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앵장.> written by Agatha Christie........
"여보, 그럼 다녀올게. "
"안녕히 다녀오세요. "
앨릭스 마틴은 작고 소박한 대문 위로 몸을 내밀고 서서, 마을
쪽으로 난 길을 따라 멀어져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
다.
이제 남편은 길모퉁이를 구부러져 앨릭스의 시야에서 사라졌
지만, 앨릭스는 여전히 자세를 허물지 않은 채, 바람에 날려 얼굴
을 가리는 풍성한 갈색 머리타래를 멍하니 쓸어넘겼다 그녀의
눈은 꿈꾸듯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앨릭스 마틴은 아름답지도 않았고, 엄정하게 말하면 예쁘장하
지도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젊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전에 다니
던 사무실 동료들이 거의 알아보지 못할 만큼 환히 빛나고 부드
러워져 있었다. 처녀 시절의 앨릭스 킹은 유능하고, 태도는 약간
무뚝뚝하지만 분명 수완이 있고 실제적이며 단정한 여자였다. 그
녀는 아름다운 갈색 머리를 갖고 있었지만, 처녀 시절에는 그 아
름다움을 최대한 살린 게 아니라, 오히려 눈에 띄지 않도록 죽이
고 있었다. 그녀는 윤곽이 또렷하고 도톰한 입술을 항상 엄격하
게 다물고 있었다. 옷은 깔끔하고 잘 어울렸지만, 여자다운 멋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앨릭스는 힘겨운 시절을 보냈다. 열여덟 살부터 서른세 살까지
15년 동안, 그녀는 속기 타이피스트로 일하면저 혼자 힘으로 생
계를 꾸려나가야 했다(그리고 그 가운데 7년 동안은 병든 어머
니까지 돌봐야 했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었고, 그것이
소녀 시절에는 부드러웠던 얼굴 윤곽을 딱딱하게 만들어버렸다.
사실은 연애 비슷한 것도 해보았다. 그것도 일종의 연애임에는
분명했다. 상대는 사무실 동료인 딕 윈디퍼드였다. 실제로는 지
극히 여자다운 앨릭스는 자기에 대한 딕의 마음을 모르는 척했지
만, 항상 알고 있었다. 겉보기에 그들은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
었다. 딕은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동생의 학비를 대느라 쩔쩔매고
있었다. 흐래서 당분간은 결흔할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데도 앨리스는 미래를 마음 속으로 그려볼 때마다, 언젠가는 딕
의 아내가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서
로 좋아했지만, 둘 다 분별있는 사람이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성
급한 짓을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전혀 예기치 못한 형태로 나날의 힘겨운
일에서 해방되었다. 먼 친척이 죽으면서 앨릭스에게 몇 천 파운
드의 유산을 남겨준 것이다. 그것은 해마다 200파운드가 넘는 수
입을 을리기에 충분한 액수였다. 앨릭스에게 그 돈은 자유였고,
인생이며, 독립이었다. 이제 그녀와 딕은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딕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가 앨릭스에게 직접 사랑을
고백한 적은 없었지만, 이제는 전보다 훨씬 더 사랑을 고백할 마
음이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딕은 그녀를 피했을 뿐 아니라, 까
나롭고 우울해졌다. 앨릭스는 재빨리 진실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이제 부자가 되어 있먼다. 딕이 그녀에게 청혼하고 싶어도, 이제
는 그녀에 대한 배려와 자존심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를 좋아했고, 그의 청흔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을
때, 두 번째로 예기치 않은 일이 그녀에게 닥쳤다.
친구 집에서 제럴드 마틴을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은 당장에 열
렬한 사랑에 빠졌고, 만난 지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약혼했다. 항
상 자신을 '사랑에 빠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여자'로 생각했던 엘
릭스가 제럴드한테 넋을 잃고 열중해 버렸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옛날 애인을 자극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
이다. 그녀를 찾아온 딕은 너무 화가 나서 말을 더듬었다.
"당신은 그 자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어디서 굴러먹던 말
뼉다귄지 알 게 뭐야?"
"내가 그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 고작 일주일 만에?"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아는 데 모든 사람이 11년씩이
나 걸리진 않아요." 앨릭스는 화가 나서 외쳤다.
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당신을 좋아했어. 그리고 당
신도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지."
앨릭스는 솔직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녀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건 사
랑이 뭔지를 내가 몰랐기 때문이었머요."
그러자 딕은 다시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빌고, 간청하고, 협
박까지 했다 그의 자리를 차지한 남자에 대한 협박이었다. 그녀
가 그토록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차분한 겉모습 밑에
그렇게 격렬한 감정이 숨어 있는 것을 알고, 앨릭스는 깜짝 놀랐
다. 그리고 약간 겁이 나기도 했다. 물론 딕이 진심으로 그런 말
을 했을 리가 없어. 제럴드 마틴한테 복수하겠다는 협박은 진심
이 아닐 거야. 딕은 화가 났어. 그것뿐이야.
이 화창한 아침, 그녀는 그 작은 집 대문에 기대서서, 딕을 마
지막으로 만났던 그때를 돌이켜 생각하고 있먼다. 그녀가 결흔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은 목가적인 행복 속에 잠겨
있었지만, 그녀의 전부인 남편이 이따금 곁에 없을 때면 희미한
불안이 그녀의 완벽한 행복을 침범하곤 했다. 그리고 그 불안의
원인은 딕 윈디퍼드였다.
결혼한 뒤 세 번이나 그녀는 똑같은 꿈을 꾸었다. 주변 상황은
제각기 달랐지만, 주요 줄거리는 항상 똑같았다. 꿈속에서 그녀
는 남편이 죽어서 누워 있고 딕 윈디퍼드가 그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남편에게 치명타를 가한 손이 딕의 손이라는 것
을 그녀는 분명히 알았다.
이 꿈도 무서웠지만, 그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잠에서 깨어
났을 때 그녀를 소름끼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기뻐했던 것이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그런 감정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녀는 고마움에 가득차
서 살인자에게 두 손을 내밀었고, 때로는 고맙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꿈은 항상 그녀가 딕 윈디퍼드의 품에 힘껏 안기는 장면으
로 끝났다.
그녀는 이 꿈에 대해 남편한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이
꿈은 그녀가 스스로 인정하고 싶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건 경고일까? 딕 윈디퍼드에 대한 경고일까?
딕은 어떤 불가사치한 힘을 갖고 있어서, 멀리 있는 나에게 그 힘
을 입증하려고 애쓰고 있는 걸까? 그녀는 최면술에 대해 많이 알
지는 못했지만, 사람을 억지로 최면에 걸 수는 없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집 안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바람에, 앨릭스는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집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에서
흘러나보는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녀는 갑자기 휘청거렸다. 그
리고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한 손을 내밀었다.
"누구시라고요?"
"아니, 앨릭스. 당신 목소리가 왜 그래? 하마터면 못 알아들을
뻔했어. 나 딕이야."
"오오!"앨릭스가 말했다. 지금 어디..... 어디 있어요?"
"트래블러스 암스'라는 여관이야. 그 이름이 맞지? 아니면 당
신은 자기 마을에 여관이 있다는 것도 모르나? 난 휴가를 얻었
어. 여기서 낚시를 좀 하고 있지. 오늘 저녁 식사를 끝낸 뒤에,
당신 부부를 찾아가도 괜찮을까?"
"안돼요. " 앨릭스는 날카롭게 말했다. "오면 안돼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미묘하게 달라진 딕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는 딱딱하게 말했다 "물론 부인한테 폐를
끼치지는......"
