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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일상의 변용

by Casey,Riley 2023.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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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변용*1)

 

 

Arthur C. Danto


I.

 

예술계의 현상황에서는 단지 초벌칠만을 한 캔버스를 회화라고 전시하거나, 이름없는 목공소에서 만든 상자에 진부한 황갈색 화학 염료를 롤러로 대충 칠하여 조각품이라고 전시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텅빈(empty)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이며, 전자를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십자가의 전설」과, 후자를 「아폴로 벨베대레」와 대조해서 보면 이들은 정말 빈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림은 이것과 식별되지 않는, 이를 테면 수태고지가 그려지기를 기다리는 빈 캔버스가 빈 공간인 식으로이거나, 혹은 우리가 예로 든 조각과 식별되지 않는, 골동품 화물을 싣고 화물 인환증을 붙이기를 기다리는 상자가 빈 식으로 빈 것들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작품들에 적용될 때의 "비어 있다"라는 말은 그 술어에 대한 판단의 주어가 이미 예술작품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하나의 미적이고 비평적인 판단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말하는 작품들과, 예술작품이 아니므로 한 부류(class)로서의 그와 같은 술어들을 거부하는 대상들 간의 차이점들이 아무리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수수께끼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위에서 들고 있는 작품들은 "무제"(Untitled)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일을 깜박 잊고, 제목이 붙여지지 않은 채로 분류목록 속에 들어갈 때처럼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진술이 아니라 일종의 제목이다. 우리가 위에서 말한 바 있는 작품들과 식별할 수 없는 단순한 대상들(mere object)도 아무런 제목이 붙여지지 않고는(untitled) 있으나, 이 경우 제목이 붙여지지 않고 있는 것은 존재론적 분류에 의한 것이다. 즉, 예술 작품들과는 대조적으로 단순한 사물들은 심지어 "무제"와 같은 인색한 제목조차 붙여지지 않고 있다. 물론, 제목들이 종종 해석의 방향을 잡아주기는 하지만, 몇개의 사과가 그려진 그림에 「수태고지」와 같이 기상천외한 제목이 붙는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제목들이 항상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말한 초벌칠된 사각형 캔버스의 경우에 있어서의 제목은 그 제목이 붙여진 사물에 관하여 어떠한 해석도 의도되지 않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좀더 지시적(directive)인 것이 되고 있다. 그 작품의 예술가는 그의 작품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것(about nothing)이라고 말하리라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예술가가 『존재와 무』의 제 2장에 나오는 방식을 따라서 그 작품이 의미하는 바가 무(nothing)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나는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예술사적인 우연으로 이 예술가의 작품과 식별할 수 없는 것으로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것이 된 한 작품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즉, 그것은 공허(void)를 그린 그림으로서, 공허한 모방(vacuous mimesis)의 사례가 아니라, 공허를 모방한(mimesis of vacuity) 작품을 말함이다. 그 텅빈 단순한 캔버스는 채워지지 않은 상자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것에 관한 것도 아니다(not about anything)라고 이야기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한 대상들은 해석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제외되어 있다라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예술가는 무엇에 관한(about something) 정당한 종류의 것을 제작했지만, 예술적 인준(artistic fiat)의 결과로써 그것은 어떠한 것에 대한 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뿐이다. 이처럼 나는 "아무 이유 없이" 내 팔을 들어올릴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에 행해진(done)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러한 말이 곧 왜 팔을 들어올렸는가라는 질문의 적용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왜 팔을 들어올렸는가라는 그 질문을 거부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만약 내가 팔을 올리지 않았는데도 어떤 외적 충격이나 내적 경련으로 인해 팔이 올라갔다면 나는 그 질문의 적용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육체적 움직임은 행해진 것이 아니며, 따라서 어떤 이유 때문에(for a reason) 행해진 것이 아니거나, 아무 이유없이(for no reason) 행해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해석을 거부할 수는 있지만 해석을 받을 수 있는 정당한 종류의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할 때 이제 우리는 식별되지 않는 세가지 대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즉,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것(one about nothing)과, 어떤 것에 관한 것도 아닌 것(one not about anything), 그리고 단순한 사물이기 때문에 전자도 후자도 아닌 것. 따라서, 이들 세가지 중 어떤 것이 예술작품인가 또는 예술작품들 중 어느 것이 내용을 지니는가와 같은 문제는 분명 작품들의 표면만을 면밀히 검토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 대상들을 차별화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대상에서 벗어나, 그 대상의 존재론적 자격의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 망막으로 식별해서는 제대로 결정될 수 없는 판단기준들을 찾아야만 한다. 내가 마주친 어려움이란 오직 예술 개념 때문에 예술이 실물로 되어버리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현재의 예술계가 권리를 수여하고 있는 바의 예술작품, 다시 말해 골자가 다 빠져버린 예술작품을 가지고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는 오직 그 이유 떄문에 야기되고 있는 것이라는 반론을 무효화시키는 과정에서 그같은 한가지 요소〔대상의 존재론적 자격의 분위기〕를 지적하고 싶다. 그렇다면 여기서 「폴란드 기수」라는 작품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외로운 기수가 묵묵히 말을 타고, 신비스러운 건물을 지나, 어떤 심원한 운명을 향하고 있는 그런 작품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비젼과 깊이 그리고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다음으로, 나는 원심분리기 속에 페인트와 니스, 스탠드 오일을 집어 넣고 회전을 시킨 후, 그것을 캔버스에 대고 뿌린 결과 통계적 역학으로 만들어진 얼룩들 중 한 경우 때문에 그렇게 뿌려진 것(that splat)이 위의 「폴란드 기수」라는 작품과 식별이 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N. 굳맨은 두 작품이 너무나 닮아서 오랫동안 교육된 안목으로 한참 보아도 구분할 수 없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나는 식별 불가능성(indiscernibility)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상정하고 있다. 혹은 내가 굳맨에게 유리한 조건을 주어야 한다면, 모렐리언 테크닉(morellian technique)을 사용한 J. 헬드가 뿌려진 것의 왼쪽 정면 말발굽의 "소묘"가 렘브란트가 그린 것일 리 없다는 사실에 나의 주목을 끌도록 했다고 상상해 보자. 나는 "소묘"라는 말에 인용부호를 달았다. 왜냐하면 내가 제기했던 문제는 이 얼룩들의 인과적 기원에 대한 정보 - 만일 우리가 이 정보를 결핍하고 있었다면 그 얼룩들은 틀림없이 드로잉처럼 보였을 것이다 - 가 주어진다면 우리가 소묘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라는 점 때문이다. 보다 깊숙히, 나는 이런 종류의 인과적 역사를 지닌 것이 역사를 떠안고 있는「폴란드 기수」와 동일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도대체 관련된 종류의 의미를 가질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만약 제멋대로 몇개의 또아리를 틀고 있는 살무사의 둥우리가 명령문 "Buy Ampex!"와 유사한 형태를 띤다면 나는 이것이 뱀이라는 매체(medium)를 통한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함직도 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뱀무리의 일상적이며 보다 전형적인 군집적 성향을 무의미하다고 말할 권리를 내가 가지고 있는가? 이에 대한 나의 입장은 비록 색채가 뿌려진 배열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심오한 작품과 닮았을지라도 그것은 결코 심오한 것도,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며, 의미를 지니거나 의미를 지닐 만한 정당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니는 두 사물이 서로 닮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요컨대, 인용(quotation)은 발언(utterance)에 관한 것이지 그 발언이 관계하고 있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며, 발언의 메아리는 결코 어떤 것에 관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어떤 것이 해석과 제목과 구조의 자격을 구비한 후보가 되기 위한 한 조건은 그것의 원인에 관한 어떤 가정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원인들은 추정상의 결과의 표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식별불가능한 대상들이라 해도 근본적으로 상이한 인과적 역사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는 경우, 이는 다만 그것이 어떤 예술사적인 전제들과 관련되고 있을 떄 뿐이다. 즉, 그것이 단순한 하나의 사물 - 그것과 예술작품 간을 혼동하는 일이 예술철학에 대해 어떤 중요성을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라면 예술에 대해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사물 - 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can) 있음을 실패했을 때이다. 그리하여 내가 본 논문에서 관심을 갖게 될 것은 앞서 거론한 두 작품 "무제" 라는 한 극단의 것과 「폴란드 기수」나 「라 템페스타」라는 다른 극단의 것을 차별없이 포괄하기에 충분히 일반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후자의 향수에 관계되는, 즉 양식과 질감의 평가 그리고 색채와 형식에서 오는 쾌에 관계되는 일체의 것들은 한쪽으로 제외되어야만 할 것이다. 감식가의 안목하에서 "무제"를 헤아릴 수 없이 풍부한 그의 존재론적 동료들로부터 갈라 놓고 있는 것이 무엇이건간에 그러한 문제보다 철학적으로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Ⅱ.

