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철학과 사회진화론
--- 하버마스의 역사철학 비판을 중심으로
I. 들어가며
하버마스의 이론적 작업은 다각도로 접근할 수 있다. 그의 이론이 여러 영역들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하고 폭넓은 이론을 포괄하는 하버마스의 작업을 몇 가지 틀로 도식화시킨 뒤 그 발달과정을 간단히 정리하기란 매우 힘들다. 그렇지만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려는 문제의식은 비판적 사회이론의 정초가능성 탐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사회비판의 규범성 정초를 일관되게 추구하려는 까닭은 그가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비판이론에 비판의 규범적인 정초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비판이론적 전통에 없는 언어적 전회와 실용주의의 수용을 통해 보편화용론과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러한 전개는 사회 정태적인 측면에서, 비판적 사회이론을 구축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그러나 사회를 정태적인 수준에서, 즉 지금 이 사회가 바람직한가라는 물음에서 고찰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사회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앞으로는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 것으로 희망할 수 있겠는가라는 역사적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물론 역사이론으로서 비판이론을 정초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일관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여러 사건들을 하나의 이론이라는 틀로서 만들기 어렵다는 것은 이미 앞서 역사철학의 전개에서 지적했던 바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과거와의 연관이 필요하다. 지금 현재의 문제들이 어떻게 발생하여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지만 비판이 온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역사화된 비판은 그 결과 자체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앞으로의 실천적 지향을 요청한다. 물론 이러한 희망이 유토피아적 시각을 갖는 것과는 조심스럽게 구별되어야만 할 것이다. 결국 비판적 사회이론을 기획하려는 하버마스의 작업이 성공하려면 그 기획은 역사이론적 틀과도 관련을 맺어야 한다고 본다.
하버마스의 이론이 역사이론과 관련을 맺을 수 있는지 살피는 데 있어서 그 고찰지점은 크게 두 방향을 향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역사철학에 대한 그의 입장과 이후 작업에 있어서 관련성이다. 다른 하나는 하버마스 이론의 주된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진화론 및 의사소통행위론과 역사이론과의 관련성 문제이다. 흔히들 하버마스의 이론전개는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과 포기라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언급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앞의 두 지점 중 전자를 중심으로 역사철학과의 관련성을 조심스럽게 논하고자 한다.
II. 하버마스의 역사철학 비판
역사철학의 극복이 단절이냐 혹은 재구성이 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은 역사철학을 그 핵심요소들로 나누어 이 요소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살필 때 제대로 드러날 수 있다. 이 핵심요소와 관련해서 역사에 대한 의미를 묻는다는 것, 역사를 파악하려고 한다는 것은 역사철학이 역사이론으로서 정립되기 위해 가장 우선시되는 필요조건일 것이다. 즉, 모든 역사이론은 그것이 근대 역사철학이던 아니던간에 상관없이 역사에 대한 파악에 있어서 일관된 설명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하버마스의 이론에서 역사에 대한 일관된 설명틀이 존재한다면 일단은 역사이론으로서는 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하버마스의 역사이론이 역사철학이거나 적어도 역사철학과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이 있는가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反역사철학도 나름대로 역사이론일 수는 있으므로 하버마스의 역사이론이 反역사철학인가 아닌가라는 물음은 역사철학의 중심요소 중 하버마스의 이론에 수용될 부분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탐구와 직결된다. 여기에서는 초기 하버마스의 이론적 작업을 중심으로 그가 행한 역사철학비판을 우선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이 헤겔-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이 가지는 일부 요소에 해당함을 밝힐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비판이 전면적인 역사철학에 대한 거부라기 보다는 역사철학의 요소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음을 언급하고자 한다.
2.1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
하버마스의 이론이 역사이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만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역사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는 마르크스 역사 철학에 대한 하버마스의 입장을 주목해야 한다.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은 하버마스의 초기 작업부터 바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이론과 실천』에서 「철학과 과학사이 : 비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라는 논문을 통해 마르크스의 토대-상부구조관계, 계급투쟁론, 프로레타리아트 등의 개념을 비판하고는 있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순수한 철학도, 순수한 과학도 아닌 비판(Kritik)이라고 보면서 긍정적으로 보고자 하는 측면도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정치적 의도를 지닌 역사철학"의 관점과 상응한다고 말했을 때, 어느 정도는 초기에 하버마스가 실천적으로 지향된 역사철학 개념을 유지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하버마스의 초기 작품인『이론과 실천』은 1963년에 첫판이 나온 이후 1971년에 다시 신판이 나왔다. 여기에는 첫판에 없었던 신판 서문이 실려 있다. 따라서 60년대 초반부터 71년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와 역사철학에 대한 하버마스의 입장이 조금씩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게다가 이 책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적으로 논구한 문헌보고」라는 논문은 이미 57년에 다른 곳에서 발표했던 글이기에 거의 15년에 해당하는 시기의 사상적 전개를 엿볼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초기 하버마스의 작업을 일단락 짓는 68년에 나온 『인식과 관심』에서도 역사철학에 대한 언급이 일부분 드러나는데 주된 내용은 독일관념론 철학의 전개와 관련하여 다루어지고 있다. 결국 이 시기를 통하여 하버마스가 내린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대한 입장은 첫째,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이 역사신학으로부터 내려오는 구원적, 목적론적 성격을 갖는다는 역사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類의 자기전개를 노동의 변증법으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마르크스 역사철학의 특수성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에서는 이 둘을 중심으로 그러한 비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또 하버마스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하려는 대안적 요소로는 무엇을 언급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2.1.1 『이론과 실천』에 나타난 역사철학 비판
『이론과 실천』5장에서 하버마스는 쉘링과 마르크스를 비교하면서 마르크스와 쉘링에서 모두 역사의 통일적 주체와 구원사적 맥락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이 둘은 "세계의 타락을 역사적 구원에로 돌리려는 욕망을 공유"(『이론과 실천』S 217)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헤겔로부터 노동의 변증법을 받아들인 마르크스에게서는 노동으로의 환원과 구원사적 역사관 모두가 나타나게 된다.