앨릭스는 서둘러 딕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연히 딕은 내 태도
를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내 태도는 정말 이상했어. 신경이 갈기
갈기 찢어져버린 모양이야. 내가 그런 꿈을 꾼 건 딕의 잘못이 아
니야.
"나는 다만...... 오늘밤에는 우리가 선약이 있다는 뜻이었어
요." 그녀는 되도록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면서 설명
했다. "그럼, 저어..... 내일 저녁에 식사를 하러 오시지 않겠어
요?"
그러나 딕은 그녀의 말투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아차린 게 분명했다.
"고맙습니다." 그는 아까와 똑같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 다른 곳으로 떠날지 모릅니다. 내 친구가 오
느냐 오지 않느냐에 달려 있지요. 잘 있어요, 앨릭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달라진 말투로 서둘러 덧붙였다. "행운을 빌어
요, 내 사랑."
앨릭스는 안도감을 느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딕은 여기 오면 안돼." 그녀는 혼잣말로 되풀이했다. "절대
로 오면 안돼. 오오! 나는 정말 바보야. 이런 상태에 빠진 나를
상상하다니. 그래도 딕이 오지 않겠다니 다행이야."
그녀는 탁자에서 밀짚모자를 집어들고 다시 뜰로 나갔다. 그리
고는 잠시 멈춰서서. 포치 위에 새겨진 '나이팅게일장(莊)'이라
는 이름을 쳐다보았다.
"너무 별난 이름이 아닐까요?"
그녀는 결흔하기 전에 한번 제럴드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는 웃었다.
"이봐요, 런던 아가씨."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당신은 아마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 거요. 당신이
그 노랫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게 나는 기뻐. 나이팅게일은 연인
들을 위해서만 노래를 부르니까. 이제 여름날 저녁이면, 우리는
우리집 밖에서 함께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듣게 될 거요."
그들이 정말로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를 들었을 때를 기억해
내고, 앨릭스는 문간에 서서 행복감으로 얼굴을 붉혔다.
나이팅게일장을 찾아낸 것은 제럴드였다. 그는 흥분에 슬떠서
앨릭스를 찾아왔다. 그는 두 사람에게 딱 알맞는 보금자리 -오
직 하나뿐인 보금자리, 보석처럼 아름다운 집, 일생에 한번 찾아
낼까 말까 한 집-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 집을 본 순간,
앨릭스도 당장 반하고 말았다. 집이 약간 외떨어져 있는 것은 사
실이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도 3킬로미터나 떨어진 외딴 집
이었다. 그러따 고풍스러운 겉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게다가
쾌적하고 편안한 욕실과 온수 설비, 전등에 전화까지 갖추어져
있어서, 그녀는 당장 그 집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부유한 집주인이 변덕을 부려서, 집을 빌려주기
를 거절한 것이다. 집을 산다면 모르지만, 빌려줄 수는 없다고 고
집을 부렸다.
제럴트 마틴은 상당한 수입을 갖고 있었지만, 원금에는 손을
댈 수가 만었다. 그가 끌어모을 수 있는 돈은 기껏해야 1천 파운
드 정도였다. 집주인은 3천 파운드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집을 갈망하던 앨릭스가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그녀의 자산
은 무기명 채권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자산의 절반을 집값으로 보태기로 했다. 그렇
게 해서 나이팅게일장은 그들 소유가 되었고, 앨릭스는 한순간도
그 선택을 후회해본 적이 없었다. 하인들이 쓸쓸한 시골을 좋아
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지금은 하인이 한 명도 없었
다. 그러나 오붓한 가정생활을 갈망했던 앨릭스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집안을 가꾸는 일을 즐거워했다.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찬 정원은 마을에 사는 조지라는 이름의
정원사 영감이 일주일에 두 번씩 와서 돌봐주었다. 그리고 정원
가꾸기에 열심인 제럴드 마틴은 대부분의 시간을 정원에서 보냈
다.
앨릭스는 집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정원사 영감이 꽃밭에서
바쁘게 일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감이 오는 날은 매주 월
요일과 금요일인데, 오늘은 수요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영감님,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앨릭스는 그에게 다가가면저 물었다.
영감은 허리를 펴고, 낡아빠진 모자테를 손으로 만졌다.
"놀라실 줄 알았습죠, 부인. 하지만 실은 이렇게 된 거랍니다.
금요일에 지주 어른 댁에서 축제가 열리거든요. 그래서 저는 혼
자 생각했습죠. 제가 이번 주만은 금요일 대신 목요일이나 수요
일에 와도, 마틴 씨나 부인께서 언짢게 여기지는 않으실 거라고
말입죠. "
"그건 좋아요. " 앨릭스가 말했다. "축제에서 재미 있게 지내시
길 바라겠어요. "
"그야 물론입죠." 조지 영감은 순박하게 말했다. "공짜로 배
불리 먹을 수 있다는 건 신나는 일입죠, 지주 어른께서는 항상 소
작인들에게 적당한 다과회를 베푼답니다. 그리고 저는 또 생각했
습죠. 부인께서 떠나시기 전에 만나뵙고, 테두리 화단을 어떻게
꾸미고 싶어하시는지 알아두는 게 좋겠다고 말입죠. 언제 돌아을
지는 아직 모르시겠지요?,,
"하지만 나는 떠나지 않을 건데요. "
조지 영감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일 런던에 가지 않으신다고요?"
"안 가요. 도대체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조지영감은 고개를 어깨 너머로 홱 움직였다.
"어제 마을에서 마틴 나리를 만났습죠. 나리께서 하시는 말씀
이, 두 분은 내일 런던으로 떠나시는데 언제 돌아을지는 확실치
않다고....."
"말도 안돼요." 앨릭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영감님이 그이
말을 오해하신 게 분명해요."
그래도 제럴드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영감이 그런 기묘한
오해를 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런던에 간다고? 그녀는 두번 다시
런던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난 런던을 싫어해요. " 그녀는 느닷없이 거칠게 말했다.
"예." 조지 영감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제가 잘못 들은 모양
이군요. 하지만 나리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 같았는데
....... 어쨌든 여기서 계속 지내신다기 기쁩니다. 저는 여기저기
놀면서 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게 생각지 않고, 런던은 형편없는
곳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저는 한번도 런던에 갈 필요가 없었습
죠. 거긴 차가 너무 많아요. 요즘에는 그게 골치아픈 문제지요.
사람들이 일단 자동차를 갖게 되면, 어디에도 가만히 눌러앉아
있질 못해요. 전에 이 집에 살았던 제임스 씨도 그놈의 자동차를
사기 전에는 조용한 생활을 좋아하는 훌릅한 신사였습죠. 그런데
차를 사더니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이 집을 팔려고 내놓았답니다.
게다가 제임스 씨는 침실마다 욕실을 만들고, 전등이다 뭐다 해
서 이 집에 돈을 꽤 들였습죠. 저는 제임스 씨한테 말했답니다. '
나리는 이제 두번 다시 그 돈을 구경하지 못할 겁니다. 모든 사람
이 나리처럼 집에 있는 모든 방에서 몸을 씻고 싶어하진 않을 테
니까요'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제임스 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
죠, '이보게, 조지. 이 집을 팔 때는 2천 파운드에서 단 한푼도 깎
아주지 않겠어' 하고 말입죠.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하셨답니
다. "
"그 사람은 3천 파운드를 받았어요." 앨릭스는 웃으면서 말했
다.
"2천 파운드예요." 조지 영감은 되풀이했다. "제임스 씨가 부
른 액수가 그때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죠. 다들 터무니없이 비
싸다고 생각했답니다. "
"아니, 정말로 3천 파운드였어요. " 앨릭스가 말했다.
