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2권
김진명
바카라
경훈은 오세회의 전화를 기다렸다. 이제 김재규를 전담했던
브루스를 만나면 많은 의혹이 풀릴 것이다. 경훈이 미국에서 돌
아온 지 3일 만에 오세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갈 시간이 된 것 같소. 브루스가 이틀 전 라스베이거스
로 떠났소. 내일쯤이면 둘 중 하나로 판가름이 나겠지.」
「저는 바로 떠나겠습니다. 어디서 만나면 좋을까요?
「필립 최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소?
「주로 엠지엠 카지노에 있습니다. 」
「그래요그거 마침 잘됐군.브루스도 엠지엠에서 하니까 그
럼 거기서 만납시다. 」
경훈은 일이 제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이제 남은 건 라스
베이거스로 날아가는 일뿐이다.
여행사 직원은 경훈이 돌아온 지 3일 만에 다시 미국 여행을
떠나자 혀를 내둘렀다.
「이번에 가시면 한 달쯤은 있다 오세요.」
경훈은 웃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연결 편으로 갈아타고 라스베이거스에 도
착한 경훈은 토세희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갔다. 오세희는 이
미 프런트 데스크에 메시지를 남겨두고 있다가 바로 내려왔다.
경훈은 오세희의 옆 방에 짐을 푼 뒤 오세희의 방으로 건너갔다.
「예상외로 브루스는 상당히 따고 있소. 이러다간 우리의 계획
이 틀어질지도 모르겠는걸.」
오세희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제껏 잃었던 돈을 다 만회할 정도입니까?
「그렇소. 한 시간 전에 보았을 때에는 거의 만회한 듯했소.」
「그럼 낭패로군요.」
「그 친구는 본전을 찾으면 그만둘 가능성이 매우 높소.」
「그렇겠죠. 인생을 날렸다가 다시 찾게 되었으니 즉각 그만두
겠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겠소.」
그러나 다른 방법이 들어먹힐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브
루스가 잃었던 돈을 만회하고 나면 그때는 어떤 비밀을 알아내
려 해도 이쪽의 약점만 드러낼 뿐이다.
「일단 필립 최 씨에게는 연락을 해야겠습니다. 한국에서 미리
전화를 넣어두었거든요.」
경훈은 필립 최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필립 최는 밝은 목소
리로 전화를 받더니 곧 오세희의 방으로 찾아왔다. 그는 경훈의
소개로 오세희와 인사를 나눈 뒤, 방을 한 번 둘러보고는 수화
기를 들어 카지노 호스트를 찾았다.
「이 방하고 이 옆 방에 계시는 분을 펜트하우스로모셔. 내가
있는 곳으로 말이야. 최고로 모셔야 할 분들이거든.」
필립 최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경훈에게 물었다.
「여행은 힘들지 않았소?
언제 들어도 필립 최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그러면서도 겸손
했다. 경훈은 이제 오십이 다 돼보이는 필립 최로부터 이런 공대
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필립 최는 결코 경훈을 나이
로 압도하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경훈은 그 점이 의아했다 여기는 라스베이거스, 필립 최의 홈
그라운드였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필립 최의 도움을 받으러 왔
고 그는 이 방면의 전문가였다. 그러나 그는 거꾸로 무슨 힘든
부탁을 하러 온 사람처럼 공손했다. 경훈은 그에게서 마치 수도
사 같은 인상을 받았다.
「아니오. 쾌적했습니다. 그나저나 괜히 번거로움을 끼치게 되
었습니다. 」
「천만에. 그런데 어떻게 된 연유인지 자세히 들어보고 싶소.
일단 장소를 옮깁시다. 」
필립 최는 경훈과 오세희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가장 안전한 방이오. 도청 같은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오.」
여러 면에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는 필립 최를 보며 경훈은 직
업 도박사란 결코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리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고 나자 오세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것은 나라를 위한 일이오.」
이때 필립 최의 얼굴에 냉소가 번졌다. 오세희가 얘기를 계속
하려 하자 필립 최가 말허리를 잘랐다.
「하나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소. 이 일이 어떤 종류의 일
이든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해드리겠소.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
는 절대 아니오. 미안하지만 나는 오 선생님 같은 애국자가 못
되니까요. 내가 이 일을 기꺼이 해드리는 것은 이 변호사의 부탁
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조국이니 뭐니 그런 단어는 가급적 쓰
지 않았으면 좋겠소.」
오세희는 약간 당황했지만 이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알겠소.」
이어 오세희는 필립 최에게 이제까지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설
명해 주었다.
「그럼 일단은 브루스가 가진 것을 도로 다 잃도록 해야겠군요.
그의 입에서 정보가 나을 때까지 말이오.」
「그렇소.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오 바카라는 손님끼리의
싸움이 아니고 카지노와의 게임이지 않소?
그러나 필립 최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애매한 미소를 띤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 다음에는 다시 따도록 해야 하구요.」
오세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경훈도 커다란 충격을 받았
다.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세희와
경훈은 단지 브루스가 잃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이
도박사는 브루스가 가진 것을 잃게 해서 정보를 알아낸 다음에
는 다시 그가 따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경훈은 마음
속에 잠재해 있던 희미한 죄의식 같은 것이 씻겨져 내려감을 느
꼈다.
'아, 세상에는 참으로 기인들이 많구나. 나 같은 범인들로선
그들이 생각하는 각도나 사는 방법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하지
만 큰 인물이란 언제나 이처럼 심성이 착한 모양이다. 내가 이제
껏 우수한 인간이라고 자부해 온 것은 얼마나 허술하고 이기적
이었던가. 나의 가치관이란 기껏 해봐야 나 하나의 입신양명을
위한 처세술에 불과하지 않았나.'
필립 최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내려가서 그가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보아둡시다. 그리
고 나중에 지금의 액수까지만 다시 올려주면 되겠지요.」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립 최는 앞장서서 두 사람을
도박장으로 안내했다. 동대문운동장보다도 세 배쯤 커보이는 카
지노였지만, 필립 최는 누군가를 찾아 몇 마디 하더니 금방 브루
스를 찾아냈다.
「역시 바카라 테이블에 앉아 있군요. 그 정도 돈을 잃었다면
당연히 바카라를 했겠죠.」
「어떻게 금방 그를 찾았소 이 넓은 카지노에서.」
「모든 손님들의 정보는 빠짐없이 컴퓨터에 기록되오. 엄청난
금액의 돈이 왔다갔다하지만 티끌만한 부정이나 실수도 없는 곳
이 바로 카지노죠.」
브루스와 일면식이 있는 오세희는 두 사람과 떨어져 약간의
거리를 두고 경훈에게 브루스가 누구인지를 턱으로 알려줬다.
잠시 서서 판이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던 필립 최는 브루스의 반
대편에 앉았다. 브루스는 한창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필립 최는 사람을 불러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경훈은 그가 브
루스의 현재 상황을 확인하는 것으로 짐작했다
「1백만 달러 가져와요.」
필립 최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온 금액은 게임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백만 달러라는 금액은 딜러
가 가지고 있는 칩의 합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카지노 측은 칩
을 날라오기에 분주했다 게임은 잠시 중단되고 딜러들은 칩을
세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안합니다. 여러분.」
필립 최는 게임을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천만에요.」
사람들은 자기의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장면을 보는 것 자체
가 신나는 모양이었다. 미국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상상
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다. 돈을 가진 자가 곧 정의
롭고 강한 자며 , 멋있는 자다.
이윽고 필립 최의 앞에 산더미 같은 칩이 쌓이자 사람들은 우
군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다시 게임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이렇
게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라면 필시 실력도 상당하리라 믿었다.
강자와 같이 게임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특히 자신감을 잃
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자, 여러분 배팅하십시오.」
딜러의 입에 밴 채근에 따라 사람들은 각자 칩을 옮겼다 '뱅
커' 혹은 '플레이어'의 두 자리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 게임은
무척 단순해 보여 초심자도 쉽게 빠져든다. 그러나 20∼30년의
경력을 가진 도박사들에게 가장 어려운 게임도 역시 이 바카라
다 어느 카지노든 바카라 룸을 따로 마련해 놓는데, 물론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한 그곳은 제일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모두 배팅하셨습니까 이제 마지막 콜입니다. 」
딜러는 필립 최를 흘끗 쳐다봤다. 배팅할 기미가 안 보이자 바
로 카드를 건넸다.
카드는 우선 플레이어에 배팅한 사람들 중 최고액자에게 보내
진다. 처음에는 두 장의 카드, 그리고 경우에 따라 한 장을 더 받
기도 하고 그냥 이기거나 지기도 한다. 독일에서 만들어진 이 게
임은 상당히 복잡하다. 뱅커와 플레이어 간의 숫자 관계에 따라
각각 한 장의 카드가 더 주어지거나 않거나 한다
브루스는 이제껏 늘 최고액을 배팅함으로써 항상 자신이 카드
를 받아 쪼아보곤 했다. 이번 판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중한 손길로 자신의 카드를 귀퉁이부터 천천히 밀어올렸다.
바카라(0)가 먼저 보이고 다음으로 올라오는 카드에는 점이 찍
혀 있었다. 포사이드.네 면에 모두 점이 찍혀 있었다. 10아니
면 9였다.
카드를 들추는 브루스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배팅액은 1만 5
천 달러. 엄청난 배팅이었다. 카지노 측과 특별히 배팅 상한액에
대해 협의하지 않은 한 최고액의 배팅이었다. 10이라면 상하에
하나씩의 점이 찍혀 있을 것이다. 9라면 상하는 텅 빈 공간이고
가운데에 하나의 점이 박혀 있을 것이다. 가늘게 떨리던 브루스
의 손길에 점차 자신감이 배었다
「내추럴.」
브루스의 자신 있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0이나 9를 내추럴
이라고 한다. 이것은 상대에게 카드가 한 장 더 갈 기회를 박탈
하는 것이다. 뱅커에 배팅한 상대가 한 번에 두 장의 카드로 이
편을 이기지 못하면 그냥 지고 마는 것이다 상대는 브루스의 내
추럴을 보자 이내 포기한 손길로 카드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
가 던진 두 카드의 합계는 6이었다.
플레이어에 배팅해서 이기면 커미션이 없다. 반면 뱅커페 배
팅하면 5퍼센트의 커미션을 카지노 측에 내야 한다. 따라서 를
은 뱅커 쪽에 약간 유리하게 되어 있다 커미션도 떼지 않은 1만
5천 달러의 칩을 끌어당기는 브루스를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경
외감이 서렸다. 기껏해야 2∼3백 달러, 혹은 5백 달러 배팅을 하
는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가 어떻게 비칠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브루스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망설임의 기색이 비쳤다. 그는
원래 이번 판만 이기면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브루스를 바라
보는 사람들의 표정과 다시 한 번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 요행
심 리가 그를 부추기는 모양이었다.
「모두 배팅하셨습니까 이제 마지막 콜입니다. 」
다시 반복되는 딜러의 음성에 브루스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칩
에 갖다 댔다. 다시 플레이어에 1만 5천 달러를 갖다 놓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사람들은 다투어 그의 뒤를 따라 플레이어
에 배팅을 했다. 사람들은 그를 이 판의 리더로 보고 있었다.
「뱅커에 3만.」
너무도 안정된 필립 최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들어와 박
혔다. 사람들은 필립 최의 얼굴에 시선을 모았다. 안정된 목소리
만큼이나 안정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사람은 얼른 배팅
금액을 줄이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배팅을 바꿔놓았다.
브루스의 표정이 상기됐다. 불안에 떠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
러나 이 무서운 판에서도 인간의 자존심은 고약하게 작용했다.
그는 이제까지의 영웅적 위치에서 스스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
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브루스는 오기가 발동하는지 냉소
를 흘리며 필립 최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필립 최는 게임 이외의
것에는 아무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딜러가
카드 나누는 동작만 쳐다보고 있었다.
카드는 먼저 브루스에게 배달되었다. 브루스의 가늘게 떨리는
손길이 두 장의 카드 위에서 잠시 멈추었다. 브루스는 남몰래 심
호흡을 했다. 한 장의 바카라가 먼저 보였다. 다음은 제법 많은
점이 보였다. 브루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7,8, 아니면 9거나 10
일 것이다.
「세븐.」
약간의 불안이 깔린 목소리였으나 어쨌거나 상당한 우위를 점
한 데서 나오는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7도 역시 다음 카드를 받
지 않는다. 상대는 8 혹은 9일 경우 무조건 이기지만 그렇지 못
할 경우는 다시 한 장의 카드를 받는다. 그러나 7이 못 된 상황
에서 한 장의 카드를 더 받아 7을 이긴다는 것은 확률이 무척 낮
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7은 사실 매우 높은 수였다
필립 최가 뱅커의 카드를 받았다. 그의 손길은 무심하게 두 장
의 카드를 밀어넘겼다. 6이었다. 7과 6은 상극이다. 6은 7에 대
해서 무조건 지는 것이 룰이다. 한 장의 카드를 더 받을 기회가
없는 것이다.
「식스.」
필립 최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순간 브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을 쳤다.
「11스.」
참으로 깊은 감회 가 밴 목소리 였다.
「플레이어 윈. 세븐 오버 식스.」
딜러의 목소리가 채 귀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브루스는 1만 5
천 달러를 같은 플레이어에 놓았다. 기세가 올랐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브루스를 따라 배팅했다. 브루스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길이 다시금 경외감으로 물들었다. 이제 필립 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역시 이 테이블에서는브
루스가 리더라는 의식이 그들의 눈빛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필립 최를 바라보는 브루스의 눈은 우월감으로 타오르고 있었
다. 이제 다시 한 번 너를 꺾어주고 말겠다는 결의가 그의 살벌
한 눈길에서 느껴졌다.
「플레이어에 1만.」
필립 최의 다소 기가 꺾인 듯한 목소리가 테이블 위에 떨어지
자 브루스는 적의 어린 눈길을 거두었다.
「내추럴 플리즈, 캡튼.」
필립 최는 부드러운 눈길을 브루스에게 보내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당신이 최고라는 표시였다.
「노 프라블럼 (문제 없소).」
브루스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를 점잖게 내뱉으며 자신에게 배
달된 카드를 차분하게 밀어올렸다. 첫 카드는 3이었다. 다음 카
드를 뽑는 브루스의 손길에 강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투 사이
드. 4 아니면 5였다. 카드를 밀어올리며 가운뎃점을 찾는 브루스
의 눈동자에 잔뜩 쌓인 칩이 반사됐다.
「예스.」
브루스는 카드를 던졌다.
「내추럴.」
합계 8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기쁨과 더불어 약간의 후회를
머금었다. 왜 좀더 배팅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었다. 딜러는
무심한 손길로 뱅커의 카드를 뒤집었다 뱅커에 배팅한사람이
없을 때에는 딜러가 대신 뒤집는다.
「하우에버 (그러나) ‥‥‥‥」
딜러의 이상한 발음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가 싶더니 이윽
고 떨어져내린 카드를 보고 사람들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
왔다.
「싯(빌어먹을) 」
딜러는 모든 사람들의 배팅을 거둬들였다 딜러의 무심한 목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잔인하게 들어와 박혔다
「뱅커 윈. 나인 오버 에잇.」
브루스의 눈에 핏발이 서는가 싶더니 다시 손길이 플레이어로
거침없이 나갔다. 역시 1만5천 달러였다. 필립 최의 배팅이 즉
각 뒤를 이었다.
「아임 서포팅 유(당신을 지지하는 배팅이오) .
브루스가 짐 여유를 가장한 미소를 지었다. 필립 최의 배팅
은 5천 달러였다. 다시 브루스에게 카드가 배달되었다. 이번에
는 브루스의 손길이 유난히 심하게 떨렸다. 브루스에게는 본전
근처의 배팅이었던 것이다. 이기면 몇 천 달러를 따는 것이고 지
면 약 2만 달러를 잃는 것이다. 브루스는 세븐을 뒤집어냈다.
「뱅커 윈. 에잇 오버 세븐.」
딜러의 무심한 손길이 사람들의 칩을 거두어갔다. 브루스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플레이어가 네 번 연달아 나오고 뱅커가 두
번 연달아 나왔다. 이제 어디에 배팅을 할 것인가. 브루스는 뱅
커가 두 번 다 내추럴로 이긴 것을 중요하게 보고 있었다. 이즈
음에서는 뱅커가 센 것이다.
브루스의 손이 칩을 옮겼다. 칩은 뱅커라고 쓰인 바닥을 묵직
하게 가리며 버티고 섰다. 필립 최의 배팅이 뒤따랐다. 높게 쌓
인 브루스의 칩에 비해 필립 최의 칩은 형편없이 낮았다.
딜러가 건네준 카드를 뒤집는 브루스의 손길에는 신중함이 상
실되어 있었다. 두 장의 바카라가 나왔다. 자신 없는 손길은 또
한 장의 바카라를 뽑아냈다.
「플레이어 윈. 파이브 오버 나씽.」
브루스는 떨리는 손길로 다시 한 번 칩을 옮겼다. 이번엔 플레
이어 쪽이었다. 필립 최는 더욱 적은 칩을 브루스를 따라 플레이
어에 옮겼다 브루스가 매판 1만 5천 달러를 거는 데 비해 필립
최는 대략 5백 달러를 배팅했다.
브루스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잔뜩굳어 있었다. 건네진 카드
를 뒤집는 손길이 더욱 심하게 떨렸다.
「뱅커 윈. 에잇 오버 파이브.」
카지노의 음모
그 판 이후로 브루스는 근 두 시간 동안 계속 풀 배팅했다. 이
제 사람들은 모두 브루스와 반대로 배팅하고 있었다. 카드는 희
한하게도 브루스의 반대편으로만 떨어졌던 것이다. 자포자기한
브루스의 눈이 점차 초점을 잃었다. 브루스는 무슨 까닭인지 사
람들과 반대로만 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기는 쪽과
반대로만 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인지 필립 최는 브루스와 엇갈려 이기는 쪽으로
만 배팅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희희낙락거리며 필립 최를 따라
칩을 옮겼다.
누가 바카라를 쉬운 게임이라고 말했던가. 두 시간 후 브루스
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배팅한2백 달러
마저 잃고 나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필립 최의 뒤에 멈춰섰다.
필립 최 앞에 수북하게 쌓인 칩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브루스
의 얼굴은 끝없는 회한과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필립 최는 가
끔씩 그에게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왜 그런 식으로 게
임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제스처였다.
브루스는 방으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
이 들자 단 한 걸음도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는 가끔 자신을 돌
아보며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고갯하는 필립 최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것만이 절망에 빠진 브
루스가 바깥 세계와 교신할 수 있는 유일한 신호였다.
이윽고 필립 최는 50만 달러나 불어난 칩을 밀어내며 일어
섰다.
「좀 쉬어야겠어. 이 칩을 보관해 줘 .」
딜러들은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필립 최의 칩을 세었
다. 황송한 표정 그것은 이긴 자에 대해 카지노 딜러들이 보이
는 본능적인 모습이다. 브루스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
이 그런 대접을 받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는 패배자일 뿐이다. 패배자란 늘 비
참하지만 카지노에서의 패배자만큼 처량한 존재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패배자의 내면적 갈등을 상상하면서 동정심과 복수
심이 교차하는 눈길로 쳐다본다. 복수란 불과 얼마 전까지 온 판
을 호령하며 빅 배팅을 해대던 화려함에 대한 비난인 것이다.
'우린들 왜 그렇게 화려하게 쳐대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마
치 겁쟁이처럼 조심하면서 쩨쩨한 배팅으로 일관한 것은 바로
당신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라는 시선을 패배자에게 사정없
이 쏘아대는 것이다.
브루스는 비록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안됐다는 듯한 표정을
고 있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다른 의미를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필립 최는 달랐다. 브루스는 필립 최가 자신의 오기 섞인
배팅에 대해서 여러 번 지지를 해준 것과 아울러 자신을 바라보
는 눈길에서도 어딘지 따스함을 느꼈다 그 느낌은 카지노에서
는 처음 대해보는 낯선 것이었다
브루스는 카지노 호스트를 통해 필립 최가 진정한 도박사라
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기분에 따라서는 턱없는 짓을 하는
괴짜라는 사실도. 브루스는 무엇보다도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을 다행으로 여겼다. 한국인에게는 자신도 할 얘기가 있었던 것
이다.
브루스는 필립 최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자 은밀히 뒤쫓았
다. 그리고 필립 최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직전 간신히 말을 붙여
볼 기회를 잡았다.
「게임을 참 잘하시더군요.」
필립 최는 브루스를 보자 무척 반가워 하다가 이내 안쓰러워하
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는 왜 그렇게 했소 그렇게 흥분해서는 이길 수가 없잖
아요.」
「고통스럽습니다.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필립 최가 안타까운 한숨을 남기고 엘리베이터를 타려 하자
브루스는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저어 ‥‥‥‥」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얘기요?
필립 최의 목소리가 갑자기 건조해졌다 브루스는 바뀌어버린
필립 최의 반응에 그만 용기를 잃고 말았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
「뭔데요?
「어디 좀 앉아서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식사를 하려던 참이오.」
「그럼 식사를 같이할 수 없겠습니까?
브루스는 필사적이었다 어려운 말을 간신히 뱉어내는 브루스
의 표정은 안쓰럽다 못해 처참할 정도였다.
「식사를?
필림 최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음, 그럽시다. 」
필립 최는 앞장서서 중국 식당으로 갔다 브루스는 자리를 잡
고 앉아서 필립 최가 요리를 서너 가지 시킬 때까지 계속 자신이
어떻게 잃었는지, 얼마를 잃었는지 에 대해 반복적으로 설명했
다. 이런 브루스의 얘기를 필립 최는 지루한 표정 한번 내색하지 않
고 들어주었다. 요리가 나오고 술이 얼근해지자 브루스는 드디
어 마음에 품고 있던 얘기를 꺼냈다.
「언젠가 저는 2천 달러를 가지고 20만 달러를 딴 적이 있었씁
니다. 」
「오호, 그래요?
「아주 침착하게 했죠. 저는 그것을 잃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최
저 배팅으로 일관했습니다. 시간과의 싸움이었죠.」
「시간과의 싸움 대단하군요. 바로 그게 게임에서 이기는 원
칙이지. 어떻게 그런 원리를 깨달았소
브루스는 용기를 냈다.
「저는 꼭 따야만 할 때는 달라집니다. 절대로 아까와 같이 한
번에 치거나 하지는 않죠.」
「그래야만 하오.」
「사실은 내일이면 집에서 돈을 부쳐올 텐데, 오늘 이렇게 허
탈한 상태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데...
「말씀해 보시오.」
「2천 달러만 좀 빌려주시면 내일 갚아드리겠습니다. 」
브루스는 한번에 1만 5천 달러를 배팅하던 때와는 너무도 달
라져 있었다. 단돈 2천 달러를 구걸하는 그의 모습을 한참 바라
보던 필립 최는 표정을 냉랭하게 바꾸었다.
「잘 아시겠지만 도박판에서는 절대로 돈을 빌려주거나 받는
법이 아니오. 운을 바꾸기 때문이지. 푹 쉬면서 기다렸다가 내일
돈이 오면 게임을 시작하시죠.」
브루스는 애가 닳았다. 필립 최라는 인물은 손에 잡힐 만한 거
리에 있는 듯하면서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
다. 그는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매달렸다.
「미안합니다. 너무 잘 알지만 워낙 사정이 다급해서 ‥‥‥」
이제 브루스의 입에서는 집에서 돈을 부쳐온다는 등의 얘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잘생긴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비굴한 기
색이 얼굴에 가득 찼다.
「잘 아시겠지만 나는 프로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카지노 호스트가 선생님이 어떤 분인
지 알려주더군요.」
필립 최는 잠시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브루스는 그의
시선을 받자 최대한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들을 싫어하오. 뭔가 특별한 인간을 좋아하
지. 알겠소
브루스는 무슨 말인지 몰라 필립 최의 입에 시선을 모았다.
「남들은 나를 괴짜라 부르지. 아무리 불쌍해도 평범한 인간을
돕지는 않소. 그들은 결국 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말기 때문이
오. 나는 뭔가 좀 특별한 사람, 특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가끔 도와주기도 하오.」
브루스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그림자가 스쳐갔다
「사실 저도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닙니다. 」
그러나 필립 최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브루스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어떻게 특별합니까?
「혹시 한국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소만‥‥‥‥」
「아, 잘되었군요. 사실 저도 한때 한국에서 근무했거든요.」
「무슨 근무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꼽자면 아마 도박일 것이다. 도박
에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무엇을 못하랴. 브루스는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브루스는 마지막 순간 망설였다. 본능적인 보안 의식
이 그를 붙들어맨 것이다.
「뭐,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소.」
필립 최는 흥미 없다는 듯이 술잔을 입에 갖다 대면서 눈길로
는 계산서를 훌었다 브루스는 당황해 하면서 술을 입에 털어넣
고는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특수한 일이었습니다. 혹시 주한 미군 철수에 대해 아십니까?
「미군 철수요?
「사실 제가 주한 미군 철수를 막은 사람입니다. 당시 미군이
철수했다면 한반도에서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을 겁니다. 」
브루스는 초조하게 필립 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표정에 변
화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자신의 목숨이 좌우될 판이었다.
「나는 한국에 대해 잘 모르오.부모가 한국인일 뿐이지 나는
미국 시민이오. 어려서 여기로 왔으니까.」
필립 최가 시큰등한 표정을 자 브루스는 다시 다급해졌다.
「당시 한국의 정보부장 김재규와 제가 미군 철수를 막아냈습
니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한국은 북한의 무력 앞에 그대로 주
저앉았을 테고, 지금 같은 발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
니다. 」
「어떻게 그렇게 확신한단 말이오 아무리 돈이 필요하다 해도
그런 억지는 쓰지 마시오. 그리고 김재규 부장이라구요그가
죽고 없다고 해서 함부로 얘기하지는 마시오.」
「정말입니다. 저는 김 부장과 보통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
필립 최는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렇다 치고 당신이 어떻게 주한 띠군 철수를 막았단 말
이요?
「당시 카터 대통령은 주한 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었죠. 과
연 카터는 대통령이 되자 주한 미군을 차례로 철수시키기 시작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의 한국
대통령을 미워한 카터는 오히려 철수에 가속도를 붙였어요.」
필립 최는 손을 내저었다.
「잠간, 나는 그런 일에 흥미가 없소. 하지만 흥미를 느낄 만한
내 친구가 있지. 그는 소설가요. 만약 당신이 그런 얘기를 하고
싶다면, 그 친구를 부르겠소. 어쩌면 그가 당신 이야기를 소설의
소재로 삼을지도 모르지. 만약 그가 흥미 있어 하면 당신에게 2
만 달러를 주겠소.」
「네 얼마라구요?
「2만 달러.」
「오, 하느님 아마 그 친구분은 틀림없이 흥미로워하실 겁니
다. 분명합니다. 」
브루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2만 달러라는 금액은 이 절망에
빠진 사나이를 완전히 흔들어놓았다.
「그럼 내일 만납시다. 」
「아니, 그 친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랜드캐니언에 관광 갔소. 하지만 전제 조건이 있소. 내 친
구가 흥미 있어 한다는 전제하에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오.」
「제발 그 친구분에게 제가 꼭 이야기할 기회를 주십시오.」
「노력은 해보겠지만 그 친구가 흥미 있어 할지는 모르겠소.」
브루스는 초조했다. 하지만 내일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일
이었다. 필립 최는 노련하게 상대의 심리를 조종했다.
두 개의 태양
다음날 식당에 나타난 브루스의 두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2만 달러라면 그가 회생을 꿈꾸어 볼 수 있는 돈이었다. 그가 간
밤을 어떻게 보냈을지 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초조한 브루스
에게 경훈의 여려 보이는 얼굴은 위안이 되었다.
「여기는 내 친구 미스터 리요. 상당한 재산가지만 취미로 시나
소설을 쓰고 있소.」
경훈과 악수를 나누는 브루스의 손이 떨렸다
「주한 미군 철수가 어떻고 했다면서요?
경훈의 시큰등한 태도는 브루스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얘기가 있습니다. 」
「저는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그저 취미로 쓰는 글인데 무슨
흥미가 있겠습니까?
아!
브루스는 다급해진 나머지 눈물마저 글썽이며 사정했다.
「제발‥‥‥」
경훈은 난감한 눈길로 필립 최를 바라보았다. 필립 최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양손을 들었다 놓았다. 경훈은 뭐 이런 재미없는 사
람을 만나라고 했느냐는 듯 필립 최에게 질책의 눈길을 던졌다.
「한번 들어나 보지 그래요.」
필립 최가 넌지시 권유하자 경훈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
들고는 무관심 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럼 어디 들어나 보죠.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육군 중위로서 주한 미군의 정보 및 공작을 담당했죠. 그리고
한국의 중앙정보부장에게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
「음, 그래요, 그러면 정보부장과 인간적으로 가까웠겠군요.」
「네, 그래요.」
「정보부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정이 많고 의리가 강했습니다. 」
브루스는 경훈이 질문을 던지자마자 바로바로 대답했다.
「그런데 선생의 그 정보 및 공작 임무와 정보부장은 어떤 연관
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일단 한국의 최고 권력자 곁에 우리 사람을 심어두어
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인물이 김재규 정보부
장이었죠.」
「최고 권력자라면 대통령을 말하는 겁니까?
예.
「어떻게 정보부장을 당신네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지요?
「우리는 김 부장에게 최고의 정보를 제공하곤 했습니다. 이
것은 이중의 효과가 있었지요. 먼저 그는 우리의 예상대로 대통
령에게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가 정보부장으로서는
건강도 좋지 않고 정치 공작에도 서툴렀지만 대통령의 신임을
계속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서 나가는 고급 정보 때문이
었지요. 이것을 너무도 잘 아는 그는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갖
는 것만이 자신이 정보부장 자리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
니다. 」
「또 하나의 효과란?
「우리도 필요한 정보를 그에게서 공급받았습니다. 즉 상부상
조한 거죠.」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간단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
법이었다.
「그런데 선생이 주한 미군 철수를 막았다는 것은 무슨 얘깁니까?
「언젠가 미국을 방문한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CIA의 터너 국
장이 한 가지 소원만 말하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김
부장은 정색을 하고는 주한 미군 철수를 중단해 달라고 하더군
요. 나는 그것이 중요한 이야기다 싶어 최선을 다해서 터너 국장
께 전달했습니다. 단순히 통역만 한 게 아니라 전력을 다해 한반
도의 상황까지 전달했던 겁니다. 나의 눈앞에는 한반도에 전쟁
이 일어날 경우 그 위대한 한강의 기적이 포화로 뒤덮이는 광경
이 선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미군 철수를 막는 것이 내가 한국민
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근무하게 된 것 자체가 신의 섭리라고 생각하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터너 국장께 설명했던 겹니다. 사실 그것은 통역이 아니었
습니다.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습니다. 」
브루스의 텁수룩하게 웃자란 수염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 브루스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소리야말
로 절규였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필립 최의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
가 피어올랐다.
「그런데 왜 터너 국장은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소원을 말하라
고 했습니까?
「하나는 거대한 시험 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김재규라는 인
물을 테스트했던 것입니다. 그의 그릇 크기를 시험했던 거죠. 그
에게 과연 나라의 큰 고민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의지가 있는
지 궁금했습니다. 또 하나는 김재규가 그런 저돌적인 인물일 경
우 확고하게 우리 편으로 만들어두자는 뜻이 있었습니다. 」
「김 부장은 왜 하필이면 주한 미군 철수를 중단해 달라고 부탁
했을까요?
「그것은 그 당시 대다수 한국민의 바람이었습니다. 또 김 부장
으로서는 자신의 자리를 영구히 보전하는, 그리고 우리로서는
우리 사람을 최고 권력자 옆에 언제까지나 근접시켜 놓는 최선
의 방법이었죠, 사실 그때 한국의 대통령은 몹시 불안해하고 있
었습니다. 미군 철수는 바로 박 대통령의 실권을 의미하는 것이
었으니까요. 미군 철수를 막지 못하면 보수 중산의 이탈은 물
론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든 시민 봉기가 일어나든 그로서는 감
당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 뻔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매일
고민을 하고 회의를 했습니다만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 철수
의지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러니 정보부장으로서 김재규의
고민도 당연히 미군 철수를 막는 일이었죠. 그러나 누가 미국 대
통령의 결정을 저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터너 국장은 김재규 부장의 말을 듣고 즉각 대답했습니다 어
려운 일이지만 김 부장의 특별한 부탁이니만큼 들어주겠다고 말
입니다. 」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터너 국장은 신속히 남북한 군사력 비교라는 자료를 만들었
습니다.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보다 세 배는 강력하고 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 호전적이라, 미군 철수는 바로 남한의 붕괴를 의미
한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리고 그 자료를 은밀히 』워싱턴포스트P
에만 넘겨주었습니다. 이슈화시키는 방법이었죠. 거대한 신문
하나에만 특종을 만들어주면서 붐을 조성하는 겁니다. 」
「잘되었나요?
「물론입니다 삽시간에 워싱턴이 들끓기 시작했죠. 언론과 공
화당 의원들이 한국이 공산권으로 넘어가는 데 대해 책임을 지
겠느냐고 카터 대통령을 몰아붙였습니다. 한국이 넘어가면 일본
도 넘어가고, 미국은 아시아를 몽땅 소련과 중국에 넘겨주게 되
며, 그 다음은 유럽에 이어 미국까지 모두 공산주의의 제물이 되
고 마는데, 도대체 카터 대통령은 뭐하는 사람이냐는 여론이 도
처에서 물 끓듯 했지요. 심지어는 민주당 의원들조차도 카터 대
통령을 공격했습니다 결국 카터 대통령은 철수를 중단시킬 수
밖에 없었지요. CIA가 마음먹고 나서서 하면 안 되는 일이 없습
니다. 」
「김재규 부장은 박 대통령에게 큰 칭찬을 받았겠군요 선생도
한국 정부로부터 훈장이라도 받았습니까?
「아니, 나는 곧 교체되었습니다. 」
「이상하군요. 왜 교체되었습니까
「당시 나도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상례에서 벗어난 인사였
으니까요.」
「교체 시기가 아닌데 교체되었다는 얘깁니까?
「그렇습니다. 」
「후임으로 누가 왔습니까?
「흘리건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
「계급은요?
「소령이었습니다. 」
「이상하군요. 선생은 중위였는데 소령이 그 일을 맡으러 오다
니. 그도 영어를 가르쳤습니까?
「그것은 모릅니다. 나는 곧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에.」
「흘리건은 원래 주한 미군이 아닌가요?
「네,그는 본토에서 왔습니다. 희미하게 들린 소문에 따르면,
그는 국방성 소속이 아니라 CIA 본부에서 나온 전문가라는 것
같았습니다. 」
「그런 경우도 있나요 CIA가 군인으로 위장해서 오기도 합
니까?
「네, 군과 CIA는 사람이나 업무를 교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 신분을 다 가진 사람도 있지요.」
「그런데 본토에서 온 사람이 바로 정보부장을 담당할 수 있습
니까 그는 한국어도 못하잖아요?
「아닙니다 홀리건은 한국어를 유창하게 했습니다. 」
「그러면 선생은 그후 한국에 없었습니까?
「나는 니카라과로 옮겼습니다. 새로운·임무를 맡았죠.」
「그후 그 일에 대해 들은 적은 없습니까?
브루스는 더 할 얘기가 없는지 경훈의 눈치를 힐끔힐끔 봤다.
「그후는 잘 모르겠습니다. 」
「알았습니다. 」
경훈은 별다른 흥미가 없다는 듯 포크를 집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브루스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경훈의 표정을 관찰
했다.
「참 언젠가 내게 소설의 소재를 주겠다고 한 분이 있었는
데, 그분도 역시 주한 미군이었습니다. 제럴드 뭐라고 그랬는데
「혹시 제럴드 현 아닌가요?
「아, 그래요. 제럴드 현이었습니다. 그분을 압니까?
「네, 알다마다요. 나의 상관이었습니다. 」
브루스는 경훈이 제럴드 현의 얘기를 꺼내자 의심스러운 눈초
리로 훑어 보았다.
「주한 미군 철수와 관련해서 제럴드 현이 한 일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 일은 나하고 김재규 부장 둘이서만 했던 일입
니다. 」
「지금 제럴드 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후로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
「소문도 못 들었습니까?
「정신이상으로 전역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만, 만나거나 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릅니다. 」
「그분은 왜 정신이상이 되었습니까 원래부터 문제가 있었
나요?
「아닙니다. 제럴드 현은 매우 날카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
경훈은 이쯤에서 끝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알았습니다.
경훈이 말을 마치자 필립 최는 측은한 표정을 하고 있는 브루
스를 데리고 나갔다.
정보 계통에서 잔뼈가 굵은 오세희는 역시 판단이 날카로웠
다. 그는 경훈에게서 브루스와의 대화를 전해 듣고는 즉각 소리
쳤다. 「이번 일은 된 것도 안 된 것도 없는 결과가 되었군.」
「무슨 말씀입니까?
「브루스에게서 알아내야 할 일이 홀리건이란 자에게 넘어갔다
는 말이오. 아마 그 흘리건이 브루스보다는 훨씬 심각한 얘기를
김재규와 나누었을 거요. 이 변호사, 생각해 보시오. 터너 국장
이라는 놈이 김재규에게 주한 미군 철수를 막아주겠다고 한 것
은 고도의 심리 전술이었소.」
「어떤 심리 전술이죠?
「김재규에게 강한 믿음을 주는 거지.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
보시오, 주한 미군 철수를 두고 대며 안절부절못하는 박 대
통령과 주한 미군 철수를 막아주겠노라고 흔쾌히 수락하는 터너
국장의 당당한 모습을.」
「박 대통령이 너무도 초라해 보였겠군요.」
「그렇소, 마인드 컨트롤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당시의 상황이 짐작 가는군요.」
「이후 김재규의 가슴속에는 하나의 태양이 더 뜬 거요. 주인이
하나 더 생겼던 것이지 .」
「바로 미국이라는 태양.」
「그렇소. 김재규의 가슴속에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주인이 차
츰 자리를 잡기 시작한 거요. 초라한 한국 대통령을 서서히 밀어
내면서 말이오.」
「박 대통령으로서는 서글프기 짝이 없는 일이었군요. 가장 믿
었던 정보부장이 대통령보다 미국을 더 상전으로 생각하고 있었
다니 .」
「김재규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거요. 일단 미국이 노리고 공을
들이면 그렇게 안 될 수 없을 테니까. 김형욱을 보시오. 정보부
장 시절 미국놈들이 박 대통령의 뒷조사를 해달라고 하자, 박 대
통령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샅샅이 조사하여 미국놈들에게 갖다
바치지 않았소?
「한국 사회의 서글픈 현실이군요. 대통령의 최측근조차 미국
꾈립 최
경훈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확률이란 것
을 배울 때 동전의 앞면이 열여섯 번이나 연속으로 나을 확률은
2의 16승분의 1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열여섯 번이나 플레이어
가 연달아서 나왔다면, 대충 암산해도 그 확률은 6∼7만분의 1밖
에 되지 않는다.
경훈은 잠시 혼돈스러웠다. 수학의 법칙이 도박이라 해서 적
용되지 않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브루스는6∼7만분의 1
이 랄 확률을 잡아냈단 말인가.
경훈은 머리를 흔들며 필립 최의 방으로 갔다. 필립 최는 경훈
을 보자 호탕하게 웃었다.
「이 변호사, 어떻소 소득이 있었소?
「물론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브루스의 돈을 그렇
게 짧은 시간에 찾아줄 수 있었습니까?
「하하, 샴페인이나 한잔하면서 기분을 좀 풉시다. 」
필립 최는 홈 바에서 샴페인을 꺼내서는 두 개의 글라스에 따
랐다.
「건배 」
「위하여 」
「하하, 이 변호사 놀랄 것 없소. 그 시간에 4백 달러를 땄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소?
「그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똑같소. 20달러씩 배팅하여 스무 번을 이기면 4백 달러고, 2
만 달러씩 배팅하여 스무 번을 이기면 40만 달러요. 4백 달러를
따는 사람들은 세상에 흔하지.」
「그러나 누가 감히 한번에 2만 달러를 배팅할 수 있겠습니까?
「칩을 돈으로 보지 않으면 가능하지. 돌멩이로 생각하는 거요.」
「보통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소. 그래서 사람들은 한번 잃으면 회복하지 못하는 거
지. 인간의 심리란 도박을 하는 데 있어 가장 거추장스런 거요.
큰 방해가 되지 잃을 때에는 화가 나서 곱으로 씌워 죽고 때
는 불안해서 쥐꼬리 만큼씩 배팅하는 거요. 그게 인간이라는 존
재지요.
「그럼 도박사는 그런 심리를 극복한 사람인가요?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소. 도박사는 그 두려움으
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존재랄까, 아니 그것보다는 그 두려
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때론 그것을 이용하거나 피한다고 얘
기하는 편이 옳겠지.」
「두려움을 이용한다구요?
「그렇소, 언제나 겁을 집어먹고 테이블에 앉는 거요. 그래서
가장 안전한 플레이를 지향하지. 가령 1백 개의 칩을 가지고 한
개만 배팅하는 거요.」
「그렇게 해서 이길 수 있나요?
「그렇게 이겨야만 하오. 위험하게 이겨서는 안 되지. 위험하게
이기는 것은 아무리 이겨도 가치가 없소.」
「도박이란 게 본질적으로 위험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 승부는
오로지 운에 의해 좌우될 뿐이구요.」
필립 최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
다. 경훈은 지난번에 필립 최가 프로는 운을 얘기하지 않는 법이
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였다.
「나는 운과는 상관없이 항상 이기는 길을 연구하는 데 오랜 세
월을 보냈소.」
역시 깜짝 놀랄 만한 대답이 필립 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전에도 필립 최가 도박에서 이기는 힘이란 게 있다고는 말했지
만, 이처럼 운과 상관없이 항상 이기는 길을 연구했다고 하자 경
훈은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그래서요 과연 그런 길이 있습니까?
「그렇소.」
필립 최의 대답이 묵직하게 경훈의 귀를 눌렀다. 경훈의 머릿
속에 불현듯 케렌스키가 떠올랐다. 케렌스키라면 이 대답에 대
해 어떻게 반응했을까 생각하면서 필립 최에게 물었다.
「케렌스키 변호사님도 깊은 연구를 하셨다는데 왜 실패했을
까요?
「미스터 케렌스키, 보통 사람이 아니었지. 그는 처음에는 도박
을 철저히 수학적으로 파악하려 들었소. 사실 수학자나 과학자
들이 가장 도박에 약한 사람들이오.늘 그들이 제일 먼저 잃지.
그들은 기(氣)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무한한 수양의 세계로 깊
이 들어갈 수가 없소. 도박을 보면 동서양 문화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데 서양인들은 대체로 공격적이고 도전적 이오. 참고 기
다리는 수양의 단계를 넘어 참선으로까지 들어가는 정()의 세
계를 이해하지 못하지. 진정한 힘이란 바로 그 기다리고 참는 것
에 있는데 말이오. 못 참으면 도박은 끝이오. 케렌스키는 오래지
않아 수학의 세계를 넘어 이 정의 세계를 깨달았소. 하지만 안타
깝게도 그는 이기는 길에 이르는 원리는 파악했지만 자신의 마
음을 다스리는 데는 실패했지, 철저히 자기를 비워야 하는데 그
게 안 된 거요. 자기를 버려야 하오. 자존심을 버리고 자기가 이
룬 것을 버려야 하오. 또한 성품이 선량해야 하오. 착하지 않으
면 역시 이길 수 없으니까.」
「최 선생님은 마치 도인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비슷할 거요. 도인만큼이나 도박사도 정신 세계를 중요시하
는 사람들이니까. 도박에서는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오.」
「감정을 다스리는 일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은데요.」
「아니오, 도박에서는 그것이 가장 어렵소. 예를 들어 절에서
10년 이상 도를 닦은 승려의 방에 천하절색의 미녀가 매일 들어
온다고 합시다. 승려는 이성으로는 그 미녀를 범해서는 안 된다
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실제로는 아마 파계하고 말 거요. 도
박에서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것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이
지. 그러니 도박에서 항상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오.」
말을 마친 필립 최는 홈 바에서 술과 얼음을 꺼내 온더록스를
만들어서 가지고 왔다. 경훈이 술잔을 넘겨 받으며 물었다.
「최 선생님은 어떠십니까?
「작게 지고 크게 이기지. 감정을 조절하면서.」
「도박에는 운이라는 것이 따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거개의 도
박사들은 소위 이 끗발을 중시하는 게 아닌가요
「한두 번 끗발이 붙을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궁
극적인 패배를 앞당기는 현혹에 불과하오.」
경훈은 필립 최의 철학이 매우 견고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
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절절한 것이
었다. 그리고 그가 터득한 철학은 인류의 스승들이 제시했던 삶
의 원칙과 다를 바 없었다.
경훈은 『장자』에 나오는소 잡는 사람의 얘기를 떠올렸다 하
찮은 직업이지만 소를 잡는 것도 한 가지만 성심성의로 하다 보
면 나중에는 칼이 힘줄이나 사이사이로 빠져다녀 칼을 갈지
않고도 순식간에 소 한 마리를 잡는다고 했다. 매일 승부를 하면
서도 그 좁고 좁은 승패의 갈림길 사이를 빠져다니는 필립 최 역
시 어느 정도는 도인의 경지에 올라 있는 듯했다.
경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필립
최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자, 이 변호사, 이제는 내가 이 변호사에게 부탁을 하나 해도
괜찮겠소?
뜻밖의 얘기였다.
「케렌스키에게서 이 변호사의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소. 상상
할 수 없을 정도의 천재라고. 사실 그래서 몹시 만나고 싶었소.」
「케렌스키 변호사님의 과찬입니다. 그분은 천재 예찬론자시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만족시켜 줄 사람을 찾아 억지로 짜맞추
는 격이었죠.」
「어쨌거나 상관없소. 나도 사람 보는 눈은 있으니까. 하여튼
내 부탁을 들어줄 테요?
「물론입니다. 」
경훈은 달리 대답할 도리가 없었다.
「이 변호사의 머리를 좀 빌려줄 수 있겠소?
「제 머리를요?
「그렇소.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일이 있는데 혼자서는 결론을
내기가 어렵소.」
필립 최의 얘기를 듣자 경훈은 본능적으로 호기심이 발동했다.
「무슨 일입니까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요.」
경훈이 관심을 보이자 필립 최는 기다렸다는 듯이 서두를 꺼
냈다.
「김형욱이랄 사람을 알고 있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김형욱 말입니까?
「그렇소.」
「물론입니다. 」
「그의 실종과 관련한 내용이오. 지금까지 나는 그의 실종을 추
적해 왔소.하지만 역시 미궁에 빠져 있지. 결론도 아마추리로
끝날 수밖에 없겠지만...
「실존했던 한 사랑의 실종을 추리로 결론 낼 수는 없지 않을
까요?
「그래서 이 변호사의 머리를 좀 빌려 보자는 거요. 천재적인 두
뇌를 가진 이 변호사라면 추리 이상의 뭔가를 찾아낼 수 있을 거
라 생각했소.」
「최 선생님이 못하시는 일을 제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있겠습
니까?
경훈은 필립 최의 머리가 자신에 못지않다고 생각했으므로,
머리를 빌리자는 그의 얘기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필립 최
는 그런 경훈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우리는 머리가 다르오. 나에게는 참고 수양하는 머리가 있는
반면 이 변호사에게는 날카로운 직관이 있소. 김형욱 사건을 분
석하는 데는 이 변호사의 머리가 훨씬 나을 거요.」
「그럼 한번 말씀해 보시죠.」
경훈은 더욱 호기심이 커졌다. 파리에서 증발해 버린 전 중앙
정보부장 김형욱, 그의 실종을 놓고 이제껏 수많은 추측이 난무
했지만 누구도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경훈은 필립 최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는 것이 의외였으나, 그
의 무게로 볼 때 근거 없는 추측에 다른 하나를 보태는 무의미한
작업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신비한 사나이 필립 최가 누구보
다도 폭넓게 정보를 접하고 있으리라는 신뢰감이 들었다.