기술적인 노동 및 노동과정을 유기적인 삶의 과정과 동일시하면서 다시 삶의 과정을 이념의 절대적 삶과 동일시하는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죽음을 택함으로써 악순환 자체에서 구제된다는 식으로 역사에 대해 구원을 보증해 준다. (『이론과 실천』S 221)
이러한 하버마스의 비판에서 조심스럽게 살필 부분은 마르크스의 역사관이 신의 구원을 다시금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려는 부분이 아니라, 도달되고 해방된 상태로서의 자연이 인간에 의해 완전히 합리적으로 규제될 수 있다고 본 것과, 그러한 자연을 목적 행위적 대상으로만 고찰하고 있다고 본 부분이다. 인간에 의해 자연이 통제되고 결국 완벽히 규제된다고 해서 해방된 사회가 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버마스가 보기에 이미 경험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적인 생산력을 해방시키는 것과는 달리 규범의 발달은 따로 마련되어야 하며 "기아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 반드시 노예상태의 지위 저하로부터 해방으로 수렴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하버마스 비판의 초점은 자연을 인간 노동의 대상으로, 즉 목적행위적 대상으로만 보려는 마르크스의 환원주의적 시도에 가 있다. 이러한 환원주의적 역사철학이 아니라 하버마스가 보기에 노동과 상호작용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인 상호촉진 관계가 없으므로, 노동이 아닌 상호작용에 해당하는 측면이 따로 고찰되어야 한다.
노동으로의 환원주의적 속성을 가진 마르크스 역사철학의 특수성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하버마스는『이론과 실천』7장에서 역사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이 부분은 하버마스의 이론틀이 얼마만큼 역사철학의 핵심요소와 관련을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단서를 제시해줄 수 있으므로 주의 깊게 살펴볼 부분이다. 하버마스는 역사철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비코의 역사철학이 역사신학과 마찬가지로 세계사적 통일성을 상정하고 있으며 역사가 총체적 위기의 흐름이라는 데서 종말-구원적 역사관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계몽주의 이후 역사는 순환과정이 아니라 진보의 법칙에 따른 직선적인 방향성이라는 개념을 내세우긴 해도 이런 계몽주의적 역사관 역시 역사진보가 자연의 목적에 따라 목적론적으로 실현된다고 보았을 때 여기에는 신학적 목적론, 신의 섭리관이 암묵적으로 내재해 있다고 본다. 이 목적론이 가지는 신학적 성격은 헤겔이 역사의 추진력으로 변증법적 모순개념을 끌어들였을 때 다소나마 해소되는 상황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추진력 전체를 헤겔은 절대적인 자기의식을 통해 정신의 역사 속에 포섭하므로 다분히 사변적(spekulative)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헤겔의 정신에 해당하는 개념이 마르크스에게서는 노동으로 바뀌었을지라도, 그 역시 회고적으로 볼 때에는 역사를 세계사의 총체성―물질적 생산체제 하에서 노동이라는 사회적 실천―으로 환원시키려는 경향이 있고, 미래 지향적으로는 소외된 노동을 완전히 극복하는 혁명적 실천을 그려 넣고 있다. 비코로부터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근대 역사철학에서 하버마스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세계사를 총체성의 단일한 틀로 설명하려는 것과, 목적론적 사고, 역사과정이 도달되는 지점에서 엿보여지는 유토피아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는 구원의 계기로서 주어진 신학적 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총체성으로서의 역사 개념에 문제가 있음을 하버마스는 지적한다. 총체성을 향하는 세계사의 통합과정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성의 역사성에서 이러한 역사성은 그 시원에서 결말까지 고정되어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최근에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역사성인 것이다. 즉 "인간이 사회조건을 합리적으로 규제하게 된 게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면, 인간이 역사를 이성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역사 단계 전체에 걸쳐 타당할 수는 없게"(『이론과 실천』S 278)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렇게 역사철학에 있어서 이성의 역사성이 전제하고 있는 총체성이 잘못되어 있음을 비판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역사철학 자체가 당장에 무의미해진다고 보지는 않았다. 더 나아가 역사철학에서 긍정적으로 인정할 부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스스로 역사를 창조하면서 특수한 역사들이 세계사로 포섭되어 가고 있음을 본다면 역사철학의 전제 자체가 결코 무의미해질 수 없다고 하버마스는 말한다. 그가 보기에 역사철학의 문제 제기 방식이 낡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도피주의적 색채를 띤 것이 된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역사철학 전체를 거부했다기 보다는 근대 역사철학이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던 신학적 유산을 비판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 역시 전면적인 거부의 성격을 갖는 그런 비판이 아니었다. 1971년 『이론과 실천』신판 서문에서 그는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이 "전통적 정치학과 근대 사회철학의 약점을 모두 보완하면서 실천적 의도를 견지하는 사회이론"(『이론과 실천』S 10)이라고까지 말한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헤겔로부터 빌어 온 변증법의 논리인데, 유적 존재인 인간의 역사가 노동의 과정인 자연사로 환원되고, 소외의 지양이 필연적 과정을 거쳐 해방된 사회로 나아간다는 합법칙적 발전을 말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에 대해 하버마스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부분과 역사철학적 문제제기 맥락에서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엄밀히 나눌 필요가 있다. 이 내용이 분명해진다면 마르크스 역사철학 비판을 거쳐 그가 새로운 이론으로 나아갈 때에도 역사철학적 물음의 지반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이론 작업을 진행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1.2 역사철학과 해방의 문제
