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3. 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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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줏간 소년 : 소수자의 역사, 유쾌한 살인
1. 소설? 영화? 그 행간에서 찾아 낸 아일랜드의 과거
감독 닐 조단은 수상경력이 있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Patrick Mccabe의 동명소설“The Butcher Boy"(1992)를 영화화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은 바쁘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카메라는 끊임없이 12살 소년 프랜시 브래디의 표정과 행동을 담아낸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치밀한 배경묘사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은 ‘도저히 예뻐할 구석이라고는 없지만 은근한 성원과 더불어 충고와 질책을 보내고 싶은 프랜시의 광기와 잔혹함, 짖궂은 장난’만을 쫓아가서는 놓치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1950년대 아일랜드의 편집증?무력증?광기?망상을 그리고 싶었던 닐조단은 TV라는 매체를 곳곳에 배치하여 핵에 대한 공포와 매카시즘의 결탁을 조롱하고 있다. 게다가 프랜시를 더블린으로 데려다 준 트럭기사, 더블린 식당의 여주인, 동네 상점에서 수다떠는 아줌마들, 프랜시가 분도랜으로 가다가 만난 사내 등도 이러한 비아냥에 동참한다. 끝내 프래디가 외친다. ?죽어라, 흐루시초프!? 닐조단의 소설과 영화의 경계를 넘나들기 위한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프랜시의 우울한 현실세계-알콜중독자 아빠, 정신이상자 엄마, 그리고 가난-와 공상과 모험의 세계를 넘나든다. 장면 곳곳에서 성모마리아와 대화를 나누고 핵폭발로 마을은 폐허가 되고 외계인이 등장하고.
그렇다면 등장인물인 프랜시, 그의 친구 조, 누전트 부인과 그의 아들 필립 누전트, 그리고 프랜시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의 성격과 행동에서 어떤 전형성(典型性)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인물들을 통해 전형성을 추출한다는 것은 곧 가변성과 다양성을 배제한 정형화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위험한 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에서 아일랜드의 역사가 읽혀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더블린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닐조단이 마이클 콜린즈(Michael Collins, 1996)에 이어 ‘푸줏간소년’을 영화화하면서 ‘아일랜드의 역사를 아이러니하게 회고’하고자 한 의도를 간파한 때문일까.
savagely funny and deeply tragic : 닐조단은 이 ‘blackly tragi-comic film'의 情調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 영화의 혹은 소설의 행간에는 그렇게 스스로를 ’가장 슬픈 나라‘라고 불렀던 아일랜드의 과거와 그 과거의 슬픈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오늘‘을 살아야 하는 아일랜드인의 절망이 깊숙이 배여 있다. “비극적 역사”“비극적 과거”라는 표현의 일상성. 1171년부터 시작되어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 성립, 1948년 영연방 탈퇴까지 750년 넘게 지속된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정복과 지배. 이것이 아일랜드에서 모든 것을 역사로 귀결시키는 관성의 법칙이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다.
2. 노예가 아니라 여동생으로 존중받기를!
내가 잉글랜드에 갔을 때 이전부터 당신네 같은 부류를 알았지
잉글랜드에서 바람만 잔뜩 들어 돌아와 마을의 주인인 양 휘젓고 다니는 누전트 부인이 프랜시의 가족에게 욕을 퍼붓는 장면의 첫 대사다.
알로삼촌이 런던에서 성공하셨다지? 런던에서 오시는데 잘 해드려야지
분수대에서 얼음을 깨고 있는 프랜시에게 다가온 신부가 내뱉은 대사다. 누전트 부인과 신부, 이 마을에서는 권력을 소지한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잉글랜드는 따르고 싶은 오빠이자 언니다!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정복은 1171년부터 시작되었다. 그후 줄곧 잉글랜드의 위협에 시달리던 아일랜드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의 와중에 아일랜드가 그들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지한 잉글랜드에 의해 1800년 완전 합병되었다.
19세기 이래 아일랜드 민족운동은 자치운동부터 출발하는 특징을 보인다. 자치지향적인 민족운동은 1823년 다니엘 오코넬(O'Connell)의 합병법 폐지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아일랜드의 토착지주계급 출신인 그는 합병법폐지연합을 설립해서 합병법을 폐지하고 아일랜드에 독자적인 의회를 설치할 것을 요구하는 대중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 혁명적 수단을 사용하는데는 반대했다. 그리고 잉글랜드가 아일랜드에 구빈법을 적용하는데 반대하는 등 아일랜드 사회문제에 관해서는 보수적 입장으로 일관했다. 그후 찰스 스튜어트 파넬(Parnell) 등 아일랜드의회당 지도자들이 오코넬의 주장을 계승했다. 그들은 아일랜드 특권계급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치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아일랜드 하층계급들의 자신들에 대한 적대감을 잉글랜드에 대한 공동투쟁으로 돌릴 수 있다는 확신때문이었다. 식민지민이라는 동일한 처지였지만 식민정책의 수혜자가 된 이들에게 절실한 것은 잉글랜드와의 완전한 결별과 자립이 아니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형제자매로서의 새로운 관계의 재정립이었다. 그들에게 잉글랜드인으로부터 불성실하고 게으르고 자립능력이 없다고 멸시받는 아일랜드의 민중은 그러한 새로운 관계정립의 장애물인 뿐이었다. 돼지!
매일 술이나 퍼마시고 돼지보다 나을게 없어, 애가 그 모양인 것은 당연하지. 필립을 괴롭힌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돼지! 너희들은 모두 똑같아
3. 오늘날 인간의 운명은 정치용어로 그 의미를 나타낸다.
조는 프랜시와 피로서 우정을 맹세한 사이다. 그러나 프랜시가 소년원에 가 있는 사이 누전트네와 가까이 지내고자 하는 아버지의 바램과 금붕어까지 선물해 가면서 자기 아들인 필립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 누전트 부인의 노력에 굴복한 조는 결국 프랜시의 곁을 떠난다. 선택의 순간마다 갈등하지만 누전트 부인의 동생들의 협박에, 기숙학교 신부의 호통 앞에 번번이 굴복한다. 그러나 종국에 정신병원을 나오는 프랜시를 맞아 준 것도 바로 조다. 또한 조는 필립을 헛간으로 유인해 흠씬 패버린 프랜시에게 몹시 화를 낸다. 폭력은 不正義! 그리고 프랜시가 신부의 성희롱사건을 고백하자, 마치 프랜시를 벌레보듯 하면서 달아난다. 불결한 이야기야!
조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잉글랜드식 교육을 받고 아일랜드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면서도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동요했던 지식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끊임없이 갈등하고 동요하면서도 일생동안 ‘아일랜드’ 문제에 고뇌했던 시인 예이츠가 이 영화의 배경인 1960년대 초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했다.
어떤 민족도 이보다 더 큰 박해를 받지 않았으며 그 박해는 오늘까지도 완전히 멈춘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과거가 우리들 속에 항상 살아 있으니 어떤 민족도 우리만큼 증오하지 않으리라. 여러 순간 증오가 나의 삶을 해치고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한 나의 나약함을 스스로 비난하곤 한다. 그 증오를 떠도는 농부 시인의 입으로 표현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비록 나의 결혼이 직계로 내가 아는 첫 영국인과의 결혼이지만 모든 우리 가족 이름들이 영국 것이라는 사실과 내 영혼이 존재하는 것은 셰익스피어, 스펜서, 블레이크 어쩌면 윌리엄 모리스 등의 영국 작가들과 내가 생각하고 쓰고 말하는 영어 덕택이라는 사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영어를 통해 내게 왔다는 사실들을 상기한다. 이처럼 나의 증오는 사랑으로, 나의 사랑은 증오로써 나를 고문한다.(W.B.Yeats, "A General Introduction for My Work" Essays and Introductions, 1961)
매력적인 여자를 안아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정치에 몰입해야만 하는 현실을 안타까와 하는 시(‘정치’)를 남기기도 했던 그는 그러나 아일랜드어로 쓰인 문학만이 진정한 문학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저항했다. 아일랜드가 영어를 수용하면 할수록 아일랜드인이 더욱 민족주의적이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실상 19세기를 거치면서 아일랜드에서 영어가 경제적 상승의 길로, 아일랜드어가 가난과 사회적 열등의 표지로 수용되면서 영어사용이 급증했다. 아일랜드어로의 복귀에 노력하던 하이드의 경우, ‘이대로 가다가는 아일랜드는 민족적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모방자의 나라, 서유럽의 일본이 될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어쨌든, 다양한 견해차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민족주의 담론의 선전자로서의 책무를 마다않던 부류의 지식인들의 정치투쟁 최정점에는 ‘지식인혁명’이라고도 불리우는 1916년의 부활절 봉기가 있었다. 아일랜드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공화주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시작된 1916년 4월 24일의 부활절 봉기 당시, 더블린 중앙우체국 앞에서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 1916년”을 낭독한 사람은 시인 패트릭 피어스(Pearse)였다. 봉기에 대한 잉글랜드의 대응은 잔혹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봉기는 전쟁(제1차 세계대전) 이라는 국가존망의 위기에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던 차에 배후에서 칼로 찔린 격이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잔인한 보복은 오히려 급진적인 봉기에 대한 대중적 동정과 지지를 촉발하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4. 굶주림, 유랑 그리고 모멸의 역사
다 찢어진 속옷을 입고 술주정뱅이 아빠와 자살중독증 환자인 엄마의 부부싸움을 지켜봐야 하는 프랜시. 아빠는 자신의 절망을 트럼펫으로, 때로는 고장난 TV-어쩌면 자신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화면에 질려서-를 박살내거나, 프래디를 때리는 것으로 해소하고, 엄마는 성공한 삼촌을 위해 온 집안 가득하도록 케익과 빵을 만드는 것으로 세상에 대한 공포를 은폐하고. 엄마의 자살, 그리고 죽은 아빠 얼굴에 달라붙는 파리를 쫓으며 이별의 순간을 연장하는 프랜시. 아일랜드 민중의 절망! 아일랜드 민중의 공포!
1800년 합병 이후 아일랜드 역사에서 가장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대기근’(1845-49)이다. 그 사건을 노래한 시가 지금도 여전히 창작되고 있고 150주년을 기념하는 대기근박물관이 만들어질 정도로.
상처
이제 내게는 그 아픈 사람이 했던 말을
단 한마디도 되살릴 기회가 없다
내 증조모의 창문을 두드리며
빵 한 조각을 구걸하며 했다는 말
병에 걸린 숨결에 전염될까봐
고통받는 서부의 오두막들에서 날아온 지독한 병
검은 감자줄기의 포자들
그르렁거리는 가슴에 든 독으로 얼룩진 침
그러나 증조모는 천성이 그러셨듯이 얼른 대답했고
대가로 기근의 열병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 우연한 만남이, 그 짧은 대면이
나에게는 내가 아일랜드인임을 영원히 기억시킨다
내가 간직하는 많은 것들이 그들의 환상과 달라도
그들이 상찬하는 많은 것들을 같이 나눌 자격이 없어도
그 여인의 죽음에서 나는 내 조국을 본다
그 오래된 상처에서 또다른 상처를 본다(존 휴잇, 1991)
대기근은 약 100만명이 아사하고 약 180만명이 굶주림을 면하고자 유랑을 떠나는 대재난을 초래했다. 19세기에 치러진 어떤 전쟁도 한 나라에 이토록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 준 적은 없었다.
거대한 이민의 물결이 끊임없이 서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다수 이민자들은 아일랜드의 농민과 날품팔이 인부들로, 신대륙에서 운명을 개척하고자 구대륙을 떠난 다섯 사람 중 최소한 네명이 아일랜드계로 추산된다. 감자기근과 콜레라가 만연하여 비참한 나날이 이어졌고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수는 갈수록 늘고 있다.(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 1850년 7월 6일)
잉글랜드의 공업도시로 몰려가 빈민가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아일랜드인들은 차별대우를 감내해야 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아일랜드인들도 도시빈민가로 흘러 들어갔다. 생활의 불안정으로 유랑하는 그들이었지만 어디를 가든 자기들끼리 모여 살았다. 이민자의 증가, 차별대우와 멸시, 고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관심으로 아일랜드공동체는 자의식이 강하며 활기찬 사회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않는 고국의 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존 F 케네디가 바로 대기근으로 인한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이었다. 그의 대통령 당선에 대한 자긍심, 그것이 바로 정신병원 진찰실에 걸려 있던 케네디의 사진으로 묘사되고 있다. 굶주림과 유랑, 그리고 모멸의 역사. 그 기원으로서의 대기근은 아일랜드의 민중에게 잉글랜드의 범죄로, 민중에게 행해진 소름끼치는 살인으로 각인되었다.
5. 폭력의 신화
저 여자가 이사와 모든게 달라졌다.
누전트 아줌마가 나의 친한 친구와 모든 것을 빼앗았다.
사과서리를 하고, 통행세를 내라고 억지를 부르고,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고 배설의 유희까지 즐기던 프랜시의 누전트 부인에 대한 증오는 살인을 종결된다. 총을 쏘고 도살장에서 가져온 칼로 난자하고 결국은 목을 자르는 토막살인을 자행한다. 살인마? 새디스트적 악마! 유치장에 음식을 갖고 온 경관을 향해 프랜시는 한마디 던진다. “무슨 세상이 이래요?”
잉글랜드의 여동생 자리라도 차지하려는 족속과 굶주림과 유랑의 길을 떠나는 소위 ‘진정한 아일랜드인=민중’간에 타협은 쉽지 않다. 1920년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자치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 오랫동안 독립투쟁을 위해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공화주의자들이 이 자치법안의 수용여부를 놓고 분열되었다. 자치법안에 찬성하는 신페인당(마이클 콜린즈로 대표되는)과 절대독립을 주장하는 IRA로. 대립은 결국 2년(1922~1923)에 걸친 내전을 야기했다. 아일랜드인의 잉글랜드에 대한 증오를 예이츠는 이렇게 표현했다.
아일랜드로부터 우리는 왔다.
커다란 증오, 비좁은 공간이
처음부터 우리를 망쳐 놓았다.
어머니 자궁으로부터 갖고 태어났다.
이 광신적인 마음을(‘무절제한 발언에 대한 후회’)
해가 지지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식민지라는 너무나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현실은 ‘폭력의 신화’에 의해 위안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아일랜드에서 영아일랜드부터 시작된 혁명적 전사들에 관한 신화는 피니언과 신페인으로 이어져 최근의 IRA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지속되고 있다. 1848년 2월 혁명에 자극받아 조직된 영아일랜드에 처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식량배급이 어려워지자 대부분 흩어지고 남은 100명도 안되는 반란군이 경찰과 매코맥부인의 양배추밭에서 충돌한 것이 봉기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아일랜드는 폭력의 신화의 기원으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1858년 미국에서 결성된 피니언(Fenians) 역시 뚜렷한 성과없이 순교자를 배출하면서 신화화되었다고 한다. 이 피니언의 신화는 그리피스(Griffith)의 신페인(Sinn Fein)운동으로 이어졌다. 신페인당은 원래 폭력이 아닌 무저항, 비폭력집단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신페인당이 1916년 부활절 봉기에 참여하면서 사태는 달라졌다. 피어스는 피를 흘리지 않고는 구원도 없다는 유혈과 희생의 원리를 설파했다. 그의 유혈과 폭력의 메타포는 ‘우리는 아마 실수로 죄없는 사람들을 살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혈은 淨化이고 신성화’라는 주장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러한 신화의 계승자는 IRA(Irish Republican Army), 즉 아일랜드 공화국군이다. 그들은내전에서 패배했지만 무기를 반납하지도 조직을 해체하지도 않은 채 통일된 아일랜드 공화국을 목표로 계속 무력을 행사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잉글랜드에 폭탄공격을 감행한 IRA에 대해 아일랜드(에이레) 의회는 재판없이 그들을 유치하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5명의 지도자가 처형되었다. 이후 IRA는 아일랜드 자유국이 영연방에서 탈퇴한 후에는 북아일랜드 통합문제를 폭력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전사를 자임했다. 1980년대 초 범죄자 취급을 거부하고 정치범으로 인정받기 위해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다. 이 단식농성 끝에 죽은 IRA의 전사들에게도 순교자의 면류관이 선사되었다.
폭력의 신화는 폭력=不正義, 비폭력=正義라는 우리의 일상적인 도덕적 관점과 충돌한다. 비폭력 행동주의자의 상징, 간디는 비폭력이 정치적으로 효과적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고 또 모든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폭력은 본래부터 부정의한 것이다. 그러나 폭력에의 연루는 우리들의 사회적 실존조건이다. 폭력과 부정의 사이의 도덕적 등가성을 승인하는 것은 그러므로 不可한 것이다. 또한 폭력에 대한 비판이 삶이나 우리들 세계 속에서 폭력의 경제를 설정하는 작업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폭력이 흔히 증오/분노로부터 솟아오른다는 것은 상투어라는 점이다. 증오/분노는 고난과 고통에 대한 자동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없다. 아무도 불치의 병, 지진, 변화될 가능성이 없는 사회조건에 증오/분노로 반응하지 않는다. 오직 조건이 변화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있다고 느낄만한 이유가 존재하는 곳에 증오/분노가 일어난다. 오직 정의감에 어긋날 때만 증오/분노로 반응한다. 특정한 환경에서의 폭력은 정의의 척도를 다시 올바르게 맞추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 프랜시의 살인에서 맛보는 유쾌함!
6. 그래도 과거는 아름답다. 민족의 행복에 기여하는 역사?
아름다운 분도랜
아름다운 분도랜 은빛 바다를 끼고
황금해변이 펼쳐져 날 유혹하는 구나
언제나 따뜻하고 행복이 흐르는 곳
아름다운 분도랜 결코 잊지 못하지
이 영화에서 분도랜은 프랜시의 아빠, 엄마에게 신혼의 행복한 시절로 기억되는 과거의 장소다. 그러나 프랜시는 그 곳 호텔 식당에서 아빠가 과거에도 술주정꾼이었고 엄마를 돼지 다루듯이 두들려 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빠,엄마의 절망과 공포의 현실 속에서 ‘언제나 따뜻하고 행복이 흐르는 곳’으로 분식되고 미화된 과거의 기억들, 그것을 프랜시는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분도랜은 프랜시의 ‘옛날’도 잔인하게 파괴해 버린다. 분도랜의 기숙학교로 그를 찾아 간 프랜시를 조는 받아 들이지 않는다. “빨갱이가 누전트가 외계인이 잡아갔나?”프랜시는 자전거를 타고 분도랜으로 가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사내를 만난다. 그 아저씨가 내뱉은 한마디. “죄악의 도시, 분도랜”
아일랜드에서 과거는 민족주의라는 ‘도덕과 규범’하에서 기억되고 있다. 그들에게 역사란 ‘예속으로부터 벗어난 민족, 지하로부터 올라와 민족 생명의 모든 동맥이 적에 의해 정복되었음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회복해서 마침내 완전한 태양 빛으로 나온 민족의 이야기’다. 또한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지배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저항은 도덕적으로 옳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민족에 기여하는, 민족의 행복에 기여하는 역사를 써야 한다! 어떻게 역사가가 가치중립적인 입장에서 상처투성이인 아일랜드 역사를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민족주의로 무장한 과거의 기억 앞에 아일랜드는 1800년 합병 후에도 한동안은 재정과 보호관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으며 웨스트민스터에 대표를 보낼 정도로 다른 잉글랜드의 식민지에 비해 후한 대접을 받았다는 수정주의 역사가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이렇게 반문한다. : 아일랜드는 식민지적이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적이지 않았는가. 아일랜드는 대영제국의 병사, 여타 식민지의 정착민과 관리를 공급하면서 사실상 대영제국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던가. 아일랜드는 영제국이라는 착취기업의 하급관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민족주의라는 프리즘을 통한 과거에 대한 ‘신화화’, 그 폐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7. 상처투성이인 아일랜드, 그 치유자는 미국, 증오는 빨갱이에게로
빨갱이들이 케네디를 속인거야, 그놈들 버릇은 쉽게 고칠 수 있어, 폭탄 한방이면 된다고
내가 그 흐루시쵸프를 작살내겠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미국적 요소들. 인디언 흉내를 내는 프랜시와 조, 존 웨인의 서부영화, 타잔과 제인,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팝송조차 미국적이다. 그리고 소련과 미국간의 냉전의 찌꺼기, 매카시즘을 너무나 쉽게 내면화해버린 사람들의 광기어린 반응이 화면에 등장한다. 그들에게 소련과 흐루시초프는 호시탐탐 원자폭탄으로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악마다! 1960년대 초, 아일랜드는 너무나 미국적이다. 잉글랜드 식민의 ‘잔재’는 완전히 청산되었는가? 누전트 부인이 영국 갔다 온 것으로 위세를 부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것은 아닌 듯하다. 750년의 피식민의 역사를 가진 아일랜드인에게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개척자의 나라, 미국에서 아일랜드의 후손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상처받은 영혼을 충분히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영화 곳곳에서 등장하는 ‘빨갱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단서로 아일랜드의 역사에서 특이한 점 하나를 지적해 보자. 아일랜드는 식민경험을 갖고 있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현저하게 일천한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를 갖고 있다. 사회주의는 일찍부터 잉글랜드적 현상으로 인식되어 기피되었다고 한다. 그저 1916년 봉기에 노동자가 주축이 된 아일랜드시민군을 이끌고 사회주의자로서는 유일하게 참여했다가 처형당한 제임스 커넬리가 언급되는 정도다. 그런데, 그는 당시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독립이나 자치보다는 합병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상당기간 동안 민족주의자로 오해받을 만큼 상당히 ‘아일랜드적=민족적’인 사회주의자였다.
1차세계대전은 이 나라의 외적인 영국정부와 다른 강대국들 사이의 전쟁이다. 혹시라도 아일랜드에 독일군이 상륙한다면, 그들과 연합함으로써 우리의 의사에 반하여 우리를 이 전쟁에 끌어들인 강도 제국과 이나라의 관계를 최종적으로 끊을 수 있는 경우에는 우리가 그들과 연합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독립된 아일랜드에서 설 땅을 잃게 되고. 이 때 미국에서 불어 온 매카시즘의 선풍. 1950년 미국 국무부에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주장한 매카시 상원의원은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고조된 미국 내 반공여론을 기반으로 정계, 학계, 언론계 등에서 용공분자를 색출하고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 굴복시키는데 앞장섰다. 1954년 이후 광기어린 마녀사냥이 미국에서는 잠잠해졌지만 냉전이 계속되는 한,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치부되는 모든 것에는 ‘빨갱이’라는 라벨링이 여전히 계속되었다. 1960년대 초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프랜시는 중얼거린다. “조를 빨갱이가, 누전트가, 외계인이 잡아갔나?” 잉글랜드에 대한 증오가 빨갱이에 대한 증오로 대체된 것이다.
