 제록스사의 다른 부서였다. 이들 부서는
각 부서 업무특성에 따라 다른 형태의 컴퓨터를 주문했는데 가격은 1만2천~2만달러선이었
다. 만일 알토를 일반에 판매해서 이익을 남기려면 대당 4만달러을 받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터무니없이 높은 수준이었다. 포춘지 선정 5백대 기업
으로 뽑힐 정도로 재정이 든든해서 자사제품을 "사들이는" 그런 회사보다 일반 소비자는 가
격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가격수준을 뛰어넘으려면 제록스사의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담당하는 직원들과의 공동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PARC의 연구요원들은 자신들의 혁신적
인 발명을 상품 화하려고 제록스 본사와 협의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4)
가장성공한 업체로는 3컴과 아도브 시스템사가 있는데 가종중에 컴퓨터 네트 워크나 레이
저 프린터 폰트 소프트웨어 등을 잘 아는 컴퓨터 전문가가 있지않은 이상 이들 회사제품은
일반가정에서 쉽게 사용할수 있는것이 아니었다.
PARC연구원출신들은 비전문가들에게 자신들을 이해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창조신화
와 다른 여러 요인 덕택으로 각광를 받게된 PARC는 컴퓨터 게임에서 는 IQ 평균치가 최고
로 높은 회사가 이긴다는 법칙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과연 지능만이 최고의 선인가. 그
것이 마력이나 효율성이 같은 어떤 종류 의 일과 대체하고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보통 긍정적으로 가정한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최초의 발명가가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했고 그 뒤를 따라가면
서 때로는 상당한 정도까지 발명품을 개선시킨 사람들은 무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념
때문에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가를 치렀다. 일본인들이 미국에서 개발한 전자기술
을 가져다가 변형하는 것을 단순 한 "복제"정도로 생각해 결국 미국의 가전산업이 무참히
참패했던 것이다.
PARC 발명의 신격화는 이런 관념의 연장인 것이다. 찰스 시머니는 PARC의 다른 연구원
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명석한 젊은 과학자 였다. 그는 1948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66년 서방
세계로 망명, 미국으로 건너 와 버클리에서 학사, 스탠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머니는 74년 PARC에 들어가 인쇄체 문자가 화면에 나타나게 하는 최초의 알토용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것은 현재 고차원의 하드프로 그램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
겨지고 있는 WYSIWYG(W-hat you see is wh-at you get의 머리글자)이지만 시머니가 브라
보(Bravo)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할 당시 이것은 일대 혁신적인 것이었다.
81년 시머니는 팔로알토를 떠나면서 스스로 "PARC바이러스"라 부른 이 기술 을 빌 게이츠
가 세운 마이크로소프트사로 가지고 갔다. 그는 원래 프로그램 의 기본적인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래도 그에게는 세계 최고의 프로그래머라는 의식이 남아 있었다.
80년대 중반 어느 인터뷰에서 시머니는 "다른 저명한 프로그래머들과 의사가 잘 통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 "그들과 서로 얘기할 것이 별로 없었다. 마치 개그맨들의 회합에서 죽 둘
러앉아 웃기는 얘기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웃기는 얘기 번호만 말하면
사람들이 다 알아듣고 웃는 격이다 라고 말했다. 이같은 그의 말에는 시머니의 과거 기억
속에 남아있는 PARC의 뿌리, 즉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대가로서 가지고 있는 인식이 잘 나
타나 있다.
한편 그의 말에는 알토 컴퓨터가 널리 보급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다는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이제는 즐거움보다 사업목적을 위해 프로그램을 개발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
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이 기뻤으며 벌어들인 돈으로 이집트여행도 가고 헬리콥
터도 대여해 탈 수 있게 되는것 역시 기뻤다. 시머니는 헬리콥터를 타는 것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헬기를 타는 것은 매우 피곤할 일이 되기
도 하며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프로그
램 개발과 관련해 그처럼 강한 물욕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은비PARC적인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빌 게이츠가 갖고 있는 사업적 재능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는 시머니같은 PARC출신 연구원들의 고용가치를 알고 있었으며 기술중심 의 연구소에
서 나온 전문지식을 시장장악을 목표로 하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활용하였던 것이다.
시머니가 입사했을 때만 해도 마이크로소프트는 매우 작은 회사였다. 시머니의 입사로 분
위기가 PARC같아졌다기보다는 마이크로소프트 고유의 문화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커다란
유기체에 PARC의 유전자가 흡수된 셈이었다. 시머니의 워드프로그램 "브라보"는 수정돼서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라는 SW로 새롭게 등장했다. 이 프로그램은 추후 PC워드프로그램시
장을 장악한 주요 프로 그램이 되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서너차례의 중요한 수정을 거쳐
야만 했으며 여기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노련한 마케팅전략이 결합했다.
결국 근원을 따져보면 초기 PARC시절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는
적절히 잘 붙여진 이름이다. 그것은 PARC가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만
들어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기 때문이다. 제록스사의 고위경영진의 서명이 빠진
것 이상의 이유 때문에 PARC의기술이 보류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주는 사례다.
작성일자 : 1994.11.07
매킨토시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5)
빌 게이츠는 시머니와 같은 우수한 프로그래머들을 많이 고용했다. 그는 어느 회사보다도
높은 봉급과 주식 배당 등으로 이들을 매수했다.
그러나 그 동기는 PARC를 재창조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게이츠는 이들을 자신의 사업
과제인 응용제품개발에 이용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나온 제품은 파생적이고 독창성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그래머들은 공개 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마이크로소프트
가 최고의 기술적인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회사는
프로그래머들이 어떠한 제품을 개발하든지간에 거기에서 상업적 가치를 최대한으로 뽑아내
는환경이다. 이는 프로그래머들이 개발실적에 대해 동료전문가들로부터 인정받는 대신 상업
적 목적을 위해 이용된다는 조건을 스스로 수락한 파우스트의 계약인 것이다.
PARC는 자체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자기기만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PARC의 경영진은 자기들만이 세계 최고의 컴퓨터 과학자들을 모아놓았다고 믿는 오류를
범했다. 79년 PARC의 간부인 래리 테슬러는 상관 인 로버트 테일러와 언쟁을 벌였다. 테일
러는 PARC에는 명석한 사람들이 모두 집결되어있으며 PC기술을 선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대해 테슬러는 다른 곳에도 똑똑한 사람들은 있을 수 있다고 반박했
다.
"그럼 그 사람들을 채용하게." 테일러는 말했다. 테슬러는 PARC밖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
다. "모두 다 데려올 수는 없습니다.
-수백명도 넘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구요." 화가 난 테슬 러는 결국
PARC를 떠나 그가 만났던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로 결심 했다. 그들이 바로 애플
컴퓨터사를 설립했던 스티브잡스와 몇 명의 엔지니어 들이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PARC가 이루어낸 성과 덕택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은제록스 내외를 막론하고 스티브 잡스를
따를 이가 없는 것 처럼 보인다. 신화는 이렇게 전개된다.
79년 어느날, PARC 관리자들은 잡스를 비롯한 애플사 사람들의 PARC방문 요청에 대해
아무런 경계심없이 이를 허락했다. 제록스가 PARC 연구원들이 개발해낸 알토와 다른 기술
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바로 그때에 잡스가 나타난 것이다. 잡
스는 알토를 한번 보고는 상용화 설계 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이것을 가지고 왜 아무것도 안합니까?" 그는 PARC측에 물었다. "이건 정말굉장합니다. 가
히 혁신적입니다." 그는 알토와 같은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는확신을 가지고 회사로 돌아와
곧 래리 테슬러를 PARC에서 끌어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매킨토시가 개발됐고, 잡스는 제
록스가 해낼뻔 했던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PARC의 창조신화처럼 스티브잡스가 PARC의 지적인 보석을 애플로 훔쳐간 사실은 그리좋
은 선례는 아니다. 거기에는 중요한 구체사항이 결여되어 있을뿐 아니라 잡스를 필요이상으
로 사악하거나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로 평가하기 쉽기 때문이다.
지적재산의 도둑행위로 낙인 찍힌 79년, 스티브잡스의 PARC방문에 얽힌의혹을 생각해 보
자. 몇 가지 사실을 잠깐 들여다보면 그 사건을 다른 시각 에서 볼 수 있다.
당시 PARC의 관리층은 외부인의 연구소방문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70년대초까
지만해도 PARC는 외부에 개방적이었다. 연구소 건물은 스탠퍼드대학과 자전거로 왕래할 수
있는 거리에 세워졌기 때문에 PARC의 간부들은 스탠퍼드 인공지능 연구소 및 기타 다른
학과의 동료들과 자유 로이 왕래하곤 했다. 원래 PARC에는 보안통제가 없었으며, 대학 캠
퍼스 처럼 공개된 곳이었다. 심지어 71년 자체 회의에서 PARC소속 친구를 따라 온 스탠퍼
드 인공지능 연구소 연구원이 제안을 하기도 했는데, 제록스의 잭 골드먼 연구팀장은 그 사
람이 외부 방문객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의 제안 에 찬사를 보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연
구원들은 모르는 척하며 웃음을 참아야했다. 이같은 태평세월은 72년 장발의 PARC프로그래
머들에 대한 기사가 롤링스 톤지에 게재되면서 갑자기 중단되었다. 연구원이었던 앨비 레이
스미스는 훗날 그 기사가 제록스사 본부를 크게 진노케했다고 회고했다. "연구소에 있는이
장발의 망나니들이 모두 기사에 나왔다니-어찌나 당혹스러웠던지." 잭 골 드먼은 캘리포니아
로 날아가 긴급 회의를 열고 롤링스톤지 기사같은 것이 한번 더 나오면 제록스는 연구소 문
을 영원히 닫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후PARC에 대한 기사는 통제되었으며 PARC 연구원
들의 기술적인 연구기 사도 상당 수준 격감되었다.
활자로 발표할 기회는 없어졌지만 자신의 실적을 동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PARC의 연구
원들은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명회를 통해 외부세계와 교류를 가졌다. PARC의 핵심
이었고 훗날 애플 컴퓨터의 "무임소장관"이 되었던 앨런 케이는 "설명회"를 PARC의 일상생
활로 표현했다. 잡스의 유명한 방문이 있기 4년전인 75년, 다양한 크기의 그룹으로 이루어진
약 2백여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가졌다. 나중에는 많은 방문객을 받아들이는 것
은 너무 소모적이라고 판단, 설명회 횟수를 어느정도 줄이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방문객중 일부는 설명회에서 본 것을 상품화해야겠다는 착상 을 얻게 되었
다.
하지만 잡스는 그런 초기 PARC방문자중 하나는 아니었다. 잡스의 방문이 다른 사람들의
방문과 다른점이 무엇인가는 케이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방문객 중 억만장자나 20대의 회
사 사장인 사람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PARC를 방문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아트를 타고
돌아가서 "그래, 이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거야"라고 말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작성일자 : 1994.11.09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6)
분명히 애플사는 제록스의 경쟁업체였지만 제록스는 스티브잡스의 방문을 허락했다. 사실
제록스사는 애플이 주식을 공개하기전에 비공개리에 상당량의 애플지분을 매입했던 것이다.
잡스는 제록스사와 자금조달 관련협의를 하면서 PARC를 방문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잡스
를 약탈자가 아닌 새로운 동업자로 간주한 제록스사는 방문을 허락했다. 애플사의 이익은
곧 제록스사의 이득이 될 것이다. 애플사 방문단 은 PARC에서 알토에 대한 한시간의 설명
을 두번에 걸쳐 들었다. 애플사 일행 의 두번째 방문시에 잡스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직접 보고 듣는 것은 청사진을 받아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잡스와 함께 PARC를 방문했던 애플사의 빌 애킨슨은 PARC에서 본 것이 그렇게 대단한
비밀사항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PARC에서 하고 있는 일을 이미 언론을 통해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익했던 점은 그런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되는 것을 보고, 자신과 동료들이 택한 방향이
올바른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PARC의 조지 페이크소장도 이에 동의했다. 물리학자 페이크는 후에 자신의제록스사 상관
들이 잡스의 방문을 허락한 것은 "아둔한 짓"이었다고 비판했다. 페이크는 제록스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잡스가 혁신적인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이었
다고 말했다. 페이크는 이렇게말했다. "러시아와 원자폭탄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것을 만들 수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자 즉시 개발해냈던 것이다." 페이크나 다
른 PARC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속에서 마치 79년 이후 애플사의 성공이 당연히 PARC의
공이었다는 듯한 어조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PARC가
개발한 것들이언제까지나 비밀로 남을수만은 없는 것이며, 제록스는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도
알토를 소개했었고, 당시 PARC는 다중 윈도즈와 팝다운 명령 메뉴 등 특징을 갖고 있는
알토 소프트웨어 "스몰토크"를 다른 회사들에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모회사로부터받은 상
태였다.
그들은 또한 애플사의 엔지니어들이 제록스의 연구소를 방문하고 돌아간 뒤에도 많은 연구
개발을 추진해야 했고 마케팅 담당자들 역시 판촉전략을 세워야 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
다. 그후에도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서 성공 이 결코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을 증명해 주었으며, 따라서 성공의 몫은 제록스가 아닌 애플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했
다. PARC를방문했던 잡스와 다른 애플직원들은 단지 기계와 그 소프트웨어의 겉만을 봤을
뿐이었다.
훗날 애플사가 독창적인 프로그램 코드를 사용해 개발한 소프트웨어가 작동 면에서 제록스
알토의 소프트웨어와 비슷하다면 애플이 "모양과 느낌" 을 복제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모양과 느낌"이라는 것은 저작권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정의하기가 매우 모호한
개념이다. 이것은 마치 자동 차 제조업체가 최초로 운전대를 자동차의 왼편에 설치했고, 브
레이크 페달은 왼쪽에 액셀러레이터페달은 오른쪽에 설치했다고 해서 그들만이 독특한 자동
차설계의 "모양과 느낌"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애플
사가 PARC에서 가져간 것은 지적재산이라고 간주할 만큼 구체 적인 것이 아니었다. 마이로
소프트사가 애플의 매킨토시 소프트웨어의 모양 과 느낌을 복제했다하여 입장이 뒤바뀌었을
때, 애플사는 아이로니컬하게도제록스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과 똑같이 불만을 표시했다.
애플은 88년 마이크로소프트를 고소했는데, 아무리 현대가 소송의 시대라 해도 이는 참으
로 위선적인 행위였다. 애플은 IBM의 컴퓨터를 매킨토시 비슷한 모양을 갖게 해준 마이크
로소프트사의 "윈도즈"소프트웨어가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당연히 많은 경쟁자들과 경쟁을 벌여왔지만 애플로부터 태고의 불의
비밀을 훔쳐내는 것은 위반항목중에 들어있지 않았다. 모양과 느낌을 도둑질했다는 애플의
주장은 세가지 이유에서 어리석은 주장이었다.
첫째, 법률적개념 자체가 불투명하고 집행불가능했고 둘째, 이 경우 애플사 가 상호 특허
라이선스계약에 따라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부여한 소프트웨어 권리로 인해 문제가 단순치 않
았으며 셋째, 애플과 PARC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 애플사의 마이크로소프트사 제소는 자신
의 역사를 잊어버리려는 엄청난 노력 을 필요로 했다.
작성일자 : 1994.11.11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7)
그러나 소송의 행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이듬해 제록스사는 애플사가PARC에 대해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위해 애플에 대해 1억5천만 달러를 요구하는 저작권 침
해 소송을 걸었다. 이렇게 해서 소송건은 갈피를 잡기가 어렵게 되어 버렸다. 마이크로소프
트사는 애플에 의해, 애플사는 제 록스에 의해 피소당했으며, 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
졌다.
제록스사는 컴퓨터 마우스의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이유로 스탠퍼드연구소 로부터 제소당
할 수도 있었으며, 개인용 컴퓨터와 관련된 모든 기술의 원조 를 찾아 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소송이 끝없이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애플사에 대한 제록스의 제소는 납득이
안갈 정도로 뒤늦게 이루어졌는데 제 록스의 주장대로라면 애플사가 저작권을 침해한 지 6
년이 지난 것이다. 이 소송은 법정에서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보언 워커판사는 6건중
5건의 기소사항을 즉각 처리했고, 나머지 하나도 곧 기각시켜버렸다. 워커의 견해 에 따르
면, 애플사는 소프트웨어를 독자적으로 개발했으며, 제록스사의 것과유사성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제록스는 당시 아무 쓸모가 없어진 자사의컴퓨터 스타(Star)로부터 뭔가 구제해보
려는 시도에서 부당한 저작권 주장을 한 것에 불과했다.
스타가 81년 시장에 나왔으나 판매실적은 아주 형편없었는데 이는 애플사를 제소하기 훨
씬 전의 일로서, 당시 애플사는 아직 "모양 과 느낌"이 유사한 컴퓨터를 개발하지 못한 상태
였다. 워크는 제록스의 스타 가 애플제품의 성공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때문에 불만을 가
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판결했다. 그는 저작권법이 "상업적인 실패를 구제해주려고 있는 것
은 아니다"라고 냉철하게 말했다.
애플사는 판사의 논리덕분에 구제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똑같은 논리를 애플 사에 적용할
수도 있었다. 저작권법은 마이크로소프트사 윈도즈의 성공에 따른 애플의 실망을 위로해주
는 적절한 치유법이 아니었다. 애플 대 제록스 사건을 다룬 바로 그 판사가 애플 대 마이크
로소프트 사건도 다루게 되었는데 그는 애플사를 제록스사로부터 보호했던 그 논리를 가지
고 이번에는 마이 크로소프트사를 애플사로부터 보호했다. 비록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은
꼭쟁취하고야 마는 8백파운드의 고릴라와 같은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지지하는것이 잘된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92년 4년간에 걸친 법정투쟁이 마이크로소 프트의 입장을 지지하는 판결
로 종결지어졌을 때, 사람들은 이성의 힘이 마침내 승리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만 했다.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제소하기 훨씬 전에 애플사를 떠났기 때문에 애 플의 위선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플사 근무시절, 그는 마이
크로소프트의 윈도즈를 처음 보고 화를 냈다.
이에대해 빌 게이츠는 "이봐, 스티브. 자네가 나보다 먼저 제록스에 침입해 TV를 가져갔다
고해서, 내가 나중에 들어가 스테레오를 가져오지 말라는 법은없잖나? 넥스트사를 설립하여
애플에서는 갖지 못했던 회사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되자 잡스는 회사를 완전히 밀실화시켜
경쟁가능성이 있는 회사는 물론 앞으로채용할 직원들까지도 내부를 들여다 보지 못하게 만
들었다. 실리콘밸리의 회사들이 철저한 보안조치에 경비를 많이 들이는 것은 보통 있는 일
이었지만, 그런 기준에 비춰봐도 잡스는 넥스트를 훗날 만들어냈던 컴퓨터같이 폐쇄된 블랙
박스처럼 만들었다.
이런 행동으로 잡스는 PARC경영진의 불유쾌한 회상에서 수시로 나타나는 잘못된 생각이
모두 맞는 것과 같은 느낌을 안겨주었다. 즉 발명품은 겉모습만살짝 보기만 해도 쉽게 모방
될 수 있고, 기술력은 마케팅 기술에 달린 것이며 비교우위는 너무 취약해서 나쁜 상대에게
살짝 보여주기만 해도 회사를 망하게 한다는 생각 등이다. 그것은 마치 잡스가 자신이
PARC에서 그랬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넥스트사의 귀중한 기술을 훔쳐가도록 놔두
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이를 소재로하여 잡스를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범
죄를 자신이 저질렀다고 확신하는 천진난만한 사람으로 묘사한 심리추리소설을 쓸 수도 있
을 것이다.
작성일자 : 1994.11.14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8)
컴퓨터 발표회에 참석하는 것이 중대한 절도죄에 해당된다면 PARC를 방문한 애플사 사람
들이 훔쳐온 것은 너무나도 거친 다이아몬드였다.
제록스사가 PARC에서 개발한 기술에 기초하여 최초로 시장에 내놓은 컴퓨터 "스타(Star)"
의 비운을 보자.
애플사가 79년 PARC에서 한번 본 것과 닮은 애플사 최초의 컴퓨터 "리사(Li sa)" 역시 비
참한 운명을 맞았다. 리사 개발계획은 잡스가 79년 11월 PARC를방문하기 이전에 이미 시작
되었으나 83년 1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장에 선보인 것이다. 제품의 설계에서부터 완성까
지의 리드타임이 이렇게 오래 걸린 사실은 애플사의 절도혐의를 풀어주는데 일조를 했음에
틀림없다. 당시 애플 은 "리사"의 개발에 5천만달러를 투자했는데 그중 2천만달러는 소프트
웨어 개발에 썼다고 주장했다.
잡스는 리사를 시장에 내놓는데 그렇게 오랜 시일이 걸린 것에 대해 이렇게말했다. "우리
는 리사를 1년전에 내놓을 수도 있었지만 완벽한 것을 만들고자 했다." 사실 수년간에 걸친
개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벽한 제품은 아니었다. 리사를 작동시키기 위해 개발한 소프트
웨어는 IBM의 개인용 컴퓨터 나 애플사의 애플Ⅱ, 애플Ⅲ의 소프트웨어보다 훨씬 더 사용
하기 쉬웠다.
리사에는 여섯가지의 프로그램이 달려있는데, 이들 프로그램은 이해하기 힘든 명령이나 안
내서에 의존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 되었다. 그러나 상호호환성이
있게끔 고안된 이들 소프트웨어는 엄청난 양의프로그램 코드를 필요로 함에 따라 실행속도
를 더디게 했고, 광고만큼 잘 작동되지 않았다.
더구나 기본 시스템 소프트웨어가 독자적이어서 다른 개인용 컴퓨터와 호환 성이 없기 때
문에 리사를 갖고 있는 컴퓨터 사용자는 다른 컴퓨터에서 사용가능한 수천 가지의 소프트웨
어를 하나도 사용할 수 없었다. 리사가 그렇게비싸지만 않았더라면 소비자들은 새로운 소프
트웨어가 시장에 나올때까지만 잠시 겪으면 되는 불편으로 생각하고 이를 감수했을지도 모
른다. 그러나 리 사의 가격은 9천9백95달러로 당시의 개인용 컴퓨터의 일반적인 가격을 훨
씬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애플사는 고가 제품의 판매에서 성공한 경험이 없었다. 당시 대단한
성공작인 애플Ⅱ는 1천5백달러였다.
잡스는 가격과 소프트웨어의 비호환성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그는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것에 가장 큰 신경을 썼다. 리사를 출시하면서 그는 "컴퓨터 산업은 5년 동안 실질적인 기
술혁신을 이룩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리사는획기적인 혁신제품이었으나 잡스가 그 개발과
정에 직접 관여하지 못한것이아쉬웠다. 그는 리사 개발책임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는 애플사
의 부사장에 불과했고 결정은 그가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애플사는 설립 초기에도 공동 설
립자 잡스와 워즈니악이 아닌 마이크 마쿨라회장과 그가 임명한 사람들이운영했다. 잡스에
게는 비록 리사가 자신의 개인적인 프로젝트는 아니었지만그의 취향에 맞는 기술적으로 훨
씬 뛰어난 컴퓨터였던 것이다.
제록스의 PARC가 선구자적인 알토의 상업적 잠재력에 대해 지나치게 환상을 가지고 있었
던 것처럼 잡스와 애플사의 다른 고위간부들도 리사에 대한 기대 가 너무 컸다.
애플사는 강력하고 사용하기 편리한 개인용 컴퓨터를 필요로 하는 3천만명의 사무직 전문
가와 관리자들과 같은 "지식근로자"들을 리사의 소비자 그룹으로 보았다. 그것은 소비자들에
게 흑백 개인용 컴퓨터(리사는 컬러 디스플레이가없었음 한 대에 최고 얼마 정도를 지불하
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가진 몽상에 불과했다. 분명히
잡스는 리사가 사무 실내의 다른 컴퓨터 및 네트워크와 공존해야 하며, 리사의 비호환성이
심각한 장애가 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잡스는 "우리는 리사를 가지고 IBM을 날려버릴 것이다. 이 컴퓨터가 나오면 그들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는 "향후 10년간은 리사를가지고 사업을 할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리사는 겨우 두 살만에 죽고 말았다. 그의 종말은 84년 그보다 가격 이 훨씬 저렴
한 매킨토시가 등장하자 더욱 앞당겨졌다. 매킨토시는 79년부터 별도로 개발되어 리사보다
늦게 시장에 나왔다. 사라지기 전 리사는 매킨토 시라는 이름으로 재구성되었고, 가격도 좀
더 적정한 수준인 4천달러까지 떨어졌다. 이에대해 시장반응이 긍정적으로 나타나 판매도 3
배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판매는 월 1천대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재정적 파탄에서 애플사를 구한 것은 소박하고 조그마한 애플Ⅱ였다.
애플Ⅱ는 개인용 컴퓨터의 선사시대에 속하는 것이긴 하지만, 애플은 훨씬 오랜 기간동안
계속해서 분기당 수억달러상당의 애플Ⅱ를 판매했다. 32비트 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채용한
리사가 사라진 반면, 8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를 탑재한 애플Ⅱ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매우
아이로니컬하다. 리사의 실패에 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소비자들과 계속 접촉하고, 고립되어 단절되지 않도록 하라. 소비자들이 신형 컴퓨터를 얻
기 위해 어떤 값이라도 치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마라. 구형과 신형을 이어줄 수 있는 소프트
웨어와 하드웨어의 다리를 제공하여 소비자들 이 손쉽게 새로운 컴퓨터에 적응할 수 있게
하라. 시장에서 최상위종컴퓨터 가 확고한 자리를 잡을 동안 기능과 성능이 약한 제품을 먼
저 내놓을 것등이다. 이런 교훈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넥스트사
를 시작하면서 이 모든 교훈을 전적으로 무시했다.
작성일자 : 1994.11.16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명해질 뻔한 대표적인물 두사람이 있다. 한 명은 영국인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인이다. 이 둘은 서로 만난 일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지만 한쌍으로 간주할 수
있다. 피터 베스트는 링고 스타가 들어오기전 비틀즈의 드러머였으나, 비틀즈가 유명해지기
바로 전에 그룹을 떠나야만했던 사람이다. 제프 라스킨은 스티브 잡스에 앞선 매킨토시 컴
퓨터의 아버지였으나 매킨토시가 인기를 얻기 전에 역시 떠나야 했던 사람이다. 베스트 와
라스킨의 업적은 하찮은 화젯거리로 어쩌다 떠오를 뿐 운명의 장난으로 "어떻게 될 수도 있
었는데"라는 아쉬움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라스킨의 경우 잡스가 매킨토시의 창시자로서 칭송을 받게되었다는 것은 오랫동안 그의 가
슴에 사무치는 일이었다. 응당 자기에게 돌아와야할 공을 주장하기 위해 라스킨은 언론과의
인터뷰나 편집인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그것은 마치 공원에서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는
행인들에게 소리를 질러대는별난사람의 경우처럼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라스킨이 아무리
열심히 세인의 관심을 끌려고 애쓰더라도 일반 대중의 머리엔 쉽게 사용할 수 있고 적절한
가격의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낸 최초의 인물로는 언제나 스티브 잡스가 떠오르게 되어있
는 것이다.
매킨토시의 태동기를 명확히 밝혀주는 것은 라스킨의 명예를 회복시켜준다는차원에서 뿐
아니라 잡스와 그후 넥스트사 제품으로 어떤 것들이 나왔는지를잘 이해하기 위해서도 중요
한 의미를 지닌다. 매킨토시는 PARC의 야심적인 비전과 제록스사의 "스타"와 애플사 "리사"
의 실패를 넥스트 컴퓨터사의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와 연결해주는 고리다. 스티브 잡스와 넥
스트사의 직원들 은 자신들의 역사에 너무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다시말하면 자신의 역사
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같은 성공의 결과를 거둘지라도 그에 이
르는 비결을 일반화시켰던 것이다.
매킨토시의 모태는 79년에 있었던 잡스의 제록스사 연구소 PARC의 방문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의 방문은 앞서 살펴봤듯이 그저 언뜻 본 것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게
다가 잡스가 PARC를 방문한 이후 줄곧 온 몸에받았던 후광은 그의 것만은 아니었다.
PARC개발품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내고 잡스에게 방문하도록 권한 사람은 바로 제프
라스킨이었다. 라스킨은 잡스보다 12살 연상이었으며, 31번 째로 애플사에 들어온 사람이었
다. 그는 철학에서 음악, 시각예술,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조예가 깊어서 캘리
포니아 대학에서 교직을 갖기도 하였고, 또 같은 이유로 교직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그는
기구를 타고 총장관저위를 날라서 대학을 빠져나왔는데, 이것을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일이
라고 생각하고 있다. 라스킨은 애플사에 들어가기 전 PARC근처에 있는스탠퍼드 인공지능연
구소에서 일하면서 PARC의 연구활동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다. 훗날 애플사에서 그가 잡스
에게 PARC를 방문하여 그곳의 연구원들이 무슨일을 하고 있는지 직접 보라고 설득하는데
에는 무려 1년이 넘게 걸렸다.
라스킨은 잡스가 PARC를 방문하기 전부터 매킨토시개발을 추진했다. 그는 마이크 마쿨라
애플사 회장에게 비싸지 않은 패키지에 그림과 정규 텍스트 를 혼합시키는 새로운 모델의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마쿨라 회장은 그런 기계가 5백달러에 팔릴 수 있도록
설계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라스킨은 일주일간의 심사숙고끝에 그 컴퓨터의 가격은 1천달
러가 되어야 할것이라고 대답했다. 화상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컴퓨터는 그래
픽 전문 워크스테이션으로, 당시 가격은 수만 달러에 달했다.
마쿨라의 격려에 힘입어 라스킨은 개발작업에 착수, "매킨토시 도큐먼트"라 는 노트에 설계
계획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잡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계획이었는데, 당시 잡스는
훨씬 더 고도화되고 값비싼 컴퓨터 "리사" 에열중하고 있었으며, 매킨토시 계획을 방해하려
하기도 했다. 그의 방해행위는 마쿨라와 마이크 스콧 애플사 사장에 의해서 저지당하긴 했
지만, 라스킨은 잡스의 방해를 피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라스킨이 매킨토시 개발 프로젝트에 함께 일하기 위해 처음 선발한 사람중에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샌디에이고 극단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는 가이 버드 트리블이 있었다. 트리블은
라스킨처럼 전혀 분야가 다른 서너가지의 직업 경력을 가지고 있던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는
데, 그가 애플사에 들어온 것은뜻밖의 수확이었다.
80년 당시 그는 시애틀 소재 워싱턴대학에서 신경생리학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중이었
다. 당시 트리블은 라스킨이 애플사에서 첨단기술의 저가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팀을 구성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애플사를 방문하여 약 4백페이지에 달하는 매
킨토시 연구자료를 보고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자신의 의학연구에서 잠시 떠나 매킨토시
그룹에 합류하기 로 결정하게 되었다. 애플사에서, 또 그 이후 넥스트사의 공동 설립자중 한
사람으로서 신경생리학자 트리블은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탁월한 능력을 나타냈다.
작성일자 : 1994.11.18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10)
트리블은 제프 라스킨과 함께 일하기 위해 매킨토시개발팀에 합류했지만, 라 스킨이 스티
브 잡스와 사이가 나빠지게 되자 그의 의욕이 시험대 위에 놓이게 되었다.
애플사 사장이 "리사" 프로젝트 팀장으로 임명해 달라는 잡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자
잡스는 매킨토시팀으로 옮기려고 결심했다. 잡스가 "리사"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는 것이 어
렵게 되자 그는 다른 프로젝트를 물색했고, 결국 라스킨의 매킨토시팀에 합류하게 된 것이
다.
얼마안가서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라스킨과 잡스는 가격에 영향을 주게될 디자인 결정
을 놓고 가장 심한 의견차이를 보였다. 가격을 가능한 한 비싸지않게 하여 1천달러정도에
판매하기 위해서 라스킨은 잡스와 반대로 새 칩보다는 기존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채용하려
고 했다. 여기에서 잡스의 견해가 우세했다. 그러나 새로운 칩을 택하게 되면 그에 따라 하
드웨어사양도 달라져야 했다. 컴퓨터의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 느리긴 하지만 단가가 낮은
일종의 변형 테이프리코더를 사용하는 대신, 단가는 높지만 훨씬 빠른 플로피 디스크 드라
이브를 채용해야 했다.
컴퓨터 기억용량도 원래 계획했던 6만4천바이트보다 확장시켜야 했다. 화면의 확대, 자판의
분리 등과 같은 변경사항 역시 가격을 훨씬 더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라스킨은 제품단가가
치솟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허사로 끝나자 결국 잡스를 통렬히 비난하는 문서를 작
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남의 말을 듣지 않았고, 분별없이 행동했으며, 칭찬에 인색했다.
그는 사람을편애했고 약속을 어겼다"등등. 라스킨은 회사의 공동설립자인 잡스와 대결 했지
만, 그를 이기기에는 사내기반이 너무 약했다.
그들사이에 버드 트리블이 있었다. 오랜 친구 라스킨은 트리블을 설득해서 매킨토시가 설
계나 가격면에서 리사처럼 되지 않도록 막으려 했고, 또 한편에선 스티브 잡스가 트리블이
작업하고 있던 소프트웨어를 탑재할 수 있게끔고성능 하드웨어를 개발해야 한다고 설
득했다.