『이론과 실천』을 중심으로 살핀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대한 하버마스의 입장은 역사철학적인 문제제기 자체는 일부분 인정하면서도 마르크스 역사철학이 가지고 있는 환원적 성격과 변증법적 발전논리는 비판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는 바로 역사철학에 대한 재구성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기에 있어서는 실천적으로 지향된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이 바로 비판(Kritik)이라고 하면서 그 핵심을 옹호하고자 하는 편에 가까웠다. 1971년에 이르기까지 하버마스는 독일관념론적 전통에 있어서 반성이 가지는 인식론적 의미를 그 역사적 맥락에 따라 재고찰하려고 하였으며 이는 『이론과 실천』이나『인식과 관심』모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와 관련하여 60년대 행해졌던 실증주의 논쟁과 해석학 논쟁을 거치면서 하버마스가 주되게 추구하였던 작업은 비판적 사회이론에 있어서 비판의 성격을 제대로 갖추는 일이었다. 비판(Kritik)은 순수한 철학도 아니요, 실증주의와 과학주의에 함몰되는 순수한 과학만도 아니었을 때, 이 비판은 자기반성(Selbstreflexion)과 해방적 관심을 지향하는 인식관심이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행해지는 마르크스에 대한 언급도 그것이 자기반성으로서의 비판(Kritik)의 성격을 제대로 갖는가 아닌가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었으며 이러한 커다란 이론적 의도 하에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도 부분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천적 의도를 지닌 비판으로서의 자기반성이 마르크스 역사철학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는 다음의 대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실천적 의도를 지니고 구성된 사회이론의 규범적 기반을 마르크스처럼 변증법적 논리에서 찾을 때는 지났다. 물론 자기반성의 논리는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의 모든 혼란을 통해 자아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적으로 추적함으로써 자아를 각성시키는데... 억압된 대화가 남긴 역사적 흔적에서부터 억압되었던 것을 재구성하는 것이 변증법의 과업이라면 자기반성의 논리를 '변증법적'이라고 부를 수는 있다. 그러나, 변증법적 사고가 억압연관에 흡수되면 그 억압연관만이 변증법적인데 이것이 아도르노의 중심된 통찰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르면 문제가 지연될 따름이다. 왜냐하면 왜곡된 의사소통구조를 확인시켜 줄 궁극적인 논리의 기반은 바로 왜곡되지 않은 대화를 통한 의사소통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천』 S 23)
결국,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의 역사철학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논리에 따라 역사전개가 필연성을 갖는다는 것을 부인하려 했을 뿐이다. 오히려 역사전개를 필연적으로 보지 않는 대신 실천적 의도와 해방적 관심이라는 자기반성의 논리로 역사유물론이 자리매김되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의 법칙적 전개 대신에 하버마스는 역사철학이 과학적으로 반증가능한 성격을 갖을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이 때까지의 역사유물론에 대한 총괄적 평가로서 1971년에 『이론과 실천』신판 서문에서는 역사유물론이 "인간의 類적 역사에 대한 자기반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에서 변증법적 사고가 노동의 소외가 만들어내는 물화현상으로만 환원된다면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소외의 역사만 전개되는 회의주의에 이를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의 필연적 전개와 목적론적 사고는 거부하되 실천적 의도와 해방적 관심은 하버마스가 인정하려 했을 때, 역사철학의 요소 중 일부와 하버마스의 이론이 관련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읽게 된다. 바로 소외의 지양[해방]과 역사이론의 연결이다. 이 연결이 어떻게든 하버마스 이론틀내에서 이루어진다면 하버마스의 이론작업은 일정한 측면에서 역사철학적 유산과 연계될 수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할 경우 역사철학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은 거부와 포기쪽으로 기울 것이다. 소외의 지양이 비판이론가처럼 회의주의적으로 단념되지도 않고 역사전개의 필연성에 따라 자동적으로 해결되지도 않는 것이라 했을 때 소외의 극복, 즉 해방의 문제는 어떻게 풀릴 수 있는 것인가? 소외의 문제가 역사적으로 발생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의 논리를 밝혀주는 것으로 해결은 일단락 되는 것인가? 하버마스에게 해방의 문제는 더이상 역사철학 아니 역사이론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문제가 되는 것인가?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하버마스의 이론은 역사철학의 문제제기에 대해서 아주 소극적인 인정만 한 채 역사이론적 해결에 대해서는 침묵을 하는 셈일 것이다. 그리고 역사이론적인 해결 대신에 의사소통이 왜곡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판가름만 해주는 규범적 기반만을 주되게 탐구하게 될 것이다. 이럴 경우 실천적 의도로서 기획된 비판적 사회이론에서 실천적 의도는 역사이론과는 상관없는 단지 당위의 차원이거나 실천적 지향의 요청이게 될 것이다. 결국 하버마스는 해방의 문제에서 역사이론적 부담을 떼어 내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일까? 물론 해방의 문제를 하버마스가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역사이론과 연결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하버마스에게는 아예 역사이론에 해당하는 이론틀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기와 달리 후기에 가서 해방에 관한 문제틀을 하버마스가 고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세 가지 모두 역사철학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하버마스의 사회진화론이 역사철학의 계승과 극복이라는 성격 모두를 갖는다고 주장했을 때 하버마스에게서 해방의 의미와 역사이론의 가능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둘의 연관성을 밝혀야 한다. 