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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무장록

by Casey,Riley 2023.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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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무장록

임진무장록 : 임진왜란을 전후한 인물들의 인명록



가또오 기요마사(가등청정) : 1559년에서 1611년까지
왜군의 무장으로 히고의 영주이다. 고니시 유끼나가와 함께 침입하였으며, 함북 회령에서 조선의 왕자인 임해군 순과 순화군 훈 등을 사로잡음. 정유재란 때에는 울산 등지에서 악전고투하였으며, 1596년 모함을 받아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각  성 : 1575년에서 1660년까지
1593년에 부휴를 따라 해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인조 때에 팔도 도총섭으로 지내는 도중에 성을 쌓아서 그 공으로 도선대사가 되었다.
강덕룡 : 1627년까지
병마사 정기룡을 따라 성주 화원현에서 적을 물리쳤으며, 고령 안림역에서 승리하여, 후에 별장 우선과 함께 삼가현에서 역전하여 그 공으로 절충 장군에 임명되었다.
강복성 : 1550년에서 1634년까지
1579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강  신 : 1543년에서 1629년까지
157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부제학을 지내고 벼슬이 판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강  인 : 1555년에서 1634년까지
우의정으로 지낸 강사상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여 호성공신 3등에 봉해졌다. 후에 왕자 사부를 지내고 수령이 되었다.
강  주 : 1567년에서 1650년까지
159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이 되었다.
강  찬 : 1557년에서 1603년까지
158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92년에 단천군수로 있을 때 회령에서 왕자가 적의 포로가 되자 의병을 일으켜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후에 강계부사를 지내고 병조참의가 되었다.
강  첨 : 1559년에서
임진왜란 때에 병조좌랑으로 출전하여 경상도 지방의 군량 보급을 담당하였으며,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을 지내면서 일본 방비책을 강구하였다.
강  항 : 1567년에서 1618년까지
159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7년 정유재란 때에 남원의 군량 보급을 담당하였다. 남원성이 함락된 후에 의병을 일으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갔다가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일본 오사카에 끌려가 그 곳의 지리, 군사시설을 염탐 보고하였으며, 1598년에 교토에 이송되어 적정을 밀송하였다. 후에 일본 성리학의 원조가 되었다.
강홍립 :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 활약하였으며, 명의 원군으로 청에게 항복하였다.
경  섭 :
문신으로 임진왜란 후에 첨지 여우길과 일본에 가서 국교를 재개하고 일본에 끌려간 포로 1340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고경명 : 1553년에서 1592년까지
대사간 고맹여의 아들로 승문원 판교를 지내고, 동래부사를 역임하였다. 60세의 고령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고니시 유끼나가 : 1600년까지
왜군의 선봉장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고득뢰 : 1593년까지
의병장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어란만호, 감찰, 방답첨절제사를 역임하였으며, 남원에서 의병장 최경회의 부장이 되어 장수, 무주, 금산에서 적과 싸웠으며 공으로 평창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93년에 전사하였다. 후에 한성부 부윤에 추증되었다.
고바야가와 다까가게 : 1533년부터 1597년까지
일본의 장군 모오리의 셋째 아들로 고바야가와의 양자이다. 다짜바나와 함께 벽제관에서 이여송을 격파한 후에 귀국하였다.
고부천
학자
고상안
문신
고성후 : 1549년부터
도원수 권율의 심복으로 예조참의를 지내고 전사하였다.
고언백 : 1609년까지
변장과 군관을 역염하였으며, 영원 군수 중화와 대동강전에서 패배하였다. 후에 양주목사로 이천에서 승리하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제직중 양주·울산에서 공을 세우고, 경기도 방어사로 서울 탈환전에서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 경기도 방어사를 지내고 후에 선무공신 2등에 임명되었다.
고용후 : 1557년에서
고응척 : 1531년부터 1605년까지
시인, 학자.
고인계 : 1564년부터 1647년까지
고인후 :
고경명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가 되었으며, 아버지와 권율 휘하에 들어가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고종후 : 1554년부터 1593년까지
고경명의 아들로 금산에서 아버지와 형이 전사하자 귀가하였다가 다음해에 의병을 일으켜 복수의병장이라 칭하였다.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최경회와 남강에 투신하였다.
고  희 : 
선전관으로 선조의 평양 피난 때 호종하여, 그 공으로 관산 군수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에 공세전운사, 군기시판관, 훈련원첨정, 풍천부사를 역임하였다. 호성공신 3등에 임명되었다.
곽  율 : 
홍산현감, 예천군수를 역임. 초계군수로 있던 중에 왜적을 방어하여 예빈시부정에 특진하였으나 63세의 나이로 병사함.
곽자방 : 
무신으로 의병 조현 휘하에서 청주에서 왜군을 격파하였으나,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곽재겸
초유사 김성일을 찾아가 모병과 군량 수집 등에 대한 계략을 제시하였으며, 서사원과 의병 모집에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 화왕산성에 가서 종숙 곽준과 종제 곽재우와 적을 방어하였다. 공으로 부호군에 임명되었고,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곽재우 : 1552년부터 1617년까지
관찰사 곽월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내다가 의병을 일으켜 청강홍의장군이라 불렸다. 관찰사 김수와의 불화로 누명을 뜨고 투옥되었으나 김성일의 장계로 석방되었다. 후에 유곡도 찰방, 조방장, 성주목사를 역임하고, 1597년 경상좌도 방어사로 화왕산성을 수비하였다. 경상우도 조방장을 지내고 은퇴하였다.
곽  준 : 1594년까지
무인으로 김면의와 출전하여 큰공을 세우고 안음현감에 임명되어 황석산성을 수호하여 항전하였으나 전사하였다.
광해군 : 1575년부터 1641년까지
1592년 평양에서 분조하여 함경도, 전라도 지방의 의병 모집, 군량미 조달을 맡았다.
구  굉 : 1577년에서 1642년까지
1598년에 감목관이 되었다.
구끼 요시다까 : 
수군으로 한산에서 크게 패전한 일본군의 구원을 위해 출동하였다가 안골포에서 격파되었다.
구로다 나가마사 :
왜장으로 13살에 조선 침략. 임진·정유재란 때 선봉으로 김해, 창원을 함락함.
구사맹 : 1531년부터 1604년까지
1569년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고, 이조참판으로 임란 때 왕자를 보호하여 의주고감이 되고, 1594년에 왕비를 해주로 시종, 성천에 피난하였으며, 이조판서를 역임.
구  성 :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구의강 :
1596년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승지, 의주 부윤을 지냄.
구인후 :
구진천 :
신라 문무왕 때의 명노사로 강노를 개발함.
국경인 : 1592년까지
전주에 살다가 회령에 유배되자 1592년 무리를 모아 반란하여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가또오에게 넘겨주었다. 북평사 정문부의 격문을 받은 회령 유생 신세준과 오윤적에 의해 참살되었다.
권극중 : 1560년부터 1614년까지
1588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권극지 : 1538년부터 1592년까지
문신으로 예조판서를 지내고 비변사유사당상으로 재직 중 국가의 안보가 위태로움을 보고 단식 중 병사하였다.
권  길 : 1592년까지
1592년 상주판관으로 동래부를 빼앗기고 도망 온 순변사 이일과 합동하여 싸웠으나 상주에서 전사하였다.
권  반 : 1564년부터
1594년에 군자감참봉, 교하현감을 역임.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를 지냄.
권  벽 : 1520년부터 1593년까지
154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이의 천거로 기용되어 사관에 임명되었다. 1546년에 춘추관의 기주관을 지내고 1568년에 춘추관의 편수관을 지내고 1580년에 대호군에 임명되었으며 승지를 지내고 오위장에 임명되었다.
권  율 : 1537년부터 1599년까지
영의정 권척의 아들로 1582년 문과에 급제하여 1587년에 전라도 도사를 지내고 1591년 의주목사를 지냄. 1592년 전라도 순찰사 이광, 방어사 곽영과 북진하였으나 용인에서 패전하였다. 그 후 광주로 돌아가 의용병 1000명을 모집. 금산군 이치에서 고바야까와의 정예부대를 대파하여,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하여 정병 8000명을 인솔, 병마절도사 선거이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서울로 진격도중 수원 독왕산성에서 지구전과 유격전으로 우끼다 부대를 격파하였다. 1593년에 병력을 나누어 선거이에게 시흥 금주산에 진을 치게 하고 자신은 2800명을 인솔하여 행주산성에서 고바야까와의 대군을 맡아하여 30000명 중에 24000명의 사상자를 나게 하여 대승하였다. 1596년에 충청도 순찰사에 임명되고,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에는 명의 제독 마귀와 울산에 대진하였으나 사령관 양호의 철수령으로 퇴각하였다.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선무공신 1 등에 임명되었다.
권응수 : 1546년부터 1608년까지
1584년 훈련원 봉사를 지내고 북방을 수비하였다. 1592년 의병올 모집하여 영천성을 탈환하여, 병마우후가 되었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 밑에서 군관으로 경주성 탈환전에 참가 선봉장이 되었으나 패배하였다. 문경·당교 싸움에서 적을 격파. 경상도 병마절도사 겸 방어사에 특진되었다. 1594년에는 충청도 방어사를 겸하였으며, 1599년에 밀양부사가 되었다. 선무공신 2등에 임명되었다.
권  종 : 1592년까지
개령현감을 지내고 1592년에 금산군수에 부임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광주 목사로 있는 종제인 도원수 권율과 연락하여 군사를 이끌고 관찰사를 따라 전주에 도착하였으나, 관찰사가 그의 노령을 이유로 군사를 빼앗고 군량 관리를 시키자 본군에 돌아가 병졸 수백명을 모집, 의병장 고경명, 조헌에게 지원을 요청, 적과 격전 끝에 순국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권  장 : 1538년부터 1598년까지
검열, 병조좌랑, 춘추관 기사관을 지내고, 1580년에 우승지, 좌승지, 충청도·강원도 관찰사, 형조참판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임잔강에서 대패하였으며, 광해군의 분조를 수행하여 경기도 순찰사로 군량미를 조달하였고, 권율과 경기·충청· 전라 3도의 의병을 규합하여 1593년에 서울 탈환전에 참가하였다. 공조판서로 이여송의 화의에 반대하였다.
권  필 : 
학자로 동몽교관에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1592년에는 강경한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권  협 :
문신으로 승문원 춘추관에서 벼슬을 지냄. 1592년에는 장령으로 서울 사수를 주장하였다. 1597년 예문관 응교로 고급사로 명에 원군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그 공으로 호조참의를 지냈다. 선무공신 2등에 임명되었다.
권  황 : 1542년부터 1640년까지
의금부도사, 호조·형조좌랑을 지내고 장악원첨정을 지냄. 용양위부호군에 임명됨.
권  희 : 1547년부터 1624년까지
1592년에 종묘서령으로 선조의 평안도 피난 때 역대 왕의 신주와 어보를 안전하게 행재소에 도착. 1596년 종부시정 겸 집의로 진위사의 서장관으로 명에 갔다온 후에 호조, 예조, 형조의 참판을 지냄.
권희인 : 1593년까지
의병장으로 유성룡의 친애를 받았다. 1592년에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절도사 김면의 천거로 옥천군수를 지내고 웅천에서 전사하였다.
금난수 : 1530년부터 1604년까지
제릉 참봉, 장례원 사평을 지내고 1592년에 의병하여 1596년에 성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봉화현감에 임명되었으나 하루만에 사임하였다.
기자헌 :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우의정으로 이괄의 난 때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기  허 : 
의승장으로 서산대사의 제자로 승병을 모집하여 싸우다가 청주에서 전사하였다.
기효근 : 
157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통정대부가 되었으며 정유재란 때 병든 노모를 모시고 피난하였다가 적에게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김개국 :
문신으로 159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조정랑, 군수를 역임하였다.
김경로 : 1597년까지
무과에 급제하여 당상관에 올랐으며, 1597년에 전주를 방어하던 중에 남원의 아군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에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을 만나 합세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였으며, 남원성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김경복 : 1550년부터 1622년까지
8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북평사 정문부의 선봉장으로 길주에서 승리하였다. 종성부사, 영원군수를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김경서 : 1564년부터 1624년까지
무과에 급제하여 1588년에 감찰을 지내고 신분상에 이유로 파직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평양 방위전에 수탄장으로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며 평안도방어사의 신분으로 부하 7700여명을 거느리고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 탈환전에 참가하였다. 1594년에는 경상도 방어사로 재직 중 남한 일대의 도적을 소탕하였다. 그 공으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1618년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김광엽 : 
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예문관 등의 벼슬엘 지냈다. 
김  권 : 1549년부터 1622년까지
80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자를 호종하고 문학, 사간을 지냈다.
김귀영 :  1519년부터 1593년까지
문신으로 대제학을 여섯 번을 지내고 1581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임해군을 호종하였으나, 임해군과 적에가 잡혀 포로가 되었다. 후에 단신으로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적에게 항복하였다고 유배되었다.
김  늑 : 1540년부터 1616년까지
157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안집사로 영남지방의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 후에 경상우도,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김담수 : 1603년까지
학자로 조식과 오건의 제자이다. 1564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지냈다.
김대개 : 1564년부터 1608년까지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조좌랑을 지냈다.
김대인 : 
천민의 신분이었으나 재주가 뛰어나 이순신의 막하로 중용되었다. 1597년에 원균이 패배한 후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임치진 첨절제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김대현 : 1553년부터 1606년까지
82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향병을 모집하여, 김늑의 휘하에서 민심 수습에 공헌하였으며, 기민 구제를 위해 노력하였다. 1595년에는 학행으로 찰방에 천거되었으며, 현감을 지냈다. 
김덕령 : 1567년부터 1596년까지
의병을 일으켜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담양부사 이경린의 휘하에 종군하였으며, 전주의 공해군의 분조에서 호익장군의 호를 받았다. 1594년에는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의병을 정리하여 권율 휘하에 종사하였다. 진해, 고성 방어전에서는 곽재우와 함꼐 왜군을 기습하였으나, 전사하였다.
김덕함 : 1562년부터 1636년까지
15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정을 지냈다.
김만수 : 1553년부터 1607년까지
임진왜란 때 황해도 봉산에서 세 아우들과 의병 900여명을 모집하여 대장이 되었다. 김천수를 후위장, 김백수·김구수를 선봉장으로하여 조방장 유극량과 연합하여 임진강을 방어하였으나, 패전하였다. 그로 인하여 동생 김백수가 전사하였다. 이에 병력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도총부도사로 있던 아들 김광협과 항해도 일대의 적을 격파하여, 그 공으로 선전관이 되었다. 또 부차싸움에 승리하였으나 아들 김광협은 전사하였다. 1593년에는 진도군수로 이순신 부대에 군량을 보급하였다.
김  면 : 1541년부터 1593년까지
이황의 문인으로 공조좌랑을 지내고 사직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거창·고령에서 의병하여 금산과 개령 사이의 10만의 왜군과 대치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합천군수에 임명되어 의병대장의 칭호를 받았다. 1593년에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병사하였다. 
김명원 : 1534년부터 1602년까지
156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좌참찬으로 정여립 사건을 수습하여 경림군의 칭호를 받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팔도도원수르 평양 함락후 행재소 경비를 맡았다. 1600년에는 우의정을 지내고 좌의정을 지냈다. 병서, 궁마에 능하였다.
김상준 : 1561년부터 1635년까지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지냈다.
김성원 : 1597년까지
문인으로 1592년에 동복현감으로 의병과 제휴하여 현민을 보호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상모산성에 피난하여 어머니를 보호하다가 피살되었다. 
김성일 : 1538년부터 1593년까지
156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90년에는 통신부사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 라고 허위보고를 하였다. 초유사, 경상우도 관찰사겸 순찰사룰 지냈다.
김  수 : 
157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한성부판윤,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영중추부사로 있던중에 탄핵되었다.
김시민 : 1554년부터 1592년까지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판관을 지내고, 진주판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진주성 싸움에서 삼면으로 둘러싼 적을 맡이하여 싸워 성을 사수하였으나 전사하였다. 후에 선무공신 2등에 임명되었다.
김시약 : 1627년까지
1596년에 창의병으로 괴산에서 선봉장으로 왜군을 격파하여 관찰사의 천거로 별장이 되었다. 통영군관, 창성부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김시헌 : 1613년까지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외요직을 지내고 대사성을 지냈으며, 좌·우승지로 임진왜란 때에는 민심수습에 진력하였다.
김신국 : 
159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율의 종사관이 되었다.
김언수 : 1574년부터 1627년까지
무신으로 1593년에 파총에서 부원수 휘하에서 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공을 세워 병조참의가 되었다.
김여물 : 1548년부터 1592년까지
1577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지내고, 의주목사로 있던 중 정철 일파로 몰려 투옥되었다. 임진왜란에 일어나자 신립과 충주 방어전에 참가하여, 새재를 이용한 방어를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탄금대에서 신립과 투신자살하였다.
김연광 : 1524년부터 1592년까지
155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창평군수를 지내고 회양부사로 있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쳐들어오자 성문앞에 좌정하여 길을 내주지 않아 참살되었다. 후에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김  용 : 1557년부터 1660년까지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안동에서 의병하였다. 그 공으로 1593년에는 의주의 행재소에서 교리, 체찰사의 종사관을 지냈다. 1598년에 영의정 유성룡의 모함으로 삭직되었다.
김우용 : 1540년부터 1603년까지
홍문관 정자를 지내고 대사헌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비어기무 7조>를 건의하였다.
김  유 : 1571년부터 1648년까지
159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검열을 지냈다.
김  융 : 1525년부터 1594년까지
학자로 전국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킬 것을 호소하였다. 그 공으로 참봉이 되었으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김은휘 : 1611년까지
음보로 호조좌랑이 되었으며, 1592년에는 의병을 일으켜 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이 되었다. 1593년에는 관병과 의병을 규합하여 수원의 독산성을 지켰다.
김응남 : 1546년부터 1598년까지
156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로 있으면서 이율곡과 당재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 우의정이 되어 유성룡과 협력하였다.
김이원 : 1553년부터 1614년까지
문과에 급제하여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고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김인영 :
1592년에 여포만호로서 옥포해전에 좌척후장으로 참가하였다. 당포전에는 우별도장으로, 제 3차 한산전 이래 당항포 해전까지 척후장으로 전공을 세웠으나, 문벌이 낮고 중앙에 정실이 없어서 큰 벼슬을 받지 못하고 훈련원부정이 되었다. 1597년에는 이순신 막하에서 명량해전에 참가하였다.
김장생 : 1548년부터 1631년까지
이이의 문인으로 1578년에 학행으로 6품직에 올라 순릉참봉을 지내고 정산현감을 지냈다. 1592년에는 호조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을 세우고 군자감청정이 되었다. 1598년에는 안성군수가 되어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김제갑 : 1525년부터 1592년까지
155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지내고 1589년에는 창성부사를 지냈다. 1592년에는 원주목사로 있던 중 관병과 의병을 규합하여 아들 김시백과 왜장 모리의 군사를 맡아 싸웠으나 전사하였다.
김제남 : 1562년부터 1613년까지
선조의 장인으로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연천현감이 되었다.
김제민 : 1527년부터 1599년까지
157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정랑을 지내고 순창군수가 되었다. 1586년에는 전라도 도사를 지내고 사퇴하였다. 1592년에는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지남 : 1559년부터 1631년까지
문신으로 159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다.
김직재 : 1554년부터 1612년까지
15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를 지냈다.
김  집 : 1574년부터 1656년까지
학자로 1592년에 진사가 되었다.
김  찬 : 1543년부터 1599년까지
1567년에 문과에 급제한 대사간을 지내고 1592년에는 선조를 호종하였으며, 이산해의 실책을 탄핵하여 파직케하였다. 1594년에는 접반사로 명나라 지원군을 인도하였으며, 일본군과의 강화회담 등에서 활약하였다. 1596년에는 지돈녕부사가 되었으며, 우참찬이 되었다. 임진왜란 후 전후 수습의 막후 인물로서 경제 정책의 전문가로 명신으로 평가된다.
김창일 : 1548년부터 1631년까지
학행으로 참봉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김준민 :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무계현에서 일본군 모리의 부대를 격파하였으며, 1593년 진주성에 김천일을 중심으로 집결하였을때 거제현령으로 참가하여 성의 동문을 맡아 악전 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김천일 : 1537년부터 1593년까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선조 25년 6월 임진왜란 때 부사를 그만두고 나주에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수원 행산고성에 들어갔다. 8월에는 다시 강화로 진을 옮긴 후 연안 각처에 주둔한 적을 소탕하고 배를 몰아 양화도에서 대승하였고, 으듬해인 1593년 월에 진주싸움에 참전하여 성이 함락될 무렵, 아들 상건과 촉석루 아래서 남강에 몸을 던져 장렬한 순절을 하였다. 영의정에 추증 되었으며, 임진삼장사로 치기도 한다.
김충선 : 1571년부터 1642년까지
귀화한 일본인으로 1592년에 가또오의 좌선봉장으로 침입하였다. 우리나라의 문물을 보고 감복하여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부하여 변방의 임무를 자청하였다. 그 공으로 정헌대부가 되었다.
김평손 :
서자 출신으로 모반을 일으키기 위해 자금 마련을 하려고 닥치는데로 물건을 훔치다가 잡혀서 죽었다.
김홍미 : 1557년부터 1604년까지
15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이 되었으며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97년에 우승지로 이순신을 탄핵하여 내쫓고 원균을 통제사로 추천하였다. 1598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다.
김  황 :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에 아우 김유, 김지 등과 의병하여 삭녕에 주둔하였다. 학자로 제자로 조헌을 배출하였다.