"기술중독자" 트리블은 보다 "환상적인 비트"의 컴퓨터를 선호했다. 훗날 트 리블은 당시를
되돌아보며 "그같은 유감스런 정치적인 일들이 벌어졌었지"라 고 말하곤 했다. 매킨토시에
몰두한 그는 프로젝트가 완성되기를 바랐으며잡스의 판정승으로 라스킨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자,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끝까지 지원하게끔 만들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이든지간에 그를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잡스에게 달라붙었다.
라스킨이 애플사를 떠나고, 3년이 지난후 매킨토시가 출하되었을 때 그 가격 은 라스킨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2천4백95달러였다. 그러나 잡스와 트리블에게는 운이 따라서, 매
킨토시에 채용한 반도체가격이 예상밖으로 하락했기 때문에 가격이 상당히 내려갔다.
매킨토시가 시장에 나오자 잡스와 트리블을 비롯한 고성능컴퓨터개발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옹호를 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같은 컴퓨터도 용량이 부족하다느니, 느리고 작으며 기
능을 충실히 수행해내지 못한다는 평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트리블은 한때 매킨토시 컴퓨터
의 용량을 당초 계획한 6만4천바이트보다 두배로 늘린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일도 있었
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도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새로운 매킨토시는 훨씬 더 많은 용량
을 필요로 했다. 애플사로서는 잡 스와 트리블의 견해가 승리했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매킨토시의 사양 결정이 모두 다 현명했던 것은 아니다. 잡스는 마우스를 사용해 컴퓨터
화면상의 화살표를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서 마우스를 사용해야만 화살표를 움직일 수 있게
끔 하려고 했다. 그는 연구원들의 반대에도 불구 하고 다른 컴퓨터에서는 표준화되어 있는
화살표 키를 매킨토시 자판에는 만들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용자가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못
하는 것을 지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잡스는 매킨토시를 완전히 "밀폐된"박스로 만들어버렸다.
사용자는 다른 장비를 추가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 컴퓨터 내부를 들여다보지도못했다. 사용
자가 실수로 뚜껑을 열게 되면 이상이 생기게 되어 있었다.
애플은 다른 컴퓨터업체가 만든 다양한 주변기기에 대해 고민할 필요없이 쉽게 매킨토시의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IBM은 박스안 에 빈 슬롯이 있는 "개방된
"컴퓨터를 제공하여 소비자들로 하여금 기억용량 을 확장시키고 다른 회사의 주변기기를 추
가하며 컴퓨터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조정할 수 있게 했다. 잡스는 IBM PC와 매
킨토시보다 먼저 나온애플 의 개방성이 그 컴퓨터를 성공시켰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만약 제프 라스킨이 매킨토시 프로젝트 책임자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묻는다면 가
격은 훨씬 저렴했겠지만 그에 따라 성능이 훨씬 약한 매킨토시가 탄생되었을 것이라고 대답
이 나올 것이다. 경제성보다 성능을 택한 잡스의 생각은 옳았다. 그러나 자판, 애드 온 보드
를 비롯하여 기타 컬러 디스플레 이 또는 플로피디스크보다 더 많이 저장할 수 있는 하드디
스크드라이브 등 소비자의 선택권을 도외시한 것은 옳지 않은 결정이었다.
매킨토시가 발표되자 여러가지 설계상의 문제가 제기됐다. 후에 애플사가 잡스의 결정을
번복하고 선택의 폭을 제한한 이러한 문제들을 개선하지 않았더라면 매킨토시는 틀림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때는 이미 잡스가 넥스트사로 옮겨간 후였고 그로 인해 문
제들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 해결되었다. 또 당초 매킨토시를 창안한 사람은 라스킨이
었지만 매킨토시를 성공시킨 공을 가져간 사람은 잡스였다.
작성일자 : 1994.11.21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11)
잡스는 혼자서 천재적인 설계자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했고 일반인들의 뇌리 에 이같은 단
순한 이미지를 고착시키는데는 언론도 한몫을 했다. 그의 전임자인 라스킨과 공덕을 나누려
하지 않았던 잡스는 자신이 예리한 직감력을 가졌다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게 되었다. 이러
한 생각은 결국 그의 판단력을흐 리게 하였고 매킨토시를 창안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하여 후에경쟁력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넥스트사에서도 비슷한 설계상의 결정
을 내릴 때, 즉 성능을 강조할지 아니면 경제성을 우선해야 할지, 하위 소프트 웨어에 영향
을 받지 않도록 시스템을 고립시킬지 아니면 다른 컴퓨터와연결 되도록 할 것인지, 컬러옵
션을 제공하기전에 먼저 기술발전이 이루어지도록 기다릴 것인지 또 품질은 조금 떨어지더
라도 컬러모니터를 탑재할지 등의 일에 직면할 때도 잡스는 그전과 같은 방식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는 그의 결정이 매킨토시에서 적중했으므로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매킨토시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일부 컴퓨터광을 제외하고는 그 판로가 매우 불확실한 상
태였다고 하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기업인들은 사업에 필요한소 프트웨어가 없고 IBM PC
와 거의 호환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용을 기피 하였고 학교에서는 가격 때문에 구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위기종인애플 도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판국인데 학교용으로 2천4
백95달러라는 특별 할인가격이 제시되었지 학교재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애플은 누구를 겨냥해야 할 것인가. 매킨토시를 살 사람들은 재력이 있어야 했고
새롭고도 IBM에 뒤지지 않는 퍼스널컴퓨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다시 말해 매
킨토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컴퓨터 초보자로 기존의 프로그램에는 별 관심이 없고 매킨
토시에만 적합한 새로운 프로그램에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대학생들이었다.
대학 근처에 있는 애플대리점은 새로 나온 이 제품을 대학생들에게 기꺼이 판매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플사의 매킨토시그룹은 대학이 대리점 역할을 하여 캠퍼스안에서 학생들
에게 제품을 판매하도록 하는 매우 색다른 계획을 세웠다. 대학이 당시로서는 독특한 이런
판매방식에 동조하도록 하기 위해 애플사는 소매가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컴퓨터 한대당 1천
달러를 제시했다.
이 컨소시엄에 가입한 대학들은 2백만달러상당의 컴퓨터를 구입하여 3년내에 학생들에게
그것을 팔도록 했다.
그러나 대학들은 이런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만일 대학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비상업주의를 표방하는 교육기관의 기본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또 특정회사에 편중되
지 않고 모든 컴퓨터업체들과 공평한 관계를유지하고자 하는 대학의 중립적인 자세를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애플사가 2백만달러상당의 컴퓨터를 판매하도록 제안한
자체가 수락하기에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학은 고등교육을 시키는 기관이지 재고를 관리하거
나위험 부담이 있는 업무를 수행하는 곳이 아닌 것이다. 대학에 있는 서점은 재고가 남으면
언제라도 출판사에 책을 반품하도록 되어 있어서 위험부담을 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애플사는 할인된 가격에도 구매자에게 부담이 되고 아직 시장에 출시되지도 않아
그 기능이 입증되지 않은 제품을 판매하는위험을부담하라고 나선 것이다. 만일 매킨토시가
실패작이었더라면 대학은큰 빚을지게 되었을 것이고 대학이 신봉하는 형평의 원칙이 크게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작성일자 : 1994.11.23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12)
애플사는 아이비 리그와 유명한 연구소를 가진 대학들을 주요 공략대상으로 삼았다. 스티
브 잡스는 애플사가 유명 대학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면 다른 대학들은 자연스럽게 동조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이비 리그가 관행을 깨고 학생들에게 컴퓨터
를 보급하기 위해 한 업체와 거래한다면 매킨토시가 정말 특별한 제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애플-대학 컨소시엄의 회원이 되지 않은 대학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매킨토시 그룹은 엘리트 대학을 설득시켜 계약을 맺도록 유도해야만 했다. 즉
매킨토시가 처음 발표되기 전에 컨소시엄 회원명단을 작성해 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사실 잡스는 대학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의사결정
과정을 잘 몰랐다. 그는 스탐퍼드 대학 총장인 도널드 케네디 와 점심 식사를 하면서 매킨
토시를 소개하고 마치 컴퓨터가 아닌 사과를 도매로 넘기려는 식으로 제의했다.
그는 "이것 천개를 백만달러에 구입할 생각 이 있습니까?"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결정은 컴퓨터연구소 소장, 학장, 부
학장, 대학 부총장 및 교직원 전체의 의사를 수렴하여 이뤄져야 하는 것이었다. 잡스는대학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무자들을 설득할 능력이나 인내력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옆에
는 잡스와 비슷하게 20대 후반이고 프린스턴 대학 출인 인덴 르윈이 있었다. 르윈은 캘리포
니아에 있는 소니사의 판매담당과장으로 근무할 당시 애플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잡스와 처음으로 만난 인물이다. 르윈이 잡스를 처음 만난 이유는 소니사가 개발한 3.5인
치 플로피디스크드라 이브 신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서였다. 잡스는 그 디스크드라이브가 마
음에 들었을 뿐 아니라 르윈의 수완에 감동하여 애플사로 오도록 설득하게 된 것이다. 르윈
에게 고등교육기관에 매킨토시를 판매하는 과제가 주어졌고 그는 각 캠퍼스를 열심히 찾아
다니면서 그들의 의견을 듣고 설득시키는 활동을 폈다.
트리블과마찬가지로 르윈은 특별한 인물로 후에 잡스와 함께 넥스트사를 설립하게 된다.
르윈은 매킨토시가 미래형 컴퓨터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매킨토시는 카네기 멜론 대학의
팻 크레신과 다른 대학에 있는 컴퓨터 전문가들이 요구하는 1백 만 바이트의 메모리 용량,
1백만 도트의 화면조성과 초당 1백만개의 명령을 수행하는 속도를 갖는 이른 바 "3M"컴퓨
터가 아니었다. 매킨토시는 모든 면에서 용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윈은
매킨토시가 사용하기 편리하면서 강력한 성능을 갖춘 "3M"형 컴퓨터라고 설명했다. IBM퍼
스널 컴퓨터는 작동이 어렵고 다른 PC들은 용량이 부족하다고 역설했다.
르윈은 매킨토시야말로 대학이 필요로 하는 성능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켜 줄것이라고 설명
했다. 르윈은 애플-대학 컨소시엄이 고객으로 구성된 단체가아니라 "함께 연구하는 집단"이
라며 애플사와 함께 고등교육기관에 상당한영향 을 미칠 수 있는 혁신적인 소프트웨어를 개
발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말했다. 스탐퍼드 대학측은 매킨토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지
만 컨소시엄에 가입 하는 것과 2백만달러라는 재정적 부담을 져야하는 조건은 기피했다. 그
러나 학생들로 하여금 대학 소유의 중앙 집중식 컴퓨터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도비용이 많이
들었다. 대학측은 메인프레임 컴퓨터와 미니 컴퓨터에 지대한관심 을 가졌다. 학생들이 대당
1천달러의 매킨토시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중앙컴퓨터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비용이 덜
들었다.
게다가 매킨토시를 사용하도록 하면 그 비용은 스텐포드 대학이 아닌 학생이 나 학부모가
지게되는 것이었다. 대학이 컨소시엄에 가입하면 대학은 대형컴퓨터를 도입하지 않아도 되
므로 1년안에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 대학은하 룻밤 사이에 컴퓨터 지원금으로 6백~7백
만달러라는 추가 예산을 얻는 셈이었다. 이같은 조건은 대학의 구미를 충분히 당길만한 것
이어서 대학의 재정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애플사의 혁신적 기술을 수용하도록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아이비 리그 대학이 5개 있는 미국 동부지역을 이끌어 가는 인물은 스테시브레슬
러였다. 브레슬러는 젊고 활달했으며 열정적으로 일했다. 애플사는 그녀를 캘리포니아로 초
청해 개발단계에 있는 매킨토시를 보여 주었다. 당시개발 된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기계에 커다란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뿐 아니라 그 컴퓨터를 미리 본 사람들은 호감을 갖게 되었고 생명이 없는 물체치고는
친밀감을 느끼게까지 되었다. 그때부터 애플사는 판매업무를 그만두고 판촉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밑바닥부터 애플-대학 컨소시엄 회원을 모집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브라운 대학은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브라운 대학에 있는 컴퓨터 전문가들은 컴퓨터업계
의 여러 소식통을 통해 이미 제품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들어온 상태였고 그녀가 방문할 것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제품을 소개 하려하자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사용하고
시험해 보겠다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들은 곧 계약을 맺겠다고 그녀에게 연락했다.
아이비 리그 대학들은 쉽게 설득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들 모두 그 제품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응답했다. 사실 그들은 퍼스널 컴퓨터를 사용할 것인지의 여부조차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고 사용한다고 결정이 되더라도 IBM퍼스 널 컴퓨터를 사용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좌절감을 느낀 브레슬러는 게릴라 전법으로 전술을 바꿔 매킨토시 시제품을 직접 들고 학교
기숙사와 근무처등 을 찾아가 그 성능을 학생과 교무처 직원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다
트마 우스에서는 컴퓨터센터 로비에 컴퓨터를 설치하여 한마디의 설명없이 화면그림을 조작
한 적도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곧 소문이 퍼지게 되어결국 그 컴퓨터센터의 윌
리암 암스소장이 직접 나와보게 되었다. 그는 그자 리에서 설득당했다. 그는 네트워크를 통
해 중앙컴퓨터와 학생 및 교직원모두 를 연결하는 개인용 매킨토시를 갖게 될 날이 올 것이
라는 것을 예견한것이다. 다트마우스는 1960년대에 학생들이 캠퍼스내 컴퓨터를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도록 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었다. 이제 암스는 다트마우스가 컨소시엄 에 가입
하도록 하여 캠퍼스내에 퍼스널컴퓨터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
는 애플사 입장에서 보면 또 하나의 변혁이었다.
작성일자 : 1994.11.25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15)
그러나 디스크 드라이브에 문제가 생겨 제 날짜를 맞추지 못하였다. 드렉셀 대가 가을에
학생들에게 선금을 받았지만 실제로 매킨토시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84년 1월24일이었
다. 매킨토시를 처음 발표하는 자리에서 잡스는아이비리그대학과 드렉셀, 스탠퍼드, 시카고
대학 및 연구소등 총 24개 기관 이 애플-대학 컨소시엄에 참여하여 새 제품을 개발하는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만일 드렉셀 대학이 성능실험도 제대로 거치지않고 출하시기도 지연된
컴퓨터에 투자하겠다는 위험한 결정을 내린 것에 조바심을 내고 포기했더라면 여러 유명 대
학이 참여한 컨소시엄의 일원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매킨토시를 실은 트럭이 학교
에 도착해 기대에 찬 학생들에게 컴퓨터가 전달된순간 모든 의혹이 사라졌다.
애플사나 대학당국은 학생들이 얼마나 빨리 매킨토시와 친숙해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3년
안에 2백만 달러 상당의 매킨토시를 판매할 수 있을지 우려하던 스탠퍼드대학당국은 첫 2주
동안에 2백5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흥분 을 감추지 못하였다. 사실 애플사가 수요를 감
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팔렸다. 스탠퍼드 대학은 학생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
해 추첨을 해야했고 그렇게 하고도 1천달러를 선불로 낸 학생 모두가 컴퓨터를 받기까지6
개월이 걸렸다. 컨소시엄에 가입하지 않은 대학에서는 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샌 루이스 오
비스포에 있는 캘리포니아 폴리테크니컬 주립 대학에서는 학생 1천명 이상의 탄원을 받아 1
백여명의 학생들이 총장실 앞에서 애플사와 재협상해 컨소시엄에 참가하라는 농성을 했다.
대학측은 중요한 계약을 맺을때 입찰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주정부법에 따라 애플사의 제의
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매킨토시를 구입한 학생들이 구매할 때의 약속을 어기고 대학가 근처에서 비싼 가격을 받
고 매킨토시를 암거래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신문 보도가 나오자 매킨토시는 다시 언론의 관
심을 받기 시작했다. 드렉셀 브라이언 허킨스는그런 행위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고 학생
들에게 경고 했으나 법적 구속력 은 없었다. 그는 "매킨토시를 판매하는 것은 학문적 자살
행위이다"라고 경고했다. 대학 교육에 매킨토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애플-대학 컨소시엄이 전국의 유명 대학으로만 구성되자 매킨토시는 다른 컴퓨터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85년 초 잡스는 1년 안에 매킨 토시가 표준 컴퓨터
로 대학에서 널리 사용될 것이라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내가 올해 만든 모든 매킨토시는 24개 대학에 모두 판매할수 있다"고 큰 소리쳤다. 그
는 매킨토시가 데뷔할 당시 중요 대학에 이를 보급시킬 수있도록 도와준 애플-대학 컨소시
엄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전통있는 명문대학이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가 새 제품을 출하할 때 그 이름 을 빌려준 사
례는 지금껏 없었다. 컨소시엄은 매킨토시의 신뢰도를 높이는데기여했고 다른 대학은 뒤늦
게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학생과 교직원들은 자연스럽게 매킨토시를 수용하게 된셈이지만 대학 구내서
점은 애플컴퓨터를 판매하도록하는 애플사의 요구를 못마땅히 여겼다. 대학 서점은 가격이
정해 있고 많은 수요가 보장되어 있는 교과서, 티셔츠등과 같은 간단 한 상품만을 취급해
왔기 때문에 애플사 직원이 판매 촉진을 위해 광고를 어떻게 할것이며 홍보 비용을 어떻게
책정하여 컴퓨터를 판매해야하는지 설명하는데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것이다. 대학 서점은
비영 리 단체이기 때문에 마케팅 활동은 하지 않는다며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런 태도를 취하는 서점들에게 애플사는 "당신들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고 말하면서
설득했다. 높은 수익률의 컴퓨터를 팔고도 학생들에게 제품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으면 학생들이 불평하지 않겠냐고 설명했다.
또학생이 서점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매킨토시가 판매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학교 밖에 있는
애플 대리점에서 학생 할인 혜택없이 제품을 구입한다면, 학부모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대학측에 항의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하면서 그들을 설득시켰다.
이렇게해서 서점은 판매뿐 아니라 일반 대리점에서 하는 마케팅 활동까지 모두 수행하게
되었다. 서점은 또 학생들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분아래 가을, 크리스마스
그리고 봄철이 되면 홍보 활동을 벌여 이윤을 남기려 하기 보다 컴퓨터를 되도록 많이 판매
해 학생들에게 더 많은 할인 혜택 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대학이 학생들에게 많은 할인혜택을 주려면 일반 대리점은 특별할인 혜택에 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리점은 크게 반발했다. 특히 학생들이 매킨토시의 주요 구매자층으로
부각 되자 대리점들은 자기들에게도 학교와 비슷한 할인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
만을 가진 미시간에 있는 한 대리점은 덴 르윈과 애플사를 제소하기까지 했다. 뉴 잉글랜드
에 있는 스테 이시 브레슬러 관할의 한 대형 대리점은 애플-대학 컨소시엄의 결성에 분노
를 느껴 그 컨소시엄이 자기 영업을 방해한다면 그녀에게 신체적 가해를 입히겠다고 위협했
다.
작성일자 : 1994.12.05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16)
결과적으로 브레슬러를 위협한 대리점사장은 후에 그녀에게 사과하였다. 그리고 애플사는
미시간에서 승소했다. 다른 대리점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할인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대학가 시장이 계속 번창하게 된것에대한 만족감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가에서 매
킨토시가 대량 판매되자 소프트 웨어 개발업자는 그 제품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많이 개발하
게 되었고 결국 매킨토시를 취급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득을 보게 되었다. 대학에서 매킨토
시 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졸업하고 나서도 대리점을 찾아가 매킨토시를 구입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윤을 추구하는 일반 대리점과 비영리조직인 대학이 함께 공존해 나갈 수 있었다.
만일 애플사보다 큰 회사들이 대학생들에게 컴퓨터를 판매하는데 성공했더라 면 애플사는
대학 서점이 PC를 취급하도록 설득시킨데 대한 보람을 느끼지못했을 것이다. 대학서점은
컴퓨터를 독점 판매하도록 한 회사에만 판매권을 주면 자신의 비영리적 이미지가 손상될까
봐 여러회사 제품들도 취급했다. 매 킨토시 마케팅 그룹이 개척한 판로에 IBM 및 여러회사
가 침투하여 매킨토 시와 비슷한 할인혜택을 줄 수 있게 된것이다.
그러나 매킨토시는 IBM이 한대 팔릴때 15대 때로는 40대까지 판매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침투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매킨토시 마케팅 담당자들 조차도 재정적으로 훨씬 튼튼
한 다른 회사들의 매출과 비교해 어떻게 이렇게까지 차이가 생길수 있는지 의아해했다. 잡
스 자신도 놀라워 했다.
그는 IBM이 4백여명을 동원하여 대학캠퍼스에 수천대의 컴퓨터 선물 공세 를 폈음에도 불
구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의기양양해 했다.
학생들은 매킨토시를 선호하였고 대학 당국도 컴퓨터를 공짜로 많이 받아도 그것을 사용하
기위해 소프트웨어 개발에 투자되는 비용과 IBM호환PC를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비
용이 훨씬 많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킨 토시가 사용교육 비용을 절감시켜준다면
IBM PC를 공짜로 준다고 해도 매킨 토시를 구입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경제적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IBM의 지원금을 받아 애플 매킨토시를 구입한 대학도 있을 지경이
었다.
IBM컴퓨터를 대학에 널리 보급하기 위해 IBM은 스탠퍼드대학에 거점을 확보 할 필요성을
느꼈다. 스탠퍼드대학은 1천8백만달러 상당의 IBM PC를 받았지만 매킨토시를 훨씬 더 많이
사용했다. 스탠퍼드 대학 당국은 IBM 컴퓨터를 용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교육훈련시키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현상을 반가워했다. IBM PC를 처음 받고
스탠퍼드는 복잡 난해한 워드스타라는 워드 프로그램 사용법을 교직원들에게 가르치느라 12
시간을 소비했다. 매킨토시용 워드프로그램인 맥라이트는 그런 교육과정이 필요치 않았다.
IBM은 스탠퍼드의 관심을 사려고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했고 애플사는 소규모의 마케팅
팀만으로도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보급시킬 수있었다. 캠퍼스내 매출이 5천만달러를 넘어설
당시 고등교육기관을 상대로 매킨토시 마케팅을 담당한 사람은 4명에 불과했다.
매킨토시가 대학에서 발판을 다지자 애플사는 대학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혜택 즉 매년 신입
생이 들어오면 25%에 달하는 새로운 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대학만이 이런 정기적 매상
고를 보장할 수 있었다. 애플사는 국민학교 및 중학교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 경우 학생들
에게 직접 파는 것이 아니라학교측에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이득을 올릴 수 없었다.
일반 기업도 마찬가지로 각 개인에게 컴퓨터가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회사로 판매되는 것이
기 때문에 애플에 돌아오는 이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은 애플 사 내부에서 "연
례시장"이라고 부를정도로 매킨토시의 사용이 많았고 매년 신입생의 입학과 동시에 새 고객
이 생겨 자연스럽게 정기 수입을 챙길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도 학생들은 애플사
에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매킨토시 는 IBM보다 월등히 우수했기 때문에 젊은 사용자의 마
음을 사로 잡았다. 이들은 취직한 다음에도 매킨토시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해 기업에서 주
로 사용한 IBM으로 바꾸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직장 상사에게 매킨토시를 소개해 때로는
매킨토시 판매에 기여했는데 애플사는 이런 현상을 "아래로부터의 판매 "라고 표현하였다.
매킨토시는 처음에 대학가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기업에서 고객을 만족시키는데 그치지
않았다. 매킨토시 사용자들은 IBM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했다.
IBM사용자들은매킨토시사용자들과 컴퓨터표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면 으레 짜증으로 자
신들을 변호했고 매킨토시 사용자들처럼 컴퓨터를 바꿔 보라고 강력하게 권유하지 못하였
다.
작성일자 : 1994.12.07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17)
이같은 매킨토시의 대학가 판매성공은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즉
매킨토시라는 새로운 형태의 PC, 대학서점을 통한 판매체계 그리고 매킨토시만 고집하는
충직한 고객의 확보 등이다.
애플사는 중간단계인 대리점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대량의 제품을 값싸게보급할 수 있었
고 컴퓨터 대금은 학생과 학부모가 직접 부담하기 문에 대학은 별다른 예산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매킨토시 의 성공사례는 이차적인 관심에 불과했다
는 것이다. 매킨토시의 마케팅 담당 자들과 대학을 놀라게한 것은 매킨토시가 학생들의 학
문활동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애플사의 스테이시 브레슬러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보면 성공에 기여한 다른 사람들의 기
분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매킨토시가 공개되기도 전에대학 캠퍼스에서 진을 치고 애플
-대학 컨소시엄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던 브 레슬러는 매킨토시가 캠퍼스에서 이례적인 성공
을 거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놀라워했다. 그는 폭증하는 수요에 대비하고 여
러 대학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주일에 1백시간이나 일했다. 할일이 너무 많고 재미
있어서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매킨토시 판매 담당자들에게 있어서 매킨토시가 출하된 이후 처음 몇년이 가장 신나는 해
였다. 대학에서 매년 들어오는 수입이 처음에 수천만 달러였던 것이 후에 수억달러로 증가
해 90년초에 들어서 8억달러를 상회하는 수준에 달했지만 그들은 초창기를 잊지 못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에 타성이 붙게되었고 개척 정신도 무뎌졌다. 매킨토시가 캠퍼스에
널리 보급되자 사용자들이 가졌던 특권의식도 점차 사라졌다. 캠퍼스 밖에서는 그렇지 않았
지만적어도 대학가에서 매킨토시는 매출면에서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캠퍼스에 매킨토시를 보급하는 일에 참여하여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평생 그 후광을 입
게 되었다. 르윈은 컨소시엄을 구성하는데 세운 공로로 애플사 에서 확고한 자리를 확보했
다.
매킨토시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그것을 받아들여 위험을 무릅쓴 드렉셀 대학 의 브라이언
호킨스는 명철한 투시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게되었다. 이를부러워한 많은 사람들이 제2의
매킨토시가 나오게 되면 르윈이나 호킨스와 같은 영웅이 될 것을 꿈꾸기도 했다.
대학이 초창기에 매킨토시를 수용했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는 여러가지 면에서 혜택을 받게
되었다. 대학은 그 컴퓨터가 일반 대중에게 소개되기도 전에구매계약을 맺었고 기존의 IBM
제품을 제치고 새로운 컴퓨터를 지원했던 것이다. 더구나 대학은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개발
하려면 앞으로 몇년 더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매킨토시를 지원한 것이다. 대학은
융통성이 있고 새로운 기술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졌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시장을 형성 했다.
매킨토시가 발표되고 3년이 채 되기도 전인 87년 초에 백만번째 매킨토시가판매되었다.
작성일자 : 1994.12.09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18)
매킨토시가 일찍이 쇠퇴해버리지 않게 작용한 요소 중에 레이저 프린터의 등장과 출판용
데스크톱 PC로 매킨토시의 사용을 들 수 있다. 데스크 톱 출판 기능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매킨토시가 큰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대학도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학은 매킨토시가 상업적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그 생
명력을 유지시켜 주었다.
잡스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한가지 교훈을 얻었다. 즉 대학이 한번 첨단 기술을 지원했으
므로 다음번 넥스트사를 위해서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교훈이 다. 1985년 2월 스티브 잡스
가 30회 생일을 맞이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애플사와 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고 머지않아
새로운 컴퓨터 회사를 설립하게 될 것이라는 운명을 알지 못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
라 회사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확고한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
다. 애플 사 직원의 평균 나이가 29세라는 것을 주목한 한 플레이보이지 기자가 잡스 와 인
터뷰를 하는 자리에서 젊은 사람들이 컴퓨터업계를 장악하는 이유에 대한 견해를 묻자 그는
"생화학적 변천과정의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겠느냐"고 대답했다.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의 사
고 방식을 비닐 레코드 판에 패인 홈에다 비교하며 그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고정관념에
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고 말했다. 그는 30, 40대가 되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놀랄만한
일을 해내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기처럼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은영예롭
게 사라지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컴퓨터업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어 절대로 필요없는 존재가 되지않으리라는 확
신을 가지고 있던 잡스는 이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위치가 무너지
기 시작하자 더이상 태연할 수 없었다.
매킨토시는처음 몇개월 동안은 잘 팔려 나갔다. 그러나 대학가 이외의 시장 에서 나타난
판매폭주 바람이 한차례 지나가자 매킨토시의 수요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잡스는 존 스컬리와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잡스는 펩시사에서 일하고 있던 스컬리
를 "평생 설탕물이나 만들면서 지내겠느냐 아니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보람있는 일을
해보겠는가"라고 말하며 2년 전에 애플로 데리고 왔다. 매킨토시의 수요가 줄어들자 잡스와
스컬리의 사이가 멀어지게된 것이다.
그는 매킨토시의 부진을 자신의 측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고 획기적인 프
로젝트를 구상하기 위해 일에 몰두하였다. 1985뇬 늦은 봄 애플 사는 결국 그의 업무 활동
을 모두 정지시키고 잡스가 시베리아라고 부를 만큼보잘것 없는 회사의 회장으로 그를 좌천
시켰다.
갑자기 그는 할 일이 없어졌다. 아침에 출근하여 날아온 우편물을 검토하는 일 외에는 별
일이 없었고 이 일도 머지않아 줄어들어서 그에게 보고되는 업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는
곧 자신이 "별 이용 가치가 없는"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자신을 필요로 하
지 않는 곳에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결심을 한 그는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새로운 다짐을 한 그는 자신은 그냥 잊혀져 가는 인물이 되지 않을 것이
며 30살이라는 나이가 절대로 많은 나이가 아니고 원하지 않는 퇴직을 하지 않을것이라는
결심을 하
게 되었다. 그는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기보다 힘차게 일어서리라는 결의를 했던 것이다.
이런 그의 결의는 9월말 스탠퍼드 대학의 생화학자인 폴 버그와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잡스가 후에 버그와 나눈 이야기를 회고하 면 그를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
들이 더러 있지만 대학중퇴의 학력으로 30세에 불과한 잡스가 버그처럼 바쁜 노벨 수상자와
점심식사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만은 주목해야 한다. 이들 두 사람이 점심식사를 함
으로써 잡스와 버그가 탄생시킨 넥스사의 장래가 밝아졌다.
버그가 그의 전공분야인 유전자 분리 연구를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고 하자 잡스
는 컴퓨터를 사용하여 모의 실험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러면 버그의 연구에 도
움이 될 뿐 아니라 앞으로 제대로 된 DNA(유전 인자)재조합소프트웨어 개발시 신입생들에
게 많은 도움을 줄것이라는 설명이 었다. 자기보다 젊은 잡스의 제안에 노벨 수상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잡스 는 이렇게 해서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노벨 수상자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버그의 말에 의하면 잡스는 이미 전국에 있는
대학을 방문하면서 대학이 필요로 하는 이상적인 컴퓨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작성일자 : 1994.12.12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19)
잡스는 가장 이상적인 컴퓨터 가격은 대당 2만5천달러가 될 것이라고 들었지만 그는
대당
5백달러에 판매하려고 했다. 사전에 대학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는 버그를 만났을 때 설명을 많이 했다. 대학 에 맞는 이상적인 컴퓨터를 만들어야
겠다는
구상은 자신과 그 저명한 대학 교수의 공동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더 바람
직했다.
며칠 후 잡스는 애플사의 컴퓨터를 보완하고 대학생과 대학 교직원의 필요에 맞는 컴
퓨터를
제조하는 회사를 설립한다는 사실을 이사회에 통보했다. 그는애플사에서 하위직원 몇
명을
데리고 갈 것이며 회장직을 사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애플사는 은밀
히
의논한 끝에 애플사와 직접 경쟁하지 않을것이기 때문에 10%의 지분을 구입할 의향이
있다고
답변했다. 이 대화를 끝으로 애플사와의 우호관계가 종료되었다.
다음날 잡스는 그와 함께 애플을 떠날 다섯명의 명단을 스컬리에게 보냈다.
애플대학컨소시엄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댄 르윈, 매킨토시 하드웨어 엔지니어인 버
드
트리블, 하드웨어 엔지니어인 조지 크라우와 리치 페이지 그리고 재무를 담당한 수센
반즈가
명단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의 평균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다 젊은 사람들
이었다.
그러나 스컬리는 애플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려는 잡 스에게
분노를
느꼈다. "이들의 직위는 절대로 낮지 않소"라고 그는 잡스에 게 분노를 터뜨렸다.
스컬리와 애플 임직원들은 잡스와 5명이 빠져나가는 자체가 애플에게 상당한 위협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새로 설립되는 넥스트사가 애플이 "빅맥"이라는 코드명으로 개발중인 제품과
맞먹는
용량을 가진 컴퓨터를 개발.판매하게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다. 이 제품은 대학가에
서 계속
요구해온 용량을 제공할 수 있는 1백만바이 트급 메모리를 가진 "3M"을 목표로한 것
이다.
넥스트사의 창립자들은 애플에있는 동안 미래사업에 필요한 제품의 가격 및 마케팅
관련
정보들을 수집해 놓았다. 스컬리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잡스의 법정출두는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 회사 창립자 중 한명을 고소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고당시를 회
고했다.