"여자분들은 절대로 숫자를 이해하지 못해요, " 조지 영감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제임스 씨가 부인한테 뻔뻔스럽게도 3천
파운드를 달라고 할 만큼 낯가죽이 꾸꺼운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마십쇼. "
"나한테 말하진 않았어요." 앨릭스가 말했다. "내 남편한테
말했죠. "
조지 영감은 다시 꽃밭에 허리를 굽혔다.
"집값은 2천 파운드였답니다." 조지 영감은 고집스럽게 말했
다
앨릭스는 굳이 조지와 실랑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꽃밭으로 걸어가면서, 그녀는 꽃을 따기 시작했바. 햇빛, 꽃향기,
바쁘게 날아다니는 벌들의 희미한 날개소리, 이 모든 것이 어우
러져 그날을 완벽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앨릭스가 향기로운 끝다발을 한아름 안고 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짙은 초록빛을 띤 작은 물건이 꽃밭의 나뭇잎 사이로 엿
보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들었
다. 남편의 수첩이었다. 남편이 여기서 잡초를 뽑고 있을 때 주머
니에서 떨어진 게 분명했다.
그녀는 수첩을 펼치고, 약간 즐거운 기분으로 내용을 훌어보았
다. 결혼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앨릭스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제
럴드가 그답지 않게 꼼꼼하고 정리 정돈을 잘한다는 것을 알아차
렸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식사하는 것에 대애 지나
칠 만큼 까다로웠고, 항상 시간표처럼 정확하게 하루의 계획을
미리 세워놓았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에는 아침을 먹은 뒤 10시
15분에 마을로 떠나겠다고 예고했다 그리고 10시 15분 정각에
그는 집을 나섰다.
수첩을 뒤적거리다가, 그녀는 5월 14일자 페이지에 '2시 30분
에 성 베드로 성당에서 앨릭스와 결혼하다'는 글이 적혀 있는 것
을 보고 즐거워졌다.
"바보 같으니."
앨릭스는 혼자 중얼거리고 페이지를 넘겼다. 갑자기 그녀는 손
을 멈추었다.
"수요일, 6월 18일,..,,, 아니, 이건 오늘이잖아."
그 날짜 페이지에는 제럴드의 단정하고 꼼꼼한 펄체로 '오후 9
시'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제럴드는 오후 9시에 무엇
을 할 계획일까? 앨릭스는 궁금했다. 그녀는 일기가 어떤 사건의
계기나 되는 소설을 자주 읽었다. 이게 만약 소설이라면, 이 수첩
에는 뜻밖의 새로운 사실이 적혀 있어서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
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혼자 빙긋 웃었다. 소설이
라면, 이 수첩에는 틀림없이 다른 여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을 거
야. 그녀는 한가롭게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겼다. 날짜와 약속, 사
업상 거래에 관단 내용이 짤막하게 적혀 있을 뿐, 여자 이름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수첩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다음, 꽃다발을 안고 집
으로 가다가, 그녀는 막연한 불안을 느꼈다. 딕 윈디퍼드의 말이
마치 그가 바로 옆에서 그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
게 되살아났다.
"당신은 그 자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어디서 굴러먹던 말
뼉다귄지 알 게 뭐야."
그건 사실이야. 내가 그이에 대해서 윌 알고 있지? 어쨌든 제
럴드는 마흔 살이야. 40년이나 살았다면, 그동안 그이의 인생에
는 여자들이 있었을 게 분명해,,,,,,
앨릭스는 성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에 빠지면 안돼.
나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어. 딕
윈디너드한테서 전화가 왔다는 말을 남편한테 할 것인가 말 것인
가?
제럴드가 이미 마을에서 딕과 우연히 마주쳤을 가능성도 생각
해야 돼.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그이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한
테 그 이야기를 할 게 분땅해. 그러면 문제는 내 손을 떠나겠지.
그렇지 않으면 어떡하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앨릭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제럴드는 딕에 대해 항상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가엾은 친구. 그 친구도 나만큼이나 당신한테 열중해 있는 것
같던데, 내가 당신을 가로챘으니 얼마나 억울할까. "
제럴드는 앨릭스의 감정에 대해서는 티끌만한 의심도 품지 않
았다.
딕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말하면, 제럴드는 틀림없이 딕을 우리
집으로 초대하자고 말할 거야. 그러면 나는 딕이 찾아오겠다고
말했지만, 내가 핑계를 대서 오지 못하게 했다고 설명해야 할 거
야. 그이는 왜 그랬느냐고 묻겠지. 그러면 내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어? 내 꿈에 대해서 얘기해? 하지만 그이는 그냥 웃어버릴
거야. 아니면, 그이가 시시한 개꿈으로 생각하는 그 꿈을 내가 중
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겠지. 그러면 그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오오, 그이가 무슨 생각을 할지 어떻게 알아!
결국 앨릭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
심했다. 그것은 남편에게 털어놓지 않은 최초의 비밀이었고, 그
것을 깨닫자 마음이 불안해졌다.
점심 시간이 되기 직전에 제럴드가 마을에서 돌아오는 소리를
듣자, 그려는 당혹감을 감추려고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가 식사
준비를 하느라 바쁜 체했다.
제럴드가 딕 윈디퍼드를 만나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앨릭스는
안도감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졌다. 이제는 남편에게 감추기로 한
방침을 단호히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온종일 그녀는 신경
이 곤두서고 멍해 있었다. 무슨 소리가 날 때마다 그녀는 깜짝깜
짝 놀랐지만, 남편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자신
도 생각이 딴데 가있는지, 한두번은그녀가 똑같은 말을 두 번
되풀이한 뒤에야 져우 대답한 적도 있었다.
조촐한 저녁 식사를 끝낸 뒤, 바깥에서 자라는 연보라색과 흰
색 비단향꽃 향기가 상쾌한 밤공기에 실려 안으로 츨어오도록 창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참나무로 들보를 댄 거실에 앉았을 때에야
비로소 앨릭스는 남편의 수첩을 생각해내고, 의심과 당흑감을 떨
쳐버리기 위해 얼른 주머니에서 그 수첩을 꺼냈다.
"당신은 이걸로 꽃에 물을 주었더군요. "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수첩을 그의 무릎 위로 던졌다.
"테두리 화단에 떨어져 있었소?"
"네. 난 이제 당신의 비밀을 전부 다 알고 있어요."
"난 죄지은 게 아무것도 없는걸."
제럴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밤 아흡 시의 밀회도 무죄인가요?"
"아아! 그거,,,,,," 그는 잠시 당황한 것 같았지만, 특별히 즐
거운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빙긋 웃었다. "어떤 멋진 여자와 밀
회하기로 약속했지. 그 여자는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갖고 있고,
당신을 쏙 빼닮았소."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앨릭스는 일부러 엄격하게 말했다.
"당신은 요점을 회피하고 있어요. "
"아니, 그렇지 않아. 사실은 오늘밤에 필름을 현상할 예정인
데, 그걸 잊지 않으려고 써둔 거요. 당신이 나를 좀 도와뒀으면
좋겠소. "
제럴드 마틴은 사진에 열중해 있었다. 그의 카메라는 약간 구
식이었지만, 렌즈만은 훌륭했다. 그는 암실도 꾸민 작은 지하실
에서 감광판을 직접 현상했다 그는 싫증도 내지 않고 앨릭스에
게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게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정확히 아흡 시에 해야 하는근요."
앨릭스는 놀리듯이 말했다.
제럴드는 약간 성난 표정을 지었다.