「나는 그의 실종 직전의 행적을 보면 이 미스터리가 풀린?
고 생각하오. 다만 내게는 완벽하게 추리해 낼 머리가 없을 뿐
이오.
「같이 생각해 보죠. 그런데 최 선생님은 김형욱과 무슨 각별한
관계셨습니까 어째서 그의 실종을 추적하셨나요?
김형욱 실종 미스터리
「사실 내가 도박을 시작한 것도 어쩌면 김형욱 그 사람 때문인
지 모르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사람은 참 멋있었소. 나는 그에게서 이 메마른 현실에서
자신의 세계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았소.」
어떠 했는데요?
「김형욱은 항상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도박을 했소. 나는 일반
인들은 상상도 못할 액수를 배팅하며 좌중을 노려보던 그 매서
운 눈길을 잊을 수가 없소. 황색인들을 깔보던 모든 미국인들이
존경과 두려움에 떠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지. 나는 그것을
보며 유색 인종 이민자도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
음 깨달았소.」
「동기가 재미 있군요.」
「김형욱온 예측할 수 없는 괴상한 행동을 즐겼소. 마치 돈키호
테처럼 말이오. 그는 그렇게 이민 생활의 외로움을 해소하고 있
었소.」
「김형욱이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김형욱은 카지노 측에서 제공한 보디가드를 수시로 두들겨팼
소. 그가 배팅한 후면 보디가드들은 항상 긴장을 하고 있어야 했
지. 언제 뒤로 돌면서 따귀가 날아올지 몰랐거든. 그는 크게 배
팅을 했다가 잃으면 어김없이 뒤로 돌면서 등뒤를 지키고 서 있
는 정장 차림의 보디가드들에게 따귀를 날렸소. 그래서 보디가
드들은 그가 게임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잃으면 황급히 뒤로 한
발짝씩 물러섰지. 그러자 김형욱은 수법을 바꿨소. 어떤 때는 이
겼을 때도 뒤로 돌며 따귀를 날렸고 반대로 졌을 때도 후하게 팁
을 뿌렸지. 그러자 보디가드들은 당황했소. 잃고 따는 걸로는 뭐
가 날아올지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어떤 때는 따귀 대신 후한
팁이 날아오니 보디가드들은 멀리 가지도 못하고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 희한한 촌극을 연출했소.」
「김형욱은 사람들을 놀렸군요.」
「아마 사람보다 돈을 높이 보는 사회에 대한 조룽이라고 얘기
할 수 있을 것 같소. 나는 김형욱을 보면서 돈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면 저렇게 멋있구나 하고 느꼈지. 모두가 두려워하는 돈, 이
미국 사회에서 멸시받지 않는 유일한 길은 돈을 버는 것이란 진
리가 단순 명쾌하게 머리에 들어왔소. 그래서 실패한 이민 생활
과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로 절망해 있던 내가 목숨 걸고 승부를
겨뤄볼 만한 데는 도박판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김형욱은 나의
인생을 결정지은 사람이오.」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민한 필립 최가 미국에서 유색 인
종으로서의 열등감에 시달리다가 마음껏 미국인들을 농락하는
김형욱을 보고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이해가 갔다.
「긴형욱은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돈을 땄나요, 아니면 잃었
나요?
「어땠을 것 같소?
「잃었을 것 같군요.」
「물론이오. 아마 김형욱이 카지노에서 돈을 따면 이 세상에 돈
못 사람은 하나도 다고 얘기할 수 있을 거요. 용기와 기백
만으로 도박을 해서는 이길 리가 없지. 그는 돈을 가지고 놀았
소. 따려고 한 게 아니라 놀려고 한 거요.」
「그러나 돈은 무한정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결국 그 돈이 김형욱을 죽음으로 이끌었소.」
「돈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구요?
필립 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훈의 가슴에서 불 같은
호기심이 타올랐다. 중앙정보부에서 김형욱을 암살했다는 게
세상에 떠도는 소문이 아닌가
「남들은 다 김형욱을 욕해도 나는 그를 호괘하고 배포 있는 한
국인이라고 생각하오. 누가 감히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백인
들의 따귀를 그렇게 마음내키는 대로 후려칠 수 있겠소.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깊은 호감을 가지
게 되었지. 게다가 그는 의외로 따스한 면을 보이기도 했소. 모
두가 김형욱을 도깨비로 알지만 사실 그에게도 인정은 있었소.」
「골프채로 캐디의 머리를 후려치기도 했다는데. 그런 그에게
인정이 있었다구요?
「언젠가 나는 김형욱이 카지노의 인적 드문 공간에서 한 한국
인 청년의 따귀를 때리며 호통을 치는 것을 본 적이 있소. 욕지
거리를 해대며 몹시 화를 내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지켜봤지. 알
고 보니 그 청년은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이었소. 그런데 카지노
에서 유학 비용을 모두 잃고는 절망에 횝싸여 넋 나간 상태로 멍
하니 몇 시간이나 앉아 있다가 김형욱의 눈에 띄었던 거요. 김형
욱은 그렇게 그 학생을 호되게 나무라더니만 선뜻 잃은 돈 모두
를 내주었소. 나는 그가 얼마나 어려운 일을 했는지 잘 아오. 도
박꾼들에게 그런 것은 금기 중의 금기거든.」
「김형욱을 잘 아시는 모양이군요. 그와 같이 도박을 하신 적도
있습니까?
「김형욱과 나는 도박의 차원이 달랐소.무엇보다도 스타일이
너무 달랐지. 하지만 카지노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니 그와 정이
들었소. 그리고 그의 처지가 안타까웠지. 김형욱에게는 어떤 종
류의 울분 같은 것이 있었소. 이유야 어찌됐든 조국에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에 응어리가 되어 남았던 거요. 그는 아
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는데, 그것도 아마 피붙이 외에
는 모두 그를 따돌렸기 때문이겠지. 그는 그런 울분 때문에 더더
구나 도박에서 이길 수가 없었던 거요.」
「김형욱이 거액을 잃은 것을 보고는 최 선생님도 기분이 안 좋
으셨겠군요. 카지노에서는 내심 그를 조롱했을 것 아닙니까?
「조롱 정도가 아니었지. 이제껏 쌓였던 것이 일시에 폭발했소.
김형욱에게 욕을 먹으며 카드를 나누어주던 딜러, 매를 맞던 보
디가드, 짐승 취급을 받던 매니저, 직원들로부터 끊임없이 불평
을 들었던 경영자 할 것 없이 그가 돈을 잃고 마커를 쓰기를 바
랐던 거요. 김형욱이 안하무인 격인 태도를 버리고 빛 독촉에 쫓
겨 초조해 하다가 마침내는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
고 싶어했던 자가 한둘이 아니었소.」
「마커가 뭡니까?
「카지노 측에서 빌려주는 돈이오. 물론 칩으로 빌려주어 계속
도박을 하게 하지만, 일단 그 마커를 쓰면 그것을 갚기 위해서라
도 카지노에 발을 끊을 수가 없소. 마커는 결국 대다수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지. 라스베이거스의 사람들은 증오든 사랑이든 모든
감정을 돈으로 표시하오, 철저하게 숫자를 신봉하며 사는 사람
들이지 여기 미국이 어차피 그런 사회지만.」
「그런데 아까 돈이 김형욱을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하셨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앙정보부가 그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습
니다. 」
「억측이오,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의.」
「억측이라구요 그렇다면 중앙정보부가 한 일이 아니라는 말
씀입니까?
경훈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렇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김형욱의 실종 미스터리를 추
적하는 모든 사람들이 중앙정보부를 지목하는데요.」
「모두 엉터리요. 나는 그의 실종을 오랫동안 추적했소. 증거를
잡지는 못했지만 증거보다 더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경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세상에 증거보다 더한 확신이 있
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필립 최의 얼굴은 신념에 차 있었다.
「자신의 확신만으로 어떤 주장을 믿어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
습니까?
「하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 논리를 제시
한다면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외투를 꺼내 입은 것은 날씨가
추웠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이오.」
「그것은 거의 증거와 맞먹는 설득력을 가지지요.」
「나는 그런 정도의 상황 논리를 세워보자는 거요. 내가 가진
정보를 가지고 말이오.」
경훈은 필립 최처럼 한 방면의 정점에 도달한 사람이 근거 없
는 정보를 신봉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자 그의 상황 논리라는
것에 흥미가 생겼다. 경훈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던 필립 최가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자, 자리를 옮겨 얘기합시다. 새로운 이야기는 새 공간에서
하는 게 낫지 않겠소?
필립 최는 리무진을 불러 라스베이거스가 한눈에 들어오는 니
들타워로 경훈을 데려갔다. 필립 최는 회전 전망대의 창가 자리
에 앉아 스카치를 한잔 따르고 나서 라스베이거스의 사막 너머
를 바라보았다.
경훈은 필립 최가 황량한 사막을 더듬으며 촉촉한 상념에 젖
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 상념이란 한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고,그 인간은 김형욱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필립 최는
자신의 말로도 김형욱과 같으리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해할 수 없군요. 확신이 있으시다면 왜 완벽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사건에 대해 그간 침묵을 지키셨습니까?
「김형욱의 마지막 행적에 대해 자신이 없어지곤 했기 때문이
오. 그의 모든 행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가 파리로 가
서 실종될 때까지 일주일 간의 행적을 내 머리로는 설명할 수가
없소.」
「아무튼 들어보고 싶습니다. 」
필립 최는 서서히 상념을 거두어들이며 힘있는 눈빛을 내쏘았
다. 그는 목소리 혼조차 바꾸었다.
「김형욱의 실종 미스터리를 다루는 사람들은 맨 먼저 박정희
와 김형욱의 갈등을 떠올리지. 무조건 그것을 원인이라 생각하
는 거요. 다음으로는 박정희의 지시를 쫓아 김형욱을 죽일 수 있
는 기관을 떠올리지. 바로 중앙정보부요. 그러나 그렇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바로 결론을 내려버리고 그에 따른 상황이나 인물
을 추적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
경훈은 필립 최가 상당히 논리적으로 출발한다고 생각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대통령들의 입장을 봅시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이렇게 네 대통령을 거치는 동안 이들
이 김형욱의 실종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리가 없소. 특히 김형욱
의 실종 직후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그 사건을 김재규 제거에 이
용하려고 집중적으로 파혜쳤지. 김재규가 그런 일을 했다면 민
주 투사니 뭐니 그를 가리키던 얘기들을 일축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오. 그러나 아무 성과도 없었소. 김재규도 사형 직전 그
사건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고백했지. 그후 중앙정보부 직
원들도 오명을 씻기 위해 전력을 다해서 그 사건을 추적했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소.」
「혹시 그 이후 다른 대통령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요?
「아니오. 대통령들이 안다는 것은 그들의 지시를 받아 사건을
조사한 사람들이 안다는 얘기고,그렇다면 이 미스터리를 아는
이들의 수는 수십 명, 아니 그보다 훨씬 많아지지. 하지만 이 사
건에는 그들이 모두 입을 꼭 다물고 비밀을 지켜줘야 할 공동의
가치가 없소. 오히려 공개를 하면 이득을 볼 이들은 있지만 말
이오.」
「즉 한국 내에는 김형욱을 누가 죽였는지를 아는 사람이 한 명
도 없단 얘기요. 모두가 모르는 거요. 그래서 완벽한 미스터리가
되어버렸지.」
「과연 그럴까요?
「믿음이 안 가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군. 온 세상 누구
보다도 반드시 알 수밖에 없는 한 사람이 있소. 만약 중앙정보부
에서 일을 저질렀다면 말이오.」
「그게 누굽니까?
「중앙정보부의 파리 지부장이오.」
경훈은 고개를 끄덕 였다.
「국내에서라면 목포 직원들이 부산에 가서 현지 직원들 모르
게 일을 저지를 수도 있겠지만 파리에서는 아니오. 첫째 문화가
다르고,둘째 출 입국이 체크되며,셋째 프랑스 공안당국의 감
시를 어나야 하기 때문이지. 또 공작에 필수적인 현지 지원도
받을 수 없고. 어쨌든 중앙정보부에서 그 일을 조종했다면 파리
지부장이 모를 리 없지 않겠소. 또 그를 배제해야 할 이유도 없
었고, 아니 그의 지시와 도움을 받지 않고는 해낼 수도 없는 일
이었소. 동백림 사건 때는 현지 공사인 양두원이, 김대중 사건
때도 역시 현지 공사인 김기완이 가담을 했으니까.」
「그렇겠군요.」
「나는 그 당시의 파리 지부장 이상렬이 일전에 어떤 잡지와 인
터뷰하는 것을 보았소. 그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더군.」
「어째서요?
「이상렬은20년 가까이 김형욱 암살의 중심 인물로 의심받아
왔소. 그 사람의 괴로운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더군. 그는 못내
공개 수사까지 요청했소. 검찰이 나서서 자신을 수사해 달라고
말이오. 그만큼 자신은 결백하다는 얘기지.」
「그랬나요?
「사건 직후 이상렬도 신군부에 의해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소.
김재규도 그 부분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았고. 알겠소 그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신군부 말이오.」
경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수사는 간단할 수밖에 없었소. 김형욱이 실종된 시기에 파리
에 갔던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있는지, 만약 있었다면 그들의 알
리바이를 확인만 하면 되는 일이었소. 이미 파리 현지에 있던 중
앙정보부 직원들의 알리바이는 프랑스 정보부와 경찰에 의해 철
저히 조사된 뒤였으니까.프랑스 측에서는 우리 대사까지도 불
러 조사했소.」
「 '혈의 없◎이었습니까?
「물론이오 국내외의 수사에서 밝혀진 게 하나도 없었소. 그러
니까 완벽한 미스터리지. 김재규 재판에서도 김형욱에 대한 얘
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소. 혐의가 전혀 없다는 얘기요.」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이 죽였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
데요.」
필립 최는 피식 웃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한 소설가가』문
예춘쏜에 작교 작전이라는 제목의 공상소설을 발표했지.
중앙정보부가 파리에서 김형욱을 납치하여 대한항공 편으로 서
울로 옳긴 후 청와대에서 박정희가 직접 총을 쏘아 죽였다는 내
용이었소.그런데 그것이 국내 언론에 사실처럼 보도되면서 김
형욱을 중앙정보부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던 거요.」
「아,그 소문이 일본의 한 소설가가 쓴 작품에서 비롯되었습
니까?
「그렇소. 그 소설가는 김대중 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그런 소설
을 썼던 거요. 김형욱 사건이 아직까지 완벽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까닭은 중앙정보부가 저지르지 않은 일을 중앙정보부가 저
질렀다고 단정하고 출발했기 때문이오.」
경훈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 최가 얘기하는 모든 정황
으로 보아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와 무관하게 죽었을 가능성이 있
었다.
「그럼 최 선생님은 김형욱이 어떻게 죽었다고 확신하시는 겁
니까?
「어떤 사람의 죽음이든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소. 특히 누
가 죽였는가를 판단하려면 그 사람이 살해당할 이유를 합리적으
로 판단해 볼 필요가 있지 김형욱의 경우는두 가지요.하나는
박정희를 비난했을 뿐 아니라 회고록을 출판하겠다고 협박했던
거요.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비롯되었지.
아까 라스베이거스의 사람들은 감정을 돈으로 표시한다고 얘기
했던 것 기억하오?
「그게 무슨 뜻이죠?
「김형욱은 봐주고 싶은 채무자가 아니었다는 뜻이오. 즉 단
1달러의 빛이라도 지옥 끝까지 추적하고 싶은 채무자였지.」
「그는 얼마나 빛을 지고 있었습니까?
「시저스 팰리스에 1백만 달러, 트로피카나에 50만 달러, 이것
이 겉으로 드러난 금액이오. 시저스 팰리스에서는 김형욱에게
딴 돈이 많으니까 어떨지 모르지만. 트로피카나에서는 그에게
돈이 많다는 소문만 듣고 첫 거래에서 돈을 빌려 줬으니까 억을
했을 거요. 물론 마케팅 담당자에게 화살이 돌아갔지.」
「그렇다면 아까 돈이 김형욱을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말씀은?
필립 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
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더니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여기 라스베이거스에는 단돈 3백 달러 때문에도 사람을 죽이
는 힛맨들이 득시글거리오.」
「그렇다면 김형욱은 라스베이거스에 진 빛을 안 갚아서 죽었
다는 겁니까?
필립 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신 거죠 정황 판단에 의한‥‥‥‥」
「나는 김형욱의 실종 소식을 접하고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소. 평소에도 그가 살해될지 모른다고 예감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예감이 아닙니까?
「그렇소. 하지만 이 자리에서 나는 그 예감을 강변하려는 게
아니오. 아까도 얘기했지만, 김형욱이 실종되기 전 일주일 간의
행적을 있었던 그대로 말해 주겠소. 이 변호사의 머리에서 보다
논리적인 추리가 나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 때문이오.」
「말씀해 보십시오.」
마지막 행적
필립 최는 스카치로 목을 축이고는 본론을 꺼냈다.
「이 사건에서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은 몇 가지 없소. 아마
이 변호사라면 모든 억측과 예단을 버리고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을 거요. 객관적 사실을 입력하여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결
론을 내주시오. 마치 논리 퍼즐처럼 말이오.」
경훈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재판정에서처럼
해보고 싶은 기분이 들던 참이었다.
「우선 잠간 사건의 배경을 설명해 주리다. 김형욱은 미국에서
아주 외롭게 지냈소. 그는 신변의 안전 관계로 불안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따돌리기도 해서 자연스럽게 도박에 빠져들었지. 도박
이란 원래 혼자서 하는 게임이니까. 그가 즐겼던 게임은 바카라
였소. 김형욱은 주로 라스베이거스에서 게임을 했지만 1년에 두
세 번쯤은 파리나 스위스에 가서 하기도 했지. 그는 불과 일주일
사이에 1백만 달러를 잃은 적이 있을 정도로 세게 배팅했소. 도
박이란 무서운 거요. 그는 애초에 돈이 많았지만 결국 가진 재산
을 거의 탕진했소.그래서 김경재에게 회고록을 대필시키는 한
편, 김경재도 모르게 회고록 출판을 미끼로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었던 김재규와 거래를 했지. 그 회고록에는 박 대통령의 여자
관계를 비롯하여 그가 한국에서 정보부장을 하면서 알게 되었던
한국의 어두운 면이 망라되어 있었소.박정희에게 치명타를 안
길 내용만 골라서 말이오.」
「김형욱은 한국에서 그 회고록이 출판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
각했을까요?
「물론 아니오. 김형욱은 그것을 협박용으로 쓰려고 했던 거지.」
「김형욱은 어떤 조건을 제시했습니까?
「세 가지 조건이었소. 여권의 연장,한국에 있는 재산의 동결
해제, 그리고 150만 달러의 현금이었지.」
「김재규는 그가 제시 한 조건을 들어 주었습니까?
「처음의 두 가지는 들어주었고, 현금은 일단 50만 달러만 주었
소. 회고록의 원본을 완전히 넘겨주면 나머지 1백만 달러도 마
저 주겠다고 했지. 그리고 김경재의 각서까지 요구했소. 김형욱
의 동의 없이는 회고록을 출판존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말이오.
김재규로서는 안전하게 하고 싶었던 거지.」
「김경재는 각서를 써주었나요?
「김형욱의 부탁을 받은 김재규는 미국의 요원들을 시켜 진저
리가 나도록 김경재의 집에 협박 전화를 해댔소. 결국 김경재는
각서를 써주었고, 그 각서는 나중에 김재규의 책상 서랍에서 발
견되었지.」
「김 형욱은 그 50만 달러도 모두 도박으로 날렸겠군요.」
「물론이오. 게다가 김형욱은 라스베이거스에서 거액의 마커를
쓰고 나서 심한 빛 독촉에 시달렸소. 그래서 그는 회고록의 완성
을 몹시 기다렸지. 나머지 1백만 달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오.」
「그 회고록과 김형욱의 프랑스 여행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김형욱은 회고록이 완성된 직후 프랑스로 갔소. 김경재를 속
이기도 하고 떼를 쓰기도 해서 원본을 받아가지 고 말이오. 그는
원본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나머지 1백만 달러를 프랑스에서 받
기로 했던 거요. 이상이 그가 프랑스에 가게 된 배경이지.」
「그러니까 김형욱이 파리에 가게 된 배경에는 김재규, 즉 중앙
정보부가 관련되었군요.」
「그렇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김형욱의 죽음과 중앙
정보부를 관련시키는 데 전혀 무리가 없지 결과적으로는 결정
적인 함정이 되지만 말이오.」
「재미 있군요.」
「이제 파리에서 일어난 객관적 사실들만 나열해 보겠소. 지금
부터 이 변호사의 머리가 필요하오.」
경훈은 미소를 지었다.
「김형욱은 10월 1일 혼자서 파리로 갔소. 비행기표는 뉴욕 맨
해튼의 한 여행사에서 구입했지.그는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서
에어프랑스의 콩코드기를 타고 출발하여 파리의 를르드골 공
항에 내렸소.」
「좌석 등급은요?
「좌석은 퍼스트 클래스가 아닌 프레스티지 클래스였지. 파리
에 내린 김형욱은 바로 최고급인 리츠호텔에 가서 6박을 했소.
그러고는 10월 7일 오전 10시에 2류급인 스트엔드호텔로 방을
옮겼지. 그는 스트엔드호텔에서 체크인할 때 5일 간의 방값을
선불했소. 그러면서 파리 뉴욕 간 비행기표를 보이고는 다음날
떠나는 비행기의 자리를 예약해 달라고 부탁했지. 김형욱은 방
에서 약 30분 간 머문 뒤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한 키 큰 동양인
과 같이 나타났소. 종업원이 왜 이렇게 일찍 들어오셨냐고 묻자,
그 키 큰 동양인이 중요한 서류를 가지러 왔다고 영어로 대답했
지. 그후 김형욱은 11시쯤부터 오후 7시까지 카지노에서 게임을
한 다음 나갔소. 그러고는 행방불명이 되었지. 실종이 기정 사실
화된 후 프랑스 경찰은 스위스 경찰에 김형욱의 소재 확인을 의
뢰했고, 스위스 경찰은 소재 불명이라고 회신해 왔소. 프랑스 경
찰은 다시 전국의 경찰에 김형욱의 소재 수사를 지시했지. 이것
이 확인된 객관적 사실의 전부요. 어떻소 이 변호사의 그 천재
적 두뇌로 감을 잡을 수 있소?
「그것만 가지고는 아무런 스토리도 읽어낼 수 없는데요.」
「참 세 가지 사실이 더 있소.김형욱은 10월 3일인지 4일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파리에서 』조선일보D 신용석 특파원의 부인으
로부터 돈 3천 달러를 빌렸소. 그리고 10월 5일 점심때 카지노에
서 도박을 하는 모습이 발견되었지. 또 스트엔드호텔에 남겨
진 그의 짐 가방에는 오를리 공항의 리표가 붙어 있었소. 오를
리 공항은 유럽 각지에서 오는 비행기들이 기착하는 곳이오.」
「아, 그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들이군요.」
「그리고 또 얘기해 두어야 할 것이 있군. 개선문 옆의 르그랑
쉐르클 카지노의 지배인은 김형욱이 최소한 5일 이상 카지노에
왔다고 증언했고, 김형욱은 실종되기 전날인 6일 밤 리츠호텔에
서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다가호텔 측의 제지를 받기도 했소.
이게 드러난 모든 행적이오. 이제 새로운 홈즈의 탄생을 기대해
도 되겠소?
경훈은 턱을 고이며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던 그는 서서히 눈을 뜨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김형욱의 거주지가 뉴저지인 것으로 보아, 그가 맨해튼
에서 표를 구입했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파리에 갔다고 생각
할 수 있겠군요.」
필립 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훈의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
었다.
「일주일에 1백만 달러도 날리곤 하던 김형욱이 퍼스트 클래스
대신 프레스티지 클래스를 이용했다는 것은 당시 그의 경제 사
정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
「동감이오. 그 당시는 라스베이거스 사람들로부터 빛 독촉도
매우 심했을 테니까.」
「그런데 리츠호텔의 하루 숙박비는 얼마입니까?
「대략 8백 달러 수준이오.」
「고가 6박을 했다면 숙박비만도 거의 5천 달러군요.」
「퍼스트 클래스에 못 탈 정도의 그로서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
지
「말씀을 토대로 김형욱의 파리에서의 행적을 보면, 그는 거의
도박만하며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애초에 얼마 정도의 돈
을 가지고 갔는가가 중요하겠죠. 퍼스트 클래스엔 못 탔지만 리
츠호텔에 든 것으로 보아 김형욱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금액을
소지하고 파리로 간 것 같습니다. 」
「구체적으로 얼마 정도라고 생각하오?
「김형욱의 행적을 보아서는 대략 3만 달러에서 5만 달러 정도
그런데 파리에서 그를 만났다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좀전에 얘기한 중앙정보부 파리 지부장 이상렬이 5일 점심때
르그랑쉐르클 카지노의 1에 있는 식당에 대사관 직원들과 점
심을 먹으러 갔다가, 누군가로부터 2에 김형욱이 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인사하러 올라갔다고 하오. 전직 부장이니까 예의
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 이상렬 지부장이 인사를 하자
김형욱은 한 번 획 돌아보고는 가라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는
거요. 그래서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김형욱이 돌아
보지도 않은 채 리츠호텔에 있다고 대답하기에 그냥 내려왔다고
하지. 그때 이상렬 지부장은 김형욱의 주머니마다 두툼한 돈 뭉
치가 채워져 있는 걸 보았다고 하오.」
「그것은 김형욱이 신용석 특파원의 부인에게서 3천 달러를 빌
린 후겠네요?
「그렇소.」
「이 사건에서 김형욱이 신용석 특파원의 부인으로부터 3천 달
러를 빌렸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통의 경우가 아니거
든요.」
「그렇소. 당시 신용석 특파원은 한국에 가 있었지. 그러니 김
형욱이 웬만큼 어려워서는 그 부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얘기할
수 없었을 거요 더욱이 3천 달러는 그들 부부에게 큰돈이었을
테니까.」
경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카치를 한 모금 마셨다. 처음 머리
를 짜낼 때와는 달리 비교적 여유 있어 보였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돈을 빌리기는 참으로 어렵습
니다. 자주 보는 사이도 아니고, 더군다나 남편도 없는 상태에서
부인에게 돈을 빌리기란 더욱 어렵겠죠. 보통의 경우라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빌릴 수만 있다면
체면이고 뭐고 버린 채 돈을 빌려야 할 사람들도 있습니다. 」
필립 최는 자못 흥미로운 표정으로 경훈의 입을 주시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오?
「바로 도박꾼입니다. 부인도 잡힌다는 게 도박꾼이. 우리는
김형욱이 3천 달러를 빌렸다는 사실에서 그가 틀림없이 도박을
했다고 단정할 수 있고, 한 가지를 더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
「그게 뭐요?
「김형욱이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았으리라는 사실입니다. 그것
도 거액의 돈을 말입니다. 」
「음,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3천 달러를 가지고 그렇게 수
있는 위인은 아니지 .」
필립 최는 경훈의 비상한 머리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5일
점심 무렵 이상렬 지부장이 카지노에서 김형욱을 봤을 때 그의
주머니마다 지폐 다발이 채워져 있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얘
기는 그전에 겨우 5천 달러를 특파원의 부인에게서 빌렸다는 사
실과 대비해 볼 때 누군가로부터 거액을 받았을 거라는 추론을
입증해 주는 셈이었다.
「그것은 회고록의 원본을 넘기는 대가로 박 대통령에게서 받
은 돈일 겁니다. 」
「그것밖에는 달리 돈이 생길 길이 없었겠지.」
경훈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박 대통령이나 김재규, 차지철은 깅
형욱을 죽이지 않았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
「어떻게 그런 논리가 나을 수 있소?
「중앙정보부가 죽였느니 어쨌느니 하는 설들은 중앙정보부 측
에서 돈을 주겠다고 김형욱을 유인한 후 죽였다는 것인데, 만약
그들이 죽이려고 했다면 굳이 돈을 줄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또
그 돈을 미끼로 김형욱을 유인했을 경우에도 돈은 밖으로 유출
되지 않았을 겁니다. 돈의 유출이란 바로 김형욱의 신병이 자유
로워진다는 것을 癸하는데, 중앙정보부가 아무리 바보라도 돈을
줘놓고 신병까지 자유롭게 해둔 후 다시 접근하여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리는 없으니까요.」
경훈은사건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필립 최는 그렇게
어설픈 몇 가지 행적에 기초해서 곧바로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
는 경훈이 신비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동감이오. 김형욱이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거래가 이루어졌
다는 것과 그가 살해될 이유도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나는
그 사실을 깨닫는 데 적잖은 세월이 필요했소.」
「추리란 갈래만 바로잡으면 하기 쉽죠. 그러나 한번 방향을 잘
못 잡으면 빙빙 돌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런데 그 스트엔드호텔에 나타난 키 큰 동양인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오?
필립 최는 추리의 가닥이 잡혀간다고 생각하며 술잔을 입에
갖다 댔다. 그토록이나 베일에 가려졌던 희대의 미스터리가 풀
릴 것 같은 지금, 한잔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경훈이 생각해 들
어가는 방식은 지극히 논리적이었고, 억측이나 선입견도 전혀
없었다.
「그 동양인은 김형욱의 원고를 확인하고 돈을 지불하는 역할
을 맡은 밀사였을 겁니다. 그 사람과 김형욱은 서로를 못 믿었기
때문에, 안전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했겠죠. 아마 그래서 돈과 회
고록을 覺개서 교환했을 겁니다. 」
「아 정말 그랬을 수도 있겠군. 나는 지난 20년 간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는데 ‥‥‥‥」
「그 동양인 밀사와 김형욱은 사전에 합의를 했을 가능성이 있
습니다. 특히 밀사 쪽에서 그런 제안을 했을 겁니다. 김형욱은
믿지 못할 사람이라는 주의를 단단히 받고 왔을 테니까요.」
「틀림없소. 사실 김형욱은 그 무렵 라스베이거스의 빛에 워낙
들렸지 하지만 돈을 구할 방법이 없었소. 오직 회고록만이 유
일한 탈출구였지. 그래서 그는 김경재를 속여가면서 한편으로는
김재규와 또 한편으로는 일본의 한 출판사와 출판 계약을 맺기
도 했소.」
경훈이 사정을 짐작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러니컬하군요. 한쪽에는 출판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돈
을 요구하고, 또 한쪽에는 출판하겠다는 조건으로 돈을 달라고
했으니 ‥‥‥‥」
필립 최는 수첩을 꺼내 메모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계약에 응했던 일본 출판사들의 이름이 여기 있소. 먼저
고단(講) 출판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던 중앙정보부는 이
고단에 상당한 이권을 주어 출판을 포기 시켰지. 그러자 김형
욱이 이번에는 일본의 마도()와 계약을 해버렸던 거요.
그래서 문고판으로 축약되어 책이 나왔소. 김형욱이 얼마나 어
려웠던가를 보여주는 대목이지 .」
「김형욱으로서는 일부 내용만 실어 박 대통령을 더 다급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죠.」
「일석이조의 포석이라 할 수 있겠지. 일부에서는 회고록이 일
단 출판되어서 더 이상 가치가 없기 때문에 김형욱에게 돈을 줄
필요도 없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오. 김
형욱이 파리를 방문하기 직전에야 회고록은 모두 완성됐지. 또
한 박정희나 김재규로서는 회고록이 문제가 아니라 김형욱을 온
순하게 잠재워 두는 것이 더 중요했소. 출판이 화제가 되고 김형
욱이 온 세상에 떠들고 다닐 일이 무서웠던 거요. 또 일본에서
문고판으로 나왔던 그 회고록은 별로 팔리지 않았지만 회고록의
완간과 정식 출판은 여전히 두려운 무기였소.」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동양인 밀사는 더욱 조심스러웠겠
군요.」
「그랬을 거요.」
「그런데 제 생각엔 그 밀사와 김형욱이 처음 만난 곳이 프랑스
가 아니라 스위스였을 것 같습니다. 」
「스위스
「김형욱은 처음의 50만 달러도 비밀이 보장되는 스위스 은행
을통해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이 미국이 아닌
◎위스나 프랑스를 이용한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이
유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글쎄‥‥‥‥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국에서 박동선의 로비 파동 등으로 인해
빛어진 코리아게이트를 매우 두려워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돈을 보냈다가는 괜히 꼬리를 밟힐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김형욱과 거래를 할 수 없었던 거죠. 그러므로 처음의 50만 달러
도 스위스의 은행으로 입금시켜 김형욱에게 지불했을 겁니다. 」
죽음의 그림자
「일리 있는 얘기요. 나 같은 사람들은 근 20년을 생각하면서도
모두 프랑스만 염두에 두었지, 파리에서 만났으니까. 그게 왜 프
랑스인지, 왜 오를리 공항의 꼬리표가 붙어 있었는지에 대해선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소.」
「증언을 토대로 김형욱의 일정을 재구성해 볼 수 있을 것 같습
니다. 」
「일정을
예.
「카지노 지배인은 김형욱이 최소한 3일 이상 왔다고 증언했는
데, 그것을 토대로 하여 그의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 김형욱은
첫날인 1일 밤엔 자거나 카지노에서 게임을 했고, 둘째 날인 2일
과 3일에도 카지노에서 게임을 했을 겁니다. 스위스에는 아마 4
일 오전에 갔다가 그날 밤에 돌아와 5일에 다시 카지노에서 게
임을 했을 거구요. 그런데 6일에는 게임을 했을 것 같지 않습니
다. 그날 밤 리츠호텔에서 술에 취해 소란을 피웠다니 말입니다.
7일에는 게임을 했을 겁니다. 아침에 호텔을 옮긴 후 그날 저녁
까지 게임을 하고는 실종되었으니까요.」
「그렇겠군.」
「프랑스 경찰이 스위스 경찰에 김형욱의 소재 확인을 의뢰한
것으로 보아 그가 스위스에 갔다 온 것은 틀림없겠죠?
「그렇소. 게다가 오를리 공항의 꼬리표가 확실한 증거요. 스위
스에서 오는 비행기는 전부 오를리 공항에 내리니까.」
이제 경훈의 추리는 무르익고 있었다.
「7일 오전 김형욱이 스트엔드호텔의 방에 머물다 나가서
키 큰 동양인을 데리고 들어왔다는 것은 그와 나머지 일을 처리
하려고 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일이 아니고서는 로비나 커피
숍에서 만나고 말지 굳이 방에까지 데려을 필요는 없었을 테니
까요.」
「그 동양인이란 한국인일 것 같소?
「아마 그럴 겁니다. 영어로 대답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
는 프랑스에 살던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면
서 불어를 쓰는 사람이 없듯이, 프랑스에 살면서 영어를 쓰는 사
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는 한국에서 임무를 띠고 간사람일 겁
필립 최는 약간 충격을 받은 듯했다
「놀랍소, 이 변호사. 모든 것이 너무나 쉽게 풀리는군. 내가
20년을 두고 생각해 왔던 것들을 이렇게 순식간에 해결하다니
· 그럼 그 동양인이 종업원에게 중요한 서류를 가지러 왔다
고 대답한 것은 회고록을 말했던 거요?
「아마 그의 잠재 의식 속에 있던 회고록이 그대로 튀어나왔을
겁니다. 」
필립 최는 술잔을 들어 경훈의 앞에 내밀었다.
「이렇게 기분 좋은 밤은 참으로 오랜만이군 수수께끼가 풀려
간다는 사실보다도 이 변호사 같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경외릅기까지 하오. 자, 한잔합시다. 」
경훈도 기분 좋게 술잔을 부딪쳤다.
「자, 이제 김형욱 사건을 연구하는 사람들 모두가 가장 궁금해
하는 점을 좀 풀어주시오. 모두가 그것을 미스터리 중의 미스터
리라고 하지.」
경훈은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으며 필립 최의 다음 말을 기다
렸다. 과연 무엇이 최대의 미스터리란 말인가.
「도대체 왜 김형욱은 리츠호텔에서 스트엔드호텔로 옮겼을
까 하는 점이오.」
필립 최는 위스키의 톡 쏘는 맛을 혀 끝으로 음미하며 질문을
던졌다.
「최 선생님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글쎄· .그것이 가장 풀기 어려운 의문점이었소. 그는 왜
호텔을 옮겼을까?
필립 최의 복잡한 표정을 한참 들여다보던 경훈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함정입니다. 중앙정보부의 공작론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아
무것도 아닌 것을 괜히 이상하게 보는 함정에 빠질 수 있죠. 공
작론자들은 김형욱이 아마도 리츠호텔에서 뭔가에 쫓겨서, 혹은
예감이 좋지 않아서 그랬을 거라고 얘기할지 모릅니다만 거기에
또 함정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쉽게 걸
려드는 함정이죠. 결과적으로 김형욱이 실종되었으니까 호텔을
옮긴 것도 신변의 안전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게
됩니다. 그러나 신변의 안전을 도모했다면 원래의 리츠호텔에
그냥 머무르는 것이 더 나았을 겁니다. 작은 호텔이 더 위험하니
까요.」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아마 김형욱이 스트엔드호텔에서 체크인할 때 비행기표를
보이며 뉴욕에 갔다 온다고 했던 것과 관계가 있겠죠. 스트엔
드호텔의 숙박비는 얼마입니까?
「1백 달러 정도요.」
「그는 미국에 갔다 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짐과 골프 클
럽은 놔둔 채로 말입니다. 그러자면 방이 있어야 할 테고 하루에
8백 달러나 하는 리츠호텔은 부담스러웠겠죠.」
「그렇군.」
「김형욱 사건의 진정한 문제는 사람들이 그를 매우 특수한 신
분의 인간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권력자였던 사람도
오늘 형무소에 갈 수 있고, 어제까지 재벌 총수였던 사람도 오늘
은 교통비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김형욱, 그는
파리에 갈 무렵 돈이 절박한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방에
짐을 두고 뉴욕에 갔다 오면서 하루에 8백 달러나 하는 비싼 방
대신 1백 달러 하는 싼 방으로 옮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지요.」
「그럴까 그렇다면 나도 그 손쉽고 간단한 이치를 버려둔 채
수십 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골치를 썩이며 세월을 보낸 사람 중
의 하나란 말이군.」
필립 최는 한동안 곰곰 생각하다가 고개를 무겁게 흔들었다.
「그런데 왜 김형욱은 돈을 챙겼으면서도 파리로 다시 돌아오
려고 했을까?
「음, 그것은 라스베이거스의 빛과 관련시켜 살펴볼 부분입니
다. 돈에 들리던 김형욱은 거액을 손에 쥐자 일단 집에 갖다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도박꾼의 아내가 얼마나 고생
하는지는 아시죠 그도 아내와 자식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았을 겁니다. 그래서 급히 미국으로 가 아내에게 돈을 주고 싶
었겠죠. 쓸 데가 너무도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역시 도박이었죠. 그는 이제껏 잃은 돈으로 인
한 괴로운 기억에서 헤어날 수는 없었던 겁니다. 그 돈을 찾는
길은 역시 도박뿐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러나 라스베이거스에
는 다시 갈 수 없었습니다 빛을 갚아야 했으니까요. 김형욱이
스트엔드호텔로 옳긴 것은 이런 두 가지 욕망을 다 만족시키
려는 의도에서 였습니다. 즉 일단 미국에 가서 아내에게 돈을 준
뒤, 일부는 도로 가지고 와 게임을 해서 돈을 딴다는 계획을 수
행하기 위해서였죠.」
「역시 김형욱이 호텔을 옮긴 것은 값비싼 퍼스트 클래스를 타
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일까?
「그렇습니다. 」
「가장 상식적인 추리가 가장 올바른 결론이란 말이지.」
「옳은 판단이란 늘 상식에 맞아야 합니다. 」
「음, 솔직히 놀랐소. 파리에서의 김형욱의 행적에 대해서 이
변호사처럼 완전한 추리를 해내는 사람은 보지 못했소.」
필립 최는 경훈의 추리를 한동안 찬찬히 곱씹었다. 그러던 그
는 혼돈에 잠겼던 표정을 풀고 이제까지의 오랜 논리 여행을 마
감하려는 듯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뿜었다. 그는
나직하나마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이 변호사의 추론에 의거하여 결론을 내
릴 때가 된 것 같소. 사실 결론은 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말씀해 보십시오.」
「김형욱은 큰 실수를 범했소. 워낙 심하게 빛 독촉에 쫓긴 나
머지 라스베이거스의 채권자들에게 파리에 가서 돈을 받기로 했
다고 말해 버렸던 거요. 라스베이거스의 채권자들을 과소 평가
했던 거지, 라스베이거스의 채권자들은 사람을 보내 김형욱을
은밀히 미행했다가 그가 정말 돈을 받는 것을 보고는 안심했소.
하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지. 그 돈은 김형욱이 자신들한
테 주기 전까지는 여전히 김형욱의 것이었으니까.그런데 문제
가 터졌던 거요. 김형욱은 돈을 받고 나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
고 계속 도박을 했던 거지 라스베이거스의 채권자들은 도박을
아는지라 덜컥 겁이 났소. 워낙 배팅이 센 김형욱이 파리에서 돈
을 모두 잃어버릴 가능성이 너무나 높았던 거요. 라스베이거스
의 채권자들은 이미 미국에서 거덜난 김형욱이 그돈마저 잃으
면 영원히 빛을 받지 못하리란 생각에 조급해 졌소. 그들은 라스
베이거스의 보스에게 상황을 보고했지.」
「결론은요?
「뻔하지. 김형욱이 돈을 전부 잃기 전에 즉각 덮쳐 돈을 뺏으
라는 지령이 떨어졌던 거요.」
「라스베이거스 사람들이 파리에서 그렇게 완벽하게 범행을 저
지를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식은죽 먹기요. 라스베이거스의 뿌리는 이탈리아 마
피아들이지 . 흑인 조직들이 라스베이거스에는 아예 발도 못 붙
이는 것을 보시오. 흑인이 출몰하면 라스베이거스는 끝장이라고
생각한 마피아들이 라스베이거스로 오는 모든 흑인 조직원들을
사막에 파묻어버린 거요. 세계적으로도 라스베이거스는 최고의
마피아들만이 장악하고 있소. 그리고 파리는 이탈리아 마피아들
의 앞마당이오. 보스가 한번 결정을 내리면 그후에는 죽음밖에
없소. 김형욱은 돈을 다 빼앗기고 죽었을 거요.」
경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형욱의 파리에서의 행적은
필립 최의 결론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필림 최는 자신도 도박을
하는 입장이라 감회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특히 김형욱은 그가
도박의 길로 들어서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람이지 않은가.
「김형욱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돈으로만 생각하는 미국 사회
에서 탈출하고 싶어했소. 그러나 조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고,
외롭고 지친 영혼을 도박으로 달랬지. 결국은 죽음으로써 그 괴
로운 삶에 종지부를 찍고 만 것이오.」
「최 선생님의 배경 설명이 없었다면 김형욱 사건을 추리하는
데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도박에 刻힌 김형욱의 삶
을 모른 채 과거의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시각으로만 보면 필연적
으로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되니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파리에서의 행적에 대한 논리적 추론인데,
그것을 이 변호사가 풀어주었으니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거요. 고맙소.」
경훈은 자신의 추론을 곰곰 되새기며 무의식중에 창 밖을 내
다보았다. 사막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필립 최가
술잔을 들어 부딪쳐왔다. 경혼은 스트레이트 잔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사막과술,그리고 도박이 있는 이 도시의 밤이 이제는
낯설지 않게 감겨들었다.
경훈은 건너편 사막으로 천천히 눈길을 옮기다가 문득 필립
최가 김형욱의 실종을 쫓는 것이 단순히 아는 사람의 실종에 대
한 의문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필립 최는
자신의 앞날에 대해서 어두운 의구심을 품은 채 김형욱의 실종
을 추적 했는지도 모른다.
「최 선생님은 어떠세요 선생님의 운명은 어떠리라 생각하십
니까?
필립 최는 웃었다.
「나도 언젠가는 이 도박에서 패하고 말 것이라 생각하오. 조금
이라도 긴장을 풀면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금방 덮쳐오지. 나
는 느낄 수 있소. 제 명에 죽지 못할 나의 운명을 말이오. 현명한
사람은 지기 전에 그만두는 법이오, 케렌스키처 런 .」
「케렌스키 변호사님처 럼이라구요?
「그렇소.」
「하지만 케렌스키 변호사님은 도박에서 지지 않았습니까?
필립 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지 않소.」
「이해할 수 없군요. 그분은 분명히 도박에서 패했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케렌스키가 도박에 심취했던 것은 분명하오. 하지만 사실상
그는 도박을 이용하여 절묘하게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가고 있
었소.」
「그분의 목표가 뭐였죠?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 아마도 그의 투쟁이라고
나 할까. 잘 모르겠소.」
「투쟁이 라구요?
경훈은 비상한 호기심이 솟았다 어쩐지 케렌스키가 도박에
패해서 자살했다는 사실이 그리 가깜게 다가오지 않던 참이었
다. 게다가 그가 다이어리에 써두었던 '성전'이란 단어가 뚜렷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분의 투쟁이란 도박이 아니었습니까?
필립 최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프로는 상대의 게임을 보면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알 수 있
소. 케렌스키는 아주 거대한 적과 싸움을 하고 있었을 거요. 그
와 같은 강력한 인물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런 적 말이오.」
경훈은 필립 최가 케렌스키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필립 최의 행동에 이상한 점
이 있었다. 경훈이 70만 달러나 되는 엄청난 돈을 내밀었을 때
필림 최는 세어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전에 그만한 돈을
빌려준다는 것 자체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째서 케렌스키 변호사님께 그런 큰돈을 빌려주시 게 되었습
니까?
필립 최는 손으로 턱을 한 번 쓰윽 어내렸다.
「케렌스키가 보스턴에서 급히 전화를 걸어와 내게 부탁했소.
한 사나이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달라고 했지. 내 돈을 지불하고
말이오.」
「그것이 그때 저에게 주셨던 그 목갑입니까?
「그렇소. 나는 순간적으로 망설였지만, 케렌스키의 너무도 다
급한 목소리와 평소 그의 인품을 보아 수락했지. 내게 그 목갑을
건네준 사나이는 쫓기는 듯했소. 그 사나이는 물건을 넘기고 돈
을 받자마자 떠났지. 그때 나는 직감적으로 케렌스키가 뭔가 다
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소. 그리고 그것이 그의 신분에
맞지 않게 위험한 일이라는 것도.」
경훈은 그때 왜 필립 최가 자리를 피하고 목갑만 자신에게 전
달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필립 최는 일단 케렌스키의 부
탁을 들어주긴 했지만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목갑을 가지고 있는 데서 오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카지노 호스트에게 맡겨두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전달하라고 했
던 것이다.
「최 선생님은 그런 일이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모
양이군요.」
「프로로서의 직감이오.」
「케렌스키 변호사 님의 자살에는 정말간단치 않은 이유가 있
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적은 누구일까요?
필립 최도 거기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경훈은 일단 의문을
묻어두고 잔을 들었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떠나겠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밤엔 한잔 마셔야 하지 않겠소?
필립 최는 기어코 경훈의 팔을 붙들었다.
「여기에도 한국 노래를 부를 곳이 많으니 같이 갑시다. 」
경훈은 필립 최를 따라 밤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목갑의 비밀
다음날 경훈은 라스베이거스를 떠나 보스턴으로 향했다. 은행
의 대여 금고에 보관해 둔 목갑을 찾아 한국으로 가지고 갈 생각
이었다. 그런데 케렌스키가 왜 자신에게 그 목갑을 맡기고 자살
해 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청난 돈을 주고 얻은 목갑이라
면 아주 중요한 물건일 텐데 왜 자신에게 맡겼던 것일까.