일단, 하버마스의 초기 작업에서 이 문제가 어떻게 짚어지고 있는지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하버마스의 초기 작업에 있어서 이 문제를 살피는 것은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서술시기와 관련해서 미묘한 입장 변화가 보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자신의 작업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1963년도에 첫판이 나온 『이론과 실천』에서는 해방과 역사이론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보려고 한다. 그는 여기서 마르크스를 칸트와 헤겔과 비교시키고 있는데 칸트에 있어서 "실천이성은 도덕적 행위에 대한 규제적 기능만을 갖기 때문에 역사의 의미는 역사이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이론과 실천』S 276)는 것이다. 반면 헤겔에게 있어서 역사의 의미는 인류가 의지와 의식을 가지고 역사를 만들어갈 때 드러나게 되므로 해방에 대한 지향은 그 자체로 역사적 과정이게 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어떠한가? 마르크스는 실천을 다시금 역사이론과 연결시키기 위해 헤겔로 되돌아가려 한다고 하버마스는 본다. 즉 마르크스에게 역사의 의미는 자기모순으로부터 인간성을 해방시키는 것으로 이해한 헤겔의 입장을 따른 것이게 된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소외의 극복, 해방의 문제를 헤겔 식으로 역사이론에 연결시키려 하는 데에는 반대한다. 즉, 인간이라는 類가 역사 전체에 총체적인 주체로서 자기모순의 필연적 과정에서 완결된 역사[해방]을 향해 목적적으로 나아간다는 역사개념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과 역사이론에 대한 관계는 그 이후 하나의 독립적인 이론틀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이 시기 헤겔-마르크스의 총체론적, 환원적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은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을 통해 이어지게 되지만 이 역시 해방과 역사이론의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해명이라기 보다는 마르크스 역사철학의 환원적 성격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과 상호작용에 관한 2단계적 접근을 정밀화시키려는 시도로 간주할 수 있다. 오히려 『인식과 관심』이후에 하버마스의 작업은 자기반성이 비판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이려고 했던 데에서부터 비판적 사회이론의 규범적 근거를 확립하려는 데로 방향을 이동하게 된다. 즉 1968년 프랑크푸르트 대학 취임강연에서는 '자기반성'이 실체화된 권력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주체를 해방시킨다고 말하지만 71년『이론과 실천』서문에서는 특정한 행위의 수행을 가능케 하는 '합리적 재구성'이라는 의미에서의 주체의 반성과, 이러한 과정들과 다른 과정들에서 생겨날 수 있는 왜곡들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의미하는 반성을 구분하게 된다. 비판적 이론의 규범적 근거 마련은 바로 합리적 재구성으로서의 반성개념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보편화용론을 거쳐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해방과 역사이론의 관련틀은 이후의 작업에서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 것일까? 하버마스가 헤겔-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을 극복하면서도 그 역사철학적 전제로서의 해방과 역사이론의 관계를 부인했다고는 보지 않기에, 이후의 하버마스 작업에서 이 문제틀을 다시 복원해 낼 필요가 있게 된다. 따라서 '해방'이라는 말이라든지 '역사이론'이라는 말이 하버마스의 이후 작업에서 그대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역사철학적 전제에 대해 하버마스가 포기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면, 비록 용어는 다르게 변했을지라도 문제틀 자체를 새롭게 복원시킬 가능성은 존재하게 된다.
III. 사회진화론적 접근과 역사유물론의 재구성
지금까지 살핀 대로 하버마스의 이론적 작업에서 역사철학과의 관련성은 '단절적 거부'가 아니라 '재구성적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조명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후자의 내용을 앞으로 살피는 데 있어서 하버마스의 이론틀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70년대 이후의 작업에는 역사철학적 개념이 직접적으로 그대로 쓰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식과 관심』에서의 '비판'이라는 자기반성 모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비판' 그 자체보다는 비판의 규범적 근거제시를 위한 '재구성' 쪽으로 하버마스의 이론작업은 중심이동을 하게 된다. 즉 이러한 재구성에로의 이행은 해방적 관심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것으로 비판의 규범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버마스는 이미 71년 『이론과 실천 』신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후 자신의 작업을 암시하고 있다.
체계적으로 왜곡된 상황에 대해 의사소통이론의 골격은 그 장애물을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만일 이론이 보편화용론과 연계되어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전개되고 정확하게 주어진 유물론의 근본적 가정과 설득력 있게 매개될 수 있다면 문화적 전통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인륜체계, 세계상이 가진 구조 및 그에 대응하는 의식(儀式)의 발달에 관한 사회진화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밑줄은 필자 강조) (『이론과 실천』S 19)
이 장에서는 비판이론의 규범적 정초를 마련하기 위해 합리적 재구성의 성격을 띠고 있는 보편화용론과 사회진화론 중 역사이론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사회진화론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진화론의 적용으로서 역사철학 특히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을 하버마스가 어떻게 재구성하고 있는지도 보겠다.
