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여 땅이여
김진명 장편소설
제2권
차례
검은 돈 9
비밀 결사 17
신사의 주문 28
저주의 바람 35
혼란의 소용돌이 43
이카로스와 프로메테우스 47
거대한 락전 60
외로운 투쟁 街
보이지 않는 힘 74
디 데이 84
해후 99
미지의 세계 112
침투 120
납치 140
운명의 시간 153
금융 전쟁 159
피의 화요일 173
묘제의 연구 180
단서 189
예기치 않은 출현 194
유언 203
겅은 목갑 209
진실의 이면 218
잃어버린 시간 230
은폐된 비밀 237
신화의 나라 245
세 가지 물음 257
눈동자 267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287
나는 시간 속 어디에 있는가
291
검은 돈
정완은 라과디아 공항에 차를 가지고 직접 나와 있었다
어머 , 이렇게 큰 차는 처음 타봐요.
내겐 차 안에 타고 있는 수아가 더 크게 느껴지는걸.
호호, 근데 이번엔 아저씨가 제게 머리를 빌려 주셔야 해요.
그래. 하지만 먼저 호텔에 가서 샤워라도 좀 하고 편히 쉬면
서 예기하자꾸나.
스탠퍼드에서 샌프란시스코, 다시 뉴욕까지의 여행은 결코 짧
은 것이 아니었다. 정환은 호화로운 호텔은 오히려 수아에 게 부
담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센트럴파크 부근
의 조용하고 자그마한 호텔로 수아를 안내하고는 그녀가 샤워를
마친 때까지 로비에서 기다렸다.
기분이 한결 좋아졌는데요.
그래 식사는 뭘로 할까?~
오랜만에 우리 나라 음식 좀 먹고 싶어요.
참, 그렇겠군 그럼 우래옥으로 갈까??
좋으실 대로요.
한국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기가 바쁘게 수아는 그 숫자표를
꺼내놓고 정완에게 설명 했다.
각각의 숫자에 40퍼센트씩을 곱한 것은 잘 생각해 보면 그 의
미를 알 수 있어요. 투자 수익률이죠. 우리 나라에 투자를 하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그 액수가 너무 크다
는 사실이에요. 한 회사가 이렇게 엄청난 자금을 어디에 투자하
는 거죠?또 그렇게 투자해서 무슨 수로40퍼센트의 이익을 얻
겠어요? 그래서 아저씨한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정완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이언펀드라면 자금 동원력이 엄청나지. 25억 달러라도 과
감하게 투자할 수 있단다 그러나 악랄한 돈 사냥꾼인 그들로서
도 한 곳에 집중 투자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박이지. 회사의 운명
을 걸어야만 생각할 수 있는 일인데 나로서도 이해가 잘
안 가는구나.
그런데 그 돈을 어디에 투자하죠?플랜트 건설일까요, 아니
면 합작 사업??
이 회사는 그런 일에 투자하지는 않는다. 헤지펀드라는 말 들
어본 적 있니??
없어요. 그게 뭐죠?
오로지 금융 사업만 하는 회사들이지.자본주의의 최첨단을
걷는 회사들이다 돈이 오가는 사업이라면 뭐든지 하지.
그렇다면 그 숫자들은 우리 나라에 대한 금융 사업 계획이겠
군요. 금융 투자라면 뭘까요??
글쎄
정완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이때 수아의 머리에 퍼뜩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아지트에 들
었던 도둑 파일을 모두 지워버리고 팩스 원본을 가져갔던 그 이
상한 도둑이 떠올랐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학생의 장
난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수아의 귓전에 테드의 목소
리가 살아나고 있었다.
'왼쪽 문자는 각 나라의 영어 이니셜이에요:
어쩌면 그들의 투자는 비정상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 정상적 인 투자라고??
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만 할 사정이 있다는 예감이 들어
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여러 나라 화폐로 투자 계획을 짜둘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각국 화폐들이 원화로 바뀌었다가 다시 달러로 환산된 것을
보면 결국 자본이 흘러나오는 원천을 은폐하겠다는 건데, 세계
여러 나라의 투자자들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위장하려는 속셈이
군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해외로 돈을 보낼 수 있으니까 이들은
해외에 분산되어 있는 투자 회사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숨기겠다
는 얘기지 .
왜 그럴까요??
우리 정부의 감시를 피하려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것은 투자
라기보다는 투기일 가능성이 크겠는데.
무슨 투기죠?~
환투기 아니면 주식인데 외환은 IMI'의 감시하에 있으
니 노골적인 환투기를 통해 40퍼센트라는 큰 차익을 내기는 어
렵고,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주식 투자일 것 같구나.
주식이요? 그렇게 많은 돈으로 주식을 사요??