보스턴에 도착한 경훈은 바로 은행으로 갔다. 그는 무심코 대
여 금고에서 꺼낸 목갑을 가방에 넣으려다가 흠칫 놀라 손길을
거둬들였다. 테이프로 붙인 셀룰로오스 띠가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잠깐, 잠간 기다려요」
경훈은 급히 금고문을 닫으려는 은행 직원을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누가 이 목갑에 손을 댔습니까 누구에게 열어주었나요?
「그럴 리가요?
직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목갑을 들고는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아무 문제 없는데요.」
「어,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
「아니, 괜찮습니다. 」
미소를 머금는 직원을 보며 경훈은 자신이 너무 과민했다고
생각했다.
「택시를 불러주세요.」
예.
경훈은 목갑을 가방에 넣은 다음 도망치듯이 은행을 나왔다.
누가 뒤에서 지켜보는 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황급히 올라탔다
경훈은 택시 운전사에게 공항으로 가자고 말하고는 차창 밖으
로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손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가방 속의 목
갑을 확인했다. 무심코 차창 밖을 바라보던 경훈은 예전과는 다
른 코스로 택시가 가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디로 가는 거요 공항으로 안 가고‥‥‥‥」
「네, 물론 공항으로 갑니다. 그런데 오늘 시내는 행사 때문에
차가 너무 막혀서요. 외곽 도로로 가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
운전사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무슨 소리요, 행사라니 막혀도 좋으니까 시내로 갑시다. 」
운전사는 툴툴거리면서도 시내로 방향을 바꾸었다 경훈은 한
참 만에 공항에 도착해서야 자신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스턴을 떠난 비행기가 뉴욕의 공항에 착륙하자 경훈은 바로
국제선으로 옮겨탔다. 그는 일찌감치 게이트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있다가 탑승 수속이 시작되자 곧장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
다. 갑갑하지 만 제일 안전한 방법이었다.
경훈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는
자신의 직관이 왜 그처럼 날카롭게 퍼덕거렸는지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경훈은 이내 그 목갑이 자신의 오감을 시종 강하게 자극하고
있다는 ◎실을 깨달았다. 몇 번이나 목갑을 뜯어보고 싶었으나
참았다. 케렌스키가 죽고 없는 지금, 경훈이 목갑을 열어본다고
뭐라 그럴 사람은 없지만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케렌스키가 죽지 않았다면
경훈은 마침내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케렌스키는 실종을
염두에 두고 자신더러 이 목갑을 찾아오라고 부탁한 것은 아닐
까, 더욱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고 신신당
부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상하게도 목감을 보면 케렌스키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장례식까지 치렀지만
경훈의 의문은 지워지지 않았다.
경훈은 목갑을 가방 깊숙이 밀어넣었다 틀림없이 목갑 안에
는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 들어 있겠지만 그 물건을 보는 순간 또
하나의 복잡한 사건에 말려들 것 같았다. 지금 추적하고 있는
10 · 26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때 가서 열어보리라 생각했다.
경훈이 한국에 돌아와서 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말끔
히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경훈은 바로 인남
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인남은 별일 없이 잘 있었다.
아직도 긴장하고 있는 경훈의 목소리를 듣더니 인남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경훈이 아무 일도 없다고 하자 그녀는 이
내 밝은 목소리를 쏟아냈다.
「고생했구나, 여행은 어땠니?
「왜 성과가 있었어.」
「잘됐네.」
「넌 어때?
「너한테 알려줄 게 있어.」
「뭔데?
「만나자 만나서 얘기해, 우리.」
「글쎄, 그래도 좋겠지만 궁금한데 먼저 알려주면 안 돼?
응.
인남은 어쩌면 도청이라도 당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경훈은 바로 자신이 도청을 조심하라고 했던 기억
이 떠올랐다.
인남은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런데 너 지나치게 사건에 빠져 있는 것 아니니목소리가
아주 급한데. 예전의 그 침착하고 여유 있던 네가 아니야.」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구 어서 얘기해 봐.」
인남은 잠시 망선이다가 결단성 있게 거부했다.
「안 돼 .」
「알았어, 만나서 얘기하자 어디서 볼까?
경훈의 말에 인남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오늘 말고 내일 만나.」
「그럴래 내일 어디?
「청량리역 시계탑 앞.」
경훈은 인남의 뜬금없는 제안에 뭐라 대꾸할 말을 잃었다
「오후 1시, 괜찮아?
「무슨 소리야 청량리역이라니?
「아무 소리 말고 나와. 나와보면 알아.」
경훈은 별수없이 그러마고 대답했다.
노벰버
다음날 경훈은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편한 차림으로 느지막이
사무실에 나갔다. 그러나 책상 앞에 앉자마자 케렌스키의 얼굴
이 떠올랐다. 게다가 가방속에 넣어 가지고온목갑이 계속신
경에 거슬렸다. 경훈은 자신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케렌스키
의 장례식을 생각하니 그의 죽음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하
지만 또 한편 자신의 직관은 납득할 수 없는 그 자살의 언저리를
날카롭게 혜집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방문객은 회사의 대표였다.
「이 변호사, 슬슬 몸이 좀 풀렸소?
「아. 네.」
89
「우리는 모두 이 변호사가 그 뛰어난 두뇌로 회사 일에 뛰어들
어 쾌도난마의 시원한 솜씨를 보여줄 날을 기다리고 있소.」
대표는 웃으며 있는 농담을 했다.
「알겠습니다. 」
대표가 나가자 경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이제 회
사 일로 복귀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창 밖을 보니, 삼각산이 한창 푸르름을 더해가는 신록으로 둘
러싸여 있는 모습이 시원스레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삼각산 상
공을 솔개 한 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었다. 저 솔개는 삼각산 기
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똑똑한 것
같아도 고작 땅 위에서 움직이는 2차원적 동물일 뿐이다. 제 나
라의 대통령이 죽은 이유나 과정 따위엔 관심도 없이 무슨 역사
를 얘기하고 사회를 얘기할 것인가. 암담했다.
그러나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사람이란 어차피 자기 목숨 하
나를 이 어가기도 힘든 존재가 아닌가. 누구라 한들 자신의 생업
과 관계없는 일에 단 하루라도 온전히 투자할 수 있겠는가. 경훈
은 그럴수록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느꼈다.
경훈은 선 채로 눈을 감고 차분하게 생각을 더듬어갔다. 먼저
제럴드 현이 케네디와 박정희의 암살을 같은 시각으로 보는 것
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암살의 배후가 같다는 얘기인가. 다
음으로 케네디 전문가인 빌은 케네디 암살의 배후에 군산복합
체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박정희 암살의 배후에도 역시 군
산 복합체가 있다는 말인가.
경훈이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전화 벨이 울렸다. 인남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경훈은 인남과의 약속을 깜빡 잊어버렸던 것이다.
「미안해. 뭐 좀 생각하느라 잊고 있었어.」
「거봐, 지금 너 무언가에 너무 몰두해 있어. 당장 나와.」
「그래, 바로 나갈게. 청량리역 시계탑이라고 했지.」
왜 하필 청량리역인가 의아해하며 경훈은 급히 사무실을 나섰
다. 시계탑 앞에서 경쾌한 복장으로 기다리고 있던 인남은 경훈
을 보자 싱긋 웃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등산을 가는 거야.」
「무슨 소리야, 등산이라니
「그래. 널 위해서도 좋을 테고 나도 한국에 오니까 심심하거
든. 너는 별로 연락이 없지 고등학교 친구들은 시집갔거나 아니
면 직장다니느라 바쁘지‥‥‥‥ 내가 너에게 별 도움이 안 되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까 해.」
인남의 목소리가 갑자기 생기를 잃었다. 경훈은 그제야 인남
이 한국으로 온 후 한 번도 따스하게 대해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속으로는 네 생각 많이 하는데, 연락을 못했어. 미안해.」
「호호, 그러니까 같이 등산을 가겠다는 거지?
경훈은 인남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마침 케렌스키에
대해 좀 떨어져서 생각해 보려던 참이었다. 케렌스키의 목갑을
보자 그의 자살에 대한 강한 의구심과 함께 자신에게 마지막으
로 남겼던 그의 말이 뇌리에 생생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형제, 이것은내 일이지만 동시에 이 변호사의 일이기도하
오. 언젠가 이 형제라는 단어가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오
「어디로 가자는 거야?
「일단 영월로 가자 거기서는 동서남북이 다좋아. 여기서 기
차 타고 가면 차창 밖의 경치도 멋지고, 치악산을 지나 영월로
가는 길도 아주 쾌적해 영월에서는 단양으로 둘러서 소백산 등
산을 하면 1박 2일 코스로는 제격일 거야.」
「1박 2일이라구
「그래, 1박은 해야 돼. 토요일 저녁엔 영월의 동강 부근에서
민박을 하고, 일요일 새벽에 일어나 남천계곡에서 소백산 연화
봉까지 올라갔다가 희방사계곡으로 내려오면서 폭포랑 절 구경
도 하면 일정이 맞을 거야. 그리고 희방사역에서 청량리로 오는
기차를타면 되거든 서울에 도착하면 밤9시쯤될 거구 그러면
찬 생맥주나 한잔하고 헤어져.」
영월까지의 기차 여행은 쾌적했고 경치도 좋았다. 기차가 높
다란 철교를 통해 치악산 고개를 지날 때에는 아슬아슬했고, 원
주에서부터는 철로를 따라 졸졸졸 흐르는 차창 밖의 시냇물이
상쾌함을 더해뒀다
기차는 신림, 구학 봉양이라는 이름의 시골역을 차례로 지나
제천역에 도착했다. 제천은 분지에 자리잡은 도시라 바람이 시
원하고 물이 깨끗했다. 부근에 오염원이 전혀 없어서인지 마을
사람들의 성격조차도 시원스러워 보였다.
제천에서 영월까지는 불과 5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라 역
전에서 택시를 탔다.
「여기는 강원도 같은 충청도군요.」
경훈의 말에 택시 운전사가 웃었다
「같은 충북이지만 제천 사람들은 충주 사람하고는 아주 달라
요. 아마 충주는 평야고 여기는 산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충주
사람들은 얌전한 반면 여기 사람들은 억세고 의리가 강하다니까
요. 한말 의병도 제천에서 처음 났구만요.」
운전사는 그 지역 토박이라 그런지 경훈이 제천에 대해 호감
을 드러내자 신이 나서 말이 많아졌다.
「옛날엔 제친 깡패들이 얼마나 무서웠다구요. 인근 도시는 말
할 것도 없고 청량리까지 원정 가서 서울놈들 다 질패고 내려왔
지 않구선요. 근데 이젠 확 바뀌었어요. 교육 도시가 돼버렸다니
까요.」
「대학교가 있습니까?
「그렇잖구선요. 대학이 둘이나 생겼지요. 서을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몇천 명이나 오니까 이 끄만 도시가 금세
교육 도시가 돼버리지 않구선요. 사실 공기 좋고 물 맑은 데 푹
처박혀 한 4년 열심히 공부하면서 실력 키우기에는 여기만한 데
가 또 있을라구요. 학교도 산에 들어박혀서 경치가 그만이잖구
선요.」
동강 어귀의 마을에 도착해 동강을 따라 내려가는 보트를
탔다.
「경훈이 너 그러다간 평생 사무실에 묻혀 폐병쟁이 될걸.」
「뭐, 폐병쟁이?
「그래, 가뜩이나 몸도 실팍치 못한 애가.」
「하하하」
경훈은 유쾌하게 웃으며 인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보트는
물살을 가르며 동강의 비경을 따라 내려갔다. 불어오는 강바람
이 사건을 푸는 데 여념이 없던 경훈의 머리를 상쾌하게 식혀
주었다.
보트는 강을 따라 한참이나 내려간 끝에 동대리를 지나 향산
에 닿았다. 두 사람은 보트에서 내려 온달산성과 고수동굴을 구
경한 다음 단양 시내로 들어가 호텔에 방을 잡았다
「더블 베드로 해드릴까요 아니면 트윈 베드?
「아니, 방 두 개로 해주세요.」
경훈과 인남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나온 소리에 종업원은 의외
라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늦은 저녁을 먹은 뒤 호수가 내
려다보이는 자리에서 맥주를 마셨다.
「충주댐이 생기면서 원래의 단양은 묻혀버렸대. 그러니까 신
단양은 호수 때문에 새로 생긴 도시야.」
「끔찍한 일이군.」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모든 것을 바칠 듯하다가도 일단
헤어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남보다 더 멀어져버리잖아.」
「난 헤어진다는 게 너무 무서워, 가까웠던 사람을 잊어야 한다
는 건 끔찍한 고통일 거야. 그런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아무도
좋아하지 않겠어 .」
「너 그 사람 만났니?
「누구?
「미국에서 널 외롭게 했던 사람 말이야.」
「아니 ‥‥‥‥
「그렇게 그리워 했잖아.」
「글쎄. 한번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에만 있지 실제
로는 만나게 되지 않아. 아마 이런 게 잊혀진다는 건가 봐.」
출렁이는 호숫가에 비치는 달빛이 물결을 따라 넘실거렸다.
초여름의 따스한 바람이 두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낭만적
인 밤이었다.
「이런 밤에 어울리지 않는 얘기지만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어. 그 첫 번째 구절 말이야, 기억나니?
경훈은 웃었다. 인남은 역시 엉뚱했다. 인남의 매력은 바로 이
런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훈은 나직이 소리내어 첫 번째
구절을 읖었다.
이제 노벰버를 스터디하는 것이 대세다. 그리고 그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모두가 등을 돌리고 있다
「맞아, 역시 넌 기억력이 좋구나. 내가 생각해 봤는데 하나는
분명해.」
「그 하나가 뭐지?
「너도 생각해 歌니?
「응, 그런데 아무것도 안 떠오르던 데.」
「그 '노벰버' 말이야, 그게 뭔지가 중요하지 않겠니?
「그렇지.」
「11월이잖아, 노벰버란.」
「그래 .」
「그게 해답이야.」
「무슨 소리야?
「11 말이야, 11이 해답이라구.」
「11이 해답이라니?
「11기, 육사 11기란 말이야.」
「육사 11기라구?
「그래, 육군사관학교 11기 .」
경훈은 뜻밖의 해석에 깔짝 놀랐다. 그러고는 인남이 얘기한
11기를 노벰버 대신 집어넣어 보았다.
「이제 육사 11기를 스터디하는 것이 대세다. 모두가 등을 돌리
고 있다. 」
「이 문장은 아마 현 선생님이 정신적 장애를 겪기 전에 쓰신
것 같아. 맨 앞의 '이하라는 말은 상황의 변화를 뜻하지 않을
까?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지 노벰버가 은어인 것은 확실
하지만 어째서 육군사관학교의 11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
느냐구?
「현 선생님의 직업과 연결시켜 보면 가장 자연스런 해윽이 아
니니 그분은 주한 미군의 공작 책임자였어. 게다가 10 · 26의 비
밀과 관련해서 이 메모를 남기셨구.」
「어 , 그렇지 」
경훈은 인남의 순발력에 놀랐다.
「다음의 '스터디'라는 말은 '연구한다'는 개념인데,문자그대
로 옮기면 육사 11기를 연구한다는 말로 해석돼.」
경훈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인남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열심이었다.
「'대세'라는 단어는 현 선생님 사무실 안의 분위기를 말하는
것 같아. 왜냐하면 그것이 그 다음의 '내가 해야 한다'라는 말과
일치하기 때문이지 .」
「 '모두가 등을 돌리고 있다'란?
「그건 나도 한참 생각했어. 그런데 그 문장만으로는 상대가 불
분명해. 누구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는
단 말이야. 현 선생님 본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고, 아니면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지.」
「훌릉해.」
경훈에게는 갑자기 인남의 성실한 태도가 부각되었다. 자신은
의미도 모르는 채 머릿속에 접어둔 것을 그녀는 나름대로 열심
히 생각해 오지 않았는가.
「육사 11기를 연구해야 한다는 문장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
을 것 같아.」
경훈도 동감이었다.
「그래,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드는데.」
「좋은 예감이라니?
「너의 그 암호 해독이 큰 결과를 가져올 것 같단 말이야.」
「호호,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 나 무시하지 마.」
「알았어. 하지만 난 한 번도 너를 무시한 적이 없어.」
경훈은 '대세'라는 단어에 신경이 쓰였다. 육사 11기를 연구한
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역사 속에서 육사 11기는 한국의
권력을 장악하고 두 사람이나 되는 대통령을 배출했다 제럴드
현이 쓴 문장은 그 역사적 사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아
니면 지나친 상상일까.
아무리 가볍게 넘기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제럴드 현의 그
문장과 두 사람이나 되는 육사 11기 출신 대통령이 겹쳐져 뇌리
에 떠올랐던 것이다.
「 '모두가 등을 돌리고 있다'라는 것의 상대는 제럴드 현이 아
닐 거야.」
인남은 경훈의 추측에 얼른 되물었다.
「그럼 누구지?
경훈은 잠시 말이 없다가 불현듯 생각난 듯 혼자말처럼 중얼거
렸다.
「박 대통령.」
「박 대통령?
「그래, 모두가 박 대통령에게서 등을 돌린다는 것으로 해석할
때 여러 가지가 맞아떨어지잖아.」
「그러니까 모두가 박 대통령에게서 등을 돌리니 현 선생님
이 육사 11기를 스터디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
이니?
「그래 .」
「그게 무슨 뜻일까?
「음‥‥‥‥」
경훈이 짧게 신음을 토했다. 만약 이 해석이 맞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승화가 김재규와 그날 궁정동에 같이 있었다
는 관점에서 10 26이 12 · 12를 태동시 켰다고 말하지만, 이 해석
은 다른 면에서 10 · 26과 12 · 12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왜 갑자기 입을 다물어?
「이것은 쉽게 결론 내릴 일이 아닌 것 같아. 만약 제럴드 현이
이런 뜻으로 그 메모를 남겼다면 대단한 거잖아.」
인남은 경훈이 다시 깊은 생각에 몰입해 들어가려 하자 서둘
러 말을 꺼냈다.
「그 다음 두 문장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경훈은 머릿속으로 제럴드 현의 메모를 떠올려보았다.
-하문. 이놈은 왜 나를 슬슬 피하는 걸까 나 모르게 할 수 있
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아는 녀석이 왜 그러지
-제리,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해줄게라고 하문, 네가, 네가
그럴 수 있는 거야 그 자식은 이미 빼돌리고
「무슨 뜻이지, 그건?
경훈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 '하◎이란 이름이 참 이상해.」
「나도 그렇긴 했어 .」
「그건 이름만일까 아니면 성도 포함된 걸까?
「확실치 알아.」
「문장의 뜻은 비교적 간단한 것 같아. 하지만 처음 문장과 두
번째, 세 번째 문장의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모양이야.
자세히 보면 볼펜의 진하고 옅은 정도가 다르거든.」
「음, 예민한 관찰력이구나.」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장은 같은 맥락이야. 하문이라는
사람이 현 선생님을 슬슬 피하다가 누군가를 빼돌린 거지. 그러
고는 미안하니까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한 거야.」
「그래, 하지만 그 이름은 정말 낯설다. '하'가 성일 수도 있고,
'하문'이란 게 성이 빠진 이름일 수도 있고 말이야.」
인남도 역시 하문이란 이름이 익숙하게 꼭닿지 않는지 입 속
으로 몇 번이나 반복해 보았다.
「인남아, 좀더 생각해 보자. 이런 건 잊어버리고 있다 보면 어
느 순간 탁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으니까.」
경훈은 금세 깊은 생각에 빠지는 인남을 위로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인남은 경훈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즐거운지 의기양양
하게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맞아, 생각 안 나는 거 억지로 쥐어짜면 머리만 아파. 편하게
살자. 나처럼 말이야.」
경훈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한턱내. 그거 생각하느라 몸무게가 2킬로그램쯤은 빠졌으
니까.」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다리안폭포를 거쳐 소백산에 올라갔다
가 희방사 쪽으로 내려왔다. 아침부터 강행군을 한 탓인지 희방
사역에서 청량리행 기차를 타자 몸이 피곤했다. 하지만 두 사람
의 얼굴에는 큰 산을 하나 넘었다는 뿌듯함이 어려있었다
인남은 기차에 오르자 곧 잠이 들었다. 경훈은 인남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녀와 미국에서 처음 만나던 때로부터 지금 등산
을 오기까지의 과정을 다시금 더듬어보았다.
제럴드 현이 얘기한 10 · 26의 비밀은 이제 하나하나 풀려가는
듯도 했고 아닌 듯도 했다. 결정적 증거나 증인이 전혀 없는상
황에서 그 엄청난 사건을 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도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어려웠다.
다만 이것은 제럴드 현과 그의 메모, 브루스와 흘리건, 김재규
행동의 미스터리,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어딘가에서 먼지를 덮
어쓰고 있을 비밀 기록들을 종합하여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방대한 작업 이었다.
거기에 인남은 또 하나의 큰 숙제를 가지고 온 것이다. 노벰
버, 그것이 의미하는 게 육사 11기라면 제럴드 현은 왜 육사 11
기를 스터디했던 것일까.
** 여)라
청량리역에 내린 후 경훈은 인남의 오피스텔 부근으로 가서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인남이 말했다.
「늦었는데 그냥 가까운 데서 먹는 게 낫지 않을까?
「데려다 주려고.」
「어머, 황송해라.」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가다 인남의 오피스텔 근처에 있는 식
당 앞에서 내렸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한 다음 인남은 경훈
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돈이 필요하면 얘기해.」
「마치 무슨 보스가 하수인에게 얘기하듯 하는구나. 너 돈 생기
니까 좋니?
「돈이 있으니까 마음은 한결 편해. 그렇다고 내가 낭비를 하거
나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왠지 불안하곤 하던 게 없어졌어.나
도 속물인가 봐. 이 나이에 벌써 돈타령이라니. 호호.」
말은 그렇게 해도 인남은 돈이 있다는 사실이 싫지는 않은 모
양인지 목소리가 가벼웠다.
「이것저것 좀 사고 그랬어?
「아니, 생각만 그렇지 손은 안 나가져.」
「요즘도 맥주 마시니?
「물론. 위스키는 생각도 안 해. 안 마시던 거니까 맛이 없어.
맥주는 살찔까 봐 겁나고 해서 소주를 좀 마시는 편이야. 애들
만나니까 다 저희들이 사더라. 내가 얼마나 부잔지도 모르고 말
이야. 호호.」
「너 돈 있다고 그렇게 자꾸 호호거리니까 정말 속물 같다. 」
「참, 일전에 미국 있을 때 변호사 사무실에 들렀는데 그 변호
사가 나보고 자기하고 만나재, 사람이 좀 우습달까 솔직하달까.
이혼하고 흔자 산다는데. 유산 때문에 그런 건 아니라고 그러면
서 뭐 내가 매력이 있대나 어떻대나.」
「어떻게 처신하고 다녔기에 그런 말을 들어
경훈은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해 비아냥거렸다.
「물론 문제는 내게도 있지 뭐. 수녀처럼 엄숙한 표정을 유지하
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너 왜 얼굴빛이 그렇게 변하니?
인남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경훈의 반응을 살폈다.
「아냐, 아무것도 아냐.」
「경훈이 넌 내게서 어나지 못할 운명이야. 전에도 그랬는데
이제 나한테 돈까지 이렇게 많이 생겼으니 꼼짝도 할 수 없어.」
「너 자꾸 돈 돈 하는 거 보니까 추하다 맑고 밝던 너는 어디로
갔니?
「그때가 더 좋았어?
「그럼 이 돈 다 불쌍한 사람들한테 줘버릴 테니까, 너 나하고
결혼할래?
경훈은 놀랐다 인남의 장난 같은 말 때문이 아니었다.
비록 순간적이지만 인남의 얼굴에는 너무나 진지해서 도저히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제야 경
훈은 잠시 잊고 있던 인남의 성격을 떠올렸다. 그녀야말로 돈 같
은 것에는 좌우되지 않을 사람이 아닌가.
인남에게는 격을 깨는 어떤 힘이 있었다. 선민이 주는 신비감
이 먼 이상의 바다에서 서로를 탐험하는 낭만이라면, 인남은 모
든 조건과 격을 깨는 자유로움과 솔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경훈은 여태껏 인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지만, 가끔씩 부
딪치는 그녀의 성격은 인간 관계를 어떤 틀 속에서만 맺어왔던
자신에게는 솔직히 과분했다. 어떨 때의 인남은 자신이 정면에
서 볼 수 없을 정도의 솔직함과 순수함으로 압박해 들어왔다.
그럴 때면 경훈은 그런 모습들이 인남의 열등한 조건, 예를 들
어 넉넉지 않은 형편이나 뒤처졌던 공부 등으로 말미암은 것이
라고 폄하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사람을 보는 시각이었다. 경
훈이 생각하는 한 세상은 함부로 아무하고나 어울릴 수 없는 곳
이었다. 따라서 인남을 보는 경훈의 시각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러나 인남이 보여왔던 것,특히 지금 보이고 있는 순수함은 말
그대로 파격적인 것이다. 격이 허물어진 그곳에서 경훈은 인남
에 비해 너무도 약했다.
「이 인남이가 언제든지 돈을 버리고 널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
지 마.
순간 경훈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격한 말이 튀어나왔다.
「인남아, 너 함부로 말하지 마. 너한테는 그 미국 변호사니 세
인이니 하는 작자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돈 좀 생겼다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건 아냐. 기본이 있는
여자라면 미국 같은 데서 그렇게 함부로 지내지 않을 거야. 나는
네가 미국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걱정돼 . 그리고 너희 집에서 왜
너를 그냥 내버려두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만해」
경훈은 인남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인남의 눈이
발개져 있었다.
「너 우리 집안에 대해 얘기하려는 거지 넌 나를, 그리고 우리
집안을 멸시하는 거지 나를 천박한 아이라고 말하고 싶었지?
인남은 무슨 말인가를 더하려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
다.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이 식탁 위에 툭 떨어졌다.
「아니, 인남아. 그게 아니 ‥‥‥‥」
그러나 경훈의 말은 인남이 앉았던 빈자리에 그냥 남고 말았
다. 인남은 아무 말없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나가버렸다.
경훈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인남이 나가버
린 쪽을 한동안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한참 후에 일어선 그의
표정은 잔뜩 뒤엉켜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경훈은 식당에서의 자신의 행동을 뉘우
쳤다. 전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후회의
심연에서 어나지 못하게 했다. 선민이나 스테파니에 비해 무
척 뒤떨어지는 여자, 비록 최근 갑작스럽게 돈이 생겼지만 워낙
볼 것 없는 형편에 대학도 못 나온 여자가 왜 자신을 이렇게 흔
들어대는지 경훈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경훈은 수화기를 들었다. 신호가 여러 번 가도 인
남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경훈은 서둘러 인남의 오피스텔에 들렸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불안해진 경훈은 관리인에게 인남이 심하게 아플
지 모른다고 설득하여 겨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인남은 없었다. 책상 위에 쓰다 만 편지 한 장이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경훈아, 꼭 해야 할 얘기가 있어 편지를 쓴다. 이 편지를 부치
게 될지 어떨지 모르지만. 그래, 너는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
어. 일전에 지방에 내려갔던 거 내 마음을 정리해 보려고 그랬던
거야.
지방에 외가댁이 있어 어릴 때는 자주 갔었지 외가댁에서는
큰 과수원이랑 목장을 하셨는데 지금은 다 남의 손에 넘어갔어.
외할아버지가 무슨 실수를 하셨대. 그 여파가 우리 집까지 미쳤
지. 아버지도 보증을 섰다가 잘못 연루되셨나 봐.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신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취해 들어와선 외가
댁을 원망하며 엄마한테 손찌검까지 하셨어.그런 날들이 왜 오
래 계속되었지, 엄마가 견디기 힘드셨나 봐. 나중에는 아예 절로
피신을 하셨어. 아버지는 더 격분해서 엄마를 찾아내 집으로 끌
고 돌아오시곤 했지. 결국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어.
나는 그런 속에서 자라면서 겉으론 쾌활하고 씩씩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곪아갔어. 부모님을 원망도 하고, 나는 주워온 자식일
거라고 상상도 하곤 했지. 그러다 차차 내겐 행복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나는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행
복한 주부가 될 수 없다고 말이야.
처음에는 발버등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세상일에 관심없이
살자는 게 내 인생관이 되어버렸어. 남들에게 절대 상처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고.
대학 같은 데를 갈 생각은 아예 없었어 이 땅과 인연을 끊고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어서 미국으로 건너간 거야. 아버지는 다행
히 좋은 분을 만나서 재혼하셨기 때문에 내 마음도 홀가분했지.
미국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었고, 또 그런대로 행복하다
고 믿고 있었어. 그런데 너를 만난 거야. 그러면서 안정되었던 내
마음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지. 너는 좋은 가문에 뛰어난 수재
잖아. 너는 옛날부터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친구였어.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런데 너는 왜 내게 잘해 준 거니 그냥 길거리에서 장사나 하
고 소리나 하게 놔두지 왜 내게 실낱 같은 희망을 주었냐 말이야.
현 선생님 일로 너와 가까워지는 듯했어 정말 난 돈에 초연할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솔직히 유산을 받고 가끔 흔들린 적이 있
었어. 이제 너한테 걸맞은 위치에 조금 다가간 것은 아닐까 해서.
너를 만날 때마다 희망을 조금씩 쌓아갔어. 세인이라는 남자
친구는 있지도 않아. 너를 떠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내
가 조심스레 쌓아가던 희망을 한순간에 무너뜨려버리더구나 구
름 위에 떠있는 기분이던 나를 단숨에 길바닥 먼지로 추락시켜
버리곤 했어.
엄마가아버지를 피해 숨어 계시던 절에 가서 며칠 지내며 다
시 용기를 얻고 희망을 가졌지 엄마처럼 살 수는 없잖아. 그래도
외국 물씩이나 먹어봤는데
그래서 현 선생님의 그 수첩에 죽자 사자 매달렸어. 나도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면서 나름대로 추적도 하고 해석
도 내린 거야. 너한테 이 인남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지. 너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몸부림 쳤어. 이 정도면 네 앞에
나설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기 더구나 그래서 너를 불러냈던 거야.
그런데 역시 너와 나는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만 재확인하
게 되었어. 이젠 마음을 비우고 편해질 거야. 네 마음속에 있다는
그 사람과 잘되기만 바라겠어
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래. 어차피 여기 있어봤자 너한테 도
움도 못 주고 신경만 쓰이게 하잖아‥‥‥
인남의 오피스텔을 나와 사무실에 출근한 경훈은 진지하게 인
남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오히려 인남
을 원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비록 자신이 상정했던 여러 조
건에는 어긋나는 여자지만 그녀는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경훈은 자책감에 쉽싸였다. 자신은 인남을 지식이나 소양, 사
회적 위상 면에서 많이 뒤떨어지는 존재로 여겨왔던 것이 사실
이다. 고교 시절엔 안중에도 없던 그녀를 미국에서 만나곤 했던
까닭도 실은 선민에게서 받은 상처를 잊기 위해서였고, 또 자신
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경훈은 인남의 말과 반대로, 인남이 구름 위의 신선이고 자신
이 길바닥 먼지같이 느껴졌다. 자신이야말로 속물이었다. 경훈
은 인남이 자기에게서 받았을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해 주고
싶었다
경훈은 수화기를 들어 인남의 자동 응답기에 메시지를 남겼다.
「인남아. 네 말대로 그동안은 나 흔자 제럴드 현의 미스터리를
쫓아온 것 같다. 그러나 이젠 네 도움이 얼마나 절실한지 알게
되었어. 네가 풀어낸 그 노벰버의 비밀도 실은 놀라웠다. 아마
나라면 평생 못 풀었을지도 몰라. 인남아, 앞으로 나를 좀 도와
줘. 우리 일을 나눠서 하자. 떠오르는 의문은 많은데 정작 만나
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어. 만약 권력 내부
에서 그 급박했던 10 · 26과 12 · 12의 진상을 지켜보았고 그후에
신군부의 내부 사정 및 한미 관계가 刻혀나가는 방향까지 세심
하게 관찰한 사람을 단 한 명만 만날 수 있어도 많은 도움이 될
텐데 물론 그간 언론에 이름이 등장했거나 현대사에 깊숙이 관
련된 사람이라면 많은 정보를 주긴 하겠지만, 그런 이들은 철저
히 자신의 시각만 고집하기 때문에 우리한텐 별 도움이 안 돼.
당장 5 · 18 수사 기록만 봐도 모두 자기 논리만 내세우고 있잖
아, 아마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인물이 꼭 있을 거야. 인남이 네
가 좀 찾아봐 주지 않을래 나는 관련 자료를 아무리 뒤져봐도
더 이상은 못 찾겠어. 이제는 너에게 기대고 싶다. 」
경훈은 비로소 자신과 인남이 갈 방향을 찾은 것 같았다. 같이
어울리고 섞이고 기대면서 두사람이 만들어가는 세계. 경훈은
이제껏 마치 심판관 같은 오만함으로 인남을 평가하고 재단하기
만 했다 인간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하찮은 기득권적 가치
만을 내세우며 살아왔다. 그러나 인남은 경훈이 생각했던 그 보
잘것 없는 조건 속에서 생명력 있는 당당한 인간으로 자라난 것
이다. 자신은 이제껏 사람의 무엇을 보아왔던가.
그러자 곧 선민이 연상되었다. 모든 남자가 선망하는 조건을
갖춘 여자. 경훈은 선민과 가까워지면서 한 사람의 여자뿐만 아
니라 그 여자가 살아온 인생도 자신의 것으로 편입된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었다. 선민에게는 낯
설고 당혹스런 자아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아는 늘 긴
장감을 자아냈으며, 선민은 그 느낌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녀
는 경훈이 미국에서 보아온 많은 여자들과 비슷한 의식의 소유
자였고, 그것을 자신 있게 뿌려댔다.
경훈은 수첩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선민의 전화 번호를 보며
한참 망설였다. 그녀를 만나 그녀와 자신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하고 싶었다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울렸다.
한참 신호음이 울리다가 선민의 음성 메시지가 울려나왔다
「이선민입니다. 지금은 외출 중이니 삐 소리가 난 후 용건을
말씀해 주세요. 돌아온 후 전화드리겠습니다. 」
녹음된 기계음이어도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경훈은 사회의 저명 인사가 된 여성 동창이나 동료 변호사 가운
데서도 선민처럼 세련된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상념에
젖은 경훈은 한동안 전화를 끊지 않고 수화기를 귀에 댄 채 가만
히 있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경훈은 이윽고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는 선민을 떠나보낼 수 있
었다.
경훈이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손 형사가 사무실 문을 힘차게 열
고 들어왔다. 손 형사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무력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변호사님 , 잘 다녀오셨십니꺼?
「아, 손 형사님 어서 오세요.」
「가셨던 일은 잘됐십니꺼?
예.
「죄송합니더 . 지는 이제엇 한 일이 아무것도 없십니더.
「보안 유지는 철저히 하셨겠죠?
「그렇십니더 .」
「그러면 큰일을 하신 겁니다. 」
「아입니더. 쥐구멍을 찾을 도리밖엔 없십니더.」
「일단 리엔지니어링의 사장인 제임스라는 자에게 혐의점이 있
는 것은 우리가 확인했고, 다만 연결이 쉽지 않았던 것은 한 사
람은 무기상이요, 또 한 사람은 의사라는 점이었죠. 그러나 두
사람을 맞추어보면 한때 주한 미군에서 활동했다는 공통점이 있
습니다. 」
「같은 미군이었는데 와 그리 죽여버렸을까예?
「글쎄요, 알아봐야겠죠. 그런데 워낙 제임스의 범죄가 치밀해
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이 정도면 완전 범죄에
가깝죠.
「전혀 방법이 없겠십니꺼?
「글쎄요, 의사 신분이었던 숀이 제임스를 위협할 수 있는 무기
가 무엇이었나가 해결의 열쇠일 겁니다. 혹시 ‥‥‥
「뭐 말입니꺼?
경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일단 숀이 한국에서 근무했던 기간을 알아보는 게 중요
합니다. 」
경훈은 일전에 지미에게서 받았던 숀의 신원 확인서를 꺼내서
는 그의 복무 기간을 확인했다.
「음 제 짐작이 맞을 가능성이 있군요.」
「뭡니꺼?
「숀은 제럴드 현이 전역하자마자 바로 한국을 떠났어요.」
「변호사님, 제럴드 현은 누굽니꺼?
「주한 미군에서 일하던 사람이에요.」
다시 경훈의 머리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오세희가 했
던 얘기였다
-그런데 그 의사는 당시 매우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었소. 개
업을 했다가 환자가 사망하는 의료 사고가 생겼지. 처방해서는
안 되는 약을 그것도 약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환자에게 주었다
가 환자가 사망하고 만 거요. 그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그는 복역
중이었소.
숀은 이번에는제잉스를 협박하려 했다. 경훈은그 점이 이해
되지 않았다. 숀이 왜 제임스를 협박하려 했을까.의사가 남을
협박할 수 있는 무기는 도대체 무엇일까
경훈은 신원 확인서 상에 있는 숀이 근무했던 캐나다의 병원에
팩스를 보내 그의 전공 과와 평소 행동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미를 통해 대사관 명의로 보내면 될 것이다.
「일단지금으로서는 숀이 어째서 의사로서 어울리지 않는 협
박이란 행동을 했는지, 그가 무엇으로 제임스 사장을 협박하려
했는지를 알아보는 게 급선무입니다. 」
「지가 할 일은 없십니꺼?
「아니, 있어요.」
「지가 할 일이 있다고예 아, 짐작이 갑니더. 사장이 취급하는
물품 중에서 야전용 의료기 등의 거래 관계를 알아보라는 얘기
네예. 숀이 의사로서 협박을 했다면 당연히 자신의 전문 지식 범
위 안에서 했을 거 아입니꺼?
손 형사는 오랜만에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숀이 근무하던 시기에 제임스는
다만 군인이었을 뿐이니까요.」
「참, 그렇군요. 그렇다면 지가 할 일이 뭡니꺼
손 형사는 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리엔지니어링사가 언제 등록되었는지, 세무서에 신고된 소득
은 연도별로 어떻게 다른지를 좀 조사해 주시죠.」
「고거야 어려울 게 없겠네예. 바로 해오겠십니더.」
「그럼 수고하세요.」
경훈은 제럴드 현이 미8군 사령부에 근무하던 당시에 제임스
와 숀도 같이 근무했다는 사실에서 세 사람 사이에 뭔가 석연치
않은 관계가 있음을 느꼈다. 게다가 제럴드 현이 오세희에게 숀
을 추적해 달라고 했던 것도 심상치 않았다. 경훈은 바로 지미의
사무실로 내려갔다.
「지미, 마침 있었구나.」
「왜 또 시킬 일 있어?
「그래, 좀 부탁해.」
「뭔데?
경훈은 숀의 신원 확인서를 내밀었다.
「이 병원에 연락을 해서 숀이 어떤 일을 했는지, 그의 전공 과
는 무엇이었는지 알아봐 줘.」
「이건 미국이 아닌데. 캐나다 병원이잖아.」
「그래 .」
「하긴 캐나다의 병원이라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 그럼 수고 좀 해줘.」
「근사하게 한턱내면 문제없어.」
「알았다니까.」
「그럼 지급으로 해주지. 대사관 명의로 보낼 테니까.」
다음날 경훈은 아침 일찍 사무실로 찾아온 손 형사로부터 사
장의 무기상 등록이 5공 때 이루어진 것을 확인했다. 무기 거래
또한 5∼6공 때 가장 많았다가 한동안 주춤해 있었다. 하지만 최
근에 이르러 접대비 및 가지급금의 항목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십니꺼?
「아닙니다. 직접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고 참고로 하기 위해
조사했던 겁니다. 」
「거기서 뭔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있십니꺼?
「자세한 것은 대차대조표를 봐야 알겠지만 이 회사는 지금 뭔
가 거대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군요.」
「그걸 우째 알 수 있십니꺼
「최근 몇 년 간 매출 실적은 미미하지만, 접대비를 비롯한 가
지급금 등이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로비를 하고 있
다는 얘기지요.」
「참, 대단합니더. 우째 종이 한 장만 보고 그런 걸 다 알아냅
니꺼?
손 형사는 연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훈은 손 형사를 배웅하
면서 지미의 사무실에 들렀다.
「아니, 지급으로 넣었는데도 안 오네. 살해된 사실을 적시했고
대사관 명의라 즉각 답신이 와야 정상인데.」
경훈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사무실로 올라온 경훈은 바로
오세희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일이오?
「제럴드 현의 주치의였던 로버트 숀 말입니다, 그 사람이 근무
했던 병원에 급히 사람을 보내서 그가 병원에서 무슨 일을 했는
지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
「그건 어렵지 않소.숀이 근무하던 병원은 이미 알고 있으니
까.사립탐정을 곧장 그 병원으로 보내겠소.그런데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요
「이상한 예감이 듭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기분이 좋지 않아
요. 무슨 일인가가 꼭 일어날 것 같습니다. 미국 대사관을 통해
서 지급으로 답신을 부탁했는데도 연락이 없어서 오 선생님께
전화를 드린 겁니다. 」
「잘했소. 내 즉시 알아보리다. 」
오세희로부터는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 오세
희는 일부러 경훈이 출근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정각
10시에 맞춰 전화를 걸어왔다.
「이 변호사, 엄청난 사실을 알아냈소. 그 의사 말이오, 제럴드
현을 치료했던 의사.」
오세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의사의 이름이 로버트 숀이 틀림없소?
예, 틀림없습니다. 」
「앨런 메모리얼 인스티튜트 병원이 맞소?
「그렇습니다. 」
「몬트리올에 있는 병원이오?
「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런, 세상에 」
오세희는 잠시 말을 멈친다 경훈은 전화선을 통해 오세희의
비감을 그대로 느꼈다.
「아마 그 병원에서는 영원히 연락이 안 올 거요.」
경훈은 고개를 11덕였다 대사관 명의로 급하다고 보낸 일에
팩스 한 장 오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던 참이었다
「특수한 병원인 모양이군요.」
「그렇소. 세상에는 사람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죽이는 의사도
있었소.」
「무슨 말씀이죠?
「그 병원은 CIA가 미국 국내법을 피해 캐나다에서 운영하던
곳이었소. 그곳에서는 무서운 일들이 자행된 적이 있었소.」
「어떤 일들입니까?
「한두 가지가 아니오. 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있
지. 그 모든 행위의 본질을.」
「그 병원의 의사들은 거기서 인간의 정신에 대해서 행할 수 있
는 모든 실험을 했소.」
「치료하다 보면 의사의 실수로 환자가 죽는 경우도 있겠지요
또는 의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병도 있구요.」
「사람을 전문으로 죽이는, 아니 최소한 죽이는 연습이라도 하
는 의사가 있다면 이 변호사는 믿을 수 있겠소?
예?
경훈은 경악했다.
「의학은 이 세상에서 정반대의 두 얼굴로 존재하고 있었소. 그
것도 의술이라고 해야 할까 정말 무섭고 잔인하며 살인적으로
쓰이는 의학적 기술이 있었단 말이오.」
「무슨 말씀입니까?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숀이 그 병원의
중요한 멤버였다는 사실이오.」
「이 변호사가 알아달라고 했던 로버트 숀 말이오.」
「숀이 그 비인간적인 실험에 가담했다는 게 확실합니까
「그렇소. 강일이 형님의 병명을 떠올려보시오. 그리고 그 조을
증이 급성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도.」
「맙소사!
「게다가 숀은 그 병원의 원장을 협박했다가 복역까지 했소.」
「내 짐작이 맞다면 강일이 형님은 너무도 비참하게 최후를 마
치신 거요.」
「비참한 최후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오 선생님은 숀이 현
선생님께 어떤 종류의 정신적 타격을 가했다고 생각하시는 겁
니까?
「틀림없소. 숀은 아주 특이한 약을 강일이 형님에게 복용시켰
을 것이오. 감기 등의 가벼운 증세로 찾아간 형님에게 말이오.
내가 언젠가 말했듯이 형님은 그전에 한 번도 증상이 없다가 갑
자기 입원하셨던 거요. 거기에 대해서는 달리 이유를 찾을 수가
없소. 삼척동자라도 다 알겠지만 정신 질환이라는 것은 옆에 있
는 사람이 가장 잘 아는 병이오. 증상이 반복되면서 차츰 쌓이다
가 입원하게 되는 것이란 말이오.」
「그럼 현 선생님이 10월 18일에 입원했다가 10월 27일에 퇴원
하신 것은 결국 숀의 솜씨였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당시 나의 후임자는 강일이 형님과 자주 만났소. 부
마사태 등 국내의 동향이 일촉즉발의 상태라, 형님은 경찰의 정
보를 극히 필요로 하고 계셨고 경찰은 반대로 미군의 동향에 대
한 정보에 목이 말라 있었지, 나는 후임자를 형님에게 개인적으
로특별히 소개시켰기 때문에 형님은 내 후임자를 자주 만나시
곤 했소. 아까도 다시 확인했지만 당시 형님에게는 전혀 이상한
증상이 없었소. 그래서 형님이 막상 입원하셨을 때는 내 후임자
도 깜짝 놀랐다고 했소.」
「그렇다면 그 특이한 약이란
「바로 그 병원에서 만든 약일 것이오. 한번에 사람의 정신을
날려버리는 가공할 약이었겠지.」
「그런 약이 정말 실재할까요?
「그럼, 얼마든지 가능하지. 다만 그 치료법까지 연구했을지 어
땠을지는 모르지만.」
「그럼 현 선생님은 그 파괴적 약품을 복용하고 평생 정신 질환
을 겪게 되신 걸까요?
「아마 그러셨을 거요.」
「아. 무서운 일이군요.」
오세희의 말이 맞다면, 제럴드 현은 너무도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다. 경훈은 언젠가 치명적 환각을 일으키는 버섯에 대한 얘
기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버섯을 조금만 먹어도 바로 신
경 계통에 타격이 온다고 했다. 아니 그런 종류의 약초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연구하여 사람의 중추신경
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경훈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일단 그 사
실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다음으로 이어지지가 않았다.
이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숀은 제럴드
현에게 그런 무서운 처방을 내렸던 것일까. 제럴드 현은 정보와
공작을 담당하는 주한 미군의 고급 장교가 아닌가. 게다가 CIA
의 업무까지 공동으로 수행하는 극비 공작원이 아닌가.그런데
그러한 제럴드 현에게 숀은 무슨 이유로 즉각 효력을 발휘하는
정신 질환제를 투여했던 것인가.
「틀림없이 10 · 26과 관계가 있을 거요.」
경훈의 심리를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양 오세희가'나직한 목소
리로 말했다.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정보 계통이란 워낙 사정이 복잡하니까 속단할 수는 없지만
형님이 입원하신 시기와 관련시켜 볼 때 관계가 있는 것만은 분
명하오.」
제럴드 현이 입원한 시기는 10월 la일이고 퇴원한 시기는
10 · 26 직후였다. 그가 몸이 다 나아서 퇴원했을 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는 10 · 26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전후하여 입원하고 퇴
원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알 수 없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숀이 강일이 형님을
해쳤다는 사실이오.」
「그렇다면 어째서 현 선생님은 숀을 찾으려고 하셨을까요
「둘 중 하나겠지 .」
「둘이라면?
「하나는 복수요. 숀을 찾아 자신을 그 지경으로 만든 데 대한
복수를 하시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소.」
「또 하나는요
「강일이 형님 자신이 끝까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숀에 대한 그
리움과 고마움에서 감사를 표하시려 했을 수도 있소. 하여튼
분명한 것은 형님은 강제로 10 · 26으로부터 격리되셨다는 사실
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의 비밀을 한 꺼풀은 긴 것 같군요.」
「역사의 비밀이라면?