이 빨갱이에 대한 증오의 이미지를 공포와 결합시키는 것이 바로 원자폭탄이다. 호수에서 터진 원자폭탄, 한마디의 외침 “빨갱이야”. 그리고 조와 프랜시는 폐허가 된 마을을 걷고 있다. 종말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두 사람. 외계인조차 두려운 그들의 구원자는 FBI!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소간의 냉전이 무력대결로 치닫지 못한 것은 핵전쟁의 결과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 초는 냉전의 최종단계에 해당된다. 1962년 소련이 핵미사일을 비밀리에 쿠바에 설치하려 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서방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소위 ‘쿠바 미사일 위기’가 전쟁이 아닌 합의에 의해 종결되면서 냉전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근대와 현대의 시기구분을 원자폭탄이 처음 폭발했던 시점으로 잡는 학자가 있을 만큼 냉전기간 동안 원자폭탄에 의한 지구멸망의 공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늘 세계최후의 날의 가능성을 의식하면서 살았다. “세계가 여전히 존재한다면”,“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재깍거리고 있는 시한폭탄과 같은 나의 운명, 그리고 지구의 운명.
8. 조선은 동양의 愛蘭이요 애란은 서양의 조선이라
1800년 합병 이후 아일랜드의 역사의 궤적은 우리 역사의 행보와 흡사한 측면이 많다. 토착지주계급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자치운동. 사회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연합전선이었던 1916년의 부활절 봉기. 민중들의 유랑의 물결, 이민. 잉글랜드인에 대한 끊임없는 테러. 민족의 과거 역사를 신화화하고 과거를 망거뜨린 잉글랜드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역사가들. 빨갱이에 대한 적대감. 反英의 대체물로서의 親美. 등등
우리에게 낯설기만 한 아일랜드. 그러나 식민기 시기에는 일본이 '동양의 대영제국'을 꿈꾸었듯이, 식민지 조선의 처지는 대영제국의 식민지 애란, 즉 아일랜드의 처지에 다름아니라는 생각이 지식인 사회에 팽배했다. 당시의 언론매체는 아일랜드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특집을 기획하는 것은 물론 정치인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상세히 보도하고 논평했다. 식민지 지식인에게 우리 민족의 처지는 아프리카 혹은 아시아의 미개한 문화를 가진 식민지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최근 대영제국의 1등 식민지로서 식민지적이지만 제국주의적이기도 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기도 하는 아일랜드 근대의 자화상.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당혹스럽기만 하다.
2000년 1월 14일, 강사 : 고미숙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3. 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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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이름, 계급의 삼중주? :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고 미 숙
“난 저 사람 몰라. 거리에서부터 날 쫓아와서 겁탈하려고 했어.”
“그 사람 누군지 몰라.
“정말 누군지 몰라. 이름도 모르는 걸”
한 중년의 사내가 대저택의 베란다에서 다람쥐처럼 몸을 웅크린 채 죽어 있고, 베란다 안쪽의 거실에선 사내를 총으로 쏜 스무살의 처녀가 허공을 향해 멍하니 이렇게 읊조린다. 그녀는 정말 그의 이름을 모른다. 죽은 사내 또한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아니, 마지막에 알기는 한다.
“사랑해, 당신 이름을 알고 싶어.”
“내 이름은.... 쟌느.”
이것이 그가 그녀와 나눈 마지막 대사다. 이름을 아는 순간이 곧 죽음의 순간이라? 결국 그는 그녀의 이름과 자신의 목숨을 맞바꾼 셈인가? 대체 이름이 뭐길래!?... 아니다. 이름은 전부다. 한 개인이 차지하는 자리, 의미, 관념, 욕망 등등의 총체! 이 영화는 이름에 관한 집요한 탐구다. 무너져 가는 중년 남자와 한창 ‘물이 오른’ 소녀 사이의 광기어린 욕정이라는 다분히 통속적 내러티브는 이름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한 영상적 장치일 뿐이다.
이름이 부재하는 공간, 그 특이한 배치
고가도로 위를 지나는 전차의 굉음. 그 굉음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틀어막고서 욕지거리를 하는 중년 사내를 위에서 아래로 카메라가 훝어내리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의 뒤에 한 소녀가 생기넘치는 발걸음으로 그를 스쳐 지나간다. 이 장면은 영화의 뒷부분에서 반대의 상황으로 다시 변주된다. 시작과 끝이 교묘하게 맞물리게 구도를 짠 것.
잠깐! 그보다 앞서 베이컨의 그림 두 편이 스크린의 맨처음을 장식했음을 잊지 말자. 하나는 붉은 메트리스 위에 길게 누워있는 남자의 초상, 다른 하나는 안락의자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있는 역시 남자의 초상. 공통점은 둘다 얼굴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뭉개져 있다는 점.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자.
어쨋든 고가도로 위에서 엇갈린 두 남녀는 하나의 공간에서 접속한다. 물론 그 경로는 전적으로 이질적인데, 사내는 삶의 벼랑끝에서 은신처를 찾아온 것이라면, 소녀는 이제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거기로 흘러든다. 그들은 거기에서 오직 몸의 느낌만으로 섹스를 나눈다. 사후적 해석이긴 하지만, “사내는 허무의 극점에서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위반으로, 소녀는 모든 것이 풍요로운 상황에서 느닷없이 맞닥뜨린” 일탈의 욕구가 ‘전기적 접속’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공간은 하나의 ‘특이점’이다.이정우, ?인간의 얼굴? 제 1장 ?정체성의 뿌리?(민음사, 1999)
이들의 말없는 섹스는 이 공간의 배치에서만 가능한 무엇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말, 즉 로고스가 부재한 공간이 만들어낸 고유의 배치! 그리고 일단 그렇게 되자마자 이 공간은 그저 하나의 임대아파트가 아니라, 외부와 차단된 밀폐된 공간으로 변이된다. 사내는 이 공간에서 무엇보다 이름을 지워버리고자 한다.
두 번째 섹스 뒤에 그들이 하는 첫 번째 대화.
(소녀)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사내) 난 이름이 없어.
(소녀) 제 이름이 궁금하지 ...
(사내) 아니, 이름따윈 필요없어. 당신이나 나나 이름이 없어. 여기선, 아무도 이름을 갖지 않
아. 당신에 관한 건 아무 것도 알고싶지 않아.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는지 ...
(소녀) 미쳤군요.
(사내) 여기서만 만나고 외부에선 안돼.
(소녀) 왜요?
(사내) 왜냐구? 여기선 이름이 필요없으니까. 모든 걸 잊을 수 있잖아. 알고 있는 모든 걸. 사
람들. 일. 사는 곳. 다 잊게 될거야. 모두.
(소녀) 불가능해요. 정말, 그럴 수 있어요?
(사내) 나도 몰라. 겁나나?
(소녀) 아뇨. 오세요.
이름을 알고싶어 하는 소녀와 이름을 지워버리고자 하는 사내의 불안감과 긴장이 화면을 팽팽하게 채우고 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는 누군가와 섹스를 나눈다는 것은 이름을 아는 것이고, 그 이름을 통해 그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사내에게는 이름이란 곧 그와 연관된 온갖 것들을 동시적으로 연상케하는 ‘호명체계’이다. 그것을 알아버리는 순간, 둘의 욕망은 곧 흔적도 없이 실종되어 버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공간이 만들어낸 욕망의 배치는 오직 이름을 모르는 순간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의 두 번째 대화.
(소녀) 이름을 알고 지내면 좋겠어요.
(사내) 이름을 알고 싶다고, 세상에! 살면서 수많은 이름을 가졌지. 더 이상의 이름은 싫어.
차라리 으르릉거리는게 나아. 으르릉...
(동물의 소리를 주고받는 두 남녀.)
수많은 이름을 가진 남자와 아직 하나밖에는 이름이 없는 소녀. 사내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느니 차라리 지금까지의 이름을 몽땅 지워버리고자 한다. 비분절적인 동물들의 으르릉거림. 함께 꾸르륵거리는 소녀. 첫 번째 대화에서 깊은 불안과 동요를 보였던 소녀가 여기서는 이름을 지우려는 사내의 욕망을 좀더 능동적으로 수락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서 이제 영화는 크게 공간적 분할을 통해 진행될 수밖에 없는데, 말하자면 이름이 부재하는 밀폐된 아파트와 이름(들)이 지배하는 외부로 구획된 것이다. 그러면 이 공간 너머에서는 대체 무슨 일들이 있는 것일까?
소녀의 이름, 사내의 이름은?
소녀의 이름은 쟌느, 사내의 이름은 폴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 이름을 둘러싼 세계 안으로 진입해들어가게 된다. 다시 말해, 이들의 이름은 이들이 사회내에서 존재하는 자리, 예컨대 계급, 관습, 인종, 문화 등등 일련의 계열들의 기표연쇄에 다름아니다.->이른바 주체화의 과정. (<창세기>에 신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창조한 이후 “주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셔,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또 다른 구절, ”하느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여기서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지배의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 신이 아담을 부르고, 아담이 다시 모든 생물들의 이름을 부르는 호명과 지배의 메카니즘. 그것은 모세가 야훼로부터 십계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알튀세르의 말을 빌리면,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 개인들을 구체적 주체로서 호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호명에는 “어떤 중심적이고 유일한 다른 주체의 존재를 전제한다.” 결국, 주체에 의한, 그리고 주체에 종속된 주체.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연구를 위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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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이름(기표)으로 불린다는 것은 기표를 둘러싸고 있는 기표들의 질서(상징계) 속에 포섭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상징적 동일시라고 하는데, 그것은 대문자 타자의 관점에서 정의되는 나를 자신의 자아-이상으로 삼는 것이다. 즉 타자의 담론, 타자의 욕망이 정의하는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이진경, ?도둑맞은 편지, 도둑맞은 무의식?, ?탈현대사회사상의 궤적?(새길, 1995), 260면 참조.
먼저 소녀, 아니 쟌느라는 이름을 둘러싼 표상의 중심에는 영화가 있다. 그녀의 현실은 곧 영화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키스하는 것도 ’언제나 당신만 생각했다‘는 표현도 모두 영화의 장면들을 완성한다. 약혼자는 아름다운 그녀의 추억을 재생하기 위해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치 그것들을 모두 조립하면 그녀가 누구인지를 말해줄 수 있다는 듯이. 영화를 위한 현실이기 때문에 그 추억들은 영화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워야한다. 거칠고 야만적인 것은 이 배치에서는 저절로 추방된다. 여기서 카메라는 주체의 외부에서 주체의 자리를 호명하는 대문자 타자의 은유적 장치인 셈. 그리고 타자 혹은 상징계의 질서가 부여하는 욕망만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데서 욕망이야말로 근원적인 무엇이 아니라, 배치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있는 것. (그녀가 첫사랑에 대해 약혼자에게 하는 내용과 사내에게 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상기할 것!)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그녀의 정체는? 거대한 저택, 계급과 인종을 단번에 구별하는 개를 칭찬해마지 않는 보모. 알제리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다 죽은 대령 아버지. 불어 숙제. 순결하기 그지 없는 첫사랑 등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이것들이 만들어내는 배치와 함께 작동한다.
폴이라는 기표는 피범벅으로 시작된다. 경찰에 의해 호명된 그의 이름들은 복서, 배우, 봉고운전수, 중남미 혁명가, 일본에서 저널리스트, 마지막으로 떠돌이로 어디선가 불어를 배워 파리에 와서 여관에 들렀다 여관주인여자와 살게 된 남자. 그는 너무나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라캉식으로 말하면, 그는 “어느 한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자리로, 다른 기표로 옮겨”다녔던 것이다. 파리는 그에게 마지막 거처였는데, 이제 아내의 죽음으로 그것마저 무너져 버린 것. 그의 허무는 그 수많은 이름들이 그 차이와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억압과 환멸만을 주었다는 것에 있다. “다 소용없어. 방밖의 다른 건 모두 쓰레기야. 이곳과 관계없는 이야기는 하지 마.”라고 할 때, 그는 이미 어떤 이름들이 아니라 호명체계 그 자체를 부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장례식이라도 신성하게 치르고 싶은 청승맞은 장모에게 난폭하게 구는 것도 자신의 주체를 구성하는 습속의 장치들과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는 영화같이 아름다운 소녀의 현실이, 다른 한편에는 피범벅이 되어버린 사내의 현실이 있다. 이것이 곧 그들의 이름이다. 그들이 아파트를 나오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둘러싼 이 계열들 안에 포섭된다. 이 계열들은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없다. 그들의 욕망은 바로 이 외부와 단절된 아파트라는 공간의 배치 안에서만 가능하다. 특이점으로서의 공간! 그러면 이제 이 특이점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베이컨, 욕망, 기관없는 신체
“팔이 무척 튼튼하군요./당신을 끌어안기 좋으라고
손가락이 길군요/엉덩이 할퀴기 좋으라고
가슴은 따뜻하군요/숨기 좋으라고.
혀가 길군요/당신을 햝기 좋으라고.
성기가 멋지군요/당신과 나의 행복을 위해“
소녀와 사내가 알몸을 부둥켜 안은 채 주고받는 이 대사는 신체의 변이에 관한 유쾌한 운문이다. 이름을 지우는 것이 단지 이름을 외면하는 것, 듣지 않는 것, 혹은 이름에 대한 말하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이들의 섹스는 쾌락으로만 영토화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름을 통해 새겨진 신체의 코드들을 하나씩 지워버림으로써 새로운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으르릉거리는 소리는 그 시작에 불과하다. 소녀의 자위행위, 그리고 버터와 아날 섹스. 목욕시키기. 등등.
여기서 영화의 첫머리를 장식했던 화면 베이컨의 그림을 환기해보자. 얼굴이 뭉개져 있는 남자들의 초상. 베이컨은 고깃덩어리로서의 신체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화가이다. 동물-되기. 그것은 신체를 해체함으로써 감각을 부여하기 위함인데, 말하자면 그가 그린 신체는 대상으로서 재현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된 신체이다.들뢰즈, ?감각의 논리?(민음사,1995), 64면.
그런 점에서 베이컨의 형상은 아르토의 유명한 명제를 떠올린다. <신체는 물질덩어리이다. 그는 혼자이며 기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들이란 신체의 적이다.>는. 유기체란 생명을 가두고 있는 것인바, 감각은 유기적 활동의 경계들을 잘라버리면서, 살 한가운데서 신경의 파장이나 생생한 흥분 위에 실린다.같은 책, 75면.
베르톨루치가 영화의 첫장면을 베이컨의 그림으로 시작한 의도는 그러므로 이 영화의 섹스가 쾌락으로 영토화되지 않고 욕망의 능동적 생산을 통해 신체의 탈유기화의 과정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지.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명시된 부분이 아날 섹스 장면이다. 사내는 소녀의 항문에 버터를 바른 뒤에 가문에 대한 비밀을 분쇄해주겠노라고 하면서 삽입을 한다.
“날 따라 해. 거룩한 가문과 교회, 훌륭한 사람들.”
“억압에 의해 망가진다.”
“자유를 위해 암살을 꿈꾼다.”
“가족, fucking!”
주체의 호명체계를 구성하는 것은 여러 층위가 있다. 교회,정당,조합,가족,학교,신문과 문화기업 등등. “지배계급은 자신의 음악 속에, 기독교 이전에는 그리스의 기적, 그리고 이후에는 영원한 도시인 로마의 영광을 만들었던 위대한 고대인들의 ‘인간주의’의 대주제들과, 그리고 민족주의. 도덕주의. 그리고 경제주의 등 특수하거나 일반적인 ‘이해관계’의 주제들을 통합시킨다.”(알튀세르, 앞의 글) 그 가운데 근대인들을 주체화하는 장치의 핵심은 가족체계이다. 이 영화에는 혁명, 교회, 가족, 문화 등에 대한 기호들이 떠다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심에 가족,가문이라는 상징적 질서에 대한 환멸이 자리하고 있다.
고통스러운 아날 섹스가 끝난 뒤 사내는 마치 베이컨의 인물형상들처럼 누워있고, 소녀는 음악의 리듬에 맞춰 유연하게 몸을 흔든다. 그와 그녀의 신체는 ‘조금’ 가벼워진 것이다.
아파트를 나와 쟌느라는 이름으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그녀의 약혼자가 연출하는 영화의 클라이막스이자 대단원인 결혼을 준비한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그녀의 냉소 - ‘결혼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는 것. 포스터에 ‘미소짓는 것’이라는 광고 문구로 존재하는 것‘ - 는 그녀의 신체가 사내와의 섹스를 통해 상당부분 탈유기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이제 결혼은 사실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 혹은 욕망의 에너지를 소거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드레스를 입고서 다시 아파트라는 익명의 공간으로 뛰어든 쟌느. 욕망의 탈주!. 하지만, 아직 그녀의 탈유기화는 진행형이다. 죽은 쥐를 먹으려는 사내를 보고 기겁하는 소녀. 다시는 여기에 오지 않겠다는 비명은 그녀의 깊은 동요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내가 그녀를 목욕시켜주는 장면 역시 그녀의 신체에 새겨진 유기적 코드들을 지워버리기 위한 과정의 하나이다. - 에로틱한 것과는 거리가 먼 몸 씻겨주기, 그리고 끝없이 미끄러지는 대화들. 그렇게 어긋나던 대화가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예요.”라는 고백과 함께 정지해버린다. 서로 극점에서 달려온 두 남녀가 처음으로 하나의 지점에서 겹쳐지는 순간, 사내는 그 순간 소녀에게 손톱을 깍으라고 한 뒤, 자신의 항문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신체에 남은 기관들의 유기적 조직들과 싸우기 위한 고투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마조히스트적 신체이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마조히즘은 고통이란 관점에서 이해되어 왔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기관없는 신체에 관한 문제다. 그는 자신의 사디스트 내지 자신의 창녀로 하여금 스스로를 꿰매게 하며, 눈, 항문, 요도, 가슴, 코를 꿰매게 한다. 그것은 기관들의 작동을 멈추기 위해 스스로를 매달게 하며, 마치 피부에 달라붙어 있는 기관들을 떼기라도 하려는 듯이 껍데기를 벗겨낸다. 모든 것들이 튼튼히 봉해져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비역질당하고, 질식당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
“난 돼지를 한 놈 낳을거야. 그놈이 당신의 입에 오물을 넣으면 너는 그걸 먹어야해.”
“예. 당신이 원한다면 무슨 짓이든지 하겠어요.”
“돼지가 당신과 그짓을 하는 동안 그놈은 죽어야 해. 그리고 당신도. 할 수 있어?”
“예. 그보다 더한 짓이라도. ”
이보다 더 뜨겁고 달콤한 사랑의 고백이 있을 수 있을까? 죽음도 불사하는 사랑이란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여기서 죽어야 하는 것은 그녀와 자신에게 새겨진 코드들, 유기적 조직들이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기관없는 신체는 기관들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라고 불리는 기관들의 조직에 대립한다. 그것은 구성되고 위치지워져야 할 그것의 ‘진정한 기관들’과 더불어 유기체에, 기관들의 유기적 조직에 대립한다. 유기체는 결코 신체가, 기관없는 신체가 아니라 기관없는 신체 위의 하나의 지층이요, 축적, 응고, 퇴적 현상이다. 그것은 기관없는 신체로부터 유용노동을 추출하기 위해 형태, 기능, 속박, 지배적이고 위계화된 조직, 유기화된 초월성을 부과한다.”들뢰즈/가타리, ?천의 고원? <제 6장 : 어떻게 기관없는 신체를 이룰 것인가?>
- 의미화와 주체화. 그러므로 이들이 익명의 공간에서 나눈 섹스는 신체 위에 부여된 지층과 퇴적물들과의 전쟁이었던 셈이다.
탱고의 리듬/계급의 코드, 탈주선/죽음
그러면 이들은 이제 ‘기관없는 신체’에 도달한 것인가? 다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뢰즈/가타리를 통해 들어보자. 그것은 하나의 도달지점이 아니다. “기관없는 신체는 오직 강렬도들에 의해서만 서식되고 점유되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오직 강렬도들만이 통과하고 순환한다.”(?천의 고원?, 166면) 이를테면, 그것은 하나의 극한이다. 다른 한편, “기관없는 신체는 기관들이 제거된 텅 빈 신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관으로서 봉사하는 것의 브라운 운동을 하면서, 분자적 복수성의 형태로 무리적 현상에 따라 분배되는 신체다.” 그것은 “죽은 신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신체”로서, “유기체와 그 조직화를 제거한 후에 더욱 더 생동감있고 웅성거린다.” 충만한 신체, 복수성으로 가득 찬 신체.(?천의 고원?, 34면) 그럴 때라야 진정 탈주선을 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멈추어 버릴 때, 그것은 곧바로 가공할 만한 죽음의 선으로 전이된다.
폴은 여전히 아내의 자살이라는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 아내 로자의 시신 앞에서 하는 절규. “당신이 왜 그따위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어. 나도 그 방법을 알면 당신을 따라갈 텐데. 나도 그 방법을 찾아야겠어.” 무슨 방법? 죽음으로 함몰되는 길? 아니면 다시 시작하는 길? 쟌느와의 사랑으로도 이것은 치유되지 않았던 것이다. 쟌느 또한 가족과 결혼이라는 주체화의 장을 떠나지 못한 것처럼.
이런 상태로 그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전차의 굉음과 화려한 도시의 빛이 있는 열린 공간으로 나온다. 이름이 없는 곳에서 이름이 있는 곳으로. 첫장면에서 서로 엇갈리던 고가도로 밑에서 다시 조우하면서 폴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시작한다. 45세. 홀아비. 작은 여관을 경영. 48년 쿠바혁명에 참여했고 등등. 자신이 호명되는 그 자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들이 곧 탱고 경연장에 들어선 것은 또 얼마나 정교한 배치인가. 엄격하기 짝이 없는 리듬과 동작에 의해 지배되는 탱고경연대회란 미시적 코드들이 그물망처럼 얽힌 근대사회에 대한 멋진 은유가 아닐는지.