 

모든 것이 꼭 철학적 논의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술철학의 중심문제는 왜 그것은 그것에 관한 철학이 있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 예술이 그러한 것들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이같은 사실은 예술과 철학에 관한 것을 우리에게 동시에 말해주어야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내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예술은 철학에 관련된 주제들이 공유하는 개념적 성질을 갖고 있다고 직관이나 한 것처럼 철학자들이 예술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처음부터 느껴왔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적어도 게임과 예술작품에 있어서는 어떤 공유된 성질을 찾지 못했고, 따라서 공유된 성질이란 없을 것이라고 제안했던 비트겐슈타인주의자에게 있어서는 공유된 성질에 대한 이같은 언급이 아마도 도전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의하면 만약 예술가들이 도상만을 제작했다면 우리는 어떤 부류의 예술작품이 정말로 공통된 특징(trait)을 공유하는 예술사적 전통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러한 도상 정의적(icon-defining) 특징들은 단지 예술사적 우연에 의해서만이 예술을 정의하는 특징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예술작품은 더이상 도상성의 특징을 충족시킬 수 없게 된 바의 혁명들이 개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이는 선호되는 특징들 각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정의는 혁명과 양립이 불가능하며, 예술작품의 부류는 이제까지 예술작품으로 인정되어온 것들과는 전혀 다른 다른 대상들을 - (회화에 한정한다면) "무제"가 육안으로 보기에는 변용(transfiguration)이나 그것을 닮은 사물들의 부류를 닮기보다는 단순한 실물을 닮은 "무제"가 가장 최근의 예이다 - 받아들임으로써 항상 혁명화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예술개념을 분해시켜 놓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 맨 눈만을 가지고 보는 사람들을 상대로 모든 예술작품 그리고 오직 예술작품에만 적용되는 일항 술어(one-place-predicates) 집합 - 그런 집합이 없다면 목적에 적합한 아무런 술어의 집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따라가야 되는 그런 집합 - 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만큼 나쁜 것이다. 그러하여 앞서 우리가 말한 세가지 식별 불가능한 것들은 그들의 표면적(manifest) 성질을 놓고 이루어지는 귀납적 추리는 사례의 구성상 실패할 것이므로 관계적 술어(relational predicate)의 영역 어디에선가 모호한 정의항들이 발견됨직도 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따라서 명제의 표면적 성질을 찾는 것으로 우리의 탐구를 한정시킨다면 그릇된 명제와 참된 명제를 구분하게 해 줄 수 있는 것 - 그것이 없다면 설령 우리가 우리의 탐구범위를 관계적 술어를 포함시킬 정도로 확대시킨다 해도 진리에 대한 정의가 발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따라가야 하는 그런 것 - 을 발견하는 데는 실패할 것이다. 예컨대, 만약 예술 표현론이 옳다면 하나의 표현이 된다는 것(being an expression)은 예술가와 어떤 관계에 있기를 요구하는 것일 것이며, 사물들이 표현일 수 있는 바의 비우연적인 권리의 상실은 없을 것이다. 즉, 표현된 것들 중 몇몇은 그들의 표면적 성질에 관한 한, 비표현적인 것을 정확히 닮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성질은 그 관계성을 통해 철학과 즉각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아저씨이다"라는 말은 분명한 철학적 관심사를 갖지 않고서도 관계적이다. 그래서 "예술작품이다"라는 말이 암묵적으로는 관계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이같은 사실이 예술작품과 철학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며, 그러므로 예술철학에 있어서의 중심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된다.