「10 · 26이 김재규의 우발적 범행이었다는 역사적 결론을 어쩌
면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부 구조가 정
리가 안 되니 ‥‥‥‥」
「배후를 움직이는 거대한 그림을 보면 짐작이 가는데 그 구체
적인 행위와의 인과 관계를 찾기 힘들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현 선생님의 인생을 보면 딱 떨어지는데
안됐습니다. 그분은 왜 끝까지 입을 다물고 계셨던 걸까요?
「강일이 형님은 정보원이셨소. 형님으로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만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지.」
경훈은 콧날이 시큰해졌다. 제럴드 현의 비애가 그대로 느껴
졌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비밀을 털어놓을 결심을 했다
가는 지워버리고 다시 결심했다가는 지워버리면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 것이다. 더욱이 노인의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조
울증까지 견뎌내다 보면 무엇이 진실이고 허상인지조차 구분하
지 못했으리라. 그러다가 그렇게 순간적으로 최후를 마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일단 현 선생님의 급작스런 정신 질환을 통하여 밑그림은 그
려지지만 아직 파헤쳐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니군요.」
「물론이오. 하지만 형님이 당하셨던 수법이 워낙 교묘하고 아
무도 입을 열지 않으니 결국 알 수 있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완전 범죄
손 형사는 경훈이 이미 숀의 내력을 완전히 파악한 것을 보고
는 혀를 내둘렀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다 알아냈십니꺼?
「다행히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
「이제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꺼?
「로버트 숀의 죽음에 대한 추리가 가능하군요.」
「지는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십니더.」
「숀은 의료 사고 후 정상적인 의사로서의 생활이 불가능해지
자 나름대로 머리를 썼습니다. 그는 아마 그 병원의 원장을 협박
하다가 형무소에 가게 된 것 같아요. 숀은 복역 후 힘들게 지내
다가 이번에는 한국으로 와서 주한 미군 시절 같이 근무하던 제
임스를 협박했을 겁니다 제임스는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었으
니까 협박에 굴할 줄 알았던 거죠.그러나 제임스 역시 정보와
공작으로 한평생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일단 손에게 약간의
돈을 줘서 안심시킨 다음에 밤늦게 술을 한잔하자고 불렀죠. 숀
은 그 전화가 미국에서 온 것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기쁜 마음으
로 나섰다가 일을 당하게 된 겁니다. 」
「지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십니더. 그런데 제임스는 당시 숀
과 어떤 관계였십니꺼?
「숀은 제임스로부터 어떤 지령을 받았을 거예요. 현재 제가 추
측하기로는 숀이 제럴드 현이란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숀이 의사란 신
분으로 제임스를 협박할 거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또 제럴드 현
이 전역하자 숀도 곧 미국으로 가버렸어요. 증거를 남겨두지 않
으려는 치밀한 음모죠.」
「대단한 추립니더. 하지만 제임스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여전히 없을 것 같은데예?
「그래요, 말려들 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거래는 가
능할 거예요.」
「거 래라꼬예?
예.
「어떻게 합니꺼
「일전에 얘기했듯이 지금 제임스는 매우 큰 거래를 준비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예?
「그는 절대로 그 거래에 실패하면 안 될 겁니다. 2년 간 모든
경비는 그 거래를 위해 지출되고 있었어요. 계약한 품목들도 모
두 시험적인 것이거나 컨설팅 같은 것으로, 큰 거래를 위한 준비
에 필요한 거죠.」
「그렇십니꺼?
「그걸로 제임스와 거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잠간만요.」
경훈은 전화 번호부를 들고 어딘가를 찾았다. 한동안 대화를
하더니 자신 있는 표정으로 손 형사에게 말했다.
「호텔이나 항공사에 가면 숀의 음성을 녹음한 기록이 있을 겁
니다. 」
「그런 기 있겠십니꺼?
「호텔에는 없다고 해도 미국의 항공사에는 반드시 있을 겁니
다. 서을 지사에 가면 알 수 있을 거예요. 그의 목소리를 따오십
시오.」
「네?
경훈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손 형사는 이해가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이
내 전화를 걸어왔다.
「신기한데예. 호텔에 숀의 음성이 녹음되어 있십니더. 예약 전
화가 녹음되어 있네예.」
「그 테이프를 얻어서 제가 얘기하는 곳으로 가져오세요. 호텔
에는 테이프를 곧 갖다 준다고 하면 될 겁니다. 」
경훈은 윗도리를 입고 사무실을 나섰다. 경훈이 손 형사와 만
나기로 한 곳은 음성 ·음파 연구실이었다. 경훈의 얘기를 듣자
전문가는 고개를 끄덕 였다.
「외국인이 한 사람 있으면 좋겠군요.」
경훈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지미, 내가 하라는 대로 해봐.」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발음 때문이야. 가장 정확한 영어 발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서 그런다니까.」
「오케이, 얼마든지 해주지.」
경훈은 지미에게 여러 가지 발음을 주문했다. 지미는 신이 나
서 여러 번이나 반복했다. 연구실 직원은 지미의 발음을 기계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다 지미의 발음이 마
치 숀의 발음처럼 바뀌어 들리는 것이었다. 경훈은 넋을 잃고 있
는 손 형사를 데리고 연구실을 나왔다.
「자, 갑시다. 」
「네 어디루요
「리 엔지니어링 말입니다. 」
손 형사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경훈은 리엔지니어링사에 들어서자 명함을 내밀었다. 비서는
두 사람을 대기실로 안내하더니 이내 사장인 제임스가 나왔다.
그는 풍채가 좋고 눈매가 매서운 오십대 후반의 사나이였다. 제
임스는 손 형사를 흘끗 쳐다보고는 경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명
함 교환이 끝나자 제임스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
로 물었다.
「이 변호사께서 우리 회사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주 능숙한 한국어 였다.
「먼저 이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강남경찰서 형사계의 손 형삽
니다. 」
「반갑소.」
제임스는 손 형사에게는 손조차 내밀지 않았다.
「녹음기가 있으면 좋겠군요. 이 테이프부터 들어보고 대화를
나누면 모든 게 부드러울 것 같습니다. 」
제잉스는 말없이 비서를 불러 녹음기를 가져오게 했다. 경훈
은 테이프를 손 형사에게 주었다.
-이 변호사, 내가 안 나타나거나 사고를 당하면 죽은 줄로 아
시오.
-누가 선생님을 해치려 합니까
-나는 리엔지니어링의 제임스를 만나러 왔소.
-무슨 일로요
-나는 제임스에게 돈을 좀 나누어 달라고 왔소. 그가 한국에
서 번 막대한 돈은 사실 내가 벌어준 거나 다름없으니까
-어째서 그렇죠
-그는 상부의 명령이라면서 나보고 제럴드 현에게 특수한 약
을 먹이라고 했소.
-그래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렇소.
-그후 제럴드 현은 어떻게 됐나요
-평생을 정신 장애로 고생하게 됐소. 보통 사람 같으면 죽었
을지도 모르오.
-그런데 제임스는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었습니까』
-한국의 새 권력자들로부터 무기 거래상 허가를 받았소.
-그러니까 선생님은 제임스를 협박해서 돈을 뜯으러 오신 것
이군요.
-그렇소
-제임스가 선생님께 돈을 줄까요
-돈을 주거나 죽이려 들 테지. 만약 내가 어떤 이유로든 죽으
면 당신이 제임스를 만나 이 테이프를 근거로 돈을 받으시오. 반
은 당신이 갖고 반은 내 가족에게 보내주시오.
테이프는 여기까지 였다. 그러나 제임스는 태연자약했다. 경훈
은 밑도끝도없는 얘기를 꺼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그날 밤 로버트 숀을 호텔에서
나와 길을 건너게 하느냐였죠. 숀은 한국에 와서 다른 사람과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즉 제임스 사장님만이 숀을 밖으로 나오게
하실 수 있었죠. 사장님은 술이나 한잔하면서 타협점을 찾자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아니면 여자라든지 무슨 다른 이유를 붙이
畿겠죠. 바로 호텔 길 건너편 술집에 있는데 숀이 나을 때쯤 길
거리에 있겠다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그 전화
를 길 건너편에서가 아닌 미국에서 하셨던 거죠. 왜냐하면 누군
가 의심을 해서 숀에게 호텔로 걸려온 전화를 체크할 수 있기 때
문입니다 그때에 미국에서 전화를 한다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
겠죠 숀의 가족이나 친구등이 전화를 한 것으로 생각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의 호텔에 전화를 걸어 사장님의 통
화 기록을 확인해 보았죠. 여기 그 자료가 있습니다. 한 통은 리
츠칼튼호텔의 손에게, 또 한 통은 휴대폰을 들고 차에서 기다리
고 있던 킬러에게 하셨던 거죠.」
제임스는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 변호사, 나는 지금 몸이 찌뿌드드해 목욕을 가려던 참이었
소. 같이 가고 싶으면 지금 나갑시다. 」
경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러죠.」
손 형사는 엉거주춤 두 사람을 따라 일어섰다.
목욕탕의 증기실에 들어가서야 손 형사는 제임스가 혹시 녹음
을 당할까 봐 자리를 옮겼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이 변호사,그것은 천재만이 해낼 수 있는 대단한 추리였소.
하지만 만약 그랬다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 범죄요. 손에게 술 마
시지 말고 일찍 자라고 전화를 했으며, 또 휴대폰으로 걸었더니
잘못된 번호라 몇 마디 안 하고 금방 끊었으니까 말이오. 그 테
이프는 역사적 자료가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범죄를 입증하는
데 쓸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인정합니다. 그것은 완전 범죄였습니다. 」
손 형사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경훈의 결론에 따르면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제임스는 살인의 공
동 정범 혹은 살인 교사죄를 범한 사람이다. 그러나 제임스는 너
무나 태연히 경훈과 선문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대단한 추리를
해낸 경훈도 제임스를 체포하라든지 하는 말 한마디 없이 완전
범죄니 뭐니 하고 있었다.
손 형사는 제임스가 잠시 나간 사이에 경훈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변호사님, 지금 이놈아를 발가은 채로 콱 연행해 삐리까
요?
「아닙니다. 」
「아니, 지금 이농아가 숀을 죽였다고 하지 않았십니꺼
「그랬죠.」
「그런데 와 연행을 못합니꺼
「완전 범죄입니다. 공소 유지를 못해요. 알다시피 녹음 테이프
는 만들어낸 것이니, 제임스를 직접 차로 친 사람을 붙들어 자백
을 받기 전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아마 자백을 받아도 안 될 겁
니다. 오히려 잘못하다가는 손 형사님이 징계를 받거나 파면까
지 당할 수 있어요.」
손 형사는 파면이라는 말에 찔끔했다. 이미 제임스의 힘을 보
아온 터였다.
「계좌를 추적해서 그 대금이 누구에게로 흘러 들어갔는지 알
수 없십니꺼?
「그 정도에 걸려들 사람이 아녜요. 수준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도 제임스는 미국 사람입니다.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수사를 할
수 없어요. 설혹 어렵게 수사를 한다 하더라도 신병 처리를 할
수가 없구요.」
「그럼 어떻게 합니꺼?
이때 제임스가 들어왔다.
「손 형사님, 잠간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아, 네.」
손 형사가 증기실을 나가자 경훈은 수건으로 땀을 한 번 문지
른 후 입을 열었다.
「저는 세상에 완전 범죄가 존재할까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있
었습니다. 여러 형태의 완전 범죄를 생각해 보았는데, 가장 완전
한 것은 범죄자의 범행을 확신하면서도 입증할 방법이 없는 경
우였습니다. 아마 지금이 그러한 경우겠죠.」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그래서 저는 거래를 하고자 합니다. 」
「무슨 거래요?
「범죄의 대가는 수사나 기소 혹은 유죄 판결만이 아니겠죠. 저
나 저 밖에 있는 손 형사가 떠들어대면 사장님은 큰 타격을 받으
실 겁니다. 비단 사업뿐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도
외면당하시고 삶에 엄청난 변화가 오겠지요. 게다가 언론의 집
중 포화를 맞으실 겁니다. 결국 사장님은 비참한 상태로 한국을
떠나셔야 하고 지금 투자한 엄청난 금액을 한푼도 못 건지시게
되죠. 뿐만 아니라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살인자라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실 겁니다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
무도 없습니다. 」
「나는 당신들을 명예 훼손으로 고발할 텐데.」
「그러시면 손해만 봅니다. 테이프가 사장님의 유죄를 입증하
는 데에는 별로 소용이 없을지 모르지만, 그런 고발 따위를 방어
하는 데에는 정말 효과적이지요. 뿐만 아니라 언론의 눈과 귀를
불러옵니다. 전 언론이 달려들어 사장님의 무기 커넥션을 까발
릴 텐데요. 저는 숀에 관한 정당한 자료들을 공개하고 말입니다.
변호사라는 신분은 충분한 공신력을 주죠. 사장님은 도저히 이
기실 수 없습니다. 」
제임스는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이 변호사, 당신이 요구하는 게 뭐요?
「어차피 숀은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렇
게 파멸시켜 놓고서도 자신의 그 살인 행위를 가지고 다시 돈을
뜯으려 했으니 인간이라 볼 수 없죠.그 당시 사장님의 행위도
용서할 순 없지만 상부의 명령이었을 테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숀을 죽인 건 평가하고 싶지도 않구요 제가 요구하는 건 숀의
말대로 약간의 돈을 그의 가족에게 보내주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그리고 저에게 두 사람의 얘기를 들려주십시오.」
「두 사람의 얘기라고 누굴 말하는 거요?
「제럴드 현과 흘리건.」
제임스는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에 관한 무슨 얘기를 들려달란 말이오?
「전역하기 직전의 상환을 들려주시면 됩니다. 숀이 왜 제럴드
현에게 약을 쓰게 되었는지. 특히 10 · 26 직후 제럴드 현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
제임스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도대체 그런 옛날 얘기를 들어서 뭘 하겠다는 거요?
「저의 관심사입니다. 」
「이미 다 흘러간 얘긴데 ‥‥‥‥」
「그래도 좋습니다. 」
「흘리건에 대해선 무엇을 알고 싶다는 거요?
「그가 김재규 정보부장을 담당하면서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
고 싶습니다. 」
「생각해 보겠소. 비밀은 보장하겠죠?
「물론입니다. 」
「하지만 지금은 곤란하오. 다음에 얘기해 주리다. 」
경훈이 밖으로 나오자 손 형사가 휘등그레진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결론이 어떻게 났십니꺼?
「완전 범죄예요. 범행을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
「그라은 지는 우짜는 기 좋겠십니꺼?
「앞으로 15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니까 실력을 키우세요. 범행
을 입증할 확신이 서면 한번 도전해 보시구요. 완전 범죄에 대해
선 저도 방법이 없으니까요.」
「15년이라, 15년. 공소 시효가 그만큼 남아 있다는 얘기 아
니꺼. 그때까지는 지가 진짜 콜롬보가 돼야 한다는 뜻이네예.」
「아마 될 수 있을 겁니다. 필립 최도 신이 되었으니까요.」
경훈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하는 손 형사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사무실로 돌아왔다. 손 형사는 불만이 잔뜩 밴 얼굴로 길거리
에 마냥 그대로 서 있었다.
힘의 논리
차츰 10 · 26의 베일이 겨지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숀을 시켜
제럴드 현을 급성 조울증에 빠뜨렸다. 그럼으로써 제럴드 현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10·26의 중심에서 빠져나가 버리게
되었다.
이것은 무얼 말하는가. 미국은 10 · 26을 전후한 상황에서 아무
래도 한국인인 제럴드 현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
까. 혹시 제럴드 현이 10·26의 비밀이라고 했던 것은 미국이
10 26과 어떤 형태로든 연관을 맺고 있다는 내용이 아닐까. 그
러자 경훈의 뇌리에 김재규의 진술이 떠올랐다. 그는 '래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경훈은 일전에 만났던 합수부의 전직 수사관에게 전화를 걸었
다. 그는 기꺼이 경훈의 사무실까지 와주었다.
「합수부의 수사에서 김재규는 미국이 배후에 있다고 얘기하지
않았던가요?
「네, 그랬습니다. 사실 10·26이 터지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배후에 미국이 있을 거란 의심을 했죠. 그러나 미국 측에서는 아
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김재규는 무언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눈치였죠. 나의 감으로는 김재규가 기다렸던 것은 미국 측의 코
멘트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종내 아무것도 없자 어느 날 김재
규는 신문을 받다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라고 한마디 절규를
던졌죠.」
「그후 조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조사는 중단됐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즉각 위에 보고를 했죠. 위에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가 느
껴지더군요. 그러나 한나절 후 내려온 지시는 영원멸구(減
Cf)였습니다. 즉 영원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죠. 그후 김재규의 신상에 어떤 일이 생겼을지 짐작할 수
있겠죠
「결국 김재규는 다시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나요?
「물론입니다. 그의 머릿속에 그런 얘기를 다시 하느니 죽는 게
백번 낫다는 기억을 자리잡게 했죠.」
「이상한 일이군요. 김재규가 그런 얘기를 했다면 수사 기관에
서는 그의 진술을 가만히 따라가면서 정말 미국이 배후에 있는
지 어떤지를 알아내는 게 순리 아닙니까?
「웬만한 일이라면 그런 시도를 했겠죠. 수사관의 심리란 것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건은 모든 수사 과정을 모니터로 감시당
하고 있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질문이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수
사관은 즉각 교체되었습니다 개인적 호기심이 있어도 꾹 묻어
두는 수밖에 없었죠.」
전직 수사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김재규의 태도는 어땠습니까 그 말을 던져놓고 무언가를 절
실히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던가요?
「처음 몇 시간은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였지만 이내 위에서 지
침이 내려와 살이 뒤틀리고 피가 튀는 신문, 아니 고문이 시작되
자 영원히, 그야말로 영원히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
「재판 과정에서는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때는 이미 김재규가 자신을 민주 투사로 탈바꿈시킨 뒤였
어요. 미국의 앞잡이가 아닌 조국의 수호자로 말입니다. 그는 자
신이 미국을 운운한다 하더라도 살아날 길이 도저히 없다는 것
을 완전히 깨닫고는 논리를 바꾼 거죠.」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직 수사관이 돌아가고 난 뒤 경훈
은 다시 커다란 의문에 부딪혔다.
왜 합수부는 김재규의 그 중대한 발언을 정식으로 수사하지
않고 고문으로 깔아뭉개 버렸을까.
배후에 미국이 있건 없건 수사상 반드시 밝혀냈어야 할 부분
이다. 당시의 합수부 수사를 전담한 보안사에서는 진상을 알아
내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재규의 입에서 터져
나온 엄청난 발언에 대해 무엇보다도 싱도 있게 조사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보안사에서 김재규의 입을 봉하는 데만급급했
다는 사실을 경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경우에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경훈은 인남이 풀어냈던 제럴드 현의 메모를 되새겼다. 거기
서 제럴드 현은 모두가 박정희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시점에서
자신은 육사 11기를 연구하겠다고 했다. 그는 도대체 육사 11기
의 무엇을 연구했으며 연구의 결과는 어디에 있는가.
경훈은 육사 11기를 면밀히 연구하는 것이 10 26의 또다른 큰
숙제라고 생각했다. 전두환을 대표로 하는 육사 11기는 그들의
주장대로 어떻게 하다 보니 대권을 잡게 되었는가, 아니면 처음
부터 어떤 거대한 보이지 않는 음모에 의해 자신들도 모르게 대
권에 다가갔던 가,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10·26이 그 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경훈은 이것을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합수부
가 움직인 방향을 규명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전두환
의 합수부는 어느 시점에서 대권으로 치달았던가.
경훈은 먼저 합수부 발표의 요지를 간추려 보았다.
중정부장 김재규는 자신의 무능력이 노출된 데다 차지철의 월
권과 대통령의 차지철에 대한 편애로 심한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금명간 있을 중요 보직 인사에서 중정부장직을 물러날 것을 걱정
하던 중,안가의 행사에서 대통령이 야당 공작실패를 나무라고
차지철이 불손하게 굴자 격분하여 차지철에게 총을 쏘고 내친김
에 대통령까지 쏘았다.
합수부는 철두철미하게 김재규의 범행을 우발적이고 개인적
인 범행으로 규정했다.
경훈은 범행 직후 작성된 김재규의 자필 진술서도 다시금 꼼
꼼히 읽어보았다.
5 본인은 거사를 다음과 같이 구상하였습니다.
가. 본인은 거사를 하여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보
안 유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나라가
역대 이조 때부터 이러한 거사에서 한 번도 보안 누설로 성공한
예가 없기 때문에 본인도 그러한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본인 독단
으로 구상하였던 것입니다.
나. 본인이 거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떠한 자리를 마련하여
각하를 모시고 한꺼번에 총격 살해하여야만 주위의 저지를 받지
않고 거사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 장소는 본인이 각하를 모시고 연회하는 중정 안가인 궁정
동 연회실을 택하기로 하였습니다
라. 시기는 적절한 기회를 보아 거행하기로 하고 기회가 포착
되면 적은 인원으로 순식간에 살해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 각하와 경호실장을 본인이 직접 동시에 살해해야 방해자가
없어서 거사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어느 누구 하나도
살해에 실패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심
복 부하이며 사제간인 박선호와 박흥주를 거사 인력으로 택하여
그들은 본인이 무엇이든 지휘하면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생각하
고 거사에 성공하면 그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주면 무조건 따라을
것이라고 판단, 거사에 동참케 하였습니다.
바 거사 후 본인은 계엄 선포 후 3일 간 보안 조치를 주장함으
로써 사전 수립된 복안을 가지고 시행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합수부의 발표와 김재규의 진술서는 너무 달랐다. 합수부는
김재규를 충성 경쟁에서 뒤진 나머지 이성을 잃고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감정적 인물로 몰아붙였지 만, 김재규는 자신의
범행이 철저히 계획된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런 와중에 김재규
는 미국의 배후를 주장했지만 합수부는 그의 주장을 고문으로
묻어버렸다.
경훈은 김재규와 미국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좀더 폭넓
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경훈이 기록들을 훔느라지친 몸을 의자에 기대고 크게 기지
재를 켤 때 전화 벨이 울렸다. 인남이었다.
「별일 없으면 오늘 저녁이나 같이했으면 해서 ‥‥‥‥」
경훈은 달력을 봤다.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기로 약속한 날
이었다.
「인남아,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오늘은 선약이 있어.」
「누구하고?
「내가 미국에서 돌아왔다고 오늘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만나기
로 했거든. 너도 알 만한 애들인데 같이 갈래?
「아냐, 난 이번에는 빠질래. 그럼 또 연락하자.」
「그래, 내가 전화할게.」
시간 맞춰 사무실을 나온 경훈은 약속 장소인 광화문 뒷골목
의 복매운탕집을 향해 걸었다. 한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이라 그런지 마음이 푸근했다.
「이 변호사, 이제 영어는 죽이겠다. 」
대학에서 영어 강사를 하는 친구가 맥주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잔을 비우더니 부러운 듯 한마디를 던졌다.
「2년 만에 만난 첫 인사가 그거야?
역시 고등학교 동창들이라 그런지 오랜만에 만나도 전혀 스스
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경훈도 마음을 풀고 술잔을 비웠다.
동창끼리의 만남이 으레 그렇듯 어느만큼 취하자 화제는 시사
문제로 옮겨갔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게 하나
있어 .」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친구였다.
「뭔데?
외무부에 근무하는 친구가 뭐든지 답해 줄 수 있다는 자신 있
는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요즘 다시 북한의 핵이니 미사일이니 하는 문제가 불거지고
있잖아. 만약에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
는 거지?
「어떻게 하다니
「미국 편을 들어야 하는 거야, 아니면 북한 편을 들어야 하는
거야?
「그야 당연히 미국 편을 들어야지.」
「그래 북한은 미국의 공격을 받고 가만있을까?
「가만있지는 않겠지. 그러면 누군가가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
잖아. 그럴 경우에 김정일인데, 그는 앉아서 숙청당하느니 즉각
대대적으로 군사 반격을 하겠지.」
「그럼 한반도에 전쟁이 나지 않겠어?
「그렇겠지.」
「그러면 우리는 북한을 상대로 동족상잔의 아픔을 또다시 겪
어야 하구.」
「어쩔 수 없지.」
「우리는 그냥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존재들이
야 미국이 북한을 치면 우리도 따라서 북한과 전쟁을 해야 하
는 웃기는 민족이냐구 그래야 한다고 애들한테 가르쳐도 돼?
「북한이 잘못하는 데야 어쩔 수 없는 것 아냐?
「북한이 무얼 잘못하는 거지?
「핵 개발이니 미사일 개발이니 하는 게 문제잖아.」
「그럼 그 대가로 한반도는 전쟁을 치러야 돼?
「할수 없어 지금은 미국 뒷다리 꽉 잡고 있는 게 사는 길이
야.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같이 전쟁을 해야지. 한미방위조약
이란 게 그런 거 아냐 미국이 북한을 치면 우리도 미국을 도와
북한을 치고, 북한이 우리를 치면 미국이 우리를 도와 북한을
치고.」
「경우가 다르잖아. 우리가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한 건 전쟁
을 막기 위해선데, 미국이 북한을 쳐서 그 결과로 전쟁이 나면
우린 뭐야 당장은 미국의 뒷다리를 잡고 있으면 안전할지 몰
라도 나중에 통일되었을 때 우리가 북한 동포들에게 뭐라고 말
하지?
「지금은 통일이 중요한 게 아냐. 미국이 적당히 북한을 처리해
서 통일의 분위기를 맞춰주면 그때 가서 본격적으로 통일을 얘
기해야지 .」
「가만히 있으면 미국이 통일시켜 줄 것 같아?
「미국은 결국 동아시아의 평화를 바라는 거 아냐 한반도의
불안은 남북간의 대치 상황 때문이니 한반도가 통일되면 최소한
전쟁은 없어. 그러니 미국이 통일을 반대할 이유가 없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다 보니까
미국이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를 알 수 있겠더라구 미국은 남북
통일을 원치 않아.」
「미국이 남북 통일을 왜 싫어한다는 거지?
이때 중앙 일간지의 국제부 기자로 있는 윤민기가 끼여들
었다.
「미국이 통일을 좋아하지 않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 우
선 남북 통일이 중국을 자극할까 봐 꺼리는 측면이 있어. 한국도
통일을 하는데 왜 우리는 대만을 흡수하지 못하나 생각하게 되
니까. 알다시피 미국은 중국이 대만을 흡수하지 못하도록 별의
별 수단을 다 쓰고 있잖아?
일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 있는 얘기였다.
「다음은?
역사 교사인 친구가 자기 편을 들어주는 지원 사격에 고조되
어 채근했다
「다음으로는 통일이 되면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역할이 줄어드
니까 그런 게 아니겠어 분쟁 지역이 없어지니까 자연히 미군의
주둔 필요성도 줄어들겠지 .」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좀 복잡해 .」
「뭐가?
「미국의 세계 전략하고 맞물리는데. 미국은 분쟁 지역을 필요
로 해. 그것은 미국의 국방력을 유지하는 일과 관계가 있지. 미
국은 언제나 길들여야 할 말썽꾸러기 국가를 필요로 해. 그래서
미국은 리비아, 이라크, 북한 같은 나라들을 테러국으로 규정하
는 거야. 그러지 않고 세계가 모두 평화로워지면 미국은 군사력
을 유지할 수 없고, 따라서 원유에 대한 지배력도 못 가지게 되
지. 그러면 달러는 미국의 실제 경제력에 따라서 춤을 추고, 세
계의 기축통화 역할을 못하게 된단 말이야. 그러니 미국은 아시
아의 적당한 긴장과 한반도의 분단을 내심 몹시 바라는 거지.」
「회한하구나.」
「길들이기의 바톤이 리비아에서 이라크로,그리고 이제는 북
한으로 넘어가는 느낌이야.」
「어쨌든 좋아.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미국이 북한을 폭격한다
면 우리가 미국을 도와 싸우는 것밖에 다른 대안은 없어, 괜히
북한 편을 들거나 어쩌거나 하다간 모든 게 날아갈 수 있다구.」
「무슨 소리야 미국이 남한을 친다는 거야?
「그건 아니겠지만 미국이 일단 폭격하면 북이 남을 칠 거 아
냐 그럼 싸을 수밖에 더 있냐구?
「나는 죽어도 미국을 도와 북한과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
각해. 북한이 먼저 남침을 한다면 죽기 살기로 싸우겠지 만, 그렇
지 않은 경우에는 절대로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을 폭격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뿐만이 아냐. 무슨 목적이 있더
라도 미국이 저렇게 북한에 대해 계속 경제 제재를 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 그 경제 제재가 결국 북한 주민을 굶겨 죽이는
데 일조하고 있잖아.」
토론은 평행선을 가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견해가 모두 일리
는 있었지만, 마침내 일동은 비애를 느끼며 가라앉은 분위기에
서 말없이 술만 마셨다. 어느새 경훈의 옆으로 다가왔는지, 고등
학교 때 단짝이었던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훈아, 너 요즘 어떻게 지내?
이념적 성향이 강한 잡지의 기자로 일하는 박상준이었다. 경
훈은 잠시 망설였다. 그냥 건성으로 대답할 수도 있었지만 취한
상태에서 이 친구에게까지 숨기고 싶지는 않은 마음도 있어, 요
즘10 26같은문제에 약간관심이 생겼다고 대답했다 순간상
준의 눈초리가 매섭게 경훈의 얼굴을 훌었다.
「그래 전혀 뜻밖인데.」
「응, 그렇게 됐어.」
술자리에서는 가볍게 지나간 상준이 다음날 아침 경훈에게 전
화를 걸어왔다. 경훈은 상준과 점심을 같이하기로 했다.
「놀랐어. 너 같은 부르주아가 10 · 26을 쫓는다는 얘기를 듣고.
사실 관심 있다는 얘기는 결국 쫓는다는 얘기잖아.」
「하하, 내가 부르주아야 그리고 부르주아는 10 · 26을 쫓으면
안 돼?
「이 땅의 돈 있는 자들이야 그런 일에 관심이 없잖아긴
「넌 아직도 왜나 이념 적이구나.」
「내가 오늘 이렇게 만나자고 한 것은 사실 너에게 큰 기대를
걸기 때문이야.」
「기대라니?
「넌 천재잖아. 네가 그 일을 조사한다면 흐지부지 끝나지는 알
을 거야.그래서 말인데 내가 평소에 의문을 가졌던 얘기를 좀
해주고 싶어.」
「뭐지?
「일전에 내가 10 26후 증발해 버린 한국의 핵 개발과 미사일
개발의 도면 및 자료들을 집중적으로 취재했던 적이 있어. 그것
들은 국방과학연구소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증발
돼 버리고 말았지. 이상한 점은 아무도 그게 어디에 갔는지, 누
가 손을 댔는지 모른다는 거야. 도무지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도난당한 것은 아니겠지?
「절대 아냐. 누가 감히 국방과학연구소에 들어가 그런 것들을
훔칠 수 있겠어 얼마나 경비가 삼엄한데. 만약 도난이라면 내
부의 소행일 수는 있겠다 싶어. 10 · 26 후의 어수선하던 시기에
없어진 것 같아. 그래서 네가 10 · 26을 추적한다면 이 부분이 아
주 중요할 것 같더군. 거꾸로 이것을 추적하면 10 26이 보일 수
도 있다는 거지.」
「그런데 정부에서는 없어진 연구 성과에 대한 수사를 하지 않
았나 돈도 엄청나게 들인 성과일 텐데.」
「수사가 다 뭐야 모두 쉬쉬하며 넘어가고 말았지. 누가 감히
그런 얘기를 꺼낼 수 있었겠어?
「왜 엄청난 국가 기밀이 없어졌는데 쉬쉬하고 있다는 게 오
히려 비정상이잖아?
「어제 술자리에서 애들도 얘기했지만 미국이 최악의 경우에는
북한을 폭격하겠다고 하던 이유가 뭔데 그게 바로 북한이 미사
일과 핵을 개발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잖아. 이런 판에 없어진
연구 성과를 수사한다고?
「그렇겠구나. 그런데 왜 내게 그런 얘기를 하는 거야
상준은 가지고 온 두툼한 봉투를 경훈에게 건넸다.
「국방과학연구소에 근무하던 중요한 사람들의 신상 명세서야.
예전에 취재할 때 만들어 두었어, 이 인물들 중에 핵과 미사일을
빼돌린 사람이 있을 거야.」
「지금에 와서 누가 빼돌렸는지가 큰 의미가 있을까?
「물론, 나도 누가 범인인지를 가리기보다는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핵과 미사일이란 자주 국방의 양 핵이 자취를 감춰버렸는
지 알고 싶은 거야. 이것을 쫓다 보면 10 26이 훨씬 분명하게 드
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너는 10 · 26에 대해 상당히 연구를 한 것 같구나.」
「약간은. 우리 일이 오직 그런 걸 파헤치는 거니까. 하지만
10 · 26과 12 · 12에 대해서는 잘 몰라. 나는 5 18 전문이지.」
그럴 것이다. 10 · 26과 12 · 12가 권력의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
사건인 반면 5·19에는 민중이 있었기에 힘없는 잡지사 기자한
테 좀더 익숙할 것이다.
「너 혹시 내가 아는 내용을 너희 잡지에 실으려고 이런 정보를
주는 것 아냐?
「후후 눈치챘구나. 사실 그런 의도도 좀 있지. (천재 변호사
가 쫓은 10·26)이라, 제목만으로도 팔릴 기사야. 하지만 나의
진정한 의도는 그게 아냐.」
「그럼 뭐야?
「역사의 진실을 찾고자 하는 거지. 늘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우리로서는 한계가 있어. 그런데 미국에서 2년 간 유학하고 온
천재 변호사가 10 26을 쫓는다, 여기엔 반드시 뭔가가 있어. 너
는 미국에서 뭔가를 알아 가지고 온 거야 따라서 너에게 거는
기대가 커.」
경훈은 놀랐다. 평소에 기자의 후각이란 돼지의 그것과 같다
는 말을 들어오던 터였지만 이렇게 날카로을 줄은 몰랐다 경훈
은 본능적으로 얼버무렸다.
「마음대로 생각해.」
「너 같은 부르주아가 그런 일에 덤벼들 때에는 단순히 역사 의
식이니 뭐니 때문이 아닐 거야. 확실한 것을 물고 있는 거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너에게는 항상 준비된 애국심이란 없어.
하지만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누구보다도 나라와 민족이라는 대
의를 쉽게 생각하게 돼 왜냐하면 너 같은 부류는 가치관 부재의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한 자존심은 하늘에 닿아 있거든. 너희는 큰 것이 필요
할 때면 애국심을 꺼내 쓴단 말이야.」
「마음대로 생각하라니까.」
백곰 사기극
상준과 헤어져 사무실로 돌아온 경훈은 국방과학연구소 두뇌
들의 신상 명세서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의심하면 한이 없겠지
만 경력만으로는 당장 의심이 가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국
방과학연구소를 거쳐 미국의 기업이나 연구소로 간 사람들이 당
연히 의심스러웠으나 그것만으로는 어떤 구체적 혐의를 알아낼
수도 입증할 수도 없었다.
경훈은 조용히 신상 명세서를 덮었다. 참고 삼아 머리에 넣어
주기는 하겠지만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국방과학연구소를 대폭 정리할
당시의 소장이 육사 11기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10 · 26 이후 소
장으로 임명된 것으로 보아 전두환과 동기라는 사실이 작용한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경훈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멈칫했다.
신상 명세서에서 사리에 맞지 않는 무언가를 보았던 것이다. 경
훈은 덮었던 신상 명세서를 다시 펼쳤다.
이경수, 신군부의 등장과 더불어 일시에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쫓겨난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경훈의 눈길은 그의 현재 직업란에
서 멎었다.
보험 회사 부회장.
아무리 전공과 직업은 별개라지만 사람의 과거와 현재 하는
일이 이렇게나 차이가 날 수는 없었다. 경훈은 이경수의 학력과
경력을 천천히 훔었다.
과학도로서 출발한 화려한 학력이나 경력은 말할 것도 없고
연구소에서도 단연코 최고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다. 매우 중요
한프로젝트의 팀장으로 일하던 그가지금은보험 회사에서 일
한다는 사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훈은 직감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밀을
빼돌렸다면 외국으로 나갔을 텐데, 현재 전혀 엉뚱한 영역에서
활동하다니 한 번쯤 의심해 볼 만했다.
경훈은 즉각 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 네가 준 서류에 이 경수라는 사람이 있던데,그에 대해
알아?
「그럼 , 유명한 사람이지 .」
「뭘 하던 사람이야?
「음, 너는 정말 천재야. 즉각 그 사람을 찾아내는군. 그를 좀
만나봐.」
「왜?
「예전에 백곰 사기극이라는 것이 있었어.」
「백곰 사기극 그게 뭐지?
「이경수 박사한테서 직접 듣는 것이 좋을 거야. 아마 네 머리
로는 그 얘기로부터 뭔가를 이끌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 백곰이란 건 누구지 어떤 사람이야?
경훈은 신문에서 '광화문 백곰'이라는 주식 시장의 큰손에 대
해 읽었던 적이 있어 선뜻 그 사람을 떠올렸다.
「백곰, 그건 사람의 별명이 아니고 미사일 이름이야.」
「미사일 이름?
「그래, 한국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미사일이지.」
「그런데 그것이 사기극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야?
「음, 거기엔 사연이 있어. 그러니 이경수 박사를 만나봐. 그 사
람이 그 백곰 개발 팀장이었어 한국 과학 기술계의 천재였지.」
상준은 대답 대신 경훈더러 이경수를 만나보라고 재차 권했
다. 경훈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경수는 내키지 않는 듯했지
만 경훈의 변호사라는 신분 때문에 잠간 시간을 내주는 기색이
었다
경훈은 이경수의 사무실로 가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국방과
학연구소의 백곰미사일 팀장에서 보험 회사의 부회장으로 옮겨
앉은 그의 신분이 아무래도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
「반갑소, 이 변호사 내가 이경수요.」
「이경훈입니다. 」
경훈은 이경수의 인상이 어딘지 보험 회사의 중역과는 어울리
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백곰미사일 개발 팀을 맡으셨다고요?
「그렇소.」
이경수는 잔잔하나 처연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어딘지 이상한 느낌이 드는군요. 한 나라의 중추적인 무기
개발을 맡으셨던 분이 보험 회사에서 일하신다는 사실이 말입
니다. 」
「그래요?
이경수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공허함이 그 웃
음 속에 짙게 묻어나고 있었다.
「틀림없이 어떤 사정이 있을 것 같은데요, 우선 그 점을 좀 설
명해 주시죠.」
이경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처음
의 잔잔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와는 백팔십도 달리 비분강개했다.
「세상에 이런 놈의 나라가 있소내가,아니 국방과학연구소
에서 내쫓긴 8백 명 넘는 사람들이 이게 무슨 꼴이오 보험 회사
라니 나는 다시는 과학이니 기술이니 하는 분야에는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소. 그래, 기술 중의 기술인 미사일
개발을 책임지고 성공으로 이끌었던 내가 보험 회사에 있다는
게 말이나 되오 한국 최고의 두뇌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게 국가
적으로 얼마나 비극이오 이 보험 회사 일, 아무나 할 수 있소.
그러나 백곰미사일 개발, 그 당시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나라가
세계에 몇 군데 없었소. 그걸 우리가 해냈는데, 그 고생해 가며
성공해서는 다 같이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조국의 앞날을 축
복했는데 ‥‥ 이게 무슨 꼴이오?
경훈은 뜻밖이었다. 만나기 전에는 기밀을 빼돌렸기 때문에
전공 분야를 떠났을 것으로 의심했는데 전혀 딴판이었다.
「이게 모두 10·26이 빛은 왜곡된 한국의 현실이라고나할까,
그 망할 놈의 10 · 26 말이오.」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장거리 유도탄을 개발하라는 지
상 명령을 받았소. 대통령은 우선 유도탄, 그 다음은 인공위성을
보아올릴 수 있는 로켓 개발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 유도탄은 대
전 기계창에서 극비리에 만들어 졌소. 우리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했소. 완전 백지 상태였지만 그 유도탄으로부터 시작해서 우
리의 과학 기술. 국방 기술, 나아가서는 진정한 정치 외교적 독
립을 이를 수 있다는 긍지로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연구에 연구
를 거듭했지.」
「미국이 눈치를 채지 못했나요?
「최대한으로 보안을 유지했지만 종내는 그들이 눈치를 채고
말았소. 하지만 박 대통령이 필사적으로 막았지 우리는 거기서
그분의 무서운 집념을 소. 박 대통령은 거기서 꺾이면 앞으로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각했던 거요. 측근에게 "나도 각오를 해야
겠어"라고 얘기했던 것도 그 무렵이라지.」
「결국 개발은 성공했습니까?
「그렇소. 4년 만인 1978년 9월 26일 박 대통령을 모시고 주한
미군 사령관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는 통쾌한 성공을 거두
었소. 그 미사일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추진제 탄두 ·유
도 조정 장치를 가진 것으로, 원 모델이었던 나이키 허클리스보
다도 훨씬 나았소. 우리 개발 팀은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렸지.
이제 미국 미사일 안 사고 오히려 우리 것을 수출할 수도 있다는
기대에 가슴이 부풀었소.」
「그런데 백곰을 사기 극으로 밀어 붙였다는 것은 무슨 얘깁
니까?
「10·26이 결국 백곰을 사장시킨 거요. 미사일로부터 시작해
서 우주 항공 분야까지의 창창한 꿈을 가졌던 우리는 10 · 26 후
이상한 소문을 들었소. 백곰은 사기극이라는 거였지.」
「그 소문은 어디서 나온 점니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그 진원지였소.」
「이상하군요. 보안사령관이라면 그 당시 대통령이 가장중점
을 둔 무기 개발에 극도로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텐데 발사 실험 당시에는 몰랐습니까?
「전두환처럼 잘 알던 사람도 없었을 거요. 우리는 개발을 검토
하던 때부터 발사 실험 때까지 한 번도 보안사 요원의 감시를
어난 적이 없었으니까.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자마자 대
전 기계창으로 내려왔소. 나는 하루 종일 그를 안내하면서 어떤
부분이 어떻게 국산화됐는지 일일이 설명했다오. 그는 감탄하면
서 앞으로도 종종 내려와서 배우겠다 하고 올라갔는데 10 · 26이
나자 태도를 백팔십도 바꾼 거요.」
「어떻게 말입니까?
「전두환은 틈만 나면 한국형 유도탄은 엉터리다. 미국 것에다
페인트칠만 했다는 등의 얘기를 했소. 그러고는 곧 유도탄 개발
팀을 해체시키고 국방과학연구소의 직원 839명을 하루아침에
해고시켜 버린 거요. 그것은 한국군 발전사에 큰 획을 긋는 일이
었소. 그후 우리 무기를 우리가 개발한다는 구호조차 없어지고
말았지. 앞으로 우리는 무기에 관한 한 만년 미국에 종속될 수밖
에 없소. 프랑스보다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여건이 있었는데도 말
이오.」
「전두환은 왜 그렇게 표변했을까요?
「미스터리지.하지만 그것이 10·26과 연관되어 있다는 건 어
린아이라도 알 거요.」
「어떻게 연관을 지을 수 있을까요?
「뻔하지 않소. 정통성 없는 정권을 잡고 나니 미국과의 관계를
확고히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고, 그러자니 미국이 해달
라는 대로 다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백곰 개발 팀을 해체시키고 그 비밀을 넘겨주기 위해
서 백곰미사일을 사기라고 했다는 말씀인가요?
「확신하오. 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이 그동안 개발했던 핵무기
에 관한 정보도 모두 미국으로 넘어가 버리지 않았소.」
「백곰미사일의 개발 자료는 그대로 있습니까?
「그것도 모두 없어져버렸소. 이미 8백여 명이라는 엄청난 숫
자의 과학자를 한번에 숙청할 때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아니
오 지금 나이키 허클리스가 인천 상공에서 폭발하고 또 엄청난
돈을 들여 차세대 미사일을 미국에서 사온다고 하는데, 우리는
제대로만 됐으면 이미 오래 전에 거의 최고의 완벽한 국산 미사
일망을 가졌을 거요. 뿐만 아니라 우리 위성도 비웠을 테고.」
이경수는 분이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미국이 하라는 대로 굽실굽실하기만 해서
는 우주 항공 분야의 산업 개발이란 어림도 없소. 아리안위성을
쏘아올리는 인도를 보시오. 그 당시 우리와 비교도 안 되던 수준
아니었소 또 중국인들은 어펐고 그러나 지금은 보시오. 엄청
난 돈을 줘가면서 중국인들에게 우리 위성을 아올려 달라고
부탁하고 있잖소. 배짱과 자존심을 다 내던진 우리에게 무슨 미
래가 있겠소 보험 회사 부회장, 물론 나로서는 편하고 돈도 많
이 버는 자리요. 그런데 내가 이러고 있어서 되겠소 세계적으
로 이름을 날리고 20년도 더 전에 나이키 허클리스보다 나은 미
사일을 개발한 내가 이러고 있어서 되겠냔 말이오. 이러고도 어
떻게 이 나라에 과학 기술의 미래가 있겠소」
이경수 박사와 헤어져 돌아오는 경훈의 뇌리에서는 백곰 사
기극은 10 · 26과 연관된 미스터리라는 이 박사의 말이 떠나지 않
았다.
신군부, 참 맹랑한 존재들이다. 군인으로서 정권을 잡았다면
최소한 국방과 군사에 대해서는 백년대계를 확보했어야 한다.
그러나 핵이니 미사일이니 하는 국가 기밀을 몽땅 넘긴 일. 율곡
이니 뭐니 무기 구매를 극도로 교활하게 이용하여 축재한 일, 그
리고 재판에서 추징 명령을 받고도 돈을 감춘 채 검찰과 숨바꼭
질을 하는 꼴 모두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정녕 이런 자들이 조국
을 다스려왔단 말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경훈은 분노를 누르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전두환은 어느 시점에서 미국과 이런 거래를 주고받았
을까. 이 박사가 생각하는 대로 일단 정권을 잡고 나서 미국과
거래를 했던 걸까, 아니면 그보다 전에 이미 어떤 밀약이 존재했
던 걸까.
경훈의 뇌리에는 다시 합수부의 수사 발표와 김재규의 진술서
사이의 머나먼 거리가 아로새겨졌다.
경훈은 사무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상준의 잡지사로 찾아
갔다.
「이경수 박사를 만나고 나니 핵과 미사일이 10 · 26과 관련 있
을 거라던 너의 말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더군. 그런데 전두환
과 미국이 거래한 시기는 언제쯤이 라고 생각해?
「글쎄, 그게 그렇게 중요해?
「물론, 대단히 중요하지.」
「어째서
「시기가 언제냐에 따라 10·26, 나아가서는 12·12의 성격이
크게 달라져. 만약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나서 거래를 했다면 이
경수 박사의 말대로 정통성이 없는 정권을 인정받기 위해서 그
랬겠지. 그러나 거래 시기가 정권을 잡기 전이었다면 상황은 그
리 간단치가 않아.
「음, 그럴 수 있겠군. 네 말을 듣고 보니 전두환은 정권을 잡기
전에 미국과 거래를 했겠다는 생각이 들어. 적어도 5 18 이전에
는 틀림없이 어떤 종류의 교감을 나누었을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일전에 나는 12·12를 그토록 싫어하던 미국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싹 바꾸고 신군부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게 된 이유에 대
해 깊이 생각했어. 레이건은 대통령 취임 후 최초로 만날 외
국의 지도자로 전두환을 선택했고, 그것은 한국민들에게 미국이
전두환을 지지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생각되었잖아.」
「그것은 신군부가 김대중을 사형시키지 않고 미국으로 보낸
다는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 아냐 언론은 모두 그렇게 분석했
잖아?