처음


나  급 : 1552년부터
사마시와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직서참봉을 지내고, 상의원직장, 한성부참군,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597년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으며, 아들 나만갑의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남언경 : 
학자로 1566년에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양주 목사, 지평,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전주부윤으로 있던 중에 파직되었다. 후에 공조참의를 지냈는데, 양명학자였다.
남언기 :
1568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동몽교관, 빙고별좌를 지내고 사퇴하였다.
남  유 : 1592년까지
1592년에 나주목사로 있던 중 노량에서 이순신을 도와 싸우다 전사하였다.
남이공 :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암행어사, 지평, 정언 등을 지내고 1597년에는 이발, 정인홍 등과 북인의 수뇌가 되어 당쟁을 주도하다가 파직되었다.
노개방 : 1563년부터 1592년까지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동래교관으로 있던 중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전사하였다.
노  순 : 1551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와 의병을 일으켰으며,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1593년에 영변부사가 되었다.
노  직 : 1545년부터 1618년까지
158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지내고 승정원 주서가 되었으며 1592년에는 병조참판으로 선조를 호종하였다. 1597년에는 접반부사가 되었으며,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노춘근 : 1592년까지
1592년에 이순신의 휘하에서 당포싸움에서 큰 전공을 세웠으나, 고하도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노  흠 : 1527년부터 1602년까지
1564년에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그 공으로 별제찰방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였다.
논  개 : 1592년까지
전주병사 최경희의 애기로 촉석루 주연에서 왜장 게다니를 데라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니탕개 :
두만강변의 여지족 추장으로 귀하한 인물이다. 1583년에 내침하였으나, 신립이 격퇴하였다.















처음


도꾸가와 이에야스 : 1542년부터 1616년까지
일본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임진왜란 후에 일본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도성유 :
정구, 서사원의 사사를 받았으며, 문행이 출중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서사원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모집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동일원 :
1597년 정유재란 땡의 명의 구원군의 장수로 사천에서 왜장 시마즈에게 대패하였다.















처음


마사종 :
문신으로 마희경의 손자로 오륜통의, 사례비요를 지었다.
마에노 나까야스 : 
1593년 2월에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던 왜장으로 우끼다 등과 4만여 명으로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마응방 : 1597년까지
음보로 현감이 되었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1597년에 청주에서 전사하였다.
마하수 : 1598년까지
임진왜란 때 선공주부로서 1597년에 이순신이 투옥되자 사직하였다가 명량해전에 향선 10여척을 이끌고 참전하였다가, 적선에 포위된 이순신을 귀하기 위해 적진의 돌입하였다가 전사하였다.
마희경 :
서경덕의 문인으로 1581년에 이이의 천거로 북부참봉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역학,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만세덕 :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의 경리로 1600년에 귀국하였다.
명광계 :
진사 명극겸의 아들로 평택현감으로 있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휘하의 정예병을 인솔하여 조헌과 합세하였고, 금산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목  첨 : 1516년부터 1593년까지
154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참의, 충청감사, 대사간, 이조참판을 지냈다.
문기방 : 1592년까지
1592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597년에 남원성에세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과 함께 전사하였다.
문덕교 : 1551년부터 1601년까지
문신이다.
문  위 : 1555년부터 1632년까지
문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김면 휘하에서 종사하던 중에 김면이 병사하자 군의 사후처리를 맡았다. 부제학 김옹과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동몽교관이 되었으며, 선공감주부, 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문위세 :
이황의 문인으로 1567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1592년에는 박광전과 의병을 일으켜 군량조달을 하였다. 그 공으로 1595년에는 용담현령이 되었으며, 1597년에는 읍민을 동원하여 퇴각하는 적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문흥도 : 1553년부터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 장령 등을 지내고 북인에 가담하였다. 유성룡을 탄핵하여 추출하였으며, 평안도어사, 수원부사를 지내고 사임하였다.
문흥현 : 1593년까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사로 초토사 고경명과 금산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패배하였다. 병마절도사 최경희의 막하에서 제 2차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여, 성이 함락되자 투신 자살하였다.
민  기 : 1568년부터 1641년까지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제주목사, 경주붕윤 등을 지냈다.
민몽룡 : 1550년부터 1618년까지
158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 예조참의, 호조참판,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민  욱 : 1559년부터 1625년까지
문인이다.
민유부 : 1559년부터 1594년까지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전적,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민인백 : 1552년부터 1626년까지
158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진안현감으로 있을 때 정여립을 포박하였다. 그 공으로 예조참의가 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주목사로 임금을 호종하였다. 1598년에는 가선대부가 되었다. 후에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처음


박광옥 : 1526년부터 1593년까지
내시교관, 운봉현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나주목사가 되었다.
박광전 : 
조선 선조 때 문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장에 추천되어 왜병과 싸웠다.
박  속 : 1542년부터 1632년까지
문신으로 1592년에는 의병을 일으켜 정찰, 경비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공으로 통정대부, 가선대부가 되었다.
박대근 : 
1592년에 적정을 정찰하고 서부참봉이 되었으며, 첨지중추부사로 쓰시마섬을 방문하고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박대덕 : 1563년부터 1654년까지
1592년에 의병 500여명을 모집하여 통정대부 가선대부가 되었다.
박동량 : 1569년부터 1635년까지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임금을 호종하여 호성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박동망 : 1561년부터 1615년까지
15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을 지내고 검열, 대교, 봉교, 지평 등을 역임하고 비산군수가 되었다.
박동선 : 1562년부터 1640년까지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6년에는 남포현감으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1597년에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백성을 피난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 후에 인천, 남양의 부사를 역임하였다.
박동열 : 1564년부터 1622년까지
문신으로 동생 박동량이 있다.
박동량 : 
15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황주목사를 역임하였다.
박명현 : 
무신으로 1596년에 이몽학이 홍산에서 난을 일으키자, 목사 홍가신의 휘하에서 적을 청양까지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그 공으로 1597년에 토포사를 지내고, 충청도방어사,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정난공신 2등의 칭호를 받았다.
박  성 : 
조선 선조 때 문신. 임진왜란때에는 김학봉의 참모로 활약
박수춘 : 1572년부터 1652년까지
학자로 1597년에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을 수비하는 참가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박숭원 : 1532년부터 1592년까지
1592년에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그 공으로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호성공신 2등의 칭호를 받았다.
박승종 : 1562년부터 1623년까지
158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을 지냈다.
박여룡 : 1541년부터 1611년까지
학자로 이이의 문인이다. 평양현감, 호조좌랑 등을 지내고, 1592년에는 의병을 일으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박  엽 : 1570년부터 1623년까지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박응복 : 1525년부터 1598년까지
156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집의를 지내고, 동부승지를 지냈으며, 1590년에는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그 공으로 대사간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왕후를 수안까지 호종하였다.
박이서 : 1561년부터 1621년까지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의 주서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병조좌랑으로 활약하다가 좌천되어 정언,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박이장 : 
1586년에 진시문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사로 활약하였다. 1593년에는 지평, 지제교를 지내고, 이조정랑, 대사헌, 이조참판,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박인로 : 1561년부터 1542년까지
무신, 시인으로 수군절도사 성윤문의 막하에서 종군하였다. 1598년에는 태평가를 지었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군사력 증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박종남 : 1601년까지
1583년에 니탕개를 격퇴하는데 공을 세우고 절충장군이 되었으며, 1584년에는 부령부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춘천방어사로 적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병조참의를 지내고, 진주목사로 지내던 중에 파직되었으나, 이순신에 의해 등용되어 주사조방장으로 해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상주, 광주목사를 지내고 회령부사가 되었다.
박지화 : 1513년부터 1592년까지
유교, 도교, 불교에 조예가 깊었으며, 기수학에 능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두산에 피난하였다고 자살하였다.
박  진 : 
무신으로 선전관을 거쳐 1592년에는 밀양부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영천의 적을 야습하였다. 그 공으로 가선대부가 되었으며, 경주성 공격에 실패하였다가,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탈환에 성공하였다. 전라도,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황주목사를 지냈으며, 참판이 되었다.
박진영 : 1569년부터 1641년까지
무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활약하였다. 그 공으로 한잠부사가 되었다. 후에 변방을 방어하여 절충장군이 되었다.
박충간 : 1610년까지
1589년에 재령군수로 있던 중에 정여립의 모반을 알고 그 것을 알려서 평난공신 1등이 되었으며, 형조참판에 승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병과 싸우다가 도주하여 파면되었다. 1594년에는 진휼사로 백성구제를 위해 활약하였으며, 순검사, 선공감제조를 지냈다. 또 붕당의 폐해를 상소하였다고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박  형 : 
선비이며 학자이다. 인조 때의 중신들 대부분의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예조의 천거로 동몽교관이 되었으며, 군직에 올라 종신녹을 받았다.
박  홍 : 1534년부터 1594년까지
무신으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적의 선봉을 격파하였다. 그 후에 임금을 평양까지 호종하였으며 성천에서 우위대장이 되었으나, 전사하였다.
박효성 : 1568년부터 1617년까지
159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을 지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접반관으로 영남지방에서 활약하였고, 공좌, 병조, 예조의 좌랑을 지냈다.
방덕룡 : 1561년부터 1598년까지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에 낙안군수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선봉장이 되었다. 노량해전에서 분전 끝에 전사하였다.
방원진 :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배  설 : 1599년까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으며, 1597년에는 원균의 휘하에서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였으며, 12척의 배를 거느리고 한산도로 후퇴하여, 후에 이순신이 울돌목에서 대승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통제사 이순신의 휘하에 종사하였으나, 전쟁 공포증 때문에 도주하였다가 후에 잡혀서 처형되었다.
배홍립 : 1546년부터 1608년까지
무신으로 선전관을 지내고, 현감이 되었으며, 영흥부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조방장을 역임하였다.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전함을 많이 건조하여 전쟁에 대비하였으며, 그 공으로 가의대부가 되었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참판, 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백수회 : 1574년부터 1608년까지
임진왜란 때에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일본에서 9년간 억류되었다가 풀려났다.
백유함 : 1546년부터 1618년까지
1576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에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그 공으로 직제학이 되어, 명군의 군량을 조달하였다. 1594년에는 동부승지, 좌부승지를 지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명의 정응태를 접반하였다. 일본과의 강화를 논의하다고 유배되었다.
볍  견 : 1552년부터 1634년까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공으로 총섭이 되었다. 1594년에는 입암산성 축조를 감독하였다.
벽  암 : 1574년부터  1659년까지
14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부휴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휴와 의병을 일으켜 참전하였다. 그 군을 항마군이라고 하였는데, 명성이 높았다.
변사정 : 1529년부터 1596년까지
음보로 경기전참봉이 되었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병 2000여명을 사살하였다. 
변시민 : 1579년부터 1633년까지
무과에 급제하여 당포만호가 되었으며, 경흥부사, 낙안군수, 남원영장을 지냈다.
변양절 : 1546년부터 1610년까지
강계부사를 지내고 경원부 번호의 난 때 조방장으로 길주목사로 부임하였는데, 병사들의 그에 대한 위망이 높았다. 이를 시기한 주장의 무고로 세변에 유배되었다가, 공을 세워서 순천부사에 복권되었다. 1591년에는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창의사 김천일과 강화를 방어하였다. 지중추부사, 도총관을 역임하였으며, 1599년에는 훈련대장에 임명되어, 명나라 낙오병들의 반란을 지혜로 제압하였다.
변연수 : 1538년부터 1592년까지
무신으로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훈련원주부를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이순신, 김효성 등과 함께 옥포에서 적선 30여척을 격파하였다. 당포 싸움에서 아들 변립과 함께 전사하였다.
변옥희 : 1539년부터 1593년까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남성방어장이 되어 적을 무찔렀다.
변응정 : 1557년부터 1592년까지
무관으로 월송만호, 선전관을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남현감으로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부임하기 전에 금산에서 김제군수 정담과 적을 물리쳤으나, 적의 야습을 받아 전사하였다.
변이중 : 1546년부터 1611년까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소모 어사로 병마와 무기를 갖추고 수원에 주둔하고, 경기도 지방의 적과 교전하였으며, 양천에 진을 치고 서울의 적을 공격하였다. 또 화차 300량을 순찰사 권율에게 만들어 주었다. 그 후에 독운사로 군량 수십만석을 조달하였으며, 그 공으로 함안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원종 1등 공신에 임명되었다.
변  헌 : 1570년부터 1636년까지
휴정·유정의 사사를 받았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에 속하여 전공을 세웠다. 1593년에는 환속하여 사과에 임명되었으며,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간관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그 후에 포의로 명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변  흡 : 1568년부터 1644년까지
무신으로 삼도수군통제사, 도총관을 지냈다.
부  휴 : 1543년부터 1615년까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인사에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