얼마 동안 나는 철학이란 언어와 세계 사이의 공간이라고 내 자신 은유적으로 특징지웠던 것에 근본적으로(au fond) 관련된 것이라는 견해를 강조해 왔다. 이 은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단어들이란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세계의 일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어들의 통세계적 용량에 스스로 포함된) 세계는 단어들에 의해 재현되거나, 혹은 잘못 재현(misrepresent)될 수도 있으며, 또한 그 단어들을 참 또는 거짓 혹은 바로 그 때문에 내용이 빠진 빈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는 세계 외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하려 한 것이다. 이처럼 언어가 재현적 성질을 지니는 것으로, 따라서 의미론적 평가에 종속되는 것으로서 간주될 때 언어와 실재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즉, 실재는 재현성(representationality)이 없기 때문에 의미론적 평가로부터 논리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사물들이 단어와 맺는 관계는 사물들이 그들 상호간에 맺는 관계와 상당히 다르며, 마찬가지로 단어들이 상호간에 맺는 관계 역시 사물들 상호간의 관계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함의한다(entail)는 것은 사물로서가 아니다.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표현과 실재 사이의 연결방식을 특징지우기 위해 내가 의미론적 어휘라고 간주하는 부류의 용어들 - 추론, 지시(denotation), 충족, 예시(exemplication) 등등 - 을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그런 연결 방식의 성패를 기록하기 위한 확장된 부류의 단어들 - "참이다", "존재한다", "비어있다"와 다른 많은 단어들과 그 각각의 반대말들 - 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내가 주장해 왔던 것은 모든 철학적 개념들 그리고 오직 철학적 개념들만(all and only) 이 그들을 분석하는 경우에 있어서 위에서 말한 모든 종류의 용어들 중 적어도 한가지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주장을 옹호하거나 지지할 생각은 없지만, 이런 의미론적 개념들은 협의로 해석된 단어 이외의 다른 재현의 수단(vehicle)들 - 지도, 그래프, 도안, 이미지, 개념, 이념, 몸짓, 믿음, 그리고 감정 등 - 에로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몇몇 전형적인 것들만을 인용해 본다 해도 단순한 실물 대상의 경우에 있어서와는 달리, 위의 것들은 그것들이 무엇의(of) 혹은 무엇에 관한(about) 것인가, 그것들의 내용이나 혹은 의미는 무엇이며, 그리고 다소 확장되긴 했어도 그 용어들이 갖는 논리적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들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묻는다면 그러한 일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술어들을 실물들에도 적용시키고 있다는 식의 이의가 제기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우리는 참된 친구 혹은 거짓 임신이라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론적 술어에 대해 중요한 시험은 바로 이런 것이다. 즉, 허위의 x는 x인 반면, 거짓 임신은 임신이 아니고, 거짓 정면 역시 (뒷면이 없다는 점에서) 정면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 할 때, Ⅰ절에서 살무사가 임의로 틀었던 또아리가 형성한 명령문에 대해서도 그것이 전혀 문장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거짓 문장이라는 주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이 진정으로 오직 하나의 문장이라고 한다면, 진?위가 말하자면 명령법에 있어서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인 한, 인식론적 의미의 진?위가 실제로 발생하는 일이 있게 된다.

매우 도식적이고 공격받기 쉬운 이런 진술에 기초해서 내가 잠정적으로 나마 주장하고 싶은 것은 예술작품이란 그것이 언어적인가 (예술은 언어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 훨씬 확대된 의미에서라면 어떠한 의미에서이건 그 예술작품이 의미론적 평가를 허용하는 정도에 따라 그리고 요구되는 본질적인 방식으로 실재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점에서 언어적이다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적절한 해석하에서 예술작품들의 동일어 집합들을 요구할 수 있다. 아마도 그러한 집합은 디드로를 그린 초상화들의 집합과 같이 동일한 사물에 관한 예술작품들이 될 것이다. 비록 어떤 작품이 그러한 특정 부류에 속하는지를 동일시하는 일은 우리가 제시한 예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은 단순한 인식처럼 자동적이거나 프로그램화될 수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무엇에 관함(aboutness)이라는 질문은 우리의 세 대상 중 오직 두개에만 적절하고, 나머지 하나에 이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거부된다. 어떤 것을 예술작품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잘못 위치 지우는 있을 수 있는 두가지 실수를 범하게 한다. 즉, 예술작품이 아닌 것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이해하거나, 예술작품인 것을 실물로 간주하는 일이다. 물론 이런 실수들은 단지 어떤 것에 관한 것이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은 해석상의 실수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왜냐하면 해석상의 실수는 그 해석 대상을 예술작품이라고 이미 간주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술이 실재와 거리를 취한다는 사실, 따라서 자기 나름의 용어로 예술작품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실재로부터 거리를 취하게 한다는 사실은 예술작품의 철학적 관련성을 설명하는 출발점이 된다. 이제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개념적으로 고고학적인 무모한 가정을 해 볼 것이다. 즉, 하나의 문화는 예술 개념과 대조되는 실재라는 개념을 갖는 한에서 예술에 대한 개념을 가지며, 철학을 갖는 한에서 실재에 대한 개념을 가진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화가 다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같은 가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작품을 재현의 다른 수단과 구별해야 하는 문제를 남겨놓고 있기는 하지만, 구분이 행해져야 하는 여지를 제시하고자 했던 나의 직접적인 목적을 만족시켜 주기는 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고찰할 것은 이같은 의미론적 고찰이 회화에 적절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312-d)에서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가정해 보자. 즉, '화가들은 어떤 현명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인식적일 수 있는가?' 라고 물었다고 가정해 보자" 라고 수사학적으로 묻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답변해야만 할 것이다. 즉, 유사한 것의 제작을 통해서라고." 분명, 모든 회화가 유사함은 아니며, 심지어 모든 예술적 유사함이 회화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유사함과 관련된 다른 쟝르에서 사례를 끌어내어, 유사함과 관련되지 않는 회화와 관련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Ⅲ.