「그 이유도 있을 거야. 그러나 미국이 김대중 한 사람을 살리
기 위해 그토록이나 비난해 오던 신군부에 대한 태도를 싹 바꾸었
을까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미국이 전통적으로 가장 싫어하
는 협박에 대한 굴복이 되는데 말이야. 네 생각은 어때?
「글쎄 .」
「절대 아냐. 진상은 이랬던 거야. 이미 광주 진압 때 한국군 이
동을 인했을 때부터 미국은 신군부를 지지했던 거지. 알겠
어?
「그런가 그런데 그 진실은 뭐야 미국이 정말 이동을 승인한
거야 위컴 사령관이 자신의 휘하에 있던 한국군을 광주에 투입
하겠다는 신군부의 요청을 승낙했던 거냐구?
「그래 .」
「믿을 수 없어. 언론에서는 그것이 학생들의 주장에 불과한 거
라고 다루었잖아.」
「그런 민감한 문제를 국내의 어떤 언론이 정면으로 건드리겠
어 물론 거기에는 미국의 언론 공작 탓도 있지만.」
「어쨌든 네가 하고 싶어하는 얘기가 뭐야?
「미국이든 신군부든 입이 열 개라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
거가 있어.」
「그게 뭔데?
「충정 작전에 대한 기록이야.」
「충정 작전이라면 광주 진압 작전을 말하는 거 아닌가?
「그렇지. 그 작전 기록의 5월 22일자에 보면 '한미간 협의 사
항 24일까지 대기'라는 대목이 있거든. 무수한 변명을 해대지만
그것 하나로 모든 사실은 명백한 거야.」
상준의 음성은 단호했다. 하지만 신중한 성품인 경훈은 상준
에게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 하나만으로 단정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데
「그 다음은 모두 거말이야. 그들이 인정하려 하겠어 릴리
대사라는 자는 』동아일보t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발뺌했지.
"20사단은 한국이 연합사의 작전 통제권 밖으로 래갔습니다. 광
주에 투입됐을 때는 연합사의 작전 통제권 밖이었습니다"라고.
그런데 80년 5월 22일 미국방성 대변인은 이미 이렇게 발표했
어.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은 그의 작전 지휘권 아래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 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
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라고 말이야. 그럼 둘 중에 하나는 거짓
말인데 어떤게 거짓말이겠어 또 5 · 18 당시 대사였던 글라
이스틴의 증언도 있어. "20사단 이동 승인은 위컴과 내가 검토했
고, 내가 그렇게 하시오 했다. 나는 부대의 이동 전에 이것을 워
싱턴에 보고했다"는. 이제 명백히 알겠어.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이 확실히 부각되지 않았을까왜 미국
과 광주가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들이 미궁 속에 묻혀 있
느냔 말이야. 미국 대사의 거말은 크게 부각되고, 실제 사실은
학생들의 주장쯤으로 비쳐지는 거지?
「미국이 세계적으로 수행한 공작들은 모두 언론의 비호를 받
아. CIA의 언론 공작이 개입돼 있는 거지. 언론이 미국의 입장을
옹호하느라 정신없는 경우도 있어. CIA의 가장 중요한 공작 중
하나가 바로 언론 공작이거든. 요즘 같은 IMF 체제하에서도 언
론이 미국의 전술적 입장은 철저히 베일 속에 숨겨둔 채 클린턴
을 비롯한 미국의 영웅들이 한국을 위해 애쓰는 모습만 부각시
키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지. 지난번에 클린턴 대
통령이나 고어 부통령이 내한해서 우리 정부에 재벌 해체를 강
요할 때도 봐 그들이 관련 미국 업계의 로비를 하는 건데도 마
치 한국의 미래를 위해 애쓰는 듯한 모습만 비추잖아. 국민은 뭐
가 뭔지 모르고 그냥 사는 거야. 그냥 말이야.」
상준의 시각은 냉정하고도 날카로웠다. 위컴 사령관은 12 · 12
때는 자신의 통제 아래 있던 병력이 서울로 진입한 것에 대해서
불같이 분노했지만, 5 18 때는 한국 정부의 요청에 동의해 병력
의 광주 투입을 허용했다. 12 · 12 와 5 · 18 사이의 어느 순간 신
군부와 미국은 거래를 했던 것이다. 거래의 조건은 물론 핵과 미
사일 개발의 성과를 미국에 넘기는 대가로 미국의 협조를 구하
는 것이었다.
박정희와 카터
집으로 돌아온 경훈은 다시 한 번 10·26부터 12·12, 그리고
j 18에 관한 기록들을 샅샅이 검토했다. 그는 진짜 중요한 정보
는 의외의 곳에서 실체를 드러내는 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모두
가 아는 정보는 이미 조작될 대로 조작됐을 가능성이 컸다. 꼼꼼
히 자료를 검토하던 경훈의 눈이 한 구절 위에서 딱 멎었다.
허화평은 이미 10 26이 발생했을 때 저에게 5 · 16을 잘 연구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는 이미 그때 대권을 생각하고 있
는 것 같았습니다.
보안사의 정보처장으로 근무하던 한용원이 5·18수사 당시
검찰에서 진술했던 내용이다.
한용원의 이 진술 조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허화평에게서 어
떤 분위기가 감지되었길래 한용원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경훈이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전화 벨이 울렸다 인남이
었다.
「애들하고 잘 만났어?
「그래. 그런데 뜻밖의 성과가 있었어.」
경훈은 상준과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면 내가 전화하기를 잘했네 결과는 어떨지 모르지만.」
「무슨 얘기야◎
「일전에 내 전화에다 네가 메시지 남겼잖아 좀 도와달라구.」
경훈은 그때 인남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같이 제럴드 현의
미스터리를 풀자고 했던 것이 생각나 소리 없이 웃었다.
「이 사람을 한번 만나볼래?
「누군데?
「그때 네가 말하길, 어느 편도 아니면서 그 역사의 와중에서
많은 것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그래 .」
「그런 사람을 찾았어 .」
「정말 기자나 뭐 그런 사람이면 아무 소용없어.」
「기자가 아냐. 나도 옛날 자료를 웬만큼은 섭렵해서 이젠 네가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안다구.」
경훈은 약간 머쓱해졌다.
「박 대통령 때 국방부 전략기획국장을 지낸 사람이야 그후 안
기부 차장을 지냈고. 그 사람은 』조선일보사와 가진 짧은 인터뷰
에서 박 대통령 시해의 배후에 미국이 있을 거라고 얘기했어 .」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그래, 그 정도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주장하
기 어려운 얘기라, 그 사람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뒤져봤어 .」
경훈은 인남에게 감탄했다. 자신도 웬만한 자료는 모두 샅샅
이 뒤졌건만 인남처럼 대발견을 하지는 못했다.
「알아봤더니 그사람 완전히 미국통이더라구 10·26바로 다
음날에 미국 대사가 맨 먼저 만난 한국인이었어. 당시 육군 소장
이었는데 말이야.나중에 전두환이 레이건과 가진 한미 정상 회
담도 당시 공사로 있던 그 사람이 앨런 특보와 함께 애를 써서
성사시킨 거였어 .」
「어떤 근거에서 그런 말은 했을까?
「그건 나도 몰라. 필요하나면 만나봐.」
경훈은 반드시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좀 특이한 사람이야.」
「왜?
「장성 출신에 전직 안기부 차장인 그가 상당히 진보적인 잡지
에 투고를 했거든. 북한이 미사일을 개발해도 쌀은 보내야 한다
는 내용이었어. 옳든 그르든 용기가 없으면 주장하기 어려운 글
아니겠어?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략기획국장과 안기부 차장을 지낸
그의 경력으로 보아서는 기대하기 힘든 전향적인 내용이었다.
마침 그 전직 전략기획국장이 기고했다는 잡지사가 상준이
일하는 회사였다. 경훈은 상준의 도움을 받아 그를 만날 수 있
었다.
10 · 26 당시 국방부 전략기획국장이었던 그는 자주 국방의 큰
갈래인 율곡 계획을 입안하고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히 대통령
의 오른팔이라 할 만했다. 그 전직 국장과 잠간 얘기를 나눠보던
경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전직 국장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걱정
을 안고 사는 사람이었다.
「나는 전략기획국장을 거쳐 안기부 해외 담당 차장을 지냈소.
1후에는 일본의 한 대학에서 연구교수로 오래 있었지.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내 나름대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
소.나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박 대통령 시해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요. 무엇보다도 미국은 박 대통령
의 자주 국방론을 싫어했소.」
경훈은 새삼 제럴드 현을 떠올렸다. 제럴드 현은 모두가 밖에
서 볼 수밖에 없었던 일을 안에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다
만 정작 10 · 26 당일에는 병원에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10
26은 그를 피해간 꼴이 되었지만.
「게다가 카터가 세계에서 가장 미워했던 지도자가 바로 박 대
통령이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거요.」
「하지만 카터는 독실한 교인으로서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요.」
「관점의 차이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박 대통령의 독재로 수많
은 시민들이 죽고 있다고 보고하면,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소.
「그렇군요.」
「하나 문제는 밑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대통령에게 보고
하지 않고 일을 저지른다는 것이오. 대통령을 편하게 해주는 거
지. 그러니 일단 정책을 수행하는 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
면 카터보다 백배 독실한 교인이 대통령일지라도 막을 수 없는
거요.」
「그런데 카터와 박 대통령은 왜 그렇게 사이가 벌어졌습니까
카터는사람이 솔직하고 남을 증오할 것처럼 보이진 않던데요.」
「문제는 카터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었던 것이 아니오. 박
대통령은 당시 자주 국방이라는 이름 아래 핵과 미사일을 개발
하고 있었고 미국은 갖은 방법으로 그것을 저지하려 들었소. 그
렇다 하더라도 당시 김포공항에서 벌어진 일은 너무나 기가 막
힌 일이었지 대통령을 수행하면서 그때처럼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소. 그 일 이후 박 대통령은 눈을 감을 때까지 미국을 증오
했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들어보시오.」
전직 국장은 애써 일그러진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소
-네, 각하. 죄송합니다.
외무부 의전국장이나 청와대 의전비서나 몸둘 바를 물라 했
다. 벌써 30분이나 전부터 공항에 와서 카터가 탄 비행기를 기다
리고 있는 박 대통령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괜찮소.
박 대통령은 점잖게 말하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공
항에 나와 있던 관료들은 끝없는 불안감에 횝싸여 있었다. 일국
의 대통령을 30분이나 기다리게 하는 것은 이유야 어찌됐든 외
교 관례상 심각한 결례가 아닐 수 없었다. 의전이란 분 단위가
아니라 초 단위로 국가 원수의 동작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지금 비행기는 어디에 있소
5분쯤 후에 눈을 뜬 박 대통령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비행기는 지금 청주 상공을 통과하고 있
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대구 상공을 지난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비행기가 너무 느리게 날고
있습니다.
-음‥‥‥
박 대통령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의전국장은 대통령의 심기가
무척 불편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미국 공군 1호기는 웬
일인지 거북이 걸음처럼 느린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놈들이 나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미국이 고의로 박
대통령을 기다리게 한다는 것을. 카터 일행은 좁은 공항의 대기
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박정희를 생각하며 높은 하늘에서 고소
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30분이 더 지난 후 의전국장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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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앞에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각하, 죄송스런 말씀입니다만‥‥‥
-무슨 일이오
-카터 대통령은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의전실로 오시지 않
고 곧바로 헬리콥터를 타고 동두천의 미군 기지로 가실 예정이
랍니다.
-음·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각하.
-그래서 나에게 비행기가 내리는 데까지 걸어오라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각하.
옆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던 차지철 경호실장이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의전국장을 노려보며 분에 못 이겨 입을 열었다.
-각하, 청와대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이
런 모욕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 대한 도발입
니다.
-아니야. 내가 나가지.
-각하, 지금 빨리 나가셔야 헬리콥터를 타기 전에 ‥‥‥
-알았소.
박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전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지
만 대통령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카터를 개인적 친분으로 만
나는 것은 아니었다 국민을 대표한 대통령이라는 신분으로 나
온 자리였다 대통령은 분노를 억누르고 묵묵히 걸었다. 밤 공기
가 싸늘했다
-각하, 죄송하지만 걸음을 좀 빨리 하셔야‥‥‥‥ 비행기가 착
륙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걸음을 빨리 했다. 기왕 나온 바에야 카터의 헬리
콥터가 떠나기 전에 도착해야만 했다. 미공군 1호기를 향하여
거의 뛰다시피 발걸음을 옮겨놓는 대통령의 뒤로 고위 관료들이
얼굴에 땀이 맺히도록 분주히 따라갔다. 한밤의 기묘한 행렬이
었다.
잠시 후 착륙한 비행기에서 갑자기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짐
가방을 어깨에 멘 수백 명의 기자들이 박 대통령 일행을 향하여
무질서하게 달려나왔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의 대통령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박 대통령은 의
연한 태도를 보이려고 했으나 기자들에 의해 이리저리 밀쳐졌
다. 대통령을 수행하던 경호원들도 뜻밖의 사태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외교 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간신히 수행
비서 한 사람의 팔을 붙잡고 수백 명의 기자들을 헤치며 두 번째
로 도착한 미공군 1호기로 다가갔다. 박 대통령의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강렬한 서치라이트를 받으며 트랩을 내려온 카터는 초라한 모
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한국의 대통령이라는 말을 듣고
무심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박 대통령이 손을 맞잡고 포즈를
취하려 했지만 카터는 바로 손을 빼고는 옆에 대기하고 있던 주
한 미군의 헬리콥터에 올랐다.
기자들을 헤치고 가까스로 도착한 우리 측 수행원들은 카터가
헬리콥터에 오르는 모습과 그 헬리롭터를 향해 분노 어린 시선
을 던지고 있는 박 대통령을 보았을 뿐이다. 한국 외교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치욕스러웠겠군요.」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지.」
전직 국장은 치 밀어오르는 것을 애써 누르는 기색이었다.
「문제는 다음날 터졌소. 박 대통령은 정상 회담이 시작되자마
자 카터가 거부한 의제였던 철군 문제를 40분이나 거론했소. 마
치 카터를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로 말이오. 카터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나가버렸소. 사람들은 카터가
그렇게 화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고들 했소.」
「그렇다면 부하들이 카터의 승낙을 받지 않고도 박 대통령을
제거하려 했을 법하군요.」
「어느 국가 원수도 직접 그런 일에 개입하지는 않소. 그런 것
은 항상 정보나 공작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몫이지. 무엇보다도
의심이 가는 것은 10·26직전 갑작스럽게 펼쳐진 미국의 유화
정책이오. 모든 것이 거꾸로 갔거든.」
「무슨 말씀입니까?
「모든 것이 상식에 어긋났단 말이오. 그해 10월 4일 김영삼 총
재가 정치 공작에 의해 국회에서 제명되자 미국은 즉각글라이
스틴 대사를 소환했소. 불만과 항의의 표시였지. 외교 관례상 그
렇게 소환하면, 양국간 불편한 관계가 해소되거나 양해가 이루
어져야 다시 부임시키는 것은 이 변호사도 알 거요. 하지만 글라
이스틴은 부마사태가 터진 10월 16일 돌연 귀임했소.」
「이례적이군요.」
「그뿐만이 아니오. 글라이스틴은 돌아오자마자 여야 할 것 없
이 한국의 거물들을 만나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소. 그러면서
한국의 방위에 대한 미국의 공약 준수를 역설했지.」
「친미 분위기를 형성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소. 더욱 심한 것은 부마사태 기간 중 열린 한미 안보 회
의에서 브라운 국방장관은 이제까지 줄곧 거절해 오던 한국 측
요구 사항을 모두 들어주었소. 가령 무기 판매 최혜국 보장이라
든지 F-16기 36대 도입이라든지‥‥‥ 그때까지 카터 행정부가
모든 것을 인권 문제와 연결시키던 태도를 백팔십도 바긴단 말
이오. 그것도 최악의 인권 상황에서.」
「음, 그것은 아마도‥‥‥‥」
「김재규에게 임무를 완수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고 나는
생각하오. 내가 국방부에 있어 봐서 알지만 당시는 중앙정보부
가 국내외의 모든 일을 관장할 때였소. 대미 관제도 모두 중앙정
보부의 책임이었지.」
경훈은 김재규를 담당했던 브루스의 말이 생각났다. CIA의 터
너 국장이 소원을 말하라고 하자 김재규는 주한 미군 철수 중단
이라 했고, 터너는 그 소원을 들어줌으로써 박 대통령으로 하여
금 김재규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게 했다지 않은가.그렇다면 미
국이 그때까지의 정책 기조를 완전히 거스르면서 갑자기 유화
정책을 편 것은 김재규의 임무와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
는 대목이었다.
「모든 것이 거꾸로 가고 있을 패 미국측이 기다리던 순간이
차츰 다가오고 있었던 거요.」
경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미션
그런데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
「무엇이오?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어떤 분은 케네디와
박 대통령의 죽음이 같은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다면 배후도 같다고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배후에 뭐가 있다고 했소?
「군산 복합체라고 했습니다. 」
「음‥‥‥‥」
「그러나 박 대통령은 자주 국방이라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는 한편 미국으로부터도 엄청난 부기를 사들이
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그런데 왜 그분은 군산 복합체가 배후에 있다고 얘기했을
까요?
「이 변호사는 자주 국방과 군산 복합체의 관계를 이런 각도에
서 생각해 본 적은 없소 자주 국방으로 인해 무기 거래 규모가
일시적으로 커지긴 하지만, 일단 핵을 개발하면 재래식 무기의
구매도 취사선택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핵도 그렇고 재래식 무
기도 그렇고 군산 복합체가 운용하는 시스템에 어긋나는 거요
그러니 그들이 자주 국방을 반길 리 있었겠소?
경훈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런데 무기 구매와 관련해서는 의문점이 있습니다. 」
「그게 뭐요?
「왜 우리 나라는 정작 필요한 무기는 못 사고 미국이 강요하는
무기만 사는 겁니까 심지어는 단종 직전의 무기를 사서 엄청난
손해까지 보고 말입니다. 」
「무기는 매우 예민한 부분이오. 우리 나라는 원하는 무기를 마
음대로 살 수 없소. 미국의 지침을 따라야 하지.」
「그런 불평등한 관계가 어디 있습니까 마음대로 사면 어떻게
되죠?
「이 변호사, 미국 정부나 정치인은 군산 복합체를 매우 두려워
하고 있소. 그들의 도움 없이는 출세를 생각도 못하기 때문이오.
군산 복합체는 재고를 처분해서 얻는 이익으로 새 무기를 개발
해 내지. 미국의 군사력은 이런 메커니즘 위에서 유지되는 거요.
그러니 우리 나라는 영원히 재고를 치을 운명일 뿐, 그들이 개발
한 신무기를 살 수 있는 입장은 아니오.」
「우리 입장이 딱하군요.」
「박 대통령은 이런 불평등을 참지 못했던 거요. 그래서 핵무기
개발을 서둘렀지. 핵무기를 개발하면 경제적 부담도 덜고 효율
적으로 국방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요. 지금 같은 국가 경
쟁 시대에는 경제적인 국방이 더욱더 절실하오. 하지만 미국은
우리에게 IMF 자금으로 무기를 사라고 강요하고 있소. 자기네
가 핀준 돈으로 무기를 사라는 거지. 실업자가 넘쳐나는 이 현실
에서, 일본도 중국도 아닌 동족을 겨눌 무기를 말이오.」
「그 군사비를 산업 자금으로 돌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려면 우리 나라가 미국의 입김에서 어나야 하오. 미국
이 시키는 대로 따라만 하다가는 언제나 멍청한 소비자밖에 못
되지. 아마 한반도 역사상 가장 많이 허비한 부분이 군사비일 거
요. 율곡에 40조가 들어갔지만 그중에 지금 쓸 만한 무기가 얼마
나 되오 엄청나게 많은 돈이 커미션으로 들어가고, 그 커미션
조금 더 먹겠다고 엉터리 무기만 잔뜩 들여다 놓고 못쓰게 되니
부품값은 부품값대로 계속 먹히고‥‥‥ 이러니 어떻게 경.제가
안 망하겠소.」
「무기 구매 얘기만 나오면 정말 가슴이 답답해져 견딜 수가 없
습니다. 그 거래의 속내는 어떻게 된 겁니까?
「무기 거래의 경우 보통 국제 관례상 공급자가 구입자에게 5퍼
센트 정도의 커미션을 주오. 하지만 인기가 없는 무기는 커미션
이 더 높아지지 게다가 특수하게 검토해야 할 무기는 컨설턴트
비용이라고 해서 10퍼센트가 더 붙소. 최고 20퍼센트까지의 커
미션이 붙는 거지. 이 커미션 비용 중 반은 국내로 들어오지만
나머지 반은 들어 오지조차 않소. 5 6공 시절 그 반은 최종 결정
권자의 몫이었소.」
「최종 결정권자라면?
「물론 대통령이지 .」
「그럼 대통령의 몫은 어떻게 처리됩니까?
「국내에 들어온 돈 중에서도 상당액이 대통령에게 전달되고
외국에서는 아예 대통령의 해외 구좌로 입금되어 버리지 .」
「대통령으로서는 가장 깔끔한 방식 이었겠군요.」
「이르다 뿐이오. 차세대 전투기 기종 변경 문제는 이런 추악한
커넥션이 완전히 드러난 결정판이었소. 모두가 F-18을 결정한
상황에서 맥도널 더글라슨지 제너럴 다이내믹슨지 하여튼 F-16
을 생산하는 회사가 노태우를 집중적으로 공략했소. 그 결과 차
세대 기종이 돌연 바뀌어버렸소. 조종사들도 평가 분석단도 모
두 F-18이 좋다고 했는데 말이오. 노태우는 해외에서 엄청난 돈
을 받았지. 우리 민족의 현실이 참 서글프지 않소 그 다음 대통
령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돈도 못 찾고 오히려 정치적 협력이니
뭐니 하고 있으니 ‥‥‥‥ 대통령도 이런 식으로 돈을 빼먹었는데
밑에 있는 자들은 오죽했겠소 공급자에게 무기 대금을 더 비싸
게 청구해 달라는 경우까지 왕왕 있었지.분통이 터질 일이오.
커미션을 더 챙기려고 쓸모없는 별 회한한 무기들을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앞다투어 들여 오기도 했고. 나는 이런 꼴들이 보기 싫
어 일본으로 가버렸지.」
「아니 그렇다고 일본으로 가시면 어떡합니까 끝까지 투쟁을
하셨어야죠.」
「그것은 권력 게임이오. 힘센 자가 이기는 거지.공군의 입장
을 대변하여 끝까지 F-18을 주장하던 공군 참모총장이 보안사에
붙들려가 수모를 당하고 결국 옷까지 었던 것을 기억하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어땠습니까?
「일화를 하나 들려 주리다. 언젠가 내가 직접 무기 거래상을 데
리고 청와대에 들어간 적이 있소.」
일행은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자 깜짝 놀랐다. 몇 년 만의 더
위니 뭐니 부산을 떨 때였는데, 박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부지런히 닦으며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일행
을 맞은 후 국제적 로비스트인 외국인이 연신 손등으로 땀을 훔
치는 것을 보자 그제야 비서를 불러 에어컨을 켜도록 지시했다.
로비스트는 준비해 온 수표를 꺼냈다.
-각하, 본사에서는 각하의 결정을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
습니다. 좀더 준비했으면 좋았겠지만 국제 관행에 따라 가져왔
습니다. 받아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박 대통령은 수표를 쓰윽 훌어보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로
비스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그는 박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해올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좀더 인
간미 있는 대통령이라면 어깨를 두드리고는 포옹을 해올 것이
다. 이제껏 커미션 봉투를 손에 든 후진국의 모든 지도자들이 그
랬듯이 ‥‥‥
그러나 박 대통령은 한참이나 수표의 액면가에 시선을 고정시
킨 채 굳은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일행은 지나치게
오래 걸린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박 대통령은 일행 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
었다. 일행은 당황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일행에게 대통령
의 무심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집어넣으시오. 대통령인 내가 국민들이 죽도록 일해서 모
은 이 돈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겠소 나라를 지키자고 한 푼 두
푼 아긴 돈인데 말이오. 수표는 집어넣으시오. 대신 이 돈만큼
무기를 더 주시오.
일행은 감동했다. 이런 일은 무기 거래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
다. 무기 거래 대금이라면 모두가 눈이 벌개져서 달려들었지만
박정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일행은 이 옹골찬 모습
의 지도자를 보면서 한국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밖에 없다고 느
꼈다.
-내 그렇잖아도 무기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소. 여기 나와 있
는 주한 미군 장성들 중에도 군산업체 하수인 노룻을 하는 작자
들이 있질 않나, 큰 거 팔아먹을 때는 국방장관이란 자가 노상
날아오질 않나‥‥‥ 정작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주지도 않고.
심지어는 자기네 나라에서 단종된 것까지 팔아먹지만 안 산다고
할 수도 없으니 우리 민족이 참으로 가련하오. 더욱이 커미션이
다 뭐다 해서 엽전이니 양코배기니 잔뜩 붙어서 뜯어먹으니, 이
래 가지고 우리 조국에 미래가 있겠소 당신은 사람이 정직해
보이는데, 본국에 돌아가면 이 커미션 대신 무기를 더 달라고 하
시오. 이익금까지 빼면 액면가보다는 더 많은 액수의 무기가 돌
아을 수 있을 거요.
-각하, 저는 진심으로 감격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후 무기 공급자는 그 커미션 액수의 두 배fl 해당하는 무기
를 보내주었다.
「박 대통령은 그런 분이었소.」
「한여름에 집무실에 에어컨도 안 켰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전직 국장은 일화를 얘기하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풀리는 모
양이었다.
역사적 격동기에 권부의 내부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전
직 전략기회국장 역시 10 · 26의 원인으로 자주 국방을 거론했다.
미국의 눈으로 보면 박정희의 자주 국방은 김재규의 말마따나
'위험한 행동'이었다. 경훌은 한국 중앙정보부장의 시각이 미국
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혀를 차지 않을 수 없
었다
김재규가 합수부에서 진술한 자주 국방이란 결국 핵 개발에
다름아니었다. 박정희의 자주 국방이 핵 개발을 뜻한다면, 김재
규가, "자주 국방으로 말미암아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지고 안보
를 저해하게 되었다"고 진술한 것도 의미가 뚜편해졌다 그것은
박정희의 민족주의가 미국과 정면으로 충돌했음을 뜻하며, 미국
의 입장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박정희의 도전에 대해 결말을 내
야 했던 것이다.
김재규의 진술은 미국의 진술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런 관점에
서 본다면 김재규는 미국의 사상과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미 박정희를 제거해야 할 미국의 필요 조건은 완벽했다
그러나 경훈은 쉽사리 단정할 수는 없었다. 미국이 김재규의
배후에 있었다 하더라도, 혹은 박정희를 제거해야 할 미국의 필
요 조건이 완벽했다 하더라도 구체적 행위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어떤 것도 단정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시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아내야 한
다. 일단 김재규가 미국의 조종을 받아 박 대통령을 시해했다면
그후 김재규와 미국의 관계가 중요할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
다. 그러나 이 작업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당장 떠오르는 의문은 미국이 김재규를 밀었다면 어째
서 김재규가 거사에 실패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미국의 관련성을 직접적으로 부인하는 거대한
현상이다 그 현상의 내부로 들어가서 진상을 캐지 못하는 한,
'미국이 배후에 있었다'는 충분 조건은 완벽하게 묻혀버리고 말
것이다
이처럼 진상을 캐는 일에는 절대로 증거가 나타날 리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 증인이 나타날 리도 없었다. 박 대통령과
그렇게 가까웠던 제럴드 현마저토 죽음의 순간이 임박해서야 전
화를, 그것도 고작 인남에게 했을 정도니 다른 사람의 경우는 말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알려져 있는 10 · 26의 진상이란 너무도 허술하고
유치했다. 그러다 보니 죽은 김재규만 보든 몰상식과 모순을 한
몸에 덮어쓰고 희대의 얼간이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경훈은 모순으로 점철된 10 26에 대한 결론을 그냥 덮어둘 수
없었다. 그것은 한민족의 수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자신이
10 · 26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단순히 감추어진 현대사를 들춰내
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부끄러운 민족사를 가다듬고 치유하
는 일인 동시에 재발을 막는 일이기도 했다
인질
경훈은 사무실로 돌아와 바로 인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남
의 대발견을 칭찬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남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경훈이 점심을 먹고 들아오자 비서는 전화가 두 통
걸려 왔었다고 전했다.
「여자던가요?
「아니, 남자였습니다. 」
「누구라던 가요?
「밝히지 않았습니다. 」
「메시지 남겨둔 것도 없구요?
「네. 다시 건다고만 했습니다. 」
경훈은 불안해졌다. 이렇게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전화는 거의
없었다.
경훈이 자리에 앉아 생각을 가다듬으며 인남에게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할 때 인터폰이 울렸다
「변호사님, 아까 전화했던 분입니다. 」
「돌려줘요.」
잠시 후에 걸걸한 음성이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이 변호사, 당신의 애인은 우리가 데리고 있소. 미인에다가
몸매도 잘 빠졌더군.」
「뭐요 애인이라니?
「그렇소. 지금 미칠 것 같소. 돈이고 뭐고 다 떠나서 이 여자를
그저 행복하게 해주고 싶소. 나뿐만 아니라 내 부하들도 모두 동
감이오.」
「당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이 봉곳한 젖가슴에 가느다란 허리. 알맞게 들러붙은 궁등이
하며 시원하고 보기 좋은 허벅지, 황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종아리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렇게 훌륭한 처녀를 애인으로
두었소?
「앞으로 두 시간 안에 미국에서 가지고 온 그 목갑을 건네주
시오. 만약에 누구에게 알리거나 하면 이 여자는 끝장이오. 알
겠소?
「흠, 그렇다면 맛을 보여주지, 얘들아, 이 여자의 옷을
벗겨라.
「잠간 멈추시오. 가겠소.」
경훈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얘들아, 멈춰라. 바로 오신댄다. 」
「그렇지만 하나는 약속하시오.」
「뭐요?
「내가 갈 때까지 그녀의 옷자락 하나라도 건드리면 안 되오.」
「후후, 그건 염려 마시오. 그 목갑만 주면 당신의 애인을 온전
하게 보내주지.」
「그녀와 직접 통화하게 해주시오.」
「그거야 좋도록 하시오.」
사나이는 바로 수화기를 넘겼다.
「경훈아 미안해. 조심했어야 되는데 ‥‥‥」
인남의 긴장된 목소리였다.
「괜찮니?
「응. 그런데 이 사람들이 가지고 오라는 것이 뭐야?
「목갑.」
「무슨 목갑?
그때 사나이가 수화기를 가로챘다.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이 여자에게 생애 최대의 모욕을 안겨
줄 거요. 알겠소?
「알았소.」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시오.」
경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인남이 다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조바심 쳤다. 그는 전화를 끊은 뒤 은행으로 향했다. 케렌스키가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중요한 목갑을 자신
에게 보관시킨 것일까.
이제 경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누구라도 이런 상
황에서는 목갑을 넘기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목갑
이 문제가 아니라 인남이 걱정이었다 저들이 목갑을 받고도 약
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경훈으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시간을 전혀 주지 않는 것이나 말하는 것으로 봐서 보통내기
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경찰에 연락했다가는 정말 인남에게 큰
일이 날 것만 같았다. 현재로서는 저들을 믿어보는 수밖에 도리
가 없었다.
경훈이 은행에서 목갑을 찾아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
인해 보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가짜 목갑을 주거나 하면 비극이 생긴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그런 염려는 하지 마시오.」
「좋소, 그러면 그 목갑을 가지고 덕수궁 정문 앞으로 오시오.」
「내 친구는?
「일단 목갑을 검토하고 돌려주겠소.」
「안 되오. 목갑과 바로 교환해야 하오.」
「그건 안 돼. 당신이 가짜를 줄지도 모르니까.」
「나는 절대 그런 속임수를 쓰지 않소.」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일할 뿐이오. 당신은 따라을 수밖에
없고. 싫다면 그만두시오.」
「아니. 좋소.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소?
「30분 정도.」
「알았소. 같은 장소에서 기다리겠소. 하지만 통화는 계속하게
해줘야 하오.」
「그건 염려 마시오.」
경훈은 밀어붙이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상대는
한치의 틈도 주지 않고 경훈의 약점을 압박해 왔다. 경훈은 인남
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상상만 해도 견딜 수 없었다. 그렇
지만 최악의 경우가 발생할 수 있었다. 상대가 목갑을 차지하고
도 인남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거나 폭행할 수도 있지 않은가. 여
기에 생각이 미치자 경훈은 목갑을 열어보는 것도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미스터 강을 보내주세요」
경훈은 사무실 직원인 미스터 강을 만나 목갑을 건네주며 부
탁했다. 미스터 강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이 변호사라고 밝히며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 목갑을 전해주라는 얘기를 듣고 어리등
절해했다
경훈은 미스터 강을 잘 지켜볼 수 있는 위치에서 기다렸다. 잠
시 후 미스터 강 앞으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선글라스를 긴 사나
이는 미스터 강의 옆에 서서 한동안두리번거리다가그에게 이
변호사냐고 묻는 모양이었다. 미스터 강은 경훈이 시킨 대로 불
안한 표정을 지은 채 목갑을 사나이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사람을 빨리 돌려보내 라는 한마디도 잊지 않았다. 사나이는 아
무 말없이 목갑을 받자마자 바로 지하철 입구로 내려갔다.
경훈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사나이를 뒤쫓았다. 사나이는 부
지런히 지하도를 건너서 플라자호텔 앞의 입구로 나간 다음 다
시 북창동 골목길로 갔다. 옛 시경 후문 앞에 다다르자 그는 흘
끗 뒤를 쳐다봤다 다행히 몇 사람의 행인이 있어 경훈은 사나이
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다.
사나이는 몇 번 힐끔거리더니 옆 골목으로 들어섰다. 경혼도
재빨리 그를 뒤쫓아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경훈은 계속 사나이
의 뒤를 쫓다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사나이의 걸음걸이가 달
라져 있었다 이제까지의 조급하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경훈
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전에 골목에서 스칠 듯 지나친
자동차가 의심스러웠다.
과연 사나이는 태평로 큰길로 나가더니 다시 플라자호텔 쪽으
로 갔다 경훈은 사나이를 불러세웠다.
「잠간 서시오.」
사나이는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 목갑을 어떻게 했소?
「목갑이라뇨?
「시치미 떼지 마시오. 경찰에 가야 말을 하겠소 당신 도대체
누구요?
「심부름센터 직원인데요.」
「심부름센터 그런데 그 목갑은?
「아, 손님이 부탁한 상자 말이군요. 그건 손님에게 전해주었습
니다. 덕수궁 앞에서 어떤 변호사로부터 받아서는 북창동에서
손님에게 전 해주었는데 무슨 일로 그러세요?
「북창동에서 누구에게?
「손님에 게요.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런데 왜 뒤를 그렇게 힐끔힐끔 돌아다보며 걸었소?
「손님이 혹시 폭력배들이 따라올지도 모르니까 조심하라고 했
어요. 뭔가 이상하면 바로 휴대폰으로 전화하라고 해서 ‥‥」
「전화 번호는?
「여기 있습니다. 」
경훈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후후, 이 변호사. 참으로 부지런히 걷더군.」
「내 친구는 어디 있소?
「걱정 마시오. 목갑이 진짜인가만 확인하면 바로 돌려보낼
테니 .」
「언제요?
「얼마 안 걸릴 거요. 기다리시오.」
「왜 그렇게 시간이 걸리지 당신이 확인하는 것이 아니오?
「그런 건 묻지 마시오.」
「그동안 친구와 계속 통화를 하게 해주시오.」
「그거야 문제없지. 하지만 쓸데없는 일을 하진 마시오. 번호를
추적한다거나 하는.」
「염려 마시오.」
인남이 전화에 나왔으나 이런 상황에서 별로 할말은 없었다.
그저 그녀의 안전을 확인해 볼 뿐이었다
「약속대로 그들에게 목갑을 넘겨줬어 별일 없지?
「아직은.」
「조금만 기다려 잘될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경훈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전화가
끊겨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엔 혹시 휴대폰이라 그랬나 했지만
자신이 그 점을 염려하여 한자리에 계속서 있었으므로 저쪽에
서 끊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경훈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기에서는 건조한 녹음만 반복되어 나을 뿐이었다.
「지금은 고객이 전원을 끈 상태입니다. 」
경훈의 가슴에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아무리 급했다고
하나 자신이 너무 경솔했다. 어쨌거나 목갑을 가지고 끝까지 흥
정했어야 하는데 이젠 목갑을 줘버렸으니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휴대폰이 울리지 않자 경훈은 절망감에 몸
을 떨었다. 인남이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30분이 가까워지도록 아무런 변화
가 없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경찰에 신고해서 전화 번호를 추
적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경훈은 손 형사를 불렀다.
손 형사가 살벌한 기세로 심부름센터 직원을 歌달했으나 그는
실제로 아는 게 없었다.
「죄라면 수고료 좀 많이 받은 것밖에 없습니다. 」
손 형사는 자세히 조사하려고 그를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그
러나 손 형사가 그를 조사해서 납치 범들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지
는 않았다.
경훈은 후회와 절망을 이기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땅거
미가 깔리고 어둠이 깊어지도록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납치
범을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납치범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았던가. 경훈은 손 형사에게도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으나 역시 아무런 성과가 없다는 대답뿐
이었다.
이제는 밤도 깊어가고 있었다. 경훈은 휴대폰을 앞에 놓은 채
벌써 몇 시간이나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혹시 전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이 목갑의 내용을 확인하는
데 예상외로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다는 털끝 같은 희망이 경훈
으로 하여금 가까스로 견디게 하고 있었다.
거실의 괘종시계가 9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무겁게 토해냈다.
이제 희망이 없었다. 그들이 인남을 어떻게 했을까 상상하기조
차 싫은 광경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경훈은 도저히 집 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답답한 나머지
속이 메슥거리고 진땀이 흘렀다. 경훈은무작정 일어섰다. 어디
론가 나가야만 할 것 같아 옷을 입었다. 마치 인생의 모든 것을
잃은 패배자 같은 심정으로 현관을 나섰다. 이때였다.
「삘리리리.」
휴대폰 벨 소리였다. 경훈은 얼른 플립을 열었다.
「경훈아, 나야.」
「아니, 인남아」
경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틀림없이 인남의 목소리였다. 경
훈은 숨이 넘어갈 듯 서둘러 물었다.
「지금 어디니 괜찮아 다친 데는 없니?
「응, 괜찮아. 여기 시내야, 시청 부근.」
「기다려, 바로 갈게.」
디스켓의 비밀
인남은 경훈을 보자 애써 웃으려 했지만 눈에 이슬이 맺혔다
경훈은 인남의 손을 꼭 쥐고 근처의 커피숍으로 데려갔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그런데 놈들이 너를 왜 이렇게 늦게
야 풀어줬지?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갑자기 상황이 바펀 것 같았어. 누군가
의 전화를 받고는 나를 풀어줬어. 목갑도 돌려주면서 말이야.」
「뭐라구 목갑을 돌려줬다구
인남은 가방에서 목갑을 꺼내 경훈의 앞에 놓았다.
「그래, 나도 이해할 수 없었어, 매우 중요한 물건 같았는데 말
이야. 그들은 누군가에게 목갑을 전해주고 나서야 나를 풀어주
려고 했어. 그런데 목갑을 받을 사람과 연락이 되지 않았는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생겼는지 한참 기다리더니 결국 한 통의 전
191
화를 받고는 나를 풀어줬어.」
「그들이 누구인지 짐작 가는 바는 없니7?
「누군가의 하수인 같았어. 하지만 그들을 지시하는 자는 누구
인지 모르겠어 .」
「왜 이 목갑을 돌려 주었을까?
경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밥은 먹었니?
「생각 없어.」
「그럼 우리 집으로 가자.」
경훈은 불안해서 인남을 혼자 놔둘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경훈은 인남을 쉬게 하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목갑과 함께 인남을 풀어 주었다면 갑자
기 상황이 바뀌었다는 얘기다. 도대체 왜 목갑을 도로 돌려주었
을까.
경훈은 목갑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테이프는 뜯기지 알은 채
그대로 있었다
한참 생각하던 경훈은 목갑의 테이프를 뜯었다 내용물을 보
지 않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목갑을 열자 디스켓 하나가
나왔다. 경훈은 극도의 궁금증을 누르며 디스켓을 노트북에 집
어넣었다.
화면에 암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가 떴다 경훈은 아차했다.
이런 중요한 디스켓이라면 당연히 암호를 알아야 열 수 있을 것
이다. 경훈은 케렌스키와 관련된 생일이니 전화 번호니 하는 것
들을 쳐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경
훈은 문득 케렌스키가 예전에 말했던 게 떠올랐다.
-언젠가 이 형제라는 단어가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오.
형제 왜 그는 '형제'라는 단어를 말했을까.
어떤 영감에 사로잡힌 경훈은 재빨리 형제라는 단어를 입력했
다. 그러자 수록 내용의 리스트가 화면에 나타났다. 리스트에는
약 20여 개의 제목이 있었다.
경훈은 리스트의 맨 앞에 있는 (걸프전) 파일을 열어보았다
(걸프전)
2차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떠오르자 세계
각국은 미국의 달러를 보유하고 싶어했다. 특히 일본 등이 대량
수출로 달러를 긁어모으자 미국의 금본위 제는 심각한 위협을 받
기 시작했다. 유출되는 달러만큼의 금을 보유해야 하는데 미국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닉슨은 금본위 제를 포기했다.
그 대신 미국은 달러가 종이 조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치밀
하게 연구했다. 그 결과 석유 대금의 결제는 반드시 달러로 이루
어져야 한다는 조건을 만들어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산유국
을 장악해야 했다. 미국은 이 산유국 장악의 초석으로 먼저 사우
디아라비아의 국방을 대신 맡기로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후
중동 지역의 산유국 정치와 군사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순조롭게
석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이나 아랍 민족주의자들, 즉 조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애국 아랍
인들이 자국에 의한 자국 석유의 처리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개입했다. 석유의 자국 소유를 주장하는
자들을 일부 회유하거나 협박했으며, 극단적인 경우 없애버렸다.
그중 리비아의 카다피나 이라크의 후세인이 가장 문제가 되었
다. 그들은 이미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납치나 암살이
용이하지 않았다. 특히 후세인이 문제였다.
우리는 이란·이라크전쟁 때 후세인과 급속히 가까워졌다 그
때는 이란의 이슬람 혁명 수출을 막아야 했기 때문에 이라크를
엄청나게 지원해 주던 시기였다.
그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힘을 키운 이라크가 석유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고 나왔다. 우리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 문제를
놓고 외교적으로 티격태격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아랍의 여론이
어디로 뭉쳐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방법은 이라크와 아랍의 다른
산유국을 메어놓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우리는 아주 좋은 기회를 포착했다. 평소 이라크
는 쿠이트에게 석유를 도둑 맞는다고 불평해 왔다. 이라크는 쿠
이트가 국경을 넘어와 특수 굴착기로 자기네 지하의 석유를 끌
어간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라크는 약 360억 달러를 손해봤다
며 그 대가로 2백억 달러를 쿠이트가 지불해야 된다고 주장하
던 참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우리 직원들은 외교적 ·군사
적으로 이라크와 접촉했다. 이에 고무된 이라크는 곧 쿠이트를
응징하고 싶다는 의견을 표명했고, 우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텍사스에서는 기름을 도둑질하는 놈들을 모두 죽여버 렸소.」
그 대답이 나가고 나서 이라크는 5일 만에 쿠이트를 침공했
다.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걸프전에 개입했고, 그
결과 석유에 대한 지배권을 반영구적으로 굳혔다.
아랍의 많은 산유국들과 더욱 굳건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는 이라크의 '위협을 증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다른 아
랍국들은 우리에게 더욱더 의존해 올 것이다. 그리고 달러의 높
은 가치는 지속될 것이다.
(아시아의 외환 위기)
지난 70년대와 80년대에 아시아와의 무역 전쟁에서 미국은 참
혹할 정도로 패배했다. 무역 흑자로 넘쳐나는 일본의 자본이 온
미국을 쉽쓸고 다녔다 록펠러빌딩은 물론 미국의 상징인 엠파이
어스테이트빌딩까지 일본에 매각되고, 심지어는 할리우드까지
일본의 자본에 먹히는 실정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무역 전쟁으로는 도저히 값싼 노동력을 기초로 한 아
시아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80년대의 엔고 조
작이 일본의 체질만 굳혀주었을 뿐이라는 사실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우리는 일본의 이자율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에 착안했
다. 5퍼센트가 넘는 프라임 레이트로 일본인들이 보유한 달러를
얼마든지 끌어을 수 있으니, 이제까지의 전략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우선 강력한 달러를 기초로 무역 전쟁에서 금응 전쟁으로
간다. 그런 다음 아시아의 가치 있는 기업을 헐값으로 인수하면
결과적으로 아시아의 강병들을 우리의 용병으로 만들 수 있다
90년대 초 우리는
미국을 움직이는 숨은 실력자들을 한데 모았
다. 그들도 모두 이대로는 안 된다는 데 공감했다. 그 결과 강력
한 달러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주식 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묵
시적 합의를 도출했다. 우리는 청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합의한 대로 주식 시장에 계속 불을 질러댔고 주식은
지난 8년 간 열 배가 뛰었다. 넘쳐나는 달러를 쥔 헤지펀드들은
아시아의 환투기장으로 몰려갔다. 결과는 계획한 대로였고 우리
는 아시아의 가치 있는 기업들을 헐값에 인수했다.
고맙게도 학자들은 이 모든 현상을 '시장의 원리'로 설명해 준
다. 그렇다. 세상은 시장의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 일단 우리가
큰 틀을 짜주기만 하면.
그 밖에 (케네디) · (리비아) · (이란) · (피노체트) ·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등 그 파일들은 모두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은
CIA의 공작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경훈은 놀라움에 가득 차 파일
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다가 한 파일의 제목 위에서 눈길을 멈
추었다.
(김대중)
우리는 바하마 회의에서 김대중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야당
에 의한 첫 번째 정권 교체라, 이 민주 투사는 수십 년 간 뭉쳐온
보수과 재벌들의 반발을 이겨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때 우
리 정부와 자본이 그의 힘이 되어준다.
김대중은 미국을 뒤에 업은 채 과감하고 자신 있게 정책을 펴
나갈 것이다 차츰 우리는 자금을 풀어주며 한국을 IMF 우등생으
로 칭찬하기 시작한다. 한국 국민들은 국가 부도 위기를 극복해
가는 그에게 신뢰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김대중은 그전의 대통령들과
달리 숫자 감각이 뛰어나다. 1.도 처음에는 정권의 안정을 위해
미국에 매달리겠지만 차츰 자신의 힘을 낼 것이다. 김대중은 한
반도를 안정시키고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뚜켠한 목표를 가지
고 있는 전문 정치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머리가 비상하다.
이런 그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는 명약관화하다.
김대중은 지금 미국, 일본, 중국을 돌면서 한반도의 경제와 안
정을 위한 외교에 골몰하고 있지만 그의 최종 목표는 남북 정상
회담이다. 그는 한반도가 군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한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
다. 그는 민주 회복에 이바지한자신의 경력으로 르윈스키 스캔
들로 얼룩진 클린턴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면서, 햇볕 정책에 관
한 강력한 공조를 이끌어냈다.