그들이 이 리듬에 맞춰 춤출 수 있다면, 이름들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그들의 신체는 탱고의 엄격한 리듬을 너무 많이 잊어버렸다! 그들의 춤은 탱고를 추는 남녀들 사이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면서 그 리듬을 깨는, 일종의 탈주선을 긋는다. 그러나 곧바로 그것은 금지의 벽에 부딪히고, 그에 대한 저항은 엉덩이를 까보이는 추행이 전부다. 새로운 춤을 생성하지 못한 채, 그저 기행과 어설픈 위반에서 그치는 탈주선. 그것은 탱고 리듬에 익숙한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통렬한 풍자일 수 있는 한편, 이들의 신체의 무력함을 동시에 표현한다. 어두운 객실에서 손으로 하는 마지막 섹스. 쟌느는 말한다. “곧 결혼해요. 당신과는 끝났어요.” “우둔한 매춘부같으니.” 폴은 추태와 기행으로, 쟌느는 다시 공주같은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 버린다. 탱고의 리듬은 이토록 강한 것이다! 그 리듬에 휘말리는 순간 그들 사이에는 오직 계급의 장벽만이 우뚝 서 있을 뿐이다. 계급의 벽을 사랑으로 넘는다고? 오, 맙소사. 그거야말로 사내가 그 익명의 공간에서 거듭 저주했던 바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건 그 스스로도 말했듯이 ‘쓰레기같은 일들’의 하나일 뿐이다. 그따위 사랑은 설령 이루어진다 해도 생산하는 욕망도, 탈주선도 아니다. 기껏해야 청승맞은 멜로일 뿐!
계급의 코드가 되살아난 쟌느는 자신의 약혼자가 한 말처럼 ‘어른답게’ 판단한다. “심각하고, 이성적이고, 신중하고 힘들어해야 하는 것”이다. 어린애처럼 즐거워하고 불결하고 매스꺼운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제 반대장면이 연출된다. 사내는 계속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소녀는 그 이름을 거부하는. 그리고 달린다. 둘 다 죽음을 향해. 사내는 신체적 운동의 정지로서의 죽음. 소녀로서는 탈유기화되는 과정을 멈추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버리는 것으로서의 죽음. 그녀의 삶은 이제 영화의 스크린 안으로 돌아갈 터이다. 세상에 흔해빠진 여자 중의 하나로, 대령의 딸로, 낭만적 분위기를 지닌 샌님같은 남자의 아내로. - 욕망, 이름, 계급의 음울한 삼중주!.
기관없는 신체가 된다는 것, 욕망의 능동적 리듬을 만든다는 것, 이름을 버리고 탈주선을 탄다는 것은 이토록 지난한 것인가?
2000년 1월 28일, 강사 : 고병권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3. 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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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그가 ‘잊어버리고’ ‘있는’ 것에 대하여
-평성 너구리 전쟁 폼포코-
고 병 권
1. 잃어버린 세계
무언가를 잃고 있는 자에게 현재는 항상 과거보다 가난하다. 풍성함은 항상 지나간 시간 속에만 존재한다. 호르크 하이머(Horkheimer)와 아도르노(Adorno)의 비관적 선언, “끊임없는 진보가 내리는 저주는 끊임없는 퇴행”(?계몽의 변증법?: 67), 이것이야말로 먹을수록 배고파지고, 만들수록 부족해지며, 알수록 무지해지는 ‘빈곤의 시대’의 세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모든 선한 시도가 악한 결과를 가져오는 시대.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계몽이 초래한 죄악을 계몽이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계산기가 초래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여전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고, 개발이 초래한 문제에 대해서도 여전히 ‘지속가능한 개발’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집합적으로 그렇게 존재하도록 운명지워진 것(Geschick)이라면 우리에게 물음은 좀 더 근본적일 필요가 있다. 그 물음은 바로 그것의 본질을 묻는 것이다. 계몽의 본질, 계산기의 본질, 개발의 본질.
본질에 관한 질문이 제기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은 적어도 그것을 묻는 학문인 것처럼 보였다. 존재하는 것들, 즉 존재자(Seiende) 전체의 보편성을, 혹은 최고의 것을 표상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형이상학이 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존재자에 관한 이야기 일 뿐이다. ‘존재하는 것들’(혹은 ‘....이다/있다’)이라고 쉽게 말해 버린 술어 속에 들어 있는 ‘존재(Sein)’라고 하는 것 자체에 대한 사유가 없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존재자를 존재자로 사유하고 있는 그러한 사유에는 ‘존재에 대한 사유’가 없다. 존재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한 존재자를 존재자로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존재다. <존재의 빛> 아래서 존재자들은 드러나며, 존재란 존재자들을 ‘드러나게 하는 것’, 즉 탈은폐시키는 것이다(?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이하 ?형이상학?): 13).
존재자들이 드러나게 되는 방식, 그것들이 존재와 맺는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는 존재자들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바로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업은 분명 ‘존재 망각에 대한 사유’가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진단하고 있는 하이데거(Heidegger)의 문제의식에 기반한 것이다.
그런데 ‘과잉생산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부유하지 못한’ 우리 세계가 뭔가를 계속해서 잃어버리고 있다면 그것은 항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항상 가지고 있는 것만이 항상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망각하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저 깊숙한 곳에 여전히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여전히 듣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무언가가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면 들어오고, 귀를 열면 들리고,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지만, 우리고 사유하고, 느끼는 방식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방식은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의 한탄처럼 ‘총체적 기만’(?계몽의 변증법?: 76)으로서다.
인간이 잊어버린 것, 그래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들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인지, 거기서 인간에게 걸어도 좋을 희망이라는 것이 있을 지에 대한 물음을 낳는다. 인간에게 남겨진 희망의 몫은 얼마나 될까?
아마 환경문제만큼 이런 질문에 친숙한 주제가 또 있을까? 이제 정말로 인간은 자연과 화해하고 싶다. 정말로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 얼마나 많은 사상과 문학과 정치가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가? 주말만 되면 어김없이 자연으로 돌아가서 숨을 쉬고 싶고, 아예 보따리를 싸서 자연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연은 그 가엾은 인간들이 기어들면서 들이받은 상처에 끙끙 앓고, 상처 입은 자연은 인간에게 그만큼을 그대로 돌려준다.
환경/생태 문제를 다룬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연과 화해하고픈 열망은 많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그 어떤 사상가들보다도 더욱더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준다. <미래소년 코난>에서부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원령공주>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과의 화해를 꿈꾼다. 인간과 자연은 계속해서 손을 내민다. 그것은 장엄한 스펙타클이다.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악당들이나 보조 캐릭터들이 분위기를 많이 누그러뜨린다고 해도 주제를 가름할 때 하야오는 여전히 진지하고 사색적이다. 작품 속에서 주제들은 그의 노력만큼이나 잘 부각된다.
그러나 <평성 너구리 전쟁 폼포코> (이하 <너구리 전쟁>)의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는 문제를 그렇게 사색적이고 어렵게 다루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피해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너구리 전쟁>의 제작자는 하야오지만 작품의 분위기는 그의 작품과는 차이가 나 보인다. 이사오 감독은 자신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서정성이 어렵고 난해한 개념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만 해도 TV 시리즈물들인 <알프스 소녀 하이디>(1974), <엄마 찾아 삼만리>(1976), <빨강머리 앤>(1979) 등이나 <첼리스트 고슈>(1982), <반딧불의 묘지>(1988), <추억은 방울방울>(1991), <너구리 전쟁>(1994) 등이 있다. <반딧불의 묘지>처럼 무겁고 슬픈 분위기를 갖는 작품조차도 그것을 개념적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이사오의 작품을 철학적으로 감상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보다도 이것에 기인한다. 그의 작품들은 주로 주제보다는 감성적 느낌으로 더 오래 남는다.
그는 감정을 ‘솟아오르는 벚꽃잎’과 ‘바람 소리’와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통해서 표현할 줄 알고, 때론 교향곡으로, 때론 어린 시절 동요로 표현할 줄 안다. 그것들은 아무리 부분일지라도 전체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철학적 개념이라는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면 감상 자체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웃고, 울고, 그리워하면 되는 것이며 관객들이 일부로 무언가를 뒤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글에서 잃어버린 것들의 세부 항목을 조심스럽게 짜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개념적인 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림과 음악을 글로 분해-조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이렇게도 재미있는 <너구리 전쟁> 같은 작품을 가지고 존재와 존재자 같은 딱딱한 이야기 할 때는....
<너구리 전쟁>은 인간들의 개발로 인해 살 곳이 없어져 가는 너구리들이 벌이는 인간에 대한 연구(?)와 투쟁(?)의 보고서다. 너구리에게 인간의 삶이 기이한 만큼 인간에게 너구리의 삶은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떨어져 있을수록 그것은 그리운 동경의 세계다. 그 세계는 본능과 자연으로 존재하는 세계이며, 즐거운 놀이의 세계이며, 마법의 세계다. 너무 생각하지 말고 ‘귀 기울여 봐요. 노래가 들려요.’
2. ‘광기의 언덕’과 자연에 대한 ‘닦달’(Ge-Stell)
영화가 인간들의 ‘뉴타운 계획’, 즉 “고도 성장 계획에 따라 도쿄의 건설부가 모자란 주택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농지나 삼림의 개발”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존재 망각’에 대한 이야기는 기술개발에 대한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오로쿠 할멈은 뉴타운을 위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민둥산’ 언덕을 “광기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광기의 언덕! 광기만큼이나 이성의 시대에 타자로 남은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이나 이성의 행진을 잘 묘사하는 것도 없다. 근대인, 그들은 정말로 미친 듯이 이성적이었다!
근대 인간들은 ‘산을 먹어치우는 벌레’처럼 미친 듯이 자연을 파먹어 왔다. 무엇엔가 쫓기기라도 하듯이 인간은 자연을 밀어붙였다. 도끼는 전기톱으로, 삽은 포크레인으로 교체되어 베어내고 파내었다.
자연공원을 지정한다고 해도, 그린벨트를 설정한다고 해도, 전기톱의 사용을 규제한다고 해도, 연료로서의 나무를 금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운명지워진 힘은 공원의 범위를 계속해서 좁혀 갈 것이며, 그린벨트의 규제를 해제해나가고, 또 다른 연료를 찾아낼 것이다. 자연 그것이 개발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한, 그것에서 무언가를 뺏어내고, 우리가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지배하려고 하는 한, 자연은 여전히 우리에게 무언가를 빚진 것처럼 계속해서 토해내야 하고, 우리 또한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게 된다. 자연은 우리에게 땔감으로, 빚쟁이로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에 대한 착취자로 존재한다.
우리가 ‘기술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그것의 본질에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목만을 바꾸어 여전히 자연과 동일한 관계 맺음으로 존재할 뿐이다. 과연 ‘기술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그것에 대한 답으로 두 가지를 말했는데, 하나는 ‘기술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은 인간 행동의 하나’라는 것이다. 사실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에 맞는 수단을 끌어다 사용하는 것인 인간이기 때문이다(?기술과 전향?(이하 TK): 17).
기술에 대한 도구적 규정은 올바른 것(richtig)이지만, 참된 것(Wahre)이라는 의미일 수는 없다. 올바르다는 것은 대상과의 상응성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고, 참된 것은 그 본질에 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인에 대해 묻는 것이 참된 것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이 원인에 대해서 했던 이야기는 우리가 통상 인과성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시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 철학은 4원인설을 제기했는데, 그것은 바로 질료인과 형상인, 목적인, 작용인 등이다(TK: 21-27). 질료나 형상, 목적 등이 그 대상의 원인이라는 사고는 분명 우리의 인과성 개념에는 낯설다. 왜 그 네 가지만 원인인지, 그리고 그 네 가지는 도대체 어떻게 함께 묶일 수 있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그 네 가지 원인들이 책임짐(Verschulden)의 공속적인(zusammen-gehorig) 방식들이라고 말했다(23쪽). 가령 祭器로 쓰이는 은잔의 경우. 은은 재료로서 잔을 만드는 데 함께 책임을 지고 있고, 잔은 자기를 존립하게 해준 것에 은에 감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제기는 또한 팔찌나 반지가 아니라 잔이 된 것에서 모양의 보임새(eidos)에 빚졌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 잔이 축성이나 봉헌에만 쓰인다는 것, 그것은 텔로스로 목적에 의해서 제기가 된다. 네 번째로 은장이가 작용인으로서 책임을 진다. 이 네가지 것들은 공통적으로 ‘그 자리에 없던 것을 있게 함’에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cf. 존립하다(wahren) 와 참된 것(Wahre)).
‘그 자리에 없던 것을 밖으로 내어 놓음’(Her-vor-bringen, 나타내다. 야기하다)을 그리스어로는 포이에시스(Poiesis)라고 한다. 포이에시스는 드러내는 것, 즉 은폐성에서 비은폐성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으로, ‘알레테이아(탈은폐, 상기함)’라고 한다. (로마의 베리타스, 진리).
기술이란 바로 포이에시스, 즉 탈은폐의 영역이다. 따라서 그것의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기술이라는 말의 그리스어는 ‘테크네’인데, 그것은 수공적 행위와 능력을 가리켰을 뿐 아니라 고차적 예술과 미술을 지칭. 시적인 어떤 것. 그리고 그것은 에피스테메라는 말과 같이 사용되어 왔다. 인식 역시 일종의 열어젖히는 힘, 즉 탈은폐인 셈이다(33쪽).
그렇다면 현대의 기술은 어떤 것일까? 그것 역시 탈은폐이다. 그러나 더 이상 포이에시스는 아니다. 그것을 일종의 도발적인 요청(Her-aus-forden, 달라고 요구하다)이다. 그것은 채굴되어 저장될 수 있는 무언가를 자연에게 내놓으라고 닦달한다.
<빨강머리 앤>이나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 나오는 기구들과 사람들을 현대의 기구들과 사람들에 비교해보자. 그 차이는 너무도 분명해진다. 풍차의 날개는 바람의 힘으로 돌아가며 바람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긴다. 그것은 기류의 에너지를 저장하기 위해 개발된 게 아니다. 농부들을 보자. 그들의 경작은 키우고 돌보는 것이다. 농토에게 무엇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씨앗을 뿌려 생장력에 내맡기고 그것이 잘자라도록 보호하는 것, 그것이 그들이 한 일이다.
이제 지구의 곳곳은 석탄과 광석을 캐내기 위해 도발적으로 굴착된다. 지구는 한낱 채탄장으로, 대지는 한낱 저장고로 탈은폐한다. 농부들은 땅을 닦달하기 시작한다. 땅이 생장력을 잃으면 화학비료를 뿌려대서 작물들을 키워낸다. “공기는 이제 질소 공급을 강요당하고, 대지는 광석을, 광석은 우라늄을, 우라늄은 원자력 공급을 강요당한다.”(41쪽) 강을 건너기 위해 세웠던 ‘낡은 목교’와 달리 새로이 세워진 수력발전소는 강을 발전시설에 맞게 변조시킨다(43쪽). 발전소의 본질에 맞게 강은 변조된다. 이제 강은 여행사가 마련해준 관광의 대상 이상이 아니다(43쪽).
데카르트의 그 날카로운 ‘연장(extention)’의 평면 위에 자리를 찾지 못한 모든 것들은 추방되며, 자리를 차지한 것들은 좌표화되고 계산된다. 모든 신비스러운 것들은 설 땅을 찾지 못한다. 하이데거는 정밀과학이 자신의 형식으로 담아지지 않는 사유를 포기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사물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는 대신에 존재자를 계산하는 데만 신경을 쓴다(?형이상학?: 123). 계산은 미리부터 존재자를 셀 수 있는 형태로 사용하며, 셈을 위해 그것을 써버린다. 한 번의 셈의 결과는 다음 번 셈에 투입되며, 자기소모적 행위를 계속해 나간다.
도발적 요청으로서의 기술은 현실적인 것들을 하나의 부품(Vorrat)으로 탈은폐한다. 저기 활주로의 비행기 자체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은닉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운송의 확실성을 보장하기 위해 요청받는 한에서 그 기계는 활주로에 있는 하나의 부품으로 탈은폐된다. 기술은 인간 역시 부품으로서 탈은폐의 길로 보낸다(schicken)(TK: 65). 집약하는 보냄을 역운(歷運, Geschick)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닦달은 분명 역운의 하나의 보냄이다. 위험성은 이것이 하나의 ‘탈은폐’이면서도 참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닦달하는 요청 속에서 그것을 쉽게 참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부품처럼 되면서도 지구의 주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위험으로 인식되지 못한 위험이 가장 큰 위험이다.’
3. 인간, 그 고독한 동물에 대하여
지배자가 된 인간, 그는 고독하다. 그는 지배자가 되는 순간 철저히 혼자가 된다. 인간은 인간인 그 자신과만 만난다. 니체가 ?즐거운 지식?에서 <인간과 세계>라는 말에 대해 그토록 우스꽝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과’자 하나로 인간이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온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 그것은 야생에서 뛰쳐나온 고독한 동물이고, 세계와 자신을 분리하고 신에 할애했던 자리를 되찾은 인간-신이다!
“야아... 사람이란 대단하군요. 여지껏 우리와 같은 동물의 일종인 줄 알았는데 이번 일로 어떤지 하느님이나 부처님 같은 힘이 있다는 걸 잘 알았어요.”
인간이 고독한 이유는 모든 것들 속에서 자신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을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변형시킨다. 그가 자연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진리에 대한 심안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쉽게 계산하고 지배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었기 때문에, 즉 그가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들은(인간 조차도) 줄줄이 끌려나와 자신의 ‘길이’와 ‘무게’를 말하였고, ‘용도’를 밝힌다.
고독을 존재자의 존재방식이라고 말했던 레비나스(?시간과 타자?: 51-55)의 지적은 좀 더 두고 생각하더라도 인간과 이성이야말로 그가 말한 고독의 적격자라고 할 수 있다. 고독은 “절망과 버림받음일 뿐 아니라 남성적인 힘이고 오만이며 주권이다”. 이성의 유아론적 구조는 그 고독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성은 말을 건넬 또 다른 이성을 전혀 찾지 않는다(68쪽).
부처나 하나님처럼 산 위에서 오만하게 내려보던 인간, 그는 철저히 고독하다. 그는 더 이상 자연과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란트만(Landmann)은 ?철학적 인간학?에서 자연과 인간의 단절 문제가 근대적인 것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뛰어난 영웅 아킬레스의 스승은 반이 짐승인 케이론(Chiron)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스승으로 삼을 만큼 동물들을 우월한 것들로 받아들였다. 데모크리투스는 인간이 동물로부터 문화를 배우게 된다고 말하곤 했다. 새에게서 노래를 배우고, 거미로부터 사냥하는 법을 배운다는 이야기다.
이사오가 영화화한 미야자와 켄지의 단편 <챌리스트 고슈>에서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인간과 스승이 된 동물들을 만날 수 있다. <챌리스트 고슈>에서 너구리는 세 번째 날 찾아와서 고슈의 첼로 연주가 틀리는 부분을 지적해준다. 첫째 날의 고양이, 둘째 날의 뻐꾹이, 셋째 날의 너구리, 넷째 날의 생쥐에 이르기까지 그 동물들이 스승인 이유는 그들이 진정한 동료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슈의 집 근처에 살면서 고슈의 연주에 고마워하고, 때로는 그 연주를 배우러 오는 동료들이다. 고슈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의 연주실력은 몰라보게 성장한다. 인간, 그는 자연과의 관계를 상실하고 말았고, 그것으로부터 낯선 존재, 그것과 대화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4. 놀이와 노동
‘인간은 유희의 동물’이라는 말은 ‘유희하는 것은 동물’이라는 점에서 (근대적) 인간 스스로에게서 경멸된다. 동물들만이 한가하다. 나태하고 게으른 자는 더 이상 인간의 취급을 받지 못한다. ‘노동하는 동물’이야말로 근대적 인간에 적합한 규정이다. 아렌트(Arendt)는 모든 경멸을 담아서 ‘합리적 동물’과 달리 ‘노동하는 동물’이야말로 그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인간의 조건?: 139). “합리적 동물에서 ‘동물’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문제가 있지만, 노동의 동물의 개념에서 사용된 ‘동물’이라는 단어는 전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이다”.
‘노동’과 ‘놀이’. 그것은 인간과 너구리의 가장 낯선 대면이 되고 말았다. 어떤 힘든 일도 놀이가 되고 마는 너구리들과 달리 어떤 즐거울 일도 노동이 되고 마는 인간! 놀이공원에 아이를 데리고 가는 일은 대단한 피로를 동반하고, 쉬러 갔다온 뒤 본격적으로 다시 쉬어야 하는 것은 노동하는 동물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의 잃어버린 타자, 너구리를 보자. <너구리>의 Opening Song은 이렇게 시작한다. “너구리야! 너구리야! 놀지 않겠니?” 그리고는 영화의 끝부분, 다소 무거운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는 기질이 없다면 너구리는 더 이상 너구리가 아니지.” 인간과의 일전을 앞두고 배우는 변신술마저 즐거운 놀이로 전환된다. 돈 천엔을 평화적으로 벌어오라는 과제를 빠찡고 구슬로 돈을 따거나 시주함에 슬쩍하는 너구리들.
어떤 심각한 것들도 설 땅이 없다. “인간을 쳐죽이자”고 외치면서도 ‘튀김과 꽁치조림, 옥수수, 햄버거’를 만들 인간은 살려줘야 한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쿠데타 이후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는 비장한 선언은 ‘우리는 쥐가 아니야’, ‘고양이를 물어봐야 소용 없잖아’, ‘쥐라고? 요즘 쥐도 먹어보지 못했구먼...’, ‘쥐는 무침 튀김이 제일이라고...’, ‘아냐, 그냥 튀김이 최고야’, ‘난 밀가루 무친 게 더 좋은데...’, ‘그 바삭바삭한 튀김...’ 쿠데타의 비장한 선언은 ‘궁지에 몰린 쥐’에서 시작하여 ‘밀가루 무친 바삭바삭한 튀김’으로 돌변한다. 무지막지한(?) 곤타까지 ‘무슨 말들이야? 너희들! 난 쥐 튀김이 제일이라구! 호이호이’라고 말한다. 쿠데타 상황은 다른 모든 것들처럼 미끄러져 버린다.