그래. 이제 얼마 후면 우리 나라 증권 시장이 완전히 개방된
다. 그러면 외국인들이 아무런 제한 없이 우리 나라의 주식을 마
음껏 살 수 있지. 이 도표는 아마도 그 투자 계획일 가능성이 커.
외국인들이 주식을 마음껏 살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나라에 득이
되나요, 아니면 해가 되나요??
한마디로 득이 된다거나 해가 된다고 간단히 얘기할 수는 없어
국제 금융의 흐름을 따라야 경 쟁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
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지. 또한 외국의 자본을 이용할 수 있다
는 점에서도 유리하고. 그러나 위험 요소도 있어 . 규모가 큰 외
국 자본은 우리 나라와 같이 작은 금융 시장을 마음대로 흔들어
자본 파동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까.
자본 파동을 초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죠??
우리 나라의 증권 시장이 개방되면 외국인들이 엄청난 자금
을 동원하여 주식을 대량 매입할 수 있지 .
그래서는요??
가뜩이나 완전 개방을 앞두고 올라가던 주가가 결국에는
천정부지로 치솟겠지 그들이 막대한 자본을 동원하여 주식을
사대면 너도나도 주식 시장으로 몰릴 테고, 주가는 날이 갈수록
상승하게 되겠지. 한창 주가가 올라가는 길목에서 그들이 한꺼
번에 팔아버리면 그 피해는 국내의 투자자들이 몽땅 떠맡게 되
고 그들은 유유히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어.
정말 그럴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렇게 위험한 주식 투기를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없나요??
없어 . 다만 정부는 시장 상황을 지켜보다가 특정 자본이 특정
주식에 몰리는 것만 경고할 뿐이야. 그러나 그들이 우리 정부의
감시에 노출될 리가 없지 .
어떻게 해야 하죠??
정부 차원에서의 대책은 없는 게 확실해.
민간 차원에서 는요??
내가 아는 한은 특별한 방법이 없어 .
그게 도대체 말이 되나요. 상대의 투자 규모는 25억 달러예
요. 아저씨 말대로라면 국내의 투자자들은 모두 망하고 말 텐데
요.
그런 위험성 때문에 정부에서는 주식의 전면 개방을 꺼려왔
지만 끝내는 외국의 금융 개방 압력에 손을 들고 만 거야.
덕을 보늣 뻔한 금융 붕괴를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여
야 하나요'~
현재로서는 두 눈 멀정히 뜨고 당할 수밖에 없어. 지난번의
외환 사태처럼 .
그들의 음모를 알려 모두가 주식을 사지 않도록 하면요?~
그들이 누군지 어떻게 아냔 말이야. 게다가 정부가 그런 식
으로 개입하면 그 부작용은 무척 오래갈 거야. 자칫 잘못될 경우
우리의 증권 시장은 국제적으로 외면당하게 될 테구. 아마 어떤
효력보다는 악영향만 미치게 될 거야.
안타깝군요.
증권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는 데 필수적으로 따르는 위험이
야. 어느 정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데, 이렇게 악의적으로 덤
벼드는 펀드가 있다면 자칫 한 방에 금융 붕괴가 올 수도 있어.
미국에서 금융 회사를 경영하는 정완은 안목이 날카로웠다
그러한 그가 방법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
지 않았으나 국제 금융 시장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보니 수아 역시
비관적인 분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증권 시장 전
면 개방은 헤지 펀드들에 게는 진정 최고의 호재였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어 우리가 앉아서 또다시 너희 자본주의
의 하이에나들한테 당할 수만은 없단 말이야. 고통은 지난번의
외환 사태로 충분해. 그래, 내 힘으로 해내 겠어. 아직 한 달의 시
간이 있잖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수아는 그들의 음모
를 그냥 둘 수는 없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당장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부딪쳐볼 뿐이었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해
야 할 것은 까다로운 교수들로부터 시간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비밀 결사
안젤로 주교는 자신이 성직자의 길을 택한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에 봉착했다고 생각했다 가톨릭 교리와 교황의 언행 사이
의 불일치를 찾아내서 교황에게 진언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그
에게 최근 몇 년 간은 매우 힘들었다
교리청 장관을 필두로 하는 보수적 성향의 추기경들은 교황의
언행에 대해 사사건건 안젤로 주교에게 책임을 물어왔다. 물론
그는될 수 있으면 기계적으로 일에 임하려 했으나 그게 마음대
로 되지 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취임 이후 교황과 추기경단 사이에는 언제
나 보이지 않는 대립이 있어 왔는데 최근에는 그 대립이 격화될
대로 격화되어 일반 신부들도 그 둘 사이의 이상한 분위기를 느
낄 수 있을 정도였다.