김대중은 필사적으로 남북 정상 회담을 추진할 것이며 그 최종
목표는 군축이다. 그는 김정일에게 북이 군축하는 금액을 산업
생산에 투자한다면 남이 군축하는 비용을 북한에 지원하거나 투
자하겠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통일의 첫걸음을 의
미한다
박정희의 핵 개발 못지않게 김대중의 군축은 우리에게 위협이
다. 이미 김대중은 IMF를 구실로 140억 달러에 달하는 대미 무기
계약을 연장하거나 실질적으로 취소해 버렸다.
한반도의 군축, 그리고 통일. 이것은 아시아에 선풍을 일으키
고 마침내는 우리 군수 산업을 도산시킬 것이다. 군수 산업의 도
산이란 곧 우리 군사력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새
로운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칼 007기 사건)
우리는 이 사건이 터졌을 때 소련 극동 지역 방공사령관과 현
지 지휘관, 그리고 조종사 간의 대화록을 신속하게 입수했다. 소
련 측에서는 당시 지속적으로 우리 공군의 RC-135정찰기를 쫓고
있었으며 , 그날도 우리 정찰기는 소련 영공을 따라 정찰 비행을
했다. 소련은 매우 신경이 곤두서 있던 참이었다.
우리는 소련 측 대화록을 분석한 결과, 자신들이 격추시키려
하는 비행기가 정찰기인 줄 알고 있었고 사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그것을 백악관에 보고했다
그런데 당시 유럽에 우리의 전략 미사일 퍼싱 2를 배치하는 문
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소련을 세계 여론을 빌려 악의 제
국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우리는 이후 침묵했다. 물론 그
당시 미공군의 레이더가 칼 007이 소련 영공으로 흘러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도 굳게 입을 다물었다.
사실 공군은 그 비행기가 어떻게 되나 보고 싶었던 것이다.
1993년 유엔에서 그 당시 소련이 정찰기인 줄 오인하고 정당하
게 요격을 했다는 판정이 나왔지만. 그때는 이미 우리가 얻을 것
은 다 얻은 후였다.
경훈은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케네디 전문가 빌의 얘기가
떠올랐다.
-케네디의 죽음은 미국의 역사에,아니 세계 역사에 하나의
뚜렷한 획을 그었소. 진정한 세계 평화를 위한 미국의 리더십은
땅에 묻혀버렸소. 그후 국내적으로는 돈과 힘의 추악한 결탁이,
국외적으로는 미국의 국가 이기주의가 있었을 뿐이오.
미국의 전횡이 뚜렷하게 다가왔다. 이쯤 되면 한국에 앉아서
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칼 007기 사건만 보
더라도 한반도의 국민들은 그동안 얼마나 소련의 잔인하고 비인
간적인 태도에 치를 떨었던가. 그러나 그 실상은 정반대였으니
역사는 왜곡될 대로 왜곡된 셈이었다.
경훈은 디스켓을 보자 케렌스키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떻게 이런 극비 중의 극비 문서를 모
았으며 자신에게 주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케렌스키는 과연 자살했을까.
처음에는 한 인간의 부탁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부담스러웠지만, 디스켓을 보고 난 지금은 케렌스키가 하던 일
이 몹시 궁금해졌다. 경훈은 눈을 감은 채 케렌스키에 대해 집중
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케렌스키의 부인에게서 받았던 이상한 인상을
떠올렸다. 부인이 여행 가방을 챙기고 있어 경훈은 위로한다고
서해안의 샌프란시스코나 시애틀 같은 데가 좋을 것이라고 말했
다. 그때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얼굴을 붉히지 않았던가. 마치
남몰래 부끄러운 일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왜 그랬을까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남자하고 은밀히 여행을 떠나려다가 양심에 걸려서 그랬던 것일
까. 그러나 경훈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케렌스키 부인은 그럴
여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그녀는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이때 문득 경훈의 기억 깊숙이 있던 케렌스키
의 유언이 두꺼운 껍질을 뚫고 그의 의식으로 떠올랐다.
점점 숨이 막혀온다.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사랑하는 아내여, 이제 한 줄기 빛조차 스러지고 나면 알바트
로스의 날개에 올라 안개 깔린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동안 안녕.
이상한유언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유언이 아닐지도 모
른다. 만약 유언이 아니라면 경훈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만약
유언이 아니라면 그것은 부인에게 남기는 어떤 암호가 아닐까.
부인은 자신이 샌프란시스코나 시애틀로 가는 것이 어떠냐고 했
을 때 얼굴을 붉혔었다.
경훈은 수화기를 들어 샌프란시스코의 교환을 불렀다
「바닷가에 '안개 깔린 천국'이란 호텔이 있습니까?
「기 다리세요.」
잠시 후에 나온 교환은 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
「그러면 시애틀에 있는지 좀 알아봐 주세요.」
이번에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네, 있습니다. 대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
전화를 끊는 경훈의 가슴속에서 분노와 더불어 의구심이 치솟
았다. 그렇다. 케렌스키는 역시 살아 있었던 것이다.
경훈은 필립 최의 말을 떠올렸다. 필립 최는 케렌스키가 매우
힘든 적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케렌스키는
자살하던 날 집에 '성전'이라는 단어를 써두고 나갔다. 그렇다면
이 디스켓은 케렌스키가 수행하던 성전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경훈은 디스켓을 다시 목갑에 넣어 깊숙한 곳에 보
관했다.
하문의 정체
다음날 아침 인남은 경훈의 집에서 잤다는 사실이 부11러운지
서둘러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가려 했다.
「인남아,무슨 급한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니면 당분간 여기서
같이 지내는 게 낫겠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이제 나도 회사
일을 해야 하니까.」
「아냐, 우리 집으로 갈래. 여기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나도 미국으로 돌아가야지. 현 선생님이 부탁하셨던 일
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면 말이야.」
「그러면 며칠 간만이라도 어디 호텔 같은 데서 묵도록 해. 아
직은 위험해.」
인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따가 호텔에서 전화할게.」
「그래 .」
경훈의 집에서 나온 인남은 오피스텔에 들러 간단한 짐을 싸
가지고는 바로 호텔에 방을 잡았다. 인남은 한국에 와서 경훈에
게 별로 도움도 되지 못하고 납치까지 당해 부담만 주었다는 사
실에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았다 경훈에게 전화할 기분도 나
지 않을 정도로 침체되어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인남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럴수록 무언
가를 해야 한다는 강한 의욕이 솟구쳤다. 인남은 최소한 제럴드
현이 남긴 메모의 의미는 자신이 풀고 싶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테이블 앞에 앉았다.
-하문, 이놈은 왜 나를 슬슬 피하는 걸까 나 모르게 할 수 있
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아는 녀석이 왜 그러지 (79. 10. 11)
-제리,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해줄게라고 하문, 네가, 네가
그럴 수 있는 거야 그 자식은 이미 빼돌리고. (79.10.27)
인남은 이것을 읽고 또 읽었다. 뭔가가 잡힐 듯 말 듯했지만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문장은 두서가 없었고 제럴드 현
이 한때의 자기 감정을 적어들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남에게
는 이 짧은 문장들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특히 '하문'이라
는 이름이 크게 부각되었다
인남은 '노벰버'를 자신이 해독한 데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
었다. 아닌게아니라 경훈은 그것이 육사 11기를 의미한다는 사
실을 알게 되자 10·26으로 비롯된 일련의 역사에 대한 포괄적
해석을 할 수 있었다.
인남은 기필코 이 문장들도 해독하여 경훈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문장의 핵심적 주어인 '하◎의 뜻
을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의 이름임에는 틀림없지만 어딘지 낯
설었다. 경훈도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하문이란 이름을 수배했
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인남은 찬찬히 머리를 굴렸다. 이름을 찾는 데는 전화 번호부
가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남은 옷을 차려입고 광화문에
있는 한국통신 본사로 갔다. 전국 각 지방의 전화 번호부가 모두
전시된 그곳에서 인남은 하문이라는 이름을 찾고 또 찾았다.
그렇게 찾은 이름을 다 적어서 호텔로 다시 돌아온 인남은 일
일이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그러나 전화를 하면서도 자신은 없
었다. 하문이란 이름은 성이 생략된 이름일 수도 있으므로. 역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인남은 지친 상태에서 경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훌은 인남
이 호텔을 잡았다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
「경◎아. 적어도 현 선생님의 메모 정도는 내가 풀어야 할 텐
데.
그러나 경훈은 인남이 하루 종일 그 이름을 찾아헤맸다는 말
을 듣자 염려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잊어버려. 안 떠오르는 건 잊고 지내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
기 생각나는 경우가 있으니까.」
인남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을 켰다. 잠시 쉬고 나
서 다시 생각해 볼 참이었다. 공허한 마음으로 무심코 텔레비전
을 보던 그녀는 한 외국인 코미디언이 등장하자 어딘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인남은 텔레비전을 보다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
으켰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 코미디언의 한국식 이
름이 자막으로 나오는 순간, 인남은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 그래 그럴 수도 있잖아」
다음날 아침 인남은 경훈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웬일이야, 이렇게 일찍?
「 '하문'이란 이름 말이야, 그거 혹시 외국인 이름을 우리말로
쓴 게 아닐까?
「외국인 이름이라구?
「그래, 문장상으로 보면 현 선생님과 매우 친한 사이 같던데
그렇다면 같이 근무하던 동료가 아닐까
「그럴듯한데 .」
「무엇보다 문맥이 맞잖아. '하문'은 현 선생님을 제리라는 애
칭으로 불렀잖아.」
「음‥‥‥‥」
「그리고현선생님은그를 '하문'이라 부르고. '하문'이란어쩌
면 현 선생님이 지어준 외국인의 애칭 같은 것이 아닐까?
경훈은 고개를 끄덕 였다.
「어쩌면 네가 또 대발견을 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런데 어떻
게 확인한담 참, 오 선생님께 물어보면 아실지 몰라.」
경훈은 바로 오세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 선생님과 같이 근무한 이들 중에 우리말로 고치면 '하문'
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습니까?
「글쎄, 너무 갑작스럽게 물으니 잘 떠오르지 않는데 ‥‥‥‥」
「그러시겠죠. 사실 그런 사람이 없는지도 모르구요. 단순한 가
정이니까요.」
「하문 하문이라, 왠지 귀에 익은 것 같긴 한데 ‥‥‥‥」
「나중에라도 떠오르면 연락해 주십시오.」
「그럽시다. 하문이라. 하문, 하맨, 하우문, 하우스맨?
「네, 뭐라구요 하우스맨?
「하우스맨, 그게 비슷한가?
「하우스맨이란 이름이 있었습니까?
「그럼, 그 사람을 모른단 말이오
「저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
「저런, 내가 얘기를 안 해준 모양이군.」
「누구죠?
「강일이 형님하고 같이 일하던 사람이오.」
경훈의 귀가 번쩍 뜨였다.
「직함은요
「주한 미군 고문관실 실장이지. 캡틴.」
「아」
「뭔가 풀렸소?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우스맨이 현 선생님이
말씀하던 사람입니다. 」
경훈은 순간 맨 처음 제럴드 현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했던 말 중에 '하우스'가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 알 수 없던
하우◎란 말도 역시 하우스 맨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우스맨은 매우 중요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10 · 26에 깊
게 연관되어 있는 사람일 것이다.
「현 선생님하고는 친했던 모양이죠 제리라는 애칭으로 부른
걸 보면.」
「그럼 , 아주 친했지 .」
「맞아요. 바로 그 사람입니다. 현 선생님, 즉 제럴드 현을 제리
라고 불렀어요. 그 사람은 언제부터 거기서 근무했습니까
「원래는 형님이 먼저 그 자리에 계셨고 하우스맨이 나중에 합
류했지. 하우스 맨은 장군까지 진급했소. 아무래도 형님은 한국
계라는 제약이 있었지.」
「업무에서는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나요?
「명콤비 라고나 할까.」
제럴드 현은 '하문'을 자기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하는 녀석이라
고 했고, 그것은 아마도 두 사람의 친밀도를 나타낸 것이리라.
「주한 미군 고문관실은 CIA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주한 미군은 특성상 고문관실에서 CD의 많은 공작 업무를
수행했소. 하우스맨의 위치는 CIA 한국 지부장에 못지않았지.
북한 및 중국 ·소련과의 대치 상황에 있던 한국의 현실에서 미군
이라는 조직은 그 무엇보다도 강했고, 하우스맨이나 강일이 형
님처럼 20년 넘게 근무한 터줏대감들은 잠시 왔다 가는 CIA 한
국 지부장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소. 대사관에 있는
CIA 직원들이 주로 정보의 수집과 분석에 몰두했다면, 미군 고
문관실은 조작이나 공작 같은 업무에서 힘을 발휘했지. 정보 기
관 간의 위상은 회의를 할 때 보면 잘 알 수 있소. 주로 하우스맨
이 지부장을 부대로 부르는 편이었지. 물론 거기에는 보안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보안상의 이유라면요?
「8군에는 구리로 만든 방이 있소. 무엇으로도 감청을 할 수 없
는 곳이지. 이 밖에도 고문관실은 한국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기
때문에 가히 주한미군의 핵이라고 할수 있소.주한미군이 얻
는 모든 정보는 일단 고문관실로 취합되어 본국으로 들어가니까
그들의 힘을 알 만하지.」
「하우스 맨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는 얼마 전에 죽었소.」
「그렇군요.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수시로 전화드리겠습니다. 」
경혼은 전화를 끊은 다음, 외우고 있던 두 문장을 종이에 옮겨
쓰고는 몇 번이나 읽었다
「뭐래, 하우스맨이 래
「그래, 하우스맨. 우리말로 옮기면 정말 하문이라고 할 만하
다 박인남,너 정말대단한데 중요한 순간에 늘 뭔가를 해내는
구나.」
인남은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하우스맨이 누구지?
「주한 미군 고문관실 실장. 즉 책임자였대.」
그랬구나.
「그래, 어떤 형태로든 미국이 김재규의 뒤에 있었던 것은 확실
한 사실 같아. 더군다나 제럴드 현의 두 번째 문장은 10 · 26 바로
다음날 씌어진 거야. 그렇다면 하우스맨이 빼돌렸다는 그 친구
는 어쩌면 ‥‥ ?
이때 인터폰이 울렸다.
「변호사님 , 전화 왔습니다. 」
「알았어요. 돌려줘요.」
「여보세요
「이 변호사, 나 제임스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전에 했던 그 이야기 말이오, 빨리 끝내버리고 싶어 전화했소.」
「그럼 지금 만나죠.」
「롯데호텔 사우나가 어떻소
「좋습니다 」
경훈은 인남을 배웅하고는 바로 약속 장소로 갔다.
최후
제임스는 사우나에 먼저 와서 땀을 흠뻑 흘리고 있었다 경훈
은 끝내 증기실 안에서 얘기하겠다고 고집하는 제임스를 보며
아직도 조직원으로서의 본능이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제임스는
벗은 상태에서만 입을 열었다.
「이 변호사가 얘기한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았소. 나에게는 재직
중 알았던 사실에 대해 보안을 유지할 책임이 있긴 하지만, 이미
20년이나 지난 일이고 내가 아는 부분이 사건의 본질을 다 드러
내는 것도 아니니 얘기하기로 결정했소.」
제임스는 일단 방패막이부터 했다
「만약 추호라도 거말로 넘기시려는 부분이 있으면 우리의
신사 협정은 깨지는 겁니다. 」
「걱정 마시오. 나는 이 변호사가 그런 엄청난 추리를 했을 때
이미 속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소. 나는 신에게 맹세코 절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오. 대신 이 변호사도 다시는 형사를
데리고 온다든지 하지 마시오.」
「좋습니다. 하우스 맨은 왜 제럴드 현을 그 일에서 떼놓으려고
했습니까?
「하우스 맨은 또 어떻게 알아냈소 사실 문제는 제리에게 있었
소.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아니 직업에 어울리지 않게 낭
만적인 사람이었지. 일단 그는 한국의 대통령과 너무 가까웠소.
그리고 그 을 사랑했소. 어떨 때 그는 노골적으로 김종필이라
든지 유력자에게 자신이 박근혜를 사랑한다고 밝히기도 했소.
이것은 우리에게 큰 득이 되는 한편 큰 장애도 되었소.」
「대통령에게 반대하는 공작을 할 때 말이죠.」
「그렇소. 우리는 박 대통령의 반독재에 대항하는 공작을 해야
할 필요성을 많이 느꼈소.」
「솔직히 그 궁극적인 이유가 한국에 민주화를 가져오기 위한
것은 아니었죠?
「하여간 계속하시죠.」
「상부에서는 제리를 미리 본국으로 송환해야만 했소. 상황이
임박해서 보내면 의심을 살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제리 본
인에게 말이오. 제리는 정보원으로 타고난 사람이었소. 그래서
우리는 고민했던 거요.」
「그런데 제럴드 현이 그것을 눈치 챘죠?
「그야 당연하지. 당시 미국의 정보 계통에서는 박 대통령을 제
거해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갖고 있었소.그의 핵 개발은 세
계 질서에 대한 미국의 구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었으
니.」
「핵무기보다는 미국의 국익 우선주의가 오히려 세계 평화에
해가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런 것은 워싱턴에서 알아서 하는 거고, 나는 명령받은 대로
하기만 하면 되었소.」
내.
「하우스맨은 제리에게 굳게 약속을 했소. 무슨 변화라도 생기
면 반드시 알려주겠다고. 제리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면 청와대
로 직접 들어가 박 대통령과 담판을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랬군요.」
「하지만 상황이란 갑자기 바뀌는 법 아니오. 우리는 청와대의
정밀 도청에서 이상한 것을 알아챘소.」
「뭐죠?
「박 대통령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핵 개발에 가까이
가 있는 듯했소.」
「그래서요
「박 대통령과 협상을 하거나 할 상황이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
했고, 그때부터 제리는 우리에게 짐이 된 거요.」
「그래서 손이라는 의사가 손을 쓴 것이군요.」
「그렇소.」
「제럴드 현의 수첩을 보면 그는 박 대통령의 서거 다음날 하우
스맨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때 두 사람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습니까?
「10월 27일 아침 제리가 눈에 핏발이 선 채 하우스 맨의 사무실
로 뛰어들어왔소.」
제럴드 현은 환자복 위에 외투만 걸친 차림으로 하우스맨의
사무실로 뛰어들어왔다 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그를 보는 순간
하우스맨의 안색이 확 변했다.
-제리
-누구야 누가 죽였어
제럴드 현은 하우스맨의 멱살을 잡고는 거세게 밀어붙였다.
-?K(재T-) .
그리고 하우스맨은 제럴드 현의 눈치를 살폈다.
-홀리건, 홀리건 그 새끼 어디 있어
-한국에 없어.
-어디 갔어
-본국으로 들어갔어 .
-이 개새끼, 너 나에게 약속했잖아. 나에게 알려주기로 했잖
아. 이 새끼야, 너 무슨 일이 있으면 나에게 기회를 준댔잖아. 나
에게 청와대로 들어가 자주 국방만 포기하게 하라고 했잖아. 자
주 국방만 포기하면 미국은 언제나 박 대통령의 뒤에 있을 거라
고 얘기하랬잖아. 하문, 너, 나하고 둘도 없는 친구라면서. 형제
보다 더 가까운 친구라면서 이럴 수 있어. 내가 그의 목숨만 살
려달라고 했잖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를 죽이지는 말아달라
고 그했잖아. 그까 미사일. 핵, 내가 다 포기시키겠다고.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고 또 빌었잖아. 그래도 그 사람, 한 나라
의 대통령이야, 대통령.우리 나라 대통령이라구 나라 한번 만
들어보겠다고 자기 집사람까지 희생시켜 가면서 일해 왔어. 부
정 축재도 안 했잖아. 너 나한테 그렇게 다짐해 놓고 이럴 수 있
어마지막 기회는 주기로 했잖아. 그런데 네가, 네가 이럴 수
있어 이럴 수 있냐구
제럴드 현은 하우스 맨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직원들이 말
리려 했으나 하우스맨이 손을 내저었다.
제럴드 현은 하우스 맨을 거세게 밀치고는 사무실을 닥치는 대
로 부수기 시작했다. 책상을 들어고 유리란 유리는 모두 깨부
수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미안해, 제리. 진정해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줄게.
-이 개새끼야, 사람을 죽여놓고 이제 와서 무얼 해준다는 거
야 뭐라고, 원하는 것을 다 해주겠다고 그럼 그를 살려내, 그
를 살려내란 말이야
제럴드 현은 급기야 통곡하며 쓰러졌다. 하우스 맨은 제럴드
현의 이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무리 정보와
공작으로 한평생을 보내온 그였지만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
었다. 더군다나 이 공작 때문에 평생을 조울증으로 고생하게 될
동료이자 친구인 제럴드 현의 모습을 보니 쓰라림이 더했다 이
제 하우스맨이 불행한 이 친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연
금을 한푼이라도 더 탈 수 있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쓰러진 제럴
드 현을 껴안은 하우스 맨의 눈에서도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역시 경훈이 생각했던 대로였다. 제럴드 현은 자신을 배제하
고 이루어진 박 대통령 시해 공작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전역해
버린 것이다
증기실 안에서 제임스의 얘기를 듣기는 너무 힘들었다. 땀이
머리 끝까지 차오르고 숨이 막히는 가운데 그와 무슨 논쟁을 한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경훈은 참지 못하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
왔다. 찬물에 몸을 담그면서 제럴드 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세계는 미국의 시각만이 존재하는 기형의 혹성
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강력한 자본주의의 힘은 미국의 대중 문
화를 전세계에 퍼뜨렸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권력과 폭력에
대해 손을 들어버린 가치 포기적 문화였다. 그러다 보니 대중은
미국의 폭력에 대해 분노할 줄 모르게 되었고, 미국은 세계의 구
조를 결정는 데 있어 절대자적 존재로 군림하게 되었다.
제럴드 현은 누구보다도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분
노했으나 고작 하우스맨의 책상을 뒤고 전역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공작을 위해 동료들에 의해 제거되어야 했던 자신의 슬
픈 운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그것은 20년 전 제럴드 현의 운명만이 아니었다. 21세기
를 목전에 둔 지금이지만 한국민 중 그 누구도 미국의 전횡으로
부터 자유로을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한국의 정책이 미국의 영향을 받아야 하고, 정치
인들은 미국을 추종한다는 것을 보여야만 하며, 경제 역시 미국
이 원하고 조종하는 방향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
다. 5천 년 역사를 자랑한다는 한국의 문화 역시 미국의 대중 문
화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현실이고 보면, 한국민으로 살고 있
다는 것은 미국의 변방혹은 아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에
다름아니었다.
「미안하오. 이제 라운지에서 얘기합시다. 」
제임스가 숨을 허덕이는 경훈에게 다가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경훈은 가운을 걸치고 라운지로 나가는 제임스의 뒷모
습을 보며 손에게 제럴드 현을 제거하라고 명령하는 모습이 그
려졌다. 경훈은 그를 따라나섰다
「찬 음료수라도 한잔합시다. 」
경훈은 콜라를 시켰다 뜨거운 열기를 쐬면서 얼마나 버렸던
지 목이 탔다. 종업원이 콜라를 날라오자 제임스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대 피우겠소?
제임스는 경훈에게 담배를 건네주고는 성냥을 켜서 불까지 붙
여주었다. 그런 제임스의 모습은 한국에서 오랜 공작원 생활을
해서 그런지 거의 한국인처럼 익숙해 보였다 경훈은담배를 피
우기 전에 찬 콜라를 쭈욱 들이켰다.
「제럴드 현은 자신의 조울증이 공작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사
실을 몰랐을까요?
「물론이오. 상상조차 못하고 살아가고 있을 거요.」
「그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
「저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십니까
「괴로운 일이오. 하지만 모든 공작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이루
어졌소. 하부 구조에서 일일이 그 윤리적 가치를 따진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소.」
「그후 제럴드 현으로부터 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나요?
「아마 하우스맨하고는 계속 연락을 했을 거요. 그들은 친했으
니까.」
「박 대통령의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지는 않았습니까?
「제럴드 현은 곧 힘든 투병 생활에 들어갔소. 아마 박 대통령
을 생각하고 어쩌고 할 여유가 없었을 거요.」
「음, 그랬군요.」
죽음의 약
경훈은 호텔을 나왔다. 하지만 발걸음을 어디로 옮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미국이라는 그림자가 사방
에서 옥죄어왔다 자신이 지금까지 의미를 두어왔던 그 어떤 가
치도 더 이상 진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의식 자체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배후, 그리고 온갖 수단으로 사람의 목줄
을 조이는 CIA와 그 하수인들이 온 거리에 꽉 들어차 있는 것 같
았다.
정치,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통일이든 외교든 한국이 독자적
으로 해나간다는 것이 너무도 허황되게 느껴졌다. 신문의 지면
을 메우는 그 많은 뉴스들도 결국은 공작의 하나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갑갑해졌다.
모두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란 것은 어느
곳에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한 나라의 운명이 그 나라의 자율에
의하지 않고 강대국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린다면 그 나라에서
숨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가련한가.
그런 점에서 모든 나라의 모든 나라에 대한 투쟁을 의미하는
경제 전쟁이란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겨우 존재할 수 있을
정도의 숨통만 트여주고 그 이상 올라오면 쳐버리는 식으로 세
계 경제가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국 세계 경제란 자
유 경제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노예 경제인 셈이다.
자본주의는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고 있다. 이제는 한 사회만의 계 불화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국가 간의 자본 지배가 무서운 속도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경훈은 자꾸 가슴이 답답하게 차올랐다. 목이 막힐 것처럼 갑
갑하다가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불끈 치 솟아올랐다. 이 세상의
어떤 불의라도 응징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아랫배에서부
터 끓어올랐다. 주위를 지나치는 모든 비겁한 사람들에 대한 분
노와 더불어 그들의 나약함을 한 주먹에 날려버리고 싶은 생각
이 들었다.
경훈은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로 뛰어들고 싶어졌다. 부딪쳐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자동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끼이이익 」
귀청을 찢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욕설이 날아들었다.
「야 이 개새끼야 자살하려면 한강에 가서 뒈져. 이 새끼야.
누구 신세 조지려고 환장했냐」
경훈은 미친 듯이 욕설을 퍼붓는 운전사에게 히죽 웃음을 남
기고 다시 보도로 돌아와서 걸었다 아련한 의식 밑바닥 어디에
선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밑도끝도없
는 용기가 다시금 솟아났다.
경훈은 주위의 건물을 올려다봤다. 20이 넘는 건물들이 좌
우에 솟아 있었다. 그는 아무 건물이고 무조건 뛰어들어서는 엘
리베이터를 탔다
한 사나이가 경혼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을 보고는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모습을 감추었다.
엘리베이터를 탄 경훈은 이 빌딩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아무
렇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아났다.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사
람들에게 이 나라를 움직이는 미국의 음모를 알려야 한다는 생
각만이 심장에서 퍼덕거리고 있었다.
맨 꼭대기에서 내린 경훈은 허겁지겁 뛰어가 옥상으로 통하
는 문을 열어젖혔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시원했다. 경혼은 잠
시 정신을 차렸다. 알지 못할 열정에 의해 자신이 움직인다는 생
각이 들었지만 이내 뜨거운 그 무엇인가로 가슴이 미어졌다.
경훈은 비틀거리며 옥상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가슴 높이의
벽을 손으로 잡고 버티며 다리를 걸어 벽 위에 올라섰다. 거리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고 그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경훈은 가슴을 풀어헤치면서 외쳤다.
「가엾은 한국인들이여 여러분들의 텅 빈 가슴속에는 미국의
음모와 공작만이 들어차 있소. 5천 년을 이어온 우리의 인간 중
심 문화는 어디로 가고, 폭력과 범죄가 난무하는 미국의 저질 물
질 문화가 꽉 들어차 있단 말이오. 이제 나는 여기에서 뛰어내리
겠소. 그리하여 우리 한국인들의 위대함을 알려줄 것이오. 나는
여기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소. 우리 한국인들은 여기에서 뛰
어내려도 죽지 않는단 말이오」
경훈은 기합을 넣으면서 바닥을 향해 점프했다. 그러고는 정
신을 잃었다.
「경훈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경훈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 인남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아득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차츰 깨어났다. 머리가 빠개지는 듯
아팠다
「괜찮아?
「으응.」
「너 왜 그랬어?
내가 어떻게 한 거니
「0프느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경훈은 머리를 흔들며 기억을 더듬으
려 애썼다.
「이 변호사, 다행이오.」
아득한 옛날의 기억 속에서 살아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
디서 들은 목소리인지 한참이나 생각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마
치 전생의 기억처럼 희미하게 머릿속을 춤추고 다녔다.
경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마치 기적과도 같은 일
이 생겼다 어렴풋이 다가오던 얼굴의 윤곽이 한순간 너무도 뚜
렷하게 경훈의 눈에 들어와 박혔다
케렌스키, 그 얼굴은 분명 케렌스키였다.
「아 케렌스키 변호사님 」
「이 변호사, 큰일날 뻔했소.」
「케렌스키 변호사님이 맞군요. 제가 죽은 겁니까, 아니면 변호
사님이 살아 계신 겁니까?
「나는 이렇게 살아 있소. 미안하오.」
경훈은 뻐근한 머리를 흔들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마치 열병을 앓은 것 같은 기억이 나긴
하는데 ‥‥」
「이 변호사는 고 빌딩의 옥상으로 올라가 뛰어내리려 했소.」
「네 제가 고 빌딩에서 뛰어내리려 했다구요
「그렇소. 다행히 우리 측의 방어 기제가 작동해서 살았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음,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 변호사는 내 직원들의
눈에 적었소. 직원들은 이 변호사가 길거리로 뛰어드는 것을 보
고 직감적으로 위험을 감지했지. 그래서 즉각 나제게 연락을 해
왔소. 나는 이 변호사가 제임스를 만났다는 보고를 듣고는 고함
을 질렀지. 내 직원들이 이 변호사를 쫓아 빌딩 꼭대기로 뛰어올
라 갔을 때 이 변호사는 막 뛰어네리려던 참이었소. 직원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이 변호사를 뒤에서 가까스로 붙잡을 수 있
「세상에 제가 그렇게 정신나간 을 했습니까?
「틀림없는 사실이오. 여기 있는 인남 씨에게도 네가 급히 연락
을 했지. 이 아가씨도 무척 놀랐소.」
경훈은 인남에게 눈길을 돌리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할 수 없어. 나의 잠재 의식 어느 곳에 그런 위험성이 내
재해 있었는지.」
「경훈아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래.」
「무슨 말이야?
경훈의 눈길이 케렌스키의 얼굴에 박혔다.
「그렇소. 그것은 이 변호사의 잘못이 아니오.」
「그렇다면 누군가 나를 떠밀었다는 말씀인가요?
「제럴드 현, 제럴드 현을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거요.」
내?
「그가 갑자기 조울증에 빠져 입원했던 사실을 기억하오
「물론입니다. 」
「이 변호사도 같은 방법으로 당한 거요. 그 옥상에서 뛰어내려
도 전혀 다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겠지. 물론 자동차 앞
에 뛰어들어도 괜찮을 것 같고, 또 그전에는 감정이 고조되고 이
성적 사고 대신에 욱하는 기분이 치 밀어올랐을 거요.」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이유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자에게 당했던 거지.」
「그자라뇨?
「이 변호사가 만났던 사람 말이오. 그자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
이 아니오.」
「그자라면 제임스 말인가요?
「그렇소. 그런데 이 변호사는 대관절 무슨 일로 그를 만나게
되었소?
경훈은 손 형사가 숀의 일로 제임스를 추적하게 된 경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케렌스키에게 설명했다.
「그랬군, 제임스는 자신의 범죄가 탄로나자 이 변호사를 죽여
야겠다고 생각했던 거군. 그런 악랄한 약을 사용해서.」
「런 살인이 정말로 가능한가요?
「물론, 제임스에게는 가능한 일이오. 그는 일반인과는 다
르오.」
「그러면 처음에 제임스가사우나에서 얘기를 하자고 했던 것
도 계산된 행동이었을까요?
「틀림없소. 이 변호사를 방심시키기 위한 작전이었겠지.」
경훈은 기억을 더듬었다. 제임스가 땀을 흠뻑 흘리게 한 후 콜
라를 주문하고 자신도 따라서 주문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가 친절하게 담뱃불을 붙여주었던 것도.
「놀랍군요. 사우나에서 땀을 흘리게 한 후 콜라를 마시게 하
고 담뱃불을 붙여주는 척하며 순간적으로 콜라에 약을 타넣다니
정말 치가 떨리도록 무서운 자로군요.」
「하지만 이 변호사에게는 결과적으로 득이 되었을 거요.」
「어째서요?
「제임스가 이 변호사가 알고 싶어하던 진실을 털어놓았을 테니까
「어차피 제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죠?
「그렇소. 그는 이 변호사가 틀림없이 죽을 걸로 계산했겠지.」
「새삼 변호사님이 고마워지는군요.」
「나에게 고마워할 일은 아니오. 결국 모두가 같은 뿌리에서 나
온 일이니 한곳으로 모이는군.」
「무슨 뜻입니까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필연일 수밖에 없는 결과란 말이
오. 이미 이 변호사가 제럴드 현의 인적 사항을 알아달라고 했을
때부터 우리는 같은 인물을 쫓고 있었던 모양이오.」
「우리가 같은 인물을 추적하고 있었다구요?
「그렇소. 이 변호사가 쫓던 흘리건, 내가 쫓던 카를로스, 그리
고 지금의 제임스, 그들은 모두 한사람이오.」
「네 그게 정말입니까 제임스가 바로 흘리건이라구요?
「그렇소. 그들은 모두 동일인이오.」
「그렇다면 케렌스키 변호사님은 누구십니까 에이펙스로펌의
대표라는 신분 외에 또다른 무엇이 있나요?
「아니, 나는 틀림없는 에이펙스로펌의 대표 케렌스키요.」
「이해할 수 없군요. 그 위험한 목갑을 제게 주신 것이나 죽었
다고 저를 속이신 것이나‥‥‥‥」
「미안하오. 이 변호사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이 변호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소.」
경훈은 고개를 저었다. 뭐가 뭔지 노두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케렌스키는 혼란에 빠진 경훈에게 말했다.
「맨 처음 이 변호사가 나에게 부탁한 문건이 있잖았소연금
을 받던 누군가의 신원을 알아달라고.」
「네, 그랬죠.」
「세상일이란 참 묘하지. 그 하찮은 문건이 내가 지난 10년 세
월을 쫓던 비밀의 열쇠를 제공했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 문건이 그림자를 상대로 한 나의 전쟁에 확실한 목표물을
알려주었소.」
케렌스키는 점점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그 문건을 보셨습니까 제럴드 현에 대한
무언가를 알게 되신 겁니까?
「아니오. 절대로 나는 그 문건의 내용을 보지 않았소. 워싱턴
에서 봉인된 채로 온 문건을 그대로 이 변호사에게 넘겨주었을
뿐이오.」
「그런데 어째서 그 문건에 의해서 변화가 생겼다고 하십니까?
「이 변호사, 이것을 보시오.」
케렌스키는 가방에서 낡은 신문을 꺼내 경훈에게 넘겨주었다
워싱턴 지역에서 발간되는 한 신문인데, 살인 사건이 보도되어
있었다.
「이 살인 사건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 겨우드라는 은이, 내가 그 일을 시켰던 사람
이오.」
「그 일이라면?
「이 변호사가 부탁했던 문건 말이오.」
내?
「그 문건을 이 친구가 빼왔소.」
「그렇다면 그가‥‥‥?
「그렇소. 셔우드는 그 문건 때문에 죽었소.」
「아니, 그럴 수가 그까 문건 하나 빼낸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이 변호사가 제럴드 현이 어떤 사람인지 사전에 내게 말했다
면 나도 신중히 생각했을 것이오.」
경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가 큰 실수를 저지른 셈이군요. 하지만 저도 그 서류를 보
기 전까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럴
드 현의 신원이 셔우드라는 사람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는 말씀
입니까
「그렇소. 제럴드 현이 보통 사람 같으면 그렇게 했을 리가 없
지 않겠소?
경혼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제럴드 현이 보통 사람은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이렇게까지 무서운 감시를 받고 있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누가 왜 셔우드를 죽였을까요?
「셔우드가 죽었다는 정보를 접했을 때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
었소. CIA와 나는 늘 극적으로 대립하고 있었지만 그런 문건 하
나 때문에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지. 그래서 나는 의문을 품
고 그 사람. 제럴드 현에 대해 조사했소. 그러나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소. 그렇다면 CIA도 셕우드를 죽일 이유가
없지. 때문에 나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소. 왜 션우드가 죽어
야 했을까를 연구하는 데 말이오.나는 내 생각의 어떤 부분이
잘못췄을까를 찬찬히 검토했소. 그러다가 경슬하게 속단을 내린
사실을 집어냈소.」
역시 케렌스키는 천재답게 논리적으로 사고했다.
「제럴드 현이 나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속단을 해버렸던 것이
오.나는 의심을 품었소.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들이 왜
나의 정보원을 죽였을까.그래서 나는 거꾸로 생각하기 시작했
지. 제럴드 현이란 사람은 나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내가 그 관
련의 인파 관계를 모른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거요. 제럴드 현은
CIA의 임무를 수행하는 주한 미군이었소. 나는 CIA와 오랜 기
간 전쟁을 벌여왔고. 나는 그 점에 주목했소. 그래서 내가 지난
10년 간 추적하던 카를로스가 제럴드 현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
나, 혹시 한국에서 무슨 공작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됐지. 나는 다시 정밀 조사를 했소.」
경훈은 점점 케렌스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케렌스키가 해온
일은 결코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럴드 현이 근무하던 주한 미군을 샅샅이 훌었지. 그랬더니
세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었소. 한 사람은 제럴드 현, 그는 군인
이지만 아주 오랜 기간 CIA의 각종 공작에 관여해 왔소.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로버트 숀. 그는 의사지만 CIA의 특별 실험 프로
젝트에 관련된 사람이오. 마지막 한 사람이 바로 카를로스, 한국
에 올 때 그는 홀리건이라는 이름을 썼소, 세 사람이 모두 10 · 26
직후 한국을 떠났지. 두 사람은 발령이 났고 제럴드 현은 치료차
였지만 모두 급히 한국을 떠났소. 나는 그들이 10 · 26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소. 그리고 특히 카를로스, 그자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소. 이 정도 일은 그자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 그 디스켓은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CIA 깊숙이 숨겨놓은 나의 정보원에게 이제까지 취합한
비밀을 모두 가지고 나오도록 지시했소. 왜냐하면 내가 제럴드
현의 신원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큰 위기감을 주었기
에 나도 신변에 위험을 느껴 잠시 잠적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오. 그래서 그 디스켓을 필립 최에게 보냈던 거요.」
「원래는 제가 당해야 했던 일이군요.」
「아니오, 이 변호사는 안전하오. CIA는 내가 필요에 의해 제
럴드 현의 신원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디스켓을 왜 저에게 보관시켰습니까?
「그 점은 미안하오. 그것은 하나의 트릭이었소. 이 변호사가
그 디스켓이 든 목갑을 한국으로 가지고 가면 그들이 결국 탈취
할 것으로 생각했소. 그렇게 되면 그들의 조직을 파악할 수 있고
카를로스란 자의 정체도 알 수 있을 테니.」
「성과가 있었나요?
「그렇소. 제임스가 카를로스란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하수인
들은 제임스의 지시를 받고 있었소.」
「제임스, 아니 카를로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팬암 공작 전체를 지휘하고 나의 증인을 살해한 자요.
이 변호사는 아마도 그자가 박 대통령 시해의 배후에 있다고 생
각하겠지?
「어떻게 그것을 아십니까?
「나는 이 변호사가 필립 최를 이용해 흘리건의 이름을 얻어내
는 것을 보며 감탄했소. 후후, 사실 라스베이거스야말로 정보가
살아 꿈틀거리는 곳이지. 모든 정보는 결국 돈으로 이어지니까.」
「그런데 그들은 왜 목갑을 돌려 보냈을까요?
「카를로스라는 자는 보통이 아니오. 그는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 같소. 뭔가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끼고는 아예
목갑을 인수하지도 않았소. 함정인 것을 간파한 거지.」
「그렇게 된 거군요. 그런데 저는 그 목갑을 열고 디스켓의 내
용을 다 보고 말았습니다. 」
「괜찮소. 어차피 이 변호사가 볼 거라고 생각했소. 또 이 변호
사를 위해서도 그 디스켓을 봐두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고.」
「놀라운 비밀이더군요.」
「엄청난 돈을 들여 얻어낸 것들이오.」
「그런데 케렌스키 변호사님은 왜 CIA와 대립을 하게 됐습니
까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팬암 공작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케렌스키는 담배를 꺼내물었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는
그의 표정에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나는 중요하고도 어려운 한 사건을 맡았소. 10년 전에 말이
오. 모두가 꺼리던 사건이지만 나는 해낼 수 있다고 믿었소. 아
니 정의를 위해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소.」
「무슨 사건이 었습니까
「여객기 폭파사건이었소. 바로 팬암 103기 말이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럴지도 모르지.그 당시 이 변호사는 한국에 있었을 테니
까. 하지만 미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건이오. 그 사고로 결국
팬암은 문을 닫고 말았으니까. 나는 당시 괜암 측 사고 조사 위
원장을 맡았소. 우리 위원회에서는 사고가 폭발물에 의한 것이
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것은 FBI나 국제민항기구의 결론과도 일
치했소.」
「그럼 변호사로서의 역할은 잘한 것 아닙니까?
「그렇소. 하지만 위원장으로서의 나의 역할은 쇈암을 그 사고
로부터 법률적으로 보호하는 것이었소. 문제의 핵심은 누가 폭발
물을 비행기에 장치했는가와 누구에게 팬암의 안전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소. 범인이 누구냐에 따라, 또 어느
측의 책임이냐에 따라 배상의 주체나 금액이 천지 차가 나니까.」
「그러나 변호사로서 범인까지 잡아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것은 수사 당국에서 할 일이지. 그러나 수사 당국에서
는 오랜 기간 수사를 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소. 유족들은 당연
히 팬암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 나는 팬암의 사고 조사 위원
장으로서 범인을 찾는 일에 부심했소. 일면으로는 소송에도 관
여하면서 말이오. 그러니 그 일은 비단 팬암의 일뿐만 아니라 우
리 에이펙스의 일이 되어버렸던 거요.」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팬암으로서는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꼬투리라도 찾아내야 했을 테고,
사립탐정 팀과는 별도로 변호사 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에이펙스는 팬암의 대리 전사였다는 얘기다.
「런던과 프랑크푸르트에 출장을 간 것만도 자그마치 30회가
넘었소. 처음에는 시리아를 의심했지. 그러던 어느 날 미국 정부
는 갑자기 폭발의 배후로 리비아를 지목했소. 리비아가 국제 테
러 분자들을 사주하여 일을 저질렀다는 거지 시리아는 걸프전
에서 미국 측에 도움을 주었으니까 제외시켰던 거요. 우리는 다
급하게 정부에 판단 근거를 요구했소. 폭발 직후부터 누군가 언
론에 그런 풍문을 흘리긴 했지만 우리가 추궁할 때마다 정부에
서는 아무런 판단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지. 그러다가 정부는 리
비아를 폭발의 배후로 기정 사실화시켰던 거요. 우리의 거센 추
궁에도 정부는 어떤 자료도 제시하지 않았소. 정보원을 보호해
야 한다는 핑계였지. 결국 팬암은 유족과의 소송에 지고 막대한
배상액을 마련하기 위해 주식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소. 리비아
를 상대로 어떻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겠소 나는 참으로 착잡
했소.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고 싶었지만 어떤 꼬투리도 찾을
수 없었지.」
「그러면 미국 정부가 리비아를 지목한 것에는 뚜렷한 근거가
없었습니까?
「미국 정부는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리비아에 폭격을 감행했지. 그러고는 자신들이
지목한 용의자들을 내놓으라고 몰아쳤소. 만만한 게 리비아 같
은 나라니까.」
「그래도 아무런 근거 없이 미국 정부가 그런 일을 했을 리 있
습니까?
케렌스키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무겁게 입을 뗐다.
「당시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하나의 강렬한 의문
을 가지게 되었소.」
「어떤 의문입니까?
「리비아인들을 용의자로 몰아붙이는 데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사실이 있었소. 그 비행기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타고 있
었거든.」
「어떤 사람들이었죠?
「그 당시 베이루트에 억류돼 있던 미국 인질들을 구출할 임무
를 띤 CIA 요원인 찰스 맥키 소령과 부하 4명이었지. 그런데 그
요원들은 이란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소. 당시 미국은 이란에
대한 금수 조치를 취하고 전세계에 미국의 정책을 따르도록 종
용하고 있었지. 자유 세계는 물론 심지어는 소련조차도 미국과
의 무역 관계상 이란에 무기를 공급하는 일을 꺼릴 수밖에 없었
소. 그런데 그 요원들은 이란에 엄청난 양의 미국제 무기가 반입
되는 것을 보고 말았던 거요. 루트를 조사해 보니까 거기에는
CIA가 개입하고 있었소. 한 더 기가 막혔던 것은 시리아의 테
러범인 몬저 알카사르가 CIA의 후원과 보호 아래 프랑크푸르트
로부터 뉴욕으로 헤로인을 반입하여 막대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이었소. 그들은 거기서 중동 사태의 본질을 깨달았던 거요.
그래서 즉각 맡았던 공작 임무를 중단하고 귀환 결정을 내렸소.
꼭두각시춤을 출 수는 없다고 판단, 미국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폭로하려고 했던 거지. GA는 수차례에 걸쳐 그들을 만류했지
만 소용이 없었소. 문제는 그들이 바로 그 팬암기를 탔다는 사
실이오.」
「그렇다면?
「그렇소. 나는 CfA가 요원들을 제거하기 위해 그 비행기를 폭
파했다는 가정을 했소.」
「그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이 아닙니까 물증도 하나 없는데.」
「바로 그게 문제요. CIA가 수행하는 공작에는 물증이 전혀 없
소. 나는 당시 승객 명단과 이란에서의 그들의 교신 내용 등을
조사하면서 뚜렷한 심증을 가졌지만 결국 소송을 제기하지는 못
했던 거요.」
「모든 것은 베일 속에서 이루어졌군요.」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을 포기할 수 없었소. 너무나 뚜렷한 심
증이 있었거든.그래서 CIA의 심부를 파고들었지.나는 지난
10년 간 소송도 직접 맡지 않았소. 전력을 다해서 그 사건만 파
헤쳤지.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소.」
경훈은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케렌스키는 경훈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19년 12월 20일 문제의 그 비행기가 떠나던 날, 프랑크푸르
트 공항의 독일 정보국 직원이 자신의 CUt 파트너를 긴급히 찾
아 교신했던 내용을 내가 입수하게 되었던 거요.」
「무슨 내용이었는데요?
「그날 독일 정보국 직원은 팬암 103기로 들어가는 몬저 알카
사르의 가방 크기가 여느 때와 다른 것을 발견했소. 그 직원은
마약이 담긴 그 가방을 세관 직원들이 손대지 못하도록 항상 감
시를 하고 있었던 거요. 그 직원은 자신의 CIA 파트너에게 급히
연락을 했지. 가방이 평소와 전혀 다른데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
느냐고 물었더니, 그 파트너는 "걱정 마시오. 중지할 수 없소.
그냥 내버려두시오"라고 응답했소. 독일 정보국 직원은 시간도
있으니 짐을 빼놓고 당신이 와서 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지. 하
지만 그 파트너는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그냥 실으라고만 대
답할 뿐이었소. 나는 그 가방이 터졌을 거라는 강한 심증을 갖고
있소.」
「세상에 」
「나는 뒤늦게나마 소송을 제기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소. 그러
나 모든 방법을 봉쇄 당했지. 그 독일 정보원도 매수했지만, 그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소. 왜 돌변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미국이 지목한 리비아의 용의자들은 결국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소. 그들은 막후 거래에 의해 하지 않은 것도 했다고 허위 자
백할수도 있소.그것이 미국의 힘이오.나는 진정 힘있는 자들
에게는 진실을 가지고도 패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그것은 불가항력의 일이 아니었습니까?