3.1 사회진화론의 도입배경과 방법론적 성격
하버마스는 『인식과 관심』에서 실천적 비판의 성격을 갖는 자기반성과, 주체의 행위능력을 구성해 줄 수 있게끔 해주는 합리적 재구성으로서의 반성을 구분했었다. 그리고 이후의 작업에서는 자신의 이론이 규범적 근거에 있어서 불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고 합리적 재구성으로서 그 근거를 확보하고자 한다. 이 중 사회진화론은 합리적으로 재구성된 자아의 도덕의식 발달이론을 규범구조의 사회진화론으로 확장한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합리적 재구성의 방법은 촘스키의 언어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 방법은 하버마스에게 있어서 2단계를 거쳐서 사회진화론이 된다. 우선 인간의 일반능력과 관련된 수준의 재구성 작업인데, 여기서는 삐아제의 인지발달 심리학과 콜버그의 도덕발달 심리학의 도움을 받는다. 이 단계는 개체발생의 논리에 해당한다. 다음 단계는 규범구조와 관련된 사회의 발달논리에 대한 재구성작업이다. 즉 개체발생학에서 도덕의식의 발달유형을 연구한 콜버그에 기초하여 이러한 도덕의식의 각 단계들이 도덕적 법률적 체계에 대한 사회적 진화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하버마스는 본 것이다. 개체발달의 논리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 이전에 이미 하버마스는 초기에서부터 사회의 발달이 진화적 관점에서 재구성될 수 있음을 언급했었다.
사회적 진화과정에 있어서 영역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드러내는 논의(Diskurs)의 제도화는 사회진화론에서 생산력의 발달 및 통제능력의 확산과 관련시켜 설명해야 하는 혁신적 성과를 드러내 보여준다. (『이론과 실천』 S 31)
그런데 하버마스는 왜 역사발전이나, 진보라는 말 대신 '진화(Evolution)'라는 개념어를 사용한 것일까? '진화'라는 말은 역사와 관련이 맺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뜻 생물학적 진화를 떠올릴 수가 있다. 물론 하버마스는 자신의 진화개념이 생물학적 진화개념과는 똑같지 않음을 강조한다. '진보(Fortschritt)'라는 개념어가 일직선으로의 방향성과 목적론적 성격이라는 역사철학적 요소와 밀접한 관련을 맺기 때문에 진보라는 말보다 진화를 선호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진화라는 말은 일직선으로의 방향성이 아니라 가역적 성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며 게다가 진보와 달리 퇴보라는 말도 포함시킬 수가 있다. 아울러 역사 발전이라고 했을 때 발전(Entwicklung) 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선 발전의 담지자 내지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럴 경우 역사를 만들어 가는 단일 주체, 즉 류적 인간이 표상 되기가 쉽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이러한 역사의 거대한 주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버마스는 "집합적 주체의 역사보다는 보편적 능력의 진화를 제시한다." 따라서 역사에 있어서 인간 류라는 단일한 주체개념과는 상관없는 진화라는 말을 선호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물론 하버마스가 진화라는 말을 쓰는 직접적인 이유는 있다. 그것은 사회의 통시적인 진행에는 발달논리의 차원에서 재구성될 수 있는 학습과정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하버마스에게 있어서 사회진화는 학습과정의 발달을 의미하게 된다.
3.2 사회진화의 이원성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이 역사발전을 인간의 노동개념으로 환원시키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마르크스의 역사관에서는 생산력 발전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생산력 중심주의가 강조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하버마스는 인간의 역사가 사회적 노동으로 환원되는 것에 반대한다. 인간의 역사에는 이러한 '자연사적' 차원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발달구조를 끄집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마르크스가 인간의 고유한 특질로 강조했던 사회적 노동의 도구적 행위는 인간만이 아니라 원숭이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노동만을 인간의 특질로 삼기에는 불충분하다. 오히려 마르크스의 사회적 노동개념은 언어를 전제하는 사회적 규범체계에 의해, 즉 사회적 역할 체계와 규범체계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삶의 양식은 사회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가족적 조직원리라는 개념과 결합시킬 때에만 비로소 충분히 해명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역할 행위의 구조는 사회적 노동의 구조와 대비해서 하나의 새로운 발전단계를 나타낸다. 이것은 인류학의 도움을 받아 인류사를 재구성했을 때 확인할 수 있다. 즉 인류는 사회적 노동을 확립시킨 다음에 언어적 의사소통을 발전시켰으며 그 다음에 가서야 비로소 사회적 역할 체계의 발달이 마련될 수 있었다. 여기서의 마지막 차원에서 사회통합 형식이 나타나는데 이 단계에서는 상호주관적으로 확보되는 타당성을 문제삼으며 규범에 의해 규제되는 의사소통적 행위는 자연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적 혹은 전략적 행위와는 구분된다. 다시 말해서 의사소통 행위의 규칙, 즉 상호주관적으로 타당하고 의식(儀式)을 통해 보증되는 행위규범들은 도구적 행위의 규칙으로 환원될 수 없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사회진화는 도덕적, 실천적 통찰에서의 발전과 경험적, 분석적 지식의 발전이라는 학습능력의 이원적 발전을 의미한다. 전자는 자연정복과 기술적 차원에서의 발전을 의미하며 후자는 새로운 수준의 사회 규범적 지식이 달성되는 생산관계의 발전이게 된다. 특히 후자에서의 학습결과는 문화적 전통으로 전승되는데 문화전통은 사회의 재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란과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인지적 역량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규범구조들은 단순히 사회 재생산 과정의 발전국면과 체계문제들의 형태에 단순히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학습과정에 의존하는 내적 역사를 갖는다. 그런데 이러한 이원성에서도 하버마스는 한 쪽의 우위성을 주장하는데, 즉 규범구조의 발달이 "사회적 진화의 주도적 역할을 한다"(RHM 35)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사회조직의 원리란 새로운 형태의 사회통합을 의미하는데 우선 사회통합이 이루어져야만 가용한 생산력을 사용하거나 새로운 생산력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진화를 학습능력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학습메커니즘으로 보았을 때 이점과 그 기능 및 한계는 무엇이겠는가?
1) 마르크스의 생산력 중심주의, 환원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사회진화의 이원성에서는 생산력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사회통합의 형식들에 대해서도 발전단계를 나눌 수 있게 된다.