 

오스틴 학파의 까다로운 과제는 모방개념의 부류 - 모사, 복사, 모방, 사본, 위조, 복제 등등 - 내에서 차이점들을 구분해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모방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내가 미메메스(mimemes)라고 부르는 한 하위 부류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 부류에 포함된다 함은 분명 어떤 다른 사물과 닮음(resemblance)의 관계에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N. 굳맨이 강조했던 것처럼 닮음은 대칭적인 반면, 미메시스(mimesis)는 "원사물"(original)과 비대칭적 관계를 함의하고 있는 것이므로, 일란성 쌍둥이 (또는 단지 두 마리의 까마귀)는 그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의 미메메가 아니고서도 서로 닮고 있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비대칭은 인과적 요인 때문일 수 있다. 즉, 원사물은 미메메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할 때 불러내어 소환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어떤 어린아이는 그의 아버지의 미메메가 아니면서도 신기할 만큼 닮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조만간 아버지를 흉내낼(impersnate)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한 사람을 흉내내는 이들은 그 사람과 반드시 생물학적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린아이와 흉내내는 이가 하나라고 해도 아버지가 자기를 흉내낸 이(혹은 흉내낸 이들)의 인과적 역사 속에 개입하는 방식은 그가 자기 아이의 인과적 역사 속에 개입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어느 한 미메메의 원사물이 그 미메메의 미메메인 것은 아니다. 비록 원사물이 하나인 경우 즉, O의 미메메가 사라져 O 자신으로 대체되는 경우를 상상해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자기 아들이 아파서 연극에 참여할 수 없게 된 경우, 수상인 아버지가 정치 촌극물에서 자기 아들이 해야할 역할을 해내야 하는 상황, 즉 자신의 흉내자를 흉내냄으로써 자기 자신을 흉내내게 되는 기묘한 상황에 이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그런 논리적 악몽에 대한 고찰을 뛰어 넘어, 보다 단순한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비록 우리가 복잡한 경우에서는 존재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으로도 난처해지는 상황을 조만간 보게 되겠지만 말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어느 실물 대상을 바로 그 동일한 실물 대상을 그린눈속임 그림(trompe-l'oeil painting)의 미메메로 이용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함을 의미하고 있다.

어느 특정 사회에서 여성들이 옷을 입고 행동하는 방식대로 옷을 입고 행동하는 남자를 상상해 보자. 습관과 걸음걸이가 단순히 닮았다고 해서 그 남자가 여성을 흉내내는 이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우연한 사정 때문에 그러한 것이 보통 사람들이 옷입고 행동하는 방식이라고 믿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린시절 여자들 사이에서 자란 아킬레스가 여자들이 옷입고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실 우리들 역시 함께 자란 사람들이 옷입고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모델들을 모방한다. 그러나 우리의 모방 행위 역시 모방된 것에 관한(about what is imitated) 것이 아니라면 그들을 흉내내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들은 단어들을 소리내어 말하는 어린아이는 그 단어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자기 선생님을 흉내내는 것은 아니듯 말이다. 어떻든, 무엇에 관함은 분명 여성스러운 행동을 흉내내기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주는 특징이며, 이제 그 남자의 행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평가는 그 행위가 단지 여성스러운 행동을 반복하는(replicate) 것인지, 아니면 그의 행위가 무엇에 관한 것이라면 여성의 행위가 바로 그것인지 하는 점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것이 여성을 흉내내는 사람과 성도착자 간의 차이점이다. 비록 양자가 다같이 자기 자신의 성적 동일성을 인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즉, 성도착자는 여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며, 그의 경우는 어떤 중요한 의미론적 특징들을 결핍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A가 B를 닮고 있으며, A가 B와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관계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에 덧붙여, A가 B에 관한 것이라면 A는 B의 미메메라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말한다. 이러한 점은 B와 A가 모든 표면적 성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도 영역 A가 영역 B의 초상(portrait)이라면 일련의 공통된 성질의 집합은 존재론적 지위에 있어서 불공평한 차이를 허용한다는 라이프니츠의 식별불가능성의 원리(principle of indiscernibility)에 대한 논의에서 때때로 언급되는 두 영역과도 같다. 그렇다면 B는 A에는 없는 의미론적 특징 - 바로 이 특징 때문에 우리는 A와의 관계 속에서 B를 실재적(real)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을 갖게 된다. 비록 내재적인(intrinsic) 그 어떤 것도 그같은 구분을 허용해 주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말이다. 우연히도 이런 사실은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 사이의 어떤 내재적인 차이점을 밝히라는 요청(주어진 예에서는 불가능하다)에 속수무책인 철학자들에게 왜 실재가 그렇게 어려운 개념으로 보이는가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때때로 환영(illusion)의 영역에서처럼 의미론적 개념들과 반대되지 않는 식으로 "실재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는 있다. 그러나 순전한 환영은 확신컨대 최소한 표면적 성질에 있어서는 차이점을 포함하고 있다. 비록 이것이 그 차이점에 대한 주된 근거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말이다. 이제 나는 환영에 대해 고찰해 볼 것이다. 

 

 