놀이와 유머, 웃음이야말로 이 영화 필름의 대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가장 큰 매력이다. 놀이와 웃음(cf. 니체의 놀이와 웃음, 춤)이야말로 근대 인간들에게 결여된 것이고, 근대의 도덕이 경멸했던 것들이다. 시간을 돈으로 여겼던 저 벤자민 프랭클린의 시간과 돈의 환산법! 놀이를 돈을 아예 갖다 버리는 것으로 인식했던 근대인들. “자신의 재산을 즐기지 않고 계속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 이것이 바로 또라이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노동에 종사하는 자, 그에게는 신체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 없고, 그토록 일하는 것은 분명히 정신에 큰 해가 되므로 공직을 주어서는 안 된다. 돈을 받고 노동을 파는 사람은 사실 자신을 팔게 되고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 우려가 있다”(라파르그, ?게으를 수 있는 권리?: 99). 고대인들의 지혜, 그것은 노동을 수행해야 할 때조차도 그것을 경멸하는 것이었다. 노동에 자신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그 철저한 신념과 비교해 볼 때, 근대 사회의 노동에 대한 찬미는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인가.
샐러리맨들은 연신 ‘드링크제’를 마셔댄다. 인간이 아닌 인간, 너구리 아닌 너구리는 그 스트레스를 견디기 힘들어한다. “대부분은 심한 스트레스를 못 견뎌 몸이 약해서 산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정말이지 잘도 인간들은 이런 생활을 견뎌내는구나....하고 감탄했습니다”.
5. 원더 랜드: 마법을 대체한 마법, 놀이를 대체한 놀이
그렇다고 자본주의 사회가 ‘놀이’를 그냥 비방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느새 놀이 공간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이름하여 ‘원더 랜드.’ 우리는 ‘놀이’가 소비하는 활동이고, ‘노동’이 생산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편에 있다.
아렌트는 “‘노동’과 ‘소비’가 삶의 필연성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동일한 과정의 두 단계이므로 이 말은 ‘우리가 노동자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인간의 조건?: 183). 영속과 불멸을 꿈꾸었던 모든 자유의 실천은 소비물품의 풍요를 위해 필연의 노동에 의해서 희생된다. 노동과정의 무한성은 매일 되풀이되는 소비의 필요에 의해 보장되며, 무한한 생산이 보장되는 경우는 생산품이 그 사용 성격을 잃어버리고 소비의 대상으로 될 때다(182쪽).
노동을 진정한 생산의 실체로, 유희를 그 반대로 정의하고 그것을 예술의 영역 안에 가두어두는 것은 근대 사회의 중요한 특징이다(184쪽). 예술은 이 극단적 가치평가 속에서 자신의 작업의 의미를 상실하고 자신의 활동을 노동의 바꾼다.
만약 노동하는 것이 생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잉여가치’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놀이는 무엇을 생산하고 있는 것일까? 욕망에 대한 뛰어난 정치경제학 비판가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니체일 것이다. 니체는 ‘놀이’에서 생산되는 것이 ‘즐거움(joy)’이라는 사실, 이 즐거움으로 인해 계속되는 ‘회귀’의 원리가 작동한다는 사실을 밝혔다(?권력의지?, 1067절). 놀이가 소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 또한 즐거움이다. 그런 이 즐거움은 다음 더 큰 즐거움으로 변이되는 한에서만 그렇다. 놀이는 분명 ‘생산’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과 ‘놀이’는 철저히 뒤바뀐 것으로 탈은폐된다. 하이데거는 근대 계산적 사유가 “존재자를 오직 주문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것의 형태로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생산성의 가상을 심어준다”(?형이상학?: 125)고 말했다. 가상은 실재의 자리를 차지하며, 실재는 가상의 자리로 물러난다.
너구리들의 마법은 원더 랜드의 마법으로 뒤바꿔진다. 뭔가 마법을 부리고 싶다면 ‘원더 랜드에 취직하는 것이 좋겠다.’ 그곳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진정한 마법의 공간처럼 보이므로.... 그러나 보드리야르가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이면서 마치 다른 곳은 아닌 척, 디즈니랜드를 세워놓은 것’에 대해서 날카롭게 간파한 것처럼(?소비의 사회?), 마법의 공간은 훨씬 더 크다. 진정한 마법은 자본주의 자체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에서 마법사를 ‘화폐위조자’라고 불렀다. 상이한 가치들에 등가의 환상을 심어주는 마법. 아무도 보이지 않게 노동자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 자본주의야말로 놀라운 마법의 체제가 아닌가!
모든 진정한 것들은 차라리 조작되었을 때만 진정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모든 메시지들은 TV 카메라 앞에서 다시 꾸며진다. 모든 메시지들은 TV 화면을 통해서 전달되고, TV 화면에 나온 것들만이 진정한 것이다. 자신들의 놀라운 마법을 원더 랜드에 빼앗긴 너구리들의 대화를 보자.
“쯔루가메 스님! 어떻게 하면 너구리가 한 일이라고 인간들이 믿을까요?”
“세상에는 반대 선전이라는 게 있지. TV 방송국에 전화를 걸고 편지를 쓰는 거지.”
“아마 장난 전화나 가짜 편지로밖엔 보지 않을 거예요.”
“그럼 TV에 나가서 우리가 실제로 변신술을 해보이자.”
“바보같이.... 트릭이라고 의심받아 분할 꼴을 당할 게 뻔해요!”
진정성이 있다면 그것은 재구성되어야 한다. ‘세계 연예’라는 프로의 진행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봐요! 너구리씨! 이래선 마치 조잡한 싸구려 TV 프로로 되어버린다구요!”
이제 너구리들은 정말로 ‘변신’해야 한다. 그것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아무런 즐거움도 없는 변신. 그 이름은 ‘적응’이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샐러리맨, 스낵점원, 심지어 삼림개발을 하는 사업가라도 변신해야 한다. ‘의태’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적응’일 것이다. 그것은 길들여짐이고, 굴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야말로 그들은 선택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내던져진 것이다’.
6. ‘달려가고픈’ 과거와 ‘만들고픈’ 미래
하이데거의 식으로 말을 하자면 도발적인 주문 속에서 자연을 닦달하고 있는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어떤 것일까? 이사오의 다른 작품 <반딧불의 묘지>(1988)를 보자. 인간에게 어떤 희망이 있을까? 인간이야말로 폭격 아래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던가! 공습 사이렌이 울릴 때 도망가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그 누구도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저 밑에서 놀란 사냥감처럼 이리저리 도망하는 그 인간들과 동일한 인간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 저 아래 인간들만 내던져진 것이 아니라 저 위에서도 인간은 그 장치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근대 인간, 그 역시 주문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숲에서 벤 나무들을 측량하고 있는 산지기는 겉보기에는 그의 할아버지와 동일한 방식으로 똑같은 숲길을 다니지만, 오늘의 그는 자신이 알건 모르건 간에 목재 가공 산업에 의해 주문받고 일하고 있는 것이다”(TK: 49). “현대 기술의 탈은폐 방식은 결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같은 쪽)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고 해도”, “그는 추락의 낭떠러지에 있으며, 그곳에서는 자신마저도 한낱 부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73쪽).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닦달이 탈은폐이면서도 매우 위험한 것은 다른 탈은폐들을 모두 감추어버린다는 데 있다. “포이에시스”의 의미로 현존하는 것을 감추어 버린다(75쪽). 인간이 더 근원적인 진리의 부름을 경험할 수도 있는 기회를 놓칠 가능성마저 있는 것이다(77쪽). 우리를 구원할 구원자는 어디에 있을까? 횔더린의 시구 속에서 하이데거는 희망을 이야기 한다. “위험이 있는 곳에는 그러나 / 구원의 힘도 함께 자라네.”(97쪽)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원자에게 우리의 마음과 귀와 눈을 여는 것이다. 존재의 역운인 현대 기술은 어떤 다른 역운의 도래가 있을 때만 극복 변형될 수 있다(107쪽).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으로나 역사학적으로 미리 계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예상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한 사건들은 역운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본질을 사유할 수 있는, 본질이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존재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함을 통해서 존재에 귀속할 수 있는 원초적 차원인 언어가 열어준다(111쪽). 그 안에서 우리는 존재의 노래 소리를 듣는다. 항상 우리 옆에 있었으면서도 듣지 못했던 소리. 우리가 합당하게 응답하면 그것이 바로 ‘사유’이다. 이렇게 될 때 존재는 이러한 본질에 떨어져 나와 존재자 내로 귀의한다. 그것은 바로 전형(Kehre)하는 것이다.
위험을 위험으로 합당하게 사유할 수 있을 때 전향은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역운적으로 일어날 지는 아무도 모르며 알 필요도 없다. 우리가 오직 <존재의 목자>로서 존재의 진리를 돌볼 때에만 기다릴 수 있다(113쪽). 위험이 위험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곳에서 존재의 망각은 존재의 진리로 전향된다(119쪽). 이 전향은 매개 없이, 인과적 맥락도 없이 급작스럽게 일어난다. 그것은 번쩍임이고 빛남이다. 존재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존재는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셈이다.
“존재의 형세(Konstellation)는 그 스스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듣지 못하고 있다. 기술의 지배하에서 청각과 시각을 방송과 필름에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존재의 형세 사물의 존재를 등한시하여 세계를 거부하고 있다.”(129쪽)
너구리들이 벌인 퍼레이드. 고목에 꽃을 피우고, 초롱을 들고 다니는 요괴. 그 옛날의 ‘등 행렬’, ‘초롱과 우산’. 사람들에게 잊혀진 아름다운 동화처럼, 그리고 꿈처럼.... 장로는 말한다. “고등과학의 합리적 해석도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없다고 깨달았을 때, 갑자기 인간들은 삼라만상의 신비에 놀라 이처럼 인간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모든 패배가 명백해졌을 때도 너구리들은 마지막으로 옛 모습을 되살려 낸다. 나무는 무성하고, 사람들은 논길을 걸어가며, 새들은 노래한다. 사람들은 그동안 잊어먹었던 것들을 보고 듣는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TV 도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풍요를 느끼고 풍요로운 그들의 세계의 빈곤함을 느낀다. 과거는 풍성하고 현재는 빈곤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매우 좋은 효과를 냈다”고 말하는 것이란 ‘너구리와 공생할 수 있는 생활’이라는 캠페인, 그리고 공원의 조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때가 늦었고, 살아가기엔 너무 좁은 것”이었다.
여전히 세계는 뛰쳐나가고 싶은 곳이다. 언젠가 너구리를 만난다면 그들을 따라 모든 옷들을 다 벗어 던지고 그들의 놀이마당으로 뛰어들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과거로 내달리고 싶은 것이다. 과거는 항상 풍성하다. 영화가 이끌어온 철학의 발걸음은 여기까지이다.
사이렌의 노래! 과거로 내달리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그 노래는 너무나 아름답다. 즐겁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약속은 동경하는 자를 과거라는 함정에 빠뜨린다(?계몽의 변증법?: 64). 과거에 대한 아름다운 회상은 혹 미래를 저당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산자(無産者), 그가 꿈꾸어야 할 것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이 영화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우리 곁에서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는 존재의 노래 소리를 듣기를 원한다.
Ending Song
“언제든지 누군가가 꼭 곁에 있어 / 생각해주세요. 그 멋있는 이름을 ..../ 마음이 울적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 꼭 꼭 누군가가 언제나 곁에 있어.
태어난 마을을 멀리 떠나있어도 / 잊지 말아 주세요. 그 마을의 바람을 .... / 언제든지 곁에 있어.
비오는 아침엔 도대체 어떻게 해 / 꿈에서 깨어나도 역시 외톨이야
언제든지 네가 꼭 옆에 있어 / 생각해주세요. 멋있는 그 이름을....
싸움에서 상처입고 빛이 보이지 않으면 / 귀를 기울여봐요. 노래가 들려와요. / 눈물도 아픔도 언젠가 사라져 가 / 그래 꼭 너의 웃는 얼굴을 원해.
바람부는 밤엔 누군가를 만나고파. / 꿈속에서 봤지. 너를 만나고파.”
2000년 1월 21일, 강사 : 이진경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3. 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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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스: 기억과 죽음의 세 가지 시제
이 진 경
1.기억의 세 가지 시제
1)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기억’에 관한 영화다. 첫 번째 영화 “마그네틱 로즈”는 먼저 과거의 기억, 혹은 과거로서의 기억에 관한 영화다. 여기에서 주인공 에바는 과거의 호시절, 명성과 성공, 사랑과 행복이 극점에 이르렀을 때의 기억에 집착하여, 마치 파우스트가 마지막에 그러하듯이, 그 순간에 대해 이렇게 외치고 있다. “멈추어라, 이 순간이여, 그대는 너무도 아름답도다!” 컴퓨터와 홀로그램, 레이저사진 등등으로 구성된 저 거대한 우주선의 공간은 멈추어선 시간의 공간, 정지의 공간이다.
하지만 어디 에바나 파우스트 뿐이랴. 우리 역시 아름다운 시간을 멈추게 하기 위해, 혹은 현재와 미래가 언제나 그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않고 멈추길 욕망하고 있지 않은가? 사진이나 영상을 이용하여 시간의 흐름을 멈추게 하려는 수 많은 시도들의 반복(“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 기억이란 한편으로는 이처럼 어떤 순간을 멈추게 하려는 의지의 형식이다. 추억.
그러나 그토록 영화로운 과거의 기억에 멈추었을 때, 그리하여 마그네틱 로즈의 자성과 같은 힘으로 현재의 시간성을 과거로 반복하여 끌어들일 때, 새로운 삶의 생성은 멈추고, 삶은 환영과도 같은 속도로 죽음의 선을 탄다. 그것은 그 주위를 도는 다른 삶조차 죽음으로 인도한다. 에바의 기억에 끌려가는 미구엘, 혹은 그것에 저항하지만 역시 자신의 지워지지 않은 기억으로 인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의 선을 타는 헤인즈.
다른 한편 나쁜 사건 역시 기억의 형식으로 우리의 현재 속에 머물며, 우리의 신체 속에 남는다. 트라우마, 그것은 감당하기가 너무도 고통스러워 의식에서 지워진, 그러나 무의식의 영역에서는 결코 지워지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과거다. 신경증은 이러한 기억에 사로잡힌 삶이며, 과거의 시간으로 반복하여 되돌아가는 현재요, 멈추어선 시간이다. eg.첫날밤의 실패한 기억으로 인한 신경증적 행위의 반복 사례. 헤인즈는 이런 점에서 보면 과거의 기억에 대한 에바의 집착을 비난하지만, 에바와 반대로 마치 트라우마와도 같은 나쁜 기억, 딸의 죽음이라는 가슴 아픈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이로 인해 그는 에바의 磁場, 아니 멈추어선 시간의 자장 안에 이미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기억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고통스러워 의식의 표면에서 지워졌지만, 아주 작은 자극만으로도 되살아나는 가슴 아픈 기억. 혹은 더 강하게 남으면 죽어서도 지상을 떠나지 못하고 중음신으로 떠돌게 만드는 기억도 있다. 이 끔찍한 강도의 기억을 우리는 보통 ‘원한’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어디 헤인즈나 프로이트의 환자 뿐이랴. 우리는 또, 종종 ‘상처’라고 불리는, 얼마나 많은 저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 점에서 우리 역시 지워지지 않는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 ‘상처’ 내지 ‘원한’이라고 불리는 과거의 사건에 사로잡혀 있는 한, 헤인즈와 더불어 멈추어선 시간의 자성 속에 있는 셈이며, 죽음의 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2)“악취탄” 역시 기억에 관한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앞의 “마그네틱 로즈”와 달리 현재 시제의 기억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다룬다. 악취의 고통과 죽음이 휩쓸고 간 제약회사에서 주인공 다나카 노부오는 비밀리에 문제의 시약과 관련서류를 동경본사로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다나카 노부오의 뇌리에 새겨진 그 명령은, 어떠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지워지지 않으며, 악취탄의 주인공을 동경으로 이송시킨다. 더불어 죽음이 선이 그의 행적을 따라 확산되고 분산된다. 마지막 장면은 이점에서 더욱더 익살스럽다. 나사의 우주복을 입고 ‘물건’을 전하는 노부오.
여기서 기억이란 단지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제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멈추어선 현재,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며, 지워지길 거부하는 현재, 그것은 변이를 멈춘 현재적 삶이며, 멈추어선 삶의 시제다. 여기서도 기억이란, 비록 명령과 임무, 부과의 형식으로지만, 어떤 시간, 주어진 어떤 삶, 혹은 현재라고 불리는 어떤 하나의 점을 멈추게 하는 의지의 형식이다.
하지만 어디 노부오 뿐이랴. 우리는 어떤 주어진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부과되는 명령·금지·과제를 지우지 않고 반복하여 수행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그런 점에서 그처럼 경직된 양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근대 사회, 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삶은 노부오의 익살스런 과업수행과 또 얼마나 다른 것인지. 차라리 더 우스운 건, 그러한 멈추어선 현재, 고착된 현재적 삶의 우스꽝스러움마저 잊혀져서 그러한 자신의 삶에 대해 웃을 수도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변이를 멈춘 삶, 그것은 노부오의 신체를 태우는 죽음의 선 위에 있으며, 더불어 관련된 다른 삶에 대해 변이를 멈추게 요구하게 된다는 점에서, 동일한 삶의 차이 없는 반복을 요구하게 된다는 점에서 노부오처럼 멈추어선 현재를, 그 죽음과도 같은 시제를 실어나른다.
물론 자신이 어떤 과제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멈추어선 시간, 정지된 현재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에서 우스운 것은 노부오가 그러한 지령과도 같은 임무를 부여받고 그것을 수행하려 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우스운 건 그 다음이다. 즉 어떠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임무의 동일성, 그러한 임무를 부여받은 자신의 동일성을 천연스레 유지하고 고집하는 노부오의 바보 같은 동일성이 그 모든 웃음의 원천이다. 그런 점에서 ‘동일성/정체성(identity)’은 현재의 삶을 멈추어선 시간성 속에 붙들어맴으로써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형식으로 변환시키는 고정의 형식이며, 멈추어선 삶을 당연한 현재성의 시제 속에 고정하고 유지하는 재생산의 형식이다.
3)“포대도시”에서 기억이란 무엇일까? 모든 것이 전쟁과 결부된 도시. 시계는 폭격을 하며 종을치고, 아이는 경례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아버지는 포탄을 나르는 노동을 하고, 어머니는 포탄공장에서 일을 한다. 아이는 포탄의 궤적을 계산하기 위해 삼각함수를 배우고, 화약의 성질을 이해하고 개발하기 위해 화학을 배운다. 환경운동가는 인체에 해가 없는 화약을 만들라고 데모를 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누구와 싸우는지, 왜 싸우는지 모르며, 또한 묻지도 않는다. 아이의 꿈, 혹은 공상은 이러한 삶 속에서 만들어진다. “나는 아버지처럼 포탄을 나르는 사람이 아니라 군인들을 이끄는 훌륭한 장군이 될 거야.” 그것은 미래에 관한 것이고, 미래 시제를 갖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삶에 대한 꿈이요 이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삶, 현재의 세계의 투사요 투영이며, 비록 아버지에게, 그리고 ‘나’에게 결여된 것이지만 현재가 만들어내는 기억의 잔상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미래의 시제를 갖는 기억’이다. 기억에 미래의 시제가 있을 수 있다니! “포대도시”가 탁월한 것은 도래하지 않은 것에 대한 꿈조차 일종의 기억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미래의 시제 역시 기억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끔찍한 공상 속의 ‘포대도시’에서 뿐일 것이며, 이것이 어찌 저 순진한 아이의 끔찍한 공상 속에서일 뿐일 것인가? 우리의 꿈, 때로는 소망 내지 욕망의 형식으로, 때로는 유토피아나 이상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우리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 그것은 얼마나 빈번하게 우리의 현재적 결여의 투영인 것인지. 집을 마련하고 싶다는 꿈, 좋은 직장을 얻어 잘 살고 싶다는 꿈, 좋은 배우자를 만나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꿈, 돈을 벌어 잘 살고 싶다는 꿈, 불멸의 명예는 안돼도 남들이 선망할만한 명예는 얻고 싶다는 꿈 등등. 이 모든 꿈은 분명 현재 부재하는 것에 대한 것이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며, 이후 도래하길 고대하는 것이란 점에서 미래에 관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사실 현재적 삶이 만들어내는 기억의 일종인 것이다. 마치 글자 그대로의 꿈이 낮의 사건들의 반영이며, 못이룬 소망을 대신 충족하려는 기억의 보충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점에서 미래는 현재와, 그리고 과거와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미래가 이처럼 현재 내지 과거의 시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차라리 턱없는 몽상과 구별되는 현실성의 이름을 획득한다. 그것은 현재에 발딛고 있는 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적 꿈이라는 것이, 현재 내지 과거로 소급되는 기억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다시 말해 망각의 선을 포함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변이 가능성이 없는 미래요, 현재의 연장일 뿐인 미래다. 비시간적인(untimely)--반시대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비현재적이고 비과거적인 요소들을 포함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의미를 제외하고는 현재 내지 과거의 시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래며, 멈추어선 미래다. 멈추어선 미래, 그것은 차라리 현재 이전의 미래요, 단순한 과거의 연장일 뿐이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새로운 변이의 선을 포함하지 못하며, 새로운 생성의 선을 그리지 못한다. 굳이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생성의 멈춤으로서 정의되는 죽음에 잇닿아 있다. “포대도시”에서도 앞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냄새가 도시 전체에 자욱한 포연처럼 화면 전체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가 아닐까?
2.비극적 기억, 희극적 기억, 표현주의적 기억
세 가지 시제로서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이 영화는 다루는 내용에 부합하는 표현의 형식을 갖고 있다. 먼저 과거의 기억, 특히 대개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좋았던 과거에 대한 기억은, 흔히 그렇듯이 낭만적인 아름다움의 형식으로 상기된다. 지나간 삶, 그것은 푸시킨 말처럼 모두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마그네틱 로즈”는 그 낭만적 삶, 낭만적 사랑에 대한 기억을 아름답게 보존하려는 여인의 꿈을 다루고 있다. 그 낭만성의 비극을. 그려지는 형상은 그에 걸맞게 아름답고 낭만적인 촉발을 제공한다. 마치 미구엘과 헤인즈가 그 낭만적 꿈으로 이끌려 들어가듯이, 우리도 낭만적 꿈을 따라 이끌려 들어간다.