서경주 : 1579년부터 1643년까지
선조의 사위로 판중추부사 서성의 아들이다. 1592년에 정신옹주와 결혼하였다.
서경충 :
무신으로 1592년에 보경장으로 장정 3만 여명을 모집하였으며, 함흥, 흥원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159 7년에는 충무위 좌부장이 되었다.
서  성 : 1558년부터 1631년까지
158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함북에서 토민 국경인이 왕자와 재상을 포로로 하자, 이를 구하여 공으로 병조정랑이 되었다. 후에 경기감사를 지냈다.
서  식 : 1561년부터 1644년까지
지사로 임진왜란의 수습책으로 향약칠조를 건의하였다.
서양잡 : 1561년부터 1644년까지
임진왜란 때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서 죽었다.
성수익 : 1528년부터 1598년까지
155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판, 예조참판을 지내고, 1597년에는 부총관으로 수안으로 왕비를 호종하였다.
성  식 : 1542년부터 1600년까지
문신으로 157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정랑을 지내고, 황해도어사 출사하여 공을 세웠다. 수원부사,청주목사를 지내고, 전라추고경차관을 지내고 병사하였다.
성안의 : 1561년부터 1629년까지
159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의 지평을 역임하였다. 영남조도사, 영해부사를 지내고, 남원부사, 광주부사를 지냈다.
성  영 : 1547년부터 1623년까지
성세평의 아들로 1592년에 경기도 순찰사로 군사 삼천여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호조참판, 한성부좌윤을 지내고,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으며, 병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성영달 : 1592년까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병마우후로 공을 세웠으며, 진주성 함락시에 판관 성수경과 전사하였다.
성우길 : 1571년부터 1623년까지
무신으로 1599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임금을 호종하였다.
성  혼 : 1535년부터 1598년까지
학자이다.
소상진 : 1592년까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에서 김성일을 만나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영남에서 진보군수 임계영의 별장으로 종사하였다. 성주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소영복 : 1555년부터
158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 익산에서 향도를 모아 용화상을 방어하였다. 천문, 지리, 의복, 전진법에 능하였다.
소오 요시모또 : 
선조 때의 쓰시마섬의 도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의 1진으로 침입하였다.
소  제 : 1593년까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인 소황과 의병을 일으켰다. 권율 휘하에서 웅치, 이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후에 병마절도사 황진의 휘하에서 진주성을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소  흡 : 
무신으로 `1564년에 삭주부사로 선출되었다.
손기약 : 1551년부터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영천군수, 창원부사를 역임하였다.
손덕심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제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 창아에서 교전하였다. 그리하여 왜군이 여현을 넘지못하게 하였다.
손인갑 : 1592년까지
무과에 급제하여 북보만호가 되었으며, 1589년에 이산해의 추천으로 가덕진 첨절제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무계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동례부사로 있던 중에 마진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송대립 : 1550년부터 1597년까지
경사, 무예가 출중하였는데,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당시 지도만호로 있던 아우 송희립과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서 종사하다가, 권율의 휘하에서 종사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의별장이 되어 큰공을 세웠으나, 복병을 만나 전사하였다.
송덕영 : 1627년까지
무신으로 선전관 송간의 아들이다. 159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가 되었으며, 사신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온 후에 맹산현감이되었다.
송덕일 :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으로 있던 중에 임금으로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진도군수로 공을 세우고 부령부사가 되었다. 영진의 침입을 군사 700으로 격파하여 그 공으로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영진의 잔당의 기습을 받고 전사하였다.
송상현 : 1551년부터 1592년까지
157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구서를 지내고, 공조정랑, 사대감, 군가잠의 정을 역임하였다. 1591년에는 동래부사가 되었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장 소오에 의해 부산이 함락되자 동래부에서 항전하다가 전사하였다.
송  선 : 1544년부터 1629년까지
1576년에 광천현감이 되었으며, 1593년에 당진현감으로 기근을 해소하였다. 호조좌랑을 지내고, 단양군수를 역임하였다.
송언신 : 1542년부터 1612년까지
157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내고 1589년에는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에 대사헌을 지내고, 병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송여종 : 1553년부터 1609년까지
임진왜란 때 무신으로 낙안군수 신호의 막료로서 종군하였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을 따라 한산도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그 후 임금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가지고 적진을 돌파하여 행재소에 이르렀다. 그 공으로 녹도만호가 되었다.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원균의 휘하에서 한산도에서 패전하였다. 다시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자 이순신 밑에서 공을 세웠다. 1604년에는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송영구 : 1556년부터 1620년까지
158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충청도관찰사의 종사관을 지내고, 지평을 역임하였다.
송익필 : 1534년부터 1599년까지
문신이며 학자로 예학의 대가이다. 이유곡, 성혼 등과 사귀었으며, 김장생, 정입 등을 배출하였다.
송  찬 : 1510년부터 1601년까지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가 되었으며, 경기도관찰사, 우찬성을 지내고 판중추부사로 사망하였다.
송한필 : 
송익필의 아우로 학자로 성리학자로 문명이 높았다한다.
송희립 : 
송대립의 아우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종군하였으며 1598년에 노량 해전에서 포위된 명나라 도독 진인을 구출하였다. 후에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순화군
선조의 서자로 강원도에서 모병하는 일을 맡았으나, 왜적이 가까이 오자 함경도로 도망하였다가 임재군과 국경인에 포박되어 왜군 가또오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성격이 난폭하고 포악하였다.
시문용 : 1623년까지
명의 장군으로 남방위 장군 휘하의 행영중군으로 있던 중에 병을 얻어서 성주에 정착하였다.
토목기관에 능하였다.
신  각 : 1592년까지
무신으로 1592년에 서울을 수비하는데 중위대장으로 도원수 김명원의 휘하에서 부원수로 참전하였다. 한강에서 패전하여 남은 군사를 정비하여 양주의 해유령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을 시기한 김명원이 그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서 한강에서 패전하였다고 무고를 하여 참형되었다.
신  감 : 1560년부터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왕조 실록을 재간하였다.
신경락 : 1556년부터 1615년까지
문신으로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중에 승장 의엄이 공을 믿고 난폭한 행동을 하자 그의 처단을 상소하였다. 후에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신경진 : 1554년부터 1619년까지
158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을 지내고 병조좌랑으로 전주사 한응인의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에는 지평으로 임금을 평양으로 호종하였으며, 유성룡 휘하에서 종사관이 되었다.
신경진 :  1575년부터 1643년까지
신립의 아들로 선전관을 지내고 훈련원3대장에 임명되었으며, 후의 영의정을 지냈다.
신경행 :
157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6년에 종사관으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청난공신 3 등에 임명되었으며,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신경희 : 1615년까지
1588년에 음보로 임관하였으며,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그의 일당인 신홍복을 체포하였다. 1591년에는 제용감주부가 되었으며, 1593년에는 고산현감으로 권율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행주대첩을 보고하여 그 공으로 특진되었다.
신계영 : 1557년부터 1669년까지
뭐했는지는 몰라도 정말로 오래 살았다.
신  노 :
의병장으로 156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단천군수 강찬에게 권유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격문을 발송하였다. 또 두 왕자가 회로에서 체포되자 종인 석린과 함께 정현용에게 권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으며, 정문부를 원수로 추대하여 그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그 공으로 5품의 벼슬을 받았으나 사임하였다.
신  담 : 1519년부터 1595년까지
155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63년에는 정언, 지평, 전적을 지내고 1571년에 군자감정으로 명종실록을 편찬하는데 참가하였으며 1591년에는 홍문관 제학을 지내고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전주부윤으로 의병 1000여명을 이끌로 왜군을 격파하였다.
신  발 : 1523년부터 1616년까지
30세에 사재감참봉이 되었으며, 안산군수, 산천현감을 역임하고 1590년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신  설 : 1561년부터
159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지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1596년에는 저작, 수찬 등을 지내고 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신성군 :
선조의 넷째 아들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평양을 거쳐 의중에 이르렀다. 1591년에 세자 책봉이 실패하였다. 후에 호성공신 2등이 되었다.
신  식 : 1551년부터 1623년까지
신중엄의 아들로 1576년에 문광 급제하여 지평을 지내고 집의를 거쳐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592년에 집의로 있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안무어사가 되었다.
신여량 : 1593년까지
무장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권율의 부장이 되어 행주대첩이 참가하였다. 통영에사 수군을 지휘하여 철정, 화전으로 적선을 대파하여 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통제사 이순신의 선봉으로 공을 세워 <당포승전도>를 하사받았다. 전도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신  율 : 1572년부터 1613년까지
159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 공조정랑, 지평을 역임하였다.
신응구 : 1553년부터 1623년까지
158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88년에 적산현감을 지내고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광주목사, 공조참의를 지냈다.
신  익 :
신명인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1571년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1583년에 순천부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충청도 방어사로 있을 때 패전하였다. 문장, 글씨가 훌륭하였다.
신  립 : 1546년부터 1592년까지
156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진주판관으로 지내고, 온성부사로 니탕개를 격퇴하였다.   그 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왜구를 격퇴하였다. 삼사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복직되었다. 갈파지보에서 졸병에게 참형을 가하였다고 하여, 동지중추부사의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1590년에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삼도도순변사로 빈약한 병력을 이끌고 출병하여,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장소 선정을 잘못하여 패전하였다. 부하장 김여물과 자살하였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  잡 : 1541년부터 1609년까지
158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내고, 지평, 우부승지를 역임하고, 이조참판, 형조참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대에는 비변사의 당상관으로 활약하였다. 1599년에 병조참판을 지내고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철산군에서 탈옥사건이 발생하여 파직되었다. 형조참판을 지내고 호성공신 2 등에 임명되었다.
신지제 : 1562년부터 1624년까지
15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지냈다.
신  초 : 1568년부터 1637년까지
무과에 급제하여 천성만호를 지내고, 박진영와 의병을 일으켰다. 창녕의 화왕산성에 주둔한 곽재우의 군대에 편입하였다. 공호겸이 적에게 항복하여, 영산에 웅거하여 경상도 관찰사를 자처하자 단신으로 침입하여 술을 먹여 사로잡아왔다. 그 공으로 현풍현감으로 선정을 배풀고, 적을 방비하였다. 보성군수가 되었다.
신충일 : 1554년부터 1522년까지
158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에세 패전하여 도주하였다. 1595년에 남부주부로 왕명으로 건주 누르하치성에 가서 상황을 탐지하고 지도, 생활, 군사 등을 염탐하였으나, 호복을 입고 오배삼두의 예를 행하여, 국위를 손상시켰다고하여 파면되었다. 1599년에 김해부사를 지냈다.
신  호 : 1539년부터 1597년까지
156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조사만호를 지내고 도총부도사, 경력 등을 역임하였다. 왜적의 침입을 방지하기위해서 무인을 배치할 때에 낙안을 지켰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을 따라 견내량, 안골포 등지에서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교룡산성의 수어사로 남원성을 지원하라 갔다가 전사하였다. 원공공신 1 등의 칭호를 받았다.
신  활 : 1576년부터 1643년까지
신준민의 아들로 임진왜란으로 학문열이 식을 것을 염려하여 단산서원을 세우고 장유, 이식등과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신  흠 : 1566년부터 1628년까지
신승서의 아들로 158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 병조좌랑을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재도 찰방으로 신리을 따라 조령 전투에 참가하여 패전하였다. 강화에서 정철의 종사관을 지내고 지평, 동승지, 병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이 되었다.
신희남 : 1523년부터 1597년까지
문과에 급제하여 1570년에 수찬을 지내고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1581년에는 성절사를 지내고 당쟁이 일어남을 꺼려하여 낙향하였다. 
심  경 : 1556년부터 1616년까지
1589년에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임진왜란 때 풀려났다.
심극명 : 1556년까지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경기도 도사를 지내고, 강화부 유수를 지내고 의주 부윤이 되었다. 시문, 글씨, 그림, 거문고, 활쏘기, 말타기 등의 달인이었다.
심기일 : 1545년부터
무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의 의병에 가담하여 정암진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심  대 : 1546년부터 1592년까지
문과에 급제하여 사인, 보덕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공으로 부승지가 되었다.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고, 서울 탈환 작전을 계획하여, 성내의 백성이 내응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평양 탈환을 위해 남하하는 도중에 삭녕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였다. 호성공신 2등이 되었다.
심대승 : 1556년부터 
문신으로 훈련원판관, 군자감정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의 의병에 가담하여 선봉장으로 각처에서 왝군을 격퇴하였다. 진주 대첩에서는 구원군의 선봉장이 되었다. 후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심민겸 :
의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수원에서 권율을 도와 군량 공급에 진력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이끌고 역전하였으며, 춘천예교 싸움에서 군량을 보급하였다. 그 공으로 주부의 벼슬을 지내고, 의괄에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또 후에 병자호란 때에도 군량을 조달하였다.
심수경 : 1616년부터 1599년까지
154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을 지내고, 감사, 우의정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켰다. 문장, 글씨가 훌륭하였다.
심  액 : 1571년부터 1655년까지
참판 심우승의 아들로 심우준에게 입양되었다. 159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 정언 등을 지내고, 경성부 판관을 역임하였다.
심약기 :
부윤 심총의 아들로 1590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부친이 웅천에 유배되자, 고향을 돌아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심  열 : 1569년부터 1546년까지
159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전적,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국가재정의 권위자였다.
심우승 : 1551년부터 1602년까지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벼슬을 지내고, 형조정랑을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는 도중에 도주하였다. 그 책임을 물으려 하였으나, 연경의 구원을 받고 승정원의 승지를 지내고 순천부사, 호조참의로 있던 중에 명나라 경리 양호의 부하들의 횡포함을 상서하였다가 파면되었다. 한성부 부윤,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심우신 : 1544년부터 1593년까지
무장으로 임진왜란 때 수천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적의 선봉을 수원에서 격파하였다. 창의사 김천일과 진주성에 방어하던 중에 성이 함락되자 자살하였다.
심우영 : 
강변칠우의 일인.
심우정 : 1546년부터 1599년까지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을 지내고, 형조좌랑, 지평을 역임하였다. 육조의 좌랑을 고루 거치고, 해운판관으로 치적을 쌓아 시강원에 필선되었다. 임진왜란 대에는 진휼랑으로 임무를 완수하여 그 공으로 광주목사로 임명되어, 산성을 수축하였으며, 영남지방의 명의 군대의 군량을 공급하였다.
심유경 : 1600년까지
명의 장군. 조승훈의 유격장군으로 1592년에 고니시와 강화 회담을 가지고 1593년에 벽제관에서 명군이 패전하자 화의를 청하였다. 사용자 서일관과 나고야에서 도요토미와 회담을 가지고, 거짓 문서로 화의를 성립시키려 하였으나, 탄로가 나자, 정유재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때 처벌을 받게 되었으나, 명의 장군인 석성의 도움으로 풀려나자 일본에 항복할 목적으로 경상도의 의령지방으로 갔다가 명의 장수 양원에게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심  집 : 1569년부터 1644년까지
159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에서 벼슬을 지내고 한원에 들어가 사정을 논하였다가 파직되었다가, 복관되었다. 수원부 판관을 지냈다.
심충겸 : 1545년부터 1594년까지
157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서 벼슬을 지내고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김효원에 의해 배척되었다. 지평을 지내고, 부제학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병조참판으로 비변사의 제조를 지내고, 임금을 평양까지 호종하였다. 당시에 병조판서 이황복과 함께 의주행을 요청하였다. 1594년에 병조판서를 지내고 병사하였다. 호종공신이 되었다.
심  탁 : 1562년부터 1592년까지
158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훈련원 판관으로 신립의 휘하에 들려고 출발하였으나 신립이 패전하자, 통어영 신길(신립의 아우)의 휘하에서 임진강 방어전에서 전사하였다.
심통원 : 1550년부터 1617년까지
158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에서 벼슬을 지내고 공조좌랑, 이조좌랑, 제주목사, 예조참의, 대사성, 대사헌, 호조판서,우의정,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심  현 : 1568년부터 1637년까지
후릉참봉을 지내고 지방수령직을 역임하였다. 돈녕부도정을 지냈다.
심희수 : 1548년부터 1622년까지
1568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1572년에 문과중 병과에 합격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며, 정여립 사건 때 의견 충돌로 사임하였다. 다음해에 부응교, 응교, 선위사를 거쳐 간관이 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공으로 도승지가 되었으며, 대사헌, 형조판서, 호조판서를 거쳐서 접반사로 명의 경략 송응창을 맡이하였다. 1599년에 이조판서로 대제학을 겸하였으며, 좌찬성, 우찬성,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처음