Ⅳ.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모방에서 갖는 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나 역시 인간이 모방의 원사물로부터 취할 수 있을 쾌와는 전혀 다른 단계의 쾌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나는 어떤 사람이 동물의 울음소리를 모방한 것에 대해서는 (가벼운) 쾌를 가질 수 있지만, 동물이 내는 울음소리에서는 이렇다할 아무 쾌를 갖지 않듯이 말이다. 만일 쾌 사이에 차이가 없다면, 위의 두 사례 중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일자가 타자를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울음소리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가 까마귀를 잘 "흉내낸다"(take off)(이것이야말로 인상적인 표현이다!)는 점에서 쾌를 얻을 수 있지만, 이 때의 쾌는 그가 모방하고 있는 대상과 그가 그것을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만 가능하다. 후자의 쾌는 문제의 울음소리가 그것이 모방하고 있는 실물의 울음소리가 아니라는 나의 믿음에 의존할 것이고,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것이 정상적인 후두를 결핍하고 있는 불쌍한 인간이 내는 울음소리가 아니라는 나의 믿음에 의존할 것이다. 모방과 환영이 구별되어야 함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왜냐하면 환영은 우리가 실제로 보고 있거나 듣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거나 듣고 있다는 그릇된(false)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환영 - 나는 환영의 경험이 아니라 환영적인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에서 쾌를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한 사람들은 반드시 소급적(retroactive)이어서, 환영에 의해 속았다거나 속을 뻔 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기 떄문이다. 분명, 모방에는 환영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다. 플라톤은 부분적으로 그릇된 믿음의 유발 가능성에 근거하여 예술이나 감각을 비난하였으며, 그 사례로서 인물상이 기둥위에 전시되어 아래쪽에서 보도록 의도되었을 경우 그 시선에서 볼 때 두상이 비례에 맞지 않게 작아보이지 않도록 두상을 확대해서 만드는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경우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정상적 비례의 인물상을 보고 있다고 믿을 수는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한 인간을 보고 있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환영이었음을 깨닫는 것은 농담의 요점을 깨닫게 되거나, 갑자기 놀라게 되는 것과 같다. 농담의 요점을 깨닫게 되거나 갑자기 놀라게 되는 것은 관객에게 인식적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모방으로서의 모방이라면 그것이 오인되지(misperceived) 않는 한 그것은 결코 인식적 변화를 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오인이란 모방의 논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즉, 모방은 처음부터 모방으로서, 따라서 실재적이지 않은 것으로서 이해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인식적 요소들 때문에 미술가들이 희구하는 바의 유사성, 말하자면 거울 이미지에 토대를 두고 있는 식의 소크라테스에 의해 언급된 모상(simulacrum)들이 그러한 인식적 쾌의 원천으로서 『공화국』에서 제외되고 있다. 왜냐하면 거울 이미지들은 그들의 권리상 결코 그러한 쾌의 원천이 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성차별주의자들의 대명사를 사용하자면) 거울에 비친 그녀의 반영 그 자체에서는 아무런 쾌도 갖지 않는다. 즉, 그녀는 그녀가 보이는 방식에서 쾌를 갖고, 그것이 곧 그녀가 마주 대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비교해 볼만한 것으로 클로디아 모리오의 목소리를 녹음한 것을 들을 때 우리에게 쾌를 주는 것은 그녀의 목소리이다. 비록 우리가 그녀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불행히 그것은 불가능하지만)과 축음기라는 조정된 매체를 통해 듣는 것간을 구분해 놓고 싶어할지는 모르지만 녹음은 그녀의 목소리의 모방이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 그 자체이다. 신중히 생각해볼 떄 우리가 알게 될 것이지만 이같은 사실은 사진으로까지 연장될 수 있는 일이다. 거울 이미지에서 쾌를 느끼는 사람의 가장 좋은 예는 직업상의 이유로 거울의 굴곡에 관심을 가지는 거울 제조자일 것이다. 거울은 거울이 없다면 논리상 볼 수 없는 것, 예컨대 우리 자신의 얼굴이나 (만약 눈이 영혼의 거울이라면)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특별한 인식적 역할을 수행할지도 모른다.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연극을 하나의 거울로서 보는 햄릿의 생각은 연극예술의 영역을 벗어나 일반화될 수 있는 흥미있는 이론이기보다는 본 문맥에 적합한 것이 되고 있다. 햄릿의 연극은 왕을 위해 특별히 의도된 것으로서, 왕으로 하여금 그 연극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도록, 즉 자기 자신의 행위를 외부로부터 보도록 하여 왕의 양심이 덫에 걸리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왕은 연극에 대해 (만약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면) 그것을 단순히 행위의 모방으로 보는 잡다한 관람객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 서있게 된다. 물론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예술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음을 알아보기도 하고, 자기 자신에 관한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비록 고대의 아폴로 토르소상이 그에 기초하여 자신의 삶을 바꾸기로 결심했던 시인의 거울이미지라면 그것은 다만 확대된 의미에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시인이 아폴로 조각상의 힘에서 반영되고 있는 자신의 부드러움을 보았다고 가정해본다.

인간에게 있어 쾌 혹은 최소한 우리가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쾌 - 이것은 인간성의 징표이다 - 는 어떤 인식적 전제에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에 관련된 믿음이 그릇된 것이라는 점이 발견되면 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성적인 쾌는 자신이 잘못된 상대이거나 혹은 최소한 잘못된 식의 상대와 그 쾌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대개 사라질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어떤 사람이 음식에서 가지는 쾌는 그 음식의 특성과 유래에 관한 믿음을 전제하고 있다. 만약 라구 요리(ragout) 속에 들어 있는 주성분이 돼지고기라는 것을 정통파 회교도인이 아는 순간, 또 우리가 식인종이 아닌 이상 맛있게 먹던 것이 인육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환멸을 느끼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입속에 있는 고기가 선교사가 아니라 연한 소고기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사정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환영들이다. 모방에 있어서 특별히 쾌를 특징짓는 것은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이 비실재적(nonreal)이라는 점이다. 즉,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연극 속에서 결투를 하는 사람들과 무대 위에서 포옹하는 연인인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모방 예술의 쾌가 공상(fantasy)의 쾌와 같다고 생각한다. 공상가는 자신이 공상을 통해 즐기고 있는 것은 상상된 사건이며, 그가 그것을 즐기게 된 이유의 일부는 그것이 상상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맥히 알고 있다. 공상가들이 어떤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공상가들은 자신의 공상이 병적이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병적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거나, 그 공상의 내용이 새디스트적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야만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그들이 공상에서 달콤한 사건들에 참여하는 것은 더구나 아니고, 그들을 목격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거의 확실한 일이다. 그러나 그 때의 쾌는 백일몽과 실재 사이의 구분에 대한 파악을 함축하고 있다는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 만약 공상가들이 플라톤의 전제군주와 같은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느꼈던 쾌는 더이상 공상가의 쾌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금지된 일을 실제로 하고 있거나 경험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느끼는 쾌가 될 것이다. 미개인들은 실재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아서 꿈속의 경험과 깨어있을 때의 경험을 구별할 줄 모르며, 아마 이점이 미개성의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모든 경험은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쪼각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불연속상의 모든 차이들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속에서 영혼은 자신의 육체를 떠나, 실제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다른 사람의 육체 속에 거주한다는 미개인의 믿음과 관련되어 설명되고 있다. 물론 우리의 계획에서 꿈과 공상은 다른 것이 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공상을 하면서도 그것을 꿈으로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같은 이유로 꿈보다는 공상이 예술에 가깝다.