전성기 오페라 가수의 꿈, 그것은 반복되는 아리아 “어떤 개인 날”에서 적절한 요약을 발견하며 암암리에 미리 제시된다. 지나간 사랑의 꿈을 고이--변함없이--간직한 채, 사랑하던 연인 핀커튼 소령을 기다리는 기생 나비부인. 하지만 에바의 연인이 그랬듯이, 사랑의 불변성 내지 영원성에 대한 몽상을 깨면서 핀커튼 소령은 나타나고, 불변성과 영원성의 형식으로 정의되는 낭만적 사랑의 환상은 그 앞에서 참담하게 깨어진다. 그것이 깨어지자마자 낭만적 사랑의 환상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낭만적 사랑의 체현자였던 나비부인은 그러한 깨어짐이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구현한다. 자신의 배를 가르는 죽음. 그래, 그것은 에바가 그랬듯이 정확하게 죽음의 선을 그린다. 낭만주의 오페라, 낭만적 소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죽음으로 끝난다. 구현될 수 없는 낭만적 영원성의 운명, 죽음 이외에 그것이 다른 경로를 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에바 역시 그렇다. 다만 차이는 자살이라는 일본 풍의 비장한 영원성이 아니라, 연인의 살해와 불변적인 영상으로의 암장이라는 서구적--확실히 플라톤적이지 않은가!--영원성의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둘째로 현재적 기억, 현재 진행형의 기억을 다루기 위해, “악취탄”은 무한히 현재 진행하는 일종의 ‘로드 무비’(!)를 만든다. 현재적 기억이 고집스런 동일성은 어떠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소명을 완수하는 불굴의 영웅을 패로디한다. 혹은 자신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奸智(List)처럼 주어진 소명을 수행하며 죽음을 실어나르는 저 평범한 영웅은 마치 알지 못한 채 행하는 헤겔적인 영웅의 패로디처럼 보인다. 동시에 주인공이 평범한, 혹은 약간 덜떨어진 인물로 설정한 것은, 그러한 영웅적 사건이 우리 역시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는 쉽고도 흔한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닌지? 어쨌든 이러한 영웅적 소명의 패로디가 반어 내지 풍자로 가득한 코미디라는 내용의 형식을 취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려지는 인물의 형상은 이러한 코미디의 형식에 부합하게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다. 전편의 분위기와 너무도 다른 이런 형상으로 인해, 기억이라는 제목-화두를 놓치면 도대체 같은 영화라는 것을 상상하기는 너무도 힘들다.
셋째, 미래의 시제 속에서 기억을 다루는 “포대도시”는 루오와는 좀 다르지만, 그럭저럭 그에 근사시킬 수 있는 굵고 거친 윤곽선을 갖는, 그로츠 풍의 인물들로 그려진 표현주의적 그림을 상기시킨다. 미래의 시제를 굳히고 고착시키는 기억을 표현하기 위해 굳은 느낌의 굵은 윤곽선을 사용한 것이라면 그 결과는 아주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표현주의자들이 대개는 전쟁으로 몰려가는, 혹은 전쟁에서 갓 나와 크나큰 상처가 아직도 그 입을 다물지 않고 있던 시대의 거대한 불안을 표현하였듯이, 아니면 그로츠처럼 그러한 시대에 휩쓸린 도시와 인민, 혹은 그런 시대를 만들어낸 부르주아와 군인, 관료들을 그렸듯이, 전쟁의 참화로 가득한 포대도시를 무대로 설정한다. 내용의 형식 역시 낭만주의적 비극이나 풍자적 희극의 형식이 아니라,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내러티브를 가진 표현주의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덕분에 세 편의 영화 가운데 가장 재미없는 영화라는 평을 듣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기에 사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3.기억과 망각
이 영화는 기억에 대한 세 편의 드라마를 통해 이런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통상적인 태도는 기억에 대한 애착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기억이 지워진다는 것, 추억을 망각한다는 것, 혹은 그런 기억을 지우고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는 만행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크 시티>는 기억을 지우고 조작하는 만행에 대해 원본적인 기억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이로써 기억에 대한 애착을 인간주의적으로 환기시킨다. 기억이란 인간적 삶의 필수요건이라는 것이다.
한편 망각이라는 만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혹은 망각으로부터 소중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기념’이라는 방식의 보충행위를 한다. 기념이란 무의식적 의지의 영역인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의식으로 표면으로 떠올리기 위한 의식적 상기행위다. 기념 내지 기념일, 그것은 이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망실되고 사라져 가는 과거의 사건을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과거를 현재로 불러낸다. 하지만 이것이 수행하는 것은 정확하게도 과거의 사건에 다시금 현재를 연결시키고,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 현재를 과거의 그 방향으로 되돌리려는 안쓰러운 노력이다. 또한 그 기념일들은 기념의 행위 속에 포섭된 주체들에 하나의 동일성을 부여한다. 예컨대 국가적 기념일은 그 국가적 동일성/정체성을 구성하며, 가정적 기념일은 그 가정의 동일성/정체성을 구성한다. 기념일을 둘러싼 투쟁들, 그것은 그 양상의 차이를 떠나서 모두 동일성을 자신의 방향으로 정의하고 자신의 힘으로 장악하려는 투쟁이다.
그러나 기억이 과거의 시제 속에서는 상처 내지 트라우마, 혹은 원한이라면, 기억 내지 기억력이란 그처럼 소중하고 ‘좋은 것’일까? 어린 시절의 어떤 상태나 사건에 고착된 사람, 과거의 사건의 기억을 지울 수 없는 사람, 혹은 원한을 잊지 못해 죽어서도 지상을 떠나지 못해 중음신으로 떠도는 귀신들, 이들의 공통점은 과거의 어떤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악취탄”의 노부오처럼 현재적 동일성을 구성하는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포대도시”의 아이처럼 미래에 침윤된 현재 내지 과거에 사로잡힌 사람 역시 기억을 지우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메모리스>의 남다른 미덕은, 기억에 대한 통상적이고 인간학적인 애착에 대해 냉정한 비판의 시선을 던진다는 점이고, 그것이 죽음의 선으로 이어지는 면을 본다는 점에서 그 비판이 근본적이라는 점이다. 이는 비장하게 시작하면서 소박하고 우습게 끝나는 <다크 시티>와 대비된다.
이 점에서 기억력에 대해서 망각능력의 능동성과 적극성을 보는 니체의 지적이 중요하다. 새로운 것이 되기(devenir) 위해서는 기억의 형태로 보존되는 무언가를 망각하고 지우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 아무 것도 망각할 수 없는 자는 동일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어떤 새로운 것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죽음의 선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새로운 것의 생성이 중지되는 것, 죽음이란 다른 아닌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기억이란 본질적으로 과거의 시제를 갖는다. 그것은 현재 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흔적이고, 미래 속에 존속하는 과거의 흔적이다. ‘기억왕 푸네스’(보르헤스), 모든 것을 기억하지만, 아무런 상상도 추가하지 못하는 저 기억의 제왕은 아무런 새로운 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그저 지나간 것, 읽은 것, 본 것을 정확하게 재현할 뿐이다. 창조와 상상, 다시 말해 기억와 무관한 것을 추가할 수 없을 때, 아니 그것을 통해 기억을 변용시킬 수 없을 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이런 점에서 지워지지 않아서 끔찍한 기억을 지워주는 사람들이 있다. 정신분석가, 그는 의식에서는 사라졌지만 그래서 더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기억을 찾아내고 언표케 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지우려는 사람이다. 원한과도 같은, 신체 깊숙이 뿌리 박힌 상처를 찾아내고 지워주는 것, 이것을 그들은 ‘치료’라고 부른다. 근대적 이성의 비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무당이 하는 것도 이와 동일하다. 그들은 원한이라는 상처로 인해 죽어서도 떠나지 못하는 귀신들에게, 그들의 상처받은 기억을 불러내고 찾아내어 지어줌으로써 가볍게 새로운 땅으로 떠나게 해준다. 근대 의학이라면 치료라고 불렀을 이 과정을 그들은 ‘解寃’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또한 죽은 자들 뿐만 아니라 산 자들, 하지만 원한과도 같은 깊은 상처에, 그 지워지지 않는 기억에 사로잡혀 멈추어선 사람들, 죽음과도 같은 고착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그 기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씻김’. 그러고 보면 무당은 산 자와 죽은 자을 가로지르며 무의식에 새겨진 기억을 지우며 새로이 생성의 능력을 찾아주는 사람, 멈추어선 망각능력을 작동시키는 사람은 아닌지?
동일성에 고착된 사람, 동일성의 강박에 사로잡힌 사람 역시 이런 점에서 보면 기억을 지우는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것이 없다면 그들 역시 생성이 멈추었다는 점에서 살아있으나 죽어 있는 사람일뿐이다. 동일성의 형태로 유지되는 기억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을 카프카라면 변신이라고 불렀을 것이고, 니체라면 변이라고 불렀을 것이며, 들뢰즈라면 유목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것은 병인 줄도 모르는 채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질병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다른 것이 되는 것(devenir-autres). 자신의 동일성을 끊임없이 변형시키는 것, 그리하여 동일성이란 말이 무의미하게 하는 것, 모든 종류의 고착의 선을 끊어버리는 것. (사실 생물학적 측면에서든, 사회학적 측면에서든 우리 자신의 동일성이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우리는 끊임없이 변한다. 현재의 순간에 몰두하여 있을 때, 우리는 동일성에 대한 물음에 시달리지 않으며, 동일성을 상기하려 하지 않는다. 반면 언제 우리는 동일성을 상기하고 찾으려 하게 되는가? 현재를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는데 몰두하지 못할 때,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데 충분히 몰두하지 못할 때, 혹은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 때, 요컨대 현재를 긍정할 수 없을 때, 바로 그 때가 동일성을 의식적으로 상기하게 되는 때는 아닐까? 긍정할 수 없는 현재를 억지로 긍정하기 위하여 어떤 과거에 동일성의 형식으로 계열화하려고 하게 되는 건 아닐까?)
4.생성의 시간, 생성의 시제
기억으로서의 미래,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서 미래란 이후의 변이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죽음의 선이었다. 그것은 도래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간으로서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투사에 불과한 미래요,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의 투사일 뿐인 미래다. 반대로 생성적인 미래란 거꾸로 현재를 변환시키려는 의지가 작동하는 미래고, 그것을 통해 현재를 유효하게 바꾸어가는 현재 시제로서의 미래며, 그것을 밀고 나아가 과거 자체도 얼마든지 지우며 새로이 구성할 수 있는 미래다. 종종 목적론으로 혼동되기도 하는 이러한 미래적 현재, 전미래적 시제는 기억에 반하는 반-기억(counter-memory)로서 망각의 선, 생성의 선이 자유롭게 뻗어나갈 자유의 공간을 통해 구성되는 현재라는 점에서 목적론에서 언제든지 벗어난다.
한편 많은 수의 공상과학 영화는 기억을 지우려는 미래의 현재적 개입을 표현한다. 예컨대 <터미네이터>는 과거라는 이름의 기억을 지우려는 미래의 시도를 기본적인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미래는 현재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되돌아가려는 자의 시점에서 보면 현재가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이 현재로, 아니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은 그들의 현재, 나아가 그들의 미래조차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어떤 결정적 과거를 지우려는 것이다. 즉 그들은 그 결정적인 어떤 기억을 지우려는 것이다. <12몽키스> 역시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분석이 그러하듯이 강력한 저항을 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구성되는 현재, 혹은 미래인 한, 거기에는 과거 내지 기억을 지우려는 시도에 반하는, 반대로 그것을 지키고 고수해야 하는 어떤 힘에 부딪치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저항은 <터미네이터>에서처럼 명시적인 투쟁과 전투의 형식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12 몽키즈>에서처럼 변경불가능한 과거, 지나간 시간의 힘 자체로 충분하게 진행되기도 한다. 그런데 적어도 이 두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서 기억을 지우는 것이 불가능하며 실패하고 만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계의 입장에서든, 인간의 입장에서든. 반대로 <토탈 리콜>은 미래로 가서 저항군의 현재를 만드는 어떤 거점, 그 기억을 지우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하거나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진다.
정작 중요한 건 어느 경우든 기억을 지우려는 시도는 현행적인 의미를 갖는 한 현재의 시제로서만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기억을 지우는 문제는 이처럼 과거로 되돌아가거나 미래로 가서 수행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의 시제로, 현재 속에서 수행해야 하는 현재적 문제일 뿐이다. 그것은 무엇을 지우는 부정적 과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긍정적인 과제다. 망각이란 잊고 지운다는 부정적 과정이 아니라, 현재적 생성에 몰두함으로써 과거가 자연히 그 안에 끌려들어 가면서 변형되거나 망각되게 되는 긍정적 과정인 것이다.
요컨대 기억과 망각의 문제는 남기는가 지우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멈춤 없이 흘러가는 현재적 순간 그 자체에 몰두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현재 그 자체에도 머물지 않고 고착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현재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 어느 시제에도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생성에는 시제가 없다.
이 지점에 이르면 생성의 문제가 절대적 생성의 문제로 변환된다. 그것은 어떤 기억에도 머묾이 없음이요, 어떤 현재에도 집착함이 없음이며, 어떤 미래에도 사로잡히지 않음이니,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시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馬祖 道一의 제자 大珠 慧海는 이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생각하여 헤아리지 아니하면 과거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과거의 일이 없다 함이요, 미래의 일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니 원하지 아니하고 구하지 아니하면 미래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미래의 일이 없다고 함이요, 현재의 일은 이미 현재라 일체의 일에 집착함이 없음을 알 뿐이니, 집착함이 없다함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집착함이 없음인지라, 현재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서 곧 현재의 일이 없다고 하느니라.”(?頓悟入道要門論?, 12절.)
?금강경?의 유명한 문구는 바로 이러한 사태를 표현하고 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금강반야바라밀경?, 제18(一體同觀分))
cf.덕산의 點心에 관한 기연.
금강경에 대한 해석과 강의로 유명해 주금강이라고까지 불렸던 덕산은, 남쪽 지방에서 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주장하면서 모든 경전이 쓸모 없다고 주장하는 선종이 발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 이들을 징치하리라” 하는 마음을 품고 그들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용담 선사가 주석하고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한참 배가 고픈 그는 앞에서 빈대떡을 부치는 노파에게 점심(點心)을 청했다. 노파가 묻는다. “그런데 등 뒤에 지고 있는게 뭐요?” “금강경을 주석한 책이요.” “그럼 금강경에 관해 내가 하나 묻겠는데, 만약 그걸 제대로 대답한다면 이 빈대떡을 그냥 드리지.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 것도 없을 줄 아시오.” 금강경이라면 덕산의 ‘밥’이 아닌가. 주금강 선생은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그거 좋지요.” 노파가 묻는다.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도 없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당신은 대체 어떤 마음(心)을 點하겠다는 거요?” 점심이라는 말을 이용한 이 절묘한 질문에 덕산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점심은 관두고 용담에게나 가보게.” (이하 생략).
2000년 2월 11일, 강사 : 고병권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3. 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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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Z: 전쟁기계는 사랑기계인가?
고 병 권
1. 노인과 Z, 그리고 기계들
키타쿠보 히로유키 감독과 원작자 오토모 가츠히로는 탁월한 엔지니어임에 틀림없다. 그는 기계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잘 다루는 사람이다. 그가 애니메이션 <노인 Z>에서 보여주고 있는 부품들의 조립과 기계들의 접속은 놀랍다. 영화 기계 속에서 그가 조립하고 접속시킨 기계들이 마구 생산하고 증식한다.
그는 다양한 배치들 속에서 그것이 조립되는 방식과 양상에 따라 수많은 기계들이 생겨나고 변신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침대와 욕조, 운동기구, 텔레비젼이나 게임기, 워드프로세서, 소통기구, 식탁, 의료기구, 재해 대처기 등을 간단한 변형을 통해 생산한다. 버스나 공사장의 불도저를 침대와 접속시키면 그것은 전혀 다른 기계로 돌변한다는 것을 그는 이해한다.
사실 이것은 기계를 다루는 특별한 용법이 아니다. 기계란 하나의 배치 속에서 조립되고 접속됨과 동시에 그 기능과 의미를 가지며, 생산물들을 생산한다. 어제까지 빵을 만들던 기계를 해체하고 재조립해서 오늘부터는 세탁을 하는 기계로 만들 수 있다. 어제까지 못을 박던 망치는 외양상의 조금의 변화도 없이, 오늘부터는 못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감자탕 집에서 뼈를 잘게 부수는 조리기구로 변화한다. 어제 청소하면서 썼던 마스크는 오늘 강도짓을 할 때 쓰는 복면이 된다. 바로 이것은 기계의 본래적인 용법인 것이다.
그런데 히로유키 감독은 훨씬 더 횡단적인 접속을 시도해서 새로운 기계들을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것 같다. 기계는 더 이상 기계와만 접속하지 않는다. 기계는 이제 인간과 접속한다. 그것은 심장에 들어와서 심전도를 재고, 뇌에 들어가 뇌파를 측정하며, 체온과 맥박, 혈압 등을 측정한다. 배설기관에 접속해서 배설물들을 때맞춰 치워주고, 긴급시에는 산소호흡기로 입과 접속한다.
기계는 기억을 저장하는 그 어느 깊은 곳에 들어와 과거의 아름다운 영상을 제공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보통의 사이버 펑크물들과 달리 빛보다 빠른 속도, 현란한 숫자들과 이미지들, 강한 금속성 등에서 보이는 미래적 이미지 대신에, 그 옛날 부인과 걸었던 한적한 해변과 얼음과자 가게, 그리고 오래된 노래들이라는 과거적 이미지를 출력한다. 미래는 과거와 아무런 거리낌없이 접속한다.
첨단 컴퓨터는 애써 젊은이들을 피하고 노인들과 접속한다. 컴퓨터는 아무런 부작용도 없이 노인들과 접속한다. 실사로 처리된 붓으로 쓰는 타이틀 글씨! 노인과 Z-001의 접속!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도대체 무슨 기계가 만들어진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해 그것은 바로 단단한 도관을 뚫고 다니는 전쟁 기계이며, 삶을 치유하는 생명 기계이고, 사랑의 깊은 의미 속에서 신과 만났던 스피노자가 보았던 그 사랑의 기계이다. 그것은 또한 연령과 가족, 군대라고 하는 몰적 영토를 가로지르는 분자적 기계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시간 기계(타임 머신)다. 과거는 현재의 중재 없이도 미래와 부담 없이 만나며, 미래는 과거의 기억을 구제한다.
기계들의 즐거운 변이. 변이하는 기계들의 개그. 영화를 따라가면서 이러한 기계들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 작은 기계들의 조립으로 이루어진 <노인 Z>라는 영화 기계에 대해 이름을 붙인다면 어떤 게 좋을까? 개그-기계?
2. 인간적인, 또한 기계적인
최근 인간이 차지하는 철학적 영토도 많이 줄었다. “19세기 모든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탄생한지 2백년 정도밖에 않은 인간 미셸 푸코, 이광래 역, ?말과 사물?, 민음사, 1995. 377쪽.
은 “마치 해변의 모래 사장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듯 이내 지워지게 되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게 되었다 같은 책, 477쪽
는 푸코(Foucault)의 언급이 상징하듯이, 근대는 인간이 지배하는 시대였으면서 동시에 인간에게 할당된 시간의 작은 경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에서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uberwinden soll)이며, 연결되어 있는 줄이 불과한 존재라고 말했다 F. Nietzsche, KGA, VI-1, p. 8
. 아마도 그 줄의 한끝에서 인간은 원숭이를 보고 깜짝 놀랄 것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초인에 대한 두려움에 덜덜 떨 것이다. 들뢰즈는 니체의 ‘초인’에 대해 ‘사이보그’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질 들뢰즈, 조형근?권영숙 역, ?들뢰즈의 푸코?, 새길.
, 그렇다면 아마도 인간이란 동물로서의 과거와 사이보그로서의 미래 사이에 매달린 줄인 셈이다.
그러나 원숭이와 인간의 거리가 인간이 생각한 만큼 먼 것은 아니듯이, 인간과 사이보그의 거리도 그렇게 먼 것은 아니다. 단순한 학습효과를 넘어서 음모를 꾸미고 사회에 대한 통치의 기예를 발휘하는 원숭이들에 대한 생물학의 연구보고서 못지 않게, 늑대가 되고, 개가 되고, 여우가 되고, 쥐가 되고, 카멜레온이 된 인간들에 대한 신문 기사들의 양도 넘쳐난다. 콘베이어 벨트에 앉아 기계처럼 단순 동작을 반복하는 인간에 대한 보고가 있는가 하면, TV에 접속해서 호모티브쿠스가 된 인간, 하루도 컴퓨터와 접속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는 컴퓨터와 한 종족이 된 인간도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인공 지능을 갖춘 로봇에 대한 과학적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으며, 영화는 자주 인간과 기계를 바꾸어 놓고, 만화는 기계보다 더 기계 같은 인간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기계를 소개한다(가령, <기계전사109>).
환경 문제를 다루는 많은 애니메이션들이 인간을 다른 동식물과 같은 자연의 권역으로 넣어서 그 패권이 초래한 문제들을 치유하고자 한다면(자연은 인간과 일치한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타잔>에서, 다른 친구들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자신의 모습에 번민하던 타잔에게 어미 고릴라는 서로 닮은 점들을 쉽게 찾아낸다. 눈이 두 개, 코가 하나, 입이 하나, 그리고 양손을 펴서 서로의 손가락을 겹쳐본다. 이 감동적인 장면은 인간은 자연이 서로 일치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사이보그들을 다루는 애니메이션들은 인간을 기계의 권역으로 넣으며,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기계와 인간은 일치한다) 상징적 장면으로 말하자면 <공각기동대>에서 쿠사나기 소령이 물에 떠오르면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합일되는 장면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공각기동대>의 끝장면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인형사라고 불리는 뛰어난 프로그램과의 합체이다.
. 인간의 권역에서 자연의 권역으로, 혹은 기계의 권역으로 들어간 인간은 전혀 다른 본질을 갖는 존재가 된다. 인간과 원숭이, 인간과 사이보그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해서 그 본질적 차이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근대 사회가 원숭이의 시대도 아니며, 사이보그의 시대도 아닌 인간의 시대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이버 펑그물인 <노인Z>를 분석하는 것은 확실히 기계의 권역에서 바라보는 인간과 기계의 일치의 문제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을 위해서 우리는 전통적인 기계론(mechanism)과 생기론(vitalism)의 전통적 대립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기계론과 생기론은 그 일치의 문제에 있어 기계적 확장으로서의 유기체, 혹은 유기체의 확장으로서의 기계라고 하는 시각에서의 통합을 시도했던 생각들이다 질 들뢰즈 -팰릭스 가타리, 최명관 역, ?앙띠 외디푸스?, 민음사. ...