교황은 어떤 일에 대해서도 예전의 교황들처럼 아는 듯 모르
는 듯 넘어가려 하지 않았다. 교황청의 자금으로 법적 금융 거
래를 해오던 이탈리아 추기경들의 부정이 누군가에 의해 언론으
로 흘러 들어갔고 급기야는 사법적 수사가 시작됐다 또한 2차
대전 당시 교황청으로 흘러 들어왔던 나치와 파시스트의 자금
에 대해서도 교황은 조사를 명령했다.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문제는 교황이 새로운 가톨릭상을 만들어내려 한다는 사실이었
다. 교황이 추구하는 이 새로운 가톨릭
상은 적당한 변화나 개혁이 아니었다. 2차대전 당시 엄청난 살
륙에 대해 침묵했던 교황청의 과오를 인정한다는 정도가 아니었
다 교황은 가톨릭이 지난 5천 년 간이나 유지해 온 유일신의 개
념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는 언행을 계속했다.
교황은 사상 최초로 타종교들에게도 가톨릭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기 시작했고, 그 지도자들과 다정히 어깨를 맞대었다. 또
한 수백 년을 이어온 과학과의 대립에서 창조를 부정하지만 않
는다면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천명했다. 사실 과학을 받아
들이면 결국 창조는 부정당할 수밖에 없기에 교리청 장관을 필
두로 한 추기경단은 가톨릭의 운명에 대해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안젤로 주교는 기도를 시작했다.
짧은 기도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벨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두 사람의 신부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 스테파노 신부 여행은 힘들지 않았나요?~
네, 속히 갔다 왔습니다.
한국의 추기경은 잘 계시던가요??
네, 건강하시더군요.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주교는 잔뜩 기대가 실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마귀입니다. 도저히 하느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 없는 사
람입니다.
스테파노 신부의 단호한 답변을 듣는 안젤로 주교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만나서 우리의 입장에 대한 이해를 구했나요??
네, 하지만 그는 파티마의 예언을 공표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
법이라 했습니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그 예언의 공표를 고집하던가요??
자신들의 문화와 고유 신앙이 파괴된 책임의 일단이 기독교
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괴상한 논리군요.
미친 사람입니다. 실제로 한국에 가서 알아본 결과 그는 정신
병원에서 중증의 과대망상증 환자라는 진단을 받았고, 지금도
정신병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정확한 문장을 구사해서 편지를 보냈단
말인가요??
아시다시피 정신병이란 게 겉으로 보아서는
음,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한국에는 어떤 신앙이 있던
가요??
조상신과 자연신 숭배의 오랜 전통이 있는데 거의 전멸되었
다는 겁니다. 사실 제가 안 바로도 좀 너무하기 는 하더군요. :)
그렇게 되기까지는 여러 원인이 있었겠지만 일본의 식민 지
배를 받은 것이 주요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 나라에서 기독교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던가요?~
기독교는 모두 기복 신앙으로 둔갑해 있었습니다. 목회자들
은 아무리 성실하고 선량하게 살아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아니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식으로 설교하
고 있었습니다. 특히 개신교의 각 교파들이 그런 논리로 신도를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이웃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과는 아주
다르더군요.
일본과 어떻게 다르다는 얘기죠?~
기독교가 전해진 것은 일본이 백 년이나 먼저 입니다만 일본
의 기독교 인구는 전인구의 0.5퍼센트도 안 됩니다. 그나마 여호
와를 유일신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10분의 1도 안 된다고
자신들의 고유 문화를 잘 지켜냈다고 생각하는 반면, 한국의 목
회자들은 일본인들은 아무도 천국에 못 간다. 그토록 예수를 안
믿는데 어떻게 천국에 가겠는가라고 하더군요.
안젤로 주교는 당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 었다
반발이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의 기독교관은 너
무나 부정적입니다.
어떤데요??
중세에 기독교는 인간성을 탄압하고 신권 세계를 만드는 데
에 열정을 바쳐왔고, 근세에 와서는 제국주의와 손을 잡고 타민
족을 짓누르고 그 문화를 초토화시켜 왔다는 겁니다.
보통 문제가 아니군요.
안젤로 주교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까짓 인간을 뭘 그렇게 대수롭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볼
때에는 정신병원에 있는 환자에 불과하던데요.
그러나 안젤로 주교는 고개를 가로저 었다
수고했어요. 푹 쉬도록 해요.
그럼
스테파노 신부를 내보내고 난 안젤로 주교는 간단한 기도를
마친 뒤 성호를 그었다. 그러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교리청
장관의 방으로 갔다.