그러나 그 소송은 존속살인과 같은 비극이라고 하기보다는더 큰 비극을 사전에 막으
려는 조금
어리석은 법적 투쟁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잡스의 애플재직당시 경영진은 그를 무능
한
관리자로 치부했었는데 그가 독립하자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신기한 일이
다.
애플사는 소송에서 잡스와 그의 동료들이 애플이 개발한 "차세대 제품"을 이용하려
한다고
비난 했고 잡스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유하고 있던 애플 주식을 비밀리에 팔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주식판매는 불법행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애플은 잡스가 법률이
규정하고
있는 최고 한도의 애플 주식을 판매하려 한다는 정도로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비
난은
잡스가 애플의 "극비정보"를 알고있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
다.
스컬리는 잡스가새 회사를 설립하여 컴퓨터 업계에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불어넣도록 도와주는 일"과 "애플의 극비 정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은 구분
하려
했지만 사실 후자가 발생하지 않게 하면서 전자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스컬리는 실리콘 밸리에 온 지 얼마 안되어 이 분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포들의
핵 분열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다. 잡스는 스컬리가 "문화적 몰이해" 로 고통받고 있다고 말하
였다.
마이크 마쿨라와 다른 애플사임원들은 그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마쿨라는 첫 행운
을
인텔사에서 잡게되었는데 그 회사 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성장한 것이다. 즉 인텔사
를 창립한
엔지니어 출신인 로버트 노이스와 고돈 무어는 페어차일드 반도체라는 모세포에서 분
열되어
나온 것이다. 따라서 분열행위를 금지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위선인 것이다.
잡스는 대학시장이 그렇게 매력적인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애플은 언제라도 넥스트사
와
경쟁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본규모 20억달러에 4천3 백여명의 직원을 가
진 회사가
청바지를 입은 6명으로 구성된 신생기업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했
다.
아무튼 그 소송으로 인해 넥스트사는 큰 타격을 입었다. 소송이 종결될 때까지 컴퓨
터를
제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애플이 불과 6명 의 직원을 가진 작은
회사와의
경쟁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어 잡스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애플이
그들을
비난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 큰 자신감과 사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작성일자 : 1994.12.14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20)
잡스는 애플사 초창기처럼 청바지를 입고 겸손하게 일하는 식으로 다시 밑바닥부터
사업을
시작할 생각은 없었다. 애플은 차고 안에서 사업을 처음 시작했고 잡스가 매킨토시
그룹을
지휘하여 회사 안의 또다른 회사를 운영할때도비유적으로 창고의 이미지를 창출하려
노력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메리카 은행의 창립자인 기아니가
로부터
구입한 우드사이드에있는 대저택에서 그는 넥스트사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사무실을
구할때까지이곳에서 4개월을 임시로 보냈다. 나이가 들고 어느정도 재산을 모은 그는
최고가
아닌 것은 거들떠 보지 않았다. 그는 그 지역에서 가장 값비싼 사무 실을 임차하였
다.
넥스트사는 첫 사무실 건물로 팔로 알토에 있는 스탠퍼드 대학 산업단지내 현대식 건
물을
선택했다. 그 사무실은 개발되지 않아 야생 생물들이 번식하고 있는 산중턱에 있는
제록스
PARC연구소와 엎어지면 코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잡스는 다른
신생기업처럼 초기자본 을 아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넥스트사가 처음으로 10명의 신
입사원을
채용 할 때 전임으로 일할 수 있는 실내 디자이너도 포함시켰다.
건물 위층부터 시작하여 내부구조를 새로 수리했다. 2층 공용공간의 바닥을 목재로
다시 깔고
부엌 싱크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라운지에는 12명이 앉을 수 있는 U자형 소파를
갖다놓았다. 벽에는 대형 거울을 달았고 안젤 애 덤스의 대형 작품들을 걸었다. 가구
는 용도와
구조에 맞게 주문제작하고 화장실도 많은 돈을 들여 새로 단장했다. 이렇게 하여 이
회사가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회사라는 인상을 풍기려고 했던 것이다. 컴퓨터를 일반인들
에게
소개하기도 전에 잡스는 전국에 설치할 판촉사무소를 어떻게 꾸밀
것인가를실내장식설계자들과 구상하기 시작했다. 잡스는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들을
우선적으로 했고 그에게는 넥스트사의 외양이 가장 중요했다. 이런 고집은 직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0만달러를 내걸고 넥스트사의 로고를 공모할 때 극에 달했다.
로고를 만드는데는 그렇게 많은 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잡스는 4명의 디자이너를 만
나보고
예일대학 교수이자 미국 디자인업계에서 최고수준으로 알려진 폴 랜드에게 의뢰하기
로 했다.
잡스는 최고를 선택한 것이다. 랜드는 IBM 로고를 제작한 사람으로 잡스는 대IBM을
만족시킨
사람이라면 자기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랜드는 잡스를 최고의 고객이라고 생각했다. 랜드는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고객을 싫
어했고
최고 결정권자와의 면담을 허락지 않는 기업의 관료주의적 풍토를 혐오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직접 잡스를 만났기 때문에 결정권자 와 모든 것을 의논할 수 있었다. 게다
가 잡스는
랜드를 격찬하였고 한푼의 에누리없이 10만달러를 선불로 주고 그 금액은 디자인
하나값이라는 랜드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랜드는 디자인을 수정하지 않겠다고 못박았
기
때문에 넥 스트사로서 그는 로고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해야 하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
다.
랜드에게그 일을 맡긴다는 것은 도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0만달러를 주는 대가로 잡스는 로고뿐 아니라 디자인의 배경까지 상세히 설
명을 붙인
팜프렛까지 받게 되었다. 랜드는 로고로 NEXT대신 NeXT를 제안하였다. 다른 문자에
비해
눈에 띄는 소문자 e는 "교육, 우수, 기술, 예외적, 흥분 e=mc2"의 의미를 가진다고
랜드는
설명했다. 랜드는 28도의 각도로 기울어진 글자를 검은색 입방체위에 놓음으로써 젊
은이들이
호감을 갖도록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또 "멋스럽게 살짝 기울어진 글자는 크리스마
스 실이
갖는 친근감과 비형식적 이미지 그리고 도장이 주는 권위를 나타낸다 고 말했다. 네
문자 모두
주홍과 연분홍색 등 독특한 색깔로 칠했다. 모든 것이 세밀하게 고려되고 도안되었
다. 랜드의
로고에 부연되는 설명을 읽은 잡스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꽉 껴안았다.
완벽한 로고는 완벽한 회사를 설립할 수 있는 기초가 되고 회사가 완벽할 수밖에 없
는 이유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라고 잡스는 설명했다. 제거해야 할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무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애플에서온 넥스트사의 한 매니저는 "넥스트는 처음
부터
모든 것을 올바르게 시작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라고 했다. 이 말은 30세 안팎의
연령층으로
구성된 이 회사는 완벽을 추구할 만큼 젊고 또 그것이 갖는 위험성을 알 만큼 성숙
했다는 것을
시사했다. 잡스는 애플Ⅱ와 매킨토시를 성공시킨 경험을 토대로 넥스트사를 애플보다
훌륭한
회사로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뛰어난 직감력"을 가졌지만 그 직감
력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넥스트사에서 과거에 큰 성공을 거
둔 경험을
토대로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그동안 배운 교훈이 있다면 고객의 의견을 귀
담아 듣지
않는다는것이었다. 그는 1985년 10월에 "두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
했다.
몇년후 모범회사로 부상하려는 넥스트사의 사훈이 공식적으로 발표되 었다. 소비자들
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덜되고 세계를 바꾸어놓을 수 있는 컴퓨터 를 만든다.
신명나는 작업환경을 갖추어 아침 출근시간이 기다려지는 위대한 기업을 만든다. 고
객을
최고로 대우하여 그들이 우리제품과 회사를 사랑하도록 한다.
통찰력과혁신으로 업계를 선도한다."
작성일자 : 199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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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21)
하나하나 모두 가치있는 목표였다. 잡스는 자신과 그의 회사를 위해 세운 순수한 목표에
도취되었다. 그는 수익은 자기한테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10년후에 "내
30대를 보람있게 보냈다"는 말을 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잡스가 30대에 이룩하겠다고 결심한 것중 대표적인 것은 이상적인 작업환경 을 갖추어 사
훈대로 애사심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넥스트사는 상하계층과 직위가 없는 수평조직의 기업이 되었다. 명함에는 본인의 이름과
부서만 넣고 직책은 표시하지 않았다. 이 회사는 직책과 책임이 라는 장애를 없앤 "균등한
회사"가 되기를 원했다. 실내구조 또한 사람들의 이동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배치했
다. 이 사무실로 이사오기 전 잡스는 2층 에 모든 벽을 없애고 자신을 포함해 모두가 같은
공간을 사용하도록 했다.
깊은산속에 모범도시를 건설한 청교도들처럼 잡스는 타락한 외부세계와 차단되고 선택된자
들 만이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려고 했다. 넥스사는 회사라기 보다 회원으로 구성된 지
역사회였다.
이같은 분위기는 평범한 다른 기업과 차별화된 기업이 되려고 노력했던 애플 사가 추구했
던 것이기도 하다. 81년 애플은 타자기를 모두 없애고 PC로 교체 하면서 "비서"라는 직책을
없애고 어감이 좋은 구역협력관(ar-ea associate) 으로 이름을 고쳤다.
미국 서부에서는 같은 표현이라도 그것을 돌려 말하여 듣기에 부드러운 표현 을 사용하는
일이 많다. 컴퓨터 업계에서 널리 알려진 "반대해안지역에서 사업을 잘할 수 있는 비전"이라
는 제목의 책은 지역간 어감의 차이를 잘 모르는 컴퓨터업계 종사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
었다.
그책에 따르면 어감의 차이는 이렇다.
*동부 1)절대로 안된다.
2)네.3)지금 당장 하시오.
4)제대로안하면 해고시키겠소.
5)이사무실에서 나가시오.
6)동네술집.7)주차장에서 만납시다.
8)독선주의자.9)젠장.
*서부 1)아마. 2)아마.
3)이사업계획을 승인해줄수 있는지요? 4)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5)이문제에 대해 중지를 모아 봅시다.
6)회사밖 시설.
7)회사밖에서 얘기합시다.
8)도움을주는 사람.
9)관심을갖게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넥스트사는 공평성에 역점을 두어 봉급을 개인별이 아닌 그룹별로 책정했다.
따라서85, 86년에 넥스트사의 급여체계는 매우 단순했다. 즉 고위 간부들의 연봉은 7만5천
달러, 나머지는 5만달러였다. 경험, 전문성, 개인의 업무실적 등은 월급에 반영되지 않았다.
이런 정책은 실리콘 밸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사이프러스 세미컨덕터사의 경우는 주당 6천개 제품생산 이라는 목표
치 달성 정도에 따라 수당이 주어졌는데 그 목표는 컴퓨터가 모두 추적하여 기록하였다. 넥
스트는 공평하게 획일적으로 봉급을 인상하였지 만 사이프러스의 봉급인상체계는 종 모양의
곡선형으로 되어 있어 직위별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사이프러스는 컴퓨터를 이용함으로
써 사람이 범할 수있는 실수와 편애를 제거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컴퓨터가 제공하는 자
료를 기초로 봉급 수준을 결정한 반면 넥스트는 직원들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없다는 견지
에서 재래방식을 고집하였다.
공평한 봉급 및 주식 배당 이외에 넥스트는 직원들에게 헬스클럽 회원권, 카 운셀링 서비
스, 최고 5천달러까지의 융자 혜택 그리고 결혼한 가족 뿐 아니라 동거 가족에게까지 의료
보험 혜택을 주었다. 처음에는 동성 동거인들에게 도 의료혜택을 주었지만 보험회사와의 어
려운 관계때문에 후에 중지되었다.
집값이 비싼 베이에리어에 집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에게 넥스트사는 연봉의5 0%에 달하는
융자를 저리로 대출해줘 집을 처음으로 구입하려는 젊은 부부 들의 내집마련을 도와주었다.
잡스는 직원들과 회사정보를 공유한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 회사설립 초기에 전
직원이 매주 한자리에 모여 회사업무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이 모임은 회사가 커가면서 2주에 한번씩 그리고 나중에 한달에 한번씩으로 횟수가 줄어들
었지만 모든 것을 공개한다는 회사방침은 계속 유지되었다. 잡 스는 "외부인들에게 정보를
누설하지 않는다면 모든것을 공개하겠다"라고 말하곤 했다.
작성일자 : 1994.12.19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22)
보안문제가 중요했기 때문에 정보가 누설되면 앞으로 회사 재정상황과 추진 중인 사업계획
을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이런 위협적인 말도 익살스럽
게하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농담으로 개한테조차 회사사정을 얘기하지 않겠다고 손
을 들어 맹세해야한다고 말하곤했다. 그러나 자신은 그 맹세를 지키지 않았다. 그는 언론에
공개하고 싶은것이 있으면 이를 서슴지 않고 밝혔고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사전 약속도 받지
않은채 손님을 초대하여 회사를 돌아볼 수 있게 했다.
모든 것을 대내적으로 공개한다는 원칙은 동료들의 봉급과 같은 민감한 내용에까지 적용되
었다. 이 회사 직원들은 동료의 봉급 수준을 알아낼수 있었다. 넥스트사의 모든 정보는 사내
컴퓨터망을 통해 개인 사무실 안에서 검색 될수 있도록 구성되었으나 봉급에 대한 정보만큼
은 인사과에서 알아봐야했다. 거기서 개인봉급과 주식배당 목록을 찾아 볼 수 있었지만 내
용 복사는 금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는 직원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언제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해 했다. 호기심으로 그 내용을 찾아본 사람들은 거
의 후회했다. 어떤 사람들은 분야별로 봉급 수준이 예상보다 상당한 차이가 있었는데 그 차
이는 능력과 책임에 따른것이 아니라 입사 날짜에 따라 책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
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동료간에 봉급 수준이 같거나 비슷하더라도 부서에 따라 상당한 차이
가 있다는 것을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져 사기가 저하된 사람들은 봉급 수준과 주식
배당에 대한 정보는 모르는 것이 차라리 좋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중서부 지역에 있는 엔지니어들을 주거비용이 훨씬 높은 캘리포니아로 유치 하려면 현재
받고 있는 수준보다 낮은 봉급을 제의하면 오지 않을 것이라는것을 알게된 잡스는 86년말과
87년초 봉급의 2층 체계로 공평성을 유지한다 는 원칙을 파기했다. 엔지니어 한명을 유치하
는데 10만달러의 보너스를 제안 했고 이 일로 인해 그때까지 지켜온 원칙이 무너짐으로써
그후부터는 융통성 있는 봉급을 책정하게 되었다.
산타 크루스에 살던 어느신입사원은 프리몬트까지의 거리가 얼마되지 않아매일 그곳에서
출퇴근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이사수당"조로 2만달러를 받은 적도 있었다.
잡스는 기업의 평등화된 운영방식에서 탈피하기 위해 일부러 사내상황을 내부적으로 공개
하는 정책을 폈다. 그는 넥스트사직원 개개인이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와 같다고 생각했다.
즉 개별적으로 볼때 전문분야는 다르지만 이런 유전정보들이 모두 합쳐져야 하나의 몸을 이
룰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경영 철학도 바로 그런 사상을 기초로 형성되었다. "우리는 여기
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인 마스터 플랜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바탕으
로 해서 모든 결정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성일자 : 1994.12.21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23)
사실 넥스트사는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기업들
(넥스트가 설립될 당시 IBM의 연간매출은 5백억달러에 달했다)이 훨씬 많은 업계의 특성상
적은 인원으로 일어서려는 기업은 큰 기업들의 자본규모를 따라갈 수 없었다. 작은 기업은
"남보다 뛰어난 아이디어"로 승부 를 내야 한다는 것이 잡스의 지론이었다. 넥스트가 경쟁에
서 이기려면 직원 들이 회사정보를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게해야 했다. 전자장비를 제대
로갖춘 넥스트사는 거대한 경쟁상대자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넥스트사가 창립될 당시만 해도 작은 것이 이상적이었다. 잡스는 애플사에서직원들을 데리
고 나올 때 넥스트에 오면 거대한 기업에서 누리지 못한 여가를 즐길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
면서 그들을 유혹했다. 회사는 바로 직원들의 것일 뿐 아니라 규모가 작아 모두가 서로 인
간적으로 친해지고 우수한 품질 의 컴퓨터를 만들어내며 제조 및 모든 활동을 한곳에서 화
기애애한
분위기속에 이룩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회사가 성장하면 영근 완두 껍질처럼
작은 회사를 또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87년 작은 규모로는 대기업과 대결할 수 없다
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는 기업이 커져야 한다고 생각 하게끔 되었다. "우리의 가장 작은
경쟁상대라 할지라도 자본 규모가 17억5 천만달러다. 세상은 1억규모의 회사를 더이상 필요
로 하지 않는다. 생존하려 면 일정 수준의 규모까지 회사를 키워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회
사규모가 적어도 10억달러 이상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입장을 바꾼 잡스는 중간단계 계획없이 바로 10억달러규모의 회사를 세우는데 전념
했다. 그는 넥스트사 임원들은 작은규모의 회사에 맞지 않을만큼 우수한 능력을 갖추었다고
떠들어댔다. 가령 필립 윌슨은 30억달러 규모로 2만7천명의 직원을 둔 커민스 엔진사의 인
사담당책임자였는데 넥스트의 인사 담당 부사장으로 영입되었다. 넥스트의 공동설립자로 재
무담당책임자인 수잔 반즈는 넥스트사보다 큰 회사에서 회계 업무를 맡았던 사람이다. 수잔
반즈는 넥스트가 10억달러 규모의 회사가 될 때쯤 되면 그에 걸맞는 조직이 정비될 것이라
고 말했다.
이러한 거창한 계획이 넥스트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을지도 모른다. 때는 80년대 중
반이었고 지금처럼 미국 기업 활동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거의없을 때였다. 이런 비전을 가
진 사람들에게 기회는 무한대로 열려 있었고 그들을 가로막는 것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넥
스트사가 인력을 갖추고 10억달러규모의 회사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충분히 그 목표
를 이룰 수도 있었던 시대였다.
잡스는 넥스트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다른
직원들도 그런 열정을 보이도록 요구했다. 회사 밖의 세계는 너저분하고 평범하며 타락되어
있는 반면 회사안은 불가능이란 없다고 직원 들은 믿기 시작했다. 선택된 소수에 있어 넥스
트에서 일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마치 비신자로부
터 보호받을 수있는 천년 왕국 종파의 본부와 같았다. 넥스트사 직원들은 일하는 것을 피곤
하게 여기기보다 일을 통해 세속에서 벗어날 수 있고 보다 큰 일을 이룩해야구제받을 수 있
다고 믿었다.
작성일자 : 1994.12.26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24)
이런 의지를 가진 넥스트 직원들은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엄격하고도 세밀한 인터뷰를 거
치도록 했다. 애플사나 그 이전의 제록스 PARC에서 그랬던 것과마찬가지로 응시자들은 예
측할 수 없는 질문을 받았고 수없이 많은 인터뷰를 거쳐야만 했다. 최종 인터뷰는
잡스가 실시하였다. 인터뷰 질문은 주로 "왜 커프스 링크를 하는지 또는 당신은 훌륭한 사
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따위의 용모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이렇게되면 겸손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거만하게 대답해야 할 것인지 갈등 을 겪게 마련이
다. 어떤 질문은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또 어떤 질문은 단순히 상대방을 자극하기 위해
던져지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입사면접시험을 볼때 터무니 없는 질문을 많이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주로 머리를 쓰게하는 질문을 많이했다. 면접하는 사람은 "미국에 주유소가 몇개 있
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즉각 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을 경우 그 답을 추론하는
과정이라도 설명해야 했다. 즉 인구가 2억5천만명이고 4명 중 한 사람이 자동차를 소유하고
5백대의 차가 한 주유소를 사용한다면 답은 12만5천이 될 것이다. 또 "자동 판매기와 주크
박스는 왜 문자와 숫자를 같이 사용하는가"라는 질문도 나온다. 넥스트사는응시자가 얼마만
큼 회사를 위해 헌신할 의사가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이보다 더 다양한 질문들을 했다.
잡스는 단순히 똑똑한 사람보다 맹목적인 추종 자를 원했던 것이다.
넥스트의 사훈은 진보적이었지만 직원들은 87년 회사가 외부에서 자본을 끌어들이기 전까
지는 실질적인 융자나 기타 혜택을 받지 못했다. 처음 몇년 동안은 비교적 인색한 급료를
지급했지만 이상적인 회사 설립 목표에는 별로 큰 지장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낮은 봉급으
로도 일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순수한 동기를 돋보이게 했다.
어떤 직원들은 일할 수 있게만 된다면 급료중 80%를 삭감해도 불평하지 않았다. 물질적인
보상은 차후로 미루어야 했고, 보상은 컴퓨터가 납품된 후 그 "납품 수당"이나 회사가 상장
될 경우 주식의 형태로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모든 신생 기업과 마찬가지로 넥스트사도 안
정되고 전망이 뚜렷한 기업이 못되었다. 넥스트사가 처음 고용한 사람중에는 소프트웨어 전
문가인 에이비 티배니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카네기 멜론 대학원생일 때 새 운용시
스템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었다. 잡스는 바로 그 운영시스템을 그가
개발하는 새 컴퓨터에 채용하려고 했다. 모든것을 그 시스템에 걸겠다는 잡스의 말에 감동
한 그는 박사 과정을 마치자마자 넥스트에 입사하기로 했다. 넥스트사에 입사하기로 결정한
그는 1백만 달러 상당의 주식을 배당해 주겠다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제의를 거절했다.
잡스가 고용한 신입 사원들은 현재의 봉급보다 앞으로 획기적인 제품을 개발 하겠다는 열
의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85년에서 첫 컴퓨터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88년 말까지 업무에 대한 직원들의 열의를 알아
보기 위해 잡스는 제품에 대해 사전지식없이 채용조건을 수락할 것을 요구했다. 비밀을 지
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 맹신 효과를 극대 화하기 위해 회사는 컴퓨터를 공개하지
않았다.
제품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잡스의 말대로 "깊은 신뢰감"을 가져야 했다. 회사
규정이 엄격 했지만 잡스자신만은 그 규정에서 예외적인 존재였다. 그는 고용하고 싶은사람
에게만은 제품을 미리 보여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막상 제품이 공개되고 나면 그 제품보다 잡스와 그의 독특한 경력이 더 큰 관심사가 되었
다.
사람들이 넥스트사 직원들을 하레 크리스나의 추종자들 같다고하면 그들은 코방귀를 뀌며
절대로 잡스를 맹신하고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들이 잡스를 맹신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끌어 들이는 잡스의 힘은 대단 했다. 잡스 같은 기록을 갖고 있는 전문가가 몇이나 되겠는
가? 잡스가 과거에 이룩한 일들을 들여다 보면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은 자연히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곁에 있으면 앞으로 저절로 성공 할 수있다는 것은 자
명했다.
봉급이나 기타 이유 때문에 넥스트의 채용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넥스트 인사 부장은
최후의 수단으로 잡스를 만나게 했다. 잡스는 능숙하게 사람들을 다루었다. 그는 적절하게
칭찬도 해가며 그 사람에게 적합한 훌륭한 비전 을 심어주곤 했다. 잡스의 제의는 거절 할
수 없는 마력을 지녔다.
교육용 컴퓨터를 만든다는 사명감 때문에 넥스트의 채용 제의는 더욱 가치있는 것이 되었
다.
작성일자 : 1994.12.30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25)
넥스트는 또 하나의 새로운 종류의 컴퓨터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고 사용하기 쉬
운 제품을 제공하여 최고의 학문을 추구하는 대학생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일을 하
게되는 것이다. 매킨토시를 지원한 대학가의 컴퓨터광들은 대학의 필요에 부응하는 컴퓨터
를 개발하게 될 넥스트사가 존재한 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해 있었다. 애플사의 마케팅그룹
은 대학가에 매킨토 시를 공급하며 만족스러운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이런 애플보다 더 호
감을 얻으려면 대학에만 전적으로 매달려야 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는 바로 넥스트였다. 넥스트가 뛰어난 인재를 채용 하면 할수록
더 뛰어난 인재들이 넥스트로 오기를 원했다. 댄 르윈과 스테이 시 브레슬러와 함께 애플대
학 컨소시엄을 결성하는데 기여한 캐서린 킬코인 이 넥스트의 채용 제의를 받고 망설이는
가운데 대학 연구소의 컴퓨터 전문 가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넥스트사로
가라고 했다. 스탠퍼 드에 있는 한 교직원은 "최고 중에 최고만 넥스트로 가고 있어요. 애플
이 최고라면 넥스트는 특수 부대(그린 베레)에 속한다"고 말했다.
애플사에서 만족스럽게 일하고 있던 스테이시 브레슬러도 넥스트사로 가기로결정했다. 겉
으로 보기에 브레슬러는 초창기 넥스트 직원들이 추구했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매킨토시그룹의 초기 멤버로 큰 성공을 이룩하는데 공헌하였고 대학에 판매한
PC가 잘 사용되고 있는 점에대해 만족해했다. 그는 또 일반 월급쟁이라면 상상도 못할 재
산을 모으기도했다. 그는 애플이 최우수 영업사원을 억지로 유람여행 보내는 기간을 제외하
고 1년에 52주, 일주일에 7일동안 일에만 매달릴 정도로 일에 중독되어 있었다. 애플사로서
도 만족스러워했던 브레슬러를 넥스트로 옮기게 만든 주된 이유는 그가 또하나의 매킨토시
가 탄생되는 순간을 지켜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다른사람들은 그가 매킨토시의 초창기 멤버라고 생각하지만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
았다. 그가 초창기부터 근무한 것은 사실이지만 라스킨이나 트리블과 함께 창업한 것은 아
니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에 있는 애 플 본사와 수천마일 떨어진 동부에서 주로 대
학에서 게릴라식 마케팅전략을 펼쳤었다. 잡스가 자신과 댄 르윈 그리고 다른 애플출신 사
람들과 힘을 모으자고 제의하자 그는 또다른 역사를 창출할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
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브레슬러 같은 사람이 역사책에 남을만한 일을 같이하자는 잡스의 유혹에 넘어갔다면 매킨
토시의 성공과정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같은 제의가 얼마나 유혹적이고 매력적이었
겠는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넥스트사는 초기에 애플에서 일했던 브레슬러와 킬코인 같은 사람들을 주로 고용했다. 그
러나 시간이 지나자 여러곳에서 사원을 모집하여 애플의 축소판 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려 노력했다. 넥스트는 여러 회사의 가장 뛰어난경영기법만 채택해서 대기업들을 이기려 했
다.
넥스트는 백지상태에 있었기때문에 잡스와 초창기 멤버들은 모든 것을 선별하여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최고중 최고만을 선택하였고 최고가 아닌 것은 거들떠 보
지도 않았다.
이런 넥스트사의 탄생과정에는 상당한 모순이 내포되어 있었다. 21세기 모범 기업이 되려
고 노력했던 넥스트는 오히려 19세기 중반으로 후퇴하여 한명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중심
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하는 것 같았다. 경영주가 최면을 거는 듯한 마력을 지녔을 때
그 사람은 카리스마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잡스가 지닌 카리스마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의 카리스마는 인간의 존재의
미를 초월하는 초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나오는 힘과도 같았다.
잡스는 아침 식사용 시리얼이나 화장실용품을 파는 일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윤을 추
구하려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소한 일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그는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했다. 컴퓨터 사용자들이 더욱 편리하게 컴퓨
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세계를 놀라게하는 혁신적인 일을 하여 역사의 한장을 차지하
기를 원했다. 바로 이러한 원대한 포부가 사람들로부터 큰 호감을 샀던 것이다.
작성일자 : 1994.01.04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26)
카리스마를 연구하는 브라이언 윌슨이라는 학자는 아주 적절하게 그 성격을 묘사하였다. "
어떤 사람이 자기만이 멸망해 가는 세상 사람들을 구제할수 있다고 외치며 벌거벗은 채 거
리를 뛰어다닐때 그를 따르는 사람이 생기면 그는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이고 사
회적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추종 자가 생기지 않으면 그는 미치광이에 불과한 것이
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추종자를 확보해 놓은 다음 할 일은 적절한 관리다. 그 지도자가 세
운 조직은 복잡하면서도 간단한 여러 방법들을 통해 추종자들을 잘 관리하여 각자의 임무를
수행토록하고 카리스마를 유지해 나간다. 이렇게보면 19세기의 유토피아관과 20세기 후반의
넥스트사는 유사한 점이 많다.
예를 들면 넥스트는 같이 일하려면 재정적 손실, 즉 월급을 덜 받는 것을 감수하도록 요구
했고 충돌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사람들의 접촉을 제한하였다.
모든방문객 및 외부인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고 특별 모임을 통해 그룹의 주체의식을 고
취해 외부의 비난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잡스는 사람들 스스로가 실패를 시인하도록
하였고 면전에서 사람을 비판했다. 잡스는눈에난 직원들을 심하게 질책해서 무안을 주었고
개인보다 회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개념을 명확히 심어 주었다.
잡스가 애플에 있을 당시 구상했던 계획을 실천 했더라면 그는 19세기형 유토피아를 건설
했을는지도 모른다.
80년대 초 잡스는 애플사로 하여금 산 호세 남부지역의 수백 에이커에 달하는 불모지를 매
입하도록 했다. 잡스는 거기에다 애플 타운을 건설하려 했다.
그는직장 생활과 개인의 사생활에 분명한 경계선이 없는 기업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도시에 사원들이 애플 문화에 몰두할수있도록 주택, 상가및 오락시설
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소방서 및 경찰 까지 갖춘 디즈니월드를 모방하려 했다.
결국 애플 타운은 잡스가 떠난후에 야 건설되었지만 그의 폐쇠적인 특성은 넥스트사의 기
업 문화에도 반영되었다. 넥스트의 스티브 잡스와 과거의 카리스마적 인물들을 비교하는 것
도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금세기 말 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과거에는 경제활동을
하는데 카리스마가 중요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속성과 전문 성이 성공의 관건으
로 작용하는 관료주의적인 커다란 조직에 있어서 카리스마적 관리체계는 부적합하다고 주장
했다. 카리스마적 관리방식은 베버가 말하는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식민주의 구축 노예무역, 해적활동, 군수산업을 위한 민간 자본 활용및
금융분야에서도 카리스마적 인물을 찾아 볼 수 있다. 넥스트는 해적 행위를 하기에는 순수
했기 때문에 그 비유는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그
성격상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념이 성공 하기 위해서는 추종자를 잘
끌어들이고 리할 수 있는 뛰어난 지도자가 필요하다. 넥스트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큰 성공
을 거둔 대 기업의 그늘 밑에서 또 급속히 발전하는 산업여건 속서새 컴퓨터 회사를 설립한
다는 것, 특히 수십 억 달러 규모의 회사를 세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난관을 극
복하기 위해서 카리스마적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넥스트의 이런 유토피아적 발상은 30대로 구성된 기업의 기본 이념과 상당한 차이
를 보였다. 넥스트가 설립되었을 당시 잡스는 매킨토시에서 인정 하지 않은 한가지를 인정
하였다. 그는 그의 직원들에게 가족이 있다는 것을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는 한동안 하루업무
가 끝나면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이중요하다고 역설하였고 회사가 파티를 할 때는 어른들만
모일 것이 아니라서커스단을 초청하여 오락을 겸한 가족놀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동료들은 중년이라는 나이를 인식하게 되었고 잡스 자신도 고삐를 조금 늦추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당시 넥스트는 공식적으로 매킨토시에 매달렸던 20대 젊은이들이 했던 것처럼 24시
간 일에만 전념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댄 르 윈과 넥스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단거리
가 아닌 장거리 선수가 되겠다고공언했고 일주일에 1백시간이 아닌 60~70시간 근무하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전의 근무시간을 은연 중에 강요당했고 스테이시 브레슬 러 같은 철인
도 지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스테이시는 매킨토시와 같은 역사적인 업적을 다시 만들겠다
는 야심을 버리고 87년 넥스트를 떠나 일주일 내내 근무하지 않아도 되는 휴렛패커드사로
자리를 옮겼다. 넥스트에서 모범 사원이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주말에도 계속 근무하거나 목
표를 이루기 위해몇 시간을 계속 일할 수 있는 뛰어난 체력을 가져야 했다. 넥스트는 작은
기업이었고 뛰어 넘어야할 난관이 많았다. 그러나 넥스트는 거대한 목표를 실현해야 했다.