안  영 : 1592년까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이 거느린 의병에 가담하여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안홍국 : 1597년까지
158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으로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후에 이순신의 선봉장이 되어 공을 세웠으며, 1597년에 보성군수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의 휘하에 중군으로 참전하여 안골포, 가덕도 등지에서 승리하였으나, 귀환중 안골포에서 전사하였다.
양대박 : 1544년부터 1592년까지
학관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담양에서 고경명을 맹주로 추대하고 전주에서 의병 2천여명을 모집하였으나, 과로로 병사하였다.
양산숙 : 1561년부터 1593년까지
문신으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전 연구에 전념하였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상소하였다가 대신들로부터 배척일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과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방어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천문, 지리, 병학에 능하였다.
양예수 : 1597년까지
의관으로 박학다식하고, 의술에 능하였다. 1563년에 순희세자의 병을 치료하지 못하여 투옥되었다가 예빈시판관이 되었다. 1565년에는 어의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1580년에는 가선대부가 되었으며, 1586년에는 가의대부가 되었다. 1595년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596년에는 태의로 동의보감 편찬에 참가하였다.
양  호 : 
명의 장군으로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경략조선군부사로 총독 형개, 총병 마귀, 부총병 양원등과 원병을 거느리고 서울을 거쳐 울산 도산성 싸움에서 패전하여 파직되었다.
양  황 : 1575년부터 1597년까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아버지(?)가 의병을 일으켜 경상도 의병 대장 정인홍의 휘하에 들려하자, 그것을 말리고, 김성일의 휘하에 들도록 하였다. 가재를 팔아서 화살을 마련하여 의주의 행재소에 전해주어, 평양탈환전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어몽룡 : 1566년부터
화가로 진천현감을 지냈다. 매화 그리기에 능하였다.
어영담 : 
무장으로 담력, 지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여도만호를 지내고, 무과에 급제하여 진관 휘하에서 해로를 익혔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휘하에서 수로향도로 활약하였다. 옥포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당상관이 되었다.
오유충 :
명의 장군으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총병으로 동정제독 이여송을 따라 참전하였다.
1593년에 휴전하자 선산에 주둔하였다. 1597년에는 충주에 주둔하였다.
오윤겸 : 1559년부터 1639년까지
무신으로 1586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1592년에는 양호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이 되었다.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성판관을 지내고, 1617년에 일본과 수교를 맺었으며, 포로 150명을 해방하였다.
오응정 : 1548년부터 1597년까지
157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수탄장으로 평얄 탈환전에 참가하였다. 1594년에는 중군이 되었으며,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행호군으로 순천을 수비하다가, 병마절도사 이복남과 함께 남원을 수비하다가 전사하였다. 후에 한성부좌윤에 추증되었다.
와끼자까 야스하루 :
일본군의 장군으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선 70여척을 이끌고 참전하여, 웅천을 거쳐, 거제도를 지나, 견내량이 이르러서 이순신에게 패하여 도주하였다. 1593년에는 웅천에서 처음으로 조선수군에서 승리하였다. 그 후 서울로 철수하였다가 남하하여, 구끼, 가또오와 안골포에서 성을 쌓고, 주둔하였다. 1597년에 정유재란 때에는 일본군 제 7군과 수군을 지휘하였다. 칠천도에서 원균을 야습하여 전멸시켰다. 그 후에 고니시와 남원성을 점령하였다. 
우끼다 히데이에 :
1592년에 왜군 제 8진 1만여명을 지휘하여 침입하였다. 고니시, 가또오의 뒤를 이어 고바야까와 서울에 입성하여, 서울을 수비하였다. 1593년에 행주싸움에서 부상을 당하여 철병하였다. 1597년에 정유재란을 일으켜 14만여명으로 재침하여 남원, 전주를 점령하고, 그 해 겨울에 철퇴하였다.
우복룡 : 1547년부터 1613년까지
문신으로 1573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다. 1577년에 학행으로 소문전참봉이 되었다. 내섬시직장, 김포현령을 거쳐 1592년에 용인현감으로 왜적을 방어하여 안동부사가 되었다. 홍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우성전 : 1542년부터 1593년까지
문신으로 1561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1568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또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검열, 봉교, 수차을 지내고, 1581년에 수원현감으로 있던 중에 파직되었다. 장령, 사옹원정을 거쳐 1583년에는 응교가 되었다. 남인의 거두로 1591년에 북인의 책동으로 파직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김천일과 강화 등지에서 공을 세우고 대사성이 되었으나, 사임하고 의병장으로 부평에서 병사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우치적 : 1628년까지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거제도 만호로 원균 휘하에서 남해현을 방어하였다. 거창현감을 거쳐 1596년에는 순천부사가 되었다.  1598년에는 노량해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 후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내고, 순변사가 되었다.
원  균 : 1597년까지
조선시대 무신. 본관 원주(原州). 자 평중(平仲). 무과에 급제, 조산만호(造山萬戶)와 부령부사(富寧府使)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서, 왜군이 침입하자 전함?무기를 버리고 1만여 수군을 해산시킨 뒤 전함 3척을 이끌고 왜군을 피하였다. 이때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의 항의를 받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원군을 요청, 옥포 앞바다에서 30여 왜선을 격침시켰다. 왜적이 당포(唐浦)에 이르자 이순신의 원병과 합세, 곤양(昆陽)에서 격파하고 사천 앞바다로 추적해 무찔렀다. 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되자 이에 불복,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었다. 이때부터 이순신을 모함 투옥하였다. 97년 정유재란 때 수군통제사가 되어, 7월 왜적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출격하나 적의 유인전술에 걸려 칠천도(漆川島)에서 전멸, 거제도에 상륙하여 도주하다가 왜적에게 참살되었다. 1603년(선조 36)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추록, 좌찬성(左贊成)에 추증, 원릉군(原陵君)에 추봉되었다.