교리청 장관은 외무장관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가 안젤로 주
교를 맞았다 그 방에는 낯익은 얼굴이 몇 사람 더 자리하고 있
었다.
그는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교회의 모순을 보여주고 싶
어합니다 그것이 파티마의 예언을 통해서 가능하다고생각하고
있습니다.
안젤로 주교로부터 스테파노 신부가 한국에서 사도광탄을 만
났던 얘기를 듣고 나자 교리청 장관은 깊은 분노가 서린 목소리
를 뱉어냈다.
파티마의 예언을 공표하는 것밖에는 아무 얘기도 듣지 않겠
군요??
그는 자신의 동포들을 설득하는 대신 파티마의 예언의 공표
를 택한 듯합니다.
음, 세계 인구는 늘어도 가톨릭의 신도 수는 급격히 줄고 있
는 판인데 그자가 다시 한 번 이상한 짓을 하면서 예언의 공개를
요구하면 보통 일이 아니지 않소.
그러게 말입니다.
외무장관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는 신도 수
의 격감이란 문제에 몹시 화가 나 있는 듯했다.
과거 레이건 대통령 때는 미국과의 관계가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미국 중앙정보국의 정보가 필요할 때면 아무
때나 보여주곤 했지요. 그러나 지금의 클린턴과는 너무 문제가
많아요. 그 건방진 친구는 며칠 전 성하와의 통화에서 고함까지
지르더군요. 성하께서도 화가 머리 끝까지 나셨어요.
외무장관, 문제는 우리에게도 있어요. 성하처럼 심하게 낙태
를 반대하면 어떤 젊은이가 가톨릭에 남아 있으려 하겠어요?~
외무장관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나저나 그 예언이 걱정이오. 그자가 극단적으로 일을 저지
르고 언론이 가세해 흥미 위주로 가톨릭을 매도하면. 파격적 개
혁을 갈구하는 성하가 전격적으로 예언을 공개해 버릴 수도 있
는 일 아니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최근에 성하는 예언과 관련하여 흔들
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자는 우리 가톨릭에 공전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인
물이오. 하지만 모든 문제의 근본은 바로 성하에게 있어요. 잘못
하면 기도가 바뀔 판이니
기도가 바뀐다구요??
'세상의 주인이신 단 한 분의 하느님'으로 시작하는 기도가
이제 '세상의 여러 주인 중 하나이신 하느님'으로 될 판이란 말
이오.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성하가 보이시는 행동이나 그자의 태도는 별로 차이가
없소. 그리스도가 아닌 그들의 신을 인정한다는 것 아닌가. 조상
신을 믿는다면 그들에게도 하느님이 있겠지.
환웅인지 단군인지 하는 존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가아니라 '단군 아
버지' 가 되지 않겠소?~
그렇습니다.
안 돼요. 이래선 안 돼 .
무엇보다도 그자가 매우 위험합니다. 파티마의 예언에 대한
성하의 생각이 차츰 공표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경향이 있는데,
그 자가 무슨 일이라도 일으키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
입니다.
그 예언은 절대로 공표되어서는 안 돼요.
장관의 어조는 단호했다
장관님은 그 예언의 내용을 아십니까??
모르오.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소. 그 예언은 공표되
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스테파노 신부에 의하면 그 사도광탄이라는 자는 교황 성하
의 급격한 변화는 바로 그 파티마의 예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
기 때문이라고 했다더군요.
장관의 눈썹이 꿈틀했다
누군가가 그런 얘기를 했다구요??
그렇습니다.
그럼 그자는 예언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얘긴가요??
어느 정도 추측하고 있답니다.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
도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소.
장관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지는 것을 보며 안젤로 주교는 혹
시 장관도 그 예언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티칸 내부의 깊숙한 곳에서는 몇몇 추기경이 그 예언의 내
용을 알고 있으며 , 언젠가 그 예언이 공표될 수도 있다는 신념을
밝힌 교황과 충돌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안젤로 주
교는 그 예언은 자신이 뭐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성하께서 너무 급격히 달라지시고 있는 것을 보면 의아
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창조론만 부정하지 않는다면' 이란 전제를 달았소.
그런 전제는 도피용이 아닌가요??
그렇소, 사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 정말 문제야. 교회
가 과학을 받아들이고 나면 무엇이 남는다는 건가.
이대로 가면 교회는 붕괴하고 말아. 도대체 성하는 왜 스스로
교회를 깨려 한단 말인가.
사람들이 나가자 교리청 장관은 기도실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혼자 기도를 했다. 수심에 찼던 그의 얼굴이 기도를 마치고 나오
자편안한분위기로 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얼굴
에는 거칠고 격정적인 기도를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전화기를 들어 숨을 미처 고르지 못한 채 단호한 목소리
로 외쳤다.