.
기계들로부터의 구조적 통일성을 추상하는 것을 통해 유기체의 기능을 설명하는 기계론(mechanism)과 생물에 고유한 개체적 통일을 끌어대고 모든 기계가 이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하는 생기론(vitalism). 기계론적 시각에서 볼 때 유기체는 가장 완벽한 기계인 셈이다. 유기체의 자유의 영역이라고 평가되던 판단의 영역조차, 수 많은 화학물질들의 접속과 물질의 전달로 이루어지지 않은가? 판단은 미세한 저울이 기우는 것에 따라 내려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기론적 시각에서 볼 때 기계란 결국 유기체의 연장일 뿐이다. 로봇 팔은 인간의 팔의 연장일 뿐이고, 자동차는 인간 발의 연장일 뿐이다.
이 두 대립을 넘어서기 위한 버틀러(S. Butler)의 전략은 대립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극한의 지점, 무차별(indifference)의 지점, 산포(dispersion)의 지점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같은 책,
.유기체에 고유한 개체적 통일은 의문시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을 보라. 그들의 팔과 다리는 권력과 부에 따라 전유되고 개체적 통일은 파괴된다. 한 눈은 모니터에, 발은 발판에 손은 키보드에 접속하도록 강제된다. 볼트를 돌리기만 하는 노동자들의 손은 자본가에 의해서 전유된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손만으로 충분하다. 그 손을 대체할 로봇 손이 개발되면 언제든지 그 손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기체들이 기계라고 보는 기계론의 구조적 통일성도 극한으로 밀려난다. 유기체들은 다시 수 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부분들은 서로 다른 기계의 부품이라고 할 정도로 구조적 통일성을 갖지 않는 것들이다. 유기체는 무언가를 위해 기능하는 ‘하나’의 기계가 아니다.
인간들은 자신들 없이 기계가 생산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꿀벌의 매개를 통해서만 수정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빨간 클로버에서 클로버 자체는 재생산 체계를 갖지 않는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클로버는 꿀벌을 유혹에서 자신의 재상산체계 속에 꿀벌을 통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기계가 우리를 유혹해서 생산 체계에 통합시키고 있다면....
구조적 통일성과 개체적 통일성을 깨고 나면 우리는 기관(organ)과 기계(machine)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기계화된 척추동물, 혹은 기계들에 진드기 같이 기생하는 기생충이다.”
기계 권역 안에서 차이는 더 이상 생물과 기계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생물과 기계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생물의 두 상태인 기계의 두 상태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생물’인 타카자와 할아버지와 ‘기계’인 하루 할머니 사이에는 아무런 종적 차이도 없다. “도대체 기계 같은 것과 어떤 약속을 할 수 있느냐”는 프로그래머 하세가와는 기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차이는 하세가와와 다른 사람-기계들, 즉 타카자와 할아버니와 하루 할머니, 하루코 등의 사이에 있다.
3. 기계들의 두 상태
우리가 생명체와 기계의 구분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이것에 대해서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야겠지만, ****를 참조하는 것으로 대체하겠다.
,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는 기계들의 진정한 차이가 몰적인 기계와 분자적 기계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규모의 문제라기 보다는 작동 방식의 문제, 그리고 기능과 포메이션(formation), 사용과 조립, 생산과 생산물이 갖는 관계 등에서 나타난다.
분자적 기계의 경우에는 기능과 포메이션이 분리되지 않으며(포메이션이 그것의 기능을 말해줌), 위치를 특정화 할 수 없는 비국지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난다. 그것들은 파동들과 입자들, 흐름들에 절단하고 채취하며, 다른 부분 대상들과 횡단적으로 접속하고, 본래적 의미의 기계로 흐름들과 절단들, 결합된 파동들과 입자들, 결합 가능한 흐름들과 부분 대상들. 이것들에 대한 횡단적 접속, 포함적으로 이접하며, 다의적으로 통접한다. 이 기계는 아주 작은 화학 물질 자크 모노가 바로 ‘기계’라고 불렀던 그 의미에서...
에서부터 우주적 알에 이르기까지 그 규모에 상관 없이 작동한다.
이에 비해 몰적 기계는 흐름들을 기술이나 제도들의 구조적 차원에서 통일시킨다. 경직된 선들이 흐름들의 가는 통로를 지정하고, 접속은 전체적인 것에 비추어 자리가 배치되며, 이접은 배타택일적인 것으로(이것 아니면 저것), 그리고 통접은 일대일대응으로 된다.
가족이라는 몰적 기계는 내부와 외부의 흐름을 엄격히 구분해서 다루며, 그것을 위계 구조에 따라 배분한다. 에너지와 욕망은 아빠-엄마-나의 외디푸스적 삼각형 안에 갇힌다. 사회 제도들 역시 몰적 기계로 작동하면서 욕망의 흐름들을 통제한다. 경직된 선분들. “19세가 넘지 않으면 이 영화는 볼 수 없어!” “60세가 넘으면 직장에서 나가시오” “동성애자 가족은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없어!” “히스패닉이 항상 말썽이야” “저놈 ***도 출신 아냐?” 인종과 연령, 성애와 지역.
거대한 사회적 배치 속에서 몰적인 기계들은 줄지어 신호를 지키며 서 있고, 충실히 수업을 받고, 지정된 장소에서 노동하거나 휴식을 취한다. 그것들은 홈패인 평면 위에서만 욕망을 흐르게 한다. 그러나 욕망하는 기계인 분자적 기계는 홈들을 지우면서 매끄러운 평면 위로 미끄러진다. 그것은 아무 것나 접속하고 아무 데서나 움직인다. 그것은 도로와 도로 아닌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곳곳에서 그것은 몰적인 선분들과 충돌하고 그것을 뚫고 지나간다.
분자적 기계는 놀라운 접속 능력을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생산해내면서 탈주한다. 버스와 접속하면 버스는 다리가 되어준다. 버려진 깡통 인형과 접속하면 그것은 머리가 되어준다. 모노레일을 만나면 그것은 놀랍게 원숭이가 되어서 줄타기 실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멀리 떨어진 양로원과도 접속해서 그것을 정보 기계로 만들고, 그것과의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확보한다.
4. 사이보그 에이지즘?
해러웨이(Haraway)는 여성을 사이보그라고 불렀다 Donna Haraway, "A Manifesto for Cyborgs: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 Feminism in 1980s", Feminist/Postmodernism, Routledge, 1992 (국역: ?사이보그를 위한 선언문?, ?문화과학? 8호)
. 그것도 아주 말을 듣지 않는... 그것은 고정된 정체성을 갖기 보다는 정체성들을 가로지르는 이름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네그리(Negri)는 노동자들을 사이보그라고 부른다. 이들은 생산수단으로서 ‘두뇌-기계(brain-machine)’를 가졌으며, 그것을 통해 인공적 언어들을 흡수하고 새로운 인식 패러다임을 가지며, 각 기계들과의 협력적 양식, 즉 접속을 통해 생산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물질적 노동과 비물질적 노동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기계와 유기체의 혼성물, 즉 사이보그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Negri, A., "Retour vers le futur", http:// listss.village.virginia.edu /~forks/exil.htm과 ?디오니소스의 노동?, 제2권, 16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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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는 ‘사이보그’라는 개념을 통해 ‘대중적 지성’을 포착하고자 한다. 소수자들은 더 이상 사회의 한계인들(marginals)도 남지 않는다. 그들은 텔레마틱, 정보적, 시청각적 테크놀로노지들을 이용해서 전혀 다른 운동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Felix Guattari, ?포스트모더니즘과 윤리적 포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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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사이보그는 당연히 타카자와 할아버지와 접속해서 할머니가 된 제6세대 자기증식 컴퓨터다. 그것은 말 그대로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을 통해 만들어진 사이보그, 바이오 컴퓨터다. 원래 전투용 로봇을 시험하기 위해 만들어진 복지용 로봇이었지만 전혀 다른 주체성을 생산한 사이보그다. “컴퓨터가 캐릭터를 가지고 있어....죽은 사람의....”
그러나 진정한 ‘노인Z들’은 따로 있다. “ALGOL 언어라는 것을 알아버리면 이미 갓난 아기 손을 비트는 거나 마찬가지야.” “지금 타이렐이라고 하는 미국 회사의 컴퓨터에 들어가서, 탈세한 꼬리를 잡은 거야.” 이 놀라운 컴퓨터의 실력자들, 그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노인네들이다. 영화가 계속해서 가족들의 사랑을 강조하고, 심지어 술집 이름마져 ‘니시노 가조쿠(西の家族)’이지만, 노인네들은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았을 뿐 아니라 사회에서 하나의 치우기 곤라한 짐짝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진짜 ‘노인Z들’은 동료들 속에서 더욱 즐거워하며, 기계들과 소통하고 접속하는 기계들이다. 모든 규칙들과 도덕은 우스꽝스럽다.
이들은 인공적 언어들을 흡수하고 새로운 감각 방식과 감수성을 획득한다. 새로운 주체성의 생산! 이들은 도망하지 않고 중심으로 뛰어든다. 여성과 노동자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소수자로서의 노인들. 그들은 정보의 사이클을 다른 방식으로 작동시키고 있다. 젊은 학생들이 네트워크를 통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순환시키듯이, 원주민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자연을 순환시키듯이, 노인들은 네트워크를 통해서 자신들의 투쟁과 사랑을 순환시킨다.
배치를 건드려서 용법을 다시 정의하도록 하는 것. “군사인가? 군사목적인가? 너는 노인 문제라고 하면서 시험해서 모니터한 것인가?” “노골적으로 병기로 실험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용법은 다시 정의된다. 바다를 보고 싶은 할아버지의 소망을 들어주는, 그리고 할아버지의 아내가 되는 그러한 것으로....
기계들은 한 때 노동자들과 외적인 대립관계에 있었다. 노동자들을 직장으로부터 몰아내고, 노동자들의 영혼을 빨아 없애며, 노동의 강도를 높여왔다. 노동자들은 그것에 맞서 기계 파괴운동을 벌여왔다. 그러나 기계의 권역 안에서 우리는 기계들의 두 가지 다른 작동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분자적 작동과 몰적인 작동. 주체성을 보편화하고 환원주의적으로 동질화시키는 경향과 주체성의 이질성 및 특이성을 강화시키는 이질화의 경향 Felix Guattari, Chaosmosis, cha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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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의 기계적 생산이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지, 더 나쁜 방향으로도 갈 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오늘날 무수한 개인이 매여있는 바보 같은 대중 매체의 지배가 있는 반면에 새로운 준거 체계의 창조 또는 혁신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5. 전쟁 기계와 사랑 기계
이 영화는 “같은 컴퓨터, 같은 성능을 가진 기계”가 어떻게 다른 질을 가질 수 있는지, 그 둘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Z001과 그것을 모델로 해서 만든 군사용 프로토타입! 결론적으로 말해 이 둘은 모두 ‘전쟁 기계’이지만 그 각각이 의미하는 ‘전쟁’은 전혀 다른 것이다.
할머니가 된 Z001이 벌이는 전쟁은 ‘바닷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과정에서 수행된다. 때로는 신호를 어기며 도로를 횡단하고, 음식점에 들어가 스피커를 떼어내며, 막아서는 불도저를 훌륭한 바퀴로 개조하는 것, 전화기를 입으로 개조하는 것 등이 그것이 벌이는 전쟁이다. 이러한 전쟁 기계는 전형적으로 노마드(혹은 노마드가 된 소수자)에게 속한다. 그들은 경계를 뚫고 매끄럽게 흐르고자 한다.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의 민병대! 그들 역시 전형적인 전쟁 기계들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고병권, <랜드 앤 프리덤: 전쟁기계와 포획장치>, 연구공간‘너머’/수유연구실 영화강좌 참조.
그것은 그들이 총을 쏘는 병사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스탈린의 군대, 프랑코의 군대가 이러한 의미의 전쟁 기계에 속하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민병대 전쟁 기계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 안에서 경직된 선분들의 출현을 막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여행하는 곳(전투를 벌이는 곳)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변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 새로운 사회를 생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인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전쟁 기계는 전쟁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의 의미를 이런 것이다 질 들뢰즈 -팰릭스 가타리, 연구공간 ‘너머’ 역, ?천의 고원?.
. 그것들은 폭력을 행할 때조차도 그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여행의 길에서 그것을 막는 포획장치들과의 충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발터 벤야민(W. Benjamin)이 말하는 신성한 폭력, 존재 자체의 폭력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존재함으로써 폭력을 행사할 지언정, 폭력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마드들을 정벌하고, 그들을 포섭해왔던 국가가 전쟁 수단으로 쓰는 군대는 이점에서 변질된 전쟁 기계, 포획된 전쟁 기계다. 그것은 규율과 훈육을 통해서 국가에 전유된 전쟁 기계다. 간혹 그것들이 국가를 상대로 총부리를 겨눌 때, 우리가 바로 ‘쿠데타’라고 하는 현상을 목도하게 될 때, 우리는 전쟁 기계의 잊혀진 야성이 어떻게 변질되어 있었던가를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전쟁 기계란 변이와 새로운 생성과 친화력을 가지며, ‘전쟁’ 보다는 ‘창조’와 ‘생성’, ‘생명’에 훨씬 가깝다. 들뢰즈가 니체의 여행에서 ‘전쟁 기계’를 발견했다면, 네그리는 스피노자에게서 그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의 숱한 오해에도 불구하고, 네그리는 전쟁 기계가 ‘사랑 기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랑, 사랑만이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결정할 수 있네. 이같이 비이성적인 부끄러운 고백의 저 안에서 나는 나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몇 명의 오랜 친구를 불러올 것이네. 이들 중의 하나가 그 좋은 스피노자네. 그는 사랑이 권력과 지식 사이를 연결하고 있다고 믿었네.” 안토니오 네그리, 장현수 역, ?사회적 실천 -팰릭스 가타리에게 보내는 편지?, ?전복의 정치학?, 세계일보사, 202쪽.
사랑(Amor)!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사랑(Amor dei)과 니체의 운명에 대한 사랑(Amor fati)! 그러나 우리는 사랑에 대한 통속적 이해로부터 가장 멀리 달아남을 통해서만 사랑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리비도, 성적 욕망을 특정 대상에만 투여하는 것, 특정 인물이나 대상에 한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피해야할 사랑이다! 또 그것을 승화시켜야 한다는 생각 역시 버려야 한다! 사랑은 직접적으로 대중에, 혹은 모든 기계들과 자연물에 리비도를 흐르게 함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앙띠 외디푸스?, 제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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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신도 니체의 운명도 사랑의 목적론을 거부했다 Joan Stambaugh, The Other Nietzsc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1994. ch. 6
. 신과 운명은 통속적인 이해처럼 정해진 길이 아니다! 그것은 만들어지는 길이며, 생성되는 길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인간적이지 않다. 신은 자기증식적인 능력일 뿐이다. 니체가 운명의 근원으로서 스피노자적 신을 공격했다고 해도, 그는 디오니소스 속에서 그것을 재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모두 세계를 긍정하는 것으로서의 신과 만난 것이다.
자기 증식의 사이보그가 난 데 없이 부처로 돌아온 것! 사이보그가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바닷가의 기억 속에서 우리는 부처를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이보그의 여행이 끝나고 다시 시작하는 점이다. Amor Dei ! 모든 것에 원리로서 내재하고,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의 이름인 부처로의 귀환과 그것에서의 출발!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를 이루는 것도 둘을 이룬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수천 수만을 이룬다는 것이다.” ?앙띠외디푸스?에서
그리고 그것은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2000년 2월 18일, 강사 : 이진경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3. 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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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의 질주>: 잠행자의 공간에 관한 에세이
이 진 경
1.잠행의 공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선
<허공에의 질주>(시드니 루멧, 1988)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인 70년대 초 라이팜탄을 만드는 무기공장에 폭탄를 던진 혁명가 가족의 탈주와 잠행(潛行)에 관한 영화다. 경찰(FBI)의 추적과, 그것을 복사하는 주변 사람들의 ‘추적’을 피해 끊임없이 탈주하는 잠행자, 그러나 죽음과 어둠의 색조를 띠게 마련인 이 잠행의 공간은, 시종일관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코 어둡고 암울하지만은 않다. 차라리 계속 덮쳐오는 암울함을 뚫고 나가는 밝고 건강함, 반복되는 슬픔의 무게를 이기는 우정과 기쁨이 인상적인 ‘정치학’을 구성한다.
알다시피 잠행의 공간은 잠행자들의 탈주선을 통해 정의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 난감한 공간을 정의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경직된, 혹은 몰적인 선분성의 선과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 언제나 함께 간다. 영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사건’은 언제나 이 세 가지 선 사이에서, 그 선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최초의 계기는 다가온 경찰을 알아보고 탈주하는 가족에서 시작된다. 탈주선을 끊고 탈주자들을 국가장치의 거대한 몰적인 선분성의 선, 그 경직된 선분 안에 가두려는 선이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경직된 선분이란, 그들이 어떠한 이유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고려를 하고 했든 간에 결과의 범법성만을, 즉 법적 코드의 선분성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새로운 감금과 처벌의 경직된 선 안에 가두려는 것이란 점에서,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거대한 망원경을 가지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경직된 선분성의 선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탈주선의 흔적을 뒤지며, 그것이 불가피하게 거쳐간 몰적인 선분들을 찾는다. 그러나 탈주선은 경직된 선과 유연한 선을 가로지르며 달린다. 위험의 지표들을 보고 그들은 다시 벗어나 달린다.
벗어난 이 탈주자들은, 그러나 경직된 선분성의 선과 다시 교차하며 그 선이 만드는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학교, 공장, 병원 등등. 그것은 탈주의 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경직된 선 사이에, 아니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선에 갇히는 순간 탈주선은 절단되고 만다. 따라서 이 경우 잠행은 불가피하다. 새로운 이름을 찾고, 학교에는 그 새로운 이름으로 거짓등록하며, 새로운 이름에 맞는 행동의 집합에 적응해야 한다. 물론 잠행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그것은 종종 탈주선 안에 균열을 만들어낸다. 경직된 선분의 안정성과, 언제나 그것의 뒤에 붙어 그것이 만드는 그늘에 스스로를 가려야 하는, 그렇기에 언제나 자신을 ‘죽여야’ 하는 잠행의 불안정성이 그렇게 대비된다.
사실 탈주선과 경직선 선분성의 선 사이의 이런 대립은 잠행자들에겐 차라리 익숙한 것이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건을 야기하지 못한다. 익숙한 선의 배치를 흐뜨리고 교란시키는 근본적 사건은 다른 하나의 선이 교차할 때 비로소 발생한다. 그것은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다. 학교의 경직된 선분에서 벗어나 음악적 소리의 흐름을 쫓는 음악선생, 혹은 그런 선생 역시 아버지로서 가족이라는 경직된 선분성의 선을 이루는 하나의 선분이기에 그로부터 또 다시 벗어나 사랑의 흐름을 타는 딸, 자신들을 잊는 세계에 대한 경멸을 죽음의 선으로 변환시키려는 과거의 동료 등.
뿐만 아니라 더 결정적인 것은 탈주선 안에서 교차하는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다. 사랑의 선에 이끌리는 주인공의 분자적 욕망, 소리 없는 피아노가 상징하는, 잠행의 선을 타는 예술적 능력의 궁지(탈주자의 연주에는 소리가 없다!), 그러한 아들의 궁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살려주고 벗어나게 해주고 싶은 어머니의 욕망. 아버지는 긍정적 탈주선, 탈영토화하는 선을 이끄는 첨점이라면, 주인공과 그 어머니는 탈주선과 유연한 분자적 선 사이에 있다. 그들은 잠행의 공간에서는 불가능한 욕망을 갖고 있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중심적인 모티브고, 그래서 그들이 이 영화의 중심인물이 된다.
2.잠행자-기계
잠행자는 끊임없이 변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끊임없이 다른 자가 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지각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 자신의 신체와 자신의 기호를 끊임없이 변환시켜야 한다. 그것은 극도의 강렬한 긴장을 수반한다. 강렬하게-되기. 이런 점에서 잠행자는 변이 내지 유목, 타자-되기(devenir-autres)를 가장 높은 강도에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떠한 머묾도, 어떠한 동일성(identity)도 허용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잠행은 모든 종류의 배치 속에 들어갈 수 있어야 지속될 수 있으며, 또한 어떠한 배치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야 지속될 수 있다. 따라서 잠행자 자신은 이런저런 배치에서 요구하는 실체와 형식으로 자신을 변환시킬 수 있는 질료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순수 잠행자는 모든 종류의 배치, 모든 종류의 지층을 가로지르는, 어떠한 형식이나 실체에 머물지 않는 강렬한 질료적 흐름을 형성한다. 순수 변이, 순수 생성으로서 잠행. 따라서 잠행자는 일종의 추상기계다. 이런 이유에서 잠행자-기계는 언제나 변신술과 함께 다닌다. 홍길동-기계, 루팡-기계, 신창원-기계.
그러나 추상기계는 언제나 구체적 배치 안에서, 그것을 통해서만 작동한다. 잠행의 선은 모든 접속된 선과 쉽사리 절연할 수 있어야 하지만, 또한 적절한 곳이면 어디에든 접속하여 그 선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존의 선들에 접속해서, 그 선의 배치 안으로 들어가며, 그럼으로써 그 안에서 탈주선을 펼치고, 그것을 통해 기존의 선들을 변환시킨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잠행자의 선은 어느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는 리좀적인 선을 그린다. 물론 볼셰비키의 선처럼 강력하게 중심화된 잠행의 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잠행이 패배하고 실패하게 되는 조직의 형상이다.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 볼셰비키는 쉽게 끊어지는 선을 발명한다. 선보다는 사실은 점으로 귀착되는 조직. 하지만 수목형의조직은 모든 상대적 중앙의 실패를 모든 상대적 하부의 파괴로 이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그러나 볼셰비키적 조직의 경우에조차 각각의 잠행자의 리좀적인 접속과 우발적인 사건화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대개 사후적으로 수목화된 조직으로 흡수될 뿐이다).