넥스트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경쟁 의식을 버리고 전적으로 일에 몰두하
는 것이었다. 지도자가 하는 대로 따라가야 했던 것이다. 60년대에 캔 케이시가 말했던 것처
럼 버스를 타든지 아니면 내리든지 해야 했다. 꾸물거리는 사람은 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작성일자 : 1994.01.06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27)
넥스트사는 창립 당시 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출범했다. 자금이 지나치게 풍족했고 회사의
기본 사업 방침을 제대로 정립하지 않은 채 재정분석 능력이 부족한 스티브 잡스를 주축으
로 운영되었다. 7백만달러를 투입하여 세운 넥 스트사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자금을
창립자에게만 의존하게 되자 재정을 합리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노력이나 인식이 결여되어
결국 넥스트의 기강을 해이하게 만든 결과를 초래했다. 넥스트는 스스로가 막강한 기
업체라고
생각했고 자체적으로 이정표를 세워 스스로를 가늠해 보곤했다. 충분한 자본 없이 사
업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은행 및 투자자를 확보하고 시장을 조사하
거나
수지타산을 맞춰보는 일 따위에 많은 힘을 기울여야만 한다. 사업이 비록 수포로 돌
아간다고
해도 사업가는 실패한 원인을 알아내려 할 것이다. 그러나 잡스와 넥스트사 창립
멤버들에게는 이런 번거로운 단계가 필요없었다. 자금이 풍족했기 때문에 자금을 끌
어들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또 애플사가 넥스트를 상대로 낸 소송을 자발적으로 해결해 나갔다. 미리 세운 사업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악의에 찬"전략을 세우고 있다는 애플의 비난 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넥스트의 창립자들은 애플에서 이룩한 성공에 힘입어 불굴
의 의지를
갖게 되었고 모든 것을 경험을 내세워 밀어붙이기 식으로해나갔다는 사실이다. 애플
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창립자들은 넥스트에 와서도 일반 사람들, 즉 "평범한 중생"들을 도
와주어야
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자기들은 영원불멸의 생명을 가졌고 아무것도 없이 밑바닥에
서
퍼스널 컴퓨터 세계를 창조한 신적 존재라고 믿었다.
단적인 예로 잡스는 넥스트에 관한 보도자료로 겸손과는 거리가 먼 내용을발표했다.
그는
자신이 애플을 20억달러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시키는데 상당 히 기여했고 애플의 매
킨토시
부문의 매출을 10억달러로 끌어 올렸다고 말하였다. 리치 페이지는 자신을 포함하여
넥스트의
창립자들은 모두 스타들로 이루어진 팀이라고 했다. "넥스트 구성원은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 사람들처럼 좋은 기록을 낸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업가는 결국 망하게 될것이라고 경고까지 했다.
잡스를 비롯한 창립 멤버들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그러나이런 자신감은 그당시 산업계에 팽배해 있었다. PARC의 일원이었고후에 아도브
시스템사의 공동창립자이면서 잡스의 친구인 존 워노크는 85년 넥스트가 창립될 당시
"우리가 모든 것을 잘 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많은 이윤이 남는다"고 생각했고
넥스트도
바로 그런 사고의 산물이라고 회고했다. 넥스트는 퍼스널 컴퓨터의 여명기에 태어난
것이다.
애플에서 넥스트로 대거 이동한 사람들은 흥분해 있었고 자신만만해 했다.
이들은이례적인 컴퓨터 업계의 급속한 성장이 그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이런 성장
이
밑받침 돼 주지 않았더라면 치명적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사실을 알지 못했다.
80년대의
시장은 퍼스널컴퓨터 수요의 급증으로 조금은관대했다. 그러나 넥스트가 컴퓨터를 제
조하여
선보일 때가 되자 업계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냉혹한 시대로
접어들어가고 있었다.
작성일자 : 1994.01.06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28)
매킨토시가 캠퍼스에 급속히 확산된 것을 직접 경험한 잡스와 그의 동료들은 대학의
필요에
맞는 우수한 제품을 개발하면 과거와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넥스트는
각 대학을 찾아가 교수와 교직원들이 과연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파악한 다음
컴퓨터를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 20 여개 대학연구소로 이루어진 컨소시엄은 이미 IBM, 휴렛팩
커드 및
애플같은대기업과 대학의 필요에 부응하는 강력한 "3M"컴퓨터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상태였다. 그러나 이들 기업은 당시 원가가 1만5천달러인 컴퓨터를 2만5천달러로
높이면서 판매가를 3천달러로 하여 이윤을 남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런엉거주춤한 태도는 넥스트에 절호의 기회를 준 셈이 되었다. 중간관리 자의 욕심
과
기존의 기술에 지나치게 집착한 기업들이 엄두를 내지 못한 일을 잡스는 꼭 성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넥스트는 쉽게 그 일을 할 수있고 그 분야에 대한 계획만 세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넥스트가 주 고객으로 겨냥한 대학들도 넥스트의 자신감을 북돋우어 주었다.
잡스와그의 동료들이 애플이 제기한 소송 때문에 변호사와 면담을 가진 같은날 스탠
퍼드
대학의 중요 인사들과 만났고 그들로부터 처음으로
극진한환대를받게되어상당한용기를얻었다.운좋게도 그 다음 주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전국
대학 컴퓨터 행정관 모임인 에듀컴(Educom)회의가 개최되었고 넥스트는그들의 주 고
객
앞에서 자신들의 계획을 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맞이하게 된 것이다. 잡스와
동료들은
그 회의에서 넥스트의 향후사업계획을발표하였다. 넥스트는 대학에 서비스를 제공하
겠다고
강조했다. 여러분들은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가르쳐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회의에
참석한 한 사람은 스탠퍼드 대학 행정관이었던 마이클 카타에게 "나는 2백명의 IBM
엔지니어들이 오스틴 연구소에서 차세대 IBM워크스테이션을 개발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지만 넥스트에는 여기에 참석한 6명이 있기에 이들에게기회를주면 더 훌륭한 제
품을
개발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러 대학을 방문하고 대학이 필요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본 넥스트 사는 많은
자문을
얻었을 뿐 아니라 스탠퍼드, 카네기 멜론, 브라운, UC버클리 텍사스, 미시간, 일리노
이즈,
라이스, 프린스턴, 듀크 및 MIT대학 등과 협조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들 대학중에는
애플-대학 컨소시엄 소속대학이 상당수 있어서 넥스트사는 매킨토시와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을것이라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이 단계에서 댄 르윈은 대학이 어떤 종류의 퍼스널 컴퓨터를 사용해야하는지와 같은
결정을
내리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했고 용모가 수려하
고
성격이 사교적이어서 기술 선택과 같은중요한 결정을 내리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
다. 대학의
지원을 얻는데 잡 스보다 르윈은 역할이 더 컸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수영으로 단
련된
건장한 체구(스텐퍼드 대학의 마이클 카터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슈퍼맨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했다)때문에 그는 어딜 가나 돋보이고 눈에 띄었다. 게다가 그는 잠재 고객과 면
담을 할
때 그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침 착성을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학에
서
컴퓨터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컴퓨터 판매원을 싫어 했고 되도록이면 그들
을
멀리하려했다.
그러나르윈만은 믿고 친구로 여겼다. 그들은 함께 일하고 역사적인 성공 을 같이 이
룩했던
것이다. 이제 넥스트가 르윈과 같은 팀이 되어 또다른 역사를 만들자고 제의한 것이
다. 그래서
그들은 넥스트를 계속 지원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낙관론은 곧 사라지게 되었
다.
넥스트사는 창립 후 처음으로 전직원이 휴식하며 자유롭게 토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마
련하였고
그자리 에서 사람들은 넥스트의 종합사업계획과 추진일정에 대한 우려의 시각을 제기
하였다.
이런 장면이 에미상을 받은 존네이던이라는 영화 감독에 의해포착되었다. 네이던의
초기작품
중에는 "최고를 향하여"라는 기업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 있는데 그는 여기서 애플컴
퓨터를
성공의 모범사례로 묘사했다. 애플의 한 판매과장이 "우리가 바라는 세계는 바로 이
렇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개종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말에 대해 한 텔레비전 비평가
는
애플의 철학은 무시무시하다고 비판했지만 스티브잡스는 그 영화 를 좋아했다. 네이
던이
특출한 기업인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잡스와 넥 스트사를 소개하고 싶다고 제의하자
잡스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회사변호사들은애플과 소송이 아직 계류중에 있기때문에 절대로 외부인을 회사안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작성일자 : 1994.01.13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29)
그러나 잡스는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영화촬영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결정
적인
타격을 준 것이다.
네이던은 언론매체가 일반적으로 "어두운 구석"을 주로 찾지만 자신은 "신 명나는 문
화적
모델"을 중점적으로 찾아서 묘사하겠다고 말했다. 잡스는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검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더욱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그의 추
측은
어긋나 버렸다. 당시는 방송 법상 사전 검열이 금지되어 있었다.) 게다가 잡스는 자
신이
사실상의 감독 역할을 하게돼 카메라설치 위치를 지시하고 민감한 주제를 피해갈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네이던은 예술적인 영화작품을 만들려했고 잡스는 영화 감독
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려 했다. 이를 감안한다면 영화가 완성된 것 자체 가 기적에 가까
운
일이었다. 이 영화는 불신과 의견 충돌로 가득찬 회사를 그렸다. 즉 생동감있는 사람
들이
적나라한 논쟁에 휩싸여 있는 회사를 묘사 한 것이다. 영화는 사실 그대로를 묘사한
것이다.
85년 가을쯤 되자 넥스트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면해야할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명확하
게 알게
되었다. 그들은 현재 대학가를 석권하고 있는 제품들을 제치고 자사 컴퓨터제품이 우
위를
차지하려면 넥스트사 제품은 보통 뛰어난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뛰어난 성능을
갖추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87년 봄까지 제품 을 출하하
여 87년
가을에 판매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학은 일년
에 한번
대량 구매 계획을 세우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넥스트가 그 시기를 못맞추면 다
음해 같은
시기가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회사의 자본이 남아 있지
도
않을것이며 기술적 우위를 지키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어느 직원은 "우리가 제품을 87년봄까지 출하시키지 못한다면 사업을 아예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잡스도 세상은 자기를 위해서 그냥 멈추어 서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넥스트사가 그 시기를 놓치면그 다음 판매주기가 돌아올 때까지 재정적으로
버틴다해도 컴퓨터는 이미 구식이 되어 버릴 것이다.
매킨토시팀의 일원이었다가 후에 넥스트에 합류한 조안나 호프만은 87년봄까지 제품
을
출하하겠다는 목표의 실현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녀는 현실 왜곡"은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비현실적 목표를 세워놓고 그것을 지키겠다고 하면 디자인 선
택을
성급하게 결정할 수밖에 없어더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결과적으로 일을 더욱 지연
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잡스는 그녀의 발언을 중도에 제지했다. "우리는 어디든 말뚝을
박아야한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운영경비
를 충당할
수 있을 만큼 87년 한해에 충분한 제품을 팔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회사가 잘 풀리
지 않는다는
소문까지 나돌게 될 것이다." 넥스트의 창립멤버 중 한사람이며 하드웨어 엔지니어인
조지
크라우는 "신용 이 떨어질 것" 이라며 민첩하게 움직이지 못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을비난했다. 이말을 듣고 화가난 잡스는 목청을 높이며 "나 혼자서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없지않은가" 라고 말했다. 그는 남들이 만들어 내지 못하는 제품 을 만들어
서 출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대해 언급하였다. 우리에게그런기회가 주어졌다. 기회는 우리
의
것이다. 이 일을 해낸 사람은 아무도없다.
우리에게는 18개월이라는 시간이 있다. 시일에 맞추어 제품을 만들어내지못하면
냉혹한시장원리에 따라 회사는 망할 것이다." 잡스는 자기가 애플에 있을 때 사람들
이 머리를
잘 쓰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더 현명하고 똑똑하고 더 많은 것을 알
고 있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일을 더 잘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잡스는 사람들이
머리를
잘쓸 뿐 아니라 초창기 애플 사람들이 그랬듯이 열성적으로 회사 발전을 위해 노력하
기를
바랐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고등교육기관을 아끼기 때문에
정열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잡스는 말했다.
고등교육기관에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학 행정관들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의 대당 가격은 3천달러를 절대로 넘으면 안되었다.
잡스는대학이 세운 그 기준만큼은 어겨서는 안되며 더 좋은 제품을 더 높은가격에
제의한다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잡스는 대학측의 요구를 충분히 귀담아 들었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그들은 속도를 3
배로
증가시키면 4천달러를 지불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3천달러를 넘어가면 거
래하지
않겠다고 했다. 마법의 가격은 3천달러다." 불행하게도 그는 나중에 이 문제 때문에
건망증에
걸리게 되었다.
작성일자 : 1994.01.16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30)
86년1월 넥스트와 애플은 결국 법정 밖에서 합의를 보게 되어 소송문제들이 해결되었
다.
넥스트는 앞으로 6개월동안 애플에서 직원들을 데리고 오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애플컴퓨터보다 우수한 넥스트컴퓨터를 가지고 애플제품과 경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조건에
합의했다. 잡스는 그런 조건들이 앞으로 마케팅에 훨씬 유리할 것이기 때문에 기꺼이
합의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송 때문에 넥스트는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소송이 해결될
때까지
잡스와 엔지니어들은 컴퓨터 디자인업무를 중단한 채 마케팅담당 댄 르윈과 함께 전
국 에
있는 대학을 방문하여 그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86년1월 소송이 해결되고 새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되자 넥스트는 이미 계획 보다 일
이 뒤처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5년 가을에 완제품을 87년봄까지 출하하겠다는 계획의 실
현성이
희박했다면, 86년초 회사가 두번째로 교외 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는 그 가능성은 더
욱
희박해져 있었다. 이번에도 네이 던이 영화에 그 장면들을 담았다. 잡스는 그 모임에
서 "이제
밀월여행은 끝났다 는 사실을 명시했다. 그들은 더 이상 과거의 합의를 들먹이거나
소송
때문에 피해를 입고 시간을 낭비했다는 식의 핑계를 댈 수 없었다. "세계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넥스트는 또 하나의 신생기업에 불과했으며 앞으로 만들 제
품들이
얼마 만큼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인가에따라 그 장래가 평가될 것이다.
사실 부족한 것은 시간뿐 아니라 자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구걸하는 것이 아니
다"라고
잡스는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넥스트사는 애플직원들을 잘 사귀어서 넥스트를 위해
그들
명의로 직원할인율을 적용해 매킨토시를 구입 토록 하지 않고 직접 구입했다. "우리
는 그것을
구입하기 위해 다른 지출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라고 잡스는 불평했다. 수잔
반즈는
넥스트가 거래처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거래처는 넥스트
의 자본
규모가 2천만달러 내지 3천만달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재정이 튼튼한 회사라는 이
미지를
그들에게 주고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외부인들이 그런 인상을 받은 것이 과연 이상한 일일까. 잡스가 소파에 앉아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회사 발전에 박차를 가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모습은마치 말 많은 뚱보가
가만히
앉아서 다이어트의 미덕에 대해 얘기하는 것과같았다. 팔로 알토에 호화로운 사무실
을 갖고
폴 랜드에게 거금을 주고 로고 를 만든것등을 봐서도 알 수 있지만 잡스는 우선 지출
하고
나중에 보충한다 는 사고방식을 가졌다. 넥스트는 "전쟁"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 전쟁의
테마는 이른바 "시장에 제품을 출하할 때까지 자금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는 것이
다.
넥스트는 86년 자금이 다 떨어지게 되었지만 제품이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더 많이 필
요했다.
외부 투자가의 자금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잡스는 지금까지 쓰고 싶은 곳에마음대로
돈을 쓸
수가 있었다. 그러나 Inc라는 잡지가 후에 돼지 저금통을 가지고 사탕을 교환해 먹은
어린
아이보다 7백만달러를 더 헤프게 사용한 넥 스트사를 "최고의 기업"으로 선정한 사실
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초기부터 재정이 튼튼했던 넥스트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기에 지출도
기형적으로 했다. 잡스와 넥스트 고위 간부들이 자본활용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
고
경제적인 경영을 시도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그때는 자금이 이미 사라
져 버린
후였다.
잡스가 넥스트를 창립할 당시 그는 이 회사가 자신과 넥스트사 직원들의 것이 되도록
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는 넥스트가 직원들의 것이 될것이라는 것을 내세워 초기에 직
원들을
채용했다. 86년 자금이 고갈되었을 때 그는 사실자기 돈으로 자금을 다시 회전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신중한 기업가라면 그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초기
자본을 다
탕진하고 나면 창립자 개인의 재산을 아껴쓰기 위해서라기보다 회사 자체의 존속 여
부를
판단하기 위해 다른 투자가와 재정 위험을 분담해야 하는 것이다. 공동으로 투자할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창립자는 그 회사에 더 투자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알수
있게 되고
고객들도 그런 회사 제품을 구입하지 않게될것이다. 이제 넥스트는 외부 투자가를 받
아들이고
자신을 시험해봐야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잡스는 동부 및 서부 지역에 있는 여러 모험투자회사에 회사 설립 취지서를 보내어
투자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85년 넥스트가 창립된 해 잡스는 애 플에서 이룩한 성공에
힘입어
마력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었고 30세된 잡스가 마이더스처럼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
화시킬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었기 때문에 장래가 유망한 이 기업에 투자하려는 모험투자가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잡스는 외부투자를 허용하지 않았고 86년에 와서 그는 저자
세 로
외부의 도움을 청해야 할 입장에 놓였다.
작성일자 : 1994.01.18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31)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지 않았다. 그는 협상의 여지가 없이 "수 락 아니
면
그만두라"는 식의 제안을 했고 더욱이 회사의 가치를 3천만달러로 못박아 놓았다.
(10%의
지분에 투자한다해도 모험자본가는 3백만달러를 투자해야 했다. 이 수치는 지금까지
넥스트에 투자된 금액의 절반에 해당된다. 넥스트가 아직 제품을 만들지 않아 매출이
없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잠재 투자가들은 3천만달러가 터무니없이 높은 수치라고 생각했
다.
잡스는투자가들에게 3천만달러가 아니면안된다는 근거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 수치
는
넥스트의 재정상태와는 아무런상관이 없었고 다만 상장되기 전 최고의 가치를 지닌
트리로지라는 회사보다높게 책정하기 위한 욕심때문이었다. 3천만 달러는 기록을 경
신할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잡스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모험 자본가들은그
를
멀리했다.
절박한 상황에 놓인 넥스트사를 구한 것은 전혀예기치 않은 로스 페로라는사람이었
다.
넥스트는 페로를 접촉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86년 전국적으로 방영된 존 네이던의
"기업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넥스트라는 회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뉴욕타임스
지에
게재된 "미국 자본주의 영웅들은 이제 더이상 큰것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앉
아서
탁상공론만 할 뿐이다 라는요지의 논평을 보면 회사내 의견대립상황을 생생하게 보도
하지
못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페로는 그 프로그램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잡스에게 매료 되어 그를 "Mr. Electricity(전기씨)"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페로는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할 말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고 말했
다. 다음날
페로는 잡스에게 전화를 걸어 그 프로그램에 대한 찬사를 늘어 놓고 "도움이 필요하
면
연락하라"고 말했다.
그의 제안은 너무도 시기적절했다. 잡스는 전화를 끊고 "누가 전화했는지 절대로 알
아 맞히지
못할거야. 매우 좋은 기회가 생겼어"라면서 기뻐했다. 잡 스는 넥스트의 절박한 상황
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일주일이 지난후 전화를 걸어 페로의 제안을 다시 확인했다. 페로
는 그의
제안이 아직 유효하다고 말하며 3명의 고위간부를 캘리포니아로 보내 넥스트사를 방
문하도록
했다. 잡스 가 애플에 있을 당시 페로의 일렉트로닉데이터 시스템사 직원이 비슷한
목적 으로
애플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별 결실을 거두지 못했었다. 페로가 보낸 직원들이 다
녀간 다음
잡스는 직접 페로에게 연락했다. 페로가 보낸 사람들은 컴퓨터 산업에 대한 투자가치
를
조사하는 전문가들로서 제안서를 세심하게 검토했다. 잡스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대
우를 받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는 넥스트의 재정상황이 드러나면 불리한 입장에 놓일까
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숫자놀이에 능한 MBA출신 사람들이 회사사정을 더깊이 알아
내기전에 페로가 스스로 판단하여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것을 요구했다. 페로
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잡스가 요구한 대로 직접 캘리포니아로 와서 수십명의 넥스
트
직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환대를 받은 페로는 제시된 조건과는
상관없이
이 회사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투자금액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나
는 기수를
뽑을 뿐이지 말을 선택하여 실제로 말을 탈 사람들은 바로 기수들이다. 나는 여러분
을 투자
상대로 선택하였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사업을 추진해야한다"고 말했다.
억만장자가 돈이 떨어진 작은 기업에 "여기 백지 수표가 있으니 당신이 알아서 금액
을 써
넣으시오"라고 말한 순간 잡스 같은 백만장자라도 그것이 바로 구제의 순간이라는 것
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수잔 반즈는 외부 사람들이 잡 스와 넥스트를 볼 때 자금이 풍부하다고
믿는다고
불평했지만 잡스 자신도자기보다 돈 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이 정말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다른 모험 자본가들에게 제의하여 거절 당했던 조건보다 훨씬 불리한 조건을 페
로에게
제시했다. 그 조건은 넥스트의 가치를 1억달러로 산정해서 마련한것이다. 주의깊은
사람이 그
제안을 받았다면 1억달러라는 수치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을 수 있지
만
페로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페로가 넥스트 방
문기간중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넥스트 사람들은 잠깐회의를 열고 의견을 나눴다.
작성일자 : 1994.01.20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32)
그 자리에서 넥스트의 한 고위 간부는 잡스에게 "지금 로스가 우리가 제의한 만큼 줄
의사가
있다면 앞으로 일이 잘 풀리면 더 줄 수도 있겠지"라고 말했다. 이말을 듣고 잡스의
눈에서는
희망의 광채가 빛났다. "우리가 바로 그것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시오."
페로는 완벽한 후원자였다. 그는 크로서스 왕 만큼이나 굉장한 부자였고 "기 수"만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심 없이 돈을 투자하려했다. 잡스는 이 기회를 그대로 넘기려 하
지 않았다.
그는 늘 그렇게 했듯이 이번 기회도 약간 과장 되게 묘사하였다. 그는 넥스트가 전에
는 외부
투자를 모두 거절 했지만(투자 가들이 넥스트를 거절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페로의
제안은 너무 감명 깊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잡스는 페로에게 투자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는
식으로 말하였다.
넥스트에 투자할 때 투자 규모를 생각하기 보다 투자하는 것 자체가 특권이 라고 생
각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넥스트가 대학만을 위해서 제품을 만들기 때문에 대
학도
투자에 참여해야 한다는 소문은 곧 대학 연구 소에도 전달되었다. 잡스는 자금난에
시달리면서도 끈질기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그만 두라는 식의 태도를 고수했
다. 그는
대학 회계사들이 넥스 트에 와서 장부를 뒤져가면서 세밀한 조사를 하도록 내버려 두
지는
않겠다는의사를 확실히 했다. 잡스의 제안은 간단 명료했다. "우리는 과거 성공한 제
품들을
만든 사람들이다. 원한다면 우리에게 모든것을 걸어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방
식대로
일을 해나갈 것이고 장부조사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모험자본가와 대학에 같
은
조건을 제시했다. 가장 기초적인 잣대로 넥 스트의 가치를 대충 평가해 봐도 그의 제
안은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페로가 결단을 내리자 스탠퍼드와 카네기 멜론 대학도 넥스트에 투자 하기로
결정했다. 페로는 2천만달러, 잡스는 추가로 5백만달러 그리고 두 대학이 합해서 66
만달러를
투자하여 넥스트의 가치를 1억달러에서 1억2천6백만 달러로 높였다. 잡스는 회사 지
분 중
63%를 소유했고 페로는 16%, 스탠퍼 드 및 카네기 멜론은 각각 0.5% 그리고 넥스트
직원들은
20%를 소유하게 되었다. 두 대학이 투자한 금액은 페로의 투자액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돈보다 잡스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넥스트의 사
업
계획안이 로스 페로의 검토를 거쳤고 두 명문대학 연구소가 넥스트의 제안을 승인했
기 때문에
넥스트는 내세울 명분이 새로 생기게 되었다. 즉 넥 스트는 튼튼한 재원과 밝은 미래
를 확신할
수 있었다. 페로가 넥스트라는 회사의 가치 평가를 기꺼이 받아들인 덕으로 잡스가
넥스트에
투자한 1천2백만 달러는 장부상으로 7천9백만달러로 평가되었다. 1년반만에 얻은 자
산치고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기업가"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후 모든 것이 넥스 트에 유
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파산직전에 있던 넥스트는 갑자기 구제되었고 무제한의 자금력을 가진 로스 페로와
명문
스탠퍼드 및 카네기 멜론 대학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실리콘밸리에있는 회사치고 제품 없이 회사 가치가 1억2천6백만달러로 평가 된 것은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라고 잡스는 우쭐대며 말했다. 넥스트는 회사 가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전에 그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회사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았다.
왜 로스 페로가 2천만달러라는 거금으로 넥스트사의 지분 16%인수에 만족했을까? 이
만한
금액을 다른 신생기업에 투자했더라면 더 큰 지분을 차지할수 있었고 뉴스위크지기사
처럼
"창립자의 첫 아들을 제외한 모든것을 살 수있다 고 호언 장담하던 그가 넥스트에 투
자한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명백 한 이유부터 짚어 나가도록 하자.
첫째, 페로는 사업을 할 때 엄격하고도 냉정하게 원칙을 지켜나가는 모험 자본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투자 결정을 내리는데 이런 사람들을 흔히 "천사"라고
불렀다.
"천사"라는 말은 브로드웨이 연극을 재정 적으로 지원하는 개인 투자가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들 "투자천사"는 위험 부담이 훨씬 큰 창업 초기에 다른 모험 자본가
들보다
관대한 자세로 투자 하는 것을 즐겼다. 어떤 "천사"들은 경영권을 휘두르고 싶어 했
다.
작성일자 : 1995.01.23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33)
예를 들어 필립 로마노라는 사람이 식당에서 벌어들인 수입으로 신생 기업에 투자하
여
천사가되려고 했을 때 그는 "그것은 내가 거는 모험이기 때문에 내 방식대로 할 것"
이라며
경영에 간여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설계자 스스로가 모든것을 관리감독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페로는 넥스트에 서 권한을 행사하려하지 않았다.
페로가 넥스트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은 두번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억만장자 에게는 넥스트
에 투자한 2천만달러가 하루 아침에 날라가든, 몇 배의 이윤을 남기든 그의 자산에는 별 영
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로는 넥스트에 투자한 금액의 10배의 이득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지는말라 고 말했다.
페로는 넥스트사가 안전성을 보장하기 때문에 넥스트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
다. 그는
잡스와 함께 과거 매킨토시를 개발했고 다시 넥스트에 모인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들
의 업적을
생각한다면 "컴퓨터 업계의 과거 25년 을 돌이켜 봐도 신생 기업치고 이들 처럼 위험
부담이
적은 기업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때는 텍사스 특유의 미소를 지으면서 넥스트
에
투자하는 것은 마치 유전 바로 옆을 파고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
나 업계
분석가들은 회의적인 견해를 보였다. 테크놀로지 스톡워처스사의 대표 인 리처드 셰
퍼는
넥스트가 책정한 1억2천6백만달러라는 자산 가치를페로가묵인했다는 사실에 대해 고
개를
갸우뚱했다. 셰퍼는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진 회사라면 완제품을 개발한 단계가 아니
라 제품을
출하하여 연 2천만내지 3천 만달러 가량의 매출을 올려야 정상"이라고 말했다.
확실히 페로는 정상적인 산업관행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돈보다 활기가 넘치는 젊고
똑똑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넥스트에 투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30대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넥스트에 젊음의활기가 넘친다는 것을 인정했다. 30대의 젊은
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오래 보고 있으면 재미있다고 그는 말했다. 페로는 잡스가 자주하는
것처럼
의학 및신경 생리학 학위 2개를 소지한 버드 트리블을 예로 들어가며 넥스트에는 특
별히
똑똑한 사람들만 모여있다고 자랑했다. 게다가 그는 교육 발전에 많은관심을 갖고 있
었기
때문에 전국에 있는 작은 인문계 대학까지도 기증의 형태든 아니든, 넥스트 컴퓨터를
이용하여 특수 소프트웨어에 수록되어 있는유명대학 교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잡스의 설명에 매료되었다. 일년전 EDS를 GM에 넘겨주고 아직 페로 시스템스라는 컴
퓨터
서비스회사를 설립하기 전 단계에 있던 페로는 어려운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획
기적인
잡스의 구상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퍼스널컴퓨터 혁명을 주도하는 선봉자였고, 페
로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잡스는 그를 따를 준비가 되어있었다. 넥스트에 투자하는 것은
마치
혁명을 제일 잘 지켜 볼 수 있도록 맨앞좌석을 차지하는 것과 같았다.
넥스트는 또 페로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잡스는 일본과의 경쟁에서 우리의것을 지킬
수
있다고 하면서 컴퓨터를 꼭 미국에서 제조하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이러한 의지는 일
본의
위협을 안이하게만 생각하는 미국 산업계를 일깨우려는 페로의 이상과 맞아 떨어졌
다. 그는
뉴욕에서 일본으로 수출되는 주요 품목은 고철과 폐지라고 곧잘 말하곤 했다. 이런
고철과
폐지는 자동차 와 전자 제품을 담은 상자가 되어 돌아온다. 미국은 보잘것 없는 세일
즈맨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그는 통탄했다. 미국에서 생산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 를 가졌다.
미국이
자기가 개발한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일본을 배우는 것이 낫기 때문이었다. 스티
브
잡스는 미국도 일본만큼 우수한 제품을 생산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미국 산
업을
부활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페 로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예술가인 노먼 록웰과 사
회주의적
리얼리즘을 혼합하여 놓은 이미지로 잡스를 묘사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
는
위협을 응시하고 있는 익명의 프로레타리아 영웅을 묘사한 혁명 포스터를 상상 할 수
있을
것이다. 손과 작업복은 기름과 때로 얼룩져있고 얼굴에는 강철같은 굳은 결의를 나타
내며
근육질인 몸은 육체미 선수를 연상케한다. 페로는지극히 미국적인 동기를 상상했던
것이다.
프로레타리아식 강철인간 대신에 전자 시대에 막노동으로 귀감이 될 수 있는 가장 근
접한
인물로, 펩시 세대 의 산업지도자로, 기강이 해이해진 동료들에게 모범이될 수 있는
인물로
그리고 돈을 빨리 벌려고 월가를 찾아가는 똑똑하고 최고중의 최고 인물로 백만장자
인 잡스를 꼽을 수 있다.
작성일자 : 1994.01.25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34)
페로가 갖고 있는 잡스에 대한 이미지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이었다. 그렇기때문에
페로는
넥스트에 투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잡스를 천재쯤으로 생각했고, 그의 가족은 노먼
록웰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쯤으로 여겼다.
페로는내셔널 프레스 클럽(신문회관)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나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끝으로 말을 맺고자 한다. 아주 총명한 젊은이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는 너무 똑똑하여 고등학교 재학시절에 스탠퍼드 대학에서 공과강의를
청강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지만 너무 가난하여 대학에 갈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취미로 밤
이면
차고에서 컴퓨터 칩을 가지고 여러가지 작업을 했다. 노먼 록웰의 그림에 나오는 인
물처럼
생긴 그의 아버지가 하루는 와서 "팔수 있는 것을 만들든지 아니면 일자리를 구해보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지 60일만에 아버지가 만들어준 나무 상자안에 첫번째 애플 컴
퓨터를
만들어 넣게 되었다.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그가 사실상 세계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좀 야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페로가 거창하게 묘사한 잡스의 약력에는 불분명한 부
분이
상당히 많았다. 잡스는 가난해서 대학 다닐 형편이 안되기도 했지만 시작한 공부를
마치려는
의지도 약했다. 오레곤주에서 등록금이 비싼 리드 대학에서 잡스는 대학생활을 시작
했지만
졸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에서 잡스 같은 사람이 갈 수 있는 대학은 리
드말고도
많았다. 그리고 최초의 애플컴퓨터는 스티브 잡스가 아닌 스티브 워즈니악이 개발했
음에 도
불구하고 페로는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페로가 "기업인"이라는 방송프로그램을 보고 잡스가 "똑똑하고 겸손하며 자만하지 않
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잡스의절친한 친구조차도 잡스를 그렇게 묘사하지 않을 것이다. 잡스가 마의 거인들
을 모두
정복했다는 페로의 다음과 같은 말을 또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젊은이는 자본
집약적인
IBM과 대결하여 모두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81년 발표되어 큰 성공을 거둔 IBM 퍼스
널
컴퓨터와 그성공으로 타격을 입은 애플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누가 누구를 통째로
잡아먹었단 말인가.
또잡스가 자금관리에 있어서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현재 잡스가
50년
사업 경험과 맞먹는 사업수완을 가졌다는 페로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잡스는 2년을 더 기다려 주가가 8배로 뛸 때까지 참지 못하고 85년 최저 가
격으로
애플사 주식을 거의 모두 매각해버렸다. 잡스가 얼마나 경솔했는지 한번 살펴볼 필요
가 있다.
잡스는 자기가 없으면애플이 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매킨토시 잡지의 창간인
인
데이비드 번넬에게 애플이 망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만 남겨놓고 애플주 모두를 팔아
버렸다고
말했다.(애플주 하나를 남긴 이유는 계속 주주 보고서를 받아보고 머지않아 닥쳐올
애플의
자멸을 지켜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잡스가 애플 주식을 팔았다고 해서 잡스
가 장담한
대로 주가가 극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주식 및 증권거래위원회의 보고서를 보면
잡스 는
85년 중반 및 후반 단계별로 몇달에 걸쳐 그의 주식 대부분을 매각한 사실을 알수 있
다. 그러나
애플 주식 값이 뛰어오르기 바로 직전 주식을 매각 함으로써 잡스가 입은 막대한 자
금 손실에
대한 소문은 여러가지 양상을 띠며 잡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모험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잡스가 3억달러를 잃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금액은 믿
기 어려울
만큼 많은 것이지만 증권거래소 자료를 보면 3억달러라는 수치도 낮게 책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계산 방법은 자료에 따라 다르고 주식 매각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실제로 손해
본 금액은
거의 7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시기를 못 맞추어 애플주를 청산함으로써 입은 손해를
상쇄하기
위해 넥스트는 보통이 아닌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어야 했다.