"여보, 앨릭스." 그의 태도에는 어딘지 모르게 성급한 데가 있
었다. "사람은 항상 계획을 세워야 돼. 일정한 기간에 할 일을 미
리 계획해 놓고, 그 계획대로 정확하게 일을 끝마쳐야지."
앨릭스는 의자에 기대어 검은 머리를 뒤로 젖힌 채 담배를 피
우고 있는 남편을 말없이 바라보며 잠시 앉아 있었다. 깨끗이 면
도한 그의 얼굴 윤곽이 어두운 배경을 등지고 또렷이 떠올라 있
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공포의 물결이 그녀
를 덮쳤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오오! 제럴드. 당신을 좀더 많이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남편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보, 당신은 나에 대해서 전부 다 알고 있잖소. 노섬벌랜드
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남아프리카에서의 생활에 대해
서도, 그리고 나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지난 10뎐 동안의 캐나다
생활에 대해서도 당신한테 모두 말했을 텐데."
"오오! 그저 사업 얘기뿐이죠."
제럴드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당신 말뜻을 알겠군. 연애를 말하는 거겠지. 당신네
여자들은 모두 똑같다니까. 개인적인 문제 말고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으니,,,,,,"
앨릭스는 목이 바싹 타는 것을 느끼면서 입 속으로 우물거렸
다.
"하지만 연애 사건이 있었을 게 분명해요. 내 말은,,,,,, 내가
알기만 한다면 . .. "
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제럴드 마틴은 얼굴에 망설이는
표정을 띤 채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얼굴은 엄숙했다. 좀전의 놀리는 듯한 태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신은 그게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해? 이 푸른 수염의 사나
이(프랑스의 샤를 페로가 쓴 동화의 주인공으로 여섯 명이나 아내를
죽인 라울 기사의 별명 -역주)의 침실을 들여다보는 게? 물론 내
인생에도 여자들이 있었지. 그건 부인하지 않겠소. 부인해 봤자,
당신이 믿어주지도 않을 테고. 하지만 나한테 중요한 의미를 지
닌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진실로 맹세할 수 있소."
그의 목소리에는 듣고 있는 아내를 안심시키는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
"이제 만족했소, 앨릭스?"그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리고
는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함에 이런 불쾌한 문제를 생각하게 된 원인이 뭐지? 지금까
지 한번도 그런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잖소."
앨릭스는 일어나처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오오! 나도 모르겠어요. 오늘은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
었어요. "
"그거 참 이상하군." 제럴드는 마치 혼잣말처럼 낮은 목소리
로 말했다. "정말 기묘해."
"뭐가 그렇게 이상해요?"
"오오! 나한테 그렇게 화내지 말아요. 난 다만 당신이 평소에
는 너무나 상냥하고 차분한 여자라서, 신경이 곤두서는 건 이상
하다고 말했을 뿐이오. "
앨릭스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모든 것들이 나를 괴롭히려고 음모라도 꾸민 것 같았
어요." 그녀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조지 영감까지도 우리가 런
던으로 떠날 거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더군요. 조지 영감은
당신이 그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조지 영감을 어디서 만났지?"
제럴드가 날카롭게 물었다.
"금요일 대신 오늘 일하러 왔거든요, "
"바보 같은 늙은이. "
제럴드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앨릭스는 놀라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남편의 얼굴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남편이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놀라는 것을 보고, 제럴드는 애써
가라앉혔다.
"조지 영감은 정말로 어리석은 늙은이요."
그는 항의하듯 말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했길래, 조지 영감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됐
죠?"
"내가? 난 아무 말도 안했어. 적어도,..... 아아! 그래.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 내가 '아침에 런던으로 떠나는 문제제 대해서 시
시한 농담을 했더니, 그 영감이 그걸 진담으로 받아들인 모양이
오. 아니면 영감이 귀가 어두워서 제대로 듣지 못했거나...... 물
론 당신은 영감이 잘못 생각했다고 말했겠지?"
그는 그녀의 대답을 조바심하며 기다렸다.
"물론이죠. 하지만 그 영감은 일단 어떤 생각을 머릿속에 집어
넣으면, 그 생각을 다시 머리에서 꺼내기가 쉽지 않은 노인네예
요. "
이어서 그녀는 제임스 씨가 나이팅게일장의 집값으로 요구한
금액이 3천 파운드라고 정원사 영감이 우겨댄 것에 대해 이야기
했다.
제럴드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제임스는 현금으로 2천 파운드를 주고, 나머지 1천 파운드는
이 집에 대한 저당권을 설정해 주면 된다고 했지. 아마 그것 때문
에 그런 오해가 생긴 모양이군."
시계를 쳐다보고, 장난스럽게 그것을 손가락으고 가리켰다.
"벌써 일을 시작했어야 할 시간이에요, 제럴드. 예정보다 5분
이나 늦었다구요."
아주 독특한 미소가 제럴드 마틴의 얼굴에 떠올랐다.
"마음이 바뀌었어." 그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밤에는 어떤
사진도 만들지 않겠소."
여자의 마음은 기묘한 법이다. 그 수요일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 엘릭스의 마음은 만족스럽고 평온했다. 잠시 공격을 받았던
그녀의 행복이 다시 전처럼 우쭐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이튿날 저녁이 되자, 그녀는 어떤 미묘한 힘이 그 행복
을 은밀히 해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딕 윈디퍼드는 전화를
다시 걸어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이 되풀이하여 머리에 떠올랐다. "당신은
그 자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어디서 굴러먹던 말뼉다귄지
알 게 뭐야." 그리고 그 말과 함께 "당신은 그게 현명한 일이라
고 생각하오? 이 푸른 수염의 사나이의 침실을 들여다보는 게?"
하고 말했을 때 그녀의 뇌리에 사진처럼 또렷이 새겨진 남편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왜 그이는 그런 말을 했을까? 그 말은 도대
체 무슨 뜻이었을까?
그 말 속에는 분명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건 일종의 협박이었
다. 그는 실제로는 이렇게 말한 것 같았다. "당신은 내 인생에 대
해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게 좋아. 그런 짓을 하면 불쾌한 충격을
받을지도 몰라." 물론 잠시 후에 그는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의
미를 지닌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맹세했지. 그때 앨릭스는 그
맹세가 진실하다고 느꼈지만, 이제 그 느낌을 다시 상기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그이가 꼭 그런 맹세를 해야 할
의무는 없었잖아?
금요일 아침이 되자, 앨릭스는 제럴드의 인생에 여자-그가
감추려고 애쓴 푸른 수염의 침실 사건-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
었다 뒤늦게 눈을 뜬 그녀의 질투심이 맹렬히 타올랐다.
그이는 그날 밤 9시에 여자를 만날 예정이 아니었을까? 사진
을 현상한다는 이야기는 엉겁결에 꾸며낸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앨릭스는 그 수첩을 발견한 이후 줄곧 마음이 괴로웠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묘한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그 수첩에는 그녀를 괴롭
힐 만한 것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것이 이 모든 일의
얄궂은 점이었다.
사흘 전만 해도, 그녀는 남편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맹세했
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는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처럼 여겨졌
다. 그녀는 그가 조지 영감에게 지나칠 만큼 화를 낸 것을 기억해
냈다. 그것은 평소에 그토록 너그럽고 온화하던 태도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마 시,소한 일이겠지만, 그 일은 남편을 정말로 알
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일깨워주었다.
주말에 쓸 몇 가지 사소한 물건을 금요일에 마을에서 가져와야
할 펄요가 있었다. 앨릭스는 제럴드가 정원에서 일하는 동안 마
을에 가서 그 물건들을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럴드는 이 계획에 맹렬히 반대하면서, 자기가 가서 가져을 테
니 당신은 그냥 집에 있으라고 고집을 부렸다. 앨릭스는 남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집요함에 놀라움과 불안을 느
꼈다. 왜 그이는 내가 마을에 가는 것을 그렇게 한사코 막고 싶어
할까?