원유남 : 1561년부터 1631년까지
좌의정 원호의 아들로 1583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 휘하에서 종사하였는데, 죄를 짓고 적진에 뛰어들어 왜적을 베어 죄를 면하였다. 1596년에는 강원도, 충청도의 조방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597년에는 분의본수군의 장령으로 활약하였다.
원  종 : 1580년부터 1619년까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인조, 능원군, 능창군을 낳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이 되었다. 후에 인조가 왕이 되자 왕에 추증되었다.
유  극 : 1537년부터
1574년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공으로 평산부사가 되었으며, 호성원종공신 2등이 되었다.
유극량 : 1592년까지
연안 유씨의 시조로 무과에 급제하여 위장을 지냈다. 1591년에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방장으로 죽령을 수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 후에 수어사 신괄의 휘하로 임진강 방어전에 참가하였으나 전사하였다.
유  근 : 1549년부터 1627년까지
문신으로 1572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87년에 이조정랑으로 문신정시에 정원을 하였다. 그 후에 일본의 중 겐소가 사신으로 왔을 때 문장이 뛰어나 선위사에 특임되었다. 1591년에 좌승지로 건저문제로 정철 일파로 몰렸으나 선조의 두둔으로 무사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1591년에 도승지로 경성안무사를 겸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 공으로 한성부 판윤이 되었으며, 사은부사로 명에 다녀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597년에 운량검찰사로 명에서 들여오는 군량의 수송을 담당하였다. 1601년에 예조판서를 지내고, 동지사로 명에 다녀왔다. 호성공신 3등이 되었으며, 애제학, 좌찬성을 역임하였다.
유대진 : 1554년부터 1599년까지 
158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85년에 저작이 되었으며, 1591년에는 정언을 거쳐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유몽인 : 1559년부터 1623년까지
15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3년에 문학이 되었다. 이이첨 등 북파와 교유하였으며, 중북의 영수로 도승지가 되었다. 설학 문학의 대가이다.
유성룡 : 1542년부터 1607년까지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장자를 지내고 1569년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와 공조좌랑이 되었다. 1584년에는 예조판사, 지경연 춘추관사를 겸임하였다. 1588년에는 양관대제학이 되었고, 1589년에는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내고, 1590년에는 우의정이 되었으며, 광국공신 3등이 되었다. 1591년에는 좌의정이 되었으며, 정철 문제로 이산해와 대립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였으며, 이순신, 권율 등의 명장을 등용하였다. 영의정이 되어 임금을 평양까지 호종하였는데,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의주에서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었다. 1593년에는 이여송과 평양을 수복하였다. 그 후에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삼도 도체찰사가 되었으며, 파주까지 진격하여 영의정이 되어, 사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를 제조하고, 성곽을 수축하였으며, 군비를 확장하였고, 군대양성을 역설하였으며,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제조가 되어 기효신서를 강해하였다. 1598년에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무고를 하였으나, 그를 해명하지 않아서 파면되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벼슬일 하지 않았다. 1604년에는 호성공신 2등이 되었다.
유영경 : 1550년부터 1608년까지
157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 초유어사가 되어 토병을 모집하였다. 그 공으로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594년에는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고, 1597년에는 지중추부사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먼저 피난시켰다고하여 파직되었다. 소북파의 영수였다.
유영근 : 1550년부터
문신으로 1582년에 생원시에 급제하여 현감이 되었다. 160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유운룡 : 1539년부터 1601년까지
문신으로 1572년에 음보로 전함사별좌가 되었으며, 풍저착징랑으로 유능하여 명성이 높았다. 인동현감을 진고 1592년에 사복치첨정을 지내고, 풍기군수로 토적을 소탕하였다. 1595년에는 원주목사가 되었다.
유자신 : 1533년부터 1612년까지
광해군의 장인으로 잔사를 거쳐, 태릉참봉, 형조참판을 지내고 1592년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을 따라 분조를 이끌고 강경에 갔다. 1595년에는 성천부사가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후에 한성부 우윤을 지내고, 1598년에 명나라 감군포정사 양조령의 부하를 구타하여 파면되었다.
유  정 : 1544년부터 1610년까지
유수영의 아들로 1556년 13세의 나이로 황악 직제사에서 출가하였다. 1561년에 승과에 급제하였으며, 1575년에 선종 봉은사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거절하였다. 묘향산의 휴정의 법통을 이어 금상산에서 도를 닦았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집하여 휴정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그 공으로 승군도총섭이 되어, 평양탈환전에 참가하였다. 그 후에 권율을 도와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1594년에는 왜장 가또오의 진지를 세차례 방문하면서 적정을 염탐하였따. 1597년에는 울산 도산성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1602년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604년에는 국서로 일본에 가서 강화를 성립시켰다. 포로 350명을 석방시켜 가의대부가 되었으며, 후에 해인사에 머물렀다.
유종개 : 1558년부터 1592년까지
15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전적을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태백산을 근거지로 왜적을 소탕하였으나, 전사하였다.
유  형 : 1566년부터 1615년까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의 휘하에서 강화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후에 의주 행재소에서 선전관이 되었다.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남해현감이 되었으며, 1597년에는 통제사 이순신의 막료로서 노량해전에서 부상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지휘하여 부산진첨절제사가 되었다. 그 후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지내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윤  경 :1567년부터 1664년까지
159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600년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윤국형 : 1543년부터 1611년까지
1568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을 지내고 예조좌랑, 사간원의 정언 등 삼사 양전에서 벼슬을 역임하였다. 1583년에 사퇴하여 1589년에 좌승지를 지내고 상주목사가 되었다. 1592년에 충청도 관찰사로 순찰사를 겸임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을 방어하였으나, 서울이 함락되지 파직되었다. 1594년에 판결사, 병조참판, 대사헌을 지냈는데, 당시의 재상이었던 유성룡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사 모든 일을 협의하였다. 한성부 우윤 및 형조참판을 지내고 모함을 받아서 파직되었다. 후에 공조판서가 되었다. 인품이 충후하고 신의가 있었다고 한다.
윤근수 : 1537년부터 1616년까지
155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62년에 부수찬을 지냈다. 1590년에는 종계무변의 공으로 광국공신 1등이 되었으며, 우찬성이 되었다. 1591년에 정철의 문제에 연루되어 형인 윤두수와 함께 파직되었다. 1592년에는 여조판서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였다. 문안사, 원접사, 주청사 등을 지내면서 명과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광녕에는 3번, 요동에는 6번을 왕래하였다. 호성공신 2등이 되었는데 성리학의 대가로 문장과 글씨가 훌륭하였다.
윤  기 : 1535년부터 1606년까지
1568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1576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공조좌랑, 감찰 등을 역임하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원부사로 성천에서 세자를 시종하였다. 
윤  낙 : 
임진왜란 때 체찰사 이원익의 휘하에서 적정일 시찰하였다. 천문, 지리, 의약, 복서에 능하였다.
윤  돈 : 1551년부터 1612년까지
15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헌납이 되었다. 1591년에 이조정랑으로 정철의 일파인 유공진을 천거하였다가 파직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였다. 1598년에 명나로 도독 유정의 접반종사관으로 군량을 보급하였다. 대사간, 이조참의를 지냈다.
윤두수 : 1533년부터 1601년까지
1555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55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63년에는 이조정랑이 되었으냐, 이양의 아들의 천거를 거절하여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그 후에 대사성이 되었다. 1577년에 사은사로 명에 다녀와서 1578년에는 이수의 옥사로 파직되었다. 1579년에는 연안부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를 하사받았다. 1586년에는 한성좌윤, 오위부총관, 형조참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90년에는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광국공신 2등이 되었으며, 대사헌으로 당쟁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복직되어 임금을 개성까지 호종하였다. 그 공으로 어영대장을 거쳐서 우의정이 되었으며, 평양에서 좌의정이 되어, 군국의 정무를 처리하였다. 또 임금의 피난시에 함흥보다는 영변으로 갈 것을 청하였다. 1594년에는 광해군을 따라 남하하여 도체찰사가 되었다. 1595년에느 판중추부사로 중전을 모시고 해주에 갔으며, 1598년에 좌의정이 되었다가, 1599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윤  섬 : 1561년부터 1592년까지
158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을 지내고, 1587년에는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와서 광국공신 2등이 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성에서 전사하였다.
윤신지 : 1582년부터 1656년까지
선조의 사위로 1596년에 정혜옹주와 결혼하여 해숭위가 되었다.
윤안성 : 1542년부터 1615년까지
1583년에 복병장으로 야인의 침입을 격퇴하여 김명원의 종사관이 되었다. 안동판관을 거쳐서 숙천부사를 지내고 전주부사로 있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이 침입한 적을 방어하지 못하고 전구관곡을 소각당하여 파직되었다. 충주목사를 지내고, 온성부사, 회령부사를 역임하고 1597년에는 표리를 하사받았다. 1599년에는 성절사로 명에 다녀와서 함북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윤의립 : 1568년부터 1543년까지
15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으며, 설서를 겸직하였다.
윤  인 : 1555년부터 1623년까지
음보로 등용되어 사과가 되었다. 160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윤인함 : 1531년부터 1597년까지
155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대교를 지내고 1563년에 이조정랑으로 전선의 기밀을 누설하였다하여 파면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주성이 함락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적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그 공으로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형조참판으로 명위사로 명장수를 접견하기위하여 평양에 갔다가 병사하였다.
윤자신 : 1529년부터 1601년까지
156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85년에는 호조참판이 되었다. 586년에는 성절사로 명에 다녀왔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던 도중에 보산역에서 종묘서제조에 임명되어 종묘의 신주를 개성까지 운반하여 1594년에는 지돈녕부사가 되었다. 공조판서, 호조판서를 지내고 호성공신 2등이 되었다. 
윤정준 : 1624년까지
무신이다.
윤  진 : 1548년부터 1597년까지
의병장으로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입암산성의 수장이 되어 네 읍의 수령들과 방어임무를 맡았으나, 다른 수령들은 모두 도망하였다. 혼자서 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다.
윤탁연 : 1538년부터 1594년까지
156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었으며 1567년에는 주서가 되었다. 1571년에는 지평이 되었으며, 1573년에는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와서 좌승지를 지내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83년에는 형조참판으로 있던 중에 임신부를 장형으로 치사켜하였다고하여 좌천되었다. 1585년에는 경기도관찰사를 지내고 형조판서,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89년에는 사인스로 명에 다녀와서 1590년은 광국공신 3등이 되었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관찰사로 광해군을 호종하고, 함경도 순찰사가 되었으며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에 대한 방어 계획을 세우다가 병사하였다.
윤 황 : 1572년부터 1639년까지
1597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봉상시정, 군기감정을 역임하였는데, 탄핵을 받자 은거하였다.
후에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윤  휘 : 1571년부터 1644년까지
15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을 지내고, 전라도 관찰사,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윤  혼 : 1564년부터 1638년까지
1582년에 사마시의 급제하여 159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우승지가 되었다.
이경록 : 1533년부터 1599년까지
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1587년에 고성현령을 지내고, 경흥부사로 있던 중에 오랑캐가 녹둔도를 침입하자 조산만호로 있던 이순신과 적을 격퇴하였으나, 피해가 커서 백의종군하였다. 1588년에 오랑캐를 격퇴하여 김해부사가 되었다. 1592년에는 나주목사로 선정을하여 관찰사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을 도와 전공을 세우고 1593년에는 제주목사가 되었다. 
이경전 : 1567년부터 1644년까지
이산해의 아들로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조좌랑,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이경창 : 1554년부터 1627년까지
학자로 서경덕의 학문에 심취하였다. 경전, 성리학을 연구하고 주역을 연구하였다. 혼천의를 만들어서 천체운형을 관측하였다.
이경함 : 1553년부터 1627년까지
15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3년에는 정언을 거쳐 세자시강원필선이 되었다가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경흥 : 1592년까지
학자로 1570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1591년에는 효행으로 선원전참봉이 되었다. 1592년에 밀양부동쪽에 있는 석동이 기거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망하였다.
이  광 : 1541년부터 1607년까지
157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서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한양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상하다가 용인의 적을 공격하였느나 패배하여 백의종군하였다. 
이광악 : 1557년부터 1608년까지
158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며, 1592년에는 고양군수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지방의 왜적과 격전을 벌였다. 적이 진수성을 포위하자 진주목사 김시민을 도와 좌익장으로 대승하였다. 1594년에는 동래전투에 종군하여 수십차례 전투에서 항상 선봉을 맡았다. 1598년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명의 군사와 연합하여 금삼, 함양 등지의 왜적을 무찔렀다. 훈련원도정을 지내고 선무공신 3등이 되었다.
이광윤 : 1564년부터
1585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1594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을 지냈다.
이광정 : 1552년부터 1627녀까지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호성공신 2등이 되었으며, 보국숭록대부가 되었다.
이구징 : 1568년부터 1648년까지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지내고 장령이 되었다.
이  귀 : 1557년부터 1633년까지
이이, 성혼의 문인으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소모관, 선유관으로 군인과 군량을 모집하였다. 그 후에 도체찰사 유성룡의 종사관으로 우마와 양곡을 모집하였다. 
이  노 : 1536년부터 1614년까지
156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으며 1581년에는 장령이 되었다. 1596년에는 호조참판을 지내고 경기도 관찰사,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냈다. 
이  달 : 1561년부터 1618년까지
무신으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 최강 등과 진주성 방어전에 참가하였다. 훈련원정을 지내고 권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덕일 : 1561년부터 1622년까지
159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여 전공을 세우고, 통제사 이순신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다.
1)이덕형 : 1566년부터 1645년까지
159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지내고 도승지가 되었다.
2)이덕형 : 1561년부터 1613년까지
158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의 정자를 지내고, 박사가 되었다가, 이조좌랑을 지내고 대사간, 새사성이 되었다. 1592년에는 예조참판으로 대제학을 겸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지중추부사로 일본의 겐소, 야나가와 등과 화의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임금을 정주까지 호종하였으며 청원사로 명에 가서 원병을 요청하여, 이여송의 접반관이 되었으며 1593년에는 병조판서를 지내고, 이조판서로 훈련도감의 당상을 겸하였다. 1595년에는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사도의 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8년에는 우의정을 지내고 좌의정이 되어 훈련도감 도제조를 겸하였다. 1601년에는 행판중추부사로 경상도, 저라도, 충청도, 강원도 사도의 도쳉찰사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1602년에는 영의정이 되었으며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608년에 진주사로 명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덕홍 : 1541년부터 1596년까지
학자로 1578년에 10명의 학자를 선발하는데 사위를 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주역에 뛰어났다.
이덕회 : 1597년까지
무신으로 약관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으로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공으로 홍양통판으로 군비강화와 이도쇄신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판관으로 남원성을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이몽학 : 1596년까지
1596년 7월에 임진왜란으로 민심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충청도 홍산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부하인 김경창에게 피살되었다.
이  보 : 1545년부터 1608년까지
유성룡의 문인으로 1580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인동을 맡아 다스렸다. 관찰사의 명으로 모속관이 되어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당진현감을 지내고, 인동현감으로 있을 때 체찰사 이원익이 천생산성을 쌓을 때에 그 역사를 맡았다.
이복남 : 1597년까지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판관, 전라도방어사, 청청도조방장, 남원부사, 전라도 병마절도사, 나주목사를 지내고, 1597년에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성에서 조방장 김경로, 산성별장 신호 등과 전사하였다.
이  봉 : 
의병장으로 정철, 이항복, 유성룡 등과 문장가로 유명하였다. 1592년에 조헌, 정경세 등과 의병을 규합하여 험준한 요지의 적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1595년에는 감찰을 지내고, 1596년에는 옥천군수가 되었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관병, 의병을 요지에 배치하여 공을 세우고 당상관이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이붕수 : 1548~1592 
조선 선조 때의 의병장. 1592년 임진왜란 때 정문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길주, 쌍포, 단천 등지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옥탑평싸움에서 전사했다.
이사홍 : 1613년까지
유생으로 일본 정벌을 주장하는 소를 올려 주목을 받았다. 허균, 박응서, 서양잡 등과 교류하였다.
이산광 : 
학자로 사시가 잘못됨을 보고 자금동에 은거하였다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호종공신이 되었다.
이산보 : 1539년부터 1594년까지
156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해미현감, 정언 등을 지내고, 순안어사로 북도를 순찰하여 직제학이 되었으나, 탄핵을 받고 종부시정이 되었다가, 집의, 동부승지, 대사간, 우승지, 대사헌, 대사간을 지내고 1591년에 황해도 관찰사로 있다가 파직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이조판서를 지내고 호성공신 2등이 되었다.
이산해 : 1538년부터 1609년까지
156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67년에 이조좌랑, 부제학, 대사간을 지내고, 1580년에 형조판서, 이조판서, 대사성을 지내고 1588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북인의 영수로 1590년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광국공신 3등이 되었으며 아들 이경전으로하여 정철을 탄핵하도록 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개성이 이르려 전쟁의 책임을 물어 양사의 탄핵을 받아서 백의종군하였다. 1595년에 영돈녕부사가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그 후에 영의정이 되었다가 탄핵을 받았다.