86년 페로가 넥스트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이유 중 마지막 이유를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다.
그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였기 때문에 가장 흥미 있는일이기도 하다. 페로는 79
년 빌
게이츠로부터 당시 신생 기업이었던 마이크 로소프트사를 매입하지 않은것을 후회하
고
있었다. 그 해 24세된 게이츠는 회사 매각에 관한 협의를 위해 댈러스에 있는 페로의
집무실로
갔다.
작성일자 : 1994.01.27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33)
예를 들어 필립 로마노라는 사람이 식당에서 벌어들인 수입으로 신생 기업에 투자하
여
천사가되려고 했을 때 그는 "그것은 내가 거는 모험이기 때문에 내 방식대로 할 것"
이라며
경영에 간여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설계자 스스로가 모든것을 관리감독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페로는 넥스트에 서 권한을 행사하려하지 않았다.
페로가 넥스트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은 두번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억만장자 에게는
넥스트에
투자한 2천만달러가 하루 아침에 날라가든, 몇 배의 이윤을 남기든 그의 자산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로는 넥스트에 투자한 금액의 10배의 이득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지는말라 고 말했다.
페로는 넥스트사가 안전성을 보장하기 때문에 넥스트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
다. 그는
잡스와 함께 과거 매킨토시를 개발했고 다시 넥스트에 모인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들
의 업적을
생각한다면 "컴퓨터 업계의 과거 25년 을 돌이켜 봐도 신생 기업치고 이들 처럼 위험
부담이
적은 기업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때는 텍사스 특유의 미소를 지으면서 넥스트
에
투자하는 것은 마치 유전 바로 옆을 파고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
나 업계
분석가들은 회의적인 견해를 보였다. 테크놀로지 스톡워처스사의 대표 인 리처드 셰
퍼는
넥스트가 책정한 1억2천6백만달러라는 자산 가치를페로가묵인했다는 사실에 대해 고
개를
갸우뚱했다. 셰퍼는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진 회사라면 완제품을 개발한 단계가 아니
라 제품을
출하하여 연 2천만내지 3천 만달러 가량의 매출을 올려야 정상"이라고 말했다.
확실히 페로는 정상적인 산업관행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돈보다 활기가 넘치는 젊고
똑똑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넥스트에 투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30대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넥스트에 젊음의활기가 넘친다는 것을 인정했다. 30대의 젊은
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오래 보고 있으면 재미있다고 그는 말했다. 페로는 잡스가 자주하는
것처럼
의학 및신경 생리학 학위 2개를 소지한 버드 트리블을 예로 들어가며 넥스트에는 특
별히
똑똑한 사람들만 모여있다고 자랑했다. 게다가 그는 교육 발전에 많은관심을 갖고 있
었기
때문에 전국에 있는 작은 인문계 대학까지도 기증의 형태든 아니든, 넥스트 컴퓨터를
이용하여 특수 소프트웨어에 수록되어 있는유명대학 교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잡스의 설명에 매료되었다. 일년전 EDS를 GM에 넘겨주고 아직 페로 시스템스라는 컴
퓨터
서비스회사를 설립하기 전 단계에 있던 페로는 어려운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획
기적인
잡스의 구상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퍼스널컴퓨터 혁명을 주도하는 선봉자였고, 페
로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잡스는 그를 따를 준비가 되어있었다. 넥스트에 투자하는 것은
마치
혁명을 제일 잘 지켜 볼 수 있도록 맨앞좌석을 차지하는 것과 같았다.
넥스트는 또 페로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잡스는 일본과의 경쟁에서 우리의것을 지킬
수
있다고 하면서 컴퓨터를 꼭 미국에서 제조하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이러한 의지는 일
본의
위협을 안이하게만 생각하는 미국 산업계를 일깨우려는 페로의 이상과 맞아 떨어졌
다. 그는
뉴욕에서 일본으로 수출되는 주요 품목은 고철과 폐지라고 곧잘 말하곤 했다. 이런
고철과
폐지는 자동차 와 전자 제품을 담은 상자가 되어 돌아온다. 미국은 보잘것 없는 세일
즈맨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그는 통탄했다. 미국에서 생산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 를 가졌다.
미국이
자기가 개발한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일본을 배우는 것이 낫기 때문이었다. 스티
브
잡스는 미국도 일본만큼 우수한 제품을 생산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미국 산
업을
부활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페 로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예술가인 노먼 록웰과 사
회주의적
리얼리즘을 혼합하여 놓은 이미지로 잡스를 묘사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
는
위협을 응시하고 있는 익명의 프로레타리아 영웅을 묘사한 혁명 포스터를 상상 할 수
있을
것이다. 손과 작업복은 기름과 때로 얼룩져있고 얼굴에는 강철같은 굳은 결의를 나타
내며
근육질인 몸은 육체미 선수를 연상케한다. 페로는지극히 미국적인 동기를 상상했던
것이다.
프로레타리아식 강철인간 대신에 전자 시대에 막노동으로 귀감이 될 수 있는 가장 근
접한
인물로, 펩시 세대 의 산업지도자로, 기강이 해이해진 동료들에게 모범이될 수 있는
인물로
그리고 돈을 빨리 벌려고 월가를 찾아가는 똑똑하고 최고중의 최고 인물로 백만장자
인 잡스를
꼽을 수 있다.
작성일자 : 1994.01.25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36)
넥스트에 투자한 스탠퍼드 및 카네기 멜론대학에 얽힌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다른
대학들은
스탠퍼드와 카네기 멜론대학이 넥스트사를 조사하여 넥스 트의 재정상황을 정확히 파
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 밖에 있는 비평가 들도 막대한 이권이 있기 때문에 두 대학이
명예를
포기하고라도 투자에 참여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다. "뉴욕타임스"지는 그런 대학을
비난하는 사설 을실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유혹에만 넘어갔지만 대학 총장들은 돈에
넘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대학이 넥스트에 투자한 것
은 돈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잡스와 페로의 불가사의한 영향력 때문이었다.
그전에도 대학이 신생기업에 투자한 경우가 있었다. 70년대부터 많은 대학은 투자형
태를
다양화시켜 기업에 투자하여 지분을 소유하였다. 그린넬대학이 그 대학 졸업생이며
인텔사
창립자중 한사람인 로버트 노이스가 설립한 회사 에 투자하여 많은 이득을 본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대학이 한 회사에 직접 투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린넬 대학이 투자한
30만달러는 거의 30배 로 그 가치가 불어났다. 그러나 잡스가 제의한 조건이 위험부
담이 있는
장기 적인 안목으로 봐야 한다고 해도 대차대조표상으로도 앞뒤가 안맞는 제의였다.
스탠퍼드는 모험자본가들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넥스트의 재무사항을 조사하도록 했고
그
결과를 검토한 대학 투자가들은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다.
그러나 잡스는 높은 이윤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대학 총장의 지지
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도널드 케네디는 잡스를 좋은 친구로 생각 하고 있었고 그에게 아버
지같은
충고를 즐겨했다. 케네디는 대학 직원들의반 대에도 불구하고 잡스의 제의를 받아들
였다.
잡스는 카네기 멜론 대학에서도 2명의 고위 간부의 도움을 받았다. 리처드 시어트 총
장 그리고
아버지 같은다정한 친구였던 패트 크리신 부총장의 지지를 받았다. 잡스가 두 대학의
고 위층
사람들과 절친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페
로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학조차도 억만장자의 존재 앞에서는 굽힐 수밖에
없었다.
87년 잡스-페로간의 협상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스탠퍼드대학 교수 클럽에서 열린
파티석상에서 잡스는 넥스트사를 페로에게 알리는데 크게 기여한 영화 를 만든 네이
던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날 저녁 식사에 초대된 사람들은 모두 앞날을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넥스 트는 교
육에
기여한다는 훌륭한 명분을 갖고 있고, 세계에 애플 Ⅱ와 매킨토 시를 선사한 잡스가
있고,
컴퓨터교육에 주력하는 2개 대학의 지지를 받고있고 돈뿐 아니라 입지가 확고한
사업가로서의 자문을 줄 수 있는 로스 페 로가 있었다. 그는 잡스와 그의 참모진들이
딴길로
새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는 제너럴 모터스(GM)로부터 돈을 받고 물러설때까지 제너럴 모터스사를지켜보며
비판적인 충고를 했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적대감을 일으키지 않는범위내에서 넥스트
사의
충실한 야당이 될 이같은 생각에 고무되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자신은 진주를 만드는 조개 안의 모래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조개는 나 때문에 고생을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관대했다. 그는 젊은 영웅들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그들을
고생시키려하지 않았다.
페로는 넥스트의 새로 구성된 이사회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CMU의 행정 관인 페트
크레신도
이사로 임명됐다. 크레신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잡스를칭찬했고 다재다능한 그를 부
러워했다.
이사회의 세번째 좌석은 잡스가 차지했다. 이들 셋이 회사를 관리감독하는 사람들이
었다.
잡스는 의도적으로 이런 조직을 구성했다. 잡스는 3명의 이사만 선출하고 나머지 두
자리는
꼭두각시를 내세워 자신의 열세를 보강토록 했다. 페로는 이사회에서는 공포의 인물
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지만 잡스와 의견이 대립되면 자신의 의견을 누 그러뜨리는 상충되
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페로는 GM의 이사진들이 "꼭 두각시같다"고 비난했었지만 자기 자신
도 같은
입장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아이로니컬한 일이다. 그러나 페로가 이윤을 바라보고넥
스트에
투자한 것이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는 일년에 4차례 열리는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넥스트사 로 오거
나 본인이
참석할 수 없으면 대리인을 참석시키거나 전화상으로 나머지 두명의 이사회 멤버와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잡스와 넥스트 이사진들에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페로
는
그들의 뛰어난 재능을 지나치게 확신한 나머지 일반 사람들에게 날카롭기로 유명한
그의 감독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작성일자 : 1994.02.06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36)
넥스트에 투자한 스탠퍼드 및 카네기 멜론대학에 얽힌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다른
대학들은
스탠퍼드와 카네기 멜론대학이 넥스트사를 조사하여 넥스 트의 재정상황을 정확히 파
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 밖에 있는 비평가 들도 막대한 이권이 있기 때문에 두 대학이
명예를
포기하고라도 투자에 참여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다. "뉴욕타임스"지는 그런 대학을
비난하는 사설 을실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유혹에만 넘어갔지만 대학 총장들은 돈에
넘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대학이 넥스트에 투자한 것
은 돈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잡스와 페로의 불가사의한 영향력 때문이었다.
그전에도 대학이 신생기업에 투자한 경우가 있었다. 70년대부터 많은 대학은 투자형
태를
다양화시켜 기업에 투자하여 지분을 소유하였다. 그린넬대학이 그 대학 졸업생이며
인텔사
창립자중 한사람인 로버트 노이스가 설립한 회사 에 투자하여 많은 이득을 본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대학이 한 회사에 직접 투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린넬 대학이 투자한
30만달러는 거의 30배 로 그 가치가 불어났다. 그러나 잡스가 제의한 조건이 위험부
담이 있는
장기 적인 안목으로 봐야 한다고 해도 대차대조표상으로도 앞뒤가 안맞는 제의였다.
스탠퍼드는 모험자본가들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넥스트의 재무사항을 조사하도록 했고
그
결과를 검토한 대학 투자가들은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다.
그러나 잡스는 높은 이윤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대학 총장의 지지
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도널드 케네디는 잡스를 좋은 친구로 생각 하고 있었고 그에게 아버
지같은
충고를 즐겨했다. 케네디는 대학 직원들의반 대에도 불구하고 잡스의 제의를 받아들
였다.
잡스는 카네기 멜론 대학에서도 2명의 고위 간부의 도움을 받았다. 리처드 시어트 총
장 그리고
아버지 같은다정한 친구였던 패트 크리신 부총장의 지지를 받았다. 잡스가 두 대학의
고 위층
사람들과 절친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페
로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학조차도 억만장자의 존재 앞에서는 굽힐 수밖에
없었다.
87년 잡스-페로간의 협상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스탠퍼드대학 교수 클럽에서 열린
파티석상에서 잡스는 넥스트사를 페로에게 알리는데 크게 기여한 영화 를 만든 네이
던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날 저녁 식사에 초대된 사람들은 모두 앞날을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넥스 트는 교
육에
기여한다는 훌륭한 명분을 갖고 있고, 세계에 애플 Ⅱ와 매킨토 시를 선사한 잡스가
있고,
컴퓨터교육에 주력하는 2개 대학의 지지를 받고있고 돈뿐 아니라 입지가 확고한
사업가로서의 자문을 줄 수 있는 로스 페 로가 있었다. 그는 잡스와 그의 참모진들이
딴길로
새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는 제너럴 모터스(GM)로부터 돈을 받고 물러설때까지 제너럴 모터스사를지켜보며
비판적인 충고를 했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적대감을 일으키지 않는범위내에서 넥스트
사의
충실한 야당이 될 이같은 생각에 고무되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자신은 진주를 만드는 조개 안의 모래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조개는 나 때문에 고생을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관대했다. 그는 젊은 영웅들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그들을
고생시키려하지 않았다.
페로는 넥스트의 새로 구성된 이사회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CMU의 행정 관인 페트
크레신도
이사로 임명됐다. 크레신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잡스를칭찬했고 다재다능한 그를 부
러워했다.
이사회의 세번째 좌석은 잡스가 차지했다. 이들 셋이 회사를 관리감독하는 사람들이
었다.
잡스는 의도적으로 이런 조직을 구성했다. 잡스는 3명의 이사만 선출하고 나머지 두
자리는
꼭두각시를 내세워 자신의 열세를 보강토록 했다. 페로는 이사회에서는 공포의 인물
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지만 잡스와 의견이 대립되면 자신의 의견을 누 그러뜨리는 상충되
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페로는 GM의 이사진들이 "꼭 두각시같다"고 비난했었지만 자기 자신
도 같은
입장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아이로니컬한 일이다. 그러나 페로가 이윤을 바라보고넥
스트에
투자한 것이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는 일년에 4차례 열리는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넥스트사 로 오거
나 본인이
참석할 수 없으면 대리인을 참석시키거나 전화상으로 나머지 두명의 이사회 멤버와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잡스와 넥스트 이사진들에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페로
는
그들의 뛰어난 재능을 지나치게 확신한 나머지 일반 사람들에게 날카롭기로 유명한
그의 감독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작성일자 : 1994.02.06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37)
후에 페로의 대통령 후보 출마를 도우려는 뜻에서 넥스트의 임원들은 페로가 넥스트
의 이사회
이사였을때 얼마나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는가를 무심코 밝혔다. 예를 들어 버드 트리
블은
페로가 넥스트 직원들에게 "여러분들을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라고 항상 물어 보
았고
그들에게 "당신들은 전문가들 이요"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잡
스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잔 반즈는 페로가 잡스와 의견충돌이 생기면 "스티브, 나는
당신에게
모든것을 맡겼기 대문에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지만 이 방법을 생각해 본적
이
있나"라고 그를 확신시켰다는 예를 들면서 페로가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는 얘기를 들
려
주었다.
이런 관계는 페로와 잡스의 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유도했지만 잡스와 넥스트 는 페로
의
뛰어난 지도력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페로가 넥스트를잘 이끌어가고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넥스트에 투자하는 것 자체가 특권이고 그는 투자가를 선택한 것
이지 그
이상은 아니라는 잡스의 생각은 옳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잡스는 이름을 제외하고
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군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때 잡스가 이사회를 구성할 때 자기와 그토록 절친한 사람들을
기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조개 안에 약간이나마 모래가 들어갈수 있도록 했더라면 더 낳은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페로와 두 대학을 끌어들임으로써 잡스는 재정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지만아무런
계획
없이, 깊은 통찰력 없이, 그리고 일상 업무에 더 숙달된 사람들과 경영 책임을 분담
하지 않고
잡스를 강요하는 사람 없이 갑자기 쏟아진 자금은 그를 방종에 빠뜨려 초창기에 그랬
던
것처럼 다시 회사를 과대 평가하게 만들었다. 억만장자를 투자가로 얻은 넥스트는 일
을
처리하는 솜씨가 더서툴러졌다. 잡스와 넥스트는 돈이 떨어지면 당연히 페로가 돈을
더
내놓을것이라고 생각했다.
87년 넥스트는 처음과 똑같은 위기를 맞았다. 과분하게 돈이 많았지만 그냥 일축해
버리기에는 너무 위험한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소파나 램프, 커튼을 고르듯 컴퓨터를 골랐더라면 스티브 잡스가 컴퓨터를
완성하여
발표하기까지 컴퓨터의 외양에 쏟아 부은 정성이 빛을 보았을 것이다. 넥스트 창립
당시부터
잡스는 컴퓨터의 외장에 시간과 자금을 아낌 없이 투자했다. 잡스는 세밀한 부분까지
빠뜨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검토하여 완벽성을 확인했다(내부에 사용되는 나사까지도
직접
확인했다). 그의 컴퓨터에 대한 비전은 순수했다. 즉 기능이야 어찌 됐건 컴퓨터 자
체로서 의
가치를 인정 받아야했다. 그의 자존님이 완벽한 금속 덩어리로 결정화되 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잡스는 컴퓨터 부품들을 입방체형 상자 속에 내장해야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한번
마음먹은 것은 어떤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고 나갔듯이 이번에도 그 생각을 꼭 실현시
킬
작정이었다. 그는 입방체 형태로 컴퓨터를 만들면 사람들에게 신선감을 주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어서 시장을 석권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엔지니어들의 요구를 가볍
게
거역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입방체의 모서리 길이는 1피트이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그 상자 안에 들어갈 기판이나 기타 다른 부품들의 크기는 외부 상자의 크기에 맞춰
져야 했다.
가로, 세로, 높이 모두 1피트여야 했다. 이 크기는 그단 순성 때문에 우아하게 보일
지는 몰라도
다른 경쟁사들의 컴퓨터 크기가 점점작아지고 있는 추세를 고려한다면 넥스트는 반대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잡스는 애플사에 있을때 같이 일한 경험이 있던 산업 디자이너인 하트무트에스링거를
믿고
그의 계획을 대담하게 추진시켰다. 잡스는 입방체 디자인을 에스링거의 디자인 회사
인 프로그
디자인사에 맡겼다. 그 디자인에 든 비용 은 밝혀진 바 없지만 랜드에게 지불된 금액
만큼이나
막대한 돈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비록 랜드 자신도 받지 못하였지만 에스링거는
랜드와
같은조건을 내세웠다. 디자인의 기본 계약금에 추가해 넥스트는 컴퓨터 판매량에 따
라
로열티를 지불키로 했다.
불행하게도 에스링거는 잡스처럼 자기 도취에 빠진 인물이었다. 다른 고객들 은 그의
방만한
성품을 견제했지만 잡스는 에스링거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재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작업하는 예술가"를 방해해서는 안되었다. 경비 의 과다
에 개의치
않는 잡스 같은 고객을 확보한 에스링거는 심미적으로 볼때 획기적인 디자인을 고안
해 냈지만
제조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넥스트사 직원들은 에스링거가 수년 동안 매달 수만 달러
에
달하는 자금을 지원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잡스와 에스링거는 넥스트 제품을 사용할 잠재 고객들이 스미소니아 국립 박물관에
전시될
만큼 뛰어난 컴퓨터의 외양보다 컴퓨터의 기능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는 사실을 모
르고
있는 듯했다. 더 중요한 것은 입방체 모양은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제조되어야 함에
도
불구하고 완벽한 외양을 만들기 위해 비용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채 필요한 부품을
선택
사용했다는 것이다.
잡스가 입방체를 마그네슘으로 주조하여 만들자는 의견을 굽히지 않자 컴퓨터의 제조
비용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다. 마그네슘은 주로 전구나 정밀 기계 그리고 폭죽을 만
드는데
사용되는 물질이다.
잡스는 마그네슘의 2가지 특성 때문에 컴퓨터 외피를 만들기에 적합한 소재 라고 확
신했다. 이
소재는 강력했고 고객이 컴퓨터를 다룰때 플라스틱 외피 의 부드러운 촉감보다 견고
한 느낌을
줄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또 연방통신위원회(FCC)가 가정용 컴퓨터의 인가 요구 조건으로 내세우는 무선 주파
수
방해를 억제하는 전자파 방어막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당시 개인용 컴퓨터보다 더
강력한
컴퓨터도 가정용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FCC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잡스는 "개인
용
메인프레임"이라고 묘사한 그의 신제품 이 최고의 제품이 되기를 원했고 마그네슘은
그의
의지를 실현시키는데 많은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마그네슘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업체들은 마그네슘이 다루기 어렵고 가연성이며 주조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용
을
회피해 왔다. 마그네슘을 주형에 넣으면 플라스틱보다 빠른 속도로 굳기 때문에 공기
방울이
생기거나 다른 결함이 생길 가능성이 더욱 높다.
작성일자 : 1994.02.08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38)
에스링거는 넥스트에서 만들어낼 입방체는 플라토를 만족시킬 만큼 한치의 오차가 없
는
완벽한 거이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안그래도 만들기 어려운 모양을 만들어 내기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 몰고 갔다. 에스링거는 눈속임없이 외피를 만들어 낼 주형은 모퉁이
없이
완벽한 입방체여야 한다고 했다.
이런규정은 상당한 비용을 요구했다. 어떤 물질을 주조하더라도 주형틀 가장자리에
약간의
모서리를 잡아주면 그 주조물을 빼기가 훨씬 수월하다. 링 모양의 팬에 빵을 굽는다
고 생각해
보자. 팬 가장자리에 모가 나 있으면 빵을 빼기가 훨씬 쉬운 것과 같은 원리이다. 산
업용으로
사용되는 주형에도 4분의 1에 불과한 미미한 각도라도 각 모서리에 각을 잡아주면 훨
씬
수월하게주형을 뜰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에스링거는 모서리 없는 입방체를 요구
했다.
에스링거가 요구하는 입방체를 만들 수 있는 특수 주형이 만들어졌다. 이 주형은 각
면이 서로
분리될 수 있고 주조물이 완성되면 각 면이 동시에 밖으로 벗겨지는 특수한 주형이었
다. 이
주형을 만드는데만 65만달러가 들었고전국 구석구석을 수소문한 후에야 이런 특수한
기술을
갖춘 금속 주조 공장 을 찾아낼 수 있었다.
잡스는 마그네슘 외장은 그가 평소 좋다고 생각했던 레코드플레이어의 암과 같은 광
택이 도는
검은 색으로 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주형으로 떠서 만들어내는 주물은 주형
이
맞물리는 부분에 가느다란 돌출선이 생기게 마련이다. 돌출선은 사포가 부착된 기계
로 갈아
냈는데 그 기계를 조금만 세게누르면 가장자리에 상처가 남게되어 폐기처분 해야 했
다.
그래서 넥스트는기계로 사포 작업을 하는 업체와 계약을 맺어 그 공정을 컴퓨터로 자
동화시
켰다. 15만달러에 달하는 그 기계는 주형을 뜨면 외장 가장자리에 남게 되는돌출선을
제거하는 일만 했다.
개인용 컴퓨터의 외장은 일반적으로 베이지색으로 통일되어 왔지만 이를 넥 스트가
검은
색으로 만들게 되면 그 전통을 깨는 것이 된다. 또 검은 색으로는 흠을 가리기도 어
려웠다.
엷은 광택이 도는 페인트는 판판한 표면 위에고르게 칠해 지지도 않았고 흠집을 덮어
주지도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페로는 넥스트측에 제너럴 모터스(GM)사의 페인트 전문가들 을 찾아
가라고
제의하면서 직접 그들을 연결시켜 주었다. GM은 컴퓨터외장에페인트칠을 해달라는
넥스트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왜 페인트칠이 잘 안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검은 색은
그 색소의 특성상 결함을 가려주는데 가장 약한 색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GM
은
결함이 제일 적은 자동차에만 검은색을 칠한다. 넥스트가 사용한 검은색 페인트는 컴
퓨터를
출하 하기 위해 스티로폼에 넣기 전 싸는 플라스틱 봉지의 마찰에도 견디지 못할정도
로
취약했다.
이 입방체 외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가지 단점들을 통해서 잡스 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시행 착오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계획을 변경하여 추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 나타나는 결점들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직원들 이 잡스
가 정한
입방체의 규격이 물리학 원칙 상 맞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해 도 그들의 의견을 일축
해 버렸다.
그는 모든것이 완벽해야만 만족스러워했다. 그 완벽성을 실현시키는데 드는 비용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외장을 개발하여 마지막까지 마무리하는데 드는 비용은 당초 넥스트가
계획했던
것보다 10배나 더 들었다.
비용이 많이 든다해도 잡스는 그의 계획을 수정하려하지 않았다. 넥스트의 고위 간부
들은
모든 면에서 그랬듯이 잡스가 선택하는 기술 사양을 그대로받아들였다. 그들은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신생 기업에서 일하려면 위험 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스
스로를
달랬다.
잡스는 그들이 자기가 함께 일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똑똑한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
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일깨워 주었다(그런데 잡스가 넥스트이 전에 애플에서 일한 경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려 한다면 그가 일했던 두개의 집단 중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라는
얘기가
된다).
작성일자 : 1994.02.10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39)
넥스트는 외부에서 자문을 주는 사람들에게 후한 대우를 해서 넥스트사 직원 들처럼
편한
마음으로 일하게끔 했다. 잡스는 불가능에 가까운 디자인을 고안하는 사람들을 좋아
했다.
일찍이 애플에서도 일한적이 있던 데이비드 켈리 라는 디자이너는 넥스트의 입방체
외장을
만드는 일을 맡았고 모니터를 올려놓을 토션 바가 보이지 않게 하는 작업을 하기 시
작했다.
외장의 모양과 모니터를 디자인하는데 걸린 시간을 계산하면 6년간 투입된 사람의 노
동력과
맞먹는다. 프로그디자인사처럼 데이비드 켈리 디자이너는 입장체외장 디자인 을 다
완성하여
그 제품이 발표되면 큰 찬사를 받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불평없이 일을 했다.
잡스는 첨단 자동화장비가 갖추어진 회사내에서 컴퓨터를 제조하겠다는 계획 을 세웠
고 그
계획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을 들여야 했는데 이
는 후에
가장 어리석은 처사였음이 드러났다.
초기에 잡스는 훨씬 현실적인 계획을 세웠었다. 그는 컴퓨터 부품제조는 하청업체에
맡기고
넥스트는 팔로알토 사무실에서 컴퓨터조립및 테스트만 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어진 좁은 공간안에서 1백명에 불과한 직원을 가진 넥스트가 1억만달러 규모로 성
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86년 마음을 바꾸어 넥스트가 모든 제조
공정을
직접 맡아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첨단자동화 장비를 갖추면 된다고 생각
했다.
그는품질에 대한 기준을 새로 설정하고 회사내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했다. 그
는 로스
페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효율적인 제조활동을 할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페로는 "네가 넥스트 제품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오사카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후에 말하곤했다. 잡스는 또 보안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회사
내에서
제품을 제조하면 비밀이 누출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사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장 좋은 비결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잡스는 그의 공장을 마케팅 도
구로
사용하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BMW를 사고 싶어하는 것처럼 넥스트 컴퓨터도 사고
싶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훌륭한 스포츠 카를 살 수 있는 방법을 아십니까. 유럽으로 가서
공장을
방문하여 거기서 직접 차를 사면 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잡스는 앞으로 컴퓨터를 구입할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객은
자신이
주문한 컴퓨터를 보기 위해 바행기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와서 조립라인을 직접 살펴
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새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과 동시에 생산자동화계획을 실현 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자금이 필요했다. 기존공장에 별도의 자금을 투입한다는 것은 막대한 부
담이
되었다. 넥스트는 컴퓨터 하드웨어 생산에 우선권을 부여해서 하드웨어를 계속 판매
해야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게 되었고 앞으로 넥스트의 강점이 될 소프트웨어
분야에
대해 노력을 집중적으로 쏟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잡스는 전자제품의 소형화
디자인기술에 매료되어 있었다. 컴퓨터 제조에는 반도체 칩 및 광섬유회로기판 기술
이
핵심이다. 잡스는 "광섬유대신 실리콘 위에 탑재"하라는 모토를 내세 우면서 컴퓨터
에 여러
개의 칩을 탑재할 필요가 없도록 하나의 IC에 여러 개의 칩을 통합할 수 있는 주문형
칩을
개발하도록 엔지니어들에게 지시했다.
이런 아이디어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부족했고, 이 제품 이 완성
될
때까지 대신 판매할 제품이 없어서 자금을 회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넥스트
자체에서 컴퓨터 부품을 조립하겠다는 잡스의 결정은 재정적으로도 채산성이 맞지 않
았다.
이런 일들은 넥스트와 같은 작은 컴퓨터 업체나 중소형 업체 혼자서는 도저히 경제적
으로
감당해낼 수 없기때문에 실리콘밸리에 무수히 많은 하청업체에게 맡기는 것이 관례였
다.
거대한 컴퓨터업체인 IBM과 디지털 이퀴프먼트사(DEC)도 컴퓨터 제조는 혼자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잡스는 이번에도 반대 방향으로 키를 돌렸다. 로
스 페로의
묵인아래 잡스는 계산상으로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는 그의 계획을 밀고 나갈 수 있
었다.
페로는 서비스업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제조업 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
고,
수십억달러 상당의 매출을 올리는 제너럴 모터스와의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넥스트사건물에 생산시설을 설치하기에는 공간이 너무 비좁았다.
작성일자 : 1994.02.13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40)
잡스는 처음에 모든 사람들은 그의 요구를 모두 받아 들여야 한다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회사
근처건물에 입주한 임대자들을 내보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가령 지올로지컬 서베이사
와 같이
넥스트사보다 오래 전부터 그곳에 터전을 잡은 업체가 넥스트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
줄 리
없었다. 그 회사가 말을 듣지 않자 잡스는 워싱턴에 있는 앨런 크랜스턴 상원의원에
게 전화를
걸어 캘리포니아에서 자기 뜻이 이루어지도록 힘써 달라고 부탁했다. 크랜스턴은 잡
스의
요구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그 회사는 이전하지 않아도 되었다.
잡스는다른 곳을 알아 봐야 했기 때문에 결국 샌프란시스코만 건너편에 있는 프리몬
트를 공장
부지로 정했다. 잡스와 수잔 반즈는 그들이 애플에 있을때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넥스트는
꼭 성공할 수 있다는 농담을 사석에서 자주 했었다. 그러나 잡스는 몇년전 완전 자동
화된
매킨토시 공장 설립 당시저질렀던 실수를 넥스트 공장 설립 과정에서도 똑같이 범했
다.
잡스는 마음 내키는대로 기계를 구입해서 설치했다. 가격보다 기계의 색이 더 중요시
되었다.
매킨토시 공장 설립과정에서 그렇게 했듯이 모든 기계와 로봇의 색깔이 서로 조화되
도록 다시
칠해야 했다. 더구나 그는 비용이 얼마 들든지 조립 라인의 방향이 오른쪽에서 왼쪽
으로
가도록 모든 기계와 로봇을 재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통 조립 라인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도록 되어 있다. 그는 앞으로 공장을 견학하러 오는 고객들이 발코니를
따라
걸어가면서 컴퓨터 보드 제조 공정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조립 라인의 방향을 오른쪽
에서
왼쪽으로 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장시설은 잡스가 계획한 대
로
한번도 마케팅 도구로 사용되지 않았다. 공장은 일부 초청인사를 제외하고는 아무에
게도
공개되지 않았다.
공장 내부에는 밝은 조명이 설치되었고 아트 갤러리에서나 볼 수 있는 하얀 색 벽면
에다 특수
타일로 마루를 깔았다. 로비에 유리 벽을 세웠고 잡스의 지시에 따라 여러 번 이리저
리 옮겨
가며 설치했다. 세련된 모양의 계단을 만들고 로비에는 2만달러나 되는 검은 가죽소
파를 갖다
놓았다. 또 화장실은 최고급으로 디자인하고 세련된 비품만 사용해 "건축 다이제스트
지"의
표지사진에 실릴 정도로 넥스트 공장의 디자인은 완벽했다.
코트를 걸어둘 만한 곳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실내장식 디자이너
는
실내가 어수선해 보일까봐 옷장이나 옷걸이를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직원들은 뾰죽
하게 튀어
나온 곳을 찾아서 코트를 걸어야 했다.
잘정돈되고 근사한 넥스트사내부는 다른 공장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20 세기 후
반의
근로자들은 이제 더이상 어두컴한 19세기식 공장에서 일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잡스
가
디자인한 공장은 사무직과 생산직 근로자들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환경을 조성했
다.
프리몬트공장에서 일하는 넥스트 근로자 들은 팔로 알토의 애플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호화로운 환경 에서 일했다. 그러나 프리몬트 공장에는 두가지가 빠
져
있었다. 즉 합리적인 재정운영과 인간성이 흐르는 근무환경이 결여된 것이다.