갑자기 그 모든 일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한 가지 이유가 머
리에 떠올랐다. 나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제럴
드가 마을에서 딕 윈디퍼드를 우연히 만났을 수도 있잘아? 내 질
투심도 결혼할 당시에는 완전히 잠자고 있다가 나중에야 깨어났
어. 제럴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이는 내가 딕 윈디퍼드를 다
시 만나는 걸 막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 설명은 사실과 딱 들어
맞았고 앨릭스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설명에 열렬히 매달렸다.
그러나 차 마실 시간지 지나자, 그녀는 다시 침착성을 잃고 불
안해졌다. 그녀는 제럴드가 마을로 떠난 뒤 줄곧 자기를 괴롭히
는 유흑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남편 방을 청소할
필요가 있다는 구실로 양심을 달래며, 이충에 있는 남편의 갱의
실로 올라갔다. 청소한다는 핑계로 자기 양심을 계속 속이기 위
해 먼지털이와 걸레도 가져갔다.
"난 그걸 확신할 수만 있으면 돼." 그녀는 속으로 되풀이해서
말했다 "확신할 수만 있다면,,,,,,"
다른 여자와 관련된 추잡한 증거물은 제럴드가 벌써 오래 전에
없애버렸을 거라고 그녀는 자신을 타일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자들은 지나치게 감상적이어서 꼼짝달쌀할 수 없는 증거물을
보관하는 경우도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더 강했다.
결국 앨릭스는 그 목소리에 굴복했다. 자기 행동이 너무 부끄
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녀는 숨을 죽인 채 편지와 서류
뭉치를 샅샅이 조사하고, 책상 서랍의 내용물을 꺼내고, 심지어
는 남편 옷의 호주머니까지 뒤졌다. 그녀가 뒤지지 못한 서랍은
두 개뿐이었다. 하나는 정리장의 아래 서랍이었고, 또 하나는 책
상 오른쪽에 달린 작은 서랍이었는데, 둘 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
었다. 그러나 앨릭스는 이제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 서
랍 속에 자기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과거의 여자, 그 상상 속의 여
자에 관한 증거물이 있을 거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그녀는 제럴드가 부주의하게도 아래층 찬장 위에 열쇠뭉치를
놓고 간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는 그 열쇠뭉치를 가져와서 하나
씩 자물쇠에 꽃아보았다. 세번째 열쇠가 책상 서랍에 맞았다. 앨
릭스는 성급하게 그 서랍을 잡아당겼다. 서랍 속에는 수표책 한
권과 지폐가 가득 들어 있는 지갑이 있었고, 뒤쪽에 끈으로 묶어
놓은 편지묶음이 있었다.
앨릭스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그 끈을 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편지를 다시 책상 속에
집어넣은 다음, 서랍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그 편지들은 그녀
가 결혼하기 전에 제럴드 마틴에게 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앨릭스는 이제 자기가 찾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보다
는 오히려 한 군데도 남김없이 조사했다는 확신을 갖고 싶어서,
정리장 서랍 쪽으로 돌아겄다. 그녀는 부끄러웠고, 자신의 강박
증이 바보스럽다고 여겼다.
곤흑스럽게도, 제럴드의 열쇠뭉치 가운데 문제의 서랍에 들어
맞는 열쇠는 하나도 없었다. 앨릭스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
른 방들을 돌아다니며 여러 종류의 열쇠를 갖고 돌아왔다. 다행
히 예비 침실의 옷장 열쇠가 그 정리장에도 맞았다. 그녀는 자물
쇠를 열쐬 서랍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거기에는 오래 되어 이미
더러워지고 누렇게 바랜 신문지 조각들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앨릭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제럴드가
어떤 주제에 그토록 관심이 많길래 그런 지저분한 신문지 조각들
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신문지 조각들을 훌어보
았다 그것들근 거의 모두 7년쯤 전에 나온 미국 신문이었고, 악
명높은 사기꾼이자 중혼자인 찰스 르메이터의 재판을 다룬 기사
들이었다. 르메이터는 그에게 속은 여자들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
았다. 그가 세든 집의 마루 밑에서 해골이 발견되었고, 그가 '결
혼'한 여자들은 대부분 그후 소식이 끊겼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유능한 변호사의 도움츨 받아 능숙하게 자
신을 변호했다. '증거 없음'이라는 인색한 평결이 그 사건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살인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다른 혐의로 장기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앨릭스는 당시 그 사건이 불러일으킨 흥분을 기억해냈고, 르메
이터가 3년 뒤에 탈옥하여 세상을 온통 들끓게 한 것도 기억해냈
다. 그는 그후 두 번 다시 잡히지 않았다. 당시에는 영국 신문들도
법정에서 쉽게 흥분하는 그의 성격과 격렬한 항의, 그리고 모르
는 사람들은 그의 연기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는
심장이 약해서 이따금 갑자기 쓰러지곤 했다는 사실 보도와 함
께, 그의 인간성과 여자를 사로잡는 비범한 능력을 장황하게 보
도했다.
앨릭스가 들고 있는 신문지 조각 가운데 하나에 그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녀는 흥미롭게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턱수염
을 길게 기르고 학자처럼 보이는 신사였다. 사진을 보았을 때 그
녀는 누군가를 연상했지만, 그 누군가가 과연 누구인지 당장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많은 남자들이 범죄와 유명한 재판에 흥미
를 갖는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제럴드에게 그런 취미
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 이 얼굴을 보고 내가 누구를 연상했을까? 문득 그녀는
그 누군가가 바로 제럴드라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눈과
눈썹은 제럴드와 아주 비슷했다. 제럴드가 신문지 조각을 보관한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사진 옆에 실려 있는 기
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피고의 수첩에는 어떤 날짜가 적혀 있
었는데, 검사는 그것이 그가 희생자들을 죽인 날짜라고 주장한
모양이었다. 이어서 한 여자가 증인으로 출두하여, 그의 왼쪽 손
목, 왼손 손바닥 바로 위에 사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피고
의 신원을 자신있게 확인했다.
앨릭스의 손에서 힘이 빠져 신문지 조각들이 떨어졌다. 서 있
던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제럴드의 왼쪽 손목, 손바닥 바로 위
에는 작은 흥터가 있었다.
방이 그녀의 주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
니, 그녀가 당장 그렇게 절대적인 확신에 도달한 것은 참으로 기
이하게 여겨졌다. 제럴드 마틴은 바로 찰스 르메이터였다! 그녀
는 당장 그것을 알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뿔뿔이 흩어졌던
단편들이 마치 제자리에 끼워지는 그림맞추기 조각처럼 그녀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집값으로 지불된 돈은 그녀의 돈이었다. 오직 그녀의 돈뿐이었
다. 그녀가 그에게 맡긴 무기명 채권이었다. 그녀의 꿈조차도 그
진정한 의미를 드러냈나. 그녀의 마음 속 깊숙이에서 그녀의 잠
재의식은 줄곧 제럴드 마틴을 두려워했고,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
어했다. 그리고 그녀의 잠재의식이 도움을 청한 상대는 바로 딕
윈디퍼드였다. 그녀가 조금도 의심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그토록
쉽사리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기도 했다. 그
녀는 르메이터의 또 다른 희생자가 될 운명이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안에.