모방 예술가가 어떤 사실주의 프로그램을 추구할 경우 그는 관객에게 존재론적으로 거짓된 믿음을 유발시킴으로써 모방이 환영으로 겹쳐버리는 일이 없도록 특별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 비록 고대인들은 멍청한 새들이 쪼을 정도로 포도를 잘 그린 사람을 위대한 예술가라고 생각하면서 환영의 가능성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그러한 일은 예술적 성공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어떤 사건이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환영을 강력하게 억제하는 한 장치이다. 무대화(staging)라는 관례의 체득은 관람자로 하여금 연기가 아무리 실감난다고 하더라도 무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믿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다. 그같은 사실은 환영이 역으로 일어날 가능성을 항상 남겨놓고 있다. 예컨대,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가 레어티즈를 연기하는 배우에게 실제로 칼에 찔려, 연기자들이 관객의 갈채에 답례를 하는 동안 무대에 엎어져 있을 때 관중들이 이것을 보고 비극의 재치라고 즐거워할 때처럼 말이다. 비슷한 사실은 화랑이나 박물관에 대해서도 똑같이 언급될 수 있을지 모른다.〔무대화의 경우와는 달리〕문맥 내의 어느 것도 예술적 공간을 결정해 주지 않을 때 환영이 무산되려면 사실주의는 침묵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극장이 거리로 옮겨진다면 가면과 의상이 예술과 삶의 경계를 겨우 설정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웰즈가 라디오 방송에서 뉴스 방송과 가벼운 촌극을 구별케 해주던 관례를 깨뜨림으로써 청취자에게 환영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유명한 예이다. 그리고 트리엔트 종교회의 이후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요구된 것은 구세주와 성자들의 고통을 마주 대하고 있다고 믿도록 의도된 관중들에게 정서적 환영을 유발시키기 위해 격리(apartheid)라는 관례를 깨뜨리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전성기 바로크 시대에 보이는 예술 공간의 현저한 경계 확장과 회화?조각?건축과의 결합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기획을 아무리 찬미한다고 하더라도 예술을 예술로서 감상하는 일이 인식적 경계에 대한 능동적인 인지를 전제한다면 이는 예술의 오용이 될 것이다.

 

 

Ⅴ.

 

내가 보기에 예술의 중요성은 예술이 실재와 거리를 취한다는 논리적 사실과 관련되어 있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인간이 상당한 정도로 실재를 견디어낼 수 없는 경우에는 두가지 휴식의 통로가 있는데, 하나는 실재의 구별을 없앰으로써 이룩하느 디오니소스적인 길이고, 다른 하나는 실재의 장소를 다른 곳으로 전위시켜(dislocation) 놓음으로써 이룩하는 아폴론적인 길이다. T. S. 엘리옷이 강조했듯, 인간이 그런 방식으로밖에 실재를 견디어낼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 않는한 그같은 거리취하기가 왜 중요한 것인가에 관해 나로서 제시할 훌륭한 이론을 갖고 있지 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F. 니체에 의해 발전된 탁월한 모방론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F. 니체에 따르면 초기 비극은 디오니소스적 의식을 모방하는 관계에 있었으며, 그러한 관계로부터 진화했다고 한다. 이런 변형의 역사적 과정에서 의식에 참석한 축배자들은 합창단으로 그리고 관객으로 변형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관객들은 예술적 공간에 의해 실제로 일어난다면 매우 위험할 행위와 격리되어 있다. 그 행위의 취지는 신의 출현(appearance of the god), 즉 극중 연기에서 관중들이 신현(a god-appearance)을 지각하는 클라이막스가 될 충전된 순간을 이끌어내는 것이 되어 왔다. 출현의 개념에는 놀랍고도 심오하기까지한 애매성이 담겨 있다. 그중 하나의 의미는 예컨대, 대통령이 취임식장에 나타난 것과 같이 x가 실제로 나타남(real presence of x)을 포함한다. 또 하나의 의미는 이와 반대로 대통령이 실제로는 거기에 없지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뜻한다. 초기 비극에 있어 출현의 의미가 첫번째가 아닌 두번째 것이라는 점은 인간이 사건 - 참여했거나 혹은 정말이지 실제로 일어났음을 목격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야만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고, 그같은 관람이 요구했던 도덕적 대가를 생생히 기억한다면 더더욱 야만스러운 일이었을 그러한 사건 - 을 모방함으로써 느끼는 쾌의 감정에 중요한 요소였음에 틀림없다. (하나의 쟝르로서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그것이 실재와 거리를 취한다는 점에서 아폴론적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야"라고 하는 것은 실재와 거리를 취하고, 실재를 무력화시키는 예술을 향수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나는 최초의 팝아트 전시회가 관람자들에게 전달해 주었던 독특한 도취를 생각해 본다. 여기서 관람자들은 철판이나 진공 청소기같은 투박한 대상들이 그들 사물을 중성화시켜 놓고 있는 화랑 공간 속에서 더이상 우리에게 어떤 힘을 갖지 못하고 마치 궁지에 빠진 바다 괴물처럼 무기력하게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린애들조차 (혹은 특히 어린애들은) 어떤 것이 원숭이처럼 흉내내어 격이 떨어진 진 것으로까지 여긴다는 사실을 보면서 나는 모방이란 언제나 실재를 무력화시키는 방식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해왔다. 