잡스는 매킨토시 공장에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관리한데 대해 문책을 받아본적이 없
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을 몰랐다. 그당시 애플Ⅱ 의 매출이 상당히 호조를 보
였기
때문에 잡스의 실책이 얼마만큼의 손실을 가져왔는지 아무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매킨토시 공장운영 모델을 넥스트 공장에서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엉성한
구석이 많았다. 새로운 것을 추구해 보겠다는 열의에 찬 잡스는 넥스트 공장에서 교
육에
적합한 워크스테이션을 개발하겠다는 원래의 설립취지보다 미국에 있는 다른 업체와
는
형태가 다른 공장을 만들었다는데 더 큰 자긍심을 가졌다. 미국에 서 전자제품을 생
산하는
공장에 가보면 대체로 근로자의 수도 만을뿐 아니라임금수준도 낮았고 대부분 여성이
거나
소수민족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고도의 자동화시설을 갖춘 넥스트 공장에서는
거의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고 그나마 일하는 사람들은 고학력 백인근로자로 임금수준도
상당히
높았다. 컴퓨터 제조공정에 지나칠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졌고 바로 곁에 똑똑한 하
드웨어
엔지니어들을 거느리려고 했던 그의 개인적인 성향때문에 그는 사업 에서 잘못된 판
단을
내렸다. 그는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컴퓨터를 어떻게 하면 소량이라도 비용효과적으
로 생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보다 고학력자들 의 수를 세기를 좋아했다. 다른 회사의 경우
전체공장근로자의 70%가 중.고 등학교 출신인 실정인데 넥스트는 생산직 근로자 70%
가 박사
학위를 가졌다고 자랑한 바 있다. 이런 최고급 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넥스트는
거의모든
것을 제공해주는 첨단 시설을 구비해야 했고 엔지니어들이 즐길 수 있는 윈드터널을
자체
내에 구비해야 했다고 잡스는 말하고 있다. 이런 일은 상식에도 어긋났고 사업적인
측면에서
타당하지 못한 조치였다.
작성일자 : 1995.02.15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40)
잡스는 처음에 모든 사람들은 그의 요구를 모두 받아 들여야 한다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회사
근처건물에 입주한 임대자들을 내보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가령 지올로지컬 서베이사
와 같이
넥스트사보다 오래 전부터 그곳에 터전을 잡은 업체가 넥스트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
줄 리
없었다. 그 회사가 말을 듣지 않자 잡스는 워싱턴에 있는 앨런 크랜스턴 상원의원에
게 전화를
걸어 캘리포니아에서 자기 뜻이 이루어지도록 힘써 달라고 부탁했다. 크랜스턴은 잡
스의
요구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그 회사는 이전하지 않아도 되었다.
잡스는다른 곳을 알아 봐야 했기 때문에 결국 샌프란시스코만 건너편에 있는 프리몬
트를 공장
부지로 정했다. 잡스와 수잔 반즈는 그들이 애플에 있을때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넥스트는
꼭 성공할 수 있다는 농담을 사석에서 자주 했었다. 그러나 잡스는 몇년전 완전 자동
화된
매킨토시 공장 설립 당시저질렀던 실수를 넥스트 공장 설립 과정에서도 똑같이 범했
다.
잡스는 마음 내키는대로 기계를 구입해서 설치했다. 가격보다 기계의 색이 더 중요시
되었다.
매킨토시 공장 설립과정에서 그렇게 했듯이 모든 기계와 로봇의 색깔이 서로 조화되
도록 다시
칠해야 했다. 더구나 그는 비용이 얼마 들든지 조립 라인의 방향이 오른쪽에서 왼쪽
으로
가도록 모든 기계와 로봇을 재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통 조립 라인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도록 되어 있다. 그는 앞으로 공장을 견학하러 오는 고객들이 발코니를
따라
걸어가면서 컴퓨터 보드 제조 공정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조립 라인의 방향을 오른쪽
에서
왼쪽으로 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장시설은 잡스가 계획한 대
로
한번도 마케팅 도구로 사용되지 않았다. 공장은 일부 초청인사를 제외하고는 아무에
게도
공개되지 않았다.
공장 내부에는 밝은 조명이 설치되었고 아트 갤러리에서나 볼 수 있는 하얀 색 벽면
에다 특수
타일로 마루를 깔았다. 로비에 유리 벽을 세웠고 잡스의 지시에 따라 여러 번 이리저
리 옮겨
가며 설치했다. 세련된 모양의 계단을 만들고 로비에는 2만달러나 되는 검은 가죽소
파를 갖다
놓았다. 또 화장실은 최고급으로 디자인하고 세련된 비품만 사용해 "건축 다이제스트
지"의
표지사진에 실릴 정도로 넥스트 공장의 디자인은 완벽했다.
코트를 걸어둘 만한 곳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실내장식 디자이너
는
실내가 어수선해 보일까봐 옷장이나 옷걸이를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직원들은 뾰죽
하게 튀어
나온 곳을 찾아서 코트를 걸어야 했다.
잘정돈되고 근사한 넥스트사내부는 다른 공장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20 세기 후
반의
근로자들은 이제 더이상 어두컴한 19세기식 공장에서 일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잡스
가
디자인한 공장은 사무직과 생산직 근로자들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환경을 조성했
다.
프리몬트공장에서 일하는 넥스트 근로자 들은 팔로 알토의 애플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호화로운 환경 에서 일했다. 그러나 프리몬트 공장에는 두가지가 빠
져
있었다. 즉 합리적인 재정운영과 인간성이 흐르는 근무환경이 결여된 것이다.
잡스는 매킨토시 공장에서 모든 것을 마음대로 관리한데 대해 문책을 받아본적이 없
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을 몰랐다. 그당시 애플Ⅱ 의 매출이 상당히 호조를 보
였기
때문에 잡스의 실책이 얼마만큼의 손실을 가져왔는지 아무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매킨토시 공장운영 모델을 넥스트 공장에서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엉성한
구석이 많았다. 새로운 것을 추구해 보겠다는 열의에 찬 잡스는 넥스트 공장에서 교
육에
적합한 워크스테이션을 개발하겠다는 원래의 설립취지보다 미국에 있는 다른 업체와
는
형태가 다른 공장을 만들었다는데 더 큰 자긍심을 가졌다. 미국에 서 전자제품을 생
산하는
공장에 가보면 대체로 근로자의 수도 만을뿐 아니라임금수준도 낮았고 대부분 여성이
거나
소수민족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고도의 자동화시설을 갖춘 넥스트 공장에서는
거의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고 그나마 일하는 사람들은 고학력 백인근로자로 임금수준도
상당히
높았다. 컴퓨터 제조공정에 지나칠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졌고 바로 곁에 똑똑한 하
드웨어
엔지니어들을 거느리려고 했던 그의 개인적인 성향때문에 그는 사업 에서 잘못된 판
단을
내렸다. 그는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컴퓨터를 어떻게 하면 소량이라도 비용효과적으
로 생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보다 고학력자들 의 수를 세기를 좋아했다. 다른 회사의 경우
전체공장근로자의 70%가 중.고 등학교 출신인 실정인데 넥스트는 생산직 근로자 70%
가 박사
학위를 가졌다고 자랑한 바 있다. 이런 최고급 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넥스트는
거의모든
것을 제공해주는 첨단 시설을 구비해야 했고 엔지니어들이 즐길 수 있는 윈드터널을
자체
내에 구비해야 했다고 잡스는 말하고 있다. 이런 일은 상식에도 어긋났고 사업적인
측면에서
타당하지 못한 조치였다.
작성일자 : 199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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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41)
잡스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최고급 콤팩트 디스크 컬렉션을 미끼로 인기인들 을 집안
으로
유인하려는 돈 많고 외로운 중학생 처럼 행동했다.
애플을 떠나 같이 넥스트를 창립한 5명의 동료 중 생산담당책임자는 하나도없었다.
그래서
86년 잡스는 다시 애플을 찾아가 린다 월킨을 채용하여 생산 담당 책임 직을 맡도록
있다.
잡스는 월킨 같은 신규 직원을 채용하기 위한 고용 계약서를 작성할 때 다소 진지하
면서도
장난끼 있게 그 내용을 작성했다. 그는 맨 마지막에 "나는 비정상적으로 멋진 이 제
안에
동의한다"는 문구 에 사인하도록 했던 것이다. 월킨은 유토피아의 꿈을 실현하려는
다른
사람들을 쉽게 따라 잡을 수 있었다. 넥스트는 아무것도 없이 제조 시설을 설치하고
있었고
넥스트의 사내 회보에 월킨이 "처음 부터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서
기쁘다"고 한말이 게재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86년 가을이 되자 넥스트 직원들은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을깨닫기 시
작했다.
존 네이던의 영화 촬영 때문에 85년 가을에서 86년 초 사이 떨어진 사기를 연수를 통
해 조금
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네이던이 86년 가을 연수에도 참가했었더라면 사기가 그전
보다
훨씬 저하되었다는 것을보게되었을 것이다. 넥스트는 87년 봄까지 제품을 출하하겠다
는
약속을 지킬 수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86년 9월 연수의
주제를
중도에 서서"라고 붙인 잡스는 "우리는 대학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정확 하게 기억
할 수
없는 시점에 와 있고 우리가 앞으로 어떤 제품을 생산할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시기상
조인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직원들이 터널 중간 에 서 있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생각했
다.
중간에 있으면 터널 입구나 출구 의 빛을 볼 수 없다. 그들은 초조해 했고 잡스는 그
런
그들에게 본능적 직감 력과 지도자인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86년이 되자 대학 컴퓨터시장전문가들은 학생용 컴퓨터가 넥스트가 생각하는 3천달러
이면
너무 비싸기 때문에 1천달러를 넘지 않아야 보급이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가격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능이 약간 떨어지는 컴퓨터를 생산해야 했다. 잡스는 직원들이
대학측의 요구나 외부세계를 의식하지 말고자기 지시만 따르고 터널을 생각하면서 앞
으로
향해 전진할 것을 요구했다.
모든 사람들은 잡스의 터널 비전이 훌륭한 이론이라고 입을 모았다. 예를 들어 존 네
이던은
잡스의 확고부동한 자세에 경탄을 보내며, "잡스는 가만히앉아서 그가 바른 길을 택
했는가를
고심하면서 업무의 능률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고 극구 칭찬했다. 로스 페로는 한술
더 떠
자기를 비하하면서 까지 잡스는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그를 칭찬했다. 이들 두사
람은
"터널 비전"을 다같이 숭상했고 페로는 성공하는 사람들은 한가지 일에 몰두하기 때
문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잡스는 고객의 요구를 무시하는 터널비전의 타당성
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그 뜻을 과장되게 설명 했다. 86년 미국 기업가
들의
원탁 토론회 과정을 폐쇄 회로를 통해 메릴 린치 사무 실로 방영한 바 있다. 그때 잡
스는
방청석에 있는 미래 기업인들에게 기술집약 회사를 설립하려면 굳이 시장 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그는" 최고의 기업에서는 그 회사를 설립하는 소수사람들 자체가
바로
시장이다"고 말했다. 다시말해서 넥스트 직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중심적이면서도 독단적 철학관을
가진
사람은 정상적인 시장 조사 활동이 필요치 않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판시기가 다가옴에 따라 잡스의 야망은 기술적인 문제로 늪에 빠지게 되었다. 잡스
의
지시에 따라 게이트 어레이라는 칩에 최대한 많은 전자 스위치를 탑재하려는 디자이
너들은
가장심한 압력을 받았다. 최종 디자인 완성 단계에이를 때쯤 되면 잡스는 디자이너들
에게 더
많은 기능을 추가하도록 요구했고 요구한 대로 칩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처
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랐다.
작성일자 : 1994.02.17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42)
잡스가 다시 디자인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겠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속으로 일
주일
내내 일해도 일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잡스가 당연 히 기간을 단축시켜
보라고 할
것이기 때문에 한달 가량 더 걸리겠다고 대답 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임기응변
은
오래가지 못했다.
87년 1월에 가진 연수회에서 잡스는 디자이너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집중시켜 그들을
무안케했고,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집단 강간"을 보는 것과 같았다고 회상했
다. 잡스는
칩을 디자인한 팀의 단장에게 "당신들이 우리 회사 를 죽게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시오"라고 소리 지르며 모든 탓을 그들에게 돌리며 경멸했다. 그는 지난 일년동안
하루
18시간 일을 하며 수고했던그들의 노고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다른 넥스트 직원들
은
이같은 장면을보 고 결론을 내렸다.
그 후로 아무도 감히 잡스에게 나쁜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잡스는주기적으
로 무리
중에서 희생양을 골라 가차 없는 비난을 퍼부었다. 선택된 희생양은 당연히 동료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입을 꽉 다문 채 그저 지켜 보거나 비난의 대열
에
가세했다. 회사 밖에서 그의 사업 철학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그는 넥스트가 시행하
고 있는
야만적인 경영 방식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그의 이런 버릇은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87년 직원들이 이런 모욕적인
관행은
끝나야 한다고 입을 모았을 때 그는 그의 잔인성을 인정했다.
그는앞으로 더 잘 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직원들은 팀을 짰고 6주간 가진 정기 회의
를 통해
모색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잡스는 그 제안을 수락했고팀은 해산되었다.) 그러나 그
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그의 경영 방식은 그당시에는 피부로 느낄 수 없었지만 회사 운영 전체 에 큰
타격을
주었다. 87년 초 연수에서 모든 비난을 뒤집어 쓴 2명의 칩 디자이너들을 예로 들어
보자.
그들은 해고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기싫은 일을 억지로 지속할 의지를 잃었
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 사퇴했고 그 후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
들이
떠남으로써 넥스트는시간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 프로젝트는 복잡했고 그들
의
일을 물려 받은 사람들이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 두달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컴퓨터의 출고가 지연됨으로써 수많은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넥스트는
시간을
낭비할 처지가 아니었다. 87년 잡스가 디자인 담당자들을그토 록 심하게 비난하지
않았더라면 넥스트의 역사는 현저히 다르게 펼쳐질수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
다.
87년 초 "후기 창립 멤버"로 넥스트에 참여하여 제조 관리를 담당했던 린다윌킨스는
일년도
채 못 채우고 넥스트를 떠나갔다. 그녀의 경우는 특이했다.
왜냐하면우선 그녀는 사실상 해고당했고 그 다음번에는 자신이 부당해고를 당했다는
이유로
넥스트를 상대로 1억1천만달러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제 기했기 때문이다.
윌킨스의 경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근거가 약했다. 법원에 제출된 자료를 보면
잡스는
윌킨스가 바로 아래 부하 직원을 확보(확보라 함은 잡스가 추천한 사람을 말한다.그
는
윌킨스가 추천한 사람들을 모두 거부했다 하지못했기 때문에 그녀를 좌천시킨 것으로
되어있다. 그는 감봉하지 않는 대신넥 스트의 주식 일부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계
약서에
명시된 대로 주식을매 입 당시의 가격대로 반납하지 않고 돈을 더 요구하자 해고당했
던
것이다.
성별이나성격에 관련된 다른 이유(그녀는 고위 간부들 중 잡스에게 대놓고삿대질을
하며
그를 거역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때문에 그녀가 해고 당했는지 알수 없다.
그러나 윌킨스가 넥스트에서 일을 시작하기 이전에 "황당하지만 위대한 제의 "말고도
신입
사원 및 "후기 창립 멤버"까지도 사인해야만하는 서류가 있었다. 그 서류에는 "나는
자의 또는
넥스트의 결정에 따라 언제든지 해임될 수있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해직 당한 직원
은 이
"언제든지"라는 구절 때문에부당한 해고를 당했을 때 항의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두번의 공판을 거쳐 윌킨스의 소송이 종결되었다. 첫째 공판은 배심원 심리 중 재판
관이
윌킨스의 변호사에게 "허풍 좀 그만 떠시오"라고 소리치자 무효 로 돌아갔고 두번째
공판(새
재판장이 주재하는)에서는 재판관이 넥스트의변 호를 들어보지도 않고 곧바로 넥스트
의
승소로 소송을 종결지었다. 공판에들어가기 전 넥스트는 67만5천달러를 제시하며 법
정을
떠나서 문제 해결방안을 모색해보자고 여러번 제의했지만 번번이 거절 당했다. 윌킨
스의
변호사는배심원의 동정을 얻어 손해배상금으로 1백50만달러를 받아 낼 수 있다고 장
담 했고,
그녀는 넥스트와 직접 맞붙어 결국 피해 보상으로 11만7천달러를 물어야하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잡스는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서류를 더욱 철저히 파기하라고 지시했고 또 다른 유사
소송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보안을 철저히 유지했다.
작성일자 : 1994.02.20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43)
넥스트는 최근 30일 동안 사용하지 않은 파일을 파기하도록 규정했지만 일반사원들은
그규정을 잘 지키지 않았다.
넥스트에서 나오기 전 윌킨스는 넥스트의 당시 시설이 납품 기일을 지킬 수있고 또
제품의
질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자랑했었다. 또 "선적 할때 제품 포장을 어떻
게 할지도
이미 생각해 놓았다"고 애매한 어조로 말하기도 했었다. 넥스트는 처음 계획했던 것
보다
2년이나 늦게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완성하여 생산하고 있는 실정인데도 공장장
이라는
사람은 제품의 포장 방법을 알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윌킨스는그녀가 가장 혐오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인 잡스와 똑같이 무엇이 중요하고 무
엇이 덜
중요한지를 판단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가지 다른점이 있다면 잡스는 아첨
꾼들로
둘러 싸여 거창한 계획뿐 아니라 세심한 부분까지도면밀하게 계획하는 용의 주도한
사람이라는 격찬의 소리를 끊임없이 들었다는 점이다. 아첨꾼들은 잡스가 특이한 힘
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는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기업인"이란 TV쇼에서 잡스는 넥스트를 설립할 때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자세히 설명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는 "제
품을
완성하여 출하하는 과정"이 마치 부엌에 찬장 을 들이는 일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이
라는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는 이렇듯 분별 없이 계속 말을 했다. "커피 메이커
를 사기
위해 진열대에전시된 제품 중 하나를 고르듯이 제조할 제품을 결정했다." 잡스가 이
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넥스트를 경영했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가리
키는
표지까지도 특별 주문하여 만드는 회사가넥 스트 말고는 또 어디 있겠는가? 화장실
표지를
특별 주문한 것은 주법에위배된 것은 아니지만 직원들은 특별 감찰이 나올 때마다 그
표지를
때고 종전의 것을 대신 다는 게임을 하곤했다.
잡스가 만일 화장실 표지판이나 커피 메이커 그리고 컴퓨터 안에 사용하는나사에 도
금을
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들을 남에게 맡겼다면 자신은 3천달러 라는 높은 가격에 컴
퓨터를
만들어 납품하는 일과 같은 중요한 일에 신경쓸수 있는 시간을 벌었을 것이다. 그러
나 그는
입방체 외피에 관련된 사소한 문제까지도 간섭했다. 그는 대부분 위험하지만 기술적
으로
타당한 기능들을 추가시키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런 기능들을 총체적으로 볼때 산
업
표준과 는 동떨어지고 가격 면에서도 목표치를 훨씬 웃도는 이상한 기계를 만들뿐이
었다. 이
입방체 외피는 후일 소위 "아첨하기 위해 창조된 우아함"의 대표적 인 사례로 꼽히게
되었다.
잡스는 그가 만드는 제품이 특별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했고 사실 모든것을 별스
럽게
만들어서 고객이 좋아하기를 바랐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자신과 엔지니어들이 만족
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런 그의 사업 방식이 매킨토시에서 성
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잡스는 한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려 컴퓨터의 제조 비용을 크게 올려놓았을뿐아니라
스스로를 영원히 고립시켰다. 잡스는 입방체형 컴퓨터에 아직 미완성 단계에 있는
소거가능한 광자기디스크를 사용하도록 결정했던 것이다.
디스크의미세한 부분을 강렬한 레이저광으로 녹이는 동시에 표준자장을 사용한 이
광자기디스크는 일정공간에 일반적인 저장 매체보다 훨씬 많은 양의 디지털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을 가지고 있다.
그당시 이 분야의 기술에 한 가지 취약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일단 0 아니면1이라는
수가
입력되면 변경하거나 지울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캐논사는 넥스트 컴퓨
터가
발표되기 전까지 소거 가능한 디스크를 개발할 수있다고 장담했다.
잡스는 대담하게도 이 광 디스크를 넥스트 컴퓨터의 모든 프로그램 및 데이터를 작동
시키고
컴퓨터 내에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로 삼아야 한다고 엔지니어들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직원들은 제조 비용을 낮출 수있는지 또는 광 디스크의 처리 속도
가 충분히
향상되어 시장성을 확보할 수있을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기능이 이미
입증되고 가격도 비싸지 않아 어디서나 쉽게 구입할 수 있는 표준형 플로피 디스크도
같이
사용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플로피 디스크를 하나 더 추가시키는 비용 은
광
디스크를 탑재하는 비용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었지만 잡스는 엔지니어 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수입보다 명성을 더욱 중요시했다.
작성일자 : 1994.02.22(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45)
86년 교육용 컴퓨터회의에서 잡스는 대학 컴퓨터 관계자들에게 "우리는 여러분들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3천달러라는 가격에 그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었다. 잡스는 넥스트가 3천달러라는 목표를 그
대로
지킬 수는 없지만 그 가격에 근접하게 맞추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잡스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주위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이런 말을 했을뿐 입방 체형 컴퓨터 개
발활동은
계속 진행되었다.
넥스트가 설립되고 2년이 지난 87년 가을이 되어도 넥스트는 잠재 고객들에 게 당당
하게
보여줄 수 있는 컴퓨터 시제품조차도 만들지 못하였고 대학측은 새로운 도전자에게
기회를
주려했던 그들의 뜻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지나 않을까 우려하기 시작했다.
87년 교육용 컴퓨터 회의에서 넥스트는 입방체형 컴퓨터에 관련된 상세한 내용을 감
추고
대신 넥스트의 로고가 만들어진 경위를 설명한 18페이지의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했
다.
그러나 비영리단체로서 절약하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고 잡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
로 돈을
아껴쓰는 학계에서 10만달러짜리 로고에 대한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현명한
처사가 못되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넥스트 소개책자를 화젯거리로 삼았다.
그날 궁지에 몰린 넥스트를 로스 페로가 유창한 언변으로 옹호하지 않았더라면 넥스
트는
일말의 희망마저도 이 교육용 컴퓨터 회의에서 모두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잡스는 그의 특유의 스타일대로 그 회의에 초대된 대학 고객들에게 수준 높은 오락을
제공하는데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미술박물관은 사치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 주었고
현악
사중주는 계속 음악을 들려 주었으며 로스 페로는연설을 통해 사람들을 감동시켜 낙
관적인
분위기를 창출했다. 그의 연설을들 은 스탠퍼드 대학의 마이클 카터는 "그의 연설은
내가
들은 즉흥 연설 중에서 가장 훌륭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페로는 넥스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왜 컴퓨터가 아직 완성되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
이
쇄도한다고 회의 참석자들에게 말했다. 월가분석가들은 넥스트가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한다고 했다. 페로가 만일 책임자였다면 그는 넥스트 사람들과는
부류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벌써 제품을 선적했지만 완벽성을 추구하는 넥스트는 제품이
완벽해질 때까지 아무것도 선적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고무적이었고 페로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넥스 트를 좋아했다.
페로는 전혀 걱정하고 있는 것같지도 않았다. 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걱정
하시죠?
잡스와 내게서 돈이 떨어질까 걱정하시는 겁니까"라고 말했다. 그말을 들은 청중들은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페로의 이런자 신 있는 태도는 대학측이 점차 인내심에 한
계를 보일
즈음해서 넥스트가절실 히 필요로 했던 시간을 벌어주었기 때문에 넥스트도 내심 안
도의
숨을쉴 수있었다. 그러나 컴퓨터의 납기일이 거듭 지연되는 가운데 88년 넥스트의 판
촉반이
대학을 방문하여 활동을 벌이면서 대학이 참아 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다시
금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 넥스트가 파견한 사람들은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대학측은 넥스트의 제품 개
발
진척도를 듣기를 갈망했기 때문에 넥스트가 보낸 사람들을 직접만 날 수 있다는 것
자체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잡스는 제품이 소개되기 직전까지 소비자들의 기대감을 최고로 고조 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은 채 겉도는 예기만 들려주었다. "우리는 여러분
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렸고 여러분들의 의견을 들었습니다"라는 식으로 얘기
가
진행되었다. 일반적인 내용만 오고갈뿐 컴퓨터의 모양이나 가격 책정 방식에 대한 구
체적인
내용은 거론되지 않았다. 대학을 방문하여 마케팅 활동을 하던 넥스트 대표단은 사실
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계속 알맹이 없는 내용만 거듭하는 넥스트에 대해 분노를 터뜨
리는
대학 관계자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대학 관계자로 구성된 자문 위원회만 넥스트의 내밀한 사정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잡스는
대학 계통에 관련된 사람중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 위원회가 제품
이
처음으로 소개되는 날 좋은 이미지를 줄수 있도록미리 수주 활동을 하여 매킨토시가
처음으로 소개되는 날 수주기록을 밝힘으로써 매킨토시의 신용도를 확고히 했던 것과
같은
효과를 얻기를 기대하고있었다. 그러나 잡스는 터널 비전 때문에 매킨토시가 거두었
던
효과를 넥스트 가 똑같이 거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84년과 달리 88년에는 대학 및 학생들 대부분이 퍼스널 컴퓨터를 소유하고있었기 때
문에
넥스트는 일찍이 애플이 경험하지 못한 문제, 즉 고객들로 하여금 현재 가지고 있는
컴퓨터를
교체하도록 유도해야 하는 문제를 하나 더안게 되었다. 잡스가 앞서 만들어낸 작품은
지나치게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나중에 태어나는 제품이 설자리를 쉽게 찾지 못
하게
만들었다.
작성일자 : 1994.02.27(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47)
에이커스는 당연히 잡스가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만드는 소프트웨어의 단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를 궁금해 했고 아직 발표되지 않은, 넥 스트가 개발한 소프
트웨어에
관심을 가졌다. 몇주후 에이커스는 넥스트 컴퓨터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잡스와
빌
트리블을 IBM 본사로 초청했고 잡스 는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는 그의 태도와는 달리
상세한
내용까지 모두 들려주었다. 에이커스는 이들이 중역이기 때문에 컴퓨터 앞으로 달려
가서
프로그래밍을 직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회의는 성공적이었고 에이커
스는
넥스트와의 협상을 IBM 퍼스널 컴퓨터 프로젝트의 시조인 빌 로에게 맡겼다. 그러나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시킨 잡스는 그 열정만큼이나 깐깐한 성격때문 에 수개월 지속
된
협상과정에서 종종 협상을 결렬시키겠다고 위협했고 또 실제로 결렬시키는 경우도 있
었다.
IBM은 넥스트의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에 대해 6천만달러를 지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
다.
그러나 IBM이 관심을 가지면가질수록 잡스는 IBM을 파트너로 받아들일지에 대한 태도
를
애매모호하게 취했다. 잡스는 IBM이 넥스트를 짓누를까 두려워 IBM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파트너가 되기를 바랐다. 넥스트의 판매부장인 토드 룰론 밀러는 직원 들
에게
잡스가 세계에서 가장 큰 데이터처리회사에 대해 얼마나 겁을 집어먹었는지 말해주면
서 쓴
웃음을 지었다.
잡스는 협상중에 상대방이 제시한 색이라든가 타이틀 등 남보기에는 사소한 문제들을
트집
잡아 두손을 번쩍 들어 못마땅한 시늉을 하며 회의실을 뛰쳐나오곤 했다. 다른 사람
이
사소하게 여기는 문제들도 잡스를 충분히 화나게할 수 있었다. 그가 "그건 가치가 없
는
일이야"라고 한마디 하게되면 협상이 결렬될 수도 있었다. 댄 르윈은 협의중에 그런
말을
하고 나간 잡스를 붙잡아 복도에서 그를 진정시키고 다시 생각해 보도록 종용하는 역
할을
했기 때문에 IBM측 사람들로부터 감사를 받았다. 그러면 잡스는 몇분 후 다시 회의실
로
들어가 "그 문제는 이제 문제도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세밀한 사항 까지 모두 합
의를 본
사안에 대해서도 잡스는 계약서가 2페이지를 넘어가면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잡스는
IBM
변호사들이 초안을 잡아 그에게 보내온 긴 계약서 사본을 읽어보지도 않고 "당신들은
내
뜻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것 같소"라고 IBM을 비난했다. 이 말은 넥스트 직원들이
가장두려워하는 말이 되었다.
넥스트는 연간 6백억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처럼 행동했고 IBM은 마치 날짜에 맞
추어 첫
제품을 출고하지 못한 회사처럼 넥스트의 요구를 불평없이 받아들여 잡스가 원하는
대로
계약서 초안을 찢어버리고 잡스를 초청하여 직접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잡스는 비록 IBM의 에이커스회장과 로의 묵인하에 자기의 뜻을 관철시킬 수있었지만
하위실무자들로부터 불만을 사기 시작했다. 잡스 또한 남의 뜻을쉽게 받아들이는 사
람은
아니었다. 그는 이제는 IBM이 자기 편이라고 생각했고 힘 약한 넥스트를 보호해줄 것
이라고
생각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 가 넥스트의 장래를 보장한다는 것은 대단히 획
기적인
일이었다. IBM과의 밀월관계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때 쯤되면 그동안 오래 기
다려
왔던 입방체 컴퓨터를 소개하는 날이 다가올 것이다. 페로와 IBM의 지지, 그리고 낙
관적인
미래가 기대되었기 때문에 잡스는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길것이라고 생각했다. 잡스는
직원들에게 넥스트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주문한 모토롤러사도 넥스 트에 대한 투자
의사를
밝혔으며 모토롤러의 고객인 애플사와의 갈등만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의
캐논사도 넥스트 컴퓨터의 라이선스계약을맺는 대가로 1천5백만달러에서 2천만달러를
제시했다. 넥스트는 이와 같이자신의 장래를 약속하는 수많은 제의들을 받느라 여념
이
없었다. 넥스트라는힘센 왕국 앞에 경의를 표하는 수많은 속국처럼 수십억 달러의 자
산
규모를 가진 기업들은 한결같이 무릎을 꿇으며 협력하겠다고 제의하는 상황이었기 때
문에
잡스와 그의 참모들은 넥스트의 제일 큰 고객들의 불평을 들어주는것과 같은 당면 문
제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넥스트는 또 경쟁업체들이 어느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가에
대한
정보에 대해서도 소홀히 했다.
작성일자 : 1995.03.08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48)
잡스는 개발하고 있는 컴퓨터를 어떻게 발표할 것인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못했다.
퍼스널컴퓨터급으로 발표하는 것이 좋을까. 그렇게 되면 경쟁제품보다 규격이 크다.
입방체
형태와 큰 모니터 그리고 메모리 용량이 수메가바이 트에 이르러 퍼스널컴퓨터로서는
용량이 너무 컸다. 컴퓨터 가격은 비싸게책정돼 퍼스널 컴퓨터급으로는 가장 유사한
매킨토시보다 가격이 훨씬 높았다. 넥스트는 또 연산작업을 많이 하는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이 주로 사용하는속도가 빠르고 견고하며 네트워크상에서도 잘 운영되는
워크스테이션으로 분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워크스테이션에 비하면 입방체
컴퓨터의 가격은 저렴할지 몰라도 경쟁제품보다는 속도 및 파워면에서 뒤처졌다.
다시 말해 이 컴퓨터는 퍼스널컴퓨터로는 가격이 너무 비쌌고 워크스테이션 으로는
성능이
너무 약해 명함도 내밀지 못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잡스는 그 제품을 퍼스널컴퓨터의 편리성과 워크스테이션의 성능을 겸비한 이른바 "
퍼스널
워크스테이션"이라는 신종 혼성기종으로 분류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퍼스널컴퓨터
로는
가격이 너무 비싸고 제대로된 워크스테이션으로는 하자가 너무 많다는 점을 전혀 고
려하지
않은, 소비자를 기만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제품을 "퍼스널 워크스테이션"으
로
발표할 경우 잡스 는 사실상 경쟁상대를 배가시키게 될 것이다. 즉 그는 애플.IBM 그
리고
나머지 퍼스널컴퓨터업체뿐 아니라 워크스테이션업계에 도전하게 될 것이다. 이는 마
치
두명의 적을 동시에 치는 것과 같았다.
캘리포니아주 마운틴 뷰에 있는 선 마이크로시스템즈사는 워크스테이션 제조 업계를
주도하고 있었고 넥스트 본사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넥스트
가 목표로
삼고 있는 대학에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있었다 넥스트의 엔지니어들은 이 회사의
워크스테이션을 참고로 초기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를 개발했다). 선사는
넥스트보다 약간 앞서 설립되었다.
1982년에창립된 이 회사는 1983년 첫 회계연도에 8백만달러의 매출을 올렸고 넥스트
가
창립된 1985년인 3차 회계연도에는 1억1천5백만달러의 매출을올렸다. 사람들은 넥스
트와
같은 업체라면 그정도 수준을 거뜬히 따라잡을 수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넥스트가 제품개발에 전력을 기울이는동안 선사는 성장을 거듭했다. 1988년 넥스트가
입방체 컴퓨터를 발표할 준비를 마무리할 때쯤 되어 선사는 연간 매출이 10억달러를
훨씬
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모든 것이 이렇듯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잡스는 선
사의
획기적인 성장을 지켜보면서 진정한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서는 본래의 취지였던 작은
규모의 경영을 포기하고 수십억규모의 대형기업으로 성장해야겠다 고 결심하게 된 것
이다.