그녀는 어떤 사실을 기억해내고 조그맣게 비명을 질렀다. 수요
일 오후 9시. 지하실에 깐 판석은 쉽게 들어올릴 수 있어. 전에도
그는 지하실에 희생자를 파묻은 적이 있었지. 그는 그 일을 모두
수요일 밤에 해치을 계획이었어. 하지만 그 계획을 그처럼 꼼꼼
하게 미리 적어놓다니, 이건 광기야! 아니 광기가 아니라 완전
히 논리적이야. 제럴드는 항상 약속이나 볼일을 기록해두지. 살
인도 그에게는 다른 것과 똑같은 사업일 뿐이야.
그런데 무엇이 나를 구해 주었지? 무엇이 나를 구해줄 수 있었
을까?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약해졌을까? 아니야. 갑자기 대답이
그녀의 머리에 떠을랐다. 조지 영감이야. 그녀는 이제야 남편이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이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튿날 나와 함께 런던으로 떠날 예정이라고 말하여 길
을 닦아둔 게 분명해. 그런데 뜻밖에도 조지 영감이 일하러 왔다
가 나한테 런던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그 이야기를 부인했어. 조
지 영감이 그 대화를 나에게 전한 바로 그날 밤에 나를 죽이는 건
너무 위험했겠지. 하지만 정말 아슬아슬했어 ! 내가 때마침 그 사
소한 일을 털어놓지 않았다면,,, ,,, 앨릭스는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이제는 어물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당장 도망쳐야
돼. 그가 돌아오기 전에,,,,,,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 해도, 그와
같은 지붕 밑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진 않을 거야. 그녀는 서둘러
신문지 조각들을 서랍 속에 도로 집어넣은 다음, 서랍을 닫고 자
물쇠를 채웠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불어 바위가 된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길 쪽으로 난 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
렸기 때문이다. 남편이 돌아온 것이다.
잠시 앨릭스는 돌처럼 굳어 있다가, 발꿈치를 들고 창가로 살
금살금 다가가 커튼 뒤에 숨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역시 남편이었다 그는 혼자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보고, 그렇지 않아도
겁에 질려 있는 앨릭스의 심장이 하마터면 멎을 뻔했다. 그것은
새로 산 삽이었다.
앨릭스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오늘밤에 나를 죽일 모양이구나.......'
하지만 아직은 기회가 있었다. 제럴드는 여전히 콧노래를 흥얼
거리며 집 뒤쪽으로 돌아갔다.
지하실에 삽을 갖다두러 간 거야. 준비하러.
앨릭스는 몸서리를 치면서 생각했다.
그녀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계단을 뛰어내려가,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그터가 막 현관문을 나설 때, 남편이 집 반대
쪽을 돌아 나타났다.
"여보." 그가 불렀다. "그렇게 급히 어딜 가는 거요7"
앨릭스슨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예사롭게 보이려고
애썼다. 지금은 기회가 사라졌지만, 남편의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하면 나중에 다시 기회가 올 거야. 어쩌면 지금도 가
능할지 몰라,,, ,,,
"가로수길 끝까지 산책하고 돌아을 작정이었어요, "
그녀는 자기 귀에도 가냘프고 분명치 않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
했다.
"그거 좋지. " 제럴드가 말했다. "나도 함께 갈까."
"아니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제럴드. 난 신경이 곤두서고 골
치가 아파요. 혼자 가고 싶어요."
그는 주의깊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 속에서 순간적으로
의흑의 빛이 번뜩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얼굴이 창백하고,,, ,,, 부들부들 떨고 있
잖소, "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머리가 아파요. 그것뿐이에요.
산책을 하고 나면 나아질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 " 제럴드는 느긋하게 웃으면서 말했
다.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든 말든, 나는 당신을 따라갈 거니
까. "
그녀는 더 이상 항의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사실을 알고
있다는 낌새를 채면, 이 사람은,,,,,,
그녀는 애써 여느때의 태도를 어느 정도 되찾았다. 그러나 남
편이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은 것처럼, 이따금 그녀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불안했다. 그녀는 그의 의심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것을 느졌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는 그녀를 억지로 소파에 눕히고, 오드클
로뉴 화장수를 가져다가 그녀의 관자놀이를 적셔주었다. 그는 여
느때처럼 헌신적인 남편이었지만, 앨릭스는 손발이 덫에 걸린 듯
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는 잠시도 앨릭스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다. 부엌까지 따라
들어와서, 그녀가 이미 마련해둔 조촐한 요리를 식탁에 나르는
일을 거들었다. 목이 콱 막혀서 음식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억지로 음식을 먹으며 쾌활하고 자연스러워 보
이려고 애썼다. 그녀는 이제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
다는 것을 알았다. 도움의 손길에서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
에 그녀는 그와 단둘이 있었고, 오로지 그의 처분에 내맡겨져 있
는 상태였다. 이제 그녀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뿐이었다.
그의 의심을 누그러뜨려서, 단 몇 분 -현관 홀에 있는 전화기까
지 걸어가서 도움을 청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시간-만이라도
흔자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것이 그녀의 유일
한 희망이었다. 집에서 도망쳐도, 도와줄 사람을 만나기 훨씬 전
에 남편한테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그가 며칠 전에 왜 계획을 포기했는가를 기억해냈을 때, 잠시
희망의 불빛이 번득였다. 딕 윈디퍼드가 오늘 저녁에 우리를 만
나러 올 거라고 말하면 어떨까?
그 말들이 그녀의 입술 위에서 바르르 떨렸다. 그러나 다음 순
간, 그녀는 서둘러 그 말들을 뿌리쳤다. 이 사람은 두 번씩 살인
을 주저하진 않을 거야. 그의 침착한 태도 밑에는 단호한 결의와
의기양양함이 숨어 있었다. 그것을 느꼈을 때, 그녀는 구역질이
났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오히려 범죄를 재촉할 뿐이야. 딕이
올 거라고 말하면, 이 남자는 계획을 앞당겨 이 자리에서 지금 당
장 나를 죽이고는, 침착하게 딕 윈디퍼드한테 전화를 걸어서 우
리가 갑자기 외출할 일이 생겼다고 둘러대겠지. 오오! 딕 윈디퍼
드가 정말로 오늘밤 이 집에 와주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딕
이 만약,,,,,.
갑자기 어떤 착상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남편이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챌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곁눈질로 날카
롭게 남편을 살폈다. 계획을 세우자, 용기가 솟아났다. 태도도 완
전히 자연스러워져서, 스스로 생각해도 경탄스러을 정도였다. 그
녀는 이제 제럴드의 의심이 완전히 풀린 것을 느꼈다.
그녀는 커피를 끓여, 그:플이 화창한 날 저녁에 자주 나가서 앉
아 있는 포치로 커피를 가져갔다.
"그건 그렇고,,,,,," 제럴드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커피를 마
시고 나서, 며칠 전에 하려고 했던 그 사진 작업을 합시다."
앨릭스는 전율이 온몸을 꿰뚤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지만, 태연
하게 대답했다.
"흔자 할 수 없어요? 오늘밤엔 좀 피곤해요, "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는 혼자 빙긋 운었다. "그리고 일
을 끝낸 뒤에는 더 이상 피곤하지 않을 거요. 그건 약속할 수 있
소. "
그는 이 말이 퍽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앨릭스는 몸서리를 쳤
다. 계획을 실행할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기회
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정육점에 전화를 좀 걸어야겠어요."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
다. "당신은 그냥 앉아 계세요. "
"정육점이라고? 이 늦은 시간에?"
"물론 가게문은 벌써 닫았겠죠. 하지만 주인은 집에 있을 거예
요. 게다가 내일은 토요일이잖아요. 얇게 저민 송아지 고기를 아
침 일찍 갖다달라고 부탁할 작정이에요. 다른 사람이 먼저 낚아
채 가기 전에 말이에요. 그 영감님은 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
든 할 거예요."