이상길 : 1556년부터 1637년까지
15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내고 1599년에 광주목사를 지내고 통정대부가 되었다.
이성임 : 1555년부터
157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 관찰사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찰사로 토병을 이끌고 임진강 연안을 수비하였다. 1593년에는 경상우도순찰사가 되었으며 1594년에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필한, 문사, 언어, 가성, 용모가 뛰어나사 오옥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성중 : 1539년부터 1593년까지
157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대사헌, 부제학을 지내고 사직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어사로 서울을 수비하였다. 그 후에 의주에 이르러 호조판서가 되었다. 1593년에는 군량 책임자로 영남에 가서, 대군의 병량을 보급하였다. 그 후에 함창에서 병사하였다. 호성선무공신이 되었다.
이  숙 :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찰사 김수의 막하로 종군하였다. 의령의 의병장인 곽재우가 싸움을 회피하는 김수를 논박하여 체포되자 곽재우의 충의심을 역변하여 구하였다. 초유사 김성일의 명으로 영산을 수비하였으며, 정기룡과 합세하여 적을 섬멸하여 합천군수가 되었다. 
이숙량 : 1519년부터 1592년까지
학자로 이황의 문인이다. 1592년에 진사시의 합격하였다. 
1)이순신 : 1545년부터 1598년까지
이정의 아들로 157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의 비보권관을 지내고 발포수군만호가 되었다. 1583년에 건원보의 권관을 지내고, 훈련원 참군이 되었다. 1585년에는 사복시 주부가 되었으며 조산보만호를 지내고 1589년에는 선전관, 정읍현감을 지냈다. 1591년에는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군비를 확충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적선 30여척을, 그 후에는 거북선을 출전시켜 13철의 왜선을, 당포에서는 적선 20여척을, 당항포에서는 적선 100여척을 섬멸하여 자헌대부가 되었다. 그 해 7월에는 한산도에서 왜선 70여척을 섬멸하고 정헌대부가 되었으며, 가또오의 수군을 안골포에서 섬멸하였다. 9월에는 부산에서 적선 100여척을 섬멸하였으며, 1593년에는 무산, 웅천의 적을 궤멸시켯다. 그리고 한산도를 본영으로하여 남해를 장악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4년에는 명의 수군과 합세하여 죽도에서 장문포의 적을 격파하고 후방을 교란하였다.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의 생업 보장하고 산업을 장려하였다. 1597년에는 원균의 모합을 받아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정탁의 변호로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종군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이 패배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명량해전에서는 12척의 배로 적의 133척의 배를 맡아서 그 중에서 33척의 배를 격침하였다. 1598년에는 고금도에 진을 치고 명나라 제독 진인과 함께 도망하는 왜선 500여 척을 기슴하였으나 전사하였다. 선무공신 1등이 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가 영의정이 되었다.
2)이순신 : 1554년부터 1611년까지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의주판관을 지내고 사직하였다가 혜산진첨절사가 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휘하에서 중위장으로 옥포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그 후에는 항상 선봉장으로 안골포 등지에서 공을 세우고 호서구군절도사가 되었으나, 좌천되었다가 1년후에 유도방위 대장이 되었다. 1597년에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자 수군절도사로 중위장으로 활약하였다. 1598년에 이순신이 전사하자 군사를 이끌고 개선하였다. 선무공신 3 등에 되었다. 후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인 : 1543년부터 1592년까지
조식의 문인으로 157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지냈다. 이산해, 최경창, 백광훈 등과 당시의 팔문장가로 성미가 괴팍하고 배짱이 세었으나, 관리로서는 청렴하였다.
이시발 : 1569년부터 1626년까지
이덕윤의 사사를 받았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박춘무를 따라 공을 세웠다. 1596년 10월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그것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장악원정이 되었으며, 형조판서가 되었다. 함경감사로 북방을 수비하였다.
이신의 : 1551년부터 1627년까지
1582년에 학행으로 예빈시봉사가 되었으며 참봉을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300명을 모집하여 공을 세우고 사옹원직장이 되었다.
이억기 : 1561년부터 1597년까지
무예가 뛰어나가 용맹하였는데 무과에 급제하여 경흥부사, 온성부사를 지내고 1591년에는 순천부사가 되었다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도와 옥포, 당포, 안골포, 절명도 해전에서 적의 병선을 대파하였다. 이순신의 투옥되자 이항복, 김명원 등과 무죄를 주장하였다. 1597년에 원균의 휘하에서 좌익군을 지휘하다가 전사하였다. 선무공신 2등이 되었다.
이언량 : 
무장으로 이순신 휘하에서 1592년에 옥포해전에서 돌격장으로 제2차 당포해전에서는 거북선 돌격장을 맡았다.
이언화 : 1556년부터 1629년까지
역관으로 중국어에 능통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하고 사자관으로 명에 발송할 문서를 썼다.
이여송 : 1598년까지
명의 장군으로 조부가 조선인이었는데 함북 이산군의 출신으로 철영위로 도망하여 공을 세웠다. 아버지 이성량은 좌도독으로 광녕총병관이었는데 그 벼슬일 이어 받아서 지휘사가 되었다. 1592년에 제독으로 방해어왜총병관으로 4만의 원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1593년에 벽제과에서 고바야까와, 다찌바나에게 패배하여, 평양에 주둔하였으며, 신유경을 고니시에게 보내 화의를 주도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용동총병관으로 토번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이  영 : 1616년까지
무신으로 1597년에 밀양부사로 있던 중에 관군과 모지한 의병을 규합하여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제주목사를 지냈다.
이영남 : 1598년까지
무신으로 1592년에 옥포만호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균을 도와 적을 방어하였다. 1597년에 가리포첨절제사로 조방장을 겸임하였다. 이순신의 휘하에서 진도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노량에서 전사하였다.
이  완 : 1579년부터 1627년까지
무신으로 1592년에 숙부 이순신의 휘하에서 종군하였으며,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전사를 알리지 않고 독전하여 승리하였다. 1599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  우 : 1542년부터 1609년까지
서화가로 이율곡의 아우이다. 156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빙고별좌가 되었으며, 감찰, 군자감정을 지냈다. 금, 서, 시, 화에 능하여 사절이라 불리었다.
이운룡 : 1562년부터 1610년까지
무신으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만호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가 원균이 군선을 버리고 도망가려는 것을 항의하였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원병을 얻어서 옥포, 영등포 등지에서 승리하였다. 웅천현감을 지내고,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1597년에 원균이 패전한 후에 육전에서 공을 세웠다. 선무공신 3등이 되었다.
이원경 : 1573년부터 1654년까지
효자로 성리학의 연구에 전심을 기울였다. 1592년에 형에게 권유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자신은 노모를 봉양하면서 군수물자를 마련하여 제공하였다. 군자감봉사가 되었다.
이원익 : 1547년부터 1634년까지
문신으로 156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을 지내고 1573년에 성절사의 질정관으로 권덕여를 따라 명에 다녀와서 황해도사가 되었다. 1575년에 정언을 지내고 1592년에 평안도 관찰사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피난을 선도하였으며, 군사를 모집하여 적과 싸웠다. 1593년에 평양탈환전에서 공을 세웠다. 1595년에 우의정을 지내고 변무사로 명에 다녀와서 영의정이 되었다. 호성공신 2등이 되었으며, 광해군 때에도 영의정을 지내다가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에 의해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후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이윤서 : 1624년까지
15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이의건 : 1533년부터 1621년까지
문인으로 1564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돈녕부직장을 지내고 공조좌랑을 거쳐 공조정랑을 지내고 사퇴하였다.
이의립 : 1642년까지
무신으로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이첨 : 1560년부터 1623년까지
1582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1593년에 광릉참봉을 지내고 159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인기 : 1549년부터 1631년까지
학자로 1589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1590년에 도화서별제를 지내고 경상도찰방을 지내고 형조좌랑이 되었다.
이  일 : 1538년부터 1601년까지
무신으로 155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583년에는 경원부사로 니탕개를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봉장으로 평야을 수복하였으며, 무용대장으로 서울을 방위하였다.
이장손 : 
발명가로 1592년에 화포장으로 비격진천뢰를 만들어 경주판관 박의장으로 하여금 경주탈환전에 사용하게 하였다. 또 이것은 수군의 함포로도 사용되었다.
이  전 : 1558년부터 1648년까지
1580년에 상주목사로 유성룡에서 학문을 배웠다.
이  정 : 1578년부터 1607년까지
화가로 13세 때에 장안사의 벽화를 그렸다.
이정귀 : 1564년부터 1635년까지
1585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을 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 행제소에서 설서가 되었다. 1593년에는 명의 경략 송응창의 요청으로 경서를 강의하였다. 예조정랑, 병조정랑을 지내고, 집의, 승지, 병조참의를 거쳐 승문원 부제조가 되었다. 1598년에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왜병을 이끌고 명을 치려한다고 무고를 하자, 조선국 변무주문을 지어 진주부사로 명에 다녀왔다.
이정란 : 1529년부터 1600년까지
156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으로 지내가다 정여립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해미현감이 되었으며 양재도찰방, 개성도사를 지내고 1589년에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다룰 때에 동향인이라는 이유로 면직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진로를 차단하였다. 태상시첨정, 군기시부정, 수주부사, 공주목사를 지내고 1597년에 전주부윤으로 소모사를 겸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정립 : 1556년부터 1595년까지
1576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158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을 하였다. 1582년에는 수찬이 되었으며 대제학 이이의 추천으로 이항복, 이덕형과 경연을 맡았다. 기축옥사 때에는 평난공신 3등이 되었으며 1592년에는 예조참의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병조참판이 되었다. 1594년에는 한성부좌윤을 지내고,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95년에는 대사성이 되었다.
이정민 : 1556년부터 1638년까지
1590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1596년에 이몽학이 난을 일으키자 의병을 규합하여 홍가신을 도와 난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감찰이 되었다. 당진현감으로 있던 중에 탐관오리로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었다.
이정암 : 1541년부터 1600년까지
156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을 지내고 1578년에 양주목사가 되엇다. 1587년에는 동래부사가 되었으며, 대사간, 승지, 이조참판을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였다.
개성이 함락되자 황해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초토사가 되었다. 병조참판, 전라도관찰사를 지내고, 1596년에는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였는데, 죄수를 임의로 처벌하였다고하여 파면되었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황해도초토사로 연안을 수비하였다. 선무공신 2등이 되었다.
이정익 : 1597년까지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한호성과 의병을 일으켜 유격장 조병남의 휘하에서 방곡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적의 응원부대와 싸우는 중에 전사하였다.
이정형 : 1549년부터 1607년까지
156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정랑을 지내고, 1584년에 교리가 되었다. 1592년에는 좌승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그 공으로 개성부유수가 되었으며 개성이 함락되자 황해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 공으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594년에는 판결사로서 고급사로 요동에 다녀왔다. 1596년에는 사도도체찰부사를 지내고, 이조참판, 대사성,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사직하였다.
이종인 : 1593년까지
무신으로 1583년에 군관으로 이제신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1592년에 김해부사로 있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하는 것을 방어하는 중에 전사하였다.
이종장 : 1592년까지
156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주목사로 도원수 신립의 조방장이 되어 출전하였다가 충주 달천싸움에서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후에 아들 이희건의 공으로 공신에 추록되었다.
이  주 :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사원과 의병을 일으켰으며, 군량을 조달하였다. 초유사 김성일의 소모관이 되었으며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이  준 : 1545년부터 1624년까지
156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 의주목사를 지내고 1589년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다스려 평난공신 2등이 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운향사로 명군의 군량을 조달하였는데 병을 핑계로 은거하였다. 후에 한성부 좌윤이 되었다.
이  증 : 1525년부터
156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 승자,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1580년에는 예조참판으로 성절사로 명에 다녀와 1589년에는 대사간으로 평난공신 3등이 되었다. 부제학을 지내고, 형조판서, 에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내고 좌참찬이 되었다.
이지완 : 1575년부터 1617년까지
157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호조좌랑, 호조정랑, 지평, 사성, 평산군사를 지내고 사직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통어사의 종사관을 지내고 헌납을 지내고, 장료로 명에 군량미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정철의 죄를 논하는 것을 반대하여 파직되었다. 1596년에는 해주목사, 형지중추부사, 승지를 지냈다.
이  철 : 1540년부터 1604년까지
158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부정자를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의주까지호종하였으며 양양부사, 집의, 좌부승지, 형조참의, 호조참의를 지내고 우승지가 되었다.
이춘영 : 1563년부터 1606년까지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1년에는 정철의 일파로 몰려 삼수로 귀양을 갔다. 1592년에 예조정랑을 지내고, 지평, 장령, 봉상시첨정을 지냈다.
이충급 : 1627년까지
무과에 급제하여 선무공신에 책록되었다.
이충원 : 1537년부터 1605년까지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이 되었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조참의로 임금을 호종하였다. 그 공으로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첩지중추부사, 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호성공신 2등이 되었다.
이  통 : 1556년부터 1620년까지
재종형인 이이에게 사사를 받았으며, 경사, 문예에 능하였다. 진사가 된 후에 현령, 군수를 지내고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
이항복 : 1556년부터 1618년까지
참찬 이몽량의 아들로 158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 검열을 지내고, 1583년에는 사가독서를 하였다. 박사, 전적, 이조정랑을 지내고 1589년에는 예조정랑으로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처리하였으며, 응교, 직제학, 우승지를 지내고 1590년에는 평난공신 3등이 되었다. 1591년에는 좌승지로 재직중에 정철의 죄를 처리하는데 태만하였다고하여 파직되었다가 도승지가 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호종하였으며, 두 왕자를 평양까지 호종하였다. 그 후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이조참판이 되었다. 형조판서로 도총관을 겸임하였으며, 대사헌, 병조판서를 지내고 명의 원군을 요청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근왕의 군사를 모집하였다. 1593년에는 명의 지원군을 선도하여 원접사가 되었다. 1594년에는 병조판서로 주사대장을 겸하였다. 1595년에는 이조판서, 양관대제학, 지의금부사, 우참찬을 지내고 1597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임진왜란 이래로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가 되어 활약하였다. 1598년에는 우의정으로 진주 사가 되어 명에 다녀왔으며 1599년에는 좌의정이 되었다가 우의정을 지내고 도원수로 도체찰사를 겸하였다가 영의정이 되었다가 사임하였다. 임진왜란후에 뒷수습에 힘쓴 명신으로 당쟁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붕당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청백리였다는 것이 그에 대한 평가이다.
이해룡 :
서예가로 1588년에 사자관으로 통신사 황윤길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역관으로 일본관의 화의교섭에 종사하였다. 1595년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해수 : 1536년부터 1598년까지
156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설서, 봉교를 지내고, 1567년에는 사가독서를 하였다. 응교, 동부승지, 호조참의, 대사간, 병조참의, 공조참의를 지내고 1582년에는 성절사로 명에 다녀와 도승지가 되었다. 1585년에는 여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1587년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대사간이 되었다. 정철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임진왜란 때 석방되어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공으로 대사간이 되었으며, 1594년에는 대사성, 예조참의,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성격이 강직하고 단아하였으며, 시와 예서에 능하였다.
이헌국 : 1525년부터 1602년까지
155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75년에는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1578년에는 성절사가 명에 다녀왔다. 도승지로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다스려 평난공신 2등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조판서로 세자를 강계에 호종하였다. 1593년에는 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1597년에는 좌참찬 김시헌 등과 함께 복수군을 조직하였다. 1599년에는 우의정, 좌의정을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호성공신 3등이 되었다.
이현영 : 1573년부터 1642년까지
159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도사, 지평을 지냈다.
이호민 : 1553년부터 1634년까지
158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용만까지 임금을 호종하였다. 요양에서 이여송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평양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공을 세우고 부제학으로 중국과의 왕래 문서를 다루었다. 예조판서로 호성공신 3등이 되었으며 대제학, 좌차성을 역임하였다.
이홍주 : 1562년부터 1638년까지
159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휘 : 1594년까지
왕족으로 은계군 이말숙의 아들로 시예과에 급제하여 원천군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총부의 도총관으로 서울의 수비를 담당하였다. 의주 행제소에서 명나라 조칙을 맡아하는 의례를 주선하여, 중의대부가 되어 세자를 호종하였다.
이  홀 : 1568년부터 1630년까지
159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가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주서로 왕비를 해주까지 호종하였다. 1594년에 홍문관에 등용되었으며 1595년에는 승문원 정자, 박사, 전적을 지내고 1597년에 문과 중시에 급제하였다. 지평, 배천군수, 형조좌랑을 역임하였다.
이  회 : 1532년부터 1592년까지
157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사하였다.
이희득 : 1525년부터 1604년까지
157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83년에는 사간을 지내고 1587년에는 대사간이 되었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북도순검사를 지내고 1593년에는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임  환 : 1561년부터 1608년까지
159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 김천일의 종사관으로 군무를 담당하였다. 그 공으로 사포별제가 되었으며, 적중에 들어가서 묘주(?)를 구해냈다. 1597년에 이순신이 보화도에서 양곡이 떨어지자 양곡 수백섬을 군량으로 제공하였으며, 팔도에 격문을 돌려서 궐기를 호소하였다. 공조좌랑을 지내고 무주현감이 되었다.
임  회 : 1562년부터 1624년까지
정철의 사위이다.
임  흘 : 1557년부터 1620년까지
158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종개 등과 의병을 모집하였다. 문경당교에서 승리하여 공을 세우고 전옥서 참봉이 되었다.
장경제 : 1547년부터 1615년까지
158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금구현령을 지냈으나, 실정을 하여 파직되었다.