귄터 백작을 바꿔주시오!
기디온 교수는 프랑크푸르트공항의 출국 카운터 옆에 있는 카
페에서 조용히 맥주잔을 기울였다. 카페에는 비행기의 출발을
기다리는 승객들이 다소 들뜬 분위기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디온은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다
한국
손가락으로 지도상에 금을 그어보니 시베리아 상공을 날아 만
주를 거쳐서 들어가게 되어 있는 작은 나라였다 이 나라에서는
아무도 총을 쓰지 않는다고.
기디온은 잠시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겼다.
처음 임무를 수행한 나라가 콩고였던가. 그 검은 나라에서는
내란중에 한 달 동안 무려 스물일곱 명의 신부와 수녀들이 암살
을 당했다. 서방 세계를 적으로 몰아야 집권을 할 수 있다고 판
단한 반군 지도자의 그릇된 전술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기디온이 가야 할 정당하고도 확실한 이유가 있었
다. 기디온은 기꺼이 갔고, 성직자들은 암살의 공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물론 반군 지도자의 가톨릭에 대한 그릇된 편견도
말끔히 없어졌다. 잠자는 사이 침실에서 깨끗이 없어져버린 목
과 함께.
다음은 어디였던가. 엘살바도르, 아니면 니카라과. 어디였는
지 확실치는 않지만 해방신학에 미쳐 날뛰던 신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신부와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그가 전개했던 논리는 옳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신부는 가톨릭의 신성성을 너무 무시하지 않았던
가. 독재자와 맞서 싸우지 않는 사제는 이미 정통성을 상실했다
는 주장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체제에 불
만을 가진 혁명가였다는 주장은 너무 심했다
그 신부는 독재와 싸워 이기고 나면 가톨릭을 정치에 이용할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비행기 출발30분 전까지도 그의 숨가쁜
주장은 그치지 않았었다. 하지만 기디온이 비행기를 타고 난 후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주장에 귀기울여줄 사람을 찾지 못했을 것
이다. 그의 주장도 구멍난 그의 머리통에서 다 새어버렸을 테니
까.
기디온은 이틀 전 귄터 백작으로부터 받은 전화를 떠올렸다
기디온 교수, 한국에 한 정신병자가 있소.실제 병원에 있는
환자요. 지난 80년 발생했던 다우니의 하이재킹을 承사했을 거
라는 혐의가 있소.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문제는 지금 그자가 파
티마의 제3의 예언을 공표하라고 교황청에 요구하고 있다는사
실이오. 아직은 잠재적이지만 언제 어떤 돌발 행동으로 이어질
지 모르오. 우리의 추기경은 그의 이런 요구가 성하를 자극하여
예언의 공표로 이어질까 봐 지극히 염려하고 있소. 물론 이제까
지와 마찬가지로 현지에서의 결론은 교수에게 맡기는 바요 바
로 떠나주었으면 하오.
기디온은 비행기의 출발을 알리는 마지막 안내 방송이 나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훤칠한키에 또렷한 이목구비,그리고 하얀
살결은 누가 봐도 학자 타입의 인물임을 말해 주었다.
기디온은 스튜어디스의 안내를 받아 퍼스트클래스의 좌석에
앉았다. 루프트한자의 여객기가 이륙하여 끝없는 구름 속을 비
행하는 동안 그는 눈은 감았지만 정신병원에 있다는 미지의 인
물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중세의 십자군전쟁에 참전한 유서 깊은 전통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 기디온은 가톨릭을 보호해야 한다는 신성한 사명감 아래
에서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 날 기디온은 극비리에 한 사람의 방
문을 받았다. 그는 기디온에게 로마의 카타콤베 시절부터 지금
까지 밀전되어 오고 있는 한 조직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인 그리스도의
말씀은 보전되어야 하고, 그 가장 순수하고 성스런 사명을 비밀
리에 수행하는 인간으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기디온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울려오는 감격에 휩싸였다
귄터는 감격에 젖어 있는 기디온에게 장미로 장식된 작은 십자
가를 내밀었다.
장미십자회.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받는 기디온의 두 뺨에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가톨릭 명문들의 묵시적 동의에 의한 최고의 비밀 결사인 이
조직은 누구도 조직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평상시에는 귄
터라는 이름의 전권을 가진 대리인이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
를 결정하되 판단은 조직원에게 맡겼다
다만 이 조직은 108년 만에 한 번씩 전 조직원들의 의사를 물
어 새로이 해석해야 할 교리와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을 결
정했다. 그러나 전 조직원이라고 해야 얼마 되지도 않는데다가
모든 것이 비밀리에 행해졌기 때문에 이 조직은 오랜 세월이 흐
르는 동안에도 결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없었다.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판단을 위해, 그리고 두 번 다시
중세의 암흑 시대와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비밀 결사는
그 시대 최고의 명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제들에게만 가입
이 허용되었다 물론 유럽 대륙의 가문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
였다. 가입자는 어떤 분야에서든 최소한 몇 개의 수석을 차지한
기록이 있어야 했다 특히 철학과 종교에서의 두각은 필수조건
이었다.