그녀는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닫았다. 그러자 제
럴드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 닫지 말아!"
그녀는 쾌활한 말투로 재빨리 대꾸했다.
"문을 닫아야 나방이 못 들어오죠. 난 나방이라면 딱 질색이에
요. 내가 정육점 영감님과 연애라도 할까봐 걱정이세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낚아채듯 수화기를 집어들고
'트래블머스 암스'의 전화번호를 댔다. 당장 전화가 연결되었다.
"윈디퍼드 씨가 아직도 거기에 계신가요? 좀 바꾸어 주시겠어
요?,,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으면서 울컥 구역질
이 났다.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남편이 현관 흘로 들어왔기 때문
이었다.
"나가요, 제럴드." 그녀는 쌀쌀맞게 말했다. "난 전화로 이야
기하고 있을 때 누가 듣는 걸 싫어해요."
그는 껄껄 웃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로 정육점 주인과 통화하고 있는 거야?"
앨릭스는 절망에 빠졌다. 계획은 실패했어. 이제 곧 딕 윈디퍼
드가 전화를 받을 거야.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큰 소리로 도움을
청할까? 제럴드가 내 손에서 수화기를 빼앗기 전에 딕이 내 말뜻
을 이해해 줄까? 아니면 그저 짓궂은 장난쯤으로 치부해 버릴까?
그녀가 절망에 사로잡혀 손에 든 수화기의 작은 버튼을 신경질
적으로 눌렀다 풀었다 하고 있을 때, 또 다른 계획이 문득 머리에
섬광처럼 떠올랐다. 그 버튼은 상대편에게 이쪽 목소리를 들리게
할 수도 있고 들리지 않게 할 수도 있는 장치였다.
'어려울 거야,,, ,,,' 그녀는 생각했다.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정
신을 바짝 차려야 하고, 적당한 낱말을 생각해내야 하고, 잠시도
더듬거리지 말아야 돼. 하지만 난 해낼 수 있을 거야. 아니, 해내
야만 돼.'
바로 그때, 수화기에서 딕 윈디퍼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앨릭스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버튼을 힘껏 누르고
말했다.
"나이팅게일장의 마틴 부인이에요. (버튼을 풀고) 내일 아침
에 얇게 저민 송아지 고기를 좋은 걸로 여섯 장만 갖고 (다시 버
튼을 누르고) 와주세요.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다시 버튼을 풀
고) 고마워요, 헥스워시 씨.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했다고 언
짢게 생각하시진 않겠죠. 하지만 그 송아지 고기는 정말로 (버튼
을 누르고) 생사와 관련된 문제예요,,.,,. ( 버튼을 풀고) 좋아요.
내일 아침에 (버튼을 누르고) 되도록 빨리 와주세요...... "
그녀는 수화기를 돌려놓고, 숨을 몰아쉬며 남편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정육점 주인한테 늘 그런 식으로 말한다는
거요?"
제럴드가 말했다.
"여자들이 흔히 써먹는 수법이죠. "
앨릭스는 쾌활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너무 흥분해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제럴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어. 딕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해도
틀림없이 와줄 거야.
그녀는 거실로 들어가 전등을 켰다. 제럴드가 그녀를 따라왔
다.
"이젠 아주 기운이 넘쳐흐르는 것 같군."
그는 이상한 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 앨릭스가 대답했다. "두통이 사라졌어요. "
그녀는 늘 앉는 의자에 앉아,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남
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난 살았어. 아직 8시 25분밖에
안됐어. 딕은 9시가 되기 훨씬 전에 도착할 거야.
"당신이 아까 끓여준 커피 말야, 별로 맛이 없던데." 제럴드가
투덜거렸다. "아주 쓴 맛이 났어. "
"시험삼아 새로운 종류의 커피를 끓여봤어요. 당신 마음에 들
지 않는다면, 그 커피는 이제 두번 다시 끓이지 않을게요."
앨릭스는 바느질감을 집어들고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
는 이제 착한 아내 역할을 계속하는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느
꼈다. 제럴드는 책을 몇 장 읽었다. 그러다가 시계를 힐끔 쳐다보
고는 책을 옆으로 내던졌다.
"여덟 시 반이로군. 지하실로 내려가서 일을 시작할 시간이
야. "
바느질감이 앨릭스의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오오! 아직 안돼요. 아흡 시까지 기다려요."
"아니, 여덟 시 반에 시작하겠어. 그게 내가 정한 시각이오, 일
찍 시작하면, 당신도 그만큼 빨리 잠자리에 들 수 있잖아."
"하지만 나는 아흡 시까지 기다리고 싶어요."
"여덟 시 반이야." 제럴드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내가 시간
을 정하면 항상 지킨다는 건 당신도 알잖소. 자, 갑시다, 앨릭스.
나는 이제 잠시도 더 기다리지 않겠소, "
앨릭프는 그를 쳐다보고, 저도 모르게 공포의 물결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가면은 벗겨졌다. 제럴드의 두 손은 꿈틀꿈틀 경련
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눈은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그리고 바
짝 마른 입술을 계속 혀를 핥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흥분을 감
추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앨릭스는 생각했다.
'그건 사실이야 이 사람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거야. 미친
사랑이나 마찬가지야.'
그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와서,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고 일으켜 세웠다.
"자, 갑시다. 아니면 내가 당신을 거기까지 안고 가지. "
그의 말투는 쾌활했지만, 그 뒤에는 가면을 벗은 잔인함이 숨
어 있었다. 앨릭스는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하여 제럴드의 손을 뿌리치고, 벽에 찰싹 달라붙어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무력했다. 도망칠 수도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자, 앨릭스,,...."
"안돼요. 싫어요. "
그녀는 제럴드를 피하려고 무력하게 두 손을 내밀며 비명을 질
렀다.
"잠깐만요. 당신한테 얘기할 게 있어요. 고백할 게......"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고백?"
그가 흥미를 느낀 듯이 물었다,
"네, 고백요." 그녀는 그의 관심을 계속 잡아두려고 애쓰면서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한테 벌써 말했어야 하는 건데."
경멸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주문은 깨졌다.
"옛날 애인 이야기겠지. "
그가 코웃음을 쳤다.
"아니에요. 다른 얘기예요. 당신은 그걸 아마,,,,,, 아마 범죄
라고 부를 거에요."
그 팔이 정곡을 찔렀다는 건 당장 알 수 있었다. 그의 관심을
다시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자, 그녀의 용기도 되살
아났다. 그녀는 다시 한번 상황을 뜻대로 퉁제할 수 있다는 자신
감을 느꼈다.
"다시 자리에 앉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방을 가로질러 자기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허
리를 굽혀 바느질감을 집어들었다.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속으로
는 초조하게 머리를 쥐어짜며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내고 있었
다. 도와줄 사람이 을 때까지, 꾸며낸 이야기로 제럴드의 관심을
붙잡아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신한테는 내가 15년 동안 속기 타이피스트.로. 일했다고 말
했지만, 그건 전적으로 사실은 아니었어요. 그 사이에 두 번 공백
기가 있었으니까요. 첫번째는 내가 스물두 살 때였어요. 어떤 남
자를 우연히 만났는데, 나이가 지긋하고 재산도 꽤 있는 사람이
었죠. 그 남자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고, 자기와 결흔하자고 말했
답니다. 나는 그 청혼을 받아들여. 우리는 결흔했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을 설득해서,
나를 수취인으로 생명보험에 들게 했죠."