처음


장  만 : 1566년부터 1629년까지
군수 장기정의 아들로 1591년에 문과에 병과에 급제하였으며 성균관, 승문원에서 벼슬을 지내고, 예문관의 검열을 지내고, 건생시주부가 되었다. 형조좌랑, 예조좌랑, 지평을 지내고 봉산군수를 지내고 승지를 지냈으며, 영남안찰사, 호조참판,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내고 팔도도원수가 되었다.
장봉항 : 1514년부터 1592년까지
참의 장곤의 아들로 성주지방에서 적의 앞잡이 노릇을 한 한숙이란 중을 잡아서 의병장 김면에게 보냈다. 동생인 장봉한과 사촌 장사진과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장사진 : 의병장으로 경상도 군위의 유생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군위에서 전사하였다. 수군절도사에 추증되었다. 
장운익 : 1561년부터 1599년까지
158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장령을 지내고 1591년에 양양부사가 되었으나, 정철의 일파로 몰려서 온성을 귀양을 갔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특사로 풀려나서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중국어에 능통하여 주청사로 명에 다녀왓다. 도승지, 해주목사, 형조판서를 지내고 1593년에 명의 제독인 마귀와 울산 싸움에 참전하였다. 그 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장  윤 : 1552년부터 1593년까지
선전관 장응익의 아들로 158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사천현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좌의병부장으로 성산, 개령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593년에는 전주성 방어전에 참가하여 대장인 황진이 전사하자, 그를 대신하여 팔주야 동안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장응기 : 1556년부터 1630년까지
158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연안군수를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토사 이정암의 명으로 연안을 포위한 구로다의 왜군을 칠주야에 걸쳐서 격파하였다. 선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장의현 : 
병마절도사 장필무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해남현감을 지내고, 1583년에는 부령부사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조방장으로 활약하였고, 경기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장지현 : 1536년부터 1593년까지
병마절도사 장필무의 아들로 1590년에 초천으로 신립의 부장이 되었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관찰사 윤선각의 비장이 되었다. 1593년에는 부하 수천을 거느리고 추풍령에서 적을 요격하여, 금산 방면에서 구로다의 군대를 협공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장현광 : 1554년부터 1637년까지
1595년에 천거롸 보은현감이 되었으며, 후에 온갖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여, 학문연구에 전심하였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장후완 : 
첨절제사 장용삼의 아들로 음보로 옥포만호가 되었으며 선전관, 문경현감을 지냈다.
장흥요 : 1564년부터
김성일, 유성룡으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전몽성 : 1597년까지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이 되었으며,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우 전몽진, 첨사 김덕홍 등과 의병을 일으켰으나, 전사하였다.
전  식 : 1563년부터 1642까지
유성룡의 문인으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연원도찰방이 되었다.
전유형 : 1566년부터 1624년까지
유생으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과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에 청안현감을 지냈는데, 의술에 능하였다.
정  감 : 1592년까지
158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니탕개를 격파하여 공을 세웠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군이 전주로 오고 있을 때 김제군수로 백병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정경달 :
157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산군수로 의병을 일으켰다. 기략(奇略)으로 적군을 금오산에서 대파하였다. 1594년에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정경세 : 1563년부터 1633까지
158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수찬, 정언, 교리, 사간을 지내고, 1598년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대사헌을 지냈다.
정곤수 : 1538년부터 1602년까지
이황의 문인으로 157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와 목사로 1583년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1586년에 노릉의 사묘를 봉안하고 1587년에 황해도 관찰사로 대기근을 구제하였다. 병조참판, 이조참판을 지내고 대사간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우승지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전주사로 명에 다녀와서 구원병을 파병케하였으며 판돈녕부사, 예조판서, 좌찬성을 지냈다. 1597년에는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다. 대명 외교의 제 1인자로 호성공신 1등이 되었다.
정  구 : 1543년부터 1620년까지
이황, 조식의 문인으로 1580년에 창녕현감을 지내고 통천군사, 강원도 관찰사, 충주목사, 공조참판을 지냈다. 산수, 병진, 의약, 풍수에 정통하였다.
정귀세 : 1592년까지
무과에 급제하여 봉사를 지내고,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정근옹주 : 1613년까지
선조의 아홉째 딸로 일선위 김극빈의 아내가 되었다.
정기남 : 1619년까지
무과에 급제하여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후에 부사가 되었다.
정기룡 : 1562년부터 1622년까지
무신으로 곤양 정씨의 시조로 좌찬서 정호의 아들로 158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왕명으로 기룡으로 개명하였다. 훈련원 봉사를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別將)으로 우방어사 조경의 휘하에서 종군하여 거창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상주판관이 되어,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상주목사를 지내고 통정대부가 되었다. 고령에서 적장을 생포하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경주, 울산을 수복하였다. 오위도총부 총관으로 삼도통제사를 겸하였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정기원 : 1559년부터 1637년까지
별좌 정상신의 아들로 15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 공조좌랑을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와서 1594년에 현감이 되었으며, 병조정랑을 지내고 1596년에 외군의 재침기미가 있자 고급주문사로 명에 다녀왔다. 1597년에 명의 총병 양유의 접반사로 남원에 가서 양원과 전사하였다. 선무공신 3등이 되었다.
정  담 : 1592년까지
평해 정씨의 시조로 정창국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김제군수로 의병을 모집하여 전주를 점령흔 왜군을 웅치에서 맞아서 백병전을 하다가 전사하였다. 
정대수 : 
참봉 정수인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장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이순신의 휘하에서 별장이 되었다. 순천, 예교싸움에서 전공을 세우고 당진현감이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거제, 옥포의 왜군을 기습하여 전과를 거두고 철수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정대임 : 1553년부터 1594년까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당지산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영주에서 전공을 세우고, 1593년에 돌격장으로 울산 대화진에서 역전하였다. 예천군수를 지내고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전사하였다.
정문부 : 1565년부터 1624년까지
부사 정신의 아들로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북평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회령의 국경인등이 반란을 일으켜 적에게 투항하자, 관민합작의 의병대장이 되어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을 죽이고 난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영흥부사가 되었다. 1597년에 길주목사를 지냈다.
정  발 : 1553년부터 1592년까지
157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훈련원부정이 되었으며 1592년에 부산진첨절제사로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에 상륙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정복시 : 1522년부터 1595년까지
서경덕의 문인으로 천문교관 정화의 아들로 155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의, 돈녕부도정을 지내고 1592년에 은퇴하였다.
정봉수 : 1572년부터 1645년까지
159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무안현대장(代將) 흑산도 앞바다에서 왜구 격퇴하였다.
정사성 : 1545년부터 1607년까지
학자로 후진양성에 힘써서 인재를 배출하였다.
정사신 : 1558년부터 1619년까지
158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저작, 감찰, 정언, 지평을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평양으로 호종하던 도중에 이탈하여 삭직되었다. 강원도에 토병을 모아 왜군을 격파하여, 복직되어 선산군수가 되었다.
정사온 :
지중추부사 정윤무의 아들로 1586년에 효행으로 참봉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이항복의 천거로 호조좌랑으로 군량을 수송하였다.
정사웅 : 1536년까지
1589년에 사평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사위 : 1536년부터 1592년까지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형조정랑으로 춘추관 기사관을 겸임하여다. 사간으로 이이에 대한 삼사의 탄핵를 벗겼으며, 1592년에 병조참의로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하였다. 그 후에 세자를 따라 강계로 가던 도중에 맹산에서 죽었다.
장사제 : 1556년부터 1592년까지
159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종사관이 되어 장수에서 전공을 세우고 남원에서 전사하였다.
장사준 :
판관 정승복의 아들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의 군관으로 조총을 만들었다. 1599년에 절성현감이 되었다. 
정사철 : 1593년까지
학자로 정구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도왔다.
정사호 : 1553년부터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장령 정이주의 아들로 호조좌랑, 호조참의, 대사헌, 이조참의를 지냈다.
정세아 : 1612년까지
의병장으로 1558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영천의 적을 격퇴하였다. 그 후에 후진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정여립 : 1589년까지
성격이 잔인하고 두뇌가 명석하고 통솔력이 있었다. 경사,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는데, 이이, 성혼의 문하로 1570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84년에 수찬, 사적을 지내고 동인에게 아부를 하였다. 1587년에 대동계를 조직하여 해주의 지훔두, 운봉의 중의연, 안악의 변숭복 등과 모의를 하여 1589년에 모반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려 하였으나, 안안군수 이축에게 발견되어 도망하다가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실제로 그가 모반계획을 세웠지는 의문이라고 하네요. 사건 가담자가 거의 없었다고 하네요.
정  엽 : 1563년부터 1625년까지
영의정 이산보의 사위로 이이, 성혼의 문인으로 158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을 지내고 감찰, 형조좌랑을 지내고 1592년에 황주판관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중화부사를 지내고 1597년에 급고사로 명에 다녀와서 사성(司成)이 되었다. 수원부사, 응교, 필선, 승지, 형조참의, 나주목사, 대사간을 지냈다.
정영국 : 1564년부터 1623년까지
15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603년에 부사를 지냈다.
정예남 : 
의관으로 1596년에 상의원주부가 되었으며, 허준과 <의방신서>를 편찬하였으나 정유재란이 일어나 중단되었다. 
정옥남 : 
정여립의 아들로 진안의 죽도에서 자살하였다. 
정  운 : 1543년부터 1592년까지
훈련원 참군 정응정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산도찰방을 지내고, 웅천현감, 제주판관을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만호로써 이순신의 선봉장으로 전과를 올렸으나 전사하였다.
정운룡 : 
학자로 주부 정집의 아들로 기대승의 문인으로 정여립에게 절교문을 보내서 왕자사부가 되었다. 1592년에 장원시강원일 지내고 고창현감이 되었다.
정윤목 : 1571년부터 1629년까지
우의정 정탁의 아들로 유성룡, 정구의 문인으로 예학, 병형, 음약, 율력에 정통하였다.
정윤복 : 1544년부터 1592년까지
좌찬성 정응두의 아들로 156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대사성, 도승지, 병조참판을 지내고 1589년에 정여립의 친구로 파직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동서로 호소사를 지내고 우통어사, 병조참판으로 왕을 호종하다가 병사하였다.
정응성 : 1563년부터 1644년까지
첨지중추부사 정담의 아들로 158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 이산해의 천거로 수문장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청하현감으로 싸워서 공을 세웠다. 1602년에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도총관, 포도대장을 지냈다.
정의번 : 1592년까지
정세아의 아들로 부친과 의병을 일으켜 영천에서 승리하였다. 경주로 진격도중에 포위된 아비지를 구하고 전사하였다.
정인홍 : 1535년부터 1623년까지
대북파의 영수로 1573년에 황간현감을 지내고, 지평, 장령으로 정철을 탄핵하였다가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격파하였다. 영냠의병장의 호를 받았다. 1602년에 대사헌, 공조참판으로 유성룡을 탄핵하여 사직하게 하였다.
정  입 : 1574년부터 1629년까지
돈녕부주부 정경순의 아들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에 가서 포로 146명을 석방케 하였으며 그 공으로 공조참판이 되었다.
정  작 : 1533년부터 1603년까지
좌랑 정순붕의 아들로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술을 즐겨서 주선이라고 칭하였다. 1596년에 동의보감 편집에 참가하였다.
정  전 : 1569년부터 1639년까지
현감 정사성의 아들로 유성룡의 문인이다.
정  조 : 1559년부터 1623년까지
승지 정철의 아들이다.
정종명 : 1565년부터 1626년까지
정철의 아들로 이이, 성혼의 문인이다. 의주 행제소에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병조좌랑, 가릉부사를 지냈다.
정창연 : 1552년부터 1636년까지
좌의정 정유길의 아들로 157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동부승지, 우의정, 좌의저을 지냈다.
정  철 : 1536년부터 1593년까지
시인, 명신으로 기대승, 김인후의 문인으로 1561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평, 직강, 교리를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장악원정이 되었다. 사간, 직제학, 승지로 있던 중에 동인의 공격을 받아서,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삭직되었다. 1580년에 강원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1583년에는 예조참판, 형조판서, 에조판서를 지내고 1584년에는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어 파직되었다. 1589년에 우의정으로 정여립의 사건을 빌미로 동인을 추방하였다. 1590년에는 좌의정이 되었다. 1591년에는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하였다가 파직되어, 진주에 유배되었다가 강계로 이배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하였으며, 체찰사가 되었다. 1593년에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으나, 동인의 모함을 받자 은거하였다.
정  철 : 
15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으로 이순신의 막하에서 우위장이 되었으며, 진주 제석당산성에 주둔하여 왜적을 사살하여 공을 세우고 이순신의 천거로 초계군수가 되었따. 아우 정인과 아들 정언신과 함께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정  춘 : 1594년까지
159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막하에서 한산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성주판관이 되었다. 1594년에 거제 옥포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정충신 : 1576년부터 1636년까지
임진왜란 때 광주목사 권율의 휘하에서 종군하였으며, 1592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정  탁 : 1526년부터 1605년까지
155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지내고, 이조참판,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1589년에 우찬성으로 사은사로 명에 다녀와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1594년에 우의정을 지내고, 1600년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호성공신 3등이 되었다. 경서, 천문, 지리, 상수, 병법에 정통하였다.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등을 발탁하였다.
정평구 : 
김제출신의 발명가로 비거를 발명하였다. 1592년에 진주싸움에서 이를 사용하여 외부와 연락하였으며, 성주를 구하였다.
정홍익 : 1571년부터 1626년까지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서, 예조좌랑, 정언을 지내고, 성혼을 변론하였다가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정희번 :
대사헌 정유의 아들로 157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85년에 충주목사로 표리를 하사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호성공신 2등이 되었다.
제만춘 : 
무신으로 1592년에 경상우수영 군교로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의 명으로 웅천에 잠입하여 적정을 염탐하였다가 포로가 되었다가 1593년에 탈출하여, 이순신의 진영에 도달하여 이순신의 막하에서 대솔(帶率)군관이 되었다.
제홍록 : 1558년부터 1597년까지
158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촌 제말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웅천, 김해, 정암 등지에서 전공을 세우고 이순신의 막하에 있다가, 1597년에 진주성을 구원하라가다가 전사하였다.
조  경 : 1541년부터 1609년까지
병마절도사 조안국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1591년에 강계부사가 되었으나, 유배되었던 정철을 우대하가다 파직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경상우도 방어사로 황간·추풍에서 패배하였다. 금산에서 왜군을 격파하였으나 부상을 당하였다. 그 해 겨울에 수원부사로 적에게 포위된 독산성의 권율을 응원하였으며, 다음해 행주산성에서 권율과 대승하였다. 그 공으로 가선대부가 되었다. 서울수복 후에 도성서도 포도대장이 되었다. 후련도감 설치로 우영장을 겸하였다. 1596년에 훈련대장이 되었으며 선무공신 3등이 되었다.
조공근 : 1547년부터 1629년까지
조덕원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에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피난하여 영변에 안치하였으며, 분조 설치 후에 광해군을 시종하여 위성공신이 되었다. 
조광정 : 1552년부터 1638년까지
1582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당쟁에 참가하지 않고 연안에 은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평산에 가서 이정암의 의병과 합세하여 적군의 진로를 막았다. 군자감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조광현 : 
의병장으로 이이의 문인이다.1582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1585년에 이이, 상혼의 신원을 상소하였다. 제릉참봉, 금성현령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 종형 조광윤과 의병을 일으켰으며,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조  목 : 1524년부터 1606년까지
이황의 문인으로 1571년에 이조의 추천으로 동몽교관, 공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였다. 봉화현감이 되었다. 1594년에 군자감주부를 지내고 일본과의 강화에 반대하여 상소를 올렸다. 공조참판을 지낸 대학자이다.
조방직 : 1574년부터
성혼의 문인이다.
조승훈 :
명의 장군으로 요동지방에서 전공을 세우고 요동부총병이 되었으며, 선발대로 5000여명을 이끌고 좌참장 곽몽징, 우참장 대조변, 유겨 사유등과 조선에 입국하였으나, 평양성 공격시에 기습을 받아서 패전하였다. 그리하여 대조변, 사유 등이 전사하였다.
조완기 : 1570년부터 1592년까지
의병장 조헌의 아들로 1592년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서 승장 영규의 군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였다.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조우인 : 1561년부터 1625년까지
조  익 : 1556년부터 16123년까지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필선을 지내고 병조좌랑, 광주목사, 장령을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에서 의병을 하였다.
조  정 : 1551년부터
158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을 지내고, 1592년에 보덕으로 세자를 호종하였다. 전적, 대사간, 동지중추부사, 대서상, 이조참팜을 지냈다.
조존성 : 1553년부터 1627년까지
대제학 조발생의 아들로 성혼의 문인이다.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대교, 전적, 예조좌랑, 정언을 지내고 명에 가서 상서 석성에게 명군의 철병론을 철회케 하였다. 호조정랑을 지내고, 1595년에 해운판관으로 군량을 운반하엿다.
조종도 :1537년부터 1597년까지
1558년에 생원시에 급제하여 안기도 찰방을 지내고 1585년에 양지현감, 1589년에 정여립에게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592녀에 안음현감, 함양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1597년에 의병을 규합하여 안음현감 곽준과 안의의 황식산성에서 가또오와 격돌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조  탁 : 1552년부터 1621년까지
1588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의금부도사를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였으며, 부흥책 10조를 올렸다. 1599년에 세자익위사의 위수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조  헌 : 1544년부터 1592년까지
의병장으로 도원, 후율, 이이, 성혼의 문인으로 156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72년에 교서원 정자를 지네고 절에 향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삭직되었다.저작을 지내고 1574년에 질정관으로 명에 다녀와서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 통진현감으로 탄핵을 받아서 부평에 유배되었다. 1581년에 공조좌랑을 지내고 전라도도사를 지내고 종묘서령이 되었다. 1582년에 보은현감을 지내고 1586년에 공주 제독관 이이, 성혼에 대한 추죄를 반대하어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1589년에 동인의 전횡을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다. 정여립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되자 용서를 받았다. 1591년에 일본의 사신을 받지 말겄을 상소하기위해서 옥천에서 상경하여, 국방력 강화를 주장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8월에 영규의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수복하였다. 전라도를 향하는 고바야까와의 왜군을 금산에서 막았다. 그의 전공을 시기한 관군의 방해로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 후에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이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호익 : 1545년부터 1609년까지
학자로 이황의 문인으로 1576년에 경상도도사 최항이 부임하여 군직을 정리할 때에 검독관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가 강동으로 유배되었다. 학문연구에 전심하여 관서지방에 영향을 미쳤다. 1592년에 유성룡의 청으로 풀려나 소모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민을 규합하여 중화, 상원에서 전공을 
세웠다. 성주목사, 안주목사를 지내고 사직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릉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선산목사를 지내고 병으로 사임하였다.
조홍립 : 1558년부터 1640년까지
158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한성부참군, 정언을 지내고 1590년에 서장관이 되었으나 부친이 연로하여 사퇴하였다. 1637년에 노인직으로 가선대부가 되었다.
주몽룡 :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1592년에 금산군수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강득룡, 정기룡 등과 거제의 우지현 싸움에서 용전하여 적을 격파하였다. 의령의 곽재우의 휘하에서 부장이 되었으며, 창녕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거제의 적을 격파하는데 참전하였다.
진무성 :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에서 중군으로 당포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진  인 : 
명의 신종 때의 인물로 부총병으로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구원군 군선 500여척을 이끌고 당진에서 이순신과 합류하였으나, 이순신의 적의 퇴로 봉쇄의견에 반대하였으나 이순신의 설복을 받고 노량에서 왜장 시마즈가 이끄는 왜선 500여척을 맡아서 섬멸하였다.