그들은 결코 요란스럽게 성당에 나가지는 않았다 가입 제의
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누가 조직원인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
조직원 서로간에도 만날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특이한 것은 희생되어야 할 사람을 직접 만나 어떤 형태로든
사상을 검증한 후 그를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서면
오로지 자신의 판단에 의해 일을 결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중세의 종교 재판장과 같은 역할을 수
행한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자신의 손에 직
접 피를 묻히는 것을 싫어했다. 일단 판단과 결심이 서면 그 다
음은 아무런 문제가 있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불가능한 일도 해내는 인간들이 많아 다음 문제를 모두 처
리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디온은 예외였다. 십자군전쟁에서 최고의 무훈을
떨친 그의 조상에게서 전해진 핏속에는 정의와 어긋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는 가문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신사의 주문
쇼토쿠 신사의 새벽은 조용히 밝아왔다 일찍 잠을 깬 신관은
부근의 산사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새벽종 소리를 들으며 이슬에
젖은 풀잎을 밟고 걸었다. 일찍 둥지를 나선 새들이 지저귀는 소
리가 종소리를 타고 새벽 안개 속으로 떨어져내리고, 이제 가을
을 알리는 낙엽이 한 잎 눈앞에서 춤을 추고는 어깨를 넘어 자취
를 감췄다.
신관은 이런 신성한 새벽이면 제를 올리기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총총히 걸어 대문을 열었다 이제 10여 세에 불과한사
동이 나머지 한쪽의 대문을 열며 아직 눈꼬리에 남은 잠을 소매
로 비벼댔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희뿌연 안개가 낮게 깔린 길을 따
라 승용차의 질주음이 들려왔다.
신관은 경건한 자세로 손을 맞잡고 대문 앞으로 나서서 기다
렸다. 잠이 완전히 달아난 사동의 얼굴에 이제는 긴장된 표정이
자리잡았다.
선생님, 정말 다카가와 선생님이 오십니까??
신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도 그분이 제 올리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안 된다.
왜요? 저도 뽁 보고 싶은데요.
아니다. 너는 아직 어리다.
야마도 선생님은 저더러 이제는 다 컸다고 하셨는데요.
하지만 네게는 아직 다카가와 선생님의 신력을 견딜 수 있
는 힘이 없어. 몰래 숨어서 보다가 실수라도 하면 큰일난다.
절대 실수 안 할 거예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쉿 !
신관의 입을 막는 시늉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에 들어온 검정
색 자동차는 허리를 깊이 숙인 신관과 사동의 앞을 지나 신사 안
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신풍이 불어 오는군.
검정색 유카타를 입고 역시 같은 검정색 하오리를 걸친 채 자
동차에서 내린 오십대 중반의 사나이가 지나가는 바람을 느껴보
려는 듯 손바닥을 펴고 팔을 허공에 뻗었다 평온하고 부드러운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눈에서 혁혁한 안광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이미 수양의 경지가 상당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는 바람을 잡아보는 듯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더니 서서 기다
리고 있던 몇 사람의 신관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다카가와 선생님의 신력이 저희 신사에 깃들이기를 바랍니
다.
수석 신관이 여럿을 대표하여 공손히 답례를 했다.
인사를 나누시지 요.
다카가와는 역시 하오리 차림으로 내린 또 한 사람의 사나이
에 게 신관들을 소개했다.
야마자키 이사장이십니다.
신관들은 역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사장이라 불린 사나이는 굵고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매
를 갖고 있었다 가슴이 떡 벌어지고 머리에는 하얀 띠를 두른
것이 에도 시대의 무사를 연상케 하는 풍모였다.
두 사람은 신당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는 신발을 벗고 신
당 안으로 들어갔다.
향을 사르시지요.
야마자키는 위패 앞에 무릎을 꿇고 신관의 도움을 받아 향에
불을 붙인 다음 느릿하나마 힘있는 동작으로 향로에 꽂았다
절을 올리시지요.