한편 잠행자는 자신이 접속한 공장에서 운동의 선을 펼친다. 환경에 관련된 것이든, 새로이 조합을 만드는 것이든. 이는 추적으로 인해 중단되지만, 새로운 탈주선이 접속하는 또 다른 선, 또 다른 배치 안에서 이들은 또 다시 전복을 꿈꾸며 새로운 변이선을 만들어내려고 할 것이다. 아들을 학교에 다시 집어넣는 것도, 심지어 자신들과 헤어지면서까지 대학이라는 또 하나의 몰적인 선분성의 선 속에 접속케 하는 것 역시 음악적 창조의 선을 따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잠행은 결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선을 그리지 않으며, 반대로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선을 그린다. 잠행을 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처럼 도망치고 도피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에조차도 결코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어떤 것을 생성하고 창조하지 못한다면, 한없는 긴장 속에서 끊임없이 탈주선을 타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잠행은 탈주할 때와 그것을 중단했을 때를 비교하는 교통의 대차대조표에 의해 지속되거나 중단되지 않는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새로운 삶의 선, 변이선을 만들 이유와 능력이 있을 때, 잠행은 지속될 수 있으며, 그것이 있는 한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망치지 않는 잠행, 쫓기지 않는 잠행이 있는 것이다. 김삿갓-기계, 조주-기계.
잠행의 중단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공포와 긴장의 고통 때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새로운 창조적 선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자신의 부친을 만나 아이를 부탁하며, 작은 아이가 그렇게 크게 되면 자수하겠다고 말한다. 혁명과 운동의 선들이 미약해지고, 그것이 갖고 있던 긍정적 희망이 미약해질 때, 창조가 주는 기쁨보다 긴장이 주는 고통이 잠행의 전면에 등장한다. 기쁨이 사라질 때, 보람이 사라질 때, 그리고 희망이 사라질 때, 잠행은 더 없는 고통이 된다. 그리고 잠행은 아마도 중단될 것이다.
3.잠행자의 징표(기호)
다시 말하지만, 추상기계는 구체적 배치 속에서 작동하고, 탈주선은 몰적인 선분성의 선을 관통해야 하며, 잠행자는 지층 안에서 잠행해야 한다. 이로 인해 잠행자는 언제나 이름을 갖는다. 기호의 동일성을 가지며, 신체의 동일성을 갖는다. 그들은 멈추며 달린다. 하나의 탈주선이 새로이 시작되자마자 그들은 신체에 변형을 가하며, 이름을 바꾸며, 바뀐 이름의 호명에 반응하는 습속을 만든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 이들의 동일성은 잠행하는 한에서 계속하여 바뀌고, 이전의 기호의 원환(그 이름을 둘러싼 관계의 원환)에서 비약하며, 그 기호들과 단절한다. 이전의 이름은 잊어야 하며, 신체의 표면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따라서 이들이 사용하는 이름은 그것이 적절한 이름인 한에, 이미 이름이길 중지한 이름이고, 그것이 의미화하는 한에 의미화에 반하는 의미를 가지며, 그것이 동일성을 형성하는 한에 동일성에 반하는 동일성이다.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기호지만, 동시에 그럼으로써 경직된 선분성의 선 안에 자신을 감추는 기호다.
따라서 이들은, 가까이 근접하는 이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고, 이해할 수 없는 기호들을 사용한다.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피아노가 없다는 말, 연주를 기피하는 행위, 혹은 사랑 앞에서의 주저함, 다른 이름이 새겨진 생일 케이크, 대학진학 문제 등등. 이러한 차이, 아니 이러한 드러남은 근본적으로 동일할 수 없는 동일성의 뒤안이고, 동일성의 기호들로 가릴 수 없는 잠행자의 기호(징표)며, 경직된 선분 안에 있어도 언제나 그 외부에 있는 탈주선의 단편이다. 탈주선에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의 선이 근접할 때, 그리하여 두 선 위에 있는 점들이 공명할 때, 이러한 비밀의 정체는 드러난다. 주인공의 고백.
이러한 누설은 두 점 간의 공명을 더욱더 증폭시키며, 한 점은 다른 한 점에 더욱더 이끌리며, 새로운 주체화의 점을 만든다. 이 점은 잠재적으로 이미 탈주선까지 포함해서 새로운 하나의 분기점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종종 새로운 탈주자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경직된 선분성의 선에서 벗어나게도 하지만, 반대로 탈주자로 하여금 탈주 앞에서 탈주하게 하기도 한다. 두 점의 공명지대, 그것은 커플의 블랙홀이다. 주체화는 이름을 부르며 작동한다. 이제 주인공은 이름을 말하고, 잠시나마 원래의 이름으로 되돌아간다. 이 영화에서 그것은, 많은 경우 그러하듯이, 탈주를 포기하고 잠행을 중단하게 하는 점처럼 보인다. “나는 여기 남고 싶어요.”
아버지는 그것을 잘 안다. 그렇기에 사랑을 말리지 않지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말하는 셈이다). 대답은 단호하다. “안 돼.” 어머니도 그것뿐이었다면 남겨두고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도 그를 가두지 않는다. “자전거 내려. 너는 여기 남는다.” 확실히 이 점에서 이들의 탈주선은 경직되지 않았으며(경직된 선 안에서, 그것과 대립하면서 탈주선은 또 얼마나 그것과 닮아 가는지!), 이들의 가족은 닫혀 있지 않았다. 주체화의 점이 공명으로 작동하는 커플의 블랙홀이 아니라, 새로운 긍정적 창조의 선을 그리는 점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들이 주인공을 놓아주는 것은, 아니 새로운 주체화의 점을 긍정하고 그것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들의 새로운 창조적 선이 더욱 활발하고 큰 스케일로 그려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위해서다. “남들을 위해 좋은 일을 더 많이 해야 해!”
4.잠행자의 가족
이 영화에서 잠행은 가족이란 단위로 행해진다. 그런데 잠행은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이라는 단위, 그 조직을 다른 것으로 변이시킨다.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잘 보여주듯이 근대의 가족은 가족구성원의 생계를 자신의 욕망으로, 동시에 자신의 책임으로 하는 가장과, 가족만의 세계 속에 갇혀 오직 남편과 아이, 가족적 삶의 재생산만을 자신의 욕망으로 삼게 되는 주부, 그리고 잠시도 눈을 때지 않고 바라보고 관찰하며 보호해야 하는 아이라는 세 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이다. 가족의 무게 때문에 가족 안에 빠져죽는 가장, “언제나 내 옆에 있기를, 언제나 우리 옆에 있기를” 욕망하는 부인, 그리고 보호와 관심 없이는, 혹은 그것의 대칭적 짝인 인정욕망 없이는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는 아이. 이 셋은 바로 그 가족 삼각형이 반복하여 재생산해내는 근대적 인간의 형상이다. 가족들로 하여금 안정적인 삶을 살게 해줄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등등의 모든 책임이 그 권한과 더불어 가장의 ‘임무’가 되고, 남편을 선술집에서 가정으로 끌어들이는 것, 아이를 거리의 불량한 공간에서 가정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내 내지 주부의 ‘임무’가 된다. 잘 보호받고 잘 자라주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건강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며, 그리하여 성공적인 삶의 요건들을 훌륭하게 성취하는 것, 그것이 또한 아이의 ‘임무’다.
그러나 잠행자의 가족은 처음부터 그런 조건에서 벗어난다. 경제적 내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나 직장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장이 경제를 책임지고, 주부는 가사를 책임지는 근대적 가족의 이분법은 처음부터 통하지 않는다. “자, 각자 무엇을 벌었는가 내놓아 보지.” 따라서 경제력의 장악에 기초한 가장의 권력은 없다. 탈주선을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권한이 있을 뿐이다.
또한 누구나 자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며, 또한 누구나 다른 가족원을 보호해야 한다. 아이들이 초병이 되고(시작할 때의 탈주), 어른들로 초병이 된다(끝날 때의 탈주). 잠행은 부모만의 긴장으론, 부모만의 변이로는 한 걸음도 떼 놓을 수 없다. 어른과 아이 사이의 대립과 구별의 선이 급속히 약화된다. 아이는 금방 어른이 되며, “누구보다 똑똑하고, 누구보다 어른스러워” 진다. 부모는 아이들을 사회적 욕망의 배치에 따라, 통념적 성공의 욕망에 따라 바라볼 수 없으며, 아이들 역시 인정욕망을 통해 만들어지는 자아의 동일성(identity)을 구성하지 않는다. 반대로 끊임없는 변이를 요구받으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자친구의 말을 통해 보여지는 음악선생의 가족, 소시민의 전형적인 가족과 주인공의 가족이 대비된다. 조개껍데기를 생일선물로 바치는 건 생각도 할 수 없고, 하인 없이는 살 수 없는 엄마, 아버지의 바램대로 피아니스트로 성공한 오빠, 학교에선 좋은 선생일 지 몰라도 가족에선 똑같이 자신의 욕망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가장인 아빠. 이는 또 하나의 몰적인 선분성의 선을 구성하는 선분들이다. 학교에선 유연한 분자적 선을 그리던 음악선생도, 이 가족의 선에 이르면 경직된 선분이 될 뿐이다.
반면 주인공의 가족을 이런 식으로 만드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거기에는 이른바 ‘성공’도 없고, 성공을 바라는 욕망도 없으며, 그것을 받쳐줄 돈도 없기 때문이다. 대신 엄마와 아들 사이의 더없이 강한 이해와 우정이 있고, 고통을 함께 넘어서는 동지로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신뢰와 우정이 있으며, 비록 불만과 충돌이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은 이해와 우정이 있다.
이러한 양상이 잘 드러나는 것은 어머니의 생일파티에서다. 돈은 없지만 애정이 가득한 선물들, 자신들로 인해 뜻하지 않게 눈을 잃은 사람을 초대하는 케잌, 초면의 객에게도 솔직하게 열리는 마음들. 여자는 이 우의에 가득한 가족에 단박에 휩쓸린다. 음악은 이들 사이에 새로운 공감을 형성하고···.
이 잠행자의 가족은 평균적인 가족, 평범한 가족과 젼혀 다른 특이성을 갖는다. 이러한 가족은 이미 가족이기를 넘어선 가족이며, 자본주의 내지 근대의 가족에 반하는 반가족이다. 그것은 새로운 연대와 결합의 형식으로서 하나의 밴드를 보여준다. 분명히 리더로서 아버지가 있지만, 그렇다고 각각의 욕망이나 활동, 사유가 그 리더의 지도와 지휘 아래 있진 않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들들은 아들들대로 각자 자신의 삶이 있고, 서로는 그것을 이해하고 도와주지만, 그리고 때로 충돌도 하지만,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의해 교란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 아들의 욕망은 잠행과 잠행가족을 벗어나지만, 아들은 그것을 고집하지 않으며, 그런 욕망에 대해 가족으로서 함께 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고서까지 허용하고 풀어준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끈(band)에 묶여있지만, 아무도 사실은 묶여있지 않다. 언젠가 때가 되면 각자의 욕망의 흐름을 따라 어쩌면 함께, 어쩌면 흩어지며 흘러갈 것이다.
5.잠행의 시제
잠행은 기억에 반하는 여행이다. 잠행자는 모든 흔적을 지우며 탈주한다. 잠행자의 탈주는 이름을 지우고, 행적을 지우며 가야 한다. 기억은 오직 변형시키고, 변이시키기 위해서만 이용된다. 새로운 이름을 얻기 위해 과거의 기록을 이용하고,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기 위해 그 사람의 흔적을 추적한다. 변이된 행적, 겹쳐진 이름은 기억과 흔적으로 작용할 때조차도 반(反)기억이요 반흔적이다.
따라서 기억을 지우는 여행으로서 잠행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시간을 앞지르는 여행이다. 그것은 기억 내지 흔적이라는 이름의 과거를 지우는 여행이기 때문이고, 과거의 시간이 쫓아오는 것을 따돌리며, 그보다 항상 앞질러 가야 하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앞지름에서 어떤 선형성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앞지르기 위해 때로 그들은 엉뚱한 과거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선명한 과거들을 겹쳐놓기도 하며, 그것들을 뒤섞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언제나 ‘때아닌’(untimely) 시간을 따르는 비선형적 시간성을 갖는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본질은 명확하다. 그것은 과거라는 시간의 추적을 따돌리고, 그것을 앞지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억을 지우는 것은 결코 여행의 목적이 아니다. 잠행자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 보이지 않기 위해 여행하고 탈주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기억을 지우는 것은 탈주하고 여행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들은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들로 인해 어이없는 다친 사람에 대한 슬픈 기억도 가지고 있다. 이는 생일마다 상기되는 기억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그들은 그 기억의 상처에 매이지 않으며, 다만 애도한다는 점에서 신경증적 반복과도,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잠행자의 여행은 어떤 정해진 목적지를 갖지 않으며, 다만 잠행의 경로만이, 그나마도 그려지면서 지워지는 경로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잠행자의 여행에는 미래(future)가 없다. 물론 유토피아도 있고, 꿈도 있겠지만, 그것은 잠행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잠행을 야기하며 현재적 잠행 속에서 작동하는 현재다. 적어도 이 영화의 잠행자들은 유토피아에 이르기 위해 잠행하진 않는다. 그들은 이르는 곳마다 달라지는 목적을 가질 뿐이며, 멈춘 장소마다 달라지는 방법을 가질 뿐이다. 그것은 새로운 탈주선을 그리는 순간 아무 미련 없이 모두 던져버리고 가야 한다. 잠행자들에게 성과의 축적으로 정의되는 발전이나 미래의 개념은 없다. 그런 미래란 사실 과거에 사로잡힌 것이기에, 과거와 절연하며 달려야 하는 이들에게 그런 미래는 없는 것이다. 오직 현재가 있으며, 현재에 잇닿은 장래(avenir)만이 있을 뿐이다.
반대로 그들을 추적하는 국가장치는 기억을 상기시키고, 기억 안으로 잠행자를 포섭하려 한다. 잠행자들의 신원을 폭로하고, 그들의 과거, 그들이 연루된 기억을 상기시키는 신문과 방송이 새로운 탈주의 직후에 이어진다. 방송은 주인공의 친구였던 아이에게도 그에 대한 기억을 상기토록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과거의 붙잡으려는 힘이고, 모든 새로운 현재를 과거로 붙잡으려는 힘이다. 경찰과 법정이 그렇고, 방송이 그렇다. 성적표를 요구하는 학교의 선분적 선도 그렇고, 누구에게 배웠는가를 묻는 선생들의 선도 그렇다. 그들은 과거로 현재를 판단하고, 그것으로 미래를 결정하려 한다. 따라서 그들의 시제는 언제나 과거다.
반면 과거가 없는, 혹은 과거를 지우며 달려야 했던 잠행자들로선 이런 물음은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음악선생이나 시험장의 교수의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 아니 대답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그래서 종종 건방진 대답이 된다). 그래서 많은 경우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잠행자의 거짓말은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로 돌리려는 힘에서 벗어나는 방법이고, 일종의 외면이다.
다른 한편 과거의 힘은 다른 곳에서도 온다. 심지어 그것은 잠행자의 내면에서부터 오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은행을 털자며 찾아온 과거의 동료가 바로 그렇다. 그가 종요하고 권유하는 테러는 과거의 ‘영화’, 그 화려했던 기억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그것을 다시 현재 속에서 상기시키려는 시도다. 혹은 잠행의 고요함과 희망의 약화에서 오는 허무주의, 무의미해 보이는 고요한 현재에 대한 경멸과 허무주의가 그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장래의 계획에 대해 말할 때로 과거로 돌아가려는 욕망 안에 있는 것이며, 영화로운 과거에 붙잡힌 장래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과거시제를 갖는 여행이다. 그것은 과거의 동지로 찾아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내면에서도 얼마든지 밀고올라올 수 있는 것이고, 많은 경우 잠행이나 탈주를 죽음의 선으로 인도하는 유혹이다. 잠행이 가장 비참하고 가장 나쁜 결과로 끝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이는 잠행의 시간, 잠행의 공간을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생성의 공간에서, 순식간에 그 반대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죽음 내지 처벌의 공간으로 바꾸어 버린다.
6.잠행의 공간
잠행자의 공간은 두 가지 전혀 다른 색조를 가지고 있다. 국가장치의 입장에서 그것은 죄를 지은 자가 도망치는 공간이고, 죽음의 공간이며, 보류된 처벌이 행해지는 처벌의 공간이다. 탈주자, 그는 도망치고 돌아다녀도 사실은 갇혀있는 것이다. 그것은 불모의 사막이고, 대낮에도 어둠이 가득한, 시간을 따라 탈주자 자신이 긴장과 공포로 속으로부터 갉아먹이는 저주받은 공간이다. 잠행과 탈주에 언제나 부정과 어둠, 파멸의 색조가 가득한 것은 이런 국가적 관념이 잠행의 공간을 어느새 검게 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덮쳐온 국가장치와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이 시작되는 탈주에서 시작하고, 그리고 또 다시 덮쳐온 국가장치와 또 다시 시작하는 탈주선에서 끝난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잠행을 감행할 이유를 우리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처벌보다 더 가혹한 처벌을, 그저 도망치기 위해 감수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잠행자가 국가장치를 따돌리며 탈주하는 것은 반대로 무언가 창조하고 생성하며 생산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성적 탈주자에게 잠행의 공간은 도망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변혁하기 위한 공간이고, 처벌의 공간이 아니라 생산의 공간이며, 파괴의 공간이 아니라 창조의 공간이고, 불모의 공간이 아니라 생성의 공간이다. 따라서 그것은 비록 빈번하게 어두운 색깔로 뒤덮이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빛이 있는 공간이며,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공간이며, 변이의 선, 혁명의 선이 흐르는 공간이다. 영화는 국가장치의 공격 사이에 있지만, 바로 그 사이가 잠행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잠행과 비밀이 고통이 되는 계기(사랑)를 포함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암울하지 않으며, 창조와 생성의 선이 지배하고 있다.
다른 한편 잠행의 공간은 선분화된 선들로 분절된 지층 사이에서 존재한다. 잠행의 공간은 ‘사이-공간’이다. 학교와 학교 사이에서(전학의 절차), 이 가족과 저 가족 사이에서(이전 신원의 포기와 새로운 신원의 획득), FBI와 여권국 사이에서(여권의 위조) 등등. 그러나 여기서 사이라는 말은 외적인 경계를 전제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차라리 그것은 하나의 지층 내부에 그 사이-공간을 끌어들이는 것, 혹은 지층 내부에 다른 지층을 끌어들어 균열과 빈틈을 만드는 것이다. 학교 내부의 사이-공간, 신원의 동일성 내부의 사이-공간, 혹은 자기 내부의 신원/동일성(identity) 사이.
사이나 빈틈없는 공간은 없다. 잠행자는 주어진 지층에 이런 사이-공간을 만듦으로써, 분절되고 홈 패인 공간 내부를 드나들며, 패인 홈들을 가로지르며 활주한다. 그것이 익숙해질 때, 그래서 어디서나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선분화된 공간, 홈 패인 공간 안에서도 탈주선이 그려질 수 있다. 새로운 창조적 선의 생성을 기대하며 아들을 떠나보내는 것은 바로 이런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2000년 2월 25일, 강사 : 고미숙
수유연구실 강좌 : 필로시네마 : 영화로 탈주하기 3. 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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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소피아’를 향한 대서사시
고 미 숙
“그 사람 푸른 옷을 입고 황금의 들판에 설지니.
그때 잃어버린 대지와의 끈을 다시 맺고서
저 푸른 청정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리라.”
마치 저 고대희랍의 서사시인 ‘호머’를 연상시키듯, 눈먼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 예언이야말로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기본동력이다. 바람계곡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기다린다. 부해의 침식, 곤충의 습격을 벗어나 저 푸르른 생명의 세계로 자신들을 인도해 줄 위대한 지도자를. 그래서 부해 최고의 검사 유파선생도 그를 찾아 세상을 끊임없이 떠돌아다닌다. 마치 그 예언의 지도자가 먼, 그 어느 곳에 있다는 듯이. 하지만, 모든 예언들이 그런 것처럼, ‘그’는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영화의 대단원에서 밝혀지는 바대로 나우시카가 바로 ‘예언 속의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중후한 중년남성의 얼굴로 그려져 있는 예언속의 인물이 나어린 처녀아이로 치환되고, 게다가 그 위대한 지도자가 서있는 황금의 벌판이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오무들의 ?? 위라는 것에서 우리는 전복적 상상력의 쾌감을 맛볼 수 있다.
대지의 분노가 가라앉고, 거신병조차 물리칠 수 없는 가공할 파괴력의 주인인 오무가 동정과 우정으로 마침내 마음을 여는 때, 이것이 바람계곡 사람들이 고대(산업문명이 멸망한 지 1000년)로부터 기다려왔던 ‘에코소피아’였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에코소피아를 향한 장엄한 서사시라 할 만하다.
‘바람의 계곡’ , 그 ‘에콜로지’적 특이지대
일본 애니매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느 생태주의자보다도 인간과 환경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탐색해왔다. <미래소년 코난>, <천공의 성 라퓨타>도 그러했거니와, 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후 최근에 만든 <원령공주> 역시 문명과 자연의 문제에 대한 심층적 탐사를 보여준다. 일본에서 1천만명이 관람했다는 <원령공주>는 여러 모로 나우시카의 연장이면서 더 광대한 내러티브와 스펙타클을 구사한다.<원령공주>에 관해서는 고병권, ?생을 위해 총체를 바꾸는 기예? -‘원령공주’와 생태주의 운동-(수유연구실 99년 봄강좌 원고)을 참조할 것.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원령공주>보다 <나우시카>가 더 한층 감동적이다. )
이 영화는 생태주의가 핵심테마이긴 하지만, 전쟁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진행된다는 점에서는 일단 전쟁영화이기도 하다.
부해의 근처에서 바람과 물에 의지하여 생을 꾸려가는 바람계곡에 도르메키아의 거대한 선박이 추락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그것은 도르메키아가 페지테를 정복하여 공주 라스텔을 인질로 잡아감과 동시에 ‘거신병’을 이동시키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이어지는 도르메키아 군대의 침략. 그것은 명분상으로는 거신병을 본국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페지테에 이어 바람계곡을 정복하고 아울러 부해를 불태워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는 크사냐의 정치적 야욕이 작동한 것이기도 했다. 나우시카의 아버지가 살해되고, 나우시카가 인질로 잡혀가는 도중 크사냐의 ‘콜벳트’들은 다시 페지테의 ‘건쉽’(라스벨)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도르메키아의 콜벳트들이 모두 침몰되고 인질 나우시카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된 크사냐는 페지테의 라스벨과 함께 모두 부해에 떨어진다. 여기까지가 일단 전쟁의 초반부이다.