「불가항력그래,불가항력이었소. 나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마의 성 앞에서 무릎을 꿇었소. 감당할 수 없는 절망과
허무의 나락으로 빠져들었소. 그때부터 이미 변호사로서의 내
삶은 구겨지기 시작했소. 나는 그 무서운 권력을 두려워하며 살
아을 수밖에 없었던 거요. 그런 인생에 회의를 느끼던 중 나는
중대한 결심을 했소. 영원히 도피하고 살아서는 일개 벌레의 삶
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들과 싸우기로 결심했던 거요.」
「그 누구도 하지 못할 결심을 하셨군요.」
「이미 감시를 당하고 있던 나는 도박을 하면서 그들의 눈길을
피하고, 엄청난 돈을 동원해 그들의 범죄 행각을 수집했소.」
경훈은 고개를 11덕였다. 디스켓에 있는 정보 하나하나가 모
두 대단한 것들이었다. 예사 노력으로는 정보를 얻기는커녕 죽
음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제임스는 지금 무기 거래상인데 아직 CIA와 관계하고 있을
까요
「그자는 평범한 무기 거래상이 아니오. 제임스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떤 음모
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오.」
「제임스를 직접 만나보셨습니까?
「아니오. 하지만 그는 틀림없이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어떤 음모와 관련되어 있소.」
「한국에서 진행되는 음모라뇨?
「미안하오. 아직은 얘기할 수가 없소.」
경훈은 잠시 눈을 감았다 미궁이었다 케렌스키는 정작 중요
한 것은 알려주지 않았다.
경훈은 이제 여기서 케렌스키를 그냥 보내면 그 한국에서의
음모에 대해 알 기회가 다시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음모는 결코 예삿일이 아닐 것 같았다. 아마 케렌스키가 한국에
와 있는 이유도 바로 그 음모 때문이리라. 더욱이 이미 10 · 26에
가담했던 제임스. 즉 '흘리건'이 다시 음모의 한가운데 있다면
분명 심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케렌스키의 태도로 보아
결코 얘기할 것 같지 않았다. 이때 인남이 케렌스키의 얼굴을 정
면으로 보며 입을 열었다.
「케렌스키 변호사님은 너무하시는군요. 경훈 씨는 변호사님으
로부터 디스켓을 부탁받던 순간부터 위험에 노출되었지만 이제
껏 이유도 모르는 채 단지 부탁을 들어드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위험을 감수했어요. 저도 이유도 모르고서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목숨을 잃을 변했구요. 그러나 지금 케렌스키 변호사님은 모든
것을 숨기려고만 하시는군요. 이것은 우리를 이용하려고만 하지
인격적으로 대하시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겁니다. 이게 변호사님
의 방식인가요?
케렌스키는 인남의 눈빛을 피해 시선을 돌리너니 한돌안 무언
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점은 두 사람에게 정말 미안하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모든 것을 말씀해 주세요. 죽
음을 가장하면서 한국에 와 계신 이유에서부터 제임스를 감시하
셨던 이유까지 말이에요.」
그러나 케렌스키의 표정은 완고했다. 순간 경훈의 머리에 케
렌스키의 디스켓이 떠올랐다. 케렌스키와 관련된 모든 일은 그
디스켓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케렌스키가 여기 와
있는 것도 디스켓과 관계가 있지 않겠는가.
경훈은 머릿속으로 디스켓의 내용을 하나하나 검색했다 떠오
르는 것이 있었다.
「말씀하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케렌스키의 표정이 변했다 경훈이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만 워낙 천재적인 그의 두뇌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는 음모는 대통령과 관계가 있는 일입
니다. 그리고 케렌스키 변호사 님은 제임스를 감시하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
「지금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협조입니다. 저도 케렌스
키 변호사님께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을 털어놓고 정보를
교환해야 합니다. 」
케렌스키의 표정이 여러 갈래로 변했다.
「좋소, 얘기하리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비밀은 지켜야
하오.」
「물론이에요.」
인남이 먼저 대답했다.
김대중 파일
「이 변호사의 짐작이 맞았소. 디스켓에 있던 (김대중) 파일을
기억하오?
「물론입니다. 」
「그 파일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과 관계가 있소.」
「그게 뭐죠도대체 한국의 대통령과 관계 있는 음모라는 게
뭡니까?
「지금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의 강경파들에게 큰 방해가 되고
있소.」
「그럴 리가 김 대통령은 철저히 친미적 성향을 보여왔는데.」
「그렇소. 이 변호사는 김 대통령이 당선 직후 미국의 의회에서
연설한 것을 기억할 거요. 의장 이하 모든 의원들이 진심으로 손
뼉을 쳤소. 모두가 그를 곱게 보았고 미국인들이 한국에 대한 호
감을 갖도록 하는 덱 그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었소.」
「그런데요?
「그런데 사실 김 대통령은 미국이 가장 경계하는 인물이오. 한
국의 대통령으로 앉히기에 그보다 더 불편한사람이 없다는 것
을 이제야 깨닫게 된 거요.」
「왜 그렇죠?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후 '민족'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그가 움직이는 방향은 지극히 민족적이오. 그는 자꾸 이유를 붙
여 미국으로부터의 무기 구매를 연기해 왔소. 그러면서 중국과
일본을 부추겨 아시아적 집단 체제를 구상하고 있지 그 집단 체
제에 김 대통령은 북한을 끌고 들어가려 하고 있소.」
「그러면 오히려 동아시아의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경
제도 더 활기차게 돌아갈 테구요.」
「음, 그것은 미국이 바라는 바가 아니오. 북한이 그 집단 체제
에 들어가면 남북 관계가 안정되고, 한반도에 통일의 분위기가
형성될 거요. 동아시아 전체에 협력과 합동의 거대한 흐름이 생
기는 거지. 그러면 중국이 대만을 흡수할 가능성이 커지고, 동아
시아가 미국의 거대한 상대로 부상한단 말이오. 한국과 중국, 일
본이 힘을 합한다고 생각해 보시오. 현재 한반도는 미국이 동아
시아의 힘을 흐트러뜨리고 제어하는 데 필요한 보루인 셈이오.」
경훈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케렌스키의 분석은 탁월했다. 언
론에 늘 떠오르는 평화니 협력이니 하는 미사여구와는 달리 매
우 현실적인 분석이었다. 미국이 한반도를 그렇게 이용하는 한
이 땅의 백성들은 뭐가 원지도 모르고 그냥 휘둘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김 대통령이 북한을 끌어내려 해도 북한이 전면 개방할 가능
성은 희박하지 않습니까
「이제까지는 그랬소. 그러나 북한의 상황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소. 상황을 변화시키는 요인은 내부적으로는 식량이지만, 외
부적으로는 김 대통령 때문이오.그는 확실하고 독자적인 그림
을 그리고 있소.」
「미국 측에서 볼 때 김 대통령이 그리는 그림에 문제가 있습
니까?
「물론, 엄청난 문제가 있소. 지난 50년 간 북한에 개방을 권유
한 지도자는 등소평과 강택민,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오. 그중
에서도 김 대통령이 그리는 그림이 가장 무섭소.」
「무섭다니 요
「미국의 매파들과 군부, 정보국, 군산 복합체들에게 말이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정상 회담이라는 미끼를 꾸준히 북한에
던지고 있소. 그리고 북한이 미끼를 물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소.」
「김정일이 과연 응할까요?
「그렇소. 김 대통령은 다른 사람이 아닌 김정일을 유혹하고 있
는 거요. 이제 김정일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소. 어쨌거나 김
정일은 기본적으로 한 나라의 지도자요. 단순한 군인이 아니란
말이오 엄청난 모험이긴 하지만 김정일은 군의 손아귀에서
어나려 하고. 김 대통령은 그 틈새를 노리고 있소. 그만큼 남북
정상 회담의 실현 가능성이 높단 말이오. 물론 그 회담에서는 군
축이 화두가 될 수밖에 없소. 이 변호사도 군축이 얼마나 위험한
화두인지 알 것 아니오
「아이러니컬하군요.」
이 세상 어느 나라가 군축이란 단어를 싫어할 것인가. 그러나
군축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케네디의 피살은 이 단어의 또다른
얼굴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 아닌가. 경훈은 섬뜩한 느낌이 들
었다
「나는 왜 미국이 이미 제네바에서 약속했던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풀지 않는지 의심하고 있었소 북한이 핵 개발이나미사
일 수출 등으로 나갈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들어간다는 생각
도 하게 되었고 미국은 국제 사회에 북한이 약속을 안 지키는
나라라고 선전하고 있지만,사실은 미국부터 먼저 경제 제재를
풀겠다는 제네바 회담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니오 어쨌든
김대중 대통령은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 남북 정상 회담을 진
행할 테고, 군축이 거론되면 김 대통령도 케네디나 박정희 같은
입장에 처할 수 있소.」
경훈은 목갑속 디스켓에 들어 있던 (김대중)파일의 내용을
떠올렸다. 그 마지막에 씌어 있던 구절은 "우리는 새로운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가 아니었던가.
「그러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음모란 김대중 대통령의 노선을
무력화시키는 것인가요?
「아직 확실히는 알 수 없소, 그들이 무슨 방법을 쓸지. 하지만
나는 카를로스가 개입할 거라는 강한 심증을 갖고 있소.」
「어째서요 제임스로 행세하는 지금의 그는 무기 거래상 아닙
니까?
「카를로스는 한국에서 무기 거래에 관여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었소. 물론 미국과 한국에 두터운 인맥도 쌓았고. 하지만 지금
그자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고 있소. 카를로스는 한국에 수송
기와 정찰기, 그리고 차세대 미사일을 팔기 위해서 막대한 자금
을 들여 로비를 했소. 엄청난 이익이 떨어지는 일이오. 그자는
이번 일을 끝으로 사업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소. 모
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계약금을 받기 직전에 한국 정
부는 군비 지출을 동결해 버린 거요. IMF 핑계를 대고 있지만
사실 그 본질은 김대중 대통령의 군축 정책 때문이오. 카를로스
는 끝까지 일이 안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가만히 있지 않는다면?
「나의 정보원은 카를로스가 한국에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음
을 당했소. 이 변호사도 카를로스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 알
잖소?
「그렇다면 ‥‥?
케렌스키는 말없이 고개를 』1덕였다.
「설마?
「미국의 군산 복합체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선에 대해 불
만을 갖고 있소. 이미 예전에 그들의 불만이 극대화되었을 때 케
네디가 죽었지 .」
경훈은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하다 케렌스키에게 물었다
「만약 카를로스가 뭔가를 하고자 한다면 먼저 케렌스키 변호
사님의 정보망에 포착되겠군요?
「그럴지도 모르오. 나는 그자의 범죄 사실을 필요로 하오. 무
슨 말인지 알겠소 나의 증인을 무참히 살해해 버린 그자, 팬암
의 재판을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만들어버렸던 그자가 이번 공작
에 연루되어 있다는 단서가 필요하단 말이오. 즉 나는 카를로스
가 음험한 CIA의 공작 전문가라는 사실을 선량한 배심원들에게
내보여야 하오. 이것이 내 필생의 과제요. 경훈 형제, 우리는 힘
을 합쳐야 하오.그리고 더 이상 미국이 범죄 조직 같은CIA에
놀아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오. 미국이 패권주의로 치달으면
인류의 역사는 정의를 상실하게 되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
은 미국을 옳은 방향으로 굴러가도록 만드는 것이오. 그것이 곧
나의 '성전'이오. 그리고 지금 군축으로 치닫는 한국의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위험에 처해 있소.」
「카를로스는 본래 어떤 자입니까?
「전설적인 존재였소. 그래서 팬암 사건에도 관여하게 된 거고.
그자는 인텔리지만 실제로는 정부 전복이나 쿠데타, 암살 등의
전문가요. 그자는 비상한 머리로 현지에서 모든 공작을 지휘하
고는 유령같이 사라져버리지. 그런데 나는 팬암 사건 후 잠적해
버렸던 카를로스가 최근에 다시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
던 것이오. 바로 여기 서울에서 말이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그자가 제임스라는 이름으로 10년 간이나 여기서 무기 거래를
해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소.」
「그런데 과연 그자가 다시금 한국의 대통령을 어떻게 할 수 있
「그게 나의 고민이오.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국제적으로 유명
한 인물이오.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지. 그럼에
도 불구하고 카를로스는 한국에 와 있소. 그자는 무기 구매를 성
사시키기 위해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려 들 거요. 또 지금 은밀
히 추진되고 있는 남북 정상 회담을 방해하려 할 텐데 어떤 방법
을 쓸지는 알 수 없소. 지금으로서는 그저 감시만 하고 있을 뿐
이오. 혹시 좋은 방법이 떠오르면 내게 알려주시오. 이 변호사는
천재잖소?
「어떻게 연락드리면 됩니까?
케렌스키는 휴대폰 번호를 일러주었다
「자, 그러면 다음에 봅시다. 」
케렌스키는 경훈을 구해준 게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경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병실을 나갔다.
음모
다음날 아침 병실에서 잠을 깬 경훈은 아무런 장애도 느껴지
지 않아 안심했다. 혈압도 감정지수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와 있
었다.
인남은 퇴원한 경훈과 같이 집으로 와서는 차를 器였다. 그동
안 경훈은 소파에 앉아 처음 제럴드 현의 전화를 받고 나서 지금
까지 겪은 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세희와 케렌스키를 만나 세상에 묻혀 있던 사실들을
어느 정도 찾아내기는 했지만 새로 직면한 문제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미국이 김재규와 어
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의문은 여전
히 남았다.
미국이 김재규를 시켜 박정희를 살해했다면 무엇보다 그 뒤가
연결되지 않았다. 미국이 배후에 있었다면 김재규는 실패할 리
가 없었을 것이다. 설사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토록 어설프게, 아
니 우스꽝스럽게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훈은 10 · 26의 진정한 비밀은 바로 10 · 26후 김재규와 미국
의 관계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만난 브루
스에 의하면 미국이 최고급 정보를 제공하는 등의 방법으로 김
재규를 조종해 왔고, 김재규의 소원이었던 주한 미군 철수 중단
이라는 엄청난 문제도 해결해 주었다.
그 다음부터 김재규는 미국 사람에 다름아니었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미국은 브루스보다 직위가 높은 흘리건이라는 자로 하
여금 김재규를 전담하게 했다. 흘리건의 임무는 미군 철수 중단
이라는 빚을 진 김재규로부터 그 빚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김재규 전담자, 그는 이전의 브루스와는 비교도 안 되게 깊이
있는 얘기를 김재규와 나누었을 것이다. 세상의 아무도 모르는,
단지 두사람만의 비밀을 나누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경훈은 갑자기 탁자를 내리쳤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어머, 너 왜 이래?
차를 誇여오던 인남은 경훈답지 않은 행동에 놀랐다
「제임스, 아니 홀리건이라는 자 말이야.」
「그래 .」
「그자가 열쇠야. 그자가 속임수를 썼을 가능성이 있어.」
「흘리건 무슨 속임수?
「아니 홀리건이 아니지. 미국, 미국이 엄청난 속임수를 썼을
가능성이 있어.맞아,그런면 수수께끼가 풀려 이것은 분명 속
임수야.」
「속임수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래야 김재규가 남산으로 가지 않고 용산으로 간 이유도 설
명이 되는 거야, 흘리건의 속임수, 아니 미국의 작전이었어.」
「무슨 말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좀 찬찬히 설명해 봐.」
「이미 미국이 김재규의 소원이었던 주한 미군 철수 중단을 들
어주었을 때부터 그의 운명은 결정된 거야. 아니 그전에 브루스
가 김재규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부터 그의 운명은 결정된 거라
고 봐야지. 미국의 선택이었으니까.」
「그런데?
「미국은 어떤 형태로 김재규를 써먹을지 연구했어.」
「그랬겠지.」
「미국이 궁극적으로 바라던 바는 박정희의 제거였어.」
「그건 확실하지.」
「그런데 미국은 하나의 고민을 갖고 있었단 말이야.」
「무슨 고민?
「당시의 동서 냉전 체제하에서 박정희의 죽음이 몰고 올 엄청
난 공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지.」
「당연히 염려했겠지 .」
「그래서 미국이 딜레마에 빠졌던 거야.」
「나도 거기까지는 이해가 돼.」
인남은 경훈의 논리를 따라잡는 데 문제가 없는지 여유 있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미국은 마침내 그 문제를 해결해 냈어.」
「어떻게?
「김재규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오래 전부터 박정희를 암살하
려고 준비해 왔대. 심지어는 군단장 시절 박정희가 자신의 부대
를 방문했을 때 그를 체포해서 억류하고 독재를 끝장내도록 담
판지으려 했고, 태극기에 주머니를 만들어 권총을 숨겨놓기도
했대.」
「나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그런 진술은 나중에 김재규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체
념했을 때부터 나온 자기 포장 같은 것이었어.」
「그럼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얘기야?
「물론이야.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얻어낼 수
있어 .」
「뭔데?
「김재규는 여러 가지 형태로 박정희를 처치할 생각을 해왔다
는 거지.」
「실제 일어난 것은 궁정동의 10 26이지만 김재규는 사전에
다양한 형태의 거사를 생각했단 말이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김재규는 모든 거사 형태의 장단점을 비교하고 분석했단 얘
기지.
「그래서?
「그러고는 실제 일어났던 방식을 택한 거야.」
「그게 제일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지.」
「아니, 이것은 매우 이상한 형태의 거사야. 보안사령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김재규는 평소에 어떻게 하면 거사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연구했고, 도상 훈련도 수없이 해두었거든.」
「그런데?
「그러나 김재규는 평소 훈련했던 방식을 택하지 않았어. 자신
의 방식을 택하지 않았단 말이지. 사람들은 그가 그런 방식을 택
하지 않은 것을 두고 바보니 얼간이니 하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다른 각도로도 볼 수 있어 .」
「어떻게?
인남은 입에 침이 말랐다.
「김재규는 다른 방법을 받아들였던 거야. 그래서 전화 한 통화
면 될 그 "김정호 시작해"를 하지 않았던 거지.」
「"김정호 시작해"가 뭐야
「평소 훈련해 두었던 중앙정보부의 작전 명령이야.」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경훈은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잔
을 든 채로 동작을 멈추었다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있는 경훈에
게 인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경훈아, 왜 그래?
그래도 한참을 더 말없이 있던 경훈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그래, 바로 그거야 연결이 돼, 그것까지도」
「뭐가?
「노벰버.」
「노벰버 , 육사 11기?
「그래. 네가 생각해 냈지, 육사 11기라고.」
「10 26과 육사 11기가 관련이 있다는 얘기니?
「그것뿐만이 아냐. 더 있어.」
「뭐가
「이럴 게 아니지 .」
경훈은 벌떡 일어나더니 책상 앞으로 가서 잔뜩 쌓여 있는 자
료를 헤치며 무언가를 찾아서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갑자기 왜 그래?
「기나긴 시나리오였어. 10·26부터 12 12를 거쳐 5·18까지
이어지는 미스터리는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 거야.
「어떻게 알 수 있지?
「바로그노벰버가 열쇠였어 육사11기의 스터디. 5 18은 결
국 육사 11기들의 권력 장악으로 가는 과정이었잖아.」
「그러나 그렇게 확신할 수 있을까?
「확신?
「그래, 나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물론 내가 마음이 약해서
그렇겠지만, 아무리 CIA라 해도 과연 한 나라의 대통령을 그렇
게 마음대로 거세할 수 있을까 싶어.」
「제럴드 현이 죽음의 순간에 얘기했던 것을 믿을 수 없단 말
이야?
「물론 믿어. 하지만 동시에 의심스럽기도 해. 미국이 정말 김
재규를 사주했을까 과연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우리가 현 선
생님의 말에 너무 경도되어 일방적인 시각으로 10 · 26을 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 말이야.」
경훈은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 인남의 목소리를 듣자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야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도 자신이 없다니 」
「물론 나도 미국이 드골을 암살하려고 했다든지 칠레의 아옌
데를 암살하고 일어난 피노체트 쿠데타의 배후에 있었다든지 하
는 얘기는 들었어, 그러나 과연 그랬는지는 확신할 수 없어.」
「그러나 그런 일들은 증거를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잖아.」
「그래, 그건 나도 알아.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나도 누구
보다 잘 알지. 너나 되니까 이 정도까지 내막을 캐온 거야. 하지
만 나는 믿기가 어려워. 그와 비슷한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고
그 증거가 있다면 믿을 수 있겠지만 말이야.」
인남은 잠시 멈추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을 해보았어. 그동안 내가 한 일이 너무 없더라, 모든 걸
경훈이 너 혼자 다 해왔잖아.그래서 말인데 나 내일 미국으로
갈 거야.」
「미국으로?
「그래. 현 선생님은 언젠가 내게 "미국은 그래도 괜찮은 나라
야, 잘했든 못했든 정부가 한 일은 모두 기록으로 남기거든' 하
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 나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미국에
가서 정부 문서 보관소를 뒤져보고 싶어. 현 선생님이 괜히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서 보관소에 간다고 무슨 자료를
얻기는 힘들겠지만 인남에게는 필요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옛 문서를 뒤지다 보면 비록 한국이 아니더라도 미국
이 세계 각국에서 자행한 검은 음모의 일단에 대해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또 그녀로서는 최근의 납치 사건으로 뒤한 마
음을 풀고 싶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미국은 인남이 은 시절을
살아온 친근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해.」
다음날 경훈은 인남을 공항까지 바래다주었다.
「성과가 있으면 연락할게.」
인남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막상 인남이 미국으로 가고 나자 경훈은 허전했다.
경훈은이제 10 26에 대한결론을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결
론이 나온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케렌스키가 얘기한 카를로스, 즉 제임스의 또다른 음모에
대비해야 했다.
경훈은 자동차를 운전하며 공항에서 시내로 돌아오는 내내 한
반도의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남과 북의 권력 내부에서 어떤 일
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누가 생각해도 한반도가 군축
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자본과 기술이 달려 경제
적으로 불안한 남한이나 식량 부족으로 주민 탈출 사태가 속출
하는 북한이나 엄청난 돈을 빈 독에 물 붓듯 하는 현실이 너무도
개탄스러웠다. 더군다나 그 무기들이 동포를 겨누고 있음에야.
경훈은 남북 정상 회담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졌으면 싶었
다. 남북간의 신뢰 회복에 정상 회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
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폭격하겠다고까지 하는 미국이 한국
정부의 햇볕 정책을 언제까지 곱게만 보고 있을 리는 없다.
경훈은 제임스를 떠올리자 불안해졌다. 제임스를 저지할 힘을
갖고 있는 케렌스키는 결코 개입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경훈은 자신에게 제임스를 저지할 힘이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함정
케렌스키는 제임스가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노릴 가능성도 배
제하지 않았다. 사실 이 나라의 대통령 가운데 어느 한사람도
청와대에 들어가 끝이 좋지 못했다. 대통령들의 삶이 그렇게 굴
곡져 왔다는 것은 바로 이 나라의 운명이 그만큼 휘둘려왔다는
얘기다.
경훈은 지금의 대통령도 그런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북한을 이끌어내어 한반도의 항구적 안전을 도모하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의 초석을 깔겠다는 김대중 대통령, 그러나
그의 정책은 미국의 대북 정책 및 동아시아 정책에 정면으로 배
치되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추구하는 햇볕 정책도 사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것이 아닌가. 미국이 북한을 쳐야겠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
부터 그의 햇볕 정책은 누구보다도 국내의 친미 인사들에 의해
도륙나고 말 것이다. 여론은 빗발치고 사태 악화의 모든 책임을
대통령 혼자서 짊어져야 할 것이다.
미국의 노선을 어나면 불안해지는 수많은 국민을 보듬어안
은 채 까탈스럽기 짝이 없는 북한을 끌어내려는 김대중 대통령.
그 역시 케네디가 겪고 박정희가 겪었던 비운의 암살 위협에 노
출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훈은 불안해졌다
경훈은 상준을 만나 은근히 자신의 생각을 비쳐보았다. 그러
자 상준은 실소를 흘렸다.
「우습잖아. 대통령을 어떻게 한다고 제임스인가 뭔가 하는
사람 말이야, 전직 CIA라면 당장 미국이 거론될 것이 뻔한데 설
마 그런 을 하겠어?
「그건 그래. 하지만 누구도 생각지 못하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방법이 있으면 그런 짓을 할지도 모르
지. 하지만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방법이란 게 있겠어?
「그건 알 수 없지.」
무심코 대답하는 경훈의 뇌리에 케네디의 죽음이 떠올랐다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방법이란 실상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
었다
다시 경훈은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는 믿을 만한 선배를
찾아갔다.
「뭐 케네디가 CIA 손에 죽었다구?
「네. 하지만 CIA는 다만 앞잡이였을 뿐이죠.」
「그렇다면 그 배후는?
「군산 복합체.」
「군산 복합체라 ‥‥‥‥
「아무튼 케네디는 군축 때문에 죽었어요. 박 대통령 역시 핵무
기 개발로 인해 죽었고. 배후에 미국이 있었어요.」
「글쎄, 박 대통령 죽음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얘기는 김재규
자신이 했던 얘기니까 어떨지 모르지.」
「박 대통령은 국방에 관한 시각이 미국과 크게 엇갈렸고 그것
이 죽음의 원인이었죠. 그리고 지금 그때와 같은 상황이 또다시
한반도에서 조성되고 있단 말이에요.」
「같은 상황이 라구
「김 대통령은 군축을 달성하기 위해 남북 정상 회답을 모색하
고 있어요. 하지만 미국에는 남북 정상 회담과 군축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죠. 대통령의 정책은 미국의 노선과 엇갈릴 수 있어요.
이승만, 박정희 모두 그럴 때 위험했어요.」
「하하, 자네 신경과민인 것 같군.」
「어째서요?
「지금은 상황이 달라.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의 화신이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의 화신이야. 국정 운영에도 아무런 흠이
없어. 그리고 노구를 이끌고 경제 위기 극복에 최선을 다하는 모
습을 국민들이 다 지켜보고 있지. 어떤 쿠데타든 국민들에 의해
거부당해 미국미국도김 대통령을 어떻게 할수는없어 아마
인격과 능력만으로 세계 5대 지도자를 꼽으라면 김 대통령도 들
어갈 거야.」
「선배, 그러나 지금 상황이 매우 급박해요. 북한은 결코 미사
일 개발의 성과를 포기하려 들지 않을 거예요. 미국의 강경파들
은 이미 북한을 어떤 형태로든 응징하려 하고 있고, 김 대통령의
햇볕 정책이 자신들의 한반도 정책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생
각한단 말이 에요.」
그러나 비서관은 경훈의 말에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경훈은
답답했지만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답답해하
는 것은 경훈만이 아니었다. 손 형사 역시 가끔 찾아와 경훈에게
갑갑한 심정을 털어놓곤 했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있십니꺼 범죄를 저지른 사실은 분명
한데 증거가 없어 잡아넣질 못하다뇨.」
「좀 기 다려봅시다. 」
「지야 힘이 없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변호사님은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십니꺼?
경훈은 손 형사에게 일전에 죽을 뻔했던 일을 얘기했다. 그러
자 손 형사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울분을 토했다
「정말 쥑이뿔고 싶은 놈이구만.」
「그자는 무슨 일을 하든 흔적을 남기지 않아요. 지금으로선 어
떻게 할 수도 없고 ‥‥」
다음날 손 형사는 다부진 결심을 터금은 얼굴을 하고 다시 찾
아왔다.
「변호사님, 두고 보십시오. 그놈이 그런 수법을 썼다면 지한테
도 다 생각이 있십니더 .」
「아니, 함부로 움직이면 큰일납니다. 」
「알고 있십니더. 하지만 지는 대한민국의 형사가 그렇게 만만
치 않다는 걸 보여주고야 말겠십니더. 그놈이 증거 없이 사람을
죽이는 데 이골이 난 작자라면 지도 똑같이 해줄 수 있십니더.」
「아니, 손 형사님, 그러면 안 돼요. 그 인간에게 섣불리 손대서는
안돼요.
경훈은 손 형사가 제임스를 건드려 큰일을 그르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제임스의 목숨이 아니에요. 그자의 배후를
알아야 합니다. 그자는 지금 엄청난 일을 계획하고 있어요. 그것
이 뭔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
「세상에는 CIA나 인공 위성만 있는 게 아니란 것을 보여줄 깁
니더. 대한민국의 형사도 있고, 전자 장치 못지않은 기술자의 손
도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줄 깁니더. 두고 보십시오.」
손 형사는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의미심장한 얘
기를 남기고 돌아갔다 손 형사는 마음껏 불법을 저지르는 외국
인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한국적 현실에 대해 순수한 인간적
분노를 터뜨렸던 것이다.
경훈은 한편으로는 불안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기대도 되었
다. 그리고 손 형사가가 남긴 전자 장치 못지않은 기술자의 손이
라는 게 무얼 말하는지 궁금했다.
손 형사가 나가고 나자 바로 전화 벨이 울렸다 인남이었다.
「지금 비행기를 탈 거야. 서울에는 내일 오후 늦게 도착해.」
「몇 시 비행기야 내가 공항에 나갈게.」
「바쁠 텐데, 괜찮아.」
「아냐, 내가 나갈게. 그런데 목소리가 아주 밝구나.」
「미국에 오기를 너무 잘했어. 가서 깜짝 놀랄 얘기를 해줄게.」
「뭔데?
「가서 들려줄게.」
제임스는 미국에서 갓 도착한 한 통의 전문을 앞에 놓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있었다.
「때르르릉 패르르릉 때르르릉‥‥‥」
전화 벨이 한참 울리도록 제임스는 무슨 생2◎가 잘게 있었
고 이내 그의 눈빛은 살기를 띠었다. 그는 벨이 열 번도 넘게
울렸을 때에야 비로소 전화를 받았다.
「제임스입니다. 」
「그 일은 어떻게 되었소?
「본국 통상본부의 라인을 통해 깊숙이 찔러보았는데 노골적으
로 거절당했습니다. 무기 구입은 좀 기다려달라는 완곡한 대답
으로 일관했다는 것입니다. 」
「핑계는 역시 IMF겠지.」
「그렇습니다. 」
「그는 사업가 출신이오. 셈에 밝지. 이제까지의 대통령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오. 그는 한국이 그런 엄청난 군비를 써가면서
는 도저히 세계 경제를 따라잡지 못한다고 생각하오.서두르시
오 지금 사태가 매우 급박하오. 식량 정책에 실패했다는 비난이
김정일에게 쏟아지고 있소. 그가 돌연 남북 정상 회담에 응할 가
능성이 매우 높아졌소.그들이 만약 전격적으로 군축에 합의하
면 모든 게 엉클어지는 거요. 앞으로 3일 이내에 썰매를 출발시
키시오.」
「알겠습니다. 」
제임스는 전화를 끊자 즉시 승용차를 대기시켜서는 어디론가
출발했다.
「니 진짜로 자신 있나?
「형님, 걱정일랑 붙들어 매노라 카니까예, 지가 별명이 안창따
기 아입니꺼, 안창따기」
「그래. 그놈이 정말 서류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더나?
「우리는 한 번 척 보면 안다 아입니쩌. 벌써 열흘이나 지켜봤
는데 전부 안주머니라예. 가방 안 들고 다니는 놈이 안주머니가
불룩하면 틀림없어예. 그라고 그놈 눈깔 돌아가는 거 보이소. 안
주머니에 먼가 엄청난 거 갖고 다니는 기 분명합니더.」
「잘못되면 니나 내나 다 형무소행이다. 」
「글마가 그렇게나 무서운 놈입니꺼?
「그래, 나 같은 형사 따윈 안중에도 없는 놈이지.」
「염려 마이소. 어떤 놈이래두 지가 개발한 수법에 걸리면 국물
도 없십니더.」
「니만 믿는다 고맙다. 」
「원참, 형님도. 그라은 지가 부」1럽지예. 근데 글마는 와 하루
에 두 번씩 꼭 평택엘 갔다 오는 깁니꺼?
「이유는 내도 모린다. 」
「밀수라도 하는 놈 아입니꺼
「밀수할 놈은 아이고 ‥‥‥‥」
안창따기는 손 형사에게 언젠가 꼭 은혜를 갚고 싶어하던 참
이었다 수년 전 특별 단속에서 붙들려 빼도 박도 못하던 안창까
기를 고향 선배인 손 형사가 동료 형사에게 사촌동생이라고 사
정하여 빼준 적이 있었다. 그후로 다시는 손 형사 앞에 나타나지
않기로 맹세했는데, 뜻밖에도 손 형사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
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에게 손 형사가 일을 부탁해 왔다는
사실이다.
「저쭈 온다. 잘해.」
제임스는 빌딩 앞에서 승용차를 내려서는 현관으로 걸어 들어
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던 안창따기는 문이 열리자 몇
사람과 같이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탔다. 제임스는 엘리베이
터에 타자 8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려는 순간 한 사나이가 급하게 외치며
뛰어왔다. 손 형사였다 한 아가씨가 얼른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
터의 문을 열어주었다
「아, 고맙십니더 .」
손 형사는 엘리베이터에 타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갑자기 고
함을 질렀다.
「어. 이놈, 이거 여기 있었구나. 야 이 새끼야 이 살인범농아」
손 형사의 고함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이거 왜 이래 」
제임스는 멱살을 잡으려는 손 형사를 피하면서 황급히 고함을
질렀다.
「너 이 새끼, 이 변호사에게 무슨 짓을 했어?
손 형사는 막무가내로 제임스의 멱살을 잡아채면서 고함을 질
렀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 형사가 제임스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자 엘리베이터가 심하게 흔들렸다.
「이거 엘리베이터 안에서 왜 이러시오. 위험하잖아요.」
한 승객이 두 사람 사이로 나서며 말렸다.
「이놈 이거 살인범입니다. 죽일 놈이란 말이오.」
「뭐 이거 못 놔 이 자식, 너는 모가지야.」
「나가서 얘기해요. 엘리베이터가 흔들리잖아요.」
다시 여자 승객 한 사람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좀 말려줘요 이 미친 사람을 좀 붙들고, 멱살 좀 풀어
줘요」
제임스의 요청에 따라 안창따기는 아주 여유 있게 그의 안주
머니를 자신의 특기인 안창따기 수법으로 뜯어냈다. 그러고는
6에서 다른 승객들과 같이 내렸다. 10여 년이 넘는 그의 작업
역사를 볼 때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너, 내가 정식으로 영장 가지고 올 테니까 도망가지 말고 기
다려 」
손 형사는 인터폰을 받고 달려온 경비원들에게 신분증을 내밀
고는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밑으로 내
려와서는 급히 안창따기와 약속해 둔 장소로 택시를 타고 갔다
그리고 안창따기로부터 봉투 하나를 전해받고는 그 길로 경훈을
찾아갔다.
「정말입니까 이게 그자의 주머니에서 빼온 것입니까?
틀림 업습니더.
봉투는 아주 두텁게 밀봉되어 있었다. 경훈은 자못 기대감이
서린 손길로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에는 종이한 장이 있었고
거기에는 다섯 사람의 이름만 씌어 있었다
이재억
지영호
유수하
임창순
민봉규
「허, 참, 아니 이게 뭡니꺼?
「그렇게나 어렵사리 빼왔는데 고작 이름 다섯 개라니예.」
「박 열흘 동안 하루에 두 번씩 평택에 내려가기에 무슨 특별
한 일이라도 있나 했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힘빠지네예.」
「이 이름들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고작 이름 몇 개에 의미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십니꺼 이 이
름들이 누구의 이름이든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구요?
경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 형사히 말은 틀리지 않았
다. 손 형사의 얼굴은 실망감으로 일그러졌다.
「이제 서에 들어가면 어떤 곤욕을 치를지 모르겠십니더.」
경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나가는 손 형사를 위로할 특
별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리며 그냥 앉아 있었다. 종이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무슨 비밀 글씨가 보이거나 하는 것
도 아니었다. 인명 사전을 찾아보아도 다섯 개의 이름 중 어느
하나도 나와 있지 않았다
경훈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신문사와 잡지사 등의 친구들에
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그 이름들을 알고 있지 않았
다. 경훈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 형사는 퇴근 시간 직전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앉아 있
다가 아무 일 없이 끝나자 날아갈 듯 가벼운 마음으로 경찰서 정
문을 나섰다. 그는 근처의 공중 전화를 들어 안창따기를 불렀다.
노고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술이라도 한잔 사주고 싶었다.
저녁을 겸해 시작한 술자리가 몇 차를 거치는 동안 두 사람은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했다 그래도 선배라 손 형사는 안창따기
를 먼저 택시에 태워보내고 자신은 길거리에 서서 다음의 빈 택
시를 기다렸다. 그때 검은색 자가용 한 대가 다가오더니 운전석
에 앉아 있는 은이가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아저씨, 쌍문동으로 가는데 같은 방향이면 1만 원만 내고 타세
요. 택시 요금도 안 되는 돈이에요. 기름값에나 좀 보태려구요.」
「그으래, 가자. 내도 쌍문동에 산다. 」
손 형사가 조수석에 올라타자 뒤에서 뭔가 다가와 이내 가느
다란 철사로 그의 목을 조였다 다음 순간부터 손 형사는 피가
끓고 살이 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자동차는 어느 야산에 멎
었다.
「어느 놈한테 전해줬어?
손 형사는 인간이 참 간사하다고 생각했다 거의 세 시간이나
계속된 무자비한 고문을 온몸으로 맞받아 이제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떨고 있는 자신을 느꼈던 것이다.
「이 새끼, 진짜 독종이구나. 야, 너는 이 보기 싫은 귀때기부터
잘라내 버리고, 너는 야구 빠따로 이 새끼 허리를 30대 갈겨.」
손 형사는 이미 부러진 두 다리와 두 팔을 힘들게 움직이며 귀
를 감싸려는 자신에 대해 웃음이 나왔다. 웃음은 이내 비명과 섞
여 입을 틀어막은 천조각 사이로 기괴한 소리를 흘려냈다.
한쪽 귀에서 금속의 싸늘한 감촉과 함께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리자 손 형사는 두려움에 젖은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고
개를 끄덕였다. 입에서 천조각이 빠져나가자 손형사는 쓰러진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누구야 빨리 말해」
「이, 이, 경훈· 이경훈 변호사.」
손 형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진작 말했으면 아무 고통 없이 편하게 죽여주잖냐, 이 미련퉁
아 야, 이 새끼 구덩이 파고 묻어버려.」
사나이는 쓰러져 있는 손 형사의 무감각해진 얼굴을 쳐다보며
휴대폰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형님, 이 짭새 새끼가 그 서류를 이경훈이라는 변호사놈한테
줬답니다. 」
에버레디 계획
다음날 오후. 손 형사를 위로하려고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넌
경훈은 그의 결근 소식을 들었다.
「지각은 했지만 결근은 안 하던 사람입니다. 어젯밤에 집에도
안 들어왔다는데 무슨 일인지 ‥‥‥‥」
경훈은 반장에게 손 형사가 출근하면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한
뒤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왔다.
제임스,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경훈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시
계를 보았다. 인남을 마중 나가야 할 시각이었다.
경훈은 공항에 나가서 다시 한 번 손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소식이 없었다
인남이 탄 비행기는 정시에 도착했다. 밝은 얼굴로 나온 인남
은 경훈의 초조한 표정을 보자 놀랐다.
「위험해. 손 형사님이 실종됐어. 제임스로부터 서류를 탈취했
는데 어제 저녁부터 소식이 없어.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지금 우리도 위험해. 도대체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건지 모
르겠다. 」
「케렌스키 변호사님께 물어봐. 도움도 청하고.」
「그래. 그게 좋겠구나.」
경훈은 케렌스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케렌스키는 측각 약속
장소로 나왔다 손 형사의 소식을 들은 케렌스키는 미간을 좁
혔다.
「다섯 사람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
「이 변호사가 모르는 사람들이오
「네,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입니다. 」
「어떤 사람들일까?
「무기 거래에 관련된 사람들일지도 모르죠.」
케렌스키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나저나 제임스는 움직임이 없습니까?
「전혀. 밀착 감시하고 있는데 왠지 통 움직임이 없소.」
「이상한 일이군요.」
「그러게 말이오.」
「하여튼 무슨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바로 연락을 주십시오.」
「알았소. 그런데 이 변호사도 집으로 들어가면 위험하지 않겠소.
「그렇지 않아도 손 형사님의 신병이 확인될 때까지는 호텔에
서 머무를 예정입니다. 」
「그게 좋겠소. 호텔을 정하면 내게 알려주시오.」
인남과 같이 시내의 호텔에 숙소를 정한 경훈은 다섯 사람의
이름이 적힌 종이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인남은 워를
마치고는 과일을 들고 경훈의 방으로 건너왔다.
「너 신경이 극도로 곤두서 있구나.」
「틀림없이 무슨 일인가가 진행되고 있는데, 손 형사님은 왜 이
렇게 소식이 없을까?
무심코과일을 집어 한입 베어먹던 경훈은 아무 맛도못느끼
겠는지 과일을 치우고 다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기자 친구도, 청와대 선배도 아무 염려 말했다면서?
「그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라 제임스가 가만있는 것이 오히
려 불안해.」
「아무리 대단한 자라 하더라도 감히 대통령을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 설마?
「ll자는 개인적으로도 이번의 무기 거래에 운명을 걸고 있다
고 했어. 그리고 김 대통령의 군축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모험이
야. 그들은 케네디조차 죽이는 자들이잖아. 그들에게 행동을 해
야 할 이유는 충분해. 다만 어떤 방법을 쓰는가가 문제지.」
경훈은 쩨임스가 하루에 두 번씩 꼬박 10일 동안이나 평택에
다녔다는 손 형사의 말을 떠올렸다. 평택과 그 이름들이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택에 뭐가 있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누구에게 물어본다?
「캐나다의 오 선생님은 아시지 않을까?
「그래 맞았어. 이젠 너도 제법이구나.」
인남의 말마따나 이런 걸 묻기에는 오세희가 적격이었다. 경
훈은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택 거기에 506이 있지.」
「506이라뇨?
「특수 부대요. 감청 전문이지. 한반도에서 오가는 모든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부대요. 멀리 만주까지도 감청할 수 있소.」
「대단한 부대군요.」
「무슨 일 있소?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
「거기 분위기는 어떻소 이쪽에는 미국과 북한의 충돌을 점치
는 시각도 있는데 ‥‥‥‥」
「글쎄요, 특별한 변화는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는 일이 있을까요?
「방심할 수는 없소. 워낙 공격적인 자들이니까 이 변호사는
지난 94년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소?
「잘 모릅니다. 」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꿈에도 모르는 채 전면전이 터질 뻔
했소.
「미국은 그때 실제로 전쟁을 계획했소. 당시 미국은 걸프전의
승리로 말미암아 호전적 분위기에 쉽싸여 있었지. 북한의 핵 개
발 의혹은 군산 복합체에게는 최고의 기회였소. 그들은 CIA를
내세워 폭격의 꼬투리를 잡으려 했지. 이 변호사,그 당시 CIA
국장이 의회에서 북한은 이미 열 개 이상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고 증언했던 것 기억나오?
「네, 기억납니다. 」
「미국은 그런 나라요. 국방성은 1차로 1만 명의 미군을 증파하
는 계획을 세웠소. 처음 미군은 영변 일대를 폭격하고 일시에 북
한의 공군력을 궤멸시키려 했지. 그러면 북한의 지상군이 대거
남으로 공격해 오리라 예상했소. 그랬을 경우 미군이 약 8만 정
도, 한국군이 약 30만 정도 희생될 것으로 판단했지. 민간인은
수백만 이상이 사망하고 한국 경제는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는
거요.그들은 이처럼 전면전을 불사하고라도 북한의 핵 개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소.」
「실제로 그 당시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
지 않습니까
「물론이오. 그러니까 더 무섭지. 있지도 않은 핵무기를 있다
고 전면전을 계획하는 미국의 시스템이 더 위험하다는 얘기요.
일반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군산복합체 국방
성 ·CIA등이 앞장서 일을 저지르고, 군산복합체는 걸프와 비
교가 안 되는 대규모 전쟁에서 다시 엄청난 이익을 챙기는 거요.
미국이 추구하는 세계 정책의 본질은 군사력이고, 군산 복합체
는 절대 망해서는 안 되오. 따라서 지구상의 어딘가에서는 위기
나 전쟁이 상존해야 하는 거요. 하지만 절대 핵무기 개발은 안
되지. 미국의 통제를 어날 수 있거든.」
「알겠습니다. 미국의 군사력 유지를 위해 한반도는 끊임없이
위기에 시달리고 무기를 사주지만, 정작 국방을 강화하고 값싼
안전을 보장하는 핵무기는 안 된다는 의미군요.」
「문제는 한반도의 어느 누구의 의사와도 상관없이 미국이 그
렇게 대담한 전쟁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이오. 미국의 필요에 의
해 남한은, 아니 한반도는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는 운명을 맞
을 수도 있소. 더욱 비참한 것은 미국의 폭격에 의해 남북한이
아수라장의 전쟁판을 벌여야 한다는 거요.」
「뭐라 말이 안 나오는 현실이군요.」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나도 가족들과 서울로 들어가겠소.」
「네 여기로요?
「그렇소. 나도 나라와 고난을 함께하고 싶소. 한반도에는 이
땅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소. 아무리
초강대국이지만 그런 식으로 함부로 약소국을 공격해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온몸으로 항의하겠소.」
「오 선생님, 고맙습니다. 」
경훈은 전화를 끊으며 온몸에서 전율을 느꼈다. 그는 평소에
도 오세희와 대화를 하다 보면 무뎌진 민족애와 조국애가 새삼
스럽게 싹트는 것을 느끼곤 했다.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아냐.」
경훈의 뇌리에 불현듯 인남이 하버드대학교 케임브리지 광장
에서 어깨에 북을 비스듬하게 메고 판소리 공연을 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이어 인남이 땀을 닦으며 하던 소리가 귀에서 되살아
났다.
-우리 것만 없는 거야 에이, 내가 못나설 건 뭐야 싶었지. 그
래서 아예 판소리를 배워버렸어. 내가 본래 노래에는 소질이 있
잖아.
경훈은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인남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니?
「우리 나라가 존속하는 것은 오 선생님이나 너 같은 사람이 있
기 때문이야. 나는 참으로 부끄럽다. 」
「놀리는 거니?
「아니 , 진심이야.」
「그럼 이제 내 얘기 좀 해도 돼?
경훈은 그제야 인남이 미국에서 성과가 있었다고 얘기했던 것
을 떠올렸다.
「참, 그 얘기 좀 들어보자. 내가 손 형사님의 실종으로 너무 정
신이 없었구나.」
인남은 손에 들고 있던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증거야.」
「증거라니?
「내가 얘기하던 증거 말이야.」
「뭐라고 그런 증거가 있어?
경훈은 깜짝 놀랐다 인남이 얘기하던 증거라면 '10·26과 비
슷한 일에 대한 증거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 내가 찾았어. 그것도 외국이 아닌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이야.」
「믿을 수 없어. 인남이 네가 그걸 찾아냈다니?
「이 땅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주한 미군이 한국의 대통령을 거
세하려 했던 기도가 있었어 .」
「증거, 네 말대로 단순한 말이 아닌 증거가 필요해. 그걸 대봐.」
「그래, 에버레디 계획이란 게 있었어. 나는 미국의 문서보관소
에서 그것을 찾아냈지 .」
「에버레디
「에버레디, 그건 항상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지. 그 말은 결과
적으로 주한 미군은 언제나 쿠데타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 돼
버렸어 .」
「뭐?