사나이는 역시 힘있고 느릿한 동작으로 위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당당하여 거칠 것이 없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이시여, 이제 야마자키가 신성한 날
의 새벽을 택해 가슴에 맺힌 한을 통곡으로 고하고자 찾아왔나
이다. 국조께서 신력으로 이 나라를 여신 이래 신민을 보호하사
천하의 환난을 이겨낸 지 2천여 년. 지난 몽고족의 침략 때에도
바다를 건너오는 그들의 군세에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자
오미카미 신께서는 바람을 보내 외적을 물귀신으로 만들고 열도
를 지키셨나이다. 그러나 이제 나라가 외적의 발굽 아래 짓밟
히고 신민의 도시들이 악랄한 폭탄을 맞아, 죽은 자는 혼을 잃고
산 자는 평생을 병마에 시달리며 울부짖고 있나이다. 절치부심
으로 살아온 지난 50여 년 세월을 신민은 고개를 숙이며 굴욕을
참고 나라의 운명을 보전해 왔나이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 국
치는 극에 달하고 지난날 우리의 식민지였던 한반도의 축생들까
지도 다케시마를 그네들의 영토라 우기며 덤비니 신민은 살았으
되 죽은 것과 다름이 없나이다. 하여 일본혼을 되살리고자 하는
신민들이 숱한 고초를 겪어가며 지난날의 굴욕을 씻고자 몸과
마음을 다하였으나 밖으로는 외적의 눈길이, 안으로는 무지몽매
한 자들의 비난이 잇따랐습니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신민이
드디어는 우리 일본혼 중흥의 중요성을 깨달아 미국과 러시아,
중국을 상대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함을 다같이 인식하였나이
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민족의 저력을 모으고 심기일전하여
새로운 눈으로 역사를 보고 어지럽혀진 신국의 역사를 되찾고자
하옵니다. 하지만 신국의 지기가 흐름을 멈추고 천기는 바야흐
로 이동을 시작하였나이다. 신이시여, 신민은 사력을 파하여 천
지의 기를 붙들고자 선인의 예언을 좇아 성업을 수행하고자 하
나이다. 하오니 신안으로 그 흥물이 있는 곳을 짚어 주소서. 부디
신력으로 도우사 신민의 정성이 하늘에 미치도록 하오소서.
사나이가 절을 마치고 일어나자 다카가와가 위패 앞에 섰다
그는 주머니에서 이상한 그림과 글씨가 씌어진 부적을 꺼내서는
위패를 덮었다. 부적은 누렇게 바래어 이미 오랜 옛날에 만들어
진 것임을 짐작하게 했다.
다카가와는 향을 다시 피우고 정종을 잔에 채워서는 위패 앞
에 놓았다. 신관의 도움 없이 걸~l를 진행하는 그의 손길은 주춤
거리는 법이 없이 유연하고 익숙했다
이윽고 제단을 다 차린 다카가와는 끈으로 묶었던 머리를 풀
어헤쳤다. 맨발에 검정색 유카타 차림으로 제단 앞에 선 그는 잠
시 고개를 숙인 후 눈을 감더니 무슨 뜻인지 모를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반복되던 주문이 그의 얼굴이 달아오름
에 따라 점점 빠르고 격해지는 가운데 간간이 신음 소리가 뒤섞
였다. 소름이 끼칠 듯한 신음과 함께 차츰 붉게 달아오르던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더니 이마에서부터 음
산한 귀 기가 감돌았다.
조금 전까지도 벌겋게 달아올랐던 다카가와의 얼굴이 삽시간
에 창백해지자 멀찍이 숨어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사동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사동은 말로만 듣던 다카가와 선생의 통혼 의식
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 신관의 눈을 피해 통로 한 곁에 숨어 이
범상하지 않은 의식을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카가와의 주문은 그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때로는 여
유 있게 불공을 드리는 스님의 독경 같기도 하다가 때로는 미친
여자가 숨쉴 틈도 없이 뱉어내는 저주 같기도 했다. 간혹 외마디
비명을 지를 때에는 비틀거리며 쓰러질 듯도 하다가 어느새 다
시 본래의 평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사동은 살금살금 기어 다카가와의 제단을 향해 다가갔다. 다
카가와의 주문을 또렷하게 듣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다카가와의 주문을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 거리에 다다
른 사동은 고개를 들다가 그만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
빠지고 말았다.
아악!
무서운 얼굴이었다. 가히 귀신의 얼굴이라 할 만했다. 이루 표
현할 수 없는 음산하고 기괴한 기색이 얼굴에서 넘쳐나고, 온몸
은 지기에 젖어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이상하게도
그의 몸짓에는 힘이 없어 보였다. 마치 몸은 없고 바람만이 유카
타를 펄럭이고 있는 듯했다.
한참을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주문을 외던 다카가와가 다시
원래의 평온한 안색을 되찾고 모든 동작을 멈췄다. 사동은 살며
시 무릎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팔굽과 무릎을 이용하여 소리가 나지 않게 뜰로 빠져나오던
사동은 뭔가가 팔굽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낡은 천 종류였다.