이런 심리학적 사변의 장점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위에서 말한 출현의 두가지 의미의 구분이 이용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두가지 의미 중 어떤 것이 그것에 적용되느냐, 혹은 적용된다고 믿고 있느냐에 근본적으로 달려있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할 것이다. 즉, 우리가 전자의 의미로서의 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후자의 의미로서의 출현이 꼭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라고 우리에게 이의를 제기해 놓고 있는 바의 외부 세계의 문제(the problem of the external world)에 있어서처럼 그 두가지 의미의 구분을 확립하는 내적인 방법이 없을 때라 해도 그러할 것이다. 이제 구체적 대상에 관련시켜 그런 변형을 고찰해보자. A. 말로는 치마부에가 그린 어떤 그리스도 수난상은 치마부에 당대인들에 의해서는 예술작품으로 간주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작품을 출현의 첫번째 의미에서 수난당하는 신의 출현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우리는 그 작품이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을 당하고 있는 신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그 작품은 수난 자체가 아니라 수난에 관한 것이라고, 또한 제시하는(present) 것이 아니라 재현된(represented)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에 대한 상이한 태도는 우리가 예술가에게 실재를 재현시키는 힘보다는 충전된 실재를 다시 제시하게 하는 힘을 귀속시키느냐에 달려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하튼 출현의 첫번째 의미에서 두번째 의미에로의 이행은 F. 니체가 그의 고전비극의 계보학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 삶에서 예술에로의 변형에 대한 예증이 될 것이다. 고전 비극에서 성역의 경계선은 극장의 네 벽으로 변형되어 있다. 이는 치마부에의 경우에서 신성한 사건이 영원히 일어나는 제단이 예술작품을 놓는 정교한 틀로 변하여, 교회 자체가 일종의 박물관으로 변모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과정은 대상 자신은 전혀 변하지 않고 이루어졌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이 두개의 초벌칠된 캔버스의 차이를 특징지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이 예술작품으로 해석될 때 그것이 획득하는 무엇에 관함(aboutness)에 대해서 간단히 생각해 볼 때이다.

 

 

Ⅵ.

 

『크라틸루스』 중의 한 항목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름(name)은 모방일 수 있고, 따라서 이름붙이기(naming)는 회화와 같은 모방 예술일 수 있다는 이론을 논하고 있다. 『크라틸루스』 423에서 "이름이란 음성 모방자가 이름을 붙이거나 혹은 모방한 것에 대한 음성적 모방"이라고 그는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한두 줄 뒤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유 때문에 그는 이 말을 거부하고 있다. 즉, 만약 이 말이 옳다면 "우리는 양이나 수탉이나 다른 동물들을 모방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방한 것에 이름을 붙이고 있는 꼴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 이것은 직관에 위배되게끔 된 것이지만, 그러나 나의 견해로서는 이것이 바로 모방자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그들은 모방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이건 그것에 대해 이름을 붙여주며, 최소한 그것을 지시해 놓고 있다. 따라서 미메시스가 이름에 대한 일반론으로서는 약간 불안한 데가 있다고 하더라도 모방은 이름을 붙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소크라테스의 의미론적 직관은 대체로 건전한(sound)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름〔혹은 명사〕에 관한 의미론에 있어서 용인되고 있는 견해는 이름에는 어떻든 의미론적 구조가 없다는 것이며, 내가 생각하기로 이 견해는 비록 그것을 적용할 때 어느 점에 있어서는 이상한 경우 - 이를테면, 우리가 어느 인용을 어느 문장의 이름으로 가정하게 되는 경우에서처럼,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인용이 구조를 결핍하고 있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경우 - 가 있기는 하지만 상당히 옹호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인용은 단순히 한 문장의 이름이 되고 있기보다는 인용에는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요구되고 있음은 명백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문장을 내가 선택한 것으로, 이를테면 "Brunhilde"로 이름붙일 수 있기 떄문이며,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 "Brunhilde"를 프루스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첫문장의 인용이거나 혹은 "Brunhilde"이라고 하는 단위 문장 이외의 모든 문장의 인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는커녕 인용은 사실상 대단히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즉, 인용이 하는 것은 인용부호 속의 문장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고, 그래서 인용은 그것이 이름붙인 것을 지정해 준다(give).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비슷한 것이 또한 모방의 특성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즉, 모방은 그것이 지시하는 형식을 보여준다. 그래서 모방은 수단, 형식 그리고 수단에 의한 형식의 지시로 구성된 의미론적 잡종이다. 맨 이름처럼 모방이 구조를 가지지 않고 있음은 정말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전 복합체는 어떤 구조, 말하자면 지시된 사물의 구조를 지닌다. 이런 식으로 『트락타투스』에서 말하는 명제도 그것이 참일 때는 그것이 지시하는 사실(fact)의 논리적 형식을 보여주고(show) 있다. 그리고 모방의 경우에 있어서도 일반적으로 지시되는 것은 모방과 원사물에 공통된 형식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다. 원사물과의 이러한 연관이 없다면 모방은 결코 모방이 아니고, 따라서 원사물에 관한 것도 아니며, 그 의미는 의아스러운 것이 되게 된다. 사진을 잠시 생각해보면 이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감광성이 있는 어떤 표면을 빛에 노출시킨 후, 호기심에서 그것을 현상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그 결과가 명암에 의해 우연히 이루어졌다는 유래를 알고 있음에도 타지마할의 사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타지마할을 닮았다고 가정해보자. 올바른 제작에 의한 사진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실제 타지마할의 사진과 정말 식별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진은 타지마할이 그 원인이 되고 있을 때에만,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지시한다면 그것이 타지마할의 형태를 보여주기 때문에 타지마할의(of) 사진이라고 된다. 그러나 그 사진은 건축물과의 인과론적이고 의미론적인 복합적인 연관을 결핍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 건축물에 관한 것이 아니고, 아마 그 어떤 것에 관한 것도 아닌 것, 의미가 있는 어떤 것에 관한 것을 우연히도 쏙 빼닮은 배열, 즉 여러 자국들로 이루어진 무의미한 배열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될 뿐이다. 이점은 인식에 관한 재현주의자들의 이론에 탁월하게 적용되는 두드러진 사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느 사람의 재현이 사진을 본따서 생각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 재현은 그것이 지시하고 있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그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면 다만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이라고 우리가 믿고 있는 바로 그것에 관한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재현은 그것이 지시하고 있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오직 그 원인이 되고 있는 경우에만 (그것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것이 지시하고 있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을 지시할 수가 있는 일이다. 따라서, 세계에 대해 의심하거나 세계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재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의심을 품는 한, 우리의 재현을 세계에 대한 재현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외부 세계의 문제는 다소 놀라운 해결을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점은 우리의 주제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재현에 대한 다른 견해를 고찰해 보자〕재현에 대한 N. 굳맨의 설명이 매우 빈약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 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그가 재현적 복합체 중에서 의미론적 부분만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어떤 것을 나타낼(stand for) 수 있고, 그런 까닭에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말한 점에서 그는 옳다. 내가 만약 스페인을 정복했고, 나의 출정 양상을 회화를 사용하여 보여주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내가 지도판을 사용하지 않고, 스페인 박물관에서 탈취한 회화를 사용하는 것은 내가 야만인이기 때문이라고 해보자. 톨레도를 나타내기 위해 우연히 나는 엘그레코의 「톨레도 풍경」 그림들 중 하나를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묘한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어떤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무엇이건 이용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똑같은 목적으로 「시녀들」이라는 작품을 이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돌덩어리를 이용했을 법도 하다. 그런데 N. 굳맨의 설명에서 그가 빠뜨리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림이란 그것이 지시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사실과, 지시는 인용에서 단지 한 요소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에서도 단지 한 요소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빠뜨리고 있다. 위에서 고찰된 사례에서 볼 때 톨레도는 재현의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에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톨레도의 형태이거나, 톨레도와 동등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되고 있다. 이런 인과적 요소 역시 인용 개념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지시하는 단어들에 의해 내가 그렇게 하도록 유발되지 않는다면 나는 단어들을 단지 반복하는 것일뿐 단어들을 인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로뎅은 「지옥문」을 위한 「세 그림자상」이 낯선 각도로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서, 그것이 사실 「시스틴 성당」에 미켄란젤로가 그린 「아담」의 인용이란 것을 깨달았다. 로댕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매우 감탄하여 젊은 시절 이태리 여행을 하면서 그 작품을 모사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림이나 조각은 원사물과의 인과적 연결이 없을 때는 인용이길 중단한다. 우리가 Ⅴ절에서 지적했던 출현의 첫번째 의미는 원사물과의 인과적 연결을 전제하고 있다. 그 인과적 연결이 의미론적 연결만을 내포하고 있는 출현의 두번째 의미에서는 사라지고 있다. 이점은 우리로 하여금 비모방적 예술, 혹은 소위 추상 예술이나 비재현적 예술이라고 불리는 것의 구조까지도 이해하도록 해준다. 나는 이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모든 예술작품은 어느 것이나 그것이 지시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러나 비모방적 회화의 경우에서 보여지는 것은 원사물을 결하고 있으며, 따라서 원사물과의 인과적 연관을 갖지 않고 있다. 초기 비극은 지시 - 이 경우 지시는 수단을 의미 수단의 지위에로 고양시키고 있다 - 를 통해 거리를 두고 관객을 떼어놓고 있는 바의 실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신비적인 동시에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상상적인 그림은 원사물로 추정되는 것과 아무리 닮았다고 할지라도 원사물과 하등의 흥미로운 관계에 있지도 않거나, 혹은 아무런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일단 재현의 인과적 측면을 느슨하게 한다면 남는 것은 오직 수단, 지시,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건 보여지는 것이다. 그 때 예술가가 어떤 종류의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인가는 예술가 자신에게 달려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가장 추상적인 회화조차도 그것의 내용과 의미론적 거리를 두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복합적인 구조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즉, 아무것도 아님을 지시하는 바의 수단은 초벌칠된 캔버스와 똑같아 보이며, 이점에서는 초벌칠된 다른 캔버스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맨 눈으로 접근가능한 어떠한 것도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가 보여지는 동시에 지시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 대상은 결과적으로 의미론적 구조를 통합하고 있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도록 하지는 못할 것이다.