처음


차천로 :
차식의 아들로 서경덕의 문인이다.
157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개성교수를 지내고, 1583년에는 문과 중시에 합격하였다. 1589년에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와 봉상시첨정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명에 보낼 원군을 요청하는 서간을 작성하였다.
채겸길 : 1559년부터 1623년까지
함경도 순안어사를 지내고, 필선, 장령 등을 지냈다.
처  영 :
서산대사의 제자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천만리 :
명의 귀화인으로 1592년에 영양사로 아들 천상과 이여송을 따라 출정하였다가 평양, 곽산에서 공을 세웠다. 1597년에 마귀와 울산 싸움에 참전하였다. 명군의 회군 때에 눌러앉았다.
최  강 : 
1585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대장으로 고성과 진해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공으로 가리포첨사가 되었다. 그 후에 화공법을 사용하여 적의 선박을 불태웠다.
최경행 :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의 의병을 모집하였고, 군량을 모집하여 명군에게 공급하였다. 
최경희 : 1532년부터 1593년까지
156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금산, 무주 등지에서 공을 세웠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에서 전사하였다.
최  계 : 1567년부터 1622년까지
159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현련을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여 전공을 세웠다.
최  균 :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싱 촤강과 의병을 일으켜 풍운장이라고 칭하였다. 고성, 사천 등지에서 공을 세우고 수문장이 되었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통정대부가 되었는데, 천문, 지리를 톨달하였다고 한다.
최  기 : 1553년부터 1616년까지
15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권지부정사를 지내고 성절사로 명에 다녀와서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최기남 : 1559년부터 1619년까지
1585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며, 상소의 소두로 아들 최명길을 두었다.
최기필 : 1593년까지
천거로 봉사가 되었으며, 진주부관을 지내고 은거하였다. 1593년에 진주가 왜병에게 포위되자 의병을 일으켜 성중에서 군량을 보급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투신하였다.
최동립 : 1557년부터 1611년까지
1585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1592년에 능참봉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5년에 봉교를 지내고, 1597년에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1599년에 병조정랑을 지내고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인 최홍간의 충고로 사임하였다.
최동보 :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경산, 경림, 영천에서 공을 세웠다. 일기로 신협기(神?記)를 지었다.
최동식 : 1552년부터 1614년까지
15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 병조좌랑, 헌납 등을 지냈다.
최명길 : 1586년부터 1647년까지
이항복, 신흠서의 문인이다.
인조때의 명신이다.
최명룡 : 1567년부터 1621년까지
학자의 신중경의 문인으로 김장생 등과 교유하였으며, 역학, 음양, 방기, 불교서적에 정통하였다.
최문병 : 1599년까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장산에서 의병 수천을 규합하여 두곡, 선암, 가지현에서 전공을 세웠다. 영천의 적을 화공으로 섬멸하고 감목관이 되었다.
최봉천 : 1564년부터 1597년까지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카 최진립과 의병을 일으켰다. 그 공으로 훈련원정을 지내고 경상도 우후가 되었으며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영천에서 공을 세우고 청암에서 전사하였다.
최상중 : 1551년부터 1604년까지
15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지내고 1592년에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이 되었다.
최유원 : 1561년부터 1614년까지
이이의 문인이다.
최입 : 1539년부터 1612년까지
156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77년에 수정사로 명에 다녀와서 1581년에 기령군수가 되어, 기민구제로 표리를 하사 받았다. 공주목사, 전주부윤, 승문원제조를 지내고 1594년에 주청부사로 명에 다녀왔다. 외교문서 작성의 일인자이다.
최진립 : 1568년부터 1636년까지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1597년에 결사대를 인솔하여 서생포의 적을 섬멸하였다. 권율과 합세하여 도산에서 대승하여 선무공신이 되었다. 경기수사로 삼도통제사를 겸하였다.
최천건 : 1538년부터 1617년까지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으로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에 가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음을 보고하였다. 진주사로 경리 양호의 선임을 진주하여, 이조판서가 되었다. 
최철견 : 1548년부터 1618년까지 
15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참봉으로 위패를 잃어서 태장형을 받았다.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와서 대사간,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최  현 : 1563년부터 1640년까지
임진왜란 때에 구국책을 올려서 원릉참봉이 되었다.
최  항 : 1529년부터 1603년까지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국, 장령, 대사간,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내고 광국공신, 평난공신이 되었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와 세자빈을 희천까지 호종하였다. 1593년에 감찰사로 왕과 환도하여, 찬성사, 세자이사를 지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최홍원 : 1529년부터 1603년까지
156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고 우의정, 영의정을 지내고 기로서에 들어갔다.















처음


하응도 :
진사시에 합격하여 천거로 소촌도찰방을 지내고 1593년에 함락된 진주의 판관으로 흩어진 군민을 규합하였다.
한  교 : 
학자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사재감참봉, 군자감판관, 현감을 역임하였다.
한극함 : 1593년까지
무신으로 경원부사를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북 병마절도사로 해정창에서 가또오와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하여 두 왕자를 놓아두고 도피하였다가 포로가 되었다. 안변에 호송되었다가 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탈출하여 고언백에 진영이 이르렀으나 처형되었다.
한덕문 : 1578년부터 1627년까지
159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 수문장을 역임하였다.
한명련 : 1624년까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1594년에 경상우도 별장이 되었다. 1597년에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공주싸움에 참전하였다. 후에 이괄의 난에 가담하였다.
한명윤 : 1542년부터 1593년까지
1568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연은전참봉을 지내고 영동현감을 역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맹주에 추대되어 전공을 세웠다. 조방장을 겸하고 1593년에 상주목사로 방어사를 겸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선무원종공신 2등이 되었다.
한백겸 : 1552년부터 1615년까지
1585년에 교저낭청에서 근무하였다. 1589년에 정여립의 생질은 이진길과 교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여 장류되었다. 1592년에 내자시직장을 지내고 호조참의를 지내고, 동국지리지를 저술하였다.
한  순 : 1555년부터 1593년까지
158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평양판관이 되었다.
1590년에 남평현감으로 성을 수축하여 군량을 준비하였다. 1593년에 창평에서 적과 교전하다가 전사하였다.
한  연 :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호조좌랑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호성공신 2등이 되었다.
한응성 : 1592년까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금산에서 선봉장이 되었다가 전사하였다.
한응인 : 1554년부터 1614년까지
157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구서, 예조좌랑, 병조좌랑을 지내고 1584년에 종계변무의 주청사로 명에 다녀와서 광국공신이 되었다. 정여립의 난과 관련하여 평냔공신 1등이 되었다. 1591년에 예조판서로 진주사로 명에 다녀왔다. 1592년에 팔도도순찰사로 요동에 가서 원병을 요청하였다. 서울수복시에 질서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1595년에 주청사로 명에 다녀왔다. 1599년에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다.
한  준 : 1542년부터 1601년까지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에서 벼슬을 지내고 예조좌랑을 지내고 1588년에 성절사로 명에 다녀와서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590년에 평난공신 2등이 되었다.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명에 두 번 다녀와서 이조판서를 지내고 1595년에 명에 다녀와서 사자관이 되었다.
한준겸 : 1557년부터 1627년까지
158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 주서를 지내고 1589년에 정여립의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92년에 예조정랑을 지내고 우승지, 호조판서를 지냈다.
한찬남 : 1560년부터 1623년까지
한  현 :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1594년에 겸사복장이 되었다. 속오군 창설 시 선봉장으로 이시발의 휘하에서 반란을 획책하여 모속장 이몽학을 부추겨서 을사주에서 거병하였다가 사형 당하였다.
한  혼 : 1543년부터 1605년까지
156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1599년에 천거로 사어가 되었다.
한호성 : 1597년까지
158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를 지내고 광흥창 봉사를 지내고 예조좌랑을 지내고 진주사의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와서 동부승지가 되었다.
한효순 : 1543년부터 1621년까지
157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영해부사를 지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해싸움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순찰사를 겸하여,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충청도 체찰사, 지중추부사,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한효중 : 1559년부터 1628년까지
함응수 : 1561년부터 1628년까지
159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수문장, 팔도도교련관을 지냈다.
허  강 : 1520년부터 1592년까지
학자로 역대사감 30권을 지었다.
허  균 : 1569년부터 1618년까지
158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지내고 1590년에 전적으로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와서 같은 서인 출신인 김성일의 의견에 반대하여 일본의 침략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정언, 응교, 사인, 이조참의, 대사간, 부제학, 이조판서를 지냈다.
허  성 : 1548년부터 1612년까지
동지중추부사 허엽의 아들로 15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8년에 황해도 도사로 재직 중에 탄핵을 받아서 파직되었다.
허수겸 :1563년부터 
허억부의 아들로 158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자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여 병조좌랑이 되었다. 강진현감, 공주목사를 지냈다.
허언심 : 1543년부터
곽재우의 매부로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킬 때에 군량미 수천 석과 가복 수백 명을 보내 협력하게 하였으며, 곽재우의 휘하에서 중군이 되어 전공을 세우고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허  완 : 1637년까지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휘하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허  욱 : 1548년부터 1618년까지
157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1년에 홍주목사가 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을 수비하였다. 승장 영규, 의병장 조헌과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1593년에 충청도순찰사를 지내고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 후에 청량사로 명에 다녀와서 조 2만 7000석을 지원을 받았다. 그 공으로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다.
허  참 : 
행의로 천거를 받아서 1587년에 선공감봉사를 지내고, 성주목사,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허  준 : 1515년까지
1592년에 어의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 3등이 되어, 숭록대부가 되었다가, 중인의 신분이라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그 후에 동의보감을 완성하였다.
허  제 : 1563년부터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언관, 영천군수를 지냈다.
허홍인 : 1613년까지
강변칠우의 일인이다.
허  흔 : 1543년부터 1622년까지
158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이를 변호하다가 삭직되었다. 1590년에 경상도도사가 되었다가, 의령현감으로 정인홍을 꾸짖어 미움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평안도도사로 평양을 수비하였다. 1597년에 안변부사로 있던 중에 파직되었다.
현덕량 : 1544년부터 1610년까지
1569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안동현감을 지냈다. 무력이 출중하고 기사에 능하였다.
홍가신 : 1541년부터 1615년까지
156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예빈시주부, 형조좌랑, 지평을 지내고 1593년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민병을 규합하여 무장 박명원, 임득의 등과 난을 평정하였다. 청난공신 1등이 되었다.
홍계남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안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전사하자, 대신 병사를 지휘하여 여러 곳에서 승리하였다. 그 공으로 경기도조방장이 되었다가, 수원판관으로 영천군수를 겸하였다. 진주, 구례, 경주 등지 싸움에 참가하였다. 1593년에 경상도조방장으로 의병을 일으켜 이몽학의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다. 
홍명원 : 1573년부터 1623년까지
158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서봉 : 1572년부터 1645년까지
15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교리, 응교를 지냈다.
홍서익 : 1572년부터 1623년까지
홍성빈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성빈 : 1536년부터 1594년까지
서경덕, 이황의 문인으로 156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 교리를 지내고 1575년에 호조참판으로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다. 부제학, 예조판서, 대사헌을 지내고 광국공신 2등이 되었다. 1591년에 판중추부사로 있을 때 정철이 실각되자 북변에 유배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특사로 대제학이 되었다.
홍세공 : 1541년부터 1598년까지
157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592년에 함경도 순찰사를 지내고 1593년에 전주부윤이 되었다. 1594년에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평안도초토사로 있던 중에 사망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홍  식 : 1559년부터 1610년까지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지내고 도승지, 대사헌을 지냈다.
홍여순 :1547년부터 1509년까지
1568년에 황해도도사를 지내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1592년에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북도순찰사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서 순천에 유배되었다. 
홍이상 : 1549년부터 1615년까지
157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수찬, 직제학, 예조참의, 병조참의를 지내고, 1594년에 성절사로 명에 다녀와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비변사와 명과 함께 고니시와 가또오의 이간책을 추진하였다.
홍인걸 : 1541년부터
홍덕령의 아들로 157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회양부사, 삼척부사를 지내고 1595년에 왜군을 사로잡았는데, 동생인 홍인벽이 포로 가운데에 동족이 있자 그들을 죽였는데 조정에 잘못 보고되어 유배되었다.
홍  진 : 
157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 수찬을 지내고 1589년에 직제학으로 문사랑을 겸하여 정여립의 옥사를 다스렸다. 좌승지, 우승지를 지내고 한성부 판윤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였다. 그 공으로 호성공신 2등이 되었다.
홍  흔 : 1541년부터 1593년까지
중추부사 홍필세의 아들로 이황의 문인이다.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 동부승지를 지내고 1583년에 대사간, 병조참의, 형조참의, 판결사, 강원도 관찰사, 양주목사를 지내고 1592년에 부제학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였다. 그 공으로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유성룡의 친구였다고 한다.
홍희남 :
역관으로 임진왜란 때에 대일 교섭에 파견되었다. 1년동안 3계급 특진하였으며, 50대 전에 숭록대부가 되었다. 지중추부사를 지냈는데, 일본에 여섯 번, 명에 두 번 왕래하였다. 
황근중 : 1560년부터 1633년까지
황수의 아들로 158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공조정랑, 호조정랑을 지내고 지평을 지냈다.
황신선 : 1570년부터 1637년까지
159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이 되었다. 
황섬 : 1544년부터 1616년까지
157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 도승지, 병조참의를 지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 수송에 공을 세웠다. 호조참판, 예조참판, 대사헌을 지냈다.
황세득 : 1598년까지
무인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에서 벽파정, 고금도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1598년에 전사하였다.
황  시 :1555년부터 1626년까지
황섬의 동생으로 158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 지평, 성균관사성, 청성부사를 지냈다.
황  신 : 1560년부터 1617년까지
정랑 황대수의 아들로 158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 호조좌랑, 병조좌랑, 정언을 지내고 1586년에 절충장군으로 일본에 다녀와서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1597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황여일 : 1556년부터
15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정랑, 길주목사를 지냈다.
황우한 : 1541년부터 1606년까지
157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헌납, 좌부승지, 경기도 관찰사,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황유중 : 1564년부터 1620년까지
황윤길 : 1536년부터 
156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 황주목사, 병조참판으로 1590년에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일본이 침입할 것을 보고하였으나, 김성일의 반대 의견이 채택되었다.
황응규 : 1518년부터 1598년까지
성균관의 천거로 전한사별제를 지내고 1569년에 52세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많은 양곡을 군량으로 제공하여, 그 공으로 절충장군이 되었다. 1594년에 동지돈녕부사로 향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장정과 군량을 모집하여 출정을 서두르다가 병사하였다.
황정욱 : 1532년부터 1607년까지
황열의 아들로 155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 정언, 집의를 지내고 1584년에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로 왕자 순화군 보를 배종하였다. 강원도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격문을 돌렸다. 회령에서 포로가 되자, 아들 황혁이 거짓 항복문서를 써서 부산에서 석방되었으나, 유배되었다가 1597년에 석방되었다.
황  진 : 1593년까지
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통신사 황윤길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서 침공을 보고하였다. 1592년에 동복현감을 지내고 관찰사를 따라 근왕병을 이끌고 북상하였다가, 용인에서 패전하고 훈련원 판관으로 이치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익산군수와 충청도 조방장을 겸하였다. 절도사 선거이를 따라서 수원에서 싸웠다. 충청도병마절도로 적병을 쫓아 상주까지 연승하였다. 왜병이 진주를 공격하자, 창의사 김천일, 병마절도사 최경희와 진주성에서 구일간 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황  찬 : 1555년부터
판돈녕부사 황진의 아우로 158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예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 함경도 소모사로 군량을 조달하였으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허위 정보를 제공하고 군사 기밀을 누설하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황치경 : 1554년부터 1627년까지
158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집의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 권징의 종사관으로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파주목사, 남원부사, 안주목사를 지냈다.
황  혁 : 1551년부터 1612년까지
158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 사간, 우승지를 지내고 1591년에 정철의 일파로 몰려 삭직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군에 등용되어 아버지 정욱과 사위인 왕자 순화군 보를 따라 강원도를 거쳐서 회령에 갔다가 포로가 되었다. 가또오의 협박을 받아서 항복문서를 작성하였다가 동인의 탄핵을 받아서 유배되었다.
휴  정 : 1520년부터 1604년까지
1549년에 승과에 합격하여 판교종사를 지내고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 십육종의 도총섭으로 승병 1500명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에 유정에게 병사를 맡기고 묘향산 천지담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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