손을 뻗어 집어본 사동은 흠칫 놀랐다. 부적이었다. 다카가와가
제단을 꾸밀 때 위패를 덮었던 바로 그 부적이 날아와 자신의 팔
굽에 걸린 것이다.
사동은 가슴이 뛰었다. 바람 한 점 없었는데 어째서 부적이 여
기까지 날아왔는지 의아했지만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틈이 없
었다. 어쩌면 자신이 부적을 훔쳤다는 누명을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사동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버리고 가야 할지 아니면 가지고 가야 할지 결심을
하지 못했다.
이때였다. 사동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눈길을 의
식했다 왠지 모르게 고개를 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
동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힘에 끌리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그 눈길과 마주치는 순간 사동은 가슴이 답답해
지면서 아찔하는 현기증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부적을 들고
일어서던 사동은 그대로 자리에 고꾸라졌다
저주의 바람
이상한 일이야, 정말 이상한 일이야.
다카가와 선생,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까 그 사동 때문에 기분이 언짢으신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이상한 일이군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어요.
다카가와는 신사를 떠나올 때부터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며 혼자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옆
자리의 야마자키가 아무리 물어도 전혀 대답이 없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른 듯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혹시 작업을 추진하던 중에 무슨 불길한 일이라도 생기지 않
았습니까??
없었습니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진행되었단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야마자키는 언뜻 대답을 해놓고는 석연치 않아 머릿속으로 이
제까지의 작업 진행을 더듬어보았다. 비록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별것 아니긴 하지만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 있긴 했습니다.
어떤 일이지요?~
누군가가 우리 연구원에게 접근하여 작업을 추적하려 했던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자료를 일체 회수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이 다카가와 선생과 무슨 관계가 있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요.
아니, 아닙니다 그 일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오. 누가 연구
원에 게 접근했습니까??
동경대학교의 한 교수입니다. 컴퓨터를 전공하는 사람이라더
군요.
동경대학교의 교수라 그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했을
까요?~
동경대학교의 이치로 교수에게 연구를 의뢰했는데 교수는 죽
고 그자가 자료를 추적해 왔더군요.
다카가와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삽시간에 그의 눈에서 무서운
빛이 努아졌다
그랬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다카가와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마자키는 이런
다카가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동경대학교 교수
가 도시아키에게 접근하여 작업을 추적하려 한 것이나 이치로의
죽음이 오늘 신사에서의 기도와 무슨 상관이라도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다카가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치로 교수는 (묘제의 연구)를 가지고 작업을 하
다 죽었단 말이지요??
그렇습니다._,
어떻게 죽었습니까??
사고로 죽었습니다.
다카가와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리는 것을 느끼며 야마자키
는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어떤 사고입니까??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가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경 찰에서는 사인을 뭐 라고 하던가요?
과로로 인한 실족사로 겁안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동경대학교의 교수 이름은 무엇입니까?~
기미히토. 최고의 컴퓨터 실력자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이람
니다.
다카가와의 굳어 있던 얼굴이 풀렸다. 그는 뭔가를 짐작했는
지 고개를 끄덕 이면서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주머니에서 아까
의 그 부적을 꺼내 자세히 살폈다
사망한 교수의 시체는 화장했습니까?~
그건 모르겠군요.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확인해 볼까요??
그러는 것이 좋겠군요.
야마자키는 비서에게 전화를 했다.
매장했다는군요.
그 시체를 한번 보고 싶습니다.
부패되기 시작했을 텐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시체는 말을 하는 법입니다.
야마자키는 매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다카가와가 혼
을 부르고 유령과 통하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긴 하지만 죽은 교
수의 시체를 파보자고 말할 줄은 몰랐다.
경찰에서 철저히 검시를 했습니다만 피부에 긁힌 자국 외에
는 별다른 상처도 없었고 누군가 위해를 가한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잠을 자듯 평온하게 죽었지요.
야마자키는 다카가와가 괜한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 시체에
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랬겠지요.
다카가와는 별말이 없었다.
봉분을 뜯어내고 1미터 이상 파들어가자 음침한 색깔의 가로
지기 버팀목이 한 끝을 드러냈다.
문화적 의미가 있는 발굴이라면 인부들도 신이 날 터이지만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그 죽음의 이유를 캐내기 위해
파내는 일이 즐거을 리 없었다.
버팀목과 상판을 들어내자 시꺼먼 목관의 기분 나쁜 색깔이
야마자키의 눈에 들어왔다.
인부들이 관을 들어올리려 하는 순간 다카가와의 목소리가 그
들의 동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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