선사의 매출액은 계속 급증했다. 설립 9년만에 선사의 매출은 30억달러를 넘게
되었다(IBM은 그정도의 매출을 올리는데 50년이 걸렸다). 1985년 이후 선사가 그토록
급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간접적 원인은 넥스트의 스티브 잡 스의 행적이 불투명했
기
때문이다. 또 선사는 넥스트와는 현저하게 다른 방식으로 경영되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실리콘 밸 리에 있는 이 두 회사를 비교하면 현저히 다
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계속 변모하는 선사는 각광받을 만한 회사로 성장했다. 어떤 기준을 중심삼 아 재어
보아도
선사는 1980년대 미국 산업에서 가장 큰 성공을 이룩한 기업 이었다. 예를 든다면 미
국인들은
포천지가 선정하는 5백대 기업을 관심있게 지켜본다. 선사는 창립된지 6년만에 5백대
기업으로 선정되어 가장 빨리 부상한 기업이 되었다.
미국인들은 특히 젊은이들이 만들어내는 성공담을 좋아한다. 선사는 이런 맥락에서도
많은
관심을 모을 수 있었다. 선사의 공동창립자 4명 모두 1954년 아니면 잡스처럼 1955년
태생이었다.
컴퓨터업계는 이 점에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지만 미국의 진보적인 이민정책이 새
일자리
창출에 많이 공헌했다는 사실을 선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선사의 초기 중역진 모두
외국태생으로 인도.독일 그리고 프랑스에서 이민온사람들이었다. 선사의 설립과정을
정리하면 미국의 신화로 여겨질 만큼 놀라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선사의 창립자들은 스티브 잡스(또는 리 아이아코카나 도널드 트럼프 처럼 자
기들을
과장하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서로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한명의 허큘
리스형
영웅을 만드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았기때문에 선사에 관련된 이야기는 일반에 잘 알
려져
있지 않다. 선 마이크로시 스템즈사가 컴퓨터업계 밖에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여러명의 영웅보다 한사람의 영웅을 더 좋아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돌린다는 사실을 나타내주고 있다.
작성일자 : 1995.03.10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49)
반대 견해를 살펴보면 잘못된 생각을 이따금 바로잡을 수 있다. 잡스가 자신의 공을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또 황금알을 낳는 천재소년이라는 이미지를 해치는 일
을
저질러놓고 그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 할 수록 사람들은 그의 의사와는 반대의
시각으로
그를 보게 되었다. 반대로 선사가 자신들이 세운 공을 별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행운으로 돌리며 각광받기를 꺼려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
졌다.
역사는 겉으로 화려하게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겸손한 자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4명의 선사 창립자중 가장 겸손한 사람은 앤디 백톨샤임이었다. 그는 엔지니어 중 가
장
뛰어나고 현명했으면서도 공석에는 6피트 4인치나 되는 거구를 수줍은 듯 움츠려 자
신이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독일에서 그는 어릴 때 고향
을 떠나
이국땅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미국에서는 그 만큼 잘 알려져 있
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전기공학 및 컴퓨
터
공학박사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후에 선사 워크스테이션의 모체가 되는 제품을 개발
했다.
대학을 중퇴한 배경과 대학 총장 또는 노벨상 수상자들과 친분을 맺어대학 고객을 확
보하는
위풍 당당한 잡스의 태도와는 달리 백톨샤임은 자기집 처럼 대학연구소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으며 스탠퍼드에서 박사 과정을 밟기 전 컴퓨터 공학분야의 또 다른 강자인 카네
기 멜론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이수했었다. 이런 배경은 그에게 상당히 유리했다. 백톨샤임은
연구소에서 매일 생활했기 때문에 연구소의 실정 및 컴퓨터의 어떤 부분이 연구활동
에
장애가 되는지를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학이 유닉스라는 일단의 기본 컴퓨터 체계
명령어들
을 운용할 수 있는 값싼 기계를 절실히 필요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유
닉스
운용체계는 어느 모로 보나 매력이 없는 시스템이다. 불가해한 명령 어들은 난해할
정도로
간결하다. 컴퓨터에 내장된 문서 목록과 그 문서들이 마지막으로 변경된 날짜를 확인
하려면
ls-l을 쳐서 다음 어떤 문서를 프린트 하려 하는지를 지정하고 1pq를 찍어 현재 돌아
가고 있는
프로그램을 중지 시키고 Kill을 찍은 다음 PID 즉 "process ident-ifier"를 덧붙인
다.
그나마 이런 명령어들은 쉬운편에 속한다. 이외에도 유닉스를 유용하게 사용하려면
dot diles,
shell variables, pipes, aliases와 같은 전문 용어들 과 친숙해져야만 한다. 이런
명령어들을 모르면
유닉스 전문가들의 도움을기대해서는 안된다. 이들은 초보자들의 질문을 들어줄 만큼
인내심이 없으며당장 "매뉴얼은 뒀다 어디다 쓰냐"라고 말해버릴 것이다. 편지를 쓰
는
일과같은 간단한 일상의 일들을 위해 컴퓨터를 사용하려는 사람들은 애써 유닉스 를
배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컴퓨터 프로그래머나 기업 또는 대학 연구소에 서 연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유닉스를 배우려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69년 벨 연구소가 처
음으로
개발한 유닉스는 곧이어 모 회사인 AT& T사가 보잘것 없는 금액을 받고 라이선스를
허가했다. 70년대에 개정된 유닉 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첫 휴대형 운용 체계로 서로
다른
제조 업체가 만든 컴퓨터에 쉽게 적용되었고 일단의 컴퓨터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동
시에
운용 하는 멀티태스킹 기능을 가졌었다. 어두운 대학 연구소의 구석자리에서나 애용
되었지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았던 이 유닉스가 앤디 백톨샤임을수줍음 잘 타는
대학원생에서 백만장자로 만들어주는데 그처럼 큰 비중을 차지할것인지 80년대에 누
가 감히
생각해낼 수 있었겠는가.
스탠퍼드 재학 중 백톨샤임은 79년에서 80년 여름까지 제록스사 PARC에서 일하게 되
었다.
같은 PARC라도 스티브 잡스는 매력적인 윈도즈와 마우스 그리고 PARC에서 사용되고
있는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언어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백톨샤임은 전혀 다른 곳에서 매
력을
느꼈다. PARC에서는 모두가 강력한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다. 터미널은 하나의
메인프레임이나 미니컴퓨터에 연결된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놀라
운 처리
능력을 갖춘 터미널이 서로 연결되어 파일 및 프린터를 쉽게 공유할 수 있게 했다.
백톨샤
임은 바로 이런 워크스테이션이야말로 대학생뿐 아니라 교수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81년 그가 대학원생이었을 당시 값싸고 구하기 쉬우며 유닉스 소프트웨어를 운용할
수 있는
스탠퍼드대학 네트워크(Stanford University Network)를 위한 디자인을 했었다. 그당
시 그
디자인은 정통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다른 컴퓨터 제조업체들은 자기들이 디자인한
칩을
사용하여 그 칩이 아니고서는컴퓨터를 작동시킬 수 없게 하였고 다른 구입처가 없는
사람들은 프리미엄을 지불하여 그 칩을 사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또 컴퓨
터를
돌아가게하는 칩을 임대하여 사용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작성일자 : 1995.03.13(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50)
백톨샤임은 정부가 선사로 하여금 컴퓨터를 개발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1970년대말 여러 대학 연구소에 자금을 지원했던 미국방고등기술개발처 DARPA
는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대학 연구원들 이 컴퓨터로 정보를 서로 교환하고 새로운
하드웨어에서 기존의 소프트웨어 를 운용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그당시 거의 대부분이 디지털 이퀴프먼트사(DEC)의 제품을 사용했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다. DEC는 널리 사용되고 있는 VAX컴퓨터에 운용되는 운용체계를 독점했으며
그
소스 코드를 알려주지 않아 대학 연구원 들이 자유롭게 그것을 사용할 수 없을 뿐 아
니라
각자 필요에 따라 특화시킬수 없게 했다.
그래서 연방 정부는 버클리 대학의 연구 프로젝트에 수백억 달러를 투자, 그당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유닉스 코드를 개정하여 최신 기술에 부응한 기능 을 갖추고 원하는 사람
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독점 불가능한 시스템 개발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런 공산주
의적
발상의 계획은 버클리 대학에서 추진되었고 다름아닌 정부가 지원했다는 사실은 실로
역설적이다. 그러나 더 역설적인 것은 다른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이 프로젝트를 통
해 미국
경제가 쇠퇴하지 않고 더 견실해졌다는 사실이다.
스탠퍼드 및 버클리 대학에 대한 DARPA의 지원은 대학 연구소에서 터전 을 잡은 여러
사람들이 기업을 창립하는데까지 영향을 주었다. 선 마이크로 시스템즈사뿐 아니라
또다른
컴퓨터 워크스테이션 업체인 실리콘 그래픽스 그리고 다른 몇개의 회사가 바로 그 부
류에
속하며, 1990년 초 이들 모두를합친 자산이 1백억달러를 상회하여 정부가 초기에 투
자한
금액의 몇배의 가치를 창출했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자유 기업정신을 저해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있다. 그
러나
백톨샤임은 반대 의견을 주장하여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선사가 설립될 수 있었
던 것은
천재적인 경영 재능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연구 활동을 했기 때문에 가
능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운용체계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투자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새 컴퓨터를 디자인하고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
미 정부
가 비용을 부담한 버클리 유닉스를 사용할 수 있었다.
1981년 백톨샤임은 스탠퍼드에서 약 20개의 새로운 제품을 개발했는데 이 소문은 대
학가에
빨리 퍼져 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그 제품을 가지려고 했지만백톨샤임은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방해 받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완벽한 해결책이라고 생각되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회로기판의 배치도, 모형 및 필요한 부품 목록을 포함해서 회사 스스
로 그
제품을 개발할 수 있는 정보를 주는 대가로 1만달러의 라이선스료를 받을 계획을 했
었다.
회사는 제품을 생산하여 유통시키고 그는 로열티를 받으며 대학 친구들은 제품을 저
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되어 모두가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어떤 대형 제조업체도 그런 제품의 라이 선스를
사려하지
않았고 같은 이유로 대학은 그런 기계를 갖지 못해 안달이 었다. 그 디자인에는 독점
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다시말해 기본부품을 조립하는 비용 이외에 프리미엄을
붙여 팔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8개의 작은 회사가 백톨샤임으로부터 라이선스를 샀
지만 그
기계의 핵심인 보드를 만드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6개월이 지나도 아무도 그
제품을
제조.판매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으며 선사가 제품을 상업화시키는 작업이 거기서 끝날
것처럼 보였다.
바로 이때, 1982년 초 백톨샤임은 스탠퍼드대 MBA출신인 비노드 커슬라로부 터 전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컴퓨터 지원 엔지니어링(CAD)을 위한 특수 워크스테이션을 제조하는 회
사의
창립을 도왔고 그 당시 회사를 막 그만 둔 상태였다. 커슬라는 백톨샤임처럼 다양한
기능을
갖춘 동시에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백톨샤임
이
그에게 라이선스 를 제의하자 그는 "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갖고 싶은 것이지
황금알에는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처음에 백톨샤임은 회사를 같이 창립하자는 커슬라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박사과정
을
마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커슬라는 모험자본가로부터 자본을 끌어들여 백톨샤임이
원하는대로 빠른시일 안에 증가하는 수요만큼의 선 기계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그를
설득했다. 그들은 백톨샤임의 스탠퍼드 대학 연구실에서 기본계획을 짠 다음 맥도널
드
햄버거 가게에서 제조활동을 감독 하도록 커슬라의 친구이자 룸 메이트이며 스탠퍼대
드
NBA 80학번인 스콧 맥 닐리를 끌어 들였다.
그당시 시판되었던 워크스테이션은 주로 컴퓨터지원 디자인을 했는데 가격이 2만달러
에서
20만달러 사이였기 때문에 회사측에서는 모든 엔지니어들 앞에각각 워크스테이션 한
대를
배당하기에는 큰 부담이 되었다. 그들은 바로 그 점을 노렸다.
그들의 첫째 경쟁상대는 동부지역에 위치한 아폴로라는 회사였는데, 그 회사 는 다른
업체처럼 독점 부품으로 제조된 워크스테이션을 2만5천달러에 판매 하고 있었다. 선
사의
창립자들은 그들의 경쟁업체보다 50~70% 저렴한 가격 으로 유사한 제품을 제조하여
소매가를 1만달러에서 2만달러 범위로 끌어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들의 제안은
사람들을
압도하여 엔지니어 한명당 기계 한대의 배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도
록 했다.
커슬라가 예측한 대로 창립 3총사들은 설립자금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작성일자 : 1995.03.15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51)
선사의 출발은 넥스트사와 달랐다. 선사는 실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선사는
로스
페로와 같이 자금을 지원해 주는 사람이나 과거에 이룩한 업적에 연연해 하지 않았
다. 또
그들중에는 스티브 잡스처럼 미래에 백만장자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는 사람도 없었
다.
그들은 비현실적인 비전을 팔려 고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금이 떨어지기 전에 이익
을
올리는데 온힘을 기울여야했다. 선 마이크로시스템즈사는 82년 2월 말 창립되었는데
그해
5월 "선 1"컴퓨터 가 출하돼 8월부터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커슬라는 다른 주요업
체에서
입원을 영입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버클리대학에서 박사학위 를 받
은
26세의 젊은 빌 조이를 기용했다. 그리고 재정적으로는 넥스트사와 극히 대조적으로
긴축정책을 썼다. 그 후 커슬라는 이사진들과의 갈등과 30 세에 은퇴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84년 사임했다. 커슬라가 떠나자 선사 이사회는 맥닐리를 사장으로 임명했다.
선사는
처음에 세웠던 판매 목표 를 달성한 상태였으므로 더이상 신생기업으로 볼 수 없었
다.
맥닐리는 스티브 잡스와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잡스는 포부를 이루지 못한예술적 자
질을
갖춘 시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맥닐리 는 예술인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지적미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92년 맥닐리가 화창한 날에
무엇을
하고 지내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먼저 18홀 골프를 친 다음 하키 게임을 하고 테니스를 친다. 그런 다음 낮잠을 자고
저녁을
푸짐히 먹은 다음 하키경기를 관람하고 친구들과 함께 맥주를 마신다." 그는 또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냐는 질문에 "프로선수처럼 퍼팅하는 법"이라 는 책을 가장 좋아한
다고
대답했다. 이 점에서는 이코노미스트지나 사이언티 픽 아메리카지 기사를 가장 좋아
한다는
빌 게이츠와도 비교가 되었다. 스탠 퍼드대학 동문회가 발간하는 잡지는 그에게 학생
시절
무엇을 배웠는가라는질문을 했는데 맥닐리는 엉뚱하게도 그가 배우지 못한 것이 무엇
인지에
대해말했다. 그리고 그는 "앉아서 분석하느라 배를 놓치는"행위에 대해 경고를 했다.
맥닐리는 대학시절에 최고 점수를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았지만 투자에 대한 생산성을
극대화시키려는 목표를 성취하려 노력했고, 자신은 대학캠퍼스에서 가장 능률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그는 모든 과목에서 C학점을 받아도 10억분의 1초라도 공부에
투자하지 않고 그 시간에 골프나 테니스를 치거나아니면 필요한 일을 하여 식견을 넓
히며
더욱 흥미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신이 승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맥닐리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진정으로 스포츠를 좋아했고 포
천지가
선정한 5백대 기업의 CEO치고 맥닐리처럼 일주일에 두번 하키게임을 하는 사람은 드
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행운을 잡은 평범한 사람으로 비춰지길 좋아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아그점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사람들이 그가
수학능력 시험의 수학 과목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고 대학은 하버드, 대학원은 스탠퍼
드를
나왔는데어떻게 평범한 사람이냐고 반문하면 그는 수능 구술 시험에서 받은 최하위
점수를
강조하면서 처음에 그가 하버드 및 스탠퍼드대학을 들어가려하자 사람들이 비웃어서
대학에
들어 가기 전까지 오하이오주의 트럭회사에서 일했다고 했다. 그는 그런 얘기를 하면
서
하루에 14시간씩 2달간을 그 공장에서 일한 후 간염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는
데 이는
"6주 동안 맥주를 못마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별로 근엄하지 못한 이미지를 주려고
하는
그는나이보다 어리게 보이는 얼굴때문에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신용을 더 얻는 결과를
가져왔다.
맥닐리의 성장 배경을 살펴 보면 그를 설명하는 것이 더 복잡해진다. 그는부유층의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숨기려고 애썼다. 그의 아버지인 윌리엄 맥닐리는
아메리칸 모터스사의 부회장이었고, 젊은 맥닐리 는 스탠퍼드대 상대에 입학하기 위
해
포드사의 사장인 돈 피터슨에게 추천장 을 써 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집안
이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일반 대중과 어울리기를 더 좋아해서 집을 나왔으며 경쟁 업체 나 공급
업자의
CEO를 만나면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높은 사람들을 만나는것은 영광이다. 나는 가
끔 벅찬
느낌을 받는다"라는 말을 할 때도 그에게서전혀 장난끼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어릴때 유명 인사가 집에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스티브 잡스는 달랐다. 그
자신이
유명 인사가 되자 눈에 띄게 권위의식을 갖추고 유명 인사 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
를
찾는데 열중했다.
작성일자 : 1995.03.17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52)
선 마이크로시스템사의 지분소유로 인해 맥닐리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백만장자가 되
었다.
재산이 그렇게 크게 불어났어도 그는 하키나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대형 스크린 TV
와
15달러 하는 하키 스틱 세트를 제외하고는 구입한 물건이 거의 없었다. 그가 친구들
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87년에 4일간의 골프시합을 개최하는 데 9만달러를 쓴 것이 돈을
가장
많이 사용한 경우였다. 다른 선사 동료들은 프르쉐 카레라스를 몰고 다니기를 좋아했
지만
그는 고물차 를 계속 타고 다녔다. 부유한 집안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값싼 것을선
호했고
그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았다. 회사를 처음 설립했을 때 직원 들은 관리비를 아끼
기 위해
다른 건물에 몰래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오곤 했다. 비용을 최대한 줄이는 긴축재정
은 회사가
수백억달러의 매출을 올린 후에도 계속 되었다. 예를 들어 맥닐리는 자신을 포함한
전 직원은
출장시 밤 비행기를 이용하던가 2등 좌석을 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닐리의 책상 위
에는
회장 겸 절약운영자(Chairman and Choap Operator)"라는 명패가 놓여있다. 잡스와 맥
닐리는
성장배경의 특징을 잘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서민출신인 스티브 잡스는 갑자기 출
세한
사람들이 자주 그렇듯 애플사에서 뿐 아니라넥스트에서도 회사 공금을 무절제하게
사용했다. 반면 부유층 자제이면서 명문대학을 졸업한 스콧 맥닐리는 특권 계층이 내
세우려
하는 허례허식을 혐요 하며 잡스와는 반대로 절제된 생활을 했다.
맥닐리는 자동차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부친의 영향으로 MBA과정으로는 비교 적 인기
없는
제조업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디자인, 제조 및 판매에 관련된 일이 진정한
일로서의
의미가 있고 나머지는 허드렛일이라고 생각했고 다시 공장감독으로 일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스탠퍼드 대학원을 갓나온 사람으로 자신이 바
라던
공장일을 얻기란 불가 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일자리를 찾으러 이곳 저곳
을
돌아다닐 때 사람들은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주유소에서 일자리를 구하려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가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모든회사들은 그가 경영전략 관련부서에서 근무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렇게 되면 나는 현장에서 남이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생각만 해야되지 않느냐"고
말하곤
했다. 그를 처음 고용한 FMC는 그가 먼저 "제조 "분야에서 일한 후 그가 원하는 공장
관리일을 시키겠다는 조건으로 그를 고용했다. 후에 그는 작은 컴퓨터 제조업체인
오닉스사로 가서 공장 관리일을 할 수 있었고 바로 그 자리에 있을 당시 커슬라의 제
안을
받고 선사에 합류 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제조 실무에 대해 대단한 열정을 지닌 그
는 잡스보
다 제조비용에 관련된 문제에서 확고한 식견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 컴퓨터 보드제조
나
조립을 하청업체에 맡기는 것이 제조비용을 줄이고 선사가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개발에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결론을 내린 그는 모든 일을 하청업체
에
맡겼다. 수백억 달러의 매출을 올린 회사로 성장한 이후에도 한 때 모든 조립을 외부
하청에
맡겼고 제품의 운송 까지도 하청선적업체가 맡았기 때문에 정작 선사 직원들은 가장
인기
있는컴퓨터를 만져 볼 기회조차도 갖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스티브 잡 스
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제조활동을 추진했다.
맥닐리는 자신이 신에 가까운 투시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오닉스에서 근무하고 있을 당시 커슬라와 같이시작한 사업에 대해 거리
낌없이
얘기했다. 그 두 사람은 대학가 근방에 여러곳의 워드프로세싱센터 설치를 지원하기
위해
데이터 덤프라는 회사를 창립 했다. 그러나 그 회사는 두 젊은이가 쏟아부은 자금뿐
아니라
다른 투자가들 이 낸 7만5천달러도 모두 날려 버리고 파산해 버렸다. 선사가 수십억
달러
규모의 큰 회사로 성장한 이후 맥닐리는 그의 성공 비결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때
그는
오랜기간을 통해 수없이 많은 업적을 남겨서 최고 자리를 오 래지킬 수 있는 것은 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디지털 이퀴 프트먼트사의 창립자인 켄 올슨
과
자신처럼 단 시일내에 성공한 사람들을 명확히 구분하여 말하였다. 맥닐리는 잡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내 동료들 중에서 말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 대해 다
시
생각해 보시오.
그러면그들은 운 좋게도 시기를 잘 타고 났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말하며 잡스를 넌
지시
암시했다.
작성일자 : 1995.03.20(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53)
맥닐리가 자신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낮추고 선사의 성공을 행운으로 돌리는성격이라
면
선사의 워크스테이션도 과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사가 제조하는 제품은
빠른
속도와 기술적 우위를 자랑하지 않았다. 대신 선사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합리적
인
성능을 가질뿐 아니라 개방형 유닉스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소비자가
특정업체가 생산하는 소프트 웨어만을 사용해야 하는 제약을 벗어나게 해서 지속적인
인기를 모았다.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는 소비자의 경우 단일상표의 컴퓨터를 구입하는 것은결혼 상대
자를
고르는 것과 다를바 없었다. 후에 이혼을 결심하여 실행하는 그 비용은 엄청난 것이
다.
마찬가지로 컴퓨터의 경우 소프트웨어가 한가지 컴퓨터에서만 돌아가기 때문에 그
교체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소비자가 선사 컴퓨터를 구입한 후 다른 유닉스 컴퓨터로 교체하더라 도
소프트웨어를 쉽게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유닉스의 매력 이었다. 신
생기업인
선사가 기업규모면에서 비교도 안되는 IBM과 디지털이퀴프먼트사 와 같이 기존의 대
형
컴퓨터업체뿐 아니라 워크스테이션의 선두주자인 아폴로사가 하지 못하는 것을 제공
하여
이들 업체와 경쟁하였다. 즉 그들은 오늘컴퓨터를 구입한 사람이 후에 그것을 교체하
더라도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사실 때문에 마음놓고 제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생 기업들을 의심하는 습성을 가진 큰 기업들은 선사가 부품을 독점하
지
않고표준기술을 채택했기 때문에 선사의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 했
다.
선사는 회사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이 엔지니어들을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하여 활발
한
교류를 가졌다. 맥닐리는 "경사길을 반쯤 빨리 내려온 공처럼 자신은 화려하지도 속
임수를
쓰지도 않는다"고 자기를 표현한 것처럼 그 이미지로 회사를 구축하려 했다.
회사 설립 초기에 컴퓨터 관계자들은 선사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만우
절이 지난
다음 선사의 엔지니어들이 중역진을 어떻게 골탕을 먹였는지에만 깊은 관심을 기울였
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어떤 직원이 만우절을 맞이하여 한 임원의 책상앞에 꽂혀있던
가족사진을 누드사진으로 교체한 후 계속 이어졌다. 그 임원은 오랫동안 사진이 교체
된
사실도 모르고 지나갔다고한다 맥닐리의 문 뒤에는 실물크기의 누드사진이 걸려있
다). 한
임원은 문 뒤에 누드사진이 걸려있는 사실도 모른채 외부 사람들과 회의를 몇차례 가
진 적도
있었다.
그 이후에도 계속 만우절 장난이 이어졌다. "연못에 사무실 넣기" "자동차에 연못넣
기"등
"연못에 자동차 넣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무실안에 연못넣기 연못은 바로 전날밤
모래로
뚝을 만들어 그 속에 물을 넣어 만들었다).
이런 장난은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이나 MIT에서 아이들이나 한가한 사람들이 하는 것쯤
으로
여겨졌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맥닐리는 장난을 즐겼다. 그는회사소개 비디오의 제목
을
"절대로 성장하지 말자"라고 붙일 정도였다. 엔지니어들이 모인 곳에서 이런 장난스
러운
행동을 종종 볼 수 있다. 넥스트의엔지니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들은 전자메일과
함께
자동적으로 전송되는 동료들의 사진을 조작하곤 했다).
그러나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잡스는 어떠한 장난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회사의
분위기를 산만케하는 "비전문적"행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으며 공장 동료를 위해
생일
축하파티에 몰래 스트리퍼를 초대하려는 엔지니어들의 계획을 알고 분노했다. 선사는
만우절날처럼 정기적으로 또는 때때 로 맥주파티를 열어 직원들이 기분전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환영했다. 창립 초기 직원들이 많지 않던 때에는 일주일에 한번 맥주파티를
열곤
했다. 그런 회사 풍토는 맥닐리가 항상 참여하여 소란스러운 대학축제를 연상케 했다
(그
러나 그런 이미지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었다. 매일 큰 술잔치를 벌여가면서 아무런
배경없이 시작한 기업이 단시일내에 10억달러상당의 매출을 올릴수는 없다). 반면 잡
스는
엔지니어들이 장난스러운 계획을 세우지 못하도록했으며 회사를 수도원처럼 조용히
관리했다.
잡스가 아직 애플사에 있던 선사의 창립초기에 맥닐리와 백톨샤임은 유닉스 소프트웨
어를
운용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자고 그에게 몇번 제의한 적이있었다. 그들은 대학은
유닉스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잡스가 직접 조작할 수 있도록 그에게 컴퓨터를 보내주었다. 잡
스는
애플이 데스크톱 컴퓨터를 석권하여 선사의 매출은 기껏해야 4천만달러에 불과할 것
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제안을 무시해버렸다. 잡스는 선사가 일을 중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말했다. 그러나 선사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1984년
아폴로사는워크스테이션시장의 40%가량을 점유한 반면 선사는 17%만을 차지하고 있었
다.
1985년에도 분석가들은 경험이 부족한 선사와는 달리 아폴로는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
들이
많고 IBM과 디지털이퀴프먼트가 강력한 기능을 갖춘 워크스테이션을 선보일 것이기
때문에
1990년이 되어도 시장점유율 4위에 머물것이라고 예측했다.
작성일자 : 1995.03.22(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54)
그러나 다른 경쟁사들은 판촉광고활동을 열심히 한데 반해 선사는 광고를 하지 않았
음에도
불구하고 매분기마다 1백%의 성장을 이룩했다는 사실을 아는사람은 별로 없다. 개방
형
유닉스컴퓨터는 다른 경쟁업체 제품과는 현저하게달랐기 때문에 고객들은 제발로 찾
아왔다.
경쟁사들은 후에 선사의 사업방침 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이며 한 업체가 독점할 수
있는
기술개발보다 엔지니어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빌 조이는 모든 것을 혼자 하려 하며 수직적으로만 구성된 회사는 결국 뒤처
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입증되
었다.
시간이 지나자 80년대 분석가들이 깨닫지 못한 점을 알게 했다. 즉 각자 개성있는
마케팅전략을 가진 중역진들의 단합된 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되었던 것이다.
백톨샤임과 조이는 회사가 채택할 기술방향을 결정하는 역할 을 담당했고 맥닐리와
라크루트는 사업운영방침을 결정하는 일을 맡았다. 그들은 한 기업이 모든 기술분야
에서
선두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듯 한사람이 모든 분야에 탁월한 관리능력을 갖
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드웨어및 소프트웨어에 관련된 최신정보를 수집하고 주식분석가를 만나고 생산작업
을
관리하는 등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돌봐야 할 수없이 많은 업무 들을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가지 일에 쏟아부을 수 있는 시간과 정신은
한정되어
있다. 컴퓨터에서는 "대역폭이 이정도밖에 안된다"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마찬가지
로
사람의 제한된 능력 을 선사는 의사결정권을 하위직에게 내려보냄으로써 해결했다.
백톨샤임과 조이는 회사 시장변화를 주시하며 기술적 결정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했
다. 예를
들어 하드웨어 전문가인 백롤샤임은 경쟁업체의 판매실적을 철저하게 파악했다. 맥닐
리는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명의 통찰력에 회사의 운명을
맡기기보다 능력있는 여러사람이 서로 협력하는 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그는 "자신
은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다"라고 하며 "다른 사
람들이
어려운 결정을 내리지 않으려고 하면 협박이라도 해서 순순히 따르도록 했다"고
농담삼아말하곤 했다. 그러나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맥닐리는 그 계획에 따라 일을
원만히
수행해 나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하키 선수가 반대팀의 선수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거친 경기를 하듯 공석에서
경쟁업체들에 대해 거침없이 말을 했다. 그런 그의 태도 때문에 실리 콘 밸리소식을
전하는
기자들은 선사는 경쟁상대가 없는 대신 적이 많다고비꼬았다. 맥닐리는 컴퓨터업체는
선사가 망하면 좋아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활주로 끝에는 분명 승무원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은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그는 말하곤 했다.
넥스트가 창립된 85년에는 여타 업체와는 다른 독특한 기술을 갖추지도 못한선사가
또
기술을 라이선스 제공받거나 판매하는 선사가 컴퓨터업계를 혁신 하여 대기업으로 하
여금
기존의 메인프레임을 선사의 고속 워크스테이션이나 그보다 파워가 떨어지는 퍼스널
컴퓨터로 교체하도록 큰 위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선사는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여러 제품에서 호환 사용될 수 있도록 한 IBM의 개방형
표준에
준거한 제품을 생산했다. 유닉스 고객들이 호환이 안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어 소프트웨어 부문에서 경쟁이 심화되기 전인 80년 이전에는 특
히 그
경향이 두드러졌다. 마이크 로프로세서를 기본으로 하고 IBM PC를 처음 탄생시킨 퍼
스널
컴퓨터 업계에서는 소프트웨어 호환성에 관련된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해서 컴퓨터
산업에서 PC업계가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스티브 잡스는 IBM PC가 일으킨 혁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는 매킨토시에
독자적인 소프트웨어를 채용했고 한 제조업체가 자사만의 하드웨어를 생산하도록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잡스는 당연히 넥스트 컴퓨터를 제조할 때도 그래픽 디스플레이를
위한
소프트웨어 표준을 채택하지 않고 독자의 방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넥스트는 표준화
를
향해가는 강력한 조류를 역행하여 나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넥스트는 또 선사와는
반대로
기업문화 때문에 난처한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넥스트사에는 서로 견제하며 역할을 분담할 수 있는 지도부가 없었으며,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기술 담당책임자들은 시장 상황
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기술 분야에서선두를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했음에
도
넥스트의 첫 제품이 완성되자 직원 들의 입을 통해 그 우수성에 대한 소문을 퍼트리
기 보다
대중 매체를 동원하여 마케팅 활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넥스트의 결점은 88년 입방체형 컴퓨터가 발표되기 이전까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회사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넥스
트는
실제보다 능력이 큰 것으로 보였다. 넥스트가 곧 비장의 무기를 들고 나올 것을 우려
한
선사의 백톨샤임은 13페이지에 달하는보고서를 작성해 대학 고객들을 겨냥한 성능이
우수하고 가격이 저렴한 신제 품을 개발할 것을 촉구했다. 그 컴퓨터의 코드명은 "캠
퍼스"로
정했다. 백톨 샤임은 대학이 머지않아 곧 수천대의 워크스테이션을 구입할 것이고 따
라서R
ISC기술을 기본으로 하는 저렴한 컴퓨터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사는 RISC기술이 유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84년 RISC칩을 개발, 반도체 업체가 공급
하는
CISC(복합명령어세트컴퓨터)칩 대신 채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87년 선사는
RISC칩을 서버에만 채용했다. 백톨샤임은 같은 RISC 칩을 탑재한 저가 워크스테이션
을
개발하자고 제안했다.
작성일자 : 1995.03.24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55)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는 선사의 간부들은 그런 백톨샤임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느정
도
성장한 선사는 고급 워크스테이션을 만들지 않겠다는 본래의취지와는 달리 마케팅 전
략을
강화했기 때문에 다른 간부들이 백톨샤임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선사는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있는 고가의 대형 서버를 많이 판매하여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경영진들은 유닉스 분야조차도 데스크톱 PC쪽으로 선호 도가 바뀌어 가고 있
고 저가
제품을 박리다매식으로 판매하는 것이 앞으로생존을 판가름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
다.