2) 학습메커니즘에서는 인간의 이성성(Vernunftigkeit)을 강조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진화의 기준을 왜 하필이면 학습능력에 초점을 맞추었는가? 물론 여기서의 학습은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차원, 유적 인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포괄적 개념이다. 학습이라는 말을 썼을 때에는 도구적 행위뿐만 아니라 규범과 관련된 행위의 학습도 포괄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자연사로 동화되지 않을 수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진화에 근원적인 메커니즘은 인간의 안 배울 수 없는 능력(Nicht-nicht-lernen-Konnen)에서 발견된다고 하였다. 즉 인간에게는 노동보다 포괄적으로 이러한 학습능력이 더 본질적인 것이다.
3) 학습메커니즘으로서의 사회진화는 인간 사회에서 문제가 어떻게 발생하고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재구성적으로 말해줄 수 있지만 그 해결과 결과까지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즉 사회진화에서는 예측기능이 없다. 학습메커니즘을 통해서 인지능력의 성장, 생산성 향상의 변화과정 및 체계문제의 발생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생겨난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열려진 문제로 남게 된다. 다시 말해서 발달된 사회 속에 구현되어 있는 잠재적인 인지능력이 실제 사회의 운동이나 혁명과 같은 움직임을 추구하는 도덕적, 실천적 의식까지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학습메커니즘이 실제 역사에서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겠는지 살펴보자.
인간 사회의 진화적 학습과정은 다음과 같은 의사소통의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①前관습적 단계 ② 관습적 단계 ③ 탈관습적 단계. ①에서는 행위결과만이 중요하고 ②에서는 행위동기가 행위결과와 독립적으로 평가되는 가운데, 규범체계들과 일치하는가가 중요해진다. 그리고 ③에서는 규범체계들은 자연발생적(naturwuchtig) 타당성을 잃고 보편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정당화가 필요하게 된다.
학습과정의 발달이라는 이러한 하버마스의 사회진화에 대해 몇 가지 문제가 지적될 수 있겠는데 하나는 개체발생의 차원을 사회발전에 적용시켰다는 범주착오의 오류에 대한 지적이며 다른 하나는 역사발전을 인간의 지적성장의 증대로 국한시킨 일종의 또 다른 환원주의가 아니겠는가라는 의문이다. 첫 번째 지적에 대해서 개체발생으로부터 사회발전수준에 대해 성급한 결론을 이끌어서는 안 된다고 하버마스 자신이 말하고 있다. 사회 진화적 학습과정은 전적으로 사회에만 속할 수 없고 또 전적으로 개인에게 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개체발생의 학습체계는 인성체계이며, 사회화된 주체만이 학습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체계도 사회화된 주체들의 학습능력을 이용하여 현존상태를 위협하는 조절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결국 사회의 진화적 학습과정은 그 사회에 속하는 개인들에 능력에 의존하지만 여기서의 개인은 이 능력을 고립적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활세계의 상징적 구조[언어, 문화, 관습 등]에 적응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의문에 대한 해결은 다음과 같다. 지식의 내적 성장이 곧바로 사회진화를 초래하지는 않게 된다. 즉 학습능력의 증대는 "사회진화의 한 필요조건" (RHM 162)일 뿐이다. 따라서 지식의 내적 성장과 더불어 이에 상응하는 제도화가 이루어져야지만 사회진화가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제도화 특히 규범구조의 제도화를 강조하는데 이는 마르크스가 생산관계에 비해 생산력을 강조한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그에 따르자면 "새로운 제도적 틀이 출현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때까지 해결되지 못했던 체계문제들이 축적되어 있는 잠재적인 인지능력이 도움을 받아 처리되고 그로부터 생산력 증대가 결과"(RHM 162)하게 된다.
3.3 사회진화의 보편성과 우연성
근대 역사철학적 사유는 역사발전에 있어서 연속성, 필연성, 법칙성, 목적성 등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이런 특징들과 달리 실제 역사에서 있을 수 있는 우연성, 비연속성 등을 자신의 사회진화론에서 주장한다. 아울러 역사발전에서 강조되는 역사의 주체문제에 대해 거부의 입장을 제시한다. 근대 역사철학은 사회적 노동을 유적 역사에 결합시킬 때 거대주체의 진행과정, 즉 일직선적, 필연적, 연속적, 상승적 발전을 거친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유적 역사에 대한 교조적 이해는 18세기 역사철학의 기획들과 일련의 약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진화의 우연성을 말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발달논리(Entwicklungslogik)'와 '발달동학(Entwicklungsdynamik)'을 구분한다. '발달논리'는 덜 포괄적인 데서 더 포괄적인 데에까지 이르는 구조들의 위계에 대해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유형(Muster)에 해당한다. 발달동학은 이에 반해 실제 사회적 기체들이 발전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를 띠므로 법칙화될 수 없으며, 엄밀한 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발달논리는 합리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므로 외적 요인들에 의존하는 발달동학과는 달리 세계상(Weltbild) 구조가 가지는 역사적 진화의 보편적인 내적 논리를 가질 수 있다.
1) 발달논리의 보편성이 발달동학의 필연성을 결코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발달논리에 따르자면 기존의 사회진화적 학습구조들은 그보다 더 포괄적인 구조들이 형성될 수 있는 논리적 공간을 규정한다. 그러나 도대체 그로부터 새로운 구조들이 형성될 것인지, 만약 형성된다면 언제 그럴 수 있는지는 '우연적인' 주변조건들과 경험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학습과정들에 의존한다. 특정한 사회가 왜 특정한 발달수준에 도달했는가 하는 발생론적 설명은 하나의 체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하는 동학적 설명과는 독립적인 것이다. 결국 진화의 도정이 '어떻게' 수행되는지는 열려진 문제로 남게 된다.