그녀는 남편의 얼굴에 갑자기 강렬한 호기심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다시 자신감을 얻어 말을 이었다.
"전쟁 동안, 나는 병원 약국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온
갖 종류의 희귀한 약과 독약을 다루었죠. 네, 독약요."
그녀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을 끊었다. 이제 그는 강한 흥미
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살인자는 항상
살인에 흥미를 갖게 마련이다. 그녀는 거기에 도박을 걸었고, 성
공했다. 그녀는 시계를 힐끔 훔쳐보았다. 8시 35분이었다.
"어떤 독약이 있는데 ,,,,,, 하얀색의 고운 가루예요. 아주 조금
만 먹어도 즉사할 정도로 독한 약이에요. 당신은 독약에 대해서
잘 아시겠죠?"
그녀는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그 질문을 던졌다. 그가 독약에
대해 알고 있다면, 조심해야 할 것이다.
"아니. 독약에 대해서는 거의 몰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일이 한결 쉬워지겠
군.
"하이어신이라는 진통제에 대해서는 물론 들어봤겠죠. 이건
그 하이어신과 거의 같은 작용을 하는 약이지만, 나중에 검시를
해도 절대로 찾아낼 수 없어요. 어떤 의사라도 심장마비로 죽었
다는 사망진단서를 떼어줄 거예요. 나는 그 약을 조금 훔쳐서 지
니고 있었죠. "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남아 있는 힘을 모두 끌어모았다.
" 계속해. "
"아뇨. 난 무서워요. 차마 말할 수가 없어요. 나중에 말할게
요. "
"지금 말해. " 그가 초조하게 말했다. "난 듣고 싶어. "
"우리는 한 달쯤 결흔생활을 했어요. 나는 나이든 남편한테 아
주 잘해주었어요. 정말 상냥하고 헌신적인 아내였죠. 그이는 이웃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나를 칭찬했답니
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헌신적인 아내인지는 모두 다 알고 있었
어요. 나는 저녁마다 그이의 커피를 항상 직접 끓였죠. 어느 날
저녁, 우리가 단둘이 있을 때, 나는 그이의 커피잔에 그 치명적인
독약을 조금 넣었답니다."
엘릭스는 말을 끊고, 조심스럽게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다. 평
생 연극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그녀가 지금 이 순간에는 세상
에서 가장 훌륭한 여배우와도 어깨를 겨룰 만했다. 그녀는 냉혹
한 독살자 역할을 실제로 열연하고 있었다.
"무척 평화로웠어요. 나는 그이를 지켜보며 앉아 있었죠. 그이
는 숨을 한번 헐떡거리고는 가슴이 답답하니까 바람을 좀 쐬게
해달라고 하더구요. 나는 창문을 열었어요. 그랬더니 그이는 의
자에서 움직일 수가 없다고 말했어요. 그리고는 이내 죽었답니
다."
그녀는 말을 끊고 미소를 지었다. 8시 45분이었다. 이제 곧 사
람들이 올 것이다.
"보험금은 얼마나 됐지? ,,제럴드가 물었다.
"2천 파운드 정도였어요. 나는 그 돈으로 투기를 했다가 몽땅
날려버렸죠. 나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서 속기 타이피스트로 일
했어요. 하지만 거기서 오랫동안 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답니
다. 그때 또 다른 남자를 만났어요. 나는 사무실에서 줄곧 처녀
시절 이름을 쓰고 있었죠. 그래서 그이는 내가 전에 결혼한 적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그이는 젊고, 꽤 잘생겼고, 돈도 많았어요.
우리는 서식스에서 조용히 결혼식을 올렸죠. 그이는 생명보험에
는 들고 싶어하진 않았지만, 물론 나를 상속인으로 한 유언장을
만들었어요. 그이도 역시 내가 커피를 끓여주는 걸 좋아했죠. 내
첫 남편이 그랬듯이. "
앨릭스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빙그레 웃고는 짤막하게 덧붙였
다.
"나는 커피를 아주 맛있게 끓이죠.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가 살고 있던 마을에서 친구를 몇 명 사귀었어요.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 내 남편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
자, 그 친구들은 나를 무척 가엾게 여겼답니다. 하지만 의사는 별
로 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 사람이 나를 의심했다고는 생각
지 알지만, 내 남편이 갑자기 죽은 건 정말 이상하다고 무척이나
놀랐거든요. 내가 왜 사무실로 다시 돌아갔는지,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요. 아마 습관 때문인가 봐요. 두번째 남편은 나한테 4
천 파운드를 남겨주었죠. 이번에는 그 돈으로 투기를 하지 않았
어요, 그 대신 투자를 했죠. 그래서 당신도 아시파시피... ..."
그러나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피가 위로 몰려 얼굴이 시
뻘개진 제럴드 마틴이 거의 질식할 것처럼 숨을 헐떡거리며, 부
들부들 떨리는 집게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
다.
"커피라고,,,,,, 맙소사! 그 커피!"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커피가 왜 그렇게 썼는지, 이제야 알겠어. 이 악마 같으니.
나한테 독약을 먹였군. "
그는 두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움켜잡았다. 금방이라도 그녀에
게 덤벼들 태세였다.
"네가 나한테 독약을 먹이다니."
앨릭스는 그를 피해 벽난로 쪽으로 뒷걸음질쳤다. 이제 그녀는
겁에 질려,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려 했다. 그러나 입을 벌린 그녀
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다음 순간에는 그가 용
수철처럼 덤벼즐 것이다. 그녀는 몸에 남아 있는 힘을 모두 긁어
모았다. 그리고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그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요. 당신한테 독약을 먹였어요. 그 독약은 벌써 작용하고
있어요. 이제 당신은 그 의자에서 움직이지 못해요. 움직일 수 없
어요."
저 의자에 제럴드를 묶어둘 수만 있다면 단 몇 분 동안만
이라도,,, ,--
아아! 저게 뭐지? 길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대문이 삐걱거리
는 소리. 그리고 대문에서 현관으로 걸어오는 발소리. 현관문이
열렸다.....
"당신은 움직일 수 없어요. "
그녀는 되플이 말했다 그리고는 그의 곁을 살짝 빠져나가, 방
에서 곤두박질치듯 도망쳐 나갔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는
딕 윈디퍼드의 품 안에 기절하여 쓰러졌다.
"맙소사! 앨릭스!"
딕이 외쳤다. 이어서 그는 함께 온 남자를 돌아보았다.
크고 건장한 체격에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저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가서 살펴보세요."
그는 앨릭스를 조심스럽게 소파에 눕히고, 그녀 위에 몸을 굽혔다.
"내 사랑." 그가 중얼거렸다. "가엾은 앨릭스. 도대체 무슨 짓
을 당한 거야?"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입술은 그저 그의 이
름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경찰관이 그의 팔을 살짝 건드리는 바람에, 딕은 혼란스러운
생각에서 깨어났다.
"저 방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웬 남자 하나가 의자에 앉아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은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입
니다. 그리고... ..."
"그리고 뭡니까?"
"그는,,, , ,, 죽었답니다. "
그들은 앨릭스의 목소리를 듣고 흠칫 놀랐다.
그녀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마치 어떤 책을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단조롭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 죽었답니다."
애거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1890--1976)
영국 토케에서 태어났다. 정식 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
터 독서를 무척 좋아챘고, 시나 소설물 창작하여 혼자 즐기기도 했다.
1920떤에 처녀작인 <스타일스 장의 괴사건>을 발표한 이후 '추리소설의
여왐'으로, 전세계적인 명성과 인기를 누렸다.
수록 작품의 원래 제목은 'Philomel Cottage'(l92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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