다른 간부들에게 그 문제의 시급함을 설득시키기 못하자 백톨샤임은 대학가 를 겨냥
한
컴퓨터 회사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전 해 선사가 상장될 당시 그의 소유 주식
의
가치는 2천6백만달러로 추산되었다. 팔로 알토에서조이와 함께 작은 집을 전세 내고
그전과
같은 생활을 누리면서도 그는 약 20만달러로 작은 사무실을 빌려 유니슨이라는 회사
를
세웠다. 그는 선사를 떠날 때 주식 전체를 팔아 버리지 않았다. 또 유니슨사에서도
CEO의
자리를차지하지 않았다. 그는 비노드 커슬라를 사장에 앉히고 자신은 수석 엔지니어
라는
직책을 맡았다. 그는 선사를 좋게 떠났으며 자신의 회사에 투자해 달라는 부탁을 했
다.
선사는 처음에 그의 호의를 간과해버렸다.
3개월 후 백톨샤임이 대략적인 디자인을 보여 주자 선사는 그의 제안을 수락 하기로
하고
유니슨사의 모회사가 되겠다고 제의했다. 재산을 모으기 보다 자신이 고안한 컴퓨터
를
만드는데 더 큰 관심을 가진 백톨샤임은 그 프로젝트를 추진하는데 든 비용을 상환해
준다는
조건으로 선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게다가 선사는 그만두겠다고 하는 엔지니어들만
을
채용하여 "캠퍼스"팀 에서 일하도록 해야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백톨샤임은 자기
만족에
빠진 선사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엔지니어들이긴 하지만 그 조건을 기꺼이 수락했
다.
백톨샤임은 넥스트가 먼저 대학가를 석권한 다음 전 세계시장을 장악할까봐 우려했
다. 그는
스티브 잡스처럼 세부적인 문제에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백톨샤임은
완벽성을 추구한다고 해서 최고가 될 수 없고 오히려 그같은 욕심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이 스티브 잡스와 다르다. 잡스와 다르게 백톨샤임은 99%보다 1백%의
완벽성을 추구하려면 막대 한비용이든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자기
주장을
양보했다.
경험에비추어 볼때 완벽을 기하는데는 마지막 1%가 가장 많은 비용을 필요 로하는
부분이다.
백톨샤임은 사업에 관한한 경쟁업체의 동향을 자세히 파악하려 노력했고 시장의 흐름
에
부응하는 표준을 확립하는데는 언제든지 타협에 응하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타
협안이
마음에 안들때에도 창업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워결정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캠퍼스"
의
개발업무가 선사로 넘어간 이후에 엔지니어들은 백톨샤임이 지정한 모든 컴퓨터 부품
을
내장하기 위해서는 케이스를 3mm 늘려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백톨샤임은 선사가
"큰박스"를 지나치게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
다.
그러나 제조담당자들이 백톨샤임의 뜻을 따르지 않고 계속 규격확대를 허용해 줄 것
을
요구하자 그들의 뜻을 받아주었다.
선사의 경영진이나 스티브 잡스와는 달리 백톨샤임은 중용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면 넥스트는 중용이란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길 정도로 유로피아
적
공상에 빠져있었다. 예를 들어 스티브 잡스는 새 컴퓨터를 생산할 때 원가를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기능을 위주로 할 것인가, 호환성을 추구할지 독자적 기술을 택할지 그리고
사용하기
편리하게 만들것인지 복잡한 구조를 선택할 것인지와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결단
력을필
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넥스트사의 제품이 공개되기 전 모든 것이 안개속에 가려져 있을 때 사람들은 넥스트
가 곧
선사를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잡 스가 어떤 마술을 보여줄
것인지
궁금해 했다. 넥스트를 믿지 않던 사람들도 그런 궁금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넥스
트는
중도를 택하지 않고도 잘할 수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선사의 경영진은 현
실적
토대위에서 의사 를 결정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넥스트와 같
은 색다른
제품도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선사는 넥스트사가 새 제품을 선보이기전
까지
새로운 기종을 개발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그토록기다려왔던 넥스트의 제
품이
예정대로 88년에 발표되면 넥스트는 컴퓨터 업계의 관심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선
사만큼
그날을 기다린 기업도 없었다.
작성일자 : 1995.03.27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56)
1988년 10월12일 입방체형 컴퓨터가 발표되는 날 1백80명의 직원을 둔 넥스 트사는
전
세계로부터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스티브 잡스와 그의 직원들은 구체적인 내용을 마
지막
순간까지 공개하지 않아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성공 했고, 사람들은 미리 정보를 입수
해
보려고 아우성을 쳤기 때문에 언론은 사람들을 광란케 한다"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발표 전날 컴퓨터 업계의 대부인 스튜워트 알솝은 뉴스레터에 스티브 잡스에 게 보내
는
공개서한을 실어 평가 보고서를 받아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 했다. 알솝은 자료
를
요청하는 것이 수치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스티브 잡스는 현재 사
용하고
있는 기종과 호환이 안되는 컴퓨터를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만들었다"고 실토했
다.
이런 일은 알솝뿐 아니라그 제품을 보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만지기는커녕
볼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발표회에는 잡스의 친지들과 알솝과 같이 유력한 사람들을 포함해 4천5백명 이 초청
됐다.
초청인사중 1백명 가량은 발표가 시작되기 2시간 전부터 줄을서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익명의 초대자는 "내가 6살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마치 크리스마스 전날 장난감
기차
서물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아이의 기분처럼 흥분된다"고 말했고 어젯밤 한잠
도
못잤다고 한 사람도있었다. 하루의 생활"이라는 책에 사진을 게재하는 사진 작가인
리처드
스모난도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동부에서 밤새워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기대가
얼마나컸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토머스 에디슨
의
축음기 발표에 참석하지 않는 것과 같다. 손자들에게 여기에 초대되었는데도 참석하
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수많은 신문 기자들과 텔레비전 카메라맨들이 샌프란시스코 데이비스 심포니 홀에서
개최된
발표회에 참석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들을 선별하여 입장시킬 수 밖에 없었다. 넥스
트의
마케팅 담당자가 발표회와 관련해 월 스트리트저널지에 광고를 내려고 광고비를 문의
했을
때 신문사측은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고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
을 것같다.
컴퓨터발표회 일주일전부터 넥스트 직원들은 잠을 설쳐가며 악몽과도 같은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그들은 IBM과 같은 큰 회사에나 걸맞는 발표회를 준비하느라 잡다한
일을
해야 했고 무엇보다도 완벽성을 추구하고 쇼맨십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잡스의 요구
에 맞는
행사를 준비하느라 진땀을 뺐다. 리허설에서 잡스는 실패로 끝난 매디슨가에 관한
브로드웨이 코미디의 스태프 진처럼 그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에 의해 둘러싸여 그의
지시는
모두 옳다는소리를 들으며 행사를 준비했다. 슬라이드를 미리 보기 위해 스크린에 화
면을
비추었을 때 잡스는 "그 초록색 정말 마음에 드는데"라고 했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
은 당장
"초록색이 훌륭해, 정말 훌륭해"라고 말하며 그의 기분 을 맞추었다고 한다.
무대장치를 디자인하기 위해 잡스는 후기 모던극을 다른 예술분야와 접합시키고 특이
한
조명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무대감독인 조지 코트스를 고용 했다. 잡스는 애플사
에서
그가 치렀던 전설적인 행사보다 시각적으로 더 특이한 무대를 만들고 싶어했지만 코
트스는
심포니홀에서는 그런 무대를 만들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코트스는 잡스를 설득
해
장소를 바꾸지 못했다.
잡스는무엇보다도 컴퓨터의 음향이 최대한 잘 나올 수 있는 훌륭한 오디오 시설을 원
했다.
코트스는 무대를 절제된 모양으로 디자인했다. 관중들은 검은 배경막위에 꽃이 꽂힌
꽃병을
보게 될 것이고 검은 장막뒤에 숨겨져 있는미묘한 형상을 보게 될 것이다. 무대는 최
대한
단순하고 불가사의한 분위기로 꾸며지도록 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발표될 컴퓨터를 완성하는 문제였다. 그날 시연될 운용체계 소프트
웨어뿐
아니라 프로그램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당시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1년후에 일
반에
발표된다는 간략한 안내만 나왔을 뿐이었다.
넥스트의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은 소프트웨어의 일부라도 제대로 돌아갈 수있도록 노
력을
기울였지만 이런 상황에서 개발된 소프트웨어의 기능이 제대 로 발휘되기를 기대하기
는
어려운 일이었다. 잡스는 시연하는 동안 미지의 여러가지 소프트웨어 기능들을
해결해나가야만 되었다. 프로그램이 중간에 멈춰서 컴퓨터를 껐다가 다시 작동시켜야
할
상황이 언제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세계의 눈이 넥스트의 거대한 컴퓨터 화면에
집중된
때에 이런 일이일어난다면 그야말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잡스는 소프트웨
어가
아직 불안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가면서 시연해야만 했다.
작성일자 : 1995.03.29(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57)
초청인사들이 모두 자리를 잡은후 9시39분에 조명이 어두워졌다. 넥스트 직원들이
대기실에서 "제발 실패하지 말아야 되는데"라는 말을 되풀이 하는 동안 잡스는 마음
속으로
기도하며 무대 위로 올라섰다.
"넥스트를 대표하여 여러분을 다시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여러분이
컴퓨터
역사상 한두번 있을까 말까한 귀한 경험, 즉 컴퓨터의 미래 를 바꿀만한 새 아키텍처
를
목격하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난 3년동안 이 프로젝트를 준비해 왔
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제조한 제품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발표회는 잡스의 독무대가 되었
다.
3시간동안 계속된 발표에서 잡스 이외에단 2명만이 무대에 그것도 잠시 얼굴을 비췄
을
뿐이었다. 그의 발표내용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면 그의 언변은 감탄할 만하지만 그
가
약속한 사항들이 얼마만큼 실현되었는지는 애매하다. 하지만 발표회의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는기대감에 들뜬 상태였다. 희미한 조명속에서 잡스는 최면술로 관중들을
사로잡았다. 잡스는 넥스트에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말로 시작했다. 그는 "컴퓨
터
아키텍처 의 수명은 10년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흔히 컴퓨터 업계에서 말하는
아키텍처라는 용어는 "다른 컴퓨터와 호환성이 없는 소프트웨어를 채용한 하드웨어
디자인"을 말한다. "혁신적"으로 개발된 이 컴퓨터는 기존의 소프트웨어로는 운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잡스는 넥스트 컴퓨터를 다른 컴퓨터 와 구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아키
텍처에
맞는 새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실 기존의 컴퓨터를 사용하
던
개인이나 기업에 지금까지 소프트웨어를 구입하기 위해 투자한 수십억 달러의 돈과
사용법을 배우 기 위해 투자한 시간을 모두 버리고 넥스트가 제공하는 새 컴퓨터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잡스는 대형화면에 비춰진 그래프의 물결모양의 곡선을 가리키며 "컴퓨터가 탄생하고
5년쯤
되면 최고수준의 아키텍처에 도달한다. 그런 다음 곡선이 가파르게 올라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컴퓨터의 단위 판매량이 최고로 올라 갔다기 보다는 그 당시의 아키텍
처가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고 말했다.
잡스는 자사 컴퓨터를 가리키며 참석자들에게 퍼스널 컴퓨터의 역사를 설명 했다. 맨
처음
애플Ⅱ가 등장하고 82년에 기술적 전성기를 누린 다음 IBM 퍼스널 컴퓨터가 나와 86
년에
전성기를 누렸다. 그 다음 매킨토시가 선보였는데 매 킨토시는 88년 "혁신적이고 공
격적이며
독특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성능을 더욱 향상시켰다." 그는 제3의 물결인 매킨토시
의
기술적 그늘에 가려진 제2의 IBM PC가 판매량 에 있어서 별로 활기를 띠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매킨토시의 장래에 대해 장황하게 견해를 피력하면서 이는 머지않아 전
성기를
누리겠지만 곧 그 기세가 쇠퇴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이렇게 해서 잡스는 "90년
대를
이끌어갈 제4의 물결"의 컴퓨터를 창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잡스가 넥스트 컴퓨터를 제4의 물결로 만들려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불가 피한 과
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넥스트는 제4의 물결을 만든다면 그전의물결이 뒤이어 나타나는
물결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제1 또는 2의 물결과는 다른 형태를 갖추게 될 것이
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예를들어 제2의 물결인 IBM 퍼스널 컴퓨터의 인기가 갑자기
떨어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되면 제4의 물결은 IBM PC 이전의 컴퓨터가 누렸던
성장을
누릴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잡스는 참석자들이 과거 모델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는 대학
친구들의
명성을 이용하여 넥스트가 컴퓨터 역사의 다음 장을 근거 없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전문가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기 때문에부상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4의 물결을 어떻게 결정했느냐고요? 우리는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많이 사용하
는
다양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그들의 의견을 수렴했습니다.
즉대학 관계자들로부터 조언을 받았는데 지난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유망한 컴퓨터가
바로
대학에서 개발된 것입니다."
작성일자 : 1995.03.31 (전자신문)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58)
그날 "월스트리트 저널"지에 게재한 광고에서 잡스는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우리는 스탠퍼드, 카네기 멜튼, 바사 및 리드대학과 같은 인문계 대학과 캘리포니
아에서
미시간 및 메릴랜드 주립 대학에 이르는 광범위한 교육기관 에서 컴퓨터 교육에 관여
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구체적인 시방서를 요구한 것이 아
니라
그들의 꿈을 알아 보았습니다. 기존 컴퓨터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형태의 컴퓨터
를
상상해 볼 것을 요청 했습니다. 이 모든 의견을 바탕으로 해서 넥스트 컴퓨터의 개발
에
착수한 것입니다. 한 대학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며 잡스는 넥스트 컴퓨터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사고를 같이 하는 동반자"라고 말했다.
잡스는 컴퓨터가격에 대해서는 행사가 끝날무렵에 언급하기로 했다. 그는 고등교육분
야는
아직 개척되지 못한 시장이라고 말하면서 대학이 마치 대기업 과 같이 재정이 풍족한
것처럼
묘사했다. 그가 말하는 고등교육기관이란 미국 전역에 있는 3천여개의 대학을 일컫는
다.
이들 대학의 학과는 총 4만5천 개이고 교직원 수는 총 60만명이며 학생수는 1천2백만
명이다.
이 분야의 규모를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그는 강조했다. 스탠퍼드대학의 연간 예산은
7억5
천만달러이고 미시간 대학은 10억달러를 넘는다. 그는 이들 교육기관은 "포 천"지의
5백대
기업에 충분히 선정될 수 있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청중들은 잡스의 재치에 감탄했다. 잡스는 교육기관들이 겪고 있는 재정상의 어려움
은
도외시한 채 시장 잠재력만 내세웠다. 잡스는 대학 교직원과 학생 들이 넥스트 컴퓨
터에 대해
여러가지 요구를 했다고 하면서도 가격에 대한 그들의 문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
았다.
"개방형 아키텍처가 필요하다. 각종 퍼스널 컴퓨터가 갖고 있는 모든 기능을 갖춰야
한다.
크고 소음이 많이나며 열을 많이 발산하는 워크스테이션은 거부한다. 작고 소음이 적
으며
열을 발산하지 않는 컴퓨터를 원한다" 등 그들의 요구를 열거했다. 잡스가 왜 개방형
컴퓨터를 언급했는지 의심스럽다. 넥스트 컴퓨터는 개방 시스템과는 거리가 먼 컴퓨
터였기
때문이다.
잡스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컴퓨터에 부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해서 다른
회사가
자사 고객에게 디스크 드라이브를 판매하는 것조차도 금지시켰다. 잡스의 이러한 태
도는
다른 업체들이 컴퓨터에 많은 주변기기를 연결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퍼스널 컴퓨터가
널리
사용될 수 있게 한 IBM의 정책과 대조적인 것이었다.
잡스는 또 소음이 없고 작으며 열이 많이 나지 않는 워크스테이션을 만들겠다고 강조
했는데
입방체 컴퓨터는 크고 디스크 드라이브에서는 소음이 비교 적 많이 나는 편이었다.
그는 컴퓨터 디자인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자료처리 병목현상문제로 재빨리 넘어갔
다.
그는 30대의 유머감각을 발휘하여 많은양의 데이터가 동시에 중앙처리장치에 입력될
때
발생하는 병목 현상을 넥스트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설명했다.
잡스가 대형 메인프레임 사진을 스크린에 비추자 청중들은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는
기존의
메인프레임 디자인에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이미 잡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고등교육기관들이 퍼스널 메인프레임을 원하고 있다는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잡스는
말했다.
그러나 입방체형 컴퓨터와 광디스크가 문제였기 때문에 신속한 입출력기능이 컴퓨터
의
판매에 전혀 도움이 안되었고 잡스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특수입출력 칩도 전
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스테레오 전축 판매원들이 항상 지적하듯 성능이 가장 좋은
스테레오라도 거기에 수준이 낮은 부품이 하나 들어가면 그 수준의 품질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처럼 컴퓨터의 처리속도도 그 컴퓨터를 이루고 있는 부품의 처리속도와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잡스 가 느린 광디스크를 고집하는 한 속도가 빠른 부품을 사용하더라도 전
반적인
처리속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잡스는 자기회사의 주문형 칩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성능이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했
다.
그러나 그의 잠재고객들은 그 뛰어난 성능을 직접 확인할 수없었기 때문에 잡스는 후
에 그의
주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또 넥스트가 다른 회사보다 적은 수의 집적회로를 사용했다는 점에별 관심을
갖지
않는 반면 다른 컴퓨터들이 제공하는 단순한 스프레드시트의탑재여부에 더 많은 관심
을
기울였다.
작성일자 : 1995.03.03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59)
잡스는 하드웨어에 대한 설명을 계속했다. 그는 모토롤러사가 개발한 프로세서에 관
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어서 성능이 탁월한 디지털 신호처리장치(D SP)라고 하는 특수
소자를
소개했다.
그는 이 디지털 신호처리장치를 사용하면 전자음악 및 컴퓨터 음성 인식에 일대 혁신
이
일어나서 인간의 음성만으로 명령이 입력되는 컴퓨터가 곧 등장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퍼스널 컴퓨터에는 유사한 칩이 채용되겠지만 그 성능은 상당히 떨어지게 될 것이라
고 그는
강조했다.
잡스는 값비싼 특수 칩과 수치계산 코프로세서를 굳이 표준으로 채택한 이유 를 거듭
역설했다. 그래야만 소프트웨어 개발업자들이 그런 기능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업체들은 가장 저렴하고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소프트웨어만을 개발하였기 때문에 DSP의 가격이 높으면 그 옵션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가장 저렴하고 일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장치를 보고 있습니다.
바로이것입니다. 평방피트의 정사각형 보드에 모든 시스템이 들어 있습니다. 이 장치는 이
분야에서 표면실장 기술을 가장 혁신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본 인쇄회로 중
에서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참석자들은 그의 말에 매혹되어 버렸고 그 당시의 분위기는 참
가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상상 할 수 없을 만 극도로 고조되었다. 회로기판이 아무리 훌륭하
더라도 그것은 회로기판에 불과한 것이다. 컴퓨터 구매자들은 잡스 처럼 기판의 심미적 가
치는 잘 모른다. 잡스는 컴퓨터가 넥스트의 완전 자동화공장에서 제조되었기 때문에 사람
손으로 만든 부분이 없다는 사실에도 대단한자부심을 가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참석자들은
회로기판 이외에는 사실 아무 것도 보지 못한상태였다. 잡스는 이런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조금 더 지속시킨 후, 이번 행사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기계를 만드는 기계"라는 제목의 회
사 소개용 짧은 비디오를 보여줬다. 비디오는 로봇 회로기판을 조립하는 장면과 조립된 기
판이 뜨거운 용액속에서 납땜되어 나오는 내용을 보여주었다. 또 묵직한 아나운서의 목소리
로 넥스트가 마치 12년 앞서 천년왕국에 입성한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비디오 상영이 끝난 후에도 컴퓨터실물이 무대에 올려지지 않았다. 대신 넥스트가 그동안
내려야했던 결정의 고비가 계속 소개되었다. 넥스트 컴퓨터를 소위 "타워"라고 하는 박스에
넣어 책상 밑에 장착시켜 모니터와 키보드를 책상 위에서 더 자유롭게 사용하게 할 것인지,
보드를 더 확장할 수 있도록슬롯을 더 만들어야 할 것인지. 파워 코드로는 어떤 것을 사용
해야 할지 등.
참석자들은잡스가 어떤 말을 해도 신중하게 들어주었다. 잡스가 자신이 개발한 컴퓨터는
제조가 특히 쉽고 또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했을 때사 람들은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
았다. 그들은 그가 하는 말을 믿고 그가 보여주는 것들만 보았다.
"우리는 완전한 시스템을 개발했습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시스템이 되도록 개발했습니다.
저는 40분동안 이 컴퓨터시스템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지금부 터는 90년대를 주도해 나갈
신형 컴퓨터를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휴식시간 이 되기 전에 잡스는 걸작으로 자부한 제
품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려고노력했다. 우리는 대량저장 관련기술을 개발하면서 그 문
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심했습니다. 플로피 디스크를 자세히 관찰한 결과 그 크기가 지나
치게 작고 시스템을 업데이트할 때마다 50~75개의 플로피 디스크를 출하해야 하는 번거로
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70년대의 낡은 기술이라는 사실을깨닫게 되었습
니다. 그래서 2년전에 과감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었다
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남들보다 4년 앞서서 그 기술을 시장에 선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 회사의 운명을 걸게 되었던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을 이뤄냈습니다. 넥스트 컴
퓨터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읽기 쓰기와 소거 가능한 광자기기술을 사용했습니다."
작성일자 : 1995.04.07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60)
그는 계속 설명했다. 광 디스크의 용량은 2백50메가바이트이다. 이것은 당시 최대용량 1.4
메가바이트의 플로피 디스크와 비교하면 대단한 기억용량이다.
잡스는디스크가 갖추어야할 여러 기능 중에서 저장 용량과 관련된 광 디스크의 장점만을
강조했다. 읽기와 쓰기의 속도도 매우 중요했지만 잡스는 그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
다. 그가 그 문제를 모르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곧 기술이 개발되어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해결하기로 되
어있는 회사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광디스크의 값도 중요한 변수였지만 잡스는 다시 한번 재치를 발휘하여 오히려 그 부담이
장점인 것처럼 느끼도록 했다. 그는 광 디스크 하나의 값이 50 달러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
만 그의 태도로 보아서는 그 비용이 결코 큰것이아니라는 느낌을 받게 했다. 넥스트의 일본
공급업자인 캐논사의 생산 비용 과 비교한다면 물론 저렴했다. 청중석에 있는 캐논측 인사
들은 잡스가 광디스크를 얼마에 판매할 것인지를 미리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날 50달러가
될것이라는 말을 듣고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잡스가 캐논의 가격보다 낮게 판매하겠
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개당 1달 러 미만에 살수 있었던 자
기디스크와 비교한다면 광디스크의 가격은 훨씬 비싼 것이었다. 분석가들은 후에 가격에 대
한 불평을 했고 가장 직접적인 영향 을 받게 된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그당
시 청중들은 아무것도파악하지 못한 채 분위기에 휩쓸려 얼렁뚱땅 넘어갔다. 잡스 같은 전
문가들 만이 앞으로 대학생들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전세계를 짊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컴퓨터의 특
정기능을 뽑아다가 캠퍼스로, 마을로, 아니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면서 다른 컴퓨터에 기능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런 구
상은 비용과 같이 다른 일반적이고 가장 단순한 사항 에 관해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전국적으로 동일한 디스크를 사용하겠다는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넥
스트의 광디스크가 다른 컴퓨터에서는 운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넥스트 컴퓨
터를 구입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잡스는 대학생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
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제품발표전 한동안 백과사전을 전자형태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몰입 해 있었다.
"5달러만 더 들이면 할 수 있어"라고 잡스는 큰소리쳤다. 한 직원이 그 구상을 비난하고 나
섰다. "스티브, 나는 대학다닐 때 한번도 백과사 전을 참고해본적이 없어. 그러나 해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니까 결과는 두고봐야지. 잡스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아무튼 전자백과사전은
나오지 않았다. 휴식시간이 되었다. 잡스는 로비로 나가 참석자들이 광디스크와 프린트 서키
드 보드를 직접 볼 수 있도록 그것들을 소개했다. 로비로 나가면 새 입방체 컴퓨터의 키보
드를 직접 조작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실망했다. 잡스가 제품
을 직접 볼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은 막아놓은줄 밖에서 일정거리를 두고 관람할 수 있는
특전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결점 투성인 소프트웨어는 손님들이 직접 작동하게 되면 곧 그
허점이 드러날 정도로 엉터리였다. 잡스는 소프트웨어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용케 숨겼다.
휴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다시 모이자 잡스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질문을 했다. 그
러자 청중들은 우렁찬 박수로 훌륭하다는 뜻을 표시했다.
잡스는 입방체형 컴퓨터가 "혁신적"인 디자인을 많이 사용했다는 점을 강조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부분의 디자인이 혁신적이 아니라는 사실 또 쉽게 복제된 것이거나
처음부터 가치 없는 디자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날 소개된 여러가지 기능 중에서 유일하게 오랫동안 가치가 평가된 기능은 넥스트스텝
(NeXTSTEP)이라는 운용체계뿐이었다. 그당시 아직 개발단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소프트웨어는 매 킨토시가 사용자들에게 컴퓨터 사용의 편
리함을 제공했듯이 소프트웨어 개발 업자들이 쉽게 개발 활동을 벌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어 주는 것을 주 목적 으로 삼았다. 넥스트는 특히 이 문제를 선결과제로 삼았다. "시장은
소프트 웨어를 개발하는데 6개월이나 걸린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장은 다음주 있을
통계학 수업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통계 프로그램이 신속하게 개발 되기를 바란다"고 잡스
는 설명했다.
그 해결책으로 "인터페이스 빌더"라고 하는 혁신적인 새 프로그램을 제공하면 된다는 것이
잡스의 설명이었다. 잡스는 그 프로그램을 신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계보를 따지고 올라가면
엑스퍼 텔리전스라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소프트웨어 매장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 1970년
대의 제록스 PARC연구 소와 그 보다 먼저 프로그래머들이 오브젝트라고 하는 미리 작성된
소프트웨어 모듈을 거듭 사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발한 대학 소프트웨어 연구소 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잡스는 과장된 그의 언변으로 인터페이스빌더 는 프로그래머가 스
크린 디자인을 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시켜준다고설명했다. 그럼 이제 시연을 하겠습
니다. 그러나 시연하는데 2가지 원칙이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번째 원칙
은 시연 도중에 항상 실수가 일어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원칙은 참관하는 사람들
의 수와 비례해서실수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오늘 실수가 생긴다면 그런
점을 생각하셔서 시연하는 사람의 입장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대중앞에서 그는 매력적
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회사내에서 직원이 만일소프트웨 어 조작에 실패하였다면 용납
하지 않는 완변주의자이다.
청중들이 대형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 잡스는 제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넥스
트와 대학과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리드 대학의 물리학 교수 이며 지난 몇년 동안 넥스트
의 교육분야 책임을 맡았던 리처드 크랜달을 무대위로 등장시켰다.
그의 발표내용을 보면 크랜달이 어떻게 해서 넥스트의 신형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넥스트
가 한 사람만을 통해 고등교육기관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기능 을 알아내려고 한 것이 실수
라는 것도 알수 있다. 크랜달은 자기 학문 분야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대학 전체의 흐
름에 대해서는 어두운 편이었다.
작성일자 : 1995.04.10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60)
그는 계속 설명했다. 광 디스크의 용량은 2백50메가바이트이다. 이것은 당시최대용량 1.4메
가바이트의 플로피 디스크와 비교하면 대단한 기억용량이다.
잡스는디스크가 갖추어야할 여러 기능 중에서 저장 용량과 관련된 광 디스크의 장점만을
강조했다. 읽기와 쓰기의 속도도 매우 중요했지만 잡스는 그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
다. 그가 그 문제를 모르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곧 기술이 개발되어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 해결하기로
되어있는 회사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광디스크의 값도 중요한 변수였지만 잡스는 다시 한번 재치를 발휘하여 오히려 그 부담이
장점인 것처럼 느끼도록 했다. 그는 광 디스크 하나의 값이 50 달러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
만 그의 태도로 보아서는 그 비용이 결코 큰것이아니라는 느낌을 받게 했다. 넥스트의 일본
공급업자인 캐논사의 생산 비용 과 비교한다면 물론 저렴했다. 청중석에 있는 캐논측 인사
들은 잡스가 광디스크를 얼마에 판매할 것인지를 미리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날 50달러가
될것이라는 말을 듣고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잡스가 캐논의 가격보다 낮게 판매하겠
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개당 1달 러 미만에 살수 있었던 자
기디스크와 비교한다면 광디스크의 가격은 훨씬 비싼 것이었다. 분석가들은 후에 가격에 대
한 불평을 했고 가장 직접적인 영향 을 받게 된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그당
시 청중들은 아무것도파악하지 못한 채 분위기에 휩쓸려 얼렁뚱땅 넘어갔다. 잡스 같은 전
문가들 만이 앞으로 대학생들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전세계를 짊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컴퓨터의 특
정기능을 뽑아다가 캠퍼스로, 마을로, 아니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면서 다른 컴퓨터에 그 기능
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
런 구상은 비용과 같이 다른 일반적이고 가장 단순한 사항 에 관해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국적으로 동일한 디스크를 사용하겠다는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넥스트의 광디스크가 다른 컴퓨터에서는 운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넥스트 컴
퓨터를 구입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잡스는 대학생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
인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제품발표전 한동안 백과사전을 전자형태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몰입 해 있었다.
"5달러만 더 들이면 할 수 있어"라고 잡스는 큰소리쳤다. 한 직원이 그 구상을 비난하고 나
섰다. "스티브, 나는 대학다닐 때 한번도 백과사 전을 참고해본적이 없어. 그러나 해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니까 결과는 두고봐야지. 잡스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아무튼 전자백과사전은
나오지 않았다. 휴식시간이 되었다. 잡스는 로비로 나가 참석자들이 광디스크와 프린트 서키
드 보드를 직접 볼 수 있도록 그것들을 소개했다. 로비로 나가면 새 입방체 컴퓨터의 키보
드를 직접 조작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실망했다. 잡스가 제품
을 직접 볼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은 막아놓은줄 밖에서 일정거리를 두고 관람할 수 있는
특전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결점 투성인 소프트웨어는 손님들이 직접 작동하게 되면 곧 그
허점이 드러날 정도로 엉터리였다. 잡스는 소프트웨어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용케 숨겼다.
휴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다시 모이자 잡스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질문을 했다. 그
러자 청중들은 우렁찬 박수로 훌륭하다는 뜻을 표시했다.
잡스는 입방체형 컴퓨터가 "혁신적"인 디자인을 많이 사용했다는 점을 강조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부분의 디자인이 혁신적이 아니라는 사실 또 쉽게 복제된 것이거나
처음부터 가치 없는 디자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날 소개된 여러가지 기능 중에서 유일하게 오랫동안 가치가 평가된 기능은 넥스트스텝
(NeXTSTEP)이라는 운용체계뿐이었다. 그당시 아직 개발단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소프트웨어는 매 킨토시가 사용자들에게 컴퓨터 사용의 편
리함을 제공했듯이 소프트웨어 개발 업자들이 쉽게 개발 활동을 벌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어 주는 것을 주 목적 으로 삼았다. 넥스트는 특히 이 문제를 선결과제로 삼았다. "시장은
소프트 웨어를 개발하는데 6개월이나 걸린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장은 다음주 있을
통계학 수업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통계 프로그램이 신속하게 개발 되기를 바란다"고 잡스
는 설명했다.
그 해결책으로 "인터페이스 빌더"라고 하는 혁신적인 새 프로그램을 제공하면 된다는 것이
잡스의 설명이었다. 잡스는 그 프로그램을 신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계보를 따지고 올라가면
엑스퍼 텔리전스라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소프트웨어 매장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 1970년
대의 제록스 PARC연구 소와 그 보다 먼저 프로그래머들이 오브젝트라고 하는 미리 작성된
소프트웨어 모듈을 거듭 사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발한 대학 소프트웨어 연구소 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잡스는 과장된 그의 언변으로 인터페이스빌더 는 프로그래머가 스
크린 디자인을 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시켜준다고설명했다. 그럼 이제 시연을 하겠습
니다. 그러나 시연하는데 2가지 원칙이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번째 원칙
은 시연 도중에 항상 실수가 일어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원칙은 참관하는 사람들
의 수와 비례해서실수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오늘 실수가 생긴다면 그런
점을 생각하셔서 시연하는 사람의 입장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대중앞에서 그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회사내에서 직원이 만일소프트웨 어
조작에 실패하였다면 용납하지 않는 완변주의자이다.
청중들이 대형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 잡스는 제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넥스
트와 대학과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리드 대학의 물리학 교수 이며 지난 몇년 동안 넥스트
의 교육분야 책임을 맡았던 리처드 크랜달을 무대위로 등장시켰다.
그의 발표내용을 보면 크랜달이 어떻게 해서 넥스트의 신형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넥스트
가 한 사람만을 통해 고등교육기관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기능 을 알아내려고 한 것이 실수
라는 것도 알수 있다. 크랜달은 자기 학문 분야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대학 전체의 흐
름에 대해서는 어두운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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