왜 한 사회가 진화적 도정을 수행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리고 일정한 사회에서는 사회적 투쟁이 사회통합의 새로운 형식을 의미하고 따라서 사회를 새로운 발전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단지 '분석적인' 대답만이 설명할 수 있다. (RHM 162)
2) 사회진화에는 일직선적인 방향성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하버마스는 주장한다. 다양한 길을 통해서도 동일한 발전 수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진화의 단위들이 많으면 이러한 일직선은 의심스럽게 된다. 진화는 충분히 다발적일 수 있다. 사회진화에서 가역적인 것과 비가역적인 것을 잘 구별해야 한다. 진화의 과정은 가역적일 수 있다. 즉 진화는 때때로 퇴보나 심지어 소멸도 불러올 수 있다. 다만 비가역적인 것은 한 사회가 진화에 포섭되는 한에서 경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구조적 계기이다.
3) 사회진화에서는 신학적, 자연 목적론적인 목적을 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회진화에는 구체적으로 정해진 어떤 도달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진화적으로 방향을 갖는 누적적 과정이 있을 뿐이다.
4) 사회진화는 진화를 수행하는 '유적주체'를 가정할 필요가 없다. 진화의 담당자는 개별 사회들과 그 사회들 속에 통합되어 있는 행위 주체들이다. 진화는 거대 주체에서 그것이 얼마만큼 진화했는가에 따라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의 차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조 형성적 과정의 경과 속에서 사회와 개인은 자아 정체성과 집단 정체성의 변화와 더불어 함께 변화한다.
집단으로 모인 개인들이 진화과정 자체에 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사회진화가 나아간다고 해도 여기서 결코 역사의 거대 주체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상호주관적인 높은 수준의 집단 정체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뿐이다.(RHM 154)
1)부터 4)까지를 사회진화의 우연성, 보편성, 거대주체의 부재를 의미하는 특징이라고 했을 때 몇 가지 문제점들이 지적될 수 있겠다. 우선 발달논리와 발달동학을 구분함으써 사회진화의 필연성을 거부한다고 했는데, 그렇다하더라도 발달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에 대한 '개연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발달논리가 학습과정의 구조를 재구성해서 얻어진 것이라 해도 단계별로 커다란 사회진화의 구조적 수준이 구획된다고 했을 때, 그 구조들의 변화와 움직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버마스는 발생론적 설명과 동학적 설명을 나눈다고 했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사회진화가 비록 퇴보를 할 수 있다는 데서 가역적이지만 일단 이루어진 진화는 누적적 과정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했을 때 이러한 과정에서 보다 고차적인 수준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우연적으로 발생한 문제들에서 학습능력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 뒤에, 즉 진화적으로 성공한 뒤에, 멈추지 않고 계속 왜 진행하는가라는 물음과 관련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사회진화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미사회는 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똑같지만 인간의 사회는 그렇지가 않다. 한 번의 성공적인 진화 뒤에도 정체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 사회의 진화적 특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하버마스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인간에게 닥친 문제들이 일정한 수준에서 해결되었다고 해서 문제의 모든 수준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력과 사회통합의 더 높은 발전상태는 확실히 이전의 사회구성체가 맞이하였던 문제들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새로운 발전상태에서 또다시 제기되는 문제는 오히려 낡은 문제들과 비교했을 때 더 강력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사회진화 학습 자체를 촉진시키는 원리는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부정의 원리와는 다르게 된다. 부정과 모순을 통해 부정의 부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화의 원리는 아니게 된다. 대신 사회진화적 학습과정 자체는 각 발전단계에서 새로운 결핍의 차원, 새로운 역사적 필요를 의미하는 새로운 원천을 발생시키게 된다.
마지막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사회진화가 다발적일 수 있다면 이는 진화의 상대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이다. 즉 사회진화의 주체를 단일한 유적 역사에서 찾지 않고 개별사회와 행위주체들에서 찾게 된다면 진화의 주체는 다원적이고 진화 자체는 동시다발성을 의미할 수도 있게 된다. 이럴 경우 세계전체 사회에서 똑같은 진화가 이루어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언뜻 실제 역사를 보거나 현재 사회를 보더라도 각 역사마다 학습수준의 발달시기도 달랐으며 지금의 각 사회들 역시 일치된 수준을 보이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여기서 진화의 보편성은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19세기와 20세기에 유행하였던 스펜서식의 사회진화론이 인류학적 연구와 문화상대주의를 통해 퇴색되었을 때 하버마스의 사회진화론 역시 문화상대주의와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이 문제는 사회진화론과 실제 역사와의 관련성을 놓고 볼 때 아주 중요해질 수 있다. 즉 사회진화론이 어느 정도 역사이론적 성격을 갖거나 역사이론과 관련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근대 역사철학이 역사를 합리적으로 파악하려고 시작했고 개별적인 역사기술과는 다른 차원의 연구를 추구했지만 결국 실제 역사와의 심각한 불일치로 인해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것은 이 논문 II 장에서 지적했던 바이다. 하버마스의 사회진화론이 비록 역사이론 그 자체는 아니지만 인간에게 있었던 과거의 시간적 차원―굳이 '역사'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면―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작업이라면 실제 역사와도 어느 정도 관련성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만약 실제 역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사회진화론의 이론적 가치는 상당히 반감되거나 심지어 무의미해질 수까지 있다. 다만 하버마스의 사회진화론이 상대성에 빠지지 않고 보편성을 나름대로 획득할 수 있음을 지적할 수는 있다. 이미 하버마스의 사회진화론에서는 발달논리와 발달동학을 구분하는 전제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문화상대주의적인 입장으로 비판했을 때 발달동학이 적용되는 경험적 역사에 초점을 맞추면 이 전제를 무시한 셈이 된다. 사회진화가 보편적이라는 것이 모든 역사에서 똑같이 그렇게 보편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학습수준의 발달을 재구성했을 때 일정한 보편적 내적 논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 역사와 사회가 서로 상대적으로 보일 수 있는 학습수준을 겪었더라도 일단 그 학습수준의 발달을 재구성한다면 발달논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게 하버마스의 주장이다.