자, 정리해보자. 지금 이 영화에 중첩된 전쟁의 층위들을. 먼저 서쪽의 군사강대국 도르메키아의 크사냐와 그들에게 정벌당한 페지테가 하나의 진영이라면, 도르메키아와 바람계곡 사이의 진영이 있다. 그리고, 이들 모두에게 적대적인 부해의 곤충, 특히 오무대군이 있다. 이들은 인간들 사이의 전쟁 과정에 계속 개입하고, 그럼으로써 전선을 변환, 교란시킨다. 억압과 적대가 도처에, 다중적으로 펼쳐져 있는 셈이다.
흔히 생각하듯이, 에콜로지는 자연, 혹은 환경만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다. 자연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인가? 등등. 하지만 사실 ‘에코’라는 말의 어원이 잘 보여주듯, 생태주의는 자연환경을 포함하여 경제, 주거, 가재 등 사회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용어이다. 나의 신체와 삶 또한 하나의 ‘에코’인 것이다. (한강물이 썩은 것을 걱정하기보다 자기 정신이 오염된 것을 먼저 걱정하라!) 그러므로 문제는 사회와 자연 사이에서가 아니라, 사회 내부, 개인의 내면에서 형성된다. 생태주의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 새로운 가치의 증식, 더 나아가 윤리학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고병권, 앞의 글, 1면 참조)
이 영화에서도 그 점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주요 갈등과 대립의 선이 부해와 오무라는 저주받은 자연과 인간들인 것같지만, 사실 자연과의 투쟁은 인간 상호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고스란히 연계되어 있다. 도르메키아인은 페지테를 점령하고, 다시 바람계곡을 지배통치하려고 한다. 부해를 태워버리고 곤충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겠다는 관념은 실상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겠다는 사유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페지테 역시 그 점은 마찬가지이다. 오무의 습격을 유도하기 위해 오무의 유충을 잔혹하게 매어달고, 거신병을 되살려 부해를 싸그리 불태워버리려 한다는 점에서 도르메키아와 다르지 않다. 자연과의 극단적 이분법은 인간에 대한 관점에도 그대로 연장되는바, 이런 이항대립적 사유 자체가 실은 ‘오염된 생태계’의 일부인 것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도르메키아와 페지테의 인간관계는 지극히 위계적이고, 군사적이다. 특히, 크사냐의 언어는 주로 명령적 형태를 취한다. 부관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나우시카에 의해 구조되어 부해에 떨어졌을 때도 크사냐는 총을 들이대고 말한다. “움직이지마. 내가 명령하겠다!” 누가 명령하고, 누가 복종하는가가 크사냐에게는 곤충들의 위협보다 더 우선시되고 있는 것이다. 페지테의 통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을 못하게 하고 금지하는 것이 그들이 즐겨 구사하는 언어들이다.
그렇게 볼 때, 바람계곡은 아주 독특한 공간이다. 우선, 그것은 부해의 근처, 다시 말해 가장 위험지대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르메키아든 페지테든 부해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바람계곡에 몰려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람계곡은 부해와 공존하는 법을 알고 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숲의 독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이 계곡의 사람들은 부해의 곤충들과 적대하지 않으면서 바람과 물을 통해 숲과 공존하는 방법을 체득하고 있다. “우리도 불로 태우려고 수없이 시도해봤어.” 그들은 불로 부해를 태우는 것이 생명 그 자체를 깡그리 소멸시키는, 근원적으로 ‘생명에 반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단지 자연과의 관계에서 획득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바람계곡의 사회체가 지니는 독특한 위상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바람계곡 역시 도르메키아나 페지테처럼 겉보기에는 ‘제국적’ 성격을 지닌다. 그럼에도 바람계곡은 권력의 위계가 강력한 분절의 선을 취하지 않는다. 나우시카가 공주인 것을 보면 그의 아버지가 통치자인 듯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왕으로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저 하나의 지도자일 뿐이다. 그렇게 보면, 나우시카에게 주어진 공주도 왕족이라는 특권적 명칭보다는 애칭의 성격이 강하다. 계곡의 사람들이 나우시카를 존경하는 것은 그녀가 지닌 선천적 위계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녀가 발휘하는 힘 때문이다. 그녀는 명령하기보다 앞서 달린다. 바람계곡에 위기가 오면 가장 먼저 달려가고, 절대적 위험이 있을 때면 그 위험을 혼자 감당하기 위하여 뒤에 남는다. 한마디로 그녀는 명령하고 통치하는 주체가 아니라, 강렬한 열정과 힘으로 사람들을 공명하게 하는 존재이다. -공명기계. 그런 까닭에 그녀가 작동시키는 권력은 그 어떤 외부와 초월적 지평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녀의 내부, 그녀만의 독특한 윤리적 태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인질로 잡힌 노인들이 크사냐에게 하는 말, “당신도 공주님이지만, 우리 공주님과는 아주 다르군요. 이 손을 보세요. 반년이 지나면 돌처럼 딱딱해질거요. 그렇지만 공주님은 이 손을 좋아했죠. 열심히 일하는 아름다운 손이라고.” 치코의 열매를 모아 나우시카에게 주는 꼬마아이들. 절대절명의 시기에도 “공주님이 웃었다”고 기뻐하는 노인들. 등등. 그녀의 권력은 이런 식으로 수많은 공명의 점들을 만들어내면서 계곡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른다.
부해 최고의 검사 유파나 예언자 할머니의 존재 또한 자신들의 능력을 통해 사람들을 이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나우시카, 유파, 할머니 이들 사이를 구획하는 사회적 위계관계는 전혀 없다. 말하자면 바람계곡은 주어진 위계의 선은 매우 희미한 반면, 사람들 개개인이 지닌 특이성으로서 서로 공명하는 사회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새로운 윤리적 가치의 생산을 내재하고 있다. 수직적 위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 안에서 상호간의 힘과 능력에 따라 특이성이 고도화되는 공동체. 그런 점에서 바람계곡은 ‘에콜로지적’ 특이지대이다. 즉, 그것은 부해의 근처에서 바람과 물을 통해 살아간다는 공간적 배치, 제국이면서도 반제국적으로 운영되는 사회적 배치, 인물들의 능동적 윤리적 태도 등의 측면에서 이미 그 자체가 ‘상호교환가능한 렌즈’(가타리, ?세 개의 에콜로지?)인 셈이다.
생을 향한 ‘죽음의’ 질주? --거신병과 오무
“거대 산업문명의 붕괴로부터 1000년. 세라믹의 유적에 황폐화된 대지에 나타난 바다.
부해라고 불리워지는 유독의 장기를 내뿜는 균류의 숲이 있는, 쇠퇴한 인간의 생존을 위
협하는 존재이다.”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은 이렇게 제시된다. 우리가 현재 구가하는 고도 산업문명이 벽화로 남은, 아득한 미래. 부해는 산업문명을 종식시킨 불의 7일 이후 탄생한 죽음의 숲이다. 여기에서 내뿜는 가스는 마스크가 없이는 5분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신체에 치명적이다. 그 숲의 식물들이 퍼뜨리는 포자는 모두 독을 뿜어대기 때문에 그것들이 퍼지는 곳은 죽음이 휩쓸어 간다. 이 부해를 지키는 것은 기괴하고도 가공할 힘을 지닌 곤충들이다. 숲의 파수꾼 대왕 얌마를 비롯하여 오무의 대군.
지구가 멸망한 뒤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가 곤충이라는 것도 참 흥미로운 설정이다. 지금의 생태계에서 곤충은 미물에 지나지 않지만(가끔 위협적인 존재가 되긴 하지만), 곤충이 번식력, 생명력,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신체적 변이의 다양성의 면에서 어느 종보다도 탁월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그려진 곤충들의 형상은 단순한 메타포 이상의 현실감을 지닌다.
어떻든 크게 보면, 이 영화의 구도는 죽음의 숲 부해, 저주받은 대지의 파생물 오무, 그리고 인간, 이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배치하에서 인간은 그저 지구의 일부를 구성하는 한 인자일 뿐이다. 혹은 더 나아가 부해를 등에 업은 오무의 위세 아래 인간의 위상은 한없이 위축되어 있다. 이것은 근대 이후 산업문명으로 그 정점에 달했던 인간주의, 다시 말해 자연을 닥달하여 인간의 통어하에 놓았던 문명이 파괴된 이후 지구위에 형성된 재배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구도에서 인간들은 다시 지구의 지배자가 되고 싶어한다. 도르메키아 제국의 크샤나, 페지테의 통치자가 그러하다. 바람계곡을 정복하고서 크사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계획은 이 행성을 되살리는 것이다. 인간을 다시 한번 이 별의 지도자로 만들
기 위해 우리는 의도적으로 굉장한 힘을 되살렸다. 우리의 계획에 따른다면, 곤충과 숲과
독의 위험이 없는 안전한 생활을 약속한다.”
그리고 나우시카에 의해 구출된 뒤 감금되었을 때, 유파에게 하는 말,
“당신은 왜 인간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자연을 다시 무릎을 꿇려 인간의 통치하에 두고싶은 이 욕망은 페지테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야. 인간의 세계를 다시 만드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부해를 단지 자신들의 삶과 분절된 외적인 것으로서만 사유한다. 즉, 생태계의 극단적 오염이 죽음의 숲을 만들어낸 것, 다시 말해 부해가 인간 삶의 내부에서 생성된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거기에서 오직 자신들의 생을 위협하는 적대성만을 볼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불태워버림으로써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한 발상은 사실 자연을 오직 통치와 계몽의 대상으로만 파악한 근대적 사유의 연장선에 있다. 만만하고 온순할 때는 가차없이 파괴하여 인간의 발 아래 무릎을 꿇리고, 그것이 가공할 위협이 될 때는 불을 일으켜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동일한 사유의 평면 위에 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자연과 인간이 상호교환가능한 렌즈임을 상기할 때, 그러한 적대적 이분법은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노정된다. 도르메키아나 페지테는 바람계곡의 사람들 또한 도구화한다. 거신병을 살려 불바다를 만들려고 하는 크사냐도, 오무를 유인하기 위해서 바람계곡의 사람들은 희생되어도 무방하다고 여기는 페지테도 그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어차피 피로 물든 길이야”(크사냐)
“모든 게 적이야. 우리의 일을 방해하고 있잖아.”(페지테의 대장)
갈 데까지 가보는 무모함, 적과 아, ‘나쁜 놈’과 ‘우리 편’만이 있는 세상. 이것이야말로 근대적 인간주의의 오만함이 도달한 극단이 아니던가. 지구를 종식시킨 거신병을 천년의 지하에서 다시 불러들이는 ‘어처구니 없는’ 짓도 그런 맥락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니,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유의 선 위에서는 그 극점에 필연적으로 다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천년이 지났는데도 이들의 사유는 자본주의에서 ‘한 걸음’도 못나간 것이다! 거신병의 모습이 인간과 흡사하면서도 흉물스러운 괴물이라는 것도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신이 사라진 자리에 등장하여 인간과 우주위에 군림한 근대 과학이 만들어낸 결정체! 그 일그러진 문명의 초상!
그리고 다른 극단에 오무와 곤충들이 있다. 자신들을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무리들.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굶주림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달리다 죽어버리면 그 썩은 시체에서 포자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독으로 대지를 침식시키는 가공할 괴물들, 이들에게도 세계는 오직 적과 동지만이 있을 뿐이다. 분노하는 대지. 광기의 자연. 저주받은 존재들이면서 그 존재 자체가 저주가 되어버린 생명체들!
거신병과 오무, 인간과 자연은 이런 식으로 대치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을 이렇게 극과 극으로 몰고가는 것은 모두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점이다. 도르메키아인이나 페지테인은 모두 안락하게 살기 위해 거신병을 되살린다. 그들이 오무를 자극하고 부해를 태우려는 것도 시쳇말로 다 ‘살자고 하는’ 짓이다. 오무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질주한다. 나우시카가 곤충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때 가장 먼저 취하는 태도는 두려움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그녀는 광기와 분노의 저변에 공포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체득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가공할 파괴력을 발휘하는 존재들. 결국 거신병이나 오무는 모두 ‘생을 향해 죽도록 질주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자신의 실존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 곧 스피노자가 말한 바 ‘욕망’은 인간이든 자연이든 모든 양태들이 공유하는 속성이다. 크사냐나 페지테나 오무 모두 그 점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들은 사실 생에의 열망 때문에, 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어버리기 위해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질주는 모두 죽음의 선위에 있는 것이다. 누구도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부해를 몽땅 태워버리면 모든 생명은 끝난다. 아니, 모든 곳이 부해가 된다. 오무대군을 죽여도 거기에서 다시 죽음만이 위세를 떨칠 따름이다. 하기야 적과 아의 이분법이 지배하는 곳은 사실 모두 이렇지 않을까. 지배와 예속, 주인과 노예, 생과 사가 맞물려 돌아가는 곳에서는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 이 대쌍들은 사실 모두 죽음의 선위에 있다는 점에서 생에의 충동과는 비껴져 있다. 생을 강렬하게 소망할수록 그로부터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역설의 평면! 그렇다고 이 대목에서 어설픈 조화나 절충을 주장하는 것도 한심한 짓이다. 오무와 거신병이 어떻게 조화할 수 있을 것이며, 한다 한들 절대 미봉의 완화국면 이상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이 대쌍의 쳇바퀴를 벗어나 제 3의 선을 만드는 것이다. 죽음의 ‘홈패인’ 공간으로부터 탈주하여 매끄러운 생성의 평면으로!
충만한 대지, 충만한 신체 - 나우시카
영화의 오프닝 신은 극도로 대비되는 두 가지 장면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부해에 침식되어 파멸해버린 죽음의 도시. 그리고 그 뒤에 청정한 하늘로부터 메베를 타고 나타나는 나우시카. 이 극단적인 대비 속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그대로 함축되어 있다.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저 푸르른 생명의 도약은 가능하다는 것을.
‘메베’는 도르메키아의 거대한 배나 여타 전투기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바람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자만이 자유자재로 탈 수 있는 도구이다. 바람-메베-나우시카. 이 계열은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그것들은 ‘공동신체’다. 그녀의 약동하는 생명력은 이 메베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나우시카의 신체는 이렇듯, 기계와 자연 모두로부터 힘을 접속시킬 수 있는 다양한 변이의 선들을 지니고 있다. 죽음의 숲인 부해를 자유롭게 나들이하고, 그 독한 포자들을 가져다 생명으로 길러내고, 공포와 분노로 가득한 곤충들을 달래주는 힘. 또 오무의 껍질로 무기를 만들고, 오무의 눈을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능력. 그녀의 눈을 통해 보는 부해의 숲은 지옥의 어둠이 아니라, 오후의 포자를 눈송이처럼 만들어내는 아름답기 그지 없는 도원경이 된다!
그것은 그녀의 신체가 인간주의적 틀 안에 갇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접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안에서 생명에의 힘을 찾아낸다. 유시아브라는 곤충을 숲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그녀는 먼저 그로부터 분노를 가라앉히고 그와 함께 날아간다. - ‘곤충되기’. 날개를 움직이게 하고 함께 날아오르면서 숲으로 가는 것. 그 순간 나우시카는 유시아브가 된 것이다.
테토를 친구로 만들고, 오무와 대화할 수 있는 힘. 그것은 크샤나나 페지테의 대장처럼 자연을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것을 버리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들뢰즈/가타리의 기계주의적 관점과 통한다. 무엇과 접속하든, 생을 위한 배치로 바꿀 수 있는 신체. 그것은 일종의 ‘기관 없는 신체’이면서 동시에 ‘충만한 신체’이다. 혹은 노자(老子)의 ‘허(虛)’의 은유. “물주전자의 유용성은 물을 따를 수 있는 공(空)에 있는 것이지, 그 형상이나 그것을 만든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다. 허는 모든 것을 포장(包藏)하고 있음으로 해서 만능이다. 허에 있어서만 운동이 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무로 하고, 사람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가 있는 사람은, 여하한 상황에서도 지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오카쿠라 텐신, ?다론(茶論)?)
바람계곡의 사람들은 도르메키아인들보다는 부해와 공존하는 법을 알고 있지만, 나우시카만큼은 아니다. 바람의 움직임을 통해 대기의 흐름을 읽고, 오무의 눈빛을 통해 대지의 분노를 읽어내는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자연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므로 분노와 공포를 생에의 능동적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우시카뿐이다. 그녀는 유사에 잠겨 부해의 밑바닥에 기절해있을 때 꿈을 꾼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죽은 사람들의 긴 행렬. 그녀는 부모의 품을 뿌리치고 죽음의 행렬에서 이탈한다. “난 거기 가기 싫어요.” 아버지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손이 그녀를 부르지만 그녀는 그것을 뿌리친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오무의 유충을 보호하기 위해 울먹인다.
“인간과 곤충은 같은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는 거란다.”(아버지)
“안돼요. 나쁜 짓 안할 거예요. 제발 죽이지 마세요.”(나우시카)
죽음충동을 이기고, 오무를 감싸안는 무한한 에너지가 그녀 안에 흘러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연한 것이지만 그러한 생의 능동성은 사회적 관계에서도 강렬하게 견지된다. 그녀는 적대하는 관계가 없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병사들을 죽일 때말고는 그녀는 누구도 적대하지 않는다.(그것에 대해서도 그녀는 이내 후회한다.) 자신을 인질로 잡은 크사냐를 구해주고, 페지테의 라스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그렇다고 비폭력 평화주의자는 절대 아니다. 도르메키아인들이나 페지테와 싸울 때 그녀는 누구보다 강한 전사다. 주요장면마다 메베위에 온몸을 그대로 노출한 채 총탄과 맞서는 장면을 환기할 것. 그 저돌적인 전투력. 가늠할 길 없는 용기. 그녀의 적은 오직 ‘죽음으로 치닫는 것들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아이들과 병든 노인들, 징그러운 곤충 누구하고도 자유롭게 접속한다. 생에의 강렬도! 그녀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그렇다고 나우시카가 흔히 에코페미니즘에서 말하는 그런 모성애의 소유자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여성이라는 성정체성의 문제와는 별 상관이 없다. 크사냐를 보라. 그와 관련하여 흥미롭게도 <원령공주>에 나오는 두 인물 모두 여자다. 들개소녀 모노노케 히메와 성주 에보시. 이 두 적대적인 배치 사이에 아시타카라는 남자아이가 ‘상호교환가능한 렌즈’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성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여성되기’의 문제인 것이다.
“모든 권력구성체에 고유한 남근적 경매에서 이탈하는 남성은 가능한 다양한 양식들에
따라 여성되기에 개입할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조건에서만 그는 더욱이 동물, 우주, 문자,
색채, 음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좀더 일반적으로 리비도의 모든 이단적인 조직
화는, 억압적 사회체로부터의 탈주선으로서, ‘최소한의’ 유성화되기로 갈 수 있는 길로서,
기존 질서와 마주하여 최후의 구명부표로서 여성적 신체되기와 연결된 부분을 지녀야 합
니다. ....본래적인 여성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성적 극이란 없으며, 영원한 여성
성의 극도 없습니다. 남성 - 여성 대립은 계급이나 카스트 등의 대립에 앞서 사회적 질서
를 근거짓는데 기여합니다. 거꾸로, 이 규범을 침해하는 것, 기존 질서와 단절하는 것은
모두 일정한 방식으로 동성애나 동물되기, 여성되기 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기호화가 붕
괴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에 유성화 또한 붕괴됩니다.”(가타리, ?분자혁명?, 226-227면)
부해가 죽음의 숲이 아니라 생명을 잉태하는 곳이라는 그 비의를 아는 것도 그런 생명에의 의지 때문이다. “인간들은 부해의 식물들을 오염시켰어. 부해는 이 세계를 정화시키기 위해서 태어난거야. 지구의 독을 흡수해서 그것을 깨끗한 결정으로 바꾸고 그것을 다시 모래로 석화되고 거기서 맑은 공기가 만들어지는 거야. 곤충은 이 나무들을 보호하고 있는 거야.” 부해와 곤충, 그 파괴와 공포의 대상들이 생명의 에너지를 온축하고 있다는 역설! 이 역설을 이해하는 것도 그러한 중심권력에서는 벗어나 있는 ‘여성되기’로 인해서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가 여성이라는 것, 여성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앞서 밝힌 그녀의 충만한 신체가 지닌 변이의 한 선일 뿐이다.
바람계곡에 바람이 멎고, 대지가 분노로 가득차 거신병과 오무의 대군이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죽음의 질주를 감행할 때, 무기도, 메베조차 없이 나우시카는 그저 몸을 던진다. 대지의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장엄한 순교. “항상 우주의 위대한 유동과의 조화 속에서 살려고 노력하면서, 언제건 미지의 세계에 갈 각오가 되어 있었던”(오카쿠라) 자만이 취할 수 있는 죽음과의 맞섬. 그것은 대지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것이면서 동시에 크사냐와 페지테의 지배자들의 사유를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의 죽음은 그러므로 오직 적대와 지배속에서만 생을 배치하는 것에서 벗어나, 저넓은 우주적 생명에로의 도약에 다름아닌 것이다. 마침내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동굴에 버려진 모자 옆에는 이름모를 식물이 자라났다. 부해가 꽃피운 최초의 생명이
었다.”
대지는 이제 생명력을 복원한 것이다. 충만한 대지, 충만한 신체!
에코소피아를 향하여!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에콜로지는 “환경, 사회적 관계, 인간적 주체성이라는 세 가지 작용영역 -의 윤리-정치적 접합”이다. “사회적 에콜로지는 부부나 연인 사이, 가족 안에, 혹은 도시생활이나 노동의 장 등에서 인간의 존재방식을 변혁시키고 재창조하는 특별한 실천을 발전시키는 것에 있”으며, “정신적 에콜로지의 측면은 신체나 환상, 지나간 시간, 생과 사의 “신비” 등에 대한 주체의 관계를 재창조하는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
그러므로 환경 차원만의 운동이란 불가능하다. 환경주의가 흔히 과거지향적 공동체주의로 나아가는 것도 환경과 인간세계를 분절해서 사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에코소피아를 위해서는 그 분절의 선들을 깨고 새로운 삶의 관계들을 만드는 일이다. 생에의 욕망으로 흘러 넘치고, 인간주의를 넘어서 기계주의적 관점에서 우주를 사유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을 둘러싼 관계들의 배치를 바꾸고 거기에서 변이와 생성의 에너지를 흐르게 하는 것. 여기에서 에코소피아의 전망은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굳이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도, 즉 복고주의와 퇴행에 발목잡히지 않고도 ‘에코소피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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