현대 예술에 있어서 수단과 내용 사이의 이같은 거리를 없애고자 하는 흥미로운 시도들이 J. 죤스에 의해 탁월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 시도들이란 수단과 내용 간의 거리를 무너뜨리고 보여진 사물의 성질을 수단의 성질과 일치시켜, 결과적으로실재와 예술 사이의 의미론적 공간을 파괴하자는 것이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러한 시도들은 논리적으로 그 운명이 예정되어 있는 것으로 나는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 논의를 시작했던 다소 빈 공간의 작품에 대해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할 것이다. 그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것은 무엇에 관함이며, 그리고 그 내용은 예술에 대한 개념이라고 말이다. 이제 철학과 예술을 갈라 놓았던 경계선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아주 적절하게도 본 논문과 같은 논문을 써서, 그 논문에 「일상의 변용」이라는 제목을 붙이고는, 자신들의 노력을 예술철학에 대한 기여라고 말할 법도 한 일이다. 점차 회색이 된 철학의 그림들(philosolhy's paintings)이 예술계의 일부가 될 때 예술계는 그 자체의 철학으로 조금씩 점차 변해갔고, 그래서 그것은 정의상 원숙한 것이 되었다.

 

주) 이 에세이의 제목은 Muriel Spark의 "The Prime of Miss Jean Brodie" 중에서 헬레나 수녀가 변용에 관하여 쓴 유명한 책의 제목이다. 나는 이 제목을 탐내왔으며, 그에 어울릴 글을 쓰자 마자 이 제목을 도용키로 결정했다. 나는 그 책이 담고 있을 내용에 대해 항상 궁금해왔지만, 바그너의 가사에 친근한 독자에게 파프니르의 생물학이 쓸모가 없듯이, 그 책은 변용을 언급하기만 할 뿐 내용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에서 Spark 부인은 "내가 그 제목을 고안한 것은 그것이 나 자신이 실행하는 창조적 예술에 대한 서술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1973.11.23.편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나에 의해 실행된 창조적 예술의 묘사이기도 하다. 내가 쓴 이전의 관련 저작으로는 "예술계"(Journal of Philosophy 1964. 571-584)와 "예술작품과 실물"(Theoria 1973. 1-17)을 참조해 보라.

*   Arthur C. Danto,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place", Journal of art and art  criticism, vol. 33, 1974, pp. 1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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