3.4 소외의 지양, 해방의 문제
근대 역사철학에서 특히 마르크스에서 소외의 문제는 인간 역사에서 실질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문제였으며 이에 대한 지양은 역사 철학이 제기한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다. 이를 좀더 일반화시켜서 말한다면 인간에게 고통과 부자유를 가져다주는 문제가 역사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며 이에 대한 극복 역시 역사적 차원에서 조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버마스에게는 소외의 문제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혹은 소외 문제 이외에 다른 차원의 문제가 역사적 차원에서 인식될 수 있는 것인가?
우선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의 소외개념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고 보며,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첫째는 소외라는 개념을 인간의 유적역사 전체에서 발생하는 거대문제로 파악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주체로 류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거대주체를 상정하는 것에 대해 하버마스가 비판하는 논리와 비슷하다. 즉 소외가 역사 전체의 문제로 나타날 때에 그것은 역사의 어떠한 거대주체가 짊어지고 가는 문제로서 표상 되는데, 하버마스에 따르자면 이러한 역사의 거대주체는 생각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소외 문제 역시 역사 전체의 총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당히 제한적인 성격의 특수한 문제이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소외개념 자체가 경험적으로 의미를 많이 상실했음을 하버마스는 지적한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는 달리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의 광범위한 층에서 생활 수준이 상승했으므로 경제적 차원에서만 인간해방을 논하는 것은 실천적인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전체 역사에 나타나는 소외가 아니라 후기자본주의에 특수하게 나타나는 소외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게 된다. 즉 억압, 지배, 착취에 대한 의식은 단편화되면서 무의식적으로 체계에 통합되고 흡수되는 쪽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전 같으면 직접적으로 느꼈을 이러한 고통이나 부자유에 대한 의식이 체제 내적으로 흡수되어 더 이상 직접적으로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과제가 다시 중요해질 수 있다고 하버마스는 본다. 이데올로기 통합을 유지시키는 왜곡된 의사소통구조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 필요하며 이러한 비판과 극복의 규범적인 정초를 마련하기 위해서 도덕의식의 발달, 규범구조의 변화에 대한 통찰도 중요해지게 된다. 따라서 소외의 문제는 더이상 역사 총체적인 성격을 갖지는 않지만 특수하면서도 '역사적인' 문제로 파악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의 구조라는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이렇게 생기는 문제들이 극복되고 해결된 결과는 어떤 상태인 것일까? 일단 그것은 '해방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방된 사회와 관련하여 하버마스는 역사적인 과정에서 그 상을 그려내고자 한다. 우선 의사소통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통합은 각 구성원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는 역할체계를 동반하는데 이러한 역할체계에는 제재메커니즘이 필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원 각자의 행동동기에 대해 규범화된 행동기대가 필요할 때 이를 강제하기 위해서 제재메커니즘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재메커니즘은 역사적으로 물리적인 힘에서 정치적인 지배로 발달했다. 결국 '해방된 사회'는 마지막 단계의 정치적 지배마저 해소되는 가운데, 의사소통의 전형인 언어행위에 전재되어 있는 자율성과 책임(Mundigkeit)이 실현되고,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성적인 논의(Diskurs)상황이 실현되는 사회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적인 논의상황이라는 것이 다소 유토피아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버마스 스스로 역사의 궁극적인 유토피아를 상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었는데 이러한 이상적인 논의상황이라는 것이 그러한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닐까? 물론 하버마스는 자신의 이러한 언급이 미래에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목적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하버마스에게 있어서 왜곡된 의사소통이 극복된 상태는 미래화된 시제 속에, 더 나아가 역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극복해야 할 상태로서 현재에 놓일 수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하버마스의 소외 개념이 너무 일면적이라는 지적이 있어 왔다. 호네트(Honneth)의 경우 하버마스가 노동의 소외문제를 후기자본주의에서는 이미 유효하지 않은, 즉 완결된 문제로서 파악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자면 후기자본주의에 있어서조차 노동과 관련된 소외의 문제를 충분히 언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버마스가 노동의 소외 문제 이외에 다른 문제들을 후기 자본주의의 핵심문제로 다룬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노동의 소외의 문제를 비판했던 것은 일차적으로 그것이 총체적 성격을 가질 수 없음에 한해서였다. 경험적인 차원에서 노동의 소외의 문제가 현재에도 아니 미래에도 생길 수 있음에 대해, 그것이 충분히 타당한 경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하버마스 역시 이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의 문제가 하버마스에게 있어서 총체적인 인간소외의 문제가 아니라 특수하면서도 역사적인, 왜곡된 의사소통의 문제로 나타날 수 있다고 했을 때 해방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이 바뀌거나 심지어 '해방'이라는 말 자체가 직접적으로 쓰이지 않는다고 해도, 해방이라는 문제틀 역시 무의미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문제는 이러한 해방과 소외의 지양이 얼마만큼 역사적인 차원에서 파악될 수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단, 하버마스의 비판대로 이 문제는 인간의 시원부터 종말까지 따라다니는 필연적, 총체적인 차원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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