「그것은 주한 미군이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고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을 사람을 지도자로 앉힌다는 계획이었단 말이야.」
「그게, 그게 정말이야 그런 계획이 정말 있었어?
「그럼,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작전도 다양해. 미군
이 직접 하는 걸로 계획을 세웠다가 한국군을 이용해 실행하는
방법도 검토하고. 어떤 경우든 한국군이나 한국 정치인을 표면
에 내세웠지. 그런 사실이 서류로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숨이 막
힐 지경이었어 .」
「믿을 수가 없어. 그런 게 어떻게 존재할 수 있지?
「비밀 해제가된 지 얼마 안 됐어.어디 이것만 그렇겠니나
는 이걸 보면서 10·26이니 12 12니 5·18이니 하는 것들도 미
국의 어느 문서 보관소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경훈은 인남의 손에서 편지 봉투를 빼앗듯이 낚아채서는 내용
물을 끄집어냈다. 눈길이 제목을 스치는 순간 경훈은 아연 긴장
했다.
(1급 비밀)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1. Cx50901 3항에 언급된 세부 계획들을 세웠는데 그것은 일
련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계획은 8군과 협조 아래
마련됐으며 무초 대사와 사전에 협의한 것입니다.
2.모든 계획이 완벽히 준비되기 전에 언커크, 대사관,유엔군
사령관이 합동으로 이 대통령에게 모종의 요구를 해야 할지는 아
직 검토되지 않고 있습니다.
3. 유엔 사령부가 어떤 조치를 취하더라도 한국 정부의 상징은
보존되어야 합니다. 설령 군사력을 통한 장악이 필요한 경우에도
유엔 사령부 이름으로 행해진 조치는 보조 차원으로 알려져야 합
니다. 그러나 한국군만의 단독 수행은 적절치 않습니다. 왜냐하
면 그럴 경우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전까
지는 안 간다 하더라도 작전에 나선 한국 군인들이 꺼려해 한국
군의 반발을 살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유엔군에 장악된 다수의
한국군 부대를 동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4. 나는 나의 임무 수행에 위협을 줄 대혼란이 도래할 경우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5. 나는 이 임무를 유엔군 보안대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
니다 그럴 경우 계획이 조기에 노출되어 이 대통령에게 외국간
섭에 저항할 시간을 줄 것입니다.
6. 개입이 실행될 때에 대비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세부 계획을
세워두고 있습니다.
a. 이 대통령을 부산 밖 어디론가 유인해 내기 위해 서울
이나 또다른 장소로 그를 유인한다.
b. 예정 시간에 유엔군 총사령관이 부산으로 간다. 이승만
의 독재 정치에 핵심 역할을 한 주요 한국군 장교 5∼10명을
체포한다. 주요 한국군 시설과 유엔 사령부 시설을 방호하고
한국군 참모총장을 통해서 계엄권을 인수한다.
c 취해진 군사 행동에 대해 이 대통령에게 통보한다. 그에
게 계엄령 해제를 선포할 것임을 서명받는다. 그리고 국회
신문사, 방송국에 대한 자유를 보장받는다.
0. 이 대통령이 만일에 이런 것들을 반대한다면 그는 외부
와 차단된 곳에 감금될 것이다.
(중략)
겸훈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미 오래 전
에 10 · 26을 예비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경
훈은 특히 제3항에 유의했다. 미국이 주동을 하더라도 한국 정
부의 상징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구절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전세계에서 행하는 모든 테러와 쿠데타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이
었다.
「대단하구나. 어떻게 이런 걸 다 구했니?
「또 있어.」
경훈은 마치 늘 특종을 터뜨리는 유능한 기자를 주시하듯이
기대감으로 들떠 인남의 입가에 눈길을 모았다
인남은 테이블 위에 있는 펜을 들었다.
No overnment emfoyer could p亂icipto i路 ttempts to
kill fo「ein leader (Executive Order l1905)
경훈의 눈이 인남의 펜에서 흘러나오는 잉크의 궤적을 뒤쫓
았다.
「미국 정부의 어떤 공무원도 다른 나라 지도자의 암살에 관여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뭐지
「미국 대통령의 특별 명령이야.」
「무슨 의미지?
「공작을 금지하는 거야.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이런 해괴
한 특별 명령을 내렸어. 이걸 보니까 불현듯 이상한 기분이 들
었어 .」
「어째서?
「보다시피 미국 정부는 타국 지도자의 암살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거 잖아?
「그건 당연한 얘기 아닌가 이런 것을 굳이 선포할 필요가 있
었을까?
「그래, 전혀 선포할 필요가 없지. 그런데도 선포했다면 왜 그
왜 그랬겠어?
「그전에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반증?
「맞아. 하지만 이 특별 명령은 이미 76년에 포드 대통령에 의
해서 선포되었다는 게 수수께끼야.」
「그게 무슨 얘기야?
「미국 정부는 이처럼 부끄러운 명령을 똑같은 내용으로 두 번
이나 선포했거든. 이미 포드가 선포했던 것을 레이건이 다시 한
거지. 그렇다면 그 사이이에 무언가 있었다는 얘기 아닐까 즉 포
드에서 카터를 거쳐 레이건으로 정권이 바뀌는 사이에 미국 정
부가 타국 지도자의 암살에 관여한 적이 있었다거나‥‥‥‥」
경훈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았던 한 문장에서 의외로 막강
한 힘을 느꼈다.
「그렇구나, 그럴 가능성이 충분해.」
「두 개의 명령 사이에 일어났던 전세계의 지도자 암살에 관한
조사를 해보았어 . 단 한 사람뿐이었어 .」
「누구지?
경훈은 떠오르는 예감을 누르며 물었다.
「누구였겠어?
경훈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인남은 잘라 말
했다.
「박정희.」
「그게 정말이야?
「그래, 오직 박 대통령만이 그 기간에 죽음을 당한 외국의 원
수였어 .」
경훈은 시대를 꼽아보았다. 1976년 포드에 의해 이 명령이 선
포됐고 1981년에 레이건에 의해 다시 선포됐다면 그사이의 미국
대통령으로는 카터가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1979년, 바로 그
카터의 시대에 죽음을 당했다
「인남아, 이것은 매우 유력한 정황 증거야.」
「그래. 레이건은 취임하자마자 자신의 정견을 미국의 국정에
반영하고 싶었을 거야. 물론 그로서는 카터의 도덕 정치의 배후
를 공격하고 집음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했을
테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이 공작 금지 명령
이고.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정희 시해의 배후는 엉뚱한 곳에
서 그 꼬리를 드러낸 것이다.
이제 추리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10 · 26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그 거대한 날개를 서서히 접고 있었다. 김재규는 군이 자기 편이
라는 강한 믿음을 가진 채 일을 저질렀고, 김재규에게 그런 환상
을 심어주었던 미국은 일단 박 대통령이 제거되자 그를 버렸다
남산을 지나쳐 주한 미군이 있는 용산으로 가버린 그날 밤의 거
사는 순진하고 정열적이었던 이 사나이에게 결국 죽음을 안겨주
었을 뿐이다
경훈은 김재규가 불쌍하기도 하고 가상하기도 했다. 모두가
김재규를 비웃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유신의 폭압이 언제까지 이
어질지 몰랐던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 끝까지 군인이었고, 군인
으로 살고 싶어했던 김재규. 그러나 그의 순진한 성품으로는 세
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국의 공작 팀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경훈은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이었던 김정호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기로 약속했다. 경훈의 마음속에 있는 김재규에 대한 일말
의 아쉬움이 자연히 김정호에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거대한 배후
경훈은 호프집에서 만난 김정호에게 인남을 소개했다.
「제 파트너 입니다. 10 · 26의 엄청난 비밀을 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친구죠.」
「그래요?
「이 친구 덕분에 저는 10 26최대의 의문점이었던 김재규 부
장의 용산행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
「그렇다면 남산을 지나쳐 용산으로 간 데는 김 부장 나름의 확
고한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자
기의 본거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김 부장을 얼
간이라고 하지만 그에게는 확고한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
「어떤 계획이오?
경훈은 김정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어정정하게 불러놓은 것도 이런 맥
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
「도대체 무엇이오, 그 계획이란 것은?
「먼저 미국의 딜레마부터 얘기되어야 합니다. 」
「미국의 딜레마라니?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고 싶었지만 그의 죽음이 몰
고 올 엄청난 공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힘의 공백을
틈타 소련. 중국, 북한이 준동할 것을 염려치 않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이미 김재규는 미국과 깊은 얘기를
나누는 단계에 있었습니
다. 주한 미군 철수 중단이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선물을 준
미국과 못할 얘기가 없는 단계에 이르렀던 거죠.」
「그랬겠지.」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미국의 배후 작용이 있었을 거라고 생
각하고 말지만, 김재규가 택한 거사의 방식을 곰곰이 들여다보
면 미국의 적극적인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김재규의 거사는
미국이 바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
「김재규는 어떤 한국인과도 그 일을 의논할 수 없었습니다 노
출 즉시 죽음 혹은 그 이상의 것이 닥칠 테니까요.」
「그랬을 거요.」
「그러나 사람이 그런 일을 아무와도 의논하지 않을 수는 없습
니다. 특히 김재규처럼 뜨거운 사람은 말입니다. 」
「그래서?
「그 당시 브루스 대신에 김재규를 전담하러 온 흘리건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인드 컨트를 전문가였죠. 아마 CIA
의 터너 국장은 홀리건을 보내며 김재규에게 이렇게 얘기했을
겁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을 보내니 모든 것을 그와 의논하시
오. 미국은 당신이 무엇을 하더라도 뒤에 있을 것이오. 박정희는
절대 자의로 물러나지는 않을 거요. 이제 한국의 미래는 없소.
이 불행한 나라 한국, 학생이 한 해에도 수백, 수천 명씩 희생되
는 나라 한국, 이 나라를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소, 당신밖에는.
김 부장, 당신이 무엇을 하더라도 미국은 당신의 뒤에 있소.무
엇을 하더라도 말이오. 우리는 당신의 뜻에 따라 미군 철수도
중단하지 않았소 미국이 당신을 받치고 있소.홀리건은 바로
나라고 생각하시오. 모든 것을 그와 의논하시오. 모든 것을 말
이오."
「음 ‥‥‥
「김재규는 흘리건과 거사에 대한 모의를 했을 가능성이 있습
니다. 만약 모의가 아니라도 최소한 상의는 했을 겁니다. 」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오 추론의 근거는
김정호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반문이 아니었다. 자신도 동의
하지만 경훈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
었다.
「거사가 미국이 바라는 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죠. 미국은
김재규의 거사를 통해 바라던 대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습
니다. 」
「두 마리 토끼라면?
「박정희 대통령도 제거했고 안보상의 공백도 없었죠.」
「안보상의 공백이 없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오
「충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근 20년을
집권해 온 박 대통령이 제거 됐다면 한국에서는 엄청난 소용돌이
가 생겨나는 것이 정상이었겠죠. 국론의 분열, 충돌은 불을 보듯
변했구요.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충돌도 없었습니다. 군과 군의
충돌, 군과 중앙정보부의 충돌, 심지어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충돌조차도 없었습니다. 결국 힘은 가장 깊은 곳, 정치적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곳으로 흘러 들어갔죠 즉 군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요?
「김재규의 선택입니다. 아니 , 미국의 선택입니다. 」
「그러나 이상하지 않소 김 부장은 의당 정보부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겠소 모든 주도권이 군부로 넘어가는 육본으로 가고
싶었을 리가 없잖소?
「바로 그것이 홀리건의 역할입니다. 흘리건은 김재규를 설득
했습니다. 아니 설득이 아니라 유혹했을 겁니다 믿어라, 이 흘
리건을 믿어라,아니 터너 국장을 믿어라,아니 미국을 믿어라,
아니 유신의 심장을 쏠 당신 자신의 영웅적 행위를 믿어라. 미국
과 한국 국민이 당신의 뒤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고는 또 이렇
게 얘기했겠죠. 당신의 거사가 진정 한국을 위한 것이 되려면 내
부의 충돌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 군과 중앙정보부와 경호실 중
어느 쪽이든 충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진정한 애국이다. 그런
순수한 애국은 당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김 부장이 그냥 있었을 리는 없지 않소 "나의 목숨은 나의
거취는" 하고 물었을 것 아니오.」
「그것은 미국이 책임 진다고 했겠죠.」
「그러나 그것은 너무 미흡하지 않았겠소 직접 방아쇠를 당기
는 당사자에 게는.」
「그랬겠죠. 하지만 거기에는 만족할 만한 대답이 있습니다. 이
것은 10 26의 또 하나의 의문에 대한 해답도 됩니다. 」
「10 · 26의 또 하나의 의문이라면?
「어째서 김재규는 정승화를 그렇게 어정정하게 불러두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
「어정정하게라,그거 참 그럴듯한 표현이오. 길 부장은 육군
참모총장을 부른 것도 안 부른 것도 아닌 형태로 불러두었으
니까.」
「그렇습니다. 홀리건은 이렇게 대답했겠죠. "부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한국군은 주한 미군이 꽉 잡고 있습니다. 비단 작전
권뿐만이 아니라 중요한 인물의 인사권도 사실상 미군에게 있습
니다. 고위 장성 중 누가 감히 미군과 맞선다는 말입니까. 일단
유사시에 군은 우리가 책임질 겁니다. 부장님은 아무도 못하는
그 일, 부장님만 하실 수 있는 그 일에만 신경을 쓰시면 됩니다.
군은 우리가 책임집니다 군은 부장님이 제시하시는 노선을 따
라갈 겁니다. 우리는 그 부분을 이미 확실하게 해두었습니다"」
「김 부장이 그 말을 그냥 따랐을까?
「따랐을 겁니다. 김재규는 거사 직후 윽군 본부에 가서 줄곧
계엄 선포를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은 내 편'이라는 확고한
신념에 기인한 주장입니다. 또한 안보의 공백이라는, 미국이 주
입한 개념이 그의 머리에 꽉 차 있었다는 얘기도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와 정승화 사이에 거사에 대한 아무런 언질도 없었
습니다. 만약 언질을 했다면 누군가가 김재규와 정승화 사이의
가교가 되었다는 얘기인데, 한국인 중에는 그런 역할을 할 사람
이 없습니다. 김재규가 어떤 한국인에게도 거사에 대해 의논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가 이미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김
재규는 군을 자기 편으로 생각하고 중요한 거사를 실행에 옮
겼습니다. 정보부장과 군을 확실하게 이어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 그것은 바로 미국입니다. 홀리건의 마인드 컨트롤은 이런 방
향으로 김재규를 유도했던 것입니다. 」
「그랬을까 나는 늘 김재규 부장이 왜 정 총장을 그렇게 어정
정하게 불러놓았던가 하는 의문을 지을 수 없었는데, 이 변호사
의 설명이 거기에 대해서 확실한 해답은 되지만 말이야‥‥」
김정호는 머리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수십 년을 굳혀온 자
신의 신념이 조용히 스러지는 기분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의문이 있소.」
「무엇입니까
「그렇게 미국이 김 부장과 군을 이었다면 어째서 김 부장 혼자
서 죽음을 당해야 했던 거요 12 · 12 때문이오 그렇다 하더라
도 미국은 김 부장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혹시 누군가 얘기하
듯이 김 부장은 아직 죽지 않고 어딘가에서 이름을 바꾸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얼토당토않은 얘기입니다. 김재규는 분명히 사형당했습
니다. 」
「그렇다면 뭔가 잘못된 것 아니오 미국이 밀었던 김 부장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것은미국이 김 부장을 살릴 정도의 힘
은 있지 않소?
「다 끝난 상태에서 김재규의 목숨을 살려주느냐 않느냐는 것
은 이미 중심 사항이 아니었죠. 문제를 간단하게 끌고 가자면
미국으로서는 김재규라는 사람, 이미 소임을 다한 그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박 대통령 사후 경
호실이나 중앙정보부가 없어져주어야 군으로 힘을 한데 모을
수 있고, 또 그것이 신속하게 안정을 찾는 최선의 길이었을 테니
까요.」
「충돌 없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김재규는 심문을 받는 도중 수사관에게 몇 번에
걸쳐서 미국에서 연락이 없었느냐고 물었답니다. 하지만 헛된
메아리일 뿐이었죠. 이미 미국에서는 그에 대한 처리 방안이 잡
혀 있었으니 말입니다. 」
김정호는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거푸 맥주
두 잔을 들이켜고는 미간을 좁히며 확인하듯 다시 물어왔다.
「음, 미국이 군을 책임진다고 김 부장을 설득하고는 실제 박
대통령을 살해하자 김 부장을 버렸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
김정호는 한참 동안이나 무언가를 생각하며 간간이 술잔을 기
울였다.
「왜 미국은 김 부장을 미더워하지 않았을까?
「미국은 박 대통령이 죽으면 그를 따르던 친위장교들의 반발
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겠죠. 김재규를 사주할 때도 그
점을 심사숙고했을 겁니다. 그들의 반발을 한 몸에 받는 김재규
를 앞장세워 안보 공백을 막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죠.」
「그렇군. 어리석은 사람 그런 걸 모르고 미국놈들을 그리 철
저히 믿다니 .」
「어차피 김재규는 한계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미국이 두려
워했던 것은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처리하고 나서 미국과의 관
련을 무기로 국정을 장악하려고 시도하는 경우였죠. 그럴 경우
미국은 김재규에게 휘둘려 끝간데 없이 끌려가야 하니까요 미
국으로서는 결코 원치 않는 결과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이중 플
레이를 했던 것입니다. 」
「이중 플레이라?
「그렇습니다. 이중 플레이.」
「누구와 이중 플레이를 했단 말이오?
「노벰버, 바로 육사 11기입니다. 미국은 권력의 성향으로 보나
군부의 편제로 보나 육사 11기가 박정희 이후를 맡을 강력한 세
력으로 부상해 있다고 이미 판단을 끝낸 뒤였습니다. 따라서 김
재규에게는 박정희를 살해하는 임무만을 수행토록 하고 그 뒤는
육사 11기가 정리하도록 한 것입니다. 」
「그럼 육사 11기가 일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요정
승화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뭉친 자들의 세력이 자연스럽게 확장
된 이 아니오?
「이제껏 모두가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10·26의 전모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미국의 정보·공작 팀이 끊임없이 육사
11기를 스터디해 온 것, 12 12를 묵인한 것, 그리고 5 · 18 때 한
국군의 광주 투입을 허용한 것으로 보아서는 그들은 이미 긴 구
도를 짰던 것 같습니다. 」
「미국은 육사 11기에게서 무엇을 바랬을까?
「무엇보다도 박 대통령과는 다르게 되어주기를 바랐겠죠. 핵
무기니 미사일이니 하는 것들은 다 넘겨주고, 한반도 비핵화 선
언이나 하고, 미국이 사라는 무기나 넙죽넙죽 잘 사주고, 자주
국방이니 뭐니 하는 것은 생각도 하지 말기를 말입니다. 」
「절묘하군. 김 부장의 대통령 시해는 한편으로는 미국의 뜻을
실현하고, 또 한편으로는 신군부의 집권을 위해 철저히 위장되
고 이용되었구먼.」
「하지만 이제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
「최소한 김 부장을 희대의 얼간이로 보는 시각만이라도 없어
졌으면 좋겠소. 그래도 독재와 유신을 무너뜨린 장본인인데 말
말이야.
경훈은 김정호를 호프집에 남겨둔 채 악수를 나누고 나왔다.
김정호는 10 · 26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손 형사는 시체로 발견됐다. 등산객이 발견한 손 형사의 시체
는 참혹했다.
복수, 경훈은 입 속으로 이 단어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태어
나서 처음으로 생각해 보는 말이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복수의
방법을 생각하던 경훈은 결국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것은 한 개
인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경훈은 손 형사가 가지고 온 다섯 명의 이름들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손 형사를 죽음으로까지 이끈 그 이름의 주인공들을 알
아내는 것이 바로 복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백방으로 알
아봐도 그중 한 명도 밝혀낼 수 없었다.
「분위기를 한번 바러보자 탁 트인 바다라도 보면 뭔가 떠오를
지 모르잖아.」
인남은 경훈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두 사람은 자동차를 타
고 영동고속도로로 빠져나가 대관령을 넘었다. 경포대, 낙산을
지나 바닷가를 끼고 설악산 방향으로 달리다가 인남이 물었다.
「설악산으로 갈까
「아니, 그냥 더 가보자. 바다가 시원한데.」
「뭐 좀 생각날 것 같아?
「글쎄, 열쇠는 그 평택의 506부대에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나도 그 생각 중이었어, 제임스가 그 부대에 하루에 두 번씩
은 꼭 다닌다는 거나.그 이름들이 평택에 갔다 오던 제임스의
안주머니에서 나왔다는 거나 506과의 관련은 확실한 것 같은데
「노동계든 어디든 다 뒤져봐도 그 이름들은 나오질 않아. 전화
번호부로도 다 확인했지만 다섯 명의 이름들사이에 아무런 공
통점도 없고. 제임스도 평택에 갔다 오는 일말고는 꼼짝 않고 있
으니 동태를 통 알 수 없어.」
자동차가 속초, 간성, 화진포를 지나자 눈앞에 통일전망대의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제 더 이상은 못 가.」
「통일전망대에 한번 올라가 보자.」
「그래 .」
두 사람은 자동차에서 내려 안내 버스를 타고 통일전망대에
올랐다 망원경으로 북녘 산하를 바라보던 인남이 갑자기 두 눈
을 반짝이며 눌넜나.
「그런데 경훈아, 제임스만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소용없지 않
을까?
「무슨 말이 야
「제임스가 시선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우리가 그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뒤에서 딴 음모를 꾸미는 게 아닐까 하는‥‥‥‥」
「제임스의 전력도 그렇고 현재 어느 정도는 정체가 드러났잖
아 그렇다면 미국이 무슨 일을 한다 해도 그 사람을 통해서는
안 할 것 같은데.」
「글쎄 .」
인남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 사람들 목표는 결국 남북 정상 회담을 못하게 하는 거
장아.」
「그렇지.」
「그런데 굳이 김 대통령에게 테러까지야 할까 그러면 세계
언론의 시선을 확 끌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 다음은 몰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경훈은 인남의 얼굴을 한동안 어지게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
을 열었다.
「필시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남북 정상 회
담을 좌절시키려 하겠지 그러나 그런 방법들이 통하지 않는다
면 결국은 테러밖에 없을 거야.하지만 네 말대로 굳이 김 대통
령이 아니라도 가능한 일일 수도 있지.」
「무슨 말이니?
「남북 정상 회담에는 김 대통령이 아닌 또 하나의 정상이 있
잖아.」
「또 하나의 정상이라니 · 북한」
인남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그래, 그럴 가능성도 있어.」
순간 경훈은 머리가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아, 어쩌면 그 이름들이란‥‥‥‥」
「경훈아. 뭔데?
「잠간만 좀더 생각해 보고.그래, 네가 맞았어. 정상 회담을
무산시키려면 북한을 건드리는 방법이 있어. 개연성이라는 측면
에서는 그게 훨씬 가능성이 높아.」
「그럼 그 이름들이 뭔데?
「확인해 봐야겠지만 짐작이 가는 데가 있어. 네 말에서 힌트를
얻었어. 제임스가 감청 부대를 드나들고 있다면 이것은 서울을
감청하는 것만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 북한을 감청할 가능성도
있지 .」
「그럼 그것이 북한 사람들의 이름이라는 거야?
「그래, 일은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을지도 몰라.」
「북한에서 무슨 일이라도 꾸미고 있는 걸까?
「내 짐작대로라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냐.」
「왜 그 이름의 주인공들이 누군데?
경훈은 뭔가 말하려다 말고 멈추었다.
「아냐, 확인해 보고. 어서 서울로 돌아가자.」
서울로 돌아온 경훈은 케렌스키를 만났다.
「그 명단이 무엇인지 짐작이 갑니다. 그들은 여기 남한 사람들
이 아닙니다. 」
「그러면 북한 사람들이란 말이오?
「그럴 겁니다. 」
「어떤 사람들이지?
「대략 짐작은 가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케렌스
키 변호사님이 여기서 제임스를 지키고 계셔도 그자의 범죄 행
위를 포착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자
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는 역할만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
케렌스키는 한동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이 변호사, 그 명단을 지금 즉시 나에게 주시오.」
「어떻게 하시려구요?
「그것을 바로 의회와 언론에 팩시밀리로 보내겠소. 추가 내용
은 없이 일단 팩시밀리의 접수 시간만 남게 하는 거요. 만약에
그 이름들로 말미암아 무슨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접수 시간이
매우 중요해지지. 그들이 사전에 무슨 공작인가를 했다는 증거
가 되니까.」
케렌스키는 경훈과 마찬가지로 그 이름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대다수의 선량한 미국 국민과 정부 담당자들에게 이제 더 이
상 미국이 CIA와 같은 공작 집단에 이끌려가서 는 안 된다는 것
을 보여 주겠소.그동안 이 변호사가 10·26의 배후를 캐러 다니
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케네디의 죽음도 밝혀져야 한다는 생각
을 했지. 정부의 예산으로 활동하는 공무원들이 암살, 테러,쿠
데타, 언론 조작 등에 관여한다는 것은 미국의 수치요. 나는 이
런 것들이 없어지도록 노력하겠소. 그리하여 한국인들에게 진정
한 미국인들의 우정을 심어주고 싶소.」
케렌스키와 경훈은 굳게 손을 맞잡았다. 누가 뭐라 해도 미국
은 역시 초강대국이고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다. 아무리 우리가
미국을 욕하고 증오해도, 문제가 생기면 역시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미국이다. 그리
고 그 미국을 끌어가는 힘은 케렌스키 같은 사람들로부터 나오
고 있다.
「케렌스키 변호사님, 고맙습니다. 이제 다시는 미국의 공무원
이 타국 원수를 암살해서는 안 된다는 이상한 특별 명령 같은 것
은 필요 없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한국과 미국은 그
각별한 인연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될 겁니다 저는 진정 그렇
게 되기를 바랍니다. 」
경훈은 케렌스키에게 다섯 사람의 이름을 적어주고 나서 다시
한 번 악수를 했다.
다음날 경훈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깜
짝 놀랐다 바로 제임스였던 것이다.
「후후, 놀라지 마시오. 당신네 회사에 일을 하나 맡겼소. 당신
네 정부가 차세대 미사일의 구매 의향서를 인도한 상황에서 마
구 해약을 하고 있으니 소송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오. 이제 이
변호사는 나의 일을 위해 뛰어야 할 거요. 나는 당신에게 이 사
건을 맡기고 싶다고 얘기 했거든. 물론 마음에 안 들 거요. 그러
나 할수밖에 없지.그게 당신들의 한계요.모두들 입으로는 미
국을 욕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미국을 위해 뛰는 거요.」
「대담하군. 여기까지 불쑥 들어와 궤변을 늘어놓다니.」
「증거.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데 있소. 증거가 없을 때 사람은
대담해지는 법이오. 10 · 26도 김재규가 입을 다물었으니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오 이제는 다 역사 속에 묻혀진 이야기가 되었
소. 어쨌거나 한국은 박정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독재로부터
헤어나지 않았소.」
「나는 당신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소. 당신은 살인에 관여한
것이 그렇게나 즐겁소?
「나는 나의 조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이상
한 것은 오히려 한국인들이오. 한국인들은 어떤 이념으로 살아
가는지 모르지만, 당신들처럼 자신의 조국을 업신여기고 창피하
게 생각하는 국민들도 없을 거요.」
「우리는 맹목적인 애국심보다는 세계 평화와 인간 존중의 이
념을 갖고 살고 있소.」
「푸하하하 그래, 한국인들은 대단한 사람들이오. 그런 면에
서는 세르비아니 크로아티아니 하는 가난한 동유럽의 나라들이
부끄러워하겠군. 그들은 타민족에게 고난받는 자기 민족이 안타
까워 모든 걸 버리고 동포를 구하기 위한 전쟁을 마다않으니 말
이오. 그래서 한국은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미국 편에서 앞장
서서 북한과 전쟁을 해야된다고 나서는 거요
「그것은 북한이 나가는 방향이 잘못되었기에 그런 것이오.」
「방향이 잘못되었다 웃기는 얘기요. 국제 정치에는 잘잘못이
없소. 강대국의 논리가 그냥 그대로 통하는 거지.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 그리도 잘못된 일이오 북한
이 그런 것들을 개발하면 남한보다 군사력에 있어 결정적 우위
에 설 것 같소 천만의 말씀이오. 북한이 핵을 개발하면 남한도
같이 개발하면 될 것 아니오남북간에 전쟁이 난다면 핵이 있
으나 없으나 결과는 비슷할 거요. 북핵은 남북한의 문제가 아니
란 말이오. 미국은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에 핵을 장착하면 본토
가 위협당할 수 있기에 한반도의 초토화를 무릅쓰고 라도 북폭을
감행하려는 거요. 게다가 일본과 한국이 북한 핵과 미사일을 기
화로 마찬가지의 무장을 할까 봐 겁내는 거지. 그렇게 되면 미국
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패권주의는 끝장이 나기 때문이오. 이
제 알겠소?
제임스는 이런 정보쯤은 우습다는 듯이 개의치 않고 말을 이
었다
「이런 미국의 전쟁에 남한은 기꺼이 미국의 전위대가되려 하
오. 그런 한국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럽소 미국의 뒷다리를 잡고
민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훌륭하오 그게 인간 중심이오 분단
50년 만의 쾌거라는 금강산 방문을. 북한이 그 자금으로 남침
준비를 한다면서 스스로 무산시키려는 민족이 그렇게나 훌륭
하오?
제임스의 비아냥거림은 점점 도를 더했다.
「간첩선 한두 척만 내려오면 모든 대북 유화책을 취소하라고
아우성치는 언론과 국민이 바로 당신네 아니오 미국 쪽에서든
북한 쪽에서든 조금만 장난치면 당신네들의 햇볕 정책이란 그냥
무너지고 마는 거요. 분단 50년 만에 처음으로 나온 민족 화해
정책이란 게 말이오. 이 변호사는 그런 조국이 자랑스럽소내
보기에 한국의 배운 사람들은 조국에 봉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
는 것 같던데 내 말이 틀렸소조국이니 애국이니 하면 비난받
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오. 겉멋 든 한국인들은 머리를 저
기 프랑스 파리쯤에서 빌려오는 것 같소. 그것도 엉터리로 말이
오. 프랑스 그들의 애국심은 아마 한국인들의 두 배는 넘을 거
요. 세계의 강국은 모두 애국심과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철철 넘
치고 있소. 이 변호사, 내가 CIA를 위해 일한 것이 그렇게도 부
끄러운 일이오 나는 자부심이 있소, 조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 말이오.」
「당신의 맹목적 애국심이 약소국에 해가 되었으니 하는 말 아
니오?
「그럼 당신들도 애국심으로 나라를 지키면 되잖소 내가 보기
에 미국은 한국이 없어도 외눈 하나 깜박 안 할 거요. 하지만 한
국은 미국이 없으면 하루도 못 버티고 쓰러질 나라지. 그런데도
할말이 있소?
「어쨌거나 당신은 살인자요」
「살인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살인은 김재규가 한 거
요. 광주사태 그것 역시 한국의 정치 군인들이 저지른 거요. 우
리는 독재로부터 한국민을 구출하고 광주의 소요를 신속히 해소
하도록 하여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남한을 보호했소. 우리가 당
신네 오합지졸의 형편없는 나라를 구해주는 세계 평화의 주춧돌
이란 말이오.」
「그런 궤변은 그만 늘어놓으시오. 어쨌거나 당신이 살인자라
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소. 게다가 당신은 지금도 무슨 공작인가
를 꾸미고 있소.」
「증거 증거가 없지 않소.당신네 대통령의 햇볕 정책은 한반
도에 불안을 가져오고 있소. 당신이 입수한 명단의 그 다섯 사람
은 남북 정상 회담에 부정적 시각을 가진 한국인들일 뿐이지. 그
들은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오. 심지어는 노동운동가도
있소.」
「나는 그들을 찾아내고 말 거요.」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당신은 똑똑하니까. 당신이 그들을
찾아내면 나도 패배를 인정하고 한국을 떠나겠소.」
「1기룬에 돋아가면 명인을 기'1리근 시릴"1 있을 -l요
신을 법정에 세을 테지 .」
「후후후. 케렌스키를 말하는군. 그가 당신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모양이지?
「얼빠진 작자요. CIA의 범죄를 조사한다나 어쩐다나, 보장된
영화를 버리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치는 자지. 누구의 노력으
로 일등 국민으로 사는지도 모르고 말이오. 군사력과 CIA를 빼
면 이 아시아의 일벌레들과 어떻게 경쟁할 수 있다고 그리 나대
는지 ‥‥‥ 딱한 친구요.」
「그러나 케렌스키는 당신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훌릉한 미국
인이오. 그는 틀림없이 자신의 손으로 당신의 인생을 끝장내고
말 거요.」
제임스는 차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5천 년의 하늘
경훈은 호텔을 나와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는 선배에게 전
화를 걸었다.
「선배, 급히 만나야 합니다. 」
「이 변호사,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전화로 얘기할 순 없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
「그럼 점심이나 같이하지.」
「안 됩니다. 지금 즉시 만나야 합니다. 」
비서관은 경훈의 비장한 목소리에 놀라 바로 만나기로 했다.
경훈은 광화문 부근의 커피숍에서 선배를 만났다
「이 이름들을 확인해 보세요.」
「뭐하는 사람들이지?
「모릅니다. 하지만 추측은 해봤어요.」
「말해 봐.」
「이들은 북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북한 사람들
일 경우에는 엄청난 문제가 있습니다. 」
「무슨 소리야?
「하여튼 확인해 보세요. 시간이 없으니 신속하게 해야 합니다. 」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경훈은 미국의 북한 폭격 가능
성을 보도하는 전광판을 보았다. 그러나 하루를 꼬빡 기다려도
선배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경훈은 초조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시간이 없어서 알아보질 못했어 그런데 그게 정말신빙
성이 있는 거야?
「선배 누군 시간이 남아나서 이러는 줄 아세요」
경훈은 화가 치밀어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얻은 정보야 내 입장도 있잖아. 밑도끝
도없이 북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하면서 던져주면 어떻게 해. 이
런 식으로는 알아보기 어려워.」
「선배, 그들은 전문가예요. 선배가 지레짐작해서 되니 안 되니
평가할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어려우면 관둬요」
「미안해.」
경훈은 수화기를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왔다. 마침 사무실로
찾아와 있던 인남이 불안한 눈초리로 말했다.
「너 이러는 거 처음 본다. 」
경훈은 다시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어떻게 하란 말이야우리더러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
구 미국이 북한을 치면 미국을 따라 북한에 총부리를 대란 말
이야 북한은 우리 형제 아냐 5천 년 민족이고 뭐고는 이제 없
는 거야 이 나라사람들에게 해답을 줘야 할 게 아냐 한미방위
조약이 있으니 미국이 북한을 치면 자동적으로 미국 편에서 싸
워야 하는 거야 북한이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
야 미국은 미사일 없어 우리는 미사일 개발하면 안 돼 미국
이 파는 미사일이나 달라는 대로 주고 사와야 하는 거냐구 북
한이 핵을 개발하면 삼천리 강토가 초토화되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거야 미국이 하자는 대로?
「경훈아, 그만해. 무섭다. 」
인남은 경훈의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살기를 띠는 것
을 보았다.
「왜 5천 년을 한 핏줄로 살아온 역사를 무시하는 거지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 폭격은 미국의 방법일 뿐이야. 우리는 거기에
동조할 수 없어. 한반도에 전쟁을 불러오는 미국의 북한 공격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구」
경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가자」
「어딜?
「술을 안 마시고는 못 견디겠어. 오늘 인남이 너, 나하고 미치
도록 마셔보자.」
경훈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비서가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수화
기를 떨어뜨렸다. 인남도 경훈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 터라 불
안한 마음으로 뒤를 쫓았다.
경훈이 회사에서 나와 눈에 띄는 대로 아무 술집이나 찾아 들
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두 사나이가 있었다. 그들은 경훈의 모습
을 지켜보다 휴대폰을 꺼내 누구에겐가 보고했다.
경훈은 소주를 거푸 다섯 잔이나 마셨다. 인남이 말리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금방 술기가 오른 경◎이 처연한 얼굴로 하소연
하듯 힘없는 목소리로 얘기를 늘어놨다.
「부끄럽다 인남아. 나는 언젠가 나도 모르는 새에 반()미국
인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 그러나 그때 부끄러워하기는커녈
온전한 미국인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지. 알겠니?
인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경훈만이 아니었다. 자신은
더하면 더했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또 언젠가는 미국이 그 강력한 힘으로 너저분한 북한을 싹 쓸
어버렸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어. 얼마 전까지도 북한과 미국이
대림한다면 나는 미국이 이겼으면 하고 바랐지. 쥐꼬리만한 양
심이 걸릴 때면 나는 미국이 북한 정권만 무너뜨리면 한반도에
는 밝은 내일이 열릴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곤 했어.」
「나도 그랬어 .」
「그런데 인남아,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거니 왜 이렇게 괴롭냔
말이야.」
경훈이 다시 거친 손길로 술잔을 비을 때 인남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검은 양복을 입은 두 사나이가 경훈을 응시하면서 다가
왔기 때문이다.
「제임스.」
인남의 입에서 제임스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경훈 역시 취
중에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야. 너희들은?
「아 미안합니다. 놀라셨습니까?
인남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사나이들이 너무도 공손했던 것
이다.
「이 변호사님, 고위 정보 책임자가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급히
청와대로 들어 가셔야겠습니다. 」
「누구요 당신들은?
사나이들은 신분증을 내보였다. 국가정보원의 직원들이었다
「가시죠.」
경훈과 인남은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올랐다. 인남은 혹시
대통령을 만나게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경훈이 술에 취한
사실이 못내 불안했다.
자동차가 청와대 입구에 도착하자 경훈의 선배인 비서관이 정
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안내를 해주었다. 안내하는 동안 선배
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 이리로.」
비서관은 경훈과 인남을 정중하게 대했다. 경훈과 인남은 회
의실이 아닌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되자 당황했다. 국가정보원
직원이 대통령도 나을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
데, 막상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자 잔뜩 긴장이 되었다.
인남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비서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집
305
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시오, 이 변호사.」
대통령은 몇 사람과 함께 앉아 있다가 경훈을 반갑게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이 변호사는 아주 탁월한 국제 변호사라면서 요?
「과찬이십니다. 」
「옆에 있는 숙녀는 누굽니까?
「박인남 저의 파트너 입니다. 」
「편히들 앉으세요. 자, 내가 이분들을 소개하겠소. 우선 비서
실장, 그리고 국가정보원장, 여기는 국방장관, 그리고 담당 비
서관이오.」
「이 변호사는 이 이름들이 북한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했다는
데 명단은 어디서 얻은 겁니까?
담당 비서관이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듯 바로 질문을 던져
왔다.
「먼저 그 이름의 주인공들이 북한 사람들이 맞는지 대답해 주
시겠습니까?
국방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각료들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국가정보원장이 넉넉한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대답했다.
「모두가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오.」
「요직이라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이 변호사, 우리는 ‥‥」
담당 비서관이 뭐라고 얘기하려 하자 국가정보원장이 손을
내저었다.
「모두가 평양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들이오. 이 변호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겠죠?
「역시 그랬군요.」
인남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역시 경훈의 추리는 비상했다.
「자, 이제 말해 줄 수 있겠지요?
국가정보원장이 차분한 어조로 경훈을 재촉했다.
「저는 그 사람들의 명단을 한 미국인으로부터 빼 냈습니다. 」
「뭐라구요?
모두들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미국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담당 비서관이 재빨리 물었다.
「전직 CIA 요원입니다. 아니 어쩌면 현직인지도 모릅니다. 하
나 분명한 것은 지금 무기상을 하고 있는 그가 김재규의 배후에
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입니다. 」
「고가 이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이 변호사는 어
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는 미국의 군산 복합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북 정상 회담이 군축으로 이어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
합니다. 또 우리 정부의 햇볕 정책도 혐오하고 있습니다. 북한과
충돌이 있을 경우 그간 햇볕 정책으로 형성된 그나마의 남북 화
해 분위기가 자신들의 패권적 국제 질서 유지에 방해가 될 것으
로 생각합니다. 저는 처음에 그들이 우리 측에 테러를 할 수 있
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들의 목표는 북한이었습니다. 저는 그
들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동시에 북한에 쿠데타를 일으
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 명단이 그 미국인으로부터 나온 것이 확실합니까?
「틀림 없습니다. 」
경훈은 이제까지 있었던 일을 소상히 설명했다
이제껏 묵묵히 듣고만 있던 대통령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오. 미국뿐 아니라 일본, 중국, 러
시아, 그 어느 나라도 우리의 통일을 원치 않소. 일본은 이웃이
강대국이 되어 좋을 것이 없고, 중국은 한반도가 통일되면 바로
조선족에게 큰 영향을 미쳐 만주 지역에서 한민족 공동체가 형
성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소. 러시아도 역시 동시베리아에 고려
인 바람이 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통일이 되지
않는 한 한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오. 우리는 이 어려운
현실을 떨치고 일어나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
북 정상 회담이 필수적이오. 그리고 남북간 군사 대결을 종식해
야 하오. 당연히 군축을 해야지요. 한민족의 에너지가 이렇듯 서
로를 향해 파괴적으로 쓰여서는 안 되오, 그 힘은 세계와의 경제
전쟁에 돌려져야 하오. 물론 이런 정책이 미국과 충돌할 수도 있
소. 그러나 우리에게는 당위성이 있어요.」
경훈은 민족의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철학이 담긴 대통
령의 목소리를 듣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한 줄기 뜨거운 기운
이 치 밀어올랐다.
「대통령님,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우리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대외 공작을 추적하다 보니 대통령 님의 대북 정
책은 앞으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남
한의 보수 기득권, 북한 강경파와 군부의 반대 공작까지 고려
하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잠수함 세 척만 내
려와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있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화해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
고, 그것은 중단 없는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님의 대북 정책은 확실한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끌고 가지 못하고 끌려 다닌다면 우린 스스로는 아
무것도 하지 못하는 박약아 신세가 되고, 결국에는 비참한 미래
를 맞고야 말 것입니다. 대통령님, 한반도 5천 년의 역사는 대통
령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
경훈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던 대통령은 국가정보원장에게
지시했다
「국가정보원장, 북한에 이 이름들을 통보해 주시오. 우리 정보
전문가들도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던 참 아닙니
까 군부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가장 큰 자들이라면서요.」
「네, 그렇습니다. 」
대통령은 자상하나 뚜렷한 신념이 담긴 눈길로 경훈과 인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상 회담은 해야만 하오. 민족이 사는 길
은 북한을 시장 경제로 이끌어내는 것이오. 그들에게 돈 버는 법
을 가르치고, 주민들로 하여금 탄탄한 경제에서 오는 가정의 행
복을 맛보게 해야 하오. 그것만이 한반도의 안전을 보장하고 민
족의 미래를 보전하는 유일한 방법이오. 누구의 어떤 방해를 받
더라도 햇볕 정책은 무너져서는 안 되오. 우리는 인내로 견뎌야
하오. 무엇보다 애정과 시간이 쌓여야 하는 일이거든요. 그리고
이 모든 화해 정책은 굳건한 국방력이 뒷받침될 때만 가능하오.
강병 강군을 육성하되 무기 구입은 효율적으로 알뜰하게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집행되어야 하오. 내가 미국뿐 아니라 일본과 중
국을 우리 국방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북한을 압박하
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안전하고 폭넓게 이끌어내기 위해서
요. 물론 엄청난 비용 절감 효과도 있소. 경제를 고려하지 않은
국방만의 국방은 뇌 없는 공룡이 될 수 있지요.」
「네, 알겠습니다. 」
각료와 비서들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경훈은 대통령
의 설명에서 뭔가 아쉬운 것을 느꼈다. 가장 중요한 현안이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물으면 대통령이 난감해 하지 않
을까 생각하며 경훈이 입술을 달싹거릴 때 인남이 끼여◎었다.
「대통령님, 지금 우리 사회는 완전히 양분되어 있습니다. 현실
적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강대국을 따르느냐, 아니면 5천 년을
이어온 우리의 역사와 민족을 지키느냐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주십시오.」
「무슨 말이오?
「만약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남의 이 말에 좌중의 분위기는 갑자기 싸늘하게 얼어붙었
다. 각료와 비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질문을 하려 했던 경
훈조차도 막상 인남의 물음이 터져나오자 긴장했다.
「아, 그런 문제는‥‥‥」
담당 비서관이 황급히 인남의 질문을 막으려 하자 대통령이
손을 내저어 만류했다. 그러고도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비서실장.」
「네, 대통령님.」
「미국의 대통령에게 전화를 연결시켜요.」
「지금 말입니까?
「그렇소.」
「대통령님,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걸어요.」
비서실장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핫라인의 단축 버튼을 눌렀
다. 잠시 후 전화는 미국 대통령과 연결이 되었다. 대통령은 간
단한 인사를 나눈 후 부드러운 음성으로 통화를 시작했다.
「각하, 먼저 저는 그간 외환 위기를 겪은 우리 나라를 위해 미
국이 보여준 안'정과 도움에 한국 국민을 대표하여 깊이 감사드
립니다. 우리는 이 도움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 귀국
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마찬가지로 도움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위기를 그토록 신속히 극복한 귀국의 국민들과 각하께 저는
감탄했습니다. 」
「고맙습니다. 우리 국민은 가일 분발하여 곧 실업 문제도 극
복할 것입니다. 」
「틀림없이 잘될 것으로 믿습니다. 」
다음 순간 대통령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각하, 우리는 북한의 핵 개발이 사실이라면 귀국과 같이 그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북한의 핵 개발
에 대한 유일한 대처 방법이 미군이 북한을 폭격하고, 따라서 한
반도에 전쟁을 초래하는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5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거치는 동안 단일 민족
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고난을 겪었고, 또 그 고난을
극복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번의 핵 위기도 충분히 스스로 극복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직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
습니다. 북한이 미국이 설정한 너무도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것을
공개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북한도 외부적으로는 하
나의 독립국입니다. 우리는 한 독립된 국가의 존엄성을 해칠 수
있는 강대국의 강제적 명령은 그 자체가 폭력이라고 생각합니
다. 지금 한반도는 미국의 북한 공격설 등으로 사회가 어수선하
며, 경제는 불안정합니다. 이것은 귀국의 문제 해결 방식이 지나
치게 고압적이고 독선적이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에 있는 사람들
은 언제 미국이 북한을 폭격할지, 그 결과로 언제 한반도가 전면
전에 돌입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은 북한에 대한 폭력일 뿐
아니라 남한에 살고 있는 자유 시민 모두에 대한 인권 유린인 동
시에 세계사에 대한폭압입니다. 인류는 힘보다는 상호 이해와
협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국가와 국가는 자국의
이익이 아닌 상호 존중의 정신으로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우
리는 북한의 핵이 정말 문제가 있다면 유엔에 모여 다 같이 회의
를 하고 세계 모든 나라가 동의하는 방식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방식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유엔의 결론에 따를
것입니다. 이것이 지구를 한 식구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문제
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은 우리
의 동의 없이 미국이 일방적으로 북한을 공격했을 때 절대로 미
국의 편에 서서 굇줄간의 전쟁을 치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각하,
안녕히 계십시오.」
대통령은 상기된 얼굴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경훈은 더 이상
그자리에 앉아 있을수가 없었다. 옆을보니 인남의 얼굴에 눈
물이 맺혀 있었다. 두 사람은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
을 나왔다.
이렇게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면, 이제껏 일방적이기만
했던 미국과의 관계도 조금씩 서로를 존중하는 대등한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경훈은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한민족의 통일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
경훈은 인남의 손을 잡고 청와대 정문을 걸어 나오면서 하늘을
우러러봤다. 5천 년을 이어온 파란 하늘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
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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